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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강혜선 (성신여대 ) 국문초록 유배를 당한 조선의 시인들은 개인적으로 고통과 좌절을 겪으면서 한편으 로 유배지라는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시적 긴장과 창작 욕구를 발현하였다 . 유배시는 주제 , 내용 , 소재 등에서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지만 , 여기서는 유 배지에서 시인 자신의 개인적 정감 을 토로한 시를 주목하였다 . 특히 , 시인 이 선택하는 한시의 양식에 따라 서정성도 상이하게 나타나는 점에 착안하 , 조선 전기 유배시와 달라진 조선 후기 유배시의 서정성을 주목하였다 . 조선 전기의 유배시는 근체시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 당풍 ( )지향한 시인으로 평가되는 이주 ( )와 김정 ( )의 경우 , 간결한 절구 ( ) 양식에 비애의 정감을 절제하여 경물 속에 응축 , 함축하는 전형적인 당 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 해동강서시파 ( )에 속한 이행 ( )노수신 ( )의 경우 , 언어의 단련과 시상의 조직을 강조하는 율시의 양식 에 언지 ( )의 면모를 강하게 보여주었다 . 조선 후기의 유배시는 조선 전기와 달리 상대적으로 고시와 연작시를 선 호하였다 . 이광사 ( ), 김려 ( ), 박제가 ( ), 이학규 ( ) 등의 유배시는 조선 전기 근체시로 쓴 유배시에 나타나는 서정성과 뚜렷이 구분 * 이 논문은 성신여자대학교 2017년 전기 학술연구조성비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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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시 양식에 따른 서정의 표출 방식을 중심으로-*

    72)강혜선(성신여대)

    국문초록

    유배를 당한 조선의 시인들은 개인적으로 고통과 좌절을 겪으면서 한편으

    로 유배지라는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시적 긴장과 창작 욕구를 발현하였다.

    유배시는 주제, 내용, 소재 등에서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지만, 여기서는 유

    배지에서 시인 자신의 ‘개인적 정감’을 토로한 시를 주목하였다. 특히, 시인

    이 선택하는 한시의 양식에 따라 서정성도 상이하게 나타나는 점에 착안하

    여, 조선 전기 유배시와 달라진 조선 후기 유배시의 서정성을 주목하였다.

    조선 전기의 유배시는 근체시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당풍(唐風)을

    지향한 시인으로 평가되는 이주(李冑)와 김정(金淨)의 경우, 간결한 절구(絶

    句) 양식에 비애의 정감을 절제하여 경물 속에 응축, 함축하는 전형적인 당

    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에 속한 이행(李荇)과

    노수신(盧守愼)의 경우, 언어의 단련과 시상의 조직을 강조하는 율시의 양식

    에 언지(言志)의 면모를 강하게 보여주었다.

    조선 후기의 유배시는 조선 전기와 달리 상대적으로 고시와 연작시를 선

    호하였다. 이광사(李匡師), 김려(金鑢), 박제가(朴齊家), 이학규(李學逵) 등의

    유배시는 조선 전기 근체시로 쓴 유배시에 나타나는 서정성과 뚜렷이 구분

    * 이 논문은 성신여자대학교 2017년 전기 학술연구조성비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222 韓國漢詩硏究 25

    되는 개성적인 서정성을 보여주었다. 먼저, 장편 고시로 가족에게 편지 대신

    쓴 이광사의 한시는 행복했던 가족의 과거와 유배의 현실을 대조하면서 유

    배로 인해 상실한 ‘가족의 일상적 행복’이란 시적 진실을 읊었다. 구체적 수

    신자를 향한 편지의 형식을 취하였기에 매우 사적인 사연을 순간의 서정과

    결합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중편 고시로 쓴 김려의 증별시(贈別詩)는 유배

    의 길에서 자신이 만난 실제 인물을 시속에 등장시켜 곡진한 사연과 정감을

    서술하였는데, 자신이 만난 인물들과 교감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인정(人情),

    인간애(人間愛)를 보여주었다. 다음으로, 근체시 연작으로 쓴 박제가와 이학

    규의 유배시는 일상을 발견하는 생활시의 면모를, 고시로 쓴 박제가와 이학

    규의 유배시는 유배지에서 새롭게 ‘나’를 발견하는 영회시(詠懷詩)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복잡한 심경의 흐름을 굴곡적으로 표출하는 데 적합한 고시의

    양식, 복잡한 상념을 분절하여 표출하거나 자잘한 일상을 인상적, 집약적으

    로 포착하는데 적합한 근체시 연작은 보편적 추상화 된 서정성이 아닌, 구체

    적 유배 체험과 감정을 중시하는 개성적 서정성을 보여주었다.

    유배 한시[유배시], 서정성, 시 양식, 구체적 체험과 정서

    1. 서론

    조선의 문인들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유형(流刑)을 받아 유배지로

    옮겨가 사는 동안 ‘유배 문학’이라는 부를 수 있는 독특한 문학적 전통을 이

    룩하였다. ‘시인’으로 이름난 이들 중에 유배생활을 통해 저마다의 시적 성

    과를 이룬 예가 많았다. 시는 삶의 모든 것을 소재와 내용으로 삼을 수 있으

    며 삶의 어떤 국면에서도 지을 수가 있지만, 특히 유배지는 시인에게 고통과

    좌절을 주는 한편으로 새로운 소재를 제공하고 창작 욕구를 자극하는 곳이

    기도 하였다. 요컨대 낯선 유배지에서 겪는 뼈아픈 좌절과 울분의 체험이 시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23

    인으로 하여금 시 정신을 다시 긴장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따라

    서 유배 한시는 조선의 독특한 유배문화에서 비롯된 문학적 성과로 그 자체

    로 주목할 만하지만, 고통과 좌절을 극복해 내는 ‘시의 힘’을 보여준다는 점

    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유배지에서 지은 한시를 통칭하여 ‘유배 한시’(앞으로는 줄여서 ‘유배시’로

    부른다)라 한다면, 유배시는 주제, 내용, 소재 등에서 참으로 다양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또 시인의 성격과 삶의 태도 등에 따라 유배시의 어조와 분

    위기 등도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유배지에서 시인이 관찰한 풍경이나

    풍속을 읊은 기속시(紀俗詩)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개인적 정감’에 초점을

    둔 서정시를 주목해보고자 한다. 특히, 시인들이 때와 상황에 따라서, 또 시

    상과 시 정신의 차이에 대응하여 저마다 시 양식을 달리하여 창작한다는 점

    에 착안하였다. 유배시 역시 마찬가지인데, 주목할 바는 조선 전기, 중기와

    달리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유배시에 유독 장편 고시나 근체시 연작이 성행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본고는 서정시라도 시 양식의 선택에 따라 서정의

    내용과 표출 방식이 달라지는 양상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이에 조선 전기 근

    체시로 지어진 유배시를 먼저 살핀 뒤, 조선 후기 변화된 양상을 대비해 보

    기로 한다.

