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소리 32호(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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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영규 이사 추모 좌담회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나눔의 리더십 대구관광서포터즈, 나의 꿈을 향해 가는 시간 제1기 대구관광서포터즈 팀원이 되면서... 눈처럼/차력사 김팔봉씨 유상종/이강순/하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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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 규 이사 추모 좌담회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나눔의리더십

대구관광서포터즈, 나의꿈을향해가는시간제1기대구관광서포터즈팀원이되면서...

눈처럼/차력사김팔봉씨

유상종/이강순/하종성

회비안내>>

회비를 미납하신 회원께서는 동봉한 지로용지나 은행계좌로 조속히 납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대구은행 031-05-003912-4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김 호

입회안내>>

국채보상기념사업회원을 모십니다.애국애족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에 뜻을 함께 하고자 하시는 분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회원에게는각종 학술행사 및 연구회에 참여하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각종 동호회에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회비는연 1만원 이상입니다. 가입을 희망하시는 분은 전화 053)745-6753으로 문의하시거나홈페이지(www.gukchae.com)를방문해서회원가입을해주시면확인후바로답변을드립니다.

발 행 인 신동학편집고문 박용규, 서상호

편집위원 엄창옥(위원장), 권오현, 남정원, 우웅택, 이용수, 전환길,최경집, 최윤진, 황성하

발 행 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670(동인동 2가 42번지)전화.053-745-6753 팩스.053-746-6753www.gukchae.com [email protected]

기획제작 밝은사람들 053-652-5700

<꿈인가생시인가, 하늘이준것인가

때가온것인가, 구름안개걷히는것인가…

대한광무11년(1907년) 새봄의제일좋은소식은

하늘에서온복음을소리쳐전하는것이로다.

이소식이무슨소식인고,

이소식이무슨소식인고

이러한좋은소식을우리는

급히말하지않을수없음이오…

이소식은다름이아니라

대구광문사부회장서상돈씨등이

단연동맹한호소식이로다.>

1907. 2. 25 자 황성신문 논설에서 따옴

국채보상운동故박 규이사추모좌담회

북후정새로운리더십이필요하다

나눔과 책임나눔의리더십

청년에게 길을 묻다대구관광서포터즈, 나의꿈을향해가는시간제1기대구관광서포터즈팀원이되면서...

천둥문학눈처럼차력사김팔봉씨

회원광장명성황후시해범은일본정부눈물로호소해보는환경학근대대구물산업역사를되돌아보며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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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김태일

전성실

강지은채윤정

김윤현엄창석

유상종이강순하종성

2014. 가을 제32호

나눔과책임의

표지사진

결실과 수확의 계절 가을을 맞아 드높아진가을 하늘을 바라본다.

산천을 수놓은 고운 단풍 틈으로 뾰족하고좁은 가시 옷 속에서 함께 자라나기 위해서로의 자리를 양보해가며 자라난 알밤이

어 꽉 찼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故박 규이사추모좌담회

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

김 호(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

참석

진행 기록

신동학(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서상호(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감사

임수현(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김종찬대구 MBC 이사

이춘호남일보 기자

엄창옥편집위원장

권오현편집위원

엄창옥 : 오늘은 고 박 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님을 회고하면서, 그분의 국채보상운동 재조

명에 바친 열정과 그분만의 따뜻한 인간미 그리고 지역사회에 미친 발자취에 관한 여러 에피

소드들을듣고, 본기념사업회의새로운전망을모색해보고자추모좌담회를열게되었습니다.

신동학 : 참석해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국채보상운동 정신이 대구지역에 뿌리를 내리는데 크게

기여해주신 고 박 규 이사님의 추모 좌담회가 우리 사업회의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길 기

대하면서좋은말 부탁드립니다.

김 호 :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발전하는데가장잊을수없는분이박 규이사님이라할수있습

니다. 그분은 초대 상임부회장으로서 실질적인 일을 다 하셨습니다. 늘 잊지 않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연구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한 분이시고, 상공회의소에서 낸‘국채

보상운동기념사’를 조항래 선생과 함께 주로 집필하셨고, 80년대 국채보상운동 심포지엄을

여는 데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 기념사업회가 2002년도에 만들어질 때에도

고생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우리로는 잊을 수 없는 분이라 이 추모 좌담회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김종찬 : 오늘 이 좌담회가 박 규 선배님 일이라고 하기에 열일 제쳐놓고 왔습니다. 저는 오늘 그분의

인간관계에관한이야기를좀드리고자합니다. 선배님은『대구일보』가 1972년 3월 31일자로

문을 닫게 되면서 대구 MBC로 오셨습니다. 처음에는 혼자이시니 외로우셨겠지만, 대구 중앙

공원쪽의 골목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구수하게 말 을 하신 기억들이 남아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신 것 같아요. 박 선배님의 첫인상이 박식하다는 점입니다. 그분의

큰자산은넓은인적네트워크이지요. 무엇보다그분은돈욕심없는소탈한인간미가있으셨다

생각됩니다. 사모님이고생많이하셨을겁니다.

임수현 : 제가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대구에

서 근무하는데 농협지도부 출입기

자로 박 규씨를 만났어요. 박

규씨가『대구일보』가 폐간되기 전

에 경제부 출입을 했으니까요. 만

나면서 느꼈던 것이 저 양반이 나

이는 우리하고 비슷하지만 내가

배울게 많은 사람이구나 그런 생

천둥소리 5

각을 했어요.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지역사, 특히 대구역사에 매우 박식한 사람이구나 느꼈

습니다. 제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이사가된것도박 규선생의권유 습니다.

서상호 : 69년도인가, 70년도인가에 직물업계 출입을 같이 했어요. 직물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도 해야

했고, 그러니자연히역사에도관심을갖게되고…. 박선배는경제부고참이고경제부기자로서

선두 위치에 있으니까, 또 그때 대구경제의 기본이 바로 섬유 으니까, 그때 아마 아이디어를

얻거나소명의식을가지고대구의과거를파기시작한것이아닌가싶습니다. 직물같으면직물

이야기만하는게아니고직물과관계되는금융, 사업이야기까지이론만아는게아니라주변을

더 많이 아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능숙하셔서 휴먼 네트워크가 아주

넓고누구든지친한분이었습니다.

엄창옥 : 언론에 계시면서 자료 부재를 강하게 느끼고, 그러다보니 지역사회를 천착하게 되고. 하면서

지역의문화와역사그속에숨어있던국채보상운동을발견해내셨군요.

이춘호 : 제가 언론생활을 하면서 마치 유성처럼 만난 분이 박 규 사장입니다. 95년 서울에서 정치부

기자를마치고『대구일보』를다시오면서대구라는곳의정신의맥, 대구에대한제대로된어

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떤 연구서적은 뭘까? 이런 막연한 생각들을 하면서 찾아봤지만 별다른 답은 얻지 못했죠. 지

역의인물들을계속탐구하는과정에제일처음만난분은사실죽순문학회회장이었던윤장근

선생님입니다. 그 향토사의흐름을공부하면서그때박 규사장님과인연이됐는데사장님이

어느날장기연재를시작한거예요. 대구가어떻게무너져내리는가를…. 그북장로회등장부터

연재를 해나가는데, 그때 박작대기(박중양) 이야기, 대구의 유곽문제, 북성로, 향촌동, 대구역

주변의요정이야기. 단순히요정이많았다이정도만되면제가놀라지않았는데그때달성관,

무슨 관하면서 열 몇 개를 언급하신 거예요. 그 기사를 다시『대구일보』에 와 가지고 각색을

해서 40회인가연재를했어요. 제가청수원자리에대한부분을중심으로대구에당시유명했

던요정의역사를정리하고싶다하니까언제한번나하고술한잔하자시면서요정이야기를

한 번 해야 되겠네 하셨는데, 그러고서 이야기가 끝났어요. 그리고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집에

세 번인가 초대를 받았어요. 돌아가시기 전 한 달쯤 됐을 거예요. 저한테 자료를 다 보여주겠

다고 하면서 가지고 계신 자료를 꺼내들고 요정과 관련되는 것, 일제 강점기 때 여러 연구

자료를 막 보여주셔서 굉장히 충격 받았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가 대구에 기독

교와카톨릭이어떻게들어왔는지이초기역사를정리하는건데, 지금성직자들로부터요청을

받고자료모으고있다”고하신이야기가제가마지막들은이야기입니다. 그리고사모님으로

부터 운명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구에 관련된 자료는 이 기자가 가지고 가는 게

좋겠다 해서 그때 사과박스로 한 두 세 박스 정도 됐고, 그 중에 4분의 3은 일반서적 그런 책

들이 있었고 나머지는『다이큐모노가타리(大邱物語)』원본이 있었어요. 그걸 계기로 제가 대

구연구에 폭발력을 얻었고 대구 음식의 역사, 향토음식, 전통음식 쪽으로 들어와서 지금은 대

구음식전문기자로방송도출연하고특강도다니고합니다. 그출발의물꼬를터준분이박

규 사장님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웃음이 매력적이셨고 구두가 흐린 날이 없었습니

다. 오뉴월따 따 한염천처럼구두가광이나고멋쟁이셨어요. 맥주를아주아름답게매력적

으로마시셨던, 손이아주선비손처럼예뻤던….

서상호 : 구두가반짝반짝하려면사모님이신경을많이쓰셔야합니다.

이춘호 : 많이썼지요. 국신사같은멋쟁이 어요.

임수현 : 내가 아는 박 규 선생은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화술도 대단히 좋았고 그 사람보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아직까지는 나는 못 느껴봤어요. 그 양반이 나한테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던 것

중에서 하나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있어요. 우리 향토 야사집을 하나 만들자고 여러

차례이야기하곤했어요.

