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자료] 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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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일시. 2016년 4월 7일(목) 오후 8시 장소. 삼성서울병원 지하1층 영결식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참여연대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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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추모자료] 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일시. 2016년 4월 7일(목) 오후 8시

장소. 삼성서울병원 지하1층 영결식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참여연대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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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추모의 밤 순서 3

약 력 4

인사말(한택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 5

인사말(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7

추모사(박원순, 서울특별시장) 9

추모사(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12

추모사(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16

추모사(이준식, 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19

추모사(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 23

기억하다 26

장례위원 명단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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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순서

l 일 시 : 2016년 4월 7일(목) 오후 8시

l 장 소 : 삼성서울병원 지하1층 영결식장

l 식 순 :

Ÿ 사 회 조영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총장

Ÿ 약력보고 박근용, 참여연대 사무처장

Ÿ 추모영상

Ÿ 인사말 한택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

Ÿ 인사말 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Ÿ 추모사 1 최병모, 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변호사

Ÿ 추모사 2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Ÿ 추모사 3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Ÿ 추모사 4 이준식, 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Ÿ 유족인사

Ÿ 헌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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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창국 변호사 약력

Ÿ 1940 전남 강진 출생

Ÿ 1961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Ÿ 1980 광주지방검찰청 부장검사

Ÿ 1981 변호사 개업

Ÿ 1990~1993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간사

Ÿ 1993~1994 제82대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Ÿ 1993 대법원 사법제도발전위원회 제1분과위원회 위원

Ÿ 1994 『시민과 변호사』 발행인

Ÿ 1995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Ÿ 1995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Ÿ 1996~1998, 2001 참여연대 공동대표

Ÿ 1999~2001 제40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Ÿ 2001 (재)한국기원 아마6단

Ÿ 2001. 11~ 2004. 12 국가인권위원회 초대 위원장

Ÿ 2006 희망제작소 이사장

Ÿ 2006~2010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위원장

Ÿ 2010~2016 법무법인 양재 대표변호사

Ÿ 2016년 4월 6일 새벽 4시 별세 (향년 7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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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안녕하십니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한택근입니다.

바쁘신 가운데도 김창국 변호사님을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

들께 감사드립니다.

김 변호사님은 대학 재학 시절인 1961.에 사법고시에 합격하시고 이후 검사의 길을

걸어오시다가 1981. 광주지검 부장검사직을 끝으로 변호사 개업을 하셨습니다.

민변은 1988. 5. 창립되었는데, 김 변호사님은 3개월 뒤인 1988. 8.에 민변 가입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렇듯이 검사 출신 변호사가 민변에 가입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김 변호사님은 민변에 가입함은 물론 이후 총무간사를 맡아 민변

의 내실을 다지는데 힘쓰시고 또한 각종 시국사건 변론을 하시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또한 김 변호사님은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차례로 역임하

시면서 전체 변호사들의 수장으로서 인권수호에 앞장서 오셨습니다. 나아가 김 변호

사님은 1996년 시민사회단체인 참여연대의 대표직을 맡으심으로써, 참여연대가 오늘

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민사회단체로 자리매김하는데 초석을 다지셨습니다.

김 변호사님의 투철한 인권의식과 조직 통솔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이에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 초대 위원장이 되시어 4년 동안 국가인권위원회의 기틀을

마련하셨고, 2006년에는 또 다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시어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데 진력하셨습니다.

이상과 같이 김 변호사님은 정말로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 동안 당신의 건강을 돌보

는 것을 소홀히 하시는 바람에 건강을 해치게 되어 오랜 기간 동안 병마와 싸워 오

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변에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으시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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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후배들에게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서 격려와 충고를 해 주시는 든든한 버팀

목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후배들은 김 변호사님의 업적을 기리고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가 공동 주관 단체로서 변호사님의 가시는 길을 추모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께서 김 변호사님과 맺은 인연, 지니고 계신 추억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1993년부터 민변에서 김 변호사님을 자주 뵈어 왔

고, 특히 최근 3년간 같은 사무실에서 대표변호사님으로 모시어 왔기에 남다른 기억

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김

창국 변호사님”은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 민족정기 확립을 위해 한 길을

걸어오신 분”이었다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추모의 밤 행사를 통해 우리 모두 김 변호사님의 생전의 뜻과 활동

을 되짚어 보고, 우리 삶의 자세를 다잡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참석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특히 유족 분들께 심심한 조의를

표하면서 이만 인사말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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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김창국 위원장님

위원장님의 부음을 받고 황망한 걸음으로 집을 나서는데 눈앞에 가득 차 후들거리

는 봄꽃이 어찌나 찬란하고 슬프던지요. 위원장님의 영정에 두 번 절을 올리고 돌아

오는 검은 밤 온 서울을 적시는 봄비가 왜 그리도 서럽던지요.

위원장님은 꽃처럼 환하게 웃으시며 손을 흔드시는데 저희들은 검은 봄비처럼 슬프

고 또 슬퍼서 보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 김창국 위원장님과 작별을 해야 하는 시간을 맞고 있습니다. 바쁘신 가

운데도 김창국 위원장님을 그리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

은 감사를 드립니다.

5공 후 검찰을 떠나신 후 시국사건 변론, 민변, 서울지방변호사회, 참여연대, 대한변

호사협회, 국가인권위원회, 희망제작소,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서의 김

창국 위원장님을 기억합니다.

특히 초대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 인권기구의 기본 틀을 세우시던 모습,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조사위원장 시절 과거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에 고심하시던 표정, 참여연

대 권력감시운동에 보내주신 묵직한 지지와 고생하는 시민운동가들을 항상 걱정하

셨던 김창국 위원장님이 옆에 계시는 듯 바로 손에 잡힐 것만 같습니다.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고는 씨익 웃으시며 ‘난 행복한 사람이야~’ 하셨지요. 항상 비스듬히

기대앉으셔서요. 그리고 이제는 봄꽃처럼 우리 곁을 떠나시려하시는군요.

흔히들 위기라고 부르는‘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않는 상황’이어서 더욱 김창국 위

원장님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공리공론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에 입각한 검토를 통해 정확한 답을 얻어 내셨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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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대하는 태도를 더 뵙고 배우고 싶어 연을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타협하거나 눈치를 보지 않으셨고, 격을 따지지 않고 솔직하고 소탈하셨던, 그러나

일처리에서는 추상같았던, 또 해직당한 인권위 직원에게는 시도 좀 읽고 살라며 시

집을 보내셨던, 위원장님을 오래 기억하고 배우겠습니다.

위원장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아름답고 행복했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다시 한 번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특히 위원장님 유족 분들께

깊은 조의와 사랑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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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소리 없는 죽비가 되어주신,

김창국 변호사님, 영전에 바칩니다.

변호사님!

잠시 소풍이라도 떠나신 건가요?

봄의 꽃들이 피어나고,

만물이 생동하는 따뜻한 이 봄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친구들과 바둑을 두는 시간이 즐겁다고 하셨지요.

사모님을 위해서 식탁을 차리는 게 즐겁다고 하셨지요.

건강 회복하셔서 가시고 싶다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시기를 바랐는데

변호사님, 어디로 떠나신 겁니까?

“어떻게 부장검사까지 한 분이 민변에 들어왔습니까?”

어느 날 민변 소속 젊은 회원이 물어본 적이 있다고 하셨지요.

검사에서 인권변호사로, 그리고 참여연대 공동대표, 대한변호사협회장, 초대 국가인

권위원장, 희망제작소 이사장,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장에 이르기까지 그곳

이 어느 곳이든 옳다고 생각한 일은 묵묵히 하셨습니다.

