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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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커뮤니티가치실현, 남도진 8월호 입니다. www.namdo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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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남도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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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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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수줍은 그 길들을 찾아서!

길들은 마치 숨바꼭질 하는 아이들 같았다. 누구나 쉽게 알아챌 순 있지만, 누구도 쉽게 찾아낼 순 없는, 초록그늘 아래 숨겨진 마법 같은 길. 유달산은 한쪽 눈을 찡긋-감은 채 그 수줍음 많은 길들을 품고 있었다.

카메라에 행복을 담는 황혼의 신사

성성한 반백을 지나 멋진 은발을 가지런히 빗어 넘긴 황혼의 신사. 그는 카메라를 만나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됐고, 그 길 위에서 풍요로운 ‘나’를 만났다고 빙그레 웃는다.

일상 공간에서 펼쳐지는 문화의 향연, - ‘목포마당페스티벌’ 마당은 편평하게 잘 닦인 빈 땅을 의미한다. 그곳은 고정된 빛깔과 억압된 형체가 없다. 흐르는 물처럼 막힘없이 자유롭다. 그곳에는 언제나 가능성이 흐른다. 개인의 소소한 일상을 담아내는가 하면, 공동체가 벌이는 축제의 이례적인 공간으로 쉽게 탈바꿈한다.

잃어버린 골목과 사람들 - 대성동 재개발지구 마지막 기록6.25 전쟁 당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사람들. 그들이 일생 동안 이웃을 가족처럼 의지하고 고향 잃은 상실감을 달랬던 그곳. 목포시 대성동 피난민촌은 과거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바다 속 정원을 거닐다 - 홍도에서 즐기는 스킨스쿠버 다이빙생기 잃은 하루가 바다라는 거대한 쉼표와 만나 이내 작은따옴표(‘’)가 되고, 어느 순간 선명한 느낌표(!)로 다시 떠오른다. 여름이면 바다 속이 맑게 걷히는 섬, 홍도. 그곳은 권태로운 일상의 허물을 벗는 특별한 공간이다.

남도는 여행자를 위한 나침반이다 - 공룡과 함께 하는 ‘남도여행’남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먼 섬처럼 아득하고 유구하다. 선사시대 공룡 화석이 발견된 우항리 바닷가. 느림의 미학을 간직한 섬, 청산도. 이순신 장군의 용맹한 얼이 살아 숨 쉬는 우수영 울돌목. 나침반은 때론 장엄하고, 때론 소박한 그곳 남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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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진” 로고는 그래픽 아티스트 정지범님의 작품으로 남도의 풍요로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2011년 8월호(창간호, 제1권 제1호, 통권 제1호)

발행, 편집 : 이길찬기획 : 이길찬에디터 : 박혜미동영상 : 이길찬

등록번호 : 전남 아 00149ISSN 등록번호 : ISSN 2234-1234발행처 : CREFUN 전남 무안군 삼향읍 남악리 1970번지 (재)전남문화산업진흥원 내 F-103호광고 및 제휴 : 070-8600-1254FAX : 061-283-1254E-mail : [email protected]

“남도진”에 실린 사진과 글은 허락없이 옮겨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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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수줍은 그 길들을 찾아서!

길들은 마치 숨바꼭질 하는 아이들 같았다. 누구

나 쉽게 알아챌 순 있지만, 누구도 쉽게 찾아낼 순

없는, 초록그늘 아래 숨겨진 마법 같은 길. 유달산

은 한쪽 눈을 찡긋-감은 채 그 수줍음 많은 길들을

품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등산로를 뒤로하고, 작은

산책로들의 꽁무니를 쫓아 걷기 시작했다. 쉿! 잠

시 숨을 멈추고 발걸음 소릴 줄였다. 꾸미지 않은

유달산을 만나러 조심스레 두 발을 내딛었다.

시작은 언제나 작은 길로부터

유달산 입산 입구. 가깝게는 노적봉 예술공원을 내려다보고, 멀리 목포항을 바라볼 수 있는 풍광 좋은 곳이다. 때마침 여객선 한 척이 뱃고동을 울리며 항구를 빠져나간다. 노적봉과 유달산 사이,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오늘 여정이 행복하길 기원한다. 하늘은 잿빛이지만 바람은 우유거품처럼 부드럽고 향긋하다. 유달산 등산코스가 새겨진 대형 팻말이 눈에 띈다. 그곳에서 중년 부부가 서성인다. 그들은 반들반들 윤이 나는 넓은 등산로를 따라 유달산에 오른다. 필자는 그 길 대신 커피 향이 스민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옛 시간 속에 커피 향과 사람들의 수다가 깃든 유달산 뒤편. 카페

가 늘어선 모퉁이를 따라 유달산 체육공원에 오른다. 젊음의 알 수 없는 일렁임을 삭히고 미래를 향해 도전을 결심하며 구슬땀을 흘리던 공간. 젊은이들은 꿈을 찾아 흩어졌고 언젠가 또 다시 모일 것이다. 그렇게 푸른 기운이 가시지 않는 체육공원에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목포에서 그들의 청춘을 보내고 이젠 그곳을 내려다보는 중년들. 황혼의 고즈넉한 시간들을 천천히 오르내리는 노인들. 다양한 일상이 운동기구 위에 땀방울로 맺혀 오늘을 맞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자 잡목과 바위가 사이좋게 아침을 맞는 성긴 숲이 나타났다. 숲 한가운데로 단발머리 여학생의 가르마처럼 새하얀 돌층계가 펼쳐진다. 껑충껑충, 계단을 뛰어오르자 테니스장이 마중을 나온다. 지난밤 내린 비로 테니스장 곳곳에 작은 웅덩이들이 꽃처럼 피어나 있다. 그 한구석에 싸리비 한 자루가 나뒹군다. 고개를 들어보니 서른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달성사로 향하는 사찰 입구가 보였다. 빠꼼히 열린 나무 문틈으로 까까머리 동자승이 귀여운 얼굴을 내밀 것만 같다. 아쉽지만 달성사로 향하는 길 대신, 유달산이 숨겨둔 작은 길들을 찾아 계속 걸음을 옮겼다. 잔디밭을 비집고 자릴 잡은 디딤돌들을 밟으며 이곳저곳을 누비다 3.1독립운동탑’에 도착했다. 뾰족한 첨탑은 무성한 수풀들의 기세에도 전혀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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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 않고,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탑은 1919년 4월 8일, 당시 만세운동에 참가한 목포 시민과 학생 들을 기리기 위해 1983년에 세워졌다. 민중의 드높은 함성을 형성화한 듯 삼각형 모양의 날선 모습이다. 인적 드문 수풀 속에서도 송곳처럼 솟아난 탑을 대하자,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선조들의 기개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동안 ‘민족과 국가’라는 단어들을 거대 담론으로만 여긴 채 외면해온 날들이 부끄럽기만 하다. 개인의 행복이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2011년, 대한민국. 이젠 정말 나라사랑, 민족사랑이 기념비적인 옛 일에 불과한 것일까. 조용히 유달산에 묻혀 있는 3.1독립운동탑을 바라보며, 평소엔 잘 품지 않는 의문들을 떠올렸다.

