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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소 소소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 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 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 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 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 소 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 소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 소소 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소 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 소소소소 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 소소 소소소 소소소 소소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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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설>       쪽 샘

간밤에 설친 잠이 눈꺼풀을 덮어 버릴 줄 알았건만 졸음은 쉬이 오지 않았다. 밤을 설친 까닭이 설레기보다는 두려움이었기에 희연은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어느새 날이 새었는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빛이 방안을 지키고 앉은 희연을 무심하게 비추고 있었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 가름한 얼굴형에 넓고 동그란 이마를 따라 날카롭지 않게 솟은 콧대와 긴 눈매에서 풍기는 여인의 인상은 언뜻 보아서는 순해 보이는 듯 했으나 조금 치켜 올라간 눈꼬리 때문일까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물고 앉아 있는 모습은 오히려 날카롭게 느껴진다. 황금색 비단에 무지개 색을 덧댄 이불이 펼쳐진 방안에 하얀 속옷 차림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있는 희연의 눈은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무슨 생각이 그리도 깊었는지 밤새 한숨도 이루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른 아침,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넘어 초당 안으로 두 여인이 들어선다. 침착한 걸음걸이에 수더분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의 여인과 큰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와 못생긴 얼굴은 아니나 어딘가가 부자연스러운 듯이 보이는 처녀아이가 물이든 놋대야를 들고 안으로 들어선다. 침모 선이 네와 계집종 옹얘였다. 마루에 놋대야를 내려놓으며 주인아기씨의 기침을 확인하고자 방문 앞에 선 옹얘는 선이 네를 잠시 바라보다 방문을 향해 아기씨를 불러본다. “애기씨!  일났십니꺼?” 방밖에서 들리는 옹얘의 목소리에 멍한 시선으로 앉아 있던 희연은 들려오는 목소리를 눈으로 쫓으며 방문을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을 않는다. "애기씨! 일나시이소. 세숫물 떠 와십니더." 다시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자 침모 선이 네가 마루로 올라서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젖힌다. 미동도 없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희연의 두 눈이 방문을 열고 선 두 사람에게로 향한다. 옹얘가 놋대야를 들고 방으로 먼저 들어와 희연의 안색을 살피면서 호들갑을 떤다. “우짜노? 우리 애기씨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는갑다!” 옹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침묵 속에 갇혀있던 방안을 울린다. “...” 희연은 대답을 않는다. 뒤이어 방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온 선이 네는 희연을 보자 얼굴이 굳어져 버린다. 망부석처럼 앉아있던 희연이 옹얘의 얼굴을 바라보다 선이 네로 눈길을 돌려 멍한 표정을 보이고는 이내 방바닥으로 눈길을 떨어뜨린다. 보다 못한 선이 네가 희연에게 걱정스럽게 말을 건넨다. "애기씨. 우째 이랍니꺼? 이 좋은 날 신부 안색이 이래 나빠 되겄십니꺼?" 나무라듯 한 말이지만 선이 네는 혼삿날까지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희연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시어머니 자리에게 선을 보인 이후부터 희연은 날이 갈수록 웃음을 잃어갔고 곁에서 지켜보던 선이 네마저 힘들어 하는 희연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처녀들이 혼사를 앞두고 싱숭생숭하다고는 하지만 희연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옹얘야...내... 시집가기 싫다!” 선이 네의 질타를 받았음에도 희연은 넋두리하듯 옹얘에게 속내를 터낸다. "애기씨요!" 옹얘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희연을 달랜다. 앞에 앉은 선이 네가 손을 뻗어 희연의 손을 어루만지며 다독인다. “애기씨! 그런 말씸은 하는 기이 아입니더! 애기씨 맴은 알지만서도 그래도 이래 좋은 날 그라시믄 안 됩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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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르듯 희연을 달래는 선이 네의 맘도 편치만은 않았다. 잡고 있던 손을 풀어 옹얘가 가지고 들어온 놋대야를 희연 앞에 밀어 놓으며, "세숫물 식겄십니더. 세수부터 하시이소." 선이 네가 시키는 대로 희연은 군말 없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대야에 손을 담가 천천히 얼굴을 씻는다. 희연의 세수가 끝나자 옹얘가 희연에게 수건을 건네고 선이 네는 물이 든 대야를 옆으로 밀쳐놓고는 이내 물기를 걷어낸 희연의 뽀얀 얼굴에 서둘러 화장을 시작한다. 선이 네의 부지런한 손놀림이 초췌해 보이는 희연의 얼굴에 조금씩 색을 그려 넣자 어느새 생기가 차오른다. 화장을 끝내고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사이에 옹얘는 벽에 걸려 있던 예복을 가져와 방바닥에 차례대로 펼쳐놓고 있었다. 머리단장을 끝낸 희연을 선이 네가 일으켜 세우고는 방바닥에 펼쳐 놓은 혼례복을 가져다 차례대로 입힌다. 하얀 속옷 위로 금박무늬가 찍힌 다홍색 대란치마와 황색 삼회장저고리가 걸쳐지고 그 위에 홍색 비단에 청색으로 안을 받쳐서 만든 활옷이 가냘픈 희연의 몸을 둘러싼다. 분주히 움직이는 선이 네의 손끝에 희연은 가만히 몸을 내 맡긴다. 단장을 마친 머리에 용잠과 댕기로 장식을 마치고 머리 위로 얹은 족두리를 마지막으로 치장은 끝이 났다. 선이 네의 분주하던 손길이 잠시 주춤하며 희연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 자신이 연출한 작품에 매무새를 다듬으며 마지막까지 티를 찾아 헤맨다. 그런 선이 네의 솜씨와는 상관없이 희연은 알 수 없는 초조함에 맥이 풀어질 것만 같았다. 신부의 치장이 끝나기 무섭게 옹얘는 감탄사를 연신 뱉으며 희연의 고운 자태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엇비슷한 나이또래에 있는 두 처녀의 신분차이, 옹얘에게는 새색시가 되는 희연의 모습이 부럽기만 한 날이건만 희연에게는 이 날이 두렵기만 하다.  “애기씨! 참말로 곱심더! 참말 선녀가 하강 한 것 같심더. 앉아 계시소. 가서 마님 뫼셔 오겠심더. ” 옹얘는 호들갑을 떨며 방을 나와 안채로 조르르 달려간다. 그 얼굴에는 희연에 대한 부러움이 한껏 쌓여 있었다. “내도 언제 저런 옷을 입어 보겄노? 참말로 애기씨가 부럽구마!” 이른 아침부터 혼례준비에 온 집안이 분주하다. 희연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집안은 온통 들썩이며 잔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한 달 전, 경주 황남리 박씨 종택의 안방에서 두 내외간에 실랑이가 인다. 왜소한 체구에 곱상한 얼굴,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가 매우 인상적인 사십 대 후반의 사내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맞은편에 앉은 여인을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내민다. 당주인 박씨 어른이 내민 종이쪽지를 그의 아내 정씨 부인이 받아 들고서는 말없이 쪽지를 내려다보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이기 뭔교?” “포항 오진사댁 처녀 이름 이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남편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재차 묻는다. '그란데요? 와 이거를 내한테 주는 기요?“ “근호 장개 안 보낼 기가?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신 그래서라. 임자가 포항으로 가서 처녀 선이나 보고 오라는 거제!”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내뱉는 남편의 말에 불뚝 성질이 난 정씨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 양반이! 무신? 논뚝에 허재비 참새 쪼치러 춤추는 소리를 하는 기요?” "사람 참! 말하는 뽄새 하고는!" 자신의 말에 한 번도 고분고분하게 말하는 법이 없는 아내가 오늘따라 더 밉게 보인다. "안 그라게 됐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이핀이 하고 있으이 하는 말 아잉교!" 정씨 부인의 빈정거림에 박씨 어른 목소리에도 잔뜩 힘이 들어간다. “임자는 그기이 농이라고 하나? 실데없는 소리 그마 하그라!” “허이구 참! 그라는 이핀은요? 그 중한 일을 내하고는 한마디 의논도 없이 혼자서 결정해 놓고 이래 통보를 하는 기요?” 화를 내는 처를 보며 당주는 목소리 힘을 풀고 달래 듯 얘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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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그래 됐다. 그라니 너무 서운해 말고 자식 위한 길이라 생각하고 맴 풀고 임자가 가서 처녀 선 좀 보고 온나!” "싫소. 내가 거를 와 가요? 내도 모르게 저질러 놓은 판에 와 내가 이핀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기요?" "사정이 그래 됐다 하지 않았나! 그라믄 임자는 평생 아들놈 장개도 안 보내고 끼고 살기가?" "그래 못할 것도 없지요." 정씨 부인이 심술 가득한 목소리로 남편에게 어깃장을 놓는다. "그라지 말그라. 그래서 임자한테 좋을 기이 머가 있노? 아들 인생 망치고 싶나!" 정씨는 남편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묻는다. “좋소! 그라믄 이핀은 내가 댕겨와서 처녀가 맴에 안 들어 그만두자 카믄 그만 둘기라요?” 답답한 노릇이다. 아들 장가 보내는 일이 이리 못마땅한가 싶은 마음에 당주의 입에서 한숨부터 세어 나왔다. “임자! 그라지 마라. 이기 다 근호 위해 하자는 기다. 나라는 어수선하고 왜놈들이 설치는 세상인데 까딱했다가는 아들 장개도 못 들고 왜놈들에게 끌려갈 수 도 있다 말이다! 그때 가서 후회 말고 후딱 장개나 들이는 기이 안 낫겠나?.” "흥. 핑계는! 이핀 혼자 부모 하소." 정씨가 남편의 말에 콧방귀를 끼며 돌아앉아 버리자 당주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다 일어나서 방문을 나선다. 방을 나가는 남편의 뒤통수에 대고 정씨 부인은 원망하듯 한마디를 던진다. “그 많은 성씨 중에 와 해필 정씨 성 인교?” “....” 그 말에는 대답 않고 방문을 닫고 사라져버리는 당주를 향해 아내는 입을 불쑥거리며 혼잣말을 해댄다. “누가 아들 장개 드리는 거를 말하나? 미리 의논 좀 하믄 누가 잡아 간다 카더나! 꼭 일 쳐 놓고는 내만 바보 만들제. 와 해필 정씨 성 인고 말이다. 시어무니도 정씨 내도 정씨인 것도 언슨시럽구만 며느리 될 사램도 같은 정씨라이 박씨 집안 삼대 고부가 정씨 아이가!  징그랍다 징그랍아! 우째 인연도 이런 인연이까!  삼대고부가 성이 같으이 무신 조화가 이런 조화고 말이다. 허허. 참!” 우연치고는 어딘가 얽혀 있는 듯 한 인연의 고리 같은 알 수 없는 찜찜함에 불편한 마음이 이는 것을, 아들의 혼사를 한마디 상의 없이 처리해버린 남편을 탓하며 더 딴소리를 해댄다. “내 아들이 우떤 아들인데! 천금 같은 내 자식이란 말이요! 이핀이 그거를 알기나 하요? 천날 만날 바깥일에만 신경 쓰제 집안은 돌보지도 않으믄서 자식 위하는 일이라꼬? 쳇! 넘들한테만 인심 좋은 사램이제 가족한테는 우째 그리도 무심하까!” 생각하니 더 화가 치민다.  바깥일에는 그처럼 자상하게 구는 남편이 정작 가정에는 소홀하다는 것이 정씨는 늘 못마땅했다. 그런 남편이기에 부인은 당주가 하자는 일에는 무조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대는 것이었다. 지금의 일도 그렇다. 아들 일이라면서 어째 자신의 생각은 빼버리고 혼자서 결정을 하는 것인가 말이다. 단 한번이라도 자신의 의사를 물었다면 이렇게 서운하지도 밉지도 않았을 것을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은 남편의 행동이 얄미워 더 심술을 부리게 된다. 생각할수록 열불이 나서 못 참을 지경이다. 쫓아가 한바탕 퍼붓고 싶은 마음이 일었으나 천금 같은 아들을 생각해서 마음을 다독인다. 결혼 후 여러 번의 유산을 경험하고 억지로 잡은 첫 자식이기에 정씨 부인의 아들 근호에 대한 마음은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자식이 모두 천금 같지 않은 부모는 없겠으나 정씨 부인에게 있어 큰아들 근호는 자신의 삶의 전부라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만석꾼 살림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도 억울한데 아들까지 왜놈의 손에 잡혀가는 것을 생각하니 머리끝이 서는 것처럼 섬뜩해진다. 그 많은 재산을 자신의 세대에서 탕진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지금 당주의 위 세대였던 박씨 종가의 종손에게 대를 이을 자손이 없자 그의 동생에게서 난 장자를 아들로 입양하여 종가의 종손 자리를 보존토록 하였었다. 그가 바로 현재의 당주인 박인택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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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에서 하는 일이라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 당시 그런 일은 어느 종가나 있는 일이었으니 박씨 종택에서도 그 순리를 따랐다. 정씨가 시집올 당시 종손은 양부모와 친부모에게서 많은 재산과 재물들을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황남리내의 전답은 대부분이 박씨 종택의 소유였으며 많은 소작인과 머슴 그리고 수양딸들이 집안을 분주하게 드나들며 종택의 일을 거들고 있었다. 정씨 부인의 친가와는 분위기가 천지차이였다. 양반의 뼈대만을 고스란히 지키고 살았던 터라 살림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기에 종택으로 시집을 오면서도 정씨는 시댁의 살림살이의 규모를 실감하지 못하였었다. 새댁으로 들어온 며칠을 방안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으니 집안을 들락거리는 하인들의 수가 너무 많아 얼굴이나 기억 할까 싶어 걱정이 먼저 앞섰었다. 말로만 듣던 만석지기 살림에 정씨는 사실 기가 눌렸었다. 그렇게 부유했었던 박씨 종택의 가세가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아픔 속에 신분의 구분이 없어지고 양반의 체통도 허물어지다 보니 경주에서 터를 잡고 대를 이어 수십 년간 유유히 명맥을 이어오던 종택에도 서서히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정씨 부인은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그리 많던 재물과 대대로 지켜 내려온 논밭을 일본인들에게 야금야금 빼앗기고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온전히 지켜낼 힘조차 역부족인데 귀한 아들까지 그들에게 끌려간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다급해진다. “안 된다! 내 천금 같은 아들 못 내준다. 내가 우째 키운 아들인데. 그 벼락 맞아도 시원찮을 놈들한테 우리 아아 못 준다. 하모! 못 주고말고!” 정씨부인은 이내 맘을 다잡고 지필묵을 찾아 손을 꼽아 가며 날짜 계산을 하다가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내기 시작한다.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를 한참, 잠시 후 붓을 내려놓고 글을 적은 종이를 봉투에 넣어 방을 나와서는 대청마루에 서서 큰소리로 머슴을 부른다. “거어... 동댕이 없나?” 상전의 부름에 삼십 줄의 나이에 덩치가 큰 사내가 안마당으로 뛰어 들어 와 정씨 앞에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고 대답한다. '예! 마님. 지.. 여 있심더!“ “자네. 지금 포항 좀 갔다 오니라!” "포항에요?" 뜬금없는 심부름에 처진 눈을 위로 치켜뜨고 정씨 부인을 바라본다. 정씨가 손에 쥐고 있던 서찰을 내밀자 동댕이가 댓돌 위에 올라서 건네받는다. "거어로 찾아가 그 서찰을 전하고 오니라." 정씨는 서찰과 함께 간밤에 당주가 내밀었던 쪽지를 동댕이에게 건네주며 이른다. “일은 쇠돌 아범 시키고 자네는 지체 말고 퍼뜩 댕겨오니라." “예. 마님! 알겄심더” 받아 든 서찰을 품에 품고 정씨에게 가볍게 절을 하고 돌아서 내려가 옷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큰 키만큼이나 시원시원한 걸음걸이로 서둘러 안채를 나와 행랑채로 들어선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던 쇠돌 아범을 보고는 불러 세운다. "보소 아제요. " 동댕이 보다 한참 위로 보이는 사내가 멈춰서더니 부르는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와?" "지 마님 심부름으로 포항에 좀 갔다 와야겠심더." "갑재기 포항은 와?" "서찰 전할 기이 있어서." "얼매나 걸리는데?" "지금 가도 반나절 아이겠심꺼?" "알았다. 갔다 오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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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 그라고 뒤 안에 보리타작 하다 만 거 있이이까 그거나 부탁 좀 하입시다." "그라꾸마. 조심해서 댕겨 오니라." "야아." 짧은 대화를 마치고 쇠돌 아범은 동댕이가 말한 보리타작을 하러 뒤 안으로 가고 동댕이는 떠날 채비를 위해 행랑채 자신이 머무는 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채비를 마치고 나온 동댕이 이내 대문을 나서 기차역으로 가 포항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지루한 시간을 졸다 깨다를 반복한 끝에 포항에 도착한 동댕이, 기차역에서 내려 정씨 부인이 건네 준 쪽지를 보며 길을 찾아 나섰다. 초행길임에도 헤매는 일없이 종이에 쓰인 곳을 찾아 가자 그 앞에 긴 골목길이 나타났다. 그 길을 따라 쭉 들어와 감나무가 심어진 대문 앞에 멈춰 서서 문을 힘껏 두드린다. 잠시 후, 집안에서 하인이 나와 동댕이를 보며 묻는다. "무신 일입니까?" "여가 정진사댁이 맞십니꺼?" "야. 그란데요." 제 나이또래와 비슷해 보이는 동댕이를 바라보며 머슴이 대답을 한다. "지는 경주에서 심부름을 온 사램입니더." "경주요?" "야! 이 댁 주인어른께 서찰을 전해 드리고 갈라고 하는데요." 대문을 열고 섰던 머슴은 일단 대문 안으로 동댕이를 들이고 잠시 기다리라 이른다. 그리고 안채로 들어가 강씨 부인을 부른다. "마님. 잠깐 나오시야 겄십니더." 안방에서 중년의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신 일이고?" "야. 그기... 경주에서 사램이 찾아 왔십니더." "경주에서?" "야아." "누가 보낸 사람이라 카던가?" "경주 박씨댁에서 보낸 사램이라는 데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던 강씨 부인이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서서 머슴을 내려다본다. 짙은 눈매가 돋보이는 아담한 체격에 연한 하늘색의 반회장저고리와 남색치마를 입고 쪽진 머리에 옥비녀를 꽂고 있는 모습에서 귀티가 흐른다. 머슴이 강씨 부인을 바라보며 먼저 입을 연다. "대문 앞에서 기다리라 일렀십니다." "가서 데리고 오그라." "야아." 잠시 후 동댕이가 머슴을 따라 안채로 들어선다. 마루에 서있는 부인을 보고는 동댕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자 내려다보던 강씨 부인이 동댕이를 향해 묻는다. "경주에서 우리 집에 무신일로 왔는가?" "예. 지 댁 안방마님께서 서찰을 전하고 오라 하시서 심부름을 온 깁니더." "서찰을?" "야아." 그리고는 품에서 서찰을 꺼내 머슴에게 건네준다. 머슴은 동댕이에게서 받은 서찰을 들고 강씨 부인 앞으로 다가가 내밀어 건네준다. 서찰을 들어 살피던 강씨 부인이 뭔가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생각에 빠져 있던 강씨를 동댕이가 불렀다. "마님. 그라믄 지는 서찰을 전해 드맀으이 그만 가보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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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강씨 부인은 방으로 들어가고 동댕이는 머슴을 따라 대문을 나와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간다. 방으로 들어온 강씨는 뜬금없는 서찰에 적잖이 당황하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하여 급한 마음에 서둘러 서찰 봉투를 열어젖히고 서찰내용을 조급하게 눈으로 쫒는다. 내려 읽는 서찰의 내용을 살펴보니 며칠 후에 딸을 선보러 올 것이라는 날받이 내용이었다. '이상하제! 매파가 왔다 가지도 않았는데 선을 보러 온다고? 뭔 일이 이런 일이 다있노?" 집에 혹시 다녀간 사람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모르게 딸을 보고 간 사람이 없기에 이 일을 칠 사람은 필시 남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강씨는 초조한 마음으로 남편을 기다린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처럼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안달이 난 강씨. 해질녘까지 남편을 기다리는 일이 좀이 쑤시는 것 같았다. 저녁 무렵, 남편이 귀가하는 기척이 들려오자 득달같이 달려 나와 사랑채로 향한다. 한휘는 급히 쫓아오는 처를 바라보고는 댓돌 위에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선다. 강씨 부인 급한 마음으로 신을 벗기가 무섭게 방으로 들어가는 남편의 뒤를 쫓아 들어간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먼저 오늘 일을 물어보려 하니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임자! 오늘 집에 반가운 소식 없었나?” “하맹 그랗지! 이핀이 저지른 일 맞구마요.” 강씨의 눈빛이 남편을 노려보자 남편은 시치미를 때듯 말을 잊는다. “와 그라노? 뭐가 잘못됐나?” “야아!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지요. 무신 일을 의논한마디 없이 혼자 저저레 하고 왔소?” “뭐가? 딸 시집보내는 일에 애비가 나서서 혼처를 정하는 기이 머 잘못된 일이가?” “내는 허재비요? 와? 희연이 내 딸 아입니까? 이핀 혼자서 결정하게. 아니 혼처 자리가 났이믄 내한테도 귀띰을 해줘야 할꺼 아입니까? 아무렴 내가 넘한테서 그 소식 들어야 겄십니까? ” “허! 허흠...” 아내 강씨의 말에 찔려 남편은 입을 열지 못하고 헛기침만을 해댄다. “임자! 내가 서운한 짓 했다 생각 말고 희연이나 잘 타일러 시집보내그라. 혼처자리는 괜찮은 곳이니까 염려하지 말고. 아! 아무렴 내 딸 시집보내는데 아무한테나 주겠나?” “...” “세상이 어수선해서 안 그라나! 과년한 처녀로 내버려두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판에 그래도 제짝 찾아 출가 시키면 한시름은 덜 것 아니겠나?” 남편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없게 되자 강씨는 할 말을 잃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세월 탓이긴 했다. 나이찬 여자아이들이 일본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니 양반이라고 다를까 온전히 딸을 지킬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온 동네에 딸을 가진 부모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서둘러 혼사를 치르는 추세였던 것이다. 따지러 들어갔던 사랑방을 맥없이 빠져 나온 강씨 부인은 안방으로 건너와 골똘히 생각을 정리한다.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다 밝아오는 새벽빛이 방으로 들어오자 자는 것을 포기하고 일어나 앉는다. 잠을 설쳐서인지 입안이 껄끄러워 밥도 제대로 넘어 가지 않아 먹는 둥 마는 둥 몇 숟가락을 뜨다 말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만다. 상을 물리고 잠시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을 딸에게 전하기 위해 강씨는 안채를 나와 초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안채의 뒤로 난 문을 열고 들어서니 딸이 머무는 방이 눈에 들어온다.  방문을 바라보다 어미는 점잖은 목소리로 딸을 부른다. "아가!  에미다." 인기척을 내고는 방문을 열고 딸의 방으로 들어가는 강씨 부인. 방문을 열고 들어선 어미를 바라보며 희연이 몸을 일으키자 어미는 그냥 앉아있으라는 시늉으로 손을 까딱거린다. 어미의 지시대로 희연은 그 자리에 서서 맞은편에 어미가 앉는 것을 보고는 따라 앉는다. 강씨 부인이 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입을 연다. “니가 인자는 어른이 됐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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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은 뜬금없는 어미의 말에 무슨 뜻이 숨겨져 있는지 몰라 대답 없이 듣고만 있다. 강씨는 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 희연의 손을 끌어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으며 지긋이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쉰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기왕지사 일이 이래 된 거 우짜겠노?” “엄마! 무슨 일 있어요?” 딸의 물음에 어미는 잠시 고심을 하다 이내 사실을 털어 놓는다. “니 혼처자리가 나왔다! 아버지가 다 알아보시고 결정 하싰단다. 좋은 집안 이라 카더라.” “혼처요?” 뜬금없는 혼인이야기에 당황하며 희연이 되묻는다. “그래! 과년한 딸을 아직 데리고 있다고 주위에서 말이 많은 갑다. 세월도 어수선하고... 해서 니를 시집보낼라꼬 직접 알아보신 긴갑다. 그래서 좋은 집안이 나서서 니를 혼인시키기로 했단다.“ “엄마! ” 다급히 부르는 딸의 목소리의 떨림을 느꼈던 것도 잠시 강씨는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딸의 맘을 다독이는 말을 내뱉는다. “오냐! 니 맘 내 다 안다. 혼사란 말이 겁이 날 기다. 근데 우짜겠노! 니도 인자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 거를.” “...” “희연아! 아버지 뜻에 그냥 따르기로 하자. 어수선한 세월에 니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노심초사 하시는데 이 세월에 어영부영하다 잘못되기라도 하믄 니 아버지랑 내는 못 살기다. 그라니 좋게 생각하고 혼사날짜 잡자!” “...” “며칠 후에 시어른 되실 분이 니를 선보러 오신다고 기별을 주싰다. 당분간은 몸가짐 조신하게 하고 방에서 가만히 지내그라! 알았제?“ 강씨는 희연에게 당부를 하고 방을 나선다. 마루 끝에 서서 신발을 신으며 어미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기사 열아홉 나이가 적은 나이는 아이구마. 혼기가 차기는 찼구나! 지 오래비 혼인시킬 때는 이래 서운하지 않았는데 딸이라 그란지 보낸다는 생각을 하니 맴이 더 애잔하구마'. 강씨는 댓돌을 내려서며 어지러워진 자신의 맘과 딸의 마음이 잘 수습되기를 바래본다. 부유한 집 양반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나 여자가 글을 알면 남자를 아래로 본다 하여 한휘는 희연이 글을 배우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나마 어미 강씨는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 세상 물정 모르고 무지한 것이 한이었기에 딸에게만은 어리석은 후회를 대물림하기 싫어 남편의 눈을 속여 가며 개구멍으로 책 보따리를 던져주며 희연을 제 오라비 따라 서당 출입을 허하였었다. 친 살붙이라고는 나이차이가 여덟 살이 많은 오라비 하나가 전부이기에 희연은 오라비를 많이 의지하고 따랐었다. 심성이 여리고 음전한 희연을 오라비 또한 어여삐 여기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업어주기도 하며 언제나 여동생을 챙겨주었었다. 그런 오누이 간이었는데 몇 년 전 오라비가 결혼을 하면서 희연은 혼자가 되었다. 서로를 의지하며 지낸 세월이 희연에게는 기쁨이었건만 이제는 오라비를 대신해줄 친구조차 없는 터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자수 놓는 일을 취미로 외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마저도 더 이상 가족들 곁에 있을 수 없다하니 청천벽력 같은 현실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어미의 통보에 마음이 불안해진 희연은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슴새벽 닭이 서너 번 홰를 쳐대고 행랑의 머슴들이 하나 둘 일어나 방을 나서다 긴 하품에 새벽공기를 폐로 밀어 넣으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편다. 안채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찬모의 손길이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마른 가지에 불이 붙었는지 뿌연 연기가 어스름 새어 나와 이슬을 머금은 새벽안개와 더불어 매캐한 냄새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앞마당으로 고즈넉하게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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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머슴 칠복이 서둘러 빗자루를 들고 큰 대문으로 나섰다. 대문 밖에는 감꽃들이 흐드러지게 날려 떨어지고 일찍 잠이 깬 아이들이 광주리를 들고 와서 감꽃을 주워 담으려고 고사리 같은 손을 잽싸게 놀리고 있으면 아이들 주위를 맴돌아 들며 칠복이 빗질을 한다. 오늘이 희연의 시어머니가 되실 어른이 선을 보러 오기로 한날이다.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돈이 될 이에게 책잡히는 일은 없어야겠기에 강씨 부인은 하인들에게 손님을 맞을 준비를 위해 집 안팎을 깨끗이 치우라 이른다. 양 집안의 가장들이 이미 합의하여 하고자 하는 혼사이지만 그래도 내자들을 무시하고 할 수 는 없기에 서로에게 선을 보이라 일러두었으나 한휘는 이를 못 마땅히 여기는 처가 혹여 찾아오는 손님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들어 출타 준비를 하며 처의 기분 상하지 않게 입을 연다. “딸을 위한 일이니까 임자가 손님대접 잘 하그라! 손님 불편하지 않게...” “쳇...” 남편의 말이 못마땅한 강씨가 입을 삐죽이며 구시렁거린다. “내도 아아 엄마요! 이핀이 안 그래도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어서 출타나 하시요!” “어험...!” 한휘는 대답대신 큰 기침 한번 하고 갓끈을 고쳐 묶고 사랑방을 나서서 대문으로 향한다. 남편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섰다 강씨는 마루에서 내려와 딸의 방으로 발길을 옮긴다. “희연아! 안에 있나?” “...” 희연은 대답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바늘을 내려놓으며 방으로 들어서는 어머니를 멀뚱히 바라본다. 딸을 향하던 어미의 눈길이 딸 앞에 조심스럽게 놓여 있는 수틀로 향한다.  하얀 천위에 놓아진 수실들이 곱게 이어져 나비와 꽃이 되어 수틀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수놓고 있었나? 오냐! 착하다. 오늘은 그렇게 조신하게 있어라! 알았제?” “...” 강씨는 딸의 상태를 잠시 살피고는 이내 돌아 나와 안방으로 건너간다. 어미가 되돌아 나간 방문을 바라보다 희연은 생각에 잠겼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혼사라고 맘을 다져먹었건만 도통 내키지가 않아 맘을 다스릴 길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살짝 호기심이라는 것이 일며 과연 시어머니 되실 인물이 어떤 분일까 궁금증이 생겨난다.

같은 시각, 경주 황남리에서는 정씨 부인이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길 떠날 채비를 한다. 머슴 동댕이는 안마당에 나와 정씨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마당을 이리저리 겉돌고 있었다. 채비를 마치고 안방을 나온 정씨부인은 마당을 서성거리고 있던 동댕이를 보며 묻는다. "준비 다 됐는가?" "야. 마님." "앞장 서그라." "야." 동댕이 대문을 열고 나오며 뒤따르는 상전을 호위하여 앞장서서 경주역으로 들어간다. 황남리에서 유지인 박씨 종택의 사람들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정씨부인의 오랜만의 외출에 알아보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 오자 정씨는 위엄을 차리고 꼿꼿한 자세로 인사를 받는다. 종택의 종부로서 위엄을 떨고 있는 그녀에게 사람들이 인사를 올리는 것도 사실 그녀가 덕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경주에서 오랜 유지로 있는 것이 한몫을 하기는 했으나 그보다는 당주인 인택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행하는 업적이 너무도 많았기에 그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그에 대한 마음을 표하고자 그의 가솔들을 극진히 대해주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남편 덕에 정씨 부인의 위신은 한껏 고양되었고 그 기세를 유지하며 기차에 올라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자리에 앉는다. 같이 기차에 오른 동댕이는 상전의 자리를 봐 준 다음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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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멈춰있던 기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는가 싶더니 육중한 무게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적을 요란하게 울리며 점점 가속이 붙고 기차는 철길을 따라 신나게 내달린다. 차내에 앉은 사람들의 몸이 움직이는 기차를 따라 흔들거린다. 정씨부인도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기차의 흔들림에 몸을 내맡긴다. 두 시간 정도를 달려 포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역에서 나와 정진사댁으로 향했다. 경주를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앞장서서 걷는 머슴의 뒤를 상전이 따라 간다. 한번 와봤던 길이라 찾기가 쉬웠던지 동댕이의 걸음은 막힘이 없이 쭉쭉 벋어 나갔다. 물론 하얀 치마 자락을 휘날리며 뒤를 따르는 상전과 보조를 맞춰가면서. 긴 골목으로 들어서 감나무 집 대문 앞에 멈춰선 동댕이. 이미 정진사댁은 손님을 맞기 위해 대문을 열어두었고 그 앞에 문지기가 지키고 서있었다. 동댕이를 알아본 머슴은 뒤에 선 중년의 여인에게 굽신 절을 올리고는 안으로 모신다. 손님이 천천히 들어오는 것을 보고 머슴은 먼저 줄달음을 쳐 안채로 뛰어 들어간다.   정씨부인이 도착했다는 문지기의 연락을 듣고 강씨 부인은 지루한 기다림을 끝내고 마당으로 내려서서 들어서는 이를 맞을 준비를 한다. 대문을 지나 안채로 난 중문으로 정씨 부인이 들어서자 정씨를 훑어보던 강씨 부인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지면서 입이 벌어졌다. 평범하리라 생각했던 여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얼굴에 기가 눌린 것이었다. 오목조목하게 생긴 강씨 부인과는 대조적으로 긴 얼굴에 이목구비가 모두 시원시원하게 생긴 것이 정씨의 인상은 보통여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뜩이나 긴 얼굴에 머리꼭대기에는 얹은머리를 하고 있었으니 얼굴은 더 길어 보여 베자 한자가 될 듯 했고 풀이 빳빳이 선 모시 한복이 기골을 가리고는 있어도 큰 키와 더불어 풍채가 더욱 웅장해 보이는 것이 영락없는 남정네의 골격이었다. 천상 여인네의 모습인 강씨와는 전혀 다른 정씨, 두 여인의 외형은 그렇게 판이하게 달랐다. “아이고나! 오시는데 고생 하셨십니다! 어서 안으로 드입시다!”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모습을 감추고 강씨는 댓돌을 내려서며 손님에게 예를 갖추고 방으로 들기를 청한다. “초면에 실례를 하겄십니다!” 정씨 또한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강씨가 안내하는 방으로 발길을 옮긴다. 댓돌 위에 신을 벗고 올라서서 방문으로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사이 뒤를 이어 올라선 강씨가 방문을 열어 주며 정씨를 먼저 방으로 들여보내고는 마당에 서있는 하인에게 일러 찻상을 준비시키고 옹얘를 찾아 희연을 안방으로 데려오라 지시를 내린다. 강씨 부인의 지시에 따라 옹얘는 초당으로 급히 뛰어 들어가 다급하게 희연을 부른다. “애기씨! 왔십니더.왔으요!” 호들갑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옹얘를 희연이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마님께서 애기씨 안방으로 건너 오라십니더.” 옹얘의 말에 희연의 가슴이 조그맣게 요동을 친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깊은 심호흡을 내뱉고 방문을 열고 나와 안채로 향한다. 앞서 걷는 옹얘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희연이 입을 연다. “옹얘야! 니도 그 분 보았나?” “아니요! 애기씨!” “그래...” “와요? “ “궁금해서...” “그거야 들어가서 보시믄 되잖십니꺼?” "..."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안채로 난 문턱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안방을 향해 옹얘가 희연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사이 희연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다시 심호흡을 한다. 그러면서도 방안의 손님이 궁금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자꾸만 손님에게 신경이 쓰였다. 희연은 궁금증을 뒤로 한 채 안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섬과 동시에 손님이 앉은 곳으로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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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며 힐끗거려 보았으나 자세히 보지를 못하고 방바닥 아래로 깔려진 하얀 모시옷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목이 굳었는지 희연이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손님을 향해 큰절을 올린다. 절을 받으며 이리저리 자신을 살피는 정씨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희연은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인 채 방바닥만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없이 살펴보던 정씨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자 옆에 앉아서 지켜보던 강씨가 딸을 향해 나가보라 이른다. 제대로 눈길도 못 마주치고 일어서서 나온 희연은 앉아 있는 손님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기다리고 서있던 옹얘가 다가서며 희연에게 물었다. '애기씨. 봤십니꺼?“ “아니...” 말끝을 흘리며 초당으로 들어서던 희연이 뒤를 따라오는 옹얘를 의식하며 잠시 망설이다 그녀를 부른다. “옹얘야!" "야?" "니가 내를 좀 도와주면 안되겠나?" "머를 말입니꺼?" 옹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연을 바라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분인지 너무 궁금하다. 그라니 니가 좀 도와도." "우짤라고요?" "안방 손님 가실 때 내가 나가서 그 분 좀 훔쳐봤으면 한다." “그러다가 마님한테 들키기라도 하믄 경을 치실 깁니더.” “그러니까 내만 살짝 보게 해달라는 거다!' “애기씨는? 지가 무신 재주가 있어 그랍니까?” 단호하게 뿌리치는 옹얘를 희연은 낙담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애절한 눈길에 옹얘의 단호했던 마음이 흔들렸다.  상전의 부탁을 단칼에 잘라내고 싶지만 낙심하는 희연이 맘에 걸려 눈치를 보며 옹얘는 망설임 끝에 그녀의 부탁에 응하기로 한다. "그랄라믄 다른 방법이 없십니다. 지 등 뒤에 숨어 있다가 그 어르신 나가시는 모습을 훔쳐보는 수밖에요.“ “그래? 니가 그리 해 줄거가?” "그거야 해 드리지만 들켜도 지 잘못이 없게 마님께 말씀만 잘 해 주이소." "알았다. 그거는 염려 마라." 어두웠던 희연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듯 했다. 옹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서 방안에서 기다리기가 답답해진 희연은 별채의 뒤 안을 오가며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사리며 시간을 보내려 서성였다. 한참을 지나 옹얘가 달려와 손님이 가시려고 안방을 나왔다며 기별을 전한다. 그와 동시에 희연은 옹얘의 뒤를 따라 함께 대문 근처로 발길을 옮겼다. 보이지 않게 자신의 뒤에 숨어있는 상전을 위해 옹얘는 손님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희연에게 귓속말을 전한다. "애기씨! 저기 오십니더!“ 희연이 옹얘의 뒤에 숨어 대문을 향하여 성큼성큼 걷는 하얀 모시옷의 여인을 바라본다. 순간 희연의 동공이 커지면서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옹얘의 뒤에서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저래 강하신 분이 내 시어머니 되실 분이라고...' 아무리 견주어도 보통의 여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어른을 대하고 보니 겁이 났다. 정씨부인의 풍채에서 느껴지는 강인함보다 알 수 없는 어떤 기가 희연을 자꾸만 주눅 들게 만드는 것만 같아 온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손님이 대문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도 희연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서있었다. 옹얘가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면 그녀는 계속 그 자리에 서서 넋을 잃고 있었을 것이다. 힘 빠진 모양새로 희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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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희연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혼사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강씨 부인은 혼인날을 잡아 경주로 보낸 후 예단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딸을 위해 정성스레 모든 것을 손수 준비하고 원앙금침을 만드느라 잠도 잊은 채 바느질에만 매달려 있었다. 희연의 부친은 딸의 결혼 소식을 문중 어른들과 친지와 지인들에게 알리고 경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 시키느라 분주하였다. 그런 부모와는 달리 희연은 맥없이 풀이 죽어 모든 것에 손을 놓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양 모른 채 외면해버리고 두문불출 방에만 틀어박혀 날이 새고 지는 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혼례 전날.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 사이로 근호는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방과 건넛방을 오가며 방정스럽게 호들갑을 떨어 댄다. “엄마요! 얼른 준비해야지요! 갈 길이 바쁜데 꾸물짝거리믄 언제 포항에 도착 하겠으요? 퍼뜩 예복 준비 좀 해주소.” 근호 자신은 안달이 나 죽겠는데 어미가 너무 태평이니 급한 마음에 어미를 다그쳐 본다. “야야! 서둘지 말그라. 아직 시간이 많은데 머가 그래 급하노! 에미가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보채지 말고 진득하게 좀 있그라.” 친영에 나서는 아들을 위해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으면서도 미리 내어 놓지도 않고 어미가 태평스럽게 앉아있는 것을 보자 급한 성격의 아들은 조급증이 났다. 제 혼사에 기분이 좋아 그런 것인지, 아니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는 행동인지, 호들갑을 떠는 그의 행동이 아랫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우째 저래 촐랑대까?" "아무리 장개 드는 일이 좋지만 서도 신랑이 저래 촐싹대서 쓰겄나?" "되련님 성격이 그란거를 우짜겄노? 지 버릇 개 못 준다 안카나?" "이사램이! 그런 소리 하다 마님 귀에 들어 가믄 니는 뻬도 못추릴기다." "우때서? 나라님도 없는 데서는 욕하는 긴데...머가 무서바서 입도 못 뗄기고." "되련님 일이라믄 눈에 불을 시키는 양반이니 하는 소리제." "아들 교육을 그래 시킸으이 저래 말망셍이 같이 오도방정이지를." "저 모습을 신부가 봤이면 학을 뗄기다. 하모." "겉은 안 그란데 우째 저래 사램이 가벼븐지 모리겄다." "그기 다 안방마님 닮아 안 그러나. 첫 아아는 아배를 닮는다 카는데 우째 되련님은 어르신을 안 닮고 마님을 닮았는지... 아매도 여자가 기가 쌔서 그랄기다." "인물이 아깝다. 인물이!" "그나저나 신부 앞날이 걱정 이구마. 아매도 평안치는 못할 기라." 행랑채에 나와 있는 이들의 입에서 상전의 험담이 늘어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근호와 정씨부인은 방안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다. 장가드는 일이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연신 채근하는 아들 때문에 정씨부인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장가를 든다는 것이 자신의 품을 벗어나는 일이기에 마음이 불안하다. 이십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첫아들에게만 정성을 쏟으며 자식으로 친구로 남편을 대신하여 모든 애정을 쏟아 부었기에 마음이 아려오는 것이 세상 어떤 어미보다 갑절이었다. 그런 심정을 알지 못하는 아들의 채근은 불난데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만다. '이놈아. 니가 내 맴을 알기나 하나?' 속으로 아들을 원망하면서 마지못해 아들의 혼례복을 내어 주고 갖춰 입는 것을 도와주는 어미다. 아들과 함께 떠날 준비를 마친 당주가 사랑채에서 나와 마당으로 들어서자 안방에서 들리는 모자간의 대화에 인상을 쓰며 방으로 들어와 아들을 나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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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사나가 돼서 그래 입이 방정스러워 되겄나? 어련히 어미가 알아서 해줄까 그거를 못 기다리고는...쯧쯧쯧 ”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아들을 책망하고 있자 옆에서 지켜보던 정씨의 맘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아들을 책망하는 남편이 오히려 눈에 거슬려 미움의 화살을 당주에게로 날린다. “장개드는 아 한테 와 혀를 차고 그라요?” 아내의 호통에 당주는 말문이 막힌다. 기껏 편을 들어 아들을 나무랐건만 되레 아들을 감싸고도는 정씨의 언행에 당주는 할 말을 잃었다. 당주의 행동 하나하나에 꼬투리를 잡는 정씨부인. 그런 아내의 면박을 애써 무시하듯 외면하고 방을 나온 당주는 포항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하인들을 둘러보며 준비 상태를 보고 받는다. 이미 대문밖에는 신랑이 타고 갈 말이 준비되어 있었고 등롱을 들고 갈 두 사람과 기러기를 안고 따르는 안부가 신랑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나가고 나서 들떠있는 아들을 바라보니 또다시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영감탱이가 일만 안쳤이믄 내가 와 이래 속이 뒤집히겠노? 아직은 내 품에 있어야 할 내 자식인데...' 모든 것이 서운하고 마음에 차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정씨부인의 속을 들끓게 만들고 있었다. 한참 후, 어미의 손을 빌려 예복을 차려 입은 근호가 방에서 나온다. 보통의 키에 다부져 보이는 체격, 반듯한 이마를 따라 오뚝하게 솟은 콧대와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는 아비를 닮은 듯 인상적이었다. 머리에 사모를 쓰고 청색 단령 포에 각대를 두르고 마루로 나온 근호는 댓돌에 놓인 목화 신을 신고 내려와 떠날 준비를 마치고 마당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비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아들의 뒤를 따라 나온 어미를 향해 근호는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올린다. "엄마요. 내 잘 갔다 오겠십니다." "온냐. 몸 조심하그라." "예에." 모자 지간에 나누는 인사말을 무심히 듣고 있던 당주의 입술이 묘하게 움직인다. '내참. 아들 장가가는 기쁜 날 무신 인사가 천리나 떠나는 사람 걱정 이구마. 참말 이해를 못하겄다.' 그러나 당주는 내색을 않고 아들걱정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처를 향해 인사를 건넨다. "내 갔다 오리다." 정씨 부인은 남편의 말에는 대꾸조차 않고 말없이 서있기만 했다. 알 수 없는 처의 속내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채 당주는 아들을 앞세워 포항으로 길을 재촉한다. 초례청에 드는 날은 내일이었으나 그들은 하루 일찍 출발을 하였다. 경주에서 포항까지 팔십 리 길, 기차를 타고 가면 반나절이면 될 것이나 걸어서는 하루를 허송해야 하기에 일찍 집을 나섰다. 이른 시간에 출발을 하였음에도 일행이 포항에 도착한 때는 오후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마을로 들어 서기 전 유숙할 곳을 찾아 일행은 그 곳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 시간을 맞춰 출발하기로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정오를 즈음하여 식이 시작될 예정이라 느긋한 아침을 먹고 신랑일행은 다시 길을 나섰다. 마을입구에는 신부 측에서 보낸 사람들이 신랑일행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아도 한눈에 보이는 일행을 보고는 머슴이 달려와 집안을 향해 외친다. "옵니다. 신랑이 오고 있습니더." 모여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들린다. 일행은 마중 나온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안내를 따라 신부의 집 앞에 당도한다. 말에서 내린 신랑을 주혼자가 맞으며 신랑을 향해 세 번 읍을 하고는 초례청으로 신랑을 안내한다. 안부가 앞장서고 그 뒤를 신랑이 따라 들어간다. 마당 한가운데 쳐놓은 차일 아래로 병풍과 휘장을 둘러 식장을 꾸며놓고 바닥에 깔린 멍석 위에는 교배상이 차려져 있었다. 대례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혼주와 하객들은 들어서는 새신랑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덕담을 던진다. “아이고! 신랑이 참말 잘 생겼구마. 인물이 훤하다 훤해.” “인물도 인물이지만 풍신도 좋은 기이 새색시는 참말 좋겠네.” “하하하.”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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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좀 보소! 신랑 입이 귀에 걸맀구마!” 근호는 자신을 향해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대화하는 하객들의 덕담과 농이 기분 좋기만 하여 연신 싱글거리며 웃음기를 참지 못하고 입 꼬리를 올려붙인다. 혼사의 분위기를 띄우느라 사방에서 봇물처럼 터지는 우스갯소리가 희연이 대기하고 있는 건넛방으로 넘어 들어온다. 혼례 청에 입장한 근호는 안부에게서 목기러기를 받아 들고 전안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한걸음 물러서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린다. 이어 강씨 부인이 목기러기를 받아 치마폭에 싸안고 딸이 있는 방안으로 들어간다.  준비를 마치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딸을 보자 가슴이 아려온다. 좋은 날 눈물은 보이지 않으려 수없이 다짐을 하고 자식을 바라보건만 눈시울은 금세 붉어진다. 희연도 어미의 눈시울을 바라보며 한 줄기 눈물을 흘린다. 말없이 딸의 눈물을 훔치고 품에 품고서는 등을 토닥여 주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방을 나선다. 그 순간이 너무도 가슴에 사무치어 두 모녀는 서로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서로의 마음으로 위안을 표했던 것이다. '신부 출'하는 소리에 희연은 방에서 나갈 준비를 하고 일어선다. 옆에 선 수모들이 희연을 도와 밖으로 나오니 또 한 번 하객들의 덕담과 농이 이어진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섞이면서 식장은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봄볕이 따사로이 내리쬐는 오월의 어느 날, 부부로서 인연을 맺을 두 사람의 상견례가 시작되었다. 교배 상을 사이에 두고 신랑은 동쪽으로 신부는 신랑의 맞은편에 섰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기 위한 의식으로 수모들이 다가서서 신랑과 신부의 손을 씻어 주고 이어 신부가 신랑에게 절 두 번을 하고 신랑은 신부에게 한번 절을 한다. 신랑 신부가 자리에 앉고 수모가 술잔에 술을 부어 신랑 앞으로 가져오고 신랑은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 남은 술은 바닥에 버린다. 수모가 다시 술잔에 술을 부어 이번에는 신부에게 가져가 신부의 입술을 축인다. 재차 같은 방법으로 합환주를 나누어 마시고 신부가 재배를 하고 신랑이 다시 일 배를 함으로써 상견례는 끝이 났다. 이어 안방에 들어가 부모에게 절을 올리고 희연은 자신의 방에 차려진 신방을 향해 수모들과 함께 들어간다. 방안에는 술과 음식을 준비해 놓은 상이 한편에 놓여 있었다. “애기씨! 고생하싰구만요.” 수모중의 한 사람이었던 선이 네가 희연을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 희연은 대답대신 흐릿한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수모들도 나가고 희연은 자신의 방에 혼자 남았다. 하루 종일 입에 댄 것이라고는 입술을 축였던 술잔이 전부였건만 잘 차려진 상위의 음식을 보아도 식욕은 생기지 않았다. 지친 몸을 누이고 싶어도 그럴 수 가 없으니 죽을 맛이다. 그렇게 망부석이 되어 새신랑이 들어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졌건만 아직도 잔치분위기에 사람들의 이야기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집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문을 여는 소리에 놀란 희연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피곤한 탓에 자신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번쩍 눈이 뜨임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몸을 바로 세웠다.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근호는 연신 싱글거리며 방으로 들어서서 다소곳이 앉아있는 신부 쪽으로 다가가 조금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초야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아낙들이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풍지를 뚫어댄다. 방문을 등지고 앉은 희연의 등 뒤에서 짓궂은 이들의 농이 들려온다. 망부석이 되어 앉아있는 희연에게 근호가 다가앉자 밖에 있는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더 요란스러워졌다. 으레 그런 흥을 돋워주는 것이기에 아낙들의 비위를 맞춰주듯이 근호의 손이 희연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근호의 손이 닿기도 전에 희연은 움찔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머쓱해진 손길이 잠시 갈팡질팡하다 이내 희연의 머리 위에 얹힌 족두리를 벗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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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선 사내에게서 나는 술 냄새가 희연을 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뛰는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고요한 방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이어 근호의 손길이 희연의 가슴아래에 둘러진 대대를 풀고 활옷의 고름을 잡아당긴다. 밖은 더 소란스러워 지고 희연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 백지상태가 되어 있었다. 새신랑의 손길이 조금씩 떨려온다. 술기운을 빌려 애써 태연한 듯 연기했었지만 뛰는 가슴을 진정 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신부의 곁에서 떨어져 앉아 상위에 올려놓은 술을 한잔 따라 마신다. 술기운 탓인지 진정되지 않은 마음 탓인지 얼굴은 붉어지고 자꾸만 열이 났다. 어두운 불빛을 빌어 맞은편에 앉은 신부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술잔을 천천히 입안으로 털어 넣으며 곁눈질로 흘겨보니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신부의 얼굴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재차 한잔 더 마시고 다시 다가가다 심지가 빨갛게 달아오른 촛불을 향해 소매 깃을 흔들자 바람 따라 흔들거리던 촛불이 훅하고 꺼져버린다. 불빛이 사라지자 소란스럽던 밖이 잠잠해지면서 흥이 깨진 아낙들이 하나 둘씩 신방 앞을 떠나기 시작했다. 서로가 아직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어색한 방안의 공기는 두 사람을 더욱 숨 막히게 했다. 근호가 숨을 고르고 희연의 곁에 다가앉아 다시 옷고름을 잡아당기자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신부의 집에서 삼 일을 머무르고 드디어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황남리 집으로 가는 날이다. 상객들은 혼사를 치른 다음날 먼저 떠났고 근호만 처가에 남아 따분한 삼 일을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아무리 처가에서 잘해 준다 해도 자신의 집만큼 편한 곳이 없으니 삼 일을 지내는 일이 근호에게는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희연은 그 삼 일이 자신의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들이었기에 떠나는 마음은 서럽기만 했다. 희연과 강씨 부인, 두 모녀에게 있어 오늘은 긴 이별을 하는 날이기에 이별에 앞서 벌써부터 눈물바람이 인다. 조반을 드는 둥 마는 둥하고 상을 물린 후에 떠날 채비를 마친 근호와 희연이 안방에 들러 큰 절을 올린다. 말없이 침묵만 지키고 앉아있던 부친의 입에서 사위를 부르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박 서방! 내 자네만 믿는다. 부디 우리 희연이 잘 좀 부탁하네.” 장인은 사위에게 딸을 위해달라며 거듭 당부를 한다. 남편의 옆에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던 강씨 부인,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어 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손수건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 어미의 마음을 알기에 희연 또한 아무 말 없이 눈물만 보인다. “경사에 눈물 좀 그만 보이그라. 사위보기에 챙피시럽구마!” 멋쩍게 앉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근호를 의식하며 희연의 부친은 아내 강씨에게 핀잔을 놓는다. 쥐고 있던 손수건에 콧물을 닦으며 겨우 울음 섞인 목소리를 가다듬어 장모는 사위에게 타이르듯 부탁한다. “박 서방! 우리 희연이 자네만 의지하고 가는 기다. 부디 시 어른들 눈 밖에 나지 않게 자네가 옆에서 잘 좀 챙겨주소.” “예에! 걱정 마십시요. 장모님. 제가 잘 하겠습니다.” “그래. 자네만 믿네. 부디 잘 살아 주시게!” 딸의 신세가 눈칫밥 신세가 되지 않기를 어미인 강씨는 바라고 또 바란다. 하직인사까지 올리고 방을 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가마 앞까지 배웅을 나온 어미를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여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희연은 눈물을 흘린다. 그런 딸의 모습에 어미도 다시 눈물보가 터지고 이어 두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 앉은 채 떨어지지를 않는다. 언제 다시 친정에 들르게 될지 모르는 긴 이별의 길을 떠나는 딸과 언제 보게 될지 모르기에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어미의 심정이 쉽게 발을 떼지 못하게 했다. 희연을 배웅 나온 옹얘까지 눈물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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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쩍게 서있는 두 사내들은 여인들의 눈물이 슬슬 지겨워 지고 있었다. 보다 못해 아비가 희연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마하고 가마에 오르그라!” 아비의 말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강제로 떨어뜨리며 희연은 어미의 품에서 벗어나 가마에 오른다. 근호도 얼른 장모에게 절을 하고 말 등에 오른다. 딸의 신행길에 따라 나서는 남편 정씨, 눈물이 그치지 않는 처의 어깨를 다독여 주며 인사를 건넨다. "임자. 내 다녀 올기이 염려 말고 있그라." 남편의 다독임에도 눈물은 마를 생각을 않고 목이 잠겨 겨우 고개 짓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새신랑을 태운 말이 앞장서 나가고 신부를 태운 가마도 가마꾼들 손에 들려 흔들흔들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그 뒤를 희연의 부친과 선이네, 그리고 짐꾼들이 행렬을 지어 가마의 뒤를 따른다. 멀어져 가는 가마를 강씨 부인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며 대문밖에 섰다. 그렇게 두 모녀의 이별의식은 끝이 났다.

먼 여정이었다. 몇 시간을 가마에 올라 긴 여정 끝에 새색시의 가마는 황남리 시댁에 도착을 했다. 이곳 분위기는 이제 잔치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종가 댁 맏며느리 시집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문중의 어른들이 종택을 드나들고 손님맞이를 하느라 대문안팎을 들락거리며 쇠돌 아범이 대문 앞을 서성거린다. 신랑신부의 행렬이 눈앞에 나타나자 쇠돌 아범이 마당으로 쪼르르 달려와 당주에게 고한다. 잠시 후, 말에 올라탄 근호와 희연의 가마가 종택 대문을 넘어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처가에서의 불편했던 얼굴과는 사뭇 다르게 집으로 들어서는 근호의 입은 벌써 헤벌쭉하다. 근호가 말에서 내려서고 가마도 흔들거림이 멈추면서 땅에 내려지자 근호가 다가가서 가마의 문을 열어 신부가 나오는 길을 터준다. 다소곳한 자세로 가마에서 내린 신부는 선이 네와 함께 하인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고 상객으로 온 한휘를 당주가 반갑게 맞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하셨십니더." "아입니다. " 점잖게 인사를 나누고 당주는 사랑채로 한휘를 직접 안내한다. 희연은 오랜 시간을 가마에 앉아 왔더니 온몸이 뻐근하고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동안 쉬는 틈을 타서 신부의 화장을 고쳐주려 서있던 선이 네는 희연이 힘든 표정을 짓자 그녀의 손을 잡고 말없이 어루만져 주었다. 손에 닿는 선이 네의 손길이 어미의 손길 같이 푸근하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희연이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는 동안 안방 대청마루에는 폐백을 위한 상이 깔끔하게 차려져 신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 할 준비를 마친 신부가 방을 나와 대청마루에 섰다. 며느리의 절을 받기 위해 당주와 정씨 부인이 자리에 정좌한다. 폐백 자리에 앉은 당주의 표정에는 인자한 미소가 번지고 옆에 앉은 정씨부인은 불편함을 애써 감추며 표정 없이 앉아 신부의 절을 받는다. “아가! 오니라고 수고했다.” 시아버지인 당주의 온화한 목소리가 희연의 귀를 타고 흐른다. “예! 아버님.” 겨우 입을 달막거리며 처음으로 말문이 터졌다. 아직은 낯설고 멋쩍기만 한 호칭이 그래도 막히지 않고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희연이 생각해도 용하다 싶었다. 시부모와의 첫 대면식을 치르고 그 뒤를 이어 박씨 문중의 어른들과 친척을 포함하여 직계가족에 이르기까지 반나절을 두 팔 올려붙이고 큰절 드리려 일어섰다 앉기를 희연은 수없이 반복했다. 그나마 선이 네가 옆에서 부축을 해주었으니 망정이지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서기가 버거워 주저앉을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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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희연의 힘겨움과는 전혀 무관하게 새색시의 절을 받고 있는 어른들은 덕담과 함께 손을 기원하는 맘을 담아 밤과 대추를 두둑이 던져주는 바람에 희연의 치마 앞자락에 밤과 대추가 한 가득 쌓여있었다. 마지막 절차까지 모두 마치고 일어선 희연은 선이 네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건넌방으로 건너왔다. 지칠 대로 치쳐 녹초가 되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누가 볼 이도 없건만 그냥 드러누울까 생각도 했으나 마음이 불안하여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는다. 고개가 떨어지자 희연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잠깐 눈을 감은 것이 몇 시간이 흘렀을까, 서산으로 해가 기울었는지 방안은 벌써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다. 종택에 머물렀던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앞마당에 하루 종일 처져있던 차일을 머슴들이 걷어내고 남은 뒷설거지를 부엌에서 일을 하는 수양딸들이 바삐 움직이며 치우고 있었다. 방 안에 쭈그리고 앉아 밖에서 나는 소리를 무심히 듣고 있던 희연의 귓가에 난데없이 새신랑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분명 밖에서 떠드는 이들의 소리와 더불어 방안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뭣이 그래 재미있다고 저래 신나서 웃고 있는 기가?' 신랑의 웃음소리가 궁금해진 희연이 살며시 창문을 열어 그 틈으로 마당을 오가는 이들을 둘러보다 머슴들 사이에 끼어있는 근호를 발견한다. 촐싹거리는 몸짓으로 머슴들과 더불어 차일을 걷고 멍석을 마는 일을 거들면서 체통 없이 웃고 있는 새신랑을 보자 희연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주위에서 말리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에 소매를 걷어 올리고 신이 나 하는 행동을 보면서 희연은 남편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다. 남자라면 조금은 듬직하고 무게감이 있어야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 갈 터인데 오늘의 행동이 모든 것을 대변하듯 제 신랑의 모습에서는 의젓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의 모습은 그저 체통 없이 무르기 만한 철없는 어린아이 같기만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희연이 근호를 가볍고 철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여 얕보게 된 것이.

희연이 이제 한식구가 되었음에도 시모 정씨부인은 며느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으레 며느리를 앉혀놓고 가풍을 일러주고 내 사람을 만들겠다며 손수 길들이기에 나서는 여느 시모들과는 달리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찾는 일도 없었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도통 관심조차 없는 근호는 매일 같이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에 바빴다. 처가를 떠나오면서 장인장모와 했던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로지 제 생활에만 눈이 팔려 갓 시집온 새댁이 시댁에 잘 적응을 하고 있는지, 시부모와의 사이가 어떤지 전혀 알려 하지 않고 신경조차 써주지 않으니 남편을 믿고 따라온 새색시는 시댁생활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힘든 내색을 하고 싶어도 신랑 얼굴 보고 얘기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으니 불편함과 더불어 답답한 마음까지 인다. 눈만 뜨면 밖으로 나가 한 밤이 되어서야 술에 취해 들어오고 그것도 자신의 방으로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어미가 있는 안방으로 조르르 달려가 한참을 어미와 얘기를 나누고 난 후에야 제 방으로 건너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잠에 곯아 떨어져버린다. 그런 남편의 행동에 처음은 당황했으나 이것이 그의 본 모습임을 알게 됨으로 희연은 더더욱 남편에게 어떠한 기대도 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근호의 일상은 나날이 밖으로 나돌며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어울려 기생집 드나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장가를 들기 전부터 해오던 버릇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는 누구도 그의 행동을 자제시키려 하지 않았다. 어미는 그런 아들을 뜯어 말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고 아비는 바깥일에만 신경을 쓰느라 아들의 행동에 옳고 그름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희연 역시 근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기에 그가 밖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이 어떻게 자랐는지 학문은 얼마나 깨우치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든 것이 궁금하였지만 입도 떼지 못하고 남편의 생활을 수수방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아들의 허물을 감싸고도는 시모, 그런 어미의 사랑에 길들여져 어미밖에 모르는 남편, 모자 사이는 날이 갈수록 더욱더 두터워만 가는데 두 사람 사이에 낀 희연은 어느 편도 될 수 가 없었다.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을 보며 희연은 홀로 외로운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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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붙일 곳조차 없는 자신의 처지가 외롭기만 해 서러운 마음은 더해갔다. 그래도 살아야 하는 시집이니 희연은 외로움과 서러움에도 마음을 굳히고 견뎌내야만 했다. 그것이 시집살이라는 것을 희연은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아직 서툴기만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며느리가 그저 주는 것 없이 미운 까닭이 자신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갔다는 이유에서 만일까, 언제나처럼 어미만을 아는 아들을 제 옆에 끼고도 정씨부인은 안심이 되지 않는 건지 며느리를 경계하고 심술을 부려댄다. 갈 곳조차 없이 집안에만 틀어박혀 시모의 눈치를 보는 것도 하루 이틀, 이젠 무언가 제 스스로 할 일을 찾아야 했기에 희연은 집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려본다. 시집 온지 보름이 지나도록 안채를 벗어난 적이 없는 희연의 발걸음이 처음으로 안채를 나와 행랑채로 향하고 그 곳을 지나 뒷마당으로 향한다. 인기척이 드문 널찍한 뒷마당으로 들어서자 마당 한 편에 깔아 놓은 멍석 위에 말린 곡식들이 펼쳐져 있고 처마 밑에는 겨울에 엮어서 매달아 놓은 무청이 비바람을 맞아가며 인고의 세월을 견디다 이제는 메말라 버린 잎이 누렇게 떠 손가락으로 잡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한해 지은 농사의 결실로 거둬들인 가마니들이 즐비한 곡간은 단단히 채워진 자물쇠가 보초를 서고 그 옆에 닫혀있는 커다란 광에도 쟁여 놓은 갖가지 음식들이 즐비하였다. 곡간을 끼고 돌아서자 마당 끝에 자리 잡은 샘터가 눈에 들어온다. 정방형의 샘터 주위를 몇몇의 아낙들이 물을 길으며, 혹은 빨래를 하며 모여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담벼락에 붙어 있는 후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문이 아마도 마을 사람들과 박씨 종택을 이어주는 가교인 듯했다. 희연이 그들의 대화를 잠시 엿듣다 이내 발길을 돌려 종택 안으로 사라진다. 종택 안에 자리한 샘터를 가리켜 마을사람들은 그 곳을 쪽 샘 이라 불렀다. 오래 전부터 종택 뒤꼍에 자리를 하고 있던 쪽 샘은 마을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오랜 세월 동안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어 마시던 샘이어서 누구나가 드나들며 물을 기르거나 빨래터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또한 이곳은 마을에 퍼지는 소문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말 많은 아낙들이 모여 수다를 떨다 저녁 준비가 늦어지기도 하고 입이 근지러워 참지 못하고 별의 별 이야기꽃이 피고 있었으니 동네 아낙들의 쉼터이면서도 말이 옮겨지는 것도 이곳을 통해 펴지기 일쑤였다. 희연도 자연스럽게 이곳이 피난처가 되어버렸다.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어미의 눈을 피해 희연이 찾아 드는 곳이 바로 쪽 샘이었다. 별 달리 시키는 일도 없고 자진해서 나서려 해도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시어미의 눈치도 피할 겸 핑계 삼아 물을 길러 뒷마당으로 가는 일이 많아졌다. 그나마 몸을 움직이는 일이 있어 외롭다는 생각은 털어낼 수 있기에 이곳을 찾을 때면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라도 자신이 살아 있음을 움직임을 통해 느끼며 희연은 낯선 시댁에서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고 있었다. 시집 온지 한 달을 보내고 있을 무렵 드디어 정씨부인이 며느리를 안방으로 불러 들였다. 이침 저녁 문안을 드리는 일 외에는 고부간에 마주앉을 일이 없었던 두 사람, 그들 사이에 흐르는 적막이 방안을 맴돈다. 냉정한 눈빛으로 며느리를 바라보며 정씨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집안 풍습을 익혔을 거라 생각한다.” “예. 어머님!” “인자부터는 니도 종갓집 종부로 살아가야 할 거니 집안 살림을 니가 맡아 해보그라.” “...” “아랫사람 부리는 일도 윗사람이 머를 알고 시키야제. 그래야 니를 따르지 않겠나!” “예에. 어머님!” “나도 그랬네라! 니 시아버님이 큰댁 양자로 입적이 돼서 내는 양쪽집안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살았제. 한 부모도 어룹은데 양쪽집안 부모를 섬기는 기이 우째 수월했겄노! 종갓집 종부 자리가 어데 쉬운 자리가! 일 년 내내 제사 지내는 일이 다반사고 찾아오시는 손님들 시중드는 일에 문중 어르신들의 눈에 나지 않게 행동해야 하는 기이 우리네 종부의 삶이다. 힘들어도 박씨 종부들이 대대로 지키내리온 것을 니도 본받아서 집안에 분란 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할기다. 알겄나?” “예...어머님! 명심 하겠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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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은 시모와 앉아 있는 자리가 가시방석인 것만 같았다. 정 없이 무뚝뚝하기만 한 시어머니의 일장 훈계가 끝이 나고 몇 마디 대답만 간신히 입 밖으로 뱉어낸 희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어머니 앞이라 잔뜩 움츠리고 있는 판에 정씨부인이 풀어놓은 사설에 한층 더 압박을 느끼고 살림을 살아본 일 조차 없는데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라 두렵고 암담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생겨난 샘이다.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모의 마음을 되돌려 놓을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기에 희연은 자신을 가다듬으며 다짐을 한다. 필히 시모의 마음을 제게로 돌려놓을 거라고.

다음날 아침 일찍 부엌으로 들어서는 새색시. 불이 붙은 아궁이에 연신 잔 나뭇가지를 쑤셔 넣으며 불길이 일기를 기다리며 쪼그려 앉아 있던 찬모가 인기척에 문 쪽을 바라보다 일어나 희연이 서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아씨! 신 새북부터 우짠 일로 정지에 들어오시는 깁니꺼?” “어머님이 오늘부터 자네에게 부엌일을 배우라 하싰네.” “야아? 큰 마님께서요? 그라믄 살림을 넘길라 카시는 갑네요.” “내가 거들 일이 있는가?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네. 잘 좀 가르쳐주시게.” 희연보다 한참 나이 많은 찬모는 이 집안에서 오랫동안 부엌살림을 맡아 오고 있는 수양딸 복순 네였다. 복순 네는 어릴 적에 부모의 손에 팔려 들어 온 계집종이었다. 기근이 심한 해에 농사지을 거리도 동이 나고 딸린 식솔들 입에 밥 들어 간 게 언제인지 모르는, 한마디로 목구멍에 풀칠도 못할 형편이라 가족 모두가 굶어 죽을 수는 없어 결국 그녀의 아비가 그녀를 박씨 종택 종살이로 들여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값으로 곡식을 받아 챙겨 가고는 한 번도 자식을 찾아 온 적이 없었다. 박씨 종택에는 그렇게 들어와 종택의 일을 거들어가며 집안의 일꾼이 된 머슴과 계집종들이 더러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예사롭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보니 눈 여겨 살피다가 수양 삼는 일이 있기도 했다. 정씨부인이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들어온 아이가 있었다. 층층시하 두 시부모 봉양에 바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차에 자신을 도와 일을 거들던 조그마한 여자아이의 야무진 손놀림과 몸에 밴 부지런함이 눈에 띄어 수양딸로 삼게 되었는데 이가 바로 찬모 복순 네인 것이다. 친어미를 탁해 음식솜씨가 남달라 어린 나이에도 음식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예전 찬모를 대신하여 한 가지씩 만들어 내놓은 찬이 정씨부인의 입맛에 맞다 보니 부엌살림의 일부분을 맡으며 입지를 굳혀 가다 찬모로써 자리를 잡게 되었다. 수양딸 겸 찬모로 지내면서 어느덧 혼기가 꽉 찬 나이가 되자 정씨부인은 부리던 머슴 중 부지런하고 체격이 건장한 장쇠와 혼인을 시켜 한 살림 안겨 분가를 시켜 주었다. 복순 네는 종택과 거리가 멀지 않은 곳으로 분가를 하여 종택을 드나들며 찬모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수양딸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아씨께서는 우선 지 하는 거를 보시믄서 차근차근 배워보시이소. 지가 아는 한 까지는 아씨께 가르쳐 드리지요." “고맙네.” 희연은 찬모의 뒤꽁무니를 쫓느라 부엌을 분주히 오갔다. 빠른 손놀림과 야무진 손끝으로 찬을 한 가지씩 만들어 내는 찬모의 솜씨는 예사가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한 희연이 찬모와 더불어 조반상을 차렸다. 대부분이 찬모의 손에서 만들진 것들이기는 했으나 그 옆에서 희연이 잔심부름을 해가며 찬모를 거들어 준비를 한 상이었다. 처음이라 서툴렀던 부엌일이 하루 이틀 날이 갈수록 손에 익게 되자 찬모를 거드는 일이 이제는 한결 수월해졌다. 집안일을 며느리에게 맡기고 손을 놓은 정씨부인은 늘 상 안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내거나 마실을 다니거나 손님 초대를 하는 등 하루하루가 편안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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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 시모를 대신하여 집안일을 돌보게 됨이 희연을 며느리로 인정하고 믿어서 인지 아니면 시어미의 심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웬만한 집안일은 희연에게 권리를 일임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것은 힘에 부치는 가사 일이 전부였을 뿐 명실 모든 권리는 아직 정씨부인 자신이 손아귀에 쥐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명분만 있는 종가 댁 며느리의 시집살이는 날이 갈수록 힘에 부쳤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집안일이라 하루 종일 종종거려도 일은 끝이 나지 않았고 날이 새면 다시 또 반복되는 일들에 희연은 일 년 삼백육십오일 그렇게 일속에 파묻혀 살아가게 되었다. 세월이 약이라 했나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들을 흘러 보내고 그 대가로 얻는 것은 오감으로 익힌 습관들과 나날이 늘어가는 눈치가 전부였다. 희연이 시집온 지 두 해를 갓 넘기고 손에 일이 익어 이제는 제법 종부로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할 때쯤 희연의 인생은 또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늘 상 하는 일들과 고군분투하는 것도 힘에 부칠 판에 언제부턴가 시작되었던 헛구역질이 몸에 이상이 생긴 것임을 알려 주었다. “마님요! 아씨 태기가 있으신갑네요.” 희연의 헛구역질을 옆에서 지켜보던 쇠돌 네가 입덧이 시작된 것 같다며 경사스런 일이니 가족들에게 알려야 한다며 부산을 떨고 안방 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정씨부인에게 일렀다. 가뜩이나 손이 귀한 집안이라 내심 걱정하고 있던 차라 희연의 임신소식은 집안의 경사로 박씨종택의 아랫사람들이 더 기뻐하였다. 그래도 희연을 지극히 위하는 마음은 이 집안에서 당주만 할까! 며느리의 임신 소식에 당주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를 않았다. 그런 당주와는 달리 남편이라는 사람은 온종일 바깥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도무지 아내에게 관심이 없었고 시어미라는 인물 또한 그깟 아이 가진 게 무슨 큰 벼슬이냐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며느리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이를 알고 있기에 당주는 언제나 며느리가 안쓰러워 미안한 마음에 며느리를 자상하게 챙기는 것이었다. 여러 번의 유산을 경험했기에 아이를 가지는 기쁨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정씨부인 또한 마음은 기쁘지만 왠지 정이 가지 않는 며느리에게 별안간 살갑게 굴고 싶지 않아 자존심을 내세우며 콧방귀만 뀌었다. 희연의 입덧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음식을 넘기지 못할 정도가 되어 몸이 축나고 있는 상황임에도 남편은 아내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 아내를 위해 조금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 근호의 행동에 희연은 울화가 치밀어 몇 마디 쏘아붙이면 아내를 팽개치고 어미의 품으로 달아나 어리광을 부리며 아내의 곁으로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신랑을 보고 있자니 희연의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다 하더라도 한 아이의 아비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감이 있어야 하거늘 언제나 어미의 치마폭에만 싸여 헤어 나오지 못하고 어미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신랑을 평생 믿고 살아야 하는 희연의 앞길이 바람 앞에 등불같이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그렇게 신랑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지내오는 동안 뱃속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이제 세상을 볼 준비가 되었다며 신호를 보내 왔다. 아침나절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몇 시간 간격으로 아프던 배가 저녁쯤 되니 수분간격으로 고통이 잦아들었다. 희연은 방안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드러누워 배만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뱃속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어미가 된다는 것이 무섭고 두려웠다.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 여인에게 얼마나 숭고하고 경이로운 일인지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 한편으로는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방안으로 들어선 산파는 산모의 상태를 살피며 아직 때가 아니라며 힘을 아끼라 이른다. 마을의 아이들을 제 손으로 모두 받아냈다며 너스레를 떨며 산파는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산모를 능숙하게 대한다. “첫 아라 그라요!. 아프고 힘들고 겁나겄제. 다 그래 에미가 되는 기라요.” “으으읍!” 희연은 산파의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는데 산파는 연신 산모에게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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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참지 못해 자신도 모르게 악이 써지고 신음이 입 밖으로 세어 나온다. “지금은 힘주지 마소! 아직 얼라 머리도 안 보이는데 벌씨러 진을 빼믄 힘이 부족해 얼라 나올 때 정작 힘을 못쓰이까 숨을 고라 쉬소.” 산파가 말하지 않아도 가쁜 숨이 저절로 쉬어진다. 배에 힘을 줄 수 없으니 고통은 더 진해져 오고 몰아쉬는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그칠 줄 모르는 산통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어 사람의 진을 빼놓는다. 그렇게 한참을 줄다리기를 하고 뒤틀리는 고통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게 만드니 산파의 다급해진 목소리가 희연의 귀에 어렴풋이 들린다. “지금이다. 더 힘을 주소. 얼라 머리통이 보이니까 쪼매만 더 힘을 주소!” “어으읍!” “옳지 옳지 잘하고 있소. 한분만 더 한분만 더 힘주소. 퍼뜩! 옳지. 옳지! 나온다. 나오고 있다. 마지막이요 한분 더 힘주소.” "으으윽... 아아악.“ 처절한 악다구니가 멈추고 나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문밖으로 터져 나왔다. 몇 년 만에 들어보는 아이의 울음소리인지 고요하던 집안에 세상을 향해 첫발을 디딘 아이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두가 기대했던 첫아이는 여식이었다. 떡 두꺼비 같은 아들 손자를 바랬던 집안 어른들은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며 서운한 마음을 위안 삼았다. 희연도 내심 첫아들을 기대했던 터라 조금은 서운한 맘이 들기는 했다. 자손이 귀해 늘 가시방석이던 맘이 시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 은근히 바랐는데 그 바람도 물 건너 간 셈이다. 종부라는 굴레는 그 어떤 이유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희연이 산후조리조차도 눈치가 보여 제대로 몸조리를 하지 못한 채 부은 몸을 이끌고 부엌을 서성거리자 찬모를 비롯하여 아랫사람들이 산모를 걱정하며 다시 방안으로 들여보낸다. 정씨부인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나서서 며느리 역성을 들어 줄 마음이 없었다. 아랫사람들 보기에 심술궂은 시어미가 될까 싶어 내키지는 않지만 그냥 그대로 내 벼려 두기로 하였다. 방에 누운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쌔근거리며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친정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시집오는 날, 어미와 부둥켜안고 흘리던 눈물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렇게 서운함도 외로움도 잠시, 아이의 커가는 모습을 낙으로 삼으며 희연은 매일같이 반복되는 날들을 견뎌내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반년을 넘길 쯤 이었다. 시부의 부름을 받고 사랑채로 들어선 희연이 시부와 마주하고 자리에 앉자 시부는 접어놓은 한지를 서안 위에 펼쳐 놓으며 며느리를 응시한다. 희연의 눈길이 한지 위로 머무르자 당주가 입을 열었다. “내가 바빠서 손녀 이름을 빨리 지어주지 못했다. 첫 손준데 무관심해서 속이 상했일긴데... 에미 보기가 민망하구마.” “아입니다. 아버님.” 시부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 이내 종이쪽지를 내려다보며 입 속으로 조용히 읊조려본다. “어떻노? 이름이 니 맘에 드나?” 며느리의 눈치를 살피며 당주도 펼쳐놓은 종이 위로 시선을 보낸다. '박정옥...'  희연은 속으로 글자를 내이면서 아이를 떠올려 본다. 아직은 누운 자락이라 모르지만 왠지 그 아이의 성품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예 아버님! 맘에 듭니다. 고맙습니다.” 시부도 며느리도 서로가 만족하여 아이의 이름을 정옥 이라 정했다. 그 이름은 그가 대서방에 앉아 고심 끝에 지어낸 이름이었다. 본래 당주는 이 마을의 유지로 대서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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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남달리 글공부를 좋아해 많은 학문을 접하고 그 실력을 쌓아온 당주였다. 시절을 잘못 타고 태어나 관직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사람 됨됨이 선하고 어질어 모든 이가 칭송하며 인정을 받는 양반자제였다. 그런 그가 출세 길에 오르지 못한 것을 두고 본인보다도 마을사람들이 더 안타까워했다. “박씨 어른이 시대를 잘 타고 났이믄 큰 자리 하고도 남을 사램이제!” “두말하믄 입아프지를. 그양반이사 어데 내 놔도 빠질 사램이 아니지!” “인물 좋겠다 성품도 온화하시고 남들 어려븐 사정 다 챙기시고 마을에 일 있이믄 먼저 나서서 처리해 주실라 애쓰시제. 그분 밉어 하는 이 누가 있노?” “하모. 그 양반을 욕하는 놈 있이믄 그 놈이 죽일 놈 인기라. 안 그렇나?” “맞제!” 마을 유지로서 책임감도 있으려니와 본시 마음이 따듯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 남의 안타까운 사정을 다 봐주고 도와주는 당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대서방을 운영하는 것도 나라 잃은 백성들이 가엾고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한 그들의 무지몽매함이 안타까워 자신에게 유일한 재주인 학문으로나마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도움을 주고자 글을 대필하는 일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세월을 걱정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바깥일에만 신경을 쓰는 그였기에 정작 집안일에는 소홀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정씨부인은 그런 남편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남편을 무시했던 것이다.

어미의 치마폭에 쌓여 어미의 인형이나 마찬가지인 근호는 가장으로써의 책임감도 뿌리치고 허구한 날 술과 기방출입에 여념이 없었다. 귀한 자식일수록 매로 다스리라 했건만 정씨부인은 아들이 자신의 품을 떠날 까봐 전전긍긍하여 아들이 하는 일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편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 생활은 결혼을 하고 식구가 생기고 자식이 태어난 지금도 변함이 없었으니 부부의 정이란 것이 생기기를 하겠나! 자식이 귀엽기를 하겠나!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자신과 어미만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부부의 인연은 끊어 낼 수 없는 법, 정 없는 두 사람 사이에 또 한 생명이 세상으로 나서려 하고 있었다. 첫아이를 받아주었던 산파가 다시 희연의 둘째를 받아냈다. 이번에는 꼭 아들이기를 바라는 맘에 기대를 걸었으나 역시나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났다. 첫째 아이보다 더 기대를 했던 집안 어른들은 또 다시 낙심을 했고 희연은 그런 시부모를 뵐 낯이 없어 풀이 죽어 지내며 시모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날이 갈수록 정씨부인의 며느리 미움은 더욱 심해져 갔고 이를 견뎌내는 희연은 그 많은 날들을 갖은 구박을 받으며 살았기에 이제는 제 속에 능구렁이 한 마리는 품고 있으련만 아직도 시어머니가 무섭고 두렵기만 해 쩔쩔매고 있으니 그녀의 앞길이 캄캄하다 못해 암흑 속에 묻혀 버릴 기세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며느리에게 역정을 내는 모습을 밖에서 들어서던 당주가 보게 되면서 두 고부간의 문제가 심각함을 감지하였다. 내당의 일이라 참견도 못하고 그저 당하기만 하는 며느리가 너무 안쓰럽고 딱한 것이 아랫사람들 보기에도 민망스러웠다. 당주는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있다 돌아서 나오는 며느리에게 들켜버리고 만다. 희연이 애써 태연한 척 시아비를 보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이제 들어오십니까? 아버님!” 당주는 말없이 며느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인다. 민망해진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른 것을 느낀 희연이 시부의 곁을 지나려 할 때 시부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야!” 희연이 고개를 숙인 채 시부를 향해 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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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 놓고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을 하던 당주는 안쓰러운 눈으로 며느리를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건네준다. “견디고 참다 보믄 좋은 날이 있을 기다.  너무 상심 말고 괴로워 말그라.” “예. 아버님!” 순간 희연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린다. 시부는 며느리의 눈물이 당황스러웠으나 그런 며느리가 한없이 가엾기만 한 것이 자신도 모르게 콧등이 짠해짐을 느낀다. 고된 하루를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선 희연이 아랫목에서 잠들어 있는 어린것들을 내려다보고 앉아 있자니 친정어미의 얼굴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낮에 시모에게 들은 꾸중 때문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친정어미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진다. 친정을 떠나온 지 벌써 십 년. 이를 악 물고 버텼던 세월에도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세월에서도 그리움만은 흘려보내지 못하고 가슴속에서 쌓여 응어리가 진다. 언제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는지 그저 코뚜레에 꿰인 소처럼 하루 종일 일을 하며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었다. 처량한 자신의 신세를 생각할수록 희연의 설움은 복받쳐 오르기만 하였다.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있어도 잠은 들지 않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 베개를 적신다. 쌔근거리며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키고 있을 즈음 술 냄새를 풍기며 근호가 방안으로 들어선다.    희연이 눈물을 훔치며 일어나 앉자 눈물이 신경 쓰였던지 인상을 쓰며 퉁명스럽게 묻는다. "와? 무신일 있었나? 이 오밤중에 와 눈물 바람이고?"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지 않는 입술을 달막거리며 쉰 목소리로 남편에게 부탁을 한다. “친정어머니가 보고 싶어 그랍니다.” “뜬금없이 무신 소리고?” “시집온 지 벌써 십 년이라요. 그 십 년 동안 친정나들이 한번도 못한 기이 서글퍼서 그랍니다.” “가면되지 머가 어렵다고 그라노?” “어머님께서 허락을 안 하실 긴데 우째 말씸을 드립니까?” “못할거 머있노? 그 말이 머 그래 어려워가 말을 못하는가?” “…” 고부간의 사정을 모르는 남편이 야속하기만하여 희연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만다. “알았다! 내가 당장 가서 말씀 올리꾸마.”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는 근호를 말리며 밤이 늦었으니 날이 밝으면 여쭈어 달라며 붙잡았으나 근호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을 열고 나가 안방으로 향했다. “엄마요! 주무십니까?” 어미를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가 반가워 정씨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대답한다. “무신 일이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들어 오니라.” 근호가 배시시 웃으며 방문을 넘어 어미 앞으로 다가와 앉는다. “그래, 무신일이라서 이래 오밤중에 건너 온기가?” 아들의 얼굴을 보며 어미는 눈빛을 반짝인다. “엄마요! 다른 기이 아이고……. 정옥에미랑 처가에 좀 댕겨 올라꼬요. 생각해보니까 정옥에미 시집오고 나서 한 분도 친정에 못 갔잖아요. 장인 장모님께 안부 인사라도 올려야 하는 기이 도리이지 않을까 싶네요.” 순간 정씨부인의 얼굴이 정색이 되어 아들을 노려본다. 이 야심한 밤에 급한 용무라도 있는가 싶어 잔뜩 기대를 했건만 기껏해야 친정나들이 하게 해 달라 꼬드긴 처의 역성을 들며 핑계 대는 꼴이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힌다. “와? 니 처가 그래 허락 받아 오라 카더나? 지는 말 못하니까 대신 나서 달라 카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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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곡을 찌르는 어미의 역정에 놀라고 당황한 근호는 아차 싶은 마음에 핑계를 댄다. “그기이 아이고……. 오늘 동문 중에 혁진이를 읍내에서 만났는데 지 처하고 같이 어디를 가나 보데요. 그래서 인사차 몇 마디 나누고 혁진이가 처가에 다니러 간다 캐서 그렇게 헤어졌는데……. 생각해보니까 저 사람 시집와서 한 분도 처가에 가보지 못한 기이 맴에 걸리고 또 나도 사위된 도리도 제대로 못한 기이 맴에 걸리고 해서 정옥에미한테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가고싶나고 물었더만 말은 못하고 눈물부터 보이서 보기 안쓰러버서 내일 말씀 드리자는 거를 저 사람 기분 좀 좋게 해 줄라꼬 서두르다 보이…….” 하면서 근호는 말끝을 흐린다. 아들의 당황한 모습에 조금의 노여움이 가라앉았는지 정씨부인의 얼굴이 평정을 되찾았다. 그새를 놓치지 않고 근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가 생각이 짧았네요. 엄마가 이래 화내실 줄 몰랐으요. 당연한 일이라 흔쾌히 승낙 할기라 믿고 말씀 드린 긴데 괜히 엄마 기분만 상하게 해드렸네요. 그만 마음 푸소.” 아들이 어미를 달래자 정씨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트집을 잡는다. “잘 지낸다고 편지나 올리면 될 것을 머할라꼬 돈 버리고 길을 나설 라는 긴지…….” 대놓고 큰소리로 못하고 아들에게 들릴락 말락 혼잣말을 해댄다. 근호는 어미의 심기를 알아채고 어리광을 부린다. 사랑하는 아들의 청이라 차마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어미는 마지못해 승낙을 한다. 근호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어미를 안아주고 급히 방을 나와 건넛방으로 넘어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희연을 바라본다. “임자! 엄마가 허락 하싰다!” 그 한마디에 희연의 마음은 벌써부터 들떴다. 쉽게 허락을 안 해 주실 거라 걱정하며 기다렸는데 어떻게 되었든 친정 부모님을 만나 뵈러 가게 된 것이 여간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설레어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이른 아침부터 조반을 준비하는 손이 가뿐하게 움직인다. 찬모의 눈에도 희연이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모습이어서 밤사이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여 묻는다. “아씨! 밤새 무신 좋은 일 있었십니꺼? 얼굴이 활짝 폈구마요.” “그래 보이나? 어머님께서 친정에 다녀오라고 하싰네.” “참말로 잘됐구만요. 아씨 친정에서도 눈 빠지게 기다리고 기실 깁니다.” “그래서 말인데…….자네한테 일을 좀 부탁해야 할 것 같네!” “아이고! 그런 걱정은 마시고 가시서 푹 쉬시다 오시이소. 친정 밥도 좀 자시고요. 내 손으로 지은 밥 보담 얻어먹는 기이 더 맛난 법이니께요. 아무런 걱정 마시고 댕겨 오이소.” “말이라도 고맙네. 자네만 믿고 며칠 다녀오겠네.” 자신의 일인 양 같이 기뻐해주는 찬모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희연은 찬모에게 연거푸 고마움을 표한다. 어미가 챙겨주는 새 옷을 부지런히 갈아입은 아이들은 철만난 물고기마냥 신이 났다. 외가에 간다는 기쁨보다는 새 옷을 입고 나서는 기쁨이 더 큰 까닭에 아이들은 어디를 가건 아무래도 좋기만 하였다. 근호와 희연이 사랑채와 안방을 오가며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재촉하는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아이들은 마냥 좋아서 달리기를 한다. 누가 더 잘 달리나 내기라도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기차역을 향해 달려간다. 근호가 뛰어가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친다. “정옥아, 찬옥아! 넘어진다. 천천히 가자!” 아비의 부름에 달음질을 멈추고 돌아선 정옥이 아비를 향해 빨리 오라 손짓을 한다. 기적소리를 울리며 플랫폼 안으로 들어선 기차에 희연의 식구가 오르고 잠시 멈춰있던 기차가 다시 기적소리를 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마냥 신기한 듯 창밖으로 지나는 풍경들을 내다보며 기분이 들떠 있었다. 창밖으로 한눈을 팔고 있던 정옥이 어미를 돌아보며 묻는다. “엄마! 우리 외갓집에 가는 거가?” 정옥의 물음에 이어 둘째가 한마디 더 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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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보러 가는 거제?” 아이들의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희연은 감출 수 없는 기쁨에 목이 멘다. 얼마 만에 와보는 곳인가? 멀지도 않은 이 길을 오는데 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것이다. 낯설지 않은 이 거리가, 눈에 선하던 이 골목이 희연은 걸어오는 내내 꿈길을 걷고 있는 것 만 같았다. 친정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의 첫 번째 대문 양 옆으로 줄을 지어 나란히 서 있는 감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이른 새벽 대문을 열면 감꽃이 떨어져서 걸음을 걸을 수 없을 만큼 수북이 쌓였던 곳, 그 감꽃을 주워가려고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섰던 동네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니 배나무에 하얀 배꽃이 달려 있다. 머슴들이 나서서 배꽃이 떨어지지 않게 손질을 하는 중이었다. 낯선 이들이 중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복도가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달려와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아이구, 아씨! 아씨 맞지요?” “날 알아보겠나?” “이게 얼매 만인 감요?” “잘 지냈는가?” “예. 예.” “안으로 드이소! 어르신께서 기뻐하실 깁니다!” 복도가 앞장서서 사랑채로 뛰어가고 희연의 식구가 천천히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로 들어서다 부엌 앞에서 한약을 풍로에 올려놓고 달이고 있는 옹얘를 보고는 희연이 반갑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본다. “옹얘야!” 풍로에 올려진 약탕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쭈그리고 앉아서 풍로에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던 옹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며 몸을 일으킨다. “아이구야! 애기씨, 아니 아씨 아입니꺼?” 옹얘의 카랑한 반가운 목소리가 희연을 맞는다. “잘 지냈나?” “야. 아씨! 이기이 얼매 만입니꺼? 잘 오싰소. 참말 잘 오싰소.” 서로의 손을 잡고 반가움에 눈물부터 글썽이며 안부를 주고받는다. 옹얘는 희연의 뒤에 서있는 근호와 아이들에게 반가움을 표하며 인사를 한다. “그간 별 일 없었나? “야. 아씨! 아씨도 무탈하시지요?” 희연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옹얘의 발아래 놓여 진 약탕기를 내려다보며 궁금하여 묻는다. “한약을 달이고 있었나?” “아씨……. 알고 오신 기이 아입니꺼?” “무신 말이고?” “모르싰나 봅니더. 대부어르신께서 편찮으십니더.” “아버님께서? 언제부터? 많이 편찮으신기가?” “건너가 보시이소!” 옹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마음이 조급한 희연이 잰 걸음으로 걸어가 사랑채 앞마당으로 들어선다. 복도에게 기별을 받고 마루에 나와 있던 강씨 부인은 딸이 들어서자 맨발로 마당으로 뛰어 내려온다. “아가! 니가 우얀 일이고?”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바라보니 정말 딸이 눈앞에 있었다. 어미 품을 떠난 십 년 만에야 다시 딸을 품에 안아본다.   “어머니!” “그래! 그래! 말문이 막히고 눈물부터 쏟아진다. 두 모녀는 그렇게 서로의 품에서 풀려나지 않고 한참을 부둥켜안고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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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강씨 부인은 희연의 등 뒤에 서서 물끄러미 자신들을 바라보는 세 사람에게 다가선다. “어서 오게나! 박 서방.” “예 장모님! 그간 강녕 하셨습니까?” “하모! 사돈 어르신들도 강녕하시제?” “예! 장모님!” “이 사람아! 일찍 좀 찾아오지 않고. 내가 얼매나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죄송합니다! 지가 생각이 짧았십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강씨 부인은 근호에게 미움 박힌 한마디를 내 던지고 아이들의 곁으로 다가섰다. “어서 오니라! 내 강아지들. 내가 너거 외할매다.” “….” 아이들은 처음 보는 외할머니가 낯설고 부끄러워 근호의 꽁무니로 숨어버린다. “정옥이 찬옥이 외할머니께 인사 드리그라!” 아비의 명령에 아이들은 쭈뼛거리며 나서서 정옥이 먼저 인사를 드리니 뒤이어 찬옥이 따라서 인사를 한다. “오냐 오냐! 너거들 오니라 고생했다, 아이구 내 정신 보래. 백년손님을 밖에 세워두고 뭐하고 있노! 박 서방 어서 안으로 들게. 우리 강아지들도 얼른 들가자." 강씨 부인은 마음이 들떠 아이들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사랑방으로 몰고 간다. 아이들은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앞장을 서고 뒤를 이어 근호와 희연이 사랑방으로 들어간다. “아버지 저 왔어요. 희연이요.” 누워있던 이부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부친은 딸을 반갑게 맞아 준다. 부모에게 절을 올리는 딸 내외와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뿌듯해져 온다. 어리기만 했던 딸을 종부로 보내고 노심초사 했던 아비는 십 년의 세월을 무탈하게 견뎌준 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어엿한 종부로써의 기품이 느껴져 내심 흐뭇해하였다. “박 서방, 잘 왔구마!” “예 장인어른! 인자서야 찾아 뵙십니다. 편찮으시다 캐서 걱정입니다.” “괜찮다! 그냥 좀 몸살이 난 기다.” “속히 쾌차하시야지요. 장인어른.” “그래야제!” 강씨 부인은 옆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앉은 외손녀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을 내민다. “사돈께서 손녀 보았다고 기별을 주신 기이 어제 같더만 벌씨러 이래 컸구나! 어디 우리 손녀들 이리 가까이 좀 오니라.” 희연이 딸들의 등을 떠밀며 다가앉으라며 정옥에게 귓속말을 전한다. 쭈뼛거리며 정옥이 먼저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와 앉자 찬옥이도 제 언니를 따라 옆에 앉았다. 푸근한 인상을 지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정겨웠는지 정옥이 할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쾌활한 목소리로 말한다, “할아버지 정옥이가 할아버지 아프지 말라고 호하고 불어 드릴까요?” 그 말이 기특하여 부친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뒤이어 찬옥이도 나서며 “나도 언니하고 같이 호 할거다.” 아이들이 소란을 떨며 재롱을 피우자 적막했던 집안이 생기가 도는 듯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옹얘의 목소리가 방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마님! 약 달여 왔십니다.” “오냐! 들이거라.” 소반에 올려진 약사발을 방안으로 들여 놓고 옹얘는 물러갔다. 부인에게 약사발을 건네받은 한휘. 사발에서 입을 떼지 않고 천천히 약을 들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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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마신 약사발을 다시 건네받은 강씨 부인은 남편에게 자리에 누울 것을 권하자 아비는 딸의 걱정하는 얼굴을 바라보며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딸을 안심시킨다. “애비 걱정 말고 건너가 보그라. 먼 길 오니라 피곤할 긴데 가서 편하게 좀 쉬그라.” "괜찮아요. 더 앉았다가 건너 갈랍니다." "박 서방도 피곤 할긴데 머할라꼬 멀뚱히 앉아 있을 기고? 가서 편하게 쉬그라." 뒤에 앉은 근호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하였음에도 아비는 제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강씨 부인이 나섰다. "너거 아부지 고집을 우째 말리겄노! 약도 자싰으이까 한 숨 주무시게 두고 우리는 그마 건너가자." 강씨부인은 눈짓으로 딸을 달랜다. 아비의 건강이 걱정되어 곁에 더 머무르고 싶었으나 한사코 거절하는 아비를 차마 이길 수가 없어 희연은 제 고집을 꺾고 어미의 뜻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라믄 이핀은 그마 누워 쉬소. 우리는 건너 갈랍니더." 강씨 부인이 먼저 일어나 손녀들을 데리고 사랑채를 나서고 그 뒤를 희연 내외가 따라 방을 나선다. 여전히 희연은 아비의 환우가 걱정스러워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어미의 뒤를 따랐다. 사랑채에서 나온 이들은 안채로 들어서 강씨 부인은 안방으로 들어가고 희연의 식구는 그 맞은편 건넛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근호와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인지 희연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희연이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에미야! 자나?” “아니요! 어머니!” “그라믄 안방으로 좀 건너 올라나?” “예!” 희연이 속옷 차림으로 안방으로 건너간다. 낯에는 너무 갑작스러워 경황도 없으려니와 건강이 좋지 않은 남편 앞이라 강씨 부인은 딸을 자세히 살펴볼 상황이 못 되어 그저 인사나 나누고 말았었다. 오랜만에 친정나들이를 온 딸이 그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궁금하여 잠을 못 이루다가 혹시나 딸이 깨어있을까 하여 방밖을 서성거리다 희연을 부른 것이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니가 온 기이 기뻐서 그란지 잠이 오지 않네.” “…….” 희연도 어미의 마음과 같았다. 오랜만에 온 친정이 조금 낯설기도 하고 어미의 곁에 있기에 자꾸만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그래 시어른들은 잘 계시제?” “예.” “니 한테 잘 해 주시나?” “시아버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시니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너거 시어무이는 니를 구박하나?” “…” 직설적인 어미의 질문에 희연은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망설인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하면 분명 어미는 속상해 할 것이고 그렇다고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희연은 속내를 털어 놓을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 옅은 미소만 지어 보인다. 어두운 불빛이었지만 강씨 부인은 느낌으로 알 수가 있었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딸의 모습에서 밝은 기색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맹 그렇지! 안사돈 보통이 아인 거를 내 진작에 알아 봤구마. 시어무이 자리가 보통이라야제. 사람심성은 얼굴에 표가 난다고 우째 그래 매섭던지 아직도 그 모습이 안 잊힌다!” “…” “내 잘못이다. 니를 보내고 맴이 편치 않아 내내 찜찜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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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거리고 있었다. “귀한 내 딸내미 시집에서 구박이나 받게 하고 내 잘못이다. 아가! 에미가 미안하다.” 희연은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어미에게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말은 입 밖으로 세어 나오지 못하고 안에서만 맴돌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희연도 강씨 부인도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줄 모르고 마주앉아 서럽게 울었다.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희연은 새벽녘에 건넛방으로 넘어와 잠깐 눈을 붙였다. 밤새 흘린 눈물이 악에 받쳐 강씨 부인은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나뿐인 딸이기에 너무나 사랑스러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곱게 길렀건만, 갑자기 시집을 보내는 것도 안타까웠는데 그 자리마저도 종부로서 책임이 막중한 자리였으니 어린 것이 얼마나 시집살이가 고될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가 있었다. 그러나 몸은 고되어도 마음만은 편히 지낼 거라 믿었었는데 그 믿음에 배신을 당한 기분이다. 어미는 그것이 분통해 딸을 돌려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당장이라도 쫒아 올라가 사부인과 단판을 지을 기세였으나 이미 부모가 된 자식을 제 뜻대로 할 수가 없어 분한 마음만 삭히고 있었다. 희연이 친정에 머무른 지 나흘이 되었다. 오랜만에 찾은 휴식의 시간임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시어미의 눈치가 보이는듯하여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수양딸들이 드나들며 시부모님 잘 봉양하고 있으리란 걸 알지만 그래도 희연은 제 마음이 불편하여 더 이상 친정에 머무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미와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도 못하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 서둘러짐을 챙긴 희연이 어미인 강씨에게 내일 시댁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전한다. 십 년 만에 만난 딸을 이렇게 돌려보내야 하는 어미의 마음은 쓰라렸다. 잠시나마 친정에서 고단한 몸을 쉬어 갔으면 좋으련만 시댁의 눈치를 보는 딸이 못내 안쓰러웠다. 그런 어미의 눈에 사위가 곱게 보일 리가 있겠는가, 시집가는 날 그렇게 당부를 하였건만 제 아내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눈칫밥을 먹이나 싶은 것이 생각할수록 괘씸해 한바탕 퍼붓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사위를 불러 앉혀 야단을 치며 딸을 못 보내겠으니 혼자 돌아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이미 자식까지 놓고 산 부부이기에 차마 가족들과 생이별 시킬 수가 없어 어미는 치미는 화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하여 사위에게 서운한 감정을 접어버리고 어떻게든 딸을 위해 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위를 타이르기로 마음을 돌린다. “박 서방은 요새 무신 하는 일이 있나?” 장모의 뜬금없는 질문에 근호는 당황해 하며 둘러댄다. “예, 장모님! 그냥 머슴들 거들어 농사일 배우고 있십니다.” “그래? 그라믄 올해 수확할 곡식이 얼매나 될지 짐작하고 있게구마.” “예?...아, 예.” 근호는 장모의 물음에 섣불리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린다. “올해는 가물라서 지난해 반이나 될란가?” “…” 사위가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함을 알면서 굳이 속내를 들어봐야겠다는 옹골찬 마음이 들어 장모는 사위를 떠보는 것이었다. “열심히 배워놓게. 논가는 일 이사 차마 양반체면에 못하지마는 그래도 남을 부릴라카믄 내가 먼저 알아야 큰소리를 치제! 모린다하고 마름한테만 맡기지 말고 자네가 나서서 먼저 챙기는 기이 좋을 기다. 지금이야 사돈어른이 계시니까 그래 염려는 없지만 서도 앞으로 자네도 가솔을 거느리야 할 입장 아인가배?  남만 믿지 말고 직접 챙기믄서 일을 배워야 제대론기라. 내 말 알겄제?” “예! 장모님.” "그라고 이거는 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강씨는 말을 꺼내려다 잠시 뜸을 들인다. "한 분 생각을 해보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니까 너무 서운하게는 듣지 말고." "...?" 근호는 장모가 무슨 말을 꺼낼지 잔뜩 긴장을 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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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같은 양반이 농사를 짓는다는 기이 쉽지는 않을 기구마. 해서 혹시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이믄 다른데 갈 생각 말고 자네 처남 공장에서 일 해보는 기이 어떻겄노?” 말은 사위를 위하는 것 같았으나 실은 이참에 딸을 자기 곁에 두려 사위에게 넌지시 분가를 유도해보고자 꺼낸 이야기였다. 장모의 말에 근호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잠시 주춤거리다 대답을 한다. “예. 장모님! 한 분 생각해 보겠습니다.” 장모의 본심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으나 뒤가 켕기는 찜찜함이 느껴졌기에 생각해보겠다는 대답으로 시간을 벌어 보기로 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희연은 일찍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 읍내에 살고 있는 오라비에게 들려 잠시 인사라도 나누고 갈까하여 서둘러 출발을 한 것이다. 포항에서 제법 큰 제재소를 운영하고 있는 오라비. 그의 공장이 근처에 있어 잠시 들러 얼굴만 보고 가려 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혹시 집에 있을까 싶어 집으로 찾아간다. 집안일을 거들어주는 아이가 대문을 열어주어 집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후 올케가 얼굴을 내밀었다. “언니!  잘지냈는교?” 희연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으나 상대는 그리 반가워하지 않는 낯빛으로 겨우 입 꼬리를 올려 반기는 척을 할 뿐, 어색하게 웃는 올케가 희연의 눈에는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친정에 잠시 다녀가는 길이라요.” 희연이 먼저 선수를 친다. “얼매 만인교? 애기씨.” “가는 길에 오라버니 얼굴이나 보고 갈라고 들맀는데. 공장에도 안 계시서 집으로 와봤으요.” “우짜고! 일 때문에 일본에 며칠 다녀온다고 캤는데.” “그래요?” "애기씨 오는 거 알았이믄 며칠 늦게 가라 할긴데. 서운해서 우짭니꺼?" "할 수 없지요.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나 전해주소." "예. 애기씨. 그라지요." "예. 언니도 잘 지내소." "예. 조심해서 올라가시이소." 별다른 볼일도 없고 출장 간 사람을 기다릴 시간적 여유도 없어 희연은 올케에게 안부 인사만을 전하고 서둘러 집을 나서서 기차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잠시나마 행복했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희연의 식구들은 다시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 근호내외와 아이들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간 아들 내외가 뽀로통하게 앉아있는 정씨부인을 향해 큰 절을 올린다. "엄마요. 잘 댕겨 왔네요." "온냐!" 아들의 인사에 무표정으로 대답을 한 정씨는 이어 희연에게 눈길을 보내며 묻는다. "그래 사돈댁은 평안 하시더나?" 희연이 어두운 낯빛으로 대답을 한다. "예. 어머님." "그라믄 됐다. 나가 봐라." 뭐 그리 다정한 고부사이라고 정씨는 며느리를 앉혀 놓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며느리를 밖으로 쫓으려 한다. 근호는 어미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고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있고 희연은 안방을 나와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그 동안 자신을 대신하여 살림을 맡아 왔던 복순 네가 희연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반긴다. “우째 이래 일찍 오싰는교? 며칠 더 기실 줄 알았는데.” "시부모님 계신데 집을 오래 비울 수가 없어서 그냥 왔네" "머가 걱정 입니꺼? 봐 줄 사램이 없어서요?" "자네를 믿고 간긴데 그거 때문은 아니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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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씨 친정 부모님들께서 서운해 하싰겄네요." 희미한 미소가 희연의 얼굴로 번졌다. 떠나올 때 보았던 아비의 병든 모습과 어미의 눈물에 희연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며칠만이라도 부엌에서 벗어나 자유로웠었는데 다시 일상으로 돌아 온 희연의 생활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시부모를 위한 밥상을 차리고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여독 탓이었는지 오랜만에 몸을 움직인 탓인지 이내 자리에 누워 잠에 곯아 떨어져 버렸다. 다음날, 비어 있는 물통에 물을 길러 희연은 항아리를 들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물가에는 이미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물을 긷고 야채를 씻고 빨래를 하고 있었다. 희연이 물가로 다가가다 뭔가 어색함을 느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며칠만 집을 비웠을 뿐인데 이곳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있었다. 희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안부를 물었다. “정옥 엄마 왔네. 친정 갔다 하던데 언제 왔노?” “어제요.” “간짐에 며칠 푹 쉬다 오지 뭐 그래 바쁜 일 있다고 그든새 왔드나?” "닷새믄 충분하지요. 그란데 샘이 우째 된깁니꺼?" 아까부터 유심히 살피던 희연의 눈동자가 마을 사람들을 향해 고정되었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이 웃고 있었다. “정옥 엄마 없는 새에 어르신이 마을사람들 위해 우물로 만들어 주싰다.” “우리 아버님이요?” “그래! 인자 물이 옛날같이 않고 자꾸 더럽어진다꼬 걱정을 하시더만 아무래도 안되겠다 카믄서 인부 몇 사람 불러다가 공사를 하싰제.” "어르신께서 이래 신경을 써주시이까 우리가 맴놓고 머든 할 수가 있는 기라." 공사를 하였다는 샘은 이제 우물로 그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정방형의 샘 주위로 어린아이 키 높이 정도의 축을 쌓아 올리고 가장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둥을 세워 그 위로 단청을 입힌 지붕이 놓여 있었다. 지붕 아래로는 줄을 길게 메달은 두레박들이 우물까지 떨어지도록 줄 아래에 걸려 있었고 우물을 덮는 뚜껑까지 만들어 물이 깨끗하게 유지되도록 하였다. 우물 주변에는 시멘트를 고르게 펴 발라 평평한 바닥을 만들어 놓았고 안쪽에는 물을 받아 나물이나 채소를 씻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고 흘러내리는 물은 수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와 널찍한 함지 모양의 움푹 파인 돌그릇에 고이게끔 되어 그곳에서 빨래를 할 수 있도록 빨래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주변이 지저분했던 옛날 샘과는 다르게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는 우물을 보며 사람들은 입이 함박 벌어졌다. 희연은 단청을 입혀 놓은 지붕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근호는 처갓집에서 돌아온 이후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쯤은 그저 집에서 쉬려나 생각했으나 며칠이 지나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어 희연은 남편이 어디 아픈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방으로 들어와 묻는다. “어디가 아픈 기요?” “…” 근호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아내의 물음에 대꾸는 하지 않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한 시선을 드리우며 희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처를 부른다. “임자.” 불러놓고는 말을 잇지 않고 한 참 뜸을 들인다. “…” 희연 또한 대답대신 물끄러미 근호만 바라보고 있었다. “임자! 내가..." "..." "임자 그 동안 시집살이 고생이 많았제?”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 희연은 대답을 않고 가만히 듣고 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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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 말씀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 또 한참 뜸을 들이고 나서 근호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희연을 바라보며 진지한 투로 묻는다. “이 참에 우리도 분가 해보는 기이 어떻겄노?” 생각지도 않은 말을 내뱉는 남편이 신기해 희연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우짠 일로 그런 생각을 했으요?” “임자 고생하는 거 보이 내 맘이 편치 않아 그란다. 내가 그 동안 너무 무심했던 것 같고 나도 이분에 많은 것을 깨달았다. 장모님 역정 내시는 것도 다 이해가 가더라.” “내 아침밥상에 뭐 잘못 올린 거 있었으요? 갑자기 와 헛소리를 하는 기요?” 근호는 희연의 핀잔에도 발끈하지 않고 묵묵히 생각을 정리한다. “어떻노? 우리끼리 한 번 살아 볼라나?” 희연이 근호를 향해 몸을 돌리며 정색을 하고 묻는다. “부모님은 우째하고요?” “그거사 뭐 돌봐줄 사람이 한둘인가? 복순 네도 있고 다른 수양딸들도 드나들고 있으니까 설마 두 분 모시는 일이야 못하겄나!”. “이핀이 행여나 그래 하겄소?” “그럼 나도 할 수 있제." “이핀이 어머님을 떨어져 살수 있을라꼬요? 어머님보다 이핀이 못살기요. 그라고 어머님도 못 가게 하실 깁니다.” 희연은 어림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기에 기대조차 않고 근호의 기를 꺾어버린다. “그야 그렇겠지만... 그래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되지 않겠나?” “…” “나도 인자 엄마 곁을 좀 떠나보면 어떻겄나 싶다. 동생은 포항 가서 자리 잡고 잘 사는데 나라고 못하라는 법은 없지!” “서방님하고 이핀은 다르지요.” “다르긴 뭐가 다르다는 기고?” “이핀은 어머님 없이는 못사는 사램이요. 어머님 곁을 떠날 용기가 없다는 거지요.” “쳇!” 자꾸만 무시를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근호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사실 희연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실상 어미의 곁을 한 번도 떠나 본적이 없고 가솔들을 책임지는 일에 크게 자신이 없는 지라 마음만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희연은 그런 남편이 그리 미덥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편의 편을 들어 주려 운을 띄운다. “정이 생각이 그라믄 이핀 뜻에 따를 기이 한 분 어른들께 말씀이나 드리보소.”  여전히 근호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며칠을 또 다시 고민에 빠져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방구석만 지키고 있는 남편을 희연은 그러건 말건 이미 속으로 포기를 한 상태라 며칠 저러다 말겠지 싶어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근호가 꼼짝 않고 방에 틀어박힌 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상을 물리고 출타 준비를 하는 아버지를 뵙겠다며 사랑채로 들어갔다. 근호가 아비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꺼낸다. “아버지! 지도 분가 할 랍니다.” “…?” 뜬금없이 내 뱉은 아들의 말을 이해 못한 것은 아니나 어떤 이유로 그런 발언을 하는지 아비는 궁금하여 대답을 못하고 아들의 표정을 살피고만 있었다. “아버지 허락 받으러 왔십니다.”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며 당주가 물었다. “농사일 배우는 기이 힘들어 도망치고 싶어서 그라는 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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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입니다. 그런 기이 아이고 지도 인자 가장아입니까? 가장으로서 지 식구들 책임지고 살아 볼라꼬요.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 부산으로 살림을 날까 합니다.” “부산에? 그래 부산가면 누가 살게 해 준다 카더나?” “그거는 아입니다.” “그라믄 살 길도 없는데 우째 부산을 가겠다는 기고?' “그래서 말씀인데 아버지가 좀 도와 주싰으면 합니다. 지 취직 좀 시켜 주이소.“ “아범이 그런 생각을 다 하고. 모를 일이구마! 혹여 어멈이 그러자고 한 거냐?” 여태껏 부모의 품에 기대어 살았던 아들이 하루아침에 변한 것이 못 미더워 당주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런 결정을 내린 아들이 이제 서야 철이 드나 싶어 반갑기는 했으나 과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제대로 지켜질지 당주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요! 실은 장모님께서 할 줄 모르는 농사일 하는 것 보다는 처남 공장에서 일을 해보는 기이 어떻겠냐고 하시 길래 지가 생각을 해 본다고 대답을 드리긴 했는데 그보다는 지 힘으로 취직해서 일 해보는 기이 나을 것 같아서 그래 정했십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마." "예에." "니 생각은 그렇다 캐도 문제는 니 에미가 허락을 하지 않을 긴데, 우짤 기고?" “지가 말씀 드리고 허락 받을 깁니다. 아버지도 지를 좀 도와 주이소." 한 번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던 부자간, 처음으로 당주의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 아들이 기특해 아비는 힘을 실어 주기로 한다. 그렇게 부자지간에 합의를 보고 난 후 근호는 내친김에 어미를 찾아 안방으로 들어선다. “엄마요! 지가 허락 받을 일이 있는데...” 섣불리 말을 잊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아들의 눈치를 보며 정씨부인은 인상을 찌푸린다. 보아하니 필시 또 자신을 언짢게 만드는 이야기를 꺼낼 거라 짐작하여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엄마요! 있잖아요..." “뜸 딜이지 말고 퍼뜩 말해 보그라.” 근호는 결심한 듯 결의에 찬 눈빛으로 정씨부인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우리... 살림날까 합니다.” "아범. 지금 머라캤노?" "지 분가할깁니다."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아들의 대답을 확인했던 것인데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분가라는 말에 정씨부인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노기 서린 눈을 부라리며 아들에게 소리 쳐댄다. “와! 니 처가 시집살기 싫다카더나?” “그런 기이 아이고 내가 농사일 못하겠으니 그라지요.” “누가 애비 보고 농사일 하라캤나? 애비 아니라도 농사지을 사램 천진데 누가 거들라 했드나?" “그것도 안하고 허송세월만 보낼 수는 없잖아요?” “허이구! 언제 니가 그래 집안에 관심이 있었드노? 사내가 여편네 치마폭에서 놀아나는 꼬락서니하고는.” 자신의 허물은 생각을 않고 애먼 며느리만 잡고 늘어진다. “내가 언제 정옥 에미 치마폭에서 놀아 났으요?” “니가 지금 하는 꼴이 안 그렇나!.” 어미의 심정을 더는 노하게 하는 것이 마음 아파 한풀 꺾고 근호는 어미의 마음을 달래 주려 한다. “엄마요! 그마 역정 내시고 허락 해주소. 지도 가장 노릇은 해야 할 거 아입니까? 천날 만날 빈둥대고 재물만 축내고 살 수 는 없어서 그래서 결심하고 말씀 드리는 깁니다.” 아들의 기세가 한풀 꺾이니 어미의 마음도 조금은 수그러들어 이성을 찾은 듯 했다. “그라믄 살림나서 농사일 안하고 뭐 먹고 살라꼬?” “부산으로 가서 일자리 구할라꼬요.” “일자리 준다 카는 사람 있드나?” “그거는 아이고 아버지가 일자리 알아 봐 주신다고 했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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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아가 치민다. “얼씨구. 아주 부자가 장단 척척 잘 맞춰가며 자알 논다. 결론까지 지어 놓고서 허락은 무신 허락. 이기이 통보지 허락이가!”  기껏 눌렀던 감정에 다시 기름을 끼얹듯 부자지간의 소행에 배신감을 느낀 정씨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애탕기탕하고 키워났더만 에미를 무시하고 니가 그라믄 안 되는 기라. 알겄나?” “엄마요! 그라지 마소. 지한테는 엄마밖에 없으요.” “그런 놈이 에미 곁을 떠나겠다는 기가?” “억지 부리지 말고 허락해 주이소. 저도 살아 볼라고 그라는 거 아닙니까?” “…” 정씨부인은 아들의 말을 묵인해 버린 채 이마를 짚고 돌아앉는다. 늘 상 아랫목에 깔려 있는 보료 위에 몸을 누이며 코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근호는 돌아누운 어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니 맘대로 해라. 내는 인자 니랑은 인연을 끊을 란다.” 어미의 협박 아닌 협박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근호는 맥없이 일어나 안방을 나온다. 한참 동안 어미와 치른 실랑이에 지쳐 방으로 들어서 곧장 쓰러져 누웠다. 억지를 부리는 어미를 어찌 달래 드려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안방의 정씨부인 역시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지를 않고 있었다.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가고 고요에 찬 집안 분위기는 너무도 싸늘하여 희연은 더욱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했다. 남편이 그리 대세게 나갈 거라 생각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강하게 밀어붙인 것이 한편으로는 새로운 희망이 되는 것이었으나 그에 따른 행동의 여파는 부메랑이 되어 만만치 않게 희연에게로 되돌아 올 것이다. 희연은 그것을 알기에 더욱 몸을 낮추어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 이후 시모는 며느리에 대한 구박이 더욱 심해졌으며 아랫사람들조차 무안해 할 정도로 심사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들의 기를 꺾고자 곡기를 끊고 물조차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는지, 며느리가 들여가는 밥상마다 족족 엎어버리는 것이다. 며칠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버티는 시어미를 잘못하다간 송장 치를 판이라 희연이 시모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한다. 희연이 아무리 사정을 하고 애원을 해도 정씨부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아들이 변한 것이 너 때문이라며 도리어 악을 쓰고 막말을 해댄다. 아내가 어미에게 당하는 모습을 하루 이틀 지켜보는 것도 낯 뜨거워 더는 미룰 수 없다 생각을 한 근호는 결심을 세웠다. “엄마요! 인자 그만하소. 아무리 그래도 지는 분가 할랍니다. 엄마가 정옥애미를 그래 미워하는 줄은 몰랐십니다. 이사람 불쌍해서라도 지는 분가 할깁니다.” “하이구야! 내 아들 근호 어데갔노? 니는 내 아들 근호가 아이다. 퍼뜩 내 아들 내놓그라.” “억지 그만 부리소! 그래 봤자 아무 소용 없십니다. 지는 결심했십니다.” 베고 있던 목침을 아들을 향해 던진다. 먹은 것이 없어 속이 허하고 힘이 없어 제 손에 던져진 목침은 다행히 근호 쪽으로 날아들지 않고 그 앞에 힘없이 떨어져 아들이 다치지는 않았다. 순간 모자는 서로의 행동에 잠시 겁을 먹었다. 그래도 정씨는 눌리는 기색 없이 큰 소리로 악다구니를 쓴다. “이 망할 놈의 자석! 오냐 그래 니 맘대로 해라. 오늘 부로 니는 내 자식 아이다. 가라 가! 가버리란 말이다.” 기운을 빼고 억지로 버티고 있는 어미에게 근호는 큰절을 올리고 돌아서서 나온다. 한바탕의 소동이 멎고 근호는 방으로 건너와 짐을 싸기 시작한다. 그런 남편을 희연이 말리며 달랜다. “이렇게 갈 수는 없는 법이요. 어머님 곡기도 끊으시고... 이라믄 이핀 맘도 편치 않을 긴데 대체 와 이라요?” “걱정마라! 우리 엄마 강하신 분이다. 내가 떠나는 기이 우리엄마 살리는 길이라서 서두르는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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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억지소리가 어딨으요?” “임자는 몰라도 된다.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따라 온나.” 이해 할 수 없는 말만 해대는 신랑을 말릴 수도 없어 희연은 그대로 내버려 둔다. 짐을 꾸리고 근호는 사랑채로 넘어가 아비와 둘만의 비밀인 양 한참을 소곤거리고 하직인사를 드리고 사랑채를 나왔다. 사랑채에서 건넌방으로 들어서려다 근호는 불이 꺼져 있는 안방 방문을 힘없이 바라보며 한숨을 토하고는 그곳에서 눈길을 돌려 어둠이 몰려든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에 가린 달이 어스름 비치고 오늘따라 유난히 빛나는 별들이 초롱초롱 빛을 발하며 근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비의 도움을 받아 얼마만큼의 자금을 손에 쥐고 부산으로 내려온 근호와 희연은 집을 얻고 필요한 최소의 살림살이를 사다 날랐다. 아비에게 부탁해 놓은 일자리가 금방 나서서 짐을 정리하고 며칠 되지 않아 근호는 비누 공장에 취직도 하게 되었다. 희연은 아직도 어리둥절하였다. 눈을 뜨면 시작되는 고된 시집살이와 시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이 꿈만 같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무리수를 두고 떠나온 시댁이 마음 한 구석에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묵직했으나 그 반면 오롯이 제 가족만을 위해 살 수 있다는 기쁨에 다시 마음이 들뜨는 것이었다. 이렇게 두 마음이 가끔씩 충돌을 일으켜 희연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처음 며칠은 적응하기 힘들어 애를 먹었으나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일상으로 접어들면서 혼란스러운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이제는 시댁 일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공장에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밥을 짓고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챙기며 그렇게 가족들 뒷바라지 하며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면서 희연은 이것이 꿈만 같아 깨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내복에도 이런 날이 있구나. 행복이 별꺼가! 이래 맘 편하고 재미있으면 그기이 행복이지! 제발 이 행복이 오래가기를 바라는 구마.' 그렇게 속으로 빌어본다. 자신의 행복이 어떤 풍파에도 깨지지 않고 견고하게 견뎌 주기를. 언제나 손님들이 북적이던 종가와 다르게 부산에서의 삶은 단출하지만 재미가 있었다. 어느덧 한 달이 지나고 근호가 월급봉투를 들고 들어와서는 희연에게 내민다. 처음으로 신랑에게 받아보는 돈 봉투라 그런지 믿어지지가 않아 두 손에 받쳐 들고 가슴에 품었다 내었다 다시 들여다보며 신기한 듯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아내의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근호 또한 뿌듯함을 느끼며 살며시 미소를 머금는다. 근호가 일하는 비누공장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공장이라 거기에 소속된 직원들의 살아가는 방식도 모두 일본식이었다. 한 달 동안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필요한 물자를 먼저 제공하여주고 월급을 타는 날에 제공 받았던 것들에 대한 값을 치르는 일명 외상이라는 거래방식으로 모두가 생활을 해나가다 보니 크게 돈을 들이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는 별 어려움 없이 지낼 수가 있었다. 희연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생활 하다 보니 이제는 마음의 여유도 생겨나 제대로 사는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십여 년의 세월을 종부로 지내면서도 어느 한 가지 제 맘대로 살림을 해본 일 없이 모든 것을 시모가 주도하는 대로 따랐을 뿐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을 내세워 본적이 없었기에 지금의 생활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평온하고 달콤하기만 하였다. 그렇게 편안함 속에서 아이들과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면서 희연은 문뜩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들 돌보는 일 외에 집안에서 별달리 할 일 없어 손을 놓고 있을 때가 많아지면서 자신도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있으니 떠돌이 장사는 힘들 것이고 곰곰이 생각하다 저녁에 퇴근하고 들어온 남편에게 희연은 의논할 일이 있다며 의논거리를 내어 놓는다. “내도 장사 좀 해볼 라고 하는데요.” “임자가 무신 장사를 한다꼬. 아아들은 우짜고?” “그래서 말인데 이핀이 공장에서 빨래비누를 좀 갖다 주소.” “빨래 비누는 머할라꼬?” “집 앞에다 좌판 펼쳐 놓고 동네사람들 상대로 장사를 좀 해볼까 해서요. 떠돌이 장사도 아이니까 아아들 돌봐가믄서 할 수 있겄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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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돈이 부족해서 그라나?" "그기이 아이라 집에서 아무 할일 없이 지내는 기이 답답해서 그라요."  “알았다. 그라믄. 이핀이 한다카이 하게 해주야제.” 두말없이 자신의 의견에 찬성을 해주는 남편이 새삼 다시 보인다. 분가를 한 것이 이렇게 사람을 바꿔 놓을 줄이야 짐작도 못했는데 자신에게 다정하게 구는 남편을 보며 정이 새록새록 생겨나는 것만 같았다. 신혼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십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느껴보니 지금의 삶이 희연에게는 모든 것이 행복이요 꿈만 같았다.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너무도 행복한 꿈에 희연은 취해 있었다. 저녁이 되어 퇴근하여 들어오는 근호의 손에는 빨래비누 한 상자가 들려져 있었다. 희연이 남편의 손에 들린 비누상자를 내려다보며 입 꼬리를 올렸다.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웃고 있는 아내를 보며 근호 또한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임자가 부탁해서 가지고 오긴 했는데 팔리기나 할라나?” 상자를 내려놓으며 근호가 의심스럽게 묻자 희연이 당당하게 대답을 한다. “내 생각에는 잘 팔리지 싶은데요. 우찌됐든 간에 함 열심히 해볼 라요.” 기대에 찬 희연은 비누상자를 바라보며 의지를 보였다. 다음날 아침, 희연은 남편이 출근을 하자 바로 집을 나와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주워 모은 나무판자를 잘 다듬어 좌판을 만들어 집 앞에 펼쳐 놓고 그 위에 빨래비누를 올려놓고는 손님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말주변이 있는 장사치도 아니요 사교적인 성격이 되어 사람이 붙는 것도 아니요 주인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좌판만 지키고 앉았고 그저 좌판에 펼쳐 놓은 빨래비누만이 나 좀 보소 무언의 소리로 지나는 행인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그냥 지나기를 여러 번 한 사람이 좌판 앞에 서서 머뭇거리다 비누를 집어 들고 가격을 물어보더니 셈을 치고 가버린다. 그러는 사이 좌판 앞에 몇 사람이 붙어 서더니 하나씩 빨래비누를 집어 들고 셈을 치르려 한다. 희연은 얼떨결에 비누를 건네주고 돈을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그렇게 한 장 두 장씩 비누가 팔리고 주머니에 돈이 한 푼씩 모이는 것을 보며 기뻐하게 되었고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장사에서 재미를 맛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삶에 만족을 느끼는 부산에서의 생활에 틀을 잡아 가기 시작할 때쯤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분가하여 처음 맞는 명절인 것이다. 희연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벌씨러 명절이 코 앞 이구마. 분명 고향에 가자고 할긴데... 우째야 하노?' 종갓집 종부가 되어 안 갈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노기에 찬 시어미의 눈빛을 대할 것을 생각하니 아직 마주하지도 않았는데 덜컥 겁부터 난다.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음인 것이다. “머하노? 사람이 들어오는데도 기척도 못 듣고.” “왔으요.” “무신 일 있었나? 임자 표정이 안 좋네.” “…” 남편이 묻는 말에 대답을 회피하고 방을 나가 상을 차려서 들어온다. 먹는 밥이 체할 것 만 같아 숟가락이 올라가지 않는다. 희연이 밥을 먹다 말고 밥상에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아내의 행동에 아무래도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근호가 묻는다. “임자 무신 걱정 있나?” “벌써 추석 이라요.” “그란데?" “이핀은 내속 모를 기요.” “아이구 답답해라.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봐라.” “명절에 어른들 찾아뵈어야 하는 기이 겁이 나서 그랍니다. 어머님 눈에 내가 우째 보이겄십니꺼?” “…” “그 난리를 치고 내려왔으이 얼마나 벼르고 계실지 내는 두렵구마요.” “그래도 가야제. 장손이 돼서 객지 생활한다고 명절에도 집안을 찾지 않는 거는 말이 안 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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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 나더라도 가야지를.” “이핀은 아들이니까 괜찮지요. 가뜩이나 사이 안 좋은 고부간인데 그기이 말처럼 쉬운 기이 아이라요.” 속을 몰라주는 남편이 야속해 희연은 토라져 앉는다. 그렇게 밥숟갈을 내려놓고 저녁밥상을 물리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버렸다. 야속한 세월은 어김없이 원망의 시간을 끌어다 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잡아매어 놓았다 명절을 건너뛰어 풀어 놓고 싶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저 흐르는 시간을 원망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추석을 하루 앞두고 근호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이 났는지 벌써 모든 채비를 끝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은 신이 나서 빨리 가자며 재촉을 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희연의 맘을 알리 없이 각자가 기분에 들떠 있는 가족들을 보며 희연의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세어 나왔다. "임자. 준비됐으면 우리도 출발하자." 희연이 미적거리고 있자 근호가 다그친다. "아버지. 빨리 가요. 빨리요." 아이들은 신이 나서 아비를 졸라대고 그 바람에 근호는 아이들을 앞세워 먼저 대문을 나섰다. 희연은 끌려가는 소 마냥 뒤에 처져 무거운 발길을 옮겨 놓는다. 앞서 나간 남편과 아이들을 쫓아 힘없는 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따라가다 앞서 걸어오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정옥 엄마! 그래 곱게 차려 입고 어데 가노?” 거리를 두고 걸어가는 희연을 불러 세운 이는 옆집에 사는 포항 댁이었다. “…” 희연이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다. “명절이라 고향 가나 보네.” “예.” ”그래 잘 갔다 오소.” “예에! 명절 잘 보내소.” 짧은 인사를 나누고 저만치 멀어진 식구들의 그림자를 쫓아 다시 발길을 옮겨 놓는다. 어느새 걸음은 기차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역 안에는 각자 고향으로 출발을 하기 위해 나온 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두가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가족들과 더불어 자신들을 고향으로 데려다 줄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호와 아이들도 기차를 기다리며 기분이 들떠 있었다. 경주로 향하는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서고 드디어 아이들과 남편이 먼저 기차에 올랐다. 희연도 뒤를 이어 기차에 올랐다. 자리를 잡고 앉자 기차는 이내 출발을 하기 시작하였다. 유리창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눈이 부시었다. 때로 얼룩진 창밖으로 눈길을 돌린 아이들은 신이 나서 창틀을 잡고 조잘거리고 딸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아비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인다. 부서지는 햇살이 얼굴에 와 닿자 희연은 눈 쌀을 찌푸리며 무심하게 창밖을 내다본다. 스치는 창밖으로 바라보는 가을 들판은 노랗게 익어가는 벼들로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황남리 종택에는 드난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마름 배서방은 드나드는 작인들과 입씨름을 하느라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작인들이 가지고 온 농작물을 머슴 동댕이와 쇠돌 아범, 그리고 장쇠가 달라붙어 비어있는 곡간 한 켠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복순 네와 더불어 근처에 사는 수양딸들이 찾아와 차례준비를 위한 음식장만을 하느라 부엌을 오가며 분주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문간방에도 수양딸들의 서방 몇몇이 모여 제상에 올릴 제기를 꺼내어 놓고 윤이 나도록 닦고 있었고 다른 몇몇은 사당 안팎을 쓸고 닦으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종택은 명절맞이를 하느라 어수선하고 분주하기만 하였다. 불과 몇 개월간 떠나있었던 고향이기는 했으나 돌아오는 발걸음에는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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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으로 들어서는 근호와 아이들의 발걸음은 이미 들떠있는 듯 했다.  아이들이 마당 안으로 먼저 뛰어 들어가자 근호도 신이 난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로 향했다. “할아버지 정옥이 왔어요!” “할아버지 찬옥이도 왔어요!” 신이 난 아이들이 사랑채 댓돌 위에 신을 벗어놓고는 툇마루에 올라서서 당주를 힘차게 부른다. 아이들 소리에 방문을 열고 선 당주의 주름진 얼굴위로 인자한 미소가 번지고 반가움에 손녀들을 보듬어 앉는다. “아이구! 우리 정옥이 찬옥이 왔나? 못 본 새에 이래 컸구마!” “예!” 아이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대답이 흘러나온다. 근호의 가족 모두가 오랜만에 당주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래! 그 동안 고생 안 했나?” 여전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에게 안부를 묻는 당주. 근호는 아비를 바라보며 대답을 한다. “아입니다. 편하게 잘 지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그간 평안 하싰습니까?” 당주는 아들내외가 떠나던 날을 떠올리며 정씨부인의 안부를 아들내외에게 전해 준다. “니가 그래 떠나고 며칠을 눈물바람으로 지내 더만 며칠 안 가서 자리 털고 일어나더라. 아매 지금도 심통은 좀 났을 기다만 그래도 여태 잘 지내고 있다. 걱정 될 긴데 건너가 봐라.” 그 말을 꺼내며 당주는 며느리의 눈치를 살폈다. 들어 올 때부터 얼굴색이 밝지 못한 며느리를 보면서 그녀가 시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며느리에게는 가혹한 명절이 되겠지만 그래도 그 것을 잘 참아 내기를 바라며 당주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며느리를 응시했다. 사랑채에서 물러나와 안방으로 발을 들여 놓은 희연의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그저 남편 옆에서 숨죽이고 있으면 되겠거니 하고 마음을 다지지만 떠날 때보다 더 험악해진 분위기에 눌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희연이 그러건 말건 정씨부인은 며느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방안에 오직 아들과 자신만이 존재하고 있다고 최면을 건 듯, 한 사람의 존재는 아예 무시해버렸다. 그런 마음을 알 길이 없는 며느리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몸을 움츠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엄마요! 그간 편안 하셨십니까?” “니 눈에는 이기 편안해 보이나?” “그래 떠났던 것은 지가 잘못했십니다. 용서해 주시이소.” “시끄럽다. 꼴도 보기 싫으이까 건너가라.” 부모자식 간에 인연을 끊겠다던 협박은 말 그대로 협박에 불과 했던 것인가, 그 난리를 치면서 패악을 부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잘못한 자식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어미의 심정으로 정씨부인은 아들을 곱게 놓아준다. 식은땀을 흘리며 남편의 옆에 기죽어 앉아 있던 희연은 한바탕의 난리가 날것을 예상하고 그것 또한 자신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며 굳게 마음을 다지고 있었건만 뜻밖의 시모의 태도에 되려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시모의 입에서 건너가라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일어서는 남편을 따라 희연은 방을 나오면서도 자꾸만 뒤가 돌아 보인다. 그 엄청났던 사건의 여파가 너무도 가볍게 마무리가 되어 보이는 것이 희연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시는 기이 더 불안하다. 내가 우째야 좋을 지 모리겄다. 이라다가 당장 내일 아침에 또 불호령 떨어지는 거는 아닌지, 참말로 불안해 죽겄네. ' 희연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하였다. 추석날 아침. 종택답게 여기저기서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포항에 살고 있던 둘째 아들 내외도 명절을 새러 고향을 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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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부터 제상 준비가 한창이라 수시로 음식들을 나르며 분주히 사람들이 오가고 준비가 끝나자 이어 당주를 비롯하여 종친들과 친인척들이 사당에 들어서 제를 지낸다. 사당 안은 향냄새가 그득했고 자못 진지하고 엄한 분위기가 주위를 싸고 있었다. 차례를 지내고 사랑방에 모여 앉은 종친들과 친척 어른들은 오랜만에 모여 이야기꽃이 한창이었다. 상을 차려 나르기가 바쁘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찾아오는 이들이 줄을 잇고 희연을 비롯하여 아낙들은 종일 부엌에서 서성이며 상차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때를 제때 챙기지 못한 아낙들은 부엌에 서서 푸짐하게 차려 놓은 음식들을 손으로 주섬주섬 집어먹으면서 고된 하루의 허기들을 달랜다. 이런 날이 아니면 먹지 못할 음식들이 눈에 아른거려 아이들도 먹을 것을 손에 쥐고 왔다 갔다 하며 부엌을 쥐방울 드나들 듯 들락날락 거리고 있었다. 명절은 그렇게 푸짐한 인심과 더불어 시끌벅적하게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낯빛이 누렇게 빛나는 둥근 보름달을 보며 저마다 한 가지씩 소원을 비는 것으로 마지막 행사를 치르고 손님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명절 준비를 도왔던 수양딸들도 그네들이 준비했던 음식들을 한 소쿠리씩 챙겨 들고 안주인에게 인사를 올리고 고된 몸을 누이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집안에 남아있던 이들은 분주하고 고되었던 하루의 고단함을 풀기 위해 정리를 마치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종부도 마지막 마무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무탈하게 넘어간 하루를 감사하며 아이들과 남편 곁에 피곤한 몸을 누인다. 무사히 지나간 하루가 감사하며 불벼락이라도 맞을 각오를 했던 마음도 내려놓고 희연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다음 날, 고요한 집안에 드디어 한바탕 난리가 일었다. 무슨 연유에서였던지 이틀을 며느리에게 군말 않고 잘 참고 있었던 시어미의 심청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부엌에서 일하는 며느리를 불러내 필요치도 않은 물건들을 찾아 놓으라며 정씨부인은 희연을 볶아대기 시작했다. 시모의 한마디에 안절부절 못하며 집안 구석을 뒤져 시모 앞에 대령시키자 이것이 아니라며 다시 다른 것을 찾아오라 하고는 또 그것을 가지고 나오면 그것도 아니니 다시 가서 찾아오라는 둥 엉뚱한 주문을 계속 해댄다. 한마디로 며느리를 골탕 먹이자는 심사였다. 그런 시어미의 심통에 속아서 희연은 반나절을 집안에서 뺑뺑이 돌고 있는 중이었다. 정씨부인은 그렇게 며느리의 혼을 쏙 빼놓고선 일 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오히려 큰 소리를 쳐댄다. “쯧쯧쯧! 시키는 일 하나도 제대로 못하나?” “그게 아니라...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거를 지가 아무리 찾아도 안보입니다.” “객지 나가 살더만 이자는 시에미 말도 우습드나?” 정씨부인이 선수를 치며 며느리의 입을 막아 버린다. “…” 아무 말 못하고 두려움에 망부석이 되어버린 며느리의 모습에 인상을 구기고 있다 그녀의 손에 든 것을 바라보며 실소를 자아냈다. “니 손에 들고 있는 기이 머꼬?" 희연이 시모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손에 들려진 물건을 내려다본다. 좀 전까지 그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것이 제 손에 떡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희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쳇! 이자는 눈도 안 보이는 구마. 밉다 밉다카이 떡 사묵으믄서 서방질 한다카더만 우째 저래 맘에 안 드는지 모리것다. 내 전생에 무신 업보라 며느리 복도 없일꼬.” 시모는 혀를 차며 안방에 들어가 방문을 세차게 닫아버린다. 정신을 놓고 있던 희연이 다리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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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희연이 시모에게 구박을 받으며 혼 줄이 나고 있는 것을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까 몸을 사리며 몰래 숨어서 지켜보던 작은 며느리가 사랑채로 쫓아 들어와 시부를 찾는다. 오랜만에 모인 두 아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당주는 작은 며느리가 쫓아와 이르는 얘기를 듣고 큰아들과 함께 안마당으로 건너온다. 희연이 한참을 시모에게 꾸중 듣는 모습을 지켜보고 선 두 사람. 고부간의 갈등에 집안 식구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희연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변함없는 어미의 행동에 화가 난 근호가 큰소리로 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안마당으로 나선다. 당주는 혼 줄이 빠져 쭈그리고 앉아있는 며느리에게 다가서서 며느리를 다정하게 부른다. “아가야!”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멍한 눈길로 쭈그려 앉아 있다 부르는 소리에 힘없이 일어선다. 당주의 입에서 한숨이 세어 나왔다. “니가 얼마나 시에미가 무서웠으면 눈에 허깨비가 다 보있겠노? 보는 내가 더 안쓰럽구마.” 잔뜩 찌푸린 얼굴로 다시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며느리를 바라본다. “이 일을 우째 감당해야 하노?” “…” 근호는 화를 참으며 아이들을 찾아 앞세우고 희연에게로 다가와 큰소리로 명령한다. “정옥아, 찬옥아! 그만 집에 가자. 방에 들가서 옷 갈아 입그라.” 아이들은 아버지의 격앙된 음성에 겁을 먹고는 쭈뼛거리며 아비가 시키는 대로 방으로 들어간다. “임자도 그만 하고 부산 가게 짐 챙기라.” 희연은 막막한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고 가만히 서있었다. “아버지! 여서 하직인사 드리고 우리 식구는 부산으로 내리 갈랍니다.” “…” 당주도 말이 없었다. 자신의 마음도 이리 불편한데 아들인들 오죽할까싶어 그 맘을 헤아려 돌아서서 사랑채로 발길을 옮긴다. 아들의 화난 목소리를 방안에서 듣고 있던 정씨부인도 화가 치민다. 멍하니 서있는 희연의 손목을 잡고 끌다시피 방으로 들어선 근호는 서둘러 짐을 꾸리고 아이들을 앞세워 방밖으로 나왔다. 건넛방 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에 벌떡 일어난 정씨부인이 안방 문을 열고 튀어나온다. 어미도 모른 채하고 신을 신고 아이들을 앞세우고 나서는 아들을 보며 어미는 분을 삭이지 못한 목소리로 억지를 쓰기 시작한다. “아이구! 내 아들이 인자는 에미도 모른 채 하고 지 마누라 자식만 챙기네. 변해도 단단히 변했구마. 이 일을 우짜면 좋노.” 어미는 분에 못 이겨 주저앉아 한 손을 치켜들어 마룻바닥을 내려치며 통곡을 한다. “아이구 저 불여시! 내 아들 뺏아간다. 내 아들 뺏아가. 이자 나는 누구를 믿고 사 난 말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내 팔자야.” 치켜들었다 바닥을 내려치는 손을 따라 몸이 앞뒤로 흔들리고 연신 신세한탄에 울먹이며 애꿎은 마루만 두들겨댄다. 그런 어미의 행동을 무시한 채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근호는 식구들을 대리고 집을 나와 부산으로 향하였다. 후회와 원망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고자 입을 꼭 다문 채 눈을 감았다. 남편의 심란한 표정을 바라보며 희연 또한 마음이 심란해 먼 창 밖 너머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살림이라고 장만한 것이 고작 궤짝 몇 개와 부엌살림이 전부이기는 했으나 시어미의 눈치를 벗어난 부산에서 생활은 부러울 게 없을 만큼 행복했었다. 그 행복에도 먹구름이 끼고 있음을 희연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본가를 다녀온 이후 남편이 예전과는 다르게 말 수도 줄어들었고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자 희연은 자꾸만 남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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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이라 하루 종일 방안에 틀어 박혀 있던 근호는 추석에 일어난 사건들을 되새김질하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처음 분가 얘기를 꺼내고 떠나 올 때 패악을 부리던 어미의 모습, 그리고 명절이라고 찾아간 본가에서 환영은커녕 박대만 받고 돌아온 생각을 하니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분가를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살았더라면 고부간의 갈등이 조금이나마 사그라져 있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행동을 자꾸만 후회를 하게 되었다. 희연은 전과 다르게 말수가 줄어든 근호를 걱정하며 눈치를 살피다 넌지시 물었다. “정옥 아버지! 요새 무신일 있는가요?” “…” “말을 해보소! 이핀이 그래 입 다물고 있으이 내가 불안해 미치겄소. 어디가 아픈기요?” “그래. 요새 여어저어가 다 아프구마.” 한숨을 내쉬며 아내의 묻는 말에 성의 없이 대답을 한다. 아프다는 말에 놀란 희연이 바짝 다가앉으며 남편의 안색을 살핀다. “어디가 아프요? 감기 몸살이라도 났으요? 약 지어다 드리까요?” “감기몸살 보다 더 많이 아프다. 가슴도 답답하고 머리도 아프고.” 허공에 눈길을 두고 멍한 표정으로 자꾸만 물어보는 아내의 말에 역시나 건성으로 대답한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속 시원히 말해 보소.” 희연의 다그침이 근호의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더 어지럽게 만들어 버리고 이 상황을 핑계 삼아 근호는 아내의 의중을 떠보기로 한다. “임자! 그라지 말고 우리 고향에 다시 돌아가믄 안되겠나?” 멀뚱히 쳐다보는 시선을 외면하고 희연은 달아오른 얼굴로 근호에게 면박을 준다. “따신 밥 먹고 뭐 때문에 식은 소리 하는 기요. 듣기 싫은 소리 할라믄 잠이나 주무시요.”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져 민망해진 희연은 돌아앉으며 심지에서 검은 연기를 피워내는 호롱불을 입으로 불어 끄고는 잠자리에 누워 버린다. 그 밤 근호와 희연은 생각들이 많아 서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뒤척이기만 했다. 뒤척이는 몸을 덮고 있는 광목에 풀을 매긴 이불이 사그락거리는 소리에 서로가 귀를 기울이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해 보려 눈을 감는다. 근호는 며칠을 아내를 설득하려 애를 써보았지만 만만치 않은 희연의 저항에 먼저 꼬리를 내린다. 완강하게 거절하는 희연을 자꾸만 야속하게 생각하여 근호는 결단을 내리기로 맘먹고 우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기로 하고 감독하는 반장에게 사직서를 내민다. “아니 박씨! 갑자기 그만둔다고 카믄 우짜요?” “미안하게 됐십니다. 사정이 있어 그래 결정 했으이 양해해 주시이소.” “와요? 월급이 적어 그라는 기요?” “그런 기이 아니라 개인 사정이 있어 그만두는 겁니다.” “그라지 말고 내가 월급 더 올려 줄 거니 그냥 다니소. 박씨 같은 기술자를 구하는 기이 쉬운 일이 아니라 그라요. 내 말 듣고 그냥 있으소.” 이미 근호의 마음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정해져 있었기에 돈이고 기술이고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이었기에 월급을 올려 준다는 반장의 제안도 그리 달갑지가 않아 거절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의 퇴근이 이른 것이 심상치가 않아 불안한 마음에 희연은 대뜸 묻는다. “와이래 일찍 들어오는교?” “내 오늘 부로 일 그만뒀다.” “머를 그만둬요?” 희연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자 근호는 재차 같은 답을 한다. “일 그만뒀다고.” “와요? 월급 더 준다는 공장에서 오라캅디까?” “아이다. 경주로 갈라고 그만 둔 기다.” 기어이 사단이 났다. 그리 노심초사하던 희연은 결국 일을 쳐버린 남편이 야속하고 미웠다. “갈라면 이핀 혼자 가소. 나는 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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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이들 데리고 그냥 여서 살기요. 이제 좀 살겠다 싶은데 판을 깨도 유만부득이제. 우째 내속을 그리도 몰라주는 기요.” “임자 맘 모르는 거 아니다. 그렇지만 이래 피해있다고 고부간의 갈등이 잦아 들겄나?” “그런 핑계 대지 마소. 이핀은 어머님이 그리운 거지요. 내보다 아아들보다 어머님이 더 그리워 못살겄지요. 그래서 어머님 곁으로 가겠다는 거 아이요? 어미님은 평생 내를 아들 뺏은 도둑으로 볼긴데 내가 그 눈치를 또 보고 살란 말입니까?” 먹고 있던 속에 말을 내뱉으며 울먹이는 희연이 남편에게 거세게 저항을 해 보인다. 언성이 높아지는 부모의 모습에 겁을 먹은 아이들은 어미의 곁에 붙어서 같이 울먹거리며 엄마를 연신 불러댄다. 한참 옥신각신하고 있던 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근호가 밖으로 나갔다. 조금 전 공장에서 사직서를 받았던 감독이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박씨! 그라지 말고 그냥 일하러 나오소.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박씨 기술이 꼭 필요해서 그라니 제발 다른 맘먹지 말고 다시 나오도록 하소. 아까도 말했지만 월급도 올려 줄 기이 거절 말고요. 내 이래 부탁하요.” 간절하게 부탁하는 감독에게 야박하게 거절을 못하고 일단 생각을 좀 해 보겠다며 맘을 달래어 돌려보낸다. 근호는 혼란스러웠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내와 남아달라고 사정하는 공장 감독을 생각하니 남는 것이 나을 것 같다가도 지켜주는 자식도 없이 외롭게 지내는 어미를 생각하니 불효한 마음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 견딜 수 가 없었다.  그렇게 날이 새도록 고민하다 이윽고 근호는 결심하고 혼자서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선다. 잠들지 않고 있던 희연은 모로 누워 남편의 행동을 모른 척 지켜보다가 근호가 떠나는 모습을 외면하고 만다. 처와 자식을 버리고 홀로 새벽 열차에 몸을 실어 경주에 도착하여 황남리 종택으로 들어선 근호를 반갑게 맞아 준 이는 역시나 어미밖에 없었다. “하맹 그렇지! 내 아들이 어디 갈라고. 잘 왔다 애비야 잘 왔다.” 돌아온 아들이 너무도 반가워 정씨부인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다. 저녁 늦게 귀가한 당주는 아들이 혼자 돌아왔음을 알고 노발대발하며 호통을 친다. “니 처하고 아아들은 어떻게 하고 혼자서 온 기고?” 아비의 호통에 바짝 긴장을 하며 근호는 대답한다.  “그기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자 캤는데 정옥에미가 오지 않겠다 해서 혼자 왔십니다.” 한심한 아들의 행동에 아비는 너무도 화가 났다. “남자가 참을성이 그리 없어 어디다 쓰겠노? 분가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결심을 꺾고 다시 돌아오나 말이다. 그것도 가솔은 버려두고 혼자서만. 쯧쯧쯧! 못난놈! ” “…” “그래 분별없이 행동할거거든 다시는 이 집에 발도 들일 생각 마라. 내는 니같이 못난 아들 거둘 마음 없다. 이 집에서 당장 나가라!” 당주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버린 채 가솔을 내팽개치고 혼자 돌아온 아들이 너무도 한심하여 호통을 쳐서 집밖으로 쫓아내고야 말았다. 아비에게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근호는 부산으로 내려가지 않고 방황을 하다 이내 술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혼자 떠난 남편을 외면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희연은 마음이 편치 않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또다시 무서운 시어머니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 일이 힘들어 떠나온 것이 아니라 시모와의 갈등이 원인이었기에 그것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거듭하여 생각하여도 결론은 하나였다. 이곳에 남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 없이 혼자서 살겠노라고. 희연은 결심을 하였다. 이를 악물고 버텨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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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시작한 비누장사는 어느덧 자리를 잡아 단골도 확보되었기에 꾸준히 팔리기도 하였고 그 동안 근호가 벌어다 준 돈도 모아둔 것이 있어 당분간은 입에 풀칠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어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며칠을 기다려도 근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행여나 맘이 바뀌어 다시 돌아올까 싶어 그래도 남편이기에 끼니때마다 따듯한 밥 한 공기를 떠놓고 기다려 보았으나 그 기다림은 헛된 수고로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희연의 삶은 이제 남편의 도움 없이 홀로 아이들을 거두고 돈을 벌어야만 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아이들을 챙기고 장판에 나서서 장사를 시작하고 늦은 밤이 되어야 파하고 들어와 아이들과 함께 잠을 청한다. 남편이 없는 삶이 고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시어머니와 갈등을 생각하면 몸은 고달파도 마음이 편한 것이 더 견딜만한 일이었다. 세월만큼 쉬이 흐르는 것이 또 있던가, 가을을 지나 초겨울에 접어들면서 바람이 제법 차갑게 느껴졌다. 어느 한날 그렇게 훌쩍 홀로 떠난 남편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남은 자식과 더불어 생계를 영위하기 위한 희연의 집념은 젊음을 담보로 여지없이 부지런을 떨어대고 있었다. 둘의 힘이 하나로 줄어든 만큼 두 몫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벅찼는지 희연의 몸이 약해져 결국 병이 나고 말았다. 먹는 것이 부실해지고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 그저 누울 자리만 눈에 들어오니 병은 병이었다. 희연은 자신의 몸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다. 그리고는 무언가가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 꿈이 태몽이었구나.' 며칠 전 새벽. 눈은 떠졌으나 몸이 고달픈지 일어날 기운조차 없어 잠시만 누워있는 다는 것이 그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꿈속에서 희연은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청 빛의 바다는 고요함을 품고 잔잔하게 부서지는 파도가 버선 벗은 발을 살포시 감싸 안으며 발목을 때리고 달아났다 다시 발등으로 덤빈다. 파도를 쫓아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발길을 옮기며 물 아래를 내려다보니 청 빛의 바다는 속을 훤히 드러내어 놓고 있었다. 투영된 바다 속을 들여다 보다 희연이 몸을 숙여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제 손에 잡혀 올라온 조개 세 마리를 치마폭에 담아서 감싸 안고 바다 속을 유유히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었다. 꿈이 생각난 희연은 속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이 노릇을 우짜노!' 홑몸이 아니기에 혼자서 두 아이와 뱃속아이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여간 부담이 아니다.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경주에 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반가움보다는 버리고 떠난 맘이 더 야속하여 쉽게 용서가 되지 않아 희연은 남편을 보자마자 시비를 건다. “그냥 고향에서 어머님 모시고 살지 뭐하러 왔으요? 나는 이핀 필요 없으니 다시 돌아가소.” “그라지마라. 내라고 맘이 편했겄나. 처자식 버리고 간 기이 좋아 간 기가? 내 맘도 좀 헤아려보그라.” “나는 싫소. 이핀도 싫고 시댁도 싫고 다 싫소.” “임자 .내가 잘못했으니 화 그만 내고 생각 좀 바꾸면 안되겠나?” “무슨 생각을 바꿔요?” “여서 이래 고생하지 말고 편하게 부모님 곁으로 가서 살자.” “편하게? 참내! 이핀이나 편하지 내가 편하겠으요?” 아내의 고집에 근호는 그만 속이 타서 참지 못하고 폭발한다. “그라믄 종부가 돼가지고 시부모님도 안 모신다는 기이 말이나 되는 처사가?” 남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서 물러서면 모든 것이 원점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희연은 어떻게든 버텨보기로 하고 억지를 부려본다. “내가 안가고 싶어 안 갑니까? 이핀도 알믄서 와 모른 척 하요! 어머님이 나를 며느리로 인정하려 하시지 않는데 내가 무신 수로 어머님 맘에 들 수가 있겠는교. 뭐든 내가 하는 것에 사사건건 꼬투리 잡으시며 못마땅해 하시는데 나도 인자 지쳤단 말이요. 이핀이 아무리 그래도 나는 못 돌아갑니다. 아니 안 갈랍니다.” 완강하게 거부하는 희연을 더는 설득할 여지가 없어 근호도 수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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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면 임자 혼자 여기서 살그라. 나는 아이들 데리고 경주로 갈 기다.” 순간 희연의 눈은 휘둥그레진다. “아이들은 와 데리고 가요? 갈거면 이핀 혼자 가소.” “내 자식들 내가 데려 간다는데 뭐가 잘못 이가?" 근호는 어미의 곁에 바싹 붙어 앉은 아이들을 향해 말한다. "정옥아, 찬옥아 아버지하고 경주 가자. 어서 짐 챙기그라!”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의 싸움에 볼모가 되어 아비의 손에 이끌려 경주로 떠났다. 혼자 남겨진 희연은 암담하였다. 모든 것을 잃고 이곳에서 홀로 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종부의 도리를 다하며 시모의 구박을 견디고 살아야 할지 어느 쪽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하루 이틀 넋을 놓고 사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며칠을 방에만 틀어박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외로움을 달래고 있을 때 찬옥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엄마를 외치며 달려온다. 아이는 희연을 향해 뛰어 들어와 어미의 품에 와락 안긴다. “엄마! 내가 엄마 없어서 얼마나 울었는데. 나는 인자 엄마하고 같이 살거다. 할머니 집에 안 갈거다.” 아이의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이 어린 것이 어떻게 집을 찾아 왔는지 그것이 더 기막히고 놀라웠다. “찬옥아! 니 우째 왔노? 니 혼자 온기가?” 어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아이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대답을 한다. “아니! 아버지하고 같이. 엄마가 보고 싶어서 내가 먼저 뛰어왔다.” 놀랬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이는 그리웠던 엄마의 품에서 따듯한 체온을 느끼려 자꾸만 품으로 파고들었다. 잠시 후, 근호가 들어와 방문 앞에 섰다. 희연은 아무 말 없이 아이를 품에 안고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근호도 아무 말 없이 그저 모녀의 상봉을 지켜보다 방으로 들어왔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을 깬 것은 근호였다. “고집 그만 부리고 그마 올라가자.” 그러나 희연의 고집은 여전했다. “나는 안 갈 거니까 이핀 혼자 가소. 찬옥이는 내가 데리고 여기 있을랍니다.” “다시 실랑이 하고 싶지 않다. 아아들 생각해서라도 임자 그러는 거 아니다.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어 멀쩡한 부모 두고 생이별을 하고 산단 말이가! 아이들 보기 미안하지도 않나?” “…” 어린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아리다. 그에 못지않게 구박받는 자신의 신세도 처량하고 안쓰럽다고 느껴졌다. “그라지말고 이핀이 마음을 돌려주소. 그래만 해주면 내 이핀 해달라는 것 다 들어 줄기요. 제발 이번 한 분만 내 편이 되어주소. 나와 아아들을 위해서 부탁 좀 합시다.” 희연이 애원을 한다. 완강하게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사정을 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돌아선 근호는 결심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런 것이 며칠을 경주 본가에 있어 보니 떠나 올 때와는 사정이 사뭇 달라져있었다. 신분제도의 벽이 허물어져 양반의 체통이 땅에 떨어 진지는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박씨종택의 비복들 또한 자유로운 몸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모시던 상전을 하루아침에 배신하고 떠나는 것이 야박하다 싶어 의리를 지키고자 함이었는지 아니면 갈 곳을 정하지 못하여 그냥 머무르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종택에 남아서 현재까지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왜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그 많은 재산을 갖은 구실을 붙여가며 야금야금 빼앗기고 흉흉한 세월만큼이나 하늘의 인심도 야박해진 것인지 가뭄으로 인해 농사일마저 줄어들게 되니 박씨종택의 가세는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기울어지고 있었다. 광에서 인심 난다고 상전의 가세가 기울어짐이 곧 제 살길이 없어짐을 뜻하기에 그나마 눈치를 보고 있었던 비복들은 힘든 농사일을 접어버리고 저마다 살 길을 찾아 떠나고 남아있는 이들은 나이든 비복 몇몇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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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을 도와주는 이들도 모두 수양딸들이 드나들며 정씨부인을 도와 일을 봐주고 있었기에 이를 지켜본 근호는 나이든 어미가 집안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기어이 희연을 설득하여 데리고 가려 하는 것이었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연로하신 부모님 팽개치고 두 다리 뻗고는 못살기라. 장손이 되어서 그런 짓 나는 못하겠다. 집안어른들 뵙기가 송구하구마.” “누구는 맘이 편한 줄 아요?” “그라니 하는 말 아이가? 서로가 불편할 일을 와 하자는 긴데? 시부모님 공양이야 당연한 일 아이가? 임자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란 말다.” “나도 아요.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거를. 하지만 내 맘도... ” 하려는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데 구역질이 먼저 목구멍을 가로막는다. 먹은 것도 없어 속은 텅 비어 있건만 뱃속은 요동을 치며 헛구역질을 계속 해댄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버린 처를 유심히 살피다 근호는 뭔가 이상한 예감을 느끼고 처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임자! 혹시 아아 가졌나?” 한참의 구역질이 조금 가라앉은 것을 보고 근호가 물었다. “…” 희연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어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고 앉아있었다. 묵언의 답을 들은 근호가 그 곁에서 다가앉으며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 기쁜 마음으로 희연을 다독인다. “임자! 몸이 힘들어 우짜노? 내 원망 많이 했제? 미안하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다 잘못했다.” “…” “그만 마음 풀고 돌아가자. 엄마는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나서서 임자 편 해줄 테니 한번만 나를 믿고 따라주면 안되겠나?” 간곡하게 부탁하는 남편을 더는 뿌리 칠 수도 없고 이미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짐작했기에 희연은 결국 자신의 고집을 꺾고 부산생활을 접고 남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다. 종택의 대문을 들어서는 두 사람의 표정은 극과 극이었다. 앞서 들어오는 근호는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온 몸에 힘을 주고 당당히 걸어 들어오고 뒤쳐져 들어선 희연의 모습은 전장에서 포로로 잡혀온 병사처럼 억지 걸음으로 터벅터벅 근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근호는 신이 나 마루에 서서 호들갑을 떨며 어미를 불러댄다. “엄마요!  정옥에미 왔으요. 엄마요!” 희연은 들어서는 걸음에 안방으로 들어 시모에게 안부를 여쭙고는 큰절을 올린다. 정씨부인은 며느리를 쳐다보지 않고 외면한 채 앉아있었다. 시어머니와의 재회로 온 집안이 또 한 번 난리가 날 거라 예상했으나 의외로 시어미의 분노에는 서슬 퍼런 날이 서지 않았던지 종부의 자질을 운운하는 몇 마디만 내뱉고는 며느리를 쉬이 놓아준다. 고부 사이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근호는 어미의 훈방에 얕은 숨을 내쉬고는 처를 데리고 얼른 방을 빠져 나왔다. 긴장했던 마음이 풀려 온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 같아 희연은 방바닥에 그대로 눕고 만다. 돌아온 어미가 반가워 아이들은 어미의 곁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어미의 곁을 지키고 앉았다. 늦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들어선 시부는 며느리가 돌아온 것이 기뻐 반갑게 맞아 주었다. 희연은 종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못했음을 죄스럽게 생각하여 시부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했다. “용서라니? 에미가 잘못한 기이 머가 있어 용서를 하겄노? ” “…” “잘 왔다. 그간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 했노? 너무 맘 조리지 말고 편안하게 지내그라.” “아버님께서 그래 말씀을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아이다, 에미야! 내가 더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보그라. 언젠가는 그에 대한 보상이 있을 기다.” “예!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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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시부가 있었기에 희연의 시집살이는 그래도 견딜만하다 여겼다. 비복들이 떠나고 난 자리를 대신하여 일을 해 줄 하인들을 찾아보았지만 바뀐 세월에 공장으로 일을 다니지 남의집살이를 하고자 하는 이들이 없어 부엌살림 전부를 희연이 도맡아 하게 되었다. 희연이 없는 동안 찬모였던 복순 네도 떠나간 비복들처럼 살림을 챙겨 도시로 나가고 없었기에 인근에 살고 있는 수양딸 강구 네가 종택을 드나들며 집안일을 맡아 해 주고 있었다. 오는 날부터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 없이 희연이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다. 이미 입덧이 시작되어 제대로 먹지도 못해 기운이 없었다. 희연은 임신한 사실을 혹여 시어른들이 눈치를 챌까 조바심하며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고 있었으나 나른한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너무 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강구네 에게 부엌살림을 잠시 맡겨놓고 방에 들어가 바닥에 누웠다. 강구 네가 부엌을 들락거리며 오가는 것을 안방에서 지켜보던 정씨부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째 니가 자꾸 드나드노? ” “예에. 아씨형님이 기차 멀미를 하싰는지 몸살이 났다 캐서 지가 부엌일 쪼매 거들고 있십니다.” ¡“참내! 지가 무신 잘한 기이 있다고 아랫사람 부리놓고 방에 틀어박히는 기가. 우째 하는 것 마다 내 맘에 안 드는지. 허이구 내 속이야. 이건 며느리가 아니라 상전 인기라 상전.” 겸연쩍게 서있는 강구 네를 앞에 두고 대놓고 며느리를 비방하고 시어미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있는 힘껏 닫아버린다. 시모의 빈정거림에 희연은 누워있기가 무서워 그만 일어나 부엌으로 나온다. 얼굴이 창백하고 힘이 없어 곧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희연이 안쓰러워 강구 네의 마음도 편치가 않아 걱정하여 말을 건넨다. “아씨 그래 있지 말고 그마 방으로 들가이소.” “아니네. 나 때문에 공연히 자네만 한 소리 듣고... 미안하네.” “별말씸 다하십니다. 그나저나 몸이 그래 안 좋아서 우짭니까?” “며칠 쉬면 나아지겠지.” 말은 쉬우나 입덧이 가라앉기가 마음대로 대는 것도 아니니 걱정이 앞선다. “그라믄 그만 들어가이소. 애지간한 거는 지가 처리 하고 갈기이 걱정 말고 들어가 좀 쉬이소.” 그래도 이 집안에서 자신을 위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고맙네. 자네가 있어서 내가 마음이 놓이는 구마. 언제나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으련만.” 혼잣말처럼 뒷말을 흘려놓고는 맥없이 주저앉은 자신의 꼴이 너무도 처량한 생각이 들어 강구 네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하고 들어와 다시 자리에 눕는다. 하릴없이 밖을 쏘다니다 들어온 근호가 방으로 들어서자 자리를 깔고 누워있는 처의 모습이 안쓰러워 안방으로 건너가 어미에게 따지듯 말을 한다. “엄마. 정옥에미 당분간은 부엌일 시키지 마소.” 다짜고짜 따지듯이 처의 편을 들고 나서는 아들의 행동에 기막혀 성질이 나서는 또다시 언성을 높인다. “아이구! 인자는 애비도 에미 역성만 드는 기가? 나가 살더만 애비 니도 변했구마. 부모는 안중에도 없고 지 처 편만 들라카네." "그런기이 아이요! 엄마는 알지도 못하믄서." "모르긴 머를 모른다는 기고? 그라믄 젊은 며느리 모시놓고 이 늙은 에미가 부엌일해야 속이 시원하겄나?” 어미의 비꼬는 투에 아들도 짜증이 난다. “그라믄 사람을 사서 일을 시키면 되잖아요.”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하고 있네. 요새 같은 세월에 사람 구하는 기 쉬운 줄 아나? 누가 남의 집 살이 할라 하는가 말이다.” “그라믄 지금처럼 강구 엄마 손 좀 빌리면 되잖아요.” “와 멀쩡한 며느리 나두고 남을 부리라는 건데? 니 마누라 닳아 없어질까 그기 걱정이가? 이 못난 놈아.” 팔불출 행동을 하는 아들이 꼴사납게 보여 어미는 아들의 팔을 한대 때리고 만다. 맞은 자리를 손으로 감싸며 근호는 어미를 향해 눈살을 찡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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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정옥에미 가엽지도 않아요? 저리 아픈 사람한테 꼭 일을 시키야겠으요?” “그래 니 눈에는 마누라 아픈 거만 보이제 이 에미는 어디가 아픈지는 관심도 없고.” 답답한 마음에 근호는 어미에게 또다시 큰소리를 낸다. “그기이 아니라...참밀로...정옥에미 아아 가져서 그라는 거요. 입덧이 심해서 먹지도 못하고 있단 말이요. 그래서 당분간만 부탁하는 긴데 엄마는 그것도 못 봐 주요.” 임신이라는 소리에 정씨부인은 그제야 며느리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느낀다. "아아를 가졌다고?” 아들의 호통에 괜스레 무안해진 정씨부인은 눈치를 보며 되묻는다. 근호는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어미의 물음에 짧게 대답한다. “예에.” “어쩐지 좀 수상하다 싶더라. 그라믄 그렇지. 낸 눈은 못 속인다.” 뭔가를 알고 있었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짚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입속말을 뱉으며 탄식을 한다. “허이구. 또 딸 이구마.” 어미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근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미에게 묻는다. “엄마가 그거를 우째 알아요?” “내 감이 틀린 적이 없다.” “나와 봐야 알지 무신 수로 안단 말인교?” 정씨부인이 아들과 안방에서 옥신각신하고 있을 무렵 외출에서 돌아와 안방으로 들어서는 당주를 향해 정씨부인은 뜬금없는 말을 던진다. “또 딸이라요. 딸!” 서두 없는 반 토막 말이 이해되지 않아 당주는 멍한 표정으로 정씨를 바라보았다. “딸이라니 무신 소리고? 밑도 끝도 없이 와 딸 타령을 하는기고?” 영문을 몰라 하며 두 모자를 번갈아 바라보고 되묻는 말에 입을 삐죽이며 아내가 대답을 한다. “모리겄지요. 나도 인자 들은 얘기니께.” “…?” 뜸을 들이며 요지를 벗어나 주변을 맴도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또 뭔가에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라 여기며 당주는 아내의 입에서 본론이 나오기를 입 다물고 기다려 본다. “정옥에미가 아아를 가졌답니다.”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는 남편의 태도에 흥미가 사라지자 툭 던지듯 말을 내뱉었다. 당주의 눈이 휘둥그 fp 져 아들을 바라본다. "그기이 사실이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아들에게 눈길을 돌리자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 정옥에미 입덧이 심해서 당분간 집안일을 못할 거 같아서 다른 사람 부리라고 엄마한테 말씀 드리고 있었십니다.” “이런 경사가 또 있을라고. 그래 애비 생각 잘했다. 당분간은 에미 몸조리하게 하자꾸나." 아들 하나도 버거운데 남편까지 가세를 하니 정씨는 더욱 기가 막혔다. "얼씨구! 부자간에 참 잘 하는 짓이요. 며느리 그리 아까바서 밥상은 우째 받는기요. 와? 이 참에 상전으로 뫼시지 그라요.” "임자! 그거 좋은 생각이다. 대를 이어줄 며느리 받들고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만. 허허허." 넉살 좋게 웃어넘기며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남편을 향해 정씨가 독설을 날린다. “허이구! 떡 줄 사램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대는 무신 대! 이분에도 딸이라 안 하요.” 심통 난 얼굴에 비웃음을 머금고 마냥 기뻐하는 남편을 향해 초를 치는 말을 퍼부었다, “그거를 임자가 우째 아노? 그래 심통을 부릴기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순산했을 때 얘기지 머가 그래 성급해서 딸이라 단정 짓는 기가?” “흥! 두고 보소. 이핀이 아무리 우겨도 내 말이 맞을 기요.” 그렇게 시어른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성별을 가지고 상반된 의견 대립을 보이며 감정싸움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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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에 끼어 희연은 그저 시부모의 눈치만을 살피며 안절부절 하였다 시어미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기에 시부가 실망할 것을 생각하면 죄책감에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가을걷이가 시작된 황금 들녘. 이른 아침부터 농부들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농작물 수확에 한창이었다.  누구네 논은 벌써 수확한 벼를 여러 단으로 묶어 노적가리로 쌓아 놓고 있었다. 어느덧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넘이를 바라보는 농부의 얼굴은 이미 땀범벅이 이요, 구부러진 허리는 언제 펴봤는지 등을 꼿꼿이 세우는 자세가 힘에 겨워 보인다. 그래도 농부는 힘든 기색은커녕 수확에 흡족함을 만끽하며 옅은 미소를 머금고 흐르는 땀방울을 소매 자락으로 닦아낸다. 며칠을 열어둔 박씨종택 뒷마당 곡간으로 드난꾼들이 오가며 우차로 실어온 볏섬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부엌에서는 일꾼들을 위해 밥을 짓느라 아궁이에 불길이 일고 찬거리를 준비하고 나르느라 수양딸들과 희연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광에서 먹거리를 가지고 돌아오던 강구 네가 부엌으로 들어오더니 찬을 준비하고 있는 희연에게 친정에서 사람이 왔다고 알려준다. 뜬금없는 소리에 희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부엌을 나와 보니 안마당에 친정 집 중머슴 김 서방이 안절부절못하며 서있는 것이었다. “아씨!” “아니 김 서방이 우짠 일로 여까지...” 순간 짐작할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옴을 느끼며 희연은 김 서방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아씨! 대부어르신께서...” 말을 잊지 못하는 김 서방을 바라보며 희연이 재촉한다. “말해 보시게. 아버님께 무슨 일 있으신가? “아씨! 대부어르신께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보일 것 같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는 김 서방을 보며 희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재촉하여 묻는다. "말씀을 하시게! 아버님이 어쨌다는 거요?" "대부어르신께서 돌아가싰습니다. 흐흐흑...“ 김 서방은 부고를 전하기 위해 희연을 찾아 온 것이었다. 부고를 전해들은 희연은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에 제대로 몸을 지탱할 수 없어 뒷걸음치다 다리 힘이 풀려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아버님...” 밖의 동정을 살피던 강구 네가 급히 달려 나와 희연을 부축한다. “이이구! 아씨. 우째 이랍니꺼? 일어나 보시이소. 방으로 갑시더.” “…”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있는 김 서방은 부축을 받으며 마당을 걸어가는 희연의 뒤꽁무니를 울상이 되어 졸졸 따라 간다. 안방 툇마루에 주저앉은 희연의 눈은 멍하니 초점을 잃고 얼떨떨한 상황에 실감이 나지 않는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마님! 마님! 잠시 나와 보시소.” 강구 네가 안방에 있는 정씨부인을 다급하게 부른다. “무신 일이꼬? 아아니? 에미는 와 이래 넋을 놓고 앉아 있노?” 멍한 표정의 며느리를 바라보며 시모가 묻자 강구 네가 나서서 대신 대답을 해준다. “그기이... 아씨 댁에서 사람이 왔는데 부고를 전해 듣고 놀라서 그랍니다.” “부고?” 마당에 서있는 이가 고개를 숙이며 정씨부인을 향해 신분을 밝힌다. “아씨 댁에 머슴 김 서방 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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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짠 일로 왔는가?” 태연하게 물어오는 정씨부인을 보며 김 서방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부고를 전한다. “아씨 아버님께서 세상을 하직하싰습니다요.” “바깥사돈이 돌아가셨다고?” “예에! 그렇습니다요.” 두 사람의 대화를 앉아서 듣고 있던 희연은 그제 서야 실감을 했는지 눈에 눈물이 고이고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흐..아버님! 흐흐흑!” “가서 정옥애비 불러 오니라.” 정씨는 마른 목소리로 희연의 옆에 서있는 강구 네에게 근호를 찾아오라 이른다. 뒷마당에서 마름배서방과 함께 볏섬을 세어가며 셈을 하고 있는 근호를 강구 네가 급히 뛰어가서 부른다. “서방님요! 퍼뜩 안마당으로 가 보시소."' “…?” “아씨 댁에서 사램이 왔는데 아씨 아버님이 돌아가싰다는 부고를 전할라고 왔다 캅니다.” “뭐? 장인어른이 돌아가싰다고?” 갑작스러운 부고에 근호도 당황하며 강구 네를 바라본다. “예에! 그래서 아씨가 충격을 받고 울고 기십니다.” 그 소리에 근호는 하던 일을 멈추고 헐레벌떡 뛰어 안마당으로 뛰어간다. 마당으로 들어오는 아들을 보자 정씨부인이 굳은 얼굴로 아들에게 이른다. “애비 퍼뜩 준비해서 에미 데리고 포항 갔다 오니라.” 마당에 서있는 김 서방과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하는 김 서방. 근호는 답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미의 명에 따라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봇짐을 싸서 나온다. 그때까지도 희연은 마루에 앉아 정신 나간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희연은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며 기차에 올라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함께 기차에 오른 김 서방은 제 슬픔을 못 이겨 보일 듯 말 듯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고 근호는 울고 있는 희연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장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서로의 불편함을 침묵으로 일관하였고 포항으로 내달리는 기차는 이들의 마음과 달리 더디게만 가고 있었다. 어느새 친정 집 골목으로 들어선 희연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대문 앞에 상을 당했음을 알리는 등이 걸린 것을 보니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한발씩 딛고 들어선 마당에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찾아온 문상객들로 가득 했다. 희연이 들어서자 옹얘가 쫓아 나와 희연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이고....아씨." 말을 잇지 못하는 옹얘를 뒤로 하고 희연은 영전가까이로 다가선다. 상주인 오라비가 희연을 보고는 말없이 어깨를 다독인다. 아비의 영전 앞에 절을 올리고 희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시작한다. 영전 앞에서 한없이 울며 희연은 속으로 자식의 도리를 하지 못한 자신의 불효를 생각하며 더욱 서럽게 울어댄다. '오랫동안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이래 허무하게 돌아가시다니.‘' 희연의 마음에 한스러움이 맺혔다. 하나뿐인 딸이기에 무척 사랑하며 귀여워해 주신 아버지. 어린 희연을 품 안에 안고 천자문을 읽어 주면 어느새 잠이 든 딸을 팔을 풀어 살포시 눕혀주며 뺨을 쓰다듬으며, “우리 딸내미 잠도 예쁘게 잘 자네.” 하며 다독여주던 그 손길이 너무도 그리웠다. “아버지! 흐흐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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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오열을 옆에서 지켜보던 강씨 부인이 슬픔에 찬 목소리로 딸을 달랜다. “에미야! 그마 울그라. 이라다가 니 몸 상할라. 뱃속에 아아도 생각을 해야제.” “어머니! 흐흐흑...” “오냐. 그래! 니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너거 아버지 오래 누워 계시지 않고 가시서 오히려 고맙구마.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불효하지 말라고 식구들 편하게 해 주고 가신기다. 그라니 너무 슬퍼 말그라.” 딸을 위로한다기보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달래는 강씨의 두 눈에서도 닭 똥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희연은 모친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눈물을 닦아준다. 딸의 손을 맞잡고 눈물이 고인 눈으로 딸을 바라보며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앙다문다. 다물어진 입은 경련이 일 듯 떨리고 참았던 울음소리는 입안에서 서러움에 북받쳐 힘없이 세어 나온다. 상주인 희연의 오라비는 두 모녀의 눈물을 지켜보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린다. 똑같은 자식이기에 아비의 죽음에 당연히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차마 같이 울 수가 없어 오라비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한다.  몇날며칠을 눈물로 지내며 그렇게 한휘의 칠일장이 막을 내렸다. 아비가 떠난, 남편이 떠난 사랑채를 돌아보는 가족들 발길을 붙잡는 망자의 유품들이 눈에 쏙쏙 들어와 박혔다. 모두가 그냥 멍하게 자리에 서서 지켜볼 뿐 달리 어떤 행동도 하지않고 있었다. 눈물샘이 말랐는지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며칠을 먹지도 자지도 못했던 그들의 삶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산사람은 살아야제. 안그렇소?” 누구를 향해 묻는 건지 강씨 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핀은 편한 세상에 계시지요? 우리도 인자 이핀 맘속에 묻고 살랍니다. 그라니 너무 서운타 마소. 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세상으로 찾아 갈기요. 그라니 외로와도 참고 기시요. 알았지요?”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강씨 부인은 자식들과 함께 사랑채를 나와 안방으로 건너왔다. 옹얘가 어느새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평범하게 차려진 밥상이 방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강씨 부인이 먼저 자리에 앉자 다들 상 주위를 빙 둘러 앉는다. “다들 앉아서 밥 묵자. 우리도 먹고 기운 차라야제.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기라.” 강씨는 말을 마치고 밥숟가락을 들어 크게 한 술 떠서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우적우적 마른밥을 씹어 삼키고 다시 한 술을 떠 넣는다. 어미의 행동에 따라 다른 이들도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제 입속으로 집어넣고는 마른밥을 씹는다. 메마른 밥이 목구멍을 메이게 하는 것이 슬픔을 참는 의식인양 모두가 똑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밥상을 내가라는 말에 옹얘와 여종이 들어와 밥상을 들고 방밖으로 나온다. “우짜꼬! 국하고 반찬은 손도 안대싰네! 마른밥 삼키시고 체하지나 않을 란가 모리겄다.” 밥상을 부엌으로 날라다 놓고는 손이 가지 않은 그릇들을 내려다보며 옹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들고 나온 밥상에 손간 것이라고는 달랑 밥그릇이 전부이니 옹얘의 속도 어지간히 타고 있었다. 먹는 둥 마는 둥 배를 채운 이들의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홀몸이 아닌 희연도 이제는 지쳤는지 건넌방으로 돌아와 자리를 펴고 누웠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눈을 뜨니 엷은 새벽빛이 장지문을 밝히고 있었다. 더는 잠이 오지 않고 혼자 계시는 어미가 걱정되어 안방 앞으로 나와 보니 밤새 밝혀진 불빛이 새벽빛에 빛을 잃은 채 희미하게 방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간간히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방문너머로 들려왔다. 희연은 차마 어미의 방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다시 제 방으로 돌아와 멍하니 앉아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린다. 조반상을 물리고 난 희연내외와 오라비가 안방으로 들어온다. 모친에게 문안을 드리고 모두가 나란히 앉았다. “매제! 큰일 치느라고 고생했다.” 희연의 오라비의 눈빛이 근호에게 향했다. “아입니다. 형님! 지가 머 한 기이 있어야지요. 형님이 애쓰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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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도움도 컸다.” “사위도 자식인데 당연한 거지요.” 그 말을 서두로 오라비는 동생내외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여 묻는다. “그래. 요새 부산 생활은 어떤가?” “예. 형님! 그것이... 우리 식솔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십니다.” “아니 왜? 일할 곳이 없었나?” “…” 근호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네가 정 할 일이 없다면 우리 공장에 와서 날 좀 도와주는 것은 어떻노?” “…” “당장에 결심하라는 것은 아니고 천천히 생각을 좀 해보고 결정을 하게나.” “예. 형님! 일간 한번 찾아뵙도록 하겠십니다.” 내키지 않는 마음에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만다. “그래! 그러면 그리 알고 있을 테니 자네도 잘 생각해보게.” 그 말을 남기고 희연의 오라비는 밀린 일이 많아 가봐야 한다며 인사를 나누고 식솔들을 데리고 떠났다. 그렇게 오라비와 인사를 나누고 희연은 며칠을 더 친정에 머물다 다시 황남리로 돌아왔다. 홀로 남겨진 어미가 눈에 밟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영원히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아픈 가슴을 끌어안고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가을걷이가 끝난 종택의 곡간에 곡식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가을비가 한여름의 장맛비처럼 심하게 내리고 나자 며칠사이 날씨가 쌀쌀해지고 찬바람이 불었다. 희연은 밀려있는 빨래거리를 들고 뒷마당 우물가에 앉아 차가워진 물에 손을 담그고 빨래를 하고 있었다. 시린 손을 불어가며 빨래하는 희연의 곁으로 물 길러온 아낙이 아는 채를 한다. 박씨종택의 먼 친척으로 넉넉지 못한 형편에 하인을 두고 살 처지가 못 되는 아낙은 중년의 나이임에도 손수 물을 길러 다니고 있었다. 가끔씩 희연의 시모를 형님이라 부르며 찾아오곤 해서 낯이 설지는 않기에 종택의 며느리를 스스럼없이 대하며 아는 척을 한다. “정옥엄마 아이가?” “예. 그간 잘 지내셨지요.” “우리사 뭐 그날이 그날이지를. 부산 가서산다 카더만 언제 올라왔노?” “예. 얼마 안됐으요.” “부산에서 자리 잡지 뭐할라고 왔나?” “그랬으면 했지만 시부모님 걱정도 되고 해서 겸사겸사 왔으요.” “수양딸들이 가까이서 돌보는데 머를 걱정이고!” “그렇기는 하지만 종부로써 책임도 있으이까 계속 거서 살수는 없잖십니까?” “하기사 성님 성미가 좀 별라야제. 아들내외 내보내고 얼매나 심청을 부리시는지 내사 근처도 못 가겄더구마.” “…” 민망해하는 희연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며 자신의 속내를 이어간다. “종부는 너무 착해서 탈이다. 사람이 약게도 살아야제. 구박하는 시에미 뭐가 이뻐서 봐주노? 모른척하고 서방하고 아아들 데불고 오순도순 재밌게 살지 뭐 좋은 꼴 본다고 찾아 오노 말이다. 지금이사 옛날 세월 같지가 않아서 아랫사램도 못 부리고 혼자서 그 큰살림 감당해야 할 긴데 그 곱은 손으로 우째 다 해 낼 긴지 걱정이다. 보는 내가 다 애처롭다. 말이 좋아 종부지...” 아낙은 자신의 입놀림이 방정스러웠음을 깨닫고 너무 지나친 간섭을 했다싶어 하던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얼버무리며 입을 닫는다. 듣고 있던 희연도 멋쩍어 빨래를 치대며 못들은 척 방망이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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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신 좀 보래. 내가 이리 새실 부리고 있일기 아이구마. 정옥엄마. 내 먼저 가꾸마. 뒤에 천천히 하고 가거라.” “예. 들어 가이소.” 부리나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아낙을 보내고 희연은 빨래터에 앉아 마저 헹굼 질을 한다. 부산생활을 접고 올라와 별달리 하릴없이 지내던 근호의 생활은 예전으로 돌아간 듯 했다.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 일쑤이고 이제는 집에 들어오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시부가 무서우면서도 몰래 밤이슬 맞으며 돌아다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밤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기어 들어와 이제 일어난 양 출타하는 시부의 눈에 띄려고 마당을 서성거리는 남편이 못마땅해지기 시작해 한마디 내뱉고 싶어도 안방을 지키고 있는 시어미의 귀에 소리가 들어갈까 터지는 속을 참고 참아본다. 그렇게 혼자 속을 끓이고 있는 사이 집밖 출입이 한동안 뜸하던 정씨부인이 마침 친정에 볼일이 있어 하루를 지내고 오겠다며 희연에게 일러놓고 대문으로 사라졌다. 희연은 간밤에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렸다. 시모가 없는 동안 참고 있던 분노를 폭발시키자 마음을 다진 것이다. 늦은 밤이 돼서야 집으로 들어오는 근호. 방으로 들어서는 남편을 향해 희연이 대뜸 소리를 친다. “정옥아버지! 부산에서 나하고 했던 약속 잊었는교?”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벼락같이 날아드는 희연의 언성에 어리둥절해 하며 되묻는다. “내가 머를 우쨌다고 이러는가?” “몰라 묻는교?” “그 사람...참!” 방바닥에 쭈그려 앉으며 히죽 웃음을 웃는다. “옛날 버릇 또 나오는 구마.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새벽이슬 맞고 들어오고 인자는 하다 안돼서 외박까지 하는 일이 잘하는 일이라요?” “그런기이 아이라 어제는 술이 많이 취해서 못 들어 온거구마.” “이핀이 먼저 한 약속 모른 채 한다믄 인자는 나도 이핀 안 볼랍니다. 나 혼자 아아들 데리고 친정 갈 테니 그리 아소. 내년에 정옥이 학교에도 보내야 하는데... 자식이고 마누라고 없이 어디 혼자 한번 잘 살아보소.” 희연이 목소리를 높이며 윽박을 지르자 근호는 손사래를 치며 죽어주는 시늉을 한다. “내가 잘못했다. 그래 윽박지르지 마라.” 반성의 표정도 없이 입으로만 잘못을 비는 남편을 희연은 못마땅해 다시 긁어댄다. “아니! 집에도 못 찾아 올 만큼 와 술을 먹는교? 와?” “너무 그라지마라. 임자 자꾸 그라믄 내 앞으로 술하고 살기다.” 그 말에 어이가 없어 희연은 더욱 화를 낸다. “그기이 말이라고 하는 기요? 참말로 기가 차구마. 그래 이핀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고 사시요. 내는 이핀 안보믄 되는 긴게.” 아내가 화를 내자 근호는 자신의 말이 지나쳤음을 깨닫고 희연을 달랜다. “화내지 말그라. 임자 홑몸도 아닌데 자꾸 화내믄 아아가 인상 쓰고 나올기다. 몸도 무거운데 그만 잠이나 자자.” 안고 쓰러지는 남편을 떠밀어내고 돌아누워 버리는 희연. 하루 종일 분주하게 움직인 탓에 힘든 몸을 이기지 못해 이내 잠이 들어버린다. 그렇게 희연의 으름장은 별 성과 없이 끝이 나고 말았다. 얼마를 잤는지 새벽이 되어옴을 몸이 먼저 반응하여 눈을 뜨니 바깥에서 대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조반준비를 위해 강구 네가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옆에서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남편을 쳐다보니 한심한 마음에 미움이 더 해 지고 그 반대편에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애처로운 마음이 사무친다. 아이들만 아니면 이미 갈라서 버릴 인연. 커가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수십 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차마 아비 없는 자식을 만들지는 못할 노릇이라 자신을 달래며 남편의 허물을 덮어 주려한다. 방을 나서 부엌에 들어서니 강구 네가 먼저 와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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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왔는가?” “예! 아씨. 큰 마님도 안기신데 쪼매 더 주무시지 않고요?” “일찍 잠이 들어 푹 잤네.” “예.”  누구에게나 삶은 어제를 답습하는 오늘일 것이다. 새로움 없이 매일 매일을 반복하는 삶 자체가 누구 한 사람에게만 지정된 것이 아니기에 희연은 자신만의 비참함이 아니라 여기며 우울한 마음을 달래어본다. 그렇게 가을의 끝은 저물고 어느새 겨울이 시작되었다. 엄동설한을 견뎌내기 위해 다들 월동 준비를 하느라 또다시 온 집안이 떠들썩했다. 수확을 끝낸 남정네들은 산으로 다니며 겨울을 나기에 충분한 땔감을 확보해 놓으려고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고 종택 마당에는 한창 김장을 담그느라 손들이 분주하였다. 시어미 정씨부인을 비롯해 집안의 여인들이 손을 걷어붙이고 일에 나섰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으로 김치를 담그는 종부의 솜씨가 제법인지라 매년 김장철이 되면 정씨부인의 자부심은 한층 기승을 부려댄다. 부엌 앞마당에는 희연과 강구 네를 비롯한 수양딸들이 배추를 다듬고 소금물에 절이는 일을 정씨부인의 지시아래 차근차근 해나가고 뒤편 장독대가 놓여 있는 마당에는 머슴들이 장독을 묻을 구덩이를 파느라 곡괭이질이 한창이다. 물을 뺀 배추를 양념 속을 넣고 버무려 넣는 날 종택은 경사나 다름없이 사람들로 분주했다. 이미 부엌에서는 일손들을 위한 푸짐한 밥상이 차려지고 버무려진 김치와 더불어 내어 놓을 보쌈 고기를 큰 가마솥에 삶아내는 냄새가 허기진 이들의 후각을 자극하고 침샘을 자극한다. 제 손에 묻은 양념장을 떨어져나간 배추 고갱이에 닦아서 입 속에 쏙 집어넣고 입맛을 다시는 아낙의 입매가 군침 돌게 한다. 희연의 배는 눈에 띄게 제법 불러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무거워 가쁜 숨이 내쉬어진다. 올망졸망 따라다니며 양념발린 배춧잎을 덥석 받아먹고 있는 두 아이들. 마치 먹이를 받아먹는 새의 주둥이를 하고 잘도 먹는다. 따끈하게 지어진 밥 한 공기를 강구 네가 들고 나오며 속 따가우니 밥이랑 먹으라며 아이들의 손에 밥그릇을 쥐어준다. 마냥 행복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은 그래도 가족이 있기에 행복하다 여긴다. 기나긴 노동이 마무리되고서 푸짐한 저녁상을 마지막으로 실컷 배를 채우고 갓 담은 김치를 담은 보시기를 들고 노동을 끝낸 이들은 각자의 집으로 사라진다. 이로써 종택의 겨울나기 월동준비는 끝이 났다. 설이 지나고 나니 이내 추웠던 겨울도 어느새 기가 죽었는지 기승을 부리던 매서운 바람도 잦아들고 양지 바른 언덕에는 푸른 떡잎들이 새록새록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른 봄. 겨우내 움츠렸던 농부들은 한 해 농사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다시 몸을 움직인다. 추위에 굳어 있던 땅을 갈아엎는 논갈이가 시작되고 농부들은 소를 몰고 나와서 각자의 논에 쟁기질을 시작한다. 아침상을 물리고 출타 준비를 하고 나서는 당주의 눈에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아들이 눈에 띄어 나서다 말고 아들에게 묻는다. “애비는 요새 농사일 좀 많이 늘었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근호는 깜짝 놀라 당황해하며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한다. “예에. 열심히 배워 가는 중입니다. 동댕이가 꼼꼼히 잘 가르쳐 줍니다.” “그래. 잘 배워서 올해에는 보리농사 많이 지어 보그라.” “예 그라겠습니다." 안방에서 언제 나왔는지 정씨부인이 아들의 역성을 들고자 한마디 거든다. “아따. 일 잘하고 있는 아범 적정 그만하시요.” 당주는 겸연쩍은 얼굴로 아내를 쳐다보며 말을 건넨다. “임자 심통 이제 좀 풀렸나 보구마. 먼저 말도 건네고. 평생 말 받아 줄 것 같지 않게 굴더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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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요. 이핀이 기다리는 아아가 세상에 나와 봐야 끝이 나제요.” “허허. 그 심통 참 오래도 가는 구마.” 너털웃음을 흘리며 당주는 대문을 나섰다. 근호는 아비가 나가고 나서 잠시 머뭇거리다 몸을 느리게 움직여 논으로 나간다. 큰 맘 먹고 오늘은 일을 좀 해보자 싶어 딴에는 큰 인심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논에 도착하여 막상 나서서 일을 거들려 하니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스스로가 짐이 된다 판단하고 일은 제쳐두고 어디론가 바삐 가버린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끝내고 방에 들어선 희연이 슬슬 진통이 시작됨을 느낀다. 배가 아파오는 것을 참으며 잠시 누워 있으니 밖에서 포항에 사는 아랫동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 저 왔습니다.” 안방으로 들어가는 동서의 발소리를 들었으나 희연은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었다. 작은 며느리는 시모에게 큰절을 하고 시모와 마주보고 앉는다. “그래 우째 나올 시간이 있었더나?” "예! 짬을 내서 나왔십니다. 아버님 어머님 우째 지내시는지 궁금도 하고 형님 해산도 다가오는 것 같아서 겸사겸사 해서 왔십니다.” 말은 그리 하였으나 목적은 따로 있음을 정씨는 알고 있었다. 포목상인 남편의 사업이 승승장구하면서 사는 것은 남부러울 것 없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지독한 구두쇠라 수중에 들어온 재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내놓지 않고 가지기만을 하기에 보는 이들이 학을 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오늘 찾아 온 목적도 실은 곡간에 쌓여있는 곡식들을 얻어가기 위함이다. 시모도 그 속셈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타지에서 홀로 고생하는 둘째 아들을 생각해서 참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설에 다녀가면서 작은 아들이 어미에게 한 무더기의 돈을 쥐어 주고 떠난 것이 고마워 마지못해 며느리의 행실을 눈감아 주기로 하였다. “그란데 형님은 어디 가싰습니까?” “밖에 없더나?” “예! 들어 올 때 아무도 없던데요.” “쳇! 몸이 무겁다 핑계 대고 방에 누웠을 기다.” “그럼 지가 건너가 보겠십니다.” 희연의 산통이 점점 심해져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배를 움켜쥐고 누워 있었다. “형님! 안에 기시지요?” “들어...오게.”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고 또 숨을 몰아쉰다. “진통이 시작 되는 갑네요.” “산파를...좀...불러주게.” “예! 형님.” 때마침 찾아온 동서가 해산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산파가 아이를 받아냈다. 순산이었다. “고춥니까?” 지친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태어난 아이의 성별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희연이 물었다. “정옥엄마! 이분에도 딸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고통을 참고 태어난 아기는 이번에도 또 딸이었다. '그렇겄제. 이미 태몽에 조개를 보았는데, 고추 일리가 있겄나!' 희연은 속으로 꿈이 맞았음에 체념을 하고 시부의 실망하는 모습을 생각하자 한숨이 먼저 나왔다. 한편 사랑채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귀를 세우고 있던 당주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해산 뒷바라지를 하는 작은며느리가 방에서 나오자 시아비로써의 체통은 무시하고 다급히 묻는다. “아아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던데... 아들이가 딸이가?" 위엄을 풀어헤친 시아버지의 모습이 왠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으나 그 물음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며느리는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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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버님! 이분에도 여식입니다.” 작은며느리의 답을 듣는 순간 당주의 안색은 굳어졌다. 그리고 조금의 지체도 없이 크게 기침 세 번을 하고 돌아서서는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로 들어가 문을 쾅하고 닫아버린다. “그럼 그렇지 내가 틀림없지.” 방안에서 자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정씨부인의 비웃음이 사랑채로 날아간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이분에도 아들을 안겨드리지 못했십니다.' 밖에서 들리는 큰 기침소리에 희연은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고 죄를 지은 죄인이 된 듯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게 시부모와의 싸움에서 태어난 아기는 현옥이었다. 쪽 샘 우물가에 물 길러 나와 있는 마을 아낙네들 입은 잠시도 쉬지를 않았다. 모인 사람들 입에서는 종부의 셋째 아이에 대한 얘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정옥엄마 이분에도 딸이라 카네.” “그러게나 말이다. 얼매나 서운 했일까.” “그 댁 어른이 아들 손자를 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해필 또 딸이라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 카데.” “원래 손이 귀한 집 아이요. 그라니 기다릴 수밖에 없지요.” “정옥엄마도 얼매나 안타까울기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렇게 서로들 한마디씩하며 태어난 아이가 아들이 아님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안타까워하며 다들 희연을 걱정해주었다.

