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2013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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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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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Page 2: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순서 입니다.

비밀 안(not)스러운 생활 / 사진. 글. beamil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사진. 글. @Ahopsi

회사옆 미술관 / 글. 강세기

환타지와 모순의 조우 (遭遇): 영화로 읽는 時空間 (시공간) / 글. 곡주대비

여기 문학이 필요한시간 - 황진이 와 홍랑 / 글. 사진. 고수진

이 링크를 눌러보시오!

0,0,0 / 글.그림. Night Planet

독후소설 / 그림. 황은정 글. 김종소리

웹디자이너 생존 매뉴얼 / 글. 그림. 김성연

부산 오뎅 이야기 / 글. odeng

바다비 일요시극장 광고

우울한 청춘 / 그림. 글. 철민

알아두면 쓸모 있을지 모르는 월간이리 이야기 / 글. exxx

김범 (Kim Beom) / 글. 그림. 지인

Page 3: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이달부터 월간이리에 하이퍼 링크가 첨가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필진들의 아이디나 블로그 주소를 누르시면 연결이 됩니

다. 시험 삼아 아래의 트위터 주소와 블로그 주소를 눌러 보세요. 이미지

에 살짝 걸려있는 것도 있습니다. 찾아보는 재미도 은근히 있으실 겁니다.

일부 기기에서 에러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테스트 과정에서 저도 크롬

에서는 괜찮은데 익스플로어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난 달을 마지막으로 이상준님과 왼손이 님이 잠시 휴재에 들어가셨습니

다. 월간이리 탄생기부터 함께 하신 분들이어서 많이 의지가 되었던 분들

이었는데 잠시 휴식기를 갖기로 하였습니다. 그간의 노력에 깊이 감사드

립니다. 그리고 이달부터 김성연님께서 웹디자이너 생존매뉴얼로 새로 참

여하셨습니다. 모든 분께 박수를 짝짝짝.

오늘 새벽부터 비가 왔습니다. 이 빗속에서 국정원 문제, 쌍용자동차 문

제, 남양유업 문제, 강정마을 문제, 밀양 송전탑 문제 그외에 산적하고 또

산적한 문제를 등에 이고 수고하시는 분들이 많은 요즘입니다. 돕고 또 생

각해보는건 어떨까요?

월간이리의 공식 트위터는 @postyri 이고

온라인 페이지는 postyri.blogspot.com 입니다.

이곳에서는 컬러 PDF 파일과 바로보기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 이 글을 보고 1주일 내에 4명에게 월간이리를 소개하지 않으면 햇볕이 당신을 쫓아다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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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안(not)스러운생활 2013 JULY

17 15:53 25 17:31

15 17:20

25 17:44

25 18:45

25 17:24

8 13:55

25 17:25

15 16:30

지도 모르지. 나이만큼 철도 들면, ‘생일 선물은 받는 게 아니라 부모님께 선물하는 것’이라는 식의 이상하고 식상한 효도도 하고 싶지 않고, 글쎄 뭘 해야 할 지 모르는 상

태가 되어 버린다. 이게 다 지금 내 나이가 참 어중간해서다(라고 생각해버리자). 생일이라고 친구들한테 맘껏 한 턱 내고 싶어도 아직은 월급이 적고, 친구나 애인, 가족에게

양껏 갖고 싶은 것들을 주문하기에는 또 그리 어리지 않기 때문이리라. 다음 해를 맞이한 7월의 생일은 줘도 아깝지 않고 받아도 머쓱하지 않은 마음의 위치를 알고 싶다.

*Android, i-Phone APP ‘인스타그램’의 필터를 이용하여 찍은 사진들만 실어요.

7월은 기고자 본인의 생일이 있는 달이다. 조무래기 시절 일곱 친구들과의 생일파티는 무조건 햄버거 가게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개적으로 싸게 생일 기분을 낼

수 있다는 약간의 어린 허세가 있었을 거라 예상한다. 그래서 일 년에 총 여덟 번의 햄버거 파티를 하던 나는(그리고 그 아이들은, 우리는.), 이제는 더이상 그런 걸 하지도 만

나지도 않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생일이 다가오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아니면 그냥 다른 이유의 더 처연한 슬픔을 그런 식으로 추억하며 잊고 싶은

{beam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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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안(not)스러운생활 2013 JU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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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모르지. 나이만큼 철도 들면, ‘생일 선물은 받는 게 아니라 부모님께 선물하는 것’이라는 식의 이상하고 식상한 효도도 하고 싶지 않고, 글쎄 뭘 해야 할 지 모르는 상

태가 되어 버린다. 이게 다 지금 내 나이가 참 어중간해서다(라고 생각해버리자). 생일이라고 친구들한테 맘껏 한 턱 내고 싶어도 아직은 월급이 적고, 친구나 애인, 가족에게

양껏 갖고 싶은 것들을 주문하기에는 또 그리 어리지 않기 때문이리라. 다음 해를 맞이한 7월의 생일은 줘도 아깝지 않고 받아도 머쓱하지 않은 마음의 위치를 알고 싶다.

*Android, i-Phone APP ‘인스타그램’의 필터를 이용하여 찍은 사진들만 실어요.

7월은 기고자 본인의 생일이 있는 달이다. 조무래기 시절 일곱 친구들과의 생일파티는 무조건 햄버거 가게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개적으로 싸게 생일 기분을 낼

수 있다는 약간의 어린 허세가 있었을 거라 예상한다. 그래서 일 년에 총 여덟 번의 햄버거 파티를 하던 나는(그리고 그 아이들은, 우리는.), 이제는 더이상 그런 걸 하지도 만

나지도 않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생일이 다가오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아니면 그냥 다른 이유의 더 처연한 슬픔을 그런 식으로 추억하며 잊고 싶은

{beam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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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기고

잡지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야말로 잡식성으로 잡지를 본다. 아무 잡지나 꺼리지 않고 일단 붙잡기만 하면 정말 재미있게 읽어줄 자신이 있을 정도다. 물론 그래서 그런지 읽는 방법도 잡스럽다. 시원시원하게 건너뛰는 거다. 한정된 시간 안에 오만 가지 잡지를 읽으려면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전략적 선택이라고나 할까? 아니 짧은 시간 안에 마음을 울릴 어떤 아티클을 찾기 위한 전략적 포기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정독하는 몇 가지 글이 있는데, 시사인의 남문희, 이종태 기자의 글(시사인의 모든 기사는 숙독하는 편이다), GQ의 장우철 에디터의 기사(기사는 짧지만 전시만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월간 미술 이건수 편집장의 editorial 이다.

그 중에도 월간 미술 이건수 편집장의 글은 즐거움 때문이라기 보다는 배우기 위해 읽는다고 얘기하고 싶다. 짧은 리듬의 문장은 경쾌하고, 최적의 단어는 문장 알알이 박혀있다. 게다가 읽기가 쉽고 재미나다! 하지만 그의 에디토리얼 앞에서 단순히 문장 자체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숙연해지지는 않을 게다. 그는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현상을 파고 들어 진짜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상 잘못을 깨기만 하려는 상사가 아닌, 내가 몰랐던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해 얘기하며 공감 백배를 이끌어내는 그 한마디를 날리는 상사 앞에 섰을 때 같은 느낌? 굳이 한마디 더하자면 어디가 가려운지 모르고 있는데 손가락 한마디 터치만으로도 등 전체가 시원해지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이건수 편집장의 글은 미술을 좋아하려는데 마땅한 지침이 없어 해메는 내게 작품과 판(scene)을 보는 관점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그가 “에디토리얼”이라는 책을 냈다. 물론 2년전에 내서 한참 지난 책이다. 나는 올해 초에 그 책을 봤고, 각 호에 수록된 한편의 에디토리얼을 한데 묶어 놓으니 그의 글을 관통하는 어떤 attitude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백문의불여일견 이라던가. 이번에는 무릎 팍 치게 만든 그의 명문을 발췌한다. 책 뒷껍데기에 보니깐 전체 또는 일부를 인용하려면 반드시 출판사와 저자의 동의를 얻으

라고 하고 있다. 이거는 인용이 아니다, 광고 글이다. 갤러리 프론트 여직원 앞에서 쫄지 않고 도록 좀 넘긴다 하는 분은 이 책 반드시 사서 보시라. 정말 꼭 사서 줄 팍팍 치면서 보라 하고 싶다. 월간 이리 땜에 세 번째 다시 봤는데 역시 인용 해야겠다는 마음이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잘 쓴 글은 모두 쉬운 단어로 쓰여있는데, 읽고 나면 어려워서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글이다. 가장 못 쓴 글은 엄청 난해한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껍데기의 글이다” 15페이지 / 역시 생각하는 대로 글이 나온다.

“……그래서 결국 월간지 편집장의 에디토리얼이라는 것은 격전의 최후에 써야 하는 유언 같은 글이 된다. ……그것은 신문이나 잡지를 만드는 책임자의 시선이자 관점이 된다.” 15페이지 / 그의 에디토리얼이 타 잡지의 그것과 극명한 탁월성을 보이는 것은 바로 한 페이지의 글 안에 잡지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베니스를 못 가보았다고 해서 카셀을 지나쳐 버렸다고 해서 주눅이 들거나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세계미술의 흐름과 그 계통을 먼저 머릿속에 그려보려고 하는 것이 중요할 지도 모른다. 몇 가지 사례에 눈이 머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윤곽을 잡아가면서 미술의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없이 펼쳐지는 미술전과 싱겁게 떠도는 미술의 담론들 속에서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게 하고 가치를 발견하게 만드는 새로운 만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술의 허상만 붙잡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미술의 대상은 경험으로만 또는 관념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술에 올바로 접근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준비과정도 필요하다. 정보나 지식의 일정한 습득, 몸과 마음의 균형 있는 자제력, 접근하는 방법론이나 시점의 선택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미술 감상도 일종의 수양이고 진리의 길에 다다르려는 수도의 과정이다.” 36페이지 / 막연히 마음 속에 그리던 길이 이 글 하나에 명확해져 버렸던 기억이 난다.

