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36
백의사와 KLO의 활동을 통해서 본 남한 대북 정보활동의 원류 (1945-1953)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차 례】 국문요약 1945년 9월 한반도에 38선이 분할선으로 현실화되고 남과 북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분단의 단초가 마련되자 남북의 국내정치도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주한미군도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여러 채널을 가동했으며 국내정치도 이에 편승해 움직였다. 1945년 11월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서 총사령은 염응택(廉應澤)의 지휘 하에 월남인결사조직 백의사(白衣社)가 조직되었다. 설립목적은 요인 암살 및 반공 테러였다. . 서 . 백의사의 조직과 활동 1. 출생과 낙양군관학교 입학, 남의사 가담 2. 대동단 조직, 1944년 8월 3. 광복 후 대동단과 현준혁 암살 4. 대동단의 백의사 개칭 5. 백의사의 대북 첩보활동과 북한 요인 암살 기도 6. 염응택과 신익회 -유진산과의 관계 7. 염응택과 김구와의 관계 8. 미 CIC와의 연결 . KLO의 조직과 활동 1. 백의사의 KLO 전환 2. KLO의 활동 3. 켈로와 유격대 4. KLO의 해체와 첩보부대로의 흡수 . 결

Upload: others

Post on 22-Jan-2021

9 views

Category:

Documents


2 download

TRANSCRIPT

Page 1: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이 완 범

(한국학중앙연구원)

【 차 례 】

국문요약

1945년 9월 한반도에 38선이 분할선으로 현실화되고 남과 북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분단의 단초가 마련되자 남북의 국내정치도 립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주한미군도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여러 채널을 가동했으며 국내정치도 이에

편승해 움직 다. 1945년 11월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서 총사령은 염응택(廉應澤)의

지휘 하에 월남인결사조직 백의사(白衣社)가 조직되었다. 설립목적은 요인 암살 및

반공 테러 다.

Ⅰ. 서 론

Ⅱ. 백의사의 조직과 활동

1. 출생과 낙양군관학교 입학,

남의사 가담

2. 동단 조직, 1944년 8월

3. 광복 후 동단과 현준혁 암살

4. 동단의 백의사 개칭

5. 백의사의 북 첩보활동과

북한 요인 암살 기도

6. 염응택과 신익회

-유진산과의 관계

7. 염응택과 김구와의 관계

8. 미 CIC와의 연결

Ⅲ. KLO의 조직과 활동

1. 백의사의 KLO 전환

2. KLO의 활동

3. 켈로와 유격

4. KLO의 해체와 첩보부 로의 흡수

Ⅳ. 결 론

Page 2: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48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6.25전쟁이 발발하자 백의사는 켈로부 로 전환되었다. 백의사도 미군정 당시 미

CIC와 연결되어있었는데 켈로로 전환되면서 연합군 직할 첩보공작부 로 변신했

다. 켈로는 북첩보공작과 유격작전을 수행하며 5000명 내지 1만여 명의 원들

이 반공전선에서 산화했다고 전해진다.

KLO부 는 북첩보공작부 백의사가 모체 으므로 양자는 불가분리의 관계

다. 한민국 정부 수립기와 6∙25전쟁 과정에서 백의사와 켈로부 는 북한에 파견

되어 은 한 정보 수집과 요인 암살 기도 등 유격작전을 수행하여 많이 희생당했다.

군번도 군적도 없었던 침투정보원과 켈로산하 유격 원들은 2010년 현재 정규전이

아닌‘유격전’의 차원으로 밖에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다. 전 제2국립묘지에 산화

한 KLO 8240부 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뿐이며 그나마 이름조차 올리지 못

했던 유격 원들도 있다.

백의사, 켈로부 , 북첩보활동, 유격전, 염응택주제어

Page 3: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49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I. 서 론

1945년 9월 한반도에 38선이 분할선으로 현실화되고 남과 북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분단의 단초가 마련되자 남북의 국내정치도 립하

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주한미군도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여러 채널을 가

동했으며1) 국내정치도 이에 편승해 움직 다. 이러한 미군 지원에 의한

한국인들의 북정보활동이 현재 북정보활동의 하나의 기원으로 작용

했다고 할 수 있으므로 북정보활동사의 공백을 매워준다는 의미에서도

이에 한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에서 좌우익이 립이 급격화하기 시작했던 1945년 11월 서울 종

로구 궁정동에서 월남인결사조직 백의사(白衣社)가 조직되었다. 이는 평

안도 출신의 서북인들이 주도하여 조직하여 1948년까지 존속한 극우 청

년 테러단체 다. 그 설립목적은 요인 암살 및 반공 테러 으며 주요활동

으로는 현준혁 암살, 김일성 암살 미수, 여운형∙김구 암살사건 개입한 것

으로 추정되었다. 북에서 월남한 청년∙학생들이 중심적인 조직원이었다.

총사령은 염응택(廉應澤: 일명 염동진, 본명 염동연)으로, 중국 국민당 장

제스[蔣介石] 정부의 반공특무 지하공작 단체인 남의사(藍衣社)라는 중국

테러리스트 집단을 본떠 백의민족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백의사라 이름지

었다. 염응택은 중화민국 정보기관 남의사(藍衣社) 공작원 출신이라는 설

도 있다.

‘ 북첩보공작부 ’백의사의 활동 내역에 해서는 그동안 알려진 것

이 거의 없었고, 또 역사적인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부 증언록과

다큐멘터리 수준의 책들이 발간되어 주관적이고 다소 일방적인 주장만이

1) 정병준, “남한진주를 전후한 주한미군의 한정보와 초기점령,”『史學硏究』제51호 (1996

년5월), pp.133-180.

Page 4: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50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2001년 9월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굴하고

2002년 1월 공개한 실리(Cilley)보고서에서 김구(金九) 암살범 안두희(安

斗熙)가 미국 방첩부 (Counter Intelligence Corps2)) 요원이자 백의사

의 비 암살단원이었다3)는 내용이 확인되면서 증언록에 기반한 백의사

와 관련된 사실들이 학문적으로 교차 비교 연구될 근거가 마련되기 시작

하 다.

한국 내 미군정보조직의 활동은 1945년 9월 9일 미 제24군단이 한국에

들어올 때, 미 육군 방첩 인 제224CIC(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따라 들어옴으로서 시작되었다. 또한 제2차세계 전당시 미국의 전략첩

보부 (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가 있었지만 제2차세계 전

종전후 해체되어 그 뒤를 이어 CIA가 신했지만 1950년 5월에 일본 도

쿄에 지부를 세워 뒤늦게 6-25전쟁에 참전하 으므로 CIA의 북첩보활

동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고 크게 알려진 것도 없다. 따라서 남한에서의

북첩보활동은 한국인들의 민간조직을 활용하는 방식을 동원하는 등 변

칙적으로이루어질수밖에 없었다.

이 연구에서는 한민국 수립과 6-25 전쟁 과정에서 북첩보에 일정

한 역할을 수행했던 백의사와 KLO(Korean Liaison Office의 약칭) 부

를 중심으로당시의 정보활동을다루고자한다.

주로 의존할 자료는 미 공문서와 당시 참여했던 인사의 회고담 등인데,

2) 정용욱, “한국전쟁시미군방첩 조직및운용,”『군사사연구총서』제1집 (국방부군사편

찬연구소, 2001).

3) 裵振榮, “安斗熙는白衣社요원이아니다,”『月刊朝鮮』22권10호통권259호(2001년10

월), pp.314-320에서는안두희의백의사요원설을반박하고있다. 그러나그후鄭秉峻,

“백범 김구암살 배경과 백의사,”『한국사연구』128 (2005년 3월), pp. 257-296,

http://www.historyewha.ac.kr/adminarea/downfile.php?no=140 (검색일: 2009년

10월 7일); 정병준, “미국 자료를 통해 본 백범 김구 암살의 배경과 미국의 평가,”『역사

와 현실』통권61호 (2006년 9월), pp.313-346; 정병준, “공작원 안두희와 그의 시 ,”

『역사비평』통권69호(2004년겨울), pp. 142-171 등미국자료에의해확인되었다.

Page 5: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51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이들 사료에 정부(미군정과 한민국)의 관여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과연 이들 부 의 활동이 남한의 북정보활동의 일환이었는

지를 검증하기가어렵다. 이것이이 연구의숙제로작용할 전망이다.

II. 백의사의 조직과 활동

1. 출생과 낙양군관학교 입학, 남의사 가담

총사령 염응택은 파주 염씨로 1902년에 평양에서 태어났으며4) 일제강

점기에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1934년에 장개석 지

도아래 있던 남경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입교했다. 낙양분교에 한국 독

립군의 양성을 위해 한인반이 설치된 것은 1933년 12월이므로 염응택은

제1기 입교생이었다.5) 철기 이범석 장군은 낙양분교 1기생 생도 표 다.

낙양분교 입교 자격은 보통학교 이상의 학력자로서 만 15세 이상 35세까

지 독립투쟁에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심사는

엄격했다. 당시 심사는 김구 이청천(�靑天) 김원봉(金元鳳) 3인이 했다.

4) “京高特秘 第3210號 金九 一黨의 愛國團員 檢擧에 關한 件,”최서면 제공자료, 안기석,

“인물연구: 白衣社총사령염동진, 金日成간담서늘케한전설적백색테러리스트,”『신

동아』통권505호(2001년10월), pp. 316~323. 위자료는1935년12월10일자로경기도

지사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경성지방법원장, 상해총 사, 남경총 사 등에게 보낸 극

비정보보고서로서중국의남경중앙군관학교낙양분교한인반사관후보생들의인적사

항과동태에관한내용을담고있다. 낙양분교제1기졸업생으로서‘김구일당의애국단

원’으로체포된엄창복(嚴昌福, 당시24세)이진술한내용과다른경로로입수한자료를

토 로작성한것. 자료를제공한사람은내부인으로낙양분교한인반사관후보생92명

의신상을소상하게보고한것으로보인다.

