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영]그녀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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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남자 [이봐, 윌!] 소매를 반쯤 걷어붙인 와이셔츠 차림에 안경을 쓴 사내가 세트장 입구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 었다. 그는 모처럼만에 찾아온 휴식의 단맛을 놓치고 싶지는 않아서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1분도 안 되어 자신의 평화가 깨지게 될 거라는 건 뻔히 아는 사실이다. [마티, 무슨 일이죠?] 짜증기 섞인 목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선 키는 180을 넘어섰다. [쉬는 중이었지, 미안!] 마티는 어느새 그의 앞으로 와 있다. '하여튼 굴러다니는 것 같아도 빠르단 말야.' 그는 자신을 잘 보필해주는 키 작은 매니저에게 새삼 감탄을 느끼면서 싱긋 웃음을 떠올렸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편지 왔어.] [팬 레터? 에이전시에 모아놓으라고 그랬잖아요.] [이건 니 특별한 팬한테서 온 거니까 그렇지.] [내 특별한 팬? 설마..J?] [그래, 그 J한테 온 거야. 그래도 에이전시에 도로 갖다놓으라고 그럴 거야?]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내가 그 편지 얼마나 기다리는지 알면서 그래요.] [훗..금방 웃는 얼굴이 되었네. 촬영도 그렇게 기분좋게 하는 거 알지?] 편지 뜯는데 온 신경이 쏠려서 고개만 끄덕이던 윌은 곧 마티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마티, 나 편지 읽는 거예요!] 그의 나직한 말에 매니저는 안경을 고쳐 쓰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알았어. 자리 피해달라 이거지. 좀 있으면 휴식시간 끝나니까 귀 쫑긋 열어놓고 있어 야 돼.] 연신 시계를 보며 사라진 매니저의 걱정어린 말투는 귓전으로 흘려들은 그는 조심스레 뜯은 봉투를 셔츠 재 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편지지를 펼쳤다. 낯익은 필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의 눈가가 웃음으로 작아졌다. 'Dear my dude.. Hi, Will or Ben! Who am I? Hahaha..It's me, J! How are you have been? I'm good...' [O,k. Cut!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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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영]그녀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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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남자

[이봐, 윌!]소매를 반쯤 걷어붙인 와이셔츠 차림에 안경을 쓴 사내가 세트장 입구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그는 모처럼만에 찾아온 휴식의 단맛을 놓치고 싶지는 않아서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1분도 안 되어 자신의 평화가 깨지게 될 거라는 건 뻔히 아는 사실이다.[마티, 무슨 일이죠?]짜증기 섞인 목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선 키는 180을 넘어섰다.[쉬는 중이었지, 미안!]마티는 어느새 그의 앞으로 와 있다.'하여튼 굴러다니는 것 같아도 빠르단 말야.'그는 자신을 잘 보필해주는 키 작은 매니저에게 새삼 감탄을 느끼면서 싱긋 웃음을 떠올렸다.[무슨 일인데 그래요?][편지 왔어.][팬 레터? 에이전시에 모아놓으라고 그랬잖아요.][이건 니 특별한 팬한테서 온 거니까 그렇지.][내 특별한 팬? 설마..J?][그래, 그 J한테 온 거야. 그래도 에이전시에 도로 갖다놓으라고 그럴 거야?][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내가 그 편지 얼마나 기다리는지 알면서 그래요.][훗..금방 웃는 얼굴이 되었네. 촬영도 그렇게 기분좋게 하는 거 알지?]편지 뜯는데 온 신경이 쏠려서 고개만 끄덕이던 윌은 곧 마티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마티, 나 편지 읽는 거예요!]그의 나직한 말에 매니저는 안경을 고쳐 쓰며 너털웃음을 지었다.[알았어. 알았어. 자리 피해달라 이거지. 좀 있으면 휴식시간 끝나니까 귀 쫑긋 열어놓고 있어야 돼.]연신 시계를 보며 사라진 매니저의 걱정어린 말투는 귓전으로 흘려들은 그는 조심스레 뜯은 봉투를 셔츠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편지지를 펼쳤다.낯익은 필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의 눈가가 웃음으로 작아졌다.'Dear my dude.. Hi, Will or Ben! Who am I? Hahaha..It's me, J! How are you have been? I'm good...'[O,k. Cut!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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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어요.]하루의 일정이 모두 끝난 촬영장엔 작별인사가 끊이질 않았다.그도 감독이자 절친한 벗 중 한 사람인 도너휴와 가벼운 우스개를 나누며 세트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오늘 연기 좋던데..오전에는 감정 안 잡힌다고 그러더니.][..훗..내가 그랬던가?][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10분 쉬고 나더니 완전 달라졌잖아.][그런게 있었지.][어, 진짜 뭔가 있는 눈치군. 무슨 일인데? 나도 알면 안 되는 거야?][나중에 말해줄께. 오늘은 먼저 갑니다.][이봐, 베냐민! 어딜 가? 말을 끝내고 가야 할 것 아니야?][다음 촬영때 보자구. 새벽 6시까지랬지?][야, 베냐민!][그때 보자구.]악다구니를 치듯 고함을 지르는 도너휴를 뒤로 한 채 윌은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멀리서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한 번 크게 웃음을 터뜨린 그는 한 손으로 일별을 던지며 집으로 향했다.가는 도중 가벼운 접촉사고가 일어날 뻔 했지만 그의 좋아진 기분을 망가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J는 잘 있다고 그랬지?감기 걸렸다고 그랬는데 많이 아프지 않을까?몸이 추운데 머리카락 자르면 더 추워지지 않을까?'감기엔 뭐가 좋더라?'샤워를 한 후 자리에 누운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편지지를 다시 집어들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세기도 어렵다.하지만 그는 전혀 질리지 않았다.처음부터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녀의 편지에 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재영은 컴퓨터 전원을 끄고 막 뽑아낸 인쇄용지를 ?어 보았다.드라마 공모전에 낼 원고뭉치는 서른 장을 족히 넘고 있었다.슬며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괜히 종이랑 잉크값만 날리는 건 아닌지 몰라.글 잘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 명함도 못 내밀면 어떡하지?에휴..그래도 할 수 없지, 뭐.이것도 다 경험인데..서두르자. 우체국 닫을 시간도 얼마 안 남았잖아!잠시 후 그녀는 의자위에 대충 걸쳐 둔 가디건을 입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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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한쪽 팔엔 갈색 서류봉투가 소중히 안겨져 있었다.

[어머, 오셨어요?][네. 이것좀..]우체국 창구 직원이 먼저 아는 체를 하자 머쓱해진 재영은 헛웃음을 흘리며 자신이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어떻게 보내 드릴까요?][음, 내일까지 들어가려면 뭘로 해야돼요?][빠른 등기로 해야겠네요, 그럼.][빠른 등기요?][네, 1980원입니다.][잠시만요..] 지갑을 뒤적이던 재영은 이윽고 지폐 두 장을 꺼냈다.[네. 2000원 받았습니다. 20원 거슬러 드리면 되죠?]

그녀는 우체국을 나왔다.볼일을 다 봤음에도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건 무슨 이유인지...아마도 우편물이 잘 갈 수 있을지 조바심을 내는 마음 탓일까?이러나 저러나 한 짐을 덜었다는 생각이 들자 홀가분해졌다.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녀는 자신이 나설 때 우체국 직원이 던졌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편지 안 부치세요? 씨익 웃는 것으로 답을 하던 그녀였지만 사실 요 사이 그에게 편지를 못 부친 것이 못내 미안하기만 했다.많이 기다리고 있을까?아니..내 편지를 그 사람이 읽어볼 새나 있을까?괜히 보내는 건 아닐까?재영은 금방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시작한 편지는 아니었다.그저 좋아하기 때문에... 깊숙이 담고 있기에는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해서 시작한 일이었다.그런 것이기 때문에 어떤 대가 없이도 계속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급한 일도 끝냈으니까 오늘밤엔 편지를 써서 보내 줘야지.. 끊겼던 노래가 다시 새어나왔다. 이번 편지엔 무슨 이야기를 써서 보낼까?동경의 대상을 생각하는 그녀의 눈가에는 애틋한 그리움이 가느다랗게 자리하고 있었다. 윌은 차에 앉아서 마티가 담배와 신문을 갖고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들어간 지 벌써 십분 째다.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리 늦는 걸까?평생 꾸물거림과는 관계도 안 맺고 살 사람인데..아는 사람을 만났나 보군.그는 더 이상 신경 쓰는 걸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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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올 때 되면 나오겠지.길쏨한 손가락이 계기판 아래 버튼 하나를 누르자 곧 음악이 나온다.가사를 전혀 알 수 없는... 그러나 무척 와닿는- 노래였다.끊겨질 듯 강하게 내지르는 보컬이 인상적인 곡들.. 발라드라고 했던가.그랬다. 그건 J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보내주었던 한국노래였다.그녀는 cd를 보내면서 한국에서 알아주는 발라드가수의 음반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라이브도 잘 하고 노래도 잘 하는...그래서 많이 좋아하는 가수라고...그가 Radio Head를 좋아한다면 이 노래들 역시 거부감없이 잘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쪽지를 작고 귀여운 글씨로 써보냈었다.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윌은 곧 귀에 익숙치도 않았던 타국의 음악에 매료되어 버렸다.눈을 지그시 감고 몇 분이나 휘파람을 불러댔을까?누군가가 올라타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음악이 꺼졌다.[눈 좀 떠봐, 윌. 자는 거야?]마티의 목소리가 자못 심각하게 들렸다.[말해요. 그리고 음악 다시 틀어요.][지금 음악 듣고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야.][왜 그러는데..무슨 일 있어요, 마티?][눈 떠서 이것 좀 보라고.]마티가 뭘 던졌는지 윌의 무릎엔 중량감이 느껴졌다.[대체 뭣 때문에...] 자세를 바로 하고 무릎 위의 것을 펼쳐 든 그의 얼굴이 일순 딱딱해졌다.그가 어느 파티에서 퍼니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사진이 실린 타블로이드판 신문의 1면이 버젓이 눈앞에 들어온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들..하여튼 이리 저리 사진도 잘 찍고 다닌다니까.][..어지간히 기사거리도 없었나보네요.]혼자말처럼 중얼거리는 윌의 소리에 마티가 흥분하며 입을 열었다.[벌써 몇 번째야? 녀석들.. 이 주일이 멀다 하고 추측기사 써놓고 엉망이잖아.][재미있나..?][어떡할 거야? 이번에도 그냥 입 다물고 넘어갈 거야?]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윌의 입이 열렸다.[오늘밤에 기자들 불러서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세요. 언제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그것만으로 될까?][,,,][윌?][음악이나 다시 틀어요. 한참 듣고 있었던 중이니까.]윌의 입은 언제 움직였냐는 듯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마티는 가만히 자신의 고용주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플레이 버튼을 다시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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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상을 찌푸렸다.미온적인 대처가 맘에 안 들긴 하지만 시킨 대로 해야지, 별 수 없었다.자신이 윌이었다면 그처럼 신사적으로 이성을 지키고 일을 처리하진 않을 것이다.너무 점잖아. 너무 ...

재영은 모니터 앞에서 꼼짝도 할 줄 몰랐다.화면엔 그녀가 자기 자신보다도 더 아끼는 이의 사진이 프린팅되어 있었다.

Benjamin, Wed? or Not!' The Sun reported, that UK's tabloid paper...

기사를 다 읽은 그녀는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내용은 별 것 아니었다.타블로이드판에 스캔들이 나자 그의 매니저가 기자회견을 열어서 사진과 기사의 내용은 사실무관이라고 반박하는 것이었다.그래, 아니겠지. 아닐 거야...재영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싸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아직은 자유로운 생활을 중시한다는 그가 언제든 결혼하는 건 마음먹기 나름이었다.더군다나 그는 유명한 사람이고 그런 그를 따르고 흠모하는 여자들은 오죽이나 많을까.자신이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그를 좋아하는데..그를 그리워하는 데..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더 심할 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눈물이 날 것 같다고...그 정도로 중증이었던가?한참 후에 그녀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침묵에 잠겨 있었다.오전 중에 보낸 편지에 자신의 사진을 동봉한 것이 과연 잘 한 일이었는지..공연한 짓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내가 미쳤지..어쩌자고 그런 걸 보냈을까. 그 사진보고 웃지나 않으면 다행인데..]자신의 엉뚱함에 히죽 웃던 그녀는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키고 잔을 내려놓았다.웃고 나니 힘이 솟는 듯한 기분이다.오랜만에 벤이 출연하는 영화나 볼까?10분 후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윌은 들어서자마자 자신에게 신문을 던지는 도너휴를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멜로디를 흥얼거리던 참이었다.그러나 그의 친구는 잘 달려나가다가 최대의 장애물을 만나 길길이 날뛰는 황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 [자네, 이거 진짜야?]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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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베냐민 모건!] 윌은 도너휴가 자신의 이름을 한 음절 한 음절 뚝뚝 끊어서 내뱉는 것에 놀라서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이든...] [시사회가 이 주일밖에 안 남았어.] [..내 얘긴가?] [잘 아는구만. ] 도너휴는 윌의 맞은 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자네, 담배 끊었잖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젠장, 자네는 신문도 안 보고 사나?] [누구랑 묶여서 나왔는데?] [..] 한참을 담배연기만 내뿜던 도너휴는 마침내 피고 있던 것을 재떨이에 비벼껐다.윌 역시 그런 친구의 행동을 말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도너휴는 그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자네, 한 6개월 정도만 결혼해 있으면 안 되겠나?]

[모건, 롤린 양과는 언제부터 사랑을 꽃피우게 되셨습니까?] [두 사람이 사랑을 느낀 건 언제부터죠?] [자세하게 말씀 좀 해 주세요. 결혼선물과 신혼여행 예정지는 어디로 잡을 예정입니까?] 기자들은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판매부수 전쟁의 일선에 서 있는 그들로서는 늘 기사거리가 부족했으므로 언제든 일이 터지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고 보는 게 근성이었다.그런 그들에게 잘 생긴 배우가 유명정치가의 사위가 된다는 소식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더군다나 만남과 결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철저히 비밀스럽다면...안 봐도 뻔한 결과였다.윌은 회견장 상석에 앉아서 쉴새없이 질문을 해대는 기자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들에 화가 났다.결코 원하지 않았고 생기리라고 믿지도 않았던 일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는 상황이 그를 허무감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그는 옆에서 줄곧 자신을 조심스레 지켜봤던 마티에게 몸을 기울이고는 나직하게 말했다.[이대로 있다가는 폭발할 것 같아요. 모든 일정은 신문에 발표된 거랑 똑같이 진행될 거라고 말해요. 롤린이 나 때문에 피해받길 원치 않는다는 말로 변명 좀 해보라고요.][윌..][..식이 끝나면 기자회견 다시 열 예정이라고 둘러대요.][알겠네.]윌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있다가는 마티에게 말한 그대로 폭발하고 말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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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마지못해 웃고 있는 그의 가슴속은 얼음 열 동이를 갖다 부어도 식힐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분노로 타고 있었다.[여러분 죄송합니다.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롤린이 기다려서 그만 가봐야겠군요. 나머지 답변은 제 매니저이자 대변인인 마티가 해 줄 겁니다.]그의 갑작스런 퇴장에 카메라들의 플래쉬가 또 한 번 반짝거리기 시작했다.윌은 의례적으로 한 손을 치켜들어 보이며 회견실을 나왔다.호텔 맨 위층에 잡아놓은 방까지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로비에는 하루밤새 나라 안의 최대 이슈가 된 배우의 얼굴을 보기 위해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의 이상하리만치 상기된 표정을 목격하고 난 뒤 슬금슬금 피하는 게 대부분이었다.실제로 그때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면 그 사람은 정말 운이 없는 하루를 시작했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는 자신이 어떻게 방까지 제대로 올 수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났다.그를 지배하는 건 뿜어낼 대상조차 확실치 않은 격렬한 분노였다.독한 브랜디 두 잔을 쉼없이 목으로 넘긴 후 잠이 든 그는 수십 분 후에 마티가 들어와 편지 한 통을 놓고 나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8개월 후,재영은 몇 시간째 흑사당하느라 피곤해져서 아린 눈을 비비며 마우스 옆에 팽개쳐 둔 안경을 썼다.그후로 키보드를 얼마나 많이 두드렸을까.깔깔한 입안을 달래려고 무심코 집어들었던 머그잔엔 식은 커피 한 모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아예 주전자 째 갖다놓고 있어야 되나..?거의 페이지 끝에 다다른 한글편집화면과 빈 머그잔을 번갈아 쳐다보던 재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키보드에 다시 손을 얹었다.커피 생각이 간절하긴 하지만 다섯 줄도 안 남은 원고의 끝을 보는 게 더 우선이다.4..,3..2..1..끝!마침내 원고가 끝났다.이로써 2개월 일정으로 방송되던 드라마도 곧 종영될 것이다.사실 말이 2개월이지 그동안 숱한 밤을 지새가며 고생한 걸 생각하면 다시는 글이라는 걸 쓰고 싶지 않을 정도다.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손끝에서 빠져나간 단어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걸 보면서 도저히 그 매력에 넘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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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고 배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마지막 대본을 전자메일로 보내고 나서야 재영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결과를 보려면 한 주를 기다려야 하지만 이제는 두 발 뻗고 편안히 쉴 수 있을 것이다.김PD도 이 정도면 만족할 거고..방송국엔 나중에 가도 좋겠지?안경을 벗고 기지개를 켜자 기다렸다는 듯 하품이 연달아 나온다.오래간의 긴장이 풀리고 피곤이 몰려온 탓인지 눈꺼풀도 자꾸만 처지려 했다.일을 끝내면 제일 먼저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지금은 잠이 더 중요해.재영은 전원을 끄고 방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침대에 누웠다.눈꺼풀이 두 서너 차례 깜빡거리는 순간에 그녀의 눈길을 차지한 건 어느 영화포스터에선가 환하게 웃고 있는 윌의 모습이었다.

도너휴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한적하기만 한 LA 한인타운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도시 안에서도 늘 활기가 넘치던 곳이었는데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평소에는 빵빵거리며 도로를 지나던 차들마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점심시간이라 다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서 그런 건가?그는 답답한 마음에 시계를 보았지만 시침은 한참때를 훌쩍 넘어서 슬슬 초저녁으로 봐도 좋을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도너휴는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야 직성이 풀렸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궁금증을 그냥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그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제일 가까운 가게에 들어갔다.입구의 카우벨이 울렸는데도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카운터에 앉아서 좀처럼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점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고용주 뒤에서 원을 형성한 채로 움직임이 없었다. 뭐 이래? 도너휴는 매장을 한 바퀴 돌다가 전혀 입에 대지도 않을 초코바 한 세트를 골라서 카운터로 향했다.[흠흠..이거 계산 좀 부탁합니다.]그제서야 원 제일 바깥에 있던 점원 한 명이 그를 돌아본다.[이것 좀 계산해 주시지요.][아, 예..잠시만 기다리십시오.][...][12달러90센트입니다. 포장지가 필요하십니까, 손님?][네, 넣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알겠습니다.] 재빨리 고개를 숙여 봉투에 초콜릿을 담던 점원은 그러나 아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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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네..네..]그가 인사를 받자마자 점원은 부리나케 원위치를 향했다.도너휴는 더 이상 그의 궁금증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실례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게 뭐죠?]조용한 실내에 그의 목소리가 울리자 좀전의 점원이 도너휴를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한국 드라마인데요!][한국..드라마? 방송극 말입니까?]그가 재차 묻는 사이에 극이 끝났는지 사람들 입에선 아쉬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고개를 드는 이들의 눈가는 하나같이 전부 다 젖어 있었다.잠시 후 주인인 듯한 사내의 시선이 머뭇거리며 서 있던 그에게 멈췄다. [더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곧바로 조금씩 벌어져 가던 도너휴의 입에서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터졌다.[저거, 어디서 구할 수 있겠소?]

