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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유 유유 유유 유유?” 유유유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 유유유유 유유유유. 유유유유 유유유유 유유 유유 유 유유유 유유 유유유유유 유유 유유 유 유유유. “유유유유유유, 유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 유유 유유유유유 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유유 유유유유유유…?” “유 유유 유 유유유 유 유유 유유 유유 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 유유유유 유유유 유 유유 유유유유. 유유 유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유유유유 유유유유유 유유 유 유 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 유 유유 유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유 유유 유유유유 유유유유유유 유유유유유 유유유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유유 유유 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 유유유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 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 유유 유유 유유유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유유유 유유 유 유유유유 유유유유유유 유유 유유유유유 유. 유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유유 유 유유유유유 유유유 유유유유유 유유 유 유 유유유. “유유유유유 유유유유?” “유유 유유유유유 유유유유유 유 유 유유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 유유유. 유 유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유 유유 유유유 유 유유유 유 유유유 유유유유. “유유유유유? 유유 유유? 유유유유 유유? 유유유 유유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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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이 거기 있는 게냐

“유천이 거기 있는 게냐?”

늙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집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방에서 책을 읽던 유천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황급히 일어나 그 진원지로 달려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마침 유천

의 방까지 오던 중이었는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어르신.”

“찾고 말고가 어딨느냐. 넌 얼른 준수에게나 가 보거라.”

“준수…아니,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제 아비 말 이렇게 안 듣는 자식 놈도 없을 게다. 그래도 네가 설득하면 조금은 마

음을 돌리겠지. 어서 가보거라.”

유천이 무엇을 설득해야하는지 말해주지도 않은 채 이 집의 늙은 주인은 유천을 지나

쳐 규방 쪽으로 갔다. 어쨌든 유천은 준수가 기거하고 있는 방으로 빠르게 걸었다.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바로 옆방에서 동고동락하는 사이였는데 자라면서부터 준수의

부친이 명령하는 바람에 제일 먼 곳으로 떨어지게 된 둘이었다. 그래도 돌아가신 부

친의 친구 분에게 기탁하고 있는 신세인 유천이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준수-”

준수는 방에 없었다. 다만 유천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방문 앞 난간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쳐 앉아있었을 뿐. 준수의 뽀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는 걸 죽마고우인 유천이

아니더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보내셨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널 잘 타이르라고 하셨어.”

준수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도 비소와 냉소가 흐르고 있음을. 준수의 기분이 지금

상당히 안 좋다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타이른다고? 누가 누굴? 아버지가 나를? 아니면 네가 나를?”

“김준수….”

“아들을 팔아넘기는 아버지에게 꾸지람 받을 정도로 내가 나쁜 아들이야?”

팔아 넘긴다…?

유천은 쉽게 그 말뜻이 이해되지 않았다. 비록 준수의 부친이 벼슬길에서 물러난 지

는 오래됐지만 집안의 재산이 먹고 살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정도였다. 가난한 평민들

처럼 딸을 기루에 팔아넘기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박유천.”

“…?”

“도망가자.”

유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준수만 도망간다는 게 아니었다. 같이 도망가자는 뜻이

었다. 그건 단순히 도피의 문제가 아니라 준수가 자신에게 품어왔던 십 수 년간의 모

든 감정이 압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유천의 반응에 준수는 다시금 허탈하게 웃었다.

“됐어. 그런 표정 따위. 어차피 박유천이란 인간이 모험 같은 거 할 수 없다는 건 옛

날부터 알고 있었어.”

“…왜 도망가려고 하는 거지? 네가 옳은 일이라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준수는 숨을 삼켰다. 차마 자기 입으로 내뱉기 싫다는 듯이. 준수의 부친도 그랬다.

뭔가 찝찝하고 더럽고 음험한 냄새가 났다. 망설이던 붉은 입술이 곧 열렸다.

“나 궁에 들어갈지도 몰라.”

“궁…?”

“황제의 노리개 감으로.”

이번엔 유천이 놀랄 차례였다. 황제의 노리개? 나쁘게 말하면 그렇고, 좋게 말하면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간다는 소리였다. 여자에겐 영광일 수도 있겠지만 준수는 남자

였다. 귀엽게 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남자가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새 황제 등극 후 어느 세력에 붙을까 고민하시던 아버지께서 드디어 결단을 내린 모

양이야. 어차피 아무 도움도 안 되는 퇴물 취급 받는 아버지를 어느 파에서 받아줄

리는 없고, 황제가 남색을 탐한다는 소문을 들었나봐.”

“설마….”

“그걸 만족시킬만한 게 나야. 아버지도 환갑 나이에 얻은 늦둥이를 이런 식으로 써먹

게 될 줄은 몰랐겠지.”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걸까? 16년동안 같이 자라왔던 사이다. 어릴 때

부터 몸이 작은 준수를 옆에서 지켰던 건 박유천이었고, 그런 친구랑 결혼하겠다고

생떼를 쓴 건 김준수였다. 한 번도 떨어져서 산 적이 없는 둘이기에 한 번 떨어지면

언제 볼지 모르는 궁에 다른 한 쪽이 들어간다면.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없다.

“…그래서 도망가려고?”

“네가 같이 가준다면.”

준수의 검은 눈망울이 유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천의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준수가 그를 어떻게 생각했든지 간에 그에겐 준수는 지켜주고픈 동

생 같은 예쁜 친구였으니까.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눈망울에게 답했다.

“…네가 도망간다면 도와줄 순 있지만, 난 갈 수 없다.”

“창민이 때문에?”

“…그 애까지 데리고 도망칠 순 없어.”

“어차피 내가 도망가면 아버진 너랑 창민이 가만 안 둬. 그럴 바엔….”

준수의 따지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울컥하는 느낌, 준수의 눈에 물기가 어리는 게

똑똑히 보였다. 그래도 볼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는 건 그의 자존심 때문이었으리라.

그의 눈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네가 없는 곳에 내가 갈 수 있을 리 없잖아.

“미안하다. 준수야.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알고 있어. 심창민이 네 약점인 것도. 내 약점이 너인 것도 아버지는 다 알고 있으

니까. 내겐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없다는 거 알잖아.”

그래도 네 마음을 확인해보고 싶었어.

동생 같은 친구가 아닌 친구 같은 연인으로 봐주길 바랬어.

유천은 자기 앞에서 애써 눈물을 참는 친구를 안아주었다. 원래 작디작아서 맨날 놀

리곤 했는데 오늘따라 새끼새처럼 애처로운 건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박유천, 정말 미워…. 진짜 미워….”

‘유천이가 과거에 급제하면 준수는 유천이 색시 될 거야.

그럼 창민이는 유천이 동생이니까 도련님이라고 불러야겠지?’

친구의 꿈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그 꿈은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친구의 꿈을 깨고 싶진 않았다.

김준수. 안녕.

넌 누구보다도 예쁘고, 사랑스러우니까 어디서나 사랑받을 수 있을 거야.

준수의 입궁 날짜가 정해졌다. 아니,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하는 게 옳은 말이었

다. 분주한 집 분위기와는 달리 유천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책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전부였다. 어차피 과거공부나 하는 백면서생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곧 남자인 주제에 꽃단장한 친구가 가마에 실려 이 집을 떠나겠지.

"형-"

고개를 들었을 땐 방문 앞에서 창민이 자신을 향하여 웃고 있었다. 하지만 유천은 뭔

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창민의 몸을 감싸고 있는 건 고급 비단. 설마 자기에게만

투자하고, 인색하기로 유명한 준수의 부친이?

"창민아, 그건 어디서 난 거냐?"

"어르신께서 주셨어."

"어르신께서?"

"응, 황궁에 들어가려면 잘 차려야한다고."

유천의 손에 있던 책이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창민의 눈동자는 금방 동그래졌다.

"네가 왜? 넌 왜?"

"준수 몸종 같은 걸로 입궁할지도 모른다고 하셨어."

"말도 안돼!!! 어르신께 가서 따져야겠다!"

유천의 얼굴은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아들이라고는 하나 자신의 죽마고우가 남자에

게 시집간다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은데, 동생은 친구의 시종 같은 걸로 왕궁

으로 들어가게 된다니. 제아무리 얹혀사는 처지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삶

을 결정하다니.

"왜 그래, 형."

“왜 그러냐고? 네가 뭔데 환관 같은 걸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거세(생식선을 제거하여 생식기능을 없애는 일) 같은 건 안 해도 된댔어.

어차피 준수도 남자니까 오히려 궁녀를 붙일 순 없는 거잖아."

"심창민!"

"어르신께서 준수 잘 지켜주라고 하셨어. 나도 좋다고 했고."

지켜주라고?

창민이 준수보다 키가 큰 건 사실이었지만 허약해서 준수나 창민이나 도토리 키재기

다. 유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김준수 성질에 얌전히 입궁해서 살 거라 생각하지 않

았던 걸까. 적어도 창민이 준수 옆에 있으면 준수나 유천이나 함부로 행동할 수 없

다. 유천이 창민을 데리고 도망가면 준수도 황궁에서 도망칠거라는 가능성을 생각한

걸까. 그 늙은이는 이럴 때만 머리 회전이 빠르다.

"나도 알아."

"무얼 말야…."

"어차피 난 인질 같은 거라는 거."

"…."

"어차피 준수도 유천 형 때문에 가는 거잖아."

"……."

"이런 식으로 입궁한다 해도 백 명이나 되는 간택에서 준수가 뽑힐지 안 뽑힐지 모르

잖아. 뽑히면 뽑히는 대로 고생일 거고, 안 뽑히면 궁 구석에서 살아가야하는 거고."

"심창민…."

"혼자 보내기엔 준수가 너무 불쌍하잖아."

동생이 이렇게 커보였던 적이 있을까? 준수가 불쌍하댄다. 후궁으로 들어가는 준수나

궁인 같은 걸로 들어가는 창민이나 유천 눈엔 둘 다 똑같았다. 적어도 준수는 마음은

몰라도 몸 고생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단순히 시종 수준인 창민은 다르다.