열려진 대문으로 중년의 여인이 손에 보따리를 들고 들어와 툇마루에 올라앉으며 안방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성님! 안에 기시요?” 여인은 안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이 들리는 안방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바라본다. “아우님! 오싰나?” 방문을 열고나서는 정씨부인이 찾아온 이를 반긴다. “잘 지내싰지요?” “덕분에. 아우님도 편안하싰나?” “하모요. 이래 성님이 안부를 물어 주시는데 편하지 않을 리 있는교? 헤헤헤.” “사람 참! 별 싱거운 농을 다하는 구마. 그라고 있지 말고 안으로 드세나.” “예에! 그라지요.” 먼저 방으로 들어간 정씨부인이 방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 어정쩡하게 일어나 댓돌 위에 신을 벗어 놓고 굽어진 허리를 잠시 펴고는 열어놓은 문안으로 들어간다. “정옥엄마 해산 했다믄서요?” “들었는가?” “예에. 그래서 한 분 들이다 볼라고 왔지요.” “흥! 뭐 경사 났다고.” “성님도 참! 뭐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는 기요. 자식 보는 일 만큼 기쁜 일이 어데 있다고.” “자식도 자식 나름 이제. 쓸데없는 가시나만 있어 뭐하노?  멧상 차리 줄 자식이 없는데.” “그거사 하늘이 점지하시는 일인데 인력으로 될라꼬요?” “그라니 속이 터지지. 속이 터지고말고.” “성님! 그래 역정 내지 마소. 정옥엄마도 속이 많이 상했을 깁니더.” 정씨를 성님이라 부르는 이는 이웃에 살고 있는 용필할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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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는 안동에서 시집을 왔다하여 안동 댁으로 불리었으나 손자를 본 이후 자연스레 손자의 이름을 붙여 용필할매로 부르게 되었다. 성님 아우하고 지낸 온 시간은 그네들이 시집와서 손자를 본 지금까지 쭉 이어져 나온 세월이라 그 둘 사이에 알게 모르게 돈독한 정이 쌓여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은 성격이 비슷하기도 하고 사뭇 다른 부분도 있어 예나 지금이나 서로의 의견 충돌로 토라질 때도 많았으나 용필할매의 뒤끝 없는 성격 탓에 언제나 먼저 털어버리고 정씨를 찾아오기 일쑤였다. 세월의 풍화작용처럼 정씨의 모난 곳도 용필할매의 매질로 깎여나간 듯 이제는 으레 그러려니 하며 날을 세우지는 않았다. “산모 뒷바라지는 누가 합니까?” “지 동서가 와서 며칠 봐주더마 바쁜 일 있다믄서 줄행랑 쳐버리고 지금은 강구 네가 와서 거들어 주는 갑더마.” “성님은 그라믄 정옥엄마 들이다보지도 않았는교?” “…” “참! 성님도 우째 그리 모진기요. 며느리 그리 괄시하다 내중에 그 업 우째 감당할라 그랍니꺼?” “자네는 내속 모른다.” “암요. 모르지요. 형님 속에 들어 가 보지 않았으이.” 비아냥거리듯 말을 질러놓고 눈치를 살피다 꼬투리 잡을까싶어 일어서려 한다. “앉아 기시요. 내사 정옥엄마 얼굴 좀 보고 올랍니더.” “내 말 들을 자네도 아닐기이 맘대로 하소.” 퉁명스레 던지는 한마디를 뒤통수로 받고 나오며 들리지 않을 만큼의 소리로 혀를 차며 생각한다. '쯧쯧. 우째 저리도 속이 좁을꼬! 그 세월을 지켜보고도 며느리 심성을 몰라서 저리 구박인감. 머 버릴기이 있다고 눈에 가시로 생각는지 시에미 심사 하늘에서 내린다 카더만 성님을 보면은 그 말이 실감이 나는 구마. 젊은 사램이 아깝다.' 대놓고 풀어 놓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웅얼거려진다. 지독히도 아들을 끼고 드는 정씨의 지나친 사랑이 해가 되면 되지 절대 이롭지 못함을 누누이 강조하며 입바른 소리를 하건만 아들과 관련된 얘기에는 애당초 귀를 열지 않으려는 고집이라 체념하는 쪽은 오히려 용필할매 쪽이었다. “자식 사랑이 지내치도 문젠기라.” 몇 발자국 안 되는 거리를 느릿느릿 걸어 건넌방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민다. “정옥엄마! 안에 있나? 내 들어 간다.” 몸의 반을 벌써 방으로 들여 놓았으면서도 안에 있는 이의 의중을 묻는다. “아주머니 오싰습니꺼?” 일어서려는 희연에게 그냥 앉아있으라며 손을 내젓는다. 엉거주춤 앉는 희연의 앞에 마주앉으며 어미 옆에 누워 방긋거리는 아이를 바라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이고. 고녀석 여장군일세. 코가 오뚝하니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생긴 기이 참말 잘 생겼구마. 욕봤다.” “아입니다.” “서운했재? 우짜겄노. 정옥엄마가 이해하그라. 성님이 속이 좁아 안 그렇나. 속 썩지 말그라.” “지는 괜찮십니다. 다만 이분에도 아들 손자를 못 안겨 드린 기이 죄스러울 뿐이지요.” “그기이 어데 사람의 힘으로 되는 기가? 하늘의 뜻이제. 아직 한창인데 뭐 그래 고민하노. 기다려 봐라, 이다음 분에는 아들이 들어 설 기니. 너무 상심하지 말그라.” “말씀이나마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내 성님한테도 한소리 해놨이니 그리 눈치 주지는 않을 기구마.” “…” 무안해진 탓에 희연은 대답을 못했다. “허 참! 고놈 아무리 봐도 여장군이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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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배냇짓에 눈이 팔려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용필할매를 정씨가 기다리다 못해 기어이 방문 밖에서 불러낸다. “그만 나오시게나.” “야 성님. 나갑니더.” 다시 느릿한 걸음으로 방문을 열고 나와 툇마루 앞으로 다가선다. 올 때 손에 들고 왔던 꾸러미를 방에 들기 전에 툇마루에 밀어 놓아두었다 그것을 집어 들어 정씨에게 건넨다. “이거나 받으소. 미역이요.” “뭐 할라고 이런 거를 사오나? 그냥 올 것이제.” “손 부끄럽아서 들고 온 거니까 너무 나무라지 마소.” “사람 참!” “기왕에 가지고 온 거니 산모 미역국이나 잘 끓여 주소. 들이다보니까 산모가 얼굴이 푸석하대요.” “알아들었구마.” 용필할매의 말에 뼈가 있다는 것을 아나 그러건 말건 내 며느리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더는 참견 말라는 으름장을 놓듯 짧은 한마디로 말문을 막아버린다. 정씨의 속내를 알아차린 용필할매는 멋쩍은 듯이 웃어넘기고 툇마루에 걸 터 앉으며 벗어 놓았던 신을 신는다. 내려앉은 용필할매의 희끗희끗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정씨는 묻는다. “와? 벌써 갈라꼬?” “야아 성님! 다른 볼일이 남아 있어서 그마 가봐야 할 것 갔십니더.” “그래? 그럼 얼른 가보소.” “야 성님! 쉬시요.”       “멀리 안나가이. 살펴 가시게.” 서로의 껄끄러운 감정을 숨기고 서로를 위하는 척 하는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 한 사람은 들어왔던 대문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고 남은 한 사람은 자신의 방으로 발길을 옮긴다. 바쁜 농사일로 드문드문 드나드는 강구 네를 대신하여 정씨부인이 손수 부엌일을 해야 할 때가 많아졌다. 밥상을 차리고 심지어 산모 뒷바라지까지 해주는 것이 며느리는 눈치가 보이고 부담스러워 더 이상 누워있기 송구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제대로 산후조리를 하지 못해 아직도 얼굴은 푸석하다. 붓기가 가라앉지 않은 몸을 이끌고 부엌일을 시작하고 되풀이되는 집안일은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도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갓난아기에게 젖 물리는 시간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아 힘에 부칠 때가 많았다. 집안일과 육아에 파묻혀 지내는 동안 희연은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남편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볼 여유가 없었다. 어느 하루, 논일을 마치고 일을 봐주러 종택에 들른 강구 네가 근호의 소식을 물어왔다. “아씨요! 요새 서방님 얼굴 뵙기가 어렵네요.” “와 그러나? 무슨 볼 일이 있는 건가?” “그기이 아이고... 지가 잘못 본건지 모르지만 읍내 갔다 오는 길에 삼거리 쪽에서 서방님 비슷한 사램이 여자와 같이 가는 것을 본 것 같아서요.” “그랄리가 있나! 자네가 잘못 본기이 맞나 보네. 그 양반 요새 농사일에 재미 붙어 열심히구마. 잠도 집에서 주무시고.” “그렇구만요. 그라믄 지가 잘 못 본기이 맞구마요.” “…” 아랫사람보기 부끄러워 남편 역성을 들어 거짓말로 얼버무렸으나 희연의 속은 타 들어간다. “실데없이 와 나돌아 다닌단 말이고? 할 일 없으면 집에서 아아들이나 좀 봐주고 할 것이제. 대낮부터 여자 끼고 가는 꼴을 보이나 말이다. 참말로 남사시럽다. 들어오기만 해봐라. 아주 내쫓아 버리고 내도 어디로든 숨어버리고 말기다.” 신뢰할 수 없는 남편의 행동에 분노가 치밀어 속으로 기필코 결단을 내리라 맘을 다진다. 그 순간 희연의 뇌리에 시부의 모습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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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거짓된 행동을 눈 뜬 봉사가 되어 제대로 보지 못하고 늘 속고만 있는 시부가 자신보다 더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이 클지 좌절하는 시부의 모습이 자꾸만 희연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에미야! 힘들겠지만 참고 살그라. 그라다 보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지 않겄나!” 하고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시부를 배신할 용기가 없었다. ‘이 사실을 아버님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기고 그라믄 어머님은 또 아들을 감싸고돌며 내를 더 미워할 기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같은 성격의 시모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본능은 불똥을 피하는 게 상책이라 여기며 몸을 사리고 죽어지내기로 맘을 돌린다. 그렇게 바쁜 나날들을 지내며 남편에 대한 원망은 점차 무관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이들과 자신만을 생각해도 삶이 벅차기에 초췌한 모습으로 가끔씩 집에 들어오는 남편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초복이 지나고 타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이 더위에 나무에 붙어 제 모습을 숨기고 울어대는 매미 소리만이 지치지 않고 쉼 없이 들려온다.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더위를 더욱 무덥게 만드는 듯하다. 어미의 등짝에 업히어 어미 움직임에 따라 같이 흔들리는 아이는 보채지도 않고 가만히 어미 등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제 몸의 열기도 식히지 못할 판에 등에 업은 아기의 열까지 가세를 하니 희연의 등짝은 땀에 젖어 축축하였다. 여름 내내 먹을 양의 보리쌀을 손질하는 작업이 쉬이 끝나는 일이 아니고 보니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등에 달라붙어 땀을 흘리고 있는 아기가 혹여 탈이라도 날까 싶어 포대기를 풀어 평상 위에 눕힌다. 돌봐줄 이가 없다 보니 아기를 평상에 눕혀놓고 어미는 부엌을 오가며 아이에게로 눈길을 보낸다. 어미가 힘든 것을 아는지 보채지 않고 제 손발을 움직여가며 옹알이를 해대는 아기. 부엌에서 보리쌀을 삶는 일에 정신을 쏟고 있던 희연은 시부가 들어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더위를 피해 집으로 들어선 당주는 마당 한켠에 놓인 평상에 누워 제 손으로 제 발을 움켜잡고 옹알이를 해대는 아기를 처음으로 보았다. 성별타령으로 두 내외간의 싸움까지 이르게 한 아기의 출산을 학수고대하였으나 결국 아들이 아니기에 실망이 커 서운한 맘을 감추지 못한 채 해산한 며느리에게 어른으로서 따듯한 위로의 한마디도 못해주고 옹졸하게 굴었던 자신이 부끄러워 한동안 며느리를 피해 다녔던 당주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가 낯설었음에도 아기는 울지 않고 연신 방긋거리며 당주를 바라보고 있었. 당주의 두 손이 누운 아기를 들어 올려 안아준다. “고 녀석 잘도 놀고 있구마. 에미 떨어져 울지도 않고.” 당주의 포근함이 좋았는지 아기는 계속 방긋거리고 있었다. 당주는 울지 않는 아기가 너무도 기특해서 자신도 모르게 염원이 담긴 주문을 외듯 한마디 덧붙였다. “아가야! 이다음에는 꼭 니 남동생 보게 해주그라.” 검은 가마솥을 열어 피어오르는 김서리를 손으로 부채질하여 흐트러트리자 코를 자극하는 구수한 밥내음이 올라온다. 보리가 잘 삶아졌는지 확인을 위해 밥주걱으로 한 귀퉁이를 떼어 입으로 가져가 씹어본다. 톡톡 튀는 낱알이 구수하게 입안을 맴돌았다. 다시 솥뚜껑을 덮어놓고 목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치며 밖으로 나왔다. 언제 들어 왔는지 시부가 평상에 앉아 아기를 안고 있는 것이 희연의 눈에 들어왔다. “아버님! 들어오셨습니까?” “오냐! 덥은데 고생한다.”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구수한 냄새가 코끝에 닿으니 보리를 삶고 있음을 알고 더운데 고생을 하는 며느리에게 수고한다는 한마디를 건넨다. “요녀석이 하도 기특해서 눈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당주는 안고 있던 아기를 평상에 누이고는 일어서서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맘고생이 심해서인지 아니면 일이 고되어서인지 핏기 없는 안색이 맘에 걸렸다. “니 시에미는 아아도 안 봐 주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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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일이 있으시다고 나가싰습니다.” “그 사람 참!… 에미는 하던 일마저 하그라. 아아는 내가 봐 주꾸마.” “예. 아버님. 고맙습니다.” 돌아서서 부엌으로 발길을 돌리는 며느리를 당주가 잠시 불러 세운다. “에미야! 내가 옹졸하게 굴었다. 마음 넓은 니가 이해 하그라.” “아입니다. 아버님.” 다독여 주는 한마디에 며느리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찡해온다. 유일하게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던 시부의 마음 씀씀이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시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자신이었기에 원망은 가당치가 않았다. 돌아서 부엌으로 들어가는 희연의 눈이 자꾸만 평상에 앉은 시부와 아이에게로 향했다. 안고 있는 아이와 눈을 맞춰주는 시부의 모습에 희연은 그간 쌓였던 마음의 짐을 이제는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집을 나간 지 며칠이 지나도 근호는 들어올 생각을 않았다. 가끔씩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다 안방에 들러 어미의 안부를 살피기만 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돌았다. 정씨부인은 그런 아들을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며칠 만에 보는 아들 얼굴이 안쓰러워 잘 챙겨먹고 다니라 당부하며 돈을 내어주니 근호로써는 자신의 뜻을 무조건 받아주는 어미 덕에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잠깐씩 들어오는 날에는 안방에서 늘 상 붙어있다가는 해질녘 즈음해서 다시 밖으로 나가면 한동안 감감 무소식이 된다. 어미는 아들과 한통속이 되어 남편의 눈을 속여 가며 아들을 두둔해 주니 속아 넘어가는 당주는 의심한번 해보지 않고 착실히 지내고 있다 믿으며 아들의 행동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되풀이되는 모자의 거짓에 동조는 하지 않았으나 손 놓고 구경만하고 있자니 희연 자신 또한 시부를 기만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해 걸음에 나간 지 달포가 지나도 근호는 집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참다못한 희연은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남편을 찾아가 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강구 네가 목격했었던 근호의 외도가 사실임이 입소문을 통해 희연의 귀에 까지 흘러들어 온건 벌써 한 달가량이 되어간다. 희연은 분한 마음보다 시부의 귀에 그 사실이 들어가게 될까 마음을 졸이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다행히 여태까지 아무런 사태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니 당주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저녁상을 물린 후 설거지를 부리나케 끝내고 희연은 아기를 들쳐 업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소문으로 들어 두었던 삼거리를 지나 그 여인이 거처하고 있다는 여각 앞에 발길을 멈췄다. 집을 나설 때까지는 멱살잡이를 해서라도 남편을 끌고 올 기세였으나 막상 찾아와 대문 앞에 서니 가슴이 뛰고 온몸이 떨리기까지 한다. 열려 있는 대문 입구로 발길을 들일 용기가 나지 않아 주위를 둘러보다 옆으로 난 봉창에서 세어 나오는 불빛에 의지하여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지나 않을까 귀를 쫑긋 세우고 서성이며 살피고 있었다. 늦은 저녁이기는 하나 드문드문 다니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있어 이를 의식하여 등에 업은 아기를 어르는 척하며 여각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자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희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에미야! 혹시나 했더만 니가 맞구나.” 모임이 있어 술 한 잔을 하고 늦은 귀가를 하던 당주였다. 여각과 요리 집이 모여 있는 삼거리 아래쪽에서 올라오던 당주의 눈에 여각 주위를 기웃거리는 아기 업은 여인의 모습이 눈에 익어 혹시 며느리가 아닌가 하여 유심히 살피는 중이었다. 흐리게 세어 나오는 불빛에 어렴풋이 며느리의 모습을 본 것 같아 당주는 가까이 와서 재차 확인을 해 본 것이다. “여서 머하고 있는 기고?” “…” “이곳은 니가 올 곳이 아닐긴데. 무신일 있는 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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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시부에게 들켜버린 것이 겁이 나고 부끄러워 희연은 한 마디도 못한 채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아기까지 업고 여각 앞을 서성이고 있는 며느리가 묻는 말에 대답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것이 수상하였으나 이내 짐작하여 묻는다. “아범이 이곳에 와 있는 기가?” “…” “내가 데리고 갈 거니 너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그라.” 시부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며 한껏 힘이 들어갔다. 잔뜩 겁을 먹은 희연은 시부의 명령에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한다. 며느리를 돌려보내며 당주의 마음은 아들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여태껏 자신이 아들에게 기만당하고 있었음에 분노가 차올라 화를 삭이지 못한 채 여각 안으로 들어가 아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취기에 분노가 더해져 온 여각을 뒤지고 돌아다닌 끝에 겁에 질려 숨어 있는 아들을 끝내 찾아내어 끌고 여각을 빠져나온다. 아비의 화난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한 아들은 순순히 아비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사랑채로 따라 들어온 아들을 무릎 꿇어앉혀놓고 아비의 언성은 높아진다. “허구한 날 술에 여자에 니는 지겹지도 않나?” “…” “어릴 적 하던 행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못 버리겠더나? 에잇! 못난 놈. 가장 구실도 못하는 어리석은 놈. 니 입에 밥 들어가는 기이 아깝다. 결혼하면 정신 차릴까 애비가 되면 좀 나아질까 하마나 하마나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은 인간이구마. 저런 놈을 자식이라 믿고 있었던 내가 천치구마.” 근호는 제 잘못을 시인하지도 용서를 빌지도 않은 채 아비의 한탄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그라. 이 세월에 어떻게 살라고 그러느냐 말이다.” 아비의 일장훈계를 듣고 한참만에야 근호는 사랑방을 빠져나왔다. 희연은 남편이 시부의 손에 이끌려 들어와 혼쭐이 나고 있음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찾아간 일이 들통이 나버린 탓에 시부는 화가 잔뜩 나있었고 그 화의 발원지인 남편이 고스란히 당하고 있음에 그간의 미웠던 행실은 뒷전이고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것이 정이라는 것인가 싶어 헛웃음이 난다. 사랑채의 큰소리가 가라앉고 희미하게나마 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아마도 남편이 방을 나온 듯 했다. 분명 문소리는 났는데 십 여분이 지나도 남편은 방으로 건너오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희연이 방을 나와 밖을 둘러본다. 어디서 혼자 근심하고 있을 것 같아 남편을 찾아 사방을 돌아가며 찾아보았다. 조용해진 사랑채를 조심이 들여다보아도 남편의 신은 보이지 않았고 안방에도 들어간 흔적이 없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 양반이 어디로 갔을까? 설마 그 집에? 다시 가지는 않았일기구마.” 여자의 직감이랄까. 아니라 부정해 보지만 의심은 자꾸 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무섭도록 맞춰지는 알 수 없는 육감이 온몸을 엄습해온다. 잠들어있는 아이들을 팽개치고 확인을 위해 다시 그곳을 찾아 나섰다. “이분에도 거 가 있는 거면 내 가만 안 있을 기다. 사단을 내뿌린다. 사단을.” 벼르고 쫓아간다. 숨을 헐떡이며 여각 대문 앞에 섰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때마침 손님 시중을 드는 심부름꾼과 얼굴이 마주쳤다. 사람을 찾아 왔노라며 묵는 방을 안내 받아 그 방 앞에 섰다. 좁은 마루 밑에 나란히 놓여 진 꽃신과 함께 남편의 신발이 춤을 추고 있었다. 순간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좁은 마루에 올라서 방문을 확 잡아 당겨 열고 희연은 씩씩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아니! 임, 임자가 여, 여를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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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호의 눈이 휘둥그 fp 지며 말까지 더듬어댄다. 다정히 앉아있다 불청객이 나타나자 당황해하고 있는 여인을 희연은 매섭게 쏘아본다. 그 순간 근호는 벌떡 일어서며 희연의 등을 떠밀어 함께 방을 빠져나온다. 두 여인의 난투극을 말리겠다는 의도에서 선수를 친 행동이었으나 정작 희연은 여인의 머리끄덩이를 잡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그럴 가치조차 없다 여기고 있었다. 이는 여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단지 그릇된 행동을 하고 있는 남편에 대한 증오가 희연을 분노케 하고 있는 것이다. 여각을 빠져 나온 근호가 성큼성큼 앞장서서 걷는다. 아내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져 걸어가다 뒤돌아보고 멈춰 서서 빨리 오라하고는 다시 재빠른 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 희연은 틈도 안주고 도망가듯 걸어가는 남편의 뒤꽁무니를 열심히 쫓았다. 늦은 밤길에 혹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싶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고 인기척이 느껴지면 달빛이 가리어진 어두운 곳에 몸을 숨겼다 나와 다시 남편을 쫓아간다. 부지런히 뒤를 쫓았건만 앞장서서 걷던 근호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보이지가 않아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섰다. 무작정 따라오다 보니 왔던 길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 참을 길 위에 서서 서성였다. 사방이 어두컴컴하여 달빛을 등불 삼아 길을 찾아 헤매다 겨우 삼거리 쪽에 이르렀다. 자신을 제쳐두고 앞서 가버린 서방이 얄밉기만 했다. 무안했던 탓에 먼저 집으로 들어갔으리라 믿고 희연은 길을 재촉해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앞서 걷고 있던 근호는 희연이 멀찌감치 떨어져 오는 것을 보고는 삼거리에서 방향을 틀어 지름길을 통해 다시 여각으로 발길을 돌려 버린 것이다. 그렇게 서로 숨바꼭질을 하다 집에 다다른 희연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갈 때 불을 밝혀놓고 갔기에 방안을 비춘 불빛에 남편의 모습을 찾고 있었으나 잠든 아이들 외에는 남편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희연은 어이가 없었다. 먼저 들어와 자는 척이라도 하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되돌아 그 곳으로 다시 간 것을 짐작하고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이 노릇을 우짤꼬. 천성고치는 약은 없다는데 무슨 수로 저 천성을 고칠까?” 희연은 암담했다.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는 희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아아들을 우짜노! 막막하고나.” 울 힘도 없었는지 고단한 몸을 쓰러지듯 누이며 어수선한 마음을 끌어안고 잠을 청했으나 잠은 쉬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고 또 하루를 맞이한다. 정 부칠 곳 하나 없는 시집살이. 남편에게 조롱당한 자존심. 마지막으로 남은 오기는 종갓집 종부로서 아이들의 어미로서의 막중한 책임이 있어 참고 견디려 이를 악문다. 남편에 대한 정은 끊어 내어 버린 채. 그러나 아비의 심정은 그렇지 못했다. 잘나도 못나도 제 자식이기에 정신 차리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사랑채에 아침밥상을 거두고 나서는 희연에게 시부가 물었다. “간밤에 애비 집으로 들어왔냐?” 희연은 차마 입을 땔 수 없어 벙어리처럼 서있기만 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며느리의 안색을 바라보니 밤을 샜는지 얼굴이 까칠해 보였다. 시부의 마음은 그저 며느리가 안타깝기만 하였다. 며느리에게 내세울 체통도 아니지만 그래도 당주는 수치스러움에 될 수 있으면 부딪히는 일은 만들지 않으려 한다. 이는 순전히 못난 자식의 애비로서 가지는 죄의식이 올곧은 성품을 가진 당주의 자존심을 건드린 탓이었다. 당주는 며칠을 고민에 빠졌다. 그냥 있을게 아니다 생각하여 아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대서방 문을 일찍 닫고 다시 여각을 찾아 가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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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하나 제대로 건사도 못했으면서 무슨 염치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일깨우겠다 하는 건가. 제가도 못하는 것이 치국이 가당키나 하단 말이가. 자식 인생도 망쳐놓고서는 나라를 일으키겠다니 그 자만은 도시 어디서 나온 배짱이란 말인가.’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하며 실의에 빠져 걷는다. 걸으면서 머릿속은 온통 잡념에 사로잡혀있었다. 걸어가는 반대편 쪽으로 빈 지게를 지고 걸어오는 이가 당주를 향해 넙죽 절을 해온다. 당주는 눈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사내를 지나친다. “어르신이 이상하네. 내를 못 본 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어지는 당주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 사내는 돌아서서 가던 길을 가버린다. 몇 사람이 그렇게 지나는 길에 인사를 해도 당주는 모른 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어르신!” 누군가의 부름에 당주는 현실로 돌아왔다. 돌아보니 곡물상을 운영하고 있는 조가였다. “어데 가시는 길 입니꺼?” “자네가! 내 볼일이 있어 가는 길이다.” “그란데 와 그래 넋을 잃고 가시는 깁니까? 아까부터 뒤따르믄서 어르신 불렀는데도 돌아보시지도 않고 가시데요.” “허허! 내가 그랬나?” “지나는 사램들이 어르신께 인사 여쭈어도 모르고 지나치신 기이 한 두 분이 아입니더.” “허허 이런! 내 딴 생각을 하다 보이 눈에 뵈는 것이 없었나 보구마.” 당주는 씁쓸한 웃음을 흘린다. 당주의 엉뚱한 행동에 관심을 보이며 조근조근 물어오는 조가의 질문에 답을 회피하고는 급한 일이 있다며 그의 곁을 빠져나온다. 그 덕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이미 목적지를 벗어난 상태였다. 당주의 이마에 주름이 진다. 낙담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목적지를 향해 길을 되짚어간다. 잠시 후 당주의 발걸음이 여각 앞에 도착하였다. 지난번의 난동을 생각하여 오늘은 조용히 여각 안으로 들어선다.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이라 얼굴을 알고 있는 업주가 경계를 하며 다가왔다. “소란 피우지 않을 기이 걱정마시오.” 업주의 태도를 알아차리고 당주가 먼저 선수를 쳤다.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며 길을 터주는 업주를 뒤로하고 아들의 숨어있었던 방 앞에 이른다. 여전히 좁은 마루아래 나란히 두 켤레의 신이 놓여있었다. 세어져 나오는 한숨을 참으며 당주는 큰기침을 하고는 조용히 안을 향해 아들을 불렀다. “허험! 아범 안에 있는 거 안다. 나오그라.” 근엄함을 앞세운 힘 있는 목소리가 방안으로 들어온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아비임을 알기에 근호는 화들짝 놀라며 누웠던 몸을 일으켜 새우고 긴장한 채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퍼뜩 나오그라." 아비의 재촉에 잠시 뜸을 들이던 근호가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나온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고 당주는 돌아서서 여각을 나온다. 소름이 돋을 만큼 침착하고 엄한 목소리에 기가 눌린 근호는 순순히 아비의 뒤를 따랐다. 다시 사랑채에 마주 앉은 두 사람. 긴 침묵이 흐르고 눈을 감고 긴 호흡을 내뱉는 아비의 호흡을 무릎 꿇고 앉아 느끼고 있었다. “내가...” 한마디를 내뱉고 다시 숨을 고른다. “내가 니를 잘 못 길렀다. 다 내 죄다. 내 자식도 일깨우지 못했으면서 주제넘게 백성들을 일깨우겠다 열의를 태웠으이 이리 한심한 일이 세상에 또 있으까?” 이미 주눅이 든 근호는 아비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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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야! 정신 좀 차리고 살그라. 네 처자가 불쌍하지도 않나? 내가 차마 며느리 볼 면목이 없어 에미 얼굴을 못 보겠다. 애비를 이래 면목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니 속이 시원하겄나? 니 하나 믿고 사는 사람을 이래 홀대하고... 니 맴은 편할지 몰라도 내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다.” “잘못했십니다.” “에미 혼자서 살림하는 것도 벅차다. 시키는 것만 하려 들지 말고 나서서 에미 일 좀 도와줄 주도 알아야제. 밖으로 나도는 짓 그마하고 말이다.” 근호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신세는 되지 말그라. 늙어가는 애비를 생각하고 커가는 자식을 생각해서 제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람 있게 생활 좀 해보그라.” “…”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이어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제 세상이 혼란타고 너마저 휩쓸려 그렇게 허황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어서는 안되는기다. 알겄나?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니를 영영 내칠 것이다. 행동거지 똑바로 하그라.” “…” “그라고 보아하니 농사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 역시 무안하여 대답을 회피한다. “그라믄 취직해서 일 좀 배워 볼라나?” "..." "와? 그것도 못하겄나?" “아입니다. 하겠십니다. 하고말고요.” “알았다. 내 일자리 한번 알아 봐줄 테니 니도 이분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처신 똑바로 하그라. 그라고 가족들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어 보그라. 제발 부탁 좀 하자. 애비아.” "예에! 아버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임을 근호는 안다. 제 아무리 노력하려 해도 한 곳에 진득하니 붙어 있지를 못했다. 안주를 하고 싶어도 마음이 갑갑하여 견디지 못해 결국 뛰쳐나가야만 속이 시원한 그였다. 조금만 지루해도 온 몸에 좀이 쑤시는 것이 그것에게서 탈출을 해야만 안정이 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역마살인지 방랑벽인지는 모르는 병에 걸린 그는 메어있는 것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일에든 실증이 나버리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래 생기 묵은 거를 우짜란말이가? 내도 내가 싫은거를.’ 마음을 다잡다가도 포기해 버린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자신도 어쩔 수가 없어 포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아들의 속도 모르는 아비는 아들을 못난이 취급 해버리고 아비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면 할수록 엇나가기만 하니 저도 답답하고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신도 어쩔 수가 없음에 지금은 아예 아비의 인정을 포기해버린 상태다. 그것이 제가 온전하게 살아 갈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대신 그에게는 어미가 있었다. 한 번도 자신을 나무라지 않는 어미. 그 어미의 사랑만으로도 근호는 만족을 하였다. 무능력한 자신이나마 어미에게는 소중한 아들이기에 세상 누가 뭐라 해도 자신에게는 어미밖에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처도 아비도 자신을 무시하지만 어미만은 어떤 잘못도 탓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기에 그는 어미의 품에서만은 안정을 느끼며 편안해 지는 것이었다. 사랑채를 나온 발걸음이 터벅거리며 안채로 들어섰다. 근호는 지난번처럼 달아나지 않고 순순히 방으로 들어갔다. 아비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일어나 아비를 향해 인사를 한다.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아이들은 아비의 출현에 어색한 인사를 하고는 다시 제자리에 앉는다. 어미 옆에 제비새끼 마냥 모여 앉아 강보에 싸인 아기를 내려다보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들은 아비에게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머쓱해진 근호가 팔을 벌리며 아이들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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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옥이, 찬옥이 어디 아버지가 한번 안아보자.” 아비의 행동에 쭈뼛거리는 아이들을 억지로 품에 안자 아비의 품이 생소하였던지 이내 몸을 내빼고 어미 곁에 바싹 다가앉는다.  머쓱해진 근호가 이번에는 아내의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며 언제 이리 컸냐며 아이를 받아 안으려 하자 아내가 그의 손을 뿌리친다. “저리 비키시요. 아아들 보는데 부끄럽지도 않아요? 아무리 어린 것이라도 해도 눈치는 있으요. 아아들이 와 이핀을 피하겠는교? 아아들 앞에서 처신 잘하소.” 희연의 입에서 참고 있던 말들이 튀어나왔다. “와 그 여자하고 영영 살 것이제 와 들어왔는교? 나갔시면 끝까지 돌아오지 말지 머하러 왔는교? 여가 이핀 오갈 데 없으면 돌아오는 곳이랍디까? 누가 받아 줄지 알고? 허! 어림도 없다.” “어허! 임자 자꾸 잔소리 하믄 내 또 간다.” 아내의 잔소리에 머쓱해진 근호가 으름장을 놓는다. 이에 질세라 희연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버럭 소리를 지른다. “흥! 간다믄 누가 겁 날줄 알고? 가시요 가.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 부리소. 가란 말이요.” 화난 어미가 무서웠는지 두 아이의 얼굴이 찌그러지며 울상이 되었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그 눈들에 원망이 담겨 아비에게로 꽂힌다. 아비가 잘못했으니 어미를 화나게 하지 말라는 무언의 원망 같은 것을 담은 눈망울들이 아비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민망해진 근호는 이 방에는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깨닫고 멋쩍게 일어선다. “임자가 가라해서 내 다시 나가는 기다. 잘 있그라.” 근호는 피식 웃으며 방을 나왔다. 화가 난 것이 아니요 그저 그 자리에 있기가 무안해서 그래서 제 발로 나온 것이다. 아니 아이들의 눈망울이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다. 마음 한켠이 아릿하게 저려온다. 근호는 애써 태연한척 표정을 지으며 발길을 옮겨 안방으로 들어섰다. “엄마요! 지 왔십니다.” 불쑥 들어서는 아들이 반갑기만 한 정씨는 호들갑스럽게 손짓을 하며 아들을 맞이한다. “아이구 애비야! 이 얼매만에 보는 얼굴이고? 어서 온나. 잘왔다. 잘 왔어.” “엄마! 지 때문에 맘고생 많았지요?” “내보다 니가 더 고생을 했제. 니 맴 내 다 안다.” “…?” “얼매나 속이 상했이믄 밖으로 나돌 겄노! 자식이라고 있는 것들은 죄다 가시나들 뿐이제 서운한 맴이 얼매나 들었겄노. 내맴이 이란데 니는 오죽할라꼬.” “…” “오죽이나 정 붙일 곳이 없었이믄 그랬일까. 내 맴이 더 아프구마. 그래도 우짜겄노. 다 니 핏줄인거로. 니 맴 니가 다독이고 살아야제 우짜겄노?” 아들이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밖으로 배회하고 다닌다 여기는 정씨부인은 그런 아들이 안쓰러워 마음을 달래 주려 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씨 자신의 심중에 깊게 뿌리내려져 있는 남아선호사상에 입각한 그녀의 옹고집일 뿐 그런 연유로 대를 이어줄 손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며느리가 밉고 손녀들이 탐탁지 않았음에 아들의 가출사건을 핑계거리로 자신의 심중을 교묘히 포장하여 아들의 생각을 지배하려 한다. 근호 또한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었던 내면의 불편함을 어미가 속 시원히 풀어내어준 덕분에 그릇된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찾은 듯 어미의 생각에 스스로의 의식을 세뇌시켜 버린다. 그것이 두 모자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드는 방법이었기에 어미의 의식에 자신도 물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집안에 틀어박혀 식량만 축내는 신세로 전락한 근호의 삶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도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삶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자신의 삶에 단비라도 내려주기만을 바랄뿐 무엇이든 스스로 노력해서 얻고자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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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날보다 일찍 집에 들어선 당주가 빈둥거리고 있는 아들을 찾았다. “애비야! 옷 갈아입고 따라 나서그라.” “무슨 일 있습니까?” “만날 사램이 있으니 속히 채비하고 나오그라.” 아비의 호령에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뒤를 따르라며 당주가 앞장서서 대문을 나섰다. 이유도 알지 못한고 따라나선 근호는 아비의 서너 걸음 뒤에서 종종거리며 따라간다. 기차역까지 따라 들어오는 아들을 기다렸다 역사 내에 위치한 사무실 앞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고 아들과 함께 들어선다. 사무를 보고 있던 역장이 당주를 보고 깍듯이 인사를 한다. 예를 갖추고 대하는 상대방에게 당주도 예를 갖춘다. “애비야! 역장님께 인사 드리그라.” 뻘쭘하게 서있는 아들을 불러 세워 인사를 시킨다. “일전에 말씀 드린 지 자식입니다.” “예에.” 영문도 모르고 아비를 쫓아와 낯선 이와의 만남에 어리둥절해 있는 자신을 향해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가 부담스러워 슬며시 눈길을 피한다. “모자란 자식을 부탁드리게 되서 송구합니다.” “원 별말씸을 다하십니다. 그라믄 당장 내일부터라도 일 했시면 하는데 괜찮겠십니까?” 역장은 두 부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린다. "빠를수록 좋은 기지요. 잘 좀 부탁 드리겄십니다." 뻘쭘히 서있는 아들을 대신하여 당주가 서둘러 대답을 대신해버린다. 당사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합의를 마친 당주와 역장 그리고 근호가 역사에서 나와 요리 집으로 향하였다. 이쯤에서 자신이 아비의 부탁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음을 근호는 눈치로 알게 되었다. 지루한 삶에 단비가 내려주기를 바랬던 마음이 아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역장과 아비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근호는 무심결에 생각이라는 것이 들었다. 만약 제게 아비가 없었다면 자신은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의구심이 잠깐이나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요 깊이 생각을 해봐야 머릿속만 복잡해질 뿐이니 이내 그 생각을 접어 버리고 만다. 생각을 한다 해서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단순함이 그에게는 평화인 것을 굳이 골치 아플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는 지금의 자신으로 만족을 하며 살 것이다.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자신을 망가뜨려 놓더라도 자신이 감내해야 자신의 삶이기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나마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사이 어느새 세 사람은 요리집 대문을 넘고 있었다. 한동안 속 썩이던 아들이 새로운 삶에 서서히 적응하며 살아가게 되어 당주와 식구들은 한 시름을 놓았다. 그렇게 남편의 일이 일단락되고 집안이 조용해지자 희연은 문득 잊고 있었던 친정어미가 그리워졌다. 친정아비가 돌아가신 이후로 줄 곧 찾아뵙지 못한 것이 맘에 걸려 홀로 지내는 어미가 무탈한지 걱정이 되었다. 갈수만 있다면 한달음에라도 달려가겠지만 집안일에 묶여있는 몸이기에 어디를 쉽게 나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궁리 끝에 희연은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을 대신하여 아이들을 외가에 보내기로 하였다. 정옥이 벌써 학교에 들어가 여름방학을 핑계 삼아 외가에 가서 놀다 오라 이르니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안 가겠다고 버틸까 염려하였는데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니 어미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며칠 동안 입을 옷가지들을 챙겨 보따리를 싸주고 두 아이만을 보내는 것이 불안하여 하인을 딸려 보내며 바래다주고 오라 이른다. 제법 철이든 아이들은 기차를 타고 포항 외조모 댁으로 가는 길이 마냥 신기하고 즐거웠다. 도착한 대문 앞에서 대동하고 온 하인이 아이들을 들여보낸 후 돌아서가고 김 서방이 아이들과 함께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마님! 경주에서 손녀들이 왔십니다.” 안방 문이 열리고 강씨 부인이 방에서 나오며 아이들을 보고 놀란다. “우짠일이고? 너거들끼리 왔나?” “아씨 댁에서 머슴이 데려다 주고 갔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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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대신하여 김 서방이 대답을 한다. “그랬구마! 어이구 내 새끼들 잘 왔다. 그래 엄마는 못 온다 카더나?” “예! 엄마는 쫌 지나서 오신다 했어요.” 정옥이 찬찬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한다. “그래? 우리 강아지들이 에미 대신해서 핼미 농사일 거들어 줄라고 왔구마. 착하다. 착해.” 오랜만에 보는 외손녀들을 품에 끌어안으며 강씨 부인은 딸을 생각했다. 시집살이가 얼마나 벅차고 힘이 들기에 한번 다녀가지도 못하고 어린것들만 보냈을까 생각하니 애처로운 마음이 인다. 강씨 부인은 남편이 죽고난후 포항의 집과 소작을 붙였던 땅들을 모두 처분하여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흥해로 들어와 살고 있었다. 흥해 읍내에 시장을 끼고 조금 지나 커다란 기와집이 강씨 부인이 거처하는 곳이었고 조금 더 한적하고 외진 곡강면에다가는 과수원을 사들여 일꾼들을 두고 과일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녀도 과수원근처로 이사를 하려했으나 과수원이 너무도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 나이든 그녀가 홀로 그곳에서 적적하게 사는 것 보다는 그래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읍내 쪽이 나을 것 같아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여름 뜨거운 뙤약볕에 일꾼들은 등을 내보이며 농사일에 한창이었다. 더위에 지친 아이들은 과수원 원두막에 올라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정옥이 방학숙제 하는 것을 찬옥이 옆에서 지켜보다 뜨거워진 햇볕 탓에 더위를 못 이기고 속옷 바람으로 개울물로 뛰어든다. 시원한 물놀이를 한바탕 즐기고 나자 슬슬 배가 고파왔다. 아이들은 허기진 몸을 이끌고 개울에서 나와 다시 원두막을 향했다. 어느새 왔는지 옹얘가 밥을 담은 소쿠리를 들고 와 원두막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기씨들 배고프지예. 퍼뜩 점심 자시이소.” 어린것들을 상전대접하며 밥숟가락을 손에 쥐어준다. 물놀이에 지친 아이들이 허겁지겁 밥을 입속으로 우겨 넣는다. “체할라 천천히 자시이소.” 희연을 대신해 어미 같은 마음으로 옹얘가 아이들을 챙겼다. 외조모와 옹얘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이들은 마냥 즐겁고 신이 났다. 그렇게 즐거웠던 외가 생활을 마치고 아이들은 어미의 품을 그리며 경주로 되돌아왔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만 보내기가 뭣해 강씨 부인 역시 하인을 따라 보내고 그편에 수확한 과일들을 붙여 보낸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대문을 들어서는 아이들을 보며 희연은 놀란다. 친정집 머슴과 함께 동반하여 들어서는 아이들의 양어깨에 한보따리씩 짐이 지어져 있었다. 가져온 짐을 내려놓고 희연에게 인사를 올리고 하인은 돌아서 나갔다. 내려놓은 짐 꾸러미에는 친정어미가 농사지은 과일들이 가득하였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보는 어미가 반가워 그동안 외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풀어 내놓기가 바쁘다. 아이들을 통해 친정어미의 소식을 듣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새로운 곳에 잘 적응하며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는 짧은 편지를 아이들 편에 들려 보냈기에 희연은 잠시나마 어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있었다.

흉년이 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삶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흉년 탓에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종택을 드나들던 수양딸들도 자기 농사일 남의 농사일 할 것 없이 품을 팔아 품삯을 챙겨야만 살 수 있는 어려운 시기라 표도 안 나는 종택의 집안일을 거들어줄 일손을 바라기도 어려워졌다. 세월이 그러다 보니 희연은 누구에게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집안일을 해내며 힘든 세월을 견뎌내고 있었다. 어느덧 현옥이 세 살이 되었고 그 무렵 현옥에게도 남동생이 생겼다. 아들 손자를 보게 되어 기쁨에 찬 당주의 입은 귀에 걸렸다. 몇 해 전 평상에 누워있던 현옥에게 남동생 보거라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당주는 그 바람을 이루어준 셋째 손녀가 기특하기만 했다. '참. 고녀석 이쁜짓만 골라서 하는 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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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했다. 누운 자락의 아기에게 주문처럼 걸었던 바람이 이루어 질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던 터라 정녕 이 아이가 복을 가져다주는가 싶어 자꾸만 눈길이 간다. 희연의 집안일은 갈수록 늘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이 혼자 하다 보니 하루가 너무 짧기만 했다. 그나마 의지 할 곳은 딸아이들뿐이라 바쁜 어미의 일을 도와 대신 해주기도 하였다. 배급을 받는 날이면 희연은 꼭 정옥과 찬옥에게 배급 심부름을 시켰다. 아이들은 양은그릇을 하나씩 손에 들고 길게 늘어서있는 배급 줄을 차례를 기다리며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정옥이 줄선 이들의 끝에 서서 한참이나 긴 앞줄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는 사이 어리지만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잽싼 찬옥은 어른들 사이에 끼어있다 옆으로 한발씩을 내밀며 앞으로 나서더니 어느새 앞줄에서서 배급품을 받아들고 신이 나서 집으로 뛰어간다. 집에 들어선 찬옥은 오늘도 먼저 배급받아왔다며 자랑을 하며 어미가 있는 부엌으로 배급 통을 들이민다. 잠시 마당에 나와 있던 정씨부인이 찬옥의 행동에 입 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정옥이는 아직도 줄서있는 기가?” “언니는 아직 한참 있어야 올거예요. 히히.” “니 또 새치기해서 배급 타온기가?” “예.” 기분에 들떠 대답을 하는 아이를 보며 정씨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흐흥! 저거는 그래도 하는 짓이 새빨라서 좋구마.” 찬옥이 들어 온지 한잠이 지나서야 정옥이 배급 통을 들고 심술 난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던 정씨가 정옥을 보며 혀를 찬다. “찬옥이는 벌쎄 와서 있구만 니는 우째 그래 행동이 꿈뜨는 기고?” “......” 갑작스런 조모의 말에 정옥은 아무 말도 못하고 울상이 되어 어미가 있는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우째 저거는 지 동생만도 못한기고. 하여간에 지 에미를 닮아 가지고는.” 정씨는 속이 탄다는 듯 입술을 씰룩거리며 정옥이 들어왔던 대문 쪽으로 발길을 향한다. 좋든 싫든 어미를 도와야 해서 하는 일이지만 아이들은 배급 받는 일이 정말 싫었다. 배급을 탈 때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고 힘들어 어떤 때는 다른 아이들 숙제를 대신하여 주고 배급을 타 달라 부탁을 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품앗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서로의 일을 대신하며 지내다보니 서로 얽혀진 관계 속에서도 우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가을걷이를 끝낸 쓸쓸한 들녘에는 찬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구경거리가 흔치않던 시절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아이들끼리 준비한 재롱잔치가 펼쳐지고 있었다. 추수를 끝내고 겨울준비에 들어설 무렵 아이들은 그동안 농사일에 힘들었던 부모를 위한 위안의 시간을 마련하고자 잔치 준비에 열심이었다. 대외적인 이유야 부모를 위한 위안의 시간이겠지만 어린 그들에게도 꿈은 있었기에 부모를 비롯한 마을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재능을 칭찬을 받고 싶은 욕심에 그 하루를 위하여 감추어 두었던 재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날이기도 했었다. 자신들의 끼를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는 무대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무척 기대되어 아이들은 열심히 잔치 준비를 하였다.    누구는 독창을 준비하고 누구는 무용을 또 누구는 연극을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을 열심히 준비하고 지치도록 연습을 한다. 마을의 축제이기도 한 그날을 아이들도 어른들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축제의 날이 되었다. 등교준비를 마치고 나서던 찬옥이 조모를 부른다. “할머니! 오늘저녁에 우리 연극하고 무용하는 거 구경하러 꼭 와요!” “그기이 오늘 이가?” “예에.” “몇 시에 시작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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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요.” 찬옥이 똑 부러지게 대답을 한다. “일찍 오셔서 앞자리에 앉아요. 그래야 내가 하는 독창, 연극, 무용 모두 볼 수 가 있어요.” “그 많은 거를 우째 니가 다 하노?” “애들이 내가 있어야 한다면서 연극, 무용 다 같이하자고 해서 나는 다 하기로 한 건데요.” 찬옥은 어깨를 으슥하며 자신의 인기를 조모에게 넌지시 자랑을 한다. “하이고! 우리 찬옥이 재주도 많다! 오냐. 할매가 일찍 가꾸마.” 찬옥은 신이 났다. 멀뚱히 서있던 정옥이 어미에게로 다가가 부탁을 한다. “엄마 내 저녁에 치마저고리 가지고 가야 하는데 다림질 좀 해주세요.” 찬옥이도 어미에게 부탁한다. “엄마 나는 까만 몸빼 바지하고 흰 적삼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 알아들었다. 준비해 놓을 기이 퍼뜩 가그라. 학교 늦겄다.” 두 딸은 신이 나서 동시에 다녀오겠다며 고함을 지르고 함께 달려 나간다. 희연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일을 대충 끝낸 후 아이들이 부탁한 옷을 꺼내어 다림질을 시작했다. 숯불을 피워 다리미에 담고 맞잡아주는 사람도 없이 발로 천을 누르고 당기면서 혼자서 다림질을 한다. 어느새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구겨졌던 주름이 반듯하게 펴졌다. 하루 종일 들떠있던 아이들은 어미가 준비해둔 옷을 갈아입고 신이 나서 뛰어나간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집을 나선 마을 어른들이 학교 안으로 한둘씩 모여들고 서로에게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는다. 종택에서도 정씨부인이 벌써 준비를 끝내고 집을 나서려한다. 아직 할일이 남은 희연이 일을 서두르고 있자 바깥에서 시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미야!  내 먼저 가서 자리 잡아 놓을 기이 뒤쫓아 오니라.” “예. 어머님! 먼저 가시이소. 곧 따라 가겠십니다.” 시모가 나가고 희연은 설거지와 방을 대충 치워놓고 시모의 뒤를 이어 집을 나섰다. 아직 어린 경현을 등에 업고 현옥의 손을 잡고 희연은 종종걸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정씨부인은 용필 할매와 함께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희연이 앉을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시어미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용필할매와 인사를 주고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교실 안은 어느새 관객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아이들은 상기된 얼굴로 막이 오르기를 초초하게 기다리고 섰다. 드디어 막이 열렸다. 무대의 끝과 끝을 연결한 줄에 시커먼 천이 늘어뜨려져 있고 그 앞으로 두 아이가 걸어 나오더니 중앙에 서서 양 갈래로 갈라진 천을 한쪽씩 잡아 구석으로 밀어내자 세 줄로 서있던 아이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방금 전 막을 연 두 아이가 서있는 아이들 곁으로 재빠르게 뛰어가 제자리를 찾는다.  이어 누군가의 구령에 맞춰서 아이들이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한다.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앞으로 나와 인사말을 전한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저희 모두가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잘 할 테니 박수 많이 쳐 주십시오.” 아이의 어설픈 인사말에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담겨있었다. 어른들의 도움 없이 순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무대라 아이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를 들으니 아이들은 용기가 생겨 더욱 신이 났다. 제 아이가 무대에 서는 것을 보는 어미는 손을 모으고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혹여 실수나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 가슴을 졸인다. 무대를 무사히 마치고 내려서는 아이를 보면서 어미의 마음도 들떠 감격의 미소를 날리며 주위 사람들에게 저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며 자랑 질을 해댄다. 부모의 마음이 그런 것을, 그 날의 모든 부모들은 자식을 보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변변하게 해준 것이 없어 늘 마음 한 켠이 무거웠건만 모든 이들에게 칭찬과 박수를 받으니 저도 모르게 기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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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양되어 자랑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부모의 기대이자 미래인 자식이 오늘은 너무도 기특하고 대견스러워 어미는 콧등이 찡해짐을 웃음으로 감춘다. 그렇게 부모들은 감격에 겨워 누구네 아이 할 것 없이 재롱을 떠는 모습에 마냥 즐거워했고 실수를 하더라도 웃음으로 넘기며 용기를 실어 박수갈채를 보낸다. 막이 내릴 때까지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법이 없었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재롱에 근심을 날리며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켜주었다. 막이 내려지고 아이들의 인사를 끝으로 모든 잔치는 끝이 났다. 스스로의 모습에 매우 만족해하며 내려온 아이들은 교실을 나와 제 부모의 손을 잡고 나란히 집으로 향한다. 밤하늘에 걸린 달빛과 더불어 마을 사람들의 환한 미소가 한데 어우러진 늦은 밤, 어두운 밤거리는 그 빛들로 인해 온통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해 겨울도 그렇게 아이들의 재롱잔치로 시작해 엄동설한을 보내고 계절은 다시 꽃피는 춘삼월로 접어들었다. 빨래터에 나와 앉은 희연의 손이 새빨갛게 얼었다. 봄의 기운은 성큼 다가와 있었어도 아직 우물의 물은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하다. 맨손으로 빨래를 치대는 희연의 손에 찬물이 닿자 손끝이 얼얼하게 아려온다. 뜨거운 물 한 바가지에 손을 담가가며 녹여보지만 뜨거운 물도 금세 식어 찬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차가워진 물에 언 손을 담근 채 희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며칠 후면 어머니 생신인데...” 아이들을 통해 친정 어미의 소식을 전해 듣기는 하였으나 제 눈으로 어미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친정을 가야겠다는 마음에 빨래는 뒷전으로 미루고 쭈그리고 앉아 묘안을 생각해 본다. 며느리의 친정나들이에 시모의 허락이 쉽게 떨어지지도 않을 것이요, 제 입으로도 차마 가야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어떤 핑계를 대야 하나 싶어 희연은 머리를 굴리며 핑계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어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방으로 들어선 희연은 이미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할 준비를 하고 있는 남편을 넌지시 바라보며 말을 꺼낸다. “정옥아버지! 내 아아들 외가에 좀 다녀올까 하는데요.” 근호는 희연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다. 희연이 잠시 기다렸다 낯에 홀로 구상했던 방법을 근호에게 털어놓는다. “내가 어머님께 말씀 드리면 분명 안 된다고 하실 기요. 그라니 이핀이 내일 아침에 나가믄서 친정에 가지 않겠냐고 내게 물어주소. 큰소리로 말이요. 어머님 들으시게.” “와? 장모님 어디 편찮으시다나?” “아이구 참! 그런 기이 아이고 아아들 외할머니 생신이라 그라요!” “맞다. 이맘때가 장모님 생신이시제. 내가 깜빡했구마!” 잊은 것이 아니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돌렸으나 가슴이 뜨끔거린다. “임자 혼자 가게?” “우리식구가 같이 가믄 두 분은 누가 모십니까?” “그거야 강구 네한테 잠시 봐 달라 부탁하믄 되제.” “그 부탁도 부탁이지만 정옥이, 찬옥이 학교도 가야하고 이핀도 일하러 가야 하이까 그냥 두 아아만 데리고 갔다 올랍니다.” “알았다! 그라믄 임자 혼자 다녀오거라.” 근호는 내심 안심을 하였다. 같이 가자하면 어떤 핑계를 대고라도 피할 생각이었는데 처가 먼저 혼자 가겠다하니 마음이 놓인 것이다. 장모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드는 근호, 처갓집을 찾는 것이 영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다음날 아침. 근호는 출근하기위해 마루 끝에 앉아 신발을 신으며 간밤에 희연이 부탁한 연극을 시작하려 큰 목소리로 희연을 부른다. “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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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이 서방의 부름에 옅은 미소를 짓다 이내 훔치며 연습도 없이 시작된 연극에 맞장구를 치려 부엌에서 나오며 대답을 한다. “예! 찾았으요?” 서방이 느긋하게 간밤에 맞춰 놓은 대사를 읊는다. “글쎄 내가 장모님 생신이라 시간을 좀 내서 댕겨올라꼬 역장님께 청을 넣었더만 요새 바쁜 일이 많아 시간을 빼줄 수 없다 카네. 어쩔 수 없으이 이분에는 임자 혼자 다녀와야겠다.” 대사를 마친 서방이 안방의 방문을 바라보고 어미의 낌새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자 곧이어 방문이 열리면서 정씨부인이 방에서 나와 아들 뒤에 섰다. “머? 사돈 생신이라꼬?” 정씨부인은 마뜩찮은 표정을 지으며 아들을 내려다본다. “예! 엄마! 임자 날짜가 언제고?” 희연이 시모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을 한다. “모레가 생신 날이라요.” 시모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그라믄 내보고 아아들 할아버지 진짓상 차리란 말이가?” 희연은 언짢은 심기의 시모 얼굴을 쳐다보며 얼른 말을 막는다. “아입니다. 강구 네한테 부탁해 놓을 깁니다.” 사돈의 생일 이라하니 가지 말라는 소리도 못하고 시모는 마지못해 며느리에게 허락을 내린다. “알았다. 그라믄 가서 잘 해 드리고 퍼뜩 돌아 오그라. 아아들 기다리게 하지 말고.” 가시 있는 말을 내뱉으면 어떠랴, 허락만 구하면 되는 것을. 희연의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난다. “예. 어머님! 고맙습니다.” 며느리의 대답을 무시하고 시모는 돌아서서 방안으로 들어간다. 전에 없이 밝은 표정으로 근호의 출근길을 배웅하고 희연은 부엌으로 돌아선다. 오랜만에 하는 친정나들이를 생각하니 미리부터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이틀 후 희연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찍 집을 나섰다. 막내인 경현을 업고 현옥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 희연은 힘이 드는 줄 모르고 걸음을 재촉하며 기차역을 향해 발을 옮겼다. 시댁을 잠시 떠나는 것만으로도 희연에게는 힘이 생겨나는 것만 같았다. 포항역에 도착한 희연은 열차에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나들이를 자주 해 보지 못한 탓에 차를 탈 때마다 멀미가 심해져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도 멀미 탓에 속이 불편했다. 역에서 흥해로 들어가는 길은 꼬박 이 십리길, 읍내로 들어가는 방법이 달리 없어 걸어야만했다. 걷는 것에는 이골이 나있어 별 문제 없지만 두 아이를 데리고 가자니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어미 곁에서 걷고 있는 현옥도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댄다. “애기엄마가 혼자서 힘들어 보이는 구마.” 뒤에서 낯선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희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오십 중반의 나이에 인상이 후해 보이는 남자가 현옥을 안아 올리며 희연에게 안심하라는 미소를 짓는다. “쩌어 건널목까지 내가 안고 갈기니 애기엄마는 뒤에 천천히 따라오소.” 뜻하지 않은 도움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희연이 뒤에서 남자를 쫓아 걸어간다. 낯선 사람의 품에 안겨가던 현옥이 무서웠던지 뒤따르는 어미를 돌아보며 서럽게 울어댄다. 희연은 아이를 달래며 걸어간다. 그러나 현옥이 겁에 질린 채 어미만을 찾으며 슬프게 울어대자 아이를 안고 가던 남자가 멋쩍어하며 우는 아이가 안쓰러워 도저히 안 되겠다며 아이를 내려놓고는 자신의 길을 재촉해 가버린다. 어미를 부르며 달려오는 현옥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쫓아와서 어미의 품을 파고든다. 어미는 아이를 달래어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희연은 아이들을 데리고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한다. 친정에 도착해 대문으로 들어서자 희연을 먼저 맞이해 준건 옹얘였다. “아씨! 오싰습니꺼?” 여전히 카랑한 목소리로 희연을 반갑게 맞으며 입 꼬리를 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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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냈는가?” “지야 늘 똑같지요.” “지난번 우리 아아들을 돌보느라 자네가 욕봤제! 고마웠네.” “아이구 아씨! 별말씸을 다하십니더.” 작년 여름 외가에 다녀온 아이들을 통해 옹얘의 얘기를 전해 들었기에 희연은 그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희연의 칭찬에 얼굴이 빨개진 옹얘는 안방을 향해 강씨 부인을 큰소리로 부르며 희연이 왔음을 알린다. 방에 앉아 있다 반가운 소식을 듣고 마루까지 쫓아 나온 강씨의 뒤로 희연의 오라비와 올케가 따라 나왔다. “오라버니! 먼저 와 계셨네요.” “어서 와라! 오느라 고생했다.” “애기씨! 오셨으요.” “예!” 오라비 내외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신을 반겨주는 어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희연은 업고 있던 아이를 살포시 바닥에 내려놓으며 앉는다. 아이를 업었던 등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어미의 체온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아이의 조그마한 얼굴이 빨갛게 익어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이고나!  지 에미 등짝에서 아아가 익었구마.” 곤하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고는 손을 저어 부채질을 한다. “오느라 힘들었제?” “아니요. 힘들기이 머 있어요.” 올꺼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딸이 찾아 온 것이 기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힘든 길에 고생한 것을 생각하자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에미는 머하고 섰노? 가서 시원한 거 쫌 안 내오고.” “예. 어머님.” 시어미의 호령에 며느리는 시누이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방을 나간다. 낯선 공간이 두려웠던지 현옥이 어미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어미 곁에 달라붙어 앉아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에 두려움을 머금고 입술을 앙다문 채 어미와 동생 곁을 지키고 있는 아이를 향해 강씨 부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넨다. “우리 현옥이. 외할매 얼굴 처음보제?” 두려움을 머금은 초롱초롱한 눈빛이 강씨 부인에게로 향한다. “내가 니 외할매다. 이리 외할매 자테 와 보그라.” 쭈뼛거리며 뒤로 나앉는 딸을 어미가 토닥여 외조모 앞으로 민다. “우째 이래 얌전노? 현옥아! 니가 효녀다. 너거 엄마가 니 때문에 눈치를 면한기라. 니 덕분에 남동생이 태어나서 그래서 시어른들 눈치는 면한기다. 아나?” 외조모의 말뜻을 아직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현옥은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외조모가 무섭지는 않아 경계심을 풀고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아이의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에 환한 얼굴을 지어보이고 어미는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아들손자 보시서 시어른들 좋아하시더나?” “예! 시아버님께서 많이 기뻐하십니다.” “박 서방은 인자 정신 좀 차맀나? 아아들 자꾸 커 가는데 인자는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할 거 아이가!” 어미의 걱정이 묻어나는 말에 희연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열심히 직장 다니고 있으니 염려 안하시도 됩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며 어미가 딸의 심정을 살피고는 말문을 닫는다. 거하게 차려진 생일상을 마주하고 식구들은 오랜만에 둘러앉아 서로의 정을 느끼며 행복하게 저녁식사를 마쳤고 오라비는 하는 사업이 바빠서 먼저 일어나겠다며 방을 나선다. 오랜만에 만난 오라비와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바쁘다하니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져야만했다. 오라비 내외를 배웅하기위해 희연이 대문 앞까지 따라나섰다. 집 앞에는 오라비가 타고 온 자동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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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차에 오른 올케에게 인사를 하고 오라비를 바라보며 서있자 오라비는 차문을 열려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희연에게로 돌아서서 주머니에서 봉투하나를 꺼내 동생에게 내민다. “이거 얼마 안 된다. 니 살림 분가하면 집이나 사주려고 했던 거다. 분가는 힘들기고 니 몫으로 준비해둔 거니까 니가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 쓰도록 해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 “아니요. 오라버니! 무신 염치로 지가 이 돈을 받아요.” “사양하지 말그라. 아아들 크는 것도 생각을 해야지. 그라니 모르는 척 그냥 넣어 둬라. 그라고 힘든 일 있으면 꼭 찾아오고. 알았제?” “예에. 오라버니.” “희연아. 아프지 말고 잘 지내라.” 희연은 가슴이 메어와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다. 희연의 마음을 알았는지 오라비는 가녀린 동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다. “들어가라. 어머니 기다리신다. 내는 이만 간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오라비의 차는 어느새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아이들을 데리고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던 희연은 버릇처럼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준비할 채비를 하다 여기가 친정임을 깨닫고는 다시 잠자리에 누워 오랜만에 늦잠을 즐기기로 했다. 어미는 잠 든 딸의 모습을 지켜보다 이불을 다독여 주고는 손주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다.  “현옥아. 경현아! 너거 에미 피곤하이 실컷 자게 냅두고 우리는 엿이나 사러 장에 가자.” 강씨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장판에 나섰다. 강씨 부인의 집에서 장은 멀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담뱃대를 물고 뒷짐을 지는 대신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강씨를 향해 장에서 만난 이들이 인사를 해온다. 종종거리며 외조모와 보조를 맞추는 아이들의 눈에 시장은 온통 재미난 것들로 가득하였다. 장판의 가운데쯤 들어서 강씨와 아이들의 걸음이 멈추어 선 곳은 엿장수 가게였다. 가게주인이 강씨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르신 나오십니껴?” “그래! 오늘 장사 좀 했나?” “아직 마수걸이도 못 했십니더.” “그래? 그라믄 우리 손자들 먹을 엿 좀 줘 보게나.” “아예. 어르신.” 대답과 동시에 엿장수는 가락으로 나온 엿을 망치로 잘게 깨어 두둑하니 챙겨 강씨 앞에 내어 놓는다. 강씨는 엿이 담긴 봉투를 챙겨들고는 엿장수에게 셈을 치르고 그 자리에서서 제 한입, 경현이 한입, 현옥이 한입하며 아이들 입에 엿을 하나씩 물려준다. 손주들과 함께 엿을 입에 물고 오물거리며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서 마루에 걸터앉자 경현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이잉 이잉 이잉.” 영문을 모른 채 강씨는 아이의 울음에 어쩔 줄 몰라 우는 아이를 달래며 안절부절못하자 희연이 방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야가 우째 이래 우는지 모리겄구마.” 어미는 딸을 향해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아이는 어미를 보고는 더 서럽게 울어댄다. 희연이 가까이 다가가 아이를 살피며 눈물을 닦아준다. 아직 말이 서툰 경현이 울면서도 손에 든 종이를 놓지 않고 있었다. 엿을 담겨있던 빈 종이가 경현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제야 어미는 아이가 우는 이유를 알고 멋쩍게 웃음을 흘린다. 그 웃음에 강씨 부인은 딸을 보며 묻는다. "와? 아아가 와 우는데?" 희연은 어미에게 아이가 든 봉투를 내보이자 강씨는 그제야 이유를 알겠다며 무릎을 치며 웃었다. 한입씩 나누어 먹던 엿 봉지가 어느새 비어 있었던 것이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했었던 가보다. “그 많던 엿이 그든새 도망을 갔구마. 우리 경현이 엿이 없어져서 울었더나? 가자. 할매가 또 엿 사주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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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서 아이를 달래며 또 엿을 사러 가자며 손을 잡고 집을 나서려 한다. 희연이 그런 어미의 모습에 실소를 터뜨리며 어미를 만류하고 나섰으나 어미는 그것이 재미있는지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시장으로 나가버린다. 할머니와 아이들은 그렇게 하릴없이 시장을 왔다 갔다 하며 하루를 보냈다. 친정에서 며칠을 부엌일도 하지 않고 집안일에 대해 신경 쓸 것 없이 편하게 지내다 보니 희연의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며칠간의 달콤한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 시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어미는 딸에게 돈과 곡식 과일 양념 등을 두루 갖추어 짐을 부쳐준다. 어미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희연은 현옥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경현을 옹얘가 기차역까지 업고 바래다준다며 희연의 뒤를 따라 나왔다. 기차역에서 옹얘와도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아씨 잘 가시이소.” “그래 고마웠다. 어머니 잘 모시거라. 부탁한다.” “걱정 마시이소. 지가 아씨 몫까지 다 하겄십니더.” “고맙구나. 옹얘야.” 그렇게 친정나들이는 끝이 나고 아이들과 희연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이 며칠 만에 돌아온 어미를 보고 반가워하며 어미의 품으로 뛰어든다. “엄마 와 인자 왔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찬옥을 다독이며 희연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 학교는 결석하지 않고 잘 다닜나?” “예¡” 찬옥이 뭐에 신이 났는지 연신 생글거리더니 방 한구석에 놓아둔 운동화 한 켤레를 가져와 어미 앞에 쑥 내민다. “운동화가 어데서 난 기고?” 희연은 아이가 내민 운동화를 보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엄마! 내가 학교에서 장깸보 잘해서 이겨가지고 타온 건데 엄마 보여드릴라꼬 신지 않았고 있었지요.” 찬옥이 풀어내는 사연인 즉, 반에 딱 한 켤레 배급으로 나온 운동화를 어느 한사람에게 줄 수 가없어 담임선생이 가위바위보해서 이긴 사람에게 주기로 약속을 하고 반 전체 아이들을 대상으로 내기를 하였다고한다. 그 중 찬옥이 이 내기에서 이겨 운동화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반 팔십 명중에 내가 일등 해서 받은 거지요.” 아이는 신이 나서 자랑을 한다. 어미는 대견하다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찬옥은 자기 반에서 인기인이 된 반면 질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쉬는 시간에 여자아이들끼리 모여 고무줄뛰기를 할 때도 다른 아이들은 고무신이 벗겨져 맨발로 뛸 때 찬옥은 상품으로 탄 운동화를 신고 뛰어 신발이 벗겨지지도 않아 신이 나서 더 열심이었다. 이에 반 아이들은 부럽기도 하고 시기가 나서 좀 져주면 안되냐며 찬옥에게 시비를 거는 행동을 보이곤 했었다. 약아빠진 찬옥은 그런 아이들의 시기를 받으면서도 절대 기죽지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하게 그들을 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찬옥은 제 반에서 인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콧대 높게 굴었다.

요 며칠 새에 나라는 더욱 더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해방의 징조가 조금씩 보이고 있음에 당주는 대서방에 앉아서 매일같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일본 천왕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오더니 거리마다 사람들이 독립을 외치며 쏟아져 나왔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고 조선은 그로 인해 드디어 광복을 되찾게 되었다. 당주의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고대하던 해방이 되어 백성들이 더는 남의 나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업신여겨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도 기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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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소란해지고 마을이 시끌벅적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것들도 덩달아 거리를 뛰어다니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해방과 더불어 침묵하고 있었던 사상들까지도 뛰쳐나와 다시 온 나라를 뒤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였다. 한 몸 이여야 하는 이 땅에서 또다시 한 핏줄이 둘로 나뉘어 좌익과 우익의 편 가르기를 시작했다. 문외한 백성은 누구의 편에 서지도 못한 채 목숨 부지에만 온 힘을 기울였다. 왕권이 무너지고 통치자가 없는 상황에서 주권회복에 안간힘을 쓰는 정치사상보다는 당장에 먹고 살기 힘들어진 세월을 또 어찌 견뎌야할지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그들에게는 정치의 이념 따위는 필요 없었다. 먹고사는 것만 해결이 된다면 어떤 이념이든 그들은 찬성을 할 것이고 그것에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올바른 것이든 올바르지 않은 것이든 그들이 선택할 사상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편하게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만 있다면 그 자체가 그들에게 필요한 사상이요 신봉할 사상인 것이다. 해방 후 나라는 다시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도망을 가버리고 그들이 운영하던 회사나 가게들이 문을 닫거나 주인이 바뀌어버려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농사까지 버리고 선택했던 일자리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이들은 다시 궁핍한 생활 속에 방치되고 만다. 근호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의 신세가 되었다. 아비 덕에 들어간 직장도 해방이 되면서 쫓겨나고 가세는 점점 더 기울어져 믿었던 주위의 사람들조차 그의 곁을 떠나버리니 마음이 허전하여 미칠 지경이었다. 술을 마시고 싶어 기생집을 찾아도 먹고 놀아줄 기생들조차도 없는 판국이었다. 수중에 돈이라도 두둑이 있었으면 어찌 한번은 거하게 취하여도 보고 싶건만 호주머니를 채워주는 이가 없기에 더욱더 답답하고 미칠 노릇이었다. 시절을 욕하며 세월을 탓하며 오늘도 근호는 술에 절어 거리를 방황한다. 늘 상 술을 마시고 흥얼거리며 지났던 거리에 갑자기 총성이 요란하게 울리고 달아나고 잡으려는 이들이 얽히고 설켜서 거리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아우성과 온통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멋모르고 그 자리에 서있던 근호는 총성에 놀라 번뜩 정신을 차렸다. 제 앞으로 사람들이 달아나는 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다시 총소리가 이어지고 달아나는 사람들을 쫓아가는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자 근호는 사람들을 피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거리에 난무하는 총성, 사람들의 절규, 제 눈으로 직접 보았던 그 두려움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근호는 생생하게 목격을 한 것이다. 그제야 근호의 눈에 변해버린 모든 것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도련님, 서방님 하며 불러주던 그때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부유한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누리고 살았고 남은 평생 또한 남겨진 유산으로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으리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건만 지금의 세상은 그 좋던 옛 시절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밀려오는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진다. 앞으로 이 세상을 어찌 살아남아야 할지 머릿속이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듯 어지럽고 복잡했다. 며칠을 방에 갇혀 두문불출하며 머리가 깨지게 고민을 한다. 평소에 그 같지 않은 근심에 찬 표정으로 방안을 서성거리며 생각의 생각을 거듭해본다. 너무도 단순하게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이제는 가족을 위해 다시 한 번 세상을 제대로 살아보리라 다짐을 하고는 잠시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아내에게 그 결심을 터놓는다. “임자 나도 돈 한 분 벌어 볼라네. 내가 전라도 가서 장사 배우고 오겠으니 그리 알고 있어라.” 희연은 남편의 생뚱맞은 소리에 남편의 말을 무시해 버린다. “이핀같이 장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우째 장사를 하겠다는 기요?” “가서 배워서 한번 해 볼기다.” “가면? 가르쳐주는 이가 있답디꺼?” “그거는 모르지만 밖에서 들은 얘기로 전라도가면 장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까 그리로 가 볼 라는 기제!” “괜히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도 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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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히 하릴없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잖은가? 임자나 아아들 그라고 아버지 어머니까지 인자부터 내 가족을 내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나!” 처음으로 남편의 입에서 나온 책임이라는 단어를 듣고 희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양반이 오늘 머를 잘못 자싰나 와 자꾸 헛소리를 하는 기요? 남의 돈 먹기가 그리 쉬운 일인 줄 아요? 괜히 집 떠나 거지꼴 되지 말고 그냥 집이나 지키고 계시요.” 말은 그리 하였으나 내심 희연은 남편이 돈을 벌러 가겠다는 것이 기쁘기는 하였다. 가세가 기울어 가는 것도 모르고 철없이 행동하는 남편이 미덥지는 않았으나 가족을 생각하고 있다는 한가지만으로도 행동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이 트기도 전, 근호는 아무도 모르게 새벽기차를 타러 역으로 나간다. 간밤에 희연에게 던져 놓은 그 말들만 남긴 채 굳은 다짐을 하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어슴푸레 잠에서 깬 희연이 남편의 자리가 허전해 어둠이 눈에 익을 때를 기다렸다 곁을 바라본다. 혹시나 했던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편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희연은 마음을 졸이며 옷가지가 들어 있는 서랍과 장롱을 뒤졌다. 있어야 할 근호의 옷가지들과 가방이 사라진 것이다. ‘이 양반이 참말로 떠난 기가! 무신 바람이 불어 이라노?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구마.’ 황당한 사건에 잠이 깨어 새벽빛이 밝아 오기를 기다렸다 희연은 부엌으로 나갔다.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그동안 집안을 서성이던 아들이 눈에 띄지 않아 정씨부인은 불안함을 느꼈는지 며느리를 불러 아들의 행방을 묻는다. “어제부터 아범이 안보이던데 어데갔노?” “저어…….지난밤에 장사 간다는 말만 남기고 집을 나갔십니다.” “뭐어? 장사를 가? 그아가 무신 장사를 한다고 집을 나간단 말이고. 니가 또 잔소리 한기제? 안그라고 그아가 와 집을 나가노 말이다. 어데로 간기고?” “…….” “어데로 간지도 모른다 말이가?” 정씨부인은 아들이 말도 없이 사라진 일을 며느리 탓으로 돌려댄다. 얼마나 견디기 힘이 들었으면 집을 나가겠냐며 희연을 원망하고 있었다. 모든 불똥이 또 며느리에게로 넘어왔다. 며느리 다그치는 정씨의 날이 선 목소리가 사랑채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당주는 대서방으로 출근을 하려 사랑채를 나오다 시모에게 혼쭐이 나고 있는 며느리가 안타까워 둘 사이에 끼어든다. “임자! 그만 목소리 높이그라. 우째 매사가 그래 며느리 잡을 일만 있는 기고?” “머요?” 속이 상한 자신은 안중에도 없고 며느리 역성을 들고 나서는 남편이 야속해 소리를 지른다. “아들 집 나간 기이 우째 며느리 잘못이란 말이고? 임자가 아들 맴을 알고나 하는 소리가?” “와 몰라요? 저 아가 지 남편을 얼매나 닦달을 했이믄 집을 나가나 말이요!” “에미라는 사램이 저래 자식 속도 모리믄서 무신…….쯧쯧쯧.”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남편을 정씨는 노기 찬 눈으로 쏘아 본다. “그라믄 이핀은 근호가 집을 나간 이유를 안단 말인교?” “잔말 말고 기다리고 있그라. 그아도 인자 한 집안의 가장이다. 지 할 도리 하겠다고 나갔으이 애먼 며느리 좀 그만 잡고 진득하니 기다려 보그라.” 애매모호한 대답만을 던지고 나가는 남편의 뒤통수에 입을 불쑥거리다 정씨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시부가 아니었으면 고스란히 제 죄가 되어 버릴 뻔한 남편의 가출사건은 그렇게 일단락 지어지고 시모는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가출문제도 걱정거리였지만 희연은 친정에 별일이 없는지 그 또한 걱정거리였다. 해방이 되고 나서 일본을 오가던 오라비가 어찌 되었는지 친정어머니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친정을 다시 한 번 다녀오고 싶으나 남편이 없는 마당에 집안일까지 팽개치고 친정을 찾아간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고 아이들 때문에 더욱더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생각 끝에 희연은 정옥에게 어미의 심부름을 대신 시키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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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이 니가 외갓집에 좀 다녀오그라.” 정옥은 현재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다니지 않은 채 집에서 어미의 일을 도우며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외할머니 우째 지내고 계시는지 그라고 외삼촌 소식도 좀 알아보고 오그라.” “예!”    정옥이 어미의 심부름을 위해 외가로 갈 채비를 하고 나서자 찬옥이 따라 나서며 같이 가겠다고 때를 쓴다. 혼자 보내는 것보다 둘이 함께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희연은 두 딸을 함께 친정으로 보냈다. 외가에 도착한 아이들이 할머니를 부르며 대문으로 들어섰다. “아이구 우리 손녀들 왔네! 그렇잖애도 소식이 궁금 했구마. 잘 왔다.” 배가 고픈 아이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고 달콤한 과일들을 챙겨주고는 어미와 아비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물어보자 정옥이 대답을 한다. “아버지는 장사하러 멀리 가셨고 엄마는 집안일을 맡길 데가 없어서 못 오셔서 우리가 대신 엄마 심부름으로 외할머니 보러 왔어요.” “그랬구나! 기특한 내 손주들! 핼미집에서 며칠 편하게 쉬었다 가그라. 알았제?” “네! 할머니.” 아이들은 그렇게 외할머니와 며칠을 보내고 돌아와 외삼촌이 일본에 있다는 소식을 어미에게 전해주었다. 희연의 오라비는 포항에서 이름난 부자였다. 열아홉 나이에 은행에 사서로 취직하여 매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은행의 심부름을 맡아 처리하는 등 눈치로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돈을 벌기 시작해 지금은 자수성가하여 유명한 사업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해방 전부터 공장을 시작하여 일본을 오가며 무역을 하였고 장사 수단이 좋아 회사가 날로 번창하더니 지금은 포항일대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를 두고 질투하는 세력들과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해방이 된 후 이유 없이 누명을 써 좌익으로 몰리기도 했었다. 그를 좌익으로 몰아가며 위협을 가하는 이들과 비리에 눈이 먼 경찰들은 서로 돈뭉치를 받아내려고 나눠가면서 그에게 접근하여 수없이 돈을 뜯어내었다. 돈 몇 푼에 전전할 그가 아니기에 돈을 내어주는 것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사상으로 옭아매려는 그들에게 돈으로는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결국 일을 핑계로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직접 찾아가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으나 갈 수 없는 현실이 희연은 너무도 야속했다. 그나마 아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기에 조금은 안심하며 친정을 찾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당주의 대서방일은 해방 이후 일이 넘쳐나 이른 아침부터 출근을 해야만 했다. 세월이 뒤숭숭한 만큼 마을 사람들의 사연들도 더 많아지고 그 모든 사연들을 들어주고 해결책들을 찾아 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당주는 일에 몰두를 하였다.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는 슬픔을 당하지 않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나라의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참된 것 그릇된 것을 판단할 줄 알아야 그 힘이 생겨난다고 생각하여 많은 정보들을 찾아 바르게 알려주겠다며 쉼 없이 일을 하였다. 며칠을 바깥출장을 다녀온 당주가 새벽녘에 배가 아파 변소를 다녀온다. 먹은 것이 잘못되어 그러려니 하고 참고 잠을 청하여 보지만 배는 계속해서 아프기만 할뿐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을 붙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하여 잠을 청해보지만 복통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룰 수 가없었다.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고통 속에서 당주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시부의 아침을 준비하여 사랑채로 들이던 희연은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는 당주를 보고는 깜짝 놀라 선 걸음에 시모에게로 달려간다. 희연이 시모와 함께 사랑채로 넘어 오니 시부의 얼굴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배를 움켜쥐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당주의 곁으로 정씨부인이 다가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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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우째 아프요?” “이, 임자. 배…….배가 아파 주, 죽겠다.” 겨우겨우 입으로 새어 나오는 한마디가 고통을 머금고 힘겹게 튀어 나온다. “언제부터 그랬는교?” 당주가 다시 힘겹게 입을 열어 새벽에 변소를 다녀온 이후로 아팠다며 겨우 말을 내뱉고는 이내 고통을 견디려 안간힘을 썼다. “이를 우짜노! 변소구신이 붙었구마. 변소구신이……. 에미야! 퍼뜩 가서 무당 불러 오니라? 아. 퍼뜩!” 옆에 붙어서 인상을 구기고 있는 며느리를 보고 호통을 친다. “예? 어머니. 무, 무당을요?” “아 변소구신이 붙었다 안카나?  퍼뜩 가서 무당을 불러 오래도? 아,아이다. 굼뜬 니를 보내는 거 보다 내가 가는 기이 빠리겄다.” 희연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 채 시모의 뒤꽁무니에서 발만 동동거리자 정씨는 이내 사랑채를 쫓아 내려갔다. 그렇게 사랑채를 나가 십여 분이 지나 무당과 함께 사랑채로 시모가 다시 들어왔다. 굿 채비를 마친 무당이 사랑채 마당에서 굿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조용한 아침을 깨우는 요란스런 꽹과리, 징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종택 앞으로 모여들었다. “무신 일이꼬?” “그라게! 갑재기 와 무당이 굿을 하꼬?” “무신 변고가 있는 기이 아인지 모리겄다.” “사랑채 앞인거를 보이 어르신한테 무신 변고가 생긴 기이 아이까?” “그런 재수없는 소리 말그라. 그 어르신이 무신 잘못을 했다고 변고가 있을 기고?” “아이믄 와 사랑채 앞이고 말이다.” 저마다 걱정스런 얼굴로 종택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궁금증을 느끼며 종택 쪽으로 눈길을 보낸다. 사랑채 마당에 화려한 무복을 차려 입은 무당은 방울과 칼을 들고 멍석 위를 가뿐히 뛰어오르고 내리며 춤을 추고 정씨부인은 무엇을 그리 잘못하였는지 연신 손바닥을 비비며 눈을 감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방안에 홀로 남겨진 당주의 온 몸에 고통이 몰아치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 얼굴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당주는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아내 정씨를 애타게 부른다. “이……. 임자! 임자! 내……. 내 좀…….사, 살리도. 내 주, 죽을 것 같다. 임, 임자!” 목구멍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는 문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고 사랑방 안을 맴돈다. 아무리 외쳐보아도 당주의 목소리는 바깥의 요란한 굿 소리에 파묻혀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고 온 방을 구르며 고통을 호소하다 지친 당주의 몸이 기진맥진하여 늘어졌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희연은 시부의 상태가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시모가 시키는 대로 그냥 지켜보기만 하다 시부의 상태가 궁금해 잠시 방으로 들어와 보았다. 나뒹굴다 지쳐 쓰러진 시부의 얼굴은 아침보다 더 창백해졌고 신음소리를 내뱉던 입은 벌어진 채 입을 다물 기력조차 없어 배만 움켜쥐고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아연실색하여 시모에게로 쫒아왔다. "어머님. 아버님께서 이상하십니다.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야 할 것 같십니다." 별일 아닌 것에 호들갑을 떠는 며느리가 못마땅하여 정씨는 인상을 찡그린다. “가마 못 있나? 와 부정 타게 설치고 난리고?” “그기이 아이라 어머님. 방에 들어가 보시이소. 아버님께서 초주검이 됐십니다.” “니 지금 굿하는 기이 안보이나? 호들갑 그마 떨고 저 짝에 물러난 있그라.” 희연은 시모의 윽박에 기가 눌려 시모의 곁에서 떨어져 서서 사랑채 쪽으로 연신 눈길을 보내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굿은 한낮이 지나 어둠이 내려앉은 밤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밤이 새도록 굿을 해대는 소리에 지친 마을사람들이 불평을 하면서도 누구 하나 종택을 찾아가 따지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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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당주가 어떤 존재인지 마을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런 당주에게 일이 생겨난 것이라 여겨 사람들은 굿을 통해서나마 당주의 무사안위를 기원하기에 말없이 그 소란을 참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무당은 지치지도 않는지 신이 들린 듯 하늘위로 솟아오르고 덩달아 정씨부인도 손금이 닳도록 빌고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세고 이튿날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사랑채 당주의 상태는 더욱 악화 되어 사람의 모습이 아닌 시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희연은 시부의 상태가 이러다 정말 죽을까 두렵고 겁이나 이른 새벽 시모 몰래 윗동네로 뛰어 올라가 시부의 막내 동생에게 사실을 알렸다. “이 새벽에 질부가 우얀 일이고?” “숙부님요! 우리 아버님 좀 살리 주이소.” “무신 소리꼬?” “아버님이 다 죽게 생겼십니다.” 희연의 흐느낌에 숙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희연에게 소리를 지른다. “형님이 와?” “…….” 말을 하지 못하고 울고 있는 질부를 보며 숙부는 그 자리에서 하인을 불러 읍으로 가서 급한 환자가 있으니 의사에게 왕진을 와 달라 이르고 방으로 들어가 의관을 갖추고 질부와 함께 형의 집으로 내려왔다. 사랑채로 시동생과 며느리가 들어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정씨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가만있으라고 했건만 기어이 일을 크게 벌인 며느리가 못마땅해 눈을 흘기며 며느리를 째려본다. “형수님! 우째된 일인교?” 사랑채 마당 앞으로 들어서며 시동생은 형수에게 물었다. “별일 아닌 일에 저아가 호들갑을 떨었구마요.” 정씨는 희연을 노려보다 이내 시선을 시동생에게 보내며 대수롭지 않은 일에 찾아온 것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속마음으로 달갑지 않게 인사를 하며 변명을 늘어놓는다. “형님이 어제 새벽에 변소를 다녀오고는 배가 아프다캐서 굿을 했으이까 곧 괜찮아 질깁니다. 걱정 마이소.” 시동생은 형수의 변명을 듣고 있자니 기가 찬 모양이다. “사람이 아프면 병원으로 데려 가야지 우째 이래 무지한 행동을 하고 계신 겁니까?” 시동생은 형수의 행동에 기가 차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며 형수에게 한마디 내뱉고는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섰다. 이미 시체나 다름없이 방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는 당주를 보고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동생은 당주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초점을 잃은 당주의 눈을 바라보며 당주의 몸을 흔든다. “형님. 지 왔십니다. 눈 좀 떠 보소. 형님!” 심부름을 갔던 머슴을 기다리고 선 희연은 머슴과 함께 종택으로 들어서는 의사를 사랑방으로 안내를 하고 자신은 방밖에 시모와 나란히 서서 시모의 꾸중을 들으며 얼굴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의사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의사가 방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는 희연은 의아스럽게 의사를 바라보며 섰고 정씨부인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괜한 일에 모두가 호들갑을 떨었다 생각하며 의사를 쳐다본다. 희연이 불안한 마음에 의사를 향해 당주의 상태를 물어본다. “조금만 일찍 기별하시지.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가망이 없습니다.” 의사는 희연에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미 손을 쓸 수가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의사는 가족들에게 그 말을 남기고 사랑채를 내려가 자신을 모시고온 머슴의 배웅을 받으며 대문을 나섰다.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말에 희연이 망연자실하여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부의 얼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숙부를 보며 희연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사람아. 우째 이래 무심하게 시아버지를 방치해 둔기고? 미리 알렸이믄 이래 허무하게 돌아가시도록 두지는 않았을 기이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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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의 질타에 희연은 죄책감을 느끼며 겨우 변명을 해댄다. “잘못했습니다. 작은아버님! 제가……. 제가 어리석어서……. 어머님이 아무에게 연락 말라며 수선 피우지 말고 굿이 끝나면 다 나을 거라고 기다리라고 하셔서 그래서……. 어머님이 무서워서 …제가……. 그만…….흑흑흑.” 희연은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며 자신을 자책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이제야 깨달은 정씨부인은 남편이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주저앉는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앉은 형수를 시동생은 날이 선 눈빛에 원망을 담아 형수에게로 날린다. “의사가 급성맹장이라 캅니다. 형수님! 조금만 일찍 서둘러 병원으로 모셨으면 이래 되지는 않았을 거랍니다.” 그 말을 내뱉는 시동생의 눈빛에 분노가 가득했다. “내참! 배가 아프다는데 굿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돈이 아까웠습니까?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평소에도 형수가 미웠던 시동생은 형수를 비난하고 나섰다. “돈이 아까워서 우리형님 결국 목숨 잃고 마는구나.” 형수는 대거리도 못하고 시동생보기가 민망하여 작은아들에게 전보를 친다는 핑계로 방을 빠져나온다. 어미의 전보를 받고 지체 없이 경주로 올라온 근우. 서둘러 도착을 하였으나 이미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비의 소식에 당황하여 대문을 들어선 근우는 아비가 누워있는 사랑채를 향해 뛰어 들어간다. “아버지! 아버지!” 근우가 아비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며 아비를 외쳤음에도 아비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방안에는 숙부와 형수가 아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힘겨운 아비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하자 근우는 아비의 곁으로 다가 앉아 아비의 손을 잡는다. 아들을 보며 무어라 말을 꺼내려 입을 오물거리자 갑자기 목안이 울컥하며 핏덩어리가 목을 가로막는 것이 느껴졌다. 당주의 입에서 참았던 구역질이 터지며 피가 쏟아져 나온다. 당황한 아들은 아비를 일으켜 안으며 소리친다. “대야!대야 좀…….대야…….” 희연이 놀라 서있다 시동생의 고함에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 놋대야를 들고 들어온다. 대야를 들이밀다 피범벅이 된 시부의 얼굴과 옷자락이 눈에 들어오자 희연의 가슴이 저며 왔다. 또 한 번의 구역질로 받치고 있던 대야 안으로 검붉은 핏물이 쏟아져 들어간다. 몇 번의 구역질로 핏물은 대야 안에 가득 채워졌다. 뱃속에 고여 있던 것까지 모조리 쏟아낸 후 초점 없는 당주의 눈동자가 허공을 헤맨다. 아비의 축 늘어진 몸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아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아들은 아비를 품에 끌어안고 오열을 한다. “아버지. 아버지. 이대로 가시면 안됩니다. 아버지.” “형님. 형님. 정신 차리세요. 형님.” 아들과 동생의 외침에도 여전히 초점 없는 당주의 눈동자는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피 묻은 아비의 입가를 닦아주는 아들의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틸 힘없이 늘어지는 아비의 몸을 간신히 지탱하여 아비의 등을 쓸어주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아비의 몸을 이부자리에 똑바로 누인다. 그렇게 아비의 모습을 내려다 보다 근우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어 아비의 손에 쥐어주며 울먹이는 소리로 입을 연다. “아버지! 이 돈 가져가시이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비는 아들이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눈을 감았다. 아비의 힘없는 손이 방바닥으로 떨어지자 근우가 대성통곡을 한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희연은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선채로 앞으로 꼬꾸라지며 정신을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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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 어르신이 돌아가싰단다!” “이를 우짜노?” “먼 일이 이런 일이 있는가?” “며칠 전만 해도 멀쩡하던 양반이 우째 이래 갑재기…….”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마을 사람들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웃집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마을 유지였던 박씨 종택 어르신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온 동네로 퍼졌다. 며칠 전까지 멀쩡했던 당주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버린 것이 사람들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숙부와 함께 근우는 아비의 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숙부는 하인을 불러 장의사에게 관을 준비하라고 이른다. 얼마 후 박씨 종택 대문에는 근조(謹弔)라고 쓰인 등이 매달렸다. 희연은 쓰러져 누워 몸을 움직일 힘조차도 없었다. 눈물만이 하염없이 흘러 베갯잇만 적시고 있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주던 시부만을 믿고 무서운 시모와 힘겹기만 한 시집살이를 참고 견디었건만 이제는 누구에게 의지하고 살아야할지 앞일이 막막했다. 편들어줄 이조차 주위에 없다는 것이 너무도 외롭고 괴로웠다. 희연은 줄곧 시부를 목 놓아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아이들도 어미의 곁에 둘러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는 어린것들도 어미의 서러운 울음에 목이 메어 같이 엉엉거리며 울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서 종택 마당은 당주를 애도하는 이들의 슬픔으로 가득 찼다. 소문을 듣고 또는 연락을 받고 친척과 문중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종택은 시끌벅적했다. 종택에서 밤새도록 굿을 해댄 까닭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으로 소문은 점점 퍼져 읍내로 전해지고 대서방을 들락거리던 이들도 소문을 듣고서 갑작스런 장례식에 어이없어 하며 문상을 왔다. “아이고 어르신! 혹시나 했는데 이 일이 우짠 일입니까?” 대문 밖에서부터 문상객들의 곡소리가 요란히 들려온다. 정씨부인은 자신의 실수로 남편을 허망하게 잃고 문상 오는 친척과 문중 사람들에게 나설 면목이 없어 안방에서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큰아들이 없는 처지라 작은아들이 상주로 앉아있었다. 희연은 강구 네의 부축을 받으며 빈소 앞에 앉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씨! 그만 우시요. 이러다가 아씨까지 쓰러지십니다요.” 눈물이 나는 것은 강구 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수양딸로 거둬주고 딸처럼 여겨 가정을 꾸리게 해준 은혜를 생각하니 고마움과 안타까움에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마을은 당주의 죽음을 두고 술렁거리고 있었다. “박씨문중도 인자는 망조가 드나 보구마. 대들보가 이리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으니.” “그라게요! 큰 아들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행방도 모리고 맏상제가 없으니 작은아들이 상주를 하고 있더만요.” “그 댁 큰 마님은 어떻고? 빈소에 나오기는커녕 코빼기도 안보이데요.” “안 그렇겠나! 당신도 양심은 있나 보제.” “내 같애도 어디 남세스러버서 나서겄나?” “그라니 불쌍한 거는 그 댁 큰며느린기라. 시아부이 사랑 듬뿍 받고 살았는데 그 양반이 그리 되싰으이…….쯧쯧쯧!” “그라게. 그 댁 마님 심사 나서 며느리 구박 더하는 거 아인지 모리겄구마.” “생때같은 자식들 데불고 우째 살긴고?” “처연한 신세 됐구마.” “처연한 신세는 우리도 매한가진기라.” “그라제. 우리 같이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줄 양반이 또 어디에 있을 기라고.”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것은 종택이나 마을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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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당주의 자리는 컸었던 것이다. 허무한 죽음 뒤에 이어진 당주의 장례식에는 경건함과 애달픔이 공존을 하였다. 상여가 지나는 길마다 당주를 알고 있던 이들의 눈물이 함께 뒤를 따랐다. 정씨부인은 장례식이 끝나는 날까지도 얼굴을 내밀지 못한 채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다. 물론 남편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갇혀 지내는 동안 자신의 무지한 행동이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했는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몇 십 년을 같이 산 세월에 정이 없었을까 미운 정도 정이라고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의 슬픔이 정씨라고 없었겠나. 방안에 틀어박혀 밤마다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당주의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이 지나 정씨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모의 뜬금없는 행동에 희연은 적잖이 당황하였다.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이라고 이래저래 잃어버린 재산들도 많지만 그래도 아직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재물은 손에 쥐고 있었던 정씨부인은 남편이 죽고 난 후 자신의 거처를 결정지으며 남은 재산을 모두 팔아 돈으로 바꾸어 제 주머니에 채워 넣기 시작했다. 종택의 큰 마님으로서 체통은 남편의 죽음과 맞바꾼 처지요, 이 마을에서는 자신의 위신이 이미 땅에 떨어졌으니 그나마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 여겨 정씨부인은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조리 처분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며느리에게는 가타부타 한마디 의논도 없이 제 잇속만을 챙기기에 바빴다. 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떠날 준비를 마친 정씨가 희연을 불러다 앉혀 놓고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한다. “내는 인자 니하고 같이 못살기이 둘째한테로 내리 갈란다.” 시모의 속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희연은 시모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라믄 저희는 우짭니까? 아아들 하고 지는…….” 말문이 막혀 말이 새어 나오지가 않았다. 희연의 물음에 시모는 냉정한 얼굴로 며느리를 노려볼 뿐 그건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며느리의 물음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재산을 처분한 것도 모자라 곡간에는 남겨둔 쌀 한 톨 없이 싹 쓸어다 내다 팔아 돈으로 챙기고 멀쩡한 살림에 장독 하나도 남김없이 손으로 두들겨가며 새것만 골라내어 놓더니만 떠나는 날 아침 그것들을 마차에다 모조리 실어 내어간다. 시모의 행동에 희연은 넋을 놓고 앉아있고 보다 못한 정옥이 울면서 정씨부인에게 매달려 애원한다. "할머니! 우리는 우짭니까? 이래 다 가져가시면 우리는 뭐 먹고 살라는 겁니까? 예? 할머니!” 정옥이 울며불며 조모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였다. 그러나 정씨부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매섭게 손녀의 손을 뿌리치고 대문을 저벅저벅 걸어 나가버린다. 정옥이 애가 타 어미를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엄마! 할머니 좀 말리 봐라. 우리는 인자 우짜노?” 정옥이 울부짖으며 마당가운데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문으로 사라지는 조모를 쫓다 그만 땅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한다. 정씨부인이 사라진 집안은 몰아친 비바람에 모든 것이 흔적 없이 쓸려 간 것처럼 텅 비어 버렸다. 정옥의 울음소리가 어찌나 서글프던지 힘이 풀려 주저앉았던 희연이 일어나 딸에게 다가가 울고 있는 딸을 부둥켜안으며 같이 운다. 서럽게 우는 아이를 달래기보다 제 설움까지 보태어 설움을 토해낸다. 어린것들도 어미와 덩달아 울음이 터지고 텅 빈 집안은 서러운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한 근호는 뿌듯한 마음을 안고 고향 길에 올랐다. 거의 일 년 만에 돌아가는 집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 동안 객지에서 고생하며 모은 돈으로 아이들에게 줄 가방과 신발을 사 들고 피땀 흘리며 번 돈을 겉옷주머니에 고이 간직한 채 기차에 오르며 돌아갈 그리운 집을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해진다. 어두운 창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근호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처음 집을 나오던 그날도 근호는 창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낯선 곳으로의 출발, 그러나 막상 그의 마음은 불안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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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안이 그 날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되돌아오는 길이다. 과거를 추억하는 그의 눈빛이 창을 통해 빛나고 있었다. 일 년 전, 무작정 장사를 해 보겠다 마음먹고 집을 나와 보니 마땅히 오갈 곳이 없었다. 양반자식이라고 대우받으며 음주가무에 빠져 살 때는 친구라고 들러붙는 이들도 있었건만 돈 한 푼 없는 백수가 되고 보니 거들떠보는 이도 없는 신세가 되어 그제야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후회를 했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새로운 각오로 시작을 해보자 마음을 다지고 무작정 새벽기차에 몸을 실었고 내린 곳이 전라도 땅이었다. 생판 모르는 타향에 내려서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돈 한 푼 없이 어떻게 견딜까 막막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스스로 노력하면 무엇이라도 되겠지 싶어 사람들 틈에 끼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장사를 시작했다. 많은 돈벌이는 아니어도 조금씩 수중에 돈이 모이면서 자신감이 붙었고 그것을 계기로 이곳저곳을 눈여겨보다보니 어느 정도 수완도 생겨났다. 이래저래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던 처지라 자신을 챙길 여유가 없으니 몰골은 말 그대로 거지꼴이 되어갔다. 호의호식하며 자란 자신의 몰골이 처참하게 망가졌어도 근호는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하여 번 돈으로 떳떳하게 금의환향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기에 근호는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남루한 차림으로 장판을 떠돌고 있는 근호 앞에 누군가가 나서서 아는 채를 하는 것이었다. “자네? 혹시……. 근호 아이가?”  “…….” 근호가 사내를 바라보자 사내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맞구만. 근호.” “…….”  근호는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는 것이 별로 달갑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타향에서 고향친구를 만난 것이 반갑기는 했다. 근호가 겨우 아는 채를 하자 사내는 근호를 위아래로 훑어 내리며 뚫어져라 바라본다. 같은 마을에서 동문수학했었던 친구, 기생집 출입을 하며 같이 술을 나눠 마시고 놀던 그 친구가 어찌하여 이 몰골을 하고 전라도 땅에 있게 되었는지 사내는 그 속사정이 궁금하였다. “이 친구 꼴이 말이 아이구마. 우짜다 이래 됐는가?” “그냥…….장사 좀 배워 볼라꼬 식솔들 몰래 나왔지. 그라는 자네는 여까지 우짠 일이고?” “내도 자네하고 별반 다를 기이 없구마. 해방되고서 모든 것을 잃고 나니까 오갈 데가 없더구마. 그래 내도 장사라도 해볼까싶어 막상 오기는 했는데……. 장사도 아무나 하는 기이 아닌가 싶네.” 사내의 시름 섞인 한 숨이 입 밖으로 세어 나온다. “사는 기이 다 그렇더구마. 시절 좋은 것도 한때였으니 그걸 모르고 허랑방탕하게 살았으이 그 대가가 이래도 혹독하구마.” “이래 될 줄 알았시면 내 좀 더 진지하게 인생을 살았을 긴데.” “인자와서 후회하믄 머 하겄노?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살아야제.” “자네도 인자 철이 들었구마.”  멋쩍게 해후한 두 친구는 그렇게 전라도 어느 장판에 서서 삶의 무게를 실감하고는 후일에 만나 술이나 한잔 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는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그 외롭고 힘든 시간들을 이를 악물고 견뎌내며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 이제는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좀 전까지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며 근호의 눈에 졸음이 쏟아져 내린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근호는 잠시 동안 눈을 붙이기 위해 비어있는 옆자리에 아이들의 선물꾸러미를 내려놓고 웃옷을 벗어 짐 위에 얹어놓고는 새로 사서 신은 신발까지 벗어 가지런히 놓아둔 채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한참을 지나 단잠에서 눈이 뜨인 근호의 눈동자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잠들기 전까지 앞뒤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언제 내렸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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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니 객차 안은 졸고 있는 몇 사람만 있을 뿐 대부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근호가 기지개를 켜다 무심결에 옆자리를 내려다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허둥대기 시작한다. 잠들기 전에 놓아두었던 옷과 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당황한 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발아래 벗어 놓았던 신발조차도 눈에 보이지 않아 근호는 맨발로 열차 안을 헤매었다. “내 옷, 내 신발, 내 짐 못 봤는교?” 근처에 잠들어 있는 이들을 깨우고 다니며 자신의 옷과 신발의 행방을 묻는다. 선잠에서 깬 사람들은 훼방꾼을 노려보며 노골적으로 신경질을 낸다. “아이구야! 내돈, 내옷, 내신발.” 근호의 속이 타들어간다. “무신 날벼락이 이런 날벼락이 있단말이가?” 큰 소리로 사방을 돌아보며 하소연을 하여도 사람들은 제 일이 아니기에 들은체만체다. 그렇게 텅 빈 객차 안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결국 아무것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동이 터 오는 시각, 기차는 경주역 안으로 들어 서기 시작했다. 기차가 멈춰서면서 근호는 결국 찾는 것을 포기하고 망연자실하여 역에 내려섰다. 바닥의 차가운 기온이 맨발에 스며든다. 돈과 옷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발까지 도둑맞았으니 맨발로 집에 들어가게 생겼다. “아이구야. 내 돈. 세상이 이래 야박할 줄이야. 잠든 새에 짐을 훔쳐갈 줄 생각이나 했겄나? 내가 어리석었구마. 내가 바보 멍충이구마.” 자신의 손으로 가슴을 친다. 잃어버린 것이 아깝고 도둑맞을 동안 잠에 취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시부의 영정을 모셔둔 사랑채에 매일같이 조석을 지어 상식을 올리는 희연의 마음이 쓰라렸다. 그 많던 재산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리도 초라한 상식이 차려지는 것인가? 살아생전 죄 한번 짓지 않고 남을 위해 사셨던 양반이 그 공도 없이 믿었던 가족들마저 등을 돌렸으니 아버님 눈이나 제대로 감으셨을까 씁쓸한 마음에 서러움이 차오른다. 땅속에 누워있는 시부의 처지나 남겨진 자신의 처지나 동병상련이 되고 보니 죽은 자나 산 자나 서글픈 인생이긴 매한가지라는 생각에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한참의 넋두리를 끝내고 사랑채를 나오다 대문을 여는 소리가 희연의 귀에 들려온다.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싶어 대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가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희연을 발견하고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와 희연 앞에 섰다. “임자. 내가 왔다.” “…….?” 희연은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 남편을 쳐다보며 말문이 막혀 장승처럼 서있기만 했다.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에 찌들어 씻지 못한 얼굴에는 땟국이 줄줄 흐르고 걷어붙인 바지자락 아래는 흙먼지가 보얗게 쌓여 색깔조차 구분 할 수 없는 양말이 눈에 들어온다. 희연이 할 말을 잃었다. 돈 벌러 간 사람이 거지꼴을 하고 나타났으니 걸었던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움을 느낀 건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어본 자신의 어리석음이 가져다 준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임자. 내다. 내. 정신 좀 차리보그라.” 멍하니 서서 정신을 놓고 있는 희연의 입에서 맥 빠진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기 도시 무신 꼴이라요?” “…….” “신발은 또 우짜고 맨발인 기요?” “사정이 있었구마. 내 다 얘기 할 테니 기다려 보그라. 그거는 그렇고 우째 집이 빈 집 같이 썰렁하노.” 주위를 둘러보며 집안 분위기를 살피던 근호는 뭔가 달라진 집안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끼고 희연을 바라본다. 이리저리 굴러가던 눈길이 흰옷을 입고 제 앞에 서있는 처에게로 고정된다. “내 없는 동안 집에 무신일 있었더나? 임자 옷은 또 뭐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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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차차 얘기하도록 하고 우선은 내 옷 좀 갈아입어야겠다. 이 몰골로는 부모님 뵐 수는 없는 노릇이제. 방으로 들어가자.” 희연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서는 근호. 지친 듯 여기저기 쓰러져 누워있던 아이들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큰딸 정옥이 들어서는 이가 아비임을 확인하고 맥없이 일어서 인사를 한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그래! 우리 정옥이 잘 지냈나? 그새 많이도 컸구나.” 뒤따라 들어선 희연이 남편의 옷을 챙겨주며 우선 세수부터 하고 오라 이른다. 찌든 땟물을 말끔히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은 근호는 아무리 살펴봐도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필시 무슨 일이 있다 싶어 속히 방으로 들어선다. “집안이 와 이래 휑하노? 임자! 무신 일이가. 응?” “…….” “아버지 엄마는 어디 계시노? 우째서 집이 빈집같이 썰렁한긴데?” 그제야 희연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인자 여 안 계십니다.” “그기 무신 소리고? 그라믄 어데 가싰노?” “아버님…….세상 떠나셨습니다.” “임자! 지금 무신 헛소리를 하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다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근호가 헛소리를 한다며 고함을 지르자 희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입을 삐죽거리며 울음을 참고 있는 처를 바라보니 아까부터 눈에 거슬렸던 하얀 소복에 자꾸만 눈길이 고정된다. “허억.”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아 한 숨을 토해낸다. “사랑채에 영정 모셔 두었으니 가서 인사 올리이소.” “지금 그기 말이 되나. 응? 엄마? 엄마는 어디 계시노?” “어머님……. 포항 서방님 댁으로 가싰으요.”  날아드는 돌을 가슴에 맞은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얼이 나간 표정으로 근호는 방을 뛰어 나와 다시 맨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로 뛰어든다. 방문을 있는 힘껏 밀어재치고 방안을 들여다보니 아비의 영정이 눈앞에 나타났다. 근호는 충격에 휩싸여 그 자리에 주저앉고는 멍한 표정을 짓다 오열을 하기 시작한다. “아이고. 아버지. 아이고 아버지.” 영정 앞에 엎드려 목이 메도록 울음을 운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표출하지 못해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한다. “아이고 아이고 아버지! 지는 인자 우짜라고. 이 불효막심한 놈은 우짜라고 이래도 허망하게 떠나신깁니까? 아이고 아버지요. 살아생전 효도 한번 못 받아 보시고…….지는 인자 우째 살라꼬 이 큰 짐을 지워놓고 떠나신 깁니까? 잘못했십니다. 아버지. 지가 다 잘못했십니다. 으흐흑. 아이고 아버지 아이고 아버지요.” 목이 터져라 불러도 아비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제 설움에 겨워 그리고 홀연히 떠나버린 아비가 불쌍해 지치도록 울고 운다. 어느새 건너 왔는지 희연이 통곡하고 있는 남편의 곁으로 다가앉으며 등을 어루만진다. “정옥아버지! 그만하소. 아버님도 이핀 마음 다 알고계실 깁니다.” “임자! 내 같은 불효자는 어디도 없을 기구마. 마지막 임종도 못 지켜드리고……. 상주 노릇도 못하고……. 이런 내를…아버지가…아버지가 용서해 주시겄나? 내 같애도 용서를 못할 기라.” “그러게 와 집을 나갔나 말이요. 이핀만 있었어도 이래 되지는 않았을 거 아니요.” 희연도 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화를 터뜨리고 만다. 남편이 집을 나가지만 않았어도 그날 시어머니 고집대로 굿을 하지 않고 병원으로 모셨으면 이리 허망하게 숨을 거두시지 않았을 텐데. 아니 인명은 재천이라고 시부의 죽음이 예견되었던 절차라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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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었다 치고라도 남편이 있었더라면 시모가 그리 가산을 챙겨 줄행랑을 쳤을까. 모든 것이 남편의 생각 없는 행동이 불러일으킨 불행인 것 같아 원망의 화살을 들이댄다. 그러나 그러면 무엇 하랴 이미 엎질러진 물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이 되었으니 맺힌 마음 쓸어내고 사는 수밖에.  두 사람은 그렇게 당주의 영정 앞에 앉아서 목 놓아 운다. 설움의 눈물을 훔쳐내고 한풀 꺾인 힘없는 목소리로 희연은 남편에게 집을 뛰쳐나간 뒤 사정을 캐묻는다. “여지껏 어디에 있었던 깁니까?” “전라도에.” “가서 머를 했기에 그 꼴이 되어 나타난 기요?” 아내의 성난 목소리에 기가 눌린 채 처음 전라도 도착해서 고생한 얘기부터 시작해 돌아오는 길에 기차에서 도둑을 맞은 얘기까지 장황하게 풀어 놓는다. “일이 그래 됐다. 낸들 그라고 싶어 이 꼴로 나타난 거 아니니까 너무 몰아 부치지 말그라.” 제 얘기를 끝내고나니 이번에는 이쪽사정이 궁금해 다시 아내에게 묻는다. “그란데 아버지는 우짜다 돌아가신 기고?” 남편의 질문에 아내는 한숨부터 짖는다. 시부의 고통스러워하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희연은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숙인다. 목이 메어져 오고 눈에 눈물이 일렁인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뒤 얘기의 서두를 꺼내기 시작했다. 시부가 외출하고 돌아와 밤에 변소를 들락거리던 얘기부터 시작해 굿을 했던 일. 왕진을 온 의사가 가망이 없다며 돌아가고 난 후 사랑채에 누워 시동생에게 몸을 의지한 채 피를 쏟고 결국은 숨을 거두었다는 얘기까지 희연은 설움을 참아가며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장례식이후 시어머니는 있는 재산을 모조리 처분해 돈을 쥐고 작은 아들네로 가버린 사실까지 모든 얘기를 남편에게 해주었다. 근호는 그렇게 떠난 어미의 얘기를 듣고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문다. 그래도 가족인데 남아있는 식구들을 위해 살 궁리는 해주고 갈 것이지 그리 모조리 챙겨서 가버렸나 생각하니 제 어미라도 야속한 마음이 든다. ‘내가 있었더라면 이래 되지는 않았을 긴데.’ 자신의 잘못이라 이제야 후회가 밀려든다. “이미 지난 일 우짜겠는교? 인자는 이핀도 마음잡고 우리식구들 살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교?” “임자는 대책이 있는가?” “당분간은 아버님 빈소를 지키야하이 생각을 좀 해봐야지요. 그래도 삼 년은 못 지키더라도 일 년 상은 치르고 나서 움직이야 하지않겠는교.” “임자! 고맙다. 임자마저 없었더라면 우리 아버지 불쌍해서 우짤뻔했노? 처자식도 형제도 다 나 몰라라 했으이 임자 아니었으면 눈도 못 감으셨을 기다.” 진심이었다. 아비를 버리고 떠난 어미도, 멀리 있다는 핑계로 찾지 않는 동생네도, 지척에 있어도 들여다보지 않는 친척들까지 모두가 당주를 잊었으나 자신의 처만은 탈상을 하는 그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시고자 하니 자신이 못하는 자식의 도리를 지키는 희연 덕분에 부친은 죽음의 효도까지 받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 한편 재산을 처분해 돈으로 움켜쥐고 큰며느리 식구를 모질게 외면한 채 고향을 떠나 포항 작은아들 집으로 거처를 옮긴 정씨부인. 무턱대고 아들만 믿고 내려온 그녀의 생각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갑작스런 시모의 출현에 당황한 둘째 며느리는 시모가 반가울 리 만무하였다. 살림을 털어 내려온 시모를 며느리는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며 경계를 하였으나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지 처음 몇 달간은 시모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온갖 아양을 떨어대다 결국 일 년을 못 넘기고 본색을 드러내놓기 시작했다. 작은며느리의 성정을 모르는 정씨가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밝히는 인사가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 자신에게 살갑게 구는 것이 자신의 돈을 보고 그러는 것임을 정씨가 모를 리 없다. 며느리 또한 시모가 필시 빈손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 처음 몇 달 동안은 간이라도 내어줄 양 입안의 혀처럼 굴며 시모의 비유를 맞추어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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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씨가 어떤 여인이던가? 제 남편 죽음 앞에서도 돈 한 푼 내어 놓지 않았던 며느리보다 더 한 시어미였거늘 자신의 안위도 보장 받지 못하는 처지에 선뜩 돈을 내어 놓겠는가? 시모는 거머쥔 돈을 한 푼도 내어 놓을 생각이 없었다. 몇 달이 지나도 시모의 손에서 돈 한 푼이 나오는 법이 없었으니 제 생각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자 며느리는 시모를 구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긴 세월 두 고부간에 신경전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돈을 뺏으려는 자,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서로 포악을 떨며 이를 갈아 댔다. 아들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정씨의 신세가 하루아침 천덕꾸러기가 되었으니 정씨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아들에게 어미의 분한 마음을 하소연하고 싶어도 아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 한번 보인 적이 없고 설사 시간이 나서 얘기라도 나눌라치면 며느리가 중간에 나서 이를 저지시켜 버리니 애가 타는 이는 정씨 혼자뿐이었다. 마지못해 아들에게 얹혀사는 정씨의 속은 문드러지고 있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 되었으니 기세등등하던 정씨의 인생에도 서서히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기가 죽어지내던 근호는 방에서 꿈쩍도 않고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는 신세이다 보니 어디를 나가려해도 나갈 수가 없고 더군다나 아비의 탈상도 끝이 나지 않은 상태라 행동거지도 함부로 할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만 끌어안고 조용히 죽어내고 있었다. 청명한 가을의 하늘은 푸르게 빛이 나고 있었다. 시부의 탈상을 끝낸 희연의 머릿속은 또다시 복잡해졌다. ‘무엇으로 아이들과 함께 살아 나 갈수 있을까?’ 한 가지 시련이 끝이 나면 또 다른 시련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에 희연의 삶은 시련의 연속인 것만 같았다. 아무리 무능력하다지만 자식들의 입에 밥이 어떻게 들어가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이 주는 밥만 꾸역꾸역 넘기는 남편의 꼴을 보니 희연의 속은 또다시 타 들어갔다. 그런 남편을 믿고 또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이 희연으로서는 적잖은 고민거리였다. 그렇다고 아이들만 데리고 혼자서 살아 갈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 그저 남편에게 의지를 하는 수밖에. 그러면서도 희연은 늘 상 남편에게 불안함을 느낀다. 시부의 상을 치르는 동안에도 남편은 방안에만 틀어박혀 폐인처럼 지내며 식솔들이 굶는지 먹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시부의 죽음에 마음의 상처가 깊다는 것은 인정하였으나 그래도 남은 자식들을 위해 아비로서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할 터인데 근호는 자신의 연민에 빠져 방밖을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희연이 자식들을 생각해 포항으로 쫓아다니며 친정어미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다. 오라비가 있었더라면 조금이나마 근심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해방 후 아직도 일본에서 나올 생각을 않고 있어 올케를 찾아 가봐야 좋은 소리도 못들을 것이 뻔 하여 친정어미를 의지하고 돈과 곡식들을 얻어다 나르며 일 년여의 세월을 버텨왔던 것이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식들과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허무하게 하루하루를 썩혀 보내고 있는 남편의 무능력함에 희연은 지치고 지친다. 그래도 어찌할 수가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진다. 지아비이자 아이들의 아비라 차마 버릴 수 도 없고 또한 버린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 희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근호를 달래어 본다. “정옥아버지! 다시 장사를 해볼라요?” “장사를?” “예! 뭐든 해서라도 먹고는 살아야 할거 아입니까? 천날만날 허송세월만하고 아아들은 우짤깁니까?” 아내의 면박에도 근호는 시큰둥하게 대답을 한다. “장사도 밑천이 있어야 하제!” “그렇다고 이래 맥 놓고 있이믄 어디서 밑천이 떨어집니꺼? 뭐라도 해봐야지요.” “내도 그라고 싶지만...어디 부탁 할 사램도 없고... 내도 갑갑하다.” “우짤 수 없네요. 친정어머니께 융통을 쫌 해보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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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 한테?” “다른 방법이 없잖십니꺼.” “…….” “이사를 갈라캐도 마땅히 갈 데도 없고 그라고 뭐를 하든지 간에 낯선 곳보다는 그래도 고향이 나을 긴데 이래저래 살 궁리를 해야지요.” “그야 그렇제. 생판 모르는 낯선 곳 보다는 아무래도 고향이 낫지를.” “그라니 우짜것십니꺼? 어머니한테 장사 밑천 빌려서라도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야지요.” “…….” 아내의 말이 다 맞기는 하나 근호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다. “와요? 그것도 못하겠는교?” “그기 아이라... 장모님이 내를 얼매나 한심하게 보시겄나 싶어서.” “알기는 아요? 이핀이 한심하다는 거를.” “…….” 가뜩이나 성에 안차는 사위라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해대는 장모이기에 근호는 장모를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그런 장모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입장이니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돈 구해다 줄 테니 장사 다시 시작 해볼라요?” 아내의 부추김에 근호는 다시 큰 맘 먹고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다. 한번 해 보자. 까짓 거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제.” 자존심이 좀 상하면 어떠랴, 앞으로 잘해서 미움까지 걷어 내버리면 될 것을. 순간 드는 치기에 가라앉았던 자신감이 솟아나는 것이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이면 장모도 마음이 돌아설 거라 기대를 하며 의지를 불태운다.  “그란데 무신 장사를 하제? 뜨내기로 여저 떠돌아다니는 것보다는 그래도 어느 한 귀퉁이에다 자리 잡고 하는 것이 낫겄제?” “그거사 이핀이 잘 알아보고 하소.” 며칠간의 시장조사와 가게 터를 알아보고 다니던 근호는 시장 어귀에 적당한 가게를 인수하여 신발 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희연은 그간 어미에게 조금씩 얻어온 돈과 몇 해 전 어미의 생신에 친정오라비에게 받아 두었던 돈을 끌어 모아 근호에게 장사 밑천으로 내어준다. 물론 남편에게는 친정 모친에게 융통한 것이니 꼭 갚아야 한다는 약속을 받아 내면서 돈에 대한 책임을 심어 주었다. 그렇게라도 방어막을 쳐두어야 헛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남편을 속인 것이다. 밑천을 건네받은 근호는 전라도에서 장사를 했던 경험을 토대로 경주 시장에다 자리를 잡고 신발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 수완이 있었는지 제법 장사에 재미를 붙이며 열심이었다. 수입도 그 정도면 식솔들을 굶기지는 않을 만큼이라 근호는 이제야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안정된 생활이 시작되었다. 희연도 이제는 남편을 믿고 다시 살아갈 용기가 생겼고 무엇보다도 두 사람에게는 아이들이 희망이기에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어느새 힘겨웠던 겨울이 지나고 꽃피는 춘삼월이 돌아왔다. 아이들이 커가는 속도도 유수같이 흐르는 세월만큼이나 빠르게 느껴졌다. 아직 어린 줄만 알았던 현옥이 벌써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입학 전부터 정옥에게 조금씩 글을 배우는 것에 재미를 붙여 학교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현옥이 드디어 학교를 가게 되어 신이 나 있었다. 현옥은 매일을 입학하는 날짜만 손꼽아 기다리며 들뜬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장사를 마치고 들어오는 아비를 아이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며칠 후면 셋째 딸이 학교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아비는 기억하고 있었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열심히 책을 보는 현옥을 보고 아비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우리 현옥이 학교 가는 기이 그래 좋나?” “예! 아버지. 빨리 빨리 학교 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들떠있는 딸을 바라보며 근호는 손에 들고 들어온 꾸러미를 현옥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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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옥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아버지가 책가방 사가지고 왔다. 자! 받아라.” 현옥이 놀라 일어나 앉으며 아비의 손에 든 꾸러미를 잽싸게 받아 챈다. 선물꾸러미를 받아든 현옥이 기쁨에 탄성을 내뱉으며 꾸러미를 풀어 그 안에든 가방을 꺼낸다. 난생처음 아비에게 받아본 선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다시 벗어 품에 안아보고는 신이 나서 입이 귀에 걸린다. 그런 딸의 행동에 아비도 웃음이 나서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는다. “그래 좋나?” “예에. 아버지! 너무너무 좋아 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가서 자랑하고 싶어요.” 천진난만한 딸의 미소에 아비의 마음도 흐뭇해진다. 냉기가 감돌던 종택에 이제야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입학시험이 있는 날 아침, 근호가 현옥을 데리고 대문을 나서려 하자 경현이 갑자기 뛰어나와 제 누이를 따라가겠다며 울면서 때를 쓰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아이의 행동에 어미가 나와 아이를 달랜다. “아가! 니는 아직 어려서 학교에 갈 수가 없단다. 다음에 엄마하고 같이 가자꾸나.” “싫다. 나도 갈거다. 나도 학교에 갈거다. 누부야 나도 같이 가자 응? 나도 같이 가자.” 경현은 서럽게 울면서 누이의 손을 잡고 놓치지 않으려 버둥거렸다. 현옥이 제 손을 잡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다 아비에게 눈길을 보낸다. 어미가 달래며 손을 떼어 놓아도 기어이 누이의 옷자락을 잡고 숨이 넘어가도록 울어 댄다. 보다 못한 아비가 나서서 아이를 달래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이의 고집이 결국 아비를 꺾고 말았다. 아비는 우는 아이가 안쓰러워 하는 수없이 아들을 같이 데려가기로 한다. 그제야 경현이 울음을 그치고는 아비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는다. 아들의 행동에 부모는 어이없는 웃음을 보이고 경현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신이 나서 아비의 손을 잡아 이끈다. 한바탕의 소동을 뒤로하고 아비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도착한 현옥과 경현이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한 교실에 앉아 시험을 치를 준비를 한다. 두 남매가 나란히 앉아 있다 젊은 남자선생이 나누어 주는 시험지를 현옥이 먼저 받고 옆에 앉은 경현에게로 선생이 시험지를 건네주자 현옥이 당찬 목소리로 선생을 부른다. “선생님. 얘는 내 동생인데 그냥 따라온 거예요. 시험은 안 볼 겁니다.” “그래?” 선생이 경현이 책상에 놓인 시험지를 거두려하자 경현이 우렁차게 소리친다. “나도 시험 칠 거예요.” “너 시험에 떨어지면 학교에 못 온다. 그래도 볼 거냐?” 선생은 아이의 행동이 재미있다는 듯 슬쩍 미소를 머금고 아이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예! 볼 거예요.” 경현이 다부지게 소리를 내지른다. 당찬 아이의 기세가 보기 좋았던지 젊은 선생은 시험지를 경현에게 내밀고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시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아이들이 일제히 문제를 풀어내려갔다. 그 조그만 얼굴들에 사뭇 진지함이 묻어난다. 제 수준에 비해 비교적 쉬운 문제였던지 현옥은 당연하게 합격을 하였고 당찬 기세를 부렸던 경현도 누이와 더불어 합격을 하였다. 해방직후라 한 학급의 학생 수는 팔십 명을 넘었다. 해방이 되기 전 일본인에게 말과 글을 배우게 할 수 없어 아예 학교를 보내지 않고 있었던 부모들이 해방이 된 후 신분제도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누구에게나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자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었던 부모들의 교육열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대대로 천민으로 살아왔던 자신들의 처지를 고스란히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식 하나쯤은 제대로 교육을 시켜 보다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부모들은 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어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제 나이에 입학하지 못했던 아이들까지 모여 학급도 나이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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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학급은 아직 입학할 나이가 되지 않은 아이들이 이 학급은 정상적으로 입학할 나이의 아이들, 삼 학급은 제 나이보다 한두 살 많은 아이들이 그리고 사 학급은 아주 나이가 많거나 장애를 가진 이들이 모여 함께 배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경현과 현옥은 각각 일 학급과 이 학급에 배정이 되었다. 입학을 하고 며칠이 지나 집으로 들어선 경현이 입이 부루퉁해서 어미에게 인사를 한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온냐! 경현이 학교 잘 갔다 왔나?” “예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아이를 보며 어미가 묻는다. “그런데 와 니 혼자고? 누부하고 같이 안 왔나?” “신경질 나서 내가 먼저 와버렸다.” 부어있는 아이를 지켜보던 어미가 아이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는다. “학교에서 무신일 있었나?” “아이다.” “그라믄 와 신경질이 났는데?” 아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어미에게 대답을 한다. “엄마! 누부야 참 이상하다.” “와? 누부야가 어쨌는데?” “아침에 학교 가믄 교문 앞에서 내보고 먼저 뛰어가라 하고 끝나고 나서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하고... 내랑 같이 안 다닐라 칸다.” 경현이 어미에게 고자질하고 있는 사이 현옥이 대문을 들어섰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현옥이 니 경현이하고 싸웠나?” “아니요!” “그라믄 와 경현이하고 같이 안 다닐라 카는데?” “그게 아니고...” 갑자기 현옥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울상이 되어버린다. “경현이하고 같이 다니면 사람들이 다 쌍둥이라 안 하나?” “그기이 우때서?” “엄마는? 남들이 내보고 남학생하고 같이 다닌다고 자꾸 놀린단 말이다.” “그냥 동생이라 하면 되제.” “동생이라 했는데도 자꾸 놀린단 말이다. 히잉!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어미의 핀잔에 서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현옥이 토라져 제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는다. 어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못내 서운했던지 급기야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울어버린다. 어미는 그런 딸의 행동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자존심을 내세우며 날을 세우는 딸이 제대로 학교에 적응을 할 수 있는 지 오히려 걱정스러웠다. 현옥은 유난히 자존심이 강하고 수치심이 많은 아이였다. 승부욕 또한 강해서 남에게 뒤쳐지는 것을 싫어해 어떻게 해서든 앞장을 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제 주위에는 질투와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이 항상 있었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동거리며 승리를 쟁취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 현옥이 학교에서의 생활은 더욱 치열하였다. 언제나 제 학급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았던 현옥이 여름방학을 기다리며 치른 학기말시험에서 순남에게 우등상을 빼앗기고 말았다. 순남 역시 승부욕이 강한 성격이라 둘의 대결은 항상 앞뒤를 다투며 경쟁을 하던 상대였다. 순남은 현옥에게 언제나 일등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 분해서 기를 쓰고 이겨보려 노력을 하였고 결국 학기말시험에서 현옥을 눌러버린 순남은 의기양양해졌고 그에 반해 일등을 놓쳐버린 현옥은 의기소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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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대에 걸쳐 한의원을 운영하는 집 고명딸로 귀하게 자란 순남은 현옥의 처지와는 상반되었다. 부모의 능력이 곧 아이의 힘이 되는 것이고 보니 부유한 집 딸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학교에서도 과한 대접을 받고 있었으니 부모덕에 아이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어른의 세계가 그러하듯 아이들의 세계도 가진 자의 여유와 못 가진 자의 비굴함은 존재하고 있었다. 순남의 주위에는 언제나 그의 추종자들이 설쳤고 사탕발림 한마디에 적선하듯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는 순남의 인심에 혹하여 추종세력들은 더욱더 비굴해지고 있었다. 현옥은 그런 순남의 추종자들을 업신여기며 무시를 하였다.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하고 주종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순남의 의기양양은 자신의 추종자가 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걷고 있는 현옥의 콧대를 꺾어 놓음으로 절반은 속을 푼 셈이다. 감히 내가 네까짓 것에게 지겠니? 하는 도도함으로 현옥을 무시하려 든다. 순남과 다르게 현옥의 의기소침은 단순히 승부욕만은 아니었다. 안하무인인 순남의 행동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자신이 총대를 메기로 했던 것이다. ‘네가 아무리 잘났어도 난 너의 친구는 되어 줄 수 있으나 너의 추종자는 되지 않겠다’는 그 자존심 하나로 순남의 기를 꺾어 놓았건만 결국 이번에는 밀리고 만 것이었다. 더욱 기고만장해진 순남을 향한 세력들은 커져가고 현옥은 그들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져 의기소침 해져버렸다. 그러나 결코 현옥은 기죽지 않았다. 다음 학기를 노리고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며 다짐에 다짐을 하고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여덟 살 난 아이의 행동치고는 그 뜻이 너무도 심오한 것이 탈이라면 탈이었다. 어린아이의 생각도 이리 거창한데 아비인 근호는 그 딸의 반도 못 쫓아가는 못난 인물이었다. 제 버릇 개 줄까, 부친의 사망으로 잠시 기가 꺾여있더니만 장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한동안 잠잠했던 버릇이 또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수중에 돈이 모이기 시작하니 또다시 술을 입에 대면서 취해 들어오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 그런 남편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희연에게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저러다가 또 옛날로 돌아가는 거는 아이가?’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가는 또 무슨 탈이 날거라 불안한 마음에 남편의 술버릇을 고치고자 남편을 붙들고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는다. “정옥아버지! 옛날같이 살면 안됩니다. 아아들 생각하소. 다른데 한눈팔지 말고 장사에만 신경 쓰소. 부탁입니다. 무너진 가문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아버님 무덤 앞에서 맹세한 거 잊어서는 안됩니다. 알았지요?” 술에서 깨어난 근호는 자신을 꾸짖는 처를 보기가 민망하여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다짐하고 또 맹세를 한다. 그러나 그 맹세는 며칠도 못 가서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한번 입에 댄 술이 자꾸만 근호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나갈 때는 처의 다짐을 마음깊이 새겨 넣고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붙들려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셔댄다. 이제는 술 취하는 것이 낙이 되어버리고 장사로 번 돈은 고스란히 술값으로 날리는 날이 반복되었다. 신발 한 켤레를 팔면 술이 두 잔이요, 신발 열 켤레를 팔면 밤새껏 술독에 파묻히고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장사 밑천까지 술값으로 탕진하고 만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희연 속이 아프다 못해 쓰라렸다. ‘천성이 나쁘지는 않은데 우째 사람이 되다 말았일꼬.’ 귀한 아들 아까워 세상에 내보내지 못하고 치마폭에 끼고 살았던 시모가 야속해진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서지 못하는 응석받이 남편을 어떻게 해야 할지 희연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이래 살수는 없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술독에 빠져 사는 꼴 더는 못 본다. 아아들 보기에도 챙피시럽구마.’ 아무리 가르쳐도 사람구실 하기는 글렀다 싶어 희연은 남편을 버리기로 작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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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까지 받아가며 부디 성공하여 큰소리치며 살기를 바랐건만 번 것을 고스란히 술집에 퍼주고 심지어 밑천까지 털어 넣었으니 이를 남편으로 믿고 살수가 있겠는가. 희연은 이제 남편에게 미련이 없었다. 제 스스로가 한 집안의 가장이기를 포기했는데 무슨 수로 사람 구실하게 만들 것인가? 이제 희연 자신도 지쳐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실망시키는 남편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희연은 아이들만 데리고 친정어미 곁으로 가서 살려고 마음을 굳힌다. 무거워진 마음을 털어놓을 곳도 없어 같은 경주에 살고 있는 친정 쪽 친척집을 오랜만에 찾아 가본다.