천둥소리 7

이춘호 : 박 규사장님은대구자료를모으려고헌책방을서울부터해서부산까지그렇게많이다녔는데

돈만 생기면 책방에 가서 책을 샀다고 하셨어요. 고서점을 다니면서 대구에 관련된 자료를

찾으려 했던 상당한 노력들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국채보상운동 기록사를 적을 수 있었을

겁니다. 일제시대의풍물상이어떻게됐나를최초로정확하게사실에근거해서적은시리즈물

이박사장님의작품이죠. 책으로묶어내도족히 3,000쪽정도나올정도로엄청난내용입니다.

제일큰게『대구일보』하고거의아마 20년전에적었던낡은어떤스크랩북이남아있습니다.

대구백년을이야기한것이지요. 그정도로방대하게정리한건최초일거에요. 그러니깐그것을

하기위해평생을아마자료를모은거예요.

서상호 : 박 선배가평소이야기한이야기를기록으로옮겨놓은것은혹시없나요?

이춘호 : 네 그런 게 없어요. 막 흩어져 있어서 그걸 다 집대성 못하고 있어요. 국채보상운동 자료는

어느정도정리가된것같습니다만.

김 호 : 박 규선생이『대구시보』라는잡지에오래연재한적이있어요. 그분이말한연재한야사중에

국채보상운동과도관련있는아주재미있는야사가있어요. 대구부사로부임해서아주청렴하게

근무하셨는데, 서울로갈때대구유지들이무슨솥을부인에게드렸다고해요. 본인한테알리면

안받을테니까부인에게줘서서울로가져가게했어요. 서울에서그걸이부사가알고는당장

내려 보내라고. 그래서 그 솥을 다시 대구로 내려 보냈대요. 그런데 대구에서는 그걸 가지고

종을만들었다는거죠. 국채보상운동당시에대구에서모금집합소가카톨릭신자집이었는데,

그 집에 그 종을 매달아 놓고 종을 쳤다는 겁니다. 청렴한 종소리를 들으면서… 국채보상금을

모았다는 것이죠. 그 종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몇 사람 있어요. 그런데 은 안 보입니다.

최근에국채보상모금장부와함께나온종이하나발견되었는데, 그종과비슷하다고보이지만

이걸공개하려면근거가있어야해요. 이 없으면내가근거없는주장이되니, 그 을 찾으

려고우리가애를많이썼어요.

엄창옥 : 이러한자료를정리하는작업이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로는중요한일입니다.

김 호 : 『대구시보』를정리하는것이중요합니다.

김종찬 : 대구시보는 대구시에서 기록물로 철해져있을 것으로 합니다. 정리하는 기회를 가져보도록

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합시다. 박 상무님이MBC 보도국부장으로계시다가 TV편성국부국장으로가서다큐를많이

했습니다. 그곳에서도자료가보관되어있고, 대구상공회의소회보에도대구경제사로연재하신

적이있습니다.

김 호 : 대구에서 누구보다도 앞서나가던 향토사학 연구자로서 많은 야사와 을 쓰고 했지만 특히

가장공들인부분은국채보상운동역사 다고생각합니다. 그분이참너털웃음을잘웃었어요.

그러면서도 항상 깊은 고민을 감추고 있었어요. 항상 너털웃음으로 웃고 빙 빙 웃고 멋쟁

이처럼 해도 가볍지 않은 깊은 맛을 가지고 있는 인품의 소유자 다는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창옥 : 박 규선생님께서열정을가지고향토사자료속에서건져낸매우중요한지역사가국채보상

운동이고, 그것이 결실을 맺어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이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국채보상

운동을 처음으로 싹을 틔우고 여기까지 왔는데, 당시 고 박 규 전 이사님과 여러분들이 다

마음을많이모았을것이라생각됩니다.

김 호 : 고박 규이사님은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이전의대구시에속한국채보상기념위원회를같이

했고, 서상돈상(賞)을 대주교님께 이야기 해 가지고 운 도 같이 했고, 그 다음에 국채보상운

동기념사업회를 전국적인 사단법인으로 만드는 작업도 같이 했고, 그야말로 고생을 같이 했

죠. 『대한매일신보』에 나오는“앞으로 국권이 회복되면 서상돈을 태양처럼 높이 우리 민족이

받들어야 한다”는 그 말을 만날 때마다 인용했어요. 그때 대구에서 관광일번지가 될 제일

높은 탑을 하나 만들자고 그런 이야기를 아마 4~50번 들었어요. 그러니깐 꿈이죠. 염원이죠.

만날때마다강조하던말 이이기념관을짓는과정의어려움속에많이남았어요. 그걸항상

기억하면서기념관을지었습니다.

엄창옥 : 국채보상운동기념관속에그정신이어려져있는것같습니다.

신동학 : 오늘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장시간 귀한 시간 내주셔서 좋은 말 해주

셔서 이렇게 기록에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 규 선생님이 하늘 위에서 우리를 볼 때

역시모두다잘하는구나칭찬을하지않을까생각됩니다. 대단히고맙습니다.

엄창옥 : 아쉽지만이것으로좌담회를마치도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둥소리 9

출생_1938년 2월 11일

출생지_대구

사망_2003년 7월 12일

학력_1957년~1964년경북대사대사회과졸업

경력

1964년~1969년대구일보정경부기자

1971년~1972년대구일보정경부차장

1972년~1975년대구MBC 취재부부장

1987년~1990년대구MBC 보도국국장

1990년~1991년대구MBC 기획심의실실장

1991년~1997년대구MBC 상무이사

1997년~세원대표이사

1998년 8월~2000년대구일보대표이사사장

~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상근부회장

상훈

경북문화상(언론부문) / 1977

저서/논문

대구상공회의소 70년사(공) / 1977

대구상공회의소 80년사 / 1987

국채보상운동사 / 대구상의 / 1997

고향

달구벌

대구의향기

박 규(朴英圭)

1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선거운동 전략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갈라치기’전략이고 다른 하나는‘끌

어안기’전략이다. 갈라치기 전략이란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쟁점을 던지면서

전선을뜨겁게만든다음자신의지지자들을강력하게동원하고그힘을가지고전선을 고나가서

다수파를만든다는것이다. 끌어안기전략이란전선을뜨겁게만들지않고상대방도받아들일수있

는 수용성 높은 쟁점을 던지면서 차근차근 지지자들을 설득하여 기반을 확장함으로써 다수파를 만

든다는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우리나라의 선거운동은 대개 갈라치기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상대 진 을 격렬하게 비판해야 하고 아와 피아의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한

다. 그러다 보면 사실이 아닌 비방과 흑색선전도 나오게 되고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도 다반

사로일어나기마련이었다. 따라서선거의후유증도컸다. 후보자들은물론지지자들사이까지감정

의 골이 깊어져 선거가 끝난 후에도 반목을 계속하는 일이 잦았다. 사회통합을 위해서 선거를 하는

데선거를하고나면오히려사회통합이더어려워지는경우가많았다.

선거운동이이렇게진 사이의격렬한배타적대결이된 것은이분법적흑백대결을기반으로한

냉전구도와 남북분단이 낳은 나쁜 정치적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권위주의 시대에 오래

동안계속된민주-반민주대결이만들어낸정치문화때문이라고하겠다.

북후정

새로운 리더십이필요하다

김태일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01

천둥소리 11

그 결과 최근 어느 대통령도 국민통합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당선에

승복하지못하는세력에의해사소한이유로탄핵을당해서나라가두쪽이났고, 이명박대통령

은취임초기부터끝날때까지격렬한반대세력의비토에시달렸다. 박근혜대통령도통합적리더

십을보이는데성공하지못하고있다. 이런현실에서우리는통합적정치문화와통합적리더십을

갈구한다. 자신을지지하지않은절반의국민으로부터도지지와성원을받을수있는리더십은불

가능한것인가? 근자의현실을보면서정치를걱정하는사람들이가지고있는우려다.

걱정스러운현실에서나는한가지희망을보았다. 지난 6.4지방선거에서보여준권

진과김부겸의리더십이다. 내가매일신문에두사람의리더십에대해쓴칼럼을여기

에옮겨본다.

나는두사람의선거운동전략을보면서, 1996년미국대통령후보클린턴캠프의전략가딕모

리스가이번대구시장선거를보았다면무릎을쳤을것이라는생각을했다. 권 진후보나김부겸

후보는약속이나한듯딕모리스의전략을선거운동의기조로삼았기때문이다.

딕 모리스의 전략은 한마디로‘중간층 끌어안기(triangulation)’다. 트라이앵귤레이션이라는

말을 그저‘중간층 끌어안기’로 번역하는 것은 적당치 않을지 모른다. 이 전략은 자기 진 과 상

대진 의‘중간’을껴안는것이아니라두진 의꼭지점위에새로운꼭지점을만들어내는것이

다. 그것이삼각도형을만드는것과같아서이름을그렇게붙인모양이다.

선거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두 후보가 제시한 슬로건에 대해 시민들이 다소 어리둥절했던 것도

그 전략 때문이다. 보수 성향의 후보인 권 진은‘대구혁신’이라는 진보의 표상

을 내걸었고, 진보 성향의 후보인 김부겸은‘대구대박’이라는 보수의

가치를제시했다.

깃발이 뒤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

까? 나는 그것을 기존‘진 정치의 한

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김부

겸과 권 진의 몸부림이었다고

본다. 김부겸은 대구의 진보진

이 이대로 가면 고립된 섬이 될 것

이라는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외로

운 정치실험을 시작했고, 권 진은

대구의 보수 진 이 이대로 가서는 큰

02

1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일이라는위기의식을가지고대구정치를시작했다. 트라이앵귤레이션의배경이다.

