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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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대륙 남동쪽에 위치한 나라.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맹금류인 독수리가 나라새인 나라. 425년 동안 외국의 식민지였던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 바나나와 파인애플의 나라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카무스타 카(안녕하세요)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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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이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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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대륙남동쪽에위치한나라.

7,107개의섬으로이루어진나라.

맹금류인독수리가나라새인나라.

425년동안외국의식민지 던아픈역사를가진나라.

바나나와파인애플의나라를여러분에게소개합니다.

“카무스타 카(안녕하세요)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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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길라스의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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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대륙남동쪽에위치한나라.”

“에이, 박사님. 범위가너무넓어요.”

“그래? 그러면인심썼다. 7,107개의섬으로이루어진나라.”

굉장한힌트 지만다울이는도무지정답이떠오르지않았다.

“무려425년동안외국의식민지로지배당했던나라.”

아뿔싸, 그래도 다울이의 머릿속은 하얗게 바랜 채, 425라는

숫자가날아다닐뿐이었다.

“맹금류인독수리가나라새인나라.”

“미국도독수리가나라새인데…….”

다울이는우물쭈물말을얼버무렸다.

“허허, 이나라국민을필리피노라하지.”

“아하, 알았어요. 필리핀이구나.”

코박사가다울을격려하듯이어깨를몇번토닥 다.

“근데박사님, 박사님걸음으로언제필리핀까지가요?”

“조금만가면우리를초대한분이마중나올거다. 그가우리

를목적지로데려다줄거야.”

조금 더 가자 풀숲 사이에 널따란 공터가 나타났다. 다울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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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코박사의 등에서 내려와 찰져 보이는 흙을 밟았

다. 그때 다. 갑자기 머리 위가 컴컴해지더니 때 아

닌바람이부는듯했다.

“길라스가온모양이군.”

코박사의 말에 다울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커다란

독수리한마리가착륙을시도하려는듯머리위를맴돌고있었

다. 독수리는 땅에 내리박힐 듯 급강하하다가 몸을 살짝 틀며

공터에무사히내려앉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독수리를 바라보기는 처음이었다. 청회색

눈에서위엄과카리스마가느껴졌다.

“반갑네, 코박사. 내 초대에 기꺼이 응해 줘서 고맙고. 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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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라스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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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자네가 말한 한국인 학생이군. 만나서 반갑다. 나는 길라

스라고한다.”

날카롭고 냉정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친절하고 따뜻한 말

투 다.

“안녕하세요. 저는다울이라고합니다. 근데길라스라는이름

이참특이하네요.”

“나 필리핀독수리 길라스(Gilas)라는 이름 속에는 우아함, 민

첩함, 강함, 리함, 고매함, 날카로움 등의 의미가 담겨 있지.

자, 이제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아

름다운땅필리핀으로가볼까?”

“우리 코박사님은 한몸무게 하시니까 걸어가시고 저만 신세

를좀져야겠네요.”

다울이장난기가득한얼굴로길라스에게말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바짝 얼어 있더니 인석이 이젠

맞먹으려드는구먼.”

코박사가빙 빙 웃으며길라스에게말했다.

“허허, 그런가. 쉬엄쉬엄가보지.”

비행기를 타는 것과는 또 달랐다. 피부에 직접 부딪치

는 바람과 함께 필리핀독수리의 날갯짓 하나에도

감전되듯 몸이 찌릿찌릿 반응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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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졌다. 너무나도 생생한 감동 그 자체

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육지의 모습도 새로

웠다. 한참을날아가자, 초록색산사이로뱀이기

어가듯구불구불하게난길이보 다.

“나라전체의원시림90% 이상이파괴된필리핀에서

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 땅을 덮고 있던 숲이 모두

사라지게되면나길라스와동료들도더이상살아남지못할거

야.”

조금은비장하게까지들리는길라스의목소리에다울이는자

신의잘못이기라도한양미안한마음이들었다. 그래서공연히

화제를돌렸다.

“필리핀의역사가궁금해요.”

원시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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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역사는 보르네오 출신의 다투족이 피나이섬으로

상륙했던 13세기부터 시작되지. 필리핀에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시기는30만년전이고, 현조상은2만 5,000년전아시

아본토로부터이주해온것으로추정된단다. 1380년경에는인

도네시아나말레이시아에서도많이이주해왔다고해.”

“코박사님 말 으로는 필리핀이 외국의 오랜 식민지 다고

하던데요.”

“1521년 스페인 사람인 마젤란이 상륙하면서 서방세계와 첫

인연을 맺게 되지. 1565년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식민정책으로

많은 갈등을 겪다가 끝내 1571년에 이르러 완전한 스페인의 식

민지가되었단다.”

그때 코박사가 길라스의 설명에 이어 아래에서 한마디 덧붙

다.

“19세기부터 필리핀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지. 1898년 스페인

과 미국과의 전쟁 당시 미국 편에서 싸우게 돼. 결국 스페인이

져서 필리핀의 독립이 선언되었지만, 미국과의 마찰로 진정한

독립은 1946년에야이루어지게된단다.”

“우리한국도한때일본의식민지로있었던슬픈역사가있는

데필리핀도그랬군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필리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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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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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점령아래있었지.”

길라스가 무거워진 분위기를 털어 버리려는 듯 목소리에 힘

을실으며말했다.