    조선의 유배문화와 유배문학에 대한 연구 성과는 다양하게 축적되었는데,

    여기서는 따로 논의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의 유배시에 국한하여 보면, 먼저

    한시 작가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해당 작가의 유배기 한시를 다룬 경우가

    대부분이고,1) 조선 후기의 경우는 특정 작가의 유배시가 지닌 특성을 조명

    하기도 하였다.2) 한편, 최재남은 체험시의 전통에서 유배 체험의 내면화 과

    1) 본고 2장에서 살펴보려 하는 조선 전기 유배시와 관련해서는 姜慧仙, 「李冑의 삶과 시세계」, 韓國漢詩作家硏究 3, 태학사, 1998; 朴守川, 「冲庵 金淨의 詩文學」, 韓國漢詩作家硏究 4, 태학사, 1999; 李惠淑, 「李荇의 생애와 시」, 韓國漢詩作家硏究 4, 태학사, 1999; 金性彦, 「蘇齋 盧守愼의 流配期 漢詩에 나타난 動植物 象徵에 대하여」, 韓國漢詩作家硏究 5, 태학사, 2000 등이 있다.

    2) 박혜숙, 「사유악부 연구」, 고전문학연구 6, 한국고전문학회, 1991; 김태영, 「海左 丁範祖의 함경도 유배기 漢詩 일고찰」, 동악어문학 54, 동악어문학회, 2010;

  • 224 韓國漢詩硏究 25

    정과 그 시적 형상을 이론화, 범주화하여 유배시의 서정성에 대한 일반론을

    펼친 바 있다.3) 본고는 이러한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하되, 시 양식에 대응되

    는 서정의 표출방식에 초점을 두어 유배시의 서정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2. 조선 전기 유배시의 서정성과 표출방식

    조선 전기는 잦은 사화로 인해 이름난 시인들 중 유배를 겪은 이가 많았

    다. 여기서는 조선 전기 유배시의 서정성과 서정의 표출 방식을 살피기 위해

    당풍(唐風)을 지향한 시인으로 평가되는 신진사류(新進士類) 이주(李冑)와

    김정(金淨)의 유배시와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에 속한 이행(李荇), 노

    수신(盧守愼)의 유배시를 대표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유배시의 시적 성취

    를 판단하기 위하여, 조선 중기 최고의 비평적 안목을 보여준 시선집인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선발된 작품을 검토의 대상으로 삼는다.

    1) 당풍의 유배시, 절구(絶句)에 담은 절제된 비애의 서정

    당풍의 한시를 개척하였다고 평가받는 이주, 조선 전기 당풍의 맥을 이었

    안대회, 「朴齊家의 竟信堂夾袋와 北關風情」, 韓國漢詩硏究 12, 태학사, 2004 등을 들 수 있다.

    3) 최재남, 「유배체험의 내면화와 시적 변용」, 韓國漢詩硏究 13, 태학사, 2005. 이 연구에 의하면, 유배 체험의 내면화 양상 또는 서정적 전환 양상은 크게 세

    층위로 범주화된다. 첫째, 고통을 내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유배의 현실이 가하는

    충격과 불만을 직접 드러내는 것으로 대부분 직접 진술을 통해 분노, 격정 등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고, 정치적 상대에 대한 비난하거나 자신의 결백을 강조한다.

    둘째, 고통(괴로움과 울분)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매개물을 동

    원하여 스스로를 위안하거나 자신을 반성하고 절제한다. 셋째, 고통을 다른 방법

    으로 변환하는 경우로, 지적 반추과정을 통하여 심리적 충격과 거리를 두고 사물

    을 매개로 고통을 내면화한다.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25

    다고 평가되는 김정의 유배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① 이주의 유배시

    이주는 1498년(연산군 4) 정언(正言)으로 있던 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진도(珍島)로 귀양 갔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형을 당

    하였다. 국조시산에는 그의 대표적 유배시가 3수 선발되어 있으며, 속동문선(續東文選) 기아(箕雅)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선발되었다. 3수를 차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4)

    늙으니 찬 날씨에 병이 더욱 더칠까 겁나서

    처마 가득 햇살 비출 때 부들자리에 앉았네.

    이웃 스님 떠난 뒤 문을 도로 닫으니

    산 위의 구름만 돌난간을 지나네.

    老㥘風霜病益頑, 一簷朝旭坐蒲團.

    隣僧去後門還掩, 只有山雲過石欄.

    이주,

    바람은 음산하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바다 기운이 산 속의 깊은 석굴까지 이르네.

    이 밤 부질없는 인생에 흰 머리만 남았는데

    등불 켜고 때때로 초년의 마음을 돌아보네.

    陰風慘慘雨淋淋, 海氣連山石竇深.

    此夜浮生餘白首, 點燈時復顧初心.

    이주,

    종소리는 달을 울리며 가을 구름에 떨어지고

    4) 본 발표에서 인용한 이주, 김정, 이행, 노수신의 유배시는 강석중・강혜선・안대회・이종묵의 국조시산, 허균이 가려뽑은 조선시대의 한시(문헌과해석사, 1998)의 번역과 해설을 많이 참조하였다.

  • 226 韓國漢詩硏究 25

    산에 비는 추적추적 내려 그대 보이지 않네.

    소금 굽는 집은 문 닫혀도 아직 불빛이 남아 있고

    시내 너머에서 사람 소리가 깊은 밤에 들리네.

    鍾聲敲月落秋雲, 山雨翛翛不見君.

    鹽井閉門猶有火, 隔溪人語夜深聞.

    이주,

    세 수 모두 칠언절구로,5) 유배지 진도에서의 쓸쓸하면서도 한가로운 생활

    에서 나온 서정시이다. 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세 수는 모두 제목만으로는 유배지의 정황인지

    아닌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또한 시 속에 제시된 공간도 구체적으로 유배지

    임이 노출되지 않는다. 물론 ‘석두(石竇)’나 ‘염정(鹽井)’이 시인이 있는 곳이

    진도임을 암시하기는 하지만, 특정 유배지라기보다 외딴, 낯선 장소로 일반

    화, 보편화된 시적 공간으로 읽힌다.

    서정의 표출 면에서 보면, 세 수는 모두 시인의 정감을 직서(直敍)하지 않

    고 주변 경물과 시인의 모습을 통해 함축적으로 전할 뿐이다. 에서는 찬바람을 피해 햇볕을 쬐는 시인의 모습(기구와 승구), 찾아왔던

    중이 떠난 뒤 문을 닫으니 산 위의 구름만이 찾아온다고 하여 아무도 찾지

    않는 고적한 정경(전구와 결구)을 읊었다. 오직 경물의 묘사 속에 시인의 한

    가하면서도 쓸쓸한 감정, 심리를 응축해 놓았을 뿐이다.

