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b 표지로 보는 < kdb소식> 역사 · 2015-12-10 · 을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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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KDB.co.kr 34 2013 JANUARY 35 <KDB소식>의 역사 1~299호 표지로 보는 < KDB 소식> 역사 1954년 창간한 산업은행 사보 <産友>의 표지는 마치 문학 소설집과 같은 느낌을 준다. 1987년 <산은소식>이라는 이름으로 재 발간된 타블로이드판 형태의 사보는 일반 신문과도 같은 느낌으로 기사 제목과 관련 기사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특징이다. 1990년 5월 책자 형태로 바뀌면서 초반에는 폭포, 풍경, 꽃, 나무 등 자연을 담은 사진으로, 90년대 말에는 일러스트 작품 등으로 채워졌다. 2000년대 중반에는 예술 화가 작품들이, 후반에는 KDB를 상징하는 콘셉트의 다양한 이미지 컷들이 실렸다. 가장 최근에는 KDB산업은행과 관련된 테마로 본점 건물, 조형물 등이 다채로운 시각으로 채워져 눈길을 끌었다. PIONEER Moving on 300호 특집_<KDB소식>의 역사 1~299호 PIONEER Moving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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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KDB 표지로 보는 < KDB소식> 역사 · 2015-12-10 · 을 수 없네요. 개인적으로는 술의 위력을 실감했죠. ㅎㅎ 우리 국민 모두에게는 한번 맺은

www.kdb.co.kr34 2013 January 35

<KDB소식>의 역사 1~299호

표지로 보는 <KDB소식> 역사1954년 창간한 산업은행 사보 <産友>의 표지는 마치 문학 소설집과 같은 느낌을 준다. 1987년 <산은소식>이라는

이름으로 재 발간된 타블로이드판 형태의 사보는 일반 신문과도 같은 느낌으로 기사 제목과 관련 기사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특징이다. 1990년 5월 책자 형태로 바뀌면서 초반에는 폭포, 풍경, 꽃, 나무 등 자연을

담은 사진으로, 90년대 말에는 일러스트 작품 등으로 채워졌다. 2000년대 중반에는 예술 화가 작품들이,

후반에는 KDB를 상징하는 콘셉트의 다양한 이미지 컷들이 실렸다. 가장 최근에는 KDB산업은행과 관련된

테마로 본점 건물, 조형물 등이 다채로운 시각으로 채워져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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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300호 특집_<KDB소식>의 역사 1~299호Pioneer Moving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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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이전부터 발간한 사보, 1987년 <산은소식>으로 재창간

KDB산업은행의 사보는 식산은행 시절 <會心>으로 발간했으며, 1954년 산업은행 창립

과 동시에 <産友>라는 제호로 창간(계간)했다. 이후 1970년대 정부의 물자 절약 시책으로

1971년 12월 제47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했다가 1987년 8월 <산은소식>(타블로이드판, 매

월 8면)이라는 제호로 다시 발간했으며, 1990년 5월 신문 형태에서 책자 형태로 판형을 바

꾸었다.

지난 2012년, KDB산업은행의 변화된 이미지 그리고 비전과 부합하는 이름으로 대체

하고자 KDB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보 명칭 공모에서 <KDB소식>(부제 Pioneer

Bank beyond Best)으로 새롭게 출발해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2013년 1월 드디어 제

300호를 맞았다.

사보의 어제와 오늘,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 다양한 콘텐츠 변화를 통한 재발견

1980년대 창간부터 199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산은소식>은 산업은행 뉴스와 이슈, 그리

고 은행의 업무 소개, 직원들의 시와 수필 등이 주를 이루며 행내 소식을 전한 사내보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산업은행 고객에게 금융 정보와 다양한 문화 정보를 제

공해주는 사외보 성격이 가미되면서 현재에는 두 가지 성격을 적절히 배합한 복합 사내·

외보로 자리매김했다.

가끔 특집호의 경우 두 달 치를 한 번에 엮어 발간하기도 한 <산은소식>의 월중 콘텐

츠는 몇 년에 한 번씩 추가, 혹은 교체되기도 하며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그중 주요 콘텐

츠로는 1980~1990년대에는 산은 만평(만화), 통신원(직원)들의 본·지점 소식, 프리즘(직

원들의 발상과 생각), 마그마(그달의 이슈), 삼일고가(직원들의 글), 산은가족 문예 등이

주를 이뤘고, 2000년대에는 구두방(만화), 우리는 동호인(동호회 소식), 지점 탐방, 문화

산책, 살며 생각하며(직원 글), 간강하게 삽시다(건강 상식) 등이 주를 이루었다.

가장 최근인 2012년에는 사보 명칭을 변경하면서 섹션명도 함께 바꾸어 PIONEER

beyond Best(현장 업무, 이슈, 경쟁력 등 소개), PIONEER with You(고객과 함께하는 금

융 정보), PIONEER Moving on(문화, 스포츠 등 역동성과 개척 정신)으로 구성해 현장

속으로(업무 소개), KDB 스타(업무를 대표하는 직원), KDB 이슈와 뉴스, 금융 정보, 문

화 산책, 레저, 스포츠, 트래블, 봉사 활동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았다.

1호부터 299호까지를 살펴보면 1980~1990년대와 2000년대 행내 소식 가운데 비슷

한 것이 많아 변천사처럼 한눈에 볼 수 있고, 중간에 소식이 뜸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생긴 업무, 기사와 뉴스 등을 보면 감회가 새롭다. 예를 들면 아주 오래전에도 체육

대회와 산행 대회 소식과 사진, 신입 행원 소개, 여름휴가지 소개와 사진 공모, 도서 벽지

아이들 초대, 역사 탐방(한국에서 사라져가는 것들-나전칠기 등) 같은 칼럼이 있었는데,

현재에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옛날 광고나 창구 직원들의 하계/동계

유니폼 사진 기사들을 요즘과 비교해 생각해보면 새롭기도 하다.