계절이 화해하는 공간을 지나, 눈물로 빚은 첨성대

를 향해

유달산 체육공원을 내려와 다시 도로변을 걷기 시작했다. 낮은 집들 사이에 목포극단, ‘갯돌’의 로고가 적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갯돌’은 숨은그림찾기의 정답처럼 몰래 웅크리고 있었다. 거기서 조금 더 걷자 ‘문화의집’이 나타났다. 목포 문화의집은 폐교된 달성초등학교 시설을 리모델링하여 1997년 12월에 개관했다고 한다. 1999년부터 YMCA가 수탁하여 운영해오고 있다. 목포 시민이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관람실,

문화사랑방, 인터넷부스, 문화창작실을 갖추고 있다고. 하지만 이번 여정은 유달산에 감춰진 길들을 찾아 나선 것인 만큼 문화의집 방문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길을 걷다보니 다시 유달산으로 오를 수 있는 달성공원이 방문객들을 반겼다. 공원 관리사무소를 지나 계단을 오르자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난전시관’이 보였다. 난전시관에는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대표하는 난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삿갓 쓴 점잖은 양반 도령을 빼닮은 난초와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난초. 무심한 듯 작은 돌 위에 아슬아슬 뿌리를 내린 난초 등. 난전시관은 각양각색의 난초들이 서로 한데 어울려 국적과 계절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누군가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무 손쉽게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해버린다. 그런데 난초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다름을 그저 다름으로 받아

들였다. 한 공간 안에서 으르렁대는 대신, 서로가 일으키는 파장 하나하나를 고유한 음악으로 받아들였다. 유달산 난전시관에는 그렇게 여러 계절들이 뒤엉켜 평화로운 시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난전시관을 벗어나 다시 길을 나섰다. 유달산은 과히 계단들의 천국이다. 하지만 그 여정은 사람을 지치게 하기보다는 설레게 한다. 작은 길이 내는 아기자기한 음을 따라가다 보면 다른 길과 만나게 되고, 그 길들은 하나로 합쳐져 흥겨운 리듬을 이룬다. 그리고 방문객은 천천히 길들의 하모니에 빠져든다. 난전시관에서 조금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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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곳에 자생식물원이 있었다. 점점 그곳과 가까워지자 정면에 첨성대가 나타났다. 경주에 있어야 할 첨성대가 목포 유달산에 있다니. 알고 보니 그것은 첨성대처럼 생긴 ‘철거민탑’이었다. 1979년 12월 유달산 달성공원이 조성되기 전, 이곳에 머물던 주민들의 애환을 달래기 위한 탑이었다. 아래는 불룩하고 위로 올라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모습이 경주 첨성대와 비슷해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탑은 돌 문양으로 된 꽃 한 송이를 그 심장부에 품고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공원을 찾은 어린 형제가 탑 앞에서 승리의 브이를 지어보였다. 다음 순간, 어린 아들들의 아버지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그렇게 한 가족이 자신들의 추억을 탑 앞에서 기념했다. 목포 시민들에게 쉼터를 내어주고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떠난 사람들. 어린 아이들에게 사진 찍는 배경이 되는 철거민들의 탑. 이제껏 얼굴 한번 본적 없는 그들이 왠지 그리워진다.

유달산, 유달산!

철거민탑을 지나 본격적으로 유달산 산행에 속도를 냈다. 그런데 또 얼마 걷지 않아 작은 동굴을 만났다. 유달산은 불공을 드리러 오는 불자가 많다. 그래서인지 어두운 동굴 안에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호기심에 동굴 속으로 몇 걸음 걸어 들어갔다. 생각보다 길게 뻗어있는 그 깊이에 놀라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왔다. 6.25 전쟁 당시 사람들의 안전한 피난처로 쓰였을 법한 동굴. 예전엔 사람들에게 고마움의 대상이 된 동굴이었을 테지만 어쩐지 등골이 오싹하다. 그래서 재빨리 동굴

을 벗어나 소요정으로 향했다. 길은 여전히 계단으로 이어졌다. 한옥으로 지어진 소요정에는 등산 나온 중년자들이 모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생수 한 병을 사들고 목을 축였다. 소요정은 일등바위에 오르려는 방문객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곳이다. 소요정에선 바람의 숨소리가 고요하다. 바람은 조용히 사람들 사이를 흐를 뿐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유달산 정산에 오르기 전, 사람들은 소요정으로부터 작은 위로를 건네받고 힘을 낸다. 그런 다음 다시 일등바위를 향해 나아간다. 일등바위는 그 명성답게 높고 가팔랐다. 바위들이 만들어 낸 좁은 길을 따라 일등바위에 오르자 목포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고하도와 아직 건설 중인 목포대교가 보였다. 고깃배는 중심부가 이어지지 않은 목포대교 밑을 지나며 포말을 일으켰다. 오고가는 배들 사이로 보이는 목포대교는 새로운 아침을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 먼 바다에서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리자 말발굽처럼 생긴 일주도로가 두 눈을 사로잡았다. 또 그 반대편에는 목포 도심이 펼쳐져 있었다. 작고 오밀조밀해 성냥갑처럼 느껴지는 건물들. 세월에 닦이며 크고 작은 발전을 거듭해온 목포 시내가 아기자기하다. 유달산 정상인 일등바위는 전설에 따르면, 영혼들이 하늘에 오르기 전 심판을 받는 곳이란다. 해발 228m인 일등바위 한쪽에는 오색헝겊으로 엮은 줄이 쳐져 있었다. 영혼들이 지상에서 머무는 마지막 장소인 만큼 누군가에겐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지는 이유에서다. 일등바위에 앉아 멀리 목포와 바다를 내려다보다 잠시 눈길을 돌리니,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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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내려앉은 나비 한 마리가 보였다. 나비는 이슬에 젖은 날개를 말리는지 바위 위에 납작 엎드려 천천히 날개 짓을 했다. 생의 잘잘못을 심판받는다는 상상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유달산에는 아직 가보지 않은 길들이 많지만 그 길들은 모두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그러나 일등바위의 전설은 누구도 돌아오지 않는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누구도 돌아오지 않는 길을 떠나는 자신을 상상하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다만, 일등바위는 달뜨지 않고 조용히,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아닐지. 과묵한 일등바위가 선물해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가볍지 않은 사색에 잠겼다.

물고기 수돗가를 지나면 바다가 보인다.

일등바위에서 내려와 이등바위를 둘러보고, 곧장 어민동산으로 향했다. 어민동산은 편안한 산책로였다. 나무로 된 계단이 사람과 유달산의 거리를 가깝게 이어주었다. 어민동산은 가파른 유달산의 일부를 완만한 동산으로 바꿔놓은 곳이다. 곳곳에 마련된 벤치에는 녹음이 뿜어내는 청명한 바람이 머물렀다. 바다는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운 것은 언제나 역설적으로 가장 멀기 때문일까? 시민들을 위해 조성해 놓은 벽천(壁川)과 분수가 바다를 그리워하듯 바짝 말라 있었다. 어민동산에서는 일주도로가 보인다. 일등바위에서 내려다보던 말발굽 모양의 해안도로. 물고기 형상을 본

