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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䀇Ẅ ㇋⊳㤟 㑼ᶓ㑫⯜ 㱋⌋䄷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2 0 1 0 F A L L S E M E S T E R Section 1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정신 : 타자의 윤리에서 기독교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Emmanuel Levinas and Christianity : What should Christians learn from the ethic of Other? 2010. 9. 15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 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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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녹취록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2 0 1 0F A L LS E M E S T E R

Section 1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정신 : 타자의 윤리에서 기독교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Emmanuel Levinas and Christianity: What should Christians learn from the ethic of Other?

2010. 9. 15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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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정신타자의 윤리에서 기독교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Emmanuel Levinas and Christianity-What should Christians learn from the ethic of Other?-

2010 Fall Semester 1st Colloquium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주최_한동대학교 학문과 신앙 연구소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지난 십여 년 간 세계의 지성사회 내부에는 고통스런 20세기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타자의 윤리를 정초했던 유대인 현상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가르침을

깊이 청종하려는 흐름이 있어 왔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한동 캠퍼스 안에서도 '시간과 타자'

'윤리와 무한' 같은 그의 저작들을 함께 읽으면서 성찰하고 또 감동하는 모임들이 생겨났습니다.

2010년 2학기 첫번째 학문과신앙 콜로키엄은 그와 같은 토대 위에서

레비나스의 철학과 기독교정신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탐색하는 대화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한동 구성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사회 : 이국운 교수 (한동대학교, 법학, 학문과신앙연구소장)발제 : 박원빈 교수 (남서울대학교, 기독교 철학 및 신학)토론 : 장수영 교수 (포항공과대학교, 산업경영공학) 나윤숙 교수 (한동대학교, 영문학)

All Nations Hall 3029/15 (Wed), P.M.7:15[ ]

Prof. 이국운 Prof. 박원빈 Prof. 장수영 Prof. 나윤숙

발제자_박원빈 교수

숭실대학교 교양특성화대학 교수

보스턴대학교, University Professors Program, Ph.D.

프린스턴신학대학원 졸업, Th.M.

장로교신학대학원 졸업, M.Div.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 B.A. 대표 저서 : '레비나스와 기독교-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현대 철학'(북코리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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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11ㅗㅗ

2010 년 가을학기_제 1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행사 사진-1]

2010 Fall Semester_1st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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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년 가을학기_제 1 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행사 사진-2]

2010 Fall Semester_1st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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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13ㅗㅗ

2010년 가을학기_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2010 Fall Semester_1st Handong Eureka Collective Intelligence Colloquium

주관 :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 [ACE 사업]

주최 : 한동대학교 학문과 신앙 연구소 [Handong Institute of Learning and Faith]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정신

-타자의 윤리에서 기독교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Emmanuel Levinas and Christianity

-What should Christians learn from the Ethic of Other?-

2010. 9. 15

이국운 오늘 이 모임은 ACE 사업의 일환으로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라는 사업에서

진행되는데, 사업을 지원해주시는 학교당국과 관련부서에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학문과 신앙

연구소에서는 작년 2학기부터 매 학기 세 번에서 네 번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전공의

교수님들, 그리고, 활동가들, 학자들을 모시고 함께 대화의 장을 열어보는 학문과 신앙 연구소

콜로키움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지난 두 학기 정도 토론을 해 본 결과, 왜 진작 이런 대화의 모임을

조금 더 빨리 시작하지 않았던가 생각이 듭니다. 그 동안의 성과 위에서 이번 학기에는 첫 번째로

레비나스에 관한 대화 모임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제가 초대하는 발문에다가 썼습니다만, 레비나스 선생님은 20세기 말 들어서 우리 인류 전체,

조금 후 교수님이 말씀 해주시겠지만, 20세기에 인류가 겪었던 대 참사를 본인의 몸으로 몸소 겪어

내신 분이고, 그 아픔과 고통을 철학적으로 수용하여서 정초해 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노력에

감사하고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서, 레비나스 선생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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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인지를 한번 진지하게 묻고 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오늘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학교 안에서, 제가 하는 기독교와 현대사상 수업에서 한번 ‘ 시간과 타자’ 를 꼼꼼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삼 년 정도 지났는데요, 제가 하는 독서모임에서도 학생들과 함께 ‘ 윤리와

무한’ 이라는 책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난 학기에는 학문과 신앙 교수님들과의 독회에서

‘ 시간과 타자’ 를 역시 함께 읽으면서 많은 깨우침을 얻고, 혹시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지면서도 감동을 하고 그렇게 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이것을 소화하는

자리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모임은 예전에는 저희가 네분의 교수님을 모시고 모두 각각 10분씩 짧은 발제를 듣고

모두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왔는데요. 오늘은 조금 형식을 바꾸어서 멀리 남서울 대학교에서

박원빈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박교수님께서는 숭실대학교, 장신대학교, 보스턴 대학교를 나오셨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으신 목사님이시고, 숭실대학과 남서울대학교에서 기독교

과목을 가르치고 계시고, 올해 초에 ‘ 레비나스와 기독교’ 라는 한글로 된,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인의

시각을 담은 첫번째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고 거기서부터 시작하게 될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학기 중에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제가 불쑥 전화 드려서 와주십사 했을 때,

하나님이 감동을 주셨는지 선뜻 그러시겠다고 하셔서 오늘 이 자리에 와주셨습니다.

박원빈 선생님으로부터 이 주제에 관한 한시간 정도의 강의를 먼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윤숙 교수님과 장수영 교수님을 모셔서 두 분이 가지신 생각을 각각 10분 정도씩

듣고, 그 다음에 논의를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대게 저희 모임이 아홉시 반 정도에 끝나는 것으로

예정하고 시작하는데 대게는 그렇게 안 끝났습니다. 오늘 촬영도 하는데, 테이프에 여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촬영하게 되면 더 좋고, 어디까지 가나 해 봤으면 좋겠고요. 특히 박원빈 교수님께서 오늘

학교 안에 숙소를 잡으셨어요. 어디 안 가실거예요. 오랫동안 레비나스에 취해보는 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너무 길었는데, 그러면 이 자리에 박원빈 목사님 교수님을 모셔서 특강을 한시간

듣도록 하겠습니다.

박원빈 한동대에 와서 여러분들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렇게 귀한 기회를 주신

이국운 교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제가 오후 네시경에 도착해서 학교도 둘러보고 캠퍼스를 걸었는데

너무 학교가 활기차고, 또 학생들을 보면서 한동대 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 대해서 제가 간단하게 여러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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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잠깐 시작하는 말씀으로 제 소개를 잠깐 드리면, 저는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종교철학과 윤리를 전공했습니다. 철학에 있어서 학문과 신앙, 영어로는, Learning and Faith

Institute 이렇게 된 걸 잠시 확인했는데, 소위 철학과 신학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가 하는 것이

고대 철학 이후에 항상 중요한 문제였지 않나 생각합니다. ‘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말도 생각이 나는데, 저는 간단하게 제 고백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저는 좋아하는 말씀 중에 에베소서 4장 13절에 있는 말씀인데, 제가 한번 읽어드릴게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 데까지 이르리니라"는 말씀입니다. 학문과 신앙에 목표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저는 성서학자는 아니지만 바울이 이야기 한 것,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믿는 것은 우리 신앙의 영역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아는 것이라고

함은 학문의 영역,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모든 영역을 지칭하는 그런 구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는데 까지 이르러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신학과 철학과 관계된 과목들을 수업을 듣고 나름대로 계속 공부하면서 제가

가졌던 끊임없는 질문 중에 하나가,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가, 학문과 신앙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가 라는 것이 저의 큰 개인적인 물음 가운데 하나였고 이것이 꼭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개의 영역이 같이 갈 수 있겠다는 생각들을 나름대로 확신하고,

학문에서 이성을 통해서 하는 작업이 즉 학문이 신앙을 보다 바른 길로 나아가고 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성을 통해서 좀 더 건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이런 관계를 갖는 것이 참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칸트(Immanuel Kant)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기억하시는 분도 많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중요한 말 중에 하나가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칸트는 자기의 짧은 명제를

통해서 근대철학의 합리론과 경험론의 전통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저는 이

명제를 살짝 바꾸어서 학문과 신앙의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제가 만든 건데요,

"신앙 혹은 신학 없는 철학은 공허하며 철학 없는 신학 신앙은 맹목적이다." 라고, 칸트를 약간 패러디

했지만, 제가 어디 등록하고 싶은 프레이즈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신앙과 학문,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까,

제가 철학사 전체를 조망해서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짧은 시간에 어려운 일이고

또 방대한 작업이기 때문에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 같고요. 아주 간단하게 레비나스 라는 사람을

다루게 될 텐데, 이 사람이 근대 철학 서구 철학의 지성사에 있어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근대 철학에

있어서 레비나스라는 사람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라는 측면에서 근대철학 이후에 철학과

신학의 관계, 신앙과 학문의 관계가 어떤 위치 어떤 관계를 가지고 진행이 됐는지 간단하게만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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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고 싶습니다.

중세 이후에 중세는 한마디로 말씀 드리면, 중세를 한마디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중세 신학의 역사 철학의 역사를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대체로 어거스틴, 즉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이후부터 신앙이 신학 혹은 신앙이 이성의 우위에 있는 학문적인

태도와 학문적인 방향성이 지속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이 학문보다 위에 있는

소위 Faith가 Reason보다 위에 있는 경향성은 천년 정도 내려오다가 근대라는, 우리가 많이 이야기

하는 모더니티라는 철학적인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근대에 있어서도 여러가지로 철학과 신학의

관계, 혹은 종교와 이성, 좀더 좁게 말해서 기독교와 철학의 관계를 여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대체로 중세에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최우선 순위에 있어서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군림했다면 근대

철학자들은 성향은 학문의 영역에서 점점 신앙적인 요소를 배제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철학자 중에 하나가 데이비드 흄(David Hume)같은 사람은 인간의 사고의 영역에서

신앙, 신학을 완전히 배제해야 할 영역이라 이야기했고요, 헤겔은 반대로 전체를 철학으로, 신앙을

포섭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철학적인 시스템 안에서 철학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칸트같은 사람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전통 속에서 어떻게 이 양자를 조합할까 고민하다가, 칸트는

신학의 영역을 철학과 구별되지만 우리의 보다 풍부한 삶을 위해서 신학적 개념을 신 이라던지 영원

이라던지 이런 고도관념들이 요청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상당히 제가보기에는 궁색한

궁여지책적인 결론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근대 철학이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 할 것인가 라는 것을 놓고 많은 근대

철학자들이 시름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일반적인 경향은 철학의 영역에서 신학을, 신앙의 영역을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고, 이 가운데 예외적인 인물도 있는데요,

대표적인 사람이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같은 사람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들으신 적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42세의 나이에 아주 짧은 생을 마감했는데, 이

사람은 자신 스스로가 철학자라고 불리우기보다 종교 저술가라고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을 혐오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철학을 접근했습니다. 철학을 혐오했다지만 철학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철학이라는 것은 헤겔 류의 철학들을 말합니다.

헤겔의 철학 중에, 여러분 헤겔 철학을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이것도 상당히 위험이 있는

말씀이지만, 여러분 헤겔 하면 떠오르는 도식이 있잖아요, 소위 발하는 정반합의 도식인데, 이것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테제(Thesis)와 안티테제(Anti-thesis) 양자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진테제(Synthesis), 종합으로 나아간다는 일종의 전체성의 철학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헤겔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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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17ㅗㅗ

안에서는 너와 나의 갈증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에 손화철 교수님이 앉아계신데,

손화철 교수님이 아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세요. 그래서 오늘 식사하다가 엄청 많이 싸웠거든요.

예를 드는 거예요. 그런데 헤겔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큰 문제가 아닌거죠. 손교수님이랑 저랑 저는

A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고 손교수님은 B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식사하다가 너무 화가 나서 상을

엎을 정도로 열을 받았는데, 아무리 그렇게 싸운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이름으로,

치고박고 싸우고 해도 어떤 순간에는 이러한 이견이 합으로 도출돼서 하나의 전체성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이야기 했기 때문에 헤겔 철학에서는 갈등구조라는 것이 그렇게 크게 중요한 모멘트를

하지 않습니다.

케에르케고어는 이러한 헤겔 철학에 구조 자체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철학적인 사유를 진행하다보니까, 키에르케고르는 앞에 붙는 수식어가 뭐죠? 실존주의 철학자죠.

굉장히 거창한 말 같은데 실존주의 철학자라는 말이 뭐냐면 나 개인의 주체, 개인성을 강조한다는

말입니다. 헤겔철학의 구조에서는 나와 너의 다른 것들이 별로 중요하게 작동하지 않고, 나와 너의

차이가 나와 너의 의견의 다름이 어떤 면에서 묵살되거나 무시되는 경향을 키에르케고르가 발견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키에르케고르가 썼던 유명한 책이 바로

'Enten-Eller'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번역이 되는데 무슨 말씀이냐면 헤겔철학에 반기를 들고 쓴

책입니다. 헤겔철학이 전체성의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게 되니까 키에르케고르는 팔딱팔딱 뛰는듯한

개인의 이야기, 나의 실존의 이야기가 전체성 철학 속에 묻혀버리게 된다고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A냐 B냐

선택하는 것이 왜 중요하지 않냐, 그것은 인간의 실존에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어디로 갈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가 아주 중요한 문제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의 ‘ Enten-Eller’ 라는 책을 볼 때마다 여호수아 24장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여호수아 24장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앞에 놓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아무리 족속을 섬길 것인지 여호와를 섬길 것인지 너희가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선포하잖아요. 이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결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헤겔 식의 전체성의 사유를 가지게 되면 키에르케고르가 가지고 있는

이런 실존의 결단 신앙적인 결단을 하기 아주 어려워진다고,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점을 봤던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장황하게 신앙과 학문의 관계를 이야기 했는데, 근대까지 이렇게 내려오다가 드디어 오늘

레비나스로 왔습니다. 레비나스도 키에르케고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물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레비나스도 신앙과 이성에 갈등관계

속에서 근대 철학이 이성 쪽으로 점점 기울어졌다면, 이 관계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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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측면에서 많이 연구했고 고민했던 사람이 레비나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라는 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아마 처음 듣는 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간단하게 이분의

비블리오그래피를 설명해드릴까 합니다. 이분은 리투아니아라는 곳에서, 지금의 구 러시아, 러시아에

딸린, 예전의 구 소련연방인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대인 입니다. 어릴 적부터 러시아 문화를 배웠고

정통적인 유대교 가족에서 자라났던 사람이 레비나스였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시기였냐면 중고등학교 시절이 1917년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였어요. 러시아

국내정치가 아주 어려웠던 상황이었는데 레비나스의 부모가 러시아에서는 더이상 정상적인 교육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프랑스로,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로 유학을 보내게 됩니다. 그곳에서

대학생활을 하게 되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18세부터 철학을 공부하게 되고, 레비나스가 프랑스에서

공부하다가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는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습니다. 하이데거는

그당시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이 프랑스에 알려지면서, 프랑스의 실존철학자들이 소개되면서

레비나스도 하이데거 철학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하이데거를 제대로 배우려면 독일로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1928년경에 가서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 대학에서

유학을 하게 되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프라이브루크로 하이데거를 배우러 갔는데, 여러분들 전공 다

있으시죠? 여러분 지금 전공 들으면서 어떠세요? 공부할 때 관심분야가 바뀌고 그러시죠. 입학할 때는

내가 이 전공으로, 이것 참 재미있을 거라고 했는데 공부해보시니까 좀 지나니까 이건 내가 생각했던

그게 아닌가봐 하면서 소위 회의하고 방황하는 분들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레비나스도 어떻게 보면

그랬던것 같아요. 나는 하이데거 철학에 철학적인 일생을 걸고 이것만 하겠다고 했는데, 독일에서

후설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요.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에 깊이 심취하게 됩니다.

이 현상학을, 어려운말 같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현상학, Phenomenology, 현상에 대한

연구라고 말 그대로 이해하시면 될거예요. 아주 간단하게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의식에 대한 연구인데요. 우리 의식이 어떻게 사고작용과 더불어서 사물을 표상해내고

나타낼 수 있을까하는데,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겁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오다가 보니까 포항의 영일만, 아주 아름답던데, 거기를 혼자서 산책하신다 생각해보세요. 한시간 동안

혼자 바닷가를 걸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혼자 한시간 걸을 때와, 만약에 여러분들이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있어서 영일만을 여친, 남친이랑 한시간 걸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차이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차이가 전혀 없겠다고 하신 분들은 연애를 전혀 안 해보시거나 연애에 대해서 모르는

분이죠. 혼자 걷는거랑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걷는 것은 똑같이 물리적인 시간의 단위지만 나에게

느껴지는 의식의 양태는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는 말이죠.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현상학이란 바로

이런 의식의 차이를, 우리에게 드러나는 여러가지 의식의 차이들을 어떻게 규명해낼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이해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레비나스가 독일에서 후설을 만나면서 현상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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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19ㅗㅗ

방법론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게 내가 철학을 하게 된다면 이런 현상학적 방법론을 내 철학에

도입해서 연구를 진행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레비나스가 그의 사상적인 여정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이예요. 2차 대전 때 일어난 홀로코스트. 철학자를 연구할 때는 여러가지 방법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생애와 사상적인 내용을 분리해놓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생애와 사상이 밀접하게 간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데, 레비나스의

경우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비나스 스스로도 자신의 사유의 여정에서

2차 대전 당시 대량의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가 엄청난 사상적 임펙트를 가지고 왔다고 고백하고

있거든요. 2차 세계대전에 일어난 홀로코스트가 어떤 사건인지 대체로 다 아시리라 생각이 드는데,

여기 사진을 하나 갖고 왔어요. 이사진은 누구 사진이냐면 러시아에 그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바실리 그로스만(Vasily Grossman)이라는 사람이예요. 이사람이 종군기자로서 러시아 레닌그라드에,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그 전선에 참여하면서 독일군과 러시아군이 벌였던 전쟁에 대해서

책을 썼어요. 그 책의 이름이 바로 "Life and Faith" 라는 책이예요. ‘ 삶과 운명’ 이정도로 번역이 될

것 같아요.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을 그린 소설인데, 레비나스가 후에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고 나이가

많이 들어서 거의 원로학자가 되었을때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 이야기를 참 많이 인용을 했어요.

