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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과 언론 : 독일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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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과 언론: 독일의 경험

  • 언론재단 연구서 2011-08

    통일과 언론 2011-1

    통일과 언론: 독일의 경험

    김영욱·심영섭

  • 언론재단 연구서 2011-08

    통일과 언론 2011-1

    통일과 언론: 독일의 경험

    책임연구: 김영욱(한국언론진흥재단 수석연구위원/연구센터장)

    공동연구: 심영섭(건국대학교 강사, 언론학 박사)

    보조연구: 강신규(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하지연(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발행인 이성준

    편집인 선상신

    발행일 2011년 11월 30일 초판 제1쇄 발행

    한국언론진흥재단

    100-750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33 프레스센터 12층

    전화 (02)2001~7744 팩스 (02)2001~7740

    www.kpf.or.kr

    편집·제작 대행 커뮤니케이션북스(주)

    121-869 서울특별시 마포구 연남동 571-17 청원빌딩 3층

    전화 (02)7474-001 팩스(02)736-5047

    www.commbooks.com

    보고서의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공식 견해가 아닌 연구자의 연구 결과임을 밝힙니다.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1

    ISBN 978-89-5711-321-9

    책값은 표지에 있습니다.

  • 차례

    01 서론

    1. 문제 제기: 통일과 언론 1

    2. 왜 독일의 경험인가 5

    3. 책의 구성과 내용 10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1.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유럽안보협력회의 16

    2. 동독의 내부 붕괴와 장벽의 개방 20

    3. 동서독의 통일 24

    4. 전승4국의 입장과 독일의 대응 27

    5. 독일 통일의 시사점 32

    03 통일 전 서독의 언론

    1. 통일 전 서독의 방송 37

    1) 서독 방송 구조와 특징 37

    2) 통일 전 서독 방송의 동독 및 동서독 문제 보도 44

    2. 통일 전 서독의 신문 50

    1) 서독 신문의 구조와 특징 50

    2) 통일 전 서독 신문의 동독 및 동서독 문제 보도 54

  • 04 통일 전 동독의 언론

    1. 동독의 언론 체제 61

    2. 통일 전 동독의 방송 65

    3. 통일 전 동독의 신문 70

    05 동서독 언론의 특수 상황

    1. 경계를 넘은 방송 전파 76

    1) 동독 주민의 서독 텔레비전 시청 정도 76

    2) 서독 텔레비전 시청을 막기 위한 동독 정권의 대응 81

    3) 서독 텔레비전에 대한 동독 주민의 신뢰 85

    4) 서독 텔레비전의 영향을 줄이기 위한 동독의 대응 86

    2. 동베를린 상주 서독 특파원의 활동 88

    1) 기본조약 체결까지의 동독 취재 89

    2) 서독 특파원의 동베를린 상주와 동독 정부의 통제 92

    3) 동베를린 주재 서독 특파원의 활동에 대한 평가 98

    4) 동베를린 주재 서독 특파원의 영향 100

    06 전환기의 동독 언론과 언론정책

    1. 구 공산권의 개혁과 동독 민주화 103

    2. 전환기 동독의 언론 정책 107

    07 통일 후 동독 신문의 재편

    1. 전환기 동독 신문시장의 변화 114

    2. 통일 이후 동독 지역의 신문 122

    3. 사례: 작센-안할트주의 일간신문 135

  • 08 통일 후 동독 방송의 재편

    1. 동독 DFF의 전환 140

    2. 통일 후 동독 지역공영방송 144

    1) RBB(베를린-브란데부르크 방송) 144

    2) MDR(중부독일방송) 147

    3. ‘도이치란트라디오’와 ZDF 150

    1) 전국 라디오 방송 ‘도이치란트라디오’ 150

    2) ZDF(제2 공영채널) 152

    4. 통일 후 동독의 민영방송 154

    1) 서독 민영방송의 동독진출 154

    2) 동독 지역의 상업적 지역 민영방송 157

    09 동독 출신 언론인의 재취업과 만족도

    1. 동독 출신 언론인의 재취업 160

    2. 동독 출신 언론인의 임금, 직업만족도 162

    3. 동독 언론의 재편에 대한 평가 166

    10 결론

    1. 독일 통일과 언론의 역할 169

    2. 독일 통일 후 동독 언론: 서독 미디어 체제의 이전 175

    3. 한국 통일과 언론에 주는 함의 179

    4. 통일 이후의 준비를 위한 함의와 제안 183

    참고문헌 187

  • 표 차례

    서독 텔레비전 뉴스 보도에서의 보도 대상 국가에 따른 비중, 1977년과 1983년

    비교: ‘호이테’(ZDF) 와 ‘타게스샤우’(ARD) 47

    서독 일간신문 현황 1981∼1989(4월) 52

    DFF의 방송시간 변화 69

    동독의 신문, 공고문, 잡지(1988년 기준) 72

    1989년 이전의 동독 일간 신문(동독공산당 및 산하 조직 기관지) 73

    1989년 이전의 동독 일간 신문(블록정당 기관지 및 소수민족 신문) 74

    독일 통일 직전 동독 일간 신문의 소유주 변화(동독공산당 및 산하 조직 소유

    신문) 118

    1990년 통일 직전의 동독 일간 신문의 소유주 변화(블록정당 등 소유) 121

    독일 통일 이후 동독 지역 신문시장(신문 제호 수) 변화 123

    동독 지역의 신문 산업 128

    동독 지역의 일간 신문(2009년) 131

    작센-안할트 지역의 일간신문 136

    동서독 지역 주요 채널 시청률 변화(시청점유율 기준) 155

    동서독 언론인의 평균 실질급여 163

    동독 지역 언론인의 생활수준 자기 평가 164

    독일 언론인의 직업만족도 - 동독 지역 및 서독 지역 비교 164

    동독 언론인의 근로조건에 대한 만족도 165

  • 그림 차례

    동독의 선전선동부서와 대중미디어 64

    동독 지역의 서독 방송 시청 가능지역(1980년) 79

    동독신문의 민영화 과정 116

    동독 지역의 주요 신문 130

    독일의 지역공영방송 146

  • 01 서론 1

    01서론

    1. 문제 제기: 통일과 언론

    분단에는 군비 등 실질적 비용이 든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혹은 그보

    다 더 막대한 기회비용을 수반한다. 그래서 분단국가에서 통일은 합리적

    선택이다. 그러나 통일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통일은 가치적·정서

    적 선택이기도 하다. 독일이 그랬다. “하나에 속한 것이 이제 함께 커간

    다.”1) 1989년 11월 9일 예고 없이 베를린 장벽이 열리고 난 다음날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베를린 시청에서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2) 이

    말은 독일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동독이

    붕괴할 당시 서독에서 빠른 통일에 대한 주저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3)

    1) “Jetzt wächst zusammen, was zusammengehört.”2) Gehler 2011, 324. 그러나 실제 브란트가 그 자리에서 이 말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3)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DDR)을 ‘동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적합한 것은 아니다.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BRD)을 서독으로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통일 후 독일의 명칭은 독일연방공화국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편의를 위해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 방식에 따라 전자는 ‘동독’, 후자는 ‘서독’이라고 표현한다. 단지 공식 명칭이 필요한 맥락에서는 원래 명칭을 사용한다.

  • 2

    그러나 하나의 민족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브란트의 입장은 역사적으

    로 현실이 되었다. 한반도의 통일은 필연적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필수

    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형태로든 남북이

    한 국가로 통합되는 것을 상정하고 그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이성적이다.

    독일 분단에서 통일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미하엘 겔러(Michael

    Gehler)는 독일의 분단(Teilung)과 통일(Einigung)을 일회적인 사건이 아

    니라 역사적 과정이라고 말했다(Gehler 2011, 15). 분단이 독일의 동과

    서에서 각각 국가가 설립된 1949년에서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1961년까

    지의 과정으로 볼 수 있듯이 통일 역시 공식적으로 두 국가가 합쳐진

    1990년의 10월 3일의 사건이 아니라 분단 이후 수십 년 동안 진행된 동서

    독일의 변화라는 것이다. 1990년의 정치적 통일로 독일 통일이 완성된

    것도 아니다. 20년이 지난 시점에도 동서독의 차이는 아직 완전해 해소

    되지 않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통일 후 20년

    의 동서독 차이를 분석한 연구에서 글랍(Manuell Glaab) 등은 동서독의

    차이가 통일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앞으로도 오랜

    기간 동안 해소되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Glaab 등, 2010, 39). 독일에

    서는 동쪽(Ost)과 향수(Nostalgia)의 합성어인 오스탈기(Ostalgie)가 아직

    도 옛 동독 시절을 그리워하는 동독 주민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표현으로

    회자되고 있다(Rehberg 2006, 225).

    분단과 통일이 과정이라고 보는 시각은 한반도에도 적용된다. 지금

    우리는 분단/통일의 과정 속에 들어있다. 현재 남북한의 관계는 보는 시

    각에 따라서는 분단이 더욱 고착되는 과정이다. 혹은 그 반대로 통일이

    라는 지각 변동을 위한 거대한 에너지가 축적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

    다. 지금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미래 어떤 시점에 국가적·정치적 단일화

  • 01 서론 3

    가 이루어진다고 통일 과정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

    의 가능성이나 방법에 대한 논의와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은 그를 위한

    준비이다.

