훨뚫國古~뼈n藍造훌훌에 關한 f규강뭘 · 2020. 6.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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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 * 0975. 2.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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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훨뚫國古~뼈n藍造훌훌에 關한 f규강뭘

    - 특허 海印뽑에 대하여

    第-章 序 論

    第-節 ilff究의 텀的

    第二節 ilff究의 範圍

    第三節 흉뮤究의 方法

    第=章 海印츄의 歷史와 宗統

    第一節 φQ椰山 海印좋의 語意와 海티]三味

    第二節 海r:p좋의 歷史와 傳統

    第三節 海印총의 극놓格과 宗統

    第四節 海印좋와 八萬大藏經

    第三훌 海印춤의 立地的 考察

    第一節 風水地理學的 位置

    第二節 立地現況과 三%不到處

    第四좋 海印츄 重홈堂宇 및 右造物의 規樓와

    配置分析的 考察

    第-節 總 說

    r. 序

    徐 貞 任*

    次**

    第二節 重흉흉堂宇의 規模와 配置分析

    第三節 重要石造物의 配置分析

    第四節 海印뿔의 古代配置와 火었後의 配置

    第五節 新羅 때의 φn藍配置와 大火前의 配置

    分析

    第표훌 海印휴 內外造景構造分析

    第一節 海印좋石搭 • 堂宇 位置의 決定과 홈j

    地分析

    第二節 海印(tm藍의 地理的 造景價f直

    第三節 行flt形局과 φn藍配置의 調和

    第四節 海印(tm藍과 自然風景과의 調和性

    第五節 海印해n藍의 훌園 • 植樹의 單調性

    第六節 海~1í!JO藍의 造景上 留意點

    第六훌 海印좋의 韓國iJJn藍造景史上의 f立置

    第t章 *홉 論

    이 論文은 西歐의 幾{可學的 接近方法에서 얻은 造;월‘擬念도 중요하지마는 우리의 傳統造

    폈속에 담겨져 있는 특유한 韓國的 美를 찾아내어 그를 뼈대로 하여 外來的 西歐造景을

    受容하고 그 長·點을 우리의 造:뭘에 溶解시킴으로싸 우리의 새 文化, 새 造景‘創造에 이바지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三國時代에 플어온 關學思想, 佛敎思想、, 道敎神仙思想에서 이룩된 造景美가

    韓國傳統造景·의 主流를 이루었A며, 특히 新羅佛敎文化에서 創造된 극협U造景文化는 羅代

    中期 以來 輝風의 興짧 ò 로 象徵的 造뭘에 移行되기도 하여 韓國佛敎的 修景造景의 새傳統

    * 서 울大學校 環境大學院 (造景學科) 第2回 직〈業 0975. 2. 26) ** 論文의 原텀次임.

  • 韓國古代fiJrJ藍造景에 關한 liff究 237

    을 이루었고, 또 朝解朝 性理學 極盛과 더불어 書院·薦室·顧堂 퉁이 홍성되어 韓國罷園‘

    的 造景美가 形成되었다.

    우리의 傳統造景‘엔 宮짧造景i~ • 新都市造景 • 빼藍造景 • 書院造景 • 樓關亨子造景 • 薦室顧堂

    造景 • 雄聞關造題.• 陸基地造景‘ • 城뿔造景 .• 書堂造景 • 民間塵園造景 등을 들 수 있다.

    筆者는 韓國造景中 古代빼藍造景을 연구함A로써 그 특정을 발견하여 오늘과 내일의 造

    景創造에 이바지하고자 히·며, 흑히 三寶宗刺의 하나인 이릎난 大法寶宗刺 海印뽑의 촉경적

    연구를 통하여 그 構造美의 특성을 別快코자 한다.

    그 연구의 범위는 海印필 本좋 最北端 좋대바위에서 ~柱門 앞 !障후까지 南北 약 1, 100

    ,R, 東西 약 500,R 속에 위 치 한 諸堂宇와 石造物의 配置, 劉地分析, 花草 • 植物 • 池湖의

    배 치 와 古建棄物과 石造物과의 構造美, 諸門樓의 佛敎的 意義, 海印뼈n藍의 全體的 造景美,

    自然과의 調和美·藝術美를·밝히고, 아울러 山門入口의 石챙·石牌 등의 배치와예술며, 本

    뽑와 자연과의 調和美를 關明함을 主目的으로 삼되, 本춤를 中心으로 흩어져 있는 附屬魔

    子와 빼耶山 • 紅流洞天 • 海印뽑 本춤의 周邊얻홈化 • 짧車場 • 新部落에 대하여는 간단히 言及

    한다.

    다시 말하면, 本꽁의 造景的昭究를 王對象£로 삼고, 그 周邊을 副次的 對象£로 잡았다.

    그리고 연구 방법£로는 海印뽑의 역사와 춤統을 文歡과 遺物로써 철저히 밝히고, 현재

    의 가람배치를 실측하고, 開山當時의 가람을 復元하고, 그 造形的 특색을 규명하며, 수목

    과 정원의 배치를 분석하고, 海印大道場£로서의 위치의 適不適을 구명코자 하였다.

    新羅古쩌 海印뽑 造景美를 歸納的 演繹的 방법 o 로 고찰하여 그 특성을 밝힘으로써 韓國

    빼藍造景‘美의 -端을 천명하고 그 傳統美를 받아 그를 뼈대로 하여 오늘의 造景·美를 새로

    創造코자 한다.

    n. 海印춤의 歷史와 宗縮海印뽑는 빼耶山 中題li像地에 자리 잡고 있£며 , 때뼈j)山의 「빼耶」는 우리 古語의 漢字

    홉f홉로 곰 「가람(江) • 개 (浦)J의 풋인데 佛家에 서 는 印度의 빼耶(象 • 牛)를 仍用하였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불교의 한국적 「멕카」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인도의 佛뼈빼耶·빼耶를 山

    名에 仍用附會하였다고 본다.

    「海印」이란 華嚴經·起信論·훌盡還源觀 등에 설명되어 있는 「海印三味」에서 따온 말이

    며, 大海中에 온갖 事物의 그림자가 일발처럼 비추듯이 佛의 智海에 온갖 萬法이 나타나무

    로 海印三뼈라 하였다.

    일찌기 義뼈祖師가 海印圖로써 心法을 정 할 제 相源、에게 전하고, 相源은 神編에게, 神짧

    은 다시 順應에게 전하였£묘로 順應。} 이절을 짓고, 華嚴의 道場이란 풋에서 海印총라 이

    름한 것이다.

    이 가람은 新羅 四十代 哀莊五 3年(A.D. 802) 陰 10月 16 日 에 王과 王듭의 도움을 받아

  • 238 環 境 論 홉흉

    現 大寂光觀 자리에 創建되었다.

    羅末 西紀 930年煩에 ~tffi派宗主로 이름 높떤 希閔스닝이 이 철 主持로 있다가 高麗太祖

    王建의 福田이 되어 太祖를 도와 戰勝케 한 功으로 太祖의 희사를 받아 절을 重創하였다.

    朝縣太祖 2年에 古쳐폼을 重營하고 大藏經을 印出하여 搭속에 봉안했다고 했을뿐, 철의 중창

    에는 言及이 없다.

    世祖 3年(A.D. 1458)에 大藏經願 40間을 짓게 하였으며 , 成宗 19年(A.D. 1488) 板願 30

    間을 다시 짓고, r普眼堂」이라 하였으며, 그 둬 3年間에 기다 160間의 절을 완성하였으며,

    이 때에 「뿔盧願」을 「大寂光願」이라 고쳤으며, 그 뒤 王亂 때도 다행히 免祝하였 o 나, 薦

    宗 20年(A.D. 1695)에 붙이 나서 동쪽 察舍와 滿月堂 圓룹樓가 불탔으며, 그이듬해 (A.D.

    1696) 에 불이 났고, 英祖 19年(A.D. 1743) , 英祖 39年(A.D. 1763) , 正祖 4年(A.D. 1780)

    에도 불났으나 모두 북구되고, 純祖 17年(A.D. 1817)에 大火가‘나서 몽땅 다버렸무냐 다시

    重創되 었는데 , 오늘날의 큰 法堂은 그 때 의 건물이 며 , 다시 高宗3年에 法性察가 불다버 렸

    으나 복구되지 않았다.

    그러으로, 이 절은 7次火짜를 당했£나 大藏經만은 無事하였ξL니 多幸이다.

    海印뽑는 新羅의 華嚴宗祖 義뼈스념 의 曾孫弟子인 I1圓應의 창건으로 浮石宗 華嚴十쩨의

    하냐가 되었고, 朝離에 이르러션 全國 三寶宗刺의 하나로 八萬大藏經을 모신 大法寶刺。1

    되어 四海에 이름이 높다.