떠 만든 수돗가에서 약수를 마신 뒤 그 도로 위에 내려섰다. 목포해양대학교를 지나 일주도로로 접어들었다. 왼편으로는 작은 민박집이나 음식점들과 팔짱을 끼고, 오른편으로는 푸른 바다와 어깨동무를 한, 일주도로. 그 길을 걷다보면 개와 고양이가 동화 속에서처럼 으르렁대는 어느 할머님의 음식점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도로를 달리다 바다를 만나면 차를 세워두고 바닷가 고운 모래 위에서 잠시 뒹굴거나 물놀이를 즐길 수도 있는 곳. 외국인이나 여행자, 목포 시민들이 함께 어울려 시원한 여름을 만끽할 수 있는 전혀 도로답지 않은 도로. 이 친절한 길을 만나면 누구든지 만면에 빙그레 미소를 지을 것이다.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도로 옆 인도는 바다를 닮아 푸른색이었다. 그 위에 쉼표마냥 드문드문 늘어진 벤치들은 바다와 섬을 관망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배려한다. 또 유람선 선착장을 지나면 작은 바위에 몰려든 낚시 인파가 낯선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마침내 길이 무르익는 곳엔 인어상이 있다. 인어상은 먼 바다를 응시한 채 지친 발걸음들을 맞아준다. 바다를 닮은 ‘일주도로’를 따라 계속 걷다보면 다시 유달산과 재회하게 된다. 그렇게 유달산과의 첫 번째 데이트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마침표를 찍었다.

Editor. 박혜미 . Photo. 남도진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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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에 행복을 담는 황혼의 신사

유달산 자락, 일상의 골목길에 숨겨진 옛 보육원

건물.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이젠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하루를 행복으

로 나는 이가 있다. 사진작가 정진태 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성성한 반백을 지나 멋진 은발을 가지

런히 빗어 넘긴 황혼의 신사. 그는 카메라를 만나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됐고, 그 길 위에서 풍요

로운 ‘나’를 만났다고 빙그레 웃는다.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셔터를 누르다

한창 청운의 뜻을 품던 시절에는 서울에서 지냈다는 정진태 작가. 하지만 폐질환을 앓게 되면서 목포로 내려와 새롭게 터전을 일궜다. 그는 60-70년대 목포에서 신안보육원을 운영하며 전쟁고아들을 돌봤다. 당시 외국 봉사단체의 후원을 받던 그는 후원단체에 보육원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 보내주곤 했다. 단체가 보내준 옷, 과자, 장난감 등이 아이들에게 잘 전달됐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후 그의 카메라는 외국 원조기관에 목포 지역사회의 어려운 실정을 알리는데 유용하게 활용됐다. 한 번은 신안 섬사람들의 지난한 삶을 사진에 담아 후원기관으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1500여 명에 이르는 아이들에게 매달 20달러라는 후원금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진심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 사진에 주

목했고, 그 일에 보람을 느꼈으며, 마침내 사진가의 길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짙은 안개를 걷어낸 장터 순례자

정진태 작가가 쉰이라는 나이로 사진가의 길에 접어들 당시, 그의 작품은 장터 풍경이 주를 이뤘다. 한 손에 젓가락과 숟가락을 모두 움켜쥐고 국밥을 후루루 넘기는 노점상. 시장 한구석, 담벼락 아래서 사람들 구경에 신명난 할아버지. 헐렁한 고무장화를 짚으로 묶고 수레를 끄는 굽은 허리의 노인 등. 정 작가는 유독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을 눈여겨봤다. 그는 장터야말로 한국인의 원초적인 풍경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지리산 자락 산골 장터에 가면 안개가 걷히듯 사람들의 표정을 생생히 읽을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작가는 산골사람들의 깡마르고 야윈 모습이 우리네 본래 모습이 아니겠느냐며, 유독 장터풍경을 많이 찍은 이유를 밝힌다. 그는 평일이면 쉼 없이 장터를 찾았다. 주말이나 공휴일을 틈타 사진을 찍는 이들이 많았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진 터라 평일에 길을 나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혼자서 다닐만한 가까운 곳을 찾게 되었고, 결국 장터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기름기 도는 도시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척박하고 모진 땅 위에서도 굳건하게 살아남은 고목의 모습이었다. 작가는 그 얼굴들 속에서 꾸미지 않은 정(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한국인이 점점 잘 살게 되면서 세련미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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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피 속에 감춰버린 본질적인 얼굴을 찾아 장터를 순례하기 시작했다. 낡은 가죽지갑에 전국의 장터 일정표를 넣고 다니면서 걷고 또 걸었다. 1월 6일에는 순창 거창, 2월 7일에는 정읍 담양, 3월 8일에는 고창 곡성 등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힌 손바닥보다 더 작은 종이를 결코 놓질 않았다. 작가는 운동화가 닳도록 장터를 돌던 예전 일을 회상하며 “산골짜기 사람들은 장날을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날은 그들 일상의 한 귀퉁이가 아닌 삶의 근원이 되는 리듬이다”라고 말했다. 장터를 거닐면서 때 묻지 않은 삶의 고유한 리듬과 만나게 되고, 그 리듬이 한국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일까. 그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형 할인마트를 드나드는 젊은 세대조차 정의내리기 힘든 그리움을 경험하게 된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로부터 굽이굽이 흘러 요즘 청춘에 이르기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평온하고 따뜻한 정(情)의 리듬. 정진태 작가의 장터 풍경은 곱은 손마디를 가진 할머니 같다. 두꺼운 얼음을 깨고 끊임없이 부지런히 삶을 향해 손 내미는

모습이 따뜻한 봄날을 닮았다.

갯벌, 그 검은 낯빛에 매료된 시간들

그가 장터 다음으로 관심을 갖은 공간은 바로 목포 갯벌이었다. 그는 거무튀튀한 갯벌 속에서 갯사람들의 말간 얼굴을 건져 올렸다. 사진과 한 몸이 된 젊은 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곳곳을 누비던 시기, 목포는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타지 사람들이 삽시간에 모여들었다가 이내 뿔뿔이 흩어지고 마는 만남과 헤어짐의 장소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포구 주변에는 날마다 제자리를 지키면서도 변화를 거듭하는 갯벌이 있었다. 썰물과 밀물에 따라 쉴 새 없이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갯벌의 변화무쌍함에 작가는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갯벌의 감춰진 매력을 깨닫고 나니, 포구 사람들의 일상이 그에게 새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무료한 일상 속에 묻혀 있던 새로운 발견이었다. 작가는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고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했다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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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위에 펼쳐진, 비록 아득한 곳으로부터 몰려들었지만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있는 수많은 시작들. 스스로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을 다시 그들 자신으로 만드는 근원적인 신비. 작가는 갯벌 사진들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들을 재생해낼 수 있었다고 추억한다.