    독일 통일의 경험이 이를 말해준다. “독일의 통일은 임시변통적이

    었다. 아무도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한 계획도 없었다. (동독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

    라 시간도 없었다.”(Lehmbruch 2000, 186). 통일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서 독일 통일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서도 좀 더 잘 준비를

    했더라면 이런 저런 실수나 착오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피

    력된다.

    물론 모든 준비가 그렇듯 준비는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언제 그리고

    어떤 형태로 통일의 전기가 마련되는 역사적 변화가 올 것인가를 예측하

    기도 힘들다. 북한과 북한 주민에 대한 우리의 지식도 매우 제한적이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잘못 알 가능성이 낮지 않다. 남한 주

    민이 북한과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유동적이며 세대에 따라 또는

    정치적 지향에 따라 서로 다르다. 그러나 충분하게 준비하기 힘들다는

    상황이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통일과 언론’에 관한 것이다. 이 주제는

    서로 다른 그러나 함께 연결되는 두 가지를 함의한다. 하나는 통일까지 가

    는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통일을 필연은 아니지만 당위라

    고 보면, 그 과정에서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

    을 수 없다. 다른 하나는 통일 후 언론에 관한 것이다. 남과 북이 하나의 정

    치적 체제가 되는 계기나 변화가 생겼을 경우, 서로 다른 미디어 시스템을

    어떤 절차와 형태로 통합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 4

    한국언론진흥재단은 2011년 이러한 의미의 ‘통일과 언론’이라는 주

    제에 접근하기 위해 동명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모두 3개의 연구과제로 구성되었다. 이 책 ‘통일과 언론: 독일의 경험’은

    그 중 하나로 진행된 연구의 결과이다. ‘통일과 언론 2: 북한의 사회적 커

    뮤니케이션 구조와 미디어’(이호규·곽정래, 2011)는 북한의 사회적 커뮤

    니케이션 구조를 공식적인 부분과 비공식적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본

    연구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한편으로는 공식 커뮤니케이션

    채널인 신문, 방송, 뉴스통신이 ‘수령의 사상과 통치 이념을 실현하는 강

    력한 사상적 무기’로 북한사회의 규범적이고 당위적인 사회주의 가치관

    을 북한 주민에게 내면화시키고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게 했다. 그러나

    북한이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장마당’을 통한 남한 방송 콘텐트의 유통,

    한국 지상파 텔레비전 시청, 남한의 대북 방송 청취 등 비공식 커뮤니케

    이션이 활성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통일과 언론3: 탈북이탈주민을

    통해 본 북한 주민의 언론과 사회에 대한 이해’(이청철·김갑식·김효식,

    2011)는 남한에 거주하는 북한이탈주민 대상의 설문을 통해 북한 주민

    의 미디어와 뉴스에 대한 이용 행태, 내용 이해 정도, 언어적 특성, 사회

    에 대한 인식을 간접적으로 알아보기 위한 연구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

    면 이들 대다수는 이미 북한에 거주할 당시 북한에서 언론 자유가 없다

    고 생각했지만 절반 이상이 북한 미디어의 뉴스를 신뢰했다고 답해 모순

    적인 태도를 보였다. 북한에 거주할 당시 남한 언론이 자유롭다고 생각

    한 비율이 절반 정도였으나 남한에 이주한 후에는 그 비율이 90%가 넘

    었다. 이들이 KBS를 신뢰하는 비율이 남한 주민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

    아 ‘공식적’ 미디어에 대한 신뢰를 나타냈다.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연구진은 세 차례의 포럼을 가졌다. 포

    럼에는 연구진을 비롯해 북한 문제 담당 전문기자, 북한학자, 북한을 이

  • 01 서론 5

    탈해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한 문제 전문가 등이 참석해 ‘통일과 언

    론’에 대한 정보와 의견을 교환했다.

    2. 왜 독일의 경험인가

    왜 독일의 경험인가? 분단 국가로서 한국과 동병상련을 함께 했던 독일

    의 통일은 우리에게 두 가지 생각을 갖게 했다. 하나는 희망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체제의 가장 첨예한 자리에서 굳건하게 서 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고착된 것으로 보였던 한반도의 분단도 언젠

    가는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1989년과 1990년 통일의 과정

    이 전개되기 몇 개월 전 만해도 독일의 통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한반도의 통일도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

    하게 했다.

    다른 하나는 자괴감이다. 독일이 통일의 ‘과업’을 성취한데 비해 한반

    도의 상황은 통일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단일

    민족으로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해 왔다. 이에 비해 독일은

    민족국가의 성립이 다른 유럽국가보다 더 늦었고, 통일국가로 존재한 기

    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 또한 독일은 전범국가로 통일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및 당시 소련이 국제법적으로 전승국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이 모

    든 것을 극복하고 독일은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 한반도의 상황은 어떤

    가?

    남북 정상이 만난 것이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 10년이 지난 2000

    년이었다. 인도적인 측면에서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이산가족의 상봉조

    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김정일의 사망 후 남북 관계는 더욱 앞을

  • 6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희망과 자괴감, 이 두 감정 모두 분단된 국

    가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독일의 사례를 눈여겨보게 만든다.

    독일과 한국은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국제정치학적 측면들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염재돈이 지적한 바와 같이 독일은 통일 국가로서의

    역사와 연륜이 상대적으로 짧았고, 통일을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승

    전 4개국의 동의가 필요했다. 또한 동독은 독자적인 국가로 존립하는 것

    을 정책 목표로 했지만, 서독은 적어도 명목적으로는 통일을 지향해 동

    서독의 정책적 지향점이 달랐다. 이와 함께 동서독 간의 상호 적대감 수

    준이나 분단 수준이 남북한에 비하면 훨씬 낮았다. 동독 주민의 역사적

    경험과 처한 상황도 북한의 그것과는 다르다. 동독은 민주주의 경험이

    있었고, 주민에 대한 통제 수준이 달랐다. 특히 우리 맥락에서 중요한 것

    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염재돈

    2010, 55 이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경험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없지 않다

    (김영욱·김택환 2000, 15 이하 참조). 사회 혹은 정치와 언론의 상관관계

    가 일정한 수준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독일

    의 언론과 한국의 언론은 다양한 측면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지만 대중

    미디어라는 속성과 저널리즘이라는 행위 양식에서는 공통적이다. 따라

    서 ‘분단국가’에서의 언론은 유사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할 개연성이 있으

    며 유사한 규범적 요구를 받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차이가 발견된다면, 그 차

    이가 생겨나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정치/사회와 언론의 상

    관관계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통찰을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독일 통일 과정과 통일 후 독일의 언론

    정책을 남과 북의 통일과 그 이후 언론 정책에 적용하기에는 주어진 전

  • 01 서론 7

    제 조건에서 큰 차이가 난다. 서독의 언론과 한국의 언론이 다르며, 북한

    의 언론 및 커뮤니케이션 상황과 동독의 그것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경험은 한국이 당면하고 있거나 당면하게 될

    문제들을 이해하는 폭과 지평을 넓힐 수 있다. 독일 사례가 구체적 해결

    책이나 행위 방법을 제시해 주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

    가 결정한 해결책이 가진 함의를 성찰하도록 자극을 주며, 언젠가 발생

    할 통일 상황에 대비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

    워 줄 수 있다(김영욱·김택환 2000).

    따지고 보면 동서독과 한반도는 공통점도 적지 않다. 독일과 남북의

    분단 상황은 역사, 언어, 문화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한 ‘민족’이 인

    위적으로 분단되어 두 개의 상호 대립하는 정치 체제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동독은 일당 독재의 계획경제 체제에 있었으며, 그 체계 하

    에서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요한 가치로 추구되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과 인권이 상당한 수준으로 제약을 받았다. 북한 체제는 그 정도

    와 수준이 훨씬 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남한은 아직 성숙도에서는 아쉬움이 적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경제적인 수준에서도 서독은 통

    일 전에 이미 많은 재원을 동독에 이전시키고 있었고 통일 후에는 천문

    학적 수준의 재정을 동독에 투입했고 투입하고 있다. 남북한의 경제적

    차이 역시 작지 않다. 통일 과정과 통일 후 남쪽에서 북쪽으로 상당한 경

    제적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통일이 독일 통일에서와

    같이 국제법적으로 전승4국의 동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과 한

    반도 주변국의 지지나 동의 혹은 적어도 묵인이 없으면 상당한 장애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독일의 통일 경험을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일이 평화적

  • 8

    통일을 이루었으며 통일 후 동서독이 모두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원칙을

    추구하는 체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정치적 통일이 구체적으

    로 동독이 서독에 편입하는 결정을 내림으로 완결되었다. 이것이 가능했

    던 것은 법적으로 서독 헌법인 기본법4) 제23조의 규정 때문이다. 여기서

    는 기본법의 효력 영역을 서독의 주들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제23조

    는 둘째 문장에서 “독일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그들의 편입 이후에 이

    기본법이 효력을 발생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기본법 제146조가 통일

    에 대비해 “이 기본법은 독일 국민들이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의결된 새

    로운 헌법이 발효되는 날 그 효력을 잃는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

    나 1990년 3월 18일의 선거를 통해 결성된 동독의 인민의회가 8월 23일

    압도적인 다수의 찬성으로 기본법 제23조에 따른 ‘기본법 효력 지역 편

    입’을 의결했다. 이것은 동독 주민들이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제146조

    의 방식보다는 제23조의 단순한 방식으로 빠른 통합을 원했기 때문이다

    (Gehler 2011, 359 이하). 한반도의 통일 과정이 독일과 같을 수는 없지만,

    남북 주민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현재 남한에서 지향하고 있는 법치

    주의와 민주주의의 체제로 통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

    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런 방향의 통일이 독일에서 이루어졌고,

    그런 점에서도 독일의 경험을 살펴보게 된다.