경주 최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친정식구들 중 유일하게 경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고모 정순옥. 경주에서 나름 부자로 알려진 최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사는 것은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다. 선대에서 소금 장사를 시작해 불려 놓은 재산이 많아 경주에서 알아주는 부자로 통했던 고모 네였다. 슬하에 자식은 오누이만 두어 아들은 일찍 장가를 들여 가업을 물려주었고 딸은 서울로 시집을 보내고 시부모를 모시고 아들 내외와 같이 삼대가 한집에서 살고 있었다. 희연이 경주로 시집을 오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고모부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박 인택과 최 기훈은 오랜 친분으로 잘 알고 지냈던 동기간이었고 둘은 자주 모임을 가지며 술잔을 기울이기를 좋아했었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봄날 푸른 하늘은 어둠이 내려앉으려 하고 있었다. 인택이 대서방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기훈이 운영 하는 소금가게에 들렀다. 무슨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지 인택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무슨 일 있었던가 보네! 자네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구만.” “말해 무엇하겠노. 나라 잃은 백성 얼굴에 근심은 당연한 것을.” “에헤! 이사람. 또 무신 심사 틀리는 일 있었구만.” “내사 항상 심사가 틀리제. 대서방 일을 보다 보면 속이 끓는 일이 한두 가지 라야제.” “또 남의 일에 그래 열을 올리나?  자네도 참말 중병이다. 그래 남의 일만 봐주다가 아매도 집에서 쫓겨 날거구마.” “…….” 인택은 피식 웃으며 쓴 미소를 짓는다. “가세. 나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기훈이 인택을 끌고 술집으로 향한다. 몇 잔 마시지 않은 술인데 빈속이라 그런지 슬슬 취기가 오른다. “자네는 그 생각을 좀 고쳐야겠구마. 백성이 나라를 걱정하는 거는 당연한 거지만서도 그래도 가족이 더 애틋한 법인데 우째 집안은 그래 무심히 하고 바깥일만 신경을 쓰는 건가?” “이사람아! 내가 언제 집안에 소홀 했다 그라노?” “내가 자네를 몰라? 이십 년 지기 친구를 몰라서? 영민하고 예의 바르고 충효를 아는 자네인 거는 인정하지만 충이 지나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내 하나로 이 나라 꼴이 바뀐다면야 목숨이라도 내 놓겠지만 그게 어디 한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던가! 백성 고달픈 거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자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모든 백성들이 잘 살수는 없는 거제. 아니 할 말로 자네가 임금도 아닌데 무슨 천명을 받았다고 구국운동에 민생고 해결까지. 자네의 몫인 양 하는 것은 내 눈에는 오지랖으로 밖에는 안보이네.” 기훈의 충고에 인택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내 행동이 지나치다... 자네 말이 맞을 수도 있지. 그러나 나는 내가 천명을 받아서 하는 일도 아니고 뜻이 있어 하는 것도 아이구마. 그저 억울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일인들에게 짓밟히는 백성들이 안타까워서 그네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자는 것이지 구국이고 민생고해결은 가당찮은 일이지. 아암! 가당찮고말고.” “얘끼, 이사람아! 그래 남의 일 걱정 말고 자네 아들 장가나 들이라고! 애비가 돼가지고 아들 앞날은 내팽개쳐놓고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우국충정을 한다는 거고! 자네도 나라 버리는 임금이나 마찬가지야. 내 가정도 바로 세우지 못해 놓고 무슨 나라를 다스려 보겠다고 기를 쓰는지...쯧쯧.” “그거야 안사람이 추진을 해야제. 나야 그저 허울뿐 아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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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다 똑같은 건데 자네가 나서나 제수씨가 나서나 그게 뭐 그리 다르다고. 보낼 마음이 있으면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제.” “그거야 그렇지. 그래! 그라믄 자네가 어디 괜찮은 혼처 자리 알선이라도 해줄 긴가?” “나야 당장에라도 알선 할 수 있지를. 자네만 뜻이 있다면.”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에서 두 사람 사이에 거론되었던 인택의 맏아들 혼인 이야기는 급물살을 탔고 기훈은 자신의 책임 하에 최고의 혼처자리를 알선해주겠다며 큰 소리를 친다. 간밤에 마신 술이 과하기는 했으나 그리 인사불성은 되지 않았기에 인택과 나누었던 대화는 기억이 난다. 혼사라는 것이 집안과 집안의 연결이나 마찬가지라 섣불리 남을 붙일 수 없는 노릇, 장사꾼인 최 기훈에게 중매를 부탁하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나 인택과 인연을 맺을 집안으로는 성에 차지를 않았다. 인택의 성품을 알기에 그에 맞는 집안을 곰곰이 생각다보니 자신의 처가가 생각났다. ‘옳지! 형님네라면 인택과 엇비슷한 처지니 맞을 기구만.’ 마침 사랑채 방문을 열고 기훈의 처 순옥이 소반에 얹힌 꿀물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술도 좋지만 몸도 좀 돌보소. 하루도 술이 빠지는 날이 없구만요.” 순옥은 기훈을 걱정하며 잔소리를 하려 든다. “임자! 형님한테 기별을 좀 보내거라.” “갑자기 무신 기별을요.” “아니다. 임자가 한번 형님 댁에 찾아가 보그라.” “아니 뜬금없이 무신 얘긴지 모리겄네요. 친정에 무신 일 생겼다는 소식 들었는교?” 기훈은 걱정하는 아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혼잣말을 해댄다. “그러는 것보다는 내가 가면 좋을 텐데. 허 참. 가게를 비울 수도 없고. 염치불구하고 형님을 오시라 하는 기이 좋겠나. 아니면 임자가 가서 전하는 기이 좋겠나.” “…….” 순옥은 기훈의 혼잣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기는 했으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혼잣말을 하는 행동은 기훈의 버릇이요,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라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이는 장사를 하며 생긴 버릇이라는 것을 추후에 알게 되었다. 그 후로도 자주 남편의 행동에 머쓱해하다가 순옥이 이제는 으레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어차피 되물은들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요,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야만 얘기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순옥이 점잖게 앉아 남편의 결론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래. 그냥 형님을 한번 올라오시라고 하는 기이 낫겠다. 오셔서 직접 대면을 하는 것이... 그게 좋겠구마.” 생각에 빠졌던 기훈의 생각이 결론이 났나 보다. 기훈은 처를 바라보며, “임자! 포항형님께 기별을 좀 넣어라.” “무신 내용으로요?” “딸 혼사 문제로 잠시 오셨으면 한다고.” “혼사라니요? 우리 희연이 말씀 이라요?” “그래.” “혼처자리 좋은 곳이 난깁니까?” “아암! 좋은 곳이제. 시부될 양반이 세상에 없는 어진 위인이지. 아암. 내 그것만은 장담을 하지.” 기훈은 얇은 미소를 보이며 흐뭇해한다. 남편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의미하고 있는 바를 눈치로 대강 알아차린 순옥이 묻는다. “혹시... 박씨종택을 생각하고 말씀하시는 깁니까?” “그래. 인택이 첫아들도 아직 혼처자리 마땅한 데가 없어 고민을 하고 있길래 여러 사람을 생각해 보다가 형님 댁이 생각이 나더라고.  아무리 가늠을 해봐도 두 집안이 사돈이 되는 기이 맞을 성 싶구마.” “그거는 이핀 생각이고 내는 쫌 안내키요.” “우째서?” “박당주야 이핀 동기니까 잘 안다손 치더라도 그 아들에 대해서는 이핀도 아는 기이 없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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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부모를 보면 자식을 아는 법, 또한 첫 자식은 아비를 담는다 했으니 인택이 성품을 빼다 박았으면 그것 같이 좋은 것이 어디 있노?” “그렇다는 장담이 어디 있십니까? 모름지기 눈으로 직접 봐야지 알지요.” “에헤. 사람 참. 어디 혼사가 둘만의 문제더나? 우리는 뭐 며느리 사위 볼 때 본인들을 직접 보고 했드나? 다 집안어른들 간에 서로 마음이 맞아 혼사를 치른 거제. 가문으로 따지면 야 인택이 빠질 기이 머 있노? 별 걱정을 다한다.” “그래도 내는 서로 아는 처지에 사돈이 되는 거는 꺼려집니다.” “내참. 아녀자 소견 아니랄까봐서! 임자 생각보다 형님 생각이 중요한 것이니 괜한 일에 잡음 넣지 말고 잠자코 있그라.” 사대부가의 규수로 자란 탓에 남편을 섬기는 일에는 오로지 순종이었다. 삼종지도에 얽매인 삶을 뿌리치는 것은 여인의 길이 아니라 여기는 고루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대대로 내려오는 고통의 삶을 고스란히 지켜내려는 지고지순한 여인이 바로 순옥 자신이었다. 남편이 나서서 하는 일에 아녀자가 함부로 왈가왈부 할 수 없어 잠자코 있기로 하고 남편이 시키는 대로 포항 오라비에게 경주를 한번 다녀가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넣는다. 며칠 지나 답장이 오고 보름을 흘려보내고 포항에서 순옥의 오라비 정한휘가 매제의 가게로 찾아온다. 손위처남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기훈은 장부 정리를 하다 손을 떼고 일어나 한휘를 맞이한다. “형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랜만이구마. 자네도 잘 지내고 있었는가?” 기훈이 수줍은 새색시처럼 웃는다. “이렇게 오시라 해서 염치없습니다. 지가 내려가서 형님을 뵈어야 하는데... 장사꾼이다 보니 시간이 나지 않아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별소릴 다한다. 오가는 거야 시간 있는 사람이 하면 될 것을 무신 염치까지 차리노! 내사 자네 덕에 경주 나들이도 해보고 좋기만 하구만.” “그래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치르고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와 기훈이 단골로 다니는 술집으로 한휘를 안내했다. 술상이 들어오고 둘이 마주 앉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기훈이 서두를 꺼낸다. “형님을 이래 오시라 한 거는 다름이 아니라 제 오랜 벗을 형님께 소개해 드리고자 해서입니다. 형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자네가 거론한 혼처자리가 그 오랜 벗이라는 거구만.” “예에. 그렇습니다. 혹시 불편하시다면 다음으로 미루겠십니다.” “내야, 뭐. 상관은 없다. 이러나저러나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으면 서두르는 기이 좋겄제.” “예. 형님께서 그리 이해해 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그 사람을 이리 오라 일렀으니 곧 도착 할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술잔이 오고 가기를 대여섯 번 할 때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잠시 후 인택이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정좌해 있던 정한휘가 일어서자 기훈도 따라 일어선다. “그냥 앉아 계셔도 될 터인데...” 인택이 예를 갖추는 한휘에게 무안한 기색을 내비친다. “아무리 그래도 초면에 예는 갖추어야지요.” 한휘가 인심 좋은 얼굴로 인택을 반긴다. 어색하게 서있던 세 사람이 술상을 앞에 두고 앉는다. “형님! 이 사람이 제 오랜 벗인 박 인택입니다.” 기훈의 소개로 인택이 한휘에게 정중하게 다시 인사를 올린다. “박 인택이라고 합니다.” “예. 정 한휘라 하요.” 기훈에게 대강 얘기를 전해들은 인택이 정 한휘가 기훈의 손위처남이라는 사실은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기훈이 중간에 나서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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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서로 긴장했던 마음들이 술로 인해 풀어지면서 세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기훈이 생각했던 대로 두 집안이 엇비슷한 면이 많아 쉽게 마음이 통했다. 술자리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이들과는 상관없이 두 사람은 서로 사돈이 되기로 약조를 한다. 한휘는 오랜만의 나들이에서 좋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흡족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딸의 혼사가 자꾸만 늦어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한휘였기에 사돈 될 사람의 인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고 식자로서 지나침이 없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올곧은 성격이 말을 주고받음으로 친근감을 느끼게 하여 자꾸만 인택에게 호감이 들었다. ‘이런 집안이라면 내 딸을 줘도 아깝지가 않겠구만.’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있다 결국 술기운에 먼저 사돈을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고 인택은 거리낌 없이 이에 응하여 결국 희연과 근호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희연의 시집살이가 고달프다는 얘기를 들은 순옥은 가끔씩 희연을 찾아가 위로를 해주며 설움을 달래어 주곤 했었고 시어미의 눈치가 보이기는 했으나 희연도 가끔씩 고모에게 들려 마음의 위로를 받으며 세월을 보냈었다. 그러던 중 최씨 집안에도 갑작스런 불화가 들이닥쳤다. 어미를 닮아 몸이 좀 약한 편이던 아들이 고뿔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를 시작하더니 앓은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그만 죽고 말았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순옥은 그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속병을 앓다 자신도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기훈마저 자식과 처를 잃고 난 후 삶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떠돌다가 결국은 자신도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기훈마저 몸져눕게 되자 대를 이어 가업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없어 한 동안 장사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집안에 불어 닥친 불행을 며느리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며느리는 그 불행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식들과 살아남아야 했기에 눈물 따위를 흘리며 허송세월을 할 수만은 없어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주인을 잃은 가게는 맥없이 풀어져있었다. 시부가 있었을 때는 활기가 넘쳐났건만 시부의 빈자리가 너무도 커 보였다. 며느리 오씨가 가게 안에 들어서자 인부들이 의아한 눈으로 오씨를 바라본다. 이제부터 그녀가 주인이라는 것을 그들 역시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여인이 상전이 되는 것이 그들로도 그리 탐탁지는 않았었다. 자연 그들의 눈살이 찌푸려졌고 그것을 오씨가 모를 리 없었다. 여인이 상전이 되었다고 해서 아니꼬워 일을 그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인부들은 불평불만을 하면서도 붙어 있을 수밖에.   며칠을 오씨는 가게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를 이어 쌓은 신뢰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이미 뜸해져 있었고 그나마 오랜 단골이었던 이들이 정을 잊지 않고 찾아주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장사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오씨가 제대로 가게를 꾸려나가기란 무리였다. 더군다나 아랫사람들조차 그녀를 무시하고 말을 듣지 않으니 아무리 오씨가 발버둥을 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무리수를 두고 물갈이를 시작했다. 자신이 거느릴 사람들이 자신을 거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녀에게 반기를 드는 이들을 모두 쫓아내고 마음에 맞는 몇 사람만을 거느리고 다시 장사를 시작하였다. 처음 해보는 장사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씨는 장사를 조금씩 익혀나갔다. 시부가 이뤄 놓은 것들을 잃는 한이 있어도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고 제 식에 맞게 바꿔가면서 몇 년을 고생을 하여 드디어 손해를 면할 정도까지 정상궤도에 올려놓게 되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이겨내 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텼던 오씨. 청상과부로 슬하에 삼 남매를 둔 오씨는 남편을 대신하여 삼 대째 가업으로 이어지는 소금 장사를 도맡아 하면서 장사꾼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시어미와는 다르게 겉모습에서 풍겨나는 위풍이 사람을 상대함에 있어 능수능란했으며 장사꾼 특유의 입심과 배짱이 두둑하여 이제는 장내에서는 여걸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몇 해 전, 시부의 죽음까지 겪어 낸 오씨는 이제 최씨 집안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다. 희연이 올케의 가게로 들어서며 올케를 부른다. “언니. 지 왔십니다.” 오랜만에 나타난 희연을 보며 오씨가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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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씨. 우짠일입니까?” “언니 얼굴 본지 하도 오래돼서 한번 나와 봤으요.” “잘했십니더. 안그래도 우째 지내시나 궁금했구마요.” 희연이 반기는 올케를 보며 흐릿하게 웃어 보이자 올케는 뭔가를 직감한 듯 희연을 보고 물었다. “안색이 별롭니더. 무신 일 있는 거는 아니지요?” 여전히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희연이 대답을 한다. “내 얼굴에 그래 써 있나 보지요?” “또 무신 일인교?” 반가움도 잠시 오씨는 근심이 가득한 희연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언니요! 지 아아들 데리고 친정에 가서 살랍니다.” “와요?” 희연이 잠시 입을 달싹거리다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올케 앞에 서슴없이 풀어 놓는다. 오죽이나 맺힌 것이 많았던 터라 이렇게라도 풀지 못하면 속병이 생길 것 같아 사촌올케를 상대로 부끄러움도 잊은 채 끊임없이 속내를 터놓는다. “우째 그래 정신을 못차리꼬? 아아들 생각하믄 그래 행동을 못할긴데.” 오씨는 한숨을 내쉬며 근호에 대한 미움을 표한다. “인자는 내도 지쳐 그만 둘랍니다. 남이 말해 머하겟는교? 스스로가 느껴야제.” “애기씨 말이 맞지요. 그래도 아아들 아버진데. 괜찮캤십니꺼?” “…….” 희연이 대답을 못하고 속앓이를 하는 것을 보고 오씨는 말을 돌린다. “그래도 애기씨는 의지할 친정이라도 있으니 다행입니다.” “어머니 볼 낯이 없지요. 잘사는 꼴 한 번도 못 보이고 항상 신세만 져서...” “언제 가실라꼬요?” “조만간에 내려 갈랍니다. 아매도 가는 날은 인사도 못하고 갈 거 같아서 겸사겸사 왔으요.” “그래도 애기씨가 가까이 있어서 외로움 많이 달랬는데. 이래 간다 카이 내 맘이 더 쓸쓸하구마요.” “지도 언니 덕에 외로움 많이 달랬구마요. 그간 고마웠십니다.” “예. 애기씨. 가서 잘 사이소.” “예. 언니! 건강하게 잘 지내소.” “예. 애기씨도요. 속 너무 끓이지 말고요. 그래봤자 애기씨 속만 아픕니다. 알았지요?” “예 언니. 건강 잘 챙기고 잘 지내소.” 헤어지는 아쉬움에 멀리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는 사촌올케를 뒤로하고 희연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대문을 들어서서 휑한 마당을 한번 둘러보고 사랑채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사랑채에 발길을 들여 놓으며 시부의 영정 앞에 꿇어앉는다. “아버님! 저마저도 아버님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불효한 며느리 용서하여 주시이소. 잘 살아 보려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제 힘으로는 한계를 느낍니다. 우짜믄 좋을까요? 아범을 우째 해야 합니까?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이래 힘들지는 않았을 긴데... 아버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비참한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불쌍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한참을 시부의 영정 앞에서 울고 나서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사랑채를 빠져 나온다. 사랑채를 건너와 마루에 올라선 희연이 방을 향해 큰딸을 부른다. “정옥아! 짐 챙기자.” 이방 저방을 오가며 세간을 챙기는 희연의 손이 더디게 움직인다. 어미를 따라 짐 챙기는 일을 거드는 정옥의 마음도 무겁기만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들은 그저 정옥의 옆에서 멀뚱히 앉아 꾸려놓은 짐들을 지키고 있었다. 이불보따리를 싸매고 있는 어미 앞에 잔뜩 성이 난 얼굴로 현옥이 무릎을 꿇고 앉는다. “엄마! 우리 이사 안 가면 안되나? 나는 학교 가는 것이 참 재미있고 좋다. 친구들도 많고 공부도 재미있고. 이 학기에는 내가 우등상 탈라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단 말이다. 그러니 엄마! 내년 방학에 이사가자, 어? 내가 우등상 타고 나서 그때 이사 가자. 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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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의 가슴이 또 한 번 내려앉는다. 아이의 뜻을 내쳐야 하는 현실이 죽도록 싫다. 보다 못한 정옥이 어미를 대신하여 현옥을 달랜다. “현옥이 언니 말 잘 듣제?” “…?” “현옥아! 우리 이사 가는 곳에도 학교 있으니까 현옥이는 그쪽으로 전학가면 된다. 그리고 지금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거기서도 우등상 타면 되는 기고.” “그라믄 내 다시 학교 갈 수 있나?” 정옥이 대답대신 현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에 신이 난 현옥이 다시 정옥을 부른다. “언니야! 우리 어데로 이사 가는데?” “엄마가 외할머니 집 과수원으로 갈거란다.” “그라믄 우리가 과수원 하는 거가?” “그래! 그렇단다.” 우울했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금세 아이들은 신이 나서 떠든다. 밖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부스스 잠을 깬 근호가 방문을 열고 나온다. “와 이래 시끄럽노?” 아비의 큰소리에 아이들은 일순간 입을 다물고 조용해진다. 아이들의 기죽은 모습에 희연이 화가나 남편을 노려보며 쏘아붙인다. “뭐 잘한 기이 있다고 큰소리요?” 비몽사몽 잠이 덜 깬 눈을 멀뚱거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내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임자 그거는 와 들고 있는데? 그라고 이 짐들은 다 뭐꼬?” 사랑채에 놓여있던 제상을 들고 서있는 아내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길을 돌려 다시 마루 위에 쌓여있는 짐들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느꼈던지 놀라 묻는다. “이핀 버리고 떠날라고 짐 챙기요.” “무신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고?” 어안이 벙벙하여 아내를 뚫어지게 응시한다. “임자가 나를 버린다 그 말이가?” 재차 묻는다. “와요? 못 그랄거 같으요?” “와? 내가 임자한테 먼 잘못을 했다고 그런 막 소리를 하는기고?” “그걸 몰라서 묻는 기요?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이핀은 아이들 보기 챙피하지도 않으요?” “참 사람 답답하게 구네. 아. 내가 머를 우쨌는데 그러나 말이다.” “그마 됐으니 입씨름 말고 인자부터 이핀 혼자 잘 사소. 그 좋아하는 술독으로 퍼부으면서 말이요.” “임자. 이러기가? 내가 무슨 술을 그리 마셨다고 하늘같은 남편 업신여기는 기고?” 뭐 뀐 놈이 성낸다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적반하장으로 되레 큰소리를 친다. “말 나왔으니 어디 한번 따져봅시다. 이핀 장사해서 돈 벌은 거 다 내나 보소. 얼마 남아 있는교? 장사 밑천이나 남았으면 용하구마.” “…….” “그래 가지고 뭐 먹고 살 것이며 아아들 공부는 우째 시킬 깁니까? 이핀 때문에 내속이 까맣게 타는 거를 알기나 하요?” 윽박지르는 처의 언행에 뜨끔하여 기가 눌린다. “임자. 화 많이 났구나. 내가 다 잘못했다. 용서하그라.” “용서도 필요 없소. 인자부터 이핀하고 남남이니 각자 갈 길로 가면 되는 기요.” “내가 갈 곳이 어디 있노? 엄마도 안 계시고 그렇다고 포항 동생 집으로 찾아 갈수도 없지 않는가? 임자! 내 다시는 술 안 마실 테니 용서해 주그라. 다 내가 잘못했다. 제발 부탁한다. 내 버린다 소리 하지 말그라.” 아내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심정으로 근호는 아내에게 매달려 사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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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는 술 마신다 하고 마싰는교? 지금 이사 술이 깼으니 안 마신다 약속하제 술만 보믄 인사불성인데 그 버릇이 그래 쉽게 고쳐질라꼬요. 인자는 안 믿을 라요. 나는 내일 여를 떠날 거니 이핀은 나보다 더 궁합 잘 맞는 술하고 한평생 잘 살아 보소.” 속 깊은 곳에 남아 있던 찌꺼기까지 모조리 끌어올려 남편을 향해 쏘아댄다. 그런들 그 속이 시원하게 풀리겠는가?  이러나저러나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두 내외의 입씨름에 잠자코 있던 정옥이 어미 앞에 나서서 애원을 한다. “엄마. 아버지 그마 용서해요. 인자는 술 안 마신다고 하시잖애요. 그라니 우리하고 같이 가시게 해 주세요. 예? 엄마!” 아비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꼴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 정옥이 어미에게 애원을 한다. 큰딸에 이어 둘째 셋째 막내까지 덩달아 어미를 조른다. 이에 풀이 죽었던 근호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으니 다시 생기를 찾아 아내에게 매달려 본다.

“임자! 내 아아들 보는 앞에서 맹세한다. 이 시간 이후로 절대 술 마시지 않고 임자 하자는 대로 다 할기이 마지막 한번만 용서해 도고.” 아내의 손을 부여잡고 비굴하게 매달리는 남편, 그리고 아비를 용서해 달라 애원을 하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 희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풀죽은 모습으로 툇마루에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아이구 내 팔자야! 이 일을 우짜믄 좋겄노?” 어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동자에 완강히 버티고 섰던 방어벽이 일순간 허물어져 내린다. 부모와 자식, 핏줄로 맺어진 관계를 어찌 자신의 입으로 부정할 수 있겠는가. 부부의 인연은 끊어져도 천륜이라는 부모자식간의 인연은 끊으려야 끊을 수도 없는 것, 마지못해 희연은 온전한 부모가 되어 있어주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심정을 헤아려 오로지 아이들의 아비라는 명목으로 남편을 붙여 놓기로 마음을 내어준다. 십 수 년을 살아도 애틋한 부부의 정을 느껴보지도 못했던 희연에게 더 이상 남편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은 네 아이의 어미요 가장이라는 명분에 매달려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 될 것이고 덤으로 붙어 있는 남편은 그녀 자신에게 그저 있으나마나 한 무가치의 존재일 뿐 그 이상의 어떤 관계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희연은 애당초 계획에서 벗어나 결국 남편과 함께 고향을 등지고 어미가 살고 있는 포항으로 짐을 싣고 떠났다. 박씨 종택의 종부로서의 무거운 짐은 내려놓았으나 어미로서 자식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또 다른 굴레가 희연의 어깨를 짓누른다.

흥해 읍내를 지나 곡강면으로 들어서는 길. 마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드문드문 보이는 집터들. 흙냄새와 거름냄새가 뒤범벅이 되어 구린내를 풍기고 논둑에 묶여 있는 송아지는 어미를 찾아 운다. 농로로 보기에도 비좁은 길 위에 개구리 한 마리가 논에서 튀어 올라 폴짝폴짝 숲으로 몸을 날리자 풀숲 여기저기에서 풀벌레가 하늘 향해 뛰어 오른다. 말라붙은 쇠똥이 여기저기 퍼져있는 길을 조금 더 오르자 사과나무들이 늘어선 과수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지막한 산이 서 있고 주위를 맴도는 새 때들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산자락에 울려 퍼진다. 과수원 안쪽으로 외롭게 자리 잡고 있는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 과수원지기가 살고 있었던 터라 비어있는 집안은 휑한 기운이 덜했다. 근호가 소달구지에 실어 온 이삿짐을 마루에 내려놓고 있는 동안 희연은 부엌에 들어가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이미 때를 훨씬 넘긴 시간이라 모두들 속이 허전하였다. 마당 한 귀퉁이에 자리한 조그만 우물에서 물을 길어 부랴부랴 쌀을 씻어 가마솥에 안치고 마루 틈에 놓인 짐들 사이에서 부엌세간을 찾아 들고 들어가 밥상 차릴 준비를 한다. 그 사이 근호는 빗자루를 들고 넓은 마당에 쌓여있는 먼지들을 쓸어내고 정옥이 비어있던 방안의 먼지를 걸레로 훔쳐내며 희연의 몫을 대신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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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이 궁금했던 현옥과 경현이 마당을 기웃거리고 과수원 길을 왔다 갔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다 어미를 찾아 부엌으로 쫓아 들어온다. “엄마 나는 여기가 무섭다.” 세간을 정리하고 있는 어미의 치맛자락을 경현이 붙들고 흔든다. “무섭긴 뭐가 무섭노?” “앞에도 옆에도 집이 하나도 없다. 사람들도 하나도 안보이고.” “여는 우리 식구만 사는 거라 사람이 없는 거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희연이 아이를 달랜다. “그라믄 여기에 친구도 없다 아이가?” “친구는 학교 가서 만나면 되제.” 학교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현옥이 어미의 얼굴에 초롱거리는 눈을 들이대고 묻는다. “그러면 학교는 어디 있는데요?” “학교는 외할머니 집 근처 읍내에 있지.” 이곳 뒷마을에도 학교는 있었다. 다만 개천을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이라 많은 비가 오거나 여름장마가 지면 개천의 물이 불어나 사람들이 오고 가지 못하고 고립이 되기 일쑤이다 보니 어린 것들이 그곳으로 학교를 다니기에는 위험이 있어 조금 멀어도 읍내로 다니는 것이 안전하였다. “그러면 나도 읍내에 있는 학교에 갈거다. 엄마. 나 전학시켜 주세요.” “오냐. 며칠만 기다리그라. 집 정리 다 하고 엄마가 전학 시켜줄 테니.” 성급하게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다시 세간을 정리한다. “에미야! 어데있노?” 마당에서 찾는 목소리가 들려 희연은 부엌을 내다본다. 언제 도착했는지 강씨 부인이 옹얘와 함께 마당으로 들어서 있었다.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각자 있던 곳에서 나와 마당으로 모였다. “장모님 오셨습니까? 그간 편안 하셨지요?” 먼지 묻은 손을 털며 사위는 장모 앞에 서서 넙죽 절을 한다. “그래 박 서방 오느라고 고생했다.” “아입니다. 우선 방으로 드시지요.” 사위가 안내하는 쪽으로 강씨 부인은 발길을 옮긴다. 그사이 옹얘는 머리에 얹은 광주리를 부엌으로 들이민다. “아씨! 이거 받으이소.” 옹얘의 머리위에 얹힌 광주리를 희연이 손으로 받쳐 부엌바닥에 내려놓는다. “식사 못하셨을 거라면서 마님께서 챙겨 오셨습니다. 지가 상차릴거니 방으로 들어가 보시이소.” 옹얘의 마음씀씀이에 희연은 항상 미안하기만 하였다. “매번 자네에게 신세를 지는구마.” “그런 소리 마이소. 마님 기다리고 기실테니 퍼뜩 들어가 보이소.” “그래 알았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을 나와 큰방으로 들어간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과 남편 사이에 서서 친정어미를 행해 절을 올린다. “그래 다들 오느라 고생 했다. 그란데 우째 찬옥이가 안보이노?” 강씨 부인의 눈에 둘째 손녀가 보이지 않아 궁금하여 물으니 근호가 대답을 한다. “예. 둘째는 이번에 졸업반이라 전학시키기도 뭐해서 경주 육촌 형님 댁에 잠시 맡겼십니다. 졸업하면 곧바로 이리로 오라꼬 일러두었고요.” “응.그랬구만. 그건 그렇고 박 서방. 농사짓는 일이 만만치 않을 긴데 할 수 있겠나?” “예. 장모님! 서투르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 볼랍니다.” “그래. 제발 그 정신 흐트러트리지 말고 부지런히 살아보게.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기다. 자네가 열심히 노력하면 그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보여 주는 것이 농사인기라.” “예! 장모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어른들의 얘기가 잠시 멈추자 기회를 틈타 현옥이 외조모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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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저는 언제 전학 할 수 있어요? 빨리 전학해서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데.” 아이의 말똥거리는 눈을 바라보는 강씨 부인이 눈웃음을 치며 호탕하게 웃는다. “오냐. 오냐. 우리 현옥이 학교에 가고 싶구마.” “예. 빨리 빨리 학교에 갔으면 좋겠어요.” “알았다. 이 핼미가 우리 현옥이 언제쯤 학교에 갈 수 있을지 알아 봐 주꾸마. 며칠만 기다리고 있그라.” “예 할머니.” 현옥이 기대에 부풀어 외조모를 바라본다.

친정어미가 다녀가고 난 며칠 후. 과수원을 지나던 마을 사람들 몇몇이 찾아왔다. 과수원지기가 떠나고 잠시 비어있던 과수원 외딴집에 새사람이 든 것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그들 나름대로는 새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궁금증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바삐 움직이는 이들은 개천 건너 뒷마을에 살고 있는 이들로 뒷마을은 가구 수가 몇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찾아 나오는 길에는 언제나 과수원을 지나야 했고 그곳에서 희연내외가 살 궁리를 찾으려 서툰 솜씨지만 부지런히 과수원 길을 오가는 것이 자연 그들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늦은 오후 일을 마치고 뒷마을로 들어가던 길에 희연내외가 나와 있는 모습을 본 마을사람들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온다. “못 보던 사람들 같은데. 어디서 왔는교?” 햇볕에 그을린 검은 얼굴에는 깊게 패인 주름들이 이마와 눈가 주위에 자글자글하게 자리하고 있어 보기에도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농사꾼이 퉁명스럽게 묻는다. 어리둥절해 있는 희연내외는 그들을 경계하며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근호가 대꾸를 한다. “예 경주에서 살다 왔십니다.” 이들이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눈치를 챘던 모양인지 농사꾼은 자신을 뒷마을 이장이라고 소개를 한다. “보아하니 농사짓던 사람들 같지는 않은데.” “예 농사일은 안 해봤십니다.” “그런데 우째서 이 외진 곳까지 왔는교?” “해방되면서 집안이 몰락해 모든 것을 다 잃고 살길이 막막해 사내 체면 내던지고 처가 신세 질라고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십니다.” 자신의 처지까지 내놓으며 서슴없이 대답하는 근호에게 경계심을 느낀 것은 오히려 이쪽이 되었다. 이장은 의심 가는 눈초리로 경계심을 허물지 않고 상대를 좀 더 파헤쳐 보고자 재차 묻는다. “농사일 안 해봤다믄서 우째 농사를 지을란교?” “해보지는 않았지만 머슴들 옆에서 조금씩 거들면서 곁눈으로 본 것이 있으이 이래저래 하다 보면 되지 않겠십니까?” “그 젊은 양반 참 태평이구마. 농사가 그래 말처럼 쉬우면 세상 농사꾼 너나없이 부자 되었제. 허허..” 근호의 성의 없는 대답에 기가 차고 한심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다. 이들의 눈에 자신이 얕잡혀 보인 것 같아 씁쓸해진 근호. 왠지 이들을 적대시 하지 않는 것이 좋을듯하여 처세를 달리한다. “신출내기 농사꾼 텃새 마시고 오가는 길에 잘못된 것 있으면 종종 가르쳐 주시이소. 열심히 배우도록 하겠십니다.” 체면은 주머니에 구겨 넣고 우선 마을 주민들과의 유대관계를 맺는 것이 좋을듯하여 자세를 낮춘다. 비굴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 대한 그들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방법은 그들과 친해지는 것이 우선이기에 웬만하면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근호의 전략인 것이다. 마을사람들 또한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고 지켜보겠다며 벼른다. 팽팽했던 신경전이 멈추고 이장의 인솔로 마을 무리들은 근호내외와 인사를 나눈 뒤 과수원을 나와 개천을 건넌다. 무리 중의 젊은 농사꾼이 옆에서 걷고 있는 다른 농사꾼을 향해 품었던 의구심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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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사람들 아무리 보아도 촌구석에서 살 사람들 같지 않던데 혹시 무신 죄짓고 도망 온 사람들 아닐란가?” 그의 말에 자신도 혹시나 했었다며 다른 농사꾼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보이제. 내가 봐도 이 촌에 숨어 살라고 온 거 같구마. 그 사내 손 봤더나? 무신 사내 손이 여자보다 더 곱노 .고생이라고는 하나도 모리고 살은 눈친데.” “이장님요! 말씀 좀 해보소. 이라다 우리 마을에 큰일 생기는 거 아이겠는교?” “그렇지는 않을 기이 미리부터 걱정 말그라.” “무신 근거로 그래 말씀 하시는 겁니까?” “과수원 어르신 사위라고 하니 거짓은 아닐기다.” “그 과수원 임자를 알고 있다는 깁니까?” “그 어르신 읍내에서는 여장부로 통하는 분이시제. 고향이 포항이라 카던데 그 곳에서도 꽤나 유명한 유지 였다는구마.” 나름 정보를 가지고 있던 이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뒤따르는 무리들은 묵묵히 인정을 하는 눈치다. 몇 안 되는 가구 수라도 마을은 마을인지라 그네들의 속사정을 꿰뚫고 있는 마을의 대표가 그리 호락호락한 자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자연 마을의 대표자 이장이라는 이도 통솔능력은 있어야 하겠고 사리분별도 할 줄 알아야 하겠기에 무턱대고 앉은 자리가 아니다 보니 나름 통하는 정보도 보통사람들보다 한 발 앞서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장의 대답이 그러하니 자연 마을 사람들도 이방인을 경계하면서도 반쯤은 품었던 의혹을 내려놓는 듯 해 보인다. 낯선 이방인에게 촉을 세웠던 것도 잠시, 노동으로 힘이 빠진 몸을 이끌고 어느새 개울을 지나 마을로 접어든다. 그들의 어깨에 고단함이 묻어나고 터벅거리는 발걸음은 묵직한 돌을 달아 놓은 듯 느리고 힘에 겨워 보인다. 서산에는 어느새 기울어진 해가 붉은 노을을 수놓고 터벅거리며 걷는 무리의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무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 희연내외는 한 낯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농사일을 시작했다. 오전해가 정수리에 꽂히기 전인데도 온몸은 벌써 땀으로 젖어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을 피해 그늘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두 내외의 모습에 어설픈 농사꾼의 풍모가 슬슬 묻어나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농사를 하는 어미를 대신해 큰딸 정옥이 집안 살림을 거들었다. 아이는 열일곱 나이보다 조금 성숙해 보인다. 어미의 힘겨운 삶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보고 자란 탓에 남들보다 조금 일찍 철이 든 소녀였다. 조부를 닮은 듯 또래보다 조금 큰 키에 쌍꺼풀이 진 시원스런 눈매에 풍성하고 윤기 나는 긴 고수머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외양뿐만 아니라 온화한 성격 또한 조부를 탁했는지 차분한 말씨와 더불어 행동 또한 엄전하여 사대부가의 여식으로서의 기품이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조부가 생존해 있었더라면 엄연히 중학교육까지는 무난히 마쳤을 테지만 기울어진 집안 형편 탓에 학업을 중단한 것이 못내 아쉬웠으나 자신보다 더 아팠을 어미를 생각하여 서운한 내색조차도 하지 않고 혼자 속으로 삭히며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며 맏이 노릇을 해낸다. 바쁜 어미의 일손을 거들어 집안일에 손을 걷고 나섰으며 아직 어린 동생들까지 돌보는 큰딸의 배려 덕에 어미는 딸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제 나이보다 일찍 철이 들어 버린 것이 안쓰럽기도 하였다. 정옥이 점심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현옥은 마루 끝에 앉아 두 다리를 내려뜨린 채 번갈아 흔들거리며 얼굴에는 지루함을 못 견뎌 짜증이 일기 일보직전이었다. “현옥아! 어디 있노?”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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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하고는 걸터앉았던 마루에서 일어나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부엌으로 다가간다. “과수원가서 아버지 어머니 점심 드시게 모셔오그라.” 큰언니 심부름에 대꾸는 않고 부엌을 등지고 돌아서서 터벅거리며 대문을 향해 걷는다. 희연 내외는 유난히 찌는 햇볕 탓에 더위를 배겨내지 못하고 서둘러 과수원 일을 접고 다른 날 보다 일찍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심부름 가려다 말고 현옥이 멈춰 서서 부엌을 향해 소리친다. “언니야! 아버지 엄마 오셨다.” “응. 알았다.” 홍조를 띠고 대문을 들어서는 근호는 힘없이 걸어와 마루턱에 걸터앉으며 목에 걸쳐두었던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아이구, 와 이래 덥노?”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 내어도 맺혀있는 땀방울들이 정수리를 타고 이마로 흘러내린다. 부엌으로 들어간 희연은 길어 놓은 물 항아리에 바가지를 집어넣어 물을 떠내어 벌컥벌컥 마신다. “후유! 문 날씨가 이래도 찌노?” 성에 차지 않았는지 독에 든 물을 재차 떠서 연거푸 마신다. “이제야 살 거 같구마.” “많이 덥지요?” “오늘따라 유난시리 덥구마.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더 있다가는 타 죽을 것 같아서 일찍 접고 들어와버렸다.” “안 그래도 점심 드시라고 모시러 갈라 했는데요.” “끼니 준비하느라고 니가 욕본다.” “엄마는 내가 뭐 어린애라 일손 놓고 있을까요?” “그래, 에미 거들어줘서 고맙다. 다 됐으면 상 내가자.” “예.” 상을 차리며 정옥이 다시 현옥을 부른다. “현옥아 점심 먹게 가서 경현이 찾아 온나.” 시무룩한 표정의 현옥은 짜증나는 목소리로 고함을 쳐댄다. “경현아! 경현아!” “…….” 누이의 고함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경현이 대답이 없다. “아이 참! 경현아. 어디 있노?” 재차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그제야 누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지 건넛방 문이 열리고 경현이 하품을 하며 마루로 나온다. “누부야! 내 여 있다.” 여전히 짜증스럽게 말한다. “큰 누부가 밥 먹으란다.” 소박하게 차려진 밥상을 모녀간에 들고 나와 마루에 내려놓는다. 그늘이 드리워진 마루위로 흩어졌던 가족들이 밥상 앞으로 모여 앉는다. 근호는 갈증 탓에 물 한 사발을 먼저 들이키고 나서 밥숟가락을 들었다. 여느 때와 다르게 숟가락질이 더딘 현옥을 희연이 유심히 살피다 딸을 부른다. “현옥아! 니 어디 아프나?” 현옥이 어미의 물음에 눈만 멀뚱거리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라믄 와 밥 안 먹고 시무룩해 있노?” “엄마! 나는 언제 학교 갈 수 있는데?” “우리 현옥이 입 나온 이유가 학교 못 가서 그러는 거가?” “…….” “아직 방학 안 끝났으니 며칠만 기다려 보자. 할머니가 연락 주실기다.” “내 심심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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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욕심을 부리는 아이가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다. 혹여 저 아이의 뒷바라지를 끝내 못해줄까 부모로서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칠월의 찜통더위는 중복을 지나 말복에 이르러 조금씩 기세가 눌린 듯하다. 한낮은 아직 더워도 산골의 아침저녁은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과수원에 딸린 작은 텃밭에서 밭일을 하고 있던 희연에게 친정어미의 집에서 일하는 머슴 칠복이 찾아와 소식을 전하고 돌아간다. 이른 저녁식사를 끝내고 나니 슬슬 배가 고파온다. 희연이 부엌에서 삶은 옥수수를 소쿠리에 담아 가지고 나와서 마당가운데 자리한 평상위에 올려놓으며 아이들을 부른다. 평상 위를 희미하게 밝히는 호롱불께로 벌레들이 날아든다.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 놓았으나 그래도 연기에 죽지 않은 놈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빛을 향해 돌진하다 불길에 휘말려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다. 어느새 나와 앉았는지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이 삶은 옥수수를 하나씩 들고 낱알을 뜯고 있었다. 부채로 벌레를 쫓고 있는 근호를 향해 희연이 옥수수를 내민다. “낮에 아아들 외할머니가 기별을 보내왔네요.” “무신 기별?” “현옥이 경현이 전학문제로요.” “그래서?” “아아들 외할머니가 아는 선생을 집으로 불렀답니다. 내일 저녁에 아아들 보러 온다고 그라니까 내일은 읍내 가서 하루 자고 와야 할 것 같네요. 방학이 지났으니 바로 전학이 될 거라고 하이 되면은 모레 아침에 바로 전학을 시키고 올라꼬요.” “알았다. 임자 알아서 하그라.” 다음 날, 오후가 되어 희연과 현옥, 경현이 함께 집을 나선다. 어미와 함께 읍내로 나가는 것이 아이들은 기뻤다. 산골생활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만큼 아이들은 사람이 그리웠고 친구가 그리웠던 것이다. 현옥은 이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그 자체에 기분이 날아 갈 듯 좋았다. 십 리가 넘는 길을 걸어 읍내 외가에 도착을 한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마루에 나와 담뱃대를 물고 있던 강씨 부인이 들어서는 딸과 손주들을 보고 반긴다. “아이구! 내 새끼들 왔나?” “할머니 안녕하셨습니까?” 아이들의 인사를 받고 흐뭇해진 강씨 부인 손주들에게서 눈을 돌려 마주 앉은 딸을 바라본다. 곱고 뽀얗던 피부가 햇빛에 그을려 까맣게 타있었다. “농사일 힘들제?” “견딜 만합니다.” “박 서방은 잘 하고 있나?” “예. 아직은 별탈없이 잘 버티고 있네요.” “정신 좀 차맀을란가?” “…….” 어미의 혼잣말에 민망해져 희연의 얼굴이 붉어진다. 오기로 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지루하였다. 하릴없이 마주앉은 두 모녀간에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진득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슬슬 지겨워 질 때쯤 칠복이 손님이 왔다고 전해왔다. 안방으로 손님을 모시고 들어 온 강씨 부인이 딸과 그의 손주들을 소개 시켰다. 인상 좋게 생긴 중년의 남자는 자그마한 체구에 회색 양복을 차려 입고 앞머리가 벗겨진 이마를 훤히 드러내 놓고 있어 실제 나이를 가늠하기가 애매했다. 연륜으로 보아서는 학교에서 중직을 맡고 있을 것 같아 보였으며 아이들을 대하는 행동에서도 인자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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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 부인은 직접 방문을 해준 손님께 귀한 대접을 하고 손주들이 빠른 시일 내에 전학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며 부탁을 한다. 별다른 문제가 없으니 서류를 꾸며 전학을 시키겠노라 대답을 남기고 강씨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손님은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드디어 현옥과 경현이 전학을 하게 된다. 아이들은 일찍 서둘러 길을 나섰다. 읍내 학교까지의 거리가 제법 멀었기에 일찍 서둘러야 했다. 큰 개천 주위에 높은 둑을 쌓아서 비가 올 때 넘어 오지 않게 만들어 놓은 뚝방옆으로 사람이 지나 다닐 수 있는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내려오면 논둑길이 펼쳐지고 조금 더 내려가니 좁은 폭의 개울물을 건너가기 위해 걸쳐 놓은 외나무다리가 보인다. 다시 외나무다리를 건너 좁은 길을 한참 내려가 큰 길이 나오고 조금 더 지나자 읍에 있는 학교가 보인다. 읍내에 위치한 국민한교는 경주에 있던 학교보다 작은 규모의 학교였다. 이곳은 남녀합반이 없었다. 현옥은 여자아이들만 있는 여학생 반에 경현은 남학생 반에 각각 배정을 받고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현옥이 예전과 마찬가지로 집을 나설 때는 동생과 같이 나서서 학교 교문 가까이 와서는 경현을 먼저 들여보내고 자신은 뒤에 등교를 하였다.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 했는지 현옥이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 친구 집에서 모여 숙제를 하는 등 재미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부족했던 공부도 제자리를 찾아 학기 중간에 치르는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현옥은 교사들 사이에서 똑똑한 학생이 전학을 왔다며 들어오는 선생들마다 현옥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였다. 오전반인 현옥이 담임의 심부름을 마치고 교실로 들어오던 중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담임을 향해 대답을 하며 돌아보니 담임과 현옥의 중간쯤에 서 있던 젊은 여선생이 뒤돌아서서 현옥의 담임선생을 째려보고 있었다. 남자선생은 여자선생에게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제자를 부른 것이라고 변명을 한다. 현옥이 어리둥절하여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으니 여선생이 현옥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니가 현옥이냐?” “예.”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담임선생의 얼굴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하였다. 젊은 여선생의 이름은 김현옥이고 오후반 수업을 맡고 있었다. 젊은 청춘인 두 사람. 현옥의 담임선생은 은근히 여선생에게 관심이 있었던지 같은 이름의 제자를 핑계 삼아 그녀의 이름을 대놓고 부르며 짓궂게 장난을 쳐댔다. 그 일을 계기로 남선생은 현옥을 더 예뻐했고 공교롭게 세 사람이 함께 있게 되는 날에는 현옥이라는 이름이 수도 없이 불리게 되었다. 물론 여선생은 역시나 남선생을 째려보았고 이를 즐기는 남선생은 마냥 신이 난 개구쟁이가 되어 하지 말라는 짓을 더 하는 것이었다. 현옥의 학교생활은 너무도 즐겁고 신이 났다. 학기 중간시험에서 우등상을 받은 현옥이 시험지를 손에 들고 뚝방길을 따라 집으로 뛰어간다. 집안으로 들어선 현옥은 목청 높여 정옥을 부른다. “언니야. 언니야! 내 학교에서 우등상 받았다.” 현옥이 신이 나서 떠들자 방안에서 나온 정옥이 현옥을 반기며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다. “우리 현옥이 전학 와서 우등상 받기 힘든데 대단하다.” 언니의 칭찬에 현옥의 입이 귀에 걸렸다. “현옥이 이래 공부 잘하는데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노?” “언니야! 나는 선생님 할꺼다.” “그래! 우리 현옥이 열심히 공부해서 꼭 선생님 되그라. 알았제?” “응.” 아이는 자신의 미래가 기대된다. 그 여선생처럼 멋진 선생이 되어 제 뜻을 펼쳐 보이리라.

희연과 근호는 이제 제법 농사꾼 티가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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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내내 물을 주고 가꾸어 온 사과나무에 열매가 잘 맺도록 손질을 하고 시든 나무에 열매가 맺지 않는 것을 걱정할 줄 알고 내리지 않는 비에 나무들이 말라갈까 비를 기다리는 농사꾼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다리던 비가 내리면 그 반가움에 비를 흠뻑 맞고 젖은 옷이 차가운 느낌도 모르고 삽을 메고 돌아다니며 물고랑을 파느라 정신이 없다. 희연도 한 알씩 영그는 과일을 보면서 흠집이 날세라 감싸주고 닦아주면서 자식 키우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해 살핀다. 농사지은 결실을 눈앞에 두고 최선을 다해 지켜내려는 희연의 의지는 밤잠도 설치게 만들었고 단내를 맡고 과수원 주위를 맴도는 새들을 쫓아내느라 팔이 빠질 정도에도 지친 기색 없이 과수원을 돌아다니며 철저하게 방어를 한다. 잘 익은 과일에 군침을 흘리는 것은 비단 새들만이 아니었다. 과수원을 지나 자신들의 생활터전으로 오가는 뒷마을 사람들 중에도 손버릇이 나쁜 이들이 있다 보니 잘 익은 과일을 탐내 손을 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것을 희연 내외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서로의 양심을 믿었고 불화를 일으키기 싫었기에 눈감아 주었고 낙과된 것이나 새들이 쪼아 먹어 상처가 난 과일들을 한 바구니씩 챙겨 마을로 찾아가 나눠 주는 등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옥이 혼자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인 안 계십니까?” 정옥이 밖에서 들리는 낯선 이의 부름에 누구인가 싶어 부엌에서 대문을 빠끔히 내다보았다. 대문 앞에는 낯선 두 남자가 제복을 입고 총을 어깨에 메고 서있는 것이었다. 순간 겁을 먹은 정옥이 밖으로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한다. “주인 안 계시요?” 다시 한 번 묵직한 음성이 조용한 마당을 흔들고 정옥은 마지못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방안에 있던 아이들이 방문을 열고 나온다. “무신 일이십니까?” 침을 한번 삼키고 송아지 같은 눈망울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집에 어른 안 계시나?” “과수원에 일을 가셨는데요?” “언제쯤 오시나?” “저녁 드시러 오실 시간이 다돼 가는데. 무신 일로 부모님을 찾는 깁니까?” 정옥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차근차근 그들이 찾아온 내막을 묻는다. “제보가 들어와서 조사 할 것이 있어 왔으니 가서 부모님 좀 오시라 해라.” “제보요?” “그래.”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방에 있던 아이들이 조르르 달려와 정옥의 뒤에 숨는다. “언니야!” “응! 괜찮다. 현옥아 가서 아버지 오시라 해라.” 현옥이 언니의 등 뒤에서 나오려 하지 않고 숨자 정옥이 동생을 다독이며 과수원으로 내보낸다. 현옥의 뒤를 경현이 뒤쫓으며 대문으로 뛰어나간다. 몇 발을 못가서 희연내외를 발견한 현옥이 냅다 뛰며 아비를 부른다. “아버지! 아버지! 큰일 났어요.” 숨이 차게 뛰어오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 났음을 직감하고 빠른 걸음으로 아이들 곁으로 다가온다. “집에 이상한 사람들이 총을 메고 와서 아버지 찾아요.” “이상한 사람들?” “예.” 희연과 근호는 어리둥절하여 아이들을 앞세우고 집으로 들어온다. 잠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은 희연 내외가 들어서자 그들 곁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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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 집 주인이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뒷마을 지서에서 나온 사람들이요. 이곳에 빨갱이들이 살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조사를 해야 하니 지서까지 같이 동행해줘야겠습니다.” “빨갱이라꼬요? 여는 우리 식구 밖에는 없는데요.” 근호와 희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야 조사해 보면 알 것이고. 두 사람이 부부입니까?” 둘 중 근호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이가 희연을 바라보며 묻는다. 희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다. “예에.” “우선 두 사람 다 지서로 같이 갑시다.” “아니! 우리가 무신 죄를 지었다고 지서로 가자는 깁니까?” 희연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허어! 이 사람들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와 같이 가서 확인 해 보면 될 것 아니요? 잔말 말고 어서 따라 나오시요.” 경찰의 윽박에 주춤거리던 근호가 화가 났는지 되레 큰소리를 친다. “좋십니다. 따라 가지요. 가서 단단히 조사 해 보시요. 우리가 빨갱이라니 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한깁니까? 내 그 사람 얼굴 좀 봐야겠십니다.” 벼르는 심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나선다. 정옥이 뒤따라 나가는 희연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거린다. “괜찮다. 아무 걱정 말고 동생들 잘 보고 있그라. 누가 모함을 한 기다. 알제?” “예. 엄마.” “그래. 금방 올기이까 걱정 말고 있그라.” 아이들의 울음을 뒤로 하고 희연도 근호의 뒤를 따라 지서로 향한다. 얼토당토않은 모함을 뒤집어쓰고 지서까지 끌려온 희연과 근호는 그날 밤을 지서에서 보내야만 했다. 지서 주임인 오순경이라는 이가 두 사람을 앉혀 놓고 질문을 시작한다. “당신들 고향이 어딥니까?” “경주 황남리요.” “경주에서 여는 어떻게 온거요?” “가문이 몰락해서 먹고 살기이 없어 이 농촌에서 농사지어 먹고 살라고 온 깁니다. 빨갱이라니 누가 그런 모함을 했는지 그 사람 대면 좀 시켜 주소.” “정말 아니라는 거요?” “정말입니다. 순경나리! 정 못 믿겠으면 이장님한테 물어 보소. 그 분이 우리를 아실깁니다.” 희연이 간청하듯 오 순경에게 이장을 불러 달라 부탁하였다. 다음날, 희연의 부탁대로 오순경이 마을 이장을 증인으로 불렀다. 영문도 모르고 불려 나온 마을이장은 지서에 앉아있는 희연 내외를 보고는 어찌된 일이냐며 묻는다. “누가 두 사람을 빨갱이라고 고발을 해서 조사하는 중입니다.” 오순경이 이장에게 이르자 이장은 두 사람을 대변하고 나섰다. “이 사람들은 그럴 사람들이 아입니다. 그거는 내가 보장을 합니더.” 처음에 자신도 과수원 사람들을 의심하기는 했으나 몇 달을 지켜보니 사람들이 그리 착할 수 없다며 오히려 희연 내외를 감싸고 나섰다. “보아하니 농사일도 서툴고 해서 옆에서 쪼매씩 조언도 해주면서 이 집 사람들을 지켜봤는데 그런 사람들 같지는 않았습니다. 오순경요! 이 사람들 이장인 내가 책임질 기이 그냥 보내 주이소.” 이장의 증언에 오순경이 애매한 표정을 짓자 이장은 뭔가 미심쩍은 마음이 들어오 순경을 부른다. “오순경요! 혹시 이 사람들을 고발한 사람이 갱이 할매 아인교?” “그건 왜 묻습니까?” “내 일전에 그 할매한테서 과수원 사람들하고 안 좋은 일이 있었다 들었는데 혹시 그래서 모함을 한기이 아인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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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희연이 소동이 일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오순경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이장은 그이가 고발을 하였다고 확신이 들어 한마디 덧붙인다. “그 할매 원래 손버릇이 좀 나빠서 자기 잘못 덮을라꼬 거짓을 고했을 깁니다. 찬찬히 조사해 보이소.” 이장의 조언한대로 오순경은 과수원사람들을 고발한 갱이할매를 지서로 불러 들였다. 며칠 전 제 발로 지서로 찾아와 제보할 때와는 사뭇 다르게 지서를 들어서는 노파는 주눅이 들어있었다. 지금의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는지 주눅 든 티를 감추려고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와 죄 없는 내를 오라 가라 하는 기고?” 큰소리를 치면서도 지서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다 희연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노파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희연의 눈길을 피해버린다. 노파의 행동을 살피던 오순경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을 내며 냉정한 목소리에 힘을 실어 노파를 부른다. “할매요! 거짓말 하믄 감방 갑니다. 대답 잘 하소.” 오순경의 냉정한 목소리에 노파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바닥만 내려다본다. “이 사람들 빨갱이 짓 하는 것 봤습니까?” “…….” “할매! 퍼뜩 대답하소.” 이장이 옆에서 노파를 다그쳤다. 사색이 되어있던 노파가 오순경의 옷자락을 붙들고 사정을 한다. “내가.. 내가 잘못했으요. 한분만 용서해 주소. 이 늙은 기이 노망이 나 그란깁니더. 순경 나리요. 잘못했십니더. 한분만 한분만 봐주소. 야? 순경 나리요.” 노파는 자신의 잘못을 빌며 오 순경에게 매달려 사정을 한다. 모든 것이 자신이 거짓으로 꾸민 얘기이고 순간 눈이 뒤집혀 저지른 행동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시인을 한다. 희연과 근호는 노파의 행동에 울분이 터진 것도 잠시 용서를 비는 노파를 보면서 한숨만 쉬고 있었다. 사건의 내막은 며칠 전 과수원을 오가던 갱이할매와 희연과의 한바탕 소동이 일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과수원 주위를 맴돌며 여러 차례 사과를 훔치던 갱이할매를 처음 희연내외는 그저 눈감아 주고 모르는 척 해주었었다. 그러나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사과를 훔쳐가는 것을 지키고 섰던 희연이 목격하고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훔친 것이 아니라 떨어진 것 주운 것이라며 변명을 해대며 발뺌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서로 옥신각신 싸움 끝에 노파는 결국 앙심을 품고 자신의 분에 못 이겨 지서에 거짓 고발을 하게 된 것이었다. 노파에게 자백을 받아낸 오순경이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노파에게 일침을 가한다. “할매! 앞으로도 계속 도둑질 하면 그때는 정말로 감방 갑니다. 아시겠지요?” “안 합니다. 다시는 도둑질 안하겠십니다. 용서해 주이소. 제발 용서해 주이소.” “용서는 우리한테 빌 기이 아입니다. 할매 거짓말 때문에 이 분들은 억울하게 잡혀 와서 괜한 고생을 안 했십니까? 빌라믄 이분들한테 비소. 그래야 할매가 감방을 안가는 깁니다.” “…….” “이 분들은 할매를 무고죄로 고소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되면 할매는 영락없이 감방을 가야하는 기고요. 인자 아시겠습니까? 할매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요.” 노파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희연과 근호에게 애걸하며 용서를 구했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 만이라고 콩밥을 먹이고 싶었으나 어미보다 나이 많은 노인에게 박절하게 굴 수가 없어서 그만 용서를 해주고 만다. 한 바탕의 소란이 끝나고 노파는 풀이 죽어 이장의 뒤를 따라 지서 문을 나섰다. 오순경은 피곤함에 찌든 희연과 근호를 보며 다정스레 말을 건넨다. “두분 고생 하셨십니다. 이제 집으로 가셔도 됩니다.” “예. 수고하십시요.” 맥이 풀어진 두 사람이 오 순경에게 인사를 건네고 지서 문을 나섰다. 두 사람의 뒤를 쫓아 지서 앞까지 따라 나온 오순경이 두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고생 하셨습니다. 다음에 제가 사과 사러 갈 테니까 많이 좀 챙겨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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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러지요.” 오순경의 웃음을 뒤로하고 지서를 빠져 나온 두 사람은 서둘러 집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하루를 집을 비웠으니 아이들이 걱정되어 부부는 발길을 재촉한다. 금방 올 거라 했던 말과 달리 하루가 지나도록 부모가 돌아오지 않자 정옥은 서서히 걱정이 되었다. 부모가 잡혀 간 사실을 외조모에게 알려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아 초조한 눈빛으로 대문 밖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서 부모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대문을 뛰쳐나가 부모에게로 달려간다. “엄마!” 정옥이 부르는 소리에 어미는 아이가 다가오는 쪽을 바라본다. 정옥이 달려와 어미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글썽인다. “와 인자와요?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어미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 걱정 많이 했제? 괜찮다. 아무 일 없으이 걱정 말그라.” “정말요? 잘 해결 된 거 맞아요?” “그래.” 정옥은 다시한번 어미의 품에 안겨 안도한다. 대문을 들어와 마루에 걸터앉은 근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온다. 난생처음 당한 일에 고향생각이 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유지였던 아버지 덕에 여태껏 평안한 삶을 살았던 자신이 어쩌다 이런 누명을 쓰기까지 했는지 자신이 한심스러워 멀뚱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희연도 마찬가지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참 살다 보니 별일 다 있네. 죄인 아닌 죄인이 돼서 지서도 가보고 세상 참 무섭다.” 한숨을 내쉬며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그날은 그렇게 두 사람이 넋을 놓고 있는 바람에 하루 농사를 접어야했다. 며칠 후 지서주임 오순경이 순경 둘을 대동하고 과수원을 찾아왔다. 일간 들르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인지 아니면 외딴집 사람들의 생활을 확인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오순경은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근호의 가족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두 내외와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있자니 부엌에서 정옥이 다과상을 준비하여 그들 앞에 내어 놓는다. 상을 내려놓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는 정옥을 오순경이 힐끗 쳐다보며 칭찬을 한다. “따님 인물이 참 곱습니다.” “예! 한참 예쁠 때지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과년한 나이지요. 열일곱이랍니다.” 희연이 대신 대답을 한다. 정옥에게 관심을 보이는 오순경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으나 사람 됨됨이를 봐서는 허튼 짓을 할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아 희연은 경계심을 드러내지 않고 묻는 말에 답을 하여 준다. 한참을 앉아 근호내외와 대화를 나누고 그제야 오순경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난번 같은 일이 없도록 저희들이 자주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불편한 일 있으시면 연락 주십시요.” “그래 주면야 우리는 한결 안심이 될기구마. 고맙소. 오순경.” 근호가 오순경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 문밖까지 배웅을 하고 돌아서 들어왔다. 그 이후로 오순경은 다른 사람들을 시켜 자주 과수원을 찾아 주었고 혹시나 있을 불미스러운 일을 대비하여 수시로 순찰을 돌아 주곤 하였다. 물론 그들의 임무는 빨갱이 소탕과 치안유지가 주목적이었고 말 그대로 외딴집은 산으로 이어지는 길에 위치하고 있어 혹시나 하는 염려에 하루 한 번씩은 경찰들이 드나들며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하고 주인이 내어주는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사람이 그리웠던 집에 사람이 드나드니 아이들도 신이 났고 치안을 책임져 주는 덕에 희연가족은 편안히 일을 할 수 있었다. 더불어 마을 주민들의 인심도 조금은 후해져 서로 왕래가 잦아졌고 농사도 거들어 주고 음식도 나눠 먹을 만큼 친분을 쌓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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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도 생기가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외딴집도 사람들로 붐비는 것이 이제는 그들도 점점 농사꾼에 합류를 하고 있었다. 간간히 들리던 오순경이 잠시 짬을 내어 왔다며 희연에게 인사를 하고 별일이 없는지 확인을 한다. “덕분에 요새는 편안합니다. 오순경님께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요.” 희연이 고마운 마음에 사과를 자루에 담아내어 놓는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주시는 거니 잘 먹겠습니다.” 오순경이 고맙다며 인사를 건네고 잠시 뜸을 들이다 희연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이거 쫌 실례되지만...혹시...따님 혼처는 정했습니까?” “아니요! 아직 없습니다.” 희연이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오순경을 바라보니 화색을 띠며 변명을 한다. “그라믄 아주머니 따님 제 동생에게 시집 보내십시요. 제 욕심입니다만 처녀가 너무 아까워서 놓치기 싫어 그럽니다. 조만간에 일이 좀 한가해지면 동생에게 선을 보였으면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갑작스런 제의에 희연은 조금 당혹스럽기는 했으나 오히려 잘 된 일인 것 같아 선뜻 대답을 한다. “오순경님이 그래 말씀을 해주시이 지가 고맙지요. 이래 사람을 알아 봐 주시고.” “그러면 저와 약속 하신 겁니다. 절대 따님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지 마십시요.” “예! 그라지요.” 희연의 약속에 오순경도 마음이 뿌듯하여 사과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가벼운 걸음으로 과수원을 걸어 내려갔다. 오순경과의 약속으로 희연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촌구석에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과년한 딸을 둔 어미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선을 보이고 싶어도 누구 하나 나서 주는 이도 없고 그렇다고 딸을 장바닥에 내다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오순경이 내어 놓은 제안이 그리 달가울 수 없었다. 그의 동생이라 하니 형을 보면 알 수 있듯 믿을 만한 사람이라 의심도 없이 그를 믿고 기약 없는 약속에 기대를 건다. 정옥은 결혼 얘기가 오고 간 사실도 모르고 두 동생을 돌보며 집안일을 착실해 해나가고 있었다. 맏이로서 자신의 처신을 똑 부러지게 하는 딸이 어미에게는 대견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의지가 되었다. 한창어미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어미를 대신해 정옥이 동생들을 챙겨주며 어미 노릇을 하니 아이들도 자연 누이를 따르고 찾게 되었다. 어느덧 가을이 깊어지고 수확이 시작되면서 두 내외는 더 바빠졌다. 과수원뿐만 아니라 온 들판의 누런 벼 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타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희연의 과수원에서 거둬들인 수확작물은 읍내 과일 도매상을 하고 있는 기운아비에게 넘기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근호와 희연을 위해 강씨 부인이 미리 손을 써뒀기에 그나마 일이 수월하게 처리가 되었던 것이다. 희연은 자신의 힘으로 처음 수확한 햇과일들을 챙겨 어린 남매를 데리고 읍내 친정 어미를 찾아간다. 황금 들판에는 농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구부정한 자세로 낫을 들고 벼를 베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시기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논으로 나와 일손 거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새 읍내 친정에 도착한 희연이 아이들과 함께 대문을 들어서자 곡간 앞에 수북이 쌓아 놓은 볏가리들이 늘어서 있었다. 마루에 나와 앉아 있던 강씨 부인이 딸과 아이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반긴다. “바쁜 철에 걸음 할 새가 있더나?” 반가우면서도 걱정을 담아 딸에게 묻는다. “예.” 희연은 들고 온 과일 보따리를 마루에 내려놓으며 대답을 한다. “햇과일 맛보시라고 쫌 가지고 왔십니다.” “그래 수확은 잘 됐더나?” “예. 기운아배 덕에 수월하게 끝이 났네요.” “이문은 좀 남은 기가?” “첫 수확이라 그래 많지는 않고 내년 농사지을 준비는 될 거 갔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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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냐! 첫술에 배부를라 하지 말그라. 사람이 욕심을 내면 한도 끝도 없다. 천천히 하나씩 쌓아가면서 내꺼로 만들어야 진짜 내꺼가 되는 거니까 차근차근 한걸음씩 나가는 기 좋은 기다. 내 말뜻 알제?” “예. 어머니.” 모녀간에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경현이 마당 앞 커다란 감나무 밑에 서서 강씨 부인을 부른다. “할머니! 감 따주세요. 감!” 아이는 감나무 아래서 발을 구르며 할미를 불러댄다. “우리 경현이가 감이 먹고 싶구마. 알았다. 핼미가 감 따주꾸마. 우리 경현이 먹을 감을 따줘야제. 크크크” 딸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강씨가 마루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서서 긴 막대기를 들고 감나무 아래로 다가선다. 잘 익은 감을 골라 꼭지를 건드리자 막대 끝에 감이 딸려 나온다. 긴 막대에 매달린 물렁한 감을 손으로 집어 옷에다 살살 문지르고 강씨는 감을 아이의 손에 건네준다. 제 얼굴 크기만 한 감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경현이 어미가 있는 마루로 가지고 와 어미 앞에 내려놓는다. 강씨 부인은 감나무 밑에 서서 손주에게 줄 감을 몇 개 더 따고 있었다. 희연이 어미의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고 있으니 대문을 들어서는 머슴 복도가 소달구지에 볏단을 한 가득 싣고 들어오며 희연은 보고 인사를 한다. “아씨마님. 오셨십니까?” “잘지냈는가? 가을걷이 하느라 욕보네.” “무신요? 늘 하는 일인데요.” 딴 감을 앞치마자락에 싸서 돌아선 강씨 부인이 머슴을 보고 묻는다. “그래 내일 타작 하는 기가?” “안되겠는데요. 내일 하루 더 나락을 베야 할 깁니더.” “그래?” 조용히 어미의 곁을 지키고 앉아 있던 현옥의 눈빛에 생기가 돌더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라믄 내일 학교 마치고 외갓집으로 와야겠다. 오전반이니까 빨리 뛰어오면 점심 나르는 시간이 될 거고 그때 따라가면 되겠다.’ 현옥이 혼자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얼른 집에 가서 숙제를 마쳐놓아야겠기에 아이는 집으로 가자며 어미를 조르기 시작했다. “가 보그라. 날도 저물라 칸다. 길 어두워지믄 힘들기이 일찌감치 나서그라.” 희연은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인사를 전하고 친정을 나서 과수원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돌아와 부랴부랴 숙제를 마친 현옥이 잠이 들 무렵 어미를 부른다. “엄마! 내 내일 외할머니 집에서 자고 모래 학교 끝나고 올 거다.” “뭐할라꼬 또 외할머니 집에 간다는 기고?” “메뚜기 잡는 숙제 있다. 그래서 내일 점심때 논에 따라 나가 메뚜기 잡을 기다.” “가서 할머니 성가시게 하지 말고 메뚜기 잡아서 얼른 집으로 온나. 알았제?” “예. 알았어요.” 어미의 허락에 신이 난 현옥이 밤잠을 어떻게 청했는지 모르게 벌써 날이 밝았다. 학교 가는 길이 즐겁고 신이나 폴짝거리며 먼 길을 뛰어간다. 오전반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튕기듯 뛰어나온 현옥이 외할머니 집으로 직행했다. “현옥이 우째 또 왔노?” “할머니. 메뚜기 잡는 숙제 있어서 논에 따라 갈라고 왔어요.” “온냐!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메뚜기 많이 잡아 오니라.” “예. 할머니.” 현옥이 신이 나서 목청이 터지게 큰소리를 친다. 이미 집안은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들에 일을 나가는 머슴들과 품을 팔러 온 드난꾼들이 섞여 마당은 왁자지껄했다. 그 틈에 현옥이 끼어들어 그새 막걸리 주전자를 날름 집어 들고는 점심을 내가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나설 준비를 하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복순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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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강씨 부인 집에서 부엌일을 하는 나이 많은 처녀로 남들보다 조금 모자라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까 부지런하고 심성이 착한 탓에 강씨 부인의 눈에 들어 옹얘를 도와 집안일을 돕게 되었다. 드난꾼들의 뒷바라지를 끝내고 빠진 것이 없는지 살펴보느라 뒤늦게 나서는 복순의 뒤를 현옥이 따라 나선다.   “복순아! 내도 같이 가자.” “니가 머한다고 따라 오노? 귀찮게 굴지 말고 집에 가마 있그라.” “싫다. 내도 논에 가서 밥 먹을 기다.” “말 안들을 기가?” “싫다. 내도 갈꺼다.” 고집부리는 현옥이 성가신 듯 입술을 실룩거리는 복순을 향해 현옥은 콧방귀를 뀌고 저만치 멀어진 사람들 뒤를 쫄래쫄래 따라간다. 큰길을 나서서 논둑길을 폴짝거리며 흥이 난 현옥이 혼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도레미파솔라시도.도시라솔파미레도.” 다시 한 번 크게 목청을 돋우고 폴짝거리던 품새도 어느새 고무줄 뛰는 흉내로 바뀌었다. “건넛집 일남이는 가난하여서 하루에 죽 한끼도 어렵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왜 우십니까. 오늘도 시험에서 만점 입니다. 모래는 방학인데 방학을 하면 낮에는 김도 메고 소도 먹이고 밤이면 새끼 꼬고 신발 삼아서 쌀 사고 나무 사고 걱정 마세요.” 사는 것이 팍팍했던 시절. 지은이조차 알지 못하는 노래에는 가난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세월을 빗대어 아이의 삶을 그린 이 노래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현옥은 그저 흥을 돋우어 불러댔다. 고무줄놀이 삼매경에 빠져 폴짝거리던 현옥이 비어있던 주전자 뚜껑이 헐거웠는지 벗겨져 논고랑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아이고 우짜꼬! 주전자 뚜껑이 떨어졌다.” 현옥이 깜짝 놀라며 소리치자 앞서 걷던 복순이 뒤돌아보며 현옥에게 성질을 부린다. “그라니까 내가 따라오지 마라 안 캤나? 귀찮게 따라와서 와 성가시게 구는 기고?” 논두렁에 떨어진 주전자 뚜껑을 집어 들고 논둑으로 나선 현옥이 복순을 노려보며 소리친다. “내는 그냥 들에서 밥 먹고 싶어서 따라온 거다. 복순이 니 자꾸 내 구박하면 할머니한테 다 일러 줄 기다.” “이아구참! 이 쥐방울만한 거를 쥐어박지도 못하고 나무라지도 못하고 내가 참말로 환장하겠다.” 구박 당하는 것이 분했던지 현옥이 복순의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본다. 그 눈초리에 아랑곳 않고 복순은 한 번 더 어깃장을 놓는다. “맴 같아서는 니를 여 그냥 두고 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혼이 날거라 참는다. 퍼뜩 가자. 니가 먼저 앞장서라.” 복순의 앞을 가로질러 현옥이 빈 주전자를 들고 논길을 걸어간다. 여전히 복순에게 혼난 것이 분해 입이 나와서는 복순을 돌아보지 않고 잰 걸음으로 앞서 나간다. 현옥의 주위로 고추잠자리 한 쌍이 맴을 돈다. 햇볕이 정수리로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가을 들녘에 허리 굽은 일꾼들의 낫질이 잠시 멈추고 밥상을 차려놓은 아낙들 곁으로 다가가 앉는다. 현옥이 그들 곁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뒤에 따르던 복순의 얼굴에 정겨운 웃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가을걷이에 생기가 돌았던 들판에는 어느새 알맹이 빠진 짚가리만 드문드문 쌓여있고 하릴없이 서있는 허수아비의 낡은 옷자락을 바람이 흔들고 지나간다. 바람이 차갑게 분다. 스치는 바람이 얼굴에 묻으니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는 것이 겨울이 오고 있음이다. 잎이 떨어져나간 나무는 날씬한 자태를 뽐내며 앙상한 가지에 바람이 스치자 사방으로 흔들거린다. 희연과 근호는 뼈대만 남은 나무를 위해 거름을 묻어주고 가지치기를 해주고 얼지 않도록 볏짚으로 뿌리를 덮어주는 등 내년 농사가 풍작이 되기를 기원하며 월동준비를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과수원 겨울나기를 끝마치고 외딴집도 본격적으로 월동 준비를 시작했다. 근호는 과수목에서 쳐낸 잔가지들을 손질해서 땔감으로 쟁여 놓고도 혹시나 부족할까 싶어 뒷산에 올라 땔감용 나무를 해다 날랐다. 희연과 정옥이 더불어 김장을 담그고 이어서 메주를 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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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을 내어 굳기를 기다렸다 그늘에 잘 마른 메주를 새끼줄로 엮어 잘 띄우기 위해 따듯한 온돌방 한 귀퉁이를 내어준다. 장롱 안에는 농사일에 메여 그동안 하지 못했던 바느질이 희연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오랜 세월 손에 익은 터라 겨우내 입을 옷가지와 덮을 이불을 손질하는 희연의 바느질 솜씨가 제법 그럴싸하다. 떨어진 옷들을 수선해 놓아야 내년에 또 입을 수 있으니 농사일이 없는 겨울동안은 바느질을 해두어야 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동짓날이 되고 희연은 디딜방아에 불린 찹쌀을 찍어 내어 가루를 만들고 팥을 삶아 팥물을 내려 새알을 넣고 걸쭉한 팥죽을 끓여 내어 놓는다. 동짓날이면 으레 해먹던 음식이라는 당연함에도 나이를 먹는다는 이유에서인지 그리 달가운 날은 아니었건만 사람들은 이날을 꼭 지키고자 행사를 치른다. 어른들은 그렇지만 아이들은 오랜만에 먹어보는 새알 띄운 팥죽이 그리 맛있을 수 없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을 한 그릇, 또 한 그릇을 비우고도 성에 차지 않아 한 그릇을 더 청한다. 죽이라는 것이 배를 채우고 나서 조금만 지나면 꺼져 버리니 가마솥 한 가득 쑤어 놓았던 팥죽은 한창 먹성 좋은 아이들 배를 채우느라 절반가까이 줄어든 샘이다. 그렇게 지나는 겨울은 몹시도 추웠으며 한가한 날이 없었다. 한 마지기도 채 안되는 과수원 옆 밭에 벼 추수를 끝내고 심어 놓은 보리밭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보리가 잘 자라도록 풀 뽑기를 해가며 집안일을 챙기는 희연의 손은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설이 지나고 정월 대보름에 복과 건강을 기원하며 오곡밥을 지어먹고 나니 어느덧 얼었던 땅의 기운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그 해 이월, 희연의 외딴집으로 둘째 딸 찬옥이 졸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반겨주는 가족이 있어 좋기는 했으나 한편 졸업을 마친 친구들이 중학교 입학을 위한 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 부러웠던 찬옥은 자신의 처지가 실은 못마땅하였다. 보리밭을 돌아보고 들어서는 아비를 향해 찬옥이 인사를 올리고 고향의 소식을 전하면서 조모의 소식을 아비에게 들려준다. “포항에 가셨던 할머니 다시 경주로 오셨다 하데요. 작은엄마하고 사이가 안 좋아져서 오신 거라던데요.” “찬옥이 니가 할머니 계신 곳에 가봤더나?” 희연은 찬옥이 전해주는 정씨부인의 소식이 궁금해 딸에게 물었다. “아니요. 가보지는 않았고 경주시장에서 쌀장사 하신다고 듣기만 했어요.” “어머님 어지가이 답답하싰던 갑다. 그 연세에 장사를 다 하시고. 세간 살이 모조리 싣고 떠나 시더만 결국 포항에서도 환대도 못 받으신 거구마. 인자는 돌봐줄 사람도 없을 긴데. 어머님 처지도 참.” 말은 그리했으나 희연의 마음에는 시모에 대한 동정도 원망도 그 세월동안 들었던 미운 정마저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남 얘기하듯 시모의 신세가 처량해졌음을 혼잣말로 중얼거릴 뿐이다.   “기세등등했던 박씨 문중 종부들 처지가 참말 한심하게도 됐다.” 시모와 자신을 싸잡아 신세타령을 해본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근호는 입 때기가 무안해져 슬그머니 일어나 보리밭에 나가본다는 핑계를 대고 방을 나선다. ‘쫌 전에 돌아보고 온 보리밭에 그새 무신일 있겄나! 허기사 당신 모친 얘기가 나오니 맴이 편치는 않을 기구마. 할 말도 없을 기고.’ 속으로 희연은 근호의 심중을 헤아려본다. 풀이 죽어 마당으로 나서던 근호가 급히 대문으로 들어서는 처갓집 머슴 복도와 마주친다. “자네가 우짠 일인가?” “저기 노마님께서 편찮으시구만요.” “장모님이?” “예! 아무래도 내려가 보시야 할 것 같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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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밖에서 들리는 희미한 소리에 희연의 귀가 쫑긋 선다. 강씨부인에 대한 얘가가 얼핏 들린 것 같아 얼른 문을 열고 마루로 나온다. “아씨요!” “어머님이 와?” 복도의 대답대신 근호가 희연의 곁으로 다가온다. “장모님께서 편찮으시다는 구마. 임자 준비해서 나오너라. 읍내로 내려 가봐야겠다.” 희연은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눈은 복도에게 가 있었다. “얼마나 편찮으시다는 거고?” “그제부터 고뿔인 줄 알고 약 처방까지 해서 드싰는데도 영 차도가 없으시구만요.” “이사람아! 그라믄 미리 말해 주지 인자서야 오면 우짜노?” 애가 탄 희연이 머슴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낸다. “노마님께서 그냥 있으라 하시서...” 말끝을 흐리는 복도의 얼굴을 보자 자신에 대한 원망이 화살이 되어 엉뚱한 곳으로 날아 간 것임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혼자 계시게 했던 내 잘못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하고 내가 불효를 한 거를...” 희연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방에 들어가 옷을 챙겨 입고 나선다. 어미가 걱정이 되는 아이들이 우르르 따라 나서며 어미의 처사를 기다린다. “정옥아! 니는 동생들하고 집에 있그라. 아버지와 나는 며칠 외가에 머무를 거니 집 잘 보고 있어라. 알았나?” “예. 엄마! 걱정 말고 할머니 잘 보살펴 드리세요.” “오냐. 알았다.” 머슴 복도를 앞세우고 희연과 근호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재빠르게 과수원 길을 내려간다. 희연이 읍내로 내려간 지 몇 날이 지나도 강씨 부인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희연이 정성을 다하여 병 수발을 들고 있었으나 병세는 오히려 더욱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오라비 집으로 전보를 띄우고 한시라도 빨리 오라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누워있는 강씨도 이제나저제나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약에 의존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차도는커녕 몸은 점점 더 약해지고 힘이 빠져 거동조차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강씨는 방안에만 누워 이제나저제나 아들이 올까 방문을 열어 놓고 대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이른 봄이라 바깥바람이 차기에 어미가 걱정스러워 희연이 방문을 닫을라치면 힘없는 몸을 바동거리며 열어 놓으라 소리를 지른다. 그 지르는 소리가 겨우 소리만을 내뱉을 뿐 우렁참은 사라진 지 오래 전이다. 날로 축이 나고 있는 어미의 모습을 지켜보는 희연의 마음은 슬프기 그지없었다.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며 반송장이 되어 누웠던 강씨 부인은 더는 버틸 힘이 없었던지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 얼굴을 끝내 보지 못한 채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적막한 집안에 희연의 식구들과 머슴들 그리고 옹얘와 복순만이 남아 초상집을 지키고 있었다. 내내 기다려도 오라비는 끝내 나타나지 않아 하는 수 없어 희연이 혼자서 쓸쓸하게 어미의 장례를 치른다. 큰딸 정옥이 오열하는 어미가 안쓰러워 옆을 지키고 맏상제가 없으니 사위인 근호가 상주가 되어 처와 함께 빈소에 나란히 앉았다. 철이 없는 아이들은 외조모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저 신기한 구경을 하는 듯 기분이 들떠있다. 조문객 맞을 준비를 하는 집안에는 음식준비가 한창이고 마당에 쳐놓은 차일아래 깔아놓은 멍석 그 위에 올라앉은 상위로 음식들이 날라지고 있는 광경을 현옥이 궁금증을 참고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낮에 보다는 저녁이 되면서 대문을 드나드는 조문객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흥해 읍내에서도 알아주는 인물이었던지 강씨 부인을 애도하는 이들이 꽤나 문상을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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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의식 사흘이 지나 저녁 늦게 한 여인이 곡소리를 내며 대문으로 들어섰다. 정씨 집안 외며느리인 백씨였다. “아이고 아이고 어머님!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며 들어오는 백씨를 맞아 옹얘가 나서서 인사를 올리고 그녀를 쫓아서 뒤를 따른다. 며느리가 빈소에 들어가기 전 옹얘는 백씨의 뒤에 서서 머리에 꽂혀있던 비녀를 뽑으며 감겨있던 머리를 풀어 준다. 빈소가 차려진 안방 마루에 앉아서 오가는 이들의 행동을 눈여겨 지켜보고 있던 현옥이 옹얘의 이상한 행동에 관심을 보이며 궁금증을 못 참고 비녀를 손에 들고 내려오는 옹얘에게 다가가 묻는다. “아지매! 외숙모 비녀는 와 뽑는데요?” 현옥의 물음에 옹얘가 얼버무리며 대답을 한다. “그거는...부모님 돌아가시믄 그래 하는 거라 들었구마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현옥을 뒤로하고 옹얘는 부엌으로 들어가버렸다. 외로이 빈소를 지키고 있는 희연의 곁으로 백씨가 들어서 서럽게 곡을 해댄다. 곡을 하는 올케를 따라 희연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꼬장꼬장하던 어미의 모습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아 희연은 어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두 여인의 울음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문상객들조차 눈물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오라버니는 장사를 지내는 그날까지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강씨 부인의 장례는 그렇게 맏상제가 없이 근호와 두 여인이 상주가 되어 칠일장으로 장사를 지냈다. 강씨 부인의 곁을 지켜주었던 머슴들도 주인이 떠나자 자신의 살길을 찾아 떠나갔다. 이제 강씨 부인이 살았던 그 집에는 김서방 내외와 부인의 손발이 되어 주었던 옹얘와 복순만이 남아서 빈 집을 지키게 되었다. 오라비가 돌아올 때까지 남겨진 재산의 처분을 미루어 두고 올케와 상의하여 임시방편으로 믿을 수 있는 김 서방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희연의 식구들은 다시 과수원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희연이 어미를 잃은 절망감에 빠져 몸져눕고 만다. 어미가 가여웠던 정옥이 희연을 정성스레 간호하며 슬픔을 달래주고 있었다. 이월의 날씨는 삼한사온을 오가며 변덕을 부려댔다. 겨울이라 농사일도 없고 보리농사도 정성을 다 쏟아 붙고 나니 별달리 할 일이 없어진 근호는 그동안 장모의 장례를 치르느라 잊고 지냈던 어미를 떠올렸다. 동생의 집에서 나와 홀로 경주에서 장사를 한다는 말에 근호의 마음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어미를 본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그 간 어미의 소식도 들을 겸 어미를 찾아가기 위해 근호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임자! 내 경주 좀 갔다 오꾸마. 엄마 경주 와 계신다고 하니 이 추운 날씨에 혼자 우째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도 하고 그 간 사정도 들어 볼 겸 갔다 올란다.” “…….” 드러누워 있는 희연은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보리농사 타작 전에는 올 기이 그 동안 임자도 몸이나 좀 추스리고 있그라.” 아내의 대답도 듣지 않고 급한 마음에 근호는 집을 나서 경주로 향한다. 경주 기차역에 도착한 근호는 경주시장을 찾아가 눈을 부릅뜨고 시장 안을 살피고 다녔다. 혹시 어미가 아닐까 쌀을 팔고 있는 노인들을 유심히 살피며 지나치고 있을 때 시장 골목 끝자락에 쌀 한 되박을 종이봉투에 담아주고 있는 정씨 부인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움에 근호는 달려가 등 뒤에 서서 어미를 부른다. “엄마요!”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란 정씨가 뒤돌아보니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큰아들이 눈앞에 서있었다. “애비 맞나? 내 아들 맞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모자 상봉이 믿어지지 않았는지 정씨는 아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물을 글썽이며 아들의 팔을 잡는다. “아이고 애비야! 니가 여를 우째 알고 왔노? 그동안 뭐하고 살았드노? 어디 가서 뭐하고 지내느라 에미한테 소식 한번 안 한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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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보자 묻혀있던 슬픔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다. “엄마! 진정하시이소.” “그래 그래. 니를 보니 너무 반갑어서 안 그러나.” 눈에 눈물을 연신 훔쳐내며 정씨는 마음을 진정시켜본다. “포항에 가싰다는 얘기는 들었으요. 한번 찾아 가볼까도 했는데 내 꼬라지가 옳지 못해서 동생 보기도 그렇고 제수씨 마주치는 것도 민망하고 해서 차마 못 가겠더구마요. 그래 하는 수 없어 포기하고 형편 나아지면 찾아 가자 마음먹고 있었는데... 죄송합니더. 엄마요.” “애비 니가 죄송할 기이 뭐있노? 세월이 그랬으니 우짜겠더노! 내도 이분에 새삼 느꼈다. 내가 이래 사람 보는 눈이 없는가 하고. 생각을 다시 하게 되더구마.” 정씨부인은 한숨을 내쉬다 불뚝 괘씸한 마음이 되살아났던지 다시 열이 올라 아들에게 고자질을 한다. “아이고. 그년! 내, 그년이 그랄 줄은 몰랐다. 지 잇속 챙기는 거는 알았지만 서도 그래 악독할 줄은 몰랐구마. 내가 여시를 갖다 앉히 놓은기라.” 정씨의 표정이 불같이 일어나며 입에 거품을 물고 작은며느리를 욕하기 시작했다. “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하마나 올까 믿고 있던 니는 감감 무소식이제, 이래저래 못마땅한 며느리만 보고 살라니 복장이 터지더구마. 그래 혼자 생각 끝에 내가 의지 할 곳은 작은아들 며느리뿐이다 싶어 정옥에미 배신하고 다시는 오지 않을기라 마음 다져 먹고 모든 재산 다 팔아 돈 한 뭉치 챙기 들고 있는 살림 다 싣고 갔더마는 그년 표정이 영 시원치 않더구마. 내를 쳐다보는 눈빛이 매섭데. 고것 성깔 부리는 기이 제법이더라. 내가 알고 있던 며느리가 아인기라. 돈 줄 때는 아무 말 안하고 있다가 돈을 안내 놓으이까 이 시에미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라. 그래도 우짜노? 오갈 데 없는 내 신세 눈칫밥 먹으면서도 붙어 있을라 캤제. 손주들한테도 할미대접도 못 받으믄서.” 지난날을 생각하니 구박받은 서러움에 눈시울이 붉어져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정씨는 할 말이 많은지 그에 아랑곳 않고 얘기를 이어나간다. “작은 애비는 장사한다고 밖으로만 돌고 내 사정을 얘기해 볼 기회도 안주더라. 밤늦게 들어오이까 얼굴을 한 분 볼 수가 있나 아침에는 밥 한술 뜨자마자 출근한다며 얼굴만 내비치고 부리나케 나가버리고 모자간에 다정하게 앉아서 말 한마디 못 나누어 보았구마. 말로는 마음 놓고 푹 쉬라고 하지 에미가 어디가 불편하지 않은지 음식이나 입에 맞는지 그런 것도 한분 챙겨보지도 않고 지는 마누라한테 잘 해주라 이르기만 했지 집안이 어떤 꼴인지는 도통 관심이 없는 기라. 내 사정도 모르면서 지 마음만 태평이제. 아들이라고 살가운 정이 있기를 하나 마음 붙이고 살 사램이 없으니 오나가나 외롭기는 매한가지 더구마.” 정씨부인은 작은아들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큰아들에게 대신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아들에게 서운했던 마음까지 털어 놓는다. 그렇게 천대를 받았다는 어미의 사정얘기를 듣던 근호의 심정도 어미와 상통했던지 어미의 서러운 마음을 아들이 어루만져준다. “엄마요! 인자부터는 내만 믿고 사소. 내 어디 안가고 엄마 옆에 있을기이 걱정 말고 내랑 같이 사입시다.” “애비 니 참말이가? 참말로 내캉 여서 살수 있겄나? 너거 식구들은 우짜고?” “정옥엄마도 이해 할 깁니다. 그거는 내 알아서 할 기이 걱정마소.” 곁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에 한결 기분이 풀어진 정씨 부인은 자신의 곁을 떠나있던 아들이 어떻게 생활했었는지 궁금해져 묻는다. “그래 애비는 그 동안 어디서 뭐하고 지내느라에 소식도 없었던기고?” “나도 할 기이 없어 장사하는 거나 좀 배워 볼라꼬 떨어진 곳이 전라도인 기라요. 돈 좀 벌어서 엄마 호강시켜 드릴라꼬 시작은 했는데 말이 십어 장사지 아무것도 모르이까 뭐 되는 기이 있어야제요.” 하며 서두를 시작해 자신의 지난 과거 얘기를 어미 앞에다 펼쳐 놓는다. 아들의 고생얘기를 듣는 어미의 심정이 좋을 수만은 없었다. “애비 니도 고생 많이 했구나.” “생전 안 해본 일 해볼라 카이 몸은 고단하고 벌이는 시원찮고 고생 좀 했십니다.” “지금 내 꼴이 딱 그짝이구마.” “그러게 엄마가 와 이런 장사까지 하는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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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만 내 옆에 있었어도 이래 되지는 않았을 기다. 그년 그 망할 년이 돈은 돈대로 다 뺐고 눈치만 주길래 내 참 더럽어서 그래서 내발로 나와 부맀다. 고향도 아이고 말상대도 없고 서러운 맘 달래줄 사람도 없어가 하루 종일 집 지키는 신세가 되고 보이 우짜다 내가 이런 팔자가 되었나 싶은 기이 한심한 생각이 들더구마. 박씨 종택 종부 신세가 이래 될 줄 누가 알았드노? 돈을 전부다 주었이믄 이 집도 못 사고 길거리에 나 앉았을 기다. 아무래도 못미더워서 내가 쪼매 꼬불치 뒀다가 나중에 지가 내한테 잘 하면 줄라 캤는데 아무리 재봐도 싹수가 글러먹은 기이 내만 험한 꼴 보겠다 싶더구마. 그래 내발로 나와 그래도 살던 곳이 낫지 싶어 장사라도 해서 먹고살라꼬 이라고 안있나?” 어미의 끝없는 넋두리를 마주앉은 아들은 하염없이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해후를 한 두 모자는 날이 저무는 것도 잊은 채 끝을 모르고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수원 겨울은 적막함에 끝이 나고 어느새 봄이 왔는지 사과나무에 잎이 파릇파릇 나기 시작했다. 겨울 동안 헛헛했던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르고 일어난 희연이 농사 전에 돌아온다던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제 손으로 나무 손질에 나섰다. 어느새 보리밭도 다 자란 보리들로 푸른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잘 자란 보릿대에 낱알들이 알차게 영글어 촘촘히 박혀있다. 농번기가 다가오자 희연의 손길은 더욱 분주해졌다. 지난해만 해도 친정 머슴들이 짬을 내어 가며 도와주기도 했었건만 이제는 그 도움마저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니 함흥차사가 되어버린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양반이 농사일은 제쳐 놓고 경주서 뭐하니라고 감감 무소식인기고? 할 일이 떡 벌어져 있구만. 일손도 없는데 올 생각도 않고.” 기다리다 애가 탄 희연이 슬슬 부아가 나기 시작한다. 또다시 어미의 치마폭에 싸여 천지 분간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서 마음이 조급해진 희연이 둘째 찬옥을 경주로 다시 보내기로 한다. “찬옥아! 경주 가서 아버지한테 농사지어야 한다고 퍼뜩 내려오시라 하고 당분간 니가 할머니 시중 좀 들고 있그라.” “내가? 와 내가 가야 하는데? 내 여 온지 얼마 됐다고 또 가라카노? 내 안 갈란다. 언니보고 가라 캐라.” “니 언니는 엄마일 도와야 하이까 그라제. 부엌살림이며 집안일 니가 다 할기가?” “…….” 희연은 시무룩해진 아이를 달래고 달래어 다시 경주로 올려 보내었고 경주에 도착한 찬옥이 아비를 대신해 조모와 함께 지내기로 하자 근호는 찬옥에게 제 어미를 부탁하고 다시 과수원으로 내려와 밀렸던 일들을 시작하였다. 보리 수확에 과수원 나무들을 돌보며 모심기 준비까지 두 내외는 힘든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하였다. 작년만큼만 올해도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며 희망을 품고 힘겨운 노동에도 꽤 한번 부리지 않았건만 무심한 하늘은 그 뜻을 저버리는 듯 했다. 가뭄이 시작되어 물이 부족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까지 끌어올려 논두렁에 부어 보지만 갈증에 목이 타있는 모들은 서서히 말라 죽어가 누가 불씨만 당기면 순식간에 타버릴 지경이고 내리쬐는 햇볕에 물기가 말라버린 논바닥은 쩍쩍 갈라져 속을 내보이고 있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농사꾼들의 시름은 깊어 갔다. 바빠야 할 시기에 연장만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마을사람들과 더불어 희연내외도 지쳐 나무그늘에 둘러앉는다. 그들의 얼굴에는 근심들이 가득하였다. “아이구! 올해는 흉년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구마. 비한방울도 구경할 수 없으이 이를 우째야 하노?” “그라게. 올해 농사는 헛것이 되겄구마.” “참말로 뜻대로 되는 기이 없다. 가뜩이나 힘든 살림 더 힘들어 우째 살라카노?” 저마다 하늘을 원망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실의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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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을 정성스레 길러온 농작물들이 말라 비틀어져 버리는 꼴을 두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하니 마음이 착잡하였다. 개천에 넘쳐나던 물도 서서히 말라 바닥을 드러냈고 식수마저도 넉넉지 못한 형편이니 마을사람들의 걱정은 더 커져만 갔다. 그렇게 가문 여름이 농사꾼들의 애간장을 태우며 심술을 부리고 간혹 장마철에 내리는 단비가 반가운 것도 잠시 해갈은 어림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렵사리 뜨거웠던 한여름의 고비를 겨우 넘기고 추수를 앞두고 있는 농부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를 못했다. 심한 가뭄 탓에 수확량은 반으로 줄어들었고 그 절반마저도 실한 것을 찾아보기가 힘이 들 지경이었다. 그나마 제 논을 가지고 수확을 거둬들인 이들은 먹을 것이나마 있었지만 작인들은 소작료를 지불하고 나면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하기에 수확의 기쁨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한숨만 쉬었다. 추수의 보람도 느껴보지 못한 가을걷이가 끝나자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가을운동회 준비로 한창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장기를 내세워 가을운동회준비에 한참 열을 올렸다. 다른 아이들보다 참가 종목이 많았던 현옥은 더욱 신이 나있었다. 현옥이 동생 경현과 방에 앉아 숙제를 하고 있으니 정옥이 사과를 가지고 들어와 동생들에게 내민다. “아나. 사과 먹으면서 해라.” 바닥에 배를 깔고 공책에 숙제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앉아 정옥이 내민 사과를 한입씩 베어 문다. 입 안 가득 사과를 물고 아삭아삭 씹어 단물을 삼키며 현옥이 정옥을 향해 입을 연다. “언니야! 내 내일 학교에서 늦게 온다.” “와?” “내일 무용 연습해야 해서 늦을 기다.” “그래? 벌써 너거 학교 운동회 하는 기가?” “응.” “어떤 무용 연습하는 기고?” “유엔군 노래! 유엔기하고 태극기 두 손으로 흔들면서 이렇게.” 신이 난 현옥이 일어서서 언니 앞에서 그동안 연습했던 율동을 선보인다.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하는 모습이 앙증맞고 귀여웠다. 노래 한 곡을 다 부르고 다시 제자리에 앉은 현옥이 정옥에게 부탁을 한다. “언니야! 내 유엔기하고 태극기 만들어 가야 하는데 언니가 만들어 주면 안되나?” 정옥이 현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는다. “그래. 내가 만들어 주께.” “그라고 또 있다. 북도 만들어가야 한다.” “알았다. 언니가 다 만들어 준다.” “언니야! 내는 세상에서 언니가 제일 좋다.” 현옥이 입이 찢어지게 좋아한다. 자신의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큰 언니가 현옥에게는 수호천사였다. 현옥이 매일 같이 학교와 집을 오가는 그 먼 길을 혼자 운동회 예행연습을 하면서 신이 나서 다닌다. “동서남북 육대주와 오대양에서 뜻 같은 겨레들이 한데 뭉치니 뻗어 진다 빛나는 유엔의 의사 사랑으로 이 땅에 베풀어 주시네 유엔 유엔 유엔 평화의 사도 두 손 높이 흔들며 노래 부르자.” “따따따 따따따 주먹 손으로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우리들은 어린 음악대 동네 안에 제일가지요. 쿵짝짝 쿵짝짝 둥근 차돌로 쿵짝짝 쿵짝짝 북을 칩니다. 구경꾼들 모여 드는데 어른들은 하나 없지요.” 혼자인 뚝방길을 제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현옥은 나름의 재미에 빠져 그 길을 지나고 있었다. 동생의 기대를 져 버리지 않으려 정옥이 집에서 틈틈이 현옥이 부탁한 국기와 박을 만드느라 재미가 쏠쏠했다. 재 나름 솜씨를 부려 창호지에 국기를 그려 넣고 막대에 돌돌 말아 완성시키고 박으로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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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지에 풀 먹인 창호지를 발라 북을 만들고서 막대기는 버드나무 가지를 다듬어 역시 창호지를 둘둘 말아서 북과 채가 잘 마르도록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내어 놓았다. 완벽한 모양은 아니지만 제법 그럴듯한 북을 내려다보며 현옥은 감탄하며 막대기로 북을 두드려 본다. 꾸둑꾸둑 잘 마른 박 바가지를 막대기로 두드리니 청량한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가을걷이를 끝낸 부모들도 아이들의 재롱잔치에 한껏 기대를 하고 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쉼 없이 노동으로 온몸이 녹초가 되었어도 일 년에 한번 아이들의 운동회에 부모들도 신이 난 건 마찬가지다. 청명한 가을하늘위로 조각구름이 걸려있는 기분 좋은 아침이다. “현옥아! 경현아! 학교 늦겠다.” 정옥의 밝은 목소리에 아이들이 방문을 열고 나온다. 경현은 흰 티에 검은 반바지 흰 모자를 쓰고 현옥은 흰 티에 검은 반 주름 몸빼 반바지에 하얀 버선 하얀 머리띠를 하고서는 방에서 나와 정옥 앞에 섰다. “준비 다 됐나?” 정옥이 아이들을 향해 묻자 두 아이가 동시에 신이 난 목소리로 경쾌하게 대답을 한다. “어! 언니야.” “응! 큰누부야.”  “둘 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현옥이는 점심에 언니가 도시락 싸가지고 갈 테이까 경현이 데리고 너거 교실로 온나. 알았제?” “응 알았다. 언니야 맛있는 것 많이 가지고 온나.” “그래 알았다.” 두 아이는 그렇게 신이 나서 대문을 뛰어나가 과수원을 지나쳐 뚝방길을 내리 달린다. 남매가 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정옥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서둘러 학교로 가져갈 음식을 준비하려 부엌으로 들어간다. 한가한 농한기를 틈타 시작 된 가을 운동회를 구경 가는 부모들의 마음 또한 들떠 있었다. 먼지에 땀에 찌든 저고리와 몸빼 바지를 훌훌 벗어던지고 어느 해에 해 입었었는지 알 수 없는 해묵은 한복은 고스란히 농 깊숙이 박혀 있다 이날 주인의 손에 이끌려 세상구경을 하게 된다. 다림질발도 못 받아 보았던지 개켜진 그대로 주름이 잡혀 있는 치마저고리를 아낙은 깨끗하게 차려입고 소쿠리에 음식을 푸짐하게 담아 이고 아이들이 있는 학교로 향한다. 앞집 뒷집 옆집 할 것 없이 학교에 다니는 자식을 둔 어미들은 그렇게 아이들을 위한 먹을거리를 챙겨 머리에 이고 혹은 소달구지에 싣고 이삿짐을 나르듯 학교 안으로 모여든다. 자식들의 운동회에 부모들이 더 열을 올려 먹 거리를 나르기에 바빴다. 정옥도 희연과 함께 음식을 준비해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학교로 서둘러 내려간다. 운동회가 한창인 학교운동장에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 흙먼지가 풀풀 날고 있었다. 영악하고 승부욕 강한 현옥이 반을 대표해 달리기선수로 출전하였다. 이기고 싶은 욕심에 재치를 발휘해 자기보다 키가 큰 선수들 틈에서 몰래 나와 만만하게 보이는 상대를 찾아 그 줄에 선다. 출발 신호와 함께 달려 나가는 현옥의 뛰는 폼이 다부졌다. 미리 골라둔 상대들을 저만치 제쳐 놓고 월등히 앞서 일등으로 결승선에 들어오자 반 아이들이 환호를 하며 현옥을 부둥켜안는다. 현옥이 아이들 틈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경현을 이끌고 자기 반으로 들어온 현옥은 교실 안을 둘러보며 정옥을 찾는다. “현옥아! 여기다. 이리로 온나.” 정옥이 손을 들어 현옥을 부르자 기쁨에 들뜬 현옥이 언니의 품으로 뛰어 든다. “언니야. 내가 달리기 일등 했다. 그래서 공책하고 연필 또 탔다.” “엄마하고 언니도 봤다. 우리 현옥이 달리기 진짜 잘하더라.” 희연이 곁에 서있다 현옥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누이에게 밀려 있던 경현이 머리를 쓰다듬는 어미의 손을 끌어 자신의 머리에 얹는다. 행복한 표정의 아이들을 보며 희연은 오랜만에 기쁨을 느꼈다. 응원의 열기가 뜨거웠었던 가을운동회는 경현과 현옥이 속해 있던 백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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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흙먼지가 뒤범벅이 된 아이들은 끝을 아쉬워하며 하루 종일 뜀박질에 응원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터벅거리는 걸음에 뿌연 흙먼지가 흩날리고 서편으로 지는 해에 붉게 물든 노을 아래로 긴 그림자들이 제 길을 찾아 흩어진다.

이듬해. 6월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한반도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이미 서울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남쪽으로는 아직 전쟁의 기미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한가롭고 적막하기만 했다. 한적한 이곳에서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사람들은 그 실상을 보지 못하였기에 실감이 나지는 않는지 수선을 피우지는 않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과수원을 비롯해 농사일을 하고 있는 희연 내외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전쟁이 난 것에 대하여 수근 거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입으로만 떠드는 나라 상황에 갈피를 못 잡고 묵묵히 자신들의 일만 하고 있는 이들은 피난을 갈 생각조차도 않고 삶의 뿌리를 내린 땅을 마냥 지키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희연이 과수원으로 나서려 하자 조모와 함께 경주에 머물렀던 찬옥이 과수원으로 돌아왔다. “엄마!” 찬옥이 대문을 들어서며 반갑게 어미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찬옥이 왔나?” 어수선한 상황에 안 그래도 딸을 걱정하고 있던 터라 무사히 돌아 온 딸이 반가웠다. “할머니는 우짜고 니 혼자 왔노?” 딸이 돌아 온 것을 보고 근호는 어미가 걱정돼 다짜고짜 딸을 향해 어미의 소식을 묻는다. “할머니가 전쟁 일어났다고 다들 야단이니까 내보고 과수원으로 돌아가라 했어요. 설마 할머니 같이 늙은 사람을 전쟁 통에 잡아 가지는 않을 거니 걱정 할 것 없다고 하시면서. 그래도 내가 있겠다고 했는데 할머니가 내를 거두기 힘들다고 자꾸만 가라고 하셔서 내 혼자 왔어요.” “노인네도 참! 혼자 뭐할라꼬 거 있노? 아아 데리고 핑계 삼아 오믄 될거를.” 지은 죄가 있어 오지는 못하겠지만 이럴 때 핑계대고 식구들 곁으로 오면 좋았을 것을 싶어 아들은 내심 어미의 행동에 불만을 표하며 구시렁거린다. 이미 마음이 떠난 희연은 남편의 태도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돌아 온 딸을 살갑게 안아준다. 찬옥이 돌아 온 이후 근호는 홀로 지내는 어미가 마음에 걸려 하루하루를 불안한 마음에 얼른 과수원 일을 정리해 놓고 찾아 가 봐야겠다며 농사일을 서두른다. 전쟁의 소식을 접한 지도 한 달 남짓이 되어가고 북새통을 피해 서울을 떠난 피난민들이 무리를 지어 남쪽을 향해 무작정 내려오고 있었다. 몰려 내려오는 피난민들을 통해 당시 전쟁의 상황을 전해들은 이들도 그들에게 동요되어 조용했던 마을에도 피난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급해진 사람들은 저마다 돈이 되는 것들을 팔아 움켜쥐고 피난을 갈 준비를 서둘렀다. 적막했던 과수원에도 예외는 없었다. 아직 이른 수확기이기는 했으나 두 내외의 손길은 부산스러웠다. 혹시나 일이 생기더라도 돈만 있으면 어찌되었든 살아 갈수 있을 거라 생각하여 부지런히 돈을 모으려 일찍 영근 과실들을 내다 팔아 돈을 쥐고 주머니에 챙겨 넣기가 바빴다. 칠월의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어느 날 한 무리의 피난민들이 인적이 드문 과수원 외딴집으로 찾아 들어왔다. 별안간 들이 닥치는 이들을 보고 희연의 식구들은 놀라 입이 벌어졌다. 평생 물 구경 한번 해본 적 없는 듯한 몰골로 기진맥진하여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기가 찼고 생판 모르는 이들이 들이 닥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넋이 나간 채 그들을 바라만보고 있었다. 잠시 생각이 멈춰 있던 희연이 여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아주머이. 얼라가 배가 고파 그라니 썩어 버리는 사과라도 좋으이 먹을 것 좀 적선 해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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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징거리며 우는 아이를 안은 여인이 희연을 향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청을 한다. 희연의 눈에 어미의 품에 안겨 우는 아이가 들어온다. 쳐다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자른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던지 앞머리가 길어서 눈을 찌르고 얼굴에는 땀과 먼지가 뒤엉켜 씻지도 못했는지 땟국이 줄줄 흐리고 있었다. 배고픔에 울고 있는 아이가 안쓰러워 희연은 나무에서 방금 따온 사과를 우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 여인을 향해 내민다. “고맙습니다. 참말 고맙습니다.” 여인과 아이를 합해 여남은 명쯤 되어 보이는 난민들은 이미 지쳐 앉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버린다.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이들을 보자 희연의 마음이 짠해져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 두었던 낙과되거나 새가 먹다 버린 과일을 들고 나와 그들에게 내민다. “성하지는 않지만 우선 이거라도 요기 하시요.” 움직일 힘도 없던 이들이 몸을 틀어 일으켜 바구니 앞에 옹기종기 모여든다. 수북이 쌓여 있던 과일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배고픔과 갈증을 동시에 해결하게 되어 과일 맛보다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뱃속을 채우는 중이다. “어디서 피난을 오는 깁니까?” 배고픈 이들의 허기를 과일로 조금이나마 달래는 동안 궁금함을 잠시 참고 있다 근호가 말을 건네 본다. “강원도서 피난 오는 거요. 한 달을 꼬박 걸어서 여까지 온 겁니다. 그라니 사람 꼴이 어디 제대로 이겄소?  목숨 붙어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요.” “그라믄 어디로 피난 가는 길입니까?” “어디로 간다는 곳도 없소. 그냥 쫓겨서 남으로 내려가는 중이니까요. 그래도 다행히 여기는 전쟁이 시작 되지는 않았나 보네요.” “예. 아직은 조용하긴 한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이니 불안 하기는 매한가집니다.” “그라믄 아주버이. 우리 여서 좀 쉬게 해 주구려. 언제 터질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좀 지내게 해 주면 고맙겠으예” “우리가 아무런 보탬도 못되고 해 드릴 거도 없는데".” “그냥 잠이라도 좀 편히 잘 수 있으면 되는 기요. 몸이 지쳐서 움직이지 못하니 그럽니다.” “알겠십니다. 그라믄 여서 좀 쉬었다 가이소. 우리도 농사 마무리 지어가는 중이니 함께 떠나도록 합시다.” “아주버이 참말로 고맙소.”   과수원 식구들은 그렇게 피난민들과 뜻하지 않게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난민들의 입에서 전쟁의 얘기를 조금이나마 들을 수가 있었다. “말마요. 새벽에 잠자다 총소리가 하도 시끄럽게 나기에 우리는 어디서 또 빨갱이 잡았나 했지요. 그란데 얼마 안 있어 전쟁이 났다 캄서 빨리 피난 가라는 거요. 식겁했지요. 여름이라 다들 마당에다 평상 피고 내 식구 남의 식구 할 것 없이 엉켜 잠을 자다가 그 깜깜한 밤에 생난리를 부리고 손에 잡히는 데로 짐을 싸고 자는 사람 깨워서 겨우 목숨만 부재하고 뛰어 나왔지요. 그래 날이 좀 밝아지니 사방이 분간이 되고 어째 어째 사램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보니 급하게 빠져 나오느라 옷가지도 못 챙기고 맨몸으로 나온 사램도 있고 아아를 업고 나온다는게 베개를 등에 업고 온 사램도 있고 자기 아아라고 데리고 나온거이 남의 집 아아 손목 끌고 왔으니 그 얼마나 억장이 무너질 일이요. 그래도 피난 나온 사람들은 목숨 부지나 했지 자다가 참변 당한 이들도 수두룩 하구만요.” 참혹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치를 떤다. 조용했던 마을에 피난민들이 들어서며 마을은 온통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팔월 초순. 드디어 포항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른 새벽 근호는 경주에 있는 어미가 걱정돼 식구들 몰래 경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과수원을 조용히 빠져 나와 한참을 걸어 읍내에 도착해 경주로 가는 길목을 들어서자 길을 막아선 인민군들의 모습이 근호의 눈앞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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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야 할 길을 통과 할 수 없게 되자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조금 돌아가는 곳을 선택한 근호가 다른 길로 방향을 틀어 얼마를 걸어가고 있자니 저 만치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걷히고 날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사람들 무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서니 그들은 다름 아닌 과수원에 머물렀었던 피난민들과 뒷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 속에 희연과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맞은편에 서 있는 근호를 보며 희연이 놀라 묻는다. “정옥아버지! 언제 여 나왔는교? 아무리 찾아도 사람이 없어 걱정하고 있었구마. 어디 간다고 말 좀 해주고 가지. 길이 엇갈맀으믄 만나지도 못할 뿐 했네요.” “길 좀 보고 올라고 먼저 나섰다. 만났으이 마 됐다. 이 길로는 못 간다. 벌써 빨갱이들이 진을 치고 있어 빠져나갈 수가 없다. 다른 길로 돌아서 가야겠다.” 근호가 둘러치는 말에 모두가 두려운 표정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자 지리에 밝은 몇몇 사람들이 앞장을 서 길을 안내하고 그 뒤를 나머지 사람들이 따랐다. 목적지도 없이 더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 사람들은 비탈진 언덕을 오르고 능선을 따라 내려와 외나무다리가 놓인 개천을 지난다. 무리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날 수 없는 길이라 몇몇 사람은 다리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물속을 맨발로 걸어 들어가 개천을 건너온다. 개천을 빠져 나온 무리가 다시 논둑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자 어디선가 '탕'하고 총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총소리에 놀라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연이어 따발총 소리가 크게 울리며 그들의 앞을 인민군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가로 막고 선다. “거기 서기요. 동무들!” 총대를 겨누고 있는 그들에게 마을 사람들은 잔뜩 겁에 질려 벌벌 떨며 그 자리에 섰다. 앞에 선 인민군 중에 계급이 높아 보이는 사람이 앞으로 나와 무리에게로 다가오며 소리를 친다. “동무들 피난 못 가오.” 사내는 그 말을 던져 놓고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우고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근호는 희연과 아이들을 자신의 뒤로 조심스럽게 물리며 바닥에 널려 있는 흙을 한 줌 쥐어 들고 손과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앞 사람들의 검열이 끝나고 근호의 차례가 되자 근호는 사내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절을 한다. “아이구! 우리 식솔들은 새벽일 하다 따라 나왔십니다.” 사내는 그 말을 들은 채도 않고 의심의 눈초리로 근호를 바라보며 위아래로 훑어 내린다. 이미 얼굴과 손등에 흙을 묻히고 있던 근호가 보란 듯이 손을 내밀자 사내는 두말 않고 근호를 지나친다. 근호의 옆에 선 희연이 겁에 질린 얼굴로 사내의 시선을 피하자 사내가 근호를 향해 부부냐고 묻고는 그렇다는 대답에 별 꼬투리를 잡지 않고 희연을 지나쳐갔다. 희연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사이 사내는 정옥의 곁으로 다가가 앞을 가로막으며 섰다. “동무! 손을 내밀어 보기요.” 순간 당황한 정옥이 옆에 서있는 현옥의 손을 꼭 잡은 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잡은 손으로 두려움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 현옥이 정옥과 마찬가지로 주눅이 들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러나 말똥거리는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하여 겁에 질린 표정을 하면서도 앞에 서서 호령하는 이를 빤히 올려다본다. ‘빨갱이라 해서 내는 사람 눈동자가 빨갛고 손도 빨갛고 코도 빨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이다. 그라믄 와 사람들이 자꾸 빨갱이라 카는데?’ 어린 마음의 현옥이 마음속으로 자문자답을 하며 이해를 할 수 없는 표정이 되어 수수께끼를 풀어내려 필사적으로 사내의 전신을 훑으며 이유를 찾고 있다 잠시 무엇을 깨달은 듯 머리를 숙인다. ‘아! 알았다. 사람이 빨간 것이 아니라 옷 위에 빨간 줄을 보고 사람들이 빨갱이라 하는구나.’ 현옥이 자문자답을 하고 있는 사이 정옥 앞에 서있는 사내의 얼굴이 험악해져서 현옥의 손을 꼬옥 쥔 채 떨고 있는 정옥을 다그친다. “여성동무 몇 살 인기야?” 정옥은 잔뜩 겁을 먹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만 깜박거리며 눈치를 보다 무겁게 입을 땐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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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앞에 서있던 근호가 굽실거리며 정옥 곁으로 다가오더니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주 선 사내를 향해 잇몸을 드러내며 웃어 보인다. “내 딸이구마요. 아아가 좀 성치 못 하구마요.” 근호가 얼버무리며 상황을 무마시켜 넘기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 곳을 빠져 나온다. 긴 행렬의 검열을 끝내고 나서 다시 한 번 사내가 무리를 향해 소리 쳤다. “말했듯이 동무들은 이곳을 나갈 수 가 없으니 날래 돌아가기요.”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경주에 가지 못하고 붙들려 마음이 조급해진 근호가 앞으로 나와 조금 전의 사내에게 다시 다가간다. “저...대장님! 내 부탁이 있습니다. 우리 식구 피난 가지 않고 여 있을 테니 내가 경주 가서 노모만 좀 모시고 올 수 있게 해주면 안되겠습니까?” 일순간 사내의 눈동자가 근호를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친다. “말하지 않았소. 여기를 나 갈 수 없다고.” 근호가 낙담한 표정으로 사내를 응시하자 사내의 어투가 조금 누그러져 다음 말을 이었다. “기다리기요 동무! 조금만 기다리면 곧 우리 인민군 세상이 될 거요. 그때는 동무가 원하는 거 다 할 수 있으니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리기요. 우리 인민군이 동무들을 해방시켜 줄거니 그날이 오도록 동무들은 날래 돌아가서 농사나 짓고 있기요.”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가 마른하늘에 울려 퍼진다. 계획했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마지못해 희연의 가족을 비롯해 마을 주민들과 피난민들은 피난을 가지 못한 채 다시 과수원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저마다 자신의 집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과수원으로 피난을 내려왔던 이들은 오갈 곳이 없어 그대로 과수원으로 돌아와 희연의 가족들과 함께 눌러 살게 되었다. 그렇게 과수원은 피난민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그들도 나름대로 살아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외딴집은 그대로 희연의 가족이 거주를 하기로 하고 난민들은 과수원 한 귀퉁이에 가마니를 깔고 우선 거처 할 곳을 마련하였다. 함께 피난을 갔다 되돌아 온 후 이곳을 지나던 또 다른 피난민들이 찾아 들며 과수원은 어느새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한 마을로 변해가고 있었다. 전쟁은 쉽게 끝이 날 것 같지 않았고 인민군의 공격은 날로 거세어지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이 곳 마을 주민 모두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할 것 같은 분위기가 엄습해 오면서 마을 사람들은 힘을 합쳐 방공호를 만들기로 하였다. 어차피 피난 가지 못한 처지에 전쟁이 끝이 날 때까지 살아 있으려면 방공호에서 생활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고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비워 두어야 인민군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겠냐는 이장의 의견에 따라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숨어 들 곳을 마련하기에 바빴다. 근호의 식구들도 서둘러 과수원 언덕길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덮어 입구를 위장해 방공호를 만들었다. 그 방공호에는 근호와 정옥이 숨어 살게 되었다. 전쟁 통에 젊은 남자는 모두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처녀들은 여성위원으로 끌려가고 있어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밤 낯없이 근호와 정옥은 그곳에 갇혀 사는 신세가 되었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현옥은 전쟁의 무서움보다도 전쟁으로 인해 그 재미있는 학교를 다닐 수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쉬워 매일 매일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방공호에 갇혀 지내는 것이 답답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현옥이 아비의 눈을 피해 방공호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가 안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잠시 후 앞마당에 요란하게 울리는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들이닥치고 웅성거리며 짐을 풀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현옥이 놀라 살그머니 일어나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두 손에 들고 뛰어나와 곧장 방공호로 들어가서 거친 숨을 몰아쉰다. 아이의 행동이 이상해 근호가 현옥을 보며 묻는다. “현옥아! 니 와그라노?” “아버지! 집에...우리 집에 인민군 빨갱이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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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꼬? 인민군이 우리집에 왔다고?” “예.” “큰일이다. 이 일을 우짜노? 너거...너거 엄마는?” “엄마는 못 봤는데요.” “찬옥아! 니가 나가서 엄마 찾아보고 오너라.” “예. 아버지.” 찬옥이 현옥의 손을 잡고 방공호를 빠져나와 과수원을 돌아가다 상추 밭에서 나오는 어미를 발견하고 뛰어가 어미에게 이른다. “엄마. 큰일났다.” “와 그러는데?” “우리 집 마당에 인민군들이 쳐들어 왔다.” “뭣이?” 찬옥이 전하는 얘기를 듣고 놀란 희연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그 자리에 서서 허둥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인민군 한 사람이 희연을 발견하고는 부른다. “어마이 동무! 이 집에 사는 사람 맞기요?” 잔뜩 겁에 질린 희연이 겨우 목소리를 내어 대답을 한다. “예에...그러합니다.” “우리는 북한 인민군이요. 이거로 밥을 지어 주기요.” 사내가 긴 자루를 던지 듯 건네준다. “이 안에 쌀이 있으니 그거 개지고 밥을 지어 주기요.”“우리 집에는 땔감도 없고 반찬거리도 없는데…….” 어떻게든 이곳에서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희연은 무슨 핑계라도 대야만 했다. 이렇게라도 핑계를 대어야 그들이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짧은 소견으로 버텨본다. 그러나 상대가 그리 호락호락한 이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터 오히려 희연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위협을 가하는 쪽은 그쪽이었다. “이 에미나이. 하라면 하지 어디서 말대꾸를 합메?” 총부리에 겁을 먹은 희연이 엉거주춤 한 걸음을 물러난다. 그 사이 방공호에 숨어있던 근호가 처와 아이들이 걱정되어 방공호에서 나와 집 쪽으로 살며시 다가온다. 대문 앞에 서서 몰래 마당을 지켜보니 희연의 가슴팍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인민군을 보고는 놀라 달려 들어온다. “임자. 무신일이고?” 총을 겨누었던 사내가 불쑥 나타난 근호를 향해 다시 총부리를 겨눈다. “쏘지마이소. 내가 이 사람 남편이오. 무신일 입니까?” 근호가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조심스럽게 희연의 곁으로 다가간다. “이 에미나이. 죽여 버리가서.” “아이고 와그라십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무신 죄를 지었다고 이라십니까? 시키는 대로 할거니 제발 목심만은 살려 주이소.” “허! 아비이 동무 하고는 말이 통하갔군. 보기요, 동무! 우리가 쌀을 개지고 왔으니 날래 밥을 지어 주기요.” “아..알겠십니다. 밥은 지어 드리는데 이집에는 이래 많은 사램들이 먹을 반찬이 없으요. 그라고 그릇도 부족하고. 그라니 그릇하고 반찬을 좀 구해다 주시요.” “알았소. 그거는 우리가 구하갔으니 아바이 동무는 날래 밥을 지어 주기요.” “예.예. 그래하겄십니다.” 두 사람에게 겨누었던 총부리를 거두고 몇 사람이 마당을 나서서 어디론가 가버린다. 근호가 자루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남편의 뒤를 따라 들어간 희연이 남편을 걱정하며 묻는다. “이핀은 우짤라고 그라요? 이 사램들 도와주었다고 나중에 우리를 빨갱이로 몰면 우짤 깁니꺼?” “그라믄 여서 우리식구 개죽음 당해야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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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 난 목소리로 희연을 향해 쏘아붙인다. “어떻게 해도 우리는 파리 목숨인기라. 이래저래 죽기는 매한가지구마. 전쟁이라는 기이 지들 살자고 힘없는 백성들 죽이는 기다. 미리 피난 못간 내 탓 인기라. 살라면 어쩔 수 없다. 이놈들 해달라는 대로 우선 해주자. 설마 밥 지어 주었다고 총살이야 시키겄나?” 마지못해 희연이 그들을 위한 밥을 짓고 있을 무렵 나갔던 이들이 그릇과 반찬을 들고 들어와 희연 앞에 내던지듯 풀어 놓는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그릇이 모두 나무그릇들이었다. 얼마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릇과 반찬을 약탈해 온 곳이 다름 아닌 마을 뒷산에 있는 절이었다. 절에 올라가 난동을 부리며 불상을 다 깨뜨리고 총질을 하여 가지고 내려온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희연의 식구들은 피난을 가지 못한 채 인민군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 세상이 올 것이니 걱정 말고 살고 있다 보면 반듯이 기쁜 날이 올 것이라며 마을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교화 작업에 열을 올렸다. 온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좀 사는 기와집에 들어가 곡식이며 식량을 모조리 들고 나오는가하면 마을의 어린 아이들을 모아놓고 인민군 노래를 부르게 하는 등 기세가 등등해져 온 마을을 자신들 세상인양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이들을 모아 놓고 교화를 시키고 있을 무렵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그들이 촉을 날카롭게 세우고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욕을 퍼붓는다. “종간나 새끼들 죽고 잡구만.” 모여 있던 아이들은 비행기 소리에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숨어든다. 찬옥과 현옥, 경현이 그들 틈에 있다 같이 나와서 집으로 이어진 길을 향해 달리기를 시작한다, 찬옥이 경현의 손을 잡고 저만치 뛰어갈 때쯤 현옥은 언니의 뒤를 쫓다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현옥아 얼른 온나.” “알았다, 언니야. 먼저 가라.” 현옥보다 더 겁이 많던 찬옥이 경현을 끌다시피 하며 집으로 뛰어 들어간다. 제 자리에 서있던 현옥은 학교 교과서에서만 보아왔던 비행기를 실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왔음이 반가워 무서움도 잊어버리고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를 유심히 바라본다. 눈 위에 펼쳐진 하늘에서 날고 있는 비행기를 보며 현옥은 감탄을 한다. “우와! 신기하다. 그림보다 훨씬 작은 비행기가 날고 있네.” 비행기에서 눈을 못 때고 바라보고 있으니 작은 비행기 한 대가 우웅 소리를 내며 주위를 몇 바퀴 돌고는 높게 올라가더니 저 멀리로 사라져 버린다. 좀 더 재미난 구경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현옥이 실망감을 나타내며 사라져 버린 비행기를 쫓아 하늘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 “아! 아깝다. 쪼매 더 가깝게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방공호로 돌아 온 현옥은 내내 비행기 생각에 얼굴이 시무룩해진다. 잠시 후 다시 하늘에서 우웅하며 비행기 소리가 들리자 현옥이 화색을 띠고 밖으로 뛰어나온다. 조금 전에 보았던 비행기가 이제는 두 대가 되어 짝을 이뤄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까처럼 두 대가 상공을 몇 바퀴 돌면서 앞뒤로 날아다니다 다시 굉음을 내고 돌아 가버리기에 현옥은 제대로 구경을 하지 못한 것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에이 참!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또 그냥 가버리나 말이다.” 그렇게 심통이 나서 방공호로 맥없이 들어오는 현옥을 바라보며 근호가 한마디 한다. “현옥이 니 자꾸만 들락날락하면 빨갱이가 우리가 여 있는 거 알고 쳐들어 와서 아버지와 큰언니 잡아 간다. 그라니 그만 들락거리고 가만히 앉아 있어라. 알았제?” “예.” 대답은 그리 했지만 현옥은 어둡고 갑갑한 방공호 안이 싫어 아비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를 보다 살금살금 문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 버린다. 아비 몰래 밖으로 빠져 나온 현옥의 얼굴에 천진난만한 미소가 번지고 단숨에 달음박질하여 집으로 들어가 빈방에 엎드려 책을 펴 놓고 비행기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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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호에 갇혀 지내며 틈을 보아 경주로 가려던 근호는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매번 헛걸음만 하고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이 세상이 바로 올 날이 꼭 있을기다. 이북 놈들 세상은 안 될 꺼구마. 암만, 안 되는 말이제.” 혼잣말을 내뱉으며 힘을 내다가도 금세 풀이 죽어 체념을 하곤 했다. 그렇게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바른 세상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어두운 지하 방공호에 갇혀 모든 것을 꾹 참고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들은 이제 날아오는 비행기를 봐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리려 쳐다보며 욕지거리를 하며 총부리를 겨누는 등 행동들이 점점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마을은 인민군들의 세상이 되었고 그들이 설치고 다니면서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해 방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방바닥으로 집어 던지고 벽에는 김일성 사진을 떡 하니 걸어 놓고 바른 자세를 취해 경례를 하고는 사진을 건드리지 못하게 주민들에게 엄포를 놓고는 저녁마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김일성 노래를 가르쳐 주며 교화 작업에 더욱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무심코 배운 노래를 흥얼거리다 부모에게 욕을 먹거나 손찌검을 당하는 아이들은 뭣 때문에 혼이 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부모가 무서워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다 깜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들의 사상에 물이 들까 염려되어 저녁마다 아이들이 모이는 것을 반대하며 못 가게 막는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눈 하나 깜짝 하겠는가 오히려 교화 작업에 더 열을 올리며 간밤에 나오지 않은 아이의 집을 찾아가 부모를 닦달을 해댄다. 먹을 것이 없어 하루에 죽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죽은 목숨처럼 늘어져 누워 있는 이들을 찾아가 윽박을 지르고 위협을 가하면서까지 교화 작업은 계속 되었다. 그 몸살에 사람들은 배겨 나지 못하고 거스를 기력조차 딸려 마지못해 그들의 부름에 달려 나가는 꼴이 되고 만다.

