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북한인권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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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시민연합 뉴스레터 머리말 모음 윤현 김상헌 윤우 박범진 김석우 허만호 김영자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북한인권시민연합 201996~2015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노력을 앞으로 지속한다면 평양에서 인권포럼이 열리고 북한의 젊은이들이 인권운동에 나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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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인권시민연합

    뉴스레터

    머리말 모음

    윤현

    김상헌

    윤우

    박범진

    김석우

    허만호

    김영자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북한인권시민연합 20년1996~2015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노력을 앞으로 지속한다면 평양에서 인권포럼이 열리고

    북한의 젊은이들이 인권운동에 나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 북한인권시민연합은 1996년 5월 인권운동가, 지식인, 탈북자가

    중심이 되어 발족한 시민단체입니다.

    휴머니즘 정신에 따라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개선하고 고통 받고 있는

    북한난민을 돕기 위해 세계 각국의

    시민단체와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활발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고, 북한이탈주민의

    재정착을 돕고 지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북한인권시민연합은 다양한

    인권상을 받았습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수상내역

    존 디펜베이커 인권·자유 수호자상캐나다정부제정, 2011. 3. 10

    국민훈장모란장2010. 12. 10

    국회의장 감사패2003. 12. 26

    2003 민주주의상미국 민주주의기금(NED) 제정, 2003. 7. 16

    국민포장2002. 12. 24

    통일부장관 표창2000. 7. 8

    제1회 모범사회활동 대상SBS 문화재단 제정, 2000. 5. 24

  • 북 한 인 권 시 민 연 합 뉴 스 레 터 머 리 말 모 음 을 펴 내 며

    1996년 5월 4일에 이 창립되면서 그해 6월부터 「소식지」

    를 발간하여왔습니다. 이 「소식지」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핵심적 내용을 담

    은 난(欄)의 이름을 ‘주장’에서 ‘권두언’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랬더니 권두언

    이 누구냐고 묻는 전화도 있었고, 권두언을 만나고 싶다는 분들도 계실뿐

    만 아니라, 시대의 흐름도 있어서 ‘권두언’을 ‘머리말’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2016년부터는 「소식지」를 격월간으로 발행하면서 ‘머리말’ 대신에 활동이나

    인터뷰 등을 실어 친근하고 쉽게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20년 전 뉴스레터를 처음 발행할 때, 신문의 ‘사설’에 해당하는 ‘주장’을

    실었는데, 그때 창설에 함께한 분들이 집필했습니다. 제1호 ‘우리 운동의 의

    의’는 윤현 이사장이, 제2호 ‘그들이 죽어가고 있오!’는 김상헌 부이사장이,

    제3호 ‘재외탈북자문제의 심각성’은 윤우 부이사장이 쓰게 되었습니다. 윤현

    이사장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인에게 집필을 의뢰한 2014년 11월호~2015년

    4월호를 제외하고는 2015년 12월호까지 윤 이사장이 계속 집필을 맡아왔습

    니다. 윤현 이사장의 입원 중에는 의 박범진 고문, 김석우

    고문, 허만호 이사, 김영자 이사 겸 사무국장이 머리말을 이어갔습니다.

    207편의 ‘머리말’에는 우리의 나아갈 방향이 제시되어 있고, 그달의 중요

    한 활동들이 해설과 함께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전편을 PDF로, 그

    중 129편을 모아 책으로 발행 하는 것에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

    다. 처음 의 활동을 시작할 때, “계란으로 바위 치는 그

    런 활동을 왜 하느냐?”는 주위의 만류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뒤로하

    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의 20년! 국제사회에서 외

    딴섬이었던 북한인권을 불모지에서 양지로 옮겨오기 위한 우리의 함성이,

    전대미문의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유엔의 개입으로 이어지게 한 국제협력옹

    호활동, 인권사각지대에 놓인 북한난민을 보호하고 생명을 구출하는 북한

    난민구호활동, 한국에 입국한 탈북 아동·청소년들에게 민주시민으로, 통일

    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남한주민에게 통일에 함께할

    북한주민의 삶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한 교육·훈련활동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되지 않도록 애쓴 흔적이 바로 이 ‘머리말’에 담겨있습니다.

    소리없이 시작된 조그마한 단체가 계란으로 어떻게 바위를 치며 활동해왔

    는가를 담은 이 ‘머리말’ 모음이 앞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더욱 힘차게 돌

    리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2016년 5월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 윤현

  • 100 국제협력 캠페인

    국제협력 캠페인 002 … 우리 운동의 의의005 … 그들이 죽어가고 있오!007 … “北 인권문제를 들이대는 게 좋다”

    009 … 메아리가 들린다

    011 … 작은 거인

    013 … 과거를 반성하는 ‘착한 일본인’

    015 … 우리의 결의

    017 … 세계인권선언 50주년

    019 … 신정부에 바란다

    021 … 이스라엘에서 날아든 전자우편

    023 … 미국이 움직인다

    025 … UN이 움직인다

    027 … 제3회 국제인권회의에 다녀와서

    029 … 한 캐나다 법조인의 탈북자돕기

    031 … 북한 수용소의 검은 그림자

    033 … 北 인권관련 지식인성명

    035 … 北의 인권개선은 통일대비책이다

    037 … 美 종교인의 기도와 편지쓰기

    039 … 북한인권문제 국제화의 첫 걸음

    041 … 내실을 다지는 해로

    043 … 초지일관(初志一貫)

    045 … 북한인권 유럽 지식인 성명

    047 … 유럽인들의 대북 관심을 보면서

    049 … 린 모리슨 수녀의 활약상

    051 … 제3회 국제회의를 유럽에서

    053 … 北 인권개선에 EU가 나섰다

    056 … 한 단계 올라선 北인권개선운동

    058 … 한 단계 올라선 北인권개선운동 (속)

    060 … 제3회 국제회의를 마치고

    062 … 침묵은 이제 끝났다

    064 … 세계로 뻗어가는 북한인권개선운동

    066 … 하벨 체코대통령과의 만남

    068 … 北 인권, 국제사회의 어젠다로

    070 … 중유럽의 고도(古都) 프라하

    072 … 제4회 국제회의를 마치고

    074 … 유엔 北인권결의 통과를 보면서

    076 … 한국이 北인권개선운동의 중심돼야

    078 … 민주주의여신상을 받으며

    080 … 영국의 北 인권운동

    082 … 기대되는 폴란드 北 인권운동

    084 … 보람찬 한해를 보내면서

    086 … 변화와 도약의 시점에서

    088 … 국제사면위원회와 북한인권개선운동

    090 … 제5회 국제회의를 마치고

    092 …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

    094 …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의 대북결의 채택

    096 … 백육십오년 전통의 NGO와 함께

    098 … 총론에서 각론으로

    100 …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의 메시지

    102 … 무엇을 할 것인가

    104 … 북한의 공개처형

    106 … 유엔과 북한: 대화냐 제재냐

    108 … 국제원조 활동가의 눈에 비친 북한사회

    110 …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선언문’

    112 … 노르웨이를 다녀와서

    114 … 새로운 접근법을 생각할 때

    116 …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 보고서

    118 … 베르겐 국제회의의 의의(意義)

    120 … 문타폰 특별보고관 폐회연설

    122 … 아리랑 소나타 감상회를 앞두고

    124 … 대(對)유엔안보리 연대 청원의 의의

    126 … 더욱 활발해지는 북한인권개선운동

    128 … 본데비크의 대북인식 전환

    130 … 새 슬로건 탄생의 배경

    132 … 특별보고관의 2007 북한인권 보고서

    134 …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과 북한인권 개선 노력

    136 … 탈북자 신동혁 씨가 주는 충격

    138 … 제8회 국제회의를 앞두고

    140 … 평양에서 인권포럼이 열리는 날

    142 … 2008년을 보내면서

    144 … UNCRC의 북한 보고서 심사

    146 … “세계는 北인권을 모르는 체 할 수 없다”

    148 … UPR 북한인권 NGO 공동보고서

    151 … 북한 UPR 준비 공동심포지엄의 의의

    153 … 세계가 걱정하는 북한의 인권상황

    156 … 왜 한국이 북한인권개선에 나서야 하는가

    158 … 대한변호사협회와 협력 양해각서 체결

    161 … 북한인권에 대한 캐나다 사회의 뜨거운 관심

    163 … 토론토에서 있었던 일들

    165 … 역사의 전진을 믿으면서

    167 … 캐나다 인권상을 받으면서

    169 … 노동돌격대원이 전하는 북한 정치범수용소

    171 … 우리의 5원칙

    173 … 정재(淨財)로 운영되는 우리의 활동

    175 … 납북자 송환: 절실한 NGO와 정부의 공조

    177 … 제네바를 들썩하게 만든 국제회의

    179 … 하벨이 남긴 ‘희망의 메시지’