    1990년 동서독의 정치적 통합 이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그 동안의

    4) 1949년 5월 23일 서독에서 제정된 독일 헌법은 그 헌법이 ‘임시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헌법을 의미하는 페어파숭(Verfassung)이라는 명칭 대신 기본법(Grundgesetz)이라고 명명되었다. 기본법 전문(前文)에는 이 헌법이 임시적이라는 사실이 표현되었다. 헌법 전문은 “전체 독일 민족은 자유로운 자기 결정으로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완성할 것을 요청받는다”라는 말로 끝났다. 그러나 통일 후에도 여전히 기본법을 사용하고 있다. ‘기본법’이 전후 서독에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인식이 기본법을 개정하지 않은 한 이

    유다.

  • 01 서론 9

    과정을 정리하고 평가하는 다양한 시도가 독일에서 이루어졌다. 독일 분

    단 이후 통일에 이르는 과정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정리하는 작업들도 적

    지 않다(Gehler 2011; BPB 2009 등). 동독의 시각에서 통일을 비판적으

    로 바라보는 작업들도 있다. “동독의 해체. 거짓말, 편견 그리고 사회주

    의적 부채”(Baale 2008), “동독에 대한 절도행각. 신탁청이 어떻게 독일

    민주공화국을 약탈했는가”(Huhn 2010), “독일민주공화국의 가치

    는?”(Wenzel 2009) 등이 그 예이다. 독일 통일과 그 이후의 과정을 학교

    에서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져 왔다

    (Kleßmann 2005). 통독 후에도 남아 있는 동서독의 격차를 분석한 작업

    들도 있다(Lessenich/Nullmeier 2006; Glaab 2010).

    한국에서도 독일 통일 20년을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통일을

    위한 시사점을 얻으려는 노력이 적지 않았다(김한규 2008; 손기웅 2009a;

    손기웅 2009b; 염돈재 2010; 이기식 2011 등). 학술대회도 개최되었다(통

    일연구원 2010).

    독일 통일과 언론의 문제에 대한 한국의 관심도 적지 않았다. 한국언

    론연구원(현 한국언론진흥재단)이 1995년에 발간한 ‘전후 분단국가의

    언론정책’(김정기(편) 1995)에 수록된 논문들과 역시 한국언론연구원이

    1990년에 발행한 ‘독일통일과 언론’(한국언론연구원(편) 1990)에 실린

    글에서 독일 통일 과정과 언론의 역할이 상당한 수준의 이론적, 실증적

    자료를 통해 논의된 바 있다. 또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독일

    통일과 언론의 관계를 분석한 작업도 있었다(김영욱·김택환 2000).

    그러나 독일 통일 20년을 계기로 그 동안 새롭게 밝혀지고 분석된 자

    료를 바탕으로 독일 통일 과정과 그 이후 언론정책과 언론의 변화를 살펴

    보는 노력은 많지 않았다. 통일부 2010년 프로젝트로 베를린 자유대 한국

    학과 통일연구팀이 작성한 ‘독일 통일 20년 계기 독일의 통일·통합 정책

  • 10

    연구’ 보고서 제1권 분야별 연구에서 다룬 ‘언론통합’(페니히, 2010)이 거

    의 유일하다. 이 연구는 그 틈을 메우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3. 책의 구성과 내용

    이 책은 ‘통일과 언론: 독일의 경험과 한국 통일 준비를 위한 함의’를 위한

    연구 결과를 담았다. 이 책은 서론을 포함해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되

    어 있다.

    제2장에서 이 책은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을 소개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언론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통일 이후 동독 미디어가 어

    떻게 재편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독일 통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

    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 독일의 분단에서 통일까지의

    전 과정을 소개하기는 힘들다. 단지 이 책의 맥락에서 필요하다고 판단

    한 부분적인 측면만을 서술했다. 먼저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유럽

    안보협력회의’를 독일 통일의 역사적 배경으로 제시했다. 이를 통한 긴

    장완화가 동서독의 언론 교류와 서독 언론인들의 동베를린 상주의 물꼬

    를 튼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동독의 내부 붕괴와 장벽의 개

    방’을 다루었다. 동독 시민들의 정권 반대 데모와 주민들의 대량 탈출, 호

    네커의 몰락과 베를린 장벽의 개방이 주요 내용이다. 다음으로는 동독의

    내부 붕괴가 ‘동서독의 통일’로 이어지는 과정을 소개했다. 통일에 대한

    동독 내부의 반응과 동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러진 자유 총선,

    그리고 통일 직후 치러진 독일 연방의회 선거 결과 등이 제시되었다. 통

    일 과정에서 중요한 걸림돌의 하나가 전승4국이 가지고 있던 독일에 대

    한 국제법적 권리였다. 전범국가로서 독일은 통일을 위해 국경문제 등이

  • 01 서론 11

    얽혀있는 이웃 국가들의 동의도 필요했다. 이어지는 ‘전승4국의 입장과

    독일의 대응’은 독일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가를 서술했다. 제2장의

    마지막은 ‘독일 통일 과정이 주는 시사점’을 통일과 언론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독일 통일이 동독의 내부 붕괴로

    시작되었으며, 그 이후 제시된 다양한 방안 중에 동독 주민들이 빠른 통

    일을 원했다는 사실이다.

    제3장은 통일 전 서독의 언론을 다루었다. 먼저 ‘서독의 방송’ 편에서

    는 역사적 발전 과정, 구조와 특징, 통일 전 동서독 문제 보도의 특징 등

    에 대해 살펴보았다. 연방제적 서독에서 방송은 주의 소관 사항이었으며

    헌법과 이를 해석한 연방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공영방송의 임무와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동독을 포함한

    전체 독일에 대한 정보 제공은 서독 방송에게 법적으로 부여된 임무였

    다. 서독의 방송은 동서독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프로그램을 편성해

    서 통일 전까지 방송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동독문제가 가진 뉴스가치가

    다른 이웃나라에 비해 특별하게 높은 것은 아니었다. 서독 방송은 동독

    을 하나의 단일한 일체로 보고 보도한 것이 아니라 정권과 주민, 반대 세

    력을 구분해서 보도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서독의 신문’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 지역에서 신문시장이 어떻게 구조화되었는가를 소개

    하고 현황 및 거대 미디어 그룹들에 대해 서술했다. 이와 함께 서독 신문

    이 동서독 문제를 보도한 경향을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소개했다.

    제4장은 통일 전 동독의 언론에 관한 것이다. 이 장에서는 먼저 ‘동독

    의 언론 체제’를 소개했다. 헌법에 신문과 방송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명

    시되어 있었지만 동독의 언론은 공산당의 통치를 위한 선전, 선동, 교육

    의 수단이었다. 이에 따라 동독의 미디어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강하고 직접적인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다음으로는 ‘통일 이전 동독의

  • 12

    방송’을 다루었다. 여기서는 동독 방송의 출발과 통일 전까지의 방송 현

    황을 제시했다. ‘통일 이전 동독의 신문’에서는 동독 신문의 구조와 통일

    전까지 발간된 신문의 현황을 소개했다.

    제5장에서는 동서독 언론의 특수 상황인 ‘경계를 넘은 방송 전파’와

    ‘동베를린 상주 서독 특파원의 활동’을 소개했다. 동독 주민들이 서독의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었다는 것은 체제 경쟁을 하고 있던 동서독의

    특수 상황이다. ‘경계를 넘은 방송 전파’에서는 동독 주민들이 얼마나 광

    범위하고 적극적으로 서독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는가, 이를 막기 위

    한 동독 정권의 대응은 어떠했으며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다루

    었다. 또한 서독 텔레비전에 대한 동독 주민의 신뢰 정도와 서독 방송의

    영향을 막기 위한 동독 정권의 대응도 정리해 소개했다. ‘동베를린 상주

    서독 특파원의 활동’ 편에서는 먼저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전까지의

    동독 취재 상황이 소개되었다. 이어서 서독 특파원의 동베를린 상주 과

    정과 이에 대한 동독 정부의 통제를 다루었다. 동독 정권은 서독 언론인

    이 상주하기 이전에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었고 이 규정에 따

    라 수차례의 추방, 지사 폐쇄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어서 서독 특파원이

    동베를린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과 태도를 갖고 활동했으며, 이들을

    동독 주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기술했다. 이 장에서는 마지막으

    로 서독 특파원들의 활동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종합적으로 논

    의했다.

