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한다(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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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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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스릴러 상처를 안고살아가는 한 소녀가 여행 중 교도소에서탈옥한 죄수들을 마주치게 된다. 죄수들은 소녀를 포함 여행 버스 안의 사람들을 인질로 잡는다. 그들은 한 명, 한 명 인질들을 죽이며 경찰들을 협박하지만 경찰들은 듣지를 않고 인질들은 공포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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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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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기억이 아득하다. 아마 중학교 3 학년이었던 것 같다. 그때도 친구가 많이 없던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쳇바퀴 굴러가는 것처럼 같은 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경험만큼은 무언가 특별했다. 그날 오후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고 빗물에 젖어버린 내

교복처럼 그 사건은 내 마음 어딘가를 물들여 지워지지를 않는다.

학원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조용하다. 회색 빛 거리,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내가 고의로 사람들을 피하고 있는 건가. 시간이 흐르는 게 너무나 더뎌

일부러 도로에 그어져 있는 선을 따라 걸어간다. 왼쪽으로 세 발자국, 오른쪽으로 세

발자국... 발걸음을 맞추지 않으면 뭔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입으로 숫자를

중얼거리며 앞으로 가던 중 길 옆의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를 발견했다. 한 마리는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옆의 고양이의 얼굴을 혀로 닦아주고 있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불쌍하기도 하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본다. 비를 오랫동안 맞았는지 두 고양이의 털은 물에 많이

젖어있었다. 흰색 털에 갈색이 조금 보이는 고양이는 이미 죽었는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친구가 죽은 것을 모르나?’

옆의 고양이는 쉴 새 없이 죽은 고양이의 얼굴을 혀로 닦아주었다. 너무도 지쳐

보이는 얼굴. 난 혹시 학원에 늦었을지 몰라 시계를 본다. 아직 10 분 정도 여유 시간이

있다. 두 고양이의 옆으로 다가가 그들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흰 백색의 고양이가

살짝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 고양이 혹시 물지는 않겠지?‘

어려서부터 고양이를 좋아했던 나는 조심스럽게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양이

또한 내 손길을 따라 고개를 흔들었다. 물기가 묻어날 정도로 젖은 머리, 얼마나

힘들었을까?

잠시 고양이와 시간을 보낸 후, 학원에 늦을지 몰라 급히 일어섰다. 아직도 밖은 비가

내렸다.

‘이대로 내가 가버리면 고양이가 얼어 죽을지도 몰라...’

걱정스런 눈빛으로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옆의 고양이 또한 지긋이 나를 바라보았다.

Page 3: 살아야 한다(소설)

‘날 버리고 가려는 거야?’

고양이의 측은한 눈빛에 난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에이! 그래 내가 좀 고생하고 말지 뭐! 근데 너도 금방 가야 돼. 친구가 죽은 것은

슬픈 일이지만 계속 여기 있다간 너도 죽을지 몰라.”

난 손가락으로 고양이의 코를 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조금 젖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

두 고양이가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우산을 씌어준 후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있는 힘껏

뛰었다. 학원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을 뛰어야 하지만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빗물마저 시원하게 느껴졌다.

수업을 듣는 내내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놈 잘 들어갔을까? 누가 우산을 치워버렸으면 안되는데’

고양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는 아직도 그칠 줄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먹을 것이라도 사서 주는 건데‘

뭔가 챙겨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양이의 측은한 눈빛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수업이 끝나려면 아직 3 시간이나 남았는데. 발을 동동 굴렸다. 수업

중간에 빠져나갈까 고민도 했지만 혹시 선생님한테 들킬까 바로 단념했다. 예전 몰래

빠져나갔다 엄마한테 들켜 하루 종일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날은 정말이지 생각 하

기도 싫다.

느릿느릿 세 시간이 흘렀다. 나는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 얼른 물건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했다.

“수영아, 나 배고파. 우리 저녁 먹고 가자 응?”

혜경이가 급하게 뛰어왔다. 친구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난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야! 소리 좀 지르지 마. 밥 먹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리고 나 오늘 약속 있어서

너랑 같이 저녁 못 먹어”

“무슨 약속? 거짓말 치지 마. 평소에 학교랑 학원 빼고는 밖에 잘 나오지도 않는

녀석이. 무슨 약속인데?”

난 ‘고양이가 잘 있는지 보러 가야 해’ 라고 말을 꺼내기 왠지 부끄러웠다. 이

녀석이라면 분명 비웃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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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무슨 일 생기겠어. 밥 먹고 바로 가보지 뭐'

나는 어깨에 가방을 메고 혜경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주변에 학원이 많아서인지

곳곳에 많은 음식점이 보였다. 혜경이는 고양이가 잘 있는지 걱정하는 내 마음도 모른

체 이리저리 거리를 둘러보았다. 난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혜경이의 손을 잡고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눠본다. 마음 속 깊이 잠겨있던 내

이야기를 꺼내놓으니 마음이 후련했다. 내 상처, 내 고통, 혜경이는 고개를 끄떡이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저녁을 먹으며 친구와 한참을 떠들다 보니 1 시간이 훌쩍 지났고

난 고양이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혜경이와 헤어진 후에 아까와

같은 길을 걸었다.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이미 밖은 어둑해졌다. 난 그제서야 고양이가

잘 있을지 걱정되었다.

’에이, 집에 잘 들어갔겠지 뭐‘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스스로를 위안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고양이가 있던

곳으로 가보았다.

‘어? 아직도 있네.’

여전히 그 곳에는 고양이가 있었다. 하지만 고양이에게 씌워줬던 우산은 어딘가

날아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왜 아직도 안가고 있는 거야!’

걱정되는 마음에 급히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고양아 괜찮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고양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본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디 아픈 거야? 괜찮아 고양아?’

고양이의 몸을 흔들어 보았다.

‘앗! 차가워.'

우산이 고양이를 오래 지켜주지 못했는지 여전히 고양이의 털 주변에서 물이 흘러

나왔다. 손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많이 추웠겠구나'

난 고양이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은 죽은 친구를 꼭 껴안고 있었다. 마치

죽기 직전의 한 순간까지 친구와 함께 하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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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내가 그러니까 빨리 집에 가라고 했잖아. 왜! 왜 여기 있는 거야 이 바보

녀석아.”

난 젖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 한 곳이 저려왔다. 많이 아팠을

텐데, 고양이는 죽은 친구를 위해 끝까지 옆에 있어주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아무리 추워도 옆에 있었다. 슬플 정도로 착한 녀석... 눈에서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난

소매로 눈물을 닦고 살며시 죽은 고양이의 몸을 만졌다. 아까는 못 느꼈는데 이 녀석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는지 뼈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가버렸으면 됐잖아. 너라도 살았어야지’

차가워진 고양이의 몸을 꼭 껴안아 주었다. 고양이의 측은해 보이는 눈은 더 이상 날

바라보지 않았다.

“미안 고양아 미안 내가 빨리 왔었어야 했는데. 나도 너희들 옆에 있어줬어야 했는데”

비가 그치고 난 후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다. 난 고양이의 몸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털어낸 후, 바람이 닿지 않는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추워 보인다. 고양이를 무릎에 놓고 밤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온다. 뭔가를 잃어버린 기분... 한 쪽 입술을 꽉 깨문다. 그리고 조용히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Chapter 1.

PM 07:00

“아, 지루하다. 뭐 재미있는 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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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거야 네가 기껏 여행 나와서 잠만 퍼질러 자니까 그렇지. 그러지 말고 술이나

한 잔해!”

이혜경, 이 놈은 나랑 똑같은 19 살 주제에 매 번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다. 얼굴은

20 대 중반같이 생겨서 편의점에서 술을 사도 퇴짜 맞을 일이 없다. 말이 심하다고?

내가 이렇게 말해도 이 녀석은 상처 하나 받지 않는다. 참 낙관적이기도 하지.

‘왜 그래, 수영아. 오늘 어렵게 여행 왔잖아, 모처럼 즐겨야지.‘

오늘만큼은 즐겨보자고 열심히 나 자신을 설득한다. 마음속으로 항상 외쳐댔던 그

한마디를 다시 되새긴다.

‘아.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특별한 무언가를 즐겨보고 싶다.’

입이 닮도록 스스로에게 말해보지만 매 번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만큼 재미없는 삶이 있을까? 공부를 못하지는 않지만 성적이 아주 좋은 것도 아니고,

딱히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닌 난 그저 수많은 학생 중의 한 명일 뿐이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인형처럼,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 본다. 난 이 녀석을 아무리 먹어도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놈을 들고 있으면 한기에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낀다.

일부러 맥주 캔을 얼굴에 대본다. 시원한 감촉에 기분이 조금씩 좋아진다.

‘그래, 오늘만큼은 즐겨보자. 누가 알아? 오늘은 뭔가 특별한 일이 내게 생길지?’

“야야!!! 우리가 뭐 가져왔는지 봐라. 짠! 소주 4 병이다. 야 오늘 우리 한 번 제대로

마시고 죽어 보는 거야.”

이 녀석들 또 와서 한창 좋은 내 분위기를 깨버리네. 가끔은 우리 학교가 남녀

합반이라는 사실이 싫다. 시끄러운 이 두 놈은 내가 그렇게 꼴 보기 싫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항상 내 주변을 맴돈다. 지겨운 녀석들, 그래 오늘만큼은 착하게 대해줘야지.

“야! 너희들이 부탁을 해서 내가 오늘 특별히 너희랑 여행을 왔지만 그렇다고

너희들을 좋아하거나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마. 그리고 당장 내

앞에 얼굴 치워!”

너무 심하게 말했나?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놈들은 싫은 내색 하나 보이질

않는다. 살짝 그들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향긋하다.

도시에서는 맡을 수 없는 숲의 향기가 코를 마구 자극해온다. 여행 오길 잘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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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든다. 아침까지만 해도 한 달 후면 수능인데 어떻게 여행을 가냐는 엄마의

호통에 나도 모르게 화를 냈었는데, 유일한 내 편인데 왜 그랬을까?

맥주 캔을 내 눈 앞에 들이대며 한 잔 마시라는 혜경이의 말에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맥주 캔을 들어 보였다.

‘에잇 다 마셔버려야지‘

난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캔 안의 남은 맥주를 모조리 입 안으로 털어버렸다. 그 순간,

“여러분!”

앞 쪽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고성에 깜짝 놀라 옷에 맥주를 조금 흘려버렸다.

“으악! 누구야, 아~ 옷에 다 묻어버렸잖아!”

순간 몰려오는 짜증을 뒤로 한 채 앞 쪽을 바라보았다. 버스 제일 앞 좌석에 나이를

알 수 없는 정장 차림의 한 아저씨가 목청이 터져라 무언가를 외쳐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세요. 불신지옥! 예수를 믿지 않으면 모두 다 지옥에 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께 커다란 은혜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믿으세요.”

“저기요. 아저씨! 조용히 좀 하세요.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네. 아저씨가 차 전세

냈어요? 적당히 합시다. 예?“

휴... 어딜 가나 저런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종교는 자유라지만 이런 고속 버스

안에서 소릴 질러대는 것은 정말 너무하잖아. 종교를 믿으면 혼자서 조용히 믿을 것이지

꼭 남에게 피해를 줘요. 예수님도 저런 사람은 구원 안 해줄 거야.

난 맥주에 젖어버린 셔츠를 바라보며 그 아저씨를 향해 투덜대기 시작했다. 혜경이가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킥킥대며 날 바라본다. 내가 그러니까 여행오기 싫다고

그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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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거기 학생! 여기가 학교는 아니지만 학생 나이에 술을 먹으면 안 되지. 여행을

즐기는 것은 좋지만 지킬 것은 지켜야지! 안 그래?”

“아저씨가 뭔데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이에요. 좀 신경 끄고 아저씨는 하던

운전이나 똑바로 하시죠. 늙어가지고“

연거푸 들이킨 맥주에 얼굴이 빨개진 수현이가 벌떡 일어나 기사 아저씨한테 대들었다.

나와 친구들은 조용히 하라며 그를 붙잡았지만 취한 놈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수현이는 재차 기사 아저씨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기분 더러우면 나하고 맞짱 한 번 뜨시던가요. 내가 우습게 보여? 내가

19 살이라고 깔보나 본데, 아저씨 사람 잘못 봤어. 내가 학교에서 댁 같은 꼰대 몇 죽여

놨거든. 떫으면 나오라고!”

우리는 그를 말리기 위해 옷을 잡고 앉히려 했지만 이 친구,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소리를 지으며 더 날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사 아저씨가 브레이크를

세게 밟으며 차를 세웠다.

“끼익~~!”

타이어 긁히는 소리가 온 신경을 자극했다. 갑작스런 정차로 인해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몸은 넘어질 듯 앞으로 쏠렸고 겁 없이 대들던 친구 또한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고 기죽은 목소리로 반항했다.

“뭐...뭐야! 똑바로 운전 안 해요 아저씨!!”

기사 아저씨는 운전석에서 뛰쳐나와 단숨에 호연이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손은

어느새 수현이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우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야! 내가 기사 짓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너 같이 싹수가 노란 새끼는

처음이다. 내가 버스 기사 짓 한다고 우습게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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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셔츠 소매 사이로 얼룩덜룩한 문신이 보였다. 호랑이인가? 나는 눈을 찌푸리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 아저씨 무서운 분이었구나.’

목덜미가 붙들린 수현이는 당황한 빛을 띠며 아저씨를 향해 어설픈 핑계를 댔다.

“아저씨가 시비를, 아니 화를 먼저 내셨잖아요. 뭐... 제가 문제를 일으키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요”

기사 아저씨는 눈을 부라리며 친구에게 사과하라고 윽박질렀고 겁에 질린 수현이는

모기 목소리로 연거푸 '죄송합니다.‘ 라고 중얼거렸다. 화가 풀린 기사 아저씨는 차츰

미소를 되찾았다. 그는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둘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친구를 타일렀다. 난 궁금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기사

아저씨는 나의 호기심을 눈치 챘는지 잠깐 말을 멈추고 나에게 찡긋 눈웃음을 지었다.