모든 깨어있는 순간을 사진과 함께

작가의 작업실은 보육원 건물 뒤편에 있는 조금한 사무실이다. 그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사진 작업에 몰두한다. 작업실 한구석에 놓인 침대는 그의 열정을 말없이 대변한다. 그는 밥보다 잠보다 사진이 먼저다. 현재 그가 보유한 사진은 무려 6-7만장에 이른다. 고3 수험생도 아닌 초로의 신사가 하루에 겨우 서너 시간 잠을 청한다. 현재까지 편집을 마친 작품이 전체 작품의 10%에 불과한 상황이라 마음이 분주하다. 작가는 묵직한 카메라 장비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기 위해 날마다 한 시간씩 러닝머신과 씨름 중이라고 살짝 고백했다. 젊은 후배들과 동반 촬영을 나서 오히려 폐가 돼서야 되겠느냐며, 앞으로도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다짐한다. 사진을 찍기 위한 작가의 열정은 불꽃처럼 일렁였다. 그는 세월을 역행하는 일까지 불사했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시력을 보완

하기 위해 시력교정술을 받았다. 흰 종이처럼 공허할 수 있는 노년기를 맞이하면서부터 사진이 주는 행복을 더욱 크게 느꼈다. 그래서 작가는 세월을 향해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진작가는 좋은 눈과 튼튼한 체력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야 한다”면서 “의학기술 덕분에 흐릿해져가는 시력을 되찾을 수 있어 만족한다. 더욱 힘을 내 열심히 사진을 찍겠다”고 활짝 웃었다. 그는 요즘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 소나무나 꽃을 주로 찍고 이를 컴퓨터로 편집해 보관해오고 있다. 카메라에 담기에는 역부족인 그의 생각과 시선을 발전시키기 위해 10년 전부터 컴퓨터를 배워왔다. 젊은 사람을 뛰어넘는 해박한 컴퓨터 지식으로 다양한 설명을 곁들이는 그의 모습에서 꿈꾸는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이미 작업실 한쪽 벽면에는 흑백의 장터풍경 대신 형형색색의 꽃과 소나무들이 가득했다. 배래모를 눌러쓰고 장터를 누비며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던 정진태 작가. 그는 이제 삶의 주변을 이루는 아기자기한 생명들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는 말한다. 꽃과 나무는 빛의 각도와 위치에 따라 다채롭게 변한다고. 남몰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삶의 기쁨이 가슴 속에서 선명히 떠오른다고. 그의 황혼기는 처연한 공기와 적막감에 무겁게 눌려있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렬하고 결 고은 노을빛을 뿜어냈다. 그 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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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나는 용기 잃은 젊은이들이 깊이 반성할 만큼 밝고 큰 힘이 느껴졌다.

사진과의 유쾌한 외출을 기대하며

4,50년 전까지만 해도 목포 역전에 가면 다방이 즐비했다. 커피숍이라는 말보다는 다방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랑방과 같은 공간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비교적 유명했던 곳은 황제다방이었다. 젊은 작가들이 모여 작품을 활발하게 전시했다. 황제다방 주인은 작가들의 전시를 돕기 위해 창문을 없애고 조명까지 신경 썼다. 그래서 작고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전시회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목포의 상황은 다르다. 갓바위를 중심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지만 작가들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다. 갓바위는 목포역 주변과는 달리 접근이 쉽지 않아 관람객들의 발길을 돌리기에 녹록치 않다. 그래서 요즘은 연례행사로 작품을 전시하더라도 개인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진태 작가는 이런 현실을 몹시 안타까워한다. 카메라 인구가 늘어가는 오늘날 사진 전시는 오히려 퇴보하는 것 같다고 근심한다. 하지만 그는 언제든 전시 기회를 맞아들이기 위해 현재 사진정리 작업에 치열하게 매진 중이다. 이 작업이 곧 마무리 되는대로 개인전을 열고 사진 책을 발간할 예정이다.

사진에 욕심이 많은 후배들에게 사물의 의미를 오로지 한 장의 사진만으로 누군가에게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감동을 주는 것. 그것은 카메라의 메커니즘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과는 별개이다. 주관적인 나의 시선을 수많은 감동으로 객관화시킨다는 것. 그러한 작업은 개인에게 큰 도전을 요구한다. 카메라를 통해 사물의 내면을 정확히 꿰뚫어보기 위해선 적어도 20,30년 동안의 끈기 있는 도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젊은 날 열정적으로 사진에 매달리던 사람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이르지 못하고 카메라를 손에서 놓아버린다. 카메라를 통해 새로운 눈을 뜨기도 전에 맥없이 등을 돌린다. 감동은 깊이에서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무조건 깊이만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깊이는 사진을 대하는 ‘나’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기에 진실하다. 사진을 찍으면서 일상의 즐거움과 보람, 그리고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찍은 사진은 분명 누군가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Editor. 박혜미 . Photo. 정진태 .

남도진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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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공간에서 펼쳐지는 문화의 향연, ‘목포마당페스티벌’

마당은 편평하게 잘 닦인 빈 땅을 의미한다. 그곳

은 고정된 빛깔과 억압된 형체가 없다. 흐르는 물처

럼 막힘없이 자유롭다. 그곳에는 언제나 가능성이

흐른다. 개인의 소소한 일상을 담아내는가 하면, 공

동체가 벌이는 축제의 이례적인 공간으로 쉽게 탈

바꿈한다. 즉, 빛과 온도에 따라 제 몸의 색깔을 자

유자재로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우리네

공간이다. 그러나 시대와 사람들의 주거환경, 사고

방식 등이 변하면서 이웃이라는 공동체 정신은 해

체되었고, 이에 마당이 지닌 다양한 가능성 역시 외

면당했다. 마당은 축제의 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공간으로서도 위기를 맞았다. 목포마당

페스티벌은 이 같은 현실 속에서도 지난 1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마당을 재생해냈다. 공터, 번화가 한

복판, 공용주차장 등의 장소를 가리지 않고 타인들

의 일상이 교차하는, 길들의 정류장을 찾아냈다. 그

리고 무관심 속에 버려진 그 접점 위에 닻을 내리고

모두가 함께 하는 축제를 시작했다.

마당을 향해 내딛은 흥겨운 첫발

지난 7월 21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된 ‘목포마당페스티벌’은 올해로 정확히 개최 11년을 맞는다. 목포마당페스티벌은 극단 갯돌이 20주년을 맞은, 2001년부터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극닥 갯돌은 이 축제의 묵묵한 지킴이다. 갯돌은 1980년대 청년 YMCA 놀이패에서 출발해, YMCA에서 자립한 후에는 문화패를 거쳐 전문예술극단이 되

었다. 80년대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 탈출 풍물 등을 배울 수 있는 시민문화교실을 열어 목포시민들의 문화적 정서를 고양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와 함께 마당극, 무대극, 아동극 등을 통해 지역의 다양한 공연문화를 선도해왔다. 그 후 90년대 중반, 지역의 곳곳에서 축제문화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그러자 전통문화의 대중화에 강한 의지를 보였던 ‘갯돌’역시 전국민속극운동협의회 주관으로 전국민속극한마당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목포마당페스티벌의 효시이다. 그리고 마침내 갯돌은 2001년에 20주년을 기념하며 대중화의 의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한 목포전국우수마당극제전(목포 마당페스티벌의 2010년 이전 명칭)을 개최하기에 이른다. 자연과 사람, 예술이 함께 하는 ‘길놀이’

마당극은 기법, 소재, 주제 등에서 야외적인 성격을 띤다. 따라서 실내에서 진행되는 지역축제보다도 시민들에게 훨씬 쉽게 다가갈 수 있다. 갯돌은 이러한 마당극의 특성에 주목했고, 주변에서도 지역의 특색을 띤 소재(도자기, 개나리, 벚꽃, 나비)를 주제로 한 공연을 의뢰해왔다. 이에 극단갯돌은 지역적 특색에 맞는 ‘맞춤공연’을 기획하여 그 공연을 길놀이 행사로 한층 발전시켰다. 길놀이는 단순한 행사의 의미를 뛰어넘어 삶의 실제 공간을 무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식이다. 그것은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을 공연공간으로 삼는다. 흐르는 물처럼 도심을 가로지르고, 점점 사라져가는 자연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위에 인간의 희노애락을 담아낸 예술혼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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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길놀이가 추구하는 가장 큰 가치는 객체화된 시민들을 축제의 주체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목포마당페스티벌은 1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며 성장해왔다.