    제6장은 동독의 내부 붕괴의 시작에서 통일까지 이르는 이른바 ‘전

    환기(Wende)의 동독 언론 상황과 언론 정책을 다루었다. 이 장에서는

    ‘구 공산권의 개혁과 동독 민주화’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이 과정에

    서 제기된 동독 내의 언론 개혁 요구를 소개했다. 에리히 호네커가 권좌

    에서 물러난 이후 통일까지 동독은 에곤 크란츠, 한스 모드로, 로타르 드

  • 01 서론 13

    메지에르 순으로 정부의 책임자가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요구된 중요한

    이슈가 표현과 언론의 자유였다. 이에 따라 각 집권자별로 언론 개혁을

    위한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전환기 동독의 언론 정책’에서는 그 내용이

    소개되었다.

    제7장은 동독 신문의 재편에 관한 것이다. 독일 통일 직전까지 동독

    에서는 새로운 신문이 창간되고 기존 신문이 매각되는 등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공산당 소유 신문사들은 국가로 소유권이 이전되고 직접 혹은

    독일신탁청을 통해 서독 미디어 기업에 매각되었다. ‘전환기 동독 신문시

    장의 변화’에는 이 과정이 정리되었다. 이어서 ‘통일 이후 동독 지역의 신

    문’에서는 통일 이후 현재 시점(2010)까지의 동독 지역 신문 시장의 변화

    와 현황을 소개했다. 이와 함께 통일 과정과 통일 후 동독 신문 시장의 변

    화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작센-안할트주의 일간신문’을 사

    례로 들어 그 곳의 변화 과정과 현황을 소개했다.

    제8장은 동독 방송의 재편을 다루었다. 먼저 ‘동독 DFF의 전환’에서

    동독의 국영 텔레비전인 DFF가 해체되는 과정이 소개되었다. DFF는

    전환기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동독공산당 선전 도구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과도기 동독 정부는 DFF를 공영방송으로 전환해 전체

    동독을 대표하는 방송사로 만들려는 계획을 수립했으나 실현하지 못했

    다. DFF 대신 동독 지역에는 서독의 체제에 따라 ARD의 회원사인 지역

    공영방송이 설립되었다. ‘통일 후 동독 지역공영방송’에는 이 과정이 서

    술되었다. 지역공영방송 설립에는 구 동동 지역에 새로 생겨난 5개의 주

    들의 이해관계와 역사적 배경, 문화적 전통에 따라 여러 가지 모델들이

    논의되었다. 최종적으로는 MDR과 RBB가 동독 지역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도이치란트라디오와 ZDF’ 편에서는 동독 주민 대상의 서독 라

    디오 방송 DLF와 미군정이 세웠던 서베를린의 RIAS 방송 등에 대한 조

  • 14

    치와 전국 공영방송 ZDF의 동독 진출에 관한 내용을 소개했다. 이어지

    는 ‘통일 이후 동독의 민영방송’에서는 서독의 상업 민영방송의 동독 진

    출과 동독 내에서 새로 설립된 많은 수의 소규모 민영방송의 상황이 서

    술되었다.

    제9장은 통일 후 동독 언론인들에 관한 것이다. 이 장에는 이들의 재

    취업 현황, 임금 및 직업만족도가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동독 언론의 재

    편 과정을 평가하는 논의가 이 장에 포함되었다.

    제10장은 결론이다. 결론에서는 먼저 동서독의 통일에서 언론이 한

    역할과 그것이 주는 함의를 논의했다. 다음으로는 독일 통일 과정과 통

    일 후 동독 지역에 서독 미디어 체제 이전되어 나타난 결과를 평가했다.

    독일이 경험이 한반도의 통일에 주는 의미도 논의했다. 마지막으로는 통

    일 이후 준비를 위한 함의와 제안을 제시했다. 결론에서는 ‘통일과 언론’

    프로젝트에서 함께 진행된 다른 두 연구의 결과(이호규·곽정래 2011; 이

    정철·김갑식·김효숙 2011) 중 우리 맥락과 관련이 있는 내용을 함께 소개

    했다.

  •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15

    02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독일 통일과 언론의 경험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독일 통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 역사적인 사건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따져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수한 원인과 우연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작용하

    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한 모든 서술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독일 통일을 광범위하고 자세하게 다루는 것이 이 연구의

    맥락에서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도 크지 않다. 여기서는

    우리 맥락에 필요한 독일 통일에 대한 이해를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자 한다.

    독일 통일은 크게 보면 동서독과 동서독을 둘러싼 세계적인 변화의

    한 결과이다. 독일 통일과 관련해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것이 고르바초

    프(Mikhail Gorbachev)가 추진한 소련의 개혁이 가져온 변화다. 이 변화

    는 크게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조건에서 계획경제와 폐쇄된 권력체제

    를 유지하던 동구권이 서구 자본주의 체제와의 ‘생활수준’ 경쟁에서 패

    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이 1989년과 1999년 독

    일에서 전개된 구체적 역사적 사실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소련의 개혁

    이 동구권을 변화시켰고, 그 변화가 동독에 이르러 내부 붕괴로 이어지

    고, 동독이 서독에 편입되는 통일 과정에 대해서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 16

    대한 설명 혹은 이해가 필요하다.

    1.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유럽안보협력회의

    그 이해의 출발 시점으로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총리가 된 1969년

    을 삼을 수 있다. 이 해에 서독에서는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의 연

    립 내각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브란트는 첫 정부 정책 발표에서 “더 많

    은 민주주의 감행”(mehr Demokratie wagen)을 모토로 개혁을 천명했다

    (아래 내용은 주로 Gehler 2011, 209 이하 참조). 이와 함께 그는 이른바

    소련과 동구권,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적극적인 동방정책

    (Ostpolitik)을 추진했다. 겔러에 따르면 사민당-자민당의 동방정책에

    대한 비판가들이 잘 모르거나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서독 정부

    가 동독 및 동구와의 긴장완화 정책을 미국, 특히 국무상 헬리 키신저

    (Henry Kissinger)의 동의 하에 추진했다는 점이다(Gehler 2011, 210 이

    하). 미국도 당시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의 개방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긴장완화 정책을 독일이 독자적으로 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은 모든 단계에서 서독으로부터 정보를 들었고 협의를 했다는 것이다.

    1970년 3월 19일 동독 지역의 에어푸르트(Erfurt)에서 1차 양독 정

    상회담이, 같은 해 5월 21일에는 서독 지역의 카셀(Kassel)에서 2차 양

    독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의 성과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1차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브란트가 머문 에어푸르트의 호텔 앞에 동

    독 주민들이 몰려와 “빌리! 빌리! 창문으로”를 외치며 그를 환영한 사건

    이 있었다. 이 사건은 1989년과 1990년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방식을

    미리 예고했다고 볼 수 있다. 브란트는 회고록에서 “마음이 찡했다. 그

  •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17

    러나 그들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서 자제하라는

    손짓을 했고, 그들은 그것을 이해했다. (…) 마음이 무거웠다. 참모들 중

    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

    이 깨어나는 것이 두려웠다”고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Gehler 2011,

    213에서 재인용).

    서독 정부는 동서독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빠른 속도로 주변국과의

    협상을 진행했다. 1970년 소련과 조약을 맺고 유럽 국가들의 평화적 관

    계를 추진하기로 약속했다. 이 조약에서 서독은 동서독의 경계와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에게 내어 주었던 독일의 영토와 동독의 국경을 형성

    하는 오더-나이스 라인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조약에서도 서독이 “유럽

    의 평화적 상태”와 그러한 상태에서 “독일 국민이 자유로운 자결권에 의

    해 통일을 다시 이루는 것”을 목표로 추진한다는 것을 조약에 포함된 추

    가적 서한을 통해 분명히 했다. 같은 해에 폴란드와 조약을 체결했다. 브

    란트가 바르샤바의 한 유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는 유명한 장면이

    만들어진 것이 이 조약 체결을 위한 방문 때이다. 1973년에는 체코슬로

    바키아와도 조약을 체결했다. 1971년 9월에는 4개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대사들이 서베를린의 위상과 동독 지역을 관통해 서독과

    서베를린을 잇는 도로와 철도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은 전승4국

    이 냉전 이후 처음으로 맺은 협정이었다.

    1971년 12월에는 동서독 간에 서독과 서베를린을 잇는 교통에 관한

    협정이, 1972년 5월에는 서독과 동독 간의 교통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었

    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바탕으로 1972년 12월 21에 동서독의 관계에

    대한 ‘기본조약’(Grundvertrag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 간의

    관계에 대한 기초를 위한 조약”)이 체결되어 1973년 6월 21일 발효되었

    다. 이 조약에서 동서독은 상호 무력과 위협의 사용을 포기하고, 현재의

  • 18

    경계선을 침해하지 않으며, 각각의 독립성과 독자성을 존중할 것을 약속

    했다. 또한 공동으로 유럽의 평화를 추구하며 국제적인 군축에 기여한다

    고 선언했다. 이 조약에서 동서독은 각각 상시 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편지 형식으로 교환된 기본조약의 추가 문서에는 언론인의 활동, 여행 기

    회 확대, 이산가족의 재결합 등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이 조약에 의해

    1973년 9월 18일에는 동서독이 각각 유엔에 가입을 했다.