난 얼굴이 빨개진 채로 급히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온 수현이에게 난 등을 사정없이 찔러대며 아저씨가 뭐라고 말했는지

물었지만 친구는 그냥 어색한 웃음만을 지을 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야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돼?”

몸이 근질거리는지 옆의 친구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내게 시간을 물었다. 난 대답

대신 시계를 눈앞에 내보이며 손가락을 펴 3 시간을 가리켰다.

‘핸드폰은 폼으로 들고 다니나‘

친구는 기지개를 피며 도착하면 깨워달라는 말을 하곤 좁은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잠을 청했다.

’그러니까 가까운 경포대나 가자니까‘

눈을 감은 내 친구를 향해 앙 다문 이를 내보이며 살짝 불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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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너희들 둘이서 왔니?”

누군가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서둘러 뒤 쪽으로 눈을 돌렸고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언니를 본 순간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와! 진짜 예쁘다.’

내 눈 앞에 있는 그 언니는 내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나보다도 작은 얼굴, 웃음으로 살짝 작아진 눈은 다른 이의 시선을 훔치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왼쪽 눈의 조그만 점까지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 안녕하세요. 저희는 앞에 있는 남자 애들까지 합쳐 네 명이서 왔어요. 누나는요?”

“난 혼자 왔어. 왜 이상해? 그냥 기분 전환도 할 겸, 딱히 같이 올 사람도 없었거든”

언니가 지은 어색한 미소 속에 알 수 없는 슬픈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호기심이

일었지만 더 이상 물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언니의 이름은 수경이라

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누며 나중에 시간이 되면 더 얘기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서로의 눈을 돌렷다.

한 30 분 지났을까? 버스가 한 휴게소 앞에 정차했다.

“자! 2 시간만 더 가면 되니까요. 딱 15 분 정도만 쉬었다 갑시다.”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는 기사 아저씨의 목소리에 잠이 들었던 주변 사람들은 하나,

둘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모두들 피곤한 표정이었다.

“벌써 도착했어? 나 3 시간이나 잠든 거야?”

옆의 혜경이가 잠긴 눈을 연신 비벼대며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난 친구의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아직 더 가야 하니까 화장실을 가자고 말했다. 혜경이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벗은 신발을 찾지 못하고 헛손질을 했다. “으이그!”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신발 바로 너 옆에 있잖아 이 바보야. 혜경아 나 급하다. 우리 화장실이나 다녀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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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구를 대신해 신발을 찾아 주었고 우리는 황급히 화장실을 다녀왔다. 약간

허기가 있어 친구의 지갑을 털어 휴게실 안 컵 떡볶이를 사들고 자리에 앉았다. 앞의

녀석들 언제 눈치 챘는지 코를 벌름거리며 처량한 눈빛을 마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내가 평소에 널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떡볶이를 주면 더 사랑해 줄 수 있는데.”

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명확하게 의사 표현을 했지만 그 놈들은 뭐가 좋은지

계속 웃음소리를 냈다. 상대하기 싫은 녀석들, 남은 떡볶이를 남자들에게 건네주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 저 멀리 황급히 걸어 들어오는 노부부가 보였다. 나는 기사

아저씨에게

“아저씨! 아직 못 들어온 분들 있어요.”

라고 외쳤고 잠시 멈칫한 아저씨는 노부부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아! 빨리 들어오세요. 뒤에 사람들 기다리는 거 안 보여요? 거의 다 왔는데 빨리빨리

갑시다.“

“어이구 죄송합니다.”

노부부는 지친 기색을 보이며 기사 아저씨께 죄송하다는 말을 했고 손으로 재촉하는

아저씨를 뒤로한 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할머니께서는 자리에 앉으신 후,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웃음을 띤 채 보따리에서 음식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조금씩 먹여주었다.

'연세가 많으신 것 같은데 아직도 저렇게 서로를 사랑하는구나.'

그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타깝게도 내 과거의 기억 속에

다정한 가족의 모습은 없다. 그저 아빠란 거죽을 둘러쓴 한 짐승과 그의 폭력에 노출된

가여운 엄마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려서부터 그 짐승은 도박을 좋아해 집 안의 돈을

모두 도박에 쏟아 부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가난이라는 무거운 덫에 물린 채 지금껏

살아왔다. 엄마는 매일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 조금의 돈을 벌어왔지만 돈은 모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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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호주머니로 들어갔고 그나마 부족하다 여겨지면 그 놈은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맞는 것에 질려버린 난 엄마에게 경찰에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안 돼, 네 아빠는 불쌍한 사람이야. 우리가 없으면 못 살 사람이야."

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야!! 너 무슨 생각해????”

“응????”

화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날 발견한 옆의 친구가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고 다시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무도 평화로운 오후, 가끔은 이런 시골에서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곳 사람들은 날 모르겠지? 다시 태어난 기분일까? 모든 것을 처음으로...

앞자리에서 자는 줄만 알았던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이 근처에 그 악명 높은 청송 교도소가 있다는 말이지? 그 온갖 흉악범이

다 몰려있다는 곳"

“그래! 그렇다니까! 넌 인터넷도 안보냐? 유명한 살인범들은 죄다 여기 몰려있어.

그러니까 너도 여기를 목표로 최선을 다해봐”

‘유치한 놈들' 난 헛웃음을 지으며 창문 밖에 펼쳐진 정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여기가 가장 악명 높은 청송 교도소 근처란 말이지. 그 죽일 새끼도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 텐데, 난 다시 옛 기억에 빠져들 것 같아 두 손으로 볼을 툭툭 두드린 후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PM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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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이어서인지 도로의 상태가 좋지 않아 버스가 계속 흔들거렸다. 멀미가 심한 난

창문을 열고 연거푸 심호흡을 했다. 이미 늦은 밤인지라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쿵쾅거리는 소리는 날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난 억지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잠을

청했다.

갑자기 차가 멈추었다.

“끼~~~~~익!!!!!”

아까보다 훨씬 큰 굉음을 내며 차가 멈추었다. 등받이에 목을 부딪친 나는 투덜대며

일어나 앞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뭔가에, 알 수

없는 무언가에 크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뭐지?’ 난 다시 자리에 앉아 밖을 살펴보았다.

앞에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손에 긴 무언가를 들고.

“야이 새끼들아. 문 열어!”

그들 중 한 명이 버스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뒷자리에서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데... 뭐지?‘

갑자기 기사 아저씨가 창백해진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퍽”

한 남자가 무언가를 이용해 기사 아저씨의 머리를 후려쳤다. 난 깜짝 놀라 그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총?'

그의 손에는 길쭉한 총이 들려 있었다. 난 급히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저 사람들 어떻게 총을 가지고 있는 거지?’

열린 문을 통해 제복을 입은 다, 여섯 명의 사람들이 버스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승객들을 총으로 협박하며 내리라고 강요했고 사람들은 손을 머리에 올린 채 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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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에 따라 한 명, 한 명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징그러운 웃음을 띤 채 말을 걸었다.

“아가씨, 귀엽게 생겼네. 어디 놀러 왔어? 친구들이랑? 지금부터 이 아저씨들이랑

놀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내 뱉은 한 마디, 한 마디는 독사처럼 내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난 미치도록 그의 말에 반항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내 몸은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다.

“아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앞자리에 있던 친구 경필이가 웃음을 보이며 손으로 그를 살짝 밀어내고 내 앞에 섰다.

난 친구의 도움이 고마웠지만 앞의 남자가 친구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경필이의 행동에 화가 났는지 눈을 부라리며 친구를 노려보았다. 한

손으로는 허리춤에 있는 칼을 꺼내 우리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뭐야 이 새끼는, 야 죽고 싶어?”

“죄송합니다. 저희 금방 갈게요.”

경필이는 칼로 협박을 하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죄를 빌었고, 나의 손을 잡고 급히

앞으로 걸어갔다. 친구는 두려움으로 물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푸욱”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Page 15: 살아야 한다(소설)

갑자기 친구의 동공이 터질 듯이 커지며 고통스러운 소리를 질렀다. 난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경필이는 자신의 옆구리에 파고들은 칼을 쥔 채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쓰러지는 그를 보며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친구의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져 갔다. 주변은 빨간 피로 가득했고 친구의 배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다. 난 무릎을 꿇고 그를 쳐다보며 한 없이 눈물을 흘렸다.

“경필아, 경필아”

그의 이름을 계속 불렀지만 이미 죽어버린 경필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야 너도 죽고 싶어? 아니면 빨리 내려. 나 화나게 하지 말고!”

칼날에 묻은 피를 나의 볼에 닦으며 그가 속삭였다.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난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며 멍해진 눈으로 죽은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이 들은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 놈들이구나.’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내

등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누구지?’

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쉿! 돌아보지 마.”

뒤에는 내 바로 뒤에 앉았던 수경 언니가 조금씩 숨을 들이마시며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부러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언니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은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억지로 힘을 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전히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몸은 미치도록 떨렸다.

칼에 배를 찔린 친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왜 그랬어? 왜, 젠장, 젠장’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내린 후 그들 중 한 명이 우리의 수를 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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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10 명, 10 명이면 인질로 충분한데요? 여자도 많고.“

경필이를 죽였던 그 새끼가 비열하게 웃으며 덩치가 가장 큰 사람에게 보고했다.

리더로 보이는 그 사람은 비열한 그 놈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그는 고개를

끄떡이며 다른 제복을 입은 이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팔을 뒤로 한

채 어딘가로 걸으라 했고 우리는 그 방향을 따라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약 10 분 동안 걸었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앞에 사람이 살 것 같은 집이 몇

채나 있는데 왜 아무도 보이지 않지? 오싹한 공포감이 날 엄습했다. 설마...

그들은 우리를 앞의 콘도로 밀어 넣었다. 콘도 밖에는 어느새 우리들이 타고 왔던

고속버스가 놓여 있었다. 어둠만이 가득한 눈앞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콘도는 방금

까지 사람들이 있었던 듯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 좁은 방 안으로 내몰렸다. 한 명이 방의 불을 켰고

나는 좀 더 자세히 그들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디선가 훔친 것 같은 옷,

까무잡잡한 피부는 그들의 흉악한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들은 총 6 명, 그 중

2 명이 총을 들고 있었다.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에게 소리쳤다.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너희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겠지? 너희들은 먹이고 우리는

일종의 포식자야. 그니깐 너희들은 우리가 가기 전까지 우릴 즐겁게 해주면 되는 거야.

보자, 여기 여자가 6 명이나 있네, 너 이리 와봐.”

그는 주변을 한 번 돌아보더니 앞에 있는 여자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저항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자의 애인은 슬픔과

무능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여자의 이름을 부를 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는 질질 끌리며 그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문이 닫히자 눈치만 살피고 있던 그의 부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욕정에 찬

눈빛은 우리 중 욕정을 발산할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눈빛을 외면하고

싶었다. 나와 내 친구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서로를 껴안았다. 친구의 체온을 느끼면

Page 17: 살아야 한다(소설)

이 지옥 같은 현실이 아닌 조금 전 즐거웠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발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쿵, 쿵, 쿵, 쿵"

우리는 있는 힘껏 서로를 껴안고 고개를 서로의 품속으로 숨겼다.

"쿵"

그들의 발소리가 멈추었다. 그때

“아악”

난 친구의 상체가 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통과 두려움, 절망으로 얼룩진 친구의

얼굴은 날 향하고 있었다.

“그럼 난 이 년으로 할까?”

난 혜경이의 발을 붙들며 미칠 듯이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그의 눈에서는 어떠한 동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난 무능했고 친구를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멀어져 가는 혜경이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다른 누군가가 나의 등을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저기요?”

난 재빨리 벽에 등을 기대며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뒤에 있던 그

사람은 다정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에이,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냥 가볍게 논다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여기선 내가 그나마 잘생긴 편이야.”

Page 18: 살아야 한다(소설)

더러운 그의 손이 “안돼요“라고 연거푸 애원하는 나의 말을 무시한 채 다리부터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온몸의 마디마디가 떨려오고 가슴이 미칠 듯이 쿵쾅거렸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으면.

“아이, 애들이랑 무슨 재미가 있어요? 괜히 엉뚱한 애랑 힘 쓰지 마시고 저랑 해요”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버스에서 만났던 수경 언니였다. 그녀는 이 거짓말

같은 악몽 속에서도 침착한 목소리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다정한 목소리는 그의 시선을 빼앗기 충분했다.

“어 예쁜데? 난 예쁜 누나를 보면 참을 수가 없더라. 괜찮아? 난 좀 거친데.”

그는 수경 언니의 어깨를 끌어안고 어둠으로 가득한 밖으로 나가버려다. 그가 어떤

나쁜 짓을 할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눈물이 흘렀다. 내가 가져야 할 고통을

누군가에게 떠넘긴 것 같아 마음이 미칠 정도로 아팠다. 언니가 그 새끼와 밖을 나갔을

때 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분노? 슬픔? 어쩌면 고통 받을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 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멍해졌다.

벽에 등을 기대고 한참을 울었다. 어떤 생각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이 곳을

빠져나가고 싶다.’ 라는 생각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눈을 있는 힘껏 감았다가 5 초를

센다. 하나, 둘...다섯, 슬며시 눈을 뜬다. 여전히 변한 것은 없다. 몇 번을 감고 다시

떠본다.

PM 11:30

한 시간이 지났을까? 그들에게 끌려갔던 여자들이 한 명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혜경이는 무언가에 홀린 듯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한 쪽 브라가 드러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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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셔츠, 부어있는 입술과 볼은 친구가 겪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난 연거푸

혜경이의 이름을 불렀다.

“혜경아, 혜경아?”

친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난 혜경이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괜찮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혜경이가 나 대신 고통을 겪었으니 미안하다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혜경이를 살짝 안아주었다. 그녀의 눈물로 옷이 젖는 것을 느끼며 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몇 분 후, 저 멀리서 나를 보호했던 수경 언니가 들어왔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 라는 말과 함께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 일도 없었나?’

