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없 어어 수선하다고? 아이들은 타협과 관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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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 & Mind 31 제114호 2009년 5월 17일 오월의 볕이 다소 따갑게 느껴지는 13일 오후, 경기도 용인에 있는 아란유치원에 들어섰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마당이 보였다. 잎 이 성성하게 푸르른 공원을 안은 마당에서는 아이 여럿이 선생님을 따라 몰려다니고 있었 다. 그 너머 이웃한 교실에는 막 야외학습을 끝낸 아이들이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아 이들은 들썩이는 소리와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시키는 일 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이 자유로워 해요. 사과나무 옆의 우리 교실, 안마당 건너에는 동생이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공간을 통해 공동체를 인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유치원이 미로 같다고 이야 기하며, 스스로 공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지요.” 유치원 구석구석을 안내해 준 허영 미 원장 선생님의 전언이다. 2004년 완공된 아란유치원은 이손건축의 세 개 유치원 프로젝트 중 두 번째 건축이다. 아란유치원은 대지와 주변환경이 가진 조건 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면서 땅이 가진 잠재력 을 최대한 끌어내 배치한 건물이다. 두 필지 에 각각 세워진 건물 두 동은 입구에서 가까 이 모여 있는 듯이 보인다. 두 건물은 뒤로 갈 수록 간격이 벌어지며 한 층 높이 위쪽에 안 마당을 살짝 숨기고 있다. 숨겨진 안마당은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안 마당은 마주 보이는 공원의 숲을 향해 양팔 을 활짝 벌려 끌어안고 있는 형상이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듯한 광장 유치원 주변은 구릉을 깎아 내며 산발적으로 아파트와 연립주택의 개발이 진행 중이어서 혼란스러웠다. 유치원에 들어서면 그런 풍경 은 바깥세상의 얘기가 된다. 두 동의 건물은 주변 풍경을 향해서는 닫혀 있는 대신, 안마 당과 숲을 향해 내부 공간이 활짝 열려 있다. 건축가인 이민·손진은 무형의 프로그램이 건축의 디자인을 이끌기보다는 관대한 공간 의 힘, 물성의 힘이 오히려 프로그램을 자유 롭고 창의적으로 수용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 고 있다. 두 건축가의 생각은 아이들의 세계 와 어른들의 세계가 만나는 아란유치원의 곳 곳에 배어 있었다. 두 동 모두 막힘 없이 흐르 는 듯한 공간구조를 가졌는데 이런 움직임이 수렴하는 곳은 층과 층을 잇는 수직 동선이면 서 동시에 아이들의 광장이 되는 극장 계단이 다. 이곳은 기능적인 움직임을 담아 내면서도 무언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듯한 기대의 공 간인 극장을 동시에 훌륭하게 담아 낸 매력적 인 공간이다.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빛을 받 으며, 아이들이 모여 소란스레 축제를 벌이는 것이 절로 상상이 됐다. 극장 계단을 지나 교 실들이 이어진 공간들은 어느 곳 하나 똑같은 곳 없이 풍요롭다. 그 공간의 어디서나 푸른 숲, 중정의 빛과 바람, 하늘이 그 일부분이 된 다. 이는 교실과 교실 사이, 내부와 외부의 경 계가 단절하고 막아서기보다 끊임없이 소통 하기를 부추기고 있어서 가능하다. 이웃한 교 실과 교실의 경계는 벽 대신 함께 사용하는 ‘아트스튜디오’와 다락방, 다락 아래의 낮은 아지트가 대신하면서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는 공간이 된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타협 과 양보를 배우게 될 것이다. 벽들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낮아져 있는데, 공간의 디테일에서 보이는 아이들의 스케일 에 대한 건축가의 섬세한 배려가 놀랍다. 