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52
2018 12 | 통권 제169우리가함께해요

Upload: others

Post on 24-Jul-2020

0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TRANSCRIPT

Page 1: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2018년 12월 | 통권 제169호

우 리 가 함 께 해 요

드러나지 않는 내면에 정성을들이고 의미를담다

Page 2: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본지의 구독은 무료입니다.

•본지에 실린 내용은 저자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본지의 저작물은 ‘공공누리’의 출처표시·상업적 이용

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사진·그림·만화는 이용할 수 없습니다.

목차2018년 12월 | 통권 제169호

발행일 2018년 12월 1일

창간일 2004년 10월 29일

발행처 문화재청 대변인실

(우)35208 대전 서구 청사로 189

정부대전청사

전화 (042)481-4675

팩스 (042)481-4679

전자우편 [email protected]

발행인 정재숙

제작총괄 박희웅, 최계원, 강형도

편집위원 김계수, 김용희, 방인아, 안호, 오명석,

윤리나, 이동융, 이원호, 이종숙, 정은선,

정현정, 조상순

홈페이지 www.cha.go.kr

기획·디자인·제작 (주)홍커뮤니케이션즈

www.hongcomm.com

04

06

10

14

거죽이나 껍질로 싸인

물체의 안쪽 부분, 속.

우리조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곳에도 의미를 담고 정성을 들였다.

감춰져 있는 곳에 소중한 가치를 간직했다.

그러한 조상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발견할 때 우리는 현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가꿔갈 수 있을 것이다.

특집

이면裏面의 문화재

속, 드러나지 않는 내면에 정성을 들이고 의미를 담다

특집_하나

특집_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제주도 용암동굴

- 신비한 거문오름용암동굴계

특집_셋

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특집_넷

기도로 속을 채우고

애정으로 누비는 예인의 손

- 국가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기능보유자 김해자

이면裏面의 문화재

우리민족은 ‘많은 것보다 알찬 것’을, ‘크기보다

깊이’를 중히 여기며 지혜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공을 들이고 작은 것이라

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우리민족의

심성과 지혜는 문화재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

니다. 지나치기 쉬운 문화재의 귀퉁이, 혹은 잘

보이지 않는 이면에 우리가 몰랐던 문화재의 가치,

조상의 정신이 숨겨져 있습니다.

06 14

Page 3: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세월이 깃든 물길, 생명을 품은 너울

가까운 곳에 있는 행복,

한강변을 따라 초겨울 속을 걷다

과거와 현재의 오버랩

종족 구휼을 위한 의장(義庄)

그리고 그 확산으로서의 나눔

- 전통사회 구휼문화 VS 현대사회 기부문화

현장의 숨결

20년 만에 다시 일어선 익산 미륵사지 석탑

전통을 잇는 사람

속도보다는 정성

추정보다는 역사적 사실

- 국립문화재연구소 김현용 학예연구사

이야기가 있는 식사(食史)

가깝지만 이국적인 북한의 겨울 별미들

뜻 있는 사람, 소중한 선물

자수박물관, 그리고 평생 모은

소장유물 기증한 허동화·박영숙

인류무형문화유산

18개 나라가 공동으로 등재한

살아 있는 인류 유산

- 매사냥(Falconry)

명인열전

전통을 잇고 현대의 미감을 창조한

금어(金魚)

- 단청 명인 이치호

문화재 다가가기

국립무형유산원 국외교류전시

「한국과 중국의 무형유산, 비단」 특별전

함께하는 문화재청

백제 사비시대 왕궁터

‘부여 관북리 유적’ 발굴 시작

카툰으로 보는 문화재 정책

상상력 가득! 구석구석

새 단장 마친 천연기념물센터

독자 코너

18

24

28

30

34

38

40

44

46

48

49

50

18 34 46

위 마크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변환 보이스아이 바코드입니다.

Page 4: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04

하나. 一속, 드러나지 않는 내면에 정성을 들이고 의미를 담다

드러나

지 않는 내면에 정성을 들이고 의미

를 담다

Page 5: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05

우리는 종종, 외형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은 말과 다를 때가 많다. 당장 눈에

보이는 곳을 먼저 살핀다. 잘 드러나는 겉부터 보기 좋게 꾸미고 관리한다. 정말 중요한 본질, 본성을

들여다보고 가꾸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둔다. 그 속에는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 좋은 것에 대한 관심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 안에 감춰둔 실체는

얼마못가 들통나고 만다. 우리조상은 당장 보기 좋게 하는 데 힘쓰기보다, 잘 표시나지 않더라도 ‘속’을

가꾸는 데 더 힘썼다. 그곳에 의미 있는 것을 간직하고 정성과 능력을 들여 아름답고 훌륭하게 했다.

탑 속에 간직되어 있다가 수천 년 만에 세상에 나온 사리장엄구에는 조상의 먼 훗날을 향한 소망과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다. 내세의 꿈이 담긴 종교나 사상에만 그러한 마음을 담았던 것은 아니다. 옷감

속에 솜을 촘촘히 넣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모양으로 박음질해 만든 누비옷을 입었으며 털과 융,

솜으로 속을 채운 남바위와 풍차로 더욱 멋스럽고 따뜻하게 겨울을 나도록 했다. 집의 가장 깊숙한

곳에 과학적인 구조의 구들을 설치해 건강하고 효율적이며 경제적인 난방을 실현했다. 감춰져 있기에,

때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도 하지만 속은 핵심이자 근본이다. 그 섭리를 알고 실천했던 조상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발견할 때 우리는 현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가꿔갈 수 있을 것이다.

Page 6: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06

1

Page 7: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07

속, 드러나지 않는 내면에 정성을 들이고 의미를 담다

둘. 二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제주도 용암동굴

일반적으로 동굴(洞窟: cave)이란 『자연적으로 암석

내에 만들어진 공동(空洞: 구멍)으로, 적어도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규모』로 정의한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동굴이란 ‘자연적으로 생긴 깊고

넓은 큰 굴’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자연적이든 인공적

이든 지하의 모든 구멍은 ‘굴(屈)’이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인공적으로 산을 뚫어 만든 도로 등의 통로는

터널(tunnel) 또는 굴이라고 표현한다. 한편 갱(坑)

또는 갱도(坑道)라 하면 광산에서 지하자원을 캐려고

땅속을 파 들어간 굴을 말한다. 따라서 ‘자연동굴’이나

‘천연동굴’이라는 표현보다는 ‘동굴’, 사람이 뚫어 놓은

굴에 대해서는 ‘OO동굴’이 아니라 ‘OO굴’, ‘OO터널’,

‘OO갱도’라는 표현이 옳다. 등록문화재인 ‘동굴진지’는

‘굴진지’또는 ‘갱도진지’라고 표현하여야 한다.

글. 이광춘(사단법인 자연유산보존협회장, 한국동굴환경학회장)

석회암동굴과 용암동굴

동굴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동굴은 석회암동굴(석회동굴)과 용암동굴이다. 석회

암동굴은 탄산칼슘(CaCO₃)으로 이루어진 석회암이

나 대리암이 탄산(H₂CO₃)을 포함한 빗물이나 지하

수에 녹아 만들어진 동굴이다. 탄산은 공기 중의 탄

산가스(CO₂)가 빗물(H₂O)에 녹아 자연상태에서 쉽

게 만들어진다. 우리나라 내륙에 있는 동굴들은 대부

분 석회암동굴로서 1,000개가 훨씬 넘는 것으로 조

사되고 있다.

용암동굴은 점성이 낮아 잘 흘러가는 용암류(熔岩流;

용암이 흘러가는 것이나 흘러가다 굳은 것)에 발달하

는 동굴로서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화산동굴의 한 종

류이다. 1,000℃ 내외가 되는 뜨거운 액체상태의 용암

류가 흘러내릴 때, 표면은 먼저 식어 굳어지지만, 내부

의 굳지 않은 뜨거운 용암은 계속 흘러내려 빠져나가

면, 용암류의 속이 비게 되어 생기는 동굴이 용암동굴

이다. 용암동굴의 생성원리는 간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동굴이 생긴 이후에도 용암동굴 속으로 뜨

거운 용암류가 계속해서 흘러들게 되면 동굴의 바닥,

벽, 천장 등이 녹아내려 동굴은 더욱 커지고 복잡한 구

조를 갖게 된다. 현재까지의 용암동굴은 대부분 제주

도에서 150여 개가 발견되고 있으며, 지금도 도로공사

등 각종 공사장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어 용암동굴의 수

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에는 하천

의 침식작용에 의한 하식동굴(河蝕洞窟)과 삼면이 바

다이고 섬이 많아 해파(海波)의 침식작용에 의한 해식

동굴(海蝕洞窟)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용암동굴계

거문오름용암동굴계란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위치

하는 거문오름(약 8,000년 전에 형성, 해발 456m,

천연기념물 제444호)이라는 작은 화산체에서 점성이

낮아 잘 흘러가는 현무암질 용암류가 분출하여 북동

쪽으로, 구좌읍 월정리 해안까지 약 13km를 흘러내

리는 동안 발달한 용암동굴들의 무리를 말한다.

신비한 거문오름용암동굴계

1.용천동굴 모습. 용천동굴 내부에는

석회동굴에서나 볼 수 있는 다양한

탄산염 동굴생성물들이 가득하다.

이광춘

Page 8: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2.당처물동굴의 각종 동굴생성물

(석회질 석주, 종유석)

이광춘

3. 4.용천동굴의 다양한 동굴생성물

이광춘

5.물이 만든 석회암 동굴.

불이 만든 용암동굴과 차이가 크다.

이광춘

6.용천동굴의 다양한 석순

이광춘

7.용천동굴에서 발견되는 제단

이광춘

8.거문오름용암동굴계

이광춘

08

2 5

63

74

Page 9: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09

동굴계, 성산일출봉 등 3지역을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Jeju Volcanic Island and Lava Tubes)’이라

는 이름으로, 2007년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된 일

등공신은 세계에서 제주도에만 있다고 평가된 당처물

동굴과 용천동굴의 다양하고 수많은 석회질 동굴생성

물과 화려함이다. 이렇게 용암동굴에서는 좀처럼 보

기 어려운 수많은 석회질 동굴생성물들이 발달하게 된

원인은 바닷가에 있던 흰 모래가 바람에 날려 동굴 위

의 지표면에 쌓여 사구(砂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

다. 제주도의 흰 모래들은 탄산칼슘 성분으로, 바다에

서 살던 여러 생물체들의 껍질이 부서진 것이다. 이 탄

산칼슘 성분의 모래가 빗물에 녹아 당처물동굴이나 용

천동굴의 벽이나 천장의 갈라진 틈(절리)을 따라 동굴

내부로 흘러든 후, 다시 분해되어 탄산칼슘이 침전되

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즉 석회암

동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이 탄산칼슘 성분인 흰 모

래로 인하여 용암동굴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전 세계

에서 제주도만이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용천동굴이

나 당처물동굴은 용암동굴임에도 불구하고 석회암동

굴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석회질 동굴생성물들이

잘 발달되어 있는 불과 물이 만들어 놓은 자연의 예술

작품이다. 이렇게 매우 소중한 지질유산은 잘 보존하

고 관리하여 우리의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주어 영구

히 보존토록 하여야 한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에 속하는 동굴은 거문오름에 가까

운 동굴부터 순서대로 천연기념물 제490호 선흘리벵

뒤굴(총 길이 약 4,500m. 이하 ‘총 길이’ 생략), 웃산

전굴(약 2,400m)과 북오름굴(약 220m) 및 대림굴

(약 170m, 이 세 동굴을 거문오름용암동굴계 상류동

굴군이라 하여 천연기념물 제552호로 지정), 천연기념

물 제98호 만장굴(약 7,200m) 및 김녕굴(약 700m),

제466호 용천동굴(약 3,000m), 제384호 당처물동굴

(약 210m)이며, 앞으로도 더 많은 동굴들이 발견될 가

능성이 있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의 동굴들은 거의 하

나의 용암류 내에 발달한 동굴들로 판단되어, 생성초

기에는 대부분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용암

이 꽉 들어차 메우거나 동굴이 무너져 서로 분리되면

이름을 달리 부르게 된다. 총 길이는 하나의 동굴과 직

접 연결되어 있는 상하층 굴이나 가지굴 등의 길이를

모두 합한 것이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에서 가장 규모

가 큰 용암동굴은 만장굴이며, 일부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관람할 수 있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에서 가

장 화려하고,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주도

에만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용암동굴은 당처

물동굴과 용천동굴이다. 이 두 동굴은 검은색의 용암

동굴이지만, 동굴 내부에 발달해 있는 동굴생성물들은

석회암동굴에서나 볼 수 있는 흰색의 석회질 동굴생성

물들이 무수히 발달해 있어, 흑백의 조화가 극치를 이

루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용천동굴에는 약 1,000여

년 전,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어떤 의식을 진행했던 것

으로 판단되는 많은 흔적(토기, 숯, 나무토막, 제단, 벽

면의 글씨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용천동굴 끝 부

분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으며, 바다까지 연결된 수중

동굴 구간과 눈이 퇴화된 흰색의 물고기가 살고 있다.

당처물동굴은 1994년 주민이 농토를 정리하다가 우연

히 발견되었으며, 용천동굴은 세계자연유산 등재 신청

을 준비하고 있던 2005년 5월 전신주를 교체하려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우리나라로서는 천운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주도의 한라산, 거문오름과 거문오름용암

1차적으로는 화산활동에 의하여

용암동굴이 형성되었으나,

그 뒤 동굴 지표면을 피복하고

있던 패사층(貝砂層)으로

이루어진 사구(砂丘)에서

용해된 석회질 성분이

동굴 천장의 갈라진 틈으로 흘러들어

탄산칼슘 성분의 2차적인

동굴생성물들을

성장시키고 있다.