나는 그녀의 웃는 표정에 안도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수경 언니가 내

옆에 앉는 순간, 그녀의 다리가 수 많은 멍으로 인해 부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언니? 언니 다리가!”

나와 눈이 마주친 언니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다. 그녀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나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마치 술자리나

편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 했다. 난 머릿속을 뒤져가며 그녀가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 또한 내게 자신에 대해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이곳에 오기 전 그에

의해 배신당한 이야기, 넓은 바다를 보면 혹시 그를 잊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여행을 결심했다는 것 등. 그녀는 안 그래도 남자에 대한 불신감이 높았다며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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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남자 때문에 앞으로 더 이상 남자는 쳐다보기도 싫다는 말을 내게 했다. 난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조금 분위기가 좋아진 것 같다. 난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마음속 깊히 묻어둔 말을

꺼냈다. 이대로 지나가버리면 언니를 마주하기 힘들 것 같았다.

"언니, 있잖아요."

"응 왜?"

"왜 날 구해줬어요? 우린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일 뿐이잖아요. 눈 한 번 딱 감으면

되는 일이잖아요. 언니가 구해주지 않아도 난 절대로 원망안했을 꺼에요. 그런데 왜,

왜…"

나도 모르게 말끝이 흐려졌다. 더 이상 말을 이으면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억지로

입을 닫았다. 당황하는 언니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수경 언니는 부드럽게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안해하지 마.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 것뿐이니까. 수영아 잘 들어, 그

놈들은 짐승이야. 짐승의 눈을 외면하면 잡아 먹힐지도 몰라 하지만 정면으로

대응한다면 그 놈들도 우릴 어쩌지 못해."

언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은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역겨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래,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 그

놈들은 그 때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죄수들이 다시 들어왔다. 그들 중 한 명이 협박하듯이 우리에게

말했다. 난 그의 얼굴에 피어난 잔인한 웃음을 본 후, 밀려오는 두려움에 수경 언니의

손을 꽉 잡았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우리는 죄수들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게 없어. 괜히 이상한 짓

했다가 걸리지 마라, 우리는 사람 하나 죽이는 거 아무것도 아니니까. 잘 자라. 내일도

즐거울 거야.”

Page 21: 살아야 한다(소설)

그는 말을 마치고 방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방 안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이 현실을 원망하며, 다들 조금씩의 반항을 하고 있었다. 욕설을

내뱉는 사람,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현실을 잊으려 하는 사람, 그때 어디선가 낭랑한

성경 소리가 들려왔다. 차 안에서 소리쳤던 그 신부였다.

“여러분, 이처럼 어려운 상황일수록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만 합니다. 오 예수님

저희를 보살피소서. 이 어린 양들을 지옥으로부터 구해주소서”

부러웠다. 이런 참담한 현실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의 주변에 2 명의 남녀가 모여 같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뱉는 성경

구절에서 분노와 절망이 보였다. 그들은 화를 내는 중이었다. 그 악마 같은 놈들에게

혹은 무능한 자신에게...

나와 친구 수현이 그리고 수경 언니 이 세 명은 한 구석에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 있는 절망을 최대한 밀어내고 싶었다. 잡다한

이야기들, 서로의 어색한 웃음을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수현이 가 말했다.

“경필이가 칼에 찔렸을 때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 심지어 미안하다는 말조차

그 놈에게 하지 못했어. 그 녀석은 항상 날 지켜줬는데, 난...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친구는 내게 화를 냈다. 주먹을 움켜쥐고 땅을 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 경필이 그 친구는 날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내가 평소에 그 놈한테

해준 거라곤 장난 어린 욕설과 가벼운 말 몇 마디 밖에 없다.

“나 때문이야, 모두 나 때문이야”

Page 22: 살아야 한다(소설)

난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이 것뿐이었다. 모두 내 잘못이다.

그를 죽음에 내몬 것도, 여행도 애초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난 울며 그를 위로했다.

내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좁은 창 틈으로 보이는 빛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내일은... 내일은 또 다른 악몽일까?

Page 23: 살아야 한다(소설)

Chapter 2

Am 9:30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젯밤 그들이 내게 심어 놓은 공포는 하루 종일 사라지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본다. 다들 눈물로 인해, 잠을 자지 못해 표정들이 말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서 어떠한 희망도 볼 수 없었다. 이곳에 오래 있다간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혜경이는?’

친구가 보이질 않았다. 난 황급히 일어나 친구를 찾아보았다. 혜경이는 방 왼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그녀의 눈은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 문이 열리는 소리는 악몽의 시작을 뜻한다. 혜경이는 항상 활발하고

누구보다 낙관적인 그런 여자였는데, 난 옆으로 다가가 있는 힘껏 그녀를 안아 주었다.

“악! 저리 가! 내 몸에 손대지마 이 개새끼야!”

그녀는 나를 세게 밀쳐버리고는 더욱 더 몸을 웅크리며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어젯밤의

경험은 그녀에게 있어 평생 지울 수 없는 치욕일 것이다. 그녀의 찢어진 옷과 브라가

그녀의 고통을 설명해 주었다. 난 울음이 터져 나올까 이를 악물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어떠한 말도 그녀를 위로해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옆에만

있어주는 것뿐이다.

“딸깍!”

방문이 덜컥 열리고 친구를 죽였던 그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총으로 우리를 위협하며

한 명, 한 명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리의 얼어붙은 표정은 그에게 만족감을 선사했다.

사람들은 최대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나 또한 그의 눈빛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그가 이 쪽으로 오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쿵쿵쿵" 그의 발소리가 커질수록 내 가슴 또한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Page 24: 살아야 한다(소설)

"야 고개 한 번 들어봐"

그는 어느새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그가 입을 벌릴 때마다

보이는 누런 이가 역겹게 느껴졌다.

“야! 너 혹시 요리 좀 할 줄 아냐? 배가 고프다. 나와서 고기 좀 꿔봐라”

다행이다. 아직은 살 수 있다. 가슴이 점차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요리를 하라고?

그의 거친 손에 이끌려 방을 나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오전 10 시는 넘은 듯 했다. 밝은 햇살에 약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밖에는 2 명의 남자가 우리가 가지고 온 짐을 뒤지고 있었다. 그들은 웃음을 띤 채

우리들의 물건을 하나하나 구경했다. 가방 속에서 다양한 옷들과 일용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죄수 옷을 입고 있던 그들은 우리들의 옷을 입어보며 서로를 비웃었다. 몇 개의

가방에는 먹을 것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삼겹살, 김치 등, 대부분 여행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음식은 충분했다.

같이 끌려온 여자 2 명과 함께 요리를 준비했다. 콘도에는 불판과 숯불 등 고기를

구울 수 있는 장비가 충분히 있었다. 느낌이 오묘했다. 나에게 있어 주방이란 곳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안식처였는데,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특히 항상 다툼이 잦았던 엄마와 나에게 있어 주방은 대화의 공간이자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장소이다. 그런데 지금은 나에게 총을 겨누는 죄수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니,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쓴 웃음이 번졌다.

고기를 굽고 반찬을 준비하며 옆의 여자들에게 말을 걸어본다. 여자 중 한 명은

죄수의 리더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들어갔던 그 여자였다. 어젯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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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그녀의 남자 친구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모르는 남자에게 모욕을 당한

것보다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 당했다는 사실이 더 아팠을 것이다.

“괜찮아?”

난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여 버리겠어! 그 새끼를 죽여 버릴꺼야!”

그녀는 더욱더 거칠게 고기를 두드렸다. "퍽퍽퍽" 식칼이 닿을 때마다 주변으로 고기가

튀었다. 난 혹시 그녀가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젖은 눈을 통해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느껴졌다. 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다들 좀 모여봐”

리더의 목소리, 우리를 감시하던 남자는 외침을 듣고는 칼을 우리의 눈 앞에 들이댔다.

"수작 부리면 죽여버릴 줄 알아."

우리가 고개를 끄떡이자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죄수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닫혀있는 문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소리가 작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죄수 한 명이 다시 부엌으로 들어와

우리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밖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죄수들을 중심으로 서있었다.

리더가 우리를 향해 지시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지시한 말에 맞춰 작업을 실시한다. 입을 벙끗하거나 반항을 하면

다 죽여 버리겠어. 입을 뻥끗하면 입을 잘라버리고, 반항을 하면 팔이나 다리를

잘라버린다. 하지만 잘 협조하면 죽이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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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웃음을 띤 채 마치 자비를 베푼다는 말투로 말했다. 사람들은 죄수들의 지시에

맞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밖에 놓여있던 테이블의 다리를 잘라 창문에 붙이고 커튼으로 안을 가렸으며 후문을

못질하여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정문 앞에는 의자 하나와 직사각형의

책상을 놓았으며 밧줄을 가져와 그 끝을 의자의 다리와 책상에 단단히 묶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걸 만든 거지?’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PM 12:00

나는 삼겹살과 간단한 반찬을 만들어 그들에게 제공했다. 죄수들은 오랫동안 밥을

먹지 못했는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비워버렸다. 식사를 마칠 무렵, 그들 중 한 명이

여행객이 가져온 소주를 꺼내 마시려 했다. 그때였다.

“미쳤어! 지금 상황 분간이 안 돼? 좀 있으면 경찰이 들이닥칠 텐데 이 미친 새끼가

술을 먹어?”

죄수의 리더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발로 그를 걷어찼다. 갑작스런 발길질에 놀란 그는

다시 자세를 바로 한 후 리더를 향해 무릎을 꿇고 빌었다. 우리를 무시했던 그도 리더

앞에서는 겁 먹은 강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수 차례 걷어찬 후, 리더는 넘어져 있는

그의 목을 잡고 칼로 위협하며 말했다.

“잘 들어! 여기를 나가고 싶으면 그 개 같은 욕심은 버리고 내 말을 들어. 어차피

나가면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으니까, 알았어?”

그는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리더의 말에 순응했다. 전에 봤던 냉혹한 모습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Page 27: 살아야 한다(소설)

‘비열한 새끼, 저런 새끼한테 내 친구가 죽다니’

죽기 전에 친구가 내게 한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우리들에게 밥을 먹으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둘러싸여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죄수들은 우리들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조롱했다.

“맛있냐? 많이 먹어. 어차피 너희들은 죄다 죽을 목숨이니까.”

공포가 오래 지속되면 조금씩 무감각해진다. 웃음도 나오지 않고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모두들 아무런 말도 없이 밥을 먹었다. 난 죽음의 공포에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지만

억지로 입 속에 밥을 구겨 넣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들에게 지기 싫었다.

식사를 모두 마친 후, 난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 남은 물건들을 정리했다. 일을 하는

동안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했다.

'난 기계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자. 어차피 쓸데없는 생각은 아무런 도움이 안되.'

참담한 현실을 잊으려 노력했다. 눈앞의 쓰레기들과 사용한 접시들을 정리하며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난 기계다. 난 기계다' 금세 주변은 정리되었다. 난 일을 마친 후

다시 사람들이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는 죄수들이 킬킬거리며 우리 중 한 명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서로 다른 사람을 고르며 즐거워했다. 난 그들에게

선택되기 싫어 조심스레 한 쪽 구석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어제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던 죄수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어느새 내게 다가와 한마디 내뱉었다.

“동생이 하자. 동생은 소리를 잘 지르는 것 같으니까, 어차피 쓸 데도 없는 것 같은데”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들은 공포에 떨고

있는 날 뒤로한 채 방 안을 몇 번 둘러본 후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들이 나간 후, 많은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었다. 환호하는 사람도 있었고 서로의 손을

잡고 위로하는 이도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수현이가 말을 걸었다.

“들었어? 조만간 경찰이 온대. 어쩌면 우리는 살 수 있을지도 몰라.”

Page 28: 살아야 한다(소설)

아마 나와 같이 음식을 준비했던 여자가 사람들에게 얘기를 한 모양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절망으로 가득했던 현실에 약간의 빛이 들어왔다. 우리는...

우리는 살 수 있을까?

30 분 정도 지난 것 같다. 갑자기 밖에서 경보 음 소리가 들려왔다.

“위이잉”

한 명이 방 안 창문 커튼을 살짝 열고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 곳에서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살았다. 우리는 드디어 살았어"

모두들 기쁨에 환호했다.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밖의 경찰이 확성기를

들고 죄수들을 위협하였다.

“너희들은 이제 어디도 나갈 수 없다. 모든 길을 이미 경찰들이 봉쇄한 상태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순순히 자수한다면 우리는 너희들의 형량을 감해줄 수도 있어.“

“좆까고 있네, 어차피 우리들은 죄다 종신형이거나 사형이야. 지금 들어가면 죽거나

감방에서 평생을 썩어야 하는데 너 같으면 순순히 자수하겠냐? 야 그 새끼들 죄다

데리고 나와”

밖에서 리더의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들 중 몇 명이 방으로 들어와 우리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죄수들은 우리들을 경찰이 볼 수 있는 곳으로 끌고 간 후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야 이게 보이냐? 너희가 까딱 이라도 하면 우리는 이 새끼들을 죄다 죽여 버릴 꺼야

알았어? 그러니까 허튼 수작 부릴 생각 하지마."

Page 29: 살아야 한다(소설)

리더가 말을 마친 후, 경찰들 내부에서 혼란이 빚어졌다. 아마도 이렇게 많은

인질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말해. 인질들과 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들어주겠다.”

높은 지위로 보이는 한 중년의 경찰이 확성기를 대고 죄수들을 향해 말했다. 그는

손을 위로 흔들며 경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주변의 경찰들은 콘도를

중심으로 넓게 퍼졌고 일제히 총을 들었다. 죄수의 리더는 우리에게 다가와 중앙에 서

있는 신부의 목덜미를 잡고 경찰 앞으로 나아갔다. 총을 신부의 뒤통수에 대고 득의

양양한 표정으로 경찰들에게 소리쳤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지금 우리가 인질을 한 50 명 데리고 있거든? 한

명당 1 억씩 쳐서 총 50 억을 당장 준비해. 그렇지 않으면 하루에 세, 네 명씩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죽여 버리겠어.”

