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운수협정 및협정의개정 - archives.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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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월남의 항공운수협정을 위해서 본 협정의 주무 부서장인 교통부장관은 외무부장관 에게 한·월 항공운수협정을 위한 제1차 실무자 회의에서 논의하여 합의한 바를 협정으로 체 결하기 위해서 월남정부의 의도 타진 및 교섭의 진척상황 파악을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교통부 입장에서는 외교부의 원활한 업무 추진에 의해서「한·월 항공협정」이조기에 체결될 수 있기를 희망하였으며, 이러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월남과 체결된 항공운수협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한편 본 협정에 앞서 한국 정부에서는 교통부장관이 외무부장관 등과 협의하여1965년 7월 16일에 개최될「한·월 항공운수협정」에 관한 예비회의를 개최하였으며, 이 예비회의에서 한 국 정부의 입장이 최종 정리되었다. 특히 이 예비회의에서는「한·월 항공운수협정」관계 부 처인 교통부, 외무부, 대한항공공사 간에 예비적인 조치로서 제반 문제의 사전 토의 및 의견 교환이 이뤄졌다. 이 협정 체결에 대해 우선 교통부는 한·월간의 무역 증진의 일환으로서 관 심을 표명하였으나, 대한항공공사는 현 시점에서 당분간 항공기의 가용능력 여부 및 미국과의 협정 등을 고려할 때 실리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또한 대한항공공사가 직항을 취항할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로 협정 체결의 필요성은 인정하였지만,시급성은 없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결론적으로“장기적인 항공 노선의 발전을 고려할 때 이 협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므로, 먼저 외교 경로를 통해서 상대국 정부의 의사를 타진하고 동시에 대한항공공사 에서 추가적인 시장 조사를 보강한다”고 합의하였다. 「한·월 항공운수협정」서명과 관련하여 양국 정부는“1966년 8월 9일부터 한국과 월남 대표가「한·월 항공운수협정」에 대 한 교섭을 진행하여, 8월 12일에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양국 수석대표 간에 가서명 을 하게 되었다”라고 확인하였다. 한편 본 협정에 첨부된 문서는 양측 대표가 합의한 「Air Service Agreement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Republic of Vietnam」의 원문이며, 여기에는 ‘Agreed Draft’라는 친필이 보인다. 이 협의안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교통부, 외 무부, 대한항공공사에서 각각 검토하였으 며, 이에 대한 의견을 교통부에 제출하였 Chapter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CET0031436‘한월항공운수협정 가조인식’에 참가한 안경모 교통부장관, 1966년 91 19 60년대 말 한국 정부는 전투병 파병 및 경제협력 규모 확대에 초점을 두고 정책을 추진 하였으며,특히‘ 월남 1) 특수’로 알려진 경제협력 확대를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1967 년 1월 16일 체결된「한국과 월남의 항공운수협정」과 1969년 9월 16일 개정된「항공운수협정 수정안」을 다루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월남과의 항공운수협정을 통해서 월남을 포함한 동남 아 지역에 대한 진출 확대를 시도하였다. 특히 본 협정이 한·월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 중 하 나였기 때문에 양국 정부의 실무 부서들은 협정 체결 과정에서 큰 잡음없이 신속하게 움직였 으나, 정작 양측 정부에서 본 협정에 대한 실리를 둘러싸고 별도의 의견이 제시됨으로써 진통 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본 문서는 한국과 월남 간의 경제협력 규모 확대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추진된 한ㆍ 월간의 항공운수협정 및 관련 문서로 구성되며, 주요 안건은 한ㆍ월 항공운수협정 관련 예비회 담 자료, 양국 정부에서 본 협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사안 등이다. 본 문서를 통해서 는 월남과의 경제협력 관계에 있어서 한국 정부가 주도적인 입장에서 협정을 체결하고 수정하 였으며, 이를 통해서 동남아시아 및 월남에 대한 진출 및 경제협력 규모 확대를 위한 초석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 한·월남간의 항공운수 협정 협정의 개정 관리번호 : CA0006651 쪽수 : 총 397쪽 생산일자 : 1967년 1월 16일, 1969년 9월 16일 생산기관(작성자) : 외무부 아주국, 주월 한국대사관 外 공개재분류 중요 기록 해제집 - 외교통상부 90 한·월남간의 항공운수 협정 및 협정의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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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과 월남의 항공운수협정을 위해서 본 협정의 주무 부서장인 교통부장관은 외무부장관

    에게 한·월 항공운수협정을 위한 제1차 실무자 회의에서 논의하여 합의한 바를 협정으로 체

    결하기 위해서 월남정부의 의도 타진 및 교섭의 진척상황 파악을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교통부 입장에서는 외교부의 원활한 업무 추진에 의해서「한·월 항공협정」이 조기에 체결될

    수 있기를 희망하였으며, 이러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월남과 체결된 항공운수협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한편 본 협정에 앞서 한국 정부에서는 교통부장관이 외무부장관 등과 협의하여 1965년 7월

    16일에 개최될「한·월 항공운수협정」에 관한 예비회의를 개최하였으며, 이 예비회의에서 한

    국 정부의 입장이 최종 정리되었다. 특히 이 예비회의에서는「한·월 항공운수협정」관계 부

    처인 교통부, 외무부, 대한항공공사 간에 예비적인 조치로서 제반 문제의 사전 토의 및 의견

    교환이 이뤄졌다. 이 협정 체결에 대해 우선 교통부는 한·월간의 무역 증진의 일환으로서 관

    심을 표명하였으나, 대한항공공사는 현 시점에서 당분간 항공기의 가용능력 여부 및 미국과의

    협정 등을 고려할 때 실리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또한 대한항공공사가 직항을 취항할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로 협정 체결의 필요성은 인정하였지만, 시급성은 없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결론적으로“장기적인 항공 노선의 발전을 고려할 때 이 협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므로, 먼저 외교 경로를 통해서 상대국 정부의 의사를 타진하고 동시에 대한항공공사

    에서 추가적인 시장 조사를 보강한다”고 합의하였다.

    「한·월 항공운수협정」서명과 관련하여

    양국 정부는“1966년 8월 9일부터 한국과

    월남 대표가「한·월 항공운수협정」에 대

    한 교섭을 진행하여, 8월 12일에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양국 수석대표 간에 가서명

    을 하게 되었다”라고 확인하였다. 한편 본

    협정에 첨부된 문서는 양측 대표가 합의한

    「Air Service Agreement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Republic of

    Vietnam」의 원문이며, 여기에는

    ‘Agreed Draft’라는 친필이 보인다. 이

    협의안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교통부, 외

    무부, 대한항공공사에서 각각 검토하였으

    며, 이에 대한 의견을 교통부에 제출하였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CET0031436‘한월항공운수협정가조인식’에참가한

    안경모교통부장관, 1966년

    91

    1960년대 말 한국 정부는 전투병 파병 및 경제협력 규모 확대에 초점을 두고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특히‘월남1) 특수’로 알려진 경제협력 확대를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1967

    년 1월 16일 체결된「한국과 월남의 항공운수협정」과 1969년 9월 16일 개정된「항공운수협정

    수정안」을 다루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월남과의 항공운수협정을 통해서 월남을 포함한 동남

    아 지역에 대한 진출 확대를 시도하였다. 특히 본 협정이 한·월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 중 하

    나였기 때문에 양국 정부의 실무 부서들은 협정 체결 과정에서 큰 잡음없이 신속하게 움직였

    으나, 정작 양측 정부에서 본 협정에 대한 실리를 둘러싸고 별도의 의견이 제시됨으로써 진통

    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본문서는한국과월남간의경제협력규모확대가본격적으로추진되는과정에서추진된한ㆍ

    월간의항공운수협정및관련문서로구성되며, 주요안건은한ㆍ월항공운수협정관련예비회

    담자료, 양국정부에서본협정을처리하는과정에서제기되는사안등이다. 본문서를통해서

    는 월남과의 경제협력 관계에 있어서 한국 정부가 주도적인 입장에서 협정을 체결하고 수정하

    였으며, 이를 통해서 동남아시아 및 월남에 대한 진출 및 경제협력 규모 확대를 위한 초석을

    마련한것으로평가할수있다.

    19한·월남간의

    항공운수협정및협정의개정

    관리번호 : CA0006651

    쪽수 :총397쪽

    생산일자 : 1967년 1월 16일, 1969년9월 16일

    생산기관(작성자) : 외무부아주국,주월한국대사관外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90 한·월남간의 항공운수 협정 및 협정의 개정

  • 다.

    항공운수협정 체결 교섭에 대한 외무부와 교통부의 의견은 1966년 1월 21일에 개최된 항공

    운수협정에 관한 관계 회의에서 집중 논의되었다. 이 회의에서 토의된 주요 안건은 태국, 말레

    이시아, 월남, 일본과의 항공운수협정 체결의 필요성 및 전망이었으며, 각 국가별 상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추진해야 할 사항임을 확인하였다. 대체로 태국, 말레이시아, 월남과는 가까운 시

    일 내에 항공운수협정을 체결하되, 특히 대통령 방문 시에 신속한 협정 체결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항공운수협정은 기존의 민간협정을 정부간 협정으로 대체

    한 이후, 한·일 무역회담과 연계하여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본 협정을 체결하기에 앞서 정부에서는 외무부장관이 법제처장과 재무부장관에게 재무부와

    법제처의 의견을 수렴하였으며, 특히 첨부로 보낸 문서인「대한민국 정부와 월남공화국 정부

    간의 항공운수협정(안)」과「Air Service Agreement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Republic of Vietnam」은 협정 체결 이전에 정부에서 고려하던 일부 의견들이 반영되어

    있다. 외무부가 요청한 본 협정안의 내용 및 절차에 대해서 재무부와 법제처에서는“의견 없

    음”과“(절차에) 문제없음”이라고 응답하였다.