이 곳에는 아이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막아서 는 벽이 없다. 아이들이 물리적으로 움직이 는 곳이 모두 열려 있기도 하고, 아이들의 시 야 또한 안마당을 건너 건너편 동의 친구들 의 수업하는 곳까지, 그를 감싸는 숲과 논까 지, 중정과 옥상정원을 통해 하늘까지 거침없 이 열려 있다. 건물이 완공된 첫해, 교사들은 이렇게 열 린 공간구조가 아이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 고, 관리도 어려울 것으로 염려했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교사들은 “벽은 없지만 마 치 보이지 않는 경계가 생긴 듯 열려 있는 이 웃 공간에서 벌어지는 활동들이 서로 방해하 지 않고 공존한다”고 했다. 그 공간을 사용하 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 것일까. 아이들 은 이 작은 도시 공간에서 이웃과, 주변 환경 과의 크고 작은 공동체 속에 자신을 자리매 김하는 법을 배우는 듯하다. 아직도 가끔 “완공은 언제냐”는 질문을 받 는다는 허 원장의 말처럼 아란유치원의 마 감에는 콘크리트·조적·미장의 가장 기본적 인 재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이들의 공간이라면 떠오를 만한 캐릭터들의 시각 이 미지가 없다. 완공 당시 다소 거칠어 보이는 마감을 보고 놀란 건축주에게 건축가는 “시 간이 지나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 다. 건축주는 몇 년의 시간을 지내며 알록달 록 아이들의 손길이 덧대어지고도 처음 제 모습을 지속하는 벽을 보며 그 소박함의 매 력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런 단순 하면서도 현장작업이 묻어나는 재료의 사용 은 환영적인 이미지로 아이들의 시각에만 호 소하기를 지양한다. 그보다는 촉각과 감성에 말을 걸고 있고, 보기보다는 만지고 싶은 건 축, 낡아도 아름다운 건축을 바라는 건축가 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보기보다는 만지고 싶은 건축 우리 아이들은 참 불행하다. 모든 것을 흡수 하고 인성의 기초를 다지는 유년기를 보내는 대부분의 교육 공간이 아이들의 자유로운 움 직임을 받아 주고 그들의 상상력과 감성에 반 응하기보다 그런 자유로움을 관리하고 운용 하기 쉬운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오죽하면 공포영화의 배경으로도 손색이 없는 공간이 겠는가. 교육 공간에 대해 새삼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공간문화과 에서 주관하는 ‘문화로 행복한 학교 만들기’ 사업에 참여하고부터다. 이 사업은 학교를 사 용하는 학생·선생님 모두가 참여하여 학교의 공간 일부를 새롭게 단장하는 프로젝트를 지 원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매일 체험하는 공 간에 사회적으로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 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그들이 꿈꾸고 지향하는 공간의 가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교육 공간을 생각하는 것은 미래 도시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과 다 르지 않다. 아란유치원에서 건축가가 상상한, 그리고 아이들이 체험하는 것이 곧 미래의 도시란 생각이 든다. 나와 이웃이 서로 막힘 없이 소 통하고, 벽이라는 물리적 경계보다 타협을 통해 조율해 나가는 유동적인 삶의 경계를 만들어 내는 성숙한 도시, 빛과 바람과 나무 와 공존하며 그들의 시간을 함께 느끼고, 그 를 존중하는, 오래오래 지속하는 그런 도시 말이다. 건축가 이민과 손진의 일련의 작업은 웅변 하지 않고 낯설도록 소박하고도 고유한 모 습으로 주목을 끈다. 그들의 건축은 대지가 가진 지형적사회적 조건에 대응하는 솔직 하고 자유로운 태도로 콘크리트, 천연 모르 타르, 시멘트 미장, 벽돌 등을 마치 거기 오 래 있었던 듯이 새로 구축한다. 추상적 개념 보다는 건물이 드러나기를 바란다는 말로 시작된 짧은 대담을 질문과 답 형식으로 정 리해 본다. -아란유치원의 계획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프로그램보다는 건축의 물리적인 힘, 존 재감, 재료와 빛이 우리에게는 더 놓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에게 대지의 입지와 지 형 조건은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중요한 출 발점이다. 