    의 경우 망헌유고의 관련 기록을 보면, 1502년 9월 왕세자를 책봉하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된 사람들만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는 소식을 듣고 이주는 깊이 절망하여 금골산의 굴속에 들어가 세상과 절연

    하고자 하였다. 이 작품은 바로 금골산 토굴에 머물 때 쓴 시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시인이 처한 그러한 참담한 상황에 비해 시적 정서는 다분히 평

    5) 망헌유고(忘軒遺稿)는 칠언율시, 오언율시, 칠언절구, 오언절구의 순으로 이주의 시를 수록하고 있어, 이주의 한시 대부분이 근체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주의 유배시가 모두 근체시인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27

    온하다. 음산한 바람[陰風慘慘], 추적추적 내리는 비[雨淋淋], 토굴까지 불어

    오는 비릿한 바다 냄새라는 경물 묘사 속에 현실의 참담함, 암울함이 온축되

    어 있고, 늙어버린 몸[白首]으로 처음 벼슬하러 나갈 때 무엇인가를 이루어보

    겠다는 먹었던 의지[初心]를 돌아본다 하여, 이제 곧 죽게 될 것을 예감한 시

    인이 환로(宦路)에 들어선 것이 애당초 잘못이었음을 우회적으로 토로하였

    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평온하면서도 강경한 어조 뒤에 깊은 좌절과 슬픔

    을 절제하여 응축해놓고 있어, 허균은 ‘비절(悲切)’이라 평가하였다.

    는 어느 가을날 산사의 스님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

    고 쓴 작품이다. 기구와 승구는 하늘 끝까지 퍼져 울리는 종소리와 쓸쓸히

    내리는 빗소리를 통하여 애써 찾아갔으나 끝내 스님을 만나지 못한 울적한

    심사를 표현하였다. 전구와 결구는 염전 쪽을 내려다보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불빛만 보이는데, 개울 너머에서는 집으로 돌아가는지 사람들의 말소

    리만 두런두런 들린다고 하였다.

    이상의 3수에서 보듯이, 이주의 시는 개인적 정감을 직접적으로 토로하지

    않으며, 또한 정감을 드러내는 시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유배지의 경물

    을 묘사하고, 그 경물 속에 또 하나의 경물로 자신을 등장시켜 그 모습을 묘

    사하여 보일 뿐이다. 즉 칠언절구의 간결한 시 양식에 정감을 최대한 절제하

    여 경물 속에 응축하는 전형적인 당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② 김정의 유배시

    김정은 사림파의 성장과 함께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까지 올

    랐으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금산(錦山)으로 유배를 갔다가, 진도

    를 거쳐 제주로 이배되었다가 2년 후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사사(賜死)되

    었다. 허균에 의하면, 김정은 특히 오언절구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한 시인이

    다. 오언절구는 근체시 중에서 가장 적은 수의 글자로 시편을 만들기 때문에

    극도의 절제와 응축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구구한 설명이나 묘사가 아니라

    무한한 여운 속에서 상상해 볼 수 있는 정경이 바로 당풍의 본질인데, 김정

    의 유배시가 그런 오언절구의 묘미를 잘 보여준다. 국조시산도 그런 점을 평가하여 김정의 오언절구 유배시를 선발해놓았다.6)

  • 228 韓國漢詩硏究 25

    지는 해는 거친 들로 내려오고

    갈까마기는 저문 마을에 내려앉네.

    빈숲에 저녁연기 썰렁한데

    초가집엔 사립문이 닫혀 있네.

    落日臨荒野, 寒鴉下晩村.

    空林烟火冷, 白屋掩衡門.

    김정,

    머리 돌려 그대 보낸 곳 바라보니

    아스라한 바다에 해가 저무네.

    고향 산을 응당 찾아주면

    꽃은 지고 사립문은 닫혀 있겠지.

    回首送君處, 蒼茫海日昏.

    家山應見過, 花落掩柴門.

    김정,

    의 경우 충암집(冲庵集)에 제목 아래 “丙子(1516년) 冬以後.”라는 세주가 있고, 의 경우 충암집에 「해도록(海島錄)」에 실려 있어 두 수 모두 유배지에서 쓴 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시 모두 제목만으로는 유배 중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며, 시의 배경과 분

    위기 역시 유배를 바로 연상시키지 않는다. 는 지는 해

    [落日]와 거친 들[荒野], 저녁의 갈까마귀[寒鴉], 빈숲의 찬 연기[空林烟火冷],

    은사(隱士)의 초가집[白屋衡門] 등 쓸쓸한 느낌을 주는 시어를 선택하여 눈

    앞에 비친 쓸쓸한 저녁의 마을 풍경을 간결하게 묘사하였을 뿐이다. 전구와

    결구가 당나라 유장경(劉長卿)의 시구 “날 저물어 푸른 산은 먼데, 날씨는 차

    6) 김정의 유배시가 수록되어 있는 「해도록」을 일별해 보면, 역시 근체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오언고시로 단편에 가까운 과 단편의

    칠언고시 2수 정도가 예외적이다.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29

    서 빈한한 집이 가난하네(日暮蒼山遠, 天寒白屋貧)”()와 비

    슷하여, 허균은 ‘유장경과 매우 닮았다(酷似劉長卿)’고 평하였다.

    다음으로 는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가는 친우에게 준

    증별시이다. 기구와 승구는 바닷가에서 이별하는 정경을 풍경묘사로 대신하

    였고, 전구와 결구는 고향으로 가는 친우에게 자신이 떠나온 뒤 쓸쓸하게 텅

    비어 있을 자기 집을 상상해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시는 전체적으로

    경물만을 묘사하였지만 경중정(景中情)의 수법으로 시인의 정을 이면에다

    응축하여, 현재의 외로움이나 이별의 슬픔을 표현한 것보다도 훨씬 여운이

    길다.7)

    2) 송풍의 유배시, 율시에 담은 언지(言志)와 서정

    당시의 전통에서 벗어나 기발한 착상과 참신한 표현, 견문과 학식의 깊이

    를 추구한 해동강서시파의 시인들은 대부분 유배를 경험하였거나 정치적 좌

    절을 겪었다. 여기서는 이행과 노수신의 유배시 중 국조시산에 선발된 작품을 주목해 본다.

    ① 이행의 유배시

    이행은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지기 권달수(權達手)와 함께 폐비(廢妃) 윤

    씨의 복위를 반대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큰 위기에 빠졌는데, 이 때 권달수가

    자신이 주동임을 내세워 스스로 죽임을 당하였기에 이행은 목숨을 건졌다.

    1504년 4월 이행은 충주에 유배되었다가 1505년 1월 다시 함안으로 정배되었

    고, 1506년 2월에 거제도로 이배(移配) 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어 200일

    을 머물렀다가 9월에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유배에서 풀려났다.

    묽은 술을 때마다 많이 마셔서

    7) 朴守川, 「冲庵 金淨의 詩文學」, 韓國漢詩作家硏究 4, 태학사, 1998, 320~321면 참조.