    「한·월 항공운수협정」과 관련하여 주월 한국대사관과 외무부가 교환한 여러 서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월 대사와 외무부장관이 주고받은 문건들인데, 이들은‘8월 12일에 서울

    에서 가서명된 한·월 항공 협정안의 차후 처리’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외무부는 이 문서

    들을 통해서 본 협정안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한 향후 일정을 주월 한국대사관과 조율하였

    다. 외무부에서는 본 협정이 국무회의의 의결, 대통령의 재가 등 복잡한 국내 절차를 마친 후

    에야 비로소 정식 서명이 가능하다는 의견, 즉 추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

    다. 반면에 주월 한국대사관에서는 월남 외무부에서 본 협정을 신속하게 체결하기를 희망하

    며, 특히 12월 15일 이전에 협정이 체결될 수 있도록 재촉하였다. 이에 대해서 외무부에서는

    국내법의 절차상 12월 15일에 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다시 피력하고, 주월 대사

    관에서 이러한 사항을 고려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대해서 주월 대사는 본 협정의 서명이 12

    월 말로 연기되었음을 보고하고, 연내 체결이 가능하도록 한국 정부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한편 총무처장관은 외무부장관에게 1966년 12월 23일에 개최된 제106회 국무회의에서“대

    한민국 정부와 월남공화국 정부 간의 항공운수협정 체결”이 원안대로 의결되었음을 공지하였

    다. 그러나 외무부장관은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본 협정이 대통령의 결재를 얻지 못하여 결국

    양국 간의 서명이 당분간 연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월대사에게 통지하고, 월남 정부의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대통령이 본 협정에 대해서 결재함으로써 모든 국내절차

    가 완료되자 외무부에서는 주월대사에게 서명에 필요한 절차를 진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주월대사는 12월 30일에 외무부에 보낸 문건을 통해서 연말연시 관계로 월남 외무성의 상황

    이복잡하여본협정의연내체결이불투명하다고보고하고, 1967년1월중에체결될수있을것

    이라고 예상하며, 일정이 확정되는 대로 추후에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이후 1월 16일에야 비로

    소한·월민간항공협정조인및교환이월남외무부장관과주월한국대사사이에이뤄졌다.

    한편 한·월 항공 협정(안)의 국무회의 상정과 관련해서는 1966년 8월 12일자로 한국과 월

    남 대표 간에 가서명된 대한민국 정부와 월남공화국 정부 간의 항공운수협정이 국무회의에 상

    정되었으며, 외무부장관이 국무회의 부의안건으로 제출한 공식 제목은「대한민국 정부와 월남

    공화국 정부 간의 항공운수협정」이었다. 외무부장관은 본 협정의 체결 의의에 대해서는“한·

    월간의 항공 협정의 체결은 양국 간의 항공 교통의 수요를 충족시킴은 물론 우리나라 항공사

    업의 해외진출을 촉진하기 위하여,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월남의 중간지점으로서 갖는 의의와

    아울러 사이공에서의 이원권 확보”라고 밝혔다. 본 문건의 첨부자료로는 각서안(국문과 영문),

    예산 조치, 교통부·재무부·법제

    처 등 관계부처의 합의 등이 포함

    되었다.

    또한 주월 한국대사관은 한·월

    간 항공 협정이 1967년 1월 16일

    오전에 Do 월남 외무장관과 신상

    철 주월대사 사이에 각각 서명, 교

    환되어 체결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 체결에서 신상철 주월 대사는

    “동 협정의 체결은 월남에서 반공

    전쟁을 공동 수행하는 역사적인

    마당에 한·월간 우호관계에 새로

    운 계기를 이루는 것”이라고 연설

    하였고, Do 월남 외무장관은“본

    협정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한

    국의 군사적, 경제적 원조에 대하

    여 재차 감사한다”는 의견을 제시

    하였다. 한편 한국과 월남 사이에

    체결된 항공운송협정은 1월 16일과 17일에 한국의 주요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한국 정부에서는 외무부장관이 공보부장관에게 1967년 1월 16일에 공식 체결된 대한민국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CET0045801 월남 외무부에서‘한·월민간항공협정 등’에서명하는신상철주월대사, 1967

    9392 한·월남간의 항공운수 협정 및 협정의 개정

  • 95

    국 정부에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다. 특히 교통부장관은 외무부장관에게

    한·월 항공협정 수정회의에서 논의할 주요 안건의 확정을 요구하며,“우리 측이 동 회의에서

    제의할 내용은 노선 구조의 수정이 될 것이며, 서울-사이공 간의 중간지점으로서 홍콩을 포함

    시키고 사이공 이원 지점을 지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상대측에서 서울 이원 동경을

    요구할 시에는 회의 진전을 보아 우리도 이의 수락 여부를 고려하게 될 것이며, 기타 사항은

    앞으로의 동남아 취항에 대비하는 견지

    에서 적의 조치될 것입니다”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1969년 5월 22일부터 26일

    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한·월 항공협정

    수정 교섭 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은 한·

    월 정상회담에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

    다. 이 회의에서 주요하게 논의된 내용

    은“월남측은 Air Vietnam의 노선을 서

    울-동경-미국으로 할 것과, R & R 장병

    운용 시 그 이익을 Air Vietnam과 KAL

    이 반분할 것을 제의한 바 있으나, 이에

    합의하지 못하고 대신 다음과 같이 합의

    함. 노선 조정의 경우 KAL은‘Seoul-

    Osaka-Taipei-Hong Kong-Saigon-

    Bangkok’으로, Air Vietnam은

    ‘Saigon-Hong Kong-Taipei-One Point in Japan-Seoul-One Point in Japan’으로 합

    의하였다”로 되어 있다.2)

    한·월 항공협정 수정 내용을 양국에서 정책 및 법령으로 발효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주월

    한국대사관과 월남정부 당국 간에 필요한 절차가 진행되었다. 대체로 본 협정의 서명은 1969

    년 6월 10일로 설정되었으나, 구체적인 확인 과정에서 수정안에 대한 조항 일부의 변경 사항

    이 발생하여 그 일정이 연기되었다. 서명 과정에서 발생한 수정안은 최초에 양국이 합의한 내

    용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한 영어 구절의 삽입, 대체에 관한 내용이어서 심각한 것은 아니었

    다. 다만 이 과정에서 양측의 확인이 필요하였고, 그 결과 실제로 본 수정안이 서명된 것은

    1969년 9월 16일 이었다. 또한 주월대사는 외무부장관에게 한·월 항공협정 수정 회의의 결과

    가 양국 간의 합의 후 서명되어 실행되는 과정이 지연되자, 1969년 10월 1일부터 동남아 주요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정부와 월남공화국 정부 간의 항공운수협정을 법령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본 협정의 공포안

    전문은“1966년 12월 23일에 제106회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1967년 1월 16일 사이공에서

    서명되고, 1967년 1월 16일부터 효력을 발생한「대한민국 정부와 월남공화국 정부 간의 항공

    운수협정」을 이에 공포한다”였다.

    한편 1969년 9월에 완결된 한·

    월 운수협정 개정에 대해서는 먼

    저 주월 한국대사관이 1969년 3월

    11일 한·월간 항로 개설을 위하여

    1967년 1월 16일에 체결된 양국

    간의 항공 협정을 수정하기 위한

    회담을 월남 외무부에 제의하고,

    그 전문을 외무부에 송부하였다.

    이 전문에서 주월 한국대사관은

    AVN과 KAL이 서울-사이공 간을

    상호 취항하기 위해 필요한 현행

    항공 협정의 수정에 대해서 실무

    자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

    서 회담을 개최할 필요가 제기되

    었음을 보고하였다.

    월남 정부는 양국 간의 항공 협정을 개정하기 위한 회담을 1969년 5월에 사이공에서 개최하

    기를 희망하였으나, 교통부에서는 여러 가지 제반 여건을 고려할 때 서울에서 회담을 개최하

    는 것이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회의 진행, 대표 등에 대한 준비에 나섰다. 이에 대해서 월남

    정부는 회의 개최 시기를 티우 대통령 방한 전인 5월 20일부터 25일로 하며, 서울 개최를 수

    락하였다. 월남 정부는 또한 전후를 대비하여 한·월 양국의 유대강화와 상호 민간 항공 보호

    육성 및 양국의 지역 내 민간 항공 시장 확보를 위하여 현재 논의 중인 미·월간 협정 수정에 앞

    서 한·월간 협정 개정을 우선적으로 시급하게 추진하려고 하였다. 사실 본 협정의 수정은 양국

    간의 홍콩 및 사이공 이원을 포함한 전반적인 영업권(Fifth Freedom)을 상호 허용하기 위한 것

    이며,양국의사정에따라상호운영협조방안도아울러합의하려는것으로파악되었다.