김창국 변호사님,

변호사님은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정의를 세우는 행동하는 양심이었습니다.

권력과도 당당히 맞서는 용기 있는 법조인이셨습니다.

한평생 정의와 공익의 길을 걸어오신 진짜 변호사였습니다.

변호사님께서 살아오신 인생, 그 자체가 시대의 메시지이자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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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역사의 한 가운데 계시는가 하면

우리 후배들에게는 한없이 큰, 늘 거기에 서있는 느티나무가 되어주셨습니다.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등 새로운 도전을 할 때마다 늘 제 뒤에 든든

하게 계셔주셨지요.

번거롭고 궂은일은 먼저 앞장 서 주셨고,

조금이라도 빛나는 일에는 우리를 앞세워주셨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도록 넉넉히 품어주셨습니다.

그런 변호사님만 믿고 저는 시대의 한 복판으로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벌써부터 그리운 변호사님의 얼굴을 그려봅니다.

한결같이 맑은 얼굴은,

시대의 거울이 되어 늘 저 자신을 성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형형한 눈빛은,

시대와 당당히 맞설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조용하고 온화한 미소는,

배려와 관용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표정에서부터 인품까지 변호사님의 하나하나는

소리 없는 죽비가 되어 저를 늘 깨어있게 해주셨습니다.

변호사님!

면목이 없습니다.

인권변호사로서, 시민운동가로서, 정치인으로서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이 나라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변호사님께서 평생 동안 싸워 오신 인권과 민주주의가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

고 있습니다.

변호사님 사무실에 걸려있던 글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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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이 잘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변호사님의 소리 없는 죽비가 다시 저를 내리치는 듯합니다.

정의란 무엇이며, 국가란 무엇인가?

인권과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정신이 번쩍 듭니다.

남겨주신 질문은 다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변호사님 이제 부디 편히 쉬십시오.

저희가 그 짐을 지고 변호사님이 가시던 그 길 끝까지 가겠습니다.

변호사님의 너무 큰 사랑을 받았던 못난 후배 박원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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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故 김창국 대표님을 생각하며

- 담백하고 담대했던 어른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 일 등으로 고인과 가깝게 지내셨던 정강자 대표나 최영애 대표 같

은 이들은 고인을 ‘귀여운 분’으로 기억하시더군요. 어제 빈소에서 이 말을 듣고

저도 놀랐지만, 생전에 고인도 꽤 놀라셨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최 대표께 “국가

인권위 직원 몇몇이 나더러 귀엽다고 하던데 무슨 의미냐”고 되물으셨답니다. 여성

들이 남성상급자나 동료에게 표하는 가장 근사한 찬사라고 설명해드렸는데, 못미더

워 하시더랍니다.

하지만, 제게 고인은 늘 어렵고 약간은 무서운 ‘어른’이셨습니다. 20대 신입간사

로서 처음 만나 뵈었을 때나 지금이나 고인 앞에선 전 늘 말을 더듬거나 횡설수설

하곤 했지요.

제가 고인을 처음 뵌 것은 1995년 말이었습니다. 참여연대 입사해서 제가 처음으로

기획안을 쓴 부패방지법 제정-맑은사회만들기 캠페인을 한창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박원순 변호사가 맑은사회만들기 본부장 겸 참여연대 공동대표로 꼭 모셔야 할 분

이 있다며 저를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덕수 합동법률사무소

였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서울변협회장 임기를 마치고 감사원 부정부패방지위원장

으로 활동하고 계시던 김창국 전 대표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민변 창립멤버라는 말씀은 미리 전해 들었던 터였지만, 솔직히 인권변호사라는 느낌

은 잘 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은 주로 박 변호사가 부탁을 드렸고 저는 간간이 떠듬

거리면서 캠페인 계획을 설명드렸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겠노라고 하셨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락하겠다는 뜻을 전해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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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9일, 냄새나는 용산 참여연대 사무실 한 켠, 밤마다 쥐들의 파티가 벌어

지곤 하던 작은 회의실에서 ‘맑은사회만들기 본부’의 출범식을 가진 이후 우리는

‘본부장’님께 서명용지와 어깨띠를 드리고 무작정 거리로 내몰았습니다. 지금 돌

이켜보면 아무리 박원순 변호사의 삼고초려가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로선 ‘듣보

잡’이었던 가난한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것이 고인에게는 민변에 참여하는 것 이상

으로 큰 도전이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렇게 전직 부장검사가 거리의 시민운동가

가 되신 거죠. 그리고 그렇게, 2000년 낙선운동까지 휘몰아치게 될 참여연대 초기

대표사업인 반부패운동의 포문이 열렸습니다. 참여연대의 요람이었고 시민단체의 용

광로였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김창국 신임공동대표 겸 본부장은 활동가에게 기획과 집행에 관한 재량을 주시면서

도 함께 결정한 사업에 대한 관심과 집중력만큼은 결코 잃지 않으셨습니다. 대표님

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되 결코 방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무서울 수밖에요. 맑은사회만들기본부의 성명은 반드시 직

접 검토하셨고, 가끔씩 활동가들에게 혼동하기 쉬운 법률용어나 맞춤법에 대해 꼼꼼

하게 설명해주시곤 했습니다. 대표님은 권력을 감시하는 운동은 치우침 없는 엄정함

과 실사구시에 기초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셨고, 몸소 실천하여 참여연대의 문화로

정착시키셨습니다. 새로운 팀을 만날 때마다 문득문득 제가 만난 첫 팀에서 고인이

보여준 리더십을 떠올리고 곱씹어보곤 합니다.

1999년 변협 회장 직에 출마하기 위해 참여연대 공동대표직에서 물러나시게 되었을

때, 이임식 자리에서 고인은 “변협회장을 마치면 다시 돌아오겠노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저나 참여연대 식구들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한 빈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돌아오시더군요. 참여연대 창립 이래 두 번 공동대표직을 맡은 이는

고인 외에는 없습니다. 비록 재취임 하시자마자 초대 국가인권위원장직을 요청받아

다시 대표직을 내려놓게 되셨지만, 이 일을 통해서 매사에 과장해서 말하는 법이라

곤 없는 고인이 참여연대를 얼마나 깊이 아끼고 계셨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변협 회장으로서, 초대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

원장으로서 고인이 해낸 일들은 그 분이 인권변호사로서 담당했던 강기훈 유서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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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김근태 고문사건 등과 더불어 참여연대 식구들의 큰 자부심이었습니다. 정부

기관들과 공무원들의 온갖 비협조와 방해를 뚫고 200명 이상의 인력을 지닌 독립적

인 국가인권위원회 구성을 뚝심있게 관철해내셨을 때, 그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정

책에 반하여 이라크 전쟁 참전 반대 의견, 국가보안법 폐지 의견,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 의견,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도입 반대 의견 같은 기념비적인 권고들을 연

거푸 내놓았을 때, 우리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그리고 이 나라의 품격이 제법 근

사해질 수도 있겠다는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 그 이가 보여준 가장 놀라운 역량은 따로 있습니다. 까

다롭기 그지없는 인권활동가들로부터 더러 ‘귀엽다’는 평판까지 얻어내신 거지요.

고인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라는, 당연해보이지만 민감하기 그지없는 과

제를 떠안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그 말 많은 일을, 고인

은 예의 치우침 없는 엄정함을 바탕으로 떠들썩하지는 않지만 명료하게, 시쳇말로

‘엣지’있게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임기를 마친 후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인은 이후 계획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회고록은 당치않다’고 단호하게 답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

습니다.

