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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서예심미관

    李 正 美 (江原大)

    Ⅰ. 머리말

    Ⅱ. 宣和書譜의 12帝王 서예嗜好

    Ⅲ.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 및 문화 면모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중국 왕조시대의 帝王은 행정, 입법, 사법 등 모든 세속적인 권력을

    장악한 초월적 존재였다. 帝王의 권위와 가치는 그들의 예술작품에서

    도 관찰되는데, 특히 ‘御筆’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서예작품은 한 국가,

    한 시대의 서예사관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연구는 帝

    王의 ‘御筆’에 관한 서예심미관을 탐구할 수 있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풍의 상징성 및 문화적 면모를 함께 고찰할 수 있는 宣和書譜1)의12帝王에 담긴 서예관에 관한 것이다.2) 여기서 말하는 12帝王은 晉

    1) 본 연구에서 활용하고자 판본은 桂第子 譯注, 宣和書譜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1999; 2002 2次 印刷)이며, 文淵閣四庫全書電子版 (香港特別行政區: 迪志文化出版有限公司, 1999) 子部 藝術類를 참고하였다.

    2) 宣和書譜의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秦琴, 李煜書學思想硏究 (美育,科敎文化, 2010); 候姸姸, 南唐後主李煜的書法成就述考 (蘭臺世界, 歷史硏究, 2012); 楊開飛, 宋人胸次論 (甘肅社會科學 1, 2010); 熊飛ㆍ佘斯勇ㆍ陶炎武, 宣和書譜未收懷素帖目補證 (鹹寧師專學報 4, 2000); 熊飛ㆍ佘斯勇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2(265-420)의 武帝(236-290)3), 唐(818-907)의 太宗4)(627-649)․玄宗

    (712-756)5)․肅宗(756-762)․代宗(726-779)6)․德宗7)(779-805)․宣宗(

    847-859)8)․昭宗(888-904), 武周(690-705)의 則天(690-705)9), 後梁

    ㆍ陶炎武, 宣和書譜所錄懷素百帖考釋 (鹹寧師專學報 4, 1999); 李尚軍,不輸文采獨領風騷 -唐太宗的書藝․書論及其書史貢獻 (書法藝術 2, 1996);張學忠, 論‘詩中有筆, 筆中有詩’ (中國人文學會 春季國際學術大會 論文集,中國人文學會, 2009); 王宏生, 北宋書學文獻考論 (上海: 上海三聯書店, 2008)등이다.

    3) 武帝에 관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聶世軍, 晉武帝司馬炎的煊赫功業與爲

    政敗筆 (領導科學 12, 2010); 尙志邁, 晉武帝與太康之治 (張家口師專學報 2, 1994); 唐明禮․張國强, 試論晉武帝司馬炎 (南都大學社會科學版 10-2,1990); 王曉毅, 司馬炎與西晉前期玄儒的升降 (史學月刊 3, 1997); 劉嘯, 再論晉初太子之爭 (歷史敎學問題 2, 2010); 曹文柱, 西晉前期的黨爭與武帝的政策 (北京師範大學學報 5, 1989) 등이다.

    4) 太宗에 관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이해원, 唐太宗 소릉을 통해서 본 唐

    帝國의 다문화사회 (한국학연구 41, 2012); 邹锦良․戴小宝, 唐太宗李世民的‘励下’艺术及其启示 (兰台世界 11, 2011); 楊宏鵬, 宋高宗趙构與唐太宗李世民書論比較 (华章 21, 2010); 余七子, 論唐太宗李世民的人文主義思想觀(史志鑒硏究 2, 2008); 薛宗正, 唐太宗李世民及其邊塞詩作 (新疆師範大學學報 3, 1989); 秦國志, 試論唐太宗李世民的重農政策 (赤峰敎育學院學報 4, 2001); 王平川, 唐太宗李世民人才觀述評 ((唐都學刊 16-2, 2000); 高靑,論唐太宗李世民的詩歌 (山西大學學報 4, 1996); 馬赫․劉堂燈, 試論唐太宗的人本思想 (遼寧科技學院學報 12卷 1, 2010) 등이다.

    5) 玄宗에 관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염경이, 唐 玄宗代 사신파견과 그 외

    교的 役割 (中國史學會, 中國史硏究 54, 2008); 김현남, 唐玄宗의 불교정책과 密敎 (韓國宗敎史學會, 韓國宗敎史硏究 12, 2004); 邢志剛, 論唐玄宗李隆基 (傳承 8, 2008); 劉浚飛, 帝王音樂家唐玄宗 (蘭臺世界 10, 2010); 潘鏞,論唐玄宗李隆基 (云南社會科學 2, 1993); 陸麗明, 論晩唐詩人筆下的‘李․楊’形象 (綏化學院學報 31-6, 2011) 등이다.

    6) 代宗에 관한 선행 연구는 다음과 같다. 姜密, 唐代宗新論 (河北師院學報 4, 1997) 등이다.

    7) 德宗에 관한 선행 연구는 다음과 같다. 華文勝, 唐代文秘大家陸贄 (秘書史話 6, 1998); 袁鳳琴, 唐德宗與元和詩人 (巢湖學院學報 11-4, 2009); 劉太祥, 試論唐德宗施政方略 (南都學壇 11-3, 1991) 등이 있다.

    8) 宣宗에 관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白光, 唐宣宗李忱與佛敎禪宗 (煙臺師範學院學報 2, 1999).

    9) 則天에 관한 선행 연구는 다음과 같다. 寇養厚, 武則天與唐中宗的三敎共存與

    佛先道後政策 (陝西師範大學學報 28-3, 1999); 賈發義, 武則天與佛敎淨土信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3(907-923)의 太祖(907-912)․末帝(913-923)10), 後周(951-960)의 世宗

    (954-959)11)이다.

    宣和書譜 제 1권에서는 御府所藏 문헌의 특징적 의의가 돋보이는帝王의 서예 嗜好 및 정치적 삶의 면모를 기술하고 있다. 이는 최고

    통치자의 특정한 사건 및 정치적 대업에 대한 역사적인 시각 이외에도

    또 다른 각도에서 그들을 평가할 수 있는 심미적 척도이자, 한 국가의

    상징적 인물이 어떻게 그러한 역량을 지녔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명맥

    을 정확히 짚을 수 있는 장점을 담고 있다. 최고 통치자의 성격, 가문,

    취미, 평소의 언행 등을 통해 한 시대의 사회 환경, 풍속을 엿볼 수 있

    으며, 이는 또한 역사적인 시각을 제고시키며, 나아가 당시의 심미의식

    을 통해 최고 통치자의 사회적 위상을 점쳐 오늘날 세계 문화 흐름의

    변동 및 예측을 가늠할 수 있는 학문적․이론적 뒷받침이 될 수 있다

    는 점에서 연구할 가치가 크다.

    특히 ‘御筆’은 帝王들이 국정을 관리할 때에 남긴 글씨, 일상생활의

    심신 수련의 여기 활동, 그리고 시문, 화첩, 현판에 남긴 예술작품으로

    서, 그들의 미의식과 예술적 천성 및 가치관을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12) 더욱이 歷代帝王 가운데에 12帝王을 선별하여 그들의 서예심

    仰 (首都師範大學學報 6, 2007); 趙瀾, 武則天時代的禮儀與政治 (福建學刊 2, 1998); 杜芳琴, 中國古代女主政治略論 (山西師大學報 20-2, 1992);王愛軍, 中國女書法家及其成就略談 (兵團敎育學院學報 15-6, 2005); 王媛․喬麗萍, 淺談武則天稱帝的社會和文化因素 (大同職業技術學院學報 15-4,2001); 甘卓群, 論武則天的領導藝術 (商場現代化 648, 2011) 등이 있다.

    10) 後梁의 末帝에 관한 선행 연구는 다음과 같다. 許結, 金源賦學簡論 (西南師範大學學報 4, 1996).

    11) 後周의 世宗에 관한 선행 연구는 다음과 같다. 原同申, 順天應時興利除弊 -

    淺談後周世宗的改革 (蘭臺世界 15, 2010); 張玉勤․張智佳, 論周世宗改革成功的原因 (山西大學報 4, 1991); 黃曉華, 周世宗紫榮改革瑣議 (蘇州大學學報 3, 1995) 등이 있다.

    12) 宣和書譜에 기록된 12帝王의 법첩은 기록 帳簿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실제의 ‘御筆’은 현재로서는 분산되어 산실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다른 문

    헌의 고증 내용과 현존하는 작품의 鑑定을 통해 12帝王의 ‘御筆’ 및 서예관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4미관 및 법첩을 기록하고 있는 점은 다른 동시대 서론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宣和書譜만의 특징이다. 따라서 帝王들의 서예관을 탐구한다는 것은 바로 역사적 본질, 시대의 흐름과 핵심을 파악함이다.

