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장면 (가운데가 손기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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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당국도 몰랐던 일장기 말소 사건 8월의 무더위도 식민지 조선 민중의 감격과 흥분을 억누르 지 못했다.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2분, 베를린의 날씨는 무척 더웠다.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었다고 한다. 베를린 메 인스타디움에 모인 수많은 관중들은 숨죽였다. 이내 ‘탕’ 소 리와 함께 10만 관중의 함성이 일제히 터졌다. 그리고 얼마 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국 시간으로 1936년 8월 10일 새벽 2시 무렵이었다. 손기정은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서 금메달을 땄고,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식 민지 조선 민중들은 아직까지 그들의 경기 결과를 알지 못 했다. 8월 10일 식민지 조선의 신문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호외를 뿌렸다. <조선중앙일보>도 손기정과 남승룡의 쾌거 를 호외로 전달했고, 소설가 심훈은 축시 「오오, 조선의 남 아여!」를 썼다.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장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밟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14 15 古典의 숲속으로 | 연속간행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인제도너희들은우리를약한족속이라고부를터이냐??’ 심훈, 오오,조선의남아여! ,<조선중앙일보>,1936.8.10.호외 손기정과 남승룡의 올림픽 메달 획득은 식민지 조선 민중의 설움을 위로하고, 상처 입었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촉매로 작용했다. 식민지 조선의 언론은 연일 그들의 승리를 자축 했으며, 민중들 역시 그들의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조선 민 족의 위대한 승리로 받아들였다. <조선중앙일보> 8월 11일 자 신문은 그들의 이야기를 신문 1면 사설로 실었다. 마라톤의 패권이 끝끝내 조선이 낳은 청년의 수중에 들어왔 다는 소식이 한 번 조선에 전해지자마자 새벽하늘에 울리는 종소리와 같이 조선 민중의 귀를 쳤다. 이리하여 너무도 오랫 동안 승리의 영예와는 연분이 멀어졌던 조선 민중이 최초의 막연한 경악에서 지금은 의심 없이 승리의 기가 우리들에게 돌아온 것을 확신할 때에 이 위대한 환희의 폭풍은 적막한 삼 천리강토를 범람하고 뒤흔들었기에 충분하였다. 마라톤의 제패, 손남(孫南) 양군의 위공(偉功) , <조선중앙일보>, 1936. 8. 11. 1936년 손기정과 남승룡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는 ‘위대한 환희의 폭풍’이 되어 삼천리강토를 뒤흔들었으며 단언컨대 스포츠 신드롬으로 확대되었다. 그들의 승리는 개 인적 차원의 영광을 넘어 민족적 차원의 영광으로 확대 해 석되었다. 한동안 정치적 무기력에 빠져 있던 식민지 조선 은 손기정과 남승룡의 쾌거를 기점으로 ‘스포츠 내셔널리 즘’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정치적 무기력 속에서 탈출하고자 몸부림쳤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추동했던 언론 미디어는 크나큰 위기에 봉착한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 건 때문이었다.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최초로 말소한 신문사는 <조선중앙일보>였다. <조선중앙일보>는 8 월 13일자 신문에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 상식 사진을 전재했다. 그 사진은 당연히 <조선중앙일보> 의 기자가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조선중앙일보>가 신문에 내보낸 손기정의 사진은 <오사카 아사히>가 찍은 여러 사진 중 하나였다. <조선중앙일보>의 유해붕 기자는 흐릿하게 처 리한 손기정의 사진을 실었다. 일장기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손기정의 얼굴조차 흐릿했다. 사진 기술이 부족한 것을 핑계로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정말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을 보면 고의로 일장기를 지운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 덕이었는지 8월 13일자 <조 선중앙일보>는 식민 당국의 검열을 무사하게 통과했다. 유해붕은 이 사실을 <동아일보>의 이길용에게 귀띔해 줬다. 이에 이길용 역시 일장기 말소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일장 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의 기자들은 경찰에 끌려가 고 문을 받게 되었다. 신문 또한 무기한 정간을 당하게 되자 <조선중앙일보>는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조선중앙일보> 의 사장이었던 여운형은 체육부 유해붕과 사진부 홍병옥 등 네 명을 불러 당국에 자수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여운형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소식을 1면 상단 사설에 게재한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1일자 1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장면 (가운데가 손기정)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몽양 여운형 <조선중앙일보>, 스리슬쩍 일장기를 말소하다 식민지 치하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로 활약했던 <조선중앙일보>는 친일파를 공격하고, 일제의 식민 지 정책을 비판하는 등 당시 조선 민중들의 심경을 대변했던 신문이다. 그러나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에 주주들 간 의 내분까지 더해져 창간 다섯 해를 넘기지 못한 채 폐간되고 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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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당국도 몰랐던 일장기 말소 사건

