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bewitching attraction,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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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Bewitching Attraction, 2006)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시나리오 이하 - 소설각색 김혜연

#조은숙(문소리)

심천 디자인대학 염색과 교수. 폼나는 타이틀, 팔등신의 미끈한 몸매, 은색 볼보를 모는 재력(?)까지 갖춘 여주인공. 지방 소도시에서 뭇사내들의 주목을 받는 관심대상 0 순위의 싱글우먼. 나이는 30 대 초반으로 추정되나 진짜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료 교수들과 ‘푸른심천 21’이라는 환경단체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지만 정작 환경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다. 왼쪽 다리를 약간 저는 장애가 있지만 어쩌다 다리를 다쳤는지도 미스터리다. 학창시절 소위 ‘날라리’처럼 놀았던 듯 싶지만 한편으로는 지적인 매력도 있다. 그녀 앞에서 남자는 모두 세 살 먹은 어린애들이다.

#김영호(박원상)

SBC 심천방송 프로듀서. 30 대의 기혼남으로 목소리가 예쁜 성우출신 부인 사이에 딸을 두고 있다. 자신의 프로그램에 여성 게스트가 출연할 때면 촬영장에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나온다. 환경을 소재로 은숙을 인터뷰하다가 모텔로 직행하면서 ‘불륜의 은밀한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프로그램 제작은 대부분 작가와 조연출에게 떠맡기고 틈만 나면 도박에 빠지는 불량감자 프로듀서의 전형. 지방방송국에서 썩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도 때로는 방송인의 양심 때문에 고민하는 순수성도 있다. 은숙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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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규(지진희)

‘박필’이라는 필명을 가진 30 대 초반의 인기 만화가. 심천대학 만화창작과 초빙교수가 되어 심천에 내려왔다. 한때 양아치로 이름을 날리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푸른심천 21’에 합류했지만 다른 남자들과 달리 은숙에게 도통 관심이 없다. 수려한 외모 때문에 여교수의 골수 팬클럽 멤버들로부터 경계와 견제의 대상이 된다.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욕설을 내뱉고, 기분에 따라 살벌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행동파 예술가다.

#유선생(유승목)

30 대 초반의 초등학교 교사로 ‘푸른심천 21’의 멤버 중 하나. 환경운동에 열성을 보이는 극소수(?)의 멤버다. 김영호처럼 자식 딸린 유부남이지만 오래도록 은숙을 향한 연정을 품어왔다.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 때문에 군대시절 실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소문이다. 은숙과 석규의 사이가 심상치 않아보이자 마음을 다쳐 심술을 부려보지만 은숙에게 미운털만 박힌다. 우유부단한 남성의 전형이다.

#명희(신주아)

심천 디자인대학 염색과 학생. ‘푸른심천 21’에 아르바이트를 자원한다. 어리고 예쁜 데다 머리도 나쁘지 않아 은숙이 여왕처럼 버티고 있는 푸른심천 사무실에서 야금야금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간다. 은숙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히면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간다. 매력적인 커리어우먼인 은숙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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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심천의 바다는 오늘 한 마디로 엉망이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에 살아요”라고 말하면 다들 “우와, 멋지네요.

아침에는 갈매기 울음 소리에 깨고, 점심에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커피 마시고, 저녁에는 푸른빛으로 가득찬 공기를 마시면서 회에 소주 한 잔…. 캬, 정말 부럽네요” 등등의 찬사가 쏟아져 들어온다.

대개는 서울 같은 대도시 아파트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보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바닷가에 산다고 해서 매일 회를 안주해서 소주 마신다고 생각하는 빈곤한 상상력을 탓하고 싶지 않다. 그냥 한심할 뿐이다.

바다라고 해서 모두 바다가 아니다. 성산포 앞바다나 지중해의 투명한 바다를 떠올린다면 곤란하다. 연달아 쏟아져 나오는 폐수와 장마에 휩쓸려온 온갖 쓰레기 더미로 뒤덮인 동해의 끝 작은 소도시의 바다. 가끔 지구의 화장실 근처에 살고 있는 듯한 모멸감도 느낀다. 하긴, 그렇다 하더라도 바다는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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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층 높다란 은숙의 집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사방 푸르스름한 저녁의 기미가 역력하다. 여기저기 하나둘 불빛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걸 보면서 은숙은 밤이 돼야 비로소 바다가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했다.

저녁 무렵 바다를 볼 때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숭고한 애정이 가슴에 차오르는 걸 느낀다. 특히 해질녘 붉은 해가 작열하며 바다를 자줏빛으로 물들여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거대한 신의 손이 무색 천을 치잣물에 담가 철렁철렁 염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둠이 짙어지면 쏟아지는 달빛 아래서 바다는 네이비 블루톤으로 변해 별빛까지 모조리 반사해준다.

은숙은 베란다 끝에 서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봉긋하게 솟은 가슴에 손을 얹어 살며시 쓸어내리자 갑자기 온몸이 나른해진다. 많은 사내들이 도도한 그녀의 가슴 앞에서 좌절하거나 정복자인 양 으스댔다. 크지도 작지도 않게 탱탱한 탄력을 유지하고 있는 가슴을 만지면서 흐물거리는 사내들의 눈빛은 은숙에게 더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그저 사내들이란 숫가락 들 힘만 있으면 들이댄다니까. 하긴, 그렇지 않은 사내들이란 이미 사내가 아니지.’

휴대폰에서 울려퍼진 ‘환희의 송가’가 은숙의 상념을 깨웠다.

“안녕하세요. 심천 디자인 대학교 염색과 조은숙 교수님이시죠?”

“네, 맞습니다만.”

“예, 안녕하세요. SBC 방송의 이승훈 PD 라고 합니다.”

“예, 반갑습니다. 그런데 제게 무슨 일로?”

“예 교수님. 다름이 아니구요.”

이 PD 의 말에 따르면 삼일 전 유조선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심천 앞바다까지 4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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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져왔고, 때맞춰 몇 미터가 넘는 높은 파도에 방제작업도 나가지 못한 터라 기름이 무한정 번지고 있다는 거였다. 은숙은 이 PD 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염색과 교수긴 하지만 환경단체에 소속돼 있는데 초등학생 취급하면서 뭘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일 ‘내고장 환경지킴이’에 객원 리포터로 출연해주셨음 해서요. 교수님이 ‘푸른심천 21’ 사무국장이시니까요. 죄송합니다. 내일 오전 여섯시에 방파제에서 뵐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촬영은 별게 아니에요. 나오셔서 멘트 몇 마디만 해주시면 돼요.”

은숙은 일단 수락했다. 환경운동하는 교수가 나서야 프로그램에 무게가 실릴 거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그런데 이승훈 PD 의 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저, 그런데 교수님, 내일 새벽에 미용실이라도 다녀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 뜻은 없구요. 교수님이 아직 젊으시고 또 나름대로 심천에선 유명인사시니까요. 예예.”

통화를 끊은 은숙은 웃기는 주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방 소도시, 특히 심천처럼 서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교수라든지 PD 라든지 하는 직함은 서울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큰 힘을 갖고 있다. 서울 사람들 생각엔 뭐 그런 이름도 모르는 지방대학 교수나 지방방송국 PD 가 그리 대단하겠느냐고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고급 인력이란 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방에선 번듯한 간판을 내걸고 있다는 게 여간 중요한 게 아니다.

간단히 말해 신뢰할만한 직함과 그에 어울리는 지적 수준을 갖춘 누군가를 찾는 게 쉽지 않다는 거다. 이런 조그마한 도시가 그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은숙은 잘 알고 있었다

밤의 아름다움이 걷힌 새벽의 심천 바다는 썩 아름답지 못했다. 아름답기는커녕, 석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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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를 풀풀 풍기는 바다만큼이나 은숙의 기분도 썩 밝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오전 내내 앞발로 오징어를 껴안고 잠든 항구의 고양이처럼 침대에 파묻혀 나른한 한때를 보내고 있을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사랑하는 바다가 태양에서 떨어진 치자물이 아니라 유조선 옆구리에서 새어나온 기름으로 염색되고 있다는데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은숙은 애써 졸음을 밀어내고 해 뜨는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그녀가 고른 옷은 연한 갈색 명품 투피스였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은숙은 아주 잠시 고민하다가, 보안경을 꼈다.

어제 이승훈 PD 와 전화를 끊은 뒤 은숙은 바로 단골 미용실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장은 새벽 다섯 시 반에 머리를 해달라는 말에 당연히 기겁을 했다. 그러나 은숙이 프로그램 이름을 대고 촬영이 있다고 하자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은 은숙의 머리를 만지면서 기분좋게 수선을 떨었다.

“조교수, 오늘 테레비 나오는 거야?”

은숙은 대답하는 대신 미용실 거울에 대고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침 여섯 시 반 방파제에는 습기 찬 바람이 불어닥쳤다. 파도도 제법 높이 일었다.

은숙은 도로를 등진 채 방파제 위에서 방송팀을 기다렸다. 새벽에 급히 차려입고 나왔는데도 은숙은 완벽한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웨이브로 마무리된 머리와 안경이 지적인 분위기를 내면서 잘 어울렸다. 바닷바람이 그녀를 향해 불면서 투피스 아래 유연한 몸매 라인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전화 드린 이승훈 PD 라고 합니다.”

은숙은 고개를 돌렸다. 시커먼 수염에, 야구모자를 쓰고 구겨진 바바리 무늬 셔츠를 입은 오동통한 남자가 자판기 커피를 권했다. 은숙은 가볍게 목례했다.

“네.”

“교수님 일찍 나오셨네요. 오히려 저희가 늦었네.”6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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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옆에는 깔끔한 검정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은숙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깨끗한 양복 차림이 마치 보험 영업이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SBC ‘내고장 환경지킴이’를 만들고 있는 김영호 PD 입니다.”

은숙은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이 담당 PD였구나. 이승훈이란 사람은 조연출이었군.

김영호가 은숙에게 어색하게 웃음을 날렸지만 은숙은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승훈은 은숙과 영호에게 대본을 건네주고 바쁘게 항구 쪽으로 뛰어갔다. 김영호는 은숙의 옆얼굴과 몸매를 빠른 시선으로 훑었다. 예쁘다. 몇 살이나 됐을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매, 지적인 맛과 적당한 백치미가 어우러진 얼굴…. ‘그래, 일단 잘 골랐어’라고 생각했다.

“감독님! 보트 준비됐답니다. 오세요!”

항구에서 이승훈이 외쳤다. 김영호는 가시죠, 하고 앞장섰다. 은숙은 순간 긴장했다.

그녀는 보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오늘처럼 파도가 높은 날 보트를 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구두를 신고 미끄러운 보트에 올라가는 것은 그녀에게 위험했다.

그러나 은숙은 또각거리면서 보트 쪽으로 걸어갔다.

김영호는 콘크리트를 맞부딪치는 그녀의 구두소리를 듣고 잠시 뒤돌아보았다.

그러다 은숙의 다리에 시선을 던지고 움찔했다. 은숙은 왼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어라, 장애인이었네….

김영호는 슬며시 은숙 뒤로 빠져나갔다. 은숙은 영호를 뒤로 하고 출렁이는 보트에 올랐다. 보트에 오르는 그녀의 걸음이 흔들렸다. 김영호는 아차 싶었다. 이따가 해경함에 올라가야 하는데, 장애인인 줄 알았으면 스니커즈라도 준비해 오시라고 할 걸. 김영호는 은숙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옆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다내음에 섞여 전해오는 여인의 향기가 짜릿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흐음, 아침부터 혼란스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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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6 미리 카메라를 든 이승훈과 카메라 감독이 맞은편에 앉자 보트는 부릉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회색 물결이 엔진에 좌악 갈라졌다. 하늘만큼 심하게 찌푸린 바다는 자기 몸에 끼얹어진 석유가 영 싫은지, 신경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파도를 들썩였다.

조용하고 우울한 아침이었다.

앞서 출발한 소형 해경함이 멀리 바다에 떠 있었다. 은숙은 바닷바람에 머릿결을 날리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김영호는 은숙의 실루엣에 빨려들 듯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영호를 대신해 이승훈과 카메라 감독은 6 미리 카메라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내내 은숙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영호는 불현듯 자신이 지금 보트를 타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냈다.

“박 감독님, 카메라 체크 끝나면 말씀해주세요.”

“어련할까. 그쪽이나 잘해.”

영호는 문득 ‘그쪽이나 잘해’란 말에 움찔했다.

보트는 높은 파도에 출렁였다가 가끔씩 퉁 하고 수면 위에 거칠게 떨어졌다. 은숙은 도도하게 수평선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영호는 승훈과 박 감독에게 미안해졌지만 그래도 은숙에게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카메라 박 감독은 영호를 흘긋 쳐다보고는 풋,

하고 코웃음을 날렸다.

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카메라 체크를 끝냈다. 김선배가 또 방송 몇 시간 남겨놓고 편집 끝내려고 저러나. 조연출인 승훈은 예쁜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김 PD 의 ‘광견병’이 지금 도지고 있다는 예감을 받았다. 갑자기 가슴 한 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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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해졌다.

해경함이 가까워지고 있다.

보트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해경함 옆에 멈춰섰다. 영호는 은숙에게 대본을 짚어주면서 인터뷰에 대해 큰 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 감독이 6 미리 앵글을 잡기 시작하자 영호는 손을 내저으며 제지했다.

“잠깐만 박 감독님. 해경함은 좀 이따가 찍고 교수님 인터뷰 먼저 따자구요. 보트 위에서 오프닝 먼저 갑시다.

승훈아 기다려봐. 좀 보이는 데 잡아야 할 거 아냐. 교수님 잠깐만 일어서 보시겠어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영호는 들고 있던 대본을 자리에 깔고 은숙을 이동시켰다. 은숙이 자리를 잡고 앉자 박 감독과 이승훈은 앵글을 잡았다. 영호는 스타트 사인을 주기 전에 렌즈를 통해 은숙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어깨가 꽤 앙증맞다. 작은 어깨를 가진 여자는 화면발을 괜찮게 받는다. 이대로 에로영화라도 한 편 찍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앵글 속에서 요염하게 웃으며 옷을 벗는 은숙이 연상돼서 혼자 피식 웃었다. 이승훈이 큰 소리로 촬영 돌입을 알렸다.

“촬영 들어갑니다 엔진 좀 꺼주세요!”

바르릉거리던 해경함의 엔진 소리가 잦아들면서 조용해졌다. 잠시 동안 물결끼리 스치며 찰싹거리는 소리 이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영호는 은숙과 카메라를 번갈아 보다가 스타트, 사인을 내렸다.

은숙은 멘트를 시작했다.

영호는 물결처럼 가슴이 요동치는 느낌을 받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욕정이다. 아니 그 느낌은 연애감정에 가까웠다. 저 여자를 어찌해보겠다는 지저분한 계산은 사라지고, 대신 흐린 바다를 배경으로 대본을 읽어 내려가는 은숙의 모습에 감격하고 있었다. 석유 냄새나는 지저분한 바다조차도 잊게 만들 만큼, 그녀는 지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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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웠다.

그 바람에 김영호는 잠시 오케이 사인을 잊었다.

“김 PD야, 오케이 안 주냐.”

“아 네! 오케이!”

오케이 사인을 받자 은숙이 영호를 쳐다보고 처음으로 싱긋 미소를 던졌다. 영호도 미소를 지었다. 승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영호는 멋쩍은 미소로 답했다.

승훈아 알지? 용서해라.

은숙이 해경함에 오르는 사다리를 붙잡았을 때 영호는 그녀에게 넓은 등을 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녀는 구두를 벗어 한쪽 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올라갔다. 그녀의 하얀 종아리가 눈부셨다. 때마침 불어닥친 바닷바람이 그녀의 흐벅진 허벅지까지 파고 들었을 땐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사다리 끝에서 해경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잡고 끌어올려 주었다.

해경함에서의 촬영과 인터뷰도 금방 끝났다. 영호는 승훈과 박 감독에게 해경 인터뷰를 맡겼다. 그 정도는 박 감독이랑 승훈이가 멋지게 찍어 오겠지.

영호는 보트를 타고 은숙과 함께 방파제로 돌아왔다. 올 때는 그다지 보트가 출렁이지 않았다. 단 둘이서 대화도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영호는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내릴 때 영호는 살짝 손을 내밀었지만 은숙은 도도하게 혼자 내렸다. 대신 그녀는 영호에게 기회를 더 주겠다는 듯 방파제 끝 벤치에 다소곳이 앉았다. 영호는 은숙에게 PDA 를 보여주면서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은숙은 편집이 끝나면 푸른심천 21 사무실로 초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인터뷰가 끝났는지 보트가 방파제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보트에서 휴대폰이 안 터지는지, 이승훈이 방파제 편을 보면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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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승훈은 오늘 일이 끝나갈 때가 되면 더 화가 나리라.

은숙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저 분이 더 PD같네요.”

영호는 뜨끔했다.

은숙은 가슴 속에 미소가 번지는 걸 느꼈다. 남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는 다 비슷비슷하다. 이 남자, 귀엽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대낮의 모텔방은 마치 연극무대 같다.

영호는 은숙의 무릎 사이를 공략하기 위해 부지런히 혀를 놀리고 있다. 은숙은 미세한 쾌감이 종아리에서 허벅지로 번져나가는 걸 느끼면서 영호의 머리 너머로 시계를 봤다. 오후 1 시?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촬영이 끝나자 은숙은 스태프들과 늦은 아침을 먹었다. 방파제 옆 횟집 매운탕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새벽부터 시달린 빈 속이 든든해졌다. 식사가 끝나자 영호는 은숙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 해안가를 쭉 따라가다 보면 제 친구가 하는 카페가 있거든요? 커피맛이 기가 막히죠. 교수님 한 번 가보실래요?”

은숙은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처음 만날 때부터 이 남자가 여자와 관련해서는 집요할 거라는 예감이 적중한 셈이다.

그녀는 영호의 어깨 너머로 짜증이 역력한 이승훈의 얼굴이 보였다. 이 남자, 내가 매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스태프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러면 좀 곤란하지 않나.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상습범이 아닐까.

“괜찮아요 김 PD님, 대신 저희 사무실로 가시겠어요? 커피보다도 제가 보여드릴 11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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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가 있어요.”

영호가 승훈에게 나머지 일정을 지시하고 카페에 전화를 거는 동안 은숙은 볼보 안에서 조교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오후 수업 휴강시켜 줘. 사정이 생겨서…. 애들 헷갈리지 않게 부탁해.’

영호가 카메라 박 감독과 이승훈을 보내고 나서 볼보에 올라타자 은숙은 말했다.

“그 카페, 인테리어는 괜찮아요?.”

바닷가의 하얀 건물 2층 카페는 센스있게 잘 꾸며져 있었다. 영호는 아침부터 맥주를 시켰고, 은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신 영호가 키핑해 놓은 양주를 꺼내려던 건 뜯어말렸다. 카페에는 끈적끈적한 재즈곡이 흘렀다. 영호의 친구는 몇십 분 같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다가 볼일이 있다면서 나가버렸다.

“대낮부터 술은 더 먹지 마라. 이 나쁜 놈아.”

친구가 방울을 찰랑거리면서 카페 문을 닫고 나가자 영호는 일어서서 유리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은숙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다짜고짜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은숙은 영호의 뒷머리카락을 만졌다. 영호는 손을 블라우스 속에 집어넣으려다 은숙의 제지를 받자, 밀어내는 손을 잡고 손등과 손바닥, 손가락 사이까지 일일이 입을 맞췄다.

“손도 너무 예쁘시네요. 교수님.”

그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카페 2층에 있는 모텔방으로 올라왔었다. 방에 들어서서 두 사람이 뒤엉키는 데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다.

영호는 긴 애무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은숙은 영호의 몸에서 와이셔츠를 벗겨냈고, 영호는 거친 손놀림으로 윤기나는 실크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은숙의 몸에서 떼냈다. 허겁지겁 서두르지 않고 절차를 밟아가는 영호나,

능수능란하게 영호를 리드하는 은숙은 이미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12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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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들이었다.

“저기, 저….”

“왜요? PD님.”

헉, 이런 상황에서 PD님이라고 부르다니.

“아이, 뭔데요….”

은숙의 목소리가 쾌감 때문에 잦아들었다. 영호의 팔 안에서 은숙의 몸이 갈비뼈들의 윤곽을 드러내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에이, 그만두자. 나중에 물어보든지….

“아뇨. 별거 아니에요.”

영호는 키스하면서 은숙의 팬티를 벗겨냈다. 영호는 살짝 다리를 저는 은숙에게 그 사연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처럼의 ‘대낮 정사’를 망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영호가 천천히 침공을 시작하자 은숙은 항복문서도 없이 성문을 열었다. 궁궐 속의 산해진미가 영호의 심장을 달뜨게 했다. 이 여자, 무르익을 대로 익었군.

은숙은 오른쪽 다리를 영호 허리에 휘감았다가 0.1 초간 망설인 뒤 영호가 정성스럽게 핥던 왼쪽 다리도 들어 감았다. 영호가 뭘 물어보려했는지 다 안다.

남자들은 늘 그녀의 왼쪽다리에 관심을 가져왔다.

평생 대륙을 누빈 정복자 칭기즈칸도 이런 기분이었을 게다. 처녀지가 주는 쾌감은 위대한 것이다. 영호가 황당한 만족감에 빠져 있을 때 은숙은 이 남자와 자주 만날 것 같은 예감에 젖어있었다.

녹근한 정사끝에 잠들었던 영호가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오후 3 시 30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다리로 일어났을 때 거울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환경을 소중하게 생각하게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알찬 프로그램, 유익한 13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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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을 만드시는 PD 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 은 숙’

“알찬 프로그램,

유익한 프로그램 만들라구?”

영호는 은숙이 남긴 포스트잇을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새벽부터 잠을 설치고 촬영을 한 데다 맥주를 마셔서인지 속이 불편했다. 영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옷가지들 중 트렁크를 찾아내 꿰어 입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다섯 시가 가까웠다.

영호는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모텔 주차장은 한산했다. 은숙의 차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볼보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는 깡통과 비닐봉지가 버려져 있었다. 쓰레기를 본 영호는 혀를 찼다.

“하, 환경운동을 한다고? 어이가 없네.”

화장실에서 한참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나서야 영호는 정신이 맑아졌다.

사내들이란 그렇다. 섹스를 끝낸 직후 온몸에서 기가 빠져나간 듯한 허탈감에 담배를 피워물곤 하는게 일상다반사다. 그러나 사내들은 마치 전리품처럼 ‘섹스의 기억’을 가슴 속에 담아두는 법이다. 때로 무르익은 술자리에서 전리품을 풀어놓으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게 마련이다. 대개 노획물이 별 볼일 없어도 열배 혹은 스무배 부풀려지기 마련이어서 섹스의 추억 저쪽의 여성은 미스코리아도 되고,

처녀로 둔갑하기도 하고, 세상에서 보기 드문 요부가 되기도 한다.

영호의 기분 또한 지금 그렇다. 실로 오랜만에 대어를 건진 기분이었다. 화장실을 나와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던 영호는 화장대에서 안경을 발견했다. 영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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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안경을 들여다보다가 테 안쪽에 조그맣게 새겨진 에르메스 로고를 포착했다.

‘캬, 교수님 안경도 비싼 거 쓰고 다니시네. 눈은 얼마나 나쁜 거지?’

영호는 안경을 써 보았다. 선글라스를 낀 듯 눈앞이 맑다. 영호는 픽 웃음이 터졌다.

액세서리였어?

‘조은숙 교수, 참 귀여우시네.’

영호는 은숙의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크리넥스를 몇 장 뽑아서 안경을 조심스럽게 쌌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침대 위에 던져놓은 포스트잇을 지갑에 집어넣었다.

왠지 버리기가 싫었다. 나중에 더 친해지면 ‘처음 만났을 때 이거 남겨놓은 거,

기억나요?’ 하면서 놀려주고 싶기도 했다.

휴대폰과 차키, 안경을 챙긴 영호는 유유히 모텔을 나섰다. 퇴근할 시간이었지만 방송국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왠지 지금부터 편집을 시작하면 막히지 않고 술술 풀릴 것 같았다. 랄랄라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가벼운 기분이다.

은숙은 푸른심천 21 사무실로 가려다가,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사무실로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게다가 몸이 조금 나른하기도 했다. 핸들을 고쳐 잡은 은숙은 카오디오의 CD 체인저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라흐마니노프를 골랐다. 약간 슬프지만 힘있는 음악이다. 집에 도착할 무렵 라흐마니노프의 리드미컬한 선율을 뚫고 전화벨이 울렸다.

“네, 조은숙입니다.”

“조 교수? 오늘 촬영 잘 끝났어?”문교수다.

“네, 잘 끝났습니다!”은숙은 일부러 방긋거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잘 끝났다구? 그럼 끝내구 바로 사무실로 와주셔야지 조교수. 심천의 스타가 될 판인데…. 심천의 환경운동가 조은숙 교수, 안 그래요? 안교수랑 기다리고 있어.

조교수 오면 한잔 하려고. 빨리 이리로 와요.”15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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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기다리세요.

일곱시까진 사무실로 갈게요.”

전화를 끊고 은숙은 픽 웃었다. 환경운동가 조은숙 교수라. 나쁘지 않다. 아니, 듣기 좋다고 말해야겠지.

심천 같은 고장에서 교수이자 운동가

노릇을 하면 돈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떠받들리는 재미는 쏠쏠했다.

은숙은 아파트로 올라갔다. 현관 앞에 걸어 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심천 밤바다의 아름다움에 반한 뒤 인터넷에서 얼른 구입한 복제품이었다. 은숙은 바다 냄새와 영호의 체취가 뒤섞인 투피스를 벗어 침대에 던져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은숙은 샤워를 하면서 쿡쿡 웃었다. 그녀는 교수 임용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은숙은 국립대의 여자 교수 채용 추세에 힘입어 임용된 케이스였다. 그녀가 남자였다면 지금처럼 푸른 심천의 핵심멤버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사무국장을 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예 오늘처럼 방송국 촬영을 할 일조차 없었을 거다.

은숙은 화장을 지웠다. 어쩜 화장을 지워도 눈썹이며 입술선이 이렇게 뚜렷할까.

거울을 볼 때마다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자, 뭘 입고 나가야 우리 푸른심천 동지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푸른심천 사무실은 심천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돈과 거리가 먼 환경단체가 도시 한복판에 버젓이 사무실을 잡은 연유는 간단했다. 문교수의 부인이 건물주이기 때문이었다. 50평 규모의 사무실을 빌려 쓰던 중소기업이 부도를 내고 임대료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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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집기를 그대로 놔둔 채 빠져나가 버렸던 것이다. 그뒤 불경기 때문에 좀처럼 임대인이 들어오지 않아 사무실은 한동안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빈 사무실은 문교수를 비롯한 은숙과 안교수의 아지트처럼 되었다. 강의가 끝나면 가끔 들러 이야기도 나누고 술도 마시고 밤새 토론도 벌이는 좋은 장소였다.

그러던 중 안교수가 그냥 모여서 술밥만 축낼 것이 아니라 단체 하나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냈다. 안그래도 심천에는 지역사회를 위해 힘쓰는 순수 시민단체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심천대 총장을 비롯한 이름있는 사람들을 더 모아 발기인을 모집하면 지역언론의 주목 정도는 따놓은 당상이 아니냐는 거였다. 사무실과 집기도 이미 갖추어져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있을 수 없었다. 은숙과 문교수도 대찬성이었다.

“저, 그런데 안교수님. 우리가 단체를 만드는 건 좋은데 무슨 운동단체를 만들까요?”

은숙이 물었다.

“특별히 무슨무슨 운동단체일 필요 있어 조교수? 그냥 이름은 대충 멋있게 지어 걸어놓은 담에 이것저것 지역현안마다 의견을 내놓는….”

“아이, 전 참여연대 같은, 문어발식 시민운동은 싫어요.”

“하긴 그래, 안교수. 이것저것 건드려 놓으면 나중에 자금도, 인원도 부족해지고 되게 피곤해질 게 뻔하거든.”문교수가 거들었다.

“그럼 조교수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거 있어요? 저번에 보니까 녹색평론도 읽구,

조교수 환경에 관심 많던 것 같던데.”

은숙은 방긋 웃었다. 안교수도 나한테 관심이 은근히 많았군.

“나도 환경에 관심 많아 안교수. 환경 쪽으로 가닥을 잡자구. 안그래도 심천이 자연 관광자원 개발에 관심 많잖아. 깨끗한 환경을 보호해서 자연 관광자원 개발하자…그러면 관 쪽에서도 영 무시할 수는 없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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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교수 말에 안교수는 끄덕였다. ‘환경을 보호해서 자원 개발하자’는 말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은숙도 찬성이었다.

은숙이 지금 생각해도 환경운동으로 가닥을 잡은 건 잘한 일이었다. 문교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심천대학 총장과 동료 교수들, 그리고 지역언론 기자들을 발기인으로 모아 시작한 ‘푸른심천 21’은 지역언론의 주목을 흠뻑 받았다. 비록 발기인 명단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심천 시의회 의원들도 푸른심천에 관심을 보이고 몇몇은 화환을 보내오기도 했다. 시의원들의 관심은 아마 지역 유지인 문교수 부인 덕분이었겠지만, 뒷배경이 든든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그렇게 푸른심천이 첫발을 내디딘 몇 개월 뒤 초등학교 교사인 유경목 선생이 합류했다. 그리고 심천시청 환경과의 요청으로 매월 열리는 ‘심천 대청소의 날’을 푸른심천이 주관하게 되었다. ‘대청소의 날’에 참여율이 저조하자 문교수가 행사마다 학생들을 동원시켜 주겠다며 담당 과장을 작업했던 것이다.

은숙이 문교수의 성과에 신기해하자 문교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과장이 우리 와이프 먼 친척이거든.”은숙은 다시 한번 심천이 작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옷을 갈아입은 은숙은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자 휴대폰이 빛을 내면서 화면에 문자를 띄웠다.

‘기다리고 있어요. 그때 거기로 빨리 오세요 조교수님.’

유선생의 문자였다. 은숙은 혀를 찼다. ‘다들’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그때 거기’는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호프집 이름이었다.

은숙은 차를 출발시켰다. 유선생의 문자가 마음에 걸렸다. 6개월 전 유선생은 환경교육 참고자료를 요청하러 사무실에 들렀었다. 그때 은숙은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말에 은숙은 심천 지역에 대한 여러 통계와 사진 자료들을 열심히 챙겨주었다. 유선생은 지나칠 정도로 여러 번 감사를 표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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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갔다.

은숙은 차를 세우고 호프집 문을 열었다. 문교수와 안교수, 유선생이 둘러앉아 있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은숙은 화사하게 웃으며 자리로 걸어갔다. 문교수가 자리를 권했다.

“우리 테레비 스타 조은숙 교수 오셨구먼, 어서 앉아요. 오늘 이거 입고 촬영한거야?”

“아뇨. 바다냄새가 온통 배서 갈아입고 왔죠.”

은숙은 유선생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유선생의 얼굴이 동경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지만 못 본 척 했다.

테이블에는 이미 전작이 상당했던 듯 빈 맥주 피처와 마른 안주 접시가 널려 있었다.

문교수는 차갑게 얼린 맥주 잔을 채워 은숙에게 건넸다. 은숙은 유선생과 안교수의 안색을 살폈다. 두 사람 다 벌써 조금 취한 듯했다. 그러나 뒤늦게 합석한 은숙을 챙기는 문교수는 멀쩡해 보였다.

유선생 옆에 앉은 안교수가 은숙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알은 체를 했다.

“어, 안경 안 쓰셨네 오늘?”

은숙은 흠칫했다. 어쩐지 뭔가 빠졌다 싶더라니. 김영호 PD 와 뒹굴고 나서 모텔에 놓고 온 게 분명했다.

“오늘 촬영 때문에 일부러 안 쓰고 가셨나보네. 하긴 조교수 미모를 그런 걸로 가려서야 쓰나. 아직 식사 안 했죠?”

“렌즈 끼고 갔죠, 일부러.”19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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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표정을 관리하면서 메뉴를 펼쳤다. 에구, 안경을 어떻게 돌려받지? 비싼 건데. 그녀는 난감해졌다. 안교수는 안경을 벗은 은숙의 얼굴을 처음 보는 물건인 양 들여다보았다. 사람이 달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유선생은 여전히 구석 자리에 끼여 앉은 채 눈을 빛내면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문교수는 은숙이 오자 본격적으로 마실 양으로 자기 잔에 술을 채웠다. 안교수도 주기가오르는 듯 질세라 자기 잔에 첨잔을 했다.

“조교수, 안경 벗고 촬영하기 잘 했어. 안경 벗으니까 조교수 본연의 모습이 보이잖아. 하늘에서 내려주신.”

“하늘에서 저한테 뭘 내려주셨는데 제가 안경을 벗고 다녀요?”은숙은 킥킥 웃었다.

“종교 얘기야, 종교 얘기 조교수. 각자 신이 내려준 재능을 백프로 활용하면서 살란 얘기지.” “머리 좋은 사람은 머리로 봉사하고, 몸매 좋은 사람은 몸매로 봉사하라?”

“그럼.”

“아이고.”

이 유치한 아저씨들아. 은숙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소시지 안주를 씹어 삼켰다. 배가 고팠다. 오후의 격렬한 운동에 비해 뱃속에 넣어 준 게 너무 없었다.

“조교수 왜에? 지금 진지한 얘길 하고 있어요. 우리….”

“그게 무슨 진지한 얘긴가요, 안교수님. 그냥 저 안경 벗고 렌즈만 끼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얘기죠. 제가 벗으니까 그렇게 좋으세요?”

“하하. 원래 여자가 벗으면 남자가 좋은 거지.”문교수 말에 다들 웃어버렸다.

피처 몇 잔이 비워져 나가는 동안 은숙은 소시지 안주를 다 먹고도 오뎅을 시켰다.

문교수와 유선생은 화장실에 간 새였다.20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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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팠어요?”

“네. 새벽부터 아침도 굶었으니까요.”

“새벽부터 안경도 안 끼고 촬영하느라 너무 힘들었겠네.”안교수의 어조가 너무 다정한 나머지 은숙은 웃음이 났다.

“안교수님. 그렇게 좋으세요?”

“뭐가?”

“저 안경 벗은 거요.”

“낯선 모습이라서.”

“안경 벗은 거 첨 보시는 것도 아니면서, 웬 오바예요.”

“처음 보는데?”

“첨은 무슨요. 제가 언제 안경 쓰고 했어요?”

“뭘…. 해?”

안경 쓰고 해? 말이 자극적이었다. 안교수는 갑자기 긴장했다. 술기운과 다른 무언가가 몸 속에서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은숙은 안교수가 흥분하건 말건 오뎅 국물을 불어 삼켰다. 호프집에서 내놓는 오뎅치고는 맛이 괜찮았다.

문교수와 유선생이 자리에 돌아오자 술자리는 자연스럽게 파했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은 은숙은 차를 가져가기로 했다. 문교수와 유선생은 각기 택시를 탔고, 집이 가까운 안교수는 걸어갔다.

은숙은 볼보에 몸을 밀어넣고 시동을 걸었다. 새벽에 일어나 촬영하고 뜻하지 않게 연애 한 번 하고 술자리까지…. 바쁜 하루였다. 조은숙 인기 많구나. 은숙은 피곤한 가운데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가는 방향을 잡았다.

차가 속력을 낼 무렵 휴대폰이 울렸다. 헉, 이 밤중에 또 누구야. 은숙은 핸드백 속 21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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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송가’를 지르는 휴대폰을 집어올렸다.

“조교수! 우리끼리 한 잔 더 해요.”헉, 안교수다.

“안돼요 오늘은….”

“어디에요 지금?”

“집에 가고 있어요.”

“휴….”

“왜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사람을 자극해요? 조교수….”

“무슨 자극이오?”

“안경 쓰고 하는 거 봤어요?라구 그랬잖아요. 그거 작업 아니에요오? 네?”

은숙은 픽 웃었다. 그 한 마디에 이렇게 달뜨기는, 쩝.

은숙은 대답 대신 그냥 호호호, 하고 웃어주었다. 그러자 한숨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달뜬 중년 사내의 욕정이 고무풍선 바람 빠지듯 사그라지는 소리였다.

차창 밖으로 전화를 받으며 걸어가는 안교수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교수님, 걸어가기엔 좀 거리가 멀지 않아요?”

은숙은 경적음을 살짝 울렸다. 안교수가 활짝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은숙의 차는 오히려 속력을 내서 그를 지나쳤다. 룸미러에 안교수의 벙 뜬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어깨 좀 펴고 걸어요. 그렇게 축 처져서야 여자가 넘어오겠어요?”

“이봐, 조교수? 정말 그냥 가는 거야.”

“안녀엉, 안교수니임.”

은숙은 전화를 끊었다. 안교수님, 심정은 이해 하지만 하루에 두 명은 저도 힘듭니다.

전 오늘 굶주린 여우가 아니랍니다.

문교수와 유선생은 택시 안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마치 술자리에서 싸우고 난 뒤 억지로 화해한 사람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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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생!”문교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왜 하루종일 말이 없어….”

“…….”

“사무실에서도 그렇고, 술자리도 그렇고. 뭐 기분 나쁜 일 있어 유선생?”

“…….”

앞자리에 탄 유선생은 묵묵부답이었다.

“뭐 잘못된 거 있어 유선생?”문교수의 말꼬리가 살짝 들려 올라갔다.

“아뇨. 괜찮습니다.”쥐어짜는 듯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역시 침묵이었다.

“암튼 유선생 나 여기서 먼저 내려요.”

문교수가 차에서 내리는데도 유선생은 여전히 무릎 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택시가 출발하자 유선생은 시선을 밤길 끝으로 내던졌다. 취했지만 기분은 더럽고, 머리만 지끈거렸다.

유선생도 자신의 모습이 초등학교 애들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매력적인 게 있으면 갖고 싶어하고, 갖지 못하면 마음 상하는 모습. 문제는 그 상한 마음을 어른스럽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유선생이 계속 푸른심천에 머무르는 이유는 은숙을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것과 거리가 좀 있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바라며 주변을 맴도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걸 은숙이 모를 리 없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유선생은 선뜻 집에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지난 주말에 집에 서방바닥만 뭉개기가 뭐해서 푸른심천 사무실로 나가려고 옷을 주워입는데 와이프에게 한소리 들었던 것이다.

“당신 어디 가?”

“사무실. 상관 마.”23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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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옷을 입고 소지품을 챙겼다. 마악 현관을 나서려는데 와이프가 한마디 던졌다.

“푸른심천인가 퍼런심천인가 하는 그런 데, 뭐가 있어서 당신이 열심히 다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지? 나가서 안 들어와도 돼. 난 선영이 데리고 바닷가에나 가볼 테니까. 다른 집 아빠들이 어떻게 하는지 선영이도 봐야지.”

와이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유선생의 등골을 쿡쿡 찔렀지만 그는 현관문을 콰당 닫고 나와버렸다.

그러고 보니 와이프의 마지막 말이 유난히 뇌리 속에 남았다. 다른 집 아빠들이 어떻게 하는지 선영이도 봐야지? 학교에서 선영이와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얼른 지나쳐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유선생은 그런 모습이 싫어서 5 학년 반층에 올라가지 않았다. 혹시 와이프가 자기 얘길 선영이에게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는 건 아닌지. 그럴 수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초경만 지나면 엄마의 제일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선생은 사무실로 향하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돌릴 수 없다는 게 정확했다. 이제 푸른심천 일을 하면서 은숙을 남몰래 그리워하고,

안교수와 문교수의 동정어린 웃음거리가 되는 게 유선생의 중요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은숙이 항상 유선생에게 냉담한 건 아니었다. 오늘 술자리에서 유선생이 워낙 입에 자물쇠를 채워서 그랬지, 은숙은 유선생에게 따뜻한 시선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사람들 있어서 내가 직접 물어보기가 좀 그렇네요, 하는 듯한 애정어린 시선.

유선생은 은숙의 시선을 생각하자 가슴에 온기가 느껴졌다. 날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야. 주변 시선이 염려돼서 그런거지. 그리고 내가 유부남이니까 주변 시선이 두려운 거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껄끄럽던 기분도 나아졌다. 유선생은 와이프와 딸이 깨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열쇠로 문을 따고 도둑처럼 집안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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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차 대청소의 날’. 푸른심천 21 의 주요 행사 중 하나다.

비온 후 하천에는 쓰레기들이 즐비했다.

여기저기서 심천초등학교, 꿈의 궁전 아파트 부녀회 등의 깃발이 나부꼈다.

문교수는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행사현장을 찍다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청소하는 사람보다 깃발 든 사람이 더 많어.”

문교수는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은숙을 찾았다. 비닐봉지와 집게를 든 여학생들 틈에 은숙이 있었다. 염색과 학생들과 같이 온 모양이었다. 보라색 블라우스에 꽃무늬 스카프를 늘어뜨린 모습이 언뜻 봐도 눈에 확 들어왔다. 카메라를 돌리자 초등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유선생과 푸른심천 깃발을 들고 산책이라도 하듯 거니는 안교수도 보였다. 문교수는 LCD 화면에서 눈을 뗐다.

“거참, 안선생도 애들이나 좀 데리고 오지.”

청소행사는 두 시간 만에 끝이 났다. 은숙은 하천 둔치에 학생들을 모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표정들이 역력했다. 은숙은 그런 학생들의 얼굴을 못 본 척하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럼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출석 부른다. 유재경. 유재경? 안 왔어?”

은숙은 허, 하고 혀를 찼다. 오늘 행사에서 출석 부른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안 나와?

교수 말을 뭘로 알고…. 아니면 아예 지난 시간에도 안 나온 모양이군. 이번 기회에 25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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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기를 좀 보여야겠다 싶었다.

“김윤정! 김윤정?”

“네!”

비닐봉투를 든 여학생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은숙은 여학생의 미니스커트를 보고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너는 그게 청소하러 온 복장이니?”

“네? 아니….”

“오정연! 오정연? 왔어? 왔으면 크게 대답을 해야지. 정희성! 정희성도 안 왔어?

오늘 분명히 출석 체크한다고 했는데.”은숙은 신경질적으로 출석부를 휙휙 넘겼다.

“니네들처럼 염색하고 옷 만드는 사람들은 더 이런 데 자주 나와야 돼. 옷만 이쁘게 만들어서 입고 다니면 뭐 하니? 그게 자연하고 다 어울려야 이쁜 거지. 저기 봐봐!

명희처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연출해서 입을 줄 알아야지.”

학생들은 명희를 돌아봤다. 명희는 컬러풀한 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은숙 못지않게 스타일리시한 모습이었다. 행사에 모인 이십여명의 학생들 중 두드러지게 예뻤다.

은숙은 명희의 옷매무새를 훑어보고는 출석부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안 온 애들 야단쳐봐야 소용없지. 차라리 시간 내서 나온 애들한테 인센티브를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암튼 오늘 행사 다들 수고했어. 오늘 출석 중간고사로 대치한다.”

학생들은 당연히 신나했다. 은숙은 볼보로 향했다. 밤에는 캠프파이어가 있었지만 얼굴만 내밀고 바로 뒤풀이 자리에 갈 생각이었다. 그 전에 차에서 좀 쉬고 싶었다.

캠프파이어는 예상대로 썰렁했다.26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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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과 안교수, 유선생은 캠프파이어를 잠시 지켜보다가 자리를 문교수에게 맡기고 빠져나왔다. 저녁을 먹은 다음 바로 호프집에서의 뒤풀이가 이어졌다.

“문교수님 바로 가신대요?”

“가시긴요. 아까 전화 왔어요. 이쪽으로 오신다고.”

출입문 방울소리가 ‘딸랑딸랑’ 울리면서 문교수가 들어왔다. 은숙은 반갑게 손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문교수 뒤로 여학생 셋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니네?”

“캠프파이어 끝나고, 그냥 간다잖아요. 고생했는데 저녁이라도 먹여야죠.”

“아휴, 그냥 가시면 안 되지. 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교수님 잘못 만나서.”

안교수가 거들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은숙도 웃었지만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캠프파이어는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같이 빠져나온 주제에. 그러나 어쨌든 싫은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 잘 왔다. 문교수님, 그런데 캠프파이어는 잘 끝났어요?”

“그럼요. 잘 끝났죠. 여기 명희씨? 명희씨 맞죠? 고생 많이 했어요. 장작 나르느라고 이쁜 팔뚝 다 까졌어요.”

“어이구, 진짜?”

안교수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몸을 쭉 내밀었다. 은숙은 틈을 놓치지 않고 명희의 팔을 잡아 끌었다.

“어디 보자. 적당히 하지. 너 또 욕심 부렸구나?”

“자, 우리 이쁜 숙녀분들도 왔는데 한 잔씩들 하시죠?”

문교수가 건배를 청했다. 명희가 은숙의 손에서 팔을 슬며시 빼고 잔을 들었다.

은숙은 공연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백설공주를 질투하는 왕비의 심정이 이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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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은숙의 기분과 상관없이 잔을 부딪혔다. 환경보호 행사보다는 모두가 뒤풀이를 기다렸다는 듯한 분위기다.

“자, 개나발. 한잔 쭈욱 들이켭시다.”

문교수는 합석한 여학생들을 챙기느라 유난을 떨었다. 배고프지 않냐, 피곤하지 않냐, 오늘 수고해줘서 고맙다 운운.

게다가 명희를 하대하지 않고 ‘명희씨’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모습도 가관이었다. 아예 명희를 옆에 끼고 앉은 형상이었다.

은숙도 술잔을 기울였다. 자기보다 어리고 예쁜 여자애보다 관심을 끌려고 경쟁하는 모습보다 추한 건 없다. 그러니 신경끄는 게 나았다. 안교수는 여학생들보다 술에 관심이 있어 보였고, 유선생은 언제나 그렇듯 은숙의 눈치만 살폈다.

본격적으로 기분이 상한 건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를 비운 새였다. 자리로 돌아오는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명희가 요들송을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려다가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문교수는 물론이고 따라온 여학생들, 안교수와 유선생까지 명희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도 예쁜 게 노래도 참 잘한다.

은숙은 벽에 기댄 채 그대로 명희의 노래를 끝까지 들었다. 왠지 노래 중간에 자리에 앉기가 싫었다. 자리에 앉아봤자 아무도 쳐다봐주지도, 챙겨주지도 않을 테니까.

남자들이란 한결같이 한살이라도 어린 여자에게 집착한다. 섹시하고 원숙한 여인보다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생머리를 늘어뜨린 스무살 안팎의 여자가 경쟁력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은숙은 명희의 노래가 끝나자 웃음을 띠고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으흠, 강적인 걸. 28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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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파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은숙은 여학생들을 차에 태웠다. 버스 타고 가도 된다는 걸 은숙이 밤길은 위험하다며 굳이 밀어넣은 것이다. 문교수와 안교수,

유선생까지도 여학생들을 차에 태우고 떠나는 은숙을 아쉬운 표정으로 배웅했다.