5) 1932년 2월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해 그해 4월 9일에 졸업했다는 설도 있으나 1934년의

오식으로추정된다.

Page 6: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52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염응택은 신익희의 추천으로 이청천의 심사를 거쳐 입교했다. 신익희는

이청천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 했던 사이며 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도

같이 했다.6) 입교생들은 추천자와 심사한 사람들에 의해 김구파 이청천파

김원봉파등으로 갈렸다. 염응택은 당연히이청천 계열로분류되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해 한인반 사관 후보생들에

게 매달 11원씩을 지급해줬는데 이 과정에서 의혹이 있어 학생들이 폭동

을 일으켰다. 염응택도 이 폭동에 가담했다가 남경에 있던 신익희에게 피

신했다. 신익희는 염응택의 이름을 요춘택이라는 중국이름으로 변성명하

게 한 뒤 중국군의 남경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의 일자리를 얻어주었

다. 여기서 얼마동안 일하다가 염응택은 장개석 직속의 특무기관인 남의

사로 자리를 옮겼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정보수

집과 양동작전을 담당했던 기구)에는 남의사들이 거 참여했다. 염응택

은 이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첩보공작을 위해 만주에 파됐다가 일본군

관동군 헌병 에 체포됐다. 이 사실은 이 신 작가가 백의사 단원들로부

터 들은 증언에 따른 것인데 관련 자료는 없다. 미군자료에는 염응택이 중

국 공산당에 체포되어 고문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신은 위 책에서

“분명한 것은 관동군 헌병 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고 그후 관동군

정보기관의 첩보원이 되어 있었다”고 기술했다. 염응택은 해방 후 서울역

앞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던 관동군 헌병 소속 아라가와 다께조 군조를

만난 적이 있는데 염응택을 고문한 당사자 다고 한다.7) 염응택이 시력을

잃게 된 것은 고문의 후유증 때문인데 고문 직후 바로 시력을 잃어버린 것

이 아니라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해 1948년 말에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것으

로 알려진다. 다만 평소에 감정의 변화를 바깥으로 표현하지 않고 늘 검은

6) 김일 , “신익희, 건국에 참여한 임정 출신의 현실주의자,”『韓國史市民講座』제43집

(2008년2호), pp.54-66; 도진순, “해방전후신익희의노선과활동,”조동걸(외), 『한국

현 사인물연구』, 2 (서울: 백산서당, 1999).

7) 이 신, 『비 결사白衣社: 이 신의현 사발굴』, 上(서울: 알림문, 1993), p.258.

Page 7: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53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안경을 쓰고 있었기때문에 염응택을시각장애자로보기 쉬웠을것이다.

관동군 헌병 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점차 시력을 잃어가던 염응택은

치료를 위해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염응택은

평양에서 돌아온 지 얼마 뒤 중매결혼을 했는데 신부 최성률(崔成律)은 일

본 나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서문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최성률씨는 해방후 정치인 암살 1호인 현준혁 암살과 관련, 남편인 염응

택이 연행되자 소련민정군 사령관 로마넨코 부인을 찾아가 무고하다며 탄

원해 남편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염응택이 남하 후에도 최성률은 평양에

남아 있다가 염응택의 측근인 백관옥의 인도로 1946년 3월 서울에서 염

응택과 상봉했다.8)

2. 동단 조직, 1944년 8월

염응택은 일제강점기 말에는 동단(大同團)을 조직했는데 그 강의

과정은 아래와 같다. 만주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염응택은 평양 기림리 공

설운동장 뒤에 있던 명사(永明寺)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절에는 민족주

의자들과 일부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인사들이 모이곤 했다. 명사의

주지는 박고봉이었는데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도 참

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 후 스님이 된 인물이었다. 임시정부 요

인이었던 박찬익씨의 동생이라고 백관옥은 증언한 바 있다.9) 고봉 스님이

8) 최성률은서평양경찰서에서구타당한뒤유산한이후로염응택과의사이에자식은없었던

것으로알려졌다. 그녀는1960년 후반까지종로구내수동에살았던것으로알려지지만

그후로는행방이묘연하다. 안기석, “인물연구: 白衣社총사령염동진, 金日成간담서늘케

한전설적백색테러리스트,”『신동아』통권505호(2001년10월), pp.316-323.

9) “백의사단원백관옥증언,”국사편찬위원회, 1980년 . 그는1952년에는노동운동에관

여했다. 1952년6월9일 한노총錢鎭漢파가개최한제5차전국 의원 회에서白寬玉

은노총부산지구감찰부장�斗漢과함께부상을입었다. “ 한노총錢鎭漢파, 제5차전

국 의원 회개최,”『민주신보』, 1952년6월11일,

Page 8: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54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 응할만한 조직을 만들 것을 권유해서 염응택

은 1944년 8월 동단을 만들었다. 박고봉은 백관옥과 선우봉을 염응택

에게 소개했고 이들은 동단에 입단했다. 단원 포섭은 염응택이 주로 했

는데 중학생들도 포섭 상이었다. 그러나 동단이 일제에 항해 독립투

쟁했다는기록이나증언은 없다,

3. 광복 후 동단과 현준혁 암살

동단은 광복 후 제2독립운동으로 반공산주의 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

고 백관옥 등 주요 단원들은 조선공산당 평남도당 위원장이던 국내파 현

준혁(玄俊爀)을 1945년 9월 평양 거리에서 암살했다. 이들이 먼저 서울로

피신한 뒤 교사 혐의로 체포됐다가 부인의 노력으로 석방된 염응택도 박

고봉의 권유로 1945년 11월말 서울로 남하했다. 서울에서 한동안 지내던

염응택은 다시 평양으로 잠입해서 동단 모임을 소집했다. 단원들이 모

인 자리에서 염응택은 각자 월남하기로 하고 본부는 서울로 옮긴 뒤 결사

를 파북하겠다고밝혔다.

4. 동단의 백의사 개칭

서울로 돌아온 염응택은 백관옥 선우봉 등을 만나 동단을 백의사로

개칭하겠다고 밝혔다. 백의사라는 이름은 염응택이 오랫동안 구상해온 것

으로 중국의 남의사와 같은 방법으로 조직을 운용하되 우리 고유의 복색

http://db.history.go.kr/front/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BC31AD00

C 6 2 5 & p S e a r c h W o r d L i s t = B C 3 1 A D 0 0 C 6 2 5 & p S e t I D = -

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00280042004900

20003A0020BC31AD00C6250029&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

=korean&code=&searchword=&return= (검색일: 2009년11월24일).

Page 9: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55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인 흰옷을 상징했다. 서울 서린동의 갑부 던 오동진은 궁정동 일본인 집

을 구해 백의사 본부로 쓰게 해주었다. 이 신이 추적한 바에 따르면 이

본부는 6∙25전쟁 때까지는 백의사의 소유 다가 환도후 법무장관을 역

임했던 이인(�仁)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한다.10) 5∙16 후에는 중앙정보부

가 이 집을 사들여 소위‘궁정동 안가’로 사용했는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쓰러진 곳이기도 하다. 염응택은 비

결사 백의사를 정식으로 출범시킨 뒤 궁정동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개별

적으로 월남해온 동단원들과 오동진, 신익희의 측근이었던 조중서 등이

만나 백의사의근간과 활동 방향을정했다.

궁정동 새 본부가 정비된 뒤 염응택은 백관옥이나 선우봉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알리지 않고 항상 혼자 외출했고, 방문하는 사

람도 항상 혼자 오도록 했다. 가령‘김아무개라는 분이 찾아오셨는데요’

하고 전하면 일언반구도 없이 손님을 모시고 실로 들어가 몇 시간이고

얘기를 나눈 뒤 돌려보내곤 했다. 백의사가 설립된 뒤 염응택은 주로 염사

장으로 불렸지만 공식 직함은 아니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염응택이

백의사 단원들을 입하는 은 한 과정이었다. 단원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염응택 혼자서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얽어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문에 백의사 단원의 수가 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만여 명에 이

르 다는 설도있다.

5. 백의사의 북 첩보활동과 북한 요인 암살 기도

북 정보 수집 단체이던 백의사는 요인 암살 및 극우 테러 활동을 주로

했으므로 반공 테러단체로 규정된다. 백의사는 첩보원들을 훈련시켜 주로

북한에 보냈다. 북한의 토지개혁과 관련, 반 하는 선동을 했고 소작농들

10) 이 신, 『비 결사白衣社: 이 신의현 사발굴』, 中(서울: 알림문, 1993).

Page 10: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56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첩보원들의 보고는 38도선이 강화되면서 중단됐

고 보고된 내용도 염응택의 머릿속에만 있을 뿐 남긴 것이 없다. 다만

CIC에 정보를 제공했다면간접적인기록이 남아있을법하다.11)

따라서 북한의 유격 활동은 백의사 첩보원들과 연계돼 있으리라는 추

정이 가능할 뿐이다. 염응택은 백의사 단원들을 경찰이나 국방경비 에

입 시키는 데도 심혈을 기울 다. 노동총연맹 등 노동계에도 백의사 단

원들을 가입시켰다.