  • 230 韓國漢詩硏究 25

    강한 창자도 하루에 아홉 번 뒤틀리네.

    도가 지금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는데

    내 행적을 혹 후인이 슬퍼해줄까?

    돌아갈 흥은 고운 풀에 생겨나고

    봄 시름은 떨어지는 매화에 붙이네.

    백 년 강호의 소원 이루었으니

    흰 머리의 재촉을 받지 않으리.

    薄酒時多酌, 剛腸日九回.

    道爲當世棄, 迹或後人哀.

    歸興生芳草, 春愁付落梅.

    百年湖海願, 不受二毛催.

    이행,

    해 저물녘에 가을빛이 새로운데

    타향에서 이별의 정 오래도록 느끼네.

    매미 소리 높은 나무에서 고요해지고

    반딧불은 먼 수풀에서 밝구나.

    문자는 삼생의 잘못이요

    공명은 한 번 웃기에도 가벼운 법.

    녹문산에 은거할 기약은 훗날의 일이니

    처자는 어느 날 맞아들일까?

    薄晩新秋色, 殊方久別情.

    蟬聲高樹靜, 螢火遠林明.

    文字三生誤, 功名一笑輕.

    鹿門他日約, 妻子幾時迎.

    이행,

    두 수 모두 오언율시로, 제목과 시적 공간을 통해 직접적으로 유배의 처

    지가 드러나지 않고 다만 타향에서 영락한 신세로 보일 뿐이다. 먼저 「남천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31

    록(南遷錄)」에 실려 있는 를 보자. 수련은 술을 먹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상황과 심정을 말하였다. 술

    때문에 창자가 뒤틀린 것이지만, 사마천(司馬遷)의 에

    보이는 “是以腸一日而九回”의 고사를 써서[剛腸日九回] 그 이면에 자신이 강

    직한 성품 때문에 직언하였다는 뜻을 내포하였다. 함련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 도(道)가 실추되었고, 또 자신이 바른 길을 갔다는 것을 후인(後人)이

    알아주지 못할 것이라고 슬퍼하였다. 경련과 미련은 이러한 실의와 비분을

    삭이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내용이다. 근심 걱정을 고운 풀과 지는 매화에 부

    치고, 강호(江湖)에서 즐거움을 추구하겠노라는 내용이다.

    는 이행이 거제도에 위리안치 된 채 염소를 치는 잡역을 담

    당하며 지낼 때의 작품이다. 수련은 거제도에서 맞는 가을이라 더욱 새롭고

    낯설어 수심이 더욱 많음을 말하였다. 함련은 가을이 오는 경치를 시각과 청

    각의 정교한 대구로 묘사하였는데, 평이한 경물 속에 시인의 고독감을 투영

    하였다. 경련은 문사로서 공명을 이루어 보겠다고 생각한 과거를 후회한 것

    이다. 미련은 방덕공(龐德公) 고사를 사용하여, 가족과 함께 정치현실에서 벗

    어나고 싶은 마음을 말하였다. 평담한 어조로 강개한 정과 의지를 말하였다.

    이상의 두 시를 통해, 당풍의 시와 달리 이행의 유배시가 잘 짜인 시상 조

    직과 언어의 정련 속에 강개한 정과 체념의 뜻을 토로하고 있어 언지(言志)

    의 성격이 뚜렷한 서정시임을 알 수 있다. 이행의 유배시를 수록한 「적거록」 「남천록」 「해도록」을 일별해 보면, 유배지에서의 울분과 좌절의 감정이나 강개한 의지 또는 체념의 뜻을 직서(直敍)하기에 적합한 고시를 선택한 경우가

    없지는 않다. 나 와 같은 중단편의 오언고시, 처럼 중편의 칠언고시가 눈에 띄지만, 이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근체

    시라 이행 역시 근체시, 특히 율시를 압도적으로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② 노수신의 유배시

    노수신은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충주로 돌아갔

    다가, 1547년 순천으로 유배를 갔고, 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진도로 이배

    되어 22년을 보냈다. 긴 세월만큼이나 노수신은 압도적으로 많은 유배시를

  • 232 韓國漢詩硏究 25

    남겼는데, 신흠은 “그가 해도에 있을 때 지은 시 가운데는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절창이 많아 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하였다.8)

    8월이라 조수 소리 큰데

    한밤중에 계수나무 그림자 성그네.

    제 집 보고 놀란 도깨비는 안절부절

    살던 나무를 잃은 다람쥐는 달아나네.

    인간 만사는 가을바람에 지는데

    외로운 회포로 백발을 빗네.

    멀리 바라보며 나그네 길을 슬퍼하노니

    삶과 죽음은 잠깐 사이의 일이라네.

    八月潮聲大, 三更桂影疎.

    驚棲無定魍, 失木有奔鼯.

    萬事秋風落, 孤懷白髮梳.

    瞻望悲行役, 生死在須臾.

    노수신,

    아득하게 하늘과 땅은 크기도 한데

    쓸쓸하게 사람의 삶은 보잘 것 없네.

    시서(詩書)와 예학(禮學)을 아직 공부하지 못했으니

    49년 지나간 인생이 잘못 되었네.

    이슬 맺힌 국화 보며 검은 탁자에 기대고

    가을벌레 소리 들으며 사립문 닫네.

    이 때 문생과 백생이 왔는데

    세 밤 자고 이제는 간다고 하네.

    莽蕩乾坤大, 蕭條性命微.

    詩書禮學未, 四十九年非.

    8) 김성언, 앞의 논문, 288면 참조.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33

    露菊憑烏几, 秋蟲掩竹扉.

    此時文白至, 三宿乃言歸.

    노수신,

    두 수 모두 오언율시로, 제목에서 역시 유배상황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

    는다. 는 노수신이 진도로

    귀양 온지 19년째 되는 1565년 8월 16일 진도의 옥주(沃州)에서 지은 작품이

    고, 는 1560년

    8월 진도에서 지은 작품이다.

    첫째 수부터 읽어보자. 수련은 8월에다가 16일이라서 조숫물이 더욱 크고

    달빛이 환한 자연현상을 포착하였다. 거센 파도소리와 환한 달빛의 강한 이

    미지 때문에 허균은 ‘씩씩하게 날아오른다[磊落軒騰]’는 평을 하였다. 함련은

    수련의 경물 묘사를 이어받아, 거센 조수소리와 환한 달빛이 만들어내는 기

    이하고 낯선 풍광을 강조하기 위하여 숨고 달아나는 도깨비와 날다람쥐를

    상상하여 제시하였다. ‘驚’과 ‘失’, ‘有’와 ‘無’, ‘定’과 ‘奔’의 대를 맞춘 기발한

    대구와 시어의 단련이 단연 돋보인다. 이렇게 두 연에 걸쳐 낯선 풍광만을

    묘사하였지만 여기에는 그런 경물에 놀라는 자신의 심정을 담았다. 경련에

    서는 인간사로 시상을 전환하여, 세상사를 초탈하려는 의지를 말하였고, 미

    련에서는 잘못된 유배 길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참담함을 강한 어조로 말

    하였다.