“바로크풍의 가톨릭교회는 스페인이 들여온 유럽 문화의 상

징이고, 근대적인 학교 시설은 미국 문화를 대표하고 있지. 그

래서 필리핀은 아시아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서문명의 결합에

의한독특한문화를이루고있단다.”

그때 길라스가 기류를 타며 구름 쪽으로 상승하자 소리치듯

말했다.

“아, 저기 내려다보이는 곳이 내 고향 민다나오섬이

란다. 내 동료들이가장많이사는곳이지. 루손섬

보르네오섬사진

바로크풍카톨릭교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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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으로서, 루손섬과 함께 필리핀 면적의

65%를차지하지. 파인애플과바나나농장도많고.”

길라스는 다울이를 태운 채 한 바퀴를 돌아 하강하며 코박사

위로가까이날았다.

“필리핀은바나나와파인애플의나라라고도하지. 길라스, 그

왜파인애플의유래있잖소. 그 이야기를우리다울이에게들려

주게.”

“그럴까? 험험, 긴얘기니목소리좀가다듬고.”

길라스가코박사의제안에웃음기어린목소리로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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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에 리오와 마셀라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두

사람사이에는루피나라는딸이있었다. 아버지는딸이하는대

로 마냥 내버려두는 식이었고 그 때문에 부부 싸움이 잦았다.

루피나는 거울 앞에서 얼굴을 단장하거나 정원에 가서 여러 꽃

들을 살피는 것 외에는 도통 하고자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

다. 집을정돈하지도않았고어쩌다어머니가시키는일이있어

도어머니가만족해할만큼해내지못했다.

어느 날, 마셀라와 에 리오는 루피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는지고심했다.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루피나에게 집안일을 가르칠 수 있을

지모르겠어요.”

마셀라는화가나서말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요? 우리 집에는 시중드는 사람들이 많지

않소?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 시키면 되지 않

소? 왜그사람들이해야할일을루피나에게원하는거요?”

에 리오가물었어.

“어떻게 당신 딸에게 여자로서의 일을 가르치는 것이 당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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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는나쁜일이되나요?”

화가날대로난마셀라가말했다.

“너무 성내지 마시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

람들이 해도 되는 일을 왜 루피나에게 가르치고자 하냐는 것이

오. 우리가일하는사람들에게돈을왜주고있냐는말이오.”

에 리오가부인을달래듯이말했다.

“당신이야기는, 일하는사람들이있다고우리가아이에게가

르칠것이없다는거예요?”

마셀라가물었어.

“아까나는그렇게얘기했소.”

“그러면우리가일꾼들에게지불할돈이없게되면요?”

마셀라는계속물었다.

“우리는부자이기때문에그럴일은없소.”

에 리오가답했다.

에 리오의말이마셀라를더욱화나게했다.

“당신아이가말을안들어내가화나지않았나요! 당신 같은

부모는처음봤어요. 나가버려요!”

마셀라는몸을떨면서말했다.

대화가 더 이상 심각해지기 전에 에 리오는 이미 집을 빠져

나오고있었다. 그는산책을나갔다가아내가진정되면집에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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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려고했다.

마셀라는 남편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잊어버리기 위해 바느

질을할참이었어.

“루피나!”

마셀라는루피나를불 다.

“바늘과실상자를가져다주렴. 옷을기워야하거든.”

마셀라는오래기다렸으나루피나는방에들어오지않았다.

“루피나!”

마셀라는다시딸을불 다.

“귀가 먹었니? 내가 말하는 것 안 들리니? 바늘과 실 상자를

가져다주렴. 바느질을해야하니.”

루피나는 거울 앞에서 얼굴을 단장하고 있다가 그제야 대답

을했다.

“조금만기다려주세요. 거의끝나가요.”

마셀라는화가나는것을참았다.

“어떻게됐어? 아직도안끝났어?”

마셀라는기다리다가다시물었다.

“바늘과실상자를가져다주렴.”

마셀라가 다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루피나가 방에 들어왔

는데빈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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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과실이든상자를보지못했어요.”

루피나가답했다.

“네책상에있는상자를보지못했단말이니?”

마셀라의목소리가높아졌다.

“보지못했다고말 드렸잖아요.”

루피나가화가나서대답했다.

“왜너는눈이없니? 눈앞에가져다주지않으면볼수가없는

거니?”

역시화가난마셀라가물었다.

루피나는 방 밖으로 나가서 정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외치듯

이답했다.

“네, 눈앞에들이대지않으면볼수가없어요.”

마셀라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루피나가 여전히 정원에서

꽃들을보고있는것이그녀에게보 어.

“주님, 내 자식이 식물의 여왕이 되어 나에게 공손하지 않아

도 되게 할 수는 없나요? 왜 그녀가 눈이 100개인 식물이 되게

하지않나요?”

갑자기 루피나가 사라졌다. 마셀라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서

봤으나그녀의딸은어디에도보이지않았다. 대신그동안없었

던새로운식물만이보 다. 잎이기다랗고가운데있는잎에는

파인애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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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가맺혔으며위는왕관모양처럼생긴것이었다. 이 열매에

는수많은눈이달려있었다.

“도대체무슨일이생긴것일까?”

“그딸이그러니까파인애플로변한거군요?”

다울이너무쉬운추리문제라는듯큰소리로말했다.

