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행은 신라사람들과 함께 - 동해지역 문화유적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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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지역 문화유적 답사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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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해지역 문화유적

    답사 자료집

  • 목 차

    ❚골굴사 ································································ 5

    ❚기림사 ································································ 8

    ❚감은사 ································································ 12

    ❚대왕암 ································································ 15

    ❚이견대 ································································ 18

    ❚장항리절터 ························································· 20

    ❚박물관 ································································ 23

    ❚문화재 명칭도 ···················································· 29

    ❚신라사람들경주시 석장동 동국대학교 창업보육센터 214호 ☎054)748-7707http://www.isilla.co.kr

  • - 3 -

    골굴사(骨窟寺)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에서는 흔히 보이는 형식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자연환경 때문이

    다.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서 석굴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석굴암만 해도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석굴사원인 것이

    다.

    이 곳 함월산의 골굴사 석굴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

    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새김으

    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

    骨窟石窟」이라는 그림을 보면 목조전실이 묘사되어 있고, 숙종 12

    년(1686)에 우담 정시한이 쓴 山中日記 에 의하면, 이 석굴들의

    앞면을 목조기와집으로 막고 고운 단청을 하여 화려한 석굴들이

    마을을 이룬 듯 하였으며, 법당 굴이니 설법 굴이니 하는 구분이

    있었다고 한다.

    호국의 무

    술 선

    무도 총

    본산

    ▲꼭대기 보호각 속에 마애여래좌상이 보인다.

  • ❙신라사람들 www.isill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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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남아있는 굴은 법당 굴 뿐인데 굴 앞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어

    집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

    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이 심해 얼굴표정은 알 길이 없다. 법

    당 굴 말고는 여러 굴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그 형체만 남아있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마애

    불상은 오랜 풍화로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다. 바위를 이루는 석회암의 약한

    성질 때문에 더 쉽게 부셔지고 있다. 지금은 보호각을 설치해 놓고 있다.

    골굴사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기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함월산의 반대편

    에 천연석굴이 있으며 거기에는 굴이 12곳으로 구분되어 각기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하였으니 골굴사는 기림사의 암자였던 것 같다.

    원효대사가 죽은 뒤 그 아들 설총

    이 원효의 뼈를 갈아 실물크기의 조

    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三國遺事

    에 보인다. 또 설총이 한때 아버지가

    살고 있던 동굴부근에 살았다는 이야

    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골굴사가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

    진다.

    ❙마애불❙

    골굴사가 있는 함월산의 석회 암벽

    에 정동남향의 여래조상을 양각하였

    다. 이곳은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의

    행적이 이어졌음을 지금도 남아 있는 부윤의 이름과 인명의 낙서 등으로 알

    ▲골굴사 마애여래좌상 전경 오랜 풍화로

    오른손과 무릎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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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있다. 전체높이는 4m로 소발의 머리 위에 육계가 큼직하고 상호는 원만하

    며 미소가 잔잔히 배어 나온다. 또한 백호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어깨부터 얼굴의 뒤쪽 암벽을 많이 깎아 내어 본존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

    다. 그러나 무릎부분부터는 바위 면에 음각만 하여 자연에 조화롭게 했다. 양

    어깨를 덮어 물결모양으로 무릎아래까지 덮었고 가슴에는 승기지가 오른편에

    서 왼편으로 비스듬히 흘러 있다.

    옷 문양은 음각으로 처리하였는데

    약간 투박하다. 손의 모양은 항마촉지

    인을 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른손은

    풍화로 떨어져 나가 볼 수 없다. 왼쪽

    손은 모지와 인지를 잡고 있다. 대좌는

    구름 문양위의 연화좌에 좌불 하도록

    되어 있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형상

    을 하고 있다. 마모가 심하여 가운데

    일부분만 구름 문양임이 확인되고 있

    다. 광배는 암벽을 다듬어 음각으로 하

    였으며, 머리 주변에는 단판 연화문이

    조각되고 바깥으로 화려한 불꽃문양으

    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의 석질은 모래가 많이 섞인 석회암이어서 비바람에 많이 파손되어 있

    으며 양어깨와 무릎 쪽이 특히 심하다. 몇 년의 보호 작업 끝에 1988년 비를

    맞지 않도록 둥근 돔형의 천정을 만들고 암면에 화학처리를 하였다. 이 여래

    좌상은 통일신라전성기인 8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염문의 광배와 부처님의 미소가 통일신라의