“먼저 손들고 나설 일은 없겠지만, 제 역할이 필요하고 제 힘이 필요한 데가 있으

면 개인적인 이유만으로 회피하지는 않겠습니다. 조그만 도움이라도 된다면 오히려

제가 고마울 따름이지요1 .”

그 분의 삶을 잘 보여주는 그 분다운 한마디라고 생각합니다.

담백하고 담대했던 분.

평생 거품이나 기름기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꼭 필요한 시간에 꼭 필요한 길목에서

요구받은 역할을 넉넉히 감당해 낼 수 있었던 분! 그리고 나서 어김없이 제 자리로

돌아오곤 했던 분! 우리는 그런 어른을 잃었습니다.

1 [한겨레가 만난 사람] 임기 마친 김창국 친일재산조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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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기 두어 달 전, 새해인사를 드리려고 휴대폰으로 연락을 시도했지만 좀처럼 연

결되지 않았습니다. 고인의 건강이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댁으로

직접 전화를 드려 가족들께 양해를 구한 후 찾아뵈려했지요. 제 힘이 부치면 박원순

시장님을 앞장 세워서라도 댁으로 찾아뵈려 했습니다. 그런데 대표님이 직접 전화를

받으셨어요. 나지막이 또박또박 참여연대 근황에 대해 몇 마디 물으시더군요. 그리

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지는 마라. 내 몸이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

그 분 앞에 서면 늘 말을 더듬는 영원한 신입간사인 저는,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변

변히 하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면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통화를 끝내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어떻게 이 조사를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대표님, 고맙습니다.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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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할 뿐, 저희는 지금 이 자리에 김창국 변호사님께

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예의 그 눈가 가득한

미소를 머금으신 채 이 추도사를 찬찬히 듣고 계시리라 여깁니다. 변호사님. 다소

겸연쩍으시더라도 저희의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2016년 “내가 미안해”

불과 몇 달 전 김창국 변호사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통화

였습니다만, “몸이 좀 불편해서 밖에 출입이 여의치 않으니 조금 나아지면 한 번

보자”라는 요지의 말씀이셨습니다. 그 날 변호사님의 마지막 말씀은 “내가 미안

해”였습니다. 설마 이 말씀이 제게 주신 마지막 말씀이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서 애통함이 더욱 사무칩니다. 미안하다니요. 변호사님께서 미안하다 하시면 저

희는 어찌 합니까. 저희는 무슨 낯으로 변호사님을 뵐 수 있습니까.

1996년 김창국 참여연대 대표

아침에 출근하면 책상에 쥐똥이 한 줌이던 참여연대의 용산사무실 시절. 아침마다

‘부패방지법 제정’,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설립’이라고 새겨진 어깨띠를 두르

시고 서울역 광장으로 나아가 직접 가두서명을 받고 유인물을 배포하시던 모습. 제

가 처음 뵈었던 김창국 대표님의 모습입니다. 부장검사 출신의 법조인이 진보적 시

민단체의 대표로 계신 것도 낯설었지만, 그런 분이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혀가며 거

리 캠페인에 직접 나서는 모습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1999년 김창국 대한변협 회장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가 만들어졌을 때. 조폐공사파업유도특검이 파행으로 치달으

면서 당시 특검보로 활동하셨던 김형태 변호사님과 함께, 특별수사관으로 참여하던

제가 댁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사실 저는 내심 심한 꾸중을 각오했습니다. 그러나 저

희 말씀을 끝까지 들으신 김창국 회장님께서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대한변협 회장으로서 어떤 의견을 내거나, 개입하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이제껏 내

가 사랑하고 믿어온 사람의 판단을 존중한다.” 그동안 많은 어른을 뵈었지만 이렇

게 담백하고 따뜻하게 말씀하시는 분은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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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김창국 초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하였습니다. 당시 정부의 노골적인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초대

위원장으로서 감당해야 할 짐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위원회에 대한 행안부의 인

사관여를 막아내고자, 격에 맞지도 않는 사무처준비기획단장을 자청하시면서 위원회

의 독립적 위상을 지켜내셨습니다. 사무처 출범식에서 위원장님은 “국민이 이런 국

가기관이라면 세금 내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여기는 기관, 그리고 먼 훗날

내 자식에게 이렇게 멋진 기관에서 일했다는 자랑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기관을

함께 만들자”고 호소하셨지요. 국가인권위원회는 김창국 위원장님께 큰 빚을 진 셈

입니다. 저는 이제껏 정부와 국회에 대해 그리 당당하게 대응하는 최고위공직자를

일찍이 본적이 없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은 이렇게 확보되었습니다.

2004년 “가난은 사람의 시간을 뺏는다.”

국가인권위원회 출범 3년 만에 세계국가인권기구협의회(ICC)의 부의장국을 수임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유엔을 비롯해 세계가

주목하는 인권위가 된 셈입니다. 당연히 그럴만한 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

니다. 정부의 반인권적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테러방지법’과 ‘이라크파병’에

대해 반대 입장을 내었고, 대통령으로 하여금 “인권위는 원래 그런 일을 하라고 만

든 것”이라는 발언까지 나오게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이 위원회의 독립성과 인권

의 가치에 대한 김창국 위원장님의 신념과 결단 없이는 애당초 가능한 일이 아니었

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지요. 언젠가 쪽방체험 캠페인에 참여하신 직후 제

게 이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김 소장. 가난한 사람의 집에서 내 눈에 가

장 먼저 들어온 게 뭔지 알아? 시계야. 대개는 시계가 멈춰 있었어. 시계야말로 삶

의 미래이자 희망을 상징하는 것일 텐데, 가난은 사람에게서 시간을 뺏어가는구나

생각했어.” 그 때 저는 이런 감수성을 가지신 어른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게 얼마

나 행복한지 새삼 느꼈습니다. 권력 앞엔 당당하고 사회적 약자에겐 시도 때도 없이

눈시울을 붉히시던 위원장님이셨습니다.

2010년 김창국 (사)인권정책연구소 고문

제가 국가인권위원회를 박차고 나오겠다고 결심한 때. 위원장님께선 한사코 만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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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습니다. 그 깊은 뜻을 제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별다른 호구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무작정 뛰쳐나오겠다고 하는 게 못내 걱정되셨겠지요. 결국엔 제 뜻을 받아

주시고 격려해주셨습니다만, 그래도 못미더우셨는지 이후 수시로 안부를 물으시고,

또 가끔 불러내 밥도 사시곤 하셨습니다. (사)인권정책연구소를 창립할 때 “내가

실제 도움 줄 게 아무 것도 없지만, 필요하다면 이름이라도 얹혀 줘야지”하시며 흔

쾌히 고문직을 맡아주셨습니다. 마땅히 수입이 없으셨을 터인데 당신은 운동화에 대

중교통을 이용하시면서도 연구소에 보태라고 틈틈이 후원금도 보내주셨습니다. 그

마음 쓰심에 저는 큰 빚을 졌습니다.

2016년 사월은 참 잔인합니다.

변호사님을 우리 곁에서 보내드려야 하는 이 사월은 유난히 잔인합니다. 이 슬픔을

감당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애통함에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엄혹한

겨울을 견딘 새순이 다시 돋듯이, 모진 간난을 이겨내고 부활하는 때가 또한 사월이

기도 합니다. 생전에 그토록 애쓰며 바라시던 인권과 민주주의는 아직도 저만치서

아른거릴 뿐입니다. 이제 그 짐 저희들이 온전히 짊어지겠습니다. 큰 어른을 잃은

상실감에 저희의 몸과 마음을 가누기가 쉽지 않지만, 변호사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

겠습니다. 그 길, 내내 저희와 함께 하실 것을 믿기에 결코 외롭지 않고, 큰 용기를

얻습니다. 변호사님. 김창국 변호사님 사랑합니다. 김창국 변호사님 사랑합니다. 김

창국 변호사님 사랑합니다.