길어지는 전쟁에 희연의 가족도 먹을 것이 부족하여 곡식을 사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과수원 과일을 모조리 팔아 돈으로 챙기면서부터 사정이 변해 갔던 것이다. 피난길에 오르면 몸이 가벼워야 움직일 수 있다 싶어 돈이 되는 것은 무조건 팔아 그냥 돈으로만 쥐었던 것이고 그 돈으로 어디든 가면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싶어 열심히 모아 왔던 것인데 전쟁에서 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였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전쟁 통에서 곡식이 없으면 죽은 목숨, 사람들은 곡식을 쌓아 놓고도 내어 놓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돈을 두 배 세배 준다고 하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식량을 제여 두고 풀지를 않았던 것이다. 식량이 동이 나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희연이 뒷마을 사람들을 만나 곡식을 사려고 애를 써보지만 이 난리 통에 인심은 더 야박해지기만 했다. 몇 번을 거절과 수모들 당해가며 사정을 해 보았으나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우째 인심이 이래 야박할꼬? 다 아는 처지에 이래 사정을 하는 데도... 참말로 사람인심이 무섭구마.’ 거절당해 돌아오면서 희연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돈이 아이라 곡식을 챙겨 뒀어야 하는 긴데... 내가 어리석었구마.’ 그래도 어떻게든 곡식을 구해 보려고 다시 뒷마을을 돌아다니며 사정을 해본다. 그러다 지나가던 인민군에게 무슨 내통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오해를 받아 추궁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목숨을 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다음날 다시 마을을 찾아가 친정어미가 돌아가실 때 남겨 주었던 금붙이를 들고 가서 사정을 해본다. “성님요! 그라지 말고 이거 금붙입니다. 내 가진 것 다 줄기이 제발 보리쌀 좀 파시요.” 몇 배의 돈에도 끄떡없던 이는 누런 금붙이를 보더니 마음이 조금 동요하는 듯하였다. 희연은 있는 것을 모조리 풀어놓으며 다시 한 번 사정을 해본다. 결국 실랑이를 벌이면서 그쪽에서 마지못해 내어 놓은 것이 찧어 놓은 보리쌀이 아닌 도정이 되지 않은 보리를 가져가라며 배짱을 내민다. “아이구 성님! 이 난리 통에 어데 가서 보리를 찍겠습니까? 그라지 말고 찧어 놓은 보리쌀 좀 주이소.” “이 사람아! 이 난리 통에 이거라도 구할 수 있는 것만도 천행 이구마. 싫으면 그만두게나.” 여인은 튕기며 내밀었던 보리가마니를 다시 부둥켜안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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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이 잠시 주춤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가진 금붙이를 다주고 가마니를 받아 이고 집으로 온다. 얼마 남지 않은 쌀에다 보리쌀이라도 섞어 먹어야 오래 버틸 수 가 있으니 도정이 안 된 보리를 매일같이 절구에 넣고 찧어 대고 있는 희연의 어깨가 힘에 겨웠다. 보다 못한 정옥이 힘든 어미의 일을 도와주려 방공호를 빠져나와 어미의 곁에 섰다. “엄마!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아이구 야야! 니 이래 나와 돌아다니다 인민군 눈에 띄면 우짤라고 그라노? 퍼뜩 들가라.” “그렇지만 엄마 혼자 힘들어서 어쩔라고 그래요?” “내 걱정 말고 니나 잘 숨어있거라. 들키지 않게.” “알았으니 조그만 거들다 들어갈게요.” “아이구. 이 전쟁이 언제 끝이 날란가?” 어미의 애타는 심정을 알고 있는 듯 정옥이 아무 말 없이 보리 찧는 일을 거든다. 딸을 바라보는 희연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곡강면 하늘 위에 매일같이 두 대의 비행기가 우웅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늘 높이 떠서 마을 주위를 몇 바퀴 돌다 사라지고는 그 뒤를 이어서 또 다른 정찰기 두 대가 이어 날아와서 앞서 왔던 비행기들과 마찬가지로 주위를 몇 바퀴 돌다 다시 날아가고 그러고 나면 또 뒤를 이어 이제는 아주 빠른 비행기가 쌩쌩 소리를 내며 날아온다. 마을 어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정찰을 하고 돌아가는 비행기를 보며 걱정을 하였다. “정찰기가 또 날아 왔나? 요즘 들어서는 제트기까지 뜨는 구마. 뭐 그래 정찰 할기이 있다고.”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기 않구마요.” “이라다가 무신 일 터질까 조마조마 하데이. 백성들은 우째 살라고 이 나라가 이 모양 이까?” 서로 싸움을 하는 군인들보다 백성들이 먼저 죽어 날 판이라며 마을사람들 입에서는 원망이 묻어나고 있었다. 수시로 하늘위로 떠오르는 정찰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 지고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인민군들도 정찰기에 신경이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지시를 내린다. “동무들! 앞으로 비행기가 날아오면 모두들 흩어져서 숨어 버리기요. 밖에는 아무도 나오지 말고 이 마을은 개미새끼 한 마리보이지 않도록 하기요. 알았슴메?” 그 말대로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려 아예 집밖으로 나올 생각도 않고 방안이나 방공호에 숨어서 지내며 마을에는 인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그나마 사람의 정이라는 것이 남아 있던 마을에 이제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본능만이 남아 이웃을 배척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만을 챙기며 목숨 부지를 하고 있었다. 비행기 정찰은 점점 더 잦아졌다. 매일 같이 날아 와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사라지는 비행기를 사과나무 아래서 총을 겨누고 노리는 자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쪼악손 이라고 불렀다. 그는 인민군 장교로 전쟁 중에 그랬던지 오른손 손가락들이 휘어지고 구부러져 붙어버린 손을 가지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그를 쪼악손으로 부르게 되었다. 성격도 그네들 중에서 가장 난폭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일에 간섭을 하는 등 횡포가 심해 마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쪼악손은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어디에 있다가도 쫓아 나와서는 사과나무 아래에 위치를 잡고 비행기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불안 불안한 마을 사람들은 제발 총을 쏘지 말라며 그에게 애원을 하고 그는 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며 사람들을 안심시키고는 한참이 지나도 사과나무아래에서 나오지 않고 똑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하며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사과나무 아래 숨은 쪼악손이 나는 비행기를 표적으로 삼아 총부리를 겨누어 하늘을 노려보며 방향을 바꾸어가며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돌다가 비행기가 조금 나지막이 떠서 주위를 몇 바퀴 돌고 있을 때 비행기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습격에 비행기 한대가 날개에 총을 맞고 불이 번쩍 거리며 연기를 내면서 하늘로 솟구친다. 뒤를 이어 따르던 나머지 한대가 총 맞은 비행기의 뒤를 따라 쏜살같이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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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해진 마을 사람들은 이러다가 우리 모두 죽을 일만 남았다며 걱정을 하며 집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방안에 틀어 박혀 바깥동정만 살폈다. 얼마 후 여러 대의 비행기가 쌔앵 소리를 내며 기러기 편대 형으로 날아와서는 마을을 에워싸고 공중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몇 바퀴를 돌기 시작했다. 굉음으로 울리는 비행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보고는 겁에 질렸다. 어디선가 전쟁이다 소리가 터지고 마을에 숨어 지내던 인민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동무들 들어가기요. 날래 집으로 들어가기요.” 다급해진 인민군은 고함을 치며 사람들을 피신시키려 하지만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상공에 퍼져있는 비행편대를 보고는 놀란 나머지 어떻게 할 지 모르고 그 자리에 서서 굳어버렸다. 집안에 있던 현옥이 겁나는 줄 모르고 신기한 구경거리가 생겼다 싶어 방안에서 뛰쳐나와 마루 끝에 숨어서 하늘을 바라본다. “와! 비행기 많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세어보니 모두 서른 네 대가 하늘 위에 떠있었다. 비행기는 여러 번 원을 지어가며 돌다가는 맨 앞에서 날던 한대가 몸체를 숙이고 마을을 향해 내려오면서 뭔가 번쩍하는 물건을 떨어뜨리고는 하늘로 솟구쳤다. 순간 땅에 떨어진 물체는 '쾅'하는 굉음을 내며 터짐과 동시에 뒤꽁무니를 보이며 솟구치던 비행기의 뒷날개 아래로 기관총이 난사된다. 한대의 비행기가 그렇게 하늘로 올라가자 다음 비행기가 역시나 똑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땅에 떨어진 폭탄이 터짐과 동시에 마을에는 시뻘건 불길이 일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쪼악손이 쏜 총에 날개를 맞고 돌아간 비행기가 시발이 되어 이곳에 북한군이 숨어 있음을 짐작하고 달려온 전투기들은 아예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한 듯 폭격을 마구 퍼부었다. “저 쪼악놈 새끼 때문에 우리 마을이 불바다가 됐구마.” “에잇! 쳐 죽일 놈! 그 놈 때문에 우리만 죽어나겠구마.” 사람들은 모두 쪼악손을 증오하며 욕을 퍼 부었다. 매일 같이 정찰만 하고 돌아가던 비행기들이 그 이후로는 마을을 향해 계속적인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계속 되는 폭격에 마을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어미 잃은 아이의 울음소리, 자식 잃은 부모의 울음소리, 폭격에 목숨은 구했으나 팔 다리가 잘려 나간 이들의 절규, 마을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밖으로 나올 생각도 않고 깜깜한 방공호에 갇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이장이 이러다가는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여겨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의견을 전한다. “다음에 비행기가 뜰 때는 모두들 흰옷을 입고 흰 수건을 준비해서 나오이소. 그라고 비행기를 보면서 손수건을 흔드이소. 그래 여기에 백성이 살고 있다는 표시를 하입시다. 뭐라도 해야지 않겠십니까?”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이 이장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그 후 삼 일이 지나서 비행기가 다시 날아들었다. 기다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비행기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집을 나와 논 가운데로 향했다. 저마다 손에는 하얀 수건을 들고 흰옷을 입고서 한자리에 모여섰다. 비행기가 조금 낮게 날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수건을 든 손을 마구 흔들어 댔다. “여기 우리는 백성이요. 우리는 백성이니 제발 폭탄을 내리지 마시요.” 들리지도 않는 곳을 향해 목청을 돋우어 악다구니를 쓰며 손수건을 흔들어 댄다. 이내 비행기는 주위를 맴돌다 조금 더 낮게 날아 가까이 다가오더니 폭탄을 내리고 올라가며 뒤쪽에서는 연달아 총을 쏘기 시작한다. 놀란 마을 사람들은 그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 뿔뿔이 흩어진다. 순식간에 떨어지는 폭탄을 피할 겨를 도 없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나자빠졌다. 너나할 것 없이 먼저 살고 보겠다고 논두렁이며 풀숲이며 저마다 몸부림치며 뛰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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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고 찢어지고 총에 맞고 폭탄조각이 몸에 박혀 울부짖는 사람들, 이미 숨을 거둔 채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널브러진 사람들,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는 이들은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폭격이 쏟아지는 곳을 피해 달아나려 애쓴다. 연거푸 쏟아지는 폭탄세례에 움직이는 생명체의 흔적이 사라지자 비행기는 굉음만 남기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날아가 버린다. 비행기 소리가 멀어지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뛰쳐나와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불고 난리다.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느라 사방팔방을 훑고 다니며 살아 있는 이들은 감사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 가족이 죽은 사람들은 비통한 심정이 되어 통곡을 한다. 희연의 식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있다 간신히 상봉을 한다. 혹여 다치지 않았을까 어미는 아이들 을 하나하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피고 또 살핀다. 찬옥의 손을 꼭 잡은 경현이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어미는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랜다. 현옥을 제외한 식구들이 다들 모였다. “정옥아! 찬옥아! 현옥이는?” “…?” 주위를 아무리 살펴도 현옥이 보이지 않았다. 내외는 애타는 마음에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사방으로 찾아 헤맨다. 폭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걸음아 나 살려라 뛰어가던 현옥이 발을 헛디뎌 나락 논 아래로 그대로 곤두박질 쳤다. 잔뜩 겁을 집어 먹고 폭격이 멈출 때가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있다 어미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 논에서 겨우 헤어 나온다. “엄마, 엄마! 내 여 있다. 엄마.” 아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딸꾹질을 해댄다. 울면서 기어 나오는 아이를 얼른 알아보고 희연이 급하게 뛰어와 아이를 살핀다. “현옥아. 괜찮나?” 흙투성이가 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어미는 아이를 품에 안는다. “흐흐흑...어(딸꾹)엄마.” “오냐. 오냐. 됐다. 살았으이 됐다.”간신히 울음을 멈춘 현옥이 제 발을 쳐다보며 말한다. “엄마! 내 신발 한 짝이 없어졌다. 논에 엎어지면서 발이 빠졌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 “나중에 찾으러 오고 우선 집으로 가자. 여 있으면 또 폭격이 시작 될 긴게 집에 가서 얘기하자.” 근호와 아이들이 어미 곁으로 몰려와 식구들은 뛰다시피 하며 걸음을 재촉하여 외딴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포항시내에도 끝없는 폭격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포항을 거점으로 남하하려는 인민군과 포항상륙에 성공한 미군과 국군이 합세를 하며 포항시내는 포격과 총격으로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접전을 거듭하면서 포항시내는 가옥이 무너지고 불에 타서 흔적 없이 사라졌고 잿더미만 무성하였다. 처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의 시체가 무너진 가옥 더미에 깔려 있거나 불에 탄 잿더미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희연의 친정도 모두 불타버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올케가 사내아이 둘을 데리고 희연을 찾아왔다. 넋이 나간 사람 꼴을 하고 대문을 들어서는 올케를 보고 희연이 놀라서 다가간다. “언니. 우짠일이라요?” “아이구. 애기씨! 말도 마소. 포항이 쑥대밭이 되었구마요.” “오라버니는요? 아이들은 우짜고요?” “아이구 내 팔자야.”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마당에 펼쳐 놓은 평상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목 놓아 울어댄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올케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전쟁터에서 피난 나온 얘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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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에도 전쟁이 나면서 올케는 두 아들만 데리고 피난을 나왔다 한다. 딸들은 혹시나 아비가 오지 않을까 싶어 그 곳에 남아서 집을 지키고 있겠다하여 아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며칠 동안 사정없이 퍼붓던 포탄세례가 조금 잠잠해진 틈을 타 올케는 딸들이 걱정 되어서 목숨을 내걸고 피난 오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되돌아가보니 폭격을 맞아 집은 폭삭 무너져 내려 앉았고 그 곳에 남아있던 딸들은 잿더미에 깔려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서울에 머물렀던 오라비도 전쟁이 나고서는 소식이 끊어져 버렸기에 자기도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제 두 남매는 영영 만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부모의 죽음에 이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오라비까지 희연의 친정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 셈이다. 두 여인은 맥없이 평상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달래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외딴집에 새로운 식구가 늘게 되자 희연은 올케와 조카를 위해 아이들이 쓰던 건넌방을 내어주고 안방에서 희연의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주로 낮에 날던 비행기가 이제는 밤에도 설치고 다니며 조명탄까지 터트리며 수색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사람들은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몰라 겁을 먹고 거리에 나가려 하지 않은 채 밤낮없이 캄캄한 방공호에 갇혀 목숨만 부지하고 있으니 사람들 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여느 날처럼 희연이 가마니에서 보리를 꺼내어 절구에 넣고 찧고 있었다. 보리를 빻는 일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희연이 혼자서 하기에는 힘에 겨웠으나 도와줄 사람이 없다 보니 매일 같이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며 식구들 끼니를 챙기고 있었다. 그런 어미가 안쓰럽고 걱정되었던지 정옥이 바깥 눈치를 살피며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방공호에서 나와 어미를 도와주러 마당으로 나왔다. “엄마!”  “야가? 니는 퍼뜩 들어가그라. 이래 있다 들키면 우짤라고 그라노?” “절구질 내가 좀 할 테니까 잠깐 쉬고 계세요.” “됐다. 내 걱정 말고 니나 들키지 않게 해라.” “알았어요. 이왕 나왔으니 절굿공이 이리 주고 잠시 안아 쉬세요.” 희연의 손에서 절굿공이를 뺏어 들고 정옥이 절구질을 한다. 희연이 잠시 정옥의 손을 빌리는 틈을 타 뭉쳐진 어깻죽지를 주무르며 평상 끝에 나앉았다. 딸아이의 절구질하는 모습에 눈길을 보내면서 연신 팔을 주무른다. 한낮의 따듯한 햇살이 희연의 머리 위로 내리쬔다. 외딴집 마당에 두 여인의 그림자가 둥그렇고 선명하게 그늘이 진다. 투명하고 따사로운 가을볕을 받아서인지 비참하게 짓밟힌 마을에 평화가 깃든 듯 잠시 고즈넉함이 느껴졌다. 이맘때면 가을 들녘은 이미 황금물결이 일렁거렸을 것이고 사람들의 손길이 추수를 앞두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련만 전쟁이 머무르고 있는 이곳에는 검게 타버린 논과 밭들이 제 할 일을 잃고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전쟁 탓에 추수는 이미 물 건너갔고 과수원농사도 쑥대밭이 되어 버리다시피 해 버렸으니 매일 끼니를 걱정하는 희연의 답답한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금붙이를 팔아서 연명하고 있는 곡식조차 얼마 남아 있지 않으니 희연의 입에서는 한숨만이 세어 나오고 있었다. 어미의 깊은 한숨에 절구질을 하던 정옥이 돌아서서 그늘진 어미의 얼굴을 바라본다. 명쾌하게 내리쬐는 볕에 노출된 어미의 얼굴은 종택 며느리 시절에 보았던 기품과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낙의 모습으로 전락되어 있었다. 삶에 찌든 어미의 모습에 절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정옥이 이내 돌아서서 눈물을 닦으며 다시 절구질을 한다. 적막한 집안에 절구질소리만 무겁게 울린다. 마을은 이미 적막강산으로 변하였고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을에 들어온 인민군들은 시시때때로 날아드는 정찰기를 피해 숲 속에 숨어있다 정찰기가 사라지고 나면 그 틈을 타서 마을로 내려와 설치고 돌아다니며 마을을 염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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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내내 잘 숨어있던 정옥이 과수원을 지나던 인민군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다. 모녀의 모습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사라졌다 몇 시간이 지나 다른 사내를 대동하고 와서 희연의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정옥이 찧어 놓은 보리쌀을 씻어서 가마솥에 안쳐 삶고 있던 희연은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마당으로 나와 본다. “어마이동무. 여기 젊은 여 동무레 있지비요?” “…?” 정옥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을 알기에 희연은 당황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다. “거짓말 할 생각은 말기요. 내레 아까 여기 있는 거를 보고 갔슴메. 있는 거를 아니 대답하기요.” 희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대답을 않는다. “이 에미나이가 와 묻는말에 대답을 안하는 기야? 동무레 뜨거운 맛 좀 보갔어?” 방안에 숨어 있던 근호가 처를 향해 윽박지르는 소리에 망설이다 급히 방을 나와 그들 앞에 섰다. “아이구. 이라지 마시요. 우리 같은 사람이 무신 힘이 있다고.” 총부리를 들이 대고 있는 사내를 향해 근호가 애원을 한다.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내가 총을 거두라며 명령을 내린다. 빨간 선을 두른 모자에 무릎아래까지 올라오는 장화와 빨간 줄을 친 군복을 입고 허리에는 권총을 차고 서있는 사내는 계급이 높은 듯 보였다. 그가 근호를 보며 묻는다. “그 여성동무레 동무 딸 입메?” “예. 예! 지 여식입니다요.” 점잖게 말을 내뱉는 간부급 사내를 의식하며 근호가 대답을 한다. “내 그 여성동무를 만나고 싶어 왔으니 잠깐 나오라 하기요.” “그기이... 아아가 아픕니다. 신열이 나고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움쩍달싹 못하고 누워 있어서 나 올 수가 없십니다.” “이 이 아바이 동무레 무시기 헛소리를 하는 깁메?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슴메. 어디 거짓부렁을…….” 졸개인 듯한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간부급 사내가 옆에서 노려보자 황급히 입을 다문다. “여성 동무레 상태를 봐야갔으니 가서 데리고 나오기요.” 근호는 피할 수 없다 싶어 어깨를 늘어뜨리고 방으로 들어가 잠시 후 정옥을 업고 마당으로 나온다. 고개를 푹 숙이고 힘이 빠져 앉아 있는 정옥을 바라보며 간부급 사내가 묻는다. “여성동무레 어디가 아픈지 말해 보기요. 내래 가서 약을 지어 보내갔소.” 무례함을 자중한 정중한 어조로 정옥의 상태를 물어온다. “아무것도 먹지를 못하고 있십니다.” 근호가 입을 다물고 있는 딸을 대신하여 대답한다. “아바이 동무에게 묻지 않았소.” 간부급 사내가 매서운 눈으로 근호를 쳐다보며 말을 자른다. “여성동무가 말하기요.” “…….”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옥이 겁에 질려 보일 듯 말 듯 온몸을 떨고 있었다. 사내는 대답 없는 정옥을 잠시 주시하다 말은 내뱉는다. “내래 부대에 가서 약을 지어 보내 주갔으니 약 먹고 날래 일어나기요.” 약을 지어 보내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두 사내는 외딴집을 돌아나간다. 근호의 임기응변으로 엉겁결에 거짓으로 사태를 무마시켜 보려했으나 그는 쉽게 물러날 인물이 아닌 듯 했다. 희연과 근호는 마당 평상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우짜노?” 희연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탄이 세어 나온다. “이라다 세월이 다시 바뀌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일긴데 이 노릇을 우쨰야 좋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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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은 모면하였으나 앞으로 닥칠 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두 사람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나온다. 희연과 근호는 마음이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정옥을 어떻게든 빼돌릴 방법을 강구해보았으나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지난번 다녀갔던 인민군간부가 부하들을 앞세우고 정옥의 병문안을 왔다며 찾아왔다. 병세가 조금 나아졌는지 확인을 하고는 약 봉투를 내밀며 잘 보살피라 이르고 나간다. 그 후로 그는 외딴집을 뻔질나게 찾아 들며 정옥의 상태를 살피고는 부하들을 시켜 외딴집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정옥을 설득했다. 사내는 정옥을 보고 탐을 낸 것이다. 과년한 나이의 처녀는 언뜻 보기에도 남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이라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정옥이 문맹이 아닌 것이 더 맘에 들었고 짧은 학력에 비해 글씨체까지 출중하니 더욱더 욕심이 났던 것이다. 사내는 정옥이 여성의용군으로 들어와 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매일 같이 찾아와 자신들과 같이 일을 해보자며 설득을 시작했고 정옥은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못되니 거절을 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번 표했었다. 그러나 사내는 쉽게 물러 날 생각이 없었고 거절하는 정옥을 어떻게든 데려 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정옥 동무! 동무의 능력이 아까워 그러니 며칠만 부대에 나오기요. 와서 몇 가지 일만 도와주고 나면 다시는 부탁 안 할거니 이번만 좀 해주기요.” 설득의 설득을 거듭하여 며칠만 부대에 가서 일을 도와주고 나면 반드시 집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는 정옥이 그들을 따라 집을 나섰다. 꼼수가 있을 것 같은 말을 믿을 수 가 없어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희연내외는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큰딸의 모습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며 사흘을 보내고 희연은 아무리 기다려도 딸이 오지 않음에 마음을 졸이며 딸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지서로 딸을 찾아 나섰다. 대문을 향하고 있으니 어디선가 찬옥이 풀쩍 뛰어들며 어미의 앞길을 가로막고 선다. 아이는 숨이 차서 헉헉댄다. “찬옥아! 와그라노?” “헉헉…….엄마!” “와? 누가 니를 따라오더나?” “그게 아니고. 엄마! 밖에 군인들이...군인들이 있다.” “군인? 인민군이 아니고 군인이라꼬?” “응.” “그럴리가 있나?” “내가 봤다. 나물 캘라고 과수원 뚝방길로 나갔는데 풀숲에서 군인들이 숨어 있다가 내를 보고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겁을 줘서 무서워서 막 뛰어 온거다.” “니가 겁이 나서 잘못 본길기다. 군인이 우째 여 있겠노?” “참말이다. 엄마는 내가 봤다는데. 머리에 탈바가지를 쓴 것이 분명히 우리 국군들이란 말이다.” 아이의 눈동자가 커지면서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어미를 바라본다. 순간 희연의 눈앞이 아찔해진다. “아이구 우짜꼬! 우리 정옥이는?” 큰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오면서 희연은 걸음을 뛰다시피 하며 지서를 향해 달려간다. 문을 확 밀어 젖히고 들어서니 그 곳에 있던 인민군들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대신 국군이 그들이 머문 자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이 쓰다 간 책상은 뒤집어져 있고 의자는 다리가 부러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벽 중앙에 걸려있던 김일성 사진은 바닥에 내동댕이질을 당했던지 유리가 깨어지고 테두리는 박살이 나 누군가의 발에 의해 짓밟혀져 있었다. 딸의 행방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녀 보았지만 아무 곳에서도 정옥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망연자실한 희연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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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정옥아! 정옥아! 우째야 하노? 우리 정옥이! 내딸 정옥이를... 어데 가야 우리 정옥일 찾겄노? 정옥아! 정옥아!” 어미의 애타는 마음이 절절하다. 혹시 집으로 오지 않았을까 다급해진 마음에 희연은 눈물을 멈추고 다시 집을 향해 달렸다. 그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집에 들어섰지만 그마저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온 집안을 들쑤시고 방공호를 샅샅이 찾아봐도 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희연이 마루에 주저앉는다. “아이고. 정옥아! 일이 와이래 됐노? 삼일만 참았이면...그랬이면... 그것이... 모질게 내속을 아프게 하는 구마. 정옥아! 어데 있노? 이 에미가 안보고 싶나? 정옥아! 아가야!" 어미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목 놓아 운다. 그렇게 몇날며칠을 희연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워 잃어버린 딸을 그리며 지냈다. 인민군이 물러가면서 마을은 국군이 들어와 점령을 하였다. 인민군이 휘젓고 간 마을을 군인들이 수색을 다니며 마을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조사를 시작했다. 곡강면이 인민군 소굴이었음에 마을 사람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없었다. 집집마다 수색을 하며 모조리 잡아 가니 어미의 등에 업혀있는 아기도 죄인 취급이었다. 한편 흥해읍에서는 쌀가마니를 숨겨두었던 창고가 털리면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뒷감당은 생각하지 않고 우선은 먹고 살아보겠다고 너도나도 개미떼처럼 창고로 몰려들었다. 인파에 밀려 사람들이 넘어지고 짓밟히며 피투성이가 되어도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 위해 쌀을 훔쳐 달아난다. 순식간에 창고는 바닥이 들어나고 사람들은 훔쳐온 쌀을 집안에 몰래 숨겨두었다. 배곯는 백성이 쌀을 훔친 것도 엄연히 도둑질이니 군인들이 가만있을 리가 만무했다. 읍을 돌아다니며 창고 털기에 가담한 자들을 물색해 내어 잡아들이고 그 중 중죄를 뒤집어쓴 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하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배불리 먹고 죽는 거나 섣불리 설치다 덤터기를 쓰고 죽는 거나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백성들 밖에 없다며 한탄을 늘어놓는다. 다음날 새벽. 조용한 외딴집에 군인들이 들이닥쳐 근호와 희연을 연행해 간다. 밖에서 들리는 잠깐의 소동에 겁이 많은 찬옥이 자신은 잡혀가지 않으려고 눈치 빠르게 일어나 옆에서 자고 있는 동생들을 깨우며 소리 내지 말라 이르고 부엌으로 숨어든다. 얼떨결에 찬옥을 따라나선 현옥과 경현이 아직 잠에 취해 눈도 못 가누고 있었다. 부엌에서 잠시 뜸을 들이다 이내 동생들을 끌다시피 하여 뒤쪽으로 난 문을 통해 풀이 무성한 풀밭으로 동생들과 몸을 숨긴다. “누부야! 와 여기에 숨는 건데?” 잠에 취한 목소리로 경현이 찬옥에게 묻는다. “쉿! 조용히 해라! 안 그라믄 우리도 잡혀간다.” 누이가 하는 얘기에 뜻을 모르고 경현은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고 누나들 곁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그 사이 죄가 없다고 버티는 희연 내외를 비롯해 옆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올케식구까지 강제로 연행되어 대문을 나간다. 먼동이 트면서 새벽빛에 아슴푸레 사람의 모습이 보일듯 말듯 할 즈음 찬옥이 동생들을 데리고 풀밭을 나와 집으로 들어갔다. 텅 비어버린 집안은 냉기가 도는 듯하였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사라진 부모를 찾아 헤맨다. “누부야! 엄마, 아버지 안 보인다. 어데 갔는데?” “엄마,아버지, 외숙모까지 군인들이 끌고 갔다.” “와?” “내도 모른다. 우리도 끌려 갈까봐서 숨어 있었던 거다.”  아무리 얘기해줘도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보이는 경현을 무시하고 찬옥은 방으로 들어간다. 현옥과 경현도 찬옥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간다. 세 아이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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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옥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있을 수가 없어 동생들을 데리고 두려움을 무릅쓰고 끌려간 부모를 찾기 위해 지서로 나갔다. 제 부모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 대다수가 잡혀와 치조를 받고 있기에 지서는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모두가 죄를 지은 죄인이라 했다. 인민군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곡식을 훔쳤다는 이유로 혹은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잡혀 들어온 사람들 투성이라 이 어지러운 곳에서 부모의 소식을 듣기란 어림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맥을 놓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적막한 외딴집에서 하염없이 부모를 기다려야만 했다. 먹을 것과 땔감이 없어 밥을 짓지 못해 생쌀을 씹어 먹고 물로 배를 불리며 그렇게 거지꼴이 되어 냉골이 된 방에 늘어져 누워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지서로 끌려갔던 희연이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어미를 보는 반가움에 찬옥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미를 부른다. “엄마!” 아이들은 어미의 출현이 반가워 어미의 품으로 달려가 안기며 참고 있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오냐. 그래.” 어미는 기진맥진하면서도 아이들의 꼴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먼저 앞섰다. “밥은 묵었나?” 아이들은 대답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연이 방을 나와 부엌에 들어가 보니 먹을거리가 없었다. 밥을 해 먹거나 불을 지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뒤꼍에서 말려 놓은 지푸라기를 들고 들어와 아궁이에 쑤셔 넣고 불을 지피고 쌀과 보리쌀을 갈아 죽을 끓였다. 멀건 죽에 소금으로 간을 대신하여 허기진 아이들의 배를 달래준다. 그래도 따듯한 것이 뱃속으로 들어갔다고 아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 했다. 아니 어미가 돌아 왔기에 어미의 체온에 다시 생기가 돈 것도 같다. “엄마! 그런데 와 아버지는 안 오시는데?” 찬옥이 궁금하여 어미에게 물었다. “응. 아버지는 언니 찾을 라고 전쟁터에 따라 갔다.”

희연과 근호가 잡혀가던 그날. 지서안과 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왔다. 치조를 당하는 사람들과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군인들이 한데 얽혀 지서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끼어 근호는 어떻게 빠져 나갈 길이 없나 싶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마당 한쪽에서 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당 한 귀퉁이에 아궁이를 만들어 놓고 여러 사람들이 그 주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궁이에 걸린 가마솥에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자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다 부산스러운 주위를 틈타 살금살금 그들 사이로 숨어든다. 그리고는 장작더미가 쌓인 곳을 향해 가더니 얼른 허리를 숙여 엎드리고는 쌓아 놓은 장작을 한 아름 안고서 국 끓이는 아궁이 쪽으로 다가가 아궁이 속에 장작을 넣어 주고는 재빨리 타고 남은 재를 손에 묻히고 슬며시 코를 문지르는 척하며 얼굴에 검은 숯가루를 묻혔다. 그리고 나서는 태연하게 아궁이 주위를 돌아다니며 허드렛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서로 얼굴을 볼 틈도 없고 보아도 대면 대면하고 있는 처지라 근호를 보는 이들도 그저 밥 심부름하는 사람쯤으로 여겨 아무도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근호는 그렇게 그들과 어울려 거리낌 없이 밥을 날라다 주고 국을 퍼주는 등 군인들의 시중을 들며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을 오갔다. 지서 안,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중년의 군인 한 사람이 근호의 눈에 들어왔다. 밥도 먹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 근호는 얼른 주방으로 와서 주먹밥을 만들어 그에게 가지고 갔다. 근호는 그의 곁에 굽실거리고 서서 조용한 어투로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대장님요! 이거 잡수시고 하이소.” 군인은 근호가 내민 주먹밥을 바라보다 얼굴을 들어 밥을 들고 서 있는 근호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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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 입니더. 일하시느라 식사를 못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만들어 왔으이 잡수면서 하이소.” 하고는 넙죽 절을 하고 되돌아온다. 그렇게 몇 번을 계속하여 근호는 대장이라는 자에게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날라다 주었다. 한 날, 식사를 날라 주고 돌아 서는 근호를 대장이라는 자가 불렀다. “아저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근호가 돌아서서 대답을 한다. “예. 대장님!” “아저씨는 내가 대장인 줄 어떻게 알았습니까? 보아하니 군인도 아닌 것 같은데요.” 사실 근호는 그가 이곳의 대장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나름 머리를 굴려 본 것이다. ‘대장이든 아니든 그냥 높여 부르는 거지. 말 잘해서 뺨 때릴 사람 없다 안하나.’ 싶어 그냥 눈치를 보아 느낌으로 감을 잡아 그리 불렀던 것이다. “예. 군인은 아니지만 지가 보기에 그래 보였십니다.” “아저씨 눈썰미 있으십니다.허허허.” 눈치로 알아보았다는 넉살 좋은 말에 대장은 호탕하게 웃어준다. 그 후로 근호는 대장의 끼니를 열심히 챙기면서 그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힘을 빌려 갇혀 있던 희연과 희연의 올케를 풀어 달라 부탁을 하고는 두 사람이 죄 없이 끌려왔음에 순순히 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희연의 올케는 친정 오라비들이 좌익으로 물든 인물들이라 치조를 당하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 여겨 갇혀 있는 며칠이 지옥이었다. 다행히 근호의 재치로 살아남게 되자 희연에게 잘 있으라는 말만 남긴 채 두 아들의 손을 잡고는 부리나케 도망을 가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올케의 뒷모습만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자신도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돌아 왔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거지꼴의 아이들을 보면서도 희연은 잃어버린 큰딸만을 생각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조차 모르고 있으니 애간장이 탔다. 집에 남은 세 아이보다 잃어버린 딸이 눈에 밟혀 가슴앓이를 하며 매일을 눈물 바람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날이 새면 일찌감치 밖으로 나가 거리를 헤매고 다니며 정옥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구석구석 여기저기를 들여다보고 살아있다는 소식을 누가 전해 줄까 싶어 반정신 나간 사람이 되어 사방을 헤매고 다녔다. 길을 가는 이를 붙잡고 물어도 보고 아는 얼굴이 나타나면 더 반가워 자신의 딸을 혹시 보았냐며 묻는 그녀를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 다독여 준다. 전세가 역전이 되어 국군과 인민군의 대치상황에서 인민군이 북으로 쫓겨 올라가고 있었다. 현옥이 어미를 기다리며 마당에 나와 앉으니 아직도 사방은 총소리가 들리고 멀리 보이는 산에서는 포탄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불빛이 번쩍거리며 이쪽저쪽 산자락에서 교대로 포격을 해대고 있었다. 전쟁이 일든 말든 희연은 그렇게 딸을 찾아 걷고 또 걷고 걷다 지치면 땅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다가 해가 지고 어두워져서야 풀이 죽은 모습을 하고 집으로 찾아들었다. 아이들은 그런 모습의 어미가 낯설어지고 있었다. 한편 근호도 큰딸을 찾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가는 국군을 쫓아 전쟁터로 따라 나섰다. 대장의 수하가 되어 군모에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고 어깨에 총을 메고 군인행색으로 대장이 이끄는 부대를 쫓아 북으로 북으로 전진을 해갔다. 북으로 넘어가다 포로로 잡혀온 자들이 있으면 대장은 근호를 불렀다. 딸이 행방불명 된 사정을 전해 듣고 도움을 요청해 온 것이 죽은 자나 포로가 된 자들의 얼굴을 한번만 볼 수 있게 도와 달라 부탁을 하였기에 대장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잡혀온 그들의 얼굴을 확인 할 수 있도록 근호에게 힘을 써주었던 것이다. 그 고마움을 대신하여 근호는 어디를 가나 대장의 식사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챙겼다. 북으로 쫓겨 가는 인민군의 뒤를 쫓다 보니 식사를 챙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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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상황이 바뀌는 전쟁터라 식사 준비를 빨리 한다고 해도 시간이 여의치 않아 부랴부랴 입 속에 밥을 쑤셔 넣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때는 반도 못 먹고 떠날 때도 있었으며 또 어떤 때는 먹기도 전에 전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니 끓고 있던 국도 밥도 모두 버리고 떠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근호는 대장의 식사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자신의 호주머니에 밥을 싸서 넣어 가지고 다니며 식사 때가 되면 대장의 몫을 챙겨주었다. 이제는 식은 주먹밥이 아니라 놋그릇을 준비하여 밥을 담아 품속에 품고 다니다 대장에게 건네주었다. 그런 근호의 정성을 알고 대장은 딸을 찾는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 포로의 얼굴을 확인시켜 주게 되었다. 이제 살아있는 포로를 총살직전에 확인을 하는 것이 으레 근호의 일이 되었다. 살려달라는 애원을 하는 이들, 무덤덤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 그에 반해 북한군 여자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이 지니고 있던 손가락만한 총을 꺼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진 경우도 있었다. 그 많은 시신들과 죽음 앞에서 근호는 오직 딸을 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생사의 길을 넘고 넘었다. 부모가 모두 정옥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무렵 삼남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주인이 돌보지 않는 과수들은 말라서 제 구실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현옥이 그 좋아하는 학교에도 못 가고 먹을 것도 없는 상황이라 맥이 풀려 마루에 앉아 있었다. 하는 일 없이 고개만 갸웃거리다 발을 들여다보니 때가 묻은 양말이 눈에 들어 왔다.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우물가에 앉아 빨래를 해서 울타리에 널어놓으면서 입으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인민군의 교화 작업으로 저녁마다 아이들을 끌고 가 부르게 했던 노래가 머릿속에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흥얼흥얼하다 끝 마디에 힘을 실어 부른다. “아-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그 순간 누군가가 현옥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얏!” 한대 얻어맞은 등짝이 어찌나 아픈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화가 나서 돌아보니 찬옥이 잔뜩 성질이 나 씩씩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니 죽을래? 잡혀가고 싶나! 니 한번만 더 그 노래 부르면 노끈으로 묶어서 지서로 끌고 가 몽둥이로 매 맞는다. 알았나?” 굵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동생을 향해 모진 소리를 내뱉는 찬옥에게 현옥은 겁을 먹고 잘못했다며 빈다. “작은언니야. 내 잘못했다. 다시는 안 한다.” 아픔의 고통과 공포가 뒤섞여 현옥의 눈에서 눈물을 떨어져 내렸다.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랬던지 찬옥도 참고 있던 눈물을 보이며 동생을 끌어안았다. 서로의 품에 의존한 채 두 자매는 서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 내어 엉엉 울음을 운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집안도 조용히 침묵을 하며 외로운 아이들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없어진 딸을 찾아 얼마를 헤매고 다녔던지 희연이 결국 병이 나 쓰러져 눕고 말았다. 먹지도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사방을 헤매고 다녔으니 정상인 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희연은 정옥만을 생각하며 한 맺힌 가슴을 부여잡고 통곡을 한다.

온 나라가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반도를 오가며 싸우는 통에 산천은 굉음에 시달리고 연일 터지는 폭탄에 몰매 맞은 나무들은 검은 연기를 피우며 한 줌의 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진격과 퇴각을 반복하며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죽자 살자 총을 쏘아대니 산봉우리마다 무고하게 죽어나간 한 맺힌 원혼들의 혈로 얼룩이 지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받쳐졌음에도 전쟁은 그칠 마음이 없는 듯 했다. 얼마만큼의 희생양이 더 생겨날지 사람들은 막연한 불안 속에서 삶을 연명해 가고 있었다. 예고 없이 치르는 전쟁의 수렁으로 내몰린 백성들의 삶이 정상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늘면서 그들은 체면이고 수치심이고 살기 위해서 이성을 버리고 오로지 본능에만 의지하여 구차스런 목숨을 부지해 나갔다. 풍족하지는 못해도 소소하게나마 삶의 재미를 느끼며 욕심 없이 지내던 그들에게 지금의 이 구차스런 삶이 치욕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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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거지신세로 전락해 버렸으니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동냥질에 도둑질에 인간의 본성이 타락의 나락 끝으로 내 몰리고 있었다. 시내에는 군인들과 미군들이 들어와 진을 치고 있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거리를 떠돌며 지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어 구걸을 해댄다. 큰길을 따라 군인들이 탄 트럭이 흙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자 어디에 숨어있다 나타났는지 한 무리의 아이들이 미군들이 탄 트럭의 뒤를 쫓아 우르르 몰려들어 트럭과 함께 달리기를 시작한다. 운전석에 앉은 미군이 백미러를 통해 쫓아오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서서히 속력을 줄인다. 뛰어오던 무리 중에 열 살 남짓의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사내아이가 트럭에 올라 탄 미군을 향해 손을 내밀며 소리를 친다. “추잉검 오케이? 기브미 초콜렛!” 그의 선창에 힘입어 아이들은 너나없이 달려들며“ 기브미 껌”“ 기브미 초콜렛”을 외친다. 차에 타고 있던 미군들은 싱긋이 웃음을 날리며 껌과 초콜릿을 아이들을 향해 던져준다. 차바퀴가 지나간 땅바닥으로 떨어진 껌과 초콜릿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싸움질을 한다. 그 광경이 미군들에게는 재밋거리였던 가보다. 처음에는 불쌍한 생각에 하나 둘 적선 아닌 적선을 베풀었겠으나 차차 그 수가 증가하면서 차를 쫓는 아이들을 보다 보니 짓궂은 장난기에 발동이 걸렸던지 약을 올리기도 했다. 군인들이 탄 트럭은 아이들이 따라 올 수 있을 만큼 천천히 달리다가 일제히 손을 내밀며 구걸을 하는 모습을 즐기다가는 속력을 내며 쏜살같이 달아나 버리고 그 뒤에 섰던 아이들은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내달리는 트럭의 뒤꽁무니에 대고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는 욕지거리들을 날려 보낸다. 그렇게 거지취급을 받아가며 그들은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삶에 대한 집착으로 먹을 것을 구걸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배는 채워지지 않고 끼니때가 되면 삼삼오오 모여 문전걸식을 일삼는다. 운 좋은 날이면 밥 한 술 얻어먹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굶기는 마찬가지였었다. 그도 그런 것이 너나없이 입에 풀칠하는 것이 힘든 판국이라 집에 있어도 배를 곯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요 거동조차 못하고 집안에 드러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산송장들이 허다 반이었다. 그 와중에도 아직까지 식량을 쟁여놓고 있는 집들도 더러 있었으나 어떻게 알고 왔는지 거지들이 때를 지어 찾아 드니 밥을 먹는 것도 남의 눈치를 봐가며 숨어 먹는 신세가 되고야 만다. 그래도 그들은 행복했다. 아직 배를 곯을 일이 없기에 끼니를 챙길 수가 있기에 그 고달픈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그들에게는 행복이었다.

가을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조석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맵다. 여름에 난 전쟁이 시간이 흐르면서 후유증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북으로 퇴각하는 인민군을 쫓아 군인들은 진격에 나서며 상황은 역전되고 남에서 북으로 전쟁은 조금씩 멀어져 가는 듯 했다. 지축을 뒤흔들던 굉음들이 물러나고는 있었으나 전선 부근은 아직도 총구에 열기가 식지 않고 있었다. 전선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이 후방으로 실려 내려오며 병원마다 환자들이 차고 넘쳐났다. 병원에 수용될 인원의 수가 한계에 넘자 인근학교로 환자들이 이송 되고 있었다. 흥해의 국민학교도 임시 야전병원이 되어 각 교실마다 환자들이 이송되어 들어와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신음소리와 악다구니가 끊이질 않았다. 총상에 폭격에 팔 다리가 잘려 나간 사람들, 머리에 총을 맞고 피 묻은 붕대를 칭칭 동여 메고 있는 사람들, 전신에 화상을 입고 온 몸을 붕대로 감싸고 눈만 내놓은 채 신음하는 사람, 허리가 부러져 거동도 못하는 사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몰골이 되어 살아남은 목숨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찾아 헤매고 다녔던 가족들이 부모자식과 부부로 상봉을 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갔다. 누워있는 자식의 몰골을 보고는 놀라 기절을 했다가 깨어나 아들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 부모. 남편의 소식을 듣고 찾아 온 아내는 팔 다리가 잘려 나간 채 누워있는 남편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도망치듯 달아나버리고 병상에 누워 아내를 부르며 울부짖는 이들의 절규로 야전병원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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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마을에는 역병이 돌아 아이들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때 아닌 천연두에 한 집 걸러 한 집에 역병이 돌고 어린것들의 몸은 불덩이같이 뜨겁고 온몸에 발진이 생겨나면서 생과 사를 오가는 기로에 놓여있었다. 한 아이기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가거나 아니면 거꾸로 위로 오르는 경우가 허다하니 부모는 남은 자식이라도 성하길 바라는 마음에 병에 걸린 아이를 격리시켜놓고 마마님께 빌고 또 빈다. 무탈하게 지나가 달라고. 다행히 목숨을 건지기는 하였으나 수포가 터진 자리에 흉터가 남아 곰보가 된 얼굴이며 몸이 흉측하게 변한 이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군인은 군인대로 민간인은 민간인대로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가면 갈수록 거지들의 수도 늘어나고 송장들도 늘어나는 상황이 계속하여 반복되고 굶주림과 추위와 이제는 전염병까지 나돌고 있는 상황이라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또 다른 불행이 씨앗을 트고 있었던 것이었다. 과수원 외딴집에도 한바탕 소동이 일었었다. 포근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따스해 마루에 걸터앉아 볕을 쬐고 있던 현옥이 추위를 느끼며 몸을 오들오들 떨더니 조금 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처음에 감기 정도려니 가볍게 여겼으나 오한과 발열을 반복하며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이불을 덮고 땀을 흘리면서도 내내 춥다며 몸을 웅크리고 열은 쉬이 내리지 않아 기어이 헛소리까지 해대는 판이었다. 아직도 큰 딸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집안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딸을 찾으러 다니던 희연이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힘이 빠진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이의 상태가 심각해져 있었다. 찬옥이 어미를 부르는 소리가 다급했다. “엄마! 현옥이가 많이 아프다.” “어떤데?” 방에 들어와서 보니 아이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열에 들뜬 목소리로 계속 헛소리를 내뱉는 것이다. “야가! 와이라노?” “모른다.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헛소리를 자꾸 한다. 엄마? 현옥이 우짜노?” 어미는 아이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아이를 안아 일으켰다. “야야. 현옥아. 엄마다. 눈 좀 떠 보그라.” “엄....마.” “그래. 어디가 어떻게 아프노? 말 좀 해보그라.” “엄....마.” “그래. 현옥아 엄마 여 있다.” 열에 들떠 아이는 계속 어미만을 부르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순간 희연의 정신이 버쩍 들었다. 이러다 이 아이마저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찔함을 느끼며 마른 침을 삼키고 아이를 등에 업고 읍내 병원까지 쉬지 않고 내달렸다. “현옥아! 정신 차리라.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다 잘못했으이 제발 정신 좀 차리라. 아가!” 업고 뛰는 내내 희연은 아이가 무사하길 바라며 말을 건다. 힘없이 늘어져 어미의 등에서 흘러내려 흔들거리는 아이의 팔이 애처롭다. 숨이 차게 달려온 희연이 병원으로 들어서서 의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우리 아아 좀 살려주소. 아아가 죽게 생겼십니다.” 마침 지나가는 의사가 눈에 들어와 그를 붙잡고 애원을 한다. 의사는 희연의 등에 업힌 아이를 들여다보고는 간호원을 불러 병원 구석에 펼쳐진 간이침대로 아이를 데리고 간다. 잠시 진찰을 마치고 돌아서는 의사의 입에서 말라리아라는 병명을 듣게 된다. “열이 내리면 좀 나아 질 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이소.” “열만 내리면 아아는 괜찮은 깁니까?” “예에. 약 처방 해줄 테니 집에 가서 챙겨 먹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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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선생님! 고맙십니다.” 십년감수를 하고 희연이 다시 아이를 등에 업고 긴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을 현옥은 방에 누워 옴짝달싹 않고 있었다. 찬옥이 현옥을 돌보며 간호를 했다. “현옥아! 일나서 약먹자.” 찬옥이 물 사발과 약을 들고와 현옥을 일으켜 앉힌다. 찬옥이 건네준 약을 들고 현옥이 입 속에 넣고 삼키려 한다. 노란 알약을 입에 넣고 삼키자 조그만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아 다시 입 밖으로 뱉어낸다. 쓰디쓴 약 맛이 입안에 남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찬옥이 동생을 달래며 다시 약을 입에 넣어준다. 그러나 현옥은 또 다시 삼키지 못하고 뱉어낸다. 물을 한 사발 떠놓고 약 한 알을 삼키지 못하는 동생이 답답해 보였던지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찬옥이 소리를 내지르며 현옥의 등짝을 내려친다. 놀란 현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찬옥을 노려본다. “니 이 약 안 먹으면 죽는다. 니죽을 기가?” 기운 없이 늘어져 있는 자신에게 손찌검을 하는 찬옥이 야속하기만 하고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입안을 맴도는 쓰디쓴 약 때문에도 짜증이 나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린다. “울면? 운다고 약 안 먹어도 되는 줄 아나?”  “내가 먹기 싫어서 안 먹는 거 아이다. 약이 자꾸 목구멍에 걸려서 안 넘어가는 거를 우짜라꼬?” 징징거리며 힘없는 목소리로 앙칼스럽게 찬옥에게 대든다. “와 안 넘어가? 니가 빨리 낫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라지.” “아이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얼른 약 먹고 병 낫게 하자.” 차분한 목소리로 현옥을 달래며 찬옥은 다시 약 시중을 든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반쯤 녹아 있는 약을 입속에 집어넣고 사발에 담긴 물을 꿀꺽꿀꺽 삼킨다. 그러나 여전히 입속에는 녹아 있는 약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현옥이 인상을 찡그리며 울먹거린다. 녹다 남은 약은 입안을 온통 노랗게 물들이고 쓰디쓴 맛이 혀끝에서 맴을 돈다. 약 한 알에 물 두 사발을 마시고도 약을 다 삼키지 못한 동생이 한심스러웠으나 찬옥은 아무 말 없이 다시 물을 사발에 부어준다. 입 속에 남은 찌꺼기를 씻어 내기 위해 또 물 한 사발을 마신다. 그렇게 연거푸 세 사발의 물은 마시고 입 안에 쓴맛의 여운을 남긴 채 약은 현옥의 목구멍을 간신히 넘어갔다. 물배가 차서 순간 트림이 올라오며 또 다시 쓴 약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찌른다. 현옥이 얼굴을 찌푸리며 울상이 되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린다.

한가로이 떠도는 구름 하나가 산봉우리에 걸려 고개를 넘을까 말까 고민을 하는 중이다.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간. 음지에 불어오는 바람은 겨울의 기운을 끌어 오려는 듯 옷깃을 여미게 만들고 양지에 내리쬐는 햇볕은 포근하여 마치 어미 품에 안긴 듯 나른함이 느껴진다. 누렇게 변해버린 들판은 한가로워 보이고 나락이 잘려나간 논바닥은 물이 말라 갈라져있다. 지난여름 폭격을 맞은 자리에는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현옥이 폭격을 피하려고 달아나다 논두렁에 굴러 떨어지며 나락 논에 처박혀 잃어버렸던 신발 한 짝을 찾으러 나왔다. 벌써 몇 개월이 흐른 시간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벼를 베고 남은 자리 어딘가에 박혀 있지 않을까 해서 짝이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 논두렁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는 중이다. 전쟁에 정신이 나가 있으니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이 먹고 사는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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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돈이 중요해도 내 배 곯으면서 돈에 욕심을 보이지는 않을 터이니 장사를 하던 이들도 제 살기에 바빠서인지 장터에 나 앉아 있는 이들도 없었다. 그렇게 신발을 잃어버리고 나서 몇 달을 아무리 신발 장사를 기다려 봐도 볼 수 가 없으니 마지못해 찬옥이 신다 헤어져 버리려 두었던 신발을 잃어버린 한 짝 대신 끌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넓은 들판을 이 잡듯 쑤시고 다녀 보았으나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다. 결국 잃어버린 신발에 미련을 버리고 기왕 집을 나선 김에 혹시 오늘은 장터에 사람들이 나와 있을까 기대를 바라고 읍내 장터로 발길을 옮겨본다. 몇 개월 전만해도 물건을 흥정하며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장바닥은 몇몇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사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장사치들보다 더 한가하였다. 비어 있는 장터 곳곳을 두리번거리며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살펴보았으나 신발장사는 끝내 현옥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대했던 마음이 자꾸만 어긋나자 이제는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칫! 장사하는 사람이 장터에 안 나오고 뭐하고 있는 거고?’ 주체 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들어 불만이 튀어나온다. 그러다 짝 진 신발을 신고 있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고는 신경질적으로 발길질을 해댄다. 불만이 조금은 가라앉았으나 그래도 속은 개운해지지 않았다. 터벅터벅 맥없이 걸음을 옮겨 장터를 빠져 나와 집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산자락을 타고 흘러 내려온 바싹 마른 나뭇잎들이 마당 안에 널브러져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오래 묵은 먼지가 풀썩풀썩 이는 마당을 희연이 비를 들고 쓸고 있었다. 터벅거리는 걸음으로 대문을 들어서는 현옥을 어미는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며 묻는다. “니 어디 갔더노?” “…….” 부루퉁해진 입을 내밀고 있으면서 대답을 않는다. “몸 좀 나았다고 그래 싸돌아 댕기면 안 된다.” “엄마!” 알겠다는 대답은 않고 댓 발 나온 입으로 어미를 부른다. “와?” 아이의 얼굴을 마주할 생각도 없이 마당을 쓸며 대수롭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답을 한다. “내 장에 갔다 왔는데...” “니가 장에는 뭐할라고 갔더노?” 여전히 비질에만 신경을 쓸 뿐 아이의 얘기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무성의하게 묻는다. “신발 장사 나와있나 볼라고 갔다.” “신발은 와?” 그 말끝에 희연은 아차 싶었다. 폭격을 피해 달아났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며 울던 아이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어미는 빗질을 멈추고 돌아서서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의 발을 내려다보자 짝이 맞지 않은 신을 신고 있는 아이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한발에는 낡고 헤진 신을 신고 있는 아이의 발을 보는 순간 마음이 짠해져 왔다. 신발 장사를 못 만난 탓도 있었으나 그간 연신 터지는 사건에 정신이 나가 있었던 희연. 잃어버린 자식이 아까워 찾아 헤매고 다니는 동안 남겨진 세 아이는 안중에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온 마을을 뒤지고 또 뒤지고 살림을 사는 일도 집에서 어미를 기다리는 아이들도 잊어버리고 오로지 정옥을 찾아 수십 수백리 길을 걷고 또 걸었던 기억이 뇌리에 스친다. 현옥이 아프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미의 손길을 필요로 했었던 세 아이가 그제야 눈에 들어 왔던 것이다. “쪼매만 참고 있그라. 설날에 엄마가 장에 가서 신발 사가지고 오꾸마.” 평상 옆에다 비를 세워두고 딸의 곁에 다가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웅얼거린다. “너거들이 무신 죄라고. 잃어버린 것만 아까워했지 버려진 너거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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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니 다시 눈물이 솟구친다. 잃어버린 자식도 눈에 밟혀 애가 끓고 곁에 남은 세자식도 못난 어미 탓에 고생한다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일고 어미로서 제 구실 못해 준 탓에 가슴이 미어진다. “엄마가 생각이 짧았다. 어린 너거를 내비러두고 그렇게 미친 꼴을 하고 떠돌아 댕겼으니... 어린 것들이 무신 죄가 있다고 그 고생을 시켰는지. 아매도 내 눈에 뭐가 씌었던갑다.” 묵묵히 앉아 어미의 하소연을 가만히 듣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미안한 마음과 애끓는 마음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어미의 마음은 미어지게 아팠다. 모녀의 서러움을 달래어 주려는 듯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해가 마지막 빛을 발하며 마루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조금은 벗어났는지 해가 바뀌면서 사람들의 생활은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여전히 굶주린 이들은 동냥질을 다니며 이집 저집을 기웃 기웃거렸다. 언제는 안 그랬던가. 다만 전쟁 통에 생겨난 고아들의 수가 늘다 보니 거지들의 수가 더 늘어났던 것일 뿐 살기 각박한 세상에서 그들의 존재는 항상 있었던 일이었다. 시간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다. 반년을 넘기고 어느덧 새해가 밝아 설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을 돌아보며 재기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덕분에 마을도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새해맞이 준비를 위해 썰렁했던 장터에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풍년이었던 시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으나 시장을 오가며 오랜만에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이 흥을 돋웠다. 희연도 오랜만에 장에 나왔다. 소박하게나마 제사준비를 위해 장을 돌며 상에 올릴 물건들을 흥정하여 사서 들고 나오다 신발장사 앞에 멈춰 선다. 아이의 발에 맞을 만한 신발을 이리저리 골라보며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한 켤레 집어 들어 셈을 치르고는 장을 빠져 나온다. 과수원 집 대문 앞에 서서 현옥이 목을 빼고 과수원 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뚝방길로 접어들어 걸어오는 어미의 모습을 보고는 신이 나서 뛰어 내려간다. 들떠 있는 마음을 따라 달음질도 신이 나서 뛰어간다. “엄마.” 천천히 걸어오던 희연이 맞은편에서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는 싱긋이 웃음을 짓는다. 어느새 현옥이 어미의 곁에 찰싹 달라붙으며 어미의 눈치를 살피고는 묻는다. “엄마. 내 신발 사왔어요?” “그래. 마처럼 신발장사 한군데 나와 있길래 사가지고 왔다.” “와! 신난다. 나도 이제 새 신발 신고 다닐 수 있다.” 현옥이 신이 나서 입이 귀에 걸리며 어미의 짐 꾸러미 속에서 신발이 든 봉투를 받아 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쳐 집으로 들어와 우물가에 앉아 발을 깨끗이 씻고 물기를 닦아내고는 새 신을 꺼내어 신어본다. 때 묻지 않은 하얀색 운동화가 아이의 얼굴만큼이나 눈이 부시게 빛난다. 뒤따라 들어온 희연이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현옥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주위가 온통 교교하게 가라앉은 설날 아침. 차례 상을 차리느라 분주한 희연을 도와 찬옥이 차례음식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펼쳐진 상위에 올려진 음식들의 수가 빈약해 보이는 단출하고 소박한 제사상이 차려졌다. 상 앞에 희연과 아이들이 모두 함께 절을 올린다. “조상님요! 차림이 변변찮십니다. 난리 통이라 그라니 용서하시이소.” 희연이 술잔에 술을 부어 놓고는 두 손을 모아 빈다. “아버님요! 우리 정옥이 부디 무사하게 집으로 돌아 올 수 있게 도와주시이소. 길 떠난 정옥아버지 정옥이 찾아 같이 돌아 올 수 있게 해주시이소.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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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상 앞에서 희연은 간곡하게 빌고 또 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기를 간절히 바라며. 희연과 아이들은 오지 않은 식구들을 기다리며 새해 설날을 우울하게 맞이하였다. 산자락 아래로 몰아치는 바람소리가 겨울의 끝자락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시간은 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겨울이라는 놈은 시간을 막아선 채 노골적으로 심술을 부려댄다. 외딴집 부엌아궁이속 불꽃은 활활 타오르지 못하고 무성한 잿더미에 갇혀 사그라질 듯 말듯 거리고 있었다. 장작을 더 넣어 불길이 일게 해주어야겠으나 땔감이 부족하여 불씨가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아궁이속 불길이 전혀 일지 않고 있으니 방안에는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아 냉한기운이 감돌았다. 아이들은 구들목에 깔아 놓은 두꺼운 솜이불을 한 자락씩 끌어안고 방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려 덮고 체온을 유지하려 애를 쓴다. 이불을 덮고 있는 몸은 그런대로 냉기를 막고 있었으나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얼굴은 냉기를 고스란히 받아 코끝이 시리고 입을 열 때마다 입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냉골 윗목에 홀로 앉아 희연은 낡고 헤진 옷들을 추려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물자가 더욱 귀해진 세월 탓에 먹을 것조차 구하기 힘이 드는데 누더기 옷으로라도 겨우 체면치레 할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삶이 버겁지는 않았다. 아침에 먹은 죽 한술로 뱃속의 허기를 겨우 달래고 아이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방구들만 차지하고 꿈쩍도 않는다. 별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요, 겨우 허기만 달래어 놓은 뱃속이 빨리 꺼질까 싶어 이불아래에서 발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차가운 윗목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어미의 손놀림을 유심히 바라보며 찬옥이 묻는다. “엄마! 엄마는 안 춥나?” “그래. 엄마는 괜찮다.” 대답은 그랬으나 방문 쪽에서 새어 드는 바람으로 온기를 잃은 방안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어깨가 시리고 등짝이 서늘하였다. 바늘을 잡고 있는 손끝이 시려 감각이 무디어 진다. 그래도 손은 멈추지 않고 바늘귀를 잡아 헤진 옷을 열심히 깁고 있다. 스스로 고행을 자초하는 것일까? 몸의 고달픔으로 마음을 비울 수가 있으니 잡념을 없애 보고자 희연은 바느질로 수행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야무진 손끝에서 춤을 추듯 노니는 실과 바늘의 향연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찬옥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을 해놓고도 정작 무엇을 물어보았던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이의 질문으로 잠시 머릿속으로 잡념이 들어 바늘을 손에서 내려놓는다. 어미의 손놀림이 멈추자 구들목에 들어앉은 아이들이 이불을 끌고 와서는 한 자락을 들어 어미의 다리위로 살포시 덮어준다. “야들이 와이라노?” “엄마도 이불 덮고 해라.” 찬옥이 제 손으로 어미의 다리 위에 올려놓은 이불을 다독이며 말한다. 어미를 생각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어미는 괜스레 핀잔을 준다. “구들목 식는다. 저리 안 내려가나?” 다리를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내며 다시 바늘을 집어 든다. 그래도 어미의 내침에 아랑곳 않고 오히려 막내 경현이 어미의 다리 위에 머리를 얹고 누워버린다. “이 다리는 내꺼다.” 어미의 한쪽다리를 잡고서 끌어안는다. “야들이 참말로 와이카노?” 아이들은 어미가 뭐라 해도 좋은지 우르르 몰려 어미의 다리로 덤벼들며 대꾸한다. “엄마가 좋아서 그런다.” 서로 어미를 차지하겠다며 행복한 실랑이를 벌인다. 희연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들을 보면서 복잡한 감정이 솟구쳤다. 이 어린것들이 부모를 잘 못 만나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다는 안타까움과 잃어버린 자식을 찾겠노라 남은 자식을 버려두었던 미안함. 그리고 어미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엉켜버린 제 감정에 혼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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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이들은 어미를 미워하지 않고 이렇게 곁을 지켜주고 있으니 고마운 마음이 더해졌다. 애정이 담긴 표현을 못해줘도 어미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만을 향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고 그런 마음을 말로 표현 안 해도 잘 알고 있기에 아이들은 어미를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 것이다. 외딴집에 남아있던 가족들이 그렇게 기나긴 겨울을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고 있는 동안 잃어버린 딸의 행방을 찾아 삼천리를 헤매고 다녔던 근호가 집으로 돌아왔다. 때에 찌든 군복을 입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근호. 마당에 나와 놀고 있는 현옥과 경현을 보고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른다. “현옥아! 경현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초췌한 모습의 아비가 마당에 서있었다. 별안간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희연이 부엌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마당으로 부리나케 뛰어나와 근호를 맞이한다. 남편의 안부보다 잃어버린 딸의 소식이 더욱 궁금하여 얼굴을 보자마자 정옥의 행방을 묻는다. “정옥아버지! 무사했는교? 정옥이는 우리 정옥이 소식은 들었는교?” “역시 임자도 모르는 구나.” 하며 한숨을 내쉬고 마루가 무너지듯 앉는다. “국군들 따라 북쪽 끝까지 올라 가봤는데도 우리 정옥이는 못 찾았다. 가는 곳곳에 잡힌 포로들마다 얼굴을 확인해 봤는데도 정옥이 흔적도 안 보이더라. 대장님 덕에 총살직전의 포로들까지도 보았고 미처 못 보여주었던 포로들은 죽은 다음에라도 확인해보라고 맴을 써주길래 죽은 시체 뒤져가며 정옥이를 찾았는데도 그 아 모습은 아무데도 없더라. 결국 아무 소식도 못 가지고 빈 몸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기대했던 희망의 불씨마저 꺼져버리고 희연은 망연자실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정옥이 죽었다는 확인만 하고는 돌아 올라고 했는데... 죽은 포로들 얼굴 확인할라꼬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내려다보고 엎어져 죽은 사람 뒤집어 보는 것도 간담이 서늘해져 못할 짓이더마. 그래 시신들마다 얼굴 도장을 찍었는데도 우리 정옥이는 결국 못보고 돌아왔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으로 집에 돌아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헛된 일이 됐구마.” 근호가 긴 한숨을 내쉬며 먼 산 위의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비질이 깨끗이 되어 있는 하늘은 티끌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했다. “아이고. 불쌍한 것! 가족이 얼매나 그리웠겠노! 죽었으면 그렇구나 생각이나 하제. 이북으로 끌려가는 것만 봤어도 이래 애타게 찾지 않을 긴데.아가! 어데 있는 기고? 그래 착한 니가 이 에미 속을 와 이리도 애가 타게 만드노? 정옥아! 불쌍한 우리 정옥아!” 소리 없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희연의 뺨을 적신다. 어미의 눈물을 보는 순간 아이들도 서러워 같이 울음을 운다. 사라진 정옥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어미를 대신해 아이들은 정옥을 믿고 의지하고 따랐는데 그런 기둥이 사라져 버렸으니 동생들에게 나눠주던 사랑이 사라졌으니 삼남매는 그리움에 목 놓아 울음을 운다. 피붙이 혈육의 정이랄까 뿌리 깊숙이 박혀있는 뜨거운 무언가가 자꾸만 가슴속을 헤집어댔다. 그 뜨거움이 자꾸만 목구멍에 차올라 눈물바람을 일으킨다. 그날, 근호가 집으로 돌아 온 날, 정옥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날, 과수원 외딴집은 초상집이 되었다. 희연은 그렇게 행방불명이 된 딸을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겨울을 보내고 봄이 시작되면서 희연내외는 다시 과수원을 돌보기 위해 일을 시작하였다. 뒷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과수원 길을 오가며 생업을 위해 일터로 나서고 있었다. 작년 여름에 강원도에서 피난을 나선 이들은 아직도 과수원에 머물고 있었다. 기나긴 겨울을 움막 안에서 서로의 체온을 난로 삼아 의지하며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내고 햇살 따스한 봄을 맞이하였다. 과수원을 오가며 그들의 삶을 지켜보던 내외의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집 없는 피난민들이 과수원 한 귀퉁이에 모여 살고 있는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외딴집 아래채를 그들에게 내어 주기로 한다. 외롭기만 했던 집안이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되자 아이들도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희연에게는 이웃이 생겼고 아이들에게는 친구가 생겼으니 집안에도 다시 생기가 도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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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라고 그들은 서로를 도우며 정을 나누며 살고 있었다.

이른 봄, 겨우내 얼어붙었던 흙과 씨름하며 말라빠진 수목에 거름을 놓고 있는 희연의 등 뒤에서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뜬금없는 인사말에 희연이 등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본다. “아이고. 이게 누꼬?” “예. 접니다. 오순경요.” “그래 맞다. 오순경. 살아 있었네. 무사했구마. 그래 전쟁 통에 얼매나 고생을 했소?” 집나간 자식이 돌아 온 듯 반가워하며 희연은 오 순경을 맞아주었다. “뭐 그렇지요. 여기는 별고 없었십니까?” “와 아이라요! 마지못해 목숨만 붙어 있었구마. 그라믄 다시 곡강지서로 온 깁니까?” “아입니다. 지금은 부산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우째됐든 얼굴 보이 참 반갑구마.” “예.” 오순경은 멋쩍은 웃음을 띠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희연을 바라보았다. 잠시나마 자신을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지어주는 희연을 보며 오순경은 머뭇머뭇하다 수줍게 입을 연다. “저... 아주머니! 정옥씨 잘 지내지요?” “…….” 희연이 아무런 대답을 않자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희연에게 털어 놓는다. “저번에 저하고 한 약속 잊지 않으셨지요? 제가 그 약속 지킬라고 왔습니다.” “…….” “실은 제가 정옥씨한테 장가들라고 부산에서 한걸음에 달려 왔습니다.” “오순경이요?  그때는 동생한테 시집보낸다 하지 않았나?” “차마 지 입으로는 쑥스러워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 그래서 자리 잡고 나면은 꼭 다시 찾아와 혼인 승낙 받을라고 벼르고 별러서 온깁니다.” 또다시 쓰라린 고통이 희연의 여린 마음을 후벼 파고들었다. 간신히 추슬러 두었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부터 고이고 이내 흐느끼며 오순경을 질책한다. “이사람아! 그럴거로 와 인자서 왔노? 어이? 불쌍한 우리 정옥이를 우짜면 좋으까? 우짜면... 흐흐흑.” 원망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서럽게 우는 희연을 오순경은 의아해하다가 무엇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묻는다. “정옥씨한테 무신일 있는 겁니까? 아주머니! 말씀 좀 해보이소.” “내 죄가 크다. 다 내 죄라.” “뭡니까? 아주머니. 답답해 죽겠습니다.” “우리 정옥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오순경이 우리 정옥이 좀 찾아 주소. 내 이래 부탁 좀 하자.” “무슨 말씀입니까? 정옥씨가 우째됐다는 겁니까?” 희연이 울먹거리며 다그치는 오순경에게 정옥이 북으로 퇴각하는 인민군들의 손에 끌려간 얘기를 들려준다. 제 아비가 북쪽까지 쫓아 올라가 딸의 행방을 찾았으나 결국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다시 돌아왔다며 오순경을 붙잡고 하소연을 한다. 말없이 얘기를 듣고 있던 오순경, 자신도 모르게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옆에 서있는 나무를 향해 주먹을 날린다. 부들거리는 주먹에 힘을 실어 죄 없는 나무를 향해 두세 번 연달아 주먹질을 해댄다. “오순경! 그만하소.” 살점이 떨어져 나간 오순경의 주먹을 부여잡으며 희연이 그의 주먹질을 말렸다. “그렇게 내가 아무데도 보내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어째서...어째서... 잃어 버리냐 말입니다. 내가 정옥씨를 얼마나 좋아 했는데...” 오순경의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가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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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사람 만들라고 그렇게 정성을 드렸는데... 과수원에 드나든 것도 다 정옥씨한테 눈도장 찍을라고 그래 열심히 찾아 다녔던 건데...어째서...어째서... 참말 너무 하십니다.” 강인해 보이던 사내의 눈에서 한줄기 굵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이 사람아! 아이고 이사람아! 그래 마음에 있었으면 언지라도 줄 것이제 와 혼자 속앓이를 했더노? 내라도 자네 맘 알았더라면 생때같은 내 자식 이래 허무하게 가슴에 묻지는 않았을꺼 아이가? 아이고 불쌍한 내새끼! 에미 가슴에 대 못을 박는구나. 정옥아! 아이고 정옥아!” 희연의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딸의 이름을 불러댄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불러보아도 아이의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미치도록 가슴에 사무쳤다. 한없는 서글픔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울어도 울어도 눈물은 마르지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희연 앞에 오순경도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거린다. 애써 울음을 참는 듯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본다. 젖은 눈을 깜박거리니 붉어진 눈시울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오순경은 그렇게 잠시 자신을 추스르며 장승처럼 서있다 간다는 인사도 없이 과수원 길을 내려가 버렸다. 뒤에 남은 희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북받치는 설움을 한없이 토해 내고 있었다.

전쟁이 사그라지면서 희연의 과수원에 머물렀던 피난민들도 하나 둘씩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사람들로 북적이던 과수원도 다시 예전처럼 고요해졌다. 학교는 다시 정상화되고 배움의 의지를 불태우던 현옥이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야전병원으로 변해 버린 학교는 여전히 부상당한 군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보니 학교의 교실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아이들의 공부할 장소가 부족해진 탓에 교실 하나에 세 학반이 나누어 쓰는 사정이 되었다. 한 학반씩 돌아가며 하루는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이튿날은 야외로 곤충채집을 나가고 그 다음날은 또다시 산으로 그림을 그리러 나가고 그렇게 아이들은 떠돌아다니며 공부를 해야 했다. 현옥은 그래도 좋았다.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경현의 손을 잡고 기쁜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그 행복감도 잠시 전쟁 통에 한 해 농사를 못 짓고 걸러버렸기에 이듬해가 되어 형편은 점차 어려워지고 곤궁한 집안 형편 탓에 아이들은 월사금을 내지 못하여 등교만 하면 월사금을 가져오라는 독촉에 시달리게 된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만큼의 철이 든 현옥이 힘들게 일하고 들어오는 부모에게 차마 월사금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아무 일 없는 듯 입을 다문 채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경현이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제 누이처럼 눈치라는 것을 알 나이도 되었건만 막내라 어리광만 부리며 하고 싶은 말을 꼭 입 밖으로 뱉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기에 부모를 보자마자 현옥이 입 다물고 있던 학교에서 월사금 가져오라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꺼낸다. “엄마! 내일 월사금 가져가야 한다.” “그래. 엄마도 알고 있다.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거라. 이번 보리농사 되는대로 월사금 마련해 주꾸마.” “치이! 난 그라믄 내일 학교 안 갈거다.” “와 학교를 안 간단 말이고?” “선생님이 출석부를 때마다 월사금 자려오라 하는데 맨날 그라니 내는 챙피해서 학교 가기가 싫다.” 경현이 시무룩해하며 토라져 버린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근호가 나서서 아들을 달랜다. “경현아! 가서 선생님한테 잘 말씀 드려 보그라. 이번 보리농사만 잘 되면 꼭 월사금 챙겨 주꾸마.” “…….” 아비가 다독여 주자 아이는 아무 말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경현을 달래어 놓고 근호는 묵묵히 바닥에 엎드려 책을 펼쳐놓고 있는 현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아이의 상황이 똑같을 진데 아무 일 없는 듯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현옥이 아비의 마음에 걸렸으나 그런 딸에게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하는 것이었다. 이 형편에 둘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 너무나 버거웠다. 한 아이는 포기를 해야겠기에 단지 여자아이라는 이유에서 현옥이 경현보다 밀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누구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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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우선이 되는 세상이다 보니 딸의 입지는 아들보다 적을 수밖에 없었다. 차마 대놓고 학교를 가지 말라고 하지 못하니 부모의 심정도 오죽하겠는가! 그런 부모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현옥은 한 번도 때를 쓰지 않았다. 눈치가 빨라진 현옥은 스스로가 감내하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다음날, 등교를 위해 현옥이 집을 나선다. “경현아! 학교 가자.” 방안에서 나올 생각을 않고 미적거리는 경현이 누이의 부름에 성이 난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내 월사금 안주면 학교 안갈거다.” 아이의 때 쓰는 소리를 들었는지 희연은 물기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면서 부엌에서 나와 방안에 들어앉은 아이를 향해 소리를 친다. “경현이 얼른 학교 안 갈기가?” “월사금. 월사금 안 주면 안갈거다.” “엄마가 어제 얘기했제. 어련히 알아서 줄거라고. 퍼뜩 가방 들고 안 나오나!” “싫다. 안 간다.” “니 참말로 이랄기가?” 한참동안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다 때를 쓰는 아이를 겨우겨우 등 떠밀어 제 누이 옆에 세운다. “아앙! 가기싫다. 안 갈기다.” “이자슥이. 니 혼 좀 나볼래?” 몸을 비비적거리는 아이의 등짝을 후려치며 대문을 향해 떠민다. “히잉! 엄마 밉다.” 맞은 것이 아팠던지 어미를 향해 빽 소리를 지르고 누이를 앞질러 대문을 나가버린다. 현옥이 인사를 하고 경현을 쫓아 과수원 길을 내려간다. 경현은 어미가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뚝방길을 가는 내내 울면서 어미가 밉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외딴집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쯤 아이는 이제 때를 써도 봐 줄 이가 없다는 것을 느꼈던지 앞서가는 제 누이를 쫓아 부지런히 걷는다. 경현이 때 쓰는 바람에 등교가 늦어 지각을 하게 된 현옥이 동생이 오건 말건 걸음을 재촉하며 앞서 걸어간다. “누부야! 같이 가자.” 경현이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제 누이와 보조를 맞추려 힘을 뺀다. “니 때문에 학교 늦었다. 퍼뜩 따라 온나.” 현옥의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겨우겨우 지각을 면하고 학교에 도착한 아이들은 각자의 반으로 들어가 수업준비를 한다. 아침 조례시간.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의 출석을 부른다. 현옥의 차례가 왔다. “박 현옥.” “예.” “현옥이는 월사금 가지고 왔나?” 현옥이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지며 대답을 한다. “저... 아버지가 보리농사 잘되면 줄거라 하셨는데요.” 현옥의 대답에 반 아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담임선생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학교 규칙이 우선이다 보니 수치심을 느끼는 아이를 향해 뼈아픈 소리를 내뱉는다. “현옥이는 월사금 가지고 올 때까지 수업을 못 듣는다. 그러니 책가방 싸서 집으로 가거라.” “예.” 아이는 저항 할 힘이 없었다. 우는 것도 창피해서 울컥하는 것을 참으며 눈물을 삼킨다. 양 어깨가 축 늘어져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하고는 책 보따리를 챙겨 교실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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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은 교실에서 쫓겨나 딱히 갈 곳도 없었다. 집으로 가자니 부모가 걱정을 할 것이고 그러다 영영 학교를 다니지 말라 할 것만 같아 차마 발길이 집을 향하지는 못했다. 수업은 듣지 못해도 학교에 있고 싶어 혼자서 운동장을 배회한다. 쉬는 시간이 되어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나오고 현옥의 단짝인 정숙이 혼자서 운동장을 배회하고 있는 현옥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현옥아! 니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라. 수업 끝나면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숙제하자.” 현옥이 기가 살아 난 듯 정숙의 얼굴을 보며 밝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알았다. 수업 마칠 때까지 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께.” “어. 끝나면 내가 제일 먼저 뛰어나오께.” 현옥이 고개를 끄덕인다. 현옥의 단짝친구 배정숙은 현옥과 같은 과수원집 딸이었다. 대를 이어 과수원 농사를 짓다 보니 흥해 읍내에서는 알아주는 부자였다. 유복한집안의 고명딸로 곱게 자란 정숙은 성격이 활달하고 모나지가 않아 반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단지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라고는 공부머리가 조금 딸린다는 것이다. 수업을 마친 어느 날. 정숙이 집에 가는 현옥을 쫓아온다. 학교에서 그저 대면 대면하는 사이라 현옥은 정숙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반면에 정숙은 현옥이 반에서 항상 일 이등을 다투는 모범생이었기에 질투라기보다는 그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에 현옥이 가는 길을 막아섰다. 자신의 앞을 막고 선 정숙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현옥은 가만히 서있었다. “야. 박현옥! 나는 니하고 같은 반 배정숙이다.” “알고 있다.” “내가 니한테 볼일이 있어서 그라는데 니 시간 좀 내라.” “무슨 볼 일? 내는 니한테 볼일 없는데.” “니가 아니라 내가 니한테 볼일 있다 안하나?” 정숙은 퉁명스럽게 대하는 현옥이 재미있는지 히죽히죽 웃으며 딴지를 걸었다. “…” 정숙의 태도가 말꼬리를 잡자는 거라 싶어 현옥은 입을 다물고 정숙을 노려본다. 그 눈빛에 아랑곳 않고 정숙은 현옥 앞에 서서 당당하게 얘기한다. “니 우리 집에 좀 가자.” “내가 와 너거 집에 가는데?” “아까 말 안했나? 내가 니 한테 볼일 있다고.” “글쎄 그 볼일이 머꼬? 뭔데 내가 너거 집에 까지 가야 하나 말이다.” “가보면 안다. 그라니 내 따라 온나.” 다짜고짜 명령질이다. 순간 현옥이 부아가 치밀었다. “야. 배정숙! 니가 머라꼬 내한테 명령을 하는 기가?” “야. 박현옥! 내가 언제 니한테 명령을 했는데? 나는 그냥 우리 집에 같이 가자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는 정숙이 현옥의 소매를 잡고 끌다시피 하며 현옥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현옥이 당황하여 처음에는 따라가지 않으려고 기를 썼으나 정숙이 하는 짓이 어딘지 모르게 귀엽게 느껴져 아무런 저항도 않고 소매를 잡은 손에 이끌려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과수원 외딴집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넓은 마당의 기와집이 눈에 들어왔다. 현옥이 경주에 살았던 종택이 문득 생각이 났다. 지금 보고 있는 정숙의 집이 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방문이 열리고 중년의 여인이 방에서 나왔다. 여인은 마루에 다가서는 딸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오냐. 정숙이 학교 잘 갔다 왔나?” “예. 엄마! 내 친구 데리고 왔다. 우리 반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현옥이다.” 현옥을 가까이 오라 손짓하며 정숙이 어미에게 친구라며 현옥을 소개시켰다. 현옥은 얼떨결에 정숙의 옆으로 다가서며 여인을 향해 수줍게 인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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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그래. 니가 현옥이구나. 우리 정숙이가 현옥이 칭찬을 많이 하던데. 정숙이 말대로 참말로 영리하게 생겼구나.” “…” “현옥아! 앞으로 우리 정숙이 공부 좀 잘 가르쳐 주고 집에도 자주 놀러 오그라. 아줌마가 맛난 거 많이 해주께.” “예? 예.”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있는 현옥의 손을 정숙이 잡아 당겼다. “현옥아! 내 방가서 놀자.” “으응? 응.” “엄마! 우리 방에서 놀 테니까 맛난 거 해주세요.” “알았다.” 현옥이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정숙이 하는 대로 이끌려 정숙의 방에 들어와 앉는다. 정숙의 얼굴에 장난기가 퍼진다. “헤헤. 현옥아!  많이 놀랐제?” “…” “사실은 내가 니랑 친구할라고 우리 집에 초대 한 거다.” “내랑 친구를 한다고?” “그래. 처음 학교에서 봤을 때부터 니가 좋았다. 그래서 내가 몇 번이나 니랑 친구 하고 싶어서 말을 걸었는데도 안쳐다 봐 줄길래 내가 니를 좀 약 올려주고 싶어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온거다.” “나는 니를 무시한적이 없다.” 현옥은 자신이 언제 정숙의 말을 씹어버렸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며 발뺌을 한다. “치이! 니는 몰라도 내는 다 기억한다.” “내가 언제?” “됐다. 지난 거는 그만두고 앞으로 내랑 친구 할거가 안 할거가?” “…” “봐라! 지금도 내 말 무시하면서.” “아이다. 그런거. 갑자기 니가 그러니까 내가 할 말이 없어 그러는 거다.” “그래? 그러면 잘 생각해서 대답해라. 우리 친구 하는 거가?” “알았다. 친구하면 되잖아.” “히히! 니 약속했다. 이제부터 내랑 친구다. 알았나?” “그래. 나는 정숙이 니하고 친구다.” 아이들을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방안이 떠나갈 듯 웃어댔다. 그렇게 정숙의 고백으로 서로 친구가 되어 버린 두 아이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진실한 우정을 쌓아갔다.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와 함께 정숙이 약속한대로 제일 먼저 운동장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는 현옥을 보고는 쏜살같이 뛰어온다. “현옥아! 많이 기다렸제?” “아니다.” “가자.”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교문을 빠져나갔다. 정숙의 집에서 맛있는 점심과 과수원에서 바로 따가지고 온 과일을 배불리 먹고 난 후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마치고 현옥은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월사금을 내지 못해 매번 등교하면 쫓겨나기를 여러 번 반복하니 경현이 이제는 대놓고 학교에 가지 않고 있었다. 어미가 월사금을 줄 때까지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결국 어미의 기를 꺾어 놓고야 말았다. 반면 현옥은 수업을 들을 수 없을망정 매일같이 학교로 등교를 한다. 제자리를 지키고 앉아 담임선생이 출석을 부르면 언제나 월사금 얘기가 먼저 나오고 준비해가지 못한 현옥은 매번 학급에서 쫓겨나 운동장을 배회한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매일 같이 등교하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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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르지 않았다. 그것은 오기도 자존심도 아니었다. 오직 배우고 싶은 욕심에 학교가 유일한 낙이기에 현옥은 오늘도 쫓겨 날 것을 알면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집념으로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완연한 봄이 시작되고 산과 들에는 온통 꽃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봄내음 솔솔 풍기는 길을 따라 걸으면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그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학교생활에 지친 아이들도 봄의 기운을 만끽하라고 학교에서 봄 소풍을 계획하였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소풍에 현옥도 가고 싶어 따라 나서기로 한다. 그날은 그래도 월사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쫓길 일은 없기에 아이들과 어울려 봄 소풍을 가기로 했다. 별 다른 놀이 문화가 있는 것도 아니라 매번 오르는 곳이 산이고 뛰어 노는 곳이 산이 건만 그래도 아이들은 소풍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떴다. 현옥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업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학교를 마치고 나와 부리나케 달려 집으로 들어서서 찬옥을 찾는다.  “언니야 1 찬옥이 언니야?” “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찬옥이 부엌에서 머리만 내밀어 밖을 내다보며 대답을 한다. 현옥은 마음이 급해져 마루 끝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간다. 점심준비를 하느라 찬옥이 제 딴에는 바쁘다.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마당과는 대조적으로 부엌은 앞뒷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어도 반쪽햇빛만 받고 있어 구석은 어두웠다. 아궁이에 올려놓은 검은 무쇠 솥에서 솔솔 김이 오르고 이어 밥 짓는 내음이 콧속으로 스며들어 허기지게 만든다. 현옥은 구수한 밥 냄새에 침을 꼴깍 삼키며 부엌일 하는 찬옥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작은언니야! 내 내일 소풍 가는데 도시락 좀 싸도.” 오전에 뚝방길에 나가 캐어온 나물을 손질하여 무쳐내느라 양념을 버무리는 손이 바가지 안에서 조물조물 거리고 있었다. “내일?” “어.” “밥은 보리밥 싸면 되는데 반찬이 장아찌 밖에 없는데?” “그래도 괜찮다. 그 걸로 도시락 좀 싸도.” “알았다. 언니가 내일 아침에 도시락 챙겨 줄 테니 소풍 갔다 온나.” “어. 언니야!” 현옥은 신이 났다. 도시락이야 아무려면 어떠냐 학교 행사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만도 기분이 좋은 것이다. 학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은 현옥과는 대조적으로 경현은 학교에는 취미가 없었다. 점심때를 알고 온 건지 땀범벅이 되어 마당으로 들어선 경현이 두 누이가 있는 부엌으로 와서 현옥을 부른다. “막내 누부야! 내일 소풍가나?” “어? 니 학교에 갔었나?” “아이다.” “그라믄 우째 알았노?” “우리반 아아들이 지나가면서 얘기해 줘서 알았다.” 찬옥이 양념 묻은 손가락을 제 입 속에 넣어 양념을 핥으며 경현에게 묻는다. “경현이 니도 내일 소풍 갈거가?” “…” 뭔가 마음이 불편한지 대답이 없다. “와? 싫으나?” 찬옥이 재차 확인하려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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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믄 내일 도시락 머 싸 줄건데?” “별거 없다. 보리밥에 장아찌가 다 다.” “칫! 그라믄 내는 소풍 안간다.” “와? 경현이 니 또 도시락이 챙피해서 못 가져가겠나?” 찬옥의 바른말에 찔렸던지 경현은 대답도 않고 방으로 들어간다. 공부보다는 노는 것이 더 좋은 아이였으니 당연히 소풍도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니 가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이 싫었던 경현은 초라한 자신을 들어내 놓기가 싫어 가고 싶은 마음을 접어버린다. 다음날 아침. 찬옥이 챙겨준 도시락과 사과, 고구마, 그리고 눈깔사탕을 책가방에 챙겨 넣고 소풍 갈 채비를 한다. 현옥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경현이 방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동생의 시선을 느꼈던지 준비를 마친 현옥이 경현을 향해 묻는다. “경현이 니 진짜로 안가나?” “응. 안간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동생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라지 말고 누부하고 가자.” “작은 누부보고 도시락 싸 달라고 할 테니까.” “싫다. 내는 안 갈거니까 누부 혼자 갔다 온나.” “…” 기가 죽은 동생의 모습에 마음이 쓰이기는 했으나 이내 대문을 빠져 나온 현옥은 신이 나서 폴짝거리며 학교로 향한다. 저마다 도시락과 먹을 것을 챙겨 들고 소풍을 가기 위해 아이들이 하나 둘씩 짝을 지어 학교로 들어섰다. 아침 조례를 마치고 각반 선생들의 인솔 하에 줄을 지어 아이들은 학교 앞에 우뚝 서있는 산으로 소풍을 떠났다. 현옥이 정숙과 손을 잡고 싱글거리며 아이들의 뒤를 따라 산을 오른다. 지난여름 초목을 울렸던 굉음이 사그라지고 따스한 봄기운이 산자락을 맴돌고 있었다. 열기를 머금은 대지가 숨을 토해 낼 때마다 아물아물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대지는 제 살 곳곳에 상처를 지니고도 신음 한 자락 내뱉지 않고 묵묵히 제 살덩이에 또 다른 생명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생명을 품어 안고 있었다. 대지란 놈은 그렇게 어미의 본능으로 만물이 생명을 잉태 시킬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고 또한 자신을 희생하며 숭고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대지 위를 아이들이 올라섰다. 집결지로 모인 아이들에게 주의사항을 일러 주고 각자 자유행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제 각각 짝을 이루어 숨 쉬는 산 여기저기로 흩어져 놀이거리를 찾아 헤맨다. 현옥과 정숙은 앞서가는 이들을 따라 산 정상에 오르기로 한다. 둘은 마냥 신이 나서 지칠 줄 모르고 산을 오른다. 높은 곳을 향해 오르고 오르며 체력이 고갈될 때까지 산행을 이어갔다. 숨이 턱에 차오르고 땀이 정수리에서 흘러 목 줄기를 타고 내렸다.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이었다. 두 아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끝내 정상에 올랐다. 먼저 올라온 몇몇 아이들이 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현옥과 정숙도 넓은 바위 위에 올라 가만히 섰다. 땀이 젖은 목덜미로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스쳐간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소매 끝으로 문지르고 두 아이는 서로 마주보고 서서 히죽거리며 웃었다. 웃다가 탁 트인 정면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야---호, 야---호.” 산으로 퍼져 나가던 울림이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 정숙이 옆에 서있는 현옥을 보며 웃었다. “현옥아! 재미있제?” “응. 정숙아! 우리 다시 한 번 해보자.” “그래.” 현옥이 손을 입가에 대고는 큰소리로 '야호'하고 외쳤다. 정숙도 현옥을 따라 손을 입가에 붙이고 같이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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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야--호--호--호--호.” 두 아이의 소리가 산으로 퍼져 다시 메아리친다. 그것이 그렇게 재미나던지 아이들은 까르르 숨이 넘어갈 듯 웃어 댄다. 어느덧 해가 머리 위로 올라섰다. 두 아이는 넓고 평평한 바윗돌을 자리 삼아 지친 다리를 뻗고 앉았다. 정숙이 오랜만에 흘린 땀 때문에 허기가 졌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준비해 온 도시락을 바윗돌 위에 펼쳤다. 정숙이 펼쳐 놓은 도시락은 역시나 부잣집 딸답게 먹음직스러운 찬들로 가지런히 나열이 되어 있었다. 현옥은 아무리 허물없는 친구라도 자신이 싸온 도시락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차마 정숙의 도시락 옆에 펼쳐 놓기가 민망스러웠다. “현옥아! 이거 먹어봐라. 우리엄마가 니하고 같이 먹으라고 싸주셨다.” “응. 그래.” 현옥은 도시락을 내려놓기 창피해 손에 들고 정숙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감추면서 밥을 먹었다. 그런 현옥이 불편해보였던지 정숙이 현옥에게 물었다. “현옥아! 와 도시락을 들고 먹노? 편하게 내려놓고 먹어라.” 현옥은 정숙을 바라보며 창피하여 수줍게 웃는다. “니 보기가 부끄러워 그란다. 나는 장아찌 밖에 못 싸왔다. 그래서 챙피해서 차마 못 내려놓겠다.” “아니다. 내가 너거 엄마 장아찌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제. 진짜 맛있더라. 우리 엄마는 장아찌 담글 줄 모른다. 나는 세상에서 너거 엄마가 담근 장아찌가 제일 맛있더라.” 그러면서 정숙은 현옥의 도시락에 담겨 진 장아찌를 집어 조그마한 제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린다. “현옥아! 진짜 맛있다. 니도 얼른 먹어봐라.” 정숙의 호탕함에 현옥의 불편한 마음이 가벼워졌다. 희연의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갈고 닦은 솜씨가 어디 가겠느냐마는 궁핍한 살림에 시늉만 하고 사는 처지라 맛을 고려하고 음식을 하지는 못했다. 단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습관이 되다시피 하다 보니 제 맛을 내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어미가 해 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정숙의 마음이 예쁘고 착해 현옥은 빈말이더라도 정숙이 맛있다고 해준 말이 고맙고 좋았다. 싸온 도시락을 맛있게 나누어 먹고 간식으로 가져온 사과와 고구마까지 배부르게 챙겨 먹고는 남은 눈깔사탕마저 돌로 쪼개어 한입씩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제 입보다 큰 사탕 때문에 양 볼이 미어터지도록 불쑥거려도 침을 삼키며 단맛을 즐겼다. 정상에 올랐던 아이들이 슬슬 집결지로 향하면서 현옥과 정숙도 그들을 따라 산을 내려온다. 경쟁하듯 정상에 오르느라 눈에 보이지 않았던 개나리 진달래 철쭉들이 산 중턱 여기저기에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하얀 꽃잎 흩날리는 아카시아나무에서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 현옥과 정숙이 아카시아 줄기를 꺾어 가위바위보를 하며 잎을 하나씩 떼어내는 놀이를 즐기는 사이 어느덧 산마루에 노을이 걸렸다. 집결지로 모인 아이들이 다시 산을 내려간다. 서편으로 기우는 해를 남겨두고 아이들의 봄 소풍은 끝이 나고 저마다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산에서 내려와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온종일을 붙어 지낸 단짝 현옥과 정숙이 서로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나누고 현옥은 지치지도 않는지 뚝방길을 신이 나서 걸으며 콧노래를 부른다. 하루 종일 지루하게 방구들만 지키고 있었던 경현이 누이가 오기를 기다리며 대문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저 멀리 뚝방길로 폴짝거리며 오는 누이를 보고는 경현이 반가워서 과수원 길을 내달려 누이를 마중 나간다. “누부야!” 반가워서 달려오는 경현이 맞은편에서 오는 현옥을 부르며 그 앞에 선다. “경현아! 내 기다리고 있었나?” “응. 누부야는 소풍 재미있었나?” “응. 재미있었다. 니는 뭐했노?” “내는 같이 놀 친구가 없어서 집에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다.” “친구가 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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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소풍 따라 갔다.” “경현이 니 많이 심심했겠다.” “응. 그럴 줄 알았으면 내도 소풍 따라 갈긴데... 누부야는 소풍가서 뭐 했는데?” 누이의 소풍 뒷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건지 하루 종일 혼자 지낸 탓에 말동무가 필요했던 건지 경현이 집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 현옥의 소풍얘기를 꼬치꼬치 캐묻는다. 혼자 두고 간 동생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탓에 현옥은 귀찮아하지 않고 물어 오는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을 해 준다. 서로 손을 잡고 과수원을 돌아 외딴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두 아이와 건너편 보리밭에서 나오던 아비가 마당 앞에서 서로 마주쳤다. 소풍을 다녀오는 딸을 보며 근호가 물었다. “현옥이 소풍 잘 갔다 왔나?” “예. 아버지.” “그래 재미있게 놀았나?” “예. 너무 재미있었어요. 진달래꽃도 많이 피어있어서 너무 예뻤어요.” “그랬구나. 우리 현옥이 예쁜 꽃도 많이 보고 왔구나.” “예.” 들떠있는 아이의 기분과는 반대로 근호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했다. 수확을 앞둔 보리농사가 겨우 한해 식량밖에 되지 않아 내다 팔 수 있는 것이 못되었다. 수확을 하면 이내 월사금을 마련해 주겠다던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으니 낙담 할 아이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실 근호의 근심은 아이들과의 약속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농사일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손이 들떠 버렸다. 허구한 날 땡볕아래 쭈그리고 앉아 땀을 쏟아가며 땅과 나무와 씨름을 해보았으나 일에 대한 보람은커녕 먹고 살기에 급급해지는 자신의 처지가 날이 갈수록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궁핍을 모르고 자랐던 지난 시절이 사실은 그리워졌던 것이다. 가장이라는 자리가 이토록 힘이 들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고 삶에 대한 무게감이 자꾸만 자신의 의지를 눌러버리는 것만 같았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한 평생을 무위도식하며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미래가 어디서부터 엉켜 버렸는지 하루하루가 절망의 나날들인 것만 같았다. 근호는 그렇게 며칠을 자신의 연민에 빠져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장롱 속에 넣어 둔 군복을 꺼내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들여다 보았다. 자신의 운명이 이 종이 한 장에 달려있다는 것에 희망을 품고 중대한 결심을 한 듯 비장한 표정까지 지었다.   늦은 저녁 고단한 몸을 누이기 위해 희연이 방으로 들어와 이부자리를 깔고 자리에 누우려 했다. 근호는 잠을 청하려 자리에 드는 아내에게 낯에 들여다보던 쪽지를 말없이 내밀었다. 희연은 잠자리에 들다 말고 남편이 내민 쪽지가 무슨 뜻인지 궁금하여 들여다보며 묻는다. “이기이 뭔교?” 종이쪽지를 펼쳐보며 남편을 바라본다. “정옥이 찾으러 다닐 때 쫓아갔던 그 부대 대장님이 내가 정옥이를 못 찾고 부대에서 떠나올 때 이거를 써서 내한테 주신기다.” 남편의 얘기를 귀로 들으면서 희연은 손에 펼쳐 든 종이쪽지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가지런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종이에 이름과 연락처 주소가 쓰여져 있었으며 그 아래에 네모난 인장이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딸을 찾을 목적에 군인 아닌 군인이 되어 대장의 끼니를 챙겨가며 뒷바라지를 하면서 북쪽 끝까지 쫓아 올라 갔었던 근호는 죽은 자들의 시신까지 들춰가면서 딸의 행방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결국 허탈함만을 안고 부대를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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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은 그 동안 정이 들었던지 자신의 뒷수발을 해주었던 근호가 아무런 성과 없이 떠나게 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부대를 떠나기 전날, 서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대장은 그 동안 근호가 보여주었던 성의에 보답을 하고자 자신의 연락처와 주소를 적은 쪽지를 건네주며 근호에게 이른다. “아저씨! 집으로 돌아가시면 가족들 만나보고 꼭 서울로 다시 저를 찾아오십시오. 그러면 내 성의껏 아저씨 식구들 살아갈 터를 마련해 드릴 테니 꼭 저를 다시 찾아오십시오. 이 종이를 가지고 차를 타면 차비도 받지 않을 것이니 차비 걱정은 마시구요.” 근호는 그렇게 하여 대장의 신상명세가 적어진 종이쪽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희연에게 그 사정을 털어놓고는 부탁을 한다. “임자! 내가 보리농사 마무리 지어놓고 일주일 뒤에 서울로 대장님 찾아 가볼라 하니 임자는 내 옷 좀 준비해 놓그라.” “알았으요!  그 동안 이핀 마음 변하지는 마소. 알았지요?” “걱정 말그라.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울에 꼭 취직을 할거니 임자 마음 놓고 있거라.” 남편의 뜻밖의 결심에 희연의 삶에도 한 가닥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어떤 일이 되었든 고된 농사보다야 낮지 않을까 희연은 기대를 품으며 긴밤 잠을 설쳤다. 며칠을 고된 농사일을 해가면서 희연은 몇 벌 안 되는 남편의 옷가지를 깨끗하게 빨아 정성스레 다려서 하나씩 준비를 해 두었다. 그 사이 근호는 식구가 한해 먹을 보리 수확을 끝내 놓고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서두른다. “내 가서 대장님 만나보고 빠른 시일 내에 연락을 할 기이 임자는 아아들 데리고 올라올 준비 하고 있그라.” “알았으요. 여 걱정 말고 이핀이나 잘 알아보고 하소.” “알았다. 그라믄 내 댕겨 오꾸마.” 그렇게 근호는 희연에게 희망을 안겨놓고 가벼운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멀어지는 남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희연은 속으로 다짐을 해본다. ‘그래. 인자 우리 식구 모두 서울 가서 전쟁의 아픔도 잊고 지난날도 잊고 새 출발 하는 기다. 뭘 해도 여 시골 보다야 나을 기다.’ 희연은 남편이 남기고 간 희망을 품고 기쁜 소식이 들려오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기다렸다. 보리수확으로도 월사금을 준비하지 못하게 되자 경현은 학교에 가는 것을 그만두고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에 재미를 붙여 밖으로만 나돌았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현옥의 집념은 쫓겨나는 상황이 되풀이 되어도 매일같이 학교를 찾아갔다. 교실이 부족하여 운동장 가장자리에 천막을 쳐놓고 간이 교실을 만들어 아이들은 공부를 하였고 현옥이 그 틈에 끼어 배우고자 했으나 월사금을 내지 못한 탓에 맨 뒷자리에 머리를 숙이고 숨어서 선생의 눈치를 보다 출석을 부르면 결국 대답도 못하고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오는 신세가 되어도 자신의 유일한 생활이 되어 버린 학교를 포기하지 못하고 그 수치스런 일을 매일 같이 반복했다. 수치심 많은 아이가 감당하기에 너무도 가혹했던 현실이었으나 현옥의 집념은 그 수치심을 뛰어넘어 배움의 의욕에 불씨를 당기고 있었다. ‘나도 아버지가 서울 다녀오면 학교를 다닐 수 있다. 그라면 열심히 공부해서 또 우등상 타야지.’ 현옥은 아비가 오면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 갈거라 믿으며 희망을 가졌다. 아이는 아이대로 희망을 품고 떠난 아비에게서 좋은 소식이 올 거라 기대하며 학교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희연은 나름대로 남편의 소식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올 연락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나날도 어느덧 반년을 넘겼다. 희연의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연락이 왔어도 벌써 왔어야 하는데 혹시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남편의 옛 버릇이 다시 도진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까지 더하여 남편을 기다리는 나날들이 좌불안석이었다. 애타던 마음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을 무렵 경주에서 살고 있던 희연의 사촌 올케 오씨가 과수원을 찾아왔다. 경주를 떠나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올케의 등장이 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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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반가웠다. 친정어미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래도 사람의 발길이 드나들던 곳이 이제는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이 없이 적막했던 과수원 외딴집에 찾아온 인척이 있었으니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희연이 들어서는 오씨를 보며 한달음에 달려가 기쁨을 표한다. “언니! 우짠일입니까?” “애기씨요! 그 동안 잘 지냈는교?” 머리에 이고 온 짐 꾸러미를 받아서 마루에 내려놓으며 희연은 반가움에 오씨의 손을 잡는다.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사는 것에 급급했던 이들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그 기쁨이야 어디에 비할까! 두 사람은 그 간의 사정얘기를 물어가면서 서로의 회포를 나눈다. “그래, 전쟁 통에 우째 지냈는교?” 오씨가 희연에게 물었다. 희연은 오씨에게 전쟁이 난 후 피난을 못간 얘기서부터 시작해 정옥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반정신이 나간 사람이 되어 아이를 찾아 다녔던 이야기까지 하소연하듯 풀어 놓는다. 허망하게 잃어버린 딸을 생각하자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희연의 눈물에 오씨도 옷소매를 붙들어 눈물을 찍어낸다. 그렇게 잠시 눈물을 보이다 애써 참았던 고통이 터져 나오는 것을 더는 헤집어 내고 싶지 않아 희연은 화두를 돌려 올케의 생활에 대해 묻는다. “언니는 우째 지냈는교? 장사는 잘 되고요?” “야아. 머 그럭저럭 먹고 사는 거는 됩니더.” “잘 됐구마요. 그래 여 까지는 우짠 일로 온깁니꺼?” “포항에 볼일 있어 내리왔다가 가는 길에 애기씨 얼굴이나 볼라고 들렀십니더.” 여전히 소금장사는 잘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제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뒷전에 물러나 앉아 뒷방늙은이 신세가 되었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경주에도 전쟁은 일었으나 자신들은 그래도 남들에 비해 피해를 덜 봤다며 모든 것이 천운이라며 전쟁 당시의 상황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얘기를 주고받으며 제 설움에 못 이겨 눈물을 보이다가 마저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해 끝을 볼 듯이 밤을 새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오씨는 불연 듯 무슨 생각이 났던지 희연에게 근호의 소식을 물었다. “그란데 정옥아버지는 애기씨하고 아아들을 여 두고 와 경주에 가있는 깁니까?” “야? 우리 정옥아버지가 경주에 있다고요?” “예에.” “그랄리가 없는데...” “…” “언니가 잘못 본거 아입니까?  그양반 서울 간 지 반년이 넘었는데요? “무신? 내가 여 오기 며칠 전에 장에서 만나 안부까지 물었구마요?” 오씨가 전해주는 새로운 사실에 희연이 놀라며 남편을 만난 얘기를 자세하게 묻는다. “그래 그 양반 거서 뭐하고 있다고 하데요?” “정옥아버지 말로는 정옥이 할매가 시장에서 하던 장사 그만 접게 하고 그거 팔아서 가정집 하나 마련하고 그 근처에 텃밭사서 채소 기르면서 지내고 있다 하데요. 그래 아아들하고 애기씨 안부 물었더만 흥해에 아직 있다 캐서 내가 내려 와 본 기라요.” 희연의 얼굴이 순간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당황한 오씨가 희연을 살피며 묻는다. “애기씨! 괜찮은교?” 괜찮다고 대답을 해야 했으나 말문이 막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달을 기대하고 고대했던 바램이 한 순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 몇 개월 동안 꿈으로 키워왔던 모든 것들이 올케의 한마디에 일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잃어버린 자식은 가슴에 묻고 서울 가서 남은 자식들 키워가며 행복한 가정 꾸려보겠다고 힘든 고생 견뎌가며 좋은 소식 오기를 학수고대 했건만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 했다. “아이구. 이 일을 우짜노! 애기씨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 갑다. 우짜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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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씨는 되레 당황해 하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한다. 들떠있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고만 오씨의 말을 되씹으며 희연은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희연이 맥이 빠져버린 사람처럼 늘어져 방문을 열고 나와 부엌으로 들어섰다.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들이 엉키어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어슴푸레 비치는 여명아래 맥없이 손을 놓고 앉아 있다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일어나 부엌일을 시작한다. 사그라진 불씨를 살려 아궁이에 올려놓은 밥솥에 밥을 지으며 아침식사 준비를 한다. 망연자실해 있는 희연을 밤새 옆에서 지켜보던 오씨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여 뒤척이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였으나 마음이 불안하여 일찍 잠에서 깼다. 희연이 올케를 위해 조촐하게 차려진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언니. 일어나셨는교?” “야. 애기씨는 잠도 못 잤지요?” “…” “모처럼 오싰는데 찬이 변변찮쿠만요.” “우리 사이에 뭐 그런 소리를 합니까?” “언니 입에 맞을란지 모리겠네요. 시장 할 긴데 한 술 떠 보이소.” “야. 애기씨도 같이 드입시다.”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은 방안에 두 사람의 밥숟가락 드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울린다. 희연의 밥숟가락을 든 손이 더디게 움직이다 이내 멈춘다. 밥을 먹는 내내 눈치가 보였던 오씨가 숟가락을 내려놓는 희연이 걱정스러웠다. “애기씨! 속 그만 끓이소. 이러다 애기씨마저 병이라도 나믄 아아들은 우짭니꺼?” “언니!” “야아. 말해 보이소.” “언니... 내 부탁 좀 들어 주소.” “무신 부탁요?” “언니 경주 가실 때 우리 찬옥이 좀 데려가 주소.” “야? 아아는 와요?” “아아들 아버지 사정이 우째 된 건지 내가 좀 알았시면 해서요.” “어디에 있는지 주소도 모르면서 그 아가 우째 찾는다고요?” “길눈이 밝아 찾을 깁니더. 언니가 알고 있는 데 까지만 일러 주면 됩니더.” “그거야... 그래 하지요.” 사실이 어찌 되었든 희연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밤새 생각을 해 보아도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어 부랴부랴 생각을 끊어 내고 사실 확인을 위해 경주로 찬옥을 올려 보내리라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오씨의 허락이 떨어지자 희연은 찬옥을 불러 아비를 찾아가 보고 오라 이른다. 다음날, 오씨는 아침 일찍 서둘러 찬옥을 데리고 경주로 떠났다. 오씨를 따라 나선 찬옥의 나이 이제 열일곱이었다. 제 나이만큼 철이 든 찬옥이 어미의 심부름으로 아비를 찾아가는 길이긴 하나 어미의 말을 듣고 실상 자신도 아비의 행동에 대한 배신감을 느껴 따지고 싶은 마음에 먼 길을 마다 않고 따라 나섰던 것이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가족을 내팽개쳐놓고 소식도 없이 경주에 눌러 있다는 소리에 아비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무슨 속사정으로 그랬는지 내 꼭 아버지한테 따질 기다.’ 속으로 다짐을 하고 기차에 오른 찬옥이 오씨와 나란히 앉아 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경주에 도착한 두 사람은 기차에서 내려 근호를 보았었던 장터로 찾아갔다. 붐비지 않는 장터거리를 돌아다니며 아비의 모습을 찾으려 했으나 장터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차여정에 피곤해진 오씨가 잠시 집에 들러 쉬었다 가라는 것을 찬옥은 마음이 급해 조심이 뿌리치고 아비를 찾아 나서려 했다.   “아가! 참말로 니 혼자 찾을 수 있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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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 걱정 마시고 들어가세요. 여 장터에 할머니를 아시는 분이 있을 거니 수소문 해보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알았다. 그라믄 몸조심하고 무신 일 있으면 내한테 찾아 오그라. 알았나?.” “예. 그라겠습니다. 몸조심하시고 나중에 다시 뵙겠십니다.” “오냐.” 그렇게 둘은 장터에서 짧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찬옥은 다시 장터골목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낯익은 얼굴을 찾아다니며 정씨부인의 소식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조모가 장사를 했다던 곳을 찾아 그 주위 사람들에게 조모의 행방을 묻고 물어 몇 시간을 헤매다 겨우 조모의 행방을 찾을 수가 있었다. 마지막 행선지를 알고 있는 이의 말을 되씹으며 찬옥은 조모의 집을 찾아 나섰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가로워 보이는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기와지붕들 사이로 띄엄띄엄 초가지붕이 몇 채 눈에 띄었다. 초가지붕들이 즐비하던 마을과는 사뭇 다르게 고요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마을 어귀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 기와집 몇 채를 지나쳐 어느 기와집 대문 앞에 찬옥이 다가가 섰다. 화려한 단청은 아니었으나 기와를 새로 얹은 듯 깨끗하게 수리가 된 집이었다. 빼꼼히 열린 대문을 밀고 들어서니 아담한 크기의 마당이 펼쳐져 있고 마당을 중심으로 기역자로 놓여 진 안채와 별채가 부엌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연결 되어 있었다. 집안은 깨끗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 집은 비었는지 고즈넉하였다. 찬옥이 호기심에 마당으로 들어서 안채와 별채를 기웃거리고 있는 사이 대문으로 정씨부인과 근호가 나란히 들어오다 두 사람의 눈이 마당을 서성이는 찬옥을 발견하고는 놀란다. 정씨부인은 갑자기 나타난 손녀의 얼굴을 보자 일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근호 역시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애매하게 서있는 세 사람 중 침묵을 깬 건 근호였다.  “찬옥이 니가 여를 우째 알고 왔노?” “아버지는 여서 뭐하고 계시는 깁니까?” 아비의 물음에 먼저 대답은 않고 다짜고짜 따지고 드는 손녀가 눈에 거슬렸던지 정씨부인이 오히려 찬옥에게 큰소리를 친다. “니는 어른을 봤시면 인사부터 하는 기이 예의라는 것도 모르나? 가시나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꼬! 어?” 조모의 일침에 찬옥은 화를 누르며 조모를 바라보고 인사를 올린다. “그간 안녕하셨십니까?” 마지못해 문안을 올리는 손녀를 보며 엎드려 절 받는 꼴이라 싶었던지 정씨부인은 부아가 치밀어 말이 거칠게 나간다. “내가 안녕했을 성싶나? 와? 니 에미가 애비 찾아오라 카더나? 흥! 어림없다. 니 애비는 여서 내랑 살기로 약속했으이 니 애비 데리갈 생각일랑 하지도 말그라.” 이미 예견을 했던 건지 미리 대비책을 세워 두었던 건지 찬옥의 얘기를 듣기도 전에 정씨 부인이 먼저 선수를 치고 나온다. 어미와 자식 사이에 낀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지자 근호는 어미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어미의 입을 막으려 소리친다. “엄마! 그만 하소. 아아 앞에서 내 체면은 뭐가 돼요?” 늘 불만이었던 대차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 또다시 아들에게서 튀어나오자 정씨 부인은 못마땅해 하며 아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애비 니 입으로 한 약속이다. 그 약속 어기면 내는 두 번 다시 애비 얼굴 안 본다. 알겄나?” 어미의 으름장이 뜨끔했던지 근호는 찬옥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근호는 방으로 들어서 마주한 딸의 얼굴 보기가 민망해 비스듬히 돌아앉으며 딸의 시선을 외면한다. 찬옥이 그런 아비를 굵은 눈망울로 뚫어지게 응시하며 따지듯이 묻는다. “아버지! 서울 안갔어요?” “…” “엄마는 매일 같이 아버지 소식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버지는 와 여서 이라고 계시는 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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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져 묻는 딸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근호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꺼낸다. “내가 니를 볼 낯이 없다.” 말을 끊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 셔츠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담배연기 대신 긴 한숨이 근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아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딸을 보며 입을 연다. “막상 집을 나서고 서울로 갈라고 하다 보이 니 할머니 생각이 나서 인사라도 드리고 갈라고 들렀던 기이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노인네 혼자 계시는 모습을 보고 나이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기라. 그래 며칠만 지내고 서울로 간다 마음을 먹었는데 떠나는 날 니 할머니가 한사코 가지 말라고 붙잡으시니 내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붙들려 있다가 결국 이 꼴이 되고 말았다.” 근호는 자신의 변명이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다 싶어 다시 한숨을 짓는다. 아비의 변명을 듣고 있던 찬옥의 입술이 부르르 떨린다. 믿고 있던 아비에게 가족 모두가 버림을 받았다 생각을 하니 분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 다시 따지고 든다. “그라믄 엄마하고 우리는 뭔데요? 자나 깨나 아버지 소식만 기다리고 있는 우리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안들었습니까?” “누구를 원망 하겠노! 다 모질지 못한 내 잘못인 거를.” 자책을 하며 한숨을 내뱉는 아비를 보는 찬옥의 눈에 야속함이 묻어났다. 어린 자식들이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을 뻔히 아는 아비가 그런 자식들은 안중에 없이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 화가 나고 분했다. 찬옥이 분해 몸을 부르르 떨며 멸시의 눈으로 아비를 바라본다.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설움으로 바뀐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아비에게 화를 내본들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라 찬옥은 눈물을 삼키며 아비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딸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아비를 눈물 맺힌 눈으로 돌아보다 찬옥은 입술을 깨물고 방을 나선다. 아비의 방에서 나오던 찬옥이 툇마루에 걸터앉아있던 정씨 부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조모의 서슬 퍼런 눈빛이 찬옥에게로 향하자 찬옥은 건성으로 조모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대문을 빠져 나왔다. 슬픔에 잠긴 찬옥의 뒤로 서산을 넘어가는 해가 뒤따른다. 찬옥이 남편의 소식을 가져오기만을 기다리던 희연은 밤늦게 집으로 들어서는 딸을 보고는 마음이 다급해져 묻는다. “너거 아버지는 만나 봤나?” 지친 기색의 찬옥이 무심한 눈으로 어미를 바라본다. 초조해 하는 어미를 달래어 방으로 들어가서는 아비를 찾아가 만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딸이 전하는 소식을 듣고 있던 희연의 속에서 열이 치받는다. “사램이 우째 그래 무책임 하꼬? 가족들이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기라는 생각을 않았다는 기이 말이 되나?” 남편을 생각하니 너무도 황당하고 어의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 희연은 결국 화를 삼키지 못하고 병이 나서 자리에 드러눕고 만다. ‘아이고. 이일을 우짜노! 믿었던 남편마저 내를 배신하이 내가 누구를 믿고 살겠노? 친정도 풍비박산이 나고 오라버니 행방도 알 수가 없으이 내가 의지할 곳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고! 저 아아들이 불쌍해서 우짜면 좋노.’ 자리에 누워있는 희연의 속이 타 들어간다. 친정도, 시집도, 남편도 모두 잃어버리고 홀로 남겨진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능력 없는 어미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자 앞이 캄캄해져 온다. 희연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추스르지 못해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숨만 토해내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자꾸만 속에서 치미는 무언가가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는 것 같았다. 생각이라는 것을 멈추고 싶어도 머릿속은 온통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만이 가득했다. 그 분노가 자꾸만 쌓이고 쌓여 미움과 증오로 바뀌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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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째 애비라는 인간이 굶고 있는 자식들을 내버리고 자기네 모자만 살겠다고 생각을 하까? 우째 그리도 매정한지를 내 상식으로는 도대체가 이해가 안 간다. 허이구! 천하에 몹쓸 양반 같으니라고!” 생각할수록 남편의 행동이 너무도 괘씸하여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고통이 남편의 무책임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자 희연은 아이들을 아비에게 보내기로 작정을 한다. 처음에는 복수심에 불타 아이들을 볼모로 아비로서 책임을 지라는 으름장을 놓으려 했으나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 싶은 자책감이 들어 마음을 접었다 자신의 곁에 있어봤자 배고픔에 허덕일 아이들을 생각하니 그래도 아비에게 가 있으면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복수의 마음을 접고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남편에게 보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난 희연이 아이들을 부른다. 어미와 마주앉은 아이들을 찬찬히 바라보다 어미는 찬옥에게 이른다. “찬옥아! 니가 동생들 데리고 먼저 아버지한테 가그라. 그라믄 엄마가 짐 꾸려서 뒤따라 올라갈 기이까 가서 여 내려올 생각 말고 엄마 갈 때 까지 거서 기다리고 있그라.” “엄마하고 같이 가면 안 되나?” “엄마는 여 과수원일 마무리 짓고 올라 갈기다. 우선 너거들 먼저 가 있그라. 할무이가 머라 잔소리해도 꾹 참고 엄마 갈 동안만 고생 좀 하고 있그라. 알았나?” 아이들이 시모에게 구박 받을 것이 눈에 선하다. 그렇다고 능력 없는 어미 곁에서 배곯으며 지내게 할 수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아비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래도 자식들의 아비이니 설마 굶기기야 하겠나 싶은 안도감도 어느 정도 결심에 작용한 것은 사실이나 우선은 자신도 무엇을 해서든 돈을 벌려면 혼자의 몸이라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다 싶은 판단도 있고 해서 모든 것을 고려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어미에게 쫓겨 마지못해 아이들은 아비를 찾아 조모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찬옥이 다녀간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세 남매가 한꺼번에 나타나자 아비가 놀란 눈치다. “너거들만 왔나? 엄마는 안 온다 카더나?” 찬옥이 냉랭한 목소리로 아비의 물음에 대답을 한다. “엄마는 과수원일 정리해 놓고 올라오신다고 했어요.” 지켜보고 있던 정씨 부인의 입가로 비웃음이 일었다. “흥! 하맹 그랗지. 그냥 있지 않을 기라 생각했구마. 언제가 돼도 서방 찾아올 기라 생각은 했었다마는 그래도 이래 빨리 아아들을 보낼 줄은 몰랐구마.” 오붓하게 지내던 두 모자 사이에 불청객이 끼어드는 것이 못마땅한 듯 정씨 부인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며느리가 미운 탓에 손주들조차 곱게 보이지가 않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친 첫날부터 조모의 괄시가 시작되었다. 어미가 받아야 할 미움이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 되어 버렸다. 정씨 부인은 힘든 집안일을 모두 찬옥에게 맡기고 자신은 천연덕스럽게 마실을 나다녔다.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는 조모를 대신하여 찬옥이 부엌일부터 시작해 집안일 모두를 도맡아하니 살림 사는 일이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힘이 들어도 조모의 눈치를 봐가며 열심히 일을 하였다. 매일 매일을 어미가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찬옥은 동생들과 함께 힘겨운 시간들을 버티고 있었다. 한편, 희연은 아이들을 경주로 보내고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장사라는 것이 하는 사람도 어려운 법이라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온 희연은 시작은 했으나 아는 것이 없어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돈을 벌기는커녕 고생만 하고 있었다. 경주에서의 아이들 삶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일같이 퍼붓는 조모의 잔소리와 구박에 못 이겨 하루에도 몇 번씩 대문 밖으로 도망 나가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온다던 어미도 소식이 감감하고 아비는 자식들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으니 서슬 퍼런 조모의 구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아이들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어미만 오면 이 모든 설움이 사라질 거라 기대하며 오늘도 삼 남매는 대문 밖을 지키며 서있었다. 보름이 지나도 어미의 소식이 없자 찬옥이 집안일도 힘이 들고 어미의 소식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기가 지루해 어미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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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조모의 잔소리를 피해 오늘도 대문 밖으로 달아난 삼 남매는 오갈 곳이 없어 담벼락에 붙어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찬옥이 자신의 옆에 붙어 서있는 동생들을 보며 무거운 입을 연다. “현옥아! 언니가 흥해가서 엄마 모시고 올 테이까 할머니 집에서 경현이하고 조금만 기다리고 있그라. 언니 하룻밤만 자고 오께. 할머니가 야단쳐도 꾹 참고 아무데도 가지 말고 꼭 여 있어야 한다. 알았나?” “언니야! 우리도 같이 가자. 우리도 엄마 보고 싶다. 할머니 집에 있기 싫다. 할머니 무섭다.” “하룻밤.  딱 하룻밤만 참고 있어라. 언니 퍼뜩 갔다 오께.” “그라믄 꼭 약속 지키라. 꼭 하룻밤만 지내고 오는 기다? 어?” “그래. 알았다. 너거도 무신일 있어도 어데 가지 말고 꼭 할머니 집에 있어야 한다. 알았나?” “어. 알았다.” 찬옥이 그렇게 두 동생만을 남겨두고 할머니 아버지 몰래 집을 나와 새벽열차를 타고 어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늦은 아침이 되도록 찬옥이 보이지 않자 정씨 부인이 또 역정을 내기 시작한다. 조모의 커지는 목소리에 겁을 먹은 아이들은 방안에서 웅크린 채 꼼짝도 않았다. 정씨 부인이 집안을 맴돌며 찬옥을 목이 터져라 부르다 대답이 없자 아이들이 있는 방문을 거칠게 열고는 둘만 있는 것을 보고는 화를 내며 묻는다. “와? 너거만 있노? 찬옥이는 어데 갔노?” “…….” 잔뜩 웅크리고 있는 아이들이 대답을 않고 있자 더욱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지른다. “와 대답이 없노? 너거 언니 어데 갔노?” 현옥이 울먹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한다. “엄마...한테... 갔다 온다 했어요.” “뭐이? 너거 엄마를 찾아갔다 말이가?” “예...에.” “요것이 간다는 말도 안하고 사라짔구마. 에이 못 땐 것. 지 에미 닮아 모질다 모질어. 어린 동생들 내팽개치고 야반도주까지 하고. 우째 하나같이 맘에 드는 놈이 없노! 아이구 내팔자야. 다 늙어 손주새끼들까지 거둬야 하고 이 무신 업보고 말이다.” 아이들이 듣는 앞에서 어미의 욕을 있는 대로 해댄다. 그러다 불똥이 현옥과 경현에게 튄다. 조모가 아이들을 향해 마구 소리를 지른다. “와? 너거도 에미 찾아 가지 와 안갔노, 어이? 여 남아서 뭐 얻을 기이 있다고 안갔노 말이다.” 조모의 큰소리에 아이들은 기가 눌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래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기가? 내 너거 얼굴 보고 있으면 속에 천불이 난다. 거 우두커이 있지 말고 나가라.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으이 저리 나가그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에 앉은 아이들을 내몰아 밖으로 쫓는다. 결국 남매는 조모에게 쫓겨나 대문 밖으로 나온다. 아침도 먹지 못한 채 쫓겨난 아이들의 뱃속이 요동을 친다. 달리 갈 곳이 없어 언제나처럼 담벼락에 기대서서 조모의 역정이 가라앉기를 남매는 기다려본다. 경현이 고픈 배를 잡고 담벼락 앞에 쭈그려 앉았다. “누부야! 내 배고프다.” “쪼매만 기다리라. 할머니 화 좀 가라앉으면 들어가자.” “어.” 남매는 담벼락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몇 시간을 흘려보내고는 쥐새끼 마냥 살그머니 집안으로 들어온다. 조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조심조심 부엌으로 숨어들어가 밥이 담긴 그릇을 찾는다. 다행히 선반 위에 올려진 밥 한 공기가 현옥의 손에 들어왔다. 허기진 아이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반찬도 없는 맨밥을 허겁지겁 먹어댄다. 성에 차지 않는 식사로 겨우 허기만을 면하고 물 한 사발을 들이키고는 부엌을 나와 마루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본다. 경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누이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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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부야! 엄마 보고 싶다.” “내도... 엄마 보고 싶다.” 남매는 어미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소리 내어 울고 싶어도 조모가 또 어떤 꼬투리를 잡을지 몰라 두려워하며 치미는 울음을 삼켜버린다. 코끝이 맹맹해져 콧물이 흐른다. 손등으로 콧물을 닦아내는데도 콧물이 흐를 것 같아 훌쩍거리며 들이킨다. 안방에 있던 정씨 부인의 귀에 아이들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던지 방문을 열고는 또다시 소리를 지른다. “우는 소리 듣기 싫다. 할일 없이면 역에 너거 엄마 마중이나 나가라. 퍼뜩!” 아이들은 또다시 조모에게 쫓겨 역으로 피신을 갔다. 역 대합실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기적을 울리며 역 안으로 한대의 기차가 들어와 멈춰 섰다. 어디에서 오는 기차인지도 모르면서 남매는 기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빠져 나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나 어미와 찬옥이 저기에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본다. 저녁이 되어도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속에 어미의 얼굴은 없었다. 오전에 겨우 허기만 달래 놓은 뱃속이 또다시 요동을 친다. 하루 종일 벌을 서듯 역 대합실에서 꼼짝 않고 앉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며 날이 저물도록 오지 않는 어미를 기다리다 지친 남매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역 대합실을 나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가 무서워 남매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조모의 집을 찾아 들어간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던지 안방에 있던 정씨 부인이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묻는다. “애비가?” 아들이 아직 귀가를 하지 않았는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문을 들어선 이가 아들이 아니라 남매인 것을 확인하고 정씨 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뜩찮은 표정으로 남매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뭐 한다고 오밤중까지 쏘다니다 들어오는 기고?” “…….” “독한 것들! 핼미가 한마디 했다고 집을 나가 인자 들어오지를 않나 핼미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하고. 참말로 독하다. 우째 저래 하는 짓이 지 에미하고 똑같겠노. 하나같이 애비 닮은 구석은 없고 모조리 독한 지 에미를 닮았는지. 하이고! 무섭고나. 손주새끼라고 있는 것들이 어디 정이 가야 보듬어 주기라도 해보제. 지 핏줄 싫다는 사램이 어디 있겠노? 아무리 밉상이라도 지하는 행동이 이쁘믄 밉다가도 맴이 돌아 설 긴데 우째 이놈의 집구석에는 정을 줄 놈이 하나도 없는가 말이다. 이기 다 지 에미가 피붙이 떼 놓자고 한 짓이 아이고 뭐란 말이꼬! 독한년. 아이고 독한년. 그에미에 그새끼들까지 모질고 독하다. 독해.” 조모의 날이 선 악다구니에 또 다시 겁을 먹고 남매는 꼼짝 않고 서서 비수가 되어 날아드는 조모의 모진 소리를 고스란히 맞고 섰다. 현옥의 꼭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콧물이 흘러내리려 하자 반사적으로 코를 들이마신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이미 두 뺨을 타고 턱밑에 고여 발등으로 떨어진다. 입 밖으로 세어 나오려는 울음소리를 수십 번 목안으로 삼키며 울음을 참는다. “뭐하고 섰노? 퍼뜩 안들가나?” “…….” 경현이 파르르 떨고 있는 누이의 손을 잡아 이끌고 아비의 방으로 뛰어 들어온다. 불이 꺼진 캄캄한 방안으로 들어와 후미진 구석에 등을 기대고 나란히 앉는다. 참고 있던 울음이 자꾸만 목구멍을 치고 올라온다. 현옥이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소리를 삼킨다. 어두컴컴한 방안으로 달빛이 스며들어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진다. 한참을 들썩거리던 현옥의 어깨가 진정이 되고 누이의 옷자락 잡고 있던 경현의 손이 방바닥으로 떨구어지며 벽에 기대고 있던 고개가 앞으로 수그려진다. 울고 있던 누이를 제 나름 달래어 준다고 누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아 있다가 지쳤는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평상시 같았으면 배가 고프다며 칭얼거렸을 경현이 배고픔도 잊어버리고 피곤에 지쳐 잠이 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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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든 달빛으로 방안의 사물들이 어슴푸레 구별이 되면서 현옥이 베개와 이불을 들고 와 동생을 바로 눕히고 자신도 그 옆에 누워 잠을 청한다. 크지도 않은 방에 이불을 덮고 누운 남매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배고픔과 설움을 잊으려는 듯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간밤에 아비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잠이 든 남매는 아침이 밝아오자 허기를 참지 못해 잠에서 깼다. 현옥이 눈을 뜨고 밝아진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비가 자고 나간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비는 간밤에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나 보다. 남매는 일어나는 것도 버거운지 이불 안에서 미동도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누부야! 우리 방에 이라고 누워 있으면 할머니 화 안내시겠제? 우리만 보믄 혼내시니까 그냥 방에 가마 누워있자.” “경현이 니 배 안고프나?” “참을 수 있다. 할머니가 혼내지만 않으면 배고픈 거는 참을 수 있다. 그라니 이방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있자. 누부야도 배고픈 거 참을 수 있제?” 동생의 엉뚱한 생각에 저도 모르게 동조 되어버린 현옥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든 조모의 눈을 피하고 싶었던 아이들은 매번 똑 같은 말을 되새김질하며 남매를 구박하는 조모가 미운 것 보다 무섭고 두려웠다. 남매에게 아비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 조모에게 혼이 나는 자식들을 보면서도 아비는 한 번도 자식들의 편을 들지 않았다. 그저 어미가 하는 것을 지켜 볼 뿐 누구의 탓도 않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채 중립을 지키고 서서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비가 자신들 곁을 지켜주기를 바랬다. 조모도 아비가 있는 날에는 손주들을 밖으로 내쫓지는 않았기에 무슨 소리를 들어도 집안에 있을 수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으며 남매는 그저 아비가 집안에 있어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어제 같이 아비가 외박을 하는 날이면 다시 조모의 잔소리는 고스란히 남매의 몫이 되고 만다. “지 에미 닮아 독한 것들!  너거들 때문에 내 아들이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밖으로 나돌고 있는 거 아이가!” 하며 죄 없는 남매를 들들 볶아 댄다. 하도 들어 귀에 딱지가 앉았을 테지만 남매는 조모의 잔소리에 두려움을 느낀다. 기척도 않고 방안에 누워있던 아이들의 허기진 뱃속은 연신 꼬르륵거리며 아우성을 쳐댄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허기 때문에 잠은 더 달아나 버렸다. 참다못한 경현이 일어나 앉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누이를 부른다. “누부야! 내는 참을라 캤는데 배가 자꾸만 꼬르륵거려서 시끄러워 못 참겠다.” “그라면 우리 잠깐 나가서 물 좀 마시고 들어오자. 그라면 좀 나아질기다.” “그래. 물마시고 와서 다시 잠자면 배 안고플 기다. 그체?” “그럴거다. 조용히 나갔다 오자.” “응.” 남매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나와 조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살금살금 부엌으로 향한다. 열려 있는 부엌문을 밖에서 들여다보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부엌 안으로 들어간다. 아궁이 옆에 커다란 항아리에 담겨진 물바가지를 들어 항아리 속 깊숙이 담갔다 꺼낸다. 찰랑거리는 물이 바가지에 퍼 올려 졌다. 현옥이 찰랑거리는 물바가지를 경현에게 내민다. “자! 마시라.” 누이의 손에 든 물바가지를 받아 들고 목구멍으로 벌컥벌컥 들이킨다. 숨 쉴 새도 없이 물 한 바가지가 단숨에 들어간다. 한 바가지로는 양이 차지 않았는지 다시 항아리에서 한 바가지의 물을 떠서 목으로 넘긴다. 물이 들어 간 배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경현에게 물바가지를 받아 들고 현옥이 경현과 똑 같은 행동으로 두 바가지의 물을 연거푸 단숨에 들이킨다. 갈증과 허기를 물로 달래고 돌아서 나오려는 아이들 눈에 밥상보를 덮어 둔 소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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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왔다. 경현이 다가가 밥상보를 들어 올리니 김치와 나물 두어 가지의 반찬과 보리밥이 담긴 놋그릇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미 물배가 차올랐으나 밥을 보니 입안에 군침이 돌면서 다시 허기가 지는 것을 느꼈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이성을 망각하고 차려놓은 밥상을 들고 급하게 부엌을 나와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혼날 때 혼나더라도 밥은 먹고 보자는 본능이 두려움도 잊게 만들었다. 수북이 담겨진 보리밥그릇을 들고 허겁지겁 제 입 속으로 넣고 있는 아이들은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굶주림을 참을 수 없었던 아이들의 뱃속이 호강을 한다. 조촐한 밥상을 초토화 시키고 빈 그릇만 수북이 남은 소반을 보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먹고 보자 했던 오기는 온데간데없고 역정을 낼 조모의 얼굴이 떠오르자 덜컥 겁이 난 것이었다. 다 먹어 치운 빈 밥상을 다시 부엌에 내 놓을 용기가 없어 상을 저만치 떨어진 구석에 올려다 놓고는 남매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려 한다. 잠을 자는 동안만이라도 두려움에 대한 고통은 사라질 것이니 그것을 위안으로 삼고자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눈을 감는다. 불안한 마음으로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아이들의 귀에 조모의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방문이 덜컥 열린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숨을 죽이고 있는 아이들 머리맡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멈추고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낸다. 잔뜩 웅크린 채 눈을 꼭 감고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정씨 부인 입을 땐다. “안자는 거 안다. 일나 보그라.” 다소 누그러진 말투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몰라 남매는 잔뜩 웅크린 채로 잠이든 시늉을 한다. 정씨 부인이 방안을 둘러보다 윗목에 아직 풀지 않은 보따리가 눈에 들어왔다. 필시 아이들의 것이라 여기고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보따리를 들고 와서는 누워있는 아이들 머리맡에 내려놓고 큰소리를 친다. “퍼뜩 안 일어나나?” 조모의 화 난 목소리에 아이들은 움찔하여 후다닥 일어나 앉는다. “이 보따리 너거들꺼 맞나?” 바로 앞에 놓여 진 보따리를 바라보며 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 너거들 짐 챙기가지고 가그라. 인자는 내도 힘이 부치서 너거들 뒤치다꺼리 해주기도 힘들다. 그라니 너거 에미 찾아 가그라. 여 있어 봤자 서로 얼굴 붉히는 일 밖에 더 있겄나? 나올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으이 가서 에미 옆에서 편하게 지내그라.” 정씨 부인은 아이들에게 짐 보따리를 안겨주며 남매를 일으켜 세워 문밖으로 내쫓는다. 떠밀리다시피 방에서 나와 다시 대문으로 내몰리면서 남매는 나가지 않으려 버터 본다. “너거들 여 있어봤자 내한테 좋은 소리 못 듣는다. 그라니 퍼뜩 가라. 퍼뜩.” 잔뜩 겁에 질린 남매는 등을 떠미는 조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 대문 밖으로 쫓겨난다. 이어 대문에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남매는 짐 보따리를 들고 굳게 닫힌 대문을 망연자실하여 바라보고 섰다. “누부야! 우리 인자 우짜노? 우리 쫓기난거 맞제?” “아이다. 할머니 지금 화나서 그라실 기다. 지난번처럼 할머니 화 가라 앉을 때가지 밖에서 기다렸다가 들어가면 될기다. 그라믄 할머니 아무 말 안하실기다.” 자신의 바람대로 되기를 현옥은 간절히 바래본다. “누부야! 그라면 우리 인자 어디로 가야하노?” “역에 가서 엄마 오는지 기다려보자. 오늘은 올지도 모르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큰 누부야라도 왔으면 좋겠다.” “올기다. 역으로 가보자.” 오갈 곳 없는 남매는 각자 보따리를 끌어안고 역 대합실로 향한다.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는 사람들을 내려놓고 기적을 울리며 사라졌다. 개찰구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며 마중 나온 사람들과 뒤엉켜 대합실은 만원이었다. 남매는 그 틈에 끼여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어미의 얼굴을 가려내어 보지만 그 수많은 얼굴들 중에 어미의 모습은 오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친 경현이 실망한 눈으로 현옥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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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부야!  오늘도 엄마하고 큰 누부는 안올란갑다.” 금세 경현의 눈이 촉촉이 젖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경현아! 하룻밤만 더 자고 나면 엄마하고 큰누부하고 올거다. 그라니 울지 마라.” 현옥이 우는 경현을 끌어안으며 달래어 동생의 눈물을 닦아주며 등을 토닥여 준다. 어느덧 서산으로 기울었던 해가 떨어지고 사방은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겼다. 현옥이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역 대합실을 나와 조모의 집으로 향했다. 경현이 걸으면서 누이에게 묻는다. “누부야! 할머니 아직도 화나 있으면 우짜노?” “괜찮다. 할머니 벌써 주무실지도 모르니까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면 된다.” 누이의 말이 안심이 되었던지 경현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진 듯 했다. 집 앞에 다다르자 현옥이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다가가 대문을 열어본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까봐 조심스레 문을 밀어보는데 어찌된 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현옥이 당황하며 다시 대문을 밀어본다. 낮에 걸어 두었던 빗장이 여태 벗겨지지 않은 건지 아비가 멋모르고 잠궈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릴 생각을 않았다. 현옥이 당황스러워하다 서글픈 마음이 일어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동생에게 보이지 않으려 작은 목소리로 경현을 부른다. “경현아! 큰일났다.” “와? 누부야!” “우짜노? 대문이 잠겼다. 니하고 내하고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라면 우리는 인자 우째야 하는데?” “…….” 현옥은 두려웠다. 이 밤에 버려진 남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덜컥 겁이 났다. 경현이 누이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누부야!  그냥 할머니 불러보자.” “알았다.” 현옥이 이웃집에 들릴까봐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나직이 조모와 아비를 불러본다. 이미 잠이 들었는지 방안의 불들은 모두 꺼져 있었고 조모와 아비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분명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 텐데 아비도 조모도 무심하게도 대문을 걸어 잠근 채 잠이 들 수 있는지 현옥은 아비와 조모가 원망스러워 진다. 아무리 미워도 제 핏줄인데 가족에게 냉혹하게 버림받은 아이들은 이미 찬밥신세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다시 오갈 데가 없어진 남매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체념하고 돌아선다. “안되겠다. 경현아! 할머니 집에는 못 들어가겠다.” “그라면 우리는 어디서 자노?” “할 수 없다. 그냥 역으로 다시 가자.” 싸늘한 밤공기가 조그마한 두 어깨를 훑고 지나간다. 추위와 배고픔과 졸음을 견디며 남매는 다시 역을 향해 걸었다. 인적이 끊어진 역 대합실은 어둠에 싸여 싸늘한 기운마저 감돌았고 술 취한 취객들이 빈자리를 차지하고 눈을 붙이고 있었다. 남매는 취객들을 피해 후미진 곳으로 찾아 들었다. 마침 주위에 아무도 없는 긴 나무의자가 눈에 들어와 그곳으로 향한다. “경현아! 우리 여 앉아 있자.” “누부야! 내는 무섭다.” “괜찮다. 누부하고 같이 있으니까 겁내지 마라. 오늘밤만 여서 자고 내일 날 밝으면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면 된다.” “할머니가 도로 우리 내 쫓으면 우짜노?” “…….”“내는 인자 할머니도 싫고 아버지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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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지 마라.” “아버지는 우리가 싫은 기다. 내는 다 안다.” “…….” 철없는 어린것의 마음에 상처가 아로새겨졌다. 의자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서로의 몸을 의지하며 추위를 견뎌본다. 자정을 넘은 시간 남매는 내려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잠 속으로 빠져든다. 잠결에 기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쪽 잠을 자던 현옥이 가까이 다가오는 기적소리에 눈이 뜨였다. 잠시 졸았던 것 같은데 벌써 날이 새고 있었다. 역 대합실 창문으로 어스름 빛이 들어와 어둠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대합실 여기저기에 드러누워 잠을 자는 취객들의 코고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선잠을 깬 현옥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화물차가 지나간 듯 개찰구를 빠져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서 청소부가 비를 들고 들어와 대합실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부는 매번 같은 일이 지겹다는 듯이 인상을 쓴 채 여기저기 의자에 누워 코를 골고 있는 사람들을 깨워 밖으로 쫓아낸다. 현옥이 잠이 덜 깬 경현을 흔들어 깨운다. “경현아! 일어나라.” 웅크린 채 고개를 파묻고 졸던 경현이 억지 눈을 뜨고 누이를 바라본다. “누부야. 기차 들어왔나?” “그기 아이고...” 어느새 두 아이 앞으로 청소부가 다가와 섰다. “어린것들이 와 여서 이라고 있노? 퍼뜩 집에 가그라. 여는 너거 같은 아아들이 있는 데가 아이다.” 겁을 주며 내쫓는 틈에 경현과 현옥이 대합실을 쫓겨서 밖으로 나왔다. 이슬이 내린 새벽거리에 뿌연 안개가 내려앉았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에서 날씨는 점점 싸늘해지고 엷은 옷 속으로 파고드는 냉기에 소름이 끼쳐 아이들은 파르르 몸을 떨며 잔뜩 몸을 웅크리고 역 앞을 기웃거리고 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반겨주는 이 없는 조모의 집을 찾아 가기는 이른 시간이라 역 앞을 맴돌며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다시 대합실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 놓는다. 매번 하던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남매는 개찰구로 들어서는 이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낯익은 얼굴을 찾아 헤맨다. 며칠 동안 계속된 반복적인 일상에 아이들은 지쳐 벼렸다. 어미와 찬옥이 안 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대를 걸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합실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천덕꾸러기가 된 아이들이 어쩌지 못해 할 수 밖에 없었던 일과였던 것이다. 오갈 데가 없어 거리를 헤매는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남매가 유일하게 품은 희망이 어미의 품이기에 그 하나에 위안을 삼아 역 대합실에 죽치고 앉아 수많은 얼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희망을 찾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의 불씨도 이제는 사그라져 가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아이들은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가 않았다. 단지 이 지겨운 현실에서 빨리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상처만남은 마음을 위로해줄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희망을 포기하고 지루한 기다림을 끝내기 위해 현옥이 경현을 데리고 조모의 집으로 가려 한다. “경현아! 오늘도 엄마하고 언니는 안 올 긴갑다. 우리 그만 기다리고 집으로 가자.” 몸과 마음이 지친 경현이 누이를 쳐다보며 인상을 쓴다. “누부야!  내 배가 고파서 걸을 수 가 없다.” “나도 그란데. 쪼매만 참고 할머니 집에 가서 밥 먹자.” “누부야!  할머니 우리 밥 안주고 또 내쫓을 긴데.” “그래도 갈 데가 없으이까 가야 한다.” 마음이 착잡했다. 간밤에 빗장이 걸린 대문 앞에서의 아찔함이 되새김질 되었다. 그래도 찾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남매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대합실을 나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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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걸음걸이로 터벅거리며 대합실을 나서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남매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현옥아! 경현아!” 근호가 남매를 보고는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비의 얼굴을 보자 아이들은 반가운 표정 대신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그 자리에 섰다. 원망이었다. 가슴에 깊게 새겨진 아비에 대한 원망이 아비에게 다가 설 수 없을 만큼의 거리를 만들었다. 아무런 대답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아비가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근호도 그것을 왜 모르겠는가? 어린 것들의 굳은 표정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못난 아비 때문에 어린것들이 무슨 고생인가 마음 한켠이 짠해져 온다. 며칠 전부터 근호 역시 나름대로 마음이 불편하였다. 아비의 도리를 하자니 어미가 걸리고 자식의 도리를 지키자니 아비로서 못할 짓을 하고 있어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어느 편에도 설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의 우유부단한 모습이 스스로도 원망스러웠다. 사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어미의 말에 순응하며 오로지 어미만을 의지하고 살았기에 그 말에 차마 거역을 못하고 자식과 처를 등지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한심스럽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비라고 찾아온 자식들을 구박해대는 어미가 미웠으나 속으로만 대들 뿐 한 번도 자식들 편에 서서 대들어 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워 밖으로 겉돌 수밖에 없었다. 어미와 자식 사이에 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라 차라리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싶어 며칠을 바깥으로만 나돌았던 것이었다. 술에 취해 외박을 하고 집으로 들어가려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현실을 볼 수가 없어 어젯밤도 술에 찌들어 늦게 귀가를 해서는 인사불성이 되어 잠에 빠져버렸다. 다음날, 이른 아침이 되어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방에 있어야 할 아이들은 보이지 않아 혹시 어미에게 혼이 나고 있나 싶어 밖으로 나와 봤다. 그러나 집안은 조용했다. 조갈이 심해 우선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한 사발 마시고 나와 다시 마당 이곳저곳을 기웃거려보았다. “야들이 어데 갔노? 밖에 나가 노는 기가? 이 새북부터 갈 데가 없을 긴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잠을 자려 이불 속에 누웠다 불연 듯 이상한 생각이 들어 윗목으로 눈길을 돌리자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할 아이들의 짐 보따리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저기 던져 놓았던 것 같은데…….” 자신이 잘못 알고 있나 싶어 귀찮은 마음에 다시 자리에 누우려다 말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어나 방을 나와 어미의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의 행방을 물었다. “엄마! 혹시 아아들 못 봤는교?” “…….” “내가 잘못 봤나? 방에 아아들 보따리가 안보이네요. 혹시 아아들 어디 갔는지 모르는교?” 정씨 부인은 아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대답을 회피했다. 평상시 같지 않은 어미의 행동에 뭔가 찜찜함을 느꼈는지 근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엄마! 무신일 있었는교? 아아들 어데 갔는지 엄마는 알고 있지요?” 자신의 눈을 외면한 채 앉아 있는 어미를 근호가 닦달한다. “엄마! 대답 좀 해보소.” “아이구마. 야가 아침부터 와 이래 사람을 귀찮게 하노?” “아아들이 없어졌다 안하요? 아무리 밉어도 엄마 손주들 아잉교?” “누가 뭐라카나!” “대답 좀 해보소. 아아들하고 무신일 있었는교?” 지은 죄가 있어 입을 다물고 있던 정씨 부인은 될 대로 되라 싶어 짜증 섞인 어투로 소리를 지른다. “가들 지 에미 찾아 갔다.”“예? 아아들이 지 에미를 찾아 가요?” “그래. 내가 가라 캤다. 내사 마 인자 가들 거둘 힘도 없어 지 에미 찾아 가라 캤다.” “그기 말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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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말이 안돼노? 자식이 에미 찾아 가는 거야 당연한 거지를.” “그라니까 지금 엄마가 아아들 내쫓은 거라요?” 내쫓았다는 말에 발끈하며 어미는 아들에게 더욱 큰 소리를 쳐댄다. “내가 뭐 내 쫓았다고 그라노? 지 에미한테로 가라 한긴데.” “그기 내쫓은 거 아이고 뭐요?” “야아가 간밤에 뭐를 잘못 먹었나? 에미한테 이래 소리를 지르고 그라노 말이다.” “아아들이 무신 잘못을 했다고 그래 구박을 하는교?” “내가 머를 우쨌다고 니는 내를 잡는 기고? 으이? 이 나이에 내가 니 자석들 뒷바라지나 해줘야 겄나? 에미 등골 휘는 거는 안중에 없고 자석새끼만 눈에 들어 오더나? 니가 내한테 우째 이랄수가 있노? 으이? 내가 오래 살았구나. 인자는 나이 든 에미를 괄시하려 들고. 아이고 내 신세야. 내가 갔어야 하는 긴데 이 꼴 저 꼴 안보고 내가 갔어야 하는 긴데……." “내가 언제 엄마를 괄시했다 그라요!” “니 지금 니 새끼들 지에미한테 보냈다고 내를 괄시하는 거 아이고 뭐꼬?” “그라믄 그 어린것들을 내쫓은 기이 잘못이 아닌교?” “몇 번을 말하노? 내쫓은 기이 아이고 지 에미한테 가라 캤다고. 에미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와 내가 니 새끼들까지 수발을 들어야 하노 말이다. 천하에 그런 일은 없다. 죽어도 내는 그 짓은 못한다.” “에잇!” 악을 쓰며 끝까지 잘못을 우겨대는 어미와 더 시비를 붙어 봤자 울화만 더 치밀어 오를 것 같아 근호는 말을 잘라버리고 일어선다. 결국 모자간의 큰소리만 오갔을 뿐 말이 안 통하는 어미와 더는 앉아 있고 싶지 않아 방문이 부서질 듯 열어젖히며 빠져 나온다. 정씨 부인은 그런 아들의 뒤에 대고 큰소리로 뭐라고 소리를 질러댄다.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근호는 더 이상 어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허겁지겁 신을 신고 대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무작정 기차역으로 향했다. 제발 아이들이 무사하게 거기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급하게 걸어갔다. 아비의 간절함을 알았던지 아이들이 역에서 나오고 있었다. 근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매의 곁으로 다가섰다. 무표정하게 서있는 남매의 앞에 선 근호는 아이들의 싸늘한 눈빛을 받아 내고 있었다. 역에서 아이들과 마주치지 못할까 마음을 졸이며 왔는데 무심한 표정으로라도 자신의 앞에 서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마음이 놓였다. “배고프제?” “…….” “가자.” 남매는 아비가 묻는 말에 대꾸도 않고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역 앞은 아직 장사를 하기에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열어 놓은 가게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길을 걸어 내려오다 문을 연 식당이 보여 근호는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장사준비가 덜 된 식당에는 아침식사로 국밥을 팔고 있었다. “아지매! 여 국밥 세 그릇 주소.” “예에.” 주문을 하고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는 아이들을 살며시 바라본다. 아비의 눈과 마주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현옥의 시선은 식탁 구석을 향해 고정이 되었고 경현은 손장난을 치며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아비와 자식 간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식당주인은 주문을 받음과 동시에 미리 끓여 놓은 고깃국에 밥을 말아 국밥 세 그릇을 뚝딱 만들어 김치보시기와 함께 탁자에 내려놓고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아비는 어린것들 앞에 놓여 진 국밥 그릇을 밀어 주며 권한다. “배고프제? 어서 먹어라!” 경현이 군침을 삼키고 제 앞으로 그릇을 더 당겨 놓으며 숟가락을 들고 뜨거운 국밥 한 술을 떠서 입 속으로 넣는다. 갓 내어온 뜨거운 국물에 입천장이 데였다. 입안이 뜨거워 갖은 인상을 쓰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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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리며 뜨거운 국밥을 씹어 넘기고 한술을 더 떠서 이제는 입으로 불어 식혀가며 제 입 속으로 꾸준히 집어넣어 삼킨다. 현옥이도 천천히 입으로 불어가며 한입씩 입 속으로 넣고 오물 오물거렸다. 아이들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비도 뜨거운 국물을 한술 떠 목구멍으로 넘긴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따듯한 아침밥에 아이들의 피곤으로 찌든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눈칫밥에 이골이 난 아이들이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밥상을 받아 보았던가? 경주에 와서 이렇게 마음 편하게 배불리 먹어 본 것은 이 국밥이 처음이었다. 그것을 마주 앉아 있는 아비는 알고 있는 것일까? 현옥은 속으로 생각을 해본다. 아이들이 국밥그릇을 깨끗이 비운 것을 보자 아비의 마음이 짠해온다. 얼마나 굶었으면 어른들 먹는 그릇에 가득 담긴 밥을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워냈을까? 아이들의 배고픔을 한 번도 생각지 못하였었다. ‘내는 애비로서 자격이 없다. 자식들 뱃속이 비어 있는 것도 모르고 지 괴로움에 술만 퍼 마시고 있었으이 내는 애비 자격도 없다. 내 같은 것은 애비도 아이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아이들 앞에 서있는 자신이 자꾸만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아비에게서 마음이 떠난 아이들은 아비의 생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아비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이들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현옥아! 경현아!” “…….” 역시나 대답 없이 멀뚱멀뚱 아비의 얼굴만 바라본다. “현옥아! 경현이 데리고 엄마한테 가그라. 이래 쫓겨 다니지 말고 흥해로 다시 내려 가그라.” “…….” 여전히 아이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비와 같이 가겠다고 때를 쓰지도 않고 어찌 우리를 버리느냐는 원망도 않고 아무런 반응도 없이 앉아있었다. 그런 아이들 앞에 오히려 근호가 변명을 한다. “아버지는 할머니 모시고 있어야 해서 너거들하고 같이 못 간다. 그라니 현옥이 니가 동생 잘 데리고 내려 가그라. 알겄나?” 현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근호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뒤적여 지폐를 꺼내 현옥에게 건넨다. “기차표 끊을 줄 알제?” 역시나 대답을 않고 고개 짓만 한다. “아버지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못 데리다 준다. 경현이 누부 손 꼭 잡고 잘 따라 가그라. 알았나?” “예에.” “그래. 그라면 나가자.” 근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국밥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온다. 뒤를 따라 나온 남매를 잠시 바라보다 기차역 쪽으로 등을 떠밀어 보낸다. “가봐라. 아버지는 여서 갈란다.” 몇 발자국 떨어져 남매는 아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뒤 돌아서서 손을 잡고 역으로 걸어갔다. 아비는 그 자리에 남아 멀어져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다 천천히 발길을 돌려 아이들과 반대의 길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린다. “누부야! 인자 우리 엄마한테 가는 기가?” “그래! 인자 우리 엄마하고 언니 볼 수 있게 됐다.” “그라면 빨리 가자. 내는 여 더 있기 싫다.” “알았다. 기차표 끊어서 퍼뜩 내려가자.” “응.” 현옥이 경현의 손을 꼭 잡고 기차표를 사기 위해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늘어선 사람들 뒤에 서서 경현의 손을 다시 꼭 잡으며, “경현아! 누부야 손 꼭 잡고 있어라. 놓치면 안 된다.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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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 걱정 마라.” 남매는 필사적으로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 사람씩 차표를 끊어서 떠나가고 드디어 현옥이 차례가 되었다. 현옥과 눈높이가 같은 매표소 구멍을 쳐다보며 외친다. “아저씨! 포항 가는 기차 반 차표 두 장이요.” 차비를 지불하고 차표를 받아 든 현옥이 개찰구를 나와 플랫폼에 서서 포항행 기차를 찾는다. 낯선 곳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 근처에 있는 역무원을 보고는 그 곳으로 달려가 묻는다. “아저씨! 포항 가는 기차 탈라면 어디로 갑니까?” 때마침 그들 사이로 중년의 사내가 지나가다 현옥을 보고 묻는다. “너거들 포항 가나?” “예.” “나도 포항 가는 길이다. 내 따라 온나.” “예. 아저씨. 고맙습니다.” 현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현의 손을 꼭 잡은 채 중년의 사내 뒤를 따라간다. 대동하는 어른도 없이 어린애 두 명이 기차를 타는 것이 궁금했던지 사내가 남매에게 묻는다. “그란데 와 어른하고 안가고 너거들만 가는 기고?” “예. 엄마가 작은집에 가 계셔서 찾아 가는 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먼 길을 아아들만 간다는 기이 위험할 건데! 우쨌거나 조심 하그라.” “예. 아저씨.” 현옥이 경현의 손을 꼭 잡은 채 사내의 뒤를 종종거리며 쫓는다. 말없이 사내의 뒤를 따라가다 기차 앞에서 사내의 발걸음이 멈추자 아이들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다. 이 기차 타면 된다. 올라가자.” 세 사람이 기차 앞에 나란히 섰다 다시 사내가 먼저 기차에 오르고 경현과 현옥도 기차에 올랐다. 객실에 들어서 앞서가던 사내가 두리번거리며 빈자리를 찾고 있었다. 뒤에 따라오던 현옥이 두리번거리며 객실을 둘러보다 눈살을 찌푸린다. 온통 시커멓게 찌들고 얼룩진 너저분한 의자들이 현옥의 눈에 들어왔다. 사나이가 빈자리를 찾아 앉으며 남매를 손짓하여 부른다. “야들아. 이쪽으로 온나. 여 자리 있다.” 현옥이 경현의 손을 잡고 부르는 쪽으로 다가섰다. 이미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에 비좁은 틈을 내어주며 사내는 아이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아이들이 자리에 앉자 멈췄던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출발을 한다. 조금씩 움직이던 기차에 속도가 붙더니 이내 선로 위를 힘차게 내달린다. 창밖을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현옥의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이 기차가 어미의 품으로 자신들을 안내해줄 것이기에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시 어미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설레어 감정이 벅차올랐다. 경주에서의 악몽 같은 시간을 두 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현옥이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사이 경현은 졸린 지 연신 하품을 해댄다. 졸릴 수밖에. 간밤에 역 대합실에서 웅크린 채 쪽잠을 잔데다 비어있는 속을 뜨거운 국밥으로 채워 넣었겠다, 게다가 제 누이와 같은 심정으로 어미의 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기차 안에서의 안도감까지 더했으니 눈꺼풀이 내려앉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누부야! 내 졸린다.” 현옥이 어깨를 경현 쪽으로 붙인다. “자! 내한테 기대서 자라.” 경현이 현옥의 어깨에 머리를 얹으며 묻는다. “누부는 안 졸리나?” “어. 내는 아직 괜찮다. 내도 졸리면 니한테 기대서 잘거니까 걱정 말고 자라. 도착하면 깨워 주께.” “알았다. 그라믄 낸 잔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어깨에 머리를 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경현은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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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의 잠든 숨소리가 현옥의 귀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옆에 앉았던 사내가 두 아이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현옥을 향해, “아가! 니도 피곤하면 눈 좀 붙이그라. 포항 도착할라카믄 아직 한잠 남았다. 내릴 때 되면 아저씨가 깨워줄 테이 걱정 말고 눈 붙이그라.”  현옥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사내에게 고맙다며 머리 숙여 인사를 한다. 중년의 사내는 어린것들이 어미를 찾아간다는 말에 마음이 동하여 자식 같은 아이들이 무사하게 포항까지 가도록 옆에서 아비 같은 심정으로 남매를 챙겨주려 하였다. 사내의 말이 미더웠던지 아님 경현의 잠이 현옥에게로 전이가 되었는지 현옥의 눈꺼풀도 서서히 감기기 시작하더니 동생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댄 채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한 낯의 햇살이 두 남매가 앉아있는 자리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얼마를 잤는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 흐른 듯 했다. 누군가가 현옥의 몸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느껴져 현옥이 눈을 떴다. “아가! 일어나라. 인자 포항에 다 왔다.” 사내의 목소리가 현옥을 잠에서 깨운다. 가까스로 떠진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니 산 너머로 석양이 내려앉아 하늘이 검붉게 물들고 있었다. “깼나? 포항 다 왔다. 짐 잘 챙기고 내릴 준비해라.” “예! 아저씨. 고맙습니다.” 현옥이 몸을 움직이자 경현이 잠에서 깨어났다. “누부야! 포항 다 왔나?” “그래. 내릴 준비하자.” 기차는 역으로 들어서며 기적을 울리고 잠시 덜컹거리더니 선로 위로 멈춰 섰다. 객실에는 역에 내리려는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섰고 잠시 후 기차가 멈추자 기차 밖으로 사람들이 내렸다. 두 남매도 그들의 뒤를 따라 역으로 내려섰다. 경주에서부터 줄 곳 보호자 대역을 해주었던 사내를 따라 남매는 개찰구를 빠져 나왔다. 역 앞 마당에 이르러 사내는 아이들을 보며 물었다. “너거들 인자 어디도 갈기가?” 현옥이 대답을 한다. “흥해가는 차를 타러 갈깁니다.” “날이 저무는데 갈 수 있겠나?” “차편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그래? 내가 같이 동행해줬으면 좋겠구만 내 사정도 있어서 너거와 여서 헤어져야겠다.” “예. 아저씨. 고마웠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오냐. 느그들도 조심해서 가그라.” “예에.” 걱정스러운 마음에 사내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미적거리다 발길을 돌려 자신이 갈 길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며 사라졌다. 검붉던 하늘이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흥해로 들어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흑 빛에 현옥은 고민을 한다. 역에서 흥해로 들어가려면 이 십리를 족히 걸어야 하는데 그 길도 산길이 되어나서 밤중에 산길을 가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 일, 난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현옥이 근심에 찬 표정을 지으며 경현을 본다. “경현아! 밤이 돼서 지금 흥해 못 들어가겠다.” “그라믄 우리는 우째야 하는데?” “내도 우째야 좋을지 지금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서 남매는 넋을 놓고 서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한참 동안 거리를 내다보던 현옥이 문뜩 스치는 생각에 얼굴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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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포항에 작은아버지 계시제? 경현아! 우리 작은아버지 집으로 가보자.” “누부야! 작은아버지 집 어딘지 아나?” “엄마 따라 한번 와 보기는 했는데... 기억은 잘 안 난다.” “그라믄 우째 집을 찾노?” “그렇다고 여 계속 서있을 수도 없다 아이가? 가다 보면 쪼매씩 생각이 날거다. 한 분 찾아 가 보자.” “알았다. 가보자.” 그래도 오늘밤을 지낼 곳이 있다는 것에 그나마 위안이 되어 작은 아버지의 집을 찾아 나선다. 현옥은 언제 와봤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집을 어미와 함께 걸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 나섰다. 역을 기점으로 이리저리 뻗은 골목길을 돌아가며 이집 저집을 기웃거린다. 비슷한 골목들이 여기저기에 있어 현옥의 기억 속에서 어슴푸레 떠오르는 장소가 다 거기가 거긴 것 같아 헛갈렸다. 골목마다 돌아가며 기억 속의 집을 찾아보지만 쉬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바퀴를 돌고 나자 누이의 손을 잡고 따라다니던 경현이 지치기 시작했다. 겨울이 가까워져 저녁 바람이 제법 쌀쌀하였다. “누부야! 아직도 멀었나? 내 춥다.” 낮아진 기온 탓에 추위를 느끼던 경현이 짜증을 내며 투덜거린다. “쪼매만 참아라. 내가 자꾸 헷갈리서 안그러나. 집들이 다 비슷비슷해서 더 모르겠다. 우리 한 바퀴만 더 돌아보자.” “내 힘들어 죽겠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단 말이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퍼뜩 한 바퀴만 더 돌아보자. 이번에는 꼭 찾을 수 있다. 기운 내라.” 그 말에 희망을 걸고 남매는 벌써 몇 바퀴를 돌았던 골목길을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본다. 사방을 분간하기 힘든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한번 다녀간 기억을 더듬어 찾아 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 어린 현옥은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골목을 헤매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는 뛰어간다. ‘숙이 언니다. 저 키 큰 사람 분명 숙이 언니 맞다.’ 현옥이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에 힘이 실어 그림자를 보고 외친다. “언니야! 숙이 언니야!” 고요한 밤에 이름을 부르는 앳된 목소리가 하늘로 퍼져 올라간다. 짧은 단발에 미색의 스웨터와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주름치마를 입은 이십 세 전 후의 키가 큰 여인이 집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부르는 쪽을 향해 돌아섰다. 현옥이 뒤 돌아선 여인을 향해 뛰어가 코앞까지 다가선다. 밤빛에 비친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여인이 입을 연다. “니... 현옥이아이가?” “어 언니야. 내 현옥이다.” “니가 이 밤에 우짠 일이고?” 반가움이기보다는 놀라움이었다. 숙이의 표정은. “니 혼자 왔나?” “아니. 경현이하고 같이 왔다.” “세상에! 무신 일이 있어가 이 늦은 시간에 너거가 여 있는 기고?” “…….” “언니야. 우리 하룻밤만 좀 재워도.” “잘 곳이 없어 왔다는 거가?” “어.” “우선 알았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현옥이 경현과 함께 숙이가 들어가는 대문을 향해 쫓아 들어간다. 숙이 대문을 들어서는 소리에 안채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숙이가?” “예. 다녀왔습니다.” 중년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마당으로 얼굴을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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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딸과 함께 서있는 아이들을 보며 묻는다. “누꼬?” “예. 엄마! 큰어머니 댁에 현옥이하고 경현이가 왔어요.” 아이들은 그제야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한다. “작은엄마! 안녕하셨어요.” 현옥이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리자 경현이도 따라 인사를 한다. “너거가 여는 우짠 일이고?” “잘 곳이 없어 왔다 하네요.” 아이들을 대신해 숙이가 대답을 한다. “어데서 오는 길이고?” 숙이 모친이 묻는다. “경주 할머니 집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집안에서 세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등지고 잠시 있으니 어둠이 눈에 익는다. 숙이 모친은 마당에 서있는 아이들을 유심히 살폈다. 어두운 불빛에도 아이들의 생기 잃은 얼굴은 초췌했고 입고 있는 옷 꼬락서니는 거지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대충 무슨 연유인지 감을 잡은 숙이 모친. 작은 눈이 더 가느다래지며 쌀쌀한 표정을 지으며 성가시다는 듯 냉랭한 목소리로 딸에게 이른다. “아아들 니 방으로 데리고 들가라.” 그리고는 자신은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작은어머니의 냉랭함에 남매는 기가 눌려 멀뚱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어미의 말에 따라 숙이는 남매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사 남매 중 맏이인 숙이는 어엿한 처녀라 혼자 방을 쓰고 있었다. 숙이 어두운 방에 들어서 먼저 불을 밝히고는 뻘쭘히 서있는 아이들을 불러 앉힌다. “서있지 말고 앉아라.” 남매는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인다. “경주 할머니 집에는 와갔는데?” 숙이 뭐가 그리 궁금했는지 현옥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물었다. “엄마가 아버지한테 가있으라 해서 갔었다.” 현옥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을 한다. “큰아버지 할머니 댁에 계시나?” “어.” “그라믄 거 있지 와 너거만 내려왔노?” “할머니가 엄마한테 도로 내리 가라고 내쫓아서 할 수 없어 왔다.” “할머니가 너거를 내쫓았다고?” 현옥이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인다. 숙이는 현옥의 말에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는다. “세상에! 남도 아이고 손주를 내쫓다니 할머니도 참 대단하시다.” 두 사람이 얘기하고 있는 사이 현옥의 옆에 앉은 경현이 졸리는지 연신 하품을 해댄다. 이미 눈은 반쯤 감겨진 상태. 숙이가 경현을 보고는 이부자리를 가지러 일어선다. “경현이 졸린 갑다. 이불 깔아줄 테이까 오늘 밤은 여서 자고 내일 아침 날 밝으면 떠나그라.” 숙이는 자신의 요와 이불을 내어주며 남매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자신은 동생 방에서 자겠다며 건너가 버린다. 잠자리에 눕자 경현은 이내 잠이 들었고 불 꺼진 방에 누워 잠을 청하는 현옥의 뱃속은 꼬르륵 꼬르륵 요동을 쳤다. 배고픔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현옥이 작은집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져 실망스러웠다. 예고 없이 찾아오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렇게 까지 냉대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작은어머니의 냉랭한 표정을 대하고 보니 현옥은 괜히 찾아 온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린다. 자신이 이 외지에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냉대를 받아도 어쩔 수가 없어 현옥은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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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생각을 안 하려 해도 조금 전 작은어머니의 태도에 자꾸만 화가 났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인데 사정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따듯한 위로의 말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일언반구도 없이 나 몰라라 돌아서 버리는 모습에 정나미가 달아나 버린다. 경현이 오는 내내 배고프다 노래를 불렀건만 지금은 잠이 들어 다행이다 싶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밥까지 달랬다가는 얼마나 눈총을 받을 것인지 당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디를 가도 환대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현옥은 불편한 잠을 청한다. 이튿날, 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남매를 숙이가 흔들어 깨운다. “현옥아! 경현아! 일어나라. 아침이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현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너거들 집에 가야제. 퍼뜩 준비하고 나온나.” 남매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잠을 깨운다.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불편한 잠자리를 털고 짐 보따리를 들고 방을 나온다. 이른 아침이라 다들 자고 있는지 숙이를 제외하고는 집안에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빈 마당에 남매가 멍하니 서있는 사이 숙이가 부엌에서 나와 남매에게 다가와 선다. “이거 가면서 먹어라.” 숙이 손에 든 고구마를 내밀어 현옥에게 건넨다. “조심해서 가고 큰엄마한테도 안부 전해라.” “어. 알았다. 언니야.”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고는 남매는 작은집에서 떠밀려나다시피 나와 대문 앞에 선다. 현옥이 간밤에 눌러두었던 감정이 다시 솟구쳐 올랐다. 왕래가 자주 없어 대면 대면하는 사이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이 정도로 야박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어제 저녁 역에서 작은아버지의 집을 찾아 가겠다 했을 때 만해도 이 외지에서 그래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척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으며 기쁜 마음으로 힘들게 찾아 갔건만 작은집 식구들이 이렇게 야멸차게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현옥이 생각하다 보니 작은집 사람들이 너무 얄미웠다. 경현이도 제 나름 기분이 좋지 않았던지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뱉어낸다. “누부야! 내 다시는 작은아버지 집에 안 올기다.” “…….” 현옥도 경현과 같은 생각이었다. 찾아 온 것이 잘못이었다. 차라리 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조모에게 받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작은집에서 마저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아이들은 풀이 죽어 작은집 대문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제 아비가 사준 국밥 한 그릇을 끝으로 끼니를 챙겨먹지 못한 탓에 경현이 몇 발자국을 못 걷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는다. “경현아! 와? 어디 아프나?” 현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자 경현은 찡그린 얼굴을 들고 누이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누부야! 내 배고파서 더 못 걷겠다.” 금세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는 동생이 안쓰러웠다. 주섬주섬 보따리를 뒤져 숙이가 건네준 고구마를 꺼내 경현에게 건넨다. “아나! 이거 먹고 쪼매만 참고 가자. 집에 가서 엄마한테 맛있는 밥 해달라고 하자.” 동생을 달래며 잠시 골목 후미진 곳으로 가 둘이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고구마를 먹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는 인적이 없었다. 퍽퍽한 고구마를 입 속에 넣고 오물거려 삼킨다. 경현이 제 몫의 고구마를 다 먹고도 아쉬운 듯 누이를 바라본다. 현옥이 남은 하나를 동생에게 양보하고는 제 손에 들고 있는 고구마를 동생이 먹는 속도에 맞춰 한입씩 베어 문다. 고구마 덕에 조금은 기운을 얻은 남매는 간밤에 헤매었던 골목을 벗어나 흥해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섰다. 좁은 골목들을 빠져 나와 포항역을 등지고 길을 따라 걸으니 큰 도로가 나타났다. 현옥이 잠시 멈춰 서서 두리번거렸다. 따라 멈춰선 경현이 현옥을 보며 묻는다. “누부야! 와 안가고 서 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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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의 눈이 사방을 훑으며 동생의 물음에 대답을 한다. “그때 엄마하고 왔을 때 여 근처 어디에서 트럭을 타고 갔었는데 거가 어딘지 모르겠다.” 경현은 누이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보내고 누이를 따라 사방을 둘러본다. 아무리 둘러봐도 트럭이 서있는 곳은 없었다. 현옥이 고개를 저으며, “경현아! 여가 아닌 것 같다. 쪼매 더 내려 가보자.” 하고는 동생의 손을 잡고 큰 길을 따라 내려간다. 여전히 사방을 훑으며 지나자 낯익은 공터가 눈에 들어 왔다. 공터에는 짐을 들고 서있는 아낙들이 삼삼오오 모여 줄을 서 있었다. 현옥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외친다. “경현아! 찾았다.” “진짜가?” “그래. 저 앞에 줄 서있는 사람들 보이제?” 경현이 누이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던진다. 짐을 든 사람들이 모여 여러 갈래의 줄을 만들어 서있었다. “보인다.” “가자. 우리도 저 가서 줄 서면 된다.” 마지막 관문까지 무사히 시험을 치른 아이들은 기쁜 마음으로 공터를 향해 달려간다. 현옥이 어미를 따라 트럭을 탔던 기억을 더듬어 흥해라 쓰인 푯말을 찾아 줄을 섰다. 수중에 가진 돈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무임승차를 해야 해 현옥이 경현에게 소곤거리며 귓속말로 이른다. “경현아! 지금부터 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그라.” “머를?” “이따가 트럭 오면 니는 저 앞에 보이는 몸빼 입은 아지매 옆에 가서 서있어라. 그라믄 트럭아저씨가 니보고 차비 내라 안 할기다. 내 말 알겠나?” “알았다. 누부야!” 경현은 두말 않고 누이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트럭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한없이 길어졌을 즈음 흥해 푯말 앞에 한대의 트럭이 먼지를 날리며 사람들이 서있는 줄 앞에 뒤꽁무니를 대고 멈춰 섰다. 땅바닥에 짐을 내려놓고 지루함에 주저앉았던 사람들이 일어나 트럭에 오를 준비를 한다. 운전수가 트럭에서 내려 뒤쪽으로 돌아와 트럭위로 오르려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민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들고 있던 동전을 운전수에게 건네주고는 하나 둘씩 트럭위로 올랐다. 경현이 누이의 곁을 떠나 현옥이 말한 여인의 옆에 슬쩍 들러붙어 트럭에 무사히 오른다. 현옥도 경현과 틈을 두고 서너 사람 뒤에 서있다 마치 어미와 함께 동행하는 딸처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며 트럭에 오른다. 남매는 무사히 트럭에 올라 사람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 몇 사람이 더 트럭에 올라타더니 이내 만원이 되었다. 더 이상 사람을 태울 공간이 없자 운전수는 트럭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에 시동을 건다. 잠시 후 트럭은 공터에 먼지만 남기고 흥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내달리는 트럭의 뒤에 앉은 사람들은 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고개를 숙인 채 심한 요동에 몸을 내맡겼다. 차가운 날씨에 얼굴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따갑게 느껴졌다. 남매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이리 저리 쏠리며 날리는 먼지를 피하려 고개를 숙였다. 얼마를 지났을까? 먼지만 날리던 길을 지나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더니 트럭이 흥해 읍내 시장 앞에 멈춰 섰다. 현옥이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눈에 익은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뒤에 올랐던 사람들이 차례로 내리고 남매도 트럭에서 내려왔다. 바람과 먼지에 그대로 노출이 되었던 아이들의 머리에는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리저리 흩날려 엉켜있었다. 몇 달 만에 밟아보는 흥해 땅이었는지 모른다. 이제 이곳에서 십 리만 더 걸어가면 과수원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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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설움과 원망은 씻어낸 듯 가시고 흥분이 되어 아이들은 집을 향해 나는 듯이 걸었다. 시장을 지나 학교 앞을 걸어가자 벌써 아이들이 교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현옥은 혹시나 반 아이들과 마주치게 될까 몸을 숨겨가며 학교 앞을 급하게 뛰어 지나갔다. 누이가 뛰자 뒤에서 열심히 쫓아오던 경현이 누이를 향해 외친다. “누부야! 인자 다 왔으니까 천천히 가자. 내 배고파서 더 못 뛰겠다.” 그들 뒤에 따라오는 학생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현옥은 그제야 뛰는 것을 서서히 멈추고 경현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걷는다. 창피했다. 친구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게 될까 그것이 싫었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이 창피하고 싫었다. 그래서 그곳을 빠져 나오려 현옥은 번개같이 뛰었던 것이다. 누구든 만나면 난처해질 까봐서 변명을 할 수 없어서 어린 자존심이 발동을 했던 것이다. 현옥이 온갖 생각을 하며 걷다 경현의 목소리에 잡념을 떨쳐내고 동생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어느새 언덕길을 올라 외나무다리를 지나고 논둑길로 들어서자 경현이 누이를 향해 웃으며 말을 건넨다. “누부야! 엄마가 우리를 보면 반가워서 안아주겠제?” “그래.” 아이들은 어미의 품에 안기는 상상을 하며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열심히 걸었다. 드디어 과수원집이 눈에 들어 왔다. 기쁜 마음을 드러내고 아이들은 신나게 걷는다. 과수원 길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이 그대로였으나 손질한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는 사과나무와 배나무의 가지가 앙상하게 드러나 추위에 버티고 있었다. 대문 앞에 다다른 남매는 그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스스로에 대한 대견한 마음이 들어 더욱 흥분이 되었다. 힘차게 대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 마당에서 어미를 소리쳐 부른다. “엄마!” “엄마!” 남매가 번갈아 가며 어미를 부른다. “엄마! 어디 있노? 작은 누부하고 내가 왔다.” 경현이 뛰어가 마루에 올라서며 안방 문을 활짝 열었다. 햇빛이 통과한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대답이 없다. 어미의 모습도 보이지가 않았다. 아이들은 어미의 모습을 찾고자 부엌을 들여다보고 작은방을 열어보고 어미가 있을 만한 곳을 여기저기 뒤지고 다닌다. “엄마! 엄마! 어디 있노? 누부야! 찬옥이 누부야!” 세간은 그대로 있는데 반겨줄 어미와 찬옥의 모습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어미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려 했던 마음이 싹 달아나고 말았다. “누부야! 엄마하고 큰누부야하고 다 없다. 집에 아무도 안 보인다.” 실망한 경현은 찾는 것을 포기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배고픔부터 해결해 보려 솥뚜껑을 열었다. 깨끗하게 설거지가 되어있는 솥을 보고 실망하며 부엌 안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 선반 위에 올려진 밥그릇을 찾아내어 뚜껑을 연다. 아침에 지어놓은 것 같은 보리밥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다시 선반 위를 올려다보며 김치보시기를 찾아내어 숟가락을 들고 아궁이 옆에 앉아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제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씹을 때마다 밥알이 톡톡 터지는 보리쌀이 침샘을 자극한다. 밥 한 숟가락에 신 김치를 얹어 한입 크게 넣고 오물 오물거리며 입을 불룩거린다. 집 뒤로 난 길을 따라 텃밭까지 훑어보고 돌아온 현옥이 체념하고 경현이 들어간 부엌으로 들어섰다. 입안을 불룩거리며 밥을 먹는 경현을 보니 입안에 침이 고이면서 뱃속에서 아우성을 쳐댄다. 현옥이 경현이 옆에 숟가락을 들고 앉으며 밥그릇의 밥을 나누어 먹는다. 오랜만에 입안을 맴도는 밥알을 씹으며 남매는 눈치도 걱정도 없이 편안하게 앉아 식사를 즐겼다. 없는 반찬이지만 그래도 제 집에서 마음 편하게 먹는 밥이라 그런지 여태껏 참고 있었던 허기도 싹 달아나버린 듯 뱃속이 그득했다. 밥그릇의 밥을 몽땅 비우고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방으로 들어온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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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날씨 탓에 군불이 잠시 머물고 간 아랫목에 식지 말라고 펼쳐둔 이불을 걷어 올리며 들어가 드러눕는다. 미지근하게나마 남은 열기를 느끼며 남매는 편안한 휴식을 맘껏 즐긴다. 가는 곳마다 주눅이 들어 웅크렸던 몸도 제 집 방안에 누이니 반듯하게 풀어지는 듯 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인지 몰랐다. 이 편안함과 따듯함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던지 경현이 누운 자락에서 현옥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비춘다. “누부야! 우리 인자는 아버지한테 안가도 되겠제? 여서 엄마하고 같이 사는 거 맞제?” “그래. 안가도 된다. 엄마하고 큰누부하고 내하고 니하고 다 여서 같이 살기다.” 생각지도 않았던 동생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불안했던 마음을 진정시키며 되뇌었다. “우리는 여서 살기다. 엄마가 다시 가라 해도 안 갈기다.” 절대로 그 악몽의 시간들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듯 현옥은 굳게 결심을 한다. 경현이 피곤했던지 곧바로 잠으로 빠져 들었다. 누이에게 남긴 의미심장한 말이 현실이 될 거라는 안도감을 가지고 깊은 단잠에 빠졌다. 옆에 누운 동생의 고른 숨결에 현옥도 이내 잠이 들어 버린다. 불안한 생각을 떨쳐내 버리듯 고른 숨을 내쉰다. 얼마나 잤을까? 비몽사몽이 되어 단잠에 빠졌던 현옥이 잠결에 밖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눈을 떠야 하는데 눈꺼풀이 무거워 떠지지를 않았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희연이 찬옥과 함께 품팔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요한 산자락아래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외딴집에 어둠이 내려앉으려 한다. 아이들을 올려 보내어 놓고 돈을 벌어 보겠다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해보기는 했으나 장사수완이 있는 것도 아니요, 사람을 붙이는 입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 하는 것마다 수치심이 발동하여 장사는 아예 물 건너갔기에 희연은 남의 집을 다니며 품을 팔아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자식을 떼어 놓고 맘 편한 어미가 어디 있으랴 희연은 자나 깨나 자식들 생각에 노심초사하였다. 사나운 시어미에게서 모진 소리를 듣고 있지나 않은지 아비라는 자가 아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은 아닌지 그 모든 것들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다가도 가족을 버리고 어미와 살고 있는 남편을 생각하자 피가 거꾸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희연이 아이들을 아비에게 보낸 것도 따지고 보면 남편에 대한 미움에 맞불로 대적하며 한번 당해보라는 심정에서 자식들을 무기로 삼았던 것이었다. 하다못해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이 바뀌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없잖아 있었기에. 그렇게 아이들을 아비에게 보내어 놓고 품팔이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찬옥이 불쑥 집으로 잦아 왔던 것이다. 어린 것들 둘만 남겨놓고 어미의 소식이 궁금하여 찾아 내려온 찬옥은 조모의 구박을 참지 못하겠다며 가지 않고 집에 눌러 앉고 말았다. 그 후 희연은 찬옥을 데리고 품팔이를 다니기 시작했고 제 살길이 바빠 자연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멀어지게 되었다. 아무리 미워도 제 핏줄이니 구박은 받아도 시모와 아비가 잘 거두어 주리라 철석같이 믿으며 고달픈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찬옥이 방으로 들어서려 마루에 오르려다 마루아래 놓여 진 신발 두 켤레를 보고는 어미를 다급히 부른다. “엄마! 집에 누가 왔는 갑다.” “뭐라카노?” “와서 봐봐라.” “야가 갑자기 와 그라는 기고?” 다급한 딸의 목소리에 희연이 마루 쪽으로 다가선다. 찬옥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아래로 눈길을 돌려 신이 놓여 있는 곳을 보고는 놀라 급하게 마루에 올라서 방문을 연다. 방안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미 뒤에 섰던 찬옥이 먼저 방으로 들어와 등잔불에 불을 밝힌다. 희연이 뒤에 들어와 희미한 불빛아래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놀란다. “이기 우째 된 일이고? 야아들이 와 여 있는 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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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의 목소리가 잠결에 들렸던지 현옥이 부스스 눈을 떴다. 희미한 불빛에 비치는 두 얼굴이 아른 하게 눈에 들어왔다. “엄마?” “현옥아, 아가!” “엄마!” “그래. 엄마다.” 어미의 부름에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어미와 찬옥을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희연이 영문을 몰라 현옥에게 묻는다. “너거들 우째 왔노?” “엄마 보고 싶어서…….” 현옥이 어미를 보자 설움이 밀려드는 듯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가 안쓰러워 어미는 딸을 품에 안는다. “울지 마라. 잘 왔다.” 경현이 주위가 어수선하여 잠에서 깨어나 어미를 보고는 울먹거리며 어미에게로 달려든다. “엄마!” “오냐! 경현이 깼나?” 어미의 품이 그리웠던 아이들이 어미의 품을 파고들자 희연은 두 아이를 말없이 품에 안았다. 어두운 불빛에 비치는 아이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어미는 알 수가 있었다. 한참을 아이들을 다독이던 손길이 멈추고 아이들은 어미의 품에서 잠시 벗어났다. 희연이 아이들의 보며 물었다. “아버지는 어데 있노?” “할머니 집에 계신다.” “아버지가 너거한테 아무 말 안하더나?” “그냥 차비 주면서 엄마한테 내리가라 했라.” “와 다시 내리가라 하드노?” 현옥이 다시 그때의 설움이 되살아나 목소리가 울먹거렸다. “할머니가...자꾸 우리한테 엄마 찾아가라믄서 맨날맨날 구박하고 밥도 안주고... 그래서 경현이 하고 맨날 기차역에 가서 엄마하고 언니 기다렸는데...하루 종일 기차역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집에 가니까 문도 잠가 버리고... 경현이하고 내는 집에도 못 들어가고...그래서 역에서 쭈그리고 자다가 청소아저씨가 또 쫓아내서 인자는 갈 데가 없어서 그라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우리 찾아와서 밥 사주고 차비 주면서 엄마한테 내리 가라고 했다. 그래서 온 기다.” 희연은 현옥의 얘기를 들으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푸대접을 했는지 시모가 너무도 미웠다. 덩달아 아비라는 인간은 제 자식을 어찌 거리에 내팽개쳐 놓을 수 있었는지 제 생각으로는 도저히 용납 되지 않았다. 희연은 남편의 처사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희연의 가슴에 피눈물이 맺힌다. 아이들 앞에서 차마 우는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입술을 깨물고 현옥이 하는 얘기를 곱씹으며 듣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포항에 와서 여까지 우째 찾아 왔노?” “포항에 오니까 깜깜해서 못 오겠어서 그래서 작은 아버지 집에 찾아 갔었다. 갔는데 집을 몰라서 한참 돌아다니다 숙이 언니 만나서 같이 집에 들어 갔는데... 작은 엄마가 우리 보고 별로 안 좋아해서 그냥 숙이 언니 따라서 방에 들어가 잠만 자고 아침에 깨우더만 그만 가라 해서 밥도 안주고 그냥 가라 해서...거서도 쫒기 왔다.” 희연이 속에서 다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못된것들! 아무리 왕래가 없다 해도 그렇제 어린것들이 에미 찾아 간다고 했이믄 데리다 주지는 못해도 밥이라도 메기든지...우째 하나같이 정이라고는 없일꼬? 하기는 너거가 눈에 보이기나 했겄나? 거지꼴로 갔으이 더 푸대접을 했을 기구마. 저거 시어무이도 쫓아내는 인사가 너거가 대수겄나!” 희연은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고 작은 집에 대한 미움을 과감하게 드러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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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들 분이 풀리겠는가, 현옥의 얘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이 겪은 고통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전해지는 것을 희연은 느꼈다. 찬옥이 옆에서 동생의 얘기를 듣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조모와 아비, 그리고 작은집 식구들까지 모두 싸잡아 헐뜯기 시작한다. “우째 박씨 집안사람들 그래 정도 없노? 엄마는 와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 결혼을 했노? 아버지 한 사람 때문에 와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데? 내는 억울해서 못 살겠다. 야들이 무신 잘못을 했다고... 할머니가 내한테 한 것만도 뼈에 사무치는데 와 어린 야들한테까지 그래 모진 말을 하노? 엄마! 내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가만히 못 있겠다. 내일 아버지 찾아가서 따질 기다. 아니! 가서 말할 기다. 우리한테 아버지 없다고! 평생 우리 곁에 오지 말고 할머니하고 천년만년 사시라고 돌아가시도 우리 찾지 말라고 할기다.” 찬옥이 거칠게 내뱉는 말들에 희연은 침묵하고 앉았다. 그 모든 말이 자신의 가슴속에 고스란히 묻혀있었던 말들이었다. 그래도 자식 낳고 산 세월이 있어 참고 참았었던 말이었는데 그 말을 내뱉고 부부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었으나 아이들이 눈에 밟혀 차마 그리 모진 짓을 못하겠어서 마음에만 담아 두었던 말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쫓아가 시모와 남편에게 모진말로 상처를 주고 인연을 끊고 싶으나 여태껏 자신이 그 말을 꺼내지 못했던 이유가 혼자서 아이들을 감당하기에 자신이 없어 참고 있었다는 것을 희연은 기억한다. 어미는 흥분한 찬옥을 달래며 진정시킨다. “그만 진정해라. 니 맴이 그란데 내는 우떨거같노? 내라고 니 아버지 같은 사람 만나고 싶어 만났드나! 억지춘향으로 맺어진 인연이라서 마지못해 참고 사는 내다.” 울분을 토하는 딸에게 자신도 모르게 신세한탄을 하고 만다. “젊었을 때야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랬다 치고 나이 들고 자식들이 생기믄 좀 나아질 줄 알았더마... 참말로 천성고치는 약은 없다더만 너거 아버지 하는 짓이 우째 그런지 내도 모리겄다. 평생을 어무이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저래 애비 구실도 못할 줄 누가 알았겠노! 무를 수만 있다믄 너거 아버지와 결혼한 것부터 물렀이믄 좋겄다. 내도.” 어미의 본심을 듣고 있던 찬옥, 자신의 눈에 비친 어미가 가엾고 안쓰러워진다. 한 여인의 삶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손에서 결정지어져 버렸으니 이 악연을 누구를 원망하고 탓해야 하는 건가. 찬옥은 어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가 되는지 아무 말 않고 어미의 침울한 표정을 살피고는 동생들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 밤은 깊어가고 심지가 타 들어간 등잔불은 처량하게 앉아있는 여인을 희미한 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희연은 잠도 잊은 채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힘도 능력도 없는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무능력한 어미가 한창 커가는 아이들을 무엇으로 먹이고 입히나 싶어 앞이 캄캄해졌다. ‘당장에 내일 먹을 쌀도 없는 판에 이 아아들을 우째 거두노? 에미 곁에 있어 봤자 밥 굶는 일이 허다 반일 긴데 이 일을 우짜면 좋노? 오라버니라도 살아 기시면 의지나 해볼 긴데... 내 신세가 우짜다 이래 됐는지 모리것다.’ 생각을 하며 잠이 든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래도 지 애비가 있는데 설마 아아들 굶기기야 하겄나, 내만 부모가, 그 인간도 반은 아아들 부모 아인가베. 내 혼자 아아들 다 책임 못 진다. 자신 없다. 찬옥이는 그래도 지 밥벌이라도 하지만 저 어린것까지 지 밥벌이하라고는 할 수는 없는 기다. 그래도 지 애비 곁에 있으면 끼니는 해결 할 수 있지 않겠나? 눈치는 보겠지만 굶는 일은 없지 않겠나! 아이다! 어무이가 어떤 사람인데? 쟈들이 여지껏 지 할무이한테 구박받고 쫒기 내려온 긴데 내가 무신 생각을 하는 기고?’ 아이들의 고통을 몸으로 느꼈던 것이 조금 전의 사정인데 희연은 다시 그 고통을 자식들이 겪게 할 수는 없다 여겨 생각을 털어낸다. 희미한 등불에 비치는 아이들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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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아! 에미가 뭐 그래 대단하다고 찾아 내리왔노? 그냥 할무이 집에 얹혀서 지내지. 구박하믄 한 귀로 듣고 흘리면 될 거를... 배따고 들어오는 것도 아인데 그냥 쪼매만 참고 있지. 인자 너거를 우째야 좋겠노? 능력 없는 부모 탓에 너거들만 고생이다. 불쌍한내 새끼들.’ 소리 없는 눈물이 불을 타고 흘러내린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 고통은 배가 된다. 희연의 생각이 갈림길에 섰다. 굶어도 내 자식들 구박덩이 신세는 만들지 말아야 할지 아니면 그 반대여야 할지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밤새 희연은 생각의 갈림길을 오가며 울다가 화를 내다가 다시 울다가를 반복하면서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었다. 어미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오랜만에 편안한 잠에 취한 아이들은 따듯한 이불 속에 몸을 묻은 채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날이 새고 있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앉아있던 희연이 슬며시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이른 아침 차가운 기운이 몸으로 스며들어 온다. 은근하게 달궈놓은 아궁이에 불쏘시개를 던져 넣으며 군불을 때기 시작한다. 마른 솔가지에 불이 붙으며 활활 타오르고 있는 사이 장작을 꺼내와 불이 붙은 아궁이에 쑤셔 넣는다.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쌀 단지를 열었다. 한 끼나 제대로 채울까 말까 한 쌀이 한줌 들어있는 것이 다였다. 비어있는 쌀독을 들여다보며 희연의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거로 저 배고픈 아아들을 우째 배불리 먹이노?’ 제 입이야 어떻게든 한술 뜨고 말 것 이지만 한창 크는 아이들의 배고픔을 어찌 달래어주어야 할지 희연은 막막하기만 했다. 쌀독에 남은 한 톨까지 긁어내어 바가지에 담아 씻어놓고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삶은 보리쌀 소쿠리를 내려 쌀의 두 배를 넘게 쌀에 섞어 솥에 안친다. 마지막 양식이나마 아이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싶어 아끼던 곡식을 거덜을 낸다. 된장을 묽게 풀어 시래기를 넣고 된장국을 끓이고 김치와 장아찌가 올라 있는 아침상이 준비 되었다. 금방 지어진 밥에서는 솔솔 김이 오르고 밥사발 가득가득 밥을 떠서 상에 올려놓는다. 어미가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실컷 자고 일어난 아이들은 세수를 마치고 방에 앉아 어미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희연은 부엌에서 상을 들고 나와 방으로 향한다. 방문을 열고 아침상을 들고 들어오는 어미를 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이 났다. 굶어서 허기가 진 것이 아니라 어미의 정에 굶주려 그렇게 허기가 졌었나 보다. 남매는 그저 어미의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들었는지 밥상보다 그것을 들고 방으로 들어서는 어미를 보는 것이 더 신이 나고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소박하면서도 정성이 깃든 밥상을 내려다보며 어미의 손맛이 그리웠던 아이들은 밥사발에 가득 담긴 밥을 야금야금 맛있게 먹어 치운다. 제 몫으로 차려놓은 밥과 국을 남김없이 비우고 상에서 물러나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희연은 빈상을 들고 다시 부엌을 들어갔다. 아침 내내 말이 없던 희연이 상을 내려놓으며'후'하고 한숨을 내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입술에 경련이 일며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울지 않으려 입술을 다물고 있으니 턱이 잔잔하게 떨려온다. ‘저 불쌍한 것들을 우야믄 좋겠노? 저것들을 또 우째 지 애비한테로 보낸다 말이고. 못할 짓이다. 참말로 못하겠다. 차라리 같이 굶어 죽으믄 죽었지 어린것들 가슴에 상처를 또 우째 남기노? 한 분도 아이고 두 번씩이나. 안 된다. 못한다.’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생각이라는 놈이 마음을 흔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없었다. 어떤 수를 써도 자신은 어린 자식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희연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두 남매를 다시 아비에게로 보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고통과 씨름을 하며 내려진 결론이었다. 그러나 어미를 보는 아이들의 눈을 대할 때마다 결심이 흔들렸었다. 차마 입에서 그 말이 떨어져 나오지를 못하고 결국 빈 밥상만 들고 나온 것이다. 서로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면서도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이라 생각하며 희연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는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 앞에 앉았다. 방에 앉은 삼 남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희연이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며 아이들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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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아! 경현아!” 어미의 부름에 아이들의 눈이 어미를 향한다. “너거들. 지금부터 엄마가 하는 말 잘 들어라.” 비장한 표정으로 어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서두를 꺼낸다. “너거들…….” 말을 하려는데 침이 꼴깍 넘어가면서 말문을 막는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어미는 얘기를 시작한다. “너거들... 다시... 아버지한테 가그라.” 찬옥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어미에게 따지듯 묻는다. “엄마! 지금 뭐라 캤으요?” “찬옥이 니 얘기 아이다. 야들한테 하는 기다. 니는 가마 있어라.” “야들이든 내든 와 다시 아버지한테 보낼라 하는데?” 찬옥이 화를 내며 어미에게 따지고 든다. “가마 있으라 안하나?” 찬옥과 어미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현옥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울먹인다. “엄마! 우리 안 간다. 다시는 아버지한테 안 간다. 엄마하고 언니하고 여서 살거다. 엄마! 우리 보내지 마라. 응? 엄마!” 아무 말 않고 있던 경현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다. 현옥이 경현을 달래며 다시 어미에게 애원을 한다. “엄마! 내랑 경현이 앞으로 엄마 말 잘 들으께. 그라니 제발 엄마! 우리 아버지한테 보내지 마라.” 애원을 하는 현옥이 울컥하며 울음을 터트린다. 조용했던 집안이 별안간 초상집으로 변하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퍼져 나간다. 순간 희연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희연은 다시 독하게 마음을 다지고 우는 아이들을 야단친다. “울음 못 그치나? 뭐 초상났다고 이래 울어쌌노? 내가 너거들을 팔아 먹기라도 하는 기가? 아버지한테 가라 카는 긴데... 죽으러 가는 것도 아인데 뭐가 그래 서러워서 우는 기고 말이다. 뚝 못 그치나?” 어미의 핀잔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희연은 기세를 꺾지 않고 아이들을 몰아간다. “너거가 여 있으믄 엄마가 아무것도 못한다. 너거도 알다시피 돈 버는 재주라고는 없는데 무신 수로 너거들을 먹이겠노? 여 있어봤자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을 기다. 그라니 엄마하고 언니하고 부지런히 돈 모아서 너거들 찾아 갈거이까 우선 너거가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그라.” “그때도 엄마는 안 왔잖아. 우리보고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바로 온다 해놓고 오지도 않았다 아이가? 그래서 우리가 온건데... 엄마는 약속 안 지킨다. 내는 엄마 말 안 믿는다.” 현옥이 악을 쓰며 어미에게 대어 든다. 악을 쓰며 내뱉는 말들이 비수가 되어 희연의 가슴을 찔러댄다. “이분에는 꼭 약속 지키꾸마. 부지런히 돈 벌어서 꼭 올라갈 테이까 너거들이 쪼매만 참고 기다리고 있그라. 할머니가 구박해도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아버지가 뭐라캐도 입 꼭 다물고 버티고 있그라. 그라믄 엄마가 너거들 꼭 데리러 갈기다. 응? 현옥아! 경현아!” “싫다! 안할기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다 보기 싫다. 안갈기다.” 어미가 달래는데도 아이들은 완강하게 버텼다. 달래어도 안되겠다 싶었는지 희연은 더 강하게 아이들을 밀어 붙인다. “너거가 이래 말 안들으믄 내도 하는 수 없다.” 희연이 잠시 밖으로 나가 부엌에서 가는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선다. “현옥이 경현이 퍼뜩 일나라.” 어미의 손에 들린 회초리를 보고 아이들은 더욱 울상이 되어 어미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본다. 제 손에 들려진 회초리를 아이들에게 들이대며 희연은 아이들을 강제로 일으켜 들고 왔던 보따리를 다시 안겨주며 방에서 내쫓으려 한다. 옆에서 어미의 행동을 바라보고 섰던 찬옥이 어미를 말리고 나선다. “엄마! 이라지 마소. 보낼 때 보내더라고 이래 쫓아내는 거는 아인거 같다.” 희연은 뜯어 말리는 찬옥을 밀쳐내고 현옥과 경현을 방에서 끌어낸다. “퍼뜩 못나가나?” 안 나가려고 버티며 우는 아이들을 억지로 방에서 데리고 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끌고 간다. 신발도 채 신지 못하고 끌려 나온 아이들은 대문 앞에 서서 어미를 목 메이도록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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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이 돌아서서 마루아래에 놓여 진 아이들의 신발을 들고 와 대문 밖으로 내던지고는 야멸차게 문을 닫아건다. 대문 밖에선 아이들은 빗장이 걸린 문을 흔들어 대며 서럽게 어미를 부른다. “엄마! 문 열어도. 엄마!” “집에 들어 올 생각 말고 퍼뜩 가라.” “엄마! 안 간다. 우리 아버지한테 안 갈거다. 엄마! 문 열어도. 엄마!” 울며불며 문에 매달려 때를 쓰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대문 앞에서 듣고 선 희연은 눈물을 참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미와 동생들 사이에서 찬옥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거리며 울고 섰다. “엄마! 엄마! 문 열어도. 큰 누부야! 문 좀 열어도.” 경현이 절규하며 어미와 누이를 부른다. 아이들의 울음과 절규에도 어미는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대문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현옥이 설움에 목이 메여 담벼락을 짚고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토해내고 경현은 악을 쓰며 대문을 두들기며 어미와 찬옥을 불렀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절규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지치기 시작했는지 대문 밖은 서서히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차례의 폭풍우가 몰아치고 난 후 고요함이 찾아 들었다. 대문을 중심으로 안도 바깥도 고요함 속에 묻혔다. 현옥과 경현이 대문과 담벼락을 기대고 앉아 서러움을 삭히고 있는 동안 희연은 자신의 등 뒤에서 울고 있는 찬옥에게 낮은 목소리로 동생들을 포항역까지 데려다 주고 오라 이른다. 울음에 지쳐 넋을 놓고 앉아있던 아이들의 귀에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몸을 튕기며 일어난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대문을 나오는 찬옥을 보고는 다시 설움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은 찬옥에게 가서 안긴다. “현옥아! 경현아!” “언니야!” “큰누부야!” 세 남매는 대문 앞에 서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또 한참을 울었다. “언니야! 엄마가 우리 들어오라 하드나?” 현옥이 간신히 울음을 거두고 희망에 부풀어 찬옥에게 묻는다. 찬옥은 동생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가...너거들 역까지 데려다 주고 오라했다.” 어미의 고집이 끝내 꺾이지 않았음에 현옥은 낙담을 하고 만다. “언니야! 언니가 엄마한테 말 좀 해도. 우리 내쫓지 말라고.” 눈물을 거둔 찬옥이 가엾은 동생들을 바라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현옥아! 경현아! 너거가 엄마 말 들어라. 가서 쪼매만 기다리고 있어라. 그라믄 엄마하고 내하고 꼭 너거들 찾아 갈 거다. 그때는 우리 식구 다 같이 모여 살수있다. 그라니 쪼매만 고생한다 치고 참고 있어라. 응?” 찬옥마저 어미의 편에 서서 자신들을 보내려하니 두 남매는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포기를 해버린다. 현옥이 야속한 심정으로 찬옥에게 묻는다. “그라믄 언제 올건데?” “그거는 모른다.” 기약 없는 이별이기에 찬옥은 동생들의 기대를 또다시 무너뜨리는 자신의 대답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땐다. “너거들 가 있으면 엄마하고 내하고 열심히 품 팔아서 돈 모아가지고 갈꺼다. 그때까지만 기다리고 있어라. 할머니 뭐라캐도 절대 기죽지 말고 알았나?” “…….” 아이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미에 대한 야속함을 품에 품고 그저 별수 없이 쫓겨 가야 하기에 마지못해 갈수밖에. 찬옥을 따라 두 남매가 논둑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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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이 대문 밖으로 나와 아이들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섰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내렸다.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미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낀다. “에미가... 에미가 미안하다. 내 살자고 너거를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니 이 죄를 다 우짜노? 현옥아! 경현아! 쪼매만 참그라. 엄마가...엄마가 너거를 꼭 찾아 갈기다. 약속하꾸마. 울지말고 아프지도 말고 기다리고 있그라.” 아이들이 듣지도 못할 말을 내뱉으며 희연은 아이들이 사라져가는 길을 눈물에 가린 눈으로 바라보고 앉았다.