    브란트 정부의 적극적 동방 정책은 서독 내부에서는 기민련(CDU)

    과 기사련(CSU) 등 보수 야당의 강한 반대를 뚫고 관철시킨 것이다. 여

    당, 특히 자민당 내에서 이탈자가 생겨났다. 반대의 움직임은 1972년 빌

    리 브란트에 대한 ‘건설적 불신임안’ 상정으로 나타났다. ‘건설적 불신임’

    제도는 정치적 안정을 위한 장치의 하나로 탄핵과 같이 현직에 있는 인

    사를 단순 불신임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인사를 선출함으로 현직 인

    사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하는 방식이다. 1972년 4월 독일 연방의회에서

    는 새로운 총리로 CDU/CSU의 원내대표인 라이너 바르젤(Rainer

    Barzel)을 선출하는 투표, 즉 현직인 브란트에 대한 불신임 투표가 있었

    다. 투표 결과는 바르젤이 247표를 얻어, 필요한 249표에서 2표가 모자랐

    다. 브란트 불신임안이 거부된 것이다.

    적극적 동방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역사적 과정의 하나가 유

    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이

    다. 이미 소련은 1960년대 중반부터 유럽의 안보를 위한 회의가 필요하

    다고 주장했으나 나토(NATO)는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서독

    의 동방정책이 결실을 맺고 미국과 소련이 군축조약(SALT-I)을 체결하

    면서 유럽의 안전을 위한 협의의 전제 조건이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동

    서 두 블록이 만나 유럽의 안전과 협력을 위해 논의한 회의가 ‘유럽안보

    협력회의’다. 이 회의는 1972년 말에 사전 접촉을 위한 회의로 시작해서

  •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19

    1975년 8월 1일 ‘헬싱키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조약으로 그 결실

    을 맺었다. 여기에는 유럽의 33개국과 미국 및 캐나다가 참여했다.

    이 조약은 무력 포기, 국경 불가침, 갈등의 평화적 조정, 상호불간섭

    등 정치적인 요소와 함께 인권 존중과 민족의 평등 및 자결권과 같은 기

    본 가치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참여국들은 경제적 및 기술적

    협력과 국경을 넘는 인적 교류에도 합의를 했다. 고르바초프에 의한 소

    련의 개혁으로 시작된 동구권 국가들의 민주화와 동서독의 통일로 이어

    진 변화의 단초가 이 조약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조약에 대해

    겔러는 ‘동구 블록 국가들이 안보와 경제적 협력이라는 이익을 얻기 위

    해 기본권과 인권에 대한 규정을 받아들였고 그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

    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그들의 커다란 실수였다’고 평가했다

    (Gehler 2011, 226). 그 후 동구권 국가들에서 민주화를 위한 저항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근거로 유럽안보협력회의 결정을 들었다. 동서독 기본

    조약과 유럽안보협력회의는 동독의 닫혔던 ‘철의 장막’이 틈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동서독의 교류, 특히 서독인들의 동독 방문이 늘어났고

    아래에서 살펴볼 서독 언론인들의 동독 상주 취재도 가능하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동독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제법적인 인정, 외교

    관계의 확장, 유엔 가입, 서독과의 동등한 자격의 주권 강화 등을 달성했

    지만, 이러한 성과가 궁극적으로는 정권의 기반을 허무는 결과를 가져왔

    다는 해석이 가능하다(Wolle 1999, 341).

  • 20

    2. 동독의 내부 붕괴와 장벽의 개방

    유럽안보협력회의로 유럽 양대 블록의 갈등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

    었다. 한편으로는 그 이후 후속 회의들이 진행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의 SS-20 미사일과 그에 대응하는 미국의 퍼싱-II 미사일 배치 문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여전히 갈등적인 사안들이 전개되었다. 특

    히 1981년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대 소

    련 정책으로 동서 긴장완화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1981년과 1982년에

    는 독일에서 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평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

    다. 동독 정부는 이러한 동서 갈등이 동서독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동독의 이러한 태도는 독일 문제에 대한 희생적인 태도

    때문이 아니라 서독에 대한 재정적·경제적 종속성 때문이었다(Gehler

    2011, 282).

    1971년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의 후임으로 에리히 호

    네커(Erich Honecker)가 동독공산당1)의 제1서기(1976년부터는 ‘서기

    장’)가 된다. 호네커는 나찌 치하에서 공산당원으로 저항운동을 한 이

    유로 1935년부터 1945년까지 감옥 생활을 한 인물이다. 그는 동독의

    생활수준을 서구의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정치적 목표를 표명했다. 그

    의 이러한 정치적 목표는 1974년에 개정된 동독 헌법 제2조에 명시된

    다. 이 헌법 제2조에는 1968년에 개정된 헌법 제2조제1항의 후반부에

    아래와 같은 규정이 추가되었다. “사회주의적인 생산의 높은 발전 속

    도와 효율성 제고, 과학적-기술적 발전, 노동 생산성 증대를 바탕으로

    1) 동독공산당의 명칭은 ‘사회주의통일당’(SED;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이었다. 이 당은 1946년 독일공산상(KPD)과 독일사민당(SPD)이 강제 합병되면서 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편의상 ‘동독공산당’으로 표현한다.

  •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21

    한 인민의 물질적 및 문화적 생활수준의 보다 높은 향상이 발전된 사

    회의 결정적인 임무이다.” 그러나 동독 주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

    해서는 서독의 경제적 도움이 필요했다. 서독 돈을 확보하기 위해 동

    독 정치범을 서독에 넘기고 돈을 받기까지 했다. 서독의 입장에서는

    이를 돈을 주고 사온다는 의미에서 ‘프라이카우프’(Freikauf)라고 불

    렀다. 염돈재에 따르면 서독 정부는 1962년에서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열릴 때까지 총 34억 6,400만 마르크(통일 당시 환율로 계산하

    면 약 1조 8,400억 원) 정도의 대가를 지불해 33,755 명과 그 가족 25만

    명을 서독에 데려왔다(염돈재 2010, 93).

    소련과 동구권에는 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

    임하면서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되고, 1989년에는 그 최고점에 이른다.

    겔러는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국가사회주의의 지속적인 경제 위기, 유럽

    안보협력회의의 긴장완화 정책, 나토의 무역봉쇄와 군비경쟁이라고 분

    석했다(Gehler 2011, 288).

    1987년 9월 7일 동독의 국가수반이자 공산당 서기장인 에리히 호네

    커가 서독 본(Bonn)을 방문했다. 서독 수상 콜은 국가원수에 상응하는

    최고의 예우를 갖추어 그를 영접했다. 이를 통해 동독이 추구한 목표인

    독립된 국가로서의 위상이 성취되는 최고점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동독의 기저에서는 추락이 시작되고 있었다. 1988년 1월 15일, 로자 룩셈

    부르크(Rosa Luxemburg)와 칼 립크네흐트(Karl Liebknecht)가 살해된

    날을 기념하는 연례행사가 열렸다. 이 둘은 동독이 이념적 기반으로 칭

    송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날 시민권운동자, 일반 시민, 해외여행 희망

    자 들이 모여 로자 룩셈부르크가 한 말인 “자유는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유다”2)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동독 경찰을 이를 강

    하게 진압하고 참가자를 체포, 처벌 혹은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를

  • 22

    계기로 동독 교회 내에서 정권 비판자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하

    고, 많은 젊은이들이 참가하는 집회들이 개최되는 등 저항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3)

    1988년 11월 19일에는 동독 당국이 소련의 잡지 ‘Spunik’의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소련은 동독 정권을 수호해주는 가장 강력한

    힘의 근원이었다. 동독의 헌법(1974년 개정)에도 제6조에 동독이 “영원

    히 그리고 비가역적으로” 소련과 연합되어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

    러나 이제는 동독 정권이 소련에서 일어난 변화에도 귀를 막은 것이다.

    1989년 1월에도 호네커는 동서독 장벽이 앞으로도 50년 혹은 100년 간

    존속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1989년 2월까지도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가

    려던 동독 청년이 경계병의 총에 맞아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9년에는 동독 주민들의 대량 탈출이 본격화되었다. 헝가리는

    1989년 2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끝낸 상황이

    었다. 5월경부터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설치되었던 경계 시설 철

    거가 시작되었다. 이후 동독 주민의 서독 탈출에서 헝가리에 여행을 와

    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경로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9년 여

    름휴가 기간에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폴란

    드의 바르샤바 등에 위치한 서독 대사관에 서독행을 원하는 수백 명의

    동독인들이 진입했다. 1989년 9월 11일에는 헝가리가 유럽안보협력회

    의 협정을 근거로 동독인들의 여행을 허가하게 된다. 이 후 10월 1일까지

    2만 5,000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10월에는 프라하와 바르

    샤바의 서독 대사관에 있던 7,000여 명의 동독인들도 서독 정부의 노력

    2) “Die Freiheit ist immder die Freiheit des Andersdenkenden.”3) 아래에 소개되는 동독의 붕괴 과정은 김한규 2008, 22 이하; Gehler 2011, 288 이하 참조.