"너 자신은 안 불쌍하니? 어쩌면 준수와 같이 늙어갈지도 몰라. 황궁이라는 곳은

한 번 들어가면 죽어서 나와야 하는 곳이야."

"난 박유천의 동생이야."

"…!"

"박유천을 위해서 황제에게 시집가는 김준수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인걸."

"창민아…."

"과거급제하면 그 때 동생 먹여 살려도 늦지 않잖아. 승상 같은 거 돼서 나랑 준수

궁에서 빼주면 되잖아. 어차피 내가 이 집에 있어봤자 어르신 미움만 받을 뿐."

유천은 쫑알쫑알 대답하는 창민을 꼬옥 안았다.

왜 이래야하는 걸까. 왜 자신 때문에 두 명이나 팔자에도 없는 일을 해야하는 걸까.

왜 자신은 이 사람들을 지켜줄 수 없는 걸까.

어릴 때부터 옆에 있었던 귀여운 꼬마를 지켜주겠단 약속도,

죽어가던 모친 앞에서 이복동생을 지켜주겠단 약속도,

결국 한 탐욕스러운 남자의 욕심에 부셔져버리는 건가.

아니. 결국 자기 자신 때문에 깨져버리는 건가.

"이제 가야돼. 아까 가마가 오는 걸 봤거든. 늦게 말해서 미안.

미리 말해놓으면 형이 난리칠까봐 차마 못 말했어."

"……창민아."

"잘 있어, 형."

한 마디 말을 남긴 채 창민은 유천의 품에서 스르르 빠져나와 방을 나갔다.

방에 남겨진 남자는 뒤를 쫓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잡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그들에게 웃으며 보낼 여력 같은 건 남아있지 않다.

황제가 있는 신기성은 처음 본 자들에게는 경악감부터 일으키는 곳이었다. 몇 겹이나

둘러싸인 담뿐만 아니라 궁 안 곳곳이 금과 옥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금룡성'이라

는 별칭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끝도 없이 보이는 건물과 웅장한

자태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황제가 있는 금룡궁 뒤편으로 후궁의 총칭인

수화궁이 있었고, 그 안에 준수가 있었다.

"쟤가 걔야? 몰락귀족 출신에 남자인 주제에 후궁이 되려고 들어왔다는?"

"폐하께서 남색을 즐기신다는 헛소문을 듣고 아비가 들여보냈대.

헛소문 퍼뜨린 환관이나 그걸 믿고 뇌물 주고 저 꼬마 들여보낸 그 사람이나."

"어머나, 이를 어째. 이미 들어온 이상 어쩔 수도 없는 거 아냐?"

"그냥 궁 어딘가에서 조용히 썩어가야지."

저 촉새들.

준수는 애써 자기 목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어차피 따져봤자 그 말이 사실인 이

상 그만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그냥 꽃단장에 여념 없는 여인들 곁을 떠나는 게

제일 나은 방법이었다. 정원 쪽으로 나가는 준수를 창민이 급히 쫓았다.

"아버지 머리가 좋은 줄 알았더니 완전히 바보였어."

"준수 형..."

"이게 뭐야!!!! 이런 곳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저런 떡칠한 여자들에게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잖아! 너까지 휘말려서 말이야!"

준수가 사실을 알게 된 건 궁을 들어온 지 이틀정도 지나서였다. 뭔가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게 이상해서 순진해 보이는 궁녀 한 명에게 묻자 저런 엄청난 소식만을

듣게 되었다. 완전 개밥의 도토리만도 못한 신세.

"그래도 간택까지 빼먹을 건 없었잖아."

"가서 뭐해! 그런 취미 같은 건 전혀 없는 남자 앞에서 당신의 옆에서 잠들고

싶어요, 이런 말이라도 내뱉으라고?"

여인들이 꽃단장하고 황제와 태후 앞으로 불려갈 때 준수는 숨바꼭질 실력을 유감없

이 발휘하여 빼먹었던 것. 덕택에 준수의 행방을 묻는 상궁들에게 시달린 건 창민이

었다.

"차라리 잘됐어. 간택 안되면 좋은 거지. 그냥 나인의 신분으로 궁 어디선가

처박혀 있으면 되는 거 아냐? 간택기간이 끝나면 저 많은 여자 중에서 소수만

직위를 받고 황제를 받들 수 있을테니. 나 같은 건 1년정도 조용히 살다가 황궁을

도망치면 되는 거야. 어차피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쓸 걸."

"형...."

"어차피 아버님도 단단히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테니 내가 돌아간다 해도 쫓아내진 않

을 거야. 돌아가면 원래대로 넌 박유천의 동생이고, 난 박유천의 친구로 살아가면

돼. 걱정 마, 어차피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간택 기간은 1주일. 그 중 마지막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기간이 지나면 황제의 마음에 든 몇몇 여인만이 직함을 받고 후궁으로서 살아가겠

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출궁하지도 못하고 어디선가 구석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

이다. 웬만한 궁녀보다도 못한 신세로. 언젠가 황제의 눈에 띌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은 채. 오히려 준수에겐 그 구석이 이 지긋지긋한 황궁을 나갈 수 있는 탈출구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창민에겐 왠지 모를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준수는 이 궁을 평생 못 나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예감.

그래도 차마 벌써부터 유천을 재회한 것 마냥 들떠 있는 준수에게 그 말을 할 순 없

었다.

그 예감이 맞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간택 기간이 끝나고 몇몇 여인들은 후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여인들은

나름대로 기쁨에 사로잡혀 시녀들을 시켜 정신없이 짐을 챙기고 있었다.

준수는 조금은 다른 의미로 짐을 싸고 있었지만.

"역시 폐하께선 내가 마음에 드셨던 거야! 비록 아직은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에 불과하지만 직위라도 얻게 된 게 어디야! 폐하의

용안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있었어. 여자인 내가 폐하의 외모에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구."

단 하룻밤으로 직위 하나를 얻게 된 한 여인은 들떠서 자신의 시녀에게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쫓겨날(?) 준비를 하고 있는

준수는 창민만 볼 수 있게 비웃음을 내뱉고 있었다.

"여자가 질투를 느낄만한 외모가 그게 남자야? 여자지."

“형, 듣겠어!”

“들으라면 들으라지. 어차피 다신 볼 일 없을 텐데.”

나이는 같았지만, 어르신의 명령으로 준수를 형이라고 불러왔던 창민은 준수의 대범

함인지 만용인지 모를 발언에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떻게 저런 선녀 같은 얼

굴로 저런 말을 내뱉는 걸까.

“어서 가자. 여자들의 이런 질투심과 경쟁 따위 이젠 질색이야.

화령전이라고 했던가?”

직위를 얻어 나가는 여자들보다 더 기세 좋게 나가는 준수였다.

앞으로 여자들의 질투심과 미움을 더욱 받게 될 것이라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을 뿐.

궁녀의 안내를 받아서 온 화령전이라는 곳은 차마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장소였다. 화

려한 금룡궁과는 달리 폐가 같은 건물 하나가 덜렁 있었고, 그 주변을 길게 자란 풀

들이 장식하고 있었다. 안은 더더욱 가관. 사람이 꽤나 살지 않았는지 거미가 꽤나

큰 집을 지어놓고 있었고, 먼지는 두께가 보일 정도로 쌓였다. 아직 해가 뜬 오후인

데도 음침하게 보이는 건 분위기 탓일까. 안내를 하러 온 궁녀는 쏜살같이 사라져버

렸다. 남은 건 벙쪄 있는 준수와 창민뿐.

“창민아, ……여기서 1년이나 살 순 있을까?”

“당장 하룻밤부터 잘 수 있겠어?”

고쳐준다는 말도 안 한 것 보니 남자니까 알아서 고쳐서 살라는 말 같기도 하다. 아

까 궁녀들이 자신들을 보며 수군거린 이유가 있었다. 거의 황궁 안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궁에 갇혀 살게 되었으니 동정심이 일 수 밖에.

“형은 가만히 있어. 내가 대충 치울 테니까.”

비록 몰락가문이긴 하나 부유한 집안의 자제가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거라고 재

빨리 판단한 창민은 청소부터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이야 준수가 없을 때 어르신의

명령으로 유천과 많이 했던 일이었으니까.

“아, 아냐. 같이 해. 이대로 가다간 우리 둘 다 풀밭에서 별 보며 잠들어야 해.”

“피- 방해만 될 걸.”

“심창민! 너 집으로 돌아가면 유천이한테 이른다!”

결국 귀하게 자란 자제분과 그 시종은 먼지를 털고 풀을 뽑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해가 다 져서야 대충 잘 수 있을만한 공간은 생겼지만 그 뿐. 수라간에서 잊어버렸는

지 식사는 나오지도 않았고, 이불 하나 챙겨온 것만 작은 침상에 깔 수 있었다.

“형이 여기서 자. 난 탁자에서 잘게.”

“안돼. 탁자 아직 못 닦았어. 어차피 이불도 하나 밖에 없어. 같이 자.”

“…그래도 난 시종의 신분이야. 간택됐을 지도 모를 후궁과 같이 잘 순 없잖아.”

“후궁은 무슨 후궁. 괜찮아. 어차피 볼 사람도 없고, 자면 어때. 남자끼린데.”

그러는 당신은 같은 남자인 유천 형한테 묘한 감정 품은 건 뭔데?

창민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준수가 앉은 좁다란 침상에 끼어 앉았다. 글 읽기와

노는 것 외에 해본 적 없는 준수 덕택에 힘을 배로 쓴 창민은 가뜩이나 약한 체력이

더욱 약해진 것 같았다.

“창민아.”

창민 못지않게 힘들었던 준수는 옆의 동무를 살짝 불렀지만 창민은 이미 꿈나라에 가

있는 상태였다. 둘 다 옷도 못 갈아입은 상태로. 준수를 생각해서인지 몸을 잔뜩 웅

크리고 침상 끝에서 자는 창민이 안쓰러워 준수는 그를 넓게 자게 하려고 했다.

“아야!”

생전 처음 막노동을 해봐서 였을까. 준수의 손에서 물집이 터져있다. 아릿한 아픔에

옆의 친구를 깨우려던 준수는 창민의 손과 얼굴에 온통 생채기가 나 있는 걸 보고는

그만 두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오히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준수는 잠든 창민에게

이불을 덮은 뒤 밖으로 나왔다.