“한때 미술계엔 평론가가 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적이 있었다. 미술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역할, 작가의 의도를 일반의 언어로써 풀이해준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었다. 그들이 신의 음성을 전하는 창조적인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큐레이터들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작품들을 고르고 디스플레이 했다. 다른 문맥에 있던 작품들이 큐레이터의 연출에 따라 새롭게 편집되고 재

회사 옆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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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되었다. 생산자의 입장에 가까웠던 과묵한 평론가에 비해 그들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소통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춤을 추었다. 관객들에겐 그들이 실력 있는 매개자였다. 그러나 그 춤곡도 희미해지고 이제는 컬렉터들의 시대가 도래한 느낌이다. 해외의 유수한 미술관들도 모두 기업이나 재단의 컬렉션을 통해 구성되고 있다. 특정한 주제의 기획전보다도 어느 컬렉터의, 다시 말해 어느 소비자의 관점으로 비추어지는 미술사의 맥락을 미술관은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52페이지 /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처럼 한목에 깔끔히 정리해줄 사람은 없을 게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이 사실을 몰랐다.

“의리란 그것이 사람이든 무엇이든 서로 맺은 관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고 지켜 나가는 균형적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데미안 허스트의 다이아몬드 해골은 그런 의미에서 의리적이다. 초기작부터 데미안 허스트는 죽음의 문제, 그것에 대한 극복의 문제, 그리고 거기에 개입되는 신성의 문제를 일관되게 화두 삼아왔다. ……해골에다 다이아몬드를 붙인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데미안(허스트)이 만들면 되고 누군가가 하면 그렇게 안 되는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죽음의 문제를 한결같이 파고들었던 ‘의리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56-57페이지 / 작가의 작업을 과거 포트폴리오부터 챙겨보기 시작했다.

“잡지는 전파매체의 쿨 함과 종이매체의 핫 함을 동시에 지닌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잡지의 느낌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중적 온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106페이지 / 나도 이래서 잡지를 좋아하나? “……근본적인 비평의 갈래는 작품에 대한 사실적인 서술과 기술, 작품 속에 담긴 의미에 대한 해석, 그리고 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라고 하는 세 가지 진술로 크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미술을 ‘캔버스 위에 칠해져 있는 물감덩어리’의 물리적인 대상으로서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 위의 문자들이 뒤섞이면서 떠오르는 관념적인 대상으로서, 사진으로 평면화되고 흑백으로 추상화 된 개념적인 이미지로서 접촉하게 된다.” 140페이지 / 역시나 비평에 대한 정리.

“책 읽기의 즐거움은 그런 수동적인 태도보다는 책

강세기 http://kangjoseph.tistory.com

속으로 들어가서 자간과 행간을 종횡하며 방황하는 모험심에서 온다. 속독법을 써서 얼마나 빨리 한 권의 책을 독파하느냐 하는 것은 축지법을 써서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놓치고 마는 무모한 짓과 같다. 축지법을 써야 할 데가 있고 쓰지 말아야 할 데가 있다.” 140-141페이지

“몇몇의 유명 작가가 마치 우리 미술의 전부를 대변하는 듯한 태도와 분위기, ‘백수’ 전업작가를 지속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교육환경, 열악하고 허술한 구조의 소통 시스템 속에서 수많은 좌절의 선수들을 바라보게 된다. 진정한 미술문화는 잘 자란 작가를 중심으로 제대로 된 비평과 갤러리, 제대로 된 컬렉션과 미디어, 매니지먼트 등이 같은 수준으로 받쳐주는 구조 속에서 꽃피울 수 있다.” 155페이지 / 현업 전문가의 내공이 팍팍 묻어 나온다.

흔들리는 대지 전문 168페이지 / 전후 미술에 대한 알짜베기 압축 판이다.

“나도 전 세계의 수 많은 미술관을 다녀본 사람이다. 나에게 가장 미술관다운 미술관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스위스 바젤 근교의 바이엘러 미술관을 꼽겠다. 기능상으로 미관상으로 ‘미술관의 엑기스’ 같다는 생각을 했다. 후면으로 밭고랑만 보이는 바이엘러 미술관의 장점은 가장 심플하면서 가장 인간적이라는 데 있다. 나는 그런 특성이 21세기에도 분명 살아남을 수 있는 미술관의 미덕이자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196페이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난 비엔날레에 다녀오지 않았다. ……편집장의 ‘직무유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공적인 핑계를 댄다면 소란하지 않은 조용한 시간에 작품들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뒤집어 말하면 십 수 년 동안의 비엔날레 유람을 통해 과연 내 눈의 비늘을 떨어뜨리고, 내 뒤통수를 때리고, 벅차오르는 흥분을 주었던 만남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는가 하는 회의를 내 몸이 알아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197페이지 /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미술 판에 한복판에 서있는 사람이 비엔날레라는 메인스트림의 중심을 거부한다? 주류 속의 비주류로 보이는 그의 태도가 특별한 시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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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월드 워 지 (The World War Z) 가 국내에 개봉 되었다. 브레드 피트 라는 인지도 높은 배우의 활약

을 뺀다면 심히 실망스러운 영화다. 영화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 남자 버전의 레지던트 이블. 신변

의 안전을 위해서 브레드의 신작 비판은 여기서 일줄 하고 왜 이런 좀비들이 대중 영화 속에서 속출 하는

지, 혹은 어떻게 하나의 공포 장르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좀비물이 최근에 태어난 장르라고 인지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초기 좀비물은

1930년대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영화 화이트 좀비 (1932) 이다. 드라큐라 물 처럼 대단한 사랑

을 받지 못했기에 (매력적이지 않은 외모를 가진 것은 분명하다) 많이 제작이 되지는 않았고 드문 드문 제

작 되어 명맥만 이어 가는 정도 였지만 1970년대에 들어와 조지 로메로에 의해 화려한 부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로메로가 만든 좀비 영화들은 당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나라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했고 공포

영화의 하나의 하부 장르로 확실히 자리잡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좀비물을 공포영화의 하부 장르로 보는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좀비물은 다

른 여타의 하부 공포장르들, 즉 (필자가 쓴 지난호 연재들의 공포물들을 복습해 보시길!) 슬래셔 (주로 찌

르는), 고어 (찢고 써는), 드라큐라물, 등과 판이한 차이점 들이 있다.

첫째로 좀비들은 흡혈귀나 살인마 들처럼 하나의 독립적인 캐릭터로 출현하기보다 항상 무더기로 뛰어나

오는 경향이 있다. 기존의 드라큐라나 살인마 들이 인간의 형태로, 인간의 캐릭터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행

동 한다면 좀비들은 인간의 형상은 하고 있지만 언제나 동물적인 형태로 이름이나 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열등하고 일차원적인 ‘악’으로 재현이 된다는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내 남

자친구는 좀비’ 는 매우 최근 작품으로 이 논지에서는 제외키로 한다) 많은 좀비물에서 좀비들은 특정한

프로젝트의 실패, 즉 국가적으로 혹은 대기업에서 이루어지는 화학 실험, 바이러스 등에 대한 결과로 설

정이 되는데 이는 다른 여타 공포물보다 좀비물이 암울한 자본주의 사회상을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있

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이다.

영화로 보는 시공간 좀비 족으로 보는 계급과 이데올로기

George Romero의 Night of the living dead

Page 11: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좀비들의 양산은 자본주의 혹은 국가적인 폭력에서 시작이 되고 이를 맞서 싸우는 인물들은 대부분 군인들

이 아닌 다른 주류 영화에서 타자화 되는 여성이나 저소득 층의 소시민일 때가 많은데 이러한 점이 좀비물

을 더 진보 적인 장르의 영화들이라고 바라보게 하는 특성이 될 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것은 이러한 타자들의 영웅 설정이 가히 성공적으로 결말을 맺진 않는다는 점

이다. 좀비들의 확산은 기하 급수 적으로 진행되고 그들은 막을 수 없을 정도의 힘과 파괴력으로 세상을 빠

르게 잠식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주인공들의 활약은 미미하거나 거의 희망이 없어 보인다. 대부분의 좀비

영화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28일 후, 월드 워) 에서 결말은 좀비들의 완전한 패배가 아닌 일시적인 휴전

정도로 맺어지고 인간과의 배틀은 시리즈로 이어 진다.

많은 영화 학자들이 영화가 계급의 존재, 갈등이나 이데올로기의 개념적인 가치 등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

하는 수단이라고 주장 해왔었다. 영화학자들의 주장 이전에도 프랑크푸르트 학파, 특히 ‘아도노’나 ‘호르크

하이머’ ( 이 두학자들은 culture industry 라는 저명한 논문을 이 주장을 바탕으로 집필하였다) 같은 막시

스트는 영화가 대중에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치를 주입 하고 훈육하는 사회악에 가까운 매체라고 비

판한 바 있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이 현재의 문화를 지배하는 영화를 정의 한다고 볼 순 없겠지만 영화의 파

급력을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좀비영화를 한번도 접해 보지 않은 독자라면 (혹은 팬이라 해도) 월드 워Z의 개봉을 맞아 한번 관람 하면서

그 영화 안에서 재현되는 좀비, 특히 계층과 인종, 국가 등을 대입해 보며 관람 해 보는 것도 효과적인 사회

학 공부가 될 것이다.

글. 곡주대비

Page 12: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황진이와 홍랑

글, 사진 고수진([email protected])

당돌하며 애달팠던 그녀들의 노래

6월호에서 예고한대로 이번시간 우리가 함께 볼

문학작품은 조선시대 명기였던 황진이와 홍랑의 시조 두

편을 골라 보았다. 먼저 가볍게 ‘시조’의 장르적 특성을

살펴보자.

시조는 고려 중엽에 탄생하여 조선시대 꽃을 피우고

지금까지도 창작되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문학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은 4음보로 끊어 읽을 수 있는

단형서정시이며 16세기 조선 중기에는 ‘시조창’ 이라고

하여 노래로 불렸다.

시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신라시대 월명사의 제망매가(누이의 죽음을 불교적

믿음으로 슬픔 극복)에서 찾아보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얘기하기로 하고 이제 시조의 흐름을 보자.