  •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23

    으로 서독으로 올 수 있게 된다.

    동독인들의 대규모 탈출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동독 내에서는 점차

    저항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중 가장 상징적이며 의미 있는 변화를 이

    끌어 낸 것이 라이프치히 월요 데모이다. 1989년 10월 2일 월요일 라이프

    치히에서 1만에서 2만 명 정도가 참가한 데모가 있었다. 이 데모에서 경

    찰의 진압으로 부상자가 발생하고 체포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다음 주

    인 10월 7일 동독 당국은 경찰 등 진압 병력 규모를 8,000명으로 늘였다.

    이 날 2만에서 3만 명의 참가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막상 데모가 시작되

    자 군중은 7만으로 늘었다. 이날 사전에 발포 허가가 내려졌는가에 대해

    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너무 많은 수의 데모대에 압도된 경찰과 진

    압 부대는 수동적으로 지켜보기만 했고, 이것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

    다. 이날 벌어진 7만 명의 평화적 행진이 동독의 변화를 의미하는 “평화

    적 혁명”(“friedliche Revolution”)의 상징이 되었다. 그 후 라이프치히 데

    모 군중의 수는 12만 명, 20만 명, 30만 명, 11월 6일에는 50만 명으로 급

    격하게 늘어났다. 동베를린에서도 11월 4일 50만 명이 데모에 참여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데모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동독 집권 세력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현 체제의 고수이다. 호네커는 후자를 택했다.

    1989년 10월 7일 동베를린을 방문한 고르바초프는 호네커에게 변화를

    외면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고르바초프는 “너무 늦게 오는 자는

    삶이 그를 처벌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방명록에 남기기도 했다. 그

    러나 호네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동독 권력 핵심에서도 분열이 생겨났다. 호네커의 경직된 태도를 비

    판하는 정치국원들이 사퇴를 했다. 결국 10월 18일 에곤 크렌츠(Egon

    Krenz)가 당 서기장으로 새로 선출되었다. 그는 10월 24일에는 국가수반

  • 24

    으로 취임하고, 호네커는 명실상부하게 실권을 했다. 그러나 크렌츠도

    동독인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1989년 5월의 지자체

    선거의 책임자였다. 이 선거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도 반정부

    운동의 중요한 기폭제의 하나였다. 그는 여행 기회 확대, 데모 참가자와

    동독 탈출 시도자 사면 등의 부분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크렌

    츠는 결국 잘 못 선정된 인물인 것으로 드러났다. 크렌츠는 재정 위기도

    돌파해야 했다. 동독이 지불 불능의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크렌

    츠는 고르바초프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서독 정부에

    대한 지원 요청도 거절되었다. 서독이 근본적인 개혁을 지원의 전제 조

    건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1989년 11월 9일 밤과 10일 새벽에는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날 장벽이 열린 것은 동독 홍보담당자의 실수 때문

    이었다. 그는 언론과의 한 인터뷰에서 동서 베를린 검문소가 언제 열리

    냐는 질문에 대해 “바로”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전에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서독 텔레비전이 보도하자 수만 명의 동베를린 사

    람들이 검문소로 몰려와 차단기를 열라고 요구했다. 관리 책임자는 어쩔

    수 없이 차단기를 열었다. 굳건하던 장벽이 그렇게 개방된 것이다. 그 후

    주말인 12일까지 2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베를린을 방문했다. 11월 13일

    에는 동서독 나머지 국경도 열리게 된다.

    3. 동서독의 통일

    동서독 국경의 개방이 독일 통일로 바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1989년 11

    월 13일에는 한스 모드로(Hans Modrow)가 국무총리가 되어 동독의 새

  •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25

    로운 리더로 등장했다. 그는 정권 반대 그룹들과 대화를 추진한 인물이

    다. 그는 ‘협력과 공존’ 및 ‘조약을 통한 공동체’를 통해 두 개의 독일을 유

    지하는 안을 제시했다. 서독 총리 헬무트 콜(Helmut Kohl)이 11월 28일

    발표한 ‘10개항 계획’에도 모드로가 제안한 ‘조약을 통한 공동체’라는 표

    현이 담겨있다. 콜은 ‘10개항 계획’에서 국가연합(Konföderation)적 구도

    를 통한 장기적인 통일안을 제시하며 ‘참을성’과 ‘신중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문서에 통일까지의 구체적 일정은 제시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문서는 콜 총리의 통일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평가 받

    는다. 주변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별다른 협의 없이 발표한 이 계획은 국

    내외적으로 독단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동독의 시민운동 단체들도 모두 통일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동독의

    시민운동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미 지역에서 ‘평화’, ‘환경’ 등

    의 주제로 다양한 시민 혹은 여성 활동들이 있었고, 이들은 동독의 제2의

    정치 문화로 형성되고 있었다(Neubert 2000; Klein 2007 참조). 특히 교

    회가 “부분적으로 보호된 반(半) 공론장”(Klein 2007, 72)으로 중요한 역

    할을 했다. 노이버트(Ehrhard Neubert)는 정권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이

    동독의 ‘평화적인 혁명’ 혹은 ‘정치적 자기 해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 보았다(Neubert 2000). 이들은 1985년에 시작된 소련의 변화도 주의

    깊게 추적하고 있었다. 볼레(Stefan Wolle)는 서독의 긴장완화 정책인 ‘접

    근을 통한 변화’와 소련의 개혁이 없었다면 동독 시민운동가들이 그러한

    성과를 낼 수 없었겠지만, 시민운동가들의 활동이 없었다면 소련의 개혁

    이 자동적으로 동독 독재 정권의 멸망으로 연결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

    가했다(Wolle 1999).

    1989년 9월 9∼10일 결성된 ‘새 포럼’(Neues Forum)은 ‘동독의 헐값

    매각’을 경고하며 통일에 반대했다. 이 단체는 정부가 이적단체로 규정했

  • 26

    지만 회원 수가 급격히 늘고 있었다. 시민운동 그룹들은 동독 정권을 반대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지만 동독의 진로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았다.

    동서 장벽의 개방과 동독 정부의 개혁 의지 천명에도 불구하고 동독

    인들의 서독행은 멈추지 않았다. 1990년 2월에는 그 해 연말까지 동독인

    100만 명이 서독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서독의 입장에서

    는 혼란을, 동독은 젊고 역량 있는 노동력의 상실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동독뿐만 아니라 서독에서도 통일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고르바초프가 실권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동서독 정부의 빠

    른 조치가 필요했다. 겔러는 두 가지 충격이 독자적 국가로서의 동독 재

    건에 대한 희망을 잃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Gehler 2011, 332 이하). 하

    나는 경제적으로 동독이 파산 직전이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하나는 국가

    안보부 혹은 슈타지(MfS: 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 Stasi) 활동의

    실상이다. 슈타지는 8만 5천 명의 정직원과 17만 4천 명의 비공식요원

    (IMs: Inoffizieller Mitarbeiter)을 통해 동독인의 모든 영역의 정보를 수집

    해 왔다. 친구나 동료는 물론이고,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에서도

    감시와 정보 제공이 일어났다. 슈타지의 문서가 공개되어 이러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밝혀지면서 가해진 충격은 개혁을 약속한 모드로 정부에 대

    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밀려 모드로 정부는 1990년 3월 18

    일 조기 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동독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러진 자유선거에서 투표율은

    93%로 매우 높았다. 동독의 신생 정당들은 선거가 갑자기 당겨져 준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고, 서독 정당의 지원을 받은 정당들만 활발하

    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었다. 투표 결과 득표율에서 기민련(CDU)이 41%

    로 승리했고, 사민당(SPD)은 22%에 불과했다. 동독공산당의 후신인

    PDS(민주사회당)가 16.4%로 예상 밖의 선전을 했다. 기민련의 승리는

  •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27

    ‘동서독의 빠른 통합’을 의미했고, PDS의 표는 아직도 과거 동독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상당 수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동독 기민련의 당수 로타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가 범 정당들을 참여한 대연정 정부를 꾸렸고, 새로 구성된

    인민회의는 드 메지에르를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이렇게 구성된 인민의회는 1990년 8월 23일 동독의 주들이 서독 기

    본법에 따라 서독인 ‘독일연방공화국’로 편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편

    입하는 날짜가 10월 3일이었다. 10월 4일에는 서독 연방의회 의원들과

    동독 인민의회에서 보낸 대표들이 참석해 통일된 독일의 첫 연방의회 회

    의를 개최했다. 이로서 동서독의 정치적 통일은 일단락되었다.

    독일 통일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명확한 의사 표시는 이어서 실시된

    통일 독일의 총선에서 이루어졌다. 1990년 12월 3일 통일된 독일의 첫 총

    선에서 ‘통일 총리’인 콜이 이끄는 기민련/기사련(CDU/CSU)이43.8%,

    이들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한 자민당(FDP)이 11.0%의 표를 얻어 확

    실한 승리를 거두었다. 통일 자체에 회의적이었고 빠른 통일에 유보적

    입장을 보였던 라퐁텐(Oskar Lafontain)을 총리 후보로 선거전을 치렀던

    사민당(SPD)은 33.5%를 얻는데 그쳤다.