두 남매는 다시 포항을 떠나 경주로 향했다. 누구 하나 반겨줄 이 없는 곳에 도착하여 아비를 찾아 들어가자 조모의 눈은 더 살벌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너거들 집에 안갔더나? 여는 와 다시 온기가?” “갔는데...엄마가 다시 아버지한테 가라해서...” 현옥이 대답을 하는데도 조모의 눈빛에 주눅이 들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뭐라꼬? 너거 에미가 너거들을 내쫓았다고?” “…….” “아이고야! 그기 인자는 간땡이가 부었는갑다. 어디 시에미하고 한 분 싸워보자 이기제?” 아이들을 다시 올려 보낸 것이 자신과 기 싸움을 하자는 의도로 해석한 정씨 부인. 며느리 행동이 괘씸해 아이들을 더 미워하며 구박을 해댄다.  ‘니가 그래 봤자 니 새끼들만 불쌍하제 내가 눈 하나 깜빡 할 줄 아나? 어림없다. 니가 내를 우습게 봤다 이거제?’ 조모에게 미운 털이 박혀 버린 남매는 잠시도 집안에 붙어있지 못하고 조모의 욕설과 구박에 못 이겨 집을 나와 밖으로 떠돌며 기차역 대합실로 찾아 들었다. 행여나 어미가 올려나 매일 같이 두 남매는 역 대합실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록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어미와 자신들을 구박하며 내쫓는 조모 사이에 희생양이 되어버린 두 남매. 기차역 대합실은 그런 두 남매의 눈물의 집이 되어버렸다. 아비 또한 이미 자식들에게서 등을 돌려버린 터라 어미가 하는 일에 일절 간섭을 않았다. 처음 몇 번은 제 자식들이 불쌍해서 감싸고돌았으나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볼 정씨가 아니기에 아들마저도 들들 볶아대기 시작했다. “이놈아! 니가 그래 대차지를 못하이까 니 마누라가 니를 우습게 보는 기다. 아아들 앞세워서 니하고 내 사이를 이간질 시켜 가믄서 복수하자는 거를 모리겄나? 제발 정신 좀 차리그라.” 어미의 잔소리가 날이 갈수록 더해지다 보니 근호는 그 모든 것이 귀찮고 싫어졌다. 그러다 어미의 세뇌에 넘어가 결국 자식들마저 외면하고 말았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어미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내쫓으려 하고 아비에게마저 버림 당한 아이들은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다시 어미를 찾아 내려가 버린다. 다시 쫓겨 내려온 자식들을 보며 희연은 남편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더욱 분풀이를 하고자 도로 아이들을 올려 보낸다. 그러나 사흘도 못 버티고 아이들은 조모와 아비의 구박과 잔소리에 시달리다 못해 또다시 어미에게로 쫓겨 내려오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던 남매는 어른들의 이기심의 희생양이 되어 포항과 경주를 쫓겨 다니면서 결국 몸도 마음도 지쳐 만신창이가 되었다. 일 년여의 세월을 그렇게 떠돌아다니며 지내다 더는 버틸 힘이 없게 되어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겨우 어미를 찾아 온 아이들, 어미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며불며 어미에게 매달린다. 현옥이 어미의 발아래 무릎 꿇고 앉아 사정을 한다. “엄마! 제발 우리 보내지 마라! 우리 여서 굶어 죽어도 좋으니까 아버지한테 보내지 마라.  경현이하고 내 인자는 몸이 아파서 못 가겠다. 제발 우리 내쫓지 마라. 어? 엄마!” 현옥과 경현이 목이 터져라 서럽게 울어댄다. 희연이 한번 두번 오기를 부렸던 것이 결국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만을 남겨 놓은 꼴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보기에도 아이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먹을 것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얼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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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마른버짐이 피었고 몸은 말라서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한마디로 거지가 따로 없는 형편이었다. 그제야 희연의 눈에 아이들이 들어 왔다. 거지꼴을 하고 있는 가엾은 아이들이. 그리고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순간 희연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며 앙다문 입술에 잔뜩 힘을 주어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내는 인자부터 남편 없다. 못살아도 내 자식들 내 손으로 거둘 기다.’ 희연은 마음속에 독을 품고 격앙된 목소리로 울고 있는 남매의 이름을 불렀다. “경현아! 현옥아! 너거한테는 인자부터 아버지 없다. 알겄나?” 어미의 단호하고 냉정한 말투에 반박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던지 아이들은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인다. 이미 아이들도 마음속으로 아비를 버렸었다. 마지막으로 쫓겨 오면서 두 번 다시는 조모와 아비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 맘속으로 수십 번을 다짐하였고 그 다짐 덕분에 어미에게 용기를 내서 못 가겠다 버텼던 것이다.  그러니 어미가 그 말을 하지 않았어도 아이들에게는 이미 아비의 존재가 무의미했다. 아이들을 방안에 남겨두고 나와 부엌으로 향하는 희연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산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부엌으로 들어간 희연은 부족한 땔감을 난감하게 바라보고 서있다 솔가지를 한 거듬 들고 와 그 중 일부를 아궁이에 남은 잉걸불 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리고는 걸어놓은 가마솥에 물을 한 가득 붓고는 뚜껑을 닫는다. 솔가지에 옮겨 붙은 불이 괄게 타고 있었다.  조금 지나 가마솥이 달아오르면서 물이 데워졌다. 그러는 사이 방안에 틀어 박혀 있던 아이들을 불러 부엌으로 들어오라 이르고는 솥뚜껑을 열어 물속으로 손을 넣어 보고는 목욕통을 가지고 와 뜨거운 물을 바가지로 떠서 통속으로 옮겨 놓고 차가운 물을 길러 다시 솥에 부어 넣고는 남은 물을 목욕통에 넣어 뜨거운 물과 섞었다. 부엌 한 구석에서 어미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고 서있던 아이들.희연은 남매를 자신 앞으로 불러 세우고 아이들이 입고 있던 옷을 훌러덩 벗겨 버린다. 그리고는 통속으로 두 아이를 밀어 넣는다. 남매는 통속에 앉아 어미가 하는 대로 몸뚱이를 내맡긴다. 뜨거운 기운이 오르자 아이들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찬바람이 부는 거리를 얼마나 울고 다녔던지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에 살이 튼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발가벗은 몸뚱이에는 가죽만 겨우 붙어 있는 형편이었다. 아이들의 몸을 씻기는 희연의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열기와 노동이 합해져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떨어지면서 눈물도 같이 떨어져 내린다. 두 아이의 목욕을 끝내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농 안에 깨끗하게 손질이 된 옷을 꺼내어 갈아입힌다. 그 일련의 행동들을 하면서 여전히 어미의 입은 침묵하고 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인지 방안에 훈기가 차있었다. 어미는 아랫목에 깔아 놓은 이불 속으로 아이들을 밀어 넣었다. 목욕을 끝내고 들어와서인지 한층 밝아진 아이들 얼굴에 나른함이 묻어났다. “누워있어라. 엄마가 치워놓고 밥 차려 오꾸마.” 희연은 아이들을 남겨놓고 다시 부엌으로 와서 목욕통을 치우고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그새를 못 기다리고 아이들은 잠이 들어 버렸다. 희연이 밥상을 들고 들어오니 이불 속에서 남매는 손을 꼭 붙잡고 잠을 자고 있었다. 둘이 함께 붙어 다니다 보니 손잡는 것도 습관이 된듯 하였다. 어디에서건 서로의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무의식적 반응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행동인 것이다. 아이들이 깰까 봐 조심스레 상을 내려놓으며 떨어져 앉아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말할 수 없는 고통이 희연의 가슴을 옥죄여 왔다. ‘불쌍한 내새끼들! 부모 잘못으로 너거가 죄 없이 고생을 했구나. 현옥아. 경현아. 엄마가 많이 미안하다.’ 곤히 잠든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어미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어미의 손에서 며칠을 지냈다고 아이들 얼굴이 다시 예전의 생기를 찾아 가고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희연은 며칠째 일을 나가지 못하고 있어 찬옥이 어미를 대신하여 품팔이를 하며 곡식을 얻어 오곤 하였다. 아이들이 없을 때는 두 사람 입만 챙겼으니 그래도 버틸 만 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져 하루 날품팔이로는 네 식구 겨우 입치레하기도 벅찼다. 게다가 일손이 한 사람으로 줄었으니 사정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 겨울을 어떻게 지내야 하나 싶은 걱정에 희연은 앞이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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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를 제대로 된 농사를 짓지 못했으니 보리농사도 과수원농사도 모두 엉망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이미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과수원 나무들은 손질을 해주지 못해 가지가 말라있었다. 더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에 희연은 더 이상 이 과수원 외딴집에 미련이 없었다. 친정도 오라비도 없는 포항 땅에 홀로 남아 있어 무엇 하겠나 싶어 마음을 돌이켜 본다. ‘그래! 모두 버리자. 버리고 아아들하고 같이 살아갈 방법을 찾아보는 기다. 어디를 가든 여 보다는 낫껏제! 품팔이도 사람들이 많은 곳이면 일도 많을 기다. 그래. 더 미련 갖지 말고 여를 뜨는 기다. 친정도 오라버니도 없는 포항 땅이 내한테 무신 소용이고.’ 모진 세월 속에 갖은 풍파를 겪어온 희연. 여리기만 한 여인이 아니라 세 아이의 어미이기에 세월을 원망하고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이제는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의무감에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보려 한다. 저녁이 되어 지친 기색으로 들어오는 찬옥을 곁에 앉혀 놓고 희연은 딸과 앞으로의 생활을 의논하고자 말을 꺼내었다. “찬옥아! 엄마가 생각해봤는데 우리 다시 경주로 이사 가면 어떻겠노?” “갑자기 와 경주로 이사를 가요?” “농사도 못 지을 긴데 여 있으믄 뭐하노? 그래도 먹고 살라 카믄 이 외진 곳보다는 사람 많은 곳이 낫겄제! 그라고 거는 친척들도 있으이 뭐를 해도 도움은 받을 수 있을 거 아이가? 그래 이춤 저춤 생각해서 다시 경주 가는 기이 낫겄다 싶어 니한테 의논을 해보는 기다. 니 생각은 어떻노?”“뭐 내야 별 상관있나? 엄마가 하고 싶은 데로 하소. 우리는 엄마 하자는 데로 하께요.” “그래? 알았다. 엄마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꾸마.” 어떻게든 이 겨울을 잘 버텨보기로 하고 이듬해 봄이 되면 희연은 여기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사이 과수원을 처리해야 할 것인데 이마저도 제 명의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오라비의 명의로 된 땅이다 보니 본인 없이 무슨 수로 팔수가 있겠는가! 해서 희연은 면에 살고 있는 어미의 사촌 동생뻘인 강 영감을 찾아가기로 한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으면서도 희연과는 거의 왕래가 없었으나 강 영감은 어미의 곁에서 마름 노릇을 하며 친정의 재산을 관리해 주고 있었던 터라 어미의 죽음 이후에도 그 일을 계속 맡아오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면서 오라비의 행방도 알 길이 없으니 마름 노릇으로 거둬들인 소작료를 강 영감 자신이 챙겨 제 살림을 불려가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오라비의 땅에서 나온 소작료를 모두 보관하고 있다 주인이 오면 돌려주겠다고는 했으나 사람이라는 족속이 원래 돈을 보면 눈이 뒤집히는 법, 제 것도 아닌 것에 주인 노릇을 하며 제 몫으로 착취하는 부분이 상당하였다. 희연 또한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에게는 어떤 권리도 없기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친정의 그 많은 땅들이 주인을 잃고 남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어도 희연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과수원이라도 내 명의로 돌려 놨이면 이래 억울하지도 않을거구마.’ 희연은 못내 아쉬워했다. 강씨 부인 살아생전 딸에게 과수원을 넘겨주고 싶었어도 사위 하는 꼴이 하도 못마땅하여 그마저도 사위 손에 있으면 어찌될지 몰라 농사만 열심히 지으라했지 명의를 넘겨주지는 않았었다. 어찌 보면 어미의 판단이 옳았을 수도 있었지만 앞으로 닥칠 일을 누가 알겠는가? 세상이 이리 뒤집힐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이제와 돌이켜 본들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결국 희연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체념하고 어떻게든 강 영감을 구슬려 과수원을 담보로 한 밑천을 얻어 볼 작정으로 그를 찾아 나섰다. 초가집이 즐비한 곡강면에 잘 지어진 기와집 한 채가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들어왔다. 그 곳이 바로 강 영감의 집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들이라 녹록한 살림살이가 대부분이었고 그 중에는 녹록치 않은 살림살이도 있었으나 티를 내지는 않는 편이라 마을 자체가 너무도 가난해 보이는 곳이었다. 그 가운데 달랑 기와집이 한 채 있으니 당연 그 집이 이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어떤 의도로 강 영감은 반듯한 이 기와집을 새로 지었는지 그 심중이 못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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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강 영감의 집도 마을과 잘 어울리는 초가집이었건만 정진사댁이 하루아침에 무너짐과 동시에 강 영감의 집터가 기와집으로 변했던 것이었다. 이에 마을사람들도 강 영감이 무너진 정진사댁의 마름 일을 거들면서 그 재산의 일부를 가로채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숨겨도 시원찮을 판에 대 놓고 자신의 위치를 드러낸 강 영감의 속내는 정진사댁이 몰락함으로 인해 자신이 이 마을에서 최고의 유지가 되었음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에 남들이 뭐라 손가락질을 해도 돈만 있으면 제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는 이들이 있음을 알기에 욕을 먹으면서도 제 욕심을 채우고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희연에게는 그저 아이들과 살아 갈 수 있을 만큼의 돈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미 제 재산이 아닌 것에 배 아파 한들 그것이 제 몫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나마 한 밑천만이라도 챙길 수 있으면 다행이라 여기고 강 영감을 구워삶는 데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두툼한 솜옷을 입었는데도 겨울바람은 옷 속을 파고들어 살갗이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추위를 참으며 희연이 강 영감의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제요! 계십니까?” 바깥마당을 걸어 들어가 사랑채를 향해 낮은 어조로 강 영감을 찾았다. “…….” “안기시나? 아제요. 안에 계십니까?” 다시 한 번 조금 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불러본다. “밖에 누가 왔나?” 잠시 후 안채에서 조금 떨어진 사랑채 안에서 강 영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창으로 난 문을 열고 강 영감이 밖을 내다보았다. 희연이 강 영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다. “자네가...우짠일이고?” 한눈에 희연을 알아보고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묻는다. “의논드릴 기이 있어 왔십니다.” “내한테?” “예에.” 촌수야 어찌되었건 자신에게 질녀가 되는 희연의 출현이 그다지 달갑지가 않은 강 영감이었다. “그라믄 잠시 들어 온나.” 여닫이문이 닫히고 희연이 마루에 올라 사랑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추위에 희연의 얼굴이 벌겋게 얼어 있었다. “춥은데... 오니라 고생했구마.” 서안을 사이에 두고 강 영감과 희연이 마주보고 앉았다. “아입니다. 그간에 별고 없으셨지요?” 서먹한 관계를 조금이나마 개선해보려 서로에게 인사치레를 한다. “내사 뭐...그래 자네는 우째 지내고 있노?” 별고 없냐는 말이 그리 기분 좋은 인사말이 아니라 강 영감은 대답을 회피한다. 희연은 별 뜻 없이 내뱉은 말이었으나 희연을 보면 왠지 당당해지지 못하고 뭔가 자꾸만 찜찜한 생각이 들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고운 시선은 아니었다. “그 일 때문에 의논 좀 드릴라고 왔십니다.” “…….” “아제요. 지 좀 도와주이소.” “내가 자네를 우째 도우라는 기고?” “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살 길이 막막해서 이래 찾아 왔십니다.” “…….” 강 영감은 희연이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돈 벌이하는 재주도 없고... 아아들 삼통 굶기고 있다 아입니까?” “아아들 애비는 뭐하고?” “경주 가서 시어무이한테 붙잡히서 못 옵니더.” “자네가 고생이 많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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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핏줄이라고 짠한 마음이 들기는 한가 보다. “아아들 아버지도 없는 판국에 지 혼자 우째 농사를 짓겠십니꺼?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데.” “…….” “여 있어 봤자 돈 벌 길도 없고 해서 다시 경주로 갈라합니더.” “경주로?” “예에. 가서 아아들 데리고 새로 살아 볼라고요.” “그라믄 아아들 애비한테로 갈라 하나?” “아입니다. 지는 아아들 아버지 버리기로 했십니다.” “자네 혼자서 아아들을 키우겠단 말이가?” “우짜겠십니까? 애비가 자식들을 버렸는데요.” “에이...못난 인사 같으니. 우째 애비가 돼서 자식들을 버릴 수가 있는 기고. 그라니 누님께서 그래 박 서방을 미워한 기라. 사램이 제 구실 못한다고. 한 집안에 가장이라는 인사가 우째 그래…….” 하다가 말을 멈추고 희연의 눈치를 살핀다. “그라니 아제요. 지 부탁 좀 들어 주이소.” “말해 보그라.” “어차피 과수원은 오라버니 명의로 돼있어서 팔지도 못 할기고 그렇다고 어무이가 지 살라고 해 준 거를 그냥 버리고 갈수는 없는 거 아니겠십니까?” “그래서?” 뭔가 심상찮은 이야기가 나올 거라 짐작하며 강 영감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 과수원하고 집을 담보로 지 돈 좀 융통 해 주이소.” “그 땅하고 집은 자네 말대로 자네 오라비의 것이 아인가베? 그란데 우째 자네 것도 아닌데 그 거를 담보로 돈을 융통해 달라 하노?” “그라니 부탁이라 안 합니까? 여 곡강면 논밭이 다 누구꺼 인지는 마을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지가 누구 딸 인지도요.  따지고 들자면 아제보다는 지가 더 촌수가 가까운 거 아입니까? 법으로 해결 할라 치면 누구 편을 들겠십니까?” 순간 강 영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입을 실룩거린다. “지금 내를 협박하는 기가? 그래서 법으로 해보겠다는 기가?” 분노가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반면 희연은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차분한 어투로 강 영감을 대했다. “진정하시이소. 법으로 따지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지가 법으로 해보겠다고 하는 말 아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지는 아제한테 부탁을 하자는 깁니다. 지가 여를 떠나는 기이 아제한테도 좋은 일 아입니까? 지는 아제하고 싸우고 싶은 맴도 없고 욕심도 없십니다. 다만 아아들하고 경주 가서 살 수 있을 만큼만 융통을 해 달라는 깁니다. 아제가 맡아 두고 있는 오라버니 재산 중에 일부를 지한테 줬다 해서 오라버니가 아제를 우짜겠십니까? 그럴 오라버니도 아이고요.”. 희연의 말이 옳았다. 그렇게 꺼림칙스러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정씨 집안 핏줄인 희연이 계속 이곳에 남아 있는 한 뭇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희연이 떠남으로 해서 자신의 명분이 확실하게 서는 것이라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일은 더 없을 것이고 어차피 땅임자의 몫으로 챙겨두었던 재산 중에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니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돈맛을 보다 보니 제 것이 아닌데도 가진 것을 내놓는 일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강 영감은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내 자네 뜻을 알았으이 우선은 돌아가 있그라. 며칠 내로 답을 주꾸마.”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지가 아제한테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거 지도 잘 압니다. 그라니 서로 좋게 좋게 해결하는 기이 안좋겠십니까?” 미적거리는 강 영감을 향해 희연이 다시 한 번 쐐기를 박는다. 대담하게 협상을 하고 나왔으나 강 영감이 자신의 청을 들어 줄지가 의문스러워 희연의 마음은 불안하였다. 그렇게 며칠을 안절부절못하며 답을 기다리고 있던 희연의 집으로 강 영감이 머슴을 동행하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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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었나?” “에. 오셨습니까?”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곡식 좀 가지고 왔다. 아아들 굶긴다고 해서 맴이 영 편치가 않더마.” “고맙십니다.” 강 영감의 어깨가 우쭐해진다. 어른으로서의 도리를 했다 싶어 제 딴에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던 것이다. 머슴이 지고 있던 지게에서 곡식을 내려놓는다. “이거면 아아들 데리고 겨울은 날수 있을 기다.” 딴에는 자신이 그리 야박한 사람은 아니라 생색을 내고 싶었고 반면 희연의 의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찾아왔던 것이다. “자네 결심은 아직 그대로가?” “예에.” “그라믄 언제쯤 떠날라 하노?” “겨울은 지내야 움직이지요. 봄쯤 해서 갈 깁니다.” “알았다. 그라믄 떠나기 전에 집에 오그라. 내 돈을 준비해 주꾸마.” “예. 알겄십니다. 그때 찾아 뵙겠십니다.” “오냐. 그래. 잘 지내그라.” 두 사람의 협상은 별 무리 없이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희연은 이제야 겨우 한시름 놓으며 앞으로의 자식들과 함께 살아 갈 계획을 차근차근 생각하기로 한다.

삼월이 되면서 추위는 많이 누그러졌다. 강 영감이 챙겨 준 양식 덕분에 아이들과 희연은 겨울을 편안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아침저녁으로는 아직 찬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한 낮은 양지바른 곳을 비추는 햇빛이 따사로워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 동안 희연은 강 영감에게 얻은 돈으로 아이들과 살기 위한 집을 마련하기 위해 경주를 몇 번 다녀왔었다. 겨우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해 놓고 내려온 희연이 아이들과 함께 이삿짐을 꾸렸다. “엄마! 우리 인자 경주 가는 거가?” 어미와 누이가 짐을 싸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경현이 묻는다. “그래! 인자 경주 가는 기다.” “그라믄 아버지한테 다시 가나?” “와? 경현이는 아버지 하고 살고 싶나?” “아이다. 내는 엄마하고 누부들 하고만 살거다.” 아이의 생각은 완강했다. “그래. 경주 가서 우리끼리만 살자.” 이 세상 어디를 가든 아이들에게는 어미만한 존재가 없었다. 아직 철부지인 아이들의 눈에는 어미가 세상의 전부였기에 그리 기를 쓰고 찾아 내려오려 했던 것, 어미가 없는 세상에서 자신들이 살아 갈 방법을 모르기에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어미가 커다란 존재인 것이다. 마지막 짐들까지 다 꾸리고 나니 한나절이 다 가버렸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경주로 가는 것이다. 희연은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잘살아 보겠다는 결심을 다지면서 과수원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아련한 기억 속으로 밀려드는 이곳에서의 몇 해가 이제는 추억거리가 되는 것이다. 어미의 임종을 지켜보고 전쟁을 겪고 자식을 잃어버리고 이 모든 것들이 꿈과 같이 흘러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 그래 고된 삶을 잘 버티고 나왔는데 앞으로도 내는 그래야 할기다. 저 아아들이 있는 한 내는 에미로서 최선을 다할 기다. 열심히 살아보자. 그라믄 내한테도 좋은 일이 있지 않겠나!’ 마지막 밤, 잠자리에 누워 희연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속으로 되뇌면서 오지 않는 잠을 청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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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 희연과 아이들은 일찌감치 일어나 분주히 움직였다. 경주로 짐을 싣고 올라갈 마부가 서둘러 우마차에 짐을 싣고 있었다. 포항에서 경주까지 팔십 리길, 꼬박 하루가 걸리는 그 길을 부지런히 가기 위해 마부는 서둘렀다. 희연과 아이들은 짐을 싣는 마부의 손을 거들어 마차에다 짐을 나른다. 해가 솟아 하늘이 환하게 밝아 오자 겨우 짐을 나르는 일을 마친 마부가 마차를 끌고 대문을 나갔다. 아침부터 고된 작업을 펼친 희연과 아이들이 짐들이 빠져 나간 마루에 이리저리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마루 끝에 앉아 있던 희연이 고개를 돌려 이방 저방 열려 진 문 사이로 텅 빈 방안을 들여다본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지워 내듯 짐들이 빠져나간 집채에는 싸늘한 냉기가 감돌아 외딴집이 더욱 외롭게 느껴졌다. 희연은 자신의 손때가 묻은 집안을 이곳저곳 돌면서 살폈다. 사연이 많았던 이곳을 정리하고 막상 떠나게 되니 공허함이 희연의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이내 가슴을 쓸어내고 희연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인자 우리도 슬슬 출발하자.” 희연은 아이들을 데리고 빈 집터만을 남겨두고 대문을 나와 과수원 길을 지나친다. 잎이 떨어져 나간 가지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앙상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희연의 몸이 자꾸만 뒤돌아지고 발걸음이 늘어진다. 몇 해를 삶의 터전으로 뿌리내리고 살았던 외딴집. 절망감을 안고 찾아왔던 곳에서 다시 절망감을 안고 떠나는 희연. 그 한해는 모든 것이 희망으로 부풀었었건만 그마저도 어그러지고 이제는 아픔과 쓰디쓴 추억만을 간직한 채 희연은 홀연히 길을 떠난다. 수없이 걸었던 논둑길을 아이들을 앞세워 걸으며 어미는 추억과 고통을 모두 지우고 싶었다. 생각이 꼬리를 무는 동안 어느새 발길은 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희연은 역으로 들어서 기차표를 끊고 아이들과 함께 경주행기차에 몸을 실었다.

아담한 크기의 집터에 일자형으로 놓여 진 초가집은 한 가족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마당을 들어서 왼쪽에는 부엌이 붙어있었고 그에 이어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서며 현옥이 신이 난 듯 어미에게 묻는다. “엄마! 여가 인자부터 우리가 살 곳 이가?” “그래.” 비어 있던 집이라 온 곳에 먼지가 인다. 새벽같이 출발을 하였는데도 짐을 실은 우마차는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겨우 도착을 했다. 방 앞으로 연결된 툇마루에 못다 푼 짐들을 내려놓고는 희연이 어두워진 방안으로 들어가 등불을 밝혔다. 희미한 그림자가 지더니 등잔불이 컴컴하던 방안을 엷은 빛을 내며 사방을 비추었다. “짐은 찬찬히 풀고 우선 찬옥이는 내하고 저녁상부터 좀 봐야겠다.” 어미를 따라 방을 나와 날라다 놓은 짐 속에서 간단한 부엌살림만 꺼내어 저녁 준비를 한다. 늦은 저녁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겨우 이부자리만 풀어 고단한 몸을 누인다. 피곤한 탓에 희연과 아이들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이사를 온 며칠 동안 희연은 집안 청소를 하느라 분주했다. 꾸려진 짐들을 풀어서 제자리에 놓고 먼지가 쌓인 집안을 걸레를 들고 다니며 닦고 또 닦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집안일에 몰두를 하였고 살림들이 어느 정도 제 자리를 잡고 나자 마음이 개운했다. 희연이 경주에서 다시 자리 잡은 곳은 남천내라는 마을, 시모와 남편이 살고 있는 곳과는 거리가 오리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오리 길, 희연에게 그 길은 가깝고도 먼 길이었다. 넉넉잡고 삼십 분이면 당도할 거리지만 마음이 떠난 이들에게 그 곳은 이미 무의미한 곳, 찾아갈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겨우 한 가지를 해결 하고 나니 또 다른 걱정거리가 희연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당장 생계를 이어갈 방법이 없으니 희연의 속은 다시 타 들어갔다. ‘이래 넋 놓고 만은 있을 수는 없다. 무신 수를 내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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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이 믿고 의지할 곳은 오로지 사촌올케밖에 없기에 답답한 마음에 오씨를 찾아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경주로 이사를 왔다는 소식을 올케에게 전할 겸 겸사겸사 올케의 집을 찾아 나섰다. 가게를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다며 하소연했던 것이 생각나 희연은 가게로 가지 않고 올케의 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마침 마당에 나와 있던 올케가 희연을 보고는 놀라며 반겼다. “애기씨! 여까지 우짠일입니꺼?” 생각지도 않았던 희연의 출연에 오씨가 당황하며 희연을 맞았다. “언니! 그간 잘 계싰는교?” “하모요! 애기씨는요? 별일 없었십니꺼?” “언니!  지 다시 경주로 이사 왔십니다. 그래서 언니한테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아 찾아 왔네요.” 오씨의 눈이 커지며 희연을 바라본다. “야? 다시 경주로 오싰다고요?” “예.” “그라믄 아아들 아버지하고는 잘 마무리 된 깁니꺼?” 희연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인자 아아들 아버지는 우리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요.” 희연의 대답에 오씨는 놀란 기색으로 묻는다. “그기이 무신 말인교?” “그 양반...우리 가족을 버렸십니다. 당신 어무이하고 단 둘이 살겠다고 아아들도 다 팽개쳐버렸으요.” 유일하게 희연의 사정을 아는 이가 사촌 올케였으니 이제는 부끄러울 것도 없다 여겨 남편의 흉을 한참 늘어놓는다. 아이들이 쫓겨 내려왔다는 말을 들은 사촌올케는 자신의 일인 양 분개한다. “참말로 몹쓸 인사구마. 우째 애비가 되가지고 그래 매정할 수가 있노! 아아들이 불쌍타.” 그간의 심정을 토로하며 희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라믄 애기씨는 지금 어데 있는 깁니꺼?” “친정 돈 좀 융통해서 집만 구해 놓고 올라온 깁니다.” “앞으로 우짤 생각입니꺼?”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언니하고 의논을 좀 하고 싶어 이춤저춤 찾아 온깁니다.” “뭐 할거라도 생각한 기이 있십니꺼?” “장사 좀 해볼까 하는데…….” “애기씨가 장사를요? 글쎄요. 지가 보기에 애기씨 장사꾼은 안되누마요. 어설프게 나섰다가 망하기 일쑤인께 우선은 다른 거를 해보는 기이 어떻겄십니꺼?” “지가 할 일이 있겠는교?” “내가 보기에 애기씨 음식 만드는 솜씨는 안있는교? 그거를 밑천으로 김치 장사를 해보는 기 어떻겠나 싶은데.” “김치장사를요?” “야아. 종부 솜씨가 어데 가겠십니꺼? 애기씨 김치 맛은 여 근방에서 알아주지 않았십니꺼. 그라니 지 생각에는 그 솜씨를 살려 보는 기이 좋을 것 같구마요. 밑천도 별로 안들이고 장사 수완도 쪼매 늘려 볼 양으로 소소하게 한 분 시작해 보이소.” 희연은 사촌올케의 충고를 받아들여 김치장사를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종택의 종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담그던 김치를 그대로 재연하기로 하였다. 갖은 양념을 넣고 맛있게 버무려 커다란 함지에 담아 머리에 이고 시장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찾은 시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희연이 아는 얼굴들도 종종 보였다. 마을에서 쪽 샘 우물을 나눠 먹던 이들도 있었고 종택의 일을 봐주었던 이들도 눈에 띠었다. 희연에게는 그들이 반가운 존재였으나 그들에게는 종택의 종부가 나타난 것이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시대가 변하여 신분의 벽은 허물어졌다고는 하나 습관처럼 몸에 베어버린 양반을 대하는 행동은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존대를 할 수도 하대를 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도 그들에게는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그런 것도 모른 채 희연은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들 틈에 슬며시 끼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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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먹고 살기에 급급한 이들에게 도리라는 것은 이미 물 건너 간 상황, 달갑지 않은 상전을 대하는 눈치가 여간 날카로운 것이 아니었다. 전에 없이 텃세를 부리며 희연이 자리를 잡는 것이 못마땅하여 비어있는 자리도 내어 주려 하지 않았다. “마님요! 이라믄 곤란하지요. 지들 입장도 좀 생각해 주시야지요.” “우리가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이고 마님 때문에 지들 장사에 지장이 있시면 서로가 곤란하지 않겠십니꺼?” “없는 놈들 생각해서 마님은 좀 비켜주이소.” “부자 망해도 삼년이라 했십니더. 지들 보다야 형편이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을거 아입니꺼?” 저마다 한마디씩 빈정거리는 말투로 희연을 공격해 온다. 그들 눈에 비친 종부의 모습은 가진 자의 여유 같은 그런 것,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이라고 굳이 이 일이 아니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것인데 하필이면 자신들과 껄끄러운 상대로 다가 서려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 앞에 목구멍에 풀칠도 못하고 있다고 차마 까발릴 수도 없는 노릇, 희연은 속이 타는 것을 참으며 장사꾼들의 텃세를 피해 장터를 벗어난다. 현재야 어찌 되었던 과거에 자신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박씨 종택의 종부, 어디에 내어놓아도 꿀리지 않았던 자신의 체면이 산산조각 부서지고 말았다. 상대도 안 되는 자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으니 꼿꼿한 성품에 치욕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이들의 목숨이 제 손에 달려 있으니 자존심이고 뭐고 모두 버려야 할 사치인 것이다. 희연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수치심을 떨쳐버리고 장사꾼들에게 밀리고 쫓기어 장터 끝자락에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조심스럽게 함지를 펼쳐 놓았다. 장사에 서툰 희연이 멋쩍은 표정으로 손님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장터 안에서 살 것을 다 사고 나오는 길이라 사람들은 희연의 함지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 길을 무심히 지나치기만 할 뿐. 장사를 하겠다는 사람은 그저 오가는 사람들의 눈치만 살필 뿐 호객행위 한번을 제대로 못하고 김치 통에서 조금 떨어져서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그렇게 김치를 들고 나온 지 몇 시간을 개시도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곳을 지나던 아기엄마가 가까이 다가와서 덮어 놓은 보자기를 열어 젖혀 내용물을 들여다본다. 희연이 그제야 함지 앞으로 다가와 섰다. 주인이 있는지 살펴보던 아기엄마가 희연에게, “이 김치 아지매가 파는 깁니꺼?” 하며 묻는다. “예에. 지가 팝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희연은 간신히 대답을 한다. “김치가 맛있어 보인다. 이거 얼마씩 하는데요?”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기엄마는 체면치레도 없는 행동으로 김치 한 조각을 떼어 제 입 속으로 집어넣는다. 희연은 그저 아기엄마의 행동을 바라다 볼뿐 아무 말이 없었다. “으음! 김치가 참 맛나다. 내 이래 맛있는 김치는 처음이네예.” “그래요?” 아기엄마의 칭찬에 희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애기엄마! 내 첫 개시고 하니까 싸게 줄기이 사가지고 가이소.” 함지에서 큼지막한 김치를 꺼내 아기엄마에게 건네준다. “이지매!  첫 개시 해드렸으이 이거 한 조각 덤으로 더 주이소.” “아따. 애기엄마도. 그라믄 내는 뭐가지고 장사 하라꼬?” “에이. 아지매도 이 한 쪼가리에 뭣을 그래요?” 희연이 말릴 틈도 없이 아기엄마는 함지에 손을 넣어 김치를 덤으로 가져가며 돈을 던져주고 줄행랑치듯 도망을 가버린다. 얼떨결에 팔기는 팔았으나 손에 쥐고 있는 돈보다 더 많은 김치를 도둑맞고 말았으니 어의가 없었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첫 개시를 했으니 조금씩 나아지겠지 마음을 먹고 다시 장사를 시작해 본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함지 앞에 붙어 앉아 보자기를 반쯤 열어 놓는다. 오며 가며 구경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보자는 의도였다. 아까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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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함지 앞에서 멈춰 섰다. 행인들은 맛있게 담근 김치를 한입씩 집어 먹어 보고는 역시나 그 맛에 반해 사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고 희연은 그에 탄력을 받아 장사를 하기는 하는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파는 양보다 덤으로 가져가는 양이 더 많아 제 값으로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맛을 보겠다는 이들이 한입씩 떼어 먹고 사가는 사람들도 마구잡이로 덤으로 가져가버렸으니 몇 시간이 되지 않아 함지는 텅 비어버렸다. 그래도 처음 장사에 인심 얻는 대가다 싶어 그냥 넘어 가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을 고생을 해가며 김치를 담아 장으로 내다 팔러 다녔다. 그러나 여전히 희연은 장사에 재미를 못 보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 일을 우야노?  매일 같이 팔기는 다 팔았는데도 이문 남는 것이 하나도 없으이 이기 무신 조화 속인고 모리겄다. 이래가지고 장사를 하겄나? 이문이 남아야 하는 재미도 있제. 이일을 우짜면 좋노!” 희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김치 장사는 안 되겠다 싶어 판을 접어버리고 다른 장사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무슨 장사가 좋을까 생각 끝에 역 앞에 나가 팥죽 장사를 해보기로 했다. 새벽기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뜨끈한 국물을 파는 것이 낫겠다 싶어 밤새 팥죽을 끓여 항아리에 담아 그 뜨거운 팥죽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새벽녘 역으로 향했다. 밤새 기차를 타고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 새벽거리에 내려선 사람들은 출출한 뱃속을 채우고자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희연이 밤새 끊인 팥죽을 담은 항아리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것을 보고는 지나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었다. “아지매요! 팥죽 한그릇 주소.” 희연이 국자로 팥죽을 떠서 그릇에 담아 주자 사내는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가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낸다. “아이구 맛나다. 인자 속이 좀 풀리는 구마. 아지매! 미안하지만 국물 쪼매만 더 주이소.” 희연은 새벽을 달려오는 사람들이 안쓰러워 조금 더 인심을 쓰기로 하고 국자로 국물을 떠서 부어주다가는 먹는 인심에 너무 야박하다 싶어 건더기를 한 국자 더 떠서 건네준다. 먹는 사람만 생각했지 자신의 이문은 또 생각지 않고 오지랖 넓게 남의 사정을 생각다 보니 결국 항아리에는 팥죽 국물만 반독이 남아 있을 뿐 건더기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아침이 되어 국물만 남은 항아리를 다시 이고 집으로 들어가니 찬옥이 어미의 머리에서 항아리를 받아 내리며 묻는다. “장사는 좀 되데요?” “아무래도 내는 장사 할 사램이 아인갑다.” “엄마! 또 남 사정만 생각해 준 기라예?” “우야겄노. 밤 새 기차 타고 내리오는 사램들을 쳐다보이 시커먼 석탄 뒤집어쓰고 형편없는 얼굴을 해서는 지친 모습으로 역에 내리는 걸 보이까 불쌍한 맴이 드는 것을!” “그래서 또 다 퍼주고 왔어요?” “하도 사램들이 뜨뜻한 국물 좀 한 국자만 더 달라 하는데 야멸차게 없다 할 수 있나? 그래 국물만 좀 퍼서 줄라카이 사램 인심이 또 그기 아인거 같아서 건데기 몇 알씩 담아서 줬더만 우예 그래 맛있게 먹는 동 내가 입맛 다실 판 아이던가베.” “엄마는 장사는 머할라고 하는교? 차라리 공짜로 넘 퍼주는 기이 맞겠구마.” 딸의 구박에 머쓱해진 희연이 찬옥을 보고 소리친다. “야가 참말로 지 에미가 우쨌다고 그라노?” “엄마는 우리 가족 살자고 하는 일에 남의 사정 다 봐주고 언제 돈을 벌라고 그라요?” 찬옥이 불뚝 성질을 내며 그 동안 참았던 말을 꺼낸다. “나는 엄마 따라 장사 거들어서 돈 많이 벌면 다시 중학교 갈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중학교는 고사하고 밥도 못 먹을 판이니까 하는 소리 아입니까?” 희연이 찬옥의 질타에 뜨끔하기는 했으나 속을 몰라주는 딸이 야속해 외려 더 큰소리를 친다. “그래 다 내가 못나서 그란다. 능력 없는 에미라 너거들 배곯게 만들고 재주가 있어 돈을 벌까 장사도 할 줄 모르는 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마. 나도 내가 한심타. 사램이 와 모질지를 못한지 모질지 못하면 인복이라도 타고 나든지 이도 저도 아닌 인생이라 이래 자식들 고생이나 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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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쫌…….” 어미의 신세한탄이 듣기 싫은 찬옥이 어미에게 성질을 부린다. 못난 어미라 욕을 하는 것도 아니요 어미 때문에 자식들이 고생한다 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마음 약한 어미가 조금만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겼으면 하는 마음에서 쏘아 붙였던 것인데 그만 어미의 자책감만 심어 놓은 격이니 자신을 탓하는 마음에 어미에게 더 성질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희연에게 전해질 리가 없었다. 각자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마음이 통하겠는가? 희연은 딸의 질타가 무능력한 자신을 힐난하는 것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희연이 자괴감에 빠져 있는 까닭에 어떤 말도 곡해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어미와의 대화가 더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 되어버려 찬옥은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삶에 찌들어 정신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어미는 사춘기를 앓고 있는 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민감하게 구는 딸이 야속하기만 했다. 남편을 대신하여 의지하고 산 두 모녀 지간에 조금씩 틈이 생겨나고 있었다.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곡해하는 부분이 더 많아 지면서 자꾸만 마찰이 일었다. 희연은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 신세라 마음의 병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갈수록 삶은 더 힘겨워 지고 머리 커가는 아이들을 대하는 것도 버거웠다. 겨우 자신의 처지를 의논 할 상대는 사촌올케밖에 없었으니 마음이 답답하고 힘이 든 날이면 올케를 찾아가 무거운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으며 위로를 받고 오는 것이 희연에게는 유일한 안식이었다. 사촌올케는 희연이 찾아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반겨주었다. 자신을 믿고 의논을 하는 희연을 대하는 올케의 마음은 친 자매나 다름이 없었다. 찬옥의 말에 마음이 상한 희연이 사촌올케를 다시 찾았다. 딸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올케와 마주앉아 찬옥과 언쟁을 풀어 놓는다. “그래 내가 뭐랬십니꺼? 애기씨는 장사할 사램이 못된다 안했십니꺼! 말이야 바린 말이제 찬옥이도 오죽했시면 그랬겠으요.” “…….” 희연은 올케의 반응에 또다시 마음에 상처를 받고는 아무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애기씨! 그라지 말고 보따리 장사 한 분 안 해보실랍니꺼?” “보따리 장사요?” “야. 다른 기이 아이고 읍내로 나오기 힘든 마을 찾아 다니믄서 대신 필요한 물건을 사다가 전해 주는 일이라요.” “…….” “내가 장사할라꼬 몇 군데 가는 곳이 있는데 마 애기씨도 내하고 그 곳에 가서 사람들 심부름을 해주고 품삯을 받는 기 어떤가 싶네요. 밑천 안들이고 돈을 버는 길은 몸 쓰는 일밖에 더 있겠십니꺼? 몸은 힘들겠지만 그거라도 해서 어쨌든 아아들하고 살아야 안 하겠십니꺼?” 자신의 재주로는 도저히 돈을 벌수가 없으니 희연은 그렇게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올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알았으요. 언니 하라는 대로 하겠십니다.” “좋십니다. 그라믄 며칠 후에 지를 따라 나서이소.” “예.언니! 고맙십니다.” “그란데... 그랄라믄 여러 날을 집을 비워야 할 긴데 아아들은 우짤깁니꺼?” 희연이 잠시 고민에 빠진다. “내 생각에는 당분간 아아들은 지 아부지한테 맞기는 기이 좋을 성 싶은데…….” 올케의 말에 희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아들이 안 갈라 할 깁니다. 상처가 클 긴데 갈라 하겠십니까?” “그래도 아아들끼리만 있다는 기이 영 맴에 걸리누마요.” “…….” 사촌올케의 말에 희연은 고민을 한다. 자신이야 부부인연을 끊었다고는 해도 천륜으로 정해진 부모 자식 사이를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기에 희연은 그래도 아비를 인정해야만 하는 아이들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것도 다정한 아비였을 때나 가능한 노릇, 그렇게 모진 소리를 들어가며 갖은 구박을 받았는데 오죽 그 상처가 크겠는가? 상처로 일그러진 아이들이 어미의 말에 따라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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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이었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아이들의 의견을 들어보아야겠기에 희연은 사촌올케와 떠나기로 약속한 전날 찬옥과 아이들을 불러 앉혀 놓고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너거들 며칠만 아버지 집에 가 있을라나?” “거는 또 와 가라합니까?” 찬옥이 다짜고짜 먼저 짜증을 낸다. “이래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아이가. 뭐를 하든 해야제. 엄마는 인자 보따리장사라도 해야겄다.” “보따리 장사요?” “그래. 경주 숙모 따라 갔다 올거다. 아매도 며칠 걸릴건데 너거들끼리만 있는 것 보다는 아버지한테 가 있는 기이 안좋겠나? 그래서 하는 말이다.” 어미의 말에 현옥이 찬옥과 어미를 번갈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엄마! 내는 아버지한테 안 갈란다. 거가면 할머니가 또 우리 보고 엄마 욕하면서 막 구박 할 기다. 내는 인자 그 소리 듣기 싫다.” “내도 할머니 무섭다. 아버지한테는 안 갈거다.” 경현이 현옥과 한마음이 되어 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다. 동생들의 반응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찬옥이 어미에게 퉁명스런 어투로 말한다. “차리리 할머니 눈치 보는 것 보다는 우리끼리 그냥 여 있는 기이 좋겠네요.” “그래 할 수 있겄나? 엄마는 너거들이 걱정 되서 하는 소리 아이가!” “우리가 한두 살 먹은 아아들 입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요.” 찬옥의 대답에 아이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그라믄 너거들끼리 집에 있그라. 할무이한테 가서 구박덩어리 되는 것 보다는 여 있는 기이 맘은 편할기다.  그라믄 찬옥이 니가 고생 좀 하그라. 동생들 잘 챙기고.” “알았으요. 걱정 마요.” 여전히 퉁명스런 어투로 어미의 걱정에 대답을 한다. “그래도 니가 있으이까 내 맴이 한결 놓인다. 현옥이, 경현이.누부야 말 잘 듣고 있어라. 알겄나?” “예에. 엄마.” 다음날, 희연은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집을 나설 준비를 한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찬옥이 어미를 따라 방을 나와 집을 나서는 어미를 배웅해 준다. “엄마! 조심해서 다녀와요.” “알았다. 걱정 말고 동생들 잘 챙기그라. 니만 믿고 간다.” 찬옥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집을 나서는 어미의 뒷모습이 쓸쓸하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찬옥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미의 모습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뇐다. ‘엄마 내가 다 잘못했다.’ 쓸쓸한 어미의 뒷모습에 연민을 느낀 찬옥이 그동안 어미의 속을 헤집어 놓았던 것이 마음에 걸려 어미가 사라진 대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있었다. 어미가 가고 한참을 서있던 찬옥이 부엌으로 들어가 동생들을 위하여 밥을 짓기 시작했다. 새로 담은 김치와 보리밥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은 별달리 할 일이 없어 방구들만 지키고 있었다. 남들 다니는 학교를 다닐 수 없는 형편의 세 남매는 할 일 없이 집에만 들어 앉아 온종일 방구석에서 그림을 그리고 학년이 지난 책을 들여다보며 읽고 또 읽으면서 심심함을 달랬다. 오후쯤 되어 부엌에 있던 찬옥이 동생들을 찾았다. “현옥아! 경현아!” 찬옥의 부름에 밖으로 나온 남매가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누부야! 와 그라는데?” “산에 가서 가랑잎 좀 긁어 오자.” “와? 집에 장작 없나?” 현옥이 묻는다. “쪼매 있는데 그거는 군불을 때야 해서 함부로 쓸 수는 없다. 저녁밥 지을라 카믄 가랑잎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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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 언니야. 같이 가자.” 삼 남매는 갈쿠리와 자루를 들고 나무가 무성한 산으로 올랐다. 울긋불긋한 색들을 뽐내며 아름드리나무들이 솟아있었다. 산길을 따라 떨어져 내린 가랑잎들이 햇볕과 바람에 잘 말라 발에 밟혀 바스락 소리를 낸다. 인적이 없는 산길에서 아이들은 바스락거리는 가랑잎들을 긁어모아서는 가지고 온 자루에다 쑤셔 넣었다. 가랑잎들이 뭉쳐진 자루가 어느새 불룩해졌다. 아이들은 산을 내려와 집에 들어서 부엌아궁이 앞에다 자루를 풀어 놓는다. 찬옥이 저녁 지을 준비를 하며 아궁이에 가랑잎을 쑤셔 넣고 불을 지폈다. 바싹 마른 나뭇잎에 불길이 일며 활활 타올랐다. 이는 불길에 밥을 안치고 저녁상을 차려 동생들을 먹이고 뒷설거지까지 끝내어 놓고는 방에 들어와 잠자리를 폈다. 그렇게 여러 날을 어미 없이 무심하게 보내고 있을 무렵 기다리던 어미가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가 아프도록 이고 오는 것을 보고는 삼 남매는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촌올케를 따라 품팔이를 갔던 희연은 차가 다니지 않는 마을을 다니며 읍내에 나올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집 또는 농사일이 바빠 시간을 내지 못해 읍내에 가지 못하는 집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대신하여 필요한 물건을 구해서 전해주는 일을 하였다. 일을 마치고 품삯을 대신하여 곡식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온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곡식을 머리에 이고 오자니 그 무게에 머리가 눌리고 목이 아파 와 몇 번을 쉬었다 오는지 모른다. 며칠 만에 보는 어미의 얼굴은 야위었고 피곤에 지쳐 있었다. 찬옥이 어미의 머리에서 곡식을 받아 내린다. “아이고. 힘들다.” “고생 하셨으요.” “집에 별일 없었나?” “예에.” 희연과 찬옥 사이에 간단한 대화가 오가고 지친 희연이 한숨을 돌리고 방으로 들어간다. 고된 노동으로 몸이 피곤하였던지 쓰러지듯 방바닥에 눕는다. 따라 들어온 아이들이 어미 곁에 달라붙는다. 찬옥이 베개와 이불을 꺼내어 누워 있는 어미에게 덮어준다. “내 좀 쉬어야겠다. 곡식이라고 무거워서 혼났네.” “식사는 하셨으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 조금 있으면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몸이 지친 희연은 밥숟가락을 들 기운조차 없어 애매하게 대답을 한다. “한 숨 돌리고 이따 저녁이나 묵자.” 어미의 피곤한 대답에 찬옥이 저녁을 차리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늘어진 어미를 생각해서 부엌으로 나가 밥을 짓기 시작했다. 현옥과 경현이 자리에 누운 어미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눈을 감고 있는 어미가 무척 힘겨워 보였다. “엄마! 내가 다리 주물러 주께.” 현옥이 어미의 다리를 붙잡고 주물럭거리자 누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경현도 어미에게 달라붙어 나머지 다리를 주무른다. 어린 나이에도 어미가 고생하는 것이 눈에 보였던지 아이들은 가엾은 어미를 위로해 준다. 희연의 고달픈 생활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고 일주일에 사나흘은 아이들만 남겨둔 채 집을 비우고 품팔이를 나섰다. 나갔다 올 때마다 희연의 몸은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미의 고생에 현옥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공부도 못하게 된 것이 아쉬웠으나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집에 눌러 있는 것도 지겨워 근처 산으로 들로 나물을 캐러 돌아다녔다. 열네 살의 나이, 또래의 아이들처럼 말끔하게 교복을 차려 입고 학교로 등교를 하고 싶었으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는 이룰 수 없는 헛된 희망이기에 오늘도 등교하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공존하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며 나물바구니를 들고 그들 곁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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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나물바구니를 들고 나서는 현옥이 같은 시각 비슷한 또래의 여학생과 마주치기를 여러 번,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길을 가던 현옥이 매일 같이 그 아이와 마주치게 되자 창피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쳐버린다. 현옥의 하루하루는 무의미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도 별달리 할 일이 없는 일요일이라 나물바구니를 들고 여느 때처럼 나물을 캐러 들로 나갔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니 항상 마주치는 그 아이를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현옥은 나물바구니를 들고 늘 가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혼자서 흥얼거리며 콧노래를 부르고 지나는데 갑자기 앞을 우뚝 막고 서는 이가 있어 깜짝 놀란다. “엄마야!” 현옥이 놀란 눈으로 앞을 막고 선 사람을 쳐다보았다. 교복을 입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단발머리에 꽃 핀을 꽂고 입가에 미소를 짓고 서 있는 모습이 아침마다 부딪치는 그 여학생이었다. “얘! 너 나 알지?” 부드러운 서울 말씨가 현옥의 귓가를 스친다. 세련된 말씨가 신기해서 인지 앞에 선 아이가 예뻐 보였다. 현옥이 서울 말씨의 여학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여기서 너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내를?” “그래! 너를.” “와?” “너 나랑 같이 교회에 가지 않을래?” 생뚱맞은 질문에 현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다. “교회?” “그래. 교회! 너 교회 다녀봤니?” “으응. 내도 주일학교에 몇 번 가봤고 크리스마스 때에 연극 구경도 가보고 했다.” “그래? 그러면 나 지금 교회 가는 길인데 나랑 같이 가자.” “지금?” “"응. 너랑 같이 갈려고 한 시간 전부터 여기서 너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현옥이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데 단발머리 여학생이 현옥의 옆으로 와서 손을 잡아끌어 당기며 걷기 시작했다. 현옥이 뭐에 홀린 듯 잠시 멍해 있는 사이 자신이 잡힌 손에 끌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참! 너 이름이 뭐야?” “나?” “그래 너!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니?” 현옥이 넋을 놓고 있는 것이 재미있었던지 여학생은 연신 웃음을 흘리며 현옥을 붙잡고 간다. “현옥이다. 박 현옥! 그러는 니는 이름이 뭔데?” 현옥이 이름을 묻자 단말머리 여학생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호호하고 웃으며 이름을 알려 준다. “나는 이 혜옥이야. 반갑다.” 혜옥이 통성명을 하면서도 여전히 얼굴에 생글생글 웃음을 흘린다. “참 재밌다.” “…….” “있잖아. 너랑 나 이상하게 오래 전부터 다정하게 지내던 사이처럼 느껴져. 너는 안 그러니?” “나는 잘 모르겠는데…….” “난 그래. 네가 참 마음에 들어. 우리 앞으로 친구하자.”  혜옥이 여전히 생글거리며 현옥의 손을 이끌어 자신이 다니는 교회 쪽으로 향한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혜옥의 손에 끌려가고 있던 현옥이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춰 섰다. “그란데 교회 가더라도 지금 이꼬라지로는 부끄러워서 못가겠다. 나는 다음 일요일부터 가면 안되겠나?” “얘는? 네 모습이 어때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냥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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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현옥이 혜옥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혜옥이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아 그냥 포기하고 따라간다. 역시나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다. “얼른 가자. 예배시간 다 됐다.” 두 아이는 교회가 있는 방향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여름이 다가서는 길목에 들판의 푸른빛이 일렁거리며 아이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그 이후로 혜옥은 일요일마다 현옥을 찾아와 교회로 데리고 갔다. 낯설고 어색해하던 현옥이 차츰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친구가 생기고 일요일이 기다려지는 재미를 느낀다. 일요일 오전. 예배를 들이기 위해 교회를 찾은 현옥과 혜옥이 나란히 들어서는 모습을 문 앞에 서있던 노년의 사내가 보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혜옥을 부른다. “혜옥아!” 혜옥이 노년의 사내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며 현옥과 함께 다가가 그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그래! 그런데 옆에 있는 친구는 못 보던 얼굴이네? 이름이 무어냐?”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키가 작고 깐깐해 보이는 노년의 사내 목소리는 의외로 서울 말씨의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현옥에게 이름을 물어왔다. “예. 박 현옥입니다.” “그래? 박 현옥이구나. 참 순하게 생겼구나.” 현옥이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고 혜옥은 노년의 사내에게 자랑하듯 말을 한다. “목사님! 제가 전도했어요.” “그래? 우리 혜옥이 참 좋은 친구를 전도했구나. 잘했다. 현옥이도 앞으로 혜옥이하고 열심히 교회에 나오너라. 알았지?” “예에.” 현옥이 부끄러워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예배 시작하겠다. 어서 들어가거라.” 아이들은 자신들을 반겨준 노 목사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혜옥은 이 곳 출신이 아닌 서울에서 온 아이였다. 전쟁이 나면서 부모와 함께 경주로 피난을 온 것이라 서울이 안정되면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동안이라도 두 아이는 친한 친구로 서로를 위하며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혜옥이 학교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항상 현옥을 찾아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같이 공부를 하였다. 현옥이 학교를 다니지 못해 늘 공부하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는 것을 알고 혜옥은 자신이 학교에서 그날그날 배운 것을 집에 와서 현옥에게 전부 가르쳐 주었다. 혜옥이 학교에 가 있을 시간에 현옥은 부지런히 나물을 캐어 와서 손질을 해놓고 혜옥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같이 그녀의 집으로 가 배운 것을 복습하며 함께 공부를 하고 두 아이는 서로서로에게 의지하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었다. 희연이 품팔이 일을 마치고 며칠을 집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품을 파는 일이 힘이 들었던지 그 사이 희연의 얼굴은 많이 상해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이들 끼니는 챙겨 줄 수 있을 만큼의 일거리는 되었으니 어미로서 마음은 한결 편했다. 현옥이 방에서 쉬고 있는 어미를 찾아 들어와 어미에게 청을 한다. “엄마! 내일 교회 가는데 십 원만 주면 안되나?.” “교회에 가는데 십 원이 와 필요 하노?” “헌금 할라꼬.” “와? 헌금 안내면 오지 마라 카드나?” “아이다. 그런 거는 아이지만 다른 아아들은 다 헌금 내는데 내만 헌금 통에 넣지 못해서 부끄러워서 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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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부끄러우면 가지 마라.” 어미의 단호한 거절에 아이는 펄쩍 뛴다. “안 된다! 이번 주일에 가면 구호물품 준다 했다.” “무신 구호물?” “우유깡통하고 옷하고 준다고 했단말이다.” “…….” 희연은 아이의 대답에 아무런 반응을 않고 하던 바느질에 열중을 한다. 어미의 무반응에 현옥이 때를 쓰기 시작한다. “엄마! 십 원만 도! 어?” 계속 어미에게 치대며 헌금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현옥을 째려보며 어미는 치맛단을 걷어 올려 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십 원을 건네주며 딸에게 다짐을 받는다. “다음부터는 가지 마라.” “알았다.” 어미에게 돈 십 원을 받으며 마지못해 대답을 한다. 다음날, 여전히 혜옥은 현옥을 데리고 교회로 갔다. 교회 앞에 나와 신도들을 맞이하며 인사를 나누던 노목사가 현옥을 보고는 불러 세운다. “현옥아!” 현옥이 노목사 앞으로 다가가서 꾸벅 인사를 한다.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현옥이 너한테 줄 구호물품 챙겨 놓았으니까 이따 예배드리고 나갈 때 가져가도록 해라.” “예. 감사합니다!” 노목사의 다정함에 현옥이 부끄러워하며 예배당 안으로 들어간다. 예배를 마치고 현옥은 노목사가 챙겨준 구호물품을 들고 집으로 와서는 어미 앞에 펼쳐 놓는다. 우유깡통과 빨간색 치마를 받아온 현옥이 치마를 들여다보면서 별로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치마가 별로 다.” 희연이 현옥을 쳐다보며 묻는다. “와? 또 뭐가 못마땅해서 별로라는 기고?” “나는 까만 색 치마가 좋은데... 학생복 치마 할라카믄 까만 색 이라야 되는데... 이거는 빨간색이라서 못하겠다.” “주는 거 그냥 받아 입으면 되제 머가 그래 불만이고?” “…….” “그래서 입어 보이까 맞기는 맞나?” “응. 맞기는 하다.” “알았다. 엄마가 염색집에 가서 검은 색으로 염색 해주꾸마.” 잔뜩 부어있던 현옥이 어미의 말에 표정을 푼다. 어미는 딸이 구호물품으로 받아 들고 온 것이 속이 상하기는 했으나 변변한 옷 한 벌 없이 지내는 아이가 가여워 못마땅해 하는 마음을 채워주려 하였다. 어미가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이자 현옥은 내친 김에 한 가지를 더 부탁을 한다. “엄마! 그라믄 내... 하얀 부라우스하고 하얀 운동화 한 켤레도 사주면 안 되나?” “그거는 또 뭐할라꼬?” “치마하고 부라우스하고 운동화만 있으면 여학생들처럼 하고 다닐 수 있다 아이가!” 아이의 꿈은 좌절되었어도 절대로 포기 하지 않고 희망을 품는 아이의 마음이 가련해 어미의 표정이 무거워진다. “알았다. 엄마가 이번에 품 팔아서 부라우스하고 운동화 사주꾸마.” 현옥이 기뻐서 어미의 목을 껴안는다. “그래 좋나?” “어! 내도 인자는 학생처럼 하고 다닐 수 있다 아이가.” 딸의 기뻐하는 모습에 어미의 얼굴에도 살짝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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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은 딸과의 약속을 지켜 치마를 염색을 하여주고 약속대로 품팔이 한 돈으로 장에 들러 블라우스와 운동화를 사서 딸에게 안겨주었다. 현옥은 어미가 마련해준 옷이 아까워 옷걸이에 걸어놓고 매일같이 쳐다보며 미소를 날렸고 한 번도 신지 않은 하얀색 운동화는 때가 묻지도 않았는데 매일 같이 닦아 관리를 하였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모습으로 친구들 앞에 서고 싶어 주일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현옥. 그런 현옥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혜옥이 어느 날 현옥을 찾아와 슬픈 소식을 전한다. “현옥아! 나 다시 서울로 간다. 엄마 아빠가 서울에 가서 중학교 다녀야 한다고 해서 올라가게 됐어.” 갑작스러운 통보에 현옥의 마음이 슬퍼졌다. 언젠가는 헤어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느닷없는 이별통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현옥의 마음은 씁쓸하기만 했다. “언제 가는데?” “며칠 후에 떠날 거야. 그 동안 너와 함께여서 너무 좋았는데...아쉽다.” “내도... 니가 내를 외롭지 않게 해줘서 좋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울한 표정의 현옥을 바라보며 혜옥이 분위기를 바꿔 명랑한 목소리로 현옥을 부른다. “현옥아! 이번 주일에 교회에서 친구들하고 송별회 하기로 했어. 너도 올거지?” “어. 꼭 간다.” “알았어. 마지막으로 내가 너 데리러 올게.” “…….”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현옥의 표정은 더욱 우울해지고 그런 현옥의 마음을 알기에 혜옥은 더욱 밝은 표정으로 현옥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혜옥이 이별을 고하고 돌아가고 현옥은 우울한 마음이 되어 방안으로 들어가 옷걸이에 걸린 옷을 들여다보며 혜옥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좋은 모습을 보일 수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혜옥과 함께 마지막으로 교회를 가기로 한 날, 현옥은 갖춰 놓은 옷으로 갈아입고 혜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옥이 대문을 들어서며, “현옥아!” 부른다. 친구의 부름에 방을 나오는 현옥을 혜옥이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후줄근한 모습을 지우고 깔끔하게 차려 입고 나서는 현옥의 모습에 신이 난 쪽은 오히려 혜옥이었다. “현옥아! 너 너무 이쁘다. 정말 다른 사람 같아.” “…….” 현옥이 수줍은 미소를 띠며 혜옥을 바라본다. “아쉽다. 너도 나랑 같이 서울 가면 좋을 텐데.” 현옥이 여전히 미소를 띠며 혜옥에게 진심을 전한다. “혜옥아! 그 동안 참 고마웠다. 니하고 같이한 시간들 영원히 잊지 못 할기다. 이래 헤어질 수밖에 없게 돼서 맘이 많이 아프다. 서울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사람 되라. 내가 열심히 기도해 주께.” “응. 현옥아! 나도 고마워. 우리 이렇게 헤어지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나 절대 너 잊지 않을게. 그리고 나도 너 잘되게 기도 해 줄게.”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을 담아 행복을 빌어주며 둘이 함께하는 마지막 길을 걸어간다. 교회에서 조촐한 송별회를 마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주고받으며 헤어져 집으로 들어 온 현옥이 밀려드는 슬픔에 몸을 말고 앉아 눈물을 떨군다. 까만 스커트 자락에 눈물방울이 떨어져 번지고 있었다. 슬픔 속에서 그동안 잊고 있던 아비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도 아버지가 서울로 갔으면 얼마나 좋았겠노. 혜옥이처럼 중학교에도 가고 공부 많이 해서 꼭 선생님 돼서 못 배운 사람들 가르치며 도움 주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건데…….’ 새삼스럽게 아비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옥은 그렇게 혜옥을 떠나보내고 마음이 허전하여 나물캐러도 가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빈둥거리고 있었다. 혜옥이 떠난 빈자리가 너무도 커서 실의에 빠져 지내던 현옥에게 교회서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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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내던 친구들이 찾아왔다. 현옥은 혜옥이 떠난 이후로 한 번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기에 노목사가 현옥을 데려오라며 아이들을 보냈던 것이었다. 마지못해 아이들에게 휩쓸려 교회에 간 현옥, 노목사가 현옥을 보며 반긴다. “현옥이 상심이 컸구나.” “…….” “현옥아! 혜옥이가 가면서 네 걱정 많이 했단다.” “…….” “착한 현옥이 소원이 학교 다니는 거라며 그 소원 꼭 이룰 수 있게 내게 기도 열심히 해 달라 했단다. 현옥이는 정말 좋은 친구를 두었어! 너도 혜옥이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고맙습니다. 목사님!” “현옥아! 네 소원을 내가 들어주면 어떻겠니?” “……?” “내가 너를 중학교에 보내줄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떻니?” “참말입니까? 목사님! 참말로 그래 주실 수 있습니까?” “네가 원한다면 내가 도와 줄 수도 있단다.” 그 말에 현옥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 현옥아 너무 상심하지 말고 집에 가서 부모님이랑 의논하고 오너라. 내가 꼭 네 소원 들어 줄테니... 알았지?” “예. 목사님!” 그 길로 현옥은 집으로 쫓아와 어미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어 어미를 찾았다. “엄마!” 실의에 빠져 있던 딸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울려오는 것이 어미는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 그러는지 궁금하였다. “와 또 무신일 있나?” 대답을 하며 아이의 기분을 살핀다. “무신 좋은 일 있나?” “응. 엄마! 교회에 목사님이 내 보고 중학교 보내 준다고 하더라.” “중학교에?” “어. 엄마가 허락해주면 내도 중학교 갈 수 있다.” “와 갑자기 그런 얘기가 나왔노?” “혜옥이가 서울 가면서 목사님한테 내가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고 내가 꼭 학교에 갈 수 있게 목사님이 꼭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갔단다. 그래서 목사님이 내한테 학교 다니고 싶으면 엄마한테 허락 받아 오면 내를 학교에 보내줄 수가 있다 캤다. 엄마! 내 학교 갈 수 있게 허락해주면 안되나?” 희연이 잠시 망설이며 딸의 물음에 대답을 않고 있다 무거운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옥아! 목사님 말씀이 고맙기는 한데... 엄마는 반대다.” “와 반대하는데?” 반대라는 말에 기대를 안고 어미를 바라보고 있던 현옥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아무리 못살고 힘들더라도 남에게 의지해서 동정 받는 거는 아이다.” “나는 중학교 가고 싶다. 공부하고 싶단 말이다.” “니 맘은 알지만.... 엄마는 그래도 그런 도움 받는 거는 아인 것 같다.” “와 안 된다 하노? 이유가 뭔데?” 희연은 어떻게 딸을 납득을 시킬까 고민을 하다 별 수 없이 말을 돌리고 만다. “엄마는 니가 남들한테 동정 받는 기이 싫다. 그라니 그런 도움 받을 생각 말그라.” “엄마는 내를 공부 시켜줄 수가 없다 아이가? 다른 아아들은 다 학교에 가는데 와 나는 나물 캐러 가야 하노? 나도 다른 아아들처럼 학교 가서 공부하고 싶단 말이다. 엄마 싫다. 엄마 밉다.” 아이는 제 마음을 몰라주는 어미가 야속해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딸이 박차고 나간 문을 내다보며 어미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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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부지야. 니가 우째 에미 맘을 알겠노! 공부가 하루 이틀에 끝나는 기가? 도움을 받았이믄 나중에 니가 그 보답을 해야 할거 아이가! 그라믄 니 인생이 우째 되겠노? 니가 사내믄 내가 이래 말리지는 않을 기구마.’ 어미는 딸의 앞길이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딸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그 도움이라는 것이 후에는 딸의 앞길을 막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반대를 하는 것이었다. 제 의지대로 살아 갈수 없는 상황이 올 경우 현옥이 겪어야 하는 마음의 상처를 미연에 방지하고 싶어 어미는 딸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그 도움을 거절해야만 했다. 어미의 반대 때문에 현옥은 더 이상 교회에도 나가지 않고 나물을 캐러 나가지도 않았다. 단지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서글퍼 어미도 원망하고 아비도 원망을 하면서 마음을 비워 내지 못하고 우울하게 방안에 틀어 박혔다. 며칠 내내 풀이 죽은 딸을 위해 해 줄 것이 없는 어미의 마음은 무거웠다. 희연은 현옥의 마음을 달래 주려 방으로 들어와 누워있는 아이를 일으켜 앉힌다. “우리 현옥이 이래 외롭고 적적해서 우짜노!” 현옥은 어미의 얼굴을 외면한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어미가 어떤 말을 하건 자신의 처지가 비관스러워 자꾸만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래도 어미 앞에서 차마 눈물은 보일 수가 없어 참고 견뎠다. “현옥아! 엄마가 니 급사 자리라도 시켜달라고 이리저리 부탁해놨으이 쪼매만 기다려 보그라. 일자리 나오면 니도 남들처럼 낯에는 돈 벌면서 밤에 야학이라도 다니게 해 줄 테이까 마음 너무 상해하지 말그라.” 그제야 슬픔에 찬 현옥의 눈길이 어미에게로 머문다. “엄마! 진짜 그래 할 수 있나?” “그래. 엄마가 니 하고 싶은 거 시켜 줄 테이까 그만 마음 풀어라.” “엄마! 내 꼭 학교 갈거다.” 다짐과도 같은 딸의 말에 어미도 마음을 내어 대꾸를 한다. “그래! 우리 현옥이 엄마가 꼭 학교 보내 주꾸마.” 어두웠던 아이의 얼굴에 잠시나마 미소가 번지고 이를 본 어미의 마음은 딸에 대한 미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어미의 말에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진 현옥이 다시 힘을 내어 나물 캐러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다.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가있어 제 하는 일에는 도통 재미가 나지 않았다. 바람 살랑거리는 언덕에 올라 푸른 하늘을 바라보아도 제 눈에는 그저 푸른 하늘일 뿐 감정이 묻어나지가 않는다. 봄이 지나는 길목 여기저기서 나물을 캐고 있는 여자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물바구니를 옆에 놓고 호미로 땅을 파고 있었다. 자존심이라는 것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여자 아이들을 보니 그들과 똑 같은 자신의 삶이 한없이 초라하고 미워져 어울리려 하지 않고 그들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그저 손에 잡히는 데로 마구 풀을 뽑아 바구니에 담는다. 현옥은 무엇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그저 심술이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분풀이 상대도 없이 혼자서 푸닥거리하듯 들을 헤매며 애꿎은 풀때기에 화풀이를 해댄다.  한편, 상심하고 있는 동생이 가여워 허한 마음을 달래주고자 찬옥은 친구를 찾아가 현옥의 취직자리를 부탁해 둔다. 경찰서에서 급사 일을 하고 있는 순영을 찾아가 현옥의 취직자리를 부탁해 둔지 얼마 되지 않아 순영은 만만치 않은 경쟁자리가 났다며 찬옥을 찾아와 귀띔을 해주었다. “경찰서 서장실에 급사 아아가 필요한 갑더라. 그래 니 부탁이 생각나서 전해주는 거다.” “고맙다. 순영아!” “아직 그런 인사는 하지 마라. 그자리 의외로 경쟁이 만만치가 않다. 높은 사람 소개 아니면 취직되기 힘들기다. 니가 하도 부탁을 해서 말은 해주겠는데 장담은 못한다. 그래도 뜻이 있으면 이력서 넣어 봐라.” “알았다.” “너무 기대는 마라.” “알았다. 어쨌든 고맙다. 순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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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영이 찬옥과 잠시 짧은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자 현옥이 터벅거리는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왔다. 풀이 죽은 현옥을 보며 찬옥은 기쁜 소식이라며 조금 전 순영이 전해준 소식을 현옥에게 들려준다. 자신의 취직을 부탁해두었다는 찬옥의 말에 현옥의 얼굴이 밝아지는 듯 했으나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라 막연히 희망을 쫓을 수가 없어 현옥은 언니의 말에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현옥의 마음처럼 찬옥 역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기에 찬옥은 하루 빨리 어미가 돌아와 이 일에 나서줬으면 했다. 어미의 인맥을 통해 한 번 더 부탁을 해두면 일이 잘 성사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찬옥은 학수고대를 하며 어미를 기다렸다. 찬옥이 어미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현옥은 들로 나물을 캐러 나갔다.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면서 빈둥거리고 있기가 뭐해 나간 것이었다. 화창한 날씨만큼 기분이 가벼워진 현옥이 고사리 손을 움직이며 나물바구니에 쑥을 캐어 담는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쑥을 담다 보니 바구니 가득 쑥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쑥이 캐어진 것이다. 몇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 쑥을 캔 현옥이 수북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쑥을 깨끗이 손질을 하여 다시 바구니에 담아 들고 어딘가로 나섰다. 잠시 후 현옥이 도착한 곳은 시장이었다. 자신도 무언가 해보겠다는 마음에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장사를 하고자 쑥을 가지고 나오기는 했으나 그 틈에 끼지는 못하고 뒤로 밀려 결국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쑥을 담은 바구니를 펼쳐 놓고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한 노인이 지나가면서 현옥이 앉은 자리에 놓인 쑥이 든 바구니를 쳐다보며 손으로 집어 올리는 것을 보고 현옥이 대뜸 말을 건넨다. “할머니! 그거 방금 뜯어온 쑥입니다.” 노인은 자리에 앉은 아이를 쳐다보며 묻는다. “이거 니가 파는 기가?” “예. 제가 산에서 캐온 깁니다. 많이 들릴 테니 사 가세요.” “아가 참 어른보다 솜씨 좋네. 우째 이래 깨끗하게 다듬었일꼬!” 노인은 손질이 잘 된 나물을 쳐다보며 감탄을 하고서 기분 좋게 쑥을 사가지고 갔다. 잠시 몇 사람이 더 와서 쑥을 사가지고 가자 어느새 바구니는 비었고 현옥의 손에는 돈이 몇 푼 쥐어져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현옥이 신바람 나서 집으로 돌아오려 시장 길을 나오는데 어디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여 주위를 살피다 건너편에서 붕어빵 장수가 붕어빵기계를 뒤집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현옥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붕어빵 장수 앞으로 가서 섰다. “아저씨! 붕어빵 한 개에 얼마 합니까?” “다섯 개 백 원이다.” “그라믄 백 원어치만 주세요.” 붕어빵 장수가 건네준 갓 구워낸 붕어빵을 손에 들고 현옥이 집으로 돌아왔다. 경현이 누이의 손에 들린 봉투를 보며 물었다. “누부야. 그거 뭐꼬? 뭔데 이래 고소한 냄새가 나노?” 현옥이 함박웃음을 흘리며 대답을 한다. “이거? 붕어빵이다.” “그거 어디서 났는데?” 찬옥이 현옥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내가 사온 거다.” “니가 돈이 어디 있다고 사 왔노?” “쑥 캐서 시장가서 팔았다. 다 팔고 오는 길에 붕어빵 장사가 있어서 언니하고 경현이 생각나서 사 온기다.” 찬옥이 현옥에게 감탄하며 칭찬한다. “우리 현옥이 참 기특하다. 쑥 나물 팔아서 붕어빵도 사올 줄 알고.” 찬옥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현옥은 언니와 동생에게 붕어빵을 하나씩 안기고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아 붕어빵을 한입 베어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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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을 맛있게 먹는 찬옥과 경현을 쳐다보는 현옥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래! 내일은 쑥 캐러 가지 말고 붕어빵 사가지고 와서 팔아야겠다.’ 속으로 오늘 나물 팔아 번 돈으로 붕어빵장사를 해보겠다는 계산이었다. 은근히 장사에 재미를 붙인 현옥이 다음날 시장에 나가 붕어빵 장사를 찾아가 당당하게 말을 꺼낸다. “아저씨! 나도 붕어빵 장사 할라는데 이거 몇 개만 더 얹어 주시면 안됩니까?” “니가 장사를 한다고?” “예에.” “어데서 할 긴데?” “우리 마을에 가져가서 팔라고요.” “얼마치 살긴데?” “천원어치요.” 아이의 하는 짓이 맹랑하기는 했으나 붕어빵장수는 이내 현옥을 보며 웃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알았다. 아저씨가 니가 기특해서 몇 개 덤으로 주꾸마.” 현옥이 그 말에 기분이 좋아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는다. “잠시만 기다리그라. 아저씨가 빠다기름 많이 발라서 가실가실하게 구워 주꾸마. 가지고 가서 잘 팔아 보그라.”“예에. 아저씨 고맙습니다.” 현옥의 얼굴에는 여전히 함박웃음이 피어 있었다. 잠시 후 현옥이 붕어빵 장사에게서 산 붕어빵을 들고 마을로 들어가 물 건너 다리 옆에 좌판을 펼쳐놓고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고 섰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려는 한 남학생이 보여 현옥은 부끄러움에 자리를 피해 나무그늘 아래로 숨어 버린다. 저만치서 걸어오던 남학생이 좌판 앞을 지나다 되돌아와서는 그 앞을 서성거리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현옥이 나무그늘에 숨어 그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뛰어나와 좌판 앞에 섰다. 갑자기 등장한 현옥을 보고 남학생이 놀라는 눈치였다. “니가 이 붕어빵 팔고 있나?” 현옥은 부끄러워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인다. “백 원에 몇 개 주노?” “네 개.” “백 원어치만 도.” 현옥은 붕어빵 네 개를 담아 남학생에게 건네준다. 현옥의 붕어빵 장사 첫 개시였다. 개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교 길이었던지 학생들이 그 곳을 지나치다 좌판에 놓여 진 붕어빵을 보고는 좌판 앞에 서서 빵을 사가지고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또 한 무리의 학생들이 지나고 그 중 몇 명이 현옥이 내어 놓은 붕어빵을 사가지고 갔다. 현옥이 가지고 온 붕어빵이 순식간에 다 팔려 나갔다. 덤으로 받은 붕어빵까지 다 팔아 현옥이 손에 거머쥔 돈이 전부 천오백 원이었다. 그 돈으로 현옥은 쌀가게에 들러 쌀을 사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서는 걸음이 의기양양해 당당하게 언니를 부른다. “언니야! 내가 쌀 사가지고 왔다.” 찬옥이 방밖으로 나오며 현옥의 손에 든 쌀자루를 보며 놀란다. 현옥이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던지 여전히 의기양양하게 서서 웃음을 지으며 자랑을 한다. “언니야! 내가 붕어빵 장사해서 돈 벌어서 서온 거다.” 그렇지 않아도 쌀이 얼마 남지 않아 어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찬옥이 동생이 들고 온 쌀자루를 보며 무척 반긴다. “우리 현옥이 참 대단하다. 니가 우째 돈을 벌 생각을 했노?” “히히.... 언니야 내 잘했제?” 현옥은 언니의 놀라는 표정을 보고는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도 무언가 집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생겨 기분도 한결 좋았다. 그렇게 며칠을 즐거움 속에서 붕어빵 장사를 계속하였으나 역시 어린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 가뜩이나 수치심 많은 아이가 또래의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이 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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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첫날 만났던 남학생들이 좌판으로 몰려와 빵을 사가는 것은 좋았으나 자신의 초라한 행색에 수치심을 못 견뎌 결국 장사를 접어버리고 만다. 그것마저도 할 수 없게 된 현옥이 속상한 마음을 아비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을 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겼던 원망의 화살에 시위를 당겨 다시 아비에게로 향했다. 아비의 생각만 옳았으면 자신의 모습이 이리도 초라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랬으면 제 하고 싶은 것을 이루고 남들처럼 원하는 삶을 살았을 텐데 막연하게 부풀던 기대가 산산조각이 난 것을 모두 아비의 탓이라 여기며 성난 활시위는 멈추지 않고 아비를 향해 날려 보낸다. 그런다고 제 속이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활을 날려도 쓰라린 속은 그대로 일뿐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현옥은 풀이 죽어 의미 없는 마음의 활 질을 던져버리고 다시 깊은 연민에 빠져 자신을 다독거려 본다. 언젠가는, 반드시 언젠가는 꼭 자신의 꿈을 향해 가리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꿈만은 포기 하지 않을 것을 가슴 깊이 새기며 오늘도 힘겹게 하루를 버텨본다.