백의사 활동중 일반적으로 소개된 것은 주요 정치인 암살과 관련된 것

이다. 북한에 청년을 파견해 북한 요인 암살을 시도하 던 것이다. 동단

이 결행했던 현준혁 암살 외에 백의사가 한 것으로는 김일성(金日成)∙강

양욱(康良煜) 암살미수가주목할 만하다.12)

1946년 2월 초 이성렬∙백시 ∙김형집∙최기성∙이희두 등으로 구성

된‘백의사 결사 ’는 신익희의 낙산장(駱山莊)13)에서 정보수집 요령과 지

하활동 방법에 한 훈련을 받은 뒤 북한에 파견되었다. 백의사 결사 가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14) 백의사 결사 가 신익희의

정치공작 15)에 합류해 북공작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백의사와 연계된

임정의 별동조직 정치공작 의 중앙본부장은 신익희 고 행동 장 조중

11) 이와관련해서는다음자료집이활용될만하다. 중앙일보현 사연구소(편), 『미군CIC

정보보고서: RG319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4 (서울: 중앙일보현

사연구소, 1996).

12) 이 신, 『비 결사白衣社: 이 신의현 사발굴』, 上(서울: 알림문, 1993), p.258.

13) 최규봉에 따르면 극우무장청년단체 養虎團의 본부가 낙산장이었다고 한다. 지하단체

양호단의 단장은 김성(속칭 김별)장군이었는데 그가 1946년 1월 16일 사망하자 최규봉

과 5명의 단원들은 백의사에 흡수되었다. “제1부 KLO 참전동지회 최규봉 회장 회고

담,”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로그들은누구이며무슨일을했는가?』(서

울: 지성사, 2005), p.32.

14) 강준만, 『한국현 사산책: 1940년 편』1 (서울: 인물과사상사, 2004), p.215.

15) 安東學人, “申翼熙氏와政治工作隊,”『新世紀』제2권1호(1949년4월); 강준식, “신익희

는우익쿠데타를기도했었다,”『다리』통권29호(1990년3월), pp.262-271.

Page 11: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57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서, 사령에 염응택, 부사령 박경구, 총무부장 유진산, 청년부장 조용진 등

이었으며 미 24군단 CIC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16) 최규봉의 회

고에 의하면 백의사는 미군 정보기관의 재정 지원을 받았으므로 미군과

연계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원산에 침투해

북한 실상을 파악해 오라는 첫 임무를 부여받은 백의사 공작원 10명은 출

발에 앞서 1946년 2월 25일 김구 선생을 예방하여 윤봉길 의사처럼 총과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김구 선생과 기념촬 을 했다는 회고담도

이어진다.17)

당시 정치공작 는 주기적으로 행동 원을 남한은 물론 북한지역까지

파견했다. 1946년 초 파견된 원들의 임무는 북한지역의 지도자 및 정당

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임정을 지지하는

우익조직을 구성하는 것, 주요한 공공기관의 건물을 방화, 소각하고 민심

을 혼란시키는 것 등이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성립 직후 북공작

은 요인 암살에 집중되었다.18)

백의사 결사 는 평양역 앞 광장에서 열린 북한의 3∙1절 기념행사에서

반탁운동을 벌임과 동시에 북한 정권 지도부 암살을 목적으로 수류탄을

투척하 으나, 김일성은 재빨리 피하 고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 중위가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딴 곳으로 되잡아 던지려다 그의 손에서 폭발했다.

노비첸코는 오른 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이 다치는 중상을 입었으나 김

일성은 무사했다. 노비첸코는‘3월 1일의 웅’으로 불렸고 1949년에는

16) 김인호,『사선을넘어서』(서울: 진흥문화사, 1984), pp.21-27; 유치송, 『해공신익희일

기』(서울: 海公申翼熙先生紀念會, 1984), p.460; 이기봉, 『인간김일성』(서울: 길한문화

사, 1989), pp.375-402;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남북관계: 이승만∙김구시 의정치

사』(서울: 서울 학교출판부, 1997), p.78.

17) “제1부KLO 참전동지회최규봉회장회고담,”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

로그들은누구이며무슨일을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p.32-33.

18)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남북관계: 이승만∙김구시 의정치사』(서울: 서울 학교출

판부, 1997), p.78.

Page 12: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58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3급 국가훈장을 받았다.19) 폭탄을 던진 사람은 열여덟 살 소련 김형집이었

다.20) 3월 1일 목적은 실패하고 미수로 끝났지만 백의사 결사 의 북한임

시인민위원회지도자 암살시도는아래와같이 연달아계속되었다.

1946년 3월 3일에는 최용건(崔庸健)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했고 3월

5일 최용건의 집을 재차 습격하 으나 역시 실패하 다. 3월 9일 김책(金

策)의 집을 습격했고 3월 11일에는 강량욱(康良煜)의 집을 습격, 그의 아

들∙딸과식모∙경비보초등의 인원을암살했다.21)

백의사 결사 원 중 최기성과 김정의는 현장에서 북한 인민군에 체포되

었고, 이희두는 인민군과의 총격전 중 사살되었으며, 이성렬만이 살아서

월남했다. 이들이 숨어있던 아지트에서는 임정포고문 제1∙2호가 발견되

었다. 김정의는 소련군에 끌려가 심문에서 임정 내무부의 정보국장 박문

(朴文)이 증명서를 작성해 주었고,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고 언급하 다.

또한 김구는 이러한 계획을 비준했지만, 자신이 직접 만나지 않아 자신의

북행을 알고있는지는 모르겠다고언급했다고한다.22)

암살단은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승차권의

19) 그는1992년4월김일성의80회생일에도초 받았으며『로동신문』1면에김일성과함

께 찍은 사진이 실렸다. 김학준, 『북한50년사』(서울: 동아출판사, 1995), pp.106-107;

박명림, 『한국전쟁의발발과기원I: 기원과원인』(서울: 나남, 1996), pp.175-158.

20) 강준만, 『한국현 사산책: 1940년 편』1 (서울: 인물과사상사, 2004), p.215.

21)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남북관계: 이승만∙김구시 의정치사』(서울: 서울 학교출

판부, 1997), p.79. 또한강준만, 『한국현 사산책: 1940년 편』1 (서울: 인물과사상사,

2004), p.215에는강양욱의아들도사망한것으로나와있다. 한편1948년4월남북협

상때김구는강양욱목사의인도로평양장 재교회에서옛친구전재선목사의주도

로예배를보았는데한때김구의약혼자 던안신호는백의사의강양욱목사집습격사

건에 해질문해난처했다고한다. 정리근, 『력사적인4월남북련석회의』(평양: 과학백

과사전출판사, 1988), pp.62-64.

22) “소련방무력정비사령부제7국부국장샤포쥐니코프가소련방중앙위원회수슬로프동

지에게 보내는 전문,”1946년 8월 22일;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

김구시 의정치사』(서울: 서울 학교출판부, 1997), p.79.

Page 13: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신임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23) 1946년 3월 군

사시설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백의사 원들의 계속된 북한 습격은

북한 고위층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24) 북한 당국은 테러가 임정의

지시 다는 증거를 확보했다면서 이를 계기로 북한은 내부치안을 강력

히 단속했고, 김구∙이승만을“팟쇼테로 강도단의 두목”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25)

도진순 교수는 이러한 북 요인에 한 테러 행위 배후에 한민국 임

시정부가 있다고 단정했는데“임시정부의 북타격 정책도 1946년 초반

기를 경과하면서 점차 소멸되어 갔다”고 주장했다. 도 교수는 임정 법통

론이 내외에 도전했기 때문에 소멸되었다는 분석을 첨가했다. 임시정부가

전국적 구도에서 북한의 인민위원회와 맞서기는커녕 남한에서조차 미군

정과 이승만-한국민주당에 의해 임정의 법통적 지위가 흔들렸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26) 북의 경호가 강화된 것도 소멸에 작용했을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일부 자료에는 여운형(�運亨) 암살에도 염응택이 관계된 것으로 묘사

돼 있다.27) 암살자 한지근이 백의사 멤버 다고 하지만 그는 백의사 단원

59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23)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 기원과 원인』(서울: 나남, 1996), p. 158; 강준만,

『한국현 사산책: 1940년 편』1 (서울: 인물과사상사, 2004), p.215.

24)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남북관계: 이승만∙김구시 의정치사』(서울: 서울 학교출

판부, 1997), p.79.

25) 북조선5-1기념공동준비위원회 (편), 『팟쇼-반민주분자의 정체』(평양: 동회, 1946년 5

월 1일); Освобождение КОРЕИ:ВОСПОМИНАНИЯ И СТ

АТЬИ (Москва:НАУКА, 1976); Ivan Chistiakov, “제25군의 전투행로,”

□조선의해방□, 국토통일원(역) (서울: 통일원, 1988); 『레닌그라드로부터평양까지』

(서울: 함성, 1989);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 기원과 원인』(서울: 나남,

1996), p. 158;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남북관계: 이승만∙김구시 의정치사』(서울:

서울 학교출판부, 1997), p.79.

26)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남북관계: 이승만∙김구시 의정치사』(서울: 서울 학교출

판부, 1997), p.80.

27) 이 신, 『비 결사白衣社: 이 신의현 사발굴』, 中(서울: 알림문, 1993).

Page 14: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60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이 아닌 외부인사 다. 김구 암살사건, 철도노조 파업(1946년 9월 24일),

구폭동사건(1946년 10월 1일) 등에 깊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물증이없어 사법적단죄에 처하지는않았다.