차에 태울 때만 해도 살갑던 은숙은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명희를 포함한 여학생들은 입을 다문 은숙의 태도에 갑자기 불안해졌다.

“교수님! 괜찮으세요?”뒷자리에 탄 여학생 하나가 물었다.

“어? 왜? 아, 괜찮아. 맥주 한 잔인 걸 뭐.”

“그래두요. 괜히 폐만 끼쳐드린 것 같아서요. 그냥 가도 되는 걸요.”

“괜찮아. 하루종일 행사 때문에 피곤했을 텐데. 명희, 너 많이 피곤하지?”

조수석에 앉은 명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은숙은 생각했다. 하, 이 기집애 겉 다르고 속 다르네.

두 여학생은 먼저 내렸다. 은숙은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액셀을 밟았다.

“명희, 집이 어디니?”

“여기서 우회전해서 조금만 더 가시면 돼요.”

은숙은 택시기사라도 된 양 말없이 운전을 했다. 차 안 분위기는 밤공기와 더불어 더욱더 썰렁했다. 명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은숙은 이유도 없이 괜히 불안해졌다. 내가 왜 이 새파란 애한테 쫄아들지? 자신감이 없어졌나.

은숙은 침묵을 지키는 명희와 경쟁하듯 질세라 입을 다물었고 덕분에 차 안에는 더욱 찬공기가 감돌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더라면 명희를 억지로 끌고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보행신호에 차가 멈춰서자 명희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

“……”

“너무 멋있으세요.”

“뭐?”29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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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멋있으시다구요.”(뭐냐? 갑자기 생뚱맞게.)

“뭐가 멋있어?”

“교수님이오.”

“내가?”

“네.”

“그러니?”

신호가 떨어지자 은숙은 차를 출발시켰다. 얘 참, 사람 말없게 만드네.

아마 은숙이 명희를 좀더 관찰했더라면 영악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조심했을 것이다.

명희는 상대방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캐치하는 스타일이었다. 오늘 행사에 나오면서 뒤풀이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일부러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문교수, 안교수의 눈치를 보고 즉석에서 부른 것이었다. 하긴 평소에 요들송 같은 개인기를 준비해놓는 건 다른 문제다.

여왕처럼 도도한 은숙도 명희의 눈에 별로 잘나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진심이야 어쨌건, 은숙이 집까지 태워다주는 호의를 베풀었으니 멋있다는 말 한마디 해주고 기분좋게 헤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일 게다.

그런 명희의 속을 은숙은 잘 알지 못한 채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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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밑에 놓은 플라스틱 개집 속 삼순이가 끙끙거렸다. 책상에 앉은 석규는 발로 개집을 퍽 걷어찼다. 삼순이는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면서 낑낑대고 진저리를 쳤다.

석규는 아이씨발, 하면서 책상 밑을 내려다보다가 하마터면 잉크병을 엎을 뻔했다.

일주일 내내 틀어박혀 그린 원고가 날아갈 뻔한 순간이었다.

석규는 아예 의자를 밀쳐내고 책상 밑의 개집을 끌어냈다. 삼순이는 아찔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픈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알았다, 이것아."

개집 문을 열자 삼순이가 얼른 기어나왔다.

보글보글한 갈색 털을 가진 푸들이었다.

삼순이는 답답한 개집에서 해방된 게 신이 나서 석규의 무릎에 뛰어올랐다

의자에 올랐다 하면서 야단을 쳤다. 석규는 잽싸게 책상 위에 삼순이가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섰다. 녀석이 또 팔짝거리다가 원고에 잉크라도 쏟으면 큰일이다. 2~3

일 전 이 녀석이 설치다가 만화원고에 잉크를 엎어버린 것이다. 망연자실한 석규는 편집장에게 감히 전화는 하지 못하고 문자만 날렸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번 원고는 3일 정도 기다려주셔야겠습니다.'

석규는 문자를 보낸 뒤 휴대폰과 집전화의 전원을 꺼버렸다. e메일도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러는 게 맘이 편했다. 그리고 근 열두 시간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 다시 원고에 돌입했다. 물론 푸들 녀석은 개집에 가두어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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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원고도 이제 거의 끝나갈 태세니 이년을 데리고 산책이나 할까. 아니, 아예 장을 봐와야겠다. 밖에 나가는 게 너무 좋은 나머지 삼순이는 석규의 다리에 기어올랐다. 석규는 다리에 달라붙는 삼순이를 떨궈내면서 동네 슈퍼로 갔다. 주인 여자가 지저분한 강아지를 보고 질색했지만 석규는 상관하지 않고 비닐봉지에 물건을 집어넣었다. 라면, 맥주, 감자칩, 가스 부스터, 비누, 샴푸….

비온 뒤 동네는 축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삼순이는 뛰고 싶은 나머지 목줄이 팽팽했지만 석규는 느릿느릿 걸었다. 지저분한 물이 고인 웅덩이가 나타나자 석규는 줄을 들어올렸다. 삼순이는 목이 조인 채 대롱대롱 매달렸다. 집에 들어가기 전 비닐봉투에 든 물건을 모조리 마루에 꺼내놓은 다음 삼순이를 집에 가뒀다. 더러운 발로 그냥 집안에 들여놓을 수 없는 노릇이니까.

휴대폰 전원을 켜자 음성이 밀려들었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석규는 음성을 듣지도 않고 지워버렸다. 어디서 온 건지 뻔하다. 그러나 책상에 앉으려는 순간 휴대폰 벨이 울렸다. 액정에 '개새끼님'이라고 선명하게 떴다.

진짜 타이밍 귀신같이 맞추네. 석규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박필입니다."

"박작가님? 여기 스타 코믹스예요. 원고는 어떻게 다 끝내셨어요?"

"네, 다 됐습니다." 두 페이지만 더 하고. 석규는 속으로 덧붙였다.

"아 그래요? 그럼 지금 오시는 길이에요?"

"네."

"암튼 오시면 박작가님 맥주 한잔 해요."

"예?"

"이번에 교수님 되셨다면서요."

"아, 네."

"축하해요 박작가님."

"에이, 뭘요."

전화를 끊고 난 석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심천 디자인 대학 만화과 교수라. 그런 32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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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동네에 그런 대학이 있다는 걸 누가 알았나. 사실 석규는 초빙되기 전만 해도 심천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교수님이라고 불리는 상상만 해도 낯간지러웠다. 그나저나 조만간 내려가야 할 텐데 이놈은 어떻게 처치하나?

석규는 앉아서 비닐봉투를 물어뜯고 있는 삼순이를 바라봤다. 그래도 귀여운 녀석이다. 원고에 잉크를 엎어서 그렇지, 성격도 모나지 않고 사람을 잘 따랐다.

석규는 삼순이를 바라보다가 책상에 앉아서 백지에 크로키를 시작했다. 동그란 몸체,

보글보글한 갈색 털, 순해 보이는 눈동자….

자, 이걸로 됐다.

석규는 강아지 크로키를 벽에 붙였다. 나중에 캐릭터화할지도 모르지. 석규는 컴퓨터를 켜고 애견동호회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성격 좋고 이쁜 푸들. 나이 3 세. 색깔은 갈색. 서울 경기 거래 가능함. 건강은 좋은 편. 연락처 011-1234-1234.'

10 만원 이하론 절대 안 넘길 테다. 저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석규는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펜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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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잡지사에 넘긴 뒤 애견인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고 전화를 건 여자에게 강아지까지 넘겨버린 석규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갤로퍼를 몰았다. 이제 심천에 내려갈 준비만 남았다.

애견 동호회의 여자는 삼순이를 보고

만족하는 눈치였다. 석규는 어제 일부러 목욕시키길 잘했다 싶었다. 여자는 어렸을 때 예방접종은 맞혔느냐, 심장사상충 약은 먹였느냐 등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다.

석규는 짜증을 누르고 애써 웃으면서 끄덕였다. 사실대로 대답했다간 데려가지 않을지도 모를 분위기였다. 다행히 여자들은 석규의 거짓말에 잘 넘어가는 편이었다.

이럴 땐 잘 생기고 인상 좋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

"몇 개월때 입양해오셨어요?"

"네? 한 석달째쯤에 입양받았죠. 갑자기 지방에 일자리가 생겨서 키울 수가 없게 되었거든요."

"정말 개를 사랑하시면 데려가셔야 하지 않나요?"

3개월때 입양했다는 건 거짓말이고, 같이 살던 여자가 나 엿먹어 보라는 의미에서 일부러 두고 간 걸 이제까지 키우고 있던 거란다. 그러니 내가 개를 사랑하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니? 사정 생겨서 안 키우겠다는데…. 내뱉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서 윙윙거렸지만 석규는 미소를 지었다.

석규는 여자한테 아예 개집까지 줘버리고 나왔다. 돌아서 나오면서 전혀 삼순이가 보고 싶지 않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래도 몇 달째 같이 지저분한 아파트에서 뒹굴면서 정도 많이 든 녀석인데, '잘 키우세요'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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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보다 자기 품의 강아지가 더 귀한 버릇없는 여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개까지 치워버리고 나자 속이 다 시원했다.

신호대기가 유난히 길었다. 석규는 운전대를 잡고 있다가 앞차 뒷유리에 적힌 광고문구를 읽었다.

'무자본, 무점포, 확실한 수입을 원하십니까? 상담환영 전화 010-795-XXXX'

무자본 무점포면 보나마나지. 깡패 몇 명 데려다놓고 서민 등쳐 먹는 사업 아냐.

석규는 휴대폰으로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광고 보고 전화 드리는건데요."

"무슨 광고요?"

석규는 광고 문구를 그대로 읽었다. "무자본, 무점포, 확실한 수입을 원하십니까?

라구요."

"아!"

"그게 정확하게 무슨 사업이죠?"

"어디신데요?"

"저기, 일단 문의만 드리려고 전화한건데요."

"그런 야글 전화로만 할 수 있나. 일단 만나서 얘기해야지."

불량한 말투에 일단 만나자는 폼을 보니 역시 깨끗한 일은 아닌 듯 싶다.

"긍까, 지금 어디쯤 계신데요?"

"여기 충무로 쪽인데…."

"아, 됐네. 그럼 잠깐 만날까요? 어? 어? 아이 씨발 진짜."

갑자기 통화가 뚝 끊어졌다. 석규는 욕설에 잠시 어이가 없다가 앞을 쳐다보았다.

앞에 가던 봉고가 우측으로 대고 있었다. 교통경찰이 석규한테도 손짓을 했다.

휴대폰 단속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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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피 같은 내돈 7 만원. 교통경찰이 사라지자 봉고에서 남자 두 명이 내려서 다가왔다. 석규도 차에서 내렸다. 둘 다 깍두기 모양으로 깎은 머리에 싸구려 선글라스를 끼고, 목이 늘어난 군용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불량스러운 차림새를 마무리하듯 둘 다 햇볕에 탄 목덜미에 순금 목걸이가 반짝거렸다. 석규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얼굴에 아예 나 양아치요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구만.

양아치 두 명은 맛있게 먹던 자장면에서 바퀴벌레 시체라도 발견한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광고 보고 전화 건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양아치들은 눈에 힘만 주면서 석규를 째려보다가 차로 슬슬 돌아섰다. 재수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저씨."

석규가 불렀다.

"뭐요?"

"내가 아저씨들 사업에 딱 필요한 사람 하나 아는데, 한 번 만나볼래요?"

"뭐? 뭐라 지금."

"에이 빼시긴. 아저씨들 얼굴 보니까 무슨 사업인지 안 봐도 비디오네."

"뭐야? 이런 개새낄…."

석규의 말에 둘 다 차에 타려다가 다가왔다.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다짜고짜 아스팔트 위에 때려눕힐 기세다.

"야이, 너 뭐 하는 놈이야? 엉?"

"무자본 무점포면 뻔하지, 안그래요? 내가 사람 하나 소개시켜 줄 테니까 전화 한 번 해볼래요?"

석규의 뻔뻔스러운 말투에 양아치들은 기가 막혔다. 하, 멀쩡하게 생긴 아저씨가 한술 더 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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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청솔유원지 주차장. 한산하다.

"딴 데로 가자. 평일에 누가 이런데 놀러온다고 그래."

" 안 그래요. 여기에 차 끌고 놀러오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데…. 형님은 보이면 안되니까 차에서 나오지 마쇼."

" 더워 죽겠다. 차라리 나가서 멀찍이 있고 만다. 손님 오면 전화해."

석호는 봉고에서 나왔다. 시동 끈 봉고 안은 찜통이나 진배없었다. 봉고 뒤에는 '무자본.

무점포. 확실한 수입을 원하십니까? 상담 환영 전화 010-795-XXXX'라고 써붙여져 있었다.

석호는 봉고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빼어 물었다.

석규와 맞붙었던 양아치 두 명이 석호 쪽을 힐끔거렸다.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다. 석호는 양아치들의 속내가 느껴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사업이 사람 믿고 하는 것도 아닌데.

기특한 자식, 그래도 동생이라고 돈벌이는 물어다 주는구나.

석호는 연기를 깊게 빨아당겼다 내뿜었다. 어렸을 때 내 꽁무니만 쫄래쫄래 쫓아다닐 적만 해도 커서 양아치 될 줄 알았지, 만화 그린다고 엄마 속 썩이다 이렇게 교수 될 줄 누가 알았나. 암튼 두 형제 중 하나라도 잘 돼서 다행이지 뭐야.

주차장에 검정색 티뷰론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어서 머리를 새빨갛게 물들인 남자애가 내렸다. 멀리서 봐도 머리색깔이 건방지다. 아니나 다를까 양아치가 빨간머리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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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오디오 한 번 보세요."

"예? 됐어요."

"이거, 에쿠스에 납품 들어가는 건데, 물건 주러 왔다가 몇 개 남은 거예요. 한번 보구 가요. 네?"

"아이, 이거 제 차 아닌데…."

"반값에 드릴게요. 이거 가져가봤자 아무 소용도 없구, 그냥 바닷가 왔으니까 회 한 접시나 먹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네? 안 사도 괜찮으니까 보고만 가요."

"에이, 안 사요."

"알았어, 사지 마. 그 대신 구경이나 좀 하고 가요. 좋은 거 많아…."

양아치가 결국 빨간머리를 봉고로 끌고 들어가자 다른 한 명이 티뷰론으로 들어갔다.

석호는 혀를 끌끌 찼다. 차 문이나 잠그고 다니면 안 당할 텐데. 저렇게 정신 빼놓고 다니는 애들은 당해도 싸다.

끌고 들어간 양아치가 봉고 안에서 이것저것 보여주면서 빨간머리의 혼을 빼는 동안 오디오 교체가 끝났다. 몇 분 후 빨간머리가 봉고에서 기어나왔다. 석호는 담배를 피우면서 지켜봤다.

"어. 아저씨, 이게 뭐예요?"

"네? 뭐가요?"

"남의 차에다 뭐한 거예요. 지금?"

"오디오요. 지금 구입하셨잖아요."

"에? 아니 이 순 사기꾼들 아냐. 당장 다시 안 붙여놔요? 어휴 나 기가 막혀서…."

석호는 담배를 비벼 끄고 성큼성큼 빨간머리에게 걸어갔다.

"뭐? 사기꾼? 이런 좆만한 새끼가. 와봐. 일루 와봐 이 새끼야!"

"예?"

"야, 이 겁대가리 상실한 새끼야. 니가 산다고 해서 붙여놨는데 어디서 오리발을 내밀어. 뭐가 사기꾼이야 어디서! 저거 포장 다 뜯었는데 어떡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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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머리는 바로 졸아들었다. 이런 머리 시뻘겋게 들이고 다니는 애들 다루는 건 일도 아니다. 그냥 겁만 팍 주면 된다.

분위기 파악한 양아치가 봉고 안에서 튀어나왔다.

"이 사람, 손님한테…."

"놔 씨발. 우리 보구 사기꾼이라는데…."

"어허 손님한테 그러면 쓰나! 괜찮아. 계산하게 들어와."

양아치가 빨간머리를 끌고 들어갔다.

석호는 잠시 서 있다가 뒤따라 들어가서 봉고 문을 촤르륵 닫았다. 문 닫는 소리에 빨간머리가 더 기가 죽었다.

"에헤, 이 사람 손님 놀래게. 현금 있어?

없어? 카드도 괜찮아.

일시불?"

석호는 양아치가 카드를 긁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며시 빨간머리 옆으로 다가앉았다.

"아버지 뭐하시냐?"

"아버지요? 그냥 집에 계신데…."

"그냥 집에 계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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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아버지한테 잘해라. 자식, 우리집에도 너처럼 시뻘건 놈 있다. 니들이 무슨 성냥개비냐. 이 새끼들아."

"참 손님한테…. 여기 봐봐! 영수증 받고. 일시불로 끊었어. AS 받으려면 밑에 전화번호 보구."

갑자기 누군가 봉고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양아치도 석호도 화들짝 놀라 쳐다봤다.

석규다.

형제는 말없이 호수를 보며 나란히 앉았다. 호수에는 오리배가 한가로이 떠 있었다.

"할 만 해?" 석규가 물었다.

"뭐…. 노는 것보단 낫지."

"돈 조금 벌고 하다가 마. 양아친 거 같던데…."

"요새 양아치 아닌 것들이 어디 있냐." 석호는 담배연기를 푸 뿜었다.

"암튼 너 잘 왔다. 용희 좀 잡아와라."

"용희? 또 나갔어?"

"……."

"형 아들이니까 형이 잡아와."

"나 바쁘잖아."

"형이 뭐가 바빠?"

"돈 벌잖아. 그리고 내가 가면 용희 반 죽어. 안돼."

"나 지방 내려가. 안돼."

"심천? 야. 남의 새끼들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말고, 네 조카나 잡아와서 좀 가르쳐 인마. 알았어?"

"아이 진짜."

석규는 난처해졌다. 집 나간 조카 잡으러 다니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걸릴 텐데. 하긴 직접 물어다 준 돈벌이 그만두고 잡으러 다니라고 하기도 곤란했다. 게다가 용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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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간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석규는 용희 친구들과 다 안면이 있었다. 그래서 석호가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것보다 석규가 수소문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몰랐다. 결국 조카 찾아 삼만리 대장정에 올랐다.

석규는 나흘 만에 부천에서 용희를 만났다는 친구를 역시 찾아냈다.

"어디냐?"

"조금만, 좀만 더 올라가면 돼요."

같이 온 고등학생이 손으로 가리켰다. 석규는 고철 쓰레기가 널린 오르막 골목을 기웃거렸다. 고등학생이 눈치를 보다가 슬슬 뒷걸음칠쳤다. 석규는 놓칠세라 손목을 꼭 움켜쥐었다.

"인마, 어디 가려고 그래?"

"저 용희한테 걸리면 죽어요. 아휴."

"지금 나한테 죽을래, 나중에 용희한테 죽을래?"

"안 죽을래요."

석규는 고등학생의 손목을 꽉 감아쥐고 다른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만원짜리 지폐를 끄집어내 흔들었다. 고등학생은 다섯손가락을 펴들었다. 석규는 세 손가락을 폈다.

"되게 짜다."

"앞장이나 서. 인마."

고등학생은 후줄근한 쪽방 앞에 석규를 데려다 주고 사라졌다. 방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주인집도 비어 있는 듯했다.

석규는 용희가 올 때까지 시간을 때울 겸 근처 초등학교로 내려갔다. 야구복을 입은 초등학생들이 올망졸망하게 모여 야구를 하고 있었다. 코치도 있고 야구장갑에 배트도 하나씩 쥔 품이 제법 버젓한 야구부 티가 났다.

석규는 담배를 빼어 물었다. 지저분한 쪽방촌 바로 옆에 깔끔한 초등학교 야구부라. 41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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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피우는 석규를 보고 야구 코치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뭐라고 하진 않았다.

석규는 초등학생들 쪽을 보고 마지막 모금을 빨아들인 다음 담배를 껐다.

초등학생들이 두 패로 나뉘어 머리를 맞댄 채 운동장에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연습경기 전 작전회의였다. 코치는 화장실에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석규는 살며시 일어나 장갑과 배트가 쌓여있는 쪽으로 갔다. 초등학생들은 새소리 같은 목소리로 저희들끼리 열심히 토론을 벌였다. 석규는 배트 하나를 집어들고 교문을 빠져나왔다. 용희 방으로 가는 골목길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붕붕 스윙을 했다.

기분이 좋아진다.

방 앞에 신발이 있다. 농구화와 싸구려 여자 샌들이다. 샌들 색깔이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석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신발 꼴만 봐도 어떤 년과 놀아나는지 감이 잡힌다. 방에 가까이 다가서자 한창 물오른 신음소리가 스테레오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에로영화를 틀어놓은 것 같다. 아니, 에로영화를 찍고 있는 모양이다. 석규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즈이 아버지랑 하는 짓이 이렇게 똑같냐.

여자 신음소리가 절정에 오르자 안에서 용희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석규는 방망이로 문을 툭툭 쳤다. 신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석규는 방문 걸쇠를 발로 걷어찼다. 퍽, 와락! 허술한 쪽방 문이 간단히 부서져 내렸다. 한창 열이 오른 용희가 여자애 위에 올라타서 피스톤 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노랑머리 여자애는 무아지경에 빠져 용희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있었다.

석규는 신발 신은 채로 방 안에 들어서서 아무거나 보이는 대로 방망이로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아이 씨발, 삼촌 왜 왔어?"

여자애가 꺄악 비명을 지르며 큰 젖가슴을 덜렁거리며 문을 빠져나갔다. 용희가 석규에게 덤벼들어 뒤엉켰다. 석규는 조카의 알몸에 순간 진저리를 쳤다. 아유,

재수없는 자식. 석규는 조카를 방바닥에 집어던지고 발로 걷어차 버린 다음 자기도 앉았다. 날씨 한 번 짜증나게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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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규는 서울로 차를 몰았다. 조수석에는 새빨간 머리를 한 용희를, 뒷자리에는 노랑머리 여자애를 앉힌 채였다. 빨강머리와 노랑머리라. 둘이 뒤엉켜 있으면 독일산 포르노 같겠다.

"삼촌."

"뭐야."

"밥이나 먹고 가요."

"밥 먹다 또 도망가려구? 집에 가서 먹어."

"아이 씨."

용희가 짜증이 만발한 얼굴로 조수석에 몸을 구겨넣자 뒤에 앉은 여자애가 키들거렸다.

"씨발, 집 나갔다고 방망이를 들고 쫓아오냐? 삼촌 맞어?"

"아가리 안닥쳐! 씨발년아!"

지 애비 닮아 제법 살벌하다. 석규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액셀을 밟았다. 쓰레기 같은 자식. 어렸을 때 곧잘 놀아주기도 했지만 다 커버린 뒤에는 삼촌 노릇을 제대로 해준 적이 없었다. 말썽 피울 때마다 가끔 야구 배트로 애정표현이나 해 주는 게 다일까. 험악한 세상 서로 피해 안 끼치고 사는 게 오히려 핏줄로서의 예절에 가까웠다. 저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거다. 석규는 입맛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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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심천의 한 고급 횟집.

은숙은 문교수와 마주앉아 있었다. 밑반찬이 깔끔하고 넉넉하다. 은숙은 젓가락을 들고 입맛을 다시다가 종업원이 날라온 불 붙은 소라에 눈이 멈췄다.

"어머!"

"처음 봐요? 이거?"43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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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런 거 어떻게 먹어요?"

"어떻게 먹긴요. 불 끄고 먹으면 되지."

문교수는 불 붙은 소라를 들어 담뱃불을 붙였다. 은숙은 담배 연기에 눈살을 찌푸리고 소라를 입으로 불어 껐다.

밑반찬으로 배가 대충 채워지자 문교수는 본격적으로 소줏잔을 기울였다. 은숙은 술보다 회가 먼저였다. 아무리 바닷가지만 이런 고급 횟집 올 기회는 드물었다.

문교수는 조금씩 혼자 취하더니 유선생 뒷담화를 시작했다. 은숙은 광어회를 하나씩 입으로 나르면서 귀를 기울였다. 얘기 들어주는 대신 맛있는 거 먹어주는 것만큼 그녀가 좋아하는 건 없었다.

"성격 진짜 이상하지 않아요? 유선생. 콤플렉스야 뭐야? 지가 공부 못해서 교수 못 된 거지. 왜 다른 교수들을 싸잡아서 빈정대요. 빈정대긴."

"화 푸세요. 그리구, 유선생님 예전에 실어증 걸린 거 진짜라잖아요. 데모하다가 군대 끌려갔을 때."

"누가 그런 소릴 해요?"

"어디서 듣긴 했는데…."

"녹화사업? 그런 거엔 아무나 걸려드는 줄 알아요? 에휴, 실어증은 무슨. 그때 기분 좋았던 사람이 누가 있어. 그냥 며칠 우울했던 거지."

"……"

"단체 나와서 활동하는 것도 다 콤플렉스 때문이라니까. 교수 못 된 거…."

"그만 하시구 좀 드세요."

은숙은 회접시를 문교수에게 돌려줬다. 아닌 게 아니라 은숙 쪽 회접시는 반 이상 비어 있었다. 문교수는 회 몇 점을 집어먹고 소주로 씻어내렸다.

"그리고 단체엔 뭐 연애하러 나와요? 뭐가 그렇게 티를 내, 티를…."

"그 얘긴 하지마요. 참."

"물론 조교수가 제일 곤란하겠지만, 뭐…."

"그만 하세요. 문교수님도 처음에 저한테 그러셨잖아요."44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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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 나요, 안 나요? 러시아어로 저한테 고백하셨잖아요. 그때 뭐라고 그러셨죠?"

"야, 우췰 루스스키이 야직, 포토무추토 야 류블류 바스."

"그게 무슨 뜻이었죠?"

"당신을 사랑해서 러시아어를 배웠습니다."

은숙은 한숨을 쉬었다.

"거 봐요. 처음에 문교수님도 그러셨잖아요. 그러시는 거 아녜요."

은숙이 과거사를 끄집어내자 문교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지금 심천에서 은숙에게 털려서 먼지 안 나는 남자가 어디 있던가.

연애의 달콤함과 별도로 상대가 장기용인가 단기용인가, 아니면 아예 피해야 할 상대인가 판단하는 능력을 터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20 대에 꼭 해야 할 일 중 하나라는 게 은숙의 생각이었다. 일단 문교수는 자격미달이었다. 와이프가 힘이 센 남자는 함부로 건드리면 골치가 아파진다. 와이프에게 별 영향력이 없는 남자라면 더더욱 피해야 한다. 연애 한 번 하자고 사회생활 안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남자의 희망을 아예 꺾어버리는 건 바보짓이었다. 아직 한국남자들은 여자와 쿨하게 친구나 동료로 지내는 법을 모른다. 게다가 성적인 관심이 느껴지지 않는 여자는 사람 취급도 안하는 마초들이 즐비한 게 한국 사회다.

적당히 호감을 유지시키면서 우호적으로 지내는 게 이익이라는 걸, 은숙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은숙이 유선생의 역성을 들자 문교수는 못내 억울한 모양이었다. 문교수가 풀이 죽자 은숙은 적당히 문교수의 비위를 맞춰 주고 술자리를 끝냈다. 은숙 눈에는 문교수도 유선생 같은 어린애였다. 기가 죽었다가도 여자의 부드러운 말 한마디에 또 생기가 돌아오니 말이다. 어쨌든 회는 맛있었다.

은숙은 차를 세워놓고 아파트로 들어갔다. 경비실에서는 불빛과 함께 텔레비전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그런데 현관 입구로 다가서자 낄낄대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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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유선생이다.

은숙은 어이가 없었다.

이 남자 멀쩡한 가정을 버려두고 여기서 뭐하는 거야?

"여기서 뭐 하세요?"

은숙은 말 끝에 도대체? 라고

신경질적으로 붙이고 싶은 걸 목구멍에 삼켰다.

"근처에 왔었거든요. 심천 교사모임…."

"네."

"식사 하셨어요?"

"네. 먹고 오는 길이에요."

"아 네, 그렇구나. 저도 식사는 했어요."

설마 집에 올라가서 차 한잔 달라고 떼쓰는 건 아니겠지. 은숙은 미소 지으면서 한쪽 머리로 핑계거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뭐 드셨어요? 교수님."

"그냥, 밥이요."

"그렇구나. 저 그러면 교수님, 저랑 참치회나 먹으러 가실래요?"

"참치회요?"

참치회? 뱃속이 이미 광어회로 가득 차 있지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횟집에 자리를 잡자 유선생도 회보다 술부터 챙겼다. 은숙은 속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술잔을 피했다. 조금 전작이 있었던 듯 유선생은 소주 한 잔에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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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콰해졌다. 은숙은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참치회를 먹었다. 냉동이지만 활어와 또다른 맛이다.

"요즘 대학교에 말이죠. 진짜 실력있는 교수가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어요. 김대중 정권이 여기저기 사학 설립을 허가하는 바람에 날림대학이 많이 생겼잖아요. 그 바람에 실력없는 사람도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채용되고, 진짜 실력있는 사람 없어요.

조교수님 안그래요?"

은숙은 뒷담화인지 노골적인 앞담화인지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문교수님, 안교수님 열심히 하시잖아요. 강의 자료도 수시로 바꾸시던데…."

"강의 자료? 그런 건 초등학교에선 거의 매주 바뀌어요. 그리고 바뀌면 뭐 해요.

수준이 안 바뀌는데…. 그리고 이건 다른 문젠데, 왜 국문학 전공하는 사람이 러시아 가서 학위를 따온데요? 네?"

목표는 역시 문교수였다. 그런데 집안에 재력 있어서 외국 나가서 간판 좀 따온다고 무슨 문제가 되는지도 은숙은 알 수 없었다.

"그만 하세요. 암튼 두분 사이 안 좋으신 거 불편해요, 전."

"불편하시다, 불편하시겠죠. 네에."

유선생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은숙은 생각했다. 불편하긴, 양쪽에서 이렇게 맛있는 걸 사주는데 불편할 리가 있나.

"유선생님, 좀 드세요."

"많이 먹었어요."

"더 드세요. 빨리 먹어야 또 갖고 오죠."

유선생은 은숙과 같이 있는데도 취하는 모양이었다. 몸이 자꾸 늘어졌다. 은숙은 살짝 짜증이 났다. 문교수와 안교수는 적어도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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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생님!"

"네?"

"제가 참치회 먹는 법 가르쳐 드릴까요?"

"네?"

"제가 아까부터 봤는데…. 이렇게 종류별로 하나씩 먹는 게 아니라 한 부위를 다 먹고, 또 다른 부위를 먹어야 돼요."

"왜요?"

"주방장이 저쪽에서 보고 없는 부위만 갖다 주잖아요. 빨간색 없으면 빨간 거 갖다주고, 하얀색 없으면 하얀 거 갖다주고…."

유선생은 은숙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은숙은 미소로 답했다. 취기가 오른 유선생도 씨익 웃었다. 자아식, 쪼개긴. 이럴 땐 유선생이 귀엽기도 하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참 순수하세요."

"……."

"은숙씨."

"네에?"

"사랑합니다."

놀고 있네. 그러나 은숙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회나 드세요, 하고 젓가락을 놀렸다.

뱃속에서 비린내가 올라올 정도였지만 줄 때 다 먹어야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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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환경지킴이' 방송날 은숙을 포함한 푸른심천 회원들은 사무실에 모였다.

"와아, 조교수 화면발 괜찮네?"

"방송으로 들으니까 목소리도 더 좋은 것 같아."

아닌 게 아니라 브라운관 속의 은숙은 화면발이 좋았다. 좁은 어깨와 긴 목, 멋지게 48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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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날리는 머릿결이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 어울리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은숙이 석유로 더럽혀진 바다의 생태 상황과 향후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자 김영호 PD

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교수님,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번 손상된 생태계는 다시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환경이야말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니까요."

보트 위의 김 PD 가 고개를 끄덕이고 클로징 멘트를 했다. 은숙은 진지한 척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지만 그날 나눈 정사의 기억이 떠올라 몸이 간지러워졌다. 그날 헤어진 뒤 며칠 동안 단 한통의 전화는커녕 이메일도 오지 않아 은근히 애가 탔던 것이다.

문교수와 안교수, 유선생도 진지하게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교수가 소리를 쳤다.

"스톱! 스톱! 잠깐만? 그때 조교수 안경 안 쓰지 않았나?"

헉, 이 느끼한 아저씨가 별걸 다 기억하네?

"조교수, 그때 렌즈 끼셨잖아요?"

"어, 그러네. 정말 안경쓰고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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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교수도 맞장구를 쳤다. 유선생도 끄덕거리는 눈치였다. 은숙은 얼른 짜증을 냈다.

"아휴, 지금 안경이 문제예요? 좀 보자구요. 좀…."

은숙이 쫑코를 주자 다들 잦아들었다. 아무래도 먼저 김 PD 에게 전화를 해서 안경이라도 찾아야 할 듯싶었다. 어쩌면 안경 두고 온 게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르지.

프로그램이 끝난 뒤 은숙이 나가려는데 유선생이 눈짓으로 잡았다. 그냥 무시하고 나가기엔 뒷목이 땡길 정도로 눈빛이 애절하다. 은숙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다른 회원들이 나가길 기다렸다.

이윽고 사무실에 둘만 남자 은숙은 유선생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참치횟집에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은 뒤 둘만 있기는 지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조교수님."

"네."

"……"

"하실 말씀 있으시면 편하게 하세요." 그때 은숙씨라고 불러놓고 조교수님이라고 부르는 건 또 뭔지?

"조교수님."

"네."

"식사나 하러 가실래요?"

은숙은 맥이 풀렸다. 이렇게 여자 앞에서 한심하게 구는 남자가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식사요?"

"네. 점심."

유선생은 유난히 점심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점심. 그래 밥은 먹어야지.

은숙은 그 말에 반사적으로 배가 고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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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뭐 저도 배고픈데,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네, 교수님 뭐 드시고 싶으세요?"

"오리탕요."

"오리탕요?"

유선생은 황당해졌다. 오리 백숙도 아니고 오리탕을 먹자구? 은숙은 황당한 유선생을 상관하지 않고 잘 아는 오리집으로 향했다.

오리탕 뚝배기에는 죽은 오리 머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진짜 오리를 삶아준다는 걸 보증하는 뜻이었지만 유선생은 오리 머리를 보는 순간 입맛이 뚝 떨어지면서 겁이 났다. 이걸 어떻게 먹는다? 여자 앞에서 편식하는 약골 따위로 보이긴 싫었다.

은숙은 오리탕이 끓는 동안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왜이러지?

"여보세요, 김영호 PD님 자리에 계신가요?"

"지금 자리 비우셨는데요."

휘유.

"저기요, 혹시?"

"네?"

"조은숙 교수님 아니세요?"

"네. 제가 조은숙인데요."

"아, 조교수님 맞으시구나. 저 이승훈입니다. 조연출하던…."

"아 네. 안녕하세요." 조연출이 받다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활 다 주셨어요?"

"아, 별거 아니구요, 오늘 방송 잘 봤다구 인사 드리려구요."

"아, 그렇구나. 마침 자리에 안계신데, 휴대폰 번호라도 드릴까요?"

번호를 여기서 받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은숙은 고민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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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교수님, 김 PD님 휴대폰 번호 불러드릴까요?"

"……"

"교수님?"

"네. 역시 직접 인사드리는 게 예의겠죠?"

이승훈은 조은숙의 내숭에 혀를 내두르며 김영호의 휴대폰

번호를 불러주었다. 나중에 안 불러줬다가 선배에게 무슨 소릴 들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승훈은 김영호의 바람막이자 조력자다. 방송국 성우인 김영호의 와이프가 눈치챌 뻔한 스캔들을 덮는데 수차례 일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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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강의까지 끝난 심천대학 캠퍼스는 한산했다. 은숙은 푸른심천 사무실로 가는 대신 김영호 PD 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갔다. 받지 않는다. 혹시 이미 김영호 휴대폰에 은숙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액정화면에 뜬 은숙의 이름을 보고 일부러 받지 않는 것일까?

"여보세요?" 이게 웬 애기 목소리?

"여보세요?"

"여보째요." 어린 여자애 목소리였다. 은숙은 맥이 풀렸다.

"아빠 안 계세요?"

"네."

"그렇구나. 아빠가 김영호 PD님 맞아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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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집에다 전화 놓고 가셨어요?"

"네."

"엄마는 안 계시구?"

"엄마 없어요." 은숙은 난감해졌다.

"저기, 거기가 무슨 동이야?"

"108 동이오."

"아니, 그런 거 말고."

갑자기 문이 열리고 조교가 들어왔다. 은숙은 흠칫 하고 수화기를 그냥 내려놓았다.

"교수님 찾으셨어요?"

"응. 이거 좀 뽑아서 공고 좀 내줄래? 알아봐주면 고맙고."

은숙은 포스트잇을 조교에게 내밀었다. 조교가 문을 닫고 나가자 은숙은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두 번이나 전화하는 건 좀 그렇고. 어쩐다?

한편 염색과 조교실 앞에는 공고가 나붙었다.

'아르바이트 모집. 책 디자인 및 편집(1 명), 만화, 일러스트레이션(1 명).

아마추어라도 환경운동이나 사회봉사활동에 관심이나 사명감 있는 분 환영.-염색과 조은숙 교수/ 푸른심천 (전화) 062-4529-9472'

같은 시각 유선생은 심천대학 단과대 로비를 거닐고 있었다. 전에 없이 깔끔한 정장 차림이다. 로비에 붙은 연구실 안내판을 보다가 유선생은 염색과가 있는 3층으로 향했다. 퇴근하려던 은숙은 로비에서 유선생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유선생은 움찔했지만 도망가지는 않았다. 은숙은 머리끝까지 짜증이 치솟았다. 지난번엔 집에 찾아오더니 이젠 학교까지 드나드는구나. 이제 아예 스토커 짓을 할 작정인가.

그렇지만 유부남이 은숙을 찾아와 얼쩡거리는 꼴을 학교에서 보여줄 수는 없었다.

은숙은 잠시 유선생을 노려보다가 홱 뒤돌아서 걸어갔다. 유선생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섰다가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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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두리번거리며 조용한 장소를 찾다가 의상작업실로 냉큼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유선생도 조용히 문을 열고 따라 들어갔다. 어느 새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시간이라 작업실 안은 어두컴컴했다. 은숙은 불을 켜는 대신 해거름이 드리워진 창가로 다가갔다. 어차피 해질 시각이니 밖에서 보일 염려는 없었다.

유선생도 창가로 다가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곤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 조교수님."

"유선생님."

"네."

"여긴 제 직장이에요. 유선생님도 학교 나가시잖아요."

"네."

"학교가 얼마나 말이 많은 덴데요. 아시면서 왜 이러세요?"

"지나는 길에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하고."

"요즘 우리, 식사 너무 자주 하는 거 아세요? 식사하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저도 식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요?"

"같이 한다는 게 중요하죠. 식사를 하든, 뭘 하든."

은숙이 도리어 무안해졌다.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 벽창호잖아. 은숙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짜증 섞인 그녀의 얼굴 위로 더욱 단호한 유선생의 말이 던져졌다.

"그럼, 식사 말고 다른 걸 찾아보죠."

으악, 미치겠다.

심천은 복잡한 서울에서 도망쳐 영원히 숨어버리고 싶은 사람들 눈에나 띌 만한 도시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었다. 여기서 '있을 것'이란, 복지 시설이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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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이 아니라 돈 있는 사람들이 편안하고 쾌적하게 모여서 즐기는 공간을 의미한다. 지금 석규가 차를 몰고 식은땀나게 찾고 있는 장소가 바로 그러했다.

"환장하겠네.

전화번호도 안 주고 알아서 찾아오라니….

솔향인지 묵향인지 모를 한정식집이 심천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도 어떡하랴. 교수들은 물론 학장까지 나와 있다는 자리라는데. 성질대로 행동했다가 나중에 무슨 미운털이 박히려고. 석규는 갤로퍼를 몰고 한밤중 심천 거리를 헤맸다. 가로등도 군데군데 꺼져 있고 지나가는 사람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운타운이 아니라 주택가로 들어온 모양이네. 어휴 미치겠다."

석규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아는 사람 전화번호가 있을 리 만무했다. 늦든가 말든가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사실 아무도 신경 안 써준다는 게 제일 무서웠다.

석규는 생각다 못해 114 를 눌렀다. 이 수라도 써야지, 어떡해.

"안녕하십니까? 국민의 비서…."

"심천 콜택시 번호 아무거나 부탁해요."

"심천 콜택시 번호 말씀이십니까?"55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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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콜택시로 전화를 걸고도 석규는 한참 진땀을 빼야 했다. 이 낯선 도시에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겨우겨우 현재의 위치를 가르쳐준 지 10 여분이 지나자 택시 한 대가 달려왔다. 석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택시 뒤를 쫓아 차를 몰았다. 이런 시골바닥, 주차할 데도 없으면 그냥 서울로 올라가 버릴 테다.

솔향에 도착하자 석규는 택시기사에게 만원을 쥐어주고 심천대학교수모임 자리를 찾았다. 한눈에도 비싸보이는 단정한 한정식집이다. 창호지 미닫이를 살며시 여는 순간 화장실에서 거울이라도 보고 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교수들의 시선이 일시에 쏠렸다. 이 오피셜한 분위기, 나이가 들어도 정말 적응 안 된다.

"누구신지요?" 마침 모임에 참석중이던 안교수가 물었다.

"저 만화과 강의 나오게 된 박필이라고 합니다."

"아아!"

"오다가 어디 들를 일이 생겨서…. 죄송합니다."

"저, 이쪽이 학장님이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필이라고 합니다."

석규는 어느 쪽인지도 모르고 일단 인사를 했다. 학장이 손짓하며 올라오라는 기색을 했다.

"들어오세요. 왜 그렇게 서 계십니까? 허허."

그제서야 한 무리의 양복 차림 아저씨들이 뭉그적거리며 자리를 내주었다. 석규는 신발을 벗고 끼어 앉았다. 에어컨 바람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 주었다.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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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팔려. 그러고 보니 석규만 혼자 티셔츠 차림이다.

"학장님, 마니아들이면 다 아는 만화과 박필 선생이십니다." 안교수가 정식으로 소개를 다시 해주었다.

"아! 나도 많이 들었어요. 박필 선생. 그런데 많이 늦으셨네요."

"죄송합니다. 길도 초행길이라서요."

"한 시간 반이면 너무 늦으셨네. 허허."

"박필 선생 벌주라도 한 잔 드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앗, 저기 제가 차를 가져…."

석규는 더위가 싸악 가셨다. 학장이 늦었다고 한마디 하니까 여기저기서 맞장구 치는 꼴이 우습기 이전에 무섭기까지 했다. 일단 오늘은 고개 푹 숙이고 미소만 지으면서 사람좋게 묻어가는 게 전략이다.

"하하, 차를 가져오셨다니 벌주는 할 수 없고, 그럼 박선생이 학장님 얼굴이라도 한 번 그려보시는 게 어때요?"

"하하. 오, 그거 좋네."

"예?"

안돼! 석규는 학장 얼굴을 올려다보고 사람좋게 웃었다. 그러나 학장의 입에서 떨어진 말을 듣고 석규는 절망해 버렸다.

"그럼 뭐 박선생이 많이 늦으셨으니 한번 그려 보시죠."

아아. 좆 됐다.

30 분이나 지났을까. 석규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학장의 캐리커처가 거의 완성되고 있었다. 학장이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떡하지? 에이 모르겠다.

"아직 안 끝났습니까?" 학장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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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생님 오늘 늦으셔서 고생이 많습니다."

허허허, 웃음 소리가 퍼졌다. 석규 평생에 이렇게 진땀나는 그림 그려보기는 처음이었다.

=====

“조교수, 내일 오후 시간 있어?”

“내일 오후요? 시간은 있는데, 문교수님 왜요?”

“시의회에서 연락왔어. 공청회 출석하라고. 시간 있으니까 조교수가 좀 나가 봐요.”

“지난번에도 제가 갔잖아요. 문교수님이 가세요.”

왜 귀찮은 건 꼭 나만 하냐고요. 이럴 때 좋아한다는 말 다 헛소리라니까…. 은숙은 일부러 책상에 고개를 숙인 채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조교수가 좀 가봐요.”

“싫어요. 왜 꼭 그런 데는 제가 가야 돼요?”

“일단 조교수는 비주얼이 되니까. 안 그래?”저편의 안교수가 맞장을 쳤다.

“그럼, 조교수가 한 번 나갈 때마다 푸른심천 대외 호감도가 쑥쑥 올라요, 올라. 우리 같은 늙수그레들이 나가봤자 무슨 호감을 얻겠어.”

“늙수그레인지 알고는 계시네요.”

“에에, 참 섭섭하게….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조교수 왜 그래.”

문교수는 사람좋게 씨익 웃음을 날렸지만 은숙의 말이 마음을 꼭 찔렀다.

늙수그레라니, 저 여잔 자기가 뭐 평생 젊을 줄 아나?

“그러지 말고 조교수님이 가줘요. 문교수님이나 나는 가정이 있잖아. 시간 많고 자유로운 조교수님이 수고해줘요. 그리고 아무래도 방송국 같은 데서 스케치도 하러 올텐데 그런 대외적인 건 조교수님이 맡아 해주시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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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적인 거 빼면 사실 우리 일에서 뭐가 남는다고? 은숙은 삐죽거리다가 ‘방송국 스케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송국 스케치? 그럼 김영호 PD 가 올지도 모르겠네?

“알았어요. 그 대신 오늘 점심 맛있는 거 쏘세요.”

“오케이.”

다음날 오후 심천 시의회 건물로 들어서면서 은숙은 몇몇 양복차림 남자들에게 인사를 받았다. 대부분 푸른심천 발기회때 화환을 보낸 의원이나 보좌관들이었다.

아마 은숙이 몇 번 지방방송에 얼굴을 내민 탓에 알아보는 것이겠지만 은숙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게 방송발인 모양이었다.

공청회 주제는 ‘심천 지역의 환경현안 과제와 환경기술개발센터의 역할’이었다.

으으, 재미없어라. 은숙은 데스크에 놓인 두툼한 자료를 뒤적거렸지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미없는 강의를 듣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호출할 거면 미리미리 자료라도 먼저 보내서 읽히든가 해야지. 이런 식으로 아무나 눈에 띄는 대로 패널 섭외해서 진행하는 공청회에서 좋은 견해가 제출될 리 없었다. 하긴 말이 좋아 공청회이지, 어차피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 몇 번 열고 나서 환경과장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게 환경조례 아닌가. 거기에 시의회 의원들이 한가한 틈을 타 의사봉 몇 번 두드려주면 그만인걸. 공청회란 이런 날림식 행정을 보기좋게 장식하는 포장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난 아주 예쁜 포장지고. 은숙은 공청회가 너무나 재미없는 나머지 졸음이 밀려왔다. 졸음을 쫓기 위해 볼펜으로 낙서를 했지만 그래도 졸렸다.