“하하, 이야기인즉그렇지.”

길라스의긴이야기가끝나자코박사가나섰다.

“필리핀에서는바나나나파인애플이국가적으로

주요한수출품중의하나란다. 그러면서쌀이나감

자 등의 주식을 생산하는 데 이용되었던 농지들이

수출작물을생산하기위한땅으로변화했지. 필리

핀전체농지의약 55%가바나나와파인애플같은

작물재배에쓰인다는구나.”

“코박사님말이맞다. 내가한마디거들자면, 예

전에는 수출할 정도로 벼농사가 활발했지만 지금

은 공급이 부족하여 태국

이나 베트남으로부터 쌀을

수입하게 된 것도 그런 이

유에서란다. 또경지들이대

농장(하시엔다)으로 변화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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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나무사진

하시엔다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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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많은 농민들이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지. 그 때

문에 수입이 줄어든 농가에서는 아이들까지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생겨났단다.”

“바나나값이싸져서많이먹을수있게되었다고좋아하기만

했지그런사연이얽혀있는줄은몰랐어요.”

“너, 지금우냐?”

코박사가눈시울이붉어진다울이의마음을어루만져주려고

괜스레장난을걸었다.

“울긴요, 눈에먼지가들어가서그래요. 박사님도참…….”

다울이얼른화제를돌리려는듯질문을던졌다.

“코박사님말 으로는섬이 7,000개가넘는다던데모두사람

이살고있나요?”

“대부분 무인도에 불과해 사람이 사는 섬은 약 1,000개뿐이

란다. 이름이붙여진섬도2,700개정도지.”

“필리핀은진정한섬나라군요.”

다울의 지나치게 진지한 표정에 코박사와 길라스는 빙그레

웃어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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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라스, 저녁초대시간에는늦지않겠나?”

“걱정말게, 코박사. 우리 필리핀에선시간엄수가절대예의

가 아니라네. 식사 초대에 정시에 나타나는 손님은 먹을 걸 밝

히는 성질 급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지. 보통 15분은 지나야 되

지만자네같이특별한인사를데리고갈때는한두시간늦어도

이해를해준다네.”

“그것참, 편리한예법이군그래. 허허.”

“그보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우선적이고 중요한 가치 하나를

말해주겠네.”

“그게뭔가?”

“히야(hiya)라고수치심, 창피함정도로옮길수있겠군.”

“히야?”

“필리핀 사람들이 뭔가를 부탁하거나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

해야 할 때,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얼굴에 미소만 짓는 것은

바로히야때문일세. 필리피노직원이맡은임무를제대로이해

하지못하거나의문이생겨도가만있는것도히야때문이지. 만

약 필리핀 사람이 당신 의견에 반대하더라도 침묵하는 것도 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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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때문이고. 많은 사람 앞에 나서게 될 때의 부끄러움을 뜻할

때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나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행동을

할때느끼는‘수치’나여러사람앞에서망신당했을때의당혹

감이나 굴욕감을 표현할 때도 쓰이지.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히야’를 느끼는 것을 꺼리듯 다른 사람을 당혹하게 하는 것도

피하려고 하네.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해야 할 때면 여러 가

지다른상황을이유로들거나제3자를통해서대신이야기하기

도 하지. 사회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행동을 계속하는 사람한테

는‘히야가 없는’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한다네.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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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야는다른아시아국가의‘체면’이나‘수치’처럼개인적인감

정을 넘어 집단이나 사회의 규칙을 따르게 하는 기제가 되기도

하지. 사실 히야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네. 한 문화인

류학자는 히야를‘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거나

모르는 체 그대로 넘길 수 없는 잘못을 저질 을 때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정의했다네. 어쨌든 히야는 필리핀에 분명

히 존재하며, 히야를 못 느끼는 사람은‘왈랑-히야(walang-

hiya: 창피한줄모른다)’라는심한욕을듣게되지.”

“그정도라면히야가없다는지적을받은사람은이른바왕따

라도당하겠군그래.”

“그렇지. 히야가 없어서 가족이나 친족에게 외면당한 사람은

사회적으로추방당한거나마찬가지지.”

“아모르-프로피오(amor-propio)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

네. 자존심또는명예정도로표현할수있겠지? 필리핀사회에

서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게 필수 덕목으로 꼽힌다고

하더군. 지금 자네 말을 듣고 보니 히야와 아모르-프로피오가

굳세게맞물려있는걸짐작하겠네.”

“제대로짚었군. 자네말이옳네.”

코박사와 길라스가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다울이는‘수치심’

이나‘자존심’이이란성쌍둥이나마찬가지라는생각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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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후필리핀의주요도시중하나인마닐라에도착했다.

“여기서우리를초대한카롤네집까지는지프니를탑시다.”

길라스가날개를접으며말했다.

“지프니요?”

다울이의반문에길라스가설명을곁들 다.

“대중교통 수단이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쓰던 4인

용지프차를개조하여만든게시작이었지.”

그러고 보니 다채로운 색과 디자인으로 꾸며진 차들이 거리

바닐라시티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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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누비는게눈에띄었다.

“저게지프니예요?”

“그렇단다. 몸집이작은편이라교통체증이심한도심에서나

좁고구불구불한산길을운행하는데유리하지.”