KDB 가족의 추억 이야기

이번 300호 특집을 기념해 지난 24년 동안 KDB가족 마음 속에 깃든 추억 이야기를

앨범으로 만들어보았다. 역대 편집인(편집 담당 직원 포함)들의 에피소드와 소감을 비롯

해 20여년 전 사보에 글이 실린 직원을 찾아가 그 당시 원고 기사를 보여주며 그들의 추억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또 20여년 전 ‘우수 거래처 소개’란에 실린 업체 가운데 한 곳을 선정

해 연락해보았는데, 그 당시 대표가 아직 그대로였으며 우수 기업(부산지점 거래처)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룬 사례가 있어 업체의 소감도 들어보았다. 이번 300호 특집 칼럼을 통

해 고객들에게는 산업은행 사보의 역사와 사내 문화 등을 소개한 재미있는 볼거리를, 직

원들에게는 하나하나의 소중한 추억들을 선사한다. 이제 그때 그 시절로 다 함께 출발해

본다. K

100호 특집 200호 특집<KDB소식>(구 <산은소식>) 300호 기념 특집

지난 25년의 세월, 유구한 역사를 지닌 KDB산업은행의 사보 <KDB소식>2013년 1월, <KDB소식>이 300호를 맞이했다. 25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KDB산업은행 사보는 창간 당시 어렵던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KDB산업은행 직원뿐만 아니라 거래처와 고객에게까지도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동반자 역할을 해왔다. 이번 300호 기념

특집호를 통해 창간호인 1호부터 지난 299호까지, 고객들에게는 ‘그때 그 시절’의 추억과 KDB산업은행의 사내 문화를 소개한 재미있는

볼거리를, 직원들에게는 그때 그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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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정부의 물자 절약

시책으로 1971년 12월 제47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했다가 1987년

8월 <산은소식>(타블로이드판,

매월 8면)이라는 제호로 다시

발간했으며, 1990년 5월 신문

형태에서 책자 형태로 판형을

바꾸었다.

300호 특집_<KDB소식>의 역사 1~299호Pioneer Moving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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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2003년, 15년간 편집주간

정재섭(잠실지점 지점장)

그윽한 향기 품은 기품 있는 ‘설중매’ <KDB소식>

KDB의 동심원으로 가교(架橋) 역할해야

이번 300호는 1987년 8월 <산은소식> 창간

호를 발간한 저에게 매우 각별한 의미가 있

습니다. 저는 창간호를 시작으로 2003년 1월

180호를 발간한 후 홍보실을 떠날 때까지 15

년간 편집에 참여했는데, 그로부터 꼭 10년이

흐른 지금 2013년 1월 <KDB소식>이 ‘300호!’

라는 의미 있는 통권번호를 달고 제 앞에 다

가왔기 때문입니다.

사보(社報) <KDB소식>은 그동안 편집진의 땀과 노력이 합해져

그윽한 매화 향을 품은 기품 있는 설중매처럼 이제는 어디에 내놓아

도 손색없는 사보(社寶)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상념 속에 창간 시절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정

부간행물발행심의를 받기 위해 정봉렬 전 부장님(당시 대리, 퇴직)과

애쓰던 일, 정기발행일을 맞추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인쇄소에서 밤

샘 작업을 한 일, 외부 유명 인사에게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 분주하

1996~1997년, 2년간 편집주간

강경완(윤리준법실 팀장)

그 당시의 편집실 직원들이 가장 먼저 떠오릅

니다. 그때는 4급 책임자 1명, 직원 3명 등 총

4명이었는데(지금에 비하면 대식구죠?) 당시

책임자는 저였고, 도곡지점의 손은숙 단장이

직원으로 있었습니다. 나머지 두 분은 이민과

결혼 등으로 퇴직해 지금은 없네요.

당시 사내보 성격이 강한 만큼 원고청탁

대상은 대부분 우리 직원들이었어요. 편집 회의를 통해 기본 콘셉트

를 정하지만 추진하는 과정에서 원고 청탁이 번번이 거절되거나 데드

라인(dead-line)을 넘어 겨우겨우 원고를 보내주는 일, 또는 글 내용

이 기대 이하인 경우 등이 가장 난감했지요.

1996년 종무식이 가장 기억에 남는군요. 당시에는 종무식 날 사

무실 풍경은 완전 회식하는 식당 분위기였죠. 임원분들도 관련 부서

를 순회하며 격려하고 술 한 잔씩 주고받는 것을 관행처럼 여기던 시

절, 얼근하게 술에 취한 4급 편집장인 저는 대범하게 외쳤죠. “사보에

에세이 한 편 기고할 수 없는 분이 임원이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자

격 미달 아닙니까!” 당시 배석한 부장님이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을 잊

을 수 없네요. 개인적으로는 술의 위력을 실감했죠. ㅎㅎ

우리 국민 모두에게는 한번 맺은 인연을 귀하게 여기는 좋은 성

향이 있는 듯해요. 그래서인지 요즈음도 사보 <KDB소식>을 매달 꼬

박꼬박 읽고 분석하곤 합니다. 300호라니, 정말 대견하고 감격적이

죠. 300호 발간은 사보 역사를 통틀어 몇 안 되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연륜에 비해 우리 사보가 너무 변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도 들

지만, 꾸준하게 나이테를 더해가면 하나의 우람한 역사가 되어 있으

리라 기대합니다. 매월 KDB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를 기록한다는

소명감으로 편집 방향을 가져갔으면 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KDB

소식>에 들어 있는 내용일 테니까요. <KDB소식> Forever!

