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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상담 28 2012·4 한국영화에서 청소년이 진정한 주인 공으로 등장한 경우가 없진 않았다. 1960년대 <얄개전> 시리즈나 1970년대 <진짜진짜 좋아해> 시리즈는 명랑만화 풍으로, 또는 순정만화 풍으로 과장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10대들의 감수성을 어 느 정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촉발되어 <꼴찌부터 일 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에 이르기까 지 당시 첨예한 사회 문제였던 대학 입 시와 10대들의 방황이라는 주제를 다소 부드러운 터치로 그려낸 영화들도 쏟아 져 나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10대 는 대중문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대신 소비자의 핵심으로, 새로운 마케팅 ‘대상’으로급부상했다. TV에등장하는 10대들 역시 진짜 고민의 흔적이 거세된 박제처럼, 혹은 연예인이 되고 싶거나 연예인 그 자체인 모습으로만 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려령 작가의 청소년 소 설 <완득이>와 이한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 <완득이>의 성공은 경이로웠 다. 심지어주인공완득이는‘평범함’이 라는 무난하지만 불분명한 수식어 따위 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한국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수에 속하는 인물이다. 열 여덟 고등학생 완득이(유아인)는 캬바레에서 춤을 추는 곱추 아버지(박수 영)와 다소 지능이 떨어지지만 착한 민 구 삼촌(김영재)과 함께 산다. 완득이는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컸으며, 지금껏 어머니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공부에도 영 취미가 없어 자퇴하고 싶지만 아버지 의 강권으로 억지로 학교에 다니고 있 다. 가진 것도 꿈도 희망도 없던 완득이 앞에 강력한 맞수가 나타났으니, 바로 담임 선생 동주(김윤석)다. 학교에서 보 는 것도 지겨운데 동주의 집은 하필 완 득이네 옆집 옥탑방이다. 동주는 사사건 건 밤낮없이 동네가 떠나가라 완득이 이 름을 불러대며 귀찮게 한다. 급기야 완 득이 어머니가 살아있으며 그녀가 필리 핀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아냄으로써 완 득이의 일상을 뒤흔든다. 완득이의 아버지는 장애인이고, 집에 는 돈이 전혀 없으며, 달동네 옥탑방에 서 다 큰 남자 셋이 함께 살아야 한다. 그나마 돈을 벌기 위해 시골장을 돌아야 하는 아버지와 삼촌은 걸핏하면 집을 비 우기 일쑤고, 완득이는 완벽하게 혼자 다. 게다가 뒤늦게 알게 된 사실, 그의 어머니는 필리핀에서 시집온 외국인이 다. 완득이는 같은 동네 외국인노동자들 이 불법체류라는 딱지를 단 채 무참하게 쫓겨나는 광경을 지켜본다. 그의 어머니 도 저렇게 피부색 하나만으로 차별당하 고 무시당하고 언제나 남의 눈치를 살피 고 조심조심 거슬리지 않게 살아왔다. 하지만 <완득이>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아니다. 사회의 비정함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10대가 택할 수 있는 길 은 거의 없다. 패배자 의식에 휩싸인 채 순응하거나, 거칠게 반항하다가 파멸하 던가. 하지만 <완득이>는 그 중 어느 쪽 도 택하지 않는다. 완득이는 서로를 향 해 분노를 발산하기보다는 타인에게 더 관심을 갖고 함께 사는 법을 모색하려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할리우드 가족 영화의 공식을 매끈하게 잘 따라가되, 결정적인 순간에는 슬쩍 그 공식들을 건 너뛰거나 비트는 방식으로(이를테면 완 득이에게 새로운 삶의 목표를 안겨준 킥 복싱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멋지게 보여 주는 장면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전 형성과 비전형성의 갈림길을 노련하게 오간다.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되, 고통을 유머와 선의로 풀어가려는 노력 이 <완득이>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너무 당치 않은 해피엔딩이라고 느낄 수 있겠으나, 분노를 되물림하기보다는 사 랑과 인내로써 극복하려는 의지를 의심 할 순 없다. 담임선생 동주는 말한다. “가난한 게 쪽팔린 게 아니라 굶어죽는 게 쪽팔린 거야.”생존의 의지, 그러나 좀더 인간다운 품위와 공감의 능력을 지 킬 수 있는 그런 생존의 의지 말이다. 김용언 영화 칼럼니스트 <완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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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가정상담1204 2012.4.6 4:45 PM 페이지28 2400-CMYK 2540DPI …°€정상담1204_영화이야기.pdf · 우기 일쑤고, 완득이는 완벽하게 혼자 다. 게다가 뒤늦게

가정상담 28 2012·4

한국영화에서 청소년이 진정한 주인

공으로 등장한 경우가 없진 않았다.