“박유천….”

찬바람을 쐬자마자 친구의 이름이 떠올랐다.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나 좋아했던 친구.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친구.

힘들면 마구 기댈 수 있는 친구.

그런 친구가 곁에 없다.

“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친구 앞에서조차 보일 수 없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막

상 헤어질 땐 슬프기만 했는데 이젠 억울하기까지 하다. 왜 바보 같은 아버지의 술책

에 자신이 희생되어야 하는 걸까. 차라리 황제가 남색을 탐해서 간택이라도 받았다면

창민이 저렇게 고생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박유천! 이 나쁜 놈아! 같이 도망쳐줬으면…좋았잖아! 흐엉엉엉엉!”

서러운 마음에 달빛 아래서 그렇게 울고 있었다.

“뭘 그렇게 시끄럽게 우는 거냐?”

준수는 너무 놀라 눈물을 뚝 그쳤다. 창민 목소리가 아니다. 뒤를 천천히 돌아보니

웬 보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준수는 얼른 눈물을 닦으며 애써

당당하게 대답을 했다.

“누구냐. 인간이면 제 볼 일 보고 귀신이면 썩 물렀거라.”

“인간이라서 네게 볼 일 좀 봐야겠다. 너는 누군데 여기서 울고 있는 거냐?”

달빛이 그를 찬찬히 비추어서 준수는 그 목소리의 정체를 볼 수 있었다. 보랏빛 옷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 옷이 무색해질 정도로 자신보다 한두 살 더 먹은 듯한 남자의

미모는 출중했다. 수려한 이목구비가 흡사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너무 수려해서 그런지 웬만한 여자들은 감당하기 힘든 외모였다. 물론 준수

에겐 돼지 목에 진주덩어리였지만.

“네, 네게 말할 필요는 없어. 너야말로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후궁에 남자는 못

들어올 텐데?”

“너야말로 남자가 왜 후궁에 있는 거냐. 그것도 화령전 같이 음산한 곳에서. 누구 암

살이라도 하려고 왔나?”

“무슨! 여긴 내가 사는 데야! 넌 뭐야?”

“나도 이 부근에서 산다.”

여기서 산다고? 황궁에서?

준수는 눈을 깜박이며 자기 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예쁘

다. 황제가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나? 그러나 그 때 간택되는 동안

있었던 수화궁에서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자기가 못 봤을 수도 있다고 여겨버렸다.

“너도…황제의 후궁 같은 거야?”

“…후궁? 너 후궁이었느냐?”

“황제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그 남자가 되물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준수는 자기 멋대로 결

론을 내리고 말았다. 막상 그 소리를 들은 남자의 눈이 되려 커졌다.

“황제가 남색을 즐긴다고? 하, 어디서 그런 유언비어를 들었느냐?”

“나도 몰라! 그딴 헛소문 때문에 난 이딴 곳에서 살게 됐으니까! 으, 아버님도 밉고,

그래. 황제가 제일 미워! 왜 그런 소문을 흘려서…. 황궁도 이게 뭐야! 아무리 간택

같은 거 안 받았어도 이런 귀신의 집 같은데 둬도 되는 거야? 유천이한테 보내줘, 엉

엉엉!”

어차피 모르는 사람 앞이니까 괜찮다고 생각 되서, 태연하게 물어보는 남자의 말에

대답하다가 열이 오른 준수는 그만 참았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울지 마라.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지 않느냐.”

지가 더 이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우느라 말로 나오질 않았다. 동시에 그 남자가 준수의 볼에 흐

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훔쳐내었다. 집에 있었더라면 유천이 해주었을 그

사소한 행동이 그리웠던 준수였기에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너…좋은 사람이구나.”

“너무 쉽게 사람을 믿는구나. 내가 수상한 사람일지 어찌 알고.”

적어도 박유천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리 없어.

그 말을 하려던 준수는 앞의 남자를 붙잡았다.

“너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거 보니까 간택을 받았구나. 어디서 살아?”

“…그러고 보니 네 옷은 왜 그렇게 헤졌느냐? 손은 또 왜 상처투성이고?”

“그게 풀 뽑느라….”

남자의 청아한 웃음소리가 밤공기에 울려 퍼지고, 준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물론 준수의 질문이 모르는 새 묵살되었다는 것도 그 자신

은 느끼지 못했다.

“웃지 마! 황제가 나쁜 거야. 간택 받지 않았다고 이런 대접은 너무 하잖아! 식사까지

주지도 않고! 차라리 출궁시켜주던지!”

“난 너를 간택 때 본 기억이 없는데?”

“그야…당연히 내가 일부러 빠졌으니까…. 넌 이미 후궁이 되어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난 황제의 후궁 따위 되고 싶지 않았어.”

“좋게 대접받고 싶었다면 황제의 눈에 드는 게 낫지 않았을까.

뭐, 어쨌든 간에 후궁 후보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건 황제에게도 수치겠지.

달빛에 취해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왔는데 좋은 구경을 했구나. 오늘 밤만 참아라.

내일 어의를 보내주마.”

그 때 어렴풋이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수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채지

못했지만 앞의 남자는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 아는 목소리인 듯 했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구나.”

하긴 초면인 사람치고 자신의 푸념을 너무 많이 들어주었다. 뭔가 아쉬운 마음에 준

수는 그를 붙잡았다.

“저기, 또 올 거야?”

“묘한 말이구나. 오고 싶다면 발길이 알아서 여기를 찾겠지.”

온다는 건지, 안 온다는 건지.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그래도 궁 안에서 처음으로 만난 남자다. -환관을 제외하고-

아무래도 자기를 비웃는 여자들보단 편해서 벗이라도 됐으면 싶었는데.

“…오기 싫으면 내가 갈까?”

정말 사심 없이 말한 말이었는데 이 남자는 준수를 빤히 쳐다보다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뭔가 놀림을 당한 기분에 준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화내지 말거라.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서 놀랐을 뿐. 네가 기다린다면 오겠다.”

어쨌든 목표 달성. 뾰루퉁하던 준수의 얼굴 표정이 누그러지자 잘생긴 청년은 자기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려 했다.

“아, 맞다. 이름이 뭐야? 난 김준수야.”

“…가르쳐줘도 되려나….”

“……?”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 그 남자 얼굴이 드러나더니 곧 붉은 입술이 찬찬히 열렸다.

“재중이다. 김재중.”

“형. 일어나봐.”

“우웅, 왜…. 더 잘래….”

“시의(侍醫 : 궁중에서 임금과 왕족의 진료를 맡아보던 의사. 어의)가 왔어.”

“시의…응? 뭐라고?”

어제 재중과의 밀회(?) 덕택에 늦게 자버린 준수는 시의가 왔다는 말에 졸린 눈을 번

쩍 떴다. 정말로 준수의 눈앞에는 지긋하신 나이의 어의가 저만치 떨어져 고개를 숙

이고 있었고, 창민의 손과 얼굴에는 붕대가 덕지덕지 붙여져 있었다. 또 뭔가 다른

듯한 느낌.

“창민아, 그 옷은 또 뭐야?”

“아, 우선 치료부터 받아. 형 옷도 있으니까.”

창민이 눈짓을 하자 어의가 다가와서 준수의 물러터진 손을 세심하게 치료하기 시작

했다. 하지만 놀란 건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손에 붕대를 감고, 옷까지 갈아입은 준

수의 눈에 비친 건 궁녀들과 환관들이 어제 미처 못 뽑았던 풀(!)들을 뽑고 있었다.

그리고 탁자에 차려진 진수성찬. 집에서조차 못 보던 것들이 가득했다.

“이, 이게 뭐야?”

“폐하의 명을 받고 가져왔다고 하던데….”

황제가?

그제야 준수는 어제 어의를 보내주겠다던 재중의 말이 떠올랐다.

“대체 요즘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는 겁니까?”

최근 어전회의 내내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황제를 보며 윤호가 걱정 어린 잔

소리를 해댔다. 비록 위위(황제 경호 및 궁성 수비를 하는 최고 지휘자)에 불과한 윤

호가 그럴 수 있었던 건 황제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아아, 잠시 궁 밖으로 밀행 좀 할까 하다가 길을 잃었던 것뿐이다.”

“길을 잃으셨다는 분이 저까지 따돌리실 필요가 있었나요? 게다가 일주일 내내 황궁

에서 길을 잃으실 건 또 뭡니까?”

“어차피 용케도 찾아내지 않았느냐.”

“폐하 덕택에 후궁 마마들께 저만 혼났습니다. 폐하께서 납시겠다고 하셔서 꽃단장하

고 있었더니 바람 맞으셔서 화가 단단히들 나셨습니다. 호위 하나 제대로 못 하냐고

요.”

“내 생각엔 네 입부터 호위해야겠구나. 네가 이렇게 고자질하고 있다는 걸 알면 더더

욱 미워 할 테니.”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던 건 폐하이십니다.”

짧은 웃음소리가 금룡궁 사이에 울려 퍼졌다. 그 웃음소리는 최근 준수가 머무르고

있는 화령전에서 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요즘 화령전 쪽으로 가시는 것 같던데. 그곳에 무엇이 있습니까?”

“아, 예상치도 못한 곳에 꽃이 피어있더군.”

“꽃 말입니까?”

“굉장히 귀여운 꽃이. 수술만 달려있어서 조금 곤란하다는 것 빼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쿡쿡 웃어버렸다. 윤호는 그런 황제를 보면서 상당히 의아해했다.

최근 밤에 모든 후궁들을 울리고, 윤호 조차 떼어내고는 어디론가 사라지는 황제가

매우 즐거운 듯 보였다. 수술만 달린 꽃?

“아, 윤호.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더구나.”

“무슨 소문 말씀이십니까?”

“내가 남색을 탐한다는 그런 소문이.”

“네??!”

“왜 그런 유언비어가 떠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유가 황제 자신이 호위대장인 윤호를 항상 가까이에 뒀기 때문에 퍼진 거라는

건 아직 깨닫지 못한 듯 하다. 궁내 입단속을 잘 하겠다고 말한 윤호 또한 아직 모르

고 있었다. 그 소문이 조만간 진짜가 될 거라는 것을.