퇴근 시간이라서일까, 몇몇 승객들은 지프니 뒤에 매달려 가

는모습도보 다.

“자, 우리도타볼까?”

코박사와길라스, 다울이는거리한쪽에서있던지프니에다

가갔다. 지프니 외부에는 다양한 색을 이용하여 민화가 그려져

있었다.

“경치나인기있는인물, 동물그림등도그려넣는경우가많

지. 특히말그림이많은데, 이는지프니의원형이었던칼레사

라는운송수단을말이끌었던데서유래한단다.”

길라스가지프니에올라타며간단하게설명했다.

20명가량 되는 승

객이 양쪽으로 길게

하나로 만든 좌석에

타고 있었다. 빽빽하

게 앉은 승객들은 기

사에게 요금을 건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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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니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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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고기사가주는잔돈을다른승객에게전달하기도했다.

지프니내부에는마리아상, 산토니뇨(Santo Nino: 어린 예수) 그

림 등이장식되어있었다. 운전석옆에는‘화장실갈때빼고는

언제나 부지런한 기사’, ‘아침에는 잔돈으로만 내주세요’라는

재미있는문구가붙어있었다.

“어떤 기사는 자칭‘잘생긴 기사’라는 문구를 붙이고 다니기

도한단다.”

길라스의 말을 들으며 차 내부를 꼼꼼히 둘러보노라니 컴퓨

터에서 떼어낸 CD 재생기와 오디오에서 떼어낸 스피커가 보

다. 아까부터귓가에흘러들어오던음악의진원지인듯했다. 내

부조명도재활용한물품인듯했다.

“주변의 작은 것들로 재조립하는 창의성과 손재주는 지프니

뿐만아니라필리핀사람의특징이기도하단다.”

다울이의 눈길이 머무는 곳을 따라가던 길라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차량 수가 엄청나게 는 데다 오래된 엔진으로 오염물

질이많이배출되어골칫거리지. 일부관광도시에서는전기로충

전해서갈수있는지프니들이개발, 운행되고있기도하단다.”

지프니가 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인 듯한 곳에 길라스와 코

박사일행을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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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라스선생님이시죠? 저는카롤의여동생입니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한 필리핀 여성이 길라스에게 말을 걸어

왔다.

“아, 반갑소. 이쪽은태국의코박사, 이쪽은한국의다울학생

이오.”

“카무스타카(Kamusta ka: 안녕하세요).”

코박사가 외국어에 능통한 학자답게 필리핀어인 타갈로그어

로매끄럽게인사를건넸다. 다울이는코박사옆에서한국식인

사로고개를숙여보 다.

“마부하이(Mabuhay: 환 합니다).”

카롤의 집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카롤의 여동생 말로는

서로 맞붙어 있는 세 집에서 카롤의 6남매 가족에 부모까지 모

두여덟가구, 총 34명이같이살고있다고했다.

“어서 오세요, 길라스 선생님. 그리고 코박사님과 다울 학생

도먼길오느라애쓰셨습니다.”

카롤과 일을 나가고 없는 식구들을 뺀 그녀의 가족들이 총출

동하여일행을맞이했다. 모두필리핀의전통복장차림이었다.

필리핀의 전통 옷은 파인애플이나 바나나 잎으로 만든 실을 이

용하여손으로짜서정교하다. 가슴부분에기하학적무늬나꽃

모양의 수를 놓은 게 일반적으로, 현재는 다른 나라에도 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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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졌다.

“옷이화려하면서도멋스럽네요.”

“그래요? 고마워요, 다울 학생. 현재는 면이나 나일론, 비단

등도 소재로 널리 쓰여요. 색상이나 디자인에서도 매우 다양해

졌고요.”

카롤의말에이어길라스가설명을덧붙 다.

“현재의 디자인은 다른 필리핀 문화의 속성처럼 토착적인 전

통에스페인을비롯한서구의 향, 그리고중국을비롯한아시

아의 특성이 골고루 융합된 특성을 보이지. 남성을 위한 옷은

‘바롱타갈로그(Barong Tagalog)’라고불리는데 자그대로는

타갈로그 지방의 옷이라는 의미란다. 깃이 없는 셔츠처럼 생겼

지만 바지에 넣어 입지 않아. 위에 재킷을 입지 않아도 정장으

로인식된다는점에서다르지. 여성의옷은위에입는블라우스

와아래에둘러입는‘사야’를합해‘바롯사야(Baro’t Saya: 바

로와사야라는의미)’라고불린단다.”

“내 입이 또 근질거려서 그렇지 내가 말이 많은 게 아니라는

점을알아다오.”

코박사가벌써부터끼어들고싶어하는눈치더니길라스의말

에이어설명을붙 다.

“필리핀에는 서구의 향을 받기 전부터 파인애플이나 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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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잎으로만든전통의상이있었단다. 남자들은신분에따라서

추장이나 용감한 사내는 빨간색, 보통 사람들은 검은색이나 하

얀색셔츠를입었으며, 허벅지부근은‘바하기(Bahagi)’라고부

르는 끈으로 묶었지. 여성들도 소매가 있는 드레스를 남자들과

같은 색깔로 입었으며, 허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내려오는 장식

끈이 있었단다. 예전에는 파인애플을 주로 이용하는‘바로’와

면이나 아바카 등을 이용한‘사야’의 재질이 달랐지만, 위아래

를 하나로 강조하는‘테르노’스타일의 옷이 유행한 이후에는

재질역시통일되었단다…….”