그는 신부를 자신의 앞에 세우고 무릎을 꿇었다. 그의 총구는 신자의 뒤통수를

향했으며 신자의 몸은 공포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난 뒤 쪽에 있어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등은 “살려줘, 살고 싶어.” 라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더 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우리의 눈물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은 본보기로 한 명을 죽여 놔야 너희들이 내 말을 듣겠지.”

그는 천천히 30 초를 셌다.

“30, 29, 28, 27”

조금씩 시간이 줄어들었다. 겁을 먹은 신부는 허리를 세운 채 경찰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Page 30: 살아야 한다(소설)

“빨리 이 분이 하는 말을 들어줘요. 돈이 얼마든 상관없으니까 빨리 주란 말이야. 이

개새끼들아! 빨리 주라고!”

“15, 14, 13“

리더는 숫자 하나, 하나를 천천히 세었다. 난 숫자가 들릴 때마다 온 몸이 떨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 죽일 놈이 웃음을 띤 채 숫자를 세는 모습이 떠올랐다. 신부는

죽을 것이다. 저 놈은 진짜 사람을 죽인다. 점점 30 초에 가까워지자 신부는 고개를 돌려

리더를 향해 소리쳤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봐요, 경찰들이 어차피 선생님 말 들어줄 테니까 이러지 말아요. 나 같은 것

죽여서 도움될 것 하나도 없어요. 선생님, 전 신부예요. 하늘이 두렵지도 않아요?“

“5, 4, 3”

리더는 여전히 숫자를 셌다. 신부는 고개를 돌려 경찰들에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난 손으로 눈을 가렸다. 뒤통수에 총을 맞고 쓰러질 신부의 모습이 상상되어

도저히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경찰들 사이에서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리더는 멈추지 않고 숫자를 세었다.

“이 개새끼들아 어떻게든 해보란 말이야! 난 죽기 싫어! 살려달란 말이야 이 씨발

새끼들아!”

“1, 0. 펑!”

"픽" 신자는 쓰러지듯이 무릎을 꿇었다. 눈에서 눈물이, 사타구니에서는 오줌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리더는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총을 입 쪽에 대고 “후” 하고 불었다.

나머지 한 손으로 신자의 뒤통수를 한 대치며 말하길

“병신 새끼, 그냥 쏘는 흉내만 낸 거야. 네가 그러고도 남자 새끼냐? 하하하”

Page 31: 살아야 한다(소설)

리더는 크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고 그 주변에 있던 그의 부하들 역시 반기절한

신자의 몸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리더는 문을 열기 전 경찰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잘 들어라. 2 시간 후에는 진짜 한 명을 너희들 앞에서 죽여주마. 그게 싫으면

50 억을 당장 내 눈 앞에 가져와. 당장!"

“지금 상부에 전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2 시간은 너무 부족해! 돈을 모을 시간도

생각을 해야지. 50 억이 적은 돈은 아니잖아. 시간을 조금만 더 줘”

“웃기지마. 2 시간이라고 했다.”

경찰은 그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코웃음만을 칠 뿐, 그들의 부탁에

응하지 않았다.

‘2 시간 후에는 누가 죽는 걸까? 방금 전의 신부 아저씨? 아니면 다른 누군가?'

나의 마음 속 한편에는 혹시 내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가득했지만 일부러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려 노력했다.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PM 02:00

리더와 경찰과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우리 중의 누군가가 죽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서서히 피부에 와 닿게 되자 사람들은 차츰 소리를 질렀다.

“난 죽기 싫어.”

“난 여기서 죽으면 안 돼. 난 두 딸이 있어”

그들 중 몇 명은 직접 리더에게 다가가 고개를 조아리며 간청하였다.

“살려주세요. 선생님, 전 지금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어요. 제가 죽어버리면 그

분들은 굶어 죽어요. 예? 선생님 살려주세요.”

Page 32: 살아야 한다(소설)

다양한 이유를 붙여가며 그에게 삶을 구걸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쉽게 볼 수 있었던

죄수들에 대한 분노와 공포가 아닌 오히려 치졸한 아부와 웃음으로 물들어 있었다.

리더도 그들의 아부가 싫지는 않았는지 그들에게 더욱 행동을 요구했다. 주변 사람들이

이를 보고는 그의 주위로 조금씩 더 모여 들었다.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과 공포,

절망을 안겨준 놈들인데 마치 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그를 대하다니, 난 욕지거리가

나왔다. 저 개 같은 놈을 만나지 않았다면 경필이는 죽지 않았을 테고 혜경이 또한 이런

모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놈에게는 죽어도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리더는 죽음을 빌미로 사람들에게 행동을 강요했다. 정해진 것은 없었다. 그저 그의

맘에 들기만 하면 됐다. 어떤 사람은 알몸으로 춤을 췄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불렀다.

리더는 자신의 맘에 들면 "넌 합격"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넌 불합격"이라는 말을 했다.

누군가는 기뻐서 환호를 했고 누군가는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그때 리더가 우연히 그를

경멸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나를 눈치 챘다. 그는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내가 싫었는지

주변 사람들을 밀친 후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내 눈 앞에 대고 살며시

속삭였다.

“넌 살고 싶지 않아? 내가 맘만 먹으면 너 따위는 쉽게 죽여 버릴 수도 있어. 최대한

아프게, 최대한 잔인하게”

가슴이 미칠 듯이 쿵쾅거렸다. 난 죽을 수도 있다. 눈에 눈물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살려주세요.” 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내 머리 속에서 날 대신해 죽은 친구, 경필이 녀석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누가 너한테 살려달라고 말할 것 같아?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넌 천벌을 받을 거야.

이 개새끼야, 이 개새끼야!”

Page 33: 살아야 한다(소설)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공포를 그에게 들킬까 악을 써가며 소리를 질렀다. 죽을 각오

따위는 되지 않았다. 그저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말들을 내뱉었을 뿐이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보더니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다시 속삭였다.

“잘됐네. 그렇게 죽고 싶었다면 뭐, 어차피 널 죽일 생각이었어. 아주 고통스럽게,

톱으로 머리를 찢어 버릴 거야.”

“톱으로?”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는 뒤로 돌아서서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 중 두 명이 내

양 어깨를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생각보다 밖은 어두웠고 수많은 경찰들이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경찰들의 사이 사이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죄수가 탈옥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이미 알려진 모양이다. 난 악을 쓰며 그들을 향해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나를 끌고 나왔던 죄수 두 명이 나를 물건 다루듯 험하게 다뤘다. 나를 앞의 의자에

앉힌 후 바닥의 밧줄로 나의 몸과 다리를 의자와 고정시켰다. 난 온 힘을 다해 빠져

나오려 했지만 삐걱거리는 의자만 느낄 수 있을 뿐, 나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뒤 쪽에서 죄수 한 명이 내 머리를 책상에 던져버렸다.

“퍽”

책상과 부딪친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과거의 일들로 가득했다. 학교 친구들, 내가 사랑하는 엄마... 엄마는 집에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나 죽을 것 같아. 엄마 나 진짜 죽을지도 몰라. 갑자기

온몸이 미칠 듯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죄수 2 명은 두 손으로 내 몸을 눌렀으며 남은

밧줄로 내 목을 책상에 고정시켰다. 난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리더는 뒤에서 내

머리를 세게 짓눌렀다. 압력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Page 34: 살아야 한다(소설)

"억울해? 사람은 말이야. 어처구니없이 쉽게 죽을 수도 있어. 이유도, 원인도 없이...

그러니까 그냥 포기하고 죽어."

그는 경찰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약속했던 2 시간이 지났다. 근데 아직도 내가 말했던 50 억은 보이질 않네. 내가

우습게 보이지? 아까 너희랑 장난 한번 쳐줬더니 내가 이번에도 안 죽일 것 같지?

재미있네. 이 개새끼들아. 똑똑히 들어! 이 꼬마 놈은 너희들이 죽인 거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죽이는 거라고.”

리더는 죄수 중 한 명에게 커다란 톱을 넘겨받았다. 그는 그것을 내 목 어딘가에

올려놓더니 자르는 시늉을 하였다. 그는 톱의 움직임에 맞춰 자르는 소리를 흉내 냈다.

“부웅, 부웅”

다리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난 진짜로 죽는다. 그때 내 입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할 말이 튀어나왔다.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뭐? 잘 안 들리는데? 다시 한 번 말해봐."

리더는 귀를 내 입에 가까이 대더니 다시 한 번 말해보라고 강요했다. 조금의 희망을

본 나는 더욱더 큰 소리도 잘못을 빌었다. 그를 향한 분노는 공포와 살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에 모두 먹혀버렸다.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선생님 제발."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Page 35: 살아야 한다(소설)

"임마! 이제야 잘못한 것을 알겠어? 진작 말했으면 죽지 않아도 되잖아. 지금 와서

말하면 어떻게 해! 이미 경찰들 다 보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널 안 죽이면 우리 꼴이

우스워지잖아. 그러니까 그냥 포기해"

그는 조롱하듯이 내게 말하고는 톱을 든 채로 몸을 일으켰다. 먼저 톱을 내 목에 살짝

대보며 힘을 줄 준비를 하였다. 톱의 차가운 끝 부분이 내 목에 닿는 순간 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에이 재미없다.”

갑자기 뒤에서 어떤 남자가 문을 열고 소리쳤다. 뒤에 있던 죄수 두 명은 급히 그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 남자는 반항의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손을

머리 위에 들고 리더를 향해 소리쳤다.

“불쌍한 애 건드리지 말고 나로 합시다. 어차피 애 죽여 봤자 기분만 더럽잖아.

나같이 인상 더러운 애랑 놀아야 뭐 죽이는 맛도 나지 안 그래?”

난 여전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 분명 친구의 목소리는 아니다.

'도대체 누구지?'

방금 전까지 방을 지키고 있었던 죄수가 급히 밖으로 나와 리더를 향해 죄송하다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리더는 발로 죄수를 차버리고는 남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미쳤네, 야 내가 지금 뭐 하는지 안보여? 내가 맘만 먹으면 너 새끼

머리에 구멍 내는 것은 일도 아냐, 알아?”

리더는 앞에 있는 부하의 총을 빼앗아 날 도와주려 하는 남자를 향해 겨누었다. 그

남자는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에이, 인질을 둘이나 죽이면 아깝잖아. 그러지 말고 나로 갑시다. 내가 제대로

죽어줄게. 내가 목소리도 커서 저 꼬마보다는 인질로 삼을 만할걸?”

Page 36: 살아야 한다(소설)

리더는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웃고는 부하들에게 나의 밧줄을 풀라고 지시했다. 몸에

감겨진 밧줄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나는 죽음이라는 공포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가슴 한 편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젠장, 내 친구를 죽인 새끼들인데 고작 몇 초 때문에, 비열한 자식, 간사한 자식'

난 이 놈들에게 죄를 빌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런 미친 새끼, 한 번 보자. 네가 끝까지 용기 있는 척 하는지. 너 같은 새끼를 먼저

죽여 놔야 다른 놈들이 겁을 먹지”

두 죄수는 내 밧줄을 모두 풀었고 난 그제야 뒤를 돌아볼 수가 있었다. 문 앞에 한

사람이 웃고 있었다. 난 조금씩 그에게 다가가 자세히 바라보았다. 날 구해준 사람은

바로 버스 기사였다.

‘기사 아저씨가?’

의외였다. 나랑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사 아저씨가 날 구해주려 하다니, 말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나를 위해 죽으려 하다니... 그는 죄수들의 지시에 따라 앞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내 옆으로 다가온 찰나의 순간, 그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따뜻한 온기…

나는 죄수에게 이끌려 문 앞에 섰다. 손으로 벽을 잡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가

떨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 앞에 있는 아저씨는 방금 전 내가

경험했던 것처럼 의자에 고정된 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어색한 웃음, 그가 떨리는 입술로 내게 말을 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난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떨리는 입술, 그 역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머리가 책상에

고정되었다. 난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Page 37: 살아야 한다(소설)

‘왜? 왜 나를 위해 대신 죽으려는 거예요?‘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무슨 말이든 그에게 하고 싶었다. 내가 대신

죽을게요. 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은 의지와 관계없는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아저씨,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저씨.”

난 무능하고 이기적인 놈이었다. 속으로 한 없이 자신을 저주했다.

‘젠장, 젠장!’

나를 위해 죽으려는 그에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죄수의 리더가 톱의 끝을 기사

아저씨의 목에 올려놓았다. 기사 아저씨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몸이 좀 전보다 더

심하게 떨렸다.

“왜? 너도 살려달라고 빌고 싶어? 그럼 빌어봐! 혹시 내가 살려줄지도 모르잖아.”

기사 아저씨는 조금 멈칫하더니 크게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는 공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크게 웃어댔다. 굴복하지 않겠다. 살려달라고

하지 않는다. 기사 아저씨는 죽음이 목에 드리워진 순간에도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리더는 화가 난 표정으로 톱을 그의 목에 대고 서서히 자르기 시작했다. 그의 목

주변에서 피가 뿜어져 내려왔다.

“드르륵, 드르륵”

톱이 그의 목을 지나가면서 나는 소리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징그러웠다. 기사

아저씨는 눈이 뒤집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일부러 미친 듯이 웃어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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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웃음소리는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아저씨! 아저씨!”

난 기사 아저씨를 향해 소리 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뒤에 있던 죄수

두 명이 나의 앞을 막아버렸다. 의자 주변이 그의 피로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발버둥

치던 아저씨의 몸이 서서히 조용해졌다. 그의 목소리도 점차 작아져 갔다.