새로운 놀이판을 창조한 마

당페스티벌

현재 우리가 ‘지상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 대상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 대상들은 새롭지 않다. 더 정확히 말

해, 과거로부터 존재해온 무언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어떤 이는 세계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는 모순된 말을 외쳤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서로를 좇으며 트라이앵글을 만든다. 목포마당페스티벌은 이러한 트라이앵글 속에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새로운 놀이판을 창조해냈다. 전통적인 ‘마당’의 이념이 현대적인 공간과 만나 충돌하고, 화해하며, 소통할 수 있도록 남도 전통의 마당극, 탈춤, 민요 등에 모던발레ㆍ힙합ㆍ댄스ㆍ저글링ㆍ마술 등과 같이 현대적인 공연을 결합시켰다. 다시 말해 전통과 현대가 서로의 자리를 뺏는 대신, 상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새로운 종합공연예술을 탄생시켰다. 이번 녛년 목포마당페스티벌’에서는 갯돌 주체 30주년을 맞아 국내외의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다. 먼저 국내공연으로는 5.18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극단, 신명의 마당극 ‘언젠가 봄날에’, 박경리 토지소설을 마당극으로 구성한 ‘최참판댁 경사 났네’가 초청됐다. 또, 우리 소리 바라지팀은 ‘국악의 향기’

로 남도 시나위의 신명을 돋웠고, 바닥소리팀의 국악 뮤지컬도 무대에 올라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다. 이외에도 차안다니는 거리에서는 아마추어 공연예술가들이 참가한 마당아티스트 선발대회가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 한편 미국, 캐나다, 우크라이나, 맥시코, 라오스 등 각국의 현대적인 해외공연도 펼쳐졌다. 특히 미국의 유명한 현대무용가인 루이스카보러스가 ‘겨울 소나타’라는 주제로 우주의 아름다움을 모던 발레로 선보였다. 일본의 요시모토 다이스케도 죽음과 삶을 표현한 ‘육체의 폐허’라는 제목의 부토춤을 무대에 올렸다.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만들기 위한 땀방울

극단 갯돌의 단원들은 축제 때만 되면 숨 돌릴 틈 없이 분주해진다. 곳곳에 포스터와 현수막을 붙이고, 직접 삐에로 분장을 하고서 시민들에게 축제를 홍보한다. 그들은 무대제작, 진행스텝, 출연자들의 뒷풀이 음식까지 준비하는 등 부족한 축제 예산

을 절약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극단 갯돌이 이처럼 최선을 다해 목포마당페스티벌 행사를 알리려는 것은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다. 즉, 지역주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이끌어내 모두가 함께 하는 지역의 문화예술을 빚어내기 위해서다. 뿐만 아니라, 2011년 목포페스티벌의 ‘마당은 나눔이다’라는 슬로건처럼 지역을 뛰어넘어 전통과 현대, 사람과 사람, 일상과 예술을 하나로 묶는 ‘마당’문화의 대중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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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골목과 사람들

6.25 전쟁 당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

온 사람들. 그들이 일생 동안 이웃을 가족처럼 의지

하고 고향 잃은 상실감을 달랬던 그곳. 목포시 대성

동 피난민촌은 과거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

한 곳이다. 그러나 2008년 목포시와 대한주택공

사가 이곳을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하면서

살아 숨 쉬던 역사는 결국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2011년 현재 그곳을 지키던 피난민들과 그들의 후

손들은 모두 어딘가로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떠난

역사의 현장에는 지난 7월부터 본격적인 철거 작업

이 진행 중이다. 이곳엔 머지않아 현대적인 도시를

상징하는 고층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벽과 벽 사이 이웃사촌

대성동 피난민촌은 집과 집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 집과 이웃집이 구분될 만큼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곳은 피난민들이 모여들 당시만 해도 복지관 건물을 경계로 ‘윗수용소’와 ‘아랫수용소’로 나뉘었다. 마을 한구석에는 공동화장실을 마련

해두고 모두 함께 볼일을 보았다. 아침마다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보라. 현대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서양식 화장실에 익숙한 우리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대성동의 피난민촌을 기억하는 인근 주민들에게는 아직도 이런 일들이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그들 중 누군가에게는 ‘수용소’라는 옛 명칭 역시 민족의 아픔을 담고 있는 불우한 단어이기보다는, 이웃이 살던 터전을 뜻하는 아련한 추억이다. 대성동 피난민촌은 세월을 거듭하면서 수용소라는 좁은 공간을 고치고 개조해 지금에 이르렀다. 그 고유성을 보전하면서도 변화를 거듭해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게 사람들 기억 속에서 영영 사라질 것이다.

공동체를 허물고 담을 쌓는 아파트

지역사회의 발전은 도시 재개발에 기대는 측면이 강하다. 사람들은 어느 지역에 아파트나 고층빌딩이 새롭게 들어서면 부동산시장의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한다. 특히 특정 부지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문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그 지역은 쉽게 ‘사재기’의 타깃이 된다.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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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획일적인 것은 변화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방식이 아니다. 아파트는 획일적이며 공동체를 강화하기보다 오히려 약화시키고, 해체시키는 주거공간이다. 삶을 통해 형성된 공간은 이미 하나의 문화이자 역사이다. 그런 면에서 대성동 피난민촌은 재개발에 앞서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했던 공간이다.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담은 작지만 의미 있는 무대였기에 도시재생사업과 접목시킬만한 새로운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국내에서는 지금껏 주택의 양적 공급과 물리적 환경개선을 중심으로만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해왔다. 주거지 정비사업이 기존 거주지를 철거하는 방식으로 추진되면서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축적된 사회, 문화자원들은 너무 쉽게 소실되었다. 공동체를 형성하던

골목이나 공터, 동네 구멍가게는 이웃에 대한 도시인의 무관심처럼 무서운 기세로 사라져 가고 있고, 삶은 공간 역시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재개발에 축제로 맞선 ‘삼덕

동’이야기

삼덕동은 대구의 대표적인 구시가지이다. 6.25전쟁 이후에는 대성동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피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했다. 삼덕동 1가와 2가는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활기찬 지역인데 반해, 삼덕동3가는 노인의 인구구성이 높은 편이다. 지난 2006년에는 삼덕동3가의 두 곳이 재개발지역으로 고시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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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한 곳이 주거환경 개선구역으로 지정되어 몸살을 앓았다. 삼덕동은 이보다 앞선 1998년부터 ‘마을의 담장 허물기’로 유명해진 곳이다. 담장을 허물어 주민들의 자연스런 소통을 이끌어 낸 동시에, 모두가 축제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마을을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지난 10년 동안 이외에도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담장 허물기와 함께 골목길을 이야기가 있는 풍경으로 만들기 위해 벽화 작업을 실시했다. 대구 YMCA, 시청, 구청의 협조로 지원비가 생기면 그때그때 주민들이 신청한 순서대로 벽화 작업을 시작했다. 벽화 작업은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했지만, 벽화를 만드는 과정은 주민들의 영역이었다. 집주인이 자신의 집에 벽화가 필요한지 고민한 후 작업을 의뢰했다. 집 주인들은 자신의 집 벽화를 나름대로 구상해 의견을 내놓거나, 이웃집 벽화에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그렇게 삼덕동의 벽화는 주민들의 참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결코 그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었다. 그들은 삼덕동의 주인으로서 벽화를 그리는 작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마을 꾸미기에 열심히 동참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벽화에서조차 삼덕동의 고유한 느낌을 담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이다. 삼덕동 벽화는 페인트 중심이 아니었다. 톱밥, 아크릴 물