    181 … 제네바에서 걸려온 새벽 전화

    183 … 독일 NGO와의 만남

    185 … 자카르타에서 있었던 일들

    188 … 유엔 인권최고대표와의 만남

    190 … 필레이 유엔 인권최고대표의 성명서

    192 … 텀블러 캠페인팀의 탄생

    194 … 유엔 北인권조사위 설치에 이르기까지

    197 … 베스트셀러 작가도 몰랐던 일

    199 …

    201 … 가우크 독일 대통령의 메시지

    203 … 이제 우리를 반기는 제네바

    205 … 북한인권: 왜 우리는 거국적 대응을 못 하는가

    207 … 커비 COI위원장의 활동을 돕자

    209 … 최근의 해외 캠페인에서 거둔 성과

    211 … 이성주 군의 첫 캐나다 통신

    213 …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이루어낸 ‘금자탑’

    216 … 북한주민을 살리는 북한인권법

    219 … 네덜란드와 한반도

    221 … “북한은 억압과 박탈로 얼룩진 세상”

    223 … 연변의 농지와 함경도의 농지

    225 … 인도네시아: 북한인권주간과 다루스만

    227 … 북한인권운동과 거쉬만 NED회장

  • 002 국제협력 캠페인 003

    우리 운동의 의의

    우리의 창립취지문에는 “이 운동은 시민운동, 인권옹호운동, 통일기반조성

    운동, 국제운동, 평화운동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어떤 이는 이 대목을 놓

    고 “소수의 무명인사들이 벌이는 운동 치고서는 너무 거창하다”라고 논평

    했다. 외양만으로 볼 때 그의 말은 맞다. 하지만, 어떤 운동의 가치는 외양

    에 있지 않고 그 지향하는 바가 얼마나 고상한가, 그리고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가 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운동에 큰 자부

    심을 느낀다.

    첫째, 우리 운동은 시민이 주체가 되고 있는 운동이다. 시민이란 무엇인

    가,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라는 말이 아닌가. 우리 시민이야말로 국가・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와 같은 자각 아래 이제 우리는 북

    녘땅 동포들의 인권상황을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로 삼고자 한다.

    둘째, 우리는 인간 존엄성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통일조국의 미래

    상으로 상정한다. 그리고 인권사상만이 남북 동포를 한데 뭉치게 할 수 있

    는 사상적 기반이라고 믿는다. 남한 땅에서 인권 신장을 위해 싸웠던 사람

    들이 다시 뭉쳐서 북한의 인권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때

    문이다.

    셋째, 우리는 통일의 날이 그다지 멀지 않다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가 가

    장 크게 우려하는 것은 그때 북한동포들이 겪게 될 가치박탈감과 아노미현

    상이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사회의 일대 혼란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이

    다. 그런 난국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북한동포들도 자유・자율에 대한 훈련

    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본다. 우리가 인권옹호운동을 벌이면서 통일기반조성

    운동으로 자처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넷째, 지금 우리는 인권이 인간의 보편적 가치로 인식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북한인권문제도 당연히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부각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끝으로, 우리는 평화운동을 벌인다고 자처한다. 역사는 인권 없는 곳에

    평화 또한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자국민의 인권을 유린한 나치스독일이 제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고 함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이후에 일어난 전쟁 중에 민주주의 국가간의 전쟁이 없었다

    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가 북한 당국을 향해 인권을 지키라

    고 외치는 것은 평화를 지키자는 말과 똑같은 것이다.

    외양만을 놓고 볼 때 우리 운동은 초라하기가 산 속의 도토리와도 같

    다. 하지만, 적당한 물기가 줄어지고 햇볕을 쬐기만 하면 도토리에서 움이

    트고 싹이 나서 우뚝 높이 솟는 상수리나무가 되는 사실을 기억하자. 도

  • 004 국제협력 캠페인 005

    토리 속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려는

    우리 운동도 오래지 않아 그처럼 무럭무럭 자라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

    한다.

    1996. 6. 통권 1호 주장 / 이사장 윤현

    그들이 죽어가고 있오!

    탈북자 이순옥 씨의 KBS TV 대담을 때늦게 보았고,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북녘땅에 사는 보통사람들이 얼마나 고달프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혹독하게 권력집단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세 남매의 먹을 것을 구하러 장삿길에 나섰다가 그것이 죄가 되어 교화

    소로 끌려간 한 아낙네의 얘기는 너무나 애처롭고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자식들 생각에 반미치광이가 되어 끝내 총살당했다고 한다. 이 아낙네는 누

    구인가. 우리의 누이가 아닌가. 순이・곱단이・옥이와 같은 정다운 이름을 가

    진 우리의 누이들이 죄 아닌 죄로 얻어맞고 갇히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조선사람인데 어째서 남조선 사람만 행복하게 살고, 북조선 사

    람은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총살당해야 합니까?” 이순옥 씨의 순박한 이 한

    마디에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맞아, 우리는 한핏줄이었어!” 하고 나는 탄

    식했다.

  • 006 국제협력 캠페인 007

    그동안 우리는 머리로는 동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지내왔다.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역대 군사정권의 대중조

    작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해마다 6・25가 돌아오면 TV는 어김없이 중무장한

    인민군 병사들의 행진 광경을, 그리고 북한 어린이들이 김일성 일대기를 달

    달 외우는 광경을 방영하지 않았는가. 화면에 비치고 잇는 것은 호전적인

    북한 권력집단의 모습 뿐이었고, 애잔하게 살아가고 있는 보통사람들의 모

    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존재를 잊었던 것이다. 이순옥 씨의 증언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들에게 깨닫게 해주었다.

    1996년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많은 귀순자들이 외치고 있다. “그들(보통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앰네스티인터내셔널 같은 권

    위있는 국제인권단체도 그들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남녘땅의 보통사람들이 떨쳐 일

    어서야 할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말씀처럼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해

    소리치는 것은 인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 보통사람들은 정치・외교・전략 따위는 모른다. 북한에 쌀을 보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야 하는지 말

    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억울하게 갇혀 있는 북녘 땅

    보통 사람들이 하루 속히 풀려나서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 뿐

    이다. 우리 힘만으로는 그 일을 해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를 향해 외

    치고자 한다. “그들이 죽어가고 있오! 그들을 구출해주시오!”라고 말이다.

    1996. 7. 통권 2호 주장 / 부이사장 김상헌

    “北 인권문제를 들이대는 게 좋다”

    황장엽(黃長燁) 조선노동당 비서의 귀순을 놓고 한 북한문제 전문가는 동

    구붕괴・소련해체 만큼이나 충격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북한의 국정 이데올

    로기를 엮어낸 사람이 ‘적’에게 투항했으니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게다가 황의 북한관은 정말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봉건적 전제주의 체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

    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말할 생각은 없다. 단지 우리는 북한 권력집단이 저

    지르고 있는 인권유린에 대한 그의 언급에 주목하고자 한다.

    조선일보(朝鮮日報)를 통해 발표된 황의 자필 문건에서 우리는 인권유린

    에 관한 언급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자비한 탄압과 허위와 기만으

    로 충만된 암흑 땅에서 인민들은 전전긍긍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위대한

    장군님 만세’를 부르고 있다”, “그들은 허다한 사람들을 마구 총살하고 있

    다”, “북에는 통제구역이 있다” 등이 바로 그런 언급이다.

  • 008 국제협력 캠페인 009

    사실, 북한 권력집단의 인권유린은 오래 전부터 국제인권단체에 의해 지

    적되어 왔다. 국제앰네스티는 18년전(1979년)에 북한에서 간첩으로 몰려 7

    년간 옥고를 겪은 한 베네수엘라 공산당원의 수기를 간행, 인권유린의 실상

    을 폭로했다. 9년전(1988년)에는 아시아워치가 수년간에 걸친 조사・연구 끝

    에 북한에 정치범과 그 가족을 수용하는 강제수용소가 10여 곳이나 있는

    사실을 밝혀냈다. 바로 그곳을 황은 ‘통제구역’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총살에 관한 지적으로는 1997년 1월 22일자로 발표된 국제앰네스티의 보고

    서가 있다. 국제앰네스티는 연도・장소・인원수・혐의・처형방법이 확인된 23

    건의 공개처형을 열거하면서 흉악범 뿐만 아니라 형사범・정치범까지도 광

    범하게 처형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암흑의 땅에서 인민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황의 말을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그러면 그들과 피를 나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대안의

    불 보듯하고 있을 수는 없다. 북은 결코 이국이 아니고, 그 곳 주민은 머지

    않아 한울타리에서 더불어 살게 될 동포인 것이다. 황은 ‘인권문제를 강하게

    들이댈 것’을 우리에게 권고하면서 그것이 북의 권력집단을 각성시키고, 또

    월남자의 가족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대북유화론자의 그것과 정

    반대가 되는 입론(立論)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년전(1995년) 공노명(孔魯明) 당시 외무장관이 유엔총회에서 북의 인권

    을 거론하고 돌아오자 對北유화론자들은 “북한을 자극만 할뿐이다”, “과연

    한국이 북한인권문제를 제기할 자격이 있느냐” 하고 공장관을 윽박질렀다. 이

    제 대북유화론자들은 황의 지적을 듣고 그들의 단견을 자괴해야 할 것이다.