리더는 흥분한 눈으로 그의 목만을 쳐다보며 톱을 그어댔다. 그의 얼굴에는 기사

아저씨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의 표정은 악마와 흡사했다. 그는 기사 아저씨의

목을 자르고 나서 그의 머리를 움켜쥐고 경찰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말했지? 이건 너희가 죽인 거야. 알았어? 너희들이 죽인 거라고.”

그는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잘려진 기사 아저씨의 머리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공포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기절하기 전 서서히 감겨지는 눈을 통해 기사

아저씨의 고통으로 물든 표정을 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이 지옥 같은 경험을 해야 하는

걸까?

Page 39: 살아야 한다(소설)

Chapter 3.

PM 07:00

몇 시간이 지났을까? 벌써 저녁이 되었는지 짙은 어둠에 앞을 잘 볼 수 없었다. 난

손을 들어 무언가를 짚으려 했으나 허공을 휘저을 뿐 아무것도 만질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등을 툭툭 쳤다.

‘뭐야?’

나는 살며시 눈을 뜨고 뒤에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죄수들의 리더가 나를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뒤에 있는 벽에 등을 붙였다.

“왜 이러세요?”

“왜긴? 다른 사람들도 다 죽었으니까, 이젠 네가 죽어야지”

그의 손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톱이 들려 있었다. 뭐? 다른 사람들도 다 죽었어? 난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모두들 누워있는 듯 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하다. 그때, 갑자기 발아래 무언가 차가운 액체가 느껴졌다. 난 잠시

아래를 살펴보았다.

‘뭐야? 피?’

검붉은 액체가 나의 다리 주변에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급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저 검붉은 피는 계속 나를 쫓아왔다. 리더는 움직이지 않은 채 이를 드러내며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저 눈, 저 입, 그는 나를 모멸하고 있었다. 난 달아나려

노력했지만 내 주변으로 피가 계속 모여들었고 난 사방이 막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저 멀리 누워있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으악!”

Page 40: 살아야 한다(소설)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나는 보았다. 사람들이 일어날 때마다 머리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떨어진 머리는 나를 향해 떼굴떼굴 굴러들어왔다. 그

중에는 버스 아저씨와 날 지켜줬던 친구, 경필이도 있었다. 그들의 머리가 발 앞까지

왔을 무렵 나를 향해 눈을 크게 부릅뜨고 소리를 질러댔다.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죽인 거야! 네가 다 죽인 거야!”

“죄송해요. 죄송해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에게 사죄하기 시작했다. 손을 빌며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들은 나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나 때문에.

“야 일어나! 일어나!”

꿈이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많이 걱정을 했는지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여전히 방 안이다. 사람들은 모두

기가 죽어있었으며 눈에는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혜경이는 여전히 방 한 쪽 구석에

웅크려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수현이가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는 힘껏 날

부둥켜안았다.

“임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난 정말 네가 죽는 줄 알았단 말야.”

그랬지, 난 정말 죽을 뻔 했었다. 하지만 기사 아저씨가 날 대신해 죽음을 맞이하였다.

죽기 전에 그가 내게 보여준 미소는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가 죽을 때 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슬퍼하는 표정? 아니면 난 죽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하는 표정?

내가 그때 울부짖었던 목소리에 그를 향한 죄의식이 담겨있었을까? 아님 그저 미안함을

표시하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이었을까.

그저 누워있는 채로 지붕만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 무언가 내 마음을 강하게 짓눌렀다. 더 이상 스스로를 위로할 수 없었다.

아니 위로할 자격이 없었다. 날 위해 돌아가신 기사 아저씨는 죽기 전에 미소를 보이며

Page 41: 살아야 한다(소설)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난 그저 우스꽝스런 소리만을 질렀을 뿐 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하하하”

입에서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나왔다.

‘비겁한 새끼, 못난 새끼, 난 정말 비겁한 새끼다.’

옆에서 수현이와 수경 언니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작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중얼거렸다.

“나한테 너무 가까이 오려 하지 마, 가까이 오면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도 죽을지 몰라”

그들에게 힘없는 미소를 보였다. 가슴이 계속 아프고 목에 뭔가 뜨거운 돌이 박힌

것만 같았다. 수경 언니가 내 쪽으로 다가와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 너 스스로를 탓해봤자 좋을 것 하나도 없어. 너한테도, 너를 위해

돌아가신 기사 아저씨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슬퍼 보이는 눈빛, 그녀는 나를 위해 최대한 웃어

보였지만 그녀가 억지로 웃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몸을 들어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겼다. “언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있는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할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언니는 나를 살포시 껴안아 주었다.

그녀의 “괜찮아, 괜찮아”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Page 42: 살아야 한다(소설)

난 한참을 울고 나서 다시 몸을 벽에 기대며 애써 심신을 가라앉혔다. 내가 아무리

슬퍼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난 여기서 나가야 돼, 나가지 못하면 기사 아저씨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조금씩 흥분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난 심호흡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망의 공기, 사람들 사이로 절망감이 맴돌았다. 그 전까지는 서로 대화를

하며 상황을 잊으려 했지만 누군가 죽어버린 지금,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다음

번에는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PM 08:00

난 살며시 일어나 창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죄수들과 경찰들은 여전히 실랑이

중이었고 그들의 뒤에는 알 수 없는 신원의 시체 3 구가 놓여 있었다. 모두 머리가

없었다. 저들 중 한 명은 분명 기사 아저씨일 거야. 쿵쿵... 다리로 바닥을 찍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미칠 듯이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제 9 명, 아무리 살아남으려 해도 이틀이면 난 저들처럼 목이 잘려진 채 죽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경찰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50 억이라는 액수는 하루 안에

모으기 힘들며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죄수의 리더는 부하 중의 한

명에게 톱을 건네주었고 자신의 옆에 있는 죽은 자들의 머리 중 하나를 경찰들에게

던졌다.

“툭”

주변의 경찰들이 놀란 소리를 하며 뒤로 물러났다. 누군가의 머리였던 그것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하며 경찰들을 향해 노려보고 있었다.

난 그들이 몸을 돌려 다시 방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보고는 방 안 사람들에게 그들이

온다는 표시를 하였다. 모두들 겁을 먹은 표정으로 몸을 웅크렸다. 하나같이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Page 43: 살아야 한다(소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죄수들은 모두 지친 표정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는지

침을 뱉으며 우리에게 성을 내기 시작했다.

“요즘 경찰 새끼들은 사람이 죽는 걸 우습게 여긴다니까, 야 우리가 나쁜 새끼들이냐

아님 저 새끼들이 나쁜 새끼들이냐?”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이 원하는 답을 강요했고 죽음이 눈앞에 닿아있는 우리로서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옷은 죽은 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죄수들 중 한 명이 손짓으로 나를 포함한 세 명을 불러냈다.

“야 배고프다, 저녁이나 한 번 해줘라.”

나는 그들의 지시에 따라 힘없이 일어나 주방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차라리 세 명밖에

없는 주방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사람들 주위에 피어나는 절망의 기운은 앉아만

있어도 숨이 막혀왔다. 조용히 음식을 준비했다. 우리 세 명은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음식에 열중했다. 마음 같아서는 식칼을 몰래 품에 넣어 나가고 싶었지만 우리를

지키고 있는 저 녀석이 뚫어져라 우리를 쳐다보고 있기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여자가 갑자기 칼질을 멈추더니 우리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너희들은 포기하지 마, 나처럼 포기하지 마”

영문을 알 수 없어 당황해 하는 우리에게 그녀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입은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아픔을 그렸다. ‘픽’ 그녀는 음식을 하던 식칼로 손목을

그어버렸다. 상처 사이로 피가 뿜어져 나왔고 그녀의 몸은 힘없이 우리 앞에 쓰러져

버렸다. 우리는 그녀의 자살에 놀라 소리를 지으며 뒷걸음을 쳤다. 나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수건을 찾아 그녀의 손목을 지혈하려 했으나 이미 바닥을 붉은 색으로 적셔버린

피는 그칠 줄을 몰랐다.

“뭐야? 이 새끼 자살한 거야?”

Page 44: 살아야 한다(소설)

우리를 감시하고 있던 죄수 한 명이 금세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전혀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누군가가 죽는 것이 그들에게는 익숙한 건가’

그는 투덜거리며 무릎을 꿇고 죽은 그녀를 퉁명스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그녀가

몸을 던져 오른손에 들고 있던 식칼을 그의 허리에 꽂아버렸다.

“으악!”

그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고 자신의 허리에 있는 식칼을 부여잡았다.

여자는 빠르게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그녀는 양 손으로 그의 머리를 두르고 몸으로

그를 짓눌렀다. 죄수는 주먹으로 여자의 허리를 치고 발로 걷어차며 있는 힘을 다해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모든 피가 빠져버린 그녀의 몸은 차갑게 굳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발버둥 칠수록 칼에 꽂힌 죄수의 허리 주변은 조금씩 붉은 피로

젖어 들었고 거칠게 반항했던 죄수도 조금씩, 조금씩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옆에 있던 여자는 구토를 하며 밖으로 뛰쳐나갔고 난 그저 우두커니 그 둘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녀는 복수를 하기 위해 자신을 죽인 것일지도 모른다. 복수라는

두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면서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쿵쿵...

“누구야? 이게 뭐야?”

뛰쳐나오는 여자를 목격한 죄수들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며 죄수들 중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놀라서 말문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쓰러져 있는 둘의 시체를

바라보다 내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나는 얼굴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그에게 아는 모든

것을 말했고 잠자코 듣고 있던 그는 피식 웃더니 싸늘해져 버린 그녀에게 다가가 ‘퍽!’

발길질을 했다.

“미친 새끼! 멍청하니까 이런 년한테 죽는 거야."

Page 45: 살아야 한다(소설)

그는 죽은 그녀에게 몇 차례의 발길질을 한 후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나에게 둘의

시체를 치우도록 지시했다. 동료의 죽음도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난 죄수가 문을

닫는 소리를 들으며 그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피 비린내가 강하게 코를 자극했다.

하지만 난 이를 악물고 주변의 물건으로 피를 닦았다. 죽은 여자의 시체는 딱딱하게

굳어 옮기는 게 쉽지 않았다. 난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 순간, 그녀가

쥐고 있는 식칼을 발견했다. 가슴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복수, 복수할 수 있다.

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난 있는 힘껏 그의 허리에서 칼을

뽑았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짙은 피가 뿜어졌다.

난 일단 여자를 밖으로 옮기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밖의 죄수들에게 내 생각을

들킬까 두려워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 칼 주변의 피를 깨끗이 닦고 수건으로

묶어 칼을 허벅지에 고정시켰다. 다행히 움직이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다시 죽은 죄수의

시체를 밖으로 옮기고 사람들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몇몇이 내게 다가와 안부를

물었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가슴은 멈추지 않고 쿵쾅거렸다.

‘멈춰라, 제발 좀 멈춰!!’

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작은 심호흡을 했다. 머리가 조금 가벼워지자

허벅지에서 차가운 칼의 날이 느껴졌다.

‘칼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면 죄수들에게 들킬지도 몰라’

어쩌면 이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난 침착해야만 한다.

PM 09:00

한 명의 죄수가 들어와 다른 여자들에게 저녁을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다행히도 나를

뽑지 않았다.

나는 안도하며 살며시 허벅지의 칼을 수건으로 강하게 고정시켰다. 칼의 끝이 살에

닿았는지 따끔한 통증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경찰들과 죄수들의 대치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미 4 명의 시체가 경찰들 앞에 놓여

있었지만 그들은 변명만 할 뿐 죄수들의 제안을 조금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한동안

Page 46: 살아야 한다(소설)

인질을 해치지 않았던 죄수들도 더 이상의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죽여야 할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죄수들의 리더가 잠시

우리들을 둘러보더니 웃으며 외쳤다.

“야 너희들 중에 혹시 그 미친 새끼처럼 자진해서 죽을 새끼 있어? 있으면 손 들어봐.

오늘은 그 새끼만 죽이고 다른 애들은 살려준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을 것이라 그는 확신했고 그의 예상은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누구도 밖에 버려진 목이 없는 시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주변 친구들과 함께

최대한 고개를 숙이며 날 부르지 않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손을 높게

쳐드는 것을 보았다. 난 살짝 고개를 들어 손을 든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차에서 보았던

그 노인이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는 희생을 택했다. 모르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의 옆에 있던 부인이 그를 말리기 위해 손을 내리려 애썼지만 노인은 조금도

내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부인을 위로 하며 말했다.

“살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은 내가 가는 게 낫잖아.”

리더의 옆에 있던 죄수가 노인에게 다가가 인상을 주며 협박했지만 그의 의지는 꺾일

줄을 몰랐다. 오히려 노인은 벌떡 일어나 죄수들을 향해 걸어가려 했다. 난 노인에게

기적이 일어나 살 수 있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리더는 갑자기 옆에 있는 죄수의 총을

빼앗아 그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퍽”

총을 맞은 노인의 가슴은 사방으로 피를 튀겼다.

“성우 아버지! 안돼! 죽으면 안돼!”

그의 몸은 뒤로 풀썩 쓰러졌으며 부인은 노인을 외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Page 47: 살아야 한다(소설)

“원래 용기 있는 새끼가 먼저 뒤지는 거야, 알았어? 야! 그 다음은 누가 뒤질 거야?

또 한 번 손 들어봐!”

리더는 히죽거리며 한 사람, 한 사람씩 묻기 시작했고 모두들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죽어가는 노인의 옆에서 부인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노인은

부인의 손을 잡으며 애써 몇 마디 하려 했으나 피에 잠긴 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서서히 눈을 남았다. 부인은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남편의

이름을 미칠 듯이 불러댔다.

"성우 아버지, 성우 아버지!"

그녀의 절규가 방 안에서 끊임없이 맴돌았고 사람들의 표정은 한층 더 침울해졌다.

결국 그는 의미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부인 또한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기절해버렸다.

그들은 노인의 시체를 끌고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경찰들에게 하는 일종의 경고였다.