감, 병뚜껑, 음료수 캔, 버려진 항아리, 한옥 지붕기와 등 대부분 마을에서 재료를 얻었다. 또한 주민들의 일상 속에 자연히 스며들어 환경의 일부분으로 존재했다. 삼덕동은 골목길 조성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쉼터와 어르신들께 일자리를 제공하는 녹색가게를 운영했으며, 식당으로 사용되던 100여 평의 한옥인 ‘마고재’를 삼덕동 인형마임축제의 공연무대로 삼았다. 다시 말해 마을공동체의 극장으로 조성했다. 특히 인형마임축제, 머머리섬은 삼덕동이 재개발 위기에 부딪히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마을이라는 공간 전체를 축제의 무대로 만든 결과물이다. 전문적인 공연공간을 설치하지 않고, 내가 사는 집, 이웃 집, 공동장소, 골목 모두를 축제의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결국 삼덕동의 마을 축제는 재개발에 맞선 문화 콘텐츠 프로그램이자 공간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삼덕동의 축제를 향유하는 첫 번째 주체는 바로 주민들이다. 즉, 삼덕동의 변화는 기존 주민들을 원 밖으로 내몰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주체가 될 수 있네도록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와 일자리 창출을 결합하는 데 주력했다. 피스트레이드(공정무역 상품을 판매하는 사업), 희망자전거 제작소 등의 사업으로 고령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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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가장, 마을 청년들에게 다양한 일자리를 제공했다. 삼덕동은 현재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골목공원과 예쁜 벽화로 주민들뿐만 아니라 외부인에게까지 기쁨을 선물하고 있다. 재개발의 광풍을 이겨내고 삼덕동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 사람들은 ‘마을읽기’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사람과 공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마을의 자원과 맥락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도시재생을 위한 소중한 첫 걸음이라고 강조한다.

석류나무는 홀로 열매를 맺었다

공사용 대형 천막을 경계로 사람들이 머무는 곳과 이미 떠나버린 그곳이 둘로 나뉘었다. 차량 출입이 제한돼 철거 인부들만이 겨우 오갈 수 있는 조금한 길을 따라 대성동 피난민촌에 들어섰다. 멀리서 희미하게 인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아직 멀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이유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사람 없는 빈집 주변에 흩어져 있는 유리파편들. 을씨년스럽게 무너져 내린 담벼락. 제 주인이 남겨두고 간 무거운 공허를 온몸으

로 견디고 있는 낡은 기와지붕. 담쟁이덩굴은 돌아오지 않는 주인 걱정에 대문 밑을 빠져나와 골목길을 가로질렀다. 낮은 담과 비좁은 골목만큼 이웃사이가 돈독했을 이곳. 사람들이 살지 않는 동네를 조심스럽게 거닐다가 유연히 대문이 열린 집을 발견했다.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그 집 마당에 석류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석류나무는 격려해주는 손길 없이도 작은 열매들을 풍성히 맺은 모습이었다. 마당은 무척 정갈하게 빗질돼 있었다. 어쩌면 주인이 집을 떠나면서 언젠가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며 정성껏 마당을 쓴 것은 아닐지. 열매 맺은 석류나무와 잘 쓸린 마당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제 더 이상 대성동에서 써내려갈 피난민들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에 서 있는 석류나무는 떠나버린 사람들을 대신해 마지막까지 그들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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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속 정원을 거닐다 -홍도에서 즐기는 스킨스쿠버 다이빙

과연 지친 일상에 치인 꿈들은 어디로 흘러갈까?

봄이 되면 습관처럼 이런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답

을 찾기란 쉽지 않다. 결국 체념을 하고 하루하루

를 지내다보면 여름이 찾아온다. 그리고 마침내 여

름은 그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유리알 같은 힌

트를 던져준다. 섬, 갈매기, 선착장.. 7, 8월의 어느

날이 다가오고,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퇴색된 꿈

들이 이윽고 어디론가 흘러간다. 바로 ‘바다’다. 생

기 잃은 하루가 바다라는 거대한 쉼표와 만나 이내

작은따옴표(‘’)가 되고, 어느 순간 선명한 느낌표(!)

로 다시 떠오른다. 여름이면 바다 속이 맑게 걷히는

섬, 홍도. 그곳은 권태로운 일상의 허물을 벗는 특

별한 공간이다. 누구나 직접, 바다 속 정원을 거닐

며 물음표뿐인 나를 잊고, 순수한 느낌표가 되는 곳

이다. 어쩌면 바다정원을 거닐다 돌고래와 마주칠

지도 모르는 행운의 섬이다.

다시 꿈꾸게 만드는 바다 산책

홍도는 행정구역상 신안군에 속해 있다. 목포에

서 서남쪽으로 115km, 흑산도에서는 2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20여 개의 섬이 모여 형성되었고, 그 주변에는 아직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많다. 노을의 붉은 손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섬, 홍도(紅島). 홍도는 매일 오후가 되면 섬과 사람 모두 붉은 베일을 쓴다. 식어버린 열정도 다시 뜨거워진다. 홍도는 일제 강점기에 매화보다 더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매가도’로 불렸다. 한편, 바다는 붉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섬과 달리 ‘푸름’이 모든 것을 휘감는 공간이다. 이 푸름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들의 오랜 욕망을 일깨워준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문장 하나, 단어 하나까지 신경 쓰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직장인. 아침 출근시간, 이미 만원인 지하철에 올라 납작한 스티커처럼 유리벽에 달라붙어 있는 이십대 여성. 서류면접에서 계속 미끄러져 이젠 고시원 천장만 올려다보는 취업준비생. 숨 막히는 공간에 갇혀 ‘떠나고 싶다, 느끼고 싶다’를 반복하는 그들. 홍도의 바다는 퇴적층처럼 겹겹이 쌓인 지겹고 우울한 일상을 사는 ‘그들’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든다. 그 바다에는 ‘청물’이라는 맑은 물이 흐르고, 그 물은 사람들을 푸른 정원으로 인도한다. 홍도 주민들은 쿠로시오 난류를 청물(맑은 물)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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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심성 고운 바닷물 덕분에 누구든 7월부터 10월까지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맘껏 즐길 수 있다. ‘청물’이 몰려들면 홍도는 자신의 넉넉한 일상을 사람들과 기꺼이 나눌줄 안다. 스킨스쿠버들은 바다가 빗장을 풀고 말간 얼굴을 내미는 그 시기가 되면, 해저 20~30m까지 무난히 다이빙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수온 역시 20도에서 22도를 오가기 때문에 체온을 유지하는데 부담이 적다. 현재 목포를 비롯한 서해에서는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는데 일부 제약이 따른다.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갯벌과 들쑥날쑥한 해저지형 탓이다. 하지만 홍도가 있기에 우리는 여름에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스멀스멀 솟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열기, 도심 속 혼잡한 자동차들, 그리고 일상을 떠나 친절하고 푸른 물결을 만난다. 그곳에 가면 우리는 누구나 매력적인 바다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바다 속 지도 따라 신나게