    1997. 3. 통권 8호 주장

    메아리가 들린다

    에 보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

    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라는 대목이 있다. 왜 하필이면 광야에서 외쳤

    을까. 신학자에 따르면 이 대목은 선지자의 경고에 온 사회가 귀를 기울이

    지 않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광야에는 산이 없다. 따라서 메아리

    도 없다. 외침은 허공에 흩어질 뿐이다. 대중의 호응이 없는 선지자의 경고

    는 광야에서의 외침과 똑같다.

    1년전(1996년 5월) 전세계를 향해 “북한의 보통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오!

    그들을 구출해주시오!” 하고 외칠 때의 우리의 외침은 광야의 소리와도 같았

    다. 메아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남한이 벌이는 또 하나의 반북(反北)선전이

    려니 하고 외국인들이 생각했던 것같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지

    성이면 감천이라 하는데 지극한 정성을 쏟으면 그들이 우리의 참뜻을 깨닫는

    날이 오겠지 하고 우리는 쉬지 않고 편지를 썼고 또 책을 보냈다. 월례회에

  • 010 국제협력 캠페인 011

    참석한 이들은 아는 일이지만 계간지를 외국으로 발송할 때마다 우리는 천지

    신명께 기도했고, 또 지금도 기도한다. “이 책을 받는 이들로 하여금 강제수용

    소에 갇혀 있는 북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해주십소서” 하고 말이다.

    최근 우리는 두 통의 편지를 외국으로부터 받았다. 한 통은 영국에서 왔

    고 또 한 통은 미국에서 왔다. 영국에서 온 것은 영국적십자총재의 친필편

    지인데 북한 적십자회 관계자에게 강제수용소의 존재 여부를 묻겠다는 게

    그 요지다. 원래 각국 적십자사는 이런 일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영국적십자 총재가 보인 관심은 이례적인 일로 생각된다.

    미국에서 온 편지는 미네소타 인권변호사회가 보낸 것이다. 미네소타 인

    권변호사회의 예전 명칭은 미네소타주변호사회 국제위원회인데 국제적으

    로 널리 알려진 NGO이다. 1988년에는

    이라는 연구서를 발간했다. 북한에 10여 곳의 정치범수용소가 있다는 것을

    밝힌 최초의 외국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치범수용소에 관한 대목을 우

    리의 계간지에 인용해도 좋다는 게 이 편지의 요지다.

    미네소타 인권변호사의 회신을 받고 감회가 남다른 것은 그동안 이 단

    체가 보여온 대한(對韓)불신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보고서 중에는 “남한

    역시 체계적 형태로 북한에 대한 그릇된 정보를 유포한다. … 남한이 제공

    하는 직・간접 자료는 모두 재검토돼야 한다”는 대목이 있고, 또 우리의 허

    가요청에 대한 회답을 6개월 가까이 미루어온 바 있다.

    자 메아리가 들린다. 목청을 가다듬고 더욱 크게 외치자. “북한의 보통사

    람들이 죽어가고 있오! 그들을 구출해주시오!”라고.

    1997. 5. 통권 10호 주장

    작은 거인

    오래된 미국 영화 중에 ‘작은 거인’이라는 게 있다. 호전적인 인디언(포니 족)

    의 습격으로 부모를 잃은 백인 남매가 평화를 사랑하는 다른 인디언(샤이

    언 족)에게 구출돼 그들의 성원으로 성장하다가 백인 사회로 돌아가게 되지

    만, 실망과 좌절만 맛본다는 게 그 줄거리다. 주인공 더스틴 호프먼은 비록

    몸집은 작지만 마음이 너그럽고 생각이 깊다고 해서 ‘작은 거인’이라는 인디

    언식 이름을 얻었는데, 영화 제목은 그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영화 때문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지만,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기록

    을 갱신하는 역도선수를 언론은 곧잘 ‘작은 거인’이라고 부른다. 애틀랜타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 슬레이마노글루브 선수의 별명도 ‘작은 거인’이다.

    최근 필자는 프랑스인 자끄 로시 씨와 담소할 기회를 가졌다. 올해(1997

    년) 88세인 그는 16세 때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했는데, 어학실력이 인정되

    어 코민테른 요원으로 유럽 각지에 파견됐다. 스페인 내전 때에는 왕당파 점

  • 012 국제협력 캠페인 013

    령지역에서 지하공작에 종사하기도 했다.

    1937년 숙청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모스크바로 소환돼 반혁명분자라는

    누명을 쓰고 투옥당했다. 여러 곳의 강제노동수용소를 전전하다가 1961년

    에야 풀려났다. 억울한 옥살이를 24년이나 치룬 것이다. 한창 추울 때에는

    수은주가 영하 45도까지 내려가는 북극권 강제노동수용소 생활도 겪었고,

    중앙아시아 지방의 혹서도 참아냈다고 한다. 그의 작은 몸집을 보면서 이런

    체구로 어떻게 그런 혹독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

    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담소가 진행되는 동안 필자는 그의 정신력에 압도당했다. 그의 기억은

    정확했고, 호기심은 왕성했으며, 마음은 무척 따뜻했다. 무엇보다도 잔혹한

    상황을 얘기하면서도 유머를 곧잘 섞는 게 놀라웠다. 어쩌면 도량(度量)이

    이처럼 클까 하고 필자는 몇 번씩이나 혀를 내둘렀다. ‘작은 거인’이라는 말

    은 바로 이런 사람에게 붙여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강제노

    동수용소에 관한 그의 견해는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스탈린이 구 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몽골・북한 등지에 건설한 전체주의 체

    제는 강제노동수용소 없이는 지탱될 수 없는 체제라는 것이다. 무리하게 추

    진되는 공업화는 노예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또 일당독재・일인독재는

    강제노동수용소라는 공포의 수단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그는 북한 강제노동수용소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리

    려는 본회의 노력에 지지와 격려를 보낸다고 하면서 “올 가을에는 한국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친애감을 드러냈다.

    1997. 6. 통권 11호 주장

    과거를 반성하는 ‘착한 일본인’

    일본인은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민족이라는 게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대일(對日)인식이다. 잊어버릴 만하면 터져 나오는 일본 정치인

    들의 ‘식민통치 미화 발언’을 보던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보상문제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런 인식에 충

    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인 중에는 지난 날의 한반도

    침략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어떤 형태로든 사죄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

    다. 30여년 전 1967년에 나가사키조선인의인권을지키는회를 결성하였는데,

    나가사키 일대의 한인 원폭피해자 조사에 나섰던 오카 마사하루 씨도 그중

    의 한 사람이다. 언젠가 일본이라는 국가가 양심을 되찾아 외국인 피해자에

    게 보상하게 될 날을 위해 자료를 수집해놓겠다는게 그의 뜻이었다고 한다.

    일본 히로시마현 다카쿠레댐 건설공사 때 한반도에서 끌려온 한인 노

    무자 2천~3천여명이 혹사당했고, 그중 수십명이 생매장당한 사실을 밝혀낸

  • 014 국제협력 캠페인 015

    것도 일본 시민단체이다. 그들은 기록을 발굴하고 생존 관계자의 증언을 녹

    취해서 ‘조선인 강제노동의 기록’ 및 ‘다카쿠레댐건설에 징용된 조선인의 행

    적조사’라는 보고서를 간행했을 뿐 아니라, 한인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기도 했다.

    금년 여름에는 한일 대학생 60명이 일제 때 일본 홋가이도로 끌려가 철

    도건설공사와 댐건설공사에 동원됐다가 죽은 한인 노무자의 유골발굴에

    나섰다고 한다. 한일 양국의 역대 위정자들이 애써 외면해온 불행했던 과거

    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한일 양국 젊은이들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본회가 일본의 북조선귀국자의생명과인권을지키는회와 1996년 5월 11

    일 제휴관계를 맺은 지 1년이 됐다. 필자는 그동안 동회 회원들의 모임에 여

    러 차례 참석했는데, 언제나 흡족한 마음으로 귀국했다. 정치적 입장이나 사

    회적 배경이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잘못된 일이었

    다는 데에는 그분들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북송교포문제도 그런

    시각에서 다루고 있는 것으로 필자에게는 느껴졌다.

    최근 참석한 한 모임에서도 자그마한 감동을 받았다. 모임에 처음 참석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제2차세계대전 종전 때 일본인들이 한인징용자를 사

    할린에 남겨놓고 자기들만 일본으로 돌아온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후로 사업관계로 사할린에 가게 되면 시장에 가서 김치를

    파는 한인 할머니들에게 “죄송합니다.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하고 머리를 숙

    이고 돌아다닌다고 한다. 우리가 북한인권문제를 다루면서 과거를 반성하는

    ‘착한 일본인’과 손잡게 됐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1997. 7~8. 통권 12호 주장

    우리의 결의

    북한동포의생명과인권을지키는운동에 있어 1997년 8월은 매우 의미 깊은

    달이었다고 할 것이다. 우선 8월 21일에는 유엔인권소위에서 대북(對北)인권

    결의안이 채택됐다. 유엔관련회의에서 이런 결의가 채택된 것은 이것이 처음

    이다. 더구나 이 조치가 외국인 위원들의 주도로 취해졌다는 것은 의미 있

    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이제 국제사회가 북한 권력집단이 저지르고

    있는 인권유린을 종식시키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는 것을 뜻한다.