    한편 1969년 5월 21일부터 23일 사이에 개최될 한·월 항공협정 수정회의에 참가할 국내

    대표단(교통부, 대한항공공사, 외무부)을 확정하고, 월남 대표로 참가할 인원들이 확정되자 한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94 한·월남간의 항공운수 협정 및 협정의 개정

    CET0058565 KAL기사이공취항시공항에첫도착환영식에참석한관계자기념촬영모습, 1968

    CET0033964 신상철 주월 한국대사 한국·월남항공항해협정조인식참석, 1969

  • 97

    용이 국내법과 저촉되거나 그 시행을 위하여 새로운 입법을 요하는 사항이 없음”이라고 응신

    하였다. 이후 한·월 항공운수협정 수정안은 1969년 9월 5일 국무회의의 심의를 통과하고, 15

    일 후인 9월 16일에 공표되어 발효되었다. 이에 따라서 주월대사는 월남 외무부와의 각서 교

    환을 통해 본 협정을 개정할 절차에 착수하였다.3)

    나종남(육군사관학교 부교수)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도시들에 대한 취항을 계획하고 있던 KAL의 업무 진행에 차질이 생겼음을 보고하였다. 이 문

    제를 해결하기 이해서는 본 수정안의 신속한 처리 및 이행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월남의 Air

    Vietnam사 역시 동일한 문제에 봉착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한·월 항공협정 수정회의 결과 보고는 한국측 수석대표로 참석한 교통부 강호륜 항공국장

    이 직접 외무부장관에게 회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이 보고서는 한국과 월남의 대표들이 회

    의에서 합의에 도달하기까지의 비교적

    자세한 과정을 기록하였다. 이 보고서의

    ‘결론’에서는“금번 한·월 항공협정 수

    정회의에서 우리 측이 획득한 가장 중요

    한 내용은 서울-사이공 간의 중간 지점

    으로써 동남아 항공시장의 핵심인‘홍

    콩’과 한·일 간 취항으로 항공시장을

    확보하게 된‘오사카’를 중간지점으로

    확보함과 동시에, 관광산업의 중심지인

    ‘방콕’을 사이공 이원으로 확보하게 된

    것임. 이로써 우리나라 민간 항공의 동

    남아 노선 취항의 기반을 구축케 된 것

    이라 하겠음. 또한 금번의 한·월 항공

    협정 수정 회의 전반을 통하여 월남측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서울 이원 미국과 한

    국군 및 R & R 분담 수송 합의를 강력하게 반복 주장한 점에 비추어 보아 앞으로 있을 회담에

    서도 월남측은 R & R 수송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외무부는「대한민국 정부와 월남공화국 정부 간의 항공운수협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 상정

    하였다. 본 상정 문건에서 외무부는“협정 개정의 의의”를“현행 협정에 의하면 아국의 지정

    항공사가 운항할 수 있는 노선이 서울을 출발점, 사이공을 도착지점으로 하여 그 중간에 타이

    베이, 마닐라를 거치도록 되어 있는 바, 이러한 중간지점이 기술적인 착륙점이라는 이외에는

    수익성으로 볼 때 별다른 의의가 없으므로 중간지점을 오사카, 타이베이, 홍콩으로 하고, 사이

    공 이원점(어떤 지점의 이원지점을 의미함)의 하나로서 방콕을 지정함으로써 서울에서 방콕에

    이르는 수익성이 좋은 노선을 확보하게 되는 것임.”이라고 밝혔다.

    한편 외무부장관은 법제처장에게 공문을 보내서 국무회의에 상정된“한·월 항공협정 개정”

    에 대한 법제처의 의견을 자문하였으며, 법제처장은 1969년 9월 3일자 답변에서“개정안의 내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96 한·월남간의 항공운수 협정 및 협정의 개정

    CET0033961 한국·필리핀항공협정서명모습, 1969

    1) 해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재의 베트남을 문서에 나타난 호칭인‘월남’과‘월맹’으로 표기한다.

    2) 본 회의에 사용된 자료의 원본 및 사본이 첨부되었으나, 각각 수정 요구사항이 제시되어 있으며 각자 다

    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어 복사본으로는 누구의 의견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 해제자주

    3) 중간에 포함된 메모 혹은 handwriting 2 쪽은 전체적으로 본 협정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이지만, 누

    가 어떤 맥락에서 작성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해제자주

  • 99

    병력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의견

    을 제시하였다. 한편 윌리엄 포터

    (William J. Porter) 주한 미국대

    사는 최규하 외무부장관에서 보낸

    서한(1968. 1. 2)에서“한국이 월남

    에 파병한 병력도 한국과 미국이

    1954년에 한국군의 규모에 대해서

    합의한 600,000명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월남 파병이

    이뤄지더라도 그로 인한 한국군의

    규모 증강을 제한하겠다는 미국 정

    부의 의사를 밝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최규하 외무

    부장관은 1954년 양국 사이에 체결

    한 합의의사록에서 결정한 대로 한

    국군의 최대 규모는 어떠한 경우에도 600,000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확답하였으며, 특히

    1965년까지 파병된 21,000여 명의 병력도 이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였다.

    비상시 재월 한국인 보호대책에 대해서는 주월 한국대사관의 특명 전권 대사가 주월 한국군

    사령관과 이택근 공사에게 보내는 서한 및 첨부 자료에서 자세하게 논의되었다. 월남 전쟁의

    진행 경과에 따라 월남 국내 상황이 혼란스럽게 변하고, 그 결과 재월 한국군의 보호대책과 주

    월 한국대사관의 경비 등 한국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시급함을 강조하고 있다. 외무부에서

    는 재월 한국인과 한국 국적의 모든 시설 및 인원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주월 한국군사령부

    와 주월 한국대사관이 서로 협력할 것과, 최대한 빨리 대책을 마련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

    다. 한편 첨부된 자료의《파월 기술자 현황》에 따르면, 1967년 현재 파월된 한국 기술자는 총

    12,947명이었다.

    월남의 한국군 추가 파병 요청은 1968년 4월 4일의 참전 6개국 외상회의 직후 최규하 외무

    부장관이 월남의 티우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나서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제기되

    었다. 티우 월남 대통령은 존슨 미국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과 하와이에서 회담한 내용, 즉

    한국군의 추가 파병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며, 이에 대해서는 월남과 미국의 공식 요청에 앞서

    한국 정부가 미리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택근 주월

    대리대사 역시 티우 월남 대통령을 단독 접견하는 과정에서 티우 대통령으로부터 한국군 추가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1968년에는 월남정부가 매우 적극적으로 한국군의 추가 파병을 요청했으며, 한국 정부는미국과 협의하는 등 다양한 대안을 고민하였다. 월남정부는 존슨 미국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

    령과 하와이에서 회담한 내용, 즉 한국군의 추가 파병안을 거론하며 구체적인 추가 파병을 요

    구하였다. 한국 정부는 월남과 미국이 추가 파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해 오기에 앞서 미리 대책

    을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파월 한국군의 전체 규모와 관련해서 미국 정부가 최규하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서 한국 정부에 추가 파병을 요청하지만,“한국군 파병 병력은 1954년 11월 7일의 합의 의사록

    (the Agreed Minute)에서 설정한 한국군의 적정 규모인 600,000명에 포함되지 않는 별도의

    본 문서는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 동안 한국 정부의 대월남 군사원조 정책을 다루고 있

    으며, 이를 통해서 월남전쟁의 진행 경과에 따른 한국 정부의 정책 방향이 변화하고 있음을 파

    악할 수 있다. 문서의 제목이《한국의 대월남 군사원조》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여기에 포함된

    사안은 외교, 군사, 경제등포괄적이다. 문서 첫부분의“한·월 관계 연혁”은 1949년 3월부

    터 1968년 4월까지의 한국과 월남관계의 주요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것인데, 작성자와

    생산기관이명확하지않다.

    20한국의대월남군사원조

    관리번호 : CA0006640

    쪽수 :총294쪽

    생산일자 : 1968년 1월 1일, 1969년 1월 1일, 1970년 1월 1일

    생산기관(작성자) : 국방부,외무부아주국外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98 한국의 대월남 군사원조

    CET0019144 월남참전맹호부대를방문한박정희대통령의모습, 1966

  • 101

    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부분이다.

    〈월남문제의 전망과 대

    책〉이라는 문건은 생산

    기관(작성자) 및 작성자

    가 명확하지 않으나,

    1969년 초에 월남전쟁의

    발전 상황을 바탕으로 전

    망과 대책을 제시한 정책

    기본문서의 초안이며,

    ‘2. 기본적 판단’에서 미

    국이 월남전쟁에서 전면

    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가정하고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책 마련이 필요

    함을 강조한 것이 독특하다. 또한 앞으로의 전쟁 양상의 전개에 대한 예측에 있어서도 일시적

    인 국면의 호전은 가능하지만, 대체로 국제 협상 및 회담에 의한 전쟁의 종결을 예측하고 있

    다. 한편 예측 가능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 중에서 한국과 관련된 내용으로는 월남에 대한 한국

    의 경제적, 군사적 참여 효과의 지속성 상실, 한국군 철수, 한국군 장비 현대화 및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 증가 등을 분석하였다.

    정치와 군사적 측면에서 월남전 상황을 분석한 보고서 초안들은 1969년 초에 월맹에 의해서

    주도된 구정공세에 의한 상황의 악화와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단계별로 분석하였다. 특히

    국방부는 월남 전쟁이 핵무기가 사용되는 등 전면전쟁으로 확전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예측하였다. 한편 외무부에서는 전쟁이 파리 평화회담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국제적 평화협상

    이나 회담에 의해서 종결될 수 있음을 가정하고,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고 분석하였다. 1968년 후반부터 1969년 전반 사이에 국방부와 외무부에서 작성된 대부분의

    문서들이 월남전의 휴전 가능성을 심각하게 다뤘으며, 이에 대한 다양한 준비와 분석이 필요

    함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국방부는 1969년 초에 월남전쟁의 진행 경과와 주요 현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월남전쟁의 전황이 점차 연합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사안별로

    한국군의 입장을 정리할 필요를 제기하였다. 주요 안건으로는 미국의 지원에 따른 월남군의

    증강과 강화, 점차적인 미군 철수 방안과 구체적 시한, 주월 한국군 철수 등이며, 이에 대한 실

    무자들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파병을 요청받고, 이 사실을 외무부에 보

    고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월남의 한국군

    증파요청, 미국 존슨 대통령과 월남 티우

    대통령의 회담 및 성명에 대한 양국의 여

    론 동향, 월맹의 반응에 대한 월남정부의

    태도 등이다. 이 중에는 특히 월남 정부의

    요청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과, 월남정

    부가 미국과 한국군 파병 문제에 대해서

    합의하였다는 내용 등이 눈길을 끈다. 이

    택근 대리 대사의 서한의 마지막 부분에는

    티우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국군 추가 파병 관련 친서 원본과 번역

    문이 첨부되어 있다.