걷기

홍도의 스킨스쿠버 다이빙 코스는 다양하다. 아름다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홍도는 해안선을 따라

이미 다양한 코스가 발굴되었다. 홍도의 대표적인 다이빙 장소는 ‘주전자바위’다. 평균수심 15m, 최대수심 30m로 바다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만끽할 수 있다. 화려한 빛깔의 홍산호 군락과 바위틈에 숨어있는 우럭, 놀래미, 혹돔 등의 토착어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청물’을 따라 이동하는 회유성 어종인 돌돔 무리가 빙글빙글 돌며 거대한 은빛 춤을 추는 장관이 펼쳐진다. 주전자바위에서는 초급자나 중급자 모두 다이빙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초급자라면 조류가 거세지 않는

시기에 맞춰 다이빙을 하는 것이 좋다. 아기자기한 재미를 선물하는 주전자바위를 충분히 구경하려면 최소 5회 정도의 다이빙이 필요하다. 다음은 ‘까진여’이다. 마치 ‘까진 여자’라는 속어의 줄임말 같은 이름 때문에 다이버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곳이다. 평균수심 20m, 최대수심 35m로, 예전에는 6m까지 자란다는 ‘만타’, 즉 대형 쥐가오리를 자주 볼 수 있었다. 때문에 다이버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여기에 주변 수면에서 돌고래 떼가 자주 목격되기도 해 다이버들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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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게 만든다. 다만, 풍부한 어종으로 낚시꾼들과의 신경전이 자주 생기기 때문에 그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곳에 몰려드는 다이버들만큼, 손맛을 즐기기 위해 몰려드는 낚시꾼들이 많아 다이빙 기회를 잡기가 만만치 않다. 암초가 작고 수심이 깊어 대부분 다이빙 중급자에게 적합한 곳이다. 강한 조류에 휘말릴 수 있으므로 반드시 안전장비를 준비해야 한다. ‘무심끝’은 평균수심 15m, 최대수심 20m인 다이빙 장소다. ‘무심끝’이란 물의 힘이 가장 센 끝을 가리키는 전라도지역 사투리다. 강한 조류 때문에 초급자는 다음을 기약해야만 하지만, 오랜 경험과 실력을 겸비한 배태랑 다이버들에게는 정감 가는 곳이다. 수천마리의 불볼락 무리가 붉은 비늘을 반짝이며 다이버들을 유혹하고, 대형 담치나 홍산호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무제비여’는 평균수심 15m, 최대수심 30m로 수중암반이 수 백 미터에 걸쳐 반도처럼 발달해 있다. 그 면적이 넓기에 어느 다이빙 장소보다도 방향감각이 중요하다. 암초를 따라 다이빙을 하다 보면 무리지어 이동하는 대형 회유 어종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방어, 농어 등 바다를 누비는 힘센 어류들이 자주 모습을 드러내 다이버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참치와 같은 대형 어종도 종종 나타난다. ‘무제비여’는 초급다이버들도 수심 유지에만 주의하면 충분히 신나는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바다정원을 산책하기 위한 준비!

최근 홍도에서는 스킨스쿠버 다이빙이 한창이다. 여름을 맞아 많은 인파가 몰리고 있다. ‘홍도’로 바다 산책을 나서려는 이들은, 먼저 홍도에 있는 스킨스쿠버 다이빙 업체에 최소 일주일 전에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현재 홍도에서 다이빙을 체험할 수 있는 ‘홍도다이브존 리조트’를 운영 중인 김명갑 씨는, 요즘 매주 홍도 투어를 실시하고 있다. 그는 홍도 다이빙 투어를 지난 7월부터 시작해 오는 10월 30일까지 당일과 1박 2일 코스로 나누어 계속할 예정이다. 당일코스는 투어비가 1인당 13만원으로 다이빙 장소로 이동 후 2회 연속 바다 속 구경에 나선다. 다음으로 1박 2일 코스는 투어비, 26만원으로 첫째 날과 둘째 날에 각각 보트로 이동해 홍도 근해에서 2회씩 다이빙을 경험하게 된다. 또, 첫째 날 저녁에는 간단한 바비큐 파티도 갖는다. 다만, 홍도 다이빙 투어는 숙식에 드는 비용과 목포ㆍ홍도를 오가는 선비를 개인이 별도로 부담한다.자세한 사항은 다음 카페 ‘홍도 다이브존 리조트(http;//cafe.daum.net/ hongdodiveingresort)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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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는 여행자를 위한 나침반이다 -공룡과 함께 하는 ‘남도여행’

남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먼 섬처럼 아득하고 유

구하다. 그곳에는 다양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흥

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존재한다. 선사시대 공룡 화

석이 발견된 우항리 바닷가. 느림의 미학을 간직한

섬, 청산도. 이순신 장군의 용맹한 얼이 살아 숨 쉬

는 우수영 울돌목. 나침반은 때론 장엄하고, 때론

소박한 그곳 남도를 가리킨다. 오는 8월 27(토)부

터 28(일)까지 국립목포대학교와 도서문화연구원

에서 주관하고, 전라남도가 주최하는 ‘공룡과 함께

하는 남도여행’이 시작된다. 이번 여행은 남도를 향

한 ‘남도진’의 첫 번째 여행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느리게 걷는 법을 배우다- 청산도 서편제길 걷기,

봄의왈츠 촬영지, 신흥 해수욕장

ㆍ청산도 슬로우길 제 1코스

“빨리, 빨리”라는 단어가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도시를 벗어나면 청산도가 보인다. 지난 2007년 12월 슬로시티로 인증 받은 완도군 청산도. ‘슬로시티’는 자연과 환경,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문명의 어지러운 속도 대신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회 혹은 도시를 말한다. 청산도에 이르면 어째서 이곳이 슬로시티인가, 라는 질문의 답을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청산도에서 걷기 코스는 총 11개다. 이번 여행은 그중 제 1코스를 중심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제 1코스는 도청항에서 시작해 갤러리길, 서편제 촬영지인 ‘당리입구’, 드라마 ‘봄의왈츠’세트장 등으로 이어진다. 도청항을 지나 갤러리길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과 멋진 해안절경을 만끽할 수 있다. 이곳 갤러리길을 거쳐 조금 더 걷다보면 서편제길이 나타나고, 서편제길에 막 들어서면 서편제촬영지가 눈에 띈다. 그리고 서편제촬영지를 나오면 봄의왈츠 세트장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이 구간이 바로 ‘서편제길’이다. 영화 ‘서편제’의 주인공들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걷는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이 길 위에서 해마다 봄은 유채꽃을, 가을은 코스모스를 흐드러지게 피워낸다. 특히 매년 4월에는 유채꽃이 만발해 걷기축제가 벌어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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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도 하다. 서편제길이 끝나는 곳에는 배우 한효주가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 ‘봄의왈츠’세트장이 있는데, 그 우측으로는 시원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봄의왈츠 세트장에서는 전복 가두리 양식장과 도락리 일대를 조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멈추지 않고 느리게 걷기를 계속하다보면 화랑포가 나온다. 포구의 이름은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이 마치 꽃 같다는데서 유래한, 화(花) 랑(浪)이다.