던 일, 청탁한 원고가 인쇄 직전일까지도 오지 않아 애태운 일, 필자

의 한문 성함이 교정 실수로 틀려 한 권 한 권 오자 수정 테이핑 노동

을 한 일, PC 보급과 함께 지금의 ‘KDB NEWS’의 전신인 ‘KDB 동서

남북’ 문자 방송을 개시한 일, 단행본 책자 <산은인이 엮는 세계 산전

수전기(Why KDB? It’s KDB!)> 발행 후 직원들과 언론사로부터 호

평받은 일 등등.

창간 시절 그때는 원고를 200자 원고지에 직접 손으로 쓰고, 청

타기(평판의 문자 제판에서 사진 촬영용 원고에 들어갈 문자를 찍는

타자기)를 사용해 조판하던, 말 그대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었습니다. 당시 행내에는 의사소통을 위한 적당한 매체가 없어 행내

커뮤니케이션 활성화가 당면한 주된 과제 중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초창기 <산은소식>은 경영진의 경영 방침과 각 부점 소식, 업무 관련

정보 사항 그리고 산은인의 일과 삶의 모습을 담은 칼럼이나 문예

창작물 등을 위주로 편집하는 사내보(社內報) 기능을 더 중요시했

습니다.

그동안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둔 <KDB소식>은 우리의 ‘얼굴’이

자 우리의 역동적인 활동 모습을 대내외에 비추는 ‘거울’입니다. 앞으

로도 <KDB소식>이 우리의 일터 KDB와 산은가족의 일과 삶의 모습

을 그대로 투영하고, KDB금융그룹의 동심원으로서 임직원 상호 간

그리고 은행과 고객을 하나로 묶는 가교 역할에 최선을 다하여 더

많은 독자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는 ‘KDB의 보물’이 되길 바랍니다.

1987~1994년, 7년여 편집 담당

신정순(신천지점 지점장)

입행 4년 차 되던 해인 1987년 8월에 순진무

구한 열정으로 <산은소식> 편집실의 멤버가

된 후, 무려 7년을 넘게 <산은소식>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그야말로 삼천리 금수강산이

변할 정도의 세월이었죠. 지금 기억에 가장 많

이 남는 분으로는 김중석 홍보실장 지휘 아

래 편집실 주간을 맡으신 정봉렬 부장(전 조

사부장)과 나종영 부장입니다. 또 정재섭 지점장(현재 잠실지점장)과

배창환 부부장(현재 기업금융2부) 그리고 지금은 은행을 퇴직한 이

완상 씨와 유태환 씨도 기억에 남습니다.

창간호 <산은소식>은 타블로이드판 신문 형식으로 발간했으며,

그 이후 PC 사용을 활용한 매체통신 역할까지 감당했고, 지금의 잡

지형 <산은소식>보다는 절제된 소식지의 형태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

다. 월 1회 <산은소식>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만들기 위해 각종 원고

를 수집하고, 현장 취재를 병행하며 일일이 교정을 거쳐 제작했습니

다. ‘<산은소식> 기자’라는 명함을 가지고 외부 필진을 만나러 가는

일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임신 9개월 만삭의 몸으로 시조 명창 등

을 만나 인터뷰 기사를 작성한 일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습니다.

<KDB소식>을 볼 때마다 첫사랑을 만나는 설렘이 느껴집니다.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꾸미는 페이지마다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나가

길 간절히 소망하오며, 3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산은소식>의 산증인들

역대 편집인의 후기와 에피소드사보 300호 특집을 맞이해 창간호 시절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편집주간, 기자, 편집 등을 담당한 직원들을 만나보았다.

무더위와 매서운 추위에도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해 글을 쓰고 교정까지 맡아 하던 산업은행 사보의 산증인들. 그들로부터 편집실의 후기와

소감 등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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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호 특집_역대 편집인의 후기와 에피소드Pioneer Moving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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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가을 <산은소식>에 실린 행내 커플 탄생

기사. 26년 전의 풋풋한 모습을 곁들인 글은

타임머신인 듯 돌이켜보기조차 아득한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게 했습니다. 읽어

내려가는 그 짧은 순간 벅찬 감회가 가슴을

두드리더군요. 그러고 보니 KDB와 인연을

맺은 지 어언 30년째가 되었습니다. 제게는 가장

소중한 인연일 것입니다. 4大家禮인 冠婚喪祭.

저는 KDB에 입행함으로써 冠을 이루고, KDB에서 배필을 만나 婚하였고,

KDB의 따뜻한 어루만짐으로 부모님 喪을 무사히 마쳤으며, 또한 어느덧

10년째 祭를 잘 모시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괜찮게 살아왔다고 해야죠?

그래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매 순간순간 꿋꿋이 옆을 지켜준

행내 커플 박나리(아내)에게도 한없는 고마움과 사랑을 전합니다.

더벅머리 대리 시절, ‘고슴도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업무단상을

올린 지 25년이나 지났다. 그 사이에 산은도, KDB소식도, 금융산업도,

한국 경제도 사진 속의 내 얼굴도 참 많이 변했다. 변치 않은 건 산은의

존재감과 산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한국 경제가 전후 폐허에서

세계 8위 무역대국이 되고, G20의장국에 20-50클럽에 진입하기까지

산은의 역할과 기능은 진화되어 왔다. 이에 따라 산은은 시대에 따라

개발은행, 정책금융기관, 국제투자은행, 글로벌CIB 등으로 달리 불렀지만

산은이 감당해야 할 시대적 소명은 아직도 국내외 금융시장에 가득하다.

