2012 가을 Ⅰ Vol.14

www.poetcho.com

28명사가 만난 조병화

인생을 노래한 시인ㆍ정호승

30편운문학상 시터

제10회 수상자ㆍ이근배, 김상현

34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세월은 화살과 같이ㆍ장경렬

37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Ⅱ

슬픈 바람을 주는 여인

38제7회 편운 시 백일장

심사평·입상작·입상소감

40소설로 그리는 조병화의 시

당신의 초자아 연인ㆍ박민정

44한 장의 사진

시인의 아내

04조병화 시와 그림

노을

06꿈의 향기

젊은 혈기에 너무 설치지 말아라ㆍ임헌영

09시인의 육성을 듣다

나태주 시인 편ㆍ김소원

14시인의 수필

구름이 흘린 것들ㆍ조병화

18조병화론

실존적 저항과 시대적 고투ㆍ안서현

22제22회 편운문학상

심사경위·수상소감·운영규정

27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Ⅰ

어느 답장

2012 가을Ⅰ Vol. 14

Contents

2012 가을Ⅰ Vol. 14 등록번호 서울 사02178 발행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발행인 박철원 편집인 조진형 편집주간 김삼주

편집위원 김종회 박덕규 박주택 홍용희 편집장 박 준 주소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5 (우)110-530 전화 (02) 762-0658

팩스 (02) 3673-0436 홈페이지 www.poetcho.com 이메일 poetcho@naver.com 디자인 GNA Communications (02) 395-2782

인쇄 예작만들기 발행일 2012년 9월 1일

『꿈』은 잡지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표지Ⅰ제자·그림_조병화

06 09 14 28

2 2012 + Autumn

화보

제22회 편운문학상 시상식·제9회 조병화 시 축제

제22회 편운문학상 시상식2012. 5. 12 조병화문학관

01 김광규 운영위원장과 김명인 심사위원장02 정현종, 마종기 시인03 제22회 편운문학상 단체사진04 축사를 하는 김병익 문학평론가05 제22회 수상자 오생근 평론가와 문충성 시인06 축사를 하는 마종기 시인

01 02

03

04

05

06

+ 32

제9회 조병화 시 축제2012. 5. 2, 11 ~ 13 조병화문학관

01 기획 전시장 입구02 안성, 시 읽는 날 행사03 제7회 편운 시 백일장 수상자 단체사진04 제5회 꿈나무 시낭송 대회05 환영사를 하는 이한경 안성시 부시장06 인사말을 하는 조진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01

02

03

04

05

06

4 2012 + Autumn 4

조병화의 시와 그림

노을

4 4 + 5

꿈의 향기

젊은 혈기에 너무 설치지 말아라 임헌영

젊은 혈기에 너무 설치지 말아라

6 2012 + Autumn

+ 76

편운 선생님의 혜화동 집필실에서

2012 + Autumn 8

임 헌 영

문학평론가. 1941년 경북 의성 출생. 중앙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주요 저서로 『불확실시대의 문학』, 『민족의 상황과 문학사상』, 『한국현대문학사상사』, 『문학

과 이데올로기』, 『분단시대의 문학』 등이 있음.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장,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96년 제6회 편운문학상을 받으며

꿈의 향기

젊은 혈기에 너무 설치지 말아라 임헌영

8 + 9

시인의 육성을 듣다

나태주 시인 편·인터뷰 김소원

7월의 금강은 남청색 비단자락이다. 단비 내려 속살이

통통해진 금강을 건너며 사람은 그가 몸담은 데를 닮아간다는 말을

생각했다. 공주문화원은 공주의 구시가지 강남지역 옛 공주읍사무소

건물 건너편 ‘시간이 멈춘 음악공원’ 맞은편에 있다. 공원 이름도

그대로 한 구절의 시가 되는 곳이 공주公州다. 오전 10시 약속에 시인은

전에 없이 지각했다. 꼭 보내야 할 시화가 있어 새벽 두시까지 그리고

썼다는 시인은 소년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진솔한 시어로 자연과 사랑과 생명을 담아낸 시집이 32

권에 이른 나태주 시인! 지난봄 광화문 거리 한복판에 걸린 시 「풀꽃」

으로 도회의 콘크리트 가슴에 새봄의 실뿌리를 내린 시인은 현재

공주문화원장이다. 누가 “공주 사는 게 어떠냐?” 물으면 “남이 알까

무섭다.” 하여 놀라게 하고, “너무 좋아서 너도 나도 다 이사 올까 봐서!”

라고 답해서 두 번 놀라게 했다는 그의 공주사랑은 단지 공주여서가

아니라 삶의 뿌리를 지킨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우체국이 내려다보이는 이층 원장실이다. 선배 시인 앞에

마주 앉지 못해 비껴 앉자 정면에 앉으라고 권한다. 대각선 자리는

비판자의 시각이란다. 십여 년 동안 수십 번 시인을 만났건만 많은

팬에 둘러싸인 시인의 곁에 한 번도 다가가지 못하고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는 필자로선 이런 날도 있구나 싶은 게 가슴이 뭉클하다.

잠을 설치며 만들어 온 질문지를 꺼내려 하자 시인이 말린다. “우리

그러지 말아요. 인터뷰는 벌써 시작된 거죠. 자연스럽게 갑시다.” 라는

말에 나는 단박에 무장 해제되어 황망히 녹음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강물처럼 쉼 없이, 때로는 잔잔히, 가끔은 소용돌이치듯 쏟아낸 시인의

육성을 여기 옮긴다.

10 2012 + Autumn 10 10

시인의 육성을 듣다

나태주 시인 편·인터뷰 김소원

개구리가 물에 풍덩 들어가듯이

저는 마주보고 앉아 얘기하는 게 좋아요. 정면은 대면

자, 옆자리는 이웃, 대각선은 비판자의 시각이 돼요. 옆자리에

앉으면 흘깃 보게 되지요. 마주 보고 앉아야 인격을 오롯이 대

하며 내면을 열 수 있지요. 시를 쓸 때도 많이 망설이기보다

개구리가 물에 풍덩 뛰어들듯이 하는 거지요. 순간을 포착하

고 찰나의 시상을 놓치지 않아야 해요.

바쇼의 하이쿠 “오래된 연못/개구리 뛰어드는/퐁당,

물소리”를 보세요. 개구리 한 마리가 연못에 퐁당 뛰어들어 고

요를 깸으로써 고요가 더해지는 거예요. 연못 전체의 고요, 변

두리의 고요가 ‘퐁당’ 소리에 중심부로 들어와 고요함이 증폭

되는 겁니다. 이렇게 시도 준비체조 하지 말고 딱! 써야 해요.

만들지 말고, 너무 망설이지 말고 말입니다. 아이들은 시를 쉽

게 쓰고 잘 씁니다. 연습하거나 단련하지 않아도 아이의 본성

이 시를 쓰게 되어 있지요.

피카소-추사-노자의 삼각형

피카소는 나이 구십 가까이 돼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

다. “나는 저 아이들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이렇게 늙었

다. 그림은 힘이 세다. 그림은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나에게

그리게 한다.” 아이에서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되면 애늙은이가

아닌 늙은 아이가 됩니다. A에서 B로, B에서 A'가 되는데 A'는

A와는 다른 겁니다. 하드웨어는 노인이지만 소프트웨어는 어

린이, 이것이 시인의 자리가 아닌가 싶어요.

추사가 돌아가기 사흘 전에 봉은사 판전版殿 현판 글

씨를 남겼어요. 이런 걸 교졸이라 하지요. 기교 교巧, 서투를

졸拙이에요.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에서 온 말인데 크게 교

묘한 것은 서투른 것 같아 보인다는 뜻이지요. 시공을 초월해

서 세 사람의 시각이 같은 게 놀랍지 않나요? 피카소는 그림

으로 추사는 글씨로 같은 생각을 드러낸 것인데 나는 모든 예

술가가 마지막에 이르는 경지라고 생각해요.

사랑의 거리는 어디까지?

아내가 대전 사는 아들네 가서 아침에 혼자 일어나 국

데워 밥 차려 먹고 왔어요. 아내가 없으면 괜히 무기력해져요.

제 시 「부탁」에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말아라/사랑아//모습

보이는 곳까지만/목소리 들리는 곳까지만 가거라//돌아오는

길 잊을까 걱정이다/사랑아”라고 썼는데 이는 심리적 빈곤 때

문인 것 같아요. 심리적으로 소유하지 못해, 심리적으로 가난

하기 때문에 죽고 사는 거 아닌가 싶어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제가 오직 아내만 사랑하는 것도 아닌

데 말입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더 많은 여성을 사랑합

니다. 다른 대상에게서 또 다른 사랑을 새롭게 느낍니다. 때로

는 남성에게서 사랑을 느끼기도 하지요.

문학이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2007년 8월 20일에 병원에서 나왔어요. 그러고 나서

바로 여섯 달 동안 전작산문집 『꽃을 던지다』를 썼습니다. 여

기서 꽃은 생명, 명예, 돈, 화려함 등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

는 모든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동안 아등바등 붙잡고

살아온 것들, 다 던져본 겁니다. 쓰라린 병원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글을 쓰면서 그 어두운 기억에서 저는 빠져

나올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아내는 1년, 2년이 지나도 그 기억

을 지우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산문집을 읽게 했어

요. 그랬더니 다 지우지는 못해도 많은 부분을 지울 수 있었

대요. 이게 바로 글쓰기의 효과, 글 읽기의 효과 아니겠어요?

문학이, 예술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겁니다. “내 생애 이토

록 황망한 날이 또 있었을까?”로 시작한 글이 6개월 후 마지

막 문장은 “감사의 홍수, 그 강물이다.”로 끝을 맺습니다. 그

두 문장 사이에 병원 생활이 들어 있어요. 글을 쓰면서 저는

치유된 것이지요.

성취의 희열, 그 무한한 에너지

병원에 있으면서 꼬리풀꽃 그림을 여러 장 그렸어요.

이해인 수녀에게 보내기도 했지요. 그림에 몰두하면서 비참

한 병원 생활을 잊고 잠시나마 희열을 느꼈습니다. 희열의 힘

은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에게 힘을 주는 호르몬에 도파민, 엔

돌핀, 다이돌핀, 세로토닌이 있다지요. 사랑을 할 때 도파민

이, 기뻐할 때 엔돌핀이, 감동할 때 다이돌핀이, 감사할 때 세

로토닌이 방출된대요. 그런데 다이돌핀의 효과가 엔돌핀의

사천, 오천 배래요.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이런 호르몬을 유도

해내야 해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거지요. 감동은 바로 문학과 관련됩

니다. 성취감과 감동이 함께하니까요.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꽃이 죽었다 합시다. 그러면 슬

퍼하지만 말고 그 꽃을 그린다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 시로

10 10 + 1110

써 보는 거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했을 때 세속적으로 사

고치지 않고 시로 사고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에요. 내 안의

격정적 요소를 고요히 바라볼 수 있게 해요. 만약 손에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이 칼 들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살인하게 되

지요. 제 손에 칼을 들고 있다는 의식을 가졌다면 칼을 함부로

쓰지 않게 됩니다. 내 안의 격정적 요소가 나를 부릴 때 공격

적이 되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내가 알

아야 합니다. 문학과 예술은 평정심을 갖게 해주고 자기를 돌

아보게 합니다. 놀라운 치유 효과지요.

공주,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

앓고 난 후에 또 『공주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을 썼

어요. 공주에 다시 못 올 뻔했지요. 간절해졌어요. 사랑, 그리

움을 넘어 폭발적인 결핍이 이 책을 쓰게 했어요. 책 속의 모

든 사진들 제가 다 찍었고, 문장 하나하나 애정으로 다듬었어

요. 문화관광부 추천도서에 선정되기도 했지요. 결핍을 채우

려 할 때 성취가 나와요. 궁핍과는 다른 거지요. 처음부터 갖지

못한 것이 궁핍이라면 결핍은 한때나마 가졌지만 가질 수 없

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결핍이지요. 볼 수 있던 것, 들을 수 있

던 것, 만질 수 있던 것이 지금은 안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래서 결핍과 그리움은 글을 쓰게 하는 가장 큰 에너지가 돼요.

미당 선생은 「국화 옆에서」에서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

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이라 했어요. 그리움은 부재, 아쉬

움은 부족함인데 이렇게 아프고 먼 인생길 위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이 결핍을 소중히 여기고 잘 조절해야 합니다.

시인은 죽어서 완성된다!

세계 명시 감상서 『시를 찾아 떠나다』를 쓰면서 시를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작고한 시인들의 시를 깊이 들

여다보면서 오늘의 시들이 허섭스레기같이 느껴지기까지 했

어요. 깊고, 무게 있고, 아름다운 옛 시들을 보면서 시인은 죽

어야 완성된다, 시인은 죽어서 새롭게 산다는 생각을 했습니

다. 죽어서 훌륭한 시인이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지요. 외국 시

12 2012 + Autumn 12

인편을 마쳤고 국내 시인편을 준비 중입니다. 『죽은 시인들의

나라』로 제목을 잡고 있어요.

다음 과제는 여자와 사랑에 대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이끌림』이라는 제목으로요. 소설가는 사랑을 죽이기도 합니

다. 죽이면서 더욱 리얼하게, 잔인하게 죽이는 과정을 그려냅

니다. 그러나 시인은 천천히 이별하지요. 조금씩, 아름답게,

돌아보았을 때 오래 기억에 남도록 이별합니다. 병과 생명, 공

주와 향토, 시, 여자와 사랑. 이 네 가지를 과업으로 삼아 5,6년

공부하고, 쓰고 있습니다.