    본 연구에서는 고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이자, 예술사상의

    절정기에 저술된 宣和書譜의 12帝王에 담긴 서예심미관에 주목하였다.13) 宣和書譜는 휘종을 위시한 당시 문인사대부의 서예예술관을바탕으로 저술되었다. 이러한 저술시기와 편찬자를 둘러싸고 많은 문

    제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張醜의 淸河書畵舫에서는 宣和書譜 제 1권에 기록되어 있는 晉의 武帝의 법첩인 이 宣和年間 秘閣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의 필세가 웅건하고 고아하면서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 帝王의 서예작품 중 최고라고 평한다.14) 비록 宣和畵譜 宣和書譜 두 문헌에 대해 品題와 鑑定에 있어서 법칙이없다고 하는 부정적인 시각을 내포하고 있지만15), 이 문헌이 宣和年間

    에 저술되었다고 간접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

    은 한 국가의 정권이 바뀌어 시대가 변화하는 가운데에서 펼쳐진 문화

    적 산물과 업적은 중앙 정권과 주변 배후 조정자 및 그들과 연계된 학

    문적 영역에도 그 영향력이 소급되어, 각기 다른 관점으로 재해석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북송의 서예가이자 정치가였던 米芾의 寶晉英光集16)․海嶽名言17), 陳思의 書小史18), 南宋의 문학가였던13) 본 연구는 宣和書譜가 저술된 시점에서 12帝王의 서예심미관을 분석한 것으로, 북송의 米芾에서부터 청대 顧復에 이르기까지 평론가들의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였다. 宣和書譜에 기록된 帝王들의 서첩들은 현존하는 자료에 근거하면 대부분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다른 서론서나 평론가들의 관점을 빌려 본 연

    구를 진행한 점을 밝힌다. 특히 宣和書譜가 관방의 편찬서라는 점을 고려할때 황권 강화와 황실 옹호의 과장된 내용으로 표현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 다른 서론가, 혹은 평론가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고자 하였다.

    14) 張醜, 淸河書畵舫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1), p.1415) 張醜, 淸河書畵舫. p.12416) 본고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판본은 米芾, 寶晉英光集 (北京: 涵芬樓, 1924)을

    참조하였다.

    17) 본고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판본은 水采田 譯注, 宋代書論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1999; 2006, 5次印刷), pp.173-187을 참조하였다.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5周密의 雲煙過眼錄19), 元末 明初 陶宗儀(1329-1421)의 書史會要20),明代 서화이론가 張醜의 淸河書畵舫21), 淸代 서화이론가 顧復의 平生壯觀22) 등의 문헌적 고찰을 통해 12帝王에게 예술적 영향을 준 각시대의 대표적인 서예가들과 12帝王의 서예 嗜好 및 심미관이 무엇인

    지 탐구해 보도록 하겠다.

    Ⅱ. 宣和書譜의 12帝王 서예 嗜好宣和書譜의 12帝王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晉(265-420)의

    武帝(236-290)는 성이 司馬, 이름은 炎, 자는 安世로, 文帝(211-265)의

    아들이다.23) 武帝는 글씨 쓰는 것을 좋아했으며, 특히 草書에 뛰어났

    다. 필력은 웅건하여 영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거기에 결단성이

    있어 의지가 확고한 모습이었다24)고 한다. 그의 성품이 여실히 반영된

    宣和書譜의 草書 25)에 대해 明代 張醜(1577-1643)는 淸河書畵舫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晉 武帝의 眞蹟 은 宣和年間 秘閣本으로, 오늘날에는 震澤의

    18) 본고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판본은 水采田 譯注, 宋代書論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1999; 2006, 5次印刷), pp.260-343을 참조하였다.

    19) 본고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판본은 丛书集成初编 (北京: 中华书局, 2010)을참조했다.

    20) 본고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판본은 陶宗儀, 書史會要 (上海: 上海書店, 1984)을 참조했다.

    21) 본고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판본은 張醜, 淸河書畵舫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1)을 참조했다.

    22) 본고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판본은 顧復, 平生壯觀 (上海: 上海古籍出版社,2011)을 참조했다.

    23)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司馬氏, 諱炎字安世, 文帝之子也. 司馬氏執魏國威柄. 凡三世矣, 至武帝時神器始歸之.”

    24)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喜作字, 於草書尤工, 落筆雄健, 挾英勇之氣.”25)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今禦府所藏草書二, , .”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6王氏가 보관하고 있다. 필세가 웅건하고 고아하면서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 帝王의 서예작품 중 최고이다. 이 작품은 비교할 데가 없는 妙品이

    다.26)

    이 明代에 이르면 황실 소장에서 개인 소장품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오늘날 宣和書譜에 기록된 草書․ 두 작품의 존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明代의 張醜도 妙品이라고 극찬한 武帝의 草書는 특히 북송의 米芾

    (1051-1107)에 의해 더욱 높이 평가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武帝의 글은 종이가 헤어져 낡았지만 墨色이 마치 새 것과 같으니, 필

    이 지나간 곳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 어찌 임서를 통해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에게 서예 쓰기를 포기하게 하려는 것인가. 옛 사람이 이

    런 서예 작품들을 임서할 수 있었다면, 이 같이 신묘한 경지에 쉽게 이르

    지 않았겠는가?27)

    武帝의 글은 그 氣象이 아주 오래된 옛 사람과 같아서, 자연스럽고 순

    박한 질감이 있다. 張旭과 懷素가 어찌 그 경지에 이를 수가 있었겠는

    가?28)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 武帝의 글은 米芾에 의해 독보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오늘날 , 두 ‘御筆’의 존위 여부

    가 불분명 하지만, 米芾은 寶晉英光集에서 그를 ‘三绝’이라고 일컫는张旭(675-750)과 ‘狂草’의 대가 懷素(725-785)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

    당시 米芾이 평가한 武帝의 글은 으로, 이 법첩에 대한 진적

    여부는 隋代의 모본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陳思의 書小史에서도 晉의 武帝가 草書에 뛰어났다29)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26) 張醜, 淸河書畵舫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1) p.14: “晉武帝我師帖眞跡,宣和秘府官本, 今在震澤王氏. 筆勢雄健, 高古絶倫, 當爲帝王書法之冠, 此無上妙

    品也.”

    27) 米芾, 寶晉英光集 卷七: “武帝書, 紙靡潰而墨色如新, 有墨處不破. 籲! 豈臨學所能? 欲令人棄筆硯也. 古人得此等書臨學, 安得不臻妙境?”

    28) 米芾, 寶晉英光集 卷七: “武帝书其气象有若太古之人, 自然淳野之质. 张长史․怀素岂能臻其藩篱耶?”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7武帝의 경지가 대단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宣和書譜가 북송 황실의 권위를 공고히 하려는 관방의 편찬서라는 점으로미루어 볼 때, 武帝에 대한 평가를 비판적 시각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宣和書譜에서는 武帝의 草書를 높이 평하고 있는 반면 그의실정에 빗대어 최고 통치자로서의 정치관과 심미관에 대해 비평적인

    태도를 취한다.30) 武帝는 ‘武’라는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 전쟁 영웅을

    뜻한다. 이러한 영웅적 기질이 그의 글씨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은 그가

    ‘文武’를 겸비한 황제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음 장에서 후술하겠지만

    북송시대 서론가인 米芾과 陳思에 의해 그의 草書가 높이 평가됨에도

    불구하고 宣和書譜에서는 武帝의 부적절한 치세로 인해 그의 서예嗜好 및 심미관을 낮게 평가한다.

    그렇다면 宣和書譜에서 고금을 통틀어 가장 슬기롭고 현명한 황제라고 칭송되는 唐(618-907) 太宗(627-649)의 서예 嗜好31)는 어떠했

    을까?

    唐 太宗은 성이 李, 이름은 世民으로, 高祖(618-626)의 차남이다. 太

    宗은 隋(581-618)나라 말기 국가의 代議를 위해 高祖에게 太原을 일으

    켜 장안에 진입하자고 擧兵을 건의하였는데, 이때 손바닥 안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세상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역사에서 太宗

    을 일컫기를, 隋의 혼란을 제압한 인물이라고 하여, 商의 湯王, 周의

    武王과 동격으로 평한다.32) 이 같이 정치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

    29) 陳思, 書小史: “帝善行草書.”30)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喜作字, 於草書尤工, 落筆雄徤, 挾英勇之氣, 毅然爲一代祖, 豈齪齪戲弄筆墨之末以取勝者.”

    31) 唐 太宗의 서예론에 대한 연구는 宋 高宗 趙构와의 서론 비교를 통해 이미

    진행되었다. 楊宏鵬에 의하면, 唐 太宗의 서론은 서예예술 본연의 독립적인 가

    치 및 예술 관념의 진보성 측면에서 宋 高宗의 서예론에 비해 상세하지 못하

    다고 평한다(楊宏鵬, 宋高宗趙构與唐太宗李世民書論比較 (华章, 21, 2010)

    pp.36-41.)