당처물동 굴,용천동굴

8

Page 10: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10

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사리(舍利)는 부처님의 열반 후 화장을 하여 나온 유골을

말하며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건축물이 탑이다.

즉 불교에서 탑의 존재 이유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

하기 위한 것이고, 탑에 사리를 봉안할 때는 금, 은, 동,

유리, 수정 등으로 만든 사리용기를 여러 겹 포개어

봉안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사리는 신라에만 전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백제의 왕흥사지, 미륵사지

에서도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백제에도 사리가 전래

되어 탑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까지 고구려의

사리장엄구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고구려에도 사리를

봉안했던 사리장엄구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글. 이용진(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속, 드러나지 않는 내면에 정성을 들이고 의미를 담다

셋. 三

최초의 사리 전래와 신라의 사리장엄구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흥왕 조에는 다음과 같

은 기록이 있다. “十年春 梁遣使與入學僧覺德送佛舍

利, 王使百官, 奉迎興輪寺前路” 이 기록은 한반도에 최

초로 전래된 사리의 기록이다. 진흥왕 10년인 549년

중국 양나라에서 사신과 승려 각덕을 파견하여 사리

를 보냈고, 진흥왕은 백관에게 명하여 흥륜사 앞에서

맞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549년에 신라에 전래

된 사리는 사리를 봉안할 사리장엄구와 함께 전래되

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신라는 양나라의 사리장엄법

식을 따라 탑에 봉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

는 신라의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로, 634년에 건립

된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리장엄구는 돌로 만든 석함

과 은합, 유리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상을 놀라게 한 백제의 사리장엄구

백제에 사리가 전래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588년

백제가 일본에 사리를 전해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

에도 사리를 봉안했던 탑과 사리장엄구의 존재는 있었

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좀처럼 존재를 드러내지 않던

백제의 사리장엄구의 흔적은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이미 폐기 상태였기 때문에

사리장엄구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치형의 석조사리

감에는 오른쪽에 세로로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백제

창왕십삼년태세재)’, 왼쪽에 세로로 ‘丁亥妹□公主供

養舍利(정해매□공주공양사리)’의 명문이 새겨져 있

어 창왕(위덕왕) 13년인 567년에 능산리 절터의 목탑

에 봉안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놀라게 한 백

제의 사리장엄구는 창왕명 석조사리감 발견 이후 12

년 후인 2007년 부여 왕흥사지에서 발견되었다. 왕

흥사지 목탑지에서 모죽임하여 지붕 모양을 한 녹정

형 석제 뚜껑을 들어내자 장방형 사리공 안에서 청

동합, 은제사리호, 금제사리병이 발견되었다. 청동

합의 몸체 표면에는 6행 29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

어 577년 창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사찰을 만들

고 목탑에 사리장엄구를 봉안한 것을 알 수 있다. 왕

흥사지 사리장엄구는 녹정형 석제 뚜껑을 포함하면

‘석-동-은-금’의 4중 구조로 되어 있고, 금제병에 사

리 를 넣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왕흥사지 사리장엄구

는 완벽한 조합으로 발견된 최초의 백제 사리장엄구

Page 11: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11

1.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보물 제1767호)

중 은제사리호, 금제사리병, 청동합

문화재청

2.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은 가장

바깥에 청동제의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으로 만든 사리호, 그리고

보다 작은 금제 사리병을 중첩하여

안치한 3중의 봉안 방식을 취하였다.

문화재청

1

2

Page 12: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12

3.보물 제1991호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639년(무왕 40)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

금동제 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금제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으로 구성되었다.

문화재청

4.보물 제366호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국립중앙박물관

5.보물 제1359호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국립중앙박물관

6.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왼쪽과 오른쪽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창왕(위덕왕) 13년인 567년에

능산리 절터의 목탑에

봉안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3

4

5

Page 13: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이고, 녹정형 석제 뚜껑과 청동합, 은제호, 금제병

은 577년 당시 백제에서 탑에 사리를 봉안할 때 중

첩되는 재료와 사리용기의 형식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2009년에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577년 왕흥사지 사

리장엄구에 이은 백제의 두 번째 사리장엄구이자 금

제사리봉영기가 발견되어 639년에 미륵사지 석탑에

봉안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미륵사지 석탑 심주

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금동외호와 금제내호,

유리병의 3중 구조로 되어 있고, 심주석을 포함하면

‘석-금동-금-유리’의 4중 구조로 중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외호와

금제내호는 왕흥사지 목탑지 발견 사리장엄구의 은

제사리호와 형태적으로 유사하여 백제 사리장엄구

의 양식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창왕명 석조사리

감을 비롯해 왕흥사지 사리장엄구,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는 모두 왕실 발원으로 탑에 봉안되었고,

시기적으로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

고 있어 백제에 사리가 전래된 기록은 없지만, 567

년 조성된 창왕명 석조사리감을 비롯해 588년 일본

에 사리를 전해 준 기록을 참고하면, 신라에 사리가

전래된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백제에도 사리가 전래

되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사리장엄구를 조성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사리장엄구는?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한 고구려는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사리장엄구를 조성했을까? 1945년 이

전 고구려의 사찰터 발굴에서는 탑지가 발견되었다.

탑지의 발견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탑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구려도 백제와 같이 사리의

전래기록은 없고, 현재까지도 고구려의 사찰터에서

사리장엄구의 발견 소식은 없다. 그렇다면 고구려에

는 사리 전래와 사리를 봉안할 사리장엄구의 조성이

없었던 것일까? 중국 섬서성 남전현 법왕사지 출토

(7세기)의 석제 녹정형 사리합의 외면에 새겨진 분사

리도(分舍利圖)에는 조우관(鳥羽冠 : 새의 깃털을 장식

으로 꽂는 관모)을 쓴 인물이 표현되어 있어 고구려의

사신으로 추정되고, 『광홍명집(廣弘明集)』 권17에는 고

구려와 백제, 신라의 사신이 수 문제에게 사리를 청하

여 허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면 고구려

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탑에 사리가 봉

안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고, 머지않은 시기에 발견

될 것으로 기대된다.

통일신라의 사리장엄구

신문왕은 682년 아버지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감

은사를 창건하였다. 감은사의 창건은 문무왕의 위업

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만, 통일 이후 쌍탑가람의 등

장과 새로운 사리장엄구의 등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중

요한 의미를 가진다. 1959년 감은사지 서탑에서, 1996

년 동탑에서 사리장엄구가 각각 발견되었다. 감은사

지 서탑과 동탑의 사리장엄구는 금동외함-전각 모양

내사리기-수정사리병으로 구성되지만, 세부적으로는

차이를 보인다. 전각 모양 내사리기는 동탑의 경우 중

앙 화염보주 주위에 4구의 승려와 사천왕이 있어 주악

상과 무동이 장식된 서탑과는 차이를 보이고, 서탑 사

리장엄구에는 없는 사자가 기단에 장식되어 있는데,

둘 다 화려하면서도 세밀한 장식이 돋보인다. 감은사

지 동서탑의 사리장엄구는 양나라의 사리장엄구를 따

랐던 신라의 사리장엄구가 통일 이후 새로운 양식을 수

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은사지 동서탑의 사리장엄

구 이후 통일신라의 사리장엄구는 다양한 형식으로 제

작되며, 건탑 세력의 확대와 조탑경(造塔經: 탑을 세울

때 근거가 되는 경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영향으

로 법사리와 작은 탑이 제작되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

한다. 탑 속에 봉안되는 사리장엄구는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불교의 교주인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기 때문에 조성 당시 최고의 재질을 사용하여 최고

의 공예적 기술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舍利器

사리를 봉안할 때 사용하는

사리병이나 사리함, 사리호 등의

용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유리나 수정으로 된

병 모양의 용기에 사리를 담은 뒤

이것을 다시 은이나 동으로 된

여러 겹의 용기 안에 넣어 불탑에

안치한다. 그래서 내용기(內容器)·

외용기(外容器)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리기

13

6

Page 14: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14

1

Page 15: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15

속, 드러나지 않는 내면에 정성을 들이고 의미를 담다

넷. 四

바깥사람들에게 김해자는 쉽지 않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빈틈없는 작품처럼 김해자는 칼 같다.

예민하고 뾰족하다. 수십 년을 바늘과 함께해서일 것

이다. 혹은 누비장으로서 지난했던 삶이 그를 그렇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전국에서 그를 찾아 들고나는 사람

들을 오랜 시간 겪으며, 김해자의 곁은 좁아졌다. 지금은

소중한 사람만이 남았고, 자신처럼 누비를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인 삶을 김해자는 살고 있다.

글. 이혜민 사진. 김병구

바늘로 비는 공의 산물

요즘 사람들에게 누빔 옷은 낯설지 않다. 겨울이면

깃털이 빵빵하게 충전된 패딩이나 안감에 누빔 처리

가 된 코트를 찾아 입는다. 말 그대로 천과 천 사이에

충전재를 넣고 박아낸 옷을 우리는 보통 누빔 옷이라

부른다. 이 누빔 옷은 옛 전통 기법인 누비와 통해 있

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만드는 이의 차이. 오늘날의 옷

들은 기계가 만들지만, 전통 옷은 모두 옷을 짓는 이

가 있었다. 기계가 없던 시절, 아낙네들이 손수 바느

질로 옷을 해 입던 그 시절의 테크닉이 지금까지도

통용되고 있는 셈이다.

언뜻 보면 누비옷의 원리는 간단하다. 천 속에 솜을 넣

고 똑바르게 홈질만 하면 된다. 그러나 홈질을 하기 전

부터 누비 천에는 수없이 손이 간다. 두 겹의 천이 움직

이지 않도록 고정하고, 치수를 재고, 틀어진 곳은 없는

지 끊임없이 점검하며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딱 맞는 순간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 칼 같음을 단련하는 데만도 몇 년이 걸리는 일이 바

로 누비다. “아무나 못하는 일이에요. 성품이 곧고 근기

가 있어야 해내는 일이니까. 저한테 오는 오랜 제자도

제가 존경해요. 15년째 나한테 다녀가고 있거든요. 기

본적으로 정서적인 안정이나 정신세계가 갖춰지지 않

으면 못하는 일이에요.”

옷을 하나 짓는데 무슨 정신수양까지 필요한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옛 여인들에게 누비는 단순히 의

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입었을 때 너무도 편안하

고 아름답지만, 의복의 기능을 넘어선 기원의 의미가

누비에는 있다. “치마 하나 완성하는 데에도 몇 달씩 누

벼야 하거든요.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

리는 행위를 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만드는

사람이 입는 사람을 위해서 공을 들인 거거든요. 속으

로 기도를 드린 거지. 신앙의 대상이고 공의 산물인 거

예요.” 기원의 측면으로 본다면 시간을 오래 들이는 것

도 이해가 된다. 어떤 염원이든 오래 빌어야 절실함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기능보유자 김해자

기도로 속을 채우고애정으로 누비는

예인의 손

1.국가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기능보유자 김해자. 그는 단순히 누비옷을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 누비’를

재현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Page 16: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더해진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을 것이

다. 단순하게 홈질을 해가며, 염주 알을 넘기듯 옛 여

인들은 가족의 안녕과 건강을 빌었고, 김해자는 그 고

귀한 정신을 잇고 싶다.

평생 누비와 함께하길 자초한 삶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누비옷은 저렴하

지 않다. 하지만 만든 이의 시간과 정성을 헤아린다면

그 값어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속뜻은

헤아리지 못한 채 단순히 누비에 걸리는 시간이나 가

격을 운운하면 김해자는 못내 섭섭하다. 그럴 때는 전

통문화든 누비든 모든 것을 등진 채 바느질만 하며 살

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렇기에 김해자

는 누비를 너무 사랑하고, 무엇보다 누비 문화에 대한

확신이 있다. “저는 누비의 세계화를 확신해요. 반드시

되는 일이거든. 앞으로는 자기 나라 문화에 대한 문화

전쟁이니까. 누비를 가지고 양장 쪽으로 가면 비전이

있다고 봐요. 핸드메이드 쪽으로 비전을 두고 하이패

션 쪽으로 가는 거죠.”

김해자가 현대식으로 해석한 누비옷은 이미 세계적

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미

국 순방과 G20 독일 순방 당시, 부인인 김정숙 여사

가 김해자의 누비옷을 입어 화제가 됐다. 김정숙 여

사는 누비옷을 보고 감탄하는 전 미국대사 부인에

게 즉석에서 자신의 누비옷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

런가 하면, 김해자는 국내전시는 물론 중국, 파리, 일

본 등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가졌다. 주제에 따라 조

선시대의 유물을 재현하거나 현대적인 작품도 선보

이며, 강의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그와 더불어 경

주 공방에서의 제자 양성까지 하루도 쉼 없는 삶이

지만, 김해자는 이렇게 해서라도 누비를 평생을 걸

고 지키고 싶다.

16

縷緋匠

누비 기법으로 바느질을 하는 장인.

우리나라의 전통 손누비는

세계 유일한 재봉법으로

그 정교함과 작품성이

자수를 능가하는 예술품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나,

지금에 와서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라져가고 있다.