마티는 다시 현관문을 두드렸다.벌써 열 번째다.제기랄..자신이 불러놓고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건 또 무슨 이유지?그의 눈에 비친 이든 도너휴는 도무지 예의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사람이었다.윌과 한창 호흡을 맞추며 일을 봐 줄때도 자신과 도너휴의 사이는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세트장에서 보면 그저 마지못해 나누는 인사가 그만인 사람이었고 상대가 누가 되었든 예의를 차리는 자신과 달리 그는 친한 사이가 아니면 뚫어져라 쳐다만 보다 헤어질 때에야 작별인사나 던지는 기괴한 면이 있었다.처음에 어리둥절하던 마티도 거듭되는 만남에서 도너휴는 자신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타입이라는 걸 깨달았다.그런데..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 사람 집 앞에 서 있는 이유는...윌이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도너휴는 새벽 두 시에 전화를 해서는 다짜고짜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소리를 했다.[무슨 일이오?][빨리 와 보시오.][도너휴 씨, 지금은 새벽 두 시요. 한 밤중이라고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러는 건지 알아야 가고 말고 할 것 아니오?][잘 하면..][잘 하면..]전화선을 타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도너휴가 말을 잇는다. [잘 하면 베냐민을 다시 살릴 수 있을 것 같소.]잠시 상념에 잠겨있는 새 귀를 찌르는 금속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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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는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털어댔다. 문소리도 집주인을 닮아서 저리도 괴상망칙한가? 문 안쪽에서 도너휴가 넥타이도 미처 풀지 못한 차림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들어 오시오.]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간 마티는 거실의 광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몇 십 개나 되어 보이는 비디오 테입이 바닥에 진을 치고 있었고 수상기엔 아직도 테입이 돌아가는 중이었다.자세히 보니 복사를 하고 있는 중 인 것도 같다.그래도 이렇게 지저분하다니...세상에 이게 집이야?도너휴는 그런 마티를 보면서 소파를 가리켰다. [좀 너저분하긴 하지만 대충 치우고 나면 거실바닥보다는 깨끗할 거요. 적당한 데 밀어놓고 앉든지.. 그렇게 서있기만 하면 천장 무너질 것 같아서..]마티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눈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다. 무엇하나 정리가 끝나지 않은 집.. 그는 도너휴의 성격이 그렇게 별난 것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갑자기 도너휴가 굉장히 안 돼 보이기 시작했다.그 새 도너휴는 머그잔 두 개를 가져와 그 중 하나를 마티에게 내밀었다.그는 마티의 심정을 알았다는 듯 자신의 집안을 둘러보더니 짧고도 긴 침묵을 깼다. [알고 있소. 집이 엉망이라는 것..그래도 커피는 기가 막히게 끓일 줄 아니 다행이오.]마티는 양심상 한 마디의 격려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집이 항상 깨끗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안 그렇소?]도너휴는 수긍한다는 듯이 픽 웃었다. [날 이해해주는군.]이에 마티는 막 생기려던 동정심을 구겨 넣었다. 역시 도너휴는 원래 동정해 줄 가치도 없는 작자였어.그는 머그잔을 손에 쥔 채 도너휴를 바라보았다. [윌을 살릴 수 있다니 무슨 얘기요, 대체?]마티의 질문에 도너휴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것들 다 보이오?][비디오 테입 아니오. 이게 윌을 살릴 수 있다는 거요?]도너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살릴 수 있고 말고. 살리고도 남을 거라고.]마티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런 비디오 테입이 윌을 살린다니..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소리야?마티의 반응을 본 도너휴는 그가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음을 알아챘는지 비디오 테입 하나를 던져 주었다. [보라고! 거기에 뭐가 담아 있나 좀 보라고.]상대방의 격렬한 태도에 놀란 마티는 엉겁결에 yes'만 연발하며 테입을 넣고 재생버튼을 눌렀다.그 후로 한동안 도너휴의 집에선 웅웅하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 외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마티의 시선은 수상기 화면에만 못 박혀 있었고 그의 옆에 있는 도너휴 또한 침 삼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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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쓴 채 같은 것에 열중해 있었다.하루가 꼬박 지나갔을 무렵 마침내 마티의 입에서 한 마디가 나왔다. [우리..윌을 불러냅시다. 이번엔 우리가 그를 살려야 하니까.]

전화벨이 울렸다.그러나 재영은 눈을 뜨기가 괴로웠다. 간만에 만난 친구들과 오래도록 얘기꽃을 피우며 잔을 기울이다 보니 집에 들어와 자리에 든 시각은 새벽 4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그녀에게 잠이란 양보할 수 없는 생존권과도 같았다.그녀가 원고를 밀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도 잠을 제대로 자기 위한 이유에서였고 왠만하면 밤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잠을 손해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그러나 간밤엔 너무 무리를 했다. 그러기에 그녀는 멀쩡하게 걸려오는 전화를 눈 부릅뜨고 받아 줄 수 없었다.하긴 자동응답기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랴..재영은 전화기를 한 번 노려본 후 등을 돌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삐익.. 서 작가 아침부터 어딜 간겁니까? 아님 있으면서도 안 받는 겁니까? 왠만하면 그냥 받으십시오. 굉장히 급한 용건이라고요! 여보세요, 서 작가? 진짜 없나보네요..할 수 없지. 그럼 메시지 남겨야겠네. 미국에서 팩스가 날아왔는데 서 작가 원작을 사겠대. 그 사람이 누구냐면..야, 알바야, 그 팩스 어디에 놨냐? 응, 어디? 아, 여기 있다. 이든 도너휴 감독이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데.. 서 작가 하여튼 메시지 확인하는 대로 연락 좀 달라고.]

재영은 드라마국을 빠져 나와서야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자신의 작품을 미국에서 사 가겠다니... 영화를 만들겠다니...내가 각색까지 한 이야기가 헐리우드에서?게다가 이든 도너휴라면 세계적으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계의 기수였다.물론 헐리우드가 질적으로 세계 제일은 아니지만 물량 및 공세면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지 않은 현실 아닌가.그런 곳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사람이 내 것을 원한다는 건 기쁜 일이리라. 감히 내가..감히 이 내가..그런 큰 일을...그녀는 감정을 잘 살리기 위해서 시나리오를 직접 집필해 주었으면 하는 미국측의 의사에 난색을 표할 수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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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글공부와 병행해서 한 때 치중했던 영문공부 덕에 번역사 자격증까지 소지한 상태였으므로.약삭빠른 국장은 이 기회를 계기로 프로그램 하나 더 팔아보려는 심산으로 그쪽에서 원하는 건 가능한 한 다 들어달라는 식으로 넌지시 얘기를 해왔다.[서 작가, 대단하군. 아직 젊은데 그런 기회를 잡다니 말이야.][하지만 영문 시나리오를 쓴다는 건 좀...][무슨 겸손의 소린가. 듣던 말로 자네, 영문번역 자격증까지 있다면서.. 그 어려운 공부한 걸 써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 아닌가. 이참에 자네 덕분에 어깨에 힘 좀 주고 살아보자구.그 사람들이 비단 자네 작품만 봐서 결정했겠나, 다른 작품도 봐서 우리 게 좋다고 했던 거겠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던가. 왠만하면 그냥 직접 해보게.][혼자 벅차지 않을까 싶어서요.][하하..그건 걱정 말게. 정 뭣하면 현지 가이드 하는 셈치고 성적좋은 유학생 한 명 수배해 줄 테니까 가서 힘들거든 연락만 하라고.][그런 배려까지..][자네만 믿고 있겠네, 서 작가. 드라마 쓰면서 못 쉬었던 거 쉬러 간다고 생각하고 잘 있다 오게나. 한 두어 달이면 괜찮을까?]

재영은 LA로 가는 비행기 좌석에 몸을 묻었다.실로 많은 일이 일어난 이 주일이었다.그녀는 제일 큰 일은 비자와 여권을 만드는 일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국장이 뒤에서 손을 쓴 모양인지 정말 싱겁게도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그녀에게 심각한 일은 정작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불거져 나왔다.그녀는 얼마 전에 미국에서 날아온 팩스용지를 펴 보았다.영화일정을 비교적 세세하게 적어놓은 계획초안서였다.Main credits & Full cast 라고 써진 부분 즈음에 인쇄된 이름 하나가 그토록 가슴을 뛰게 할 줄이야...Casting의 굵은 철자 밑에는 William Benjamin Morgan이라는 이름이 제법 많은 칸을 차지하며 한자 한 자 또렷이 찍혀 있었다.재영의 머리 속은 백지처럼 텅 빈 느낌이었다. 그를 만나면..만날 기회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인사를 할까?그렇게 된다면...그냥 만나서 반갑다고만 할까, 잘 있었느냐고 할까..내 편지를 알고 있냐고 물어볼까?겉봉에 J라고 써보낸 그 무수한 편지들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냐고 물어볼까?재영은 머리를 저었다.그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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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입밖에 내어 말할 용기가 생기기나 할까...그가 난데없이 결혼식을 치른다고 했던 그때가 생각났다.아주 비밀리에 식을 진행했다는 그가 결혼 후 처음으로 출연하는 토크쇼가 있었더랬다.허전하지만 그를 보겠다는 일념하나로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불행히도 그날은 강풍을 동반한 태풍으로 정전이 된 하루였다.그에 대한 소식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들의 결혼이 갑작스러웠던 것처럼 이혼 또한 갑작스러웠고 이후 그는 불쑥 영화계를 떠나 버렸다.그의 잠적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아파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수많은 사이트를 이 잡듯 헤집고 다녔지만 그의 근황에 대한 소식은 올라있지 않았다.그리고 그녀는 그에 대한 동경을 자연스럽게 잊어가기로 했다.그런 그가, 그런 자신이 어쩌면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어느 덧 비행기는 한국 상공을 벗어나고 있었다.

[Excuse me, U are.. Mr. Donahue?] [Yes, yes.. um...U are Mz. Seo?] [yeah. I'm, Seo jai- young!] [jai yong?] [Oh, not jai yong. my name.. jai-young. just call 'J'!] [ho..I see. well, whoops, You must be tired.. follow me.] [Yes, sir.] 재영은 막무가내로 자신의 짐을 뺏어들고 성큼성큼 앞서가는 갈색 눈의 외국인을 쫓았다.도너휴는 사진에서만 봐오던 것과 거의 차이점이 없었다.약간은 비쩍 마른 듯한 체구에 껑충한 키가 그를 다른 사람과 차별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그러나 그를 튀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을 궤뚫어보는 듯한 깊은 눈매였다.재영은 어깨에 맨 배낭을 한 번 추스리고는 뒤질세라 도너휴의 뒤를 따랐다.그가 가져온 차는 모양새없이 튼튼하기만 한 캐딜락이었다.과연 소문답게 멋보다는 실용성을 따지는 사람인 듯 했다.그의 운전솜씨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마치 흔들리는 비행기에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재영은 좌석 위쪽에 위치한 손잡이를 잡고 싶은 심정을 꾹 참았다.그가 물어왔다. [Eh..eh.. do you good at english?] -에..저..영어에 능숙한 편인가요?[no, paricularly.. but I haven't any problem. I can speak English!]-아뇨, 별로요. 그렇지만 별 문제는 없다고 봐요. 영어로 소통할 수 있어요.[That's good.]- 그거 참 다행이군요.이든이라는 사내는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한 번 씨익 웃었다.[잘해 봅시다.][제가 드릴 말씀이네요.][..작품이 아주 좋더군요.][과찬의 말씀이시네요... 캐스팅은 다 된 상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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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연 설득하는 게 조금 문제긴 하지만 크게 어려울 건 없을 겁니다.][..그렇군요.][그렇게 힘들 건 없을 겁니다.][..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이죠?][이런 제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무슨 일..][지금 호텔로 배우와 매니저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호텔..이요?][우리 쪽에서 숙소를 포함한 경비일체를 댄다는 거 알고 있는 줄로 아는데..][네..네]그녀는 알았다는 뜻으로 살짝 고개만 움직이고는 입을 닫았다. 이윽고 차안은 조용해졌다.그녀와 도너휴 중 누구도 애써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드디어 호텔이 전방에 들어올 무렵 도너휴는 핸드폰을 열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나요, 이든. 지금 가고 있으니까..]통화를 하다 말고 송화기를 막은 그는 재영에게 눈을 돌렸다. [1시간 후가 낫겠소, 30분 후가 낫겠소?][1시간..아니 30분 후에 만나도록 하죠.][너무 빠른 건..][빠를수록 좋을 것 같네요.][뜻이 그러하다면..] 도너휴는 막았던 송구에서 손을 떼어냈다. [30분 후가 좋겠소. 그때까지 책임지고 데리고 오는 거요. 윌은..지금 뭐하고 있소?]그는 상대방과 몇 마디 이상을 더 주고받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30분이면 얼마 안 남았소.][..그 30분이 의외로 길수도 있죠.]도너휴는 잠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그가 아는 여자들- 물론 여배우를 포함해서 그가 친하게 지내는 여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을 한 번 만나기 위해서는 가뜩이나 부족한 인내심을 동원해야 할 판국이었다.그런데 지금 자신과 앉아 있는 여자는 30분도 오히려 길다는 듯 얘기하고 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입가 한 쪽이 스윽 올라갔다 내려온다.재영의 시선이 이리저리 맴돌다가 도너휴에게로 향했다. 절대 과묵의 상징처럼 보이던 남자가 굳었던 표정을 지워내고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재미있는 일이 생각났나 보군.

윌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모래빛 금발이 셔츠 깃 위로 간당간당해 보이는가 하면 턱 밑으로 파르란 수염자국이 얼마전에 면도가 끝난 상태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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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이후로 6개월이 지났다. 그 6개월동안 그는 자신이 갇혀있던 이미지속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었다. 더군다나 전혀 다른 익명성에 면역이 되어 간다고 스스로도 기특해하던 차였다. 그는 이제야말로 자유롭고 싶었다.또한 세상도 자신을 잊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새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욕실 문이 빼꼼이 열리더니 마티의 동그란 얼굴이 나타났다. [가자, 30분 다 됐어.][꼭 이래야 되겠어요? 난 새 생활이 아주 마음에 든다구. 다시 카메라 앞에 서서 억지로 웃을 필요도 없고...][자네 심정은 이해해. 하지만 우리로서도 쉽게 결정하고 일을 벌인 건 아니야.][마티..][도너휴가 기다리겠어. 그리고 한국서 온 그 Mz. Seo라는 작가도..]여느때처럼 조용하지만 무게가 실린 마티의 목소리에 윌은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다소 귀찮긴 하지만 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이런 일을 만든 게 아닌가.[알았어요. 내려가죠.]윌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욕실에서 나왔다.거울에 비친 마티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도는 걸 그는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윌!]그가 테이블에 닿기도 전에 도너휴는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활짝 벌렸다.[이든..]두 남자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포옹을 했다. 와락 껴안았다가 다시 몸을 떼서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친구의 얼굴을 확인하는 감독의 눈에선 말로 다 표현 못한 반가움이 배어 나왔다.[흠..흠, 자, 회포는 나중에 풀고 우선 진정 좀 합시다.]마티의 말에 윌과 도너휴는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재영은 가만히 앉아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는..그는..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아니 더 멋지게 변했다고 해야 옳을까.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그녀는 도너휴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시켜 주려 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J! J!..well., Mz. Seo!]재영은 습관적으로 고개만 끄덕이다가 도너휴의 성마른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네..네?][인사 좀 시켜 주려고..][죄송합니다. 다른 생각 좀 하느라고.. ][이쪽은 마티 프랜서요. 배우의 매니저 겸 대변인이지.][안녕하세요. Seo, Jai- young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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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그리고 이쪽은 알고 있을 테지만...윌리엄 베냐민 모건이오.][안녕하시오.][안녕..하세요..]큰손이 눈앞에 쑥 디밀어져 오자 재영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그녀가 인사를 건네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멍하니 그의 손을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Mz. Seo, 어디 아픈 데라도?]마티라는 사내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건넸지만 그녀는 그 어떤 말로도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아주 가득히 목이 메어 한 마디라도 했다간 그대로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도너휴는 이미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얘기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그녀의 무반응에 손을 거두고 도너휴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윌은 자신까지 가만있으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아서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하도 오랜만이라 내 손이 무색해질 때가 있던 적도 있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했군요.]그제서야 재영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깊게 그윽한 네이비 블루 눈동자는 한 층 더 진해진 듯 했고 나직하게 깔리던 저음은 어딘가 모르게 연륜을 느끼게 해 주었다. 베냐민..당신.. 예전보다 더 절 가슴뛰게 하는군요. 그녀는 심호흡을 크게 세 번 하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제발 목소리가 제대로 나와주기를...[초면에 실례했습니다. 시차 때문에 좀 예민해졌나 보네요. 당신이 이번에 주연을 맡을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윌리엄 베냐민 모건씨?]다행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결 가라앉아 있었지만 걱정하던 것처럼 욱죄어 있지는 않았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었다. 그처럼 빠른 시간에 자신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은.이 여자는 그가 보아왔던 어떤 여자들보다도 더 냉정함을 지닌 것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J라는 호칭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윌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직 마음의 결정이 다 내려진 건 아닙니다.]그의 대답에 이번에는 도너휴가 입을 열었다.[무슨 소리야, 자네. 이건 자네를 위해서 만들어진 얘기라고.][완전히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건 바로 이런 뜻이었나 보군요.][이봐, 윌. 기회가 아주 좋다고. 자신이 원해서 몰아넣어진 것도 아닌 일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네. 자네도 이젠 지겹지 않나?][...마음먹기 나름이더군.][시놉시스는 읽어 보셨나요?][자세히 보지는 못했소. 워낙 갑자기 불려진 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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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은 열정이 없으면 안 돼요. 감정이 없으면 살지도 못한다고요. 제목도 모르고 있겠군요?][...][제목을 벌써 정해놨습니까?]계속되는 재영의 다그침에 놀라버린 도너휴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눈은 윌만을 향해 있었다.[..제목이 뭐죠?][기본 스토리라인조차 모르는 주연감을 띄워주기 위해 미국까지 온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목을 알고 싶으면 내용부터 살펴보세요.][이봐요, 난..][도너휴 감독님, 당신의 작품을 좋아해요. 과거에 모건씨와 콤비를 이뤄 만든 영화들도 훌륭했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오랜만에 일한다고 해도 작품의 의도를 모르는 배우를 쓴다는 건 꺼림칙하군요. 선택은 감독이 하는 거랬죠?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일리있는 말이군요.][벤..아니 모건씨, 충분히 이해가 되었을 때 얘기를 나누고 싶군요. 제가 지나친 건 아니겠죠?][인정하오.][도너휴 감독님, 오늘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도 될 것 같은데 어떠세요?][그래도 될 것 같군요... 아직은 메인조차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으니.][그럼 남아서들 회포를 풀도록 하시죠? 전 구상할 게 있어서 먼저 일어나 봐야 될 것 같습니다.[벌써? 식사도 안 하고 괜찮겠습니까?][사실 좀 피곤해서요...내일 뵙겠습니다.]재영은 인사를 마치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의 시선이 등뒤로 따갑게 느껴질 건 각오해야겠지만 더 이상 그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도너휴는 그녀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자네랑 J, 전에 만난 적이 있나?]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만난 적은 없어. 하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이군. J라고 했나?][그래, 원래 이름은 그보다 길지만 그냥 J라고 불러달라더군.][J라면 자네의 팬 중에도 있지 않았나?]마티가 그에게 물었지만 윌은 대답하지 않았다.석연치 않은 의문이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걸 봐야겠어...]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던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그걸 보다니 무슨 소린가?][마티, 시놉시스랑 플롯 카피 본 갖다놨다고 그랬죠?]여전히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마티와 묻는 듯 쳐다보는 도너휴를 뒤로 하고 윌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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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 본다는 거야?]마티는 윌의 심중을 알지 못한 채 투덜거렸지만 도너휴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살아난 걸 축하하네, 베냐민!]그의 말에 마티는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의 주변엔 왜 이렇게 이상한 소리만 하고 다니는 인간들만 있는 것일까.이든 도너휴야 원래 그렇다 치지만 윌은 왜 그러고 가는 거지. 또 그 작가라는 동양여자는 할말만 하고 가버리질 않나.그로선 오늘밤같이 사람들의 행동이 난해한 밤은 처음이었다.

윌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티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패스포드를 집어들고 그것을 펼쳤다.몇 장의 지폐가 담겨 있는지는 알 필요도 없다. 그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작은 주머니들을 몇 개 지나 그의 손가락이 꺼내 든 것은 올망졸망하게 테두리가 둘러진 흑백 사진이었다. 사진 속엔 바다가 있었고 가로등이 있었고..그 가로등에 기대 선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뭘 보고 그렇게 웃고 있었던 걸까. 활짝 핀 웃음으로 반달형상이 된 눈매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를 웃게 해주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J의 얼굴이 있었다....그녀의 얼굴이 그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는 무너질 듯 침대에 걸터앉아서 행여 닳을까봐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진 속의 얼굴을 매만졌다.어렴풋이 그때 생각이 났다.기자회견이 있었던 이후 엉망으로 취해 집에 돌아간 날이 있었다.불을 켜고 비틀비틀거리며 잘 준비를 하던 그의 눈에 흰 편지봉투가 들어왔다.주인이 언제 들어올 지 모르는 빈집에서 그가 봐주기만을 기다렸던 편지가.술이 깬 다음날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편지는 그가 호텔에 있었을 때 이미 전해진 것이었으며 마티가 가져다 놓았던 것을 윌이 모르고 가져가지 않자 호텔에서 직접 우송을 해 준 것이었다. 그는 불이 붙은 담배를 입에 물고 봉투를 뜯었다.편지지를 가득 메운 글씨들이 그를 피식 웃게 만들었다. 그녀는 편지 끝에 부끄럽지만 자신의 사진을 보낸다고 썼다. 아주 웃긴 모습이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바다가 들어있는 유일한 사진이라고. 그 날의 자신처럼 그도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녀의 우려 또는 바램대로 그는 사진을 보며 실컷 웃었다. 웃음 끝에 눈물이 조금씩 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윌은 사진을 편지함에 같이 모아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사진을 따로 챙겨 두었고 다른 모든 것들은 상자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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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5일 후, 그의 결혼식이 있었다.