그건 그렇고 방송 카메라는 어딨는거지? 은숙은 고개를 들고 눈동자만 움직이면서 영호를 찾기 시작했다. 11 시 방향에 SBC 로고를 붙인 카메라가 서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 뒤에 영호가 있었다.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아, 왔구나. 후후. 은숙은 얼굴에 떠오른 웃음기를 밀어넣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59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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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발언 차례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은숙은 낙서 대신 발언할 내용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영호는 한참 전부터 은숙을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졸려 보이더니 이제 괜찮아지나 보네. 쿡쿡. 미소를 띠면서 은숙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이승훈이 속삭였다.

“조은숙 교수도 왔네요?”

“쉿.”

은숙이 발언을 시작했다. 공청회장에 은숙의 맑은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내용은 환경 교육에 관한 것이었지만 영호 귀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지난번에 안경 두고 갔는데, 혹시 갖고 계세요? 돌려받을 수 있나요? 만나고 싶었어요. 지난번에 그 모텔 너무 좋았어요. 근데 벽에 무슨 그림이 걸려 있었는지 기억이 안나니 어쩌죠? 영호는 머릿속에서 에로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물론 주인공은 조은숙 교수.

“선배.”

“…”

“선배?”

“어?”

“스케치 다 끝났으면….”

“너 먼저 갈래? 편집 테이프 챙겨서.”

그럼 그렇지. 승훈은 테이프와과 카메라를 챙겼다.

공청회가 끝난 뒤 영호는 로비에서 담배를 피우며 어슬렁거렸다. 마주칠 줄 알았으면 좀 차려입고 나올 걸 싶었다. 그러나 은숙은 일부러 공청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느릿느릿 인사를 나누고 자료집도 꼼꼼히 챙겼다. 기자들에게 명함까지 받고 나서 은숙은 천천히 로비로 내려갔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은숙 못지않게 다른 패널들과 시의원, 기자들도 공청회가 재미없었던 모양인지 60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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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물처럼 건물을 빠져나갔다. 영호는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 틈에서 은숙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은숙은 영호와 마주치기 전 로비 화장실에서 매무새까지 다듬었다.

급하다고 거울 보는 것까지 빠뜨릴 수 있나. 어물거리다가

영호가 먼저 가버릴지도 모르지만, 왠지 기다려줄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

영호는 PDA 를 만지작거리다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은숙을 발견했다. 그녀도 영호를 보고 그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머…. 안녕하세요. 여긴 웬일이세요?"

"스케치 하러 왔죠. 뭐. 기자석에 있었는데, 못 보셨나봐요."

"못 봤어요. 중요한 자리니까요."

중요한 자리? 꾸벅꾸벅 귀엽게 졸더만. 영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셨구나…참, 안경 없으서셔 그동안 어떡하셨어요?"

"렌즈 끼고 다니죠. 안경도 새로 맞췄구요."

"그 안경, 다시 받을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렵지 않은데, 어디서 드릴까요? 다시 해후한 은숙은 영호 눈에 관능적이었다.

그날 헤어지고 나서 편집 테이프 속에 담긴 은숙을 보면서 내내 몸이 달았던 것이다.

한 번의 인스턴트 섹스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아, 영호도 은숙과 마주치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오늘도 특별히 노출이 심한 옷을 입거나 섹시하지 않은데도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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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시키는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은숙도 영호를 훑어보면서 생각했다. 처음엔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귀여운 데도 있다. 20 대때 잘생기거나 멋있기보다는 귀여운 인상으로 여자들 손좀 탔겠다 싶었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땐 양복발에 조금 속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후줄근하게 차려입었다고 해서 안에 든 콘텐츠까지 폄하할 수 없지. 더구나 이미 확실히 검증된 물건이 아닌가.

영호는 가실까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은숙은 빙긋 웃으며 영호 뒤를 따라갔다.

목적지는 물론 지난번 카페 위의 모텔이었다. 열이 식을세라 급하게 부둥켜안던 첫 번째 만남에 비해 이번에 은숙은 여유있었다.

"저, 좀 먼저 샤워할게요."

영호는 화장실로 들어가는 은숙의 뒤를 따라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그래,

같이 샤워하는 건 일 끝나고(?) 아니면 좀더 친해지면….

물에 젖은 은숙의 몸은 처음에 비해 스릴감은 적었지만 더 무르익어 보였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더 친숙하기도 했다. 영호는 은숙 눈치를 보면서 허벅지에 입술을 가져갔지만 은숙은 신경쓰지 않았다. 꼭 다친 데라서가 아니라 원래 허벅지 안쪽은 은숙의 성감대였다. 사실 남녀가 처음 만나 치르는 정사보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더욱 농익게 마련이다. 첫 정사는 짜릿하지만 완성도가 떨어진다면, 두 번째부터의 정사는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가면서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인 셈이다. 두 번의 정사를 치르고 두 사람은 침대 위에 늘어져 막간의 여유를 즐겼다.

"김 PD님."

"네."

아직도 PD님이라고 부르려나? 영호는 묘하게 마음이 상했다. 그 말에 마음이 상하는 자신이 놀랍기도 했다.

"안경은…. 안 가지고 오셨어요?"62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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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하…. 회사에 놔뒀어요. 학교로 가져다 드릴까요?"

"아뇨. 제가 한 번 찾아갈게요."

은숙은 베게 위에 엎드린 채 방긋 웃었다. 이걸로 세 번째 만남은 확보한거다. 영호는 은숙 등에 입을 맞췄다. 은숙은 졸음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계속 애무를 하던 영호는 아예 은숙의 뒤로 올라탔다.

몇 시간을 뒹군 끝에야 은숙은 무릎이 풀린 채로 일어섰다. 영호는 졸린 모양인지 엎드린 채로 쿨쿨 자고 있었다. 커튼을 젖혀보니 이미 시커먼 밤이다. 은숙은 깜짝 놀라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여덟 시였다.

은숙은 영호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포스트잇을 남기긴 좀 그렇지? 사실 가지고 있는 포스트잇도 없었다. 내 전화번호는 입력되어 있는 걸까. 아까 일부러 PD

님이라고 불러봤더니 약간 흠칫하는 것 같던데, 그럴 거면 먼저 이름을 부르던지….

은숙은 영호 옷가지 속에 내던져진 PDA 를 찾기 시작했다. 이거 어떻게 만지는 거야? 은숙은 복잡한 전자제품에 약했다. 컴퓨터도 남들보다 익숙해지는 데 오래 걸렸다.

아, 켜졌다. 여기저기 만지다보니 꺼져 있던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은숙이 읽은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자였다.

'어디냐? 어디 박혀서 놀고있는 건지 전화도 안하고 회사에도 안보이고…. 승훈씨가 걱정하더라. 집에 전화좀 해'

결혼했구나. 은숙은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곧 어깨를 폈다. 상관없어. 원래 좋은 남자는 다 유부남이라잖아. 괜히 여기에 상처받을 이유가 없었다. 은숙은 새근새근 자고 있는 영호를 흔들어 깨웠다.

"배고파요. 밥먹으러 가요. 네?"

은숙이 영호와 뜨거운 시간을 보낸 밤.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유선생은 은숙의 아파트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물론 술에 취한 채였다. 은숙과 특별한 약속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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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아니었다. 술에 취해 이성이 마비되자 자연스럽게 발이 유선생을 은숙의 집으로 이끈 것이었다.

들어가봤자 와이프가 바가지를 긁을 게 뻔한 집으로 일찍 가고 싶지 않았다.

유선생은 멍하니 은숙의 아파트 현관문을 바라봤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딱 스토커였다. 열한시가 넘었지만 아직 은숙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벨소리가 우리집이랑 똑같네. 유선생은 취중에도 그런 사소한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벨을 한번 더 눌렀다. 딩동, 딩동… 몇 분 지나자 센서등이 꺼졌다.

복도가 순식간에 암흑 속에 묻혔다.

아… 불이 꺼졌네. 사방이 어두워지자 몸이 더워지면서 어지러웠다. 유선생은 가만히 선 채 택견 자세를 취했다가 멋지게 한쪽 다리를 착! 차올렸다. 센서등이 팍 하고 다시 들어왔다. 흐흐. 아직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 유선생은 기분이 좋아져서 다른 쪽 발차기를 하려다가 문득 시선을 느꼈다.

복도 끝에 은숙이 서 있었다. 유선생은 천천히 다리를 내렸다. 뻘쭘해야 할 상황이지만 왠지 부끄럽지가 않았다. 은숙은 구두굽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걸어왔다.

약간 피로한 기색이지만 유선생은 알아채지 못했다. 유선생은 어색하게 문앞에서 물러섰다. 은숙은 키홀더를 들고 아파트 문 앞에 막아서듯 섰다.

휘유. 이젠 아예 현관문 앞에서 지켜섰구나….

"어딜 갔다 이제 오세요?"

"약속 있었어요. 친구랑." 은숙은 쌀쌀맞게 대답했다.

"유선생님은 여기서 뭘 하고 계셨어요?"

"저요? 하하… 그냥 지나는 길에 생각나서 들렀죠. 근처에서 교사모임…."

"…."

"저기, 벨소리가 저희집이랑 똑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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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똑같겠죠. 같은 주공아파튼데."

"네…."

은숙은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 정말 대책이 안 선다. 유선생은 점점 취기가 오르는지 조금씩 비틀거렸다. 불그스레한 센서등 아래 유선생이 입은 알록달록한 개량한복이 눈에 거슬렸다.

"얼른 집에 가세요. 많이 늦었어요."

"네…."

"그리고 그런 거 입고 다니지 마세요. 제발…."

"왜요?"

"겉멋 아닌가요. 그거."

"겉멋요? 겉멋이라…."

"네. 그리고 그런 거 입고 있으면 늙어 보여요. 할아버지 같고… 별로 보기도 안 좋아요."

"…."

"기분 상했죠?"

"…."

"상하라고 그런 말 한거예요."

유선생은 정말 은숙의 말에 상처를 받은 모양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면 취해서 정신이 흐려졌거나.

"휴… 신경쓰지 마세요.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보기에 좀 그렇다는 얘기예요."

"… 그럼 개인적으로 그러지, 전체적으로 좀 그럽니까?"

"내참… 보기에 꼭 파자마 같애서 한 소리예요."

유선생은 눈에 띌 정도로 비틀거렸다.

"파자마요? 하하… 조교수님? 파자마가 뭔지 알아요? 파자마 영업니다… 영어. 피!

에이! 제이! 에이! 엠! 에이! 몰랐죠? 다 아는 거 같아도 조교수님이 결코 알 수 없는 세계, 그런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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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대뜸 실어증이오? 하고 쏘아붙어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아닌 게 아니라 너무 취해서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다.

센서등 불빛 아래서 은숙의 불쾌한 표정이 보였던지, 유선생은 미안하다고 인사하고 뒷걸음질쳐 사라졌다. 은숙은 한숨을 쉬고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문교수 말대로 유선생의 실어증이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문교수 앞에서 은숙이 유선생 편을 든 건 그 실어증이 진짜건 가짜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진짜면 어떻고 가짜면 어때.

문교수 말마따나 그때 기분 나쁘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나. 그리고 유달리도 예민한 유선생이 가엾기도 했다.

그래도 남들은 그 부채의식을 예술이나 정치로 잘도 승화시키는데 저 재능없고 나약한 남자는

마치 사춘기 소녀처럼 징징거리기만 하는 게 이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애도 아니고 저게 뭐야. 영호와의 저녁은 화기애애하고 다정했었는데, 유선생이 뜻밖에 나타나 망쳐버렸다. 심천은 몰래 연애하기 너무 좁은 곳이다. 은숙은 거실 불을 켜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몸에 남은 쾌감과 유선생에 대한 연민이 뒤섞였다.

====

영호는 차를 몰고 심천 도립공원 주차장에 들어섰다. 옆에는 은숙이 타고 있었다.

바람결에 초록색 나뭇잎에 소스라치는 평일 대낮 따뜻한 오후다.

"내려요.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좋아요. 아무도 없고."

"걸어가요?"

은숙은 걷는 게 싫었다. 게다가 산책에 어울리지 않는 블라우스와 스커트에 샌들을 신고 있었다. 두 번 만나서 두 번 다 모텔에서 뒹굴고 난 뒤 겨우 데이트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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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에 나선 날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산이라니 조금 불만스러웠다. 시원한 바닷가에 가든가, 맛있는 걸 먹으러 갔어야 했다.

"나 걷는 거 싫어하는데. 구두 신고 왔고."

"그래요?"

영호는 브레이크를 내리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등산로 입구의 바리케이드 옆에는 공익근무요원이 서 있었다. 영호는 공익요원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는 눈치인데 잘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저쪽에서 관리소장이 뛰어왔다.

"아이고 김 PD님 아닙니까."

"예 소장님. 오랜만이죠?"

"오랜만이네요. 뭐해, 어서 치워드려."

관리소장과 뻘쭘해진 공익요원이 같이 바리케이트를 치워주자 영호는 그대로 등산로 위로 차를 몰았다. 은숙은 기분이 좋아졌다. 심천에 온 이래 이런 특권을 누리는 남자는 처음이다. 역시 요새는 어딜 가나 방송이 최고인 모양이다.

"위에 올라가면 아무도 없고, 호젓해서 아주 좋아요."

영호는 텅 빈 등산로를 쭉 밀고 올라가다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은숙은 차에서 내렸다. 새소리만 들리는 울창한 숲이다. 영호는 은숙의 손을 잡고 조그만 산책로로 들어갔다.

"여기, 좋죠? 전 평일에 자주 와요. 주말엔 붐비니까."

"좋네요. 정말."

처음에 은숙은 영호가 등산하자는 말에 뾰로통했지만 막상 조용한 숲속에 발을 들여놓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산책로 옆에는 벤치 의자가 있었다. 영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누웠다. 은숙도 천천히 누웠다. 영호는 팔을 뻗어 은숙 머리 밑에 괴어 주었다. 은숙은 누운 채로 미소를 지었다. 햇빛을 받아 나뭇잎 색깔이 예뻤다. 마치 연인들 같다. 이윽고 영호는 은숙에게 몸을 기울여 키스를 했다. 은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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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거리는 나뭇잎들이 몽롱해지는 순간을 즐기면서 영호의 혀를 받아들였다.

은숙은 눈을 감고 이 순간을 본격적으로 즐기려다가 인기척에 놀라 일어났다.

"엄마야!"

"왜요?"

"저기요!"

숲속에서 웬 예비군 한 명이 느릿느릿 기어나와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근처에서 예비군 훈련하나 본데요. 길을 잃었나, 아니면 혼자 놀러 나왔나…."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예비군들이 어깨에 M16 을 하나씩 걸쳐 메고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족히 스무명은 되어 보였다. 영호는 황당했다.

"뭐예요?"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금방 가요."

은숙은 한숨을 푹 쉬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영호도 의자에 누웠다. 다행히 예비군들은 그들을 못 본 거 같았다. 영호는 누운 채 몸을 뒤틀었다.

그 순간 호르륵하고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선배님들! 여기서 15 분간 휴식합니다! 빵하고 우유 받아가세요."

헉. 좆됐다. 꼼짝 못하고 누운 두 사람에게 부스럭거리며 빵 봉지 뜯는 소리가 들렸다. 영호는 마음 속으로 대한민국의 후져빠진 예비군제도를 저주했다. 예비군 훈련만큼 한국 남자의 후진성이 드러나는 때도 없다. 은숙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드러내보인 것 같았다. 마치 깔끔히 치운 집에 여자를 초대했는데 책상 서랍에 감춘 포르노 테이프와 콘돔을 들킨 듯한 기분이랄까.

은숙은 조마조마한 가슴을 달래며 기다렸다. 예비군들의 욕설 섞인 잡담과 음란한 68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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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들이 들려왔다. 은숙이 웃음을 참고 누워 있는 동안 영호는 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나름대로 첫 번째 데이트에서 이게 무슨 망신인가.

영호는 고개를 돌려 살짝 은숙을 보았다. 은숙은 눈을 감고 있었다. 의외로 편안해 보여서 영호는 마음이 놓였다.

"자요?"

"아뇨."

영호는 은숙에게 몸을 붙이고 키스를 했다. 은숙도 키스로 답했다. 불과 몇 미터 밖에서 예비군 이십 여명이 몰려있어서 그런지 스릴이 만만치 않다. 은숙은 가슴이 콩당거렸다. 훔친 사과가 맛있다고 했던가. 두 사람은 금지된 장난으로 몸이 금세 뜨거워졌다.

영호는 아예 손을 은숙의 브라우스 사이에 넣고 브레지어를 헤집고 있었다. 은숙은 신음소리가 나려는 걸 애써 참았다.

키스와 애무를 하면서도 예비군들이 부스럭대고 총이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두 사람을 더욱 흥분시켰다.

===

석규가 심천에 온 지 일주일이 됐다. 하지만 아직 강의가 서툴다. 초빙 자체가 급하게 이루어진 탓에 강의 내용을 번갯불에 콩 볶듯 준비해야 했으니 말이다. 늦은 오후 강의실은 조용하기는커녕 어수선하고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석규가 들어와도 학생들은 본체만체다. 출석부를 펴들어도 여전히 수선스럽다. 석규는 바로 옆에 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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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도 겨우 들을까 말까한 목소리로 출석부를 읽기 시작했다.

"…김선재, 이미희, 박현우…."

대답을 못한 학생들이 웅성거렸지만 석규는 못 들은 척하고 출석부를 대강 체크한 뒤 내려놓았다.

"못 들어도 상관없어. 꼬박꼬박 출석한다고 만화 잘 그리는 거 아니다."

석규는 강의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조용해졌지만 강의에 집중하는 학생은 겨우 십여 명 남짓했다. 마음 같아선 자거나 휴대폰 만지작거리는 녀석들은 창문 밖으로 패대기치고 싶다. 하지만 일단 이번 학기만 참아보기로 한다. 도대체 비싼 등록금 내고 심천까지 와서 왜 강의에 집중하지 않는지 석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림 그리는 손에 힘이 쭉 빠지고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서울대 모 교수는 강의할 때 학생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칠판만 보고 수업한다는데… 남의 얘기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강의에 집중하는 아이들이 특별히 예쁜 것도 아니었다. 이런 거 열심히 듣는다고 만화 잘 그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만화를 잘 그리냐고? 어떻게 하긴. 이런 데 와서 비싼 등록금 내고 시간 낭비하는 대신 방에 처박혀 열심히 그리면 된다. 열심히, 무엇이든, 산도 바다도 강도 얼굴도….

날씨가 덥다 보니 강의를 듣는 학생도 그림을 그려가며 강의를 하는 석규도 점점 지쳐갔다. 한쪽 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떠들자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 용희 자식은 집에 잘 들어갔을까… 그 몸 팔다 만 것 같은 여자애랑 또 나가도 난 몰라….

이마에서 식은땀이 났다. 석규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맨 앞에 앉은 여자애가 열심히 필기를 하다가 석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석규는 여자애와 눈을 맞췄다.

"왜? 왜 그러니?"

"교수님, 되게 피곤해 보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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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네. 좀 쉬셔야 될 거 같애요."

"교수님 좀 쉬세요…."

"와 교수님 쉬신대…."

강의실은 순식간에 웅성거렸다. 나 원, 어이없는 자식들. 석규는 혀를 차다가 그리고 있던 그림을 문득 보았다. 처음에 그리려던 것과 동떨어진 엽기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허, 내가 피곤하긴 한가 보네.

"그래, 오늘은 쉬자. 미안하다."

휴강은 강사 평가에 마이너스 요소였지만 석규도 오늘처럼 유달리 김빠진 분위기를 이끌기가 버거웠다. 학생들은 석규 말이 떨어지자 와아 하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석규는 한번 더 기가 막혔다. 저런 것들을 대학생이라고 가르치고 앉아 있는 내가 다 한심하다.

석규는 만화과 강사실로 향했다. 유난히 조용하다. 오후의 심천대학 캠퍼스는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닷바람이 뒤섞여 달콤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강의를 하러 온 게 아니라 한적한 리조트에 머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학생활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시간이 많이 남는 것이니 애들 가르치면서 작품 구상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석규는 복도를 걸어가다가 문득 강의실에 출석부를 두고 온 게 생각났다. 대학생활의 단점은 사소하고 형식적인 걸 챙기지 않으면 바로 미움을 산다는 것일 게다. 석규는 급히 강의실로 되돌아가다 멈춰섰다. 강의실 안에 웬 커플이 부둥켜안고 한창 진한 키스를 나누는 중이었다.

자식들, 아예 이불을 펴라 펴. 대학생이래봤자 용희와 별로 다를 것도 없네. 석규는 잠시 어린 커플의 애정행각을 감상했다. 둘 다 스물 안팎쯤 되었을까? 어린 티가 팍팍 난다. 몸은 다 자랐어도 머릿속은 유치원 수준이라는 게 얼굴에 다 씌어 있다.

석규는 엉켜있는 아이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유리창을 주먹으로 쾅, 쳤다. 여자애가 71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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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하면서 소스라치자 석규는 바로 냅다 뛰어 옆 강의실에 숨었다. 큭큭큭. 너무 재미있다.

남자애는 소스라친 여자애를 감쌌다.

"아 씨… 어떤 새끼야? 누구야?"

"야, 무서워. 가자."

남자애는 잠시 여자애를 놓고 복도를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어. 괜찮아. 갈까?"

"… 저거 봐."

여자애는 칠판을 가리켰다. 석규가 강의시간에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큰 칼을 휘두르는 장군 그림인데,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튀어나올 듯 생생하다.

===

등산로에서는 아예 예비군들이 소풍이라도 나온 듯이 팍 퍼진 채 떠들어댔다. 시끄러운 게 꼭 개구리떼 같다. 영호는 바야흐로 은숙의 귓불을 잘근거리며 애무하고 있었다. 쾌감에

스릴이 더해져 은숙은 더욱 열이 달았다.

"자, 선배님들 이제 이동하시죠."

덜거덕거리면서 예비군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은숙은 영호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은숙의 심장 소리가 영호의 귓가에 박동쳤다. 은숙은 간질거리는 아랫도리를 어쩌지 못하고 진저리를 쳤다.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은숙이 킬킬거렸다.

"영호씨, 너무 무거워요."72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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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는 그제서야 은숙의 몸에서 떨어져 벌렁 누웠다.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재밌잖아요. 예비군들 좌악 몰려 있는 데서. 가슴이 터질 것 같던데요. 들킬까봐…."

"들키면 뭐 어때서요."

"좋은 추억 될 뻔했는데…."

은숙은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져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영호는 머릿결을 바람에 휘날리며 벤치에 비스듬히 앉은 은숙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옆얼굴에 나른한 오후 햇살이 번지고 있었다.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듯 보이지만 지금만큼은 마치 순수하고 앳된 처녀로 느껴졌다.

영호는 다시금 그녀의 다리에 얽힌 사연이 알고 싶어졌다. 어쩌다 다친 건지, 은숙 정도의 재력이라면 얼마든지 수술로 고칠 수 있을 텐데 왜 지금까지 불편한 다리로 지내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은숙의 기분이 좋아보이는 지금 굳이 얘길 꺼내고 싶지 않았다. 좀더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고백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숙은 웃음보가 그친 뒤에도 계속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다 영호와 눈을 마주쳤다.

"일어날래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더 올라가 볼까요?"

"아뇨, 안 봐도 괜찮아요. 조금만 여기서 더 쉬었다 가요."

은숙은 옆으로 몸을 다시 뉘었다. 영호도 누웠다. 전 같으면 바로 모텔 직행이었을 텐데, 시원한 숲바람이 욕정을 씻어가 버린 것 같다. 그러나 서운하기는커녕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은숙은 영호의 손을 찾아 쥐었고 영호도 응답했다.

새소리가 뺨을 간질이듯 울렸다.

"광릉 수목원 가 봤어요?" 영호가 갑자기 말했다.73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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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오."

은숙이 산들바람에 졸음이 오는지 뭉개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송 하느라구 조류학 박사 한번 좇아서 가 봤는데요."

"네."

"새소리 수집하는 접시모양 스피커 있거든요. 이만한 거…."

"……."

"그런데 그 박사님이, '이거 되게 재밌는 거예요' 하면서 들려주더라구요."

"뭘요?"

"그걸 듣고 있으면 새소리도 잘 들리지만, 연인들 손 붙잡고 다니면서 나누는 말이 전부 다 들린대요."

"푸하하, 그래서 들어봤어요?"

"그럼요. 되게 재밌어요. 또 그런 호젓한 데서 나누는 얘기가 따로 있잖아요."

"진짜 재밌었겠네."

은숙은 킥킥거리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영호도 미소지으면서 은숙에게 몸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웃으면서도 은숙의 머리에 '수목원이나 다니는 커플 치고 불륜 아닌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란 생각이 스쳤다. '듣고 있으면 리얼리티 쇼가 따로 없었겠네.' 그러나 이런 생각에 집중하기엔 바람이 너무 달콤했다.

몇 분이나 잤을까, 은숙은 몸서리치며 깨어났다. 어느 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어머, 추워라." 은숙이 몸을 일으키자 영호도 일어났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밖에서 자면 체온이 떨어지죠. 차로 가요."

은숙은 얼른 차에 몸을 밀어넣었다. 영호도 시동을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트렁크에 너저분하게 놓여 있던 빵봉지와 우유팩들이 등산로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허기를 느꼈다.

도로에 나서자 예비군들이 탄 트럭이 보였다. 은숙은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차가 트럭 뒤에 따라붙자 예비군들이 무료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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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가 신호에 걸리자 잽싸게 은숙에게 키스를 했다. 예비군들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다가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에요? 잘못하다간 총질 하겠네요."

"상관 없어요. 이보다 더한 짓도 했는데."

예비군들이 으아악, 닭살스러워 미치겠다는 몸짓을 쏟아놓았다. 은숙도 영호도 낄낄대다 결국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안교수는 수업을 막 끝낸 석규를 교수실로 불러들였다. 석규는 영문 모른 채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뽑아 들고 안교수의 방으로 갔다. 한정식집에서 학장의 캐리커처를 그리는 혹독한 신고식 이후 석규는 대학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아무리 친절한 얼굴로 웃어줘도 또 이상한 짓이나 시키지 않을까 겁이 났다.

안교수 눈에 석규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학장 눈 밖에 날 뻔하긴 했지만 모임에 늦은 게 죽을 죄도 아니고, 겉으로 터프해 보이지만 속은 성실하고 자존심 있는 예술가 같았다. 은숙의 뒤나 쫓아다니는 유약해 빠진 유선생보다 훨씬 남자답고 보기 좋았다.

안교수는 커피를 받아들고 미소 지으며 석규를 자리에 앉혔다.

"뭘 이런 걸 타오고 그래요. 앉아요."

"예." 석규는 군기가 바짝 든 채 소파에 엉거주춤 앉았다.75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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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강의 시작하신 지 한 달 정도 됐지요?"

"예. 한달쯤…."

"해보니까 어때요? 재밌죠?"

"예? 뭐 아직은…."

"지금은 잘 모르는데, 나중엔 너무 재밌어져요. 그러면 안 되는데."

"?"

"가르치는 거 재미 들리면 나중에 아무것도 못 하거든. 편하니까…말로만 먹고 사니까…대우받고…."

"아…예…."

"한 몇 년 입으로만 먹고 살면, 아무것도 못하게 돼요. 다른 건 하기도 싫어지고, 겁도 나고."

석규는 끄덕였다. 안교수의 말을 들으니 임용 전에는 작품이며 연구활동에 두각을 보이던 사람들이 대학만 들어가면 나자빠지는 게 이해가 갔다. 하기야 몸도 마음도 편한 데다, 아무것도 안 해도 대접 받는데 작품에 의욕이 날 리가 없다. 역시 학문도 예술도 헝그리 정신인 모양이다.

"겁이오?"

"나지…애들한테 구라만 잔뜩 쳐놓고 나면 함부로 못 하거든. 무서워서."

석규는 미소지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양심 한 조각은 간직하고 사는 모양이네.

안교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애들이 학교에 있을 때나 제자고 선생이지…나가면 다 적이에요. 적."

그럼 그렇지. 석규는 속으로 조소했다. 학교에 파묻혀 떠받들리면서 신선놀음하다보면 펜 끝에 녹이 스는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 자기가 게으른 탓이지 왜 학생 탓을 하나. 그러나 심천 같은 조용한 곳에 몇 년만 파묻혀 지내다 보면 석규 자신도 안교수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쉽고 편안한 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는 건 알지만,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석규도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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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외로움이란 걸 석규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니, 한정식집에서의 신고식 때문에 고립될까봐 오히려 석규답지 않은 얌전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학교 내외에 친분을 쌓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태라고 해야 정확했다. 기세등등한 박석규도 외돌토리가 되니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 그건 그렇고…커피 마셔요 식겠다. 오늘 나 부탁이, 아니 박선생이 하면 딱 좋을 일이 있어서 일부러 불렀어요."

석규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나하고 문교수하고 염색과 조은숙 교수하고 또…덕천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유승목 선생이라고 이렇게 넷이서 지역사회에 이바지할 겸 환경단체를 해요. 박선생은 아직 내려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르겠지만 우리 단체가 심천 내에서 나름대로 유명하고 주목을 많이 받아요. 내놓는 의견마다 시정에 반영도 많이 되고. 그래서…."

"…예, 그런데 단체 이름이 어떻게…?"

"아, 이름? 이름…푸른심천 21. 푸른심천."

"예, 푸른심천요."

네이밍 센스 되게 촌스럽다고 석규는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이번에 심천 시청이랑 덕천초등학교에서 직접 의뢰를 받았어.

환경교육과 관련해서 초등학생용 교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용은 만화구요?"

"물론 만화지. 원래 서울에 있는 디자인 회사로 넘어갈 걸 유선생이 따왔어요. 심천 디자인 대학 만화과가 있으니까 여기서 소화할 수 있으면 하자고."

"예…."

"여기 자료들이랑, 이전에 나온 환경교육 만화책들 가지고 가서 연구 좀 잘해 봐요."

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경교육 교재용 만화책이라, 사실 이전에 교육용 교재를 그려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먼저 임용된 만화과 교수들을 제치고 먼저 석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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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준 안교수의 마음씀이 고마웠다. 보수 얘기가 없어서 약간 뒤통수가 가렵긴 하지만 설마 떼어먹진 않겠지.

===

늦은 오후 푸른심천 사무실. 책상에는 은숙이, 소파에는 명희가 종이컵을 앞에 둔 채 앉아 있었다.

"너 혼자 왔니?"

"네."

은숙은 기분이 나빠졌다. 2 주일이나 아르바이트 공고를 냈는데도 찾아온 사람은 명희 한 명뿐이다. 혹시 이 여우 같은 기집애가 보는 족족 공고를 다 뜯어버리고 혼자 온 거 아냐?

"책 디자인, 전에 해 봤니?"

"…전혀 안 해본 건 아니구요."

"전혀 안한 거랑 전혀 안 해본 거는 또 뭐야.

아이구 참…."

"…."

"일러스트레이션은?

그림은 좀 그리기나 하니?"

명희의 얼굴이 발개졌다.

"중요한 거야 이거…아무나 시킬 거

아니야. 그런데 혼자 왔으니 내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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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르바이트생 뽑아놓고 프로 수준의 실력을 바라는 게 우스웠다. 중요한 거면 돈 좀 들여서 회사에 맡기든지.

"…공고에, 환경보호와 사회활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일부러 왔어요."

"관심만 많으면 뭐해. 기본적으로 실력이 있어야지."

"…."

은숙은 명희를 쏘아봤다. 살다 보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미운 사람들이 있다. 은숙에게 명희는 그런 사람들의 장점만 모아 뭉쳐놓은 존재다. 예쁘니까 더 밉상스럽고, 밉상스러운 와중에도 예뻐보이니까 더욱 짜증이 났다. 아휴, 얘는 이 코딱지만한 사무실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비집고 들어오는 걸까. 혹시 나처럼 되고 싶어하는 걸까?

좀더 실력과 경험이 필요하니 미안하지만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고 말하려는 순간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안교수, 문교수, 유선생까지 푸른심천의 멤버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은숙은 아차 싶었다.

"어? 명희씨네?" 안교수가 제일 먼저 아는 척을 했다.

"그러게? 반갑네…지난번엔 잘 들어갔어요?"

문교수도 반가워했다. 어머, 기가 막혀. 은숙이 명희를 집까지 태워다 준 게 벌써 한 달 전인데, 그걸 이제 물어본단 말인가. 유선생조차 명희를 보고 반가운 모양인지 미소를 짓고 있다. 은숙은 속이 뒤틀렸다.

명희는 벌떡 일어섰다.

"예, 잘 들어갔어요. 교수님 덕분에요. 그리구요, 시켜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명희는 책상에 앉은 은숙과 우르르 모여 있는 안교수들 사이로 머리를 꾸벅 숙였다.

문교수가 웃으면서 명희를 앉혔다. 명희가 활짝 미소를 짓자 은숙은 기분이 나쁘기에 79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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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어이가 없었다. 내가 자기 싫어하는 걸 알면서, 뭘 믿고 저렇게 뻔뻔스러운 걸까.

"조교수, 명희씨 자리 좀 챙겨줘야지? 자리가 날까?"

"공간 잘 활용하고…저기 창고에 있는 책상 빼내오면 어떻게 되겠지?"

"저 먼저 일어설게요." 은숙은 펼쳐놓은 서류철을 탁 덮고 일어났다.

"안교수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환경교육교재 얘기 어떻게 됐죠?"

"아, 그거? 만화과 박필 선생한테 얘기했는데 하겠대요."

"하겠대요?"

"응."

"잘됐네요. 언제 사무실 온대요?"

안교수는 갑자기 자기 일을 따져 묻는 은숙이 뜬금없었다. 그러나 기분이 역력히 나빠 보이는 은숙을 건드릴 순 없었다.

"뭐…내가 나중에 데리고 오지 뭐."

"수고하셨어요. 선약있어서, 나중에 뵐게요."

은숙은 핸드백과 서류를 챙겨 들고 나서면서도 명희에게 한 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이왕 같이 하기로 했으니까 열심히 하구, 청소 좀 해놓고 가라. 안녕."

"…네…."

명희도 은숙 못지 않게 기분이 나빴다. 마녀 같으니라구. 그러나 명희는 한편으로 은숙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아무렇지도 않은 푸른심천 사람들에게 적이 놀랐다. 이제 보니 저 여자 싸가지 없네. 평소에도 저렇게 성질부리듯이 행동하나보지? 뭘 보고 받아주는 걸까. 단지 은숙이 홍일점이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은숙은 사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가슴이 조금 답답했지만, 명희에 대한 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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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만은 아니었다. 결국 제대로 된 남자라고는 도시 전체를 들고 탈탈 털어도 찾아보기 힘든 심천 때문이 아닌가. 안교수도 문교수도, 유선생도 은숙의 눈에 성찮았다. 다람쥐 도토리들 같은 고만고만한 남자들 따위야 명희한테 연애 연습이나 하라고 줘버리지 뭐. 쳇.

갑자기 은숙은 영호가 그리워졌다. 섹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커피도 마시고 싶었다.

=====

안교수가 네트 너머로 석규를 노려봤다. 시선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석규는 어설프게 탁구채를 들고 안교수의 서브를 기다렸다.

"박선생 운동신경이 얼마나 되는지 좀 볼까?"

안교수의 공이 날아오자 석규는 간신히 받아쳤다. 탁구를 언제 마지막으로 쳐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안교수의 공격은 꽤 날카로웠다. 양발로 탄력있게 무게를 옮기는 자세부터가 엉거주춤 탁구대에 엎어질 듯 서 있는 석규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쳇,

사무실에서 환경 일은 안 하고 만날 운동만 하셨나. 지난번에 얘기한 환경교재 얘길

하자면서 교수실로 불러들여 잡담을 하더니 점심 먹고, 밥 먹었으니 산책이나 하자더니 다시 푸른심천 사무실로 가서 30 분째 탁구를 치고 있다. 석규를 아예 데리고 다니며 놀기 편한 후배나 친구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건 고맙지만 꼬붕 취급은 원래 질색이다. 그래도 석규는 성질을 누르고 안교수를 하루종일 따라다녔다. 심천에 내려온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안교수를 제외하고 친구는커녕 지나다니며 안부인사 나눌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쩝, 매일 방에만 처박혀 원고만 죽어라 그리는 놈이 사교성이 있을 턱이 있나.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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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강의 열심히 하고 내 작품만 열심히 그리면 될 줄 알았지, 대학 문턱에 들어서자마자 학장 초상화를 그리느 건 물론 선배 교수와 매일 놀아줘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한심하다. 만화 일만 아니면 무슨 환경단체인지 뭔지 하는 이 사무실에 오지도 않았을 거다. 만화 교재 작업만 끝나면 아예 잠수타버려야지. 석규는 탁구채를 고쳐잡았다.

"하아, 땀 잘 흘렸다. 박선생 힘들죠?"

안교수는 탁구채를 던지고 나무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느 새 안교수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다. 석규는 이제야 몸이 풀리는 참이지만 따라서 탁구채를 내려놓았다.

"힘들긴요."

"박선생도 하루종일 앉아서만 지낼 텐데 의외로 체력이 쓸 만하네요. 나이가 얼마라고 했더라? 서른셋이라던가?"

"예, 그쯤."

"우리 땀 좀 흘렸으니 시원한 거나 뭐 좀…"

쿵! 누가 사무실 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안교수는 깜짝 놀라 문을 쳐다보았다. 조교수인가? 며칠 전에 좀 뾰로통해져서 나갔기로서니 문을 발로 걷어찰 건 또 무엇인가. 안교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구지? 누군데 문을 발로 차…"

쿵쿵쿵! 둔탁한 발소리가 울리자 석규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명희였다. 머리를 묶은 명희가 이마에 송글거리는 땀방울이 맺힌 채 PC 본체를 들고 서 있었다. 석규는 뒤로 물러섰다. 명희는 혹시 석규가 받아줄까 잠시 멈춰섰다가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와 책상에 PC 를 내려놨다.

"어 명희씨네. 컴퓨터 가져왔어요?"

"네."

"저기 새 책상 보이지? 저게 명희씨 거야. 앞으로 잘 써요."

"감사합니다."82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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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는 고개를 꾸벅 하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안교수도 따라 웃었다. 어린 여자애들 웃는 건 느낌이 달랐다. 뭐랄까, 나이 먹고 지저분해진 자기 자신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줬다.

명희는 석규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안녕하세요, 이명희입니다, 인사를 건넸다.

석규도 꾸벅 했다.

"에구, 명희씨도 왔는데 나 마실 것 좀 사올게."

"아뇨 교수님 제가…"

"됐어 박선생. 어차피 담배도 떨어졌거든."

안교수는 와이셔츠 앞섶을 펄럭거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명희는 잠시 동안 석규의 깔끔한 이목구비를 주시하다가 다시 PC 를 들고 안교수가 가리킨 책상에 내려놓았다. 석규는 명희가 PC 를 들고 낑낑대는 꼴을 보면서도 가만히 서서 명희의 마른 듯한 뒷모습을 훑었다. 예쁘네. 심천에도 저런 애가 있었나.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과 짙은 눈썹이 무척 깨끗한 인상이다. 섹시하거나 귀엽기보다는 깨끗한 공주님 같은 이미지였다.

"심천 디자인대 학생이에요?" 석규가 불쑥 물었다.

"예? 네…. 염색과 2 학년이에요."

"뭐하러 여기 왔어요? 학생이…"

"예?"

"공부나 하지, 학교에서…. 사무실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석규는 괜히 툴툴거렸다. 아, 난 왜 여기에 뭐가 있어서 와 있는 걸까.

"저는 놀러 온 거 아닌데요."

"그럼, 일하러 왔어요?"

"네. 조은숙 교수님 공고 보고, 디자인도 하고 사회봉사도 하고, 경험도 쌓으려고요."

명희는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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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그래요. 예, 열심히 하세요. 그런데 조은숙 교수가 누구예요? 난 처음 듣는데…"

"조은숙 교수님 모르세요?" 명희는 짙은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몰라요. 누군데요?"

"정말 모르세요?"

"네. 꼭 누군지 알아야 되나?"

"꼭 아실 필요는 없어요. 그럼."

명희는 생긋 미소를 날렸지만 석규는 이미 명희의 미모를 충분히 감상한 뒤라 이미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조은숙 교수? 전에 안교수가 언뜻 얘기한 거 같은데 기억 나지 않았다. 여기 푸른심천 사무실 사람인가. 알 게 뭐야. 난 만화만 그려주고 짱박혀 작품 구상이나 할 테다. 심천에서 여자와 얽히기 싫었다. 아르바이트 하는 여학생이 자꾸 미소짓는 것도 귀찮았다.

안교수가 사무실 문짝을 콰당 밀치고 들어왔다.

뒤를 따라 문교수와 유선생도 걸어들어왔다.

안교수는 명희와 석규에게 차가운 오렌지 주스를 한 병씩 쥐어주었다. 석규는 반갑게 따서 마셨다.

"명희씨 왔네?"

"네, 안녕하세요?"

"조교수 안 왔어요?"

"네, 오늘은 안 오실 건가봐요."

문교수가 들어오자마자 명희에게 말을 건넸다.

석규는 김태희처럼 깨끗한 인상의 명희가 갑자기 역겨워졌다.

"박필 선생도 오셨는데 그냥 우리끼리 간단하게 얘기하고 맥주 한 잔 하러 갑시다."

안교수가 자리를 정리하자 다들 둥글게 회의 대형으로 모여앉았다. 석규는 잠시 84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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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인사를 나눠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서 있다가 안교수가 가리키는 유선생 맞은편에 앉았다. 안교수가 유선생 옆에 앉아 자료를 펼쳤고, 유선생은 언제나 그렇듯이 아침 먹은 게 속에 걸린 듯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앉아 있었다. 문교수는 새로 사 온 꽃병이라도 보듯 명희를 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옆에 앉은 석규에게 반갑습니다 하며 가볍게 손을 건넸다. 석규는 어색하게 문교수의 손가락만 살짝 잡았다 놓았다.

명희는 가방에서 케이블을 꺼내 책상에 소리나지 않게 살며시 내려놓았다. 회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은숙이 없는 조용한 사무실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새 책상까지라니.

안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선생, 여기 만화과에 새로 출강하시는 박필 선생이에요. 박선생 이쪽은 덕천초등학교 유승목 선생님이시고."

석규는 고개를 깊게 숙였지만 유선생은 목을 살짝 까닥였다. 석규는 순간 기분이 팍 상했다. 두루미처럼 생긴 주제에 모가지 되게 뻣뻣하네. 재수 없는 자식. 석규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다시 들었지만 찌푸려진 눈살은 감추지 못했다.

유선생은 유선생대로 석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선 잘 생겨서 싫었다. 그냥 깔끔한 인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남자답고 단단한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다.

여자들의 생각과 달리 남자들끼리도 외모에 대한 질투는 엄연히 존재한다. 게다가 젊고 나름대로 만화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작가니, 은숙이 마음에 안 둘리 없을 것 같았다. 상상력 많은 유선생은 머릿속에 벌써 은숙과 석규가 놀아나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상상만 해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박동치는 것 같다. 왜 나한테는 좋은 일이 하나도 없는 걸까.

"이미 아시다시피 환경 교재 집필은 박선생이 맡아주시기로 했고, 유선생님이 내용 감수를 해주실 겁니다. 박선생님이 교재용 만화는 처음이시라지만 유선생님은 이전에도 여러번 하셨으니까, 박선생 모르는 거 있으면 유선생한테 기탄없이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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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석규는 끄덕였지만 유선생의 우울한 표정을 보니 벌써 만나기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환경 교육이라면 컨셉트가 너무 모호하지 않나? 구체적으로 범위가 어느 정도 되는 거예요 안교수?" 문교수가 물었다.

"일단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면 다 들어갈 수 있다고 봐야겠죠. 하지만 초등학생 대상이고 또 만화 교과서니까 애들 흥미를 자극해주고 재미있어야겠지요.

캐릭터도 귀여워야지."

안교수가 심드렁하게 받았다. 석규도 고개는 끄덕였다. 어딜 가나 만화는 당의정 취급밖에 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대접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석규는 자료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전체적 구상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유선생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재미도 재미지만 만화 이전에 교과섭니다. 한 번 읽고 깔깔거리다 버리는 거면 곤란합니다. 신중해야죠. 신경 쓸 부분이 많을 겁니다.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죠."

유선생의 까칠한 태도에 안교수의 얼굴이 살짝 벌개졌다. 문교수도 인상을 슬쩍 구겼다. 석규는 픽 웃었지만 딱히 유선생의 말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었다. 꼭 저런 친구가 나중에 발목을 잡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게 마련이라니까. 물론 꼼꼼하고 신중해야 하는 건 알지만, 솔직히 이런 일 열심히 해 주긴 싫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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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영호의 귓가에 주방에서 조그맣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 같지는 않다. 미진인가? 잠결에도 발소리와 그릇 움직이는 소리로 주방에서 소리를 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미세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미진이 같다.

아내는 일찍 나갔거나 아니면 아직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영호는 늘어지는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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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퍼진 가죽을 끌어모으듯 해서 겨우 일어났다. 애 혼자서 물 마시려다 그릇이라도 깨면 좀 곤란하다. 베인 자리야 꿰매면 되지만 와이프의 잔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주워담을 길이 없으니까.영호는 눈을 비비면서 주방으로 나갔다. 헝클어진 머리의 미진이가 물컵을 든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방에서 나온 영호를 바라보았다. 유희왕 카드에서 빠져나온 괴물이라도 본 표정이다.

"자아식, 그게 아빠 보는 표정이냐?"

미진이는 고개를 돌리더니 물컵을 가까스로 식탁에 올려놓고 다시 냉장고로 다가갔다. 물통을 꺼내려는 모양이었다.

"가만 있어. 아빠가 해줄게…."

영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은 꽂아 둔 전기 플러그가 서운하도록 썰렁했다. 눈을 비비면서 물통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애가 목마를만도 하네. 아 나도 목마르다. 미진은 냉장고에 고개를 박은 영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진아, 물통이 어디 있냐?"

"몰라."

미진은 어느 새 찬장에서 물주전자를 꺼내 수돗물을 담고 있었다. 영호는 아이 손에서 주전자를 빼앗았다.

"물 그냥 마시지 말고 끓여서 마시자. 보리차 어디 있니?"

미진은 보리차가 뭔데, 하고 고개를 도리질쳤다.

영호는 일단 가스불을 켜고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찬장을 뒤졌지만 보리차 비슷한 것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영호는 가스불을 끄고 생수를 사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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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을 보니 벌써 낮 열두시다. 이 여잔 어디로 사라졌어? 영호는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내의 멀쩡한 목소리에 영호는 잠시 화가 치받쳐서 몇 초간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야?"

"회사. 이제 녹음 끝났어. 인제 일어났니?"

"무슨 녹음을 만날 밤새서 해? 이런 개 같은 회사…."

"뭐?"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집안에 물 한 방울 없어, 이 한심한 여자야."