희연의 여정이 이번에는 좀 길어지고 있었다. 농사가 한창인 시기라 일손이 모자란 농부들을 도와 일을 거들어 주러 들어간 희연은 쉬이 나올 상황이 못 되었다. 태산 같은 논일을 며칠 보아주는 조건으로 날품을 대신하고 있는 터라 일이 얼추 끝이 나려면 며칠은 더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사이 아이들은 어미의 사정도 모른 채 어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현옥이 사다 놓은 쌀 덕분에 끼니 걱정은 덜 수가 있었으나 올 날짜에 어미가 오지 않으니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찬옥이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며 동생들에게는 내색을 하지 않고 평상시대로 행동을 하였으나 속은 바싹 타 들어가고 있었다. 혹시나 어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동생들 몰래 오씨의 집을 찾았다. 가게 안을 이리저리 살피다 오씨의 얼굴을 볼 수가 없자 집안으로 들어간다. 찬옥이 대문을 들어서서 오씨를 불렀다. 자신을 찾는 소리에 오씨가 방에서 나와 찬옥을 보고는 반긴다. “이게 누꼬? 찬옥이 아이가?” “예. 그간 평안 하셨십니까?” “그래! 그란데 니가 우짠일로 여까지 왔드노?” “다름이 아니라 엄마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셔서 혹시나 엄마 소식을 좀 알 수 있을까 해서 왔으요.” “그래. 그랬구마. 애기씨가 아직도 안 돌아왔구마.” “예에. 벌써 올 날짜가 훨씬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어 걱정이 돼서 혹시 아시는 것 있나 싶어 와봤십니다.” “그래. 와 안그렇겠노? 아매도 내 생각에는 농촌에서 일손 거드느라고 못 오지 않나 싶다.” “농사일 말씀입니까?” “그래! 이분에는 농사철이 한창인 시기라 아매도 품팔이 보다는 거서 일 거들어 주고 올라고 그라는 갑다. 농번기에는 사램 손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이 너나없이 나서 주기를 바라니 엄마도 그 사람들한테 붙들려 농사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예에...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너무 걱정 말그라. 며칠 지나면 돌아오실 기다. 엄마도 엄마지만 너거가 고생이 많제?” “아입니다. 저희야 집에서 편하게 있는데 뭐가 힘들겠습니까? 엄마가 고생이지요.” “그래. 너무 상심 말고 쪼매만 더 고생 하그라. 그라다 보믄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기구마.” “예에.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너거 아버지 소식은 듣고 있나?” “아니요. 서로 왕래가 없어서 통 소식은 못 듣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우리가 경주에 와있는 것도 모를 깁니다.” “한 분도 아부지 찾아가보지 않았드나?” “엄마가 싫다 하고 또 지도 동생들도 할머니가 겁도 나고 해서…….” “그랬구마!  참... 핏줄도 소앵이 없다. 우찌 그래 처자식을 버리고...” 말을 하려다 찬옥의 눈치를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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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씨는 찬옥을 보면서 말을 꺼내야 할지 말지 고민을 하면서 입을 딸막거렸다. “찬옥아, 있제?” “예에.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오씨는 찬옥을 바라보며 한 숨을 내뱉었다. “그 기이…….” “말씀하세요.” 망설임 끝에 결심을 하고 찬옥에게 이른다. “그래. 너거도 알거는 알아야 할거 아이가! 내 입이 가벼운 것도 문제겠지만 너거가 자꾸 불쌍한 맴이 들어 차마 입 다물고 못 있겄다.” “…….” 찬옥이 오씨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궁금하여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기이 너거 아부지 말이다.” “예에. 우리 아버지가 뭐 어쨌는데요?” “너거 아부지... 새 여자 얻었다 카더라.” 찬옥이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 잠자코 오씨를 바라본다. 아이의 눈치를 살피던 오씨는 근호의 대변인이라 된 듯 그의 편에 서서 입장을 대변하려 애를 썼다. “그기이 말이다. 아매도 너거 할무이 모시고 살라 카이 그 노인네 인자 연세도 많고 해서 부엌일도 힘이 들고 했겄제. 그래 너거 아부지가 여자를 하나 데맀는 갑더라.  두 사램이 노인네 모시고 살믄서 달리 할 것도 없고 해서 텃밭에다 배추하고 무 심어서 그거 팔아가며 살고 있나 보더라.” 그 말을 전해들은 찬옥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곧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아가, 찬옥아! 괜찮나?” 오씨는 쓰러질 것 같은 찬옥이 걱정이 되어 곁으로 다가선다. “내가 니한테 씰데없는 소리를 했는갑다. 내 딴에는 너거들이 아부지에 대한 미련을 버렸이믄 싶어서 그래 일러 준 긴데...이일을 우짜노? 내가 경솔했는 갑다.” “…….” 찬옥의 귀에는 어떤 말도 들리지가 않았다. 핏기 없는 얼굴로 망부석이 된 듯 우두커니 섰다 민망했던지 고개만 숙여 꾸벅 절을 하고는 도망치듯 집을 빠져 나가버린다. 찬옥이 나간 자리를 보며 오씨는 자신의 경솔함에 후회를 하고 있었다. “내입이 방정인기라. 아아들 가심에 대못을 박는구마. 저 어린것들이 우째 감당하라고... 내가 주책이다. 이입이 주책이다.” 하며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마구 때린다. 차라리 희연에게만 살짝 얘기를 할 것을, 후회를 해본들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거리로 뛰쳐나온 찬옥이 어떻게 집으로 돌아 왔는지 기억조차 없다. 겨우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치를 떨고 있었다. 아비를 생각하니 불쾌하고 분한 마음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우째 그럴 수가 있노? 우리는 이래 고생을 하고 있는데 처도 자식도 버리고 딴 여자를 얻어 산다꼬? 우리에 대한 미안함은 책임감은 쪼매도 없단 말이가? 분하다. 너무 분하다. 그런 사람이 우리 아버지라니 내는 믿을 수가 없다.’ 순간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억울하고 비참해서 나는 눈물이었다. 격렬하게 이는 분노 탓에 닦아내어도 눈물은 자꾸 방울 맺혀 떨어졌다. ‘아버지가 우리한테 우째 이랄수가 있노? 내는 아버지 절대 용서 못한다. 이대로는 못 있는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우리한테 잘 못한 거 다 뉘우치게 할기다.’ 누구를 깊이 미워해 본적 없는 찬옥이 어미와 동생들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힘이 들어도 불평 않고 주어진 운명이라 여기며 살아왔던 나날들이 아비의 배신에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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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구름에 가린 어두운 밤을 찬옥은 기다리고 앉았다. 불빛 하나 없는 방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현옥과 경현이 아무것도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경현이 깨지 않게 찬옥은 조심스럽게 현옥을 깨운다. “현옥아! 언니 변소 따라가자.” 깊은 잠에 빠진 현옥은 대답이 없었다. “현옥아! 언니 따라가자.” 찬옥은 다시 한 번 현옥을 부르며 흔들어 깨웠다. 그제야 어렴풋이 눈을 뜬 현옥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언니야! 내는 오줌 싸러 가기 싫다.” 찬옥은 기어이 현옥을 깨워 손을 잡아 일으켜 경현이 깰까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온다. 마지못해 언니 손에 끌려 나온 현옥은 짜증이 났다. 찬옥은 미리 준비해둔 자루를 들고 나오며 현옥을 이끈다. “현옥아! 니 내 좀 따라가자.” 아직도 잠이 덜 깬 현옥이 언니의 뒤를 따라가다 변소로 가는 방향이 틀리다 싶어 앞서 있는 찬옥을 부른다. “언니야! 변소는 이쪽이다.” 현옥이 언니의 손을 잡고 방향을 틀려는 순간 찬옥이 선수를 치며 현옥의 팔을 잡아끈다. “잔말 말고 니 내 따라 온나.” 한 밤중이라 인적이 없는 길에 어둠까지 짙게 내려앉았으니 눈을 부라리고 쳐다봐도 암흑으로 가려진 앞에서 무엇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섬뜩함에 머리털이 곤두섰다. 현옥이 무서워 언니 뒤를 따르다 멈춰 선다. “언니야! 내는 무서워서 안 갈란다.” 찬옥이 현옥의 손을 잡아당기며 인상을 쓴다. “잔소리 말고 가자.” 현옥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찬옥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다. “언니야! 어디 가는데?” “여러 말 묻지 말고 언니 손 꼭 잡고 얼른 따라 온나!” 새벽이 오기에 아직 이른 시간, 밤이슬이 내려앉은 대지는 축축이 젖어 냉기가 스며 올라와 이슬을 맞고 걷는 자매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현옥이 이 상황이 두렵고 겁이 나서 도망치고 싶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언니야! 내 무서워서 못 가겠다.” 찬옥은 징징거리는 동생이 짜증이 나 화난 목소리로 낮게 소리를 지른다. “내만 따라 오면 된다 안하나?” 현옥이 언니의 화난 목소리에 벌벌 떨면서 뒤를 쫓아간다. 한참 후에 도착한 곳은 배추와 무가 심어진 남의 집 텃밭이었다. 찬옥이 자루를 내밀며 현옥에게 꼭 잡고 있으라 이르고 밭으로 들어갔다. 현옥이 잔뜩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자 잡고 있는 자루에까지 그 떨림이 전해졌다. 잠시 후 밭에서 나온 찬옥의 손에는 무가 들려 있었다. 밭에서 뽑아 온 무를 현옥이 들고 있는 자루에 담았다. 현옥이 두려워 찬옥을 말리며, “언니야! 내는 무섭다. 그만 집에 가자.” “조용히 해라.”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밭으로 들어가 무를 더 뽑아 온다. 겨우 한 자루에 무가 수북이 담기자 이번에는 배추를 뽑으려고 다시 밭으로 들어갔다. 찬옥이 조심스럽게 배추를 뽑아 올리고 있는 순간, 방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있어 신발 끄는 소리와 더불어 큰 기침소리가 들렸다. 현옥이 인기척에 놀라며 밭 가운데에 앉아 있는 찬옥을 애타게 불렀다. “언니야! 사람 나온다. 그만하고 가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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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애원을 해도 찬옥은 끄떡도 하지 않고 배추를 뽑고 있었다. 현옥이 이제는 겁에 질려 잡고 있던 무 자루를 내동댕이치고 냅다 뛰어 도망을 친다. 어두운 길이 무서운 것보다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이 더욱 무서워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친다. 이곳이 누구의 밭인지도 모르고 언니의 손에 이끌려 쫓아 온 현옥이 부리나케 도망을 가는 사이, 대문을 열고 나온 이는 다름 아닌 근호였다. 찬옥이 현옥을 이끌고 온 곳이 바로 아비가 일구고 있던 텃밭이었다. 소변을 보려고 잠이 깬 근호가 일어나 방을 나서는데 텃밭 쪽에서 배춧잎이 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심이 들어 잠시 마루에 서서 귀를 기울고 있자니 그 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 들리자 근호는 신발을 신고 마당에 내려서 큰 기침을 하고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나와 어둠이 내려앉은 텃밭을 유심히 살폈다. 어둠에 가린 밭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잠시 서 있었으나 더 이상 밭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다시 대문을 닫고 변소로 향했다. 아비가 대문을 여는 소리와 동시에 찬옥은 내팽개쳐진 무 자루를 챙겨 담벼락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아비가 들어가는 대문 소리를 듣고는 그 무거운 자루를 낑낑대며 혼자서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먼저 집에 도착한 현옥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방으로 뛰어 들어와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찬옥이 무 자루를 끌어다 두고 방으로 들어와 멍하니 앉아 있다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고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찬옥의 울음소리에 이불 속에 숨어있던 현옥도 이불을 뒤집어쓴 채 서럽게 울었다. 두 자매는 그렇게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새벽을 맞이했다.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짓무르고 퉁퉁 부어 올라있었다. 현옥은 새벽이슬을 맞은 탓에 기어이 병이 나고야 말았다. 찬옥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동생이 대신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현옥아! 언니가 잘못했다. 내 순간적인 잘못된 판단 때문에 너까지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만기다. 언니가 니 마음을 다치게 했다. 미안하다. 현옥아!” 마음이 아픈 건지 몸이 아픈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 현옥은 언니의 자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자 고통스러운 얼굴로 싱긋이 웃으며 언니를 위로한다. 한 바탕의 소동으로 아이들은 두문불출하며 어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기로 한 날짜를 훨씬 지나 희연이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대문을 들어서는 것을 보고 찬옥이 달려가 어미의 머리에 이고 온 보따리를 받아 내린다. 고개가 빠질 것 같은 짐 보따리를 내려놓으니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일을 다녀오면 늘 상 그랬던 것처럼 희연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서 잠시 뉘였다가 일어나서 집안일을 살폈다. 오랜만의 휴식을 뒤로하고 부엌으로 들어선 희연의 눈에 무 자루가 보였다. 나물 그릇에 무가 절여져 있는 것을 보고는 찬옥을 불렀다. “찬옥아! 큰아야.” 어미의 부름에 찬옥이 달려와 부엌으로 들어선다. “니가 무 샀나? 무가 참 싱싱해 보인다.” 어미의 말에 찬옥이 조심스럽게 대답을 한다. “예에. 직접 밭에 가서 사가지고 왔으요.” “이 자루를 다 산기가?” “예에.” “많이도 샀다. 이기 다 얼마치고?” “…….” “돈이 어디 있어서 산기고?” “현옥이가 돈 줘서 샀어요.” “현옥이가?” “예.” “현옥이가 무신 돈이 있다고 돈을 줬다 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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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이가 엄마 없는 동안에 쑥 나물 캐서 장에가 팔아서 쌀사고 붕어빵 장사해서 무도 샀어요.” 거짓말을 하는 찬옥의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우리 현옥이 참 기특하다. 공부 가르쳐야 되는 것을 어린 것이 장사까지 하게 했구나.” 딸을 생각하자 어미의 목이 멘다. 제대로 공부도 못 가르치는 딸의 앞일이 걱정스럽지만 어미로써 해 줄 것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일고 그 안타까움은 자신의 무능력함을 드러내어 놓는 치부 같은 느낌이라 자꾸만 감추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오죽 어미가 못났으면 어린 것의 손을 빌려 밥을 얻어먹었으니 제 자신이 한탄스러워 이리 살아도 살아야 하는 것인지 죽지 못하여 사는 인생 자식들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겨우겨우 목숨 연명하듯 날품을 팔러 다니는 희연이 며칠을 쉬어 다시 장사 길에 오르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위가 시작되려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옷에 땀이 배여 났다. 장에 나가 보따리가 미어지도록 물건을 사 들고 들어와 마루에 밀어 놓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 대문이 불쑥 열리며 화가 난 얼굴로 근호가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희연이 갑자기 나타난 남편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참았던 말들을 불쑥 내뱉는다. “여는 우째 알고 찾아 왔는교? 와요? 아아들하고 죽었나 싶어서 그거 확인하러 왔는교? 이핀이 와 그기이 궁금한데? 버릴 때는 언제고. 와? 잘살고 있으이 배가 아픈교? 뭐가 알고 싶어서 이 집에 발을 들이는교. 으이? 어린아아처럼 어무이 말이나 잘 듣고 살지 무신 할 말이 있다고 여를 서성거리느냐 말이요?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내 집에서 나가소.” 가슴에 담아두었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근호에게로 쏟아진다. 희연의 폭포수처럼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던 악다구니가 잠시 멈추고 눈을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희연의 악다구니에 주춤해 있던 근호가 질세라 더 큰소리로 희연을 다그친다. “뭐 잘했다고 큰소리고?” 목청을 돋우는 남편을 향해 희연이 더욱 목청을 높인다. “와? 내가 뭣을 잘못했는데? 잘못은 이핀이 저질로 놓고 와 곡식에 제비겉은 내를 끌고 드노 말이다.” 과거에 자신이 보아왔던 처의 모습이 아니라 잠시 당황한 근호가 주춤하며 한발 물러섰다. 희연은 그 기세를 몰아 더욱 거세게 남편에게 대들었다. 마치 지난날의 앙갚음을 되돌려 주려는 듯 길길이 날 뛰었다. “세상에! 애비 찾은 어린 자식들이 무신 죄가 있다고 그래 구박을 했노 말이다! 자식이 부모 찾는 기이 당연한 거를 그 어린것들 구박도 모자라 밥도 굶기고 기어이 쫓아내서 거지꼴을 만들어 놓고 이핀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데요? 그라고도 이핀이 애비 자격이 있는 사램이요? 지나가는 사램들 잡고 물어 보소. 이핀이 뭐를 잘했는지를. 아아들 가슴에 그래 대못을 박아 놓고도 잠이 옵디꺼? 흐흥! 보나마나 두 다리 뻗고 살았일기다. 거치적거리는 식솔들 다 때내 버렸으이 얼마나 맴이 개운 했겄노! 어무이 치마폭에 묻히가 호강하면서 잘 지냈을 기다. 아아들이야 우째 됐든 이핀은 자신 밖에는 모르는 인사니께.” 희연은 남편을 보자 거지꼴로 자신을 찾아온 아이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침과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시모와 남편의 냉대를 받으며 경주와 포항을 오르내렸던 아이들의 지치고 병든 모습을 생각하자 울분이 봇물 터지듯이 터졌다. 어미와 아비가 서로 싸움을 하는 동안 찬옥은 도둑질이 들통 난 것을 알고 겁을 먹고는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자식 얘기가 나오자 입장이 난처해진 근호, 날뛰는 처를 저지하지 못하고 봉변을 당하고 있다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을 생각해 내고는 말꼬투리를 잡는다. “그래 잘난 임자는 그래서 자식들 앞세워 도둑질을 시킨 기가?” 희연이 영문 모르는 소리에 기가 차다는 듯 남편을 노려본다. “이 양반이 지금 무신 소리를 하는 거고? 자다 봉창 두들기요?” “시치미 떼면 내가 모릴 줄 아나?” “도둑질이라니! 내가 무신 도둑질을 시킸다는 기요?” “임자가 시킨기 아이믄 아아들이 할 짓 없어 그랬드나?” “내 참! 무신 뚱단지 겉은 소리를 하는 긴지 내사 모리겄다.” 아무것도 모르는 희연은 남편이 그저 쓸데없이 억지를 쓰고 있다 생각하여 기가 찬 표정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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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있던 찬옥이 영문도 모르고 자신을 대신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어미의 편을 들고자 밖으로 뛰어 나오며 아비에게 성질을 부린다. “아버지! 엄마한테 소리치지 마요. 엄마 아무 잘못 없십니다. 다 지가 한 일이라요.” 찬옥이 어미의 편에 서서 어미를 옹호하고 나서자 근호는 머쓱해진다. 그 틈을 타서 희연이 다시 남편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이핀하고 더 입씨름하기 싫으이까 그마 돌아가소. 나는 인자 더는 이핀하고 말 섞고 싶지가 않으이까 다시는 우리 찾아올 생각 하지마소. 아아들도 아버지 버리기로 했으이 그래 알고 이핀 편한 대로 사소.” 그 말에 다소 충격을 받았는지 근호는 놀라며 처에게 물었다. “임자 참말로 내 하고 끝낼 생각이가?” “흥! 무신 미련 남았다고 내가 이핀하고 살겄소?” 처의 말에 오기가 난 근호가 재차 묻는다. “참말로 우리 가족이 이래 흩어져도 임자는 상관없다 말이가?” 희연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이핀 가족이요? 가족이라는 기이 이핀 편한 대로 버리고 싶으면 버리고 가지고 싶다고 가져지는 것인 줄 아요? 착각 마소. 이핀이 자식들 매정하게 뿌리쳤을 때 그때 우리는 이미 남남인 기라요.” 처의 말에 오기가 난 근호는 희연의 마음을 떠보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라믄 임자는 내가 다른 여자하고 살아도 아무 말 안 할기가?” “허이구! 언제는 내 허락 받고 다른 여자하고 살았는교? 이핀이 여자를 얻든 어무이 모시고 단 둘이 살든 인자 내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이 맘대로 하고 사시요.” 희연이 비꼬는 말에 감정이 격해진 근호는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다그쳐 묻는다. “임자 지금 한 말에 후회 안하제?” “흥. 무신 애틋한 정이 남았다고. 마누라 자식들 다 버리고 죽을 때까지 어무이 모시고 잘 살아 보소. 내는 이핀한테 아무런 미련도 없다 안하요.” 희연은 끝내 남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단호하게 나오는 처의 모습에 불쾌감을 느끼고 근호는 다시는 처와 아이들을 찾지 않으리라 큰소리를 치며 대문을 나왔다. 부부싸움을 한발 물러서 지켜보던 찬옥이 자신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부모가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 어미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스러워진다. 남편이 나가고 난 후 어이없는 표정으로 넋을 놓고 앉은 어미에게로 찬옥은 다가가 옆에 앉는다.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어미의 손을 잡고 찬옥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 내가 잘못했다.” 희연이 손을 뻗어 아이의 눈물을 닦아준다. “니 잘못 아니다. 어차피 한번은 너거 아버지하고 부딪쳐야 하는 일이었다. 니는 잘못 없다. 그래도 그 시기가 이래 빨리 올 줄은 몰랐구마.” 뒷말을 흘리며 한숨을 내쉬는 어미를 보며 찬옥의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그 무거운 마음을 걷어내기 위해 찬옥이 자신의 잘못을 어미에게 털어 놓으려 한다. “엄마! 그거 다 내 때문에 그런거다.” “니 때문이라니? 그기이 무신 소리고?” “사실은 내가 아버지 텃밭에 가서 몰래 무를 뽑아 왔다. 그래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찾아 온거다.” 희연은 딸의 고백에 놀라 묻는다. “와 그랬노? 아무리 아버지 밭이라도 그거는 엄연히 도둑질이다. 그거를 몰랐더나?” “아버지가 너무 괘씸해서 못 참아서 그랬다. 우리는 이래 고생을 하는데 아버지는 딴 여자 얻어서 알콩달콩 재미나게 산다는 소리를 들으이까 못 참겠어서 그래서 아버지한테 복수를 하고 싶어서 그만 앞뒤생각 안하고 일을 저질렀는데... 나도 그 동안 맘이 편하지는 않았다.” 희연이 딸을 통해 모든 사정얘기를 듣고는 그제야 남편이 한 말의 뜻을 알아챘다. 그리고 곁에 앉은 찬옥을 바라보며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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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얼매나 성질이 났이면 그랬을까 마는 어쨌든 니가 잘못을 한기다. 아무리 아버지가 미워도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제.” “…….” “너거 아버지 하는 짓은 나빴다만 너거는 그러는 거 아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램들이 들으면 너거를 나쁘다 하지 너거 아부지를 욕하는 기이 아이다. 그라믄 너거만 다치게 되는 기다. 알겄나?” “예.” “그라고 아버지 찾아 가서 니가 용서를 빌그라.” 찬옥이 어미의 말에 수긍을 하고 집을 나오기는 했으나 아비와 마주하는 것이 껄끄러워 아비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잘못을 시인하기보다는 아비에 대한 원망이 풀리지 않은 채 찜찜한 마음으로 성난 아비를 찾아가 잘못을 빌어야 하는 것이 더 억울한 찬옥이었다. 조모의 집에 다다른 찬옥이 대문으로 당당히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고 있자니 건넛방에서 젊은 여인이 나오고 있었다. 아담한 체격의 여인이 부엌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열린 대문으로 서성거리는 찬옥을 보고는 대문 쪽을 향해 걸어 나왔다. “누군데 남의 집 대문에서 서성거립니까?” 찬옥을 바라보는 여인은 백옥 같은 피부에 동그란 눈이 두드러져 보이는 앳된 여인이었다. 찬옥이 보기에도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직 풋풋함이 묻어나는 순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찬옥이 여인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가 아버지가 새로 얻은 여자구나. 나이가 한참 어려 보인다.’ 잠시 여인에게 생각을 빼앗겼던 찬옥이 정신을 차리고 여인을 향해 대답을 한다. “우리 아버지 좀 만날라고 왔는데요!” 동그란 눈이 찬옥의 위아래를 훑다 돌아서서 마당을 가로 질러 건넛방으로 다가가 문을 연다. “잠깐 나와 보이소.” 여인이 열어 놓은 방문 사이로 근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찬옥이 마당에 서서 아비의 눈과 마주쳤다. “니가 뭐할라꼬 왔노?” “…….” 냉랭한 아비의 목소리에 찬옥의 심장도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왔으면 들어 온나!” 찬옥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간다. 여인은 찬옥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부엌을 향해 걸어갔다. 찬옥이 방에 들어서 아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방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찬옥이 숨을 들이키는 순간 목이 따가웠다. “뭐할라꼬 왔노? 너거 엄마가 보내서 온기가?” 목구멍에서 치고 올라오는 분노를 겨우 삼키고 찬옥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아비에게 사죄를 한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를 빌러 왔습니다.” “…….” 근호는 아무런 말도 않고 딸을 외면하고 앉아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입에 문다. “엄마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지가 심술이 나서 그란깁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우리 때문에 품팔이 다니면서 고생하고 나도 학교도 못 다니고 집안일만 하고 있자니 속이 상하고 이렇게 사는 기이 너무 싫고 화가 나서 그랬던 겁니다. 용서 해주세요.” 찬옥이 먼저 죄를 빌자 아비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니가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 같아서 내 용서는 한다만 그래도 이 자슥아! 니가 우째 그런 행동을 할라 했노? 차라리 필요하면 와서 달라하제 오밤중에 그 무신 숭악스런 짓을 저지르노 말이다. 니가 머시매 같으믄 내 손이 벌써 올라갔을 기다. 아무리 아버지가 너거들 눈에 하찮게 보인다 해도 사램의 도리로 할 짓 못할 짓이 있는데 우짜자고 도둑질이고 말이다.” 찬옥이 아비의 꾸중을 아무 말 않고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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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사! 내가 누구를 나무랄 처지는 아니구마. 니가 그래 행동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내 잘못인데 니를 욕할기이 아이다. 내가 천하에 나쁜 놈이구마. 너거 어매 말 대로 처자식도 버리는 파렴치한이다. 내가 너거를 볼 면목이 없다.” 아비의 뉘우침에 찬옥이 의아한 표정을 짓다 아비의 마음을 물었다. “아버지 참말로 엄마 안 보실 겁니까?” “내가 안본다 캤나? 너거 엄마가 거부하는 것을 내가 우짜겠노?” “그라믄 이대로 우리를 영영 버리실겁니까?” “인자는 너무 늦었다 싶다. 너거 엄마 저래 내를 퍼붓는 걸 보이 맺힌 것이 산더미 같아 보이드라. 내가 무신 말을 해도 너거 엄마는 내를 인자는 안 믿을 기다. 내도 너거 엄마 설득할 자신도 없고.... 그라고 싶지도 않다. 내 인생 하나도 책임 못지는 못난 놈이 무신 자식하고 처를 거느리고 살겄노! 이래저래 살다가 너거 할무이 따라 가는 기이 속 편컸다.” 스스로 자신을 내던져 버리는 아비를 바라보는 찬옥의 마음이 서글퍼진다. 아비가 가여워서가 아니라 이리도 나약하고 무능력한 아비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도 커 이제는 진정 아비에게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아비와 어미 사이의 틈을 조금이나마 붙여보려 했던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어미가 아비를 보지 않겠다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 이해한 찬옥은 더는 아비를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여기며 방을 나와 텅 빈 마당을 쏜살같이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온다. 조모의 집에 있는 어느 누구와도 마주치기 싫어 도망을 나오다시피 걸음을 재촉한다. 남편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이후 희연은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을 느끼며 희망 없는 미래에 두려움을 느꼈다. 막상 큰소리치며 남편을 쫓아 버린 것이 후회가 되는 것이다. 하나보다는 둘이라 했는데 차라리 사정을 하고 달래어 곁으로 끌어 들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에 순간을 참지 못하고 치받아 버린 것이 후회스러웠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캤는데 내가 우짜자고 그래 큰소리를 쳤일꼬! 그래도 집안에 남자가 있어야 할 긴데. 지 한 몸도 건사를 못하는 기이 자존심만 있어갔고. 그래 매몰차게 내쫓았으이 있던 정도 떨어졌일 기다. 으이구 이 답댑이. 천륜을 거스를라 카나? 무신 재주가 있다고. 서방그늘에서 사는 기이 그래도 편할 거를 지 복을 지가 차는 구마.’ 자신의 행동을 아무리 정당화 시켜보려 해도 처한 상황이 불리하다 보니 가해자였던 자신이 어쩔 수없이 피해자가 되어 버렸다. 제 손으로 엎어 버린 물그릇이니 누구를 탓 할 수도 없어 희연은 한숨만 내쉬다 손을 놓고 있었던 장사를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어미가 집을 비운 그 사이. 친구 순영의 연락을 받고 찬옥은 현옥을 데리고 경찰서로 찾아 갔다. 지난번 부탁을 해두었던 급사자리에 면접을 보이겠다며 현옥을 부른 것이다. 찬옥이 급한 마음에 나물 캐러 나간 현옥을 찾아 데리고 그 길로 경찰서를 찾았다. 순영이 시간에 쫓기어 헐래 벌떡 뛰어오는 찬옥의 뒤를 따라 오는 현옥을 보고는 기겁을 한다. “니는 동생을 우째 저 꼴을 해가지고 데리고 왔노?” “갑자기 연락을 받은 거라서... 야가 나물 캐러 나가서 겨우 찾아서 데리고 오다 보이 이래됐다.” “아무리 그래도 저 꼴이 뭐꼬? 완전 거지 아이가? 저 몰골을 해서 우째 면접을 보일 수가 있겠노? 니도 참 생각 없다. 니는 그래 말쑥하게 차려 입고 나오면서 면접을 보이는 니 동생 꼬라지를 저래 해가지고 데리고 오나? 그라믄 소개 시켜준 내는 뭐가 되겠노? 이래서는 면접 못 본다. 당장 동생 데리고 가라.” 순영이 화가 나서 어찌나 퍼붓는지 찬옥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현옥은 언니 친구에게 거지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창피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순영아! 내가 생각이 짧았다. 그라믄 내가 동생 데리고 가서 옷 갈아 입혀서 다시 데리고 올 테니까 니가 한번만 더 봐주면 안 되겠나? 부탁 좀 하자. 어?” “그기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거면 내가 이래 성을 내겠나? 겨우 부탁해 놓은 거라 내도 난감하단 말이다. 니 때문에 내까지 곤란하게 생겼다. 더 이상 내가 해 줄게 없으니까 이번 일은 없었던 거로 하고 그마 돌아 가그라. 내는 바빠서 들어 갈란다.”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는 순영의 뒷모습을 찬옥과 현옥이 나란히 바라보고 섰다. 어미가 있었더라면 두 자매가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인데 운이 없을라 하니 되는 것도 없다. 집으로 돌아 온 현옥이 쓸쓸히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리고는 소리 나지 않게 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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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어막고 서글픈 울음을 운다. 거지꼴이라 했던 말이 귓전을 맴돌며 한없이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이 견딜 수가 없어 서럽게 운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호되게 야단을 맞은 억울하고 기막힌 이 심정을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몰라 그저 눈물로 아픈 가슴을 씻어 내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또 다시 상처가 아로새겨진다. 며칠을 방구석에 처박혀 풀이 죽어 있는 현옥과 동생을 맘 아프게 했다는 자책에 빠진 찬옥이 집안에서 쥐 죽은 듯이 지내고 있을 무렵 친척이라는 나이 지긋한 여인이 집으로 찾아와 희연을 찾았다. 찬옥이 몇 번 본 얼굴이라 인사를 하며 아는 척을 했다. “오야! 니가 첫째가?” “아닙니다. 둘째 찬옥입니다.” “엄마는 어데 갔나?” “예. 촌에 장사하러 가셨습니다.” “그라믄 언제쯤 오노?” “오늘 저녁이나 내일쯤 오실 긴데요.” “알았다. 내가 내일 다시 오꾸마.” “예. 오셨다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 친척어른이 다녀간 지 몇 시간이 지나 희연이 돌아왔다. 어미의 머리에 인 무거운 짐 보따리를 찬옥이 받아 내린다. “집에 별이 없었나?” “조금 전에 돌이 오빠네 엄마가 다녀 갔어요.” “그 양반이 무신일로? 연락도 않던 양반이 무신 바람이 불었일꼬? 니 보고 무신 말 않더나?” “아무 말 안하고 내일 다시 온다고 하고 갔어요.” 희연은 별일이다 싶어 잠시 생각을 하다 피곤한 몸을 누이려 방으로 들어간다. 으레 하는 행동으로 찬옥이 맨 바닥에 누운 어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가 저녁 준비를 하면 현옥과 경현이 누워있는 어미의 곁에 달라붙어 팔다리를 주물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살을 주무르는 아이들의 손길을 느끼며 희연은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다음날, 정오가 지나기도 전에 어제 찾아왔던 나이 든 여인이 희연을 찾아왔다. 대문을 들어서며 마당에 나와 있던 희연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정옥에미야!  내 왔다.” “어서오시이소. 당숙모님! 그간별일 없으셨지요?” “그래. 여도 별일 없제?” “예에. 그냥 저냥 합니다. 우리 아아한테서 어제 다녀가셨다는 얘기 들었십니다.” “그래. 다른 기이 아이고 내 자네한테 부탁을 좀 할 기이 있어 이래 찾아왔다.” “지한테 부탁을요? 무신 부탁 입니꺼?” “아! 그기이 다름이 아이고 서울 사는 우리 돌이네가 또 아아를 가짔는 기라.” “잘됐네요. 축하드립니다. 당숙모님요.” “축하는 무신 축하! 내사 그 일 때문에 이래 사방팔방을 쫓아 댕기고 안 있나?” “…….” “아아를 연년생으로 가짔으이 지 몸도 주체를 못하니 우야겄노! 큰 아아를 누가 돌봐줘야 할 형편아이가. 그래서 내 어디 부탁을 할 데도 없고 해서 조카를 찾아 온기라. 어데 얼라 좀 데리고 놀아줄 아아 없는지 자네가 좀 알아봐 도가. 내 소개비는 섭섭치 않게 주꾸마.” “소개비가 문제가 아이고 어디 그래 갈만한 아아가 있으면야 그라지만 지도 아는 사램이 없어서…….” “그라지 말고 좀 알아 봐 도고. 내가 오죽이나 급했으면 자네를 찾아 왔겠나!” “뭐...일단은 알겠십니다. 지도 힘닿는 데로 부탁을 해놓겠십니다.” “그래. 고맙다. 잘 좀 부탁한다.” 그 말을 남기고 당숙모는 대문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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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이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석연치가 않은 느낌이다. 제 잇속만 차리지 남을 생각지 않는 당숙모의 행동을 아는 처지라 자신을 찾아와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수상쩍은 느낌이다.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싶어 희연의 신경에 날이 섰다. 박씨 종택이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는 사이 여태까지 기를 못 피고 있었던 당숙모는 하나뿐인 외동아들 돌이가 경찰이 되어 서울로 가고 나서는 자식자랑을 늘어지게 하고 다녔다. 정씨 부인 그 꼴에 약이 올라 사촌동서를 보기를 꺼려하였으나 틈만 나면 정씨 부인을 찾아와 아들자랑을 늘어놓고 가는 것이었다. 누가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에 결국 빈정 상한 정씨 부인과 당숙모 사이에 실랑이 일어 크게 한판 싸우고 나서는 서로가 연락을 끊고 살았던 것이었다. 희연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참말 희한한 일이다. 와 내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 길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은 일이었으나 그저 노파심으로 여기고 시장에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농사에 쓰일 물건들이라 빨리 준비를 해서 전해줘야만 했다. 이틀 동안 장을 봐서 짐을 꾸려 떠날 준비를 하는 희연의 앞에 또다시 당숙모가 나타났다. “아직 출발을 안했구마. 다행이다. 내사 조카 못 만날까봐 헐레벌떡 안 뛰어 왔나?” “무신 급한 일 있십니까?” “자네한테 어려운 부탁이 있어서 말이나 전해 볼라꼬 이래 성급하게 왔다.” “일전에 그 얘기 말씀이라면 아직 못 알아 봤십니다. 요새 농사철이라 부탁 받은 물건 전해주는 기이 급해서 안 알아 봤십니다. 이분에 촌에 가면은 물어 볼라꼬요.” “글게. 이 바쁜 와중에 내가 너무 주책인거는 알지만...염치 불구하고 쫓아 온기라.” “숙모님! 아무리 급해도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쪼매만 기다려 보이소. 지가 이분에 꼭 알아 보겠십니다.” “그라지말고.... 자네 막내딸 있지 않은가?” “우리 현옥이 말씸입니까?” “그래. 현옥이! 다른 아아 구할 때 까지만 그 아아를 놀기 삼아 좀 보내 주면 안되겄나?” 순간 희연이 화가 솟구쳤다. “그 아가 가준다면 서울서 공부도 시키 줄기다. 가서 공부하면서 아아하고 놀아 주면 되는 기다.” 희연이 성질 난 목소리로 당숙모에게 큰소리를 쳤다. “숙모님요! 그래서 지를 찾아 온깁니까? 우리 현옥이를 생각하고 그래 오신 깁니까? 그런 말씀이라면 안들은 걸로 할긴게 그만 돌아가시이소. 지가 능력이 없어 아아를 학교에 못 보내고 있어도 남의집살이는 안시킬랍니다.” “그래. 자네 말이 다 맞구마. 어느 부모가 자식을 그래 보내고 싶겄나? 그맴 내도 충분히 안다. 그렇지만 정옥에미야! 내를 좀 봐달라는 기다. 오죽이나 내가 답답하면 그런 소리를 하겄노?” “싫습니다. 지는 그래 못하겠십니다. 그라니 그만 돌아가시이소.” 희연이 언짢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는 돌이어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쉬움을 드러내며 대문으로 사라진다. ‘내가 와 이래 됐노? 과거에는 우리 집에 발걸음도 못하던 사람들이 이래 내를 무시하고 있으이 이 가심에 맺히는 한을 우째 풀어야 하는 기고!’   그나마 마음을 다잡고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한 번씩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만드는 일이 생길 때마다 희연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방에 앉아 경현과 놀고 있던 현옥이 어미와 돌이어미와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돌이어미가 사라지고 난 뒤 방을 나와 어미 옆에 다가와 앉는다. “엄마! 그 할머니 말대로 내 서울 가면 안되나?” “니 지금 무신 소리 하고 있노?” 핏발 선 눈이 현옥을 노려본다. “공부 시켜준다 안하나?” “니는 공부가 그래 중요하나? 서울이 어디라고 그 먼 곳에 니 혼자 떨어져 가겠다 카노?” 가뜩이 속이 상하는데 현옥마저 철없는 소리로 자신의 속을 뒤집자 희연은 화를 누르지 못하고 그만 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라믄 나는 뭐하라꼬? 만날천날 나물만 캐러 다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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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의 역정에 현옥도 화가 나 어미에게 짜증을 내고 만다. 딸의 심정을 십분 이해는 하나 한번 안 된다고 하면 포기를 해야 하건만 이 아이의 고집은 쉬이 꺾이지 않고 한 번씩 못난 어미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현옥아! 니 그래 공부가 하고 싶나? 포기가 안되겠나?” “응 엄마. 나는 꼭 공부해서 선생님이 될거다. 그것이 내 꿈이다. 엄마! 내 가게 해도. 응 엄마!” “야가 와이래 황소고집이고? 남의집살이가 니 생각 맨치로 쉬운 줄 아나? 쓸데없는 생각 버리고 엄마가 여어저어 취직자리 말해뒀으이 쪼매만 기다리그라. 엄마가 약속하꾸마. 취직되면 니 야학에 꼭 보내 줄 긴게 아무 생각 말고 기다려 보자.” “엄마는 모른다. 엄마 없을 때 언니 친구가 경찰서 급사자리 소개해서 갔더만 내보고 거지꼴을 하고 왔다고 얼마나 구박을 했는데!  면접도 못 보게 하고 언니하고 내하고 쫓아냈단 말이다.” 현옥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서러웠던 그날의 일을 어미에게 털어 놓는다. 어미의 곁에 섰던 찬옥이 미안한 마음에 동생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를 못했다. “해필 와 내가 없을 때 통지가 왔더노? 그라믄 은행 다니는 아저씨한테는 아직 연락이 없었드나?” 어미의 물음에 찬옥이 대답을 한다. “그 아저씨도 자기가 아직 은행장이 아이라서 말도 못 꺼내 보았다 하데요.” 희연은 한심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박씨 종택의 도움을 받았던 이들이 이제는 하나같이 자신을 등지고 외면하니 외로움만 남은 처절한 자신의 신세가 개탄스러웠다. ‘세상이 변했다고 사램 인심도 이래 변하는 기가? 내 집 덕 보고 살던 사램들이 인자는 다 등을 돌리는 구마. 세상을 탓해야 하는 기가. 망해버린 가문을 탓해야 하는 기가. 우째 이래도 내신세가 나락 끝인지 모리겄다.’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훔친다. 현옥이 어미의 대답을 듣고자 기다리고 있었으나 어미는 아무런 말을 않고 부탁 받은 물건들을 전하기 위해 다시 시골로 떠날 준비를 했다. 대문을 나서는 어미의 뒤를 현옥이 혹시나 싶어 따르고 희연은 그런 딸을 향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달랜다. “니 서울 가는 거는 짐 갖다 주고 와서 결정하자. 그동안에 니도 잘 생각해보고 있그라.” “알았다. 엄마! 오래 있지 말고 퍼뜩 와야 한다.” 어미의 어느 정도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는 현옥의 얼굴이 밝아진다. ‘엄마만 허락 해주면 내는 꼭 서울 갈기다. 공부만 시켜준다면 그까짓 거 아아하고 놀아 주는 기이 뭐가 어렵겠노.’ 현옥의 마음은 부풀었고 그 부푼 마음은 벌써 서울에서 공부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들고 예쁜 여학생이 되어 중학교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았다. 현옥은 그 상상이 꼭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매일 같이 어미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찬옥이 동생의 부푼 희망을 꺾고 싶지는 않았으나 걱정이 되어 현옥을 설득한다. “현옥아! 서울 가는 거 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여서 서울은 아주 멀다. 엄마도 내도 경현이도 못 만난다. 니 아무도 없는 거서 가족들 보고 싶으면 우짤라고 그라노? 내는 니가 그 낯선 곳에 가는 거 반대다.” “언니야! 내 꾹 참고 열심히 공부만 할거다. 엄마 보고 싶어도 언니 보고 싶어도 경현이 보고 싶어도 꾹 참고 공부만 할거다.” “니는 우째 그래 공부 욕심이 많노? 형편이 안돼서 못 보내 주는 거를 이래 때를 쓰면 못 보내는 엄마 마음은 어떨 것 같노? 니도 참말로 이기적이다.” “그래도 나는 학교 가고 싶다. 엄마가 내를 못시켜 주니까 내가 간다 하는 거 아이가!” 말리다 결국 황소고집을 부리는 현옥을 꺾지 못한 찬옥이 한발 물러난다. 현옥은 자신이 얼마나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제 뜻을 굽히지 않으려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길을 꼭 찾겠다는 굳은 의지를 지켜내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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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가 돌아오고 기대에 차있던 현옥이 어미에게 대항하며 기어이 어미와 찬옥의 만류를 뿌리치고 제 고집대로 서울로 가겠다며 때를 썼다. 말리다 지친 어미는 마지못해 승낙을 하고 현옥은 돌이어미를 따라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떠났다. 희망이 현실이 되는 기쁨을 한시라도 빨리 누리고 싶어 걱정을 하는 가족을 외면하고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밤새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자 현옥은 낯선 거리에 주눅이 들어 몸이 움츠러들었다. 몸이 움츠러들자 당당했던 마음마저도 기가 눌려 움츠러든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틈에 낯선 이방인이 되어 아는 사람이라고 없는 거리에 덩그맣게 서있는 자신을 보자 서글픔과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햇볕이 따듯하게 내리쬐는 광장에 서있는데도 한겨울 같은 찬바람이 스치는 듯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앞서 걷던 돌이어미가 멈춰선 현옥을 돌아보며 불렀다. “아가! 퍼뜩 안 오고 뭐하노?”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현옥이 두려움에 눈물을 참으며 돌이어미 뒤를 부지런히 따라간다. 역에 내린 두 사람은 한참을 걸어 자신들이 가려 했던 목적지에 당도했다. 돌이어미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며 뒤채 끝에 붙은 방 쪽으로 다가가 며느리를 부른다. “에미야! 집에 있나?” 시모의 목소리를 듣고 가녀린 몸매의 여인이 느린 걸음걸이로 쪽마루에 나와 선다. “어머님! 오셨어요?” 서울 여인답게 곱상한 말씨에 하얀 피부를 가진 젊은 여인이 쪽마루에서 내려와 돌이어미에게 인사를 한다. “그래. 잘 있었나?” “예에. 오시느라고 고생하셨네요.” 인사치레를 하고 시어미의 뒤에 선 현옥을 바라보며 시모를 향해 물음을 던진다. “저 아이에요?” “오냐! 아가. 여 와서 인사 하그라.” 돌이어미가 현옥을 불러 세워 며느리에게 인사를 시키자 젊은 여인이 현옥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니?” “예. 박 현옥입니다.” “그래? 현옥이.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예에.” 현옥이 수줍게 대답을 한다. 며느리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 돌이어미는 조그마한 방안 한가운데 누워있는 갓난아이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핀다. “아이고! 우리 정무 그든새 많이 컸구마.” 누운 자락의 아기를 안아 올리며 돌이어미는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현옥이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피고 있는 동안 두 고부간에 눈짓을 주고받더니 안고있던 아기를 며느리에게 넘겨주며 말한다. “에미야! 정무 얼굴도 보았고 내는 그마 내리 갈란다.” “오신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 가신다 하세요? 오신 김에 며칠 머무르시다 가세요. 어머님!” “아이다. 가서 할 일도 많고. 바로 가봐야 한다.” 그 말을 하며 현옥을 바라본다. “아가. 현옥아! 올케 말 잘 듣고 지내그라. 알겄나?” “예에.” “그라믄 내는 선걸음에 바로 기차역으로 갈란다.” 현옥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돌이어미는 서둘러 아들의 집을 나와 걸음을 재촉하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시모가 가고 난 후 정무 네가 현옥을 부른다. “현옥이라고 했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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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시장가서 반찬거리 사가지고 올 동안 애기 좀 업고 있어.” 그 말과 동시에 정무 네는 방으로 들어가 아기를 안고 나와 현옥의 등에 업혀주며 포대기로 현옥의 몸과 아기의 몸을 둘러쌌다. 단단하게 메여진 포대기 속에 아기와 현옥의 몸이 하나가 되었다. 올케는 아기를 현옥에게 업혀주고는 곧장 나가버렸다. 현옥이 뭔가 찜찜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룻밤도 지내지 않고 되돌아가버린 돌이어미의 행동과 오자마자 자신의 등에 아기를 업혀주는 올케를 보았을 때 현옥은 내심 서운한 마음과 불안한 마음을 느꼈다. ‘와 할매는 자세한 얘기도 해주지 않고 그냥 가버리고 올케언니도 내한테 아무 말을 안 해주고 아아만 업어주라 카노?’ 현옥이 심드렁해있다 다시 생각을 고쳐본다. ‘그래. 아직 오빠가 안 와서 그런거다. 오빠가 오면 다 얘기 해 줄거다.’ 그 희망에 기대를 안고 올케가 오기를 기다리며 현옥은 아기를 업고 마당을 빙빙 돌고 있었다. 집터가 넓은 집 안은 안채와 뒤채로 나뉘어져 있었다. 현옥이 서 있는 마당은 뒤채 쪽 마당으로 공동이 생활을 할 수 있게끔 각각 방과 부엌이 딸린 셋집이었다. 한 두 집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안채는 안채대로 뒤채는 뒤채대로 여러 가구가 같이 거주하며 안채와 뒤채를 연결하는 곳이 바로 수돗가였다. 그 수돗가에도 사람들이 오가며 서로 아는 채를 하였다. 모두가 낯선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말씨. 현옥은 주눅이 들어 사람들을 피해 대문밖에 나와 업은 아기를 달래고 있는 사이 시장에 갔던 올케가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자신이 아는 이가 저 한 사람이기에 현옥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생기가 돌았고 대문으로 들어가는 올케를 쫓아 다시 집안으로 들어온다. 올케는 시장을 보아온 것을 쪽마루에 내려놓고는 아기를 업고 있는 현옥에게 다가와 이른다. “현옥이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으니까 따라 오거라.” 집을 나와 백 미터 정도 거리를 아기를 업고 올케의 뒤를 쫓아 들어간 곳은 다름 아닌 올케의 언니가 살고 있다는 집이었다. “언니. 나왔어!” 올케가 집안을 향해 사람을 부르며 스스럼없이 마루 위로 올라섰다. 현옥은 아기를 업고 마당에 서서 집안에서 사람이 나타나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나타난 여인이 올케의 언니가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현옥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올케보다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인에게서 올케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자매인 것이 티가 났다. 여인은 반가운 표정으로 동생을 맞았다. “어서 와!” 으레 하는 인사말을 나누고 현옥이 서있는 마당을 쳐다보며 동생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저 아이니? 정무 봐줄 애.” “응. 현옥아! 와서 인사 드려.” 현옥이 멈칫하다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한다. “여기는 우리 언니 집이야. 너는 우리 언니보고 그냥 이모라고 부르면 돼. 여기가 앞으로 네가 머무를 곳이야. 방은 여기서 일하는 언니하고 같은 방을 쓰면 되고 아침에 우리 집으로 와서 정무 봐주고 저녁에는 여기로 건너와서 잠을 자도록 해.” 현옥이 그 말에 생각이 뒤죽박죽이 되어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이 생각했던 서울의 첫인상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이 모든 것이 탐탁지 않아 자꾸만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럼에도 현옥은 모든 것을 꾹 참기로 했다. 그것은 오로지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희망에 모든 것을 감내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만 간다면 어느 집에 있은 들 어디에서 잠을 자든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울을 온 목적이 오직 그 이유 하나였기에 현옥은 불편하여도 올케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서울에서 경찰관 일을 하고 있는 돌이의 사정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경찰관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신출내기에 불과해 서울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기에 단칸방에 세를 들어 살고 있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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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현옥이 머무를 곳은 마땅치가 않아 근처에 사는 올케의 언니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한참 동안 어미의 품을 떠나 낯선 이의 등에 업혀 있던 것이 불편했던지 현옥의 등에 업힌 아기가 칭얼거리다 울음을 터트린다. 그제야 올케는 현옥의 몸에 감긴 포대기를 풀어 아기를 받아 안는다. 한 번도 아기를 업어 보지 않았던 현옥이 몇 시간을 허리를 굽혀 아기를 업고 있었더니 자세가 굳어져 제대로 펴지를 못하고 구부정하게 서있었다. “현옥아! 오늘은 첫날이니까 너도 힘들 테니 여기서 쉬도록 해.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집으로 건너 와. 알았지?” “예.” 현옥이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올케의 언니가 부엌을 향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성란아!” “예.” 대답이 들리고 앞치마를 두른 덩치가 작은 여자가 부엌에서 나와 그들 앞에 섰다. “그 아이 네 방으로 안내 해줘.” 어느새 아기를 받아 안았는지 올케의 언니가 정무를 안아 달래며 성란에게 일렀다. “예.” 성란은 짧은 대답과 함께 현옥을 향해 눈짓으로 따라오라 신호를 보내고 잰 걸음으로 앞장서서 부엌 옆에 딸린 방으로 현옥을 안내했다. “이방이야.” 자신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 온 현옥을 보며 무뚝뚝하게 말을 건네고는 다시 방을 나가버린다. 현옥이 텅 빈방에 혼자 남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좁은 방에 서랍장 하나만 덩그맣게 놓였고 그 위에 이불과 요가 올라 앉아 있었으며 그 줄기에 성란의 옷으로 보이는 회색빛의 치마 정장 한 벌이 벽에 걸려 있었다. 성란이 나가고 나자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짐과 동시에 피곤이 몰려 왔다. 현옥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낯선 방안에 홀로 남게 되자 어미의 얼굴이 그리워졌다. 두렵고 쓸쓸한 마음에 그리운 어미를 생각하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이제 정말 혼자라는 생각에 자신이 없어진 현옥은 몸을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었다. 사무치게 어미가 그리워 현옥은 그렇게 밤새 눈이 짓무르도록 소리 죽여 울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날 성란이 아침 일찍 현옥을 흔들어 깨웠다. 아직 잠이 덜 깬 부은 눈을 하고 현옥은 정무네로 향했다. 어제 만나지 못했던 친척오라비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잔뜩 기대하고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 뒤채 끝의 방 앞에 서서 아기의 이름을 부른다. “정무야!” 그 소리에 방문이 열리고 올케가 밖을 내다봤다. “왔니?” 열려진 문 사이로 방안을 들여다보니 올케와 아기만 있을 뿐 친척오라비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오늘은 꼭 학교 얘기를 듣게 되리라 기대를 했건만 그 얘기를 꺼내 줄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현옥은 실망을 한다. ‘오빠는 집에 없는 갑다. 내는 빨리 입학을 해야 하는데... 늦으면 학교 못 가는데.’ 학교 생각을 하자 현옥의 마음이 다급하고 초초해진다. 이러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지나 않을까 싶어 가슴이 답답해진다. 현옥의 그런 마음과는 전혀 아랑곳없이 정무 네는 현옥의 등에 또다시 정무를 업혀준다. 현옥의 하루 일과가 그렇게 시작되어 하루 종일 아이를 업고 오갈 데 없이 대문 밖을 서성거리거나 골목길을 빙빙 돌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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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업고 있는 허리는 끊어져 나갈 듯 아팠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이곳에서 말동무가 되어줄 이도 없었으니 현옥의 신세는 벙어리 아닌 벙어리 신세가 되어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처럼 외롭고 서글프기만 했다. 현옥이 칭얼거리는 아기를 달래려 마당을 서성이고 있자 제 나이보다 어린 여자아이가 다가오더니 현옥을 힐끔 쳐다보고는 올케가 있는 부엌 쪽으로 걸어가 올케를 불렀다. “이모!” 부르는 소리에 밖을 내다보며 올케는 소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미원이 왔어? 왜 엄마 심부름 왔니?” “응.” “무슨 심부름?” “엄마가 시장가서 토마토 사가지고 집으로 오래.” “알았어. 이모 금방 간다고 엄마한테 전해.” “응. 이모. 빨랑 와요.” 함박웃음을 웃으며 돌아서 나오던 미원이 현옥이 업고 있는 정무를 쳐다보며, “정무야! 누나 간다.” 하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흔들어 보이고는 발걸음을 옮겨 대문을 빠져나간다. 현옥은 미원이 빠져나간 골목길을 잠시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하루 종일 업고 있던 정무를 내려놓고 현옥은 끊어질 듯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정무이모네로 돌아왔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 아직 어둠이 내려앉지 않은 마당에 세 자매가 옹기종기 모여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현옥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 중에는 현옥이 낮에 보았던 여자아이도 있었다. 서로가 낯설어 아직 인사를 트지는 못했으나 현옥은 대충 짐작으로 미원이 정무이모의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나머지 두 아이는 미연의 동생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이 고단한 현옥이 아이들이 노는 곳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깔고 고된 몸을 누인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이집 저집을 건너다니며 아기를 업어주고 또는 올케의 심부름을 대신 하여주고 밤이 되면 가족들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어미의 품을 떠나 온 것을 후회하는 반복된 일상으로 현옥의 서울 생활은 외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외로움과 서글픔에 며칠을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현옥은 겨우 정무아비 돌이를 만날 수가 있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 온 돌이는 자상한 얼굴로 현옥을 반겼고 친동생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며 살갑게 대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 씀씀이에 현옥의 불편했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현옥은 희망을 품을 수가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 갈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소망했던 꿈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돌이를 만났으니 이제 자신이 학교에 가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초조한 기다림의 끝을 보게 된 것이 현옥으로서는 너무도 기쁜 일이었다. ‘자상한 오빠니까 내가 말 안 해도 알아서 해 줄 거다. 오빠가 말 할 때까지 나는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희망에 부푼 나머지 현옥은 모든 것을 돌이가 잘 처리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초조한 마음을 다스리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현옥이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를 않았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현옥과는 다르게 돌이 내외에게서는 현옥이 생각하는 어떤 희망의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현옥과 얼굴을 대하면서도 그의 입에서는 학교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가 없었고 현옥의 초초한 마음 또한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아직 어린 마음의 현옥이 어른들에게 실망을 하며 또다시 마음의 상처를 받고 말았다. 낯설고 힘든 남의집살이를 하고자 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 그것 하나만을 믿고 버티고 있었건만 정작 자신에게 중요한 그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것이 너무도 괘씸하고 야속하게만 여겨졌다. 자신의 입으로 그들을 비난할 수조차 없는 현옥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여러 날을 속을 태우다 결국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집에 들어 온 돌이에게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며 통보를 하고 만다. “오빠! 나 집에 다시 갈랍니다. 집에 보내 주세요.” 뜬금없는 현옥의 심통에 돌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갑자기 왜 그라는데? 여기 온지 며칠 됐다고 벌써 집에 간다 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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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답을 한다. “엄마 보고 싶어서 갈랍니다. 그냥 보내 주세요.” 현옥의 변덕에 당황한 돌이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린아이의 변덕을 그저 어린 탓이라 치부해 버리기에는 상황이 난처했다. 현옥이 다시 내려간다면 당장에 현옥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기에 자신의 입장도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기에 현옥을 달래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알았다. 그러면 며칠만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바쁜 일 끝내고 보내 줄 테니까.” 궁여지책으로 며칠을 미루어 그 동안 현옥의 마음을 달래 볼 심사로 돌이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하고 만다. 그런 돌이의 대답에 현옥은 더 상처를 받았다. 먼저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해놓고서 정작 아무런 조치도 없는 돌이의 행동이 야속해 오기가 나서 꺼낸 말이었는데 돌이는 현옥의 심정을 헤아려보지도 않고 그 말에 두 말 않고 수긍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화가 난 현옥이 차마 돌이 앞에서 큰소리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 대놓고 그를 욕했다. ‘거짓말쟁이!  자기가 약속해 놓고 지키지도 않는 나쁜 사람.’ 서운한 마음과 분한마음이 교차하며 현옥을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품었던 희망마저 놓쳐버린 현옥은 또다시 풀이 죽어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내려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현옥은 학교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매일 아침을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등교 하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현옥은 저도 모르게 아기를 업은 채 등교하는 학생들을 따라 학교 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교복 입은 모습의 아이들이 학교로 들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현옥은 잠시 상상 속으로 빠졌다. 교복을 입은 자신이 나비처럼 사뿐사뿐 걷다 뒤돌아서서 어미에게 학교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하고 있다. 단지 상상에 불과 하지만 너무도 기분 좋은 상상이었다. 그러나 그 헛된 망상도 모두가 교실로 사라진 후 텅 빈 운동장에 처량하게 아기를 업고 서있는 자신을 보게 되면서 깨어지고 만다. 현실로 돌아온 현옥은 초라한 제 모습이 싫고 자신을 속인 모두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힘없는 발걸음을 돌려 교문을 터벅터벅 걸어 나오며 현옥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눈물이 흘러내릴까 눈을 깜박거리며 겨우 눈물을 삼켰다. 초라한 제 등에 업힌 아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두 손으로 받쳐 등에서 흘러내리는 아기를 치켜 올리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기를 업고 나간 시간이 길었던지 한참이나 현옥을 찾고 있던 올케가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 들어오는 현옥을 보고는 화를 낸다. “현옥이 너 어디 갔다 오는 거니? 내가 한참 찾았잖아.” “…….” 현옥의 등에 업힌 정무는 언제 잠이 들었던지 고개가 뒤로 젖혀져 넘어가고 있었다. 현옥의 등 뒤에서 위태로운 자세로 잠이 든 아기를 보며 올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세상에! 아기 얼굴이 빨갛잖아.” 올케의 곱지 않은 시선이 현옥에게로 향했다. “얼른 들어가서 애기 눕혀 놔! 그리고 가서 걸레나 빨아 가지고 와.” 가뜩이나 심란해 미치겠는데 짜증을 부리는 올케의 한마디에 현옥이 울컥하고 만다. ‘내가 도대체 여서 뭐하고 있는 기고? 나는 여 공부시켜준다고 해서 왔는데 와 공부는 못하고 걸레나 빨아다 주고 애기 업어주고 그래야 하노? 나는 이거 할라고 온 기이 아이단 말이다. 그 할매가 내를 속인 기다. 정무할매 참말로 나쁜 사람이다. 이 집 식구가 모두가 다 내를 속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척이 내한테 거짓말을 한기다. 나쁜 사람들. 정무할매는 나중에 벌 받을 기다.’ 속으로 아무리 욕을 하고 미워해도 마음의 응어리는 가시지 않았다.    돌이가 현옥을 다시 집으로 보내주겠다던 약속도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현옥의 서울 생활은 어느덧 한 달이 흘러가고 있었다. 돌이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두 집을 오가던 현옥의 설움도 조금씩 잊혀져가고 어느덧 그 생활에 익숙해져 외로운 마음이 줄어들고 있었다. 매일 마당과 대문 앞을 서성거리던 시간들도 정무이모의 딸 미원과 친해지면서 혼자 보내는 시간들이 차츰 줄어들었다. 이제 현옥은 정무를 업고 미원이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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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정무 이모 집으로 놀러 다니고 있었다. 현옥이보다 네 살 아래인 미원은 학교가 끝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현옥과 정무를 불러 함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다. 어느 틈에 두 아이가 친해졌는지 미원은 현옥을 의지하며 서로가 친 자매처럼 지냈고 현옥은 미원의 부족한 공부를 도와주고 숙제를 대신해 주면서 공부에 대한 미련을 조금이나 삭이고 있었다. 계절은 가을의 문턱을 들어서고 어느덧 현옥의 생활도 점점 몸에 베인 습관처럼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부엌방에 기거하고 있는 객식구 둘은 두 달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나마 조금은 편한 사이가 되었다. 처음 며칠은 현옥이 성란과 같은 방을 쓰면서 불편함과 불안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편인 성란은 현옥의 존재가 떨떠름했던 건지 싫은 내색은 않았으나 달가운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현옥의 존재 자체를 무시해버리듯 제 할일만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현옥이 그런 성란의 행동에 기가 눌려 아무런 말도 못하고 눈치를 받으며 방안 한 구석을 차지하고 지내다 마음을 고쳐 먼저 다가가 살갑게 굴었다. 현옥의 노력으로 성란이 조금은 현옥을 편하게 대했고 원래가 말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지금까지도 서로의 속내를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현옥이 성란과 지낸 두 달에 그의 신상에 대해 알아낸 것이라고는 서울 태생으로 자신보다 여섯 살 위인 스물이라는 나이와 고아라는 사실, 그리고 이 집에 들어 온지 삼 년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 외에 그녀에 관한 것은 이 집안 어느 누구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녀의 됨됨이가 맘에 들었던 미원 엄마는 한 번도 성란에 대해 의심을 품어 본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이 집에서 신뢰를 쌓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면서 잠이 늘었는지 현옥이 부쩍 아침잠이 많아졌다. 그런 현옥을 아침마다 깨우는 일이 성란의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현옥아! 그만 자고 일어나. 얼른 건너가야지.” 성란이 잠에 빠져 있는 현옥을 흔들어 깨운다. “어서 일어나서 건너가! 너 또 늦게 왔다고 이모한테 꾸중 들을라. 괜히 혼났다고 입 내밀지 말고 얼른 건너가.” 며칠 전, 현옥이 늦잠을 자고 건너 간 일이 있었다. 그 날 현옥은 올케에게 심한 잔소리를 들었고 서운한 마음에 하루 종일이 우울했었다. 가족끼리도 서운한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상하는데 하물며 남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현옥의 마음이 어떠리라는 것을 잘 알기에 성란은 밤이 깊도록 어린 현옥의 마음을 다독이며 달래어 주었다. 그리고는 현옥이 두 번 다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아침마다 깨우는 수고를 해주고 있었다. 같은 처지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아직 어린 현옥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성란은 옆에서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성란 덕분에 다행히 늦지 않게 올케의 집으로 건너간 현옥이 방으로 들어가며 정무를 부른다. “정무야! 누나 왔다.” 돌을 갓 지낸 정무는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서서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아이를 보고 현옥이 손뼉을 치자 아기는 현옥에게로 걸어와 와락 안기는 것이었다. 아기를 지켜보고 있던 올케가 현옥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우리 정무 현옥이 없으면 울겠다. 현옥이 너를 나보다 더 따르는 구나.” 그 사이 아기는 현옥의 등 뒤로 돌아가 업어달라며 매달렸다. 매일 반복되는 행동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옥이 등을 내밀자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현옥의 등에 달라붙었다. 현옥이 아기를 들쳐 업고 방을 나와 잰 걸음으로 다시 미원의 집으로 향했다. 미원이 아직 학교에 가지 않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현옥은 미원이 등교하기를 대문밖에 서서 기다렸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고 미원이 나오고 현옥은 정무와 함께 미원을 학교까지 바래다준다. 그리고는 그 길로 현옥은 중학교로 찾아간다. 텅 빈 운동장에 초라한 자신을 내려놓고 교실 안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부러움으로 바라보다 허무한 발걸음으로 돌아 나오는 일. 이 또한 현옥이 매일같이 반복하는 일상이었다. 매일 같이 미원을 학교까지 바래다주고는 발길을 돌려 중학교 교문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교실을 올려다보며 부러움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 나와 천천히 걸어서 다시 미원의 집으로 향한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포기를 하지만 발길은 언제나 생각과 다르게 그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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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하는 것이었다. 안 되는 일에 미련을 두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지만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제 마음을 추스르고 집으로 들어오면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미원의 동생들이 현옥을 기다리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반나절을 아이들과 더불어 소꿉놀이 인형놀이를 하며 즐겁게 보내고 나면 학교에서 미원이 돌아와 현옥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서는 학교에서 내어준 숙제를 현옥에게 내민다. “언니! 오늘 숙제 할 것 정말 많아. 언니가 도와 줄 거지?” 미원이 천진한 웃음을 웃으며 현옥을 바라본다. “알았다. 내가 니 숙제 다 해줄 테니까 니는 정무하고 사이좋게 잘 놀고 있어라.” “알았어. 언니.” 현옥이 미원을 대신하여 숙제를 한다. 국민학교 삼학년의 미원이 가져온 숙제는 이미 현옥이 잘 알고 있는 것이어서 막힘없이 문제를 풀어 내려간다. 숙제를 마치고 나면 현옥은 언제나 자신이 풀었던 문제를 미원에게 가르쳐주었다. 모르는 것을 터득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 나가는 것이 얼마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인지 현옥은 당장에 자신이 이루지 못하는 꿈을 미원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옥이 나서서 미원에게 숙제뿐 아니라 공부까지 도와주다 보니 미원의 성적이 부쩍 올랐고 이에 미원은 아비에게 칭찬까지 받게 되었다. “우리 미원이! 요즈음 성적이 많이 올랐네. 아버지가 모르는 비결이 있는 거니?” 기분이 좋아진 미원이 배시시 웃으며 대답한다. “이거 다 현옥이 언니가 매일 숙제해주고 가르쳐줘서 제 성적이 좋아진 게예요.” “그랬구나. 현옥이가 너의 공부를 봐준 거였구나. 아이가 참 기특하구나.” 미원이 아비에게 칭찬들은 것이 신이 나 집안을 돌아다니며 현옥을 찾는다. 정무를 올케에게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 온 현옥을 미원은 기다렸다는 듯 뛰어와 자랑을 한다. “현옥이 언니!  나 오늘도 학교에서 시험 백 점 맞았어.” “그래? 잘 했다. 우리 미원이 인자 내가 안 가르쳐도 되겠다.” 두 아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원의 아비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현옥에게 칭찬을 해준다. “현옥이 덕분에 우리 미원이 성적이 많이 좋아졌구나.” “…….” 미원 아비의 칭찬에 현옥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미원을 바라보았다. 잠시 두 아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는 것을 보던 미원의 아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현옥이 너 그냥 우리 미원이 과외선생 좀 해줘라.” 현옥이 그 칭찬이 기분이 좋아 입이 함박웃음을 짓는다. 현옥과 달리 그 말을 듣고 있던 미원의 어미는 펄쩍 뛰며 남편의 말을 막고 나섰다. “당신은? 현옥이가 어떻게 미원이를 가르쳐요? 현옥이는 정무 봐주러 온 아이란 말이에요. 미원이 과외선생이 말이 되요?” 순간 올라붙었던 현옥의 입 꼬리가 아래로 떨어지며 발끈하여 소리를 높인다. “아입니다! 내는 여기 아아 봐줄라고 온 거 아입니다. 정무할매가 아기하고 잘 놀아 주면 중학교 공부 시켜준다고 해서... 그래서 온 겁니다. 내는... 여기서 공부 할라고 할매 따라온 거라 말입니다.” 현옥이 설움에 받쳐 눈물이 솟구쳤다. 그동안 참았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새어 나와 주체할 수 없는 설움을 토해낸다. 현옥의 모습을 지켜보던 미원의 부모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울고 있는 현옥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이가 총명해 보인다 했다.” 미원의 아비가 속삭이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현옥아! 너 정말 정무 할머니가 너를 공부시켜준다면서 여기에 데리고 온 거니?” 미원의 어미가 현옥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며 물었다. “예! 저는 공부하고 싶어서... 공부 시켜준다고 해서...식구들이 말렸는데도... 공부 하고 싶어서 할매 따라서 서울로 올라 온 겁니다.” 현옥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원의 어미는 현옥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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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 할머니, 세상에! 그 노인네가 어린 너에게 거짓말까지 하시다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나 현옥이 진실을 알게 되자 더욱 화가 났다. “어르신도 참!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거짓말로 아이를 속여서 데리고 오시면 어떡하자는 건지.” “그러게 말이야. 어르신행동이 옳지 못하셨구만.” 처음 듣는 얘기에 두 부부도 어지간히 당황 하였던 모양이다. “정무엄마한테는 아이를 데려오려고 돈까지 주었다 하셨어요. 그래서 정무아버지가 그 돈을 어르신께 돌려 드렸다고 들었는데…….” 현옥이 그 말에 깜짝 놀란다. 자신이 돈을 받고 온 꼴이 되어 어린 마음에도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정무할머니의 거짓임이 들통 나고 현옥은 이 모든 일에 불쾌감이 들어 또다시 속으로 어른을 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고 불쾌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그 날 밤 현옥은 눈물을 떨구며 어미에게 편지를 써서 붙였다. 모든 상황을 세세하게 적어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글로 대변하며 서글픔에 눈물을 떨구며 만리장성의 글을 써내려 갔다. 사실이 그러했다. 며느리가 아기를 연년생으로 가져 몸이 무거워 큰아이를 돌볼 수가 없게 되자 아들은 어미에게 아이를 보아 줄 사람을 구해 달라 청을 넣었던 것이고 그에 돌이 어미는 생각을 하여 아이를 봐줄 사람을 구하러 다녔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하여 결국 자신이 손자를 키워야 할 형편이 되니 이를 면하고자 부랴부랴 조카인 희연을 찾아가 마음에 두었던 현옥을 거짓으로 꼬드겨 데리고 올라왔던 것이었다. 돌이는 어미의 거짓에 꼬여 현옥이 서울로 올라 온 것을 듣고는 무척 놀라며 어이없어하다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올케 또한 그 사실에 놀라는 듯 했다. 어쨌거나 지금의 이 사태는 돌이 어미 혼자서 계획한 일이라는 것을 현옥은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오라비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을 조금이나마 미안하게 생각했다. 돌이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혼란스러워하며 현옥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는, “현옥아! 미안하지만 당분간만 올케언니를 좀 도와주면 안 되겠나? 정무 동생 태어나면 내가 꼭 약속 지킬 테니까 조금만 참고 있어라. 잠시 동안이나마 이렇게 너와 내가 가족이 되어 생활을 했으니 내 사정을 좀 봐서라도 니가 조금만 더 있어 줬으면 한다.” 돌이의 말에 현옥이 나란히 앉은 올케의 배로 시선을 떨구었다. 산달이 가까워 배는 더욱 불러 있었고 몸이 무거워 움직임도 둔해진 올케와 걸음마 연습에 한창인 정무를 보니 그 동안 든 정을 모질게 뿌리칠 자신이 없어 현옥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돌이의 눈치만 살폈다. 그렇게 또 어영부영 세월이 지나는 사이 미원의 집과 정무의 집만 오갔던 현옥에게도 서울 친구가 생겼다. 정무네와 같은 집에 살고 있는 현옥 또래의 아이로 이름은 순자고 안채에서 아비와 단둘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순자의 아비는 배를 타는 사람으로 한번 나가면 몇 달씩 집을 비워야만 했다. 혼자가 적적했던 순자는 어느 날 아기를 업고 있는 현옥을 보고는 친구가 되고 싶다며 말을 걸어왔다. 현옥이 역시 혼자라는 외로운 처지에 말을 걸어주는 순자가 고마워 둘 사이는 허물없는 친구가 되었다. 순자 역시 학교를 다니는 아이는 아니었고 책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있어 퇴근을 할 때도 언제나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와 책장을 한장 한장씩 실로 꿰어 책 한 권을 만드는 작업을 계속 반복하였다. 현옥이 그날도 혼자 있는 순자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손에서 일거리를 놓지 않고 얘기를 주고받던 순자가 현옥에게 제안을 하였다. “현옥이 너 여기서 나랑 같이 일하러 다니지 않을래?” “일?” “응. 나 다니는 공장에 일자리는 많으니까 여기서 나랑 살면서 같이 일하러 다니자.” 현옥이 순자의 제안에 선뜩 답을 못하고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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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 깨나 그리운 어미의 곁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미의 노동으로는 겨우 입만 먹고 살 수 있으니 제 입 하나 줄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 그냥 서울에 남을까를 고민해본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현옥은 어미의 곁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돈도 필요하지만 내는 엄마가 더 그립다. 엄마 떨어져서는 내는 못살겠다. 아무리 힘들어도 엄마 곁으로 갈란다. 떨어져서 그리워하며 애타지는 않을 거다.’ 현옥의 결심이 그러하니 친구를 붙잡지 못하는 순자의 마음은 아쉽기만 하다. 현옥이 언제 다시 돌아갈지는 아직 모르지만 떠나는 그날까지 둘은 계속 함께 할 것을 약속하며 우정을 쌓았다.

가을의 끝자락에 머문 소슬바람은 초봄에 불어 닥치는 소소리바람같이 차고 매서웠다. 해산 날짜를 며칠 앞두고 있는 정무어미의 배는 터질 듯이 부어올라 있었다. 만삭에 몸이 무거워 움직임이 둔해진 올케는 방안에 가만히 누워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런 올케를 혼자 두고 현옥이 여전히 이모 집에서 미원과 더불어 그 동생들과 함께 정무를 돌보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아장아장 걷는 정무를 두고 아이들은 서로 사랑싸움을 하며 제 나름대로 정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열심히 재롱을 피워댄다. 그 놀이에 아이들은 재미를 붙이고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정무는 이제 현옥을 제 친누이로 아는지 어미에게 있는 시간보다 현옥과 지내는 시간을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곁에서 정무를 지켜보았던 현옥 역시 서울생활의 설움을 정무와 함께하며 가끔씩은 등에 업힌 정무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고는 했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가 무엇을 알겠는가마는 그 당시 현옥의 설움이 그만큼 컸기에 오죽했으면 제등에 업혀있는 아기를 상대로 얘기를 했을까? 어쨌거나 그렇게 지낸 세월에서 현옥에게 정무는 고락을 같이 한 사이가 된 것이다. 저녁때가 되어 하루 종일 현옥의 곁에 붙어있었던 정무의 손을 붙잡고 올케의 집으로 현옥이 들어섰다. 언제 들어왔는지 방안에는 올케와 돌이 오라비가 함께 정무와 현옥을 맞았다. 현옥이 아기를 방에 들여 놓으며 돌아서 가려는데 돌이가 현옥을 불러 세웠다. “현옥아. 잠깐 들어와 봐라.” 방안의 분위기가 조금 무겁게 느껴져 현옥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돌이 맞은편에 앉았다. 현옥을 앉혀 놓고 돌이는 무거운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지키다 긴 한숨을 내뿜으며, “현옥아! 너거 어머니한테서 편지가 왔다. 집주소를 몰라 경찰서로 편지를 보내셨더라.” “…….” 지난번 현옥이 어미에게 제 사정을 털어 놓은 편지를 보냈던 것에 대한 답장인 듯 했다. 돌이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현옥에게 건네준다. “이 편지받고 생각을 많이 했다. 우리어머니가 니를 속이고 데리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 사실 내 사정이 좀 나아지면 너를 학교에 보내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보다시피 정무동생이 곧 태어날 거고 또 커가는 정무한테도 돈이 많이 들거라 내 월급 가지고는 너를 아무래도 학교에 보내줄 수가 없을 것 같다.” 돌이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던 현옥이 궁금증을 참고 다음에 나올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너거 어머니 편지도 그렇고 또 지난번 내가 한 약속도 있고 해서 내가 니를 여기에 붙잡아 둘 수가 없게 됐다. 니 생각은 어떻노? 그래도 니가 우리하고 반년을 같이 살았으니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내는 생각한다. 우리는 니가 여기 남아서 지금처럼 살면 하는데... 안되겠나?” 현옥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처음이 두려웠지 이제는 점차 생활에 익숙해지고 여러 사람들과 정도 들었기에 다시 내려가는 것도 이별이라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옥은 그 어떤 것보다 지금 어미가 너무도 그립고 가족이 그리웠다. 모든 것이 다 주어진다 해도 어미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현옥에게 있어 어미의 존재는 공부에 대한 열의만큼이나 강한 집착이었다. 지금도 어미의 편지를 손에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무치게 어미가 그리워지고 있었다. “오빠! 내는 엄마가 보고 싶어 더 못 있겠습니다. 다시 경주로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 말에 현옥의 슬픔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돌이는 더 이상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알았다. 그라면 며칠만 좀 참아라. 너 대신에 정무 돌볼 사람 구하면 내가 너 경주 가는 기차표 끊어 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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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방을 나와 미원의 집으로 향한다. 일찍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집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맥없이 터벅 걸음을 걸어 도착한 현옥이 부엌방으로 들어가 어미의 필체가 고스란히 담겨진 편지를 불빛에 비춰가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정무아범 보시게. 거두절미하고 지금의 내 심정을 이 글로 대신하여 자네에게 보내네. 우리 아이가 자네의 곁에 있다는 것은 안심이 되는 일이나 일전에 아이에게 받은 편지가 너무도 마음을 헤집어 놓았기에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네. 자네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내가 아이를 보내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어미로서 무책임한 행동을 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네. 그 어린 것을 품에서 떼어 놓은 것을 생각하면 어미의 죄를 대신 받는 것 같아 가슴이 내려앉는다네. 당숙모님께서 어떤 연유에서 내게 그런 거짓말을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결과는 나와 내 딸을 기만하는 격이 되었으니 더는 자네 곁에 내 딸을 두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라네. 하여 부탁하니 우리 현옥이를 다시 경주로 내려 보내 주게. 어린것의 마음에 더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어미의 마음을 자네가 헤아려 주었음 하네. 자네가 옳은 판단을 해줄 거라 믿고 이만 글을 줄이겠네.- 짧은 글 속에 어미의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건만 제 고집으로 서울까지 쫓아온 자신의 잘못이 큰데도 어미는 모든 것이 제 탓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 마음에 현옥이 잘못을 반성하며 어미의 편지를 끌어안고 오열을 한다. 그럴수록 어미에 대한 그리움은 사무치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 정무의 집으로 새로 일할 사람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나이가 조금 있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올케는 정무동생을 순산하였다. 이번에도 아들이었다. 현옥이 내려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동안 돌이는 집안의 일을 마무리 지어 놓고 경주행 기차표를 끊어 현옥에게 건네주고는 역까지 데려다 준다. 올케 네와 올케언니의 식구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집을 나오려는데 이미 정이 들었던 이들이 현옥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보였다. 어린 정무는 현옥의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고 때를 쓰며 매달렸다. 어린 것이 무엇을 알기나 한 듯 떠나려는 현옥의 품으로 자꾸만 파고든다. 그런 정무를 떼어 놓으려니 현옥의 마음도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렸다. 겨우 우는 아기를 달래어 어미의 품에 안겨 놓고 뒤돌아서서 돌이를 따라 서울역으로 향했다. 역 입구에 서서 돌이는 현옥에게 기차표를 넘겨주고 현옥은 마지막까지 돌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내일이면 사무치게 그리웠던 어미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기쁨에 현옥은 이 밤이 빨리 지나고 날이 밝아오기를 고대해 본다. 현옥의 마음과는 달리 기차는 느리기만 하고 창밖으로 배여 든 어둠은 가실 생각을 않았다. 잠이라도 자면 더딘 시간이 빨리 흐를 텐데, 조급한 마음에 잠조차도 쏟아지지를 않았다. 밤새도록 달리는 기차에서 내뿜는 석탄가루와 어른들의 담배연기 탓에 현옥의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고 있었다. 여명이 트고 한참을 지나 오전해가 머리위로 올라섰을 때 현옥은 대구역에 도착을 했다. 밤새도록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얼굴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현옥은 경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고 고향에 도착을 하여 집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현옥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어미가 기다리고 있기를 품팔이에서 돌아와 자신을 반겨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엄마! 내 왔다.”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어미를 부른다. 텅 빈 마당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어 가쁜 숨을 내쉬며 방을 향해 뛰어간다. 그와 동시에 방문이 열리고 어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현옥이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따듯한 어미의 품으로 뛰어들고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나타난 딸이 반가운 한편 걱정스런 표정으로 어미는 딸을 품에 안는다. “엄마! 내가 엄마 얼마나 보고 싶었는줄 아나?” “그래. 인자 집에 왔으니 됐다. 우리 현옥이 잘 왔다. 이번에 큰 경험했다 생각하고 앞으로는 누가 공부시켜준다는 말해도 현혹되지 말그라. 이 못난 에미 탓에 니가 맘고생을 많이 했구나.” “엄마!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엄마보고 공부시켜달라고 하지 않을 거다.” “우리 현옥이한테 엄마가 큰 죄를 짓는다.” 희연이 혼잣말처럼 뇌까리며 현옥을 보듬어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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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현옥은 그 외롭고 서러웠던 마음을 되새기며 공부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로 한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어미와 가족들을 보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목 놓아 그리워했던 집에 돌아 온지 이삼일이 지나고 나자 현옥은 그 그리움이 자신만의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옥이 그 서러웠던 서울 생활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이 집안의 어느 누구도 궁금해 하지를 않았다. 처음 온 날 어미의 눈물은 진심이었으나 여전히 여유 없는 생활에 하나의 입이 다시 늘었으니 그 감당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것이 희연에게는 크나큰 근심거리였다. 그러나 그런 사정도 모르는 어린 현옥은 어미의 마음이 자신의 애달픔만큼이 아닌 것에 대하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오면 모두들 자신을 반겨주고 그 서러움을 달래주며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줄 거라 여겼었는데 힘든 생활고에 지친 어미의 마음은 현옥의 상처를 돌 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나마 품을 팔았던 일도 이제는 시골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시골에도 버스가 생겨 물건을 날라다 주던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어 희연의 삶은 더욱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되자 어린 날부터 익혔던 바느질 솜씨로 옷감을 받아다 남의 옷을 지어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나마 그 일도 며칠씩 날밤을 세워가며 하는 중노동이요, 그에 비해 대가는 약한 편이라 겨우 생활을 유지하는 형편만 되어 막내 경현이 학비도 못 내고 있어 빚을 지며 살아가고 있었다. 현옥이 그렇게 노래 부르던 공부도 실은 딸이라는 이유로 경현에게 밀렸던 것이었다. 다시 경주로 이사 오기로 하고 포항을 떠나기 전날, 희연은 아이들의 전학문제로 다니던 학교를 찾았었다. 육 년이라는 시간 동안 월사금을 제때에 내지 못하여 사실 아이들이 제대로 학교를 다닌 것은 그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형편으로도 두 아이를 다 전학시킬 수가 없어 희연은 고민 끝에 월사금을 준비하여 아들의 전학서류만 받아 들고 경주로 왔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현옥은 다시 학교에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고 어미는 그런 딸을 향해 차마 학교를 그만두라는 얘기를 꺼내지 못했었다. 공부욕심이 많은 딸이 가지게 될 실망감과 허탈감을 조금이나마 줄여주고자 희연은 아들의 전학서류를 들고 학교를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현옥과 경현이 동시에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경현은 아직 나이가 어려 한 학년을 다시 다니기로 하였고 현옥은 육학년으로 마지막 학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미 여름이 지났으니 한학기만을 남겨두고 현옥은 졸업을 해야 했다. 그 한 학기를 현옥은 열정을 내뿜으며 기를 쓰고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중학교 진학까지 꿈을 꾸었었다. 학기의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아이들은 이제 남은 졸업을 기념하며 졸업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고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의 진학문제를 상담을 해주며 학기말을 마무리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현옥에게는 졸업에 관한 그 어떤 것에 대하여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현옥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집에 와서 어미에게 궁금한 것을 일렀다. “엄마! 선생님이 다른 아아들은 다 진학상담해주던데 내한테는 아무런 말도 안하더라. 그라고 아아들은 다 졸업사진 찍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것도 얘기를 안 해 준다.” 현옥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희연이 한숨을 내쉬며 “현옥아! 인자 학교에 그만 가그라.” “와?” “니 월사금 줄 돈 없다.” “…….” 어미의 말뜻을 알지만 현옥은 포기가 되지 않았다. “사실 월사금이 부족해서 니 전학서류 못 가지고 왔다. 그런데 니가 하도 공부를 하고 싶어 해서 엄마가 니 마지막 공부라도 해보라고 선생님한테 부탁을 한기다. 그냥 뒷자리에 앉아서 공부만 시키 달라고 부탁을 해서…….” 말끝에 눈물이 맺혔다. 현옥이 어미의 눈물을 보면서 멍한 표정을 지으며 나름 생각에 잠겼다.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제일 뒷자리에 앉아 있었구나. 나는 졸업장도 없는 거다. 졸업 앨범도 없는 거다. 나는 그라믄 학생이 아니었던 거네.’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졸업장도 진학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현옥은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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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딸의 마음을 알았는지 눈물을 훔친 어미가 딸을 위로했다. “니 서운한 마음은 알지만 형편이 그라니 니가 이해 하그라. 나중에 생활이 좀 나아지면 엄마가 꼭 중학교 보내 주꾸마.” 그러나 생활은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고 현옥이 학교를 나온 후부터 할 일이 없어 산으로 들로 나물 캐러 다니다 돌이 어멈 말에 속아 서울로 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일 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아 온 집안은 아직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어떻게든 아들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어미의 판단에 엄두도 못 냈던 월사금을 아는 사람을 통해 빛을 져가며 마련해 대주었고 그 원금을 갚지 못하여 겨우 이자만 주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마저도 돈을 빌려준 이가 계속하여 원금상환을 독촉하고 있는 상황이라 희연의 생활은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런 어미의 생활을 조금씩 알게 된 현옥이 자신의 철부지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다. 오로지 집이, 어미가 그리웠던 생각에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어미의 고충을 몰랐던 것이 아니 애써 나 몰라라 했던 이기심에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만 철든 행동을 했더라면 조금이나마 어미가 편했을 터인데, 돌이 오라비가 가지 말라 했을 때, 그때 그냥 서울에 눌러 있었더라면 서로가 좋았을 것을 현옥은 이제야 후회를 한다.

희연과 아이들이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근호는 또 다른 여인을 집으로 들이게 되었다. 희연과 헤어지고 같이 살던 앳된 얼굴의 여인은 일 년도 못 살고 정씨 부인의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제 발로 나가버리고 이에 근호는 어미와의 갈등 속에서 밖으로만 나돌며 술에 여자에 또다시 번잡한 삶을 살다 고생하는 어미를 생각해 다시 맘을 잡고 지인의 소개로 울산 댁을 만났다. 근호의 눈에 비친 여인의 첫인상은 곰살맞아 보이지 않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광대가 불거져 나온 모습이 꾀나 고집이 있어 보이고 억척스러워 보이는 것이 흡사 젊은 날의 어미를 닮은 듯도 하였다. 비슷한 몸집의 두 여인, 서로 닮은 듯 한 외모며 당차 보이는 인상이 근호의 눈에는 어미의 과거와 현재를 보는 듯 했다. 그래서 일까 근호의 눈에 울산 댁은 왠지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울산댁이라는 여인. 어린 나이에 출가를 하여 일 년도 채 살아보지 못하고 남편과 사별을 하고 홀로 된 청상과부였다. 그런 그녀를 시댁에서는 남편을 잡아먹은 계집이라 하여 소박을 놓았고 소박을 받은 딸을 거둘 수 없는 친정의 입장에서 또다시 딸을 내쳤으니 어린 나이에 오갈 데 없는 신세로 전락해 팔도를 떠돌며 갖은 풍파를 겪으며 억척스럽게 홀로 살아온 강단 있는 여인이었다. 기구한 팔자라 십 수 년을 남자들을 경계하며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제 한 몸을 지키며 살았던 여인이 근호에게 마음이 끌려 아무런 조건도 따지지 않고 그와 살기로 결심을 하고 근호를 따라 모자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왔다. 사실 이 여인은 근호가 어미를 모시기 위해 얻은 여자였다. 정이 있어서도 사랑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나이든 홀어미를 잘 모셔주고 집안일을 잘 할 수 있는 여인이라면 아무나 상관없다는 생각에서 울산 댁을 만났고 그녀가 좋다하니 자신도 굳이 싫을 이유가 없어 데려온 것이었다. 곰살스럽게 굴지 못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까 깔끔한 음식솜씨에 집안일도 부지런을 떨며 잘 이끌어 나가는 편이었다. 비록 첩으로 들어오는 시집이었으나 울산 댁은 남편인 근호를 지아비로 섬기는 것에 무척 만족을 하며 사는 편이었다. 그러나 정씨 부인의 눈에 울산 댁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며느리와 손주들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완전한 소유로 아들을 차지 할 수 있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울산 댁이 달가울 수가 없는 것이 정씨 부인의 심정이었다. 아들이 어미를 생각해서 데리고 들어 왔기에 마지못해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정씨 부인은 내심 마음에 차지 않아 울산 댁을 처음부터 업신여겼다. 본처도 아니요 첩이라 여겨 하대하며 괄시를 하고 면박을 주었으나 당찬 성격의 울산 댁은 웬만한 상황은 눈 깜짝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참아 넘기며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하며 시어미를 봉양해 나갔다. 그런 울산 댁이 보통이 아니다 싶어 정씨 부인은 더욱 더 미운 털을 박고 울산 댁을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그런 정씨 부인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날이 갈수록 더욱 등등해지는 것이었다. 첩이라는 자신의 위치가 떳떳하지 못한 것이었지 산전수전을 겪은 울산 댁의 성격 또한 정씨 부인에 버금가는 기가 센 여인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이유 없이 싫어하는 정씨 부인의 눈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서슴지 않았으나 차츰 심해지는 시어미의 눈치는 어느 순간 노골적으로 미움을 표출했고 아무런 이유 없이 악을 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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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미가 이제는 지겨운 상대가 되어버렸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폭발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울산 댁은 정씨 부인의 미운 털에도 아랑곳 않고 오리려 보란 듯이 남편을 제 편으로 돌려놓으려 갖은 수를 쓰며 시어미와의 끊임없는 머리싸움으로 전쟁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낀 근호의 처지는 어디에도 붙을 수 없는 상황이라 여인들의 등살에 못 배겨나 집밖으로 나돌며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새벽녘에 들어와 잠이 든 근호는 밤새도록 마신 술이 덜 깨 해가 중천에 머물렀어도 방안에서 꼼짝을 않고 누웠다. 그사이 아침부터 마실을 나갔던 정씨 부인이 집으로 들어왔다. 부엌에서 일을 보고 있던 울산 댁은 집으로 들어서는 정씨 부인을 보고도 아는 채를 않는다. 그녀뿐 아니라 정씨 부인 역시 울산 댁을 보는 눈빛에 독기를 품고 있었다. “망할 년! 어른을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꼬라지를 봐봐라. 저 백년 묵은 여시 같은 년.” 정씨 부인은 울산 댁을 볼 때 마다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런 시어미가 무엇이 달가워 마주하겠는가? 애써 무시하고 못 본 척 하는 것이 상수라 생각해 그리 행동을 하는 것, 그러나 그런 행동이 오히려 정씨 부인의 눈에는 안하무인이요,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더 기를 쓰고 광적인 분노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이년아! 팔자도 센 년이 어디서 천금 같은 내 아들을 꿰차고 앉을라꼬? 니 복에 내 아들이 가당키나 한 줄 아나? 서방 잡아먹은 년이 인자는 내 아들까지 잡아 먹을라카네. 이년아. 내 아들 인생 망치지 말고 퍼뜩 내 집에서 꺼지라. 이 망할 년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던 말, 그래도 무던히도 참고 참았건만 이제는 한계에 부딪힌다. 자신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시어미라는 사람에게 이토록 가혹한 학대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생각을 해 보아도 알 수 가 없는 노릇이었다. 정씨 부인의 욕지거리는 계속 이어지고 귀를 틀어막아도 걸걸스런 목소리는 귓전으로 달려들었다. 울산 댁은 참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기어이 정씨 부인에게 말대답을 해댄다. “그란다고 내가 순순히 물러설 줄 압니까? 착각 마이소. 그쪽이 그랄수록 내를 더 자극을 하는 기고 기어이 내 인내심을 바닥내겠다면 좋십니다. 그리하이소. 그라고 곧 후회하게 해 줄텐게.” “저기이 뭐 저런 기이 다 있노? 니가 지금 내를 협박하는 기다 이기가?” “협박 아입니다. 경고하는 깁니다. 지 건드리봤자 득 될 거는 없다는 얘기니께요.” “허헉... 독한년. 독사 같은 년. 이년아. 이 천벌을 받을 년.” 입정 좋은 정씨라도 울산 댁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분에 못 이겨 악다구니를 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악을 쓰는 두 여인의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담 밖으로 세어나가고 마을 사람들은 망한 박씨 가문의 수치를 목격하며 혀를 내두른다. 밖에서 나는 소리가 듣기 싫어 방안에 누워 베개로 귀를 틀어막고 있던 근호가 더는 못 참겠다 싶었는지 씩씩대며 일어나 방문이 부서질 듯 열어젖힌다. “제발. 그만들 좀 하소. 동네 챙피해 이래가 살겠나?” “애비야! 이 년이 이래 내를 무시하고 깔본다. 내는 이년하고 같이 못 살기다. 애비야.” “엄마가 먼저 부애를 지르면서 뭐를 그라요? 와 걸핏하면 과거를 들춰가지고 사람 복장을 뒤집는교? 한두 번도 아이고 우째 매번 볼 때마다 그라는데요? 그런 소리 듣고 가만히 있는 기이 천치지 뭐겠으요?  저 사람도 나름대로 잘살아 보겠다고 노력을 하는데 와 자꾸만 초를 치는 기요?” “이놈아! 인자는 니까지 이 에미를 우습게 보나? 와 하고많은 여자들 중에 조신하고 참한 아아는 못 데리고 오고 이래 우악스럽은 년을 내 며느리로 들이노 말이다.” “엄마 마음에 드는 며느리가 어디 있는데요? 양반가의 조신한 며느리도 싫고 굽신 굽신 말 잘 듣는 며느리고 싫고 우악스럽은 며느리도 싫고, 며느리라면 다 싫은 사람이 엄마 아닌교?” “뭣이 우짜고 우째?니가 우째 내한테 그런 소리를…….” “그라니 그만 하소. 내도 참는데 한계가 있십니다.” “저 놈이 인자는 여자를 잘 못 만나 지 에미한테 대들기까지 하는 구마. 야! 이놈아.” 기가 넘어가는 정씨 부인을 모른 채 하고 울산 댁에게 화살을 돌린다. “자네도 어른한테 말버릇이 그기이 뭐꼬? 아무리 엄마가 잘못을 했어도 시어무이 아이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인자는 듣고 흘려도 될 기구마 기어이 노친네 기함하게 만드는 심사가 뭐꼬?” 참고 있던 말들이 울산 댁의 입에서 제멋대로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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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참았십니다. 이핀 생각해서 참았고 기구한 내 팔자 원망하며 참았십니더. 그란데 더는 안되겠십니더. 어무이한테 이래 매여 살지 말고 내하고 멀리 떠납시더. 내가 이핀 책임지고 먹여 살릴 테이 걱정 말고 내를 믿고 같이 떠납시더.” 울산 댁의 말에 근호도 정씨 부인도 놀라 말문이 막힌다. 정씨 부인 인상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주먹을 쥐고 달려와 울산 댁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이년이. 이년이. 인자는 미쳤구마. 어디 내 금쪽같은 아들을 꼬여내 줄행랑을 칠라고. 내가 내가 가만 앉아서 그 꼴을 볼 것 같으나? 이년아. 이 망할 년아." 근호가 놀라 방안에서 후다닥 뛰어내려와 울산 댁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어미의 손을 말리려 든다. 머리채를 움켜잡은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센지 말리는 근호도 힘에 부쳤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제풀에 힘이 풀려 울산 댁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떨어져 나간 정씨 부인이 씩씩대며 아들을 달랜다. “애비야! 저년 하는 소리 듣지 마라. 저 여시 겉은 년이 니를 홀릴라고 하는 소리다. 니가 이 늙은 에미를 버리고 갈 수는 없다. 니가 내를 버리믄 니는 천벌을 받을 기다. 애비야! 내말 들어라. 저년 말 듣지 말고 이 에미 말 들어라. 알았나?” 근호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난처한 표정을 짓고 두 여인 사이에 서있었다. 순간 판단에 이렇게 사는 것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미의 곁에서 평생 어미의 노리개 감이 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제 삶을 살아보는 것이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한때는 세상에 어미가 제일이었건만 지나친 간섭과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이제는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근호의 갈등을 눈치 챈 울산 댁이 야릇한 미소를 머금는다. “흥! 그런다고 돌아선 맴 다시 되돌리질까? 소용없심니더. 인자 당신 아들 내가 탁 차 갈깁니다. 두고 보소!” 그 말을 끝으로 울산 댁은 근호를 이끌고 집을 나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아들을 허무하게 울산 댁에게 빼앗기고 정씨 부인은 하루가 다르게 몸이 쇠약해져 갔고 이제는 거동조차 힘이 들었다. 시모의 삶이 비참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희연은 그래도 끊을 수 없는 인연이요, 자식 된 도리는 해야 할 입장이라 거동이 힘든 시어미를 찾아가 본다. 입 소문을 전해들은 사정은 다 죽어갈 판이라 하였건만 정작 희연이 시모를 보니 그 기세는 아직 다 꺾이지가 않고 있었다. 홀로 누워있는 방으로 희연이 들어서는 것을 본 정씨 부인의 입에서 대뜸 큰 소리가 나왔다. “와? 시에미 꼬라지 어떤가 싶어 구경 왔나?” “편찮으시다 해서 죽 좀 쑤어 왔십니다. 드시고 기운 차리시야지요.” “치아라. 니한테 동정 받을 내가 아이다.” “그런 거 아입니다. 지는 단지 어무이가 걱정이 돼서 온깁니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희연을 노려본다. “이 사태가 다 누구 때문인데 뭐가 우짜고 우째? 걱정이 되에? 니가 우리 집에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내 이 꼬라지는 안됐을 기구마.” 또다시 정씨 부인의 처절한 악다구니가 시작되었다. “악연도 우째 이런 악연이 있어서 내가 니같이 며느리를 봤일꼬? 어디 한 구석이라도 내 맘에 차야지 정을 붙이제. 음식은 싫으믄 뒀다 먹는다 카지만 사램 싫은 거는 우짤 방도가 없는 긴데. 니만 보믄 내 속이 뒤집힌다. 니만 보믄은. 전생에 무신 업보로 만났길래 이래도 모진 악연이란 말이고.” “…….” 아니 할 말로 시어미 심사는 하늘에서 내린다고 정씨 부인의 큰며느리에 대한 감정은 이유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큰아들을 희연이 꿰찼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유 없이 미워하고 이유 없이 구박을 하는 것이었다. 딱히 뭐가 마음에 안 든다, 싫다는 것도 없었다. 사람 싫은데 이유가 있겠는가? 그것이 희연에 대한 정씨 부인의 마음이었다. 아들에 대한 집착이 유달랐던 정씨 부인의 애증이 종래에 가서는 며느리를 내쫓는 사태를 만들었고 기어이 아들까지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으나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오로지 희연으로 인해 일어난 분란이라 여기며 끝까지 며느리만을 미워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어미 곁에 자신이 있는 것도 못할 짓이라 여겨 이 사태를 수습하는 몫은 시동생의 몫으로 남겨두고 희연은 부산에 살고 있는 시동생에게로 편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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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에서 포목장사로 때 돈을 벌고 있었던 근우는 전쟁이 나면서 포항을 떠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었다. 장사에는 재주가 있어 새로 정착한 부산에서도 꽈배기장사를 시작하여 제법 장사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부산에서 근우가 희연을 찾아와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 어미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가겠다 하였으며 형수인 희연에게 면목이 없다는 인사를 남기고 시모를 데리고 떠났다. 이십 여 년의 긴 세월에 단 한 번도 마음을 터놓지 못한 두 고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모진인연으로 엉킨 실타래 같았던 희연과 근호 그리고 정씨 부인 세 사람의 모진인연에 비로소 엉킨 매듭이 풀렸다.