그러자 길라스도 지지 않는다는 듯 코박사의 말을 자르고 끼

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바롱 타갈로그를 식민 시기 전통과 관련지어

해석하곤 한단다. 바나나나 파인애플의 잎으로 만든 옷감은 얇

고 색깔이 하얗기 때문에 안이 비치게 되지. 이들의 설명에 따

르면 이러한 속성 때문에 무기를 안에 감추기 못해서라고 하는

구나. 이러한 옷은 필리핀인 중에 지위를 얻은 사람들이 주로

입었는데 스페인 사람과의 차별을 이유로 옷을 내어 입는 방식

으로 구분했다고 해. 하지만 사회학자들은 근거가 없다며 이러

한 의견에 반대하여, 옷을 내어 입는 방식은 스페인 시기 이전

부터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에 널리 퍼진 것으로 덥고 습한 기

127

Page 27: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후에적응한방식이라고이야기하지.”

이야기를계속들어보니, 유래에대한논쟁과상관없이현대

에들어서는 1935년 케손대통령이국가를대표하는옷으로선

정한 이후 최고 지도자들이 민족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널리

이용하거나 홍보해 온 듯했다. 현재는 대통령의 취임식, 의회,

내외 손님을 위한 중요 만찬 등에서 이용되고, 결혼식 때 신랑

예복으로입는등가장중요한복장으로자리잡은모양이었다.

“준비한음식드시면서천천히얘기나누세요.”

카롤이 길라스와 코박사를 양손으로 이끌며 집 안으로 안내

했다. 조촐하지만깔끔한음식상이차려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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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8: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이왕이면 필리핀을 대표하는 음식을 맛보시게 하고 싶어 아

도보(Adobo)를 준비했습니다. 소, 돼지, 닭 등의 고기를 양념에

재운 뒤 오래 끊인 요리로, 조리가 편리하기도 하며 상하지 않

고오래보관할수있어필리핀사람들에게가장사랑받는음식

중의하나랍니다.”

카롤의말이끝나기가무섭게길라스가말을이었다.

“스페인어로 원래 아도보는 양념하거나 절인 것을 뜻하는 단

어이며, 아도바르(Adobar)는 절인 고기를 물과 함께 오래 끓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지. 스페인에서는 주로 올리브유, 식초,

마늘, 월계수 잎, 소금 등을 혼합하여 고기를 재우는 방식이었

단다. 하지만필리핀에전해졌을때는식초, 후추, 월계수잎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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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보(Adobo) 사진

Page 29: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에중국에서전해진간장이주요한양념이되었지. 여러가지방

식이 있지만 가장 흔한 방식은 잘게 자른 닭고기나 정사각형으

로 자른 돼지고기를 간장에 재워 놓은 후, 마늘, 후추, 월계수

잎, 식초와 함께 끓이는 거지. 필리핀은 전통적으로 코코넛이나

사탕수수로부터식초를만들어서필리핀만의독특한맛을내왔

어. 또한 재워 놓은 고기는 필리핀의 전통적인 토기인‘팔라욕

(Palayok)’에 담아 두어 맛이 더 배게 한다는 점도 색다르지. 비

사야(Visaya) 지방에서는코코넛유를넣어함께요리하거나매운

고추를함께넣기도하지. 소금과식초에절 기때문에쉽게상

하지않아, 아도보는소풍을가거나잔치를열때유용하게이용

된단다. 필리핀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외국에 나가 있는 필리핀

사람들이가장그리워하는음식중에하나기도하지.”

“사실은제가비사야지방출신이랍니다.”

카롤이살짝웃어보이며말했다.

“카롤의 마닐라 상경기도 드라마틱하지. 다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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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0: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번들려주게.”

“길라스 선생님도 참! 일자리를 찾아 어쩌다 보니 마닐라로

오게된건데요뭐.”

그러자다울이궁금한듯물었다.

“그러면그후에이곳으로가족들을불러들이신건가요?”

“네, 제가자리를잡은뒤에친족들을불 죠. 제가직장에나

가야할때는시누이나여동생이제아이들을돌보고, 휴일에는

제가해외에나가일하고있는언니의아이들을돌본답니다.”

카롤의 아버지는 학교 통학 차량을 운전했으나 나이가 들어

그만두는바람에카롤이모시고산다고했다. 전기나수도가설

비나 이용료가 비싸서 카롤의 이름으로 신청된 전기와 수도를

모든식구들이쓰고있다고도했다.

또다시호기심이생긴다울이물었다.

“근데카롤과길라스선생님은어떻게만나신인연이에요?”

“아, 네, 실은 제가 고향에 있을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 관련

131

Page 31: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주제로강연오신길라스선생님을처음뵈었어요. 그때이런저

런질문으로선생님을귀찮게굴었죠, 제가.”

카롤이그때를회상하는듯아련한시선으로대답했다.

그때 동서양의 요리가 혼합된 아도보를 맛있게 먹던 코박사

가문득생각났다는듯이말을꺼냈다.