    八萬大藏經, 이는 刻板藝術의 精華요,iJL世界的 無;燮國寶로써 海內外에 이흡높을 뿐아나

    라, 그를 奉安한 大藏經顧 또 뛰 어 난 木造建物이 다. 이 板願이 언제 장건되 었는가에 대 하

    여는 확실히 알 수 없A나, 筆者의 생각으로는 現在 大藏經이 江華島에서 海印몫에 移安된

    時期를 麗末 爾王煩부터 朝解太祖六 .t年煩 以前으로 推斷한다. 그러므로 現板顧은 海印

    좋로 移安될 째 , 창건되 었으리 라 생 각한다.

    ][. 海印휴의 立地的考察

    海印몫는 行政區域ξL로는 慶南 隊川都 뼈n椰面 觸仁里 10짧地에 있다.

    이 基地는 빼椰山 南녘 中臨 陽地바른 淸遠靈輝의 吉햄地로 左右山川이 아릎맙고, 여릎

    도 가을, 가을도 여름인 明堂이었다.

    il.Jn椰山은 옛부터 r~山而六號」라 하여 ßJn椰 • 牛頭 • 象玉 • 累香 • 只但 • 雪山으로 불러 왔

    다. 新羅以後부터 가람이나 칩쓸 지을 때엔 風水地理說을 重視하였다. 그 風水地理學的見

    地에서 본 海印꽁 形局은 大邱와 마찬가지로 行m-形局이라 하겠다.

    해0椰山 줄기 가 西南으로 뻗어 내 려 오다가 남녘 중턱 에서 來龍이 두 服으로 갈라져 한服은

    香盧l隆을 이루어 吉햄챔과 事隨E뻗 앞에 서고, 한 服은 學土臺룹 이푸이 一柱門 옆에 섰다.

    主山 牛頭峰이 南走하여 山南 中턱에서 한 靈地를 이푸-었는데, 左협껴~(香;魔峰山J!ijÜ' 右白

  • 韓國古代빼藍造景에 關한 돼究 239

    虎(學土훌훌服)가 뚜렷 하게 에 워 싸서 行짜形局을 이 룩한 明堂이 라 할 수 있다. 最北端 윷대

    바위(法寶願 뒤 便)에서 -柱門 앞II!훌쭈까지 南北 약 1, 100R , 동쪽 극락전 옆 漢川가에서

    서쪽 學士훌까지 동서 약 500R이 다, 그러므로, 길이 1, 100R , 폭 500R의 大型行빠 모앙의

    形局이며 , 그 배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白虎등에 큰 전나무 옷을 박아 잡아 애니 그

    것이 千年老木 學土휠 전나무요, 一柱門과 j힘凰門 사이에 큰 느티나무 못을 박았으니 그것

    이 開山老據이며, 法寶願 뒤에 우뚝 솟은 大담然、石을 좋대바위로 장아 이 배의 f1JJt橋으로

    상았다.

    좋대바위에서 -柱門까지 남북일직선상에 諸掌宇를 짓고, 中央 三級石搭을 중심으로 모

    든 佛字가 이푸어져야 하므로 이 가람의 건불이 꼭 이 行쩌形局에 맞추어 지어 졌으며, 배

    의 거 의 中心部인 石챙을 中心으로 옳대 바위 에 서 -柱門까지 배 中央숍ß 南北-直線上에 서

    左右前後로 알맞게 건물을 배치해야만 배가 기울지 않을 것이며, 현재 서 있는 건물들을 조

    시해 본즉 해인사 총 건평이 千九百여평인데, 이 건물들이 東西로 半半썩 안분배치되어 있

    다. 그리고, 三級石搭에서 북쪽 약 100R 지점에 大寂光願이 서 있는데 이것은 開山當時의

    위치였다고 본다. 신라말 개산 당시는 子坐午向의 良J盧願이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지금은 寅

    坐申向으로 西南쪽에서 西쪽으로 가까이 당겨져 있다. 純祖 17年에 大火를 만나 크게 중창

    할 해, 좌향을 바꾸고 그 위치도 통쪽에서 서쪽으로 조금 이행시켰떤 것으로 생각된다. 혜

    인사가 현재 위치하고 있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의 치인리라는 명청은 나말

    海印솜:立地現況圖

  • 240 環 境 論 홉훌

    崔致遠이 솔권하여 이곳에 와 살았으므로 致遠里라 하였는데, 그 뒤 짧仁里로 개칭되었다

    가 1914年에 지금의 치인리로 고쳤£니 織徒을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이란 풋이다.

    이곳은 自古로 三淡不到의 땅£로 民族的 至寶八萬大藏經을 봉안할 수 있는 吉햄터라고

    생각한다.

    N. 海印춤 重훌堂宇 및 右造物의 規模와 配置分析的 考察

    이 가땀은 一柱門 앞 陣뚱에서 놓대바위까지 南北길이 약 1,100R, 東南福 약 500R 그

    속에 여 러 門樓와 諸佛宇 • 石造物 • 處l펴 • 老木 • 大藏經願 등이 行빠形局에 알맞게 南北 東

    西로 배치되어 周圖의 自然)ill~)덮‘과 갚 調和릎 이푸고 있다.

    여기 에 海印뿔 2f面圖로씨 그 位置職몇블 表示해 보면 아래 와 같다.

    〈圖-2) 海印총 zp:面圖 (1974.12.1 현 재 )

    -柱門은 建행 3행, 本환·에 플어 가는 第-門으로 開山時의 創建이 긴 하나, 기록상으로는

    朝縣朝 以來 여려벤 重創되었다. 그 中에도 현재의 건물은 朝廳初期의 솜싸를 보이고 있다.

    화려한 색채도 새롭거나와 전체의 比例가 좋고, 짜염새가 있고, 二寶工 지붕의 모양이 高

    雅하므로 이 런 종류의 건축중 가장 우수한 작품이 다.

    그리 고, 行판形局의 本렇 地形上으로 보아 현재의 -柱門자리 에 開山當時부터 建,門되 었

    을것이다.

    鳳凰門은 一名 「四天王門」이 라고도 하며 , 憲宗 4年에 빼~I1‘ • 那提 • 文珠 • 普賢 등 四位의

  • 韓國古代ftJJJ藍造景에 關한 阿究 z4Ì

    탱을 봉안히-였다. 그러나, 1933年에東西南北에 四天王娘을 봉안하였다.

    鳳凰門。1 란 것은 三寶天體。1 降臨하는 道場의 靈瑞門이라는 뜻이며 I四天王門」이라 함

    은 四天王이 佛法을 옹호할 서원을 세웠으므로 山門入口에 모셔 守門將않과 道場守護沒을

    맡게 하였다.

    局司壞은 海印좋 局內를 수호하는 護局神을 모신 딸이다. 局司神은 四天王神과 함께 佛

    敎土善信때의 한 양상이 다.

    解脫門은 -名 不=門이 라고 하며, 모든 것을 벗 어 나 不二훨如의 佛門애 플어 가는 門이 다.

    四뿔堂은 建행 146햄, 지금은 宗務所로 쓰고 있S며 , 明月堂이 란 心鎬。1 밝은 닫과 같으

    면 海印三味가 顯現한다는 뜻이며, 住持室과 講堂으로 쓰였다. 그밖에 尋쨌l堂은 293행으로

    住持室, 敎務室로, 罷玄堂은 293행으로 지금은 食堂과 佛敎專門講院, 經學院은 SOrtp..2...로

    講院講義室로, 癡香聞은 74행£로 -名 爛願이 라 하나, 지금은 輝悔堂이 라 改爾하고 輝房

    o 로 쓰고 있으며 , 堆뿔堂은 70행으로 經願의 香火플 奉行하는 곳£로 현재 는 輝房으로 轉

    用하고 있a며, 解行뿔은 14헬으로 開山祖부터 大功德主에 이르기까지 52位를 봉안하여 그

    공덕을 기리고 있다.

    훌府顧은 19rtp..2...로 莫府란 죽은이 의 혼의 종착처 로 업보를 받는다는 곳인데 , 無量苦에

    빡진 이를 건지고자 六環文을 짚고; 地澈門을 出入한다는 지장보살。1 이 願에서는 맴 中央

    에 자리잡고 있다. 應률願은 23rtp..2...로 16羅漢의 觀이며, 釋尊을 中心£로 左右에 16羅漢。1

    있고, 獨흘끝娘과 山神娘이 있다. 三뿔聞은 8행A로 獨뿔 • 龍王 • 山神의 三位를 봉안했기 때

    문에 이렇게 말한다.

    大寂光願은 125행무로 海印총의 큰 법 당으로 新羅 哀莊王 3年 王午(A.D. 802)에 당시 외

    高價 JI原應, ¥Ij貞 두 스님 이 王과 王듭의 도움과 받아 물고이 고, 철기 와가 많던 이 자리 에 法

    훨을 세우고 뚫盧選那佛을 모셨기 째뭄에 뿔盧願이라 하였다. 그 둬 7次나 火…를 만나 再

    建되 었으묘로 創建 당시의 규모는 확실히 알 수 없£냐 本짧 쥬1 큰 주춧돌 3個가 있는 것

    ξ로 보아 現法堂보다 四方이 1間썩 더 넓었으리라 추측된다.