8월의 무더위도 식민지 조선 민중의 감격과 흥분을 억누르

지 못했다.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2분, 베를린의 날씨는

무척 더웠다.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었다고 한다. 베를린 메

인스타디움에 모인 수많은 관중들은 숨죽였다. 이내 ‘탕’ 소

리와 함께 10만 관중의 함성이 일제히 터졌다. 그리고 얼마

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국 시간으로 1936년 8월 10일 새벽

2시 무렵이었다. 손기정은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서 금메달을 땄고,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식

민지 조선 민중들은 아직까지 그들의 경기 결과를 알지 못

했다. 8월 10일 식민지 조선의 신문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호외를 뿌렸다. <조선중앙일보>도 손기정과 남승룡의 쾌거

를 호외로 전달했고, 소설가 심훈은 축시 「오오, 조선의 남

아여!」를 썼다.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장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밟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14 15

古典의 숲속으로 | 연속간행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심훈, 「오오, 조선의 남아여!」, <조선중앙일보>, 1936. 8. 10. 호외

손기정과 남승룡의 올림픽 메달 획득은 식민지 조선 민중의

설움을 위로하고, 상처 입었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촉매로

작용했다. 식민지 조선의 언론은 연일 그들의 승리를 자축

했으며, 민중들 역시 그들의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조선 민

족의 위대한 승리로 받아들였다. <조선중앙일보> 8월 11일

자 신문은 그들의 이야기를 신문 1면 사설로 실었다.

마라톤의 패권이 끝끝내 조선이 낳은 청년의 수중에 들어왔

다는 소식이 한 번 조선에 전해지자마자 새벽하늘에 울리는

종소리와 같이 조선 민중의 귀를 쳤다. 이리하여 너무도 오랫

동안 승리의 영예와는 연분이 멀어졌던 조선 민중이 최초의

막연한 경악에서 지금은 의심 없이 승리의 기가 우리들에게

돌아온 것을 확신할 때에 이 위대한 환희의 폭풍은 적막한 삼

천리강토를 범람하고 뒤흔들었기에 충분하였다.

「마라톤의 제패, 손남(孫南) 양군의 위공(偉功)」,

<조선중앙일보>, 1936. 8. 11.

1936년 손기정과 남승룡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는

‘위대한 환희의 폭풍’이 되어 삼천리강토를 뒤흔들었으며

단언컨대 스포츠 신드롬으로 확대되었다. 그들의 승리는 개

인적 차원의 영광을 넘어 민족적 차원의 영광으로 확대 해

석되었다. 한동안 정치적 무기력에 빠져 있던 식민지 조선

은 손기정과 남승룡의 쾌거를 기점으로 ‘스포츠 내셔널리

즘’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정치적 무기력 속에서 탈출하고자

몸부림쳤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추동했던 언론

미디어는 크나큰 위기에 봉착한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

건 때문이었다.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최초로

말소한 신문사는 <조선중앙일보>였다. <조선중앙일보>는 8

월 13일자 신문에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

상식 사진을 전재했다. 그 사진은 당연히 <조선중앙일보>

의 기자가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조선중앙일보>가 신문에

내보낸 손기정의 사진은 <오사카 아사히>가 찍은 여러 사진

중 하나였다. <조선중앙일보>의 유해붕 기자는 흐릿하게 처

리한 손기정의 사진을 실었다. 일장기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손기정의 얼굴조차 흐릿했다. 사진 기술이 부족한

것을 핑계로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정말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을 보면 고의로 일장기를 지운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 덕이었는지 8월 13일자 <조

선중앙일보>는 식민 당국의 검열을 무사하게 통과했다.

유해붕은 이 사실을 <동아일보>의 이길용에게 귀띔해 줬다.

이에 이길용 역시 일장기 말소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일장

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의 기자들은 경찰에 끌려가 고

문을 받게 되었다. 신문 또한 무기한 정간을 당하게 되자

<조선중앙일보>는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조선중앙일보>

의 사장이었던 여운형은 체육부 유해붕과 사진부 홍병옥 등

네 명을 불러 당국에 자수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여운형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소식을 1면 상단 사설에 게재한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1일자 1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장면

(가운데가 손기정)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몽양 여운형

<조선중앙일보>,

스리슬쩍 일장기를

말소하다

식민지 치하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로

활약했던 <조선중앙일보>는 친일파를 공격하고, 일제의 식민

지 정책을 비판하는 등 당시 조선 민중들의 심경을 대변했던

신문이다. 그러나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에 주주들 간

의 내분까지 더해져 창간 다섯 해를 넘기지 못한 채 폐간되고

야 말았다.