    8월 27일에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은신중인 탈북자 10여 명이 집단으로

    주중한국대사관에 보호를 요청하는 한편,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하루 속히

    우리를 받아 주시오. 중국 공안원에게 잡혀서 북한으로 송환되면 우리는 죽

    습니다” 하고 호소해왔다. 이 비디오테이프는 우리가 왜 북한동포의생명과인

    권을지키는운동을 벌여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새삼스레 일깨워 주었다. 같은

    날 본회 앞으로 법인설립허가증이 교부됐다. 북한동포가 당하는 고통을 자

  • 016 국제협력 캠페인 017

    기 일처럼 알고 괴로워하는 뜨거운 마음을 지녔을 뿐, 영향력도 없고 운동

    자금도 없는 본회와 같은 미약한 단체로서는 뜻밖의 경사였다. 이것은 우리

    정부가 지난 1년간 우리가 벌인 활동을 높이 평가해 준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가 처음 이 운동을 벌일 때 나름대로의 성산(成算)은 있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70년대・80년대에 이 땅에서 민주화운동

    을 벌인 사람 다수가 본회에 참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북한동포의생명과인

    권지키는운동은 반권위주의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당당한 자세로 국제인권단체와의 유대 형성을 모색할 수 있

    었다.

    현재 우리는 일본의 북조선귀국자의생명과인권지키는회와 튼튼한 유대

    관계를 맺는 가운데 계간지를 공동으로 발행, 각국에 배부하고 있다. 제3국

    인 일본의 시민단체가 함께 펴낸 책이라고 해서 이 계간지는 해외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최근 에콰도르 소재 라틴아메리카인권협회는 지키는회

    앞으로 편지를 보내오면서 대북캠페인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그런가 하면

    현재 중국 공안 당국에 체포돼 갇혀 있는 한 탈북자를 석방시키는 일을 놓

    고 본회는 앰네스티인터네셔널과 빈번하게 통신문을 교환하고 있다. 이 일

    을 계기로 본회와 앰네스티인터내셔널 사이에 확고한 신뢰관계가 구축될 것

    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우리는 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킨다는 값진 일에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임할 것이다.

    1997. 10. 통권 14호 주장

    세계인권선언 50주년

    인권운동사상 1998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해다. 국제연합총회에서 세계

    인권선언이 채택된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개인도 결혼한 지 50년이 되면 금혼식이라고 해서 꽤나 성대하게 잔치를

    벌인다. 인권선언 중에서도 가장 포괄적인 인권선언으로 평가받고 있는 세

    계인권선언이 제정된 지 50주년을 맞았으니 국제연합을 비롯한 국제기구・

    국제 NGO들이 벌써부터 큰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IMF한파다, 정리해고다 해서 온 나라가 어수선한 때에 세계인권선언 50

    주년의 의미가 어떻고 한다는 게 한가한 소리 같지만, 세상 일이란 그런 것

    이 아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

    다” 하는 말도 있지 않는가. 세상 한구석에서는 인류 또는 민족의 먼 앞날

    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차근차근 벌이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018 국제협력 캠페인 019

    1998년이 50주년이라고 한다면 세계인권선언은 1948년에 제정됐다는

    말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게 1945년이므로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년

    후에 세계인권선언이 제정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 한 가지를 제기할 수 있다. 전후처리문제도 산적해

    있는데 연합국 지도자들은 무엇이 급해서 다른 일들을 제쳐놓고 세계인권

    선언을 제정했을까 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을 치르고 나서 연합국 지도자들은 자국 국민의 인권을 우습게 아는 국가

    지도자는 오래지 않아서 이웃나라 국민의 인권을 짓밟으려 든다는 것을 깨

    달았다”라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국 국민의 인권을 우습게 아는 국가 지도자’가 나치스

    독일, 파시스트이탈리아, 군국주의일본의 지도자들이라고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연합국 지도자들은 세계인권선언을 서둘러 제정해서 국가권력

    과 국민간의 올바른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온 세계 앞에 제시했던 것이다.

    앞으로는 국민의 기본권 즉 인권을 함부로 짓밟는 국가권력이 다시는 나타

    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세계인권선언을 국제조약으로 다듬어놓은 게 바

    로 국제인권규약이다. 오늘날 문명국가치고 이 국제인권규약에 가입하지 않

    는 나라는 없다. 그런데 가슴 아프게도 작년 8월 북한은 국제인권규약 탈퇴

    를 선언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으로 하여금 문명국가 대열에

    돌아오게 하는 게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1998. 1~2. 통권 17호 주장

    신정부에 바란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다. 한때 계엄령하의 재판에서 정치범으로

    서 사형 선고를 받은 분이 국정을 이끌게 된 것을 볼 때 필자의 감회는 남

    다른 바가 있다.

    그때 필자가 몸담았던 국제앰네스티 회원들은 전세계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국제앰네스티 회원들의 항의시위는 매우 조용하고 평화적이어서 돌

    을 던지거나 함성을 지르는 일은 없다. 그때도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한국

    대사관 앞에서 밤을 새웠다.

    그 해는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눈 속에서 사람들은 묵묵히 촛

    불이 꺼지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마치 그 촛불이 김대중 씨의 목숨인 것처

    럼 여기면서 말이다.

    만약 그때 그 분이 처형당했더라면 지금 한국인은 누구에게 국난 극복

    을 부탁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국난 극복의 성공 여부를 좀 더 두고 볼

  • 020 국제협력 캠페인 021

    일이지만, 우리가 기대를 걸어 볼 수 있는 지도자가 우리 옆에 있었다는 것

    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마터면 처형당할 뻔한 정치범이었다가 후일 훌륭한 국가지도자가 된

    사람으로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오늘날 그의 탁

    월한 지도하에 도저히 화해할 것 같지 않던 흑인과 백인이 한 국민으로 통

    합되는 것을 보면서 한 인간이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새삼스레

    깨닫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7월 24일 독일 헌법재판소는 구동독군장성 6명이 제기한 헌법

    소원청구심 최종판결문에서 “어떠한 국가이익도 국민의 생명권에 우선할

    수 없다”는 이유로 탈출자에 대한 사살명령을 인권침해로 판시했다. 국민의

    생명권은 어떠한 국가이익보다도 더 높은 가치라는 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북한 각지에 산재한 정치범수용소에서는 수많은 정치범들

    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맞아 죽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몰래 국경을 넘다

    가 사살당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고, 중국 쪽에 사는 조선족 동포 중에는

    시베리아나 만주 벌판에서 지쳐서 쓰러지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의 생명이 똑같이 귀중하다고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

    북녘땅과 시베리아・만주에서 죽어가는 동포 속에 장차 통일조국의 대들보

    노릇을 할 인재가 섞여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북녘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김대중 정부도 당장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겠지만, 시베리아・만주 땅에서 떠도는 탈북자들에

    대해서는 마땅히 획기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1998. 3. 통권 18호 주장

    이스라엘에서 날아든 전자우편

    1997년 5월, 본회의 홈페이지가 개설된 후로 필자는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

    다. 국내 방문자수가 3천 명을 넘은 것도 놀랍고, 탈북자를 어떻게 도울 것

    인가 하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랍다. 전자우편(E-mail)이라고

    해서 수만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과 마주보고 얘기하듯이 대화를 나누

    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게 된다.

    미국의 한 청년은 어렸을 때 입양아가 됐지만 자신은 한국인이고 조국의

    반쪽인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고 전해왔다.