    大寂光願이라 함은 비로자나불。1 大寂光土에 있 o 면서 華嚴經을 常說 遍說한다는 풋에서

    이렇게 불렀ξ며, 海印콤·는 화업종의 근본 道場이므로 비로자나불을 本尊£로 모시며, 李

    朝 成宗朝 學祖大師가 重創할 째 , É용盧願을 大寂光願이라 고쳐 부료게 되었다.

    이 건물은 朝解後期A의 솜씨 로 內七包 外五包 20間의 包접 이 석 단위 에 섰고, 건실하고‘

    웅대해 보이고, 어 딘지 모르게 전통적 美感이 靈動하고, 천정 의 妙는 華嚴뽑 覺皇願의 전

    정 이 單化한 것으로 한국엔 보기 도문 樣式이 며 , 山의 形局과의 조화, 扁銀의 세 로씩 調和

    는 좋£나, 솜씨가 섬약하고 득이한 예술적 함축미가 不足한 느낌이 난다.

    그리고 이 건물앞의 석단·석축은 근래에 근본적£로 고처 쌓아서 新羅的 古味를 앓고

    말앓닥. 한국적 멋을 요루는 日A石手와 中國A 石手 姜公美의 愚훨훌후 新羅的 古웹의 예술

  • 242 環향중論홉총

    미를 앓고 말았으나 매우 유캄스렁다.

    그러 나, 이 法堂은 開山時엔 子坐午向이 었S나 지금은 寅坐申向이 다. 이 절은 行冊形局

    에다가 三級石행을 中心으로 諸堂宇를 배치하여 海印構造美를 이루었다.

    지금 石챙은 變함없이 옛 그대로 놓여져 있으나, 法堂만이 西쪽으로 딩겨져 石착한과 法堂

    부처념이 一直線上에 놓여 있지 않다.

    (~)西If[

    I성

    (水)北死

    〈뻐-3> 坐向圖

    (北)

    (!엽) 〈뼈 4> φn藍基地形局平面圖

    ”읍東 (木)

    (東)

  • 韓國古代빼藍造景에 關한 liff究 243

    開山當時엔 石搭 • 石燈 • 頂禮石이 一直線上에 놓여 있었고, 또 法堂 부처 넘 도 石햄과 一

    直線上에 座定되어 있었다고 본다. 一搭式인 경우는 이렇게 배치하는 것이 常例였다.

    大藏經板짧은 우리의 조상들의 뛰 어 난 과학적 넋이 어 린 건물, 國寶 52號로 四海에 이릎

    높다. 이 板戰은 無雙國寶 八萬大藏經板인 國寶32號가 봉안되 어 있다. 大藏經板은 말할 것

    도 없지마는 그 藏經觀 또한 우리의 木造建察史上의 適品이다. 이 뿔典을 모신 經願을 板

    庫라 부르지 말고,:k藏經顧 • 藏經顧 • 藏經板짧 • 經板顧 으로 부르는 것 이 옳음을 주장하

    였다. (徐首生博士의 「八萬大藏經빠究」에 이렇게 주장하였는데, 筆者도 그 말이 옳다고 생

    각한다)

    이 藏經板願의 初創年代를 청 확히 말한 文廠은 없으나, 筆者·는 麗末이 나 李朝 太祖 6"-'7

    年 以前에 大藏經板이 江華島에서 海印좀’로 移安되었S니 그 째, 現建物이 創建되었jζ리라

    推斷하였다.

    그러나, 現建物은 成宗 19年(A.D. 1488) 에 學祖大師가 大重創한 것인데, 法寶願과 修多

    羅藏, 東西小板願 등 四陳의 建物이 適宜하게 배치되어 있다.

    아 經願도 法堂과 거의 같은 坐向(寅坐申向)으로 地形上 不得E 그렇게 정했£리 라 생각

    한다. 大寂光願에서 북쪽 약 100.R 지점에 위치하며, 法堂의 비로자나불이 法寶를 이고 있

    는格이다.

    建:!ip 合計 365:!ip, 本願은 南北兩陳이 나란히 서 고, 그 새 에 東西로 小板願을 이 룩한 朝

    離初期 建葉의 適fF이 다.

    法寶觀과 修多羅藏에 國寶經板 81 , 340餘板이 奉安되 어 있고, 東西小板顧에 非指定文化財

    인 춤刊藏經板 6千餘가 鎭藏되어 있다. 이곳은 土質도 좋아 法寶願 뒷면에 地花가 누렇게

    돋아나는 여름도 가을, 가을도 여름이 라 할 수 있는 吉洋地이 다.

    이 經觀은 修多羅藏 正面 15間 fJ{U面 2間單}휩 우진각지붕, 法寶願 正面 15間 fJ{U面單層 우

    진각지붕의 大建葉으로 寶柱心包系樣式이 驚一T系樣式 o 로 넙어가는 과도적 手法을 지닌 건

    축이다.

    法 寶 願 165행 1 正面 15間 빼面 2間 單層 우진각지풍

    大 | 修 多 羅 藏 165ftp J 國쩨大藏經板奉安所(81, 340 餘板)藏 l 좋刺東板戰 17파 1 뚫 ) 댐5fU藏經板奉安所 6, 000餘板

    걷F종U西板觀 17:!ip J

    普 眼 堂 l :!ip 大藏經戰 出入正門

    合 計 365첼

    이 藏經戰은 이 行빠形局 좋대 바위 아래 에서 西南間으로 向한 大建葉으로 四周 팀然風뚫·

    과 잘 조화되어 있으므로 西北端에서 西南間으로 階敵할 때의 해인가람의 構造的秀麗美는

    -福 名畵를 뛰 억 넘는다.

  • 244 環혈論盡

    法 寶 願 (165핸) ! i 기 둥. 48柱(16 X3) 1~9야m

    ...... 6.105cm ........

    高 380cm

    聞 144cm {柱柱

    ~I 빼 f기풍 6柱(3X 2) 기풍 6柱(3X2) ’ 4 웰 17짜 홉 {柱홉 320cm 網 320cm 펠 명 | 願 l柱開 136cm 柱聞 136cm ) -:

    : .. 350cm": :"350cm":

    I i 柱 高 380cm u. h =_ /. A" ,=, i 1 修多羅藏 (1 6짧) 편

    l 柱 閒 144cm 기둥 48柱 (16 x 3) 밴

    .... 6.105cm ..

    팝 眼 ?향

    ; j 1 핸 l ... 31Ocm ..... ;

    大藏觀觀 w數와 치 수圖

    소守 利東板觀

    17헬

    〈뻐-5>

    ( 당 장 )

    뚫l東ι 쪽

    N

    f

    (당장)

    (

    다n ‘장

    )

    (西킹 디 쪼;

    N

    !짧

    (덩-장)

    〈圖-6> 大藏짧嚴의 平面 略圖

    大藏經板 陳列}I넓序는 대체로 과 같다.

    CD 法寶願과 修多羅藏엔 國寶 大藏經板 81 , 340餘板(6815卷)이 奉安되어 있다. @ 극훈;fU東西板願엔 광;fU藏經 139種, 6千餘板이 奉安되어 있는데, 이것은 非指定文化財이

    긴 하나, 귀 중한 가치 가 있는 經板둘이 다. (이 에 대 하여 는 徐首生 博士著 「海印좋 광:刺藏

    總맑究」에 소상하다. 國語敎혐맑究 NO.5, 慶北大學校 師範大學 國語科 發行)

  • 24~ 韓國古代ftIIl藍造핑;에 關한 짧究

    \딩 장)

    C1l"'@:法 寶 짧

    CV""@: 格多羅藏

    @""@: 法 寶 용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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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j@@

    (

    다디 자Q )

    솜씨를 지난 건축이다.

    修多羅藏의 장은 아래 창이 3배 나

    I웹柱를 세워 긴-결

    朝蘇‘初期 건물로는

    大藏經願으j-般的 特色

    @ 柱心包系樣式이 짧I系樣式 o 로 념 어 가는 과도기 적

    @ 벽면 유자장을 내어 자못 古調를 띄우고 있£며,

    크고, 윗창은 아랫창보다 3分의 1 정도 작다.

    法寶顧은 修多羅藏 창보다 正反對로 되 어 있어 通風이 잘 되 겠금 科學的a로 구상되 어 있다.

    @ 기둥과 중방이 실하며, 板架장치가 굴뚝 형식을 취하여 通風이 잘 되게 하였다.

    @ 內部는 二重燦架構 臨束의 M木과 附木홈의 重緣形은 이 른 바 浮右뽑流를 닮았다.