김부겸과권 진은지역과나라가둘로쪼개져싸우는것을넘어서지않으면미래가없다는확신

을가지고있는듯했다. 그래서권 진은선거운동기간내내혁신, 변화, 소통이라는진보지향적

가치를강조했고, 김부겸은선거운동기간틈만나면책임, 능력, 신뢰라는보수지향적가치를외

쳤다.

트라이앵귤레이션전략에따라권 진, 김부겸캠프는상대편지지자들에게익숙한‘수용적이

슈’를내걸며지지를확장해갔다. 권 진은대구를바꿀다섯개의혁신과제를내걸면서젊은층을

공략했고, 김부겸은대통령과협력하여대구를발전시키겠다는안정감있는대안을제시하며나이

많은층에지지를호소했다.

이전략의딜레마는각각의전통적지지층으로부터제기되는비판이다. 권 진과김부겸도그랬

다. ‘시민과 함께 대구를 바꾸겠다’고 줄기차게 주장한 권 진은 이 지역 보수 본진으로부터 협력

을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화해하겠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던 김부겸 역시 이 지

역진보본진으로부터날카로운추궁을받았다. 그러나두사람은흔들리지않았다.

김부겸과권 진은상생정치를했다. 두후보는 2004년미국대선에서조지부시캠프의전략가

칼로브가 썼던, 강력하고 민감한 이슈를 던지면서 뜨거운 전선을 만들고 지지자들을 강력하게 동

원해내는‘갈라치기’전략의 유혹을 끝까지 떨쳐냈다. 칼로브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지지

했던김부겸은가슴아픈패배에도불구하고박원순, 안희정과함께대권주자의반열에이름을올

렸고, 당선자 권 진은 정당지지도에 턱걸이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원희룡, 남경필과 함께 당당

한개혁시장으로서시선을모으고있다.

오른쪽의권 진이왼쪽으로, 왼쪽의김부겸이오른쪽으로옮겨가면서끊임없이새로운‘동의의

기반’을만들고자했던트라이앵귤레이션전략은기존정당으로부터지지가부족한권 진과기존

정당의사회적기반이약한김부겸이단순히선거에서이기기위해고안한책술이라고할수도있

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것은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치철학과 성정의

표현으로보인다. 이번 선거를통해김부겸은합리적진보의지도자로서, 권 진은성찰적보수의

지도자로서면모를아낌없이보여주었던것같다.

진 논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김부겸과 권 진은 앞으로 대구를 대한민국 새로운 정치의 중심으

로만들것이분명하다. 그래서나는권 진과김부겸이곧만나야한다고생각한다. 김부겸이축하

난을 보냈다고 하니 권 진이 화답할 차례다. 대구의 발전을 위해 두 사람이 손을 마주잡고 뛰는

통큰모습을봤으면좋겠다. 두진 의꼭지점위에새로운꼭지점을만드는진정한트라이앵귤레

이션을기대한다.

천둥소리 13

두사람이선거운동전략에서보인리더십은새로운것이었다. 갈라치기를통해유

권자를두동강이내고자기지지자를결집시키는전략이아니라차곡차곡자기비

전을 제시하면서 유권자를 설득하는 모습을 보 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리더십은 통합적이었

다. 이 두 사람의 리더십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리더십이라고 본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대

결, 독점, 갈등, 독선의 정치에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나눔과 배려, 상

생, 협력, 통합, 평화, 돌봄의리더십을희망하고있다. 동원의정치가아니라공감의정치를원

하고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여성주의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20세기의 리더십이 동원과 선동,

대결의리더십이며그것은남성중심의리더십이라고한다면 21세기의리더십은돌봄과상생의

리더십이다. 경쟁보다는협력이라는가치가더중요하다는메시지를가진사람이지도자가되

는세상에우리는살고있다. 그런데현실정치가이러한시대의변화에부응하지못하고있다.

세월호참사문제만해도그렇다. 중요한것은공감이며연민이다. 수사권, 기소권그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그러한해법을두고서로를이해시키고납득시키는자세가문제다. 공감과연

민은‘고통스럽고어려운처지에있는사람의입장에자신을놓아보는상상력’이라고했다. 그

러한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힘든 교착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팽팽하게

대처하고 있고 실마리가 복잡하게 된 것은 해결의 대안 그 자체가 아니라 공감과 연민을 기초

로한신뢰가무너졌기때문이라고생각한다.

여야. 보수진보모두에게필요한것은연민의정이며, 공감의리더십이다. 그리고그것을바

탕으로 한 나눔, 배려, 돌봄, 협력, 상생, 평화의 가치를 가진 리더십이다. 지난 지방선거 과정

에서우리지역에서나왔던권 진, 김부겸이그런희망의단초를보 다. 자랑스러운일이아

닐수없다. 새로운시대에걸맞는새로운리더십을가진지도자가우리지역에서나왔다는것

은우리로서행복한일이다.

DAEGU

나눔배려

돌봄협력상생평화

03

Ne

w re

ad

ers

hip

1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을 읽고 알게 된 일본의 유명한 NGO 단체인 Table for two의 홍보 상을

보면나눔을왜해야하는지를알수가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눔은 타인이 불쌍하게 보이기 때문에 합니다.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그

들의생각이나삶은포함되지않습니다. 그러다보니물질적인나눔을주로하게됩니다. 그런데나눔은불

쌍하니까하는것일까요?

상을보면뚱뚱한아저씨와비쩍마른소년이시소를타고있습니다. 하지만시소는기울어져있습니

다. 누구의책임일까요?

아저씨가먼저말을합니다.

“너가너무말라서기울어져있는거야.”

소년은말합니다.

“아저씨가너무무거워서기울어져있는거예요.”

여러분은어떻게생각하세요? 누구때문에기울어져있는걸까요? 시소가기울어져있는건자본의불

균형을 의미합니다. 지구의 적도를 기준으로 북반구와 남반구가 있는데 지구 자본의 80%를 북반구가 소

유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20%를 남반구가 나눠가지기 때문에 남반구 국가는 아무리 일을해도 부유해질

수없습니다. 이런책임을북반구는남반구의전쟁과게으름으로돌리고있습니다. 사회구조적모순을개

인에게돌리는것입니다.

아저씨는또이야기합니다.

“너는자라서커지지도힘이세지지도않을거야.”

전성실나눔교육연구소 대표

나눔의 리더십

나눔과 책임

천둥소리 15

소년도말합니다.

“아저씨는오래살지못할거예요.”

자본의불균형이가장잘드러나는게식량문제입니다. 북반구는식량생산이넘쳐서 양의불균형으로

비만이사회문제가되고있고남반구는식량이부족해매해기아에들어가는비용이만만치않습니다.

이러한불균형을바로잡으려면누가노력을해야할까요?

소년은아무리뛰어도바로잡지못합니다.

아저씨는한방에바로잡을수있습니다.

바로 북반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만 불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전지구의 사회구조의

변화라면더좋겠지만자본의속성상아직은어렵기때문에개인의힘으로조금은변화가가능하다는것

입니다.

나눔(기부)를해야하는이유입니다. 기부는상대방이불쌍해서하는것도있지만상대방과의불평등으

로얻은이익을돌려주는것입니다. 나눔은세상을바꾸는힘입니다.

이 힘으로 북반구는 비만을 해결하고 남반구는 기아를 해결합니다. 서로 이익이 되는 나눔이야말로 지

속가능한순환의나눔인것입니다.

지구가아닌마을로눈을돌리면어떨까요? 마을의리더가되려면무엇을잘해야할까요? 단적으로성

장과분배라는키워드를던진다면무엇을잘해야할까요? 물론둘다잘하는것이최고의리더겠지만둘

중에하나를잘해야한다면저는분배를고르고싶습니다. 왜냐하면조금덜성장하는것은함께이해하고

견딜수있지만분배의정의가무너지는것은누군가만잘살게되는불평등이생기며조직이와해되기때

문입니다. 리더는일부만을위해서는안됩니다. 바로신뢰가깨지기때문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처음에는 데려다가 우리 집에서 재운 다음 나중에는 집을 만들어줘서 자

기 집에서 잘 수 있도록 해주죠. 집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함께 도와서 집을 만들

어주죠.”

“빅맨과 함께 돼지고기를 나누는 날엔 마을엔 잔칫날이 따로 없습니다. 풍족하진 않지만 모두가 함께

먹는 즐거움이 있죠. 많이 먹지 않아도 배부른 행복이 있는 곳. 상각부족 사람들은 이웃의 집 없고 가난

한 사람이 있는 것을 마을 전체의 수치로 여깁니다. 때문에 집이 없어 밖에서 떠돌고 밥을 굶고 가난한

자가 방치되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행복의 바탕에는 나눔으로서 존경을 받는 빅맨이 있기

때문입니다.”

SBS 다큐 최후의 제국 2부 슬픈 제국의 추장

1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그래서리더는나눔을잘할줄알아야합니다. 리더는혼자잘살려고되는게아니라공동체를함께잘

살게 하려고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리

더로서신뢰를받을수있습니다.

과거우리나라에도상각부족과같은풍습들이있었습니다. 동네의가난한이들에게일년에한번씩곳

간을 열어 곡식을 나눠주기도 하고,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음식을 넉넉히 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마음껏먹고가도록했으며, 끼니를때우기힘든사람에겐음식을싸서보내기도했습니다. 눈에띄게뭔

가를주기보다는자연스럽게잔치에와서먹고싸갈수있도록받는사람을배려하기도했습니다. 그만큼

공동체를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마을의 생산구조인 농사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잘살기위한자연스러운행동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리더들에게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은 그들 위에 군림하거나 누리는

것이아니라그들의신뢰를얻기위해자신의것을아낌없이나누는것입니다.