오늘까지 총 5 명이 의미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대로라면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을 것 같았다. 난 살며시 다리의 칼을 만지며 이를 갈았다.

죄수들도 인질의 수가 더 이상 줄어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더 이상의 살인을

벌이지 않았다. 대신 방에 들어와 안의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가끔 다리로 있는

힘껏 가격하거나 혹은 말로 형언하기 힘든 심한 모욕을 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폭력으로

인해 눈 주변이 찢어지고 피를 흘렸지만 공포로 뒤덮인 눈으로 죄수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떠한 반항도 하지 못했다.

“예수님, 저 어린 양들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옳은 길로 인도하소서!”

죄수들이 떠나고 난 후의 방 안은 신부의 기도 소리로 가득 찼다. 여전히 그의

주위에는 2~3 명의 사람들이 그와 함께 기도를 했고 때때로 그들은 같이 기도하자며

주위를 부추겼다. 난 저들 중의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멍하니 죽음을

Page 48: 살아야 한다(소설)

기다리는 짓은 하지 않겠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난 최대한 죽은 노인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노력했다.

“이 할머니가 미쳤나, 뭐가 그리 기분이 좋다고 웃어? 남편이 죽으니까 기분이 좋아?”

한 죄수가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는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는 남편의 죽음

이후, 충격이 컸는지 슬픔도 잊은 채 마냥 웃고만 있었다. 호기심이 생긴 죄수는

그녀에게 강아지 다루듯 여러 가지를 강요했다. 앞뒤로 구르거나 자신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할머니는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웃으며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죄수는

한동안 할머니를 괴롭히고는 싫증이 났는지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할머니는 그가

나간 후에도 웃기만 할 뿐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몇 시쯤 되었을까? 창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죄수들은 우리들을

통제하기 위해 밤에는 불을 켜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밖에서 들어오는 불빛이 서서히

약해지고 우리는 앞에 있는 사물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난 작게 수경 언니를 불렀다. 앞 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조금씩 땅을 짚으며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커다란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어 쉽게 분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눴다.

“수영아?”

“네?”

“넌 남자친구가 있니?”

갑작스런 질문에 난 당황한 나머지 얼굴을 붉혔다. 난 혜경이와 달리 괄괄한 성격

때문에 학교 안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없어요” 라고 말하며 난 고개를 숙였다. 수경

언니는 분명히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을 거야.

“너처럼 귀여운 여자 아이가 남자 친구가 없다니 너무 이상해.”

“하하, 전 언니처럼 여성스럽지 못한 걸요.”

Page 49: 살아야 한다(소설)

가벼운 대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많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경 언니는

나를 지긋이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걸었다.

“넌 반드시 나가서 좋은 사람을 만나. 분명히 잘 살 수 있을 꺼야.”

“언니도 같이 나가야죠. 여기서 죽을 순 없잖아요.”

“난.... 사실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돼. 나... 실은 자살할 생각으로 혼자 여행을 온

거였거든. 그니까 난 죽어도 괜찮아. 하지만 동생은 반드시 살아야지.“

예전 남자친구가 그녀에게 남겨둔 상처는 내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수경

언니와 남자 친구는 대학 시절부터 교내에서 유명한 커플이었다고 한다. 벌써 6 년을

교제했고 언니는 그 남자와의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남자가 출세하면서

둘의 거리는 서서히 멀어졌고 언니는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결국 유명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해버렸다.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떠안게 된 수경 언니는

그에게 벗어나는 방법은 자살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난 후 난 엄마의

표정이 떠올랐다. 항상 웃었지만 눈에는 슬픔이 묻어나왔던 엄마와 수경 언니는 참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난 이를 악물고 그녀의 향해 밝게 웃었다.

“언니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난! 반드시 언니랑 밖에서 다시 만날 거예요.”

확신 없는 약속을 내뱉었다. 하지만 언니가 죽는다면 난 기댈 사람이 없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누군가가 다시 죽는다는 건.

PM 10:30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불이 들어왔다. 밝은 불빛에 적응하지 못해 눈이 따끔거렸다. 그

사이 죄수들 중 세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살펴보았다. 나머지 인원은 아직도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듯 했다. 죄수들은 잠깐 둘러보더니 이내 우리에게 이를

Page 50: 살아야 한다(소설)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옆의 혜경이는

어젯밤의 기억 때문인지 몸을 심하게 오들오들 떨며 머리를 손으로 가리려 했다.

“자! 이제 자야지,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피곤하잖아? 어디 보자, 오늘은 누구랑 자는

게 좋을까?”

둘 중 한 명이 혜경이에게 다가가 비열한 웃음을 띤 채 더러운 손으로 그녀의 볼을

만지려 했다. 혜경이는 눈을 부릅뜨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다. 그녀는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그가 다가오는 것을 거부했고 죄수는 갑작스런 그녀의 반항에

화가 났는지 욕을 하며 발을 들어 그녀의 몸을 밟으려 했다. 이를 본 수현이가 참다못해

몸을 던져 그녀를 방어했다.

"죄송합니다. 혜경이가 충격을 받아서 그래요. 용서해 주세요."

수현이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난 혹시나 경필이처럼

수현이도 죄수에게 당하지 않을까 가슴을 졸였다. 다행히 죄수는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수현이를 잠깐 노려본 후 다른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다른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놈이다. 어젯밤 수경 언니에게 많은

상처를 남긴 그 놈, 그가 한걸음,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난 그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치마 속 칼을 쥐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기서 저놈의 가슴팍에 이 칼을 꽂는다면,

복수를 한다면? 아직도 4 명의 죄수가 있다. 내가 이놈을 죽인 다해도 밖의 네 놈에게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 차라리 이 번 한 번만 참으면 다음에는 더 좋은 기회가 있지

않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을 때 죄수는 어느새 수경 언니에게

다가왔다.

“오늘도 한 번 해야지? 어제도 재미있었잖아. 오늘은 더 터프 하게 놀아보자고”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생각하란 말이야! 무엇이든 해야 돼! 더

이상 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 난 그 놈에게서 수경 언니를 지키기

위해 그를 막아 서려는 순간, 수경 언니의 손길이 내 무릎에 닿는 것을 느꼈다. 언니는

Page 51: 살아야 한다(소설)

순순히 그의 말에 응하며 그를 따라 반대편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 멈칫거림이 그녀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젠장! 멍청한 새끼!”

멀어져 가는 수경 언니를 바라보며 머리를 부여잡고 나 자신을 욕했다. 언니와 함께

나가겠다고 말했는데, 질린다. 다른 사람들이기 보호받는 것도, 더 이상 고통 받는 것도,

조용히 머리를 숙인 채 그들이 상처받지 않고 돌아올 수 있기를 희망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으악!! 아파! 아파!!”

“뭐야? 무슨 일이야?”

문 밖 너머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에 우리를 지켜보던 죄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권총으로 문을 겨누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문을 살짝 연

순간 반대편에서 죄수에게 끌려갔던 수경 언니가 그를 향해 몸을 던졌다.

“푸욱”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죄수의 몸이 반대쪽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배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칼이 꽂혀 있었다. 수경 언니가 그를 찌른 것이다. 죄수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꿈틀거리기만 할 뿐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풀썩 쓰러졌다. 그가 가지고 있던 권총은 언니와 부딪쳤을

때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고 멀리 한 쪽으로 굴러갔다. 수경 언니는 잠시 죽은

죄수의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보며 그제야 정신이든 듯 소리를 질렀다.

“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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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몸을 벽에 기댄 채 자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에 오열했다. 찢어진 치마

사이로 보이는 다리는 후들거렸으며 손에 묻은 피는 아무리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의 입은 피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를 입으로 물어뜯은 것처럼.

멍하니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난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였으나 밖에 있던 죄수들이

동료의 비명 소리를 들었는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형철아! 너 이 씨발 년이! 네가 죽였냐?”

동료의 죽음을 확인한 죄수의 리더가 분노로 가득한 욕을 내뱉으며 수경 언니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그녀는 살인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초점 없는 눈, 리더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손을 들어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다.

“짜악, 짝”

그의 손이 수경 언니의 볼에 닿을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소름

끼쳤다. 수경 언니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나는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한 쪽에서는 죄수가 반대편 방에서 동료의 시체를 꺼내고 있었다. 수경 언니와

같이 들어갔던 죄수였다. 그는 하의를 모두 벗은 상태였고 사타구니에서는 검붉은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구석에는 잘려있는 죄수의 그것이 놓여 있었다.

“야이 새끼들아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해!”

반대편에 있던 신부가 벌떡 일어나 죄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어느새 죽은

죄수의 총을 들고 있었다.

“보이지? 나도 군대를 갔다 와서 총 쏘는 법은 알거든? 빨리 그 여자에게서 떨어져

아니면 진짜로 쏠지 몰라. 진짜야! 진짜 죽일 거야.”

Page 53: 살아야 한다(소설)

신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죄수들을 협박했다. 그의 총구는 그들을 향해 겨누고 있었지만

공포에 묻혀 손이 떨리는 것을 반대편에 있는 나조차도 느낄 수 있었다.

“어쭈? 네가 날 죽인다고? 임마, 사람 죽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리더는 죄수를 향해 코웃음을 치며 옆에 있는 죄수에게 손짓을 했다. 옆의 죄수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허리춤에 손을 넣어 칼을 꺼냈다. 이미 누군가의 피를 마셔본 듯한

칼날은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리더는 칼을 건네 받고는 신부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자 5 초를 준다. 5 초 안에 네가 날 안 쏘면 이 칼이 이 여자의 뱃속에서 헤엄치는

것을 보게 될 거야. 5 초라고 했다.”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내며 신자에게 칼을 찌르는 흉내를 냈다. 신자는 성경 구절을

반복해서 읊조리며 리더를 향해 총을 겨눴다.

“허튼 짓 하지 마! 진짜로 쏜다!”

“자, 5, 4, 3”

“빨리 쏴! 빨리 쏘란 말이야!”

난 죽을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신자를 독촉했다.

‘쏘란 말이야! 아니면 수경 언니가 죽어!’

난 상기된 표정을 띤 채 손으로 바닥을 강하게 두들겼다.

‘안 돼! 수경 언니는 나랑 같이 나가기로 했단 말이야!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아악! 이 개새끼들아! 진짜 쏜다고!"

“2, 1”

"빨리 쏘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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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목소리가 서로 뒤엉켰다. 결국 신부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리더는 1 을

외치고 나서 칼을 세게 쥐었다. 칼이 수경 언니의 배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언니는

“큭...” 하는 작은 비명만을 지른 채 앞으로 꼬꾸라졌다. 리더는 쓰러지는 그녀의 얼굴을

한 쪽 어깨로 지탱한 채 반대편 손으로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이고 불쌍한 것, 이렇게 예쁜데.”

신부는 여전히 그들에게 총을 겨눈 채 노려보고 있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입은

계속해서 성경 구절을 읊조렸다. 그는 결국 힘없이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리더는 신부의 앞으로 다가가 그가 떨어뜨린 총을 주어 가슴팍에

집어넣었다. 한 손으로 신부의 볼을 툭툭 치며.

“거봐! 내가 그랬잖아. 사람 죽이는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만을 흘리고 있는 신부를 뒤로 한 채 리더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당장이라도 죽일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고개를 돌려 그의

눈빛을 외면했다. 어느새 그는 내 옆으로 다가와 얼음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굴 죽이라고? 아가야 그렇게 날 죽이고 싶어?”

“그래! 널 죽이고 싶어!”

난 반항하듯 소리쳤다. 머릿속은 의외로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차가웠다. 내가

칼로 이놈을 죽여도 뒤에 있는 놈들을 죽일 수 없다. 내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누나의

죽음은 무의미해져 버린다. 참자, 참자.

“하? 그래? 날 그렇게 죽이고 싶어? 야... 생각 같아서는 나도 당장 널 죽이고 싶은데

내일까지는 살려줄게. 넌 내일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최대한 아프게”

“네가 할 수 있으면 어디 마음대로 해봐!”

Page 55: 살아야 한다(소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목을 그으는 척 하며 나를 위협했다. 나는 공포감도 잊은 채

눈을 부릅뜨고 그 놈을 노려봤다. 더 이상은 약한 모습 보이지 않을 테다. 너 따위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 마음 속 한편에 있는 조금의 공포감이라도 그에게 들키기 싫어

최대한 눈에 힘을 줬다. 그는 한 쪽 입 고리를 올리며 나를 비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방 안의 불을 껐기 때문에 금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PM 12:00

리더는 수경 언니의 시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또 다시

수경 언니를 바닥에 내던진 채 경찰들을 협박할 것이다. 문은 닫혔고 방은 다시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이미 밤 11 시가 넘은 것 같다. 그나마 창문의 틈 사이로 들어오던

빛마저 희미해지고 우리는 서로의 윤곽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키며 내 마음을 안정시키려 해보지만 항상 내 옆에 있어주었던

수경 언니마저 떠나버린 지금, 도저히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벽을 두들겼다. “퍽, 퍽” 벽에 부딪힐 때마다 살갗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난 아픔 따윈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왼쪽 가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무거웠다.

“미안하다. 어쩔 수가 없었어...”

반대편에서 신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나는 벌떡 일어나 어딘가에 있을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어 눈을 치켜 뜬 채로 그를 찾아보았지만

어둠으로 가려진 방 안은 그가 있는 곳을 말해주지 않았다. 난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미안해? 그게 지금 당신이 할 소리예요? 당신이 수경 언니를 죽인 거예요. 알았어요?

왜.. 도대체 왜 안 쏜 거예요? 그 새끼가 그렇게 무서워요?"

“쏠 수가 없었어. 난 사람을 죽일 수 없어."

Page 56: 살아야 한다(소설)

또 빌어먹을 종교 타령인가? 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평소에 입에 담아 본 적도 없는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종교가, 종교가 사람 목숨보다 중요해요? 그깟

종교 때문에 수경 언니가 죽도록 내버려 둔거예요?"

