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천지인 참부모님mnet.upf.cc/pwpa_tp/201207_trans_kr_fv.pdf · 2) 레다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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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애하는 천지인 참부모님, 작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우연히 호텔 로비에서 휠체어를 타고 공연장으로 향하 시는 모습을 뵌 이후 오랫동안 인사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산과 들, 그리고 바다에서 저희들을 훈련시켜 주신 참부모님을 생각하면 금석지감 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랜만에 이번 소집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근황을 보고 드리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Ⅰ. 국가메시아 섭리 및 봉사활동 (1996년~2012년) 1) 국가메시아 섭리의 출발 (1996년 7월 1일) 1996년 7월의 국가 메시아 섭리에 이어 동년 11월에는 4,200명의 남미 33개국 을 중심으로 한 섭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참부모님께서는 "일생 일대의 큰 도 박이다. 작은 나라 3-4개는 서서히 복귀될 것이다"라고 하셔서 그 대단한 기세에 감탄했습니다. 당시 저희 어머니도 "이번이 마지막 봉사가 될 것이다"라며, 큰 지원 을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저희들은 부부동반으로 우루과이 수련회에 참석할 수 있 었고, 이후 120명의 식구와 함께 바하마에 상륙한 뒤 그 곳에서 총독이 주최하는 파티에 선교사 전원이 초대되어 바하마에서 국가적인 수련회를 개최할 수 있었습니 다. 그런데 단 한 명의 애번저리스트가 야당 성향을 지닌 낫소즈 가디언에 "UC는 컬트다!"라고 호소하여 여당을 공격한 바람에, 때 마침 총선을 앞두고 있던 총리는 저희들에게 국외추방을 명했습니다. 그 당시 똑같이 국외추방 위기에 놓인 앤티가 바부다는 총리의 교사와의 관계를 통해 그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바하마에서도 이 와 비슷하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화가 있었습니다만, 불신의 소용돌이가 일어 난 나머지 시련을 극복하지 못해 국외추방이라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 후 에도 좀처럼 하나가 되지 못 하고 선교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살려주지 못한 채 오 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93세라는 고령의 참부모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기반을 아직까지도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것은 저희들이 너무나도 부족한 탓이며, 하늘과 참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2) 레다 섭리 (1999년 8월 1일~) 1999년 8월 1일부터는 오린뽀 및 레다 섭리가 시작되었는데, 나베레케의 아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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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경애하는 천지인 참부모님mnet.upf.cc/pwpa_tp/201207_trans_kr_fv.pdf · 2) 레다 섭리 (1999년 8월 1일~) ... 휴식시간에 소생으로부터 오른쪽으로 3번째

1

경애하는 천지인 참부모님,

작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우연히 호텔 로비에서 휠체어를 타고 공연장으로 향하

시는 모습을 뵌 이후 오랫동안 인사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산과 들, 그리고 바다에서 저희들을 훈련시켜 주신 참부모님을 생각하면 금석지감

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랜만에 이번 소집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근황을

보고 드리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Ⅰ. 국가메시아 섭리 및 봉사활동 (1996년~2012년)

1) 국가메시아 섭리의 출발 (1996년 7월 1일)

1996년 7월의 국가 메시아 섭리에 이어 동년 11월에는 4,200명의 남미 33개국

을 중심으로 한 섭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참부모님께서는 "일생 일대의 큰 도

박이다. 작은 나라 3-4개는 서서히 복귀될 것이다"라고 하셔서 그 대단한 기세에

감탄했습니다. 당시 저희 어머니도 "이번이 마지막 봉사가 될 것이다"라며, 큰 지원

을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저희들은 부부동반으로 우루과이 수련회에 참석할 수 있

었고, 이후 120명의 식구와 함께 바하마에 상륙한 뒤 그 곳에서 총독이 주최하는

파티에 선교사 전원이 초대되어 바하마에서 국가적인 수련회를 개최할 수 있었습니

다. 그런데 단 한 명의 애번저리스트가 야당 성향을 지닌 낫소즈 가디언에 "UC는

컬트다!"라고 호소하여 여당을 공격한 바람에, 때 마침 총선을 앞두고 있던 총리는

저희들에게 국외추방을 명했습니다. 그 당시 똑같이 국외추방 위기에 놓인 앤티가

바부다는 총리의 교사와의 관계를 통해 그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바하마에서도 이

와 비슷하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화가 있었습니다만, 불신의 소용돌이가 일어

난 나머지 시련을 극복하지 못해 국외추방이라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 후

에도 좀처럼 하나가 되지 못 하고 선교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살려주지 못한 채 오

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93세라는 고령의 참부모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기반을

아직까지도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것은 저희들이 너무나도 부족한 탓이며, 하늘과 참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2) 레다 섭리 (1999년 8월 1일~)

1999년 8월 1일부터는 오린뽀 및 레다 섭리가 시작되었는데, 나베레케의 아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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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 호텔에 재빨리 집합할 수 있었던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부모님의 부름에 그 곳에 모인 국가메시아는 11명, "아버님과 어머님을 포함하면

13명이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지원해준

5만 달러의 절반을 레다 주변 국가에 대한 조사 및 섭외 활동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카지쿠리(梶栗) 선생과 사바누마(柴沼)씨와 함께 파라과이강에 몸을 담그고 자연 에

어컨으로 무더위를 견디며 레다 토목 공사를 했습니다. 일본과 레더를 여러 번 왕

래하는 사이에 여비를 마련하는 것조차 점점 어려워져 일본에서 자립할 기반을 세

울 필요성을 진심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3) 미래구상전략포럼 창설 (2002년 1월 23일~)