누비장

2

Page 17: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17

밤새워 누벼 넣는 애정

누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만, 김해자는

그 속에 자리 잡은 정신과 문화를 더욱 중히 여긴다. 결

코 사라져서는 안 되고, 계속 지켜나가야 하는 문화라

고 그는 생각한다. 역시 무형문화재다운 대단한 사명감

이다 싶지만, 실은 그 마음보다 누비에 대한 애정이 더

욱 크다. 그래서 요즘도 김해자는 천을 자르고 반듯하

게 홈질해나가는 작업을 밤새워 한다. 밤새 바느질을

한 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게 진정 내가 한 게 맞나 싶

을 정도로 황홀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아무래도 내가 아니라 귀신이 한 거 같다’며

들떠있다고 제자들은 귀띔한다. 예쁜 누비옷을 하나 완

성하고는 오는 사람마다 입혀보기도 한다. 그 정도로

김해자는 누비를 사랑하지만 그 마음을 쉽게 밖으로 드

러내지 않는다. 제 사람들에게만 보여주는 김해자의 천

진함이다. 그토록 좋아하는 일이기에 그는 지금 직접

누비를 알리고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경주에 마련 중

이다. 한옥마을을 짓고 전통손누비 전시장을 마련해 누

비를 여러 사람한테 알리려 한다. 이 많은 일들을 처리

하려면 몹시 분주하고 마음이 바쁠 것 같은 데도 김해자

는 항상 느긋하다. “그냥 주어진 일을 오롯이 할 뿐이니

까. 한국인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어떤 행위를 할 때 좋

은 마음으로 하는 거죠. 인연이 이리 됐으니까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직분을 다해야죠.” 누비를 처음 시작할 때

김해자에게 책임은 없었다. 여자로서 바느질이 괜찮은

직업이라 생각했고, 무엇보다 누비 바느질이 좋았다.

그러나 누비 장인으로 인정을 받고 무형문화재가 된 후

에는 많은 책임들이 붙었다. 가끔은 그것이 버겁게 느

껴지기도 하지만, 버티는 이유는 여전히 누비가 좋아서

다. 천 속에 불어넣는 기운이 좋고, 옷 속의 따뜻한 온

기로 전하는 기도가 평온하다. 그래서 김해자는 세월과

세월 사이를 오늘도 힘겹게 누벼내고 있을 뿐이다.

2.안감과 겉감을 붙이기 전 시침을

함으로써 천이나 올이 틀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3.김해자는 자연에서 염료를 채취해

자신이 지을 옷의 염색을 손수 하고 있다.

4.천과 천 사이에 들어가는 누비솜.

옷에 보온성을 더하려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5.누비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위해

김해자는 전통 유물 재현과 현대적인

디자인의 양장을 모두 선보이고 있다.

3

4 5

Page 18: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세월이 깃든 물길, 생명을 품은 너울

18

가까운 곳에 있는 행복,

한강변을 따라 초겨울 속을 걷다

한강漢江

Page 19: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19

날이 쌀쌀해지니 주변을 더욱 챙기게 되는 연말연시다.

행복은 늘 가까운 곳에 있다는데 왜 사람은 멀리만을

바라보며 사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전국을 돌아다

녔던 발걸음으로 이번에는 가까워서 더욱 들여다보지

못했던 한강변을 찾아볼 참이다. 반만년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곳, 뺏고 빼앗기며 여러

나라의 흥망성쇠를 수없이 함께 겪어냈던 곳, 그럼에도

너무나 익숙하고 편안한 한강. 길이 잘 조성되어서

산책하듯 거닐기도 좋은 그곳으로 초겨울 한나절

여행을 떠난다. 오늘은 서울의 서쪽 끝, 김포부터 본 후

양화나루, 아차산성을 거쳐 동쪽 끝, 암사동까지 줄곧

다녀볼 참이다. 겨울치고는 날이 화사해서 사람들이

많기를 기대하면서 밖으로 나선다.

글. 신지선 사진. 김병구

Page 20: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대대로 국토의 대동맥 역할을 해온 한강

한강은 아리수, 한수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남한에서

가장 유량이 많은 강이다. 면적만 26,018km2로 한반

도에서 압록강, 두만강 다음으로 넓고 긴 강이다. 본

류는 양평군 양수리에서 시작되어 북서쪽으로 흐르

며 왕숙천, 탄천, 중랑천, 안양천, 굴포천 등의 지류

를 합치고 임진강과 만나 경기만으로 흘러든다. 한강

은 역사적으로도 이 땅의 대동맥 역할을 해냈다. 수

많은 물자와 문화가 한강을 거쳐 이 땅에 흘러들었고

유역을 중심으로 꽃피고 번성했다. 도시화와 산업화

가 일어나면서 한강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수도

권의 인구가 증가하자 한강은 생활용수, 관개용수,

공업용수의 수자원이 되었다. 더불어 그 일대는 아름

답게 개발되어 서울 시민의 휴식을 책임지는 명소들

이 되었다. 오늘은 말끔하게 정비되어버린 한강변이

아니라 자연 상태의 한강을 먼저 만나고 싶어 김포에

위치한 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부터 찾았다.

너른 들판이 한눈에, 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

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은 기존 철새 취식지의 생태성

을 보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다. 생태공원의 문

을 들어서니 묘하게 생긴 건물이 제일 먼저 시선을 끈

다. 이곳이 바로 공원의 심장, 에코센터다. 새 둥지 모

양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로 김포의 역사 및 생태 관람,

먹이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간단하게 전시시설도 둘

러보고 조그맣게 조성된 조류생태전시관을 보며 새들

에 대한 이해도 높여본다. 이런저런 설명들보다 먼저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싶어 센터 안은 잠깐만 둘러보

고 에코센터 철새조망 전망대를 오른다. 공원이 한눈

에 내려다보이는 것은 물론, 한강의 풍경과 주변 경치

가 사방으로 보인다.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이다. 서울

에서 이렇게 시원하게 들판을 조망하기란 정말 어려

운 일이다. 공원 면적만 60만 m2. 초겨울에 들어서는

때라 초록빛이 가셔서인지 넓은 들판이 좀 휑하게 느

껴진다. 다시 내려와 잘 조성된 산책로를 잠시 걷는다.

20

1

Page 21: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푸른 나뭇잎은 없지만 운치 있는 억새가 분위기를 제법

낸다. 야생조류생태공원이라서일까? 겨울철새들이 하

늘에서 기분 좋은 비행을 선보인다. 한동안 이어지는

철새들의 군무를 넋 놓고 쳐다본다.

성지가 된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눈이 하얗게 쌓이고 북풍이 휘몰아치니 한 나라 궁정

의 승로반 선인장이 얼어 꺾어졌으리, 나귀 타고 강가

에서 술 취해 읊으니 가스목 호탕한 기운 천 길 무지

개로다.” <한도십영 양화답설(漢都十詠 楊花踏雪)>의

한 대목이다. 풀어 쓰자면 양화나루에서 밟는 겨울 눈

에 대한 시. 조선 성종 때의 명신인 이승소가 지은 시

로 사적 제399호인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의

절경을 시상으로 느껴볼 수 있다. 초겨울 찾은 나루

인데도 그 경치는 예사롭지 않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을 앞에 두고 누에 머리를 닮은 봉우리, 잠두봉이 우

뚝 솟아 있다. 양화나루는 경치도 빼어나지만 역사적

으로도 중요한 요지다. 이곳은 고려 때부터 한강의 중

요 도선장이었으며 양천, 강화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

이었다. 특히 영조 때는 한강의 수로와 한성 방어의

요충지로 지정되어 군사 100명이 주둔하기도 했다. 그

러나 병인양요 때 이곳은 역사의 커다란 변화에 휩싸

이게 된다. 1866년 프랑스 극동 함대가 조선 원정을 시

도한 끝에 양화진과 서강을 올라왔다가 중국으로 돌

아갔고 그해 9월 다시 강화를 침략한 사건이 일어났

다. 그러자 조선은 이 사건이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간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 때문에 일어났다 생각하고 프

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1만 천주교 신자들

을 처형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이곳은 천주교 신자

들에게 ‘신자들이 칼날을 받은 곳’이라는 뜻의 절두산

으로 불리게 되었다. 잠두봉 정상에 천주교 절두산 순

교자기념관과 성당이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호

젓한 길을 올라 성당으로 들어가 본다. 평화롭고도 고

요한 성당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이곳에서 목숨

을 다한 성인들을 위해 잠시 눈을 감아본다. 발길을 돌

려 한강변으로 내려온다. 양화나루에서 멀리 바라다

보니 한강 유역의 전경이 그림처럼 보인다. 흐르는 한

강의 모습은 이곳의 분위기를 닮아선지 평화롭고 고

요하다. 잠시 한강변을 따라 걷다가 차를 타고 양화대

교를 건넌다. 다음 목적지는 아차산성이다.

21

1.철새 취식지의 생태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

2.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성인들의

유품과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절두산순교자기념관

3.1966년 병인양요 100주년을

기념하여 잠두봉을 중심으로

조성한 감두봉유적의 형구돌

4.잠두봉유적의 김대건 신부 동상.

김대건 신부는 혹독한 고문 끝에

선교부와 신부들에게 보내는 편지 및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쓴 후

26세로 순교했다.

5.서울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시대 교통의 요충지였던 양화나루

2

3 54

Page 22: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눈길을 끈다. 입구를 지나니 넓은 산책로가 펼쳐진다.

공원 같은 암사동 유적지는 선사시대의 대움집을 재현

해놓은 움집터와 유적을 보관 전시한 유적박물관, 체

험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움집터로 향해본다. 겨

울이라선지 움집이 따뜻해 보인다. 선사시대에 이런

집을 지었다니 선사인의 지혜에 새삼 감탄한다. 작은

박물관으로 들어서니 신석기시대 대표 유물 빗살무늬

토기를 볼 수 있다. 불 피우는 것과 토기를 제작해보

는 등의 체험시설도 있다. 직접 해보는 것이라선지 어

린 아이들의 줄이 제법 길다. 왠지 성가신 마음에 멀찍

이 서서 구경만 해본다. 암사동 유적지가 잘 정비된 신

석기 유적지라고 해서 이곳에서 신석기 유적만 발견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해다. 대홍수 후 발굴 때는 6개

의 자연층위로 된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중에는 백제

토기와 건물자리가 나온 검은모래층, 민토기와 돌도끼

등 청동기시대 유물이 나온 회색모래층, 빗살무늬토기

가 출토된 붉은갈색모래층이 모두 섞여 있었다. 이처

럼 암사동에서는 가장 멀리 신석기시대부터 한강 주변

에 살아왔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이

다. 그러고 보면 한강은 그런 곳인 것 같다. 무궁무진한

역사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곳. 한강의 서쪽부터

동쪽까지 반나절. 강을 중심으로 엮어낸 조상들의 삶

의 역사를 한눈에 목격한 기분이었다.

강변북로를 타고 아차산성으로

강변북로를 타고 구리 쪽으로 가다 보면 사적 제234호

아차산성이 나온다. 한강 하류의 북쪽 강변에 있는 해

발 285m의 봉우리 위 산성. 둘레는 1,125m에 이르니

까 꽤 크다. 이곳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한강의 상류와

하류에서 올라오는 선박의 움직임을 빨리 포착하기 좋

다. 그래서인지 한강 유역을 두고 다투었던 삼국은 그

들이 이곳을 차지할 때마다 저마다 필요에 맞게 방어요

새로 활용했다. 이처럼 아차산성은 격렬한 항쟁의 역사

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강변을 내려다보는 관광 구역

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아차산성. 평안한 세월에

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아차산은 평강공주와 온달

장군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온

달이 전사한 곳이 아단성, 즉 이곳으로 기록되었기 때

문이다. 아차산 입구에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동상이 서

있는데, 온달장군의 용맹한 모습이 설화 속 바보 이미

지와 겹치며 이채롭다. 산으로 난 길을 굽이굽이 올라

가본다. 정상에 올라가 한강을 이리저리 내려다볼 참이

다. 오르는 길에는 곳곳에 출토유물을 설명하는 설명판

들이 서있다. 토기부터 구절판, 마구나 쇠스랑 등이 보

인다. 아마도 성 안에서 이곳을 지키던 병사들의 생활

물품들이었을 것이다. 유물들을 보니 갑자기 그 당시

성 안의 생활 모습이 눈에 보이듯 그려진다. 흥미롭다.

나지막한 산인 줄 알았는데 한참을 오르니 힘이 든다.

숨을 몰아쉬고는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에 섰

다. 정말 한강의 모습이 한눈에 다 보인다. 멀리로 다리

들이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풍납토성도 보이고 롯데 타

워도 보인다. 서둘러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신석기시대 모습을 볼 수 있는 암사동 유적

이번에는 광진교를 거쳐 암사동으로 건너간다. 삼국

시대에서 선사시대로 넘어가는 길이다. 1925년 대홍

수로 인해 유물포함층이 발견되어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간 사적 제267호 암사동 유적지. 들어서는 길에

걸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 추진’ 플래카드가

22

溫達

고구려 평원왕~영양왕 때의

장군으로 북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출정하였다가

아단성에서 전사했다.

온달

6.백제의 수도 한산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이 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하는 아차산성

6

Page 23: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23

한강 주변

추천명소

➊ 한강야생조류생태지역

큰기러기, 쇠기러기, 재두루미 등과 오리, 백로 등 철새

들이 취식활동을 하는 한강하류지역 633,547m2에 들

어선 한강야생조류생태지역은 야생조류의 생태 및 서

식환경을 보존, 관리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에코센터와

철새 전망대 등도 함께 건립하여 지역주민들과 방문객

들이 야생조류 생태정보를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도심 속에서 자연을 느끼고 싶다면 꼭 한 번 찾아

보시기를 권한다.

*경기도 김포시 김포한강11로 455

➋ 병인박해의 현장,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양화나루 또는 양화진은 잠두봉과 주변에 있었던 나루

터이다. 경치가 뛰어나서 조선시대 중국사신이 오면 이

곳에서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양화나루 위 잠두봉은

병인박해의 현장으로 유명하다. 병인양요가 일어났던

시기, 흥선대원군은 이에 격분해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

했고 1만여명의 천주교인들을 처형했다. 잠두봉 정상에

순교성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절두산순교자기념

관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찾는 성지이기도 하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96-1

➌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6호 조선장

조선장이란 우리나라 전통 배인 한선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거룻배, 나룻배, 야거리배, 당두리 등 일제강점

기 전후로 강이나 바다에 떠다니던 배가 모두 한선이다.