자신의 사상에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레비나스에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가 얼굴 개념인데, 여러분들 옆에 앉아있는 친구분들

얼굴을 보세요 보시면 좀 은혜가 되세요? 한숨이 나오세요? 걱정이 되세요? 은혜가 되셔야 되요.

레비나스는 얼굴이 사람의 얼굴에, 이런건 형이상학적 이야기지만, 사람의 얼굴에 하나님의 신성의

자취, 신성의 그림자가 담겨있다고 이야기해요. 여러분들 친구의 얼굴을, 사람 외모로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돼요. 내 얼굴 안에는 내가 아무리 잘생기고 못생겼던 건에 남들이 뭐라든 간에 내

얼굴에는 하나님의 신성의 자취가 깃들어 있다는 거죠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죠.

이 소설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어요. 예브게니라는 사람이 등장인물인데, 러시아 전쟁터에서

치고박고 싸우다가 러시아의 한 감옥에서 감옥소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실리 그로스만이

묘사하는 대목이 나와요. 이 부분을 레비나스가 직접 인용하면서, 이 부분이 그의 철학적 사유의

발전과정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고 이야기해요. 사람의 등이예요. 앞에 앉은 친구분들의 등이 보이시죠.

"예브게니는 등이 풍부한 감정을 표현해낸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 앞에 앉아계신 분의 등을

보세요. 지금 막 들썩이거나 움직이거나 몸이 막 꼬이는 분들은 뭐의 표현이예요? 강의 재미없다는 웬

철학자이야기를 하고 이런 것의 표현이잖아요. 사람의 등이 얼굴이 아님에도 그와 같은 여러가지

감정을 표현해 낸다는 것. "사람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창문 밖을 내다보게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갇혔다고 하니까 얼마나 자유가 얼마나 그립겠어요. 얼마나 바깥세상이 그립겠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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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그리고 창 밖을 보기 위해 높이 올라간 그들의 등과 긴장된 어깨는 마치 흐느끼고 소리치며 울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건 아마 이런 유사한 감옥에 갇혔다던지 정말 자유가 구속된 상태에 있을

때라면 이 구절이 더 깊이 가슴에 와닿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튼 레비나스는 이런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을 보면서 2차대전 때 홀로코스트때, 유대인 컨센츄레이션 켐프라고 그러죠 유대인

수용소에 갇혔던 자신의 동족을 떠올렸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이 소설을 읽은 다음에 이러한 이야기를 했어요. 도덕적으로 깨끗한 매일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아무리 거룩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타자의 얼굴은 대표적으로 얼굴을 표현하지만

얼굴에는 모든게 다 포함되죠. 혹은 목과 등에라도 우리의 모든 신체가 다 타인을 나타내는 도구라는

것이죠. "타자의 얼굴을 모든 요구를 뛰어넘는 것이다. 얼굴은 당신을 부르며 당신에게 요청한다.

이러한 요청은 이미 시내산 말씀에 울려 퍼진다. "살인하지 말지니" 이 말씀은 너는 타인의 삶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말해 타인에 대한 사랑을 매우 구체화 한 표현이다. 당신은 어느

하나도 당신이 빚진 게 없는 타인에게 책임이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계는 원천적 사회성보다

이전의 관계이다." 이게 아주 심오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원천적 사회성, 다시 말해서 다시 한번

옆에 분들 얼굴을 보세요. 옆에 친구가 나에게 뭔가를 요청하고 있대요? 뭐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나를 죽이지 마. 나를 인격적으로도, 말로도, 혹은 여러가지 방법으로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나에게 요청하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이러한 타인이 여러분의 친구가 나에게 걸어오는, 말을 해서가 아니라 얼굴로 온

몸으로 나에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부름은 원천적 사회성보다 이전에 서구 사회에서 서구에 소위

근대가 발전하면서 발달했던 개념이 시민 개념이라고 이야기해요. 근대국가가 농업사회에서 급격하게

상업사회로 전환되면서 근대국가가 급속히 성장했어요. 이때 사람들이 발견했던 것이, 인간이 아주

이기적인 존재구나 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 당시 중세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다스리고 교회가

다스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람들이 개인의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화 되고 이러면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인 홉스(Thomas Hobbes)라는 사람은 인간이 사는 사회는 만인이

만인을 위한 투쟁 같은 사회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누르고 밟고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런 투쟁을 해야지만, 나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사회라고 이야기했던 거예요.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인류가 필요했던게, 근대사회가 필요했던게 소위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한

계약(Contract)이었다는 거죠. 개인의 자유가 아주 중요했는데, 이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양도해서라도, 누구한테? 국가에게 양도해서라도 내 개인의 자유를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가 국가라는

제도에 우리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양도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는거예요. 그때부터 법이 발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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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21ㅗㅗ

국제법이 발달하고 이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이러한 원천적 사회성, 소위

인간이 필요했던 가장 기본적인 사회계약보다도 오히려 더 한발 앞선 것이 타인에 대한 타인의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해야 한다는 거죠. 레비나스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을

통해서 영감을 받았고 실질적으로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중요한 사상적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생각과 거룩함 중간쯤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룩할 수 있는 선한 사회도 믿지 않는다. 그가 오로지 믿는 것은

유일하고 사려 깊은 선한 행동과 친절함뿐이다." 이것은 소설에 나와있는 한 사람의 인간상인데, 이

사람은 굉장히 선한 사람이에요. 선한 사람에 중요한 것은 친절함 그리고 선한 행동, 윤리적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이 어떻게 보면 유대교 인간상의 가장 중요한 예시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후반부에 기독교와 레비나스 철학의 차이점들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번 언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홀로코스트 때 찍은 유명한 사진 중에 하나예요. 독일의 한 홀로코스트

지방에, 홀로코스트는 폴란드에 있는 지방이고, 체코에서 열차가 도착했어요. 열차가 보이시죠? 가운데

독일 장병이 있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 노동자캠프로 보내져서 살 사람들이고, 왼쪽 줄에 있는

사람은 가스 쳄버로 보내져서 죽게 될 사람들이에요. 독일기자인지 러시아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인지,

보관이 돼서 나중에 이렇게 알려지게 됐어요. 아주 인상적인 사진이죠. 가운데 독일 장교가 서 있고,

저는 너무 가슴이 아픈게, 줄 한번 잘못 서서 자신의 삶이 왔다 갔다 하는거 아녜요?

여기에 선 사람은 어떻게 됐냐면, 여러분들이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영화나 기록들을 보시면

노동을 한참 하다가 어느 순간인가 자신이 사망일이 정해지죠. 그러면 옷을 다 벗겨요.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샤워를 시킵니다. 그러면 다 벌거벗은 체로 샤워를 하게

되는데 노동자 수용소에 갖혀 있었으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몸을 못 씻었겠어요. 그러니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 들어가는데 들어가서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우리가 씻는구나 너무 좋다 하고 좋아하다가

물이 끊기자마자 천장에서 가스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으면 서로 엉키고

설키고 시체더미가 쌓이게 되죠. 독일 나치들이 시체를 모아다가 불에 태우죠. 그래서 그 사람 몸에서

나오는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었다는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전해지고 있죠. 맨 앞에 아이를 안은

엄마는 이쪽으로 간 것 같죠? 꼭 이쪽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이쪽을 향하고 있으니까. 왼쪽 줄에 있는

사람들은 죽음의 수용소로 들어가게 되는데.

혹시 여러분들 미국에 가실 기회가 있으면 워싱턴DC에 홀로코스트 뮤지엄이 있어요. 거기를

꼭 가보시기 바래요. 제가 올해 1월에 거기를 잠시 다녀왔는데, 제대로 보려면 두어시간 걸려요. 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생존자들의 증언과 독일 나치의 일들을 생생히 자료화해서

모아놨어요. 인류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같은 인류에게 저질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박물관이라

생각해요.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셜 스튜디오 이런걸 보시는 것도 좋지만 홀로코스트 뮤지엄,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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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가보시는 것을 추천해요. 제가 가서 사진을 찍어오려고 했는데 박물관에서 사진 찍는게

금지되어있어요. 제가 가장 인산적이었던 건, 박물관투어를 마친 후에 맨 마지막에 기도의 방이 있어요.

큰 원형 방에 촛불을 밝게 켜고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위해서 잠시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거든요. 그 시간이 저에게 좋았고, 인간이 근대라는, 근대성이라는 이름으로 홀로코스트를

통해 저질렀던 비참한 인류의 참사를 반성하고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건 어린 아이의 사진인데 굉장히 끔찍한 사진이죠. 이 당시 인체실험을 많이 했어요. 특별히

나치들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흩어졌던 집시를 여호와의 증인들(Jehovah's Witnesses)을 다

잡아다가 생체실험을 자행했어요. 엄청난 끔찍한 모습들이 나중에 공개됐고 보이시죠. 어떤 사진인지

아시겠죠. 사람이 죽은 시체, 수 만명, 수 천명이 집단 학살되고 이것을 나중에 중장비로 묻어버리는

장면을 생생한 영상으로 아직까지 확인할 수 있어요. 레비나스는 이런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던 거죠.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하나님이 어디

계셨는가라는 질문을 충분히 할 수 있게 되죠. 여러분들 고난을 겪어보세요. 어떤 반응이 나타나요?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그런 질문 해보신 적 있으세요?

한동대 학생들은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실 거라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삶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면 이런 질문이 생기게 되죠.

노벨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Elie Wiesel)이라는 유대인 문학가가 있어요. 이분이 1970년대

노벨상 수상자 이신데,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이분을 한번 뵈었어요. 이분이 쓴 책 중에 'Night'란 책이

있어요. '밤' 이라는 책인데, 우리나라말로도 번역이 된 것 같은데 혹시 기회가 되시면 읽어보세요.

미국에서는 주로 학부 학생들이 많이 읽는 책 중에 하나예요. 어린 한 소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열세

살짜리 소년이 아버지가 수용소캠프에 갇혔다가 아버지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노란 별을

붙이는데, 유대인이라는 것만으로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직접 봐요. 본인의 자전적 스토리가 같이

들어있는 거죠.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Where is God?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레비나스도 같은 질문을

하는 거죠. 레비나스도 2차 대전에 자기부모와 친척들을 다 잃었어요. 다행히 자신의 아내와 딸은

프랑스에 있었는데,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카톨릭 수녀님들이 가족들 아내와 딸은 숨겨줘서

목숨만을 구할 수 있었는데, 러시아에 있었던 나머지 친척들은 다 학살을 당한 상태에 있었죠.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셨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기독교인들도, 제가 도전적 질문을 해볼게요. 한동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방학 중에 선교여행을

갔다고 생각해보세요. 갔는데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홀로코스트를 겪고 살아난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여러분에게 만약 이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한동대 학생이시고 크리스쳔이라는걸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믿는 유대교와 여러분들이 믿는 기독교만이

하나의 형제 간의 종교이고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홀로코스트를 겪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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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23ㅗㅗ

나로써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정의로운 하나님을 믿기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대답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죠? 그리고 또 만약에 여러분 중에 한 학생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하나님의 큰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모르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겠죠. 이렇게 대답했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그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한다고 가정해보세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정의와 섭리 가운데 이 끔찍한 사건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받아들인다고 할 지라도

이것이 정말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일으켰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라고 되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냐는 것이죠. 기독교 신학에, 우리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오는 질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은 신앙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레비나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홀로코스트가 미친 영향을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 이것은 신정론의 종말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The end of

theodicy라고 이야기 합니다. theodicy라는건 그리스어의 theos, 하나님을 뜻하는 theos 라는 희랍

말이랑 dic이란 정의라는 말의 합성어예요. 하나님의 정의를 영어로 번역하면 Justification of God,

이렇게 번역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자기정당화, 이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걸

신정론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해 역사 속에서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났는데,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개인에 힘든 일이 닥치고 할 때,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인데 어떻게 이 세상에 어떻게 악이

존재하는가 라는 것이 신학자들의 큰 문제였어요 여기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신학의 한 학문 중에

하나가 신정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세상에 있어서 악의 문제는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왔던 것이, 만약에 하나님이, 보통 이야기 하듯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그런데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요? 만약에 선하신 하나님이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면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이면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악을

없애버리시거나 제한할 수 있으신데 왜 그러지 않으시는 거예요? 답은 두 가지죠. 하나님이 실제로

전지전능하지 않으시거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에 관심이 없으시거나.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죠? 그러면 오늘부터 채플드릴 이유가 없어지는 건가요? 큰일나는거 아니에요?

세상에 악의 문제는 신정론에 큰 도전을 가지고 왔는데, 신학자들이 신정론을 통해서 악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하나님은 이 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 신정론의 큰 신학적인

흐름이라고 말씀합니다.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서구신학에 있어서 신정론은 붕괴되었다.

종말을 고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홀로코스트같은 사건이 일어나겠는가

이야기하고, 또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고통의 문제였어요. 신정론에서는

고통 즉 Suffering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어떻게 이야기하냐면,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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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는 잠깐 겪는 고난의 과정의 일부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말씀 드리자면, 저는 미국에서 8~9년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미국에서 지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간이, 제가 목회하고 있을 때 제가 이민교회를 맡아서 담임목사를

잠깐 하고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에 제 아내가 유산을 했었어요. 그때 제가 가장 소화하기

힘든 말씀 중 하나가, 우리 교인들이나 동료 목사님들이 찾아와서, 물론 그분들은 좋은 의도로, 저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었는데, 제가 소화하기 힘든 말씀이, '목사님 큰 일에 쓰시려고 이런

고통을 주시나 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에요. 자꾸 들으니까 막 이런게

올라오더라고요. 그럼 큰 일하게 당신이 한번 당해보시지 하는 마음들이 솔직히 생기고요. 제가

실존적으로 힘들어지니까 저는 레비나스가 그런 차원에서 신정론, 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어려움, 고통들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정당화시키니까 우리가 느끼는 고난들, 고통들, 삶의

깊이있는 바닥에서 느끼는 눈물들을, 키에르케고르에서 말씀드리면서 얘기 했듯이, 잊어버리고 그냥

넘어가더라는 거죠. 고난이라는게, 우리가 눈물을 흘리려야 하는 자리에서는 눈물을 흘려야 되고

아파하는 자리에서는 같이 아파해야 하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우리 아버님 천국가서 너무

좋아요 하고 웃고 있어요. 나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아버님과 함께, 물론

천국에서 다시 뵙지만 이 땅에서 살았던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슬퍼서 울 수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슬퍼서 울어야 되는데, 신정론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름답게 변한 것이다. 고통은 중요하지 않아. 하는데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봤어요.

레비나스는 이런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서구 신학과 철학에 있어서 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신정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라고, 신정론의 종말을 고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서구 도덕성의 붕괴나 인간성의 붕괴나 이런 것들은 근대사회가 함께 보여준 여러가지 측면도

있기 때문에, 제가 간단하게만 얘기 할게요. 근대 모더니티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이루었던 가졌던

중세에 교회의 지배, 교황의 교권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인류가 가졌던 꿈 중에 하나는 인간이 과학을

통해서 유토피아, 인간이 정말 고통이 없고 아름다운 세상, 인간이 주인이 되는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겠다는 그런 희망이었어요. 그것을 통칭적으로 말해서 "모던 프로젝트(Modern Project)"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거예요. 근대가 가지고 있던 하나의 목적이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이렇게 과학이 급속히 발달하다가는 어느 순간엔가 우리가

꿈꿔왔던 고통과 질병과 눈물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유토피아에 인류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었는데, 홀로코스트 사건이라는, 정치적으로도 근대의 낭만주의적인 긍정적인 미래상에

충격을 가져다 주었죠. 인간이 이성으로 제도적으로 비도덕적이고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에, 근대가 한참 진행되면서 2차대전 때 홀로코스트 사건을 통해서 이 이후에

포스트모던 담론이라는 것이 활발하게 시작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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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25ㅗㅗ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신은 죽었는가? (Is God Dead?)라는 문구가 하나가 될 것 같아요.

이것은 타임지(Time Magazine)표지인데 1966년 4월 8일자 판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죽었는가라는

아주 도발적인 제목으로 타임지 기사가 실렸던, 표지 스토리였겠죠. 소위 1945년에 2차 세계대전이

종결한 후에, 66년이면 약 20년이 흐른거죠. 홀로코스트의 참화를 겪으면서 인류가 어떻게 이렇게

근대의 낭만적인 근대사회가 발전하리라는 이상이 다 붕괴되고 난 후에 1960년대 인류가 철학자들

지성인들이 생각했던 것은 신이 죽은 세계를 이야기 했던 거예요. 희망이 사라진거죠.