“필리핀에서는친척이나친족이라는개념을상당히유연하게

사용한다고 들었네. 아버지 계통과 어머니 계통의 친족에 대한

명칭이다르지않고모두같이불리며, 남편이나아내의친족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부른다고. 그래서 필리핀 사람들에게

가까운 친척과 먼 친척은 촌수의 차이가 아니라 얼마나 가까이

살며 얼마나 자주 왕래하는가에 따라 결정되곤 한다고. 좀 더

자세히설명해주겠나, 길라스?”

“자네말대로네. 부모 양쪽모두의혈통, 그리고결혼한아내

나 남편의 친족도 똑같이 친족 범위에 들게 되니, 상상할 수 없

을 정도로 많은 수가 친척이 될 수 있는 셈이지. 더욱이 필리핀

사람들은세례나결혼식때대부나대모를선택하게되네. 이들

은 유사 친족이 되어 성장기 때 필요한 교육비나 성년 때의 결

혼비용등에대해지원하지. 친족이많은셈이되니, 필리핀사

람들은도움이필요할때이친족을먼저찾게되네. 예를들어,

일자리를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해야 할 사람은 도시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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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2: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133

는 친족의 집에 머물게 되지. 또 해외로 나가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하여아이를기르는것도친족이대신하게되고. 지금의카

롤과마찬가지로.”

“필리핀에서는 얼마나 잘 돕고 의무를 다하는지에 따라 멀고

가까움이결정된다고할수있겠군.”

“그렇지. 정확하게 짚었네. 그와 관련해서 설명할 개념이 하

나있네. 바랑가이라고.”

“바랑가이?”

길라스의 설명에 따르면, 필리핀은 16세기에 스페인 세력이

들어오면서당시스페인국왕이었던필립2세의이름을따서필

리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

이전에도아메리카대륙에는원주민들과그들의사회가존재했

던것처럼, 필리핀에는‘바랑가이(barangay)’라불리는작은집

단들이 있었다. 바랑가이는 한국의‘동’처럼 가장 작은 행정단

위인 것 같았다. 원래 말레이어로 범선을 뜻하는 발랑아이

(balangay)에서유래했다고한다.”

“범선이라면배잖아요?”

다울이 자신을 배려해 설명하는 길라스의 마음을 읽고 더욱

귀기울이며말했다.

“그렇지.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후 1000년경까지 자바나

Page 33: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수마트라섬에서 살던 말레이인들이 이동

할 때 발랑아이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어. 이 배에는 60명에서 90명에 이르는

한 집단이 함께 타고 해안가를 따라 이동

했지. 해안이나 강가는 고기잡이를 통해

육지에서짐승을사냥하는것보다훨씬쉽

게 단백질을 구할 수 있고, 식용이나 생활

에필요한물을얻을수있어한집단이정

착하기 좋은 곳이었어. 이 사회에는 다투(Datu)라고 부르는 지

도자와 그의 친족들이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계급을 이루었고,

이외에평민층, 노예층이존재했어.”

“그런 다투에게는 부족 사람들을 다른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할책임이있었겠네요?”

“다울 학생의 짐작이 옳아. 게다가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공급할책임도지녔지. 반면에부족사람들은다투를따

르며 그에게 조공을 바칠 의무가 있었어. 또한 다투의 농사, 고

기잡이, 집짓기에협력하여노동력을제공해야했지. 이러한바

랑가이 사회는 이동이 편하고 집단의 단결력이 강했지만, 서구

세력이침입했을때대항할정도는못되었어.”

“오늘날바랑가이가차지하는의미는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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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사진(바랑가이)

Page 34: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코박사가질문을던졌다.

“이후필리핀의정치와사회는많이변했지만, 바랑가이는현

재까지도 필리핀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가장 작은 정치, 사회,

문화 단위로 기능하고 있네. 바랑가이 의장과 의원은 지역민들

의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이들은 예전의 전통처럼 지역민들을

보호하고인간적으로후원해야하는의무와책임이크지.”

“그렇군. 한가지더, 아까여성의사회진출이야기가나와서

하는말인데필리핀의여권상황이듣고싶네.”

“필리핀은일찍부터여성이기업, 정부 기구, 대농장등의경

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네. 두 명의 대통령이 여성일 정도

로, 아시아에서는여성의사회진출이가장활발한나라중의하

나이지.”

아까 친족 얘기할 때도 나왔지만 전통적으로 필리핀은 부계

나 모계와 관계없이 동등하게 친족으로 인정된다고 했다. 남녀

모두 동일하게 재산을 상속할 수 있었으

며, 서구 세계와 접촉하기 전에도 여성에

게 남편과 이혼할 권한이 있었다. 추장 중

에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딸이 이 권한을

잇기도 했다. 또한 여성들은 점성가, 의료

인 등으로 활동했고, 대부분이 여성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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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트라섬

Page 35: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바일란(Babaylan)’이라는 적 지도자는 추장의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했지. 바바일란은 적재능이있는사람으로정신과육

체를치료하는일도했지만, 철학자로나현자의역할을하며집

단을통치하는일을도왔다.

“하지만 스페인과 가톨릭 문화가 들어온 이후로는 좀 달라졌

을것같은데?”

“그 후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 짓기 시작했지. 대부분의

고등 교육은 엘리트 남성들에게 집중되고, 여성들이 담당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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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6: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의료나 적 활동 등은 미신으로 여겨 바바일란의 개인적·사

회적 활동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방해를 받게 되었지. 그래

도 이 시기에 독립 전쟁을 이끌었던 가브리엘라(Gabriela) 장군

이나 기타 여성 지도자들은 전투에 참여하여 직접 군을 이끄는

등매우적극적이어서후대여성운동의모델이되었다네.”