"……"

"일을 하고 다녀도 애는 먹이고 입히고 다녀야 할 거 아니야? 집안 꼴이 이게 뭐니?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애는 쫄쫄 굶어서 수돗물이나 틀어 마시려고 하고. 우리집이 무슨 결손가정이냐?"

"그래서?" 그래서? 영호는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래서라니? 지금 그게 할 소리냐?"

"그래서 미진이한테 수돗물 먹였니?"

"수돗물 먹였냐고? 집안 샅샅이 뒤져봐도 보리차 한 봉지 없어서 생수 사러 나왔다.

아우 씨발… 네가 엄마냐?"

영호는 휴대폰에 대고 한참 주절거리다가 전화기 저쪽이 침묵을 지키자 흠칫했다.

평소 같으면 영호 못지 않게 큰 목소리로 대꾸했을텐데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직 물 한방울 못 마신 게 억울한 나머지 전화를 걸어 마구 해대긴 했지만 순간 미안해졌다. 정작 자신은 어제 밤새 어울려 술 마시다가 새벽 다섯시경에 집에 들어온 주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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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여보?"

"……"

"여보세요?"

"김영호. 이 씹새끼야."

"여보세요?"

"너란 인간은 뭐 아빠냐? 내가 어제 문자 보내서 밤샘 녹음이니까 미진이 챙겨달라고 했지? 정 바쁘면 어머님한테 맡기든가."

"문자 받은 적 없는데."

"확인해 봐. 이 쓰레기야. 열두시까지 자면서 오전 내내 애 쫄쫄 굶긴 주제에 인제 전화해서 집에 물 한 방울 없다고 지랄을 해? 미진이가 굶은 게 아니라 니가 굶은 게 억울하겠지."

"……"

"생수 한 통 사러 가는 게 그렇게 억울하냐? 애한테 밥 한 끼 해주는 게 그렇게 몸서리치게 싫으니? 아니, 어머님 집에 데려다 주는 것도 못하겠니? 자식이 그렇게 귀찮으면 고아원에 갖다 처넣든가."

"야이 씨발…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지금 집으로 간다. 나도 니 새끼 챙기는 거 졸라 귀찮아서 고아원에 맡기러. 집에서 꼼짝말고 기다리고 있어."

틱, 전화가 끊겼다. 영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PDA 가 아스팔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인내심에 PDA 화면에 반짝거리고 있는 아내의 문자 메시지가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제기랄, 영호는 바로 회사로 향했다.

심천 SBC 방송국 편집실 안.

영호는 베타테이프와 6 미리 테이프들을 쌓아놓고 본격적인 밤샘 편집 준비를 시작했다. 일주일 뒤 내보낼 환경 특집 프로그램에 삽입될 자료화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PDA 는 전원을 꺼둔 채 집에 놓아두고 나왔다. 아직 와이프와 대판 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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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맛이 남아 아무에게서도 연락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편집기 앞에 가득 채워져 모락모락 향기나는 김을 피어올리는 커피 주전자와 지저분한 머그컵까지 세팅을 마치고 나자 영호는 생각이 달라졌다.'전화기 집에 두고 왔어요. 오늘 밤샘 편집할 테니 강의 끝나면 방송국에 들러요.'

은숙에게 문자 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자 영호는 기분이 한결 나아져 편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먼저 ENG 카메라로 찍은 베타테이프부터 편집기에 밀어넣었다.

일단 손에 속도가 붙으면 다섯, 여섯 시간은 거뜬하게 붙어 앉아 해치우는 게 방송 편집이다. 영호는 사실 그저께 빠진 술독에서 미처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방송쟁이로 뛴 지 10년, 밤샘 편집을 하기 전에 반드시 머리를 신선한 알코올로 흠뻑 적셔주지 않으면 조그셔틀 버튼을 돌리는 감각이 살아나지 않은 지 오래였다.

영호는 연신 커피를 들이켜면서 베타테이프를 재생시켰다. 일부러 카메라 이감독을 이끌고 바닷가와 산을 헤매며 ENG 를 돌렸지만 쓸 만한 화면이 많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찍을까보다."

영호는 이면지에 편집할 화면의 타임 코드를 적은 다음 공청회를 담은 6 미리를 재생시켰다. 공청회 화면이야 뻔한 것이니 쓸 만한 코멘트를 따서 CG 로 처리하는 방법도 생각해두어야겠다.

화면에 은숙이 잡혔다. 영호는 웃음을 빼물었다. 꽤 오랫동안 은숙의 모습이 촬영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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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졸음에 눈을 깜박거리다 낙서를 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 관능적이다. 공청회 촬영분과 지난번 '내고장 환경지킴이' 출연분까지 합쳐서 기념삼아 편집해줄까 싶었다. 대낮의 따끈따끈한 정사 장면도 찍어놨으면 좋으련만…. 조은숙 교수 특집?

낄낄.

6 미리 테이프의 타임코드까지 메모하고 나니 자정이었다. 머리가 뜨겁다. 영호는 커피로 허기를 씻어내린 다음 몸을 쭈욱 뻗었다. 갑자기 은숙이 궁금해졌다. 어디 있는 걸까. 오기는 하는 걸까.

한편 은숙은 SBC 방송국에 마악 볼보를 대려던 참이었다. 자정이 지난 방송국 건물은 대낮인 양 몇몇 창문이 빛을 내뿜었다. 방송도 못할 짓이구나, 은숙은 중얼거리며 졸고 있는 경비 앞을 지나 지하 편집실로 향했다. 손에는 생선초밥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젓가락은 두 개였다.

영호는 은숙 못지 않게 초밥을 반겼다.

"언제 방송할 건데 오늘 밤 새는 거예요?"

"시간은 많은데, 원래 편집이란 게 한 번 속도가 붙으면 멈추기가 힘들어서 할 때마다 밤을 새게 돼요."

"힘들겠네요."

"힘들긴요. 스태프들끼리 같이 밤 새면 동료의식도 높아지거든요. 이렇게 누구 불러다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배가 부르면 밤샘 도중 잠이 올지도 모르지만 초밥은 그런 생각을 잊게 해 줄 만큼 맛있었다.

"은숙씨, 공청회 촬영분 한 번 볼래요?"

"시청에서 한 거요?"

영호는 타임코드를 찾아 보여주었다. 은숙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잠기가 쏟아진 자기 얼굴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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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요? 이런 모습 찍어서 기분 나빠요?"

"나쁘긴요."

"안 좋은 일이 있었나보죠?"

"누굴 미워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죠."

은숙은 한숨을 폭 쉬었다. 영호는 은숙의 옆 얼굴선을 눈동자로 훑다가 이 여자가 누굴 미워하기 시작하면 끝도 한도 없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갑자기 딸을 고아원에 처넣겠다던 와이프의 음성이 떠올랐다. 물론 말뿐이었지만 그녀는 정말 미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지금까지 장인 장모에게는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그러나 영호는 가정 생활이 불행하다고 해서 애정생활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누굴 미워하는데요? 누가 은숙씨 미워해요?"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사람 같아요?"

"사람 미워하는 건 소모적이죠. 은숙씨는 누굴 미워하기보단 질투하는 게 어울려요.

마녀처럼. 지금도 누굴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아요."

은숙은 크게 미소를 지었다. 생긴 거답지 않게 말재주가 있네. 영호가 단지 은숙의 먹기 좋은 겉모양만 보고 좋아하는 건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숙은 답례로 영호에게 키스했다. 커피향과 생선 비린내가 달콤하게 뒤섞였다.

영호는 은숙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통해 머리끝까지 전해왔다. 안으면 안을수록 휘감기는 맛이 일품인 여자다. 땀냄새와 커피향이 뒤섞인 영호의 체취가 전해지자 은숙도 금세 나른해졌다.

은숙은 한동안 포옹하고 서 있다가 갑자기 겁이 더럭 났다.

"이 시간에 또 누가 불쑥 들어오는 거 아니에요? 지난번 예비군들처럼…."

영호는 킥킥거리다 편집실 문을 아예 잠가버렸다. 은숙은 방송 테이프가 빽빽이 꽂혀 있는 진열대 사이로 들어갔다. 철제 진열대에는 먼지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꼭 도서관 같다. 영호가 뒤따라와 진열대에 기댄 은숙을 껴안았다. 은숙은 대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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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잘 도서관에서 키스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누구였더라.

영호는 은숙의 탄력을 확인이라도 하듯 허리를 부여안았다. 금세 묵직해진 영호의 아랫도리가 은숙의 삼각주를 파고들었다.

"기분전환 시켜주고 싶어요." 영호가 속삭였다.

"무슨 기분 전환요?"

"일본 갈래요?"

"일본요? 지금?"

"지금 말고…. 좀 나중에요. 이번달 말이나 다음달쯤."

"어떻게 가요?"

"어떻게 가긴 그냥 가는 거지. 같이 기분 전환하고 싶어요."

은숙은 영호에게 뜨겁게 키스했다. 영호는 은숙의 몸을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와이프의 짜증 섞인 얼굴이 떠올랐지만 애써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대신 이미 뜨거워질대로 뜨거워진 여인의 향기로운 육체가 그를 반겼다. 아, 하면 아, 하고 어,

하면 어, 하면서 두 사람은 궁상각치우로 녹아내렸다.

한 시간 뒤 은숙은 편집실을 떠났다. 다른 때 같으면 영호는 편집을 미뤄놓은 채 당장 모텔로 갔을 것이다. 편집실에서의 스릴 넘치는 섹스만으로는 두 사람의 열망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방영이 촉박한 테이프를 이 밤 안으로 해결해야 했다.

은숙은 집으로 가려다 운전대를 바닷가 쪽으로 틀었다. 바로 집에 가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달아오른 몸을 삭여야 했다. 이 기분은 분명 성욕만은 아니었다. 바닷바람을 쐬며 맥주 한 캔만 마시고 싶었다.

은숙은 해수욕장 인도 옆에 차를 세우고 슈퍼마켓에서 딱 맥주 한 캔만 샀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라 해수욕장은 호젓하다. 은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구두를 벗어서 한쪽 손에 들고, 한 손에는 핸드백과 맥주캔을 들고 모래사장에 맨발을 디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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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한 해수욕장에는 파도 소리만 조용히 메아리치고 있었다. 자정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이 불꽃놀이를 하며 시끄럽게 놀더니, 지금은 금빛 모래에 잿가루 흔적만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대신 연인인지 신혼부부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커플이 강아지를 끌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은숙은 걸으면서 맥주 캔을 따서 쭉 목구멍에 흘려넣었다. 고개를 젖히자 군청색 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다. 달이 뜨지 않은 대신 별빛이 두드러졌다.

발바닥에 밟히는 모래 감촉이 까끌거리면서 시원하다. 문득 영호 생각이 났다. 같이 손만 잡고 걸으면 좋았을 걸. 그녀는 개를 산책시키는 커플을 뒤돌아보았다. 둘다 스스럼없이 발목을 바닷물에 적시는 모습을 보니 연인이 아니라 신혼부부처럼 보였다.

다행히 은숙이 더 외로움을 느끼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 여보세요?"

" 은숙씨, 나예요."

" 네."

" 집에 잘 들어갔나 해서요."

" 아뇨, 아직 안 들어갔어요."

" 아직요? 에구…. 지금 세 시가 가까운데,

어디서 뭐 하고 있어요?"

" 바닷가예요."

" 바닷가요? 혼자서?"

은숙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바닷가 쪽으로 향했다. 전화기를 붙든 영호 귓가에 희미하게 파도가 철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그런 데 혼자 가시면 누가 잡아가요." 영호가 소리쳤다. 은숙은 휴대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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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댔다.

"안 잡아가요. 여긴 내 지역구니까."

"지역구요? 하하."

사실은 심천 전체가 내 지역구라고요, 은숙은 소리나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 지역구에서 이제야 당신을 찾아내다니.

"조금만 걷고, 얼른 집에 들어가요."

"사랑해요."

"네?"

"영호씨 말대로, 조금만 걷고 분위기 잡다 들어갈게요. 편집 잘 해요."

은숙은 휴대폰 폴더를 탁 접었다. 영호는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은숙이 내뱉은 사랑한다는 말이 그다지 급작스럽게 들리지 않아 스스로도 놀랐다.

은숙은 그 뒤로도 며칠 동안 푸른심천 사무실에 가지 않았다. 명희 꼴도 보기 싫었고,

예쁘장한 명희를 보며 해해거리는 문교수와 안교수도 보기 싫었다. 은숙이 잠수를 타는 동안 두 사람은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던 것이다.

유선생도 얼마전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부딪친 뒤 은숙을 찾아오기는커녕 개인적인 연락을 끊고 있었다. 은숙은 그런 유선생의 면모가 더욱 매력없게 느껴졌다.

살다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지, 실수 한 번 하고 나서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감쪽같이 사라지는 꼴도 영 밉상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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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제일 밉상맞은 건 역시 명희였다. 은숙은 원래 여자와 친해지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늘 남자들 틈에 섞여 일을 했고, 여자친구들과 어울리는 대신 그 시간에 데이트를 했다.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는 태반이 남자였고, 학생 때도 언제든지 전화를 걸어 일상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도 대부분 남자였다. 그중에는 예전에 사귀다 헤어지고 친구가 된 사람도, 드물지만 처음부터 마음 맞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20 대가 지나고 대부분 유부남이 되자 선뜻 전화걸기가 어려워졌고,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러던 중 임용이 되어 심천에 내려오자 은숙에게는 친구랄 만한 친구가 거의 없어졌다. 쌀쌀맞은 은숙의 성격에 따르는 학생도 있을 리 없고.

그런 상황에서 푸른심천에 발을 끊으면 사실 외로워지는 쪽은 은숙이다. 은숙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여기까지 푸른심천을 키워온 공적이 혁혁한 은숙을 이런 식으로밖에 대접하지 않는 멤버들이 미워졌다. 그 예쁘장한 기집애, 간사로 키워서 토론회라도 내보내 보라지.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면서 배시시 웃기만 할 걸.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은숙은 강의가 끝난 뒤 푸른심천 사무실에 갈 준비를 했다. 무려 일주일 동안 칩거한 끝에 조그만 백기를 든 셈이다.

그러나 차를 출발시키기 직전 은숙은 마음을 바꾸고 문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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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조교수? 요새 왜 이렇게 안보여? 둔갑술이라도 써요?"

은숙은 픽 웃었다.

"안 웃겨요, 문교수님."

"안 웃겨?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사무실에 너무 안 오시네요."

"제가 바쁜 걸 문교수님이 어떻게 아세요?"

"명희씨가 그러던데 조교수님 요새 바쁘시다고. 오랜만에 개인전 기획하고 있다면서요?"

은숙은 순간 이가 갈렸다. 개인전? 이거 무서운 애네. 내 등 뒤에서 무슨 시나리오를 써서 뿌리고 다니는 건지.

"네, 그동안 강의에만 바빠서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 만들어볼 생각 하고 있어요."

"좋네요. 그래도 사무실엔 들러야지. 강의 끝났을 시간인데 오늘은 올 거죠?

"조금 늦을 거예요."

"늦어요? 뭐 늦어도 괜찮아요, 저녁에 박필 선생 환영회 있으니까 '그때 거기'로 와요."

은숙은 전화를 끊었다. 명희가 괘씸해진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개인전을 열고 싶어지는 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저녁 여덟시, '그때 거기'. 안교수와 문교수, 유선생, 석규와 명희가 둥글게 앉아 있었다. 은숙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조교수님 오늘도 안 오신대요?" 안교수가 물었다.

"아니, 올 거 같애요. 오후에 전화했거든."

"요새 왜 그렇게 안 보이신데요?"

"명희씨 말대로 요새 작품 만드는 데 좀 집중하고 싶다시나."

"안교수님 별걸 다 신경쓰시네요." 갑자기 유선생이 입을 열었다.

"내가 뭘?"97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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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조교수님 그렇게 신경을 쓰셨어요?"

"내가 뭘 신경을 썼다고 그래요. 조교수가 요새 사무실에 잘 안 보이니까 궁금해서 그런 거지. 유선생은 조교수 요새 어떻게 지내는지 안 궁금해요?"

"굳이 궁금할 이유가 있습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 갑자기 뜸하면 당연히 궁금한 거지."

"……"

"유선생 도대체 요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내가 궁금해 하든 말든."

"안교수 말이 맞아. 나도 조교수님 요새 뭐하는지 되게 궁금해요."

안교수 말끝이 날카로워지자 문교수가 얼른 자르고 들었다.

"그렇게 궁금하시면 연락을 하시면 되지 이런 자리에서 뜸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지요."

"쳇, 내참…."

"……"

"알았어요, 조교수 근황 안 궁금해. 하나도 알고 싶지 않아. 됐죠 유선생?"

정 보고 싶으면 찾아가든지 연락을 하든지, 얼굴 못 보는 걸 왜 나한테 화풀이하나.

안교수는 이제 유선생이 짜증나다 못해 가엾어질 지경이었다.

은숙은 몇 시간 동안 연구실에서 뭉개다가 결국 '그때 거기'로 갈 준비를 했다. 미리 문교수에게 전화를 해두긴 했지만 영 내키지가 않았다. 솔직히 가기 싫다. 그러나 더 이상 얼굴을 비치지 않는 것도 곤란했다. 조금만 더 자리를 비웠다간 은숙이 푸른심천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잡기는커녕 책상부터 빼줄 분위기니까. 그러니, 일단 움직이자.

"네, 여기 다 있어요. 빨리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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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이라, 명희도 낀 모양이다. 은숙은 휴대폰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얼굴에 미소를 준비했다. 오늘은 명희가 무슨 공격을 해올지라도, 연륜으로 맞서는 거다.

은숙은 호프집 문을 밀고 들어섰다.

"다들 안녕하셨어요."

"조교수, 어서 와요."

문교수가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안교수도 미소지었고 명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은숙은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웃어는 주는구나.

"오랜만이죠?"

"뭐하느라고 그동안 잠수를 탔어요?"

"그냥 기분전환 좀 했죠. 이것저것, 혼자 있는 시간을 좀 가질까 해서….

유선생님도 안녕하셨어요?"

"그냥 들어오시지 뭘 다 와서

전활합니까?"

"네?"

"그리고 조교수님, 꼭 문교수님한테만 전화하시더라."

유선생의 말에 은숙은 약간 화가 났지만 '유선생은 제가 반갑지 않으신 모양이죠'

라며 가볍게 받아넘겼다. 유선생이 작은 목소리로 '미안해요'하고 대꾸했다. 은숙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유선생이 반겨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사탕을 안 주면 안 준다고 떼쓰고, 주면 더 자주 달라고 떼를 쓰고, 자주 주면 다른 걸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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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를 쓸 테니까. 아예 신경 꺼버리는 게 좋은 남자다.

"조교수 오늘 처음 보시지? 지난번에 말씀드렸는데, 만화과 박작가님. 이쪽은 같이 활동하시는 조은숙 교수님이에요."

안교수가 뒤늦게 소개를 했다. 석규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필이라고 합니다."

"조은숙입니다."

은숙은 앉은 채로 고개를 까딱하고, 바로 고개를 돌려 안교수와 얘기를 나눴다.

"지난번에 저한테 말씀 안 하신 거 같은데요. 안교수님."

"말씀 안 드렸었나?"

"네."

안교수는 괜스레 뻘쭘해졌고, 은숙의 냉랭한 태도에 금세 분위기가 졸아들었다.

명희도 입을 다물고 있었고 문교수도 어떻게 끼어들지 몰라 조금 난감해하다가 결국 잔을 채웠다.

"아 이제 조교수님도 오셨고 하니까 건배 한 번 합시다. 건배."

위하여, 하고 모두들 잔을 비웠다. 은숙은 잔을 기울이는 명희를 슬쩍 쳐다보았다.

여전히 언제 봐도 예쁘다.

석규는 맥주를 마시면서 은숙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일단 예의없는 태도에 팍 짜증이 났다. 그리고 석규의 타입도 아니다. 꽤 세련돼 보이지만 진한 화장과 비싼 옷을 벗겨내고 나면 별로 예쁜 것도 아니었다. 예쁜 게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건 여기서 은숙이 석규의 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여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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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대학이 군대도 아니고, 나이 많은 선배 교수들 눈치보기도 바쁜데 이런 여편네 비위까지 맞춰야 하다니. 초면에 데면데면하게 구는 걸로 보아 성격이 부드러워 보이지 않는다. 아마 길들이려는 모양인데 사람 잘못 봤다. 석규는 오래 전부터 자신을 길들이려 드는 여자라면 이골이 나 있었다. 특히 은숙처럼, 암고양이처럼 고개를 빳빳이 돌리고 '내 옆얼굴을 감상하세요'하는 오만한 타입이라면 더더욱 석규에게 약발이 받지 않았다. 길들이려는 의도가 남자로서인지 단지 단체 내 파워게임의 일환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석규는 은숙이 그다지 똑똑하거나 힘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얼굴이 왠지 낯익다.

어디선가 오랫동안 만난 듯한 인상이다. 어디서 봤더라?

한편 은숙은 잔을 기울이면서 문교수, 안교수와 담소를 나눴다. 명희에게도 '해보니까 어때? 재미있니? 계속 하면 더 재미있는 일 많이 생길거야"라는 둥,

마음에도 없는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명희도 은숙에게 애교스러운 미소로 답했다.

어휴, 소름 끼쳐라.

저 미소짓는 순간만큼은 진심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저런 애정어린 표정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푸른심천의 앞날이 불안하다. 그러니까 내가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거다. 암.

은숙은 명희 못지 않게 화사한 웃음을 날리며 술자리의 분위기를 띄웠다. 문교수가 기분이 좋다며 아는 횟집으로 2 차를 가자고 외쳤다. 은숙도 안교수도 합세했다. 아싸.

횟집에서의 2 차 자리는 자정 가까이까지 계속됐다. 남 못지않은 주량을 자랑하는 문교수와 안교수도 상당히 취했고, 은숙과 석규도 잔뜩 취해버렸다. 유선생은 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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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술을 마시는 상태에 이르렀다. 명희는 열한 시쯤 되자 연방 비워내는 소주병의 행렬에 기가 질려 먼저 가버렸다.

“죄송해요, 먼저 갈게요.”

은숙은 반갑게 손을 흔들어줄 힘도 없을 만큼 취해 있었다. 의외로 술에 약하구나.

술로 이길 줄은 생각지 못했는데. 어쨌든 약점 하나는 찾은 셈이다. 그러면 앞으로 술자리 정치를 구사해야 되는 건가.

그나저나, 은숙도 석규가 은숙을 마음에 안 들어하는 만큼 석규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이목구비 생긴 거야 출중했지만 원래 은숙은 남자의 외모에 큰 점수를 주지 않았다. 초면에 쌀쌀맞게 대한 건 은숙 잘못이지만 석규의 냉랭한 태도도 재수없다.

은숙이 말할 때는 고개 숙인 채 술잔만 내려다보다가 문교수나 안교수가 입을 열면 얼른 경청하는 척하는 게 ‘너 같은 것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사표시가 분명했다.

근본적으로 여자를 우습게 보는 스타일이었다.

유선생과는 눈도 안 마주치는 걸 보니 내가 왕림하기 전에 벌써 칼 한번 맞댄 분위기고…. 은숙은 취한 머리 한구석을 동원해 대충 석규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경험적으로 은숙을 여자로서 좋아하지 않는 남자 치고 도움되는 남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석규는 마이너스에 가깝다.

은숙은 문교수와 단체 이야기를 하다가 안교수의 야한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고, 기절 직전의 유선생을 건드려보다가 문득 영호가 보고 싶어졌다. 석규는 취할수록 말이 없어졌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취중에 말이 막 나올까봐 일부러 입을 다문 탓이었다. 친구들과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자유롭게 떠드는 술자리 분위기가 그리워졌다. 주말에 서울로 한번 도망쳐버릴까.

갑자기 휴대폰이 메시지 수신을 알렸다. 석규는 이때다 싶어 잠시 휴대폰을 들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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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자리 안 끝났어요? 대단하시네요.’

모르는 번호다. 석규는 몇초 동안 아리송하다가 명희를 생각해냈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아냈지? 새파란 게 맹랑하긴…. 술자리 내내 배시시 쪼개면서 눈웃음을 치던 명희가 떠올랐다. 석규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찬물로 세수를 했다.

화장실을 나오려다가 석규는 벽에 기댄 은숙을 발견했다. 머리가 아픈 모양인지 은숙은 비스듬히 벽에 머리를 대고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자리로 안 가시고 뭐 하세요?”

“머리가 좀 아파서요.”

“네.”

“화가시라고요?”

“아뇨, 만화갑니다.”

“만화가요?”

“예.”

“아, 만화…. 만화가시구나.”

은숙은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석규는 취중에서도 부아가 났다. 보면 볼수록 버릇이 없다.

“……”

“뭐, 잘해보죠. 이왕 한 배 타신 거…”은숙은 배시시 웃었다.

“여기 사람들 다 좋으세요…. 문교수님, 안교수님, 유선생님도 좀 예민하지만 순수하시고. 명흰가 뭔가 하는 애는, 잘 모르겠고요. 휴우~”

은숙은 주정인지 애교인지 모를 소리를 늘어놓았다. 석규는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눈빛에 ‘너 재수없어’라는 뜻을 담으려 애를 썼다.

“조교수님은, 제가 맘에 안 드시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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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요?”

“……”

“댁은 뭐 내가 맘에 들어요?”

알긴 아는구나. 석규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몸짓을 했지만, 은숙은 벌써 가버린 직후였다.

석규가 자리로 돌아오자 문교수가 손짓을 했다.

“조교수 어디 갔어요?”

“예? 누구요?”

“조교수님. 아까 화장실 가는 것 같던데 못 봤어요?”

“자리로 가시는 것 같던데요. 저는 세수 좀 하느라고…”“먼저 가셨나? 하긴 많이 취했더라. 자, 우리도 갑시다.”

석규는 축 늘어진 유선생을 부축했다. 밖으로 나오니 역시 은숙의 볼보는 보이지 않았다.

“박작가님…?”유선생이 갸날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

“조교수님은?”

“먼저 가셨어요.”

“아아.”

유선생의 몸이 대책없이 늘어지자 그만 석규는 유선생과 엉켜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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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가 거나했던 다음날 은숙은 푸른심천 사무실로 향했다. 차가운 샤워로 취기를 말끔히 씻어낸 직후였다. 오늘은 강의가 없는 날이라, 오전에 사무실을 혼자 지키면서 책상도 치우고 밀린 일도 처리할 생각이었다. 문교수, 안교수와 유선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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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술자리의 여파로 느지막이 나오거나 아니면 들르지 않을 게 뻔했다.

예상대로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은숙은 문을 열고 창문까지 모두 열어젖혔다. 소금 냄새가 밴 심천의 공기를 사무실

가득히 끌어들였다. 환기를 시키고 난 은숙은 컴퓨터로 음악을 켜고 책상을 닦았다.

마치 학교에 제일 먼저 도착해 친구들을 기다리며 혼자 노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오전 8 시 반. 은숙은 사무실 문과 창문을 다시 닫고, 음악을 껐다. 기분이 상쾌했다. 은숙은 의자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온 샌드위치와 우유팩을 뜯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두 입 먹으면서 그녀는 고요를 음미했다. 시내 한복판의 사무실에서도 평화로운 침묵을 가질 수 있다니, 행운이다.

의자에 앉아 발을 까딱까딱 흔들던 그녀의 시선에 뭔가 낯선 것이 잡혔다. 사무실 구석에 새 책상이 놓여 있었다. 은숙은 먹던 것을 놓아두고 다가갔다. 못 보던 책상이잖아? 밤색 책상이었다. PC 와 새 서류철이 나 보란 듯이 놓여 있었다.

은숙은 기가 막혀 책상 다리를 발로 쾅 걷어찼다. 발끝이 아팠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활동비가 남아 돌아도 쓸 데가 따로 있지? 잡일이나 시킬 아르바이트한테 새 책상에 컴퓨터가 무슨 가당치도 않은 대우란 말이야! 아예 명함까지 찍어주시지?

흠집이 크게 날 정도로 다시 책상을 걷어차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비싼 구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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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할까봐 은숙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아 남은 샌드위치를 먹어치웠다. 공청회 출석이니 방송이니 궂은 일은 나한테 다 떠맡기고 자기네들은 탁구나 치고 술이나 마시러 다니면서… 힘들게 일한 사람한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젊은 여자한테 반해 해해거리는 꼴이 우습고 역겨웠다. 평소엔 명희씨 명희씨 하며 떠받들다가 정작 일이라도 닥치면 '조교수~'만 찾을 게 뻔하다. 어휴 짜증나.

은숙은 애꿎은 새 책상을 노려보다가 필통 속의 커터칼에 시선이 멈췄다. 새 책상 들인 액땜이나 한 번 해줄까. 우유팩을 다 비운 은숙은 새 책상을 노려보다가 슬로 모션으로 천천히 일어났다.

그때 갑자기 사무실 문이 삐꺽 열렸다. 은숙은 팍 주저앉았다. 안교수다.

"어? 열려 있었네…. 조교수님 나오셨어요?"

은숙은 한 손에 우유팩을 든 채 인사도 못하고 안교수를 쳐다보았다. 깜짝이야.

"네. 안교수님도 일찍 나오셨네요."

"아침 드시는 중이셨나봐요?"

안교수는 은숙을 쳐다보다가 묘한 손짓을 했다. 입에 우유 자국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은숙은 당장 알아채지 못하고 허둥지둥 책상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어젠 잘 들어가셨어요?"

안교수는 소파에 앉아 담배부터 꺼내 물면서 은숙에게 말을 걸었다.

"네. 대리운전 불러서 집에 들어갔어요. 자리, 오래 안 갔죠?"

"우리도 금방 일어섰어요. 유선생 취해가지고 넘어지고, 어제 과하게 마시긴 마셨지…."

"네…. 그런데 안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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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저게 뭐예요?" 은숙은 한 손으로 명희의 새 책상을 가리켰다.

"아, 저거? 명희씨 책상이잖아요?"

"남는 책상 있잖아요."

"그거요? 아…. 쓰다 보니까 너무 낡아서 흔들흔들하는 데다 PC 케이블 꽂을 구멍도 없고해서, 도저히 못 쓰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하나 샀어요."

"도저히 못 쓰겠다고 누가 그래요?"

"누가 그랬냐구요? 나야 자세히는 모르고 듣기만 했는데요."

"그럼 결재는 누가 했어요? 문교수님께서 하셨어요?"

"…내가 안 했으니까 문교수나 유선생 둘 중에 한 사람이 했겠지 뭐."

"… 어휴. 지금 우리가 새 책상 새 의자 사들일 형편이에요? 그렇게 활동비가 남아 돌아요?"

"…."

"쟤 월급 주는 것도 만만치 않잖아요. 여기가 회사는 아니지만 불필요한 지출은 필요없잖아요."

"뭐 필요하다니깐…."

"아무리 필요해도 그렇지, 저한테 말씀 한 마디 없이 저런 걸 들여놓으셨어요?"

"조교수가 사무실에 뜸해서 연락 못 했나 보죠, 뭐."

사무실에 나오지 않아서 연락을 못했다는 말에 은숙은 더 부아가 났다.

"아니, 안교수님?"

"왜요?"

"사무실에 뜸하다니요. 누가 들으면 제가 한 달 정도 사무실 비운 줄 알겠네요."

"…."

"사무실에 안 나왔다고 해도, 같은 학교 다니는 입장에서 한번쯤 연구실로 찾아와 줄 수 있는 거잖아요. 찾아오기 귀찮으시면 전화는 뒀다 뭐해요. 우리가 전화 한통 거는 게 민망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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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섭섭하네요. 사무실 좀 비웠다고, 이런 식으로 대접받는 건."

"미안해 조교수."

"정말 미안하신 거예요?"

"?"

"…안교수님도 아시잖아요. 이런 일, 사실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니고…. 하다 보면 보상도 없고 지치잖아요. 그럴 때면 다 그만두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든지, 집에 틀어박혀 푹 쉬고 싶어지잖아요. 누구나 그렇지 않나요?"

"그럼, 그렇지."

"잠깐이나마 쉬고 싶어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 갖고 있었는데, 이렇게 의사결정과정에서 싹 배제당해 버리면…. 더구나 여기가 회사도 아니고, 같이 운동하는 입장에서."

"이해해, 조교수. 정말로."

안교수는 은숙의 얼굴에 묻은 우유자국이 계속 신경쓰였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끄덕였다.

"서운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죠."

"알아요. 조교수 말대로라면 누가 운동하겠어요. 서로 도와줘야지."

"…고마워요. 안교수님."

은숙은 우유 묻은 입으로 미소를 보냈다. 안교수도 답례로 웃어 보였다.

"조교수님."

"네."

"말씀 듣고 보니 조교수가 그동안 단체 일로 많이 힘들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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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회에, 방송에, 그렇죠?"

은숙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살래살래 저었다.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요 조교수. 원래 운동이란 게 부담을 너무 가지면 오래 못해요. 조교수도 알고 있을 테지만."

"네. 정말 고마워요. 안교수님."

은숙은 어깨를 으쓱 하고 일어서 화장실로 향했다. 문이 닫히자 안교수는 참았던 웃음을 쿡쿡 터뜨렸다. 우유를 입가에 묻힌 채 진지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이 귀여웠다.

조은숙 교수 하는 짓이 여우같지만 저런 모습을 보니 새삼 측은하다. 겉으로만 잘 나가는 싱글 우먼이지 따지고 보면 그냥 노처녀에 불과했다. 그러나 좋은 남자는 눈씻고 찾아보기 힘든 심천에서 홀로 썩고 있으니, 안교수는 갑자기 은숙이 안쓰러워졌다. 그 직업에, 그 미모에,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도 아직 짝을 못 만나고 있으니 말이다. 오히려 은숙의 조건이 넘치는 게 문제다.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이미 결혼을 하고 안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다리를 절며 사무실을 나서는 은숙의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안교수는 머리를 흔들며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켰다. 다 넘쳐서 문제라니까.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한편 은숙은 화장실 거울을 보다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입가의 허연 우유 자국이라니. 은숙은 차마 거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물로 입을 씻어냈다. 얼굴은 물론 목과 귓불까지 뜨거워졌다.

아이고, 쪽팔려. 안교수가 얼마나 속으로 웃었을까.

은숙은 잇몸이 얼얼할 정도로 박박 양치질을 했다. 이게 다 명희 그년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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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질을 하고 나서 은숙은 화장실 문에 기대 섰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은숙은 텅 빈 화장실에서 잠시 웃음을 배어 물었다.

명희의 새 책상을 보고 솟구쳤던 짜증이 혼자 소외된 것 같다는 이야기로 번질 줄은 은숙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안교수는 잘 들어주는 눈치였다. 비록 우유 자국 때문에 좀 스크래치가 났지만, 방금 안교수를 상대로 늘어놓은 스피치는 은숙 스스로 생각해도 감동적이고 설득력이 넘쳤다. 인간적이고 솔직한 내용인 데다 어조도 완벽했다. 은숙 스스로도 도취될 정도였다. 그녀는 킥킥거리다가 이윽고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나자 은숙은 문득 푸른심천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새로 들어온 박작가라는 작자마저 한심한 인물이라면 이런 손바닥만한 단체쯤이야, 명희에게 먹혀버리는 건 시간문제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지금부터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폼만 잡는 단체일지라도 쉽사리 무너지도록 내버려둘 은숙도 아니었다. 그녀는 탁상 거울을 사러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10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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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강의를 끝낸 석규는 갤로퍼를 몰고 푸른심천 사무실로 향했다. 어제 억지로 먹은 술 탓에 여전히 머리가 욱신거렸다. 집에 일찍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강의가 끝나자마자 점심이나 같이 먹자는 안교수의 전화를 받았던 터였다.

에이, 귀찮아 죽겠네. 석규는 전화를 끊고 투덜거렸다. 체력들도 좋네. 전날 술을 퍼마셨으면 얌전하게 집에 들어가 속이나 달랠 일이지 뭐하러 사무실에 오전부터 기어나와 있담. 조은숙인가 뭔가 하는 여자도 같이 있는 모양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버릇없는 태도는 유난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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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향해 운전을 하는 도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석규는 보지도 않고 통화 버튼을 틱 눌렀다.

"여보세요?"

" 임마, 나다."

석호다.

" 형, 나 지금 운전중이야. 끊어."

" 짜아식, 지방에 무슨 휴대폰 단속이야.

서울에서도 어쩌다 한 번 잡는거."

" …."

석호 말이 맞긴 하다. 석규도 심천에 내려오고 지금까지 휴대폰 단속은커녕 음주운전 단속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뭐 별건 아니고, 잘 있나 해서 전화 한 번 해봤다. 잘 지내지?"

"형답지 않네…. 무슨 일이야? 용희 또 집 나갔어?"

"에이 씨…. 몰라."

그럼 그렇지.

"이번엔 형이 찾아봐. 난 지금 학기중이라 안 돼."

"알아. 그래도 이번엔 편지 써놓고 나갔다. 전화번호랑."

"그랬어?"

"응. 돈 벌어갖고 다시 올테니까 전화번호 남겨둔 거로 연락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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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집 나간 게 아니라 독립한 거지."

"…그런 거냐?"

"잘됐구만 오히려."

"…."

"그건 그렇고 형, 그 양아치들이랑 일 계속해?"

"좀 있다 때려칠란다."

"그래…. 용희 걱정은 말고, 가끔 전화나 한 번씩 해줘. 죽었나 살았나. 남자애들 다 그런 거지 뭐."

"대가리 시뻘건 거나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씨발."

"지 소관이지 뭐…. 형도 어렸을 때 용희 못지 않았잖아. 안 그래?"

"…."

"그런데, 형."

"뭐?"

"저기, 우리 중학교 때 말이야."

"그건 갑자기 왜?"

전화기 저편에서 목소리를 다잡는 석호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긴장한 모습이다. 그럼 그렇지… 형도 완전히 그때 일을 털어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형 여자친구 말이야…."

"여자친구? 무슨 여자친구?"

"에이… 기억 좀 해봐."

"…."

"걔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잘 안 나서."

"왜, 은숙이 닮은 년이라도 만났냐?"

말은 거칠었지만 어딘가 어조가 부드럽다. 석규는 절로 미소를 떠올렸다.

"형 말투가 왜 그래?"

"말투가 뭐? 야 이 새끼야, 갑자기 그년 얘긴 왜 꺼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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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형. 갑자기 생각나서 그래."

"갑자기 생각나? 실없는 새끼…."

"흐흐흐…."

혹시 형에게 그녀는 첫사랑이었던 것일까. 생각만 해도 우스웠다. 석규는 휴대폰 스피커에 물컹한 웃음소리를 흘려보냈다.

"야 임마, 끊어."

"알았…."

전화가 끊어졌다. 석규는 휴대폰을 조수석에 툭 던졌다.

햇살이 따갑게 눈 위에 쏟아져내린다. 석규는 바다 쪽으로 운전대를 틀었다. 그냥 보내버리기 서운할 정도로 매혹적인 날씨였다. 창문을 내리고 해수욕장 쪽으로 속도를 내자 바다냄새가 점점 진해진다.

석규는 휴대폰을 차 안에 놔둔 채 슈퍼마켓에서 빵과 우유를 사 들고 맨발로 비척비척 걸어 모래사장으로 들어갔다. 평일 오후 1 시의 바닷가는 텅 비어 있었다.

석규는 굴러다니는 신문지를 깔고 주저앉았다.

석호가 별 주저없이 은숙이라는 이름을 낼름 뱉어낸 건 의외였다. 석규만 홀로 그때 일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석규는 단 한 번도 석호와 중학교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형에게는 오히려 추억에 가까운 일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자 석규는 혼자 악몽에 시달렸던 게 억울해졌다.

사실 석규는 중학교 시절에 만났던 은숙과 조은숙 교수가 동일인물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 반드시 확인하고 싶지 않다. 그게 뭐 중요한가. 그나저나 둘 다 확 까진 건 똑같네. 석규는 오랜만에 바다가 주는 여유를 즐겼다.

"박작가 안 오나 보네." 안교수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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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끼리 먹으러 가죠."

"그럴까…."

은숙과 안교수가 일어섰다. 유선생도 따라 일어섰다.

"문교수님은 오늘 안 오시나보죠?"

"뻗었어, 문교수. 내가 평소에 운동 좀 하라니깐 말 안 듣더니…. 이럴 때 팍팍 차이 나지 않아요, 조교수?"

"무슨 차이요?"

"밤새 술 먹고 다음날 뻗는 거랑 이렇게 쌩쌩하게 나와서 밥 먹으러 가는 거랑, 확 차이가 나잖아요."

"유선생님도 오늘 나오셨는데요."

"유선생 오늘 단축수업 했다잖아요."

"그래요? 초등학교는 벌써 개학인가봐요?"

유선생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귀찮다는 몸짓을 했다. 안교수가 밖으로 나가자 맨 뒤에 남겨진 은숙이 문을 잠갔다.

"남자는 체력이야, 체력…. 유선생은 요새 운동해요?"

"애들 뒤치다꺼리도 바쁩니다."

유선생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못 본 새 얼굴이 핼쓱해진 듯도 싶었다.

은숙은 유선생이 가여웠다. 단축수업까지 했으면서도 집에서 쉬지 못하고 사무실에 나오는 이유는 뻔했다. 와이프와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인 게다.

점심식사 뒤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돌아오니 명희가 와 있었다. 뭘 또 가지고 왔는지 보자기로 싼 꾸러미가 여기저기 놓여 있다.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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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명희는 짐꾸러미를 풀다 말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은숙은 책상에 가서 앉았다. 점심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내 알바 아니구.

" 이게 다 뭐니?"

" 책하구요, 가습기 좀 가져왔어요."

" 가습기? 필요없어."

" 제가 느끼기엔 좀 건조한 것 같아서요."

" 네가 느끼기에 건조하다고?"

" 네. 좀."

여기서 네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은숙은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안교수님이랑 유선생님은?"

"담배 피우러 나가셨어요."

"그래? 알았어…. 가습기는 네가 알아서 해."

"네."

"깨끗이 씻구. 설치하기 전에."

은숙은 의자를 당겨 책상에 앉았다. 그러나 정작 처리해야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석규의 만화 원고 외엔 특별히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은숙은 이리저리 서류 파일을 들쳐보다가 인터넷에 접속해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안교수와 유선생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담배맛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날씨 정말 좋네, 유선생."

"네. 좋군요."

"네 좋군요가 뭐요 멋없게…. 애들 가르치는 사람이 너무 감성이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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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에 오래 살다 보니, 웬만큼 날씨 좋은 건 좋은 것도 아니더군요."

"하…. 유선생 심천에 언제 왔죠?"

"교사 임용되고 한 오년 지나서니, 벌써 십년 가까이 됩니다."

"오래됐네요. 그럼 유선생 고향이 어디더라?"

"청줍니다. 청주…."

"부모님은 청주에 다 계시겠네요?"

"돌아가셨죠, 두분 다."

"아, 그렇군요. 참, 우리 단체를 같이 만든지도 꽤 오래 되는데 유선생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네요." 유선생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아, 박작가도 고향이 청주라던데."

"박필 작가요? 청주?"

"응. 거기에 한 열댓 살까지 살다가 서울로 이사왔대요."

유선생의 눈빛이 슬며시 달라졌다.

"그럼 제가 알지도 모르겠네요. 그때 청주는 손바닥만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두분이 동갑이니까 알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한 동네에서 같이 놀던 사이 아니에요? 허허."

"같은 학교 나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인연이네요. 여기가 서울도 아닌데 말이에요."

박필. 안 그래도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싶더라니. 유선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졸업앨범을 뒤져보면 얼굴이 나올지도 모른다. 유선생은 세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석규가 집에 혼자 가는 은숙을 배웅했다. 유선생은 새삼 가슴이 타들어갔다. 은숙이 마음만 먹으면 석규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유선생은 은숙이 자신에게 관심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은 견디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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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훈아, 이게 일본 자료 테이프야? 이게 다야?"

"네~선배~"

편집실 책장 저편에서 승훈의 대답이 들려왔다. 편집기 앞에 앉은 영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6 미리 테이프를 내려다보았다. 테이프는 딱 한 개였다.

아이 씨발, 이걸로 어떻게 자료화면을 만들어.

"야, 정말 이게 다야? 너 일부러 한 개만 가져온 거 아니야?"

"그게 다예요, 김국장님 작년에 다녀오신 거."

"일본밖에 없니? 중국이나 그런 건 없냐?"

"에이 선배, 생각해보세요. 환경다큐에 중국 화면 들어가는 게 말이 돼요?"

승훈 말이 맞다. 영호는 승훈이 가져온 테이프를 편집기에 넣고 재생시켰다.

컬러바가 지나가고 이윽고 일본 지방의 하수처리장과 바닷가를 스케치한 화면이 지나갔다. 작년? 너무 화면이 낯이 익다. 언제 찍은 거야? 영호는 조그셔틀을 누르고 날짜버튼을 눌렀다.

"승훈아, 이거 작년이 아니라 재작년꺼다."

대답은 없었다.

재생시간은 50 분 남짓했지만 영호는 귀찮은 나머지 테이프를 끄집어내고 편집용 텔레비전 화면도 꺼버렸다. 다큐에 뉴스에, 최소한 몇 번은 족히 써먹은 화면이다.

영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저께 영호는 와이프와 미진을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 와이프는 화가 나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영호는 차를 몰면서 와이프의 눈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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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도 안 했더라."

"휴가 냈어. 일주일."

"장모님 집에도 없던데?"

"미진이 데리고 놀러갔었어."

"…그래?"

"……"

"재밌었겠네…. 여자 둘이서."

와이프는 조수석에 앉아 고개만 까딱했다. 미진이는 뒷자리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

"어디 놀러 갔다 왔니?"

"…김영호."

"……."

"너 이뻐서 돌아온 거 아니다. 미진이 아빠 없는 애 만들기 싫어서 다시 온 거야.

알았어?"

"……."

"그만하자. 나도 피곤하다. 하긴, 애가 굶든 말든 술에 꼴아서 자빠져 자는 아빠가 꼭 있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애 듣는다. 이 씨발년아. 영호는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와이프는 집에 들어오자 애를 안고 옆방에서 잤다.

그날 밤 영호는 처음으로 심천에 너무 오래 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천에 내려온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젠 손가락을 꼽아봐야 햇수를 계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사법시험보다 더 경쟁률이 높은 중앙 방송국 자리를 노리며 백수로 노는 것보다 과감히 지방 방송국에서 일찍 일을 시작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심천 SBC 에서 잔뼈가 굵은 지 벌써 1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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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연애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영호는 편집기 앞에 앉아 상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와이프는 성우였고, 심천에서 남부럽지 않은 유지 집안의 딸이었다.

영호도 사내 연애가 꺼림칙했지만 어느새 조금씩 입소문이 나면서 약혼이 기정사실화되어 버렸다. 영호는 그때 이미 결혼이 기정사실화된 분위기가 끔찍했다.

그러나 심천에서 와이프는 찾아보기 힘든 조건의 여자였고, 영호도 지방 유지인 그녀 아버지의 미움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렇게 결혼한 지 7년째, 지금 영호는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승훈아."