여러가지 사람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토머스 알튀르라는 사람이 사신신학, 소위 신의 죽음의

신학을 이야기했고요. 특히 유대교 신학자들, 홀로코스트라는 개인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포한 리차드 루벤스타인(Richard Rubenstein)같은 유대인 학자도

있어요. 이러한 2차 대전 이후에 신의 죽음의 신학들, 지금까지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레비나스는 이러한 줄기와는 조금 다르게 소위 타자윤리를 주창하게 되죠 .소위 신의 죽음의

시대, 하나님이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영역과 학문의 영역,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다시 한번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레비나스는 이것이 바로

타자에 있다고 이야기해요.

이 타자, Ethic of Other, 타자윤리라고 이야기하는데, 레비나스는 타자가 어떻게 얘기할 수

있는가. 아주 간단히 얘기해서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옆에 앉은 친구분들, 나의 이웃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신성이 깃들어져 있다. 그 신성, 그 하나님의 타자, 내 옆에 있는 이웃이 하나님이고,

그 이웃으로부터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돌볼 것을 요청받는다고 이야기해요. 더 나아가서

레비나스는 주체 소위 Subjectivity, 근대에 가장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가 주체성, 나, 자아, 자아 인식

같은 자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데카르트(René Descartes)부터 시작해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인데,

레비나스는 여기까지 얘기해요. 나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나는 타자를 통해서만 나의 바른

인식이 가능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나는 타자를 통해서, 내가 내 주위에 있는 타자를

통해서만 나는 나 자신을 파악할 수 있다고 얘기해요. 이것은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저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동양적인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서 오래 살면서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점을 몇 가지 발견했는데,

우리는 항상 주어에 ‘ 우리’ 가 오죠. ‘ We’ 가 주어에 오죠. 그래서 아내를 소개할 때 여기 우리

아내입니다. This is 'our' wife가 되잖아요 그러면 미국사람이 깜짝 놀라는거죠. This is 'my' wife가 되야

하는데, This is 'Our' wife? 언제 당신이랑 나랑 아내를 공동으로 섬겼나? 우리 말 가운데는

문법적으로는 어긋나지만 소위 공동체 의식, 이걸 어떤 학자는 ‘ WE’ Consciousness 우리의식이다

라고 얘기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는 유교문화권 속에서, 소위 나라는 존재는 항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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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속에서 규정돼요. 나는 누구집 자식이고, 어느 부모님 밑에 있고, 내 형재자매는 누구이고, 나는 어떤

학교를 다니고 그래서 우리 사회 속에서 학연 지연 그리고 이런 것들이 중요시되는 이유가, 한국인의

심성이 있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우리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의식구조 속에 그런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외국인들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죠.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뭘 좋아하고 My hobby is 이렇게 얘기하고, 저는 항상 소개 할 때마다 힘든게, 내

취미가 뭐가 있지? 이런 것을 이야기할 때, 항상 같이 하고 같이 놀고 했는데, 혼자 있으면?

정서상에서 오는 의식 구조상에서 오는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차이들이 있는데

레비나스는 굉장히 동양적 사유를 하는 사람이라 이야기할 수 있어요 나는 나 혼자 유아독존하는

그런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사회성 속에서 여러 사람들의 관계성 속에서 내가 규정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죠. 그래서 레비나스는 어떻게 까지 얘기하냐면, 나는, 주체는 타자의 볼모로 잡혀있다.

Hostage로 잡혀있다고까지 이야기해요. 나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타자의 음성에 귀 귀울여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규정된다고 이야기하죠.

바로 여기서 책임, Responsibility가 생기게 되는 거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레비나스의 책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선한 행위 선한 사마리아인이 한번 도와주고

여비를 주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적인 책임을 의미해요. 어느

정도까지 가냐면, 이 책임이 어느 정도까지 실현 가능할 수 있을까? 레비나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얘기하는 건 좋은데, 도무지 그게 실현 가능하냐?

아주 어려운 질문이에요. 레비나스는 어떻게 이해하냐면, 주체와 내가, 나와 타자의 관계에 있어서

나는 타자에게 전적으로 종속되어있는 관계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타자 앞에 서면 나는 항상

작아지는 존재예요. 타자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하고 돌보아야 하는 그런 입장에 서 있는 관계를

얘기해요. 이러한 생각은 현대의 철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 신학자들에게 어려운 문제들을 제기하죠.

어떤 면에서 그러냐면, 현대 윤리학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평등이라는 개념이거든요. Receive

probity라는 상호성, 너와 내가 동등한 위치에 섰을 때, 그때 윤리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거든요.

어떤 사람이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혹은 힘에 관계에 있어서 A가 B라는 사람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한다면 벌써 이건 평등한 관계가 아니잖아요. 이건 윤리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평등한 지평에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해요. 이 사람이 내가 어떤 지위와 어떤 배경인지 전혀

모르고, 나는 윤리적으로 이 사람과 그 사람이 어떤 배경이든지 간에 대통령의 아들이건 혹은 심지어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민주주의에서는 그 사람과 내가 윤리적으로는 동등한 관계에 있다고 보는 거죠.

그게 소위 말하는 존 러기(John Ruggie)가 얘기했던 무지의 배일에 싸인 기본적인 윤리적인 기초적인

상황이다 라고 얘기를 드릴 수 있어요. 아무튼 이 레비나스는 이러한 현대 윤리학이 가진

상호동등성을 완전히 파괴시키는 거죠. 이 무게중심이 나와 타자에 있다면, 근대에는 주체에 있어서

근대철학자들은 주체가 중요하다, 내가 중요하다 라고 했는데, 레비나스는 이 관계를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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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27ㅗㅗ

역전시켜버립니다. 타자가 훨씬 중요하다.

레비나스가 이렇게 얘기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힘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의 개인적인 실존적인 홀로코스트 경험에 있지 않나 생각이 들고요, 또하나는 이 타자를

통해서 레비나스는 신의 음성과 연결을 시키고 있죠. 타자가 나에게, 나좀 도와줘 이렇게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는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다 라고 까지 얘기하고 있어요. 제가 그림을 하나 가지고

왔는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그림 중에 하나에요. 레비나스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그러한 그림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체코의 화가인 레오 하스(Leo Haas)라는 사람이 ‘ The Blind of

Theresienstadt’ 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Theresienstadt는 체코에 나치가 만든 유대인 수용소였어요.

Theresienstadt의 시각장애인들이라는 의미죠. 이 시각장애인들 그림을 잘 보세요. 모두가 시각장애를

가지신 분들이죠. 그런데 서로 팔짱을 끼고 연대해서 걸어가고 있죠. 또 인상적인 것은 이분들이 다

하얀 지팡이를 짚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앞은 못 보지만 자신의 하얀 지팡이를 짚어가면서 어두운

세상을 밝혀나가는 길을 걸어가는 힘이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잘 보여주는게 아닌가 생각해요.

레비나스는 철저하게 유대인이었어요. 유대인이다라는 말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고,

우리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어디서 드러나냐면, 기독교를 비난하는 글을 레비나스가

쓴 적이 있는데, 기독교를 이야기하기를 Childish Religion이라 이야기해요. 아까 말씀 드렸던 신정론과

관련해서 이야기하는데, 기독교는 고통이 찾아오면 너무나 쉽게 하나님에게 의지하려 든다 라는 거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서로 손을 잡으면서 자신들의 삶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극복하려 한다. 유대교는 Adult Religion이다 라고 합니다. 기분 나쁘죠. 그리고

정확하게 레비나스가 유대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게, 기독론이 가지고 있는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시는데,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예요? 참 인간이신 동시에 참 신이다라고

고백하잖아요. 그 말은 뭐냐면 예수님이 초월적임을 보이시는 동시에 우리 삶에 함께하신다 라는 거죠.

다시말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레비나스에 있어서는 예수그리스도라는 고리가 없다고 보시면 되요. 그러면 어떻게

나아가느냐,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내가 타자를 향한 윤리적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이 윤리적 실천에는 구체적이고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노력이 필요하죠.

굉장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에요. 과연 인간이 타자를 위해 100% 헌신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보고,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학자 입장에서 인간관이 죄인이기 때문에 레비나스처럼

하라면 못할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감히 타자를 위해서 어떻게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을까. 그런

자신이 솔직히 없어요. 윤리적 실천만으로 구원이 가능할까.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가리켜서 Jewish

Humanism이라 이야기하죠. 유대교적 인본주의다 라고 이야기 해요. 레비나스는 이 말을 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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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을 제기할거예요. 왜냐면 그는 레비나스가 초월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가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결국 우리가 초월을 안다는게, 뭔가 초월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 세계 저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네 이웃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사람에게 정말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이야기하거든요.

레비나스는 소위 계시, 우리는 계시를 이야기하는데 특별 계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계시

아니에요? 유대교에 있어서 계시는 윤리적 차원의 계시예요 내가 남을 돕는 가운데 타자를 위해 나의

삶을 전폭적으로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길이 바로 내가 하나님의 자취를 체험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이렇게 얘기 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얘기해볼까 합니다. 아까도 얘기 했듯이, 레비나스의 이런 타자

윤리는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근대성에 대한 여러가지 위기를 겪고 있는 서구의 신학계, 철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그가 가지고 있는 타자에 대한 윤리는 서구철학에 수 천년간 내려온 근대 이후

가져왔던 주체중심의 철학,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소위 주체 중심의 철학을 완전히 뒤엎고 타자가

우선이라는 새로운 전혀 역발상적인 새로운 시스템을 제시했기 때문에 큰 반향을 가지고 왔고

레비나스 이후에 많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 신학자들이 레비나스의 철학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론적으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레비나스의 철학을, 신학을 혹은 신학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보면서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저는 레비나스가 비록 유대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지만 우리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사유할 수 있고 또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그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열려있다고 봐요. 그 가운데 하나는 탈 근대성 속에서 주체가

근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주제였다는 주체성을 상실한 시대, 포스트모던 시대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 라는거, 우리가 기독교의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전파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결국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 함께하는 삶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단순하게 내가 복음을 외치고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같이 이차원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더 타자의 삶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하는 삶, 타자를

단순히 돕는 차원을 넘어서 타자와 함께하는 삶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레비나스가 기독교 신학에 혹은

우리 기독교인에게 주는 도전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아주 도전적인 요구죠. 우리가 한번

도울 수는 있죠. 자선할 때 한번 돕고 여러가지 기부를 할 수 있고 그런데, 제가 도발적인 질문을 하면,

거지를 한번 도울 수는 있지만 거지와 같이 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잖아요. 그런데 레비나스는 지금

자신의 삶 속에서 거지와 같이 살라고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바로 네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취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거예요. 그러니까 굉장히

레비나스가 기독교신학에 주는 도전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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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29ㅗㅗ

또 하나는 고통의 문제를 잠시 얘기 했는데, 기독교인 입장에서 레비나스의 고통에 관한

지적은 기독교인이 정말 깊이 반성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봐요. 고통의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다

해결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학생들한테 제 경험을 이야기하면, 제가 아까 잠시 개인적인 말씀을

드렸는데,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제가 가장 크게 은혜 되었던 분은, 찾아와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목사님을 크게 쓰시려고 그래요. 하는 분들이 아니라, 제가 가장

크게 은혜 되었던 분은 그냥 와서 아무 말 없이 저를 꼭 안고 한참 같이 울어주는 우셨던, 저희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제 마음에 가장 큰 은혜가 되셨어요. 그분이 제게 가장 큰

은혜가 되셨어요. 결국은 타자와 함께 하는 게 그런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누구를

위로한다고, 고통에 대해서 반응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남들의 고통, 남들의 어려움을 함부로

이해하고 해결해줄 수 있겠어요? 다만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내가 너와 함께, 내가 너의 고통을 다

모른다 할지라도 내가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마음을 표현하는 게 가장 좋은 위로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이런 도전을 줘서 기독교인이 가지게 되는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해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두서없이 얘기했는데 지금까지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국운 네 감사합니다. 시간을 더 드렸으면 좋겠는데, 레비나스가 특히 시온주의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입장이라던지, 여러가지 얼마나 개인적으로 괴팍한 분이었는가 이런 얘기까지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시간이 허락치 않는것 같습니다. 예정된 대로 얘기를 진행해보겠습니다. 두분

교수님께서 오늘 박교수님 하신 말씀에서 어떤 실마리를 잡아서 시작해주셔도 좋고 아니면 그동안

한동 안에서 이런저런 나누어졌던 이야기들 속에서 실마리를 잡아도 좋고 아니면 그런 것과 상관

없이 그냥 이 자리에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을 하셔도 좋습니다. 10분 정도씩 두분 말씀을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나윤숙 가나다 순으로 하시자고 해서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토론회를 지난주에 갑자기

교수님이 알려주셨는데, 만들어놓았던 질문을 먼저 드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두번째 세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제주도 글제주도 없는 사람이지만 몇 자 적었거든요. 일단 읽을게요.

우선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레비나스 같은 유태인 철학자가 고통의 문제, 특히 타자의 고통의

문제와 신의 개념을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과 일종의

죄의식 같은 것이 제 안에서도 꿈틀거렸던 것 같습니다. 일단 잠정적으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자아

개념을 여전히 차용하자면, 레비나스 선생님도 고통스러워 하셨기는 하지만, 내가 나의 고통을

바라보는 혹은 수용하는 자세와 내가 타자의 고통을 대면하는 자세는 인간 실존에서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곤 합니다. 제 담화가 좀 칸트적이지요, 특히 지적하신 것처럼 신정론의 이름으로

자행된 타자의 고통에 대한 합리화 내지는 정당화, 그리고 어차피 한 고리에 걸려 있는 나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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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라는 문제는 저 역시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절대적으로 무기력하지만 또한 절대적으로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론을 들고 나왔고, 이러한 명령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책임을 통해 거꾸로

우리는 신, 혹은 신적인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타인의 위치에 내가 들어가서,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그야말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

고통을 온전히 대신 수용해야 하는 것이 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아주 유사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물론 유대교 전통에 있는 레비나스에게는 incarnation 자체가 처음부터 어불성설일

수 밖에는 없었을 수 있고, 또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양이 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오용 내지는

악용하여 타자에 대한 나의 윤리적 책임을 떠 넘길 위험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겠으나, 아주 조심하고있어요.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를 완벽하게 구현한 샘플이라고 제게는 여겨지는

예수그리스도를 혹은 십자가 사건을 레비나스는 어떻게 수용 내지는 해석 하고 있는지 조금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 제가 원고를 받고 질문을 만들어봤고요.

제가 그 전에 제가 마음대로 타자에 대한 이해 없이 만들어놓은 질문, 요즘 슈퍼마켓 가면

우유 하나 사면 요구르트 같은걸 두개 정도 얹어줘요 그런데 정말 우유 사러 갔다가 우유보다

요구르트가 더 맛있을 때가 있거든요 그런 심정으로 들어주시면 됩니다. 잘 알려진 대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유대교, 기독교 모두의 정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외재성 차원에서 볼 때 자칫 이 명령이 레비나스가 주체의 폭력이라고 했던 동일성의 문제와

중첩될—물론 오해라면 좋겠지만요—혐의가 있다고 여겨질 소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박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질문이 하나 더 남았어요 제가 이왕에 토론의 역할을 맡은 여성으로서 여성에 관한

질문을 드리지 않는 것도 실례가 될 지 몰라 예의 상 한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사실 여성들에게

레비나스는 애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철저하게 소외된 타자의 얼굴을 중심으로 한 그의

윤리철학은 역시 역사에서 소외된 주체로서 고통 당한 여성들과 같은 집단에게는 아주 반가운 소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레비나스는 타자성을 잡히지도 않고 신비하다는 표현을

하며 여성성에 비유하고,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책임을 잘 나타내주는 예로 어머니, 혹은 모성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이를 통해서 향유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간주되었던 전통적인 어머니상에서

타자에게 내가 향유하고 소유하는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일종의 윤리적인 주체로 어머니상이

재정립된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레비나스가 '나'를 남성으로

전제하면서 여성처럼 타자를 환대하라고 권면할 때, 여전히 여성의 희생을 전제로 한 남성의 윤리성

회복을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조장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가 희생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신정론의

이름으로 타자에 대한 고통을 회피하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던 것처럼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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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31ㅗㅗ

여성이라는 타자를 미화시키고 존재를 왜곡시키는 오류를 다시 반복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이에 대한 박원빈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국운 이거 지금 우유 통에 매달려 있는 요구르트가 굉장히 큰 것 같습니다. 조금 이따가

모아서 같이 해주시겠어요?

장수영 저는 질문을 만들어오지는 않았고요. 저는 과학기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기

선생님들과 레비나스를 읽는데, 레비나스가 누군지도 모르고 재미있는 책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그

경험이 저한테는 참 재미있었어요. 저만 재미있는지 알았는데, 거기 선생님들 다 오셔서 레비나스를

읽으러 오면 엘리스의 원더랜드에 갔다오는것 같다는 이야기까지 했어요. 여러분들 한번 이 책을

읽어보시면 공감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참 읽기 힘든 텍스트였던것 같습니다. 그때 느꼈던 것과,

마지막에 한가지만 교수님한테 토론 말씀 드릴까 합니다.