    둘째 수를 읽어보자. 수련은 광활한 건곤과 미미한 자기운명을 대조하면

    서 시상을 열었다. 함련에서는 선비의 기본인 시서(詩書)와 예학(禮學)을 충

    실히 하지 못했고, 나이 50이 되어 지난 49년의 삶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는 ‘거원지비(蘧瑗知非)’의 고사를 인용하여 지난 시절 올바르게 살지 못했

    음을 자책하였다. 경련은 함련에서 보인 자책의 심정을 전환하여 국화를 감

    상하고 가을 벌레 소리를 듣는 한가한 생활에서 위안을 얻는 심정을 말하였

    다. 미련은 유배지로 찾아온 문생과 백생이 사흘 머물다 간다고 그저 담담하

    게 서술하였을 뿐, 이별의 서운함 등을 말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시인이 느꼈

    을 적막감이 배가된다.

  • 234 韓國漢詩硏究 25

    소재집(蘇齋集) 수록의 유배시 역시 근체시가 압도적이다. 그중 노수신이 장처를 보인 율시는 함련과 경련의 대우에 공을 들이고, 기승전결의 구도

    속에서 정(情)과 경(景)을 정교하게 교직하는 것이 기본이다. 노수신은 이러

    한 율시의 형식에 강서시파 특유의 산문적 시어와 기구(奇句)를 사용하여 기

    발한 경물 묘사와 함께 비분과 강개의 정을 토로하고 현실을 초탈하려는 의

    지 등을 토로하였다.

    3. 조선 후기 유배시의 서정성과 표출 방식

    조선 후기에는 주목받는 상당수의 시인들이 다채로운 유배시를 양산하였

    으니, 이광사(李匡師), 김려(金鑢), 정범조(丁範祖), 박제가(朴齊家), 정약용

    (丁若鏞), 이학규(李學逵)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유배시는 그동안 주로

    개인적 서정시보다 현실주의, 사실주의 관점을 강조한 악부, 죽지사류가 많

    은 관심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들의 시는 조선 전기 근체시로 쓴 유배시와

    뚜렷이 구분되는 개성적인 서정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1) 장편 고시로 쓴 이광사의 편지시, 가족의 발견

    타지에서 가족이나 지인에게 한시로 편지를 쓰는 것은 문학적 전통이자

    관습인데, 유배지에서 시로 편지를 대신하는 것도 일반적인 일이었다. 이행

    의 「남천록」에 보이는 같이, 조선 전기에도 편지시의 사례가 종종 있었다. 이 시는 25구의 오언고시로 유배

    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심정과 자식에게 당부

    하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의 마지막 단락을 옮겨보면 “바라노니 너희

    는 근골이 장성하여, 한 해가 다 가도록 농상에 힘써라. 아침저녁 네 어미를

    잘 모시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기를. 훗날 과연 이 바람대로만 된

    다면, 네 아비는 귀양살이도 달게 여기마(望爾筋骨成, 卒歲攻農桑. 晨昏奉爾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35

    母, 庶免饑凍殃. 他時果若斯, 乃翁甘遐荒).”이다. 일상의 언어와 산문적 구법

    으로 당부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아 송시의 면모를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런 부류의 유배시가 더욱 장편화 되고, 유

    배의 체험과 가족의 사연이 다채롭게 형상화되면서 서정시의 서술화, 서사

    화가 강화되었다. 그런 시를 많이 남긴 이로 이광사를 들 수 있다. 이광사는

    1755년 백부 이진유(李眞儒)로 인해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에서 7년, 다시 신지도로 이배되어 총 23년의 유배를 살다가 적소에서

    73세로 목숨을 마쳤다. 그의 아내 문화 유씨는 옥사가 일어나자 남편이 죽임

    을 면치 못할 것이라 여겨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광사

    의 부령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광사의 부령 유배기 한시의 내면과 진정

    (眞情)을 조명한 김동준은 서독시(書牘詩) 선례(善例)로 이광사의 장편 고시

    (180구의 오언고시), (36구의 칠언고시), (220구의 오언고시) 등을 주목한 바 있다.9) 이 외에 , 큰 며느리에게 준 (오고), 막내며느리에

    준 (오고) 등

    많은 수의 편지시가 장편 고시로 씌어 있다.

    이처럼 이광사가 산문의 서신을 대신하여 굳이 장편의 시를 선택한 것은

    왜인가? 바로 시가 정을 절실하게 전하데 유리하고, 또 절제된 근체시로 응

    축할 수 없는 자유로운 감정과 생각의 발로를 마음대로 담기 위해 고시를

    선택한 것이다. 이광사에게 있어서 이런 장편의 편지시는 자신의 삶을 돌아

    9) 김동준, 「富寧 流配期 李匡師 漢詩의 내면과 眞情의 문학적 지평」, 韓國漢詩硏究 13, 태학사, 2005. 일찍이 鄭良婉의 江華學派의 文學과 思想(2)(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에서도 이광사가 가족들에게 부친 장편의 편지시가 주목된

    바 있다.

  • 236 韓國漢詩硏究 25

    보고 서술하는 자술시(自述詩), 영회시(詠懷詩)이면서, 가족을 그리워하는

    회인시(懷人詩)이고 또 안부를 묻고 당부를 전하는 편지였다. 대부분의 편지

    시가 수신자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지만, 때로는 자신의 비감한 정을 강렬하

    게 표출하는 방식으로 편지시를 활용한 경우도 있다. 8세의 막내딸에게 보

    낸 다음의 시를 들 수 있다.

    변방이라 날씨 더디 풀려 제철 것도 늦어서

    으레 칠월에야 앵두가 붉기 시작하지.

    수박은 무산 어름에서나 난다는데

    올해는 장마가 져 모두 뭉크러졌다지.

    고을 사람 두 손 들어 두 주먹 맞붙이고

    자랑삼아 하는 말이 큰 건 더러 이만하다나.

    늘 항아리나 술병만 한 수박만 익히 보다가

    이말 듣고 웃음이 나 밥알이 튀어나와 쌓일 지경.

    평소 수박씨 까먹길 즐겨

    우습다! 맛 좋은 대추인양 몹시도 밝혔지.

    수박도 없는데 씨를 따질 게 있나?

    한여름 내 내놓고 이가 심심하더니,

    서울 아들 올 때 한 봉지를 가져와선

    어린 누이가 부지런히 멀리서 바친다 하네.

    기꺼이 벗겨 먹고 껍질 뱉으며

    기쁜 일 슬픈 일 보며 서로 눈물만 가로세로.

    풀로 붙여 보낼 때 이내 생각하니

    알고말고 이 아비 그려 네 눈물이 줄줄 흐른 줄.