조선배의 특징은 물 깊이가 무릎밖에 안 되는 강 상류

를 오르내릴 수 있도록 배 밑바닥을 넓고 평평하게 만

든 것이다. 서울 전역에서 이처럼 조선배를 만들던 박정

옥 조선장 기능보유자가 1994년 사망하여 현재는 기능

보유자가 없는 상태다.

*서울특별시 강서구

한강야생조류생태지역 ➊

➋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아차산성 ➍

➎ 암사동 유적

➎ 선사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암사동 유적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마을

유적. 1925년 대홍수로 유물포함층이 드러나면서 토기

석기가 대량 채집되었으며 196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학 조사단에 의해 정식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출토유

물로는 빗살무늬토기, 뗀석기, 맷돌 등의 연모와 도토리

새뼈 등 자연유물이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 박물관과 체

험 프로그램도 경험할 수 있고 선사시대 주거지를 그대

로 재현한 마을도 있어 아이들과 함께 둘러보기 좋다.

*서울특별시 강동구 올림픽로 875

➍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천연요새, 아차산성

사적 제234호. 테뫼식에 속하는 말굽형 산성이지만 규

모가 크고 성안에 작은 계곡이 있다. 삼국사기에 비추어

추정해보면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백제가 축조한 아

단성으로 보인다. 한강 북안에 자리잡고 있는 지형적 조

건 때문에 한강 상류와 하류에서 올라오는 선박의 움직

임을 포착, 왕성으로 연락해주는 진성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아차산성은 온달장군이 실지회복을 위해 출정

해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정

상에 오르면 한강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원한 뷰

를 만날 수 있다.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진동 5-11

Page 24: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24

과거와 현재의 오버랩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나날이 계속

되고 있다. 기업가는 기업가대로, 자영업자는 자영업자

대로, 월급생활자는 월급생활자대로, 수많은 구직자들

은 또 당연히… 노년은 노년대로, 중년은 중년대로, 청

년은 청년대로,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누구 하나

쉽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고, 남을 받아줄 여유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어느 때나 세상살이는 녹록지 않았고, 지금껏

어느 때고 괴로움 없는 시대가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까지 사람들의 삶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서로를 보듬어

주려는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전통시절

부터 내려오는 개인차원의 예, 그중에서도 비교적 잘

언급되지 않은 의장(義庄)을 소개한다.

글. 서신혜(한양대 인문대학 교수)

1.기년진곡도(機年賑穀圖).

조선은 백성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먹을 것을 구하러 유랑하게 되고

이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백성을 돕기 위해 구휼정책을 폈다.

인제대 김학수기념박물관

2.의장(義庄)을 실시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진 범중엄의 초상

한국사전연구사

종족 구휼을 위한 의장(義庄) 그리고 그 확산으로서의 나눔

전통사회

구휼문화

1

2

Page 25: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25

이웃을 돕기 위한 농장

의장(義庄)이란 일정한 토지를 마련하여 거기에서 나

는 것으로 친족을 돕거나 빈민을 구제하는 것을 말한

다. 한마디로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공동 농토 혹은

농장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의장(義莊), 의전(義田)이

라고 하여도 같은 뜻이다.

의장은 중국 송나라 때의 재상 범중엄(范仲淹, 989~

1052)이 처음 실시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범중엄은

자신의 고향인 고소에 수천 묘의 땅을 사들이고 일가

중에 덕망 있는 사람을 관리자로 세워서 그 땅에서 나

는 곡식을 모아 일가 중에 형편이 어려워 혼인이나 장

례 등을 치르지 못하는 자들을 돕게 하였다고 한다. 이

것을 고소 땅의 의장이라고 하여 ‘고소의장(姑蘇義莊)’

이라고 부르고 있다. (『송사(宋史)』권314, 「범중엄열전

(范仲淹列傳)」 참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 종법(宗法)

에 따른 유교적 예교(禮敎)가 전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의장 역시 시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른 시기의 예

를 고려시대 학자 이곡(李穀, 1298~1351)의 문집에서

볼 수 있다. 이곡의 「의재기(義財記)」라는 글이 그것이

다. 이 글은 이곡과 그의 벗 이경보의 문답을 적고 뒤에

이경보와 그의 친인척의 재물 출연 사실을 적는 방식으

로 이어지고 있다. 끝에 이경보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가까운 형제와 먼 형제를 모두 합쳐서

20여 인이 있는데, ……지금 각각 기금을 약간씩 출연

하여 의재(義財)라고 명명하고는, 해마다 두 명씩 교

대하여 번갈아 가며 주관하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

달이 그 이자를 받아서 경조(慶弔)와 송영(送迎)의 비

용에 대비하는 한편,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장차 구

휼하고 전별하는 밑천으로 삼으려 하는데, 앞으로 자

손들로 하여금 이 법을 계속 지키면서 잘못되지 않게

하려고 한다. 이는 대개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설립한

의전(義田)의 고귀한 뜻을 본받으려 함이니…” (『가정

집』권2, 「의재기」)

3.현대사회의 온라인 기부

셔터스톡

현대사회

기부문화

3

Page 26: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26

땅이 아니라 재물을 냈다는 점에서 ‘의재(義財)’라고 명

명했지만, 친족들 간에 재물을 내어 다른 친족들의 어

려움을 돌아보고 구휼한 의장의 예와 같다. 자본금을

모아 그 이자로 친척들의 경조사와 손님맞이의 비용,

구휼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는 것이다. 이곡은 이경

보의 이런 예에 대해 칭찬하면서 그것에 대한 글을 써

준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친족 간의 이런 예는 분명

또 국가적인 차원의 구휼책, 진제책(賑濟策)이 아닌 민

간 차원의 나눔이다.

의장제도는 대체로 한 사람 혹은 친족 몇 명이 땅이나

재물을 내어 친족의 구제에 사용하게 하였으므로 자

기 가족만 챙기는 행위일 뿐 나눔이 아니라 할 수도 있

다. 하지만 옛날은 가족의 범위가 지금보다 훨씬 넓어

한 마을 전체, 한 고장 전체에 한 성씨가 모여 사는 경

우가 많았다. 한 종족을 위한다는 것이 한 마을, 한 고

장 전체를 살리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의장

이 단지 자기 종족의 범위를 넘어서 그 고장의 다른 가

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에 사용했다는 기록도 많으

니, 의장을 민간의 나눔 전통의 하나로 보더라도 부족

함이 없을 것이다.

의장의 본을 보인 조상들

이런 의장의 예는 계속 이어져 조선시대 내내 여럿

발견된다.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말년에 의장을

마련하여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였다는 것이 알려져

있고, 조석기(曺錫基, 1830~1889)가 경남 창녕에 살

면서 재물과 곡식을 희사하고 토지도 마련하여 의장

을 만들어서 흉년에 구휼하는 데에 사용했다는 것이

『암서집』권20 「학음재의장기」에 나온다. 경남 고성에

살던 이한필(李漢弼: 1811~1894)이 의장을 마련하여

가난한 종족을 구제함은 물론 고종 13년(1896) 대흉

년에 기민의 진휼에 힘쓴 공으로 부호군이 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면우집』 권156, 「부호군이공묘갈

명」) 정약용은 『목민심서』 12부 「해관(解官)」에서 지방

관이 되어 청렴결백하게 선정을 베풀고 돌아와서는 6

5

4

Page 27: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27

방편을 마련하여 종족들을 넉넉하게 해주는 것이 좋

다면서 몇몇 예를 들었다. 윤광안(1757~1815)이 경

상도 감사로 있다가 돌아와서 의장을 마련하여 종족

들이 도움을 받도록 했다는 예가 거기에서 나온다.

어려울 때에 정부차원의 구휼제도를 논의하는 맥락

에서 각 지방 누구누구의 의장의 예가 언급되는 경우

도 많았다. 한 사람의 죽음을 맞아 그의 평생을 정리

하는 행장이나 묘지명 등에 그가 의장을 설치하여 종

족을 구휼하였다는 내용도 자주 언급된다.

김제 지방의 부자 장석보(張石補, 1783~1844) 집안

의 의장은 근래에 소개되었는데 현재까지 「장씨의장

서(張氏義庄序)」 등 문중 기록까지 자세히 있어 좋은

자료이다. 장석보와 그의 네 아들이 힘써 치부를 한

후에 그 다음 대에 여덟 아들이 각기 출연하여 의장

을 만들었다. 해마다 나이순으로 일 년 임기의 유사

를 뽑아 집안의 제사며 각종 관리하는 일을 하게하

고, 그 유사에게 삼사백석의 재산을 기증하여 김제군

서도리에서 해마다 한 사람의 부자가 탄생할 정도였

다고 한다. 물론 장씨 형제들이 계속 마흔 석 정도의

쌀을 내어 충당하여 본래 의장의 규모도 줄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다는 뒷이야기도 전해진다.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현재 중앙고등학교 건립에 거액을 기

부하고 『조선어사전』 편찬에 또 거액을 기부하여 옥

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던 인물 장현식(張鉉

植, 1896~1950)이 바로 그 집안사람이다.

가족 개념을 확산한 인 사상

의장은 친족단위의 구제와 나눔 전통에서 시작된 것

이 사실이다. 하지만 유교적인 정신사 속에서 친족단

위의 구제는 사회 전체로 이어진다. 유교적인 맥락에

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인(仁)이다. 인은 사람을 사랑

하는 것인데, 이 인을 내부에서 외부로, 가까운 곳에

서 먼 곳으로 확산해 나가는 방식으로 가정의 일이 천

하의 일로 이어진다. 내 마음의 중심을 다하는 것이라

는 충(忠),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서

(恕)라는 방식으로 인(仁)이 천하로 이어지는 것이다.

내가 내 가족을 생각하고 대하는 방식으로 우리 고장

을 생각하고 대하고, 우리 고장을 생각하고 대하는 것

을 미루어 다른 고장을 생각하게 될 때 결국 온 나라를

붙들 수 있게 되는 방식이다.

한국인은 사회적 기부보다 개인의 연결망 안에서 나누

는 특징이 있다면서 이를 두고 기부의 전근대성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국가나 기관, 제도에 대

한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 현대사회 기부의 올바른 길

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서구 중심의

기준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사회는 유교 사상

의 영향 아래 가족 개념을 확산한 인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 그리고 근대에까지

의장은 인 사상의 확산을 기반으로 중앙 차원의 제도

적 구휼이 손 닿지 않은 곳에서 공동체 차원의 구제와

협력으로 함께 살아간 전통이다.

4.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지방관이

되어 청렴결백하게 선정을 베풀고

돌아와서는 방편을 마련하여 종족들을

넉넉하게 해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5.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부자댁

곳간채. 경주 최씨 가문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했고, 만석 이상의 자산을

모으지 말도록 했으며, 흉년에는 곳간을

잠그지 않았다고 한다.

문화재청

6.장현식고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며

사회사업가인 일송 장현식 선생이 건축한

한옥으로, 이 고택은 일제하 독립투사로

평생을 바친 장현식 선생의 나눔과

섬김의 정신이 담긴 곳이다.

전주시

7.겨울을 맞아 불우한 이웃을 위해

연탄을 배달하고 있는 봉사자들

flicker

7

Page 28: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현장의 숨결

28

미륵사지 석탑의 수리 배경과 과정

수리 전 미륵사지 석탑은 반파되어 6층 일부까지만 남

아있는 모습이었다. 창건 당시 석탑은 7층 또는 9층이

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층수, 비례, 상륜부 양

식 등은 규명되지 않았으며, 17세기 전후 시기에 붕괴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일본인들은 흐트러진 석탑

과 주변을 정비하고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워

보강하였다. 당시의 작업은 불안정한 석탑의 추가 붕

괴를 막기 위한 응급수리의 성격이었다. 미륵사지 석

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 석탑의 붕괴면에 보

강된 콘크리트의 노후와 구조적 불안정성 때문에

1999년 해체수리가 결정되었다. 당시의 수리방침

은 석탑의 구조 및 보존 상태 등에 대한

자료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

에 체계적인 조사연구를 거쳐 수리방

법을 정하고 신석재의 사용은 최소화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석탑의 특수한 양식,

풍화훼손 정도, 수리난이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익산 미륵사는 7세기 백제 무왕 때 건립된 사찰로서

세 개의 탑(서 석탑, 중앙 목탑, 동 석탑)과 세 개의

금당이 나란히 배치된 특징을 갖고 있다. 현재는 건물

들이 사라지고 기단 유구 정도만 남아있지만 역사적

으로 매우 중요하고 규모가 큰 고대 사찰유적 중 하나

로서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포함되었다.

이번에 수리를 마친 미륵사지 석탑은 사지 내 서쪽에

위치한 석탑으로써 한국에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석탑이다. 이 탑은 목탑에서 석탑

으로 변화되는 모습이 충실히 반영되었으며, 1층 내부

에는 十자형의 통로 공간이 조성되는 등 한국 고대

건축의 실존사례로서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글. 김현용(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수리에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고려하도록 하였다. 이

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1년부터 본격적인 석탑의

해체에 착수하여 2010년까지 해체 및 발굴 조사를 마

치고 2013~2017년 6층까지 석탑의 조립을 완료하였

다. 미륵사지 석탑은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논의를 거

쳐 원래 남아있던 6층까지 수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

다. 석탑의 해체조사 과정에서 9층으로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추정에 의한 복원은 석

탑의 역사성과 진정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었다. 또한

원부재의 물리적 성능이 신석재의 절반 이하로써 층수

추가에 의한 상부하중의 증가 시 풍화된 원부재의 재

사용은 더욱 어렵게 되고 멸실된 상륜부의 고증에도 한

계가 있었다. 따라서 남아있던 6층까지 석탑을 수리하

여 진정성을 확보하고 원래의 재료와 기법만으로 구조

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 현대적 기술의 보

완 등을 핵심으로 다음과 같은 석탑의 수리원칙을 마련

하였다. 첫째, 미륵사지 석탑은 7층 이상의 부재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론에 의한 복원을 지양하고

남아있던 6층까지 수리하여 진정성을 확보한다. 둘째,

석탑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훼손된 부재는 과학적

방법으로 보강하여 재사용하고 원래의 기법과 재료는

최대한 보존·활용한다. 셋째, 전통기법만으로 원형의

20년 만에 다시 일어선

익산 미륵사지 석탑

2

1

Page 29: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는 구조적 안정성 확보를 위하여

실험연구 등을 통해 검증된 현대적 기술을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보완한다. 넷째, 조사, 연구, 시공 등 모든 과

정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이를 자료화 및 공개하여 향

후 연구에 활용되도록 한다.