저는 사실은 과학기술을 하는 사람으로써 다원주의적인 생각이 불편해요. 과학하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현대에 가장 중심에 있었고, 확실성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첫 장이 끝날 때부터

카르미데스(Charmides)와 결별하겠다. 우리는 다원성을 지양한다. 그리고 중심에 있는 게

환원불가능성,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처음에 새롭기도 하고 도전이 됐어요.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 환원이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무엇을 측정하고 예측하고 통제한다는 것에 기본이 되는

과학기술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데, 이게 다 환원이 되니까 우리가 종이 위에다 얹어서 숫자로

환원해서 다시 구성해서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자동차도 만들고 기계도 만들고 대포도 쏘는 이런

것들을 하는 게 과학기술인데, 그런데 쭉 읽으면서 나중에 깊이 이해하면서, 아 이게 어디선가 느끼는

점이 있겠다 했던 부분이 향유라는 부분에 들어가서, 그때 좀 알게 된 것 같아요. 과학기술이 가지고

있는 환원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환원 불가능한 실제가 환원불가능성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맞지

않는,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내가 바라보고 있는 불완전한

이해이지만, 그래도 그것이 주는 유익은 내가 향유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은 했습니다. 지난번

콜로키움에서 그런 것들을 나누어보았는데요. 그때 레비나스의 생각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학문을 한다는 것, 도대체 주체성, 그런 것들이 해체가 되는데, 레비나스에 의해서. 그

다음에 빛, 이성 파악하는 것, 그리고 남성성, 파악하고 손아귀에 넣고 분해하고 다시 새롭게

구성해내고 하는게 그런걸 포기한 학문이 가능할 것인가 학자로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후반부를 읽어가면서 아들의 이미지가 나올 때 재미있었습니다. 비록 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몸짓, 애무라고 표현하는데, 그런 것들을 통해서 여성성, 존재하고 있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것은 나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나의 연결이고 연장이지만 그러나

타자의 존재이죠. 그것이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 이상으로 우리 삶 속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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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물을 레비나스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생각한다. 말한다. 소리를 낸다고 하지만

우리가 알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소리라는 과정을 전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가 손을

이렇게 움직이는데 교수님 손 움직이시는 건요, 그 안에 전기가 어떻게 흐르고 화학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건 아무도 모르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단지 향유할 뿐이죠. 그런 결과물들, 그런

가능성도 있겠다. 그런 학문의 가능성도 가능하겠다. 내가 이렇게 뒤로 물러서서 관조하고, 사고와

모든 생각의 결과들이 내 소유가 아니고, 그것은 이세상에 대한 나의 몸짓, 무언가를 잡으려는 몸짓

아래서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 속에서 만들어지는, 아들과 같은 것들이다. 라고 그렇게 굉장히

겸손한 태도의 학문도 가능하겠다 같은 생각도 가능하겠다 하는 생각도 좀 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기독인에게 그 타자가 하나님이냐, 복음에서 명쾌하게 읽으면서 저는

박교수님 의심의 해석학 the hermeneutic of suspicion, 모든 것을 다 해체하는 이런 생각을 그런

생각을 할 때 결국 하나님을 버리게 하는, 하나님이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기 쉬운데, 레비나스의

철학은 거기서 오히려 윤리의 회복, 비록 의심의 해석학 가치, 의심으로 출발하지만 오히려 회복을

한다는 교수님 말씀이 인상적이었고 이해가 됐습니다. 그래도 그 타자는 구약에 나와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소리를 들었던 아브라함을 생각해보면, 그리스도라는 역사도 없었고 정말 이방인들 속에 있었을 때

들리던 그 음성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레비나스가 얘기하고 있는 그런 타자의 존재와

맞아떨어지는 것 같고, 그 후에 역사들이 만들어짐에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어떤 색깔을

갖게 되기 때문에, 그것까지 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 연결시키기 어려워지기는 것 같습니다.

원초적으로 유대인이 가졌던 하나님의 모습은 레비나스가 말했던 타자와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신약의 하나님과는 어떻게 되느냐, 이건 믿음의 문제인데, 신약의 하나님은 로마서에서

1장 18절을 제가 가지고 왔는데,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좆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그러셨다 하거든요. 성경을 통해서라는 말도 없이 그냥.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영원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로마서 1장 20절) '알면서' 그 다음 구절이 나오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래서 감사하지도 않고 우리가 우둔하게 우상을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또

갈라디아서에 가게 되면 몽학선생 이야기가 나오고 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넣어두신 창조물의 모든 현상과 모든 것 안에, 사실 우리 안에 우리가 지성이라고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거 안에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이다. 난 너희들에게 이렇게 사는 삶을 제시하고 있다.

하는 그런 것을 다 심어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레비나스를 들으려고 한다면 타자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갈라디아서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 믿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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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33ㅗㅗ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질문은 이게 마지막인데요. 우리가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기도 힘들고 너무나 사람의 생각과

철학이 확고하고, 그 사람이 구성한 나름대로의 세계관이 탄탄하게 있는 대상에게 접근할 때. 더

어려워 지는 것은, 그 사람과 내가 같이 공동체를 만들어서 공공성 윤리 정의를 같이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이런 다원주의 속에서 여러 개의, 여러 형태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안에 어떻게 공공성을

건설할 수 있는가 하는, 그런 공공성의 기반이 뭐가 될 수 있는가 생각했을 때 저는 여기서 말하는

몽학선생. 마음에 드러나는 하나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 그런 것들이 우리 기독인들이 이제

그리스도 온 후에는 필요 없는 것이지만, 그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는

우리는 공공성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런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 그래도

이세상을 붙들 수 있는 공공성을 건설하는 이것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를

돌보는 일을 위해 그리고 파괴적 전체성에 대하는 공공성을 건설하기 위한 범 세계관. 즉 연대에

정언적 기반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정언적 기반의 가능성이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제 1 철학으로서의 의미, 이유가 없다는 거죠.

왜냐면 정언적으로 '살인하지 말라' 아무 설명이 없어요. 가언적이다 하는건 조건이 붙는다는 거죠.

조건이 붙어서, 이러니까 하지 말라는 거야, 네가 사람을 죽이면 나중에 네가 죽임을 당하잖아. 이건

가언적인 것이죠.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전혀 내 안에 포섭할

수 없는 존재가 나에게 와서 다짜고짜 '죽이지 마' 그런다는 거죠.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윤리가 사실은 상당히 그렇게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선행을

볼 수 있다고. 그래서 여기서 레비나스가 그런 문을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잘 알 수는

없지만 레비나스가 죽은 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왜 너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잘 풀어나갔는데 왜 직접적으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냐고 하면 그랬을 것

같아요. ‘ 화가 나서 그랬어요’ 라 할 것 같아요.

박원빈 예 우리 두분 교수님들 말씀이 너무 감사하고요. 제가 선배 교수님한테 배운 건데

별로 안좋은 건데, 학회에 가서 가장 잘, 자신의 발표할 것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좋은 길중에

하나는 발제원고를 최대한 늦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그런거였는데, 제가 고의로 그랬던건 아닌데

여러가지 사정이 있다 보니까 이국운 교수님 재촉하실 때까지 깜빡 잊고 있다가 급하게 원고를

드리고. 이국운 교수님 말씀하시기는 여러 과 교수님들이 오셔서 그냥 개인적인 이야기 하고 편하게

말씀 하시는 거라고, 그래서 저도 편하게 왔는데, 두분 평을 해주시는 걸 듣고 두분이 전공이 영문학

산업경영학 이런게 아니시고 전공이 철학이신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깊이 있는 이해와

질문 감사드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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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숙교수님 말씀하신 것부터 제가 생각나는 대로 간단히 말씀드리면요. 나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레비나스는, 제가 나눠드린 논문에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일반 윤리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여러가지 케이스 스터디를, 사실 윤리라는게 굉장히 파워 다이나믹스(power

dynamics)가 배제된 체 이야기할 수 없는 거죠. 거기 일단 힘이 들어가게 되면 윤리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그 가운데서 윤리적인 테제들을 이끌어내어 지는데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의 관계에 있어서

겪는 여러가지 개별상황을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아까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적인 차원에서

타자의 우선성만을 얘기하고 있거든요. 하면서 나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과의 관계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구체적 실생활 속에서 적용한다고 했을 때 조금 더 논의가 되어져야 하고 구체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을 하는데, 레비나스 본인은 나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타자의 고통 만이 우선이 되고 그 가운데서 나의 고통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에 있는 모든 관계성에서 타자가 우선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고.

예수그리스도의 관계에 있어서 잠깐 말씀드렸던 것처럼, 레비나스는 철저히 유대교 식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레비나스가 기독교의 기독론, Christology를 비판하면서 자기는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겸비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 했거든요. 이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유대교 정통성에서 나오는 건데, 여러분 ‘ 야훼(Yahweh)’ 라는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야훼를 히브리말로 쓰면, 야훼라는 발음을 못해서 유대인들이 ‘ 아도나이(adonay)’ 로

바꿔서 읽었거든요.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야훼라는 이름 자체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야훼라는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도나이라는 것이 '주', '주님' 의 그거거든요. 성경에

주께서 나를 어떻게 하시고 라는 건 다 아도나이에 번역인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했거든요. 모세, 가장 지상의 온유함이 승한

사람이었던 모세도 본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고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등이었거든요. 하나님이

지나가시고 난 후에. 왜냐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직접 보면 다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레비나스도 이런 유대교 전통 가운데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제가 잠깐 말씀 드렸지만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돼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 앞에 구원의 보좌로 나아가는 그런 식의 구원의 교리를 말씀들은

레비나스 책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아까 나교수님이 잘 말씀해주셨는데, 다만 예수그리스도가

레비나스가 말한 가장 타자를 위해 자기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신,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레비나스가 말하는 참된 인간상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바로 그 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기독교적으로 이해했을 때 우리가

기독교 신학의 케노시스(Kenosis)라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빌립보서 2장에 하나님께서 보좌를

버리시고 스스로를 비우시고, 영어성경 King James 버전을 보면 'empty himself'라고 되어있어요.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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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35ㅗㅗ

스스로를 비우셨다' 라고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자기 스스로를 비워서 낮은 자리에 까지 처할 수 있을

때, 그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의 참된 아들로서 이 땅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실 수 있던 것처럼, 우리가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의 가르침대로 만약에 실천한다면,

내가 내 자신이 가진 것을 얼마나 포기할 수 있을까 라는 구체적인 질문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에 하버드에 마이클 센달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데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정의는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될 수 있어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다시 조사해보아야 한다는 거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혹은 타자의 향유를 타자가 누리고 있는 것을 빼앗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철저하게 나 자신에

대해서 나의 소유, 내가 당연하다고 느끼고 받아들였던 것들을 철저하게 재구성하지 않고서는,

조사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도전적인

가르침인데, 아까 교수님 말씀하셨던 질문에서 두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면, 제가 첫번째 질문은 잘 못

들었어요. 우유와 요구르트 얘기가 너무 재미나서,

나윤숙 두번째 질문 다시 읽어드릴게요. 잘 알려진 대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유대교, 기독교 모두의 정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외재성 차원에서

볼 때 자칫 이 명령이 레비나스가 주체의 폭력이라고 했던 동일성의 문제와 중첩될—물론 오해라면

좋겠지만요—혐의가 있다고 여겨질 소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을 듣고싶습니다.

박원빈 굉장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도 제가 이 질문을 듣고 나교수님은 철학전공 하신것

같다는 생각을,

나윤숙 상대적으로 제 전공에 취약하고 잘 모른다는 말씀이시죠? (청중 웃음)

박원빈 이웃사랑을 타자의 외재성과 연결해서, 이것도 또 하나의 동일성으로 오해될 수 있지

않냐, 그런 질문이신 것 같은데, 이것은 제가 마틴 부버(Martin Buber) 이야기를 좀 했으면 좋겠어요.

마틴 부버 하면 레비나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유대교 철학자인데, 마틴 부버가 썼던 유명한 책 중에

"Ich und Du", "나와 너"라는 책이 있습니다. 근대성 사회 이후에 인간의 관계, 마틴 부버도 관계성을

중시했거든요, 인간의 관계가 나와 그것, 즉 I와 It의 관계로 전락되었는데, 나와 사물, 그 어떤

인격성이 배제된 도구적이고 사물화된 개념으로 전락되었는데 이런 인간관계에서 벗어나서, 나와 너

인간 대 인간이 만나는, 인격 대 인격이 만나는 새로운 관계로 전환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레비나스는 마틴 부버의 나와 너의 도식을 비판을 했어요. 그 이유는 나와 너라는 건 항상 1인칭과

2인칭의 관계 속에 있는 것 아닙니까? 1인칭과 2인칭의 관계 속에서는, 항상 여기에는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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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나믹스가 존재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쉽게 말씀을 드리면, 제가 한동대에 초대를 받아서

왔는데, 저는 손님으로 왔는데 나교수님은 여기 교수님으로 계시거든요. 저는 나교수님보다 힘에서

약할 수 밖에 없겠죠.

나윤숙 손님은 왕이죠. (청중 웃음)

박원빈 손님이 왕이면 손님이 힘이 더 세질 수도 있고, 이런 여러가지 파워 다이나믹스가

나와 너라는 2인칭 관계 속에서는 항상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레비나스가 말하는 이웃 개념, 타자

개념은 일리아(Ilya)라는 단어, 어떻게 보면 철학적인, 테크니컬한 용어인데요 '제 삼자성' 이라는 것을

들고나옵니다. 나와 너의 파워 다이나믹스를 배제하고, 나와 타자의 관계라는 것은, 타자는

2인칭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3인칭으로부터 나에게 오는 것이다. 라고 얘기해요. 그래서 이

타자는 항상 레비나스가 이해하기에는 항상 모호해요. 타자를 내가 주재화 시킬 수, 하나로 주재화 할

수 없다고 얘기하거든요. 주제화 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나윤숙 교수님,

한동대학교 교수님 이렇게 한마디로 나교수님을 한마디로 카티고리 안에, 규범 안에 가둬놓고, 그렇게

규범지을 수 있기 때문에, 타자성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타자성은 나와 너의 파워 다이나믹스를

초월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신성한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나와 너의

힘의 관계를 배제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야만 된다고 얘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의 음성에 내가 유일하게 반응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얘기하는 것뿐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부분은 종교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의 철학이 많은 철학자들로부터 이게 무슨 철학이냐 신학이지 라고

비난받기도 하고, 또 많은 신학자들로부터는 이게 무슨 신학이냐 철학이지라고 비난을 받는 이유가 그

부분에서 기독교 철학과 유대교와 서구철학의 경계선 상에서 양자를, 히브리적인 것과 헬라적인 것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자신의 사유의 논의를 펴고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두가지 면이 다

나타나고, 그래서 레비나스가 가장 염려했던게 그러한 자신의 타자성이 동일성으로 오해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되냐면, 나와 너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그럴 수밖에 없죠. 이것은 아까도 얘기 했듯이

헤겔의 변증법, 헤겔의 변증법이 제가 초두에 말씀 드렸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체성의

철학이거든요. 나와 너의 다른 것들을 하나의 전체적인 Totality라는 하나의 체계 속에서 묶어버리겠다

라는 거죠. 그래서 나와 너가 그 전체성의 체계 안에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죠. 결국 그 체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가 자신의 도식을 깨기 위해서 철학적 기획으로 가져온 것이

‘ 제 3자성’ 여기에 종교적인, 신학적인 의미를 가미해서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음성이고 신성의

자취이다 라고 얘기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국운 페미니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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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37ㅗㅗ

박원빈 페미니즘은 아까 얘기했듯이 페미니즘은

나윤숙 저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결코 쓴 적이 없는데 (청중 웃음)

박원빈 여성주의, 레비나스 철학을 페미니즘과 적극적으로 연결하려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고요. 그리고 레비나스 체계 자체가, 아까도 말씀드렸다 싶이 정의 개념과 연결해서 말씀 드리면,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기 남학생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 한국 사회에서 여성관계에 있어서

생각을 할 때, 내가 남성으로 누릴 수 있는 지위, 가정에서 아들로 누리는 지위, 사회 속에서 남자로서

누리는 지위, 혹시 그게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부당한 것이 없는가를 철저하게 내면화 하면서

자기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게 레비나스의 정의라고 얘기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은 우리가

얼마든지 연결할 수 있고, 다만 레비나스의 용어 가운데, 이 사람도 1905년 생이거든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세대예요. 그러니까 현대에 있어서 Neutral Language,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그의 글에서 하나님(God)을 He라고 쓰는 건 전통 유대교 주의자답게 그런 부분에서 너무

남성적인 언어이다 하는 비난을 받는데, 그것은 상당히 지엽적인 비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레비나스 책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페미니즘으로 연결해서 발전시킬 수 있는 사상적인 체계들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국운 나교수님 질문은 제가 기억하기에는 그것이 오히려 여성을 더 타자화 하지, 그런

결과를 낳지 않느냐는 것을 기억이 되는데.

나윤숙 레비나스 선생이 의도하셨다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렇게 될

소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박원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국운 여성이 자기를 비우고 남성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나 이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박원빈 그렇죠. 그럴 수도 있죠.

이국운 답을 하셔야 합니다. 안하셔도 되고

장수영 저는 사실은 레비나스가 여성성과 남성성을 이야기할 때 남성, 여성 우리가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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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개념 보다는 우리 존재 본질 자체에서 내가 뭔가를 거기에 어떻게 파악하고 그것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을 남성성이라 얘기 하는거고, 거기에서 포기 상태에서,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따르는

어떤 결과들을 떠안는, 그리고 생산성, 토양이 되어주는 그게 보니까 그 시대에 봤던 그 시대의 남성의

그리고 여성의 성질을 가져다 쓴 것이지, 오히려 그보다는 주체성과 어떻게 보면 그걸 남성성이라

보고 여성성이라는 것은 그것 안에서 자기 주체를 사실로 직시하고 바라보기를 포기했을 때 그런

토양 안에서 뭔가 향유하게 되고 얻게 되고 그런 의미 아닌가요?