    필자의 코끝이 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엉뚱한 칭찬을 받고 약간 난처해진

    적도 있다. 어떤 외국인이 우리의 홈페이지가 북한사람에 의해 개설된 것으

    로 잘못 알고 “여러분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최근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나는 특히 북한의 인

    권상황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다. 가까운 장래에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 022 국제협력 캠페인 023

    일을 하고 싶다”라는 이스라엘에서 날아든 메시지였다. 문맥으로 보아 호기

    심으로 본회의 사이트에 들어와 본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유대인으로 태

    어난 사람이어서 그 일을 잘 안다. 나의 몇몇 친척은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

    에서 살해당했다.” 이 분이 말하는 ‘그 일’이란 강제노동수용소 안에서 벌어

    지는 인간학대임이 분명하다. 그의 일가친척을 포함해서 동족 수백만 명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살해당한, 그리고 그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 유태인이

    기에 멀리 떨어진 한반도 북반부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

    간학대에 충심에서 분노를 느끼고, 또 그런 만행을 종식시키기 위해 무엇이

    든지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진실한 전우 한 사람

    을 얻은 것 같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관한 많은 문헌이 쏟

    아져 나왔다. 체험수기・자료집・연구서・사진집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구소

    련의 라게리(강제노동수용소)에 관한 문헌도 많다.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

    는 라게리문학의 고전에 속한다. 구소련의 해체, 러시아의 민주화로 이어지

    면서 라게리의 기원과 확대과정에 관한 연구도 활발해졌고, 라게리용서사전

    도 편찬됐다. 북한의 민주화로 정치범수용소의 옥문이 활짝 열리게 되면 다

    시 한번 많은 기록・자료가 쏟아져 나와서 인류의 ‘수용소문학’을 더욱 풍부

    하게 만들 게 예상된다. 그날이 오면 아마 온 세계는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서 벌어진 인간학대가 나치, 구소련의 그것들을 능가한 데 놀랄 것이다. 이

    스라엘의 그 분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북한의 강제수용소의 상황은

    사상 최악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1998. 6. 통권 21호 주장

    미국이 움직인다

    마침내 미국인들이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

    인권문제에 관한 의회공청회가 열려야 한다는 편지가 상하원의원들에게 날

    아들고, 한 하원의원은 북한정치범수용소에 관한 탈북자들의 진술 요지를

    의회속기록에 올렸다. 또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한 학술잡지는 탈북자와

    의 인터뷰 기사를 크게 다루었다. 정책입안자들이 여론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게 미국임을 생각할 때 미국정부의 금후의 대북자세가 주목

    된다.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라는 사실

    은 현지를 다녀온 분들에 의해서도 확인됐다. 1998년 2월 강철환 씨(정치범

    수용소생활 체험자)와 함께 미국을 방문한 이순옥 씨(교화소생활 체험자)

    에 따르면 2년 사이에 미국사회의 분위기가 크게 바뀐 게 감지됐다고 한다.

    1996년 10월 이순옥 씨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주최한 교민초청간담회

  • 024 국제협력 캠페인 025

    연사로 각지를 순회했는데 그때는 교민신문・방송만이 이 씨의 강연 내용을

    보도했다. 그랬던 게 이번에는 미국 TV의 유명 프로그램이 경쟁적으로 보도

    했을 뿐 아니라 멕시코 TV도 인터뷰를 요청하더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미국 의회・행정부의 한반도문제 전문가들이 계속해서 이들과의 면담을 요

    청해왔다고 한다. 귀국후 이순옥・강철환 양 씨는 한동안 흥분을 가라앉히

    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1998년 6월 상순 필자는 솔라즈 전 하원의원과 탈북자 5명이 회견하는

    자리에 동석하게 됐다. 그런데 이 회견의 주체 역시 북한 정치범수용소・교

    화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솔라즈 씨는 장장 4

    시간에 걸쳐서 수용자의 일상생활・식사량・작업시간・징벌・환경・구금이유・

    정신상태・탈북동기 등에 대해 매우 주의 깊게 물었는데, 대답이 미흡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씩 반복해서 물었다. 필자는 솔라즈 씨의 이런 태도를 통해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이 단순한 호기심의 소치가 아니라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어떤 나라에서 벌어졌건 정치권력이 인간의 존

    엄성을 짓밟는 행위는 결코 묵과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는 말이다.

    필자가 우리와 제휴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시민단체 북조선귀국자의생

    명과인권을지키는회의 한 임원에게 미국사회의 이런 움직임을 알려주자 그는

    “역시 청교도의 자손들은 우리와는 다르군요” 하고 감탄했다. (청교도란 17세

    기 영국 최초의 시민혁명을 일으킨 칼빈주의자들이다.) 그 말이 맞는 말이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오늘날 미국이 인권의 파수꾼을 자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북한인권개선운동은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은 것 같다.

    1998. 7~8. 통권 22호 주장

    UN이 움직인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비록 느리지만 쉬지 않고 돈다는 말이 있다. 북한의 인

    권상황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을 두고 볼 때 그 말이 진리임을 알 수 있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국제앰네스티가 북한정치범수용소문제를 국제사회

    에 처음 고발한 것은 1979년 7월이었다. 북한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7년간이

    나 치룬 베네수엘라인 알리 라메다의 수기가 국제앰네스티 출판국에서 간

    행된 것이다. 1년 간의 불법구금, 반복되는 자백강요, 피고인의 자기방어권

    이 무시되는 재판, 끊임없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수용소 생활 등 비참한 북

    한정치범생활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하지만, 그때 국제사회의 반응은 미미했다.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 굵직한 국제적 사건의 그

    늘에 가려서 세인의 이목을 끌지 못한 것이다.

    1995년 가을 공노명 당시 외무장관이 유엔 총회에서 북한인권문제를 제

  • 026 국제협력 캠페인 027

    기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각국 대표는 남북한 대표의 설전을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으니 국제무대에서 동족의 치부만 들춘 꼴이 됐다.

    그랬던 게 1997년 8월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국제연합 인권소위원회에

    서 프랑스 출신의 위원과 미국 출신의 위원이 북한의 인권상황을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이 발의한 대북결의안이 찬성 13, 반대 9, 기권 3으로 가결

    되는 것을 보고 한국 대표는 뜻밖의 사태 진전에 놀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98년 8월에 열린 국제연합 인권소위원회에서는 일이 더욱 재미있게

    전개됐다. 대북결의안의 문안은 더욱 신랄해졌고, 국제구호기관의 대북식량

    원조와 인권감시기능의 연계 가능성이 암시됐으며, 북한인권문제의 거론을

    국제연합 인권위원회에 권고하는 문항이 새로이 첨가된 것이다. 뿐만 아니

    라, 만약에 국제연합 인권위원회에서 북한인권문제가 거론되지 않으면 국제

    연합 인권소위원회의 명년도 회의에서 거론하기로 아예 못박아버렸다. 이처

    럼 톤이 한 옥타브 높아졌는데도 이 결의안은 찬성 19, 반대 4, 기권 1표로

    채택됐다.

    국제사회의 힘을 빌려서 북한의 인권상황을 개선해 보려는 우리의 운동

    은 이제 제 궤도를 찾은 것 같다. 미국에서는 우리와 새로이 협력관계를 맺

    은 방위포럼재단(DFF)이 북한정치범수용소관계 공청회 개최를 위해 다각적

    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재외탈북자돕기를 주요사업으로 삼

    는 새로운 시민단체가 발족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국제연합의 공식기관에

    서 2년째 대북결의가 채택되고 있으니 마음이 여간 흐뭇한 게 아니다. 그리

    고 가일층의 분발을 다짐해 본다.

    1998. 9. 통권 23호 주장

    제3회 국제인권회의에 다녀와서

    1998년 10월 중순 바르샤바에서 제3회 국제인권회의가 열릴 것이라는 소식

    을 필자가 접한 것은 9월 중순이었다. 이 국제회의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에 나름대로 준비를 서둘렀다. 에 실린 ‘북한판 굴라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비롯한 북한정치범수용소에 관한 글들을 모아 책 한 권을

    엮었다. 그리고 국제캠페인팀이 그동안 틈틈이 만든 북한정치범수용소생활

    에 관한 그림을 한데 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초청장이 오리라고

    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자료를 참가자들에게 어떻게 배부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1회 국제인권회의가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개최된 것은 1988년이었다.

    그 이듬해 폴란드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돼 공산당정권이 붕괴했다. 제2회 국

    제인권회의가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개최된 것은 1990년이었다. 그 이듬해

    소련이 해체됐다. 말하자면 국제인권회의는 자유화의 기폭제 구실을 한 셈

  • 028 국제협력 캠페인 029

    이다. 그런 역사를 가진 국제회의가 8년만에 다시 열린다고 하니 필자로서

    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회의 개최 1주일을 앞두고 필자에게 초청장이 왔다. 뜻밖의 일이기는 했

    으나 매우 반가웠다. 북한인권문제를 국제인권계에 제기하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회의는 폴란드 국회의사당 본회의장과 소회의실에서 열렸다. 개회식에는

    폴란드 상원의장・하원의장・총리・외무장관 등 요인이 대거 참석했고, EU대

    표・헝가리 총리・나토사무총장도 달려왔다. 폴란드의 국가적 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참석자 중에는 체첸대통령・전 벨라루시대통령・전 슬로바

    키아총리 등 정치가 이외에, 사하로프 박사 부인・코바료프・웨이징센 등 세

    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인권운동가도 많았다. 이들 앞에서, 그것도 두번째

    전체회의에서 북한인권문제에 관해 연설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회의는 10월 14부터 16일까지 3일간 진행됐는데, 주로 다루어진 문제는

    러시아연방・유고슬라비아연방・벨라루시・슬로바키아 등 구사회주의국가의

    인권문제였다. 그리고 티베트・미얀마・중국・북한 등 아시아의 인권문제는

    문제제기에 그쳤고 심층적인 토의는 생략됐다. 역시 유럽인은 유럽의 인권

    문제에만 관심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필자가 준비해 가지고 간 북한정치범수용소에 관한 책과 그림이

    첫날에 모두 없어진 것을 보면 비관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앞으로는 좀더

    부지런히, 그리고 치밀한 준비를 갖추고 이런 국제회의에 참가해야 하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1998. 11. 통권 25호 주장