    월남에 일시 귀국 중이던 Do Cho Tri 주한 월남대사도 이택근 주월 대리대사를 만나서 티

    우 대통령이 언급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택근 대리대사는 월남의

    한국군 증파 요청에 대해서 국내적으로 야당의 파병 반대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이를 위해

    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군사원조가 연계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월남에 대한 병

    력의 추가 파병과 더불어 기술자 추가 파견도 함께 고려할 것을 강조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티우 월남 대통령에게 친서(1968. 3. 15)를 보내 월맹군의 구정공세에서 월

    남이 입은 피해에 대한 위로와 이를 극복한 월남 정부와 국민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하였

    다. 이에 대해서 티우 월남 대통령은 답신(1968. 4. 4)을 통해서 월남에 대한 한국의 군대 파

    견, 우방국으로서 친선 및 지원에 감사함을 표시하였다. 특히“만약 한국 정부가 추가로 병력

    을 파병해 준다면, 이는 양국의 우호관계를 더욱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안보를 증

    진시키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외무부 아주국장이 작성한〈越南 戰爭 解決을 위한 協商에 대한 我國立場에 관한 硏究書〉는

    장차 월남전쟁이 종료된 이후 개최될 종전회의에서 한국 정부가 취해야 할 입장을 정리한 정

    책 연구서의 초안이다. 국제 협상이 개최 될 경우 이 협상이 갖는 절차적·실질적 사항을 고려

    하였으며, 회담의 성격, 절차, 참가국, 주요 안건 등을 언급하였다. 또한 이 회담에 참전국이

    참가하는 안건과 문제점 등을 분석하였다. 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닐라 정상회담

    에서 연합국들이 합의 내용이 장차 종전회담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

    기한 부분과, 장차 종전에 직면할 경우 한국의 군사적, 경제적 입장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100 한국의 대월남 군사원조

    CET0019152 월남전쟁참전7개국수뇌정상회담모습, 1966CET0021657 미국을방문중인박정희대통령이존슨미국대통령과기념촬영하는모습, 1965

  • 103

    외무부 아주국에서 작성한〈월남분쟁 해결을 위한 외교활동 문건〉들은‘참전국 외상회의 개

    최’,‘라오스 사태’,‘캄보디아 사태’,‘파리평화협상 진전 상황’등을 다루고 있다. 우선‘참

    전국 외상회의 개최’에 관한 내용 중에서는 미국을 포함한 각국 정부가 SEATO4) 회담 개최

    시기를 라오스 사태 등의 추이를 바라본 이후 즉, 4월보다는 7월에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즉 참전국 외상회의를 SEATO 회담과 연계하여 개최하기

    위해서 연기된 것이다.

    먼저‘라오스 사태’에 관한 내용 중에서는 미국 내의 여론을 악화시켜 파리 평화회담에서 미

    국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시작된 사태라고 판단하는 미국과 월남의 분석

    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한국 정부는 호지명 통로에 대한 연합국의 폭격

    이 적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한 월남전 해결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라오스 사태의 확대를 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즉“월맹군이 호지명 통로를 계속 이용하는

    한, 이에 대한 연합군의 효과적인 포격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는 점이다. 한편 라오스 문제

    에 대한 닉슨 대통령의 연설문이 부록에 수록되어 있어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한국 정부가

    그대로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캄보디아 사태’에 대해서는 공산군에 대해서 미지근한 태도로 일관하던 캄보디아의 지도자

    시아누크의 지도체제에 반대하는 군부와 지방 지도층의 봉기라고 평가하고, 이 과정에서 미국

    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즉 미국의 개입 가능성은 없으며,

    캄보디아 사태에 대하여 한국 정부가 어떠한 형태로든 공식 입장을 표명하는 것 자체가 불필

    요하다고 분석하였다. 또한‘파리 평화협상 진전 상황’에 대해서는 회담 진행 과정을 상세하

    게 기록하였으나, 회담 자체에 큰 진전이 없었다고 분석하였다.

    1970년 5월 14일에 신상철 주월대사가 이세호 주월 사령관, 문형태 합참의장과 함께 월남의

    키엠 수상을 예방하고 면담한 내용에서는 키엠 월남 수상이 캄보디아에서 시아누크의 좌경 정

    권이 우경중립정부가 수립된 것을 환영하면서, 그 동안 시아누크가 월맹군을 지원한 것에 대

    해서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서 신상철 대사는 캄보디아 사태의 발발로 인하여 월남 전쟁이 더

    욱 장기화 될 것을 우려하였으며, 특히 미군과 한국군 철수가 지연될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대해서 키엠 수상은 미군이 제4차 철군에 앞서 월남군 110만 명을 완벽하게 무장시키고, 경찰

    을 4만 명 추가로 증강한다면 캄보디아 사태의 지속은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답변하였

    다. 또한 키엠 수상은 한국군이 담당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점을 치하하며,“아시

    아의 문제는 아시아인의 힘에 의해 해결한다”는 대의명분을 다시 강조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월남전쟁 말기에 한국 정부가 추진하던 군사원조 정책의 방향은 첫째, 월

    남전쟁의 승리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둘째, 이 과정에서 월남에 대한 한국의 영향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외무부 아주과에서 작성한〈월남문제

    의 전망과 대책 : 정치, 외교, 군사부

    문〉이라는 문건에서는 미국의 북폭 중

    지, 파리회담의 확대, 구정공세 등으로

    인한 월남문제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었으며, 이에 따라 한국 정부가 대처해

    야 할 사항들이 분석되었다. 이 문건에

    서 다루는 주제는 전쟁의 양상 전망, 월

    남의 정치 및 군사 정세, 파리 협상, 미

    군 철수, 월남군 강화, 문제점 등이며,

    각 사항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주호놀룰루 총영사관, 주월 한국대사관

    등 업무 담당자들에 대한 지시사항으로

    제시되어 있다. 특히 이 문건은 경제와

    군사 두 가지 측면에서 담당부서인 경

    제기획원과 국방부가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한 점을 감안할 때, 월남 전쟁에 관한 주무부

    서의 입장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한편〈대월 대책 추진 및 월남전의 전망〉은 경제기획원과 외무부가 공동으로 작성하였다. 이

    두 부서는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를 통해서 외무부가 2월 24일에 대통령에게 보고 한 방

    위체제의 검토, 미군 철수에 관한 사전 협의, 주월 미군 철군 시 주월 한국군 장비 현대화, 한

    국군의 전후복구사업 참여, 군사고문단 편성, 참전국 비상 대기군 설치, 파월 국군의 대우 개

    선 및 후방 지원 등에 대한 국방부의 의견을 요구하였다.

    한편 국군의 월남 파병을 정치적·경제적 의미에서 분석한 문건에서는 국군의 파병 이념,

    정치·경제적 성과와 월남전의 전망 등의 분석을 통해 국군의 해외파병 활동을 홍보하고, 파

    병 활동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특히 부록에서는“월남에서

    의 외화가득 실적표”,“파월 한국군의 성과(각종 통계)”등을 제시함으로써, 국군의 해외파병

    활동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를 부각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 문건에서 제시하는 정치적인 면의

    성과로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 반공 한국에 대한 인식 심화, 닉슨 대통령의 아세아 독트

    린(Asian Doctrine) 적용에서 제외, 한국 안보의 강화, 국군의 전투력 강화, 한국과 월남의 유

    대 강화 등이다. 한편 경제적인 성과로는 월남전의 특수 경기, 기술혁신 및 국내 산업에 대한

    자극, 전후 복구사업에의 참여 등을 고려하였다.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102 한국의 대월남 군사원조

    CET0058463 전투 과정에서 파괴된 사이공 시가 모습,1968

  • 105

    외무부 통상국은 방교국(邦交局)과 아주국(亞洲局)으로 한·월남 경제협력에 관하여 고려하던 안건 중 군수 용역단 조직 및 운용에 대해서 질의하였고, 정부는 군수 용역단을 주월 미

    군 군수기지사령부에 배속시켜 군수지원업무를 대행할 것을 고려하였다. 군수 용역단 단원들

    이 공무 및 공무 이외의 귀책사유가 발생하였을 때 법에 있어서 국제법상의 지위에 대한 의견

    을 수렴하기 위해서 작성한 문건의 초안으로 보인다.

    군수 용역단으로 파견될 인원은 약 2,600명이며, 이중 행정요원은 100명 수준이다. 이들은

    민간 노무자 자격으로 파견되며, 경비 및 중장거리 수송, 항만 하역, 탄약 관리, 일반운전기술

    등 미국이 요청한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대체로 이들에 대한 계약은 한국과 미국 정부 사

    한국과 월남 사이의 경제협력의 추진 배경과 경과를 다루고 있는 본 문서는 군수용역단 조직

    및 운용, 1968년의 대월 경협 실적과 1969년 목표, 월남 수출 진흥정책 방안 등에 관한 자료

    로 구성된다. 또한 1969년 6월부터 1970년 2월까지 대월남 경제협력 현황이 포함되어 있다.

    눈에띄는것으로는휴전이후추진될전후복구사업에한국기업과업체가주도적으로참여하

    기 위한 대책, 전후 월남 복구 및 자립 노력에 대한 지원 또는 협력 강화, 기존 한·월남 경제

    협력유대강화방안등이다.

    21한·월남경제협력

    관리번호 : CA0006649

    쪽수 :총312쪽

    생산일자 : 1968년3월26일

    생산기관(작성자) : 외무부아주국,외무부동남아제2과,주월한국대사관경제기획원外

    력을 확대하여 경제 협력 규모를 확대하며, 셋째, 미국 및 연합국과의 우호 관계를 증진 시키

    는 것 등이었다.