    찬란함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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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림사(祇林寺)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 기슭에 있는 기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12) 천

    축국의 승려 광유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라 개칭하였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를 뜻한다. 즉, 석가모니가 생

    전에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승원 중에서 첫손에 꼽히는 것이 죽

    림정사와 기원정사이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가 20년 넘게 머무른 곳이다. 이와 더불어 불자들의 수행도 점차

    ▲기림사 전경

    함월산 자락이 그림처럼 기림사를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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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랑위주에서 정착위주로 바뀌었고 정사도 점차 수를 널리게 된다. 그 기원정

    사의 숲을 기림이라고 하니 함월산의 기림사는 그러한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

    이다.

    신라 제31대 신문

    왕은 대왕암에 다녀

    오던 길에 이 절의 서

    쪽 계곡에서 점심을

    들었으며, 고려말의

    각유는 이 절의 주지

    로 있었다. 그뒤 1578

    년(선조11)에 축선이

    중건하였고, 정조때에

    는 경주부윤 김광묵

    이 사재를 희사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1862년(철종13)에는 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봄에 사찰의 승려들이 부윤 송우화 등의 시주를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복원하였으며, 그 뒤 1878년의 중수를 거쳐 1905년에는 혜훈이 다시

    중수하였다. 31본산 시대에는 경주군 일대를 관장하였으나, 현재는 불국사에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조선시대에 이 절은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전, 서쪽에 오백나한

    전과 정광여래사리각인 삼층전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무량수각과 진남루가 있

    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전면 5칸, 측면 3칸의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왼쪽

    에 약사전, 오른쪽에 응진전, 앞쪽에 진남루가 사각의 성지를 이루고 있고, 뜰

    에는 삼층석탑과 새로 조성된 석등이 있다. 조금 떨어져 명부전, 삼성각, 관음

    전, 산신각, 주지실, 종무소, 요사채, 산문, 창고 등이 있으며, 특히 대방은 2동

    이 모두 중후하다. 그밖에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이들 당우 중에서 대적광전

    ▲ 신문왕과 관련된 용연폭포-용이 되어 승천하면서 생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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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절의 본당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1986년 9월에

    가운데 주존불의 복장에서 대반야경 등 금, 은, 사경 14권과 조선시대에 만든

    불경, 부처님 진신사리 4과 등이 발견되었다.

    또 약사전에는 약사삼존상과 사천왕

    상, 사라수왕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이 탱화는 기림사 창건의 연기설화를 보

    여주는 특이한 불화로서 근래 이를 모사

    하여 다시 그렸다. 이 밖에도 응진전 안

    에는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15호로 지정된

    건칠보살좌상과 목탑지, 석조치미, 문적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석조 치미는 화강

    암으로 만든 것으로 화문이 장식되어 있

    으며,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절에는 원래 오정수가 유명하였다

    고 한다. 그 중 장군수는 마시면 힘이 용솟음친다하여 인근에 널리 알려졌는

    데, 조선시대에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 나라에서

    샘을 메워 버렸다고 한다. 나한전 앞쪽 탑 자리에도 샘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또 하나는 절 입구에 있었으나 최근 도로 확장 때 매몰되었

    으며, 현재는 큰방 옆과 아랫마을에만 보존되어 있다. 이 절에는 천년에 한번

    핀다는 ‘우담바라’라는 한약초가 있었다고 전한다.

    ❙乾漆菩薩坐像(건칠보살좌상) ❙

    1501년에 조성된 관세음보살상인데, 새김이 정교하며, 드물게 전하는 건칠

    불(乾漆佛)이다. 보살상의 머리에는 상투를 올리고 그 위에 따로 만들어진 2

    ▲작지만 아담한 기림사 3층석탑

  • - 9 -

    단 구조의 보관을 썼는데 관의 표면에는 아름다운 당초문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얼굴이 둥글고 꽃 모양의 귀걸이를 달았으며 양어깨에는 천의를 걸치고

    세 가닥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군의는 가슴 부근까지 올려 입고 띠를 묶었는

    데 독특한 형태로 처리하였다.