현옥이 서울에서 내려 온지도 벌써 일 년이 흘렀고 그 사이 집안 형편은 도통 나아지지를 않고 더욱 궁핍해져만 갔고 어미의 고된 삶은 여전히 버겁기만 해 보였다. 현옥이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철이 들어 어미의 삶의 무게를 나누어지고자 자신도 어미를 도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는 것이 급급한 처지에 자신의 꿈은 이미 날아가 버렸고 결국 공부에 대한 미련을 접어 두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기로 결심을 한다. 열여섯의 나이. 아직은 자신의 미래를 꿈꾸어야 할 시절에 현옥은 그 꿈을 버리고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섰다.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다.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만 한다. 내 목표는 인자 돈을 버는 것으로 바뀠다.’ 어린 나이에 살고자 발버둥 치며 어미의 시름을 덜어주려 애를 쓴다. 그러나 배움이 부족한 현옥이 할 수 있는 일은 마땅치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지인을 통해 좀 나은 자리를 알아보았으나 매번 허탕이요 헛수고였다. 국민학교 졸업장도 없는 아이가 세상에 나오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현옥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틈도 없이 어떤 일이든 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을 하여 공장에라도 취직을 하려한다.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도 이제는 접어버리고 현실에서 자신은 남들보다 못한 하등인생을 살아야 함에 비참함을 느꼈으나 가난을 면하고 싶은 마음이 더 절실해 공장에 취직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 일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쉽게 들어 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제 능력의 한계에 부딪힌 현옥이 말벗이 되어줄 친구를 찾아 집을 나섰다. 생애에 두 번 다시없을 마지막 학년의 한 학기를 단짝으로 같이 보냈던 이가 생각난 것이다. 현옥이 제 사정을 모르고 단지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기쁨에 여학생 반에서 만난 짝궁이 경선이었다. 둘은 맨 뒷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으며 어느덧 친해져 숙제도 같이 하고 아침 등교에 경선이 항상 집으로 현옥을 데리러 와서는 나란히 등교를 하며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 마지막 학기를 즐기며 보냈었다. 졸업을 하면서 둘 사이는 소원해졌으며 현옥이 서울로 가게 됨으로 서로 연락이 두절 되었고 지금은 현옥이 집에 가만히 있기가 답답해 오랜만에 경선을 떠올리며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집을 나선 것이었다. 내를 사이에 두고 현옥이 사는 곳과 반대편 마을에 경선이 살고 있었다. 유난히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다 구름 사이에 얼굴을 내민 햇빛에 눈이 시려 고개를 숙인다. 청량한 하늘아래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현옥이 궁색한 자신의 모습이 창피스러워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부는 바람을 따라 하늘 위를 맴돌고 있던 잠자리가 현옥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난다. 마을을 벗어나 내를 건너 경선의 집 앞에 도착을 한 현옥. 이엉을 간지 오래되었는지 삽짝문 안으로 보이는 초가지붕은 잿빛으로 변해있었고 누가 다녀가도 모를 만큼 활짝 열린 삽짝문은 경계의 끈을 풀어 놓고 있었다. 열린 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선 현옥이 경선을 불렀다. “경선아! 안에 있나?”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현옥이 재차 친구의 이름을 불러본다. “경선아!” 머뭇거리며 집안을 둘러보았으나 집 안에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경선이 집에 없는 것을 알았으니 그냥 돌아가야 했으나 현옥은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맘먹고 찾아온 친구의 얼굴은 보고 가야겠다 싶어 잠시 빈집에서 기다려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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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빈집에 혼자 있으려니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앉은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학교를 같이 다닐 때만 해도 이곳을 제집 드나들듯이 자주 들렀던 곳이었는데 새삼 이 공간 낯설기만 하고 거북스럽게만 느껴진다. 불편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서려는데 활짝 열린 삽짝문 안으로 경선의 모습이 나타났다. 현옥이 반가운 마음에 경선을 맞이한다. “경선아!” 경선이 들어서며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현옥을 보고는 반가워 달려온다. “현옥아! 니가 우짠일이고?” 두 아이는 서로 반가워 두 팔을 마주잡고 뛸 듯이 기뻐한다. “니 서울로 갔다는 소식 들었다. 그래 언제 왔노?” “좀됐다.” “그래 서울생활 재밌드나?” “재미는 무슨? 천지로 모르는 사람들뿐이라서 억수로 외롭고 힘들었다. 혼자 지내볼라 캤는데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더라. 그래서 다시 내려 온거다.” “집 떠나믄 원래 고생아이가! 그래도 좋은 기횐데 쪼매 참아보지.” “사실 내도 다시 내려온 거 후회한다. 거서 취직해서 돈이나 벌걸 싶었다.” “와? 무신 안 좋은 일 있나?” “내려와 보이까 우리엄마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데. 그거를 보니까 내 맴도 편치가 않더라. 서울에 가만히 있었으면 내 한입은 줄었을 거 아니가? 내 입장만 생각해서 섣부르게 행동을 한 기이 자꾸만 후회가 된다.” “…….” 현옥의 하소연을 경선이 잠자코 듣고만 있다. 비슷한 처지의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런 동병상련의 느낌이랄까, 아무튼 경선도 현옥의 입장을 백분 이해한다. “니는 그 동안 우째 지냈노?” 현옥이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내려앉은 것을 느끼고 화제를 바꾸어 보려 경선에게 묻는다. “내도 별 다른 거 없다. 제 작년에 울 아부지 돌아가시고 집안형편도 어려워져서 나도 중학교도 못 갔다. 그래서 나도 니 처럼 돈 벌어야겠다 싶어서 지금 공장에 다니고 있다.” “공장에?” “그래.” “무슨 공장인데?” “성냥 만드는 공장.” “그라믄 지금 거서 퇴근하고 오는 거가?” “어.” 얼마 전 경주에 처음으로 성냥공장이 생겼다. 신분의 격차가 줄어들지 않던 시절에 너나없이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던 사람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공장으로 들어갔다.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돌아 갈 곳이 없는 사람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제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아이들, 또는 넉넉지 못한 집안형편 탓에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 돈을 벌며 야학을 다니는 학생들까지 모두가 그 공장에서 제 나름대로의 꿈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현옥이 경선의 얘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어차피 자신도 없는 살림에 보탬이 되어보고자 할 일을 찾고 있던 처지라 동병상련의 경선과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이 들어 성냥공장에 취직을 부탁해 본다. “경선아! 그라믄 내도 거 들어갈 수 없겠나?” “니도 일할라고?” “응.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니까.” “거는 수시로 사람을 뽑고 있으니까 니가 맘만 먹으면 일 할 수 있을 기다.” “그래? 그라믄 내가 우째야 하노?” “내일이라도 니가 일하러 가겠다면 내하고 같이 가자. 가서 공장장한테 말하믄 바로 일을 시키 줄거다.” “알았다. 그라믄 내일 당장 공장에 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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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아침에 너거 집으로 가께.” 다음날, 이른 아침에 경선이 현옥을 찾아와 둘이 나란히 성냥공장으로 향했다. 배움이 부족하여 제 차지가 되지 못했던 자리들과는 달리 이곳은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 그저 성실하게 일만 해 주면 되는 것이었다. 현옥은 경선의 추천으로 공장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이제는 제 손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희연에게 그 소식은 기쁜 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제 자식의 앞길을 막은 것 같은 안타까움이 무거운 마음을 짓눌렀다. 서툴게 시작한 공장 일은 차츰 손에 익숙해져갔고 어느덧 한 달의 시간이 흘러 현옥이 첫 월급을 탔다. 깊은 밤까지 야근을 하면서 번 돈이지만 사실 얼마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돈을 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현옥은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제 할 노릇을 한 것 같아 마음도 뿌듯했다. 늦은 저녁 일을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들어서면 어미는 늦게 들어오는 딸을 위해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현옥이 왔나?” “예. 다녀왔습니다.” “고생했다. 배 고프제? 어여 밥부터 먹어라.” 현옥이 밥상 앞에 앉으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어미를 부른다. “엄마!” 그리고는 가방에서 월급봉투를 꺼내 어미에게 건넨다. “내 오늘 월급 탔다. 한 푼도 안 건드리고 고스란히 가지고 온거다. 제일 먼저 엄마한테 주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다.” “…….” 희연은 딸이 내민 월급봉투를 손으로 받아 들고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어린것이 혹사당하며 벌어 온 돈이기에 마음 한켠에는 뭔지 모를 먹먹함이 자꾸만 가슴을 쳐댄다. “우리 현옥이! 한 달 내내 고생해서 번 돈인데 이 돈을 엄마가 받아도 되겄나?” “그럼요. 내가 엄마 줄라고 열심히 일 한건데.” 현옥은 제 나름 뿌듯한 마음이 들고 어미는 딸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이 급급하니 한 사람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이 희연에게는 위안이었다. 어미의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현옥은 굳은 다짐을 한다. 어미를 위해서 더 열심히 일을 하겠다고 그리고 돈을 벌겠다고. 어린 마음에 가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렇게 악착같은 마음을 먹을까. 이제 현옥의 마음속에는 하등인생의 부끄러움보다 가난을 벗어나는 돈이 우선이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에만 몰두를 하였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주위사람들과도 어울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만 하였다. 현옥이 고생하는 만큼 어미도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어 여전히 바느질을 하며 생계에 보탬을 하고 찬옥은 이미 어엿한 여인으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어 처녀아이 밖으로 함부로 내돌릴 수 없다는 어미의 지론대로 바깥출입을 자제 시키고 집에서 조신하게 지내며 어미를 도와 부엌일이며 집안일을 맡아서 이끌어 가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의 경현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려운 형편 탓에 제 누이는 공부를 접어버리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밤낮없이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 그다지 공부에 취미가 없던 경현이 부쩍 공부에 열을 올리며 열심히 노력하여 중학교에 입학을 한다. 누구도 못 갔던 중학교에 아들이라는 이유로 없는 살림 쪼개어 자신을 공부시킨다는 것을 철이 들어 알았기에 어려운 가정형편에 월사금조차 내기 빠듯한 형편을 생각해 자신의 학자금은 스스로의 힘으로 벌어 보고자 아는 사람의 소개로 제 나이 보다 어린 학생을 맡아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경현이 맡은 학생은 서울에서 피난을 내려와 경주에서 병원을 개업한 오원장의 막내아들 이었다. 칠 남매 중에 막내요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이유로 오원장이 애지중지하는 자식이었기에 아들을 위한 일에는 무엇이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오 원장이었다. 가정교사로 경현이 처음 오 원장을 찾아갔을 때 경험도 없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꺼려하였으나 소개시켜준 이와의 친분 때문에 그다지 기대를 하지는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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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달 가르쳐 보도록 내버려 두었었다. 제 위로 누이만 여섯이요, 남자형제라고는 없었던 오원장의 막내아들 기욱이는 처음부터 경현을 친 형처럼 잘 따랐다. 서울내기에 누이들 틈에서 자란 기욱은 새침스럽고 잘 삐쳐 마치 여자 아이 같은 행동들을 하며 어리광을 부리고는 해서 오원장도 사실 아들이 걱정되기는 했었다. 그랬었던 아들이 경현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성격이 활발해지고 너그러워지는 모습에 놀라며 경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차피 가르쳐봤자 한두 달, 그 후에는 경험 많은 가정교사로 바꾸려 했던 오원장의 생각이 변해버렸다. 아들의 변화도 변화이지만 딸들과도 잘 어울리며 오빠처럼 동생처럼 살갑게 구는 경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인물에 성격에 볼 때마다 경현의 매력에 매료되어 오 원장은 경현을 제 자식으로 삶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이들도 경현을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아들이 경현을 많이 따르며 친 형제처럼 지내는 것이 보기 좋아 경현을 붙잡기로 하였다. 과외를 마치고 병원으로 들어서는 경현, 오늘이 과외비를 받는 날이라 병원을 찾았다. 지난번에는 기욱의 모친이 챙겨 주었기에 그냥 받았었으나 오원장이 아침에 나가면서 경현을 병원으로 보내라 일렀기에 기욱의 모친도 영문을 모르고 경현에게 병원으로 가보라 일렀다. 경현의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과외를 그만두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난색을 표했다. 오원장의 집과 병원은 옆 옆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경현이 병원 문 밖에 서서 긴 호흡을 내뱉고는 천천히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경현과 안면이 있는 간호원이 경현을 알아보고는 원장님이 기다리고 있다며 경현을 원장실로 안내했다. 환자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그 틈에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던 오원장, 간호원을 따라 들어오는 경현을 반긴다. “경현군! 어서 오게.” 하얀 가운을 입고 지친 기색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원장을 향해 경현이 꾸벅 인사를 한다. “이리 와서 앉게나.” 오원장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의자에 경현을 앉으라 권한다. “자네 덕에 우리 기욱이 성격도 많이 변하고 공부도 꽤 열심히 더구만.” “예. 기욱이가 열심히 할라고 노력을 합니다.” “어찌되었든 다 자네 힘이 컸네.” “아입니다.” 자상한 미소를 보이며 오원장은 책상서랍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경현에게 내민다. “한 달 동안 수고했네.” 경현이 봉투를 깍듯이 받으며 인사를 한다. “고맙습니다.” “자네가 수고 한 대가를 받는 것인데 고맙다는 인사는 과분하지.” 여전히 경현의 안색은 굳어있다. 그 다음에 펼쳐질 상황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생각이 복잡하다. “어때? 우리 기욱이 자네가 가르칠 만한가?” “예. 기욱이가 잘 따라줘서 가르치는 지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구만. 그럼 내가 자네한테 부탁을 좀 하고 싶은데.” “…….” 무슨 말이 오원장의 입에서 나올지 경현은 긴장이 된다. “나는 자네가 우리 기욱이를 몇 년 더 봐줬으면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우리 기욱이 중학교 들어갈 때 까지만 계속해서 자네가 봐줬으면 싶네. 물론 자네 공부에도 지장이 없어야겠지.” 생각지도 않은 말이라 경현은 당황하여 잠시 말을 않고 있다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그래. 생각을 해보게. 그리고 이거는 내 욕심이지만 제대로 가르치자면 자네가 우리 집에 입주교사로 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데. 지금처럼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절약할 수도 있고 그러면 자네 공부에도 시간을 더 할애 할 수 있으니 낫지 않겠나? 만일 자네가 입주를 해준다면 자네 학비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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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부담을 해주겠네. 물론 과외비는 따로 계산을 해줄 것이고. 어떤가? 이 정도의 조건이면 자네도 괜찮지 않겠나?” 오원장의 파격대우에 경현의 얼굴이 경직이 되었으나 차분함을 잃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을 한다. “원장님 뜻은 고맙습니다만 그 제안은 저에게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직된 경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원장은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내가 너무 계산적이어서 기분이 상했나?” “…….” “나는 그런 뜻이 아니였어. 다만 자네가 내 아들 같고 아니 내 아들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자네를 욕심을 내서 그러는 거라네. 자네만 보고 있으면 꼭 친아들 같은 느낌이 들고 그 재주가 아까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그러는 거라네. 이거는 내 본심이야. 기욱이도 자네도 내게는 탐나는 녀석들이거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은 것이 쑥스러웠는지 오원장은 멋쩍은 표정으로 호탕한 웃음을 웃었다. 아비에게서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함이 경현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아비의 정을 잃어버린 경현이 오원장에게서 아비의 정을 느낀 것이다. “혼자 결정을 할 문제가 못돼서 어머니와 상의 해 보겠습니다.” “물론 그래야지. 될 수 있으면 좋은 쪽으로 답을 얻었으면 하네.” “예. 신중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받아 든 봉투를 가방에 넣고는 인사를 하고 원장실을 나온다. 원장실에서 병원 문까지 걸어 나오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거리를 걸으면서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경현의 발걸음이 자꾸만 멈춰 선다. 나름 생각을 정리해봐야 어미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싶어 제 나름 생각을 정리해본다. 조건이야 저에게는 과분한 것, 어미와 누이가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제 한입이라도 덜어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물론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학비까지 지원을 해준다니 학비 때문에 빚지는 일은 없을 것이니 그것 또한 파격의 조건, 그뿐인가 지금처럼 과외비를 매달 챙겨 준다 하니 이 얼마나 과한 조건이던가.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당연히 입주교사로 들어가는 것이 백 번 나은 것이다. 이미 그 집 가족들과는 거리감 없이 지내고 있었으며 저보다 나이 많은 누나들에 동생들까지 모두가 편이 되어주고 좋아해 주고, 생애를 통틀어 이런 행운은 없을 것이다. 경현의 생각에 가닥이 잡힌다. 무조건 하리라. 이 일을 무조건 승낙하리라. 나를 위해서도 내 가족을 위해서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마음을 다지고 힘찬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희연의 손에는 여전히 바늘이 쥐어져 있었고 바늘귀에 걸린 실이 옷감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어미가 바느질에 빠져 있는 동안 찬옥이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 온 아들을 보며 그제야 옷감을 내려놓고 굽었던 허리를 편다. “인자 오나? 오늘은 쪼매 늦었네?” “예. 원장님하고 얘기 좀 하고 오느라고요.” 어미의 표정이 굳어진다. “와? 그만 두라 카드나?” “아니요.” 경현이 어미를 안심시키며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어미 앞에 놓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희연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굳어진 표정을 풀며 미안한 마음으로 아들 바라본다. “벌써 한 달이 됐드나! 세월이 참 빠르다.” “그렇지요.” “힘들제? 남 공부 봐주느라고 니 공부도 못하고.” “아니요. 가르치는 거 재미있습니다. 그라고 내 공부 소홀히 하지 않으니까 걱정마요.” “오냐. 니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나! 엄마가 미안해서 안그라나!” 어느 샌가 부엌에서 찬옥이 밥상을 차려 방으로 들고 들어온다. “니 온거 같아서 퍼뜩 상 차렸다.” 경현이 방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찬옥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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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제. 퍼뜩 밥 먹자.” 어두운 방안에 호롱불을 의지하고 밥상에 둘러 앉아 세 식구가 밥을 먹는다. 경현이 밥을 먹으면서 생각했던 말을 꺼낸다. “엄마! 기욱이 아버지가 내 입주교사 해달라 하는데 우짤까요?” “입주교사면 니가 그 집으로 들어간단 말이가?” 어미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아들에게 묻는다. “예. 입주교사 해주면 중학교 학비도 대주고 지금처럼 과외비도 매달 주시겠다고 하시네요.” “갑자기 와 그런 말씀을 하시드노?” “기욱이가 지를 형처럼 잘 따르고 성적도 오르고 해서 계속 봐달라 부탁하시면서 그런 조건을 내 놓으시네요.” 찬옥이 어미대신 나선다. “참말로? 그렇게만 된다면 니 학비 줄라고 빚은 안 져도 되겠다.” “찬옥이 니는 가만 있그라.” 냉랭한 어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방안으로 퍼진다. “돈도 중요하지만 니 공부가 먼저다. 엄마는 입주교사 반대한다.” “공부하는 데는 지장 없으이까 걱정 마세요. 원장님도 지 공부에 방해 되지 않도록 도와주신다 했으니까요. 그라고 지금처럼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으니까 그 시간에 공부에 집중을 더 할 수가 있어서 나은 거라 봐야지요.” 아들의 마음이 이미 굳혀졌다는 것을 어미는 느꼈다. 아무리 반대를 해도 아들은 제 생각을 실천할 것이다.  “그래서 한다 캤나?” “아니요. 엄마하고 상의하고 대답 드린다 했어요.” “엄마가 하지 마라 카믄 안할 기가?” “원장님이 좋은 소식 전해 줬으면 한다고 하셨어요.” 자신의 입장을 원장의 뜻으로 돌려 대신 대답을 한다. “알았다. 니는 이미 갈라고 마음을 굳혔고 니 알아서 하는 일에 내가 나서기도 뭐하다. 니 뜻대로 해보그라.” 어미는 순순히 아들의 뜻을 받아 들였다. 가진 것은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우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러기에도 너무 지쳐버린 삶이었다. 베풀어주는 호의에 감사는커녕 콧대만 세우는 꼴도 우습다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공부시키기에는 벅찬 일, 찬옥의 말대로 매번 빚을 지면서 뒷바라지를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희연은 자존심을 버리고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떤 조건으로 보나 어미의 곁에 있는 것 보다 무엇이든 나은 조건이니 그것도 아이의 운이기에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다진다. 어미의 대답이 떨어지자 경현은 오원장에게 제 뜻을 전하였고 그리고 며칠 지나 경현은 오원장의 집으로 들어갔다. 매월 받을 과외비를 선불로 받아 어미에게 쥐어 주고는 그렇게 가족의 곁을 잠시 떠나기로 했다. 어떻게든 제 몫은 해내겠다는 집념으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삶에도 싫은 내색 않고 어미와 삼 남매는 주어진 삶에 열심히 제 할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일 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현옥이 열일곱 나이의 의젓한 소녀가 되었다. 이른 아침에 출근을 해서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은 어둠뿐이라 그 어둠이 무서워 달음질을 치는 날들이 수없이 많았다. 남들과 같은 시간에 퇴근하여 돌아오면 되는 것을 야근을 하면 수당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악착같이 남아서 야근을 하고 오는 것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가 겁이 나서 달음질쳐 집으로 들어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넘긴 것에 대해 감사하며 현옥은 매일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여전히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가는 현옥의 뒤로 자전거 한대가 뒤를 따랐다. 등 뒤를 따라 철커덕거리며 자전거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페달소리에 예민해진 현옥이 혹시나 자신을 앞질러 가지 않을까 싶어 걸음을 잠시 늦추어 걷는다. 그러나 자전거는 여전히 현옥의 뒤를 따르고 현옥의 보폭에 맞춰 자전거의 움직임도 달라지고 있었다. 자신을 따른다는 확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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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겁을 먹고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늦췄던 걸음을 다시 재빠르게 움직여 달아나려하자 뒤따르던 자전거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뒤를 따른다는 느낌에 이제는 도망치듯 달음질을 쳤다. 언제 붙잡힐지 모르는 불안감속에서 현옥은 집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있는 힘껏 뛰어가는 현옥의 앞으로 갑자기 자전거가 튀어나오더니 급정거를 하며 현옥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엄마야!” 놀란 현옥이 소리를 쳤다. 달밤의 줄달음질에 현옥이 화가 나기도 하고 혹시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막고 선 자전거의 실체를 보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해 버린다. 달빛을 등지고선 남자의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쯤 되어 보였다. 청년은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현옥을 붙잡았다. “그 아가씨!  걸음이 내 자전거 못지않게 빠르네요.” 현옥이 자신의 앞에 마주한 청년을 노려보며 소리를 지른다. “참말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노! 와 사람을 겁주고 그랍니까?” “늦은 밤에 여자 혼자 가는 것이 위험해 보여 같이 가줄라고 따라 온 사람한테 성을 내면 안 되는거 아닙니까?” 현옥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청년을 노려보며 덧붙인다. “그 쪽이 내를 압니까? 나는 그쪽보고 그런 부탁을 안 했는데요?” “내가 좀 오지랖이 넓어서요.” 청년이 너스레를 떤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노?” 현옥은 성질을 내며 청년의 말을 무시하고는 자전거를 지나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청년은 자신을 무시하는 현옥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계속하여 현옥의 뒤를 따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매일 이 시간 때에 자전거를 몰고 이 길로 운동을 다니는데 오늘은 아가씨가 나를 불러 따라 온 겁니다.” “내참! 이상한 사람 다 본다. 부르긴 누가 불렀다고 그랍니까?” 그냥 무시하고 가면 될 것을 사람의 심리가 참 묘했다. 아무 반응 않으면 제 풀에 꺾여 갈 것을 현옥은 괜스레 청년의 말에 자꾸만 토를 달게 된다. 무서운 밤거리를 같이 동행해 주는 이가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청년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뾰루퉁 화를 내는 현옥이 내심 마음에 들었던지 청년은 떨어지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현옥과 나란히 걸었다. “와 자꾸 따라옵니까?” “저기…….” 청년이 말을 꺼내며 다시 현옥의 앞을 막고 섰다. “실은 내가 일주일 후에 군에 입대를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그쪽하고 내하고 펜팔 친구 합시다.” “내가 그쪽을 언제 봤다고 편지를 주고받자는 겁니까? 그라고 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일에 시간 쓸 여유 없습니다.” 도도하게 거절을 하고 다시 걷는다. 청년은 자전거를 끌고 쫓아오면서, “그런 핑계 대지 말고 우리 그냥 친구 합시다.” “싫습니다. 내가 와 그쪽하고 친구를 합니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카는데 우리는 이렇게 말까지 주고받은 사이가 아닙니까? 그라니 인연도 큰 인연인 거지요.” 청년은 억지스런 말을 끼워 맞추며 계속하여 현옥의 옆에 나란히 붙어 자전거를 끌고 따라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옥은 역시나 도도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힘차게 걸어간다. 어느덧 현옥의 집 앞이 가까워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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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따라와요. 집 앞에 어른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쪽 괜히 혼나지 말고 이만 돌아가세요.” 현옥이 쌀쌀맞게 청년을 쫓는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갈 테니 내일 또 봅시다.” 청년은 현옥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자전거를 타고 휑하니 사라졌다. 매일 밤 두렵기만 했던 밤거리가 오늘은 무섭지가 않았다. 늘 혼자였던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친구가 되어 준 것이 오히려 기쁨이었다. 그러나 현옥의 마음은 아직 어리기만 했다. 난생처음으로 남자에게 자신이 여자로 보였다는 것이 쑥스러웠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단지 남자와 말을 주고받은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 것이다. 물론 같은 공장에 다니는 또래의 남자들도 있었지만 현옥은 한 번도 그들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등인생의 똑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는 그 자체가 자신에게는 수치요 굴욕이라 느껴 누구와도 친해지기를 거부한 채 자신의 세계에 빠져 군계일학으로 살아가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 현옥이 그들의 눈에는 아니꼬운 상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잘나지도 않은 똑같은 처지에 저 혼자 잘난 채를 한다싶어 유별난 사람으로 분에 넘치는 사람으로 상대하기를 꺼려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 현옥의 생활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모르는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는 자체가 아니 자신이 그와의 대화를 즐겼다는 자체가 신기하고 이상할 따름이다. 난생처음 경험한 알 수 없는 감정을 수줍어하며 현옥은 어미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달려 들어간다. 그날 이후 청년은 현옥이 그 길을 지나는 시간에 항상 자전거를 타고 나와 기다리고 있다 현옥과 함께 밤거리를 거닐면서 자신의 목적을 쟁취하려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나 현옥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았다. 자신의 청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현옥을 청년은 매일 밤 기다려 그녀의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오늘도 역시 안 된다고 할겁니까?” “예.” “이제 나흘 남았습니다. 그래도 나는 포기 안 합니다.” 그 말을 뒤로 하고 청년은 온 길을 되돌아갔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길목에서 다음날, 그 다음날도 두 사람은 똑같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의 끈질긴 행동에도 여전히 끈질기게 뿌리치는 현옥의 성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입대하기 하루 전 여전히 그 자리에서 현옥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뭔지 모를 초조함에 풀이 죽어 있는 듯 돌아선 뒷모습이 우수에 젖어 있었다. 자전거를 옆에 세워놓고 자신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그 사람을 보며 현옥은 어쩌면 자신을 시험했는지도 모른다. 까칠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그는 지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갈 것이다. 과연 며칠 만에 떨어져 나갈까, 쉽게 떨어져 나가버린다면 그를 시답지 않은 상대였다고 여길 것이고 그러면 이 애매모호한 감정은 다시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평정을 찾고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것이라 장담을 했던 것. 그러나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 끈을 쉽게 놓지 않으려 했다. “오늘이 그쪽을 만나는 마지막 밤입니다. 저 내일 갑니다.” “…….” “여전히 안 되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자신을 기다리며 승낙을 구하는 그에게 현옥은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어 둘러댄다. 공장일 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당신을 위해 편지를 쓰는 일 따위를 할 여유는 내게 없으니 포기하라. 그렇게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막상 그의 쳐진 어깨를 보는 순간 마음이 불편해졌다. 매몰차 지지를 못했다. 그가 그렇게 정성을 보였건만 이쪽에서도 조금의 양심은 있는지라 매몰차게 굴 수가 없었다. “우리 집 며칠 후면 이사를 갑니다. 새로 이사 갈 집 주소를 몰라 그러니 그쪽 주소를 가르쳐 주면 내가 먼저 편지해서 주소 알려줄게요.” “정말입니까? 정말 저한테 편지 해 줄 겁니까?” 현옥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청년에게 건넸다. 기쁜 마음에 또박또박 정성 들여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간 종이쪽지를 다시 현옥에게로 돌려준다. 청년은 자신이 해냈다는 뿌듯한 마음에 기분이 좋아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데 우리 아직 서로의 이름도 모르네요. 나는 김 현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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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쪽 이름도 말해줘야죠.” “박...경선.” “아. 경선씨! 고맙습니다. 친구 되어 줘서. 군대 있는 동안 경선씨 편지 기다리는 낙으로 살 거 갔습니다. 부탁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이제 집에 가서 편하게 잘 수 있겠습니다. 하하하.” 현수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그러나 언제고 현옥과의 재회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일주일의 추억을 가슴에 품고 헤어졌다.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현옥의 마음은 무거웠다.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인연이라는 것이 지금 자신의 처지로는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그나마 궁핍한 생활을 면할 수 있어 현옥의 생활은 오직 공장에만 매달려있었다.  시간으로 계산하여 돈을 주기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겠다 기를 쓰며 이른 아침 출근을 하여 늦은 밤까지 꼬박 공장에서 기계처럼 움직이며 일을 하였다. 늦은 시간에 귀가하여 지친 몸을 잠으로 보충하고 다음날 피곤함이 가시지 않은 몸으로 다시 출근을 한다. 그렇게 매일 같이 고달픈 삶을 살다 한 달에 한번 겨우 쉬는 날은 잠으로 때우기에도 충분치가 않았다. 그러니 현옥의 삶에 여유라는 것은 없었고 오로지 살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하여 돈 벌기에 여념이 없었다. 현옥이 현수를 거절한 것도 자신이 세워놓은 삶의 방식이 현수에 의해 깨어지게 될까 염려스러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거짓말로 그가 받을 상처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상대방보다 자신의 처지가 더 다급한 것을. 자신의 감정을 버려야만 가족들이 살아가는 것을. 현옥은 제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진다. 잠이 덜 깬 채 출근준비를 하느라 아침을 거르고 나왔으니 점심때를 기다리는 것도 곤욕이었다. 너무 이른 아침부터 한낮이 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왜 이리 더디기만 한지 굶주린 뱃속이 요동을 쳐댄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고 일하던 손들은 일제히 멈추고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내어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경선이 현옥과 마주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얘기를 꺼낸다. “현옥아! 내 이번 달만 일하고 그만 둘 거다.” “와? 갑자기 무슨 일 있나?” “그런 거는 아니고... 여기 말고 대구로 갈라고.” “대구에?” “그래. 거가서 방직공장에 취직 할거다.” “대구에 누구 아는 사람 있나?” “어! 옆집에 사는 아아가 거가서 일을 한다. 며칠 전에 내려왔는데 얘기 들어 보니까 거는 월급도 많이 주고 명절 수당도 있다 카더라. 또 기술 배워서 기술자 되면은 여기저기서 서로 오라 한다 카데. 그래서 기술도 배우고 돈도 많이 준다카니까 그쪽으로 가볼라고.” “그래…….” “현옥아! 그라지 말고 니도 내하고 같이 안갈래?” “나는.... 아직 모르겠다. 내 혼자 결정할 수는 없으니까 엄마하고 상의해 봐야겠다.” “아쉽다. 니랑 같이 가면 좋겠는데.” “니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어라. 그라믄 나도 엄마하고 잘 상의해서 갈수 있도록 할 테니까.” “그래. 알았다. 그라믄 니도 어머니한테 말씀 잘해서 꼭 온나.” “그래.” 보름 후 경선은 대구로 떠났다. 그 동안 마음 맞는 경선과 함께여서 좋았는데 현옥이 이제는 정말 혼자 외롭게 공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경선이 떠난 빈자리에 마음이 허전해진 현옥이 며칠을 벼루다 어미에게 대구로 가겠다는 얘기를 꺼내다. “객지에서 그래 고생을 했으면서 또 객지로 간단 말이가?” “그때야 내가 어렸으니까 그랬지만…….” “그래도 그 객지에 의지할 사람도 없이 혼자 외롭게 지내는 거는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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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경선이도 있고. 또 직장 다니면서 사람들 사귀면 예전처럼 혼자는 아니니까 서럽고 외로운 마음은 덜 하겠지요.” “니 맴은 알겠는데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고 결정하자.” 어미는 딸이 걱정스러웠다. 저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려 하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딸의 꿈을 좌절시켜 놓은 것도 가슴 아픈데 또다시 홀로 떨어져 외로운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는 딸의 뜻을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미라고 곁에서 밥이나 해주며 그나마 딸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하고 있는데 그것마저도 해줄 수 없는 입장이 된다면 자식을 위해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어린것에게 생활고를 안겨놓고 자신의 마음은 편하겠는가? 그것이 어미의 마음이었다. 현옥 또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막상 간다고는 했지만 또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서울에서의 서러움과 외로움을 이미 경험하였기에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그 마음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은 어미가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어 그나마 편하게 다니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할 것이라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돈을 생각하면 떠나야 했으나 외로움을 견딜 자신이 생기지가 않아 미적거리며 매일 같이 열심히 출근을 한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 인 채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어느덧 삼 개월의 시간이 흘러 대구로 갔던 경선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다. 점심시간에 홀로 밥을 먹고 있는 현옥을 경선이 찾아왔다. “경선아!  우째 된기고?” “잘 지냈나? 내 다시 내려왔다.” “와?” “친구 말만 믿고 갔는데 혼자서 생활하는 기이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더라. 그래 다시 왔다.” 경선에 말에 따르면 이제 겨우 기술을 배우는 처지라 일은 힘이 들고 그에 비해 돈벌이는 적어서 그 돈으로 혼자서 생활하는 것도 모자라 결국은 일을 그만두고 다시 내려왔다는 것이다. 경선은 가족과 함께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편하고 좋았었는데 혼자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아무도 거들어 주는 사람 없이 모든 것을 제 손으로 해결을 해야만 해서 그 또한 만만치가 않아 힘이 들어 못 하겠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미의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경선이 내려온 이유가 한때는 자신도 고민을 했었던 그 부분이었다. 객지 생활이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요, 게다가 혼자의 몸이니 더 견디기 힘이 들것이었다. 그러나 현옥은 생각한다. ‘그래도 돈 벌려면 기술을 배워야지 천 날 성냥공장에서 있어 봤자 무슨 희망이 있다고. 기왕지사 그래 올라 간 거니까 내 같으면 그냥 죽치고 기술이나 배웠을 건데.’ 경선이 포기하고 돌아 온 것이 자신의 일인 양 못내 아쉬웠다. 더 나아지는 모습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이 어찌 이리도 궁상스러운지 현옥은 따분하기만 한 자신의 신세가 못마땅해 진저리 치고 있었다. 이 곳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정해진 자리가 없으니 갈대 같은 마음만 헛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 하등인생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요. 동시에 더 나은 자신의 앞날을 위한 출구가 되어 줄 것이기에 아등바등 거리며 출구를 찾아 헤맨다. 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어미가 어찌 모르겠는가! 살림살이만 조금 나아지기라도 한다면 어린 것이 고생하는 것을 당장이라도 그만두라 하겠거늘 겨우 굶는 것을 면한 처지에 허세는 가당치도 않은 처사라 입을 다물어 버린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딸의 고충을 외면할 수 없으니 어미도 제 나름 딸을 위해 좀 더 나은 취직자리를 수소문하고 다녀본다. 그러나 일자리는 쉽게 나지도 않았거니와 세상인심이 예전 양반 때와는 사뭇 다르기만 해 박씨 종부의 위신은 개나 물어 갈 노릇, 제 살기에도 바쁜 세상에 남의 일에 신경 써주는 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판국이었다. 결국 희연은 마음이 답답할 때면 찾아가는 친정 사촌 올케 오씨의 집에 실로 오랜만에 마실을 간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오씨밖에 없기에 무거운 마음을 끌어안고 한동안 뜸했던 발걸음을 그 곳으로 돌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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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보다 나이가 여섯 살 위인 올케는 얼마 전 사십 후반을 넘겼다. 볼 때마다 자신은 뒷방늙은이가 되었다며 하소연을 하면서도 완전히 일에서 손을 놓지는 못하고 자식의 뒷바라지를 끊임없이 해주고 있었다. 가업을 첫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뒤로 물러 나앉기는 했으나 여전히 집안의 실권은 올케가 쥐고 있었다. 어미의 뒤를 이어 가게를 물려받은 큰아들 또한 일찍 철이 들어 어린 나이 때부터 고생하는 어미의 뒤를 쫓아다니며 일을 배웠기에 장사에 대하서는 어미 못지않았다. 긴 세월을 어미의 곁에서 익혀온 나름의 수완으로 장사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으며 체질상 장사가 몸에 맞는 옷인 양 품 새가 천연덕스러웠다. 희연이 경주로 오고부터 일 년에 너덧 번은 들락거리는 집이었으나 작년 한 해 동안에는 연락을 끊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바빴었던지 희연이 찾지 않으면 올케가 다녀가고 했을 터인데 한 해 동안 올케는 가게 일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희연도 나름대로 현옥을 챙기느라 그러기도 했거니와 바쁜 올케를 잡고 앉아 있기가 거북스러워 발길을 끊었던 것이다. 작년 이맘때 사촌오라비의 제사가 있을 무렵에 찾은 것이 마지막이요, 오늘이 그 날이라 거들 일을 핑계 삼아 다시 올케의 집을 찾은 것이다. 희연이 대문이 열린 집안으로 들어선다. 넓게 펼쳐진 마당에 커다란 화덕에 불을 피우고 전을 붙이고 있는 올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언니요. 지 왔십니다.” 한참 열을 올리고 달궈진 무쇠솥뚜껑에 밀가루 반죽을 놓으며 대문 쪽을 바라보는 오씨와 희연의 눈길이 마주친다. 오씨의 눈은 희연을 바라보며 반기고 손은 전을 놓느라 분주했다. “아이고 애기씨. 오랜만이라요. 들어 와서 잠시 앉으이소. 내 손에 밀가리가 묻어서 쪼매만 앉아 기다리소.” 하던 일에서 잠시 눈을 떼었다 이내 전 붙이는 일에 열을 올린다. “바쁘시네요. 지가 좀 거드까요?” “무신? 인자 다 되갑니다. 마루에 올라 앉으이소.” 희연이 올케를 지나쳐 대청 앞에 서자 부엌에서 동숙이 나오며 인사를 한다. “당고모님 오셨습니까?” “이게 누꼬? 니 동숙이 아이가?”“예. 그간 별고 없으셨지요.” “그래. 니도 잘 지내나. 인자는 밖에서 보믄 못 알아 보겄다. 처녀티가 확 나네.” 처녀라는 말에 동숙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어무이 일 도울라고 왔드나?” “예.” “우째 시간이 되드나?” “회사에 휴가 내고 왔습니다.” 제 어미를 닮아서인지 서글서글한 인상이 사람을 푸근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인물이 잘난 것은 아니나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예뻐 보였고 말쑥한 말솜씨에 고등교육을 받은 이답게 세련미를 풍기고 있었다. “언니! 인자 동숙이 시집보내야 겠십니다.” 여전히 전을 붙이는 일에 손을 움직이며 오씨가 대답을 한다. “와 아이라요.” “엄마는 무신 벌써 시집이고? 내는 아직 멀었다. 일이나 더 할 란다.” 시집이라는 말에 동숙은 얼굴을 붉히며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제사 음식은 다 장만해 갑니까?” “예에. 전하고 나물만 무치면 됩니다. 전은 인자 다되가고 부엌에서 나물 무치고 있일깁니더.” “질부는 어데 갔십니까?” “예에. 장보러 갔십니더. 생선하고 과일하고 몇 가지 사러 나갔네요. 금방 올깁니다.” “둘째는 언제 장개 들일라요?” “아직 대학 졸업도 못했는데 결혼은 좀 이른 감이 있어서 공부 마치고 시킬라꼬요. 지가 그래 하고 싶어 하는 거를 에미가 되가지고 우째 말리겄십니까? 다행히 공부머리는 있어가 지 형 하는 일 돕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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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는 지 나름대로 지 길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어서 그냥 하겠다는 대로 놔두기로 했다 아입니까?” 희연이 올케의 말에 가슴 한 켠이 아려 오는 것을 느낀다. ‘지가 그래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어미가 되어 가지고 우째 말리겄십니까?’ 올케의 말을 되씹으며 희연은 머릿속으로 현옥을 떠올린다. 그렇게 기를 쓰고 공부하겠다는 아이의 희망을 꺾어 놓은 것이 자신이니 자식에게 못난 부모요, 능력 없는 부모인 것이다. 올케의 말대로 현옥 역시 공부머리는 타고 태어났으니 뒷받침만 잘 해주었더라면 제 능력이상으로 실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억척스런 아이인데 그 기를 못살려 준 것이 한이 되고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미어지는 노릇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틈에 올케는 전 부치는 일을 끝내고 일어나서 희연이 앉은 대청마루에 오른다. 이어 부엌으로 들어갔던 동숙이 주전부리를 들고 나와 희연과 어미 앞에 내려놓는다. “뭐하러 이래 차맀노? 내가 무신 손님이라고. 일도와 줄 거 없나 하고 왔구만 하릴없이 걸거치기만 하네.” “별소리 다합니다.” 희연이 머쓱해하자 올케는 정색을 한다. “안 그래도 배도 출출하고 했는데 애기씨 덕에 좀 쉬면서 뱃속이나 채워야 겄십니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지만 좀 잡사보이소.” 올케의 권유에 희연이 젓가락을 집어 들면서, “동숙아! 니도 이리와 앉아라. 같이 묵자.” 동숙을 부른다. “아니요. 저는 나중에 올케 오면 먹을 랍니다.” “와? 자리가 불편해서 그라나?” “아입니다.” “그라믄 온나.” “예.” 동숙이 어른들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음식을 집어 든다. 희연의 눈이 자꾸만 동숙에게로 향한다.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은데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계속 망설이며 동숙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입속에 음식을 넣어 삼켜도 무슨 맛인지 모른다. 체면과 자존심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으니 신경만 곤두섰다. 혹여 말 한마디라도 잘못해서 자존심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도 딸의 앞일을 생각하니 그냥 있기가 뭐했다. 모처럼의 기회인데 이때가 아니면 부탁도 못해볼 터이니 희연은 자존심을 뿌리치고 동숙에게 살며시 말을 건넨다. “동숙이 니 지금 부산에 있다 캤제?” “예.” 동숙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한다. “하는 일이 뭐꼬?” “사무실에서 경리 일도 봐주고 비서 일도 봐주고 그라는데요.” “그라믄 동숙아! 내 염치불구하고 니한테 부탁을 좀 하자.” “......?” 부탁이라는 말에 동숙이 희연을 조용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어린 니한테 부탁을 하는 기이 잘하는 건지는 모리겄다만 내 입장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이라서.” “우리 사이에 무신? 편하게 말씀 하이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올케가 편이 되어 주니 용기가 난다. “다른 기이 아이고 우리 현옥이 니 일하는 사무실에 급사로 좀 넣어주면 안되겠나? 아아는 착실하고 눈치가 빨라 일도 잘 할기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공부를 못 가리쳐서 그라지 아아는 영민하다.” 희연의 부탁을 듣고 동숙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을 한다. “급사자리는 아마도 힘들겁니다. 지 권한이 아니라서요. 아직 아는 사람이 많지가 않아 말을 꺼내기도 힘들고요.  사무실은 힘들고 공장에서 일하는 공원은 아마도 가능하지 싶습니다.” “그렇나? 그라믄 거는 무신공장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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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공장요. 신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그래?” “현옥이가 생각이 있으면 말씀 해주세요. 제가 자리 알아 볼테니까요.” “알았다. 가서 현옥이하고 상의 해 보꾸마.” 세 사람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알기라도 한 듯 시장을 보러 갔다던 올케의 큰며느리가 대문을 들어섰다.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들어오자 동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쫓아 나가며 짐을 받아 든다. “무거운거 들고 오니라고 수고했다.”  시모의 말에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옆에 앉은 희연을 보고는 꾸벅 절을 한다. “당고모님 오셨습니까?” “그래. 질부가 고생이 많구마.” “아입니다. 어머님이 다 준비하시는데 지가 힘들게 뭐 있겠십니까?” “가게에 안 들렀더나?” 올케가 며느리에게 물었다. “예. 짐이 많아서 그냥 왔십니다.” “점심때가 됐는데 짐 좀 들어 달라카고 같이 들어오지 혼자 무겁게 들고 왔더나.” 며느리는 시모의 말에 새색시 같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장 본 것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방금 전까지 무거웠던 분위기에 눌려있던 사람들, 한 사람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전환이 되고 서로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이전으로 돌아간다. “애기씨! 점심 차리 올 테이까 앉아 계시이소.” “점심은요? 주전부리 먹은 것도 배부른데.” “그래도 끼니는 챙기야지요. 아아들보고 상 차려 오라 할 테이 기다리소.” 올케는 두 사람이 있는 부엌으로 사라지고 홀로 남겨진 희연은 마루에 손님처럼 멀뚱히 앉았다. 부엌으로 들어간 세 사람의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오씨가 며느리 장 봐온 것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는 사이 두 사람은 점심준비를 하느라 손길이 분주했다. 잠시 후 동숙과 며느리가 두 어른의 밥상을 차려 안방으로 들여 놓고 나간다. “애기씨! 드입시다.” “예 언니. 잘 먹으께요.” 두 사람은 마주앉아 어색하게 식사를 한다. 가끔씩 올케가 음식의 간을 물어 오는 것이 전부였고 희연이 그에 맞게 간결하게 대답을 하면서 점심식사는 끝이 났다. 식사를 끝내고 장을 봐온 음식들을 장만하는 일이 남았기에 희연도 일을 거들었다. 올케의 만류에도 고집을 부리며 일을 돕겠다고 나서니 말리는 사람들도 더는 말 못하고 희연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저녁 늦게까지 음식 장만으로 분주했던 올케의 집, 가게에 나가있던 큰아들이 여느 때 보다 일찍 집으로 들어왔다. 희연이 와있는 것을 보고는 반가워하며 인사를 한다. 늦은 시간까지 올케의 집안에는 환한 불빛들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음식장만을 끝내고 나자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고 희연은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자정에 지내는 제사이니 보고 갈 수는 없고, 자신이 그 자리에 끼는 것도 뻘줌한 일이라 일을 거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제 할 도리는 다한 것이었다. “언니! 인자 지는 갈랍니다.” “애기씨! 오늘 고생하싰구마요.” “지가 뭐한거 있다고요. 거들다 만 거를 가지고.” 희연이 대문 쪽으로 나가려 하자 모두들 나와서 배웅을 해준다. 그사이 올케의 큰 며느리가 음식을 담은 보따리를 내밀며 희연에게 건넸다. “무신! 이래 안 해도 된다.” 희연이 손사래를 치며 받으려 하지 않자 오씨가 기어이 보따리를 쥐어준다. “아아들 좀 주라고 싼 깁니더. 그냥 가져 가이소.” “매번 염치없이 받기만 하네요.” “음식이야 나눠먹자고 하는 긴데 뭐를 그라요.” 올케의 인심 좋은 얼굴이 불빛에 드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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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언니! 잘 먹겠십니다.” 희연이 대문으로 나서며 올케에게 인사를 하고 대문 밖까지 조카와 질부가 뒤따라 나와 희연을 배웅한다. 희연은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낯에 잠시 동숙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상기한다. 어미는 그렇게 공부를 하고 싶어 발버둥을 치던 딸을 뒷바라지 못해준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고 공부가 부족한 탓에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해보지도 못한 채 공원으로 발을 들여 놓은 딸의 인생이 가엾기만 했다.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어 동숙에게 기대를 걸고 말을 꺼냈지만 그마저도 허무하게 끝이 나고 고무공장이란 말에 마음이 달갑지가 않아 현옥을 보내야 할지 말지 고민에 쌓인다. 생각이라는 것이 머릿속을 헤집어 대는 데도 발걸음은 익숙하게 길을 찾아 잘도 간다. 어느새 집에 도착한 희연이 대문을 들어서자 일을 마치고 돌아 온 현옥이 어미를 맞았다. “엄마. 어디 갔다 오세요?” “동숙이 집에 갔다가 온다. 오늘이 지 아부지 제사라서 일 좀 도와주고 왔다. 니 밥먹었나?” “아니요. 엄마하고 같이 먹을라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찬옥이는 어데 갔노?” “친구들하고 영화 구경 간다고 하데요.” “지 동생 밥이나 좀 차려주지 어데를 그래 싸돌아다니는 기고!” “내가 엄마 오면 같이 먹는다고 했어요.” 희연이 올케에게 얻은 음식들로 한 상 차려 들고 들어온다. 현옥이 밥을 먹으며 어미에게 묻는다. “동숙 언니는 뭐 한다 하데요?” “부산에 취직해서 사무실에 다닌다 카더라. 먹물이 들어 그란지 도시 생활을 해서 그란지 아아가 많이 세련됐더구마.” 현옥이 어미의 말을 들으며 밥숟가락을 움직인다. 침묵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두 모녀는 말없이 방에 앉아 어미는 바느질을 하며 한숨을 짓고 현옥은 제 나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잠들었어야 하는 시간에도 눈이 말똥거리고 있었다. 펴놓은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생각에 빠져있다 어미를 부른다. “엄마! 나도 부산에 일자리 구하면 안되까요?” “와? 부산 가고 싶나?” “여 보다는 일자리도 많을 거고 돈도 많이 주겠지요. 동숙이 언니한테 부탁하면 안되까요?” “안 그래도 동숙이한테 물어보고 왔다. 니 사무실에 취직 좀 부탁을 했더만 사무실 일자리는 힘이 들고 대신 공원으로 취직하는 거는 쉽다 카더라.” “그라믄 나도 부산 가까요?” “대구 방직공장으로 간다더만.” “거는 못 가게 됐네요.” “와?” “경선이가 다시 내려왔어요.” “와? 돈이 안 된다 카드나?” “예. 아직 기술이 없어서 기술을 배워서 기계 앞에서 일을 해야만 월급이 많이 나온다 하네요.” “그렇겄제. 뭐든지 기술이 있어야 대우를 받제, 아이믄 학식이 있든가.” “그러게요. 경선이가 가서 보니까 처음에는 시다 하면서 실 푸는 기술을 배우고 차츰 하면서 배 짜는 기술까지 완전하게 배워야만 대우도 좋아지고 명절에 상여금도 나오고 그란다네요.” “…….” “집이 대구에 있었으면 우째 하더라도 다닐 건데 돈이 너무 적어서 혼자서 생활하기도 어려웠다 카네요.” “아무래도 그렇겄제.” 여전히 바느질에 손을 움직이며 짧은 추임새를 넣어가며 딸의 얘기에 장단을 맞춘다. “그러다보니까 일은 일대로 힘이 들고 먹는 거 해결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집으로 내려와 버렸다네요.” “남의 돈 먹는 기 어디 그래 쉽나? 다 그라믄서 배우는 기제. 하루아침에 배부를 수는 없는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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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옥은 어미의 말을 되씹으며 생각을 해본다. 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당장에 어떤 결론도 못 내릴 거면서 생각만 많아져 잠이 오지를 않았다. 내일 일찍 출근을 하려면 벌써 잠을 잤어야 하는데 눈꺼풀은 내려오지 않고 눈이 말똥 말똥이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겠기에 현옥은 잡념은 접고 잠을 청하려 이불을 뒤집어쓴다. 몸이 고단했던지 어둠과 고요한 적막 속에서 고른 숨을 내쉬며 현옥은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찬옥의 나이 스물하나, 자그마한 얼굴에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가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담한 체구에 귀티 나는 자태가 어우러지니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과년한 딸을 둔 희연의 근심은 날로 늘어만 갔다. 딸을 탐내는 이들은 많았으나 집안형편이 어렵다 보니 시집을 보낼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먹고 사는 것도 어려운 판에 딸의 시집이 가당키나 하나, 그렇다고 딸을 홀로 늙게 할 수도 없는 노릇, 무엇 하나도 순탄하게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가진 것 없는 자의 궁핍함은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어미의 걱정과는 달리 찬옥의 삶은 황금빛으로 빛이 나고 있었다. 어미의 고루한 생각은 아무리 세상이 뒤바뀌었어도 아직은 양반의 법도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기에 과년한 딸을 바깥으로 함부로 내어 놓을 수 없는 입장, 그렇기에 찬옥은 어미의 말에 따라 조신하게 집안일을 거들며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었다. 찬옥이 가끔씩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경주에 처음 생긴 극장 구경을 나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그때나마 어미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렸다. 젊은 처녀 서너 명이 함께 모여 경주시내의 극장을 찾는 날이면 으레 남자들의 눈길은 찬옥에게 머무르고 그 덕에 같이 동행한 친구들까지 으쓱해져 온몸에 힘을 주고 자신들을 쫓아오는 시선들을 즐겼다. 물론 그 시선들은 찬옥을 향한 것이지만. 어디에 속해 있어도 빛이 나고 항상 당당하기만 한 찬옥을 좋아하는 남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찬옥의 마음은 오직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에게. 고루한 어미의 생각에 붙들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찬옥이 집에만 박혀 있으려니 좀이 쑤신다. 어미를 비롯하여 현옥과 경현이 나름 집안을 위해 돈을 벌고 있었는데 자신만은 유독 어미의 간섭아래 갇혀 지내는 것이 답답하고 싫증이 났다. 저보다 어린 현옥이 직장에 출근을 한다며 새벽같이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와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현옥의 사정이 딱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매여 있는 몸이기는 하나 그래도 어미의 눈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것이고 만나는 사람들이 있으니 얘기 상대도 생겨 지루하지는 않을 거라는 나름의 생각이 들어 현옥이 부러운 것이다. 매일 어미와 같이 집안을 맴도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았다. 타고난 기질이 진득하니 기다릴 줄 모르는 급한 성격이었으니 그 성격 탓에 남보다 먼저 행동하기를 잘하여 재빠르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었다. 게다가 다혈질적이라 흥분을 하기도 잘하였다. 그런 찬옥이 조신하게 집안일을 배우라는 어미의 말을 순순히 듣고 있겠는가, 어떻게든 집을 빠져 나와야만 직성이 풀렸고 그래야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찬옥이 하루는 어미를 졸라 자신도 일을 하게 해 달라 부탁을 한다. 그러나 어미의 고집도 만만치는 않았으니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나름 딸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로 결코 허락을 하지 않는다. 그런 어미와의 대립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부딪히고 그때마다 벽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집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찬옥이 생각해 낸 것이 동네일을 도와주는 품팔이라도 하겠다는 것이었다. 멀리 나가는 것도 아니요 그저 동네에서 남의 집 밭에 심어 놓은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일을 같이 거들겠다는 것이었다. 움직여봤자 집 근처이고 또한 아낙네들과 더불어 하는 일이니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며 어미를 설득하여 겨우 품팔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찬옥은 날아 갈 듯 기분이 좋았고 좁은 집안에서 해방이 된다는 사실에 답답한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만 같았다. 없는 살림에 한 사람이라도 거들면 형편은 좀 나아질 것이며 허덕이던 생활도 조금은 펴질 것이라 판단하여 어미는 못이기는 척 딸의 품팔이를 허락한다. 한여름 뙤약볕에 앉아 양파를 캐고 감자를 캐는 일을 하면서도 찬옥은 신이 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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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뜨거운 태양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도 힘들고 고되다는 생각보다 이렇게 숨을 쉬고 움직이는 것에 자신이 생동하고 있음을 느끼고 행복해 한다. 새벽에 나가 새참으로 배를 채우고 목구멍이 타 들어 가는 갈증을 느낄 때면 물로 갈증을 달래고 밭에 앉아 아낙들과 점심을 먹고 하는 것이 고되고 힘이 들어도 찬옥의 얼굴은 언제나 웃고 있었으며 생기가 돌았었다. 나이 많은 아낙들 사이에 젊은 여인. 곱상한 외모에 웃음을 잃지 않는 찬옥의 모습이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곤 했었다. 그들 중에도 유독 찬옥을 눈 여겨 본 한 사람이 있었다. 찬옥과 같은 스물한 살 동갑의 천상일이라는 사내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상일은 포기를 모르는 만학도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제 힘으로 돈을 모아 공부를 시작하느라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건천이라는 마을이 그의 고향이었으며 집에서 학교를 다니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혼자 나와 객지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학교 근방의 방값이 비쌌던 탓에 학교와 조금 떨어진 남천내에 방을 얻어 같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 둘과 함께 세 사람이 모여 자취를 하고 있었다. 찬옥이 밭에서 일 하는 모습을 몇 번 오가면서 보았던 상일의 눈에 생글거리는 찬옥의 얼굴이 빛을 받으며 들어왔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요, 차츰 시간이 갈수록 그의 마음 한 켠에 찬옥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상일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던 길, 때마침 찬옥이 일을 끝내고 품삯을 받아 들고 오다가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친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빛이 났던 찬옥을 가까이서 보니 그 화려한 외모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순간 상일의 심장이 고동치며 무표정해 있던 얼굴이 빨개졌다. 찬옥은 그런 상일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생끗 웃어주었다. 상일의 얼굴은 이미 홍당무가 되었고 귀까지 빨개졌다. 수줍게 자신을 바라보고선 남자, 찬옥 역시 그에게 향하는 마음이 예사롭지는 않았다. 얼마 전부터 자신을 향해 오던 낯선 눈길을 느끼며 은연중 그 눈길을 즐겼던 찬옥이었다. 그 상대가 상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차츰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었다. 안보는 듯 했으나 그의 시선을 피해 찬옥은 밭일을 하면서도 힐끔거려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살피곤 했었다. 말쑥한 외모에 큰 키,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쓴 모습에 남자다움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도도하게 그의 눈빛을 무시했고 그러다 그의 시선이 다가오는 것을 조금씩 의식하며 행동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피 끓는 청춘의 두 남녀는 그렇게 처음부터 서로에게 이끌림을 느꼈고 호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상일은 마을 아낙들이 모여 일을 하는 곳을 지날 때면 으레 찬옥의 모습을 찾게 되었고 혹시나 보이지 않을 때면 얼굴에 실망감을 나타내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찬옥을 보지 못한 날에는 괜스레 짜증이 났고 공부에도 도통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삶이 한 여인으로 인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릴 거라는 생각을 해 본적 없던 상일이 무슨 결심을 했는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찬옥과 마주쳤던 그 길에 서서 찬옥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며 서있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도록 찬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며칠을 그렇게 같은 자리에 서서 기다려 보았으나 허탕을 치고 말았다. 기다리기에 지친 상일이 그녀를 꼭 만나야겠다는 의지로 택한 방법은 이 마을을 이 잡듯 헤집고 다녀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동네이니 하루 동안 돌아다니다 보면 그녀를 만날 것이라 기대를 하고 일요일 아침 서둘러 집을 나와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돌아 다녔다. 품팔이 일을 다니는 아낙네들을 보면 그 속에 찬옥이 있지 않을까 싶어 유심히 살펴보기도 하고 거리를 걷는 젊은 여인의 뒷모습을 볼 때면 앞으로 뛰어가 찬옥이 맞는지 확인을 하는 등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을 해대고 있었다. 오전 내내 그런 행동으로 남의 시선을 받으면서 거리를 서성여 보았지만 역시나 찬옥을 만나지는 못했다. 겨우 오전이 지났을 뿐인데 마음은 조급해지고 몸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점심식사도 거르고 저녁까지 그렇게 거리를 오가며 사람들 속에서 찬옥을 찾았건만 오늘 하루가 허탕이 되고 말았다.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상일이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를 어깨를 늘어뜨린 채 걸어간다. 붉게 물든 노을 아래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가는 상일의 모습 뒤로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있던 찬옥이 모습을 드러내며 처진 어깨의 그림자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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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일을 가려 나섰던 찬옥이 우연히 길에서 상일을 보게 되었다. 우스꽝스런 행동으로 사람들을 살피고 있는 그를 지켜보다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찬옥이 혹시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닐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일을 가려 했던 것도 잊고 몰래 숨어서 그의 행동들을 지켜보았다. 잠시 동안 지켜 보다 돌아가리라 했던 것이 상일이 떠나는 그 시각까지 숨어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하루를 숨바꼭질을 하였다. 찬옥은 상일의 처진 어깨를 보고는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다 맥없이 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에 묘한 감정을 느끼고는 자신에 찬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날, 상일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그 길에 찬옥이 나와 서있었다. 순간 제 눈을 의심하고 눈을 깜박거려 보았으나 여전히 찬옥이 저만치 자신이 지나는 길가에 서있는 것이었다. 반가움에 걸음이 빨라진 상일, 성큼 성큼 걸어 찬옥의 앞에 선다. 찬옥은 역시나 생기발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감 넘치는 눈동자로 상일을 올려다본다. “혹시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상기 된 목소리로 상일이 찬옥을 보며 물었다. “예.” 찬옥이 당차게 대답을 한다. “무슨 일로?” 찬옥이 피씩 웃으며, “그쪽이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아닙니까?” 상일이 당황해 하며 얼굴을 붉힌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찬옥이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원래 그렇게 얼굴이 자주 빨개지나요?” “…….” 그는 멋쩍은 듯 모자를 벗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으로 자세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외양에서 풍겨 나오는 남성미가 깎아 놓은 조각상같이 잘생긴 굴에서도 흠씬 묻어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길가에 서서 서로를 마주한 채 한참을 서있었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것도 아이요, 그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피씩 거리는 것이 행동의 다였다.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미 마음이 통하였고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설레는 것이었으니 찬옥과 상일의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만물이 녹아내릴 것 같은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조석으로 부는 바람이 선선하다. 날은 어느새 구월에 접어들어 곧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내 말없이 성냥공장을 나가던 현옥은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자 마음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뻔 한 살림살이에 먹고 사는 것은 그럭저럭 해결이 되었으나 더 나은 삶을 살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았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현옥 역시 그런 욕심이 자꾸만 들었고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삶을 갈구하는 자신을 채우고 싶어 도시로 나가기로 마음을 굳히고 어미에게 넌지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어 놓는다. “엄마. 아무래도 내... 부산으로 가는 게 나을 성 싶네요.” 희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름 섞인 눈으로 딸을 바라본다. “기어이 갈라나?” 어미의 눈과 마주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웠던지 현옥이 어미의 얼굴을 피하며 대답을 한다. “예에.” “또 니 혼자서 외지 생활을 해야 할 긴데.... 엄마는 니가 그냥 내 곁에 있었이믄 한다.” “이 시골에 처박혀 이래 있는 거 보다는 도시로 가서 기술이든 뭐든 배워서 좀 더 대우 받으면서 살랍니다. 어차피 공순이 되는 거... 기왕이면 돈 많이 주는 데서 대접받는 기이 낫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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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희연은 무거운 마음으로 딸에게 묻는다. “에미가 말리도 니는 그 생각 안 접을 기제?” “…….” “알았다. 니 생각이 그라믄 내는 더 말 안하꾸마. 니가 알아서 하그라.” 딸의 속마음을 알기에 어미는 더는 딸을 말리지 않는다. 가까스로 어미의 허락을 구했으나 현옥 역시 그리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명절이라고 보너스를 두둑이 받은 동숙이 두 손이 무겁게 선물꾸러미들을 들고 집으로 온다. 일하는 여성답게 세련된 옷차림으로 대문을 들어서는 딸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어미는 딸을 맞아준다. “뭐를 그래 많이 들고 오노?” 딸이 두 손 가득 들고 있는 선물 꾸러미에 눈길을 주며 오씨는 미소를 흘린다. “명절 보너스 받아서 몇 가지 사가지고 왔네요.”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큰올케가 시누이 목소리를 듣고 마당으로 동숙을 반긴다. “애기씨. 오십니까?” “예. 언니! 고생하시네요.” 동숙은 올케에게 인사를 건네고 마당을 지나 대청마루에 짐을 내려놓고는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앉는다. “오느라고 욕봤다.” “음식 하시느라 고생이지요.” “늘 하는 거를 뭐 고생이라 하노? 너거 올케가 매번 고생이제.” “그러게요. 올케가 둘이면 그래도 나을 건데. 엄마! 작은오빠 빨리 장가보내요.” “안 그래도 추석 지나고 선 자리 좀 알아볼라 칸다.” “내년 명절부터는 큰올케가 좀 편해지겠네요.” 큰며느리는 시누이 말에 싱긋이 웃으며 다시 부엌으로 들어간다. “뭣을 이래 바리바리 사가지고 왔노?” “식구들 옷하고 먹거리 좀 가져왔네요. 회사에서 준 것도 있고.” “회사는 다닐 만하나?” “뭐 다 그렇지요. 남의 밥 얻어먹는 게 쉬운 거는 아니니까요.” “참말 우리 딸이 대견시럽구마.” “엄마는? 다들 하는 일인데 뭐가 그렇게 대견스럽다고…….” 어미의 칭찬에 머쓱해 하며 동숙이 웃는다. “그러게. 현옥이도 니만큼 공부를 했이믄 그 아도 제법 제 몫을 해냈을 긴데. 안타깝구마.” “왜요? 당고모님 댁에 무슨 일 있어요?” “그기이 아이고. 며칠 전에 당고모가 와서 니한테 현옥이 일자리 좀 부탁을 해 달라 캐서 말이다.” “지금 공장 다닌다 하지 않았어요?” “거 있어 봤자 몇 푼 번다고. 밤낮없이 일해도 돈은 적고 몸만 축나이까 힘이 든 갑더라. 지난번 니 말 듣고 당고모가 현옥이한테 일자리 얘기를 했는갑데. 당고모는 혼자 떨어뜨려 놓는 기이 별로 내키지가 않아 안 된다고 하는데 그 아는 생각이 다른 갑더라. 그래 내내 고민을 해오다가 지 에미 반대도 꺾고 니 따라 부산으로 가겠다고 했단다. 그래 이분에 니 오믄 말 좀 잘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갔다. 아매도 내일 찾아 올 거구마.” “취직이야 자리가 많으니까 별 문제가 없는데……. 혼자 있을 라면 방도 구해야 하지 않겠어요?” “니 있는 기숙사는 안되나?” “거기는 벌써 인원이 차서 힘들지요.” “우째 방법이 없겠나?” “정 안되면 지하고 같이 자취하는 수밖에요.” “그래 할라나? 현옥이 그 아가 온순해서 니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 기다. 그거는 내가 안다.” “엄마가 그래 편 안 들어도 내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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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거 당고모가 오죽이나 답답했이믄 내한테 그래 간곡하게 부탁을 했겠노. 현옥이 그아만 생각을 하믄 가슴이 미어진다 카더라. 그래 공부를 하겠다고 설치는 거를 부모가 돼서 뒷바라지 못해 준 기이 자식 앞길을 막았다는 자책감이 드는 갑더라. 공부시키 준다고 해서 서울까지 따라갔다가 거짓말에 속아 아아만 봐주고 내려왔다 카이 당고모맴이 오죽했겄나? 너거 당고모도 참말로 고생이 말이 아이다.” 친 자매와도 같은 사이라 그 속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올케는 사촌 시누이를 생각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런 어미의 마음을 백분 이해하는 것은 아니나 동숙 역시 당고모의 삶을 어미를 통해 들은 바 있었으니 측은한 마음은 들었다. “어무이 살아 계싰으믄 조카딸 그래 힘들게 살게 하지는 않았을 기구마.” 오씨는 희연의 평탄치 못한 삶을 안타까워하며 사촌시누이를 동정한다. 추석날 아침, 희연이 두 딸을 데리고 차례 상을 차리고 있었다. 박씨 집안과의 인연은 이미 끝이 났으나 그래도 종부로써 도리를 다하여 해마다 명절에 차례지내는 일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더불어 시부에 대한 존경심은 변함이 없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년 제사상을 차려 모시는 희연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전쟁까지 겪었으나 힘이 들어도 어느 한 해 도 거르지 않고 시부의 제상에 밥과 국이라도 올려놓고 제사를 모셨던 며느리였었다. 올해라고 푸짐하게 차례 상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언제나처럼 마음을 다해 정성껏 준비하여 차례를 지낸다. 경현이 대표로 차례 상에 절을 올린다. 아비도 버리고 간 조상을 어미가 해마다 챙기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했으나 어미의 정성을 생각해 마지못해 아비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차례를 지내 놓고 오후가 되어 희연은 현옥을 데리고 올케의 집을 찾았다. 명절 장사를 접고 큰아들내외와 작은 아들, 그리고 막내딸 동숙이 어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둘러앉아 있었다. 희연이 현옥과 함께 마당으로 들어서서 올케를 부른다. “언니! 지 왔십니다.” 방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오며 희연에게 인사를 올린다. “당고모님 오셨습니까?” “오냐. 다 있었구나.” “올라 오시이소.” 희연이 대청에 오르며 현옥이 따라 올라가 육촌 오라비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촌 당숙모에게 인사를 올린다. “그래. 현옥이 니도 인자 아가씨티가 나네.” “…….” 현옥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희연이 방에 들어오자 큰아들 내외와 작은아들이 나가고 동숙이 어미와 같이 자리에 앉았다. “현옥이 니 참말로 부산 갈라나?” 오씨가 먼저 말을 꺼낸다. “예에.” “요즘 세상에는 일에 귀천이 없다고는 한다만 좋은 자리 마련해 줬이믄 좋겄구만 그기이 쉽지가 않다캐서....쪼매 마음이 무겁다.” “그런 거 안 따질 겁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기 나름이니까 열심히 해서 돈 벌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현옥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희망에 찬 빛이라기보다는 삶을 이겨보겠다는 집념의 빛으로 보였다. “그래. 기왕지사 그래 맘 먹었이믄 동숙이 따라 가그라.” 어미 옆에서 잠자코 있던 동숙이 어미의 말을 거든다. “나는 내일 아침 기차로 내려 갈거다. 가서 공장장한테 소개시켜 줄 테니까 너도 준비해서 같이 가자.” “예! 언니.” 현옥이 동숙에게 눈길을 주며 대답을 한다. 옆에서 말없이 딸을 지켜보는 희연의 얼굴은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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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현옥은 동숙과 동행하여 부산역에 내렸다. 처음 현옥이 서울역에 내려섰을 때의 낯설었던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그때는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말씨도 틀려 주눅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그때보다는 낫긴 했다. 같은 경상도 같은 말씨에 혼자가 아닌 동숙과 함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외로움은 한결 덜했다. 명절의 끝이라 고향을 찾았던 사람들이 어느새 돌아와 기숙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동숙은 저보다 먼저 기숙사에 들어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 제 방에 짐을 내려놓고는 뻘쭘하게 서서 뒤따르는 현옥과 함께 공장 안 사무실로 간다. 혹시나 문이 잠겨 있을까 했는데 마침 공장장이 사무실 자기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동숙이 문을 열고 들어가 공장장을 부른다. “공장장님! 명절 잘 보냈습니까?” 사십 대쯤으로 깐깐해 보이는 사내가 문으로 들어서는 동숙을 바라본다. “사무실 최양 아이가?” “예 맞습니다.” “집에 안 갔나?” “갔다가 지금 오는 길입니다.” “그란데 여는 무신일로 왔는데?” “공장장님! 공원 한 사람 써달라고 부탁 좀 할라고 왔습니다.” 그제야 동숙의 뒤에 서있는 현옥을 바라본다. 공장장은 현옥을 말없이 바라보고 섰고 현옥이 동숙이 시키는 대로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한다. “여기는 제 육촌동생 입니다.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해서 여기서 일해보라고 데리고 왔습니다.” “이 계통은 처음 이가?” “생 초짜라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현옥을 대신하여 동숙이 대답을 한다. “나이는 몇 살이고?” “올해 열일곱요.” “…….” “잘 좀 봐주세요. 우리 동생 착실하고 영리해서 일은 잘 배울 겁니다. 그라고 책임감도 있고요.” 현옥은 말없이 동숙의 옆에 조용히 서있고 그런 현옥을 공장장이라는 이가 힐끔거리다 역시나 깐깐한 표정으로 사람의 속내까지 훑으려는 듯 이제는 뚫어지게 바라본다. 큰 공장에 있으니 일하는 사람들이 들고나는 것은 당연한 것, 그 때마다 제 나름대로 사람을 평가를 하며 일할 사람, 스쳐갈 사람을 눈으로 구분을 짓기를 하다 보니 반 점쟁이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현옥은 몇 점짜리인지는 모르나 우선 눈 밖에 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출근은 언제부터 할 건데?” “아직 방을 못 구해서.... 방 구하고 이삿짐 오고하면 한 열흘, 열흘이면 될 것 같은데요.” “그라면 열흘 후에 출근을 하도록 하고 부서는 우선 내가 생각을 해보고 최양한테 알려주께.” “예. 알았습니다.” 공장장이라는 직책이 꾀나 높은 것인지 사내는 어지간하여 목에 힘을 빼지 않고 권위적인 자세로 두 사람을 대했다. 동숙이 제 나름 싹싹하게 대하며 비위를 맞춰주었으나 일이 잘 성사 되고 나오는 걸음에는 아니꼬운 마음이 든다. “참말. 공장장이 뭐 그래 대수라고 저래 목에 힘을 주는지 모르겠다. 현옥아! 니 처음에는 많이 힘들 거다. 여기 사람들 다 약기만 해서 정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그래도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요령껏 잘 견뎌라. 알겠나?” “예. 언니. 잘 하께요.” “우선 니하고 내하고 같이 지낼 방을 구하는 게 먼저니까 니는 지금 경주로 올라가서 이불하고 옷가지 챙겨서 일주일 후에 온나. 그 동안 내가 방 구해 놓을 테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져 동숙은 다시 기숙사로 들어가고 현옥은 경주행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바느질감을 손에 달고 있는 어미는 딸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손에 든 바늘을 내려놓으며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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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일이 잘 안됐나?” “아니요.” “그란데 와 이래 일찍 올라 왔노?” “언니가 말해줘서 쉽게 자리는 구했어요. 당장에 내가 지낼 방이 없어서 다시 올라 온거고요.” “그래서 우짜기로 했노?” “언니가 일주일 동안 방 구해 놓는다고 내보고 집에 가서 옷하고 이불 챙겨서 일주일 후에 오라 해서 그때 내려 갈라고요.” “그랬구마. 동숙이 그 아가 큰 심 쓴다.” “예에.” “현옥아!” 어미의 부름에 현옥이 어미를 바라본다. “니 혼자 객지 생활 괜찮캤나?” “예에.” 현옥이 어미를 안심시키려는 듯 웃음을 짓는다. “니가 간다 캐서 허락은 한다만 내사 영 맴이 편치가 않다. 니 같이 마음 여린 아아가 우째 견딜까 싶어 걱정 이구마.” “엄마는? 내도 인자 철이 들었어요. 예전처럼 울고불고 하지는 않을 거니 걱정 마세요. 동숙이 언니도 같이 있고.... 예전보다는 나은 편이니까 염려마요.” 못미더워하는 어미를 현옥이 달랜다. “참말 자신 있나?” “예에. 그러니 그만 마음 놓으세요.” “그래. 알았다.” 어미는 딸의 손을 어루만지며 마음을 달랜다. “현옥아! 니는 여자니까 항상 몸조심을 해야 한다. 인자 니 혼자 힘으로 니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기라. 누구한테도 의지하지 말고. 알겠나? 그라고 매사에 자신을 가지고 살그라. 니 자신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기다. 엄마 말 명심하그라.” “예에. 엄마.” 일주일의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드디어 현옥이 부산으로 떠나려 마지막 짐을 챙긴다. 몇 가지되지 않는 옷과 이불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서며 어미를 부른다. “엄마! 지 갑니다. 틈나는 대로 집에 올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래. 알았다. 엄마가 한말 명심하고 힘들면 집에 다시 와도 된다. 그라니 니 혼자 고민하지 말그라. 알겄제?” “예에.” 짐을 들고 나서는 현옥의 뒤를 찬옥이 이불보따리를 들고 따라 나섰다. “엄마! 내 현옥이 역까지 배웅하고 오께요.” 찬옥이 어미를 돌아보며 말한다. “그랄라나? 현옥이 몸조심하고 끼니 잘 챙기 먹어라.” “예에! 엄마 가께요.” 앞서 현옥이 나가고 뒤를 찬옥이 따르며 어미는 말없이 딸들의 뒤를 따라 나와 대문 앞에 선다. 마지막까지 인사를 나누고 멀어져 가는 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가 어미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찬옥이 덕분에 힘들지 않게 기차역까지 온 현옥은 차표를 끊고 잠시 시간이 남아 대합실 의자에 찬옥과 나란히 앉았다. “현옥아! 엄마 말대로 힘들면 그냥 온나. 니 혼자 고생하지 말고.” “응. 알았다. 언니야!” 기약 없는 이별을 하는 사람들처럼 두 자매는 짧은 이별의식을 치른다. 잠시 후 기차가 출발을 하고 현옥이 떠나는 모습을 찬옥은 끝까지 남아 지켜보고 섰다가 어미가 한 것처럼 눈에서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섰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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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현옥의 마음이 고독해진다. 외롭지 않다고 잘 견딜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래어 보지만 막상 혼자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모든 것을 혼자서 책임을 져야 하고 의지할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해 보려 갖은 애를 써보지만 여전히 마음은 두렵기만 하다.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난 것이니 어떻게든 혼자서 부딪쳐 이겨보리라 다짐을 하며 움직이는 기차에 몸을 맡기고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린다. 드디어 부산역에 도착을 하였다. 현옥은 지난번 동숙과 함께 갔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무거운 이불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옷가지가 든 보따리를 손에 들고 전차가 서는 정거장 앞에 서서 전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앞과 뒤가 똑같은 전차를 보며 신기해하던 현옥이 지난번 동숙과 함께 동행 했을 때 타본 것이 전부였기에 그 기억을 되짚어 가면서 혼자서 기숙사를 찾아 간다. 얼추 퇴근 시간을 맞춰서 도착을 하여 동숙이 머문다던 기숙사 앞에서 동숙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섰다. 동숙에게 왔다는 연락을 할 방법을 몰라 무작정 기다리고 서있기로 하고 그 앞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으려는 거리에 홀로 서 있는 현옥을 지나는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쳐다본다. 그 시선이 창피하였지만 달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이고 서서 오가는 시선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잠시 후, 기숙사에서 나오던 젊은 여인이 현옥에게로 다가온다. “여기서 누구 기다리고 있어요?” “예.” “여기 기숙사에 있는 사람이면 내가 알아봐 주께요.” “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최 동숙이라고…….” “아하? 동숙이.” “예. 친척 동생입니다.” “그래요?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동숙이 아직 퇴근을 안 한 것 같던데 내가 사무실 가서 전해줄게요.” “고맙습니다.” 현옥이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자 여인은 웃으며 현옥의 앞을 스쳐 빠른 걸음으로 공장 안으로 사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급하게 걸어오는 동숙의 모습이 현옥의 눈앞에 나타났다. “현옥아! 많이 기다렸나?” “아니요.” “짐 들고 오느라 힘들었제?” “괜찮아요.” 현옥은 대답을 하며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그런데 어짜노? 아직 방을 못 구했다. 나간다는 사람이 있어 그 집으로 갈라 하는데 사는 사람이 아직 갈 곳을 못 정했다고 며칠만 좀 봐 달라 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현옥은 순간 앞이 캄캄해져 온다. 홀로서기 첫날부터 뭔가 일이 꼬이는 것만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든다. “니 몇 일간 가 있을 만한 곳 없제?” “…….” “짐은 기숙사에 둔다 캐도 니가 머물 곳이 없어서...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 동숙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는 것을 보며 현옥은 망설이다가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꺼낸다. “실은 작은 아버지가 부산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 “예에.” “어딘 줄 아나?” “주소를 적어가지고 오기는 했는데…….” “주소 좀 내봐라.” 옷 보따리 속을 헤집어 조그맣게 접혀 진 쪽지를 동숙에게 내민다. “여기서 전차 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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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옥아. 니 며칠만 작은아버지 집에 가 있어라. 방 문제 해결되는 대로 니한테 연락 주께.” “예에. 언니!” 현옥이 마지못해 대답을 한다. “우선 짐은 기숙사에 들여 놓여다 놓고 내가 니 작은아버지 집으로 대려다 주께.” 동숙이 현옥의 짐을 들고 기숙사로 들어간다. 이층 오른쪽 끝 방 문을 열고 들어가 구석 쪽에 짐을 내려놓는다. 사람 서너 명이 잘 수 있는 좁은 공간에 옷장 하나와 경대가 놓여있고 벽에는 옷들이 걸려 있었다. 초라하고 답답한 공간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지내기에는 별 불편은 없어 보이는 듯 했다. 기숙사를 빠져 나와 전차를 타고 주소에 적혀있는 작은집을 찾아 간다. 동숙이 부산의 지리를 알고 있는 터라 찾아가는 것은 수월했다. 판잣집이 즐비한 거리를 따라 한참 오르막을 오르다 한옥을 개조한 가게가 딸린 집 앞에 다다라 동숙이 걸음을 멈춰 선다. “현옥아! 이 집 이다.” 낡은 기와에 흙벽돌을 쌓아 보수를 해 놓은 오래된 집이 현옥 앞에 버티고 섰다. “여기 명패에 이름이 박 근자 우자. 맞나?” 집 대문 한쪽으로 한문으로 작은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진 명패를 발견하고 동숙이 묻는다. “예. 맞아요.” “그래? 맞게 찾아 왔네. 그라면 나는 여기서 갈 테니까 혼자 들어가 봐라.” “예에 언니. 고생했어요.” “아니다. 사흘만 기다리고 있어라. 알았제?” “예.” 현옥을 남겨두고 동숙은 돌아서서 비탈진 길을 다시 내려간다. 시월의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거리는 걸음으로 동숙은 비탈진 산길을 차분히 내려가고 있었다. 멀리 동숙의 모습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듯 현옥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켜켜이 쌓인 판잣집 아래로 모습을 감추는 동숙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 그러나 현옥의 눈길은 동숙에게로 향하지를 않았다. 고민과 갈등 속에서 자신이 처해야 할 행동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년 전, 경주에서 조모에게 쫓기어 어미를 찾아 가던 그날, 그 밤에 들렀던 포항에서의 하룻밤이 역시나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다시는 작은집을 찾지 않으리라 동생 경현과 다짐을 했던 것이 머릿속에 맴을 돈다. 왜 하필 작은집에 또다시 신세를 져야만 하는 지 현옥의 마음은 괴롭기만 하다. 어미에게도 그렇게 큰 소리를 쳤건만 꼴이 우스워졌다 생각이 든다. 현옥이 짐을 싸고 있을 무렵 어미는 종이쪽지 한 장을 딸에게 건넸었다. “너거 작은 아버지 집 주소다. 혹시나 급한 일이 생기믄 그래도 우짜겠노? 피붙이니까 도움을 청할 일이 있이믄 너거 작은아버지 찾아 가 보그라.” “싫다. 엄마! 내는 작은집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갈거다. 경현이하고 내가 다짐을 했었다. 두 번 다시 작은집에는 안 간다고. 작은엄마도 싫고 할머니도 싫다. 거는 죽어도 안 갈 거다.” “그래도 그라는 거 아이다. 부산에갔이믄 그래도 할무이 찾아 뵈야 할거 아이가?” “싫다. 우리를 그렇게 구박을 한 할머니를 내가 뭐가 아쉬워서 찾아가 문안을 드리겠노? 나는 그래 안한다.” 그렇게 어미 앞에서 큰 소리를 친 것이 어젯밤 부산으로 내려오기 바로 전날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지금 자신이 해야만 했다. 돈이나 넉넉하게 있었으면 여인숙에 들어 사흘만 기다려 보겠는데 그것조차 여의치 않은 현실이 싫고 화가 났다.  단 삼 일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살고 싶건만 그것조차도 현옥에게는 사치인가 보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과 타협하기가 너무 싫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거지 행세를 할 만큼 담이 큰 것도 아니요, 동숙을 찾아가 민폐를 끼칠 철부지도 아니니 하는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수차례 옮겨 보려 해도 두 다리조차도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버티고 서있기만 했다. 이미 자신과의 싸움에서 져버린 현옥의 얼굴은 울상이 되고 만다. 금방이라도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말로 할 수 없는 심적 갈등이 온 몸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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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딪치기를 완강히 거부해 보지만 결국 현옥의 이성이 감정을 누르고 만다. 버티고 있어봤자 별 뾰족한 수도 없으니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여 대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밖에. 포항의 집과는 비교가 안 되게 초라하게 낡은 집. 마당에 나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근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현옥이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들어서 근우를 부른다. “작은아버지!” 등 뒤에서 나는 소리에 근우가 뒤를 돌아보며 놀란다. “니 현옥이 아이가? 니가 우짠 일로 왔노?” “그간 편안 하셨습니까?” “그래 그래! 니는? 식구들은 다 잘 있나?” “예. 엄마가 작은아버지한테 안부 전해 달라 했습니다.” “잘 기신다니 다행이다. 그란데 니는 우째 알고 찾아 왔노? 부산에 무신 일이 있어 왔나?” “저어...그게에...” 현옥이 말을 꺼내려는데 방안에서 인기척을 듣고 근우의 처가 나왔다. “현옥이 니가 우짠일이고?” 근우와 똑 같은 질문을 매정스럽게 묻는 작은어머니가 현옥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예. 작은어머니! 그간 편안 하셨습니까?” 그래도 어른이라 무시할 수 없어 현옥은 내색을 않고 인사를 올린다. “이 꼬라지가 니 눈에는 편안해 보이나?” 근우의 처는 시비를 걸 듯 한참을 비꼬아 말을 툭 내뱉는다. “임자! 아아한테 와그라노?” 지켜보던 근우가 인상을 쓰며 처를 다그친다. “내 말이 틀린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있어야 편하다고 하제. 병든 시어무이 수발에 집안일까지 내 손이 안거치는 일이 없구마는. 내 신세가 이래 될 줄 내도 몰랐제.” “잘한다. 어린 조카 앞에서 흉허물이나 뜯고 있고.” 처의 행동이 보기 싫었는지 말을 하다 말고 근우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현옥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대뜸 근우의 처가 다그치며 묻는다. “니는 여까지 무신일로 왔노? 너거 어무이가 보냈나? 가서 할무이 시중들라고.” “예에? 아...아니. 그게 아이고…….” “그라믄 무신 볼일이 있어 왔나? 와? 너거 작은아버지한테 돈이라도 빌리 오라 카드나?” “…….” 현옥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말문이 막히고 만다. 무슨 억지를 써도 참아 보려 했으나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어 울분이 터져 나오려 했다. “니 참말로 입 그래 방정시럽게 놀릴기가?” 어디론가 사라졌던 근우가 나타나서는 처를 다시 나무란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 하그라. 열 살 먹은 아아도 그래 유치하게 굴지는 않을 기다.” “내가 틀린 말 했소? 성님이 자를 보낸 이유가 뭐겠는교? 돈 밖에 더 있겠는교.” “그래서 형수님이 그랬다 치자. 니가 돈 내놓을 기가?” “내가 와요? 피 같은 내 돈을 내가 와 큰집에다 내 놓는단 말이요.” 돈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고삐 풀린 말처럼 길길이 날뛴다. “그래 안 할 거면 입 다물고 있그라.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다시 한 번 처를 향해 으름장을 놓는다. “내가 동네 북 이제. 우째 이집 사램들은 내만 못 잡아 묵어 안달인지 모리겄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남편의 으름장에 기가 눌려 그냥 돌아 설 수가 없었던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조금이라도 동정을 받을 심사로 신세한탄을 하며 다시 방으로 기어 들어가 버린다. 처가 사라지고 나서 근우는 울상이 되어 서있는 조카를 보고는 조용한 어투로 말한다. “너거 작은엄마가 요새 좀 힘이 들어 그러니라. 니가 이해해라.” “…….” “그래 무신 일로 여까지 왔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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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제가 부산에 취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 뭐하는 데고?” “고무공장요.” “직공으로 온 기가?” “예에.” “누가 소개를 해 준기가? 아니면 니 혼자 알아보고 온거가?” “육촌언니가 그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언니 소개로 왔습니다.” “그래. 우쨌든 잘됐다만 니가 고생이다.” “취직은 됐는데 지낼 방을 아직 못 구해서 며칠만 작은아버지 집에서 신세를 좀 질까 해서 찾아 왔습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현옥이 어미가 오명을 쓸까 싶어 먼저 선수를 쳐서 어미를 방어하려 한다. “그랬나? 니 사정이 그라믄 당분간 여서 지내그라. 걱정하지 말고.” “고맙습니다. 작은아버지.” 그때 다시 방문이 열리며 작은어머니의 앙칼진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허이고! 우리가 부탁 할 때는 그래 모질게 거절을 해 놓고 인자 와서 당신 자슥을 우리한테 맡기는 기가? 성님도 참말 양심이 없는 기다. 안 그렇나?” 또다시 어미를 헐뜯을 기세로 현옥을 슬슬 약을 올리는 작은어머니였다. “그 입 못 다무나!” 남편의 큰소리에 움찔하면서도 제 할 소리는 다해야겠다 싶은지 끝내 자리를 뜨지 않고 눈치를 살펴가며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내 말이 틀맀는교? 우리가 어무이 모실 형편이 못돼서 그래 사정사정 해가며 어무이 좀 보살피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성님이 뿌리칬지요. 누가 성님보고 직접해도라 캤십니꺼? 현옥이 저 아, 집에서 놀고 있는 저 아를 지 할무이 집에 머물게 하면서 시중이나 들고 끼니나 챙겨 드맀으믄 한 기이 뭐가 그래 억울해서 그 자리에서 모질게도 거절을 했답디까? 막말로 그 없는 살림에 입하나 줄이는 기이 얼매나 큰 심이 되는데. 할무이 모시고 있었이믄 현옥이 니도 굶지는 않았을 거 아이가? 그래 놓고는 인자 와서 아아를 우리 집에 잠시 맡아 달라고 하는 기이 사램으로서 할 처사가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윗동서의 행동이 괘씸했던지 이를 갈며 얘기를 한다. 그런 작은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기보다 현옥은 이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하였다. 지금껏 몰랐던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쨌거나 자신에게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어미가 강제로 시켰으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겠지만 조모의 시중을 드는 일은 내키지 않는 일이 기는 했었다. 다행히 어미가 딸의 심정을 헤아려 거절을 하였을 것이라 여겨 현옥은 아무 말 않고 역정을 내는 작은어머니의 싫은 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한참 동안을 떠들어 대는 그녀의 말에 어느 누구도 대꾸를 해 주지 않자 그녀는 신이나지 않아서인지 깔아놓은 멍석을 걷어 들인다. 험담도 누가 맞장구를 춰져야 흥이 나거늘 혼자 열심히 열을 내고 성을 내어 봐도 듣는 이들의 반응이 시원찮으니 흥이 깨져 버려 제 풀에 꺾여 궁시렁거리다 결국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현옥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있는 것을 보고는 근우가 조카를 달랬다. “주눅 들거 없다. 너거 작은어무이 무신 말을 해도 한귀로 듣고 흘리그라. 너거 어무이 입장에서는 그랄 수밖에 없었다는 거 내도 안다. 할무이가 오직이나 무시를 했이믄 그 어진 성품의 양반이 그래 모질게 굴었겄노. 내 어무이지만도 할무이가 너거 어무이한테 몹쓸 짓을 많이 했다. 너거 어무이 참 불쌍한 양반이다. 너거들이 잘 해드리그라!” “예에. 작은아버지! 그란데 할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몸이 많이 편찮으시다. 거동도 못하고 계시다. 따라 온나. 그래도 왔으이까 인사는 여쭤야제.” 현옥이 근우의 뒤를 따라 집을 나와 대문을 지나서 옆집으로 들어간다. 작은아들 집에는 어미가 있을 만 한 방이 없었다. 실은 그래서 형수에게 경주에서 어미를 모셔 달라 부탁을 하였던 것이었으나 어미도 형수도 서로가 완강하게 거절을 하는 터라 어쩔 수 없이 모시고 내려와 따로 방을 얻어 드릴 수밖에 없었다. 큰아들에게 버림을 받은 데다 작은아들마저 제대로 어미를 봉양 할 수 없는 사정이라 정씨 부인의 처지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함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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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마음의 병은 깊어지고 그것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한 정씨 부인은 결국 자리에 드러눕고 만 것이다. 현옥이 막상 조모를 대하려 하니 가슴이 뛰었다. 예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조모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상스러운 욕지거리에 걸핏하면 '지에미를 닮아서'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었던 그 악몽 같았던 시간들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아들인 근우가 먼저 방으로 들어서고 그 뒤를 현옥이 뒤따라 들어간다. 낡은 방안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화초장이 살림의 전부요, 그 나머지는 텅 비어있었다. 그곳에 물색이 나른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조모의 얼굴이 보였다. 천하를 호령할 것 같았던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얼굴은 퀭해 있었고 이불위로 내어 놓은 팔목에 살이라고는 붙어 있지 않아 야윌 대로 야위어 가죽밖에 남지 않아 잡기만 해도 부러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조모의 눈에서는 날카로움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했다. “어머니. 현옥이가 찾아 왔십니다.” 아들에게 고정되었던 시선이 현옥에게로 꽂혔다. 언제나 조모의 눈빛을 피하기만 했지 제대로 쳐다보지를 못했던 현옥이 누워있는 조모의 시선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 시간은 단 몇 초에 불과했으나 조모의 눈빛은 날카롭게 현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비를 찾아 온 것을 원망하던 그 눈빛이 현옥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는 현옥에게서 눈길을 거둔 조모는 아무런 말없이 눈을 감아 버린다.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고 어떤 이와도 대화 하고 싶지 않다는 침묵의 시위라고나 할까, 반평생을 의지하며 살았던 자식을 끝내 품에서 풀지 못한 한이 화근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단명 시키고 있음을 알기에 그 누구도 아닌 큰아들 근호만이 오로지 자신을 이해하고 보살펴 줄 거라 여기며 목숨 줄을 부지한 채 그 아들이 찾아오기만을 어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근호 이외는 그 누구와도 눈길을 마주하려 하지 않은 채. 그런 생활이 오래 되었던지 작은아들은 그저 어미의 표정을 한번 살피고는 현옥에게 나가자고 손짓을 한다. 자식의 얼굴을 외면하고 고개 돌리는 어미에게 무슨 따듯한 정이 있을까, 평생 형의 뒷자리에서 어미의 사랑 한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채 그 사랑에 목말라하며 어미를 바라보았던 근우였다. 큰아들바라기만 하는 어미가 야속해 일찍 장가를 들었고 어미의 품을 떠나 먼 곳으로 가 벼렸던 것, 그런 아들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는 어미와 이제 와서 가까이 지낸다 한들 그 외로웠던 세월을 보상 받을 수 있을까. 보상은커녕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는 어미에게 애틋한 정도 측은한 마음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집으로 건너와 근우는 현옥이 당분간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고는 현옥이 오기 전 하던 작업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다시 시작했다. 큰 통에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었던 근우는 잘 부풀어 오른 밀가루 반죽을 보자기로 덮고는 쪽문으로 사라졌다. 집의 안과 밖을 연결하고 있는 쪽문을 통해 들어 간 곳은 근우의 가족이 장사를 하고 있는 가게였으며 부풀어 오른 반죽은 바로 꽈배기를 만드는 재료였었던 것이다. 꽈배기 만드는 기술을 터득한 근우의 손놀림은 재주에 가까웠으며 즉석에서 꽈배기를 튀겨 내니 배고픈 이들의 입을 호강시켜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남들보다 먼저 시작한 장사라 아직 경쟁자도 생기지 않아 돈을 수월찮이 벌기는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가산은 늘지 않고 그 자리에 맴돌고 있었으며 벌었다는 표시가 어디에도 나지 않는 것이다. 돈 관리는 이미 제 손을 떠나 처에게 맡겨진 몫, 그녀가 어떻게 살림을 하는 지에는 별 관심이 없는 그였다. 다만 자신은 장사를 하는 것에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남편이 고생하여 번 돈을 움켜만 쥘 줄 알았지 재산을 불리는 능력이 없었던 근우의 처는 포목상을 했을 때도 그랬으며 꽈배기 장사를 하고 있는 지금도 변함없이 제 주머니에 돈을 쑤셔 넣을 줄만 알았지 한 번도 내 놓은 적이 없었다. 그저 먹고 사는 것에만 모든 것이 취중 되어 있을 뿐이었다. 현옥이 집에 온 관계로 근우의 처는 장사를 나가지 못하고 집에 있어야 했다. 물론 조카에게 집을 맡기고 비워도 상관은 없었으나 그 상대가 내키지 않는 인물이기에 영 성가셨던 것이다. 아들들이 아비와 같이 호흡을 맞춰 일을 하고는 있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비우고 가게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었던 그녀는 당분간 현옥이 갈 때까지 그 일을 못하게 된 것이 여간 짜증스럽지 않았다. 시모를 모시는 것만으로도 귀찮아 죽겠는데 혹이 하나 더 붙었으니 제 딴에는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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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작은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현옥이 하루를 버티는 것도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밤늦게야 문을 닫고 들어오는 작은아버지와 사촌 오라비들을 보며 인사를 나누어도 그들 역시 현옥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겨우 사흘을 버텨내고 현옥은 더는 붙어 있는 것이 거북스러워 작은어머니에게 간다는 인사를 하고 일찍 집을 빠져 나온다. 차라리 길거리에서 맴도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겠다 싶어 동숙이 퇴근하는 시간 동안 하릴없이 돌아다니기로 작정을 하고 직장 근처를 찾아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몇 번 타봤다고 이제는 전차 타는 것이 조금은 익숙해진 듯 현옥은 편한 마음으로 전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는 것을 기억해서 내릴 곳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도 가도 목적지는 나오지를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히 몇 정거장 안 되는 길이었는데 와 계속 가도 그 길이 안 보이는 거고.’ 현옥이 속으로 불안해하며 생각을 한다. 그러는 사이 창문을 통해 반대편으로 지나가는 전차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현옥의 머리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간다. ‘맞다. 내가 전차를 잘못 탔는 갑다.’ 그제야 자신이 가는 길의 방향이 어긋난 것을 알고 전차에서 내려 반대편으로 건너가 전차를 타고 다시 지나쳤던 방향을 되짚어 돌아간다. 전차라는 것이 앞뒤가 똑같아 가는 방향을 구분 못하였던 것이 실수였던 현옥, 이제 도시생활에 조금이나마 적응을 하기 위한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다시 되돌아가 회사 앞에서 현옥이 지난번처럼 동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되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공장 안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다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야간작업을 하기 위해 지금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현옥이 다시 공장으로 들어가는 무리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몰려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동숙의 얼굴이 보였다. 정장을 차려입고 핸드백을 울러 맨 모습이 일반 공장사람들과는 다른 세련미가 흘렀다. 그녀는 경주에서는 알아주는 부잣집 고명딸로 고생을 모르고 자랐으니 티 하나 없이 맑을 수밖에. 남들처럼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녀 가장도 아니니 제가 번 돈으로 제 나름 멋을 내고 다니는 것이고 자신을 위해 투자를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자신감이 흘러넘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를 향한 부러움은 현옥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여성들은 그녀처럼 살기를 원했으나 모두가 현옥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지 동숙이 과는 아니었기에 그저 동경과 질투의 대상으로 동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세련된 걸음으로 먼저 나오던 동숙이 문 앞에 서있는 현옥을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현옥에게로 다가왔다. “언제 왔노? 안 그래도 지금 너거 작은아버지 집으로 갈라 했는데.” “쪼금 전에요.” “잘됐다. 어제 살던 사람이 방을 비워줘서 내가 니 짐 그 방에다 옮겨 놨다. 가자.” 동숙은 현옥의 손을 잡아 이끌며 공장을 빠져 나와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역시나 빠르게 걸음을 걷는다. 현옥이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그저 손에 이끌려 걷는다. 해 길이가 짧아지는 계절이라 일곱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인데도 어둠은 짙게 내려앉았다. 한산한 주택가로 들어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한옥을 개조한 여인숙 건물이었다. 근처에 큰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보니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현옥과 같이 타지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기에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도시생활을 해야 했던 이들을 상대로 집 주인들은 방을 임대해주었고 집 없는 사람들은 셋방살이를 하며 삶의 희망을 꿈꾸었다. 현옥 역시 그들처럼 셋방살이를 시작하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꾸어 본다. 세평 남짓한 방은 아늑하기는 했으나 때 묻은 벽지에는 여러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동숙이 쓰던 경대와 옷장이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구석으로 현옥이 들고 왔던 짐 보따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은 좀 초라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같이 지내는 데는 크게 불편할 것 같지는 않다. 현옥이 니 생각은 어떻노?” “예에 언니.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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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참 내일 아침에 내하고 같이 공장에 가자. 니 자리 마련해 뒀다고 공장장님이 알려 주더라.” “예에.” “현옥이 니는 심성이 고와서 사람들이 좋아 할거다. 기죽지 말고 열심히 해봐라.” “고맙습니다. 언니.” 친 동생처럼 자신을 챙겨주는 동숙이 현옥은 너무도 고마웠다. 다른 친척들처럼 무관심하게 지내도 별 상관없을 육촌지간, 그래도 어릴 때부터 보았던 정이 있어서 현옥은 동숙이 그저 친 동기간처럼 느껴졌고 동숙 역시 집안에서 막내이다 보니 현옥을 동생 삼아 예뻐하였기에 제 나름 신경을 써서 보살펴 주고자 했던 마음이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서둘러 두 사람은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세련된 옷을 차려 입고 나서는 동숙과 비교되게 현옥의 옷차림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멀쩡한 옷이라고는 없고 죄다 헤지고 낡아서 어디에 내어 놓기도 창피한 옷들이었다. 그나마 찬옥에게 물려 입은 물이 낡은 양장 한 벌만이 정상적인 옷이라 처음 출근하는 현옥은 제 나름 신경을 써서 그 옷을 차려 입고 나섰다. 집에서 나와 공장까지 가는 시간은 십 여분쯤, 그 짧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현옥은 동숙과 비교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주눅이 들었다. 그런 현옥을 동숙은 그저 긴장을 해서 그러려니 생각을 할 뿐 자신이 문제인 것은 전혀 알지를 못하였다. 공장으로 들어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공장장이 있는 사무실이었고 동숙이 공장장에게 현옥을 인계하고는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제 일터인 사무실로 돌아갔다. 홀로 남겨진 현옥을 데리고 공장으로 들어선 공장장은 이제부터 현옥이 맡아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알려주었다. 이곳에서 만들고 있는 것은 고무신이었다. 처음에는 검정고무신, 그 다음에는 흰 고무신, 그리고 지금 유행하는 것은 바로 꽃 코고무신이었다. 같은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모여 있는 미예 부서에 현옥은 배치되었다. 미예 부서에서 하는 작업은 고무판에 그림을 박아 넣는 일이었다. 공장 안에는 여러 개의 작업대위에 고무판이 놓여 있었고 작업대 주위를 여공들이 둘러싼 채 빙빙 돌아가며 고무판에 그림을 그려 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젊은 사내들이 쪄낸 고무판을 작업대위에 펼쳐 놓거나 작업이 끝난 고무판을 지고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간 현옥이 맡은 일은 금방 쪄낸 고무판에 고무가루를 뿌려 판이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하는 작업과 그림이 그려져 나온 판 위에 다시 고무가루를 뿌려주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 하는 일이었으나 별로 고된 작업은 아니었지만 쪄서 내온 고무판에서 나는 고무냄새가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역하게 올라왔다. 경주에서 다니던 공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현옥은 잠시 이곳 사람들과 얼마나 빨리 친해질지 걱정이 들었다. 낯선 이들과 말을 잘 섞지 않는 현옥이 그래도 일을 배우려면 여기 있는 사람들과 빨리 친해져야만 하기에 낯설음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였다. 먼저 다가가는 것에 서투른 현옥은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중이다. 자존감이 강한 성격이라 남에게 지는 것도 싫은데 저 보다 나아 보이지 않는 이들과 같은 서열도 아닌 그 아래에서 저들의 지시를 받으며 일을 배워 나가야 한다는 그 자체가 우선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여 일을 배운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배워야 할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것도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 어떻게든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 생각을 하고는 마음을 다진다. ‘세상에 내 하기 좋은 거만 하고 살수는 없는 거 아이가?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거니까 참고 해내자. 그래야만 일을 배우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거다.’ 현옥이 여기에 온 이유가 뭐였던가!  오로지 돈을 많이 벌어 어미의 곤궁한 삶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했고 이겨 내야만 했다. 해 내야만 한다는 마음이 오기를 발동시킨다.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에 불이 붙어 버렸으니 반드시 그들을 누르고 자신이 이곳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한 집념도 발동한다. ‘그래 내가 먼저 다가서는 거다. 난 할 수 있다. 꼭 해내고 말거다.’ 강한 집념과 오기가 현옥에게 힘을 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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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에 서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다 차츰 다가와 그들과 나란히 선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눈에 들어 온 뭔가를 발견하고는 화젯거리 삼아 먼저 말을 건넨다. “여기는 모두 명찰을 달고 있어서 서로 소개를 하지 않아도 이름을 알 수가 있어서 좋다.” 누구에게 던진 말은 아니었으나 현옥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현옥의 가까이에 서있던 여자아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호기심이 일어 그녀가 현옥에게 묻는다. “니 오늘 새로 들어 왔나?” “어. 처음이라 일을 잘 모른다. 많이 좀 가르쳐줘라.” 붙임성 있게 다가서는 현옥의 인상이 나쁘게 비치지 않았던지 그녀는 별 거리낌 없이 현옥을 받아주었다. 어깨 아래로 내려온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검은색 점퍼위로 늘어뜨린 여자아이의 눈 밑에는 주근깨가 가뭇가뭇하고 평평하게 생긴 얼굴 위로 뭉툭하게 생긴 코끝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래. 알았다.” 현옥이 그녀의 가슴에 붙어 있는 명찰을 바라본다. 그녀의 이름표에는 ‘박화자’라는 세 글자 쓰여 있었다. “어? 니 성이 박씨네! 내 성도 박씨인데. 우리 같은 종씨네.” “그렇나? 니 이름은 뭔데?” “나는 박현옥이다. 우리 종씨끼리 잘 친해보자.”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아이가 끼어들며 현옥에게 묻는다. “니 집은 어디고? 니도 통근차 타고 다니나?” “통근차?” “그래.” “여기 통근차도 있나?” “어. 사람들이 멀리서도 오니까.” “그렇구나. 나는 집이 가깝다. 그래서 통근차 안타고 다닌다.” “좋겠다! 집이 가까워서.” 화자는 현옥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겼는지 두 사람의 대화에 다시 끼어든다. “그라믄 누가 소개해서 여기 들어 왔는데?” “언니 소개로 왔다. 우리 언니가 여기 사무실 직원이다.” “그래? 이름이 뭔데?” “최동숙.” “어? 니 하고 성이 다르네? 친언니 아인갑다.” “어. 친언니가 아이고 육촌 언니다.” “그라믄 니 고향은 어데고?” “경주.” “부모님하고 여서 같이 사나?” “아니다. 언니하고 같이 산다.” 현옥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 나가고 있는 이 때, 반장이라는 사내가 옆으로 다가오며 소리를 지른다. “야. 너거 세 사람.” 부르는 소리에 놀란 현옥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본다. 화자는 놀란 표정으로 짜증이 나서는 화를 낸다. “아이고, 놀래라.” 작업대 앞에 선 반장이 다시 큰 소리로 호통을 친다. “누가 작업시간에 잡담하라캤노? 손으로 일하지 입으로 일하나? 입 그만 놀리고 호씨나 잘 끼워 맞춰라.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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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마른 체구의 사내는 화자를 노려보며 그렇게 호통을 치고는 작업대를 지나간다. 반장의 모습이 저만치 멀어지자 화자가 입을 삐죽거리며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문디! 조용히 말해도 알아듣는 구마 와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고. 호씨 잘만 맞추고 있다. 말 좀했다고 아주 사람을 잡아먹을라 카네. 내 참 더럽어 죽겠다.” 그리고는 돌아서있는 반장의 뒤통수를 힘껏 째려본다. 화자가 화를 내는 동안 현옥은 여전히 겁에 질려 무서워하고 있다. 현옥이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씩 얼굴을 익히고 조금씩 다가서며 먼저 인사를 건네면서 말벗이 되고 친해져 그럭저럭 적응을 잘 해나가고 있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현옥은 불 꺼진 방으로 혼자 들어섰다. 동숙과 함께 들어오려 했으나 동숙은 기숙사에서 사람들과 저녁을 먹는 중이라 했고 늦을 것이니 혼자 밥 먹으라며 현옥을 먼저 집으로 보냈다. 컴컴한 자취방에 혼자 들어와 불을 켜고 배고픔을 견디며 혼자서 밥을 지어 먹는다. 혼자서 밥을 먹으려니 자꾸만 어미가 생각이 난다. 언제나 일하고 돌아오는 현옥을 위해 따듯한 밥상을 차려 놓고 힘든 딸을 위로하며 먹는 모습을 지켜봐 주던 어미의 모습, 그 모습이 그리움으로 사무친다. 어미 옆에서 어미가 해준 밥을 먹으며 모든 것을 어미에게 의지하며 지냈었는데 이제는 하나에서 열 가지 모든 것을 제 손으로 해결을 해야 하니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출근한지 삼 일이 지나고 현옥은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시간 나는 틈틈이 작업대에서 하는 일을 눈 여겨 바라보았다. 작업대 앞에 줄을 선 여공들이 하는 일은 바로 고무신에 꽃이나 나비를 찍어 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고무를 쪄서 만들어 낸 고무판이 달라붙지 않게 고무가루를 뿌려 놓은 것을 휘발유로 닦아내고 휘발유가 날아간 고무판위로 도안지에 그려진 그림의 틀을 예닐곱 사람들이 한 장씩 나눠가지고 서서 작업대를 돌며 고무판 위에 호씨(밑그림을 맞춰 나가기 위해 그려 놓은 삼각형 모양)를 맞춰 틀을 고정시키고 그 위에 색깔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현옥은 그 일이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 여기며 눈 여겨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에 정신이 팔려 지켜보고 선 현옥에게 한 젊은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남자의 물음에 현옥은 멍한 얼굴로 그 사람을 쳐다본다. “……?” “새로 들어 온 시다가?” 현옥은 자신을 무시하듯 반말을 해대는 남자에게 불쾌감을 느꼈다. ‘뭔데 처음 보는 내한테 반말을 하는 기고. 못 배우고 무식한 사람같이.’ 대뜸 하는 반말에 기분이 상한 현옥은 그가 묻는 말에 대꾸도 않고 못들은 척 지나치려 하는데 작업을 하고 있던 한 여공이 그를 향해 “선생님!”  하고 부르며 다가왔다. 현옥이 자리를 피해 나오면서 돌아보니 그 남자가 여공에게 무언가를 열심 가르쳐 주고 있었다. ‘선생님? 자는 저 건방진 사람한테 와 선생님이라고 하노? 나이도 얼마 안돼 보이는 구만 참 희안타.’ 현옥이 속으로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어 여럿이 같이 둘러 앉아 밥을 먹다 현옥이 좀 전의 일이 궁금해서 묻는다. “저 사무실에서 있는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인데?” 현옥이 공장 한 켠에 마련된 사무실을 가리키며 묻는다. 화자가 대답을 한다. “저 사람들? 대학 졸업하고 여기 도안실에서 일하는 도안사 선생님들이다.” “도안사?” “그래. 우리가 그리는 그림을 저 사람들이 도안해서 도안 틀을 하나씩 만들어서 우리한테 나눠주는 거다.” “아하! 그렇구나.” 현옥이 처음 공장에 오던 날 그 곳을 들락날락거리는 젊은 청년들이 뭘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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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사라는 것을 알게 된 현옥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이제야 감이 잡혔다. 하나의 그림을 토대로 도안사들은 그 그림이 고무판에 잘 나오도록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표현들을 따로 떼어내 한 장씩의 도안 틀을 만들고 거기에 들어가는 색깔들을 지정해서 틀과 색을 여공들에게 넘겨주면 기술을 가진 여자 아이들은 그 그림에 호씨를 맞춰 그림에 맞는 색깔을 뚫려진 도안지에 칠을 하고 그 아래 고무판위로 그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고 그렇게 여러 사람이 자신이 가진 그림에 색을 칠해 넣으면 마지막에 하나의 그림이 완성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작업을 하는 이들을 보면 현옥이 나이 또래의 젊고 손 빠른 여자 아이들이 대부분으로 주로 그 일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도안사에 의해 작성된 도안지를 가지고 그림이 들어 갈 자리에 호씨를 잘 맞추어 찍어야 그림 모양이 제대로 나오는 것이기에 호씨를 맞추는 작업이 제일 중요했다. 누구 한 사람의 실수로 인해 작업이 틀어지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호씨를 맞춘다 해도 처음부터 틀어졌기에 불량이 생기는 것이라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기술과 요령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여공들이 하는 일이 주로 그 일이라면 남공들이 하는 일은 무거운 고무판을 여공들이 일하기 좋게 펼쳐 놓는 일과 그림 작업이 끝난 판들을 기계실로 날라주는 일이 그들의 몫이었다. 무거운 것을 지고 나르는 막일을 하는 이들 역시 건장한 젊은 사내들이었다. 그렇게 현옥이 일을 차츰 알아 갈 때쯤 벌써 일주일이 지나고 주간으로 하던 일을 이제는 야간에 하게 되었다. 미예 부서는 공장에서 유일하게 주야간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꽃신 카피를 만들어서 신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 카피를 넘겨줘야지만 다음 작업을 할 수가 있어 그 날 만들어야 하는 신발의 개수를 맞추려면 카피가 항상 모자라지 않게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해서 주간 야간 두 팀으로 나누어 작업을 하며 미예 부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직원들이 일주일씩 교대로 출근을 하며 일을 해야만 했다. 작은아버지 집에서 나와 동숙을 찾아 왔던 그날 현옥이 공장밖에 서서 퇴근하는 동숙을 기다리고 섰을 때 반대로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몇 사람을 보았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때는 그 사람들이 왜 다시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지 궁금하기만 했을 뿐 잊고 지냈었는데 이제야 그들이 되돌아 온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이 되돌아 온 것이 아니라 야간근무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현옥 역시 한 주가 지나고 새로운 한 주를 맞아 야간근무를 하러 공장으로 들어온다. 주간에는 그래도 견딜 만했던 고무 찌는 냄새가 야간근무를 시작하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비위에 거슬려 자꾸만 구역질이 올라오고 머리가 아파온다. 어떻게든 참고 견뎌내야 한다는 집념으로 고통을 참아본다.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것은 몸이 고단해도 견딜 만 했는데 낮과 밤을 바꿔서 생활을 한다는 그 자체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일주일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야간작업을 시작한지 겨우 서너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몸은 벌써 지치고 있었다. 처음보다 고통은 줄었지만 그래도 역한 냄새는 아직도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 여기저기에서 꾸벅꾸벅 조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공장에만 매여 있는 것이 싫었던 여공들은 잠을 줄여가며 노는 것을 즐겼기에 야간작업을 하는 날이면 하루 종일 싸돌아다니다 공장으로 들어와서는 잠에 못 이겨 작업대에 머리를 조아리며 졸고 있는 것이었다. 현옥은 아직 부산의 지리를 모르고 또 혼자이기에 야간에 들어오기 전에 잠을 푹 자고 출근을 해서 인지 아직은 버틸 만했다. 이틀 사흘이 지나고 주중이 되니 몸은 천근만근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는 이른 아침 교대하여 집으로 들어오면 눈이 감겨 맥을 못 추고 먹는 것도 마다하고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어 버린다. 피곤함 때문에 밥도 지어 놓지 못하고 곯아 떨어져 저녁이 되어 일어나서는 밥이 없어 먹지도 못하고 출근 준비를 하고 다시 공장으로 나간다. 하루 열두 시간 아침 일곱 시에 출근하여 저녁 일곱 시까지 그 시간을 공장에서 보내고 야간은 저녁 일곱 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일곱 시까지 그렇게 힘겨운 반복된 생활을 한다. 몸이 피곤하다 보니 먹는 것도 부실해지고 끼니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 더욱 더 그러했다. 이른 아침 출근에 아침도 못 챙겨 먹고 출근을 하면 점심시간까지 기다리는 것도 곤욕이요 게다가 겨우 우동 한 그릇으로 두 끼를 채우는 것이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에는 텅 빈 뱃속에서 곡소리가 요란하였다. 그나마 주간 근무일 때는 야간만큼 힘들지는 않아 혼자서 밥을 지어 먹고 간혹 다음날 도시락도 챙겨 놓을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지만 야간을 하는 날은 잠으로 반나절을 때우다 보니 굶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두주를 그렇게 힘겹게 일을 하고 나면 이주 동안 일한 수당을 지급해주는데 이를 간주라고 하여 지급을 해주고 간주를 받은 그 다음날은 휴일로 하루를 쉬게 해주었다. 한 달에 단 두 번 쉬는 날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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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일에 적응이 되지 않은 현옥은 잠 속에 빠져 황금 같은 하루를 허비해 버리고 만다. 그래야지만 또 한 주를 버티는 힘을 생성할 수 있기에.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부산에서 현옥은 그렇게 자신의 삶에 적응을 하며 공장에 매여 일만 한다. 그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그나마 일을 함으로 돈이 생기는 것이기에 제 힘으로 돈을 버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며 삶의 낙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공장 일에 조금씩 적응을 하며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벗이 되고 일의 순서를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가며 남들이 하는 일들을 눈여겨보는 여유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한 고무냄새는 끝내 적응이 되지 않고 그 냄새 때문에 구역질까지 해대는 형편이었으나 달리 어디 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라 그저 참고 참으며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두주가 지나면 어김없이 간주는 지급이 되었고 그 돈을 받아 현옥은 제 생활을 하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조금씩 모아서 어미에게 붙여주었으며 가끔씩은 쉬는 날 어미를 찾아 가기도 했었다. 부산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어미를 찾아가자 현옥의 몰골을 보고 어미는 놀란다. 피곤에 지치고 제때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해 야윌 대로 야윈 딸의 모습을 보고는 안쓰러워하며 눈물을 보였다. “혼자서 객지에서 얼매나 고생을 하기에…….” “처음이라 그래요. 인자 조금씩 적응하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현옥이 힘든 내색을 않으려 애를 쓰며 어미를 안심시킨다. 그런다고 어미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나서서 뭔가 해줄 것이 없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라도 올라오라 소리도 내려간다 소리도 못하는 것은 의지할 이는 딸밖에 없었고 집을 구할 돈이라도 있어야 따라 내려가겠건만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자신이 뭐라 큰 소리를 치겠는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야윈 딸을 보며 가슴앓이만 할 뿐. 현옥은 그래도 좋았다. 힘들어하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어미가 있기에 응석을 부릴 어미가 있기에 그 하나만으로도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것이다. 힘들게 일하여 벌어 온 딸의 돈을 고마워하며 눈물을 훔치는 어미, 가엾지만 그래도 자식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어미를 위해 현옥은 젊은 날의 제 노동에 자부심을 갖는다. 어미를 보고 온 날은 새로운 힘이 솟는 듯 했고 그 힘으로 또 기나긴 시간들을 견뎌낸다. 그렇게 생활에 적응을 잘 해나가고 있을 때 현옥은 다시 외로움을 맞이하게 된다. 현옥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동숙이 오랜만에 밥상을 차려온다. 피곤에 지친 현옥이 동숙이 차려 준 밥상을 받으며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언니! 오늘 일찍 들어 왔나?” “어. 니 밥해 줄라고 일찍 왔다.” “……?” “배 고프제? 밥 먹자.” 동숙의 행동이 유별스러워 보였던 것은 벌써 몇 일전의 일이었다. 화를 잘 내지 않던 동숙이 어느 날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기도 했고 명랑하기만 했던 얼굴이 차츰 짜증과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기도 했었다. 그런 동숙의 눈치를 보며 현옥은 될 수 있으면 눈에 거스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자신을 낮추고 지냈었다. 지금의 이 행동도 사실 현옥은 낯설기만 했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말없이 밥을 먹는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그러다 동숙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현옥아! 내 사무실에 사표 냈다. 며칠 후에 경주로 다시 내려 갈 거다.” “언니! 와 내려가는데? 내가 언니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거가?” “니 때문이 아니다. 내가 힘들어서 그런다. 사무실 사람들하고 잘 안 맞아서 일을 더 못하겠다. 그리고 나도 객지생활이 지쳤는지 그냥 식구들하고 같이 살고 싶어서 그런다.” “언니야! 안 가면 안 되나?” “미안하다. 현옥아!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만 나는 여기서 더 지낼 자신이 없다.” “…….” “현옥아! 니는 잘 해낼 거다. 똑 소리 나는 우리 현옥이라서 내는 잘 버텨 낼 거라 믿는다.” 몇 달 동안 같이 지냈던 정이라고 현옥을 남겨두고 가는 것이 동숙에게도 마음의 빚을 지는 듯 무겁기만 했다. 어떻게든 현옥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 꺼낸 말이었으나 사실 몇 달 동안 옆에서 지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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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이 자신보다 생활력이 강하고 의지가 강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돌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 해낼 것이라는 것을 동숙도 인정을 한다. 동숙은 자신의 말에 책임이라도 지는 것처럼 곧바로 경주로 내려가 버렸다. 현옥은 이제 홀로 남아야 하는 현실을 받아 드려야만 했고 그로 인해 다시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신세가 되고 만다. 동숙이 떠난 빈자리가 의외로 크게 느껴졌다. 빈방에 혼자 들어오는 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니 더욱 그리워지는 것인가 싶다. 외로움도 외로움이지만 사실은 혼자서 방세를 부담하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동숙이 방세 절반을 부담하고 있었을 때에도 월급은 언제나 빠듯했었는데 이제는 그 부담을 혼자서 책임져야 하니 제 나름 열심히 발버둥을 쳐도 내내 그 자리에 머무르고만 있었다. 생각 끝에 현옥이 같이 일하는 여공들과 함께 자취를 결심한다. 현옥과 친한 화자의 소개로 전라도에서 올라온 현옥보다 한 살 어린 여공과 함께 자취를 시작했다. 그러나 내 식구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 생각만큼 편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서로의 뜻이 맞지 않다 보니 결국은 같이 살지를 못하고 몇 달 만에 깨어지고 만다. 이런 저런 경험을 해보고 결국 현옥이 택한 것이 하숙이었다. 하숙집으로 들어간 현옥은 이제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버는 돈이 모조리 제 일신을 위해 살 수 있을 정도라 매번 어미에게 보내던 돈도 이제는 붙이지 못할 상황이 되고 만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온 몸이 전율을 한다. 이른 아침, 거리에는 벌써부터 고향으로 출발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현옥이 부산에 와서 두 해를 넘겨 찾아가는 명절 설이었다. 설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 틈에 현옥도 끼었다. 설빔으로 한 벌 맞춰 입은 남색 반코트에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검은색 정장바지를 입고 굽이 조금 있는 구두를 신은 현옥의 모습은 삼년 전 처음 부산을 왔을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촌스러운 땟물은 어느새 벗어 던지고 이제는 의젓한 숙녀가 되어있었다. 찬옥처럼 뚜렷한 이목구비는 아니었으나 수더분하고 점잖아 보이는 얼굴은 선한 인상을 풍기고 하얀 피부와 남색반코트가 잘 어우러진 것이 귀티가 나 보였다.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도 결근하지 않고 일한 덕분에 회사에서 선물로 부모님 한복 한 벌과 꽃 코고무신을 선물로 받고 명절 보너스도 받아서 신이 나서 고향으로 향한다. 딸이 올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았는지 어미가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기차에 내려서며 어미를 보고는 현옥이 반가워 달려간다. “엄마!” 딸을 바라보는 어미의 눈이 다정스럽다. “어서 오니라. 오니라 고생 했제?” “아니요. 이 추운데 뭐할라고 나왔어요?” “춥기는? 하나도 안 춥다.” 현옥이 어미의 언 손을 잡으며 어미를 바라보자 눈시울이 붉어진 어미의 눈과 마주친다. “우리 현옥이. 인자 처녀티가 나는 구마.” 그 말이 쑥스러워 현옥은 웃음으로 넘기며 어미와 함께 역을 나와 집으로 향한다. 명절을 지내려 경현도 먼저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찬옥과 방안에서 얘기를 나누다 대문소리에 두 사람은 방에서 나와 어미와 함께 들어서는 현옥을 보고는 반긴다. “작은 누부야!” “경현아! 잘 지냈나?” “어. 누부야도 잘 지냈제?” “응.” 찬옥이도 현옥을 반갑게 맞는다. “현옥아! 왔나?” “언니야! 잘 있었나?” “그래.” 작년 추석 이후로 오랜만에 함께 모인 삼 남매는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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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식들을 보고 있는 어미의 마음도 흡족하여 미소를 짓는다. “야들아. 춥다. 방으로 들가자.” 모두가 방으로 들어가 앉는다.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현옥이 들고 온 가방 안에서 선물을 꺼내어 어미 앞에 내민다. “엄마! 이거 엄마 선물요.” “이기 뭐꼬?” “열어보세요.” 딸에게서 건네받은 가방을 펼쳐 보니 그 안에 꽃 코고무신과 함께 한복이 한 벌 들어있었다. 옥색 빛이 감도는 반회장저고리와 치마를 꺼내어 펼쳐보며 어미는 환하게 웃음 짓는다. “아이고. 색도 참말 곱다.”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다마다. 니 덕에 내가 호강을 한다.” 어미는 딸이 가져온 선물에 오랫동안 기뻐하며 흐뭇해했다. 그런 어미를 보며 현옥의 마음도 한껏 기쁘고 즐거웠다. 힘들게 고생은 하지만 그만큼의 보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어미의 웃는 얼굴을 보니 삼 남매의 마음도 흐뭇하기만 하다. 어미와 더불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명절을 보내고 현옥이 다시 부산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어미는 홀로 떠나보내는 딸이 걱정되어 조심스럽게 묻는다. ?현옥아! 인자 니 혼자 객지에 떨어져 있지 말고 엄마가 니 따라서 부산으로 이사 가까?“ “부산으로요?” “그래. 니 혼자 살라고 발버둥치는 거를 보니까 내 맴이 편치 않아 그런다. 엄마가 가서 밥이라도 해주면 니 먹는 거는 걱정 안 할거 아이가.” “그거야 그렇기는 한데...... 당장에 집을 구할 돈이...... 엄마, 조금만 더 기다려요. 내가 내년에는 어떻게든 돈을 모아서 집구해서 엄마 내려오시도록 할게요.” “그래. 니 말뜻 알았다. 내도 부지런히 돈 모아 볼 테이까 니 혼자 다 책임질라고 무리는 하지 마라. 알았나? 니 몸이 전 재산이다. 그라니 니 몸부터 챙기그라. 알겠제?” “예. 엄마. 걱정마요.” 그나마 강 영감에서 얻은 돈으로 장만해서 살고 있던 집도 경현의 학비와 생활비로 야금야금 빚을 진 것이 있어 그 빚을 탕감하고 나니 남는 것이 없었다. 겨우 쫓겨나는 신세만 면하여 근처에 방 하나를 얻어 이사를 했던 것이 현옥이 서울에서 내려온 그해였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기에 현옥은 꿈을 버리고 돈을 벌기위해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가진 것 한 푼 없이 현옥만을 믿고 어미는 딸의 곁으로 가려 하였다. 현옥역시 어미가 곁에 있어주었으면 했으나 혼자 힘으로 가족들을 부양할 여력이 부족해 어미에게 당분간만 참고 있으라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 거라 희망을 가지며 두 모녀는 무언의 답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은 나선 현옥이 역으로 향할 때 어미가 동행을 했다. 날씨가 추우니 나오지 말라 한사코 말렸으나 어미는 딸이 혼자서 역까지 가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져 기어이 동행을 하겠다 고집을 부린다. 찬옥과 경현이 가겠다는 것을 극구 만류하고 직접 딸의 동행자로 역까지 따라나선 희연은 현옥과 걸으면서도 그다 지 할 말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에 서로를 챙길 뿐. 기차역 대합실에서 어미와 인사를 나누고 현옥은 기차에 오른다. 마지막까지 딸의 모습을 지켜보고 서있는 어미는 기차가 출발한 한참 후에야 느긋한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매서운 한파라고는 하지만 희연은 겨울바람이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름 잘 지내고 있다고는 했으나 무척 야윈 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려오는 것이 어미 마음, 홀로 외지에서 고생하는 딸만 생각하면 마음 한 켠이 무거워져 온다. 어떻게든 현옥을 뒷바라지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마음만큼 삶이 녹록지 않은 것이 서글프기만 하다. 딸을 보내놓고 혼자 돌아서는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지고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오로지 현옥에게 미안한 마음만이 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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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떠난 기차가 중간쯤에 도착했을 무렵 현옥이 타고 있는 열차 칸으로 역무원이 들어서자 승객들은 역무원에게 기차표를 꺼내어 보이고 역무원은 승객의 차표를 일일이 점검을 하였다. 준비성이 철저한 현옥이 제 차례가 되기도 전에 미리 표를 준비하고 대기하려고 코트 앞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표를 꺼내려고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깊지 않은 주머니 속에서 빠져 나온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순간 현옥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나타났다. ‘이상하다. 분명히 내가 여기다 넣었는데.’ 마땅히 있어야 할 표가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 다른 곳에 넣어 놓고 착각을 했는지 몰라 현옥은 입고 있는 옷의 호주머니를 열심히 손으로 뒤져보고 들고 있는 가방까지 샅샅이 찾아보았다. 그러나 기차표는 어디에도 없었다. 차츰 제 앞으로 다가오는 역무원을 보면서 현옥의 얼굴은 당혹감을 넘어 초조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기차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고 있는 사이 좌석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젊은 사내가 현옥을 향해 말을 건넨다. “저 혹시 기차표가 없어졌습니까?” “예.” 현옥의 얼굴이 상기되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며 간신히 대답을 한다. “분명히 앞 호주머니에 넣었는데…….” 현옥이 다음 말을 이을 틈도 없이 역무원이 두 사람 앞에 서서 표를 내어 놓으라 한다. 현옥은 뭐라 말도 못하고 역무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사내는 역무원에게 자신의 기차표를 내밀며, “이 차표는 이 아가씨 거고 저는 방금 전에 급하게 기차에 올라오느라 차표를 못 샀습니다.” “일행입니까?” 역무원은 미심쩍은 얼굴로 사내를 째려보며 묻는다. “예.”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집요하게 묻는다. “그런데 왜 따로 온 겁니까?” “결혼 문제로 속이 좀 상해서. 혼자 가겠다는 것을 겨우 붙잡느라 타고 온 기차에서 급하게 내려서 오다 보니 차표 구입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한번만 봐 주십시오. 제 일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 친구 놓치면 제가 평생 후회를 할 지 몰라서 그럽니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역무원을 향해 애원을 하고 있는 사내를 보며 현옥은 어안이 벙벙했고 남자의 다급한 사정을 알았다는 듯 역무원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남자와 눈빛을 주고받는다. “일생이 걸린 문제라고 해서 그냥 봐드립니다.” 두 사람 사이의 눈빛교환과 마찬가지로 돈을 주고받으며 역무원은 사내에게 차표 값을 받아낸다. “아가씨! 애인 괜찮은 사람이구만 그만 속 썩이고 한번 용서해 주소.” 역무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현옥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옆에 있는 남자의 눈웃음을 보며 자신이 무슨 계략에 빠진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일이 잘 해결이 되었기에 현옥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맞은편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에게 미안하고 쑥스러워 얼굴이 붉어진다. 자신을 보고 웃는 남자를 향해 간신히 입을 열어, “선생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남자는 현옥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기차가 부산역 플랫폼 안으로 들어와 멈추었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를 배려하며 일어나서는 통로를 지나 기차에서 내렸다. 현옥이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남자에게 전한다. “저기 선생님!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차표 값을 갚아드려 하는데 주소를 알려주시면…….” 남자 쪽에서 현옥의 말을 잘라버린다. “혹시 배 안고픕니까?” “예?” “제 배가 요동을 칩니다. 같이 식사나 하고 헤어집시다.” “아니…….저는…….” “부담 갖지 마시고 그냥 식사 친구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한 현옥이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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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현옥이 제안하고 싶었던 말이다. 아까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한 끼 식사라도 대접을 하고 싶었으나 기차표 살 값만 남겨놓고 가진 돈 전부를 어미에게 주고 왔으니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라 대접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런 자신이 부끄럽고 초라해 주소만 알아내고 도망치듯 피하려고 했는데 그가 현옥을 붙잡은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우선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뭐하고 해서 복잡한 마음으로 그를 따라 나선다. 앞서 걷는 그를 따라 들어선 곳은 역 앞에 위치한 중국집이었다. 한산한 가게 안은 몇 개의 테이블이 덩그맣게 놓여 있었고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라 가게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카운터에 멍하니 앉아 있던 주인장이 두 사람이 들어서자 인사를 한다. “어서오이소.” 가게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로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가서는 의자를 빼며 현옥이 안기를 기다린다. 난생처음 받는 대접이라 어색하였으나 기분은 좋았다. 현옥이 자리에 앉자 남자는 현옥의 맞은편에 앉으며 묻는다. “뭐 드시겠습니까?” 벽에 써 놓은 메뉴 판을 훑으며 현옥에게 묻는다. “저는....그냥 자장면이요.” 현옥은 남자와 다르게 메뉴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스스럼없이 대답을 한다. “메뉴판 보고 고르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자장면이면 됩니다.” 현옥이 살짝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남자는 메뉴 판에서 눈을 떼고는 주문을 한다. “여기요! 자장면 두 그릇이요.” 주인장은 주방을 향해 '자장둘'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어색하게 마주앉은 두 남녀. 현옥이 별달리 할 말이 없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댁이 부산입니까?”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남자 쪽이었다. “아닙니다. 집은 경주고요 명절이라서 부모님 뵙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그라믄 직장이 부산입니까?” “예에.” “직장이 어딘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냥....아무데나 다니고 있습니다.” “아아.... 그렇습니까? 아무데나. 그런데 아무데나 라는 직장 이름도 있나 봅니다.” 순간 현옥은 자신도 모르게 피씩 웃음을 웃었다. “참! 짓궂으십니다.” “그랬습니까? 저는 진지하게 드린 말씀인데요.” 굳어있는 현옥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나름 유머를 던진 것인데 그 말에 웃음을 웃는 현옥의 모습이 순진하게만 느껴진다. 현옥을 보고 있는 그는 그녀에게 끌리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이끌리는 감정은 자신이 기차에 올랐을 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기차에 올라 남은 자리를 찾아 앉은 곳에는 젊은 여인과 중년의 여인이 함께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시골아낙의 모습을 한 중년여인과는 달리 남색반코트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가지런히 다리를 모은 채 조신하게 앉아 있는 젊은 여인이 남자의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앉은 여인은 무심한 눈길로 맞은편에 앉는 사람들을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유리창 너머로 고정을 시킨다. 멈췄던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여전히 현옥은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현옥의 옆에 앉은 중년여인은 피곤에 지쳤는지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들어 있었고 남자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남자의 눈은 자꾸만 현옥에게로 향한다. 특별하게 예쁜 인물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얼굴인데 어딘가 귀티가 나 보이는 것이 자꾸만 시선을 끌게 만든다. 남자는 계속 여인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민망하여 창밖을 바라보다가도 곁눈질로 여인을 계속 주시를 하고 있었다. 수수한 외모에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정한 옷차림을 보며 남색코트가 얼굴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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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눈에 들어 온 현옥이 쉽게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현옥은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내리깔고 빈 탁자만 노려보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이야기를 꺼낸다. “아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차표 값은 제가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계신 곳 주소를 알려주시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것보다는 제가 받으러 가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직장이 어딘지 알려주세요. 한 달 뒤에 제가 받으러 가겠습니다.” “예에? 제 직장으로요?” “네. 안됩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별로 내세울만한 직장이 아니라서 창피해서 말해 드리고 싶지가 않습니다.” “저런! 외모는 신여성이신데 생각은 의외로 고루하십니다.” “……?” “이런 시국에 직장을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요. 무슨 일을 하든 어디에 다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하겠다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수치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직업에는 귀천은 없습니다. 저 또한 직업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대답을 한다. “실은 신발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순간 남자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현옥이 혼자만의 착각일까? 자존심강한 현옥이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자신을 까발려 놓고 있다는 것에 놀라며 괜히 사실대로 말을 했다는 후회가 든다. 어차피 한번만 더 만나면 끝날 사이인데 스스럼없이 대답을 해버린 자신이 어리석게만 느껴진다. 낯선 사람에게는 말도 못 붙이는 자신이었는데 왜 이 남자에게는 자신의 치부를 보였는지 의문이 든다. “그래도 멋있는 여성이십니다.” 자신을 칭찬해주는 남자의 눈빛이 다시 이전상태로 돌아 온 듯 했다. 정말 현옥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어쨌든 자신을 인정해주는 남자가 고맙기는 했다. 자신의 자존심을 되살려줘서. 다시 용기를 얻은 현옥이 이번에는 남자에게 묻는다. “제 직업을 아셨으니까 선생님도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지 말씀을 해주셔야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공평하지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시네요.” “예?” 무슨 뜬금없는 말인지 현옥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지금 겨울철에 제일 한가한 사람입니다.” 현옥은 도대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주인장이 음식을 들고 와서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김이 나는 자장소스에 면을 비비면서 남자가 다시 묻는다. “어떻게 생각났습니까?” “예? 무었을요?”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치며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현옥을 바라보자 조금 전의 대화가 생각이 났다. “아아? 선생님 직업요...” “보십시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잘 맞추시잖습니까?” 여전히 알 수 없는 남자의 대답에 현옥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장난기가 발동한 남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선생님! 그렇게 부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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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눈치를 챈 현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정말 선생님이 맞습니까?” “네. 국민학교 선생님 입니다.” “진작 말씀을 하시지 왜 스무고개를 하면서 사람 약을 올리십니까?” “내가 말하지 않아도 계속 선생님이라 부르기에 저는 당연히 알고 부르는 거라 생각을 했는데요.” 장난스런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며 대답하는 남자를 보며 현옥도 웃음을 웃는다. 두 사람은 그렇게 기분 좋게 얘기를 나누며 배를 채우고 식당을 나와 전차가 지나가는 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정류장 앞에 선 두 사람, 말없이 전차가 지나는 것을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남자가 현옥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뭔가 잊은 것이 있다 했는데... 채무자께서는 저한테 직장주소를 알려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제가 빛을 받으러 가지요.” “아아!” 현옥이 가방을 뒤지며 종이와 펜을 꺼내 회사이름과 주소를 적은 종이쪽지를 건넨다.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도 안 했습니다. 제 이름은 장종훈 입니다. 장종훈!” “네.” “그쪽 이름도 말씀을 해 주셔야지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쪽지 좀.” 현옥은 종훈에게 건넸던 종이쪽지를 되받아 주소아래 제 이름을 적어서 다시 종훈에게 넘긴다. 흰 종이에 또박또박 쓰인 글씨는 잘 썼다기보다는 글씨가 가지런하게 나열된 것이 깔끔한 글씨체였다. 종훈이 종이에 적힌 현옥의 이름을 천천히 발음해본다. “박 현 옥 씨!” 제 이름을 발음해주는 종훈을 바라보기가 쑥스럽다. “알겠습니다. 현옥씨. 제가 한달 후에 찾아뵙도록 하지요.” 서로의 방향이 틀려 결국 이곳에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며 현옥이 먼저 전차에 오른다. 전차가 출발할 때까지 그곳을 지키고 섰던 종훈이 멀어져 가는 전차를 바라보다 제 갈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옥은 전차에 올라 집으로 오면서 남자를 생각한다. 저보다 나이가 한참 많아 보이는 오빠 같은 사람. 깔끔하게 차려 입은 양복 위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걸치고 있었던 그는 누가 봐도 교사 타입이었다. 단정한 외모에 평범하게 생긴 모범생 같은 얼굴로 가끔은 짓궂은 장난을 치기 좋아하는 웃는 얼굴의 종훈이 현옥은 싫지는 않았다. 황금 같은 휴일이 지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현옥은 변함없이 일을 하면서 힘들고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종훈이 현옥을 찾아왔다. 퇴근시간이 가까울 무렵 반장이 현옥에게 다가와 손님이 찾아왔다며 나가보라 이른다. 현옥은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일까 궁금해 하며 밖으로 나갔다. 공장 앞마당에 코트를 걸치고 선 사람은 다름 아닌 종훈이었다. 그제서야 그와의 약속이 기억이 난 현옥은 그에게로 다가가자 종훈이 현옥을 알아보고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다. “현옥씨! 잘 지냈습니까? 저 기억하시지요?” “예.” 당황한 표정으로 서있는 현옥을 보며, “제가 꼭 찾아온다 하지 않았습니까? 잊으셨나 봅니다.” “그게 아니라 좀 갑작스러워서.” “그렇지요. 한 달이라 했을 뿐 날짜를 정하지 않은 것이라 좀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아직 퇴근시간이 되지 않아서...조금 기다리셔야 할건데요.” “아. 그러지요. 몇 시가 퇴근입니까?” “일곱 시요.”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종훈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한다. “예. 여기 아래로 내려가면 다방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서 좀 기다려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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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거기로 가 있을 테니까 마치고 천천히 나오십시요.” “예.” 현옥은 다급하게 다시 공장 안으로 들어가고 종훈은 현옥이 말한 다방을 찾아 길 아래로 내려간다. 일곱 시를 조금 넘겨 현옥이 다방으로 들어선다. 종훈이 앉아있는 자리를 발견하고 급한 걸음으로 그쪽으로 다가가 종훈의 맞은편에 앉는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낭만이 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말에 현옥의 얼굴이 붉어진다. “저녁식사 아직 안 하셨지요?” “네. 슬슬 배가 고파 옵니다.” “가세요. 제가 맛있는 저녁 대접해 드리께요.” “얻어먹어도 되겠습니까?” “됩니다.” 두 사람은 다방에서 나와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저녁시간이라 식당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침 구석진 곳에 한자리가 나서 두 사람은 그쪽으로 자리를 잡아 앉았다. 바쁜 식당주인이 다가와 주문을 받고는 사라진다. 해장국을 파는 집이라 달리 주문할 것이 없어 국밥 두 그릇을 시켰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종훈이 현옥에게 물었다. “저야 뭐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전부인데 별 꺼 없습니다.” “짬짬이 제 생각도 좀 하셨습니까?” “예?” 현옥이 그의 말에 놀란 반응을 보이자 종훈은 특유의 장난기 어린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이런! 제 생각을 한 번도 안 하셨나 봅니다. 저는 꿈에서 까지 현옥씨를 생각했는데. 서운합니다.” “…….” 현옥이 뭐라 말도 못한 채 얼굴만 붉히고 앉아있었다. 수줍어하는 현옥을 종훈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지켜보며 흐뭇해한다. 말없이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로 식당주인이 국밥 두 그릇을 들고 와서 각자 앞에 놓고 급히 돌아간다.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쉴 새 없이 그릇을 나르는 식당주인의 몸짓은 분주하기만 했다. 침묵 속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고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다시 다방으로 돌아왔다. 따듯한 차를 주문하고 어색한 침묵을 지키며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다. 주문했던 차가 나오고 두 사람이 한 모금씩 마시고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오늘은 현옥씨하고 진지한 대화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 종훈이 무슨 말을 꺼낼까 은근 마음이 조려진다. “현옥씨 보다시피 제가 좀 나이가 많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노총각이지요.” “…….” “사실 제 나이가 많다 보니 주위에서 자꾸 장가가라고 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직 제 마음에 드는 상대를 못 만났습니다.” “…….” 현옥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나 싶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처음 현옥씨를 기차 안에서 보고 제 마음이 많이 설레었습니다. 현옥씨는 못 느꼈겠지만 요.” “…….” “제가 한달 후에 찾아온다고 했던 것은 일종의 핑계였습니다. 그 한 달 동안 현옥씨가 제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장난기 가득했던 그의 얼굴이 이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다. 종훈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 인연으로 현옥씨를 받아들이겠다고. 그런데 그 한 달 동안 제 뇌리에는 현옥씨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했습니다. 그래서 결심을 하고 현옥씨를 찾아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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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뜻을 안 현옥의 머리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현옥씨 마음이 내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저의 뜻을 받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무방비상태인 현옥은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은 종훈을 잊고 있었고 처음 인연에도 이성이라는 생각보다 친근한 오라비 같은 생각으로 그를 바라봤기에 자신과 다른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그에게 표현해야 하는데 적당한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는 단어들뿐이었다.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결혼이라는 단어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그것도 이유이거니와 우선 지금의 현옥의 입장이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결혼은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궁핍한 삶,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한 어미를 조금이나마 편하게 모시고 싶은 것이 현옥의 마음이었다. 그뿐 아니라 아직 찬옥도 시집을 안 갔는데 자신이 먼저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여러모로 생각을 정리한 현옥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는...저는 아직 마음이 없습니다. 좋은 분이라는 거 알지만 저한테는 과분한 상대입니다.” “과분하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현옥씨가 어때서요? 매정하게 뿌리치지 마시고 차분하게 생각을 좀 해보십시요. 무 자르듯 단칼에 쳐내지 마시고요.” “…….” “제가 좀 서두는 감은 있습니다. 그만큼 현옥씨를 놓치고 싶지 않은 제 마음이니 이해해 주시고 차분히 생각을 좀 해주십시요. 부탁 드립니다.” 종훈이 정중하게 부탁을 한다. 그러나 현옥은 어떤 대답도 않고 굳은 표정으로 종훈을 바라본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그만 들어가시고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생각을 다시 한 번 해주십시요.” 어색한 분위기로 두 사람은 다방을 나와 서로의 갈 길로 헤어진다. 종훈은 밤길이 어두워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했으나 현옥은 한사코 뿌리치며 종훈을 쫓아 보낸다. 집을 알게 되면 그가 찾아올 것이 뻔하기에. 현옥에게 쫓기듯 돌아가는 종훈의 발걸음이 무겁다.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그는 집으로 향하는 길을 나섰다. 종훈이 돌아가고 현옥이 집에 들어와 멍하니 앉았다. 간곡하게 부탁하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 다시 돌이켜 생각을 해봐도 역시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성으로의 감정은 아직은 없으나 어쩌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됨됨이를 봐서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을 하지만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상대는 아니라는 판단이 든다. 너무 과분한 것은 사실이었다. 욕심이 안 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제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그를 멀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자격지심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현옥은 정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늦은 잠을 청한다. 몸은 피곤한데 머릿속은 온통 잡생각들로 가득 차 쉽게 눈이 감아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종훈은 다시 찾아 왔다. 이미 마음을 접어버린 현옥의 태도는 완강했다. “찾아오지 마십시요. 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현옥씨.” “선생님은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실 수 있는데 왜 하필 배운 것 없고 능력 없는 저 같은 사람을 선택하려 하십니까?”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조건 좋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옥씨가 좋아서 현옥씨가 제 인연이라서 그래서 현옥씨를 선택하는 겁니다.” “선생님은 저를 모르십니다. 저를 선택한다는 것은 제 가족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버는 돈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계시는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남동생까지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것이 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제 식구들을 버려두고 저 혼자 살자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감당을 하실 수 있습니까? 괜히 어린 제 가슴에 상처주지 마시고 그만 돌아가십시요. 다시는 선생님 만나지 않겠으니 찾아오지도 마시고요.” “책임지겠습니다. 현옥씨 가족까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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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싫습니다. 제 가족은 제가 책임을 질 겁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제 힘으로 지킬 겁니다.” 현옥이 매몰차게 정훈을 뿌리치고 돌아선다. 그러나 종훈은 포기를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현옥을 찾아와 만나주기를 애원했으나 현옥은 거절하였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기에 같이 일하는 친구들에게 부탁을 한다. “아저씨. 그만 오세요. 현옥이 인자 여기 없습니다. 고향으로 갔십니다.” “현옥씨가 그러라고 했습니까? 그런 거짓말 안 통합니다.” “참말입니다. 아저씨가 자꾸 찾아와서 현옥이 마음 흔들어 놓는 바람에 일도 제대로 못하고 그래서 반장한테 혼도 났어요. 결국은 견디다 못해서 아저씨 얼굴 못 보겠다면서 다시 경주로 가버렸어요. 그러니 인자 그만 찾아오세요.” 결국 종훈이 지고야 만다. 거짓일거라는 걸 알면서도 돌아서야만 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이토록 완강하게 거부하는 현옥의 마음을 더는 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자신이 마음을 접는 수밖에 없었다. 일방적인 사랑이 상대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제 마음을 접으면 된다고 종훈은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리고 종훈은 다시 현옥을 찾아오지 않았다. 종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현옥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런 마음을 쓸어버리기라도 하듯 일에 몰두하며 오로지 일을 배우는데 정신을 쏟았다. 이제는 제법 기술을 익혀 다른 아이들과 나란히 서서 꽃을 찍어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보조로 일을 할 때 보다 간주는 조금 더 많아지고 대우도 보조일 때 보다 한결 나아졌다. 이제 기술을 가졌으니 어디에서도 옳은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 무렵, 같이 일을 하던 여공들 사이에서 이직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 몇 군데 안 되던 신발공장이 차츰 늘어나면서 기술을 가진 이들을 뽑는 곳이 많아졌다. 이곳보다 더 큰 곳으로 이직을 하게 되면 기술직이라 간주를 배로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귀가 솔깃해진 현옥도 이직을 생각했다. 딸의 곁에 오고 싶어 하는 어미를 생각해서 전셋집이라도 마련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기에 더 나은 곳 돈을 더 많이 주는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포기하고 돌아선 종훈이 다시 찾아올까 싶은 염려도 있어 아무래도 이직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하고 몇 군데 면접을 보러 다녔다. 별도로 시간을 낼 수가 없으니 야간을 하고 온 날에 시간을 내어 면접을 볼 수밖에 없었다. 현옥 외에도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다. 기술을 가진 사람도 기술이 없는 사람도 제 나름 포부를 가지고 입사지원을 했다. 모두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같은 일이더라도 더 많은 돈을 주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현옥 역시 그 같은 이유로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는 입장, 그렇게 본 면접이 운 좋게 붙어 수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당당히 합격을 한다. 게다가 기술을 가진 기술자였으니 대우는 더욱 좋은 편이라 처음 간주를 받으니 그전의 직장에서보다 두 배는 족히 되었다. 그러나 뭐든지 좋은 법은 없는지 인격적인 대우는 그녀에게 사치였다. 단체로 하는 일이라 누구 한 사람의 실수가 있어도 단체로 혼이 나고 계급을 무시 못 하다 보니 위에서 누르면 그 여파는 자연 아래로 퍼져 상사의 분풀이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가끔은 위 상사에게 혼이 난 반장이 여공들을 앞에 세워 놓고 단체로 기합을 주면서 고무신으로 머리를 때리며 욕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수모를 당할 때면 현옥은 맞은 아픔보다 수치심이 드는 것을 더 못 견뎌 했다. 저보다 잘난 것 없는 인간이 제 지위를 이용해 아랫사람을 마구대하는 것에 분노로 치를 떨면서 그래도 대들지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자신을 볼 때면 한심하고 수치스러웠다. 치사하고 더럽다는 욕을 하면서도 돈이라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수모를 받아 넘겨야만 했기에 비참한 눈물을 삼켜내며 이를 악물고 버텨야만했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 날을 되풀이 하면서 현옥은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어미를 모셔와야겠다는 일념에서 현옥은 새로 옮긴 공장에서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현옥의 노력이 보였던지 책임자가 현옥을 눈 여겨 보고는 칭찬을 해주었다. 일도 일이지만 지각, 결근을 모르고 남들보다 조금 서둘러 출근하여 여유 있게 교대를 해주는 등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어 고가점수도 올려주어 일당도 조금씩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현옥은 제 몫의 일을 착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어제 내린 비에 모든 것이 씻겨 간 듯 하늘이 온통 유리알처럼 푸르고 투명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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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막 끝낸 현옥이 동료들과 잠시 수다를 즐기고 있었다. 유리문으로 내다본 선명한 하늘 위로 나른한 정오의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시리도록 눈이 부신 파란하늘은 스무 살내기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도록 흔들어댄다. “하아! 날씨는 이래 좋은데 나들이 한번 못 가고 공장에 쳐 박혀 일이나 하고 있는 우리 신세가 참말 한심하다.” “우리 밖에 나가서 일광욕이라도 좀 하까?” “치아라. 햇볕에 얼굴 탄다.” “니는? 햇빛 보는 기이 사람한테 얼마나 중한지 아나? 자고로 사람이 햇빛을 많이 쬐야 병도 안 나는 기라.” “됐다. 마! 나는 햇볕에 얼굴 타는 거보다 차라리 병 있는 기이 낫겄다.” “가시나! 말도 참말로 밉상 맞게도 한다.” 보기만하면 서로 티격태격 거리는 동료들을 보면서 미소 짓고 있는 현옥을 누군가가 불렀다. “박현옥씨!” 현옥이 돌아 본 곳에 한 남자가 서서 현옥을 보며 웃고 있었다. 통통한 몸매에 살짝 나온 배, 둥글둥글하게 생긴 얼굴은 남성스럽기 보다는 정이 가는 편이라고 할까, 아무튼 둥근 얼굴에 입 꼬리를 올리고 웃고 있는 모습은 마치 개구쟁이 같아 보였다. “나 물 한잔 좀 부탁합니다.” 그는 현옥에게 물 잔을 들어 보이고는 도안실 안으로 사라졌다. 평소에도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고 다니는 박계장은 여공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옆집 오빠 같은 푸근한 인상과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편이라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박계장님이 현옥이 니한테 호감이 있는 갑다. 물심부름까지 시키고.” “현옥아! 퍼뜩 갔다 드리라. 박계장님 목 타겠다.” 현옥이 짓궂게 놀리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물 잔을 들고 도안실 안으로 들어간다. 점심시간이라 도안사들 중 몇 사람만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현옥은 들고 들어간 물을 박계장 책상에 내려놓았다. “계장님! 물가지고 왔습니다.” “오우! 우리 현옥이 땡큐.” 박계장의 개구진 얼굴이 현옥에게로 향한다. 과장된 행동을 하는 박계장을 바라보며 현옥이 웃어 보이고는 뒤돌아서 나가려 하는데 뒤에서 다시 박계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박현옥씨. 그러고 보니까 나하고 같은 성씨네.” “계장님은 그거를 인자 아셨습니까?” “그렇네. 내가 와 인자서 그 생각을 했을까?” 현옥이 피씩 웃는다. “그라면 내보고 오빠라고 불러주면 안되겠나?” 역시나 장난 섞인 농담이 시작된다. “저한테 오빠라는 소리 듣고 싶습니까?” “그래. 내한테 여동생이 없어서 그랬는데 현옥이 니가 내를 오빠라 불러 주면 좋겠다.” “알았어요. 앞으로는 오빠라고 불러 드리께요.” 현옥은 별 뜻 없이 그의 장단을 맞춰주고 사무실을 나온다. 달콤한 휴식이 끝나고 오후 작업이 시작되었다. 기계처럼 몸을 움직여가며 똑같은 작업을 수십 번을 반복하고 있는 여공들. 한 작업대에서 같이 작업하는 일이 익숙해져 제법 손발이 척척 맞아나간다. 처음 실수하며 혼이 났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는 실수도 요령껏 잘 무마시킬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겨났다. 실수 하나에 단체로 벌을 받는 수치스러움을 면하기 위해 서로의 실수를 덮어 줘가며 서로가 서로를 챙겨준다. 돈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면서 현옥은 경주에 있는 어머니를 모셔오기 위해 본격적으로 집을 알아보러 나서기로 한다. 그러나 일밖에 모르는 현옥이 기껏 나다닌 곳이라고는 하숙집과 공장이 전부라 몇 년이 흘렀어도 이곳 지리조차 알지 못하여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떻게 집을 알아봐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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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했다. 현옥이 아는 길이라고는 오로지 공장과 하숙집이 전부이다 보니 지리도 잘 모르는 이곳을 혼자서 헤매고 다닌다는 것이 불안하여 도움을 요청할 곳을 생각해 본다. 또래의 친구들에게 부탁을 하면 당연히 같이 다녀 주기는 할 것이나 현옥은 그들보다 좀 더 믿음직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이가 박계장이었다. 자신을 오빠라고 불러 달라 했던 그 사람. “그래. 박계장님한테 부탁을 좀 해보자.” 또래의 철부지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것 보다는 결혼한 사람이 오히려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현옥은 박계장에게 부탁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처음 장난삼아 장단을 맞춰주었던 오빠라는 호칭이 박계장은 진심이었던가 보다. 박계장은 늘 작업실에 들어 올 때면 현옥을 보고는 "우리 동생. 수고한다." 며 친 오라비 같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어깨를 툭툭 쳐주는 등 마음을 표현해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면대면 대하다 차츰 두 사람 사이에 신임이 두터워지면서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편안한 사이가 되었다. 퇴근시간이 되어 도안실 직원들이 사무실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현옥은 그 때를 기다리고 있다 박계장이 나오는 것을 보고 다가갔다. 앞서 나간 사람들보다 조금 쳐져 나온 박계장 옆에는 현옥과 안면을 익힌 젊은 청년이 서있었다. 현옥은 그를 무시하고 박계장을 향해 말을 건넸다. “오빠! 제가 부탁을 좀 할 것이 있는데요.” 박계장은 여전히 개구진 미소를 지은 채 현옥을 바라보며 대답을 한다. “좋다. 오빠 동생 된 기념으로 부탁을 들어 준다. 무슨 부탁이고?” 박계장 옆에 서있는 젊은 도안사를 의식하며 현옥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경주에 살고 계신 어머니가 부산으로 이사 오시고 싶다 캐서 집을 좀 구해 봐야 하는데 내가 아직 여기 길을 몰라서 그러는데 길을 좀 알려 주실 수 있는지 해서요.” “그런 거 쯤은 당연히 이 오빠가 해줘야제. 걱정마라. 같이 찾아보자.” 흔쾌히 허락해주는 박계장 덕분에 현옥은 한시름 놓게 되었다. 현옥이 집을 구하러 다닐 시간이 별도로 나지 않아 야간 일을 하는 주를 선택해 박계장과 함께 집을 보러 다니기로 약속을 하고 야간 주가 시작되어 일을 마치고 아침에 퇴근을 하여 박계장과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향했다. 현옥은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박계장을 향해 다가서다 그 옆에 한 사람이 같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 한다. 현옥이 다가와 서자 박계장은 “동생 왔나?” 하며 현옥을 반겼다. 현옥의 눈길이 옆에 서있는 남자에게 멈추자 박계장은 넉살 좋게 웃으며, “내가 같이 가자고 해서 데리고 왔다! 알제? 여기는 이성찬이다.” 마른체형이라 그런지 박계장과 엇비슷해 보이는데도 키가 훨씬 커 보이는 성찬이 현옥을 보며 쑥스럽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한다. 현옥도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다. “동생. 놀랬나? 둘보다는 셋이 다니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데리고 왔다. 괜찮제?” “예에. 나야 고맙지요.” “그라면 됐다. 서둘러서 돌아 다녀 보자.” 세 사람은 주택이 즐비한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대문에 붙여 놓은 '전세, 사글세'라는 글자를 찾아 골목을 뒤지고 다닌다. 오전 내내 골목 구석구석을 찾아보았으나 신통한 결과는 없었다. “마땅한 집이 쉽게 나오겠나. 여러 날을 둘러 봐야제.” 급한 마음에 서두르는 현옥을 달래려 박계장이 먼저 꺼낸 말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접고 내일 다시 찾아보자. 이따가 또 출근할라믄 피곤할거니까 집에 가서 잠시라도 눈 좀 붙이고 나오는 게 좋겠다.” 현옥은 두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야간하고 피곤할 텐데 제가 어려운 부탁을 드려 죄송하네요.” “그런 소리 마라. 미안할 거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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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거나 좋은 집이나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현옥의 바람만큼이나 박계장도 똑 같은 마음이었다. 세 사람은 다시 내일 만나기로 하고 우선은 헤어지기로 했다. 일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어야 할 것이니 오전에만 돌아보고 나머지 시간은 피로를 풀기로 하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꼬박 집을 구하러 다닌 끝에 현옥이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게 되었다. 안채와 뒤채가 독립된 공간, 연세 지긋한 할머니가 집주인이었고 식구가 없이 혼자서 살고 있어 큰집이 필요하지 않아 안채를 세를 놓고 자신은 뒤채의 방 하나만 쓸 거라 한다. 출가한 딸의 집에 자주 가는 편이라 집을 비우는 일이 많다고 하니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현옥이 더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어미에게 전보를 쳐서 보내고 보름 후 어미는 조촐한 세간을 싣고 찬옥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내던 가족이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옥의 매일매일은 편안하고 즐겁기만 했다. 어미와 함께 한다는 것이 기뻤고 어미가 차려준 밥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혼자였던 사 년이라는 시간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으나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허전했던 한쪽 구석을 가득히 채워주는 느낌. 현옥은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마음이 뿌듯했다. 희연 역시 그랬다. 그 외롭고 지친 자신의 삶에서 한줄기 빛을 보았고 그 빛을 비춰준 이가 현옥이었기에 딸로 인해 지친 삶을 위로 받게 되었다. 고단하기만 했었던 고향 땅을 떠나올 때도 미련 같은 것은 없었다. 시집오던 날부터 시작되었던 풍파에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 이십여 년의 세월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생각만 해도 처절했다. 가진 것 없이 새로이 시작하는 생활이지만 이제는 삶에 대한 용기가 났다. 혼자서 아등바등했던 가난했던 시절을 지나 장성한 자식들 덕을 보게 되었으니 어미의 삶에도 보람은 있었다. 물론 넉넉하게 살지는 못하지만 이제는 배고픔쯤은 잊을 수 있는 정도의 삶을 살고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한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현옥은 잠에 곯아 떨어져 누가 업어 가도 모를 판이다. 밤을 세고 들어와 식사도 않고 잠이 들어버린 현옥, 어미가 깔아 놓은 깨끗한 이부자리에 몸을 누이고 편안하게 잠든 딸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미의 눈빛에 애잔함이 묻어난다. ‘우리 현옥이가 이래 고생을 하고 번 돈이다.’ 어미는 딸에게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잘해주지도 못했던 어미였는데 원망 한번 하지도 않고 묵묵히 제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던 딸, 이제까지의 시련을 무덤덤하게 견뎌낸 딸이 대견하기도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희연은 곤하게 잠이 든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평온한 얼굴을 내려다본다. 비몽사몽간에도 어미의 손길을 느꼈던지 잠시 움찔하더니만 이내 다시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어미는 잠든 딸이 깨지 않게 방문을 살며시 열고 밖으로 나왔다. 현옥이 잠에서 깨어 난 것은 정오를 한참 넘긴 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야간근무를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일어난 현옥은 방을 나와 어미의 흔적을 찾았다. 이곳 안채는 독채로 되어있어 현옥의 식구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 어디 있어요?” 부엌에서 어미가 나온다. “깼나?” “예.” “퍼뜩 씻어라. 밥 차려 주꾸마.” 다시 어미는 부엌으로 들어가고 현옥은 세면대로 향한다. 마당 끝자락에 돌을 쌓아 놓은 곳에 물 항아리가 자리하고 있었고 세숫대야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세수를 끝내고 물기 묻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방으로 들어가자 뒤따라 어미가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다. “밥 묵어라.” 어미는 현옥 앞에 차려진 밥상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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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엄마는 드셨어요?” “하모. 점심 지난 지가 언젠데? 니 깨울라 카다 너무 곤하게 자고 있어서 안 깨웠다.” “언니는 어디 갔어요?” “여 길도 좀 알 겸 한 분 나가보고 온다면서 나갔다.” “예에.” “국 식는다. 퍼뜩 묵어라.” 현옥이 밥상에 놓인 숟가락을 든다. 깔끔하게 차려진 어미의 밥상. 밥상을 받을 때마다 현옥의 마음은 푸근해진다. 수많은 날을 어미가 지어준 밥을 그리며 굶기를 밥 먹듯 했던 그 시간들. 일에 치여 잠에 치여 하루를 우동 한 그릇으로 때우고 버텼던 지난 세월들. 그때의 배고픔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어미가 차려준 밥상은 소박하면서 정이 넘쳐났다. 어미도 딸도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의 마음은 똑같았다. 서로에게 고마워 한다는 것을. 현옥이 몇 년 만에 되찾은 평온이었다. 일주일간의 야간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현옥이 잠자리에 들려다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어미 앞에 내어 놓는다. “간주 받은 겁니다. 인자부터는 엄마가 관리해요.” 자신이 땀 흘려 노동한 대가로 받은 월급봉투를 한 푼도 건드리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 어미의 손에 쥐어준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월급봉투인가! 희연은 손에 들려 있는 누런 봉투를 들고 두 손 모아 합장을 하며 눈을 감고 기도를 한다. ‘조상님요. 우리 딸이 벌어 온 피 같은 돈 입니더. 부디 복되게 쓰여 지도록 잘 보살펴 주시이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옥이 지난 날 성냥공장에서 받았었던 첫 월급봉투가 생각이 났다. 그때도 지금처럼 현옥은 한 푼도 건드리지 않고 고스란히 봉투를 들고 와 어미에게 건네주었다. 평생 처음으로 받아 든 월급봉투에 어미는 감격을 하여 눈물까지 보이면서, “내 생전에 월급봉투 받아 보는 기이 소원이었는데 우리 현옥이가 에미 소원을 풀어 주는 구마.” 그리고는 지금처럼 똑같이 봉투를 들고 두 손을 합장한 채 기도를 드리던 모습. 그 순간을 어미는 다시 재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에게 하는 기도인지는 모르지만 현옥은 어미의 감사하는 마음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고 그 마음은 더없이 뿌듯했다. “엄마! 내일을 쉬는 날이니까 오늘은 잠 좀 푹 잘랍니다.” “오야.오야! 피곤할 기다. 어서 자그라.” 자리에 눕는 딸을 위해 이불을 덮어 다독거려 준다. 피곤함 속에서 찾아 든 꿀맛 같은 휴일. 한 달에 두 번 유일하게 있는 휴일 중의 하루를 현옥은 말 그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휴일 오후, 어미가 차려준 밥상을 넙죽 받아먹으면서 종일 방구들과 씨름하고 있는데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동생! 집에 있나?”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옥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와 본다. 마당 한 가운데 박계장과 이성찬이 장승처럼 서있었다. 현옥은 뜻하지 않은 두 남자의 방문에 당황하며 인사를 건넨다. “오빠가 우짠 일입니까? 오실 거라 생각을 못했네요.” 현옥이 박계장을 반기자 그 옆에 서있던 성찬이 자신을 드러내며 현옥에게 인사말을 건넨다. “저도 같이 왔습니다.” 방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던 희연이 말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와 본다. 방에서 나오는 희연을 발견하고 현옥과 얘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이 희연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머님!” 희연이 궁금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자 현옥이 나서며 어미에게 두 사람을 소개시켜준다. “엄마! 내하고 같은 부서에서 일하시는 분들 이세요.” 현옥의 소개를 받은 희연은 반가움을 표하며 그들을 맞았다. “아이고. 어서 오시요. 귀한 손님들이 발걸음을 하싰구마.” “먼 길 이사 오시느라 힘드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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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장 특유의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희연을 바라본다. “힘은 무신! 그라고 보이 젊은 두 양반이 우리 현옥이가 입이 닳도록 그래 칭찬하던 그 청년들인 갑다.” “예. 엄마. 제가 말씀 드렸던 그분들 맞아요.” “젊은 사람들이 집구하러 다닌다고 고생을 많이 했다더마. 고맙소. 이래 챙겨주서.” “아입니다. 고생은요.” 박계장이 과장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마루에 좀 올라앉으소. 내 감주라도 좀 내 오꾸마.” “올라오세요.” 현옥이 자리를 청하자 두 사람이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앉는다. 잠시 뒤 희연이 대접할 음식을 가지고 나와 그들 앞에 내려놓는다. “앞으로 자주 놀러 오소. 내 해줄 거는 없다만 밥이라도 같이 묵게.” “예, 어머니!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성찬이 희연의 말에 반색하며 대답을 한다. 말없이 앉아있던 성찬의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온 것이 신기하여 현옥은 성찬을 바라보았다. 수줍게 미소를 흘리고 있던 그와 잠시 눈이 마주치다 현옥이 당황하며 눈길을 돌려 어미를 본다. “엄마! 이분이 내보고 동생하자 한 박계장님요. 같은 성씨라고 내를 동생이라고 불러요.” “참말로 믿음직한 청년 이구마. 인물도 좋고. 그래 장가는 들었는교?” “예. 어머니! 저는 장가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라니 우리 현옥이가 오빠로 받아들인 기구마.” 역시나 넉살 좋은 웃음을 웃는 박계장 이었다. 희연이 그 옆에 있는 성찬을 바라보며, “이쪽은 쪼매 어려 보이는데…….” “예. 어머니! 저는 이성찬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 총각입니다.” “그래요. 훤칠하니 잘 생겼소.” “감사합니다. 어머니!” “손님이 왔는데 변변하게 내 놓을기이 없구마. 시원한 감주라도 좀 자시요.” 소반에 올려 진 감주를 권하는 희연에게 감사를 표하며 두 사람은 그릇을 들어 한 모금씩 들이킨다. 달달한 감주 맛이 입안을 휘감고 목으로 넘어간다. 짧은 시간을 두 사람은 현옥 모녀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저녁이라도 자시고 가지 벌써 갈라고?” “예. 어머니. 밥은 집에 가서 마누라하고 먹어야지요.” 박계장이 대답한다. “다음에는 점심때 한번 오소. 내 밥 한끼 대접할 테니까. 그라고 종종 놀러도 오고.” “예. 어머니! 어머니 귀찮아 하 실 만큼 자주 자주 들리겠습니다.” 이번에도 성찬이 나서서 대답을 한다. “아이고 내사 그래 주믄 좋지를. 건장한 사내들이 이래 찾아 주이까 내 맴이 다 든든 하구마. 아들 맨치로.” “제가 자주 찾아와서 아들 노릇 해드리겠습니다. 어머니.” 넉살을 부리는 쪽은 언제나 박계장이었는데 오늘따라 성찬이 희연에게 넉살을 부리는 모습이 현옥은 자꾸만 껄끄럽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가고 난 후 현옥은 성찬의 행동에 대해 생각을 했다. 박계장과 늘 함께하는 사이라 셋이 어울릴 때가 가끔 있었고 그때마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기만 했을 뿐 오늘처럼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던 그였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별 관심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그가 보인 행동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왜일까? 알 수 없는 찜찜함에 현옥의 마음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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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옥은 어미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와서 별달리 할 일 없이 지내고 있는 중이다. 경주에 있을 때 보다는 행동이 자유로웠다. 남의 이목을 생각해 혼기 찬 딸의 앞길에 혹시나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까 전전긍긍하며 딸을 감시하였던 어미였는데 부산생활을 하면서 조금은 관대해진 편이었다. 경주에서의 생활은 언제나 박씨 종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혹시나 가문에 해를 끼치게 될까 싶어 모든 행동을 자제하며 살았으나 그 곳을 벗어나 아는 사람 없는 이곳에서의 생활에서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 진 탓에 딸에 대한 간섭을 조금씩 덜하게 되었다. 찬옥이 부산에 온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갔다. 그동안 집에만 있었기에 답답함을 떨쳐내려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현옥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일자리를 알아 볼 겸 그리고 길을 좀 알 겸 겸사겸사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기만 도시. 경주 촌구석과는 확연히 달랐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우뚝 서있는 공장의 굴뚝들. 산비탈까지 꽉꽉 들어찬 판잣집들. 구제물품들이 즐비한 시장. 산업화가 진행 중인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모두가 제 할 일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찬옥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공장근처들을 돌아다니며 구인공고문이 나있는 곳을 찾아다니고 있던 찬옥이 어느 공장 앞 철문에 나붙은 공고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상일이 서있는 것이었다. “니 찬옥이. 찬옥이 맞제? 니가 여기는 어떻게…….” 돌아 선 찬옥을 확인하고는 상일이 놀란다. 상일이 서있는 것을 보고는 찬옥의 숨이 멎는듯했다. “경주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는 어떻게 왔노?” “…….” 찬옥은 상일을 마주보고 서있을 용기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삼 년만의 재회.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꼭 삼 년만이었다. 굵은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쳐다보는 상일의 마음이 아려온다.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가 겨우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다. “이라고 섰지 말고 어디 좀 들어가자.” 찬옥이 흐르는 눈물을 소매 끝으로 닦아내고는 매몰찬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나는 니하고 할 얘기 없다.” 찬옥은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상일을 노려보고는 돌아서서 거리를 내달렸다. 잠시 주춤하던 상일이 찬옥의 뒤를 쫓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우며 애원한다. “잠깐만 시간 내라. 니는 할 말 없어도 내는 있다. 내 말 좀 들어도.” “내가 와? 내가 와 니 말을 들어야 하노? 싫다. 싫다고.” 악을 쓰는 찬옥에게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상일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찬옥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근처에 보이는 다방으로 무작정 끌고 들어갔다. 찬옥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다 잡힌 손목이 아파서 마지못해 끌려간다. 두 남녀가 씩씩거리며 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나 사람들의 눈길이 두 사람을 향했다. 그 시선들을 아랑곳 않고 상일은 구석진 자리로 찬옥을 끌고 가 자리에 내던지듯 앉혔다. 여전히 찬옥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렸고 그 눈빛을 고스란히 상일에게 겨눈다. 잠시 흥분했던 상일이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자 여종업원이 다가와 묻는다. “뭐 드실 겁니까?” 상일이 여종업원을 올려다보며 커피 두 잔을 시켰다. 종업원이 가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상일은 찬옥을 쳐다보며 물었다. “부산에는 어째 왔노? 집에서 나온 기가?” “뭐가 궁금한데. 뭐가 궁금해서 내를 끌고 온기고?” “화만 내지 말고 대답해봐라. 니가 여기는 우째 왔노?” “이사 왔다.” “니 혼자?” “엄마하고 같이.” “언제 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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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됐다.” 찬옥의 눈빛은 여전히 이글거렸으나 묻는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을 한다. 좀 전에 왔던 종업원이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와서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이내 자리를 뜨고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지냈노?” “…….” “내가 그렇게 떠난 거는 미안하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쁜 놈!” “그래 안다. 내가 나쁜 놈이라는 거.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니가 아무리 소중해도 내 부모님을 버리면서 까지 선택을 할 수는 없는 거 아이가.” 찬옥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아픔이다. 그를 마주하고 있는 이 자리가 고통이고 슬픔이다. “내가 백 번 잘못했다. 미안하다. 찬옥아! 내가 죽일 놈이다.” “…….” “니하고 헤어지고 나서 내도 많이 아팠다. 숨도 못 쉴 만큼 고통 속에서 지냈다.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진짜 죽고 싶었다. 니가 없이는 살아 갈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죽을 각오까지 했었다.” 그때의 일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고 있는 상일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삼 년 전, 찬옥과 상일이 서로의 감정을 알게 되면서 둘 사이의 사랑은 급속도로 진행이 되었다. 어미를 돕는다는 핑계로 품 파는 일을 계속하면서 찬옥은 어미의 눈을 속이고 상일을 만나고 있었다. 상일 역시 찬옥을 만나기 위해 학교를 마치고는 곧장 집으로 달려오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다. 둘이 함께하는 시간, 오로지 그 시간을 위해 서로가 존재하는 것이었고 그 시간에 서로를 탐닉하며 서로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타인의 눈길을 피해 둘만의 공간으로 숨어들어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갈구하고 있었다. 사랑에 눈이 먼 두 사람. 그들의 사랑은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이 위태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찬옥은 상일을 만나기 위해 숱한 거짓말을 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미 몰래 나가려다 들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나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는 집을 빠져 나오곤 했었다. 오늘따라 어미가 일찍 잠이 들어 조심스레 집을 빠져 나와 상일이 기다리고 있는 그 곳으로 달려갔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에도 추운 줄 모르고 상일을 만나기 위한 일념으로 한달음에 달렸다. 찬옥을 기다리며 먼저 나와 있던 상일은 어둠속에서 찬옥이 뛰어 오는 것을 보고는 마주 달려가 찬옥을 와락 끌어안았다. “춥제?” 찬옥의 옷에 묻어온 찬 기온까지 제 품으로 감싸 안으며 얼어있는 찬옥의 몸을 녹여준다. “니가 안아줘서 하나도 안 춥다.” 어두운 밤길을 달려온 그녀의 볼을 감싸는 상일의 두 손에 찬 기운이 스며든다. 한참을 서로를 의지하며 부둥켜 앉고 있다 서서히 몸이 떨어졌다. 여전히 칼바람은 두 사람 사이를 헤집고 들이쳤다. 상일의 가는 손이 찬옥의 조그마한 손을 잡고는 어둠을 따라 걷는다. 두 사람 사이를 훼방이라도 놓으려는 듯 바람은 더 거세게 몰아쳤다. 상일은 바람을 막아서며 찬옥을 제 등 뒤로 숨긴 채 바람을 맞서며 걸었다. 그렇게 둘이 도착한 곳은 상일이 거처하고 있는 자취집이었다. “미쳤나? 여를 어째 들어가노?” 무작정 따라 온 찬옥은 상일의 걸음이 멈춰선 곳을 보고는 놀란다. “안에 아무도 없다. 방학이라서 다들 집으로 내려갔다.” 상일이 찬옥을 달래며 발걸음을 죽이며 방문 앞에 서서 찬옥을 먼저 방안으로 들여보내고 그녀가 벗어놓은 신발을 들고 방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불빛 없는 어두운 방안을 더듬거리며 이불이 깔려있는 아랫목을 찾아 두 사람이 앉았다. 사물의 형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칠흑같이 어두운 방안에 두 연인의 속삭임이 정적을 깬다. “방학했으면 니도 인자 집에 내려 가야제?” 찬옥이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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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지.” 상일의 대답이 시큰둥하다. “언제 갈거고?” “곧.” “곧 언제?” “와? 니는 내가 빨리 갔으면 좋겠나?” 찬옥이 따지듯이 묻자 상일은 기분이 언짢아져 툭 쏜다. “와 화를 내는데?” “니 말투가 그렇다 아이가!” “내가 뭐라 캤다고? 언제 갈 건지 물어 본 기이 잘못이가?” “내가 귀찮아서 가버렸으면 하는 거 아이가?” 생트집을 잡는 상일의 말에 어이가 없는 찬옥이었다. “니를 보지 못할 날이 몇 일 남았는지 알고 싶어 물은 기다. 남자가 우째 그래 속이 좁노?” “내가 속이 좁은 거가? 니 말투가 그랬으면서.” “내 말투가 뭐?” “그래 톡톡 쏘아대니까 내가 헷갈리는 거 아이가.” “참말...어이없다.” 찬옥은 피씩 웃고만다. 덩달아 상일도 제 어리광이 우스웠던지 머쓱하게 웃고만다. “모레쯤 내려 갈거다.” 상일이 진지한 어투로 다시 말을 꺼냈다. “…….” “찬옥아! 니 내하고 혼인 할 거제?” “…….” “대답해봐라.” “모른다.” “내 이분에 내려가서 부모님한테 혼사 얘기 꺼낼거다.” “허락하시겠나?” “허락 받아야지. 꼭 허락 받고 올 거다.” “…….” “찬옥아! 내맘 알제? 나는 니 없으면 안된다.” “우리가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 뜻이 중요한 거 아이가?” “니만... 니만 맘 변치 않으면 된다. 부모님은 어떻게든 내가 설득 할거다. 그라니 니 맘만 변치마라.” 간절하게 애원하는 상일의 목소리에서 떨림을 느꼈다. 찬옥은 어둠 속에서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속에 묻혀 찬옥의 작은 행동까지도 지켜보고 있던 상일의 눈에 찬옥이 고개 짓하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온기가 돌아온 손으로 찬옥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의 따듯한 손길을 느끼며 찬옥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상일의 뜨거운 입술이 찬옥의 조그만 입술 위로 포개어졌다. 정적을 깨고 울리는 심장의 고동소리. 몸속으로 파고드는 전율을 느끼며 서로의 입술을 탐한다. 그 시각,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희연이 선잠에서 깼다. 목이 탔던지 일어나 앉아 머리맡에 놓아 둔 자리끼에 손을 뻗어 목을 축인다. 심한 갈증은 아니었으나 물 한 모금이 목안을 타고 흘러내리자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밖은 아직 어둠으로 뒤덮어있었고 사위는 고요했다. 한 참을 잔 것 같은데 밖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깬 잠을 다시 청하려 자리에 눕기는 했으나 다시 잠들기에는 정신이 맑았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옆자리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다시 일어나 앉았다. 찬옥이 잠들어 있어야 할 자리에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빈 배게만 요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야가 변소 갔나?” 희연이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고 한참을 뒤척이며 딸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인기척이 들리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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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가 안직도 안 들어오고 뭐하노?” 살짝 마음이 불안해진 희연은 겉옷을 걸치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살 속으로 파고드는 밤바람에 소름이 돋는다. “아이고. 춥어라! 변소에서 이래 오래 있지는 않을 긴데…….” 혹시 다른 곳에 있을까 싶어 집안을 뒤진다. “찬옥아! 니 어딨노?” 딸을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야가 참말로. 이 오밤중에 어데 간 기고?” 다시 한 번 사방을 둘러보다, “참말로 변소에 가서 무신일 생긴거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설마 하는 마음으로 대문밖에 떨어져있는 변소로 발길을 옮겼다. “찬옥아! 니 거 있나?” “…….” 변소 앞에서 딸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분명 사람이 있었으면 안에서 불빛이 세어 나와야 하는데 아무런 흔적도 없는 것이다. “여도 없으면 야가 어데로 간기고? 참말로 이상타.” 희연이 돌아서 대문 앞으로 오고 있는데 저만치서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희연은 그 자리에 서서 희미한 달빛에 비치는 형체를 알아내고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천천히 걸어오는 그림자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희연이 그 그림자 앞으로 서서히 다가선다. 두 그림자는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느라 앞으로 다가서는 인기척을 놓쳤다. “거 찬옥이가?” 순간 어미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찬옥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찬옥을 바래다주러 같이 온 상일도 덩달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찬옥이 다가오는 어미를 보고는 상일에게 도망가라며 밀어낸다. 잠시 상황파악을 하고 있던 상일은 그 자리를 물러나려다 말고 찬옥과 함께 서있었다. 어미가 앞으로 다가설 때마다 찬옥의 동공은 커지고 심장이 심하게 요동을 쳤다. 희연이 찬옥의 코앞까지 다가와서 묻는다. “니 어데 갔다 오는 기고?” 떨리는 심장을 손으로 누르며 찬옥의 곁에 서있는 낯선 그림자를 노려본다. 두 사람 아니 세 사람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 사람 누꼬?” 정신을 먼저 차린 것은 희연이었다. “두 사람 다 따라 들온나.” 노기에 찬 어미의 목소리. 찬옥은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하나 머릿속이 하얘졌다. “퍼뜩 안 들어오고 뭐하노?” 희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지켜보는 눈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어미는 서둘러 두 사람을 집안으로 불러 들였다. “니는 그냥 집으로 가라. 내가 알아서 하께.” 찬옥이 상일을 걱정하여 돌려보내려 한다. “아이다. 어차피 들킨 거 정면 돌파하는 기이 낫다.” 상일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찬옥의 손을 잡아 이끌고 대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먼저 들어간 희연이 어느새 방안에 불을 밝혀 놓고 있었다. 마당에서 우물거리는 두 사람을 향해 희연은 방안에서 일침을 가한다. “남새스럽구로 그라고 있을기가?” 두 사람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불이 켜진 방안으로 들어갔다. 깔려 있던 잠자리를 뭉쳐서 벽 쪽으로 밀어 놓고 불빛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희연의 눈은 노기에 차있었다. “니 어데 갔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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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를 숙이고 있는 찬옥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바른대로 대라. 이 밤중에 어데 있다 오는 기고?” “엄마! 그게 저…….” 희연이 홧김에 이부자리에서 불쑥 삐져나온 베개를 집어 들고는 찬옥을 향해 내던진다. “엄마.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어미의 분노를 처음 접한 찬옥이 부들부들 떨면서 두 손을 비비며 잘못을 빈다. “뭐를 잘못했노? 니가 잘못한기이 뭐꼬?” “엄마…….”" 찬옥이 말을 잊지 못하고 울먹거리고 있자 상일이 찬옥의 앞을 가로막아 앉았다. “어머님! 찬옥이 잘못 없습니다. 지가 찬옥이 불러낸 겁니다.” 분노에 찬 희연의 눈길이 상일에게로 향한다. 절망과 분노가 깃든 눈길로 상일을 노려본다. “좋소. 그라믄 총각이 말해 보소! 지금 이기이 무신 상황인지를.” 상일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희연에게 대답을 한다. “어머님! 찬옥이하고 결혼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요.” 그의 한마디가 희연의 머리를 내려쳤다. 심하게 얻어맞은 충격이었던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불을 밝힌 방안에 기나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방안을 흐르는 정적을 누구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부동의 자세로 세 사람은 마냥 앉아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희연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며 상일에게 이른다. “밤이 늦었으니까 총각은 그마 돌아가소.” “어머님! 혼을 내실라면 저를 혼 내십시요. 찬옥이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지가 꼬신 겁니다. 모두가 지 잘못입니다. 지를 욕하시고 지를 때리십시요.” 딸을 감싸고도는 상일의 행동이 어처구니가 없어 상일을 노려본다. “내가 내 딸 잡아먹기라도 하나? 총각이 역성든다고 해결 될 일 아이니까 조용히 돌아가소.” “…….” “오밤중에 큰소리 치봤자 내만 우사 당할 거라 내 입 다문다. 그라니 총각도 내 화 그만 돋구는 기이 좋을 기구마.” “…….”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으나 완강한 희연 앞에서 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상일은 마지못해 찬옥을 막고 앉았던 몸을 뒤로 물리며 일어섰으나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찬옥과 영영 헤어질 것 같은 불길함이 그를 엄습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두 모녀 사이에서 빠져주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싶어 희연에게 절을 하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서서히 옮겨 밖으로 나간다. 상일의 움직임에 희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찬옥은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뜸을 두고 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는 이내 정적이 집안을 감싼다. 호롱불빛에 비친 두 여인의 그림자가 벽 쪽으로 길게 드리워져 불빛을 따라 흔들거렸다. 희연이 낮게 한숨을 쉬며 숨을 고른다. 어미의 숨소리에 긴장한 찬옥은 숨을 죽인 채 어미의 모습을 눈치로 살폈다. 한참만에야 어미가 입을 열었다. “기가 찬다. 기가 차. 니가 우째 내를 속이고…….” “잘못 했으요. 엄마. 잘못 했으요.” “언제부터고?” “……?” “저 놈 만난 기이 언제부터고?” “여름...요.” “여직지 내 눈치 보믄서 저 놈을 만나러 다닜든 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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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년이 그라고 다니는 거를 에미라는 인간이 눈치도 못 채고 있었이니...다 내 불찰이다. 내가 어리석은 기라.” “엄마. 잘못했으요.” 찬옥의 눈에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려 치마 앞자락으로 떨어진다. 어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어미를 분노케 한 죄를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몰라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동이 터오는지 밖이 밝아져 온다. 희연은 한쪽무릎을 세워 무릎 위에 팔을 걸치고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시름에 잠겨있었다. 앉은 채로 잠이 든 찬옥의 고개가 땅에 닿을락 말락 연신 꾸벅거리고 있는 것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어미. 그 눈빛을 느꼈는지 찬옥이 떨구어진 목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잠에서 깨어 자신에게로 향해 있는 어미의 눈과 마주친다. 지난밤 분위기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찬옥은 어미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고 어미는 비참한 표정이었다. 어둠이 사라지자 희연은 밤새 타 들어간 호롱불을 입으로 불어 끄고는 밀쳐두었던 이부자리를 펴서 드러눕는다. 아무 말 없이 눈을 감는 어미를 가만히 지켜보다 찬옥은 고른 숨을 내쉬는 어미를 확인하고는 이불을 가져다 등 돌려 누운 어미의 뒤에서 몸을 웅크린 채 이불을 덮고 잠이 든다. 찬옥이 어미의 눈치에 안절부절못하여 지낸 지 이틀이 되는 날, 이른 아침 상일이 찾아왔다. 도무지 마음이 불안하여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욕먹을 것을 각오하고 희연을 찾아 온 것이다. “가라. 우리엄마 아직 화 안 풀리셨다.” “각오 하고 왔다.” “그래도 아직은 아이다. 며칠만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엄마 설득시켜 볼 테니까.” “내가 한다. 내가 어머님 설득 시킬거다. 니한테 짐 안 지운다. 그러니 어머님 만나게 해도.” 두 사람이 대문 앞에 서서 옥신각신하는 사이 희연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대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제발 내 쫓지 마십시요.” “방으로 따라 들어 온나.” 세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상일이 큰 키로 희연에게 절을 하고 다시 앉는다. “할말이 뭐꼬?” 차가운 눈길은 여전하였으나 말투는 다소 누그러진 편이었다. “어머님! 찬옥이 저한테 주십시요. 지가 잘해 주겠습니다. 그러니 지를 믿고 찬옥이 지한테 주십시요.” “부모님도 아시나? 우리 찬옥이 만나는 거를.” “아니요. 아직 모르십니다. 오늘 내려가서 부모님 찾아뵙고 허락 받을 겁니다. 그러니 어머님도 저희 둘 사이 허락해 주십시요.” “우선 자네 부모님 허락부터 받아 온나. 그라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알겠습니다. 지가 꼭 허락 받아 오겠습니다.” 방을 나온 두 사람의 표정은 더없이 밝아졌다. “찬옥아! 걱정 마라. 내가 우리 부모님한테 꼭 허락 받아 올거다. 그러니까 니는 아무 걱정 말고 어머님 마음 달래드리고 있어라. 알았나?” “응. 니만 믿는다.” 희망을 품고 떠나는 상일의 발걸음은 날아 갈 듯 가벼웠다. 찬옥은 상일이 떠난 이후로 그가 다시 돌아 올 날을 기다리며 초조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상일이 떠난 지 한 달이 다되어 가도록 연락이 없자 찬옥은 상일을 기다리는 것이 불안하고 초초해졌다. 그런 딸을 지켜보며 희연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 총각하고 혼사는 물 건너 간 기다. 그만 맴 접어라.” “엄마는 무신 그런 말씀을 합니까?” “내 말이 틀린 거 같나? 한 달이 다 되가는데 감감 무소식인 거는 부모들이 반대를 하고 있는 기라.” “그래도 상일이는 꼭 허락 받아 올 겁니다.” “부모가 반대하는 혼사는 하는 기이 아이다. 그래 가봤자 니만 힘든다. 그냥 맴 접고 다른 혼처자리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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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나는 상일이 아니면 시집 안가요.” “그라믄 평생 혼자 살다 죽을 기가?” “혼자는 와 혼자요? 나는 상일이하고 혼인 할건데.” “혼인이 혼자서 할 수 있다더나? 부모가 반대하는데 그 총각이 부모 배신하고 니한테 올거 같으나? 그 총각 그래는 못할 사램이다. 니만 다친다. 그라니 엄마 말 듣고 다른 선 자리 알아보자.” “다쳐도 괜찮아요. 나는 상일이 끝가지 기다릴라요. 아무리 그래도 내는 상일이하고 혼인 할거라요.” “그 자리가 뭐가 그래 대단하다고 미련을 못 버리노? 부모 반대하는 결혼이 가당키나 하나? 설사 그래 혼인을 했다 손 치더라도 그 생활이 행복할 거 같으나? 평생을 시부모 눈치 보면서 미운 털 박혀서 사는 꼴 내는 두 눈 뜨고 못 본다. 내 하나도 시집살이 언선시럽은데 니까지 시집살이 당하는 꼴 절대로 못 본다. 절대로! 에미 사는 꼴이 사람 사는 꼴이더나? 그래 옆에서 지켜봐 놓고는 니는 지겹지도 않나? 그라니 에미를 봐서라도 니가 맴을 접어라. 찬옥아! 에미 말 들어라.” 그러나 찬옥은 완강했다. 자신이 어떻게 살든 그 곁에 상일이 있기만 하면 그 하나 만으로도 충분했다. 함께라면 무엇이든 이겨낼 자신이 있었고 평생이 행복할 거라 어미와 같이 불행하지는 않을 거라 장담하며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미래에 희망을 품고 상일이 오기만을 앉아서 기다리다 못해 상일의 자취집으로 찬옥은 찾아간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상일이온 것인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혹시나 다른 자취생이 돌아 온건 아닌지 찬옥은 난감한 표정으로 방문밖에 서있었다. 잠시 주춤거리다 찬옥은 용기를 내어 상일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아니면 어떤가 혹시 그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용기가 난 것이었다. “상일아!” “…….” 분명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대답이 없다. 찬옥이 다시 한 번 상일의 이름을 부른다. “상일아!”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섰는데 이윽고 방문이 열리며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찬옥은 어둠 속에서 상일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눈물이 났다. “언제 왔노? 왔으면 우리 집으로 먼저 오지. 내가 한참 기다렸구만.” 찬옥의 반가움과는 다르게 상일의 기분은 가라앉아있었다. “안에 누구 있나?” 찬옥은 상일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이 혹시 상일을 난처하게 만들어서 그랬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다. 내 혼자 있다. 들어 온나.” 얼마만의 재회인가? 찬옥은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을 참아내지 못하고 상일의 품으로 달려든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그의 체취가 불안한 찬옥의 마음을 달래어준다. 그녀를 안은 상일의 팔에 조금씩 힘이 들어간다. 품속에서 그녀를 꼬옥 안고 긴 한숨을 토해낸다. “보고 싶었다. 찬옥아!” “나도! 나도 니가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말없이 서있다 몸을 풀고는 자리에 앉는다. “언제 올라 왔노?” “며칠 됐다.” “그란데 와 연락 안했노?” “생각 좀 정리하느라고…….” “무신 생각? 일이 잘 안됐나?” 찬옥의 물음에 상일은 가만히 찬옥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부모님이 허락 안 해 주시더나?” “…….” 찬옥을 바라보는 상일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찬옥아!” “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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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옥아!” “…….” 찬옥의 심장이 옥죄어 온다. “기다리께. 부모님 허락하실 때까지 내가 기다리께. 실망하지 마라. 우리 둘이서 부모님 설득해보자.” “허락 안 하신다. 당신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허락 못하신단다. 우리 아버지가…….” 상일의 목이 메였다. 눈물을 참아 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목소리는 울고 있었다. “내가 우째야겠노?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방법이 생각이 안 난다. 찬옥아! 내가 우째야 하노?” 울먹이는 상일을 따라 찬옥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이토록 아파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자신의 심정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의지하며 두 사람은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상일이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는지 그 동안의 사정이야기를 찬옥에게 털어놓았다. “부모님은 이미 다른 사람을 며느리 감으로 정해 두셨던 갑더라. 내가 혼사 얘기를 꺼내자 당신이 이미 혼처자리를 정해 놓았다면서 내려온 김에 선을 보라 하더라. 내가 싫다고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그 사람하고 혼인할거라 말씀을 드렸는데도 아버지는 들은 척 만 척 하시고는 기어이 나를 끌고 나가 선을 보이셨다. 한 달 내내 아버지하고 싸우고 배은망덕 불효자식 소리 들어가면서 버텼는데도 우리아버지는 내를 꺾겠다고 결국 단식까지 하시더라. 며칠 그러시다 말겠거니 했는데 일주일을 꼬박 물 한 모금 안마시고 버티시는데 그러다 참말로 아버지 어떻게 되실까 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아버지 뜻에 따르겠다고 말을 해 버렸다. 결국 아버지 고집이 내를 이기고 말았다.” “그라믄 나는 뭐꼬? 니만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니한테 뭐꼬?” “…….” “니가 허락 받아 온다고 했다 아이가? 그래 놓고 인자 와서 내를 버리겠다고? 이 나쁜 놈아. 니가 내한테 그럴 수가 있나? 이 나쁜 놈아.” 어미의 말이 맞았다. 어미의 말대로 상일은 부모를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니가 그럴 수 있나? 어떻게. 내한테 그럴 수 있노? 나는 니만 믿었는데. 니만 믿고 기다렸는데…….” 찬옥이 제 설움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눈물에 상일은 가슴이 아파온다. “찬옥아!” 상일이 찬옥을 품에 안는다. “놔라. 이거 놔란 말이다.” 찬옥은 상일의 몸을 밀쳐내며 품속에서 빠져 나오려 몸부림쳤다. 그럴수록 상일은 찬옥을 더 힘껏 끌어안았다. 헤어 나올 수 없는 그의 품에 안겨서 찬옥은 설움을 쏟아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상일의 가슴을 적셨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상일아! 니 내 버릴기가? 니 부모님이 정해준 여자하고 결혼 할기가? 아니제? 니는 내하고 결혼 할거제. 그체?” “…….” “대답해봐라.” “찬옥아!” “내하고 산다고 대답 해라.” “…….” “상일아! 내하고 살자. 아무도 모르는 데로 도망가서 우리끼리 살자. 어? 상일아.” “그거는 못한다. 우리 부모님을 버리고는 나는 못산다. 내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나는 못 버린다. 그렇게는 못한다.” “그라믄 우리는? 이대로 헤어져도 니는 괜찮나?” “찬옥아…….” “니가 택해라. 니 부모님하고 내 중에서 니가 선택해라. 그라믄 나도 두말 안하고 니 뜻 따르께.” “나는 못한다. 죽어도 우리 부모님 못 버린다.” “결국 니는 내를 버릴 거라는 거제. 결국은…….” 찬옥이 원망의 눈빛을 담아 상일을 쏘아보고는 방을 뛰쳐나와 미친 사람처럼 뛰어 간다. 상일이 찬옥의 뒤를 쫓아 부리나케 방을 나오며 찬옥의 이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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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옥아! 찬옥아!” 얼마를 가지 못하고 뒤쫓던 상일의 손에 찬옥의 손목이 잡힌다. “찬옥아!”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서있는 그의 눈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혀 위태롭게 매달렸다. “놔라. 이 손 놔라.” “찬옥아! 제발... 제발 내 얘기 좀 듣고 가라.” “무슨얘기? 니 장가간다는 얘기? 내가 와? 내가 그 얘기를 와 들어 줘야 하는데?” “찬옥아!” 찬옥은 매정하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뛰었다.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으로 끝없는 달음질을 한다.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찬옥의 뺨 위로. 그러나 찬옥은 그 눈물을 닦을 생각이 없었다. 눈물이 타고 흐른 뺨을 매서운 밤바람이 사정없이 따귀를 갈겨댄다. 그러나 그 매질에 찬옥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 보다 더한 아픔이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기에. 상일은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난 찬옥을 달려가서 붙잡지 못했다. 사랑하는 저 여인을 울린 사람이 자신이기에 감당 못할 고통을 준 것도 자신이기에 죄인이라서 그녀를 붙잡을 구실이 없었다.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먼 거리에서 그녀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가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기를 바라며. 앞도 보지 않고 달려가던 찬옥이 메마른 땅 위에 몸을 부딪친다. 발이 꼬여 넘어진 찬옥은 그대로 땅 위로 쓰러졌다 간신히 몸을 비틀어 일어나 앉았다. 아픔도 잠시 그녀는 그 앉은 자리에서 하염없이 통곡을 한다. “찬옥아…….” 상일은 그녀의 곁에 다가서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바람소리에 그의 목소리는 묻히고 만다. 오늘 밤 유난히 바람이 거세었다. 가녀린 몸으로 바람을 맞고 앉아 있는 찬옥을 상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녀와 함께 그 곳에서 세찬 바람을 맞고 서있었다. 흐느낌이 조금 잦아들면서 찬옥은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불안한 걸음걸이로 간신히 제 몸을 지탱하면서 그녀는 집 앞에 다다른다. 대문을 열고 찬옥이 집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섰던 상일은 목표물을 놓쳐버린 짐승처럼 허탈한 걸음걸이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딸을 어미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묻는다. “찬옥아! 니 와 그라노?” 넋 나간 사람처럼 들어와 방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채 초점 잃은 딸의 눈을 바라보며 어미는 물었다. “니 그 총각한테 갔더나?” “…….” “말해 보그라. 그 총각 만내고 오는 기가?” “엄마……으흐흑!” 찬바람에 얼어붙은 그녀의 조그만 입이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겨우 입을 달막거려 낯은 소리로 어미를 부른다. “엄마…… 으흐흑. 내는 인자 어짜요?” 이미 찬옥이 방으로 들어올 때 뭔가 불길하다 싶었는데 사달이 나도 크게 난 것 같아 보였다. “뭐가 우째 된기고? 자세하게 말해 보그라.” “엄마. 내는... 내는 인자 우짜요? ...흐흐흑." “야야. 찬옥아!” 어미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흐느끼고 있는 딸에게 향하면서 몸을 움직여 곁으로 다가가 앉아 딸의 등을 쓰다듬는다. “이것아! 이기이 무신 꼴이고.” 처연한 딸의 모습에 어미는 가슴이 아려온다. 찬옥은 어미의 팔에 매달려 슬픔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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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한 흐느낌에 어미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엄마! 나는 상일이 없으면 안되는데...상일이가 없으면 나는 못사는데....상일이는...상일이는...으흐흑...” “그래 울어라. 니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울어라. 참지 말고 다 토해 내그라.” “엄마... 엄마... 흐흐흑...흐흐흑.” 어미의 따듯한 손길이 찬옥을 위로한다. 그날 밤, 힘겹게 잠자리에 든 찬옥은 온몸이 불덩이 같이 열이 오르며 심하게 아팠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헛소리를 해대는 딸을, 어미는 놀라서 허둥댄다. “아가? 찬옥아! 눈 좀 떠봐라. 찬옥아!” “으으으으 …….” 찬옥의 입에서 연신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며 온몸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야가 우째 이라노? 찬옥아! 에미 좀 쳐다보그라.” 아무리 불러도 찬옥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희연은 밖으로 뛰쳐나가 세숫대야에 찬물을 들고 들어와 수건에 물을 묻혀 딸의 얼굴을 닦아주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입고 있는 옷을 하나씩 벗겨낸다. 알몸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딸의 몸 구석구석을 차가운 수건으로 닦아내며 열을 식혀본다. 한 밤중에 때 아닌 소동에 혼이 빠진 희연은 찬옥의 열이 조금이라도 떨어지기를 바라며 수건을 갈아가며 딸의 몸을 찬물로 적시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열이 떨어진 딸의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한숨을 내쉬는 희연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서 자신이 환자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틀이 지나면서 찬옥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고 고뿔이 심하게 걸려 아직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이불 속에만 누워있었다. 희연은 딸의 상태가 조금 호전된 것을 보고 잠시 혼자 두고 집을 나와 시장으로 향했다. 무엇이라도 몸보신을 시켜야겠기에 장을 보러 나간 것이다. 그 사이 상일은 찬옥의 집을 찾아왔다. 그 밤에 그녀를 그렇게 보내어 놓고 돌아와 한없이 울었던 상일, 그 또한 아픔을 견디다 못해 그녀가 그리워 그녀의 집 앞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앞만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던 것이다. 마음은 간절한데 그녀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만큼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죄책감이 그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대문 앞을 서성이는 사내의 모습을 보고 희연의 얼굴이 굳어진다. 땅으로 고정시켰던 상일의 눈동자가 다가오는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그림자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순간 희연과 상일의 눈이 마주쳤다. 상일이 몸을 움찔하며 당황한 기색으로 희연에게 절을 한다. 그의 출현이 별로 달갑지 않은 희연의 목소리는 메말라있었다. “뭐할라고 찾아 온기요?” “어머니. 찬옥이 좀 만나게 해 주십시요.” 떨리는 목소리로 용기를 내어 상일이 희연에게 부탁을 한다. “그아 가심에 그만큼 상처 주었으면 그걸로 됐소. 서로 인연이 아이다 생각하고 잊어부리소.  그기이 서로를 위해 좋을기요.” “어머니! 지 그냥 못 돌아갑니다. 찬옥이 제발 한번만, 한번만 만나게 해 주십시요.” “이 사람아! 감당 못할 짓을 와 하노 말이다. 어차피서로 엮일 인연이 아닌데 보면 뭐하노. 서로 가심만 아프제. 내말 들으소. 그냥 총각 갈 길 가소. 두 번 다시 우리 찬옥이 만날 생각 하지 마소.” 희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상일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다. 냉랭한 바람만 남긴 채 희연은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상일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장승처럼 서있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않은 채. 수 없는 날을 그렇게 상일은 찬옥의 집 앞을 서성거리다 돌아갔고 찬옥은 몸이 회복되었어도 집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았다. 희연은 상일이 대문밖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찬옥에게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으며 자신 또한 그를 무시했다. 결국 이월 중순을 지나면서 상일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그 해 겨울은 두 사람에게 너무도 가혹한 상처를 남기고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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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들은 낯선 곳에서 우연히 재회를 하였다. 찬옥은 모진 열병을 앓은 후 조금은 성숙해졌고 그에 대한 마음도 관대해졌었다. 그를 원망하기 보다는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로, 그래서 그를 용서하기로 자신의 사랑은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 만큼 상처는 회복이 되었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가 나타나기 바로 전까지는. 그러나 그것은 그녀만의 착각이었을까? 지금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면서 그날의 기억을 되씹으며 원망의 불씨가 다시금 타올랐다. 혹여 그를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 자신하였건만 그 다짐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그를 향한 분노와 원망이 예전의 찬옥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한때 그를 사랑했었던 그 시절로.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그를 이렇게 우연히 만나고 보니 설레임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흐르는 세월을 따라 한층 더 성숙해진 상일의 모습은 예전의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조각상을 깎아 놓은 듯한 반듯한 외모에서 풍겨나는 남성미.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그를 마주하고 있는 찬옥의 마음이 처음 만났던 그때 보다 더 설레고 있었다. “어머니 편안하시제?” 잠긴 듯한 목소리로 상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찬옥은 그의 물음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니는? 니는 잘 지내나?” 안부를 물어오는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찬옥의 귓전을 울렸다. 다정하게 물어오는 그 음성을 듣게 된 이순간이 영원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상일은 떨리는 눈동자로 찬옥을 바라보고는 이내 커피 잔으로 손을 뻗어 마른 입술을 적신다. 쓰면서도 달콤한 커피의 맛이 지금 자신의 감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목 메이게 그리던 첫사랑. 그 아련하고도 아픈 기억들 속에 갇혀 있던 그녀가 지금 자신의 바로 눈앞에 숨을 쉬며 앉아 있는 것이다. 상일은 그날 이후로 멈춰버린 심장이 다시금 뛰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이었다. 찬옥이는 내한테 이런 존재였다.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그런 사람.’ 상일은 못 다했던 사랑에 갈증을 느꼈다. 그녀와의 끊어진 인연의 끈을 다시 잇고 싶다는 간절함이 상일의 이성을 마비시켜 버린다. “여 근처가 집이가?”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그녀에게 들킬 까봐 서둘러 말을 꺼낸다. “아니다.” “그라믄 여서 약속 있어서 나온 거가?” “아니다. 일자리 알아볼라고 나온 거다.” “결혼은...아직 안했나?” 결혼이라는 단어에 서로의 신선을 피해왔던 두 사람의 눈빛이 교차한다. 그리고 정적. 상일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화제를 돌린다. “니 내일도 여기 올거가?” “…….” “내일 열두 시에 여서 다시 만나자.” “내가 와? 나는 니하고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내는 아니다. 찬옥아! 나는 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부탁이다 찬옥아! 내일 열두 시에 다시 보자. 어?”  “안 올거다. 기다리지 마라.” 최대한 냉정하고 차갑게 찬옥은 상일의 부탁을 뿌리친다. “아니! 기다릴거다. 니가 나올거라고 믿고 나는 여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알았제?” “내 알 바 아니다.” 찬옥은 매몰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다방을 빠져 나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그가 달려와서 붙잡을 줄 알았는데 한참을 걸어도 그의 인기척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나쁜 놈. 버릴 때는 언제고 인자와서 다시 보자고? 내가 그래 만만하나! 나는 니얼굴 다시는 안 본다.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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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진심인양 마음속으로 외치지만 사실은 그가 다시 만나자는 제의를 했을 때 찬옥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뛰었다. 그와의 재회가 이렇게 스치듯 지나는 허무한 인연이 되어 버릴까 마음이 조마조마 했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다시 만나자는 말을 했을 때에는 이유 없이 화가 났다. 마음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어떤 것이 자신의 진심인지 찬옥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거리를 방황하다 늦게 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 상일이 만나자고 제의했던 어제의 그 다방으로 찬옥이 들어섰다. 시계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상일은 다방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들어서는 이가 혹시 찬옥이 아닐까, 그녀가 과연 나와줄 것인가, 단지 몇 분이 지났을 뿐인데 마음은 초조하고 괴로웠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에 떠는 상일의 시선이 문 앞에 멈췄다. 찬옥은 어제 앉았었던 자리에서 상일의 모습을 보고는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상일이 일어나며 찬옥이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 상일은 놀라는 표정이었으나 오늘은 긴장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찬옥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긴장이었던 듯하다. “니가 안 나올 까봐 걱정했었는데...나와 줘서 고맙다.” “안 올라 캤다.” “그래. 어쨌거나 나와 줘서 고맙다.점심 안 먹었제?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나는 배 안고프다.” “내가 고프다. 니 기다리느라 기운이 다 빠져서 허기진다. 같이 밥 먹자.” 상일의 청을 귀찮아하며 찬옥은 마지못해 일어나 상일의 뒤를 따라 다방을 나온다. 다방을 벗어나 조금 뒤쪽으로 올라가니 한적한 곳에 깔끔하게 단장한 음식점이 눈에 들어온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조용하고 깔끔하니 아늑한 분위기의 식당 안을 종업원을 따라 들어간 두 사람이 안내된 곳은 한실로 꾸며진 방이었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을 공간, 그 곳으로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찬옥이 처음 경험하는 곳이라 어리둥절하기는 했으나 상일이 앞에 있어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곳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을 하고 있었다.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이 들어오고 두 사람 앞에 차려졌다. 어렸을 때 찬옥이 종택에서 보았었던 그 상차림이었다. 어미와 찬모와 수양딸들이 행사 때마다 손님을 맞아 차려 내 놓던 그 상차림. 조부의 사망으로 모든 것이 풍비박산 나버린 이후 처음으로 화려한 밥상을 받아 보는 찬옥이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두 사람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상일이 일부러 말을 아끼는 듯 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사실 갈피를 못 잡은 탓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은 나중의 문제, 두 사람이 이렇게 오붓하게 앉아 밥을 먹는 이 시간이 흐르지 않고 영원하기를 간절하게 바래본다. 식사를 마치고 그제서야 찬옥이 입을 연다. “할말 있다면서 인자 해봐라.” “찬옥아! 우리 다시 만나면 안되겠나? 이렇게 친구처럼 지내면서 가끔씩 얼굴 보면 안되겠나?” “그럴 수는 없다. 니하고 내 사이가 친구가 될 수 있나?” “와 안되노? 마음먹기 나름 아이가. 그냥 이렇게 한 번씩 만나서 서로 얼굴만 보면 된다. 내 다른 거 안 바란다. 니 얼굴 보는 거, 그거면 내는 충분하다.” “니는 어째 그래 니 생각만 하노? 나는 니 한테 뭐꼬? 니 노리개가! 가지고 놀고 싶으면 찾는 그런 노리개가 말이다. 가만있는 내 맴을 와 자꾸 흔드는 긴데? 와?” 화를 내고 있는 찬옥에게서 상일은 일말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녀도 역시나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상일의 일방적인 감정이 아니라 서로가 통하는 감정인 것이다. “내가 다 잘못했다. 다 내 탓이다.” 어떻게든 그녀의 감정을 끌어내어 보기로 하고 그 날 이후의 얘기로 찬옥의 귀를 홀린다. “그날 니 그렇게 보내고 내내 마음이 언짢아서 너거 집으로 찾아 갔었다. 어머니가 두 번 다시 찾아 오지마라고 단호하게 말씀을 하시더라. 그런데 나는 그렇게 니를 포기 못할 것 같아서 몇 날을 너거 집 대문 앞을 서성거렸었다. 기다리는 것도 미치겠고 그래서 너거 집 대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고 싶었는데 막상 니 얼굴 보는 기이 덜컥 겁이 나더라. 내가 그래 상처를 줬는데 다시 찾아 가서 니 맘을 또 얼마나 헤집어 놓을까 싶은 두려움이 들더라. 그래도 니가 혹시나 내가 기다리는 것을 알고 나올까 싶어서 그 추위도 잊고 스무 날을 기다렸는데도 결국 니는 바깥으로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 그러다 내 몸도 병이 나버렸고. 며칠을 알아 누웠다가 간신히 졸업식만 마치고 아들자식 졸업식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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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오신 부모님 따라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었다. 어쨌든 이번에는 부모님 설득해서 니랑 꼭 결혼할거라고 나도 독한 마음먹고 아버지한테 대들며 용을 써봤는데도 기어이 아버지가 먼저 일을 쳐 버렸다. 내를 오도 가도 못하게 붙잡아 놓고는 사생결단을 내시겠다고 낫을 들고 들어와서는 협박을 하시더라. 혼사 엎어 버릴 거면 당신 손모가지를 자르겠다고. 우리 아버지는 그라고도 남으실 분이다. 남의 땅 붙여먹고 사시던 분이 얼마나 억척을 부렸으면 그 땅이 당신 손아귀에 들어 왔겠노. 그런 아버지를 내가 아니까 차마...차마 혼사 엎어버릴 용기가 안 생기더라.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 뜻대로 혼인을 하고 말았다. 내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아버지 뜻대로 말이다.” 찬옥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그의 입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것은 확연한 사실. 결국 그는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의 진심을 알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인을 선택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찬옥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자리여야 하는 상일의 옆에 다른 여인이 있는 것 그 자체가 찬옥을 흔들어 놓았으며 질투로 온몸이 불탔고 그를 가지지 못하면 차라리 같이 죽는 편을 택하겠다는 그에 대한 집착이 강렬하게 일었다. “찬옥아! 니 내하고 살자.” “미쳤나?” “사랑 없이 한 결혼, 그 사람한테는 정 없다. 나는 니 하나 밖에 없다.” “그라믄 니 처하고 이혼이라도 할거라는 거가?” “…….” “대답해봐라! 이혼 할 거가?” “이혼은 할 수 없다.” “그라믄? 같이 살자는 거는 무슨 뜻으로 한거고?” “그 여자는 시골에서 그냥 우리 부모님 모시고 살라카고 나는 니하고 여서 살림 차려서 살고 싶다.” “그라믄 지금 내가 니 첩이 되란 소리가?” “찬옥아! 내 말뜻은 그런 뜻이 아이고…….” “그런 뜻이 아니면 어떤 뜻인데?” “니도 내 사랑하잖아. 내 맘도 변함이 없다. 서로 사랑하는데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데 형식이 뭐가 필요 하노? 서로의 마음이면 되제. 평생 니만 보고 사께. 평생 니만 위하고 사께. 그라니 니도 내만 보고 살면 안되겠나? 내 욕심인 거 안다. 그래도 내는 욕심 부릴 란다. 니만 내 옆에 있어 주면 된다. 찬옥아! 우리 그래 살자. 어?” 그의 달콤한 유혹이 찬옥을 괴롭혔다. 어처구니없는 말도 안되는 제안이었지만 찬옥은 솔깃했다. 그를 가질 수만 있다면 첩이면 어떻고 내연이면 어떠랴, 그의 옆에 자신이 있는데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사랑을 가지는 건데 뭐가 두려울까. 지금 그가 더한 말로 자신을 유혹한다 해도 넘어갈 것이다. 그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있는 한 찬옥은 상일을 내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일 뿐 그녀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가 부모를 거역할 수 없듯이 자신도 어미의 가슴에 못을 박고는 살 수 가없는 것이니 달콤한 그의 유혹을 스스로가 뿌리쳐야만 했다. “싫다. 나는 싫다. 내 사랑 지키자고 한 여자 가슴에 못 박는 짓 나는 못한다. 내 사랑이 아무리 소중해도 남의 눈에 눈물 빼면서 내 사랑 지키고 싶은 마음 없다. 니 달콤한 유혹에 잠시 흔들린 거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거는 사랑이 아이다. 내 집착인 거다. 니도 마찬가지다. 이거는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 니도 나도 똑 같은 그런…….” 찬옥의 말에 상일은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다 옳았다. 집착인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랑이 영원할 수 있을 지도 장담 못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싶은 마음에 저질렀던 오만이었다. 찬옥이 그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불같은 사랑은 한번으로 충분하면 되었다. 젊은 날 그렇게 맹목적이었던 사랑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가진 것이다. 얼레에서 풀어져서 나온 연실을 따라 끝없이 하늘을 올랐던 연이 순간 실이 끊어져 방향을 잃은 채 하늘 어딘가로 날아 가 버리듯 두 사람의 인연의 끈도 이미 끊어져 방황을 하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다 바닥으로 추락한 연을 찾았을 때 사람들은 더 단단한 실로 연을 달아 메는 것으로 다시 끊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다. 두 사람의 인연도 끊어진 연처럼 더 튼튼한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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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니 끝이 난 인연에 대한 미련은 이쯤에서 접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것임을 찬옥은 깨달았다. 자신의 길을 이제야 찾은 듯 찬옥은 상일을 그 자리에 내버려 둔 채 혼자 일어나서 방을 나온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라 다짐을 하며 찬옥은 바람 부는 거리로 쓸쓸하게 발을 내딛는다.

저녁을 끝내고 현옥이 자리에 누우려니 어미의 한숨 속에서 걱정이 흘러나온다. “찬옥이 마땅한 혼처자리를 찾아야 할 긴데…….” 상일과의 재회를 모르고 있었던 어미는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닌다며 매일 집을 나서는 찬옥을 보는 것이 여간 마음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스물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라 혼기를 놓친 것도 불안하였고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마음에 차지가 않았다. 어디 중매자리라도 알아보고 싶었으나 아는 이가 없으니 혼자서 속앓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현옥도 사실 찬옥이 걱정이 되었다. 요즘 들어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고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는 찬옥을 보며 마음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었다. “엄마! 내가 한번 알아 보까요?” “니가? 우짤라고?” “공장 사람들 중에 결혼한 언니들도 많으니까 한번 얘기해 보면 되지요.” “그래도 괜찮을 라나?” “뭐 어때서. 내가 가서 한번 잘 얘기해 보께요.” “현옥이 니가 인자는 언니 혼인까지 신경을 써야 하고 니 어깨가 무겁다.” “그런 말씀 마요. 가족끼리 당연한 건데요.” “그래. 가족. 가족 이구마.” 어미의 얼굴에 쓰디쓴 웃음이 지나간다. 가족이라는 미명하에 현옥은 얼마나 더 희생을 해야 하나, 어미는 현옥을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저려 옴을 느낀다. 가족이라는 것이 서로를 도우며 사는 것인데 현옥은 일방적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있으니 어미로서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저 쓴 미소를 지을 수밖에. 현옥은 이제 제법 기술공으로써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을 함에 있어서는 항상 철저하게 제 할 일을 해내는 현옥을 인정해주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그녀를 질투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현옥을 칭찬하며 친해지려는 이들도 많았다.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자연 호칭은 언니 동생으로 부르며 서로의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들 중 몇 사람에게 찬옥에 대한 얘기를 털어 놓고 혼처자리를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 현옥을 동생처럼 아껴주는 여공이 좋은 혼처자리가 있다며 현옥에게 얘기를 꺼낸다. “우리 남편 군대에 근무하고 있는데 장교가 괜찮은 사람이라 소개하였으면 해서 니한테 말하는 기다.” “언니! 내가 엄마한테 말씀 드리고 일간 한번 자리 마련 하께요.” “그래라.” 그리고 며칠 뒤 현옥은 소개시켜준다는 여공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어미에게 소개를 시키고 세 사람이 나란히 방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여공은 희연에게 소개시켜줄 사람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는 현재 군인 장교이며 한번 결혼을 했었고 부인과는 사별을 하였으며 그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딸은 조모가 맡아서 키울 것이고 아들의 직업이 군인이다 보니 어차피 부대를 따라 이동을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며 결혼을 하면 따로 살림을 나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조건은 마음에 들었지만 희연은 재취자리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혼기를 놓친 딸이지만 초혼도 아닌 재취자리에 딸을 보내는 것이 너무도 아까웠다. 일단 딸하고 의논을 해보겠다며 약속을 미루고 여공을 돌려보내고서 희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는 것이 딸을 위한 길인지 어떤 것이 최선인지. 우선 찬옥의 생각을 들어 보고자 넌지시 말을 꺼내어 보았다. 그러나 찬옥이 생각을 해보겠다고 하고서는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미는 속이 탔다. 한 살 두 살 나이 먹는 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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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고 있겠나 싶어 재취자리라는 것이 흠일 뿐 꺼릴 것이 없다 싶어 딸의 얘기도 듣지 않고 혼자서 결정을 내려버린다. 현옥을 통해 선볼 날짜를 잡아 오라 이르고 찬옥에게 선을 보라 이른다. 이미 마음은 콩밭에 있는데 콩깍지는 엉뚱한 곳에 씌었는데 어미의 말이 귀에 들리겠는가! 찬옥은 그저 어미가 시키는 대로 아니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한 것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어차피 상일이 아니면 아무나 상관없는 것, 굳이 시집을 가야 한다면 어미가 골라 준 상대하고 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을까 무덤덤하게 생각을 한다. 며칠 후, 현옥이 일을 가지 않고 쉬는 날 현옥을 집에 남겨 두고 희연과 찬옥을 데리고 선을 보러 나갔다.  근처 다방에서 만나기로 하여 그 곳으로 들어서니 중매쟁이로 나선 여공이 선보는 남자와 함께 나와 있었다. 희연이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이 여공이 손을 들고 희연과 찬옥을 불렀다. “엄니요! 여깁니더.” 두 모녀가 나란히 걸어 여공이 앉은 테이블 근처로 다가선다. “아이고. 우리가 늦었는 갑네.” “아입니더.  온지 얼매 안됐십니더.” 여공과 나란히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나서 희연에게 인사를 한다. “엄니요. 이분이 저번에 말씀 드렸던 그 분입니더.” 희연의 눈길이 남자에게 멈추고 남자는 박력 있는 어투로 절을 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군인 장교라 해서 희연은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사내일거라 상상을 했었는데 신랑감으로 나온 이는 상상의 정 반대에 있는 사람이었다. 양복으로 체구를 어느 정도 가리기는 했으나 한눈에 봐도 체구는 왜소했고 게다가 키까지 작아서 사람이 더 왜소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나마 인상이 다부져 보이기에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지 이 체격으로 봐서는 제 몸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듯이 보였다. 자신의 마음에도 영 차지 않는 상대인 것 같은데 딸은 오죽하겠나 싶었다.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딸을 데리고 나오고 싶었으나 소개시켜준 사람의 체면을 생각하니 나오기도 민망하고 그렇다고 앉아있기도 그랬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처음 선을 보는 것인데 상대에 대한 예의는 차려야 할 것 같아 싫은 내색 않고 앉아 있었는데 문제를 터트린 것은 찬옥이었다. 내키지 않기는 했으나 어미의 뜻도 있었고 상일에 대한 미련을 접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따라 나오기는 했는데 막상 상대를 앞에 두고 보니 상일에 대한 미련이 더욱 밀려오는 것이다. 흠잡을 데 없는 외모에 남성미까지 외양만으로도 앞에 앉은 사람과 비교가 안 되는 것, 그런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었기에 그 자부심이 외려 찬옥을 더 거들먹거리게 만들었는데 그런 그를 버리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 그에 비해 너무도 처지는 상대라 마음이 상해버렸던 것이다. 순간 찬옥은 이 상황이 짜증스럽고 불쾌하게 느껴져 상대를 무시하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미안합니다만 지는 그쪽하고의 인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자리는 없었던 일로 해주세요. 미안합니다. 엄마! 갑시다.” 상대에게 거침없이 일침을 가하고 찬옥은 어미의 손을 잡아 이끈다. “야가 와이라노? 사람 면전에 두고 니 지금 뭐하는 기고?” 희연이 당황해 하며 찬옥을 나무란다. 희연뿐만 아니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도 그리고 중매쟁이로 나선 여공도 어이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찬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안가면 내 혼자 갑니다.” 희연 역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찬옥은 쌩 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뒤돌아 다방을 걸어 나가고 만다. 그녀의 도발적인 행동을 남은 세 사람이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희연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사색이 된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맨다. “이거를...이거를 우짜꼬? 내가 큰 실례를 범했네. 자가 갑재기 와 그라는지를 모리겄다.” 저고리 소매 끝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난 식은 땀을 닦는다. “이래 사람을 면전에 두고... 실례를 범했구마요. 미안합니더. 참말로 미안합니더. 다 내가 딸을 잘못 가리친 불찰 이라요. 늙은이를 봐서라도 너그럽게 용서하소.” 희연은 쩔쩔매며 딸의 흠을 덮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엄니요. 이라는 법이 어디있십니꺼? 사람을 소개해 준 지는 뭐가 됩니꺼?” 여공이 난처한 기색으로 희연을 닦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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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이. 내도 참 난감해 죽겠구마. 자네 볼 면목이 없다. 참말로 미안하다.” 두 여인의 사이에 끼여 아무 말을 않고 점잖게 앉아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어머님! 처음 뵙지만 지가 어머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는 희연에게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야. 그라소. 부르고 싶은 데로 부르소.” “예. 그라겠습니다. 따님 말씀대로 지하고는 인연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래 곱고 아름다운 따님을 지 짝으로 생각을 해 주신 것만으로도 지는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지한테는 따님이 과분하지요. 총각도 아닌 지가 처녀장가를 들라 한 것부터가 지 욕심이었습니다. 그라니 지한테 너무 미안해하지 마십시요. 오늘 이 자리가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지가 복이 없는 사람이라 그러거니 괘념치 마십시요.” “아이구. 이래 마음 넓은 사램은 처음 이구마. 내 딸 허물을 눈감아 주고. 참말로 내가 면목이 없소. 고맙소. 참말 고맙소. 장교양반. 내가 장교양반한테 빚을 지네요.” “그런 말씀 마십시요. 따님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노여움 푸십시요.” “내가 할 소리를 장교양반이 대신 하는 구마. 어쨌든 오늘 일은 참말로 미안하요. 장교양반 좋은 인연 만날거니 부디 행복하시이소.” “예. 고맙습니다.” 그리고 희연은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여공을 바라본다. “자네한테도 참말로 못할 짓을 시켰구마. 우리 현옥이를 봐서라도 자네가 내를 용서하시게. 부탁함세.” “그러십시요. 나는 괜찮으니까 어머니 마음 편하게 해드립시다. 내가 아주머니 공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사내가 나서서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자 조금은 누그러진 어투로 희연에게 볼멘소리를 한다. “중매하믄서 이래 난처한 거는 처음입니더. 지는 인자 자신없은께 지한테 중매 부탁하시지 마이소.” “그래. 그래. 알았구마. 자네 심정 다 이해하는 구마. 내 다시는 중신 서돌라 소리 안할기이 마음 푸소.” 그렇게 사내의 너그러움으로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희연은 그들과 헤어져 부리나케 집으로 쫓아와 먼저 집으로 들어 온 찬옥을 보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딸을 나무란다. “우째 니는 사램이 그래 경솔하노? 마음에 안차도 사램을 그래 면전에 두고 박차고 나올 수가 있노? 니만 잘났나. 상대는 니만 못해 그래 자리 지키고 있었겄나 말이다. 남의 얘기 들어나 보고 싫든 좋든 표현을 하는 기제 지 맴에 안 찬다고 그래 배운 버릇없는 행동을 하는 기가?” “…….” 찬옥이 제 잘못을 알기에 퍼붓는 어미의 잔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몇 마디라도 나눴이면 모리겄다. 우째 상대방 말 한마디도 안 들어보고 그래 팩 토라져 나오노 말이다. 싫든 좋든 나간 자리면 지 처신은 제대로 하고 와야제. 니 그릇된 행동이 몇 사람을 난처하게 했는지 아나?” “…….” “다행히 사람이 좋아서 그냥 넘어가는 거지 잘못 걸리 봐라. 온갖 욕은 다 먹었일 기다.” 그때를 생각을 하니 아직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말이야 바린 말로 니 보다 그 사람이 더 인정이 있더라. 화낼 쪽은 그쪽인데 되레 내를 챙기면서 과분한 딸 선보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내를 안심시키는 기이 우째 그래 믿음직스럽든동 내사 마 사람을 다시 봤구마. 겉보기는 왜소해 보이도 속은 대천 한 바다 거치 넓은 기이 사내 중에 사내 더구마. 그 사람이 복이 없는 기이 아이고 니가 니 복을 찬기다. 알기나 하나?” 찬옥은 더는 어미의 잔소리를 듣기 싫다며 방을 나가 버린다. “저기이! 지가 뭐를 잘했다고 어디서 성질이고? 니가 에미 생각 쪼매라도 했이믄 그래 행동 안 할 기다. 지금도 봐라. 지에미 얘기하는데 듣기 싫다고 나가는 꼬라지를.” 희연은 찬옥이 나간 문을 향해 언성을 높이고 만다. 두 모녀의 싸움을 말없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현옥은 찬옥이 나가버리자 어미의 마음을 풀어 주려 어미의 곁으로 다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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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언니 너무 나무라지 마요. 언니도 잘못한 거 아니까 엄마한테 미안해서 암말도 못하고 나가버리는 거 아니겠어요.” “내사 마 넘 부꾸럽어서 못 살기다. 나이나 적나? 마처럼 혼처자리 나온 기이 재취인 것만도 속이 상하더만 그래도 지 생각해서 사람 괜찮으면 후처 자리라도 궁하게 살지 않고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믄서 살 수 있다는데 그런 자리가 어디 쉽나? 시집살이도 안하고 신랑 따라 여기저기 유랑하듯 살믄 지 팔자야 얼매나 편하고 좋노. 에미 꼴 당하지 마라꼬 내 속 문드러져 가믄서도 지 위해서 그 자리라도 보내볼라 했구만... 다 모린다. 내 속을 누가 알겠노! 신랑 잘못 만난 죄로 펭성을 고생하믄서 자식들 뒷바라지도 못해주는 에미 노릇이 어데 편한 줄 아나? 에미 고생하는 거를 봤이면 지는 에미 팔자 담지는 말아야제. 허우대 말짱하믄 뭐하노. 인물 팔아먹고 살기가? 다 지 좋으라고 했거마는 에미 속도 모리고...아이고. 내 팔자야.” 신세 한탄에 저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 올라 어미는 딸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만다. 그간 힘겹게 참았던 감정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려 주체할 수 없는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어미는 설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바탕의 소동은 그렇게 어미의 하소연으로 끝이 나고 말았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 탓에 두 사람 사이는 당분간 상처가 아물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어김없이 흐르는 시간 탓에 현옥의 일상은 공장에 메여 똑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복되는 생활에 새로울 것이 없는 하루하루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현옥의 일상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성찬이 박계장과 함께 현옥의 집을 다녀간 이후로 그는 노골적으로 현옥에게 달라붙었다. 도안실에서 근무를 하다가도 일을 핑계 삼아 작업실로 건너와서는 현옥이 일하는 작업대에 붙어 서서 그녀가 하는 일을 도우며 그녀의 주위를 자꾸만 맴을 도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현옥은 거북함을 느껴 성찬을 대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현옥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오려는 성찬의 마음을 현옥은 거들떠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단지 그녀에게 동료일 뿐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로는 단 한 번도 생각을 해 본적이 없기에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현옥은 성찬과 거리를 둔 채 그를 피해 다녀야만 했다. 성찬과 친해진 계기는 박계장과 함께 집을 구하러 다닐 때 그의 도움을 받으면서였다. 현옥은 단지 박계장에게 도움을 얻으려 한 것인데 오히려 성찬이 발 벗고 나서서 길을 알려주고 집을 구하는데 더 열성을 보여주었기에 그런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배려가 너무도 고맙게만 느껴졌었다. 어차피 일하면서 계속 얼굴을 볼 사이고 같은 부서에 있으니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 낫겠다 싶어 딴에는 성찬을 친한 친구로 여기며 그의 마음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 주었던 것이 결국 감정이 꼬이고 만 것이었다. 눈치 없는 현옥은 성찬을 그저 동료로 생각하였으나 처음부터 현옥에게 관심을 가졌던 성찬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현옥과 비슷한 시기에 입사를 한 성찬은 처음 현옥과 대면하면서부터 남다른 마음을 품기 시작했었다. 뛰어나게 예쁜 외모도 아닌데 그의 눈에 비친 현옥은 이곳에 있기에는 아까운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그저 평범함 보다는 남들보다 돋보이는 존재, 그래서 자꾸 눈길이 간 건지도 몰랐다. 혼자서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현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마음이 뿌듯했었다. 그런 그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숨통을 열어준 이가 박계장이었다. 새침데기 현옥과 유일하게 장난을 즐길 수 있는 상대가 바로 자신의 직속 선배인 박계장이었기에 성찬은 박계장과 함께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낄 수가 있었다. 같은 직장의 남자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현옥이 박계장을 스스럼없이 대하며 의남매 결의를 하는 것을 질투하기는 했으나 오히려 두 사람 사이가 편해질수록 그녀에게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되어 줄 것 같아 그들 둘 사이에 자신은 자연스럽게 녹아드려 하였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현옥에게 알게 모르게 표현을 하기도 했으나 둔한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현옥은 단 한 번도 성찬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현옥이 야속하였지만 성찬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그녀의 주위를 돌며 조금씩 그녀의 마음에 들어가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현옥이 쉬는 날 박계장과 함께 집을 찾아와 희연에게 낯을 익히고부터는 부쩍 현옥의 집을 제집처럼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그 날도 성찬이 찾아 온 것에 의아해 했던 현옥은 불쑥불쑥 집을 찾아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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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이 이상하게 생각이 되었었다. 희연에게 자주 찾아뵙겠다고 했던 것이 그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말 그대로 행동이었던 것이다. 틈만 나면 희연에게 인사를 오는 것이고 현옥이 없는 틈을 타서 손이 필요한 일을 대신해 주고 가는 것이었다. 그런 성찬의 행동을 보며 희연은 그가 자신의 딸에게 단순한 동료가 아닌 그 이상의 감정이 있음을 눈치 챘고 이를 확인하려 넌지시 딸에게 운을 띄었으나 딸의 반응은 냉담했었다. 그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듣기 싫다는 반응이고 상대도 하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딸의 마음이 그런데 일방적으로 찾아다니는 성찬을 보면서 희연의 처신이 상당히 난감해 졌다. 도울 일 없으니 오지 말라 소리도 여러 번 했건만 그저 어머니 얼굴 뵈러 온다며 수시로 드나드니 그것마저 야박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주곤 하는 것이 그나마 딸을 대신하여 성찬에게 해줄 수 있는 나름의 위안이었으며 그가 상처를 덜 받게 하는 궁여지책이었다. 현옥의 뒤꽁무니만 쫓는 강아지처럼 성찬은 쉬는 날이면 으레 현옥의 집을 찾아 와서 어미의 밥을 얻어먹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니는 우리 엄마가 니 밥해주는 사람이가? 와 허구한날 우리 집에 찾아 와서 엄마한테 밥 달라 하노? 쌀 맡겨 났나?” 현옥이 성찬을 보는 것이 짜증이 나서는 태방을 놓는다. “니도 참! 손님을 그래 대하는 법이 어데 있노? 야가 니보러 왔더나. 내보러 왔지.” 무안해하는 성찬을 끼고 도는 것은 어미의 몫, 딸의 태방을 막고 나서서 성찬을 옹호한다. “성찬아! 자 말에 괘념치 말그라. 내 얼른 상 차려 줄끼이 앉아 있그라.” “예. 어머니!” 현옥이 무안을 줄 때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들더니 희연이 편을 들어 주자 금세 태도가 당당해진다. 현옥은 성찬의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다. 자신 앞에 당당하게 서지도 못하고 지질하게 구는 모습이 남자답지 못해 보여 믿음이 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성찬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현옥은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잠시 후, 말쑥하게 차려 입고 방을 나오는 현옥을 보고는 성찬이 묻는다. “어디가나?” “남이사 어디를 가든 말든. 니하고 무신 상관이고?” 그 사이 상을 차려 나온 희연은 나들이 준비를 하고 나온 딸을 보며 한마디 한다. “니는 사람이 왔는데 같이 안 있고 어데 가는 기고?” “자는 엄마 보러 왔다 했으니까 엄마가 있어 줘요. 나는 친구 만나러 나갈랍니다.” “니도 참말로…….” “성찬아! 밥 먹고 가라. 나는 나간다. 엄마 갔다오께요.” 그렇게 핑계 삼아 밖을 나오기는 했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기에 가기 쉬운 극장을 찾는다. 영화를 감상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조각 같은 외모의 남녀 주인공들이 나누는 사랑이라는 것이 어찌 그리 아름답고 애절한지, 자신의 사랑도 그 영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애절하고 아름다웠으면 하는 허황된 꿈을 꿔본다.  어쩌면 현옥이 꿈꾸는 사랑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춘 남자 주인공처럼 현실에서도 완벽한 사람을 만나 자신의 인생이 달라지길 바라는, 그래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황홀함을 느끼고 싶은 현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똑 같은 생활의 반복이기에 그로 인해 성찬의 존재는 되레 화를 돋우는 것이고 짜증을 유발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더 나을 것 없는 상대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기에. 성찬의 행동은 날이 갈수록 더 노골적이 되었고 이제는 알게 모르게 직장에서도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가 되었다. 물론 그 소문의 발상지는 성찬이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소문을 현옥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성찬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것은 자신하고 상관이 없는 일이며 그 소문에 대해 펄펄 뛸 필요도 굳이 아니라고 해명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남들이 오해를 하든 말든 이곳에서 자신의 배필을 찾을 것은 아니었으니 무어라 소문이 떠돌아도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당당하게 자신을 펼쳐 보였다. 며칠 전부터 성찬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현옥은 알고 있었다. 무언가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는 듯이 보였으나 현옥은 그와 마주하기를 꺼려 틈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무렵 현옥이 작업실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성찬이 그녀 앞을 가로막고 선다. “현옥아! 잠깐 내 좀 보자. 할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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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니하고 할 얘기 없다. 비키라.” 냉정한 그녀의 행동에 성찬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녀가 자신을 지나치는 것을 보고만 있다. 낙심한 표정으로 현옥이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섰을 뿐 성찬을 그녀를 쫓아가 잡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 도안실로 맥없이 걸어 들어간다. 모두가 오후 작업 시작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작업실 책임을 맡고 있는 과장이 작업대 앞으로 나와 사람들의 이목을 주목시킨다. “자자. 잠시 내 말 듣고 일 시작하자. 다름이 아이고 오늘저녁에 송별회가 있다. 다들 집에 가지 말고 회식자리에 참석하도록. 알겠나?” 갑자기 웬 송별회인가 싶어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손을 들어 질문을 던진다. “누구 송별횝니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인다. 과장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 하고 같이 일해 오던 도안실 이성찬군이 군에 입대를 하게 됐다. 그래서 그 친구를 위해 준비하는 송별회다.” 또다시 웅성거림이 시작되고 이번에는 현옥에게로 모든 눈길이 쏠렸다. 옆에 있던 여공이 현옥의 팔을 툭 치며 묻는다. “니는 알고 있었나?” “뭐를?” 모든 이들의 눈길이 자신에게 쏠리고 있음에도 현옥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다. “성찬이 군대 가는 거 말이다. 알았으면 얘기 좀 해 주지.” “내가 와 가 일을 알아야 하노? 내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데.” “상관이 와 없노? 성찬이가 니 좋아하는 거 공장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근거 없는 소문이다. 나는 성찬이 가하고 아무 사이도 아이다. 괜히 실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소문을 일축시키는 현옥에게 여공은 순순히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콧대 세우는 현옥이 자기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았기에 기회를 노리고 언젠가는 그 콧대를 꺾어 주리라 벼르고 있던 찰나 오늘의 일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때다 싶어 여공이 반격에 나서려는 순간 앞에 서있던 과장이 이제 일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리를 떠버린다. 현옥의 코를 납작하게 누를 기회를 놓친 그녀의 눈이 찢어지게 현옥을 노려본다. 자신의 시선을 무시한 채 묵묵히 일을 하는 현옥이 보면 볼수록 밥맛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오후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퇴근시간이 되었다. 모두들 하던 작업을 마치고 송별회 참석을 위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회식장소로 향한다. 현옥은 그들 틈에 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가뜩이나 자신을 못마땅하게 보는 눈들이 많을 것인데 굳이 자신이 그 곳에서 그들의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아 집으로 가려고 발길을 돌리는데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현옥! 니 어데가노?” 그 목소리의 주인은 책임자 과장이었다. “송별회 장소는 그쪽이 아이다. 퍼뜩 일로 온나.” “과장님! 저는 그냥 집에 갈랍니다.” “야! 니 애인이 군대 간다는데 니가 가서 위로해주야지 어데 빠질라카노? 퍼뜩 못오나?” 낮의 상황이 반복된다. 현옥이 그 말이 더 짜증나 가지 않으려 했으나 괜히 윗사람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해 봤자 손해는 자신이 보는 것이라 마음을 접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애인은 누가 애인입니까? 지는 연하 안 좋아합니다.” 뾰루퉁하게 입을 내밀고 한마디 쏘아 붙인다. 과장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면서 현옥의 등을 두들겨주며 앞장세워 걷는다. 사람들이 빼곡히 둘러앉은 음식점으로 들어간 현옥은 성찬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송별회가 시작이 되고 음식과 술이 날라져 오고 사람들은 게걸스럽게 음식과 술을 제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앉은 자리에서 사방으로 술잔들이 오가며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취하는 사람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들 중에서 가장 많이 취한 사람은 오늘의 주인공인 성찬이었다. 주는 술잔들을 연거푸 마셔대더니 결국 몸을 추스르지 못할 만큼 취해버렸다. 그런 성찬이 현옥의 곁으로 다가와 주사를 부리려하자 현옥은 그 모습마저 언짢은 생각이 들어 그 자리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어느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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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행분위기로 접어들어 이쯤에서 자신이 사라져도 별탈이 없을 거라 여기며 집을 향해 가려 하는데 어느새 뒤를 따라 나왔는지 성찬이 현옥을 부르며 따라오고 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틀거리며 현옥을 잡으려고 따라 오는 성찬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현옥은 그를 모른 척하며 뛰다시피 걸어서 그를 피해 집으로 돌아 왔다. 현옥이 헐떡거리며 방으로 들어서자, 어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와 이래 늦었노? 와 누가 쫓아 오더나?” “아니요. 늦어서 좀 빨리 걸어 왔더만 숨이 차네요.” “뭐한다꼬 이래 늦게 돌아 다니노? 내일 새북거치 나갈라 카믄 몸도 피곤할긴데 우짤라고!” “회식이 있어서 그랬어요.” 현옥이 한숨 돌리며 자리에 앉으려는데 밖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밤중에 누가 이래 대문을 두드리노?” 희연이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누구요?” “어머이. 지 왔심다. 문 좀 여러 주시이요.” 술에 취해 제대로 발음조차 어려운 성찬이 밖에서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희연을 부르고 있었다. “성찬이 목소리 아이가? 자가 이 밤중에 우얀 일이고?” 희연이 급하게 방에서 일어나 대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아이고. 이 사람아! 이 오밤중에 동네 사램들 다 깨것다.” “어머니이. 죗송합니더. 지가 오늘 술을 마이 마싰심더.” “그래. 많이 취했구마. 그란데 집에 가야지 와 여로 온기고. 우선 들 가자.” 겨우 성찬을 부축하여 마루 끝에 앉히고 희연은 큰 숨을 들이킨다. “뭐한다꼬 이래 술이 떡이 됐노? 어이?” 희연의 물음에 헤벌레 웃음을 짓던 성찬이 마루 끝에 다리를 드리우고는 앉은 자리에 그대로 드러누워 버린다. 그리고 이내 코를 골며 곯아떨어지고 만다. “아이고. 이사램이. 여서 이래 잠들믄 우짜노? 봐라. 성찬아. 일나그라. 일나서 방에 들가자.” 희연이 여러 번 얼굴을 때리며 깨워보지만 성찬은 꼼짝 하지 않았다. 어미가 마루에서 실랑이하는 소리를 방안에서 듣고 있었던 현옥이 짜증을 내며 마루로 나온다. “여가 니 집인 줄 아나? 와 여 와서 퍼질러 자노? 일나라. 너거 집 가라.” 현옥은 반응 없는 성찬의 몸뚱이를 흔들어 깨워본다. 그래도 여전히 꿈쩍 않는 성찬을 보며 희연은 딸의 행동을 말린다. “놔두라. 인사불성 돼서 못 일어난다.” “엄마. 어짤라고요?” “할 수 없제. 그냥 마루에 재우는 수밖에. 들가서 홑이불하고 베개 갖고 나온나.” 현옥은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베개와 이불을 가지고 나와 마루에 던지듯 내려놓는다. 두 모녀는 성찬의 다리를 마루위로 끌어 올려 겨우 자세를 잡아주고는 베개를 머리에 고여 주고 배위로 이불을 덮어준다. “한여름이라서 감기는 안 걸릴 기다.” 술에 취해 잠이든 성찬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희연은 수건을 가져와 얼굴을 닦아주고는 땀을 식혀 주려 그의 얼굴위로 슬슬 부채질을 해준다. “허어 참! 야도 술주정을 다 할 줄 아네. 성실하고 맴이 곱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구석도 있었구마. 하기사 사램인데 기분 나쁜 일도 있일기다. 그래 곤죽이 됐일기고.” 성찬이 그러는 이유를 현옥을 알고 있었으나 어미에게는 아무런 말을 않고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야가 참 내한테 살갑게 굴어서 친자석처럼 대해 줬더만 정을 느낀 기라. 그라니 술에 취해서도 저거 집인 줄 알고 여로 찾아 온기제. 내 혼자 외롭다고 말벗도 해주고 무겁은 것도 들어 주고 부산 질도 알리 주고 참 다정도 하제. 남자가 그래 살갑게 구는 기이 힘든데 야아는 천성이 타고 난기다.” 누가 듣고 있는 것도 아닌데 희연은 혼잣말로 성찬을 칭찬한다. 성찬이 이 모양새로 여기까지 온 것은 분명 현옥 때문일 테니 그의 속을 오죽이나 끓여 놓았으면 제 정신이 아닌데도 이리 쳐들어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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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는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딸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니 그의 진심을 조금이라고 알아보라고 현옥에게 할 말을 혼잣말처럼 해대는 것이었다. ‘내 딸이지만 참말로 매정타. 우째 사램 맴을 그래 무시하는 기고. 야가 내를 보러 온기가? 지 좋아서 온 거를 알면서도 이래 매정하게 구는지 도통 자 속을 모리겄다.’ 생김새야 좀 촌스럽게 생겼지만 사람 됨됨이는 어디에 내어 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 착실하고 순수한 성찬을 희연은 사윗감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현옥이 원수 보듯 하니 제 딸이라도 사람 보는 눈이 없다며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현옥은 끝내 고집이었다. 성찬이 자신의 배필은 아니라며 그의 짝사랑에 자신은 책임이 없다며 한사코 그를 거부하는 것이 어미로서는 딸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어찌되었든 혼인은 본인들의 몫. 자신도 평생의 한으로 남는 결혼이라는 형식에 학을 때는 판인데 딸마저 자신과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억지 결혼은 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결국 딸의 마음이 돌아서는 길밖에는 달리 어떤 방도도 없는 것이다. 한밤이 깊어서야 땀을 식혀줄 한줄기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어지간한 더위에 혀를 내두를 판이나 밤은 그래도 잠을 청할 수 있을 만큼은 기온이 알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찬이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희연의 눈꺼풀이 서서히 무거워져 오자 부채질하던 손길을 멈추고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눕는다. 어느새 잠이든 딸들 옆에 나란히 누워 희연은 눈을 감는다. 이른 새벽, 목이 타는 갈증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난 성찬은 물을 마시려 마당으로 내려와 물통에 받아 놓은 물을 바가지로 떠서 벌컥벌컥 마셔댄다. 배가 부르도록 물을 마시고 나서 겨우 눈이 트이자 밝아 오는 새벽빛에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닫는다. 간밤에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현옥의 뒤를 쫓아 찾아 온 곳이 현옥의 집, 그 곳에서 대문을 두드리며 어머니를 외치던 자신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이 났다. 술김에 벌인 치기 어린 행동을 이제 와서 후회해본들 엎어진 물이었다. 그냥 몰래 도망쳐버릴까 생각하다 그래도 떠난다는 인사는 하고 가는 것이 예의다 싶어 희연이 깨어나기를 마루에 기대어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에 눈을 뜬 희연이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온다. 멍하니 마루 끝에 앉아 있던 성찬이 방문소리에 놀라 튕기듯 일어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술 좀 깼나? 무신 술을 그래 마싰노? 아무리 젊다 캐도 그래 마시면 속 베린다.” 어미의 심정으로 자식을 생각하듯 자신을 챙겨주는 희연의 말에 성찬의 얼굴은 붉어졌다. “잘못했십니다. 어머니! 못난 꼴 보여 드렸십니다.” “벨소리 다한다. 속 쓰리제? 아침 차리 줄테이 먹고 출근하그라.” “아입니다. 집에 가서 묵겠십니다.” “혼자서 무신 밥을 먹겠노? 그라고 속도 쓰릴 긴데 밥이나 차리 묵겄나? 얼른 밥 안칠 기이 쪼매 앉아 있그라.” 희연이 마루에 내려서자 성찬이 희연을 부른다. 그리고 마당에 내려서 희연을 향해 큰 절을 올린다. “어머니!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건강하게 지내시이소.” “야가, 갑재기 와 이라노? 니 어데 멀리 떠나나?  와 이라노?” 뜬금없는 성찬의 행동에 희연은 놀란 얼굴로 성찬을 바라본다. “지 내일 군대 갑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희연의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남이지만 그래도 자식같이 여겼던 성찬이 군대 간다는 말에 희연은 조금은 충격을 받았는지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온다. “우무야꼬! 그 말을 와 인자 하노? 미리 귀띰이라도 했이면 내가 이래 서운하지는 않을기다. 우째 니가 그래 술이 떡이 됐나 캤더만 그래 속이 상해 술을 그래 많이 마신기였구마.” 이제야 성찬의 행동에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된 희연, 성찬을 바라보는 눈빛에 안쓰러움이 묻어난다. 그런 희연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 듯 성찬은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지난밤의 일을 후회하며 희연에게 용서를 빌었다. “마지막까지 추한 꼴 보여 드리서 참말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런 소리마라. 니 속이 오죽했시면 그랬겄나. 내 다 이해한다.” “고맙습니다. 지를 친아들처럼 대해 주신 어머니 덕에 마음이 따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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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 니는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니가 그래 살갑게 대해 주는데 내라고 니가 안이쁠리가 있더나. 다 니가 잘 해서 받은 상 인기라.” 희연의 따듯한 말에 성찬의 가슴 한 켠이 뜨거워지면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성찬아! 삼 년이 긴 세월이기는 하다만 니 하기 나름이다.  사내라면 한 번씩은 다 거치는 관문 아이가? 니도 잘 지내다 올기라 믿는다. 몸조심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삼 년 후에 다시 보자. 알겄제?” “예.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래도 가기 전에 내가 니 밥 차려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기다리고 있그라.” 뒤돌아서 슬쩍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며 희연은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간다. 어미가 차려 준 밥상에 성찬까지 둘러 앉아 아침식사를 마치고 현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성찬이 가는 마지막까지도 그를 보려 하지 않았고 어미는 그런 딸을 나무라면서 집을 나서는 성찬을 끝까지 배웅해준다. “몸 성히 잘 갔다 오니라.” “예. 어머니! 건강하시고요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오냐! 그라자.” 희연이 성찬의 등을 토닥거리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성찬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바라보고 선 희연을 향해 몇 번을 더 절을 하고는 골목길을 빠져 나간다. 그의 등 뒤로 뜨거운 해가 열기를 발산하며 뒤를 따랐다.