초기 시조의 모습은(고려 말 -조선 전기)주로 유교철학을

이야기 하거나(임금님에 대한 충성) 조선건국의 예찬 등을

다루는 양반시조,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는 강호가도류의

시조로 나뉜다. 간혹 여성화자가 쓴 시조도 보이는데,

규방시조라 하여 유교철학에 맞는 몸가짐이 바른 여성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후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주로

양반계층에 의해 창작되었던 시조는 서민층까지 확대되어

양반을 놀리는 풍자류, 가혹한 세금으로 황폐해져

가는 농촌의 설움, 직설적인 애정표현등 그 주제가

매우 다양해진다. 이 가운데 기생들도 시조를 활발히

지었다. 기녀는 사치노예로 귀족층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존재였다. 그녀들이 비극의 원점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대부와의 잦은 교류로 그들은

천민의 만남이 아닌 남녀의 만남으로 그 성격이 변모되고

둘 사이는 종종 연정이 싹트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대부와

기녀는 본질적으로 화합할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녀들은 역시 홀로 남겨지고 임을 그리워하며 정절하고

기다림의 나날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미인도 - 신윤복

Page 13: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천민신분이었던 그녀들은 당대 유교적 풍습에 따라야

했던 규방 여성들과 다르게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그리움이나 애정에 대해 노래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

조선시대 명기였던 황진이와 홍랑의 시조 두 편을 보자.

1. 황진이의 시조

이 시조는 홍랑이 최경창과 이별할 때 쓴 시조 이다. 이

시는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를 알고 읽어야 하는데

그 스토리는 이렇다.

최경창은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 해주 최씨의

자손으로 당대 유명한 문장가였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과

경성의 최고 기생이었던 홍랑은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며

부부처럼 정을 쌓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봄,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어 이별하게 된다.

기생홍랑은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법으로

강력히 구속당하고 있어서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

옆에 피어있는 산 버들이었다. 홍랑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구슬프게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묏버들 가려꺾어”이다. 마지막 구절 ‘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도 녀기소서’는 그녀의

애환을 짧고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묏버들을 보며

나를 잊지 말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시를 타고 들리는

듯하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애끓는 이별을 뒤로 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뒤 곧바로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곧바로 경성을

출발하여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고,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최경창을 찾아 갔다.

거의 2년 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난 홍랑은 그의

수척함에 마음이 아팠지만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병수발을 들었다. 그러나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사헌부(조선시대

관청)가 함경남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는다. 결국 최경창은 파직되고 둘은

다시 이별하게 된다. 최경창은 자신의 마음을 ‘송별’이란

시에 담아 떠나는 홍랑에게 주었다고 한다.

동지ㅅ달 기나긴~

동지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현대어로 풀이하면 당신이 계시지 않는 동지(겨울 중

가장 밤이 김.)의 밤 시간 중에 한 부분을 싹둑 잘라 치마

밑에 넣어 놓고 당신이 오시는 날에 그 잘라 놓았던 밤을

펼쳐 놓겠다. 당신과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다. 라는

의미로 풀이 할 수 있다.

그를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며 ‘밤’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주관적으로 변용하여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연장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절묘하게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없는 긴 겨울밤을 도려내었다가 그와 함께하는

짧은 봄밤을 연장해 보겠다는 발상은 도발적인 매력을

충분히 어필한다. 이 얼마나 두근두근하고 센스

넘치는 표현인지. 밤이란 시간은 참으로 솔직한 시간이

아니던가. 언젠가 나도 마음에 들어오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용기내어 이렇게 카톡 해보겠다.

‘치맥하러 나오실래요?’

2. 홍랑의 시조

묏버들 가려 꺾어~~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도 녀기소서

Page 14: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옛날, 함관령에서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내며 이 가지를 자신처럼 여겨 달라 했던 홍랑의 시에

최경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하며 자신의

애끓는 심정과 쓸쓸한 홍랑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이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곧바로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홍랑은 이 소식을 듣고 그의

무덤을 찾아가 칼로 얼굴을 긋고 숯물을 마셔 목소리를

버린다. 기생의 삶을 완전히 버리고 최경창의 무덤을

돌보겠다는 그녀의 절개를 결국 최경창 집안도 인정하고

홍랑이 죽은 뒤 양반집 선산에 그녀의 유골이 묻히게

된다.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도 가슴이 아픈데 실제

그들은 얼마나 가슴이 너덜너덜했을까.

짧고 간결한 시조의 형식에 두 여인은 모든 감정을 쏟아

붓고 있다. 구구절절하게 쓰지 않아도 말이다. 어쩌면

구구절절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들의 마음에는

한 단어만 차고 넘쳐서 더욱 우리에게 공감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학원 강사는 10시가 훌쩍 넘어서야 뒤늦게 하루를

정리한다. 일반 회사원들이 퇴근 후 잠을 청하거나 쉬고

있을 시간에 난 동료 선생님과 이리카페를 찾아 갔었다.

따끈한「월간이리」6월호를 읽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깊어져 결국 맞은편 식당에서 맥주 한 잔 하게 되었다.

하루를 얘기하며 맥주를 홀짝이고 있을 때 출입구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쑥 안으로 들어왔다. 5월호의

주인공. 그 기타 선생님이었다. 맙소사.

궁금하면 5월호를 읽어보자 복습은 중요한 것이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리

함관령에 올라서 옛노래를 부르지마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못 본 척, 모르는 척,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딘가, 하하하, 어색한 웃음소리,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아 인사라도 할 껄 멋지게...’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밖으로 뛰어 나갔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도로만 덩그러니 펼쳐져 있었다. ‘

마지막’ 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콕 박히는 순간이었다.

담담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난 좀 찌질했다.

약간 알딸딸하고, 다음호 주제인 홍랑의 묏버들도

생각나고, 마침 내 가방엔 그의 이야기가 담긴 5월호도

있고…. 가게 주인께 양해를 구한 후 ‘잡지 두고 갔으니

시간 괜찮을 때 보라.’는 문자를 남겼다.

그 이야기를 읽어주어도 혹은 읽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고마웠다. 난 온 마음을 다했고 그 기억을 남겨주었기

때문에.

Page 15: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사르트르는『존재와 무』에서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절대적으로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인데 이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고 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나’를 오히려 알게

되는 하나의 구심점이 된다. 내가 얼마나 치졸한지, 혹은

내가 의외로 당돌한지. 요즘 나는 월간이리를 기고하면서

내가 얼마나 지난 기억에 끙끙거렸는지도 알게 되었다.

저는 누구입니다. 라고 말 할 수 있으려면 아직 멀었음을

알아간다. 사르트르의 ‘시선과 타자’를 추천한다. 한 번

쯤 읽어볼 만한 인문학서적이다.

얼마 전 지인과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난다는 양수리의

두물머리에 다녀왔다. 소원을 비는 돌탑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는데 내 지인은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돌을 올렸고 난 가족의 건강을 비며 돌을 올렸다.

결국 우리 둘 모두 ‘사랑’을 위해 돌을 올린 셈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많은 사랑들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적극적으로 사랑하자.

외면하거나 망설여서, 그래서 후회하지 않게.

혹시, 눈치 챘는가? 현대시-현대소설-고전시 이런 순으로

연재를 하고 있다. 이제 고전소설,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의

풍자소설 ‘호질’을 다음시간에 살펴보겠다.

지각하면 보강이다.

참고: 사르트르,『존재와 무』

조동일,『한국문학통사-2』

Page 16: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이슈 털어주는 남자 364회 “학생들의 역사인식 - 한국전쟁 위안부” - 30분 무렵부터 시작되는 ‘한국전쟁

위안부’이야기는 한국 전쟁 당시 있었던,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참혹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앞서 한번 이야기 했었지만. 이번 달 부터 월간이리에는 새로운 시도가 시작 되었습니다.

PDF 파일을 태블릿이나 컴퓨터를 통해 이용하시는 분들은 아래의 제목들을 누르시면 해당 웹페이지로 연결됩니다. 시간이 지나 링크가 변경되었거나 오류로 인해 사용할 수 없거나 인쇄물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제시된 제목을 이용 구글 검색을 하시면 바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외에도 월간이리 내 원고의 일부분이나 필진 이름, 블로그 주소등을 누르시는 경우 해당 페이지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찾아보세요!

이슈 털어주는 남자 369회 “원전마피아 - 군 인권문제2” - 30분 무렵부터 시작되는 오창익의 인권이야기

“군 인권문제” 입니다. 개선되지 않고 있는 군 내부 인권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줍니다.

그것은 알기 싫다 31회 “한 남자가 있어 / 얼마 전 종편간” - 최근 JTBC로 간 손석희 씨에 대한 여러가지

시선과 반응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꼭 짚어야하는 사고의 한 지점에 대한 이야기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월간이리에서 필진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패션, 미술, 식물, 여행, 의학, 과학, 철학, 육아 등에 관심을

갖고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분들은 언제든지 편하게 문의 주세요. 월간이리 @postyri

트위터 계정이나 [email protected] 으로 연락주시면 입구에서 친절히 안내해 드립니다.

그것은 알기 싫다 32회 “신인류 연대기 / 스톨만의 좋까” -최초의 카피 레프트 운동을 시작했던 리차드

스톨만의 생각과 시선을 이야기 합니다.

GNU 선언문 한글 번역본 http://www.gnu.org/gnu/manifesto.ko.html

이 링크를 눌러보시오!

Page 17: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0,0,0> 야행성Night Planet

twitter : @

hitch

h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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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를 닮은 집을 짓는다는 이탈리아 속담처럼,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에게 집은 돈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Page 18: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네번째 집(2001 - 2004)>

세들어 살던 다가구 주택의 2층집에서는 3년 가까이를 살았다. 그 동안에 전세를 줬던

신도시의 아파트는 구도시에서 2층짜리 다가구 주택 한 채를 살 수 있을 만큼 값이 올라 있었다.

IMF 이후로 3-4년이 지났지만 동네 사람들의 가계 경제는 여전히 불안해서 대기업에 다닌다던 동네

아저씨는 명예퇴직 후에 택시 운전을 시작하셨고, 누구네 집은 유망하다는 벤처 기업 주식에

투자했다가 크게 손해를 봤다고 했다. 그 후로 계속 티격태격하다 부부 사이가 틀어졌다고도 했다.