2016. 4. 7.

모두의 마음을 모아 삼가 김창국 변호사님 영전에 김형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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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이준식(전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김창국 위원장님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지 6년이 지났는데도 저에게는 아직도 위원장

님이라는 호칭이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어제 오전 4·13 총선 때문에 위원장님이 한때 공동대표를 맡으신 적이 있던 참여

연대로 가는 길에 장완익 사무처장으로부터 위원장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휴대전화 저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마치 먼 외계에서 온 소리처럼 느

껴질 정도로 부음 소식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

었으면서도 이렇게 빨리 저희들 곁을 떠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도 위원 몇몇이 조만간에 한번 찾아뵙자고 이야기했는데 허언이 되고 말았습니

다. 죄송합니다. 자주 연락드리고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

제 오늘 옛 동료들과 급하게 연락하면서 내내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제 기억에는 2006년 봄 위원장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위원장님은 친일재산조사위원

회 위원장으로, 저는 상임위원으로 내정된 뒤였습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위원장

님은 ‘나는 강만길 교수 외에는 잘 아는 역사학자가 없습니다’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말이 법조인으로서 뒤늦은 국가 차원의 친일청산에

임하는 위원장님의 각오가 담긴, 뼈있는 한 마디라는 걸 알게 된 건 시간이 조금 지

난 뒤의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위원장님은 법에 충실한 법조인이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검사가 되고

1980년대 초 전두환정권에 의해 사실상 강제로 검사직에서 쫓겨난 뒤에는 마지막까

지 인권변호사로서의 길을 걸으신 위원장님에게 법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판단의 기

준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원장님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법조인은 아니었습니

다. 법을 그 누구보다 중시했지만 위원장님이 생각하는 법은 사람이 빠진 법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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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늘 사람이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 곧 인권을 위한 법이었습니다.

위원회에서 위원장님은 법적인 원칙을 강조하셨습니다. 위원회 출범 초기에 위원장

님은 사석에서 해방된 지 60년도 더 지난 뒤의 친일재산 국가귀속은 사실상 혁명적

사건이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위원들은 모두 위원장님의 생각에 동의했습니다.

그렇지만 혁명적 사건이기 때문에 친일청산을 혁명의 대의에 맞게 과감하게 해야

하다는 위원들과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위원들의 생각이 갈렸습니다. 위원장님은 후자의 입장이었습니다.

법과 현실을 중시하는 위원장님과 역사와 이상을 중시하는 위원들 사이에 어떤 때

는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위원장님은 특별법의 엄격한 적용이라는 큰 원칙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몇 가지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대승적으로 위원들의 의견

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위원회는 여러 과거사 관련 위원회 가운

데 유일하게 내부 갈등이 없는 모범적인 조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무

엇보다 친일파 후손들이 제기한 행정소송 대부분에 대해 사법부가 위원회의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리고 특별법의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이

아니라고 결정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특별법의 엄격한 적용이었다는 점에서 위원장

님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위원장님은 위원회 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2008

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위원회 활동은 한때 위기를 맞았습니다. 위원회를 포

함해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하나로 통합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위원회 내부가

술렁였습니다. 그때 위원장님은 조사관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친일재산의 국가귀속

업무에만 매진하라고 단호하게 지시하셨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건국절 제정

움직임 등을 둘러싸고 역사 왜곡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수정 논란이 벌어지자 한국사 연구자들이 집단적으로 정권의 부당한 개

입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는데 여기에 위원회의 직원 몇 명이 동참했습니다. 정보기

관에서 인사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 서명 참여자에 대한 징계 운운 했다는 보고를

받고 위원장님은 크게 노하면서 징계는 말도 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습

니다.

위원장님의 단호함은 위원회의 활동기간 종료를 앞두고 다시 한 차례 발휘되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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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특별법에는 4년의 정해진 활동기간이 끝난 뒤에는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활동기

간을 2년 더 연장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일부 위원들은 물론이고 직원들도

활동기간을 연장해 빗발치던 후손들의 소송 업무까지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

각을 갖고 있었지만 위원장님은 이때 연장을 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최종 결정을 내

렸습니다. 특별법에 따르면 위원회의 활동기간은 연장되지만 위원의 임기는 연장되

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이명박정부가 새로 임명한 위원들이 그동안 위원회가

이루어놓은 성과를 하루아침에 뒤집는 결정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남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주어진 임무를 마무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

래서 위원회의 친일재산 국가귀속 활동이 법적으로 종료되기 직전까지도 위원회의

활동은 쉼 없이 계속되었고 당시 시가로 2000억 원 이상의 친일재산을 국가에 귀속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원들과 직원들은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친일재산은

다 찾아냈다는 자부심과 함께 친일재산 국가귀속 활동을 종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위원회 활동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데 위원장님은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위원장님이 아니었다면 친일재산의 국가 귀속 활동은 훨씬 많은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라는 걸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위원장님은 역사를 다루는 위원회의 수장으로 활동했지만 사실 당신의 삶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일부였습니다. 따로 한국 역사를 공부할 필요도 여유도 없었을 것입

니다. 그러나 위원회의 책임을 맡은 이후 친일의 역사를 포함한 한국 근대사, 그리

고 친일청산이 좌절된 한국 현대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 것을 저

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공식 회의 자리에서 아니면 따로 위원장실로 불러 모

르는 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미진한 것은 재삼 확인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늦은 친일청산은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욕심을 부

려서는 안 된다고 저에게 당부하고는 했습니다.

위원장님은 어떤 때는 위원장으로서의 엄격한 조직 관리를 통해, 어떤 때는 동네 할

아버지 같은 소탈한 모습을 통해 위원들과 직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직원

수련회나 체육대회 때면 선글라스와 청바지로 멋지게 차려입고 등장해 여직원들로

부터 위원회의 최고 패셔니스타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위원회 활동 초기에 직원 전

체모임에서 한 여성조사관에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낭송하도록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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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감성적인 면모도 갖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손주 이야기를 할 때면 여지없이 인

자한 할아버지의 얼굴이 되고는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 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위원회 활동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추

진하던 위원장님의 중국 출장이 무산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위원들과 직원들에게

해외 출장의 기회를 주면서도 위원장님은 해외에 나가는 걸 극력 사양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백두산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시기에 연변

대학에서의 강연과 백두산 답사를 함께 묶는 일정으로 해외 출장을 추진했고 위원

장님도 여기에는 기꺼이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중국 현지 사정에 의해 출국 직전

에 급하게 출장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원장님은 웃고 넘어가셨지만 저에게

는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창국 위원장님

이제 저희는 위원장님을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위원장님 삶의 말년에 최대의 화두였

던 인권과 친일청산이 간곤일척의 위기에 처해 있는 현실이 위원장님의 마지막 발

길을 무겁게 하겠지만 저희는 위원장님을 더 이상 괴로움이 없는 영겁의 세계로 보

내드립니다. 남은 일은 위원장님의 뜻을 마음에 새긴 살아 있는 저희에게 맡기고 편

안하게 가십시오. 백두산이든 어디든 마음껏 다니시면서 위원장님이 남긴 인권수호

와 친일청산의 씨앗이 큰 나무, 더 큰 숲으로 자라나는 모습을 저 하늘에서라도 기

꺼운 마음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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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고 김창국 변호사님을 추모하며

비판하고, 저항하고, 자유를 그리며 살다

박찬운(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

캠퍼스에 하얀 벚꽃이 만발했습니다. 계절의 여왕을 완상하던 중 바람이 한 차례 부

니 꽃잎이 눈송이처럼 떨어집니다. 그때 한통의 문자. ‘김창국 변호사 별세’. 그

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날카로운 눈매의 깡마른 노신사. 제가

26년 전 새내기 변호사로 그 분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50초로의 중년에게

서 느껴지는 일반적인 인상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포스가 넘쳤고, 자신감이 충만

한 분이었습니다. 법조인들 사이에서 고인은 젊은 시절 수재로 통했습니다. 약관 21

세에 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일면에 불과합

니다. 만일 고인이 그것에만 만족해 살았다면 오늘 제가 그를 추모하는 이런 글을

쓸 일은 없었을 겁니다. 고인은 비판적 지식인으로, 저항하는 법률가로, 평생 자유를

그리며 살았습니다.