“굉장했어. 수라간 나인들이 음식을 줄줄 들고 오는데 창민이 눈이 동그래질 정도였

으니까.”

“다행이구나. 마음에 들어서.”

어김없이 체력이 약한 창민은 일찍 잠이 들었고 - 침상도 하나 더 들어온 덕택에 따

로 자게 되었다 - 뜰에 나와 있던 준수는 재중을 만날 수 있었다. 잡초밭이 아닌 꽃

밭으로 변해있는 정원을 보며 웃는 준수를 보며 재중도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

다. 준수와 재중이 밤나들이(?)를 시작한지 일주일쯤 된 밤이었다. 그동안 재중도 약

속을 지켜서 매일 찾아왔고, 준수도 밤에 약한 창민 대신 말동무가 생겨서 즐거웠다.

“고마워.”

“무엇이 말이냐?”

“네가 황제…아니, 폐하한테 말해준 거 아냐? 첫 날엔 그렇게 푸대접하더니, 네가 어

의 보내준다고 한 그 다음 날부터 요술이 벌어졌잖아.”

“음, 굳이 틀린 말은 아니다만.”

“덕택에 1년 동안은 편히 지낼 수 있게 됐어.”

“1년? 무슨 1년을 말하는 거냐?”

“…음, 2년 정도가 될 수도 있고. 여기서 살 기간.”

미소를 띠고 있던 재중의 얼굴에 미소가 가셨다는 걸 준수는 느끼지 못한 채 계속 말

을 이었다.

“난 황궁 구석에서 썩고 싶은 생각 없거든.”

“그럼 썩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그게 아냐. 집에 돌아갈 거야.”

“입궁하면 황제의 명이 없는 한 출궁할 수가 없을 텐데?”

“그러니까 몰래 나가야지.”

준수는 순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중의 얼굴엔 호기심 가득한 미소가 아니라

약간 화난 듯한 무표정이 드러나 있었으니까. 아무리 편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황제

의 후궁이다. - 준수가 생각하기엔 - 심한 말을 해버린 것 같다.

“왜 나가려는 거냐? 네가 마음만 먹으면 총애도 받고, 재물을 얻거나 권력을 쥘 수도

있을 텐데?”

“황제의 총애는 너에게 필요한 거고, 권력은 아버지한테 필요한 거야. 나에게 그런

건 필요 없어.”

“겨우 그런 연유로?”

“그것 뿐만은 아니지만….”

“그럼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

준수는 금방 입을 열지 않았다. 재중의 저 아름다운 얼굴에서 풍겨오는 위엄이 심상

치 않아서 말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황제한테 안 말할 거지?”

“말하진 않으마.”

집요한 재중의 눈길을 피하기엔 준수는 아직 너무 어리숙했다. 그 말 속에 숨겨진 묘

한 뉘앙스를 눈치 채지 못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고 싶어서.”

“…그럼 황제를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 그것이 후궁의 임무일 텐데.”

“너 이상하구나. 후궁들은 한 명이라도 경쟁자를 떨어내고 싶어 하는데. 내가 물러난

다면 넌 좋아해야하지 않을까?”

“아니, 그 반대다.”

확고한 대답에 되려 할 말이 없어졌다. 오늘은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 항상 자기

를 놀리듯 장난스럽던 재중의 모습은 어디가고 차가우면서 뜨거운 그런 재중만이 있

었다. 짧은 침묵에 어색해진 준수는 도피하려 했다.

“나 이만 잘게.”

“난 너에게 물러나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어.”

돌아서던 발걸음이 멈췄다. 재중이 이런 식으로 준수를 강제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도 황제의 후궁이라면 직위가 없는 자신에게 명령할 권리는 있겠지라는 생각에

준수는 그대로 서 있고 말았다. 입만 제외한 채.

“너, 너 왜 이래?”

도망 못 가게 하려는 듯 준수의 팔을 꽉 잡자 잡힌 당사자는 떨리는 목소리부터 나왔

다. 재중의 무미건조한 표정. 아니, 더더욱 화난 얼굴. 공포에 휩싸여버렸다.

재중이 뭔가를 말하려던 그 때.

“준수 형, 거기서 뭐해…? 누구냐!”

준수에게 구세주라고 할 말한 인물이 나타났다. 뭔가 소란스럽자 창민이 깨어났던

것. 준수가 수상한 남자에게 잡혀 있는 걸 보고 달려와 재중과 준수 사이를 가로막았다.

“어느 궁에 소속된 신분인지는 모르지만 후궁에 있는 것들은 모두 황제 폐하의 것입

니다.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당황해하는 준수와 그런 준수를 감싸려는 창민.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 사이에 재

중의 비웃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이 퍼졌다.

“하, 후궁에 있는 것은 모두 황제의 것이라? 맞는 말이구나.”

단순히 한 마디 말을 내뱉은 것뿐 이었는데 주변 공기를 모두 얼리는 듯 했다. 창민

조차도 살짝 떨고 말았다. 그 사이 재중은 준수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살짝 만지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까지와 전혀 다른 목소리로.

“출궁하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나는 네가 이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살았으면 싶으

니. 오늘은 이만 가겠다.”

동시에 준수는 뺨에 뭔가 촉촉한 것이 닿았음을 느꼈다. 그것이 자기 얼굴을 만지던

남자의 입술이라는 걸 자각했을 땐 이미 재중은 되돌아가고 없었다. 어안이벙벙해진

준수는 창민이 그를 흔들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준수 형, 저 사람 누구야?”

“나, 나도 몰라….”

준수가 재중이 단순히 황제의 부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한 날,

창민이 재중을 만난 날이 바로 이날 밤이었다.

“그 재중이라는 사람이 후궁 중 한 명인 줄 알았다고?”

“당연히. 예쁘고, 그렇지 않으면 이 황궁에 우리말고 다른 남자가 있을 리 없잖아.”

…그게 문제지.

“그럼 형, 그 사람 직위가 뭔진 알아? 재인? 빈? 비? 설마 황후 마마는 아니겠지?”

“그건 안 말해줬어.”

둘은 잠드는 것조차 잊은 채 재중의 정체에 대해 힘찬 토론 중이었다. 준수는 궁에서

처음으로 생긴 벗이 의외의 행동을 보여서 매우 놀랐고, 창민은 그가 준수에게 한 행

동 때문에 심란했다.

남자가 남자에게 입을 맞춘다는 것 자체가 단순히 친구 의미는 아닐 터.

“…하지만, 형. 그 재중이라는 사람이 황제의 후궁이라 해도 형은 잘 못 한 거야.”

“뭘?”

“황제의 부인과 밀회를 했으니까. 간통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황실모독죄?”

헉, 간통죄? 준수의 입이 크게 원을 그리고 말았다.

“말도 안돼. 우리 둘 다 남자인데? 그리고 얘기하는 것 외에 아무 짓도 안 했어!”

“어차피 그 재중이란 사람이나 황제 폐하나 두 분 다 남자잖아. 후궁이 아니라면 황

궁에 남자를 끌어들였다는 죄로 벌 받고.”

창민의 현실적인 말에 준수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 재중이 확실히

누구인지도 모르고 이름 밖에 모르는 사람한테 자신의 미래 계획을 알려주다니.

“걱정 마. 외부인일 리는 없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며칠 새 왔던 옷이나 음식 같은

게 설명되지 않잖아.”

“…그렇겠지?”

“그러니 얼른 자. 내일 생각하자.”

걱정으로 안색이 파리해진 준수를 창민은 얼른 재우려했다. 어차피 둘이서 머리 굴려

봤자 더 이상 나올 건 없다.

“창민아.”

“응?”

“…걱정 마. 벌을 받아도 나만 받을게. 넌 유천이한테로 꼭 보내줄 테니까.”

“바보. 이복동생이나 죽마고우나 유천 형에겐 둘 다 소중해. 둘 다 돌아가야지. 쓸데

없는 소리 말고 얼른 자.”

그래도 친구 동생을 살려주겠단다. 준수의 씀씀이에 창민은 걱정이 되면서도 겉으론

웃어보였다. 안 그러면 김준수 안심 못 하니까.

이윽고 준수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자 이불을 덮어주는 걸 잊지 않는 창민이었다.

잠든 준수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 순진한, 자기 형 박유천 밖에 생각 못하는 김준수가 간과하고 있는 것까지 생각해

야 했으니까.

최근 벌어졌던 과분한 일들.

폐허나 다름없던 화령전은 웬만한 사가로 변신했고, 비단 의복에 이곳에 처음 왔을

땐 주지도 않던 식사가 진수성찬이 되어있고, 준수와 창민이 다친 줄은 어찌 알고 어

의까지 왔단 말인가.

그 당시엔 그저 좋아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김재중 때문이 아닐까.

준수는 자기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해서 재중이 도와준 거라고 했지만,

단순히 동정심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크다.

황제의 후궁이라면 자신의 연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 수 있을

까? 그리고, 자기들이 입궁했을 때 궁녀들 입으로 듣지 않았던가. 황제가 남색 같은

건 즐기지 않는다고. 단지 환관들 사이의 소문일 뿐이라고.

그러면 남자 후궁 따위가 준수 외에 있을 리가 없다.

창민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어쩌면 예감이 현실이 된 건 아닐까. 김준수와 심창민

은 앞으로 영원히 박유천 곁에 못 돌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로,

김준수가 김재중이라는 남자 눈에 띠였다는 이유로.

창민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황궁에 있는 남자는 준수와 자신. 그리고….

이 황궁의 주인뿐이라고.

“폐, 폐하.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태감은 무얼 하느냐! 얼른 이 아이를 자기 처소로 데려가거라!”

금룡궁 안은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이제 겨우 열아홉의 나이인 황제가 기분이 매우

나빴던 것이다. 표면적 이유로는 얼마 전 간택했던 여인들 중 한 명과 자려다 여인의

끈질긴 유혹에 짜증이 나버렸던 것. 실질적 이유로는 명을 어기는 한이 있어도 황궁

을 나가겠다고 또랑또랑하게 말하던 한 남자 때문에.