당시‘정치깡패’ 던 김두한의 배후에 염응택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신에 따르면 김두한의 우익테러 행위는 모두 염응택이 지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두한도 한때 백의사 멤버 다는 것이다.28) 1945년 11월 말

서울로 내려온 염응택은 남선전기주식회사 사원이던 인척 이봉렬의 집에

머물면서 백관옥과 선우봉을 접촉해서 당시 조선공산당 전위 장으로 포

섭돼 있던 김두한을 납치했다. 염응택은 오동진의 집에서 김두한의 부친

인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에 의해 살해됐다며 김두한을 설득해 우익으

로 전향시켰다. 그 후 김두한이 테러와 관련해서 구속되자 염응택은 미군

정 등에 있는 자신의 인맥을활용해서석방시켰다고한다.29)

6. 염응택과 신익희-유진산과의 관계

염응택은 정치인들과도 일정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양분교 입학

때 추천서를 써준 신익희는 환국 후 염응택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주도

하는 한정치공작 구상을 알리며 합류를 권유했지만 염응택은 정치적

성향의 조직과 공개적으로는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신익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야당 정치인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유진산은

염응택과 자주 만나 한민주청년동맹 등 우익 청년단체들의 통합을 논의

했던 것으로알려진다.

28) 이 신, 『비 결사白衣社: 이 신의현 사발굴』, 中(서울: 알림문, 1993).

29) 이 신, 『비 결사白衣社: 이 신의현 사발굴』, 中(서울: 알림문, 1993).

Page 15: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61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7. 염응택과 김구와의 관계

그런데 김구와 관련해서는 매우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다. 후술하는 미

군자료(실리보고서 등)는 안두희가 염응택에게 백범암살 지령을 받은 것

처럼 단정하는 기사들도 있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전혀 아니라고 안기석은

주장했다.30) 다른 책이나 증언록에도 백의사 단원이나 염응택이 백범 김

구 암살에관여했다는암시는없다는 것이다.

다만 낙양분교 폭동사건 때 김구는 폭동에 가담했던 염응택에 해 좋

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환국 후 염응택이 신익희와 함께 김구를 방

문해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올렸으나 김구는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냉 했

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과 접한 중국지역에 우익군 를 세우는 계획서를

염응택이 작성해서 신익희를 통해 김구에게 보여주자 김구는 화를 풀고

중국 총통 장개석과 부총통 이종인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계획은장개석 군 의패배로 실패하고만다.

이렇듯 초창기 백의사는 김구-신익희로 이어지는 임정계의 지휘라인의

명령을 받아 활동했으며 임정과의 연관 관계 하에서 북한에도 사람을 보

내 북타격작전을수행했다는설이 있다.

8. 미 CIC와의 연결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George E. Cilley) 소령이 백

범 암살 3일 뒤인 1949년 6월 29일 작성해 그 해 7월 1일 미 육군 일반 참

모부 정보국장 앞으로 보낸 문건이 미국 펜실배니아 주 미육군군사연구소

에서 방선주 교수와 정병준 박사에 의해 발굴되었다. ‘김구: 암살에 관한

30) 안기석, “인물연구: 白衣社총사령염동진, 金日成간담서늘케한전설적백색테러리

스트,”『신동아』통권505호(2001년10월), pp.316-323.

Page 16: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62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배후정보(Kim Koo: Background Information concerning

assassination)’란 제목의 미 육군 정보국 문서파일에 들어있으며 3급 비

(confidential)로 분류돼 있다.31) 이 실리 문건에 미군정이 백의사 요원

들을 북 첩보활동에 활용했다고 하고 있다(또한 백의사 단원 안두희가

미 CIC 요원으로 드러남에 따라 백범 암살에 미국이 개입돼 있다는 의혹

이 더 깊어졌다32)). 이 자료에서 실리는“분명 가장 악질적인(the most

malignant) 인물은 염동진 혹은 일반적으로‘맹인장군(Blind General)’

으로 알려진 한국인이다”라고 적고 있으며 염동진이 백의사를 통해 각종

청부 살인을저지른 것으로실리는 평가했다.33)

이 미군자료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문은 염응택과 미군 방첩 (CIC)와의

관계이다. 이 정보보고서를 작성한 실리는 당시 내부 정보 유출문제로 가

명을 사용했다.

당시 염응택은 신익희의 부름으로 낙산장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미군 정

보국에 몸담고 있는 이순용을 소개받았다. 이순용은 재미교포로 미군에

31) 정병준, “공작원 안두희와 그의 시 ,”『역사비평』통권69호 (2004년 겨울),

pp. 142-171.

32) 더불어백의사특히그총사령관염응택이김구암살사건에직접개입돼있다는의혹

이제기되었다. 그렇다면백의사는왜같은우익계열인백범을암살했을까? 김구는남

북협상참여등으로공산주의자들을포용했고이승만과한민당이주도하는1948년5-

10선거를 단독선거라 규정하며 반 했다. 이런 사상적 노선 변화가 그와 계파가 다른

우익반 자들에게암살의빌미를제공했다. 또한백범암살에이승만이과연얼마만큼

개입하고 있었느냐 하는 점도 의문인데 여기에 해서는 심증만 있을 뿐 결정적 물증

(hard evidence)이발굴되어있지않다. 이에 해방선주교수는“기 해제시킨미주

한방첩 원의증언문서중에는백범암살의최후배후가이승만 통령이라는확신에

기반해서술되고있다. 파넬소령의증언이그렇고, 맥두걸 위의증언이그렇다”고주

장했다. 김태식, “백의사와 CIC, 염응택, 그리고 백범,”『연합뉴스』, 2001년 9월 4

일,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1/09/

009000000200109041420749.html (검색일: 2009년11월24일).

33) “김구 암살 관련 미 정보문건 전문(번역),”『연합뉴스』, 2001년 9월 4일,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1/09/

009000000200109041443712.html (검색일: 2009년11월24일).

Page 17: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63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입 하여 2차 전에 참여했던 CIC소속 중사 다. 그후 한국 정계에 들어

와 이승만 정권 아래서 내무부장관에 기용된 바 있다. 이순용은 하지 장군

이 신익희의 한정치공작 를 해체하라고 하는데 북 정보를 제공하면

해체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신익희가 화를 내고 나

가버리자 측근인 조중서가 그 역할을 백의사가 맡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

이다. 그 후 백의사와CIC와는 가까운사이가 되었다.

염응택의 주 채널은 당시 이순용의 상사 던 CIC 서울지구 장인 미

육군 소령 위테커. 그는 궁정동 백의사 본부를 찾아와 북 관련 정보를

제공하면 백의사활동을 비호하겠다는약속을했다.

위테커는 염응택과의 약속에 따라 북한에 파견할 첩보원 훈련을 적극적

으로 지원해주었다. 훈련장소는 위테커의 도움으로 마련한 정릉 골짜기의

외딴집이었다. 일본인 부호의 별장으로 쓰이던 그 저택은 이후 백의사의

한 아지트로 이용된다. 저택 주변이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은

한 활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이 집은 9∙28 수복후 국군 HID 유격 의

비 훈련장으로쓰이기도했다.

염응택은 각 산하단체 청년 가운데 열명을 선발했다. 선발기준은 매우

엄격했다. 각 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하는데 조금도 차질이 없도록 정확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 조건에 따라 각도 출신자 중에서

2명씩 선발됐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무장도 요구됐다. 동단 원이었던

박현 (朴玄英)이 훈련 책임자 다.

위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염응택이 이끌던 백의사가 단체 성격상 주

한미군 방첩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와 G-2로 표되는 당

시 미군정 정보기관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렇지만 확실한 물증

은 아직 발굴되어 있지 못하다). 이 단체 회원들이 남긴 회고록에는 이러

한 가능성이 많이 언급되었는데 공식 문건인 실리 보고서 등으로 이런 사

실이 확인되었다고할 수 있다.

Page 18: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64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광복 이후 남한에 주둔한 미24군단은 예하에 크게 두 그룹의 정보기관

을 거느렸다. 하나는 4개의 일반참모부(G-1, G-2, G-3, G-4) 중 정보

참모부로 알려진 G-2 고, 다른 하나는 CIC로 일컫는 방첩 다. 1945

년 9월 9일에 제224 CIC파견 (the 224th CIC Detachment)가 최초로

남한에 들어왔으며, 소속 요원 부분은 태평양전쟁 당시 리이테와 오키

나와 전투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이었다. 224 CIC파견 는 다양한 CIC 전

투부 분견 (combat unit detachment), 수도부 (metropolitan

unit), 지역부 (area unit)들과 함께 활동했다. 이들 각 파견 는 도쿄의

제441 CIC 파견 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다가 1946년 2월 13일 서울의

제224 CIC파견 가 남한주둔 모든 CIC파견 에 한 작전통제권을 장악

한데 이어 그 해 4월 1일 모든 CIC파견 가 971CIC파견 로 교체되고 나

서야 본격 활동에 돌입한다. CIC의 활동은 매우 광범위해서 첩보, 정보

수집뿐만 아니라 한국인 정치지도자와 미국인에 한 사찰도 벌 다. 이

와 더불어 CIC는 남한의 우익반공청년단체들과 연 해 직접 공작원을 파

견해 적극적 정보를 수집하는 북 공작을 벌 는데 여기서 백의사와 접

점을 이루었다.

현재까지 CIC의 북공작은 정확한 실상과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

이며 1948년 12월 부 는 공식 철수했으나 그 요원 상당수는 그 로 남아

‘켈로부 ’로 알려진 KLO(Korean Liaison Office; 미 극동군사령부주

한[첩보]연락사무소)와 미극동공군의 북 첩보기관인 미공군 인간첩보부

(USAF HUMINT)로 역할이 옮겨졌다. 백의사 단원 중 상당수는 6.25

전쟁 중 KLO특수부 로전환되었던것이다.