리더에게 있어 나눔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리더로서 나눔을 하는 이유는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함이

거나내가가진게많기때문이아니라리더로서구성원이올바로설수있게만들기위함이고그들의신

뢰를얻기위해나누는것입니다. 구성원중하나라도올바로서지못하면리더로서매우수치스러운일이

기때문입니다. 리더에게있어나눔은개인적인행동이아니라사회적인행동인것입니다.

리더에게있어서나눔은선택이아니라필수입니다.

천둥소리 17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청년에게 길을 묻다

저는 계명대학교의 호텔관광학과에 진학하여 다양한 전공수업을 들으면서, 관광산업 관련 기획업무에

관심을가지게되었습니다. 여러전공수업중‘관광자원론’과‘여행사경 론’의프로젝트 던‘관광상품개

발’과제를하면서, 저를포함한조원들의다양한아이디어를도출시킨후, 그아이디어들을융합하여실제

상품으로기획하는것이재미있음을깨닫게되었습니다. 제진로와관련하여제가잘할수있는일에대해

고민한 끝에, 한국관광공사와 대구·경북 지자체의 문화·관광부서와 같이 지역 관광 발전을 위해 관광

관련기획업무를하는사람이되어야겠다는마음을지니게되었습니다.

지난여름방학동안저는한국관광공사대구경북협력지사에서현장실습을하면서, 관광관련다양한기

관과조직들의역할에대해알게되었고이들이하는일들을직·간접적으로경험해보고배울수있었습

니다. 학교에서 과제를 통해 얻었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실습 중 직접 관광코스를 짜고, 여러 팸

투어 여행코스를 준비하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실제 관광산업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게 되었고,

이일을계속하고싶은마음이더욱커졌습니다.

저는대구컨벤션관광뷰로에서진행하고있는이번‘대구관광서포터즈’활동을통해, ‘관광’이라는공통

분모를지닌사람들과교류하며다양한배움을얻고있습니다. 서포터즈조원들과함께대구도시민박전략

세미나에참여하여대구컨벤션관광뷰로에서 일하고계시는분들과대학교수님들그리고여러관광관련

강지은계명대학교 호텔관광학과 3학년

1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가분들을뵐수가있었습니다. 세미나발표를들으면서‘한옥형게스트하우스’가잠재력이많은숙박

업임을배웠고조원들과다양한의견을나누며유익한시간을보냈습니다. 최근관광주간과관련하여실시

된 대구관광지 방문자들의 인식을 이해하기 위한 설문조사 경험을 통하여 잠재 관광객들의 여행 동기 및

만족도이해를위한시장조사의중요성을느끼게되었습니다. 현관광지가지닌문제점을파악하고개선방

안을도출하며, 관광객들의관광욕구를충족시키고가치있는경험을제공하기위해서는시장조사가반드

시이루어져야한다고생각하게되었습니다. 서포터즈활동을통해제가모르고있었던것들을배울수있

게되어기쁘고, 대구관광발전에이바지할수있는사람이되고자하는내꿈을향해한발짝내딛게하는

이시간이소중하게느껴집니다. 앞으로약한달간, 낙동강·비슬산권역의스토리텔링을통한코스기획

미션을수행하는동시에계명대학교‘관광서포터즈양성과정’을통해체계적인코스개발실무교육을이

수시성실하게임하여대학생의시선에서독특하고신선한신규관광자원발굴을위해노력할것입니다.

또한실무자연계멘토-멘티제도는업무노하우를배울수있는좋은기회가될것이라생각합니다.

‘대구관광서포터즈’1기로서제자신에게다음과같은다짐을해보았습니다.

천둥소리 19

첫째, 지난현장실습경험과학교에서배운것을바탕으로, 이미개발되어있지만제대로활용되지못하고

있는관광자원을활성화시킬수있는아이디어, 그리고새로운트랜드에맞춰사람들이원하는다양한체

험이가능한관광상품개발을위한아이디어를제안할수있도록치열하게고민하고노력하자.

둘째, 함께조를이루는사람들과잘어울리고활동하며, 대구시민들및잠재관광객들과의원활한소통을

위하여노력하는서포터즈의역할을다하는사람이되자.

셋째, 지지않는청춘인실버세대들과곧실버세대로진입하는40~50대의중년들을위해그들의청춘을

되살릴수있는, 감성을자극하는스토리가있는신규관광자원발굴에도움이되자.

넷째, 한국관광공사대구경북협력지사페이스북공식페이지관리를했던경험을살려, 대구관광서포터즈

로서대구관광지홍보를위해서어떤컨텐츠들이필요한지고민하고, 내 개인페이스북을적극활용하여

대구·경북지역관광홍보단의역할을열심히수행하자.

저는 앞으로 주어질 서포터즈 미션활동을 통해 한단계 더성장하게 될 제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서포터즈가간절히되고싶었던초심을잃지않고, 학교와현장실습을통해배운것들을적극활용하여대구

관광발전에기여할수있는관광전문가로성장하도록최선을다하겠습니다.

2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청년에게 길을 묻다

저는중학교때부터관광외식사업이나호텔관광컨벤션, 이벤트기획등에많은관심을가지고있었습니다.

때문에이분야의전문가로성장하고자대구관광고등학교로진학하 습니다.

이번에 선생님을 통해서 관광서포터즈 운 및 프로젝트 수행으로 대구 명품관광코스 내 숨은 관광,

문화자원 발굴 등으로 사업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대구컨벤션관광뷰로에서 제1기 대구관광서포터즈를

모집한다는소식을듣고도전하게되었습니다. 학교대표로선발되었을때는소원하는하나를이루었다는

작은쾌감마저들었습니다.

이제대구관광서포터즈로활동한지두달정도밖에안되었지만, 대구관광을알리는데앞장서는관광서

포터즈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고등학생이지만 대부분 대학생 선배들과 함께

미션을수행해나가야한다는점에서특별하다고생각합니다.

본격적인 관광자원 발굴 미션을 수행 전, 제1기 대구관광서포터즈 발대식, 대구도시민박 전략 세미나,

관광주간이용실태설문조사및현장답사행사등에참가하 습니다. 이를통해관광서포터즈의역할과임

무수행에필요한자질과자세가무엇인지조금씩알아가게되었습니다.

‘Colorful DAEGU’라는캐치프레이즈처럼대구가대구만의개성있는다양한색을낼수있도록이번

관광서포터즈를 통해 대구에도 큰 발전이 있고 학생들에게도 많은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며,

채윤정대구관광고등학교 1학년

천둥소리 21

앞으로대구제1기관광서포터즈의일원으로대구를대표하는민간외교관이라는자세로다음과같이임하

겠습니다.

첫째는, 대구관광서포터즈의 주요 역할인 여러 공식행사 활동을 통해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을배우겠습니다.

둘째로는, 대구의관광자원홍보및온라인종합정보안내를통한관광활성화를위해도움을줄수있는

안내자임무를다하겠습니다.

셋째는, 대구의다양한관광지를답사할뿐아니라, 청소년및젊은이들의눈높이에맞는먹거리, 볼거리

등관련정보를수집·분석하여블로그와SNS 등을통해서알리도록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향후미션수행및관광서포터즈공식행사활동을통해풍부한실무경험을쌓아관련분야에

취업으로이어질수있도록자기발전에도게을리하지않겠습니다.

2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천둥문학

몸뚱이하나로

낮고어두운곳으로내려가

세상을하얗게껴안을수있다면

삼동혹한도마다않겠네

한줄기햇볕조차들지않는언덕도

바람불어조용할날없는

얇고마른풀잎위도

하물며

멀지않아녹고말청춘일지라도

•「사람의문학」편집위원, 한국작가회의회원

•시집「들꽃을엿듣다」외다수

김윤현

Profile

천둥소리 23

차력사김팔봉씨를만난것은내가열살이되던해 다.

강구다리와조금떨어진오일장장터에서 다. 오일장은빗자루, 대바구니, 철사, 뱀장어,

프라이팬 따위의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원근 각처에서 몰려드는 곳이다.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오일장을 어슬 거리며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있는

곳을발견했는데, 거기서만난사람이차력사김팔봉씨 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를 <김팔뚝>, 혹은 <팔뚝이>이라 불 지만 나는 그가 우리들에게

끼친무한한감동을기려서본명그대로 <김팔봉> 씨라고부르겠다.

김팔봉씨가나타났을즈음나는내신체가하루가다르게성장하고있는것을느낄때

다. 나는비슷한처지에있는또래들과어울려서수많은신체적실험에몰두했다. 가령,

어제보다 돌을 얼마나 멀리 던질 수 있을까. 숨은 몇 분 몇 초 동안 참을 수가 있으며,

고추를 잡아당기면 몇 센티미터나 늘어날까. 그리고 우리들은 풍선을 사다가 한 번에

불어서부풀어오른풍선의크기를보며누가허파가큰지를겨루었다.

그럴 때 차력사 김팔봉 씨가 우중충한 오일 장터 한 모퉁이에서 눈부시도록 흰 천막을

쳐놓고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종류의 신체적인 실험을 펼쳐보 던 것이었다. 처음

엄창석

2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천둥문학

우리들은약장수들이하는약은꾀라고코웃음을치는실수를범했지만곧그가여느약장

수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을 내쫓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도리어자신의묘기를아이들한테보여주는것을즐거워하는듯했다. 김팔봉씨는

오일장이서면자주왔는데어른들도그가오기를꽤나기다리는눈치 다.