    32)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唐太宗, 李氏諱世民, 高祖之次子. 有隋末首建大議, 起太原, 入長安, 取天下如運諸掌. 故史稱除隋之亂, 比跡湯武; 致治之美, 庶幾

    成康, 夫可謂近古之英主.”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8한33) 太宗은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과 심미관까지 구비하고 있었다.

    太宗은 조정 대신들에게 “서학은 소소한 이치이니 본래 급하게 정무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 어떤 때는 정신을 집중하여 시간을 헛되이 허비하지

    않아야 하지만, 또 배우지 않으면 정통할 수 없다. 짐은 어릴 적 전쟁터

    가까이 있었기에 戰勢를 위주로 정황을 판단한다. 지금 내가 서예를 익히

    는 것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다.34)

    그는 전쟁에서 얻었던 경험을 서예 학습에 빗대어 논했는데35), 전쟁

    의 격동으로부터 국가가 안정되자 ‘예술 장려’36)라는 타이틀로 군신과

    민중을 격려하여 많은 예술가들의 잠재력과 재능을 발굴해 냈다. 이는

    다음의 내용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筆法․指意․筆意라는 세 권의 지침서를 만들어 서예를배우려는 자들에게 훈련시키는 용도로 사용하게 했는데, 그가 서예에 뛰

    어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37)

    33) 唐 太宗 李世民의 정치적 본질 및 목표는 ‘爲治之道’에 있다. 太宗은 隋가 정

    벌의 실패와 가혹한 착취에 저항하는 농민 반란으로 급속히 패망한 사실을 교

    훈으로 삼았는데, 爲政의 근본은 세상을 보호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에 있

    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均田制를 실시하여 경제력과 군사력을 튼튼히 하여서

    안으로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영토를 확장하여 세계 제국을

    건설한다(林樟杰, 李世民的爲治之道 , 上海师范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 2,

    1980, pp.137-142).

    34)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嘗謂朝臣曰“書學小道, 初非急務, 時或留心, 猶勝棄日, 然亦未有不學而得者. 朕少時臨陣, 料敵以形勢爲主, 今吾學書亦然.”

    35) 太宗이 집필한 論書에서는 그가 전쟁 중에 경험했던 心得을 서예 학습에대비하여 논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太宗 또한 ‘文武’를 겸비한 정치

    가이자, 예술가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예술심미관은 태종의 문예관에서도 살

    펴볼 수 있다. 全唐詩, 全唐詩外篇에서 太宗의 시가 모두 102首가 기재되어 있다. 대부분이 治國, 富强에 대한 내용으로, 전쟁 상황을 묘사한 시이다(李

    中華, 唐太宗的文藝觀及詩歌創作初探 , 武漢大學學報(社會科學版) 2, 1984,pp.77-80)

    36) 邹锦良․戴小宝, 唐太宗李世民的‘励下’艺术及其启示 (兰台世界 11, 2011)pp.17-18.

    37)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又嘗作「筆法 ․ 指意 ․ 筆意 三說, 以訓學者,蓋所得其在是歟.”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9太宗은 筆法決․指意․筆意38)․王羲之傳論39)․論書를 집

    필하여 서예예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내세운다.40) 筆法은 筆法決이라고도 칭하며, 서예의 用筆 방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執筆과 運毫 등의 기술적 방법 이외에도 ‘마음이 바르고 기운이 화목하면 곧 묘

    함을 맺게 된다’41)는 서예 미학에 대해 논한다. 指意에서는 서예의취지와 의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心’․‘神’과 서예의 관계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며, 또 執筆의 정확성과 작품의 好惡에 대해 논하고 있

    다. 筆意에서는 서예작품의 표정이나 태도 및 정취에 대해 설명한다.그리고 서예의 기술과 풍격에 대해서도 논한다.42) 이는 太宗이 개인의

    嗜好를 넘어서 체계적으로 서예 문화를 장려하고 발전시키려고 했다는

    점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그의 서예예술에 대한 애호는 王羲之에 대한

    존경과 흠모에서 비롯되었다.

    太宗은 이전부터 王羲之의 글씨를 마음속으로 앙모하여 그것을 따라

    쓰기도 하였는데, 국고의 재화를 꺼내어 王羲之가 세상에 남긴 친필 묵적

    을 사들이고, 그의 眞書, 行書, 草書 등 2,200첩이 넘는 작품으로 대신 세

    금을 내게 했다.43)

    太宗의 직접적인 서예 스승은 虞世南이었다. 그러나 그는 虞世南의

    스승인 智永이 흠모한 王羲之의 서예를 먼저 배우고 차례대로 智永의

    글씨를 본받아 虞世南에까지 이른 것이다.44) 다시 말해 王羲之→智永

    38) 筆法決․指意․筆意은 朱長文의 墨池編 卷1에서 살필 수 있다. 그리고 历代书法论文选 (上海: 上海书画出版社, 1979)에서도 참조할 수 있다.

    39) 朱長文의 墨池編 卷4; 陳思, 書苑菁華 卷 20을 참조할 수 있다.40) 太宗이 집필한 筆法決․指意․筆意․王羲之傳論․論書은 다음의

    문헌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潘運告 主編, 蕭元 編著, 初唐書論, 湖南: 湖南美術出版社, 1999, pp.83-99).

    41) 虞世南, 筆隨論「契妙 : “欲書之時, 當收視反聽, 絶慮凝神, 心正氣和, 則契于妙.”

    42) 桂第子 譯注, 宣和書譜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2002), p.5.43)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雅好王羲之字, 心慕手追, 出內帑金帛, 購人間遺墨, 得真行草二千二百餘紙來上.”

    44)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先是釋智永善羲之書, 而虞世南師之.”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10→虞世南에 이르는 계승 구도를 그릴 수 있다. 太宗의 글씨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 형태 구조가 상당히 닮았다고 한다.45) 그리고 이와 같

    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太宗이 羲之傳論에서도 기술하고 있지만, 서예예술의 궁극적인 경지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46) 이러한 王羲之의 서예 예술에 대한 진중함은 그의 제자

    虞世南, 智永에게도 영향을 끼쳐 그 본질적 의의가 太宗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智永은 매번 닳아빠진 붓을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 두었는

    데, 그것이 10통에 가득차면, 그 퇴필들을 땅에 묻어 ‘退筆冢’이라고 하

    였다47)고 한다. 이는 서예가로서의 쉬지 않는 근면정신과 노력을 강조

    하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정신은 太宗의 서예기호 및 심미관

    에도 영향을 끼쳐 열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미적 가능

    성을 제고시켰다.

    앞서 논한 바와 같이 晉의 武帝와 唐의 太宗 두 인물의 서예가 웅

    건한 필력을 과시하는 아름다움을 나타내었다면, 唐 玄宗 李隆基는 웅

    건한 필력에 섬세함과 풍부함을 더한 작품성이 돋보인다. 특히 앞선

    두 황제가 草書에 뛰어났다면, 玄宗은 八分書에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

    했다. 그는 성품이 영민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예술적으로 뛰어났는

    데, 특히 음악에 소질이 있었고, 八分書에도 뛰어났다48)고 평한 내용에

    서 살필 수 있다. 玄宗은 睿宗(662-716)의 세 번째 아들이다. 그의 타

    고난 영리함은 서예심미관에서도 살필 수 있는데, 전대로부터 답습된

    서예 풍조가 翰林院에서 세속적인 경향으로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

    자, 玄宗은 스스로 章草와 八分書를 연구하여 그 모순점에서 벗어나려

    고 했던49)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다음의 내용에서 살필 수 있다.

    45)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頗得其體. 太宗乃以書師世南.”46)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又嘗贊羲之傳, 痛論字學, 固亦見其髣髴. 觀夫淵源, 變態出於筆端者, 信非一日之習, 其所由來遠矣.”

    47) 宣和書譜 卷16, 草書四 : “所用之筆, 退即投大甕中, 歲久輒貯數甕. 自爲銘以瘞之.”