제반 사정으로 인해 바하마에도, 레다에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여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3의 변천이 있었습니다만,

일본 최대의 싱크탱크인 (주)일본종합연구소(직원 2,000명)의 창발(創発)센터장의

신타니 후미오(新谷文夫) 씨가 ‘장소 무상 제공’이라는 후의를 베풀어준 덕분에

2002년 1월 23일 싱크탱크 미래구상전략포럼을 창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해

로 만 10주년을 맞이했습니다만, 주말이 없는 24시간 체제로 운영돼 아카데미 시

절보다도 더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2005년에는 글로벌적인 이슈를 해결하기 위

해 수많은 NGO 단체가 결집해 만든 세계시민기구(시민유엔 : Global Citizens

Initiative)를 창설했습니다. 경제산업성과 외무성을 비롯해 무사시노시와 각 대학,

여러 기업들의 협찬도 받으면서 크게 비약하고자 했을 때인 2009년 6월 16일, (이

날은 공교롭게도 이시이 이츠하루(石井光治) 회장의 승화식이 거행된 날이자 역사

편찬의 츠루가이 미노루(鶴谷稔) 씨가 쓰러졌던 날임) 아사히신문이 "이제 그 존재

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라며, 미래구상전략포럼을 공격해 왔습니다. 사회적 십자

가에 걸려 여기서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그로부터 몇 달 후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듬해인 2010년에는 도쿄대학에서 국제평화문화포

럼을 개최했고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의 후원을 받아 현지에서도 감동적인 포럼

을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 기업의 협력으로 인해 케냐 및 마이애미, 바하마

에서 감동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4) 아사히신문의 공격과 부활섭리 (2009년 6월 16일)

결국 아사히신문의 공격은 사탄이 메시아를 입증해 섭리에 협조한 결과가 되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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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아사히신문의 공격에도 겁먹지 않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소생의 모습을 보

고 "오오와키 씨는 통일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초월하여 일본을

위해,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소생의 진심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지금보다도 더 강한 결속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올라가면 내려가고

또다시 올라간다. 이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진짜가 된다."라는 참부모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부활의 기적도 계속 지속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인 2011년 3월 11

일에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급속히 일본 경제시장도 위축되어 소

생의 지적 자원봉사 활동도 사무소를 운영하는 것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단 10년으로 일단락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2012년을 맞이했습니다.

5) 하늘의 은사의 계기 (2012년 2월)

그러자 또다시 뜻밖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 계기는 지난 2월 초 아침 5시경에

마쓰에 (이즈모)에 있는 코마츠 아키오(小松昭夫) 사장한테서 결려온 전화였습니다.

"오오와키 씨는 새벽 3시부터 일하시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해 전화 드렸습니다"

라고 말문을 튼 뒤, 끝없이 이야기가 이어져 오전 9시 이후까지 통화했습니다. 이

렇게 무려 4시간이 지났을 무렵, 소생이 작년(2011년) 8월 6일 동북부흥지원대회에

갔을 때 파티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소생의 가방이 일시적으로 분실

된 사건을 통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깨달음 얻었다는 이야

기를 했더니 "그것으로 모든 것을 알았다. 오오와키 씨는 드문 분이다. 조금 더 노

력하면 세계에 큰 도움을 줄 사람이 될 것이니, 40일 동안의 생활은 보장해 드릴

테니 마쓰에로 오세요."라고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40일간 마쓰에에 있

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고마츠 사장 내외는 다마

즈쿠리온천과 요정에 초대해 주었습니다. 그 때 소생의 고향이 이나바의 하얀 토끼

전설의 땅이고 코마츠 사장의 고향은 이즈모대사 발상의 마을임으로 오오쿠니누시

노미코토의 도움을 받은 하얀 토끼의 신화를 떠올렸습니다.

또 체류기간 중에 소생이 당뇨병에 걸렸고, 병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상경길 도중에 고향인 돗토리를 방문해 종족메시아 섭

리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40일 후 도쿄에 돌아간 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은사를

경험함으로써 아련하게 나마 향후 방향성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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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3대 은사

1) 나카소네 전 총리에게 지적 성과를 전달했습니다. (2012년 4월 11일)

차녀 치에코(千恵子)는 흥숙님과 함께 춤추고 싶다며 발레에 몰두해 15살 때 우

크라이나로 유학 갔습니다. 그러나 유학 와중에 허리를 다쳐 진로를 예술학으로 전

향하게 되는데, 그 때 스베틀라나 리바루코 교수(평화대사)를 만났습니다. 그 인연

으로 예술학 박사학위까지 수령해 12년 만에 일본으로 귀국했습니다. 현재 남편인

노무라 야스히로(野村安弘: 노무라 켄지 선생의 4남) 씨와 함께 한국에서 유학생

기숙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스베틀라나 교수는 1년에 2번 정도 연구하러 일본을

찾아옵니다. 지난 4월에는 통역인 치에코가 한국에서 귀국하지 못해 소생이 도와드

리게 되었습니다. 일본을 떠나기 하루 전날, 박사는 "사랑하는 가부키를 보고 가고

싶다"라며, 답례로 소생을 초대해 주었습니다. "일본에 있으면 매일이라도 가부키를

보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왜 이렇게 좋아할까?"라는 호기심에 끌려 초대에

응했습니다. 휴식시간에 소생으로부터 오른쪽으로 3번째 자리에서 나카소네 전 총

리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습니다. 이후 5시간 반 동안 "가나데혼 츄신구라(仮名手

本忠臣蔵)"를 함께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휴식시간이 총 5번 정도 있었는데, 점심

휴식시간은 35분이나 있어 그 때 스베틀라나 교수를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나카소

네 전 총리도 매우 기뻐하여 같이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이 우연한 나카소네 전

총리와의 만남은 소생에게 요셉이 감옥에서 임금의 급사를 만난 광경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당시 소생은 일주일 안에 사무실을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만, 하

루를 꼬박 들여 지난 10년 간의 정책 제언을 정리한 후 상당한 분량의 자료를 인

쇄하고 보냈습니다.