    @ 지붕은 四注로 古色이 창연하여 新羅建藥美를 찰 나타내고 있다.

    @ 얄은 기단 위에 不定形 無柱座 自然石을 놓고, 알맞은 배흘림있는

    한 供包를 짜아 지붕을 받고 있다.#1;包는 寶I系形成과 갇이 짜여져서

    特異하다.

    @ 집높이가 山의 位置, 高低에 알맞게 찰 調和되어 있다.

    @ 印經時의 通行 便宜計劃j이 서었다.

    좋대아래 位置케하

    상징하였다고 보겠다.

    大藏經을 守護케 하고, 法寶願

    여 法堂의 부처념이 修多羅를 이고 있음을 상징하였다.

    @ 기둥이 百八로 定立되었S니 이것은 불교의 百八煩腦를

    이 經願 中 修多羅藏엔 童휩普眼홉購을 모셔 百千萬世에

    엔 바 로자나 主佛과 左右補處에 文縣 • 普賢홉陣을 모셔 이 經願의 尊嚴性과

    @ 大藏經願 坐向이 法堂과 같은 方向 o 로 定해 져 있고, 行폈形局의

    華嚴道場임을

    옛날 七百數十年前에 江華島에서 댐홉送되어 그곳어! 奉安되었닥가 麗末 •

    상징하였다.

    이 大藏經이 그

  • 246 環境츰싫홉홍

    廳初에 。1 곳 海印道場으로 移安되 어 그사이 七次의 祝敵之網를 만났으나 。1 經板만은 無

    옳在하니 靈山의 靈跳야 한갖 신기 롭기 만 하다.

    이 大藏佛事는 당시에 우리 강보를 짓밟떤 몽고명을 불리치기 위하여 만든 靈板이다. 이

    大佛事를 이룩하는덴 오랜 時日동안 上下一體가 되어 百折不屆의 끈기와 信佛力, 民族的

    無我統一精神으로 勇益前進함으로써 이 大藏佛事를 成就하였다.

    온 겨 례 가 佛의 無我로 結心敎力하고 民族的 總和統一精神으로 이 佛事를 도다 어 이 룩함

    으로써 外敵을 退治하고 民族的 危機를 모면하였으니 이 大藏經板은 單純한 經板이 아니 라

    民族的 넋과 佛의 神通力이 영 킨 那山白玉이 다.

    이 聖스려운 大藏經板을 모신 經板戰 또한 佛敎의 大法寶設인 동시에 民族의 흉딛렸이다.

    이 뿔짧아 三%不到之處인 이 行빠形同의 海印大道場의 大自然美속에 奉安되었으니 海印造

    景‘美가 또한 凡常치 않다.

    重훨 石造物의 配置와 古代配置 및 火淡後의 配置를 대략 적어 보면 아래와 같다.

    海印뽑는 黃隨뽕式의 -향式 山地가람으로 三級石搭을 中心j즈로 여러 佛宇가 배치되어

    있다고 추정하며, 石챙 後方에 法堂(大寂光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黃龍뽕는 興輪좋式 가람이 中國 六朝의 永寧뽕系統을 받아 이룩된 -搭式 가람이라고 생

    각한다. 그러나, 新羅 統一時의 二향式 가람도 中國에서 傳來되었다. 이 二增式도 傳來된

    。1 래로 서로 발달하여 -납山꽁 • 海印좋 등을 짓고, 高麗에 傳해 져 朝蘇朝까지 主로 石搭혔

    主의 가람을 이룩하여 요늪에 이르렀다. 木搭形式을 取한 것도 있£나, 대체로 우리나라엔

    石構가람이 그 主流를 이루었다.

    현재 해 인사엔 三級石챙이 九光樓 慶中에 우뚝 섰고, 그 바로 앞에 石燈。1 있고, 增前方

    서 쪽에 頂禮石이 있고, 搭 뒤 法堂 서 쪽 혹府願 앞에 四級小石樓이 있고柱門밖 큰 걸

    가 왼펀(-柱門에서 110m 地點)에 妙吉j洋搭이 있고, 그 옆에 1972年에 세운 事題6명가 우

    뚝하며, 그 옆에 20餘位의 짧德牌林。l 있다. 그러나 鳳凰門안에 元景王師牌가 서 있는데,

    이것은 1961年에 가야면 般若날Î'~Jl:에 있던 것을 옮겨와서 해인사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1968

    年 10月에 문화재 관리국에서 비각을 세우고 이곳에 再建하였다.

    그렇다면, 新羅開山當時의 石造物은 무엇 우엇인가.

    R톨中三級石境 ...... 이 搭은 佛챙으로 九光樓안 處中에 있£며 , 장건당시 에 세 움. 위 치 도 현

    채 그대 로라고 추정 한다. 이 石↓홉을 中心으로 諸佛宇를 배 치 하였다고 斷定한다.

    右 燈...... 搭 바로 앞에 있으며, 장건당시에 세움.

    I頁 짧 石 ...... 樓前方 서쪽에 있으며, 창건당시의 유물이긴 하나, 그 위치를 石燈앞에서 西

    쪽ξL로 변경시켰다고 추정한다.

    四級小樓 ...... 혹府顧 앞에 있 ò 며, 이것은 最近에 주어 모은 搭S로 별 가치가 없다.

  • 韓國古代{vj]藍造景이1 關한 없究 241

    -þ''þ吉群搭 ...... -柱門 밖 약 110m 지점에 있으며, 開山後 약 九十餘年 둬에 세운 護國忠짧

    챔‘이다.

    ñ;景王師陣 ...... 1968年 10月에 般若춤跳에서 移建한 牌이며, 元來부터 이곳에 있지 않았다.

    이 牌는 高麗 仁宗三年(A.D. 1125)에 세웠으며, 國內 唯一의 E렇世南體의 비석이요, 그

    文章도 四六文體에서 古文體로 넘어가는 劃期的 文體였다. 그러므로, 매우 가치높은 柳

    가 여기에 서게 된 것은 해인 조경미를 한층 古抽하게 하였다.

    앞에 든 것 중 新羅의 遺物은 底中石搭·石燈·頂禮石·妙吉備搭 등인데 石增·石燈·頂

    禮石만이 開山當時의 寶物이 다.

    이 三種石造物의 位置는 九光樓(中門) 안에서 一直線上에다 石增·石燈·頂禮石 JI煩으로

    세 워 졌으리 라 斷定하였다.

    여기 에 「石搭中心距離밟」와 「開山當時의 石搭 • 石燈 • 頂禮石 位置圖」를 明記해 둔다.

    U、폐

    ;끄?r; :f턴 〈圖-8> 石搭中心距雜圖

    〈뻐-9> 開山時石搭 • 石燈 • 頂禮石의 fft置

    해 인사는 애 장왕(A.D. 802) 째 , 창건된 이 래 千二百餘年의 역 사가 흘렀다. 그 사이 하고

    많은 兵火를 겪었으되 無옆하더니 成宗 19年부터 3年間 大重創쓸 이룩하여 면목을 一新하

    고 내려오다가 史上 未曾有의 王亂도 면하더니 蕭宗 21年(A.D. 1695) 에 뭇밖에 大火를 만

    난 이래 七次나 火魔에 휩쓸려 불타 버렸다가 重創되었다.

    그렇게 屬次 火썼를 당해도 大藏經願만은 無事하였고, 現홉堂 등 여러 캘宇가 李朝末純

  • 썽 最

    祖 17年(A.D. 1817) 에 큰 불이 나서 몽땅 갯더미가 되었먼 것을 당시의 경상감사 金홈敬의

    도움을 받아 重創한 것야 오늘의 해인사다.

    다행 히 曺偉의 「海印좋重修記」와 「知守爾集游애n椰山記」에 의 하여 그 옛 날

    論境環248

    가람규모를

    알 수 있다.

    해인사는 華嚴宗의 중요가람A로 창건되었으나 成宗 째 學祖大師가 大重創을 싣랭할 때

    나, 그 뒤의 重修時는 종래의 건축명을 輝宗風으로 고치고, 移建 또는 創建하기도 하였다.

    이 절은 開山 以後 七次의 火JJ

  • 韓國古代{1Jn藍造景에 關한 돼究 249

    그리고 三級木搭은 李太祖 2年煩에 大藏經板本을 奉安하기 위하여 세운 *똥이었£리라 추

    찰되나 지금은 없고, 그 위치는現莫府顧과 應훨願이 서 있는 자리가 아니었을가 推定한다.

    그러나, 이 木樓은 三級石搭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 절은 自然的 基地가 行빠形局a로 板觀 北쪽에 있는 좋대바위를 基點 o 로 하여 「新羅

    時代配置復原圖」처 럼 南北輔線과 東西輔線을 그어 보면, 南北 一直線上에 중요당우가 자리

    잡고 있다. 현재는 西南間으로 -直線上에 모든 堂宇가 서 있다.