나윤숙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요, 레비나스 선생님이 안티 페니미스트거나 그런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지 후대의 사람들이 그분의 어떤 선한 의도와 무관하게 그렇게 악용하거나

오용한 소지를 자신도 모르게 남기신 분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이 부분에 우리가 주의하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원빈 이미 답을 가지고 말씀하신거기 때문에 저도 철저히 공감합니다.

이국운 : 그런데 그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서 과부를 홀아비로 바꿔 읽어보면, 요새는 또

차라리 과부는 삶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윤택함을 유지할 수 있는데 홀아비들의, 특별히 기러기

홀아비의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개입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장교수님 특별히 덧붙일 말씀이

있으신가요?

장수영 없습니다.

박원빈 장교수님 레비나스를 아주 기독교적으로 잘 이해하셨고 너무 좋은 코멘트라고 생각을

하고요. 초반부에 말씀 하셨던 다원성에 관련된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레비나스나 혹은 근대 이후에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자라던지 철학자들이 강조하는게 타자를 얘기하고

주체를 해체시키고 타자의 의식, 타자의 존재성, 존재론을 기존의 전통적인 서구 철학의 도식을

뛰어넘어서 타자를 얘기하다 보니까 당연히 그 동안 Marginalized 되었던 타자의 잊혀진 목소리들을

자꾸 발견해내고, 그런 작업들을 하고 있어서 앞으로 우리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기독교 변증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주 중요한, 기독교인으로서 주어진 과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교수님 말씀하신 것, 공공성의 건설 얘기하시고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윤리적 책임

말씀하셨는데, 결국에는 그게 레비나스가 말했던 것과 잇닿아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서요.

결국에는 공허한 신학적 사변이나 구호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삶으로 보여주실 수

있는가가 중요한 과제로 남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 기독교가 한국 사회

속에서 많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비난을 받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예수의 가르침, 성서의 가르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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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39ㅗㅗ

너무 많이 미달되게, 우리가 다 죄인이고 거기에 완벽하게 도달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삶의 모습에, 이게 너무 지나치게 가면 율법주의가 되는 오류를 피할 수 없지만, 윤리적

모습에 있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어서, 그런 믿지 않는 사람들의 비난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데, 그런 부분을 우리가 좀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우리 삶과 신앙을 어떻게 일치시켜나갈

것인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어떻게 하나로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해 낼 수 있을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레비나스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유대교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진정한 인류를 구할

휴머니즘이고 이것이 바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인간적 Universalism이다 라고 까지 얘기

하거든요. 그러니까 굉장히 유대교 뿌리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기독교인이 한동대

학생들이 글로벌 크리스천의 비전을 품고 기독교인이 어떻게 세계를 품고 세계로 나아갈 때 결국

영향력 이라는 것은 삶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닌가, 하루하루 삶의 영성에서 나오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이런 부분에서 좀 도전을 받고 고민하고 지금부터 실천하는 노력들을 서로 해나간다면

중요한 기독교적 실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장수영 저는 사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다원주의와 윤리가 어떻게 가능한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사람 죽이는게 좋다. 예를 들면. 왜 그런데? 그냥 그렇다. 그러면 그렇게 살게 놔둘 수 없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서부터 안되는 거냐? 저는 이게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레비나스가 아주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 사람이 유대교가 희망이라 할 수 있는 그것도 어떻게 보면 호소력 있는것

같아요. 아무런 전재를 허용하지 않고도 우리 존재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고 난 후에 그렇지 않냐?

했을 때 굉장히 호소력 있게 들리는 것 같아요. 나한태도 타자가 말하는 것 같아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저는 그렇게 해석되는데, 그 소리를 듣게 해주는, 그리고 그 이후에 그래 우리가 서로

인정해야 되지만 우리에게 떨어지는 선언적인 정언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었어요.

호소력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국운 여러분들이 개입할 시간인데요 원래 계획보다 좀 늦었습니다. 질문을 하셔도 좋고

그냥 코멘트를 하셔도 좋고, 아니면 넋두리를 하셔도 좋습니다. 노래를 한판 부르겠다.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는데요. 얘기를 돕기 위해서 제가 간단히 제 고민을 내어놓을까 해요. 레비나스에 관한

이야기를, 요새 정말 레비나스 산업이 도래했다고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특별히 기독교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 철학자들 신학자들이 많이 합니다. 최근에 사회과학자들도 하기 시작 했습니다.

한국 만이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그렇습니다. 책들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게 기독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편으로는 굉장히 반갑게 느껴집니다. 이제 사람들이 아까 말씀하신 동등성

상호성을 전재로 윤리를 사유하는 시대를 벗어나서 비대칭성, 그런데 나를 중심으로 하는 비대칭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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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타자를 우위에 놓는 비대칭성으로 사유하기 시작하는구나. 이게 뭔가 그래도 21세기는

20세기와는 다른 세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교회식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이 레비나스를 쓰시나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좋은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순간 크리스천으로서는 갑자기 절벽 앞에 선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때 오늘

자꾸 오늘 채플 생각이 나는데 김남준 목사님이 아마 굉장히 오랫동안 준비해오신 말씀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누가복음 24장을 펼치시고 십자가의 사건을 구경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 위에서

죽어가고 있는 한 사나이에 관해서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보다 더 강렬한 기독교의 메세지가 없는데,

오늘 채플에서 이상하게 그 말씀이 풍겨져 나오는듯한 느낌을 김목사님이 받으시지 않았는가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비슷한 느낌을 지금 우리가 레비나스에 물들어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기독교인이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이야기 할 때, 세상 사람들은 그냥 우리는

타자의 윤리를 알고 있어 라고 답하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얘기해야

합니까? 오늘 박교수님이 우리한테 가져오신 질문, 레비나스의 질문이기도 하고요. 과연 신정론이

가능한가? 하나님이,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엘리비젤의 그 ‘ nights’ 라는 작품, 아주 훌륭한

작품이죠. 그때, 당신이 가장 필요했을 때 당신은 어디 있었습니까? 라는 물음 자체를 이제 던질 필요

없다. 레비나스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 물음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저는 이 다음 국면으로 가서는, 제가 레비나스를 지난 한 10년동안 굉장히 감동해왔는데,

요사이는 전전긍긍하고 있어요 복음은, 복음의 독특성은, 복음의 호소력은 어디로 가는가? 오늘 저녁

모임을 준비하는 바쁜 마음 중에 제가 오늘 체플에 갔는데 김남준 목사님의 그 모습 속에서 저는

상당히 불길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결코 지금 여러분들에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서 해보는 말이 아닙니다. 교수님 좋은 말씀 있으신 것 같아요 우리학교에 두분 계시는

언어학자중 한분이십니다. 윤상헌 교수님 입니다.

윤상헌 학생들 질문할 시간을 뺏을 것 같아서. 예 참 감사합니다. 오늘 튕겨져 나왔던 건

저도 비슷하게 느꼈는데, 하나님이 어디계셨는가 하는 질문은 저는 어떻게 와 닿았냐 면요, 예수

믿는다고 하는 기독인, 기본적으로 우리가 다 기독인 이지만, 너희들 어디 있었느냐 그 질문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저는 그건 굉장히 존재론적인 질문 같지만 레토릭인 것 같습니다. 화가 나서,

하나님 안 계시다고 하면 하나님이 사라지시는게 아니잖아요. 하나님 살아계신데 그래서 아까

유대인적 휴머니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들으면서 제가 어떤 생각이 하나 들었어요 우리 주님의

incarnation이 기가 막힌거다, 레비나스가 못 볼 정도니, 그 신성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변장을 기가

막히게 하셨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런데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으로 기독론을 이해했다

그런데 그게 저는 뭐 신학적인 이해냐 존재론적인 이해냐에는 관심이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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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41ㅗㅗ

아마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까도 이야기 한 소위 작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들이

역사가운데 이 사회 문화공간 속에서 그냥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을 종교 소비제로 쓰고, 혼자

배부르고 그래서 문밖에서 내 형제가 헐벗고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나는 잔치를 벌이고 감사하다

하고, 또 다른 바리세적인 참의를 드리고 있고, 그것에 대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유대인적

휴머니즘이란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초월해야 될 때 초월하지 않고, 내재할 때 내재하지 않고,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앙가주망(engagement)을 해야 할 때는 disengagement 하고

disengagement 해야 할 때는 달라붙는, 그러니까 내 욕망에 관해서는 우리가 disengagement 해야

하는데 철저하게 앙가주망을 해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개차반이 되어야 할 때 반대모습을

보이고, 그것이 또 고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까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인간이 윤리적 실천만으로 구원이 가능한가 우리는 답이 있어요.

답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요. 이 질문에 내재된 의식세계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거죠. 우리

윤리적 행위로 실천만으로 구원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이것이 아까 초월과 내재의

기가 막힌 이중국적자들이 군복무 안하고 권력이나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은, 윤리적인 실천으로

구원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면서 최소의 윤리적인 실천도 하지 않고 그리고 채플에서는 Sing & Sleep

그 다음에 손들고 펄펄 뛰기도 하고 그러나 펄펄 뛰어야 할 장소에서는 펄펄 뛰지 않고 그런

차원에서 크리스천 휴머니즘이 가능한가? 종결을 짓겠습니다.

저는 레비나스가 하나님을 성자 예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잘 알지 못해서

정직하게 표현해서 결과적으로 부인하였는데, 오히려 신성의 충만함을 저는 느꼈어요 그 독회에서

읽으면서 시간과 타자를 읽고 있는 동안에, 빈약한 예배를 하는 기독인의 예배에서도 뭔가 신성이

빈곤한, 빈곤한 신성, 마치 너무나 귀한 물건을 값싼 보험삼품 팔듯이 파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재우나 최시우 그들이 토해냈던 인내천을 능히 덮고도 남는 신학의 가르침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인데, 우리가 함부로 살인하고 함부로 형제를 팔고 그럽니다. 그것도 솔직하게 내 이름으로 그래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럽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선생님께서는 크리스쳔 휴머니즘에

대한, 크리스쳔 휴머니즘이 가능하겠는가 저는 사실 그 부분에 대한 소망 아까 공공성 말씀을

하셨는데,

이국운 학생들 얘기를 좀 더 듣고 해볼까요.

장수영 비난을 막 당했는데 기분이 나쁘잖아요. 선생님이 막 몰매를 때리신것 같은데.

이국운 저는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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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윤상헌 저도 아닙니다.

장수영 제가 보기에는 타자들이 와글와글거리고 있는데요.

윤상헌 죽비로 좀 때렸습니다.

이국운 타자의 또 다른 의미에서.

장수영 아 그렇지요.

이국운 여러분의 타석입니다. 아 이걸 농담이라고 하고 있는데 (청중 웃음), 오늘 이야기가 좀

어려웠나요?

장수영 여러분들 그 영화 보셨어요?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저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아 저렇게 죽음을 초월 할 수 있겠다. 맨 마지막에 잔잔한 메세지 속에 이렇게 두 사람이

죽었는데 아름다웠잖아요. 그렇게 해서 죽었다 해도 그 삶이 아름다웠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배제한 상태로 우리가 공공성을 만든다고 했을 때, 그러네 하나님이 없어도 우리가 충분히 충족할 수

있구나로 갈까봐, 거기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십자가 의 길과 이제는 몽학선생이 아니다,

믿음이 왔으니까 그리스도가 왔으니까, 그렇게 해야하는게 우리의 미션인데 그런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런 헐리우드 영화에서 만드는 사람들한테 그리스도를 어떻게 전할까, 이런 생각이 많이 있었어요.

밀양에 마지막 장면에서 느끼는 그 잔잔함 충족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데, 저는 완전히

하나님의 부제, 시궁창에 묻히는 그렇게 하면서 끝나잖아요. 있기는 뭐가 있어, 그냥 그대로 머리에

맴돌면서 그러고 가거든요. 그리고 그게 존재야 어때 괜찮잖아, 하는.

이국운 장교수님이 지금 시간을 끌어주고 계십니다.

장수영 얘기 해봐요.

이국운 다른 질문이나 이야기가 잘 떠오르지 않는가요? 우리 교수님 뭘 열심히 적으시고

그러시는데 대체로 지금쯤에 개입하시지 않아요?

손화철 저는 제 생각에는 저한테 제일 어려웠던 문제라고 생각이 되는데, 제가 옛날에

96년에 지금 서강대에 계시는 서동욱 선배한테 제가 이것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뭔가 대답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서 좌절하고 다시는 이제 다시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잘 이해가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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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43ㅗㅗ

그러니까,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명령한다 라는 이야기가 굉장히 묘한 말이거든요. 왜냐면 타자를

아무리 봐도 나에게 명령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명령을 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이제 두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사실은 타자가 나에게 명령하고 있는 중인데 내가 모르는 거예요. 타자가

나에게 명령함으로써 내가 사실은 생겨나는데, 나의 주체가 그때 확보가 되는데, 나는 그걸 모르고

마치 사유하는 내가 있는 것처럼 생각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사실은 타자가 명령 하는지 모르지만

그런 측면이 있으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윤리적으로, 타자가 명령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해라, 이렇게

두 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첫번째는 타자가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가, 혹은 네가 너인 것이 타자한테

얽혀있다라고 이야기 하는, 그때는 사실은 타인이 나에게 명령하거나 말거나 나의 주체성이 타자한테

걸려있는 것, 타자인것처럼 생각하면서 행동해, 아니 타자가 사람인것처럼 생각하면서 행동해 그게

두번째 인 것 같아요. 그런데 레비나스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많은 분들이 두번째 이야기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타자를 너무 무시하면서 살았어, 타자를, 이웃을 하나님처럼 생각해 그렇게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살려니까 다 바쳐야 하는데, 다 바치면서 살 수 있니? 살수 없잖아? 그러니까

우린 뭔가 문제가 있어. 이 이야기가 기독교는 그렇게 무리한 요구는 안하는데, 레비나스는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 같아. 얘기가 이렇게 되는데, 그러고 나면 타자를 하나님처럼 생각하는게

감동적이기는 한데, 그러고 나서 다시 타자를 봐요. 사랑하는 학생들을 아무리 봐도 아무 소리가

안들려요. 그러니까 그런 명령에 강력함이 있나? 저한테 전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아요. 그리고

TV에 나오는 배고픈 아이들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찡하죠. 그래도 그걸로 그만인데, 그게 명령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그 다음에 이제 여지가 남은 존재들만 알게 된다고 하는데, 그 지점이 알 것 같기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제일 저한테는 불편해요. 타자의

얼굴이, 타자가 나에게 명령한다. 이렇게 얘기했지 타자가 명령한다고 생각해, 이렇게는 한 바는

없거든요. 그런데 보면 명령 안하는데 명령 한다고 하는게 그게 굉장히 애매하군요.

이국운 근데 지금 이 말씀을 깨려면, 반박하려면 '명령 하는데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 팁을

하나 줬어요.

박원빈 예 손화철 교수님 질문에 먼저 잠깐 타자의 얼굴은 아까 말씀하신 그 전자

레비나스에서 제가 이해하기에는 전자가 더 가까운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비교를 하자면 거기에서

레비나스와 칸트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레비나스는 타자의 음성이,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그 부분에서는 굉장히 존재론을 넘어서 종교적 차원으로 넘어가거든요. 그분이 레비나스가

타자를 만나는 부분은 신에 음성에 대해서 타자가 신의 음성으로, 신의 자취로서 나에게 다가올 때

그부분에 내가 내 실존적인 결단으로 응답할 수 있느냐 라는 이런 차원인데, 그 후자의 이해는 타자가

하나님이니까, 마치 그래야 해 라는 것은 칸트의 정언명령 수준으로 도덕적 차원에서 얘기를 하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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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은 손교수님이 정확하게 이해하신게, 이게 사실 레비나스가 철학을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첫번째 말씀하신 신성의 명령으로 아무리 이해하려고 하고 그렇게 받아들인다고 할 때, 저도 아까

말씀 드렸듯이, 이게 부딪치는 문제가 이게 어떻게 실천 가능한 것이냐 라는 문제가 항상 제기가

되거든요.

손화철 거기서 실천 가능한가 하는 문제 전에, 타자가 나에게 명령한다 라고 하는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선포를 해버리니까,

박원빈 그 부분은 선포적인 면이 굉장히 크고요. 그래서 종교적이고 신학이다 라고 비난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두번째 식의 오류를 잡고 이해로 자꾸 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레비나스 철학을 신학을 자꾸 응용시키다 보니까 그런 식의 이해가 많이 등장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손화철 그런데 그 선포가 사람들한테 설득력 있는 이유가 뭘까요? 저만 안보이고 다들

타인의 얼굴이 마구 명령하는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인지.

장수영 그런데 그건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는 사람 이야기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는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가슴 아파 하실 것 같다고 얘기 하고,

이런걸 아는데, 그런 질문을 하고 계신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손화철 예 그런데 이제 그러니까 어떤 종교라는 세팅에서 경전을 가지고 우리가 그런걸 쭉

할 때 하고, 레비나스라는, 한때는 ‘ 듣보잡’ 이었던 사람이 나타나서 타인이 얼굴로 명령하잖아,

그러니까 ‘ 아멘’ 하는 식으로,

장수영 아니 그런데 크리스천 커뮤니티에서 우리가 정언명제 때문에 공감하는 것 아니에요?

하나님이 어떠하셨고 그것이 왜 그런지, 누가 그렇다는 것을 확인해본 것도 아니고 그런 것처럼

레비나스가 던지고 있는 것도 타인이 그렇게 얘기 하니까 들을게 있으면 들어라고 이렇게 하는게

아닌가요?