현재 나카소네 전 총리는 세계평화연구소의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 재단의 기

금 70억 엔은 다케시타(竹下) 전 총리가 들여온 것입니다. 하늘의 "한(恨)"이 된 나

카소네 재정(中曽根裁定)의 요인입니다. 소생이 마쓰에에 가 있는 40일 동안에 카

사이 테츠오(河西徹夫) 씨는 40일 금식을 했습니다. 소생은 와세다대학 출신의 식

구 모임인 소우세이카이(早成会)의 회장으로서 금식 종료를 축하해 주기 위해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 "왜 금식했는가?"라고 물었는데, 그는 "참아버님의 입국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카소네 재정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데 이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국회의원을 그만둔 뒤 평화연구소에서 일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만, 아무리 국가적으로 뜻 깊은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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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어떻게 된 것인지요? 지금 금리가

거의 제로에 가까워 어마어마한 돈이 잠들어 있습니다. 평화연구소는 당초 있었던

큰 빌딩에서 이사를 갔고, 연구프로젝트 비용도 사사가와재단(笹川財団)에서 지원

받고 있습니다.

이번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건곤일척으로 소생의 10년간의 지적 공헌을 전달했

습니다만, 나카소네 전 총리에게 작게나마 자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솔직

히 말씀 드리자면, 지적 자원봉사는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앞으로도 차세

대를 위한 유산으로 계속 키워나가고자 합니다.

2) 유엔OB모임이 일본에서도 결성되었습니다. (2012년 3월)

"조국이 그대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 건지 묻지 말고, 그대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1961년 J.F. 케네디 취임연설)

10년간의 소생의 "위하여 사는" 불타오르는 불길이 유엔OB 사람들에게도 전파되

어 지난 3월 일본에서도 유엔OB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지

금까지 일본에 유엔OB모임이 없었다는 사실 자체를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롱박에서 망아지가 나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소생의 지난 10년간의 봉사활

동이 이것 하나만을 보더라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느꼈습니다.

초대 회장으로 이세 모모요(伊勢桃代) 씨가 취임했습니다. (청평 WLS 참석함, 유

엔대학 설립자, 전 유엔직원연수센터장) 올 7월 19일에 유엔 OB 모임이 있어 그

회의를 마치고 20일 방한할 예정입니다. 소생의 역할은 유엔 OB 분들과 젊은이 사

이의 가교역할로 무대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가학회(創価

学会) 본부도 이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열심히 하는 것보

다 그들이 열심히 뛰어준다면 일본도 유엔도 변화될 희망이 생길 것입니다.

3) "사람과 사람의 마음의 중재자"의 일(자원봉사사업)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이공학 붐이 일어나기 시작할 무렵 와세다대학 이공학부를 다니면서 과학기술의

첨병이 되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설령 본인이 말주변이 없다 하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마음의 중재자가 될 필요성을 통감하여 벼랑 끝에서 뛰어내릴 각오

로 큰 결단을 한 50년 전의 일을 상기해봅니다.

처음 10년 동안은 사람을 하늘에 연결하는 전도활동을, 1970년대부터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 다음 하늘에 연결하는 섭외활동을 했습니다. 북남미를 거쳐,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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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터는 시즈(Seeds: 씨앗)와 니즈(Needs)를 연결함으로써 양쪽에게 행복한 결과

를 가져다 주는 브로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중재자는 양쪽에서 신뢰를 얻지 못

하면 서로 연결시켜 줄 수 없습니다. 신앙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것

은 서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고, 참부모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식구는 참부모

님 덕분에 서로 믿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쌓아온 봉사활동이 막강한 인맥을 형성하게 되면서 자

연스럽게 서로를 연결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어 결과적으로 생활이 유지되고 있습

니다. 마치 마태복음 6장 33절처럼 하늘을 위해 살고자 개척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

습니다. 미래구상전략포럼을 함께 시작한 신다니 소장은 "앞으로는 자원봉사 경제

시대가 된다"라고 했었습니다. 작년 1월 마이애미를 방문했을 때 미국 사회의 산업

중 절반 이상이 사회공헌형 비즈니스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자본주

의 경제의 주류를 걸어온 나카타니 아와오(中谷巌) 씨도 "자본주의와 그 이후의 세

계"에 대해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는 이기주의 경제에서 이타주의 경제, 즉

호혜사회(互恵社会)로 이행되고 있습니다. 소생이 걸어온 길이 어려웠던 것은 다소

시대에 앞서 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재 진행 중인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A) 대학의 재생

저출산이 진행되면서 일본의 600개 대학 중 200개, 실로 30% 이상이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인 군마현 다카사키시(群馬県高崎市)에 있는 창조