침상에 앉아 고운 얼굴을 구기고 있는 황제를 보자마자 밖에 있던 주 환관, 민규는

그의 심기를 맞추려 애썼다.

“폐하. 여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래도 폐하께서 직접 고르신 여인들이 아

닙니까. 다른 사람이라도 올릴까요?”

“너는 뭘 하고 있었던 게냐!”

“…?! 폐, 폐하.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내가 남자를 탐한다는 소문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어떤 자가 그런 허튼 소문을 퍼

뜨려서 남자가 간택에 끼게 되었단 말이냐!”

민규는 그제야 떠올랐다. 얼마 전 내시인 황상훈이 재물을 모았다는 걸. 그 이유가

어떤 아들 밖에 없다는 몰락부자에게 황제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헛소문을 흘려 아들

을 입궁시켜주는 조건으로 돈을 받아 챙겼다는 것. 마침 그 아들이라는 자는 간택에

서 도망쳐 다니는 바람에 굳이 뒤로 손을 쓰지 않아도 뒷수습을 안 하게 되어 다행이

라며 뿌듯하게 말하던 상훈이 모습이 또렷이 떠올랐다.

“폐,폐하. 그럼 그 자를 궁에서 내보낼까요?”

“아니, 그건 중요치 않다. 왜 그 남자가 간택에 빠지게 되었지? 도망쳤다면 잡아서라

도 나와 태후마마 앞에 보이는 것이 도리 일 텐데?”

“?!”

이건 또 뭔 소리.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 남자의 존재가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그 때서야

또다시 기억났다. 며칠 전부터 황제가 화령전 쪽으로 사라졌고, 얼마 전엔 그곳에 여

러 가지를 보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곳에 있는 남자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

“폐하. 그럼 화령전의 그 자라도 데려올까요?”

“아니, 됐다. 그 일에 대한 책임은 나중에 묻겠다. 나가라.”

황제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묻어나오자 민규는 뒷걸음질치며 황제의 침궁에서 나왔

다. 눈치 빠른 민규는 나오면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보통 일이 아니군. 새로운 총비의 탄생인가?’

다음 날 오후쯤, 창민은 궁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얻어온다며 나갔고, 준수는 별로 도

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화령전에 남아 있었다. 작은 건물 안이 답답해서 풀

밭에 앉아 살랑거리는 바람과 햇볕을 맘껏 쬐고 있었다.

‘박유천….’

왜 꼭 힘들면 유천이부터 떠오르는 걸까. 너무너무 즐거워서 유천이 같은 건 잊어버

리면 좋을 텐데. 왜 골치 아픈 일만 생기는 걸까. 왜 이렇게 황궁이라는 곳은 좋다가

도 싫어지는지. 그나마 친구라고 생각했던 재중이 어제 보여준 행동 때문에 매우 찜

찜하다. 그 때 준수의 얼굴에 그림자가 비쳤다.

“넌 낮이나 밤이나 뜰에 나와 있구나.”

“김재중!”

마침 생각했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자 놀람은 배가 되었다. 어젯밤에 그토록 놀라게

했던 인물이 다시 나타났다. 휘둥그레진 준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

“뭐, 뭐야. 지금은 밤이 아닌데?”

“난 밤에만 온다고 한 적이 없는데.”

사실이다. 준수의 입은 단숨에 다물어졌다. 뭐랄까. 예전만큼 편하게 대하기가 어렵

다. 항상 청아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놀리던 재중이 어제 창민에게 보인 차가운 모습

때문에 편하지 않다. 뭔가 담판을 지어버릴까. 준수는 위험한 시작을 하고 말았다.

“저기. 재중아.”

“응?”

“어제 네가 했던 말. 난 역시 못 받아들이겠어.”

“…무슨 말을 말하는 거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 말. 나 이곳에서 누군가 좋아

하고픈 사람 없어.”

“어차피 선택권은 없지 않느냐. 상대가 황제 밖에 없을 텐데.”

조심스레 내뱉은 말이었는데 재중은 무신경하게 넘겨버린다. 뭔가 엇갈리는 느낌에

준수는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아버지께서 헛소문에 빠져 날 입궁시키지만 않았어도 그 사

람이랑 잘 살았을 거야. 게다가 난 여자가 아니니까 황제를 사랑할 필요도 없고, 황

제도 나한테 신경 쓸 필요 없고.”

주변 공기가 싸늘해졌다면 그건 준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힘들게 말을 내뱉은 준수

를 내려다보는 재중의 눈은 한없이 날카로웠다. 거기서 멈춰야했다. 그러나 준수는

너무나 솔직한 것이 문제였다.

“물론, 넌 이미 황제의 후궁이니까. 폐하께 안겼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난 아직 황

제의 눈에 띄지도 않았고, 아무런 관련도 없으니까 상관없잖아. 내가 언젠가 이 궁에

서 도망친다 해도 화내지 마.”

“그럼…. 황제의 눈에 띄어 안기기라도 했다면 도망갈 수 없을 거란 건가?”

“뭐?”

재중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준수는 팔을 잡히고 말았다. 이미 퇴로 차단.

“뭐, 뭐야. 놔!”

힘껏 뿌리치려했으나 얼굴은 더 곱상하게 생긴 게 힘은 몇 배는 더 세다. 재중의 단

정한 얼굴이 분노를 담고 있자 더욱 무서웠다.

“후궁에 있는 것은 모두 황제의 것이라. 그럼 너도 내 것이겠지?”

“뭐…? 황…!”

준수의 뒷말은 재중의 입술로 묻혀버렸다. 고개를 뒤로 빼려던 준수는 재중의 손이

자기의 뒷머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걸 슬프게도 깨달아버렸다.

그제야 황제의 이름이 김재중이라는 걸 입으로 깨달았다.

황제의 이름이 김재중이라는 건, 황제가 이렇게 젊다는 건,

상상해보려 하지 않았다. 하니 창민이 아닌 준수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힘든 궁중생활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건 지금 처절할 정도로 몸으로 느끼고 있는 김

재중이었으니까.

“하, 하지 마!”

힘껏 밀쳐낸 끝에 맞붙었던 입술이 떨어졌다. 그러나 준수의 몸은 여전히 재중의 팔

안에 있는 상태였다. 팔도 여전히 잡힌 상태.

“내게 안기기라도 하면 여길 떠날 생각 같은 건 버릴 수 있겠지?”

“마, 말도 안돼!”

안긴다는 의미를 아직 열일곱에 불과한 준수라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

런 의미로 황궁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상상이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자 준수는 자기

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친구를 불렀다.

“창민아, 심창민!!!!!!!! 어딨어!!!!!!”

“어차피 화령전 안으로 누구도 못 들어오게 해놨으니 들린다고 해도 소용없다.”

“하지 마, 이거 놔!”

이 상황에서 준수를 누구도 구해줄 수 없다는 걸 각인시킨 재중은, 아니 황제는 그대

로 그를 풀밭 위로 쓰러뜨렸다. 햇볕 때문에 살에 와 닿은 흙이 따뜻하다는 사실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난 내 손에 있는 꽃을 감상할 생각 따윈 없다. 꺾어서 곁에 두는 게 내 방식일 뿐.”

“하지 마, 하지 말란 말야! 누구 없어?! 심창민----!!!!!!!”

옷으로 감싸였던 살갗이 바깥 공기와 맞닿는 순간 강제적인 키스가 준수의 살결을 훑

었다. 대낮에, 그것도 이런 뜰 안에서, 남자와 이런 짓을. 준수의 눈에선 분노인지

수치인지 알 수 없는 눈물 줄기가 한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준수야.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왜 헤어질 때 했던 말이 지금 와서 더 아프게 들리는 건지. 지금의 준수가 할 수 있

는 건 주변의 무언가를 붙잡아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는 것뿐. 소리 없는 비명이 준

수 안에 울려 퍼졌다.

‘박유천……!!!!!!!!!!’

창민은 정신없이 화령전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다들 새내기인 창민은 상대도 안 해

주는 터라 한참을 헤매다가 어느 환관에게 돈을 쥐어주고 나서야 정보를 얻을 수 있

었다. 재중의 이름을 대자 그 사람의 대답은 간단했다.

「폐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예상이 맞을 줄이야. 남자에게 관심 없다는 황제, 아니 재중은 요즘 준수에게 묘한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자기들 존재가 잊혀지면 몰래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가자던 준

수의 순수한 소망이 이미 금이 간 듯 싶었다.

‘저건 뭐지?’

화령전으로 들어가는 문에 병사들이 서 있었다. 원래 병사 같은 게 이런 외딴 황궁에

있을 리 없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에 창민은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어딜 들어가느냐.”

“비키시오. 난 화령전의 궁인입니다.”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이 있었다.”

“명? 누구의 명입니까?”

“하? 보면 모르나? 황제 폐하의 명이다.”

창민이 본 눈앞에 있는 병사들의 복장은 황제 직속 병사의 그것이었다. 근데 직속 근

위대가 왜 이곳에? 저 안에 무엇이 있길래? 뭔가 안 좋은 느낌.

“비켜. 난 들어가야 돼.”

“어허, 안된다고 했을 텐데! 한창 폐하께서 재미 보시는 중이란 말이다, 킥킥.”

“그게 무슨…!”

창민도 직감적으로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재중이 어제 준수의 볼에 입 맞췄던 게 떠

올랐다. 집에 돌아가자던 준수의 순진한 얼굴이 창민의 머릿속에서 깨지고 있었다.

“비켜!!! 비키란 말이야! 준수야, 김준수!!!!!!!!!!!!”

“이, 이게 미쳤나! 야, 얼른 잡아!”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어떻게든 막으려는 병사와 정신없이 소리치며 들어가려는

창민 사이에서. 그 실랑이가 멈춘 건 누군가의 목소리 덕택이었다.

“폐하께서 계시는 곳이다. 웬 소란이냐.”

차마 화령전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밖을 맴돌고 있던 윤호는 소란에 위엄 있는 목소리

로 대처했다. 병사 두 명이 아직 새파랗게 어린 한 소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고

사정을 물었다.