“어이, 팔뚝이오늘와있더나? 또무슨묘기를보여줄랑가?”

오촌아저씨는나를보고물었다.

“우리도지금가보려구해요.”

우리들은구슬치기를하다말고오일장으로뛰어갔다.

김팔봉 씨는 오일 전과 마찬가지로 눈부시게 흰 천막 아래서 심각한 표정으로 묘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는 유리병을 깨뜨려 판자 위에 흩어놓고는 그 위를 맨발로 걸었다.

또한 차돌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알고 있는 우리들의 눈앞에서, 그는 주먹이 아니라

이마로 차돌을두동강내버렸다. 하지만우리를가장황홀경에빠트린묘기는그의‘이빨’

에서 나왔다. 천막을 걷어 올리자 뒤에 세워놓은 트럭이 나타났는데, 그는 트럭 밑에

다 긴 쇠사슬을 걸었다. 우리들은 저 엄청난 팔뚝으로 트럭을 끌어당기려나 보다 싶어

긴장했다.

그런데 그는 쇠사슬 한쪽 끝을 수건으로 감싸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이빨로 쇠사슬을

무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뒷걸음을 치자 늘어진 쇠사슬이

처 처 소리를 내며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팽팽한 쇠사슬을 손으로 팅팅

때려보고는괴성을토했다.

“우와, 트럭이움직인다!”

우리들은비명을질 다. 노인들은마치자신의이빨이쇠사슬을물은채로입에서

튀어나오지않을까싶어입술을꼭다무는시늉이었다.

차력사김팔봉은우리들이지금까지해왔던신체적인실험이얼마나형편없는

수준인가를 알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김팔봉을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

었다. 우리는 그의 묘기를 보면서 어떤 위대한 육체적인 꿈을 떠올렸던 것 같

았다.

실제로 그랬다. 유리 조각 위로 걸어가는 김팔봉의 발

바닥굳은살을보면서당시올림픽마라톤을맨발로뛰어

세계를놀라게했던‘맨발의아베베’가가소롭게여겨졌다.

사자의 이빨이 아무리 힘이 센들 그

이빨로 트럭을 끌지는 못할 게 아

천둥소리 25

닌가.

그러던어느날이었다.

그날은 우리가 무슨 일로 늦어 해가 설핏할 즈음에야 김팔봉을 찾아갔다. 그는 묘기를

마치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는 반갑게 우리를 맞았지만 왠지 표정이 밝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더 이상 강구 오일장에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모른 채, 빙 둘러서서 그가

이빨로끌었던어마어마하게큰트럭을손으로어루만지며감격에떨었다.

그가 우리들에게 싱긋 웃음을 흘려주곤 차에 올랐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차바퀴가

움직 다. 우리들은 트럭의 뒤를 쫓았다. 쿠당탕쿠당탕 하며 트럭은 흙길을 내달렸고

우리도전속력으로트럭을따라갔다.

그는 금호 변전소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제야 우리도 헉헉 대며 달리기를 멈추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우리들에게 사탕 하나씩을 나눠주고는 말없이 운전석에 올랐다. 그의

차가 먼지를 풍악처럼 일으키며 노을이 지는 강변도로로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사탕을

손에들고오랫동안바라보았다.

•1961년경북 덕생<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

•<슬픈열대><황금색발톱><어린연금술사><비늘천장><빨간염소들의거리> 등

Profile

2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서론

1895년 일본은 명성황후의 시해사건(乙未事變)에 대해 시종일관 정부의 관여를 부인해 왔을 뿐

아니라 이 사건이 낭인(浪人)들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범행으로 발뺌했다. 일본의 최초이자

최대의 역사 왜곡이라 할 수 있는‘을미사변’의 진실을 밝혀, 우리 국민의 역사 인식을 새로이 함과

아울러 이를 일본인들의 진실어린 반성을 일깨우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코자한다.

明成皇后명성황후

시해주범은

일본정부

회원광장

유상종전 대구과학대학교 지도교수현 재향군인회 원로자문위원

천둥소리 27

1. 민 황후의 출자

명성황후는 철종 2년(1851년) 9월 25일에 경기도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현 여주읍 능현리

250-2번지)에서 민치록(閔致걤)과 이씨 부인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자 , 본관은 여흥

(轝輿), 아버지는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중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의 5세손이다.

황후의 생가는 1976년에 중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에서 가까운 동

쪽에는 유형문화재 제41호인 명성황후 탄강구리비(明成皇后 誕降舊里碑)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씨는 고종의 친필로 그 뒷면에‘광무 8년 존경하여 절하고 울면서 쓴다(光武 八年 敬拜泣書)’라

새겨져 있다. 광무 8년은 명성황후 사후 9년째인 1904년이다. 황후는 8세에 부모를 여의고 의붓

오라비 민승호(閔升鎬)와 더불어 친척집에서 자라다가 16세 대인 고종 3년(1866년) 3월 6일에 왕

비로 간택되어 3월 20일 운형궁에서 왕비책봉의 가례를 올렸다.

2. 백수건달 대원군과‘개똥이’고종

고종(高宗)의 아버지 흥선군은 국태공(國太公)으로 정권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백수건달 노릇을

하며 60여 년 동안이나 정권을 잡고 국권을 좌우하던 안동 김씨(安東金氏)로부터‘궁도령’이니

‘상가집 개’라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당시 대왕대비 조씨를 은 히 접근하며 조(英組, 1724~1776)의 직계

혈통인 자기 가문이 왕위 계승의 전통성과 당위성을 설득했다. 1863년 12월 8일 철종(哲宗)이 재위

14년 만에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는 옥새부터 챙긴 다음 곧바로 중신들을 불러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複)으로 하여금 철종의 대통을 이어 보위에 오르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참으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조치 다. 연 날리기를 하며 놀던 대원군의 둘째인‘개똥이’가 갑자기 대궐로

불려가 임금 자리에 앉으니 그가 바로 26대 고종(高宗)이다.

3. 번개 작전으로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

대원군은 집권하자 평소

구상해온 국정쇄신책을

실행에 옮겼다. 가장 먼저

손댄 것은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청산이었으며, 두

번째는 서원(書院)의 철폐,

2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세 번째는 과감한 세제 개혁, 그 다음으로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관 때 소실돼 방치돼온 경복궁을 재건했다. 또한

쇄국정책을 시행하며 천주교를 박해함으로써 병인양요(丙寅洋

擾)와 신미양요 등을 자초했을 뿐 아니라 먼저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인 일본이 조선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으며 청나라와 러시아 외에

도 서구 열강들도 기회를 노리게 되었던 것이다.

4. 시아버지 대원군을 어낸 민황후

명성황후는 고종 3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한 살 아래인 고종은 왕비를 어렵게 여겼는지 후

궁을 찾는 날이 잦았으므로 황후는 독수공방하는 밤이 많았다. 그러나 밤늦도록 책들을 읽으며 무

료함을 달랬다. 전하는 말로는 민황후는 비교적 귀가 컸고 얼굴도 약간 검은 편이었다고 한다. 또

한 고종이 황후를 홀대한 것은 아버지 대원군이 민씨의 활달한 성품을 경계하며 멀리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황원갑「한국사를 바꾼 여인들」2004)

고종 10년(1873) 그의 나이 22세 때 황후는 고종에게 보령도 20을 넘겼으니 친정(親政)을 건의

하는 한편 대원군의 입궐 전용문까지 폐쇄해 버렸다. 또한 최익현을 시켜 두 번씩이나 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렸다. 대원군은 당시 왕비를 갈아치울 수 있었지만 자신의 시대는 끝났

다고 생각, 그해 운 궁을 떠나 온양에서 휴양하다 양주 별장으로 은퇴했다.

5. 안동 김씨 보다 더한 민씨 세도정치

대원군을 내쫓고 정권을 잡은 뒤 명성황후가 벌인 일은 첫째로 민씨 일족의 요직 등용과 세자

책봉 다음으로 후궁들의 숙청이니 고종은 허수아비요 황후는 여왕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국고를 물 쓰듯 탕진했다. 세자 책봉을 받기 위해 청나라 고관들에게 뇌물을 바쳤고 밤마다 궁중

에서 연회를 베풀어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탐관오리가 횡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죽어가는 것은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이었다. 그것이 고종 19년(1882) 6월 5일에 벌어진 임오군란이

었다.

봉미(俸米)관계로 분노한 군인들은 들고 일어나 무기고를 부수고 민씨 일파의 집도 부수는 한편

일본공사관도 습격했다. 3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인과 백성들은 대궐로 몰려갔다. 이 난중에 황

후는 인정 많은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용케 대궐을 빠져나가 충주를 거쳐 장호원으로 피신하여

숨었다.

천둥소리 29

6. 임오군란 이어 갑신정변

대원군이 난을 수습하기 위해 대궐로 들어가 중전 민씨가 난 중에 죽었으므로 국상을 발표하고

10년 만에 재기의 기회를 잡았지만 그 기간은 한 달 남짓 밖에 지나지 않았다. 황후는 몰래 고종에게

자신의 생존을 알린 뒤 청국에 파병을 청토록 했다. 결국 오장경(吳長慶)이 지휘하는 청국군에 의

해 7월 13일 대원군은 납치되고, 청국으로 끌려가서 3년간 연금 생활을 했다. 8월 1일 서울로 돌

아온 황후는 50일 만에 고종과 재회했으며 이때부터 무자비한 복수극이 뒤따르면서 한층 더 청국

에 의지하니, 젊은 개혁파들이 들고 일어나 바로 김옥균과 박 효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일

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계기로 황후는 더욱 국정에 앞장섰으며 특히 외교일선에 나서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른 고종 31년(1894) 3월, 전라도 정읍에서 전봉준(全琫準)이 이끄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그 여파는 마침내 그해 6월에 시작된 청일전쟁(淸日戰爭)은 일본의 일방적

인 승리로 돌아가 이때부터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며 조선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

냈다.