학원대학(創造学園大学)의 이사장이 소생이 잘 알고 있는 기업그룹 회장에게 도움

을 요청해 소생에게 그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2-3명의 대학 총장에게 상담해봤더니

모두들 그 대학의 경영난에 대해 익히 알고 있어 이 일을 위해 위험을 무릎 쓰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위기야 말로 방향 전환의 기회입니다. 현재

소생은 대학 재건을 위한 진영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아키타현이 설립한 대학이 파

탄 나 아키타현 지사는 동경외국어 대학의 나카지마 미네오(中嶋嶺雄) 학장에게 대

학의 재건을 의뢰했습니다. 이제 이 대학은 아키타국제교양대학(秋田国際教養大学)

으로 잘 회생되어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는 대표적인 대학으로 도쿄대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는 시대의 니즈에 잘 부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창조학원대학은 료고구(両国)에 도쿄분교가 있어 중국인 유학생들이 개

호사(介護士)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원래 예술 및 간호 계열의 대학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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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어떻게든 시대의 니즈에 부응하는 개성 있는 대학을 만들기 위해 구상을 다

듬고자 합니다.

B) 토양개량 및 바다의 소생

카지쿠리 회장의 동생인 카지쿠리 타츠야(梶栗達也) 씨는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

안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토양개량의 외길을 걸어온 사람입니다. 순환형사회개발협

회의 회장인 그는 동료들과 같이 지금 일본 동북지방 대지진 부흥을 위해 토양개량

에 힘쓰고 있습니다. TV 아사히 뉴스에서도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다이세이건설

(大成建設) 등의 슈퍼종합건설업자는 눈앞의 이익만을 쫓아 파편이나 콘크리트, 해

일에 밀려 온 중금속 등을 그대로 매립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는 환경보전이라는

측면에서 미생물 사용을 통해 토양을 개량하면서 부흥시키고자 하는 카지쿠리 씨의

노선과 맞지 않아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갈등에 대한

조정방안을 모색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가시마(佐渡ヶ島)의 천연

기념물인 따오기를 번식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수질이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 2년 사이에 고향이 사도(佐渡)인 우간다 국가메시아 카와쿠보(川久保) 씨와 차

드 국가메시아인 사토 요시노리(佐藤儀義) 씨가 순환형사회개발협회의 활성공법으

로 산성비의 피해가 심한 산림을 잘 소생시켜 사도시에서 강 수질이 좋아졌다는 평

가를 받아 향후 전국적인 전개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두 국가메시아는 임지

국가에서도 이를 활용하고 싶다고 합니다. 소생은 일본 최고의 잠수부 수중공사 전

문가인 세부야잠수공업(渋谷潜水工業)의 시부야 사장을 비롯하여 관련자들에게 이

내용을 알리고 있습니다. 또 시부야 사장은 지난 6월 18일, NHK 종합TV 의 1시간

프로그램인 "일의 방식, 프로페셔널"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http://www.nhk.or.jp/professional/2012/0618/index.html)

C) 원자력 문제

우주의 궁극적인 에너지인 원자력이 전쟁의 도구로 그 에너지의 문이 열린 것은

인류에 있어 불행한 일이며, 마치 판도라 상자가 연린 듯 성가신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태양은 지핵의 마그마, 인체는 핵융합으로 열을 발생하는 등 장기적으로

는 원자력 개발은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원자폭탄의 산물인 경수로 원자력발전은

그만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22조 엔의 비즈니스모델은 민주

당과 GE 등의 이권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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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륨 발전은 U. 위구나 박사, 와인버그 박사, 나시보리(西堀) 선생 등이 안전한

원자력발전소로 권장했었습니다만, "방위전력이 되지 못한다, 경수로 발전 추진에

방해된다"라며 거부 당해 왔습니다. 이와 같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일본에서는

지하 원전 방안도 묵살되어 왔습니다. 흔히 미스터 토륨으로 알려져 있는 후루카와

카즈오(古川和男) 박사도 1960년대 초 4년간 오크리지에서 작동 중이던 실험로의

소형 버전을 만들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습니다만, 작년 말 암으로 돌아가셨

습니다. 후루카와 선생의 유지를 받든 사람과 토륨 안전 원전 추진을 위해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대표자 중 한 사람이 도쿄대학 전 총장인 아리마 아키토(有馬

朗人) 씨(원자력공학, 전 문부과학성 장관) 입니다.

Ⅲ. 오키나와 종족메시아 섭리 보고 (6월 21일~27일)

영계의 협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오키나와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 아

니었지만 쌓아둔 항공사 마일리지가 7월에 없어지기 전에 아내와 함께 가기로 했습

니다. 아내에게는 실로 15년 만의 귀향이었습니다. 또한 서울에서 장녀 요시미코(善

美子)가 남편 정유성(鄭有盛) 씨와 함께 성묘하러 간다며, 오키나와에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5형제자매 중 막내인 아내의 오빠와 언니는 대부분 병원에서 통원진료

를 받고 있어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어려워 저희들이 한 집 한 집 찾아가기

로 했습니다. 장남인 처남은 오랫동안 오키나와현청에서 근무했고, 정년퇴임 후에도

노인회 회장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새벽 4시까지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져 회사를 며칠 동안 쉬면서 이야기에 합류해준 처형도 있었습니다. 모

두 성주를 마시고 참부모님의 자서전을 소중히 받아주었습니다. 아내의 마쯔도(松

堂) 가문의 선조는 마씨(馬氏)이며, 중국에서 일어난 정변 때문에 오키나와에 표착

해 류큐왕조를 섬겨 유교를 가르쳤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마쯔도’라는 성을 하사 받

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내는 1965년 여름 오키나와 개척에서 고미야마(小宮

山)씨가 오키나와에서 처음으로 전도한 사람이고 그 곳에서 맺은 첫 열매였습니다.