    48) 舊唐書 卷8, 玄宗本紀 : “性英斷多藝, 尤知音律, 善八分書.”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11

    玄宗이 張九齡을 비평한 표와 裴耀卿에게 하사한 시, 그리고

    이라는 칙령 및 이라는 글에서 살펴보면, 평가자들은 여기에서 서

    체의 풍부하고 조밀함, 아름답고 기묘한 점이 있다고 논한다.50)

    竇臮는 玄宗의 서예에 대해 “風格은 지극히 아름답고 碑刻에 탁월하니,

    문장 속에 담긴 사상은 온천이 샘솟듯 하며, 봉황이 출현한 듯 아름답고,

    筆은 파도가 물결치는 듯하며, 筆勢는 거대한 고래를 삼킨 듯하다”고 말

    한다.51)

    玄宗의 서예는 웅건함을 바탕으로 풍부하고 정세하며 신묘한 아름

    다움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는 米芾의 海岳名言에서 開元(713-741)이래로 玄宗은 풍부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글씨를 애호했기에, 徐浩

    (703-783)와 같은 풍부하고 비교적 거친 글이 당시에 환영받을 수 있

    었다고 한다.52) 또한 張九齡(678-740), 裴耀卿(681-743) 등과의 교류를

    통해 쓰여진 표53)와 시에서는 玄宗의 박학다식함을 읽을 수 있다. 竇

    臮가 평했듯이 玄宗의 글에서는 풍부한 풍격을 나타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가 엿보인다. 예컨대 宣和書譜에 기록된 , 등의 隸書 작품의 명칭에서 보더라도 玄宗의 학문적․

    종교적 경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의 法空은 불교 언어로서 諸

    法의 물질과 정신 현상에 대한 總和를 말한다. 그리고 의 太

    一은 하나의 ‘太乙’을 만드는 것, 다시 말해, 도가에서는 이를 ‘道’라고

    부른다.54) 또 安史의 亂55), 형제의 돈독한 우정, 나아가 처절한 황권

    49)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初見翰苑書體狃於世習, 鋭意作章草八分, 遂擺脫舊學.”

    50)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觀其批張九齡表․賜裴耀卿詩, 與夫嘉賓之勑․五王之贊, 議者言其豐茂英特.”

    51)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竇臮賦其書, 以謂“風骨巨麗, 碑板崢嶸. 思如泉而吐鳳, 筆爲海以吞鯨.”

    52) 米芾, 海嶽名言: “開元以來, 緣明皇字體肥俗, 始有徐浩, 以合時君所好, 經生字亦自此肥.”

    53)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54) 桂第子 譯注, 宣和書譜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2002), p.9.55) 安史의 亂 이후 당 후기 왕법주의에서의 황권과 관신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12다툼을 다룬 詩賦에서는 唐代 21명의 帝王 가운데에서 집정 기간이 가

    장 길었던 그의 정치적 치열함도 엿볼 수 있다. 宣和書譜에서도 기재되어 있으며, 현재 대만국립고궁박물 소장되어 있는 은 玄

    宗의 유일한 墨迹이다. ‘鹡鸰’는 옛 문학가들이 형제의 우애를 비유할

    때 자주 사용하였고 한다.56) 淸代 서화이론가 顧復의 平生壯觀에서는 에 대해 글자는 마치 옛 화폐와 같고 그 행간이 서로 어

    울리며 묵색은 빛이 나는 사람과 같다. 끝부분에는 蔡京․蔡卞이 발문

    을 썼다57)고 기술하고 있다.58) 또 玄宗의 ‘御筆’이 먹색을 사용하는 데

    에 있어 풍부함을 구비하고 있다59)는 내용은 전대의 太宗의 글씨보다

    는 더욱 윤택하고 풍부한 아름다움을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玄宗의 학문적․종교적․예술적 경지 및 서예 嗜好는 唐代 帝王 가운

    데에 가히 독보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玄宗의 세 번째 아들이며 당의 7대 황제인 肅宗 李亨은 아버

    지의 혈통을 이어받아 학문과 예술에 끊임없이 증진했다고 한다. 이런

    아들을 위해 玄宗은 賀知章(659-744)과 같은 뛰어난 인재를 선별하여

    肅宗의 좌우를 살피게 하여서 그의 학문과 서예예술이 진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60) 肅宗은 이러한 아버지의 총애에 못지않게 효성이 지극했

    는데, 다음의 내용에서 살필 수 있다.

    肅宗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응당 해야 할 본분으로 동궁에서 玄宗을

    섬겼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저녁 무렵에는 부모님께

    이부자리를 챙겨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여쭈었다. 어찌 아버지의 가르침

    이 없었겠는가? 이 때문에 그의 行書에서는 당연히 가법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자료로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张春海, 唐后期司法领域中皇权, 官僚与宦

    官之关系 (中國史硏究 54, 中國史學會, 2008) pp.73-82).56) 桂第子 譯注, 宣和書譜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2002), p.10.57) 顧復, 平生壯觀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1), p.12.58) 대만국립고궁박물 소장되어 있는 은 玄宗의 유일한 墨迹이지만 이

    작품은 明代 董其昌(1555-1636)이 임서한 것으로 추정하는 이도 있다.

    59) 顧復, 平生壯觀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1), p.12.60)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肅宗早歲時, 明皇爲選佳士如賀知章等, 侍讀左右, 氣味漸摩, 曾非一日.”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13있어서, 그 氣韻과 서예 형태 구조, 필세의 높고 낮음에서 장점이 있을

    수 있었다.61)

    인용문에서도 살필 수 있듯, 肅宗의 行書는 가법을 계승한 정통 궁

    정서예의 법도를 구가하고 있었으며, 玄宗을 비롯한 賀知章과 같은 대

    서예가의 필법과 기운을 이어받은 글씨였다. 그의 이러한 영명함과 성

    실함은 그의 집정 능력과 군신, 민중의 뒷받침, 그리고 서예학습에서도

    살필 수 있다.

    肅宗이 즉위한 두 번째 해에 승상 韋見素를 파견하여 玄宗을 蜀으로부

    터 영접하여 수도로 돌아오게 하자, 그는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비로소 天子의 아버지가 되었다. 어찌 좋지 않겠는가?” 그는 盛德

    을 이루었다. 비록 商의 湯과 周의 武王과 견주기에는 부족하지만, 재난

    과 혼란을 깨끗하게 평정하여 다시 唐을 재정비하였다. 또한 그는 출중하

    고 비범한 재능을 발휘한 군주였다. 그래서 郭子儀․李光弼 무리들은 진

    정으로 천하의 호걸이며, 중흥 제일의 관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모

    두 肅宗이 장수들을 관리하는데 뛰어나고, 그들을 적당히 등용할 수 있었

    기 때문이다. 그는 영명하며 사려가 깊은 군주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진정한 人才이다.62)

    讀書하도록 좌우에서 섬기니, 意趣에 감화된 교육은 하루 이틀이 아니

    었다. 또 玄宗이 재위에 있을 때, 그의 行書, 八分書, 章草의 필법을 통해

    항상 경의를 품고 중시했다.63)

    肅宗 757년 정월 安祿山이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살해당하자 자연

    스레 반란군의 힘이 약해져 장군 郭子儀와 李光弼이 쉽게 그들을 진압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9월에 郭子儀와 함께 수도 장안으

    61)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肅宗以子職侍東宮, 方溫凊定省間, 得無過庭之訓? 是宜行書亦有家法, 而其氣韻與能字者爭衡也.”

    62)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即位之明年, 遣韋見素迎上皇自蜀還京, 使明皇感悟, 自謂“吾始得爲天子父, 不其美歟?” 其盛德成功, 雖未足以比跡湯武, 而至於削

    平禍亂, 再造唐室, 亦傑然用武之君. 是以郭子儀․李光弼之徒, 真天下豪傑之士,

    功名爲中興第一, 皆肅宗善將將而能禦之要, 知英主自有真也.“

    63)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侍讀左右, 氣味漸摩, 曾非一日. 又當明皇在禦,以行書․八分․章草書爲時矜式.”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14로 돌아오게 되고, 12월에는 蜀으로 피신해 있던 玄宗까지 영접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해결한 肅宗의 집정 능력은 그의 서예 嗜好에서도 나타

    나는데, 肅宗의 行書․八分書․章草는 玄宗을 비롯한 賀知章이 감화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집중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

    러나 安史의 亂은 진압되었으나, 역사적 흐름에서 살펴보면 唐은 쇠퇴

    기에 들어선다.

    太宗과 玄宗, 肅宗에 이어 이미 唐 중기를 넘어서 말기에 들어선 代

    宗의 서예 嗜好는 여전히 황실 가문의 가풍을 이어받아 근면함을 나타

    내었다. 그렇다면 唐 代宗 李豫은 어떠한 예술관으로 唐朝의 서예 흐

    름을 수용했을까? 李豫는 玄宗의 嫡皇孫이었다. 그 또한 할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아 총명하며 마음 씀씀이가 넓었고 얼굴은 항상 밝아서

    화난 기색을 살필 수가 없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주역에 정통하였다64)고 한다.

    정사에 근면하고 여유가 있으면 정신을 집중하여 서예를 익혔는데, 行

    書에 뛰어났다. 대체로 唐 太宗 이래로부터 대대로 서예를 배우는 학풍이

    전해져 代宗에 이르러서도 그 가풍이 쇠퇴하지 않는다. 代宗의 필력은 비

    록 太宗과 玄宗의 넓은 도량과 호방한 기운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볼 만하다. 예컨대 과 의 시에서는

    필법이 뛰어났는데, 자태가 고와서 여전히 전대 사람과 서로 필적할 수

    있었다.65)

    오늘날의 역사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代宗시대는 정치적 쇠퇴기에

    들어선 것이지만, 그의 서예와 시부는 太宗과 玄宗으로부터 계승한 황

    실 가풍의 면모가 그대로 답습된 듯하다. 歐陽脩는 代宗을 일컫기를

    잔여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혼란을 평정하고 나라를 수호하니, 인

    64)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聰明寛厚, 喜怒不形於色, 好學強記, 深於 易象.”