Page 19: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65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III. KLO의 조직과 활동

1. 백의사의KLO 전환

백의사 단원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맡은 바 소임을 완수

하겠다는 정신무장을 철저히 받은 상태에서 체력 훈련과 무술, 각종 무기

를 다루는 기술을 반복하여 훈련받았다. 폭파술, 적진 침투와 탈출방법,

산악돌파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유격 훈련이 뒤따랐다. 소련제 각종 무기

에 한 식별법과 조작법도 가르쳤다. 미 CIC 교관들이 비 리에 파견되

어 훈련을 도와주었다. 1946년 5월 초순 첩보 가 이북으로 잠입했다. 2

인 1조의 첩보 는 군사적인 첩보가 주임무 다. 각 지역별로 주둔 부

의 배치 상황과 병력수, 그리고 각 부 별 화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하

게 파악해서 귀환하라는 명령이었다. 소련으로부터의 무기 반입 현황을

알아내는 것도 주요 임무 다. 위테커가 염응택에게 직접 부탁한 내용이

었다. 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좌우 립의 시 도 끝나자 백의사의 역

할은 점차 축소됐다. 더 이상 사설단체의 음성적 역할이 필요 없게 된 것

이다. 정부수립 후에는 직업이 있던 단원들은 직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100여명의 단원들은 갈 곳이 없었는데 한 단원이 육군본부 첩보과장에 취

임하면서 이들중 상당수를데려가기도했다.

1949년 2월에는 한 인사가 염응택을 찾아와 맥아더 사령부 윌로비 소장

으로부터 북한에 한 정보를 확보하라는 극비명령을 받았다며 협조를 요

청했다. 그 결과 1949년 6월 1일 미 극동군사령부(맥아더 사령부) 주한[첩

보]연락사무소(Korean Liaison Office, 약칭 KLO, 한국에서는 켈로부

로 통칭됨)가 설치됐다고 한다. 곧이어 주한미군이 철수했는데 KLO 설치

는 이를 위한 준비조치 다.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하며‘한국(Korea)에

Page 20: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66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연락사무소(Liaison Office)’를 두었던 것이다. 병력은 철수하나 북 첩

보 활동은 계속해야 했으므로 비 정보기관을 설립해야 했던 것이다. 최

규봉의 회고에 의하면 총칼이 물러나면서 눈과 귀는 남겨두겠다는 속셈이

었다는 것이다. 그 눈과 귀는 북한의 총칼과 병력의 증강 및 그 배치 현황

을 즉각 정확하게알아내야할 책임이있었다.34)

KLO는북한의정보를구하기위해이북에서내려온한국인청년들을고

용해 북 첩보원으로 활용했는데 이들을 가리켜 속칭‘켈로(KLO) 부

원’이라고 했다. 미 극동군사령부(맥아더사령부)가 북한 출신 민간 반공청

년단체(서북청년단이 중심)를 규합해 북파 공작 첩보부 를 조직했던 것이

다. KLO는 미국의 극동군 사령부가 한반도에서의 정보 수집활동( 북-

중공군 첩보)을 목적으로 조직해 운 했던 비정규 첩보조직으로 사무실은

서울반도호텔202호실에마련되었다. 사무실입구에내걸린‘미극동군사

령부 주한[첩보]연락사무소(Korea Liaison Office)’라는 평이한 이름은 그

들의비 스럽고도위험한과업을위장하려는목적도숨어있었다.

미군의 지휘를 받는 첩보부 인 이 부 는 미 CIC산하에 이북출신들로

창설되었고전쟁 중에 전사및 실종된숫자가 3,400여명에달했다.

KLO는 수 백명의 원들이 북정보수집과 침투공작에 종사했다. 백

의사 잔존 단원 전원은 모두 여기에 들어가 6∙25전쟁 기간동안 첩보활

동을 벌 다.35) 고위 공직자 중에는 여기에 소속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미국 CIA와 월남인결사조직 백의사가 공동으로 정릉의 북암살단훈련

원을 운 했다고 한다.36) 이들은 실제 침투에 기반 했기 때문에 비교적 정

34) “제1부KLO 참전동지회최규봉회장회고담,”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

로그들은누구이며무슨일을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35.

35) “제1부KLO 참전동지회최규봉회장회고담,”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

로그들은누구이며무슨일을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p.32-36.

36) 오연호, 『우리현 사의 숨은그림찾기: 미국의 한반도 정치공작』(서울: 말, 1994); 강정

구, 『민족의생명권과통일』(서울: 당 , 2002), p.67.

Page 21: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67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확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KLO공작원들이 전쟁 전 명확한 증거를 확

보하여 북한남침을 사전 경고하기도 했다.37) 실제로 최규봉의 회고에 의

하면 1949년 10월부터 남침 개시 가능성에 해 수십 차례 관계 요로에

정보분석을 제출했으며 특히 1950년 1월 전곡 주둔 북한군 장병 4명을 생

포하여 그들의 증언을 통해 남침전쟁 준비상황을 상세히 보고했고 당시의

상황 분석으로는 침략군이 진격하며 야 이 가능하려면 6월 남침 개시 가

능성이 농후하다고판단했다는구체적 예견까지했다고한다.38)

2. KLO의활동

6.25전쟁 동안 수많은 비 작전을 수행하며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 지

만 부 특성상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있는 비운의 부 이

다. 군번은 물론 군적도 없는 경우도 있었으므로‘얼굴 없는 부 ’라고 칭

해졌다.39) 적진에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고 납치를 하는 등 종횡무진했지

만 비 공작이었으므로 자료를 남길 수는 없었다.40) 연구에 활용할 수 있

37) 하기와랴료, 『한국전쟁』, 최태순(역) (서울: 한국논단, 1995), pp.264, 266의근거는미

국버지니아주노포크(Norfolk, Virginia) 소재‘맥아더기념관’에소장된비 해제문

서이다. 한편 하기와랴는 pp.256-257에서 미국의 군부-극우세력들이 김일성의 남침

가능성을미리알고있었음에도불구하고이에 처하지않고오히려유도하면서방치

한음모가있었다고주장했다. 이견해는증명될수없는하나의가설에불과했다.

38) “제1부KLO 참전동지회최규봉회장회고담,”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

로 그들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39. 물론 사후회고이

므로100% 신뢰하기는어려운점도있다. 특히1950년1월생포한장병으로부터획득

한전쟁준비정보가그렇게정확했다는것은그장병의직급과전쟁개시5개월전이

라는 비교적 이른 시점이라는 점 때문에 과장된 면이 없지는 않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지만맥아더기념관문서에서도자료가발굴되었으므로이들의정보수집과

예견능력이보통수준은넘었음을확인할수는있다.

39) 강준만, “얼굴 없는 켈로부 ,”강준만, 『한국 현 사 산책 1: 1950년 편, 6.25전쟁에

서4.19전야까지』(서울: 인물과사상사2004).

40) 이정훈, “수도 없이 넘다는 死線“나는 원한 KLO맨”: 이연길 회장, 6∙25전쟁 특수

공작의 산증인 …적진 침투해 정보 수집∙납치 등 종횡무진 활약, 황장엽 망명 비화,”

Page 22: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68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는 자료는 당시 유격 의 수집 사료, 생존자의 회고록류와 미군의 비 자

료에 기반하여 2000년에 발간된 미국 문서집 등이 있다.41) 이 문서집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에 있는 자료에 기반한 것으로

이에 한 해제로는 방선주, “KLO문서 해제,”『아시아문화』제15호

(2000년 11월), pp. 271-286이 있다. 또한 최근의 연구물로는 조성훈,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가 있다. 이

역작의 내용은아래 목차를통해 개괄할 수 있다.

『주간동아』통권468호 (2005년 1월 11일), pp.24-25. 이연길은 황장엽 망명을 중개했

다고한다. 金容三, “黃∙金망명중개인A씨는KLO 장출신�淵吉北民協회장: 黃

長燁∙金德弘망명사건의진상,”『月刊朝鮮』통권207호(1997년6월), pp.242-261; 이

정훈, “북도내조국, 남도내조국내가왜미국으로가?: 이연길북한민화협회장, 망

명공작입열다“황장엽씨당초미국행권유에정색하며거절,”황장엽망명비화,”『주

간동아』통권468호(2005년1월11일), pp.14-18.

41) 한림 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편), 『KLO∙TLO 문서집: 미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

무소, 1950. 1-1951. 2』(춘천: 한림 학교출판부, 2000).

42) 호림부 에 해서는 오세 , “남북 현 사의 10 비화: 최초 북파공작 ‘호림부 ’

의비극적운명,”『신동아』(2010년5월) 참조.

제1장 머리말

제2장 민간 자생유격 활동

제3장 국군 유격

제1절전쟁이전유격 의활동

1. 좌익 빨치산 활동과 게릴라의 남파

2. 호림부 42)

제2절전쟁시기유격 편성과활동

제4장 미 제8240유격부 의 창설과 운용

제5장 제8240유격부 의 활동과 해체

제1절동키부

1-15. 동키 제1-15부

16. 동키 제20부

17. 동키 제21부

18. 기타 부

제2절울팩부

1-8. 울팩 제1-8부

제3절동해안유격부

1. 창설배경과 각 부 편성

2. 커크랜드(Kirkland) 부 의 활동

3. 아밴리(Avanlee Regiment) 부

4. 스톰(Storm) 부

5. 토치라이트부 (Torchlight Regiment)

제4절제1공수유격부

제5절첩보 의조직과활동

1. 전쟁이전 첩보기구와 KLO

2. 전쟁시기 KLO 첩보 조직과 활동

제6절해체와국군편입

1. 유격부 의 후방 철수와 국방부 제8250부 편입

2. 육군 편입

3. 전사자, 포로 및 실종자

제6장 미국 중앙정보국 산하 도유격

제7장 맺음말

Page 23: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69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이 책은 주요 부 의 부 사를 기초로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보고서, 증

명서, 사진 등과 증언,43) 미군 자료 등 광범위한 자료를 활용했다. 위 목차

와 같이 서해안 동키 부 17개와와 강화도 울팩(Wolfpack)8개 부 , 동

해안 주문진 커크랜드(Kirkland) 기지의 부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

다. 당시 참전자가 제공한 자료 등이 도판 사진으로 본문 중에 실려 있는

데 그 주요 목차는다음과 같다.