고미야마 씨가 본토로 돌아간 뒤에는 전도와 교육에 책임을 가지고 열심히 임했으

며, 사와우라(沢浦) 씨, 에리카와(江利川) 씨가 차례로 부임하면서 오키나와교회가

발전해 나갔다고 합니다. 오키나와교회에서 아내가 초창기 시절에 대한 간증을 했

을 때 다카바야시(高林) 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21년 만에 환고향한 카와바타(川

畑) 교구장은 "본인은 그 몇 대째가 되는 영적 혈통에 있다"라고 하여 뜻밖의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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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놀라워했습니다. 다카바야시 씨와는 1964년 구마모토현 개척 당시 함께 했었기

때문에 당장 전화를 했더니 그도 몹시 기뻐해주었습니다. 그는 지금 바둑6단의 유

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1) 진정한 위령이란?

오키나와 체류기간 중인 6월 23일은 위령의 날이었습니다. 불민하여 지금까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1945년 일본의 패전을 앞둔 이 날은 오키나와

총사령관인 우시지마(牛島) 대장을 비롯해 수많은 민간인이 자결한 날이자 4월 1일

에 시작된 오키나와 전쟁이 종결된 날이라고 합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위

령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날 아내는 아직까지도 유골이 돌아오지 않은 장인의 위

령을 위해 평화공원으로 나갔고, 소생은 가까운 신사의 위령제에 참석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오오타 히로가즈(太田洪量) 씨를 맞이해 통일교회의 위령제가 평화공원

에서 열렸습니다. "죽음을 극복해야만 종교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합니다만,

오오타 씨의 이야기는 파라과이에서의 생사의 갈림길에서 깨달은 영감으로 여러 번

들어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진정한 위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년

전에 교토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자인 코헨 박사를 접대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

밤, 호텔 오너의 배려로 사모님의 60세 생일파티가 마련되었습니다. 박사 내외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에 나치의 유대인학살로 목숨을 잃은 친족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그 공간에 나타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평안한 분위기가 그 방을 둘러쌌습

니다. 그 때 "진정한 위령이란 자손이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

는 것이다"라고 통감한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매년 열리는 히로시마 위령제, 그

리고 이번의 오키나와 위령제도 총리와 현지사를 비롯해 수천 명의 참석자가 참가

하는 대대적인 행사입니다만, 의식과 형식만을 중시하는 마음이 없는 행사로 느껴

집니다. "교파나 단체를 초월해 전몰자의 영혼을 울리고 미래의 세대를 위해 더 평

화로운 환경을 조성하는데 노력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사에서의 위령제 후, 야스쿠니신사의 궁사를 역임하고 최근 오키나

와 제1의 나미노우에신사(波上神社)의 궁사로 부임한 오오야마(大山) 씨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약 1시간 동안의 강연은 태평양전쟁, 오키나와상륙전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이 죽음을 앞두고 조국과 부모, 형제, 처자식을 위하는 애절한 마음을 엮은

내용이었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日本之情忠孝之源"이라는 휘호를 주신 듯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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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정(情)의 본질을 이해하시고 세계만민을 위해 살려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아울러 이 순수한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 일본 민족 고유의 정신)

를 세계를 위해 활용해야 하며, 이것 외에는 일본을 재생시킬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2) 소리 없이 다가오는 중국의 위협

"더 이상 오키나와 현민만이 희생되는 것은 싫다"라는 반미감정이 확산되고 있습

니다. 역사적으로 책봉제도에 익숙한 오키나와 사람들은 저희가 놀랄 만큼 중국에

대해 친근감과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은 일본의 부동산 회사들에게 "얼마

든지 돈은 빌려줄 테니 땅을 몽땅 사들여라"라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만

히 둘 경우 오키나와가 중국의 속국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가졌습니다.

3) 오키나와과학기술대학원(OIST) : 방향전환의 필요성

오키나와기지대책을 위해 매년 2,000억 엔의 보장비가 지급되고 있는데, 이 돈을

투입해서 만든 오키나와과학기술대학원이 올 9월에 개교합니다. 저희 식구 한 명이

직원으로 있어 이번에 약 90% 완공된 캠퍼스를 견학하러 갔습니다. 노벨상을 수상

할만한 연구 성과를 창출하겠다며, 풍광명미한 언덕에 초일류호텔과 같은 호화로운

건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600억 엔을 들렸고 앞으로 1,000억 엔을 쏟아 부을 것

입니다. 일부의 학자들의 도락을 위해 낭비되기 십상이고 오키나와 부흥이라는 고

되고 촌스러운 일은 뒷전이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핵심 학자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노벨상과 오키나와진흥이라는 서로 모순된 이념을 가진 채 개학을 앞

두고 있는 이 대학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생은 그 사이에 “아시아의

유능한 지도자를 양성한다”라는 항목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엔대학의 창

설자인 이세 모모요 씨도 "아시아를 대표하는 교육기관을 수천 억 엔을 들여서라도

오키나와에 창설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세금낭비가 되지 않도록 이 대학의 방향전

환을 위해 하늘의 뜻이 있으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위령의 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4) 생명의 원류, 고향으로의 회귀