7. 시해 주도자 이노우에(井上)

민황후는 시해를 주모한 자는 미우라(三浦悟걹)라고 알려져 있지만 미우라를 조선공사로 내보내

게 된 이면에는, 일본 외교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무력으로‘민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서는 문관 출신으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으니 박력 있고 용기 있

는 무관 출신으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으니 박력 있고

용기 있는 무관출신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일본 수상인 이또오(伊藤博

文) 이노우에(井上馨)가 구수

회의 끝에 천황(天皇)

의 재가를 실행한 것이

다.

(윤군본부「한국민조

사」1981) 특히 이노우

에는 내무대신으로부터

3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894년 10월

15일 조선 특명

전권 공사로 부임했

던 일본 제일의 조선통

이었기에 현직 대신으로부터

국장급인 공사직을 자진해서 맡고

나선 저의가 바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부임 후 대신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암탉이 울면 집안

이 망한다.”느니“모든 잘못은 왕비 때문”이라며 고종과 황후를 모욕했다. 따라서 황후는 친로(親걠)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8. 조선 강점 장애자로 일제가 참살

고종 32년(1895) 마침내 운명의 해가 되었다. 7월에‘칼잡이’미우라 고로(三浦悟걹),

(1846~1926)가 공사로 부임했다. 국왕에게 신임장을 제출한 뒤 뜻밖에도 참선승(굱禪僧)인양 일체

바깥출입을 않고 있었다. 그러나 황후 시해 두 달 전인 8월에 고종은“일본인들이 궁궐 내에서 못

된 짓을 하고 있다”며 미국인 타이(DYE)장군과 러시아 귀족인 사바찐(Sabatin)등 외국인 3명을

군내에 거주토록 했다.

훈계의 실행일은 1895년 8월 20일 새벽, 미우라는 검객, 낭인들, 그리고 일본인 장교가 훈련시

킨 훈련대 등 조·일 혼성부대와 대원군을 교여에 태우고 광화문을 거쳐 대궐로 쳐들어갔다.

대궐에서의 참상을 목격한 타이장군의 증언과 사바찐의 수기(手記, 조선일보 1995. 5. 10)를 통

해서 살펴본다. 「폭도들은 새벽 5시 궁궐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 다. 총격으로 궁궐이 혼란에 빠

졌으며 내가 도주한 장소가 왕비의 거처 앞마당이었다.」(장경전, 일명 옥호루)

폭도들은 소리를 지르며 마당을 휘젓고 궁녀 10여 명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나와 왕비 있는 곳을

묻고 모른다면 그 자리에서 죽 다. 이때 한 구석에 숨어있던 몸집 작은 여인이 발견되어 왕비가

아니냐고 다그치자 아니라며 달아나다 낭인들이 그 뒤를 쫓아가 그녀를 넘어뜨리고 움직일 수 없

도록 가슴과 다리를 짓누른 후 칼로 찔러 살해했다. 몇 사람의 시녀가 끌려와서 여기 저기 나뒹굴

어져 있는 시체를 확인한 결과 시녀들의 통곡으로 왕비의 시체가 판명되자 시체를 홑이불로 싸서

숲속으로 가지고 가, 장작 위에 놓고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1895년 9월 26일의 참극이 바로 을

미(乙未)사변이다.

천둥소리 31

9. 명성황후의 죽음과 대한제국의 태동

국왕의 국장은 6개월을 넘기지 않는게 관례임에도 황후의 시해 2년 2개월이 지난 1897년 11월

22일에서야 치러진 것은, 국민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그 추진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것이었다.

1897년 후반, 고종을 황제로 격상시키자는 운동이 급속화 되면서 미루어왔던 장례를 서거 2주기에

이르러서야 왕실에 대한 충성이 정점에 달했다. 마침내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이 반포됐고

고종은 40일 후 장례를 치룬 것이다. 명성황후는 죽음으로써 殺身成仁했으며 이로써 명성황후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

일본 정부는 을미사변의 책임을 미우라에게 지워서 관련자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감금하는

한편 그들은 대원군이 협조를 요청한데도 원인이 있었다며 이노우에 주모를 숨기는데 총력을 기울

여왔으나 미우라 등은 1896년 1월 20일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면소한 것은 속이 빤히 들여

다보이는 연극이었다.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렴치한 사건이다. 전시도

아닌 평화시에 다른 민족이 자신들의 군대의 비호 아래 왕궁에 무리를 지어 쳐들어와서 왕비를 시

해한 만행에 대해 시종일관 정부의 관여를 일본은 부인해 오고 있다.

최문형 교수도“강화도 조약 때부터 조선 문제에 대해 관여해

온 이노우에는 주한공사 임명과 함께 조선에 대한 전결권을

부여받은 일본 정부 당국자 다. 또한 사건 한 달 전에

17일간 미우라와 함께 서울에 머물면서 시해사건을

기획했다”고 밝혔듯이(「명상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2002)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 정

부에 의한 국가적 범죄임을 실증하는데 초점

을 맞추어야하며 명성황후 시해 11주년을

맞이하여 한·일 양국은 지난날의 불행

했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

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3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현재를살고있는우리들은수많은관계로부터자

유롭다하지만, 실상은얽매임안에서로를견제하며

살아가고있다고해도과하다하지않을것같다.

인간은 생명을 부여 받은 후 맑고 깨끗함 안에서

살아갈혜택을지녔다고생각한다.

그렇지만, 인간 스스로가 이를 부정해 버리거나

일상 속에서 소각해 버리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환경보전적 인간존중 의미로 이렇게

이야기를해본다.

이강순(사)환경보전실천연합중앙회 회장

회원광장

천둥소리 33

대학의 환경학과는 학술적으로 기술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쳐 오고 있지만, 어렵고 때로는 따분

해 졸업 후 전공을 살리는 것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교과과정 속에 남겨져

있어야 되고, 일상적 활동을 동반한 환경만이 우리 일반인들 주위를 맴돌고 있다고 볼 때 환경이

라는두 자의울타리속에갇혀있는속칭환경활동가라하는필자는솔직히가식일지라도눈물을

흘려야될것같은심정이다.

학술적 환경은 사회 전반에 녹아내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전반의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고하지만, 각 대학의환경학과전공분야도자리매김을하 다고볼수있고사실이그

러한것이학생들의입학율을보면더욱명백해진다. 하지만이를전공한학생은현재무엇에절

심함을느끼고있는지궁금하지않을까?

학문적 배출로 나온 전공 학생이나 가르친 교수가 사회 전반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수질,

토양, 대기오염등에얼마나고민하고걱정하며현장을스스로뛰어나와활동으로자리매김한환

경단체들에게 손을 내 어 준 적이 얼마나 될까? 정화를 책임지라는 것은 아닐지라도 공동체적

책임을느끼며사회의길잡이는되어주는것이옳지않나생각해본다.

이에대한대답은우리모두가잘알고있는현실속에있지않나싶다.

3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환경활동가집단들의반성을저부터하는것이순서일것이라생각하면서지난2월중순경환경

부주관한국환경단체협의회대표자모임에참석하 는데모든단체대표자분들의열정과풍부하

신환경지식을바탕으로활동하신다는정서는충분히감지했지만, 그당시의느낌은좋은편이못

되었다는것이다.

어딘가모르게자신의아집에포위되어있는활동가들로보 고, 몇분의활동가들은솔직히무

엇을추구하기에이토록자기아집만내뱉는것일까? 하는의문속에그가운데내자신을반성해

보면서 슬프고 매우 답답한 마음 안에 눈물이 고 다는 것을 보게 되어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기억을해보면서이 을보실협의회대표분들께서저에게어떤질타를하실지모르겠으

나필자는그때의심정을표현한것임을이해해주시리라본다.

이자리를빌어질타를감수하면서몇가지더짚어볼까한다.

대한민국은 각종 단체공화국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환경단체만 보더라도 대략 얼마

나 될까? 솔직히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환경부 등록 허가단체를 대략 200여 개 이상이라 보고

광역시·도에등록된단체는환경부숫자보다몇배는더된다면지방자치단체에등록된풀뿌리

단체는 얼마나 되며 등록하지 않고 열심히 활동하는 단체까지 열거한다면 수 천 개는 족히 될 것

으로짐작해본다.

솔직히단체들이너무난립해있다고본다.

그렇다면오늘날환경단체들의실체는어떨까? 고민해보지않을수없다는생각에다음과같은

현실을이해를구하며적어보았다.

- 단체는어떤전문성을가졌을까? 지역민과국민을위해무엇을전달하고자태생되었을까?

- 단체는진실로회원은몇명이나있을까? 회원들은어떤활동을지속적으로하고있을까?

- 단체는때로는보여주기식행사와지방정부및지방자치단체에간섭을일삼고있지는

않는지, 단체의집단적과시적힘으로어떤무리한요구는하고있지않는지?

이런 거북한 내용을 적시하여 무슨 말 하고 있냐는 핀잔들을 듣지는 않을까 하는 반문을 해 보

면서 제 스스로의 활동상을 반성하고 함께 고쳐 나가는 모습을 다 잡아 보는 의미로 이해해주실

것이라본다.