    나종남(육군사관학교 부교수)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104 한국의 대월남 군사원조

    4) 동아시아조약기구(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 - 편집자주

  • 107

    획, 도로망의 복구 및 확장 계획, 전력개발 계획, 주택문제 해결, 기타 등으로 구성되며, 총 투

    자소요는 미화 약 26억 달러이며, 이 중에서 내자는 40%, 외자는 60%로 구성된다.

    한국의 대월경협 현황은 1965년에 18.4백만 달러, 1966년에 61.6백만 달러, 1967년에

    143.2백만 달러, 1968년에 177.7백만 달러이며, 총 400.9백만 달러로 집계되었다. 이 중에서

    물품 수출은 25%이며, 무역외 수입이 75%를 차지했다. 무역외 수입 중에서 인력수출이 47%,

    군납수입이 28%였다. 총 15,571명에 달하는 기술자 취업 중 외국 업체에 11,287명, 48개의 한

    국 업체에 4,284명이 참여했다.

    1969년의 경협 목표와 지침은 전체적으로 180백만 달러 수준을 계속 유지하고, 기술인력 지

    원도 15,000명 수준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또한 1969년을 기준으로 전시 경협에서 전후 경협

    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일반 무역의 2배 이상 증가와 물품 군납 전년 수준 유지가 목표였다.

    또한 군수용역 계약, 건설참여 확대, 기술인력 지원, 경제협력 증진 등을 추구하였다.

    수출 분야에서는 1968년에 37.9백만 달러를 달성하였으나, 1969년에는 40.0백만 달러를

    목표로 추진하며, 특히 일반 무역을 2배 달성하고 군납물품의 전년도 수준 유지가 주요한 목

    표였다. 주요 추진계획으로는 요소비료, 시멘트, 석회 및 아스팔트 등 주요 전략상품의 수출확

    대 및 장기수출 대책을 마련하고, 약 2,000천 달러 규모로 직물시장을 개척하고 확대하며, 연

    초, 직기, 재봉기, 한약재 등 기존 시장의 규모를 확장하려 하였다. 또한 AID Project 물자구

    매 참여 확대, 주월 한국군 군납의 전년도 수준 유지,

    월남군 군납확대, 보세창고 활용 등에 중점을 두었다.

    용역군납 분야에서는 대체로 전년도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하되, 기존 계약을 적극적으로 보호

    및 갱신하고, 신규시장 개척에도 노력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항만하역 및 육상 수송, 미군 세탁, 군

    복수리 및 자수, 연예 공급 등을 대상으로 추진하였다.

    건설계약 분야에서는 1969년에 총 15,000백만 달러

    를 목표로 추진하되, 전후 복구 및 건설참여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기술고용 분야에서도

    1968년 현재 총 15,571명이 파견된 인력진출 분야를

    더욱 확대하여 외국 업체 및 한국 업체에 대한 인력진

    출에 박차를 가하려고 하였다. 기술인력 중 1968년까

    지 사망자는 총 118명으로 주요 원인은 월맹 공격(26

    명), 작업 중 사망(30명), 교통사고(30명) 등이었다. 경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이의 협정형식을 취해서 결정하며, 한국의「근로기준법」을

    적용하기로 하고, 노무시간 중 발생한 상황들에 대해서는 대

    한민국 국내법의 적용을 받는 것을 제안하였다. (차후 이 문

    서에서 제기하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이 그대로 반영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외무부 방교국장은 통상국장에게 월남에 파견될 군수 용

    역단에 대한 처우문제와 법적 지위문제에 대해 답변하면서

    군수용역단의 처우문제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협의를 통해서 제시할 것과, 한국인 용역단원에 적용

    할 법규문제에 대해서는 월남 법규를 적용받는 것이 당연하

    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다만 보다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

    는 한국, 미국, 월남의 차후 협의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한편 외무부 동남아 제2과에서 작성한〈대월 경협 : 1968년 실적도 및 1969년도 목표 (요약

    보고)〉라는 문건에서는 전후 월남 복구 및 자립 노력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협력)에 관한 기

    본 지침을 마련하였으며, 민간 군수용역지원 확대, 전후 복구 및 건설 참여, Mekong 델타 관

    개수리 기본조사 원조 등 기술원조, 기존 한·월남 경제 협력 유대 강화 등을 차후 대월남 경

    제 협력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 협조실에서는〈1968년의

    대월경협의 실적과 1969년 목표〉를 제시하였다. 이 목표

    에 따르면 월남의 전후계획은 총 3단계로 구성되었으며,

    제1단계는 6개월간의 준비기간이며, 전후복구를 위한 행

    정조직의 정비, 경제통제수단의 강구, 난민의 귀농정착

    등을 해결할 것이다. 제2단계는 3개년간의 전후복구단계

    로서, 전쟁복구 및 재건을 위해서 농업생산의 수준 복구,

    지방행정조직의 정비 및 확보, 1차 산업품 가공 및 기간

    공업의 건설 등을 다룬다. 제3단계는 7개년간의 경제발

    전단계이며, 이 기간에는 가용자원의 최대 개발 및 활용,

    자립을 위한 국민생산능력의 총동원, 농업기계화 및 영

    농방법의 근대화 등을 다룬다. 주요 분야별 사업으로는

    메콩 델타 종합개발 계획, 지역개발 계획, 공업개발 계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106 한·월남 경제협력

    CET0058529 한국농업기술단의월남에서의활동모습, 1969

    CET0040394 제4차 한국·월남 경제각료회담모습, 1969

    CET0042399 파월 기술자들 작업모습, 1969

  • 제협력 분야에서는 1969년에도 민간의료단(122명)을 지속적으로 파견하며, 농업 기술단(35

    명)의 인력도 증가도 추진하였다.

    1969년의 대월 경협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주요 대책으로는 기존 계약의 적극 보호 및 수

    의 계약에 의한 전반적인 계약 연장 등 대미교섭의 적극 강화, 제4차 한·월 경제각료회담에

    서 추진한 수출확대, 전후 복구 및 건설 참여 등 대월교섭의 적극 강화, 진출업체 및 기술자 관

    리 강화 등 전후 대비태세의 정비 강화 등이었다.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기획원에서 작성한〈대월 경협 대책 : 휴전과 관련하여〉라는 문건에서

    는 대월 경협 관련내용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추가된 일부 내용들은‘가정’및‘기본 방향’

    에 포함되어 있다. 이 문건에서 제시하는 가정 사항들로는 휴전, 미군 철수, 한국군 복귀, 월남

    군 증강, 월남 정부의 통치력, 미국의 대월 기본 정책, 기술인력 자원, 사회 정세, 월남 경제 자

    립 노력, 각국의 대월 원조 등이다. 이 중에서 눈에 띄는 것으로는 전쟁은 점차 휴전으로 정리

    될 것이며, 미군과 한국군의 철수가 가시화되고 있으며 월남 군대의 성장 및 정부의 통치력 강

    화를 통해서 자립적인 월남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긍정적인 예측이 주를 이룬다.

    한국 정부가 추구하는 대월 경협의 기본 방침으로는 전후 월남 복구 및 자립 노력에 대한 지

    원 또는 협력 강화(민간 군수용역지원의 확대, 전후 복구 및 건설 참여, 기술 원조, 통상 진흥

    강화, 한월 합작의 확대), 기존 한·월 경제협

    력 유대 강화(기존 협력 유지, 기술고용 확대,

    한국 업체 우대) 등의 방안이다. 구체적인 세

    부추진 대책을 다룬 부분들은 기존 계약의 보

    호, 미군군수 후방지원 업무의 민간계약으로

    의 이관과정에서의 한국참여, 전후복구 및 건

    설참여, 기술인력 진출, 통상증진, 기술원조,

    합작투자 등을 다루고 있으며, 그 내용도〈1월

    26일자 보고서(1969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교섭 방법은 한·월 정상회담, 한·월 경제각

    료회담 등 사안별로 구분하였으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본 문

    건에서는 대미 교섭사항과 대월 교섭사항을

    구분하고 있다.

    이처럼 주월 한국대사관 경계기획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1969년의 대월 경제협력 사업은

    1968년보다 밝은 전망이었으며, 더욱 그 성과를 확대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 해결해야 될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문제들을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다. 월남 전쟁이 점차 휴전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파악한 이후

    한국 정부에서는 전후 복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

    러냈다.