고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인권변호사입니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검찰과 작별하자마

자 일반적인 검찰출신 변호사의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의감 넘치는 젊은 후

배들과 민변이란 조직을 만듦으로써 이 땅의 인권변호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고 김근태 의원 고문 경관 이근안에 대한 공소유지 변호사로 활동했고, 강기훈 유서

대필조작 사건, 보안사 윤석양 이병 양심고백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의 변호인으로

서 활동한 것은 지금도 우리들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고인은 대한변협과 서울변호사회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인권변호를 개인적 차원에서

제도화된 차원으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서울변호사회 회장 시절 당시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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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기적인 법률부조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경찰서에 체포 연행된 사람들에게 가장 필

요한 건 변호사입니다. 변호사 없이 어떻게 국가권력을 상대로 자기주장을 할 수 있

겠습니까. 고인이 만든 당직변호사 제도는 돈이 없어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하는 서

민이라도, 전화 한 통만 변호사회에 하면, 대기하고 있는 변호사가 달려가는 것으로,

우리 법조사에 길이 남을 인권제도였습니다.

고인의 활동은 법조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시민운동가로 이어졌습니다. 1990년 대

참여연대가 만들어지고 아직 그 틀을 잡지 못했을 때 그 공동대표가 되어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민단체가 될 수 있도록 초석을 닦았습니다. 고인의 삶에서

화룡점점은 15년 전 이 땅에 새로운 인권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었을 때

그 초대 위원장을 맡은 것입니다. 독립기구를 원치 않는 법무부를 비롯한 권력기관

의 갖은 방해를 극복하면서 인권위를 만든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

었습니다. 때론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과도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지만, 고인은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갔고, 마침내 국제사회가 경의를 표하는 인권기구를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독립기구로서의 인권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할 말은 하는 국가기관이어

야 하지만, 작금의 현실을 보더라도 녹녹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베트남 전 이후 최

초로 국군을 이라크에 파병할 때 인권위가 이를 정면으로 반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

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고인은 위원회 성명으로 그 파병은 헌법과 국제법 위반

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고인은 역사인식도 분명한 분이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우리 현대사에서 역사적 청산작업은 아무리

늦어도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고인에 대한 추모를 알려진 업적으로만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누구는 말할지 모릅니

다. 고인은 다가가기 힘든 분이었다고. 고인을 제대로 모르는 분들이 그의 인상만

보면 그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고인의 그 면도날 같은 날카로움 뒤에

숨어 있는 따뜻한 인간애를 추억합니다. 변호사회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인은 연

신 사진을 찍었습니다. 제가 보관하고 있는 젊은 시절 최고의 사진 몇 장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입니다. 고인이 아마추어 사진작가였다는 사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자연과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찍어 왔다는 사실,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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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리워할 것입니다.

캠퍼스의 하얀 벚꽃이 오늘따라 유난히 화려합니다. 이 찬란한 봄날 김창국 변호사

님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이제 고인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남아 있는 사

람들이 이렇게 빕니다. “이생이 준 굵은 사슬을 모두 끊어 버리고 천국으로 훨훨

날아가소서. 그리고 “나는 자유다”를 외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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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다

故 김창국 변호사 관련 글 모음

Ÿ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Ÿ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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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다_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유서대필’ 유감

Ÿ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창간호, 김창국, 1993년

변호사로서의 자부심과 비애를 함께 맛본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앙금처럼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피어난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아니면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 나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유서

대필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는 ‘강기훈사건’에 매달렸던 1년 동안은 내게는 용기

와 희망과 사명감에 불타던 한 해이기도 했고, 반면 실망과 분노 그리고 좌절의 참

담함을 맛보아야 했던 1년간이기도 했다. 1,059쪽에 달하는 수사기록을 검토하고 김

기설군이 남긴 20여 종의 필적 자료를 확인하면서 갖게 된 ‘무죄’라는 확신은, 계

속되는 강행군에도 피로를 모르게 하였으며, 사건의 중요성을 되새기며 반드시 무죄

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들떠 “강기훈에게 무죄가 선고되지 않으면 변호사업을

그만두겠다”고 큰소리치기도 하였다.

강기훈의 유서대필 혐의를 굳게 믿고 있는 대부분의 법조출입기자들과 검찰관을 방

불케 하는 공판진행으로 변호인들을 화나게 했던 재판장도 공판이 진행됨에 따라

혐의사실에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공판이 밤늦

게 끝나는 날이면 박연철·이석태 회원과 함께 소주잔을 앞에 놓고 다음 공판준비

를 의논하면서도 진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확신은 없지만 유죄선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재판장의 판결이유 설명에는(변호사 10년에 판결선고공판에 입

회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실망을 넘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나

를 분노케 한 것은, 확신이 없어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하였던 제1심 재판부와는 달

리 너무나도 확신에 찬, 그래서 고민 같은 것은 아예 내팽개쳐버린 소신있는(?) 항소

심 재판부였다.

‘혹시나’로 시작해서 ‘역시나’로 끝난 재판부의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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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라운드에서 패배를 맛본 변호인들이 제2라운드에서의 승리를 다짐하며 항소심

변론준비를 하고 있을 때 터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실장 김형영 등에 대한

감정비리사건은 변호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으니, 강기훈 사건의 유일한 직접

증거가 김형영의 엉터리 필적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못해 수사에 착수한 검찰이

1,035만 원의 뇌물수수에 관한 자백을 받아 김형영을 구속까지 하면서도 허위감정의

혐의는 없다고 밝혔지만 그가 행한 많은 감정결과의 신뢰성에 크게 금이 가게 한

사건이었고 언론도 강기훈 사건의 항소심과 관련지어 희망적인 전망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한편 변호인들은 항소이유서 및 변론요지서의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김형영의 감정

에서 잘못된 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함과 동시에, 그가 1980년 허위감정죄로 1심에서

실형선고까지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동료 이인환의 도움으로 무죄가 된 사건의 감정

자료를 입수하여 복사카메라를 이용한 인영감정의 새로운 기법을 동원, 김형영의 당

시 감정이 누가 보아도 허위였음을 명백히 알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2심 재판부에

제출하였다(증인으로 출석한 수갑 찬 김형영에게 위 자료를 제시하여 확인을 구하려

하였으나 재판장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의 태도는 너무나 확고해보였다. 유죄의 심증을 내비치는 재판진

행에 대하여 “재판부에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면 변호인들은 힘이 빠지지 않느

냐”고 항의하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는지 ‘혹시나’는 ‘역시나’였으

며 며칠 후에 받아본 다분히 감정적인 판결내용에는 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소심 판결을 그대로 베낀 듯한 대법원 판결은 깊은 좌절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것

이었다.