주변의 환경에 대응하여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란유치원 은 진입로와 3m의 차이를 가진 대지라는 점, 공원과 주거단지로 둘러싸인 입지, 레지 오 접근법을 근간으로 하는 유치원의 교육 철학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다.” -교육방식에 대응하여 공간 구성을 제안한 것인가. “아이들이 전체를 인지하며 부분적인 공 간을 점유하기를 바랐다. 느슨한 파악이 가 능한 공간,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행위가 이 루어질 수 있는 공간을 생각했다. 이전에 레 지오 접근법을 참고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한 유치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어린 아티스 트들의 에너지로 가득 찬 학교를 돌아보면 서 이것은 교육방법이나 프로그램이라기보 다 오히려 자신의 생에 대하여 생생하게 반 응하는 삶의 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어린이 교육시설 을 설계하는 일이란, 앞으로 만들어질 세상 에 대하여 세심하게 귀 기울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자연스러운 재료들이 다소 거칠어 보인다. 물성과 재료에 대한 생각은. “변화하면서 오래 유지 가능한 재료를 선 택한다. 아란유치원은 우리가 시공까지 했 다. 어렵지만 현장까지 연속되지 않으면 우 리의 의도가 구현되기가 힘들다. 시각에 의 존하기보다 촉각에 의존하여 지각되는 재 료 마감을 지향하기 때문에 시멘트 미장 등 현장에서의 수작업을 통해 그러한 느낌을 살리려고 한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용인 아란유치원 벽이 없어 어수선하다고? 아이들은 타협과 관용을 배운다 보이지 않는 경계 저절로 생겨 이웃 공간의 활동들과 공존 시간 지날수록 보기 좋아져 느슨한 공간 파악이 가능하면서 여러 행위가 함께 이뤄지게 꾸며 교육시설 설계는 미래와의 대화 ①아란유치원은 2개 동으로 구성됐다. 아이들은 건물 생김에 따라 ‘S건물’ ‘네모건물’이라고 각각 부른다. S건물의 지하층은 교사를 위한 공간이고 지상 1 2층은 교실과 극장·아틀리에 등으로 사용한다. ②S건물 1층 교실 내부. 안마당과 건너편 네모건물에서 아이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③아이들의 광 장이다. 공연도 하고, 영화도 보고, 다양한 놀이도 할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도서관으로 이어진다. 천장 왼쪽에는 자연광이 들어온다. 신동연 기자 조재원 0_1도시건축스튜디오 대표 건축가 이민손진 “교육 프로그램보다는 아이들의 삶을 드러내고 싶어” 아란유치원은 경기도 용인시 언남리에 있다. a동(지하 1층, 지상 2층)과 b동(지상 3층)으로 구성 면적은 a동 대지 1148㎡·건축 630.89㎡, b동 대지 1646㎡·건축 361.34㎡ 내외부 마감은 노출콘크리트와 미장, 타일, 벽돌, 합판으로 했다. 이민씨는 충남대 건축학과, 서울대 환경대학원, 이탈리아 로마 대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후 스튜디오 프란체스카 베 네치아에서 실무를 쌓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출강 중이다. 손진씨는 홍익대 건축학과와 이탈리아 베네치아 건축대학원을 거쳐 스튜디오 프란체스카 베네치아, 스콥피예 건축 사무소에서 일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출강 중이다. 두 사람은 1997년 파트너십 형태의 이손건축 을 개소했다. 이손건축의 대표작으로는 천사유치원(안양), 운문유 치원(경산), 안상규스튜디오(헤이리아트밸리), 손정환 패션사옥(논현동), 아란유치원(용인), 발트하우스타운 하우스(용인)가 있다. 필자 조재원 대표는 1970년생으로 연세대 건축공학과와 네덜란드 베를라 게건축대학원에서 공부했다. 0_1도시건축스튜디오의 대표이자 연세대 겸임교수. 도시와 건축의 새로운 원형 에 대해 관심을 두고 연구와 실무를 병행하고 있다. 조재원 이민 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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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벽이없 어어 수선하다고? 아이들은 타협과 관용을 배운다‚¬색공간/사색공간517.pdf · 주변 풍경을 향해서는 닫혀 있는 대신, 안마 당과