윌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과 테이블에 있었던 동양 여자가 사진 속의 얼굴과 일치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흔히 떠도는 말로 서양인의 눈에 비치는 동양인들은 전부들 비슷비슷해서 몇 번을 만나도 구분할 수 없고 오래동안 친숙해지는 기간을 통해서만이 겨우 알 수 있다고들 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어쩌다 정말로 우연히 만나지게 되더라도 자신만은 J를 다른 동양인들과는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단지 사진에서만 봤다고 그녀를 몰라보지는 않을 거라고-그만큼 자주 그녀의 사진을 보아 왔기에-. 그리고 오늘 자신은 그녀를 만났다. 이젠 어디로 나가야 하지. 현실의 J는 편지를 통해 그토록 친근한 필체로 자신을 달래주던 친구가 아니었다. 그녀는 서리발이 날리도록 냉랭하게 굴었고 심지어는 자신과 있는 자리마저 피해 버리지 않았던가. 하긴 변했을 수도 있겠지. 실제로도 좋아하는 스타가 결혼을 하게 되면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연모의 정을 미련없이 끊어버리는 팬들이 많은 추세였다. J도 내게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 그래서 내게 차갑게 대하는 걸까?윌은 머리를 저었다. J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겐 분명히 남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걱정해 주던 따스함을 지녔던 그녀였는데....나직히 한숨을 쉬던 그의 시선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탁자 위에 멎었다.두 묶음의 흰 종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시놉이군.

재영은 몸을 뒤척였다.이번엔 베개가 편치 않다.벌써 몇 번째 이러고 있는 건 지 알 수 없었다.자리에 누운지도 2시간 가량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도무지 잠이 올 기색도 오지 않는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때에 따라서는 더 심한 말도 했으리라는 걸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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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녀가 보았던 벤의 눈은 깊이는 더해졌지만 그전에 그를 감싸고 있던 열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누가 그에게서 그런 열정을 뺏어 갔을까. 아내와 헤어진 것이 그렇게 아픈 상처로 남아서..그래서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무신경해 보이는 걸까.머리가 아파왔다.너무 많은 것을 바래도 안 되는 일이겠지.그를 동경만 하고 있을 때에 비한다면 지금의 감정은 사치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야 했다.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좋은 시나리오를 쓰는 것뿐이다.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자신이 할 일을 정하고 나니 그제서야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어렴풋이 잠이 들 찰나에 그녀를 깨운 것은 누군가 벨을 누르는 소리였다.그녀는 습관대로 소리를 무시하며 잠에 빠져들려 했다.그러나 벨을 누르는 상대방도 그녀 못지 않게 집요한 사람이었다.그는 그녀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을 사람처럼 계속적으로 벨을 누름으로써 그녀의 귀를 자극했다.[누구야, 이 시간에?]반쯤 체념한 상태로 투덜거리며 눈을 뜬 재영은 낯선 풍경에 멈칫하다가 이내 자신이 미국으로 왔으며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나저나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온 거지?메이저급 호텔이 괴한이 들 정도로 경비가 허술하지는 않을 텐데...호수를 잘못 알고 온 건가?[누구세요?]얼결에 한국말을 내뱉은 재영은 이내 말을 정정하고는 상대방이 누군가를 물었다.[나요, 베냐민 모건!][벤이라고요?] 당황한 나머지 그녀의 입에서는 윌의 애칭이 흘러 나왔다.문밖에 있던 윌은 그녀의 반응에 다시 한 번 강한 확신을 가졌다.J는 그를 벤이라 불렀던 단 한 사람이었다!한참을 머뭇거리던 끝에 재영은 문틈 사이로 빼꼼이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예요?][시놉 다 읽었소. 플롯도 다 봤고.. 작품 잘 이해하려고 노력했소.][그래요?][다리가 아프군. 무례한 건 알지만 잠시 들어가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이미 새벽이니 너무 늦었다는 것도 이상하게 들릴 테고.. 참 일찍 찾아오셨군요.]다소 잠긴 그녀의 목소리에는 비꼬는 감정이 가득했지만 윌은 그저 싱긋 웃는 게 전부이다.[방해했다는 것 충분히 알겠소. 그 점은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그러고 화를 내고 가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잖소. 물론 원인도 내가 제공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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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커피 얻어 마실 생각이 아니라면 잠깐동안은 괜찮을 것 같네요.][작품 좋더군요.][고마워요. 하지만 그 말은 아침에 해도..][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소.][..][뭐가 궁금한 거냐고 묻지도 않소?][작품 제목이 궁금한가 보군요.]윌은 놀랐다는 듯 눈썹을 치떴다. [놀랍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소?][작가생활 하기 전부터 다른 사람 표정 보면서 무슨 생각할까 연구하는 걸 즐겼죠. 그러다 보니 어쩌다 들어맞는 지레짐작이 늘었을 뿐이예요.][..][She's Only mine으로 정했어요.][She's only mine?][한국제목은 ‘안개같은 사랑(Misty Love)’ 이었지만 좀 고쳤어요. 드라마와 영화는 많이 틀리니까요.][그랬군..][제목 알았으니 더 이상 궁금한 거 없죠?]윌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그녀를 쳐다봤다.위아래 모두 자신의 치수보다 훨씬 큰 듯한 잠옷 속에 파묻힌 그녀는 어른 옷을 몰래 걸쳐입은 소녀 같았다.[왜 당신이 J라는 걸 말해주지 않았지?][ ..!][난 당신이 보고 싶었어, J. 당신은 날 만난 게 반갑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난 당신 만나서 기뻐.][어..어떻게?][사진이 많은 도움이 되었지.][사진이?][내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조차도 시치미 뗄 작정이었소?]한참을 멍해있던 그녀는 읊조리듯 조용히 대답했다.[난..당신이 내 편지를 읽어 보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어요.][아니, 틀렸소. 내가 얼마나 당신의 편지를 기다렸는지는 하늘만이 알 거요. 나 자신도 그 깊이를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니까.]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거짓된 것이 자리잡지 않았던 것처럼 진실해 뵈는 얼굴이었다. 이 말을 조금은 믿어도 좋을까.이 사람이 내 편지를 때마다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정말 믿어도 좋을까.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고마워요. 내 편지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줘서.]그의 표정이 별안간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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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백을 듣고 난 감상이 고작 이것뿐이오?][고작 이것 뿐이라 미안해요. 하지만 이것도 조금 분에 넘치는 칭찬일지도 몰라요. 억지로 잠깨는 건 제가 제일 치를 떠는 일이예요. 당신은 몰랐으니까 이번만 예외로 봐드리죠. 그럼 이제 용건 끝났으면 가보셔야죠?]언제 멍해있었냐는 듯 똑 부러지는 그녀의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선 윌의 입가엔 조그마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래도 당신은 가짜가 아니었군, J][가짜라니 무슨...?] 미처 짐작도 못한 사이에 그녀의 입술은 키스를 해오는 윌의 입술공격에 말할 자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촉촉한 남자의 입술이 자신의 것을 공략해 오는 동안 재영은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녀야만 했다. 그녀의 두 팔이 허공을 휘젓다가 그의 등으로 정착하기까지 퍼부어지는 키스는 그나마 남아있던 재영의 이성을 앗아가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그녀의 뇌관은 팥죽처럼 흐물거리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윌은 입술을 떼내며 아쉬운 듯 긴 집게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윤곽선을 따라가며 그려댔다. 처음과는 달리 충분히 물기에 젖어 있는 것이 윤기가 흘렀다. [내가 얘기했던가? 당신 만나서 반갑다고..] [이..이..] [잘 자요, 작가선생. 당신은 더 자야 할지도 모르지만 난 이미 깨 있는 것처럼 상쾌하군. 아침에 봅시다.] 윌은 벙 떠져 있는 재영을 남겨두고 방을 나왔다.그녀의 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기에 윌은 그의 인사대로 그녀가 자신이 나온 후 바로 잠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키스가 수면제로 둔갑할 수 있다는 상황엔 기분이 상했지만.그러나 10분 후 새벽에 온 손님 때문에 복도를 오가던 포터는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괴성을 들었다. [벤, 이 나쁜 놈, 어쩌자고 그런 거야? 어쩌자고 그런 거냐고?]

스웨터를 벗다 말고 전화기를 주시하던 윌은 곧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마티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이든은 가능하겠지? 몇 초의 여유가 있은 뒤 바로 응답이 들려왔다. [누구요?] [이든, 날세!] [베냐민?] [J작품, 내가 하겠네.] [베냐민? 자네 이제 확실히 돌아온겐가?] [아침에 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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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돌아올 생각을 한 거로군.] [이든..] 선 너머로 흥분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전화는 끊겨 있었다. 윌이 친구의 다혈질에 실소를 금치 못할 동안 그 친구는 다른 방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이봐요, 마티. 정신 좀 차려 보라구. 베냐민이 기지개를 켰다니까.]

윌은 면도를 하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주시했다.무표정한 안면이 약간 풀어진 걸 제외하면 별다른 점은 없었다.그러나 요 근래 항상 지친 듯한 자신의 모습에 알게 모르게 싫증을 느껴가던 그로선 신선한 감각이 아닐 수 없다.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조금씩 미소를 던졌다.처음엔 일그러진 듯 보였지만 차츰 얼굴근육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안면은 이내 활짝 웃음으로 변해 있었다. 다시 시작하는 거야, 윌 베냐민 모건. 그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면도크림을 깨끗이 닦은 후 애프터 셰이빙 로션을 발랐다. 어느 새 튀어 있었는지 그의 입안에 씁쓰레한 화장품 냄새가 맴돌았다. 문득 J와의 키스가 생각났다. 방을 나오기 전 보았던 그녀의 떨떠름했던 얼굴도.. 엉겁결에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품 좀 그만 하시오, 마티. 계속 그러고 있다간 밥 나올 때는 졸고 있겠군.]마티는 자신을 꾸짖는 듯한 도너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박을 시작했다. [곤히 자고 있는 사람 전화로 깨워서 잠 설치게 한 사람은 당신 아니었소? 그런 얘기는 우리가 다 모인 아침식탁에서도 할 수 있는 얘기잖소. 더구나 그렇게 전화해 놓고 딱 한 마디밖에 얘기하지 않고 끊으면 당황하리란 생각은 안 해 봤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연예인 매니저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오. 그만한 눈치밥은 있어야 할 것 아뇨.] [그거야 그렇지만...] [뭐가 이렇게 시끄럽죠?] [베냐민 자네 왔군.] [마티 도너휴한테 얘기는 들었죠?] [말도 마..윌. 그것 때문에 이 모양이니까.] [눈 때꾼한 것 보니까 잠 설쳤나 본데?] [영화 하는 거 좋지만 아침에 다 같이 있을 때 알리지 그랬어.] 마티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을 하자 윌은 무슨 일 때문에 시끄러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네, 한밤중에 도깨비같이 전화하는 버릇은 아직도 남아있군, 그래.] [말도 마. 여기로 자네 끌어들일 때도 그 버릇에 당했으니까.] [도대체 그게 왜 잘못됐다는 건지 알 수가 없군,] 도너휴는 집중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못내 불만스러웠는지 자신 앞에 놓인 커피잔만 만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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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상대역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시나리오 나가는 대로 설정잡아서 맞춰야겠지.] [너무 늦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Mz. Seo가 어떤 방향으로 끌고 나갈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여주인공 뽑는 건 신중해야 돼요.] 어느 새 왔는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는 재영에게 세 남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언제 왔소?] [보시다시피 방금요.] [뭐 들겠소?] 윌이 먼저 그녀에게 식사 의향을 묻자 도너휴는 예의 눈썹을 치켜세우는 것으로 놀라움을 감추었다 [아침엔 커피만 있으면 돼요.] 윌이 웨이터를 불러 커피를 주문하는 동안 재영은 도너휴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 언제 크랭크 인 할 계획인가요?] [시나리오 정해지는 대로 바로요.] [그렇군요. 그럼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죠?] [재촉은 안 하겠소. 난 빨리 내려고 설익은 밥에는 일절 관심도 없는 사람이오.] [그건 알고 있어요. 저도 날림은 싫어해요.] [얼마나 빨리 끝낼 수 있겠소?] [한 달에서 한 달 보름정도면 수정까지 다 될 것 같군요.] [한 달에서 한달 반? 그렇게 빨리?] 도너휴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소만은.]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으니까 감독님은 메인 여배우한테 신경 많이 쓰셔야 될 거예요. 후보로 정해놓은 사람이 있나요?][그게 문제요.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과는 이미지가 맞지 않더군.][이미지가 안 맞는다고요?][그렇다고 1인극으로 할 셈은 아니잖은가.][그걸 말이라고 하시오?]재영은 날라져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구수한 향이 입안 가득 맴돌면서 몸 전체로 온기가 퍼졌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인데요, 오늘 오후부터 오디션 열어보는 건 어때요?] [오디션을?] [대본도 없는 상태인데..] [드라마 대본분으로 대신하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그걸 대상으로 리메이크 하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오전중에 각 에이전시로 공문을 띄워야겠군.] 마티가 얼른 거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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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과 이든 도너휴의 영화라면 많은 괌심이 쏠리겠지?] [관심이라...] [아무튼 좋은 아이디어에 감사하오. 글만 잘쓰는 줄 알았더니 생각해내는 것도 여간하지 않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나 한테?] [네. 제 숙소에 대해서요..] 재영은 아침시간 내내 생각했던 것을 입밖에 내기로 결심했다. [왜, 여기가 불편합니까?] [아뇨, 불편한 건 없어요. 단지 조금 갑갑하다 뿐이죠.] [갑갑하다고요?] [어디 노을이 멋진 곳에 잠깐동안 빌릴 수 있는 집은 없을까요?] 순간 커피를 젓던 윌의 손이 멈췄다. 담담하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져 들려온다. [제가 좀 까다롭게 굴죠? 죄송해요. 하지만 여긴 왠지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아요. 이대로 가다간 감도 제대로 살릴 수 없을 것 같고- 맡은 건 물론 해 내겠지만- 딱딱한 글이 나오게 될지도 모르겠어서요.] [약간 층이 높고 창문만 큰 집이라도 괜찮겠소?] 도너휴가 조심스레 묻자 재영은 슬쩍 웃음을 내비쳤다. [근사한 노을만 볼 수 있다면 나머지는 따지지도 않을 거예요.] [그런 집이라면 매물로 나와 있는 게 몇 채 있을 법한데.] 마티가 안경을 벗더니 있지도 않은 얼룩을 닦는 척하며 참견을 했다. [마티가 어디 아는 중개인이라도 있을 게요. 삼일 내로 알아봐주겠소.] [그렇게 빨리요?] [적당한 집 골라서 대리인하고 연락만 취하면 해결될 테니까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군요. 오디션 대본은 점심시간 전까지 넘겨드릴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안으로만 해두면 돼요. 공문을 오늘 돌린다 쳐도 참석할 여배우들 명단 뽑아서 프린트 부수도 정해야 되고 그 사람들이 대본 읽어 볼 시간이라도 줘야 하니까.] [빨라도 내일 오후부터에야 가능하겠군요.] 도너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마티에게 말을 걸었다. [에이전시들에 보낼 공문은 생각해 놨소? 아는 중개인은 있겠지?] [피를 말리려고 드는군. 어차피 내 능력 안의 일이니까 하기야 하겠지만 숨 좀 돌리면서 물어볼 수는 없소?] [내 성격이오.] 한 마디의 군더더기도 없이 딱 잘라 말하는 도너휴를 보며 마티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생각을 한 재영은 그를 향해 사죄의 뜻으로 겸연쩍은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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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지어 보였다. [괜히 저 때문에 일이 많아지셨네요.] [아닙니다, J. 아니 Mz. Seo. 어차피 첨 있는 일도 아닌데요, 이든 도너휴 감독과 일하게 되면 쉴 틈이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지금은 한가한 축에 속하죠. 최대한도로 신경써서 좋은 집 빌려 놓을 테니까 대본에만 신경쓰세요.][감사합니다.]그때였다. 아무 말도 없이 커피만 훌쩍이고 있던 윌이 느릿느릿 입을 연 것은. [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J, 노을이 보이는 그 집에 바다까지 보인다면 안 될 이유는 없겠죠?] [바다..요?] [그래요, 바다. 덤으로 바다가 보인다고 해서 싫다거나 기분 나쁘거나 할 이유는 없겠느냐고..] [왜 그런 말을..] [그 조건에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말한 것에 아주 적당한 곳을 알고 있거든. 어때 관심있소?] 재영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자 윌은 다시 재촉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가겠소, 안 가겠소?] [베냐민, 자네 무슨..] [이든, 자리 좀 비켜 주겠나? 마티도요.] [윌? 자리 비키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곧 식사가 나올 텐데..] [룸서비스로 돌려놓죠. 이든 방에 2인분 배달되도록 하죠.] [하지만 윌..] [그만 갑시다. 마티. 오디션 일정 상의해 보자고요.] 눈치가 빠른 도너휴는 윌이 재영과 단둘이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 와요. 마티.] [고맙네.] 도너휴는 윌이 덧붙이는 감사의 소리를 듣고는 쓴 미소를 지었다. 마티는 여전히 옆에서 석연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신통한 대꾸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잘 잤소?] [무슨 이야기죠? 난데없이..] [난 잘 잤냐고 물었소.] 이 사람이 정말..속으로 발끈하는 그녀였지만 계속 물고 늘어지는 건 자신도 맘에 들지 않았다. 나라도 끝내야지... [잘 잤냐고 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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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시피.] [유감스럽지만 잘 못 잤어요. 당신..그쪽..은요?] [..시오.] [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벤이라고 부르라고.] [하지만..] [하지만이란 없소. 난 그쪽보다는 벤이라는 호칭이 더 좋을 뿐이오.] [좋아요. 벤이라고 불러 줄게요. 벤, 당신은 잘 잤어요?] [우리가 헤어질 때 난 분명히 잠에서 다 깼다고 했을 텐데.. 못 들었소? 다시 생각나게 해줄까?] 재영의 태도가 금새 굳어지더니 이내 얼굴색이 변해버렸다. [그럴 필요까지는..] [안 됐소. 난 우리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숙면을 취하길 바랬는데.] 윌은 느물느물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잠에 들 수가 없었군.] 사람 놀려먹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새벽의 일은 그냥 넘어가는..] [난 그렇게 하기 싫어.] [이봐요, 윌..아니 벤. ] [당신도 잊지 않기를 바라오. 앞으로도 계속.] [무슨 의미가 있었나요? ] [의미?] [합당한 이유를 대면 잊지 않도록 노력해 보겠어요. 하지만..] [당신 처음 만나면 따뜻하게 맞아주고 싶었지.] [따뜻하게 맞아주는 방법이 그거 밖에 없었어요?] [아니, 이것도 있소.] 재영은 윌이 하는 모양을 보며 멍하니 있다가 다시 한 번 불의의 기습을 당했다. 그녀는 얼결에 눈을 감았지만 곧 후회하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고 움직이는 동안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불길들이 더 큰 열기를 뿜어내려 아우성을 쳐댔기 때문이다. 살며시 눈을 뜨고 주저하던 그녀의 손이 자신의 얼굴을 잡고 있는 손 근처에 닿았을 때에야 재영은 윌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번엔 무슨 방법이었죠?] 그는 양 뺨에 손을 대고 조그만 목소리로 질문을 해오는 그녀를 보며 예의 환한 웃음을 보였다. [이번엔 방법이 아니라 당신하고 앞으로 일하게 되어 기쁘다는 의미요.] [?] [훗..놀란 모양이 막 잠에서 깬 코알라 같다는 얘기는 못 들었소? 당신은 모든 게 조금씩 남하고 다르군.] [어디 가요?] [난 올라가서 이든이랑 더 얘기를 해봐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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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집은?] [염려 붙들어 매시오.] 윌은 재영에게 한쪽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끝내고는 입구를 향했다. 결국 집 얘기는 자세히 알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호텔 레스토랑 안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 아까 벤하고 내가 키스할 때도 보고 있었겠지? 그런데 어째서 그때는 어느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로튼? 저요, 윌. 손님 한 명이 가 있게 될 것 같아요. 글세, 한 두 달 정도는 머물게 될 것 같은데.. 지장 없나 해서요.] 사이를 두었다 대답을 듣는 그의 입가가 올라갔다. [그때 가서 구경하라고요. ...물론 매일은 아니지만 저도 같이 있을 겁니다. 그래요, 부탁해요. 로튼.]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이어 쩌렁쩌렁한 전화벨 소리가 호텔방에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전화할 줄 알았네. ..식사 끝내거든 마티더러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 주겠나? 아니, 그럴 것 없이 마티 좀 바꿔주게. 마티? 선셋비치에 다녀올까 하는데..내가 없어도 잘 해 줄 수 있죠?..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요. 아 그리고 J의 집일은 더 이상 신경쓰지 말아요. 내가 해결했으니까. 내일 모레 오후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거요. 그럼 끊읍시다.]마티가 전화를 끊었지만 식사를 하고 있던 도너휴는 어떤 관심도 표하지 않고 접시에만 시선을 박고 있었다.[빨리 와서 마저 식사나 하시오. 아무리 호텔이지만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언제 내려앉을 지도 모르는 일이오.][알다가도 모르겠군. 9년이나 같이 일해왔는데.. 코드 읽기가 이렇게 힘든 건 이번이 처음이야.]뇌까리는 듯 말하는 마티의 소리에 그제서야 도너휴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인간이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때마다 들통나면 재미도 없잖소. 난 항상 판에 박힌 듯한 성실성이 그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그 단점을 깨달은 것 같군. 그가 이제야말로 인간처럼 된 것 같소.][모르는 소리만 해대는 데 인간이 된 것 같다고? 난 전혀 이해를 할 수가 없소.][유감이군. 난 이해가 될 것도 같소. 삶은 이래서 재미있는 것이거든.][이 판국에 음식맛이 느껴지오?]도너휴가 접시에 남은 달걀반숙을 집으려는 것을 보고 마티는 물었다. [어떻게 아침부터 달걀반숙을 먹을 수 있지?] [이거? 마티, 당신이 몰라서 그러는데 아침에 이것처럼 좋은 식단도 없을 거요. 자, 당신도 빨리 와서 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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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요. 더 있으면 음식냄새가 배서 호텔 측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거요.] [난 윌한테 가봐야겠소. 아무래도 이상해.] [그만두시오, 마티. 그에게도 지키고 싶은 게 있는 거야. 정 가겠다면 막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난 친구가 좀더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소.] 도너휴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자 마티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군. 당신 말처럼 식사나 마저 끝내야겠소.]