나는 귀신을 느낀다

인간이 보통 이상으로 파워풀해지는 계기로 섹스, 명

정酩酊, 기도, 선禪, 무당, 시를 꼽을 수 있어요. 섹스의 황홀경에

서나 술에 취했을 때 환시나 환각상태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가 생기기도 하지요. 기도는 신과의 대화라고들 하는

데 저는 신에게 대드는 일이라고 봅니다. 조근조근 뭘 청하는

것이 아니라 보채고 울며 몸부림치며 목숨을 내놓고 통사정

하는 것입니다. 시간도 잊고 한 가지만 통절하게 청할 때 신도

하는 수 없이 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평생 한번 할까 말까 한

것이 진짜 기도입니다. 제가 입원했을 때, 서울의 저명한 의사

도, 이웃이나 가족들까지도 포기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

내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절대 혼자서는 공주에 내려가지 않

겠다고 하나님께 죽기 살기로 매달린 겁니다. 아내의 기도 덕

분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시집이에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

케가 「오르페우스의 소네트」 수십 편을 쓰고 까무러쳤다는

일화가 있지요. 시가 주는 몰입의 힘을 보는 예입니다. 제 아

들이 점쟁이한테 들은 말인데 제가 무당이라는 거예요. 제가

웃으며 끼리끼리 알아보는 거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귀신은

보인다기보다 느껴지는 것입니다. 느끼거나 미세한 소리로

듣습니다. 신의 목소리는 미세합니다. 봄도, 사랑도, 시도 미

세하게 옵니다. 때로는 몸의 상태로도 느끼지요. 영화 「사랑

과 영혼」에서처럼 예를 들어 찻잔을 떨어트린다거나 하는

것을 통해 보이기도 하지요. 시인은 내면의 소리를 듣습니

다. 나의 소리지만 내 소리가 아닌 것, 또 다른 나의 소리를

시인의 육성을 듣다

나태주 시인 편·인터뷰 김소원

12 12 + 13

건전하게 듣고 겸손하게 받아쓰는 일이 바로 시입니다. 미

당 선생도 “나는 서기書記다.”라고 했잖아요. 랭보는 보엥카見

者, “내면을 보는 자”라고 했고요.

예술작품에는 기氣가 있다

저 연꽃 그림을 보세요! 한낱 물질일 뿐인 물감을 발

라 놓은 그림이지요. 요는 그림을 보는 사람이 심리적으로 반

응하는 겁니다. 외롭다거나 고결하다거나 그렇게 느끼는 그

기운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보는 내가 반응하여

발산하고 내가 가지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나 행복감도 마찬

가지입니다. 지극히 개별적인 겁니다. 소월의 「엄마야 누나

야」를 읽고 그대로 느끼면 됩니다. 아빠는 왜 없지? 오빠는?

이런 것 따지는 사람은 고시 공부하는 사람일 겁니다. 따지지

말고 그냥 감동하는 거지요. 그러면 내 안의 좋은 기를 내가

만들어내고 누릴 수 있게 되지요.

씨눈이 다치지 않게 쌀을 씻어라

시를 쓸 때는 너무 많이 손대지 말아야 합니다. 쌀을

씻을 때 너무 박박 문질러 씨눈까지 다 씻겨나가도록 씻으면

안 되지요. 그래서 저는 너무 오랜 퇴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흘려보낸 것 속에 진짜가 들어 있을 수 있고 어수룩한 빈틈이

감동을 주기도 하니까요. 오래 다듬다 보면 시가 오던 순간의

말랑말랑함이 사라져 뻣뻣하고 질겨질 수가 있어요.

중국 송나라 구양수歐陽脩 선생의 말에 다독多讀, 다작多

作, 다상량多商量이란 권유는 오늘날도 유효합니다. 이 가운데

다독, 다작은 기본이고 다상량이 중요합니다. 이는 오래 구상

하고 생각하라는 권유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

다가 글을 써야 한다는 걸 말합니다. 숙성을 오래 한 뒤에 쓰

는 시간은 짧게 가져야 해요. 산모가 5개월부터 배에 힘을 주

면 사산하고 맙니다. 열 달 채운 아기가 아이 자신의 힘으로

산도만 빌려 나오듯이 충분히 구상을 한 뒤에 시가 나오려 할

때 받아내는 거지요. 시를 꺼내는 게 아니라 시가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출산의 아픔을 겪으며 시가 나오게 돕는 겁

니다. 산후병이 있는 아낙은 출산을 다시 함으로써 병을 고친

다잖아요? 상처 받은 상태로 다시 돌아가 상처를 잘 치유해서

아픈 몸을 건져내는 것이지요. 시원찮은 시는 애써 고치려 하

지 말고 과감히 버려요. 다시 쓰는 거예요.

어려운 시가 좋은 시인가?

까뮈가 말했어요. “분명한 문장을 쓰는 사람에겐 독

자가 모이고, 불분명한 문장을 쓰는 사람에겐 평론가가 모인

다.” 제 딸, 나민애도 평론가지만 평론가들에게 하는 충고이

지요. 요즘의 젊은 시인들 시엔 영혼성이 부족한 시가 너무 흔

해요.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파는 식으로 시를 쓰는 건 곤란하

다 생각합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최소한 저는 시에 영

혼의 흔적을 담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평론가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아요. 섭섭한 일이지요.

박완서 작가가 돌아가기 직전에 한 말씀이 떠오르네

요. “내 문장이 독자가 읽기에 쉬웠다면 글 쓰는 나는 갑절로

어려웠던 것이다.” 박용래朴龍來 시인의 「저녁눈」을 읽어 보면

언어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어울림이 느껴져요. 언어에도 자

력磁力이 있어요.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끌어당기듯

이 아름다운 우리말에서 상생相生의 언어를 찾는 일은 시인이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할 과제 아니겠습니까? 그러자면 충분히

외워서 자기 시를 써야 해요.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시, 주옥편

을 겨냥하고 시를 써야 합니다.

시인에게는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화원 근처 식당으

로 자리를 옮겨 소박한 점심을 나누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까지 얍

복 강가에서 환도뼈還刀뼈, 넙다리뼈를 다쳐가며 신과 씨름한 이야기, ‘나태주

풀꽃 문학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들었다. 사이사이 드나드는 시민들

과 나누는 인사나 종업원 여학생에게 건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그대

로 시다. 공주 금학동 사람 나태주 시인! 레테의 강어귀에서 되돌아와 더

뜨겁게, 푸르게 사는 그의 모습에서 하루도 같은 얼굴 보이지 않으면서

쉼 없이 흘러가는 비단강을 보았다.

김 소 원

1959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수학과 졸업. 2002년 『문학과 경계』로 등단. 시집으로 『시집 속의 칼』, 『그리운 오늘』. 편운문학상 신인상 수상.

14 2012 + Autumn

시인의 수필

구름이 흘린 것들 조병화

+ 1514

1. 고독한 영혼

어려서부터 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습니다. 극도로 혼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편안하기 때

문이었습니다. 사람 앞에 나서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사람 앞에서 이야

기를 하는 것처럼 수줍은 일도 없었습니다. 자연히 혼자 생각하고 혼자와 문답하고 혼자를 사

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눈이라는 작은 마음의 창을 열어 놓고 세상 사람들을 많이 구경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귀라는 작은 영혼의 문을 열어 놓고 실로 멀리, 멀리, 들리지 않는 것까지

들으며 자랐습니다. 신비로운 세상을 신비롭게 들으며, 보며, 혼자서 혼자서 자랐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 것을 즐겨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쓰

고 그리고 만드는 것에 취미를 붙였습니다. 학교에서도 작문이 뛰어났고 그림이 뛰어났고 공

작이 뛰어났습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무엇을 만드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없었습니다.

혼자서, 혼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랬습니다. 학교에서도 떠들썩

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반장도 하고 회장도 했지만 반장이니 회장이니 하는 것의 일이

끝나면 나는 언제나 혼자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이러한 혼자 속에서 나는 자랐습니다. 이 혼자야 말로 내가 혼자서 성숙한 큰 에너지, 그 원

동력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실로 혼자서 많을 것을 생각하고, 혼자서 많

은 것을 느끼고, 혼자서 많을 것을 살고, 혼자서 많은 것을 움직이고, 혼자서 많은 여행을 했습

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첫 장에 나옵니다. “나는 내 내부

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것에 애썼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어려운지……” 그때도 내부

의 자기를 살려 했고, 그걸 살아왔고 지금도 그걸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것이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혼자만을 고집하는 개인주의적인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을 생각하고, 우리를 생각하고, 사회를 생각하고, 공손과 우정

을 생각하면서 살아온 생애였습니다. 나와 우리, 이 큰 틀을 의식하면서 응시해온 생애라 하

겠습니다.

“어느 것에나 휩쓸려서는 안 된다.” 이러한 철학을 세워 누구에게 이용당하지 않는 생애, 누

구를 이용하지 않는 생애, 그 꼿꼿한 곧은 나의 생애를 살려 했을 뿐입니다. 항상 자기가 있는

생애, 자기가 보이는 생애, 자기를 확인하는 생애, 자기를 실감하고 책임지고 매듭을 짓는 그

혼자의 세계를 살려 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생애에 매듭을 지으며 살아가는 생애, 그것은 아마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삶

일 것입니다. 저는 요즘 이러한 생각들에 잠겨 있습니다. 별 것 아닌 이 짧은 인생에서.

(1986년 3월)

2. 인간의 무게, 인간의 값

언젠가 여름방학 기간에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비행기가 늦어져서 김포

공항에 내리자마자 시내로 급히 전화할 일이 생겼습니다. 밤 아홉시 반. 공중전화 부스까지 달

려갔으나 동전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흔한 동전이 없는 거였습니다. 그렇다고

16 2012 + Autumn

시인의 수필

구름이 흘린 것들 조병화

지폐를 동전으로 바꿀 곳도 모두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꼭 동전이어야만 했던 공중전화.

이거 야단났다 싶어 조마조마하고 있는 상황에 거지 행색을 한 사내가 지나가고 있었습니

다. 나는 “혹시!”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동전이 있느냐고 물은 내 말에 그 사내는 반갑게도 있

다고 했습니다. 그거 좀 바꾸자고 호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잔돈은 없고 빳빳한 새 지폐가 선

뜻 손에 잡혔습니다. 얼결에 “이것 자!” 하고 동전 하나와 그 신권 지폐를 바꿨습니다. 황급히

다시 공중전화에 달려들어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통화 중. 다시 걸려고 전

화 수화기를 내렸으나 그 귀중한 동전은 다시 나와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전화통을 흔들어

도 동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공항에는 그 많던 인파도 사라지고 어두컴컴한 대합실에 나만

외톨이로 남았습니다. 이거 야단이로구나 하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공항 대합실에서 나와 버

렸습니다.

그렇게도 운이 없던 날.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조국은 아직도 이렇게 캄캄하고 어려운 곳이

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연거푸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택시마저 나를 땀

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1979년 8월, 무덥기 짝이 없던 여름날이었습니다. 밤인데도

밖에서 매미가 따갑게 울어대고 있었습니다. 오일 쇼크로 한층 더 무덥고 찌는 한여름이었습

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제의 불안, 급변하는 자본시장에서 하루살이 같은 돈의 함수를 견

디어 내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그렇게 소중했던 동전이 이제는 우리들 사이에서 큰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쓸모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 동전이 빛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값어치가 완전히 하락했습니

다. 이제 동전은 그저 동전지갑 속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구는 무겁고 성가신 쇠붙이로 천대

를 받는 형편이 되어버렸습니다.

동전이 예전처럼 행세를 못하는 요즘, 동전은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택시에서

도 천덕스럽게 되어버렸습니다. 술에 취해서 백 원짜리인지 오십 원짜리인지, 동전 뭉치로 잔

돈을 치르면 “이건 오십 원 짜리입니다.” 하고 반색을 하는 택시 기사의 얼굴을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고의로 그렇게 치른 것도 아닌데 오십 원짜리가 섞여 있던 것입니다. 체면이 참

부끄럽게 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렇게도 소중하고 쓸모 있던 동전이 오늘에는 이렇게도 천덕꾸러기가 되

어버린 것입니다. 장기에 있어서 때로는 마馬나 상像이나 포包보다도 더 나은 졸卒의 구실을 하

던 그 동전이 완전히 그 구실을 할 수 없는 힘없는 폐물처럼 빛을 잃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경제와 인식은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눈 코 뜰 새 없는 속도의 시대입니

다. 무서운 것은 돈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무게입니다. 인간의 가치, 사람의 가

치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값이 이토록 하락해가는 시대입니다.

과거 존중받았던 인간의 가치는 오늘에 와서 완전히 퇴색되어버렸습니다. 어제는 그렇게도

소중해하고 존경했던 사람을 시간이 지났다고 오늘에는 완전히 민망스러울 만큼 무용한 존재

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삽시간입니다. 이렇게도 변화가 빠릅니다. 무서운 일입니

다. 천대를 받는 인간처럼 처량한 인생이 또 있겠습니까. 버림을 당하는 동전, 그처럼 버림을

받는 처지로 전락한 인간. 이러한 것들을 두루 생각하면서 새삼 실용주의로 빠져버린 현대의

이 무서운 현실주의자들을 한탄해봅니다.

수양법으로 삼아 생자무상生者無常이라는 글귀를 붓글씨로 써본 일이 있습니다. 인생은 이렇

+ 1716

게 무상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무상을 무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무

상을 무상으로 사는 사람만이 강한 사람입니다. 무상을 무상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지키려

는 것에서 인생의 비애가 생겨납니다.

애착이라는 것은 무서운 병입니다. 약한 자의 병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생각해서 소용

이 없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를 해방시켜두어야 삶은 그제야 살만해 집니다.