“아, 정 위위. 이 자가 하도 들어간다고 난리를 쳐서….”

“비켜! 막지 마! 안에 준수 있지? 김준수!!!”

“네가 심창민이라는 자냐?”

“…?!”

김준수라면 저 안에 있는, 재중의 눈에 든 그 남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윤호는 앞의

남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준수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 보니 수상한 자는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그의 초조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그가 알고 싶어 하는 말을 내뱉었다.

“아까 그 남자가 심창민이라고 부른 것 같기도 했는데.”

“날 들여 보내줘요! 지금 무슨 일이….”

“어차피 상황은 끝났다.”

“……!”

순간 창민은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고. 바닥에 쓰러지려는

걸 가까스로 윤호가 붙잡았다. 창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바, 방금 뭐라고….”

“승은을 입는 일이다. 한낱 나인이 나설 일이….”

윤호의 뒷말은 그대로 멈췄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윤호의 머리를 돌아가 있었고, 병

사들의 눈동자가 두 배로 커졌다. 황궁 근위대 최고 수장인 위위 정윤호가 하찮은 나

인한테 뺨을 얻어맞은 것이다. 그리고 그 나인은 어안이벙벙해 있는 윤호를 밀치고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준수야…!’

조금은 짐작했으면서. 왜 알려주질 못했을까.

어쩌면 넌 유천 형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살아야할지도 모른다고.

화령전의 아담한 뜰이 보였다. 그리고 두 남자가 창민의 시야에 들어왔다.

물론 한 남자는 다른 쪽에게 안겨 있는 상태였다.

“준수….”

창민은 황제, 아니 재중의 모습을 보고도 무릎을 꿇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과

자신의 형 친구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다. 그리고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

다. 뒤쫓아 온 윤호는 재중의 모습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소신의 불찰입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부르려던 참이었으니까.”

그리고 윤호를 향해있던 재중의 고운 시선이 창민 쪽으로 옮겨졌다.

“무례하구나. 지난번엔 짐의 앞을 가로막더니 이번엔 예의도 갖추지 않는 거냐?”

“…….”

“네 죄는 나중에 묻겠다. 우선은 네 주인이나 잘 보살펴라. 후궁의 첩지를 받으려면

몸부터 추슬러야지.”

그리고는 창민의 품에 준수를 안겼다. 창민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준수의 앞섶은

이미 풀어헤쳐져 있었고, 옷 사이로 군데군데 붉은 자국이 보인다. 게다가 준수의 몸

을 감싼 하얀 비단옷의 아래쪽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본인은 이미 정신을 잃은 듯

했다.

“깨어나면 내게 전하라.”

그리고는 창민을 보던 눈과는 다르게 안쓰러운 표정으로 준수를 한 번 힐끔 쳐다보았

다. 준수의 얼굴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본 것인가.

“가자.”

재중은 윤호를 데리고 화령전을 나갔다. 준수를 받치고 있는 창민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작은 새가,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유천이라는 보금자리로 돌아가려

던 새가 재중이라는 새장에 갇혔다.

‘유천 형…. 나 어떻게 해야 해?

준수 어떻게 해?’

“…!”

책을 읽던 유천은 아릿한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종이에 베였는지 손가락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촛불까지 꺼져버렸다.

‘창민아, 준수야….’

갑자기 왜 그들 생각이 나는 걸까.

분명 둘이라면 어디서든 미움 안 받고 살 수 있을 텐데, 걱정할 필요 없는데. 근거

없는 불안이 유천을 감쌌다.

황궁에도 비가 내릴까.

근데 왜 이리 비가 어두운 걸까.

황 환관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펄펄 뛰는 준수의 부친 덕택에 유천도 대충 사정을 알

고 있었다. 다만 유천은 그들이 눈에 안 띄고 산다면 언젠가 자신이 벼슬길에 나아가

그들을 데려올 수 있겠지라는 한가한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준수야….”

벌써 이틀째였다. 준수가 고열에 시달린 건. 어의 말로는 심한 상처 때문에 몸에 열

이 나는 거라고 했지만, 계속 이런 상태니 창민이 되레 미칠 노릇이다. 가뜩이나 약

한 창민까지 준수 몫까지 마음 고생하는 바람에 체력이 더더욱 바닥 나 있었다.

잠시 눈을 붙이려던 창민은 환관의 황제 폐하 납시오라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이윽고 재중의 모습이 나타났다. 평소완 다르게 용포를 두르고 있는 모습.

“폐하를 뵙습니다.”

“되었다, 일어나라.”

준수가 누워있는 침상에 가볍게 걸터앉은 재중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전만

해도 자기를 향해 조잘거리던 아이가 가쁜 신음소리를 내며 아파하고 있다. 꿈을 꾸

는지 볼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고, 무언가를 계속 웅얼거리고 있었다.

“왜 이리 애를 먹이는지….”

그 날 준수를 찾아갔던 이유가 사심이 없었다고 할 순 없었다. 왠지 모르게 계속 눈

에 걸리는 아이를 곁에 두려고 자신의 정체를 말하려던 것이, 이미 연정을 품은 사람

이 있다며 말하는 준수에게 안달이 나버렸다고.

취하지 않으면, 꺾지 않으면,

빠져 나가버릴 것 같았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재중은 준수에게 머물렀던 손길을 거두고 뒤에 힘겹게 서 있는 창민을 쳐다보았다.

“창민이라고 했던가?”

“네, 폐하.”

“준수가 네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 보니 네가 그에게 소중한 존재겠구나. 너도 그 때

이 아이의 이름을 그냥 불렀던 것 같은데.”

‘제가 아니라 제 피가 섞인 박유천을 불렀겠지요….’

차마 말할 순 없었다. 황은을 입은 자가 다른 사람을 품고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앞으로 준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

“기껏 나인에 불과한 네가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선 이 궁중의 법도에 맞지 않는

다. 아니, 아내의 이름은 지아비만이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창민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말로는 법도를 운운하고 있지만 재중의 눈은 그게

아니다. 창민에게 질투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 입이 벌어진 창민에게 재중은 말을 계

속 이었다.

“맘 같아선 너를 준수 곁에 두고 싶지 않다만.”

“……!”

“윤호의 얼굴을 후려치고도 무사하길 바랬더냐?”

떠올랐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로 남자답게 잘 생겼던 그 호위대장의 뺨을 때렸던

게. 분명 황제의 신임을 단단히 받고 있는 위위 정윤호를 말하는 것이다.

“윤호는 별로 신경 안 쓰는 듯 하지만 네가 직접 가서 사과해라. 윤호의 얼굴을 친

건 나를 친 거나 마찬가지. 겨우 그런 일을 못하겠다고는 못하겠지.”

“예….”

창민은 쥐어짜듯이 작게 대답했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에겐 준수의 무탈이 중요했

고, 그에겐 황제의 명이 우선이었으니까.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가는 듯 싶었다. 적

어도 창민에게는. 그러나 착각일 뿐이었다. 재중의 붉은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아, 그리고 박유천이 누구냐?”

“……!!!!!!!”

“놀라는 것 보니 너도 아는 자로군.”

재중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서 그의 정체를 말해보라는 듯. 창민의 입술이 바싹바싹

메말라갔다. 준수가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내뱉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준수가 이

곳을 빠져나가려는 이유가 박유천이라는 걸 알면 그를 어떻게 할까.

“…소인은 모릅니다, 폐하.”

“…굳이 캐묻진 않겠다.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으니. 준

수가 일어나면 물어봐도 늦지 않겠지. 어쨌거나 너만큼 소중하든지, 너보다 소중하든

지. 둘 중 하나.”

새초롬한 얼굴과는 다르게 겨우 열아홉의 나이라는 황제는 너무나 심리를 읽는 게 능

숙하다. 창민이 입술을 심하게 깨물었는지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리고 준수가 몸을 추스르는 대로 신주궁으로 옮겨라.”

“네…?!”

“미인(美人)정도 되는 후궁이 수많은 궁녀와 환관들을 수용하려면 이런 작은 곳은 무리지.”

정4품 후궁. 미인(美人).

준수가 정식으로 후궁이 되는 것이다. 원래 승은을 입는다 해도 그저 잊혀지는 경우

도 많은데 준수는 단숨에 꽤나 높은 후궁의 반열에 들어버렸다. 창민은 좋아해야 할

지 싫어해야 할지 모를 얼굴을 했다. 그런 창민의 고민을 해결해주려는 듯 재중은 마

지막 말을 내뱉었다.

“무엇보다도 화령전은 황궁을 빠져나가기 좋은 곳에 있으니까.

황궁을 탈출하려는 후궁에겐 좀 더 깊은 거처를 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

창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준수에겐 정말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고.

황제의 눈에 단단히 들어버렸다고.

유천을 다시 보기는커녕 유천을 입에만 담아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그제야 황궁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무얼 하는 것이냐.”

위위(황제 경호 및 궁성 수비를 하는 최고 지휘자)로써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던 윤호

는 신주궁 근처에 왔다가 곤란한 얼굴의 남자를 발견했다. 예전에 자기의 얼굴에 시

원하게 손바닥을 내려친 그 나인이었다. 윤호의 물음에 창민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

고는 애타게 물었다.

“혹시 한 남자를 못 보셨습니까? 옷은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고, 몸이 불편해서 약간

거동이 불편할….”

“…김 미인(美人: 정4품 후궁)을 말하는 것인가?”

“에? 그걸 어떻게…아! 당신은!”

그 때서야 떠오른 모양이다. 창민은 윤호를 보며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잠시

뿐. 창민의 얼굴은 다시 다급하게 변했다.

“그 때 얼굴에 손을 댄 건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준수 좀 찾아줘요!”

“마마께서 왜?!”

“사라졌어요!”

“뭐?!”

준수가 정신이 든 지 이틀 째. 첫날엔 낯선 신주궁의 구조와 수많은 궁녀에 어리둥절

해하다가 미인이라는 후궁 직위를 받았다는 사실에 경악하더니 창민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궁녀들이 한눈 판 사이 준수가 사라져버렸다. 평소에 침착한 창민조차도 이미

울상이 되어있었고, 윤호는 이 남자가 부탁하던 간에, 자기가 위위이던 간에 준수를

찾아야했다.