“가브리엘라 장군이라면 1762년 일로코스(Ilocos) 지방에서

민군을이끌어스페인군에맞섰던인물아닌가?”

“잘 알고 있군. 독립군을 이끌던 남편 디에고

(Diego)가 죽고 나서 아무도 군을 이끌 사람이 없

자 그녀는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죽

창, 활, 곤봉 등의 구식 무기를 가지고도 산타

(Santa)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스페인군과의 싸움

을 승리로 이끌었지. 그러나 그녀의 존재가 위협

적이 되자 스페인군은 더 강하게 대응했고 비간

(Vigan)이라는 지역에서 5일간 벌어진 전투 이후

그녀는 체포되네. 결국 1763년 처형됨으로써 서

른두살의짧은생을마감했지.”

“현대에들어서는어떤가?”

길라스는 필리핀이 1986년 민중혁명 이후 코리

아키노 대통령, 그리고 2000년 민중혁명 이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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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라장군동상사진)

Page 37: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로요대통령이당선되어, 두 명의여성대통령을보유하게되었

다고 했다. 하지만 상층부 여성의 경제적·정치적 활동과 참여

가 남편이나 아버지의 명성 덕이거나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

한경우가많아여성일반의사회적지위가높다는것을보여주

지는못하는모양이었다. 많은서민여성들이공직을비롯한여

러 직종에 몸담고 활발히 사회 진출을 하고 있지만, 가사와 양

육은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어 생계와 가사를 모

두책임져야하는부담이있다는것이었다.

코박사와 길라스가 주고받는 대화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다

울이물었다.

“제 친구네 집에 필리핀 가정교사가 있는데, 외국에 나가 일

하는필리핀사람도많나요?”

“현재 해외 이주 노동자로 꼽는 필리핀 인구는 1,100만이 넘

어 전체 인구의 11% 정도가 된단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는 의

사, 간호사, 회계사, 건축가 등의 전문직 종사자들이 이주하여

그 사회에서 중산층을 이루고 있고, 중동이나 아시아 국가에는

기계공, 선원, 가사 도우미 등으로서 일하고 있지. 한국의 경우

엔 필리핀 출신의 많은 산업연수생이 가서 일을 배웠거나 배우

고있기도하고.”

“그들이벌어들이는외화도만만치않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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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8: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코박사가한마디거들었다.

“필리핀에서 벌어들이는 외화 중에 가장 많이 비중을 차지하

는 것은, 사실 해외에 나가서 일하고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본국에보내는송금액이라네. 한 개인은약할수있지만집단적

으로보면이러한이주노동자들은필리핀경제부문에서, 그리

고또일하고있는국가의경제와인력으로서도역할을하는진

정한국가 웅이라할수있지.”

“언젠가본 <파워오브원(The Power of One)>이라는 화가

떠오르네요. 인종 갈등을 깔고 있는 화라 성격은 다르지만

‘한방울의물이모여폭포를이룬다’는의미는왠지통하는것

같아요.”

“제법이구나. 이코박사가다울이에게한수배워야겠는걸.”

“에이, 박사님도. 또 놀리신다! 그나저나 아까 시내에서 보니

까성당이많이눈에띄는것같던데요.”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동티모르와 함께 기독교도가 가장 많

은 국가 중의 하나란다. 16세기 이후 도입된 가톨릭교는 현재

85%의필리핀사람들이믿을정도로대표적인종교가되었지.”

부활절이나 성탄절 기간은 필리핀에서 가장 크고 긴 휴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의 뜻을 기려 고통을 함께하거나 탄생

을 같이 축하하는 여러 가지 의식을 벌인다고 했다. 더욱이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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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9: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리핀 사람들은 출생부터 세례, 결혼, 장례 등의 모

든 통과의례를 성당에서 하거나 가톨릭 방식으로

치른다고했다. 하지만이러한신앙행위에서도가

톨릭의 향뿐만 아니라 토착적인 믿음이나 행위

가여전히강하게존재하는것이필리핀신앙의특

징인 것 같았다. 가톨릭을 믿지만 역시 아프거나

큰일이 있을 때 전통적인 적 지도자나 심령술을

수행하는사람들을믿곤하는것이다.

갈라스가덧붙 다.

“전통적으로 믿어 오던 초자연적인 존재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아스왕(Aswang)’이란다.”

“아스왕이오? 어느시절의왕을말하나요?”

“왕이아니라필리핀사람들의전설에많이등장하는것으로,

보통 필리핀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가장 무서워하는 신화

적 존재 중에 하나이지. 지방마다 그 생김새를 표현하는 것은

조금씩 다르지만 일로카노 지역만 빼고 필리핀 전 지역에서는

뱀파이어처럼 생겼다고들 얘기한단다. 태아나 어린아이를 해친

다는 이야기 때문에 이를 믿는 임산부들이 특별히 두려워하지.

현대의학이발달하기전에는임신부의유산이나아이들의질병

을 설명하는 데 이용되었지만, 요즘에는 부모들이 아이들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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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왕 이미지

사진)

Page 40: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141

Page 41: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에서 놀 때 조심하라거나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할 때 입에

올린단다.”