    한편 경제기획원 연구부 연구위원이 작성한〈대미 및 대월 수출 진흥정책을 중심으로 한 경

    제외교 강화책〉발표문은 대미·대월남 수출과 수입에 대한 경제기획원의 입장을 밝힌 의견서

    의 성격을 갖는다. 세미나에서 발표된 글이지만 장차 정부의 정책 방향을 제시할 목적으로 작

    성된 문건이라는 점에서 중요성하다. 특히 이 발표문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대미 및 대월 수

    출 및 수입에 한정된다는 점에서 볼 때, 한국 정부가 월남전쟁을 무역수지 개선을 위한 매우

    중요한 기회로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남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1968년 현재 미국

    이 한국수출의 51.7%, 월남이 31.3%를 차지하였으며, 수입은 각각 27.2%, 0.04%였다. (수입

    의 54.2%는 일본이었다.) 이처럼 한

    국과 미국과의 교역 역조는 1962년에

    14:1에서 1968년에는 2:1로 줄어들었

    고, 월남의 경우 1968년에 14:1로 한

    국에 유리하게 적용되었다. 한편 본

    발표문은 향후 대미 수출의 현황과 전

    망을 다루면서 점차 한국의 수출과 수

    입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특히 대일 무역 수지 적자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방안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월남 전쟁에 의한 소

    위‘월남 특수’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전후 복구사업 참여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서 정부

    가 적극적, 조직적으로 나서야 함을

    지적하였다.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 협조실이 1969년 6월부터 1970년 2월까지 매월 작성한〈대월 경제협

    력 현황〉을 외무부와 경제기획원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월별 보고서들은 1969년 초기에 작성

    했던 경협 예측 및 전망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에 대한 세부적인

    전개과정을 실증하고 있는 중간 점검 보고서의 성격을 갖는다. 특히 매 보고서마다 송금실적,

    수출, 용역 군납, 건설, 기술 고용을 포함한 대월 경협 현황과 농지개혁 추진 현황 등 월남의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CET0060127 사이공에 개관한 대한무역진흥공사 무역관전시장모습, 1968

    109108 한·월남 경제협력

    CET0042411 월남다낭지역에진출한한국기업체를시찰하는모습, 1970

  • 111

    외무부 아주국 동남아 제2과에서 작성한〈주월 미군의 철군에 따른 주월 한국군의 안

    전 및 철군에 관한 연구서〉는 주월 한국군의

    안전 및 철수에 대한 한국 정부의 기본 방침을

    정리한 정책 기본서이다. 외무부에서 고려한

    기본 가정은 파리회담 등 국제적인 노력에 의

    한 평화협상의 진전에 따라 철군문제와 정치

    적 해결문제가 연결될 것으로 고려하고, 정치

    적 해결에 대해서는 공산 측과 연합군 측의 입

    장이 상호 달라서 합의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

    본문서는월남전쟁에참전한한국군의철수문제를둘러싼한국, 월남, 미국정부의의견을다

    루고 있다. 크게 주월 한국군의 안전 및 철군에 관한 연구서, 주월 한국군의 철군을 다룬 각종

    언론 기사, 제3차 월남 참전국 외상회의 자료, 한국군 추가 파병을 요구하는 월남 정치인들의

    면담기록등으로구성된다.

    22주월남한국군철수

    관리번호 : CA0006674

    쪽수 :총77쪽

    생산일자 : 1969년 1월 1일, 1970년 1월 1일

    생산기관(작성자) : 외무부아주국,주월한국대사관,주미한국대사관外

    주요 경제 사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경제기획원은 대월남 경제협력 측면에서는 1968년보다 1969년에 훨씬

    더 큰 규모의 경제협력이 추진될 예정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매우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

    다. 이러한 전망은 베트남전쟁의 파리 평화회담 및 철군 등으로 인해서 점차 전황이 오리무중

    으로 빠져드는 것과 반대였는데, 이는 전쟁이 점차 휴전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파악한 이후 한

    국 정부가 전후 복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나종남(육군사관학교 부교수)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110 한·월남 경제협력

    CET0019144 월남 맹호부대를 시찰하고 있는박정희대통령모습, 1966

  • 으로 예측하고 있다.

    또한 이 문건은 월남 전쟁의 군사 정세에 대해서는 공산측이 다시는 구정공세와 같은 공세

    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지만,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공세는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이며 미군의

    병력이 감축되는 시점에서 한국군의 군사적 부담감이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였다. 월남의 정

    치 정세에 대해서는 월남이 월맹에 대해서 과감한 정치 공세를 펼칠 것이지만, 그 효과는 부

    정적으로 전망하고, 정치적인 타협과 협상에 의한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평가

    하였다.

    따라서 한국군의 안전과 철수에 대해서 한국 정부가 고려할 사항들로는 1969년 6월까지 추

    진될 주월 미군의 추가 감축을 파악하고,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월남전의 월남화 계획 및 월남

    군 현대화의 속도를 관찰해야 한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미국의 대월남전 전략이‘최대한의 군

    사적 압력(the maximum military pressure)’으로 부터‘전투 수준의 경감전략 (the policy

    of reducing the level of combat)’으로 전환될 것이기 때문에, 주월 미군의 감축에 따른 전

    쟁 진행 상황의 변화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즉 미군의 철군이 지속되

    면 적군이 주월 한국군을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연합군의 철군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첫째 월남군의 대체계획이 뒤따라야 하고,

    둘째 공산 측의 상응적인 축전(縮戰) 조치가 있어야 하며, 셋째 파리협상에 진전이 있어야 함

    을 조건으로 제시한다. 한편 한국군의 철군 조건에 대해서는 우선 평화회담에서 제시하는 상

    호 철군 합의에 따라 철군할 것, 월남 정부의 요구, 한반도 내의 비상사태 발전 등 국내 사정,

    미군의 병력 감축이 일정 한도에 도달하여 주력부대가 철수함으로써 연합군의 안전에 위협을

    줄 우려가 있을 때 등을 고려하였다. 철군 시기는 원칙적으로 연합군, 특히 미군의 철수와 보

    조를 맞추고, 미·월 대체계획의 진전에 따른 철수 가능 시기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한

    다. 철군 방법에 대해서는 한국군의 파송 명분이 손상되지 않으면서, 월남정부 및 미국과 합의

    하에 진행하되, 철군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여 단계적 철수를 고려하고 특히 파월 진출 업체 및

    한국인 기술자에 대한 안전에 영향을 주지 않는 방향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①주월 한국군 철수 시 고려할 안전대책으로는 미군 철수로 인한 병력의 공백 상황에서 적

    군의 한국군 집중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주월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 및 주월 한국군에 대한

    대우 개선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한편 ②비상시에 주월 한국군이 철수할 경우

    에 대비해서 한국 정부는 국군 파월의 대의명분이 손상되지 않는 명예로운 철수 방법을 강구

    해야 하며, 또한 한반도 내부에서 긴급 사태 발전 등의 경우에도 주월 한국군의 철수가 원활

    하게 진행될 수 있는 독자적인 입장에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판단

    하였다.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③주월 한국군 철수와 병력 수준에 대해

    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합의한 바에

    따르면 한국군의 최대 병력 한계가

    600,000명인데, 파월 병력은 이에 포함되

    지 않았기 때문에 주월 한국군이 일시에

    철수할 경우 한국군 최대 병력 한계를 초

    월할 수 있으므로 주한 미군 철수와 같은

    문제들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

    였다. 따라서 주월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철수할 경우에는 한국과 미국 간의 외교

    분쟁이 야기될 가능성이 있으며, 특히 미

    국 측은 한국군의 병력수준 증가에 계속

    반대하고 지속적으로 주한 미군의 철수를

    요구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④주월 한국군의 철수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사항으로는 평화협상 타결 시에는 주월 한국군

    을 건설부대로 개편하여 월남의 전부 복구사업에 참여시키도록 준비해야 하며, 한국 민간인

    군수 용역단 대체 문제도 함께 고려했다. 그러나 끝까지 평화적 해결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한

    국군 철군 시 사용 장비의 휴대 문제, 철군 시 복원 비용의 미국 측 부담, 한국군 군사고문단

    잔류 문제 등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할 것으로 제기되었다. 또한 전후 월남 복구 및 건설 사업

    에 소요되는 물자와 용역을 제공할 것과, 경제 협력을 통한 대월 경제 진출 및 단계별 수출 진

    흥책에 대해서도 적절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주월 한국군 철군 관련 기사들 중 12월 22일자『International Herald Tribune』은 주월 미

    군의 철수 문제와 관련한 한국군 철수에 대한 기사의 내용을 전송하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한

    국의 국방장관은 한국군 철수를 고려하기 위해서는“첫째, 월남군이 미군을 대체할 정도로 강

    화될 때, 둘째, 적군의 적대행위가 감소될 때, 셋째, 파리 평화협상이 본질적으로 진전할 때”

    등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밝히고,“군사적 승리나 협상을 통하여 정당하고 항구적인 평

    화가 이루어지거나 또는 월남 정부로부터 철군 요청을 받을 때까지는 계속 월남에 한국군을

    주둔시키는 것이 기본 정책”이라는 점을 명시하였다.

    12월 21일자『New York Times』는‘Seoul is Planning No Troop Pullout’이라는 기사를

    게재하였는데, 미국 등 월남 전쟁에 참전한 연합군들의 철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

    가 주월 한국군의 철군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한국 정부가 월남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CET0046652 월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의 모습,1968

    113112 주월남 한국군 철수

  • 전의 상황에 진전이 없거나, 월

    남 정부의 주둔 요구가 철회되

    지 않는 한 계속 한국군을 주둔

    시키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

    미군의 철수에 박차를 가하는

    미국 정부와 대조적인 사실을

    주지시킨 것이다.

    한편 제3차 월남 참전국 외

    상회의에서 미·월 공동으로

    제의한「철군 문제에 관한 의

    견」에 대해 한국 정부는 월남

    전쟁에 참전한 모든 외국군대

    의 철수와 관련하여 연합군 측

    에서 공산군 측에 제시할 철군

    조건에 관한 공식 입장을 표명

    하였다. 한국 정부는 월맹군의 철수와 함께 연합군의 철수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미국과 월남

    이 제안한“철군문제에 관한 의견”을 연합군의 철수 대상이 전투부대 및 기타부대에 한정하

    되,‘모든 군사요원을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한국군도 연합

    군의 일부로 군사고문단의 형태로 월남에 잔류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미국과 월남의 정부

    는 철수시기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입장을 제기하였는데, 월맹군과 연합군의 철수가 동시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월맹군이 철수하기 시작하고 병력의 침투가 종식되는 때에 연합군의 단

    계적인 철군을 규정’하고 있다. 즉 연합군의 철수는 월맹군이 먼저 실질적으로 철수해야 그 다

    음에 비로소 진행될 사항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또한 양측이 단계적인 철군과 최초 철군의 동

    시 실시를 규정하고 있지만, 연합군 측의 최종 부대의 철수는 월맹 측의 철군이 완료된 후에

    실시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을 언급하였다.