    소반마다 거둬 모으느라고 손발이 수고롭고

    아침마다 볕을 쬐랴 마음을 쓰고

    자주 이리저리 눈 굴리며 어린 종이 훔쳐 먹을세라

    갊아두곤 매양 올케에게 당부했으리.

    지난해엔 쪼그리고 앉아 같이 깨물어 먹었는데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37

    오늘 이렇게 서로 헤어질 줄 어이 알았으랴?

    이 딸이 늦둥이라 내 살뜰이 사랑커니

    두 눈썹은 그린 듯하고 예쁜 모습 많았지.

    병든 어미 모시기를 제법 잘하고

    응대에 민첩하고 넉넉하여 가르칠 것이 없었으니

    부모가 아끼기를 세상에 드문 보배인 양

    서로 자랑하기 입귀에는 침이 질질.

    좋은 사위 가려서 늙마를 즐기자했더니

    뉘 알았으리? 여덟 살에 어버이를 다 잃을 줄이야.

    나야 이제 생이별에 애가 마디마디 무너지나

    내 어미 어이 차마 널 버리고 죽었단 말인가?

    저승에서도 그 눈 응당 감지 못하리니

    가슴 헤치며 말하려다 문득 절로 말문 막힌다.

    邊城暖遅時物晩, 七月櫻桃紅始慣.

    西瓜云出茂山境, 今歲積雨皆爛幻.

    邑人擧手合兩拳, 誇說大者或幾然.

    常時厭見如甕壜, 聽此噴飰遽堆前.

    平生愛嚼西瓜子, 自笑嗜癖羊棗似.

    西瓜不見子暇論, 一夏公然負吾齒.

    兒來自京携一封, 謂言小妹勤遠供.

    訢然剝食吐其殼, 頫仰紅白相橫縱.

    仍憶糊褁寄託時, 知汝戀我淚如絲.

    案案收聚勞手脚, 朝朝出曝費心思.

    顧眄頻防婢兒竊, 藏置每囑兄嫂說.

    前年抱䣛同噉食, 豈道今日此相別.此女晩出我絶愛, 雙眉如畫多竗態.

    扶護病母能適意, 應對敏給無煩誨.

    父母寶若希世珍, 相矜口角雙流津.

    儗選佳婿娛晩景, 誰謂八齡訣兩親.

  • 238 韓國漢詩硏究 25

    我今生離膓寸毁, 汝母何忍棄汝死.

    泉下之日應不閉, 欲說攤胷遽自止.

    이광사, , 圓嶠集選 卷第二

    위 시는 환운(換韻)을 하고 산문적 구법을 쓴 칠언고시이다. 이렇게 형식

    이 비교적 자유로운 대신 이 시는 시적 긴장과 호소력을 간곡하게 펼친 사

    연에 담아내었다. 첫 단락에서는 북방의 유배지는 앵두조차 늦게 익고 수박

    은 주먹 만큼밖에 자라지 않는 척박한 곳임을 말하여, 자연스럽게 딸이 보낸

    수박씨로 화제를 전환하였다. 이어지는 단락에서는 유배지로 찾아온 아들이

    가져온 수박씨를 까먹다가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형상화하여 유배로 인해

    생긴 가족의 슬픔을 토로하였다. 다음 단락에서는 어린 막내딸이 아버지가

    평소 즐기던 수박씨를 여름 내내 모아서 말리는 정경을 상상해서 그려보였

    다. 이 장면을 통해 사랑스러운 딸의 모습과 지금 수박씨를 깨문 채 눈물 흘

    리는 자신이 대조되면서 유배로 인한 가족의 비극이 형상화되었다. 이어서

    다시 유배 전 단란했던 가족 품에서 잘 자라던 딸의 모습과 부모를 모두 잃

    은 지금의 딸을 대조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죽은 아내가 저승에서도 이

    딸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하리라 하며 격정적으로 비감을 토로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이광사가 장편 고시로 쓴 편지시는 행복했던 가족의 과

    거와 유배의 현실을 대조하면서, 특히 유배로 인해 상실한 가족의 일상적 행

    복’이란 시적 진실을 발견해 낸다. 이런 서정의 세계는 언어의 절제, 응축과

    함께 감정의 절제를 필요로 하는 근체시에서는 결코 담을 수 없다. 구체적

    수신자를 향한 편지라는 형식을 취하였기에 매우 사적인 사연이 순간의 집

    중된 서정과 결합할 수 있는 것이다.

    2) 중편 고시로 쓴 김려의 증별시(贈別詩), 인간애(人間愛)의 발견

    김려는 1789년 15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문재(文才)로 명성을 얻었으나,

    1797년 벗 강이천(姜彛天)의 유언비어(流言蜚語)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39

    령에서 4년간 유배를 살다가 다시 1801년 신유옥사(辛酉獄事)에 연루되어 진

    해로 이배되어 도합 10년을 보냈다. 김려의 유배시로는 장편 연작시 「사유악부(思牖樂府)」가 일찍부터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10) 여기서는 「감담일기(坎窞日記)」11)에 수록된 한시를 주목해본다.

    유배형에 처해진 뒤 유배지까지 가는 여정에서 지은 시들은 대체로 기행

    시의 성격을 띠면서 새로 접한 경물과 유배 가는 심정을 결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감담일기」의 한시는 매우 다르다. 「감담일기」의 산문일기에는 그날의 일정과 연도에서 본 견문과 자신의 체험이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 서술되어 있다. 이 하루의 일기가 끝나는 곳에 김려는 그날의 가장 절

    실한 심회나 인상적인 체험을 따로 한시로 읊어 놓았다. “북풍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거센가? 차가운 달빛이 온 하늘에 가득하네. 어버이 이별하니 자식

    마음 애달프고, 서울을 떠나니 신하의 심정 괴롭구나. 어찌 알았으랴? 공야

    (公冶)처럼 억울하게 죄를 쓰고, 마침내 유배의 길을 떠날 줄을. 목 놓아 통

    곡하니 애간장이 찢어지는 듯, 저 푸른 하늘도 이 심정을 몰라주는가!(北風

    何太急, 寒月滿天明. 賤子離親恨, 孤臣去國情. 那知公冶絏, 遂作季通行. 痛

    哭肝腸裂, 皇穹不照誠)”()와 같이, 격렬하게

    비탄을 토로한 예도 있지만, 주목할 시들은 유배지로 호송되어 가는 도중 그

    가 겪은 구체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재현한 고시로 쓴 서정시이다.12)

    10) 박혜숙, 앞의 논문. 김여 지음, 박혜숙 옮김, 부령을 그리며, 돌베개, 1996. 이 연구에 의하면, 의 세계는 민간의 세계를 그저 바라보는 차원에서

    인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 당대의 민중을 추

    상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갖춘 구체적 인간으로 이해하면서 그들과

    친교를 나누는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요컨대 김려의 시적 감수성은 현저히 탈중

    심적 성격을 보이는 바, 하층민, 변방민, 여성 등의 ‘주변부’를 향하고 있으며, 또한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그의 감수성은 하찮은 동물이나 사물에까지 미치고 있

    다 하였다.11) 「감담일기」는 김려가 강이천의 유언비어 옥사에 연루되어 1797년 11월 12일 의금부에 체포된 날부터 유배지 부령에 도착하여 서울 집으로 첫 소식을 보낸

    다음해 1월 26일까지의 일기이다. 1819년 5월에 쓴 김려의 후기에 의하면 원래의

    일기는 당시 남아 있는 일기의 두 배 분량이 넘었다 한다.12) 강혜선, 「조선후기 한시 속의 일상의 양태와 의미 - 김려의 한시를 대상으로」,

  • 240 韓國漢詩硏究 25

    (전략)

    고인의 풍모를 지닌 남생이

    나그네 모습 보고 깜짝 놀라서,

    섬돌 아래로 내려와 인사를 차리고

    내 손을 붙들고 들어가 온돌방에 앉히네.