    65)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宵旰之暇, 留心翰墨, 於行書益工. 大抵有唐自太宗以還, 世相祖襲, 至代宗家學未墜. 論其筆力, 則非有太宗․明皇超邁之氣, 然亦

    有足觀者. 今及見者, 與夫之詩, 筆法勁媚, 尚可以

    追配昔人云.”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15재 중의 으뜸이다66)고 평하였다. 宣和書譜의 ․․․․․ 7

    첩의 제목에서 보더라도 그의 심미관을 가늠할 수 있다. 의

    ‘歲功’은 일년 농사의 수확에 대한 시인데, 그가 정사에 근면했다는 점

    과 자연 현상의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代宗의 장자인 德宗 李適, 憲宗의 13번째 아들인 宣宗 李忱, 懿宗의

    17번째 아들 昭宗 李曄의 서예 嗜好는 어떠했을까?

    德宗은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고 한다. 그는 황제가 되기 전 제후

    의 직위에 올랐기에 명망이 높았으며, 선천적으로 재주가 뛰어나고 노

    련하여 배우지 않아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서 일에 대한 통찰력이

    있었다67)고 한다. 이러한 집정 능력은 그의 서예 嗜好에서도 살필 수

    있다.

    이로 인해 군신이 상소문을 올리면 모두 즉시 허가 여부를 회답하여

    새겼는데, 이때의 筆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고 筆墨은 자연스럽고 소탈하

    여 눈여겨 볼 필요가 있었다. 대체로 당의 선왕들이 서예를 애호하였기에

    후세 자손들도 여전히 그들의 업적을 계승받았다. 게다가 관사를 설치하

    고 侍書를 만들어서 대대로 인재가 줄지 않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었

    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이다.68)

    宣和書譜에 기록된 德宗의 작품으로는 行書 1첩이 있다. 그는 학문에 증진할 나이가 되었을 때 이미 국가를 통솔하였

    다고 한다. 조정과 일상의 복잡한 정무를 장악하여 치국의 도에 정신

    을 집중시켜 예법으로 선왕이 펼치고자 한 일을 성사시켰다.69) 德宗은

    66) 新唐书 卷6: “代宗之时, 馀孽犹在, 平乱守成, 盖亦中材之主也.”67)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初在宗藩, 譽望已著. 性識強敏, 一經於目, 往往不待學而能. 其所以自任者, 亦複如此.”

    68)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故群臣章奏來上, 皆即批答, 筆無滯思, 翰墨落落可觀. 大抵唐以文皇喜字書之學, 故後世子孫尚得遺法. 至於張官置吏以爲侍書, 世

    不乏人, 良以此也.”

    69)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齒胄之年, 便爲統帥. 既總萬幾, 頗勵精治道, 思前王能事, 以壯大猷.”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16太宗의 가풍을 계승하였지만 玄宗처럼 서예미학에서 특출한 성과를 내

    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 출중한 인재들을 배출하여

    후대에 계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관사 설치와 詩書를 둔 점이다.

    宣宗, 昭宗 또한 당 황실의 서예 애호 가풍을 계승하였는데, 宣宗 李

    忱은 性情이 진중하여 말이 적어서 궁실에서는 그를 총명하다고 여기

    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술 전략에 능통하여 조정의 일을 명확하게

    주관했다.70) 이때 썼던 그의 詔書는 높이 평가 받았지만, 여전히 太宗

    의 글씨에서 벗어나지 못해 발전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종실의 많은 자제는 太宗의 서학을 답습하여서 모두 이 筆墨

    으로 세상에 전해졌는데, 宣宗도 이를 이어받아 行書에 뛰어났다. 太宗의

    오래된 필법이 아직까지 남아있기 때문이다.71)

    太宗의 잔재를 여전히 살필 수 있다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太宗을

    능가할 수 있었던 실력은 구비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宣和書譜에 기록된 宣宗의 작품으로는 行書 ․․ 3첩이 있다.

    昭宗 李曄는 사람됨이 밝고 기민하여 글을 쓰고 만드는 것을 좋아

    했다72)고 한다. 宣和書譜에서는 行書 1첩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법첩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唐 皇

    室을 회복시키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73) 이미 국운이 쇠퇴

    기에 들어선 것을 점치듯 이들 세 황제의 예술심미관도 선대의 太宗과

    玄宗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70)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性嚴重寡言, 宮中以爲不慧. 然精於聽斷, 而專事明察, 其所以黜陟臣下, 皆出於已.”

    71)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故諸宗承襲太宗之學, 皆以翰墨流傳, 至宣宗複以行書稱, 蓋其典刑猶在也.”

    72)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爲人明倩, 多喜作書字.”73)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觀其以賜鏐,, 當時不能無意. 其書雖不稱於世, 而興複之志於斯可見矣.”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1712帝王 가운데에 유일한 女皇帝 則天의 서예 嗜好도 주목할 만하다.

    그녀의 글씨는 대장부의 기세가 엿보이는 필력과 형세를 갖추고 있

    었다. 宣和書譜에서는 1첩만 기록하고 있으며, 舊唐書와新唐書에서는 則天에 대해 ‘窮妖白首’라고 상당히 낮게 평가하고 있다.74) 이렇게 폄하되는 則天 順聖皇后는 성은 武, 이름은 曌, 幷州 文

    水 사람이다.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했으며, 성품

    은 영명하여 결단성이 있어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성의 기질에서 벗

    어나 있었다고 한다. 高宗(628-683)의 넘치는 사랑을 이용하여 분수에

    맞지 않는 희망을 품었다75)고 전한다. 이러한 則天의 글은 그녀의 외

    모와 성품에서도 알 수 있지만, 상당히 적극적인 기풍과 저돌적인 면

    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당시 신하의 상소문과 전국의 모든 문자는 그녀가 만든 글자를 사용하

    였다. 그러나 한 순간 행해졌을 뿐이었다. 겨우 唐의 석각에 그 글자가

    실려 있었으니, 則天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이 글자를 통해 알 수 있

    었다. 비록 상황이 이와 같았지만 그녀는 원래 글자를 만드는 것을 좋아

    했다. …… 이로부터 필력이 증진하여 그녀의 行書는 매우 빠르게 대장부

    의 강성한 기개를 구비하게 되었다.76)

    강단이 있는 則天의 서예기호는 그녀의 정치적 삶과도 연계된다. 宣和書譜에서는 그녀가 인재 관리 능력에 뛰어났다고 기록한다. 그녀의 이러한 능력은 무주혁명을 일으켜 중국 최초의 女帝가 되는 데 결

    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설명한다.77)

    다음은 왕조가 바뀌어 오대시기의 제왕 중 後粱의 太祖(907-912),

    末帝(913-923), 後周의 世宗(954-959)의 서예 嗜好는 어떠했는지 살펴

    74)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新史貶而傳之, 舊史以謂窮妖白首, 良以爲訓.‘75)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武則天順聖皇后武氏諱曌, 幷州文水人, 凜凜英斷, 脫去鉛華脂韋氣味, 椉高宗溺愛而窺覦竊起.”

    76)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當時臣下奏章與天下書契, 鹹用其字. 然獨能行於一世, 而止唐之石刻載其字者, 知其在則天時也. 雖然, 亦本於喜作字.…… 自此筆

    力益進, 其行書駸駸稍能有丈夫勝氣.”

    77)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駕馭英雄, 使人人各爲其用, 不旋踵踝移唐室.”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18보도록 하자.

    太祖는 성이 朱, 이름은 溫이다. 行書로 신하가 올리는 상소문이나

    축서를 썼는데, 그 글은 소박하고 능숙해 보였지만, 글자의 氣韻이 부

    족하여, 당시 사람들은 筆吏가 쓴 것이라고 여겼다78)고 한다. 당시 朱

    溫은 당나라 신하의 신분으로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글은

    상단에 사용되는 것으로 천명을 받드는 부적에 쓰였다.79) 그의 行書로

    1첩이 기재되어 있다.

    末帝는 이름은 瑱, 太祖 朱溫의 네 번째 아들이다. 당 文德元年(888)

    에 東京(오늘날의 낙양을 가리킨다)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용모와 자

    태를 갖추었으며, 사람됨이 순박하고 진중하여,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

    았고 유명한 유학자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했다80)고 한다. 그의 서예

    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朱瑱은 별다른 재능이 없었으나, 筆墨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대부분 行

    書로 상소문을 올린 것에 대한 답을 표시하였으며, 草書로 칙명에 대한

    의견을 담았다. 글자는 한 척의 크기로 사방에서 그 필력과 기운이 가득

    하였는데, 王羲之와 王獻之의 필법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 온 末帝의 글을 보면, 일반적인 서예가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

    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81)

    ‘二王’의 서예관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의 필력이 황

    권을 나타내는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아쉽게

    도 그의 필적은 行書 1첩만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後周의 世宗은 성이 柴, 이름은 榮, 睿武孝文皇帝로 太祖 聖穆柴后의

    78)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梁太祖朱氏諱溫, 批答賀表行書字體, 雖純熟, 然乏氣韻. 當是筆吏所書.”