“그러면아스왕이단순히초자연적인존재를가리키는것인가?”

코박사가궁금하다는듯물었다.

“사회학자인 라울 페르티에라(Raul Pertierra)에 따르면 서양

에서의 마녀처럼 사회가 용인하는 것보다 주장이 강한 여자들

을 배제시키는 개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하네. 인류학자 중

에는 단지 여성뿐만 아니라 필리핀에서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

인‘파키키 사마(pakikisama: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가

부족한, 사회성이없거나사회관계를맺는데어려움이있는사

람도 아스왕이라고 불린다는군. 산업사회에서는 이런 사람이

개성강한사람으로이해되고때로는칭송을받기도하지만, 작

은시골마을에서는이상한사람으로받아들여지니까말일세.”

“그것참흥미롭군. 계속해보게.”

“필리핀에서는보통다른사람의집을방문할때나가게밖에

서주인을찾을때, ‘따오포(Tao Po)’라고외치네. 문자그대로

는‘나사람이오’라고할수있는데, 이는나는아스왕이아니고

사람이니문을열어달라는의미에서유래했다는군.”

“나사람이오? 하하, 나도꼭써먹어봐야겠군.”

“보통의 서민 가정에서 필리핀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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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42: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었는데괜찮았나?”

“물론일세. 아주 좋았네. 우리 다울이에게도 좋은 공부가 되

었을걸세.”

“예, 맞아요, 길라스 선생님.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거예요.”

다울이코박사의말에맞장구쳤다.

“이제우리는또다음갈곳을향해일어서야겠군. 모두들잉

앗뽀(Ingat Po: 잘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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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43: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필리핀, 어디까지 아니?

스페인세력과겨루었던다투, 라푸라푸(Lapu-Lapu)

1521년 포르투갈인이었던 마젤란(Magellan)은 스페인

국왕의 도움을 받아 항해에 나섰다가 필리핀 중동부

의 막탄섬에 도착했다. 마젤란은 막탄섬에서 원주민

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당시 막탄 부족을 이

끌었던 다투, 라푸라푸는 조공을 바칠 것과 기독교로

개종한 인근 부족장의 신하가 되기를 요구한 마젤란

에 반대하며 격전을 벌 다. 이 싸움으로 마젤란은 사

망했고, 라푸라푸는 서구 세력에 저항했던 인물로 필

리핀 사람들에게 널리 기억되고 있다. 라푸라푸는

1542년경 사망했다고 하나, 죽은 원인에 대해서는 아

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한다.

필리핀의국화, 삼파기타(Sampaguita)

필리핀의 국화는 하얗고 그윽한 향기가 나는 삼파기타라는

꽃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재스민과에 속하는 이 꽃을 집이나

교회의 성상에 걸어 놓거나, 차의 장식이나 방향(芳香)을 목적

으로 백미러에 걸어 놓는다. 도시 거리 곳곳에서는 아이들이

꽃잎을 묶어 목걸이 모양으로 묶어 파는 광경을 쉽게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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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의 지도 삽입)

국기

면적 : 30만㎢

인구 : 약 9268만 명(2008년)

수도 : 마닐라

Page 44: 친절한 길라스의 초대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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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이 삼파기타는 필리핀어로‘숨파 키타’(Sumpa kita: 너에게 약속할게)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고 한다. 돌아오지 못한 연인 을 기다리다 꽃이 된 한 바랑가이 공주의 전설이 서려 있다. 이후

순정과 믿음을 상징하는 꽃으로 기억되었으며, 1936년 필리핀 국화로 지정되었다.

집을함께들어옮기던협동정신, 바야니한필리핀어로 바얀은 민족이나 마을 등을 뜻하는 말이다. 이에 어근을 둔‘바야니한(bayanihan)’은

공동체 정신이나 마을에서의 집단적인 노력을 뜻하는 말로 이용되고 있다. 바야니한의 어원은 집

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인 협력이 필요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을 사

람들은 대나무 장대를 이용하여 옮겨야 할 집의 지주를 통째로 들어 올려 어깨에 짊어졌다. 다른

사람의 무게를 덜어 주기 위해서는 본인이 힘을 많이 써야 했고,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힘을 많

이 쓰면 본인이 무게를 덜게 되었다. 집주인은 이사가 끝난 후 잔치를 열어, 자신의 집을 옮겨 준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서로의 짐을 덜어 주면서 공동체의 발전을 꾀하는 바야니

한 정신은, 집을 통째로 옮길 일이 없어진 현재에도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고 있다.

필리핀의복싱 웅, 마니파퀴아오(Manny Pacquiao)

현재 필리핀인의 자긍심을 세계적으로 높이고 있는 인물은 단연

복싱 챔피언인 마니 파퀴아오이다. 다섯 체급에서 챔피언 타이틀

을 가진 권투선수는 필리핀뿐만 아니라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이

다. 그가 2009년 5월에 다섯 번째 타이틀을 획득했을 때 거둬들

인 2,000만 달러(260억 원) 정도의 천문학적인 수익은 큰 기업들

이 버는 액수에 못지않은 외화 소득이다. 주로 미국의 라스베이거

스에서 열리는 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필리핀 전역의 국민이

집과 체육관, 극장 등에서 그를 단체로 응원하며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