    살찌고 연한 소 염통 꼬치구이에

    향긋한 술이 술잔에 가득.

    구리 화로에 숯불을 지피고

    더울세라 찰세라 술을 따르네.

    은실 같은 새하얀 국수발에

    구슬 같은 붉은 과일.

    내게 하는 말이 “추위와 눈이

    요즘 들어 더욱 혹심한데

    남쪽에서 오신 외로운 손님

    보아하니 약골의 선비군요.

    두툼한 갖옷이야 없다 쳐도

    어찌 무명옷도 이렇게나 얇으시오?

    사나이 몸 천금같이 귀중하거늘

    잠시라도 귀한 몸조심 하시오.

    사람의 목숨이란 경각에 달렸으니

    아차 한번 실수로 죽기도 한다오.

    올해는 흉년 들어 살림이 가난하여

    잡곡밥일망정 정성껏 지었으니

    원컨대 그대여 편안히 앉아

    이 밤 즐겁게 쉬시오.

    세상엔 뜻밖에 당하는 일 흔히 있나니

    韓國漢詩硏究 15, 태학사, 2007. 이 논문에서 한차례 「감담일기」 소재 한시를 일상적 체험의 재현과 의미화라는 점에서 주목한 바 있다.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41

    무엇이든 부탁할 것 내게 맡기시오.”

    주인의 마음씨 너무나 고마우니

    내 어찌 감히 허락하지 않으랴?

    기한이 정해진 엄중한 길이라

    자꾸만 떠나자고 재촉을 하네.

    주인에게 진심으로 사례를 하며

    뒷날 다시 보자 약속하였네.

    이 세상이 비록 넓고 넓지만

    어디에 이 한 몸 부칠 수 있을까?

    눈물을 흩뿌리며 대문을 나서니

    날 저문 하늘은 적막키도 하구나.

    南生古之人, 見客色嗟愕.

    下階親肅揖, 携手坐煖閣.

    肥輭牛心串, 香釀鸚觜爵.

    獸炭銅爐口, 溫冷隨斟酌.

    素麪銀絲縷, 朱果亦瓔珞.

    爲言此雪寒, 近來創饕虐.

    煢煢南遷子, 貌淸氣脆弱.

    旣無狐狢厚, 奈玆綿袍薄.

    丈夫千金軀, 造次宜敬恪.

    人命在須臾, 萬死由一錯.

    歉荒業貧窶, 粟飯猶精鑿.

    願君且安坐, 良夜樂相樂.

    緩急世所有, 窮途幸依託.

    深感主人意, 賤子敢不諾.

    嚴程有期限, 以此相驅迫.

    款款恭致謝, 脉脉留後約.

    宇宙雖廣闊, 何處可棲泊.

    揮淚出門去, 暮天空寂寞.

  • 242 韓國漢詩硏究 25

    김려, , 藫庭遺藁 권7, 「坎窞日記」

    이 시는 11월 20일 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김려는 새벽에 안변을 떠나 얼

    어붙은 남강을 걸어서 건너 원산에 들어갔다. 이날 두 편의 시를 남겼는데,

    하나는 이고, 다른 한 수가 바로 위의

    시이다. 위에서 생략한 전반부 20구는 매서운 찬바람을 뚫고 굶주린 채 원산

    에 들어가는 과정을 읊었다. “두 손가락 얼어서 떨어져 나갈 듯, 온 몸은 굳

    어서 묶어놓은 듯. 이 한 몸 보존할 길 없어, 저 하늘 향해 목 놓아 우네.(兩

    指凍欲墮, 四體硬似縛. 一身不自保, 慟哭叫冥漠)”라 한 뒤 바로, 급전환하여

    남이곤이란 인물을 소개하였다. 남이곤은 원산의 남천교 돌비석 앞거리에

    사는 부호로, 김려 일행이 잠시 그의 집에서 쉬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남이곤이 김려에게 베푼 인정(人情)을 시의 후반부에

    전면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산문일기만으로도 이날의 힘든 여정과 남이곤이

    베풀어준 인정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굳이 장편시를 쓴 것은 험지에서 낯선

    이가 베푼 인정에 벅차오르는 감회를 토로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생생한 장

    면 묘사가 돋보이는데, 남이곤이 섬돌 아래로 내려와 자신의 손을 붙들고 온

    돌방으로 들어가 구리 화로에 숯불을 지피고 술을 데우고 소 염통 꼬치구이,

    과일, 국수 등 음식을 내오는 장면을 차례로 재현함으로써,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인정에 목마른 유배죄인이 받았던 감동이 입체화된다. 또, 남이곤

    이 자신에게 건넨 위로의 말을 마치 등장인물의 대사처럼 옮겨 놓아 현장감

    을 더하였다. 요컨대 이 시는 작가의 실제 체험을 서정자아의 체험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작가가 느낀 개별적 인정을 보편적인 시적 인정으로 확장하고

    있다.

    11월 22일의 다음 시 역시 비슷하다.

    (전략)

    들리는 곳마다 길을 재촉해

    바람에 쫓기듯 빨리도 왔네.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43

    하지만 신희욱은 의협심이 많아

    불쌍한 나를 극진히 돌봐주었네.

    따뜻한 온돌방에 나를 불러 쉬게 하고

    맛 좋은 술 부어 내 목을 적셔 주며,

    왼손으로 죽 그릇을 당겨놓고

    오른손으론 고깃국을 받쳐 들고서,

    공손하게 어른으로 받들며

    정성껏 어서 들라 권하였지.

    밤이 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서

    나의 병을 정성껏 구완하였지.

    아침에 문천고을 떠나올 때도

    한 낮에 송포진에서 잠깐 쉴 때도,

    시내길이 험하면 나를 붙들어주고

    벼랑길이 가파르면 나를 잡아주었지.

    궁색한 길손 어려운 처지를 재빨리 살펴서

    특별히 인색한 빛 비치지 않았었지.