Heart & Mind31제114호 2009년 5월 17일

오월의 볕이 다소 따갑게 느껴지는 13일 오후,

경기도 용인에 있는 아란유치원에 들어섰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마당이 보였다. 잎

이 성성하게 푸르른 공원을 안은 마당에서는

아이 여럿이 선생님을 따라 몰려다니고 있었

다. 그 너머 이웃한 교실에는 막 야외학습을

끝낸 아이들이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아

이들은 들썩이는 소리와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시키는 일

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이 자유로워 해요. 사과나무 옆의

우리 교실, 안마당 건너에는 동생이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공간을 통해 공동체를 인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유치원이 미로 같다고 이야

기하며, 스스로 공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지요.” 유치원 구석구석을 안내해 준 허영

미 원장 선생님의 전언이다.

2004년 완공된 아란유치원은 이손건축의

세 개 유치원 프로젝트 중 두 번째 건축이다.

아란유치원은 대지와 주변환경이 가진 조건

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면서 땅이 가진 잠재력

을 최대한 끌어내 배치한 건물이다. 두 필지

에 각각 세워진 건물 두 동은 입구에서 가까

이 모여 있는 듯이 보인다. 두 건물은 뒤로 갈

수록 간격이 벌어지며 한 층 높이 위쪽에 안

마당을 살짝 숨기고 있다. 숨겨진 안마당은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안

마당은 마주 보이는 공원의 숲을 향해 양팔

을 활짝 벌려 끌어안고 있는 형상이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듯한 광장

유치원 주변은 구릉을 깎아 내며 산발적으로

아파트와 연립주택의 개발이 진행 중이어서

혼란스러웠다. 유치원에 들어서면 그런 풍경

은 바깥세상의 얘기가 된다. 두 동의 건물은

주변 풍경을 향해서는 닫혀 있는 대신, 안마

당과 숲을 향해 내부 공간이 활짝 열려 있다.

건축가인 이민·손진은 무형의 프로그램이

건축의 디자인을 이끌기보다는 관대한 공간

의 힘, 물성의 힘이 오히려 프로그램을 자유

롭고 창의적으로 수용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

고 있다. 두 건축가의 생각은 아이들의 세계

와 어른들의 세계가 만나는 아란유치원의 곳

곳에 배어 있었다. 두 동 모두 막힘 없이 흐르

는 듯한 공간구조를 가졌는데 이런 움직임이

수렴하는 곳은 층과 층을 잇는 수직 동선이면

서 동시에 아이들의 광장이 되는 극장 계단이

다. 이곳은 기능적인 움직임을 담아 내면서도

무언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듯한 기대의 공

간인 극장을 동시에 훌륭하게 담아 낸 매력적

인 공간이다.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빛을 받

으며, 아이들이 모여 소란스레 축제를 벌이는

것이 절로 상상이 됐다. 극장 계단을 지나 교

실들이 이어진 공간들은 어느 곳 하나 똑같은

곳 없이 풍요롭다. 그 공간의 어디서나 푸른

숲, 중정의 빛과 바람, 하늘이 그 일부분이 된

다. 이는 교실과 교실 사이, 내부와 외부의 경

계가 단절하고 막아서기보다 끊임없이 소통

하기를 부추기고 있어서 가능하다. 이웃한 교

실과 교실의 경계는 벽 대신 함께 사용하는

‘아트스튜디오’와 다락방, 다락 아래의 낮은

아지트가 대신하면서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는 공간이 된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타협

과 양보를 배우게 될 것이다.

벽들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낮아져 있는데,

공간의 디테일에서 보이는 아이들의 스케일

에 대한 건축가의 섬세한 배려가 놀랍다. 이

곳에는 아이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막아서

는 벽이 없다. 아이들이 물리적으로 움직이

는 곳이 모두 열려 있기도 하고, 아이들의 시

야 또한 안마당을 건너 건너편 동의 친구들

의 수업하는 곳까지, 그를 감싸는 숲과 논까

지, 중정과 옥상정원을 통해 하늘까지 거침없

이 열려 있다.