전명희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제가 오늘 레비나스 처음 만나서 레비나스 선생 하시는

말씀을 전해들었는데,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았나 궁금했거든요. 왜냐하면

성경에서 예수님도 그런 감동하는 삶을 살았고 한데, 레비나스는 타자의 음성을 들었는가, 들었으면

거기 반응하는 삶을 살아냈는가. 제가 전혀 몰라서 무식이 드러날걸 감안해서, (청중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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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45ㅗㅗ

박원빈 예 아주 좋은 질문이시고요. 레비나스는 공부를 마치고 프랑스로 귀화를 하게 돼서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않고 평생을 프랑스에서 소르본 제 4대학인가요?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지냅니다. 어떻게 보면 레비나스는 프랑스 유럽 지식인의 삶을 살았죠. 자신이 어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처럼 예일대 교수를 하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공동체로 들어가고 그런 사람은 아니고요. 이

사람은 철저하게 직업철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런 면에서 레비나스

너는 자기도 못하면서 왜 남한태 부담을 주냐, 질문을 분명히 할 수 있는데,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무슨 말씀이냐면, 레비나스가 바라봤던 것은 서양

철학에 그러니까 동일성의 철학, 존재론 우위의 철학, 타자를 망각하는 철학을 역사를 내려오면서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체험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철학의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를 굉장히

고민했던 사람이고요. 여기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응답을 철학적인 시스템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얘기

했던 사람이 레비나스 입니다.

제가 엘리비제를 만났을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제가 레비나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엘리비제 선생님이 자기가 레비나스를 잘 안다고 하시더라고요.

1960년대에 같은 랍비 밑에서 동문수학을 했던 사람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레비나스는

철학으로 자기 철학적 시스템을 구축한 사람에 불과하다 철학자였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냐, 레비나스가 여러 책에서 자기는 철저하게 Totality 혹은 시스템이란 말을 가장

싫어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했더니 웃으면서 엘리비제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레비나스는

시스템을 부인했지만 헤겔식의 시스템을 파괴하고 자기 만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을 뿐이다 라고

얘기 하시더라고요. 자기는 유대교 문학가로서 홀로코스트를 겪을 때 문학적인 차원에서 삶의 고통을

얘기하고 있다. 레비나스와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을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걸 들었는데, 레비나스는

직업철학자였다. 직업 철학자라는게 폄하대상은 아닐 것 같고요. 아무튼 서구 철학계에서 수백년 동안

흘러왔던 흐름을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적인 논지와 시스템을 가지고 새롭게 제시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는 차원에서 이해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윤숙 아까 손화철 교수님 말씀하신 것이 제가 생각하고 있던 거고, 제가 사실 요구르트

하나 더 넣을까 말까 했던 건데 또 관련이 있을 듯도 하여서

이국운 오늘 나윤숙 교수님이 요구르트 아줌마가 되었어요. (청중 웃음)

나윤숙 제가 문학번역이라는 과목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르치고 있는데요. 니체나

쇼펜하우어, 이렇게 뭔가 이상적인 것에 집착하는, 그런 염세주의 선생들께서 대게는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여기세요. 특히 완벽한 시 번역은 불가능하죠 그런데 레비나스 선생님이 번역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하셨는데, 이론상 번역에 불가능할 수도 있으나 우리가 실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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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번역책을

보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드리는 거냐면, 제가 손화철 교수님의 말에 제가 100% 공감을 해요. 아무리

정언명령으로 주어져도 제 이웃이 제 몸처럼 사랑이 안되고 또 얼굴로 현현한다는데 명령처럼 실천할

힘이 부족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그냥 타자의 얼굴이 그렇게 확 다가서지 않는데 그러면 그게 그렇게

선포하면 그것을 내가 다가서게 만들, 스스로 내것으로 만들, 내 안에 체화될 동력이 있어야 될 것

같은데 라고만 생각하니까 없는 것 같은 거에요.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대한 나의 은혜

외에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주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지금 레비나스 식의 타자가

현현하는 체험을 못하는 찌질한 인간일 지라도, 적어도 비슷하게라도 저를 타자로 대해주는 인간이

계신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 그래서 저를 타자로 대해주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나는 남을

그렇게 타자로 못 대해도 레비나스 선생의 명령이 그게 정언명령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닐 수

있겠구나 라는 체험으로 제가 인식이 됐고요. 그런데 제가 야구루트 하나 남겨놨던 것이, 그러면 나를

타자로 인식해주는 그 고마운 또 다른 의미의 타자 대상에 나에 대한 환대를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대해야 하며 수용해야 하는가 그런 질문도 드려볼까 했다가 관뒀었어요.

이국운 아까 손교수님께서 레비나스를 ‘ 듣보잡’ 이라고 잠깐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진중권 선생이 유행시킨 그 말을 써야만 할 만큼 레비나스 선생의 타자의 윤리가 강력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라고 생각이 들고요. 그 이유를 제가 읽은 글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의 그 명령은 칸트 식의

정언명령, '하라' 라는 그 명령이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청유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하면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나를 죽이지 마라 라고 무섭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칼을 들이대는 데도

나를 죽이지 마세요,

박원빈 울면서 얘기하죠.

이국운 죽여도 죽여도 계속 그렇게 말한다고 하는,

박원빈 죽임을 당하면서도,

이국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칸트의 정언명령보다 더 무섭게 더 그 앞에 우리를 꿇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주체를, 주체라는 말 자체를 무색하게 해서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를 보는

사람 얘기가 좀 그런데, 오늘 주로 철학자 이면서 목사님이시고 신학자 이면서 철학자시고 사실은

우리 레비나스 선생님이 종교와 철학과 신학 사이를 왔다갔다 했는데 박원빈 선생님도 비슷하게

철학자들 모임에는 신학자로 취급받으시고 신학자들 모임에 가서는 철학자 취급을 받으시고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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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47ㅗㅗ

장수영 : 산업과학도 그래요. 경영학 가면 공대 공돌이라 하고, 공대 가면 문과라 하고.

이국운 :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서는 기대할게 있고, 기대하지 못할게 있어요. 이를테면

레비나스의 철학이 과연 실천 가능하냐, 뭐를 도대체 하라는 거냐?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 이를테면

법학의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2학기에 내가 이 시간에 하는 수업에서 예일에 있는 세일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가 쓴 타자의 권리라는 책을 읽었어요. 세일라 벤하비브는 하버마스

주의자입니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 하는데, 타자의 권리라는 생각

자체를 레비나스에서 가져온 것 같아요. 확실히 그런 혐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하는 것은

그동안 근대국가 시스템 안에서는 언제나 국민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그 구성원의 자격을

전제로만 권리를 얘기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일런트 시커들이 너무나 많다. 그 사람은 그러면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거냐. 이 바운드리 바깥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건가, 그런데 이분은 아주 감동적으로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서 한 구절을 가지고 와서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법학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법학은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법학은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믿을만 하지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레비나스의 윤리가 실현 불가능하다, 이건 그냥 호소일

뿐이다, That's it. 법학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것이 방향을 바꾸어서

적어도 우리에게 찾아온, 그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은 나그네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 심지어는 그것이 그들의 권리라고 말하는 것, 그것 해볼 수 있다, 그게

어디서 온거냐, 레비나스의 청으로서의 타자의 윤리에 대해서 법은 법률가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서 온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이 부분에 있어는 목사님들이나 신학자나 철학자들 말고 경영학자가 나온다면, 우리가

아까 ‘ 히즈빈스(Hisbeans)’ 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사회적 기업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를 레비나스의

호소 속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뭔가 조금 더 삶에 가까이 있는, 대체로 우리

한동에는 그런 전공들이 많은데, 철학이나 고전 읽고 이런 건 없고 국제 어문 이라던지, 통역을

한다던지, 법 이런건 어떤 의미에서는 약간 공대스러운거, 이러한 것들이 많은데, 어떤 의미에서는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철학자들, 신학자들 한테는 기껏 해봐야 레비나스 이야기를

반복하고 나서 근데 좀 어려워요 하고 마는 것, 그 자리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Late people들이 뭔가

반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수님들이 시간을 끌었는데도 뭔가 반응을

보이지 않을거에요?

학생 1 머리 속에 많이 질문할 것들이 정리가 안돼서 맴도는 건 많은데 정리가 안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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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레비나스가 홀로코스트를 겪어서 그런 타자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크리스쳔들도

예수그리스도의 상황을 자기가 체험하기 전까지는 정말 그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없듯이, 만약에

레비나스가 홀로코스트라는 그런 엄한 사건을 겪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타자의 얼굴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장수영 그러면 홀로코스트 라는 사건이 그나마 레비나스를 깨우쳤으니까 약간은 필요성이

있다는 건가요?

이국운 고통에도 뜻이 있다?

학생 1 아까 손화철 교수님께 그런 얼굴이 안보인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얼굴이

너무 보이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서나, 강의실에서 교수님 들에게나, 제가 예전에 있던 지난날에

있어서도 늘 그런 얼굴을 남에게 취해왔었고, 정말 제가 생각하는 악한사람에게도 그런 얼굴로 도움을

구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저한테 그런 심정이 있어서 그런지 남의 얼굴을 보면 그런게 약간은

보이거든요. 그래서 사람마다 겪는 그런 사건들이 다르기 때문에 체험하는게 다 다르지 않을까

몽롱하게 보이던지 간절하게 보이던지 몰라도 다 다르지 않을까 아예 안보이던지.

학생 2 저는 손화철 교수님과 비슷한 의견인데요, 저도 타인의 얼굴이 막 다가오고 이런걸 못

느낍니다. 레비나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그걸 못 느끼는 원인은 무엇인지, 이국운

교수님 수업에서 '물화'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데, 우리가 인정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망각하는게 물화라는 원인으로 짚고 계신데요, 그러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은 타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내재적으로 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제가 왜 그걸 못 느끼는지

혹시 그거에 대해서도.

박원빈 레비나스가 이야기 한다는 것은 간단하게 말씀하면, 자기 향유 자기 욕구에 너무

만족해서 타인의 욕구를 망각한다는 거죠. 아까 제가 말씀 드렸듯이 레비나스에 있어 정의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철저히 신 앞에서 철학적으로 반성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들을 반성하는 순간

어느 순간엔가 내가 소유한 것들이 이게 다 나의 향유를 누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 순간부터 타인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고, 내가 이제 그 안에서

윤리적인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타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학생 3 저는 아까 질문 하셨던 것처럼 교수님들의 얼굴을 보면 뭔가 계속 강의를 들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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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기독교 정신 49ㅗㅗ

박원빈 교수님이 타자로 보이시는가요? 도와드려야 될 그런 타자로?

학생 3 계속 궁금했던 것이,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가 신정론의 종말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것이, 타자는 신의 음성이다. 또 타자의 얼굴에 하나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다. 이렇게

타자를 내세우는 타자의 윤리를 레비나스 선생님이 얘기 하고 있는데, 여기서 신이라는 얘기가 제가

기독교 인이기 때문에 내가 신이랑 연결이 되는데, 이것이 레비나스도 똑같은 입장이 아니었을 텐데,

그렇다면 이 신이 절대윤리로서의 신인지, 그렇다면 결국은 타자의 얼굴이 신이다 라는 곳까지 가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한 개 더 궁금한건 이것이 유대교 전통에서 철학을 발전시킨 레비나스라고

생각하면 유대교의 전통에서 또 어떻게 해석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학생 4 저는 아까 개인적으로 타자라는 말을 이국운 교수님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됐고

레비나스도 오늘 처음 알게 됐는데, 강의 들으면서 다시금 타자에 대해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고,

타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아서 감사 드리고요. 저는 제가 질문하려고 계속

고민했던 거랑 답변해 주신 거랑 접목시켜서, 제가 생각한 타자의 윤리의 한계점, 제 생각으로 제가,

저도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말이 정리가 좀 어눌한데, 아까 설명해주신 타자의 음성을 위해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들, 내가 철저히 버렸을

때에 그 타자의 음성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라는 행동적인 부분에 대해서 얘기 해주셨었는데, 제

생각에는 타자윤리에 대한 한계점이 타자를 통해서 타자와의 관계 또 어떻게 보면 타자에 대해

종속되어져 있음으로 인해서 나의 주체성을 알게되고, 타자의 음성과 타자가 원하는 그런 부분들을

알게 되지만 결국 반대입장에서 봤을 때는 저 자신이 타자에게 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그 타자의 음성과 타자의 윤리적인 것을 내가 맞춰주기 위해서 아니면

오히려 그것을 내가 기독교인이지만 그런 기독교인 간의 또 어떤 타자를 위해 내가 나를 버려졌을

때는 내가 타자에게 내 자신이 그 타자의 타자가 되지 못하는 이게 아니게 되지 않을까 그 생각을

했을 때 그 레비나스와 기독교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정론이 완전 배제된 것으로 저는 이해했는데요.

제가 생각했을 때는 그런 관계적인 것이나 나를 버려지게 되고 타자를 찾거나 그런 것들에

있는 것에는 좀 한계가 있지 않나, 오히려 나의 주체성이 바로 정해지고, 그리고 이국운 교수님이 아까

설명해주신 것에서 말을 빌리면 아무것도 속해져 있지 않은 그런 관계적인 부분,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나그네가 오히려 신이라 봤을 때, 그 아무것도 경계가 없는 신과 내가 먼저 바르게 정립이 되야

근본적인 시작으로부터 시작이, 우리가 말하는 창조의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같이 동등하게 같이

서로에게 타자로서 윤리가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굳이 나를

그렇게 버리고 비우면서 주체성을 잃으면서 까지 그 윤리를 내가 굳이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게 약간

한계성을 보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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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5 저는 03학번 법학부 정아령이고요. 아까 말씀하신 분이랑 저도 좀 비슷한 생각인데

타자윤리라는 것이 사실 위선일 지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왜냐하면 우리 사실 사람 살아가는 것

자체가 타자에서도 나오지만, 먹고 에너지를 내것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사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멀쩡하게 살고 있으면서 온전히 타자를 위해서 라고 얘기 할 수 있는가. 솔직히 저는 거기에 공감이

안가거든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면서 또 그냥 먹으면서

그렇게 살아야 될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저는 차라리 그냥 솔직하게 나를 위해서 산다고

얘기 하는게 낫지 않나, 한마디로 레비나스가 틀리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국운 글쎄다.

학생 6 저는 타이틀이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레비나스와 기독 정신을 병립시켜 얘기

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레비나스와 기독교의 쇠태’ 이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레비나스의 철학과 복음을 같이 두고 보는 것은 조금 불유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이 세태가

복음을 잘 못 전해서 레비나스의 의견이 들쑤시고 다니는 거지, 복음이 만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들쑤시고 다니는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저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를 오늘 처음 접하면서

그 윤리를 접하면서 복음이랑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면 이 시점에서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진정성에 대해서 더 얘기를 나눠보고 타자의 윤리를 위라고 볼 수는

없지만 좀더 유리한 입장에서 바라 볼 수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국운 우리 한동 학생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무거운 질문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학생 7 안녕하세요. 법학부 05학번 이세훈 입니다. 저는 레비나스에 대해 궁금한게,

레비나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타인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과 타자의 윤리가 서로 갈등한 적이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적 소수자의 문제에

있어서 소수자의 입장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권리의 문제와 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법적으로 그것을 허용했을 때 보호받지 않은 대상들 즉 성적 소수자가 아닌 자들에게는 그렇게

살아도 될 유형으로 비추어지지 않는가 그런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시 정리를 드리자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지 않는 사람과 타자의 윤리와의 불편함 마음입니다.

이국운 어쩌시겠어요. 방법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계속 가는 방법이 있고요. 좀 가다가 그치고

차수변경이라는, 이건 밤 문화, 또는 회기를 변경해서 내일 아침에 연장전을 하는 방법이 있는데 일단

말씀 좀 듣겠습니다.