동네 꼬마들도 부도, 해고, 구조조정, 명예퇴직 같은 단어들과 익숙했던 시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다들 집에 투자를 하는 분위기였다. 여윳돈이 있는 사람도, 여유가 없는

사람도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다 집을 샀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부자되세요’ 나 ‘대박나세요’

라고 인사를 했다. 노동의 가치는 떨어지고 앉아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동경과 부러움

의 대상이 되었다.‘사람은 자기를 닮은 집을 짓는다’는 이탈리아 속담처럼,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에게 집은 돈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투자하기 안정적인 건 집밖에 없다고 했고,

집 값은 떨어질 일이 없다고들 했다. 집이 돈이 된다고 했고, 이 고만 고만한 살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모두가 공유하는 욕망이란 탐욕도 꿈이 되는 법이다. 우리 집은 사실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이사한 집은 엄마의 꽃가게에서 조금 멀어졌지만 기껏해야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고,

바로 앞에는‘베르네천’을 복개하고 세운 베르네 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이 있었다. 베르네

시장은 길이가 300미터도 넘게 이어진, 번성했을 때는 점포수가 180개나 되던 큰 시장으로 초행자가

길을 물으면 베르네 시장을 알아야 이 동네 어디든 찾아가는 것이 가능한, 동네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

다. 베르네 시장에 관해서는 재밌는 이야깃거리도 많다.‘베르네’라는 명칭의 유래부터 동네 어른마다

말이 달랐는데, 별내, 베리내로 변화해 온 이름은 모두 벼랑을 의미하고 낭떠러지를 굽이 도는

천이라는 설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 하천변에 쌓아 둔 죽은 일본군과 조선군의 시체에서

배어 나온 핏물이 베르네천을 흐르며 그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하여 비린내, 비리내, 베르네가

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나를 비롯한 동네 친구들은 당연히 비린내 나는 베르네 얘기를 더 좋아했다.

어느 날 엄마는 모임에 가고 아빠와 둘이 꽃가게에 있다 퇴근한 날이 있다. 아빠가

베르네 시장에 있는 순대국집에서 순대국을 먹고 가자고 했고, 나는 생각이 없었지만 어쨌든

아빠를 따라 갔다. 샷시문을 열고 들어가니 빨간 앞치마를 한 아줌마가 아빠를 정겹게 맞았다.

‘아빠가 이 집에 자주 들렀구나’묘하게 낯선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앉아 아빠는 순대국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고, 난 앞에 앉아 아빠를 보고 있었다. 아빠랑 단 둘이 공유한 기억은 그 순대국집에서의

시간이 아마 유일하다. 대화도 없이 마주 앉아 있었던 게 전부지만 그 날 만큼은 아빠가 술 마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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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0: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모습도 참을 만 했다. 4-5년 전쯤 구도시에도 아파트 단지들이 생기면서 대형마트도 함께 들어왔

고, 베르네 시장은‘재정비를 하겠다.’‘철거 한댄다.’말이 많았다. 알고 보니 시장이 세워진 땅

은 시소유이고, 90년대 초에 역전에 있던 불법 노점상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지은 시장이라고 했다.

우리집도 베르네 시장에 점포를 하나 소유해 세를 주고 있었는데, 사실은 시장 안에 있는 점포들은

개인이 소유하거나, 판매, 임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거래 자체가 불법이었다. 보상문제도 있

고, 지역상권 문제, 각종 이해 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혀 시장 상인들이 시위도 하고 투쟁도 한 걸로

아는데 결국 시장은 철거 되고 지금은 그 자리에 주차장이 생겼다. 오래된 주택지가 항상 주차공간

이 부족해 문제인 걸 생각하면 대규모 주차장이 생긴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잘된 일이긴 하지만 어

떻게 된 게 이 도시는 삶의 흔적이며 추억의 장소들이 남아나질 않아 슬프다. 시장에서 곱게 차려

입고 수입 화장품을 파시던 아주머니가 대형마트에서 유니폼을 입고 시식용 만두를 굽는 장면을 보

는 것도 그리 유쾌하지 않다.

베르네 시장의 가장 북쪽 끝에 있던 이 집은 1층에 한 가구가, 반 지하층에 2가구가 있는

다가구 주택이었고 우리 가족은 2층에 살았다. 이렇게 다가구 주택은 가장 상층부는 한층을 통으로 넓게

쓰도록 설계해서 집주인이 살고 아래층들은 잘게 쪼개 세를 주는 경우가 많다. 여느 다가구 주택처럼

발코니가 있던 난간 위에는 샷시가 끼워져 있었는데 이렇게 하면 실내가 외부 공기와 바로 닿지 않아

단열에도 좋고,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창고로도 쓸 수 있어 좋다. 전에 살던 집과 별다를 게 없는

집이었지만 유난히 층고가 높은 집이라 화장실 위로 언니방에서 연결되는 다락방이 있었다. 층고가

1미터도 안되는 공간에 창문 하나가 달렸고 형광등도 없이 어두운 곳이라 사실 별게 없었고, 단지

“창고는 마치 가족의 취미생활 박물관 같다. 전리품은 아빠의 낚시용품부터엄마의 가정용 운동기구들, 그리고 배드민턴채, 캠핑용품, 장기판 등. 지금은 먼지가 쌓였지만 한 때 우리의 관심을 받았던 것들.”

Page 21: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비밀 공간이란 게 왠지 멋져보여서 이사하고 방 정할 때 언니랑 싸우기도 했었는데 결국은 언니의

이승환 씨디들이 차지했다.

당시 우리 집도 경제적으로 타격이 좀 있어서 더이상 가게에 앉아서 오는 손님을 기다리는 것

만으로는 장사가 충분하지 않았다. 엄마는 전부터 조금씩 참여하던 지역단체 활동을 늘려가기 시작했

고, 모임에 갔다 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아졌다. 모임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이 경조사나 행사에서 필

요한 꽃을 많이 사주었기 때문에 장삿속에 봉사활동을 한다고 수근대는 사람도 있었지만, 엄마는 원래

사교성이 좋고 사회활동을 좋아했다. 꽃처럼 예쁘고 고운 사람이라 어딜 가도 주목을 받았고 아빠는

그런 걸 불안해했다. 아빠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표현이 서툴고 고지식해서 주변사람들과 마찰이

잦았고, 두루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속에 쌓이는 화를 적절히 방출하지 못하니 술마시고

가족을 괴롭히는 전형적인 못나고 외로운 가장이었다. 엄마의 귀가가 늦어지는 날에는 티비 앞에

앉아 평소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셨다. 이상하게도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질 수록 정서적

으로는 점점 더 빈곤해졌다.

아빠가 평소보다 더 술에 취했던 어느 날에, 집에서 도망을 나가 마땅히 갈데가 없어 고민

하다 마침 반지하에 비어있던 방에 숨어있던 적이 있다. 나이 많은 아저씨가 혼자 살던 곳이었는데

담 옆으로 폭이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서 현관문을 열면 부엌 겸 현관이 나오고 안쪽으로 방이 하

나 딸린 집이었다. 기억에 빛도 전혀 안들어 오고 사람 살만한 집이 못되었던 것 같지만, 어딜가도

주거환경을 따질 만큼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니까. 그 때 아빠는 술에 취해 동네방네로

우릴 찾아다닌 모양이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찾아 내지 못했고, 혹시 먹을 걸 사러 나갔다 마주

칠까 무서워 밥도 굶으며 숨어 있었는데 아빠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짓눌러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삼일 쯤 지났을까 전화를 한통 받더니 잠깐 나갔다 온다며 나간 엄마가

몇 시간이 지나 방에 돌아와서는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자고 했다. 그렇게 상황은 종료였고 언니와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아빠는 여느 때처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했고, 엄마는 아빠

를 용서했다. 그날 방문을 열고 집에 돌아가자고 말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측은한 생

각이 들지만,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취해서 우릴 괴롭혀대던 아빠만큼, 그런 환경 속에 우릴 방치

하는 엄마가 미웠다. 뭔가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아무 것도 해주지 않을 때의 원망은 오히려

나를 갉아먹었다. 어른들의 머릿속이란 뭐가 그렇게 복잡한 걸까 이해하기 어려웠고, 멍이 든 얼굴

로 ‘그래도 여자는 남자 그늘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엄마의 나약함이 견디기 힘들었다.

뭐가 그렇게들 바쁜지 늘 집에 혼자 있었으니까, 십대를 관통한 집에 대한 정서는‘외로움’

이었고 함께 살아도 항상 가족들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그리고 네번째 집에 살았던 10대 후반에서

20대가 시작되던 시점에는 그나마의‘그리움’도‘진저리’로 바뀌었고 어느 새 집은 벗어나고 싶은 곳,

지긋지긋한 곳이 되어버렸다. 슬프지만 한동안 그랬다. 지금은 봐도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지만 이

집에서 도망쳤던 날에 피아노에 부딪히며 찢긴 상처는 여전히 이마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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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선정 도서

『염소의 맛』, 바스티앙 비베스, 이혜정 ·그레고리 림펜스 공역, 미메시스, 2010

건강상의 문제로 억지로 수영장을 다니

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여자를 만난다.

여자는 매력적이다. 수영이 좋아진다. 그

런데 어느 날부터 그녀가 수영장에 오지

않는다.

수영이 계속 좋을까? 아님 싫어질까?

그나저나 물속에서 그녀는 무슨 말을 한

것일까?

- 이 작업은 술집에서 영감을 얻어

오민근의 형이 운영하는 술집은 바도 아니고, 호프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주방도, 이자카야도 아

니었다. 위스키, 보드카, 럼, 진과 같은 양주부터, 병맥주, 생맥주, 흑맥주, 소주, 청주, 심지어 사케까

지, 술이란 술은 죄다 갖다 팔았다. 술처럼 안주도 제멋대로였다. 계란 프라이에서부터 과일, 부침개,

오징어초무침, 떡볶이, 피자 등, 그때그때 있는 재료에 맞춰 메뉴가 바뀌었다. 오민근은 형의 술집에

갈 때면 늘, ‘하나나 똑바로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름을 그냥 ‘술집’이라고 지은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난잡한데, 이름까지 어중간하게 그냥 ‘술집’이라니…….

오민근이 이런 ‘술집’을 일주일간 맡아서 운영하게 된 것은 갑작스레 걸려온 형의 전화 때문이

었다.

“여보세요?”

“야. 너 요즘 뭐해?”

“요즘? 전시 준비하고 있어. 왜?”

“바빠?”

“아니. 왜?”

“너 일주일 동안 가게 좀 봐줄 수 있냐?”

“가게?”

“응. 일주일 동안만.”

“내가 가게를 어떻게 봐.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냥 앉아만 있으면 돼. 어차피 미진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미진이?”

“우리 알바 있잖아… 아무튼 해줄 거야, 말 거야?”

Page 24: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잠깐만. 갑자기 전화해서 다짜고짜 가게 봐줄 수 있냐고 물으면 어쩌자는 거야?”