최근 황제가 엄청 관심을 쏟고 있는 연인이었으니까.

“준수 아직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데….”

“…병사들이 조용한 걸 보아 정문을 지난 것 같지는 않으니…. 담이라도 넘으신 건가?”

“침입자다!!!!!!”

윤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서 들려온 목소리. 윤호

는 소리의 근거지로 빠르게 달려갔고, 창민도 죽어라 쫓아갔다. 신주궁 뒤편의 어느

담벼락에서 난 소리였다. 궁 담벼락이 워낙 넓었으니 창민과 궁녀들끼리는 못 찾았던

게 당연.

“어서 순순히 내려오지 못해?!”

“난 침입자 아냐! 난 나가려는 거야!”

어이없는 말싸움. 윤호가 목격한 광경은 약간은 황당한 광경이었다. 병사 몇몇이 창

을 들고 담 위에 있는 남자를 향해 협박하고 있었고, 담 위의 남자는 담을 넘는 건지

담에 매달려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자세로 빽빽거리며 대응하고 있었다.

“김준수!”

뒤에 있던 창민의 목소리가 그쪽을 향하자 담 위의 남자는 화들짝 놀라는 듯 했다.

“창민아?! 어떻게…. 어? 어어어어어어어!!!!!!!!!!!”

“준수야!!!!!”

창민은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준수의 이름을 불러버렸다. 창민을 발견하자마자 담 위

에 매달려 있던 준수는 중심을 잃고 담 반대편으로 떨어져서 다쳤던 것. 아니, 다쳐

야 했다. 그러나 예상은 많이 빗나갔다. 윤호가 너무나도 날렵한 몸짓으로 날아올라

중심을 잃은 준수를 안고 반대편으로 함께 떨어졌다.

“아야….”

“마마, 괜찮으신…마마!”

철푸덕-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후궁이다. 윤호가 쿠션이 되어 받쳐줬더니 어찌 되었던 간에

담을 넘었다는 걸 확인한 준수가 윤호의 품을 벗어나 다다다 도망가려 했다. 물론 그

전에 윤호의 빠른 손이 준수의 발을 잡아버리는 바람에 준수는 풀밭에 넘어지고 말았

지만. 때맞춰 창민과 병사들이 멀리 떨어진 문을 통해 담을 넘어 그들에게 달려왔다.

“준수야! 아니, 준수 형, 아니지, 마마!”

준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던 황제의 명이 이제야 떠오른 창민은 몇 번이나

준수의 호칭을 바꿨다. 그리고는 풀과 나뭇가지에 긁힌 준수를 일으켜 세웠다.

“도대체 어딜 가려던 거야! 담은 왜 넘어?!”

“이이, 이거 놔! 나 나갈 거야! 이딴 곳에 조금도 더 있고 싶지 않아!”

“몸도 성치 않으면서 어딜 가! 담 하나도 제대로 못 넘으면서 무슨 탈출이야! 너 혼

자 가면 나는 어떻게 해!!!!!!”

창민의 꾸지람에 준수는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창피함, 수치심, 무능력함, 모든 게

마구 섞여 뺨에 흐르고 있었다. 집에 있을 땐 자존심이라는 이유로 절대 남 앞에서

울지 않던 준수가 이 궁 안에서는 도대체 몇 번이나 운 것인지.

“엉엉엉! 창민아, 유천이가 보고 싶어. 엉엉엉!!”

옷의 먼지를 털던 윤호는 그 순간 황제의 연인을 껴안고 위로하는 창민의 시선을 받

았다. 의미는 곧 알 수 있었다. 이 일을 황제께 고하지 말아 달라. 그런 뜻.

윤호는 왠지 모를 힘에 이끌려 창민의 눈에 대고 긍정의 표시를 보내버렸다.

그 후로도 그런 일이 몇 번 정도 반복되었다.

“….”

“….”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중은 침상에 앉아있는 준수의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것에 대해, 준수는 재중이 자기 침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매우 기분이 나빠져 있었다.

“요 며칠간은 탈출소동이더니 이젠 단식투쟁이냐?”

“….”

“무슨 수를 써서 윤호가 내게 계단에서 굴렀다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네 일을 모르

게 하려고 애쓰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게 반항하는 것이냐?”

잘 알고 계시네요.

준수는 거의 배째라는 기분으로 재중의 시선까지 무시해가며 시위하고 있었다. 덕택

에 두려움에 떠는 건 신주궁의 궁인들이었다. 준수가 수십 번이나 담을 넘으려고 해

서 저렇게 다칠 때까지 말리지 못한 책임을 그들에게 물면 즉시 태형(곤장)감이다.

준수가 조금이라도 나긋나긋하게 굴면 떡고물이 떨어질 텐데, 저렇게 냉랭하게 대하

니 되레 불똥이 튈지도 모르겠다.

재중의 손이 준수의 얼굴에 와 닿았다. 동시에 앙칼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지지 마!”

딸꾹.

차라리 바늘방석이 편하겠다. 그 궁 안에 있는 모든 이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황제가 자기 비를 만지는데 뭐가 나쁘다는 거지?”

“그 때 실컷 만졌잖아! 그만 만져! 나한테 오지 마! 나말고도 후궁들은 많잖아!”

“김 미인, 무례하오! 어디서 황상 폐하 앞에서 그런 망발을….”

옆에서 잠자코 서 있던 주 환관이 나서서 준수의 무례함을 탓했다. 그러나, 준수의

말이 너무 웃겼던 걸까. 재중의 웃음에 그대로 묵살되었다.

“됐다, 민규야. 그만 나무라거라. 다른 후궁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갸륵하지 않느냐.”

준수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앞의 이 화려한 외모의 남자가 비꼬고 있다는 걸 표정만

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만 재중이 자기를 감싸주려는 의도도 있었음을 그 당

사자는 못 느끼고 있었지만.

“식사도 하지 않을 거냐?”

“안 먹어.”

“그럼 짐이 어떻게 해야 먹겠느냐.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마.”

순간 준수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혹시라도 재중이 취소라도 할까봐 걱정됐는지 조금

도 주저 않고 대답했다.

“집에 보내줘.”

“안돼.”

“해준다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을 텐데.”

“할 수 있잖아!”

“할 수 없어.”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재중이 자기를 보낼 생각이 새끼손톱의 반만큼도 없

다는 걸 깨달은 준수는 다시 뾰로통한 얼굴로 외면해버렸다. 곧 그의 귀로 무미건조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을 치졸한 남자로 만드는구나. 네 약점이라도 잡을까?”

“약점…?”

“박유천이 누구냐.”

“……!!!”

예상치도 못한 사람 입에서 유천의 이름이 나오자 준수는 펄쩍 뛰었다. 침상 멀리 서

있는 창민을 쳐다보았다. 창민도 그를 쳐다보았고, 짧은 사이 그들의 눈빛이 오고 갔다.

‘황제가 어떻게 유천일 알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전혀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재중을 쳐다보자 젊은 황제는 쉽게 답을 내놓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넌 그 남자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었고, 그날 네가 기절하기 직전

에도 나왔던 이름이다. 보통 사람은 아니겠지.”

재중의 설명에 준수는 자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방정맞은 입.

어쩌자고 유천의 이름을 담아버렸을까.

“황제의 애첩의 입에 다른 남자의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불경죄겠지?”

“난 그런 사람 몰라. 아파서 헛소리 한 거야.”

“사실인지 아닌지는 조사해보면 알 수 있을 거다. 네 생가에 가서 알아보면 되지 않

을까? 총비의 마음을 훔친 남자라는 죄목으로 죽으면 그에게도 영광이겠지?”

“그, 그런…! 아냐, 박유천이란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냥 아버지들끼리 아는 사이야!

아무 관계없다고!”

그러나 준수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이자 그것만으로도 재중은 유천이 어떤 존재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심창민보다도 더 한 존재라는 걸. 더 이상 알면 재중 자신이

제어 못한다는 생각에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 아무 사이도 아닌 자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다면 식사부터 해라.”

“….”

“행여나 내게 안긴 게 수치스러워서 네가 황궁을 나간다든지, 죽겠다는 헛된 마음을

품는다면 심창민과 박유천에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은 다 느끼게 해주지.”

“너…!!!!”

“역대 황제들이 후궁에게 빠져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네가 더 잘 알 거다. 황제의

질투심을 시험하려하지 마. 죽이나 가져와라.”

재중의 분부에 한 궁녀가 죽을 들고 침상 가까이로 왔다. 황제의 눈짓에 그녀는 수저

를 준수의 입으로 가져갔다. 준수는 창민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눈빛을 흔들었다.

‘준수 형. 먹어. 형을 위해 먹어.’

‘싫어. 여기서 수긍하면 이젠 뭘 해도 내보내지 않을 거야.’

‘어차피 폐하께선 형을 놔줄 생각 없어. 형을 위해서가 안 된다면 유천 형을 위해서

라도 먹어.’

준수가 죽을 받아 삼킨 것은 눈물을 한 방울 떨구고 나서였다. 한 입, 두 입. 그와

더불어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나중엔 우는 것인지 먹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겨우 한 그릇을 비우자 용포 자락이 준수의 눈가를 닦아내

었다.

“언제쯤이면 다시 날 보고 웃을까.”

조금은 쓸쓸하게 말하는 재중의 목소리에 준수는 더더욱 서러워졌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눈물을 닦아줬었는데.

재중은 그 때와 똑같이 대하는데 자신은 왜 그 때처럼 대해줄 수 없는 걸까.

미워. 김재중.

박유천보다도 더.

“또 신주궁에 납시었다고?”

“네, 마마.”

“도대체 어떤 요망한 것이 이리도 폐하의 발걸음을 붙잡는단 말이냐!

이지연도 아니고, 서현진도 아니라면 대체 누가?”