미륵사지 석탑 조사연구 성과 및 의미

미륵사지 석탑의 수리원칙과 기술적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진행한 학술 및 기술 연구는 크게 ‘기

초조사연구’, ‘보존과학 조사연구’, ‘구조 및 재료 연구’,

‘수리기술 연구’로 분류할 수 있다. 기초조사연구는 석

탑의 원형과 현황을 규명하기 위한 가장 기본단계의 연

구로 석탑의 해체조사 및 3D스캐닝 기록화, 기단부 발

굴조사, 출토유물 수습조사, 축조기법 연구 등이 이루

어졌다. 보존과학 조사연구는 석탑과 주변의 보존환경

조사, 표면오염물 조사, 가공도 및 풍화도 조사, 파손부

재 보강기술 연구 등 원래의 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기

위한 과학적 보존처리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구조

및 재료 연구는 석탑의 구조해석을 통한 붕괴원인 조사

연구, 구조안정성 평가 연구, 신석재 공급지 조사연구,

무기질재료 연구 등으로 석탑의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

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리기술

연구는 기초토층 보강 판축다짐, 공극 충전 및 보강용

무기질재료, 풍화등급별 파손부재의 구조보강, 부재접

합용 장치 등 선행된 연구결과를 정리하여 특허기술로

발전시킨 것이다. 한편 2009년, 석탑 1층 내부 중앙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발견된 유물(

총 9,900여점) 중 금판으로 제작된 사리봉영기에는 미

륵사의 창건 배경과 주체, 석탑의 건립시기(639년)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다양한 분야의 학술연구

가 활성화되면서 백제 미륵사와 석탑의 역사적 가치가

재조명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 목조와 석조

의 건축기법이 조합된 독특한 양식의 석탑이다. 그러나

1,300여년 세월의 풍파를 거치면서 반파되었고 남아있

는 석재들도 대부분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따라서 기존

의 수리방법만으로는 석탑의 원형보존과 구조적 안정

성 확보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장기간 체계적인 조사

연구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근거하여 개발된 기술들을

활용하여 수리를 마칠 수 있었다.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

의 문화재수리 역사에서 단일 문화재 대상으로는 최장

기간 조사연구와 수리가 진행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하나의 석탑을 수리하는 데 20년이란 긴 시간이 소요된

만큼 수많은 역경과 성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추정에

의한 복원을 지양하고 원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함으로써

석탑의 역사적 가치 보존 및 진정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국제적인 기준의 석조문화재 수리방법론 제시 및

수리기술 고도화를 선도하게 됨으로써 국내·외 전문가

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문화재를 보존하

기 위한 일체의 행위는 대상의 종류, 국가, 시대에 관계

없이 속도보다는 정성에, 추정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중

점을 두는 것이 보편타당하다. 문화재는 살아있는 역사

이기 때문에 수리나 복원의 행위는 그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성급함은 마땅히 경계해야

할 요소이다. 언젠가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라지

겠지만 다시 태어난 문화재는 제자리에 남아 새로운 역

사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29

1. 수리 후 미륵사지 석탑 동북측

국립문화재연구소

2.수리 후 1층 십자통로 내부

국립문화재연구소

3.6층부 조립 당시 모습.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3~2017년

6층까지 석탑의 조립을 완료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

3

Page 30: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30

1.1915년 이후 미륵사지 석탑.

1915년 일본인들은 반파되어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던 석탑과 주변을

정비하고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워 보강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

2.익산 미륵사지 보수정비 현장

팀장인 김현용 학예연구사.

그는 18년 전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에

젊은 날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부었다.

전통을 잇는 사람

졸업을 코앞에 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한 건축학도가

있었다. 그는 마지막 학년을 보내며 한국건축사라는

전통건축 수업을 듣게 되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던 그였기에 전통건축 수업이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

왔다. ‘이 분야도 좋겠다’라고 생각할 즈음 익산 미륵

사지 석탑의 해체 전 모형을 만드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겨 곧바로 시작했다. 그렇게 18년이 흘렀다. 우연히

시작한 이 일은 어느새 평생의 운명이 됐다. 익산 미륵

사지 보수정비 현장 팀장인 김현용 학예연구사의 이야

기다. 글. 박세란 사진. 이민희

속도보다는 정성추정보다는 역사적 사실

국립문화재연구소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현장 팀장

김현용학예연구사

1,3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그 자리에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대한민국에 현존

하는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창건연대가 명확

하게 밝혀진 것 중에 나이가 가장 많다. 최고(最古), 최

대(最大) 타이틀을 모두 가지고 있다. 무려 1,300년이

라는 장구한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목조건축 양

식이 반영된 고대 건축의 실체적 사례’로서 역사적, 학

술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모진 풍파도 적지 않았다. 세월의 흐

름 속에 붕괴, 개축되며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1915년

에는 6층 일부까지 반파된 상태로 남아있던 석탑을 일

본인이 콘크리트로 덧씌우는 일도 있었다. 1999년에

석탑의 해체 수리가 결정되었고, 2001년부터 본격적

으로 시작되었다. 2000년부터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

수정비 사업에 참여한 김현용 학예사는 이 사업의 처

음과 끝을 함께 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자신의 젊은 날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부은 사업이 20년에 가까운 시간

이 지나서야 마무리되고 있는 이 시점. 김현용 학예사

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가장 궁금했다. “2017년

말에 마지막으로 6층 부재를 올렸습니다. ‘아, 드디어

끝났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약간 허무함이 느껴지더

라고요. 물론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은 아닙니다. 석탑

을 둘러싸고 있던 가설건물 철거공사부터 시작해서 내

년 3월에 열릴 공개 행사, 보고서 작성 등이 남아 있어

요. 지금도 매일매일 두렵습니다. 이 사업이 어떤 평가

를 받게 될지, 어떤 변화를 맞을지 걱정돼요.”

20년, 단일 문화재 보수로는 최장 기간이다. 그간

23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으며 현장 인력만 해도 연

인원이 12만 명, 전문가 그룹이 100여 명에 이른다. 1

Page 31: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31

2

Page 32: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문화재 보수정비 속에 깃든 첨단 과학기술

김현용 학예사는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행위의 전제

조건을 ‘깊은 이해’라고 말했다. “문화유산은 우리의 것

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서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

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의식을 가져야 해요. 또 의무감

도 있어야죠. 그렇기 때문에 대상 문화재를 대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문화재 보수정

비 또한 이런 마음가짐 아래, 해당 문화재에 대한 본

질, 특성, 형태, 구조, 양식, 제반사항을 깊게 이해하

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는 수리행위가 이루어져야 합

니다. 그 결과에 따라 기술, 재료, 방법 모두 달라질 수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력(功

力)이 모이고 모여,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생(生)이 다

시 시작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이제 다시 태어

난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사라져가겠지만 이 석

탑은 남아 우리 후손들에게 지난 시간 동안 켜켜이 쌓

인 선조들의 손길을 보여줄 수 있겠죠.”

미륵사지 석탑의 역사성을 밝힌 사리장엄구

단일 문화재 보수정비 사업에 막대한 예산과 엄청난

인력이 투입되는 데다 진전이 빠르지 않아 오해의 시

선이 하나 둘 싹트기 시작했다. 1999년 미륵사지 석탑

의 해체 수리를 결정할 당시의 기본 방침은 원형에 대

한 자료 부족, 풍화 등 훼손 정도, 구조 및 양식의 특수

성, 수리의 난이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충분한 시

간을 갖고 수리하도록 했다. 따라서 국립문화재연구

소는 미륵사지 석탑에 대한 다양한 학술조사를 진행

하고, 실험연구를 통해 수리 기술을 개선했다.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구성원이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걸었다. 이와 동시에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사업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을 이

해시키기 위한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사업이 10년 가까이 진행되

던 어느 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석탑 1층 심주석의

사리공 기단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이다. 이

때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로 미륵

사의 조성연대가 확인됐다. 이와 더불어 금동제

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금제사리내호(金製

舍利內壺),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도 발견됐다. “사리장엄구가 발견됨으

로 해서 미륵사의 창건 배경, 주체 등이

규명됐습니다. 또한 약 9,900여 점 유물

들의 절대편년이 확인되어 백제지역 최대

의 고고학적 성과 중 하나로 평가 받게 되

었습니다. 이 유물들은 올해 6월에 보물 제

1991호로 지정됐습니다.”

32

3

4

5

Page 33: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있으니까요.”

문화재의 원형 보존은 원래의 재료를 얼마나 잘 보존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다. 허나 전통적인 방법

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현대의 첨단 과학기술이 필요

하다. 미륵사지 석탑의 경우에도 석재가 풍화되거나

기울어지거나 파손된 것이 많아 이에 대한 현황 조사

와 보존처리에 다양한 과학기술이 접목됐다. “미륵사

지 석탑은 기울어짐, 붕괴 등 복잡한 형상을 가지고 있

어 2차원 자료만으로는 정확한 조사가 어렵습니다. 그

래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02년부터 2010년까지

3차원 형상정보 구축을 위한 3D 스캐닝을 진행했습니

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진행된 석탑 조립과정에서

도 활용되었고요. 3D 스캐닝은 대상물에 레이저를 쏜

뒤 돌아오는 시간을 이용해 거리를 계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를 통해 석탑의 형태에 대한 3차원 정

보를 컴퓨터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수십

미터 원거리에서 실시하는 광대역스캔과 50cm 내외의

근거리에서 실시하는 정밀스캔으로 정보를 모았다. 이

는 석탑의 복잡한 형상에 대한 정밀한 분석, 구조해석,

모델링, 공사설계, 조립검측 등의 분야에 활용되었다.

“우리선조들은 석재 사이에 흙을 채웠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며 빗물에 흙이 씻겨 나간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때문에 석탑이 구조적으로 불균형한 상태가 되면서 파

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빗물에 취약한 흙의 단

점을 개선한 무기질 재료(Mineral Binder)를 새로 개

발했습니다. 이 재료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천연광

물에 모래, 구운 황토를 일정한 배율로 배합한 것입니

다. 이는 석재 사이의 공극을 메울 뿐만 아니라 석탑의

상부 하중이 고르게 분산되도록 해 지진피해를 줄이는

효과도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사업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원래 석재를 최대한 재사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절

단되거나 일부 유실된 석재 재사용을 위한 구조 보강

및 접합 기술을 개발했다. 이로써 원래 석재의 재사용

비율을 47%에서 81%까지 끌어올렸다.

문화재의 진정성을 지키기 위한 열정

20년 동안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사업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의문점이 하나 있을 것이다. “왜 9층으

로 복원하지 않는가?”하는 점이다. “미륵사지 석탑 보

수정비 사업 과정 중, 꽤 오랜 시간 동안 보수정비 범

위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현재까지는 미륵사지

석탑이 9층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

문에, 과도한 추정으로 복원하는 것은 문화재의 진정

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어요. 물

론 동탑은 발굴 당시 9층으로 추정되는 부재까지 확인

됐어요. 따라서 서탑 또한 9층일 가능성이 높기는 하

지만 실제적인 근거에 의해야 하기 때문에 현재는 6층

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앞으로 미륵사지 석탑 원형 연

구를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2019년 3월,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한 만남이 예정돼

있다. 장장 20년 동안 이어진 보수정비가 마무리되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그 말간 얼굴을 우리들에게 보

여줄 것이다. “이 사업을 수행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

각한 것은 ‘속도’ 보다는 ‘신중함’을 갖고 싶다, ‘창조’ 보

다는 ‘역사적 사실’에 집중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33

3. 석탑 1층 심주석의 사리공 기단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됐을 때의 모습

4.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행위의 전제

조건은 ‘대상 문화재에 대한 깊은 이해’라고

말하는 김현용 학예사

5. 6.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의 사리공 속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국립문화재연구소

6

Page 34: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이야기가 있는 식사(食史)

34

가깝지만 이국적인

북한의

겨울별미들

1

Page 35: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35

함께 냉면배달부로 취직하여 그 경험을 적은 체험기

가 있었으며, 1938년 동아일보에는 점심시간에 냉면

을 주문하고 오지 않아서 다시 전화를 하면 “벌써 떠

났습니다”라고 응대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예

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풍경이다. 이런 냉면배달문화

는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9권에 다음과 같이 언급

되어 있다.

순조(재위 1800~1834)가 즉위년에 한가로운 밤이면

매번 군직(軍職)과 선전관(宣傳官)들을 불러 함께 달을

감상하곤 하셨다. 어느 날 밤 군직에게 명하여 문틈으

로 면(麵)을 사 오게 하며 이르기를, “너희들과 함께 냉

면을 먹고 싶다.” 하셨다. 한 사람이 스스로 돼지고기

를 사 가지고 왔으므로 상이 어디에 쓰려고 샀느냐고

묻자, 냉면에 넣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상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셨다. 냉면을 나누어 줄

때 돼지고기를 산 자만은 제쳐 두고 주지 않으며 이르

기를, “그는 따로 먹을 것이 있을 것이다.”하셨다.