당시 켈로 부 원들은 미군에게 수여받은 독일 군복을 입었다고 한다.

KLO는 특히 6-25전쟁기간동안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표적으로 1950

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북한군에 점령된 팔미도를 탈취해 등댓불

43) 조성훈, 『한국전쟁의유격전사』(서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3), p. 665.

당나귀지(특전사령부 역사관)

조남혁∙이종암∙이 재 등의 일기

육군 을지 제2병단 사령관 보고서(1951.7.15)

제9172부 동해안파견 표지(이인배 제공)

임관장

부 계급표(구월부 )

무전기 휴 증(정화섭, 1953.9.1)

울팩부 전차포 교육 사진

유격사관학교 졸업증

제1회하사관교육수료기념사진[노튼(Charies W. Norton., Jr.) 령(예) 제공]

김응수 동키 제15부 장 등 훈장수여

타이거여단 신분증(이원근, 1952.9.20)

신분증(최광일)

신분증:임병화 1951.7(전쟁기념관)

스캐논부 표지

낙화산 휘장(정화섭, 1953.4.22)

미 제8240부 제 증서

배치 상황도(1951.12)

Page 24: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70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을 밝혀 유엔군 해군 상륙함 를 유도했던 것이다. 상륙함 가 인천항에

진입하려면 흥도와 종도 사이의 물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이 길목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팔미 등 다. 팔미 등 확보 명령은 9월 7일

상부로부터 내려졌고 9월 12일 맥아더 장군 휘하의 유엔군 함정들이 인천

항과 월미도에 함포사격을 가하고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200 의 함재기

들도 상륙 지점과 후방의 포 들을 연일 폭격했다. 그리고 掃海艇들이 인

천만 일 를 선회하며 KLO 원들이 찾아놓은 기뢰의 제거작업을 벌

다. 그간 KLO 원들은 보름가까이 기뢰를 옆에 두고 수심 측정 작업을

했으며 9월 14일 최규봉 KLO 고트 장은 흥도에 상륙했다. 9월 14

일 저녁 7시 고성능 무전기에“15일 0시에 팔미도 등 에 붉을 밝혀라”라

는 맥아더 사령관의 암호명령이 특공 원들(팀장 유진 F. 클라크[Eugene

F. Clarke] 미 해군 위, F. 클라크혼[Clarkhorn] 미 육군소령, 존 포스

터[John Foster] 미 육군중위, 계인주 한민국 육군 령, 연정 해군소

령, 최규봉 KLO 고트 장)에게 하달되자 북한군과 싸워 9월 14일 22

시에 팔미도를 탈취했다. 그러나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 점화 불능상

태 다. 최규봉 장은 등 바닥에서 나사못을 찾아 등 의 불을 밝히고

성조기를 계양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등댓불과 성조기를 확인한 맥아더

사령관은 함 261척에게 인천 앞바다 진격 명령을 내렸다. 결국 팔미도

등 에 불을밝혀 인천상륙작전성공에결정적 기여를했다.44)

1951년 7월 26일 미 정보당국이 지휘하는 제8240 유격[첩보]부 가 설

44) 吳東龍, “켈로(KLO)부 장 崔奎峰옹의「인천상륙작전 秘史」:『八尾島 등 를 먼저 점

령, 10만병력과함정261척을인천으로인도했다』,”『月刊朝鮮』제24권9호통권282호

(2003년 9월), pp.256-263; “제1부 KLO 참전동지회 최규봉 회장 회고담,”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로그들은누구이며무슨일을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p.63, 78-90, 104-105. 그때 그 피 묻은 성조기는 최규봉에게 증정되었다가

다시그가맥아더기념관에기증했다. 이사실은1999년에건립된인천상륙작전기념비

문(팔미도해군기지소재; 당시국방부기관지승리일보주간이었던구상시인이1999

년9월14일작성)에기록되어있다.

Page 25: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71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립되어 KLO부 는 이에 흡수 개편될 기반이 마련되었으며45) 실제로 흡수

된 것은 1951년 10-11월이었다.46) 휴전 무렵부터 개편안이 다시 논의되면

서 1953년 8월 한민국 국방부 제8250부 로 재편되었다.47) 1953년 초

에는 그들의 규모가2만 명이 넘었다고한다.48)

창설 당시에는 미군정보팀에서 파견된 미국인 5명과 한국인 6명이 전

부 고, 책임자는 미 24군단 CIC 공작과장 런치 위 으며 동해, 중부,

서해의 3개 부서로 나뉘어 정보공작을 분담했다. 한국인 최규봉은 동두

천, 개성, 춘천 등지의 근무경력과 공적을 인정받아 중부와 서해 지역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KLO 원에게는 별다른 신분증명서를

발급하지 않고 신 수도경찰청장과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발행한 신분증

을 가지고 활동하게 하다가 6-25전쟁 이후 구에서 KLO신분증이 처음

발급되었다.49)

KLO는 구로 내려가면서 피난민 중에서 공작 원을 발굴해 부 를

증편했다. 그때까지 한국인 책임자 밑에 몇 십명씩 흩어져 있던 원들의

집단들을 통합해 고유 부 명칭을 부여했다. 박태현 장의 위스키

(Whiskey) , 전훈 장의 선(Sun) , 최규봉 장의 고트 가 그것이었

45) 조성훈, 『한국전쟁의유격전사』(서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3), p.146.

46) “제1부KLO 참전동지회최규봉회장회고담,”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

로 그들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p.111-112; �永純,

“KLO/8240部隊 戰記,”『世代』제5권 2호 (1967년 2월), pp.190-198; �永純,

“KLO/8240部隊戰記,”『世代』제5권3호(1967년3월), pp.205-213; �永純, “諜報共

作員: KLO/8240部隊戰記,”『世代』제5권12호(1967년12월); �永純, “니트로구리세

린作戰: KLO/8240部隊戰記,”『世代』제5권11호(1967년11월).

47) 조성훈, 『한국전쟁의유격전사』(서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3), p.139.

48) 안병한, “발간사,”조성훈,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p.ii.

49) 崔奎峰, “나는 KLO部隊長이었다 <特輯>,”『新東亞』통권213호 (1982년 6월), pp.252-

268; “제1부 KLO 참전동지회 최규봉 회장 회고담,”이창건, 『KLO의 한국전 비사:

KLO, 켈로그들은누구이며무슨일을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p.35-36.

Page 26: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72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다. 이런 부 명칭으로 각종 공작을 계속 수행하다가 1951년 10월 3개 부

를 단일부 로 통합하여 미 극동군 정보부 로 발전-개편했는데 아마

도 당시 동경 유엔군 사령부 CIC 부 인 441CIC와 짝을 맞추기 위해서

을 것이다. 부 장에 러셀 령, 한국인 책임자로 계인주 령이 취임했

다. 그때까지는 각처에 아지트를 두고 공작 원을 분산 수용했지만 원

수가 계속 늘어나자 1951년 11월 부 명칭을 8240부 로 바꾸면서 분산

수용했던 원들을 선린상고 자리에 통합 수용하게 되었다. 부 이름을

특수공작 로 부르면서 최규봉이 공작과장으로 임명받았고 원수는 1천

여 명에 이르 다. 작전계획, 지휘 및 집행은 최규봉 장이 맡았고, 전훈

장(보급과장 겸무)은 보급을, 박태현 장(인사과장 겸무)은 총무, 인사

업무를 담당했다. 실제 인원은 섬에 나가있는 2천명, 서울 본부와 훈련 캠

프 및 북한 지역에 침투 중인 공작원을 포함해 5천 명 수준이었다. 상근

인원수가 그러했고 수많은 손실 원 및 교체 훈련병들을 수시로 보충해

야 했으므로 KLO-8240을 거쳐 간 인원수는 몇 만 명을 헤아렸다. 당시

원들은 병력수가 여단 규모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50) 이들은 적을 교란

시키기 위해 병력 수를 10만 명 선까지 과장했고 실제로 북한군은 과장된

병력 수를 믿어 KLO를 단히 무서워했다고 한다. 이러한 위장전술은 미

육군의 심리전교재에 성공사례로인용되고있기도 하다.51)

초창기 KLO정보원의 북파는 2, 3명씩 이루어졌는데 1951년 11월 이후

6-12명의 분 원 단위로 확 했다. 또한 육로에 의한 침투와 함께 공수침

투도 병행했는데, 북한군은 공수부 를 특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공수부

의 후방 침투와 교란에 전전긍긍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일성도 공수

50) 이창건, 『KLO의 한국전 비사: KLO, 켈로 그들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가?』(서

울: 지성사, 2005), pp.482-483. 이 자료에 의하면 1952년 말부터 8250으로 불렸

다고 한다.

51) “제1부KLO 참전동지회최규봉회장회고담,”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

로그들은누구이며무슨일을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p.112-113.

Page 27: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73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부 가 무서워 신의주로 도망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부득이 산세가 험한

강계 쪽으로 도망치느라애를먹었다는후일담도 있다.52)

KLO 부 는 활동지역과 활동무 에 따라‘고트(goat∙염소) ’따위

의 암호명이 붙은 분견 로 나뉘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고트, 이 , 윔

프스, 불독, 리바이벌, 레오파드(leopard; 백령도에 있던 기지), Y부 등

10여 개의 한국인첩보조직을미군당국이고용했던것이다.