    발끝에 늘어진 옷자락은 자연스러운 문양

    을 이루며 흐르고, 체구에 비해 작게 조각된

    손과 발은 비례감을 떨어뜨리나 아담하다. 이

    불상을 조선전기 불상과 비교해보면 얼굴이나

    비만한 체구에서 이국적인 조형감이 느껴져

    중국 명나라 조각의 영향이 다소 미친 것 같

    다. 특히, 건칠 기법을 사용한 점과 반가좌 자

    세를 취한 점이 주목되는 귀한 작품이다. 근

    래 따로 보관되어 있는 목조대좌에 묵서명이

    있어 이 보살상의 제작연대에 대한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엔 탑이 몇 개나 있을까?❚한국을 석탑의 나라, 중국을 전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하는

    데 과연 우리나라에는 탑이 몇 개나 될까?

    현재까지 조사된 전국의 탑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약 1,300여기를 헤아리고 있다.

    건조 재료에 따라 전탑(벽돌탑), 목탑, 석탑으로 나뉘는데 전탑은 만드는데 시간과

    인력이 많이 소모되고, 목탑은 쉽게 썩고 전란에 불에 타 버리는 등의 이유로 전탑

    과 목탑은 수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반면 석탑은 많은 수가 남아 있다.

    전탑은 안동, 청송 등지에 남아 있으며 목탑 양식을 취한 법주사 팔상전 정도가

    남아 있다.

    ▲건칠불 -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

    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 버린, 속이 빈 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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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은사(感恩寺)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효심으로 지은 절 - 감은사❙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터는 동해의 용이 되신 문

    무왕이 드나들었던 절터로 한국석탑의 전형양식을 보여주는 동서

    쌍탑으로 유명하다.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차례로 항복 받고 당나라와 8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문무대왕의 마지막 근심은 바다 건너 왜구였다. 죽어

    서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는 대왕의 뜻은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동해구에 절을 세워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를 격퇴하고자

    ▲발굴당시의 감은사터 전경

  • - 11 -

    절을 짓다, 완성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그 아들 신문왕이 절을 완공하고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 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라고 이름을 붙였다.

    1959년 발굴 조사 때

    가장 관심이 된 것은

    용이 되신 문무왕이 감

    은사에 출입하였다는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금당의 바닥 구조는 방

    형대석을 2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 위에 장대석

    을 걸쳐놓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듯이 놓고 그 위에 초석을 놓게 하였고 이 마루 장대석 밑은

    빈 공간으로 된 특수한 구조로 그 예가 없는 것이다. 금당의 빈 공간은 용이

    되신 문무대왕이 감은사 금당 아래에서 지친 몸을 편히 쉬시게 한 상징적인

    공간일 것이다. 감은사의 구조는 쌍탑 1금당 양식으로 종래의 1탑 1금당 양식

    에서 발전한 것이다. 창건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랜 된 것이다.

    ❙통일의 힘이 느껴지는 동∙서 3층 석탑(국보 112호)❙

    석탑은 통일 전부터 건립되었을 것으

    로 추측되나 현존하는 예는 없고 신문왕

    2년(682)에 건립한 감은사터에 있는 동

    서 쌍탑이 가장 오랜 것이다. 이 탑의 양

    식은 기단이 2중이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표시되고, 몸돌(탑신) 각 층에는

    우주가 표시되었고, 지붕돌(옥개석) 밑에

    ▲ 감은사터 전경 - 북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강당자리까지 집들이 들어서 있다(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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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직각으로 꺾이는 계단식 받침이 5층 있고,

    추녀는 좌우 끝이 수평을 이루며 낙수면은 완만

    히 경사지게 되었다.

    이러한 형식은 목탑의 외형을 가능한 한 그

    대로 재현하고자 한데서 오는 결과로서 삼국시

    대 백제의 석탑과는 다르며 이러한 양식이 이

    후 우리나라 석탑의 표본이 되어 한국 석탑의

    전형양식이라고 한다.