공공성이냐, 상업성이냐 또는 정책금융이냐, 시장금융이냐 하는 산은

기능에 대한 논란도 ‘고슴도치의 사랑’으로 풀어야 하리라. 어느 추운

겨울, 한 쌍의 고슴도치가 추위를 이기려 몸을 비비다가 서로의 가시에

찔려 추위와 아픔을 견딜만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붙어있던 사랑

이야기. 우리의 산은 사랑만 있으면 걱정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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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005년, 3년간 편집주간

이준훈(압구정지점 지점장)

예상치 못한 발령을 받아 2003년 3월부터

2005년 2월까지 만 3년 동안 사보 제작에 참

여했습니다. 명색이 시인이라 차출된 것으로

짐작합니다. 당시 홍보실장은 심상운 선배

님, 민호기 선배님이셨고 직원으로는 김영민

님, 손명호 님, 방수경 님, 방현진 님, 송미연

님, 김경희 님이 있었고 사진작가 이종화 님은

현재도 맹활약 중입니다. 당시 제작 콘셉트는 ‘명품 KDB의 볼만한

잡지’라고나 할까요? 해서 우선 제호를 ‘푸른산은 좋은소식’으로 바

꿨고요, 디자인을 아웃소싱(outsourcing)해 볼거리를 늘렸으며, 연

간 테마를 설정하고 테마에 맞는 소재를 발굴하려고 노력한 점이 기

억납니다. 발행 부수를 늘려 개인 고객에게도 배송하면서 한마디로

‘읽히는 잡지’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04년은 은행 창립 50주년이었습니다. 특집으로 ‘50주년 축하

메시지’를 기획해 추진한 일이 기억에 크게 남습니다. 세계적 성악가

조수미 님, 야구 국보인 선동렬 감독, 안랩의 안철수 님, 여의도공원

을 만든 조순 시장님, 이헌재 당시 재경부 장관님, 식당 ‘수라청’ 대표

등등 12분을 인터뷰하면서 동영상 촬영(홈페이지 참조)과 서면 메시

지를 받았습니다. 조수미 님의 흔쾌하고 다감하던 모습, 안철수 님의

그 나직한 목소리, 선동렬 감독의 호탕한 웃음, 이헌재 장관님의 어

눌한 듯 확실한 메시지 등이 기억나는군요. 기획 당시는 반의(半疑)

했지만 모두들 흔쾌히 응해주어서 KDB Brand Power를 새삼 느낀

기억, 지금도 생생합니다.

KDB산업은행 사보 300호! 정말 대단합니다. 얼마든지 축하해

도 될 것입니다. 전(前) 편집인님 중 정봉렬 선배, 나종영 선배 고생하

셨는데 그립습니다. 무엇보다 독자인 여·수신 고객이 많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용이 좀 들더라도 한층 깔끔하고 볼거리 넘치

는 기획을 기대합니다.

옛 추억과의 만남 1

KDB인들의 Before&After20여년 전 사보에 기고했던 직원들 몇 분께 그 당시 원고와 사진을 찾아 보여 드렸다. 이럴 때가 있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며 웃는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지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본인들의 원고를 보며 행복해 했다.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들이 오랜만에 다시 펜을 들었다.

2006~2007년, 2년 편집 담당

손명호(성장금융부 부부장)

그 당시 함께 고생하며 사보 제작을 맡아 한

이준훈 부장님과 에디터인 김경희 씨가 생각

납니다. 제작 과정은 사보를 만드는 과정이

다 그렇듯이 주제 잡고 기사 아이템 정하고

취재, 기사 작성, 편집, 디자인 등 여러 가지 움

직일 일이 많으나, 무엇보다 사내·외 원고 청

탁, 자료 수집 등 편집 마감하는 일이 힘들었

고, 글재주도 없고 사보는 커녕 원고 한 번 제대로 써본 적이 없는 사

람에게 사보를 담당하라고 해서 엄청 황당하고 당황해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다양한 사람을 접할 수 있

었고, 좋은 분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준, 참으로 즐겁고 재미있

었던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우리 사보에 전문성을 더하고자 우여곡절 끝에 전문 에디터를 채용

해 자체적으로 사보를 제작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고, ‘추억의 한 컷’

이라는 칼럼이 있었는데 직원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 한 장과 그 일화

를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칼럼에 모 직원(현재 수석부부

장임)의 아주 어릴 적 사진(흑백)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머리에 기계

충이 생겨 동생과 함께 어머니 손에 이끌려 이발소에 다녀오는 사진이

었죠. 정말 귀엽고(죄송) 웃음이 나오는 사진이었는데, 제가 그 사진

을 보고 한참을 놀려서 거하게 식사 대접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간 매번 발전적으로 새로워지는 사보를 보면서 편집진들의 수

고와 노력을 알 수 있었습니다. 300호를 맞았다니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이어져온 것이 기쁘고, 그간 지나온 세월이 아쉽기도 합니다. 하

지만 그 세월만큼 많이 성숙된 사보로 거듭났으니 기쁨이 더 큽니다.

요즘은 책자 사보보다는 웹 사보가 대세지만, 우리는 아직도 책

자 사보를 발간하고 있다는 점에 적잖이 자부심을 느낍니다. 앞으로

도 우리 사보가 교양지, 정보지, PR지로서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도록

계속 발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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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호 특집_Before&After 1Pioneer Moving on

최재홍(기업금융3부 부장) 1987년 9월 제2호 게재

윤만호(KDB금융지주 사장) 1987년 9월 제2호 게재

Page 5: KDB 표지로 보는 < KDB소식> 역사 · 2015-12-10 · 을 수 없네요. 개인적으로는 술의 위력을 실감했죠. ㅎㅎ 우리 국민 모두에게는 한번 맺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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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구(베이징지점 부부장) 1988년 5월 제10호 게재 이삼규(기획관리부문 부행장) 1990년 3월 제32호 게재