애호가들의 음식, 평양냉면

면을 찬물에 말아먹는 음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냉면이다. 요리명 자체가 차

가운(冷) 면( )인 냉면은 평양에서 먹던 평양냉면이

유명했다. 냉면이라는 단어는 장유의 『계곡집(磎谷集)』

에 ‘자장냉면(紫漿冷麵, 자주빛 육수의 냉면)’이라는

제목의 5언절구의 시에서도 언급된다. 면을 차가운 물

에 말아 먹으면 되는 음식이 냉면이지만 각 지방마다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에서 평양냉면은 메밀로

면을 만들었다. 저마다 평양냉면을 언급하며 꿩육수,

닭육수, 소고기육수, 동치미 등을 말하며 원조, 전통을

말하고 있지만 집집마다 면을 누르는 기계가 있었으니

집집마다 솜씨를 발휘하여 육수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육수가 전통이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일제강점기 서울에도 평양냉면이 유행했는데 설렁탕

과 함께 평양냉면은 배달음식으로 인기였다. 『별건곤』

48호에는 기자가 “냉면배달부가 되어서”라는 제목과

여행의 묘미는 낯선 사람, 낯선 풍경, 낯선 음식일 것

이다. 그러한 것을 우리는 ‘이국적(異國的)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은 가까우면서도 이국적인 곳이다. 우린 이곳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밥과 국을 먹고 겨울이

되면 김장을 하지만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의 음식 맛이 다르고 특색이

있듯이 북한 역시 각 지역별로 특색 있는 음식들이

있다. 글. 편성철(지역문화연구소)

2

1.평양 지방의 향토음식인 평양냉면은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찬 육수에 말아먹는다.

한식재단

2.김준근의 <국수 누르는 모양>.

한 남자가 줄에 매달려 지렛대에

등을 대고 한 남자는 국수틀에

반죽을 넣고 국수 가락을 빼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Page 36: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36

사람의 내력에 대한 이야기를 종합해 들으면 어느 때부

터 이 음식이 생긴 것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당초에

는 쇠고기로 만들지 아니하고 물고기 내장들을 가지고

만든 것이라 어복(魚腹)이라고 한 것인 듯 한데 그후에

는 소의 내장에다가 소의 골수(骨髓)를 섞어가지고 만

들었든 모양이며 다음에는 쇠고기에다가 소의 골수를

섞어 만들어서 마침내 지금의 어복장국이 된 모양입니

다.(현대어로 옮김)

‘버들치’라는 필명의 작가가 1920년대 어복장국의 유래

를 평양에서 모아 정리한 내용은 ‘물고기 내장’→‘소 내

장+골수’→‘소고기+골수’의 재료 변화를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것은 평양 옥류관에서 음식을 배우고 지금은

서울에서 식당을 하는 윤종철 씨의 말에 따르면 북한

요리교본에는 ‘어복장국(소뱃살쟁반)’이라고 적혀있으

며 소뱃살로 만든 우복(牛腹)장국이었는데 ‘우’가 ‘어’로

발음되면서 어복장국이 되었다고 한다.

100년 전 평양에서도 어복장국의 여러 유래가 이야기

되고 있었으며 그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고 지금도 이

야기가 분분하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언급한 것은 어

복장국은 아침에 먹었다는 것이며 그 음식을 담은 그릇

이 독특하여 음식명칭 중에 언급되기도 하는 점이다.

평양에서 어복장국을 시킬 때는 “쟁반 하나 만들어주

소”라고 말했다고 하며 지금은 어복장국이라는 이름보

다 ‘어복쟁반’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명태를 먹는 또 하나의 방법, 명태순대

한국전쟁 당시 남으로 내려왔다가 고향에 올라가지 못

한 이들이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기 위해 모여 사는 마

을들이 몇 군데 있다. 강원도 속초에 있는 아바이마을

역시 그러한 마을이다. 함경도 방언 ‘아바이’에서 이

름을 따온 이 마을의 풍습 역시 강원도보다는 함경도

의 것이 많다. 음식 역시 함경도식이었는데 이것이 속

초일대에 퍼지게 되었고 그중 하나가 명태순대이다.

속초시장에 가면 오징어순대를 판매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명태로 만들다가 명태가 잡히지 않자 명태를

또 냉면과 관련된 ‘냉면당(冷 黨)’이란 단어도 흥미

롭다. 평양면업노동조합과 관련된 사건기사들이 여러

편 있는데 고용주들이 월급의 10%를 삭감하자 동맹파

업을 한 것이다. 그 기사들 중 1938년 12월 2일 동아일

보에는 “동맹파업을 단행하여 냉면당의 머리를 앓게

하고”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1938년 4월 27일 기사에

는 불량 냉면 판매로 “냉면당으로 하여금 전전긍긍”한

다는 구절이 나온다. 도대체 냉면당은 무엇일까? 그

답은 1962년 4월 1일 경향신문에서 찾을 수 있다. “냉

면을 즐기는 사람은 흰 눈이 뒤덮인 추운 동지섣달에

도 소위 「겨울냉면(冬冷 」을 찾는다. 이런 냉면당(冷

黨)은 대개 북한 출신인 경우가 많다.” 즉 냉면당은

한겨울에도 냉면을 즐기는 요즘 식으로 하면 ‘냉면애

호가’, ‘냉면마니아’인 것이다.

쟁반에 먹는 장국, 어복장국

어복장국은 어복쟁반이라고도 부른다. 대부분의 음식

이 그렇듯 어복장국 역시 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

이 존재한다. 어복장국의 유래에 대해서는 1926년 8월

22일 신문기사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그 내력에 있어서는 이곳 사람들도 여러 가지 말을 하

는 것을 볼진대 필경 분명히는 모르는듯합니다. 모든

3

玉流館

북한 평양에 위치한 음식점으로

1961년 8월 15일 문을 열었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평양냉면 및 평양온면,

대동강 숭어국, 송어회 등이 있다.

옥류관은 모란봉과 능라도,

대동문과 연광정, 옥류교를

옆에 끼고 있다.

옥류관

Page 37: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6

37

대신해 오징어로 만든 것이 오징어순대이다.

함경도에서는 명태가 많이 잡혔는데 다양한 방법으

로 명태를 가공, 보관하였고 그에 따라 파생된 음식

도 다양하다. 그중 하나로 명태 속을 각종 야채와 쌀

로 채워 북어를 말리듯 널어서 보관하였다가 쪄서 먹

는 것이 명태순대이다.

명태순대를 만드는 법은 지역과 개인별로 조금씩 차

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손질한 명태의 간과 내장을

볶은 후 김치와 쌀을 넣고 명태의 입을 통해 명태 안을

꽉 채운다. 돼지고기를 다져 넣기도 한다. 속을 꽉 채

워 빵빵해진 명태를 광에 걸어놓거나 논밭에 널어 말

린다. 그러면 북쪽의 추운 날씨로 인해 얼고 녹기를 반

복한다. 그래서 이것을 동태순대라고 하기도 한다. 명

태순대는 찜통에 져서 순대처럼 썰어서 먹는데 이때

보에 싸서 쪄야 순대가 터지지 않는다. 손질하고 남은

명태대가리 안에 소를 채워 순대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때는 보를 싸지 않고 쪄낸다. 순대를 찌기 전에 나무

망치로 두드려 뼈를 뽑아내서 만들 수도 있는데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고급음식에 속한다. 이러한 명태순

대는 함경도에서도 별식으로 통하는 음식이다.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들이 만나 먹은

음식은 평양냉면이었다. 옥류관 요리사들이 만든 평

양냉면은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 냈으며 9월에 있던

남북정상회담에서 평양냉면은 화제였다. 평양냉면이

평양의 대표음식을 넘어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한 일이었다. 평양냉면뿐 아니라 북한의 별미를 본고

장에서 먹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친가, 외가가 모두 이북이

라 어린 시절 명절음식은 이북식이었다. 추운 겨울밤

이면 가족들이 방안에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되면 할머니가 김칫독을 열고 김치 국물을 떠오셨다.

그 국물에 삶은 면을 넣고 참기름 한 방울을 넣어서

먹던 맛의 기억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진해진다.

한 해가 끝나가는 오늘 모두들 어릴 적 맛의 기억을

추억해봄은 어떨까.

3.어복쟁반은 놋쟁반에 갖가지

고기편육과 채소류를 푸짐하게 담고

가까운 사람끼리 둥글게 모여 앉아

육수를 부어가며 먹는 음식이다.

셔터스톡

4.한국전쟁 당시 남으로 내려왔다가

고향에 올라가지 못한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

한국관광공사

5.옥류관은 북한 평양에 위치한 음식점으로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평양냉면 및

평양온면이 있다.

위키백과

6.명태순대는 명태 속을 각종 야채와 쌀로

채워 북어를 말리듯 널어서

보관하였다가 쪄서 먹는 음식이다.

전통향토음식 용어사전

4

5

Page 38: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뜻 있는 사람, 소중한 선물

38

자수·보자기 수집에 빠진 부부

한국자수박물관은 국내 대표적인 전통 자수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다.

허동화·박영숙 부부가 공동관장이다.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서 시작된

이 박물관이 을지로를 거쳐 1991년 강남구 논현동 지금의 위치에 이르

기까지, 부부는 40년 넘게 꾸준히 수집활동을 펼쳐왔다. 그러다 보니

보자기, 자수, 다듬잇돌, 발, 화문석, 침장, 의상과 장신구 등 3000여 점

의 유물을 소장하게 됐다. 그중 보물 제653호 자수 사계분경도, 제654

호 자수가사와 국가민속문화재 제41호 운봉수 향낭, 제42호 일월수 다

라니주머니, 제43호 오조룡 왕비 보 등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될 정

도로 소중한 것들이다. 이곳에 소장된 자수와 보자기들은 국내뿐만 아

니라 외국에서도 많이 전시됐다. 1978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벨기에,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에서 60여 차례

전시를 통해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외국인에게 한국

섬유예술의 우수성을 알려왔다.

허 관장은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고 다녔다. 박물관장치고는 허

관장의 이력이 의외다. 육사 9기 출신으로 동국대 법정대학과 동대학

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전쟁 참전공훈으로 화랑무공훈

장을 받았다. 1956년 소령으로 예편한 후 한국전력에서 감사를 지냈다.

아름답다. 감동이다. 존경스럽다. 왜? 아무나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살면서 평생 모은 문화재급 유물을 선뜻

기증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한 땀 한 땀

정성이 들어 있는 보물이다. 한국자수박물관을 운영했던

고 허동화 선생과 부인 박영숙 씨. 평생에 걸쳐 수집한

소장유물 5129점을 서울시에 무상 기증했다. 자수병풍,

보자기 등 1000여 점을 비롯해 자수공예 및 복식 등 각종

직물공예품, 장신구, 함, 바늘과 같은 침선구 등이다.

4폭 병풍 ‘자수 사계분경도’ 등 보물 2건과 국가민속

문화재 3건도 포함돼 있다. 허 선생은 지난 5월 생애

마지막 출간기념회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기증을

했다. 그는 ‘보따리 할배’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한평생

자수 유물 모으기에 열정을 바쳤다. 작고하기 4년 전

그와 인터뷰를 가졌던 내용이 새삼 생각난다.

글. 김문(서울신문 국장) 일러스트. AM327

자수박물관, 그리고 평생 모은 소장유물 기증한

허동화

박영숙

Page 39: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처음에는 도자기 수집이 취미였을 뿐 자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치과의사인 부인 박씨와 함께 자수 수집가로 변했다. “1960년

대 초반이었죠. 도자기를 보러 인사동에 갔는데 미국인이 화조(花鳥)로

수놓인 병풍을 헐값에 사가더라고요. 저 아름다운 물건이 제값도 못 받

고 해외로 반출된다는 것이 속상했습니다. 그래서 병풍과 자수에 관심

을 갖기 시작했고 아내가 삼각지에서 치과병원을 차리자 옆에서 손님

을 끌 요량으로 자수박물관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반공방첩을 중요시했던 터라 자수하면(?) 돈을 3000만 원이나 벌 수 있

었거든요. 그래서 자수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혹시 간첩이 오면 자수

라도 시킬 생각이었죠(웃음).”

수집만큼이나 열심이었던,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 알리기

이후 곳곳에서 자수를 가진 사람들이 박물관으로 찾아왔고, 소문이 나

면서 수집품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박물관에 최순우 국립중

앙박물관장이 찾아왔다. 최 관장은 전시된 자수들을 보고 “사라져 가던

우리의 자수와 보자기가 여기에 다 보존돼 있다.”며 감탄했다. 이를 계

기로 197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처음 초대전을 갖는다. 무려 30만 명

이 다녀갈 정도로 성황리에 전시가 이루어졌다. 이듬해 도쿄에서 한국

문화원이 개관할 때도 자수와 보자기를 전시했다. 해외 전시는 그렇게

시작됐다. 어림잡아 700만여 명의 외국인 관람객들에게 한국의 보자기

를 보여줬다. 외국 문화계 인사들은 한결같이 ‘비구상 회화’의 아름다움

이라고 극찬했다. 독일 린덴 국립민속학 박물관장인 피터 틸레는 그의

저서에서 ‘색채 구성이 뛰어난 한국 조각보는 몬드리안이나 클레의 작

품을 연상시킨다. 20세기 추상화 거장들이 한국 보자기를 본 적이 있을

까’라고 썼을 정도였다.