    통일 초기에 건립된 높이 약 13m의 감은사

    탑은 긴 찰주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상륜부가

    있었던 잔재로서 그 중심이 되었던 찰주만이

    남은 상태이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수 십 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청동

    제 사리함(보물 제366-1호)과 청동제 사각감(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3층 석탑

    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

    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1996년 4월 동탑 해체 수리 때에도 사리

    장엄구가 나와 신라 금관과 함께 신라의 금세공 기술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동시에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감은사터 삼층석탑(서탑), 기단

    아래 부분이 묻혀 있다(1914년)

    ▲서탑 출토 사리함 장식

  • - 13 -

    문무대왕의 수중릉 - 대왕암

    경주시 양북면 봉길 해수욕장에서 200m 되는 바다 가운데 작은

    바위섬이 있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대군주가 누워 계신 문무왕릉

    이다. 옛날부터 이곳 사람들은 대왕암이라 하여 섬 근처에는 얼씬

    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

    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놓여 있

    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KBS-TV ‘역사스페셜’팀의 조사결과 유골이 매장돼 있

    을 것이라는 추측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문무대왕의 뼈를 뿌린

    ▲봉길 해수욕장에서 바라 본 대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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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처로 확인됐다. 또한 물이 들어오는 부분보다 나가는 부분이 15Cm 가량

    낮게 만들어져 있는데 여기에는 일부러 돌을 다듬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

    뼈를 뿌린 후 상징적 무덤으로 만들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대왕❙

    대왕의 아버지는 무열왕 김

    춘추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를 따라 전쟁터에서 청춘을

    보낸 분이다. 21년간의 전쟁

    을 마친 문무왕은 병기와 투

    구를 무장사에 묻고 평화스러

    운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681년 7월, 문무왕은 죽으

    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

    겼다. 나의 유해를 불교

    식으로 화장해 동해에 장사

    지내라. 그리고 나를 위해 큰

    무덤을 만들지 말라, 옛날 천

    하를 다스리던 위력 있는 임

    금일지라도 끝내는 한 줌의

    흙더미로 변하고 마침내는 나

    무하는 아이들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와 토끼들이 굴을 파는

    데 죽은 사람의 일에 많은 경비를 들이는 일은 재물만 낭비하는 일이요, 백성

    들의 수고만 헛되게 하는 일일뿐, 영혼을 오래도록 고요히 평안하게 하는 일

    은 못될 것이며, 또한 내가 즐거워하는 일이 아니다.

    ▲문무왕의 화장터로 전해지는 능지탑 전경

    ▲능지탑-처음 알려질 당시의 모습으로 탑 위에 소나

    무가 무성하고 왼쪽에는 초가집도 있다. 사람 오른쪽에

    십이지호석 한 점 등이 보인다(1930년대)

  • - 15 -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화장하고 장례는 간소하게 하라. 그러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삼국사기 에 전하

    고 있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

    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이 얼마나 위

    대한 임금인가! 일찍이 어느 통일군주의 유언 중에 이른 유언이 또 있을까!

    오늘날 이곳에 오게 되면 대왕의 위대한 생애를 생각하면서 잠시 머리 숙

    여 감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문무대왕의 전기 정도는 꼭 읽어보

    아야 할 것이다.

    ❚만파식적 -고전에 전하는 신라의 피리❚

    일종의 가로피리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추모하였는

    데,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東海)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

    동(擧動)하였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

    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

    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은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

    로 삼았는데, 효소왕(孝昭王)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

    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고쳤다고 한다. 대금(大)의 기원을 이 만파식

    적에 두는 사람도 있으나, 이미 이전에 삼죽(三竹)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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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

    이견대(利見臺)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이 깃들은 대왕암, 감은

    사지와 인근 한 지역인 대본 초등학교 앞에 있다. 삼국유사 에

    인용된 감은사 사중기「感恩寺 寺中記」에 의하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처음 창건하였는데,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

    어서 동해바다의 해룡이 되었다. 감은사는 아들 신문왕이 681년 7

    월 7일에 왕위에 올라 682년에 완공을 하였다. 금당 뜰 아래에 동

    쪽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었는데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

    게 하기 위함이었다.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고 한다. 682년 5월에는

    왕이 이곳에서 해룡으로 화한 문무왕으로부터 옥대와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한다. 이견대란 명칭은 중국의 고전인 주

    역 周易 에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글귀가

    있어 그곳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현재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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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의 연대는 감은사와 대왕릉이 완공되는 시기이며, 동해안에 인공으로 마련

    하여 이 같이 이름을 단것으로 보인다. 즉 이견대는 동해구에서의 대왕릉의

    설치와 화룡 전설의 성립 같은 두 조건에 따라서 그에 알맞은 명칭을 찾았던

    것 같다.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에 정부에서 대지에 남아 있던 초석들을 근

    거로 하여 새로이 건립한 것이다. 현판인 「利見臺記」는 당시 신라오악 조사단

    장이었던 동빈 김상기 박사가 1976년에 쓰고 게액 및 현판은 1990년 3월에 후

    학인 황수영 박사와 김석산이 하였다.