    79)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方時溫以唐之臣子, 盜竊神器, 故多引瑞物爲受命之符.”

    80)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梁末帝諱瑱, 太祖溫第四子也, 以唐文德元年生於東京. 美容儀, 爲人沈厚, 未嘗妄語言, 喜與聞人儒士遊.”

    81)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瑱無他伎, 喜弄翰墨, 多作行書批勅, 大者或近盈尺. 筆勢結密, 有王氏羲․獻帖法, 流傳到今, 覽之便知, 非侍書者所能及也.”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19조카이다. 어릴 때부터 太祖와 성목왕후를 극진하고 효성스럽게 섬기

    기로 정평이 났다. 太祖는 자영을 아꼈는데, 그가 성장하여 성인이 되

    자 태자로 삼아 중임을 맡게 했다. 그가 즉위하여 조정을 통솔하게 되

    자, 옛 신하들을 계속해서 임용하여 그들과 함께 선대인들이 세운 과

    업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82)고 한다. 그의 이와 같은 정치

    적 업적은 그에 대한 평에서도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다.

    이 때문에 그 신묘하고 용감한 기백은 그의 강렬한 筆에서 발휘될 수

    있었는데, 그가 표현한 것은 이미 일반인들이 추구한 경지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가 쓴 行書의 賜張昭詔를 보면, 그 대략적인 의미를 파악할수 있다.83)

    世宗의 작품으로는 行書 1첩만이 宣和書譜에 기록되어 있다. 宣和書譜의 그에 대한 평에서 알 수 있듯, 그 역시 비록 일반인 추구하는 경지에는 비교될 수 없었지만, 당 황실의 가풍을 이어

    받은 서예 嗜好로 전대 선왕들의 서예관을 초월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으로 宣和書譜의 저술자가 12帝王 가운데 가장 주목한 인물은 唐 太宗이며, 이는 宣和書譜가 저술된 시기의 북송 황실의 서예심미관이 어떤 방식으로 유통되고 수용되었는지 추정할 수 있다.

    Ⅲ.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 및문화 면모

    西晉은 武帝가 죽고 惠帝가 즉위하면서 왕족과 제후의 내분에 의해

    82)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周世宗, 柴氏, 諱榮, 睿武孝文皇帝太祖聖穆柴后之侄也. 丱歲事君後以孝謹聞, 太祖愛之, 及長, 委以主器之重, 乃克負荷. 迨其繼

    明在禦, 因任舊臣, 相與紹述前烈, 增大基構.”

    83)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故宜神武之略, 氤氳盤磚發於筆端, 其運用處, 自己過人遠甚. 觀, 有行書法, 亦可見其略也.“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20쇠퇴의 길을 걷는다. 八王의 亂이 발생한 계기로 주변 이민족들의 침

    략도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국가적 혼란으로 인한 후퇴의 원인

    은 武帝의 정치적 결점으로 평가한다.84) 武帝는 조상들의 뜻과 과업을

    계승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주요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즉위 초에는 근면하였지만, 점점 제멋대로 한가로이 국정에 임하자 천

    하를 잃게 된다.85) 이를 두고 宣和書譜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한 시대를 풍미하여 존경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가 천하를 얻은 것이

    어찌 필묵의 기술적인 면이 우수하여 어색하지 않다고 하겠는가? 안타깝

    게도 그는 끝까지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賈充의 중상모략에 빠지어, 衛

    瓘의 충성도 저버리게 되니, 자손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장기간의 계책

    을 꾀하지 못하여서 이러한 간신들로 인해 통탄할 일이 생기게 되었다.86)

    武帝는 웅건하고 결단성 있는 필력과 골력으로 草書에 뛰어났지만,

    집권 초기 전대인의 역사적 교훈을 중시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인식

    의 오독으로 인하여 판단력이 흐려졌다. 당시 玄․儒 양립에 대한 적

    절한 대응책을 통해 국가 기반의 초석을 세우려고 했지만 이 또한 결

    과적으로 실정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 된다. 사마일족이 魏(220-265)

    나라 조정을 주관한 것은 모두 세 차례87)였는데, 武帝 때에 이르러서

    야 국가 정권의 실무를 장악할 수 있었다. 다만 長江 동쪽에 위치한

    吳(222-280)의 孫皓(242-284)는 59년 동안 그곳의 정권을 독점했는데,

    武帝가 일단 王浚(252-314)을 거용하면 전쟁에서 쉽게 승리하였으므로,

    84)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然以優勤得之, 以佚樂棄之, 其後東西分裂而爲兩晉, 後世論優劣, 鹹自武帝始.”

    85)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夫可謂繼志述事之主. 然以優勤得之, 以佚樂棄之.”

    86)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毅然爲一代祖, 豈齪齪戲弄筆墨之末以取勝者. 惜乎不克終譽, 而信賈充之言, 舍衛瓘之忠, 不爲經遠計以貽翼子, 故爲有爲者之所痛

    恨也.”

    87) 촉을 병합한 공로로 진왕이 된 위의 실권자 사마소가 죽자, 그의 아들 사마

    염은 명목뿐인 위 황제 조환으로부터 禪位을 받아 265년 晋의 황제가 되었다.

    그의 조부 사마의로부터 백부 사마사를 거쳐 부친 사마소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치밀한 준비공작의 결실이었다.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21이 시기에 이르면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다.88) 이를 통해 武帝의 집권

    초기의 무권 장악 능력과 인재 등용의 역사적 시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賈充의 중상모략에 빠지어, 衛瓘의 충성도 저버리

    게 되니, 武帝의 부적절한 치세와 극도의 사치 및 부패한 생활로 인하

    여 사회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점은 정치적 고립으로 이어진다.

    사회적으로는 가난한 백성을 압박하는 귀족제의 모순이 강화되어 북방

    이민족의 침입도 잦아지게 되었다. 특히 전대 위나라 왕실의 고립으로

    인한 정치적 실패를 거울삼아 武帝는 즉위 후 조환을 陳留王으로 봉하

    며 57개의 왕위를 국내 요지에 봉하였는데, 이는 이후 八王의 亂이 일

    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武帝가 중시한 유가적 인애주의인 형제의

    정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경향은 이후 국가 고립의 원인으로 나타나는

    데, 武帝의 인재 등용에 있어서의 불평등적인 측면과 귀족주의 만연의

    당위성을 오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89) 이로 인해 민중은 이러한 황실

    에 대해 원망을 품고, 현실을 도피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며, 이 시기의

    사회적․정치적 환경은 오히려 ‘淸談’, ‘尙韻’의 미학사상으로 발전하여,

    漢․魏시대의 예술관 보다 초월적이고 성숙한 단계에 이른다.90) 예컨

    대 서예예술은 전대의 간편하고 실용적인 글씨에서 벗어나 고도의 성

    숙미를 발현한다. 인용문에서도 언급한 衛瓘(220-291)은 索靖과 함께

    ‘二妙’라고 불리며 ‘二王’이라고 불리는 王羲之․王獻之 부자와 더불어

    중국 서예문화에서 한 획을 긋는다.

    주지하다시피 武帝는 초기에는 ‘文武’ 겸비, 전대 선현들의 과업을

    중시한 역사적 인식을 통해 정권의 핵심 세력으로 집정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적절하지 못한 인재 등용과 말기에는 측근의 전횡에 부

    딪쳐 농민 반란으로 국정을 뒤흔들어 놓았다. 다시 말해 인재 등용의

    88)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司馬氏執魏國威柄. 凡三世矣, 至武帝時神器始歸之. 獨江左有吳後附皓者, 擅五十九年之業, 一旦用王浚, 唾手而得, 故天下始一於

    晉.”

    89) 曹文柱, 西晉前期的黨爭與武帝的對策 (北京師範大學學報 5, 1989), pp.44-51.

    90) 郭魯鳳 譯, 中國書藝80題 (서울: 동문선, 1997), pp.41-45.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22실패 및 특정 정치 세력의 거부할 수 없는 모략으로 인해 실정을 하게

    됨으로서, 국가 사회의 다양한 조직과 제도의 복합적인 측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唐 太宗은 ‘文武’ 겸비를 통한 중앙집권체제의 세계제국 건설로

    도약한다.91) 정벌의 실패와 가혹한 착취로 인해 농민 반란이 일어난

    隋는 30년 만에 패망한다. 唐의 太宗은 이러한 隋를 제압한 황제로 周

    의 成王 및 康王과 같다고 하여 고금을 통틀어 가장 슬기롭고 총명한

    군주라고 칭송되었다.92)

    시문, 음악, 서예 등 어느 하나 그 예술풍격에서 뒤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太宗의 서예 嗜好는 歷代帝王 가운데에 가장 특출하다.