    한 캐나다 법조인의 탈북자돕기

    1998년 10월 중순 필자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국제인권회의에 참

    석했을 때의 일이다. 오전 회의가 끝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서양인이 다가와서 인사를 청했다. 그는 자신을 캐나다 토론토에서 법률사

    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성(姓)이 슈타인으로 끝난 것

    을 보면 유태계가 아닌가 싶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관한 필자의 연설을 매우 감명 깊게 들었다고 하

    면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필자에게 물었다. 우선 정치범수

    용소를 폐지할 것을 북한 당국에 요청해주었으면 좋겠고, 다음으로 북한인

    권상황의 심각성을 캐나다 사회에 널리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마주칠 때마다

    그는 눈인사를 보내거나 손을 들어 친밀의 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귀국하고 나서 필자는 인사 편지와 함께 우리의 계간지

  • 030 국제협력 캠페인 031

    한 질을 그에게 우송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

    렸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바빠서 그렇겠지 하면서도 서운한 생각

    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999년 1월 하순 또 한 번 그에게 편지를 보내보았다. 이번에는 팩스로

    보냈다. 그러자 10분도 안 돼서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수일내에 그의

    발의로 토론토에서 한국교포 지도자들이 모이게 되고, 그들이 캐나다인과

    함께 중국 대표부로 찾아가서 재중 탈북자의 강제송환에 항의할 예정이라

    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그는 이런 행사를 준비하느라고 답장

    을 쓸 사이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 뉴욕으로 가서 재미 교포・미국인들과 함께 유엔본부

    내 중국 대표부에 가서 똑같은 일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의 힘찬 말소

    리를 들으면서 필자는 서구인들의 높은 인권의식과 실행력에 새삼 감탄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아는 재미・재캐나다 교포들에게 북

    한인권시민연합의 목적과 사업을 소개하고 직접 연락을 취하도록 권고하겠

    다고 약속했다. 그다지 길다고 할 수 없는 필자와의 대화 내용을 기억하고

    이처럼 북한 동포의 인권신장을 위해 힘써 주는 캐나다 노(老) 법조인의 성

    의가 여간 고맙지 않았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양명학의 중심개념이라고 한다. 참다운 지식은 반

    드시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게 그 뜻이다. 캐나다 노법조인의 전화를 받고

    나서 필자는 북한인권개선운동에 관한 한 우리는 서구인에게서 지행합일을

    배워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9. 1~2. 통권 27호 주장

    북한 수용소의 검은 그림자

    북한에 정치범 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지도 꽤 오래

    됐다. 1979년 2월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은 베네

    수엘라인 알리 라메다의 을 간행했는데,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관한 최초의 외국 문헌이라

    고 하겠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수용소 생활을 경험한 두 청년과 수용소 경비대원으

    로 근무한 두 청년이 북한을 탈출,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북한수용

    소 생활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됐다. 온갖 잔학행위가 그 곳에서 공

    공연하게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가해자들과

    동족이라는 사실이 그처럼 부끄러울 수가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옥이 따

    로 없고, 북한 정치범 수용소가 바로 지옥인 것이다. 1999년 초 국가정보원

    은 납북자・월북자 가운데서 22명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음이 밝혀졌

  • 032 국제협력 캠페인 033

    다고 발표했다. 어떤 이유로, 언제부터, 어디에 갇혀 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

    이 없어서 그 가족・친지들로서는 더욱 답답할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2월

    26일에 개최된 본회 1999년도 정기총회 회의장에는 22명 중 한 명의 아버

    지가 참석, 아들의 피랍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협조를 간곡히 요청했다. 필자

    는 똑같이 슬하에 자식을 둔 사람으로서 그 분을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정치범이란, 보통 정치체제의 변혁을 꾀할 목적으로 실정법을 위반한 사

    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그 범위가 훨씬 넓어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권위를 훼손한 것으로 인정된 사람, 김부자에 대한 충성심이 약한

    것으로 의심받은 사람, 북한을 탈출하려고 한 사람들도 모두 정치범으로 몰

    린다. 이것은 결코 필자의 억지소리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정치범수용소

    체험자・경비대 근무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체제의 원형(原形)이라고 할 스탈린체제하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사례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이 수용소생활을 경험했고, 또 수용소의 전모

    를 밝히는데 반평생을 바친 러시아의 작가 솔제니친의 대작

    에는 유사한 사례가 무수히 기술돼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아버지에 따르면 그 분의 아들은 납북당해 몇년 살던 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수용소로 끌려간 것 같다고 한다. 20년전 북한 공작원

    들에게 납치당한 신상옥 씨도 북한을 탈출하려다가 실패, 정치범수용소에

    서 5년간 갇혀 있었다고 한다. 그와 똑같은 케이스인 것이다.

    이제 북한 정치범수용소는 그 검은 그림자를 남한 땅에도 드리우게 됐

    다. 남한 주민들도 북한정치범수용소 폐지운동에 나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1999. 3. 통권 28호 주장

    北 인권관련 지식인성명

    1999년 3월 10일 프랑스의 피가로지(紙)는 북한의 인권상황을 우려하는 지

    식인 21명의 성명 전문을 게재했다. 이 성명은 북한에서는 15만명이 강제수

    용소에 갇혀 있고, 공개처형이 자행되고 있으며, 정신착란적인 개인숭배가

    행해지는 가운데 식량부족・약품부족으로 주민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는 전

    적으로 북한 지도부의 책임이라고 규정한 다음, ‘주인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과 ‘미사일 등 첨단무기의 생산을 그만두어야

    할 것’, 그리고 ‘강제수용소를 폐지할 것’ 등을 요구했다.

    9일 후, 한국 지식인 70여 명이 프랑스 지식인에 동조해 ‘북한주민의 인

    권보장과 탈북난민보호를 위한 지식인 선언’을 발표하고 ‘자유와 인권 그리

    고 적법절차의 보장’을 북한 당국에 요청하는 한편, ‘탈북자에게 난민의 지

    위를 인정해 줄 것’을 국제연합에 호소했다. 선언기안자들은 이 캠페인을 국

    제사회에 확산시키기 위해 국제회의 개최를 준비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

  • 034 국제협력 캠페인 035

    고 있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실태를 널리 알리고, 또 재외 탈북자의 생명

    과 인권을 지키는 사업을 벌여온 본회로서는 프랑스 및 한국 지식인들이 이

    처럼 발벗고 나선 데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프랑스 지식인의 성명을 정독한 일본시민운동가는 “강제수용소

    의 폐지가 지적돼 있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면서 역시 유럽 지식인은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볼 줄을 안다”고 감탄했다. 무슨 말이냐고 하면 강제수용소

    의 폐지 없이는 자유민주주의가 소생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럽 지식인들은

    알고 있다는 말이다.

    일찍이 솔제니친은 에서 강제수용소가 존재하는 사회의 특

    징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①끊임 없는 공포 ②거주지지정제도 ③상호불

    신 ④전면적 무지 ⑤밀고제도 ⑥생존을 위한 배신 ⑦타락 ⑧생존을 위한

    거짓말 ⑨잔혹 ⑩노예적 심리 등의 열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존엄성

    이 여지 없이 짓밟히는 사회가 아닐 수 없다.

    현재 한국에는 7백명 가까운 탈북자가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이

    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야말로 솔제니친이 묘사한 바로 그런

    사회라는 것이다. 말 한 마디 잘못한 죄로 밤 사이에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가족이 어디론가 끌려가는가 하면, 굶어 죽어 가면서도 소요 한번 일으키

    지 못하는 사회가 오늘의 북한이라는 것이다. 솔제니친이 갈파했듯이 강제노

    동수용소는 수용소 바깥 세상마저 ‘얼어 붙은 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제 한국 지식인은 북한강제수용소 문제를 진지하게 그리고 체계적으

    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1999. 4. 통권 29호 주장

    北의 인권개선은 통일대비책이다

    10년 전, 1989년의 일이다. 동유럽 나라들에서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고 자

    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은

    그 앞날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이 거의 없는

    이들 나라에서 과연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한 것이다.

    어떤 저명한 정치학자는 “정치체제의 변혁에는 5개월이 걸리고 시장경제의

    정착에는 6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제도의 개혁은 비교적 쉽지만 정신

    의 개혁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라고 보겠다.

    동유럽의 최근 형편을 살펴볼 때 그의 예상은 부분적으로는 적중했고

    또 부분적으로 빗나갔음을 알 수 있다. 체코, 폴란드, 헝가리는 오늘날 유

    럽사회의 어엿한 성원이 된 데 반해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는 아직도

    혼미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신(新)유고스라비아는 나토의 폭격

    대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 036 국제협력 캠페인 037

    한때 공산당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조건에서 출발한 셈인

    데 10년 후 어째서 이처럼 격차가 벌어진 것일까. 한 국제정치학자는 구(舊)

    공산당 정권의 질(質)과 사회에 끼친 영향을 원인의 하나로 들고 있다. 체

    코, 폴란드, 헝가리를 지배한 구 공산당 정권은 비교적 온건했고 또 일찍부

    터 개혁・개방노선을 추진한 바 있다. 이에 반해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

    아는 차우셰스쿠, 지프코프, 호자와 같은 독재자의 철권통치하에서 마지막

    까지 개혁과 개방을 거부했다.