난 어둠 속에 가려진 문을 가리키며 그에게 소리쳤다. 밖에 있는 그들이 내 고함을

듣고 들어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미 그를 향한 분노에 아무런 생각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그저 이 무거운 것들을 쏘아내고 싶었다.

“미안해. 하지만 난, 난 보다시피 신부잖아. 남들이 아무리 날 미워해도 난 그들을

미워해선 안 돼.”

“뭐? 당신은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네요. 난 이제 당신이 저 새끼들한테 죽어버려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슬퍼할 가치도 없어!"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은 방 안에 나와 신부의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많은 이들을 죽인 죄수들은 저 문 밖에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앞에 있는 신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물론 나도 느끼고 있었다. 신부 역시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난 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벗어나고 싶어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신부를 향해 던지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부는 그저 나의 욕지거리를 받아주고 있었다.

몇 차례 그에게 소리를 지른 후, 난 풀썩 주저앉아 멍하니 지붕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에 가려져 있는 지붕은 나의 마음을 더욱 그늘지게 만들었다. 벽을 향해 몇 번

뒤통수를 박았다.

"쿵쿵."

벽을 부딪치며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는 나를 웃게 만들었다.

Page 57: 살아야 한다(소설)

"하하"

몇 차례 반복해서 머리를 박았다. 살며시 느껴지는 이 통증이 내 머릿속의 빌어먹을

고통을 덮어주길 바랬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더 세게 부딪혀본다. 더 세게... 더

세게...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눈물이 새어 나왔다.

"아악! 아아아아악!"

난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벽에 부딪쳤다. 나의 절규에서 분노와 아픔이 묻어 나왔다.

옆의 친구가 뭐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난 일부러 대꾸하지 않았다. 몇 차례 머리를

박은 후, 다시 벽에 몸을 의지했다. 머리 쪽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왠지 따스했다. 난

조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그저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 언니는 이 것보다 더

아팠겠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린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는

거지? 수많은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복수...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졌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입으로 한 없이 중얼거렸다.

"수경 언니, 미안해요. 난 누나처럼 강하지 못한 가봐요."

그때 앞에서 누군가가 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난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좀 더 자세히 그를 쳐다보았다. 깊게 패인 주름, 옅은 회백색 머리카락이 보이는 그는

죽은 노인의 부인이었다.

'할머니가 어떻게?'

할머니는 아무 말도 않은 채 내 옆에 앉아 손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날

위로하려는 것 같다. 난 조용히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작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웃음을 보이며 손을 움켜쥐었다. 할머니는 잠시 내 손을

만지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할머니의 눈이…'

Page 58: 살아야 한다(소설)

눈 주위 깊게 패인 주름 위로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녀 또한 이 악몽 같은 현실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몸을 끌어 안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정신 차리자! 수영아 정신 차려, 힘들어할 여유가 없다. 내일이면 끝난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거나 아니면 기사 아저씨나 수경 언니, 경필이처럼 저 놈들에

의해 죽겠지. 예전과 달리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다. 조용히 내일을 준비하자. ’

잠시 그녀를 껴안은 후 다시 벽에 몸을 기댔다.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어차피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조용히 잠을 청했다. 눈을 감고 나니 먼저 떠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금만 기다려요. 조금만...’

AM 05:00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다. 밖에서 스며들어오는 햇빛에 잠이 깼다. 한 3 시간 정도

잠들었나? 일부러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심장이 여느 때와 달리 쿵쾅거리지 않는다. 난

조심스럽게 일어나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많이 줄어든 사람들... 이제 8 명밖에 남지

않았다. 다들 이틀 동안 씻지 못해 지저분한 모습이다. 여전히 죽어있는 눈, 그들은 모두

숨을 쉬고 있지만 정신은 이미 공포에 눌려 죽어버렸다.

‘혜경이는 먼저 일어나 있었네'

난 혜경이 옆에 앉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혜경아, 많이 힘들다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리 조금만 힘내자. 오늘이 아마 마지막일

거야. 이 좁은 방도, 힘든 생활도”

괜히 혜경이의 손을 잡고 싶어졌다. 또 나에게 화를 낼까? 난 손을 들어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살짝 그녀의 손가락을 건드려 본다. ‘윽’ 그녀가 소리 지를까 몸을

잔뜩 움츠렸다. 의외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걸까? 조금 더

Page 59: 살아야 한다(소설)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잡아 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난 그녀의 손을 잡고는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힘내자!”

난 그녀의 옆에 앉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조금 있으면 죄수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치마에 손을 넣어 칼을 한 번 만져본다. 여전히 차가운 감촉. “휴우” 심호흡을 크게 한

번하고 조용히 그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 복수라는 단어를 되씹으며.

밖이 다시 소란스러웠고 경찰과 죄수들의 목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경찰들은

50 억이란 돈을 들여가며 우리를 구해줄 생각이 없다. 잠자코 앉아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일어나 닫힌 창문 틈을 통해 소리를 질렀다.

“50 억 따위 줘버리고 빨리 우리들을 꺼내달란 말이야. 우리를 정말 죽일 생각이야?”

우리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경찰들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죄수들은 한참 동안

경찰들과 말다툼 후 다시 방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난 급히 허벅지에 묶어 놓은 칼을

꺼내 왼쪽 소매에 집어넣었다.

“드르륵”

방문이 열리고 하나 둘씩 죄수들이 들어왔다. 난 그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죄수들은 아직 4 명이나 남았다. 그들을 쳐다보다 마지막에

들어온 죄수의 리더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본 후 피식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 눈빛, 이번만큼은 절대 도망치지 않는다.'

난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를 향한 나의 분노가 느껴지기를 바랬다.

“오늘 좋은 꿈 꿨어? 표정이 좋아 보이는데? 좋아, 그럼 우리 나가볼까?”

Page 60: 살아야 한다(소설)

리더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남자 두 명이 나의 두 어깨를 붙잡고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나는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는

수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뒤돌아보지 않은 채 일부러 크게 외쳤다.

“난 괜찮아! 금방 돌아올게”

방문이 열리고 나의 눈으로 빛이 들어왔다. 아침 햇살은 너무나 따스했다. 고작 하루

정도 방안에 갇혀 있었지만 이미 어둠에 익숙해져 버린 난 햇살의 따스함에 살짝 눈을

찌푸렸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밖의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경찰들과 방송 기자들이 나의

등장에 소란스러웠다. 고개를 들어 그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가지각색의 표정들…

‘어? 누구지?’

익숙한 모습의 누군가가 보였다. 그 사람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수영아! 수영아!”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외침 속에서 나의 이름을 들려왔다. 익숙하지만 미칠 듯이

듣고 싶었던 목소리, 엄마의 목소리다.

‘엄마가 어떻게?’

당황해 하는 나의 표정을 눈치 챘는지 엄마는 더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외쳤다.

“수영아! 안 돼! 수영아! 죽으면 안 돼”

젠장, 난 언제나 엄마를 아프게 만드는구나. 난 고개를 푹 숙이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예전과 동일하게 의자와 책상을 준비 했다. 한 죄수의 손에는 붉게

물든 톱이 들려있었다. 죄수의 리더가 앞에 나가 경찰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지금까지 총 6 명이 너희 경찰들 때문에 죽었어. 그런데 아직까지도 돈을 줄 생각을

안 해? 인질들이 다 죽어야 정신을 차리지!"

Page 61: 살아야 한다(소설)

'아무리 떠들어봤자. 저들은 변명만 할 뿐 돈을 줄 생각이 없어'

난 조심스레 양 옆 죄수의 눈치를 살 핀 후, 소매 속의 칼을 조금씩 밖으로 빼내었다.

그때 옆의 죄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 녀석이다. 경필이를 죽인 자식

"죽는다는 기분이 어때? 난 말이야, 처음부터 널 죽이고 싶었어.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가장 보고 싶었거든"

"그래? 그럼 좀 있으면 볼 수 있겠네. 즐거워?"

"하하. 즐거워 미칠 것 같아. 빨리 널 죽여 버리고 싶어."

" .... 그러면 내가 더 즐겁게 해줄게"

난 칼을 들어 그 놈의 목 주변에 찔러 넣었다. "크악!" 칼날이 살 속 깊게 파고들었고

죄수는 갑작스런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그는 살고 싶어 벽을 잡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의 손에 닿은 벽만 그의 피로 인해 붉은 색으로 물든 뿐, 다시는

일어설 수 없었다.

난 재빨리 반대쪽의 죄수를 온 힘을 다해 밀치고 다시 콘도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고민을 했다.

'차라리 경찰과 엄마가 보이는 반대쪽으로 도망갈까? 그럼 나 하나만은 분명히 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혜경이와 수현이는 어떡하지?'

고통스러워하는 둘의 표정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 하나만 살수는 없어!'

콘도 안으로 들어가 중앙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계단은 2 층으로 이어져 있었다. 2 층은 1 층보다 좁고 방도 하나밖에 없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던 중 바닥에 떨어져있는 나무 막대기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거라면!'

난 급하게 나무 막대를 줍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AM 09:00

Page 62: 살아야 한다(소설)

2 층의 방은 1 층보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난 벽을 더듬어 문 옆의

스위치를 찾아냈다.

'딸깍'

불을 켜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방안은 무언가의 썩은 내로 진동을 했고 수많은

시체들과 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이 사람들은?'

죄수들에게 끌려 콘도로 들어오기 전에 느꼈던 위화감이 떠올랐다. 분명 이 주변의

주민들이다. 저들은 도대체 얼마나 사람들을 죽여야 속이 풀리는 걸까? 속에서 구토가

올라왔다. 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옆의 스위치를 부숴버렸다.

'분명히 이쪽으로 들어올 거야.'

죽은 사람들 사이에 누워 몸을 숨기고는 막대기를 몸 안 쪽으로 쑤셔 넣었다.

10 초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죄수 한 명이 들어왔다. 그 역시 문을 더듬어

스위치를 키려 했으나 이미 부숴져 버린 스위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지금 나오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어."

그는 말을 끝마치고는 조금씩 앞으로 걸어 들어왔다. 옆에 있던 동료가 칼에 찔렸기

때문인지 그 역시 쉽사리 들어오지 못했다. 앞으로 몇 발자국을 더 걸어오더니 걸음을

멈춰 섰다.

"탕!"

총소리가 들려오고 앞의 시체가 살짝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탕!탕!탕" 연이어 세

번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참자. 참아야 해.'

난 혹시 총에 맞아 소리를 지를지 몰라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이를 악물었다.

Page 63: 살아야 한다(소설)

"퍼억!"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다리에서 올라왔다. 총알이 오른쪽 다리 어딘가로

파고들었다. 난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에게 나의 위치를 들킬지 몰라 이를 악물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다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너 이 새끼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총알을 모두 소진한 후, 화가 났는지 급하게 주변을 돌아다니며 한 명, 한 명 시체를

확인했다.

"퍽!퍽!"

시체를 발로 차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조금씩, 조금씩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마침내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조용히 나무 막대기를 들고 일어났다. 총을

맞은 왼쪽 다리가 욱신거렸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죽어!"

재빨리 그의 뒤통수를 몇 차례 내리쳤다. "으악!" 그는 뒤를 돌아 나를 노려보았지만

머리를 맞은 충격에 반항도 하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머리를 내리쳤을 때 그의 피가

셔츠와 나무 막대기에 묻어버렸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이토록 소름 끼치는

일이었나?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고 뱃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난 벽을 잡고 구토를 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흰 액체만

입에서 흘러나왔다. 눈에서 눈물이 났다.

"쿵쿵쿵"

Page 64: 살아야 한다(소설)

다리가 저릴 정도로 몇 차례 바닥을 찧었다. 소매로 눈 주변을 닦아낸 후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2 명이나 남았다. 난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다리가 떨려 걷는 게 어려웠다. 난 아래로 이어진 난간을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아래로 내려갔다.

반대편에서 죄수의 리더와 그에게 머리채를 잡힌 한 여자의 모습이 보여 급히

계단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보이냐? 여기 네 친구가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고 있거든? 빨리 내려와라. 아니면

이 칼로 네 친구 목을 도려내 버리겠어."

뭐? 난 난간을 잡고 급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의 옆에 울고 있는 혜경이가 보였다.

이미 죄수들에게 폭력을 당했는지 그녀의 입술은 붉게 터져있었다.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끝인가?'

나무 막대를 앞으로 던지고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향해 걸어 나갔다.

"내가 죽어줄 테니까, 혜경이는 풀어줘."

"일단 내려와. 죽이든 살리든 그건 내가 결정할 테니까."

웃고 있는 그의 표정과는 달리 그의 눈은 나를 죽여 버리겠다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난 계단을 내려와 그와 마주했다. 그는 옆의 죄수에게 혜경이를 맡기고 발로

나의 배를 걷어찼다. "억" 배의 고통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는 나의 턱을 잡더니 볼을

사정없이 때렸다.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몇 번을 때린 후 그는

나를 다시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수영아! 괜찮아?"

옆의 수현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반대쪽에는 신부가 피투성이인 채로 쓰러져

있었다. 난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수현이에게 억지웃음을 보였다.

'미안하다. 어떻게든 너희들과 함께 나가고 싶었는데'

Page 65: 살아야 한다(소설)

한 손으로 수현이를 안으로 밀어 넣고 죄수의 리더를 향해 소리쳤다. 일부러 얼굴에

웃음을 보였다.

'나에게 화내, 괜히 딴 사람 건드리기 말고!'

"미칠 것 같지? 내가 너희 새끼들 두 명을 죽였어! 두 명 밖에 안 남았지? 너희

둘이서 경찰들을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아? 너희는 이제 끝났어!"

어차피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에게 더 이상의 힘은 없다. 하지만 난 뭔가 알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곧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웃음이 나오다니, 난 킥킥대며

웃었다.

'난 지지 않았어. 살아남지는 못했지만 이 저주받은 자식들에게 한 방 날린 거야.'