    魏徵과의 서예 담론 및 王羲之에 대한 숭상에서 보더라도 그의 남다른

    서예심미관을 감지할 수 있다.

    太宗은 또 虞世南을 스승으로 삼았지만, ‘戈法’에 정교하지 못한 것에

    자주 불만을 가졌다. 우연히 ‘戩’자를 쓰게 되자, 일부러 ‘戈’자를 쓰지 않

    고 공백을 남겨 虞世南에게 그 글자를 보충하게 하고서는 그것을 魏徵에

    게 보여주었다. 魏徵은 그것을 보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성상께서

    쓴 글을 보니 ‘戩’자의 ‘戈’자만이 생동감이 넘치십니다.” 太宗은 魏徵의

    품평을 높이 샀는데, 이 일로 인해 서예 쓰기에 더욱 열중하였다고 한

    다.93)

    虞世南이 세상을 떠난 후 太宗은 褚遂良을 기용하여 지속적으로 서예

    학습에 심혈을 기우렸는데, 사람들이 王羲之의 작품을 太宗에게 바치면

    오직 褚遂良이 그 작품의 진위를 알 수 있어서, 이로 인해 太宗의 서학은

    91) 唐 太宗의 중앙집권체제의 세계제국 건설의 도약을 가능하게 한 이유 중 하

    나는 이민족을 포용하는 외교문화정책의 실시에 주목할 수 있다. 나아가 唐의

    대외정책과 수입된 외래문화는 唐帝國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민족 문화의 영향

    을 받은 唐帝國은 다문화사회를 형성하였고 새로운 唐 문화를 창조하였다고

    한다(이해원, 唐太宗 소릉을 통해서 본 唐帝國의 다문화사회 , 한국학연구41, 2012, pp.223-252).

    92)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庶幾成康, 夫可謂近古之英主.”93)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太宗乃以書師世南, 然嘗患戈腳不工. 偶作‘戩’字,遂空其落戈, 令世南足之, 以示魏徵. 徵曰“今窺聖作, 惟‘戩’字戈法逼真.” 太宗嘆其

    高於藻識, 然自是益加工焉.”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23특별할 수밖에 없었다.94)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 太宗은 옛 서예가들의 글씨에 얽매이지 않

    고 스스로 그 이치를 깨달으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판단되며 서예예술

    에 대한 그의 완벽성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는 특히 정책적으로

    서예예술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는데, 다음의 내용에서 그 사실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太宗은 飛白書에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는데, 하루는 玄武門

    연회에서 三品 이상의 조정 대신들에게 자신의 飛白書를 하사하려고 하

    자, 신하들은 술에 흥겨워 그것을 서로 쟁취하려고 했다. 太宗은 弘文館

    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들 가운데 천성적으로 서예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

    여, 소장한 서첩 중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것을 꺼내어 그들에게 임서하

    게 했다. 세상에서 서예를 좋아하는 자라면 모두 弘文館에 들어오게 하였

    다. 이로 인해 십년 동안 세상 안팎은 서예를 배우려는 풍조가 성행하게

    된다.95)

    朝廷 연회를 통해 자신의 서예예술에 대한 애호를 나타내고, 弘文館

    설치 및 서예 이론서를 집필하여 정책적으로 서예문화를 정착시키려고

    한 점은 그의 문화적 감수성과 적극성을 살필 수 있다. 여기서 太宗의

    천성적으로 타고난 집정 능력과 문화정책의 핵심이 ‘知人’을 통한 인재

    등용과 문화예술을 통한 세상의 구현에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예컨

    대 虞世南, 褚遂良은 太宗의 직접적인 서예 스승이었다. 비록 太宗이

    王羲之를 흠모하여 智永, 懷素의 서예를 배웠지만, 虞世南과 褚遂良은

    당시로서 王羲之의 서예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그 품격을 논할 수 있었던 심미적 경지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太宗의 서학 풍토를 형성하게 한 근원은 王羲之가 추구하려는 이상적

    인 심미관에 도달하려는 노력과 함께 측근에 虞世南, 褚遂良, 魏徵과

    94)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世南既亡, 以褚遂良侍書, 凡人間所上羲之帖, 惟遂良究其真贗, 故所學尤勝.”

    95)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複善飛白, 一日宴三品以上於玄武門, 作飛白以賜, 臣下椉酒爭取, 以爲娛樂. 置弘文館, 選貴遊子弟有字性者, 出禁中所藏書令斆學焉. 海內有善書者, 亦許遣入館. 由是十年間, 翕然向化.”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24같은 우수한 서예가, 문학가, 품평가들이 있었기에 그와 같은 독보적인

    서예심미관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감수성과 진

    보성은 태종의 ‘以民爲本’, ‘安人寧本’의 치국사상에서 살필 수 있다. 그

    는 정치사회, 경제문화, 종교사상, 민족 간의 갈등 문제 등에서 치세의

    핵심을 인본주의에 두고, 국가와 사회를 연결하는 제도적 모습에 포커

    스를 맞추어 집정했다. 다시 말해 정치 영역 내에서의 상대적 자율성

    을 강조한다. 법과 제도를 통한 현상의 변화에 주목하고, 이를 동태적

    인 인간관계나 권력 갈등 또는 인간의 심미 등으로 고려하여 실제 현

    상에서 제도와 법이 가진 괴리를 줄이려고 한 것으로 파악된다.

    唐 太宗의 이와 같은 정치적 삶 및 서예심미관은 대대로 계승되어

    玄宗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玄宗은 앞서 논했지만 太宗의 웅건한

    필력과 영웅적 기질을 품은 골력을 바탕으로 더욱 풍부하고 윤택한 필

    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의 이 같은 서예작품은 宣和書譜에 기록된歷代帝王 가운데 가장 많은 법첩이 기록되어 있는 점만 미루어 보아도

    그 가치와 품격을 가늠할 수 있다. 玄宗의 작품으로 隸書의

    외 3첩, 行書의 외 20첩으로, 모두 25첩이 기재되어

    있다. 대부분이 行書 작품으로 이들 법첩의 제목에서만 보더라도 그의

    사상적․종교적․문학적 사유가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앞장에서 玄宗 이후의 肅宗, 代宗, 德宗, 宣宗, 昭宗, 武周의 則

    天, 後梁의 太祖, 末帝, 後周의 世宗에 관한 서예嗜好를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宣和書譜에 나타난 帝王들이 추구한 예술관의 본질적의미는 인간의 품성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창조적 사유, 아름

    다움을 추구하는 심미적 인간의 가능성에 있다. 宣和書譜에서 가장주목한 太宗은 弘文館 설치 및 서예 이론서를 집필하여 서예문화를 정

    착시켰고, 개인의 예술애호 정신과 함양을 통해 자신의 문화적 감수성

    과 적극성을 강조하였다. 太宗은 정벌의 실패와 가혹한 착취로 인해

    농민 반란이 일어나 30년 만에 패망한 隋를 본보기로 ‘제도’의 중요성

    을 파악하고 천성적으로 타고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宣和書譜를 통한 단적인 예이지만 과거의 중요 인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25통해 이론서를 집필하고 정책적으로 민생을 안정시킨 점은 바로 太宗

    이 추구하고자 했던 최고 통치자로서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武帝 역시 비록 정치적 결함으로 인한 후대의 국가 양분과

    패망의 길이 모두 그에게로 향하는 화살로 저평가되었지만, 宣和書譜에서는 이를 통해 그가 ‘知人’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점을 강조하여교훈으로 삼고자 한 것으로 파악된다. 賈充의 중상모략에 빠지어, 衛瓘

    의 충성도 져버리고, 자손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장기간의 계책을 꾀

    하지 못한 점으로 묘사되는 武帝의 실정은 바로 武帝 자신이 개인의

    행위에 집중한 나머지 그 행위를 둘러싼 시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적절한 행위규범의 원칙에 어긋났던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개인의 야

    망과 정치적 야욕으로, 일면에서 저평가되는 則天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則天은 宣和書譜에서 성품이 대장부와 같고 여성적 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인물로 묘사되지만, 최고 통치자로서의 그녀의 정치적 삶

    은 그녀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의지 및 제도적 구조에 의한

    변화,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자율적 영역에서 제한을 받고 있었던 심리

    의 모순적 갈등이 아닐까? 이러한 갈등은 그녀가 전통적인 법과 제도

    의 접근 방법에서 자신의 이념과 사상을 현실에 대입하고 변화시키려

    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그녀가 새롭게 제안한 글자 만들

    기의 기획은 단지 개인의 상상에 의해 생각해내는 것이었다. 宣和書譜에서의 그녀의 글자 기획은 전대의 구법에 의거하지 않은 자신의의견을 고집하는 점으로 묘사한다.96) 이러한 단편적인 예만 보더라도

    그녀의 정치적 노선은 제도주의의 변화를 꾀하는 단절된 역사의식, 점

    진적 변화가 아닌 특정 시점의 구성 요인에 의한 개혁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합리성이 결여된 원칙과 규범화의 노선이 아닌, 여

    성 통치자로서의 단점을 드러낸 개인의 기호를 고집하려는 의지로 판

    단된다.