    동유럽 구 공산당 정권의 강압통치에도 질적 차이가 있었다는 점과 관

    련해서 폴란드의 저명한 영화감독 안제이 피디크는 일찍이(1991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사상이 개인생활을 지배하는 정도를 놓고 본다면 체코,

    폴란드, 헝가리에서는 50퍼센트 정도였고,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에서는 90

    퍼센트 정도였다.”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체코, 폴란드, 헝가리 국민은 공

    산당 치하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자유(인권)를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오늘날 체코 등 세 나라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정착시

    킬 수 있었던 것이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는 그 반대라고 함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민족적 과제가 통일이라고 하는 데 아무도 이론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은 더 많은 자유와 번영을 남북 7천만 국민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어야 한다. 세계사의 흐름을 볼 때 자유민주주의만이 자유와 번영

    을 가져준다고 보아야 하고, 그때 북한 동포도 적절하게 적응할 수 있으려면

    지금부터 더 많은 자유(인권)를 누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1999. 5. 통권 30호 주장

    美 종교인의 기도와 편지쓰기

    1999년 5월 13일 필자는 미국 방위포럼재단(DFF)의 수잔 숄트 회장에게서

    전자우편 한 통을 받았다. 얼마 전 미국상원에서 열린 북한 정치범수용소문

    제 청문회 개최와 관련해 숄트 회장의 노고를 치사하는 필자의 편지에 대한

    회답이었다.

    이 편지에서 숄트 회장은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전날 CBN(기

    독교방송)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관한 특별프로그램이 방영됐다는 것이

    다. 이 특별프로그램은 상원청문회 광경과 3명의 탈북자(강철환, 안명철, 이

    순옥 제씨) 및 숄트 회장과의 인터뷰 때 북한인민을 위해 기도해 줄 것과,

    북한인권문제를 제기할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상하원의원에게 보낼 것을

    시청자에게 강조했다고 한다.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특별프로그램이 끝나자 곧 이어서

    CBN의 패트 로버트슨 회장과 시사해설자 2명과의 대담이 시작됐는데, 주제

  • 038 국제협력 캠페인 039

    는 북한문제였다. 그런데 로버트슨 회장은 세계적인 명사로 1992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한 바 있다. 대담을 끝내면서 세 사람은 한결같이 북

    한인민을 위해 기도해 줄 것과 상하원의원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북한인권문

    제를 거론하도록 요청할 것을 시청자에게 호소했다는 것이다.

    숄트 회장은 이 사실을 전하면서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

    도 못했다. 너무나 좋아서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제 미국의 많은 교회

    에서 북한인민을 위한 기도회가 열릴 것이고, 상하원의원 사무실에 유권자

    들의 편지가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글을 받고 필자 역시 흥분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그리스도교

    단체가 정부의 대외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또 상하원의원

    들이 유권자의 편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CBN 특별프로그램이 방영된 것을 계기로 북한 정치범수용소문제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이 증대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언짢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

    부가 대북포용정책을 추진한다고 하니까 우리나라 각계각층이 대북협력사

    업에만 몰두할 뿐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이나 중국・러시아 등지에서 떠

    돌고 있는 탈북자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늦었지만, 종교인을 비롯한 온 국민이 북한 정치범수용소문제와 재

    외탈북자문제 해결에 발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1999. 6. 통권 31호 주장

    북한인권문제 국제화의 첫 걸음

    1999년 12월 1~3일, 본회와 조선일보사가 공동주최하고 MBC와 iTV가 후

    원한 제1회 북한 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가 성공리에 끝났다.

    이 회의에 참석한 내외국인이 이구동성으로 “감동적인 모임이었다” 또

    는 “훌륭한 모임이었다”고 소감을 피력한 사실에서도 이 점을 알 수 있지만,

    개회식에 장 폴 로오 프랑스 대사 등 대사・공사 8명을 포함한 주한외교관

    19명과 마이크 치노이 CNN 홍콩지국장 등 많은 외국언론 특파원이 참석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내인사의 관심도 대단해서 첫날에는 5백여 명이, 둘째날・셋째날에는

    3백 명이 넘는 분들이 시종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중에는 전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여러 명의 정치인, 법조인, 전・현직 통일부 차관의 얼굴도 보였다.

    이 국제회의가 이처럼 내외국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북한인권문제

    에 관한 첫 국제회의라는 점 이외에도, 그 숫자가 10만 내지 20만에 달한다

  • 040 국제협력 캠페인 041

    는 북한난민(재외 탈북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개회식 벽두에 비쳐진 비디오 테이프는 북한 난민의 처지가 얼마나 절박

    한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이 테이프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TV

    방송국이 제작한 것인데, 1999년 11월 10일 한・러 국경 부근에서 잡힌 북

    한난민 7명이 “제발 우리를 북조선으로 돌려보내지 마시오. 돌아가면 우리

    는 죽습니다” 하고 애절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회의 둘째날의 심포지엄 제1세션에서는 프랑스, 일본에서 온 학자와 중국

    계 미국인이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유린을 외국 수용

    소에서의 사례를 들어 뒷받침해주었고, 또 제2세션에서는 재일동포, 한국 연

    구가, 영국 연구가가 북한난민의 실태와 보호대책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셋째날 NGO 회의에서 서울선언이 채택되면서 회의 분위기는 한껏 고조

    됐다. 이 선언에는 정치범수용소를 폐지하고 식량을 구하러 인접국으로 가

    는 사람들을 막지 말라는 북한당국에 대한 요구와 자국 영토에 들어온 북

    한난민을 강제송환하지 말라는 러시아 정부 및 중국 정부에 대한 요구가 담

    겨 있었다. 이 선언이 거수가결로 채택되자 참석자 일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래도록 박수를 치면서 기뻐했다.

    이제 북한인권문제와 북한난민문제의 국제화는 막 시작된 셈이다. 성사

    여부는 우리 한국인의 관심과 노력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냐에 달

    려 있다고 할 것이다.

    1999. 11~12. 통권 35호 주장

    내실을 다지는 해로

    ‘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운동’도 이제 2000년 현재 4년 째로 접

    어들었다. 그동안 이 운동을 벌이면서 허탈감에 사로잡힌 적인 한두 번이

    아니었다. 쏟는 노력과 정성에 비해 국내외의 호응이 너무나 미미했기 대문

    이다. 그것은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와도 같았다. 그러나 마침내

    메아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젊은이들이 우리 운동에 적극적

    으로 참가하는가 하면, 국외에서는 유력한 NGO와 저명한 지식인들이 우리

    와 행동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국내 젊은이들의 호응은 1999년 1월부터 나타났다. 국내에 들어온 탈북

    자들이 사회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그들 곁으로 다가서자는 우리의

    요청에 마음이 따뜻한 젊은이들이 동조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

    된 ‘탈북자와 정을 나누는 운동’이 해를 넘기고 있다.

    외국 NGO・활동가와의 연대는 얼마 전에 열린 북한 인권・난민문제 국제

  • 042 국제협력 캠페인 043

    회의의 성공으로 마침내 달성됐다. 7개국에서 모인 30여명이 우리와 함께 3일

    간이나 진지하게 문제의 심각성과 지원방안을 토의했고, 귀국후에는 적극적

    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예를 들면 카나다의 엡쉬테인씨는 북한난민받아들

    이기운동을 개시했고, 러시아의 포드라비네크씨는 이번 국제회의를 소개하

    는 기사를 러시아 신문에 기고했으며, 영국의 바바르씨는 북한인권상황 및 북

    한난민 실태조사에 관한 프로젝트를 연구기관으로부터 승인 받았고, 미국의

    잭 렌들러씨는 국제앰네스티, 인권워치, 인권법조인위원회, 국제인권법그룹, 미

    네소타대 인권센터 등과 접촉했다는 것이다. 또 그동안 우리와 긴밀한 유대관

    계를 맺어온 일본 북조선귀국자의생명과인권을지키는회는 12월 5일 피에르

    리굴로・수잔 숄트・해리 우 제씨를 도쿄로 초청해 ‘북한 정치범수용소 폐지

    를 위한 국제포럼’을 개최했고, 미국 방위포럼재단(DFF)은 재미교포들이 만

    든 AEGIS재단과 함께 북한난민돕기 캠페인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고 우리

    에게 알려왔다. 이제 메아리는 또 다른 메아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외침이 널리 퍼져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책임이 중차

    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인권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고 또 인

    권 신장이 인류사회의 공동관심사라고 하지만, 북한 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일차적 책임은 동족인 우리 한국인에게 있는게 아닌가. 우리가 계속

    정보를 확산시키고 북한난민돕기에 심혈을 기울일 때만이 이 국제캠페인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2000년 1년은 우리가 이

    캠페인의 파워플랜드(발전소) 역할을 계속 담당할 수 있도록 내실을 착실히

    다져야 할 것이다.