허 관장은 인터뷰를 하면서 옆에 앉은 부인 자랑을 자주 했다. 박씨는

어릴 때부터 조각보를 만들 정도로 전통공예에 관심이 많았으며 결혼

후에는 이런 부인의 영향으로 허 관장도 자수와 보자기를 수집하기 시

작했던 것이다. 거의 잊혀 있거나 내버리다시피 한 것들이었지만 그 시

대를 살아온 여인들의 한 맺힌 사연들이 숨어 있음직한 한 점 한 점에 관

심을 갖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같이 수집을 하게 됐다. 허 관장은 “부부

가 같이하다 보니 세계 제일의 자수 수집 가정이 됐다”며 웃었다.

허 관장은 자수뿐만 아니라 1990년대 중반부터 버려진 농기구와 어구,

가재도구 등을 수집해 오면서 오브제와 콜라주 작업으로 환경친화 작가

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허 관장은 생전에 “국가에서 자수민속박물관

을 지으면 모두 기증하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기증유물 일체는 서울시

가 옛 풍문여고에 건립 중인 ‘서울공예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2020년

5월부터 전면 공개될 예정이다.

39

Page 40: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놀이, 매사냥의 기원

매사냥은 야생 맹금류가 사냥하는 습성에서 착안한 것

으로, 신석기시대 전후인 기원전 3000년에서 2000년

사이에 중앙아시아 및 몽골 평원에서 발원했다. 중앙

아시아에서 발원한 매사냥은 이후 인도, 페르시아, 이

집트 등 동서 국가로 전파되었다. 칭기즈칸의 몽골제

국 때 가장 번성했다.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의 치세(B.C 722~705)에

매사냥이 중동에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고, 5세기

인 400년 훈족과 알라니 족으로부터 매사냥이 유럽으

로도 전해진다. 이후 엽총이 발명되는 17세기 후반까

지 유럽 전역에서 매사냥이 성행하였다. 특히 영국 색

슨왕조 시기에 매사냥은 전성기를 누렸고,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원정 때 자신이 중동

에서 본 매사냥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책 『조류를 이용

한 사냥 기술』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동양에서는 몽골

초원을 거쳐 지금의 만주지역 원주민인 숙신(肅愼)에

의해 전승되던 것이 중국으로 전파, 고대 주 왕조 시대

에 처음 출현하였고, 한 왕조와 당 왕조에서 모두 매사

냥을 즐겼다. 동양과 서양 모두 매사냥이 왕족, 귀족 중

심으로 향유되면서 수렵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오락으

로써 존재 가치를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韓)민족의 매사냥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행해졌다.

인류무형문화유산

40

18개 나라가 공동으로 등재한

살아 있는 인류 유산

Falconry

1. 매사냥은 훈련된 매를 이용하여 사냥하는

것을 말하며, 사냥에 쓰는 매를 사육하고

사냥하는 사람을 응사라고 한다.

셔터스톡

매사냥

오늘날 60이상 국가에서 지역 공동체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매사냥을 즐기고 있으며, 따라서 각국의 문화 전통

양상도 매우 다양하다. 매사냥꾼은 비록 국가적 배경이

서로 다를지라도 보편 가치와 전통, 기술을 공유한다.

2010년 11월 16일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서는 제5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가 열렸다. 이 회의

에서 새로 유네스코 무형유산이 된 매사냥의 등재 과정

에는 아주 특이한 점이 있었다. 우리나라와 아랍에미

리트, 모로코, 몽골, 벨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스페인, 체코, 카타르, 프랑스 등 모두 11개 나라가 공동

으로 등재를 신청하였으며, 2012년에 오스트리아, 헝가

리가 확대 공동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독일, 이탈리아,

카자흐스탄, 파키스탄, 포르투갈이 공동 등재 명단에

추가되었다. 국경이 가까운 두 나라가 공동으로 등재한

경우는 간혹 있었지만, 생활 터전과 문화가 전혀 다른

18개 나라가 함께 등재한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었다. 한편, 지난 11월 26일 아프리카 모리셔스에서

개막한 제13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씨름’이

최초로 남북 공동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발표됐다. 매

사냥은 국제적인 협력이 돋보였다는 점에서, 씨름은

남북한 화합을 위한 하나의 디딤돌을 놓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글. 김효신(대구가톨릭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Page 41: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41

1

Page 42: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주요한 비공식적 교육 방법은 노련한 매사냥꾼이 입문

자에게 직접 기술을 보여주며 가르치는 방법이다. 비공

식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의 전승은 주로 가족

내에서 일어나며, 몽골·모로코·파키스탄·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 등에서 이루어지는 전

형적인 방법이다. 매사냥꾼들은 자녀를 훈련시켜 새를

다루고 새와 신뢰를 쌓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는 매에

게 먹이를 주고, 손가락에 앉히고, 미끼를 이용해서 매

를 부르는 등의 기술을 습득시키는 기나긴 훈련 과정이

다.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이러한 방식은 문화적 가치

및 전통을 전수하는 데도 동일하게 효과적이다.

중앙아시아 및 동아시아, 중동아시아, 북아프리카 및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매사냥의 전통 명맥은 끊겼던

적이 없다. 18세기부터 19세기 유럽에서 잠시 쇠락의

시기를 겪기도 했으나, 매사냥 전통은 이내 회복되어

점차 증가하는 도시 사람들과 전원 지역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다. 유럽의 이주민들이 아메리카 대륙, 남아

프리카, 오스트랄라시아(Australasia, 오스트레일리

아·뉴질랜드·서남태평양 제도(諸島)를 포함하는 지

역)에 정착하였을 때 그들과 함께 들어온 다양한 전통

중에는 매사냥도 있었다. 매사냥은 심지어 아조레스

(Azores) 제도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

는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매사냥의 전통이 사라진 경우

도 있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전원 환경에

고구려의 도읍지 국내성에 위치한 무덤의 벽화가 이

를 증명한다. 한반도 매사냥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중국에서 전파되었을 확률이 높다. 북방 지역

에서 전래된 매사냥이 고조선을 거쳐 삼국시대로 이

어지면서 활성화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삼국시

대에 매사냥이 유행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

유사』에도 남아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라는 역사책

에는 백제 사람들이 일본에 매사냥 방법을 알려주었

다는 기록이 있다. 매사냥이 활성화된 시기는 고려시

대이다. 특히 고려 충렬왕 때가 최고의 전성기였다.

직접 매사냥을 즐겼던 충렬왕은 매의 사육과 사냥을

담당하는 ‘응방’이란 관청을 두었다. 고려 때 문인 이

조년이 쓴 『응골방』이란 책에는 매의 생김새, 훈련법,

치료법, 관리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 매사

냥은 일제강점기에 금지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

도 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통을 이어온 사

람들에 의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매사냥의 전통 및 전승

매사냥은 그 자체가 ‘사회적 관습과 의례, 축제 행사’는

물론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 및 관습’ 등 다양한 문

화 영역에서 표현되는 전통이다. 여기에는 새의 생태

와 행동 및 생활환경에 관한 전통 기술 및 지식, 전통

적인 매사냥 도구의 제작, 그리고 그와 관련된 언어 표

현, 회화, 조형물, 시, 의식, 음악 등에 내재한 언어학

적·예술적 표현이 포함되어 있다. 매사냥은 하나의

전통문화로서, 전수교육, 가족 내에서의 학습, 클럽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공식 훈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매사냥의 본질은 실전 활동이므로,

2.독수리와 함께 말을 타고 가는

매사냥꾼(몽골)

유네스코

3.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냥에

쓰이는 매는 종류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사냥에 쓰이는 매는 빠른

비행 능력과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미지투데이

4.사우디아라비아의 매사냥꾼

셔터스톡

5.카자흐스탄의 매사냥꾼

유네스코

2

3

Page 43: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기반을 둔 매사냥의 전통을 위협하는 가장 중대한 요인

이다. 매사냥의 전통은 60여 개 국가에서 발견되고 있

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 사막의 개활지에서는 장거리

를 비행하는 매를 날리는가 하면, 아시아의 초원 지역

에서는 매뿐 아니라 몸집이 큰 독수리도 날린다. 한편,

유럽 대부분과 일본, 중국의 일부 지방, 파키스탄과 우

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림지대 및 혼합농지에

서는 참매나 새매와 같이 단거리를 비행하는 새를 선호

한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서식지가 다양하

여, 날개가 짧거나 긴 맹금을 모두 날릴 수 있다.

유럽의 매사냥꾼들은 경기 대회 같은 특별한 국내외

사교 모임에 함께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를 마칠

때에는 연설을 하고 나팔을 불어 그날의 사냥감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스트리아·벨기에·체코 공화국·

43

헝가리·스페인 등의 많은 유럽 국가들은 사냥의 성공

을 기원할 수 있도록 성당에서 매사냥의 수호성인에게

미사를 올리는 전통이 있다. 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매사냥꾼들은 매에게 포획된 새나 동물을 두고 신의

이름을 되뇌기도 한다. 또한 매사냥은 공동체에 자부

심과 정체감을 만들어 주는 원천이다. 예를 들어 모로

코 중서부의 크와셈(Kwassem) 부족은 지난 수세기

동안 매사냥 기술 덕분에 명예를 얻고 인정을 받아 왔

다. 일부 매사냥꾼 연행자 가문은 널리 알려져 ‘비아즈

(Biaz, 매꾼)’라는 성(姓)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많은

매사냥 단체나 클럽에서는 좀 더 공식적인 학습 체계

를 개발해왔으며, 이를 통해 국가공인자격증 취득을

위한 견습 프로그램이나 강좌를 도입하게 되었다. 예

를 들어, 오스트리아·체코 공화국·독일·헝가리·

이탈리아·포르투갈에서는 합법적으로 매사냥꾼이

되려면 매사냥꾼 지원자가 국가공인시험을 통과하여

야만 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매사냥에 관한 지식을 전

승할 책임을 부담하는 보유자 명인 제도를 개발하여

왔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각 주의 협회별로 ‘매사냥

꾼 명인’을 지정하였으며 새로운 매사냥꾼을 지도하고

훈련하는 과정을 돕도록 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부르키치(Burkytshi)·쿠스

베기(Kusbegi)가 제자들에게 기술을 전수하여 매사

냥에 관한 유산을 전승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10월 초부터 이듬해 해동(解凍)

될 때까지 매사냥이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의 매는

‘해동청’, ‘해청’이라 하여 용맹하고 사냥을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한편 매사냥을 할 때에는 매의 꽁지에

소리를 나게 하는 방울과 주인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시치미’를 달았다. ‘시치미를 떼다’라는 말은 바로 자

기 집에 날아온 매의 시치미를 떼고 자기 매인 척하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사냥에 쓰는 매를 사육하고 사냥

하는 사람을 응사(鷹師)라고 하며, 현재 우리나라에

는 2명의 응사가 시도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

되어 매사냥의 전통을 잇고 있다.

4

5

Page 44: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명인열전

단청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 오방색 안료를

사용하여 궁궐이나 사찰 등 건물의 벽면과 부재 면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목조건축에서 단청은 필수조건이다. 단청을 하는 이유는

우선 목재의 보존과 목재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인데 표면이 갈라지거나 비, 바람 등 자연현상으로

인한 부식과 충해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건물의

위엄과 신성함을 보이기 위한 목적도 있다. 단청에 종사

하는 사람을 단청장이라 부르는데 일반 단청장은 어장

(魚杖)이라고 하며, 승려인 경우에는 화승(畵僧), 특히

불화에 숙달된 승려는 금어(金魚)라고 부른다.

글. 성혜경

44

전통을 잇고 현대의 미감을 창조한 금어(金魚)

단청장 만봉(萬奉) 이치호 스님은 1909년 서울 종로

에서 이윤식(李潤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5대독자였던

그는 6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는데 그 까닭은 타고

난 사주팔자로 인하여 단명할 것이라는 점술가의 권유

때문이었다. 선친은 아들의 장수를 위해 6세의 어린

자식을 봉원사(奉元寺)로 떠나보냈다. 예술적 자질을

타고난 그는 출가 후 만봉(萬奉)이란 법명을 받았으며

8세 때부터 불교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는

1916년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1924년 수료할 때까

지 이동명 스님으로부터 경문(經文)을 배웠으며, 그해

10월에 당대 제일의 금어(金魚)인 예운선사를 만나면

서 그림을 사사받게 되었다. 당시 서울 안정사에 상주

하고 있던 예운선사는 조선후기 전통화사의 맥을 계승

한 인물로 한말 이후 금강산 화맥을 이끌어온 불화·

단청 명인 이치호

1

2

Page 45: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45

문양은 단연 머리초(긴 부재의 양 끝부분에 넣는 무늬)

양식으로, 그의 머리초 도안은 다른 단청장들과는 구

별되는 요소를 갖고 있다. 특히 머리문양에서 빛을 상

징하는 휘색대의 형상을 직선으로 도안하는 것은 독보

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평방의 문양을 머리초나 별

화 등을 적용하지 않고 금문으로만 치장하는 수법도 만

봉스님의 단청문양이 갖는 특색이다. 만봉스님이 이처

럼 단청에 탁월한 공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불화작

업으로 기초를 탄탄히 닦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단청

은 처음부터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불화수업에 충

실하다 보면 저절로 단청기법도 습득되는 것이다. 만

봉스님 역시 단청을 위한 공부를 따로 한 것이 아니라

평소 불화작업을 열심히 하다 보니 자연히 단청의 기

법을 익힐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1972년 만봉스님을

비롯하여, 김일섭, 원덕문 등 3인의 승려 화사가 국가

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

는 2006년 5월 서울시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입적했

다. 스님의 문하에는 이세환, 이인섭, 홍창원, 박정자,

양선희, 김정순, 배정숙, 김창순, 이형기, 박귀영 등의

제자들이 화업을 계승하고 있다.

단청계의 거장이었다. 그로부터 수년간 시왕초, 천왕

초, 여래초의 선묘습화를 각각 3,000장씩 총 9,000여

장을 그린 끝에 비로소 스승으로부터 금어의 칭호를 하

사받았는데 당시 나이는 18세에 지나지 않았다.