오키나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전일본항공(ANA) 기내잡지인 "날개의 왕국 '을

읽었습니다. "송어처럼”이라는 제목의 글은 이토 전일본항공 사장의 인사말이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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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처음에는 낚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읽었었습니다만, 마지막 몇 줄에 전일본항

공의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불민하여 오늘날까지 산천어와 송어가 동

종임을 몰랐습니다. "가을에 태어난 강에서 1년 반 보낸 후, 은백색으로 그 모습을

변화시켜 바다로 내려가는 송어는 북해에서 크게 성장하고 산란을 위해 모천으로

회귀하고 덩치가 큰 송어 암컷이 몸집이 작은 산천어 수컷을 뒤쫓습니다. 자연의

섭리라고는 하나 매우 흥미로운 생태입니다. 전일본항공도 세계의 거센 파도로 단

련되고 성장하면서 모국 일본을 기반으로 차세대를 육성하고, 국가에 이바지하고자

한다"고 서술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장 뒤에는 개인주의, 자유 · 민주주의의 근대화

문명은 생명의 연결을 끊어버린 절화(切花)문명, 조만간 시들어가는 것은 당연지사

이며, 어머니의 전통문명, 동양문명으로 돌아갈 때임을 느끼게 하여 감명을 받았습

니다. 노동조합 분쟁으로 일시적인 경영난에 빠진 일본 항공(JAL)은 이번에 정부로

부터 몇 천억의 융자를 받아 신기종 비행기를 도입하는 등 항공 경쟁에 참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민간의 입장에서 전일본항공은 잘 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하였든

최고경영자가 자연에 눈을 돌릴 여유가 있는 회사 직원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5) 오키나와의 현민성

인사말 다음 페이지가 오키나와 문화에 대한 소개였고, 그 다음 페이지에는 돗토

리현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유행가인 "강은 흐른다"는 나카소네 미키(仲

宗根美樹)라고 하는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가 불러 대히트를 기록해 영화도 만들어

졌었습니다. 오키나와와 돗토리를 연결하는 로망이었습니다. 1970년 777쌍 축복 당

시, 오키나와는 아직 일본에 반환되지 않아(1972년 5월 반환됨) 미국 달러를 사용

했고, 여권도 미국 여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법적으로는 국제결혼 커플인지

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아내가 축복을 받았을 때 일본본토 사람과 결혼한다고 하자

"인신매매 되는 것은 아닌가"라고 친족들이 많이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 축복에서 42년 지난 지금, 하늘의 뜻이라며 가장 가까운 배우자를 심판할 일

이 많았던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본체론의 에센스가 사대심정권 체휼입니다만,

그 핵심이 서로 사랑하는데 있다는 의미를 절실히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정이 많고 마음이 느긋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해외로 이민 간 사람도 많지만 서로 잘 도와주는 것으

로도 유명합니다. 저희 아내가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말하면 "같은 ‘우치난추(오키나

와인)’이다"라고 북남미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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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돗토리 종족메시아 섭리 보고 (3월 16일~23일)

오키나와에 앞서 3월 16일부터 21일까지 소생의 고향인 돗토리를 방문할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3월 18일 새벽 6시부터 8시까지 장남 부부와 손자 2명과 함

께 오와키 가문의 삼대권을 위해 예기치 않게 역사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어 신기

한 하늘의 섭리를 체험했습니다. 그날은 마침 52년 전인 1960년, 16세의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내가) 산다”에서 “(나는) 살려져 있다”라는 대전환, 즉

성령체험을 통해 난치병이 불과 2시간 만에 치유되고 본격적인 구도생활을 시작한

날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돗토리교회의 예배에도 참석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돗토

리교회의 추억을 포함해 인사를 드렸더니 사토(佐藤) 교구장이 "사실 올 여름, 돗토

리교회를 헌당할 예정이다"라고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돗토리대학 바로 옆에 자

동차 1,000대를 주차할 수 있는 700평의 교회입니다. 사토 씨의 고향은 일본 동북

지역 대지진이 발생한 미야기현 이시노마키(宮城県石巻)입니다. 고향의 사정은 제쳐

두고 외지에서 헌신하는 모습에는 머리가 숙여집니다. 47년 전에 돗토리교회 헌당

섭리를 이루지 못했던 소생에게 있어 이번 헌당식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돗토리교회 헌당과 탕감조건

1965년 로고스라는 일본 산인(山陰)지방에서 가장 큰 서점이 땅을, 교회가 인재

를, 그리고 오와키전기회사가 자본을 출자해 8층 건물을 세워 산인지방에 일대 문

화 돌풍을 일으키려는 섭리가 진행되어 소생은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수행한 후, 아

키하바라의 사장 격려를 받으며 돗토리에 환고향했습니다. 이듬해인 1966년 3월

20일, 그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새벽에 돗토리 지구장이 오와키전기회사의 마츠다

사장(외삼촌)을 찾아왔습니다. 외삼촌은 가게 셔터를 열고 춘분 무렵이라 날이 차가

워 난로에 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지구장이 돌아가자 다시 셔터를 내리고 2층으

로 올라갔습니다. 오후 4시 소생은 돗토리은행의 은행장에게 입체문화센터 구상을

설명하기 위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서류가 하나 부족해서 본사로 다시 돌아갔는데,

그곳에 가보니 2명의 외사촌이 열심히 세숫대아로 물을 나르며 불을 끄고 있었습니

다. 그 때는 책상 하나 밖에 불타지 않은 상태여서, 소생은 근처에 있던 소화기로

불을 끄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라나 사용법을 몰라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 불은 무섭