    ❚대종천(大鐘川)❚토함산 동쪽을 감싸고 나온 물줄기가 함월산 기림사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합쳐져 양북면 일대의 넓은 들을 지나 대왕암이 있는 동해바다로 흘러드는데 이것

    이 대종천이다.

    고려시대의 일이다. 고종25년(1238년) 몽고의 침략으로 경주 황룡사의 구층탑을

    비롯한 문화재가 많이 불타버릴 때였다. 황룡사에는 봉덕사종(성덕대왕신종)의 4배

    가 넘는, 무게 100톤에 가까운 큰 종이 있었는데 몽고군들이 이 종을 탐내어 그들

    나라로 가져가기로 하였다.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당시로는 가장 효과적인 운반수

    단이어서 토함산 너머에 있는 하천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무왕의 화신인 호국룡은 몽고병들이 큰 종을 가져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배가 대종천에 뜨자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종을 실은 배가 침몰되면서

    더불어 종도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 이 후 큰 종이 지나간 개천이라고 해서 대종

    천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그 뒤부터는 풍랑이 심하게 일면 대종 우는소

    리가 동해일대에 들렸고 몇 년 전만 해도 마을의 해녀들이 대종을 보았다하여 탐

    사를 하였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은은히 울리는

    종소리의 주인공은 황룡사의 종이 아니라 감은사의 종으로 임진왜란때 왜병들이

    빠뜨린 것이라는 일설도 있다.

    그러나 대종천의 조선시대까지의 명칭은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를 통해 확인

    해보면 동해천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언제 오늘날의 대종천으로 바뀌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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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항리 절터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인 장항리

    사지는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에서 동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

    면 좌우에 계곡을 끼고 있는 낮은 대지에 있다. 이 계곡은 감은사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대종천의 상류이다. 장항리 사지

    는 이곳에 존재했던 사찰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동

    리의 이름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 사지라고 불러오고 있다. 그러

    나 원래 장항사가 있었기 때문에 동리 이름이 장항리로 되었는지

    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절터는 계곡의 비교적 높은 단의 위에 있고 오층석탑인 서탑과

    파괴된 동탑, 그리고 석조 불대좌가 남아 있다. 현재 땅위에 노출

    되어 있는 건물터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자리로 여겨지며, 석불대

    좌는 이 건물터의 중앙에 마련되어 있다. 건물의 기단 규모는 동

    ▲연화대좌 밑의 사자상이 태권도를 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있는 것이 귀엽다.

  • - 19 -

    서 15.8m, 남북12.7m이며 그 속에 남아 있는

    초석을 볼 때 정면과 측면이 각각 세 칸으로

    된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의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조 불대좌는 상하 각기 다

    른 돌로 만들어졌는데, 하부는 측면의 안상

    속에 신장과 신수를 조각한 팔각형으로 되어

    있고 상부는 연꽃을 조각한 원형연화대좌이

    다. 크기는 하부의 높이 0.6m, 최대 폭 2.4m

    이며 상부는 높이 0.53m, 지름 1.84m이다. 서

    탑인 오층석탑은 금당터에서 서남방향으로

    약 15m 거리를 두고 있으며, 동탑은 계곡에

    붕괴된 상태로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금당터와 서탑 사이에 부재를 모아두고 있다.

    서탑은 1925년 도굴범이 탑 속에 있는 사리장치를 탈취하기 위해 폭파함으

    로써 파괴되어 있던 것을 1932년 복원, 보수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다. 탑은 이중의 기단 위에 통일신라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

    으며 높이는 약 10m이다. 현재 파괴되어 있는 동탑도 남아 있는 부재로 미루

    어 보아 서탑과 규모가 같은 오층탑으로 여겨진다.