아무리 모든 것들이 다 쓸모 있을 때 그 빛을 발하는 것이라지만 그렇다고 인간까지 그래

서야 되겠습니까?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쓸모없는 인생의 먼지로만 여겨져야 되겠습니

까? 빛을 보고 있는 인간, 빛을 잃어가고 있는 인간,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손에 쥔

동전을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1986년 3월)

3. 싸리꽃

지금 나는 시에 의지하여 인생의 좁은 길을 맑게 걷고 있지만 나는 늘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에, 풍요로운 것보다는 청빈한 것에, 요염한 것보다는 애절한 것에 눈길을 두었습니다. 이렇

게 가진 것 없는 영혼들을 찾는 나는 아직도 구름입니다.

큰 꽃보다는 작은 꽃을, 이름 있는 꽃보다는 이름 없는 꽃을, 황홀한 꽃보다는 빈약한 꽃을,

으스대듯 핀 꽃보다는 가려지고 조촐하게 핀 꽃을 좋아하는 나의 심정은 무엇인지 때론 나도

이것이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장미보다 백합보다 모란보다 다알리아보다 해바라기나 칸나보

다 작은 들꽃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이것은 내가 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는 데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존 경쟁에 있어 늘 쳐지기 때문을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인 나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꽃이 있습니다. 싸리꽃입니다. 그중에서도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 핀 싸리꽃을 좋아합니다. 외떨어져서 피어나는 싸리꽃, 나는 그 영롱한 눈알들

속에서 숨어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내가 찾고 있는 내가 그 속에 들어 있는 듯

한 착각, 착각인 줄 알면서도 나의 마음은 길을 가다 길을 얻는 것 같이 큰 기쁨을 느끼곤 합니

다. 온 하늘이 모두 그 꽃송이들 속에 들어박혀 있는 듯한 즐거움, 생명이 주는 그 희열을 이곳

에서 발견합니다. 오물오물하고, 아기자기하고, 맑고, 깨끗하고, 항상 웃고 있는 듯한 꽃의 모

습. 그 속에 무한한 세계가 들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작은 꽃 한 송이 속에서 우주가 돌

고 있는 모습도 봅니다. 하늘이 돌고, 구름이 돌고, 바람이 돌고, 세월이 돌고, 삶과 죽음이 같

이 돌고 있는 무한한 시공이 그 속에 있는 것 같은 생존의 기쁨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발견의

기쁨은 내 영혼의 약입니다. 고된 영혼을 위로하는 약입니다. 이 영혼의 약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는 동안 나는 이 빛 속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1988년 1월)

18

조병화론

실존적 저항과 시대적 고투 안서현

편운片雲 조병화의 시에서 고독의 시정詩情은 그 연원이 깊

다. 그러한 정서는 말년에 쓴 후기 시에서 더욱 그 전모가 완

연해지고 있으되, 그 본래적 형태는 초기 시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멀리는 해방기나 전후에 쓴 시들부터 이미 특유의 고

독의 원형질을 포함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그 시대의 황폐한

분위기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요컨대 혼돈과 격랑

의 시대를 온몸으로 지나며 그 정신적 내상의 풍경을 시화한

것, 그것이 조병화 시인 특유의 고독과 허무라는 시적 정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이후 시인의 긴 창작 행보에서

더욱 난숙한 철학적 깊이를 얻으면서 단순한 ‘정서’를 넘어선

하나의 ‘태도’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여러 선행한 글들이

밝혀놓은 바와 같다.

조병화 시인의 시가 고독과 허무를 주조로 하면서도 감상

주의에 그치지 않고 의미의 넓이와 깊이를 얻게 되는 지점이

바로 이러한 배경의 역사성과 또 그러한 역사를 이념이나 권

력 등에 속박된 시선으로서가 아니라 철저한 외부적 시선으

로 바라봄으로써 획득된 문명 비판성, 또 그러한 과정에서 시

인 자신만의 고유 상징과 시의 정조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며

그 의미론적 깊이를 더해온 시작詩作 활동의 연속성이라는 세

가지 측면일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점에 초점을 두고 조병화

시인의 초기 시들을 검토함으로써 여기에 투영되어 있는 원

체험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해보기로 한다.

거리는 차다쌀쌀하여라뭉쳐 흐르는 수없는 洋靴의 무리손님 없는 인력거같이

아스팔트만 굽어보곤 했다

太陽보다 <時計>사치스러운 베일을 쓰고 거리는 쏘다니길 좋아하며名銜 履歷書 貨幣 체취街路燈이 處女의 感傷같이 익을 무렵엔門 닫은 店員같이 보이곤 했다

거리는 차다쌀쌀하여라洞穴같이 깜깜한 地下室 入口에 故鄕을 잊은어린 淡水魚들은哲學보다 詩, 詩보다 生活忘却을 즐기는 습성을 배워 꼬리치며가볍게 가볍게 돌아가곤 그랬다

—「거리」, 전문

처녀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에 수록된 위 시에서 공간

적 배경이 되고 있는 도시의 거리는 삭막한 “명함 이력서 화

폐 체취”라는 물질성으로 요약되는 문명화의 공간이자 그 안

에서 자기 운명을 망각한 “어린 담수어”들이 헤엄치는 역동

적 공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이 시적 장면을 읽어

내기 위해 우리는 이 시집의 후기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

조해볼 수 있다.

고독과 우울과 표박漂泊, 또한 언제나 혼란과 고뇌로 나의 모든 어린 신경을 짓밟아 놓은 생의 위협, 그리고 그의 공포, 그러한 것의 간헐적인 내습……. 그런 날의 농회색 바다와 하늘이 원한이었고 위안이었던가. 바다와 나-나의 허전한 운명.

2012 + Autumn

실존적 저항과 시대적 고투

조병화

초기 시에

나타난

‘바다’의 시학

+ 1918

그러나 해와 달이 가고가던 어느 날 내가 소라의 갑라甲

羅를 벗어 버리고 대도시 한가운데 어린 담수어와 같이 헤엄치길 배워 가던 날 나는 새로운 <그 무엇>의 예고를 떨리는 가슴에 홈빡 안고 <나>를 잊어버릴 지경이었습니다. <무거운 유산遺産을 버리자.><불안한 안식일의 그 유산을 버리자.>

다시 말해 조병화 시인에게 ‘바다’는 운명론적 공간인 동

시에 문명론적 공간이다. 즉 인간 보편의 운명인 고독과 우

울, 실존적 불안을 의미하는 동시에 근대 도시에서 일반화된

개인들의 단자적 삶의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식민지시

기에 청춘기를 보내어 “고향을 가지지 못한 어느 <시대의 기

형아> 같은”(후기의 일부) 시인 자신의 세대적 위치에서 오

는 혼란과 고뇌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자신

만의 갑라甲羅 속에 들어가 고뇌와 번민에 침잠해 있는 ‘소라’

와 같은 존재태도 가능하지만, 그 안에서 무엇에도 얽매임 없

이 활발하게 유영하는 ‘담수어’와 같은 실존의 방식도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같은 시집에 수록된 시 “바다엔/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허무한 희망에/몹시도 쓸쓸해지면/소라는 슬

며시/물 속이 그립답니다”(「소라」, 부분)의 일절에서는 바다

가 고독과 내핍의 공간으로 부각된다. 그러나 또 다른 이 시기

의 시 「추억」의 “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이틀/사흘//여름 가고/가을 가고/조개 줍는 海女의 무

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라는 구절에서는 망각과 체념의 공

간으로서의 바다가 드러나 있다. 시인은 ‘바다’로 표상되는 인

간의 존재 조건에 순응하되 대신 ‘나’라는 강고한 껍질과 자기

정체正體의 피로한 유산을 버리는 자기 부정의 과정을 통해 역

설적 자기 해방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오히려 異國人들끼리 다정한 거리에 내가 태여났오그것이 내 過誤의 第一原因인가 보-아무려면 어떤가나는 人間에서 絶緣된 人間거리마다 二面의 表情이오아 距離上의 曲藝師들이오地圖를 펼치면 다 나의 鄕土鄕土 밖에 서서잃어버린 엄마 엄마의 이름을 부르오누구의 아들이기에 나는 이리 약할까미련이 있으나마단번에 부정해버릴 수 있는 그러한 것에

나는 나의 삶을 봉사해 왔오祭典 끝에 남은 것이아 찬란한 空虛戰慄이라오내일을 황홀히 기다리는 절망 속에내일의 到來를 두려워 하는 심사라오그래도나는 아름다운 실연가처럼 슬프지 않으오오히려 異國人들끼리 다정한 거리에외롭지 않은 사람처럼 내가 살아가오-아무려면 어떤가나는 人間에서 絶緣된 人間이오

—「곡예사」, 전문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에 수록된 「曲藝師」라는 위 시

에도 역시 고독에 갇혀 있기보다 먼저 스스로 세계로부터 절

연絶緣하는 시적 주체의 태도가 드러나 있다. 이때의 고독은 이

번에는 “이국인들끼리 다정한 거리”에서의 소외에서 비롯한

다. 이는 피식민의 상황이 종식된 후에도 여전히 외국인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혼란한 향토의 상황을 지시하는 것으

로, 역시 고독이라는 정서의 시대적 의미를 보여주는 대목이

다. ‘나’를 만들어왔던 모든 것은 모두 “단번에 부정해버릴 수

있는” 것들이라는 구절에서 예의 자기부정을 통해 이러한 고

독을 극복하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시적 주체는

이를 통해 공허와 절망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실연가처럼 슬

프지 않”을 수 있다고 예감하고 있지만, 그러한 모습이 곡예

사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긴 세월을해류에 닦인 암석의 표정이 있고몇 천년을바다의 생리를 닮아온 女人의 피부-피부속 그 속에머언 어버이들의 海峽을 지키고억센 생존의 역사처럼 따스한 혈액이 흐르고가냘픈 운명을 구양하던海神祭의 마지막 등불이 넓은 적막에 저물 무렵엔또하나 어린 信仰이어족의 행렬을 쫓아 들었다파도치는 암석 사이사이로海藻類 사이사이로生死에 얇은 사이사이로한 개의 박은 흘러간다생활의 애수인양 맑은 육체는 흘러 간다

20

먼 <아세아>늙은 山脈 끝머리 海峽에 출렁생활의 애수인양 따스한 乳房은 저물어간다

-「해녀」, 전문

「해녀」에서는 이러한 민족의 운명이 “아세아” 끝의 한 “해

협”으로 공간화되고, 그 안에 뛰어든 한 해녀의 육체가 포착

되고 있다. 그러한 역사 안에서 “생활의 애수”를 간직하며 살

아온 한 민중이자 어머니의 육체에 대한 애상적 시선이 드러

난다. 이 해녀의 육체 이미지 역시 예의 “담수어” 이미지처럼

척박한 운명을 자기부정의 “신앙”을 통해 이겨내고자 하는 가

냘픈 저항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러한 航海의 聽覺이 남어 있어창문이 없는 貝殼의 寢室에 누워축축한 덱끼에아즉 경험하지 못한 등불처럼떠오던시모노세끼 안개 깊은 아침을 회상한다부드러운 言語를 잃은貝殼의 寢室이밤새 여물어가던 달과 별이 굴러내리는해협 기슭에

일그러진 玩具처럼잠을 걷는다꿈을 걷는다

—「해협의 아침」, 부분 하얀 貝殼 속에서 授業을 한다산머루처럼 익어 가던 학생들의 까만 눈알들이

전쟁에 혼 떼어파란 海峽의 魚卵처럼 맑다

고사리 같은 하얀 목들은바다를 향하여 날로 길어진다

하얀 貝殼 속에서魚卵처럼 맑은 눈알들에 끼어 아내와 싸우고 나온 기억을 잃어버린다水平에 뜬 病院船을 바라다본다

비 내리는 날이면나의 臨海敎室은HOLIDAY

바미리온 표식 아래 누워나는發疹디부스에 걸린 바다를 내려다 본다

학생들이 理解하지 못하는 詩를 쓴다

아세아 작은 半島南端으로 밀려 와하얀 貝殼 속에서 授業을 한다

—「임해교실」, 전문

위에 길게 인용해놓은 두 편의 시는 한국전쟁기, 시인의 부

산 피난 시절에 쓰여진 다른 시들과 함께 『패각의 침실』1952

에 묶여 있다. 부산 피난지에서 겨우 마련한 “패각의 침실”에

찾아온 꿈은 식민지 시대의 상징물인 관부 시노모세키에 대

한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고난이 되풀이되는 것을 “항해의 촉

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피난지 학교의 교실이 위치해 있

는 바다에는 학생들의 맑은 눈빛과 달리 “병”과 불건강의 기

운이 만연해 있다. 따라서 ‘내’가 휴교일을 틈타 쓰는 시는 학

생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들에 나타난 전쟁의 기운

은 개인을 단단한 “패각” 속으로, 즉 고독 속으로 다시 움츠러

들어가게 하는 존재 조건으로 의미화되고 있다.