1960년대 <얄개전> 시리즈나 1970년대

<진짜진짜 좋아해> 시리즈는 명랑만화

풍으로, 또는순정만화풍으로과장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10대들의 감수성을 어

느 정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촉발되어 <꼴찌부터 일

등까지우리반을찾습니다>에이르기까

지 당시 첨예한 사회 문제였던 대학 입

시와 10대들의 방황이라는 주제를 다소

부드러운 터치로 그려낸 영화들도 쏟아

져 나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10대

는 대중문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대신소비자의핵심으로, 새로운마케팅

‘대상’으로급부상했다. TV에등장하는

10대들역시진짜고민의흔적이거세된

박제처럼, 혹은 연예인이 되고 싶거나

연예인그자체인모습으로만등장했다.

그런의미에서김려령작가의청소년소

설 <완득이>와 이한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 <완득이>의 성공은 경이로웠

다. 심지어주인공완득이는‘평범함’이

라는 무난하지만 불분명한 수식어 따위

는신경쓰지않는다는듯, 한국사회에서

철저하게소수에속하는인물이다.

열 여덟 고등학생 완득이(유아인)는

캬바레에서춤을추는곱추아버지(박수

영)와 다소 지능이 떨어지지만 착한 민

구 삼촌(김영재)과 함께 산다. 완득이는

어머니의얼굴도모르고컸으며, 지금껏

어머니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공부에도

영취미가없어자퇴하고싶지만아버지

의 강권으로 억지로 학교에 다니고 있

다. 가진것도꿈도희망도없던완득이

앞에 강력한 맞수가 나타났으니, 바로

담임 선생 동주(김윤석)다. 학교에서 보

는 것도 지겨운데 동주의 집은 하필 완

득이네옆집옥탑방이다. 동주는사사건

건밤낮없이동네가떠나가라완득이이

름을 불러대며 귀찮게 한다. 급기야 완

득이 어머니가 살아있으며 그녀가 필리

핀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아냄으로써 완

득이의일상을뒤흔든다.

완득이의 아버지는 장애인이고, 집에

는 돈이 전혀 없으며, 달동네 옥탑방에

서 다 큰 남자 셋이 함께 살아야 한다.

그나마돈을벌기위해시골장을돌아야

하는아버지와삼촌은걸핏하면집을비

우기 일쑤고, 완득이는 완벽하게 혼자

다. 게다가 뒤늦게 알게 된 사실, 그의

어머니는 필리핀에서 시집온 외국인이

다. 완득이는같은동네외국인노동자들

이불법체류라는딱지를단채무참하게

쫓겨나는광경을지켜본다. 그의어머니

도 저렇게 피부색 하나만으로 차별당하

고무시당하고언제나남의눈치를살피

고 조심조심 거슬리지 않게 살아왔다.

하지만 <완득이>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아니다.

사회의 비정함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10대가 택할 수 있는 길

은거의없다. 패배자의식에휩싸인채

순응하거나, 거칠게 반항하다가 파멸하

던가. 하지만 <완득이>는그중어느쪽

도 택하지 않는다. 완득이는 서로를 향

해 분노를 발산하기보다는 타인에게 더

관심을갖고함께사는법을모색하려는

이들에게둘러싸여있다. 할리우드가족

영화의 공식을 매끈하게 잘 따라가되,

결정적인순간에는슬쩍그공식들을건

너뛰거나 비트는 방식으로(이를테면 완

득이에게새로운삶의목표를안겨준킥

복싱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멋지게 보여

주는 장면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전

형성과 비전형성의 갈림길을 노련하게

오간다.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되,

고통을 유머와 선의로 풀어가려는 노력

이 <완득이>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너무당치않은해피엔딩이라고느낄수

있겠으나, 분노를 되물림하기보다는 사

랑과 인내로써 극복하려는 의지를 의심

할 순 없다. 담임선생 동주는 말한다.

“가난한 게 쪽팔린 게 아니라 굶어죽는

게 쪽팔린 거야.”생존의 의지, 그러나

좀더인간다운품위와공감의능력을지

킬수있는그런생존의의지말이다.

김용언 영화 칼럼니스트

결혼과인생(110)

<완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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