    한편‘월맹이 철군 약속을 어기고 철수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 연합군측도 철수하

    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보하며, 새로운 협정 준수 조건으로 철군, 침투 종식, 비무장지대 존중,

    주요 도시에 대한 무차별 공격 근절, 철수 중이거나 철수 대기 중인 연합군에 대한 공격 근절

    등을 추가하였다. 또한 군사적인 문제 해결과 정치적인 문제 해결을 동시에 고려하되,‘정치적

    인 문제의 해결에 관한 합의 없이는 철군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상호

    관련시켜 해결을 도모해야 한다.’는 새로운 입장을 제시하였다.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월남의 국방장관 및 주요 정치

    인들은 주월 한국대사관을 방문

    하여 한국군의 추가 파병을 요청

    하였는데, 1970년 5월 18일 오후

    에 이루어진 정래혁 국방장관과

    의 면담에서 Vy 월남 국방장관은

    전쟁의 전황이 안정되고, 평정,

    개발 및 재건이 큰 진척을 이루고

    있다고 거론하면서, 한국군의 철

    군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표시

    했다. Vy 장관은 한국군 1개 사

    단의 철수 문제를 거론한 정래혁

    국방장관의 발언에 대해서 미군

    이 점진적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

    황에서 한국군마저 1970년에 1개

    사단의 철수를 고려하는 것은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Vy 장관은 캄보디아 상황이 월남 전쟁과 연결된 것임을 지적하며, 시하누크가 집권하

    면서 공산당의 숫자가 증가하였고 이들이 월남 전쟁에 직접 및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

    다고 비난하였다. 캄보디아 내에서 활동하는 공산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고작해야

    1,500~2,000여 명 정도로 예상했으나, 실제로 그 숫자가 10,000명 정도로 늘어났다고 토로

    하였다. 따라서 월남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캄보디아 내부의 공산 세력을 진압하는 것이 필요

    하며, 현재의 양호한 전황으로 파악할 때 머지않아 론 놀 장군이 주도하는 민주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여 사태가 호전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처럼 캄보디아 사태가 발전되자 월남 국방장

    관은 미국 정부가 이 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참전이나 참여보다는 국내의 반전 여론을 고려하

    여 다른 방법으로 관여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티우 월남 대통령도 캄보디아사태에 대해서 단기적으로는 큰 성공이나, 긴 안목으로 볼 때

    어려운 문제가 없지 않다고 밝혔다. 또한 캄보디아 사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확인하며,

    한국군의 추가 파병 문제와 연계하여 한국군의 캄보디아 사태 개입 여부를 질문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래혁 장관은 한국의 캄보디아 사태 개입 의사는 전혀 없으며, 월남 전쟁으로부터 한

    국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 고려 중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키 부통령 역시 캄보디아 사태를 집중

    적으로 언급하면서 론 놀 정권이 안정되면서 미국과 월남 군대의 캄보디아 개입 및 지원이 점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CET0038454 월남방문시의장대사열을받는정래혁국방부장관, 1970년

    115114 주월남 한국군 철수

    CET0058505 제3차 월남 참전국 외상회담에 참가한 최규하 외무부장관, 1969

  • 117

    와 철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최규하 외무부장관은 이러한 언론의 보도 내용을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보고하였으며, 그

    주요 내용은 미 상원이 1970년 8월 20일 1971년도 군사조달법안 심의 중 풀브라이트 상원 외

    교 위원장이 주월 연합군에게 미군보다 많은 전투수당을 지급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법안 통과

    에 관한 내용과 정부의 대책 등이다. 외무부장관은 또한 주월 한국군에게 지급되던 추가 전투

    수당은 미국 정부로부터 나온 것이며, 이에 대해서 미국 상원의원들은 청문회를 통해서 한국,

    태국, 필리핀 등의 군대를 소위“용병”이 아니냐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부 상원 반전

    파 의원들은 연합국의 조기 철군 방안으로 추가 수당의 지급을 제한하자는 수정안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 수정안이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예측하기 힘들다. 따라

    서 만약 이 수정안이 미국 정부에서 법률로 확정되면, 미국 정부가 수당 지급의 개정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브라

    운 각서」의 수정사항이라고 분

    석하였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는 미국의 요청대로 감액된 수

    당을 지급하거나, 감액된 부분

    을 한국 정부가 부담하거나, 또

    는「브라운 각서」의 이행 위반

    을 지적하며 주월 한국군 조기

    철수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고 제시하였다. 이처럼 미국 정

    부가 본 수정안을 법안으로 채

    택할 경우 한국 정부로서는 주

    월 한국군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분석하였다.

    최규하 외무부장관은 미국 의회에서 주월 한국군에 대한 추가 수당지급을 제한하는 수정안

    을 논의하는 이유를 에그뉴 부통령의 아시아 방문에 따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압력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하고, 이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

    라고 판단하였다. 부록에 첨부된〈주월 국군 해외수당 지급 실적〉에 따르면 1966년 3월 4일에

    한국과 미국 사이에 체결한「브라운 각서」에 의해서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특별 전투수당을

    지급하기로 합의하였으며, 그 실적은 1965년에 약 3.3백만 달러, 1966년에 19.9백만 달러,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차 활기를 띠고 있다고 주장하

    였다. Vein 월남군 총사령관

    은 미군의 철군에 따른 연합군

    의 재배치 계획에 대한 질문에

    미군이 주도하는 월남 전쟁의

    월남화 계획이 진전됨에 따라

    월남 정규군은 앞으로 북방과

    변경 지대를 담당하고, 연합군

    은 동부 해안과 평야지대를 담

    당하게 될 것이라고 답변하였

    다. 키엠 수상은 중국이 시하

    누크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 의

    사를 공개하고, 캄보디아 사태

    에 중국이 개입하는 문제에 대

    해서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였

    다.

    한편〈주월 한국군에 대한

    특별수당 지급을 둘러싼 문건〉들은 한국과 미국 정부 사이에 미묘한 긴장 관계를 조성하였다.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외무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풀브라이트 (J. William Fulbright) 민주

    당 상원의원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군대가 정상 급료의 몇 배에 달하는 급료 지급과 PX 사

    용권 등을 보장받지 않았다면 이들이 월남 전쟁에 파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미국 의

    회의 일부 기록들을 삭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참전 외국 군대에 지급하는 수당이 주

    월 미군에게 지급하는 양보다 많아서는 안 된다고 제기하였고, 주월 한국군이 미군과 동등한

    급료를 받아 암시장 활동을 일삼는다고 비난한 서한을 증거자료로 채택할 것을 제안하였다.

    써먼드 의원은 닉슨 대통령이 추진한 월남화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만

    약 미국이 월남에 참전한 국가들에게 약속한 것을 위반하는 경우에 이들 국가의 철군을 초래

    할 우려가 있으므로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주월 한국군에 대한 전투 특수수당이 줄어들면 한국군의 철수가 부득이하

    게 될 것이라는『Washington Post』와『New York Times』의 보도가 나오면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특히『New York Times』는 한국군 등 외국군에 대한 전투 수당의 삭감을 주장하는

    미국 의회의 분위기를 전하며, 장차 이 결정이 월남전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연합군의 사기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116 주월남 한국군 철수

    CET0026761 브라운주미대사와담소를나누는박정희대통령.브라운 대사와 이동원 외무부장관 사이에 체결한「브라운각서」에는월남추가파병에관한내용이포함되어있다, 1967

    CET0058544 월남에서철수하는미9사단의철수식모습, 1969

  • 119

    것이었다. 또한 라오스 및 캄보디아를 지원하기 위해 자유세계 군대에 대해 자금을 지출하는

    것은 금지되었는데, 대신 동 지역에서 주월 미군의 철수로 인해서 군사원조가 더욱 필요할 것

    이라고 판단하여 동남아에 대한 군사원조액을 증액하는 대안이 제시되었다.

    한편 신상철 주월 대사는〈외무

    부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자신이

    1970년 9월 28일에 티우 월남 대

    통령을 방문하여 약 2시간 동안 주

    월 한국군 철수 문제, 주월 태국군

    철수 문제, 월남의 캄보디아 지원

    문제, 미국의 캄보디아 지원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그 결

    과를 보고 하였다. 주월 한국군의

    감군 문제에 관해서 신상철 대사는

    “아직까지 한국 정부는 주월 한국

    군의 감군 문제에 관해 결정된 계

    획은 없다”고 대답하였으며, 일부

    언론에 의해서“미군이 철군하고

    있으니 한국군도 철군문제를 고려

    해야 될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활발하게 거론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한국군의 철군 문제가 월남 정부와 양국의 우호관

    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협의 하에 해결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서 티우 대통령은“한국의

    국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답하며, 1971년에는 한국에서도 선거가 있으니, 국내 정치적

    으로 주월 한국군 감축 안건이 필요하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박대통령에게 협조할 용의가 있

    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주월 한국군의 철수가 가시화 되면 월남군의 부담이 많아지고,

    특히 캄보디아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월남군의 철수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문제라

    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

    이 회담에서 티우 대통령은 월남전의 월남화 문제와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 등은 닉슨 대통

    령의 재임기간 중에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하며, 닉슨 대통령이 재선되면 그 만큼 시간이

    확보되고 이 문제들이 유리하게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티우 대통령은 특히“한국군

    장비 현대화 문제를 미국과 협상함에 있어서 한국 정부가 주월 한국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위협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1967년 9월말 현재 24.9백만 달러 수준이었다. 한편 주미 대사관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긴

    급 전문을 통해서 미 상원이 주월 연합군에 대한 전투 수당지급 금지안을 가결한데 이어, 캄보

    디아, 라오스 정부에 대한 지원을 위하여 월남군 또는 기타 자유세계 군대에게 미국의 자금을

    지원할 수 없게 하자는 내용의 합의안을 통과시켰다는 내용을 보고하였다.