    4. 전승4국의 입장과 독일의 대응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는 독일 통일과 이웃나

    라와의 국경 등 독일 문제에 대해 국제법적 권한을 갖고 있었다.4) 따라서

    4)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이 1945년 6월 5일 발표한 “독일에 대한 최고 정부권한의 접수”

  • 28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이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와 함께 침략국이었던

    독일은 통일을 위해 폴란드 국경 등 국제법적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이웃

    국가들의 이해를 구해야 했다. 나토에 속한 서독으로 동독이 통합될 경우

    나토의 동방 확장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군사안보적인 위상의 정리도

    필요했다. 독일의 통일은 동서독이 동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국제적 문제 해결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독일은 명확한

    목표 의식과 강한 리더십을 가진 콜 총리를 중심으로 이러한 난관을 슬기

    롭게 해결했다고 평가된다(Gehler 2011, 353 이하; 손기웅 2009, 3 이하

    참조).

    아래에는 손기웅의 서술(손기웅 2009a)을 중심으로 전승4국의 통일

    에 대한 입장과 독일의 대응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전승4국과 독일의 이웃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독일의 통일로 유럽의 기본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각 국가들의 입장과 이해관계는 달랐다.

    이미 빌리 브란트의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지지한 바 있는 미국은 다

    른 어느 나라보다 독일 통일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미국의 이러한 입장은

    다른 국가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동구권의 민주화와 시

    장개방에 관심이 있었고, 고르바초프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

    았다. 미국은 또한 독일민족의 자결권을 존중한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독일의 통일이 미국과 소련의 관계 정립에 방해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그

    리고 나토와 유럽 공동체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독일 통일을 위한 외교적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상대가 소련이었다.

    그것은 소련이 동독의 주 동맹국이자 ‘형제국가’였다는 점에서 당연한

    선언이 여전히 유효했다. 1954년 10월 23일 서방 전승국과 서독 사이에 체결된 협정에서도 “독일의 재통일을 포함한 전체 독일에 대한 전승4국의 권리와 책임”이 언급되어 있다(BPB, 2009).

  •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29

    귀결이다. 소련에게 동독은 히틀러 파시즘과 싸워서 쟁취한 곳으로 사회

    주의 진영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기지였다. 이런 점에서 동독의 변화는

    폴란드나 헝가리와 달리 “매우 예민하고 감정적으로 개입되어 있고 국

    내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Gehler 2011, 343). 소련은 동독의 붕괴

    가 진행되는 시점에 두 개의 독일을 상정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초 프랑스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동서독 문제를 서독이 단독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에 대해 경고하고 유럽의 세력균형과 역사적 조건이 고

    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1990년에 들어와서 소련의 입장이 변하기 시작했다. 고르바

    초프가 개혁을 이끌기 위해서는 서방의 지원이 절실했다. 당시 소련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구 중 6천만에서 1억 명 정도가

    생존에 필요한 최저선 혹은 그 아래에 처해 있었고, 군대와 경찰의 사기

    도 위험할 정도로 저하되어 있었다(BPB 2009). 또한 독일인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1990년 2월 콜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

    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어떠한 국가적 형태로, 어떠한 시간적 공간 속에

    서, 어떠한 속도로, 어떠한 조건하에 독일이 통일을 실현할 것인가는 독

    일 국민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고 밝혔다(손기웅 2009a, 12에서 재인

    용). 그러나 문제는 군사안보적 위상이었다. 소련은 통일된 독일이 나토

    회원국이 될 경우 바르샤바조약기구(WTO)와의 세력 균형이 무너질 것

    을 우려했다. 그래서 소련은 처음에는 통일된 독일이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영국은 전승4국 중 독일 통일에 대해 가장 유보적이었다. 통일된 독

    일이 유럽에서 다시 지배적 세력으로 부상하고 그에 상응하게 영국의 영

    향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영국의 ‘선데이타임스’(The

    Sunday Times)는 나찌의 ‘제3 제국’에 빗대어 ‘제4 독일 제국(’’Fourth

  • 30

    German Reich)의 출현’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손기웅 2009a, 16). 특히

    대처(Margaret Thatcher) 수상이 독일 통일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

    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영국은 독일 문제가 독일 국민의 자결권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원칙적 입장을 견지했다. 영국은 동독 총선에서 독일

    인들의 통일 의지가 확인되자 ‘2+4 협상’에 적극 참여해 영향력을 행사

    하는 실용적인 방향으로 입장을 전환했다. 영국은 통일된 독일이 통합된

    유럽에 묶여 있어야 하며, 나토에 잔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와 함

    께 독일과 폴란드 간 현재의 국경이 영속되는 것을 통일의 전제 조건으

    로 삼았다.

    프랑스는 독일의 잠재력이 유럽 통합의 중요한 기반이 되기를 기대

    했다. 프랑스는 통일된 독일이 유럽 통합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을 것

    이라는 우려 때문에 처음에는 통일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콜의 ‘10개

    항 계획’ 발표 후 당시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은 독일 통일이 (국제) 법적

    으로나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히기고 했다. 그러나 1990년 2월 동

    서독이 경제 및 화폐 통합을 천명하고, 그 해 3월 동독 총선에서 빠른 통

    일을 원하는 동독 주민들의 민의가 확인되는 등 통일이 ‘기정 사실’이 되자

    프랑스도 ‘2+4 협상’에 참여해 독일 통일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전승4국의 입장과 염려를 독일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군사

    안보적 위상과 관련해서 다양한 안이 있었지만 독일은 통일 후 나토에

    잔류하면서 동시에 나토 군사력이 동독으로 주둔 지역을 확대하지 않는

    다는 중간적인 안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동독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소

    련군(당시 35만 명)이 철수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로써 미국을 비롯한 서

    방 전승3국을 설득할 수 있었다.

    이 안이 관철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소련의 동의였다. 소련은

    동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변화들이 되돌리기 힘들며, 독일 통일을

  •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31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독일의 나토 잔류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90년 5월 4/5일 개최된 제1차 ‘2+4 협상’(동독, 서독+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서 이러한 입장이 노출되었다. 소련은 통일된

    독일이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지 않는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

    다. 그러나 소련의 입장은 그 후 점차 변하게 된다. 1990년 7월 16일 콜과

    고르바초프의 코카서스 회담에서 소련은 통일 독일의 나토 잔류에 동의

    하게 된다. 이를 위한 독일은 소련에 약 600억 마르크(약 300억 유로)를

    지불하기로 했다(Gehler 2011, 344). 소련은 또한 중립국이 된 독일이 오

    히려 예측불가능할 위험이 더 크며 나토에 묶어 놓은 것이 더 안정적이

    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강화하게 만드는 나토의 조치

    도 있었다. 1990년 6월 7/8일에 개최된 나토국 외무장관회의에서 긴장

    완화와 상호협력을 천명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같은 해 7월 6/7일

    의 나토국 정상회담에서 “나토가 소련을 더 이상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

    다”는 선언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방은 군사적 무력을 먼저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공표되었다.

    소련이 통일 독일의 나토 잔류에 동의하면서 통일과 관련한 외교적

    인 난관이 해결되었다. 1990년 9월 12일 모스코바에서 개최된 제4차

    ‘2+4 협상’에서 ‘독일에 관한 최종 규정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는 현존하는 국경선이 최종적인 것이며 독일은 타국에 대해 영토

    요구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또한 독일군의 병력은 37만

    을 넘지 않으며, 동독 지역에는 외국군대, 핵무기 및 핵무기 운반수단을

    주둔시키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이 조약에 따라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완전히 주권을 되찾았다.

  • 32

    5. 독일 통일의 시사점

    통일과 언론을 다루는 이 연구의 맥락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독일 통일이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세 개의 측면에 주목하고자 한다.5) 첫

    째는 독일 통일이 동독 체제의 내부 붕괴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는 동서독, 특히 동독 주민들이 빠른 통합을 원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는 외교적으로 독일 통일에 대해 국제법적 권리를 가진 전승 4개국과 독

    일의 이웃 국가들이 독일의 통일을 적극 원한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동의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독일 통일은 동독 내부의 ‘평화적 혁명’을 통해 동독 체제의 정

    당성과 통치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어 더 이상 체제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

    에서 출발했다. 동독 체제는 변화에 귀를 막고, 자기 최면에 걸린 호네커

    를 비롯한 동독의 집권세력이 현실 파악 및 대응 능력을 상실한 결과 비

    교적 짧은 시간 내에 급격하게 붕괴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 시스템과 언

    론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시스템이론으로 설명한 론네베르크(F. Ronneberger)는

    정치시스템이 생존하는 데 있어 미디어 시스템에게 의존하는 기능들이

    있다고 설명했다(Ronneberger 1978, 104 이하). 먼저 정치시스템은 환경

    으로부터 끊임없이 정보를 입수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구체적 사실과 함

    께 사회 구성원의 의견과 태도가 포함된다. 복합성이 증대된 현대 사회

    에서 이 기능은 주로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치시스템은 또한 결

    정된 사실과 결정 과정을 환경에 통보해야 한다. 이 기능 또한 미디어에

    5) 아래 내용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에 해당한 논점은 이 책의 공동필자 김영욱이 ‘김광호 1995’의 논문에서 이미 제시한 바 있다.