    開山堂時의 가람 위 치를 圖示해 보면 아래 와 같다.

    新羅末 創建當時의 가람배 치 의 大훨는 아래 와 같다.

    특히 이 가람은 -搭式 山地빼Q藍으로 三級石培을 中心으로 行빠形局에 알맞게 가랍을 배

    치하여 海印造景을 이룩하였다.

    E몽.願…現大寂光願이 며 , 이 法堂 建物은 純祖 18年重創. 當時는 子坐午向, 지금은 寅

    坐申向.

    三級右搭…創建時의 遺物. 舍利*똥이 아니 라, 九尊佛構 1926年에 이 搭을 根本的으로 改

    棄하였으묘로 新羅 古味를 잃었다.

    右 燈‘ .. 佛國뽑 石燈 다음가는 遊作. 創建時의 遺物. 愚細하게 후石을 갈아 넣어 新羅古

    味를 잃었다.

    頂禮石…現存 拜禮石인데, 位置가 변경되었다.

    講 堂…現罷玄堂자리에 있었A리라 추측되며, 食堂도 여기에 있었다고 본다.

    察 좀‘ .. 現觀音顧자리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中 門 ... 現九光樓인데, 當時는 左右뺑郵이 있었는 듯. 現建勳은 純祖時의 重創.

    紅露門 ... .--.柱門 本좋에 도는 第一門. 現建物은 朝解初期에 重創.

    開山老樓 ... ---"柱門안 右便에 있는 느티나무. 開山時의 紀念植樹. 지난 1948年에 拍死하였

    ξ나, 그 풍치만 남아 있다.

    開山俊 九十餘年만에

    ( 學土台 전나무,-‘崔孤雲의 入山紀念植樹언 듯.

    新羅末葉 ( 妙솜蘇樓 .......•. 崔孤雲 39歲 해 지은 樓記가 이 탑속에 서 발견됨 o 로써 護國忠、

    l 중鬼樓으로 判明.( 大藏經願......•. ~開山時엔 없었는듯. 高麗最末, 李太祖 2年項에 創建 ?

    麗末蘇初/l 三級*~홉 ......... 李太祖 2年 煩에 廳륨願 • 莫府願자리에 있었는듯. @ 놓대바위(퇴然石)에서 남쪽 直線上 350R. 지점에 法堂(현 大寂光願)이 위치했고, 坐

    向은 子坐午向이었다. 지금은 寅坐申向으로 西쪽에 偏在.

    @ 놓대바위에서 남쪽 直線上 450R. 지점에 三級石쩍똥이 위치하였고, 그 앞에. 세로로 石

    燈과 頂禮石。1-直線上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頂禮石만은 樓에서 前方 서쪽 약 50R. 지점

    에 옮겨져 原位置에서 벗어났다.

    @ 三級石챔에서 서쪽 100R. 지점에 강당이 있었고, 東面으로 서 있었다.

  • 250 環 境 論 흉흥

    @ 三級石챙에서 통쪽 100R. 지점에 察舍가 있어 東面으로 서 있었고" 그 옆에 東門01

    있었다.

    @ 三級石搭에서 남쪽 100R. 지점에 中門(九光樓)이 있었고, 左右에 佛國극훈처럼 컷멜願。1

    있었는 듯하다.

    @ 三級石행에서 난쪽 600R. 지점에 紅露門(一柱門)이 있었다.

    @ 三級石챔에서 남쪽 약 450R. 지 점 에 開山紀念植樹가 현존한다.

    @ 其他 新羅石!1양과 植物로는 學士臺 古木과 吉햄챔이다. 학사대 전냐무는 崔孤雲入山紀

    念植樹의 古木이며, 감備챙은 A.D.895年(휩뿔女王 9年)에 山門밖에 세운 護國忠塊搭이다.

    그런데 , 開山以後 純祖 17年(A.D. 1817) 大火까지 사이 에 여 러 번 重創 또는 新創한 堂

    宇가 많았떤 것이다.

    @ 현재의 大寂光願은 大火를 만나 純祖 18年에 重創한 건물. 原來創建 堂時는 뿔盧願.

    成宗時 學祖大師가 大重創 할 때 , 大寂J\:i li랬으로 改名하였다.

    @ 현재의 大藏經願은 윷대바위에서 250R. 지점에 修多羅藏, 150R. 지점에 法寶願을 麗

    末 • 解初 太祖 6年 以前에 創建된 板觀이 었는데 , 世祖 3年(A.D. 1458)에 40閒을 增葉하였

    다가 成宗 21年(A.D. 1490) 에 30間을 重創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成宗 21年에 새로 지은

    건물인데, 그 위치가 원래보다 약간 서쪽으로 偏在하였다.

    그러나 휩偉‘의 「海印굉; 重修記」애 장경전 40r랩을 증축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30間의

    잘옷인 듯하다.

    이들 重횟 堂宇가 놓대바위에서 紅뚫門까지 i휩北直線上얘 -定한 거리를 두고, 정연하게

    건립되어 있었다.

    風水地理學上으로 行판形局에 찰 맞추었는데 , 科學的으로 따져 봐도 地形 • 地勢 • 方向 •

    日光·通風· 自然뤘觀과의 관계가 잘 조화되었다. 그 옛날 가람배치가 理想的a로 잘 짜여

    져 있으므로 후인듭이 이에서 배울 것이 많다.

    V. 海印휴 內外造景構造分析

    현재 당우의 위치와 石짧·古木 등과 그역사 응을 종합하여 그 復原的 맑究를 규명해 보

    았으나, 그 당시 의 £경 적 뿔U地를 다시 생 각해 보고, 지 리 적 조경 가치 , 行:ffi形局上의 가럼

    배치의 &화, 底國植振l의 짧調住, 海印쉰宗維삼上의 짧意點 등을 동해서 海印大道場의 造

    景을 再評價.5L자 한다.

    행·地 最北端 윷대 바위에서 最南端(현 紅행門) 輔쑤까지 약 1, 100R. (340m) , 東西는 약

    500R., 이 폭은 三級石搭‘을 中心地로 잡으연, :j;찬에서 서쪽 學士臺 山마루까지 250R., 챙에

    서 동쪽 南影湖(觀숍)랬 뀌 핏) 11)까지 약 250R.이므로 이펀게 볼 수 있다. 이렇다면, 이 뽑

    地 陸線1:을 6폐示해 본다. 만드-시 山地가만이 젠形01 나 正方形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韓國古代íIJIl藍造景에 關한 wf究 251

    (띤

    CJ.t) ~~."li lJ~

    ----入 I.j

    〈뻐-11> 海印츄 극풍地地뽕tl大略圖

    r.t寶없g

    修多羅짧

    -},:寂光없a

  • 252 環 境 論 홉종

    다만 地形上£로 보아 이렇게 잡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이 南北 1, 100.R, 東西 500.R 안에 海印좋가 들어 서 서 自然옮‘觀과 아릎다운 가람을 이 루

    러고 있다.

    이 뽑地블 南北으로 兩大分해 보면, 대체로 中心點 掌宇가 中門(九光樓)이며, 좋대바위

    에서 中門까지 약 550.R, 中門에서 一柱門 앞 轉뚱까지 약 550.R이다. 이 철의 重要 건축

    이 中門(九光樓) 안 三級石행을 中心으로 左右前後方으로 배 치 되 어 있는데 , í메 인」 堂宇는

    北半部에 모여 았다.

    이 광는 깊이 1, 100.R, 폭 500.R의 大形船모양을 이푸고 있오묘로 )훼水學上으로 行와形

    局。l 략 말하고 있다.

    開山 당시는 대개 山地의 各段을 五等分法을 써서 搭과 諸堂宇를 배치하였던 모양이다.

    石搭을- 中心S로 海타1堂¥플 배치하였£니 그것을 表示해 보면, 아래와 같다.

    石챔‘中心-大寂光댔中心距離 : 111.1늑100.R (31m)

    石搭中心-大藏經願台地上方基部距離 : 204.6늑200 (62m)

    石搭中心-九光樓下底距離 : 108.9늑100.R

    石搭中心-解脫門中心距離 : 214.5늑200.R (65m)

    石搭中心-紅露門中心距離 : 603.9늑600.R(l83m)

    現在의 훌훌地段高는 다음과 같다.

    -柱門段高 ............ 6.6.R늑7.R (2m)

    鳳凰門段高 ............ 6.6.R늑7.R (2m)

    解脫門段高 ............ 17.82.R늑18.R (5.4rn)

    九光樓段高 ............ 14.5.R칙15.R (4.41rn)

    大寂光願段高 ......... 14.85.R늑15.R (4.5m) (法堂段高 : 3 .3.R)

    大藏經段高 ............ 14.85.R늑15.R (4.5m)

    좋대 바위段高 ......... 3.3.R늑3.R(l m)

    이 行빠形局 基地의 正中心點이 中門(九光樓)인데柱門 앞 健뚱에서 550.R 地點이다.