박석(선양사무소 소장, 선양지점 개설준비위원장) 1987년 10월 제3호 게재 서정욱(조사분석부 팀장) 1989년 3월 제20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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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산은소식>에 ‘10년 후…’라는 주제의 짧은 산문 한 편을

기고했는데 이제 그이상의 세월이 지났다. 내가 그런 글을 썼는가 싶을

정도로 잊고 있었는데, 메일로 보내온 자료를 보니 내 사진과 글이

있었다. 지금보다 앳된 얼굴의 사진을 더듬으며 읽은 예전의 치기 어린

글이 부끄러운 느낌으로 다가오면서 글 말미에 써넣은 ‘금석지감’이

실로 강하게 느껴졌다. 지난 10년 동안 베이징사무소와 지점 두 번의

해외 근무를 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은 이제는 중국어로 단순한

대화의 소통만으로는 현지에 제대로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첫 번째

근무 때에는 외국인으로서 중국어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감탄해하는

중국인들이었다. 하지만 작금의 중국은 모든 문호를 개방해 중국어를

잘 구사하는 외국인이 현저히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 위상도

크게 달라져 이제 외국인도 중국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계’에

더욱 편승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행내 체계적인 중국어 학습 과정

진행, 연수생 파견 등으로 중국어는 물론 중국 문화를 이해하는 전문가

인력풀이 형성되어가고 있음을 볼 때 당행의 미래는 더욱 희망적일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가볍다. 올해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다시 그 10년 후가 기대된다.

한때 문학소년, 문학청년으로 살고자 한 시절이 있었다. 문예지 응모에

거듭 실패하면서도, 지금 보면 치기 어리기 이를 데 없는 내 글을 하찮은

지면엔 결코 실을 수 없다는, 정말 턱없는 자기만족에 빠져 내 작품을

몰이해하는 사람만 비하하며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내 글을

보여주고 싶은 통속적 요구를 참다가 도저히 못 참을 때 슬며시 내 詩를

몇 편 실었는데 그때 너그러이 받아준 마당이 바로 <산은소식>이었다.

이 詩를 쓴 시기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사회생활에 첫발을 디딘 후

만 7년이 지나 첫 승진의 기회를 맞은 해였다. 詩의 해석은 독자의

몫이지만, 그 당시 나는 한강을 건너는 출근길에서 ‘한동안 묻어둔

그리움’을 만날 수밖에 없는, 생각이 많은 시기였다. 아마 인생 행로의 또

다른 사춘기쯤이 아니었을까? 그 이후 詩는 내 손에서 벗어나 그림 속

정물처럼 내 주변에서 박제가 되어갔고, 대신 내 마음속에는 또 다른 삶의

모습들이 동그마니 들어앉게 되었다. 이젠 언제 그런 글을 썼는지도 모를

정도로 세월이 흘러 홍보실에서 내 詩를 보내왔을 때 감흥을 되살리느라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혹시 오늘 전철로 한강을 건넌다면 또 다시 새로운

풍경을 만날지… 화석처럼 껍질만 남은 詩心에서 새싹을 찾을지….

스물일곱, 한 청춘의 想像

우선 <KDB소식> 300호 발행을 축하한다. <KDB소식>의 역사도 이제 한

세대를 아우르는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KDB소식>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은행 발전에 기여해왔다. 앞으로도 KDB 조직 문화 발전과 직원들 간

소통의 장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내가 ‘수채화’라는 시를 투고했을 때는 <KDB소식>의 창간 무렵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스물다섯 해 전쯤 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내 눈에는 많은 것이 아름답고 생동적이었나 보다.

사무실 책상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소녀를 아침 장미원이라고 말하며,

그 장미원의 정원사가 되고 싶다고까지 했으니까…. 지금 이 시를

읽어보니 당시에는 내가 너무 근접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스무 살 후반의 청춘에게는 다소 그런 점이

있었을 것이다. 좀 더 멀리 떨어져서 바라봤으면 더 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럼에도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그 스물일곱, 한 청춘의

상상이 나를 행복한 회상 속으로 인도한다. 아마도 내게 스물일곱은 그런

마력이 있는 청춘이었나 보다.

24년 전의 신입 행원 연수 후기를 보니 감회가

짜릿할 정도다. 20대 중반을 막 넘기던 청년의

산업은행에 대한 첫인상은 약간 유치하지만

어딘가 풋풋하다. 문장에 유난히 ‘나는’이라는

주어를 많이 쓴 것으로 보아 아직 세상 풍파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미꾸라지의 당돌함도

느껴진다. 당시의 <산은소식>은 우리 은행

문화의 결정체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자부심이

있었고 서로를 존중했다. 나는 매달 이 투박한 인쇄의 행내 신문을 받아

드는 순간이 아주 따뜻했고 자랑스러웠다. 고객을 대상으로 한 은행

홍보지를 겸하는 지금의 세련된 <KDB소식>보다 가족적인 따스함은

더했다. 세월은 흐르고 시류도 변했다. 그러나 우리 은행이 변화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게 답답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엔트러피가 높은 상태야말로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자. 아 참, 이제 보니 그때는 머리카락도 꽤 있었다.