20세에 스승의 하교로 만봉스님이 처음 책임자를 맡

아 시공한 단청불사 건축물은 평양의 황건문(皇建門)

을 옮겨 복원한 서울 조계사의 일주문이었다. 첫 작업

을 무사히 마친 그는 예운선사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

았으며 단청책임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는 금강산 표훈사 16나한전 금단청

(錦丹靑)을 비롯하여 강원도, 황해도, 경기도, 서울 등

유수 사찰의 주요 전각에 금단청을 시공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전국 각지의 사찰, 사당, 궁궐 등의 금단청을

장엄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만봉스님이 작업한 사찰 단청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데, 그중에서도 경복궁 경회루, 남한산성, 공주 마곡사

등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으며, 색상이 유독 화려하

고 초(草)가 다양하며 세밀하다. 특히 광복 이후 주로

사용한 단청문양은 조선시대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

서도 밀도감이 더욱 깊은 것이 특색이다. 가장 독특한

1.전국 각지의 사찰, 사당, 궁궐 등의

금단청을 장엄하는 큰 업적을 이룩한

단청장 만봉(萬奉) 이치호 스님

문화유산채널(공공누리)

2.<채색 나한도>는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하는 다양한 모습의 나한을

그린 불화이다.

문화유산채널(공공누리)

3.<쌍봉황도>. 서로 마주 보며 날개를

활짝 편 봉황 1쌍이 오색 구름 속에서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활달하게 그려내어

단청장 본연의 솜씨가 잘 드러난다.

문화유산채널(공공누리)

3

Page 46: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한국과 중국을 비롯해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직물인

비단은 실크로드(Silk Road)를 통해 유럽에 전해지

면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비단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은 한국과 중국의 소중한 무형문화유산으로, 국립

무형유산원은 중국실크박물관과 함께 ‘한국과 중국의

무형유산, 비단’ 특별전(이하, 비단 특별전)을 준비했

다. 비단의 오랜 역사와 다양한 제조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비단 특별전에 대해 살펴보자. 글. 사진. 이용국

양잠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중국은 세계 최초로

양잠을 발명하고 비단을 직조한 나라로, 신석기시대

유적지인 황하 유역과 장강 유역에서 견직물과 견

의 생산도구가 다수 출토되기도 했다. 한국 역시 동

아시아 견직물 문화권에 포함된 지역이지만, 언제부

터 그 역사가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

만, 「삼국지」의 「위지동이전」을 살펴보면 부여인의 의

생활을 언급한 부분에서 견직물과 관련된 최초의 기

록이 나온다.

삼국시대 이후로 길쌈은 농경과 더불어 농가의 중요

한 생업이었고, 고려 시대에는 비단을 짜는 잡직서와

염색을 담당하는 도염서가 존재했다. 조선시대에는

선잠제도가 행해졌는데, 정종 2년(1400년) 이후로 왕

이 선잠제를 지냈고, 궁궐에서 왕후가 친히 뽕을 따

고 누에를 치는 ‘친잠례’를 거행하기도 했다. 의복을

생산하는 기반이 되는 양잠은 선조들의 삶에서 중요

한 요소였으며, 근·현대에도 양잠 학교를 설립하거

나 교과 과정에 양잠 과목을 두어 가르치는 등 기술

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장려했다. 누에고치에서

문화재 다가가기

46

국립무형유산원 국외교류전시

「한국과 중국의 무형유산, 비단」 특별전

1

2

Page 47: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하는 것은 물론, 한국 여성이 입었던 항라(亢羅)치마

저고리와 청나라 황제의 용포(龍袍) 등 비단으로 만

들어진 복식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특별히 이번 전

시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양잠과 비단을 경험하도록

구성됐다. 전시장 내에는 관련 영상들을 상영하는데,

한국과 중국의 비단 직조 기술과 문화가 각각 어떠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는지,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입구 옆에 마련된 공간에

는 증강현실(AR)을 이용해 한국과 중국의 비단옷을

가상으로 입어볼 수 있는 ‘비단옷 입어보기 3차원 입

체(3D) 체험’이 있다. 또한, 누에 캐릭터가 그려진 엽

서에 각종 직물 스티커를 오려 붙이는 누에 엽서 꾸

미기, 물레 돌리기, 중국 베틀 짜기 등 다양한 프로그

램을 체험해볼 수 있다.

특별전은 정기휴관일인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12월

30일까지 국립무형유산원 누리마루 2층 기획전시실

에서 진행된다. 국립무형유산원에서 공들여 준비한

이번 전시회를 통해 한국과 중국의 소중하고 특별한

무형문화유산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47

1.한국은 기후 풍토가 양잠에 적합해

일찍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며,

실을 켜서 비단을 짜는 일이 발달했다.

2.명주·무명·모시·삼베 등의 피륙을

짜는 베틀의 부품, 북(shuttle).

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짜기

전수교육조교 이규종 소장품

3.유네스코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될 만큼

화려하고 다채로운 중국의 견직물

4. 전시장에는 누에 엽서 꾸미기,

비단옷 입어보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5.한국과 중국이 각각 어떠한 방식으로

비단 직조기술과 관련 문화를 발전시켜

왔는지 살펴볼 수 있는 비단 특별전

풀어낸 실로 만든 직물을 통칭하여 ‘비단’이라고 부르

지만, 사실 비단은 실의 종류와 직조 방법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하다. 여러 가지 비단 직조 기술 가운데

한국에서는 평직으로 명주를 짜는 ‘명주짜기’가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중국의 양잠과 비단 직조 공예’와 ‘난징

(南京) 윈진(雲錦) 문직(紋織) 비단 직조 기술’이 각각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세

계 최초로 설립된 무형유산 복합행정기관인 국립무

형유산원은 국외교류전시의 일환으로 중국실크박물

관과 함께 이번 비단 특별전을 준비했다. 특별전에서

는 양국 양잠의 역사를 시작으로 비단 직조기술과 그

에서 파생된 관련 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한국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주짜기 도구를 중

심으로 그 과정을 보여주고, 그 외에 각종 유물을 통

해 다양한 견직물을 소개한다. 중국은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에 등재될 만큼 화려하고 다채로운 견직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누에를 길러 실을 만들

고 비단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도구와 함께 전시

3

4 5

Page 48: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48

함께하는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11월 12일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의 하나인 백제 사비시대 왕궁터 ‘부여 관북

리 유적’(사적 제428호)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부여 관북리 유적’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의 사비시대 왕

궁터로, 북쪽으로 부소산성을 등지고 남쪽으로 부여읍 시가지가 내려

다보이며, 서쪽으로 백마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문화재청은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

로 등재되면서, 유적의 체계적인 보존·관리를 위하여 백제왕도 핵

심유적 사업을 추진 중이다. 또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사비

왕궁터 관련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중장기 학술조사계획을 마련하

고 있다.

부여 관북리 유적 조사는 1982년부터 2014년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

구소를 포함한 충남대학교박물관, 한국문화재재단, 백제고도문화재

단 등 10개의 조사 기관에서 시굴·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

대형건물터·지하창고시설·연못·도로·공방터, 수로시설 등이 발

견되었다. 성질이 다른 흙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쌓아올리는 성토(盛

土) 기술로 쌓은 층에서 나온 것들로, 같은 방향으로 배치되어 일정한

규칙성도 있다. 이는 백제가 도시계획에 따라 도성을 조성하였음을 보

여주고 있어 왕궁터로서의 가치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는 백제 사비시대 왕궁터에 대한 학술조사의 하나로, 국

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11월 5일부터 발굴조사 사전 준비 작업을 거쳐

12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번 조사는 기존 조사지역의 남쪽에

서 하는데, 바로 인접한 지역에서 도로, 목곽고(木槨庫), 배수로 등이

과거 확인된 바 있어서 추가 조사를 하게 되면 사비시대 왕궁터와 관

련된 주요 시설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도성 체계를 규명하고, 부여

지역 핵심유적에 대한 사비 왕도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

할 것이다.

백제 사비시대 왕궁터‘부여 관북리 유적’ 발굴 시작

글. 사진. 백제왕도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추진단

1. 관북리유적 인면문토기 2. 관북리유적 호자 3. 관북리유적 대형전각건물터

1

1

2 3

Page 49: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카툰으로 보는 문화재 정책

49

Page 50: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독자 코너

50

문화재행정 Q&A

이춘성 / 서울 구로구 경인로

어쩌다 시골이나 오래된 식당같은 곳

에서 나무에 불로 지져서 만든 듯한 글

씨나 그림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런 그림이나 글씨를 쓰는 낙죽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둥

근 대나무에 인두로 새긴다는 것은 일

반적인 새김보다 몇 배의 노력과 시간

이 들어갈 것은 자명한 일이겠지요. 새

삼 명인의 솜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

집니다.

2018년 11월호 독자의견

이재섭 / 서울 중랑구 면목로

딸네가 있어 틈이 날 때마다 들러보는

춘천에 대한 기사가 정겹게 여겨졌어

요. 소양강 처녀상 옆에 신설된 스카이

워크, 은근미가 배어 있는 청평사 고려

선원 모두가 옛날과 오늘을 이어주는 맛

을 담뿍 안겨주고 있어요. 지하철 운행

으로 가까워진 경춘선의 풍미는 늘 즐겁

기만 하답니다.

김태화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진해대로

요즘 공룡에 관심이 많은 아들 녀석이

함께 보던 중에 ‘화석-지구역사의 흔

적’ 속의 사진을 보고는 “와~ 공룡 발

자국이다”하고 외칩니다. 퇴근 후 짧은

시간 함께 하면서 다양한 문화와 역사

를 배우는 재미가 가을 단풍처럼 알록

달록 물들어 가면서 아이들과 함께 행

복의 책장을 넘깁니다.

최한용 / 대전 대덕구 문평동

‘한민족의 대표적인 식문화, 김장문화’

는 우선 시기적으로 좋았고 점점 주거

생활 패턴이 단독주택에서 아파트 주

거문화로 바뀌면서 예전같지 않은 우리

고유의 식문화 김장에 대한 적절한 글

이었습니다. 김장이 겨울의 반양식이라

는 말이 퇴색하지 않도록 우리 고유문

화를 잘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권은미 /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다리로

젓갈은 다양한 식재료가 생산되는 우리

나라에서 선조들의 지혜로 단연 으뜸이

라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염장 및 건조

방법의 소개로 생동감을 더하여 읽었습

니다. 다른 나라의 젓갈 문화와의 비교

도 신선했던 점이네요. 익숙한 냉장고

보관 문화에서 옛 식생활에 대한 궁금

점을 호기심으로 유발시키는 기사였습

니다.

윤성환 / 대구 동구 동부로3길

유교책판과 위키디피아를 비교한 기사

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역사를 전공하고 있기에 고문헌을 많이

접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동안 옛 기록

의 내용을 공부하기에만 급급했을 뿐,

공동체가 함께 경비를 조달해 문집을 출

간하는 공동출간의 형태에 대해선 잘 모

르고 있었는데, 이번 기사를 통해 이 점

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재청 간행물

•월성 고환경 복원 연구

•고대 한·일의 화살통과 장식칼

•익산 미륵사지

•대한제국 황제복식

※ 문화재청 간행물은 문화재청 누리집

(www.cha.go.kr) > 행정정보 > 문화재

도서 > 간행물에서 PDF파일로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

Q. 고고 유적지에서 집단으로 매장된 인골이 출토되었을 때 수습하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A. 유적지에서 여러 구의 옛 사람 뼈가 동시에 발굴되는 경우 개체 식별이 가능한지 여부가 중요하므로 뼈대의 해부학적인

연속성을 고려하여 옛 사람 뼈의 수습을 진행합니다. 우선 옛 사람 뼈의 수습에 참여할 연구자는 발굴 현장을 검토하고 옛

사람 뼈 수습을 진행할 순서와 방향을 결정합니다. 현장을 일정한 간격으로 나누고 영역을 X축과 Y축으로 코드화한 뒤

해부학적 연속성을 고려하여 일련번호를 부여합니다. 옛 사람 뼈를 수습할 때는 해부학적 위치를 고려하여 현장 일련번

호와 옛 사람 뼈 부위명을 기록하여 수습을 합니다.

바로잡습니다

지난 11월호 8p의 13번과 14번 사진의 캡션

(해설문)이 바꿔져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Page 51: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Page 52: 2018 12 통권 제169 우리가함께해요 - 116.67.83.213116.67.83.213/love/ebook/169/pdf/201812.pdf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 루고 있을 뿐만이

blog.naver.com/chagov

twitter.com/chlove_u

instagram.com/chlove_u

facebook.com/chloveu

<문화재 사랑>을 웹진(e-book)으로 만나보세요.

발간등록번호 11-1550000-000370-06ISSN 2005-3584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우는 춤사위

승전무

국가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는 경남 통영(충무)에서 전승되어

온 북춤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충무공이 장수와 병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추게 하였으며, 전쟁에서

이긴 후에는 축하의 의미로 추게 하였다. 승전무는 활옷을 입고

양손에는 한삼을 낀 4명의 무희들이 중앙에 북을 놓고 동서남북

으로 나뉘어 북을 울리며 창(唱)을 하고 춤을 춘다. 흩어졌다 모여

드는 형태는 삼진삼퇴를 뜻하며 전체가 화려하고 웅장하면서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영산회상’ 가운데 삼현도드리와 타령을

반주음악으로 쓰며, 춤가락은 순박하면서 예스럽고 독특한 향토적

특색을 띠고 있다. 승전무는 의상이나 사용되는 도구, 춤의 내용

등이 궁중무고와 흡사한 춤으로, 우아한 춤사위와 가락 그리고

치밀한 짜임새는 예술적 가치가 높고 전통성을 담고 있는 우수한

춤이다.

2018년 12

월 | 통

권 제

1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