    여기 三級石켠향을 中心ξ로 하면, 45.5.R인(一柱門에서 九光樓段高) 中門段高안에 石형을

    세 우고, 63.67.R인 法뀔段高에 大寂光般을 세 웠고, 78.52.R인 板願段高에 大藏經願을 세

    워 海印뼈U藍의 美를 한층 아릎답게 하였 다.

    다시 一柱門에서 81. 52.R이나 되는 高地에 좋대바위가 있는데, 南北-直線上에 해인가람

    이 자연과 잘 어울려게 배치되어 있다.

    다음에 海印원 ~t뿔Ji'Fi離大짧t폐, j섣·中心配置h’딘離f꾀, 紅짧門rþ心配置距離圖 등을 보였는데

    그 數字는 매우 조감하나, 강건 덩시의 배치 까 21 플 얀기 위하여는 현재의 배치 거리블 조

  • 韓國古代f1m藍造景에 關한 맑究 253

    사함£로써 옛날 당우 배치를 알 수 있기에 여기에 그 대강을 적어 해인조경마를 엿보고자

    한다.

    /- 끊3Q투발灣띤\ :r: ιø~양:i :ti \ \ \ F낙---' λκLgx「--- \

    -=t ζ 「때편 §j ! 、l/ //끼?ιιψt [ -←--f까까싸찮;JL숲'-넣;꿇뚫뚫풋듀벽브;짧생縣웹추뛰-뉴뉴- /

    \ -줬견팩굉)l j-/ \\ 청、、 # 팩/ § ? / j

    \ 정、‘、、:내 •/ 판 -'웰국팍~rl~-

    〈圖-13> 海印좋配置距離圖(搭中心) (1974.12.1 현 재 )

    〈圖-14> 海印츄配置距離圖(紅露門中心) (1974.12.1 현재 )

    海印가람은 地理的 造景價f直가 매 우 뛰 어 났다. 黃龍式의 -‘樓式 山地빼藍£로

    의 細佳를 ÁI的으로 잘 調和하여 新羅的 애n藍造景·美을 創造했다-

    自然風景

    大藏經顧 最北端에서 南西쪽£로 府敵하였을 때의 構造美는 細部보다 全體的美,

    美보다 지붕의 新羅美는 中國이나 日本에서 볼 수 없는 一大 「스팩타아클」이요,

    全體的

    은근한美

    大成한海 다. 이 절은 秀麗한 四圍 빼耶風光과 牛頭神宋의 護持를 입어 야룩된 靈觀이요,

    ‘印造景美는 韓國빼藍美의 極致라고 할 수 있다.

    더 우기 大藏經願 기퉁이 108柱, 一柱門에서 修多羅藏까지 의

    -는 것은 불교의 百八煩熾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石階가 총 108階로 되어 있

    이 절은 風水地理學上ξL로 行빠形局인데, 이 巨船이 風波에 휩쓸리지

    윷대 바위 에서 약 950餘R 地點에 開山木을 심어 배 를 매는 木휩投劃하고,

    에 다시 좋대바위에서 350餘R 地點안 學土臺에다가 전나무 못을 박아

    않게 하기 위하여

    그 둬 90餘年만

    東西兩便에다 배를

    팝아 매어 이 形局의 안전을 꾀하였다고 해석된다.

  • 뿔 행

    이 基地가 行왜形局이므로;옛날 가람배치도 그형국에 잘 맞추어 배치하였다고 해석된다.

    곧 좋대 비·위 에서 石搭 • 中門을 거쳐 一柱門까지 南北 -直線을 그어 그 直線上 左右에

    알맞게 重훨 堂字로 배치하였다. 三級石搭을 中心點으로 배가 기울려지 않고 諸堂宇를 배

    치하였다는 것은 現建物들의 :Itp數안배를 보아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總建행이 약 1, 843.

    햄인데, 이것이 東西로 均衝있게 배치되어 있다. 南北 -直線上의 東便에 926첼, 西便에

    論풍훌 環254

    920¥~~로 거의 얄맞게 배치되어 있다.

    11Jn藍의 處園은 현대식 정원처럼 서구적 기하학적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형식을 取하지 않

    고, 佛敎的 빼藍空間이므로 별다른 技巧를 부리지 않고, 自然的 單調性을 가졌다.

    〈表-1) 海印좋 建物配置 fl'數比較

    훌대바위

    (西)

    大 藏 經 願

    普 眼 堂

    좋刊東板짧

    大寂光顧

    九 光 樓

    解 脫 門

    鳳 凰 門

    i 柱 門

    쫓 府 顧

    應 휩 嚴

    三 聖 聞

    廳 玄 堂經 學 院

    四 雲 堂

    元景 王師 牌閒

    (14야)

    (70핸)

    (20m (293햄)

    (170햄)

    (6햄)

    (5야)

    大藏經願

    놓刊西板願

    大寂光顧

    九 光 樓

    解 脫 門

    鳳 凰 門

    柱 門

    行 賞

    雪 堂

    露 揚

    劍 堂

    月 堂

    司 훤흩

    행훌 堂

    -解堆퓨디尋 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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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핸)

    (34fl')

    (21fl')

    (3첼)

    (19햄)

    (23fl')

    (8fiP)

    (293햄〉

    (80fiP)

    (164쩔)

    (1:1"-1')

    (東)

    C1m (74햄)

    藏經案內室

    Y疑 香 聞

    1

    74

    新羅

    混合된造

    갇기도하

    가람 處園入口엔 대개 門樓를 設하고 뽑堂 뜰앞엔 搭·石燈·頂禮石을 배치하고, 搭과

    法堂 四I潤에 풍경을 달고, 불두화·木運花·펀日紅·챔花·느타나우·전나무 등을 심어 간

    소한 정원율 이루었을 뿐이다.

    이 해 인가람은 浮石펀, • 華嚴펀 • 道뼈캉 • 楚魚향 등과 함체 華嚴宗의

    빼藍은 敎宗派와 輝宗派로 兩大分되 어 있었는데 , 많은 가람들이 전자에 의 하여 창건되 었다.

    그러 나, 新j羅中期 輝宗。1 일어 나 많成 가랑이 그대 로 輝뭘가 되 고, 輝敎兩宗。1

    훨·으로 치달았다. 海印좋와 法住휴 등은 一見 자못 六朝·曺式 敎宗빼藍配置法

    大빼藍이다.

    計 926핸 920쩔

  • 韓國古代빼n藍造景에 關한 f다究 255

    나, 오랜 세월의 흐릎에 따라 輝敎兩宗의 混合配置 형식이 취해져 있었다.

    이 역사적인 新羅古쩌연 海印뽑는 行빼形局上에서 博統性을 발휘한 특유 造景·美을 지니

    고 있으므로 行빠形局에 얄맞게 修景 再建에 留意해 야 하며 , 韓國的 傳統 造景美를 살려 야

    할것이다.

    윷대바위를 再建하든지 그렇지 않A면 그자리에다가 좋대바위를 代置할 수 있는 5爾動佛~

    을 建立함。1 可하다고 생 각한다.

    더우기 이 가람은 五等分法 劃地方훨을 取하고 講堂을 法堂 前뼈l面에 세워 전체적 造옳

    構造블 창촉한 것은 庸系빼藍樣式을 근본적£로 바꾼 한국적 새 傳統創造의 가람이 라고 보

    겠으며, 地形의 行와性, 가람배치의 均衝組織性, 大藏經願의 優秀뾰, 經板積立의 煙突性,

    奇總風景-美와의 調和性, 지붕미의 特有性, 一搭式 土地빼藍의 創造的 自由性, 輝敎 兩宗의

    混合的 造景性 등이 우리의 빼藍造景-史上에 異彩를 띄우고 있다.

    VI. 結 論

    예로부터 地靈λ‘傑이라 하였다. 名區腦地에서 人傑이 나고, A傑은 名區&청地를 찾는다.

    여기 海印大道場은 塵農을 념어선 淸遠靈禮의 吉備地요, 左海의 小金剛으로 그 이릎 千秋

    에 길이 빛나고 있다.

    이 가람은 千年의 ·由續깊은 海東圓宗大柳藍이요, 大法寶宗刺로서 韓國佛數文化史上에 이

    릎이 높을 뿐 아니라, 우리의 빼藍造景史上에 있어서도 特異한 構造美를 지니고 있다.

    筆폼難盡의 自然風景美는 天下에 冠網히-였무묘로 海東의 小金剛이 여기에 빼出되었다고

    보겠£며, 太初의 自然風景과 빼藍景‘觀을 調和하여 A工을 加한 海印造震美는 텃기없는 奇

    總大道場이다.