나의 웃음은 리더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웃어? 재미있지 아주, 내 부하들을 죽이니까 아주 즐거워 미칠 것 같지?"

그는 발로 나의 몸을 걷어찼다. 나는 그를 자극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발이 총에 맞은 상처를 찼을 때, 난 다리부터 올라오는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으악, 아아악"

손으로 다리를 붙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리더는

나의 반응에 즐거워했다.

"아, 너 총 맞았네? 아프지? 어디였지? 무릎이었나?"

그는 계속해서 내 무릎을 가격했다. 아찔한 고통에 난 소리를 지르며 반대쪽으로 기어

그에게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뒤에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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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이가 앞으로 나와 리더를 저지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리더의 다리를 잡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이제 그만해요. 때릴 만큼 때렸잖아요. 인질도 몇 명 안 남았는데 차라리 그냥

도망가세요."

"안 비켜? 이 개새끼가, 죽고 싶어?"

수현이는 그의 폭력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나를 보호했다.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밟혔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새끼들 도대체 뭐 하는 새끼들이야. 죽는 게 무섭지도 않아?"

그는 소리를 내지르며 허리춤에서 총을 꺼냈다. 총 끝으로 수현이의 머리를 세게

눌렀다.

"너 총에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 맞고 나면 나한테 편하게 죽여 달라고 애걸하게

될 걸? 그래도 안 비켜?"

그는 말을 마친 후 수현이를 쳐다보았다. 수현이는 여전히 나를 보호했다. 눈을 질끈

감고 리더의 발을 끌어안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리더는 그의 행동에 여전히

변화가 없자 다리에 총을 쏘았다.

"퍼억"

수현이는 허공에 비명을 질렀다. 그가 내지르는 고통 어린 소리가 내 마음을 찢어버릴

것 같았다. 난 연거푸 수현이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나가려 했으나 친구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는 날 뒤로 밀어 넣었다. 리더는 그의 반대쪽 다리에 한 발 더 총을 쏘았다.

심한 고통에 소리조차 내질 못했다. 친구는 고통으로 물든 표정을 지은채 양 팔을 들어

나를 보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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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린다. 정말 너희 새끼들은, 그냥 죽어라"

수현이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난 몸을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따악"

응? 수현이는 살아있었다. 리더의 총알이 다 떨어진 것이다. 그는 욕을 하며 뒤에

있는 부하에게 총을 요구했다. 그때.

"야아!"

조금씩 이쪽으로 기어오던 신부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몸을 이용해 죄수의

부하를 있는 힘껏 밀쳤다. 부하의 손에 있던 총은 바닥으로 떨어진 후 어딘가로

굴러갔고 둘은 서로 엉겨 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리더는 깜짝 놀라 총을 주우려 했으나

수현이가 이를 놓치지 않고 그의 다리를 잡아 끌었다.

"쿵"

리더는 중심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부딪친 그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거 안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리더는 수현이를 떨쳐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그를 걷어찼다. 하지만 수현이는 이를

악물고 그의 다리를 잡고 놓지 않았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 또한 양 손으로

바닥을 끌며 조금씩 리더에게 다가갔다.

한편 반대편에서는 신부가 죄수의 몸에 올라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그는

분노 어린 표정으로 죄수를 죽일 듯이 때렸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성경을 읊었다.

Page 68: 살아야 한다(소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저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부하의 얼굴에서 새빨간 피가 튀었다. 그는 손으로 애써 신부의 공격을 저지하려

했지만 신부의 거친 공격에 조금씩 움직임이 둔해졌다. 신부는 죄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의 몸에 고개를 묻어버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반대편의 상황을 인지할 여유도 없이 리더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리더는

몸을 일으켜 총을 줍기 위해 쉴 새 없이 머리와 몸을 가격했지만 우리는 이를 악물고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나는 얼굴을 그의 다리에 파묻고 있는 힘껏 껴안았다. 리더는

일이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자 분노가 어린 소리를 질러대며 다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이 지겨운 새끼들아! 떨어져! 떨어지라고!"

그때 할머니가 웃으며 총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리더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옳지, 할머니 그 총을 나한테 던져요. 그렇지, 그렇지."

"할머니! 안돼요!"

할머니는 여전히 웃음을 띤 채 땅에 놓여 있는 총을 주었다. 설마?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나? 그녀는 총을 들고 이쪽으로 조금씩 걸어왔다. 리더는 총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저 총이 이 놈 손에 들어간다면 우린 죽을 것이다.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났어.'

할머니는 자신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리더를 향해 총을 들더니 그의 머리를

겨누었다. 그녀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이제 그만 죽어라."

"툭"

Page 69: 살아야 한다(소설)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할머니는 총을 이리저리 만지며 총을 쏘려 했지만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뭐야 할머니, 일부러 미친 척 연기한 거였어?"

리더는 할머니의 반응에 크게 놀랐으나 금세 고개를 젖힌 채 그녀를 비웃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수현이의 얼굴을 발로 강하게 밟았다. 수현이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반대편으로 튕겨나갔다.

"수현아!"

나는 더욱더 이를 악물고 다리를 당겼다. 이미 고통에 익숙해졌는지 더 이상 아픔이

느껴지질 않았다. 난 할머니가 이 녀석에게 총을 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총을 만지기만 할 뿐 리더를 향해 쏘지 못했다.

그때 신부가 어느새 할머니의 뒤로 다가와 총을 움켜쥐었다. 그는 총의 안전 장치를

풀고 할머니의 손에 총을 쥐어준 채 리더의 머리를 겨누어 주었다.

"할머니, 꽉 잡으세요."

신부는 뒤에서 떨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감싸 쥐었다. 할머니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총구를 리더에게 겨누었다. 잠깐의 정적. 리더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네가 숫자 새는 것을 좋아한다며? 자 3, 2"

"안 돼, 쏘면 안 돼! 살려줘!"

리더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강하게 몸을 흔들었다. 난 그를 놓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그를 붙들었다. 마지막 기회다. 난 눈을 감고 총 소리를 기다렸다.

"1, 0"

Page 70: 살아야 한다(소설)

"안 돼!"

할머니가 0 을 외쳤을 때 리더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눈을 부릅뜬 채 방아쇠를 당겼다.

"퍽"

총소리가 들려왔고 총알이 리더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이마에서 피가

솟구쳤다. 리더는 잠시 뒤로 휘청 하더니 손으로 바닥을 잡고 할머니를 잠시 노려보았다.

"쿵"

오래 지나지 않아 리더는 앞으로 꼬꾸라져 버렸다. 난 내 눈을 믿을 수 없어 멍하니

리더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미동도 없다. 마침내 그는 죽은 것이다. 난 남은 힘을 짜내

몸을 일으켜 수현이에게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온 몸이 욱신거려 제대로 걸을 수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걸었다.

"수현아 괜찮아?"

쓰러져 있는 수현이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의 양다리는 총에 맞아 피가

멈추지 않았고 얼굴 또한 리더의 발길질에 온통 멍이 들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난 밝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온 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숨을 쉬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우리는 벽에 몸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난 가슴을 안정시키며 앞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어느새 죽은 리더의 옆으로 다가가

멍하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몸이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주먹으로

시체를 치며 울부짖었다.

"이 새끼야, 살려내! 내 남편을 살려 내란 말이야!"

Page 71: 살아야 한다(소설)

그녀는 리더에게 복수를 했지만 내 눈에 비친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난 고개를 돌려 수현이와 한 걸음, 한 걸음 문을 향해 걸어 나아갔다. 마침내

문을 열고 두 손을 들어 그들을 향해 흔들었다. 밖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 밖은 여전히 따스했다. 햇살이 내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것 같다. 우리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마음껏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 끝났다. 난, 난 살아남았다.

Page 72: 살아야 한다(소설)

Chatper 5

눈을 떴다. 지금이 몇 시지? 이불 옆에 놓여 있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본다. 아침 7 시다.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이런 상쾌한 기분 정말 오랜만이다. 음침하고 답답한

병원에서 생활한 여섯 달 동안 제대로 잠을 자 본적이 없다. 이미 끝난 일인데 매일 밤

꿈 속에서 보이는 죄수들은 여전히 내게 칼을 들이댔다. 하지만 요즘은 그들이 나타나질

않는다. 악몽 같았던 3 일... 이젠 정말 끝난 일이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난 보지 않아도 단숨에 누군지 알 수 있다. 그 날 이후 엄마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난 다리가 조금 불편할 뿐, 움직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지만 엄마는 여전히 날 걱정한다.

지금도 걱정스런 눈으로 날 쳐다본다. 난 일부러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저 표정... 마는 웃는 표정이 참 잘 어울린다. 콘도에서 빠져 나와

엄마를 마주했을 때 그녀가 지었던 표정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때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행복하게 웃었다.

난 엄마의 부축을 받아가며 조심스럽게 일어나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죽은

사람들의 성묘를 가기로 한 날이다. 정말 오랜만에 그들을 만나는 것 같다. 사실 그 날

목숨을 잃었던 모든 사람들의 장례식은 이미 끝났지만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던 난

사건이 끝난 후 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아... 수현이와 신부 아저씨도 나랑 같은

방에서 입원했었다.

병원에 있을 때 난 신부 아저씨께 몇 번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난 그에게 입에

담지 못할 심한 욕을 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매 번 웃으며 괜찮다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지금도 그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난 항상 약속에 늦는다. 나를 보며 살짝 불평하는 수현이에게 내가 하는 변명은 항상

똑같다.

Page 73: 살아야 한다(소설)

"야! 난 다리를 다쳤잖아. 여자가 목발 짚고 걷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난 목발을 그에게 들이대며 투덜댔다. 참 야속하다. 수현이는 양 다리에 총을 맞았고

갈비뼈 몇 개가 부러질 정도로 상처가 심했는데 석 달도 안되어 바로 퇴원했다. 대단한

놈.

수현이는 내 어깨를 붙잡고 발걸음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저 멀리

웃고 있는 신부 아저씨와 할머니 그리고 방 안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반가운

사람들, 난 수현이의 걱정도 잊은 채 급히 그들에게 걸어갔다. 신부 아저씨에게 다다를

무렵 다리를 헛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아저씨는 내 어깨를 잡으며 야단치듯이

말했다.

"조심해! 넘어질 뻔했잖아. 넌 여전히 정신이 없구나. 여자애가 참..."

"헤헤헤"

아저씨의 장난 어린 핀잔에 난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살며시 돌린다. 그래 여기에

나를 위해 죽은 사람들이 묻혀있다. 수현 언니, 경필이, 기사 아저씨... 한 순간도 그들을

잊어본 적 없다. 난 손을 들어 그들의 묘를 살짝 만져본다. 수경 언니의 묘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살아있을 때 순수해 보였던 그녀의 표정처럼. 난 가져온 꽃 중에 한

다발을 그녀의 묘 앞에 놓았다.

"언니가 그랬잖아요, 약해지면 안 된다고, 나 약해지지 않을 거예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약해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꼭 날 지켜봐 줘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했다. 난 언니의 묘를 향해

잠시 고개를 숙인 후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 놓인 경필이의 묘는 살아생전의 그처럼 밝아 보였다. 왠지 금방이라도 무덤에서

튀어나와 나한테 장난을 칠 것 같다. 난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경필아, 고맙다. 말로 표현 못할 만큼 고마워."

Page 74: 살아야 한다(소설)

잠시 경필이의 묘를 만진 후 옆을 돌아보았다. 옆에는 수현이가 기사 아저씨의 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이는 나의 눈빛을 눈치 챘는지 멋쩍게 웃으며 나를 아저씨의 묘

앞에 데려다 놓았다. 수현이는 그의 무덤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친구의 옆으로 다가가 살짝 등을 두드려 주었다. 친구는 나를 보며 한마디 건넸다.

"남자다운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금쯤 저 위에서 기뻐하고 계실까? 나 정말

죽을 만큼 아팠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어, 아저씨도 보셨겠지?"

난 조용히 고개를 끄떡였다. 떠난 그들이 남겨놓은 짐들을 우리가 잇고 살아가기엔

너무나 무겁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들의

삶까지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지금의 이 기분을 잊지 말자. 우리는 이들에게 빚을 졌다.

난 조금 뒤로 물러나 세 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자주 와서 새로운 소식을 들려줄게요. 슬픈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그러니까

항상 내 옆에 있어줘요'

주변의 사람들이 조금씩 줄어든다. 난 나머지 사람들의 묘를 보기 위해 수현이와 신부

아저씨와 같이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셀 수없이 많은 수의 묘들, 죄수들에 의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난 비석에 적힌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보며 앞으로 걸었다.

'어? 할머니께서도 오셨네.'

앞에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버스 안에서 할아버지에게 음식을

먹여주었듯이 오늘도 먹을 거리를 잔뜩 싸왔다. 난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위로를 하려

했으나 막상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나니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 노부부는 여느 때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정해 보이는 대화, 난 말없이 그녀의 뒤에서 할아버지의 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손을 들어 비석을 어루만졌다.

"내가 평소에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나요? 성우 아버지, 오늘은 성우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다. 앞으로 난 혼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성우 아버지…"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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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할아버지의 이름을 연거푸 외쳐댔다. 난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할머니의 손, 난 잠시 머뭇거리다 비석을 만지고

있는 할머니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부어있는 눈으로 날 보고 있는 할머니에게 씩

웃음을 지었다. 뒤에서 수현이와 신부 아저씨가 조심스레 다가와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양 손에서 전해오는 온기에 마음 속 깊이 따뜻함이 전해진다. 조금씩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 둘씩 우리 주변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들

또한 조금씩 할아버지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 명씩, 한 명씩 손을 얹었다. 난

그들에게 고개를 끄떡인 후, 할머니에게 속삭였다.

"할머니, 뒤를 보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웃는 모습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슬퍼 마세요."

그래, 남겨진 우리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마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처럼

우리는 함께 살아갈 것이다. 할머니의 얼굴에 살며시 퍼지는 미소를 바라보며 우리는

함께 웃었다. 서로 손을 잡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