건물이 완공된 첫해, 교사들은 이렇게 열

린 공간구조가 아이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

고, 관리도 어려울 것으로 염려했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교사들은 “벽은 없지만 마

치 보이지 않는 경계가 생긴 듯 열려 있는 이

웃 공간에서 벌어지는 활동들이 서로 방해하

지 않고 공존한다”고 했다. 그 공간을 사용하

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 것일까. 아이들

은 이 작은 도시 공간에서 이웃과, 주변 환경

과의 크고 작은 공동체 속에 자신을 자리매

김하는 법을 배우는 듯하다.

아직도 가끔 “완공은 언제냐”는 질문을 받

는다는 허 원장의 말처럼 아란유치원의 마

감에는 콘크리트·조적·미장의 가장 기본적

인 재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이들의

공간이라면 떠오를 만한 캐릭터들의 시각 이

미지가 없다. 완공 당시 다소 거칠어 보이는

마감을 보고 놀란 건축주에게 건축가는 “시

간이 지나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

다. 건축주는 몇 년의 시간을 지내며 알록달

록 아이들의 손길이 덧대어지고도 처음 제

모습을 지속하는 벽을 보며 그 소박함의 매

력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런 단순

하면서도 현장작업이 묻어나는 재료의 사용

은 환영적인 이미지로 아이들의 시각에만 호

소하기를 지양한다. 그보다는 촉각과 감성에

말을 걸고 있고, 보기보다는 만지고 싶은 건

축, 낡아도 아름다운 건축을 바라는 건축가

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보기보다는 만지고 싶은 건축

우리 아이들은 참 불행하다. 모든 것을 흡수

하고 인성의 기초를 다지는 유년기를 보내는

대부분의 교육 공간이 아이들의 자유로운 움

직임을 받아 주고 그들의 상상력과 감성에 반

응하기보다 그런 자유로움을 관리하고 운용

하기 쉬운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오죽하면

공포영화의 배경으로도 손색이 없는 공간이

겠는가. 교육 공간에 대해 새삼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공간문화과

에서 주관하는 ‘문화로 행복한 학교 만들기’

사업에 참여하고부터다. 이 사업은 학교를 사

용하는 학생·선생님 모두가 참여하여 학교의

공간 일부를 새롭게 단장하는 프로젝트를 지

원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매일 체험하는 공

간에 사회적으로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

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그들이

꿈꾸고 지향하는 공간의 가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교육 공간을 생각하는

것은 미래 도시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과 다

르지 않다.

아란유치원에서 건축가가 상상한, 그리고

아이들이 체험하는 것이 곧 미래의 도시란

생각이 든다. 나와 이웃이 서로 막힘 없이 소

통하고, 벽이라는 물리적 경계보다 타협을

통해 조율해 나가는 유동적인 삶의 경계를

만들어 내는 성숙한 도시, 빛과 바람과 나무

와 공존하며 그들의 시간을 함께 느끼고, 그

를 존중하는, 오래오래 지속하는 그런 도시

말이다.

건축가 이민과 손진의 일련의 작업은 웅변

하지 않고 낯설도록 소박하고도 고유한 모

습으로 주목을 끈다. 그들의 건축은 대지가

가진 지형적사회적 조건에 대응하는 솔직

하고 자유로운 태도로 콘크리트, 천연 모르

타르, 시멘트 미장, 벽돌 등을 마치 거기 오

래 있었던 듯이 새로 구축한다. 추상적 개념

보다는 건물이 드러나기를 바란다는 말로

시작된 짧은 대담을 질문과 답 형식으로 정

리해 본다.

-아란유치원의 계획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프로그램보다는 건축의 물리적인 힘, 존

재감, 재료와 빛이 우리에게는 더 놓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에게 대지의 입지와 지

형 조건은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중요한 출

발점이다. 주변의 환경에 대응하여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란유치원

은 진입로와 3m의 차이를 가진 대지라는

점, 공원과 주거단지로 둘러싸인 입지, 레지

오 접근법을 근간으로 하는 유치원의 교육

철학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다.”