    그러 므로, 海印造景美는 天作總勝의 風뚫과 地形에 다 AI的 「마 자언」을 加하여 自然과

    λ、工이 교묘히 어울린 構造美가 宇內에 뛰어났다.

    海印뿔는 行빠形局의 名區로 가람배치가자연과 잘조화를 이룩하여 아무 구김새가 없고,

    全體的 景觀美가 一福의 寫生畵블 방불케 하였으며, 이 가람의 建葉美는 細部보다 全景,

    全景보다 지붕의 曲線美가 卓榮함은 한국건축미의 특색이라 하겠다.

    앞에서 논술한·組趙의 構造美를 지니고 있는 海印빼藍의 全體的 造景美를 간추려 結論지

    워보면 아래와 같다.

    1. 海印뿜는 新羅古刺로 羅末 哀莊玉 3年(A.D. 802)에 創建된 浮石宗 華嚴十체中의 하

    나요, 無JZ國寶 八萬大藏經板을 모신 大法寶宗刺이 다.

    다시 말하면, r海東圓宗之大刺이 요, 無雙法寶之宗家다. J

    우리의 三寶宗쩨 곧 佛之宗刺은 梁山通度좋요, 法之宗刺은 陳川 海印뽑요, 層之宗송U은

    )1댐天 松廣좋라 일컬어 왔다. 南道古郵 映川은 빼耶山으로 이츰높고, ffiD耶山은 海印좋로 이‘

  • 256 環 境 論 홉흉

    름높고, 海印뽑는 八萬大藏經으로 이름높다.

    2. 海印컴:는 風水地理學的으로 볼 때, 이基地는 行쩨形局의 妙點을 가졌다. 동대바위에

    서 紅震門까지 南北 -直線上 左右에 가람이 배 치 되 어 있으며 , 羅末 創建時엔 法堂이 子坐

    午向이 었으나, 현재 는 寅坐申向이 다. 開山當時(A.D. 802)부터 현 大寂光願자리 에 法堂이

    있었오나, 7次의 大火를 만나 불타 버리고 현 法堂 건물은 純祖 18年 멍寅(A.D. 1818) 에

    重創한 것인데, 이 혜에 子坐午向을 寅坐申向으로 바꾸었다. 그 理由는 하도 여러먼 불이

    나므로 風水學上오로 朝山인 南山 梅花~짧(火峰)을 避하여 購火하기 위 함이 었다.

    自古로 이 道場은 風景과 地德이 暴備한 三~不到之地로 높이 칭송되 어 왔다

    3. 海印놓는 自然風景 憲-觀이 海東十勝之一이요, 海印漢짝의 天作美는 左海八勝中의 으

    뜸이라 일컬어 왔다.

    4. 海印뽑는 黃뚫흰:式(中國의 永寧뽑系)의 -→樓式 山地{加藍£로 韓國的 特性을 지 니 고

    있는 가람이다.

    5. 羅代 中期 佛敎에 輝風이 일어 남에 따라 가람이 高山 漢짝의 E:陸 :zp:地를 利用하고,

    그 明堂에다 가람을 세워 자연 풍경을 調和시켜 大道場을 이룩하였으묘로 이 가람도 그 풍

    조를 받아 造景이 이루어졌다.

    6. 山地빼藍 배치에 있어서는 地形이 제약되어 있으므로 傳純的 배치에서 벗어나 그地形

    地勢에 알맞도록 배치되었기에 오히려 새로운 造景美롤 이룩하였다.

    本좋나 華嚴휴‘ • 金띠뿔 같은 것은 講堂을 法堂 前測面에 배 치 하여 庸系f加藍形式을 根本

    的으로 고쳐 韓國的 새 傳統을 확럽했다.

    中門판 다락을 이룩하여 參禮者는 이 다락을 거쳐 高훌에 오르게 하였으니 本좋와 浮石

    흉-는 그 좋은 標本이다.

    2. 各邊 五等法부로 劃地하여 꽁地 南北길이가 東西길이보다 二倍나 되며, 華嚴휴-와 거

    의 같다.

    南北길이 : 1, 100R.(윷대바위에서~健후까지)

    東西길이 : 500R.(極樂顧 쪽 漢川邊~學士臺까지 )

    8. 海印뽕 法堂은 開山當時 자리에 重創되긴 하였A나, 現建物은 純祖十八年에 세운 것

    이며, 五間四面으로 外五包 內七包, 析間과 梁間比率이 높A므로 舊制에 가까운 建葉美를

    지니고 있으며, 天井이 특이하다.

    9. 大藏經戰은 地形에 찰 촉화되 어 있으며 , 寶工系의 朝蘇初期의 우수한 건축이 다. 正面

    15間 測 .2間의 우진각지붕 單層 柱心包칩으로 장식이 거의 없으나, 매우 기능적이고, 과학

    적 인 건물이 며 道뼈걷F 解脫門과 같은 系統의 건축이 다.

    이 板觀 創建年代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筆者는 現存 大藏經板이 江華島에서 이 곳 海印

  • 韓國古代ftlll藍造景에 關한 맑究 257

    극훈로 移安된 年代를 高麗最末期 禮王煩부터 朝蘇太祖 6"'7年 以前£로 推定하였으나, 요히

    려 麗末이 아닐까 한다. 그러 므로 이 때 에 板願이 創建되 었으리 라 推定하며 , 現存 大藏經

    顧은 曺偉-의 海印뿜 重修記, 世祖 때의 印經歐文 등 문헌과 기와 刻銘 등3로 마루어 볼

    혜 , 成宗 19年(A.D. 1488)建立이 툴렴 없다고 본다. 특히 通風 • 橋子憲와 妙, 經板積立의

    굴뚝性 등과 天然 士質의 우수성, 自然風景과의 調和 등이 뛰어나 一福名畵를 연상케 한다.

    10. 大規模 가람가운데 , 華嚴혼 • 控魚뿔와 같이 本뼈藍도 山地를 擇하되 zp.地빼藍手法

    을 지키면서 山의 地形에 갈 적응시킨 가장 좋은 標本이다.

    11. 이 基地는 빼耶山의 中復 두 山服사이 의 땅동線地帶로- 東西兩測에 짧川이 흐르고 北쪽

    에 lí:曉地가 한계되어 있는데, 最北端 좋대바위에서 南端 一柱門앞 |樓추까지 南北길이 약

    1, 100R, 東西 l團 약 500R의 大形船 모양의 地形이 니 곧 風水地理學上으로 行왜形局의 名

    堂이다.

    12. 三級石搭을 中心무로 南北 100R 單位로 구분하여 절을 배치하였다. 윷대바위에서

    南北 一直線을 그어 절의 조경을 이룩하였다.

    좋대바위~法 寶 願...... 약 150R

    法 寶 願~修多羅願 ...... 약 100R

    修多羅願~大寂光觀 ...... 약 100R

    大寂光願~三級石樓 ...... 약 100R

    三級石樓~中門(九光樓)…약 100R

    中門(九光樓)'"解脫門 ...... 약 100R

    解脫門~鳳凰門 ...... 약 100R

    I흙l‘凰門~紅震門 ...... 약 100R

    紅露門"'1障 쭈 ...... 약 50R

    南北 1, 100R의 頂點 곧 좋대바위에서 550R 지점에 中門(九光樓)이 서 있다. 石搭은 좋

    대바위에서 450R 지점에 서있는데, 이 石搭을 中心a로 海印뻐藍이 배치되어 있£며 三級

    石짧 後方에 法堂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했皇휴·法住持·납山持·大康zp.百濟搭과 같

    은 배치법이다.

    지금의 海印좋는 南北主輔線이 西쪽으로 移行되어 있는데, 地形 地勢에 따라 그렇게 되

    었으리라. 옛날부터 風水說에 의하면, 創建時의 홉堂이 子坐午向에서 寅坐申向S로 변경되

    었다고 한다. 創建以來 우려 七次나 불이 났으므로 이 불을 避하기 寫하여 純祖 18年(A.D.

    ’ 1818)에 再建할 때, 南山 梅花峰(火峰)을 피하고, 購火하기 위하여 法풀을 훨씬 西쪽으로

    移行시컸던 것이다.

    13. 海印휴는 창건 후 7次나 火핏를 만나 再建하였으므로 현재 남아 있는 開山當時(A.D.

  • 258 環 境 論 홉흥

    802)의 유물로서 는 三級石향 • 石燈 • 頂禮石 • 開山老擺와 鐵표 뿐이 다. 그 위 치 도 현재 대 로

    라고 생각되나, 다만 頂禮石 위치만이 바꿔졌다. 法堂도 현재 위치 그대로이긴 하나, 다만

    坐向이 바뀌 졌을 뿐이 다.

    14. 開山 혜 (A.D. 802) 인 항r羅時代로 소급하여 復原해 보았다.