무수한 金屬粉처럼 쏘다지는태양을 맞아가며友情과 背馳되는 路上에 서서나는 낡은 紙幣의 皮膚를 비벼야 했다

一九五二年亞細亞 그어느 콩크리이트 계단에 비켜서서검은 薔薇를 안은 수만의 淑女들을나는 보내야 했다

戰爭과 戰爭의 溪谷으로 黃昏이 저물어아애들의 울음이 먼 하늘에 짙으면오히려 그 누구도 理解할 수 없는薔薇의 祝福을 기울이고

찬 겨울 밤年代와 年代가 바뀌는 틈 속으로

2012 + Autumn

조병화론

실존적 저항과 시대적 고투 안서현

+ 2120

이렇게 낙타깃을 여미고 나는 내려가야만 한다

벗이어出世와 利得이 가랑잎처럼 쏟아지는書類의 그늘을 비켜 가며이와는 背馳되는 人間構圖의긴 斜陽을 걸어가는 벗이어

오오 一九五二年생명의 푸른 絶壁을너와 나는 이렇게 서야만 했다

—「인간구도-김규성 씨에게」, 전문

제4시집 『인간고도』1954에 수록된 시다. “전쟁의 계곡”을

지나오자, 이번에는 “출세와 이득”을 위하여 지폐와 서류들

사이를 걸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이와 배치되는 “인

간구도”의 길을 따라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벗을 본다. 두 길

은 “생명의 푸른 절벽”을 놓고 마주 서 있다. 이 시집의 표제

역시 이렇게 각자 고립되어 있는 인간의 모습을 ‘섬’으로 표현

하고 있다. 또 시인은 이 시집의 후기에서 “書類 貨幣 組織 이

러한 文明의 콩크리이트 틈바귀에 끼어 둥둥 외롭게 떠 있는

섬과 섬. 이 섬이 그대이고 나이고 人間인 것이다.”라고 말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도 도저한 문명 비판적 의미

가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소멸하는 것과 생존하는 것-<대천해수욕장>

에서」1957년 시집 『서울』에 수록는 조병화 시에 등장하는 ‘바다’의 상

징성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전문을 살펴본다.

바다는 일체의 권위를 무시한다바다는 일체의 철학을 웃어버린다

바다는 일체의 만물을 동등하게 한다<適者>는 생존하는 것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모두 그저 사라져버리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서로의 숙명을 지닌 약한 자들이 서로 소멸되어감에 있어 소멸하는 자끼리 서로 슬픔을 위안하기 위하여 같이 소멸해가는 사랑에 엉겨 사랑할 뿐이다사랑은 약한 자들의 최대의 보람이다사랑은 약한 자들의 최대의 저항이다

충남의 남단. <황해> 바다 <대천해안>의 모래밭 조개껍질

깔린 바닷가에 인간의 아들들이 물개들처럼 재주를 넘는다.

시간에 구른다. 물을 헤치고 나가다 물에 밀려 되돌아와 옹기

종기 햇살에 모여 앉는다.

바다는 일체의 철학을 웃어버린다바다는 일체의 권위를 무시한다

위의 시에서 “바다”는 알 수 없는 생사와 유한성, 소멸의 운

명이라는 인간 실존의 조건을 나타낸다. 그곳에서 연약한 인

간들은 “사랑”을 통해서만 이에 저항할 수 있다. 자기부정을

통해 고독과 허무에서 초탈하려는 삶의 의지가 다시 사랑에

의 의지로 변화하고 있는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조병화 시인의 초기 시에서 고독한 인간 운명의

행로이자 표지로서, 많은 개인들이 고립되어 헤엄치는 도

시적 삶의 공간의 표상으로서, 의미론적 구심으로 기능하고

있는 ‘바다’의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인간 운명의 무자비

함과 그 속에서 조개처럼 구르는 개인들의 유약성, 그리고 그

러한 개인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근대 문명의

차가운 속성 등을 시인은 ‘바다’를 둘러싼 이미지와 상징체계

를 통해 의미론적으로 구축해놓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식민지

와 전쟁 등의 시대적 체험의 양상을 함축함으로써 역사적 질

곡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바다’의 의미는 더욱 의미

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를 통해 조병화 시인의 “바다의 시학”이라 함은 그 안에

서 찾아진 실존적 저항과 시대적 고투에 대한 의지, 나아가 초

월적 사랑의 의지에의 표명을 일컫는 것으로 정리해볼 수 있

겠다. 바다에서 표박漂迫하다가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하

고, 또 나아가 이를 거슬러 움직이려는 인간의 실존적 몸짓이

조병화 시인의 시에서 환조丸彫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

안 서 현

문학평론가. 201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계간 『학산문학』 편집위원.

22 2012 + Autumn

제22회 편운문학상

심사경위ㆍ심사평

심사경위

제22회 편운문학상은 2011년 한 해 동안 발간된 신작 시

집, 평론집을 대상으로 했다. 이전의 수상자를 비롯해 문학전

문가들에게 추천받은 작품집 200여권을 바탕으로 운영위원

회에서 예심을 거쳐 강은교의 『네가 떠난 후에 너를 얻었다』

서정시학, 고진하의 『거룩한 낭비』문학에디션 뿔, 문충성의 『허물어

버린 집』문학과지성사, 오정국의 『파묻힌 얼굴』민음사, 이명수의 『

풍마 룽다』책만드는집, 최정례의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

데』문학과지성사, 한영옥의 『다시 하얗게』천년의시작 등 7권의 시집,

김수이의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창비, 문흥술의 『언어의 그

늘』서정시학, 오생근의 『위기와 희망』문학과지성사, 정효구 『일심의

시학 도심의 미학』푸른사상 등 4권의 평론집을 본심에 올렸다.

본심은 3월 23일 오후 4시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사무실에

서 열렸다.

제22회 편운문학상 본심 심사위원들은 신중한 토론을 거

쳐 문충성 시인과 오생근 평론가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한편, 지난해까지 21회를 이어온 편운문학상은 올해부터

우수상, 신인상 부문을 없애고 시와 평론 본상만 운영하기로

하고 상금도 각각 1,000만원으로 올렸다.

시부문과 평론부문 심사평은 다음과 같다.

제22회 편운문학상

심사위원장 김 명 인

심사위원

김명인(시인), 박덕규(시인, 문학평론가), 장경렬(문학평론가)

시 부문 심사평

중진에서 원로급이 주요 대상이 된다는 게 편운문학상의

한 특징이라 할 만한데, 본심에 오른 중진, 원로들의 시집 7권

은 새천년 들어 10년 동안에도 우리 시가 수준과 다양함에서

쌓아올린 양이 만만치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들은 고단한

현실의 비애를 경험하면서, 역사나 신화의 세계를 탐색하거

나 표변하는 일상의 층을 탐사해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값진

가치를 재현하고 있다.

문충성의 『허물어버린 집』은 그 중에서도 지나온 시간으로

부터 오늘에 내재된 욕망의 잔재를 씻어내는 질료를 부단히

찾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시인은 이미 1970년대 후

반부터 제주도의 오랜 역사와 오늘의 각박한 삶을 연계해 개

인의 진실이 설 자리를 질문함으로써 지역적 특수성을 그 자

체의 문화적 가치로 각인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동시대

적 문제로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바 있다. 이 시집에서도

적절한 제주 방언 구사로 시인은 오늘의 삶에 면면한 시간의

경험과 그것이 깨우쳐주는 교훈을 간결하게 드러낸다.

시인은 이제 어쩔 수 없이 흐르는 시간에 몸과 마음을 방임

하고 있지만 그만큼 원숙해지면서도 여전한 언어 감각으로

흘러간 시간을 성찰한다.

허물어버린 집이 요즘

꿈속에 나타나온다

할머니 어머니가 사셨다

돌아가시고 나서

제22회

편운문학상

심사경위ㆍ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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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버리면 안 될 집을 허물어버렸다

[중략]

시간이 사라져 없는 풍경 속으로

오늘도 들어가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도

풍경이 된다 어느새

—「허물어버린 집」에서

허물어버려서는 안 될 것까지 허물어버리고 살아왔다는 쓰

린 자각과 그 자각마저 사라지는 시간의 풍경에 맡기고 있는

비움의 자세가 ‘환한’ 시 세계를 열고 있다.

(글: 박덕규)

평론 부문 심사평

객관적 분석과 심미적 평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

아야 한다는 점에서, 문학 평론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리고 문학 평론 가운데 특히 쉽지 않은 것이 시 평론인데,

조병화 시인의 말대로 시란 “짙은 안개”와도 같은 것이고 시

를 평론하는 일은 이 “짙은 안개” 속을 거니는 것과 다름없

기 때문이다. 탁월한 시 평론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연유

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예심을 거쳐 이번 편운문학상 평론 부분 수상 후보

작으로 올라온 네 권의 평론집은 모두 즐거운 예외에 속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시에 대한 명징한 분석과 예리한 평가가 어

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를 나름대로 보여주는 흔

치 않은 역작들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사정이 그러했기에,

수상작을 선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평론집의 장점을 다각도로 짚어보는 오랜 시간의 논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오생근 씨의 『위기와 희망』을 수상작으로 올리

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위기와 희망』을 통해 오생근 씨가 모색하고 있는 것은

“문학의 위기를 위엄 있게 극복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그는 “몸은 쇠약했어도 정신은 더욱 투명해진 문학

이 꼿꼿한 자세로 자기의 설 자리와 갈 길을 의식하고 한 걸

음, 한 걸음 나아가는 모습”에서 “오래된 희망이자 새로운 희

망”을 찾고자 한다. 이처럼 ‘위기’와 ‘희망’의 구도에서 오늘날

의 한국 문학을 점검하고 있는 오생근 씨의 이번 평론집은 4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특히 주목했

던 것은 최근의 한국 시단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시도한 시

론들이 수록되어 있는 제1부 및 최근 시단에서 주목받는 시

인들의 작품 활동에 대한 개별적 분석과 평가가 수록되어 있

는 제2부였다.

오생근 씨의 시론에서 모든 심사위원들이 무엇보다도 먼

저 확인한 덕목은 오늘날의 한국 시단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

에 담긴 탁월한 균형 감각이었다. 이어서 정치하고 세련된 분

석과 설득력 있는 평가 사이의 조화로운 결합 역시 심사위원

들이 확인한 또 하나의 덕목이었다. 아울러, 그가 구사하고 있

는 평론의 언어가 난삽하지 않으면서도 예리하고, 예리하면

서도 유연하다는 점 역시 그의 시론이 갖는 덕목이라는 데 심

사위원들은 의견을 함께했다.

제22회 편운문학상 평론 부분을 수상하게 된 오생근 씨에

게 축하의 말을 전하며, 앞으로도 계속 한국의 문학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탁월한 평론 작업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글: 장경렬)

24 2012 + Autumn 24

제22회 편운문학상 수상소감

시 부문 본상 문충성

편운문학상 운영위원회 김광규 위원장

이 이번 편운문학상 시 본상 수상자로 제

가 뽑혔다고 통보해 주셨습니다. 놀랐습

니다. 그 놀라움은 이내 기쁨으로 바뀌었

습니다. 시골에서 문학상은 수상해 봤지

만 한 번씩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작품

이 신통치 않아서 ‘문학상’하고는 인연이

없는 저로서는 이 수상자 통보에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 조병화 선생님에

대한 몇 가지 옛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오현고교 1학년 때 제가 선생님

의 심사로 『학원』학생지가 주는 제2회 학

원문학상에 입선작으로 뽑혔습니다. 당선

작 한 편과 입선작 열 편, 가작 등을 뽑았

는데 입선작은 그런대로 시골에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6ㆍ

25 피난시절 대구에서 발간된 이 소년 잡

지는 당시 중·고등학생들에게 좋은 읽을

거리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친구

들 사이에서 저는 갑자기 소년 시인이 되

어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이후 마흔이

되도록 시 쓰기를 게을리 했습니다. 그러

다 계간 『문학과지성』에 몇 편의 시를 발

표하게 되어 늦깎이 데뷔를 하게 되었습

니다. 『문학과지성』을 이끌던 김병익 선

생은 『학원』 시절 같이 시를 쓰던 같은 또

래였습니다. 황동규, 마종기 시인들은 이

미 중견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분들

을 이곳에서 보자면 아득한 사이를 느낍

니다.

다른 하나는 제가 1970년대 말께 제주

신문 문화부장으로 있을 때 조병화 선생

님께서 제주에 오셨습니다. 편집국장으

로 계셨던 소설가 최현식 선생님과 몇몇

신문사 기자들(소설가 오성찬, 문학평론

가 송상일)과 저녁을 나눈 적이 있습니

다. 특유의 파이프 담배를 즐기시던 모습

이 떠오릅니다. 그 후엔 만나 뵐 수 없었

습니다.

칠순에 큰 상을 받아 한 녘 마음이 무

겁기도 합니다. 죽는 날까지 나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쓰겠습니다. 나위없는 제 시를

좋게 봐주시고 뽑아주신 심사위원께 머리

숙여 고마움을 표합니다.

나만이 쓸 수 있는 시

문 충 성

●

1938년 제주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7년 계간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

시집으로 『제주바다』, 『내 손금에서

자라나는 무지개』, 『바닷가에서 보낸 한

철』, 『허공』, 『백 년 동안 내리는 눈』,

『허물어버린 집』 등이 있음.

현재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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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편운문학상 수상소감

평론 부문 본상 오생근

3월의 어느 주말 오후에 김광규 선생

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김 선생

님이 먼저 “편운문학상이 있는 것은 아시

죠?”라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나는 “잘 알

고 있지요.”라고 대답했는데, 그 순간 김

선생님이 나에게 그 상의 심사를 맡아달

라고 전화한 것이려니 하고 짐작했습니

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내가 그 상

의 평론부문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것입

니다. 나는 정말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럽

기도 했습니다. 어떤 상이건 수상자가 되

었다는 통보를 받으면 당사자는 당연히

그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텐데, 그

어떤 느낌보다 민망하고 난처한 느낌이

앞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상은 젊

은 사람들이 받는 상일 텐데, 제 나이에 어

떻게……”하면서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

었습니다. 그랬더니 김 선생님이 심사위

원들은 수상자의 나이를 보지 않고 오직

책을 보고 결정했을 뿐이며, 저보다 훨씬

선배인 비평가들도 이전에 수상자가 되었

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서 저는 한 두 시간쯤 생각할 시간을 달라

고 했습니다. 그런 후 이 생각, 저 생각하

다가, 남들이 저를 어떻게 볼까 하는 문제

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수상 결정에 동

의를 하였습니다.