    이 절터의 금당자리에 있는 불대좌 위에 놓여 있던 석조불상은 1932년 서

    탑을 복원할 때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 박물관의 북쪽 뜰에 전시되

    어 있다. 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었던 것을 복원하였으나, 뒷부분의 광

    배 일부와 무릎 이하는 결실되었다. 머리와 얼굴모습 그리고 광배에 새겨져

    있는 작은 부처인 화불 등의 새긴 수법을 볼 때 8세기경에 만들어진 여래입

    상으로 판단되며, 현존 높이 3m이나 실제로는 4m이상 되는 큰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곡 속의 좁은 면적을 최대한 이용하여 쌍탑을 배치한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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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신라시대의 가람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강당이나 회랑의 존재는 아직 밝혀

    지지 않고 있다.

    ❚재미있는 불교용어❚야단법석 :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듣

    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이처럼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쓰이던 말이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게 되었다.

    건달 (바 ) : 우리는 주위에서 건달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 말도 불교에서 유래된 말로 원래는 음악과 향기를 담당하는 인도의 신으로 악기를 타고 춤을 추면

    서 우리 인간들을 즐겁게 해주는 신인데 지금은 내용이 변질되어 일하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을 건달(바)이라고 한다.

    아수라장 : 아수라는 인도 고대의 신으로 모습은 얼굴이 셋이고 8개의 손에 해와 달, 해골, 칼과 창 등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 아수라가 화가 나서 여덟 개의 팔을 휘두르면 온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는데 그 상태를 수라장 또는 아수라장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상태를 아수라장이라고 일컫는다.

  • - 21 -

    국립경주박물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보려면 박물관을 꼭 관람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주박물관은

    필수사항이다. 그러나 박물관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못하다. 그 이유는

    눈으로 보기만 하는 1회성 관람이 위주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을 관람할 때 해당 유물을 설명하는 음성기기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그 유물 앞에서 해당 자료를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역

    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어느 전시

    관에 어떤 유물이 전시돼 있는지 정도는 알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미술관 전경

    2002년 6월 개관한 곳으로 신라조각 ․ 공예 걸작품을 전시해 놓은 공간으로 1층에는 불상, 2층에는 불교 관련 공예품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으며 황룡사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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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를 갈무리 한 글을 정리한 것이다.

    (http://gyeongju.museum.go.kr)

    고 고 관 (본 관 )

    1) 선사 · 원삼국실 : 경주와 주변일대에서 출토된 신석기,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의 선사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의 모형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실에는 신석기 · 청동기 · 초기철기의 선사시대 및 원삼국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지만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그리 많지 않고 전

    시유물의 대부분은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유물들이다.

    이 전시실에는 지금까지의 고정된 전시개념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토기

    들을 한 곳에 모아 전시함으로써 관람객들이 경주지역의 토기문화를 일목

    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주 사라리고분, 구정

    동고분, 포항 옥성리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 철 갑옷, 투구, 말머리가리개,

    철칼 등의 무기류를 전시함으로써 신라가 주변 소국을 정복하고 고대국가

    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을 보여주고 있다.

    2) 고분실 : 경주일대의 고분과 각 유적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을 비롯한

    금장신구 등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명품들을 종류별, 시대별,

    주제별로 엄선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실은 현재 경주 시내 곳곳에 남

    아 있는 거대한 무덤들 가운데 발굴조사를 거쳐 출토된 부장품(副葬品)들

    을 한데 모아 전시하고 있다.

    즉, 금관총(金冠塚), 서봉총(瑞鳳塚), 천마총(天馬塚), 황남대총(皇南

    大塚), 교동(校洞)고분, 계림로(鷄林路)고분군, 월성로(月城路)고분군 등

    경주지역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용강동(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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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江 洞 ) 고 분 · 황 성 동( 隍 城 洞 ) 고 분 ,

    포항 냉수리고분 등 돌방무덤[石室

    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황성동 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신라초기의 제철관련 유물

    과 유구들을 모형과 함께 전시하여

    철기 제작공정을 자세히 알 수 있

    도록 하였다.

    금관 · 관장식 · 관모 · 허리띠 ·

    귀걸이 등의 금제 장신구와 자루

    솥·다리미 등의 청동용기류, 합·굽

    다리접시등의 금동용기류, 말갖춤

    류, 무기류, 토기, 유리컵, 각종 구슬 등 화려하고 풍부한 유물을 통해서 당

    시 예술의 뛰어난 면모와 대외문화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3) 국은기념실 : 고 국은 이양선박사가 생전에 수집한 귀중한 문화재

    666점을 기증한 높은 뜻을 기려 마련한 전시실로서 국보 275호 말탄 무사

    모양 토기가 눈에 띈다.