동키(후술함)나 레오파드 등의 부 들은 미군 연락장교가 훈련을 담당

했거나 조직이나 군수지원등 각종 지원을 미군이 담당했다. 이들은 초창

기에 자생적인 유격전부 로 시작되어 점차 미군통제 하에 들어갔고 일부

부 는 CIA에서 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생적 유격전부 이다 보니

모든 통제가 정확히 이루어지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1951년에는 다수의

유격전요원들이적지에 침투되기도전에달아나기도했다.

여자 첩보원집단이었던 암호명 래빗이나 공군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한

첩보조직이 알려지며 KLO부 또한 알려졌다. 현재까지 신원이 확인된

총 3천여 명의 군번 없는 용사들의 위패는 전국립묘지에 봉안되어 있

다. OPC(JACK)는 부산 동래 베이커 기지에 근거지를 둔 부 이며, 예하

에 도부 (일명 Y부 ) 1000여명이 함경도 산악과 개마고원일 , 한반

도 동북부 내륙지역을 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주로 낙하산으로 공중

침투후 이 지역에 탈출한 미 공군조종사를 구출하는 것이 주 임무 고 종

전 후 생환한 팀은 1개팀 6명 정도 다. 나머지는 전사했거나 실종되었다

고 한다. 기타 첩보부 로 무지개부 가 있다. 이 부 는 1952년 4월 창

설되었으며 사이판에서 공수훈련을 포함한 유격전 교육을 받았고 제주도

에 투입되어 주로 공비토벌 전담부 가 되었다. 초 사령관으로 박창암

소령이 부임했다.

52) “제1부KLO 참전동지회최규봉회장회고담,”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

로그들은누구이며무슨일을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112.

Page 28: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한편 미 공군 첩보부 제6004 항공정보 산하에 제1특수전부 (일명

NICK)가 있었다. 한국 육군 결사유격 백골부 (백골병단)로 1연 , 2연

, 3연 로 구성되었으며 각 연 는 병력이었다. 지휘관은 김한철

위, 채명신 위, 김한식 위가 있었다. 작전지역은 강원도 인제군 일 ,

원산 일부지역, 금강산일 다.

한편 이창건 KLO 기념사업회 회장에 따르면“이승만 통령은 KLO부

에 남다른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6.25 전쟁 중 가장 빛나는 승리의 하

나인 인천상륙작전(팔미도등 탈환작전)이나 화천-철원지구 승리, 그리

고 반공포로 석방 역시 KLO부 의 활약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53) 이

회장은“이승만 통령이 6.25 당시 밴 플리트(Van Fleet) 미군 사령관에

게‘전쟁 후를 생각해 물과 전기를 공급해줄 화천을 꼭 탈환해 달라’고 요

청했다. 밴 플리트는 산악전에 강한 중공군이 주둔하고 있는 화천으로 병

력 전개를 꺼리다가 이 통령의 요청이 계속되자 인천상륙작전 때 팔미

도를 탈환하고 등 를 밝힌 KLO 최규봉 장에게 화천지역 정탐을 맡겼

다. 최 장은 성공적으로 화천에 침투해 적정을 보고했고 이 정보로 결심

을 굳힌 밴 플리트가 공격을 감행, 중공군 1만3000명을 사살했다. 보고를

들은 이승만 통령은 크게 기뻐하며 화천 저수지를 파로호(破虜湖)라고

직접 이름 지었다”고 소개했다.54)

이 회장은 또“1953년 반공포로 석방 때도 이 통령은 KLO에게 특수

임무를 부여했다”고 증언했다. 이승만 통령은 원용덕 헌병사령관에게

74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53) 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로그들은누구이며무슨일을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54) 최규봉, “한국전쟁기KLO의창설과활동내막에 한생존자들의구술,”국사편찬위원

회, 2005, http://www.history.go.kr/app.inform.Inform.top?comm

=usr.viewOralData&unit=50&searchrange=All&searchkeyword=&page=2&bbs_c

ode=938 (검색일: 2009년 11월 24일). 이 구술자료 수집은“한국전쟁기 미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의 창설과 활동 내막에 한 생존자들의 구술조사”라는 제목으로 김기 ,

김봉림, 오우일, 우용빈, 이경복, 이종각, 전 찬, 최규봉 등의 구술자가 참여했다. 총

Page 29: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75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구출작전을 지시하면서 원 사령관 병력의 각 소 마다 KLO 원을 2명씩

추가배치하라고 명령했다. 이 회장은“이 통령이 KLO의 특성 상 반공

포로며 만행을 원하는 중공군 포로를 잘 구출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

었을 것”이라며“그 혜안이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55)

3. 켈로와유격

8240부 에는 특수공작 와 선린상고와 서울여상의 공작 외에도 귀

순자로 구성된 공작팀이 따로 있었다. 소위 동키 부 등 50여개의 유격

부 는 모두 그 부 에 배속되었다.56) 이들 부 는 KLO 직할 부 는 아니

지만 큰 역할을했다.

한국군이 정보부 를 재건한 것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할 때인

1950년 10월 21일로, 이 날 기무사의 전신인 육군 방첩 가 창설되었다.

1951년 1∙4 후퇴로 다시 리면서 일단의 한국군 패잔병이 황해도 구월

산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구월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백령도에 포진한

미군(당시는 KLO 부 고트 가 주둔하고 있었다)의 지원을 받으며 유격

전을 펼쳤다. 구월산 유격 로 불린 이들은 1953년 정전을 앞두고 백령도

로 철수했는데 미군은 이들을 모아‘동키(donkey∙당나귀) 부 ’를 창설

22시간 27분 분량이다. 이외에 본 연구와 연관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구술사 자료로

는“죽산조봉암과 HID( 북첩보기관),”2005로 김봉환, 복진풍, 정태 이 구술했으며

12시간59분분량이다.

55) 이창건, “이승만 박사와 KLO부 ,”우남이승만연구회 제48차 콜로퀴엄, 서울 정동제

일교회 아펜셀러홀, 2009년 9월 21일 오후 3시; 『한국논단』(2009년 10월); 이승만

통령, KLO부 에 각별한 신뢰”: 이창건 KLO 기념사업회 회장, 이승만연구회 콜로퀴

엄서 증언, “1953년 반공포로 석방 때도 KLO에 특수임무 부여해 성공,””『뉴데일리』,

2009년 9월 21일 , http://www.newdaily.co.kr/html/article/2009/

09/21/ART33799.html (검색일: 2009년11월23일).

56) “제1부KLO 참전동지회최규봉회장회고담,”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

로그들은누구이며무슨일을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114.

Page 30: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했다.57) 인천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동키부 는 곧 북한에 들어가는 첩보

부 의 중추세력이 되었다.58) 적진에 침투해 적을 교란시키고 첩보수집

등의 임무 수행을 위해서는 북한 출신이 안성맞춤이었다. 동키부 는 황

해도 장연군 무장 출신 26명으로 출발했지만 백령도로 피해온 북한 청

년들이 잇따라 자원하면서 2,000여명으로 늘어나자 10여개 산하 부 를

편성했다. 동키부 는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83차례의 작전을 벌여 적

사살 2,100여명, 생포 105명, 반공인사 구출 4,500여명이라는 혁혁한 전

과를 올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첩보활동이었다. 원들이 적

진에서 얻은 정보는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은 물론 연합군이 각종 전투를

수행하는 데 요긴하게 활용됐다. 동키부 에 한 모든 작전명령은 미군

으로부터 하달됐기에 한국군은 거의 알 수가 없었다. 동키부 가‘잊혀진

부 ’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동키부 원들은 전사 338명, 부상

406명, 행방불명340명이라는큰피해를입었다. 동키부 의후방교란은

인민군 2개 사단의 발을 묶어 놓았다고 전쟁 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동키부 활동은 휴전협정과 동시에 중단됐다. 전사한 전우의 시체를 북

한지역 산골짜기나 해변가 모래밭에 묻어 두고 각각 주둔지에서 철수했

다. 1954년 2월 살아남은 원 중 지휘관 49명은 장교로, 460명은 사병으

로 국군에 편입되면서 짧은 기간었지만 파란만장했던 동키부 는 역사에

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북활동 중에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원들은

보상을전혀받지못했다. 군번조차없는비정규군인이었기때문이다.59)

8240부 는 북한 각지에서 서해의 백령도와 평안도 인근 섬으로 온 반

76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57) 조성훈, 『한국전쟁의유격전사』(서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3), pp.251-418.

58) 이정훈, “[심층취재|남북첩보전쟁반세기] 피의보복전을부른공작의세계,”『신동아』

통권496호(2001년1월), pp.248-267.

59) 6∙25전쟁이한창이던1951년2월중순부터북한출신청년들이인민군을상 로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벌여 왔는데 이것이 동키부 의 기원이라고 한다. 이중 세력이 가장

왕성했던황해도장연군무장 는1∙4후퇴에도불구하고항전을계속하다1951년1월

Page 31: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공청년들에게 보급품을 조달했으며 다시 황해도와 평안도 등으로 복귀한

이들의 봉기-유격활동에 관한 작전을 지휘했다. 그 중에서 백령도에 본부

를 둔 윤민섭의 특수 는 그런 반공청년을 효과적으로 조직하여 서해안에

10개 도서를 점령한 후 해안 침투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서해안 도서를

통해 해안지 로 들락거리자 후방이 언제 뚫릴지 모른다고 생각한 북한군

은 전 해안선에많은 병력을분산 배치해야했다.