박원빈 간단하게만 말씀 드리면, 제가 뭐 레비나스를 공부했지만 여러가지 질문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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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해야 할 의무와 책임은 전혀 느끼고 있지 않은데, 저도 잘 모르겠는 부분들, 그리고 저도 지금까지

고민하는 부분들을 교수님들, 학생 분들이 너무 진지하게 질문을 해 주셔서 참 저는 질문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씀을 좀 드려보면, 지금 여러분들이 하셨던 질문은 제가 논문을

쓰면서, 공부하면서 부딪쳤던 질문들, 그 노력들이 그대로 생각이 나네요. 그래서 참 너무 지난 시간을

뒤돌아 보는 시간이 됐고,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여전히

아직까지 고민하는 부분 중에 하나인데, 저는 레비나스를 공부하면서 고백적인 말씀을 드리면, 굉장히

차갑다는 생각을 했어요. 유대교 휴머니즘으로 표현을 하지만 너무 차가워서, 다 말이 맞고 동의는

하는데, 웬지 모르게 이 사람에 사상의 바다에 뛰어들었다가는 얼어 죽어버릴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 그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가 결국 거기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레비나스를 이해할 때 철저히 기독교 적으로 이해 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실마리를 잡은 것은 결국 예수그리스도에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 인간과 하나 되었을 때 결국은 타자 윤리의 신적인, 타자윤리의 구현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고, 예수님만큼 타자윤리적인 삶을 산 분이

있을까 하는 생각. 앞에 결국은 타자의 윤리를 제가 기독교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바로는,

예수그리스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라고 저는 제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을 했고요. 여전히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손교수님이 질문하신 것도 여러 학생들이 질문 했던 것처럼 아직

그 답답함, 갈등들 그리고 저 자신의 한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가 설 수 있는 기반이다 라는 것들을 확인하면서, 결국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게,

니부어(Reinhold Niebuhr)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산상수훈에 여러가지 기독교윤리들을 얘기하면서,

기독교 윤리는 불가능에 가능의 윤리이다 Impossible possible ethic, Ethic of impossible possibility다

라고 이야기 했거든요. 불가능의 가능의 윤리.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지만 결국 거기서 은혜의

차원이 작용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 힘으로는, 나는 도저히 아까 우리 학생들도 잘 얘기 했던

것처럼, 나는 내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살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내 욕망도 성령의 비추임과 조명을 받을 때 나를 새롭게 나도 타자윤리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은혜의 힘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다시 한번 레비나스를 기독교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제가 그냥 여러분들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기 보다는 그냥 좀 두서없이 말씀을 드리면, 아까

교수님이 질문하셨던 것 중에 크리스천 휴머니티의 가능성에서 잠깐 언급 하고 갔는데, 그 말씀이

아직 저는 계속 앉아서 들으면서 뇌리에 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가장

종교적이지만 거기 신성이 곁들여지지 않은 하나님 앞에 선, 그런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진지함이

보이지 않는, 종교적 바리세인의 모습, 신성을 상실한 모습과 하지만 신성이 없다고, 하지만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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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삶으로 타자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던지는 사람을 보면서 기독교 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서 보여지는 어떤 거룩한 신성의 자취들을, 이게 결국은 우리들이 갖게 되는 아이러니고 고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데 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하지만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가

결국은 그 가운데서 계속 Struggle하는 게, 천국에 갈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고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해봅니다. 질문에 답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국운 아무래도 연장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 9시부터 맘스키친에 따로 된

공간에 박교수님 모시고 제가 있겠습니다. 여러분들께 커피를 드리겠습니다. 오셔서 교수님 아까

어려운 말씀을 하셨는데, 개인적인 경험 아까 목사님 크게 쓰시려고 이러신 것 같아요 이런 말을 들을

때 이렇게 뭐가 올라왔다고 하셨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이런 얘기를 포함해서 조금

더 Informal한 얘기로 내일 아침에 하고, 열시 쯤 되시면 나가셔야 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늘 이 모임을 기획하면서 기획할 때부터 클로징을 생각합니다. 법 배운 사람에 직업병

같은 건데요. 계속 생각했던 것은 신정론에 관련된 교수님 글을 보면서 어쩌면 하나님이 후회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보냈으니까 이제 끝이라고 하셨지만, 여러분

왜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너무 패악하니까 하나님이 머리 끝까지 화가 나셔서, 이 나쁜자식들

다시는 안해 하고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예전에 했던 약속 파기하고 너랑 나랑 같이 하자 이렇게

하시는 장면이 나와요. 거기서 모세가 하나님을 달래는 유명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태면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죽이셨습니까? 하나님이 지구를 수 십번 폭파시켰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탄을 만들라고

그러셨습니까? 이 수많은 악들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용했다고 이야기 하는데, 쉽게 말해서, 제가

2년 전에 그 수업에서 신정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내가 언제?' 이렇게

오히려 하나님은 그 추악한 죄악의 현장에서 이거 다 집어치우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여러분 제가 어제 글을 받고 나서 쿠오바디스의 마지막 장면을 제가 계속 생각했어요.

쿠오바디스 도미네라고 하잖아요. 베드로가 로마에서 나오다가 예수님이 나 십자가 한번 더 져야겠다

하시니까 그러지 마시라고 그러고 들어가서 그 양반이 거꾸로 달린다 다 알려진 이야기 이죠. 글쎄요.

우리가 얘기를 끌어간 모든 전제가 신정론이었는데, 그 전제 자체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아

나 너희들 정말 싫다 나 이거 정말 무효로 하고싶다, 만약에 만약에 조금 도전적으로,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 하나님을 다시 임하시게 하는 그 호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우리

박교수님이 두 가지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첫째는 당신이 정말 필요할 때 어디

계셨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추궁하는, 다른 하나는 이제 하나님을 찾지 말자 이제 우리가 우리의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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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해야 한다. 자 이 둘 중에 어떤게 모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화가 잔뜩나신 하나님을 좀

달래자 우리를 버리시지 않도록, 그 호소에 조금이라도 가까운게 될까. 오늘은 그냥 이렇게 아프게

마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교수님 멀리서 오셨는데 축도를 부탁 드리는건 아니고요. 오늘 이

모임을 좀 마지막 기도로 마쳐주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박원빈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이 밤을 허락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한동의 주의 지체들 교수님들 학생들과 함께 모여서

귀한 시간 가졌습니다. 하나님 이자리에 함께 해주시고 꼭 우리가 여러가지 말들 속에서 우리의

우둔한 지혜와 표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곡해한 것이 있다면 성령께서 이 자리에 함께 임재해 주셔서

어두웠던 부분들 잘못 알았던 부분을 밝히 이해하게 해 주시고 우리의 부족함들 주님 누구보다 잘

아시오니 날마다 우리 삶 가운데 함께해 주셔서 참으로 동행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삶의 깊은

고통에 현장 질곡의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용기 허락해

주시옵소서. 우리 학생들 여러가지 공부하는 중에 학업하는 중에 여러가지 말못할 고민들 힘든 것들

가지고 공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그때 친구가 되어주셔서 그들의 삶의 현장에 함께해 주시고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 주님이 늘 함께 하심을 깨닫고 느끼며 캠퍼스 생활에서 참으로 이 시대를

밝히는 귀한 주의 정병으로 성장하고 훈련될 수 있도록 주님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늦은 밤

기숙사로 돌아가는 발걸음 들을 주님 인도해 주시고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날마다 우리 삶 가운데

주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하루하루 숨쉬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사 드리며 귀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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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담론으로서 타자윤리의 가능성과 한계

박원빈 (남서울대학교)

1. 들어가며

레비나스의 무한 개념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개념인가? 레비나스의 초월과 무한에 대

한 이해는 자신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1960년대 『전체와 무한』발표 이후

끊임없이 제기된 질문이다. 특히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는 초월과 내재의 문제를 중요한 과제

로 삼아온 기독교 신학에 윤리라는 실천적 매개를 통한 양자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어서 많

은 기독교 신학자 및 철학자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연구는 레비나스가 어떻게 타자윤

리를 통해 무한과 유한, 초월과 내재를 매개하는지 밝힘으로 그의 타자윤리가 신학으로써

자리매김 할 수 있는지 그 타당성을 검토하는데 있다. 무한과 유한, 초월과 내재의 가능성

을 탐구하는 이 연구는 철학적 신학(philosophical theology), 혹은 종교철학(philosophy of

religion)의 기반을 세우는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통 조직신학 체계 안에서 다

루는 신론(神論)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매개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시도가 될

것이다.1)

프랑스 현상학자 장-뤽 마리온(Jean-Luc Marion)은 철학과 신학의 이러한 통합적 연구

방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신학의 대상이 철학이 제외한 초월적 영역만을 추구

해 왔기 때문에 양자의 간격은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진단한다.2) 신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신학이 다른 제반 학문 분야에 비해 어려운 이유는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도 말했듯

이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우리의 인식에 포착될 수 없고 쉽게 대상화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신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종교 철학의 시도는 “두 가지 아주 험

난한 기로에 서게 된다. 먼저 종교현상이 지닌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객관적

으로 정의할 수 있는 현상들만 다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유한 종교적 현상을 다루지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입장을 포기하는 것이다.”3) 그렇다면 철학적인 엄밀

함을 가지고 종교현상을 다루는 종교철학 혹은 철학적 신학은 불가능한 과제란 말인가? 최

근 들어 이러한 가능성은 프랑스 현상학자들에 의해 점점 증대되고 있는데 필자는 그 중심

혹은 그 중심의 시작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윤리가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1) 이러한 문제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 신론은 본질적으로 윤리적임을 믿는 필자의 신학적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

다. 마태복음 22장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는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예수는 이웃사랑을 말하면서 둘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질적으로 같다는 의미로 “둘째도 그와 같으니”(39절)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땅에 드러난 하나님의

신비한 지식과 계시를 밝히는 것이 신론의 가장 큰 주제라면 이러한 주제는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이웃사랑을

통해 온전히 드러남을 밝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Jean-Luc Marion, “Le phénomène saturé,” Phénoménologie et théologie (Paris: Criterion, 1992), 79.

3) 앞의 책,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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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정론의 유혹을 거부하며

레비나스는 신에 대한 담론(theo-logy)으로서의 신학이 그 자리를 상실했다고 진단한다.

신학이 일탈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철학의 언어로 신을 증명하려고 했기 때문이

다. 레비나스는 시몬 베이유(Simone Weil)의 글을 인용하면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존재는....신을 담기에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

스의 신 이해는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전통적인 [기독교] 신 이해와 정반대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전통 신학이 추구한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 언어를 통한 신 이

해는 정작 신성의 가장 중요한 거룩함을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전통신학은 이성(the

logos)안에서 초월을 주제화함으로써 초월을 세상 안으로 응고시켜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

았다.4) “세상 안에 응고되어 버린 하나님”의 자리는 “초월이라는 종교적 조건을 파괴시킨”

신학적 언어의 자연적 귀결이며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오류이며, 신화이기

에 결코 문자적으로 취할 수 없는 것이다.”5) 최고의 절대적 존재자로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레비나스의 신 이해는 전통 신학에 심각한 도전을 던져준다.

레비나스가 전통신학의 신 이해를 거부하는 것은 신정론(theodicy)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다. 신정론은 세상의 악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를 변증하는 중요한 신학적 도구였다.6) 레비

나스는 과연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협의가 없으며 신앙의 이름으로 신성을 구출하려는 이러

한 신정론의 시도가 적절한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레비나스는 신학에서 신정론은 형이

상학적 최종체 (metaphysical finality)로서 유비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서구 신학은 신정론을 통해 도덕적(혹은 철학적) 논의의 배후에 항상 “신의 섭리” 혹은 “신

의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음을 주장한다.7) 이러한

견해에 따라, 자비로운 지혜와 절대 선이신 하나님에 의해 추구된 초월적 왕국은 자연과 역

사라는 한계 내에서 여러 가지 질곡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과정은 비록 궁극적 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 할지라도 매우 고통스러운 것 이었다.8) 신학적 이상으로서 초월적

4) Emmanuel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Hague: Martinus Nijhoff, 1981), 5.

5) 앞의 책, 197.

6) 신정론(神正論, Theodicy) 라는 말이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자기정당화”(justification of God)이라는 뜻

이다. 이 말은 G.W. Leibniz (1647-1716)가 처음 사용했는데 하나님을 뜻하는 Θεος (God) 와 정의를 뜻하

는 δικη (justice) 의 합성어이다. 그 후 이 신조어는 세상에 현존하는 악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

을 변호하는 자연신학적 입장에서 주로 적용되었다. 라이프니츠의 책 Theodicy 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

지 현존하는 악의 모습을 열거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주장한다. 첫 번째는 형이상학적 악 (metaphysical

evil) 인데 세계가 만들어 질 때 내재되어진 퇴행성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는 자연악 (Natural evil)으로 이것

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시련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도덕악 (Moral evil)은 자연악이 정당한 형벌

이 되도록 만드는 사람들의 죄를 가르킨다. 신정론 (Theodicy)은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선한 사람들의 고통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정의를 나타내려고 하는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

다. 이러한 면에서 신학에서는 인간의 고통도 보이지 않는 신의 계획의 한 부분임을 말한다. Walter Kern

and Jӧrg Splett, “Theodicy,” Encyclopedia of Theology: The Concise Sacramentum Mundi, ed. Karl

Rahner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75), 1644-71 와 Y.K. Kang, “Levinas on Suffering and

Solidarity,” Tijdschrift Voor Filosofie 59(1997/3), 482-504를 참조; 최근 도덕악과 관련된 신정론 논의로

Susan Neiman, Evil in Modern Thought: An Alternative History of Philosoph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y Press, 2002), 22 참조.

7) 플라톤의 이데아, 칸트의 예지계와 현상계의 구분, 헤겔의 절대정신 등이 이러한 형이상학적 최종체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8) Emmanuel Levinas, “Useless Suffering,” Entre Nous: Thinking-of-the-Oth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96.

Page 61: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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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도달하기 위해 고통은 이 땅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었으며 고통을 신

학화함으로써 고통은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고통으로 변화된다. 더

나아가 세상과 개인이 겪는 고통은 세상에서 절대 선을 실현하거나 증진하기위한 효과적 도

구로 이용되었다. 신적인 경륜에서 이루어지는 이 세상의 총체적 고통의 현실은 각 개인의

고통의 삶까지도 침투하여 신의 경륜 안에서 고통은 쉽게 설명되고 이해되었으며 심지어 고

통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권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이해는 사람들의 고통

이 크던 작던 간에 종극에는 선에 도움을 주며 고통조차도 신의 섭리 안에 있는 선물이라는

믿음을 낳게 되었다.

레비나스는 기독교 전통 신학이 가르치는 이러한 신정론을 통해 이 세상에서 고단한 실존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고통은 “쓸모없는 고통” (Useless Suffering)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 진단한다. 레비나스에게 고통은 다른 모든 경험처럼 비록 그것이 우리 의식 가운데 주어

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종합할 수 있는 성질의 경험이 아니다. 고통은 칸트식의 초월적 통

각(transcendental apperception)9)처럼 어떠한 일치나 종합에로 이를 수 없는 성질의 경험

이다. 고통은 감각과 같이 주어지는 것으로 고통의 종합이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고통

은 하나의 의미론적 전체성을 가질 수 없다. 고통은 따라서 질서를 전복시키며 그 자체에

항상 동요가 자리하고 있다. 고통의 무규정적이며 철저한 무의미성 때문에 고통을 상황화

(contextualize) 할 수 없다. 고통을 상황화 한다는 것은 우리의 시공간 속에 가두어 놓고

언어를 통해 그 의미를 포착하고 개념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고통의 의미를 존재

론적으로 범주화하려는 시도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레비나스는 고통의 “상상할 수 없는 측

면”(unassumability)을 강조한다.10) 각 개인의 고통은 철저하게 사적인 영역이며 타인의 고

통과 환원불가능하다.11) 이러한 고통의 성격 때문에 레비나스는 고통이 초월적 성격을 가진

다고 말한다. 고통의 초월성은 “부정적 초월성"(negative transcendence)이다. ‘부정적’이라

는 형용사는 고통이 가지는 과다(excess)한 성격을 일컫는다. 레비나스는 고통의 부정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악은 통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통합할 수 없는 것의 비통합성이다. 악은 마치 칸트식의 형식적 통합처럼 아무

리 복잡한 정보라도 범주를 통해 정보를 종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악은 예외이다. 악은 그 형식에 있어서

그 잡다성이 바로 악의 사악성(malignancy)을 드러내는 형식이고 이러한 잡다성은 바로 [범주나 오성의 작용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파악되는 것에 저항한다.12)

9) 칸트는 ‘경험적 통각’(transcendental apperception)과 초월적 통각을 구분했다. 경험적 통각은 일상적인 우리

의 의식 안에 일어나는 모든 경험을 말하는 반면에 초월적 통각이란 이러한 모든 경험을 하나로 통합해 주는

기능을 하는 경험으로 이러한 초월적 통각을 통해 주체는 모든 가능한 경험과 사고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

기도 한다.

10) Levinas, Entre Nous, 91.

11) 비트겐쉬타인은 그의 저서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no. 243 에서 사적언어의 문제를 제기한다. 아픔

(pain)의 문제를 예로 들면서 그는 이러한 사적 언어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철저하게 사적일

(private) 수 있는가라는 것을 탐구한다. 그의 결론은 이러한 언어는 의미와 관련하여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비트겐쉬타인이 언어의 사용과 관련하여 사적언어의 불가능성을 논구한다면 레비나스는 실존적인 차원에서

고통은 소통불가능함을 말한다. 고통은 오직 윤리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야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

다. 비트겐쉬타인의 사적언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A.J. Ayer, “Can There Be a Private Language?,”

Philosophy of Language, ed. A.P. Martinic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5)와 H.N.

Castandeda, “Private Language Problem,”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 Paul Edwards (New York:

Macmillan, 1967)을 보라.

12) Emmanuel Levinas, Collected Philosophical Papers, trans. Alphonso Lingis (Dordrecht: Martinus

Nijhoff, 1987), 180.

Page 62: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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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통으로서의 악이 지닌 현상학적 특성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기독교 신정론을 비판한다.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고통으로서 악이 지닌 철저한 무규

정성과 무의미성에 맞서 신정론으로 대응해왔다. 신정론을 통해 인간의 고통을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입증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이미 증명하였듯이 아우스비츠

(Auschwitz) 이후 모든 신정론은 비도덕적으로 변질되었고 그 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신

정론은 마치 칼 맑스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폄하했듯이 고통당하는 자를 위한 일시적

위안과 도덕적 합리화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정론은 ‘나’로부터 유래하는 일종의 속임수이며

도피일 뿐이다. 고통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통해 타인의 고통은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되지만 반대로 고통 받는 자에게는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고통의 현상을 분석하면서 악에 존재하는 두 가지 층을 밝혀낸다. 첫째는 고통 받는

당사자에게 현존하는 고통 그 자체가 악의 일차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또 하나는 나

(주체)에 의해 타자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시도야 말로 더 사악한 악임을 주장한다.13) 레비

나스는 이 두 번째 악의 개념, 다시 말해 타자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악을 가리켜 “모든 비

도덕성의 근원(the source of all immorality)”이라고 말한다.14)

레비나스는 타인의 고통을 정당화하며 드러나는 고통의 참된 의미의 부재는 고통이 단순

히 개인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 상호간(inter-human relation)의 문제

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15) 하지만 기독교 신학은 신정론에서 나타나듯이 신의

완전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위해 타자의 고통을 정당화함으로 타자에 대한 주체의 책임을 망

각하여 하였고 결과적으로 악을 배가하는 신학적 오류를 낳고 만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

한 신정론의 유혹을 거부하고 타자윤리를 주창한다. 세상의 악의 문제를 대처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통해서이다. 바로 타자에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있고

그 타자와의 만남에 무한의 자취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3. 무한의 자취로서 타자의 얼굴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보는 사회적 소수자들로 나타나는 동시에 그

이상의 초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체성과 무한』에서 타자의 두 가지 형태의 얼굴에

대해 상당부분을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 고아, 과부

등의 얼굴이다. 두 번째로는 주인의 얼굴 혹은 힘을 가진 상대방의 얼굴임을 알 수 있다.