ㆍ신흥리풀등해수욕장

슬로우길 1코스와 함께 청산도 걷기에서 경험해볼 곳은 신흥리풀등해수욕장이다. ‘풀등’이란

상류로부터 흘러들어온 모래가 쌓여 형성된 모랫등을 말한다. 섬의 형태를 띤 지형으로, 크기는 지형에 따라 다양하다. 바닷물의 흐름에 따라 육지와 연결되거나 깎이고, 소실되기도 한다. 보통 때는 그 위에 바닷물이 넘실댄다. 끝이 새로운 시작이 되는 곳- 해남 땅끝관광지

청산도에 이어 남도여행의 두 번째 목적지는 바로 해남 땅끝이다. 이곳은 한반도의 최남단으로 북위 34도, 해남군 송지면 갈두산 사자봉 땅끝이다.

오래 전 대륙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우리민족이 이곳에서 발길을 멈추고 한겨레를 이루었다. 역사 이래 ‘땅끝’은 동아시아 문화의 이동로이자 해양문화의 요충지가 되어왔다. 이번 여정에서는 땅끝모노레일을 타고 땅끝전망대에 오른다. 땅끝전망대는 1987년 4월 18일에 처음 건립됐다가 지난 2002년 1월, 대한민국의 최남단이라는 상징성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다시 건립 됐다. 현재 해남 송지면 송호리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는 서남해의 다도해인 흑일도, 백일도, 노화도 등이 한눈에 들

어온다. 땅끝전망대는 조국의 통일을 기원하고 대양을 향한 새로운 출발의 염원을 담고 있다. 그 모습은 타오르는 횃불과 횃불을 감싸고도는 강강술래 하는 여인네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형상화했다. 땅끝 전망대로 향하는 길을 편하게 열어줄 모노레일카는 땅끝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국토순례의 시작이 되는 땅끝의 아름다움을 더 생생히 전달하고, 장애인, 노약자의 불편을 덜고자 지난 2005년 12월부터 운행되고 있다.

공룡의 신비를 찾아서- 해남 우항

리 공룡화석지, 공룡박물관

해남 우항리 화석지는 세계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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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익룡, 공룡, 새 발자국 등이 동일 지층에서 발견된 지역이다. 이곳은 해남읍에서 진도방향(서쪽방향)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과거 우항리 화석지는 해남만 남쪽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금호방조제에 막혀 담수호를 낀 육지로 변했다. 담수호가 되기 이전까지 그곳은 조수가 교차하는 바닷가였다. 그러한 환경 탓에 밀물 때에는 지금의 공룡 화석지가 대부분 바닷물 속에 잠겨 관찰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현재는 일정한 평균수면을 유지하는 담수호의 호숫가이자, 잘 발달된 퇴적층과 수려한 경관으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우항리 화석지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다양한 화석이 발굴됐다. 그 가운데 공룡발자국 화석은 514점, 익룡발자국 화석 443점, 새발자국 화석은 약 1000여점 등이다. 다음으로 공룡화석지와 함께 둘러볼 곳은 공룡박물관. 지난 2007년 4월에 개관해 현재까지 우항리 공룡 발자국 화석의 발굴과정과 공룡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박물관은 실내 전시관과 옥외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옥외 전시관은 세 곳으로 공룡의 긴 목이나 몸통, 그리고 등뼈의 형상을 건물 설계에 반영했다. 가까이에서 공룡 발자국 화석을 관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건축양식도 구경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혼이 간직된 ‘명랑대첩지’- 우수영관

광지, 울돌목 거북배 체험

이번 여행의 세 번째 목적지는 우주영관광지이다. 이곳은 명랑대첩공원, 울돌목, 충무사, 우수영성지로 조성돼 있다. 이순신 장군의 충정과 명량대첩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생생히 재현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ㆍ명랑대첩공원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위치한 명량대첩공원은 임진왜란 3대 수군대첩지 중 한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명랑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길고

길었던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이자,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해 세운 기념공원이다. ‘명랑대첩’은 전라 우수영이 역사성을 지닐 수 있도록 도운 계기가 되었다. 1597년 9월 16일 새벽. 어란포에 머물고 있던 일본수군들이 밀물을 타고 명량으로 공격해왔다.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왜선을 공격하자, 왜선이 장군의 배를 포위하여 격전이 벌어졌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이 의도한 바대로 조수가 썰물로 돌아섰고, 적장 마다시와 왜군들은 이에 당황해 혼비백산하기에 바빴다. 그 틈을 이용해 이순신 장군은 왜선 1백 33척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바로 ‘명량대첩’이다.

ㆍ충무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충정과 구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에 건립한 사당. 명량대첩비와 충무공 영정이 봉안돼 있다. 충무사에 세워진 명량대첩비는 조선 숙종 때 충무공이 정유년(1597) 9월 16일 우수영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을 기록한 것이다. 이 후 1942년 일본 총독부가 전남 경찰부에 명량대첩비를 뜯어 올려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왜란 당시 크게 패한 기록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다. 일본인 경찰들은 인부들과 목수,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해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고, 결국 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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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흔적도 없이 헐리고 말았다. 그러다 1945년 조국해방으로 우수영 유지들이 수소문 끝에 대첩비를 다시 발견하고, 모금 운동을 벌여 대첩비를 세울 비각을 짓는다. 그리고 마침내 1950년 비각을 완성하고 그 안에 대첩비를 모셨다. 그동안 명량대첩비는 두 차례나 믿지 못할 영험한 현상을 보여 주변의 관심을 끌었다. 국가적인 위험이 예상될 때마다 땀을 흘리듯 검은 물을 흘린 것이다. 사람들은 그 현상을 보고 나라를 근심하는 이순신 장군의 충절이 살아난 것이라고들 한다. 명량대첩비는 1950년 6.25사변과 1980년 5.18민주항쟁 때 두 번의 검은 눈물을 흘렸다.

ㆍ울돌목 거북배 체험

바다가 운다고 해 ‘명량’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울돌목. 울돌목은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 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이다.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사이를 소용돌이치며 급류가 흐른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정유재란 당시 4백여 척의 왜선들이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울돌목 바다 위로 아치형의 진도대교가 허공을 가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울돌목 거북배 체험을 즐길 수 있다. 거북배에 직접 올라 울돌목과 벽파진, 피섬 등지를 둘러본다. 벽파진은 진도 동부의 해안가 나루터로

본래 진도의 관문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이곳에 수군영을 두었으며, 현재는 이순신 장군의 전첩비가 있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벽파진에서 왜군을 명량해협 쪽으로 유인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어란포 해전에 이어 벽파진 해전에서도 왜군 함대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을 격퇴했다. 거북배를 타고 울돌목을 지나다보면 볼 수 있는 것이 ‘피섬’이다. 피섬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속해 있는 섬으로, 명랑해협인 ‘울돌목’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지금은 녹진관광지에 포함돼 육지와 연결되었다. 규석 계열의 붉은 색 암반으로 이루어진 섬이기에 붉은 색이지만, 명량대첩 당시 물에 빠져 죽은 일본수군의 피가 스며들어 붉은 빛으로 보인다하여 ‘피섬’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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