저는 70년에 문단에 데뷔해서 문단 경

력은 42년쯤이 됩니다. 전반기에는 주로

소설 비평을 하다가, 후반기에 들어서 시

비평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소설 비평

보다 시 비평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 이번 비평집에서 저의 시를 이해하는

마음이나 시 분석의 관점이 아마도 심사

위원들의 호의적인 시선을 끌게 된 모양

이라고 제 멋대로 해석하면서, 뒤늦게 기

쁜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표현합니다.

시를 이해하는 마음

오 생 근

●

문학평론가. 1946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불문과 졸업.

프랑스 파리 10대학 불문학 박사.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로 『삶을 위한 비평』,

『현실의 논리와 비평』,

『그리움으로 짓는 문학의 집』,

『위기와 희망』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대한민국학술원상 등을

수상.

26 2012 + Autumn

제22회 편운문학상

운영규정

시는 영혼의 화석

- 제1회 편운문학상 시상을 마치고

가진 거 하나도 없이 이 세상에 나와서

돈 들이지 않고 공부도 하고

많은 굵은 상도 탔습니다

지금 인생을 마무리 지으려는 나는

그 많은 은혜를 다 합쳐 보답도 하고

다시 가진 거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이 상을 마련했습니다

‘시는 영혼의 화석’ 이라는

황금의 메달을 달아서

1991년 5월 2일

◉ 편운문학상 운영규정 ◉

1. 이 상은 편운 조병화 시인의 문학에 대한 순수하고 깊은 뜻에

의해서 제정된 상으로 한국시의 새 지평을 연 우수한 시인 및

평론가에게 준다.

2. 수상자 자격 및 대상 작품은 아래와 같이 정한다.

가) 수상부문은 시부문과 평론부문으로 나눈다.

나) 수상작품은 수상 연도를 기준으로 지난 1년간의 성과(작품집)

를 대상으로 한다.

다) 수상작은 한국시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키는데 기여한 시

인의 작품 및 평론가의 작품으로 한다.

3. 시상은 편운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정하는 소정의 상금과

상패를 수여한다.

4. 심사위원과 심사방법은 다음과 같다.

가) 심사위원은 예심과 본심으로 나누어 운영위원회가 위촉한다.

나) 예심위원은 부문별 수상 후보작을 추천하고 본심위원은 예심에

서 선정된 후보작을 대상으로 부문별 수상작을 결정한다.

다) 수상작은 심사위원 과반수로 정한다.

5. 시상식은 매년 5월 초에 한다.

6. 이 이외의 규정은 운영위원회에서 필요에 따라 정할 수 있다.

1990년 5월 2일 제정

2012년 1월 10일 개정, 시행

편 운 문 학 상 운 영 위 원 회

위원 : 김광규(장), 김삼주, 김종회, 박덕규, 오형엽, 조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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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답장

조병화

먼 여행에서 돌아와

난로에 장작을 지피며

쌓인 편질 읽는다

마냥 적막한 산장,

창 밖엔 나무 사이로 눈이 지나가며

한 장 한 장 넘겨가는 눈에

문득 머무는 한 여인의 사연

안면도 모르는 이 편지의 주인은 누굴까

소녀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인생의 길을 잃은 듯한 사연, 아니면

길을 묻는 듯한 사연

나는 이 사연에 어떻게 답장을 써야 하나

활활 타오르는 불꽃

튀는 불꽃 소리

이 가숙假宿에서

잠시 여정을 푸는 이 자리

나도 아직 길을 찾는 사람이 아닌가

지금쯤, 아주 오래

애타게 답장 오래 기다리겠지, 하는

먼 그 사람 생각에

멍, 하니 호수를 내려다보니

그곳에 내가 혼자 서 있다

답장처럼.

-제33시집 『지나가는 길에』 중에서

인생이라는 먼 여행은 지독히도 고독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채로 우리는 그

길을 외로이 걷습니다. 인생의 길을 잃은 듯

한, 길을 묻는 듯한 어느 여인의 편지는 시인

이 보낸 편지이자 우리 자신이 보내는 편지

이기도 할 것입니다. 시인이 호수를 내려다

보며 혼자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은

우리 모두가 정처가 없고 도리가 없는 여정

을 걷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지독

한 고독에도 시를 읽는 우리의 마음 한켠 어

딘가가 밝아지는 것은 왜일까요? 고독한 이

의 편지에 자신의 고독으로 화답하는 시인의

모습은 설령 우리의 삶이 고독한 것일지언정

각자의 고독을 통해 우리가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 소박한 답장이야말로

생을 이어나가는 힘일 것입니다.

다시 읽는 조병화 시Ⅰ

어느 답장

황 인 찬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및 동대학원 재학.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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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만난 조병화

인생을 노래한 시인 정호승

시인 조병화 선생의 제자들 중에는 시인들이 무척 많다. 이

는 물론 그 자신이 시인이고 대학에서 평생 시를 가르쳐 온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시 쓰는 후배, 제자들을 그 누구

보다도 사랑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시를 쓰는 나도 선생님의

한 제자로서 사랑을 많이 받아 왔다. 한편 그런 연유로 지극

히 선생님께는 지극히 부끄러운 한 제자이기도 하다. 그런 나

를 선생은 잊지 않고 종종 불러주시기도 해서 영 송구스러울

때가 많다.

선생은 만날 때마다 나에게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 호승이! 자네 요즘 뭐하나? 시는 열심히 쓰나? 정호승

이 넌 말이야, 누구보다도 좋은 시를 쓸 수 있어. 좋은 시인이

될 기질이 풍부하단 말이야. 열심히 노력해, 응?”

선생의 이런 말씀은 언제나 무섭고 두려운 화살처럼 날아

와 내 가슴속에 깊이 박혔다. 그럴때마다 나는 내가 정말 좋은

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까 선생은 괜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끝내는 선생의 말

씀에 큰 용기와 위안을 얻곤 한다.

오늘날까지 그래도 내가 시를 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내

가 할 일은 시를 쓰는 일 밖에 없구나, 이 새상에 태어나서 문

학에다 인생을 걸어 볼 만 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은 선생

의 그런 말씀이 큰 밑거름이 되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9월 28일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회에서 주최한 전국 고교생 백일장 대회가 열린

임간林間교실에서였다.

감청빛 양복을 입은 선생은 베레모를 쓰고 간간이 파이프

담배를 피우셨는데, 임간교실 땅바닥에 떨어진 낙엽 위를 거

니는 선생의 모습은 그야말로 문학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들어진 시인의 모습이었다.

그 이듬해에 나는 경희대 문예장학생이 되어 국문학과에

입학, 선생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당시 선생은 신입생들에

게 교양 국어를 가르치셨는데 가끔 강의 대신 작문 시간을 갖

곤 하셨다.

시골뜨기였던 나는 선생 앞에 나서기가 부끄러워 늘 선생

의 뒷전에서만 머뭇거렸다. 그래도 선생은 그런 나를 용케 알

아차리시고는 “넌 집이 어디냐” 하고 자상하게 물어주셨다.

그해 작문 시간에는 내가 쓴 산문을 칭찬하시면서 학생들 앞

에 나가 읽게 하시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답십리 전농동에서 자취를 하며 옷이 없어 늘

검게 물들인 군용 작업복만 입고 다녔는데 산문의 내용은 자

취생활의 고달픔을 호소조로 적은 것이었다. 특히 환절기 때

마다 감기에 잘 걸려 손수건에 코를 풀곤 하였는데 빨래할 때

마다 그 코푼 손수건 빨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라는 글의 내용

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때 내가 쓴 산문을 다 읽은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학생은 말이야, 앞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학생이야.

이 학생이 나중에 훌륭한 문인이 될 때까지 이 산문은 내가 잘

간직했다가 돌려주겠어, 기념으로 말이야.”

훗날에도 나는 그 산문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 많

2012 + 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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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세월이 지나가 버린 탓도 있겠고 혹은 선생의 기대에 부응

되는 작품을 못 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선생님은 강의시간에 학생들이 떠들면 “시인이 강의하는

데 왜 떠들어? 시인의 강의시간이 뭐 이러냐?” 하는 말씀을

곧잘 하셨다. 어떤 때에는 학생들이 지나치게 떠들면 화난 표

정으로 “너희들 떠들려면 자습이나 해” 하시며 그날 강의를

중단하시기도 했다.

나는 선생의 그런 모습 특히 “시인이 강의하는데” 라는 말

씀의 속뜻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자의식, 시인으로서의 자부

와 자존심 등을 배우게 되었다. 얼핏 생각하면 시인이라고 해

서 뭐 대단하고 별난 사람일까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아직도

그 때 선생님을 통해 배운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은 내 가슴 깊

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선생님은 나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문사들

을 특히 사랑하셨다. 그들이 어떠한 등용문을 통해서든 문단

에 등단하기만 하면 4년간 학비가 전액면제되는 총장장학금

문예장학생으로 추천, 큰 어려움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도와주셨다.

나도 선생님의 추천에 의해 4년간 문예장학생이 되어 가난

한 가운데서도 학비조달의 어려움을 크게 겪지 않고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문학공부를 하는 제자들에 대한 선생의 그러한 각별한 사

랑은 언제나 두고두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등록금을 내

지 못해 휴학을 하거나 군대를 가거나 아예 학업을 포기해 버

리던 친구들이 눈에 띄게 많았던 그 시절, 그나마 내가 대학

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그런 따스한 보살핌이 있

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인생을 노래한 시인이다. 선생님에게는 “시를 노

래한다”는 말이 가장 적절하다. 그는 누에가 실을 뽑아 고치

를 만들 듯 언어의 실로 시의 고치를 만든다. 선생님만큼 시

를 자연스럽고 쉽게 그리면서 커다란 감동과 충격을 주는 시

인은 드물다.

현대시는 어려워야만 하고 언어와 언어의 난삽한 연결을

통해 난해의 벽이 높이 쌓여야만 그럴 듯한 좋은 시라고 여겨

지는 오늘날, 선생님의 시는 그 반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의 시는 우리가 들녘에 서서 노래를 하듯 또는 차를 마시

며 이야기를 나누듯 우리의 일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쓰여진

다. 그의 시는 어느 한 구석 난해한 것이 없고 있는 그대로 솔

직담백하다. 선생님의 생각이 곧 시요, 선생님의 삶이 곧 시

다. 선생의 시 속에는 인생의 슬픔과 기쁨 삶과 죽음의 명암이

그려져 있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

는 인간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그려져 있다.

선생님은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을 ‘이별’과 ‘작별’로 파악하셨

다. 인간 삶에 있어서의 이별이 사랑의 이별이든 죽음의 이별

이든 그는 이별의 고통을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이승을 사는

우리들의 참된 삶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주요 시편들은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 중에서도 ‘이별’의 문제, 만남과 헤

어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선생님의 이별은 죽음을 인식하고 그 죽음을 준비하는 데

서 오는 이별이다. 선생은 삶의 집을 죽음의 집으로 가는 가

숙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선생님의 시에는 주로 삶의 죽음의

가숙 인식이 도처에 드러난다. 결국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 선

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인간이란 결국 삶의 유

한성에 의해 죽음의 무한성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작별의 존재,

헤어짐의 개체임을 일깨우고 있다.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삶을 인식하지 못하고 삶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죽음 또한 인식하지 못한다고 할 때 선

생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인식하고 삶과 죽음을 서로 분리시

켜 개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곧 죽음임을, 그리고

죽음이 곧 삶 자체임을 이야기한다.

이는 선생이 인생의 의미를 파악하고 인생의 영원성이 어

디에 있는가를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죽음의 이

별을 인식 초월하고 있으며 죽음을 항상 삶 속에 포함, 끌어

안고 있다.

선생은 분명 인생의 시인이다. 선생의 시는 인생의 이별의

시이며 선생은 인생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선생은 언젠가 내

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헤어진다는 것은 곧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 호 승

시인.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2년 『한국일보』, 1973년 『대한일보』로 등단.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사랑하다가 죽어버

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밥값』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30

편운문학상 시터

제10회 본상 수상자 이근배

송광사에 와서

이근배

아직도흐르고있느냐

조계산이온몸으로끌어안던

밤의살냄새를다씻지못하고

물소리는저대로치닫고만있느냐

피가비칠세라

뼈가드러날세라

사랑은숨죽여안개속에묻히더니

그입덧은자꾸기어나와

국사전뒤뜰에부스럼같은

상사화로피어났구나

눈에보이는것도

본래는없는것이라고하는데

이름이야열번백번

바뀐들어떠랴

산에오면나도

산이되어야할텐데

감로탑앞에서면나도

머리깎은돌이되어야할텐데

왜내겐물소리뿐이지

저삐죽삐죽한상사화들이

내잃어버린사랑으로보이지

왜나는물소리가되지못하지

헛것들에게갇혀서

돌아가는길을잃고있지

2012 + 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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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시의 진실은 오직 시로서만 말할 수 있는 것 우리의 시는 모국어 정신으로서만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 시의 회복을 위한 시

의 정체성을 위한 허물기와 새로 짓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여기에 지난 세기에 시에 닥쳐왔던 편견과 오만에 대한 거센 반론이 있어야

한다. 반란은 일어나야 한다. 독선과 아집의 껍질을 벗기는 아픈 혁명은 있어야 한다. 모국어는 생명이고 생존이다. 모국어는 자유이

고 정의이다. 해일과도 같은 활화산과도 같은 모국어의 범람은 있어야 하고 폭발은 있어야 한다. 이제는 시가 나설 차례이다. 시인이 나

설 차례이다.

자진 한 잎

이근배

세상의바람이모두몰려와

내몸에여덟구멍숭숭뚫어놓고

사랑소리를내다가

슬픔소리를내다가

이별이아니면

저별?