조용~.

"승훈아?"

"왜요. 선배?"

테이프 먼지를 털다 나왔는지 승훈이 얼굴에 하얀 먼지를 묻힌 채 기어나왔다.

영호는 책장 사이에서 나오는 승훈을 보고 잠시 은숙을 떠올렸다.

"이걸로 되겠냐?" 영호는 손가락 사이에 테이프를 끼운 채 까딱까딱 흔들었다.

"재작년에 찍은 거야."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임마…. 이걸 어따 써."

"왜, 못 써요? 작년이나 재작년이나, 하수처리장이 어디 가요?"

"저 자식이…. 언론인답지 않게 무슨 소리야."

"언론인이요? 푸핫 선배도…. 정 못 쓸 화면이면 그냥 빼세요. 어차피 몇 분 안 들어가잖아요."

"그걸 어떻게 빼."

"그럼요?"

"찍어와야지. 다시."

"일본 가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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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사에 보내줄 돈이 어딨다고?

"국장님이 보내주시겠어요? 안 보내 주실걸요."

"왜?"

"김국장님 마지막으로 나가신 지도 오래됐잖아요. 저것도 재작년 테이프라면서요."

"왜, 국장은 되고 나는 안되냐? 놀러가는 것도 아닌데, 자료화면 찍으러 가는 게 왜 안돼?"

안되죠, 선배. 회사에 돈이 없다니깐요, 돈이…. 승훈은 대꾸하려다 그만두었다.

"나 올라갈게." 영호는 윗도리 재킷을 집어들었다.

"편집 안 하세요?"

"안 하긴…. 승훈아."

"네?"

"네가 한 번 좀 해보고 있을래?"

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영호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해외 촬영을 위한 기획안을 쓰기 위해서였다. 자료테이프가 하나밖에 나오지 않다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벌써 은숙과의 여행 일정이 잡힌 듯 기분이 들뜨려고 했다.

한편 은숙은 오후 네 시경 사무실에서 나왔다. 새 출발을 다짐하며 모처럼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전날 술자리의 여파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피곤하다. 은숙은 볼보에 올라타고도 피로가 몰려와 잠시 운전대에 이마를 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더 졸음이 쏟아지기 전에 얼른 집에 가서 한숨 자야겠다. 몇 분 후 정신이 조금 맑아지자 바로 차의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그러나 운전으로 신경 끝이 날카롭게 되살아나자 몇십 분 전 사무실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조교수님, 고향이 어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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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에요."

"정말 서울 맞아요?" 은숙은 모니터에서 고개를 떼고 유선생을 넘겨다보았다.

"안교수님 말씀으론 서울이 아니던데요."

"안교수님이오?"

"네."

은숙은 사무실 안을 휘이 둘러보았다. 강철 체력을 자랑하며 유선생과 탁구까지 쳤던 안교수는 어느 새 사라진 뒤였다.

"안교수님, 가셨니?"

"네. 교수님 잠깐 자고 계실 때요." 명희가 대답했다. 은숙은 떨떠름해졌다.

"유선생님, 갑자기 제 고향 얘긴 왜 꺼내세요?"

"…. 뭐, 그냥요."

"유선생님은 고향이 심천이세요?" 갑자기 명희가 톡 끼어들었다.

"아뇨, 난 심천 아니고, 청주예요."

"유선생님 고향이 청주셨어요?"

은숙은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려는 걸 제지했다.

"모르셨어요? 저 청주 사람인 거…."

"전혀 몰랐는데요. 언제까지 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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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까지 살다가, 서울로 이사왔죠."

"…그러셨어요."

유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숙은 책상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더 오래 앉아 있을 맛이 나지 않았다.

"피곤하네요. 유선생님, 저 먼저 갈게요. 명희 너도 수고해."

"벌써 가시게요?"

"아무래도 어제 술 마신 게 남아 있나봐요. 유선생님도 일찍 들어가셔서 쉬세요."

"전 괜찮아요. 들어가세요."

유선생은 은숙에게 미소를 지었다. 은숙도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사무실 문이 닫히자 유선생은 안교수의 말을 떠올렸다.

'본적은 청주인데 조교수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말하고 다니더라고. 그건 어떻게 알았냐고? 임용될 때 꽤 얘기가 나돌고는 하니까. 몇 년 전 얘기지. 근데 조교수 겉으로 봐선 지방사람 같지 않으니까 거의 잘들 모르지. 그리고 요즘은 촌스럽게 고향 따지지도 않잖아'

왜 안 따져. 은숙은 숨이 막혔다. 유선생과의 대화를 생각하자 피로한 와중에도 졸음이 달아났다. 유선생도 청주에 살았었구나.

지금 되돌릴 수 없잖아. 더구나 책임질 수도 없는 나이에 일어난 일을, 은숙도 자책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다는 걸 머리로 알고 있다. 그러나 가끔씩 찾아오는 악몽까지 뿌리칠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 일을 떠올린 게 벌써 몇 년 전이다. 몇 년 전이라면, 심천에 내려오기도 전이 아닌가.

신호대기다. 은숙은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볼보는 안전선을 한참 넘어 멈췄다.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잔뜩 인상을 쓰면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은숙은 그녀들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열여섯? 열다섯? 열넷?

==== 1986년. 청주. ====122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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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모두 집에 가버린 학교는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붉은 노을빛이 창문을 물들이고 있었다. 은숙은 교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책상과 의자를 끌어다 몸을 숨겼다. 토끼굴처럼 아늑한 자리가 마련되자 고개를 들어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에 거미줄이 비단실처럼 반짝인다. 눈에 보일까말까 할 정도로 조그만 거미가 하루살이를 실에 돌돌 말고 있었다.

은숙은 눈이 부신 채 잠시 거미를 지켜보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싼 종이와 성냥을 꺼냈다. 주머니에 넣고 있느라 한두 개는 부러졌지만 상관없다. 은숙은 성한 개비를 입에 물고 성냥불을 그어 불을 붙였다. 파란 연기가 몸에 스며들자 온몸의 근육이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소지품 검사에 용케 걸리지 않은 담배라 그런지 맛이 더 달콤했다.

은숙은 연기를 너무 깊게 빨아당기다가 기침이 나서 콜록거렸다. 눈까지 매워왔다.

은숙은 눈과 코를 문질렀다. 담배는 중학교 3 학년 석호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석호는 은숙이 마음에 들었는지, 곧잘 데리고 다니면서 술도 먹이고 담배도 피우게 했다. 은숙은 석호 패거리와 곧잘 어울렸다. 석호가 쌈박질 잘하는 3 학년 짱인 탓도 있었지만 담배 한 개비를 미끼로 은숙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재간도 중학생답지 않았다.

은숙은 손부채로 연기를 내보내고 다시 담배를 빨았다. 화장실이나 뒷산에서 몰래 피우는 담배 못지 않게 방과 후 교실에 틀어박혀 피우는 담배의 맛도 만만치 않았다.

담배 자체의 맛보다도 교칙을 우롱한다는 즐거움이 더 큰 게 사실이었다. 은숙은 두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좁은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졸음이 몰려왔다. 은숙은 두 팔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석호 오빠가 이따 집으로 오라고 했는데…. 에이 모르겠다. 한숨 자고 가야지. 은숙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벽에 기대고 졸기 시작했다. 몇 분이나 그렇게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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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당탕!

뭔가 무너지는 소리에 은숙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담뱃불은 저 혼자 꺼져 꽁초가 되어 있었다. 연기 때문에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은숙은 눈을 비비고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학생주임이었다.

제길, 차라리 담임한테 걸리는 게 나을 텐데. 은숙은 몸이 굳었다.

"누구냐? 이리 나와."

은숙은 무너진 의자들을 헤치고 기어나왔다. 학생주임은 퇴근길이었는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은숙은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고 넥타이를 맨 목 언저리를

노려보았다.

" 인마, 눈에 힘 주면 어쩔래? 겁도 없이 신성한 학교에서 담배를 피워?

창문에서 연기가 다 새어나오더라. 몇 학년 몇 반 누구야?"

" 1 학년 3 반이오."

학생주임은 은숙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 너 누군지 알겠다. 최은숙이지? 저-기 아래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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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어쩌시려고요? 은숙은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았다. 저-기 아래 사는 은숙이네 집이 어떤지 아시면서.

"담배 내 놔."

은숙은 순순히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어차피 뺏길 거 그냥 내주는 게 덜 맞는 길이다. 학생주임은 종이에 싼 담배를 세어 보다가 자기 와이셔츠 포켓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은숙의 따귀를 세 번 연속해서 갈겼다. 은숙은 쓰러질 뻔했지만 균형을 잡고 섰다.

"어린 게 벌써부터 까져갖고…. 커서 뭐가 되려고 담배는 피우고 지랄이야."

학생주임은 따귀를 치느라 얼얼한 손을 흔들었다. 은숙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니네 엄만 아직 안 들어왔냐?"

"…."

"뭐 하긴…. 뭐 볼 게 있다고."

은숙은 눈물이 쏟아질 뻔했지만 겨우 참고 문 쪽으로 향했다. 담배 피운 건 잘못이지만 저런 돼지 같은 인간에게 더 이상 모욕당할 이유는 없었다.

"야, 누가 가랬어?"

"집에 갈래요."

"집에 누구 기다려 주는 사람이라도 있냐? 이리 와 봐…."

"…."

"이리 와 봐 이년아."

은숙이 가만히 서 있자 학생주임은 머리채를 잡고 끌었다. 은숙은 눈물이 나면서도 이를 악물고 발에 힘을 주고 버텼다. 결국 학생주임은 한 번 더 세게 따귀를 때렸다.

은숙은 벽에 머리가 부딪히면서 넘어졌다. 학생주임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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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년…. 뭐가 되려고 그러냐?"

"…."

"멘스는 했냐?"

은숙은 천천히 일어나면서 학생주임을 노려보았다. 개새끼. 아빠보다 못한 새끼.

학생주임은 겨우 일어난 은숙의 가슴을 손으로 그러쥐어 보더니 교실을 나갔다.

은숙은 본능적으로 학생주임이 담임에게 이르지는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

빵빵!

클랙슨이 울렸다. 은숙은 깜짝 놀라 엑셀을 밟았다. 택시 한 대가 그녀의 차를 추월해 사라졌다. 은숙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러다 사고 나겠다. 다시 신호대기에 멈춰서자 은숙은 추억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맞은편에 갤로퍼가 서 있었다. 은숙은 망연히 시선을 던지다가 갤로퍼 속의 운전자 얼굴에서 멈췄다. 박필 작가다. 어디서 자다 왔는지 부스스한 얼굴이었다. 은숙은 멀리서 석규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자세히 보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석…규?

은숙은 뒤통수가 뾰족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뒤에서 클랙슨이 울렸고, 은숙은 떨리는 발로 차를 출발시켰다. 석규는 은숙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이제 조금만 직진하면 은숙의 아파트다. 은숙은 손에 더 힘을 주면서 운전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일단 집에 들어가서 쉬자. 아무 생각 말고 잠들어 버리자.

깨어나면 뭔가 생각나는 게 있겠지.

한편 석규는 룸미러를 스칠 듯 쌩 하고 지나가는 볼보를 보고 갸웃거렸다. 조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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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인가? 이 동네에 볼보가 은숙 말고 또 있을 리가 있나. 어쨌든 석규는 사무실로 향했다. 들어가는 발길이 영 내키지 않는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으면 좋으련만….

그러다 석규는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다. 명희다. 클랙슨을 울리자 명희가 뒤돌아보고 뛰어왔다. 석규는 차를 세우고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명희씨, 어디 가요?"

"뭐 사러 나왔다가, 사무실 들어가는 길이에요." 명희는 하얀 얼굴에 웃음을 띠웠다.

"교수님은 지금 사무실 가시는 길이세요?"

"네. 지금 사무실에 누구누구 있어요?"

"아무도 안 계세요. 문교수님은 아예 안 오셨구요, 조교수님도 계시다 가시고,

유선생님도 방금 들어가셨구요."

"안교수님은?"

"안교수님은 점심만 드시고 바로 가셨어요."

그렇다면 굳이 출근도장 찍어줄 필요는 없다. 귀찮던 김에 잘 됐다.

"명희씨는 집에 안 가요?"

"지금 사무실 들렀다가 들어가려구요."

"그래요? 태워다줄게, 타요." 명희는 차에 올라탔다.

"교수님은 오늘 왜 안 오셨어요? 점심 같이 드시자고 기다리시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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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기다려요? 누가?"

"안교수님 하고 조교수님요. 유선생님도 계셨구요."

"그래요? 보충 강의가 있어서 좀 늦었어요."

"네에."

"저기, 조은숙 교수는 사무실에서 방금 나갔어요?"

"네, 방금요. 그건 왜…?" 석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숙이 맞는 모양이었다.

"교수님은 사무실 안 들어가세요?"

"아무도 없는데 굳이 갈 필요 없겠죠."

"그럼 저녁 드시고 가실래요? 근처에 해물 잘하는 데가 있는데요."

"저녁요?"

석규는 망설이다가 결국 명희를 따라갔다.

집에서 라면만 끓여 먹은지라 제대로 차린 식탁 생각에 마음이 동했다. 설마 얘까지 날 잡아먹으려 들진 않겠지.

명희가 이끈 곳은 대중음식점치고는 깔끔하고 조용했다.

반찬도 식당에서 나오는 것치고 공들인 편이었다. 석규는 오랜만에 맛있게 먹었다.

"교수님은 집에서 식사 안 하시나봐요?" 명희가 물었다.

"잘 안 해먹죠. 귀찮으니까."

석규는 밥공기에 고개를 파묻다시피한 채 대답했다. 상 위에서 해물탕이 보글보글 128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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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고 있었다. 조개가 하나씩 벌어질 때마다 상 위에 향긋한 해물 냄새가 퍼졌다.

제대로 끓인 해물탕 먹어보긴 처음이다.

명희는 열심히 먹는 석규를 처음 보는 물건인 양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명희씨. 나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마요."

"왜요?"

"교수님이라고 불릴 나이도 아니고, 뭔가 좀 간지럽고 어색하고, 좀 그래서."

"교수님이시잖아요. 만화창작과 교수님. 그러면 교수님을 뭐라고 불러요?

교수님부터 말씀 놓으세요. 명희야라고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그래요?" 석규는 픽 웃었다.

"그럼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르든지…. 내가 보수적이라 그런가, 교수라고 하면 뭔가 좀더 학자풍이고, 훨씬 권위있고 도덕적이고 더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만화 그리는 사람이 그렇게 될 순 없잖아요."

명희는 방싯 웃었다.

"만화라고 반드시 수준 낮아야 되는 법은 없잖아요. 전 선생님 만화가 수준 높다고 생각하는 걸요.

내 만화를 봤어요?"

"네. 재미있던데요."

"그래요? 고맙네…. 말만이라도."

석규는 괜히 얼굴이 붉어져서 해물탕 그릇에 코를 박았다. 명희는 뭐가 좋은지 웃음을 띠다가 가방에서 만화책 한 권을 꺼냈다. 표지에 '오아시스'라고 적힌 노란색 글자가 박혀 있다. 석규는 책을 보고 수저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니, 그걸 어디서 구했어요? 10년 전 걸?"

"지방에선 총판 통하면 절판된 책도 구하기 쉬워요. 사인해주실 거죠? 식사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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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또 잊어버릴 것 같아서요."

명희는 식탁 위로 만화책과 네임펜을 건넸다. 석규는 책을 받아들고 속표지에 사인을 했다. 200×년 8월, 박필. 10년 전, 데뷔 초기의 작품들을 모은 단편집을 심천에서 다시 만나다니…. 감회가 새롭기 이전에 괜히 창피스러웠다.

"책은 봤어요?"

"네. 재밌어요."

"재밌긴…. 유치하죠?" 석규는 귀까지 빨개지는 것 같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고맙네요. 나도 거의 잊어버린 작품집인데, 이렇게 챙겨줘서."

"제가 영광이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 중 하나인 걸요."

"그래요? 하…."

석규는 미소를 짓고 다시 수저를 움직였다. 명희도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데뷔하신 지 벌써 10년 되셨어요?"

"그렇죠."

"작품 수도 만만치 않으시겠어요."

"권수로 치면 나도 기억 잘 안 나요. 연재 중단된 것도 많고.

요새 만화판 상황이 정말 안 좋으니까,

만화과에 누가 온다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만화 좋아해서 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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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겠죠."

"그림만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이나 인터넷 플래시 만화, 4 단 만화 생각하고 오는 애들이 대부분이에요. 본격 극만화는 아예 생각 밖이고…."

"본격 극만화요?"

"네. 권수도 길고, 스토리도 작화도 본격인 거." 석규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일단 애니메이션은 만화랑 틀려요. 난 잘 알지도 못하고. 하지만 극만화를 제대로 그리면 플래시 만화나 4 단짜리 만화는 아주 쉽게 그릴 수 있어요."

"그래요?"

명희는 눈을 반짝이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요. 극만화를 제대로 그리려면 일단 그림 실력이 출중해야 돼요. 인터넷 만화는 그냥 한 번 웃기면 되니까 그림 좀 못 그려도 수습이 되지만, 열 권, 스무 권 되는 만화를 그림 못 그리는 사람이 그릴 수는 없잖아요. 요샌 컴퓨터로도 많이 작업하지만 기본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명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만화과 오는 학생이라면 기본 실력은 되어 있지 않을까요."

"글쎄, 과제로 받은 그림들 보면 인체비례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것 같으니까. 죄다 3등신 4 등신 캐릭터들만 그려서 내놓더라고요. 크로키 한 장 제대로 하는 애도 드물고…. 데포르시옹(왜곡)도 기본을 알고 해야 되는 건데 말이지요."

그런 수준 낮은 애들 잡고 가르치는 주제에 교수님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내 낯가죽이 두껍지 못하다고…. 석규는 뒤따라 나오는 말을 뱃속에 겨우 구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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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명희씨는 어떻게 염색과에 갔어요?"

"저요?"

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염색과로 입학한 건 아니었어요. 원래 교회미술과였어요."

"교회미술과?"

"네. 스테인글라스랑, 내부 장식 같은 거."

"아…. 그런 전공도 따로 있구나."

"네. 기본적으로 신앙심을 갖고 하는 것이니까요."

신앙심.

"그런데 왜 그만뒀어요?"

명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평균 정도만 되어도 가능할 줄 알았는데, 막상 입학하니까 저보다 두 배, 세 배 예수님을 사랑하는 애들만 있더라고요."

"핫…."

"일요일 예배는 물론이고 수요예배, 토요일 모임, 월요일 성경공부, 화요일 세미나,

금요일 통성기도….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더라고요."

"답답했겠네요."

"포기한 거죠. 저는 지금 제 전공이 좋아요." 명희는 방긋 웃었다.

"염색이 좋아요?"

"네. 조교수님도 멋있고…."

"조은숙 교수요?"

"네."

"그분 말이에요. 진짜 교수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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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희는 잠시 석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진짜 교수요?"

석규는 자기가 막상 뱉어놓고도 설명할 뜻을 몰라 허둥거렸다. 진짜 교수라니,

그러면 가짜 교수도 있나?

"혹시, 정식 임용되신 게 맞나 해서요."

"조교수님은 강사 선생님 아니세요. 그건 왜요?"

"어, 그냥 정교수치곤 좀 젊어서."석규는 겨우 빌미를 찾아냈다.

"젊은 편인가요? 조교수님이…."

"그런 편이죠. 교수사회에서 조교수 정도면 상당히 젊지."

"그래요? 전 몰랐어요."

명희는 짐짓 관심없다는 포즈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석규의 말은 흥미로웠다.

듣고 나니 은숙이 왜 자꾸 심천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는지 다시금 이해가 갔다.

태어나서 심천을 벗어나 본 적이 많지 않은 명희는 교수사회에서 은숙이 얼마나 독특하고 매력적인 존재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식사가 끝난 뒤 석규는 명희를 집까지 태워다 주려고 했지만 명희는 극구 사양했다.

결국 그는 명희를 보내고 잠시 망설이다가 푸른심천 사무실로 갔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의 고요함을 맛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한편 은숙은 낮잠을 깼다. 눈을 뜨자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은숙은 일어나고 싶지 않아 어두운 침대 속에서 게으르게 몸을 비틀었다. 배가 고팠지만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없다. 은숙은 이불 밖으로 손만 내밀어 휴대폰을 집어올렸다. 문자 한 통 와 있지 않았다. 영호는 편집을 하다 아예 편집기 속으로 기어들어간 모양이다. 은숙은 불안해졌다. 이럴 때 전화해서 속내를 털어놓을 진실한 친구 한 명이 아쉽다. 그러나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현명한 의논상대가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 관계가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한심하다. 은숙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낮잠을 푹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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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인지 얼굴을 파묻을수록 눈동자만 고양이눈처럼 또렷해졌다.

결국 그녀는 베개를 걷어치우고 벌떡 일어나서 불을 켰다. 안되겠다. 바깥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지. 은숙은 머리에 빗질을 하면서 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처럼 방송국 편집실에 있다면 좋을 텐데.

"여보세요? 은숙씨?"

"영호씨?" 영호의 목소리가 명랑하다.

"어디에요 지금?"

"퇴근하려던 차예요."

"저녁은 드셨어요?"

"먹어야죠. 은숙씬 먹었어요?"

"아뇨, 아직."

'같이 먹자고 해 줘요.' 은숙은 마음 속으로 속삭였다.

영호가 불러낸 곳은 스카이라운지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투명한 유리벽을 통해 잔잔한 바다가 떠올랐다. 날은 흐렸지만 여기저기 켜 둔 고기잡이배 조명과 등대 불빛에 일렁이는 파도가 보였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은숙은 바다를 보고 마음이 놓여 미소를 지었다. 영호도 은숙을 보고 웃음을 띄웠다. 볼수록 사랑스럽고 신기한 여자였다. 그러나 오늘의 은숙은 어딘가 걱정스러워 보였다.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걸까?

그런 것 같진 않다. 먼저 연락을 주었어야 하는 건데. 영호는 은숙이 다른 걱정거리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람둥이다운 예민한 촉각을 곤두세워봐도 특별히 이쪽에서 잘못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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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으니까. 영호는 부드러운 매너로 은숙을 위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영호가 만약 연애할 때 기울이는 마음씀의 절반만 결혼생활에 쏟으면 와이프가 애를 데리고 집안을 들락날락하는 사태는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으악, 와이프 생각은 나중에….

자리에 앉자 은숙은 전망에 시선을 돌렸다. 영호는 스테이크 주문을 하고 나서 은숙과 90 도 각도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은숙이 다정스럽게 웃었다. 영호도 은숙의 볼과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역시 웃는 걸 보니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니구나 싶다.

"조금 말랐어요, 은숙씨."

"그래요? 살은 안 빠졌는데."

영호는 아이스박스에 재운 와인병을 들고 손수 은숙의 와인잔을 채웠다. 은숙이 잔을 부딪쳐오자 영호는 로맨틱한 정복감을 느꼈다. 오늘도 그냥 보내지 않으리라.

식사가 끝난 뒤 영호는 자연스럽게 모텔로 은숙을 데리고 갔다. 영호는 편집실에서의 짤막한 정사가 남겼던 욕망까지 덧붙여져 은숙에게 덤벼들었다. 은숙도 답답한 심경을 잊고 싶은 나머지 영호 못지 않게 엉겨붙었다. 두 번의 섹스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만족감에 젖었다.

몇 시예요?"

은숙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영호는 테이블에 놓아 둔 PDA 를 찾아 눈앞에 갖다댔다.

"열한시요."

"벌써 그렇게 됐어요? 우리 진짜 오래 한다…."

"힘들어요?"

"아뇨. 영호씨가 힘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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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영호의 가슴 위에 머리를 얹으며 쿡 웃었다. 안교수의 강철체력 자랑이 이 남자 앞에서 우스워진다.

"무슨 걱정거리 있어요?" 영호는 은숙의 머리칼 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아뇨. 없어요."

"있는 거 같은데?" 은숙은 영호의 몸 위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영호씨. 우리 떠나요."

"응, 알아요. 일본 출장준비하고 있어요."

"아니, 아예 떠나요. 아주 멀리…."

"?"

"아주아주 멀리…… 멀리 떠나지 않으면 떠날 의미가 없어요."

영호는 내심 놀랐다. 은숙답지 않은 나약한 모습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괜찮을 거예요. 은숙씨. 도쿄에 가보면, 기분이 확 달라질 거예요. 가본 적 있어요?"

"일본은 한 번도 안 가봤어요."

"아주 좋아요. 재미있어요. 도쿄도 좋고, 오는 길에 벳푸에서 온천도 하고…."

영호는 은숙을 쓰다듬어 주면서 잠시 일본 여행 이야기를 지껄였지만 은숙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눈빛이었다. 영호는 농담을 건네는 등 그녀를 달랬지만 은숙은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영호의 품만 파고들었다. 결국 영호는 혼자 떠들다가 그녀를 안은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은숙은 사정을 캐묻지 않는 영호가 오히려 고마웠다. 그녀도 복잡하게 따져 생각하기 싫었던 것이다. 생각을 한다고 뭔가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구.

그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비는 수밖에. 은숙은 -그녀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지만- 기도를 했다. 아무 일 없게 해주세요라고. 비록 남자 품에서 드리는 기도지만 왠지 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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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두 사람은 외박을 했다. 일부러 한 게 아니라 깜박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아침 일곱시가 다 되어 있었다. 은숙과 영호는 앞다투어 샤워를 하고 모텔을 빠져나와 각각 학교와 방송국으로 향했다. 헤어지기 직전, 영호는 은숙의 팔을 잡고 말했다.

"여행 준비 슬슬 해 놔요. 비자부터 받아놓고, 알았죠?"

은숙은 미소 짓고는 볼보에 올라탔다. 영호의 마음씀이 고맙다.

영호도 출근길에 올랐다. 은숙과 외박을 한 건 처음이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외박이라 어딘가 아쉬움이 남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텔 방에서 맥주라도 마시면서 더 알차게(?) 보냈을 텐데.

아무튼 영호는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어? 일찍 오셨네요?"

"너도 일찍 나왔네?"

"저 원래 이 시간에 나오는데요."

영호는 승훈 머리 위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8 시 반이었다. 벌써 저렇게 되다니.

"선배, 어제 퇴근하시고 나서 국장님이 찾으시던데요."

"국장님이 찾아? 무슨 일로?"

"저야 모르죠. 이따 나오시면 가보세요."

영호는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때우다가 10 시 반이 되자 국장실로 올라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어, 김 PD 들어와." 영호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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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냐고? 짐작 안 가?"

김국장이 은테 안경 너머로 눈웃음을 보냈다. 영호는 괜스레 긴장되었다.

"아, 별거 아니고 해외 촬영 때문에 잠깐 불렀어. 뭐 마실래? 커피 타줄까?"

"아니요, 마시고 올라왔습니다."

"그래? 난 요새 녹차만 마셔. 몸에 좋다잖아."

김국장은 잔을 들고 영호와 대각선 방향 소파에 앉았다.

"일본 촬영, 가능하겠습니까?"

영호는 기다리지 못하고 재차 묻고야 말았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갑자기 은숙과의 밀월여행을 고대하는 속내를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환경 스페셜에 쓸 화면이지?"

"네."

"내가 찍어온 거 있잖아.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재작년 거고 또 그동안 환경 관심사가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근데 김 PD, 해외 촬영은 1년에 한 번으로 되어있잖아. 금년 초에 갔다왔지?"

"예. 중국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국장님, 이번 특집은 초점이 좀 다릅니다."

"응, 나도 기획안 봤어요. 멸종위기 동물 보호니, 하긴 내가 찍어온 거랑은 조금 결이 다르겠지."

'하수처리장과 지리산 반달곰이 조금 결이 다른 건가요.' 영호는 반문하고 싶은 걸 참았다.

"암튼, 그리 알구…. 요새 건강하지? 화선이도 건강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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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화선이란 영호의 와이프다.

"아무튼 자세한 건 김팀장이랑 얘기해요."

"국장님."

"왜?"

영호는 '국장님'이라는 말에 포함된 불만족스러운 어조를 깨닫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 아, 내 몸 속에 아직도 반항기가 남아 있었던가.

"뭔가? 김 PD…."

"예…, 화선이는 건강하구요."

"또?"

영호는 잠시 우물쭈물했다.

"저는 이번 일본 촬영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스태프들과 회의를 해 봐도 그렇고,

멸종위기 동물보호는 이제 한국에서 시작에 불과합니다. 선례를 보여주는 게 프로그램상 반드시 필요합니다."

김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예….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단순히 해외 촬영이 안 된다는 말씀만 하시려고 저를 일부러 보자고 하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김팀장을 통해서 얼마든지 전달하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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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을테니까요."

김국장은 양 입꼬리를 늘이며 웃었다.

"이틀 전에 모임이 있었어. 사장님하고 나하고, 심천대 학장이랑 또 시장이랑 그쪽 공무원들 몇몇이서 술자리 했거든. 심천에 눌러산 지 오래돼서 굳이 일이 아니더라도 조금씩들 인연이 있잖아. 안 그래?"

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이런저런 얘기들 하다가…. 김 PD 생각이 나서, 궁금해서 불러 올린 거요.

요새 맡은 프로그램이 많아서, 힘들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PD 라면 당연한 거지요."

"그래, 몸 챙기고…."

"감사합니다 국장님."

"화선이, 미진이 안부도 궁금했거든. 같은 회사 다녀도 부서가 다르면 얼굴 한 번 마주치기 힘들잖아. 그렇다고 임자 있는 유부녀를 내 사무실에 불러서 잘 지내냐,

어쩌냐 캐물으면 또 이상하잖아. 그래서 겸사겸사해서 부른 거야. 별 생각하지마…."

영호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나가 봐요."

"예."

영호는 목례를 하고 국장 사무실을 나왔다. 문을 닫자 목덜미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영호는 뒷덜미를 손으로 닦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역시 윗사람이 부를 땐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영호는 소변을 보고 손을 씻으면서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했지만 어젯밤 은숙과의 과로에, 카페인과 덜 깬 술기운이 어우러져 그만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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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았다. 그 와중에도 뒤엉킨 머릿속에 명료하게 한 마디가 떠올랐다. '화선이 잘 있지?'

'잘 있지 못합니다.' 영호는 머릿속으로 김국장에게 톡 쏘아붙이고 사무실로 내려왔다. 김국장이 이틀 전에 가졌다는 술자리에 장인이 끼어 있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그러나 영호는 심천대 학장의 참석의미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사무실에 내려온 영호는 승훈을 다그쳤다.

"이작가 오늘 나왔어? 대본 아직 안 나왔대?"

"모르겠는데요."

승훈은 특유의 두루뭉술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식 모르는 것도 많아…. 당장 전화 좀 해봐. 회의 좀 하자구."

"오늘요?"

"오늘 오후."

회의를 끝낸 영호는 답답해진 나머지 담배를 피우러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일본 촬영 불가 소식에 승훈도 이작가도 난색을 표했던 것이다. 영호도 동감했다. 일본의 동물보호현장을 단순한 참고대상이 아닌 선례이자 모범대상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기획 전체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물론 영호가 일본 촬영이 필수불가결하도록 방향을 잡았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김국장의 태클로 은숙과의 밀월여행이 한 발 멀어진 느낌이지만 영호는 왠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넘어서야 할 산이 나타난 느낌이랄까. 게다가 제작회의를 통해 처음에 구상한 기획안에 자신감이 생겼다.

"선배 어떡하실 거예요?" 영호가 자리로 돌아오자 승훈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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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뭐긴요, 지금 기획 전체를 다 고쳐야 한다면서요. 난 아까 회의 들어가서 깜짝 놀랐어요. 그냥 몇 분만 들어가는 줄 알았거든요."

그 몇 분이 조교수 만나고 나서 몇십 분으로 새끼를 쳤다. 영호는 피식 웃음을 띄웠다.

"네 생각은 어떠냐 승훈아."

"제 생각이요? 무슨 생각요?"

"다 빼는 게 좋겠냐, 아님 들어가는 게 좋겠냐."

영호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승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승훈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제가 뭘 아나요."

"니가 왜 몰라. 넌 PD 아니냐?"

"몰라요. 못 나간다면서요."

"아니, 돈은 신경쓰지 말구, 네가 국장이라면 내보내 줄래, 말래?"

'이 사람이 왜 이래? 어차피 내 말 들을 것도 아니면서.' 승훈은 의아해졌다.

영호는 다그치듯 승훈의 얼굴을 주시했다. 승훈은 영호의 시선에 불편해졌다. 뭐라고 말하지?

"선배가 편한 대로 하세요."

"내가 편한대로 하라고?"

"네. 선배가 좋은 대로. 선배가 담당 PD잖아요. 잘 돼도 못 돼도 선배 책임이죠. 안 그래요?"

영호는 수긍했다. 승훈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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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은숙은 오전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혹시 석규나 유선생과 마주칠까봐 겁이 나서, 아예 문패까지 '퇴근'으로 돌려버렸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외로웠다. 그나마 학교에 있으면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은 피할 수 있었다.

은숙은 음악을 들으려고 차이코프스키의 CD 를 얹었지만 그것조차 시끄러워서,

그만 오디오를 꺼버렸다. 운동장과 복도의 소음이 교교히 밀려온다. 은숙은 보조의자에 발을 얹고 눈을 감았다. 어두워지자 바깥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은숙은 그대로 반쯤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 1986년 청주. ====

은숙은 방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녀 앞에는 잔뜩 상을 찌푸린 시골 여인네가 양반다리를 한 채 앉아 있었다. 무릎 옆에 싸리나무 회초리가 놓여 있었지만 선뜻 은숙의 종아리를 후려칠 기색은 아직 없었다. 그 대신 그녀의 표정에는, 어이없음과 도대체 은숙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헷갈려하는 기색이 반반이었다.

"몇 살이고?"

"열네 살인데요."

"……" 은숙은 입술을 반항적으로 앙다물었다. 여인네는 한숨을 폭 쉬었다.

"열네 살밖에 안 묵은 게 벌써 이리 까졌냐."

"……"

"네 이년을 어떻게…."

그녀는 다시 방구들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은숙을 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여인네는 다름아닌 석호와 석규의 어머니다.

"커서 뭐가 될라구 벌써부터 우리 아그들한테 꼬리를 치구 다니냐. 이년아."

"꼬리는 석호 오빠가 먼저 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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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석호가 먼저 쳐? 우리 아들이 여우새끼냐 꼬리를 치게. 여우는 네 년이지."

"……"

"화냥년 자린 맡아놨구나. 아주. 네년 화냥년 되는 건 별 수 없겠지만 우리 아그들은 화냥년하곤 인연이 없으니 니만 딱 떨어지면 되겠다. 알긋냐."

은숙은 턱을 가슴에 붙인 채 눈동자를 치뜨고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머릿속으로 마주앉은 여자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단어들을 선별했다.

"아주머니."

"뭐냐, 눈은 흡뜬 채."

"제가 화냥년 되면요, 석호 오빠는 석규랑 같이 냄비 장사 하겠네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손이 날아왔다. 은숙은 뒷벽으로 날아갔다. 뒤이어 싸리나무 회초리가 날아왔다. 은숙은 손을 내밀어 회초리를 붙잡아 부러뜨려 버리고 방에서 뛰쳐나왔다.

"우리 엄마도 아닌데 왜 때려! 왜 때려!"

"아니 저년이…."

은숙은 뒤돌아 혀를 내밀어 보이고 그대로 내달았다. 뒤에서 욕지거리가 들려왔지만 상관없었다. 은숙은 달리면서도 '어미가 저 수준이니 애들도 개아들이지' 하고 생각했다.

쭉 뻗은 황톳길이 은숙의 달리는 발밑에서 먼지를 날렸다. 시골길의 상쾌한 바람이 얼굴에 와 부딪쳤다. 은숙은 그대로 달려 학교 뒷산으로 들어갔다.

은숙이 향한 곳은 뒷산 바로 앞에 있는 폐수영장이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잡목숲과 덤불을 헤치고 몇십 미터를 들어가야 한다. 은숙은 달리기를 멈추고 천천히 숲속으로 발을 디뎠다. 담배 연기가 코끝에 와 닿았다. 다들 와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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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이 늘어진 담쟁이 덩굴을 확 제치자 수영장 옆에 모여앉아 담배를 피우던 석호 패거리가 그녀를 주목했다.

"어디 갔다 왔어?"

석호가 소리쳤다. 중학생밖에 안 되는 석호지만 자기 암컷에 대한 소유권을 확인하는 듯한 어조다. 은숙은 석호 옆에 가서 앉았다.

"담배 피다 걸렸다며?"

"응."

"미친년, 나도 학교에선 담배 안 펴! 그러니까 너도 피우지 마. 알았어?"

은숙은 고개를 끄덕하고 오른손을 내밀어 담배를 청했다. 석호가 담배를 손가락에 끼워주고 불까지 붙여주었다. 그 모습을, 석규와 종두는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넷은 모여앉아 담배맛을 더 즐겼다. 숲속에서 피우는 담배는 상쾌한 공기와 어우러져 더 달콤하다. 석호가 담배를 피우면서 은숙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은숙은 담배를 피우자 얻어맞은 뺨의 통증이 심해진다. '나쁜 년.' 은숙은 속으로 욕을 했다.

====

은숙은 의자에 앉은 채 낮잠이 들어버렸다. 요 며칠 동안 밤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잠을 잘 이루지 못한 탓일 게다. 혼곤히 잠에 빠져 있던 은숙은 문자 메시지 소리에 선잠을 깼다. 휴대폰은 저 혼자 띡띡거리고 있었다. 은숙은 부스스 눈을 뜨고 책상 위의 휴대폰을 집어 액정을 눈앞에 갖다댔다. 영호인가?

'저녁 드시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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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생이다. 은숙은 한숨을 쉬고 휴대폰 배터리를 아예 빼버렸다.

한편 영호는 수정한 기획안을 다시 김팀장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려다, 승훈과 함께 자동차를 몰고 점심 식사를 하러 나와버렸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선배." 승훈은 육개장을 퍼넣으면서 우물거렸다.

"뭘?"

"방영까진 한 달 반쯤 남았는데 프로그램 방향을 다 수정해야 하잖아요. 이작가님도 대본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판이구요."

순두부찌개를 앞에 놓은 채 영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와서 어떻게 수정해. 한 달이면 대본 쓸 시간인데. 2 주일 동안 촬영하고 편집하면 그게 다큐멘터리니 뉴스지."

"그래도 어떡해요. 해외 촬영 못한다는데."

"위에다 다시 기획안 올렸어."

영호는 숟가락을 들고 국물부터 맛을 보았다.

"다시 올리셨어요? 안 될 걸요…."

"……."

"선배?"

"야, 이 집 괜찮다. 새로 생긴 집이라 일부러 왔는데 앞으로 자주 오자. 먹어."

승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영호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국장님이 따로 불러 이야기했을 정도면 알아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 달 반이면 작가 닦달해서 대본 다시 쓰게 하고, 대본 쓰는 동안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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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니며 화면 찍고 인터뷰 딴 다음 대본 가지고 일주일 동안 편집하면 방영 못 할 것도 없었다. 물론 그렇게 프로그램 만들면 좀 후지긴 하지만, 방송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점심 식사를 끝내고 승훈은 바로 6㎜를 들고 스케치 화면을 따러 나갔다. 영호는 편집실에 들어가 지역 뉴스 화면을 편집하고 자막을 삽입했다. 김팀장의 호출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김팀장도 식사 후 촬영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영호는 가슴이 뻐근하도록 답답해왔다. 새장에 갇힌 정도가 아니라 온 몸을 철망으로 꼼꼼히 묶인 느낌이랄까. 아주 잠깐이라도 일본 바람을 쐬면 해방감을 맛볼 것 같았다. 단지 은숙과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영호 자신이 탈주를 꿈꾸는 듯했다.

편집기 앞에서 조그셔틀을 돌리다가 저녁 6 시가 되자마자 영호는 벌떡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PDA 배터리도 빼버렸다. 승훈과 이작가가 전화를 해 올지도 모르지만 오늘만큼은 집에서 와이프가 해 준 저녁을 먹고, 아이와 잠시 놀아주다가 뉴스를 보고 잠드는 '모범적인 가장 놀이'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영호는 퇴근하려다 로비에서 화선과 마주쳤다. 저녁께였지만 화선은 아침에 출근을 하는 사람처럼 깔끔한 모습이었다. 영호는 새삼 그녀를 훑어보았다. 방송일의 특성상 한 집에 살아도 낮과 밤처럼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지나치는 날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부부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어색하게 나란히 앉았다.

"이제 퇴근해?"

"응."

"당신…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라니?" 영호는 화선을 돌아보았다.

"이 PD 가 뭐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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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PD? 하여간 그 자식은…. 뭐라고 했는데."

"아냐, 아무것도."

영호는 짜증이 났다. 국장이 친히 불러올린 게 어느 새 좌악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오늘 밤에 녹음 있어?"

"어. 이따 여덟 시."

"누구 거야?"

"이 PD 거야. 왜?"

"그 자식은 왜 꼭 밤에 스케줄을 잡어? 꼭 능력없는 것들이…. 당신도 여기 PD

들한테 굽신거릴 거 없어. 대충 해주고 들어가."

영호는 공연히 심술이 나서 불뚝거렸다. 성질 나쁜 초등학생처럼.

"왜 그래, 말하는 게. 당신은 PD 아냐?"

"PD 는 애 걱정도 안 하냐?"

"…."

"그리고, 여기 PD 도 PD냐?"

영호는 한숨을 쉬더니 종이컵을 구겨 내던지고 '나 먼저 들어갈게'하고 일어서 버렸다. 화선은 어이가 없었다. 언제부터 애를 챙겼다고? 그리고 여기 PD 가 PD

아니면, 여기 성우는 성우도 아니라는 건가. 화선은 로비에 남겨진 채 영호의 비아냥에 마음이 상해버렸다.

영호가 순두부 찌개를 먹으며 방송인으로서의 양심과 은숙을 향한 마음을 다지고 있을 무렵, 은숙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물론 은숙의 마음은 영호와 조금 다른 상태였다.

"조교수 어제 뭐 했어요? 학교에서도 안 보이고 사무실에도 안 보이고…."

문교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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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빼고 꼬박꼬박 잘 나왔는데, 문교수님만 저를 못 보셨나 보네요."

"그런가? 허허…. 요샌 술 한 번 잘못 먹으면 일주일 넘게 뻗기 일쑤야. 여기서 나만 피곤한 건가?"

문교수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안교수와 유선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기에 운동 좀 하라니깐. 사무실 나오면 인터넷만 하지 말고 가끔 나랑 탁구도 좀 치고 그래요."

"됐어. 이 나이에 몸짱 될 일 있나?"

"몸짱은 아니더라고 몸'꽝'은 곤란하잖아요. 안 그래요?"

은숙이 받아넘기자 다들 웃음을 지었다. 그 가운데로 해물 전골이 향긋하게 들어섰다.

"박작가는 오늘 안 오나?"

"요새 원고 작업하느라 조금씩 바빠지는 모양이에요.

유선생이 감수 봐주고 있으니까, 둘이 가끔 연락하죠?"

"네. 가끔." 유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나와서 하지? 유선생이 원고 봐주기도 좋고, 자주 나오면 더 친해지고 좋잖아."

문교수가 말하자 안교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만화 원고는 전용 작업대에서 해야 되거든요."

"아, 전용 작업대. 듣고 보니 그렇네. 특수한 작업이니까 그런 게 필요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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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교수는 수긍했다. 은숙은 고개를 꺾은 채 무관심을 가장하고 국물과 밥을 입 속으로 떠넣었다. 석규도 이제보니 꽤나 관심의 대상인 모양이었다. 하긴 심천 같은 좁은 도시에 뉴페이스 한 번 떴다 싶으면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심천은 심심한 도시다.

유선생은 석규에 대한 이야기를 못 들은 척 하는 은숙을 눈여겨보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러니 저러니 인물평을 내릴 은숙이 침묵을 지키는 게 수상했다. 역시 마음이 있는 걸까.

"요전에 박작가 집에 가서 봤는데 만화 작업도 만만치 않더라구."

"안교수님는 언제 또 박작가 집에 놀러갔어요?" 문교수가 물었다.

"그저께 잠깐 들러서 맥주 한 잔 같이 마시고 왔거든. 원고 잘 하라구."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박선생님은 어떻게 임용이 된 겁니까?"

유선생이 불쑥 끼어들었다.

"만화창작과 전문인 초빙이지 뭐. 만화 많이 보는 사람들은 박필 하면 다 알잖아요.

유선생은 만화 잘 안 보니까 모르겠지만…. 조교수도 잘 모르겠네."

"네. 저는 잘 모르죠…." 은숙은 말꼬리를 흐렸다.

"전문인 초빙 케이스라, 요즘 대학들도 많이 상업화 추세에 들어선 거로군요."

유선생이 덧붙였다.

"대학이 점점 전문교육화 추세니까요. 지방대는 특히 더. 사실 세월이 좋아서 교수지, 사실 만화쟁이지 뭐."

"왜, 뭐 하나만 잘 하면 요샌 교수죠."

은숙이 말했다. 만화쟁이라는 안교수의 말이 묘하게 거슬려왔다. 학위 있고 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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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만 교수라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유선생은 은숙의 말에 섞인 뼈를 눈치챘지만 안교수, 문교수는 은숙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잠시 대화가 끊기고, 네 사람은 말없이 숟가락을 놀렸다. 은숙은 전골이 맛있긴 하지만 조개맛이 좀더 났더라면 훨씬 맛있겠다 싶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싱싱한 패류들이 쏟아져 나올 테니 그때 영호를 불러들여 조개국을 해 먹어야겠다. 석규도 만화 원고가 완성될 때까진 사무실에 잘 나오지 않을 테니 마주칠 일도 없을 게다.

일본은 언제쯤 갈 수 있을까? 가을? 겨울?

"그런데, 박선생님…. 나 아는 사람 같애요. 옛날에 본 얼굴이야." 유선생이 불쑥 말했다.

"응? 무슨 소리?"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는데 낯이 익어요. 많이."

은숙은 철렁했다. 입에 든 생선살이 톱밥으로 변해버린 것 같다.

"고향이 같아서 그런가 보지, 청주."

"고향이 같아서가 아니라 잘 생겨서 낯익은 게 아니고?"

문교수가 끼어들자 유선생은 썰렁하게 웃었다. 은숙도 가슴 떨리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얼른 외교용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그러나 유선생은 은숙의 완벽한 표정 뒤의 떨림이 느껴졌다.

====

영호는 김팀장의 책상 앞에 꼿꼿이 서 있었다. 김팀장은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책상 위에는 영호의 기획안이 올려져 있었다.

"일단 올린 것이니 먼저 검토해 주십쇼."

김팀장은 몇 초 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기획안을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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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던졌다. 하얀 A4 종이들이 파닥거리며 휘날렸다. 영호는 뒷덜미가 살짝 뜨거워졌지만 꾹 참았다.