    2000. 1. 통권 36호 주장

    초지일관(初志一貫)

    한자 숙어에 초지일관(初志一貫)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 먹은 마음을 끝

    까지 관철한다는 게 그 말뜻이다. 비록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처음에 세운 뜻에 따라 처신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새삼스레 이 옛말을 인용하는 것은 우리 모임의 활동과 관계가 있기 때

    문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로 북한의 인권상황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는 우

    리 모임의 활동이 위축되는 게 아닐까 하는 말들이 있는 모양이다. 한국대

    통령과 북한 실권자가 포옹하고, 북한 고위급 인사가 청와대를 방문하는 마

    당에 북한의 인권상황을 고발하는 일을 언제까지 벌일 수 있겠느냐 하고

    우려하고 있는 것 같다. 또 민족화해를 추구해야 할 마당에 북한의 인권상

    황을 거론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의도 있는 듯하다. 우리

    모임을 사랑하거나 겨레의 앞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 줄로 알고 우선 고

    맙게 생각한다.

  • 044 국제협력 캠페인 045

    그러나 우리 모임의 입장은 분명하다. 우리는 상황이 어떻게 바뀌건 북

    한의 인권상황을 비판하고 그 실상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는 활동을 결코 멈

    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권은 언제 어디서나 지켜져야 할 보편적 가

    치이기 때문이다. 북한 땅에 관리소라는 이름의 정치범 수용소가 존재하는

    한, 강제송환 당한 탈북자들이 중벌을 받는 한, 그리고 유일사상체제 10대

    원칙이라는 게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한 우리는 목소리를 결코

    낮추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이런 자세를 놓고 어떤 이는 “어렵게 이루어진 남북한 화해무드

    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겨레의 일원인

    이상 어찌 남북한간의 화해를 바라지 않겠는가.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공존공영의 방도를 찾아줄 것을 충심으로 바라 마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활동을 멈출 생각은 전혀 없다. 원래 인권운동

    은 정치와는 상관없이 전개된다. 1970년대에 이른바 유신(維新)이 선포됐을

    때 필자는 중앙정보부에서 국제앰네스티운동과 관련해 조사를 받게 됐는

    데, 조사관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우리나라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 바

    로 유신인데, 유신 때문에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다고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있으니 당신은 과연 대한민국 국민이요 뭐요” 하고 호통치는 것이었다. 이

    말에 대해 필자는 “정치와 정책은 한때의 일이지만 인권은 영원이 지켜져야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오늘의 상황과 그때의 상황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정치와 정책이 인권에

    우선할 수 없다는 원칙만은 바뀔 수 없다는 게 우리의 신념이다.

    2000. 7~8. 통권 42호 주장

    북한인권 유럽 지식인 성명

    2000년 9월 22일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을 위해 유럽인도 공동행동을 취하

    자는 취지의 성명이 프랑스 파리에서 발표됐다. 이 성명은 본회와 유대관계

    를 맺고 있는 국제인권협회(IGFM) 프랑스지부의 피에르 리굴로 씨가 주도

    한 것으로, 프랑스・체코・루마니아・스페인・벨기에・독일・그리스・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9개국 지식인 31명이 서명했다.

    성명은 “6월의 남북정상회담이 우리로 하여금 북한 내부의 비극적 상황

    을 잊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경고로 시작되고 있다.

    비극적 상황이란 15만 명이 갇혀 있는 강제수용소의 존재, 공개처형, 유

    일사상체계에 의한 주민통제, 주민 2백만 명의 아사 등을 말한다. 유럽 지식

    인들은 이 사실을 지적한 다음 북한을 가리켜서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

    는 가장 범죄적인 국가”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남북정상회담의 의의를 결코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은

  • 046 국제협력 캠페인 047

    아니다. 북한 주민 생활의 개선을 위한 실제적이고도 진정한 활동이 앞으로

    취해질 수 있다면 정상회담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유럽 지식인들은 북한 주민을 위해 그들이 앞으로 벌여야 할 활동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북한 당국에 압력을 가해 국제인도단체가

    원조식량・의약품의 분배를 관장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만 원조

    물자가 특권층에 유입되는 것을 막고, 또 어려운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둘째는 북한 당국에 압력을 가해 주민들로 하여금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국경을 넘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성명은 국제인도단체에 의한 원조물자 통제와 출입국의 자유를 놓고 대

    북 지원 계속의 ‘필수 불가결의 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셋째는 북한 난민으로 하여금 정치적 망명자의 지위를 보장받게 하고,

    인접국이 그들을 북한으로 강제송환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활동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북한 민중을 돕기 위한 유럽

    위원회’를 발족시킬 것을 성명은 촉구하고 있다.

    최근 필자는 국제인권협회 독일지부 사무국장인 칼 하펜 씨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하펜 씨는 이 편지에서 자기 자신이 유럽지식인성명에 서명

    했을 뿐 아니라, 그 성명을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독립국가연합(CIS) 가맹국

    의 국제인권협회 지부에 배부하면서 널리 확산시킬 것을 촉구했음을 알려

    왔다. 그는 편지 말미에서 “멀지 않아서 우리는 ‘북한인권 세계 지식인 성명’

    을 발표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0. 10. 통권 44호 주장

    유럽인들의 대북 관심을 보면서

    ‘메아리가 들린다’는 3년 6개월 전의 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되고

    있다. “성서에 보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하는 대목이 있다. 왜 하필이면 광야에서

    외쳤을가? 신학자에 따르면 이 대목은 선지자의 경고에 온 사회가 귀를 기

    울이지 않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광야에는 산이 없다. 따라서 메

    아리도 없다. 외침은 허공에 흩어질 뿐이다. 대중의 호응이 없는 선지자의

    경고는 광야에서의 외침과 똑같다.”

    이어서 은 북한인권상황・북한난민에 관한 우리의 활동이 그동안

    광야의 외침처럼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마침내 메아리가 들려오고

    있다고 하면서, 영국적십자사 총재의 친필회신과 미국 미네소타변호사회 국

    제부 담당자의 호의적인 반응을 그 실례로 들었다. 이때 영국적십자 총재는

    북한 적십자사 관계자에게 정치범수용소의 존재 여부를 묻겠다고 알려왔

  • 048 국제협력 캠페인 049

    고, 미네소타변호사회 관계자는 그들이 간행한 ‘북한인권보고서’에서 몇 대

    목을 인용해도 좋다는 회신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6개월이 경과했는데 북한 인권・난민문제에 대한 국제회의

    의 관심은 이만저만 커진 게 아니다. 그동안 코소보사태와 같은 유럽내문제

    에만 관심을 보여왔던 유럽인들까지도 이제는 북한 인권・난민문제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 10월 19일에는 영국 민영 TV ‘채널4’를 통해 탈북청소년(꽃제비)

    의 생활상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 이 다큐멘터리는 주로 인권문제

    를 다루어온 하드캐시프로덕션이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미 본회

    에도 탈북청소년을 돕고 싶은데 송금방법을 알려달라는 여러 통의 이-메일

    이 날아들고 있다. 10월 25일에는 프랑스 국회의사당에서 ‘북한 민중을 돕

    는 유럽위원회’가 결성됐다고 AFP 통신이 전했다. 이 단체는 지난 9월 22일

    유럽인도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을 위해 나서야 할 것이라는 유럽 지식인들

    의 호소문에 호응해서 결성된 것이다. 이 호소문에는 프랑스・체코・루마니아

    ・스페인・벨기에・독일・그리스・이탈리아・포르투갈 등 9개국 지식인 31명이

    서명했다.

    이런 소식을 듣고 필자의 심정은 착찹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국내사

    정이 이와는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인권상황이나 재외 탈북자

    들이 겪고 있는 고초를 거론하는 것을 놓고 마치 남북화해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요즘 부쩍 늘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는 그 분들

    에게 무엇을 위한 화해・통일인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2000. 11. 통권 45호 주장

    린 모리슨 수녀의 활약상

    영국 노포크 카르멜수도원의 린 모리슨 수녀에게서 이메일이 본회로 날아

    든 것은 2000년 10월 28일의 일이다. 그녀는 북한 부랑아(꽃제비)에 관한

    비디오를 시청했는데, 그들을 돕는 일에 있어서 자기가 무슨 역할을 맡을

    수 있느냐 하고 물어왔다. 곧 그녀에게 우리의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를 알려

    주면서 국제캠페인에 참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2000년 11월 2일 그녀는 다음과 같이 알려왔다. 납북어부들과 북한으로

    강제송환당한 북한난민, 특히 투먼수용수폭동사건 연루자들의 안전을 우

    려하는 서신을 로빈 쿠크 영국외무부장관, 크리스 패튼 EU 외무위원장에게

    보냈을 뿐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 빈・제네바・뉴욕 소재 북한대표부 대

    표들에게도 보냈다는 것이다.

    북한 인권・난민문제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앞으로

    제2회 국제회의 자료집을 보내주면 노포크 지방신문에 투고할 예정이고, 계

  • 050 국제협력 캠페인 051

    간지 테블리트 편집장에게 우리의 국제회의 취재를 권고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