구월산 유격 는 자생유격 이었는데 내륙지역 부 인 연풍부 , 백호

부 ,60) 수월부 , 송화치안 등이 있다. 최후로 남은 구월산 유격 는

1953년 김정숙을 장으로 둔 자생유격 로 1954년까지 활동하다가 소

멸되었다. 그 외 구월산지역 부 로는 은율군, 초도, 장연군, 백령도, 옹진

반도 등의 신천무장치안 , 신화치안 , 송림부 , 옹진학도유격 등이

있다. 서해도서 구월산 유격 로는 고트, 선, 위스키등 3개 지 가 있는데

이들은 백령도의 레오파드 부 의 통제를 거치며 1951년 4월 동키부 란

별명으로 불리었고 나중에 휴전선 이남 강화도의 울프백부 의 통제를 받

았다. 결국 육군 HID 부 에 흡수되었다. 동강 하류에 있는 초도를 본

거지로 삼아, 인근 웅도, 평안북도의 화도와 수운도까지 작전지역으로

삼은 고트 가특기할 만하다.

켈로 직할부 는 아니지만 산하부 인 유격백마부 의 활동상도 주목

할 만하다. 1950년 11월 17일 평안북도에 진격하 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침략으로 전략적인 후퇴를 하게 되자, 정주군의 각 면 치안 가 단합하여

77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13일 시가전에서 크게 패하자 원 수백명이 주민들과 함께 백령도로 숨어들었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한 미군이 이들을 주축으로 유격부 를 창설했다고 주장된다. 김학준,

“1∙4후퇴에도백령도사수‘군번없는유격 ’: NLL 서해5도위로끌어올린숨은공신

동키부 ,”『서울신문』, 2010년2월6일13면,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206013006 (검색일: 2010

년2월6일).

60) 백호부 유격군전우회 (편), 『백호부 유격전사(白虎部隊遊擊戰史): 제3,4연 편』(서

울: 백호부 유격군전우회, 1992).

Page 32: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11월 22일 유격 로서 백마부 라고 명명하고 발족하 다. 무기도 없고

훈련도 안 된 상태에서 정규군인 중공군에 항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었다. 최 의 위기에 몰린 정주군 각 面의 치안 들은 포구인 각산면 본저

리로 집결했다. 각 面의 치안 들은 1950년 11월 22일 이곳에서 육군본부

G2 요원인 �應洙(김응수)를 부 장으로 추 하고 유격백마부 를 창설

했던 것이다. 오산학교출신들이주축을이루었다고한다.

그 후 서해의 여러 섬을 전전(평안북도 중심의 12개 섬 중 화도에 백

마부 본부가 있었다)하면서 공 유격전으로 북한군 3,000여 명 사살,

중공군 포로 600여 명, 애국 청년 구출 2,800명, 동포 구출 1만 5,000명

의 전과를 올렸으며, 그외 적의 보급로 파괴(철도∙터널∙교량)와 중요 시

설 기습 등 많은 전공을 거두었다. 유격백마부 는 병력이 2,600여 명으

로서, 20개 유격부 중 그 규모가 가장 컸으며, 이들 각 유격부 는 처음

에 미8군에서 관장하다가 1952년 11월 美 극동군사령부 정보처로 이관되

었다. 휴전 후 1953년 10월 국방부 산하 8250부 로 흡수되어 유격 로

존속하여 오다가 1954년 2월 국군으로 정식 편입되었다. 유격백마부 는

유격작전 기간 중 552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이들 전사자는 육군본부 민

사감실에 통보되어 그 명단이 기록으로 보관되어 있으나 軍籍(군적)에 오

르지 못했다.61)

4. KLO의해체와첩보부 로의흡수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연합국 사령부는 켈로부 의 해산을 명했으므로

1953년 9월 해체된 후 뿔뿔이 흩어져 육-해-공군 첩보부 에 흡수되었

78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61) “국방부장관의전유격백마부 에관한사실증명,”1971년9월16일; 金成東, “KLO부

소속 유격백마부 원들의 마지막 증언:『散華한 570명의 백마부 원을 기억하는 사

람은 우리들밖에 없습니다』,”『月刊朝鮮』제28권 7호 통권328호 (2007년 7월), pp.

672-684.

Page 33: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다.62) 휴전이후 기 침투했던 KLO부 원들은 부분 담당부 에서 통신망

을 끊어버려 휴전협정과 동시에 한국과 미국정부 양국에서 버림받았다.

첩보부 에선 이런 일들을 용도폐기 되었다고 표현한다.63) 육군 첩보부

에 흡수된 상당수는 북에 남겨진 동료들을 구해오려는 비공식 활동을 휴

전 이후에도 수년간 계속했다. 휴전협정 체결 전 북한 해안가의 부분의

섬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들은 휴전과 더불어 고스란히 넘겨주게 되었다며

한탄했다.64) 한편염응택은 6-25전쟁 때 납북되어피살당했다고한다.

IV. 결론

KLO부 는 민간반공단체인 서북청년회가 중국 남의사(�衣社)를 본떠

서 별도 조직한‘ 북첩보공작부 ’‘백의사(白衣社)’가 모체 다. 따라

서 백의사와켈로부 는불가분리의관계 다.

월남인결사조직 백의사(白衣社)는 1945년 11월 서울에서 총사령은 염응

택의 지도하에 조직되었는데 요인 암살 및 반공 테러가 목적으로 이러한

과업을 수행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백의사는 켈로부 로 전환되었다. 백의사도 미군

정 당시 미 CIC와 연결되어있었는데 켈로로 전환되면서 연합군 직할 첩

보공작부 로 변신했다. 켈로는 북첩보공작과 유격작전을 수행하며

79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62) 육성철, “어느 노병의 끝나지 않은 전투_KLO 부 첩보 장 이연길 씨,”『세상을 향해

어퍼컷』(서울: 샨티, 2008), p. 213.

63) �東昱, “42년만에戰死인정받은군번없는�戰의戰士KLO 秘話; 휴전협정사흘전

에개마고원에떨어뜨린隊員들의저주서린육성무전,”『月刊朝鮮』통권187호(1995년

10월), pp. 432-449.

64) “제1부KLO 참전동지회최규봉회장회고담,”이창건, 『KLO의한국전비사: KLO, 켈

로그들은누구이며무슨일을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p. 333-334.

Page 34: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5,000명 내지 1만여 명의 원들이 반공전선에서 산화했다. 이들의 투쟁

정신은 후일 남한 북첩보기관의 정신적 원류이며 조직적 원천으로서 작

용했다.

한민국 정부 수립과 전쟁 과정에서 백의사와 켈로부 는 북한에 파견

되어 은 한 정보 수집과 요인 암살 기도 등 유격작전을 수행하여 많이 희

생당했다. 군번도 군적도 없었던 침투정보원과 켈로산하 유격 원들은

2010년 현재 정규전이 아닌‘유격전’차원으로만 인정받았다. 전 제2

국립묘지에 산화한 KLO 8240부 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이름조차올리지못했던 유격 원들도있다.

이 연구를 통해 1945-1953년간 백의사와 KLO활동에서 남한의 북정

보활동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백의사는 미 CIC와 연계되었고 켈로는 맥

아더 사령부의 직할부 다는 것은 북정보활동사 분야의 상식에 속한

다. 그런데 서론에서 지적했듯이 실리 문서를 비롯한 어느 공문서에도 이

들의 활동이 미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뒷받침되었던 증거는 없다. 이에

백의사-켈로와 미국 정부와의 관계를 단지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그 관계가 느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 규명 불가

상황에 해 정보활동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

연구의 한계라고 아니할 수 없다. 회고담 차원이 아닌 미국의 정보문서에

서 이들에 한 공식 지원현황이 발굴하는 것을 차후 연구과제로 제시하

면서 이 을마치고자 한다.

80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Page 35: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South Korea’s Counter Intelligence Activitiestoward North Korea:

Baekuisa and Korean Liaison Office, 1945-1953

Wan Bom Lee(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With circumstances evolving to lead to national division as

the Korean peninsula was divided along the 38th parallel in

September 1945 and each Korea was occupied, one by the US

and the other by the Soviet Union, domestic political circles of

the two Koreas started to divide as well. The US Army in

Korea tapped into diverse channels to gather intelligence and

domestic politics moved in the same direction. In November

1945, at Gungjeong-dong, Jongno-gu, Seoul, a secret

organization of North Koreans defecting to South Korea,

called the White Shirts Society (WSS), was formed under the

leadership of Ungtaek Yeom, the Commander in Chief. Their

mission was to kill high profile figures and commit terrorist

acts against communism.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the WSS turned themselves into the KLO (Korean Liaison

Office). The WSS was connected with the CIC (Counter

81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 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이완범

Page 36: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 정보활동의원류(1945-1953)20%C0%CC%BF%CF%B9%FC.pdf · 2015. 5. 8. · 백의사와klo의활동을통해서본남한대북정보활동의원류(1945-1953)

Intelligence Corps) of the USA under the rule of the US

military forces, but the KLO was formed as an intelligence

unit directly reporting to the Allied Forces. It is said that the

KLO conducted intelligence operations and guerrilla warfare

against North Korea and as many as 5,000 to 10,000 of its

agents sacrificed their lives in the fight against communism.

Derived from the WSS, a secret intelligent unit, the KLO was

closely related to the former. The two units were dispatched

to North Korea during the establishment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nd the Korean War to secretly collect

intelligence and attempt to kill high-profile figures, and lost

a great number of its members in guerrilla warfare. As of

2010, the infiltration agents and the KLO guerrilla fighters

who were given no military service number or registration are

underappreciated described merely as having fought in

“guerrilla warfare”, not in regular operations.

The only recognition they received was having the names of

the KLO8240 unit engraved at the Secondary National

Cemetery in Daejeon, while some names were never even

listed at all.

82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Baekuisa, Korean Liaison Office, South Korea’s Counter IntelligenceActivities toward North Korea, Guerilla War, Yum Ung-taik

Key W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