"이미 제작진들끼리 여러번 회의를 거듭했지만 이제 와서 포맷을 바꿔 제작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검토해 주십시오."

"제작진 전부가 다 자네처럼 생각해? 김 PD?"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팀장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김 PD, 방송국도 회사야. 방송사…. 당신들 생각처럼 허술한 데 아니야. 여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일본 가겠다, 그러면 잘 갔다와라, 하고 돈 주는 덴 줄 알아? 여기가?

스케줄대로 움직여 스케줄대로!"

"팀장님께서 정 허락 못하시겠으면 제가 다시 국장님께 말씀드리고 허락 얻겠습니다. 이대로는 제작이 불가능합니다."

"안돼. 김 PD 가 직접 국장님한테 간다고 해도 내가 중간에서 막아. 윗선에선 이미 그렇게 정리됐어."

윗선에서 정리되었다는 말도 이미 영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이대로 밀려날 수 없다는 생각만 가득 차올랐다.

"괜찮습니다. 직접 올리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PD 하면서 못된 것만 배웠어. 여기가 무슨 복지단체야? SBS야?"

"왜, SBS 는 되고, SBC 는 안됩니까?"

"뭐?"

"S 랑, C 랑, 한 글자가 그렇게 틀린 겁니까?"

김팀장은 잠시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다가 혀를 찼다. 방송 20년 만에 이런 꼴통은 또 처음이다.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똥고집을 피우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이 자식, 혹시 장인 믿고 이러는 걸까.

"긴 말 필요 없고 스케줄대로 움직여, 스케줄대로…. 가 봐. 이거 가져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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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팀장은 흐트러진 기획안을 영호에게 내밀었다. 영호는 몇 초 서 있다가 김팀장이 내민 손을 무시하고 그대로 돌아서서 자리에 놔둔 윗도리를 챙기더니, 그대로 지하 편집실로 내려가 버렸다. 김팀장은 순간 벙쪘다. 멀리서 김팀장의 노성을 지켜보며 조마조마하던 승훈도 마찬가지였다. 햐, 선배 저러다 어쩌려구. 영호가 오늘처럼 뻗대고 나서는 건 승훈도 처음 본다. 김팀장이 저런 미친놈, 하고 담배를 들고 나가버리자 승훈은 그제서야 편집실로 따라 내려갔다.

"선배, 여●어요?"

승훈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편집기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영호가 보였다. 손끝에는 벌써 불 붙인 담배가 끼워져 있다.

"우, 선배, 어쩌려구요? 안된다잖아요."

"승훈아." 영호는 오랜만에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선배?"

"나 이번엔 끝까지 간다."

"예?"

"우린 예능팀이 아니잖아. 사회문화시사교양팀이라구.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하는 거야. 안 그래?"

승훈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해 주지 않으면 한 대 날아올 기세였다.

"그래서요?"

"3, 4년 된 자료를, 그것도 포맷이 전혀 안 맞는 데 집어넣는 건 시청자에 대한 우롱이야. 나 스스로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너도 방송하려면 정신무장하고, 이번에 잘 봐둬…. 데스크에 욕 먹는 게 진짜야."

영호는 머리를 감싸며 돌아앉았다. 승훈은 앉아 있다가 커피 한 잔 타드릴게요, 하고 조심스럽게 편집실 문을 닫고 나갔다. 편집실이 조용해지자 영호는 피우던 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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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질적으로 눌러 끄고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두 개비를 연속으로 빠르게 피워버리고 나자 좀 긴장이 풀리는 듯 싶다.

그제서야 영호의 머릿속에서는 자기 객관화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나? 그래, 미쳤나 싶다. 영호는 혼자 쿡쿡 웃었다.

여행 한 번 가자는 거, 사소할 수도 있지만 지키고 싶었다. 은숙씨 미안해요, 약속한 여행 바로 못 갈 거 같아요, 다음번에 시간 내요하면 다 해결될 것을. 이렇게 말하면 은숙도 알아들을 사람이라는 걸, 영호도 알고 있었다. 그까짓 환경 다큐쯤이야, 한 달 반이면 충분히 포맷 바꾸어 만들 수 있다.

영호도 그 정도 능력은 있는 PD 다.

승훈이 어느새 조심스럽게 다가와 선배 진정해요, 하고 커피를 갖다주었다. 영호는 달달한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느 새 담배연기로 편집실은 너구리굴이 되어버렸다.

"전화기 갖다드릴까요? 책상에 있던데…"

"됐어."

승훈은 조용히 편집실 문을 닫고 나갔다.

영호는 커피잔과 담배를 앞에 놓고 상념에 잠겼다. 여행을 같이 가든 못 가든, 이번 일 마무리되면 다음 번 환경 다큐멘터리에 은숙을 끌어다 써보고 싶어졌다. 탐사 주인공으로서 프로그램 중심에 세우는 것은 물론, 목소리도 좋으니 내레이션도 맡겨보고 싶다.

영호는 컴퓨터를 켜고 한게임 고도리에 접속했다. 오늘은 여기서 밤샘은 물론, 다른 프로그램의 예정된 일정까지 모조리 엎을 심산이었다. 영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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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화선에 대한 지겨움과 분노 때문이란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한편 은숙은 다시 긴장중이었다. 점심 식사 후 사무실에 돌아와보니 석규가 명희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한창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숙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잘들 한다. 집에서 작업대 놓고 원고 만든다면서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그것도 명희와 다정하게 겸상이라니.

명희는 은숙의 폭발 직전 표정을 보고 주섬주섬 도시락 먹은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석규는 명희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명희만 보면 인상을 박박 쓰며 잡아먹으려 드는 은숙이 새삼 짜증난다.

"넌 여기서 뭐 하니? 사무실 지저분하게 이게 뭐야?"

"죄송해요. 다 먹었거든요, 얼른 치울게요…"

"사무실에 냄새 배잖아. 음식쓰레기 잘못 처리했다가 곰팡이라도 피면 어쩌려구?"

"그만 해요. 내가 시켜먹자고 했으니까. 식사는 하고 들어오셨어요, 안교수님?"

석규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안교수, 문교수,

유선생 쪽에 인사를 건넸다.

"우린 다 먹고 왔어요. 천천히들 잡숴…"

칫솔을 들고 안교수가 씨익 웃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문교수와 유선생도 커피 한 잔씩 들고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지 따라나섰다. 은숙은 인상을 박박 쓰면서 자리에 앉았다.

석규는 은숙이야 비위가 상하거나 말거나, 도시락을 한입씩 꼭꼭 씹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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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의 짜증에 꼬리를 감았던 명희도 따라서 젓가락을 놀렸다. 은숙은 입을 꼭 다물고 서류철을 뒤적거리며 쿨한 척했지만 짜증이 치받쳤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자 명희가 도시락이며 테이블에 덮은 신문지를 들고 나갔다.

사무실에 둘만 남자 석규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 붙이지 마요." 은숙이 석규의 뒤통수에 대고 쏘아붙였다.

"여기서 피우지 말라고요?"

"문교수님 유선생님 담배 갖고 나가는 거 못 보셨어요? 실내에선 금연이에요.

기본적으로."

"식사도 금지고요?"

"연애도 금지예요. 금연."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시나? 석규는 웃음이 나왔지만 담배를 다시 담뱃갑 속에 집어넣었다.

"교수님은 담배 안 피우세요?" 석규가 물었다.

"안 피워요."

"원래 안 피우시는 거예요?"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피우시다 끊으신 거 같아서."

"끊었어요. 대학교 때."

"언제부터 피우셨는데요?"

"그건 왜 물으세요, 언제부터 피웠는지?"

은숙은 서류철을 꽉 움켜쥐고 눈동자만 치켜뜨고 석규를 노려보았다. 석규는 소파에서 몸을 돌린 채 은숙과 눈을 마주쳤다. 잠시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

푸른심천 사무실에 보기 드문, 험악한 공기가 흘렀다. 서로를 증오하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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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두려워하는 공기였다.

석규는 그만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몸을 돌리고 앉아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은숙도 날선 시선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석규의 뒤통수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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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어떻게 된 거야?"

"……"

"다리 때문에…, 못 알아봤잖아."

"알아보면 어쩌고?"

"…알아보면?"

"……"

"하긴, 알아보면…"

석규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가 스멀거리다 은숙이 들이마시는 공기에까지 흘러왔다. 은숙은 말없이 창문을 열었다. 조용한 사무실에 가습기가 삑삑대는 소리만 울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문교수와 유선생이 들어왔다. 어라?

"이게 뭐야? 우린 실내 금연이라서 옥상 담배 피우고 왔는데…."

문교수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했다. 유선생도 은숙을 넘겨다보았다. 은숙은 짐짓 시선을 내리깔았다. 석규는 담배를 얼른 껐다.

"그러게요. 조교수님이 하도 뭐라고 하셔서, 사무실에선 담배 안 피우는데….

박선생님은 특별 대우인가보죠?"

유선생의 명랑한 어조에 어딘가 가시가 돋쳐 있다. 은숙은 급히 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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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원고 때문에 스트레스 좀 받으시는 거 같아서요. 그냥 안에서 피우시라고 했어요."

"그랬어요? 그래도 조교수 사람 차별하는 것 같은데 좀 섭섭하네."

"원고 하시니까…. 원고 끝내시면 바로 밖에서 피우셔야죠."

은숙은 생긋 웃었다. 문교수는 주억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유선생도 끄덕였다가 커피를 타 들고 석규 맞은 편에 앉아 권했다. 석규는 꾸벅 하고 커피를 받아 마셨다.

유선생은 그러면서 석규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눈치였다.

은숙은 유선생의 거동을 보고 서류철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아아, 미치겠다. 어째 일이 이렇게 자꾸만 꼬여가는 걸까.

다음날 저녁 은숙은 영호의 문자를 받았다. 영호는 전화보다 문자 메시지를 더 좋아했다. 주로 색스러운 문구였다.

'은숙씨랑 섹스하고 싶어요.'

식사를 하자는 말도, 커피를 마시자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없다. 그러나 은숙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심천시 전체를 통틀어 은숙을 만족시켜 주는 남자는 영호뿐인가 보다. 영호는 은숙을 지난번에 만났던 스카이라운지로 청했다.

엘리베이터가 스카이 라운지로 올라가는 동안 은숙은 전망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에 올 때는 날이 흐렸는데, 오늘은 밤하늘이 맑아 전망이 아주 예뻤다. 은숙은 밤바다를 보다가 영호를 보고 한껏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영호도 은숙을 보고 웃음을 띠었다.

"때르릉."

영호의 PDA 다. 엘리베이터에서도 터지는구나? 은숙은 신기해서 영호 쪽을 넘겨다보았다. 그러나 영호는 PDA 마이크 쪽을 손으로 막고 몸을 돌렸다.

"여보세요? 응, 밖이야. 밥 먹고 들어갈게. 기다리지 마. 알았어…. 먼저 자."158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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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구나, 은숙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내 앞에서 와이프와 당당히 통화를 하다니,

은숙은 가슴속 한구석이 찡하고 아파왔다. 그러나 그녀는 자리에 앉을 때까지 도도한 태도를 유지했다. 눈치 못 챈 영호는 은숙을 보고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전망 좋지 않아요?"

"……."

"왜 그리 시무룩해요? 갑자기…."

"아까 누구랑 전화하셨어요?"

"와이프요." 영호는 약간 긴장되었다.

"……."

"저 결혼한 거 모르셨어요?"

은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결혼한 거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와이프도 계신지는 몰랐죠."

"…?"

"식사나 해요."

은숙은 무릎에 냅킨을 떨어뜨리고 메뉴를 펼쳤다.

영호는 잠시 은숙 눈치를 보다가 메뉴에서 지난번에 시켰던 스테이크를 골랐다. 은숙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무슨 심오한 사색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영호는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괜히 여기서 담배를 피워 물거나 아까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캐물었다간 더 혼날 거 같다.

은숙은 스테이크가 나오자 맛있게 먹을게요,

한마디하고 칼질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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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한 잔 할래요?"

"아뇨, 차 가져왔어요." 바늘 꽂을 틈도 없군. 영호는 한숨을 쉬었다.

"화났어요?"

"화 안났어요. 괜찮아요."

"미안해요. 전화 받지 말 걸."

"왜요. 집에서 온 전화면 받아야죠. 애한테 무슨 일 생긴 거일지도 모르잖아요."

"…애 있는 것도 알았어요?"

영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집에서 온 전화 한 번 받았다고 삐져 있는 은숙이 답답했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건 은숙이 시무룩해져 있는 건 보기 싫었다. 이런 게 사랑인걸까.

한편 은숙은 영호 눈치를 살폈다. 기분은 상했지만 영호가 어떻게 비위를 맞춰줄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호도 은숙처럼 침묵을 지키면서 칼질만 하고 있었다. 은숙은 그런 태도에 더 상처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영호는 나름대로 은숙의 심사를 살피면서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배려였지만, 오히려 은숙은 영호가 무관심해 보여서 더 화가 났던 것이다.

"맛있어요?"

"…네."

은숙은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지만 스테이크를 씹으면 씹을수록 입 속에 울화가 번지는 듯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이 남자는 발신자 번호 표시 서비스도 안 받는단 말인가. 일단 안 받았다가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다시 전화를 거는 센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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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단 말인가. 아무리 내가 바람 상대라지만 최소한 만날 때만큼은 100% 존중해줘야 되는 게 아닌가. 이젠 영호가 자신을 막 다뤄도 되는 상대로 생각하는 듯 해서 은숙은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러나 눈물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울음을 참다가 눈이 멀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울 수 없다.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 남자는 우는 여자를 겉으로는 달래주면서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멸시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은숙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 같아선 와인 몇 잔 마시고 싶었지만 은숙은 묵묵히 스테이크에 집중했다.

대놓고 화내봤자 받아줄 남자도 아니다. 그러니 조은숙, 일단 부아는 가라앉히고 힘 내. 지금 맛있는 거 먹고 있잖아.

영호는 그런 은숙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식사를 하고 나서 모텔로 갈 작정이었는데 은숙이 기분을 완전히 잡친 기색이다.

"잘 먹었어요."

은숙은 접시를 깨끗이 비운 뒤 일어섰다. 영호는 은숙을 올려다보다가 따라 일어섰다.

"다 먹었어요?"

끄덕.

은숙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총총히 볼보를 타고 가버렸다. 영호는 섹스는커녕 은숙의 손목도 잡지 못하고 그녀를 보내야 했다. 부웅 사라지는 은숙의 뒷모습을 보면서 영호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때맞춰 전화를 건 화선은 물론이고,

은숙 앞에서 냉큼 전화를 받은 자신의 무감각에 화가 났다. 섹스에 대한 기대감도 따라서 영호를 괴롭혔다. 아, 저 자존심에 한 번 틀어지면 영영 안 볼 기세인데.

어떡하지.

영호는 망연히 앉아 있다가 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술이나 마시고 들어가야 속이 좀 시원해질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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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도 술 생각이 났다. 그러나 영호처럼 휴대폰을 뒤져 술 상대를 찾아내진 않았다.

그녀는 즐거울 때나 자랑거리가 생겼을 때 술 상대를 찾아 마시지, 괴로울 때는 혼자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그녀의 냉장고에는 맥주와 양주가 항상 채워져 있었다.

승훈과 뻐드러지도록 마신 다음날 아침 영호는 다시 김팀장의 호출을 받았다.

"부르셨습니…."

"너, 라디오국으로 내려와. 지금 당장."

김팀장은 그렇게 말하고 혼자 투당탕거리며 내려갔다. 당장 영호의 목덜미라도 잡을 기세였다. 영호는 약간 놀랐지만 일단 자리에 윗도리를 벗어놓고 따라 내려갔다.

김팀장은 라디오국의 빈 스튜디오 문을 열고 영호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영호는 흠칫했지만 안 들어가고 배길 수는 없었다. 결국 망설이다가 들어갔다. 도살장에 끌려들어간 소 등 뒤에서 울타리가 걸어 잠겨지듯, 스튜디오 문이 퍽 하고 닫혔다.

영호를 스튜디오에 들여보내고 나서 김팀장은 조정실 마이크를 켰다. 영호는 주춤거리다가 스튜디오 마이크 앞에 가서 섰다. 영호와 김팀장은 스튜디오의 넓은 유리창을 마주보고 섰다.

김팀장은 한참 영호를 노려보다가 마이크를 얼굴 앞으로 끌어당겼다.

"김 PD! 너 여기 들어온 이유 알지? 지금부터 네 얘긴 안 듣겠단 말이야."

"……."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 도대체…다 있는 자료를 왜 일본까지 찍으러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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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기획한 포맷과 다릅니다. 게다가 재작년에 찍은 걸 또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영호는 똑부러지게 대답했다. 김팀장은 머리를 박박 쓰다듬었다.

"휴우……. 너 왜 이렇게 사람 짜증나게 하냐? 방송 한두 번 해봐?"

"그런 걸로 시청자 더 이상 우롱할 수 없습니다."

"김 PD!"

"팀장님!" 영호는 마이크를 잡고 매달렸다.

"나 책임 못 진다. 마이크 끈다."

"팀장님! 저도 이번엔 마음 독하게 먹었습니다. 저를 어떻게 보시는지는 상관없지만,

이번만큼은, 방송인의 양심! 지키고 싶…."

김팀장은 더 듣지 않고 가차없이 스튜디오 마이크를 아웃시켜 버렸다. 조정실은 순간 정적에 싸였다. 영호는 꺼버린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지껄였다. 김팀장의 멀뚱한 얼굴을 보고서야 영호는 저 혼자 떠들기를 그쳤다. 김팀장은 한참 스튜디오 안의 영호를 바라보다가 무어라고 한 마디 하더니, 그냥 나가버렸다. 영호는 그대로 스튜디오 안에 남겨졌다. 영호의 목소리가 퍼지던 스튜디오 안에 정적이 흘렀다.

마이크 앞에 한참 서 있던 영호는, 10 여 분이 흘러서야 스튜디오 문을 열고 걸어나왔다.

데스크로 천천히 올라온 영호는 은숙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강의 중인가? 영호는 신호음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문자 메시지보다 직접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은숙씨! 기분 안 좋은 거 알아요. 제가 은숙씨한테 실례했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저 피하시는 거, 저한테도 실례하시는 거예요. 메시지 들으면 연락 부탁합니다."

김팀장이 전화로 음성을 남기는 영호를 건너다보고 가재미눈을 지었다. 영호는 김팀장의 시선을 의식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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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부탁,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다릴게요."

메시지가 저장되었습니다, 라는 안내 멘트를 듣고 영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때까지도 김팀장의 못마땅한 눈길은 거둬지지 않고 있었다. 영호는 그런 김팀장에게 도전적인 시선으로 맞서면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오늘도 아무데도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김팀장은 한참 동안 영호를 쏘아보다가 일어섰다. 영호는 책상에 시선을 박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김팀장은 그런 영호의 책상 옆을 지나치면서 한마디 쏘아붙이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미친 놈, 지 아이템이랑 자는 PD 가 어디 있냐?"

영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김팀장마저 나가버리자 사무실 전체가 스튜디오인 양, 영호만 홀로 남겨졌다. 영호는 천천히 일어서서 지하 편집실로 내려갔다. 다들 영호만 빼놓고 점심을 먹으러 간 모양이다. 구내 매점에서 빵이라도 살까 싶었지만 배고프지 않았다. 그 대신 담배와 커피가 무한정 댕겼다.

일어선 영호 뒤로, 책상에 남겨진 PDA 가 진동을 했지만 영호는 알아채지 못했다.

한편 음성을 받은 은숙은 미친 듯이 전화를 했지만 영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호는 PDA 를 데스크에 처박아 둔 채 고슴도치처럼 편집실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은숙은 기가 막혔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가지고 노는 거야?

"도대체 왜 이래요? 전화 하라고 음성 남겨놓고 전화 안 받는 건 또 뭐예요? 왜 이렇게 날 비참하게 만들어요? 어떻게 내 앞에서 와이프 전화를 받아요? 내가 안 보여요? 내가 투명인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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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영호 대신 죄없는 음성사서함에 악을 썼다. 그녀도 영호처럼 한밤중 텅 빈 푸른심천 사무실에 남겨져 있었다. 음성을 남기고 나자 은숙은 정말로 외로워져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서 안주도 없이 마시기 시작했다. 울고 싶었다.

새벽 한 시나 되었을까. 은숙은 잔뜩 취한 채 택시를 잡으러 나왔다. 소주 두 병 반을 안주도 없이 마셨으니, 제정신일 리가 없다. 운전은커녕 어디에 차를 세워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 은숙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섰다.

은숙은 겨우 뒷문쪽으로 다가섰다. 손잡이를 잡으려는 찰나 뒷문이 저 혼자 벌컥 열렸다. 어라 자동문이네? 은숙은 댓자로 발을 꼬며 택시로 다가갔다.

"조교수님! 괜찮으세요?"

"…네?"

"택시 잡고 있었어요?"

은숙은 눈을 비벼댔다. 흐릿한 그녀의 눈 앞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유선생이다.

"유선생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전화 하셨잖아요. 와달라고."

"……?"

"전화 해놓고 기억도 안 나죠?"

은숙은 비몽사몽했다. 유선생은 그녀를 택시에 태우고 심천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겨우 문을 연 맥주집을 찾아냈다. 빨간 의자와 지저분한 테이블에, 누르스름한 조명이 드리워진 이상한 분위기의 맥주집이었다. 유선생은 은숙을 부축해서 의자에 앉히고 병맥주와 찬물을 부탁했다. 얼굴이 술기에 시뻘개진 은숙은 앞뒤로 몸을 까닥까닥하다가 벽에 몸을 기대고 숨이 찬 모양인지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유선생이 병맥주를 딴 다음 은숙 앞으로 물잔을 내밀자 은숙은 기갈이 들린 듯 꿀꺽꿀꺽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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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드셨어요?"

끄덕.

"얼마나 드셨어요?" 은숙은 말없이 손가락 두 개를 펴서 내밀어 보였다.

"두 병이오? 소주로?"

"두 병…반이오. 안주 없이."

"…"

"왜 그렇게 많이 드셨어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은숙은 고개를 도리질치고 잔을 들어 물을 청했다. 유선생은 일어나서 아예 물통째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다.

같은 시간 영호는 분노에 찬 은숙의 음성을 들었다. 뭔가 일이 제대로 꼬여간다 싶다. 그러나 전화를 걸기엔 너무 늦었다 싶은 영호는 대신 문자를 날렸다.

"미안해요, 급한 일이 있어서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 두었어요…. 용서해요, 보고 싶어요. 전화할게요."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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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생은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보았다. 은숙에게 문자가 온 모양이다. 유선생은 다시 휴대폰 액정을 켜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한 시 반이다. 이 시간에 은숙에게,

누굴까?

"문자 왔네요."

"알아요."

물통에 든 물을 모두 마시고 나자 은숙은 술이 조금 깬 모양이었다.

메시지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럼 꺼두세요."

"…왔다는 건 알아야죠…. 꺼놓으면 잊어버리잖아요."

다시 한번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지만 은숙은 무시했다.

"제가 아는 사람입니까? 은숙씨…."

"…"

"…"

"유선생님."

"네."

"저 유선생님…많이 좋아해요."

"?"

"유선생님 참 순수하고 정직한 분이세요."

"…"

"나는 날 속이는 사람은 싫어요. 유선생님이 훨씬 좋은 분이세요."

유선생은 감동에 젖어들었다.

"은숙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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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씨도 참 좋은 분이세요. 정말로…순수하고."

"…"

"사랑합니다, 은숙씨."

"사랑해요, 유선생님…."

은숙은 헝클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은숙, 제대로 맛이 간 증거다.

그러나 유선생은 은숙의 손을 꼭 잡았다. 취중에 은숙이 실수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은숙의 취중 농담에 감동을 제대로 먹은 모양이었다. 은숙은 자기 입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놓고도 마음속으로 영호와 유선생, 둘 다에게 조소했다.

드디어 짝사랑이 결실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지, 어쨌든 유선생은 은숙을 데리고 모텔방을 잡았다. 은숙은 순순히 따라 들어갔다.

은숙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구두를 벗어던지고 피곤한 나머지 침대에 벌렁 쓰러져 버렸다. 유선생은 방바닥에 나뒹구는 은숙의 핸드백을 테이블에 놓은 다음

조심스럽게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은숙의 사랑한다는 말이 가슴에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샤워를 하는 동안 은숙이 꿈나라로 가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유선생이 옷을 주워 입고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그런 걱정은 순간 날아갔다. 은숙이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선생은 흠칫했다.

"…유선생님."

"은숙씨."

"겁내지 말고…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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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이 손을 내밀었지만 유선생은 덫에 놓인 먹이 주변을 서성거리는 야생동물처럼 은숙 주변을 맴돌았다. 이거 진짜 먹어도 되는 거야? 답답해진 은숙은 유선생을 침대에 끌어들이고 티셔츠를 벗겼다. 그제서야 유선생은 은숙의 허리를 안고 키스하기 시작했다.

"불 꺼요."

은숙의 한마디에 유선생은 벌떡 일어나 스위치를 내리고 다시 은숙의 몸 위로 올라왔다. 은숙은 눈을 감고 급하게 삽입하는 유선생의 몸을 받아들였다. 남자는 불 끄면 다 마찬가지다. 영호도, 유선생도…. 정말?

지금 은숙에게 필요한 건 섹스지 유선생이 아니었다. 물론 영호에게 배신당하고 끝났다고 느낀 지금, 재깍 찾아와서 위로해주는 유선생이 고마웠다. 그 고마움을 봐서라도 은숙이 유선생에게 실수를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은숙에게는 그러한 이성적인 능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은숙의 이성적인 사고능력은 아침이 되자 돌아왔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가…

유선생은 눈을 떴다. 은숙의 핸드백 속에서 휴대폰이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일어나 보려는데 불편하다. 몸에 이불이 칭칭 감겨 있었다.

유선생은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보았다. 은숙이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다. 벌써 오전인지,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 은숙의 나신을 가감없이 비추고 있었다. 모닝 어페어 욕구를 자극하는 관능적인 모습이다. 술을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유선생은 간밤 일이 꿈이라도 꾼듯 믿기지 않았다. 은숙과 자다니.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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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생은 은숙의 핸드백을 보았다. 새삼 메시지가 궁금해진 유선생은 슬며시 이불을 걷어 내고 뱀이 미끄러지듯 은숙의 핸드백에 손을 내밀었다.

"스톱!"

"은숙씨?" 유선생은 은숙을 돌아보았다. 그대로 누운 채로다.

"움직이지 마요!"

"네?"

"나 지금 나갈 거니까, 그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말고 이불 뒤집어쓰고 있어요."

"저기, 은숙…."

"말도 하지 말아요! 이불 뒤집어 써요!"

이게 무슨 중학생 같은 짓이야. 그러나 유선생은 은숙 말대로 이불을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었다. 침대가 흔들리는 듯하더니 은숙의 무게가 출렁, 유선생의 곁을 벗어났다. 뒤이어 사락거리며 살결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10 여 분 만에 문 닫히는 소리가 꽈당, 들렸다. 그제서야 유선생은 이불 자락을 제치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빠르다. 유선생은 혀를 내둘렀다.

한편 은숙은 모텔 뒷문으로 빠져나와 시간을 확인했다. 8 시 반이다. 토요일이기 망정이지 평일이었다면 무단 휴강이 될 뻔했다. 머리가 쑤시듯 아프면서 눈앞이 어지러웠다. 제대로 숙취에 걸린 듯했다.

그러나 일단 은숙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어디지? 제기랄, 도대체 어디로 데려온 거야? 그러나 은숙은 머리가 너무 아픈 나머지 택시를 잡기 전에 약국에 들러야만 했다.

"상주동 주공아파트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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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가 출발하고 나서야 은숙은 갈피가 잡혔다. 완전히 필름이 끊긴 건 아니었다.

영호의 문자 메시지를 계속 씹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어디서 결정적으로 유선생과 스파크가 튀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어휴, 머리야. 은숙은 택시 뒷자리에서 머리를 감싸쥐고 무릎 사이에 끼워넣었다. 머리에 철사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집에 도착한 은숙은 핸드백을 내던지고 찬물로 샤워를 한 다음 다시 침대에 뻗었다. 밤새 열심히 영호의 문자 메시지 도착을 알리던 휴대폰은 배터리가 다해 전원이 꺼져버린 직후였다.

으악, 내가 미쳤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런 스무 살 같은 짓을 했을까. 은숙은 머리가 복잡해지다가, 어제 열심히 울리던 휴대폰 생각이 났다. 메시지! 벌떡 일어서서 핸드백을 거꾸로 들고 흔들자, 전원이 꺼진 휴대폰이 데구루루 굴러나왔다.

은숙은 충전 케이블을 꽂고 전원을 켰다. 영호의 메시지가 떴다.

'…용서해요, 보고 싶어요. 전화할게요. 김영호'

은숙은 휴대폰을 들고 머리맡에 놓은 다음 다시 침대에 누웠다. 두통이 절반은 가시는 듯싶다. 은숙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어갔다.

은숙과 달리 유선생은 편안하지 못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간 은숙이 못내 불쾌했다. 왜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졌을까. 역시 취중에 실수한 거로구나 싶었다.

부리나케 사라진 은숙과 달리 유선생은 천천히 샤워를 하고 여유있게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어제 은숙이 술을 왜 그렇게 마신 걸까.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맥주 한 잔도 잘 마시지 않는 사람이…. 신상에 별일이 생겼다면 해결하려 달려들 은숙이지, 혼자 깡소주를 마시며 비련의 여주인공 놀이를 할 은숙은 아니었다. 유선생도 은숙의 성격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역시 남자 문제? 유선생의 머릿속에는 석규가 떠올랐다. 박필과 뭔가 틀어진 모양이다.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석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은숙이 박필에게 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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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까. 그래서 보복삼아 나와 자버린 걸까.

유선생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며 수업을 마치고 푸른심천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는 명희와 문교수가 나와 있었다.

"조교수님 나오셨네요."

"네."

은숙은 유선생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어색하게 고개를 까닥했다. 오전에 집에 갔다왔는지 옷이 바뀌었다. 유선생은 석규와 명희, 안교수에게 목례를 하고 책상에 앉았다.

은숙은 낮잠을 잤는데도 머리가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사무실이 조용하기라도 하면 좀 나을 텐데, 가습기의 삑삑대는 소리가 계속 신경을 건드렸다.

"저 약 좀 사올게요."

결국 은숙은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은숙이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막 들어서려던 석규와 마주쳤다. 깜짝.

"어…나오셨어요?"

"예."

석규는 꾸벅 하고 얼른 들어갔다. 은숙도 문을 닫고 나갔다. 유선생은 그런 은숙의 모습을 눈으로 쫓아갔다. 명희도 문교수도 각자 책상에 코를 박고 무언가 하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선생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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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도 석규도 헤어진 지 얼마 안 되는 커플처럼 많이 불편해 보였다.

석규는 자리에 앉아 원고 자료를 펼쳤다. 유선생은 그런 석규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박선생님! 혹시 조교수님 핸드폰 번호 아세요?"

"예?"

"조교수님 나간 김에 뭐 좀 부탁할까 해서요. 혹시 아세요?"

갑자기 질문을 받은 석규는 어이가 없었다. 나보다 더 잘 알 사람이 생뚱맞게 왜 나한테? 그러나 문교수가 책상에서 고개를 들지도 않고 소리쳤다.

"010-410-****요!"

저런 도움 안 되는 인간…. 유선생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책상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은숙이 들어오자 유선생이 불쑥 물었다.

"머린 좀 어떠세요?"

"예? 괜찮아요…. 고마워요."

은숙은 움찔했다. 유선생은 웃어 보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은숙도 하던 일에 다시 집중하려고 했지만 머릿속이 영 복잡하고 뒤숭숭했다.

스무 살도 아니고,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심천에서 술에 취한 채 건드려서는 안 될 남자와 정사를 벌인 게 은숙은 처음이었다. 영호도 따지자면 건드려서는 안 될 남자지만, 적어도 술김에 시작하지는 않았다. 서울 같은 대도시라면 몰라도,

심천만한 곳에서 함부로 몸을 굴렸다가 무슨 뒷소문이 날지 몰라 은숙은 은근히 조심, 또 조심했던 것이다.

다행히 유선생은 '나 조은숙 교수 먹었다'며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닐 사람은 아니다.

그럴 만한 위인도 못 되지만, 은숙이 취중에 유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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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중에 유선생을 영 나쁘게만 보고 있지 않다는 증거 아닐까.

아무튼 속도 더부룩하고, 비타민 드링크에 진통제 몇 알을 까먹었는데도 두통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진통제가 속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석규는 아무 말 없이 자료집만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은숙은 석규의 존재 자체가 불편했다.

삑삑, 조용한 사무실에 가습기 소리만 명징하게 울렸다. 자동으로 분무량이 조절되면서 나는 소리였다. 저건 또 계속 무슨 소리야? 은숙은 가습기를 짜증스럽게 쳐다보았다. 명희가 들여놓은 가습기다.

"저거 뭐니? 왜 저렇게 시끄럽니?"

"네?"

"어떻게 좀 해봐…. 머리 아파 죽겠다."

명희가 놀란 눈으로 은숙을 쳐다보다가 살며시 일어나서 가습기에 다가갔다. 은숙은 머리를 싸쥐고 짜증스러운 눈길로 가습기와 명희를 쳐다보았다. 명희는 뒷모습에 쏟아지는 은숙의 눈길을 느끼면서 스위치를 조절했지만 좀처럼 잘 되지 않는다.

삑삑.

"저거 무슨 냄새 안 나니?"

"네?"

"가습기 말야. 저거 들어오고 나서 사무실에 무슨 냄새 나는 거 같아…. 안 그래요?"

유선생과 석규, 문교수가 동시에 슬며시 고개를 들고 은숙을 주시했다. 마치 허공에 독수리가 뜨자 고개를 들고 위치를 파악하는 토끼들 같다.

"가습기…, 집에서 잘 씻은 거야?"

"…네."

"가져와서도 씻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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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렇게 썩은 냄새가 나니? 무슨 냄새 안 나요?"

썩은 냄새? 명희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가습기 저런 거 잘 안 씻으면 세균덩어리야…. 저게 다 세균 날리는 거라고.

알았어?"

"…네."

"저거 좀 잘 좀 해봐…. 소리 좀 안 나게 해보고."

명희는 눈물이 삐져나오려고 했다. 언젠가는 대차게 갈굼을 당하지 않을까 내심 예상하고 있었지만 가습기로 당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박박 소리지르는 것도 아니고 나직한 목소리로 상처받을 말만 골라서 하는 은숙의 솜씨도 대단했다.

"알았으면 얼른 가서 다시 씻고 와. 머리 아파 죽겠다…."

"그만 좀 해요!"

은숙의 모욕을 받고 명희가 나가려는 순간 석규가 버럭 소리를 쳤다. 명희는 물론 은숙조차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유선생과 문교수도 깜짝 놀란 기색이다.

"그만 좀 해요…. 그만. 추하게 그게 뭡니까?"

석규가 한마디 더 쏘아붙였다. 명희는 눈물을 닦다가 가습기를 통째로 들고 나가버렸다. 은숙은 기가 막혔다. 같이 머리 맞대고 식사도 잘하더니

이젠 정말 짝이 맞는구나. 석규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겸연쩍었는지 공연히 담뱃갑을 부스럭거리며 나가버렸다. 유선생과 문교수는 은숙 눈치를 슬슬 살폈다.

은숙은 사무실 문을 쏘아보다가 주소록을 펼치고 석규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그리고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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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오후쯤 나 좀 봐요.' 마침표까지 찍힌 에누리없는 말투다.

석규는 사무실을 나와 옥상으로 올라가려다, 슬쩍 여자화장실을 들여다보았다.

명희는 보이지 않았지만 세게 튼 물소리며 뭔가 문질러 닦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규는 그대로 옥상으로 올라가 버렸다.

자그마한 하천 둔치에 차를 세워둔 채 은숙은 석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푸른심천에서 가끔 대청소를 하러 나오는 장소였다. 심천 바닷가에서 내륙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곳이기도 했다. 바다 냄새에 질린 심천 시민들이 이 둔치에 휴일마다 가족 단위로 찾아와 물냄새를 맡고 가곤 한다. 그러니 심천에 내려온 지 오래되지 않은 석규는 잘 모르는 곳이기도 하다. 해수욕장에서 만나자고 하면 석규가 잘 찾아왔겠지만, 지금 은숙은 친절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오후 다섯시다. 둔치에는 해가 빨리 지는 것 같았다. 벌써 구름이 연보랏빛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은숙의 눈에는 전연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귓가에 거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석규의 갤로퍼인 모양이었다.

은숙은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하천을 내려다보았다. 갤로퍼는 둔치 위로 엄청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왔다. 그 바람이 은숙에게까지 와서 모래알들을 튕겼지만 은숙은 더욱 얼굴 근육을 긴장시켰다.

이윽고 갤로퍼는 은숙의 볼보 옆에 멈춰섰다. 석규는 차에서 내렸다. 분명히 엔진 소리가 들렸을 텐데, 열심히 무시하는 은숙이 돌연 귀엽기도 하다. 석규는 미리 사 들고 온 캔커피를 은숙에게 내밀었지만, 은숙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만 내밀어 받았다. 석규는 은숙의 옆모습을 흘끔거렸다. 그러나 은숙은 커피를 천천히 따 마시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석규도 자기 것을 따 마셨지만 뻘쭘하기 짝이 없었다.

"진짜로 물어보고 싶은 게…. 다리는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하마터면 영영 모를 뻔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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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기가 막혔지만 표정은 그대로 유지했다. 영영 모를 뻔? 차라리 서로 못 알아보는 게 나을 텐데? 은숙은 커피를 든 채 고개만 돌려 석규를 쏘아보았다.

석규는 은숙의 사마귀 같은 눈초리에 절로 졸아들었다.

"너무 티내는 거 아니에요?" 앗, 존댓말이다….

"무슨 말…입니까?"

"명희 말이에요. 보통 애 아니에요, 걔."

"무슨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네요. 저 명희씨랑 아무 관계 없어요. 이상하게 연결시키지 마세요."

"내가 연결하는 게 아니에요. 댁들이 이미 연결돼 있는 거지…."

석규는 짜증이 났다. 연결이 되어 있으면 어떻고 안 돼 있으면 또 어떤가? 그걸 당신이 이래라 저래라 할 이유가 없잖아. 명희가 무서운 애라면 당신은 어느 정도나

될까? 지옥에서 온 마녀? 석규는 은숙에게 주루룩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그렇게 명희씨가 밉습니까?"

"뭐라고요?"

"명희씨가 보기 싫으냐고요."

"댁은 보기 좋으세요 그럼?"

"보기 나쁠 이유는 전혀 없지요."

"그러니까 걔가 무섭다는 거예요. 내 말이."

"내가 보기엔 당신…아니 조교수님이, 너무 예민한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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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는 말에 은숙이 노려보자 석규는 얼른 말을 바꿨다. 그래도 은숙의 눈길이 거둬지지 않자 석규는 다시 면피용 발언을 내뱉었다.

"정 불편하시다면 제가 몸조심하도록 하지요."

"고마워요."

"뭘, 그런 걸 가지고…."

"그건 그렇고요, 박선생님. 유선생 어디서 보신 적 없으세요?"

"유선생이오? 어디서 보다니요?" 석규는 고개를 도리질쳤다.

"모르겠는데요? 무슨 말인지?"

"유선생 고향도 청주예요. 우리랑 동갑이고."

"그래서요?"

"그래서라니요? 지금 몰라서 물어요?"

은숙은 가슴을 쳤다. 이런 답답할 데가. 내가 저런 것과 같이….

"지금, 유선생이 우리랑 같은 중학교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얘깁니까?"

"유선생님이 그랬어요. 박선생님 어디서 본 것 같다고."

"그랬어요?"

"유선생 허튼 소리할 사람 아니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본 적 있을거예요…."

"…모르겠네요, 저는. 절 알아볼 정도면 은숙씨도 예전에 알아보지 않았을까요?"

은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유선생 앞에서 신경 좀 쓰세요."

"신경을…뭘 써요? 뭐 죄진 거 있습니까?"

"그럼 죄진 게 없나보죠?"

은숙은 정말로 석규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캔커피를 쭉 들이켜더니 빈 캔을 바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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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내던지고 볼보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석규는 둔치에 땡강, 하고 내던져진 캔커피에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은숙은 석규를 본체만체한 채 차에 시동을 걸고 부웅,

먼저 사라졌다. 석규의 갤로퍼가 그랬듯이 은숙의 볼보도 석규에게 따가운 모래알갱이들을 튕겼다

다음날 아침, 심천 바다는 터키옥 빛깔의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이승훈은 활짝 갠 날씨를 확인하고 카메라를 메고 나섰다. 지역 민방 뉴스 삶의 현장에 방송될 새끼 사슴을 스케치하러 가는 길이었다. 지역 뉴스 아이템이란 게 다 그런 종류다. 내보낼 게 없어서 억지로 만들 때도 왕왕 있었다. 재미 없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아이템을 찾다 못해 방송시간이 촉박해지면 그때 방송인의 양심이란 것은 제 시간에 방송을 내보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오직 한 가지로 압축돼버리니 말이다.

아, 이런 날 잠수복 입고 서핑보드 들고 나가면 딱 좋을 날씨인데…. 승훈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심천에서 좋은 것이란 승훈에게 서핑밖에 없었다. 전쟁 같은 서울의 공중파 방송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심천의 여유로운 방송 생활에 이제 승훈도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서 영호의 막무가내식 행동에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에라, 오는 길에 바다 스케치라도 하고 와야겠다…. 승훈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회사 주차장으로 향하다가 화선과 딱 마주쳤다.

"이 PD님!"

"어? 사모님?"

"촬영 나가시나 봐요?"

"네. 녹음 있으신가 봐요?" 화선은 대답 대신 미소로 답했다.

"혼자 가세요? 영호씨는요?"

"안 가세요. 저보고 그냥 갔다오라시네요."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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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선은 의아해졌다. PD 가 촬영을 안 나간다니. 승훈은 대답이 곤란해진 나머지 그냥 씨익 미소만 지었다.

"에, 요즘 데모 중이시거든요. 먼저 갈게요!"

화선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승훈이 잽싸게 사라져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사무실 영호의 자리로 가보았지만 비어 있었다. 다들 야외에서 진행할 일이 있는지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선은 영호의 빈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녹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혼자 사무실을 지키던 중 책상에서 무언가 진동을 쳤다. 화선은 여기저기 뒤지다가 영호의 PDA 를 찾아냈다. 용케도 전원이 끊어지지 않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물론 모르는 번호다. 이 사람 전화기도 두고 어디로 사라진 걸까?

"여보세요."

"…."

"여보세요? 김영호 PD님 전화입니다."

"…여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거기 방송국인가요?"

"네, 그런데요."

"김영호 PD님…, 멀리 가셨나요?"

"아니요, 방송국 안에 계신 것 같은데요."

"아, 예…."

"누구시라고 전해드릴까요?"

"…."

"여보세요?"

전화가 끊어졌다. 화선은 PDA 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30 대 여자 목소리다.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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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은숙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달달 떨었다. 도대체 뭔가, 이 남자. 전화를 하라더니 받지도 않고, 기껏 다시 한 전화는 와이프가 받고….

은숙의 졸아드는 마음도 모른 채 영호는 지하 편집실에서 한게임 고도리에 빠져 있었다. 꽁초로 수북한 재떨이와 빈 컵라면이 널린 모습이 마치 심야 PC 방 같은 모습이었다. 만약 김팀장이 보았더라면 대로하여 편집실 인터넷부터 끊어버리지 않았을까.

화선은 책상 위에 놓인 PDA 를 만지작거렸다. 액정에 전원 표시가 들어왔다. 곧 배터리가 끊길 것 같다. 그녀는 PDA 액정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사무실 한구석에 꽂힌 휴대폰 라인을 가져와 PDA 에 꽂았다. PDA 가 충전되자 화선은 영호에게 온 문자 메시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몇 분 후….

꺄호~대박이다! 100점 나왔다. 모니터 속의 담요장 위에 불꽃놀이가 퍼졌다.

영호는 혼자 낄낄대고 박수를 쳤다. 얼마나 좋았던지 영호는 화선이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영호 앞으로 PDA 가 툭 던져지며 빙글빙글 돌았다.

"지랄들 틀구 있어…. 진짜…."

영호가 놀라 고개를 들자, 화선이 족제비눈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뭐라고 한 마디도 하기 전에 화선은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망연해진 영호가 PDA 를 들고 액정화면을 켜자 문자가 들어왔다.

'음성 들었어요. 영호씨가 잘못한 거 없어요. 절망적이지만…. 사랑해요. - 은숙.'

좆됐다! 이보다 정확하게 걸리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영호의 가슴 한편에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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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이 연락을 주었구나싶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다행이다.

이윽고 영호는 문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은숙씨, 고마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내가 연락할게요.'

문자를 받은 은숙은 한시름 놓았다. 그러면서도 혹시 와이프에게 들통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영호도 은숙 못지않게 주변 사정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시 연락을 취해 캐묻는 건 피해야 한다. 은숙의 경험상 남자가 여자에게 복잡한 주변 일을 주절주절 설명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답답했지만 기다리라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푸른심천 사무실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은숙은 창문을 열고 맑은 공기를 끌어들였다. 좋은 날씨다. 오후 늦게 회의만 없다면 볼보를 끌고 드라이브를 가고 싶었다.

은숙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열한 시 반이다. 오늘 점심은 혼자 먹어야 되나 싶은 순간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명희다. 명희는 들어오더니 은숙 혼자 있는 걸 보고 움찔했다. 은숙도 흠칫했다.

"안녕…하세요."

"…왔니?"

"아무도 안 계세요?" 아무도 없냐니, 은숙은 그 말에 또 불쾌해지고 말았다.

"네 눈에 난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보이니?"

"…죄송합니다."

명희는 자기 책상에 가서 앉았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오지 않으면 꼼짝없이 이 계집애와 겸상을 해야 할 판이다. 아윽, 싫어. 은숙은 명희를 무시한 채 다 본 신문을 펴들었다. 사무실에 침묵이 흘렀다.

몇 분 후 명희는 한숨을 폭 쉬더니, 휴대폰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집어넣고 발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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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서 가습기를 들고 뚜벅뚜벅 나가버렸다. 그녀 뒤로 문이 철컥 닫혔다. 은숙은 명희의 이거 보란듯한 태도에 벙찌고 말았다. 그렇게 30 분이 지나도 명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진 은숙은 화장실로 갔다. 복도까지 세게 튼 물소리가 났다. 설마 아직까지 문질러 닦고 있는 건 아니겠지.

화장실로 들어가자 소매를 걷어붙인 명희가 이마에 땀이 맺힌 채 가습기 물통을 닦고 있었다. 물비누를 왕창 뿌렸는지, 세면대에는 허연 거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혹시 물기가 튈까 걱정된 모양인지 휴대폰은 아예 창가에 놔둔 채로였다. 은숙은 또 한번 벙찌고 말았다.