게 퍼져갔습니다. 119번을 눌러 소방서에 전화를 했었는데, 외삼촌이 2층에서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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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와 "110번! 110번!"이라고 외치니 전화를 다시 걸었습니다. 그 때 이미 전기제

품, 새로운 건축자재가 불타 독가스가 자욱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부득이 옆

집으로 뛰어들어가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소방차

출동이 늦었습니다. 소방차를 기다리는 동안 외삼촌과 둘이서 불을 끄고 있을 때

“아이들이 2층에 있다”는 외삼촌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소생은 지붕을 타고 2층으

로 올라갔습니다. 창문을 깨자마자 검은 열풍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토시 짱!"이라

고 외치자 "준 짱!"이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때 불 속에 뛰어들어갔었어야

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소방서가 달려왔을 때는 초등학교 5학년과 1년이

었던 외사촌은 이미 질식사했었습니다. 외삼촌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아이는 둘째

치고, 친여동생의 한 명 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것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

습니다. 화재 이후 수개월 동안 오와키전기회사는 부채상환으로 지지부진해 있었고,

소생은 강변에 나가 심야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바로 '바위도 외친다. 하나님은 살

아 있었다! 전도하고 싶다."라는 감정이 북받쳤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구보키(久保

木) 회장에게 전화했더니 "부질없는 놈이구나! 우선 올라 와라!"라고 했습니다. 이렇

게 소생은 또다시 상경하게 되어 원리연구회와 승공, WACL 대회의 기획 등을 담당

했습니다. 그러나 1967년 대수련회 때는 아직도 영적으로 정리하지 못해 말씀과

파장이 맞지 않아 엉망이었습니다.

Ⅴ. 아카데미 섭리의 배명

소생이 영적 골짜기에서 벗어난 것은 1973년 8월 17일, 하와이대학에서 단기 유

학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만 30살의 생일, 철야기도 속에서 드린 하늘을 향한

선언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자기부정,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에 도움

을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밀려왔고, 진심이 있어야만 하나님

은 새로운 뜻을 주신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을 때, 소생은 아카데미를 설립하라

는 뜻을 배명 받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많이 들려 왔지만 이

러한 잡음에 현혹되지 않고, 그 후 10여 년 동안 하늘을 위해 학자를 통해 세상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헌금 낭비"라고 생각했던 간부들도 아카데미가 획득한 사

회적 신용 기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점차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참부

모님의 크나큰 복귀 계획을 통해 하늘의 예지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참부모

님께서는 소생을 미국으로 보내시어 1990년 다시 한번 아카데미를 담당케 하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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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 4개월 동안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이와테현의 미션스쿨이 복귀되었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언론인회의, 중국인 간부들과의 프로젝트 등을 담당했습니다만

뜻밖의 인사이동으로 해피월드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고 해도 이미 날개가 뽑힌 새와 같았던 소생은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과 미국 알래스카, 남미에서 뵐 때마다 참부모

님의 분노가 아직도 가시지 않아 소생을 보시자 마자 질책의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이는 소생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역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

다. 참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한심한 소생임을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참부모님께 드리는 참회

지난 20년 동안 제대로 도움을 드리지 못한 채 이제 70이라는 나이를 코앞에 두

고 있습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천명을 가지고 태어난 많은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참부모님께서 의기양양한 청춘 시절을 감옥에서 보내시고 무지몽매한 제

자들을 훈련하시면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

나고 보면 사랑이었다"라는 말처럼 순풍만범의 직선 코스보다는 소나무와 같이 곡

선에서 더 깊은 맛을 느낍니다. 산 위에서, 배 위에서 부모님께서 주신 말씀을 문득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12제자들이 남기고 간 복음서, 저희들도 후손을 위해 말씀을

남겨놓을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마디만 말씀 올릴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야

하는 사항인 만큼 많은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소생이 알고 지낸 VIP의 배

후에는 거의 대부분 여성문제가 있었습니다. 참부모님께서 사사가와 선생과 키시

선생을 대하시는 모습, 또 이를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대하시는 모습을 통해 소생

이 어떻게 대해야겠다는 것을 나름대로 숙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쿠다(福田) 선생을 지키기 위해 알게 된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이후 소생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중요한 섭리를 위해 가야 했지만, 이를 완강히 거부하

고 하와이로 가셨습니다. 개인적인 여행이었기 때문에 방심하여 세관에서 공산주의

자라는 과거 기록이 남아 있어 그대로 수감되었고, 일본으로 귀국했을 때는 기듯이

하여 차에 올라탔습니다. 죽을 만큼의 굴욕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이 충격적인 사

건으로 후 후쿠다 선생은 갑자기 늙어갔으며, 알츠하이머가 진행되었습니다. 츠쿠바

대학의 학장이라면 문부성 장관, 유명 사립대학의 학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

습니다만, 늘 통일교회 때문에 그 길이 봉쇄되었기 때문에 후쿠다 선생은 억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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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소생의 실수를 사과 드립니다. 아카

데미를 그만둔 후에도 후쿠다 선생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는 "후쿠다 헤르츠"이라고

불릴 만큼 호쾌한 사람이었습니다만 섬세한 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일 후쿠다