    에그뉴 미국 부통령은 아시아를 순방하면서 제일 먼저 한국

    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환담하였다. 서울을 방문한 에

    그뉴 부통령은 64,000여명의 주한 미군 중에 약 20,000명

    정도가 철수할 것이며, 동시에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

    물자지원을 계속할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이에 대해서 박정

    희 대통령은 에그뉴 미국 부통령에게 북한의 공격이 있을 경

    우 미국의 한국 지원 보장을 요구 할 것이라고 외신이 보도하

    였다. 한편 태국의 다른 외신들도 에그뉴 미국 부통령은 박정

    희 한국 대통령이 요청한 북한의 남침 시 미국의 한국지원 보

    장을 본국에 요구할 것이며, 미국은 이를 수락할 것이라고 보

    도하였다. 또한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서 2억 달러의

    군사지원을 제공할 것이며, 일본에 주둔 중인 미국 공군기들

    이 한국에 대한 공중지원을 전담하며, 일본도 한국의 안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또 수상의 성명을 거론하면서 한국의

    안전보장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보도를 실었다.

    한편“만일 주월 한국군이 월남에서 철수할 경우 주한 미군을 월남에 재배치해야 한다”고 주

    장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 상원 풀브라이트 외교위원장의 발언에 대해서 외무부장관은 주미 대

    사에게 그 발언의 진의 확인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서 주미 대사는 풀브라이트 미 상원 외교위

    원장의 대담 내용을 보고하며, 풀브라이트 의원이 NBC TV와의 대담에서“한국을 포함한 연

    합국 군대에게 전혀 수당을 지급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미군보다 더 많은 수당을 지급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내용을 언급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또한“만약 전투수당의 지급 여부

    때문에 한국군이 철수한다면, 한국에 배치되어 있는 주한 미군이 월남으로 옮겨야 하는 것 아

    닌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단지 장소 정도는 바뀔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대답하

    였다.

    또한 외무부는 미국의 1971년 군사 구매법안에 대한 상하 양원 협의회가 당초 행정부가 요

    청했던 206억 달러의 요구액을 199억 달러로 통과시켰다는 내용을 파악하였다. 이 법안의 통

    과에 따라 기존에 미국 언론이 지적하였던 주월 한국군에 대한 수당지급은 변함없이 지속될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118 주월남 한국군 철수

    CET0041185 월남 파병 맹호부대를 시찰 중인 월남 외무부장관, 1970

    CET0020307 애그뉴 미국 부통령을 접견하는 박정희 대통령,1970

  • 121

    처럼 주월 한국군의 철수가 불가피한 상황으로 발전되자, 한국 정부는 철군과 연계된 몇 가지

    안건, 즉 미국의 안보지원 공약,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 전후 복구 사업에 한국의 주도적 참여

    등에 대해서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나종남(육군사관학교 부교수)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하면 확실히 효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하였다. 티우 대통령은 또한 닉슨 독트린에 대해서

    도“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든지, 해외의 미군을 점차 철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지적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닉슨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임에 틀림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따라서 한국은 닉슨이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는 기간 중에 한국군에게 필요한 장비 현대화와

    같은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그는 또한 주월 태국

    군이 캄보디아 사태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철군한 것에 대해서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앞으로

    월남은 캄보디아에 약 3,000여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공산세력을 제압할 계획이라고 설명하

    였다.

    미국의 캄보디아 사태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 티우 대통령은 미군의 직접적인 개입은 기대하

    기 힘들다고 설명하며, 11월의 중간 선거가 끝나면 캄보디아에 대한 지원의 정도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즉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최소한 중

    립국가로 남는 것을 원할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공산세력의 침투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

    라고 분석하였다.

    또한 티우 대통령은 캄보디아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의 직접 투입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고

    밝히면서, 다만 11월 중간선거가 끝난 이후에야 비로소 미국의 캄보디아에 대한 지원이 활발

    해 질 것으로 예측하였다. 또한 캄보디아의 총 병력은 약 12만 4천명이나, 실제 전투 병력은 8

    만 명이며, 적의 병력은 5~6만 명 정도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론 놀 장군에게 지방 민병대

    를 속히 조직시켜서, 공산군이 지방에서 확산하는 것을 방지하고 약화시켜야 하다고 조언했다

    고 한다.

    동남아의 주요 언론들이 한국군 철군 및 국내 군사상황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였는데, 1970

    년 12월 7일자『Saigon Post』는 주월 한국군의 철군문제에 대해서“한국은 현 시점에서는 철

    군할 의사가 없다. 한국 정부는 다른 연합국과 협의한 후 동의를 얻지 않고서는 철군하지 않겠

    다. 한국 정부는 현재 월남에서 한국군이 사용하고 있는 무기를 한국측에 인도하라고 미국측

    에 요청한 바 없다. 미국 의회가 1억 5천만 달러의 한국군 장비 현대화를 위한 대한국 군사원

    조 및 기타 대외 원조에 관한 닉슨 대통령의 추가 원조 요청안을 승인하여 주기를 희망한다”는

    기사를 전했다. 또한 이 신문은“12월 5일 임진강변에서 북괴군의 도발로 인하여 발생하였던

    총격전이 9시간이나 지속되었다”는 서울발 UPI 기사를〈Koreans Swap Fire Along Truce

    Line〉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주월 한국군의 철수 여부는 미군의 감축 등으로 인해서 불리한 상황에 처

    한 월남 정부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안건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도 미국과 태국 등 다른 연

    합군이 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월 한국군의 철군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120 주월남 한국군 철수

  • 화를 드러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또한 외교부 내에서 작성자 및 담당부서

    가 명확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문서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외상회의 초반에 공개된〈Briefing on the Military Situation in Vietnam presented to

    the Conference of 7 Allied Countries Bangkok-Thailand (11 May 1969)〉라는 제목의 참

    고자료는 방콕 외상회의에서 월남 대표인 Ngo-Dzu 중장이 참가국 외상들에게 월남전쟁의

    전황 및 각종 사안의 진행과정을 브리핑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전쟁의 진행과정에 대한 월남

    정부의 시각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마지막에 첨부한 지도 자료를 통해서 월맹군의 보급로 현

    황, 구정공세 이후의 주요 전황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철수에 관한 미월 공동제안〉이라는 문건은 방콕 월남 참전 7개국 외상회의에서 채택

    된 공동성명이며, 그동안 미국과 월남, 미국과 개별 참전 연합국 사이에 조율된 내용이 이 회

    의에서 종합 정리된 것이다. 본 문건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의견은 대체로 기본적, 원칙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몇 가지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우선 미국

    과 월남의 공동제안이 월남에 침략한 모든 월맹의 군사력이 철수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한 것

    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연합군의

    철수는 월맹군의 완전 철수와 연계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

    편 월맹이 월남뿐만 아니라 라오스

    및 캄보디아에서도 완전 철수해야

    하며, 이를 확인하기 위한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

    닐라 정상회의에서 확인했던 것처

    럼, 월맹의 철수가 확인된 이후에야

    비로소 연합군의 철수를 고려할 수

    있다는 기존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미국은 월맹이 철수를 하지

    않거나, 철수를 시작하더라도 완료

    되지 않는 경우에는 현재의 군사작

    전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 하였다.

    한편 닉슨 대통령은 1969년 3월 15일에 실시한 연설을 통해서 주월 미군의 철군을 공식적,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미국의 월남정책에 대 변화를 예고하였다. 이날 연설에서 닉슨 대통령

    이 제시한 8개항의 제안은 이후 월남 전쟁의 진행 과정에 주요한 변화를 초래하였고, 이후 미

    ChapterⅡ베트남전쟁

    관련

    해제

    CET0019154 필리핀마닐라7개국정상회담에참석한박정희대통령, 1969

    123

    1969년 5월 22일에 개최된 월남 참전 7개국 외상회의에서 채택될 공동성명 기초자료에는 미국과

    월남을 포함한 참가국과의 의견 조율, 의제 채택,

    정책 방향 결정 등이 반영되었다. 다만 최종 공동성

    명이 아니고, 중간에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수

    정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한국 정부의 입장

    이 변화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

    서가 구체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이러한 정책의 변

    본문서는 1969년 5월 22일에태국의수도방콕에서개최된월남전쟁참전7개국외상회의에

    서 채택될 공동성명의 기초자료로, 회담의 주요 의제에 대한 참가국과의 의견 조율, 공동성명

    채택, 정책방향결정등에관한한국정부의입장을밝힌자료들이포함되어있다. 월남참전7

    개국 외상회의의 핵심의제는「철수에 관한 미·월 공동제안」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월

    남에침략한모든공산주의군사력이철수해야하는점을강조하고연합군철수는월맹의완전

    철수와연계되어야한다는점을강조했다.

    23월남참전7개국외상회의3차Bangkok

    관리번호 : CA0006668

    쪽수 :총211쪽

    생산일자 : 1969년5월22일

    생산기관(작성자) : 외무부

    공개재분류중요기록해제집Ⅱ-외교통상부

    122 월남참전 7개국 외상회의 3차 Bangkok

    CET0058505 제3차월남참전국외상회담에참가한최규하외무부장관, 1969

  • 125

    합국 군대의 구체적인 철군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특히 향후 12개월 이내

    에 월남전의 획기적인 전황 호전이 없는 상황에서 공산측과 연합국측이 상호 철군하고 전쟁의

    월남화(Vietnamization)를 추구하는 것은 자칫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즉 월

    남 사회의 현저한 안정, 월남군의 증강 및 현대화, 월맹군의 완전한 철수 등이 선행되지 않는

    한 월남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편 닉슨 대통령의 변화된 태도는 그

    동안 월남전에 대해서 강한 자신감을 표명해 오던 미국 정부의 정책에 일부 변화를 암시하였

    다는 점에서 눈 여겨 볼만하다.

    나종남(육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