유수같이 흐르는 세월을 따라 나이는 점점 늘어가고 철부지 멋모르기만 하던 현옥의 나이도 어느덧 스물넷, 여전히 사는 것에 급급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차츰 생활은 안정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찬옥이 일을 하게 되어 두 사람이 벌어들이는 돈으로 생활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편이었으나 어미의 근심은 여전히 사라지지를 않았다. 찬옥이 나이 어느덧 스물여덟, 혼기 놓쳐도 너무 놓쳐버렸기에 딸을 여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여전한 근심거리였다. 게다가 현옥의 나이도 한창인 스물넷, 두 딸을 생각하면 어미의 가슴은 미어진다. 하나 여의는 것도 벅찬 일인데 둘을 어떻게 시집보내나, 게다가 막상 그녀들이 출가를 하게 되면 남은 자신은 어떻게 생활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또다시 막막해지는 것은 여전하였다. 조금 나아지면 또 다른 고난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서니 팔자 한번 기구하다 싶은 마음에 자신까지 원망을 해본다. 과년하다 못해 넘치는 두 딸을 데리고 있는 어미는 남의 눈도 무시 못 하는 것이기에 집밖을 나서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물론 어울리는 성격이 되지 못해 이웃이라고 친하게 지내는 이들은 그리 많지가 않았으나 어쨌든 그녀의 집안을 아는 이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는 했다. 말로야 딸들이 콧대가 높다고는 하나 그 말을 믿어줄 이는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니 어찌할지를 모르고 하루하루 미적거리며 날을 보내는 수밖에. 어미의 걱정거리도 모른 채 현옥은 쉬는 날이면 친구들을 만나면서 나름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려 애를 썼다. 육 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과 낯을 바꿔가며 매번 똑같은 작업을 하고 맡기도 싫은 역한 고무냄새를 억지로 참아가며 견디는 자신을 위해 안식을 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휴일의 달콤함은 일주일을 버티는 힘의 원천이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망각의 시간, 그녀에게 있어 휴일은 그런 의미였다. 그렇기에 자신을 위해 스스로에게 주는 상이라 집을 떠나 직장을 떠나 친구들과 뭉쳐 다니며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중이다. 오늘도 현옥은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구경을 가기로 했다. 시내에 유명한 사찰이 있다 하여 그 곳을 찾아보는 것이 오늘의 일과였다. 화창한 사월의 어느 날, 현옥이 깨끗하게 차려 입은 차림새로 방을 나오자 마루를 닦고 있던 희연이 딸을 쳐다본다. 나이보다 앳돼 보이는 얼굴에 흰색 옷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차림새가 어미의 눈에는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단정하고 청아해 보였다.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을 만큼 당당해 보이는 딸이 대견스러우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가슴에 한 곳에 응어리져있는 자식에 대한 미안함, 어미의 한 때문이리라. ‘아아가 그래 하고 싶어 하던 공부나 제대로 시켜줬이믄 지 말대로 선생질이나 하믄서 지 인생 펼치고 살긴데... 공장에 틀어박히서 썩는 것이 아깝다. 부모 업을 대신 짊어졌으이 얼매나 억울할꼬.’ 어미의 속에 스미고 차오르는 것은 자식의 앞길을 제대로 터주지 못했다는 자책에 이는 미안함. 어미는 평생을 한으로 현옥을 바라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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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데 갈라고 차리 입고 나왔노?” 밝게 번지는 미소로 어미를 바라보며 현옥은 대답을 한다. “친구들하고 시내 구경하기로 약속을 해서 나갈라고요.” “또 야간 들어갈라 카믄 푹 쉬어 주는 기이 안 낫겄나?” “오늘 하루 놀고 내일 푹 자면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 마요.” “그러기... 꽃다운 청춘을 방구석에서 잠으로 때우는 거보다는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는 기이 나을 기다. 갔다 오니라.” “예. 엄마! 다녀오께요.” “그래. 조심하고 일찍 들어 오그라.” 현옥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와 선희네를 찾았다. 같이 모이기로 했던 친구들이 아직 오지 않았는지 집안은 고요했다. 방안에 있을 선희를 부르며 현옥은 문 앞으로 다가갔다. “선희야! 내 왔다.” 현옥이 아무런 생각 없이 방문을 열려고 하자 방안에서 남자가 방문을 열고 불쑥 얼굴을 내미는 것이었다. 순간 현옥은 놀라 당황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선희 잠깐 변소 갔는데... 들어 와서 기다리소.” 현옥이 잠시 망설이며 들어가기를 꺼려하자 남자가 밖으로 나오며 방을 비워준다. “들어가소. 금방 올깁니더.” “예에.” 현옥은 남자의 시선에 잠시 머뭇거리다 방으로 들어가 선희가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방을 등지고 있는 남자는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 사이 선희가 나타나며 남자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방안을 들여다보더니 현옥을 보고는 반겼다. “왔나?”  “어.” 선희는 곁에 선 남자와 잠시 몇 마디를 나누고는 이내 방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는다. 현옥이 그 남자가 궁금해 선희에게 물었다. “우리 오빠다.” “오빠?” “그래. 친 오빠! 처음 보제.” 올 때마다 선희네에는 선희 혼자 있기만 해서 오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아. 그렇구나. 난 또 니 애인인 줄 알았다.” “니도 참! 사람 볼 줄 몰라 큰일이다. 남들은 다들 남매인줄 한번보고 알던데 우째 니는 애인으로 생각을 했노! 참말로 신기하다.” 선희가 웃으며 현옥을 놀리자 현옥은 입을 삐죽거리며 선희의 말을 되받아 친다. “그래. 나는 사람 볼 줄 모른다. 처음 보는 사람 얼굴 뚫어지게 보는 것도 아인데 내가 남매 줄 어째 알겠노?” “그라니까 니가 여직도 애인이 없는 기다.” “그러는 니는 애인이 있어 하는 소리가?” “내야 당연... 있을까 말까 한다.” “뭐꼬?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기지 그래 애매한 대답이 어디 있노?” “아직 좋다는 말을 안 했으니까 그라제.” “누군데?” “궁금하나?” “어! 내도 아는 사람이가?” “그래! 니도 안다. 그 사람.” “그라믄 그 사람도 우리하고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거가?” 선희의 고개가 세로로 움직였다. 현옥은 선희의 대답에 김이 빠진다. 제 주위에 하나같이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엮여서 결혼까지 하는 커플들을 많이 보아 온 터라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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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이 접하는 그들의 일상을 현옥이 지켜 본 결과 자신의 눈에 비친 그들의 행복은 그저 궁상스럽다고나 할까, 현옥에게는 그 일상이 행복일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같은 직장에 둘이 나란히 출근하여 부끄럽다는 생각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귀에 입을 걸고 다니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히죽거리는 그들, 점심시간이면 작업대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마주 쳐다보며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연신 웃어대며 밥을 먹는 그들, 큰 밥통에 두 사람 분의 밥과 반찬이라고는 김치뿐인 도시락을 싸와서는 신랑이 퍼놓은 밥숟가락 위에 시뻘건 김치를 쭉 찢어서 걸쳐주고는 양념 묻은 손가락을 제 입으로 쪽쪽 빨며 다시 그 손으로 또 김치를 찢어서 제 숟가락 위에 걸쳐 한입 크게 삼키는 여인,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현옥은 정말 저들이 행복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결혼에 대한 환상을 무참하게 깨어버리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봄으로 결혼이라는 것이 행복이기보다는 서글픔인 것만 같아 결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만약에 한다 해도 같은 직장에서 얼굴 맞대고 보는 이와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희마저 그들의 삶에 동참을 하겠다고 하니 자신이 아는 모두가 그런 삶을 행복으로 안다는 것이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누군지 궁금하제?” 엄청난 비밀이라도 발설할 것 같은 표정을 한껏 부풀린 선희의 얼굴, 그에 반해 현옥은 그 사실이 별로 궁금하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답을 한다.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다. 얼마 안 있으면 소문 날건데.” 김이 빠져버린 듯 선희의 얼굴에서 기대감이 사라져 버린다.  “참말 안 궁금하나?” “그래! 하나도 안 궁금하다.” 현옥이 놀리 듯 새침하게 굴자 조금 마음이 풀어진 선희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가시나가 뭐 그래 멋대가리 없노?” 둘이 마주보고 웃고 있는 사이 같이 가기로 한 친구들이 하나 둘씩 선희의 방으로 모여 들었다. 하나 같이 표정들은 들떠 있었고 나름대로 제 모습들에 신경을 쓴 표가 확연히 났다. 사월의 온화한 날씨 속에 또래의 다섯 여인이 화창한 길을 따라 걸음을 걸으며 산등성이를 따라 제철을 맞아 만개한 철쭉꽃을 감상하며 완만한 산길을 천천히 걸어 오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따듯한 햇살이 정수리에 쏟아져 내리고 몸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은 청량함으로 다가왔다. 한나절 봄의 기운을 몸 속 깊이 간직하고 산사를 내려오는 여인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낸 다섯 사람은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각자 흩어져 집으로 향했다. 선희가 집으로 들어서자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오라비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재밌게 잘 놀았나?” “어. 재미있었다.” “처음에 온 니 친구. 가도 니하고 같이 일하는 친구가?” “누구? 현옥이 말이가?” “그 친구 이름이 현옥이가?” “어. 와?” “참 얌전하고 순해 보이더라. 인상도 좋고. 호감 가는 인상이데.” “…….” “그 친구 혹시 애인 있나?” “와? 오빠가 관심 있나? 그라믄 애저녁에 관심 끊어라. 그아도 박씨다. 같은 성씨는 안 되는 거 알제?" “야! 내가 언제 관심 있다고 했나? 와 혼자 앞서노?” “그라믄 와 꼬치꼬치 캐묻는데?” “내가 아이고. 니도 알제? 내 친구 창수. 가를 소개 시켜 줄라고.” “창수오빠 말이가?” “그래. 그아가 대학 졸업하고 부산에서 약방 차리서 장사 잘하고 있다 아이가.” “창수 오빠 아직 장가 안 갔나?” “그래. 그라니까 내가 소개시켜 줄라 하는 거 아이가.” “현옥이야 괜찮은 아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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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라믄 내가 한번 나서보까?” “마음대로.” 선희는 오라비의 말에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고 피곤하다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미련이 남은 오라비가 동생의 시큰둥한 반응에 몸이 달아 쫒아 들어온다. “그라지말고 니가 좀 나서봐라.” “내가 어떻게?” “니가 니 친구한테 말 좀 건네 봐라. 뭐라고 하는지?” “그거는 어렵지 않지만 가는 그런거 싫어 할거다.” “그래도 물어보고 온나? 알았제.” “알았다.” 오라비의 성화에 선희는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는 오라비를 방에서 쫒아낸다.

꿈같은 휴식을 끝내고 현옥은 야간근무를 위해 출근을 하였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선희가 현옥의 모습을 보고는 쫓아와 현옥을 부른다. “현옥아! 우리 오빠가 니를 잘 보고 칭찬을 많이 하더라.” “그랬나!” “니 인상이 호감 가는 인상이라면서 순하고 착해 보인다고 니 애인 있는지 물어 보길래 내가 없다고 했더만 오빠 친구 중에 괜찮은 사람 있다고 소개 시켜 주까 그라더라. 니 혹시 관심있나?” “내가? 나는 아직 결혼 생각 없다. 집안 형편도 그렇고 아직 시집 안 간 언니도 있어서 언니가 먼저 가야 내 차례가 될 거다. 오빠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아직 생각이 없다.” “그래? 나는 니가 그 오빠하고 잘 됐으면 좋겠는데.” “너거 오빠 맘 상하지 않게 잘 말해도. 알았제?” “알았다.” 선희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현옥이 거절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희 오라비는 그래도 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며칠을 혼자서 고민하다 선희를 데리고 현옥의 집으로 찾아왔다. 야간 근무라 현옥과 선희가 피곤한 줄은 알지만 그냥 미적거리고 있기가 답답해 현옥의 어미를 만나 얘기를 전하고 싶어 찾아왔던 것이다. 현옥의 소개로 선희와 선희 오라비가 희연에게 인사를 올리고 희연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네 사람이 마루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희 오라비는 자신이 이곳을 찾은 목적을 희연에게 털어놓는다. 뜻하지 않은 좋은 인연이라 선뜻 뭐라 대답하기가 곤란해 희연은 말을 돌린다. “그래 잘난 사램이 공장 다니는 우리 현옥이를 만나 줄까 싶지 않은데...” 희연은 층이 지는 상대를 만나면서 현옥이 상처를 받지 않을까 은근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학벌에다 집안도 부유하니 제 딸 처지와는 너무도 층이지는 것이라 보기 전부터 주눅이 드는 것이다. “이런 저런 얘기는 우선 다 생략하고 만나기나 한번 해 봤으면 싶습니다. 현옥이 처음 봤을 때부터 자꾸 그 친구 생각이 나고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 지를 믿고 한 번 만나는 거 허락해 주이소. 그 친구도 그래 꽉 맥힌 놈은 아이니까 지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깁니다.” “내 허락이 중요한 기이 아이고 우리 현옥이가 맴이 있어야제? 니 생각은 어떻노?” 어미 옆에 말없이 앉아 있는 현옥에게로 두 사람의 시선이 고정된다. 늘 상 자신이 꿈꿔왔던 상대기는 했다. 학벌에 직업에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더 나은 상대라는 점에서 현옥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행복을 바랄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에 뭐라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허락하시믄 현옥이도 그냥 따를 깁니다. 그라니 허락 해 주이소.” 딸을 위한 길이니 반대를 할 수가 없는 입장, 어미에게는 항상 생인손 같은 현옥이기에 그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후에 어찌 되는 것은 하늘이 정하는 일, 우선은 그들의 만남을 가로막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 어미는 허락을 한다. 남의 일까지 신경 써주는 선희 오라비의 마음이 고마워서 자신의 뜻을 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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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에 날을 잡아 만나게 하겠다며 선희 오라비는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마치 그 일이 자신의 일인 양 그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우리 현옥이가 복이 없지는 않은 갑다. 저래 좋은 친구들과 니한테 관심 써주는 사램들까지 우리 현옥이가 인복이 있는 구마. 니 맴이 곱아서 사램들 눈에도 그기이 보이는 갑다. 이래 나서주는 사램들이 다 있는 거를 보믄.” 희연은 흐뭇하게 웃으며 현옥을 칭찬한다. 며칠 후 선희를 통해 그쪽에서 만나겠다는 연락이 왔고 선희 오라비와 서로 약속을 맞춰 현옥이 쉬는 날에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두 오누이가 중매쟁이가 되어 선희는 현옥과 함께 그리고 선희 오라비는 친구인 창수와 함께 다방으로 나왔다. 어색한 침묵 속에 네 사람이 같이 앉아 분위기를 풀어가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잠시나마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놓고 이윽고 두 남매는 자리를 뜨고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첫 만남에서 현옥이 느낀 그의 인상은 무척이나 모범생다운 모습의 과묵하다고 해야 하나 별로 말이 없는 조용한 편이었다. 여름이라 가볍게 걸치고 나온 하얀색 와이셔츠가 하얀 피부와 잘 어울려 깔끔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어색한 자세로 앉아 서로에게 간단하게 몇 마디씩 던지는 것이 다였으며 선희 남매가 나가고부터는 별달리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무는 편이었다. 현옥 역시 낯을 가리는 편이라 상대에게 먼저 질문을 건네거나 하지는 못하였다. 그저 묻는 말에 대답을 할 뿐 몇 마디 하는 것으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그저 재미없는 사람이겠거니 생각을 하고 자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것이라 지레짐작을 하며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둘은 서먹하게 헤어지고 말았다. 선을 보고 들어온 딸의 표정이 밝지 못한 것을 보고는 어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기대도 없었던 터라 큰 실망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쪽의 반응은 좋은 편이었다. 다시 선희 오라비를 통해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며 선희가 현옥에게 알려주었다. 현옥은 망설여졌다. 진실을 감추고 만남을 유지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거절의 뜻을 밝히고자 선희 오라비를 찾아갔다. “오빠! 저는 자신 없습니다. 저같이 낮은 위치에 사람하고 어울리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런 사실 알게 되면 그쪽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 거고요.” “영 감추자는 거는 아이다. 몇 번 더 만나보고 나서 하자는 거다. 미리 안 된다고 겁먹지 말고 되는대로 한번 해보자. 내가 거들어 줄거니까 내만 믿고 만나봐라.” 간곡하게 청하는 선희 오라비의 청을 거절하기가 뭐해 우선은 아무런 마음 없이 만나기로 한다. 이번에는 주선자들은 빠지고 현옥과 창수 단 둘이 만나기로 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역시나 선희 편에 알려왔고 현옥은 처음 하는 데이트에 마음이 조금 설레었다. 상대편은 아직 현옥이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약속시간은 평일 오후로 약속장소는 시내의 한 음식점이었다.  부산에 온지도 벌써 육 년이 지나고 있는데 아직 지리는 익숙지가 않았다. 근처 가까운 곳을 다녀보기는 했으나 그다지 밖으로 나도는 성격이 못되어 매일 반복되는 생활은 집 아니면 직장, 가끔씩 친구들과 시내구경이 전부였었다. 게다가 길눈까지 어두운 편이니 그가 말한 유명한 음식점을 혼자서 찾아간다는 것이 조금 두렵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약속은 정해져 있는 것이고 피할 수가 없으니 부딪혀 봐야 할 것이다. 약속시간이 다가올수록 긴장이 되어 현옥은 처음으로 일찍 조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른 시간에 집으로 들어서는 자신의 발길도 어색하기만 했다. 그 시간에 들어 와보는 것이 처음이라 당연히 집에 어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으나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현옥은 우선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고 나갈 옷을 골랐다. 많지 않은 옷이지만 그 중에서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골라 깔끔하게 차려 입고 외출할 때만 신는 구두를 신고 서둘러 약속장소로 향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길을 잘 모르고 헤맬 것이 분명해 일찍 서둘러 나섰다. 전차를 타고 시내에 도착을 한 현옥, 복잡한 도심에 있기는 처음이었다. 자신의 동네와는 사뭇 다르게 평일 오후인데도 시내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오전에 선희에게서 이곳의 지리를 대충 듣기는 했으나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현옥은 음식점이 즐비한 거리를 이리저리 살피며 그와의 약속장소를 눈으로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음식점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히 여 어디라 했는데 와 이래 안 보이노?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 큰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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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은 벌써 약속시간을 십 분이나 지나쳤다. 도착은 벌써했으나 길을 몰라 헤매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버려 결국에는 약속시간을 넘어섰던 것이다. ‘분명히 저기가 맞는데 와 그 음식점이 안 보이노 말이다.’ 애타는 현옥의 마음을 약 올리기라도 하듯 그녀가 찾는 음식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꽁꽁 숨어 있었다. 현옥이당황한 표정으로 건널목 앞에 서서 음식점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를 찾으십니까?” 조용한 목소리로 남자는 현옥의 옆에 바짝 달라붙어 현옥에게 물었다. 현옥이 바라본 곳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창수가 다가와 서있었다. 순간 현옥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어벙한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았을 창수를 보게 되자 무안하여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어색하게 묻는다. “일찍 오셨습니까?” “네. 현옥씨 오기만 지루하게 기다리다 안 오시기에 집으로 찾아가려고 내려오던 중입니다.” 그가 웃으며 붉어진 현옥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죄송합니다. 제가 길눈이 좀 어두운 편이라서요.” “제가 내려오기를 잘 했나 봅니다.” “…….” 자신의 촌스런 행동에 기가 눌린 현옥은 그를 똑바로 보기가 민망하였다. “갑시다.” 그가 이끄는 곳으로 현옥은 말없이 뒤를 따랐다. 조금 앞서 걷던 창수가 현옥을 돌아보며 묻는다. “여기는 언제 나와 봤습니까?” 현옥은 주춤거리다 대답을 한다. “아직 못 와 봤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찾기가 힘들었나 봅니다.” 창수는 걷던 걸음을 멈춰 서더니 건물 한 곳을 가리키며 현옥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그 음식점입니다.” 몇 바퀴를 돌며 보았던 곳이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 곳은 음식점이 아니었다. 현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챈 창수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현옥에게 말한다. “여기 이층이 그 음식점 입니다.” 그제야 현옥의 눈에 이층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만 보고 다녔으니까 못 찾을 수밖에요.” “음식점이 다 아래층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혼잣말처럼 대꾸하는 현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창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올라갑시다.” 창수가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고 그 뒤를 현옥이 따라 오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현옥은 자신의 촌스런 행동이 바보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 것은 현옥의 자격지심일 뿐 창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현옥을 대해 주었다. 처음 보았었던 그의 인상과 다르게 오늘은 그도 꽤 수다를 떠는 편이었다. 조용하기만 할 것 같은 사람이 은근히 재미있는 농담도 던져주고 현옥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가며 분위기를 띄어 주었다. 재미없는 사람일거라 여겼던 현옥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식사가 나오고 두 사람은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서로에게 질문을 던져가며 즐겁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의외로 그가 자상하게 챙겨주는 것이 현옥은 어색하였지만 그래도 이런 것이 데이트의 묘미란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선 두 사람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낮 동안의 뜨거웠던 열기를 식혀주듯 거리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배도 부른데 조금 걸으까요?” 창수가 현옥을 보며 물었다. “예.” 현옥은 짧게 대답을 하고는 천천히 걸어가는 창수와 보조를 맞추며 거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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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괜찮으시다면 우리 영화 한편 보고 갈까요?” 창수가 현옥에게 물었다. 여름이라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은 초저녁, 창수는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웠던지 현옥을 붙잡는다. “혹시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은데…….” 현옥이 망설이는 것 같아 창수가 선수를 친다. “그러면 영화보고 갑시다.” 현옥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혼자서 결정을 내라고는 영화관을 찾아 성큼성큼 걸어간다. 시간이 아직 이르니 영화 한편을 보고 간다 해서 그리 늦지는 않겠다 싶어 앞서가는 창수의 뒤를 현옥이 열심히 쫓아갔다. 영화관에는 한여름의 더위를 날려줄 공포영화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포영환데 볼까요?” 창수가 현옥을 생각해서 물어본다. “상관없는데요.” 의외로 대담하게 나오는 현옥을 보며 싱긋이 웃으며 놀린다. “보다가 겁난다고 울지 마십시요.” “에이. 그런 행동은 어린애들 하는 짓이고요 저는 겁이 별로 없어서 괜찮은데 창수씨가 괜찮을지 걱정입니다.” 현옥의 농담에 창수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대답을 한다. “저도 겁이 없으니까 염려마십시오.” 두 사람은 표를 끊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저녁인데도 영화관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상영관으로 들어서 좌석을 확인하고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불이 켜진 상영관 안에는 벌써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잠시 후,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자 사방에서 작은 움직임들이 일었다. 현옥 또한 바짝 긴장을 한 채 손을 움켜쥐고 무서움을 대면할 자세를 취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창수는 웃음을 띠우며 현옥에게 짓궂은 물음을 던진다. “벌써부터 무서운 거 아닙니까?” 현옥의 행동에 잠시 눈길을 주고 있었던 창수가 현옥의 움켜진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움켜쥐고 있지 말고 제 손을 잡지 그럽니까? 그러면 조금 덜 무서울 겁니다.” “아니요.  겁 안 납니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잔뜩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데도 현옥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가 내민 손을 당당하게 거절한다. 그녀의 행동에 머쓱해진 창수는 옅은 미소를 흘리며 자신의 손을 가지런히 모아 제자리에 내려놓는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으려는 현옥의 행동에 창수는 조금 서운함을 느꼈다. 아직 서로가 연인으로 발전하기에 이른 시기이기는 했으나 창수는 현옥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유치하지만 공포영화를 보면서 서로가 더 친숙해질 기회를 가지려 했는데 제 마음과는 다르게 선을 긋고 나오는 그녀에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현옥은 소리를 지르며 눈을 감기도 했지만 창수에게 기대는 행동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하게 만드는 영화가 끝이 나고 두 사람은 사람들에 휩싸여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음식점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과 더불어 휘황한 달빛아래 짝을 지어 걸어가는 연인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바람은 어느덧 시원하게 불어 여름밤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가 없을 듯하다. 어두운 밤거리에 온화하게 퍼져 나오는 불빛을 따라 밤의 풍경에 눈을 빼앗기고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걸으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현옥의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며 창수를 겨우 골목 끝에서 돌려보내고 현옥은 헐레벌떡 뛰어 집으로 향한다. 대문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어둠에 가려진 대문 앞에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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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은 그 그림자가 어미일거라 장담하며 어미를 향해 뛰어간다. “엄마!” 대문 앞에 다다라 어미를 부른다. “야야. 와 이래 늦었노?” “예. 그렇게 됐어요.” 걱정하는 어미의 팔을 잡으며, “뭐 하러 밖에 나와 있어요?” “밤늦도록 니가 안 들어와서 불안해서 나왔다. 가뜩이나 밤길 무섭어 하는 아아가 이래 늦도록 안 들어오는데 에미가 맴이 펜컸나?” “알았어요. 앞으로는 안 늦으께요.” 어미를 다독이며 어미와 함께 대문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고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으로 들어간다. “이 시간까지 뭐하고 인자 들어오는 기고?” 방에 앉자마자 희연이 딸에게 물었다. “선희 오빠 소개로 만난 그 사람 만나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그쪽에서 별로 라고 안 했나?” “나는 그날 그런 줄 알았는데 그쪽에서는 다시 만나보고 싶다고 선이가 말해주더라고요.” “…….” “그래서 선희 오빠가 다시 만나보라면서 날짜까지 잡아줘서 어쩔 수 없어서 만났네요.” “니 사정 알고 만나자 했드나?” “그거는 아니고... 선희 오빠가 그런 생각 말고 우선 만나만 보라고 해서 그냥 그러기로 했어요.” “내사 마 니가 다칠까봐 그기이 걱정인기라. 니가 상처를 받게 될까봐. 니만 아무렇지 않으면... 인연이야 그런 인연이 어디 쉽나?” “엄마! 너무 걱정마요. 그냥 선희 오빠 말대로 만나다보면 뭔가 생각이 들겠지요. 미리부터 걱정은 안할랍니다. 되는 데로 할 테니까 너무 걱정마요.” “그래. 니 말대로 되는 대로 하자. 미리 걱정해봐야 속만 상하제.” 딸의 말대로 걱정을 한들 무엇 하겠는가! 두 사람의 마음이 맞으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가족 위해 희생한 딸의 앞날이 펴질 수도 있는 것이니 부모가 되어 그 좋은 기회를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인연도 어찌 보면 딸의 운인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나서서 재를 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어미의 결론이었다. 다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면 좋겠지만 혹여 잘못되어 딸이 상처를 받게 될 까봐 그로 인해 좌절을 할 까봐 그것이 더 염려스러워 어미의 걱정은 자꾸만 커져간다.

현옥의 일이 차츰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동안 때를 같이하여 찬옥에게도 중매를 서겠다는 이가 나섰다.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집 여인, 그녀는 판자로 둘러친 울타리앞쪽에 쳐놓은 빨래 줄에 빨래를 널러 오가면서 옆집에 살고 있는 희연과 가끔씩 눈이 마주칠 때가 있었다. 그것을 계기로 희연은 그 여인에게 그저 인사를 나누며 대면 대면하게 지내고 있었다. 희연보다 여남은 살이 더 많은 여인은 중년이기 보다는 노파에 속할 정도로 늙어 보였다. 이사 와서 얼마 되지 않아 희연이 시장을 다녀오는 길에 옆집 여인과 마주쳤었다. 집으로 오는 길이라 먼저 가기도 그렇고 해서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희연이 그저 인사조로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한마디 건네주었던 것을 그녀는 진심으로 받아들여 하릴없이 수다나 떨어 볼 겸 희연의 집으로 방문하여 여러 시간을 죽치고 앉아 얘기를 주고받았다. 얘기를 주고받는 다기 보다는 일방적인 여인의 수다가 시작되면서 희연이 그저 맞장구를 쳐주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반가의 여인으로 살아온 삶이라 그다지 말주변이 없었던 희연이었기에 남의 말을 들어주기는 익숙했어도 남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어 놓는 데는 서투르기만 하여 말을 아끼며 상대의 말을 고스란히 듣고 앉아 있었다. 그런 성격 탓에 그다지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없었는데 그래도 말이라도 나누어 줄 사람이 생겼으니 외로움은 덜했다. 무더위와 지루함을 피해 말벗이나 나누어보려 희연을 찾아 온 옆집아낙이 대문으로 들어선다. “아이고. 덥어라. 무신 날이 이래 푹푹 찌노! 사램을 삶을라 카네.” 세면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 걸레를 빨고 있던 희연이 소리 나는 대문 쪽을 바라보며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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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는교.” “이 덥은데 뭐합니꺼?” 아낙은 부채를 손에 들고 연신 부채질을 하며 마당을 가로질러 안방 앞 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희연에게 묻는다. “야아. 방청소 좀 했더마 걸레가 새까맸네요.” “찬옥네는 덥지도 않는 갑네. 청소까지 하는 거를 보이.” “와 안 덥겠십니까? 그래도 치울 거는 치우고 살아야지요.” “내사마 땀이 줄줄 흘러내려서 움직이지도 몬하겠구마.” “그러게요. 날이 참말로 푹푹 찌는 구마요.” 희연은 물기를 꼭 짠 걸레를 들고 마루 끝에 앉으며 물기가 묻은 손과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걸레로 닦으면서 아낙을 향해 말을 건넨다. “점심은 자싰는교?” “하모. 벌시러 먹었제. 찬옥네는 아직 점심전이요?” “아입니다. 지도 벌써 먹었지요. 뭐 시원한 미숫가리라도 타올기이 좀 앉아 기시이소.” “덥은데 뭐를…….” 거절하는 듯 말하는 그녀를 마루에 앉혀 놓고 부엌으로 들어간 희연은 큰 대접 두 개에 미숫가루를 타서 소반에 얹어 들고 나온다. “그래 시원치는 않지만 자시보이소.” 대접을 들고 미숫가루를 목구멍으로 들이키는 여인, 그릇에서 입술을 떼고 잠시 입맛을 다시면서 “아이고나. 참말 고소하데이.” 희연이 옆에 앉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제 앞에 놓인 그릇을 들어 자신의 입 속으로 미숫가루를 한 모금 삼켜 넘긴다. 갈증이 나던 차에 달콤하고 고소한 미숫가루 맛이 입안을 맴돈다. 연신 부채를 손에 쥐고 부채질을 하며 한 대접을 다 비우고 나서 여인은 희연의 집을 찾은 목적을 얘깃거리 삼아 말을 꺼낸다. “찬옥 엄마! 찬옥이 나이가 올해 몇이고?” 갑작스런 질문에 희연은 멀뚱하니 아낙의 얼굴을 바라본다. “갑자기 우리 딸 나이는 와 묻는교?” 여인은 싱긋이 웃으며 희연을 보며 대답을 한다. “내가 중매를 좀 서보까 싶어서 그란다.” “중매요?” “그래! 큰 딸래미 보믄은 인물도 예쁘장하고 성격도 활달한 기이 남자가 꼬일긴데 우째 아직도 혼잔지 모리겄다. 혹시 배필로 생각하는 사램이 따로 있는기요?” “아이요. 그거는 아인데.” “그라믄 내가 나서서 선 자리 알아 볼기이 한 분 보소. 본다고 해서 다 되는 것도 아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알았지요?” “보는 거사 뭐 어렵겄소만…….” “그라믄 마 됐다. 내가 나서서 선 자리 한 분 알아 볼기이 찬옥네는 그리 아소.” 아낙은 그 말을 남겨 놓고 신이 나서 자리를 떴다. 그녀가 떠나고 홀로 남은 희연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난다. 혼기를 놓쳐버린 두 딸을 데리고 사는 것이 어미로서는 남들 보기 창피한 일이 기는 했다. 오죽 답답해 보였으면 자신보다 주위에서 중매를 서주겠다고 제안을 하였을까. 희연이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땅한 혼처자리도 나서지 않은 데다 이제 겨우 두 딸들이 벌어 오는 돈으로 살림에 재미를 조금이나마 붙이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아직은 목돈을 준비할 수 있는 여력까지는 없었다. 혼사비용이 한두 푼 드는 것이 아니니 그 감당을 어찌 할 것이며 또한 하나도 아닌 둘을 다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희연은 눈앞이 캄캄해져 온다. 남편과 헤어지고 이제 겨우 고생에서 벗어나 딸들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막상 딸들의 결혼문제가 닥치자 아무런 대책이 서지 않는 것이다. 희연의 시름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사이 옆집 아낙은 아주 괜찮은 선 자리가 나왔다며 찬옥을 이쪽으로 선을 보여 보라며 희연을 부채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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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댄다. 남의 속도 모르고 자신이 신이 나서 누가 보면 중매쟁이가 아니라 제 딸을 선보이려는 어미 같이 아주 호들갑이었다. “그 쪽 중매쟁이 말로는 총각이 키도 훤칠하이 크고 인물도 예사 인물이 아이라 카네. 그라고 집도 부자라 하더마.” “우리 찬옥이한테 물어 보고 대답 드리기요.” “물어 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찬옥네가 결정하믄 되제. 내사마 딸이 하나만 더 있이면 그 총각을 내 사우 삼고 싶구마.” “글쎄요…….”" “참말로 찬옥네도 답답타. 뭐 그래 고민을 했샀노? 어매가 보라캐야 보제 딸래미가 나서서 보겠소 하겄나! 그냥 밀어부치소. 그래야 일이 되제. 안돼겠다마. 내가 나서서 날 잡을라요. 찬옥네는 그날 딸래미나 데리고 나오소.” 희연이 제 생각과 같이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자 아낙은 설레발을 치며 제 선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통보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말리지도 부채질도 못하고 희연은 하는 수 없이 그이가 하는 대로 그냥 놔두기로 한다. 인연이 되면 좋은 것이고 아니 된다 하더라도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을 것이라 여겨 희연은 그냥 딸을 선보이기로 마음을 먹고 늦게 집으로 귀가한 찬옥에게 낮에 있었던 얘기를 꺼내어 놓는다. 어미의 얘기에 찬옥은 싫다 좋다는 표현을 않는다. 이미 첫사랑을 호되게 앓고 났으니 남녀의 정이라는 것에 그리 미련은 없는 사람처럼 그녀 또한 그 일이 성사되든 안 되든 별반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을 한다. 두 모녀의 마음은 그럴 진데 엉뚱한 사람만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찬옥이 쉬는 날을 맞춰 선을 보기로 하고 약속장소로 어미와 함께 나갔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 중매쟁이들과 선을 보는 총각 그리고 찬옥과 희연이 한자리에 나란히 앉아 서로를 탐색하고 있다. 총각 쪽 중매쟁이가 나서서 총각을 소개시키며 칭찬을 하느라 입이 마를 지경이었다. 이에 옆집 아낙도 질세라 옆에서 찬옥을 지켜 보아왔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어 놓는다. 한마디로 두 사람은 서로가 최고의 상대를 소개시켜주었다며 은근히 자신들의 자랑을 더하는 것으로 공치사를 해대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두 사람의 인물로 봐서는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찬옥의 인물이야 자타가 공인하는 미녀, 그에 못지않게 상대편도 손색없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찬옥이 그에게 마음이 끌린 것도 사실 그의 외모가 한 몫을 하기는 했다. 부자라는 말도 솔깃했으나 첫사랑 상일을 연상시키는 출중한 외모에 반해 처음 보는 그가 자신의 인연처럼 느껴졌다. 상대도 찬옥에게 호감이 있었던지 그날 헤어지고 나서 다음날 곧바로 중매쟁이를 통해 다시한번 더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고 옆집 아낙은 신이 나서 희연을 찾아왔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는 동안 몇 번의 만남을 가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하여 결혼을 하기로 약속을 한다. 찬옥이 총각을 만나고 와서 그쪽에서 날을 잡기를 원하고 있다며 어미에게 말을 흘리고는 어미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그 마음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찬옥도 마찬가지이기는 했다. 어미가 어떤 말을 해도 이번 인연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현재 찬옥의 마음인 것이다. 어미가 걱정하는 것을 알기는 했으나 이번만큼은 자신의 인생이 달린 문제라 한 치의 양보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찬옥아. 한해만 더 있다가 결혼하믄 안되겠나?” “싫어요. 나는 이 사람하고 결혼 할랍니다. 허락해주이소.” “니도 알다시피 우리 형편에 잔치 할 돈이 어데 있노? 머 쪼매라도 가진 기이 있어야제 니를 보내제.” “이 사람 놓치믄 내는 평생 후회할 겁니다. 엄마! 사정은 아는데 나도 이사람 놓치고 싶지 않아 그래요.” “…….” “그 사람이 자기하고 결혼만 하면 비용은 다 그쪽에서 책임지겠다고 했어요. 그라니 엄마. 내 빈 손으로라도 그 사람하고 결혼 하고 싶어요.”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해가지고 가믄 니가 시댁에 낯이 서겄나? 혼수 안 해가서 구박이라도 받으면 니는 서러워서 못 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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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는 내가 하기 나름이지요. 시부모님한테 잘하면 예뻐해 주실 겁니다. 엄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허락 좀 해줘요. 예?” ‘허기사 에미가 못나서 그란거를 누구를 탓하겄노? 혼기 놓친 딸 데려가기만 해도 감지덕지제 무신 주제에 튕기겄노? 대동진 빗을 내서라도 보내는 수 밖에.’ 이 일에 있어서 희연은 딸에게 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평생을 딸의 인생을 망쳐버린 무능한 어미가 되는 것이기에 한발 물러 설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막상 빚을 질 생각을 하니 희연은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무슨 수로 그 빚을 갚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기에 희연의 속은 애가 타고 있었다. 야간업무를 마치고 아침에 들어 온 현옥이 늦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어미의 밥상을 받으면서 찬옥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현옥이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미는 근심을 털어 놓으며 현옥에게 의논을 청한다. “니 생각은 우쨌으면 좋겠노?” 현옥이 밥숟가락을 놓으며 시선을 어미에게 고정시킨다. “그래 원하는데 결혼 시켜줘야지 별수 있어요?” “그거사 그렇지만서도 내 돈 한 푼도 없이 우째 남의 돈으로 결혼을 시키노 말이다. 내사 엄두가 안난다.” “그라믄 저래 갈라고 발버둥을 치는데 무슨 수로 말립니까? 말렸다가 나중에 그 원망을 어떻게 들을라고요?” “그라믄 빚지고 나믄 우리형편에 그 돈을 우째 갚을 기고? 니 하나 벌어서 겨우 입만 사는데 무신 수로 그 빚을 책임 지노 말이다. 그뿐이가? 우리 처지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돈을 빌리 줄 사람은 또 어디 있노. 내가 누구한테 부탁을 할거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사 내 간으로는 못할 기다.” 어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현옥도 잘 안다. 그러기에 현옥도 자신 있게 그 일에 나서지를 못할 수밖에. 어떻게 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으니 희연과 현옥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어미가 밥상을 들고 나가고 현옥은 방에서 이부자리를 개고 있으니 바깥에서 누군가 찾아 왔는지 희연과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방안에서 잠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현옥은 찾아온 이가 옆집 아낙임에 잠시 어미와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찬옥이가 얘기 하데요? 그쪽에서 날짜 잡자고 했다는데.” “예에.” 희연의 목소리에 기운이 빠진다. “그래 좋은 사람 만나기 힘들기요. 그마 결혼 시키소.” “좋은 사람 인줄은 아는데 내가 가진 기이 없어 걱정 아입니까? 혼수고 잔치비용이고 어디서 마련할 길이 없십니다.” “그쪽에서는 많은 거 바라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쪽 말로는 결혼식만 하믄 혼수는 신랑이 알아서 준비한다고 했으이까 없는 살림에 그냥 눈 딱 감고 그 날 잔치에 오는 사람들 음식 값만 좀 마련해서 후딱 해치우는 기이 좋겄구마.” “내도 그랬이믄 좋겠는데 아무것도 안해 가믄 혼수 때문에 아아 기 죽을 까봐 그 것도 문제고 당장에 음식 장만할 비용도 한 푼 없는데 어디 가서 빚을 낸단 말입니꺼?” “찬옥네 사정이 이래 딱했나? 내사 옆에서 한 번도 그래 안 봤는데 참말 딱한 노릇이제. 우째야 하노?” “…….” “그라믄 내가 음식값 좀 빌리주까?” “말은 고맙은데 지가 갚을 능력이 안되서...언제 갚을지 모릅니더. 이런저런 사정을 다 생각하믄 좀 더 있다가 보내고 싶은데 아아는 갈라카고...내도 참 쉽게 결정을 못하겄네요.” 밖에서 어미의 한숨 소리가 땅이 꺼질 것처럼 깊게 느껴진다. 이제 겨우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시련이 닥쳐올 거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현옥 자신이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접은 터라 언니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보통사람들처럼 살아간다는 게 이리도 어려운 것인지 현옥은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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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옥의 일이 발등에 불이라 현옥은 제 일에 별로 신경을 쓰고 싶지가 않았다. 어미의 한숨에 땅이 꺼질듯한데 제 마음이라고 편하겠는가. 어미의 근심을 알기에 현옥 역시 어미의 근심을 풀어 줄 방법을 생각하느라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선희가 전해오는 소식은 그다지 달갑지가 않았다. 창수가 자꾸만 현옥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 선희 오라비는 단순히 두 사람을 소개를 시켜준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인연이라 여겨 두 사람을 엮어주려 했기에 중간에서 두 사람 일에 발 벗고 나서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서로가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며 만남을 주선하여 그들이 친해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창수와 현옥을 부추김으로써 두 사람의 만남이 잦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가 서두르고 있었으나 현옥은 오히려 그것이 부담스러웠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자신과 비교가 안될 만큼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현옥의 처지를 이해하고 받아 줄 것인가. 현옥은 그것부터가 마음에 짐이요, 게다가 그런 말을 그 앞에서 꺼내어 놓는 일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기에 차라리 이쯤에서 모든 것이 끝났으면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선희 오라비를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며 그와의 만남을 더는 안 할 것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았었다. 그러나 선희 오라비의 생각은 완강하였다. 친구라서가 아니라 누가 보아도 그는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현옥의 입장을 이해해줄 거라며 조급하게 마음 가지지 말고 자꾸만 만나보라며 오히려 부추기는 것이었다. 현옥이 거절을 하여도 우정을 내세우는 선희 오라비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결국은 그냥 돌아서 나오고야 말았다. 잠시 앉아 얘기 한다는 것이 시간이 훌쩍 흘러버리고 말았다. 어미가 대문밖에 나와 기다릴 거란 생각에 현옥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향했다. 별빛이 초롱초롱한 하늘에 달은 어딘가로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하늘아래 희연은 대문 앞을 지키고 서서 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잠자리에 들었어야 하는 시간인데 두 딸들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어미의 마음이 불안하여 밖에 나와 서성였다. 가을밤이라 소슬 바람이 엷은 옷 사이를 스쳐 지날 때마다 희연의 몸이 움츠려 들었다. 달빛마저 나오지 않은 밤거리를 지키고 서있는 희연에게로 재빠르게 다가오는 그림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혹여 딸의 모습일까 지켜보며 섰다 차츰 그림자의 형체가 눈으로 들어 올 때쯤에 그림자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현옥이가?” “예 엄마! 또 나와 계셨어요?” “너거가 안들어 오는데 우째 가만히 있겄노?” “언니도 아직 안 들어 왔어요?” “그래. 아매도 총각 만나니라고 늦는 갑다.” “춥은데 들어가요. 언니는 그 총각이 데려다 주겠지요.” 어미의 등을 떠다밀며 방으로 들어 온 현옥이 어미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엄마! 그냥 언니 결혼 시킵시다. 언제까지 미루고 있을 수만도 없잖아요.” “내도 시키고 싶제. 그란데 형편이 그라니 문제지를.” “중매 해주신 분한테 그냥 돈 빌려 달라해요. 그라고 모자란 거는 내가 직장에서 조금 융통을 해볼 테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언니 보내요.” “내사 참말로 니 볼 면목이 없다. 모든 짐을 니한테 지우는 것 같아서 에미가 염치가 없구마. 현옥아! 참말로 에미가 미안하다.” “엄마…….” 어미는 딸이 안쓰러워 눈물을 흘린다. 그런 어미의 마음에 동요되어 현옥 또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단 한 번도 가족을 짐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자신에게 가족이라는 존재는 힘이었고 삶의 전부였다. 어미의 눈물에 같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가족이기에 느낄 수 있는 통하는 마음인 것을 현옥은 오히려 그것이 기쁨으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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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옥의 결혼식이 치러지는 날 아침부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좁은 마당에 펼쳐 놓은 초례청 앞에 결혼식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일가친척 없이 가족끼리 단촐 하게 치러질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소문을 듣고 찾아 와준 친척들 덕에 찬옥의 결혼식은 섭섭하지 않게 치러졌다. 찬옥의 결혼을 작은집에는 알려야 했기에 희연은 시동생에게 편지를 띄어 보내 결혼식에 참석을 해 달라 부탁을 하였었다. 일가친척이라고는 와줄 사람이 없으니 꼭 와 달라 부탁을 하였던 것이 시동생은 전쟁 통에 경주에서 피난을 나와 부산에 흩어져 살고 있던 친척들에게 연락을 하여 그들과 함께 찬옥의 결혼식에 나타났던 것이다. 뜻하지 않은 반가운 얼굴들을 오랜만에 만난 희연은 경사스런 일에 참석해준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바람만 조금 그쳤으면 금상첨화의 날이 되었을 텐데 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바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모두들 반가워하며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식이 거행되었다. 선남선녀의 만남으로 초례청은 들썩거렸고 희연은 오랜만에 눈물대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촐한 혼례식이 끝나고 그동안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친척들과 오랜만에 재회한 희연은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쟁으로 경주에서 피난을 나온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서로 피난 나온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날의 끔찍했던 악몽을 되새김질을 한다. 희연 역시 전쟁 통에 정옥을 잃어버린 이야기로 가슴에 묻어 두었던 사연들을 하나씩 꺼내 놓으며 이렇게 좋은 날 눈물을 찍어 내며 가슴에 한을 삭혔다. 그렇게 날이 새는 지도 모르고 밤새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람들은 잔치에 남은 음식들로 가득한 거한 아침상을 받고 나서 정오쯤 하여 신랑신부의 배웅을 받으며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결혼식을 치른 지도 어언 한 달. 찬옥은 시댁으로 가지 않고 여전히 어미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찬옥의 시댁은 울산이었다. 원래는 그 곳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기로 했었으나 새 신랑이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아 있다며 잠시 동안만 친정에 신세를 지겠다하여 어미는 딸과 사위를 보내지 않고 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딸을 보내기가 아쉬워 며칠 머무르는 것이 기분 좋았으나 희연은 날이 지체되면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여 이러다 시집에 들어가지도 못할까 어미는 속이 타는 중이었다. 참담 못한 희연은 한 달이 지나도록 고향으로 갈 생각을 안 하고 있는 사위를 붙잡고 얘기를 꺼내어 본다. “김서방! 자네 언제까지 여 있을 기고?”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가고 싶은데 일이 차일 피일 자꾸만 미뤄지는 바람에 저도 참 난감합니다. 장모님!”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네 안사람을 이래 처가에만 두믄 사돈어른들께서 불편해 하시지 않겠나?” “그거는 제가 잘 말씀 드려 놨습니다. 당분간 제 일이 잘 해결 될 동안 처가에 머물러 있겠다고 했더만 부모님도 허락을 하셨습니다. 언제 또 친정에 올지 모르는 게 시집살이라고 여기 머무를 동안 잘 해드리고 오라면서 서두르지 말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사돈어른들 말씀은 고맙지만 서도 그래도 내는 이기이 잘하는 짓이라고는 생각 않는다. 며느리가 시부모를 모시고 있어야제 친정에 들이 붙어 있는 거는 자식으로 할 도리가 아니제.” “예. 장모님 말씀 알겠습니다. 제가 일 서둘러서 처리할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요.” 희연은 불안한 마음에 사위를 부추겨 딸을 데려 갈 것을 부탁하였으나 사위는 그 말이 나고도 한참 동안 일을 핑계 대며 집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딸을 생각하면 이러다 신행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자신의 세대에서나 일 년이나 아이를 놓을 때까지 시댁으로 가는 것을 늦추기는 했으나 세월이 바뀐 지금은 이렇게 느긋하게 있다는 것이 어미로서는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사위를 재촉하고 나섰건만 사위는 천하태평으로 걱정할 것 없다며 장모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것이다. 장모의 애타는 마음을 불식시키려는 듯 사위는 장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의 노력이 눈에 보이자 희연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사위가 괜히 안쓰러워져 다시 마음을 내어 사위를 감싸 주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줄어들면서 사위는 더욱더 다정하게 장모를 대하였고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희연에게 애기해주며 장모의 환심을 샀다. 그렇게 희연은 세상물정 모르고 사위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일이 잘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사실 결혼식 때 옆집에서 빌린 돈도 아직 갚지 못한 상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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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를 볼 때면 언제나 마음이 불안하고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가 없을 만큼 창피했었다. 결혼식만 올리고 나면 신랑 쪽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하여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건만 반년이 다 되어가도 아직 아무런 해결이 나는 것 없이 시간만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다. 옆집아낙도 자신이 자청해 빌려준 돈을 못 받고 있는 것이 애가 탔던지 이제는 뻔질나게 희연의 집을 드나들며 돈을 갚아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돈을 어디에서 구할 방도가 없으니 사위를 핑계 대며 차일피일 미루며 희연은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버텨온 세월이 일 년이 지나면서 빚 독촉은 더욱 심해지고 희연은 그로 인하여 입이 바싹 마를 정도로 혼이 나고 있었다. 현옥이 받아오는 월급도 역시나 찬옥의 결혼비용에 들었던 빚을 탕감하고 나오는 것이라 겨우 식구들 입만 붙이고 살기에 그 돈으로 빚을 갚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도 희연은 사위가 일을 해결해 줄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찬옥 역시 남편을 믿고 기다리며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해보려 했으나 그 사이 아이가 들어서는 바람에 옴짝달싹도 못하고 집안에 갇혀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혼 빚 때문에 어미가 시달리는 꼴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찬옥의 심정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어미와 동생이 고생하는 것이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아 죄스럽기만 했다. 현옥의 고단한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어미와 덩달아 현옥도 근심에 쌓여 야위어 가고 있었다. 자꾸만 야위어 가는 현옥을 보며 선희가 걱정이 되어 현옥을 붙잡고 물었다. 차마 얘기하고 싶지 않은 일이나 꼬치꼬치 물어오는 선희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아 사정이야기를 꺼냈던 것이 선희 오라비의 귀에 들어가고 기어이 창수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건너가고 말았다. 그 동안 현옥과 꽤 친해진 창수가 어려움에 처한 현옥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선희 오라비의 생각은 오랜 우정을 함께 한 친구에 대해서 너무도 과신을 했기에 현옥의 처지를 생각해서 그가 나서 줄거라 믿으며 그에게 숨겼던 모든 사실을 털어 놓게 되었다. 그러나 선희 오라비의 오지랖이 결국 현옥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현옥을 만나면서 창수는 현옥을 좋은 사람, 예의 바른 사람, 자신의 인생에 동반자로 손색이 없겠다 생각하여 마음을 주고 있었으나 뜻하지 않게 불거져 나온 사실에 그 동안 자신을 숨기고 지낸 현옥이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웠다. 사람 하나만 보았을 때는 어디에 있어도 빛이 나는 사람인데 그녀의 가정환경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녀가 고무공장 직공이라는 사실에 조금은 실망스러움도 있었다. 가난한 환경에서 억척같이 사는 그녀가 안쓰럽기는 했으나 그런 그녀를 책임질 자신은 스스로에게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나 가지는 편견이었지만 그 편견을 극복하기에는 스스로가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친구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생각해보겠다고는 했으나 그 친구를 마주 할 자신도 없었다. 그런 창수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선희 오라비의 권유로 현옥은 불편한 마음으로 창수를 만나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들었으니 그가 어떤 말을 할 것인지 현옥은 대충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 짐작이 맞아 떨어지는 느낌을 침묵을 지키는 그의 얼굴에서 확인을 할 수가 있었다. 현옥은 더는 구차하고 싶지 않아 이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심정을 터놓기로 한다. “미리 말씀 못 드린 거는 죄송합니다. 속였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할 말은 없습니다.” “저를... 속물이라고 생각하시지요?” “아닙니다. 제가 주제가 넘은 거였지요.” “…….” “선희 오빠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요.” “미안합니다. 현옥씨!”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은 정리가 되었다. 두 번 다시 이 사람을 볼일은 없을 것이니 오히려 현옥의 마음도 가벼워지는 듯하다. 여태껏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비겁하게 숨어버렸던 자신을 되찾게 되어 오히려 마음은 홀가분했다. 어미의 소식을 알았는지 서울에 있던 경현이 부산으로 득달같이 내려오고야 말았다. 빚 독촉에 시달려 형편없이 여윈 어미를 보고 경현은 마음이 아팠다. 그 동안 어미의 곁을 떠나 자신은 호강하며 지냈었는데 어미는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들의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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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을 생각하고 있을 무렵 오원장의 식구들은 다시 서울로 떠나게 되었다. 경현은 그냥 고향에 남아 제 길을 가려고 했으나 오원장은 경현을 쉽게 놓아 주려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도 자신이 맡아서 해 주겠노라며 서울로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하기에 처음에 경현은 거절을 하였었다. 그러나 오원장은 자신이 점찍어 놓은 경현을 이대로 쉽게 포기 할 수가 없어 계속 설득을 하였고 결국 경현은 그의 뜻에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그들과 계속적인 유대를 맺으며 그들의 일원으로 잘 살고 있었다. 그리고 대학까지 진학을 하게 된 경현은 오원장이 바라는 대로 훌륭한 인재가 되어 그를 만족 시켜 주었다. 그러나 오원장이 경현을 염두에 두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신의 셋째 딸, 자신을 꼭 빼 닮은 딸이 경현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경현을 제 자식같이 거두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을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던 경현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오원장의 뜻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그런 이유로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던 경현은 단지 자신의 딸이 좋아해서 그래서 자신을 그들의 곁에 묶어 두었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꼈다. 지금껏 오원장에게 진 빚이 있었으니 그에 대한 보답은 해야 하겠지만 한 번도 여자로 본적 없는 단지 여동생쯤으로만 생각했던 그녀와 결혼은 경현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되고 말았다. 이 집안에 대릴 사위로 들어앉을 마음이 없었던 경현은 오원장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후에 결국 쫓겨나 다시 어미의 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시기가 하필이면 어미가 빚에 시달리고 있는 시기였으니 어미도 아들도 서로가 서로를 안쓰럽게 여기게 되었다. 과외로 시작해서 과외로 제 길을 개척하였던 경현이기에 어미를 도울 방법을 생각하다 중학교 학생들을 모아 과외지도를 하기로 하고 선불로 받은 몫 돈으로 어미의 빚을 갚아주었다. 아들까지 합세하여 어미의 살길을 터주었으니 어미는 자식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나마 아들 덕에 빚을 해결하고 한시름 놓게 되었다 싶었는데 뜻하지 않은 일들이 계속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찬옥은 산달이 가까워오면서 몸이 점점 무거워 거동이 힘이 들어 방안에 드러누워 있는 날들이 많아 졌다. 아침에 일을 나간 남편이 정오쯤 집에 잠시 들러서는 서둘러 가방을 꾸리며 찬옥을 안심시킨다. “내 일 때문에 며칠 집에 못 들어 올 것 같다. 출장을 좀 가야 할일이 생겼다.” “갑자기 무슨 출장인데요?” “서울에서 오기로 한 물건이 아직 도착을 안 해서 그 쪽에 가봐야 해서 지금 서울 가야 한다.” “언제 오는 데요? 곧 아아가 나올 긴데…….” “안다. 며칠 안 걸릴 거다. 출산날짜 맞춰서 꼭 올거까 너무 심려 마라. 몸조리 잘하고 있어라. 알았나?” 찬옥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급하게 나서는 남편의 뒤를 따라 대문 앞까지 배웅 해 준다. 뭔가 큰 일이 벌어 진 듯 허둥거리며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희연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장모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허둥대며 사라지는 사위가 미심쩍어 대문 앞에 서있는 찬옥을 보며 물었다. “와 무신 일인데 김서방이 이 시간에 집에 들어 온기고?” “회사에 일이 생기서 출장을 가야 한다면서 짐을 챙기러 잠시 들렀네요.” “출장을 가? 어디로?” “서울이라 하데요.” “언제 온다 카드노?” “출산날짜 전에 오겠다고는 했는데 가봐야 알겠지요.” “그래 급했나? 장모한테 인사도 못할 만큼. 사램 참 한 식구끼리 우째 먼 길 가믄서 인사도 않고 가노! 며칠 집을 비운다는 사램이 아무리 그래도 웃사람한테는 알리고 가야제.” 어미가 남편에 대해 싫은 소리를 하자 찬옥이 나서서 남편의 편을 들었다. “엄마가 안계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 사람도 급하다 보니까 잊었을 수도 있고요.” “하루 이틀 본 사이가? 제기나 생각이 있이믄 장모가 어디 있는지 묻기라도 할 것이제.” 괜스레 사위가 못마땅해 사위를 나무라는 소리를 딸 앞에서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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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의 말이 맞기는 했다. 아무리 급해도 집안 어른에게 인사 정도는 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 맞는데 너무도 황급히 사라지는 남편을 생각했을 때 뭔가에 쫓기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다급해 보였던 것이라 자신도 어미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라는 말조차 꺼내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중간에서 처신만 잘했으면 무탈했을 것을 제 생각이 부족한 탓에 어미와 남편의 사이가 소원해지는 거라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부족한 자신을 책망하며 어미의 잔소리를 묵묵히 듣고 만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찬옥은 자꾸만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되짚게 된다.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사라지는 남편의 뒷모습에서 찬옥은 찜찜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다음날, 모녀만 남은 고요한 집안에 난데없이 대문을 요란하게 흔들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에 있던 희연이 집 앞에서 무슨 난리가 났나 싶어 대문 앞으로 다가가니 빗장이 걸린 대문이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이다. 순간 희연은 그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며 문 앞에 서서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어 밖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부서질 듯 흔들거렸다. “누구요?” 희연은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문을 향해 고함을 쳤다. 안에서 사람의 소리가 났음을 확인하고 대문 밖에서는 다시 웅성거림이 일더니 이윽고 걸쭉한 사내의 목소리가 대문 안으로 날아든다. “여기가 김창기 처가가 맞습니까?” “그란데요? 댁들이 누군데 우리 사우를 찾는 기요?” “아주머이. 문 좀 얼어 보소. 우리는 김창기를 만날라고 온 사람들 입니더.” 조금 전과는 또 다른 목소리가 대답을 대신한다. 희연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다시 대문이 크게 요동을 치자 불안한 생각이 엄습해온다. ‘아이고오. 사단이 났고나.’ 희연은 마음속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 문을 열까 말까 고민을 하다 빗장을 풀고 대문을 열어 준다. 양복을 말끔히 차려 입은 남자 넷이 마당으로 쳐들어왔다. “김창기 어디 있습니까?” 밖이 요란스럽자 낮잠을 자고 있었던 찬옥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앉는다. 잠시 밖의 사정을 살피던 찬옥의 귀에 남편의 이름이 거론되는 소리를 듣고는 방을 나온다. “무신일 인교? 우리 사우 여 없십니더.” 희연이 남자들을 가로막고 서서 묻는다. “아지매! 숨길 생각 마소. 우리가 나서기 전에 퍼뜩 나오라 카소.” “이사램들이! 여 없다 안하요. 일이 있다고 서울 갔소. 와요?” “서울요? 하아 이놈. 눈치는 빨라가지고 고새 도망을 가버려야.” 남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씩씩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마루 끝에 선 찬옥이 그들을 향해 소리친다. “그사람이 와 도망을 가요? 사업 때문에 잠시 출장을 간다 했는데 도망은 무슨 도망입니까?” “어허! 그 놈한테 속은 사램 여 또 있구마. 보소! 백수건달이 사업은 무신 사업이라요? 아지매도 그 놈한테 속은 기요. 평생을 거짓말만 하는 놈이 우째 용케 장개를 들었다 했더만...사람하나 신세 조져 놨구마. 쯧쯧쯧.” “이 사람들이 뭐라카노? 와 멀쩡한 사람을 매도를 하고 그라노?” “정신 차리소. 그 놈, 김창기 그 놈 순 사기꾼이라요.” 희연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마당 한가운데에 퍼질러 앉는다. 찬옥 역시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들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리가 없십니다. 말도 안됩니더.” “말이 되건 안 되건 간에 그거는 이쪽 사정이고 우리는 그 놈이 빌리간 돈만 받으면 되니까 그 돈 아지매가 책임지소.” 날벼락이었다. 찬옥이 정신 차릴 사이도 없이 공격이 시작된다. “와 내한테 그랍니까? 내한테 빌리 준 것도 아인데 와 내한테 책임지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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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사기꾼 놈한테 한두 번 당한 것도 아인데 아무 담보 없이 돈을 빌리 주겠는교? 지도 이분에는 담보가 확실하다고 자신을 해서 돈을 빌리준 기라요. 잘사는 처가 덕 좀 보게 됐다믄서 입이 찢어 지더구마.” “뭐라카노? 처가 덕을 봐아?” 주저앉아 있던 희연이 벌떡 일어서며 앞에 선 사내의 멱살을 잡으며 악다구니를 쓴다. “아지매! 와이라요? 내가 그캤소? 아지매 사우가 그란기제. 이손 놓으소.” 사내는 희연의 멱살 잡은 손목을 뿌리치려 가녀린 손목을 힘껏 잡아서 제 목에서 떼어낸다. “우리한테 이라지 말고 아지매 사우나 잡아 놓고 멕살을 잡든지 물어뜯든지 하소.” “내는 모린다. 너거가 빌려준 돈 내는 구경도 못 해봤이니까 그 돈 너거들이 그 놈한테 받아라. 내는 한 푼도 못 준다.” 희연이 악다구니를 쓰다 결국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만다. 찬옥이 기겁을 하며 마루에서 뛰어 내려와 어미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사이 사내들은 당황하며 대문을 빠져 나가버렸다. 찬옥은 무거운 몸으로 어미의 상반신을 들어 올리고 오열한다. 잠시 기절했던 희연이 눈을 뜨자 찬옥은 눈물을 닦으며 어미를 일으켜 간신히 방으로 들어가 어미를 눕힌다. 누워있는 희연의 눈동자가 울고 있는 딸의 얼굴에 한참 꽂혔다 부풀어 오른 배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에미야! 이 일을 우짜믄 좋노? 이 뱃속에 어린 것은 우째해야 하노 말이다.” 어미의 말에 더욱더 서러워진 찬옥은 어미를 붙잡고 하염없이 흐느꼈다. 희연의 뜨거운 눈물이 귓전을 타고 흘렀다. 현옥이 퇴근을 하고 돌아오니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미도 찬옥도 눈이 부어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고 어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드러누워 있는 것이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케 했다. “엄마! 어디 아파요?” 등 돌려 누워 있는 어미를 향해 현옥이 물었다. 희연은 그대로 돌아누운 채 아무런 말을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현옥이 어미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그제야 어미는 딸을 향해 돌아누웠다. 눈물이 그치지 않는지 눈가에 고여 있었다. “엄마! 낮에 무슨 일 있었어요? 와 우는데요?” “현옥아!... 흐흐흑! 이 일을 우짜믄 좋노? 내가... 내가 차마 니 얼굴을 못 보겠다.” “무슨 일인데요? 말씀을 해야 알지요!” “내가 이래 사람 보는 눈이 없다. 그 놈을 믿은 내가 어리석은 기제. 우째 그래 철석같이 믿었일꼬?” 혼잣말처럼 되뇌는 어미의 말이 도통 무슨 소리인지 현옥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찬옥은 옆에 앉아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언니야! 무슨 일이고? 뭔데 엄마가 이라시는데?” “현옥아!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 미안하다. 현옥아!” 두 사람 다 알 수 없는 말만을 해대자 현옥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두 사람이 이러는 건지 그 내막을 알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겨우 희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현옥은 어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형부가 그런 사람 일거라고는 한 번도 의심을 해본 적이 없기에 이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울고 있는 모녀의 모습을 보면서도. 일 년을 같이 살면서 그렇게 감쪽같이 처가식구를 속였다는 것이 그리고 그런 그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 현옥은 기가 차기만 했다. 현옥까지 가세하여 넋을 놓고 있는 사이 경현이 늦게 귀가하여 또 한바탕의 소동이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김창기를 찾아 나서려는 경현을 겨우 저지시켜 자리에 앉혔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경현이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려치며 분을 토해 내고 있었다. 현옥이 경현의 주먹을 감싸 쥐면서 그의 분노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모여 있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라 일단은 내일을 위해 다들 잠을 청하기로 하고 경현은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누워있다고 잠이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잠을 자야지만 내일을 버티는 것이기에 모두가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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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현옥은 밤새 잠을 설친 채 출근을 하였고 경현은 오후시간에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어 이른 아침에 일어나 남는 시간을 활용해 김창기를 찾아 나섰다. 희연과 찬옥은 죄인처럼 집안에 틀어박혀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집을 알고 있으니 빚쟁이들이 찾아오는 것은 시간문제, 잠잠하기만 한 집안에 남겨진 두 여인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를 못했다. 며칠이 지나 다시 그들이 찾아 왔다. 그날은 희연이 기절을 해 버린 탓에 별 말없이 사라졌으나 오늘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것이라 아무리 악을 쓰고 떼를 써도 그들은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빚 독촉을 하는 것이었다.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상황, 빚쟁이들은 마지막까지 윽박을 질러대고는 돌아서기는 했으나 쉽사리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날이 새면 찾아오는 빚쟁이들 때문에 희연은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갈 지경이다. 허구한 날 찾아와 희연의 식구들을 들볶고 희연은 일면식도 없는 그들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뺐다. 어미가 이유 없이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가 없어 현옥이 어미를 대신해 결정을 내린다. “엄마! 그냥 이 집 전셋돈 빼서 빚쟁이들 줘버려요.” “그거는 안 된다. 이 전셋돈 니가 얼매나 고생을 해서 마련을 한긴데... 그 놈들 입에 털어 넣을 수는 없다. 그거는 안 된다.” “그라면 매일 같이 그 사람들한테 시달리면서 어떻게 살라고요?” “그렇다고 그 피 같은 돈을 그래 버릴 수는 없다.” “돈이야 또 벌면 되지요. 그러다 엄마 쓰러질까 그게 걱정이지요. 이왕 이래 된 거 그냥 미련 버립시다.” “아이고오 내 팔자야. 우째 박복해도 이래 박복할 수가 있노? 전생에 무신 죄를 지어가 이생에서 이래도 모질게 벌을 받는 기가 말이다. 내 하나믄 족한 거를 우째 너거들 한테까지 이래 애를 먹이노 말이다.” 희연은 분하기만 했다. 오십 평생을 나쁜 짓 한번 하지 않고 올곧게 살았건만 이제는 그 보상을 조금이라도 받을까 했는데 난데없이 터지는 이 황당한 사건에 또다시 망연자실하며 자신의 기구한 삶이 되풀이 되는 것이 억울해 희연은 몸서리친다.

수년을 맡은 고무냄새지만 아직도 그 냄새에 적응이 되지 않는 현옥, 밤낮으로 맡는 고무 찌는 냄새가 역해 일터로 들어서는 것이 곤욕이었다. 그렇게 하기 싫은 일에 매달려 사는 것도 싫었고 야간업무에 지쳐 몸이 망가져가는 것도 싫었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는데 기운을 못 차리다 결국은 작업장에서 쓰러지는 일까지 생겨났고 그런 현옥을 직장동료들이 부축하여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란 어미는 이러다 딸을 잡겠다며 직장을 그만두고 쉬기를 원했으나 돈 한 푼이 아쉬운 생활에 자신이 일을 놓는 다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생각에 현옥은 계속 일을 다니고 있었다. 그 해에 찬옥이 결혼을 하였고 결혼식에 들어간 비용은 신랑이 알아서 해준다고 해서 희연은 큰 걱정거리가 사라져 현옥에게 일을 그만두고 당분가 몸을 추스르기를 권했었다. 그런 어미의 말을 따라 현옥 역시 조금의 짐을 벗어버리고 싶었던 터라 그냥 놀 수만은 없어 야간근무를 하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물론 야간근무를 안 하니 월급은 그 전 직장보다 반으로 줄기는 했으나 탈이 났던 몸은 조금씩 회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좀 편하게 지내나 싶었는데 기어이 일이 터져버리고 무일푼이 된 집안을 위해 현옥은 다시 예전 직장으로 옮겨 가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전히 앞날에 대항 희망을 가질 수 없는 현옥은 죽으나 사나 밤 낮 없이 직장으로 향해야만 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 현옥의 앞날은 긴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세월을 따라 세상은 변해 가는데 현옥만이 그 세상에서 도태되어 한 발짝도 나아가지를 못했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하였으나 제자리걸음뿐인 이 삶이 이제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배운 것 없이 부족한 사람으로 아무리 잘난 체를 해본들 그 근본이 일개 고무공장 직공이라는 꼬리표는 여전히 현옥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초라한 자신을 숨기려 화려하게 치장을 해보아도 공순이라는 낙인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삶에 희망과 기대마저 무너진 현옥은 너무도 지쳤다. 마음이 다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때마다 힘을 내어 보았으나 이제는 두려움마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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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이렇게 살다가 한세상을 마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헤어날 수 없는 가난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과 씁쓸함이 현옥의 마음을 짓누른다. 빚 청산에 전셋돈을 빼어주고 결국 무일푼이 된 희연의 식구들은 도심에서 벗어난 외진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으로 다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찬옥이 딸을 순산했다. 아비 없이 혼자 키워야만 하는 딸을 생각하면 찬옥의 가슴은 미어졌다.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자신은 미혼모요 아비 없이 태어난 아이는 사생아가 되는 것, 그것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이제 와서 원망을 한들 무엇 하겠는가, 제 식구를 버리고 줄행랑을 쳐버린 몹쓸 인간을 저주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지금 이 모습이 현실이고 받아들여야 하는 당연함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꼬일 줄은 예상도 못한 일이기에 그것을 극복해 내는 것이 얼마나 시간이 지날지 찬옥은 자신이 없었다. 아이이게 젖을 물릴 때마다 눈물을 쏟아내는 딸을 바라보는 희연의 심정도 만신창이였다. 딸의 인생은 어미를 닮는다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꼴이 자신의 처지와 닮았으니 희연은 더욱 속이 상하고 억울해 미칠 지경이다. 그래도 찬옥이 강하게 버텨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처음 아이를 안고서 눈물부터 쏟아 내던 딸은 이제 한 아이의 어미라는 이름으로 강하게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선택은 자신이 한 것이었으니 그 결과도 반드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부분, 찬옥은 어느새 돌을 지난 아기를 어미의 손에 맡겨두고 제 일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큰 시장 옷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찬옥은 그 곳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로 했다. 자신의 어미처럼 무능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물고 버티며 일어서려 했다. 다행히 찬옥의 성격이 어미와는 다르게 활달하고 붙임성이 있어 사람들을 상대하는 이 일이 적성에 맞는지 적응이 빨랐으며 장사도 제법 잘 하여 주인에게 신임을 얻게 되면서 시장 안에서 찬옥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며 종행무진 나아갔다. 찬옥이 그렇게 자신의 삶에 긍정적으로 대하는 동안에도 현옥은 여전히 삶의 의미를 고민하고 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 온 성찬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며 현옥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같이 일을 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결혼을 하면서 이제 그 자리에 현옥만이 남게 되어 자신의 위치기 애매해지기 시작해 일을 그만 두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는데 그 찰나에 성찬의 구애는 현옥이 이제는 결혼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같은 동료들이 한두 명씩 짝을 지어 떠날 때도 현옥은 자신이 외롭다는 생각과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마지막까지 단짝으로 지내던 경남의 결혼에 현옥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녀의 주위에 있었던 친구들의 결혼생활을 지켜보며 현옥은 과연 그들이 정말 행복할까 하는 의구심이 자꾸만 들었다. 결혼을 하고서도 여전히 같은 직장에 출근을 하며 도시락을 함께 나눠먹는 부부들을 보면서 저렇게 살아도 행복한 건지 의아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경남마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대를 만나 결혼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녀만은 그래도 자신과 잘 통하였기에 좀 더 괜찮은 인연을 만날 것이라 생각을 했었는데 결혼상대라고 소개를 시켜준 이는 연탄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행복하게 웃으며 서로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현옥은 남자의 억센 손끝에 연탄가루가 거뭇한 때처럼 끼어 있는 것이 거슬려 인상을 찡그린다. 자신이라면 그 손을 저렇게 맞잡고 싶지 않을 텐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잡고 있는 경남이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깔끔을 떠는 것이 현옥 못지않았던 경남이었는데 때가 낀 남자의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잡고 행복해 하는 그녀가 현옥에게는 너무도 충격이었다. 여전히 경남은 남자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저 것이 사랑이라는 것일까. 콩깍지라는 것이 저런 것인가. 상대의 눈을 멀게 만들어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현옥은 그런 사랑을 할 자신이 없었다. 성찬이 아무리 구애를 해 온다 하여도 성찬은 현옥에게 그런 행복한 웃음을 짓게 하지는 못하였다. 지금의 삶도 지치는데 결혼까지 마음에 없는 사람과 반평생을 공순이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지며 하등인생으로 살아갈 자신의 미래가 너무도 가엾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 현옥은 그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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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무리 간절하다고 해도 이는 현옥이 들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똑똑히 깨닫게 해주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성찬과의 관계를 직장동료로 선을 그어 놓고 현옥이 그와 같은 부서에서 일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있을 즈음 십 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낸 자신의 일터에는 이제 어린 여공들이 새로 들어오면서 자연 세대교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마땅히 오 갈 곳이 없는 현옥은 그 곳에서 고참으로 남아 새로 들어온 어린 여공들에게 자신이 했던 일들을 가르치며 하나씩 일을 넘겨줌으로써 그 곳에는 더 이상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그녀가 이곳을 떠날 때가 된 것임이 분명해진다. 어린 여공들에게서 밀려나 더는 이 부서에 있기에도 민망해져 다른 부서로 옮기던지 아니면 다른 직장으로 이직을 하던지 그것도 아니면 결혼이라는 도피처를 선택하고 떠나 줘야만 했다. 그러나 현옥은 어떤 것도 자신이 없었다. 아무것도 결정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하루하루 시간만 때우며 미련조차 남지 않은 그 자리를 맴돌고만 있었다. 자신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는 현옥의 마음은 허탈감에 빠졌고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제 마음을 털어 놓을 수가 없는 것이 더 서글퍼진다. 가족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 수가 없는 상황, 이제는 그마저도 제 몫에서 떨어내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가족을 위해 스스로가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은 결단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건만 주체성을 잃어버린 지금 현옥은 인생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딸의 속내까지는 속속들이 몰랐어도 어미의 눈치는 항상 딸을 향해 있었다. 근래에 들어 현옥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았을 때 어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딸의 눈치를 살폈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는 딸을 바라보는 어미의 눈빛에는 안쓰러움이 잔뜩 묻어난다. 밤새 일을 하느라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쓰러질 듯 집으로 들어서는 딸이 어미의 눈에는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힘없이 인사하는 딸의 등을 토닥이며 맞아 주는 어미의 입에서 한숨이 세어 나온다. “간밤에 일이 많이 힘들었던 갑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다.” 어미의 걱정을 들으며 현옥이 애써 태연하게 웃음을 짓는다. “괜찮아요. 늘 하는 일인데요 뭐. 잠을 못 자서 그런거니까 걱정마세요.” “니가 얼매나 고단하믄 그렇겄노.” 현옥은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끌어 마루위로 올라서며 어미를 부른다. “엄마! 내 잠부터 먼저 자고 이따가 밥 먹으께요.” “그래. 알았다. 방에 이부자리 깔아 놨으이까 퍼뜩 들어가서 자라.”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간 현옥은 몸을 지탱할 힘도 없어 겨우 옷만 갈아입고 이불에 몸을 누이고 금세 잠이 들어 버린다. 오후가 지나도 딸이 잠에서 깬 기척이 없어 희연은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와 딸이 누워있는 머리맡에 앉아 잠에 곯아떨어진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쉰다. 어미의 손길이 닿는 것을 잠결에 느낀 현옥이 잠시 몸을 뒤척거렸다. “그래 공부에 한이 맺히가 공부라는 말에 물불 안 가리던 기이 부모 떠나서 고생도 참 많이 했제. 우리 현옥이! 그래 고생을 했는데도 결국은 지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고 이래 에미 돕겠다고 밤낮없이 공장에 매달려 지 몸 축나도록 일만 해댔으이 인자는 지칠 때도 됐일기다. 가엾은 것.” 잠결에도 어미의 목소리가 들렸던지 현옥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우리 현옥이 복 받고 살 날 올기다. 쪼매만 참아라.” 어미의 넋두리에 현옥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느낌으로 바뀌자 서글프게 울고 있는 딸을 달래주며 어미의 눈시울도 뜨거워진다. “울지 말그라. 니 복은 따로 있으이까 지금처럼 열심히 살믄 다 이루어 질기다. 현옥아! 가슴 아파하지 말그라.” “엄마...흐흐흑.” 희연은 딸의 등을 다독이며 울음을 달래어 준다. 서럽게 흐르던 눈물은 어미의 품에 안겼어도 쉽게 그칠 줄 모른다. 한동안의 서글픔을 쏟아내고 겨우 마음이 진정된 현옥이 어미의 품에서 풀려 나와 눈물자국을 닦아내는 동안 희연은 부엌으로 가서 딸을 위해 미숫가루를 타서 대접에 들고 들어 와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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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마시고 쪼매 더 눈 붙이고 있그라. 얼른 저녁 차리 주꾸마.” 어미에게 건네받은 사발을 조심스럽게 목구멍으로 넘긴다. 어미는 딸의 모습을 지키고 앉았다 비워진 대접을 들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홀로 방안에 남겨진 현옥은 어미의 말대로 다시 잠을 청하려 자리에 누웠다. 눈물 덕분에 마음은 그나마 홀가분해지기는 했으나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아 눈만 말똥거리다 이부자리를 걷어 놓고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그 사이 어미는 상을 차려와 딸 앞에 내려놓고 현옥은 어미가 지어준 따끈한 밥상을 받은 후 다시 야간근무를 위해 집을 나섰다.

완연한 봄기운이 감도는 사월. 희연은 돌이 지난 아기를 등에 업고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왔다. 정수리에 내리쬐는 따듯한 햇살을 벗 삼아 찬옥이 일하는 시장까지 나온 희연은 찬옥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그 곳에서 과일 장사를 하고 있는 사촌시누이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날 찬옥의 결혼식에 다녀간 친척들과 내왕이 잦아지면서 근처에 살고 있는 시누이를 만나러 가끔씩 시장을 나가곤 했었다. 겨울이라 아이를 들쳐 업고 나갈 수가 없어 날이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야 짬을 내어 찾아간다. 시장 입구에서 한참을 들어가 끄트머리쯤에 과일상자들을 펼쳐놓고 지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사촌시누이가 눈에 들어온다. 희연은 그곳으로 다가가서 그 앞에 서서 시누이를 부른다. “애기씨요! 장사는 좀 됩니까?”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던 눈길이 부르는 쪽을 바라보며 희연에게로 향한다. “아이구 언니요! 오랜만이라요. 안그래도 춥어서 안 나오나 했는데 날 풀리니까 인자서 얼굴 보네예.” “와 아이라요. 아아가 있으이까 함부로 나올 수 가 있어야제요.” 등에 업힌 아기에게로 시선을 보내며 희연이 대답을 한다. 할미의 등이 푸근했던지 그새 아기는 잠이 들어 있었다. “찬옥이 딸래미 구마.” “야아.” “아이구야. 벌씨러 이래 컸나? 아아 낳았다 칸기 엊그제 일 갔더구마 벌씨러 이래 컸네.” “얼라들 크는 거 보믄 흐르는 세월이 겁이 나제요.” “늙는 다는 기이 그렇다 아입니까? 이리 들어와 앉으이소.” 시누이는 희연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며 앉으라 권한다. 등에 업은 아이를 품으로 끌어안으며 희연은 간이 의자에 몸을 내려놓는다. “요새 장사는 좀 어떻십니까?” “뭐 그날이 그날이지요. 별 기이 없구마요.” “사는기이 다 그렇지요.” “현옥이 일 잘 다니지요?” “야아. 잘 다니고 있지요.” “현옥이 나이도 인자 꽉 찼일긴데 결혼은 안시키요?” “시키야지요.” 희연이 대답과 동시에 한숨이 세어 나온다. “그라게 언니도 연달아 돈 나갈 일만 남았구마요. 현옥이 이어서 경현이까지.” “…….” “참말 부모 노릇하기 힘듭니더.” 희연은 씁쓸한 웃음을 흘린다. “현옥이는 결혼 할 사람 있는교?” “여저 몇 번 선을 보기는 했는데 마음에 차는 사람이 없구마요.” “그라믄 내가 중신 한 분 서보까요?” “어데 좋은 사람 있는교?” “야아. 안 그래도 언니 한 분 만나서 얘기 해볼라 캤는데. 우리 옆집 사는 사램이 내하고 성님 동생 하는 사이라요. 그 집에 총각 하나가 들락거리는 기이 아매도 조칸가 보데요. 동생을 보고 고모라 카는 거를 보이. 고모 집에 인사 오는 거를 내가 몇 분 봤는데 사램이 참 착실하더마. 인물도 남자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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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깄고 직장도 좋은데 다니는 갑데요. 올 때마다 빈손으로 오는 거를 못 봤구마요. 우째, 내가 그 동생한테 한 분 말을 건네 보까요? 사람은 내가 보장 합니더. 내가 이래도 사람을 상대하는 장사를 이십 년을 했으요. 반은 점쟁이라요. 내 말 믿고 선 한 분 보라카소.” 희연은 잠시 망설이다 답을 한다. “그라믄 시누가 한 분 애 좀 써보소.” “그라지요.” 생각 없이 들렀던 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현옥의 중매얘기가 나오고 보니 희연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딸의 나이를 새삼 생각해 본다. 스물아홉, 그 나이가 되도록 시집도 못 가고 직장에만 매달려 있었으니 어미로서도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래도록 딸의 길을 막고 있었던 것 같아 어미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 앉아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향하는 길, 이미 서산에 걸린 해는 산중턱으로 넘어가면서 하늘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희연은 바쁜 걸음을 재촉하여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을 두고 딸의 앞길을 고민을 하던 희연이 현옥을 불러 앉혀 놓고 이야기를 꺼낸다. “현옥아! 인자 니 일 그만 두그라.” “갑자기 와요?” “니도 니 인생 살아야제. 언제까지 식구들 위해 살기고? 그라니 인자는 니 길 그마 찾아가그라.” “…….” “니 나이를 생각해야제. 혼기를 놓치도 한참 놓칬다. 엄마 말 듣고 선봐서 결혼 하자.” “생각해 보께요.” “인자 니 언니도 돈 벌고 있으이까 집안 걱정은 그마 해라. 니도 할 만큼 했다. 마음의 짐 내리 놓고 니 길 찾아라. 현옥아!” 어미의 말대로 혼기를 한참 넘긴 나이, 노처녀란 소리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나이가 들어버린 현옥이지만 결혼을 나이에 밀려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저 좋은 사람을 만나서 마음에 이끌림으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이 현옥의 바람인데 그 바람을 이루기란 너무도 어렵다는 것을 안다. 남보다 월등 잘난 것도 없고 내세울 것 없는 하등인생이라 스스로를 치부해버렸으니 남 앞에 서는 것도 당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어미의 말대로 속박을 벗어 던지고 자유로이 제 길을 찾아 가려니 어디로 향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 본 적이 없기에 자유라는 것도 현옥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그런 딸의 속내도 살피지 않고 희연은 본격적으로 현옥의 인생에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직장에 대해서는 현옥 자신이 판단하게 내버려 두었으나 결혼문제만큼은 어미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주위에 아는 사람들을 통해 선 자리를 주선 받아 가기 싫어하는 딸을 억지로라도 끌고 나가서는 기어이 그 자리에 앉혀 놓고 선을 보이는 것으로 어미는 딸의 결혼을 강압적으로 얽어매려 하고 있었다. 현옥이 주로 야간근무를 마치고 온 날 선 자리에 끌려 나가다 보니 잠도 제대로 못 자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미를 따라 나서는 것이라 그 와중에 보는 상대에게 제대로 된 마음이 열릴 리가 없었다. 선 자리에서 대충 시간만 때우고 조건만 따져서 퇴짜를 놓는 것이 어미의 눈에도 다 보였다. “그래 모지리 다 마음에 안든다카믄 니 우예 시집갈기고?” “아 그러면 싫은데 어째 만날 수가 있어요?” “와? 와 싫은데? 보는 사람마다 다 싫은 이유가 뭔데?” “그냥 인상이 별로잖아요.” “얼굴 뜯어 먹고 살기가? 남자 잘 생기서 뭐할긴데?” “엄마는 언제 내가 인물이라 했으요? 인상이 별로라 했지.” “그말이 그말이제. 인물 좋으믄 머할끼고? 인물 번드르르 해봤자 사기나 치고 다니고 여자 속이나 썩이는 기이 머가 좋노? 사람은 심보가 좋아야지를 그래야 니가 속을 덜 상하는 기다. 에미말 함부로 듣지 마라. 아직 생 속이라 몰라 그란다. 남자 속 좁은 거는 여자보다도 못하다. 한번 보고 싫다카지 말고 몇 분 만나 보믄서 사람 속을 좀 들이다 보란 말이다. 나이 서른 되 가는 기이 우째 저래 철이 덜 들었노. 쯧쯧” 어미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명분 좋고 인물이 잘났으면 뭐 하는가!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고 형부가 그런 사람이었다. 책임도 못질 행동으로 가족들에게 상처만을 남겨놓고 사라진 사내들.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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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가슴에 한을 품고 살고 있으니 어미는 노파심에 남은 딸마저 그 길을 걷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 자신을 다그친다는 것을 현옥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 어미의 마음을 알지만 현옥은 떠밀려서 하는 결혼이 너무도 못마땅하여 자꾸만 어미의 뜻을 거스르려 하고 있었다. 딸의 생각이 그러할진대 어미는 알면서도 제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사람 겉모습에 혹해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제 식구만 봐도 아는 사실이기에 현옥이 좀 더 신중하게 사람을 봤으면 하는 소망에서 어미는 딸의 행동을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었다. 한참을 어미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밖에서 사람소리가 들려왔다. 희연이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사촌시누이가 집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아이고. 애기씨. 우짠일로 오싰는교? 장사는요?” “맏기 놓고 잠시 나왔지요!” “들어오소. 안으로 들어오소.” 희연이 반가운 마음에 손짓을 하며 방으로 사촌시누이를 불러들인다. 희연과 방안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던 현옥이 그녀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인사를 올린다. “오셨습니까?” “우째, 현옥이도 집에 있었구마.” “예에. 야간근무라서 이따가 나갈 겁니다.” 현옥이 자리를 비키고 서자 희연은 시누이를 아랫목에 앉힌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것을 보고 현옥도 그들을 마주하고 자리에 앉았다. “니 인자 일 그만하고 시집이나 가그라. 니 엄마가 니 걱정 이만저만 하는 기이 아이다. 오죽했이면 내가 니 선 자리 알아보고 다니겄노.” 현옥이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어미를 쳐다본다. “언니! 내가 지난번에 말한 총각 그 쪽에서 선보자고 연락이 와서 이래 달려 온기요.” “급한 일도 아인데 장사 넘한테 맏기고 이래 온기요? 찬옥이한테 귀띔해주믄 내가 찾아 갈 긴데.”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서도 일을 자꾸 미루고 있을 수는 없어가 단판 지을라고 왔지요. 마처럼 현옥이도 집에 있으이까 일이 수월하게 됐구마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거북해진 현옥이 목을 축일 거라도 내어 오겠다며 방을 나가 버린다. “언니요! 그 총각 현옥이하고 인연인거 같데요.” 그 말에 희연은 피씩 웃으며 대꾸를 한다. “에이. 그거는 시누가 그 총각을 잘 봐서 그란기지요.” “아이요. 그 총각 온 거를 내가 잡아 앉히고 얘기를 좀 해봤는데 배운 사람처럼 말도 얼매나 이뿌게 하는지 그냥 인물만 좋은 줄 알았는데 점잖고 예의도 참 바리고 손도 우째그리 곱든동, 남자 손이 내 손보다 더 곱더구마. 아무리 봐도 양반인기라.” “허이고. 애기씨가 그 총각한테 푹 빠졌구마요.” 그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그녀는 히죽거리는 웃음을 보이며 대답을 한다. “쭈구렁 할망이 빠져봤자 뭐하요? 내 사우 삼을 수도 없는 거를. 말했잖소. 내가 사람은 보장한다고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그냥 현옥이 한 분 보입시다. 선본다고 닳겄소?” 희연이 입 꼬리를 올리며 코웃음을 친다. “알았으요. 시누님 말 들을 기이 그마 흥분하소.” 제 생각에도 자신이 좀 흥분을 했다 싶었는지 시누이는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잠시 후 부엌에 갔던 현옥이 미숫가루 대접을 들고 들어와 두 사람 앞에 놓고는 건넌방으로 건너간다. 잠시 짬을 내서 왔다는 시누이는 한참을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현옥이 출근준비를 하는 사이 돌아갔다. 한 주를 아무 일 없이 보내고 주간으로 다시 일이 시작되는 그 주의 중간쯤 어미의 사촌시누이가 다시 현옥의 집을 방문하였다. 현옥이 퇴근하여 대문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하는데 마루에는 그녀들 외에 낯선 두 여인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고집이 있어 보이는 나이 든 여인과 현옥과 비슷한 나이의 순박하게 생긴 여인이 들어서는 현옥을 빤히 바라보았다. 현옥이 집에 들어서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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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가 궁금해 할 사이도 없이 어미의 시누이가 나서서 현옥을 팔을 잡아끌고는 낯선 여인들에게 소개를 시킨다. “야아가 우리 사촌올케 딸이다.” 현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만 살피고 있자 이내 어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옥아! 인사 드리그라. 니 선보러 온 총각 고모님하고 형수님이시다.” 현옥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마주한 두 사람과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나누자 어느새 제 앞으로 다가 온 어미의 시누이가 현옥의 손목을 끌고 마루에 올라서 건넌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 난데없이 남자가 나타나더니 문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서는 것이 현옥의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싶어 어미의 시누이를 쳐다보자 그녀는 웃음기가 한 가득 퍼진 얼굴로 흐뭇해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남자 쪽을 향해 말을 던진다. “앉아서 차근차근 얘기 나누소.” 그 말을 끝으로 현옥을 방안으로 밀어 넣고는 곧바로 방문을 닫아버린다. 황당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현옥과 달리 그가 침착한 어조로 먼저 말을 꺼냈다. “주인도 없는 방에 먼저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사과를 건네는 남자를 현옥은 아무런 대답 없이 쳐다본다. “저도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그저 고모님이 따라 나서라고 해서 따라왔더니 오늘 선을 보는 거라 하더군요. 저도 좀 당황했습니다.” “에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점잖은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네는 남자에게 현옥이 시선을 보냈다. 빛을 밝히고는 있어도 그리 밝지 않은 방안이라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처음 보는 사이라 더욱 어색하여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방바닥만 내려 보고 있는 현옥이었기에 그의 얼굴을 세세하게 관찰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말을 시키거나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물어 봄으로 그때서야 시선이 마주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게 될 뿐 침묵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머님께서 안 오시고 고모님하고 오셨습니까?” “어머님은 얼마 전에 돌아가셔서 안 계십니다.” “아아……예에.” 현옥이 괜한 말을 꺼냈나 후회를 하고 있자 그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 혹시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는 김무원 이라고 합니다.” “예예. 저는 박 현옥입니다.” “예. 현옥씨. 오늘 처음 뵙는데 인상이 참 좋으시군요.” “예. 감사합니다.” 그의 칭찬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껏 자신이 만난 사람들과는 조금 차원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처음 보는 그에게서 어떤 세련됨이 느껴졌다. 현옥은 그의 첫인상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닌 듯 한마디씩 물어 보는 것으로 긴 침묵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현옥의 생각에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삼십 분쯤을 두 사람은 어색하게 앉아 있다 현옥이 달리 할 말이 없어 일어나려 하자 그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옥이 먼저 방문을 열고 나가 마루 앞에 서고 뒤이어 무원이 나와 섰다. 마루에 앉아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희연을 향해 고모라는 여인이 인사를 한다. “오늘 실례가 많았습니다.” “별말씀을요. 오시느라고 고생을 하싰구만요.”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조카가 아주 재주가 많은 사람입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조카를 피력하고 나서는 고모에게 희연은 점잖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예에.”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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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살펴 가십시오.”대문 앞까지 따라 나서며 희연과 현옥이 인사를 하고 남자도 희연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며 여인들과 함께 대문을 나갔다. 낯선 이들을 돌려보내고 방으로 들어온 두 모녀가 마주 앉자 희연이 딸에게 물었다. “니 보기에 사람이 어떻드노? 말 좀 붙이봤나?” “그냥 뭐 몇 마디 해봤는데 말수가 별로 없는 사람 같던데요.” “사람은 참 착실하고 순해 보이던데. 인물도 그만하믄 잘 생깄더구만.” “그래 좋지도 나쁘지도 않데요.” 현옥이 그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 어미에게는 반응이 긍정적이라 생각이 들어 마음을 놓는다. 희연이 보기에도 총각은 반듯한 사람 같았다. 겪어 보지는 않았으나 악기 없는 순한 인상이 총각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어 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왠지 그 총각에게서는 천상 양반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잘 어울린다고 희연은 생각했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역겨운 고무냄새를 맡으며 자신의 청춘을 보냈던 직장을 현옥은 이제 떠나기로 하였다. 어미의 부탁 때문이기보다는 오래 전부터 품었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뿐이었다. 또래의 친구들이 다 떠나버린 그 곳에서 혼자 외로이 버텨야만 했던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하여 더는 머무를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어미의 말대로 이제 가족에 대한 책임을 떨쳐버리고 제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것이라 여기며 미련 없이 직장을 그만 두었다. 오랜 세월을 같이 했던 이들이 아쉬워하며 마지막 송별회까지 자리를 같이하여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마지막 회식을 끝으로 이제 그들의 세상에서 떠나게 됨을 실감한 현옥의 얼굴에 만감이 서렸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녀는 그들의 세상 속에 속한 일원으로 청춘의 한 면을 수놓았으니까. 십여 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울고 웃으며 지냈던 그 많은 감회가 새삼스레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어려서 당하는 무시와 학대를 이겨내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던 그 세월을 그녀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늘 직장에서 현옥만 바라보았던 성찬이 이제는 대놓고 현옥의 집으로 찾아와 그녀를 귀찮게 하였다. 그런 성찬이 그저 성가신 존재로만 느껴져 현옥은 그에게 따듯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찾아오는 그를 냉담하게 대했다. 현옥의 마음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알면서도 성찬의 마음은 포기가 되지를 않았다. 그녀가 아니면 안 되었기에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아 보려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웬만하면 성찬의 마음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희연 또한 성찬을 안쓰럽게 여기며 딸을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그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 않는 딸에게 어미는 매정한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섣불리 나설 수는 없었다. 딸이 저렇게도 싫어하는데 자신이 나서서 억지로 짝을 지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미는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저 두 사람이 서로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현옥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성찬이 더는 힘이 들었는지 희연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어머니, 부탁입니다. 제발 저희 어머니 한번만 만나 봐주십시요.” “자네 어머니 만나는 거야 뭐가 어렵겄노! 아무리 그래도 현옥이 마음이 중요하제. 내가 이 일에 나선다고 해서 현옥이 마음이 돌려지지는 않을 기다. 자네가 우리 현옥이를 먼저 설득해봐라. 그기이 일의 순서일기다.” 성찬의 마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현옥은 그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 집요하게 끌어당기는 그에게 조금쯤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결론은 한결같았다. 현옥에게 있어 성찬은 그저 동료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리 제 딸이지만 저리도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나 싶어 결국 성찬이 안쓰러운 마음에 어미가 나서기로 하여 딸의 마음을 다독인다. “현옥아! 별사람 없다. 저래 성찬이가 니를 쫓아다니며 지 자존심 굽히고 저래 매달리는데 못이기는 척 하고 그아 소원 좀 들어 주그라.”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러면 결국 성찬이가 더 상처를 받는 것밖에 안되잖아요.” “그래만 생각하지 말고 성찬이 그아가 아무리 니를 좋아한다 캐도 그아 부모님이 니를 거부하면 혼사는 할 수가 없는 기다. 그라니 그아 맘 너무 괴롭게 하지 말고 그아 소원 한 분만 들어 주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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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다. 한번 여지를 주면 그는 계속하여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모질게 대하는데도 그의 마음은 흔들림이 없는데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주면 결국 상처는 더 커지고 말 것이다. 자신은 어쨌든 그에게는 마음을 줄 수가 없으니까. 어미는 현옥을 조금이나마 설득시키기 위해 지난날 성찬이 그들 모녀에게 베풀었던 일들을 상기시켜준다. “성찬이 그아도 내가 보았을 때는 그래 험하고 나쁜 사람은 아이다. 그런 심성 좋은 사람이 또 있일까! 처음 부산으로 이사 왔을 때도 그 무거운 짐을 전부다 옮겨주고 부산지리 모린다고 지 시간 쪼개가면서 길 알려주고 무겁은 거 이고 올 때 마다 그아가 나서서 들어다 주고 그기이 보통 정성이가 말이다. 아무리 니를 좋아해도 그래 헌신적으로 하는 사램은 없일 기다. 그라니 그 마음을 봐서라도 니가 한 분은 성찬이 뜻에 따라주는 기이 옳다고 본다. 저래 매달려 애원을 하는데 우째 그래 야박하게 굴것노? 이분 한 분만 그아 소원 들어 주봐라.” 어미까지 나서서 그렇게 애원을 하니 저만 옳다고 우겨대는 자신이 좀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미의 말대로 그쪽 부모가 싫다 하면 결혼은 이루어 질 수가 없으니 현옥은 실낱같은 희망을 오로지 그 하나에 기대를 걸고 마지못해 제 뜻을 굽힌다. 현옥의 승낙에 성찬은 기쁜 듯이 뛰며 당장에라도 선 볼 날짜를 잡겠다며 서둘러 대문을 나간다. 그리고 며칠 후 정해진 약속 시간에 맞춰 희연과 함께 현옥은 성찬을 따라 약속장소로 향했다. 다방으로 들어 선 현옥이 어미와 떨어져 따로 자리를 잡고 앉았고 희연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성찬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잠시 후 성찬과 비슷한 인상에 작은 체구의 여인이 다방으로 들어서자 성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인의 곁으로 가서 그녀와 함께 희연이 앉아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있던 희연이 일어나 성찬의 모친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먼 길까지 와주시서 고맙십니다.” 전형적인 시골 아낙 차림의 성찬모친은 희연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네고 성찬을 향해 자리를 비키라 이른다. 이에 성찬은 두 여인만을 남겨 두고 현옥이 앉아 있는 자리로 발길을 움직였다. 아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으로 잠시 시선을 옮긴 성찬의 모친의 눈에 현옥이 들어왔다.  현옥이 일어서서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는 성찬의 모친에게 목례를 올리고는 다시 제자리에 앉고 이어 성찬도 현옥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옥의 맞은편에 앉은 성찬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주문한 차가 나오고 두 여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성찬모친이었다. “따님을 참 이쁘게 키우셨습니더.” “아이고 과찬 이십니더.” “저래 고운 처자를... 우리 성찬이가 욕심을 낼 만도 하네요.” “…….” 희연이 멋쩍은 표정으로 상대편을 응시한다. “결론부터 말씸 드리자믄 따님이 성찬이 짝으로는 너무 과분한 상대라 지는 반댑니더.” 수더분한 모습과는 다르게 딱 부러지는 그녀의 태도에 희연은 조금 당황했다. 그런 희연을 보면서 성찬의 모친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성찬이 위로 형이 하나 있십니더. 저아 형이 대학 교수입니더. 그라고 큰 며느리도 배운 사람이라서 지금 학원 원장을 하고 있십니더.” 그 말을 먼저 꺼내고 그녀는 앞에 놓인 찻잔으로 손을 뻗어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랑을 할라고 드리는 말씸은 아입니더. 지 사정을 먼저 말씸드리야 할거 같아서 꺼낸 얘깁니더.” “예에.” 희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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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이는 겨우 고등학교만 졸업을 했십니더. 지 형 공부는 저아가 다 시킨깁니더. 부모가 능력이 없어서 뒷바라지도 못해줬는데 저아가 지는 희생하고 저거 형을 공부를 시켰다 아입니꺼. 그래도 불평 한 분을 안했십니더. 지자식이라 그래서가 아이고 아아 심성은 참말로 곱지요.” “압니더. 지도 아드님한테 도움을 참 많이 받았구마요. 아들같이 의지도 많이 했십니더.” 희연의 말에 성찬모친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따님이 탐이 안 나는 거는 아입니더. 성찬이 생각하믄 지 뜻에 따라 주고 싶지만서도 지 입장이 그래 안됩니더. 일하는 큰며느리 때문에 집안일은 전적으로 지가 다하고 있으이 인자 나이도 있고 지 혼자서는 살림을 살기도 벅찹니더. 그래 둘째 며느리는 집안일 도우믄서 같이 살아 줄 그런 아아였이믄 하는 기이 지 생각입니더.  첫째 며느리도 지한테는 벅찬데 둘째까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믄 지가 무신 꼴이 되겠십니꺼. 내 수준하고 맞는 며느리를 보고 싶은 기이 지 맴입니더.” “그만 하시믄 무신 말씀인지 알아듣겠십니다. 성찬이가 상처를 많이 받을 기이 걱정이구만요. 마음 다치지 않게 잘 다독여 주시이소.” “예. 그래야겄지요.” 더는 나눌 말이 없기에 두 사람은 찻잔을 비우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공손히 인사를 나눈다. 그 모습을 떨어져서 지켜보던 성찬이 급하게 어미의 곁으로 다가와 서자 어미는 아들을 앞세우고 다방 문을 향해 걸어간다. 성찬이 어미를 따라가면서도 희연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어미와 함께 문을 나섰다. 그들 모자가 사라질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희연이 현옥이 앉아있는 자리로 건너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현옥은 일이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궁금하여 어미의 환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현옥이! 그래 고생하고 살았는데도 남들 눈에는 그래 안 보이는 갑다. 성찬이 엄마가 니가 너무 부티나고 이쁜기이 성찬이한테는 과분한 상대라고 결혼을 반대한단다.” 딸이 퇴짜를 맞았음에도 어미의 얼굴에서는 서운함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희연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 실려 있었다. 남들처럼 번듯한 공부도 못 시키고 고생만하고 자란 딸이라 어미마음에는 부족한 것이 많아 보이는데 다른 이들의 시선에는 제 딸이 너무도 과분할 정도로 보인다 하니 어찌 어미의 마음이 흡족하지 않겠는가. 딸을 퇴짜 놓은 이유가 그런 뜻이었기에 희연은 서운함보다 곱게 자라 준 딸이 고맙고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성찬이 엄마말로는 성찬이 형수가 대학졸업하고 학원원장을 한다는데 아매도 니를 보믄 질투를 할기란다. 대학 나온 며느리보다 니가 더 티가 나 보인다믄서 니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서 며느리로는 못 받아들이겠다고 자신의 수준에 맞는 며느리를 볼 거란다.” 어미의 말에 현옥은 안심을 한다. 혹여 결혼승낙이라도 나게 되면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었는데 일이 잘 무마되어가고 있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어미와 한 동안 그 자리에 앉아 마음의 위로를 받고 두 사람은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틀 후, 성찬이 현옥의 집으로 찾아와 마당에 나와 앉은 희연을 보고는 쫓아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정을 한다. “어머니! 한 분만 더 기회를 주이소. 지가 우리 어머니 설득하겠습니다. 설득해서 결혼 허락 받아 올테이까 기다려 주십시요.” “성찬이 이 사람아! 부모가 거역하는 혼사는 안 하는 기이 옳은 기다. 결혼이 두 사람 마음만 가지고 되는 거는 아인기라. 가문과 가문이 만나는 기이 혼산데 우째 부모의 뜻을 무시하고 할 수가 있겠노. 그래 한 혼사는 어디서 동티가 나도 날기다. 그라니 자네가 마음을 접는 기이 옳다 싶다.” “저는 아입니다. 저는 현옥이 없으면 안됩니다. 어머니! 지가 이래 부탁할테이까 한분만 더 기회를 주이소. 예? 어머니.”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를 하다 희연은 완고하게 버티는 성찬을 겨우 달래어 집으로 돌려보낸다. 겨우 달래어 보내기는 했으나 희연은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어미가 무거운 마음으로 마루에 앉아 한숨을 내쉬고 있자 현옥이 방문을 열고 나와 바깥사정을 살폈다. 성찬이 가고 없는 집안을 살피며 대문 너머로 힘없이 터벅거리며 걸어가는 성찬의 뒷모습을 쫒는다. 축 처진 그의 어깨가 너무도 슬퍼 보여 현옥의 마음도 아릿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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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성찬아! 우리는 인연이 아니다. 그 동안 니 힘들게 한 거 내가 많이 미안하다.’ 현옥은 그렇게 성찬에게 미안한 마음을 속으로 전하며 멀어지는 성찬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성찬의 일로 마음이 복잡해진 현옥은 며칠 째 집안에 틀어박혀 뜨개질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결혼도 직장도 아직 제가 가야 할 길이 정해지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하여 그냥 손 놓고 있기가 뭐해 뜨개질을 시작하기는 했으나 마음이 불안해서인지 진도가 전혀 나가지지 않았다. 막막한 자신을 생각할 때마다 입에서는 긴 한숨이 세어 나오고 있었다. “천날 만날 뭐 그래 닦아 싸요.” 희연이 마루에 앉아 걸레질을 하고 있는 것을 사촌 시누이가 들어서면서 보고는 객쩍은 소리를 한다. 희연이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며 싱긋이 웃는다. “오싰는교? 장사는 우짜고요?” “맡기놓고 왔지요!” “그래 자꾸 비워도 됩니꺼?” “언니가 확답을 안 해주이까 내가 답답해서 쫓아 온거 아이요.” 밖에서 어미와 대화를 주고받는 목소리를 듣고 현옥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지가 결정하는 기믄 벌씨러 답을 드렸지요.” “와요? 현옥이가 아직도 맴을 못 잡고 있는 깁니꺼?” “확실한 마음이 안생기나 봅니더.” “현옥이 안에 있십니꺼? 내가 한 분 얘기 해 볼라요.” 희연이 말릴 새도 없이 사촌시누이는 희연을 지나쳐 안방으로 쫓아 들어가 현옥과 마주한다. “오셨습니까?” 방으로 들어서는 오촌아주머니께 인사를 올리며 현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집에 있었네?” “예에.” 세 사람이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시누의 입에서 먼저 말이 튀어나온다. “조카야! 생각을 좀 해봤더나? 총각이 다시 한 분 꼭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못이기는 척하고 한 분만 더 만나 보그라. 만나보고 정 싫다카믄 내가 그 고모한테 얘기를 할 기이 내 입장을 봐서라도 한분만 더 만나 보그라.” 현옥이 망설이며 오촌아주머니의 눈치를 보고 있자 희연이 딸 앞으로 다가앉으며 그 동안 먹었던 마음을 딸에게 털어 놓는다. “니도 고집만 부리지 말고 잘 생각 해보그라. 총각이사 내가 봐도 인물에 키에 머 하나 빠질 거는 없더구마. 우리형편에 그 사람 정도면 나쁠기이 없다 싶다. 니는 너무 높은 곳만 쳐다볼라 카는데 결혼이라는 기이 서로가 상반 해야제 한쪽이 기우는 것도 안 좋은기라.” “…….” “찬옥이 혼사도 이 에미가 생각을 잘 못해 그래 된기다. 우리 주제에 가당찮은 사람을 들일라 캤든 기이 사단이 난거지를. 그때 내가 말맀어야 했는데... 그랬이면 니 언니 신세도 이래 되지는 않았을 꺼로.” 딸의 신세를 생각하자 어미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만다. 딸 셋을 하나는 전쟁에 잃어버리고 또 하나는 결혼에 실패하여 미혼모로 낙인이 찍혔고 남은 하나마저 서른이 다 되도록 결혼 못하고 속을 썩이고 있으니 어미의 심정이 갈갈이 찢어지는 고통이 아니겠는가? 어느 자식 하나 번듯하게 사는 꼴을 못보고 있으니 어미도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운 것이었다. 제 능력이 좋아 자식들을 번듯하게 키운 것도 아니요 아비에게 버려진 자식으로 홀어미 아래에서 갖은 고생을 해가며 가족을 위해 살아 온 딸을 제 갈 길을 못 찾아 준 것이 어미에게는 상처로 남아 자식을 볼 때마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늘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런 어미의 마음을 현옥이 조금이라도 헤아려주기를 바랐건만 딸은 제 고집만을 부리며 어미의 속을 태우고 있었다. “알았어요. 엄마 말 데로 할 테니까 울지 마요.” 어미의 눈물이 결국은 딸의 고집을 꺾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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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조카야. 잘 생각했다. 조카가 효도하는 셈 치고 어매 말에 한 분 따라 드리그라. 어른 말 들어서 나쁠 거는 없다. 잘 생각했다.” 눈물을 훔치는 어미대신 올케가 나서서 현옥을 마음을 다독여 준다. 그리고는 소매 속에서 곱게 접은 종이쪽지를 꺼내어 현옥의 손에 쥐어준다. “피봐라. 그 쪽에서 만나는 시간하고 장소를 적어준 기다. 내일 만나자고 하이 그 시간에 그리로 찾아 가믄 되는 기다.” 현옥이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손에 든 쪽지를 조심이 펼쳐 들여다본다. 무원이 적어 보내준 쪽지에는 그의 인품과 학식을 대변하여 줄 것 같은 글씨체가 정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간 현옥은 글씨체에 잠시 눈이 팔렸다. 한번도 주위에서 본 적 없는 필체가 그의 인상을 새롭게 각인시켜 놓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자신들의 뜻을 순순히 따라 준 현옥이 기특해 두 사람은 마주보며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다음날, 그와의 만남을 위해 현옥은 시간을 맞춰 약속장소로 나갔다. 이미 다방 안에는 오촌 아주머니와 김무원 그 사람이 먼저 나와 앉아 있었다. 현옥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들 앞에 다가가자 남자가 일어서며 현옥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현옥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그의 대답을 대신하고 오촌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며 그와 마주한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의 주선자인 오촌아주머니의 얼굴빛이 환하게 빛이 났다. “우째 이래 천생연분일꼬? 참말로 잘 어울리는 구마.” 무원도 현옥도 쑥스러워 서로의 눈길을 피하였다. “아 이사람아! 남자인 자네가 무신 말이든 해야 할 거 아닌감?” “…….” “알았다. 내가 자리를 비켜줘야 두 사람이 할 말을 하제. 그라믄 나는 그만 일어날기이 두 사람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그라.” 오촌아주머니가 먼저 일어나 나서는 것을 현옥은 어정쩡한 자세로 잠시 넋을 놓고 있자 무원이 현옥을 대신하여 그녀를 배웅하러 문 앞까지 따라 나간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넨다. “아주머니. 바쁘실 텐데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가실 때 차비나 하십시요.” “아이고. 이사람아. 무신? 걸어 가믄 되는 거를.” “아닙니다. 이래야 제 마음도 편하지요. 넣어 두십시오.”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였으나 무원은 기어코 봉투를 그녀에게 건넨다. “내 자네 정성이 고마워서 받는 기다. 아무쪼록 우리 조카 이쁘게 봐주소.” “예에. 잘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이 살펴 가십시오.” “그래. 우리조카 기다리는 구마. 퍼뜩 들어가게.”  무원은 그렇게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현옥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행동을 찬찬히 지켜보았던 현옥은 그가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두 사람을 별로 말이 없었다. 남자 쪽도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 같지 않았고 현옥 역시 도도한 성격이라 함부로 말을 내뱉지 않고 있으니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무원이 그 답답함을 못 견디겠는지 찻잔을 비우고는 현옥에게 제의를 한다. “여기 안이 좀 답답한 것 같은데 밖으로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현옥이 그의 말에 별 다른 생각을 않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현옥의 찻잔이 비워지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다방을 나와 잠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봄날의 햇살이 맑은 하늘을 뚫고 따사롭게 내리쬐는 거리. 어색한 침묵은 여전히 두 사람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제가 좀 말주변이 없습니다. 재미없으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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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시간 때우기에는 영화 감상이 좋은데! 어때요? 영화 보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또다시 그의 제안에 현옥은 아무 말 않고 따랐다. 어두운 영화관에 둘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때늦은 점심을 먹으러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두 사람은 마주하고 앉아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조금 늦은 점심이라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식당 안이 그리 더운 것 같지도 않은데 무원은 음식을 먹으면서 자꾸만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고 있었다. 더운 음식을 먹어 그러려니 하며 현옥은 제 몫의 식사를 즐기다 잠시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고는 당황한 기색을 내보인다. 무원이 음식을 먹는 내내 땀을 어쩌면 그렇게 흘리는지 보는 자신이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현옥의 눈길을 느꼈던지 무원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현옥을 보며 말했다. “제가 뜨거운 것만 먹으면 땀이 나는 편이라서요. 신경 쓰지 말고 식사 하십시오.” “앞에 앉아 있는데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는데요.” “그렇군요.” 잠시 식사를 멈추고 땀을 닦아내며 무원은 변명을 하듯 이야기를 꺼낸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땀을 좀 많이 흘리는 편이라 어머니께서 한약을 끊이지 않고 지어주셨지요. 그렇게 먹었는데도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힘은 장사입니다. 꼭 음식 먹을 때만 땀을 흘려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을 하셨지요. 어머니께서 저를 많이 감싸며 좋아하셔서 형들이 질투를 많이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추억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는 현옥은 그에게서 눈길을 돌려 남은음식을 다시 천천히 먹기 시작하였다. 식사까지 끝내고 다시 거리로 나온 두 사람.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되었다 싶어 현옥이 먼저 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오늘 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제가 집까지 바래다 드릴 테니 가시죠.” “아.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밤길도 아닌데 저 혼자 가도 됩니다.” “숙녀 분을 혼자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무원은 현옥의 의중을 듣지도 않고 도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현옥이 잠시 주춤거리고 있는 사이 택시를 잡은 그가 현옥에게 오라며 손짓을 한다. 어떨 결에 그와 함께 택시에 올라 현옥은 집 앞까지 그와 동행을 하였다. 집 앞에 다다라 현옥이 택시에서 내리며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그도 택시에서 따라내려 그녀 맞은편에 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타고 왔던 택시는 언덕 아래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니... 집에 안 가십니까?” “천천히 가도 됩니다. 집 앞까지는 모셔다 드려야지요.” 현옥의 집 앞까지는 택시가 들어 갈 수 없어 두 사람이 내려 선 곳에서 집까지는 조금 더 걸어 올라가야 했다. 그리 어둡지 않은 거리를 혼자서도 갈 수 있는데 굳이 따라 붙는 그가 귀찮게 느껴져 현옥은 볼멘소리를 한다.  “그래 멀지도 않은데 자꾸 따라 오실겁니까? 그만 돌아가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어머님께 인사는 드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니...저...” 현옥이 그의 행동을 말리려 하는데 그럴 사이도 없이 그가 먼저 앞장서서 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종종걸음을 치며 그의 행동을 말리려 현옥이 그의 뒤를 따르다 성질이 나기 시작했다. ‘참 별사람 다 본다. 언제 봤다고 우리 엄마를 만난다는 거고?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노?’ 겉으로는 표현을 못하고 속으로만 못마땅하여 성질을 내며 그의 뒤를 열심히 따라 잡는다. 먼저 그가 대문 앞에 도착을 하여 현옥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주인이 먼저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안 들어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재주가 없다는 그가 자꾸만 그녀에게 장난을 걸고 있는 것 같아 현옥은 슬슬 약이 올랐다. 순진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사람이 실실 웃으며 대하는 것이 꼭 장난꾸러기의 심술 같아 현옥은 속이 달아올랐다. 무원이 대문 옆으로 비켜서는 것을 보고 현옥은 눈을 흘기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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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더워서인지 방문이 열려있었다. 현옥이 들어가며 어미를 부르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고 잠시 후 방에서 경현이 나오는 것이었다. “경현아! 언제 왔노?” “얼마 안됐다.” “엄마는 어데 가셨나?” “시장에 찬거리 사러 가셨는데... 그란데 누부야 저 사람은 누꼬?” 현옥의 뒤에 서있는 남자를 눈으로 가리키며 경현이 누이에게 물었다. “어, 어... 그러니까...”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현옥의 옆으로 불쑥 그가 다가와 경현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현옥씨하고 선을 본 김무원이라고 합니다.” “예. 반갑습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어머님 얼굴이나 뵙고 갈려고 했는데 안 계신다니 다음에 다시 찾아와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현옥씨!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다시 경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무원은 대문으로 사라졌다. 경현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현옥을 바라보며 묻는다. “누부가 선을 봤다고?” “어! 오촌 아지매가 소개 시켜준 사람이다. 니 보기에는 어떻노?” “사람 참 괜찮네! 그만하믄 나무랄데가 없어 보이는데.” “그렇기는 한데 아주 세련된 사람은 아이다.” 동생의 칭찬에 마음은 놓였으나 아직도 그가 자신의 마음에는 흡족하게 차지 않아 현옥은 꼬투리를 잡는다. “와? 누가 어떻다는 기고?” 소리 없이 대문을 들어 선 어미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는 어미에게로 꽂혔다. “누가 우리 집에 왔더나?” 자식들의 대화를 스치듯 들었던 희연이 다시 물었다. “누부가 선 본 사람요. 김무원이라 했나? 그 사람이 누부하고 같이 들어오데요.” “그 사람이 왔더나?” 아들의 얘기에 어미는 기분이 좋아 되묻는다. “예. 엄마한테 인사드리고 갈라고 왔다는데 엄마가 없어서 그냥 갔어요.” “아이고. 그래. 그 사람이 우리 집까지 따라 왔드나! 우리 현옥이가 꼭 마음에 들었는 갑다.” 어미는 무원이 딸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어미의 설레발에 현옥은 샐쭉 토라진 목소리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엄마는…….” 그런 누이의 모습에 경현이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 한마디 더 거들고 나섰다. “누부가 그 사람 어떠냐고 물어서 좋은 사람 같다고 대답을 해줬는데 누부는 그 사람을 흉을 보네요.” “저아가 배불러 하는 소린 기라. 그만하믄 사람 좋은 거지를. 니도 그래 생각하제?” “쫌 무뚝뚝해 보이기는 하지만 인상은 순하고 좋던데요. 인물도 그만하면 잘 생긴 거고요.” “내 말이 그 말인기라. 남자 인물 팔아먹을 것도 아이고 심지만 굳으면 되는 기라. 안 그렇나?” “엄마 말씀이 맞아요.” 오늘따라 모자 지간에 손발이 척척 잘도 맞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 마음에 안 들면 그만 인데 뭐 그래요?” 현옥이 민망해 제 흉을 보는 두 사람에게 으름장을 놓고는 방으로 들어와 버린다. 옷을 갈아입고 방안에 앉아 현옥은 무원이라는 사람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인물은 머 나쁘지는 않다. 배운 사람답게 글씨도 잘 쓰고. 예의도 바른 것 같고…….’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약점은 그리 없는 듯하였다. 밥 먹을 때 땀을 흘린다는 것 외에. 그것도 어찌 생각을 하면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하나하나 그를 떠올리며 생각을 해보지만 그의 큰 단점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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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의 말대로 말수가 적어서인지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이기는 했으나 악기 없는 순한 얼굴에는 곱게 자란 티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어디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곰곰이 생각을 하다 그의 말씨와 억양이 이곳 사람들처럼 투박하거나 거칠지가 않고 부드럽다고 느꼈던 것이 그런 인상을 가지는데 영향을 끼쳤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그가 확실히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을 결심할 만큼 그가 좋은 것이 아니기에 현옥은 또다시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았는지 무원은 그날 이후 매일같이 현옥의 집을 찾아 왔다. 희연 역시 어미의 정에 굶주린 무원이 가여운 생각이 들어 아들마냥 다정하게 챙겨주기도 했었다. 보면 볼수록 사윗감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딸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이렇게 노력을 한다 싶어 마음이 뿌듯한 생각도 들었다. 그 날도 현옥의 식구들이 방안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마침 무원이 찾아 왔다. 희연은 무원이 오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워 말을 놓으며 반긴다. “자네 왔나? 저녁 아직 안 자싰제? 와서 한 술 뜨게.” “예. 어머니! 잠시만요. 제가 이것부터 하고 밥 먹겠습니다.” 그는 손에 든 무언가를 내려놓으며 마루 위로 올라섰다. 모두들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때 그가 마루 위에 걸려있는 전등을 붙잡고 전구를 갈아 끼우기 시작했다. 전 날, 현옥이 마루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백열등이 나가 버렸었다. 잠깐 잠깐씩 들어오다 이내 전등이 꺼져버려 어찌 손을 쓸 수가 없어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는데 무원이 어떻게 알고 전구를 사가지고 와서 교체를 해주는 것이었다. “아이고. 안 그래도 전구 갈아 끼울 사람이 없어가 어디에 부탁을 하까 했더만 자네가 해주는 구마!” “예. 어제 저녁에 보니까 마루에 불이 안 들어오는 것 같아서 제가 오늘 해드리려고 왔습니다.” 희연이 무원을 보며 감탄을 한다.  남자의 손을 빌려 본 적 없이 살아 온 터라 작은 손질 하나에도 마음이 동하는 것이었다. “우째 이래 자상도 할꼬.” 여전히 감탄사를 연발하며 어미는 무원의 칭찬에 입이 마를 지경이다. “역시 집안 애는 남자가 있어야 하는 기다. 사람 사는 집에 무신 일이 있어도 있일긴데 남자 손이 필요할 때가 얼매나 많겄노? 이래 집안 손질을 해 줄 사람이 있으이 내가 속이 다 시원 하구마.” 단지 전구하나 갈아 끼워 준 것에 이리도 기뻐하는 희연을 보며 무원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집에서는 아버지가 일일이 알아서 챙기고 있었으니 자신이 별도로 나설 일이 없었는데 단순한 손질에 이곳에서 자신은 너무나도 큰 대접을 받는 것 같아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님! 말씀만 하십시요. 제가 손 봐드릴 것 있으면 다 봐드릴 테니.” “하모 하모. 내가 또 손 볼일 있이믄 자네한테 부탁을 하제. 수고했다. 퍼뜩 손 씻고 들어가 밥 묵자. 자네 올 것 같아서 된장찌개 맛있게 끓여 놨구마.” “예. 어머니.” 누가 보면 두 사람이 모자지간이라 해도 믿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사이는 날이 갈수록 두터워지고 있는데 정작 현옥은 제 일이 아닌 양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원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어미가 저리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무원이라는 사람이 조금은 새롭게 보이기도 하였다. 평생 어미의 얼굴에 그늘만 진 것을 그는 어미에게 웃음을 찾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무원을 사윗감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희연은 딸을 독촉하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불타는 사랑이 아니라 잘 모르지만 두 사람 사이는 이미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서로에게 서서히 배어드는 그런 사이가 되고 있음을 어미는 짐작하고 있었다. 어미도 그것을 바랐다. 앞 뒤 분간 없이 덤비지 않고 천천히 서로를 지켜보며 서두르지 않는 것이 자신의 딸을 위해 좋을 것이라는 판단에 무원이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무원이 현옥의 집을 드나들고 있을 때, 대문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집 앞까지 왔다 발길을 돌리는 이가 있음을 희연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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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렇게 울부짖던 성찬이 차마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을 서성이는 것을 희연은 한두 번 보았던 것이 아니었다. 어미의 허락을 받아오겠다며 울면서 매달리던 성찬을 모진말로 끊어낸 자신이었다. 그의 마음에 상처가 얼마나 클지 보지 않아도 안다. 용기를 내지도 돌아서지도 못하고 현옥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성찬이 가엾고 안타까워 희연은 마음이 아팠다. 그 날도 성찬이 집 주위를 맴도는 것을 희연이 장에 갔다 오면서 보게 되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집으로 들어서려다 한번은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희연을 보며 성찬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희연 앞에 나섰다. “성찬이 이사람아.” 실없이 히죽히죽 웃어대던 그의 얼굴은 생기를 잃은 채 퀭한 눈빛이 희연과 마주하고 있었다. “자네가 계속 찾아오는 거를 내 다 안다.” “어머니…….” 울먹이는 그의 목소리가 희연의 가슴을 짓누른다. “인연이 안 되는 거로 우째 이래 속을 썩이고 있노!” “…….” “성찬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희연을 바라보던 성찬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눈물에 희연의 마음이 아려왔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입술을 떼었다. “인자 그마 현옥이는 잊어라. 현옥이는 자네 짝이 아인기라. 그라니 자네도 그마 상처받고 좋은 사람 만나 새롭게 살아 보그라.”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성찬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버렸다. “아이고 다 큰 사내가 이래 약해빠져서 어데다 쓰겄노!” “어머니...흐흐흑” 성찬을 내려다보면서 희연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아무리 자신이 달래어 준들 그 마음이 쉽게 풀어질 수는 없는 것, 희연도 성찬도 그 자리에 묶여 북받쳐오는 설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참의 오열을 겨우 진정시키고 성찬은 아무런 말없이 희연에게 인사를 남기고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져갔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희연은 그 자리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서서 그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여전히 무원은 현옥을 보러 오는 핑계를 희연에게로 돌리며 찾아와 이제는 스스럼없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히려 희연이 무원을 더 기다리고 반겨주었다. 그런 희연에게서 무원은 어미의 마음을 느꼈고 어미의 사랑으로 지은 밥상을 받으며 행복해했다. 희연도 무원을 아들 대하듯 고장 난 것을 고쳐 달라 혹은 무거운 것을 들어달라며 스스럼없이 대하였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현옥이 옆에서 지켜보며 무원을 다시 보게 되었다. 보잘것없는 자신을 이렇게 위해 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일 년이라는 세월을 거의 매일같이 들락거리며 자신의 가족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 않는 그를 보며 그에게 조금씩 마음이 열리고 있음을 자신도 느꼈다. 모든 것이 하나씩 정리가 되어 가고 있음에 희연은 이제 현옥을 제 갈 길로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싶어 결혼을 서두르려 한다. 무원의 퇴근길은 바로 현옥의 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현옥의 집으로 들어와 밥을 먹고 난 후 희연이 무원을 불러 앉혔다. “이 사람아! 그만큼 우리 집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이믄 인자 됐다.” 희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무원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희연에게 되묻는다. “예?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참, 사람! 눈치가 그래 없어가 장개도 못들꺼구마.” 빙빙 말을 돌리며 요점을 말하지 않는 희연을 바라보는 무원의 얼굴이 점차 굳어지고 있었다. “아. 일년을 내 집에 드나들었이믄 됐제 이년을 채울라 그라는가? 내는 더 이상 안 받아 줄 기이 올라믄 사주단자나 가지고 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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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무원은 희연의 뜻을 알고 굳었던 표정을 푼다. 그리고 희연을 향해 넙죽 절을 올리며 큰 소리로 외친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현옥이 나설 기회조차 주지 않고 어미는 일을 치고 말았다. 무원은 당장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께 여쭙고 사주단자를 준비하겠다며 희연에게 다시 절을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대문으로 사라졌다. 결혼 승낙을 받은 그의 발걸음이 더없이 가벼워 보였다. 무원이 돌아가고 현옥은 어미의 뜻밖의 말에 당황하여 어미에게 심술 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엄마는 내가 아직 결정을 안 했는데 갑작스럽게 그래 말씀을 꺼내믄 어째요?” “여태까지 지켜봐 놓고 뭐를 더 바라는 기고? 저래 니한테 지극정성인데 그 마음에 또 상처를 줄기가? 성찬이 뿌리친 것만 해도 내사 가슴이 아픈데 무원이 까지 내치지는 못하겄다. 그라고 니 나이에 저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 같나? 인자 니 나이로는 재취자리 밖에 갈 수가 없는 기다. 더 좋은 사람 바라지 말그라. 무원이가 니 천생연분이다. 그거는 이 에미가 안다. 딴마음 먹지 말고 인자 니도 니 길을 찾그라. 그기 내가 바라는 기다.” “엄마는... 내가 없어도 괜찮겠으요?” “뭐가 걱정이고? 니 할 도리 다 했다. 인자 에미 걱정은 말그라. 찬옥이도 벌고 경현이도 보태고 있으이 니는 인자 친정 걱정 말고 니 길 가도 된다. 그 동안 우리 현옥이 못난 에미 만나가 고생 많이 한 거 다 안다. 그라니 무원이 같이 자상하고 좋은 사람 놓치지 말고 니 행복 니가 찾그라.” 그 동안 현옥을 누르고 있던 짐들이 한꺼번에 내려진 느낌이다. 어미의 위로에 마음은 가벼워지긴 했으나 무언가를 놓친 것처럼 마음은 자꾸만 뒤가 돌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책임감이다. 어미의 말대로 이제는 언니와 동생에게 어미를 부탁하여도 되는 것인데 여전히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것 같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현옥의 마음이 아직도 다 잡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원이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나오며 현옥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현옥을 찾아 온 날 무원은 자신의 아버지가 현옥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망설일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어미와 무원의 합동공세에 결국 현옥은 무원의 아버지를 만나러 나가야만 했다. 집 근처 빵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현옥은 서둘러 준비를 하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현옥이 시간 맞춰 도착을 하였으나 이미 무원과 그의 아비가 먼저 와서 현옥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원과 함께 나란히 앉은 무원의 아비는 한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모습으로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흡사 무원이 나이 들었을 때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흰색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현옥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흐뭇함이 묻어났다. 어른 앞이라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현옥을 넌지시 바라보던 무원의 아비가 현옥에게 물었다. “어째 음식은 할 줄 아느냐?” 현옥이 무어라 대답을 하기 전에 아비는 아들을 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저래 가냘픈 손목에 밥이나 얻어먹겠냐? 니가 맛난 것 좀 많이 사주고 살 좀 찌게 해 주거라. 그래야 결혼해서 밥을 얻어먹을 거 아니겠느냐!” “예. 아버지! 그러겠습니다.” “나는 이미 찬성을 한 것이니 나머지는 두 사람이 알아서 하거라.” 아비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옥과 무원이 동시에 일어나 아비를 배웅하려 나섰다. 그러나 아비는 손사래를 치며, “둘이 할 얘기가 많을 테니 더 앉아 있다 오너라. 나올 거 없다.”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의 인사를 받고 무원의 아비는 빵집을 나섰다. 선을 보인 자리가 어색하고 힘들었던 현옥이 긴장이 풀렸는지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져 배가 고팠던지 현옥은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앉아 빵을 열심히 집어 먹고 있었다. 처음으로 현옥의 풀린 행동을 보며 무원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빵을 참 복스럽게 드시네요. 아버지께서 다 드시고 가셨으면 얼마나 서운했겠어요?” 그 말에 현옥은 샐쭉하여 대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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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말씀 못 들었요? 맛난 거 많이 사주라고 하셨잖아요?” “예. 많이 사드릴 테니 맛있게 많이 먹어요.” 언제나 날을 세우고 다가오지 못하게 경계를 그어 대던 현옥이 무원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다. 날을 세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다가서고 보니 무원이라는 사람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현옥은 해본다. 처진 눈이 웃을 때는 더 처지는 것이 보고만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우리 좀 걸을까요?” 오랜만의 외출에 현옥의 마음이 확 트이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히 무원이 현옥의 마음을 알았던지 데이트 신청을 해주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현옥과 함께 두 사람은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가 불분명했던 날이 엊그제 같더니 이제는 제법 바람이 차가워졌다. 달은 이미 구름에 가려 어스름 형체만 보이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거리에 몸을 잔뜩 움츠린 사람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난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닿는데도 현옥은 춥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바람은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말이 없는 무원을 대하고 있으면서도 현옥의 마음은 불편하지가 않았다. 어떤 마술을 부린 것처럼 그에게 마음을 열고나니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편안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 행복인지 현옥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이 기분은 그와 함께 한다면 영원할 것만 같았다. 비로소 자신의 앞날에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것 같아 현옥의 마음도 따듯해지고 있었다. 사주단자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 받아 주겠다던 희연의 협박이 통했다. 시아비가 될 어른을 만나고 온 이후 무원이 며칠 발걸음이 뜸하더니 오늘따라 말쑥한 차림으로 희연을 찾아왔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왔는가? 안 그래도 며칠 안 오길래 걱정을 하고 있었구마. 매일 오던 사람이 발길을 끊어 내 무신 일 있는 줄 알았는데 그든새 신수가 더 좋아진 것 같네.” “예. 어머니께서 사주단자 가져오지 않으면 안 받아 주시겠다고 해서 준비해 오느라 늦었습니다.” “참말 인가?” “예.” 무원이 웃으며 빨간 보자기를 희연 쪽으로 내어 보였다. “가마 있그라. 이래 그냥 받을 수는 없제.” 희연이 얼굴을 밝히며 얼른 부엌으로 뛰어가 대접에 맑은 물을 담아와 상을 펴고 그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무원에게서 받은 사주단자를 상에 올려놓고는 손을 비비며 절을 한다. “조상님요! 인자 우리 현옥이 결혼 합니더. 우리 현옥이 잘 살게 조상님들이 잘 돌봐주이소.” 딸의 행복을 소원하는 어미의 간절함이 담긴 기도로 사주단자를 맞이한다. 사주단자를 받고 나서 희연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결혼식 비용이 또다시 희연의 마음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십 년을 넘게 직장생활을 했는데도 딸에게 내어 줄 돈이 없다는 것이 희연은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다. 그런 어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혼준비에 들뜬 무원과 현옥이 식장을 잡겠다며 희연과 함께 시내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저 물 한 그릇 떠놓고 가볍게 치르고 말리라 생각했었는데 신식으로 예식장을 빌려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미는 마지못해 두 사람을 따라 나서기는 했다. 아직 예식장이 흔하지가 않아 시내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예식장을 찾아 들어갔다. 보기에도 으리으리한 건물 입구와 내부가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희연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머니! 이곳으로 정할까 합니다.  처음 지은 건물이라 내부도 깨끗하고 서비스도 좋다고 하니 괜찮으시면 이곳으로 결정을 하겠습니다.” “내사 뭐... 두 사람이 보고 괜찮으믄 그냥 하게나.” 어리둥절해 있는 희연을 뒤로하고 무원과 현옥은 식장내부를 둘러보며 한껏 기분이 들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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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현옥은 더 그러했다. 그냥 전통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말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무원은 예식장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언제나 영화에서 보았던 결혼식을 자신이 하게 된 것이 너무도 기뻤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게 된 것이 너무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남들 보다 늦은 나이에 하는 결혼이었지만 현옥은 주위에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를 누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화려하게 걸려 있는 드레스를 몇 차례 입고 벗으며 현옥은 정말 신부가 된 느낌이었다. 세상이 제 주위로 돌아가고 있음에 현옥은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현옥은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데 어미는 딸의 결혼비용을 어떻게 마련을 해야 하는지 가슴을 졸이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무원이 저녁에 집으로 오면서 신부의 함을 혼자서 짊어지고 왔다. 함이 들어오는 것을 희연은 반갑게 맞이하고 현옥과 둘러 앉아 함의 내용을 살폈다. 기대를 하며 함을 열었건만 내용은 너무도 단출해 희연이 이에 조금 실망의 기색을 보이자 무원이 희연의 속을 알아채고 마음을 달래어 준다. “어머니! 함이 너무 단출해서 아쉬우시죠? 제가 아버님께 그리 하자고 말씀 드렸습니다. 함을 대신해서 결혼 비용은 제가 다 부담을 하겠다고 말씀 드렸으니 어머님께서는 비용에 관해서 신경을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단도 서로 주고받지 않기로 아버님과 얘기가 되었으니 그것도 신경을 쓰시지 마십시오. 저는 단지 현옥씨만 있으면 됩니다. 곱게 키운 따님 저에게 주시는 것만으로 제게는 넘치는 행복입니다.” “아니 이사람아! 그래도 딸 시집 보내믄서 예단도 안해 보내는 에미가 어데있노? 그거는 말이 아이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현옥씨 책잡히지 않도록 제가 준비 할 것이니 어머님께서는 염려 마십시오.” 희연의 눈에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이런 사람이 내 사우가 되는 구마. 우리 현옥이 인자는 고생 안 해도 되겠다. 자네 같이 심성 고운 사람 만났으이 평생 행복할 기구마. 내 사정까지 살펴주는 자네가 우째 이래 든든한지 모리겄다. 고맙네. 참말 고맙구마. 김 서방!” 무원의 손을 잡고 기쁨의 눈물을 보이는 어미를 따라 현옥의 눈시울도 뜨거워진다. 꿈에나 상상했던 영화 같은 현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희 집에 식구가 많아 아마도 저희는 분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버님께서 서운해 하시지 않겄나?” “아버님께 다 의논을 드렸습니다. 집이 좁아 저희까지는 들어가 살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여유만 되시면 전셋집이라도 구해주려 하셨는데 저희 어머니 오랜 병수발을 들다보니 병원비로 빚을 진 것이 있어 아직 그럴 여유가 못됩니다. 그래서 어머님과 현옥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선 월세로 단 둘이 살아 갈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그것도 충분 하구마. 단칸방이라도 신혼생활 둘만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행복이제. 아무 걱정 없다. 두 사람만 행복하믄 그거로 된기라.” 자신이 평생 해 온 시집살이를 딸이 대물림 하지 않게 된 것이 어미로서는 너무도 기쁜 일이다. 물론 자신 같이 험한 시집살이는 하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그래도 시집이라는 단어는 희연에게 학을 뗄 만큼 부담스러운 존재라 자신의 딸 또한 어미처럼 심한 시집살이를 하지 않을까 고민을 했었는데 그마저도 무원이 가로 막고 나서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현옥도 모든 것이 흡족하였다. 무원이 제안한 모든 것이 저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배려가 오히려 고마웠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면서 결혼식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이 신혼살림을 차릴 집도 비록 한 칸짜리 방이었으나 새로 지은 집이라 아담하고 깔끔해서 현옥의 마음에도 들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모녀는 잠자리에 들었다. 딸과의 마지막을 함께 보내는 이 밤, 희연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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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 누웠으나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몸을 들썩이는 어미와 딸이 어둠속에서 일어나 마주보고 앉는다. 어렴풋이 창을 뚫고 들어오는 달빛에 어미는 딸의 손을 잡아 이끌어 자신의 손으로 감싸며 다독인다. “현옥아! 이 못난 에미 곁에서 고생 참 많았다.” “엄마!” “니 꿈 접고 가족들 챙기느라 속도 많이 상했일긴데 그런 내색한번도 안하고...우리 현옥이 참 대견하다.” “엄마....” “그래. 인자부터가 진짜 니 인생이다. 풍파 다 겪고 일어나는 거니까 니 앞에는 평탄한 길만 있을기다. 착한 남편에 착한 자식들 그기 다 니 복인기라.” “...” “현옥아! 잘 살아라! 에미처럼 고생도 하지 말고 속도 상하지 말고 그렇게 평온하게 살아라! 알았나?” “예. 엄마!” “그래. 우리 현옥이는 잘 살거다. 내는 안다. 우리 현옥이가 잘 살거라는 거를.” “엄마...” 소리 없는 눈물이 희연의 뺨을 타고 흐른다. 어미의 눈물은 밤빛을 받아 반짝였다. 밤은 그렇게 두 사람의 마음을 담아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예식장 안은 이미 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두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발길로 식장 안은 미어질 지경이었다. 분주함 속에서 두 사람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식장 안으로 들어서는 무원. 잠시 후, 순백의 드레스의 현옥이 행진곡에 맞춰 차분한 걸음걸이로 조심스럽게 무원의 곁으로 다가간다. 저 만치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무원을 향해 현옥이 발을 내딛는다. 한걸음, 한걸음 그녀가 지나는 걸음에 쓰라렸던 과거는 묻히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는 걸음이 꼿꼿이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저 희망으로 향하고 있다. 무원이 서있는 그 옆자리, 그 곳에서 희망이 그녀를 기다리고 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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