    石향을 中心으로 搭後方(北方) 直線上 100R 지점에 f용盧顯(大寂光願)을 배치하였고, 搭

    前方(南方) 直線上 100R 지점에 中門(九光樓)을 배치하였고, 搭前方(南方) 200R 지점에

    解脫門을 배 치하고, 搭前方(南方) 600R 지점에 紅震門(一柱門)을 배 치하였으며, 搭에서

    서 쪽 -直線上(學士臺쪽) 약 100R 지 점 에 講堂을 배 치 하고 樓에 서 동쪽 약 100R 지 점 에

    察舍를 배 치 하고, 그 옆에 東門을 세 워 가람을 이 룩하였다고 생 각한다. 中門엔 左右에 행

    願이 있었으리 라 推定한다.

    15. 大藏經願은 麗末·蘇初에 창건되었다면, 開山當時는 없었던 건축이었고, 朝J蘇太祖

    印經顧文에 말하고 있듯이 太祖 2年에 古搭을 修葉하고 大藏經板本을 樓속에 奉安하였다연,

    아마 그 板本 한 縣을 모실만한 三級大木搭이 세워져 있을 것이니 그 木造搭은 底中佛搭과

    는 何等 관계 가 없고, 다만 大藏經奉安木造搭일 것이 니 현재 의 혹府願 • 應률顧 • 四級小石

    搭이 있는 자리 에 있었으리 라 推斷한다.

    16. 處中 三級石搭은 九尊金佛像을 모신 佛견똥이 며 , 紅震門밖 事讀牌 옆에 있는 妙吉햄향

    은 護國忠、塊搭인데, 이 챔은 千年間 無名향으로 傳해 오다가 지난 1965年 이 搭속에서 발

    견된 崔孤雲擇인 妙吉群훤記에 의하여 羅末의 妙吉禮搭A로 확정되었다.

    그려나 혹府願 앞 四級小石챔‘은 최근에 주어 모은 행으로 별 가치가 없되, 石燈은 佛國

    뽑 石燈 다음가는 適品이 다. 廳中챙과 石燈은 1926年에 改葉할 째 , 樓은 基훨 2層以下를

    근본적A로 고치고 주위에 石째을 돌려 慶色이 짙게 만들어 新羅美를 잃었고, 石燈도 支柱

    를 새로 갈아 넣어 古調를 앓고 말았으나 海印뽕는 환寶를, 나라엔 國寶를 앓고 말았다.

    17. 海印뭘·는 原來 華嚴{fJn藍£로 創τ향되었오므로 法堂을 「뿔盧願」이라 명명했다가 다시

    成宗 19年(A.D. 1488) 大重創時에 大寂光願이 라 고쳤 다.!Í!.盧顧。1 나 大寂光觀이 모두 華嚴

    宗刺의 表象이 다. 그러 묘로, É몽盧願이 나 大寂光願의 佛像배 치 가 비 로자나불상을 主佛로 삼

    고, 左右補處로 文珠 • 普짧홉鍾을 배 치 하여 華嚴뼈藍의 本原을 드러 내 었다.

    堂宇마다 當代名筆의 현판과 珠聯을 붙여 美化시키고, 新羅末 華嚴宗의 가람배치법을 중

    시하여 세운 것을 그 둬 高麗·朝蘇朝의 輝宗이 발흥됨에 輝꽁式으로 當宇 명칭이 붙여지

    고 輝宗에 펼요한 건물도 세워져 많成가람에다 輝風式으로 加味하여 오늪에 이료고 있다.

    18. 가람과 자연풍경과의 오화미는 他띔;에서 볼 수 없는 秀進性이 內在되어 있다.

    海印총는 좋대 바위 에서 一柱門까지 南北-直線上에 가람이 배 치 되 었는데 , 左右에 均衝이

    찰 잡혀 져 배 치 되 어 있 다. 總 1 , 900餘야의 건물이 半半式 各各 -直線上에 서 左右로 배 치

  • 韓國古代빼藍造景에 關한 맑究 259

    하여 行母形局의 妙點을 살렸다. 行빠形局이기 때문에 배가 기울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배

    中心部에서 左右로 알맞게 건물을 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風水學올 떠나서라도 地形

    地勢가 行빠모양£로 생겼으므로 그 形局에 따라서 가람을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羅末 風水地理學이 들어온 둬부터는 가람이나 宮행·書院·樓關·家屋 등은 모두 이 風

    水學的인 立場에서 그 위치를 청하고 造景을 이룩하였으므로 이 海印얘Q藍도 風水學의 영향

    을 받아 이룩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가람은 風水學上으로 보아 行챔形局이므로 이 배를

    매어서 搖動없이 하기 위하여 一柱門 얀에 開山 느티낡을 심고, 學土훌에다 전나무를 집어

    各各 배를 배는 큰 나무뭇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며, 현대적으로 생각하면 開山紀念

    植樹였던 것이다.

    19. -柱門에서 大藏經顧까지에 石階가 108이요, 板願 기풍도 108이다. 이것은 佛敎의

    百八煩腦를 상징하였다고 볼 수 있다.

    20. 海印혼 法堂이 나 기 다 佛宇가 朝蘇後期에 再建되 었다 할지 언정 細部보다 全體的 構

    造美, 全體的美보다 지붕의 遠뿔的 曲線美가 뛰어났다.

    海印휴板觀 西北端에서 個敵하였을 혜의 造景美는 一福의 名東洋畵의 雅趣가 서린 느낌

    이 난다.

    21. 海印뼈藍의 @줄園과 植樹는 單調롭다. 걷F종Uw좋園은 佛敎의 修道 空間이 므로 별 다른 技

    巧를 부려지 않고 자연적 單調性을 가졌다.

    뜰에 搭·石燈·頂禮石·石牌 등과 門樓 등을 배치하고, 불두화·木運·느E-J 나무·천나

    무를 심어 간소한 정원을 이룩하였을 뿐, 더구나 海印뽑는 山地뼈藍이묘로 四周의 自然짝

    變과 自生의 塊林 • 奇花 • 짧草 • 樹木 들을 效用하여 若千의 A工을 加함£로써 自然景觀을

    잘 調和하여 海印做藍을 이룩하였다.

    22. 海印빼藍은 新羅古刺이 며 國之大利이 요, 法之宗家로서 行빠形局上에 위 치 한 韓國뼈Q

    藍造뚫史上 特異性을 지니고 있ξL묘로 그 傳統美를 보존하기 위하여 후인이 重修·增藥할

    때, 無商量 無計劃으로 함부로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이다.

    權域湖山은 山河가 明婚하고 春夏秋쪽四時가 엄연히 구분되어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이루

    었다.

    아름다운 이 江土에 아득한 옛날 三國 때 佛敎 東傳과 더불어 뛰어난 名區에 가람이 이루

    어지면서 1600年의 /엎久한 역사속에서 특유한 한국적 가랑 조경이 창조되었다.

    특히 新羅文化는 佛敎精神과 土倚짧과의 調和土홉에서 萬世不易의 특이한 新羅精神과 예

    슐적 극치를 이룩하였다-

    千古에 빛나는 石庸魔의 大佛, 佛國츄美, 奉德권의 神鐘, 願石亨, 廳星臺 등과 옛 뽑~J!:

  • 260 環 覆 論 홉쫓

    에 흩어져 있는 石搭·石燈·石牌. I陣추 등이 新羅的 美의 극치를 이루고 半月城빠의 自然

    環境이 新羅宮행 옛모습을 如實히 도러내고 있다.

    筆者는 韓國造景·中 특히 韓國古代뻐藍造景을 연구합£로써 그 특성을 발견하여 오늘과

    내얼의 造景創造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우선 三寶宗쩌의 하나인 法之宗家海印뽕의 造景‘的ι

    맑究를 통하여 그 특성을 발견코자 애썼다.

    海印혼의 극훈格 • 宗統의 特異性, 八萬大藏經의 m.世界的 秀速性, 立地的 優位{生, 홈U地의‘

    組織性, 諸佛宇와 石構·石牌의 特性, ,大藏經願의 優秀性, 內外造景의 自然과의 調和美,

    歷史的 構造美, 環境의 隱化와 海印뽑 造景·上의 티와 傳統造景保存上의 留意點 등을 ìf.Lt明/

    하여1 그 傳統的 韓國WU藍造景·을 밝힘무로써 요늘과 來日의 韓國造景創造에 基m~로 삼고자

    한다‘

    아1 傳統的 韓國造景美블 뼈대로 하여 西歐의 幾何學的 造景美를 受容 溶解함 o 로써 韓國,

    的 새 傳統美를 創造고자 하는 바이 다.

    韓國古代伽藍造景에 關한 研究Ⅰ. 序論Ⅱ. 海印寺의 歷史와 宗統Ⅲ. 海印寺의 立地的考察Ⅳ. 海印寺 重要堂宇 및 石造物의 規模와 配置分析的 考察Ⅴ. 海印寺 內外造景構成分析Ⅵ. 結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