오늘날환경문제는매우복잡하면서세분화되어가고있는것이사실이다. 학문적분야는몇개

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현장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환경활동가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

천둥소리 35

이현실이다.

환경선진국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들도 자국의 이익과 국민의 환경적 복지에 촉각을 세우며

많은 정책과 실천을 하고 있고 선진국의 좋은 자료들로 공부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을

감안할때우리나라의실정은어떤점수를받을까깊은반성을해볼필요가있다고본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다가선 만큼 정부와 지방정부,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에

게만맡길수있는시대는아닌것같다.

우리국민들도스스로환경의식변화가절실히요구되는만큼형식적인변모보다실천적변화를

스스로할자세가필요하다는것이다.

학교에서 환경을 전공으로 사회에 보내기 위한 학문과 연구도 중요하지만 현실 속에 녹아드는

방법도함께고민하면서사회에배출시켰으면한다.

방법으로는 학교 내 수많은 동아리가 있지만, 정녕 환경동아리는 찾아 볼 수 없다는데 우리는

문제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학교 안에서부터 환경 실천을 배우는 자세가 바르게 형성될 때 사회

속에올바른환경인으로자리매김을할수있다고생각하면서학교와지역의환경단체와의유기

적연대를통한진정한환경활동가또는환경인으로거듭나길기대해보는것이다.

스스로풀뿌리환경단체를구성한단체들도저를포함하여자성속에“참환경운동”을위한지역

민과 국민들께 환경의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면서 고통분담적 착 활동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정화활동을통한오염배출현장을시정과고발운동도더없이중요한부분일것이다.

또한편으로는각단체의특성에맞게활동을전개하는것을바라며저희단체처럼꾸준히교육

(시민환경대학)을 통한 환경기초지식과 함께 정화활동을 병행해 줄 때 스스로의 체험이 새롭게

발휘되지않을까조심스럽게대안을제시해보면서눈물로환경을바르게공부하자고더이상호

소하는일없기를간절히바라는마음을전하고자한다.

3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옛 우리 조상의 생활상은 대부분 땅속에 묻힌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엿볼 수있는데 이 유적은 생활유

적과 무덤(墓)유적으로 크게 분류되고 있다. 먼저 대구 지역에서는 금호강과 만나는 신천, 동화천, 불로

천, 팔거천, 달서천과 낙동강과 만나는 진천천, 천내천 등 많은 세천변에 퇴적층을 이룬 비옥한 토양에

농사를짓고살아온생활유적이발견된점으로보아오래전부터물과가까이한조상의삶을엿볼수있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취락형태로서 도시가 형성되어 하천과 강이 오염되고

샘물이 고갈되면서, 병원성 미생물이 오염된 물을 통해 먹는 물로 전달되는 수인성 전염병인 장티푸스,

콜레라로설사, 복통, 구토등이급속히확산되어목숨을잃게되는일이벌어지게되었다.

이에 1906년 11월에처음대구상수도설치문제를논의하기시작하 으며, 1911년대구인구는 28,240

명에불과하 으나이때구체적인설치계획을수립하여 1914년 7월 1일에가창계통의상수도시설과대봉

배수지 공사가 착공되자 계속적인 인구증가로 30,000명을 넘어서게 되었고 시가지 또한 본격적으로 형

성되게 되어 외형상으로는 큰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도 시민들의 급수문제는 여전히

하종성대구광역시 행정동우회 사무처장

근대 대구물산업역사를 되돌아보며2015 대구·경북세계물포럼을계기로물산업허브도시로의도약

회원광장

천둥소리 37

우물물에의존하고있었다.

그로부터4년이지난 1918년

3월 31일 본 공사가 준공되

어, 급수구역은 대구 시가지

일원으로 하 으며, 급수인

구는 30,000명을 대상으로

하루 급수량을 2,800㎥으로

하 다.

그 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

함에 따라 수요도 크게 증가

하 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원지에서는 가끔 원수 부

족현상이 나타나는 등으로

1921년 말경부터는 수차례

단수소동이 빚어졌다. 그리

하여 급수인구33,000명에 1

일 약4,600㎥를 생산할 수

있는급수시설확장공사를 1924년 4월 23일에착공하여그이듬해인 1925년 4월에준공하 고, 그해 12

월 10일에대봉제2호배수지를완공하 다.

그러나이러한확장공사에도불구하고몇년이지나지않아또수원이부족하게되자우선응급조치로

당시물맛이좋기로평판이자자했던대봉동수

도산밑“배나무 샘”부근에 보조수원지 신설공

사를시행하여 1933년 12월에완공하여이보조

수원지에서 하루 평균 300㎥를 생산하여 보충

하 다.

이러한 귀중한 물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우주

공간의수천억개별중에유일하게물이있는곳

은 지구밖에 없다. 그리고 또 세계사를 통해 볼

때도 지역 간 국가 간에도 물로 인한 다툼과 분

쟁이이어져왔음을볼수있다. 우리인체(人體)

도 70%가수분이며그중2%만부족해도통증과

대봉배수지(현. 대구상수도사업본부 / 자료 :’73대구시사(제2권))

1918년에 설치된 대봉배수지 전경으로 앞쪽으로 관리사무실이 보인다. 배수지가 소재하여 이곳을 수도산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은이러한 역사성을 찾아 이곳에 상수도사업본부 건물을 세웠다.

대봉배수지 축조공사 장면(현. 상수도사업본부에 위치함 / 자료 : 정성길)

1911년 인구 3만명에 급수인구 6천명을 기준으로 처음 상수도 설치계획을 수립하여1914년 7월 1일에 착공하여 1918년 3월 31일에 준공하 다. 가창정수장 완속여과지 축조공사와 대봉배수지 축조공사를 완료하여 급수방식은 가창면 오동의 취수정에서 자연유하 방식으로 원수를 공급받아 가창정수장에서 정수하여 대봉배수지로 송수하여 1일2,800㎥를 생산하 다. 그 후 수요량이 증가하여 1924년 4월 23일 ~ 1925년 4월로확장공사를 마쳐 1일 4,600㎥를 생산하 다.

38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갈증을 호소하게 되고, 5%가 모자라면 환각증세가 나타나며, 12%가 빠져나가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지금도 70억명의세계인구중에매년 5억의인구가물부족으로신음하며죽어가고있다. 이러한물에

대한대비가없다면 2025년엔 30억인구가죽음을맞게되며, 2050년에는세계인구의 2/3가고통을직

면하게될것이란전망을내놓고있다.

유엔보고에의하면전세계국가별로물사정에대한구분으로

⑴ 물기근 국가군으로 1인당 사용가능한 수자원량이 매년 1,000㎥ 미만으로 만성적인 물부족 국가로

서 국민보건을 저해하는 수준의 쿠웨이트, 바레인, 싱카포르,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 등 서남아시아 및

북아프리카지역이되며

⑵물부족(스트레스) 국가군으로 1인당매년 1,700㎥ 미만으로써주기적인물압박을경험하는국가로

서인도, 파키스탄, 폴란드, 남아프리카, 덴마크, 한국등이며

⑶ 물취약 국가군으로 1인당 매년 2,500㎥ 미만으로써 간헐적으로 물이 부족한 국가로서 이라크, 이

란, 중국, 수단, 국, 독일이해당되며

⑷ 물안정국가군으로 1인당매년 2,500㎥이상으로써장래물부족이없는국가로노르웨이, 캐나다,

미국,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등으로나누고있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연평균 강수량 1,277㎜로써 세계평균 807㎜의 1.6배이며 수자원 총량이 1,297억

㎥/년이지만, 연강수의 2/3가여름철에집중되는등계절별, 지역별편중이매우심하며, 높은인구 도

로인해 1인당연강수총량은 2,629㎥로세계평균의약1/6에불과하며실질적인사용가능한수자원량을

생각하면문제는더욱심각하다하겠다.

앞서소개한대구시상수도의역사는여명기를보내고혼란기와성장기를거쳐낙동강수원확장공사와

함께 안정기를 맞게 되었다. 근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대구의 물산업은 1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1918년 달성군 가창면 오동에 설치한 최초의 취수장의 취수탑전경 자료, 상수도90년사

1918년 당시 가창정수장 전경(원형의 여과지와 침전지가 보인다)

현. 수성구 파동소재. 자료, 상수도90년사

청도를 지나 부산으로 이어지는 길↓

천둥소리 39

지닌 곳으로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

하여 1918년 하루 2,800㎥의 수돗

물을 생산·공급했던 것이 현재는

하루 1,720,000㎥를 생산할 수 있

는 시설용량을 갖추게 되어 급수보

급률이99.6%에이르게되었다.

이러한 양적인 증가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고도정수처리공정을 도

입하여 안전하고 질 좋은 수돗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급수

구역 곳곳에 가압설비와 배수지를

설치함으로써고지대급수지역에관계없이안정적이고원활한급수가가능하게되었다. 앞으로도대구시

의상수도사업은생산, 공급시설의확충, 유수율향상과배수관망구역화, 수돗물수질의안정성확보, 수

남산동 주교관 경내 묘지 건너 현. 1918상수도본부가 위치하고 있는 수도산(대봉배수지)이 보인다. (자료, 교구사 화보)

현. 가창정수장1918년에 준공된 정수장이 지금까지 잘 보존 관리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 보호됨. 원형여과지엔 용두천(괟頭泉)이라 새긴 씨가 선명하다. 당시 가창에서 상동 중동을 거쳐 흘러내리는 하천을 용두방천이라 불 다.

40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대봉배수지

돗물의신뢰재고를위한행정혁신을통한시민만족도향상, 적정시설용량유지등으로가강맛좋은물, 믿

고마실수있는물의공급을위하여끊임없는노력을해나갈것이다.