  •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33

    크게 의존하고 있다. 정치시스템은 이러한 정보 입수(input)와 통보

    (output)를 넘어 환경으로부터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시스템의

    활동 방식을 나타낼 필요가 있다. 결정에 대한 동의를 얻고, 사회 구성원

    의 긍정적 반응을 얻는 과정이 그것이다. 여기에도 미디어가 중요한 역

    할을 한다. 이 외에도 론네베르크는 정치시스템 내부 조직원간의 정보

    전달에서도 미디어가 중요한 기능을 하며, 정치시스템과 다른 시스템

    간의 갈등에서도 미디어를 통한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능이 대중미디어를 통해 잘 수행될 때 그 체제는 안정을 가

    질 수 있다. 물론 정치커뮤니케이션이 대중미디어를 통해서만 이루어지

    는 것은 아니다. 단지 효율성과 신뢰성, 정당성 확보에 있어 국가로부터

    독립된 대중미디어가 더 기능적이라는 것이다.

    동독의 집권자들은 국민의 의사와 욕구를 파악하는 데 있어 대중미

    디어보다는 국가안전부의 정보망에 의존했다. 문제는 복잡화된 현대 사

    회에서 생기는 각종 각양의 욕구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있어

    이러한 관료적인 체계가 얼마나 효율적인가에 있었다. 특히 비공식 요원

    을 통해 비밀스러운 정보 수집은 정보를 제공하는 자의 개인적 편견과

    이해관계가 혼합될 위험이 크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이중 삼중의 상호

    감시가 필요했다. 결국 동독의 국가안보부는 8만 5천여 명의 정식 직원

    과 17만 4천여 명의 비공식 요원을 운용하는 거대 조직이 되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동독 수뇌부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동독은 정당성 확보와 사회 구성원의 긍정적 반응을 만들어 내기 위

    해 언론을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이용했다. 아래에서 그 체계를 살펴본

    다. 문제는 동독의 언론 상황이 동독 집권자들의 의지대로 통제되고 유

    도될 수 있었는가 하는 데 있다. 아래에서 동독의 미디어 정책이 동서독

    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매우 어려웠다는 점을 살펴보게 된다.

  • 34

    둘째, 동서독 특히 동독 주민이 빠른 통일을 원했다. 동독 체제의 내

    부 붕괴가 바로 동서독의 통일로 연결된 것은 필연이 아니었다. 서독 내

    에서도 급격한 통일에 대한 주저가 있었다. 동독 내부의 변화에 대해 동

    독의 집권층은 약간의 변화를 통해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

    다. 무엇보다 동독 체제에 반대해 ‘평화적 혁명’을 주도한 자들은 서독의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했다. 그러나 동

    독의 주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열렸을 당시

    를 대표하는 구호가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였지다. 그러

    나 1989년 말 경에 그 구호는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로 변했다. 전자가 동독 정권을 겨냥한 국민 주권을 표현한 것이라

    면, 후자는 동서독 국민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희망과 요구를 담고 있

    다.

    고스(Anthony John Goss)는 심리학자 호프슈테터(Peter. R.

    Hofstätter)의 논의를 참고해 서로 다른 집단 간의 신뢰도, 동질성 등을

    형성하는 조건을 논의했다. 호프슈테터는 두 개의 집단이 각각 스스로에

    대한 상(像), 다른 집단에 대한 상, 다른 집단이 자기 집단에 대해 갖고 있

    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상들이 비슷할수록 서로를 더 잘 이해한다고 하면

    서 다음의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Goss 1980, 18). (1) 서로 다

    른 두 집단이 가진 각각의 자기상이 서로 비슷하다면 이것은 두 집단의

    구성원의 규범에 따른 행위 양상이 공통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2) 한

    집단의 자기상과 그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이 비슷할

    경우. 이를 통해서 가깝다는 경험이 나타난다. (3) 한 집단의 자기상과 그

    집단에 대해 다른 집단이 가지고 있는 상이 비슷할 경우. 이 경우는 내가

    나를 보듯이 남도 나를 본다는 동일성을 나타낸다. (4) 한 집단의 자기상

    과 다른 집단이 자기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상이

  • 02 독일 통일의 역사적 주요 과정 35

    비슷할 경우. 이를 통해 다른 편이 나를 보는 시각이 왜곡되지 않았다는

    신뢰가 나타난다. (5)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제3의 집단에 대한 상이 비슷

    할 경우, 제3자에 대해 서로 오해 없이 소통할 수 있다.

    동서독 간의 인적 교류는 분단 역사에서 완전히 봉쇄된 적은 없었고

    통일 전까지 점차 확대되는 추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접촉

    은 제한된 사람과 제한된 범위에 머물렀다. 동서독의 대부분의 사람들에

    게 상대방에 대한 상이나 상대방이 자기들에 대해 갖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 상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 언론이 제시한 모습이었다. 인쇄

    미디어가 동서독 경계를 넘기가 힘들었다는 점에서 경계를 넘은 방송,

    특히 텔레비전의 역할이 컸다. 따라서 통일 전에 동서독 대중미디어가

    동서독 주민들 사이에 존재했던, 또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는 동질성 혹

    은 이질성, 신뢰감 혹은 불신감, 친근감 혹은 거리감 등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동서독은

    공통된 문화적 배경과 역사 및 언어를 갖고 있다는 동질성과 함께 정치,

    경제 등 사회제도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성이 있었다. 이러한 객관적인

    요소들이 대중미디어에 의해 강조, 과장되거나 무시될 수 있다는 점에

    서, 방송은 친근감-거리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또한 동서독의 방송

    을 통해 서로 다른 쪽의 모습이 어떻게 전달되었느냐에 따라 상호 간의

    동질성-이질성, 신뢰-불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동독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형성된 것은 우선

    은 경제적 동기나 역사의식에서 나온 동기 등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이

    를 가능하게 한 데는-혹은 불가능하게 하지 않은 데에는-언론의 역할

    이 중요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셋째, 독일 통일에 대해 국제법적 권리를 가진 전승 4개국과 독일의

    이웃 국가들이 독일의 통일에 결국 동의를 했다. 독일 통일에 대한 전승4

  • 36

    국의 이해관계가 달랐고, 독일 통일에 주저할 심리적, 실리적 이유가 없

    었던 것은 아니다. 독일이 유럽에서 새로운 위협적 세력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노력은 늦게 잡아도 빌리 브란트의 적극적 동방정

    책에서 시작되었다. 통일 과정 당시에도 콜 총리의 탁월한 외교력으로

    군사안보적 문제 등 민감한 외교적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추동력은 독일인들이 자발적으로 통일을 원한다는 사

    실이었다. 민족자결을 원칙으로 천명한 전승4국으로는 동독 총선을 통

    해 드러난 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손기웅 2009a, 33 이

    하). 그 이후의 외교적 조정 과정은 독일에게 통일을 허용할 것인가의 문

    제가 아니라, 통일 후 독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즉, 독일 통일 과정에서 극복해야 했던 중요한 과제인 외교적 문제 해결

    도 궁극적으로는 여기서 두 번째로 논의한 문제인 동서독 주민 간의 신

    뢰, 동질감, 친밀감 등의 종속변수 하나라는 사실이다.

  • 03 통일 전 서독의 언론 37

    03통일 전 서독의 언론

    1. 통일 전 서독의 방송

    1) 서독 방송 구조와 특징

    전후 서부 독일과 서 베를린을 점령한 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은 침략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1) 그 중

    하나가 독일 국민의 재교육(Reeducation)이었다(Schatz 1989, 391 이하).

    특히 나치 독일이 보여준 방송의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염두에 둔 연합군

    은 방송에 대해 국가로부터 독립, 공공성, 연방주의적 체제의 3가지 원칙

    에 따른 정책을 실시했다.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서독 각 지역에서 연합군의 감독 아래 혹은

    연합군에 의해 공영방송사가 설립되었다. 그 모델은 국가로부터 독립되

    며 시청료를 재원으로 하는 영국의 BBC였다. 연방주의 원칙에 따라 지역

    에 공영방송사가 설립되었는데 이때 설립된 방송사가 NWDR(북서독 방

    송), BR(바이에른 방송), HR(헤센 방송), SWF(남서부 방송), RB(라디오

    브레멘), SDR(남부 독일 방송)이다(아래 내용은 Schuler-Harms 1994 참

    1) 통일 전 동서독의 언론에 대한 아래의 서술 중 일부는 ‘김광호 1995’에서 이 책의 공동필자 김영욱이 서술한 내용을 발췌 혹은 재정리한 것이다.

  • 38

    조). 그 후 NWDR이 WDR(서부 독일 방송)과 NDR(북부 독일 방송)으로

    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