동료들의 억측과 혼란을 막기 위해 모자 쓴 사진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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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종(개인금융부 금융 컨설턴트) 1990년 6월 제34호 게재 김동춘(리스크관리부 선임연구위원) 1992년 4월 제55호 게재

김세진(개인금융부 금융 컨설턴트) 1990년 7월 제35호 게재 이해용(자본시장부문 부행장) 1991년 4월 제43호 게재

참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사진과 글인데, 잘

기억이 안 나는 이유는 뭘까요? 사진 예찬론을

기고한 1990년은 30대로서 한창 일하고

돌아다니기 좋아하던 시절인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런대로 잘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행스럽지만, 사진 예찬을 말로만

떠들고 보여준 거 없이 게으른 흔적만 드러난

것 같아 민망한 느낌입니다. 사진부 활동을 하면서

은행의 사진부 역사를 찾고자 오래된 <산은소식>을 뒤지기 시작한 후,

몇 번의 사진과 글을 올리면서 사보와 친해졌지요. 과거 한때 폐간의

위기도 있었으나, 지금은 산업은행의 일상을 기록하며 밖으로는 은행을

널리 알리는 훌륭한 역할을 하는 매체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니

<KDB소식>이 성취감뿐 아니라 공감할 이야기를 실어 용기와 감동을

줌으로써 여러 사람의 삶을 바꾸는 사보가 되길 바라며, 한 지붕 일터의

사람들은 한 번 더 읽어보는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줘야 합니다. 저는

백구과극(白駒過隙) 같은 세월 속에서 2013년을 맞이해서 12개월 매달의

느낌을 알수 있는 사진 촬영을 작정하고 1월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산은소식> 창간호부터 애독자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원고료에 욕심이

있어서 틈틈이 기고했는데, 지면이 남아서였는지 아니면 <산은소식>

편집자와 친분이 있어서였는지 여러 번 제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립서비스로라도 잘 봤다고 하는 분도 꽤 있었으나, 모 상사로부터는

“쓸데없는 글 쓸 시간에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꾸지람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1992년 3월 <산은소식> 편집자로부터 창립 기념

특집 원고 청탁(21세기 산은의 미래상)을 받고 2001년 창립 47주년 총재

기념사를 가상으로 써본 것입니다. 당시 자금부 대리로서 산은 업무

계획을 담당했고, 1980년대 중·후반의 3低好況이 1990년쯤 정점을 찍은

후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 후반 퇴조의 기색이 역력하던 터라 우리 은행과

우리 경제의 앞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글은 그러한

상황에서 쓴 것인데 불행하게도 몇 가지는 적중했지만 산업은행과

우리나라는 우여곡절 끝에 건재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콘텐츠와 디자인이 좋아진 <산은소식>을 직원들이 잘 보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KDB소식>이 산은 직원과 가족, 고객 등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정다운 사랑방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신문사 기자질을 하고

있는 우리 큰아들은 “엄마, 난 여자 기자들이

무서워”라고 한다. 매사 남자보다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여성 동료들 때문에 남자 기자들이

힘들어한다나. 여성 대통령까지 나온 마당에

꿀릴 게 뭐 있겠어? 근데… 난 아직도 여전히

산업은행과 산업은행 남성들을 짝사랑하는

느낌은 그저 자격지심일까?

그 시절 나는 13년 만에 4급 대리로 승진하고 혹시라도 “여자라서

일 못한다”라는 말을 들을까 봐 매사에 나 자신을 힘들게 한 게 조금

후회되기도 한다. 비록 그 덕분에 산은 최초 1급 부장까지 승진했지만

말이다. 이제 우리 은행 신입 직원의 절반 가까이가 여성이고, 각 업무

분야에서 여성 후배들이 두각을 드러낼 때마다 정말 자랑스럽고 마음이

뿌듯하다.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예언해본다. 머지않아 남성들이 우리

여성 행우들을 짝사랑하는 날이 올 거라고.

행원 시절 쓴 ‘편집 체제의 독립적 기대’, ‘부하

직원과 동참하고 고민해주는 상사’에 대한 나의

기사를 보면서 조리 있게 잘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의 문체가 전혀 낯설지 않지만

기사 속 사진은 참으로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다. 조사부의 엄격한 상사들 밑에서

자기의 의견을 명료하게 쓰려는 노력이 눈에

선하고, 바람직한 상사에 대한 의견은 지금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나의 덕목이 된 것을 보고 함께 일하는 동료와

후배님들에게 기사 사본을 드리고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에게 가장 많은 교훈을 주신 분들은 나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철학을 지니고 사신 분들임을 볼 때 지금도 강조하는

‘좋은 상사는 깐깐한 분’이라는 생활신조가 어린 시절부터 배어 있음을

알았다. 요즘 상사의 개성과 권위는 존중받을 만한 것 아닌가 생각하면서

공감하는 나의 표현 “개성에서 비롯된 갈등은 극복하되 좋은 방향을

설정해서 조직을 선도하는 권위 있는 상사”는 강 회장님이 강조하는

“manage하지 않고 lead”하는 상사가 되라는 말씀과 어찌 이리 통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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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KDB산업은행 여러분.

한성기업 회장, 임우근입니다.

2013년은 한성기업이 창업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이런 때에 50주년 역사의

반 이상을 함께 해온 KDB산업은행의 사보

300회, 뜻 깊은 특집호 지면으로 다시 인사

드리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89년 당시의 기사를

다시 보니 매우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 24년간

한성의 겉모습은 적지 않게 변하였습니다. 하지만 한성의 일등간식이

‘숯불구이 왕오징어’에서 ‘크래미’로 변하였어도, 모두에게 더욱 신선하고

좋은 제품을 전하기 위한 노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와의

어업협정도 적극 주도하여 우리의 수자원 확보에도 계속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전의 한성이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는 젊고 패기 넘치는 젊은 신인

영화배우였다면, 지금은 차분하게 자신의 이름보다는 연기와 인물을

먼저 내세울 수 있는 경험과 연륜을 쌓은 베테랑 연극 배우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성이 여기까지 오기에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넘어서는 데는 단순한 거래관계를 넘어

좋은 인연으로, 소중한 벗으로 함께 해준 KDB산업은행의 도움이 아주

컸습니다. 지금도 한성과 한성의 관계사들은 KDB산업은행의 조력과

함께 좋은 일을 만들고, 어려운 일을 넘어서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고마운 벗 KDB산업은행이 사내문화에 큰 의미를 가지는 사보

300회를 맞이 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 있는

때에 한성을 생각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한결같은 벗으로

변함없이 함께하며 더욱 발전할 <KDB소식>의 400호에서, 500호에서

또 인사를 드리게 될 수 있기를 마음 깊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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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으로 보는 KDB의 역사. 행화(매화), ‘샛별돌이’, ‘여의도 본점 이전’ 기사 등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추억의 앨범> 나는 누구일까요?