양자의 얼굴 모두 타자성을 결정하는 비대칭성, 비균등성, 비환원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

면 어떻게 우리는 악한 자의 얼굴과 선한 자의 얼굴의 차이를 구분한단 말인가? 만약 타자

가 파괴만을 일삼을 악한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직면하는 사실은 타자가 항상 고

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아니라는 것이며 또한 자아는 반대로 이기주의적 쾌락주의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레비나스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고려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레비나스는 어떤 특정한 사례에 집중하여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가치 판단을 하는 상황윤리적 관점에서 자신의 윤리를 주창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

의 근본전제를 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피할 수 없는

13) Richard A. Cohen, Ethics, Exegesis, and Philosophy: Interpretation after Levina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275.

14) Levinas, Entre Nous, 99.

15) 앞의 책, 100-101.

Page 63: 2010년 가을학기 제 1회 한동 유레카 집단지성 토론회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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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칸트의 정언명령과 유사하다고 말하지만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의 동기가 인간의 이성

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이성의 바깥에서 초월적으로 이성에 침투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철저하고 종교적임을 알 수 있다.16)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이 이성의 필연적 당위의 결과물인 정언명령보다 더 종교적이며

철저한 이유는 타자의 얼굴이 다름아닌 무한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그의

철학적 작업을 통하여 끊임없이 무한의 개념은 우리의 인식과 표상을 초월하는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17) 무한이란 “어떠한 능력도 미치치 못하고 어떠한 기반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변화의 깊이”라고 말한다.18) 레비나스의 무한에 대한 이해는 근대 인식론의 창시자라

고 할 수 있는 데카르트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주체가 모든 개념의 근원인

지 아닌지를 묻는 질문에서 시작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주체는 그 자체보다 더 크고 완벽한

관념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데 그 이유는 결과는 그 원인보다 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주체보다 크고 완벽한 신 개념은 결코 주체로부터 올 수

없다고 말한다. 신 개념은 주체의 능력 밖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남는 것은 신에 대한 관념으로 이것은 내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내

가 마지막으로 고려해야할 대상인 것이다. 신의 이름 때문에 피조물인 나는 영원하고 독립적이며, 전

지하고, 전능한 실체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의 개념은 너무나 광대하고 완

벽한 것이어서 내가 그러한 관념들에 고려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나에게서 그러한 위대한 신의 개념

들이 유래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통해 내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비록 신의 완벽한 실체개념들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유한한 존재로서 무한한 신의 개념을 지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유한한 존재로서 무한의

개념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어떤 실체가 나에게 이러한 무한의 개념을 심어놓았기 때문이

다.19)

데카르트는 유한존재로서의 인간은 결코 신의 개념을 생각해 낼 수 없으며 이러한 신의 관

념은 틀림없이 외부로부터 연유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에게 주체에 대한 데

카르트 해석이 중요한 이유는 데카르트가 초월적 자아의 유아론에 빠지지 않고 무한과의

만남을 시도했다는데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무한과의 만남은 주체를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고 또한 무효화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한과의 만남을 통해 주체는 새로운 개념 정립

이 가능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데카르트의 하나님 개념을 타자에 대한 자신의 이해로 대체한다. “무한은 절

대적 타자이다.”20) “신은 타자이다”21) 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데카르트의 신 이해를

타자 개념으로 대치시킴을 통해 레비나스가 그의 저서 『전체와 무한』에서 자주 언급하는

용어들인 무한, 초월, 외재성, 타자성등의 개념을 보다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무한에

대한 데카르트의 개념은 무한에 대한 존경과 철저한 외재성을 유지하는 존재와의 관계를

16) 칸트와 레비나스의 도덕성에 대한 비교 연구로 Catherine Chalier, What Ought I to Do? Morality in Kant and Levinas, tran. Jane Marie Todd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2002)를 참조하라.

17) Totality and Infinity, 80-81.

18) Emmanuel Levinas, Of God who comes to Mind, trans. Berttina Bergo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66-67.

19) Rene Descartes, The Mediations and Selections from the Principles of Rene Descartes, trans. John

Veitch (LaSalle: Open Court, 1962), 54.

20)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49.

21) 앞의 책,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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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낸다.”22) 신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한다는 의미는 끊임없는 인식론적 긴장을 야기 시킨

다. 신은 다른 사물이나 사람처럼 쉽게 대상화되지 않기에 주체는 신이라는 대상 이해에 지

속적인 한계를 호소한다. 이러한 인식론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대상으로서의 신과 신을 인식

하는 인식주체로서의 자아 사이에서 인식 대상이 인식 주체를 넘어서는 모순적 상황이 발

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에게 이러한 인식론적 모순은 모순에서 그치지 않는다. 왜

냐하면 이러한 인식론적 모순은 인간주체로 하여금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다.23) 외재적으로 주어진 무한에 대한 인식론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욕망은 주체로 하여금

타자에 대한 책임을 추구하도록 독려한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오직 타자에 응답

하는 것 만이 결국 인간 주체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신 이해가 주목받는 것은 데카르트, 파스칼, 키에르케가르로 이어지는 기독교

철학자들이 존재론적이며 실존적으로 신을 이해한데 반해 철저하게 윤리적 차원에서 초월

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신을 인간의 인식론적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

상으로 보지 않을 뿐 더러 하나의 무한 존재자(an finite being)로 보는 것도 거부한다. 신

은 레비나스가 거듭 말하듯이 “존재를 뛰어넘는” 분이다. 다시 말해 레비나스에게 있어 신

은 이 세상을 넘어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부재의 바로 그 지점(the point

of absence)까지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시다.24) 우리의 인식과 존재를 뛰어넘는 그 신은

우리 앞에 바로 타자의 얼굴로 그 흔적(trace)을 끊임없이 계시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함에 있어 도덕적 언어(책임, 대속, 연대성 등)를 즐겨 사용

한다. 하지만 그가 도덕적 언어를 사용한다고 도덕적 선택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칸

트 도덕철학에 있어서 선택은 의식적 주체의 산물인 반면 레비나스가 추구하는 책임이란

타자의 관계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책임은 내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든지

안 하든지 아무 상관없이 나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주체와 관련한 모든

논의는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다. 책임이란 주체에게 일어나는 한갓 우연한 사건도 아니요25)

타인에 대한 “자애적인 의지와 자연적 사랑의 본능”26)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레

비나스의 책임은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책임 그 자체가 주체의 근본적인 개념 가운데 포함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주체의식을 가진 인간이면 그 인간은 누구나 다 윤리적

으로 책임적인 존재이다. ‘나’라는 주체는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데 개별 주체로서

나의 존재는 전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가운데 얽혀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관계를

일종의 강박관념(obsession)으로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타자와의 관계가 전적으로 나를 지

배하기 때문이다고 밝힌다.27) 다시 말해 주체는 자기 스스로를 타자에게 노출시킴으로써 존

재하게 된다. 개별적 존재로서 ‘나’라는 주체가 이처럼 전적으로 타자에 지배되어있는 주체

와 타자 관계의 독특한 성격이 “나는 타자의 볼모(hostage)로 잡혀있다”란28) 표현 속에 함

축적으로 드러난다. 주체는 나위에 군림하는 타자의 힘을 외면할 수 없기에 오히려 핍박받

는 존재이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주체이해는 기존 서구철학의 인식론과 존재론의 차원에서

22) 앞의 책, 50.

23) 레비나스는 이러한 욕망을 ‘형이상학적 욕망’(metaphysical desire)라고 불렀다.

24) Of God who comes to Mind, 69.

25)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114.

26) 앞의 책, 111-112.

27) Emmanuel Levinas, “Langage et proximite,” En decouvrant l' 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Paris: Librarie Philosophique J. Vrin, 1967), 228-31, 233-34를 보라. 또한 Otherwise than Being, 158

도 참조.

28)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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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매우 생소하고 주체를 해체하려는 급진적인 시도로 까지 비쳐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

다.

주체를 향해 무한의 책임을 요구하는 타자와의 만남은 그래서 신을 만나는 ‘신적체험

(epiphany)'에 비유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나타날 때 이 얼굴은 전적으로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29) 타자의 얼굴이 나의 의도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는 지적인 표상작용과

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얼굴이 존재하는 방식은 보여질 수도 없으며 명확히 체험될 수도

없다.

타자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있는 타자의 개념을 초월한다. 이러한 양식

은 내가 바라봄으로 하나의 주제를 파악하지도 않고 하나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몇 개의 성질들을

조합과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얼굴은 매 순간마다 나에게 이러한 모든 조작된 이

미지들을 파괴하고 쓸어낸다. 이러한 개념은 다 주체의 도구로서만 존재할 뿐이며 감각 자료의 재료

로서만 적절한 것이다.30)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레비나스는 계속해서 타자의 얼굴은 우리가 쉽게 주제화하거

나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타자의 얼굴은 나의 힘에 복속되기를

거부하는 무한한 저항인 동시에 윤리적으로 나에게 명령하는 신의 음성인 것이다.

4. 신학 담론으로서 타자윤리의 가능성

레비나스의 하나님은 존재를 뛰어넘는 선(the good)의 개념과 연결되기에 필연적으로 윤리

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레비나스의 신학을 철학적 신학 혹은 신학적 철학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레비나스에게 신학의 궁극적 의미인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담론

은 타자와의 윤리적 만남을 통해 이루어 진다. “신학”과 “윤리”라는 단어는 신과 사람 사이

의 상호적 역동성을 묘사하는 학문이기에 이 둘은 레비나스에게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레

비나스의 타자윤리를 통해 우리는 신학과 철학, 초월과 내재를 아우르는 새로운 접촉점을

얻게 된다. 이런 이유로 초월을 다루는 신학의 과제는 레비나스에게 언제나 중요한 과제였

다.

우리는 그동안 신학을 무시해 왔던 지난 날의 과오를 비난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신학이 다시 회복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주장하지도 않았고 적어도 그 기회조차 만들지 못했음도 비난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점진적 소생은 초월을 경험한 후에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것으로 일차적인

것이다.31)

레비나스의 신학은 타자윤리로 나타난다. 레비나스의 신학은 비록 그가 전통적인 철학의

언어, 즉 존재론적이며 인식론적인 신 담론을 거부하나 한때 미국에서 유행했던 것처럼 신

의 ‘죽음의 신학’에 빠지지는 않는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도

덕적 진리의 외적 원천으로서의 신은 죽었으며 따라서 인간 개인이 스스로 신의 자리에 서

야 함을 역설하였다. 물론 레비나스도 니체와 마찬가지로 신성을 타자에 대한 책임을 다루

29) Levinas, En de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 173.

30)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50-51.

31) Levinas, Of God who comes to Mind, 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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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윤리적 차원, 즉 인간성(humanity)의 큰 범주 안에 정위시키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레

비나스의 타자는 “구약성서의 전통 속에서 인간 존재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존

재”임을 깨우쳐 줌으로 그 인간존재가 초월과 잇닿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32) 레비나스에

게 하나님의 형상은 따로 떨어진 자율적 인간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닌 항상

타자와 윤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다. 이러한 주체와 타자의 연결은 앞서 말했던 것

처럼 주체가 타자에게 “볼모”로 잡혀있다라는 의미인데 주체가 타자에게 볼모로 잡혀있다는

말은 주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타자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로 신의 편재

(omnipotence)의 또 다른 윤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33)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신적 권위에 버금가는 타자의 힘은 바로 철저한 무기력함

(powerlessness)에서 나온다. 이러한 타자의 무기력함을 표현하기 위해 레비나스는 성서의

“나그네, 고아, 과부”의 메타포를 사용한다. “초월을 통해 나를 압도하는 타자는 내가 [책임

져야 할] 나그네, 과부, 고아이다.”34) 이러한 사회적 소수자는 모두 결핍이라는 공통된 존

재양상을 지니고 있다. 나그네는 친구가 결핍된 자요, 과부는 배우자의 결핍을, 고아는 부모

의 결핍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타자가 지니는 윤리적 저항은 바로 이러한 소수자들이 지

니는 육체적 힘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레비나스는 하나님을 하나의 존재자로 고려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신의 존재론적 부재의 공간에 타자에 대한 인간의 책임

을 정위시킨다. 이러한 타자에 책임을 통해 우리는 신의 자취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레

비나스에게 하나님의 자취는 타자의 얼굴에서 발견되어 지고 타자의 얼굴은 다름 아닌 신의

자취의 현현이다.35) 타자의 얼굴에 드러난 신의 자취는 레비나스로 하여금 인간실존의 문제

에 대해 등을 돌리거나 어떤 초월적 신비경험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고통 가운데 있

는 인간 실존과 직면하도록 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레비나스가 신정론을 그토록 완강

히 거부했던 이유도 신정론은 서구 신학에서 신의 정당화를 위해 타자의 고통을 합리화함으

로써 타자에 대한 주체의 책임을 망각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미에

서 레비나스 철학이 지닌 신학적 성격이란 타자에 대한 책임을 통해 신정론의 오류를 극복

함과 아울러 타자에 대한 주체의 책임이야 말로 다름 아닌 우리가 이 땅에서 무한의 자취를

맛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임을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는 자신의 신학을 “신을 향한

다는 것은 다름 아닌 타자를 향한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다시한번 이같은 입장을 확인해

주고 있다.36) 레비나스 신학의 중요한 장점 중의 하나는 그가 끊임없이 전통 신학(특히 신

정론)에 대한 의심의 해석학(the hermeneutics of suspicions)을 적용하지만 이러한 의심의

해석학이 신의 해체나 신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윤리라는 회복의 해석학(the

hermeneutics of retrieval)을 통해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

를 인도한다는 점이다.

32) Emmanuel Levinas, Alterity and transcendence, trans. M. Smith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9), 64.

33) Otherwise than Being, 5; Totality and Infinity, 200.

34) Totality and Infinity, 215.

35) 레비나스의 신과 윤리의 개념에 대한 최근의 연구로 J. Bloechl이 편집한 The face of the other and the trace of God: Essays on the Philosophy of Emmanuel Levina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0)을 보라.

36) Emmanuel Levinas, “The trace of the other,” in Mark Taylor ed., Deconstruction in Context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6),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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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오며

레비나스에 따르면 신정론은 지금까지 타자의 고통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통해 주체가 타

자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도록 했다. 근대철학은 윤리학을 주체 안에 가두어 놓음으로 이성

의 광기가 지배하는 20세기의 비극에 대해 어떠한 해답도 해 줄 수 없었다. 레비나스가 윤

리학을 주체 밖에 정위(正位)하여 어떠한 상호성(reciprocity)도 거부함으로써 윤리학을 초

월적 신의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 여기는 것도 바로 서구 철학에서 드러난 전체성의 폭력에

대한 반동이라고 볼 수 있다.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는 신정론의 종언을 통해 신의 이름으로

타자의 고통을 정당화하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며 고통에 대한 해결은 오직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타자 윤리를 통해 신학과 철학, 초월과 내재를 아우르려고 하는 레비나스 철학(혹은

신학)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과연 레비나스의 윤리가 실천가능한가

라는 단순한 물음에서 시작하여 그의 타자를 통한 신이해를 기독교의 신 개념과 동일한 것

으로 여길 수 있는가라는 복잡한 신학적 물음에 이르기 까지 그의 사상은 많은 과제를 우리

에게 던져준다. 특히 그의 신 이해는 전통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

운 부분도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하나인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의 기

념비적 저작인 『종교경험의 다양성』(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이 지나치게 개

인적 경험을 강조한 나머지 종교가 지녀야할 공동체적이며 윤리적인 성격을 간과했다는 비

난을 받는다면 레비나스의 신학은 그 어디에도 신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말하고 있지 않는

다는 점에서 정 반대의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레비나스 스스로도 이러한 신 개념과 타자이해를 둘러싼 복잡한 논의를 미리 염두해 두기

라도 한 듯 타자에 대한 주체의 의무는 항상 채워질 수 없으며 항상 잉여(surplus)로 남는

다고 말한다.37) 이 말은 우리의 타자를 향한 무한한 윤리적 책임 또한 신을 이해하는 결정

적이며 궁극적인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이른 말이다. 타자의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것

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이런 실천적 아포리아(난제)의 문제를 고려하면서 자신의 타자이론을 발전시

켰다. 이는 비록 그의 사상이 실천적으로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할지라도 세상의 어찌할

수 없는 악과 부조리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윤리적인 책임을 통해서임을 체

험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통한 신의 자취로서만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온전히 보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8)

37) Emmanuel Levinas, Basic Philosophical Writing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6), 17.

38) 고린도전서 13장 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