물소리가 커서 못 들었는지 명희는 은숙이 들어와도 여전히 물통을 닦고 있었다.

은숙은 혀를 내두르면서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정말 대단한 애다. 가습기 갖고 말 한마디 좀 했다고… 저럴 줄 알았으면 단체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청소 용역을 맡길 걸 그랬다.

은숙이 천천히 볼일을 보고 나올 때까지도 명희는 가습기에 달라붙어 있었다. 은숙은 명희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어린애한테 내가 잘못했다 싶어 뻘쭘하게 말을 걸었다.

"뭐…하니?"

"…"

"됐어 그만해…."

명희는 은숙의 말을 듣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새로 물을 틀어 가습기를 헹궈냈다.

은숙의 치마까지 물방울이 팍 튀었다. 그러더니 명희는 가습기 물통을 휘둘러 물기를 털어내더니, 창가로 뚜벅거리며 걸어가 휴대폰까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가버렸다.

"얘!"

콰당. 은숙은 기가 막히다 못해 현기증이 났다. "…하! 저런 좆만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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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이 열이 받든가 말든가, 그날로 명희는 가습기를 집으로 다시 싸들고 가져가 버렸다.

오후에 석규의 만화 원고를 가지고 첫 번째 회의가 열렸다. 안교수와 문교수,

유선생과 석규, 그리고 은숙과 명희까지 푸른심천의 모든 멤버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날이었다.

"좋습니다, 일단은. 초등학생용으로 좋구요, 흥미롭고 다 좋은데…. 처음 의도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에요. 만화지만 엄연한 교과섭니다. 교과서. 낄낄대며 한 번 읽고 마는 만화책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들 끄덕거렸다. 석규는 속으로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역시 끄덕였다. 석규도 달변이었지만 자기 작품이 아니라 교과서용 만화책을 그리는 입장이니 반론을 펴려고 해도 뭐라고 해야할지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어떤 목적의 교과서인지도 생각해야 돼요. 이 책은 정보 전달이 목적이 아니잖아요?"

은숙이 입을 열었다. "조교수님, 정보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구요?"

"정보 전달 목적이 전혀 아닌 게 아니라, 유선생님 의도대로라면 환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 목적이시잖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초등학생들에게 멸종된 동물 이름을 외우게 하는 것보다는 환경에 대해 가능하다면 평생토록, 관심과 흥미를 가져가도록 유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저는 박선생님 원고 괜찮다고 봐요."

은숙의 정연한 반론에 유선생의 얼굴이 살짝 벌개졌다. 석규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바로 저거다.

석규와 유선생을 제외하곤 다들 원고를 진지한 눈길로 들쳐보면서도 내심 갈피를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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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겠다는 표정이었다.

"…조교수님 말씀은 알겠는데,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책을 만드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책을 한 번 자세히 보세요. 정작 환경에 대한 애정이나 고민은 없습니다.

그냥 애들 만화책이에요."

은숙은 유선생 말에 짜증이 확 났지만 참았다. 유선생이 '애정'이나 '고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았다. 애들 만화책이면 됐지, 어차피 초등학생들에게 무슨 얼어죽을 진정성이란 말인가?

원고를 뒤적거리던 문교수가 입을 열었다.

"유선생? 나도 초등학생 수준에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은데?"

"이 정도 수준에 그냥 만족하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한 번 읽고 웃고 버리는 그런 책으로 무슨 수업을 합니까?"

은숙은 이마에 손을 댔다. 내가 이래서 회의를 하기가 싫다니까.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수습할 겸 석규가 발언을 했다.

"에…애정이 좀 부족하다는 지적은 인정합니다. 자료나 시간도 좀 부족했구요, 제가 원래부터 환경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고…."

"관심이 없는데 왜 여기 계신거죠? 뭐 다른 거에 관심이 있는 겁니까?"

분위기가 순식간에 졸아들었다. 은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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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쉬었다. 왜 저렇게 유선생은 공사 구분을 못하는 걸까. 미쳤다고 저런 사람과 같이… 윽, 그 일은 생각하지 말자.

"…관심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게 우리 일이에요. 그건 유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유선생이 쳐다보았지만 은숙은 무시해버렸다.

분위기가 잦아들자 안교수가 원고에 분리수거에 대한 스토리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둥, 초등생이 생활에서 직접 실천 가능한 일을 짧은 에필로그로 맨 뒤에 넣었으면 좋겠다는 둥 몇 마디 덧붙였다. 은숙은 안교수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회의를 마쳤다. 가습기 저 혼자 삑삑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한결 살 것 같다.

회의가 끝났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누군가 함부로 말 꺼내기가 어색했다. 눈치를 본다기보다 유선생과 석규, 은숙이 어떻게 행동할지 서로 궁금해하며 엎드려 있는 셈이었다. 은숙은 애써 냉랭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유선생과 석규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주시했다. 따지고 보면 석규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셈이었지만.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유선생이 갈대처럼 부스스 일어났다. 은숙을 포함한 다른 멤버들이 유선생을 주목했다. 석규만 눈치채지 못한 채 원고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유선생은 모두들 쳐다보거나 말거나, 냉장고로 다가가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 석규의 책상에 놓았다. 친절한 비서 같은 태도였다.

석규는 스윽 들어온 요구르트 병을 보고 올려다보았다. 유선생이 석규를 보고 씨익 웃음을 지었다.

"아깐 미안했습니다. 제가 좀 심했죠?"

"아닙니다. 맞는 말씀인걸요 뭐…."

유선생은 다시 돌아서서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은숙은 들리지 않게 차오른 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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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보냈다. 유선생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지뢰제거 작업 같다.

"저기, 박선생님?"

"네?" 헉, 은숙은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혹시 청주 서중학교 나오시지 않으셨어요?"

"…예?"

"청주서중 나오셨죠?"

"청주서중이요? 아닌데요…."

"아니세요? 청주서중 35회…."

"네…."

"중간에 전학 가신 건 아니구요?"

"아닌데요…."

석규는 굳은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은숙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청주서중 35

회라니.

"그때 다니실 때…은숙이라구 모르세요?"

"누구요?"

"은숙이요…여자애."

석규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지려는 찰나 은숙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교수, 문교수는 물론 명희도 화들짝 놀라 은숙을 쳐다보았다.

"아니, 왜 저를 연결시키고 그러세요???"

석규는 유선생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인상을 팍 찌푸리고 말았다. 지금 저런 반응을 보이면 안 되지!

유선생은 은숙을 보고 씨익 웃었다. 도마뱀 같은 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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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조교수님 얘기 아니에요. 박선생님, 모르세요? 1 학년 때 같은반이셨을텐데…최은숙이던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그 학교를 안 나왔는데, 당연히 모르죠."

석규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유선생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맹세할 수 있습니까?”

“네? 무슨 맹세요?”

“유선생님 오늘따라 참 이상하시네요. 무슨 맹세 말입니까?”

“청주서중 안 나오셨다는 맹세 말입니다.”

은숙은 달려가서 유선생의 뒤꼭지를 후려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석규는 픽 웃었다.

“할 수 있습니다…. 맹세.”

“뭘 걸구요?”

“네?”

“뭘 걸구 맹세하실 수 있습니까?”

유선생의 계속되는 괴문에 다들 주목했다. 은숙은 석규를 노려보았다. 대답 잘 해야 돼.

“허허…나참…유선생님 사람 참 어색하게 만드시네요….”

“…”

“…맹세하죠 뭐…. 우리 엄마 걸고.”

“어머님 거시고 맹세하시는 겁니까?”

“네, 우리 엄마 걸고 맹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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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생은 몇 초 간 더 석규를 노려보았다. 석규는 애써 외교용 미소를 유지했다.

유선생은 천천히 자리로 가서 앉았지만 눈길은 여전히 거두지 않고 있었다. 상황을 보다 못한 문교수가 헛기침을 몇 번 했지만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지긴 애초에 글렀다.

자리에 앉은 석규는 티나지 않게 이를 갈았다. 여자 뒤나 캐고 다니는 나쁜 자식.

유선생이 공개적으로 석규를 추궁한 데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확실해?”

“어.”

“근데 왜 앨범엔 없어?”

“걔가 아마 전학갔을 거야…. 사고치고.”

“무슨 사고?”

“우리 1 학년 때 3 학년 남자애 하나 죽은 거 기억나냐?”

“죽었어? 누가?”유선생은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이 갔다.

“솔밭수영장 알지? 거기서 죽었잖아 3 학년 남자 하나. 기억 안 나?”

“…나는 거 같애. 그래서?”

“그래서긴, 걔가 아마 거기 있었을거야. 박석규.”

“어떻게 죽은거야?”

“몰라, 자세힌. 사고겠지 뭐. 박석규 형이 3 학년 짱이었는데 둘 다 장난 아니었거든.

둘이 붙어다니면서 온갖 양아치짓 다 하고. 박석규도 형 때문에 대책 안 섰어. 그 형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너도 얼굴 보면 알걸?”

“그래서?”

“그래서…죽는 바람에 다 전학갔지. 동네에서도 못 살고. 박석규네도…아! 여자애 한 명 있었다.”

“여자애가 있었어?”

“어. 1 학년에 양아치년 있었어. 최은숙인가 김은숙인가…성은 기억 안 나네.

은숙인건 확실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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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년도 진짜 양아치였다. 석규네 형 깔따구였을걸 아마? 걔네 빠구리 뛰는 거 동네 애들이 다 알았어…석규랑도 몇 번 했을걸 아마.”

“최은숙이야, 김은숙이야?”

“몰라…최은숙인지 이은숙인지…그건 그렇고 잘 지내지?”

“…응. 언제 올 거니?”

“다음주중? 아마?”

유선생은 전화를 끊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교실은 교교한 침묵이 흘렀다.

유선생은 올망졸망 놓인 책걸상들을 지켜보다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칠판과 교실 천정으로 푸르스름한 연기가 빙그르르 피어올랐다. 전화한 상대는 여태까지 청주에 붙박혀 살고 있는 동창 주홍이었다.

유선생은 담배를 피우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초등학생도 침대에 누워 키스하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자랑하는 시대에 중학교 시절 빠구리 뛴 것 가지고 벌벌 떠는 두 사람이 가소로웠다. 하긴 진상이 떠벌려지면 은숙이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

석규야 다시 서울로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은숙은 심천에서 여태껏 닦은 기반을 송두리째 잃는다. 유선생이 교사 모임 같은 곳에서 살짝 입만 벙긋하면 소문은 삽시간에 퍼질 것이다. 안교수 문교수 같은 위인들이 은숙을 편들어줄 리도 만무하고….

유선생이 정작 궁금한 건 은숙과 석규가 심천에서 해후한 이후였다. 서로 알아보긴 한 듯한데,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불꽃이 튕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어릴 적 동창만큼 편하고 빠른 바람상대도 없다. 슬슬 유선생 눈치를 보는 걸로 봐선 좋아서 잤건, 술에 꼴아서 같이 침대에 널브러졌건 같이 자긴 잔 것 같다. 그러면?

유선생은 한 손으로 담배를 피우면서 칠판에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솔밭수영장?

박석규? 형? 양아치? 최은숙? 김은숙? 이은숙? 주르르 썼다가 유선생은 이름들 밑에 ‘빠구리’라고 썼다가, 지우개로 하나씩 천천히 지워나갔다. 은숙이 맞다면 성은 어쩌다 바뀌었을까. 유선생은 깨끗이 지운 칠판 앞에 한참 우두커니 서 있다가,

교단에서 일직선으로 담배 꽁초를 떨어뜨려 발로 비벼 끈 다음 그대로 교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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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편집실에 앉아 밤을 샌 영호는 로비에 나왔다가 게시물을 발견했다.

<인사발령 (×월 ××일 시행)>

피발령자 김영호발령전(前) => 발령후(後)

SBC TV => SBC 라디오 사회문화팀 라디오 편성국(제작 PD/6급) → (사무/6급)

영호는 게시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손을 내밀어 인사공고가 인쇄된 A4 용지를 뜯어냈다. 그리고 네 번 접은 다음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윗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돌아서자 텅 빈 로비 끝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화선이다. 영호가 그대로 서 있자 화선이 팔짱을 낀 채 걸어왔다.

"…여기서 뭐 해?"

"……."

"집에 안 들어갔어?"

"…음. 앉자 좀…."

영호는 한숨을 쉬며 로비 벤치에 걸터앉았다. 화선은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았다.

"인사공고 봤냐?"

"보진 않고, 얘긴 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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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님한테서."

"…그랬냐?"

"……."

"휴…."

"……."

"…인제 어떡할 거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니? 내가 잘렸어?"

"……."

"골고루 한다, 골고루 해…. 미친놈."

화선이 영호의 얼굴을 표독스럽게 쏘아봤다. 영호는 꽂혀오는 시선이 거의 아플 지경이었다. 며칠 동안 감지 않은 머리칼을 싸쥐고 있자니 이미 화선은 사라진 후였다.

그날 저녁 은숙은 영호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은숙씨?"

"네." 은숙은 내심 긴장했다.

"만날 수 있어요? 오늘…."

"오늘 저녁…이어야만 돼요?"

"오늘 아니면 한동안 못 볼지도 몰라요. 내가 사정이 좀 복잡해서."

그날 영호는 은숙을 태우고 밥 먹자는 말도 없이 자주 가던 모텔로 향했다. 은숙은 기가 막혔다.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은숙은 내심 불쾌해졌다. 영호를 만나면 하려고 준비했던 말이 가슴에 빼곡했던 것이다.

영호도 딱히 섹스를 바란 게 아닌 모양인지 방에 막상 들어오고도 뻘쭘하게 창가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저녁 시간의 맑은 하늘엔 푸르스름하게 어둠이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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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영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여기로 데리고 왔어요?"

"……."

"여기서 뭐 할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오늘은."

"근데 왜 여기로 왔어요? 지금 우리가 이럴 분위기예요?" 영호는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은숙씨. 나 방송국 그만뒀어요."

"……?"

"잘 해보려고 했지만…이젠 아니다 싶어요."

"영호씨."

"……."

"혹시 나 때문이에요?"

영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은숙은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우리 소문났어요?"

"아니에요, 은숙씨, 절대 아니에요."

"…영호씨."

"……."

"미안해요. 난 영호씨 복잡한 사정도 모르고…."

"괜찮아요."

영호는 침대로 다가와 은숙의 손을 잡았다. 은숙도 영호의 손에 다른쪽 손을 포갰다.

"…영호씨."

몇 분이 흐른 뒤 은숙이 입을 열었다. 영호와 다시 만날 때 하기 위해 그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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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으로 수십 번이나 되뇌었던 말들이다.

"내 다리 말이에요."

"……?"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 않아요?"

영호는 내심 놀라 은숙의 얼굴을 보았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옛날에요…남자를 잘못 만났거든요."

"……."

"물론 그런 사람 선택한 거, 다 제 잘못이긴 해요. 하지만…."

"……."

"누구나 상처는 있잖아요…. 근데 저는 한 번 삐딱일 때마다 가슴이 아팠어요.

하루에도 수십 번, 수천 번. 그래서 생각했어요. 몸을 고친다고 마음까지 낫진 않을 거라고. 그래서…."

"……."

"그래서…내버려뒀어요. 어떻게들 생각하든." 은숙은 말을 계속했다.

"아무한테도, 이제까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요…. 이런거. 정말로 마음까지 고쳐줄 수 있는 사람 만나면 얘기하려고요…."

"…."

"미안해요 영호씨…."

영호는 은숙의 어깨를 끌어당겨 가슴에 얹었다. 은숙은 어느 새 울먹이고 있었다.

영호는 한숨을 쉬며 은숙을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몇 시간에 걸친 포옹과 길고 따뜻한 정사가 끝난 뒤 영호는 은숙을 집이 아닌 사무실에 내려주었다. 은숙의 차가 사무실에 주차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리기 전 은숙은 영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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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씨."

"네."

"…괜찮은 거예요?"

"뭐가요?"

"…회사요."

"아…회사…." 영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오히려 잘됐죠. 일단 다 정리하고 푹 쉬다가 다른 데서 새로 시작할 거예요. 걱정 마요. 의외로 이 바닥, 사람이 부족하거든요."

은숙은 비로소 마음이 조금 놓였다.

영호의 차가 떠나고 나서야 은숙은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올라갔다. 이 시간까지 누가 있는 걸까. 석규인가? 사무실에 들어선 은숙은 바로 후회했다.

유선생이 소파에 앉아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간까지 뭐하세요?"

은숙은 일부러 쌀쌀맞게 말을 걸며 책상으로 갔다. 아닌게 아니라 볼보 키가 핸드백 속이 아닌 책상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담배 피우고 있었습니다. 보다시피."

"실내에선 금연인데요. 알다시피."

"박작가는 잘만 피우지 않습니까."

"좋으실 대로 하세요 그럼."

은숙이 볼보 키를 집어들고 문으로 다시 향하자 유선생이 갑자기 일어나 통로를 막고 섰다. 은숙은 짜증 섞인 눈길로 유선생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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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요즘."

"뭐가요?"

"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저한테 뭐 삐진 거 있어요?"

은숙은 픽 웃음을 날렸다.

" 제가 왜 유선생님한테 삐져요?"

" 근데 요새 왜 그러세요?"

" 제가 뭘 어쨌기에요?

유선생님은 지금 왜 그러시는 건데요?"

"휴~." 유선생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 사람 때문입니까?"

"누구요?"

"그 사람 때문이에요?"

유선생의 말꼬리가 높아지자 은숙의 신경질도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 누구요? 누구 때문에 제가 뭘 어쨌는데요?"

"…박작가 말입니다."

"박선생님이요? 박선생님이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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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씨, 박작가랑 사귑니까?" 사귀냐고?? 은숙은 기가 막혔다.

"무슨 소리예요 지금? 박석규랑 나랑 어쨌는데요? 왜 박석규를 나랑 연결시켜요?"

은숙은 몸이 떨렸지만 눈에 힘을 주고 유선생을 쏘아보며 버텼다. 유선생은 한숨을 몰아쉬고 인상을 찡그렸다. 상을 찡그리자 유선생의 눈가에 자글자글 주름살들이 피어났다. 무슨 마음 고생을 혼자 잔뜩 했는지, 며칠새 폭삭 늙은 기색이다. 은숙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유선생에 대한 연민에 마음을 내주어야만 했다.

"유선생님, 저 그 사람이랑 아무것도 없어요."

"…."

"그 사람보다 유선생님이 훨씬 좋은 분이세요. 왜 자꾸 그러세요…."

"…조교수님."

"네?"

"석규라…본인들끼리만 쓰는 이름인가보죠? 석규…, 이름 참 친근하고 좋네요."

유선생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숙은 순간 치가 떨렸다. 착하고 예민하게만 보이는 유선생이 비열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무슨 말을 퍼부었다가 유선생이 뭐라고 답할지 두려워졌다. 유선생이 이미 모두 캐낸 상태에서 은숙과 석규를 슬슬 괴롭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갈게요. 유선생님. 말이 안 통하는군요."

은숙은 유선생을 비켜서서 사무실을 나섰다. 웬일인지 유선생은 은숙을 잡지도 않고 내버려두었다. 은숙은 계단을 빠르게 걸어내려가 볼보에 올라타고 운전대에 머리를 박았다. 몇십 분 전 영호와 나눴던 감미로운 순간이 알코올처럼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아아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영호씨처럼 나도 직장을 때려치워야되는 건가.

은숙은 운전대에 머리를 비비다가 휴대폰을 뒤져 석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고객님이 현재 전화를 받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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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휴. 망할 자식, 도움이 안되는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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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 / 깡~

한밤중 야구장에서 배트와 공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서너 석밖에 안 되는 조그만 야구장에 손님은 석규 한 명뿐이었다. 꽤 오랫동안 쳤는지 티셔츠가 제법 땀에 젖어 있었다.

은숙은 공을 쳐내는 석규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세가 그럴 듯했다. 따지고 보면 석규도 그리 나쁜 남자는 아니다. 적어도 유선생보다는 훨씬 나았고, 다른 푸른심천 떨거지들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꼬이지만 않았어도, 아니 석호만 아니었어도… 은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선생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 인연 탓인 듯싶다.

한참 공을 치고 나서도 석규는 야구 배트를 휘두르며 씩씩거렸다. 은숙은 입맛을 쩍 다셨다. 그래, 교수까지 돼서 여기 내려왔는데 기껏해야 이런 일에나 휘말리고, 너도 답답하겠지.

석규가 야구장에서 내려오자 은숙은 차에서 내려 걸어갔다. 갤로퍼에 올라타려던 석규가 은숙을 보고 움찔하더니 도로 차문을 닫았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누구 만나러 왔어?"

"이 시간에 배트 휘두르는 사람 너밖에 없어."

은숙이 받아쳤다. 석규는 뻘쭘해졌다.

"…그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명희한테 전화해보니까 여기로 가보라고 하더라."

"명희씨….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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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사귀니?"

"사귀긴."

"아니라고는 말 안 하는구나. 연애는 나가서 해. 꼴사나워…."

"그런 거 안 한다니까." 석규는 야구 배트를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뭐 마실래? 목마르지?"

"목마를까봐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어?"

"받아치지 마. 나 지금 머리 너무 아프다."

은숙은 머리에 손을 댔다. 석규는 자판기에서 이온음료 두 개를 뽑아들고 앉았다.

"근데 갑자기 웬일이야?"

"…."

"유선생이 또 뭐래?" 은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도 참… 집요하다."

"집요해. 좀."

"그 사람이 너 좋아하지?"

"응."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지난 일 캐내서 들이대면 뭐 어쩌자는 거냐. 참."

석규는 캔을 따서 콸콸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래?"

"뭘 어떻게 해?"

"짐 싸…. 웬만하면."

은숙은 캔을 두 손으로 꼭 감아쥐었다.

"짐 싸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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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서울 다시 올라가."

"내참…." 석규는 한숨을 쉬었다.

"불안하니? 소문날까봐."

"아니. 유선생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닐 사람은 아니야."

"그러면 왜?"

"불안해. 또 무슨 일 생길까봐…. 또 누가 죽을까봐."

"…."

"올라가, 다시. 미안하지만."

"야. 그 죽은 게… 우리 책임이야?" 석규는 벌컥 화를 냈다.

"너 아직도 그런 생각하니? 우리 책임이라고?"

"…."

"우리 잘못한 거 없어. 왜 그래…."

"우리가 잘못한 게 왜 없어…."

"어이, 조교수님."

"…."

"조교수님답지 않으세요."

은숙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답지 않다고? 네가 날 얼마나 안다고…."

"뭐,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안 바뀌었던데."

석규는 싱긋 웃으며 음료수를 마셨다. 은숙은 석규를 흘겨보았지만 왠지 밉지는 않았다.

"나도 여기 완전히 눌러 살 생각으로 내려온 건 아냐. 있어보면서 차차 결정하려고 한 거지…. 넌 아주 내려와서 사는 거니?"

"아니." 은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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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데, 처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살다가 뼈를 묻을 각오로 내려오는 사람이 어딨니? 다 처음엔 좀 있다가 다시 서울 갈 생각하고 내려오는 거지…. 그러다가 기반 잡히고 인정 좀 받으면 이제까지 파온 게 아까워서라도 계속 살게 되는 거야.

여기서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라 떠나지 못해서 사는 거지…." 석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너도 발목 잡히기 전에 가란 말야."

"…."

"명희 조심하고. 걔 때문에 여기서 늙어 죽을래?"

명희를 왜 조심해? 석규는 은근히 은숙 말이 거슬려왔지만 일단 넘겼다. 은숙은 캔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놓고 일어섰다.

"운동할 때 또 마셔. 나 간다."

은숙은 그대로 볼보를 타고 멀어졌다. 석규는 멍하니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은숙이 두고 간 캔을 들고 일어섰다. 가슴이 다시 답답해져왔다.

며칠 뒤 은숙은 화선의 문자를 받았다. 만나자는 얘기였다. 은숙은 영호에게 말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말하지 않고 혼자 나가기로 결정했다. 물론 은숙에게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열네 살 때 석규와 석호 어머니와의 맞대면이 처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몇 번의 기분나쁜 체험을 통해 은숙은 이런 종류의 만남에서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자와 헤어질 요량이라면 아예 나가지 않고 더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의사만 밝히면 그만이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날 의사가 없다면 만나서 정확히 입장을 전달하는 게 상책이었다. 예의는 끝까지, 상대가 싸움을 걸더라도 지키는 게 좋다. 적어도 상대로 하여금 만만한 여자는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남녀관계에 이력이 난 은숙일지라도 오늘의 만남이 기분좋을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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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영호에게 와이프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영호 같은 남자가 은근히 꼬리를 감는 걸 보면 결코 만만한 사람 같진 않았다.

화선이 불러낸 곳은 시내의 조용한 커피숍이었다. 은숙은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했지만 처음 보는 화선의 얼굴을 찾기 난감했다. 혼자거나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여자들을 찾으면 되겠지. 인상은 잔뜩 찌푸려 있을 테고. 은숙은 남자에게 이별통고를 받는 자리나, 바람 상대와 맞장뜨는 자리에 여자친구를 달고 나오는 여자들을 내심 경멸했다. 친구와 같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두렵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양아치도 아니고, 자기 일은 일대일로 해결해야지 그게 뭐야. 그리고 은숙의 경험상 그렇게 떼지어 몰려나오는 여자들 치고 우아하게 끝맺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은숙은 커피숍 안을 두리번거렸다. 하얀 소파와 투명한 유리 테이블이 깨끗한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영호 와이프의 취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던 중 은숙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30 대 초반의 단정한 여자를 발견했다. 몇 초간 은숙도 그녀의 시선을 받아치다가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만만찮은 인상이다. 걸핏하면 머리채부터 잡으려는 무식한 여편네들과는 아예 종자가 다른 듯싶었다. 은숙은 긴장했다. 이런 사람이 뜻밖의 카드를 던질지도 모른다.

화선은 은숙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배우자의 바람 상대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이었다. 특별한 미인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잘 가꾼 티가 났다. 스타일은 지적이고 단정했지만 얼굴에서 묘한 색기가 흐른다. 여자들은 미처 알아채기 힘든,

그러나 남자들은 캐치하기 쉬운 분위기다. 의외로 멍청할지도 모른다. 아니, 멍청할 것이다. 고르고 골라 김영호 같은 쓰레기를 고르다니, 그것도 애까지 있는 남자를.

"조은숙 교수죠?"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아셨죠?"

"다 아는 수가 있어요. 저는 이화선이에요. 직업은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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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네요."

"네,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네요."

화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에 입술을 댔다. 은숙은 버튼을 눌러 물 한 잔만 갖다달라고 청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앞으로."

"그건 교수님이 어떻게 하실 건가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제가 어떻게 하든, 이미 마음은 정하신 듯한데요."

"그걸 어떻게 아시죠?"

"지금 별로 화가 나신 것 같지 않아서요."

화선은 턱을 당긴 채 은숙을 째려보다가 잔을 팅 하고 유리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눈치 빠르시네요. 김영호, 그 인간 좋아하세요?"

은숙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화선은 은숙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끄덕이고, 아무 말 없이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은숙도 침묵을 지켰다.

"교수님 말씀이 맞아요. 호기심 때문에 보자고 했어요. 막상 뵈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둘이." 칭찬인지 저주인지 모를 멘트다. 은숙은 침묵을 지켰다.

화선은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혹시 그 사람을 가져가게 된다면, 그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라는 걸 기억해요."

은숙의 귓가에 화선의 목소리가 낮고 깊게 울렸다. 은숙은 고개만 위아래로, 아주 약간, 보일락말락할 정도로 흔들었다. 화선은 그 말만 남기고 유유히 커피잔을 비운 뒤 먼저 일어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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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선이 먼저 가버리자 은숙은 조이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나름대로 데스매치를 각오하고 나왔는데 생각보다 쉽게 끝난 것 같다.

천천히 일어서는 은숙의 귓가에는 아직도 화선의 목소리가 여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본처의 앙칼진 저주라기엔 너무 정연한 말투다. 오래 살아본 후에 나온 말일 테니 함부로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가장 가혹한 형벌이라. 재혼을 생각하는 여자의 가장 가혹한 형벌은 전처 자식을 떠맡는 게 아닐까.

화선은 멋진 커리어우먼답게 자기 자식은 제 손으로 챙길 요량인 모양이었다. 은숙은 마음 속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잘 가라. 잘 사시구.

은숙은 커피숍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볼보 맞은편에 쏘나타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쏘나타 조수석에는

아까 화선이 두르고 있던 스카프가 던져져 있었다. 은숙은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스카프를 잠시 바라보다가 포스트잇을 꺼내 무어라고 적은 뒤 차 앞유리에 붙였다.

그리고 볼보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바로 출발했다.

몇 분 후 화선은 은숙이 남긴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똑같은 염료로 염색해도 나일론과 실크는 전혀 다릅니다. 염색은 제가 전문이니 저한테 맡겨보시죠."

화선은 포스트잇을 구겨 쥐었다. 나는 나일론이고 너는 실크라 이거지. 싸가지 없는 년. 화선은 운전석에 올라 차문을 콰당 닫았다. 은숙의 얼굴을 보았을 때만 해도 평온했던 마음에 갑자기 화통이 번졌다.

영호의 바람 상대가 심천대 교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학교에 소문을 내 망신을 줄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 바람피운 남편을 두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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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떠벌려지는 게 싫어서였을 뿐이다. 그러나 굳이 은숙 때문이 아니라도,

화선은 지금의 영호에게 지치고 짜증이 나 있었다. 영호의 해고와 은숙의 존재는 내내 심중에 두고 있던 이혼 결심에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었다.

그래 년놈들끼리 잘 해처먹어 보시지. 어쩌면 김영호가 제대로 임자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을걸.

한편 은숙은 한결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화선과 헤어진 뒤 오후 실습 강의를 하고,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자 어느 새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영호에게 연락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차차 정리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밤 열한 시 반쯤 되었을까. 은숙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섰다. 나른한 피로가 기분좋게 느껴졌다. 은숙은 문을 잠근 뒤 어두운 거실 조명을 켜기 위해 손으로 벽을 스치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막 스위치에 손을 대려던 순간 은숙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 모양의 시커먼 물체를 보았다. 순간 은숙은 소리도 지르지 못할 정도로 공포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거실 안의 공기가 빨려들어가 진공 상태가 된 듯했다. 은숙은 벽에 손을 짚은 채 이를 악물고 섰다.

"…누구세요?"

그림자도 은숙을 알아본 듯 천천히 일어서서 다가왔다. 은숙은 벌벌 떨었다. 불을 켜야 되나? 얼굴이 드러나면 흥분해서 덤벼들지도 모른다. 그림자는 은숙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얼굴의 실루엣이 드러나자 은숙은 막혔던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따라 숨막힐 일이 왜 이리 많이 일어나는지. 유선생이었다.

"…미쳤어요? 어떻게 들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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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씨."

"…"

"확인해야 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뭐가요?"

"제가 아는 은숙이란 애하고…."

"…?"

"조은숙 교수님이…같은 사람 맞습니까?"

"경찰 부르기 전에 빨리 나가요."

"맞습니까 아닙니까?"

은숙은 핸드백을 뒤져 휴대폰을 찾았다. "빨리 나가요 신고하기 전에…."

"그래요! 제발 신고 좀 해주세요! 신고해서 사람 좀 찾아줘요! 청주서중 35회 최은숙 그년 지금 어디 있는지…"

유선생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은숙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은숙은 반사적인 공포에 질려 유선생의 따귀를 심하게 갈겼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은숙의 손이 아플 지경이었다. 유선생은 잠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은숙은 그 틈을 타 거실 조명을 켰다. 안이 확 밝아졌다.

은숙은 유선생 얼굴을 살폈다. 술을 마신 것 같진 않다. 정말 이 새끼가 돌았나?

유선생이 얼굴에 손을 대고 망연자실한 동안 은숙은 휴대폰을 꺼내 폴더를 폈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112 를 누를 참이었다.

다행히 유선생은 비슬거리며 나가버렸다. 대문이 닫히자 은숙은 바닥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망할 주공아파트. 당장 내일 새 자물쇠를 해달아야지. 공포로 부들부들 떨렸다. 심천에 내려와서 주거침입을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아는 사람한테.

은숙의 아파트에서 나온 유선생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그리고 벤치에 푹 주저앉았다. 흥분했던 탓에 몸이 피로했지만, 의외로 기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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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했다.

몇십 분이나 지났을까, 유선생은 일어서서 은숙의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거실 불이 아직도 켜져 있다. 아직도 잠들지 않은 걸까. 유선생은 한참 은숙의 아파트를 올려다보다가 왼쪽 주머니에 휴대폰, 오른쪽 주머니에 지갑을 확인하고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새벽 1 시가 되어 있었다.

은숙은 유선생이 가버린 뒤 몇 분 동안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놀람이나 공포보다 분노가 치밀었다. 어디서, 감히, 누구 집에 쳐들어와? 은숙은 이를 갈면서 베란다 창문과 현관문을 여닫으면서 억지로 침입한 흔적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은숙은 문단속을 한 뒤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놓은 채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거실 조명도 켜둔 채였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어두워야만 잠이 잘 왔지만, 오늘밤은 텔레비전을 멍청히 쳐다보아야만 잠이 올 것 같다. 은숙은 온몸에 샤워 크림을 바르고 문지르면서 유선생과 섹스한 날을, 아니 그런 실수를 한 자기 자신을 그리고 상황을 제공했던 영호까지 저주했다.

그러나 다음날 은숙은 푸른심천 사무실에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을 하고 나왔다.

안교수, 문교수는 물론 석규와 명희도 나와 있었지만 유선생은 하루종일 보이지 않았다. 그날 유선생과 회의 약속을 했던 석규는 사무실에서 유선생을 기다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은숙은 속으로 코웃음쳤다. 겁많은 닭대가리.

한편 석규는 유선생이 마주치기가 영 싫었다. 일 때문에 사무실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기는 했지만 유선생은 업무 파트너로서도 별로 매끄러운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며칠 동안 휴대폰을 집에 놔둔 채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는 유선생과 냉랭한 은숙의 분위기를 보아 둘이 또 한판 벌인 눈치다. 석규는 짜증이 났다.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면 할수록 긍정의 증거로 받아들여질 뿐이니 말이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드디어 유선생이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맑고 조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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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였다. 그날따라 은숙과 석규는 아직 보이지 않았고, 안교수와 문교수, 명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선생은 탐탁찮은 기분으로 사무실에 들어서다가 묘하게 썰렁한 분위기를 느꼈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 무슨 일 있습니까?"

안교수가 대답 대신 유선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유선생은 긴장했다. 은숙에게 무슨 얘길 들은 걸까?

"박작가 만난 적 없어요? 오늘?"

"박선생님이요? 모르겠는데 … 왜죠?" 유선생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명희가 대신 대답했다.

"박선생님 댁에서 … 계속 전화 왔었거든요."

"예?"

"어머님이 … 돌아가셨다고 …."

명희가 석규 책상으로 다가가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유선생은 소파에 앉은 채 그대로 경직됐다. 그의 뇌리 속에 석규의 맹세가 떠올랐다.

'맹세하죠 … 뭐 … 우리 엄마 걸고.'

유선생은 머리를 싸쥐고 상을 찡그리다가 담뱃불을 붙였다. 세상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석규는 두 시간여가 지나서야 사무실에 두고 간 휴대폰을 찾으러 왔다.

장례식장은 의정부였다. 석규와 석호의 어머니는 의정부에서 혼자 조용히 살고 있었다. 주변을 시끄럽게 휘젓고 다니는 아들들과 달리 그녀는 늙어갈수록 말도 존재감도 희미해지다가 잠들어 있던 중 숨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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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객은 많지 않았다. 석규는 영정이 놓인 장례식장에서 상복과 상모를 입은 채 서 있었다. 석호는 상복만 입은 채 일찍 들른 문상객들과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석호가 맏상주 노릇을 해야 했지만 석규는 석호가 나서지 않는 게 오히려 고마웠다. 대낮 한가한 틈을 타 석규는 석호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마셨어?"

"응? 별로 안 마셨어.

두 병쯤."

식탁 위에 놓인 소주병은 얼핏 봐도 다섯 병이 넘었다.

" 실수 안 할 정도로만 마셔."

" 알았어 인마 …."

" 용희는 언제 온대?"

"용희? 너한테 전화 안 했냐?"

"전화 안 왔는데."

"안 했어? 미친놈 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전화도 안 하고…. 내버려둬, 오겠지 뭐."

석규는 일어섰다.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술은 얼마든지 마셔도 상관없었다. 다만 복잡한 장례절차를 전적으로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게 머리 아팠다. 용희라도 와서 옆에서 잔일 거들어주면 좀 편할 텐데.

안그래도 썰렁한 장례식장은 첫날 밤이 되면서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해졌다. 석호는 술에 취한 채 새벽까지 제법 버티다가 결국 이불속으로 파고들어 버렸다. 용희에게는 내일 아침 일찍 오겠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지금 쉬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석규는 잠이 오지 않았다. 두 시간째 아무도 오지 않자 석규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내일 일찍 오라고 이르고는 보내버렸다. 석규는 상모는 물론 상복까지 벗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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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영안실용 식탁들 틈바구니에서 잠든 석호의 코 고는 소리만 울렸다.

석규가 중학교 1 학년 때 - 그러니까 은숙도 1 학년 - 두 살 위인 석호는 3학년이었다. 석호는 학년 짱이었고 그 덕에 석규는 학교생활이 편했다. 가끔 선생들이 석규를 불러다 형 어디 있느냐며 닦달해댈 때만 빼고.

언제부터 석호와 은숙이 붙어먹었는지 석규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석규의 가장 오래된 기억에 은숙은 얼굴 생김새는 귀여웠지만 깡마르고 키가 석규만큼 껑충한 여자애였다. 석규는 은숙을 보고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다. 그러나 석호는 학기 초 석규네 반에 갔다가 은숙을 보고 바로 찍었다. 석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형, 걔보다 더 이쁜 애들도 있잖아. 왜 은숙이야?" 석호는 씩 웃었다.

"걔는 다 알고 있거든. 난 아무것도 모르는 애는 싫어."

은숙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담배였다.

어머니가 밭일을 하러 오후 내내 집을 비우거나 읍내 장날이면 석호는 학교를 빼먹은 채 은숙과 내내 방에서 뒹굴며 보냈다. 석호는 은숙만 학교에서 빼내오는 게 아니라 석규를 미리 보내 집이 비어 있는지 확인하게 했다. 학교에서 빠져나온 석규가 빈 집을 확인하고 학교에 있는 석호에게 알려주면 석호는 은숙과 비어 있는 집에서 오후 내내 빠구리를 떴다. 그럴 때마다 석규는, 자기도 새삼 학교로 돌아가기 뭐한 나머지 솔밭수영장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거나 빈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문밖으로 새어나오는 은숙의 신음소리와 몸 부딪치는 소리를 엿듣곤 했다.

그렇게 두 달이나 지났을까. 5월이었다. 석규는 교문 앞에서 석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석호는 같은 반 똘마니 종두와 함께 나오던 중이었다. 종두는 석호의 가방을 들고 있으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이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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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여기서…."

"집에 엄마 있어. 지금."

"에이~씨발, 은숙이 오라고 했는데."

"집에?" 석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은숙인?"

"담배 피우다 걸려서 남았어."

"미친년. 좆나 까져갖고…. 나도 학교에선 안 피우는데."

정확하게는 교실에서 혼자 피우다 학생주임에게 얻어맞은 은숙이, 다음날 다시 담임의 호출을 받았던 것이었다.

석호는 빈 집에서 보낼 은숙과의 섹스가 물거품이 되자 실망한 듯 종두와 석규 패거리를 돌아보았다.

"야, 수영장이나 가자."

석호를 필두로 세 사람은 저벅저벅 솔밭수영장으로 들어갔다. 만들다 만 폐수영장은 어른들도 깜박 잊어버린 은밀한 장소였다. 수풀이 우거질수록 수영장은 점점 찾기 어려운 장소가 되어, 석규 패거리들조차 가끔 입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기도 했다.

세 사람은 모여 앉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가 조용한 숲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녀석들에게 담배는 어른들이 흔히 그러듯 스트레스 해소용이 아니라 아직 불온한 장난감에 불과했다. 석규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형! 이게 뭔지 알아?"

"뭔데?"

"은숙이 담배 걸렸다고 했잖아. 담임이 담배 찾는다고 열라 뒤졌는데 안 나왔거든….

어따 숨겼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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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따 숨겼는데?"

"빤스 속에."

"에이~드러운 년, 씨발."

"좆나 웃기지?"

종두가 손을 내밀어 담배를 뺏으려 했지만 석규는 담배를 코에 갖다 대며 킬킬댔다.

"야야, 줘봐봐."

"안돼요~아 보지냄새…냄새 좆나 희한하네."

"줘봐봐, 새꺄아~."

수영장 모서리에서 석규와 종두가 몇 분 동안 킬킬대며 담배를 뺏으려 뒹굴었다.

석호는 피식 쪼개면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해가 지기 시작했다. 수영장은 바깥보다 해가 빨리 진다.

종두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붙이자 주변이 밝아졌다. 슬슬 배가 고파 올 시간인데,

석호는 자리를 뜰 생각은 없이 뭔가 심각하게 상을 찌푸린 채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다.

"야! 이종두!"

"어?"

"너 은숙이 좋아하지?"

종두는 뜬금없는 석호의 말에 놀라 쳐다보았다. 석규도 석호를 주목했다. 석호는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미 어두워진 숲속에서 모닥불빛을 받은 석호의 얼굴은 제법 으스스해 보였다.

“아냐.”

종두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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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뒈질래? 아니긴 뭐가 아냐…. 좋아하잖아 씹새야.”

“….”

“박고 싶지?”

“어?”

“너, 은숙이랑 좆나 박고 싶지?”

종두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기 힘든 얼굴로 머뭇거렸다. 석호의 얼굴에 장난기라기엔 좀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석규 너는?”

“어? 형? 뭘?”

“너도 박고 싶지? 은숙이랑….”

“어? 어…, 아니, 형….”

석규와 종두가 당황해하면서도 자극된 욕망에 어쩔 줄 몰라하자 석호는 낄낄댔다. 더 재미가 나는 모양이었다.

“너네 둘이 싸워서 이긴 사람, 한 번 박게 해줄게.”

석규는 석호의 제안에 얼어붙었다. 종두도 마찬가지였다. 석호가 방금 한 말을 보증하듯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석호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이미 알 바 아니었다. 그걸 판단할 정도로 이 녀석들의 머리가 굳으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릴 터였다.

이윽고 두 녀석은 양말에 바지를 접어넣고 일어서서 수영장 아래로 내려갔다. 석호가 모닥불을 아래로 옮겨놓고 나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석규와 종두는 주먹을 쥐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물거나 할퀴는 건 반칙이다.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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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학년인 종두는 두 살 아래인 석규보다 조금 컸다. 그러나 석규는 나름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먼저 발길질로 덤벼들었다. 종두가 석규의 발을 피하면서 왼쪽 주먹을 날렸지만 석규도 용케 피했다. 대신 석규의 오른쪽 주먹이 종두의 옆구리에 박히자 종두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쓰러지진 않았다. 뒤이어 종두가 석규에게 붕붕 주먹을 휘둘렀고, 석규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발을 잘못 놀려 광대뼈 쪽을 얻어맞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종두의 펀치가 석규 얼굴을 몇 번 더 스쳤고, 석규 얼굴은 금방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석규는 주먹을 피하면서 허리를 숙인 채 종두의 몸통에 달려들었다. 석규의 어깨가 명치에 꽂히자 종두는 숨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틈을 탄 석규가 종두에게 박치기를 했다. 이제 서로 거리를 두고 주먹과 발을 주고받는 우아한 싸움이 몸과 몸이 뒤엉키고 얽히는 개싸움으로 변해버렸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석호는 야구 경기라도 보듯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뒤엉킨 틈을 타 석규가 종두에게 다시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역시 몸이 맞붙는 싸움에서 덩치가 조금이라도 큰 종두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더러운 수영장 바닥을 닦고 쓸고 나가기 몇 분여, 힘에 부친 석규가 종두 밑에 깔리고 말았다. 퍽퍽퍽, 석규의 코와 눈가가 터지고 찢어져 수영장 바닥에 선혈을 튀기기 시작했다.

“그만!”

석호의 말을 못 들었는지 못 들은 척 하는 건지 종두는 계속 펀치를 날렸다.

“그만! 그만해 새꺄!”

석호가 종두를 발로 팍 걷어차고 나서야 종두가 석규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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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학년이 1 학년한테 쩔쩔매냐? 무승부!”

석규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종두도 모닥불을 등진 채 퍼지고 앉아 얼굴을 닦았다. 피가 흘러 들어가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언뜻 서로 보기에도 얼굴이 개깔창나 있었다. 

석규는 한숨을 쉬고 입에 고인 피를 찍 뱉었다. 종두가 코를 잡아보고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석호가 담배에 불을 붙여 한 개비씩 두 사람에게 물려주었다.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고 나서야 석규는 석호가 장난을 쳤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미 늦었다.

석호가 순순히 은숙을 내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머리 위를 날갯짓치며 지나가는 까마귀가 까악까악 바보놈들, 하고 울어대는 것 같다.

며칠 뒤 석호는 집을 나갔다. 계획성 가출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매를 맞다가 그대로 도망쳐 사흘째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석규는 학교에 혼자 갔다. 석호가 없으니까 학교도 집도 평화로웠다. 

대신 재미는 없었다. 석규는 얼굴도 아프고, 귀찮기도 해서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체육시간을 빼먹었다. 아이들이 먼지를 날리며 체육복을 갈아입고 나갈 때까지 석규는 한 손을 배에 얹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아이들이 다 나가버리고 나자 석규는 빈 연습장을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긁적긁적. 석규는 연습장에 적나라한 여자 알몸이며 로봇들을 그리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자신도 모르게 그림 삼매경에 빠져 연필을 움직이다가 선생님에게 걸려 매를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딴짓을 한다는 이유로 몇 대, 그게 여자 알몸이었다는 이유로 몇 대 더 맞곤 했다. 그러나 선생들이 조금만 더 석규의 그림을 눈여겨보았다면 제멋대로 그려진 듯한 그림에 나름대로의 균형과 생동감이 들어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석규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런 사려깊은 눈을 가진 선생을 만나지 못한 채 그대로 선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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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서 학생들이 흙바닥을 뛰어다니는 소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귀를 막은 듯 멀리서 들려왔다. 석규는 연습장을 덮고 잠을 청했지만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부은 얼굴을 책상에 대고 엎드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결국 석규는 교실 바닥에 가방을 베개삼아 드러누워 버렸다.

몇 십 분쯤이나 지났을까. 교실 뒷문이 살며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규는 여학생인가 싶어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남자놈들이라면 저렇게 문을 조심스럽게 열지 않는다. 석규는 일어나는 대신 드러누운 채 고개만 비틀어 누가 들어왔나 보았다. 눈에 거꾸로 선 은숙이 들어왔다.