‘유서대필’이라는 사법사상 유례없는 작품 탄생되다

돌이켜보건대, 1991년 4월 26일에 발생한 강경대군 치사사건은 그동안 지리멸렬상태

이던 재야세력들을 다시 결집케 하는 계기가 되어 곧바로 ‘고 강경대열사 폭력살

인규탄과 공안통치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라는 긴 이름을 가진 기구가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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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정부규탄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등이 분신한

데 이어 1991년 5월 8일 오전 8시 7분경 서강대학교 본관 5층 옥상에서 김기설이

또 분신을 하는데 그가 남긴 유서 2장이 엄청난 파문을 가져오게 된다.

연일 계속되는 대규모 시위에 박종철군 사건의 악몽을 떠올리며 전전긍긍하던 정부

당국은, 친야인사라고 여겨지던 어느 대학총장의 즉흥적이고도 무책임한 얘기 즉

“분신자살에 배후가 있는 듯하다”는 발언에 천군마마를 얻은 듯 용기백배하게 되

었다. 그리하여 ‘분신배후 수사’라는 악역을 검찰이 떠맡고 나섰고, “분신의 배

후에 무엇인가 있다”는 선입견과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

로잡힌 검찰이 김기설의 필적확인 과정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사법사

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유서대필’이라는 창작물을 내놓게 된다.

검찰의 실수란 첫째로, 누가 보아도 유서의 필적과는 같다고 하기 어려운 김기설의

가족이 제출한, 그의 누나에게 선물한 책 표지의 글씨 “누님 우리 혜정이 잘 키워

주세요. -삼촌 기설-”이라고 쓴 것이 김기설의 중학교 3년 또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의 필적이며 미성년자의 필적은 그 특징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유서는 김기설의 필적이 아니라고 속단한 것이고, 둘째로는 전민련이 검찰에 제출한

업무일지에 세 사람의 필적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유서와 업무일지는 동일

필적”이라는 국과수의 감정결과를 그대로 믿은 것을 말한다. 업무일지에 3인의 필

적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검찰이 그 필적 주인공의 한 사람인 임무영을

유서대필자로 지목하여 현상수배 끝에 검거하였다가 혐의가 드러나지 않자 그를 집

시법 위반죄로 구속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소위 ‘재야운동권’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편견과 그

릇된 선입견이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유서대필’이라는 비상식적인 작품을 낳게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변론요지서의 첫머리에 “유서는 누가 쓰는가”라는 제목으

로 이렇게 적었다.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면 무엇인가 얘기를 남기고자 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신의 목숨을 끊겠다고 결심한 사람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자살의 경우에는 거의 예외없이 유서를 남깁니다. 그러나 병석

에 누워있는 사람의 유언장을 대필한다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자살자의 유서를 대필

하여 준다는 얘기를 우리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자살을 결심한 사람

Page 31: [추모자료] 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30

이, 유서를 쓸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남에게 유서를 대필하여 달라고 부탁한다면

그는 이미 자살을 포기한 사람이며......이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리고 변론의 끝부분에, 프랑스 국민 대부분이 드레퓌스(Dreyfus)의 유죄를 믿고 있

을 때 그의 무고함을 확신한 끌레망소가 외쳤던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강기훈의 승리가 아니라 건전한 상식의 승리”라고 썼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드레퓌스사건의 교훈

지금부터 약 100년 전, 프랑스군 장교 에스떼라지가 독일에 프랑스군의 정보를 팔

아먹으려고 작성한 ‘명세서’를 정보당국이 드레퓌스의 필적으로 단정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이었고, 필적감정을 의뢰받은 베르띠옹은 “‘명세서’

를 쓴 사람이 다른 사람의 필적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면 두 필적은 같은 사람에 의

해 써진 것으로 사료됨”이라고 감정함으로써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는 11년간 억울

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강기훈이 재야운동권 인사가 아니었다면, 재야운동권은 목적달성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편견이 없었다면, 우리의 건전한 상식으로는 상상키 어려운

‘유서대필’이라는 작품이 가능하였을까. 그리고 한국의 베르띠옹 선생 김형영의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엉터리 감정이 나올 수 있었을까. 또 너무나 확신에 가득 찬

소신있는 유죄판결이 가능하였을까. 나는 자신있게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다. 강기

훈사건을 통하여 보다 자세히 알게 된 내가 본 재야운동권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

럼 조직적이지도 않았고 영악스럽지도 못했으며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사명감에 투철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이 사건의 주인공인 강기훈은 소위

‘재야운동권’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래서 두 시간 반에 걸친 긴 변론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유서가 대필되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는 분이 계신다면, 혹시 전민련을 포함한 재

야운동권에 대한 평소의 선입견과 편견이 진실을 보는 당신의 눈을 흐리게 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시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Page 32: [추모자료] 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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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에 대한 유죄판결이 허위였음을 시인한 프랑스의 양심은 그의 장교 계급

장을 박탈한 지 12년 만에 “배견할 데 없이 가혹한 희생을 치른 군인에게 적합한

보상으로서”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는데, 우리의 불쌍한 강기훈에게는 과연 그러한

영광의 날이 있을 것인가.

“김형영이 양심선언을 한다면” 하고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다.

이제 강기훈 사건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끝났다. 그러나 역사적 판단은 아직 끝나

지 않았다. 역사적 판단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의 승리를 위해서, 변호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일익을 담당하

여야 할 책임감을 느끼며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변호인의 판결 즉 ‘판결의 판결’

을 쓸 것이다. 역사적 기록을 남겨야 할 것이므로.

Page 33: [추모자료] 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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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다_참여연대

민주주의의 길, 8가지 뜻을 잡다.

Ÿ 월간 『참여사회』, 김용민이 만난 사람, 2010년 10월

두산대백과사전에서 ‘잡다’라는 말을 검색했다. 무려 스물 네 가지였다. 생소한

단어도 아닌데 뒤진 이유는 김창국 변호사(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초대 국가인권위

원장,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장)를 9월 17일 오후 2시30분, 법무법인 양재

사무실에서 만나 고희(古稀) 인생을 되짚어보면서였다. 기막히게 떨어졌다.

1. 일, 기회 따위를 얻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제13화 고등고시 사법과로 법조계에 입문했다. 검사가 된 것이

다. 이후로 대검 검찰연구관, 광주지검 부장검사를 거쳤다.

2. 권한 따위를 차지하다

대단한 권위였다. 아버지, 삼촌뻘 되는 사람이 찾아와 “영감님”하며 고개를 숙이

니 말이다. 사실 본인이 ‘내가 이런 권력을 가지니까 와서 고개 숙이는 것’이란

생각을 안 했을까. 아니었다. 그러나 연기는 표 나게 돼 있다. 자신만큼 인격과 원칙

준수를 한 몸에 품는 검사도 보기 드물다는 자신감 또한 대단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이 연기하는 사람의 비율을 30%, 반대로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에 자신에게 넙

죽하던 사람 70%로 여겼다. 환상은 검사 생활 끝나고 변호사를 개업하면서 완전히

깨졌다. 후자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검사들 있는 자리에 강의차 가게 되면

이런 이야기를 꼭 하게 된다고 한다. ‘겸손 하라’는 취지에서. 하지만 “그건 옛

날이야기입니다”라며 코웃음 치더란다. 기막혔다. 옛날과 지금, 뭐가 달라졌는데,

그 젊은 검사들, 저토록 자신할까.