90년 2월 입행_ 최중복(영업부 팀장), 석순영(업무지원부 부부장)

300호 특집_추억의 앨범Pioneer Moving on

한성기업㈜ (부산지점 거래처) 1989년 3월 제20호 게재 추억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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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추억과의 만남 2

<산은소식> ‘그때 그 시절’과 <KDB소식>‘오늘’의 만남’80~’90년대와 2000년 초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내 소식들

가운데 최근에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행사와 뉴스들을 찾아 보았다.

KDB산업은행의 ‘그때 그 시절’의 모습과 ‘오늘날’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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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300호 특집_Before&After 2Pioneer Moving on

서클 탐방 <산악부>. ’87년 10월 설악산 대청봉에서. 오른쪽은 ’11년 평창

선자령에서 한 컷. 산악부는 지금도 산은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1987년 10월1989년 04월 2012년 01월

’88년 ‘벽지학교생 서울 초청 행사’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초대해 문화체험을

제공, 지금도 ‘도서벽지 어린이 서울 초청 행사’는 계속되고 있다.

1988년 07월 2011년 06월

’02년과 ’12년, 10년 전후로 비교해보는 ‘여름휴가 때 읽으면 좋을 추천

서적’.

’89년 여름, 휴가 사진 공모전. 2012년에도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는

국내여행’ 휴가 사진 공모전이 있었다.

화합, 전진, 도약을 위한 산은 한마당 ‘89년도 종합체육대회’.

그 당시 산금채의 마스코트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모습도 눈에 띈다.

2002년 07월1989년 08월 2012년 08월2012년 09월

’02년과 ’12년, 지점탐방. 10여년 전의 광주지점 모습이다.

지난 해에는 1년 동안 신설점포 소개가 이어졌다.

’95년 봄철 체육대회. 테니스와 탁구 대회 등 본점 및 지역별 경기를

펼쳤다. ’12년에는 원더풀리그 2012 KDB금융그룹 마라톤대회가 열렸다.

2002년 07월1995년 05월 2012년 10월2012년 05월

’87년에도 신입행원들을 소개하는 지면이 있었다. ’12년 신입행원들도

20여년 후 지금 모습을 떠올리길.

2000년, 직원들이 여름 휴가지를 추천해 만리포 해수욕장, 제주도 등이

꼽혔다. ’12년에는 전국 지점에서 지역별 휴가지를 추천했다.

1987년 10월2000년 07월 2012년 09월2012년 08월

10년 전 ‘미스&미스터’라는 선남선녀 직원들을 소개하는 칼럼이 있었다.

’11년에는 금융그룹 내 X-미팅을 통해 최근 1호 커플이 탄생하기도 했다.

’87년도 산업은행 일반 테니스부가 ‘금융인 테니스대회’에서 4部 우승을

차지했다. 오른쪽은 금융그룹의 최강 명문 실업팀 <테니스단>의 모습.

2002년 07월1987년 09월 2012년 07월2012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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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용(조사분석부 선임연구위원)

<산은소식> 1호가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된

지 어언 25년이 흘러 300호를 맞는군요.

<KDB소식>의 300호 발행을 축하드립니다.

은행의 역사와 기록을 간직해주는

<KDB소식>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예전처럼

직원들의 시, 소설, 웹툰 등을 많이 볼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손경상(개인금융부 팀장)

<KDB소식>이 300호를 맞았네요. 모든

부분에서 볼 때마다 새롭게 발전하는 모습이

좋습니다. *Day by day, in every way, I am

getting better and better -에밀 쿠에- 소통

채널의 융합, 세대 문화의 융합 그리고 비전

융합의 실질적 도구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대호(종합기획부 파트장)

<KDB소식> 300호, <산은소식> 창간을

국내지점 직원

찾아보니 1987년, 제가 고3 때네요. 우리 모두

그 시절 그 마음으로 더욱 정진하는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KDB소식>이 우리에게 시원한

청량제가 되어줄 것을 확신합니다.

장상헌(법무실 부부장/변호사)

KDB와 함께 발전하는 아시아 Pioneer 사보,

<KDB소식> 국제판이 발행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심미란(비서실 차장)

매월 편하게 받아보는 <KDB소식>. 알찬 소식과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애쓰는 사보 담당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정성을 모아 사보를 탄생시키는

당신들의 수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KDB소식>

300호가 3000호, 3만 호, 300만 호가 되는

그날까지 원더풀입니다. KDB 가족 여러분,

튼튼한 몸에 맑은 정신이 깃드는 법입니다.

짬짬이 시간을 내 운동해 건강한 신체를

만들고, 강건해진 체력으로 업무에도 보다

열정과 창의적으로 매진해봐요!

홍영상(시스템전산실 차장)

<KDB소식> 300호 발행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KDB소식>은 지난 25년 동안

은행의 주요 이슈와 직원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산업은행의 역사입니다. 세련되고 유익한

<KDB소식>의 발행인, 홍보실 홍보팀 파이팅!