이런 역사성에 발맞추어, 2015년 4월 대구에서 개최되는 제7차 세계물포럼 개최도시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갖고, 지구촌의최대과제인물문제를해결해나가는데선도적역할을다하는한편, 2,600억원의

경제적편익과2,500명의고용창출을기대하면서, 이를대구의새로운성장동력인주력산업으로생활용수의

재활용, 지하수개발, 계절적편중된호우에대한물비축방안, 빙하와바닷물의이용등다방면에걸쳐철저한

연구와대책을강구해나감으로써물산업의허브도시로의도약을기필코이룩해나가야할것이다.

현. 대봉배수지 전경

천둥소리 41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보 제32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소식

(사)한국여성유권자대구연맹주최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패트롤맘대구광역시부, (사)대구광역시

여성단체협의회의가 후원하는‘6.4지방선거 공명선거 및 매니페스토 캠페인’이 5월 16일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에서 열렸다. 이 캠페인은 대구시민들로 하여금 선거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이날 100여 명의 회원과 시민이 모여 바람직한 선거문화 정착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 다.

6월 29일에는 (사)일하는여성연합회가개최한‘제7회대구여성문화공연한마당경연대회’에후원하여

건전한여성문화육성, 지역여성의문화적잠재력향상, 여성문화를선도할여성문화예술인재의발굴에

함께하 다. 대상(대구시장상)은 청운신협두손모아풍물단, 최우수상(대구예총상)은 한국춤교육원고전

무용팀, 한국규젤벨리댄스컴퍼니규젤벨리팀이차지하 다.

지난 4월 25일 메세지팩토리(대표 노경민)와 원활한

체험프로그램의 운 , 시민들의 역사의식 고양을 위한 업

무협약식을가졌다. 양기관은「대구독립운동발자취를따라

떠나는 시간여행자」체험프로그램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양해각서를체결하 다.

메세지팩토리는 가치를 지닌 메세지를 공유하려는 사람

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소통할 수 있는 행사와

프로그램들을 기획하여 소통의 장을 생산하는 소셜기획사

로 감동콘서트, 청년봉GO, 100일 후 우체통 등을 기획하

고운 하고있다.

42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6월 8일, 8월 10일 대구지방보훈청과 도심RPG의 후원을 받아 메세지

팩토리와공동으로청소년나라사랑체험프로그램인‘대구독립운동발자취를따라떠나는시간여행자’

를운 했다. 효성여자고등학교학생86개팀(264명), 원화여자고등학교학생 96개팀(288명)이참여하여

지역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역사적 정체성과 지역사회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시

간이되었다.

이 행사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근대역사관, 광문사터, 이상화·서상돈 고택, 진골목, 북후정, 3·1운

동길 등 지역 항일운동과 관련된 장소를 방문해 미션을 수행하고 최종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팀이

우승을차지하는내용으로대학생기획단 30여명의아이디어로만들어진다양한미션을통하여재미와

함께역사적지식을얻을수있게구성된프로그램이다.

8월 20일 오전11시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2014년

(사)국채보상운동기념

사업회 임시이사회를

열어 기 추진 상황과 향

후추진계획을보고하고

안건을 결의하 다.

이·감사 및 신입이사

에게위촉장을전달하는

시간도가졌다.

천둥소리 43

4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사)대경늘푸른자원봉사단, (사)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중구지회, 게이트볼협회, 국회의원조원진,

대구광역시 여성청소년가족과, 대구광역시 보건정책과,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대구사회연

구소, 대구생명의숲, 대구은퇴자협동조합, 대전동산초등학교, 대전한남대학교역사탐험대, 동촌

중학교, 사회적기업활성화 대구네트워크, 삼토회, 연합연구회, 양군읍 서부리, 인권운동연대, 중

구기동대예비군, 중구시니어클럽, 중구장애인주간보호센터, 청년연합 36.5, 한남교육사랑, 한빛지

역아동센터

(사)어린이도서연구회경북지부, 50사단 501여단, 경동초등학교, 경명여자중학교, 경원고등학교,

경일여자중학교, 공무원교육원, 관음초등학교, 관천중학교, 국가인권위원회대구인권사무소, 달서

초등학교, 달서초등학교 4학년, 달성고등학교, 달성군학부모문화유산해설사, 달성중학교, 대구경

북언론클럽대경뿌리학교, 대구공업고등학교, 대구광역시보건정책과, 대구광역시여성청소년가족

과, 대구광역시 온라인셀링협동조합, 대구문화관광해설사회, 대구생명의 숲, 대구선명학교, 대구

시설관리공단, 대구여성가족재단, 대구외국어대학교, 대구은퇴자협동조합, 대진중학교, 동덕초등

학교, 동촌중학교, 만촌초등학교, 매곡초등학교, 매천고등학교, 매호중학교, 메세지팩토리, 북중학

교, 불로중학교, 삼덕초등학교, 삼덕초등학교 4-1, 삼덕초등학교 4-2, 삼성전자, 상원중학교, 성

당중학교, 성서고등학교, 수목원, 신기중학교 1학년, 어린이도서관 햇빛따라, 남공업고등학교,

오성중학교 3학년, 유천포스코반올림문고, 자원봉사능력개발원, 죽전초등학교, 중앙도서관, 중앙

중학교, 질병관리본부, 청림초등학교, 평리초등학교, 한국청소년지원협의회, KDB산업은행

천둥소리 45

50사단 501여단, 가창초등학교, 경덕여자고등학교, 구미고등학교,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남산고등학교, 논공교회, 달성고등학교, 담사신구,대경뿌리학교, 대경학회, 대구공업고등학교, 대구아이쿱소비자생활협동조합, 대구통합건강증진지원사업단, 대구학교도서관사서협의회, 대구학교도서관사서협의회, 대림중학교, 동덕초등학교,동평중학교, 메세지팩토리, 범일중학교, 본리초등학교, 성곡중학교, 성당중학교, 성북초등학교,성서중학교, 수정유치원, 안심중학교, 신중학교, 용산중학교,용전초등학교, 울산 신일중학교,월배중학교, 율하초등학교, 인권운동연대, 인성유치원, 일성중학교, 죽전중학교, 중리중학교,하남초등학교

※ 단체 관람 문의 : 국채보상운동기념관 053)745-6753

㈜햇빛나들이, 강북중학교, 강제연행을생각하는 대구광주실행위원회, 경북대학교, 경북대학교 환경공학과·농업토목공학과, 경운초등학교, 경진초등학교, 경혜여자중학교, 교동중학교, 그룹신도시건축사사무소, 김충선연구회, 남도초등학교, 남산고등학교, 달서공업고등학교, 대곡중학교, 대구경북소비자연맹, 대구경북언론클럽 대경뿌리학교,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대구경북진보연대, 대구경북학회, 대구공업고등학교, 대구광역시건축주택과, 대구광역시 보건정책과, 대구광역시 안전총괄과, 대구광역시 자치행정과, 대구광역시 정책기획관실, 대구광역시문화관광해설사,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대구여성의전화, 대구여자고등학교, 대구중학교, 대구초등학교 5학년, 대전세빛선교학교, 대평중학교, 도원중학교, 동도중학교, 동변초등학교, 동부중학교, 동부초등학교, 동화마을 어린이집, 메세지팩토리,문성초등학교, 반야월초등학교, 복명초등학교, 복현초등학교, 북부초등학교, 삼락회, 상인초등학교, 새벗도서관, 성명여자중학교, 시각장애인협회, 시지중학교, 신명여자중학교, 아이누리유치원, 남공업고등학교, 남중학교, 운암고등학교, 월곡초등학교, 유천초등학교, 인권운동연대, 입석중학교, 제일여자상업고등학교, 죽곡초등학교, 중리초등학교, 통일시민대학연합회, 학남중학교, Indonesia, LG디스플레이

(사)대구사진비엔날레조직위원회, (사)대한어머니회대구연합회, (사)전국주부교실대구시지부, 50사단 501여단, 강동중학교, 경북대예방의학교실,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관음어린이집,구암중학교,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노변중학교, 달서숲해설단, 대건중학교, 대구 중구시니어클럽, 대구경북소비자연맹, 대구경북진보연대, 대구경북학회, 대구공업고등학교, 대구광역시 경제정책과, 대구대학교 부설 유치원, 대구시민센터, 대구시청 도시재생과, 대구시청 보건정책과, 대구시청 자치행정과, 대구 남공업고등학교, 대구YMCA, 대중금속공업고등학교, 메시지팩토리, 성광중학교, 시설관리공단도시공원, 신기중학교, 신당중학교, 월암중학교, 인권운동연대, 통합건강증진사업단, 팔달중학교, 프라임어린이집, 학남고등학교, YCK국토대장정

4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을 한국근대사에 자리매김을 하신 故 박 규 이사님의 추모 좌담회를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소박하게 자리를 마련하 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박 규 이사님의 추모를

위해 당시 근거리에서 함께 하셨던 여러분이 좌담회에 참석해주셔서 더 큰 보람 있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이제 남은 숙제는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본 기념사업화를 짊어지고 가야한

다는 생각을 하게 된 자리 습니다.

편집위원장엄창옥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신채호선생님의 말 처럼 천둥소리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길잡이가 되길 바래봅니다.

그래서 나눔과 배려 그리고 기부 활동 등을 통해 사회 양극화를 줄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위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를......

편집위원우웅택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아름다운 을 통해 아름다운 나눔이 온 누리에 아름답게 퍼지는 것이

인간의 아름다운 책임을 알고 생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나눔과 책임의 꽃임을 자각하고 그

속에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편집위원이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