현비(賢妃: 정1품 후궁) 홍씨, 한때 황제의 총애를 받아 ‘다나’라는 칭호까지 따로 얻

었던 여인이 머무는 대서궁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찾아오

는 곳은 이곳이었는데, 간택이 있은 후부터 황제는 발걸음을 뚝 끊었다. 자신의 최대

연적인 덕비(德妃: 정1품 후궁) 이씨도 아니고, 수원(脩媛: 정2품 후궁) 서씨에게 간

것도 아닌데.

“김준수라는 자가 신주궁의 주인이라 합니다.”

“김준수? 처음 들어보는데?”

“이번에 폐하의 승은을 입어 미인의 첩지를 받은 듯 합니다.”

쨍그랑.

현비 홍씨, 즉 다나가 예의 그 고운 얼굴을 잔뜩 구기며 자신의 직속 상궁에게 거울

을 던지는 바람에 거울은 산산조각이 났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분노에 일그러지

니까 더욱 무섭게 느껴진다.

“하! 얼마나 대단한 미모길래 사흘이 멀다 하고 여인을 바꾸는 폐하를 이리도 오래

잡아놓는단 말이냐!”

“그것이….”

“꾸물대지 말고 얼른 말하라!”

“김미인이 남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뭐?”

“여어- 박유천.”

오랜만에 저자거리에 나온 유천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렸을 적부터 형

님 동생하던 사이인 재원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재원 형님.”

“뭘 그리 비싸게 구냐. 네가 공부만 하느라 네 얼굴값이 열 배는 뛴 것 같다. 가끔은

술도 하고, 여자를 즐기는 풍류를 즐겨야지.”

유천은 풍류를 운운하는 재원에게 씁쓸히 웃어보였다. 명문가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

하고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귀족, 평민 가리지 않고 친구가 많은 그였다. 단 너무

자유분방해서 거의 놀고먹는 한량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잘 됐다. 이왕 만났으니 기방에 가서 술이라도 한 잔 하자.”

“전 곧 돌아가야 합니다만….”

“가끔은 머리도 식혀줘야 돼. 마침 여기 기방이 있구나. 들어가자.”

“재원 형님!!”

함부로 거절할 수 없는 재원이라 유천은 질질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기루 문

에 들어서자마자 술 냄새와 짙은 향내가 유천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형님, 전 역시 먼저 가봐야….”

“어서 오십시오! 변덕 심한 황제폐하조차 헤어 나오지 못하는 ‘김준수’ 못지않은 아이

들이 많아요!”

나가려던 유천의 발길을 어떤 목소리가 붙잡았다.

김준수라고…?

유천의 표정이 바뀐 걸 깨닫지 못한 재원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호객 행위를 하는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런, 아무리 장사라고 하지만 황제의 애첩이라고. 함부로 이름 팔아먹어도 되는 거

야?”

“이곳이 다 그럽죠. 1년 전만 해도 현비 ‘다나’ 덕택에 매상이 얼마나 올랐는지. 우리

평민들의 낙이 저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 따라하기 아닙니까.”

“그럼 나도 동참해볼까.”

호객꾼의 말에 재원이 혹해 머무르려 했으나, 곧 유천의 손길에 의해 저지되었다.

“유천아, 뭐냐? 얼른 올라가야지.”

“무슨 소리입니까. 황제의 애첩이라뇨.”

“아하. 이런. 네가 공부만 하고 나다니지 않으니 세상물정을 모르는 게다. 여자를 삼

일만 데리고는 그 뒤로 청상과부로 만든다던 그 변덕심한 황제가 벌써 보름째 한 후

궁에게 빠져있다고 난리다. 그게 김준수라나.”

“!!!!!!”

유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얼마 전 집이 요란하다 싶었다. 침울해하던 어르신

께서 만세를 부르며 좋아하시던 게 이런 거였나? 유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

원은 눈치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 꼬맹이 이름도 김준수였지. 그 애는 잘 있냐?

황제의 총비와 같은 이름이라니 걔도 참 기분 묘하겠는데.”

재원의 말은 이미 들리지도 않았다. 유천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준수가 후궁의 반열에 올랐다. 창민은 수석시종이라도 되어 있겠지.

철없기만 했던 친구가 황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준수의 이름은 신기성뿐만 아니라 도나라 수도에 널리 퍼져있었다.

“예쁘지 않느냐?”

“…….”

재중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찬송에 마지않은 어화원

(御花園 : 황제의 개인 정원)까지 데리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 아이는 조금도 좋아

하지 않는다. 아니. 호기심 어린 눈빛이 잠깐 서렸다가 재중이 빤히 쳐다보자 그 눈

빛을 애써 거두는 게 좋아도 싫어하는 척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유치하긴.

“어? 뒤에 왕벌!”

“뭐, 어디? 우앗?!”

촉-

경쾌한 소리가 준수의 뺨에서 났다. 정말 진지한 얼굴로 뒤를 가리키며 왕벌이 있다

고 하는 재중 때문에 준수는 놀라 피하려다 재중의 기습공격(?)에 당해 버렸다.

“하- 어떻게 그런 단순한 수법에 계속 걸려드는 거냐?”

“이잇- 너…너… 폐하.”

“너면 너고, 폐하면 폐하지, 너 폐하는 또 뭐란 말이냐?”

어화원까지 오는 중에도 여러 번 재중의 수법에 걸린 준수는 화가 나서 시큰거리고만

있었고, 그런 준수의 말투와 표정이 웃겼는지 재중은 정신없이 웃어댔다. 뭔가 비웃

음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준수의 얼굴이 어화원에 핀 백일홍처럼 빨갛게 물들어버렸다.

“이런 데서 뽀뽀하지 마! 사람들이 보잖아!”

“어차피 황궁이 내 집인데, 내 집에서 내 비에게 손대는 게 뭐가 나쁘냐.”

재중의 장난스런 얼굴이 준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준수는 거리를 두고 그들을

지켜보는 저 뒤의 환관들과 궁녀들의 시선이 더 신경 쓰였다. 특히 그 중의 하나일

창민이. 재중은 길옆으로 난 꽃을 꺾어 준수에게 꽂으며 말했다.

“넌 참 솔직해. 말투나 표정이나. 그리고 몸도….”

“시끄러! 그런 소리 하지 마!”

희롱에 가까운 말에 재중과 한 마디도 말 안 하겠다는 준수의 다짐은 와르르 무너지

고 있었다. 그런 반응에 황제는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좀 더 영악했으면 좋으련만. 조금만 기대온다면 여러 사람이 좋지 않겠느냐.”

“여러 사람?”

“넓게 말하면 신주궁에 있는 궁인들이나, 좁게 말하면 박유천도 해당되겠지.”

준수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는 듯 싶더니 유천에게 좋을 만한 일이라고 하니까 창피

를 무릅쓰고 애써 재중에게 묻는다.

“어떻게 기대야 하는 건데?”

“뭐, 후궁이 베갯머리에서 황제에게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벼슬을 얻고, 죽임을 당하

는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많지 않았느냐.”

준수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한 마디로 침상에서 온 몸으로 유혹하면서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폐하, 박유천에게 승상 자리 하나 주세요’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닌가. 물론

재중이 말한 의도와는 많이 떨어졌지만.

“유천인 내가 안 도와줘도 잘할 거야. 장원급제 같은 건 쉽게 할 수 있어.”

“…….”

“아, 아냐. 방금 한 말 잊어버려!”

황제의 얼굴이 다시 굳어지는 걸 본 준수는 얼른 내뱉은 말을 수습하려 애썼다.

곧 아무 감정을 담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너에게 매우 신뢰받고 있구나.”

“…그거야….”

“이번뿐이다.”

“응?”

말을 잘 이해 못한 준수가 재중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재중이 준수의 이마를 쿡 찌

르며 대답했다.

“박유천이라는 남자의 이름이 네 입에서 나오는 게.

다시는 내 귀에 들리게 하지 마라. 아니, 남의 귀에도 들리게 하지 마.”

준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왔지만 너무나 아찔

하게 느껴진다. 아니, 실은 앞의 진지한 얼굴의 남자 때문에 아찔하다. 한순간에 친

절했다가 한순간에 잔인해지는 재중이라는 걸 똑똑히 알고 있으니까.

“농이 지나쳤나. 뭐, 어디까지나 너 하기 나름이겠지.

어디까지나 네 지아비는 내가 아니더냐.”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환히 웃으며 딱딱 굳어진 준수를 살포시 안아준다. 유천의 이

름만 나오면 무서워지는 재중을 미워할 수 없는 건 지금 느끼는 다정함 때문이 아닐

까.

“정 위위이시죠?”

윤호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그 근원을 찾았다. 그곳엔 매력적인 피부색을

가진 소년이 서 있었다. 분명 창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또 신주궁 마마께서 도망이라도 치셨나?”

“농이 지나치십니다. 준수가 도둑도 아니고 날마다 담으로 넘어 다니겠습니까.”

“뭐, 어쨌든 그 변덕쟁이 폐하의 마음을 이렇게 오랫동안 훔쳐놓은 도둑이 아닌가.”

“이야기가 그렇게 된다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창민의 눈은 이미 웃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있었던 담 넘는 준

수와 이젠 알아서 담 밖에서 기다려 넘어오는 준수를 받는 윤호의 모습이 떠올랐으리

라. 덕택에 준수가 윤호를 엄청 원망하고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왜 날 부른 거지?”

“아, 그 때 일을 사과드리려고 일부러 가시는 길을 방해했습니다.”

“그 때 일?”

“화령전에서 제가 정 위위의 얼굴에 손찌검을 하지 않았습니까.”

또렷이 떠오른다. 엄격하신 아버지 말고 남에게 얼굴을 얻어맞아본 게 처음이었으니.

분명 손의 움직임이 보였었는데도 그냥 맞았던 기억이 났다.

“이제 와서 사과하는 건가?”

“폐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까.”

“…명령 때문에 사과를 하는 건가?”

그렇게 말하는 윤호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실망이 묻어났다. 창민은 나이에 걸맞지 않

게 또랑또랑한 말투로 그런 그를 달래듯이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전 제 신념이 닿지 않는 일이면 황명이라도 받들지 않을 것입니다. 폐

하께서 마마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전 아직도 준수라고 부르지 않

습니까. 이건 제가 사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