산사태가지고

해일이오고

둥둥둥북이다가징이다가

꽹과리이다가새납이다가장고이다가

잃어버린여자의머리카락이다가

달빛이다가

풀잎이다가

살아서는만나지못하는

눈먼돌이다가

한밤새우고나면

하늘툭터지는

그런울음을우는

이 근 배

시인. 1940년 충남 당진 출생. 1960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수학. 1961년~64년 『경향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에 시와 시조가 당선되며 문단활동 시작. 시집으로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노래여 노래여』, 『한강』 등이 있다. 가람문학상, 중앙시조대상, 만해

대상 등 수상 및 은관문화훈장 서훈. 현재 예술원 회원.

32

편운문학상 시터

제10회 신인상 수상자 김상현

메밀밭 소묘

김상현

메밀밭너머동산리에살던한청년이소쩍새시름시름울던

팔월보름날밤에메밀밭밭머리에옥양목흰적삼을벗어

놓고그옆에흰고무신가지런히벗어놓고메밀밭속에그

림처럼단정히누워죽었는데동네사람들이수군거리며하

는말이적삼벗어놓고신발벗어놓고죽은것보니께달빛

에비친흰메밀꽃밭이강인줄잘못알고빠져죽은거라고

하더라.그뒤론아이들은메밀밭근처에는얼씬도않고밭

주인만죽은총각의넋을달랜다며별반소득도없는메밀

밭을매년일구었는데메밀꽃피면동네에는메밀밭에빠져

죽은동산리총각이야기가되살아나고.

2012 + Autumn

+ 3332

시작노트

다시 꿈을 꾼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꿈꾸기를 시작해 보려한다. 그런데 머리를 굴려서 쓰는 글재주가 있는 시인이 아니라 시인다운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시인다운 삶을 사는 분들을 한없이 경외하며 그 아름다운

태도를 배우려고 한다. 나는 시인으로서 시작을 하거나 시집을 펴내는 일은 진솔한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작품에

그려진 삶의 무늬를 통해 생의 아름다움이 발전하기를 원한다.

사향 麝香

김상현

사향노루의불두덩이가향내나는까닭은

풀섶에다뒤를보고풀잎으로닦기때문이다

사람도동심이향내나는까닭은

풀잎이나콩잎같은것으로

뒤를닦아본경험이있기때문이다.

김 상 현

1947년 전북 무안 출생. 1973년 한양대 산업공학과 졸업 1992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2009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달빛 한

짐 바람 한 짐』, 『싸리나무숲에 서리꽃 피면』, 『노루는 발을 벗어두고』, 『기억의 날개』, 『어머니의 살강』, 『거멀장한 바가지가 아름답다』, 『꽃비노을』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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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세월은 화살과 같이 장경렬

“동숭동에서 관악산으로 캠퍼스를 옮기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학림 다방 아래층에 있던 술

집에서 열댓 명의 친구들이 모여 술을 마실 때였어요. 이제 정든 캠퍼스를 떠나는 마당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동안 캠퍼스와 그 주변에서 부렸던 온갖 객기가 화제에 오르기 시작했습

니다. 한밤에 분수에서 목욕을 했다는 녀석에서 시작하여, 교실에서 책걸상을 꺼내 운동장 한

가운데에 모닥불을 지폈다는 녀석에다가 정문 앞쪽 차도 한 가운데를 따라가며 방뇨했다가 경

범죄로 잡혀갔다는 녀석까지, 온갖 악행을 실토하더군요. 그때 제가 친구들에게 물었어요. ‘센

강에서 목욕해 본 사람 있냐?’ 몇몇 친구가 절 바라보더니 ‘넌 해 봤냐’고 묻더군요. ‘아니, 지금

하러 갈 생각이야. 같이 갈 사람!’ 선생님, 당시 서울대 문리대 앞에는 개천이 있었지요? 그걸

저희는 센 강이라 부르고, 정문 앞의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 불렀습니다.”

1981년 봄, 조병화 선생님께서 인하대학교 문과대 학장님으로 오시고 난 다음 얼마 안 되

었을 무렵이었다. 문과대 교수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나는 어

쩌다 대학 시절에 부렸던 객기를 선생님 앞에서 실토하게 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동숭동 캠퍼

세월은

화살과

같이

2012 + Autumn

+ 3534

스 주변인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 살고 계시다는 선생님의 말

씀을 듣고, 그 근처에서 이루어졌던 나의 대학 생활을 이야기

하는 도중이었다.

“센 강이라니? 문리대 앞을 지나던 개천 말이오? 냄새 진

동하는 썩은 물이 흐르던 그 개천 말이오?” 선생님께서는 어

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을 이었다. “거기에서 목

욕을 하다니?”

“그때가 2월 말 몹시 추울 때라서 개천에 물이 얼마 없었어

요. 아무튼 저를 따라 나선 대여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센 강

에 뛰어들었죠. 그런 다음 얼마 없는 개천 물에 주저앉거나 뒹

굴면서 온갖 오물을 다 묻힌 채 술집으로 돌아갔어요. 저희들

한테서 나는 냄새가 어찌나 지독했던지 술집 안의 사람들 가

운데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요. 밖으로 뛰쳐나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허허, 그것 참 대단한 객기로구먼. 냄새나는 구정물이 흐

르는 개천에서 목욕이라!” 너털웃음을 터뜨리시던 선생님께

서 웃음기가 여전한 표정으로 나에게 술잔을 내미셨다. “세상

살이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 센 강처럼 이름은 멋

있어도 흐르는 물은 구정물인 게 인생 아닌가? 거 참! 자, 장

교수의 젊은이다운 객기를 위해 술 한 잔 더 하세.”

사실 대학생 시절 ‘객기’를 넘어 ‘치기’ 어린 삶을 우리는 살

았다. 동숭동 캠퍼스 안에서, 그리고 그 주변에서, 때로 데모

를 하기도 하고 현실에 대한 깊은 절망에 빠져들기도 하면서.

그리고 때로 문학에 대한 희망과 좌절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아니, 술에 취하기도 하고 객기와 치기를 부리기도 하면서. 하

지만 우리가 어떤 일에 빠져 있든 우리 곁에는 항상 시가 있

었다. 누군가 노트에 시를 적어 오면, 술집에 둘러앉아 우리는

함께 그 시를 소리내어 또는 속으로 읽곤 했던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가 만나게 되었던 시 가운데 한 편이 바로 조병화

선생님의 「후조」였다.

후조기에 애착일랑 금물이였고

그러기에 감상의 속성은 벌써 잊었에라

가장 태양을 사랑하고 원망함이 후조였거늘

후조는 유달리

어려서부터

날개와 눈알을 사랑하길 알았에라

높이 날음이 자랑이 아니에라

멀리 날음이 소망이 아니에라

날아야 할 날에 날아야 함이에라

달도, 별도, 온갖 꽃송이도

나를 위함이 아니에라

날이 오면 날아야 할 후조기에

마음이 구속일랑 금물이었고

고독을 날려 버린 기류에 살라 함이에라.

이 시와 처음 만나던 날 나는 무수히 되뇌었다. “높이 날음

이 자랑이 아니에라/멀리 날음이 소망이 아니에라/날아야 할

날에 날아야 함이에라//달도, 별도, 온갖 꽃송이도/나를 위함

이 아니에라.” 이 구절을 읊조릴 때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후조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곤 했다. 그렇다, 센 강에 몸을 맡

긴 채 흐느적거릴 때의 나는, 그리고 나를 따라 나섰던 친구들

은 모두 조병화 선생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후조 한 마리를 각

자의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이리라. “날아야 할 날”이 언제인

가를 몰라 불안해하면서. 하지만 이 아름다운 시를 우리에게

선사한 시인이 바로 그 근처인 혜화동 로터리 언저리에 살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저녁 모임이 있고 난 다음 며칠 후 선생님께서 전화로 나를

부르셨다. 학장실에 들어서자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접힌 한

지를 주시며 펼쳐 보라 하셨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펼쳐보니

선생님 특유의 굵고 힘차면서도 편안하고 개성적인 붓글씨가

눈앞에 펼쳐졌다. <日月如矢>.

“장 교수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그 옛날에

내가 보냈던 학창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소. 그때가 엊그제 같

은데 내 나이 벌써 환갑이 넘었다오. 장 교수는 아직 20대 후

반이지요? 앞으로도 계속 센 강에 뛰어들 때의 기백을 잃지

말기 바라오. 아무튼, 장 교수 생각을 하다 몇 자 써 보았다오.”

언제나 변함없는 엷은 미소 위로 파이프 담배 연기를 드리우

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선생님을 뵙고 난 다음 연구실로 돌아오면서 나는 계속 ‘세

월이 화살처럼 빠르다’라는 내용의 한자 성어를 한지에 담아

나에게 주신 선생님의 뜻을 헤아려 보았다. 무엇보다도 젊음

2012 + Autumn 36

장 경 렬

문학평론가. 1952년 인천 출생. 서울대 영문과 졸업. 미국 텍사스 대학교 영문학 박사. 비평집으로 『미로에서 길 찾기』, 『신비의 거울을 찾아서』, 『응시와 성찰』, 문

학연구서로 『코울리지』, 『매혹과 저항』, 번역서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 『셰익스피어』, 『아픔의 기록』, 『노인과 바다』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 영

문과 교수.

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하기야 선생님께서 호의적

으로 말씀해 주시긴 했지만, 객기나 치기만으로 인생을 살아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아니, 치기나 객기만으로 채우기에는 젊

음은 너무도 짧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깊은 뜻을 담아 나에

게 주신 교훈이 “日月如矢”가 아닐지?

그때 선생님께서 주신 글을 편액에 담아 벽에 걸어놓은 지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다. 지난 30년이 넘는 동안 몇 번 이사

를 했지만, 선생님께서 주신 글이 담긴 편액은 항상 집안 어딘

가의 벽에 걸려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아니, 내 마음 속 어

딘가의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선생님의 글이 담긴 편액이라 해

야 할 것이다. 아니, 단순히 걸려 있는 것만이 아니다. 선생님

의 글은 무시로 나에게 말을 건넨다. 때로 타이르기도 하고 때

로 꾸짖기도 하고 때로 다독이기도 하면서. 내 나이 30대에 선

생님의 글이 나에게 전하는 것은 주로 젊음을 헛되이 낭비하

지 말라는 경계와 타이름의 말씀이었다. 40대에 이르렀을 때

선생님의 글은 젊음의 기백을 상실한 채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에게 꾸짖음의 말씀을 전해 주곤 했다. 이윽고 50대에 들어

서자 선생님의 글이 나에게 주는 것은 위로의 말이었다. 별다

르게 한 일도 없이 세월이 보내고 있음에 안타까워하는 나에

게 선생님께서는 글을 통해 위로의 말씀을 들려 주셨던 것이

다. 화살처럼 빠른 세월을 타고 가면서 우리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지극히 작은 일뿐이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

인지를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그러니 무엇보다도 욕

심부리지 말고 겸손해질 것을 조언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나

는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내 나이도 환갑에 이르게 되었다. 이

제 어처구니없게도 내 나이가 선생님께서 나에게 글을 써 주

시던 바로 그때의 나이에 이른 것이다. 어찌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세월은 진실로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 이제 환갑의 나이에 이른 내가 30년 전에 뵙던 환갑 나

이의 선생님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의 벽에 걸려 있는 편액의 글을 주시던 바로 그때의 선생

님의 모습을 떠올리는 지금 이 순간, 이 어찌된 일인가! 내 마

음은 어느 사이에 어리고 미숙한 20대의 젊은이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어리고 미숙한 20대의 젊은이로 돌아간 내가 선생님께 말

을 건넨다. “선생님, 세월이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의 글에 눈길을 주노

라니, 문득 선생님께 말씀드렸던 저의 젊은 시절 치기가 생각

났고, 그때를 생각하다 보니 불현듯 선생님의 시 「후조」가 생

각났어요. 그런데 「후조」를 처음 읽었을 때의 정조가 놀랍게

도 지금 제 마음 안에서 그대로 살아나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

입니다. 제 마음에는 다시 후조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고 있

어요.” 담배 파이프를 입에서 뗀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

시는 듯도 하다. “그게 바로 시라오. 아무리 빠르게 나르는 화

살이라도 순간을 포착하는 사람의 예리한 눈에는 정지해 있

는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오.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삶의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 안에 담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라

오. 그리고 그 영원의 순간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바

로 시 읽기라오.”

조병화 선생님께서 나에게 남긴 흔적 앞에서 나는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는 느낌에 젖기도 하고, 빠른 만큼 세월이 전

혀 흐르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에 젖기도 한다. 아니, 순간의

영원을 언뜻 감지하기도 한다. 그만큼 선생님의 옛 모습이 너

무도 가깝고 확실하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께서

손수 써 주신 “日月如矢”라는 글은 ‘나만’을 위한, 오로지 ‘나

만’을 위한, 정녕코 ‘나만’을 위한 조병화 선생님의 시, 또 한

편의 시다.

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세월은 화살과 같이 장경렬

36 + 37

슬픈 바람을 주는 여인

조병화

내겐 쉴새없이

슬픈 바람을 주는 여인이 있습니다

때를 가리지 않고

불쑥

슬픔을 주는 여인이 있습니다

소리도 나지 않으며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는 바람

나는 이 바람이 불어닥칠 때마다

저린 피를 토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허공에 나를 새겨왔습니다.

잊으려 하면 불어 닥치는

슬픈 인연

아, 얼마나 많은 세월을

이 바람에 시달려 왔던가

한 세상 이렇게

저리게 새겨온 나의 생존

이제 흙에 묻히며 피하련가

지금도 내겐

기쁨보다 슬픔을 주는 여인이 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이렇게 세상 다하도록 자주

내겐 슬픔을 주는 바람이 있습니다.