윌의 지프는 금문교를 지나고 있었다. 운전을 하면서 곁눈으로 조수석에 앉은 재영을 넘겨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생각도 없는 듯 무심한 얼굴로 스쳐 지나는 밖의 것들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일까? 윌은 숨막힐 듯한 이 침묵이 두려워졌다. 운전할 때 말을 하는 걸 가급적 삼가는 그였지만 그녀에게만은 입을 다물고있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유모를 초조함이 그의 길솜한 손가락으로 하여금 계기판의 재생버튼을 누르게 하는 순간이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외우다시피 한 곡이었다. 여전히 가사를 알 수도 없는 노래이긴 했지만 팽팽한 침묵속에 던져져 있기보다는 차라리 이 편이 더 나을 성 싶다. 재영의 고개가 그를 향해 천천히 옮겨졌다. 윌은 무언가를 묻는 듯한 그녀의 시선을 막바로 보았다. [기억하오?]귀 안을 적셔오는 익숙한 멜로디가 고조될수록 재영은 자신 안의 감정이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가지고 있었구나.. 가지고 있었어... [아주 좋은 노래들이더군.] 윌은 그후로도 몇 마디를 더 내뱉었지만 재영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을 계속 걸어보려던 그는 음악에 빠진 듯한 재영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그녀처럼 음악에 묻혀있기로 했다. 공감대로 이어지는 음악을 같이 듣고 있다 생각하니 아까와는 달리 마음이 편해져왔다. 두 어 차례가 더 반복재생되고 나서야 운행을 멈춘 그의 차가 선 곳은 몇 채의 방갈로가 늘어서 있는 해변가였다. [내려요.] [여기가 어디예요?] 질문에도 아랑곳않고 시계를 들여다보던 윌은 잠자코 그녀의 손을 잡더니 모래사장으로 이끌었다. 몇 분을 걸었을까... 해안선의 중간쯤 되는 부분에 다다랐을 때 그는 손을 놓았다. [당신이 원하는 걸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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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말을 잃었다. 그가 억센 손길로 자신을 끌고 왔던 건 더 이상 따질 게 못 되었다. 해지는 바다를 보느라 넋을 잃고 있는 그녀의 뒤에 선 윌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이 하늘과 바다를 나눠주고 싶었소.] [..] [억지로 끌고 왔다는 얘기를 들어도 할말은 없지만 ..] [잠시만 조용히 계셔 주시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둘의 대화 같지 않은 대화는 끝이 났다. 재영은 해가 수평선 너머 바다 저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래사장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던 사방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들어갑시다. 바람이 차요.] 거듭되는 채근에 재영이 그와 걸음을 맞추면서 차로 돌아왔다. [고마워요.][천만에. 나도 아주 좋아하는 곳이니까. 그런데 감상이 그것뿐이오? 작가라는 사람이 생각나는 미사여구도 없는 모양이군.] [그런 게 있잖아요..이해할는지 모르지만..입밖에 내면 느꼈던 것들이 몽땅 사라질 것 같아요.] [특이하군. 난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름다운 건 그냥 아름다운 것일 뿐이오.][당신한테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중얼거리듯 내뱉는 그녀의 한마디가 씁쓸하게 들렸던 건 그의 착각이었을까.[우리 어디로 가는 거죠?]그녀의 조바심 내는 듯한 말투에 윌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내가 납치라도 할까 겁나서 그런건 아니겠지? 걱정 말아요. 그런 건 꿈도 안 꾸니까. 차가 다시 멈추면 알게 될 거요.]해변을 떠난 지 채 10분도 안 되어 그들은 완만히 경사진 언덕 위에 자리잡은 저택 앞에 도착했다. [짐은 다 트렁크에 실었댔지? 뭐하오, 내리지 않고?] [어딘데요?] 그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는 듯 싱긋 웃고는 막 꺼낸 짐을 들고 바삐 걸음을 옮기며 집쪽을 향해 소리쳤다. [로튼, 우리 왔어요. 얼른 나와 보라구요.]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이가 재영의 눈에 들어왔다. [다녀오셨군요, 윌리엄 도련님!] [그 새 별일 없었죠, 로튼. 참 인사해요. 이쪽은 이번에 묶게 될 손님이예요.] [이 아가씨가 손님이라고요?] [내 집에 온 걸 축하하오, 아가씨.] 윌의 갑작스런 말에 거무잡잡해서 변화라곤 안 보일 것 같은 얼굴에 놀라움 반 호기심 반의 표정이 번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듬성듬성 나기 시작한 흰머리와 턱 밑으로 자라기 시작한 수염을 쓰다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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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멋적은 듯 활짝 웃어 보이는 눈은 그가 얼마나 호인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귀한 손님한테 초면에 실례했군요. 지미 로튼입니다.] [안녕하세요. 첨 뵙겠습니다. 로튼씨.] [그냥 로튼이라고 하세요. 그게 저한테도 훨씬 편하고 익숙하답니다.] [그래도...] [후훗..로튼이 수줍어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군.] [도련님도 참..] [J, 로튼이 원하는 대로 불러드려요. 안 그러면 당신이나 로튼이나 아주 불편하게 지낼 테니까.] [그래도 될까요?] [되고 말고요. 그건 그렇고 어서들 들어오세요. 피곤도 하고 시장들 하실텐데...] [괜찮아요. 그렇게 서둘지 않아도...] [먼데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두 어 시간 전부터 불 지펴 놨으니까 안은 제법 따뜻할 겁니다.] 윌이 한사코 마다하는데도 짐을 받아든 로튼은 앞장을 섰다. 멀거니 섰던 윌과 재영도 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짐을 풀고 나와보니 난로가엔 윌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다가 그녀를 보자 새로 자리를 만들어 준다.주방에선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섞여 들려왔다. 재영이 그쪽으로 귀를 기울인 것을 알아챈 윌이 빙긋 웃는다. [로튼이 가끔가다 식사준비를 할 땐 꼭 저런 소리가 나지.][친절한 분이더군요.][그래요, 내겐 아주 소중한 분이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윌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영은 상념에 잠긴 그를 방해하지 않고 현관 앞 포치로 나왔다. 옅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나온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다. 고즈넉한 기분.. 도심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집이라는 게 다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호텔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길어야 한달 반이다. 그 동안을 못 참겠는가. 더구나 벤은 영화 일로 바빠서 이곳에 없을 테니까 자신은 그동안 시나리오 완성해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아주 간단하잖아. 이성으로는 그렇게 판단이 잘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켠에서 피어오르는 서늘한 불꽃을 그녀 자신조차 꺼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젠장..복잡하기도 하군. 저녁을 먹으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서야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음이 연거푸 났다. 심정은 복잡한데도 배꼽시계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그녀의 입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났다. 가서 먹자, 재영아. 그래야 힘도 날 것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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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기 전 그녀가 다짐한 것은 어떻게 되든 상황을 즐기자는 것이었다. [와..냄새가 근사한데요.] 식탁에는 두 명의 남자가 얌전히 앉아서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 후 윌은 호텔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세 명 있는 중에서 고작 한 명이 없어졌을 뿐인데도 집안은 아주 적막스러웠다. 재영은 마음이 잡히지 않아서 집안 곳곳을 거닐었다. 일을 빨리 시작해야 했지만 지금 같아서는 단 한 줄도 진척될 것 같지 않았다. [벌써 보고 싶은 거군요.] 언제 나타났는지 로튼이 그녀에게 머그잔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그가 없어서 많이 쓸쓸할 거요.] [무슨 말씀이세요?] 동그래진 눈을 하고 그녀가 묻자 로튼은 속일 생각 말라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가 이 집에 여자를 데려온 건 아가씨가 처음이오. 마음이 여려서 상처받은 일도 많고... 하지만 아가씨 보고는 자주 웃음을 보이길래 한시름 놓게 됐소.] [로튼, 난..] [아가씨가 그에게 잘해 줬으면 좋겠소. 그에겐 그럴만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으니까.] [...] [내 정신 좀 보라지. 장작도 사다 날라야 하고 식료품도 점검해봐야 하는데 늘상 잊어버린다니까. 까딱했으면 아가씨가 굶을 뻔했군요.]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허허.. 이 아가씨 잘 모르는군. 나중에 윌 도련님의 얼굴을 어찌 보라고 이러시오? 지금 읍내에 나갔다 올 건데 부탁할 것 있으면 말해요. 내 사 가지고 오리다.] 로튼의 배려에 재영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됐어요, 로튼. 지금은 필요한 게 없고요. 나중에 필요한 것 있음 당장 말씀 드릴게요. 그럼 잘 다녀오세요.] 그나마 말벗이 되어주던 로튼까지 나가자 윌의 집은 괴괴하게만 느껴졌다. 문득 그가 떠나기 전 잠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제가 있으면 로튼이 불편하지 않을까요?' '내가 잊어먹고 말 안 할 뻔했군. 로튼의 집은 따로 있소. 그는 단지 필요할 때만 와서 관리를 해 주고 있을 뿐이지. 당신도 보았다시피 로튼은 험한 일을 하기에 나이가 좀 들었지. 따라서 내가 있을 때를 제외하곤 그도 이 곳에 잘 오지는 않소. 그러니 여기 있는 동안은 당신 집처럼 편히 지내기를 바래요. 그의 말대로라면 집에서 있던 것처럼 편하게 자기 생활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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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입에서 짧은 휘파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벤이 부러워지는군.물론 그는 이런 한적함보다는 시끌벅적한 도시에 있어야 더 잘 어울릴 테지만... 그는 뭘하고 있을까. 오디션을 치르기 위해 대여된 호텔의 세미나실 앞 복도엔 각 에이전시에서 보낸 여배우들과 매니저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사이로 바깥동정을 살펴보려던 마티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렇게 가다간 한도 끝도 없겠어. 호응이 좋은 건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이 정도까지는 예상못했다고.] [그만 와서 앉아요, 마티.] [크게 한 방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마티가 제자리로 돌아오며 중얼거리자 윌과 도너휴의 시선이 그에게로 갔다. [훗..첫날이예요, 마티. 어느 오디션 장이나 첫날은 이렇다고요. 알고 있으면서 그래요..] [자네가 아무리 재를 뿌려도 내 기분이 가라앉을 것 같나? 난 지금 아주 기분이 최고라고, 스타씨. ] 마티의 기분은 붕붕 나는 듯 했다. 그는 자신의 고용주의 컴백이 성공적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쉽게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이런 기분은 윌을 만나서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막 계약을 했을 때 외엔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딱딱한 사람이 흥분하면 저렇게 되는군, 그래.] 마티의 흥분에 생소한 도너휴는 들릴 듯 말 듯 지껄였다. 그 말을 들은 윌이 슬쩍 미소를 지었지만 마티는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무 소리 않고 의자에 와서 앉았다. [자, 테스팅 들어가야죠? 1번은 누구죠?] 2시간 후 그들은 어지간히 지쳐 있었다. 많이 오긴 했지만 그들이 바라는 정도의 여배우는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았다. [몇 명이나 남아있죠, 마티?][오늘 차례는 가만히 보자... 음, 딱 2명이 남아있군.][그래픽 에이전시 소속이랬소?][그렇소만.]마티의 수긍에 도너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빌어먹을 놈의 회사군.] [...괜찮을 거네, 이든.] [좋아, 베냐민. 마저 들어오라고 하겠네. 마티!?] 아무런 진전없이 하루 일정을 마치려는 중이었다. 갑자기 복도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더니 큰 소리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피곤해진 윌이 자신의 손으로 눈자위를 막 비빌 때 즈음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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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놀라고 있는 세 남자의 앞에 당당히 섰다. 그녀는 마티와 도너휴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더니 마지막 윌의 얼굴에 가서는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윌 역시 자신이 왜 한 여자의 시선을 받아야하는가를 알 수 없어했다. 과거에 내 팬이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저러는 건가.. 보다 못한 도너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봐요, 아가씨. 여기에 무언시위라도 하러 온 게요? 어디 소속이오? 오늘은 다 끝났는데 매니저가 말 안 해 줬소?] [오..알아요. 내 차례는 한참 뒤에 있어요. 사실 난 얼마전에야 오디션에 참가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거였거든요.] [그런데 왜 들어왔지?] [그저 인사나 하려고요.] 여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다시 윌과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실례지만 어디서 봤던가요?] [아..그렇군요. 당신은 나를 모르겠군요. 하긴 결혼식에도 안 갔었으니...] [결.혼.식?] [이혼은 했지만 어쨌든 부부였었으니까..] [!] [만나서 반가워요. 형부.] [내가..아가씨의 형부라고?] [그래요. 전 제이스예요. 지니언니와는 배다른 자매 사이고요.] 실내에는 잠시 묘한 정적이 흘렀다. 윌은 자신이 떨치려 했던 악몽이 현실세계에서 숨을 쉬며 살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그러나.. 냉정해야 한다. 흥분하면 할수록 그들에게 발목을 잡힌다는 건 익히 경험한 사실이니까. 찰나적으로 눈을 감았다 뜬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많이 닮아있지 않아서 몰랐소. 어쨌든 이렇게라도 만나서 반갑소.] 그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마티 역시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많이 놀라긴 했지만 오래된 직업의식에서 나오는 초연함으로 표정관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말이 나와서 묻겠는데..롤린.. 지니는 잘 지내고 있소?] [언제쯤 언니 안부를 물을까 궁금했어요. 안 그래도 언니 요즘 이혼한 거 많이 후회하고 있던데..] [유감이군.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오.] [아버지도 요즘 궁금해하는 눈치던데..] [오늘 일정은 다 끝냈다고 했죠, 마티?] [그래..끝났지.] [그럴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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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부, 어디 가시게요? 여기에 계속 있는 것 아니었어요?] [윌, 자네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바람이 쐬고 싶어요. 바람이...] 윌은 아무런 대꾸없이 세미나실을 나가버렸다. 마티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물잔을 바라보며 들고있던 만년필을 무의식적으로 쓰다듬고만 있었다. [너무 차가워. 하지만 지니가 왜 매달리려 하는지 알 것 같아..] 제이스라 불리는 여성이 한 마디 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무언가 충격받은 듯 입을 다물고 있던 도너휴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미안하네, 베냐민. 정말 미안해. 다 나의 이기심때문이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하네, 친구.]

살다보면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날이 있었다.윌에게는 그런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안주도 없이 그 독한 술을 몇 잔이나 들이켰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를 찾으러 왔던 마티가 그만 마시라는 말을 수 차례 했음에도 그만둘 수 없었다. 마실수록 정신은 멀쩡해지는 듯 했고 어디에도 그의 심경을 알아줄 사람은 없는 듯 했다.계산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 순간 중요한 건 술값계산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몇 초라도 자유롭게 숨쉬고 모든 걸 털어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비척대는 걸음으로 호텔을 나선 그는 택시가 잡힐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었다.십 여분만에 잡힌 택시에 오른 그는 무너질 듯 주저앉았다.[어디로 갈깝쇼, 손님?]피로에 젖은 운전수의 얼굴이 그를 돌아다보았다.[해 뜨는 곳 아시오? 해가 뜨는 해변 말이오.][해 뜨는 해변이라고요?] 눈썹을 한번 꿈틀거리던 운전수는 취기 섞인 그의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곧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와 재영 앞에 똑바로 서자 그녀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숨 쉬는 소리 하나, 눈 깜박이는 순간 하나까지 다 잡힐 듯이 가까운 자리에 있어도 그는 계속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어떤 손짓도, 몸짓도 보이지 않는다.이대로 있으면 숨도 못 쉬고 죽을 것만 같다. 왜..왜 그렇게 보죠? 그녀가 헐떡이듯 묻자 그는 빙긋이 웃다가 자신의 한 손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이마에서부터 입가까지 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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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덧그리기만 한다. 왜 그러는 건데요? 거듭해서 묻는 그녀에게 그는 자신의 집게손가락을 그녀의 아랫입술에 갖다대었다. 깃털이 스치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 상태에서 그는 재영의 귓가에 대고 가만가만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사랑하고 싶어..하고 싶어...싶어..사랑해, 사랑해..

달칵...어디선가 희미한 마찰음이 들려왔다.눈을 떠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재영은 그럴 수가 없었다.아주 조그만 빛이라도 보게 되면 지금 있는 달콤한 곳에서 잔인하게 내침을 당할 것 같았기에 그녀는 도저히 잠을 깰 수 없었다.그대로 다시 깊숙한 잠에 빠져든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 그녀를 흔들며 일어나라 종용하고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라고. 평소의 그녀라면 당연히 무시할 만한 내용의 다그침이었다.그러나 이 목소리는..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이의 것이었다.벤.. 내가 사랑하는 벤...사랑한다고..사랑한다고?..그래 사랑한다고...마침내 그녀의 눈이 열렸다.그리고.. 나직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그녀를 깨어나게 한다.[아침을 보러 왔는데..같이 가지 않겠소?]