어? 석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았다. 은숙도 문을 닫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잠시 어색하게 마주보았다.

"안 나오고 뭐해?"

"어? 배가 좀 아파서…."

"그래?"

은숙은 천천히 걸어와 석규 자리의 의자를 빼고 걸터앉았다. 석규는 교실 바닥에 퍼지고 앉아 은숙을 올려다보았다.

은숙은 반팔 반바지 체육복 차림이었다.

대부분의 여자애들은 여름에도 겨울용 긴바지 체육복을 입었지만 은숙은 봄부터 가을까지 체육시간마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여름용 반바지 체육복을 입었다.

운동부에 속한 여자애들을 빼고는 여름용 반바지 체육복을 입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은숙이 반바지를 입고 계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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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내리거나 깡충깡충 달리기를 하면 남자애들은 물론 선생들도 시선을 주었다.

체육시간마다 드러나는 가늘고 하얀 은숙의 다리는 일종의 신호였다.

석규는 옆자리에 감히 앉지 못하고 은숙을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석호 오빠 아직 안 들어왔어?"

"…응."

"언제 온데?"

"몰라. 씨이~아빠가 잡으러 갔으니까 금방 오겠지."

"…" 은숙은 씨익 웃더니 부기가 덜 빠진 석규의 얼굴을 살폈다.

"종두 오빠랑 싸웠대매?" 석규는 고개만 끄덕였다.

"네가 이긴 거야?"

"아니. 무승부." 은숙은 살포시 웃었다.

"석호 오빠한테 얘기 다 들었어. 종두 오빠 3 학년인데 1 학년한테 꼼짝 못했다구."

"…"

"…너, 할래?"

"…어? 뭘?"

"네가 이겼대매…."

석규는 놀라서 은숙을 올려다보았다. 은숙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색기어린 웃음을 띠고 있었다.

"…싫어?"

"…어? 아니…."

"그래?"

"그럼 하기로 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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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일어서서 천천히 교실 뒷문을 열고 운동장으로 가버렸다. 걸어가는 흰 다리가 광채가 나는 듯이 눈부셨다. 석규는 멍청히 은숙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체육시간이 끝난 뒤 은숙은 옷을 갈아입고 앉아 그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석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석규는 은숙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은숙도 아무래도 석호처럼 장난을 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규는 석호가 딱 일주일만 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 가방을 챙기면서 석규는 은숙을 살폈다. 은숙은 여자애들과 수다를 떨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석규는 좀더 앉아 은숙을 기다리려 했지만 은숙은 석규따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청소당번들이 비질을 하며 먼지를 구름처럼 일으키자 결국 석규는 먼저 일어나고 말았다. 은숙도 장난을 친 거로구나.

석규는 집에 반쯤 가다가 솔밭수영장으로 갔다. 뭔가 허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숲 속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담배 냄새가 났다. 형이 돌아왔나? 아니면 종두 형인가? 석규는 수풀을 헤치고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은숙이 혼자 수영장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석규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은숙도 석규를 돌아보고 씩 웃었다.

"왔어?"

"어…. 혼자 있었어?"

"응." 은숙은 방긋 웃었다.

석규는 가방을 던지고 은숙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종두 형은?"

"몰라. 오려면 벌써 왔겠지."

석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기척도, 종두 것일 법한 가방도 보이지 않는다. 은숙 말처럼 오려면 벌써 왔든가, 아니면 오늘은 아예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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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석규는 귀에서 목덜미까지 갑자기 빨개졌다.

"추워?"

"아니, 조금…."

"모닥불 피울게…."

석규는 일어나서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리가 떨려서 수영장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은숙은 담배를 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땔감을 모으는 석규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종두 오빠랑 어디서 싸웠어? 여기서 싸운 거야?"

갑자기 은숙이 큰 목소리로 묻자 석규는 움찔했다가, 허리를 펴고 수영장 바닥을 가리켰다. 은숙은 가리키는 대로 바닥을 보았다.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 있다.

은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규는 나뭇가지를 모아 들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완전히 어두워지려면 두 시간 정도 남아 있었지만 모닥불은 주변에 따스한 빛을 던졌다. 석규와 은숙은 한동안 말없이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하다.

이윽고 은숙이 꽁초를 모닥불에 던졌다. 틱. 꽁초가 불꽃 속에 던져지자 석규는 흠칫해서 은숙을 바라보았다. 은숙은 일어서더니 모닥불에 흙을 끼얹어 끄기 시작했다. 석규는 영문도 모르고 같이 불을 껐다. 은숙은 불씨 하나하나 꼼꼼히 흙 속에 묻어버린 뒤 석규의 손을 잡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석규는 마술에 걸린 듯이 은숙을 따라갔다.

숲 속에는 심마니들이 이용하는 조그만 움막이 있었다. 은숙은 먼저 들어가 지저분한 담요 위에 비스듬히 누워 손을 내밀었다. 석규는 잠시 망설이다가 은숙처럼 누웠다.

어두웠다.

"너, 한 번도 안 해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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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규는 대답하기 싫었다. 그러나 다음 튀어나온 말에 석규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난 형하고는 달라."

어두웠지만 은숙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희미한 빛에 치아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석규는 그 반짝이는 곳에 입을 갖다댔다. 은숙이 바지 벨트를 헤치고 올라오려는 걸 석규가 가슴을 움켜쥐면서 거꾸로 올라탔다. 작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 안에 잡혔다. 석규는 자주 해 본 사람처럼 은숙을 다루기 시작했다. 석규의 몸놀림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은숙은 물론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석호와 은숙이 하는 걸 열심히 훔쳐본 덕분일까.

그날 은숙은 석규가 두 번 사정하는 것까지 보고 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석규는 움막에 누워서 생각해 보았다. 은숙이, 종두 형이랑도 한 걸까?

이틀 뒤 석규는 자신을 보고 눈을 부라리는 종두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종두 형이랑은 안 했구나.

"이 씹새야! 했어 안했어? 엉?"

종두가 석규의 입에 펀치를 몇 번 날리자 혀에 부서진 치아 조각이 느껴졌다.

아무리 중학생이라도 그렇게 두들겨대는데 이빨이 안 나갈 리가 없다.

"안 했다니까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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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규는 밑에 깔려 있으면서도 큰 소리를 쳤다.

"좆까, 씨발놈아."

퍽퍽퍽. 석규는 얼굴에 날아드는 종두의 주먹을 잡고 아예 부서진 앞니를 푹 박았다.

종두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빼자 석규는 몸을 굴려 일어났다. 턱에서 피가 투두둑 떨어졌지만 이상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다.

"했지! 이 씨발놈, 은숙이 먹었지?"

"안 했다니까 씨발, 우리 형 오면 죽었어."

"어휴, 이 씨발놈이 진짜…. 죽을 줄 알아."

종두가 다시 덤벼들었다. 피를 흘리며 서 있던 석규는 몇 번 용케 피했지만 다시 엉겨붙고 말았다. 처절한 수컷들의 다툼이다.

"야! 씹새들. 거기서 뭐해!"

피묻은 주먹을 든 종두도 이를 악문 석규도 순간 얼어붙었다. 석호의 목소리다.

수영장 바닥에 굴러 있는 석호가 둘을 내려다보았다.

"야, 뭐야? 왜 싸워?"

"형!"

석규가 발딱 일어났다. 종두가 침을 찍 뱉으며 좆됐다는 표정으로 물러섰다. 석호는 씹창이 난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수영장 바닥으로 톡 내려섰다. 그리고 종두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야 임마, 내 동생은 왜 때려? 왜 둘이 싸워?"

"씨발, 저 새끼한테 물어봐!" 종두가 손가락으로 석규를 가리켰다.

"형, 언제 왔어?"221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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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왔잖아 새끼야. 야 종두가 널 왜 때려. 뭐야 도대체?"

석규가 멈칫거리자 종두가 반쯤 울먹이며 소리쳤다.

"저 새끼가 은숙이 먹었다니까!"

석호는 잠시 못 알아듣고 눈을 희번덕거렸다.

"뭘 먹어?"

"야 이 새꺄, 똑바로 말해. 너 은숙이랑 했지? 했지!" 종두가 다시 덤벼들려는 걸 석호가 막았다.

"안 했어 씨발!"

"좆까 씨발놈아!"

석호가 종두 따귀를 퍽 하고 때리자 종두가 비슬 물러섰다. 그러면서 석호는 석규에게 시선을 박았다.

안 했어?"

"안 했다니까!"

"근데 종두가 왜 그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씨발놈…."

석호는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한 두 놈을 번갈아보다가 한참 만에 말했다.

"둘 다 기다려. 은숙이년 데리고 올 테니까."

석규는 숨이 막혔지만 석호를 잡을 수는 없었다. 종두가 씨익 웃었다. 석규는 아연해서 종두를 쳐다보았다. 은숙이랑 한 걸 어떻게 냄새 맡은 걸까.

석호는 금방 왔다. 석호가 돌아왔다는 얘길 듣고 은숙도 수영장으로 오는 길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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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다. 두 사람을 보고 석규와 종두는 수영장 바깥으로 올라갔다. 오면서 스토리를 들었는지 은숙의 얼굴이 바짝 졸아들어 있었다.

"거짓말하면 죽여버린다. 너부터 죽여버린다."

석호가 은숙의 어깨를 흔들었다. 석규와 종두는 은숙의 입만 쳐다보았다. 몇십 초의 침묵이 흘렀다. 석규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윽고 은숙이 입을 열었다.

"안 했어."

종두가 움찔했다. 석규는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석호는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안 했다는데…?" 석호가 종두를 째려봤다. 종두는 아무 말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안 했다잖아 씨발놈아…."

석규는 피에 젖은 얼굴을 슥 문질렀다. 석호는 사냥감 주변을 도는 호랑이처럼 어슬렁대더니 굴러다니던 각목 하나를 집어들었다. 종두를 제대로 팰 심사인 모양이다. 석호는 손에 맞는 방망이라도 고르듯 각목을 이리저리 쥐어보더니,

석규에게로 던졌다.

"네가 패!"

종두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좆됐다. 석규는 망설였다. 그러나 석호가 고갯짓으로 어서, 하는 시늉을 하자 석규는 천천히 각목을 집어들었다. 종두가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야 이 씨발놈아…. 미안해, 미안해! 오지 마, 씨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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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규는 별안간 각목을 들고 종두에게로 덤벼들었다. 종두는 질겁을 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석호와 은숙까지 종두 뒤를 쫓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니까! 오지마!"

"야 이 씨발놈아 안 서!"

"모르고 그랬잖아! 하지 마!"

종두가 죽어라고 달음질치자 뒤를 쫓던 석규는 웃음이 다 났다. 빠르다. 네 사람은 그렇게 수영장을 몇 번이나 돌았다. 맨 뒤에서 따라오던 은숙이 깔깔대자, 석호와 석규도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치는 것 같다. 종두 바로 뒤에서 따라가던 석규는 크게 웃다가 각목을 집어던졌다. 종두가 팔짝 뛰며 각목을 피했지만 발목에 각목이 걸려들었다. 순간 종두는 찍 미끄러졌다.

"야 씨발…?"

종두는 그대로 수영장에 각목과 함께 머리부터 곤두박질쳤다.

두개골과 타일이 부딪치면서 뼈가 어그러지는 이상한 소리가 수영장 벽을 타고 울렸다. 나머지 세 사람은 굳은 듯

멈춰섰다. 시커먼 피가 수영장 바닥에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석규는 가까이 있지는 않았지만 종두의 오른쪽 눈알이 비어져나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오면서 종두의 얼굴이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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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이 주저앉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석호는 은숙이 소리를 지르건 말건 멍청해져서 수영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끔찍했지만 석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종두의 손이 조금씩 경련했지만 아래로 내려가서 살아 있나 확인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물론 확인했더라도 손 움직임이 아직 살아있다는 표시가 아니라 근육 반사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몰랐겠지만.

"형…."

"…."

"형?"

석규는 석호에게 다가갔다. 석호는 멍하니 서서 거꾸로 박힌 종두를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 은숙의 울음소리인지 발악하는 소리인지 구별 못할 소리가 들렸다.

"…형? 어떡해?"

"…씨발새끼…."

석호가 야수처럼 중얼거렸다. 석규는 석호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석호는 그대로 한참 서 있다가 울고 있는 은숙과 석규를 번갈아 보았다. 석규는 석호의 눈빛에 몸서리쳤다. 이윽고 석호는 가방을 찾아 들더니 숲 바깥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버렸다.

"형 어디 가!" 석규는 공포에 질려 냅다 소리질렀다.

"어디 가!"

"어딜 가긴 어딜 가! 종두네 가잖아!" 멀어지는 석호의 대답이 숲속에 울렸다.

석규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은숙이 울고 있었지만 위로는커녕 석규가 더 큰 소리로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었다. 숲속이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은숙이 겁에 질린 모양인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석규에게 꼭 달라붙었다. 석규는 은숙을 한 손으로 밀쳐내면서 성냥을 찾았다. 담배라도, 아니 불이라도 피워야 미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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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시간쯤 지난 뒤 석호와 종두의 아버지가 현장에 도착했다.

셋은 밤새워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고 종두의 죽음에 형사적 책임이 없다는 판단이 내려진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사관들이 종두가 수영장 바닥에 떨어진 것이 단순 사고였다는 사실을 납득할 때까지는 석규와 종두가 싸운 이유부터 사고 직전까지의 모든 일들이 시시콜콜 까발려져야만했다. 그 와중에 경찰들이 다시 은숙의 입을 주목했음은 물론이다.

석규는 화가 잔뜩 나다 못해 지쳐버린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돌아갔고, 석호는 그대로 경찰서를 나오는 대로 다시 집을 나가버렸다. 은숙은 아무도 맞아주는 이 없이 혼자 집에 가야 했다. 그대로 은숙은 며칠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석규는 은숙이 전학을 갔다는 말만 전해들었다.

석규네도 이사갈 준비를 해야 했다. 경찰서에서 한 얘기가 어느 새 동네에 소문이 퍼져 새끼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은숙이 전학을 간 진짜 이유는 애를 배서라느니, 두 형제가 은숙을 갖고 놀았다느니란 소문이 돌았다.

석규는 은숙이 보고 싶었지만 수소문할 길이 없었다. 이사를 간 후에야 서울 집으로 찾아온 석호는 그 뒤로 은숙 얘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석규는 석호의 행동거지를 은밀히 살폈지만 은숙을 따로 만나는 것 같진 않았다. 다른 여자애들과 놀아나면 놀아났을까. 여기까지가 석규가 은숙에 대한 기억이 전부였다.

새벽 몇 시나 되었을까. 석규는 퍼뜩 눈을 떴다. 휴대폰을 보니 5 시 반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석호의 나직한 코골이 소리만 울렸다.

석규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았다. 용희 이 자식, 아직도 안 오고 어디 있는 거야.

한편 그날 오후 푸른심천 사무실에 멤버들이 모였다. 문교수의 밴에 모두 함께 타고 의정부로 문상을 가기로 한 것이다. 안교수와 문교수는 검은 정장, 은숙과 명희는 각각 검은 투피스 차림이었지만, 유선생만 유독 혼자 검정색 개량한복을 입고 나왔다. 갓만 쓰면 영락없이 저승사자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런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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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밴에 탄 채 고속도로 위를 달리면서 묘한 감회에 빠졌다. 물론 얼른 절만 하고 뒤돌아 나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20년 후 어엿하게 그녀를 닦달해대던 석규의 어머니 문상을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박작가? 바쁘죠? 통화할 수 있어요?"

"문교수님? 예, 말씀하시죠."

석규는 휴대폰을 들고 나와 식탁에 앉았다. 오후가 되어도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아 오히려 지루해지던 찰나였다.

"우리 지금 의정부로 가고 있어요. 아마 한 시간 반쯤 후면 도착할 것 같아….

박작가가 오지 말라고 미리 얘기했다는데,

그래도 가 봐야지.

혹시 몰라서 미리 전화하는 거예요."

"예? 예…."

"바쁘지? 끊어요. 힘내구."

석규는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은숙도 온다는 말인가? 석규는 저도 모르게 석호를 눈으로 찾았다. 둘이 다시 마주치는 모습은 석규도 보기 싫었다. 아이 씨…, 어디 가서 숨어 있으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떡하지?

푸른심천 멤버들은 해가 어둑해지고 나서야 도착했다. 장례식장은 어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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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했다. 안교수와 문교수, 은숙과 명희 그리고 유선생까지 절을 한 뒤 한 식탁에 모여 앉았다. 은숙은 자기가 상을 당하기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고 종종걸음을 쳤다.

석규는 내실이 비자 옆에 있던 용희를 나직이 불렀다.

"야! 네 아빠 어디 갔냐?"

"자…."

"어디서?"

"조오기~."

용희가 구석을 가리키자 구석에 처박혀 시뻘건 얼굴을 하고 잠든 석호가 보였다.

석규는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대로 새벽까지 잠들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안교수와 문교수, 유선생은 소주잔을 기울였다.

"유선생은 어머님 언제 돌아가셨어?" 안교수가 물었다.

"아직 살아 계시는데요."

"아, 그런가? 난 재작년에 가셨거든. 살아계실 때 잘 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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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생은 안교수의 말을 흘려들으며 장례식장 안을 시선으로 훑었다. 이윽고 유선생의 눈에 구석에서 잠든 사내가 들어왔다. 석규와 왠지 비슷한 분위기로 봐서 주홍이 말한 3 학년 짱, 석호란 사람 같다. 유선생은 석호를 주시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석호는 부스스 일어나더니, 화장실에라도 가려는 듯 바지춤을 잡고 나갔다.

"조교수는 어디 있대요?"

"몰라. 분위기 답답한 거 싫다면서 차에서 쉬고 있겠다던데."

유선생은 아무 말 없이 슬며시 일어났다. 방금 은숙이 주차장으로 가는 대신 화장실 쪽으로 가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화장실은 영안실 복도 끝에 있었다.

유선생은 소리내지 않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 끝 화장실 앞에 은숙과 석호가 마주 서 있는 모습이 유선생의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돌이라도 된 듯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고개를 숙이고 무시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은숙은 다시 화장실로 들어갈 수도, 그냥 지나쳐 갈 수도 없이 어쩔 줄을 몰랐다.

한편 석호는 이상한 감회에 젖었다. 구석에 구겨져 있었지만 푸른심천 멤버들이 도착할 때 바로 은숙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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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한숨을 나직이 쉬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박석규, 도움 안 되는 자식.

은숙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입속으로 삼가 명복을, 하고 중얼거리며 석호를 피해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러자 석호가 은숙을 향해 등을 돌렸다.

은숙은 흠칫했다.

"결혼은 하고 사냐…?"

은숙은 석호의 말을 무시한 채 빠른 구두소리를 내며 복도를 빠져나갔다. 남이야 결혼을 하건 말건, 어렸을 때랑 양아치스러운 건 똑같네. 그러나 오히려 치를 일을 치른 듯 마음이 편안해져 왔다. 은숙도 모를 일이었다.

한편 훔쳐보고 있던 유선생은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맞구나.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유선생은 석호를 향해 다가갔다.

"누구요?"

석호는 마른 까마귀 같은 유선생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개량한복에 익숙하지 않은 석호 눈엔 유선생이 문상객처럼 보이지 않은 탓이다.

밤이 깊어가자 안교수와 문교수는 석규에게 인사를 남기고 일어섰다.

"박작가, 힘내고 심천에서 봅시다."

"먼데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뭘. 조만간 다시 봅시다."

안교수와 문교수까지 가버리자 장례식장 내실은 텅 비어버렸다. 석규는 상모를 벗어버리고 주저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일이면 끝날 장례식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의식처럼 무겁게 머리를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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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혼자 앉아 있던 중 여자 구두소리가 울려왔다. 석규는 깜짝 놀랐다.

은숙인가? 아니, 명희가 서 있었다. 석규보다 더 우울한 표정이다.

"아직 안 갔어? 명희씨…"

"박선생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요. 안교수님이랑 문교수님 나가셨어요. 명희씨도 와줘서 고마워."

석규는 눈을 비비며 자세를 바로 고쳐앉았다. 명희는 석규의 말에 상관없이 구두를 벗고 내실로 올라왔다. 석규는 피곤한 눈으로 명희를 바라보았다.

"안 가요?"

"…"

"명희씨?"

명희가 눈물을 글썽였다. 석규는 픽 웃었다. 그러나 죽기는 우리 엄마가 죽었는데 명희씨가 왜 울어, 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석규는 피곤했다. 명희가 석규 손에서 담배를 살며시 빼앗았다. 석규는 가만히 있었다. 명희는 그대로 커다란 눈이 젖은 채 석규를 바라보다가 키스했다. 석규는 피할 틈도 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얼떨결에 명희의 키스를 받기 시작했다. 석규는 당황했지만 키스는 감미로웠다. 평소의 석규라면 당연히 피했겠지만, 오늘은 석규가 제 스스로 안겨오는 여자를 피할 만한 컨디션이 못 되었다.

한편 석호는 병원 공터에서 유선생을 샌드백마냥 두들겨패고 있었다. 석호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펀치 한 방 제대로 날리지 못하는 위인이 왜 덤볐는지 석호도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쨌건 먼저 싸우자고 주먹을 쳐든 쪽은 유선생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누구야? 이 씨발놈아."

"알 거 없다…. 씹새야."

"허, 진짜 이상한 새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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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는 유선생의 명치를 발끝으로 걷어찼다. 금세 위경련이 일면서 유선생은 고꾸라졌다. 그러나 한쪽 손은 석호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채였다. 석호는 발로 유선생의 손을 뭉개면서 침을 뱉고 떠나버렸다.

유선생은 석호가 떠나버린 자리에 한숨을 쉬며 드러누웠다. 얼굴 전체가 퉁퉁 부어오른 듯 답답하고 아프다. 떠나기 전에 응급실이라도 들러야 할 판이었다.

유선생은 공터에 난 풀을 쥐어뜯었지만, 별 수 없었다.

은숙과 명희, 안교수와 문교수는 한밤중 심천으로 가는 길을 달렸다. 유선생은 차 안에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고 나타나지도 않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먼저 출발했던 것이다. 그렇게 출발한 지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안교수와 연결이 되었다. 유선생 먼저 심천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하여간 이상한 성격이야. 말도 없이 간거예요?

조교수한테도?"

"누가 알아요 그 속을…."

은숙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깨 위에 명희가 기대어 자고 있었다. 어깨가 꽤 아팠지만 왠지 명희 머리의 무게가 싫지 않다. 자는 모습을 보니 별 수 없는 여자애란 생각이 들어 우습기도 하다.

은숙은 의외로 담담한 기분에 스스로 놀랐다. 석호와 마주쳤지만 화가 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다만 적잖이 놀랐을 뿐이다. 그래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도망치듯 나왔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오랫동안 준비하던 시험을 드디어 치러버린 수험생 같은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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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생이 석호와 마주치는 모습을 봐버렸지만 그것도 별로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런 일로 누구도 지금의 은숙을 단죄할 수는 없었다. 은숙은 최악의 경우 심천을 떠날 마음의 준비까지 해 두었지만,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서 부끄럽지는 않았다.

은숙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새삼 유선생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유선생이 심천에 먼저 도착했을 리가 없었다. 지금 의정부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사흘 뒤 은숙은 영호와 만났다. 모텔도 레스토랑도 아닌 조용한 카페였다. 은숙은 하얀 소파가 놓인 카페로 들어서면서 화선과의 대면을 떠올렸다. 그러나 영호의 밝은 표정을 보자 그런 생각이 휙 사라졌다.

"잘 지냈어요?"

"네. 영호씨도 잘 지냈어요?"

"난 그냥 그렇죠, 뭐. 토요일에 전화 안 받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별일 아니에요. 단체 사람 중 한 분이 모친상을 당했거든요."

은숙은 거기까지만 말했다. 석규는 심천에 다시 온 모양이지만 아직 만나보진 않았다. 아마 만나면 기분이 사뭇 다를 것 같았지만, 영호에게 그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영호씨는 요새 어때요?"

"그냥 푹 쉬고 있어요. 대학 졸업하고 나서 십몇 년 만에 마음놓고 놀아보는 거거든요. 은숙씨도 장기휴가 같은 거 내보면 어때요? 대학에서 안식년 같은 거 안 내줘요?"

"안식년이요? 난 그런 거 받으려면 아직 멀었어요."

은숙도 밝게 웃었다. 커피향이 유달리 감미로웠지만 영호의 내내 밝은 표정이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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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렸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는 노력이라는 걸 경험많은 은숙이 모를 턱이 없다. 허세라도 부려 보이는 마음씨가 고마웠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라는 증거였다. 영호가 축 처져 징징거렸다면 은숙도 정나미가 떨어졌을 것이다.

찻잔을 비운 다음 영호는 은숙을 단체 사무실에 데려다 주겠다고 나섰다. 은숙은 사양했지만 영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앞으로 자주 못 볼 거 같아서, 일부러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내 마음 알죠? 은숙씨…."

출발하기 전 커피숍 주차장에서 두 사람은 길고 긴 키스를 나눴다. 이윽고 영호가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지만 정작 도착한 곳은 단체 사무실이 아니라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곳, 바닷가 카페 위 모텔이었다.

영호 품에 안긴 와중에서도 은숙 머릿속에는 앞으로 자주 못 볼테니까란 말이 굴러다녔다. 앞으로 주변이 상당히 복잡하겠지. 그걸 자세히 캐물어 봤자 은숙이 도움 될 일은 없었다. 은숙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한 달이나, 길면 3개월까지.

푸른심천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 시쯤이었다. 은숙은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이 밤중에 불이 켜져 있다. 유선생인가? 명희인가? 영호도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어? 이 시간에 누가 있나 보네?"

"그러게 말이에요."

은숙은 안전벨트를 풀고 영호에게 미소를 지었다. 영호가 다시 한 번 은숙에게 미소를 짓더니 머리를 끌어당겨 키스를 했다. 다시 두 사람은 한동안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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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선생은 그 모습을 차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석호의 펀치가 아로새겨진 얼굴은 곳곳에 멍이 들고 까진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은숙은 유선생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에 있던 사람은 명희도 아닌 바로 석규였다. 은숙은 적잖이 놀랐다.

"벌써 왔네. 좀 있다가 오지 않으시구…."

"있어봤자 뭐하겠어. 화장해드리고 바로 올라왔지."

석규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의 앙금을 내보이지 않는 남자다운 태도였다. 은숙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집에서 안 쉬시구?"

"자료 가지러 온 김에 이것저것. 원고 마감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석규는 편한 반말 말투, 은숙은 반말 반 존댓말 반의 이상한 말투다.

"이 시간엔 웬일로 들렀어?"

그냥. 며칠 안 왔으니까 잠깐 들여다보고 가는 거지…. 습관이야."

"좋은 습관이네."

은숙은 돌아서는 석규의 뒷모습을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보았다. 석호와 마주친 이야기를 해줄까 말까 망설여진다.

"박선생님."

"네? 응?" 석규는 움찔해서 돌아보았다.

"유선생님은 제대로 인사하고 가신 거예요?"

"유선생님? 글쎄? 갈 때는…잘 모르겠는데…. 암튼 명희씨하곤 그날 잘 내려간 거구요?"

"명희? 잘 내려갔어요. 걱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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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명희도 어디선가 우물쭈물한다 싶더니 그 사이에 석규의 빈틈을 공략한 모양이다. 그러나 은숙이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석호와 마주친 뒤 은숙은 자신도 모르게 많이 쿨해져 있었다.

"수고하시고, 먼저 갈게요."

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숙은 일어서서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에 세워진 볼보에 올라탔다. 묘하게 평온한 마음이 들었다. 시동을 걸자 며칠동안 달리지 못했던 볼보가 우우웅하고 울었다. 은숙은 애마의 엔진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천천히 도로로 빠져나와 속도를 올리려는 찰나 은숙의 뒤에서 하얀 캐피탈이 따라붙었다.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차창을 꼭 닫아붙인 차안에까지 들릴 정도로 캐피탈이 속도를 올리더니 중앙선을 넘어 볼보 앞을 가로막아 버렸다. 은숙은 소스라치게 놀라 브레이크를 꽉 밟았다. 끼익! 다행히 충돌은 면했지만 은숙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도대체 어떤 개새끼야? 은숙은 운전대를 잡은 채 하얀 캐피탈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운전석 차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내려 걸어왔다. 은숙은 기가 막혔다. 맙소사!

유선생이다. 은숙도 차에서 내렸다.

"미쳤어요? 사고날 뻔했잖아요!"

은숙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유선생의 얼굴을 보고 두번째로 기가 막혔다. 누구한테 맞았는지, 아스팔트에 얼굴이라도 대고 미끄러졌는지 여기저기 멍들고 부어 있었다.

"얼굴은 그게 뭐예요?"

은숙은 두번째로 버럭 소리를 쳤다. 유선생은 천천히 은숙에게 걸어왔다. 술에 취한 듯 소주 냄새가 났다. 얼굴은 저렇게 돼가지고 술마시고 운전이라니, 은숙은 짜증이 버럭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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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페이스네요?" 유선생이 다가오더니 말했다.

"누구 말이에요?"

"박선생은 위에 있던데. 아까 데려다주던 양반은 누굽니까?"

"……."

"키스도 찐~하게 하시던데."

은숙은 눈썹을 모으고 턱을 치켜올렸다. 이젠 못할 말이 없었다.

"…결혼할 사람이에요."

"오! 결혼! 결혼! 결혼할 사람?" 유선생은 손뼉을 짝짝 쳤다.

"뭐하시는 거예요 지금?"

"결혼? 석규는 아니고…. 석규 형인가? 그 깡패새끼?"

은숙은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았다. 어두운 도로 위에서 가로등 불빛만 명멸하고 있었다. 유선생은 술기운이 치밀어오르는 걸 누르려는 듯 고개를 도리질치더니 부은 얼굴을 손으로 비비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리고 갑자기 진지한 태도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은숙씨, 다 농담이에요. 저는 그런 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로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다시 돌아와 줘요. 여기서 끝내지 말아요."

은숙은 망연한 와중에 유선생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돌아가? 어디로? 끝내지 말아 달라고? 도대체 언제 시작했는데?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돌아가긴 어딜 돌아가요 제가! 지금 술 드셨어요?"

"술은 술이고, 과거는 과겁니다!"

"내 과거가 뭐든, 더 이상 상관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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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줘요 은숙씨…. 다 용서할게요."

"용서를 해요? 내가? 누가?"

"더 이상 미치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유선생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두운 길 위에 유선생의 고함소리가 메아리를 쳤다. 은숙은 움찔 놀랐지만 이내 짜증이 솟구쳤다. 이젠 정말 이렇게 따라다니는 거 지겹다. 날이 밝으면 안교수 문교수에게 이야기해서 단체에서 내쫓아 버릴 테다. 은숙은 보라색 피멍으로 여기저기 물든 유선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더 이상 할 말 없어요…. 유선생님 계속 이러시는 것도 지겨워요."

은숙은 홱 돌아서서 볼보 차문을 열고 타려 했다. 유선생은 은숙의 팔을 잡았다. 은숙은 뿌리쳤지만 유선생은 한사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몇 초 동안 두 사람의 몸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은숙은 뿌리치다 못해 유선생의 따귀를 몇 번 때렸지만 유선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비리비리한 유선생의 몸에서 웬 힘이 나오는지 은숙도 신기할 정도였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중 뒤편에서 눈부신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가왔다. 뒤를 돌아다보자 지프 차량의 거친 엔진 소리가 들렸다. 갤로퍼 한 대가 끽 서더니 석규가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때까지도 유선생은 은숙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유선생님, 지금 무슨 짓이세요?" 석규가 달려와 유선생의 팔을 잡았다.

"이거 놔!"

"유선생님이나 놓으세요, 네?"

석규는 유선생과 은숙 사이에 끼어들어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애를 썼다. 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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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해서 그런지 유선생의 힘이 만만치 않았다. 은숙도 유선생을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결국 석규는 유선생의 팔을 반쯤 비틀고 나서야 은숙과 떼어놓을 수 있었다.

은숙은 팔이 너무 아픈 나머지 저려왔다. 유선생은 술이 덜 깼는지, 석규에게 힘으로 제압당한 게 억울한지 씩씩거렸다.

"그만 하세요, 그만…."

석규는 은숙과 유선생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유선생이 몇 걸음 떨어지더니 씨익 웃었다.

"오! 석~규…."

"대체 무슨 일입니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유선생은 비틀거리면서 석규의 말을 흉내냈다. 석규는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뭐 이런 쓰레기가 다 있나. 얼굴만 저렇게 씹창나지 않았으면 아까 은숙과 떼어놓는다는 핑계 삼아 몇 대 더 때렸을지도 모른다.

"박석규! 어머니 장례는 잘 치르고 왔냐?"

"…."

"함부로 어머니 걸고 맹세하는 거 아니다. 깡패새끼들 키우느라 고생도 많았을 텐데…."

"이거 봐요!"

석규는 유선생 멱살을 잡으려다 관뒀다. 은숙이 살며시 석규의 옷자락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너 가져라 가져…. 네가 갖든지 네 형이 갖든지…."

"말조심 해요."

"…둘이 돌려서 쳐먹든지…." 유선생은 횡설수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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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둘다…."

"…."

"너네 년놈들…내일부터 얼굴 못 들고 다닐 줄 알어! 내가 못할 거 같지? 엉? 못할 거 같애?"

유선생은 주절주절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석규와 은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유선생이 떠들어대는 욕설을 그대로 듣고 서 있었다. 유선생은 한참 지껄이다가 혀가 꼬였는지 발을 비비 꼬면서 캐피탈로 다가갔다. 석규가 그 뒤를 쫓아가 잡았다.

"지금 무슨 운전을 한다고 그럽니까?"

"지랄하고 있네. 양아치 새끼…."

"알았어요. 잠깐만요."

"뭐야?"

석규는 말을 가다듬었다. 뭔가 해명을 해야 했다. 유선생이 알고 있는 것과 사실이 다르다는 것, 아니 적어도 유선생의 말을 강하게 부정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유선생의 술기운이 석규에게 옮겨왔는지 석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뭐야?"

"…유선생님, 잠깐만요. 잠깐만."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

"…예를 들어서." 유선생은 탁 코웃음을 쳤다.

"단도직입적이라면서, 뭔 예를 들고 지랄이야? 엉?"

"이것봐요 유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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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규는 팔을 잡았지만 유선생은 홱 뿌리쳤다.

"유선생, 유선생 부르지마 새꺄! 너네들이 아는 유경목은 죽었어. 나 시체거든.

시체한테 값싼 동정 바라지마."

유선생은 차문을 탁 닫아버렸다. 석규는 차에서 물러섰다. 캐피탈이 부우웅 무서운 속도를 내면서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타이어와 노면이 마찰하면서 타는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석규와 은숙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쭉 뻗은 도로 위를 달려가는 캐피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200 미터쯤 달려갔을까? 갑자기 오른쪽 길에서 덤프트럭이 굴러나왔다.

트럭도 과속을 하고 있었는지, 순식간에 은숙이 비명도 지르기 전에 굉음과 함께 덤프트럭과 캐피탈이 충돌했다. 트럭은 캐피탈을 들이받은 채 그대로 몇십 미터를 밀어내고 나서야 멈춰섰다. 흰색 캐피탈이 트럭 밑에 종이조각처럼 구겨져 박혀들어가버렸다. 멀리 있는 석규와 은숙의 귀에 충돌 소리가 아프게 와서 박혔다.

멍하니 선 두 사람의 발밑에까지 조각난 유리파편이 날아와 굴렀다. 멀리서 언뜻 봐도 캐피탈 운전자가 살아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은숙은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도 사람이 죽어버렸다. 석규가 휴대폰에 대고 무어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석규가 휴대폰을 끊자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은숙씨."

"…."

"조교수님?"

은숙은 저도 모르게 아스팔트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석규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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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석규의 손을 무시하고 일어섰다. 어느 새 주변에 경찰차와 앰뷸런스가 와 있었다. 응급 요원들이 다가와 혹시 다친 데가 없냐고 물었지만 은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고 현장 주변에도 빨간 불빛들이 윙윙거렸다. 그 가운데 석규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문교수님? 저 박필입니다. 사고가 났습니다. 유선생님이… 유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윽고 교통경찰들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사고 경위를 말씀해주셔야겠는데요. 불편하시더라도 협조 바랍니다."

석규와 은숙은 순순히 갤로퍼와 볼보에 나누어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종두가 죽었을 때처럼, 두 사람은 경찰서에서 사고 경위를 세세히 진술해야 했다.

"저기, 일단 두 분 직업 좀 말씀해 주시죠."

"저는 심천 디자인대 염색과 교수 조은숙입니다. 이쪽은 만화창작과 박필 교수구요.

실명은 박석규입니다."

석규는 의외로 차분한 은숙의 태도에 놀라 그녀를 보았다. 수사관이 호의적인 미소를 짓고 몸을 앞으로 당겼다.

"아~두 분 다 심천대 교수시구만요."

"네."

은숙은 미소지었다. 석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보장된 신분 덕분인지 조서 작성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유선생이 만취 상태에서 석규와 은숙의 만류를 뿌리치고 과속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는 것이 요지였다.

"사고 당사자 채혈 결과 음주상태가 확인됐고. 이건 뭐 사건하고 상관없는 거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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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사고 당사자가 뭐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일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말렸는데 무리하게 음주운전까지 하고."

수사관이 물었다. 석규는 수사관의 눈빛을 보고 형사다운 호기심을 읽었다. 은숙도 같은 걸 느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셋이서 … 언쟁이 좀 있었습니다. 견해차이로요."

"견해차이라, 무슨 견해차이요?"

"단체 일에 대해서예요." 은숙이 대신 대답했다.

"단체 일이오?"

"예, 평소에 의견이 좀 안 맞아서 … 서로 쌓인 게 있어서 길거리에서 다투다가, 혼자 차 타고 씽하니 가버린 거거든요….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석규는 저도 모를 소리를 늘어놓았다.

수사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참 미인이시네요."

수사관이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씩 웃었다.

석규와 은숙은 집으로 돌아갔고, 오후에 나머지 멤버들은 옷장 구석에 박아놓았던

상복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다시 다려 입고 유선생을 애도해야 했다.

빈소에는 유선생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이다. 학교 사람들은 벌써 왔다 간 모양인지 영안실은 문상객 없이 조용했다. 유선생의 와이프와 딸만 상복을 입고 내실을 지키고 있었다.

문상을 마친 푸른심천 회원들은 영안실에 마련된 술자리에 모여 앉았지만 입 하나 243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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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사람이 없었다. 은숙도 석규도 침묵을 지켰다.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의 장례식,

그것도 한창 나이인 유선생의 죽음에 다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악상(惡喪)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분위기였다.

"이럴 수가 … 하늘도 무심하시지…." 안교수가 천장만 쳐다보며 담배연기를 올렸다.

문교수와 명희도 침묵을 지켰다. 석규와 은숙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유선생 죽음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 외에 무언가가 두 사람을 괴롭혀댔다. 조금만 더 차분하게, 지혜롭게 행동했더라면 유선생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은숙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차분하고 지혜로운 행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생각해낼 수 없었다. 은숙도 석규도 유선생의 은밀한 행패에 참을 만큼 참지 않았던가.

뭔가 두 사람 사이에 액이 낀 것 같았다. 은숙과 석규와 연관된 사람은 죽고, 두 사람은 아무 상처없이 빠져나가게 되는.

자리는 곧 흩어졌다. 석규는 안교수와 문교수, 명희까지 집에 가는 걸 보고 은숙을 기다렸다.

"괜찮아요?"

"네."

"한 잔 하시겠습니까?"

죽은 유선생에게 미안했던지 두 사람은 어느새 말을 높이고 있었다.

"어디로 갈래요?"

"…우리 집으로 가요."

석규는 은숙을 따라갔다. 은숙의 아파트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은숙은 석규를 집안에 들여보낸 다음 술을 사러 슈퍼마켓에 내려갔다. 잠시 홀로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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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규는 베란다 아래 바닷가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웠다.

잠시 후 들어온 은숙은 아무 말 없이 거실에 술상을 차렸다. 소주와 맥주 두 병씩,

그리고 물과 오징어가 전부였다. 술상을 사이에 두고 은숙과 석규는 마주앉았다.

석규는 잔을 들었다.

"건배 한 번 할래요?"

"…."

"한 번 해요. 자요!" 석규는 잔을 들었지만 은숙은 못 본 척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건배가 나와요?"

석규는 뻘쭘해졌다. 공연히 잔을 높이 든 손만 무안해졌다. 은숙은 혼자 자기 잔에 맥주를 채우고 반쯤 마셨다. 석규도 그냥 따라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다시 올라가요."

"…."

"올라가서 만화 그리고 먹고 살아. 우린 만나면 안 돼."

"왜요?"

"우리가 지금 몇 명 죽인지 알아요?"

"그게 우리가 죽인 거야?"

석규가 발끈하자 은숙은 말문이 막혔다. 다 운수가 뒤틀려서 그랬으려니 하면 넘어갈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숙은 싫었다. 더 불길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여간 올라가요. 올라가서 조용히 살아."

"안 그래도 그럴 겁니다."

"내가 남쪽, 그쪽이 북쪽. 절대 왔다갔다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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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은 잔을 비웠다. 석규가 빈 잔에 맥주를 채워주었다.

"…."

"알았어요?"

"…."

"알았냐구!"

"통일되면 어떡해?"

"어휴~"

"…."

"그럼 동서로 갈라. 네가 동쪽, 내가 서쪽…."

석규는 아무 말 없이 술잔만 비웠다. 은숙 말처럼 더 이상 그녀와 얽혔다간 또 무슨 재수없는 일이 일어날지 석규도 답답했다.

"알았어요. 술 마셔…."

"…휴~알았어요. 한 잔 해요."

"우리 사이에 도대체 무슨 마가 낀 거야?"

"쉿, 술이나 마셔요."

은숙은 안주도 없이 계속 맥주를 들이켰지만 취기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

도리어 정신이 말똥말똥 맑아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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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사이에 술 따르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계속 침묵이 흘렀다. 가끔 가다 은숙은 한숨을 쉬었고, 석규는 담배를 피웠다. 평소 같으면 은숙은 누구든 아파트 안에서 담배를 절대 피우지 못하게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잘 살아. 나도 잘 살게…." 은숙은 잔을 들었다.

"지금도 잘 살고 있잖아…."

"쉿, 시끄러."

"…."

"그리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석규는 은숙의 말에 기꺼이 동의하고 잔을 부딪쳤다. 조용한 거실에 건배하는 소리가 땡강 울렸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조금씩 어둠이 깔렸다.

은숙은 어둠이 깔리자 유선생이 자기 집에 숨어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랬던 유선생이 내일이면 한 줌의 재가 될 판이다.

잔을 비운 석규가 다시 맥주를 채운 뒤 은숙의 잔에 혼자 '땡강' 하고 부딪치고 혼자 마셨다. 은숙은 어두워져 가는 거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라고 말하고 잔을 부딪친 순간 종두와 유선생, 석규의 어머니까지 죽은 영혼들이 모두 모여들어 은숙과 석규 머리 위를 떠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은숙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남은 생을 살면서 떠오를 때마다 명복을 빌어줘야 할 것 같았다.

가까운 절에 위패라도 모셔야 내 맘이 편할까. 은숙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픽 웃고,

석규가 따라준 술을 마셨다. 깜깜해져 마주앉은 서로의 얼굴도 잘 안 보일 지경이 되었지만 두 사람 다 일어나 불을 켤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마주앉아 있었다. 그러던 중 '띠리리'. 어둠 속에서 은숙의 휴대폰이 울리자 휴대폰을 들고 내실로 들어갔다.

"여보세요?"

"은숙씨?" 영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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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영호씨."

"저 오늘 이혼했어요."

"네?" 은숙은 흠칫했다.

"이혼했습니다. 오늘로."

"…네." 은숙은 마치 영호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양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세요?"

"괜찮냐구요? 물론 괜찮죠. 저 괜찮아요, 은숙씨….""영호씨!"

"이제 일본 가요. 우리…. 이게 다 일본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 순간 은숙은 오래 눌러왔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눈물이 휴대폰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영호씨?"

"…네."

"사랑해요."

"…은숙씨, 우리 잘 살 거예요. 걱정마요."

"…."

"요즘 주변에 죽는 사람 많다고 했죠? 그거 되게 좋은 거래요."

은숙은 우는 와중에 웃음이 나왔다. 못 말리겠다.

은숙이 내실에서 전화를 받는 동안 석규에게도 전화가 왔다. 석규는 휴대폰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피곤한 얼굴을 훑어내렸다.

"여보세요?"

"박선생님?" 술에 취했는지 혀가 좀 꼬인 음성이었다.

"누구세요?"

"저 명희예요, 박선생님."

"술…마셨어요?"

"네." 휴대폰 저편에서 술기운을 수습하려는 듯 명희의 힘준 음성이 들려왔다.

"어디예요? 아직 병원이에요?"

"아뇨,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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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석규는 한숨을 쉬었다.

"박선생님…."

"네, 명희씨."

"지금, 나와 주실래요?"

"네?"

"지금, 저를 위해서 나와 주실 수 있으세요?"

"명희씨?"

석규는 저도 모르게 수화 부분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명희의 말은 계속됐다.

"지금 나와주시면…저도 박선생님께 다 드릴 수 있어요. 진짜루."

"…."

"나와 주실래요?"

석규는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치 상대방의 마지막 카드가 날아와 던져진 느낌이다.

"…지금 어디 계신데요?"

"사무실…앞에 있어요."

석규는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 할까. 일단 석규는 거실로 들어섰다. 전화를 받으러 들어간 은숙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불현듯 은숙이 예전에 했던 충고가 머리를 스쳤다.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사람은 없어…. 다 살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 명희 조심해.' 석규는 시계를 보고 5 분 내에 은숙이 통화를 마치고 나오지 않으면 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거실 소파에 걸터앉았다. 20 초, 30 초, …50 초, 1 분.

한편 은숙은 통화가 끝난 다음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은숙은 거실 불을 켰지만 집안 어디에도 석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은숙은 눈물을 터뜨렸다. 나 혼자, 혼자 남을 수는 없는 거잖아! 은숙은 아이처럼 엉엉 크게 소리를 내며 소파에 엎드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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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은숙은 일어서서 휴대폰을 찾았다. 영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꺼져 있었다.

은숙에게 전화를 건 뒤 바로 배터리를 뺀 모양이었다. 은숙은 음성 사서함에 들어갔다.

"영호씨, 은숙이에요…. 어려운 일들이 다 잘 되었어요. 모든 게 다 잘 되었어요….

미안해요. 영호씨는 저 때문에 이혼까지 하고. 보고 싶어요…. 날 위해서 오실 수 있죠? 기다릴게요."

은숙은 녹음이 끝난 뒤 저장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꼭 누르는 순간 마침표가 찍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두번 다시 도망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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