-제31시집 『길은 나를 부르며』 중에서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자 슬픔입니다. 시인의

말처럼 그 슬픔은 마치 바람과 같이 우리를

엄습해오곤 합니다. 소리도 나지 않으며 그

림자도 보이지 않는 그것이 어쩌면 이렇게나

우리의 실존을 뼈에 사무치게 관통하는지요.

이 시를 읽고 있으면 그 슬픔에 평생을 괴로

워한 시인의 심정이 절실하게 전해지는 듯합

니다. 그러한 슬픔 속에서도, 살아있다는 비

극 속에서도 다시 피를 토하며 허공에 나를

새긴다는 것, 그러한 일이 죽을 때까지 반복

된다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슬픔일까요. 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아름다움인가요.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Ⅱ

슬픈 바람을 주는 여인

황 인 찬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및 동대학원 재학.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38 2012 + Autumn

제7회 편운 시 백일장

심사평

시인들은 항상 파수꾼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으로 타인의 고통과 슬픔, 번뇌와 갈망을 대신하는 영원히 너

그러운 세상의 예지자로서 삶의 길 위에 서 있게 마련이다. 제

9회 조병화 시축제의 중요 행사인 편운백일장은 올해로 7회

째를 맞아 그 어느 해보다 많은 관심과 역량 있는 젊은 시 지

망생들의 참여로 그 열기가 따가운 봄 햇살이 무색할 정도로

자못 뜨거웠다.

그러저러한 이유도 있지만, 올해 시축제의 주제가 편운 선

생님의 고향 그리움에 대한 회고였다는 점과, 아울러 시백일

장이 단순한 백일장을 위한 백일장을 넘어서 진정한 시인으

로서의 자질을 키우고 격려하며, 그로 인해 보다 현실감 있고

삶의 가치의식과 지향의 공간을 생산해낼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이번 시제는 ‘고향’과 ‘휴대전화’로 정했다.

이번 본선 진출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시제의 특성에 기

인하는 것이기도 하겠으나, 대체로 산문적인 마음의 토로나

성찰적 독백이 많았다는 점이다. 글쓰기의 시대적 추세를 반

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이미지나 형상에 종속되는

의미의 표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 대

한 깊이 있는 성찰과 의미화가 아쉽다.

본선 참여자 30여 명의 작품 중 최종 심사대상으로 남은 세

편은 심사 마감시간을 넘겨서까지 결정을 미룰 정도로 시적

진정성과 표현력에 있어서 각자의 미덕과 장점을 지닌 작품

들이었다. 김근배의 「월곡동 도깨비집」은 월곡동 산동네에서

살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의 기억을 통해 가장 현실감 있는

‘고향’의 실체를 의식화함으로써, 다소 산문적이고 고백적인

문체의 단점을 성찰의 진정성으로 극복해냈다는 점이 심사위

원들의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지해찬더미의 「휴대전

화」는 마음의 소통과 가치 있는 삶의 이상이라는 가장 현실적

이면서도 보편적인 시적 주제를 기원과 호소, 소망과 독백을

담은 대화체의 어조를 통해 말함으로써 가장 서정적이면서도

감정적 절제를 지닌 담백한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었다. 유현

민의 「부재중」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라는 서정시 고유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여 그 의미에 대한

견실한 형상화가 주목되는 작품이었다.

심사위원들의 진지한 논의 끝에 김근배의 작품을 장원으

로, 지해찬더미의 작품은 차상, 유현민의 작품은 차하로 결정

한 것은 결국 시적 진정성의 강도와 대상에 대한 성찰적 사유

의 깊이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고민정, 홍의준

의 「휴대전화」, 문영혜, 박성규, 이세인의 「고향」과 같은 작품

들이 가작으로 선정된 바, 홍의준의 산문시적 상상력, 박성규

의 즉물적이면서 상황적인 이미지 형상력은 가다듬기에 따라

발전된 시적 성취가 기대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고민정과 이

세인의 작품은 시적 언어의 구사와 구성력이 돋보였으며, 문

영혜의 작품은 전형적인 서정시로서의 안정된 정서 구현력

을 가지고 있었다.

시심은 흔히 창조적이며 비의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사물과 현상, 사람과 사회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사색, 그리고 자신의 가치와 세계관의 투여를

겪는 한없는 성찰과 탐구로부터 진정한 주체의 언어가 탄생

된다. 모든 미래 시인들에게 건투를 기원한다.

진정한

주체의 언어

심사위원

김광규, 김명인, 박윤우(글)

+ 3938

입상소감

시가 좋아 시를 쓰게 된지 햇수로 6년째입니다. 시창작

동아리 <틈>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시를 사랑하는 친구들과

울고 웃으며 함께 했던 시간입니다. 다 함께 알싸한 수요밥

을 나눠 먹으면서 조금씩 자라났던 시간입니다. 장원 발표

에서 제가 쓴 작품의 제목과 이름 석 자가 불렸을 때 얼떨떨

했던 표정이 당시의 기분 그대로였습니다. 스스로 부족하

다고 느끼고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던 차에 운 좋게 이번 장

원의 영예를 안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저보다 시를 더 잘 쓰

는 많은 이들을 뒤로 하고 큰 상을 받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

하고 있습니다. 이번 행운을 계기로 나태해지지 않고 정진

하여 더 좋은 글을 쓰고, 좋은 시인을 목표로 삼는 습작생

이 되겠습니다. 숨 쉴 틈 없는 일상에서 펜을 쥐지 않아 시

를 쓰지 못할 때에도 제게 한없는 격려를 해주셨던 우리 <

틈>의 아버지이자 수요밥 요리사 서범석 선생님. 조금이나

마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선물로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한

결 가벼워야 하는데 오히려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저와 저

희들에게 걸고 계신 기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꼭 더 좋은

시들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장원을 차지할 수 있었던 운,

그 조그마한 능력을 만들어 준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틈>에

서 보낸 시간일 것입니다. 제게 시와 열정을 알려준 <틈> 선

배들. 여태껏 오랜 시간을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물고 뜯고

싸우며 서로 의지할 동기들. 설익은 꿈을 안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뒤따라 걸어오는 마냥 예쁜 후배들. 당신들이 항상

곁에 있어주는 덕분에 제 마음이 마르지 않습니다. 상 탔다

고 잘 해준 것 하나 없는 학회장 축하해준 우리 19대 집행부

아이들, 못난 제자 칭찬해주신 국어국문학과 선생님들, 항

상 즐거운 일상 만들어주는 선후배 동기들. 제 마지막 학교

생활을 빛내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받은 상의 의

미가 바라지 않도록 더 간절해지겠습니다. 제 보잘 것 없는

시에 멋진 옷을 입혀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

다. 마지막으로 말썽쟁이 아들이 가는 길을 항상 응원해주

시는 부모님께 이 상을 바치고 싶습니다.

김 근 배

1988년 인천 출생. 대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제7회 편운 시 백일장

입상작·입상소감

월곡동 도깨비집

김근배

산동네 비탈길 끝까지 올라

담벼락 도깨비불들이 펼쳐둔 절벽 길

게걸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드러나는

눈높이 맞춘 녹색 문을 하나

문짝도 없는데 들어갈 길 막막해요

토종 진돗개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누렁이

야차상처럼 노려보는 그 눈빛에

종종걸음 그만둘 수 없죠 똑똑,

현배왔냐

입에 잘 붙는 큰 형 이름으로 바꿔 부르곤 했던

자다 깨 뿔처럼 머리 솟은 할배

술기운 올라 벌겋게 달아오른 도깨비로만 알았죠

등 긁다 난데없이 휘두르는 할배 방망이

맞으면 쌍시옷자 된소리만 달고 나왔던 엉덩이

심부름 갈 때마다 무서워지는 게 당연하죠

약 봉투와 음료수를 한과 몇 봉 넣은 쇼핑백 툭

제물로 바치고 도망치곤 했던 그 때는

고향집 할배 무섭기만 했던 그 때는

엉덩이 툭 털고 찾아간 산동네 꼭대기엔

아무도 찾지 않는 도깨비집 한 채

야차상도 오래돼 부서져 없는

현배 이놈 쌍노무시끼 한 번 들어보고 싶은

2012 + Autumn 40

소설로 그리는 조병화의 시

당신의 초자아 연인 박민정

목련화

조병화

어린애를 밴 소녀가

목련이 핀 가지 아래서 나비를 잡는다.

소녀와 목련이

흡사 그 어느 유명하지 않은

소설집같이 놓여 있는데

나도 그와도 같이

잔디밭에 파란 스웨터를 비비고

아버지처럼 체스터필드를 피운다.

바다.

바다는 어린 시절의 그림책처럼 나풀거리고

어린애를 밴 소녀는

목련이 핀 가지 아래서 나비를 쫓는다.

-제3시집『패각의 침실』중에서

+ 4140

나는 해마다 봄이면 목련화를 빌려서 내 마음이 변화하는

모습이라든지, 사회의 변화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목련화를 좋아한다. 나에게 있어 목련화는 자연의

목련화 그대로가 아니라 나의 모든 “생각하는 목련화”였다.

이번 「목련화」는 한국전쟁이라는 불안한 연대의 어느 소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학대를 받고 있는 인간, 아무런 폭력에도,

아무런 세도에도, 아무런 조직에도, 아무런 금전에도 관여치

않기 때문에, 오로지 인간이 인간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환경적 외로움을 견디는 나와 내 이웃과 그러한 사람들을

그려본 것이다. 폭력과 사상. 이것은 우리의 공포와 위협의

생의 장소였다 해도 좋다.

이러한 장소에 둥둥 떠 있는 인간들을 그린 것이라 하겠다.

(1999년 11월 조병화)

42 2012 + Autumn

그보다 더한 꽃을 본 적 없다. 목련은 가장 탐욕스러운 꽃

이었다. 저공비행하는 미군 수송기의 소리를 들으며 당신은

동생을 받았다. 피난지의 낡은 골목 곳곳에는 목련이 피어 있

었다.

옛날 일이다.

지금 당신은 매일 커다란 통에 가득 담긴 아이스크림을 퍼

낸다. 일을 시작한 후부터 당신은 그곳에 있는 자신을, 지나

는 그 누구도 알아보지 않기를 바랐다. 당신과 관계를 맺은 누

구든, 그냥 지나쳐주기를. 하지만 그만은 일하는 당신의 모습

을 보아주었으면 했다. 그는 일하는 당신을 목격해야 한다. 일

하는 사람만이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

하던 그였다.

팔 힘 좋아졌겠네. 엄살도 심한 애가 용케 버티네.

그가 빨리 그런 말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인간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래야 잡생각이 없어진다고, 당신을 탓하듯

혼잣말을 하던 그였다. 나도 정당하게 노동해 돈을 벌 수 있노

라고, 나도 비로소 쓸모 있는 인간이 되었노라고, 당신은 겨우

길거리를 돌며 아이스크림을 팔며 그렇게 중얼거려보는 것이

다. 그는 왜 찾아오기는커녕 지나치지도 않는 것일까. 당신은

아이스크림을 푸는 자신의 손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자신의

손에 그 정도의 악력이 있을 줄 몰랐다.

당신 손의 악력은 그 때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이십 년 전

높은 언덕에서 스물다섯의 젊은 엄마가 갓난아이였던 동생을

던졌다. 아래에서 놀고 있던 당신은 나비처럼 팔랑팔랑 떨어

지는 동생의 머리부터 받았다. 당신은 일곱 살이었다. 당신이

받아 안은 동생은 살아남았다. 당신이 무서운 악력으로 갓난

애의 머리를 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생은 의식불명이나 다름없었던 시절의 사건을 두고 끊

임없이 엄마를 탓했다. 동생 자신은 기억도 못하는 사건일 터

였다. 지속되는 타인들의 다툼이 자라는 내내 당신을 무력하

게 만들었다.

동생을 받아 안을 때 어린 여자아이의 손이 발휘한 무서운

악력이 그러했듯, 아이스크림을 풀 때 팔에 드는 힘은 당신이

가진 최소한의 도덕이다.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 당신은 다시금 팔에 힘을 준다. 하루 종일 아이스크림을

푼 탓에 손목이 욱신욱신 저려온다.

간혹 불룩한 배를 감싸 안고 다니는 또래의 여자들을 본다.

앳된 얼굴에 덕지덕지 기미가 낀 그녀들의 가슴은 곧 수유하

기 위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곧.

당신은 저녁에 일을 마친다. 늦은 시간에도 늘어선 길거

리의 불빛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한다. 당신은 팔을 주무

르며 걷는다. 당신은 모른 척 아무 남자나 따라가고 싶다. 당

신은 언제나 그런 충동에 시달린다. 그가 달아난 후 그 충동

은 더욱 심해졌다.

당신은 꼬깃꼬깃 접힌 편지를 다시 꺼내든다. 아이를 가졌

다는 말을 한 후에도 절대 먼저 연락한 적 없는 그였다. 당신

은 숨을 고른 뒤 글자를 읽어 나간다.

- 너 아이 안 가진 거 알고 있어.

- 이건 뭐, 사람을 바보로 아나본데, 그 날짜에는 절대로

임신 안 돼.

당신은 입 밖으로 새어나가는 울음소리를 막지 않는다.

- 없는 애 만들어서 나한테 얻고자 하는 것이 뭐야. 원하

는 걸 말해!

당신은 다시 편지를 접어든다. 거짓말같이 울음이 뚝 그쳐

진다. 당신은 걸음을 재촉한다. 그는 다시 그를 찾지 않을 것

이다. 당신은 문득, 조금 아쉬웠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나, 엄마 됐어.’ 라는 말만으로 하

는 것이 아니다. 온몸 송두리째 크나큰 충격을 받아 타인에게

당신의 초자아 연인-그 소녀가 낳은 소녀

소설로 그리는 조병화의 시

당신의 초자아 연인 박민정

+ 4342

삶을 선사하는 두렵고 끔찍한 노동이다. 당신의 엄마가 그러

했고 당신이 그러했듯 당신의 아이도 엄혹한 삶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든 예외 없이 그런 것이고 그런 삶

을 감히 선사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럴 자신이 없다.