“해줄 수 있어, 없어? 빨리 말해. 너 안 되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게.”

“언제부터 봐주면 되는데?”

“내일.”

“내일?”

“응.”

“돈은?”

“치사하게 왜 이래?”

“치사하긴 개뿔. 다짜고짜 전화해서 부탁하는 사람이 누군데?”

“알았어. 줄게. 갔다 와서.”

“갔다 와서? 어디 가?”

“응. 태국.”

“언제부터?”

“내일.”

“참나… 근데 오늘 전화해서 일할 사람 찾고 있는 거야?”

“응.”

“……. 싫어.”

“뭐라고?”

“가게 봐주기 싫다고.”

“돈 준다니까? 일당 오만 원 쳐줄게. 그럼 일주일이면 삼십오. 어때? 너 요즘 돈 없지?”

“음…….”

“그럼 나쁘지 않잖아? 정말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그냥 앉아만 있어.”

“그럴 거면 왜 시키는데? 알바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면 되잖아.”

“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주인이 가게를 비우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결국 오민근은 형의 부탁, 아니 일종의 협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통장 잔고의 바닥이 슬슬

드러나고 있었고, 전시를 준비해야 하긴 했지만 한 달이나 시간이 남아있었다.

다음날, ‘술집’에 가야할 시간이 다가오자 오민근은 괜시리 짜증이 났다. 딱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형의 여행 때문에 자신이 대신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오민근은 어차피 하기로

한 거 기분 좋게 하자는 생각으로 일부러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돈도 없는데 잘 됐지 뭐. 그렇게 바쁘지도 않으니까 작품이나 구상하면서 시간 떼우면 금방 갈 거

야. 겨우 일주일인데… 게다가 이럴 때 아니면 내가 언제 사장 노릇을 해보겠어? 안 그래?’

이렇게 생각하며 슬슬 준비를 해볼까 하는데 형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

“나 이제 비행기 타는데, 하나 까먹은 게 있어서.”

“뭔데?”

“가게 문 바깥쪽에 보면 통이 하나 있을 거야. 따로 신경 쓸 건 없고, 그거 치우지는 말라고. 그 동

네에 길고양이들이 많거든. 그 고양이들한테 밥 주러 다니는 아줌마가 있어. 그분이 알아서 챙기니

까, 넌 그냥 그 아줌마 오면 고맙다고 인사나 하면 돼. 고양이들 와서 잘 먹는지 가끔 확인하고. 아니

다. 그렇게까지 할 것도 없어. 미진이가 알아서 할 거야.”

오민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아무튼 나 간다. 잘 부탁할게.”

형은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오민근은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서서 인상을 찌푸

렸다.

평소에 티를 내진 않았지만, 사실 오민근은 고양이가 무서웠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고양이와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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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들이 질겁하며 무서워하는 말벌이나, 바퀴벌레보다 오민근

은 고양이가 훨씬 더 무서웠다. 오민근은 역시 형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미 형은 태국을 향해 날아가고 있을 터였다.

오민근이 ‘술집’에 도착했을 때, 미진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기, 저… 형 대신…”

“아, 네. 얘기 들었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컴퓨터 하실래요?”

“아, 네.”

“음악 좋아하세요?”

“네? 아, 네.”

“음악은 알아서 틀어주시면 돼요. 사장님이 동생 분께 맡기라고 했거든요. 근데 성함이 어떻게 되

세요?”

“오민근이요.”

“오민근… 그럼 민근 씨라고 부를게요. 오민창, 오민근… 형제가 둘 다 흔한 이름은 아니네요? 성

때문에 그런가?”

미진은 말을 붙이는 건지, 혼잣말인지 헷갈리게 중얼거리며 다시 청소를 하러 갔다. 오민근은 붙임

성 있게 구는 미진이 영 불편했다.

‘그 사장에 그 알바인가?’

일은 생각대로 바쁘지 않았지만 오민근은 생각한 것처럼 작품 구상을 하진 못했다. 쉴 새 없이 미

진이 말을 붙여왔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하세요? 먹고 살만하세요? 이 음악은 뭐예요? 등등등.

오민근은 집에 돌아와 이불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미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고기를 받아먹는 펭

귄이 떠올랐다. 쉴 새 없이 부리를 벌렸다가 닫았다가, 다시 벌렸다가 닫았다가… 왜 그렇게 말이 많

은지, 손님도 별로 없는 가게 안에서 단 둘이 있으니 계속 그녀의 수다를 들어줘야만 했다. 오민근은

짜증이 났다. 문득 고양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는 못 봤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오민근은 미진의 수다를 듣고, 또 들었다. 물론 자신이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

만 대개 단답으로 끝냈다. 그가 단답으로 끝내든 말든, 미진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게 앞에 작은 통은 잘 놓여 있었고, 사료도 수북이 담겨 있었지만 줄

어들질 않았다. 오민근은 그것이 영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에겐 잘된 일이었다.

마지막 날. 일을 마쳐갈 때쯤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잘 하고 있어?”

“응.”

“대답이 왜 이리 심드렁해.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튼 내일 나 간다. 선물 사갈까?”

“아니. 그냥 돈이나 줘.”

“야. 너 뭐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어?”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삐쭉거려?”

Page 26: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그냥.”

“미진이가 잘 안 해줘?”

“아냐. 미진 씨는 좋은 것 같은데?”

“그럼 뭐가 문제야?”

“됐어. 아무튼 내일 오면 돈 부쳐줘.”

오민근이 전화를 끊자, 미진이 말을 걸었다.

“사장님이에요?”

“네.”

“근데 왜 그렇게 심드렁해요?”

“뭐가요?”

“아니, 민근 씨 표정이 뭔가 안 좋아서요.”

“그런 거 아니에요.”

“네…….”

미진이 미덥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좀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아요. 밤에 일하려니까 피곤하네요.”

“그럼 먼저 들어가실래요? 어차피 손님도 한 테이블 밖에 없고… 제가 마무리하고 들어갈게요.”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네. 들어가서 푹 쉬세요.”

“네.”

오민근은 짐을 들고 ‘술집’ 밖으로 나왔다. 오른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고양이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민근은 황급히 술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왜 다시 들어오세요?”

“아, 뭘 좀 놓고 간 것 같아요.”

“뭐요?”

미진이 카운터 쪽을 훑어보며 물었다.

“아, 그냥, 뭔가 좀 허전한 기분이 들어서요.”

“뭐 없는 것 같은데요?”

미진이 카운터에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아, 저기, 사실은요.”

“네.”

“저기 고양… 아니, 미진 씨.”

“네?”

“저기 제가 다음 달에 전시를 하는데요.”

“네. 얘기하셨잖아요.”

“그림 보러 오실래요?”

“네. 간다고 했잖아요. 저번에.”

“아, 네. 그게…”

“왜 그러세요?”

미진이 카운터에서 나와 오민근에게 다가왔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저 갈게요.”

오민근은 문을 살짝 열고 작은 통 쪽을 보았다. 고양이가 통 속에 고개를 박고 사료를 먹고 있었다.

오민근은 다시 문을 닫고 뒤를 돌았다. 미진이 어느새 그의 뒤에 와서 서있었다.

“안 가세요?”

“저기, 그게…”

“진짜 왜 그러세요?”

Page 27: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미진 씨,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커피라도 한 잔 하실래요?”

“커피요? 지금요?”

“아니, 술 마셔요.”

오민근은 카운터에 짐을 내려놓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미진은 문을 열고 밖을 둘러보았다.

“어? 안녕?”

미진은 밖으로 나가 고양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민근은 식은땀이 났다. 잔에 생맥주를 한 잔 따

랐다. 그리고 한 입 마시며 생각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잠시 뒤, 미진이 들어왔다.

“피곤하다 그러지 않으셨어요?”

“네.”

“근데 맥주?”

“피곤할 땐 역시 맥주죠.”

“네? 지금 민근 씨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혹시…”

“혹시?”

“혹시 고양이 때문에 그러세요?”

“고양이요?”

“네. 고양이요.”

“고양이가 뭐요?”

“고양이가 문 앞에 있어서요.”

“고양이가 문 앞에 있어서 뭐요?”

“음…… 고양이가 문 앞에 있어서 못 가신 거 아니에요?”

“고양이가 문 앞에 있는데 제가 왜 못 가요?”

오민근은 맥주를 들이켰다.

“무서워서?”

오민근은 잔을 내려놓고, 미진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무서워서?”

미진도 오민근을 바라보았다.

“소주 드실래요?”

“네?”

“저랑 소주 한 잔 하실래요?”

“갑자기 뭐에요? 고백?”

미진이 웃으며 물었다. 오민근은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다. ‘술집’도 엉망진창이고, 미

진이라는 이 여자는 말이 너무 많아 엉망진창, 형은 늘 막무가내라 엉망진창……. 그런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네. 저는 고양이가 무서워요.”

“진짜? 고양이 진짜 귀여운데.”

“저는 무서워요.”

“뭔가 좀 귀엽네요?”

“뭐가요?”

“아까 말하지 왜 계속 말 안 한 거예요?”

“창피하니까요.”

“같이 소주 마실래요?”

미진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오민근 앞에 내려놓았다. 오민근은 소주병을 보며, 이번 전시엔 눈

앞에 있는 여자와, 고양이와, 형을, 태국 풍으로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Page 28: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Page 29: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잘 다니던 4년제 대학을 때려치우고 서울로 상경해

발 빠르게 2년제 디자인 과를 졸업.

막상 졸업하고 나니 받아주는데도 불러주는데도 없다.

그때부터 이 악물고 익힌 갖가지 처세술과 생존법을 이용해

처음 취직한 회사에서 1년 6개월 만에 팀장으로 승진했다.

앞으로 수주에 걸쳐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몸 건강히

살아남는 방법을 쓸 예정이다.

거의 모든 텍스트가 주관적 경험에 의거한 것이기에 관점에

따라 비판적 지점들이 상당 부분 형성될 여지가

크다. 국내의 많고 많은 웹디자이너 중 하나의

개별적 사례로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Chapter 1{취직}의 생존매뉴얼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대학에서 정말 열심히 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죄다 88만 원 세대네, 취업이

힘드네, 20대는 개새끼네 같은 식의 비관적인 말들뿐이었다.