선생의 장남의 요청으로 국장에 가까운 장례를 맡아서 치렀고 추도회도 잘 하고 영

계로 보내드렸으니 이 점은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Ⅵ. 2세시대

장녀 요시미코는 미국선교에 간 아내의 공로 덕분에 참아버님께서 하사해주신 이

름입니다. 요시미코는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이마르 인터내셔널

의 창설자 중 한 명이자 수많은 동시통역사를 키워낸 사이토 미츠코(斎藤美津子)

선생이 "오와키 씨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다"라며, 딸의 미국유학을 지원하고 싶다고

제안해왔습니다. 덕분에 요시미코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이후 한국으로 유

학해 777쌍 아르메니아 국가메시아인 정지구(鄭之九) 씨의 3남, 정유성 씨와 축복

을 받았습니다. 선문대학교 통번역대학원 동시통역과를 졸업한 뒤 약 5년간 삼성에

서 근무했지만 "피스메이커"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못해 퇴사했습니다. 한국정

부에서 장학금을 받고 관료양성교육기관인 KDI국제정책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올해

초 졸업했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IGM 세계경영연구원에 취직해 일본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과장으로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습니다. 일과 가정을 도저

히 양립할 수 없게 되자 (회사의 경영이념도 본인과는 맞지 않았다고도 합니다만)

4월 말 퇴사했습니다. 소생이 올 7월 19일 유엔OB포럼을 일본에서 치르고 가야 하

기에 딸에게 먼저 수련회에 참가할 것을 부탁 했습니다. 소생은 20일부터 참석할

예정입니다. 한국에서 일본인유학생을 교육, 관리하고 있는 차녀 치에코, 미국 LA

에서 마이클 라구롯소 가정의 장남과 축복을 받은 삼녀 니미코(仁美子)는 사람을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딸입니다만, 딸들은 어학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장남의 후미유키(史行)는 할아버지가 세운 회사를 이어받기 위해 돗토리로 귀성해

지금 본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2세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Ⅶ. 마지막으로

소명을 받기 위해서도 사람이 다해야 할 5%의 책임이 있고, 소명을 받은 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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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뜻을 이루기 위해 다해야 할 5%의 책임이 있다는 엄숙한 사실에 경외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보키 회장을 소명하시기 전에 하늘이 미리 준비하셨던 인물(아오키 히로시:青

木宏) 씨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본인의 고백을 듣고 알게 되었지만, 이 이야기를 사

쿠라이 세츠코(桜井節子) 여사에게 전하자 "우선 이야기부터 들어봐라"라며, 그 당

시의 분하고 억울했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40분 넘게 듣게 되었습니다. 아오키

씨는 지금 천진회(天真会: 텐신카이)라는 일본 무술을 통합한 세계적 조직의 회장으

로, 서예는 중국정부가 의뢰할 정도로 명필이고, 중앙대학 웅변회 간사장 출신답게

언변실력도 대단한 데다가 당당한 체구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침례교회 신자로 학생시절부터 해외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

에서 찾아온 목사의 "저것은 이단이다"라는 말을 듣고 수많은 동료를 데리고 교회

를 떠난다고 합니다. "초종파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할 만

큼 마음도 넓고 당당합니다. 소생이 와세다대학에서 원리연구회를 설립하기 전에

원래 하늘은 와세다대학 철학과의 기독교인을 준비하셨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기반이 되었었으면 일본 복귀가 훨씬 더 수월해졌을 텐데"라고 참부모

님께서 몇 번이나 혼잣말을 하시며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역시 섭리

는 기독교에서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고미야마 씨에게는 참

부모님께서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하셨겠습니까? 수많은 리더를 믿고 기대하셨지만

여러 번 배신 당하신 참부모님, 그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의 모습이자 하나님의 아픔

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참부모님께서는 가만히 견디고 계신다는 것을 통감합니다.

참으로 구보키 회장은 하늘이 예정했던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만년에는 휠체어

를 타고 지낸 회장을 좀 더 잘 모셔야 했었습니다. 전도라면 사족을 못 쓰던 마츠

모토 마마에게도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오랫동안 일심병원에 입원하고 계신 김원

필 선생의 병문안도 제대로 하지 못한 세월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본심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임지와 레다의 일이 뜻하는 대로 잘 풀리지 않아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결과 탄생한 것이 미래구상전략포럼과 지구시민기구입니다만, 이는 예

기치 않는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섭외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번(藩)

을 떠나 떠돌이가 되어 명치유신의 길을 열었던 사카모토 료마처럼 일대 결심을 할

Page 17: 경애하는 천지인 참부모님mnet.upf.cc/pwpa_tp/201207_trans_kr_fv.pdf · 2) 레다 섭리 (1999년 8월 1일~) ... 휴식시간에 소생으로부터 오른쪽으로 3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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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40일 동안의 명상 기간이 주어졌고, 종족메시

아 활동, 즉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랑의 빛을 밝혀나가는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복지활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군중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개개인의 영혼입니다. 나는 당신을 돌보고 가능하면 한 명 더 돌보는 것뿐

입니다. " 라고 말한 테레사 수녀의 경지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소생이 생활하고 있는 아카데미 하우스에는 4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

니다만, 축복이 깨진 후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해 낙담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

니다. 갈 곳 없는 어려운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곳 입니다만, 이러한 사람들을 헌신

적으로 도와주는 건강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선 아무리 작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진심을 다해 추진해나가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훌륭한 가르침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참부모님 옥체의 안녕을 기원하며, 이만 줄이고자 합니다.

2012년 7월 7일 畢

오오와키 준이치로(大脇 準一郎) 배상

777쌍, 바하마 국가메시아, 1963년 12월 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