    이 박사는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수집품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문화재의

    공공성을 깊이 생각한 나머지 절약과 검소 속에서 30여년 동안 모아온 수집

    품을 경주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박물관에서는 그의 고마운 뜻을 기리기 위하여 기증유물실을 마련, 상설

    전시하고 있다.

    중요한 유물로는 기마인물형 토기를 비롯하여 경주 안계리(安溪里), 죽

    동리(竹東里), 대구 지산동(池山洞) 출토의 청동기 일괄유물, 일본과의 역

    사적인 관계를 말해주는 모자곡옥(母子曲玉), 도가니, 와질토기, 기와틀,

    ▲금제관모

    고고관은 국립경주박물관의 본관으로 신라금관

    을 비롯한 각종 금제유물과 각종 토기등 신라

    를 대표하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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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에 옻칠한 발걸이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한국의 고고학, 미술사 연구

    에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

    미 술 관

    1) 역사자료실 : 왕경을 중심으로

    찬란하고 화려했던 통일신라시대의

    유물, 왕경 모형, 도로유구 등이 전시

    되어 있다. 또한 경주지역에서 출토

    된 임신서기석, 남산신성비 등 금석

    문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특히 신

    라왕경의 복원 모형을 통해 당시에

    이미 도시계획이 상당히 발달하였음

    을 엿볼 수 있다.

    2) 조각실 Ⅰ : 삼국시대와 통일

    신라시대에 많이 제작된 소형 금동

    불상이 주제별, 시기별로 전시되어

    있어 금동불상의 양식적 변화과정 및

    명칭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3) 조각실 Ⅱ :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석조유물(불상, 능묘

    조각)을 전시하고 있다.

    장창골 석조미륵 삼존불을 비롯하여 송화산 석조미륵 반가사유상, 서악

    동고분 출토 신장상 문비석 등 신라 석조미술이 최고수준에 달했음을 느낄

    수 있다.

    4) 금속공예실 : 신라 금속공예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사리장엄구를 비

    롯하여 범종 및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각종 불구류와 와전류가 전시돼 있

    ▲애기부처

    친근한 미소로 박물관 유물 중 가장 인기 있는 부

    처님으로 경주 남산 장창골에서 가져왔다.

  • - 25 -

    다. 감은사 동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를 비롯하여 신라부터 고려시대까

    지의 금속공예품들과 와전류를 통해 뛰어난 신라인의 공예기술을 이해할

    수 있다.

    5) 황룡사실 : 황룡사는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대표적인 호

    국사찰로 황룡사실에서는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사리구, 불상, 지진구, 기와

    등이 전시돼 있다.

    황룡사는 553년에 창건된 대표적인 신라의 호국사찰로서 진흥왕 14년에

    새 궁궐을 지으려다가 황룡(黃龍)이 나타나 계획을 바꾸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었으나 복원된 황룡사 모형을 통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의 모습

    과 당시 최고조에 달했던 목조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안압지(월지)관

    안압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3만여점의 유물 가운데 예술성이 뛰어난

    700여점을 선별하여 전시해 놓았다. 이들 유물은 고분 유물과는 달리 생활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 당시 신라시대 궁중생활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하

    는 실생활용품들이며 그 종류도 다양하다.

    아울러 이 유물들은 통일신라문화를 밝혀줄 뿐 아니라 그 당시 당(唐)

    및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실생활과 관계된 금속공예품,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불상과 불구류, 목제 건축부재, 목간(木簡) 등을 비롯한 목제품, 철제

    품, 토제품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특히 출토 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와전류(瓦塼類)는 통일신라 와전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1) 14면체 주사위 : 용도는 귀족들이 놀이판을 벌일 때 이 주사위를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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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려서 나오는 글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는 놀이이다. 총 14면의 주사위에

    는 각 면에 재미나는 글들이 쓰여져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삼잔일거’ : 술 세잔 한꺼번에 마시기

    ‘음진대소’ : 술 한잔 마시고 크게 웃기

    ‘양잔즉방’ : 상에 술 두잔 이상 놓지 않기 등등…

    야 외 정 원

    박물관 정원에는

    경주 일대의 궁궐터

    나 절터에서 옮겨온

    400여점의 석조유물

    이 전시되고 있다. 우

    리나라의 대표적인

    범종인 성덕대왕신종

    ( 聖 德 大 王 神 鍾 ) 을

    비롯하여 경주지역의

    절터 궁궐터 등에서

    옮겨온 석조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석조유물은 대부분이 불교관계 조각물로서 석불, 석탑, 석조, 석등, 비석

    받침 등이며 이밖에 주춧돌, 계단석과 같은 건축부재도 다수 있다.