그들은 여명의 바닷가를 거닐었다.아직 빛이 쏟아지지 않는 해변은 그들 외엔 다른 사람의 그림자라곤 얼씬하지 않았고 미미한 달빛에 누운 바다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듯 서툰 물결 하나 보내지 않고 있었다.그가 걸음을 멈췄다. [춥지 않소, J?]새벽추위를 싫어하는 재영은 벤에게 그 사실을 알릴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대책 없이 끌고 나온 건 여전히 괘씸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토를 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또한 이대로 넘어가 주길 원하는 듯 했다. 카디건을 스미고 들어오는 한기가 이빨을 악물게 했지만 재영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팔짱을 꼈다. [참을 만 해요.]그런 그녀의 떨림을 알아챈 것일까. 잠시 재영을 쳐다보던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씌워주었다. [뭐예요? 당신이 더 추울텐데요..]재영이 뜨악한 눈으로 바라보자 윌은 단지 웃을 뿐이었다. [괜찮소. 난 지난 6개월동안 이 런 기후에 많이 익숙해졌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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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우리 그만하고 앉읍시다.]그가 먼저 털썩 주저앉자 눈치를 보던 재영이 따라서 앉았다.텅 빈 해변에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앉아있는 두 사람의 형체가 생겨났다.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공기에 섞여 술냄새가 약하게 나는 것 같기도 했다.손가락 끝으로 모래를 지분거리던 재영의 눈길이 그를 향하는가 싶더니 이내 손끝으로 가버린다. [왜 왔는지 물어봐도 돼요?]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세. 여기 왜 왔는지 모르겠어. 그냥.. 당신과 일출을 같이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둘러대지 말고요..][진짜라니까.][기분은 괜찮지만 그래도 거짓말하지 말아요.][안 믿는군.][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요.][어리석지 않다고? 그래..그럴 수도 있겠군. 나는 어리석지만 당신은 어리석지 않아.]길게 늘어지는 그의 어조는 자못 씁쓸하게 느껴졌다. [무슨..일 있었군요..]그는 다시 어깨를 추썩거렸다. [아무 일도..아무 일도 없었소. 그저 오랜만에 일하려고 하니 힘이 들었는지도 모르지.]그들 사이에 더 이상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재영은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작 하루를 못 본 새 그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고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뭐예요, 이게.. 내가 고작 이런 꼴 보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요?나 당신.. 다시 빛나는 것 보고 싶었는데..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게 또 있었나요? 그녀는 그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의 두 어깨에 세상의 무게가 다 실려있는 듯해서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벤.. 당신.. 나라도 괜찮다면...내게 기대요.][J..][내가 당신 짐 모두 받아들일 수 없지만..아주 조금이라도 괜찮다면 내가 받아갈께요.]그의 두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가늘게 뿜어내던 입김도 몽땅 얼어버린 것 같다. [벤..][내가 보아왔던 여자들은 눈이 크고 입도 크고 모든 게 다 큼직하게 자리잡혀 있어. 당신은 눈도 많이 크지 않고 입도 안 커. 그런데도 난 당신 보면 괜히 신나. 하늘 나는 것처럼 붕 뜬 기분이고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선물을 본 애들처럼 들뜨기도 해.][벤..][처음부터였어. 그래.. J, 당신, 내가 편지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 당신 마음에 들었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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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봐도 좋았지만 사진보고 나서 더 좋아졌어. 그리고 이제는 이 말 해주고 싶어. 어디 갔다 이제 왔냐고..왜 이제서야 왔냐고 말이야.]그에게 달리 무슨 말을 하랴.. 그녀는 그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게 진심인 양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와서 미안해요. 늦게 와서.. 벤?][쉿..]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시리도록 투명하게 변해갔다. 이런 눈을 할 수도 있는 거구나.그의 눈 속에 자신이 점점 빠져드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게 두려워서 그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그리고.. 그의 입술은 서서히 그녀의 것을 스치기 시작했다.조심스레 아주 살짝. 감질나게.. 그렇게...그의 입술은 너무나 따뜻했고 부드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의 입술에 퍼부어지던 온기는 어느 순간엔지 모르게 눈두덩으로 옮겨갔다. 깃털같은 가벼움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그 감촉은 곧 목덜미께를 선회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재영의 머리카락 속 곳곳에 단단히 엉켜 갈 즈음 그녀의 두 손은 두툼한 스웨터로 감싸인 남자의 넓은 등에 고정되어 있었다.휘파람 같이 긴 한숨이 흘러나오자 그녀의 목울대가 잠시 움직였다.윌은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고 머뭇거리듯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눈을 떠 봐요, J..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겠소?] 재영은 그의 눈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그것은 그녀 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처럼 그녀를 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살짝 감겼다 떠졌다. 어떤 것이든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벤의 얼굴이 들어왔고 이전보다는 밝아진 하늘이 느껴졌다. 주어 버릴까.. 이 사람.. 편할 수 있게 주어 버릴까. 이 사람 위로해 줄 수 있다면..그래, 이 순간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한 번만이라도 맘껏 사랑해 보자.. 한 번만이라도... 그녀가 언제 수긍한다는 뜻을 내비쳤을까. 그들을 둘러싼 문명의 산질들이 하나 둘 씩 그들의 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옷을 벗겨주는 그의 손길이 조금씩 떨렸기 때문에 재영은 초조한 중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웃고 있군.] 윌은 재영을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 들였다. 그의 손바닥으로 만져지는 피부는 매끄러웠고 가슴에 맞대지는 뭉클함은 그의 말문을 닫아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그러나 그는 무언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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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아주 기분 좋아.. 따뜻하고.. 조그맣고.. 진작부터 내 안에 들어올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야 했어..]묘하게 어눌한 말투였지만 재영은 예전부터 익숙했던 사람처럼 모든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서로를 갈구하는 그들의 몸짓은 안타까울 이만치 급박했다. 난생 처음 겪는 일에 이성을 잃어버린 그녀의 다리는 금새 꺾여질 듯 흐느적거렸지만 재영은 자신의 무너짐으로 인해 그와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그녀의 심경을 알아차린 것일까. 윌은 재영의 어깨를 잡은 채로 무릎을 꿇고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우리 서로 편하게 있읍시다.] 그들의 몸이 모래 위에 겹쳐진 채로 몇 번 굴렀다. 그리고 정신이 아뜩해지는 순간이 왔다.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을 쓰던 윌의 격한 동작도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고 그를 더 깊숙이 안기 위해서 남자의 둔부를 감았던 그녀의 다리에서도 점차적으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숨막히듯 아름다웠던 정사의 끝이 났다. 재영은 자신의 뽀얀 가슴사이에 묻혀있는 그의 모래빛 금발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흡사 영원과도 같은 순간이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스물 여덟 해를 살아온 자신에게 오늘처럼 특별한 경험을 겪는 날이 또 올 수 있을까..느릿느릿한 그의 손길이 그녀의 몸을 적셔갔다. 재영은 자신이 그의 애무 때문에 젖어가는 지 시나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파도 때문에 젖어드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어느 순간 그의 고개가 잠깐 들렸다 내려간다. [당신 아프게 해서 미안해.][..][나.. 나쁜 놈이지? 당신의 순결을 잃게 했으니..]윌은 자신의 심장이 잠시 뛰기를 멈춘 것 같다고 느꼈다. 그녀와의 정사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좋은 것이었다. 그녀가 첫 경험이었기에 아프게 했던 건 유감스러웠지만..그러나 그 문제로 날 원망한다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멈췄다고 생각된 순간 그는 그녀의 나직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원망할 수 있겠어요. 그건 잃은 게 아니라 내가 준 거예요.]

윌은 자신의 주위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이상하다.. 내 안에 들어온 이가 있었는데.. 왜 이렇게 춥게 느껴지는 걸까.J는 어디로 간거지?그는 잠결에 옆자리로 손을 뻗쳤다. 잠시라도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늘 그래왔음에도 불구하고 왠일인지 혼자 눈뜨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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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손에 만져지는 건 없었다. 없다고...?번쩍 떠진 그의 눈에 사람의 머리도 닿지 않았던 듯 평평한 베개가 놓인 옆자리가 들어왔다. 결국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얘기였다. 혹시라도 뒤늦은 후회를 하는 거라면...윌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이른 아침 바닷가에 누워 있을 때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건 잃은 게 아니라 내가 준 거예요 .그럼 대체 뭘하고 있는 걸까.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 단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옷장에 걸려있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꺼내 입고 서둘러 자신의 방에서 나왔다.[J, 어디 있소? 방에 있는 거요?]2층을 돌아다니던 윌은 그녀의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방에도 없었다.활짝 젖혀진 커튼이 창문 양옆에 정돈되어 있었고 그 틈을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한가득 내리비치고 있어서 방안은 마치 빛으로 둘러싸인 작은 성 같았다.그러나 그또한 윌의 눈길을 잡아두기엔 역부족이었다.몇 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그는 포치 한 구석 테이블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커피가 한 가득 담겨 있는 커다란 머그잔 주위로 보기에도 꽤 육중해 보이는 포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서려던 윌은 그녀의 어깨가 잔뜩 굳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일에 몰두해 있었더라도 그가 오는 기척을 들었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무심하게 있는 걸까. 돌연 그의 마음속으로 알 수 없는 차가움이 스멀스멀 기어들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기 위해 허공에 떠있던 손이 스르르 내려갔다. 돌아가서 냉수샤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나 자신이나 아직까지 얘기할 준비가 안 돼 있는 모양이다. 그가 발걸음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갈 무렵 재영은 참고 있던 숨을 뱉어냈다. 자판을 오가던 그녀의 손이 그대로 벗어나 머그잔을 향했다. 한 모금을 들이키자 입 안 가득 구수한 향내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차분한 손놀림으로 살펴지는 커피잔의 표면엔 길게 늘어선 가로수를 거니는 그림자 두 개가 그려져 있었다. 커피를 담을 뿐인데 멋지기도 하군. 잔에서 손을 걷어냄과 동시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를 어떻게 봐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마디쯤은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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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 쉬운 말조차 어려워서 못 들은 척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새삼 충격적인 일로 다가왔다. 그럼 어떠리라고 생각한 거니..더 이상 맘에 두는 건 부질없는 짓이야.어느 새 안전모드로 변해버린 화면은 버튼 하나를 누르자 쓰고 있던 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알 수 없는 상실감이 그녀를 움찔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풀어낼만한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언제나 그렇듯 글을 쓰는 것만이 그녀가 처한 현실에서 유일한 도피처가 되는 것 외엔.그녀의 타이핑 소리는 멈출 기색도 보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윌은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벌써 여러 시간 째였다.그는 그녀의 얼굴 한 번 자세히 보지 못했다.냉장고에 들어있던 재료로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고 처음 불렀을 때 그녀가 한 말은 먹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이후 두 번째로 물었을 때는 먹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내내 모니터에만 시선을 박고 있었다.제기랄.. 제기랄...그 노트북이란 것 대신에 자신의 얼굴을 보고있게 하고 싶었다.근원도 불분명한 소유욕이 잘못된 생각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등돌린 모습만을 보기 위해 한밤중에 술 마시고 미친 사람처럼 달려온 건 아니었다.R..R..R..R...[여보세요?][윌? 거기 있었군. 거기로 갔었어. 혹시나 해서 해봤는데..][마티?][자네 그렇게 가고 나서 도너휴 그 작자랑 나랑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나?][미안했어요.][기가 막히고 황당한 건 알겠지만 어쩌겠나. 그때 일이 그렇게 되었던 걸 탓할 수 밖에.][..그만해요, 마티.][윌, 듣고 있나? 제이스양한테 알아봤더니 그 여자 나름대로 내력이 있더군.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눈치였어.][..그랬어요?][언제쯤이면 돌아올 수 있겠나?][글세..][여배우들이 난리군. 오디션 하는 데 상대역이 없어서야 되겠느냐고.. ][이든은 뭐하고 있죠?][담배만 뻑뻑 피워대고 인상쓰면서 공포분위기 조성하고 있네. 그런데 자네한테 미안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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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계속하는군.][그러지 말라고 해요. 곧 갈 거예요.][곧 온다고?][자세한 시간은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돌아가긴 해요. 끊어요.]

가긴 가야 한다. 그곳에 자신의 일이 있으므로 가긴 가야 할 것이다.그러나 J는.. J와의 관계는 어떻게 하고 간단 말인가.높이 세워진 벽 앞에서 이도 저도 못해보고 돌아가야 하는 꼴이 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윌은 그녀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정말이지 그녀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고 싶다.하지만 어떻게.. 무슨 수로..그는 옷을 갈아입고 집안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올 때 빈 몸으로 왔던 것처럼 갈 때 지니고 갈 것은 없었다.언제쯤 다시 오게 될까.집안을 나서기 전 벽난로에 머무는 그의 시선이 유난히 쓸쓸했다.

[나, 갈 거요, J.]그는 보았다. 어느 샌가 풀어져 있던 그녀의 어깨가 다시 꼿꼿해 지는 것을..무슨 말이라도 해 보시오. 젠장..그가 속으로 욕설을 퍼붓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 걸까.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그를 향했다. [이제.. 가는 건가요?][그렇소. ][잘.. 다녀와.. 아니, 잘 가요.][..내가 가서 서운하다고 물어보는 건 잘못된 질문이겠지?][차는 어떻게 하죠?]다시 나직한 음성이었다. 그녀를 모르기 전에 들었다면 흡사 떨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것이었으리라. [걱정해 주는 거요? 훗.. 로튼이 데려다 주기로 했소. 참 고맙지?] [그러네요. 고맙네요...] [끼니 잘 챙겨 드시오. 하긴 내가 가면 맘 편히 놓고 생활할 테지. 매일 뒷모습 보이지도 않을 테고..] [벤..] [아니오, 쓸데없는 말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럼 잘 있어요.] [저기.. 로튼씨가 오는 게 아니었나요?] [차 얻어 타는 것만도 고마운데 집앞으로 대령하라고까지 하는 건 너무 무례한 처사잖소.] [확실히 그렇군요.] [다녀..오겠소.] 그때 와서는 우리 얘기 나누길 바라겠소.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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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짧은 틈이나마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재영은 그가 언덕 밑으로 가다 말고 되돌아오자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왜.. 가다 말고...?] 윌의 입술이 힘차게 다가왔다. 재영은 멈칫했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 역시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따뜻한 입술이 닿는 것을 환영했다. 입술 윤곽선을 따라 다니던 무언가가 이물감과 함께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왔을 때조차도 재영은 그를 놓치기 싫었다. 그의 혀끝에서는 알싸한 커피 향과 향긋한 허브 냄새가 감돌았다. 이대로라면 숨이 막혀도 좋으리라.까치발을 떼었던 그녀의 다리가 힘을 잃어갈 무렵 그가 아쉽게도 입술을 떼어낸다.그의 눈빛은 심해보다 더 파랗게 변해 있었다. [당신.. 내가 가끔 찾아오면 잘 받아 줄거요?][..그래요.][한밤중에 전화걸어 투정 부려도 다 받아 줄 수 있소?][그래요..그래..] 재영의 목이 서서히 메어왔다.[됐어. 그럼.. 됐어..그게 알고 싶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에 강렬한 키스의 여운을 남기며 떠나갔다.그가 떠난 후 재영은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쓸어 보았다.그것은 자기 자신이 꿈을 꾸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라면 증거였다.고개를 들어 바다쪽을 바라보니 먼 수평선 너머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베냐민,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에 휘말려 들지 않게 내 처신을 잘 하겠네.''지난 일이야, 이든... ..내가 자네를 위해서 해줄 일이 뭐가 있겠나? 날 위해서 해 줄 일이라.. 딱 한 가지 밖에 없군. 다른 단점은 살아가기에 이득이 될 수 있지만 도박하는 버릇만은 제발 참아주게. 꼭 그러겠네. 그 버릇 못 고치면 그땐 더 이상 자네의 친구임을 그만두겠네. 윌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도너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술이 들어간 취기였는지 진정한 마음에서 그랬는지 그는 진지해 보였다. 그러나 윌은 알고 있었다.앞으로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나갈 것이라는 걸.그 증거로 이든과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던 제이스라는 여자는 일정을 앞당겨 막바로 체크 아웃을 하고 떠났다.아니, 지나친 비약일는지 모르지만 윌은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가 좌절만을 느꼈던 시간과 연관된 인물에 의해서 생활이 뒤흔들리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어쩌면 자신은 그의 친구보다도 더한 겁쟁이일 수도 있다!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걸로도 머리를 어지럽히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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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머리 속은 자신을 일으켜 주고 있는 조그맣고 당찬 여자 생각만으로 꽉 채워져 가고 있었으므로.. 오디션 일정은 종국을 향해 치달았다. 로비는 모든 시험과정을 마치고 떠나려는 이들과 뒤늦게 기회를 잡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로 인해 매일 혼잡스러웠다. 사람이 붐비면 자연적으로 홍보가 된다며 처음에 반색을 하던 호텔 측도 한 달이 다 되어가자 서서히 지겨운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윌은 선셋으로 전화를 할 지의 여부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었다.로튼에게 알아본 바로는 최근 며칠동안은 통 바닷가 산책도 안 하고 오직 원고에만 매달려 있는 눈치라고 했다.끼니를 챙겨주기 위해서 어쩌다 들여다보기라도 할라치면 질색을 하고 마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그러면서 그는 덧붙여 말했다. 도령의 마음도 알지만 왠만하면 지금은 전화 안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소. 난 연기하는 사람들만 예민한 줄 알았더니 글쓰는 사람한테 비하면 될 것도 아니더군요. 허허.. 노인의 가식 없는 웃음소리가 아직까지도 귀에 울리는 듯 하다. 그가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윌, 날세, 마티. 도너휴가 잠시 보자고 해서 오는 김에 같이 왔네.][들어와요.] 그는 좀전까지 만지작거리던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그들을 맞아 들였다. [무슨 일이예요?] [히로인 감이 낙첨됐네.] [이제 슈팅하는 것만 남았다고.] 사람좋은 그의 매니저가 예의 그 흥분하는 말투로 손짓을 섞어가며 설명하고 있었다.[정말인가, 이든?][그렇다네, 베냐민.][하지만 시나리오는.. J는.. 다 쓰지 못했을 텐데?][무슨 소리야, 윌? 자네는 모르고 있었나? 그녀는 벌써 며칠 전에 시나리오 다 완성되었다고 연락을 해 왔다네.][뭐라고요, 마티?][아마, 내일쯤 다니러 온다고 그러지 않았소?.][마티 말이 맞나, 이든?][그랬지. 내일 오전 중으로 올 모양인가 보더군. 우리로서는 지체되지 않으니 좋은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그녀가 그렇게 빨리 끝낼 줄 몰랐네. 어쩌면...]도너휴와 마티가 몇 마디 교환해가며 그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있었지만 윌은 자신이 해야 할 질문 따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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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잊었다. 왜 내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왜 내겐...[자네는 별 감흥이 없나보군.][아, 이든. 잠시 다른 생각했네. 내 상대역 이름은 뭔가?][신인이라 자네는 들어보지 못했을 걸세. 로라 파커라고 마스크랑 이미지가 꽤 신선한 편이지.][로라 파커..] 윌은 앵무새처럼 이든의 말을 따라 했다. 로라 파커.. 로라 파커.. 누구처럼 짧은 이름도 아니군. 이를테면 J처럼.. 젠장..[베냐민, 약간 피곤한 기색이군.][윌, 자네 룸서비스 불러 줄까?][됐어요, 마티.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잠을 설쳤더니 머리가 먹먹해서요.][진작 말하지 그랬나. 우리가 이만 나가도록 하지.][내일 보세, 친구.][윌, 오늘은 제발 숙면 취하길 바라겠네. 그래야 내일 기분좋게 지낼 수 있지 않은가.]두 사람이 나가자 그의 방은 조용해졌다.그로선 더 이상 망설인다는 게 무의미했다.

재영은 잠시동안 머물던 그의 집을 눈 안에 넣을 듯 바라보았다.그녀의 손때가 묻었음 직한 천창의 손잡이와 현관의 노커는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였다. 결국 어떤 것에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가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그가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 종종 집에 들러 서로간의 괴인 열정을 확인하며 사랑을 나누던 그의 방과 자신이 있던 그 공간에는 더더욱...하지만 혼자만의 욕심을 차리기 위해 짧은 추억-어차피 그에게는 어설픈 추억거리밖에 되지 않을 테지만- 따위나 가지고 살게 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인 것 같았다.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는 조금 더 그의 곁에 있고 싶은 자신을 속일 수 없어서 원고를 넘겨주러 호텔로 가면 그가 싫증을 낼 때까지 머물 참이었다.그러나 동생으로부터 날아든 E-mail은 그녀가 계획으로 세워두었던 작은 일거리에 찬물을 끼얹었다.

작은 누나, 누나가 필요해. 일이 생겼어. 큰누나.. 큰누나가... 메일로는 긴 얘기 못하겠고.. 빨리 돌아왔음 좋겠어.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오기나 하는 거야? 메일 확인하면 연락 좀 해 줘.