-교육방식에 대응하여 공간 구성을 제안한

것인가.

“아이들이 전체를 인지하며 부분적인 공

간을 점유하기를 바랐다. 느슨한 파악이 가

능한 공간,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행위가 이

루어질 수 있는 공간을 생각했다. 이전에 레

지오 접근법을 참고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한 유치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어린 아티스

트들의 에너지로 가득 찬 학교를 돌아보면

서 이것은 교육방법이나 프로그램이라기보

다 오히려 자신의 생에 대하여 생생하게 반

응하는 삶의 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어린이 교육시설

을 설계하는 일이란, 앞으로 만들어질 세상

에 대하여 세심하게 귀 기울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자연스러운 재료들이 다소 거칠어 보인다.

물성과 재료에 대한 생각은.

“변화하면서 오래 유지 가능한 재료를 선

택한다. 아란유치원은 우리가 시공까지 했

다. 어렵지만 현장까지 연속되지 않으면 우

리의 의도가 구현되기가 힘들다. 시각에 의

존하기보다 촉각에 의존하여 지각되는 재

료 마감을 지향하기 때문에 시멘트 미장 등

현장에서의 수작업을 통해 그러한 느낌을

살리려고 한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⑩

용인 아란유치원

벽이 없어 어수선하다고? 아이들은 타협과 관용을 배운다

보이지 않는 경계 저절로 생겨

이웃 공간의 활동들과 공존

시간 지날수록 보기 좋아져

느슨한 공간 파악이 가능하면서

여러 행위가 함께 이뤄지게 꾸며

교육시설 설계는 미래와의 대화

①아란유치원은 2개 동으로 구성됐다. 아이들은 건물 생김에 따라 ‘S건물’ ‘네모건물’이라고 각각 부른다. S건물의 지하층은 교사를 위한 공간이고 지상 1

2층은 교실과 극장·아틀리에 등으로 사용한다. ②S건물 1층 교실 내부. 안마당과 건너편 네모건물에서 아이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③아이들의 광

장이다. 공연도 하고, 영화도 보고, 다양한 놀이도 할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도서관으로 이어진다. 천장 왼쪽에는 자연광이 들어온다. 신동연 기자

조재원

0_1도시건축스튜디오 대표

건축가 이민손진

“교육 프로그램보다는 아이들의 삶을 드러내고 싶어”

아란유치원은

경기도 용인시 언남리에 있다. a동(지하 1층,

지상 2층)과 b동(지상 3층)으로 구성

면적은 a동 대지 1148㎡·건축 630.89㎡, b동

대지 1646㎡·건축 361.34㎡

내외부 마감은 노출콘크리트와 미장, 타일,

벽돌, 합판으로 했다.

이민씨는

충남대 건축학과, 서울대 환경대학원, 이탈리아 로마

대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후 스튜디오 프란체스카 베

네치아에서 실무를 쌓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출강 중이다.

손진씨는

홍익대 건축학과와 이탈리아 베네치아 건축대학원을

거쳐 스튜디오 프란체스카 베네치아, 스콥피예 건축

사무소에서 일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출강

중이다. 두 사람은 1997년 파트너십 형태의 이손건축

을 개소했다.

이손건축의 대표작으로는 천사유치원(안양), 운문유

치원(경산), 안상규스튜디오(헤이리아트밸리), 손정환

패션사옥(논현동), 아란유치원(용인), 발트하우스타운

하우스(용인)가 있다.

필자 조재원 대표는

1970년생으로 연세대 건축공학과와 네덜란드 베를라

게건축대학원에서 공부했다. 0_1도시건축스튜디오의

대표이자 연세대 겸임교수. 도시와 건축의 새로운 원형

에 대해 관심을 두고 연구와 실무를 병행하고 있다.

조재원

이민 손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