생각 없이 툭툭 던지는 주위의 냉소 섞인 농담들이 터지면서

나는 학생 때 항상 불안 같은 것들을 얼굴 가득 묻히고 살았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2년제 디자인 과를 졸업한 일종의

전형성을 가지고 살았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전형성을 가지고 있었냐고 누가 물으면

생각할 것 없이 열등감이라고 말할 것이다.

잘 다니던 4년제 대학교를 내 손으로 그만두었지만 결국

학벌에 대한 열등감은 공기처럼 주위에 항상 퍼져있었다.

웹디자이너로 보통 취직을 하면 사내에 ‘기획팀’이라 불리는

무리와 함께 근무하게 되는데 이들은 보통 번듯한 4년제를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초봉도 보통 디자이너들보다 300~400 정도 더 높게

시작한다. 웹디자이너로 최초의 기획회의에 참여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온갖 알 수 없는 용어에 마케팅 이론에 전문지식을 요하는

대화들.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모르는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반성이

분노로 대치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현재는 그런 종류의 트라우마들은 상당 부분 극복되었지만,

보통의 사회 초년생 디자이너들이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우회해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취직의 문 앞에서 있는 저기 저 왜소한 예비 디자이너의

정수리 위로 날아가 잠시 스탑. / 손에는 출력한 포트폴리오로

추정되는 검정색 바인더가 들려 있고 나름 디자이너로 보이기

위해 신경 쓴 옷차림도 보인다.(까만 옷) / 어젯밤 달달 외운

면접용 멘트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 눈치다. / 면접 대기실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묵묵히 차례를 기다린다.

Page 30: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웹디자이너 면접 테이블 풍경은 내 생각에는 몇 가지

유형들이 존재하는듯하다.

첫째, ‘내 노트북은 애플형’

‘내 노트북은 애플형’의 면접관들은 나를 똑바로 보지 않는다.

인사를 해도 그의 시선은 번지르르한 애플 노트북으로

향해 가 있고 입만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어서오세요’

면접관이 보고 있는 것은 당연히 정성스레 준비한 나의 피 같은

포트폴리오 사이트와 고등학교 때 갔었던 아련한

기억의 농활까지 끌어다 모은 처절한 이력서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서브 컬쳐에 흥미가 많아 남들과 달라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었는데 성장하면서 그것들이

무기화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래서 취직용 포트폴리오도 나의 매니악한 취향을

반영해 아주 가시성이 높게 제작되었는데 평단의 반응은

역시나 (예상했던) 극과 극이었다.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예비 디자이너님 이렇게

디자인하시면 앞으로 디자이너 생활하시기 곤란하실 것

같습니다. 선배로서 충고하는데 평범하게 다시 제작해 저희

회사에 다시 도전 부탁드립니다.’ 라는 공손하면서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난 쓰레기야’를 약 3 회 정도

소리 내 크게 외쳤고 옆에 앉아 있던 무고한 시민도 덩달아

크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두 곳의 면접제의 전화가 차례로 울렸고 박살 났던

자존감의 조각들을 서둘러 쓸어 모아야 했다.

한 곳은 대형 에이전시였고 또 다른 한 곳은 아담한 규모의

디자인 스튜디오였다.

인원수로만 따져보자면 400명과 15명 정도의 차이였다.

당연히 두 곳 모두 면접을 봤고 나의 매니악한 디자인이

통했는지 며칠 뒤 두 곳에서 합격 통보를 동시에 보냈다 .

연봉은 대형 에이젼시가 약 200 정도 높았다.

아담한 규모의 디자인 스튜디오는 200 정도 작은데도

불구하고 그 연봉을 다시 한번 13분의 1로 쪼개 그 나머지

1은 연말에 주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형 에이젼시에 가지 않았다.

이유는 그곳의 면접관들이 바로 ‘내 노트북은 애플형’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작은 곳은 겉보기에 인정이 넘쳐났다.

면접관 앞에는 번지르르한 애플 노트북 따위는 없었고 대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당신의 내면세계가 진심으로

궁금해요.’ 라는 눈빛만이 존재했다.

여기서 두 번째 면접관 유형이 나올 타이밍이다.

바로 ‘초롱초롱 아이컨택형’이다.

보통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면접관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수법이며 그 초롱초롱한 눈빛에는 이러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우리 회사는 대기업보다 복리후생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뜨거운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한 가족 같은 회사임. 님아

얼른 들어오셈.’

나는 용팔이에게 관광 당하는 순진한 호갱님 마냥 그러한

착시에 홀랑 넘어가 버린 것이다.

물론 그때의 내 선택에 대해 지금도 한치의 후회는 없고

실제로도 따뜻하신 분들이었다.

Page 31: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첫 취직을 하려는 웹디자이너의 취업용 포트폴리오는 내

생각으로는 조금 매니악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결론이다.

물론, 다양한 작업물들을 담는 외형에 국한된 측면이며

작업물들은 학생 수준을 넘어선 디테일들이 간혹 보여

면접관들에게 반드시 어필되어야 한다. 그래야 뽑힌다.

보통 웹디자이너로 사회의 포문을 연 학생들은

이시기에 문어발식 면접을 보기 마련이다.

실력이 좋은 학생들은 미리 여러 군데가 합격 되어 앞으로의

장밋빛 디자인 인생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뿐일 확률이 높다. 내 경험으로 비추어 봤을 때

웹디자이너만큼 첫 끗발이 개 끗발일 경우도 드물다.

어쨌든 나도 취직이 확정되고도 몇 군데 더 면접을 본

호사스러운 기억이 난다.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사실 더 좋은 조건이면 옮기겠다는

여우의 머리가 아니라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얼굴에

가깝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적 환상은 학생 때 어렴풋이 먼저 느껴볼

기회가 있다.

그 기회는 바로 팀 작업을 할 때인데 만약 자신의 실력이

좋다면 어중간한 실력의 친구들이 쏠릴 때가 있다.

그때 순간적으로 본인이 무엇인가 된 것 마냥 어깨가

잔뜩 부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에서 디자이너 생활할 때는 크게 도움이 안 되는

측면이니 한번 제대로 느껴보고 폐기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여기서 세 번째 면접관 유형을 소개할까 한다.

대학도 1지망, 2지망, 3지망이 있듯 웹디자이너의 세계에도

당연히 그러한 구분은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1지망은 대기업과 포털 그리고 일류 에이전시들이고

2지망은 중견 에이전시들이며 마지막 3지망은 쇼핑몰과

인쇄소 그리고 막 시작한 군소 회사들이다.

이러한 구별법은 사실 연봉이나 근무환경에 대한 편의적

구별법이다.

3지망에 속해 있는 회사가 모두 나쁘다는 결론은 전혀

아니다.

실제로 다수의 쇼핑몰이 포털급 대우를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근무환경과 급여조건이 좋다고 해도 앞으로

자신이 맡을 일에 대한 질적인 문제는 항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런 군소회사 면접관들은 보통 ‘네 맘대로 다해봐’ 형이 많다.

군소 회사들은 재정상 디자이너를 많이 둘 형편이 없을 확률이

크기에 대충 2~3명일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신입으로 입사해 실력발휘를 제대로만 한다면

빠른 지위 상승도 노려볼만하다.

왜냐하면, 군소 회사에 근무하는 팀장급 디자이너들은 대개

산전수전 다 겪고 말년을 편하게 다녀보고자 하는

매너리즘 형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초반에 실력 발휘를 잘하거나 포트폴리오 구비가

잘되어있다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이야기를 일찍부터

들을 확률이 높다.

물론 앞서 열거한 세 가지 타입의 면접관보다 훨씬 더 많은

유형의 면접관들이 세상에는 존재하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볼 수 있는

회사들에서 만나 볼 수 있는 꽤 보편적인 타입의 면접관들에

대해서만 국한해서 하는 이야기다.

Page 32: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한창 면접 보러 다닐 때 재밌는 경험을 하나 했다.

그 당시 스마트폰이 처음 출시되고 그에 맞춰 트위터를

이용한 갖가지 커뮤니티들이 성행했다.

그때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멘토 김영세를 모시는 트위터

모임에 우연히 나도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스마트 폰도 없고 트위터도 안 했는데 말이다.

김영세 디자이너의 강연을 듣고 그가 쓴 책을 받기 위해

긴 줄을 기다리는 기이한 경험도 했다.

사실 김영세 디자이너의 팬은 아니었지만, 무한도전에도

나왔고 중딩때 아이리버를 쓴 기억도 있고 할 것도 없고

해서 꽤 긴 줄을 기다리기로 했다.

꽤 긴 시간이 지났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유명인을 실제로 보니 촌스럽게 살짝 두근거렸다.

형식적으로 악수하고 ‘요새 뭐해 ’라고 쿨하게 물어 보시길래

‘취직 준비요’ 라고 대답했더니 ‘명함 한 장 놓고 가봐’라고

다시 쿨하게 응답하셨다.

그래서 대뜸 학생 때 만든 조악한 레이아웃의 취직용 명함을

한장 건냈다.

그 명함 앞면에는 ‘윤 고딕 550’을 적용한 ‘디자인 변태’라는

텍스트가 떡 하니 박혀 있었다.

노안이신지 내 명함을 눈 가까이 대시더니 이내 흠칫

놀래셨던 표정이 아직도 역력하다.

약 일주일 뒤 핸드폰이 울렸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여비서였다.

‘이노디자인 인데요, 저희 대표님께서 면접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나는 침착하게 ‘감사합니다. 약속한 날짜에 맞춰 면접을 보러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부끄럽게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어쨌든 약속 시각이 되어 김영세 디자이너의 집무실 앞에

앉아 있었다. / 나 말고 한 명이 더 있다. / 머리가 길다. /

약간 살집이 있다. / 까무잡잡한데 눈빛이 매섭다. / 디자인

잘해 보인다. / 오게 된 경로를 물어보니 나랑 비슷한

케이스였고 홍대를 졸업했다고 말했다. / 엘리트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상상했다.

물론 내가 다윗이었다. 나는 이야기에선 다윗이 골리앗을

운좋게 이겼지만 현실에선 밟혀 죽을 거야 라고 망상했다.

갑자기 미지의 힘이 발동되어 2년제 특유의 똘끼와 패기

그리고 유니크함으로 승부해 보려고 자신을 다잡고 집무실

문을 힘차게 여는데 김영세다! 김영세가 앉아있다!