왜 얘기 안 했소? 왜 전화 안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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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긴장이 풀어져서 경황이 없었나 봐요. 내 전화 기다렸다면 미안해요. ..휴, 시나리오 가지고 내일 온다는 소리에 기다릴 수가 없었소. 당신이 요 며칠 통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길래 걱정이 되기도 하고..일 끝난 것 나한테 미리 알려 주지 않아서 서운하기도 했나 보오. 그랬군요. 그나저나 당신 올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잠도 제대로 안 올 것 같고 자더라도 얼마 안 가 깰 것 같군. 벤.. 당신 내일 오려면 오늘 푹 자둬야겠지. 아쉽지만 이만 끊어요. 우린 내일을 기약합시다. 잘 자요. 당신도 잘 자요. J? 네? 뭐 할 말 없소? 뭐.. 보고 싶다거나.. 뭐 하여튼 그런 말 많잖소.. 보고 싶어요.(정말 많이 보고 싶어요.).. 됐어요? 내가 졌소, J. 이제 진짜 끊겠소. 희미한 소리로 투덜거리던 그가 전화를 끊었는지 기계에선 뚜뚜거리는 소음만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재영은 섣불리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가 상대도 없는 전화기에 대고 통화를 하듯 대상없는 고백을 흘려 보냈다.[윌리엄 베냐민 모건, 당신 알아요?내가 얼마나 당신 마음에 넣고 살아왔는지... 당신 결혼했을 때 얼마나 아팠는지..이혼하고 나서 자취를 감췄을 때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아서 얼마나 가슴이 탔었는지...그렇게 안 보여서 미워하고.. 잠시 당신 잊고 살았었다는 거.. 그래서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 당신 아나요..?]

그녀는 어느 새 절로 고인 눈물을 소매로 스윽 닦아냈다.불과 1시간 안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만약 그의 전화를 먼저 받고 동생의 메일을 나중에 확인했더라면, 그리고 제일 나중에서야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면 서슴없이 그를 택했을까.그녀는 자신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순서야 어찌 됐든 그녀는 돌아가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어찌 보면 그건 그녀에게 지워진 당연한 의무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재영은 잘 생각도 잊어버린 채 벽난로 앞에 앉았다.한없이 타들어 가는 장작불은 그녀와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아 서글프다.시작도 없었던 것처럼 급히 타오르다가 이제 꺼지는 일만 남았으니...노을과 바다가 보였던 그 집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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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었어요?] [그래.. 많이 보고 싶었어..]방에 들어서자마자 윌은 그녀를 홱 잡아당겼다. 급작스러운 손짓에 스웨터 소매가 길게 늘어났지만 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 어떤 것도 끼어 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 것도..조각한 듯 단단하고 윤곽이 뚜렷한 입술이 도톰한 여자의 입술에 닿았다. 방해할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탐닉은 계속되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맛있는 사탕이 닳아 없어질 까봐 안달 난 어린아이가 된 심정이었다.그의 행동에 놀라 질책을 하던 그녀의 음성도 차츰 부드러운 신음으로 변해갔다.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은 천천히 옷안으로 들어와 아주 자연스레 브래지어의 훅을 풀어내 버렸다. 등줄기를 쓰다듬는 손길에 짜릿한 해방감마저 느껴지자 재영의 손도 덩달아 바빠졌다. 셔츠를 벗기는 그녀의 몸짓은 무척 서투르고 미숙했지만 윌은 끈기 있게 모든 것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바지 버클에 손이 닿자 그녀는 주춤거리며 서 있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잡고 바지 쪽으로 향했지만 여전히 주저하는 눈치를 보이자 윌은 한숨쉬듯 웃어 보였다. [언제까지 이럴 거야,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눴어도 영 익숙해지지 않는 거야, 당신?][서툴러서 .. 하지만 암만해도 익숙해 질 것 같지 않아요.] [할 수 없다. 익숙해 질 때까지 내가 하는 수밖에...]그는 어느 새 알몸이 된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곧 자신의 바지와 속옷도 걷어냈다. 참 아름다운 선을 가진 하나의 육체가 이미 여체가 누워있는 침대 위를 마저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그녀는 호흡이 거칠어짐을 숨길 수 없었다. 손톱조차 기르지 않은 손이 자신의 것과는 전혀 달리 강직해 보이는 남자의 팔선을 쓸어내리자 어디선가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다.[후..당신 놀란 거예요?][그렇게 갑자기 손을 가져오면 안 놀랄 사람이 어디 있나? 지금 웃음이 나와? 남은 놀라서 가슴이 오그라들지도 모르는데.. 좋아, 그럼 당신도 나처럼 만들어 주지.]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던 윌은 재영이 숨 돌릴 틈도 없이 간지럽히기 시작했다.[아하하하.. 간지러워, 하지 말아요. 나 간지럼 많이 탄단 말이예요.]그러나 그의 장난기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한참을 웃다가 기진맥진해진 그녀가 항복을 외치며 마음을 가라앉힐 때였다. 같이 즐기며 웃던 윌이 정색을 하며 재영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눈을 내리깔고 어색하지만 낯설지 않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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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빠져들었다. [J, 나 정말 당신이 보고 싶었어. 매일 같이 있어주기를 바랬다구.]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그녀의 몸을 향한 그의 항해가 시작되었다.봉긋한 가슴의 둔덕에서 한참 맴도는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움폭하게 파인 배꼽에서 또 몇 바퀴를 그려대는 윌의 손이 이내 오직 그를 위해서만 숨어 있기 원하는 곳에 닿았다.단지 몇 번의 손놀림이었음이었지만 그녀를 흥분시키고도 남는 것이었다.[날 .. 사랑해 줘요. 당신 그렇게 할 수 있죠?]

물론 그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흡사 시간이 멈춰주기라도 했으면 바라는 시간들이었다.그녀를 가지는 건.. 가진다는 건.. 아무리 가져도 충분치 않은 것이었다.자신의 품안에 가둬진 그녀를 만지는 그의 손짓은 회를 거듭할수록 더 열정적인 것으로 변해갔다.태고적 종족번식의 춤이라도 추는 양 격렬하기도 했다가 세상에 둘도 없는 진기한 것을 대하는 듯 경건하기까지 한 그의 사랑언어에 재영은 문득 눈시울이 촉촉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을 들뜨게 했던 사랑이 단락을 맺은 후 그제서야 침실은 조용해졌다.한쪽 팔꿈치를 괴고 있던 윌은 여자의 눈이 감겨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러고 보니 호텔에 오자마자 이든이랑 얘기하고 나한테 왔었지, 참.따지고 보면 한 시간도 제대로 못 쉬게 한 셈이었다.보자마자 품안에 안는 것에만 연연해 했으니.. 새삼스레 미안해졌다.하지만 한편으론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그동안 전화를 안 받은 것에 대해서 괴로움을 겪은 자신에게 그만한 보상은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어쩌면 이것도 다 그 자신의 욕심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나른한 미소를 짓던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면서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다.이마 위로 슬쩍 내려온 머리카락을 치워주면서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대고는 가만히 속삭였다. [당신, 그래 줄 거지? 일 끝났어도 계속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지?]대답을 듣고 싶었던 그였다.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그새 잠들은 걸까.. 들리는 거라곤 달콤한 한숨소리밖에 없다.윌은 당장이라도 깨워서 응답을 하게끔 하고 싶은 심정을 자제하며 눈을 감았다.지금이 아니라도.. 내일 아침에 다시 물어볼 수 있다. 그때는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겠지.그녀를 품안으로 바싹 끌어당긴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하루를 마감했다.이내 깊은 잠에 빠져 든 그의 숨소리는 재영의 것처럼 규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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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어둑한 새벽 무렵이었다. 눈을 뜨고 있던 재영은 천천히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어느 정도 익숙해진 희미함 속에서 그녀의 손은 자신의 옷을 하나씩 찾아내고 있었다.기계적인 동작으로 외출상태가 된 재영은 잠시 침대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자신의 사랑을 바라보았다. 행여 깨어날 세라 만져볼 수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눌러앉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발이 떨어질 수 있을까. 딱 한번.. 딱 한 번 더 그의 감촉을 손 아래로 느끼고 싶었다. 자신의 몸을 제외하고 나서 가장 자세히 알게 된 그 탄탄하고 매끄럽던 육체를.. 그녀가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그의 몸이 뒤척거렸다. 단지 자세를 바꾼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런 때 만지면 십중팔구 깨어나게 된다는 것을... 그는 그녀가 만질 수 없는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라는 것을.. 그러긴 싫지만.. 그러리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었지만... 이제는 정말 가야 할 때였다.눈을 한 번 질끈 감아 뜬 그녀의 뺨 위로 투명한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자고 있는 그의 등을 향해 손가락 키스를 날린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리모콘의 버튼이 눌려졌다.화면은 이내 정지된 채로 가는 노이즈 몇 줄을 보이고 있었다.영어자막과 모니터를 오가던 손가락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리고 잠시 화면은 멈춘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재생되었다. 집안은 키보드를 연이어 치는 소리로 겨우 사람이 있다는 기척을 알 수 있을 만큼 조용했다.얼마나 더 지났을까.안경을 벗겨내는 집게손가락이 떨고 있었다.작품의 끝을 알리는 검은 화면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지만 더 이상 들여다 볼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무심결에 옆으로 뻗친 손은 머그잔을 찾고 있었지만 곧 그 행동은 멈췄다. 커피는 이제 작업의 파트너가 아니었다.무에라도 간지러운 게 들어간 듯 눈을 부비다가 슬쩍 일어난 맞은 편의 전신거울엔 파리한 얼굴의 여자가 비치고 있다.그녀의 모습은 거센 풍랑을 겪은 것 마냥 초췌해 보였다.한때 등허리 중간까지 오던 머리는 어깨 깃 아래에 닿을 듯 말 듯 짧게 정리되어 있었고 보기 좋게 살이 올라있던 얼굴 또한 해쓱하다.종종 웃음을 머금었던 그녀의 눈은 한 번도 웃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것처럼 엄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익숙해질 법도 되었건만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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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릴 것 같지 않던 입에서는 영혼의 울림같이 짧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등을 돌렸다. 슬그머니 고이는 눈물을 거울에까지 비치게 하고 싶지 않다. 눈가로 향하려던 손이 돌연 복부로 내려갔다. 그녀의 손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녀는 그렇게 선 채로 몇 십 분이, 몇 시간이 될 지도 모르는 시간을 보냈다.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로 방해를 받기 전까지는... 그건 언제나처럼 산만하지만 익숙해 있는 김PD의 음성이었다. [어, 또 안 받네? 하여튼 제때 통화하는 것 성공한 적이 없는 것 같군. 서 작가, 나요, 김. 좀 쉬면서 영화번역 한다더니 일은 잘 되가는 거요? 뭐, 서 작가라면 야무지게 잘 하고 있을 테지. 흠흠.. 아무튼 한가해지거든 방송국 나들이 좀 하라고. 은둔하는 체질인 거 알지만 이러다가 얼굴 잊어 먹겠다고요. 그럼 잘 있어요. 아 참, 왜 전화 걸었는지는 말 안 할 뻔했네. L.A서 팩스 날아들었어요. 발신자가 폴리마 그랜시, 이든 도너휴 공동명의네.. Dear Miz. Suh 라고 되어 있는데.. 가만, 뭐라고 그랬지? 아이고, 이런. 회의가 있는 걸 깜박했네. 서 작가가 아무래도 한 번 나오긴 나와야겠네. 제발 이 참에 얼굴 좀 봅시다. 그럼 끊어요.] 평정을 찾아가던 그녀의 태도는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발걸음은 욕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나마 먹은 것도 없어서 새삼스레 비워 낼 것도 없는 서너 차례의 토악질 후 그녀는 핏기를 잃은 얼굴에 물기를 축였다.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생명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중이었다.

금발로 덮인 고개의 뒤통수가 똑바로 세워졌다. 말끔하게 면도 된 턱 주변을 쓰다듬는 손길에 미소가 따른 것도 잠시, 남자의 눈은 작은 여유를 몰아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행사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서두르면 대어 갈 수 있을까?스킨을 바르는 모습이 능숙했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윌, 뭐예요, 깨워 주지도 않고.]여자의 투정이 섞인 목소리에 파란 눈동자가 시선을 돌렸다. [격식 차리지 않아도 돼. 옷차림은 별개인 날이 있으니까.][그래도 카메라들이 장난이 아닐 텐데..][꾸미지 않아도 이뻐, 린. 빨리 샤워부터 하라고.][당신도 참..] 콧소리가 제법 나면서 눈이 가늘어지는 걸 보면 기분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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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다시 안 할래요?]나직한 유혹을 짧은 웃음으로 거절한 그는 여자를 욕실에 남겨 둔 채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오늘은 영화 시사회가 있는 날이었다.그리고 어쩌면 누군가를 다시 보게 될 지도 모르는 날이기도 했다. 어떤 배려도 없이 자신을 떠나버린 한 여자를...... 그녀의 이름을 J라 했었다.

그를 태운 검은 색 리무진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멈춰섰다.근 1년반만에 치러지는 컴백이니만큼 영화계는 그의 등장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이라는 건 시사회장 앞에 진을 치는 보도진들을 굳이 보지 않고서라도 이미 짐작할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윌의 옆에 앉아서 외부의 웅성거림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퍼니 린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우와.. 윌. 들어 봐요. 모두 당신이 나타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요. 당신 정말 대단해요.]들떠있는 말투에 그가 실소를 머금었다. [린, 당신한테는 깜짝깜짝 놀라겠어. 그들은 초조한 게 아니라 물어뜯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상어떼라는 걸 익히 알고 있을 텐데.][이런.. 이런.. 또 비관적으로 보는군요. 제발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아무리 인정사정 없는 육식동물이라 할 지라도 진심은 통한다구요. 얼마만의 작품인데.. 물어뜯는다고요? 오, 윌...언제나 냉소적이라니까.. 하긴 그래서 당신을 좋아하는 거지만 말예요.]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자신의 팔짱을 끼고 있는 퍼니를 향해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두 번 툭툭 쳐댔다. [애늙은이 같은 충고 고마워, 린. 다 끝났으면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라구.] 그의 손이 차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뿜어지기 시작한 카메라 플래쉬 세례는 엄청났다. [모건, 다시 돌아온 기분이 어떤가요?] [영화는 마음에 들게 찍으셨나요?] [린, 옛 연인과 재결합한 셈인데 감회가 새롭지 않나요?] [모건, 이번 영화의 작가가 동양 출신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모건, 린과 포즈 좀 취해 주시죠.] 거듭되는 요구에 하나 하나 응하면서 윌은 자신이 영화계에 복귀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카메라에 찍히고 답변을 하는 건 쉬고 있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자연스러워졌다. [시사회가 끝난 후에도 영화는 계속 될 겁니다. 식전행사는 이만 접고 파티에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모두들.] 그가 선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들어가는 중에도 필름 돌아가는 소리는 여기 저기서 흘러 나왔다. 배급사 대표의 인사말이 끝나고 극장의 불이 꺼지는 동안 윌은 눈을 감았다 떴다. 일에 대한 열정도 없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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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뤄졌던 한 사람과의 만남 때문에 찍게 된 영화.. 증오를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시원찮았고 그가 매달릴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의지가 전부였다.그리고 지금은 그 의지가 제대로 살아져 있기를 그는 간절히 바랬다... 숨죽인 기침소리와 함께 영화가 돌아갔다.린이 그의 손을 막 잡고 있을 때 맨 뒷좌석 끄트머리에 미끄러지듯 누군가가 앉았다. 그림자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스크린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고 유난히 꽉 쥐어진 주먹 안엔 흰 손수건이 언뜻 내비치기도 했다.

이든은 벅차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한동안 자신의 손으로 내친 거나 다름없는 베냐민을 볼 면목이 없었는데 이번 작품으로 인해 그런 껄끄러움이 사그라드는 듯 했다. 정말 다행이야... 영화 속 주인공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의 장단점을 다 알아서 살릴 건 살리고 피해가야 할 건 철저히 피해간 것 같아. 그는 자신의 곁에 앉은 여작가 -그것도 한국의 젊은 여류방송작가-에게 시나리오를 맡긴 걸 추호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의심이 있었다면 계획을 처음부터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녀를 불러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녀를 몰랐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든이 자신을 그날 한인타운으로 가게 한 변덕에 고마움마저 갖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자신의 대본으로 만든 영화를 보는 J의 기분은 어떨까. 아까부터 서 너 차례 왔다갔다 하더니 지금은 괜찮나?영화관의 침침한 어둠 속에서 빙긋 웃던 그는 그녀에게 말이라도 걸어볼 요량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J, 잘 보고 있소? 정말 대단하오. J? 이봐요, Mz. Seo?]재영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는 중이었다.며칠 전부터 몸 안을 오르내리던 기분 나쁜 울렁거림은 기회라도 잡은 것처럼 그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럼 안 돼,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그를 봐야 하잖아. 그를 보고 싶어했잖아. 안간힘을 다해 눈을 뜨려 했지만 축 늘어지는 몸은 가벼운 눈꺼풀 하나 들어올릴 힘조차 제공하지 못했다. 도너휴 감독의 당황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Mz. Seo. 괜찮아요?]대답을 하고 싶었다.[아, 그래.. 난 괜찮아요...]맞아, 이 사람도 있었지. 그나마 다행이야...날 아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서...설명 못할 안도감으로 눈이 감겼다. 가슴을 에워쌌던 불쾌함이 일시에 밀려 나가는 것 같았다. 몸 속 제일 깊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쏟아짐.. 재영은 그곳이 너무나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아. 숨을 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누가 나 좀 도와줘요. 나 숨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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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수 있게 해 줘요. 큰 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그녀는 완전히 의식을 놓아 버렸다. 시사회를 망칠 수 없어 전전긍긍해가며 응급차를 불렀던 이든이 병원으로 실려 가는 도중 내내 옆에 지키고 앉아서 자신의 입술을 얼마나 깨물었는지, 그가 입고 있던 재킷에 피가 얼마나 묻었는가에 대해 재영이 알아야 하고 책임져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그건 그녀의 책임이 아니었고 그녀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윌은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눈으로는 항상 어딘가를 좇고 있었다. 아무 데도 보이지가 않았다. 왔으면 분명히 이든과 같이 있을 텐데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기자단의 고무적인 반응에도 씁쓸해하는 윌의 태도에 짜증이 난 퍼니는 영화위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그가 쳐다보자 한쪽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의례적인 미소로 답을 해준 그는 곧 자신에게 되뇌었다. 여자가 오든 말든..J가 자신을 찾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고. 그러나 이든은 아니다. 이든은 오늘 같은 날 빠질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화가 오랜 침묵을 깨고 상영된다는 데 더 깊은 의의를 가질 사람이었다. 대체 어디 간 걸까.혹시 J랑 같이 있는 걸까? 둘이 좋아져 지내는 걸까?고개를 저었다. 머리만 추악해지는 상상이었다. 망할.. 당신은 결국 친한 친구까지 내 스스로 오해하게 만들었군. 지나가는 급사의 쟁반에서 술잔 하나를 더 집어든 그는 허공에다 대고 건배를 한 후 목을 축였다. [당신한테 감사하오, J, 제때 떠날 줄 알만큼 냉정했던 당신과 이상으로 집도 지을 수 있다고 믿었던 어리숙한 나와의 차이점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 줬으니..] 입안이 써진 그가 빈 잔을 내려놓았을 때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음, 이든! 거기 어딘가?..뭐라고? 왜 그래? 왜 그러고만 있는 거야?]