朝 鮮 中 央 日 報

16 17

그러나 그들의 생활에는 쌀 한 근에 3전씩 할 때나 9전씩 하

는 지금에나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불만과 절망의 빛이 사

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윗말 김초시 집은 세줄 기와집을 새로 짓고 논도 백석내기

나 더 샀다고 하드구만

우리 옆집 상○이네는 빚 때문에 야간도망을 하였다하고

이 동리 몇몇 집들도 이 가을에는 만주론가 북간도론가 떠나

간다 합니다.

사방을 휘돌아보아도 푸른 것은 모두 곡식들인데

그들의 입에는 만주 쌀도 배불리 들어가지 못하여 영양부족으로

그들의 눈에는 정기(精氣)가 없고 늘 텁텁하여 보입니다.

언제나 그들의 눈에서는 빛을 찾아볼 수 있을는지

정국은(鄭國殷), 「고향 사람들」, <조선중앙일보>, 1936. 7. 28.

1931년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일본 제국의 식민지 수탈은

가속화되었고, 수많은 농민들이 고향을 등지고 만주나 북간

도로 떠나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산업화가

가속될수록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탄압이 거세져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고향 사람들」은 일

본 제국의 식민지 정책을 문학이라는 양식을 통해 우회적으

로 비판한 작품이다. 또한 <조선중앙일보>는 노동자들의 임

금문제와 근로조건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산업통제에 대해

서 비판적 논조가 담긴 사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1933년 자본금 20만 원으로 설립된 <조선중앙일보>는 <조

선일보>・<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로 활약했으나

1936년 8월 13일의 사건을 계기로 결국 1937년 11월 5일

발행허가 효력의 자연 상실로 폐간되고 말았다. <조선중앙

일보>의 폐간은 일차적으로 일장기 말소 사건이 계기가 되

었지만, 이차적으로는 주주들 사이의 내분과 대립 역시 폐

간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박용규, 「여운형의 언론활동에 관한 연구-일제하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기를 중심으

로」, <한국언론학보>, 1997.11.

천정환,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 푸른역사, 2010.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9월 5일부터 자진해서 휴간하겠다

는 뜻을 밝혔다.

여운형이 바랐던 것은 자진 휴간조치를 통해 조선총독부에

자신들이 근신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만약 조선총

독부가 자신들의 근신과 반성을 알아준다면 무기정간이라

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운형은 판단했

던 것이다. 하지만 사태는 여운형과 <조선중앙일보> 기자들

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꼬였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다

최초의 일장기 말소를 결행한 <조선중앙일보>의 전신은 <중

외일보>와 <중앙일보>였다. 1926년 11월 15일에 창간된

<중외일보>가 1931년 11월 27일부터 <중앙일보>로 제호를

바꿨고, <중앙일보>는 1933년 3월 7일 다시 신문의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변경했다.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은 식

민지 조선의 독립투쟁에 앞장섰으며 사회주의 운동가로 이

름을 날렸던 몽양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원래 <조선일보>

의 사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만주동포 구제금 유용사건’으

로 내홍을 겪고 있는 <조선일보> 대신 제호를 변경하고 새

롭게 출발하는 <조선중앙일보>를 선택했다. 감옥에서 출옥

한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직을 맡은 것은 지속적

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중앙일보>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기자들은 대부

분 <조선일보> 출신이었다. 부사장이자 최대 출자자였던 최

익선을 비롯하여 이관구, 김동석, 홍증식 등이 <조선일보>

출신이었다. 이들은 <조선일보>의 안재홍・이승복과 대립

적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조선중앙일보>의 편

집진에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다수의 문인들도 참여했다.

염상섭, 이태준, 김남천, 박노갑, 박팔양, 노천명 등이 그들

이다.

<조선중앙일보>는 최린이나 박희도 등의 친일파를 공격하

는 것은 물론, 민족개량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

았다. 또한 이 신문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직접적으로 비

판할 수 없으며, 민족독립운동을 전면적으로 주장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 정책의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비

판했다. 조선 민중들의 소작쟁의나 노동쟁의를 적극적으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의 자작농 창설계획의 허

구성을 폭로했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문제점을 폭로하

는 방식으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맞서나갔다.

반(半) 십년 동안에

저의 동무들은 모두들 아이 아버지가 되었고

그들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글. 이승원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초빙교수

한국 근대문학을 전공하면서 문학의 프리즘을 통해 한국 문화

의 근대적 풍경을 연구해 왔다. <사라진 직업의 역사>, <세계

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학교의 탄생>,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 등의 책이 그 결실이다.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최초로 말소한 사진이 실린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3일자 기사손기정과 남승룡의 올림픽 메달 획득 관련 내용이 자세히 보도된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1일자 2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