나는 당장 달려가 싸인 받고 싶었지만, 디자이너로서의

품격을 갖추며 정중히 배꼽 인사를 드렸고 차분히 그리고

엄숙하게 노트북을 열었다. 그때의 풍경은 지금 생각해 봐도

상당히 생경하다.

상당한 인조미를 자랑하는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티브이에서만 보던 유명 디자이너 앞에서의 1:1 피티.

나는 떨린 것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애써 시크한 척했다.

실제로 가진 것이 없었기에 절박한 심정으로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때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보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가

아니라 그때부터 이미 열등감을 보완할 처세술에 대한

필요성을 강력히 느낀 것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실제로 나에게 있지 않은 것들을

얻을 때까지 꾸준히 노력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노력해야 할 부분들에 집중하되 그 외적인 부분들에

대해서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이 바닥에서 건강히 살아남을 수 있다.

어쨌든 김영세 앞에서 피티를 무사히 마치고 홍대 졸업생

친구와 시원한 냉면을 맛있게 먹으며 트위터 친구를

하기로 했다. 며칠 뒤 결과가 나왔는데 둘 다 동시에 떨어졌다.

어차피 합격해도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 다시 자존감에

상당한 금이 갔다. 아마 홍대 졸업생 친구만 붙었다면

내 자존감은 산산조각 났을것이다.

Page 33: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첫 면접을 본 회사에서 나는 다년간

드라마로 학습된 면접자의 모습을 연기 했었다.

그 당시 나의 외형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졌었고 항상

조금의 식은땀을 머금고 있었으며

목의 시작점까지 오롯이 잠근 푸른색 옥스퍼드 셔츠와

시키면 다할 것 같은 성실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시간이 지나 그때의 원인을 다시 분석해보면 포트폴리오의

매니악하고 독특함을 기대했던 면접관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너무 평범한 모습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작전을 바꾸어 면접 준비기간 동안 매니악한

포트폴리오와 유사한 면접자의 캐릭터를 구상했다.

우선 나의 매니악한 포트폴리오에서 키워드 다수를 추출 /

키워드를 조합해 가상의 페르소나를 설정 / 키워드가 조합된

페르소나의 성격에 잘 들어맞는 캐릭터를 고전 문학에서

찾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매니악한 내 포트폴리오에서 추출된 키워드들은

‘변태’, ‘유미주의’, ‘겉멋’, ‘좌파’ 등이었다.

이러한 프로세스를 거쳐 최종적으로 뽑힌 면접에 쓰일 참조

캐릭터는 오스카 와일드의 저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등장하는 ‘헨리 워튼 경’이었다.

‘이봐 자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는가’라고 물어보면

‘그래요 나 그만큼 절박했어요’ 라고 가녀린 소녀 톤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최종적으로 뽑힌 면접 캐릭터의 롤모델 헨리 워튼 경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도리언 그레이를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유미주의의 대표주자였다.

소설 초반에 헨리 워튼 경과 도리언 그레이가 나누는

대화 중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대목이 있다.

그 대목에서 헨리 워튼 경은 유미주의자들에게 진정한

예술이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안에는 추악하고 볼품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정말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려면 나를

지워내고 그 자리에 외부에서 주입된 절대적 아름다움들을

외삽시켜야만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나는 감동 받았고 헨리 워튼 경의 유미주의적 상징 코드들을

끌고 와 면접에 이용했다.

그때의 나는 초췌하고 병약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일부러

예술병에 걸린 유미주의자처럼 행동했다.

면접관들이 나의 디자인관에 대해 물어보면 병약하고 작은

목소리로 ‘제 안에 있는 것들이 추하기 때문에(쿨럭!) 완벽한

외적 경험들을 이용(쿨럭! 휴지로 한번 닦고)합니다.’

라고 말해버렸다. 실제로 연기가 그렇게 능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확하게 저렇게 말했다.

면접관들의 반응은 역시나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진짜 미친놈으로 알거나 다른 차원의 사람으로

알거나였다. 후자 쪽으로 면접관의 인식이 조금

이동했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매니악한 나의 포트폴리오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표 주체가 지시 대상을 오롯이 가리키듯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포트폴리오와 그 포트폴리오 주인의 외적

닮음으로 말미암아 면접관들에게 나는 잠시동안 지구상에서

손꼽히는 특이한 인간으로 각인될 수 있었다.

이러한 면접 전략은 꽤 잘 맞아 떨어져 그 후로 많은

합격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별 볼일 없는 스펙으로 지원 가능한 곳들)

이게 다 헨리경 덕분이다!

그때 당시 부족한 스펙을 메꾸기 위한 생존의 처세술이라고

느끼고 행했던 것들이 지속되어 지금은 꽤나 번듯한

디자이너의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고 자신한다.

아직 가야 할 길은 상당히 멀고 부족함도 많지만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나 하나 믿고 가보자. (끝)

<2부 스킬의 생존매뉴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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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4: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요즘 대세인 프로그램이 있다. 나는 한 두번 아주잠깐 10-20분 본적이 있지만.. 군대를 체험하는 프로그램 진짜사

나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나 앞으로 가야할 사람, 앞으로 가야할 그들의 여자 친구 또는

그들의 부모님 가족 친지 TV만 틀면 나오는 아이돌에 식상한 시청자들이 많아서인지 (물론 거기도 아이돌이 있는

듯)10대가 타깃이 아닌 전 연령층이 다 볼 수 있는 포멧이라서 그런지 인기가 많다. 리얼인지 실제로 하는건지 갔다

온 사람들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안가본사람 못가는 사람들에게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요소가 무궁무진하다보니

까 인기가 있는듯하다. 프로그램의 인기의 원인 뭐 이런건 내가 대중문화 평론가도 아니고 이쯤에서 끝내고 필자의

군대 얘기를 잠깐해보기로 한다

특등사격수였니 저격수 였니 간첩을 잡았니 특전사 였니 뱀을 산채로 잡아 먹었니하는 확인불가한 깔때기는 들이

대지 않겠다. 나는 그냥 평범한 육군이었다. 아무런 보직도 없는 그냥 말 그대로 육군... 군대 다녀온 남자들은 알겠

지만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땅개라는 은어를 썼다. 암튼 땅개 육군은 10월에 입대를 해서 훈련병 6

주 기간을 거쳐자대로 배치 누구나 다 한번쯤은 거쳐 가는 보초를 서게 된다.

정규방송 프로그램 시작과 끝에 나오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군인의 모습. 국민의 안전은 우리육군에게 맡겨 달라는

듯 한 철조망의 손망 상태 점검이라던지, 뭐 적의 동태를 발견과 동시에 눈에서 나오는 강력한 레이져로 적의 잠수

부산오뎅 이야기

(진짜 사나이의 진짜 능력)

Page 35: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함도 구멍 내버릴꺼 같은 그런 느낌이라기보단 졸린 눈 비비며 고참이 편하게 주무시게 혼자서 다음 교대근무자 올

때까지 뜬눈으로 맡은바 시간완수가 최대의 사명이었다. 뭘 하던 돌아가는 국방부시계 그렇게 보초서고 눈 오면 눈

쓸고 군가 좀 부르며 밥 먹으러 다니고 설거지 잘하고 다림질 좀하고 PX좀 들락거리고 훈련받으며 군복에 흙 많이

묻혀서 열심히 한 것처럼 보이고 하던 어느 날 .

말년병장 운전병들의 대거 전역으로 인한 운전병 급모집....

1종 보통 93년 라이센스의 소유자인 나는 땅개 생활을 청산하고 운전병 특채가 된다. 79년식 군용트럭을 최고속도

50마일로 자유로를 쾌속질주하고, 선탑자의 단골다방에 가서 다방누나들과 장기 두고 다방누나가 서비스로 주던

첨 먹어보는 냉마차도 먹어보고 군용차도 불법주차단속하려 했던 경찰에게 같이 나라밥먹는 사람들끼리 그러지맙

시다라며 국방부예산의 무분별한 지출을 온몸 던져 막았던 나의 군 생활.

참 열심히 했었던걸로 기억한다. 그러면서 어김없이 돌아가는 국방부시계, 그러면서 쌓여만가는 나의 고과점수 바

쁜 업무로 인해 휴가까지 보류해가며 정기휴가와 포상휴가를 반납까지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한꺼번에 나가게된 포상휴가+정기휴가는, (군대다녀온 사람들은 못 믿을지 모르겠지만) 무

려 49박 50일에 이르렀다. 49박 50일 휴가를 다녀오고 나서는 휴가 복귀 하는 날로 전역일도 맞춘다. 49박 50일 동

안 그동안 쌓아온 나의 전투력을 헛되이하지 않기 위해 2-3일간의 짧은 휴식 후 바로 동대문에 취직을 한다. 거기

서 하게 된 일은 여자속옷판매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말년병장에게 딱 어울리는 일 이었다.

20대 초반의 솜털 뽀송한 청년에게 이것저것 사이즈며,디자인이며 단가며 착용감이며 컵 속 와이어의 유무, 소재

질감 이것저것 물어보는 누나 이모들... 49박 50일 동안 열심히 한 덕에 나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한결 업그레이

드 되고 거짓말하는 여성들은 단박에 검거하는 놀라운 능력까지 휴가를 가서도 전투력 업그레이드에 불철주야 땀

흘렸던 나.

마지막휴가를 부끄럽지 않게 보낸 나는 휴가 복귀하자마자 전역을 하게 된다. 전역을 해서도 전투력을 잃지 않기

위해 눈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나. 이것이야말로 진짜사나이가 아니였던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성분들이여 다른사람들한텐 거짓말해도 나한텐 거짓말하기 있기없기?

황금잠바맨

Page 36: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3.7.28 http://cafe.daum.net/badabie

“두 방향, 한 계절”

Page 37: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우울한 청춘 글. 그림. 철민

Page 38: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사람이 31년을 살면 한번 쯤 인생을 뒤돌아 보게 되거나 부연 설명 같은 것을 하고 싶어지는데,

이번달이 유독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 월간이리를 만들기로 한 그때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

외에 여러가지 이야기도 조금.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처음에 이리카페에서 재미삼아 <월간 고민과 잡담>이란 것을

만들었었습니다. 그게 오래 전부터 잡지를 만들어야 겠다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왠 시인의

낭송회를 하던 중이었는데, 너무 재미가 없고 저게 뭔가? 하고 마음속으로 의아해 하다가 문득 <

월간 고민과 잡담> 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만들면 재미있겠다 싶었습니다. 만드는 방법은 전체 자유

기고를 도착 순서에 따라 Ctrl+C 로 이어 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오타도 수정하지 않았었고요. 앞에

실리고 싶으면 빨리 보내면 될 뿐이었습니다. 다만 a5 크기라는 용지 제약은 있었죠. 그리고 그때는

pdf 배포를 하지 않았고 (태블릿이 없던 시절) 그냥 웹에서 보기 좋게 블로그를 만들었었습니다.