    96) 宣和書譜 卷1, 歷代諸帝 : “考其出新意持臆說, 增減前人筆畫, 自我作古爲十九字.”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26앞에서 논한 帝王들의 서예심미 및 정치적 삶은 宣和書譜를 저술

    한 시기인 북송 황실의 예술관, 문화적 면모와도 관련되는데, 특히 화

    원예술을 지칭하는 황실의 심미관과 이 시기의 문인사대부가 지향하는

    문인정신의 조화로운 관계에서 살필 수 있다. 宣和書譜가 관방의 편찬서임에도 불구하고 문인정신을 중시하고, 시․서․화․인 일체를 강

    조한 문헌이라는 점, 그리고 문학예술을 통한 심미적 인간의 가능성을

    담고자 한 것은 ‘知人’에서 탐구해 볼 수 있다. 이러한 ‘知人’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맹자의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

    을 읽었으면서 그 사람에 대해 모른다면 말이 되는가? 이런 까닭으로

    그 시대를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옛 사람과 벗삼는 일이다.”97)라는 말

    에서 고찰할 수 있다. 곧 심미적 인간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

    도가 ‘知人’에 있음을 강조한다.

    Ⅳ. 맺음말

    ‘知人’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품행과 재능을 알아보다는 뜻이다.

    이러한 ‘知人’의 활용은 사람의 인성, 생명, 기예, 학식 등을 올바르고

    합당하게 논단 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실천의 중요성으로 인해 세상

    사의 흐름과 경향을 파악할 수 있음을 말한다. 사람은 세상과 동떨어

    져서 논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안목이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사람의 됨됨이

    를 알아봄으로써 그 시대의 상황과 풍습, 사회적 경향, 종교적 특징 등

    세상사와 관계된 특성과 흐름도 가늠할 수 있다. 宣和書譜에서는 12帝王의 서예품평 이외에도 역대 서예가 197인, 법첩 목록 총 1,240여

    건에 달하는 서예 작품평과 그들의 전기를 기록하고 있다. 東漢

    97) 孟子 萬章章句 ,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27(25-220)시대 張芝에서부터 북송시대 蔡卞에 이르기까지 역대 서예가

    들의 심미관을 담은 인물평과 서첩 목록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들의

    인성, 학식, 기예, 창조적 사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미적 가

    능성을 엿볼 수 있다.

    宣和書譜에 의하면, 최고 통치자로서 현실체제와 관점을 분석하여이론화․정책화․실용화 시키려는 측면은 12帝王 모두가 주목하는 점

    이다. 특히 이 점을 정책적으로 정립시키려는 의지가 확고한 太宗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예술정책의 실현에 있어서의 한 단면에

    불과하지만 그는 정책적으로 서예이론서를 집필하고 이론적․학술적으

    로도 체계적인 정립을 꾀하였다. 弘文館 설치 및 서예 이론서를 집필

    하여 정책적으로 서예문화를 정착시키려고 한 점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그의 집정 능력과 문화정책의 핵심이 ‘知人’을 통한 인재 등용과 문화

    예술을 통한 세상의 구현에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전대의 우

    수한 예술정신을 계승하여 이상적인 심미관에 도달하려는 太宗의 노력

    과 함께 측근에 虞世南, 褚遂良, 魏徵과 같은 우수한 서예가, 문학가,

    품평가가 있었기에 그와 같은 독보적인 서예심미관을 발전시킬 수 있

    었다. 또 새로운 제도를 정립하기 위해 당시의 다문화사회에서의 여러

    가지 개혁도 일삼았다. 이는 구제도의 단점을 파악하고 신제도의 개념

    과 속성을 어떻게 인간의 형태에 맞추어 규제하고 체계화하여 제도화

    시키는 방법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宣和書譜에서는 제왕․시인․사대부․문신․무신․승려․도사는물론이거니와 기생․女仙 등 각 시대의 대표적인 서예가들이 등장한

    다. 이는 宣和書譜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예술론의 핵심이 ‘知人’을통해 세상을 알고, 인재 등용과 문화예술정책을 펼치기 위해 사람의

    인품, 학식, 기예를 활용한다는 점을 나타낸 단적인 예이다. 예컨대 宣和書譜에서는 顔眞卿의 충성은 비할 바가 없어 천하의 광대함을 안다98)는 그의 인격정신을 제고시키고 있는데, 인물의 됨됨이를 평할 수

    98) 宣和書譜 卷3: “忠貫白日, 識高天下.”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28있는 지적 능력과 실천을 강조한다. 이는 宣和書譜에 기록된 각 시대의 대표적인 서예가들의 인물 유형에서도 살필 수 있다. 예컨대 諸

    葛亮, 李白, 白居易, 등은 서예가로서 정평이 나기 보다는 정치가, 문학

    가, 시인으로 유명한 인물들이지만, 宣和書譜에서는 각 시대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분류하였다. 이는 이들의 학식과 인품, 문화적 감수성

    및 기예 등을 중시하여 지적 능력을 논할 수 있는 인간의 창조적인 사

    유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미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李正美) 29(Abstract)

    Emperors’ Calligraphic Aesthetics

    Reflected in Xuanhe-Shupu

    Lee, Jung Mi

    This study is to research the collection ‘Xuanhe-Shupu’ that shows

    the twelve emperors’ calligraphic perspectives, calligraphic aesthetics

    reflected in their handwritings and calligraphic styles and cultural

    trends in respective eras. The collection contains comments on 197

    historic calligraphers’ handwritings a total of 1,240 copybooks printed

    from the works of 197 historic calligraphers and their biographies, in

    addition to the twelve emperors’. It deals with historic calligraphers’

    aesthetics, from Zhang Zhi (the Eastern Han dynasty (25-220)) to Cai

    Bian (the Northern Song dynasty), and contains the list of their

    scrapbooks, which enable readers to get a sense of their characters,

    eruditions, accomplishments, originality and aesthetical potentials.

    The collection ‘Xuanhe-Shupu’ shows that all the twelve emperors

    tried to analyze realistic systems and perspectives and to put them to

    theories, policies and practical uses. Emperor Taizong of Tang, who

    was determined to put them to policies, is the representative emperor.

    He politically systematized calligraphic theories, which well provides a

    look at the face of his will to artistic policy. Add to that, he founded

    a royal archive (Hongwenguan) as part of promoting calligraphic

    culture. It implies that his reign and cultural policy aimed to engage

    intellectuals and popularize culture and art. In particular, he went after

    ideal aesthetics, following the artistic spirits of previous generations,

    and as a result could have unique aesthetics, which could not be

  • 中國史硏究 第82輯 (2013. 2)30possible without outstanding calligraphers, writers and critics such as

    Yu Shinan, Zhu Suiliang and Wei Zheng. Besides, he carried various

    reforms into effect in the multicultural society of those days. He was

    instructed in how to do away with old-fashioned customs and to set

    up new systems without big backlashes.

    The collection ‘Xuanhe-Shupu’ contains diverse calligraphic works of

    different epochs made by emperors, poets, nobles, civil ministers,

    military officials, monks, ascetics and even barmaids and nuns. It

    exemplifies the artistic theory of Xuanhe-Shupu, i.e., to wise the ways

    of the world presented by intellectuals, and to engage men of ability,

    character, erudition and accomplishment as part of cultural and artistic

    policies. For instance, in Xuanhe-Shupu it is written that Yan

    Zhenching’s loyalty is beyond compare and wordly-wise; to be specific,

    a person’s measure is taken with his intellectual capacity and loyalty.

    The same applies to calligraphers introduced in Xuanhe-Shupu. To

    give an example, Zhuge Liang, Li Bai and Bai Juyi had renown for a

    politician, a writer and a poet respectively, but in the collection they

    are classified as calligraphers of different epochs. The reason why it

    makes much of their erudition, character, cultural sensibility and

    accomplishment is to aggressively body out human’s creative thinking

    and aesthetical potential associated with intellectual capacity and

    pursuit of beauty.

    주제어: 선화서보, 진무제, 당태종, 현종, 지인, 서예심미관, 서예기호關鍵詞: 宣和書譜, 晉武帝, 唐太宗, 玄宗, 知人, 書藝審美觀, 書藝嗜好Keywords: Xuanhe-Shupu, Emperor Wu of Jin, Emperor Xuanzong of Tang,

    Intellectuals, Calligraphic Aesthetics, and Tastes in Calligraphy

    (원고접수: 2012년 11월 10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12월 15일, 수정원고

    접수: 2013년 2월 20일, 게재 확정: 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