백웅조(기업구조조정부 차장)

KDB 구성원들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역할을

해온 <KDB소식>의 300호 발행을 축하드립니

다. 은행 외부에서 활동 중인 KDB Alumni와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KDB 전·현직 구성원 간의

근황을 공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매달 새롭

고 유익한 내용의 사보를 제공해주시는 제작진

께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KDB의 사보(史報)로

계속 함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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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한(KDB금융지주 기획관리실 팀장)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용감히 싸운 레오니다스

왕과 300인의 스파르타 용사들처럼 거침없이

앞을 향해 전진하는 파이어니어 <KDB소식>이

되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KDB 가족들의

진솔한 삶의 향기가 느껴지는 사랑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2013년 계사년에도 <KDB소식>과

KDB 모든 가족에게 건강과 행복만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이재걸(성서지점 팀장)

“祝 제300호 26돌! <KDB소식>이여, 영원하

라!” 저희 ’87 행번 동기 외에 또 다른 한 명의

든든한 동기(?)가 있었네요.^^ 지난 사반세기

동안 KDB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해준 동기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벗으로

KDB의 꿈과 희망을 듬뿍 담아주세요.

조윤승(노동조합 부위원장)

‘300’은 참 기분 좋은 숫자입니다. 아마추어

골퍼에게 있어 어쩌다 한 번씩 터지는

드라이브 비거리 300야드는 기분 좋~은

한방입니다.우리나라처럼 출판 환경이

척박한 곳에서 월간지인 <KDB소식> 300호를

발간했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산업은행이 국내 최고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감에 따라 <KDB소식>도

함께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고 다양한 언어로

발간되어 세계인이 함께 보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1987년 사보 창간 동기 ’87 행번을 대표하며 노동조합

강한호(부산지점 지점장)

어언 통권 300호 발행을 축하합니다.

1987년 창간호와 함께 시작했던 은행 생활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400호를 맞는 2021년

무렵에는 KDB가 글로벌 금융을 선도하는

모습과 함께 “KDB in the World”라는 KDB소식

영문판도 발행하여 국적은 다르지만 세

계속의 산은인들과 함께 하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앞으로도 산은의 역사를 기록하고

산은인과 그 가족들을 하나로 묶는 소통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고객들이 다투어 먼저

찾는 풍성하고 알찬 내용을 담은 대한민국

금융산업 대표 사보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지금은 은행을 떠나셨지만 저희

후배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셨던 존경하는 퇴직

선배들의 글들을 자주 접할 수 있으면 합니다.

이원호(광저우지점 과장)

멀리서 본점 소식을 접하는 하나의 창구인

<KDB소식>이 벌써 300호를 맞이했네요.

우선 정성을 다해 만드는 홍보실 관계자께

감사드립니다.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더욱

알찬 내용과 세련된 디자인의 <KDB소식>이

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다음 400호 특집에도

제가 격려의 말을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국외지점 직원 2013년 1월 300호, 새로운 출발을 알리며

KDB 가족들이 소망하는 <KDB소식> 박형건(뉴욕지점 과장)

25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KDB소식>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KDB금융그룹처럼

국내를 넘어 해외로 뻗어가는 <KDB소식>

기대하겠습니다. 또 KDB금융그룹 내의 화합을

도모하고 고객들과 소통하는 사보가 되기를

바랍니다.

Cyndi To (KDB홍콩, Assistant Manager)

<KDB소식> 300호 정말 축하드려요. 한국어를

할 줄 알아 멀리서도 은행 소식 잘 보고

있습니다. 해외에 있지만 사보 덕분에 KDB

가족 같은 느낌이에요.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은행 소식뿐 아니라 행원들의 일상 이야기와

부서 소식, 또 가끔은 경제 동향도 참고할 수

있는 재미있고 유익한 사보가 되길 바랍니다.

신희준(KDB헝가리 차장)

산업은행 16년 차인 저보다 한참 선배 격인

<KDB소식>이 300호를 맞게 되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멀리 떨어진 동유럽의 이국에서

만나는 <KDB소식>은 KDB의 정(情)을 듬뿍

느끼게 해줍니다. 향후 해외 네트워크의 현지

직원들도 일정 부분 공유할 수 있도록 영문

칼럼도 늘려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Kubo Hiroki (토쿄지점)

KDB소식 제 300호 창간을 맞이하신 점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KDB소식>을

통하여 토쿄지점 현지직원들도 KDB에 대한

많은 것을 알 수 있어 매월 잘 읽고 있습니다.

<KDB소식>을 읽을 때마다 KDB 일원으로서

기쁨, 자부심 등이 터져 나옵니다. 향후

해외점포 특집이나, 해외점포 현지직원을

대상으로 인터뷰 형식의 직원소개 코너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300호 특집_KDB 가족들이 소망하는 KDB소식Pioneer Moving on

Muhammad(싱가폴지점 기사)

1955년생으로 1982년 8월 KDB Singapore에 입행, 작년 8월부로 30년 동안 기사로 근무했다.

1982년 제가 파트타임 겸 일하던 곳이 있었는데 그 근처에 당시

KDB International Singapore의 Managing Director이시던 최신규

부장님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 집 경비(Security Guard)를 통해

기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길로 바로 지원해 1982년 8월

입사해서 지금까지 30년 5개월을 KDB Singapore에서 한식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연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1983년

즈음인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월드컵 선발전을 치르기 위해 한국에서 온 축구팀과

코치를 모시고 다닌 일이 가장 마음속에 남습니다. 끝나고 나서 자그마한 태극기도 선물

받았습니다. ‘항상 같이한다’라는 동료 의식과 때론 싫은 일을 시켜도 ‘즐겁게 일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난 30년간 KDB에서 근무하면서 항상 기쁘게 그리고

Yes Man으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이로 인해 직장 동료들의 신임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감사할 일이지요. <KDB소식> 제3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지금처럼 조직 내 많은 다양하고 알찬 이야깃거리를 찾아 모두가 공유하는 데

큰 역할을 해주실 것을 부탁드리며, 계사년 새해 모두 승승장구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