퍼니는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연예계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맨 처음 스캔들이 났었을 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은 자신들의 열애설이 차라리 사실이 되기를 바랬었다. 이후 그들은 서먹서먹한 한 때를 보낸 적도 있었지만 어려울 때는 항상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주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물론 그의 결혼과 잇따른 이혼, 종적을 감춘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게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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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장 친한 이성친구라는 데 위안을 삼고 있었고 최근엔 예전처럼 밀접한 사이가 회복된 후로 그와의 결혼이라는 은밀한 꿈까지 생기게 된 참이었다.그런 사람이, 그런 남자가 지금 자신의 옆에서 시종일관 굳은 얼굴을 풀려들지 않았다.[윌, 무슨 문제예요? 도너휴가 무슨 전화를 했길래 황급히 빠져나온거냐구요?][...][윌.. 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물으려던 퍼니는 그의 꾹 다물어진 입매를 보고서야 어떤 질문을 해도 대답을 못 들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병원이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이든의 대답이었다.왜 거기 있느냐는 자신의 물음에 그는 그저 그 한마디만을 반복했다. 여간해서는 흥분도 안 할 성격의 이든이었다. 수세에 몰려도 자신이 할 말은 꼬박꼬박 챙기고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친구.. 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했을까.윌은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긴장감에 몸이 오싹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뭔가가 있었다.머리 속에서는 침착해야 한다는 속삭임이 멈추지 않았으나 어쩌면 J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외침은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사정이 어떻게 되었건 그는 와야만 했다.그의 친구가 있는 곳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그래야만 아직까지 가라앉지 못하고 남아 있던 앙금을 완전히 없앨 수 있을 것 같았다.택시가 병원 입구에 서자마자 그는 차에서 빠져 나왔다. [100불입니다. 나머지는 필요없소.]이게 왠 횡재냐는 듯 눈이 휘둥그래진 운전수의 극성스런 인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윌, 뭐예요?] 하이힐을 신은 탓으로 뛰지 못하는 퍼니가 종종거리며 그를 붙잡기 위해 보내오는 손짓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채 따라오기도 전에 안내 데스크에 다다른 그는 병원상호가 찍힌 유니폼을 입고 있는 중년의 여인을 발견했다. [3시간 전쯤에 들어온 환자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이름은요?][이름은 J. Suh.. 아니, 이든 도너휴라는 이름인데...][이든 도너휴요?] 검색을 해보던 여인은 곧 머리를 내저었다. [실례지만 그런 이름은 없습니다.][다시 한 번 찾아봐 주세요. J. Suh라는 이름도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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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찾아봤어요. 둘 다 없습니다.][그러지 말고 잘 찾아보시오. 꼭 있을 거라고요.] 분통을 터질 지경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뒤늦게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윌은 막막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이든의 휴대폰마저 꺼져 있어서 연락이 닿을 길은 없었다.이렇게 돌아가야 하는 건가. 어떤 일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로..? 무력감이 그의 전신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윌은 그런 느낌을 견딜 수 없었다. 눈앞에 어떤 일이 펼쳐졌는지 뻔히 알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가지지 못한 그런 느낌은 더 이상 갖기 싫었다.좋아, 알지 못한다면 스스로 알아내기라도 하자. 그래도 안 된다면 할 수 없지만 최소한 노력하고 안하고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그는 응급실부터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목을 죄고 있던 셔츠 단추가 몇 개 풀러지고 걸치고 있던 수트의 소매는 진즉부터 걷어붙여진 듯 구김이 배고 있었다.그렇게 얼마나 돌아다녔을까.아까부터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나이 어린 여자 하나가 그에게 다가갔다.[저...][무슨 일입니까?][혹시, 베냐민 모건 아니세요?][이봐요, 아가씨..][맞죠? 정말 맞죠? 너무 좋아요. 니일, 제 이름은 니일이예요.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전 이 곳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요.][좋아요, 니일. 나도 만나서 반갑지만 지금은 누군가를 찾아야 할 일이 있소.][오, 내 정신 좀 봐. 지금 우리 병원에 실려온 동양여자 찾고 있는 거 맞죠?]동양여자?!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습니까?][제가 알아요. 사실 처음부터 듣고 있었는데 일이 바빠서.. 절 따라 오세요.]여자는 몸을 돌려서 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몇 개의 병실을 지나자 너른 복도가 나타났다. 그들은 한참이나 복도를 걸어가야 했다. 초조함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J가..그녀가 이 병원 어딘가에 누워 있었다. [여기예요.][고맙소. 저..][니일.][고마워요, 니일.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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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깎듯이 인사를 하자 젊은 아가씨의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천만에요. 오히려 제가 영광인 걸요.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께요.][고맙소.]자신을 도와준 간호사를 보내고 나서 윌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문이 닫혀진 병실은 그에게 왠지 모를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저 문안에 J가 누워 있는 것이다.갑자기 흰 시트로 가려진 그녀의 모습이 환상처럼 다가왔다. 윌은 얼른 고개를 흔들어 허상을 쫓으려 했지만 찜찜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한 그는 문에 손을 갖다댔다. 그가 손잡이를 돌리자 육중한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이든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핏발이 선 눈은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쥐어뜯은 듯한 머리는 온통 헝클어졌고 입고 있던 윗도리는 어디에 팽개쳐 두었는지 구깃해진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그녀는..] 묘하게 탁한 음성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윌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침대로 다가갔다. 거기 그녀가 누워 있었다.백지처럼 창백한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입술, 이마 위로 내려온 몇 올의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를 더 작아 보이게 했다.울컥하는 덩어리가 가슴을 차고 올라왔다. [어떻게 된 거야? 당신 왜 여기 누워 있는 거냐고?][베냐민, 그만해. 좀전에 막 잠들었어.][안 돼. 깨워야 돼. 설명 들어야 돼. 어떻게 된 거냐고 직접 이야기 들어야 돼.][그만 하라니까.] 이든의 다부진 손이 그녀를 흔드는 윌의 몸짓을 막았다. 윌은 자신이 쥐고 있던 자제력의 끈이 단번에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날 힘들게 하더니 왜 이제 와서야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거냐고?]그의 성마른 다그침에 이든의 손이 툭 내려갔다. [베냐민,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그녀도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그래, 몰라. 알 수 없어. 제기랄, 난 그녀가 날 만나서 좋았는지 어땠는지 알지도 못한다고.나도 힘들어. 힘들어서 그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래. 미워해야 되는데 그럴 수 없어 미치겠어서 그래.] 격앙된 어조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윌의 기세에 눌린 도너휴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다 알아낸 듯한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방금 잃은 아이가 자네의 아이겠군.][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라니...][들은 대로야. 하혈하면서 의식 잃고 이리로 실려 온 거야.][...말도 안 돼..!][6개월째 접어들었었던 상태였대. 영양상태가 안 좋은데다가 모체가 너무 안 좋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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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네, 마티한테 전화 안 해봐도 되나? 찾고 있을 텐데..]시계를 보던 도너휴가 몇 마디를 건넸지만 윌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모든 신경은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한 여자에게로 쏠려 있었다.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다른 여자랑 보낼 때도 잊혀지기는커녕 언제나 기억속에 살아서 잠 못들게 하던 얼굴이 거기 그렇게 있었다.[..냐민. 베냐민.][고마웠네, 이든. 이제 여기는 내가 있겠네.][하지만 자네..][가주게, 이든. 이대로 두고 가면 평생 못할 짓 했다고 가슴에 남을 것 같아. 내가 있겠어. 제발 가주게.][..] 다행스럽게도 도너휴는 오래된 친구답게 물러날 때를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로 자리하고 있는 이 배우가 여자를 두고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그를 위한답시고 자신이 거들 일도 없다는 사실도..문이 닫힌 병실에는 한 명의 눈감은 이와 그 곁을 지키는 이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의자를 바싹 끌어당겨 앉은 윌은 숨소리조차 고요한 여자의 얼굴을 그제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속눈썹, 살이 한참이나 내린 눈두덩, 홀쭉해진 볼.. 너무나 형편없이 야위어버린 얼굴이건만 어찌된 셈인지 가느다랗게 자리한 눈 밑 그늘이 서럽도록 아름다워 보여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무겁고 가벼운 한숨이 눈물을 뿜어내려 하자 얼른 눈을 깜박였다. 행여 그녀가 깰 세라 윌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한참이나 갸름해진 얼굴의 윤곽선을 따라 몇 번이고 덧 그리던 윌은 시트 깃 사이로 비어져 나와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보았다.너무나 차가웠다. 너무나 서늘해서 차라리 기분이 좋아지는-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그런 느낌이었다.바보 같으니.. 온갖 굳센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그렇지도 않네.. 그렇지도 않으면서. 그렇지도 않을 거였으면서.[J야, 당신 말 좀 해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눈 좀 떠서 대답 해 봐. 왜 내 앞에서 그렇게 강한 척 했는지. 지금 얘기 안 하면 나중에 당신 깨어나서 나한테 원망 많이 들을 줄 알아.그래도 싫어? 그래도 안 할거야? 왜 그때 날 떠났는지 그 말도 안 해 줄 거야?나보고 행복하란 말 순 거짓말이었지? 내가 당신 생각 안 할 거라는 거 미리 알아서 일부러 생각나게 한 거지?이거 알아? 당신이 쓴 시나리오로 연기하는 내내 내가 얼마나 당신 원망하고 미워했는지. 이제 보니까 내가 그때 그렇게 미워해서 당신 아픈 건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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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냐고? 어떨 것 같아? 후회 할 것 같아, 안 할 것 같아? 아니 후회 안 해. 내가 아팠던 만큼 당신 아프게 했으니까 후회 안 해. 그런데 말야. 왜 하나도 즐겁지 않은 걸까? 똑같이 주고 받았으면 기뻐야 되는데 왜 그렇지 않은 거야, 왜 그런 거야.. 당신 말 좀 해봐라. 왜 즐거워지지 않는지 얘기 좀 해 보라고...제일 화 나는 건 뭔지 알아? 당신 내 옆에 그대로 있었으면 우린 아이를 볼 수도 있었을 지 몰라. 그 생각이 날 화나게 해. 우린 같이 행복해 질 수도 있었어. 그래서 나 당신용서 못 할 수도 있어. 그래도 원망 못 하겠지. 이건 어차피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당신도 이제 알고 있겠지?]듣지 못할 이야기를 주워 넘길 뿐인데도 이미 그의 목은 꽉 메여 있었다. 눈썹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그의 시야를 부옇게 만들고 있었다.

도너휴는 병원을 나서다가 로비 한 쪽에 성이 난 채 앉아있는 퍼니를 보았다. [여기서 뭐하는 거요?] 그가 손나팔을 만들어 그녀에게 묻자 곧 쨍하는 말투가 날아왔다. [도대체 그 사람은 왜 불러낸 거예요? 무슨 일이죠? 얼마나 걸린대요?][그만 나랑 갑시다. 퍼니, 헛수고요.][기다릴 거예요. 윌은 나랑 돌아가야 한다고요.]남자의 고개가 내저어졌다. [그만. 기다려도 소용없을 거요. 자, 갑시다.]그는 큰 걸음으로 다가가서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이든, 이것 좀 놓고 얘기해요. 아귀힘이 너무 세다고요.]그러나 그는 힘을 늦추지 않았다. [갑시다. 마티 프랜서한테도 볼일이 있어서 예서 지체할 수는 없소.]결국 퍼니는 영문도 모른 채 이든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나오면서도 도통 알 수 없는 한때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검은머리에 천상의 눈동자를 지닌 한 남자아이가 그녀의 품안에서 놀고 있다. 간지럼을 태우자 까르륵거리며 웃음을 넘기는 소리가 영락없이 천진한 아이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웃음을 멎은 아이가 새처럼 울울 날개짓을 시작하자 그녀와 아이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날 두고 가지 마. 너마저 가 버리면..너 마저 가버리면..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떨어졌을 때 그녀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아이의 눈은 수레국화처럼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날 두고 너마저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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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은 뿌리치기 어려운 잠의 유혹을 이겨내고 눈을 떴다. 한참이나 울고 난 듯 뻑뻑한 눈을 비집고 햇살이 부서져 들어온다. 밀빛으로 칠해진 라디에터만 빼놓고 온 사방이 하얀 방..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다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소매를 보았다. 하얀 홑겹의 그것-더구나 소독약 냄새가 곳곳에 밴- 은 입고 있던 검은 색 옷의 소매하고는 전혀 틀렸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래, 온몸이 미칠 듯이 뜨거웠었지..환자복 위로 자신의 명치끝을 쓰다듬던 그녀의 손이 배쪽으로 내려갔다.타는 듯한 고통은 없어졌지만 뭔가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기분좋게 채워주던 질량감은 어디로 간 것일까.설마.. 자꾸만 아랫배를 쓰다듬던 그녀의 눈이 잔뜩 겁에 질려갔다.없었다. 자신의 품속을 그토록 묵직하게 만들었던 그 무언가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안 돼. 안 돼..] 밤새 잠 한 숨 못 잔 윌은 피곤함을 달랠 겸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 들어오는 길이었다. 병실문을 닫고 들어서자마자 그가 본 것은 자신의 배를 감싸쥐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는 재영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바싹 마른 아랫입술에서는 선명한 잇자국과 함께 핏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당신..왜 그래, 뭐하는 짓이야? 일어나 있으면 안 돼. 안정 취해야 한다구.] [..] [괜찮아? 괜찮은 거야? 피까지 흘리면서..] 단걸음으로 다가서는 자신을 보면서도 말 한마디 않는 그녀의 태도에 윌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날 봐.] 시선조차 꼼짝 않는 그녀의 눈동자 속엔 그가 들어있지 않았다.아니 눈을 가득 메운 눈물로 인해서 볼 수조차 없다고 해야 옳을까.그는 그녀를 덥석 안았다. 그의 가슴에 안긴 그녀의 몸은 그칠 줄 모르는 속울음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눈물은 뺨을 따라 계속해서 떨어졌고 그런 그녀를 위해서 윌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등을 다독여주는 것밖에 없었다.한참을 그렇게 안겨 울던 그녀가 어느 순간 그를 밀어냈다. [좀 나아졌어? 왜..][나가요. 혼자 있게 해줘요.][J, 당신..][자고 싶어요. 혼자 있게 해줘요.][그래. 그렇게 할게. 나중에 올게.]수긍하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을 나가려던 윌은 재영의 말로 인해 굳은 듯 멈춰섰다.[오지 말아요. 이제..][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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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지 않아요.][J!][오지 말아요. 당신이 오는 그 날로 병원 나갈 거예요.][..꼭 그렇게 해야 해?][...그래요.][알았어.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할게.][..고마워요.][다..시 볼 수 있을까?][..][잘 있어. 건강해야 돼.] 윌은 문이 닫히기 전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늘진 그의 모습은 언뜻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재영은 그가 나간 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어느 틈엔가 말랐던 눈가가 다시 촉촉해져 온다.

미안해요, 벤.정말 미안해...하지만 나도 힘들어요.

병동 저쪽 어디에선가 식사 카트가 돌고 있는 소리가 났다.그 사람, 아침이라도 먹은 걸까...뭐라도 먹여 보낼 걸..

인기척이 났다.문을 등진 채 창문 쪽을 바라보던 재영은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누가 왔나 보고 싶지도 않았고 본다 한들 아무런 할 얘기가 없었으므로 굳이 얼굴 맞대 인사하는 수고는 덜고 싶었다.[Mz. Suh., 자는 건가요?]이 목소리는...[안 자면 나랑 얘기라도 할래요?][..][얘기하기 싫은가 보군요. 그래도 난 얘기해야겠소. 잘 수 없다는 거 뻔히 아니까.]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다는 걸까..[어떻게 말해야 할까...그래 처음부터 얘기하는 게 낫겠지. 그와 난 거의 10년동안 영화판에서 뒹굴었지. 베냐민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속을 아주 잘 알아줬소. 그래서 난 그를 대하기가 점점 편해졌지. 나에 대해 그가 모르는 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말이오. 그런데 나는 속이는 게 딱 하나 있었지. 난 도박을 좋아하오. 영화일이 쌓여있지 않을 때는 도박에 빠져 살았을 정도니까 짐작은 할 수 있겠죠? 내가 가는 클럽은 번화가에 위치한 곳이었소. 난 일이 끝나고 나면 언제나 그곳에 들르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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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으로 삼았지. 어느 날이었던가 굉장히 안 풀리는 때가 있었소. 큰 판돈이 걸렸는데 남은 돈이 없었지. 급한 김에 나는 눈 딱 감고 돈을 빌었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결국 난 거액을 잃었소. 문제는 그 다음부터 터졌지. 알고 보니 정치가의 돈이었던 거요. 한 달 동안은 잠잠하던 전화통이 불이 나기 시작했소. 급기야 영화에서 손떼게 하겠다는 협박까지 해대더군. 그러던 차에 베냐민의 스캔들이 신문에 났소. 상대는 그를 몹시 좋아하던 정치가의 딸이었지. 그쪽으로 전화를 해보니 부인기사를 실었다간 영화고 뭐고 평생 대하지 못하게 할 거라고 하더군. 대신 베냐민을 잘 을러낸다면 빚은 탕감해 줄 거라는.. 그의 이름이 들어간다면 곧 있었던 선거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따 논 당상이었으니까. 내가 어쨌을 것 같소?난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소. 어떻게 해서든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을 그가 짊어지게 했지. 내 이기심과 비겁함에 기가 질렸지만 난 괜찮을 거라고 위안했지. 그는 곧 이겨낼 거라고. 하지만 그는 무너지고 있었어. 결국엔 뻔한 일이었지만 결혼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잠적해버렸소. 당신의 작품으로 끌어들였을 때에 그는 날 탓하지 않았소. 그냥 괜찮다고만 하더군.][..][그렇게 엉망으로 살다가 당신을 만났을 때 그는 생기를 되찾았소. 그 한달 동안 그는 인생의 최고인 날을 사는 것 같이 보였어. 당신이 말없이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말이 없었어. 오직 악에 받쳐서 연기에 모든 걸 불살랐소.][..][그를 내치지 말아 주시오. 부탁이오. 그가 한 우물만 판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만큼 한 여자를 바라보고 좋아했던 건 당신이 처음이오.][...][..그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겠지?][...][부탁하오.]

재영은 하루동안 있었던 일을 다 정리하고 그만 잠을 청하기로 했다.언제쯤 퇴원할 수 있을까.병원측에서는 영양상의 이유로 그녀의 조기퇴원을 만류하고 나섰지만 그녀는 더 이상 갇혀있고 싶지는 않았다. 이래저래 엉켜있는 감정의 거미줄은 그녀에게 침묵이라는 벽을 깨기 어렵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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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척이며 잠이 들 찰나였다. 누군가 발소리를 죽인 채로 병실에 들어왔다.코끝에 감도는 알싸한 로즈마리 향을 쓰는 남자...그였다.

윌은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은 자신의 생각없음에 자책을 하며 병실을 둘러봤다.그녀를 위해 놓여지거나 준비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비록 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잠이 든 얼굴이라도 좋으니 그녀를 지켜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당분간은 밤손님처럼 그녀의 병실을 드나들 수 밖에다른 도리가 없는 셈이었다.그녀는 옆으로 누운 채 고요했다. 잠이라도 든 모양이다. 어두침침한 미등이 그녀의 실루엣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머리결이라도 쓰다듬고 싶었다. 사랑을 나눌 때면 늘 손가락에 둘둘 말아놓고 풀어보기를 즐겨 했었던 그녀의 머리결.. 그 한결 짧아진 머리결이그의 박동을 급하게 만들었다.딱 한 번이야. 그래 딱 한 번..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위로 내렸다. 한 번 두 번...그의 손이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결을 오르내렸다. 그러기를 10여번.. 그는 기대조차 안 했던 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나, 그곳에 좀 데려다 줄 수 있어요? 노을이 보고 싶어요.]

[차가 바뀌었군요.]차를 달린 지 한 시간만에야 들을 수 있었던 그녀의 말이었다.[찬바람 쐬면 안 좋을 것 같아서 당분간 빌리기로 했지.][괜한 수고를 했군요. 가뜩이나 바빴을 텐데..][괜한 수고라고?] 그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그녀를 보며 반문했다.그녀는 이미 입을 다물고 무릎께에 놓여있던 모포를 끌어당겨 덮고 있었다.'그렇게 생각해, 괜한 수고라고?'차는 사실 마티의 것이었다. 그는 빡빡하게 짜여져 있는 방송일정을 무시하고 드는 윌에게 우려와 원망을 동시에쏟아 부었다.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자리 좀 지키고 있게. 카메라가 얼마나 삐딱하게 꼬일 수 있는지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웬만한 일이예요, 마티. 그리고 방송이 인정머리 없다는 건 제가 더 잘 알아요. 걱정 말아요. 방송에 차질 안 가게 돌아올 테니까. 빨리 와야 하네. 제가 어떤지 잘 알면서 그러는군요 . 알지, 너무나 잘 알지. 그래서 더 걱정이 되는군. 차를 몰고 나설 때까지 걱정을 그치지 않던 마티를 생각하며 윌은 피식 웃었다. 웃음 끝에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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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를 보던 그는 그녀가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숨이 고르기 때문일까. 깨어 있던 중에 핏기 하나 없던 얼굴은 희미한 홍조마저 돌아서 훨씬 나아 보였다. 그녀와 가는 두 번째 길이었다.처음 이 길을 갔을 때 이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이 다음엔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이보다 나쁜 일들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설령 그렇더라도 피해가 가지 않아야 했다. 비켜 가야 옳다. 그는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불안감을 꾹꾹 눌렀다.