    장항리 석조여래입상, 낭산 출토 관음보살입상, 분황사 우물에서 출토된

    20여구의 불상, 고선사터삼층석탑, 사자·공작무늬돌 등이 그 대표적인 전시

    물이다.

    ▲고선사지 3층석탑

    덕동댐 건설로 고선사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7년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층 몸돌에는 문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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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성덕대왕신종(국보 29호)

    국 립 경 주 박 물 관

    입구를 들어서면 제

    일 먼저 눈에들어오

    는 것이 있다. 성덕

    대왕신종을 매달고

    있는 종각이다. 성

    덕대왕신종은 신라

    35대 경덕왕이 부친

    성덕왕의 명복을 빌

    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기 시작해 혜공

    왕 7년(771)에 완성

    하였다. 처음 봉덕

    사에 달았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박물관이 완성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신종의 모양은 입 부분에 당

    초 무늬로 된 띠가 있으며 당초

    무늬 사이에 8개의 큼직한 연꽃

    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돌렸다.

    종의 위에는 용이 음관을 감고

    있고 몸체에는 당초무늬의 띠가

    있고 그 아래 4개의 유곽 안에

    각각 9개씩 모두 36개의 유두를

    넣었으며 대칭으로 보상화무늬

    와 연꽃으로 된 당좌가 있다.

    ▲성덕대왕신종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재물로 바쳤다고 해 에밀레종이라는 별명도 가

    지고 있다.

    ▲성덕대왕신종 음관

    음관과 용뉴는 우리나라 종에만 있는 특징으로 중

    국, 일본종에는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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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좌는 종을 치는 자리이다. 당좌는 앞면과 뒷면 두 곳에 있는데 종 높

    이의 1/3쯤 되는 곳에 보상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연꽃은 부처님을 상

    징하는 꽃으로 종소리가 온 누리에 맑게 퍼져 부처님 말씀을 전하려는 뜻

    일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

    상이 4구 조각되어 있다.비

    천은 연꽃 방석에 앉아 꽃구

    름을 타고 옷자락을 휘날리

    며 향로를 받들고 땅으로 내

    려오는 모습을하고 있다. 비

    천상 사이의 두 곳에 1천자

    가 넘는 글씨가 있는데 종의

    유래와 종을 만들 때 참가한

    사람과 글쓴이 등이 있다.

    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종소리는 ‘일승원음(一乘圓音)’이라 하고 그 뜻은

    이 소리를 들으면 곧 바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진리를 포함한

    둥근 소리란 뜻이니 곧 바로 부처님의 음성이 된다.

    신종의 종소리는 단연 세계최고이다. 맑은 종소리의 비결은 음관에 있다

    고 한다. 중국과 일본 종에는 음관이 없다. 유독 우리 종에만 음관이 있어

    음관이 있는 종을 특별히 한국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음관에 대한 정밀 검사를 한 결과 음관을 덮었을 때는 깡통 깨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열었을 때는 막힌 숨이 탁 트인 듯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또한 신종의 맥놀이파의 청음은 사람이 참선이나 수면에 돌입했을 때의 뇌

    파 주파수와 동일하다는 결과가 나와 종소리의 신비를 밝혀주는 기회가 되

    었다.

    ▲성덕대왕신종 이전 광경

    1915년 봉황대에서 동부동 구 박물관으로 옮겨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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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래상 명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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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상 명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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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탑의 세부명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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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 부분명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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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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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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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 ▮신라사람들▮

    Part 1 테마 투어버스 운행

    Part 2 문화유적&경주남산답사

    Part 3 주제가 있는 테마답사

    Part 4 사진으로 배우는 유적 슬라이드 강의

    Part 5 색다른 재미와 체험 체험학습

    Part 5 문화의 세기 기업연수&문화강좌

    ❚신라사람들❚Tel : 054-748-7707. Fax : 054-748-2212. isilla.co.kr(748-140) 경북 경주시 신평동 375번지 보문상가 제4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