이 때는 참 순진한건지 멍청한건지 자유가 보장되면 일정 수준의 완성이 되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돌아보면 만드는 방식이나 고집 개념은 높게 사지만 잡지로서의 완성도는 글쎄요..

그걸 한 1년 반 정도 만들다가 스스로 “아 이것은 실패다!” 라고 말하고 그만 뒀습니다. 그리고 그냥

저냥 살았습니다. 그리고 한 참 뒤 어느 겨울 헌책방 가가린 앞을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월간 고민

과 잡담>을 만들던 시절 가가린 주인분 께서 가가린에서 배포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셔서 아 좋

겠다고 생각하고 실행하지는 못했는데, 우연히 그 앞을 지나다가 들렀습니다.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

고 안을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거리에 쌓인 눈을 밟으면서 <월간 이리>라는 제목의 잡지를 만들어야

지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의 표지를 그려주시는 분을 설득하고 사람을 모아 만들게 되었습니

다. 아마 처음 만드는데 보름이 안걸렸을 겁니다.

처음에는 책을 소량 찍고 알리기도 힘들어서 스티커를 만들어서 배포 했었습니다. 그 스티커는 2000

장 정도 만들었고 지금은 700장 정도 남아있었는데 7월부터 이리에서 다시 배포할 예정입니다.

첫달에 고민한 것들은 크게 2가지 였습니다. 판형과 글자 크기 입니다.

판형이 너무 괴이하면 책꽂이에 꽂기 애매하고 그렇게 되면 이 잡지가 누구의 집으로 가든

쓰레기통이나 재활용 코너로 가게 되리라고 생각해서 여러가지 판형 후보군 중 가장 비용과 관리

측면에서 안정적인 지금의 판형을 선택하였습니다. b5.

글자 크기는 가독성을 가장 중요시 하기로 했었습니다. 제가 원래 남의 글을 잘 안 읽는 성격이라

(지금은 좀 바뀌었지만) 가능하면 디자인 적 요소를 배제하고 라도 가독성을 확보하자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글자 크기가 작아지면 보다 예쁘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이 전달되는

것에는 하나의 장벽이 생깁니다. 그래서 최저크기 9포인트로 결정을 내렸었습니다.

알아두면 쓸모 있을 지도 모를 월간이리

이야기

Page 39: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지금은 몰래 8pt 까지 쓰고 있긴 하지만 표지 디자이너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을 보면 8pt 까지는 글자체에

따라서 가독성이 확보되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줄간격도 넉넉하게 주는 편입니다.

글자색도 가능하면 검정을 벗어나지 않게 만들기로 했습니다. 흑백 인쇄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가능한 잘 보이게 만들어서 필자의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첫호를 얼마전 인터뷰 자리에서 보았는데 지금 보면 조금 창피한 부분도 있는게 사실입니다. 좀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노력하지 않은 부분이 엿보이기도 합니다.지금이 뭐 크게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 미묘하게 많은 부분이 조정되고 정밀화 되었습니다.

그 사이 몇분의 디자이너 분들의 참여도 있었고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함께 하고 있지

않지만 그분들의 참여가 월간이리의 디자인 개선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많은 기고자 분들도 있었습니다. 좋은 글도 많았습니다. 지난 잡지를 다 읽어보시는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번쩍거리는 글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있고요. ^^

그럼 가장 중요한 것. 저를 비롯한 모두는 이걸 왜 만드는 걸까요?

우선 저는 가공되지 않은 생각과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논문으로 치면 1차 자료라고 하지

요. 생각의 1차 자료에 가까운 것들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계절오면 돌아오는 무엇이

든 물어보세요의 건강음식 코너 같은 잡지 말고 잡다하지만 한번 봐도 기억에 남는 잡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덜 원해도 언젠가 보았을때 ‘어? 이런 생각들. 어? 이런 방향들’ 에 대한 이야

기를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벌써 있는 기술이었지만 늦게나마 하이퍼 링크를 도입하는 것도 그 일환입니다. 이미 있던 것을 다

시 한번 돌아보고 보다 쉽게 다가가고 다른 방향의 물고를 트는 과정입니다. 어쩌면 인디잡지 중에

서는 너희가 처음 하는 걸 수도 있습니다. (으쓱?) 그리고 언젠가는 명품 광고도 실어보고 싶습니다.

에르메스나 뭐 제가 이름도 모를 명품들의 광고들 말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흑백 인쇄 인디 잡

지 안에 실리는 정식 명품 광고는 분명 하나의 자극이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사실 1

년도 전에 기획했다가 게을러서...)

청춘의 조각, 미래의 씨앗을 이달에도 남깁니다.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월간이리 exxx 드림

Page 40: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왜 좋아?’ ‘그냥’

‘왜 좋아?’ ‘잘해서’

의 차이는 뭘까요?

‘좋다’와 ‘잘한다’는 틀립니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이죠. 아시다시피 ‘좋다’와 ‘잘한다’는 다릅니다가

맞습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분명히 다른 말이지만 혼용됩니다. 그리고 그 다르다-틀리다의 혼용

이 문제되는 것은 저변에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차별정신이 깔려있기에 그렇고요. 좋다-잘한다

도 마찬가지로 혼용되는 말사이인데, 이 경운 ‘좋다’의 의미가 워낙 넓게 쓰여 ‘잘한다’를 부분 포함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잘한 것이 좋다’라는 표현은 ‘좋은 것이 좋다’는 표현이상이 되지 않는 경

우가 많습니다. 이런 의미의 겹침은 다르다-틀리다와의 관계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분명히 해야 할

것임엔 마찬가지인데요.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기 쉽기 때문이에요. 뭔 소리냐면 잘한

다-좋다-착하다/옳다로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좋은 것이 옳다로 스물스물 넘어가

는 정신작용을 경계해야하는 거죠. 취미활동을 건강하게 발전시켜나가는 데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잘한다-좋다가 동어반복이 되는 중복 부분을 빼고 ‘잘한 것이 좋다’ 했을 때 잘한다-좋다는 좋다-

잘하니까라는 판단과 근거의 관계인거죠.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 일컬어 ‘절대미’에 더 가까운

것은 내 기준에서 볼 때 잘한 것이고 그렇기에 좋은 것이지만, 좋다에 옳고 그름을 포함해버리는

실수를 한다면 그것이 사회의 도덕기준이나 가치평가의 영역으로 비어지는 거죠. 나에게는 좋은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옳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을 일단 못 박아야 해요. 이것이 당연한 것인

데 때때로 의식하지 않으면 의식 사이에 교묘하게 감춰진 채 나도 모르게 작동됩니다. -내가 좋아

하는 것은 잘한 것이고 옳은 것이야. 너가 나와 다른 것을 좋아한다면 네 취향은 틀린 것이야.- 이

렇게 자연스럽게요. 취미활동은 이런 태도를 경계하는 고도의 판단을 겸해야 하며 결국 취미활동

으로 정신은 더 자랄 수 있게 됩니다.

잠시. 개인의 취향을 절대미로 말해서 싫으실지 모르겠는데요. 집단의식이 공유하는 미가 어떻든

제겐 절대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개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대를 추구하는 개인들

끼리는 절대를 추구한다는 것만 공유될 뿐, 그 ‘절대’는 같지 않은 것이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절때리세요. 제 생각엔 절대가 절대인 것은 절대라는 개념 하에서만 절대인 것이고 개개인에게 절

대는 다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내게 좋은 것이 옳은 것은 아닌 하에서 그리고 우리서로

는 진짜 많은 부분이 같은데 개성인 부분만 다른 하에서만큼 ^^ 우리의 절대는 다릅니다-라는 것.

김범 (Kim Beom)

Page 41: 월간이리 2013년 7월호

김범 작가의 작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게시판의 포스터. 아마 2010년 아트선재에서의 개인전

알림 포스터였던 것 같습니다. 치타가 영양을 쫓는 영상을 영양이 치타를 쫓는 것으로 보이게끔 편

집한 비디오 작업의 캡처가 그 포스터에 있었고요. 작품 제목 및 연도는 [볼거리(spectacle) 2010]

입니다. 와, 좋다. 라고 생각했죠. 사실은 사진 작업인 줄 알았다가 후에야 비디오인 것을 알았지만.

이 경우에 ‘잘해서 좋다’를 적용하려면 무엇을 잘했다고 해야 할까요. 일단 예술작품이니까 미적

인 의미에서 접근해야할까요? 아니면 비디오 작업이니 기술인 영상편집을? 이런 경우엔 발상을?

이렇게 그냥 좋다에서 멈추지 않고 왜 좋은가를 찾는 일. 즉각적으로 느낀 ‘좋다’에 대해 관심을 갖

고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작품은 성공한 것일 겁니다. 어떤 것이든 거슬러 올라가

는 경험은 결국 내가 본 작업을 마지막 도미노로 삼아 넘어진 도미노의 과정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

가는 것으로, 도착한 첫 번째 도미노에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세계관이 되었든 미적 기준이

되었든 간에요. 그 것은 절대미와 닮아있고, 내지는 닿아있고요. 사람들은 절대를 추구합니다. 그

래서 그것이 작업이 되었든 삶의 다른 것에 있든 본인의 여정이나 결과물이 절대를 암시하거나 드

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접했을 때 때로 그냥 좋다는 말로 두루뭉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말로 표현이 안 되거나 말로 표현을 할 필요가 없거나인데 가끔은 말로 표현할 테면

말로 하지 뭣 하러 작업을 하나 싶기도 하니까. 좋아서 좋음을 내세우죠. 저는 김범 작가의 작업의

방향이 가리키는 절대에 공감을 하며 그것들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것은 즉 그냥 좋습니다. 그

리고 그냥 좋기에 왜 좋은 가를 찾도록 시작하게 하는 것이고요. 그러니 ‘잘해서 좋다’보다 때로 ‘

그냥 좋아’가 더 가능성을 품은 말일 겁니다.

글. 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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