[로튼도 없고 나 또한 여기 있지 않을 거야. 그러니 부디 편히 지내길 바래.][로튼은 어디..][플로리다에 있는 딸네 집으로 갔지. 겨울이 되면 바닷가는 추워지니까.][..그랬군요.][더 이상 물어볼 건 없지?][네, 됐어요. 고마워요.][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소. 바닷바람 너무 쐬지 말고.. ] 당신, 정말 잘 있어야 돼. 유산한 것도 출산한 것처럼 똑같이 관리를 잘 해 줘야 한대. 찬 바람 들어가면 안 좋고 너무 심하게 움직여도 안 좋고.- 그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모조리 꺼내 보이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은지 그녀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난 며칠 후에나 올거요.][일 주일..?][더 걸릴지도 모르지. 운좋게 금방 올 수도 있을테고.][..][그때 우린 꼭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소. 이건 명령이오. 갈 때 가더라도 날 보고 갔음 하오.][..][당신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조심해 가세요.] 부질없을 테지만 기다리고 있을께요. 그녀는 그의 차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허리를 굽혀 불쏘시개를 집어넣고 나니 전신이 뻐근했다.재영은 주먹을 쥔 채로 팍팍한 허리와 다리를 두드려댔다. 아무도 보지 않은 채 며칠이 흘러갔다. 혼자 있을 때의 시간은 야금야금 파 먹혀 들어가는 과자 부스러기 같이 빠르게 지나간다. 해뜨고 지는 것조차 그녀에겐 그저 좋은 구경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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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장작불이 타들어 가는 걸 보았다.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참이었다. 네 잔째.. 오늘은 이것으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잔을 더 마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러다 보면 자연히 늦어지는 취침시간은 늦잠으로 인해 일출이라는 좋은 선물을 놓치게 할 것이 뻔했다.재영은 머그잔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개켜 놓았던 이불을 펴기 시작했다.오늘도 역시 벽난로 앞은 그녀에게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잠자리가 되어주리라..푹신한 러그 위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간 그녀의 눈은 별로 지체할 시간도 없이 감겨졌다.깊이 잠든 그녀는 윌이 새벽에 문을 따고 들어온 것도 몰랐다.

윌은 아주 피곤했다.이 주일이 소요되는 방송일정을 열흘만에 소화하기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사람들 관계를 정리하는 따위의 개인적인 일 또한 예삿일은 아니었을 터였다. 특히 퍼니와 끝낼 때 그는 가지고 있던 인내란 인내는 모조리 바닥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림으로서 그를 당황케 했지만 윌은 그 눈물에 속을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관계엔 진실이라곤 하나도 섞여있지 않았고 그런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퍼니는 아무리 눈물을 짜내도 그가 꼼짝않고 있음을 알아챈 즉시 거짓눈물을 닦으며 그의 인생에서 나가 버렸다. 유감과 욕설을 동시에 퍼부으면서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았던 그 당당함이란.. 도시에서의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선셋으로 차를 몰았다.피곤해서 안 된다며 한사코 만류하던 마티와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이든의 얼굴을 떠올리면서.벽난로가에 남아 있던 장작을 마저 집어넣으며 자신의 쉴 곳을 찾던 윌의 눈에 이불을 덮은 채 자고 있는 J가 보였다.오랜 고통에서 헤어나온 듯 편해 보이는 모습.. 그는 더 이상 졸음을 방치할 수 없었다.처져가는 눈꺼풀은 그에게 어떤 반항도 하지 말고 편히 누울 것을 종용했다.잠시 후 결심을 굳힌 그는 그녀의 옆에 살짝 미끄러지듯 몸을 눕혔다. 이불 속은 따뜻했고 그녀의 숨은 고르고 얕았다. 그는 그 채로 여자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무언가 한껏 충족된 느낌은 잠에 들어서까지 그를 만족하게 했다.

윌은 눈을 떴다. 자신의 몸을 얌전히 덮고 있는 이불은 분명 그녀의 솜씨였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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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의 불씨는 보이지 않았지만 방금 전에 꺼진 듯 실내에 온기는 남아 있었다. 부엌 쪽에서는 향긋한 커피 내음이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필시 그녀가 해 놓은 것일 테지.. 식탁 위는 정갈했다. 퍼콜레이터에선 예상했던 대로 커피가 끓고 있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걸까.. 그는 반잔의 커피로 속을 채우고 집을 나섰다. 여기에서 갈 곳은 바닷가뿐이 없었다. 그녀는 예의 그 바다에서 아침을 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찬 데 왜 나왔소?] 등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재영은 곧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네요.][춥지 않아?][응, 네, 그래요. 당신 점퍼 그냥 걸쳐입고 나왔는데 괜찮죠?][음, 그래. 당신 맘대로 입고 하고 다녀. 여기에선 당신이 뭘 어떻게 하든 다 �I찮아.][말이라도 고마워요.]그녀의 말투는 조용했다. 윌은 다시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또 떠난다는 말을 할까?[참 좋죠..] 그녀는 화제가 끊기는 것을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어찌됐건 이번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당신 왜.. 떠났었소?][...][그 아침에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기만 했다면 그렇게 쉽게 가지는 못했을 거요.][...][내 말 듣고 있는 거요, J? ][..][아이 가졌을 때 왜 연락 안 했소? 날 두고 가면 그대로 보지 않을 셈이었던 거야, 그런 거요?][..][답답해, 말을 해 봐. 왜 그냥 갔어?][..난 여기에서 해뜨는 게 정말 보기 좋아요.][J!][..나 귀 안 먹었어요. 그리 소리 지르지 말아요.][..그럼 어찌 된 일인지 말해 봐요.][글을 끝낼 때쯤 서울에서 급한 연락이 왔었어요. 집으로부터 온 거였죠. 일이 생겼댔어요. 내가 있었어야 했죠.][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소?][언니 내외가 여행을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대요. 부랴부랴 서울에 가니까 장례도 다 끝나 있었고.. 조카 하나가 있었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이쁜 아이였는데.. 그애도 많이 다쳐 있었어요. 그 아이를 돌봐야했죠. 넋이 나가버린 엄마 대신에 제가 그 아이를 봤어요. 아이는 많이 나아지는 것 같았고.. 난 병원서 퇴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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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 그 아이 내 아이로 만들 결심까지 했었어요. 그런데...][그런데..?][이모가 봐주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었나 봐요. 급격히 나빠져서 골골 앓더니 즈이 엄마 아빠 곁으로 가더군요.][..][장지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몸이 말을 안 들었어요.][그때..][네, 그래요. 우리..당신 아이였어요. 내 안에 내가 아닌 다른 생명체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게 참 신기하기도 했고.. 그랬어요. 언젠가는 당신한테 연락도 하리라고 생각했었죠. 몸 생각해서 드라마 일도 제쳐두고 영화 번역하는 거에만 매달리면서 집에 있었어요. 정기검진 갈 때마다 의사는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경고를 했지만 난 문제없다고 말했어요. 그때는 아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훗, 결국 이 꼴이 되어 버렸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난 아이들이랑은 인연이 없나 봐요. 조카도 가 버렸고.. 우리..의 아이도가버렸으니까 말이예요. 난 정말 좋은 엄마가 돼주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여러 가지를 물어와도 절대 귀찮아하지 않고 꼬박꼬박 대답해 주고 그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늘 집에 있으면서 맛난 음식으로 반겨주면서 우리 아이들 왔니 웃어줄 수 있는 그런 엄마가 돼 주고 싶었는데..]말끝을 흐리는 담담함속에 숨은 슬픔이 그의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그만..이제 그만해도 돼. J, 제발 더 이상 당신 자신을 괴롭히지 마.] 안타까움이 묻은 그의 음성은 이상하게 젖어들고 있었다.[당신은 모르고 있었죠? 내가 당신 닮은 푸른 눈동자의 아이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아이가 내 안에 있었을 동안 난 당신을 볼 수 없었어도 참 행복했었어요.][J..제발..]눈가에 이슬을 매단 채 아침햇살을 받는 그녀의 모습은 처연했다. 그녀는 습관처럼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이 못 지켜서 미안해요. 그 말 해주고 싶었어요.][J..] 그는 비어 있는 손을 뻗어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 넓은 품에 안아서 그동안 겪었던 슬픔을 모두 잊고 자신이 간직해왔던 사랑으로 보듬어줄 수 있기를 바랬다.그러나 그녀는 그에게서 비켜났다. [아니, 아니예요.][왜.. 왜?][이젠 아니예요. 이제 여기에 있지 않을 거예요. 나 돌아갈 거예요.][무슨 소리야, 당신? 나 사랑한 거 아니었어? 그래서 돌아온 거 아니었어?][.. 많이 사랑했어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죠. 하지만 그게 다예요.][더 이상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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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못하는군요, 벤.] 그녀가 슬픈 미소를 띠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당신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사랑하는 데 더 이상 줄 게 없어서 남아 있는 게 없어서 그래서 돌아가는 거예요. 그걸 몰라요?][아니, 난 모르겠어. 사랑하는 걸로 됐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해? 나 하나에 대한 사랑만 있으면 되지, 왜 다른 게 필요하냐고..][당신은 나, 사랑하나요?]그녀의 물음에 그는 잠시 말문을 여는 걸 잊어버렸다. 솔직히 본능의 목소리에만 급급했을 뿐 자신의 감정이 어떤 건지는 정의 내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없으면 자신은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가 입을 열 즈음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니 됐어요. 이런 거 묻는다는 건 지금은 의미가 없겠죠. 당신이 나 사랑 안 해도 좋아요. 난 당신 만난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그 기억은 두고두고 날 행복하게 만들겠죠.][J, 난 당신 없으면..][애쓰지 말라니까요. 괜찮아요. 나 그냥 편히 가게 해 줘요. 쉬운 부탁이죠? 당신이 들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정말 갈 생각이군..][돌아가서 짐 챙길게요.]그를 해변에 남겨 둔 채 집으로 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슬플 정도로 씩씩해 보였다. 그 낯선 느낌이 그를 더 힘없게 만들었다.그는 그녀를 막을 힘이 없었다. 아니, 그녀를 가지 못하게 막는 건 부당한 일인지도 몰랐다.절대 보낼 수 없음에도 그는 그녀를 보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있으면 당신을 공항까지 태워 줄 택시가 올거야.]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이야기한다. 그녀를 보면 못 가게 막을 것 같아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당신이 태워다 줄 줄 알았는데..][미안해.]택시가 왔는지 밖에서는 경적소리가 울렸다. 조그만 여행가방을 든 재영은 여전히 등 돌린 채 서 있는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나 가요, 벤.][잘 가.] 신경을 바스러뜨리는 듯 무뚝뚝한 말투..[정말 나 보지 않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따스한 배웅 받고 싶은데..][잔인하군, 당신. 뭘 더 바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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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돋친 그의 말에 그녀는 쓸쓸히 집을 나섰다. 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났을 즈음에야 그는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택시는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그의 전신으로 자괴감이 흘렀다.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는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오, 맙소사. 벌써부터 당신이 그리워.J, 나 당신 안 보고 어떻게 살아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5개월 후, 서울. 여의도김PD는 투덜거리며 방송국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한참 점심을 기다리는 중에 걸려온 전화는 그를 황당하게 했다.밑도 끝도 없이 바쁜 일이 생겼으니 들어오라는 국장의 지시는 그의 입을 퉁방울만큼 나오게 했다.젠장, 내가 즈그 전속 쫄다구인 줄 아나?국장만 아니었으면 내 손에 반쯤 죽는 건데..주먹이 운다. 주먹이 울어그나저나 오늘따라 이 길이 참 길게 느껴지는군.갖은 불평 끝에 도착한 드라마 국은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 연상될 정도로 시끄러웠다.국장실 문은 여느 때처럼 닫혀 있었으나 방송국 안의 사람들이란 사람들은 죄다 그 앞에 모여들어 있는 것처럼 붐비고 있었다. 이건 또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는 이 사람 , 저 사람을 훔쳐보다가 곧 아르바이트생들끼리 흥분해서 모여 있는 걸 발견했다. 저것들까지 모여있네..허, 참. 진짜 무슨 일이야? 그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야, 학생아, 무슨 일이냐?][어우, 김PD님 왜 이제야 오세요? 국장님이 얼마나 찾으셨는데요. 빨리 들어가 보세요.][아, 글세 무슨 일이냐니까...][그 사람이 왔어요, 그 사람이.][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군데?][왜 있잖아요, 재영 언니 작품에 출연했던 사람.][그런 사람이 한 둘이냐?][아휴, 참. 영화요. 영화. 왜 이름이 생각 안 나지? 유명한 사람 있는데..]그에게 잡힌 아르바이트생은 생각이 안 나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영화?]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야?정말 궁금했지만 더 이상 망설이고 있다간 국장이 불호령을 내린다는 건 뻔한 이치였다. 그 양반, 누굴 불러들이고 있는데 이리 꼭 싸매고 도는 거야? 그는 자신의 등뒤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는 것을 알아채자 기분이 묘했다.조바심과 호기심 사이에서 오가던 그였지만 결국은 그의 호기심이 이겼다. 그는 국장실 방문에 조심스레 노크했다. [들어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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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서 작가 주소 발설하면 안 된다니까요.][이보게 김PD. 볼일 있다고 미국에서 찾아온 손님을 그냥 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부탁드리겠습니다. 좀 알려 주시오.][아우, 정말 난감하네. 서 작가가 함부로 가르쳐 주면 인연 끊는다고 그랬는데.. 아, 진짜. 끊을 수도 없고 안 가르쳐 줄 수도 없고..미치겠네.][거 봐, 김PD. 자네도 가르쳐 주고 싶지. 이왕이면 가르쳐주고 미치라고.][아후, 진짜..][김 선생.. ]김PD는 자신의 앞에 선 푸른 눈의 이방인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호소하는 듯 크게 벌어져 있었고 김PD는 고민하는 걸 멈춰버렸다. 이 사람한테는 알려줘도 되겠군. 일단 결정을 내리고 나니 거짓말처럼 갈등이 사라져갔다.[까짓 거, 좋습니다. 가르쳐 드리지요.][그게 정말입니까?][적어드리겠습니다.]이런 일 없기로 약속했는데..휴, 서 작가 얼굴을 나중에 어찌 보나.

재영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당장이라도 해변에 내려가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안고 있는 갈색봉투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시내에서 장을 봐오던 길..특별히 입맛 당기는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굶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자주 드나들어 단골이 되어버린 빵집에 들어가서 몇 가지를 구입해왔던 것이다.언덕으로 갈수록 거세지는 바람에 입고 있던 치마가 나부꼈지만 그녀는 구태여 옷자락을 잡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맞는 꽃바람이 바싹 세워진 경계까지 풀어놓았을까.그녀는 가지런히 정리 된 돌담주위에 누군가 서 있는 것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일일이 보고 있었다.드디어 그녀를 보았다.

잘 살고 있었구나.. 건강하기는 할까..나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좋아하기는 할까.문은 닫혔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봐야 했다.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떨렸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 그녀를 찾아 들어가는 거야.그러고 말해야지. 당신 찾으러 왔다고...

그가 막 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문소리가 나더니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바다를 보러가려 했던 걸까. 쇼올을 두른 그녀는 마당을 벗어나다가 몇 미터 밖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얼은 듯이 멈춰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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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쇼올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역시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벤..벤..]흐느낌이 봇물처럼 흘러나왔지만 그녀의 얼굴은 웃음으로 환해져 갔다. [어떻게..어떻게 당신, 여기까지 왔어요? 당신이 왜 여기 와 있는 거예요?][당신이 나한테 오지 않으니까. 나라도 당신 곁에 와야 했으니까.][..벤..] 앞 뒤 잴 것도 없이 그에게로 달려간 재영은 그 새 팔을 벌리고 섰던 윌의 품에 안겼다. 희고 자그마한 손이 그의 목이며 입술을 더듬더듬 매만져 갔다.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잊지 못해서 매번 꿈에서 깨어나면 베갯잎을 흥건하게 적시게 했던 남자가 그녀를 다시 안아주고 있었다.눈물이 마르지 않고 계속 흘러 내렸다.나직한 웃음소리가 그녀를 포옹한 가슴을 떨리게 했다. [울지 마. 바보 같은 아가씨야. 나 버리고 갈 때는 언제고 왜 당신이 울어?][보고 싶었는데.. 당신 오니까 많이 속상해서..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요.]그의 손이 길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나도 그랬어. 나도 당신 많이 보고 싶었어.]길쏨한 집게손가락이 그녀의 볼 위를 스쳐 지나가자 재영은 겸연쩍게 웃으며 그에게서 벗어나 눈물을 마저 닦아냈다.흐뭇한 표정으로 그녀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윌은 다시 그녀를 끌어 당겨 가만히 안아 주었다. [어떻게 왔냐고 했지? 왜 여기 왔냐고 했지? 말해줄게. 당신 없으면 내 심장이 살아 있지 못할 것 같아서 왔어. 어딘가 내 반쪽 띠어놓고 살 수 없어서 왔어.][..][나 이제 여기 왔으니까 다시는 버리면 안 돼. 알았지?]다짐하듯 명료한 말에 그녀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 고이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비어져 나오는 울음이 그를 웃음 짓게 했다. [당신 또 우는 거야? 순 울보였구나.][..울보라고 해도 괜찮아요. 당신 곁에 있으니까. 그래도 괜찮아요.]잠시 그녀를 떼어냈던 그의 입술이 재영의 이마에 닿았다. 따스하고 촉촉한 입김이 내려지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감자 곧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짭짤한 눈물이 묻은 아랫입술을 핥던 그는 살짝 떨고 있는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것으로 덮어 버렸다. 꿀 냄새가 나는 듯 달콤한 타액이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오고 그의 입 속으로도 바람을 닮은 향기가 들어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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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건 순결하고도 경건한 사제의 입맞춤과도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그의 등에 놓여졌던 그녀의 손은 그의 허리를 꼭 감고 있었다.[J..당신 잘 들어야 돼.][네.][나. 이제 영원히 당신 거야. 당신 없는 곳엔 나도 없는 거고 우린 어딜 가든 항상 같이 있는 거야. 우리 둘이 여기서 살 거라고.][벤..][쉿!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말아. 먼길로 돌아왔으니까 우리 조금은 쉬어도 되겠지.][하지만 당신..영화는 어떡하고요? 그립지 않겠어요? 나중에 원망 않겠어요?][뭐가 걱정이야. 우리 둘이 있는데. 우리 둘이 함께 있으면 어떤 일도 해 나갈 수 있을 거야.][...벤, 정말 당신 사랑해요. 당신이 내 남자여서 정말 감사해요.][나도 당신 사랑해. 내 작은 울보 아가씨.]

뒷 이야기.

오프닝 시그널과 함께 방송이 시작되자 무대 뒤편에서 한 사람이 뛰어 나왔다.사람들은 그를 보고 박수를 치며 연신 그의 이름을 환호했다. [제이 레노, 제이 레노.][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미국 시민 여러분 오늘 하루도 안녕하십니까?][네.][여기 모이신 분 중에 혹시 들쭉날쭉이 되어버린 정당의 치기배들 때문에 다치신 분은 없으시겠죠?]왁자한 웃음소리와 함께 밴드의 가벼운 음악이 연주되었다. [오늘의 초대손님은 여러분이 그동안 너무 보고 싶어했던 우리들의 영원한 스타, 바로 베냐민 모건입니다.] 요란한 함성을 환영으로 받으면서 출연한 윌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사회자 옆 소파로 자리했다.

[부인되시는 분이 한국여성이라고 들었는데요.] [네. 아주 예쁘고 착한 여자입니다.] [이런, 이런.. 칭찬이 대단하군요. 그 분이 당신의 재기작을 썼던 작가라는 소리가 있던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대부분의 할리우드 남성들은 그들과 필적할 만한 인기를 누리는 여배우들과 결혼을 하는 게 통례입니다만 당신은 좀 특별하군요. 왜 당신은 지금의 아내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았죠?]순간 웅성대던 스튜디오는 조용해졌다. 모두는 자신들이 사랑하는 대배우가 그의 한국인 아내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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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녀는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고 좋은 엄마가 될 소질을 많이 갖고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제가 그녀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는...]

방송이 나간 다음날 각 신문사의 표제는 일제히 윌리엄 베냐민 모건의 특별한 아내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황홀한 눈빛의 사나이 모건, 그가 한국인 아내를 사랑하는 법 최근 시사회를 가졌던 재닌 감독의 영화 [My funny Valentine]으로 활동을 재개한 영화배우 모건은 제이 레노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대해 밝혀 화제가 되고 있다. 프로그램 관계자에 따르자면 이날 그는 자신의 영화얘기보다는 아내 자랑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다음은 왜 그녀를 선택했느냐는 제이 레노의 짓궂은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그녀는 저만을 보아 왔습니다. 한번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당신과 나는 아주 오래전에 못다 이룬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이천 오 백 만년이나 되는 시간을 거슬러서 만나지게 됐다라고요. 전 그 말을 믿어요. 아내가 제게 특별하듯이 저 또한 그녀에게 얼마나 특별한 지 알고 있거든요. 제가 그녀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는 다른게 아닙니다. 그건 바로 제가 그녀의 남자이기 때문이죠.] 영자신문을 보고 있던 여자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모래빛 금발에 파란 눈동자를 지닌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윌리엄 베냐민 모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그는 오랜 기다림 끝에 하늘이 보내 준 그녀의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