그가 떠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당신은 그에게 연락을 했

다. 가만히 생각해보라고, 걱정되는 일 없냐고. 그는 당신의

그런 화법을 싫어했다. 당신은 완곡하게 말한다는 것이 그에

게는 언제나 비꼬는 투로 들렸다. 그는 당신을 달래듯 말했다.

한 달밖에 안 지났는데,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같이 병원에 가

자고. 아직 불확실하지 않느냐, 고 그가 말했을 때 당신은 울

음을 터뜨렸다. 모든 것이 두려운데 그마저 곁에 없어 너무나

두렵다고. 당신은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며 그렇게 말했다. 당

신은 그의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당신은 그를 기만하고 그는

그녀를 기만했다.

당신은 과거 당신 엄마의 몸에 나타났던 상상임신의 여러

징후를 떠올려본다. 아버지가 두 번째 애인에게 머무르던 시

기마다 그것은 찾아왔었다. 큰 덩치를 한 엄마는 아이처럼 울

었다. 더러 하혈을 하고 자주 입덧을 했다. 새벽마다 냉수를

찾았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당신은 엄마가 아이를 가지

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을 가졌

을 때처럼 엄마는 정말로 입덧을 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

다. 당신이 늦은 밤 보채는 동생을 달래고 있을 때 술을 마시

고 돌아온 엄마는 웃었다. 불콰한 얼굴로 웃으며 당신을 꼭 껴

안았다. 그것은, 한없는 긍정이었다. 일순간 모든 적의를 한꺼

번에 내려놓은, 엄마는 홀로 중절하고 온 것이었다.

당신의 엄마는 몇 번이나 헛것을 잉태했고 헛것을 중절했

다. 실체보다 더욱 둔중한 헛것이었다. 당신의 헛것도 너무나

둔중하다. 그러나 당신의 몸에는 어떤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

다. 당신은 자신의 몸이 원망스럽다.

당신의 엄마는 아버지의 외도 때문에 수십 번 중절했다. 아

이가 아닌 스스로를.

당신은 매번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와 잠을 잤다. 당신은 언젠가 아버

지의 맥없는 턱수염을 보며 엄마의 활활 타오르는 적의를 이

해했다. 엄마가 아버지를 과거로 관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

을까, 당신은 생각했다. 뜨거운 바늘 하나 삼킨 듯이 가슴 속

에 아버지를 묻어둔다면. 젊은 날에 잠시 머문 남자 정도로 여

겼으면. 당신이 일곱 살 때, 아버지는 처음 집을 나갔다. 당신

의 엄마가 높은 언덕에서 동생을 던진 것이 그 무렵의 일이었

다.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죽일 뻔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무척

이나 괴로워했다.

그래도 버릴 무언가가 필요했다. 자신과 함께 버릴 자신의

아이가, 엄마에게는 언제나 필요했다. 가까운 사람들은 두고

두고 엄마를 탓했다. 엄마가 되기 전에 사람부터 되었어야 한

다고. 당신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당신이 기어이 얻고자 하는 것……그것은 빚이다. 빚도 없

이 가난하기만 하다면 더욱 외로울 것이다. 당신은 그를 기만

해서라도 한 시절의 증명을 남기고 싶다. 아직도 당신의 엄

마를 끈덕지게 따라다니는 부채감, 꺼진 눈으로 자신의 아이

를 허방에 놓아버린 젊음을 증명하는 부채감. 당신은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증명이 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 시절에 나

도 거기 존재하고 있었다는, 나도 누군가를 기만하고, 때리고,

놓아버렸다는, 그렇게 죄를 지었다는, …… 살아있었다는 분

명한 증명.

당신은 한 시절을 중절한다.

당신은 아이에게 온몸으로 이쪽 생은 안 된다고 가르쳐주

는 엄마가 될 것이다. 당신의 엄마가 당신에게 그러했듯이. 아

이는 언제든 가질 수 있다. 또 다른 남자의 아이를.

아이가 울면 같이 울어야지.

당신은 우는 아이가 무서워 옷장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도

괜찮겠다, 고 생각한다. 아이가 크면 당신은, 나는 네 아버지

가 남몰래 사랑한 그녀였노라, 말해줄 것이다. 언젠가 또 다른

남자의 두 번째 애인이 되어 임신에 성공한다면.

당신은 볼우물을 만든다. 그의 아이를 낳는다면 말이다. 당

신은 오늘 먹지 않으면 상할 저녁 찬거리를 생각하며 발걸음

을 재촉한다.

박 민 정

소설가. 1985년 서울 출생.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2012 + Autumn

한 장의 사진

시인의 아내

1970년 설악산에서

조병화 시인과 시인의 아내 김준 여사.

한 여인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듯 진명여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은 당시 학생이던 김준 여사에게

詩影(시의 그림자)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고, 그 후 그녀는 시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두 분은 모두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습니다.

시로 사는 조병화 시인이 이상의 세계에 있었다면 ‘시의 그림자’로 사는 그녀는

현실의 세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상의 세계와 늘 사소한 부딪침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딪침의 시간이 곰삭아 시가 되기도 했고 함께 보낸 세월이 되기도 했습니다.

훗날 조병화 시인은 운명을 앞둔 아내를 위해 마음으로는 이해하면서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의 말들을 담아 시를 써내려갔습니다.

일생의 반려자에게 바치는 고해 같은 말들, 병상에서 힘겨워하는 아내에게

화해와 감사의 마음을 아프게 시로 적으며, 조병화 시인은 삶이란

결국 이러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명예회장 김영수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

회 장 박철원 (주)에스텍시스템 회장

부 회 장 허영자 시인ㆍ성신여대 명예교수

감 사 황상현 법부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김종성 (재)선교재단 상임이사

고 문 김양수 문학평론가

성춘복 시인

신봉승 작가ㆍ예술원 회원

이 사 강대신 정원산업 회장

김삼주 시인ㆍ경원대 교수

김유항 인하대학 화학과 명예교수

한국 과학기술 한림원 총괄부원장

김재홍 문학평론가ㆍ경희대 명예교수

김종회 문학평론가ㆍ경희대 교수

노정익 전 현대상선 사장

박규원 (주)델타엔지니어링 회장

신용극 유로통상 회장

오호수 전 증권업협회 회장

이병규 문화일보 사장

이완섭 (주)세이프라인 회장

이재후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조진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황영기 법무법인 세종 고문

Ⅰ편운 회원Ⅰ

강대신ㆍ강은모ㆍ경응수ㆍ권오륭ㆍ권은영ㆍ김기수ㆍ김동명ㆍ김병학ㆍ김상선ㆍ김성기ㆍ김성중ㆍ김수문ㆍ김여옥ㆍ김연호ㆍ김영관

김영수ㆍ김용건ㆍ김용정ㆍ김용화ㆍ김우형ㆍ김유항ㆍ김윤숭ㆍ김진겸ㆍ김학래ㆍ노정익ㆍ독고윤ㆍ마종기ㆍ박원규ㆍ박주원ㆍ박철원

설영기ㆍ신봉승ㆍ신용극ㆍ안중진ㆍ양규모ㆍ양규모ㆍ양숭문ㆍ오호수ㆍ유 현ㆍ윤석민ㆍ윤석현ㆍ윤세영ㆍ윤일중ㆍ윤정자ㆍ윤지원

윤희정ㆍ이기남ㆍ이동건ㆍ이상림ㆍ이운형ㆍ이원복ㆍ이인학ㆍ이일향ㆍ이재후ㆍ이정혜ㆍ이종호ㆍ이종호ㆍ이춘배ㆍ이항주ㆍ이현구

이현구ㆍ임건우ㆍ장철수ㆍ장현수ㆍ장홍선ㆍ전기석ㆍ전찬민ㆍ정광선ㆍ정도환ㆍ정동수ㆍ정성환ㆍ정용선ㆍ정용숙ㆍ정윤표ㆍ조성인

조성호ㆍ조성환ㆍ조수남ㆍ조진완ㆍ조진형ㆍ차성규ㆍ최경애ㆍ최은아ㆍ허영자ㆍ호종일ㆍ홍성호ㆍ황상현ㆍ황영기

Ⅰ꿈 회원Ⅰ

(사)양지회ㆍ강창희ㆍ김광규ㆍ김소원ㆍ김은규ㆍ김정일ㆍ문충성ㆍ박순화ㆍ박종규ㆍ이금기ㆍ이 일ㆍ이철화ㆍ장부웅ㆍ정준명ㆍ최병철

Ⅰ사랑 회원Ⅰ

김기인ㆍ김삼주ㆍ노대래ㆍ박병근ㆍ박현호ㆍ소현구ㆍ안창모ㆍ이규호ㆍ정구호ㆍ정분순ㆍ조성걸ㆍ차진도ㆍ최명안

Ⅰ멋 회원Ⅰ

강일철ㆍ강태흥ㆍ고경호ㆍ고연수ㆍ공상진ㆍ권광중ㆍ김가현ㆍ김명인ㆍ김미란ㆍ김석진ㆍ김성경ㆍ김영남ㆍ김종안ㆍ김종환

김진석ㆍ김헌출ㆍ김희옥ㆍ노완규ㆍ문창욱ㆍ민용식ㆍ박규원ㆍ박대현ㆍ박덕규ㆍ박동환ㆍ박민규ㆍ박진성ㆍ배홍규ㆍ백인기

서석인ㆍ손순자ㆍ송충석ㆍ신동욱ㆍ신유은ㆍ안광명ㆍ안유화ㆍ유범준ㆍ유자효ㆍ유종해ㆍ유태전ㆍ윤영선ㆍ윤진석ㆍ윤춘호

이명규ㆍ이성열ㆍ이순재ㆍ이용기ㆍ이재복ㆍ이찬석ㆍ이창우ㆍ이혜숙ㆍ임두영ㆍ임서영ㆍ장기학ㆍ정성화ㆍ정영기ㆍ조건식

조 범ㆍ조장우ㆍ주기영ㆍ주동설ㆍ최승범ㆍ최일곤ㆍ하미혜ㆍ한광석ㆍ한중진ㆍ한진해ㆍ황선도ㆍ황일운

Ⅰ기업 회원Ⅰ

JW홀딩스(주)ㆍ영화기업(주)ㆍ정원기업ㆍ(주)델타엔지니어링ㆍ(주)동아일렉콤ㆍ(주)스틸코리아ㆍ(주)웰빙테크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임원진

귀하를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인간의 숙명적 본질인 고독과 허무에 맞서 반세기에 걸친

시작활동을 전개했던 우리 대표시인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성실성으로 후학들을 교육한 교육자이자 16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문인이자 10

여 회의 미술개인전을 연 미술가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교육계와 문단에서 이 땅의 문학을 일구어 나가는 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은 물론 법조계와 기업계 등 각 분야에서도 정치ㆍ경제ㆍ사

회ㆍ발전을 위해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의 많은 독자들은 현대

적 삶 속에서도 그분의 시를 통해 위안을 받고 꿈과 사랑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에 본인을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모여 2006년 10월 사단법인을 설립했습니

다. 저희 법인에서는 기존에 유족들이 운영해 오던 편운문학상과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조병화문학관 사업을 지원하고 나아가 한국 시문학 발전에 기여 할 수 있

는 여러 사업을 펴나갈 예정입니다.

귀하께서도 저희의 뜻에 동참하셔서 이 뜻 깊은 기념사업을 함께 이루어 주시

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에 꿈을 담아주신 분들입니다.(2012년 8월 25일 현재)

1970년 설악산에서

조병화 시인과 시인의 아내 김준 여사.

한 여인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듯 진명여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은 당시 학생이던 김준 여사에게

詩影(시의 그림자)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고, 그 후 그녀는 시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두 분은 모두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습니다.

시로 사는 조병화 시인이 이상의 세계에 있었다면 ‘시의 그림자’로 사는 그녀는

현실의 세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상의 세계와 늘 사소한 부딪침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딪침의 시간이 곰삭아 시가 되기도 했고 함께 보낸 세월이 되기도 했습니다.

훗날 조병화 시인은 운명을 앞둔 아내를 위해 마음으로는 이해하면서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의 말들을 담아 시를 써내려갔습니다.

일생의 반려자에게 바치는 고해 같은 말들, 병상에서 힘겨워하는 아내에게

화해와 감사의 마음을 아프게 시로 적으며, 조병화 시인은 삶이란

결국 이러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회원가입신청서 및 약정서

절취

선

위 사항과 같이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를 후원할 것을 약속하며, 귀 사업회의 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2012년 월 일 후 원 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인)

조병화문학관 홈페이지 http://www.poetcho.com 에서도 회원가입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5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110-530) 전화. 02-762-0658 팩스. 02-3673-0436 Email. poetcho@naver.com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Cho ByungHwa Foundation

우편

Fax 발

송용

개인 회원

이 름 (남 / 여) 주민등록번호:

전 화 자택 직장 FAX :

휴대전화 E-mail :

주 소 자택 직장

후원종류CMS

매월납부 1만원(멋회원) 2만원(사랑회원) 3만원(꿈회원)

10만원(편운회원) 직접입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

후원금 CMS(Cash Management Service) 자동이체 동의서

CMS는 금융결제원과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가 계약을 맺고 자동이체 출금을 의뢰하는 납부방식입니다. CMS 자동이체를 신청하시면 희원님이 직접 은행에 가시는 번거로움 없이 매달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납부할 수 있으며 출금 수수료가 들지 않습니다.

예금주 이름 예금주 주민등록번호

출금 은행 계좌번호

이체 금액 월 ______________원 출금일 선택 10일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