3. 실마리, 요점, 단점 따위를 찾아내거나 알아내다.

대중에게 '권력의 청부기관’ 쯤으로 낙인 박힌 검찰을 떠났다. 김창국 변호사는 이

때부터 ‘인권 변호사’로 거듭난다. 놀라운 변신이다. ‘강병철과 삼태기’가 메탈

Page 34: [추모자료] 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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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을 결성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나만 경이로웠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한

번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한 젊은 변호사가 정중하고 진지하게 물었다고

한다. “부장검사까지 하시고 어떻게 민변에 몸담으시나”라고 말이다. 따지고 보니

민변에서 검사출신은 시니어그룹부터 젊은 층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감을 찾기 힘들

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력이 김창국 변호사의 유명세를 더하게 만든 힘은 아니었

다. 1987년 김근태 고문사건 공소유지 담당 변호인(특별검사), 1991년 강기훈 유서대

필사건과 윤석양 이병 사건의 변호인 등 주요 시국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1988년 민

변 창립에 참여했으며, 서울변협 회장으로 있으면서 서민들을 위해 당직변호사제를

시행했고, 대한변협 회장 때는 변호사의 공익활동을 의무화하는 변호사법 개정을 주

도하기도 했다. 족적 하나하나에 철학과 일관성이 박혔다.

검찰 개혁에 대한 질문으로 화제를 몰았다.

“박정희의 청와대는 정권 유지에 있어서 검찰력이 ‘전가의 보도’라는 점을 알게

됐지요. 그래서 인사권을 손에 넣어 검사들 수사 방향까지 좌지우지하려 했던 것입

니다. 검찰총장, 법무부장관이 막아줘야 하는데, 막아준 사람,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검찰에게 구속 대신 불구속 수사를 지휘하다 그만둔 법무장관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위’에서 내린 불구속 결정이라 이행할 수밖에 없던 처지였

죠. 이행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총리대신 참모로서 그 명을 거역할 수 없어 그런

결정을 내렸지만, 내가 양심에 비춰 볼 때 대단히 잘못된 결정이었다. 나는 물러난

다’라며 사퇴했어요. 자존심이 있었던 거지요. 인사권은 권력으로부터 분리, 독립해

야 합니다.”

4. 손으로 움키고 놓지 않다.

그러다 2002년, 한국 사회에 ‘기본권’의 의미를 바로 새긴 국가인권위원회 초대

위원장 자리에 오른다. “인권위원회가 독립기구여야 한다는 것은 1993년 12월 파리

유엔총회에서 국가인권기구의 준칙을 세우면서부터였지요. 사실 인권을 다루는 정부

기관이야 많이 있습니다. 한국만 하더라도 법무, 고용노동, 보건복지, 여성부 등이

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게 돼 있습니다. 정부로부터

독립된 인권 보장 기구는 그래서 필요합니다.”

Page 35: [추모자료] 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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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구. 하긴 법원 검찰 권력도 명목상 독립기구이다. 그러나 반만년 역사 어느

순간에 이에 부합하는 이름값을 했던가. 다행히 ‘인권의 가치를 위해 권력과 대립

할 수 있다’는 관념을 가진 김대중 대통령과 일을 하게 됐다. 그래서였을까. 청와

대 수석비서관 조차 인권위원회를 실질적인 대통령 직속기구라고 생각했다. 이걸 바

로 새기는데 1년 이상 걸렸다. 인권위원회 직원을 100명으로 한정하려던 정부와 맞

서, 216명으로 관철하는 ‘정치력’도 어쩌면 인권위원회가 어떤 기구인지를 관료들

에게 심어주는 계기라면 계기였을 터. 인권위원회의 르네상스 시대였다고 볼 수 있

다. 김창국 전 대표가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일화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Ÿ 김대중 대통령은 내가 추천하는 인권위원 안을 그대로 수용했다. 힘이 인권위에

쏠리게 되자 청와대 일부 수석실에서 일종의 기세 싸움을 걸어왔다. ‘김창국 위

원장이 대통령 허가 받지 않고 외국 출장을 했다’고 언론에 흘린 것이다. 몇몇

신문은 “인권위는 정부 예산 안 쓰는가”라며 김창국 위원장을 몰아세웠다. 흐

름을 간파한 김창국 위원장, 빈틈없는 논리를 만들어 반박에 나섰다. 연속적으로

말이다. 청와대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Ÿ 당시 여권 주변에는 요직 발탁을 갈구하는 재야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많았다.

따지고 보니 인권위원회는 좋은 거처였다. 이 때문에 김창국 위원장 책상에는 이

력서가 잔뜩 쌓였다. 김창국 위원장은 이를 묶어 자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어떤

용도였냐고? 블랙리스트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창국에게 부탁하면 역효과가

난다’는 소문이 여권에 퍼졌다고 한다.

Ÿ 노무현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정권 초, 미국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이라크 전

쟁 참전이 결정된다. 김창국 위원장,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국무회의에서 난

리가 났다고 한다. ‘위원장에 대해 제재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압도적이었

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이 그때 “인권위는 그런 일 하라고 있는 곳입니다. 넘

어 갑시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내도 하루 이틀이다. NEIS(교육행정

정보시스템) 도입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을 때, 김창국 위원장 시절 인권위원회

는 “개인 신상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했다. 이런 반대 저런 저항

에 치였던 집권 중반기의 노무현 대통령, 격노했다고 한다. 하지만 격노하는 것

으로 끝났다고.

Page 36: [추모자료] 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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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도 인권위원장으로 있는 동안 나한테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문제

삼거나 압박을 가한 일이 없었어요.”

쟁점이 붙은 문제, 특히 인권 업무를 분산 또는 이관하려는 관료 사회의 건의가 있

을 때마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창국 위원장을 불러 견해를 듣고는 그 뜻을 대부분

존중해줬다고 한다. 청와대와 내각 쪽에서는 심히 불쾌하게 느꼈겠지만 인권위는 그

렇게 순항하며 안착했다. 지금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돼 버렸지만.

5.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굽거나 잘못된 것을 바르게 만들다.

참여정부 때 김창국 변호사는 2006년 정부 위원장 자리를 또 하나 맡게 된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장. 더 이상의 당위론은 사족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

어받은 대한민국 정부가 일제에 부역하면서 획득한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환수해

독립운동가 후손 등 건국 수훈가문에 부여하는 것에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기 때

문이다. 궁금했다. ‘친일하면 3대가 영화를 누리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가난하다’

는 말이 맞는지. 그랬단다. 조사대상 450여 명 중 선조의 혐의가 입증되고 소재가

파악된 168명, 대체로 부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창국 위원장의 절망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한 명이라도 나올 줄 알았어요. ‘우리 선조의 행위는 잘못입니다. 기꺼이

내놓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양식 있는 후손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은 사실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했다’라며 두둔하기 일쑤였죠. 그런 두둔, 억지입니다. 다 조

사했습니다. ‘남모르는 독립운동가’ 경력, 사실로 확인이 안 됐어요.”

6. 흥분되거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다.

사실 위원회 안에는 역사학자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친일 행위의 단죄라는 역사적

당위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 사람,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김창국 위원장은 법률가의 양식을 고집했다. 법 논리에 맞춰 단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자 있는 판단 때문에 패소 등의 상황이 발

생할 경우 친일재산환수의 역사적 명분에 흠집이 생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Page 37: [추모자료] 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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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떤 상태를 유지하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 이런 의미에서 인권위원장, 친일재산환수위원장, 이 두 자

리는 일맥상통하다. 공직을 훌훌 털고 원로 인권 변호사 신분이 된 김창국 위원장에

게 수년에 걸친 공직 생활의 소회를 물었다. 권력과 각을 세우며 ‘My way’를 걸

었건만 그의 입에서는 ‘노무현’이라는 권력자의 이름을 주어로 한 문장이 흘러나

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더 오래 사셨으면 했지만 천수(天壽)를 누린 셈이었죠. 그러

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침없는 언변이 논란이 됐을 때엔 저도

같이 비난했지만 바른 역사의식과 철학 또 인권 감수성을 가진 대통령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기억납니다. 종로에서 국회의원 하다가 부산에 내려가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지요. 나보고 후원의 밤 축사를 부탁하더라고요. ‘그 돌쇠 같

이 미련하고 고집스런 선택을 했지만, 아무도 흉내 못 냅니다’라고 했어요. 얼마

전 봉하마을에 가서 추모 박석에 새길 글을 알려 달라고 했을 때, ‘당신은 역대 어

느 대통령보다 역사인식과 철학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답했어요.”

친일재산조사위원장 자리는 공교롭게도 2년은 노무현 정부, 나머지 2년은 이명박 정

부에서 지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도 물었다. 이런 답을 들었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 인권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오로지 전 정권의 모

든 것을 부정하면 잘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고요. 친일재산조사위원회를 다른

과거사위원회와 통폐합하려던 시도를 보며 느낀 감회입니다.”

8. 『…을 …으로』 계획, 의견 따위를 정하다.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하면서 놀랐어요. 생활비는 물론 용돈도 안 될 보수지만 참

여연대 상근자들, 정말 사명감과 열정으로 일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나마 최소한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실은 이들의 사명감과 열정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

서 이 분들, 존경합니다.”

김창국 전 위원장은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두 번이나 맡았다. 맑은사회만들기본부장

Page 38: [추모자료] 故 김창국 변호사 추모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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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엔, 원로 법조인 체면을 벗어 버리고, 대중 앞에서 연설도 하고, 어깨띠 두르고

서명도 받기도 했다. 실천 속에 애정이 샘솟기 마련이다.

기왕 이야기 나온 김에 적체된 시민운동에게 활로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이명박 정부가 최근 ‘공정한 사회’를 기치로 내걸었지요. 코웃음 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런 걸 너희들이 할 수 있겠는가’라며 시작부터 냉소적으로 나와서는

안 됩니다. 공정한 사회란 무엇인지, 그 사례는 무엇인지 정부를 지도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완수한다면 우리는 지지하겠다’라는 입장까지 밝혀야 합니다. 이 정부

를 좋은 길로 견인해 가야 합니다.”

참여사회 지난 호에 이어 이번에도 만난 시민운동의 원로들, 한결같은 입장이다.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는. 거듭되는 조언이다. 이런 지적에 우리가 귀를 닫고 있

는 것은 아닐까.

김창국 변호사의 인생을 ‘잡다’로 풀어봤다. 24가지 중 1/3인 여덟 가지가 이 안

에 녹아 있다. 나머지 중에는 ‘돈이나 재물을 얻어 가지다’, ‘노름 따위에서 어

떤 끗수나 패를 가지다’, ‘남을 모해하여 곤경에 빠뜨리다’, ‘기분, 일 따위를

망치다’ 등의 부정적 내용도 적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부덕의 소치’ 따위는 허

용하지 않은 ‘다 잡은 처신’은 요즘 3당4락(‘비리 의혹이 세 가지로는 부족하고

네 가지쯤 돼야 공직에 발탁된다’는 뜻) 정부에 큰 귀감이 된다는 생각도 든다. 우

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상실한 도덕성, 무너진 민주주의의 기틀을 부여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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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위원 명단

Ÿ 공동장례위원장 : 김균, 김선수, 백승헌, 법인, 송두환, 장주영, 정강자, 정현백,

최병모, 하태훈, 한택근

Ÿ 고문 : 고영구, 김중배, 명진, 박경서, 박상증, 백낙청, 이삼열, 이선종, 장임원, 청

화, 최영도, 함세웅

Ÿ 공동집행위원장 : 박근용, 조영선

Ÿ 장례위원 : 강금실, 강명득, 강문대, 강문민서, 강석금, 강은옥, 강을영, 강홍구,

고윤덕, 권오성, 권오재, 권정호, 권현숙, 김거성, 김경율, 김기식, 김기중, 김남근,

김남준, 김다섭, 김당, 김도형, 김동춘, 김동한, 김미경, 김미란, 김미희, 김민영,

김병주, 김성수, 김성진, 김성희, 김수정, 김영수, 김예림, 김용민, 김용휘, 김은숙,

김은영, 김인숙, 김인회, 김자연, 김재용, 김정인, 김종귀, 김종보, 김주관, 김주현,

김준우, 김준현, 김지미, 김진, 김진국, 김진욱, 김진형, 김창준, 김칠준, 김하나,

김한주, 김해창, 김행선, 김현정, 김형완, 김형태, 김효중, 김희진, 김희진, 남규선,

남상철, 남성욱, 남인순, 남호진, 도재형, 라영재, 라종연, 류신환, 문현웅, 민경한,

박갑주, 박강배, 박삼성, 박석분, 박성하, 박숙미, 박순성, 박연철, 박영립, 박영선,

박옥임, 박원석, 박재승, 박정은, 박치현, 박태현, 박현근, 박호성, 박희경, 백미순,

백승우, 백주선, 서복경, 서상덕, 서중희, 서채완, 설창일, 성상희, 성춘일, 손명호,

손문상, 송기호, 송상교, 송아람, 송해익, 신성수, 심재환, 안경환, 안상운, 안영도,

안재웅, 안진걸, 양규응, 양길승, 양태훈, 양홍석, 여연심, 여치헌, 염태영, 오규홍,

오민애, 오성윤, 오세범, 오유진, 오창익, 오현정, 원민경, 원유미, 유남영, 윤설아,

윤영환, 윤인섭, 윤홍식, 이강훈, 이경미, 이경우, 이광철, 이귀보, 이남주, 이노형,

이대훈, 이덕우, 이민종, 이병훈, 이상철, 이상호, 이상희, 이석범, 이숙진, 이승희,

이애림, 이영기, 이오영, 이용철, 이원호, 이유정, 이윤갑, 이재명, 이재정, 이재화,

이준식, 이지원, 이지은, 이진숙, 이찬진, 이태호, 이헌욱, 이형범, 이혜정, 이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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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택, 임수경, 임순례, 임순영, 임재성, 임종대, 임채균, 임태훈, 임헌영, 장경욱,

장영석, 장완익, 장유식, 장윤선, 장하성, 전성태, 전순옥, 전영식, 전은경, 정병욱,

정상근, 정석윤, 정연순, 정영원, 정인섭, 정천식, 조국, 조동환, 조병규, 조성제,

조세열, 조수진, 조숙현, 조연민, 조영관, 조용환, 조지훈, 조형수, 조효제, 조흥식,

좌세준, 진선미, 진영종, 차미경, 차병직, 채희준, 천낙붕, 최광수, 최미경, 최봉태,

최석봉, 최영애, 최용근, 최윤정, 최은순, 최일숙, 최현주, 탁경국, 하원호, 하주희,

한경수, 허상수, 홍석인, 홍일표, 황미선, 황선주, 황준협, 황희석 (이상 271명)

Ÿ 유족 : 배우자 조효순, 아들 김태윤, 딸 김지항, 사위 박휘석, 며느리 김선희, 손

자 박원우, 김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