    헤어질 때 강개한 눈물 흘리며

    애절하게 이르던 말 금석이 울리는 듯했지.(후략)

    沿道事驅迫, 疾若飄風迅.

    端公獨意氣, 憐我恭承順.

    煮堗招魄安, 勺醴啓喉潤.

    左手持饘粥, 右手擎臛腝. 逌然敬尊執, 懇懇來勸進.

    終宵不成寢, 款曲勤問訊.

    朝發文川郡, 午憩松浦鎭.

    提携溪澗險, 扶持巖壑峻.

    窮道急人難, 特立無悔吝.

    臨別忼慨泣, 哀響金石振.

    김려,

  • 244 韓國漢詩硏究 25

    別申端公希 歸文川>, 藫庭遺藁 권7, 「坎窞日記」

    총 38구의 오언고시로, 등장인물 신희욱은 문천 관아 소속으로 김려를 다

    음 고을인 고원까지 호송한 젊은 관원이다. 이날 일기에 의하면, 신희욱은

    김려가 문천의 향청에 들어서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자기 집으로 데

    리고 가서 돌보았으며, 호송 중에도 여러 가지로 그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

    다. 그런 인물과 헤어지면서, 그가 유배죄인에게 베푼 온정과 의기, 자신의

    감동을 한데 압축한 시가 바로 이 작품이다. 여기서도 김려는 남이곤을 형상

    화한 것처럼 신희욱이라는 인물을 장면화의 수법으로 형상화 하였다.

    이상의 두 증별시를 통해 김려가 현실의 시공간 속 실제 인물을 등장시켜

    세부 묘사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쓴 서술적, 서사적 서정시의 면모를 살펴보

    았다. 이러한 시에서는 유배지에서 새롭게 만난 인간과, 그와 소통하고 교감

    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인정이란 시적 진실을 보게 된다. 훗날의 「사유악부」에 보이는 연희를 비롯한 다수의 북방지역 사람들에 대한 김려의 사랑과 인

    간애13)가 바로 「감담일기」의 유배시에서 예견되고 있는 것이다.

    3) 근체시 연작으로 쓴 박제가, 이학규의 생활시, 일상의 발견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사망한 이듬해 박제가는 절친한 친구이자 사돈인

    윤가기(尹可基)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종성으로

    유배되어 4년을 보냈다. 이 기간에 남긴 시집 경신당협대(竟信堂夾袋)를 대상으로 박제가의 종성 유배기간의 인생 궤적과 시세계를 검토한 안대회에

    13) 김려는 다양한 계층의 부령 주민들을 회상하였다. 예컨대, 짚신 삼고 자리를

    짜는 머슴인 황씨 아들을 읊은 시에서는 자신이 황씨 아들에게 옷을 억지로 주

    자 다음날 아침 성 서쪽 시장에서 신을 팔아 술 한 병을 사온 일을 회상하였고,

    이웃에 사는 과부 성씨를 읊은 시에서는 술을 팔아 생계를 해결하는 그 과부가

    새로 술을 거를 때면 담 너머로 술 한 병씩 자신에게 건네주던 일을 회상하였다.

    이처럼 김려는 부령에서 만난 많은 북방민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회상하면서

    그들이 보여준 인간미를 형상화하였다.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45

    의하면, 박제가는 유배기간 동안 북관지역의 인문적 환경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며, 특히 유통과 상업의 측면에 시선을 맞춘 시작들을 대거 창작하였으

    며,

    등을 통해 북관의 풍정과 세태를 관찰하고 탐색하였다. 박제가의 유배기 서

    정시의 주요한 소재는 시인의 심경과 생활모습, 가족에 대한 그리움, 과거에

    대한 회상 등이었다. 박제가의 특장인 칠언율시 는 국경에 유폐된 채 살아가는 시인의 생활과 내면을 잘 드러내

    었는데. 감각적인 어휘로 눈앞의 경물을 핍진하게 묘사하였다.14)

    박제가 역시 침울하고 비감한 정서는 고시로 표출하곤 하였지만, 전체적

    으로 보면 박제가의 유배시는 근체시를 더욱 선호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

    은 박제가의 시가 다른 시인들과 달리 잡절(雜絶)이라는 절구 연작을 선호한

    점이다. 짧은 절구는 복잡한 사회나 심사를 세세하게 설명하는 데는 부적합

    하지만,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을 인상적이고 집약적으로 포착하기에는 적합

    하다. 수십 수에서 수백 수에 이르는 연작 절구의 창작이 18세기 한시의 한

    특징으로 지적되는데,15) 박제가는 그러한 형식을 유배시에서 즐겨 구사하였

    다. 그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유배생활, 일상을 인상적이면서

    집약적으로 포착한 시들이다. 칠언절구 연작 중에서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시를 골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울타리 아래 텃밭에 상추를 심었는데

    이리저리 뻗은 잎 꽤 많이 따먹었네.

    뉘 알까, 더 있으면 빗자루인 양 높이 자라

    떨기를 따고 나면 작은 국화 되는 것을.

    種得籬根半畔萵, 離離繁葉摘還多.

    誰知老大高如帚, 叢碎都成小菊花.

    14) 안대회, 앞의 논문, 95면.15) 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의 구도」,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 소명, 1999.

    43~47면.

  • 246 韓國漢詩硏究 25

    상추 잎 열 몇 쌈을 맛있게 먹었으니

    난간 위로 거여목 웃자라게 말아야 해.

    오이와 보리 맛은 예전과 꼭 같은데

    궁궐에서 반사하신 준치만 빠졌구나.

    萵苣饞呑十數丸, 不消苜蓿上闌干.

    瓜情麥味都如昨, 只欠鰽魚內府頒.

    박제가, , 貞蕤閣五集

    제목의 ‘여차(旅次)’가 없다면 유배중임을 알 수가 없다. 적소(謫所)의 울

    타리 아래 상추를 심어서 따먹는 생활을 포착하였는데, 특별한 감정의 토로

    없이 안정된 시인의 내면과 심리, 일상의 정감이 느껴질 뿐이다. 특히 두 번

    째 시에서는 다소 장난스러운 어투로 “궁궐에서 반사하신 준치만 빠졌구나.”

    라며 정조의 인정을 받던 시절과 지금의 생활을 대조해 보였다.

    종성의 지형적 특징, 민중의 생활상, 관에 의한 민중 수탈, 행정 무능과 곤

    핍한 민중생활, 종성지역의 문화와 민속, 종성의 역대 수령, 종성의 폐정(弊

    政) 등 다양한 소재를 읊은 에도 시인의

    객고(客苦)에 초점을 맞춘 시가 5수정도 있다. 그 중 유배객의 일상과 심경

    을 담은 두 수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하인이 책상을 빌려 왔는데

    삐걱삐걱 마치 노 젓는 소리 같네.

    손에는 우미불을 쥐고 있지만

    왕이보의 품격에는 부끄럽구나.

    從人借策牀, 雅軋如柔櫓.

    手持牛尾拂, 自媿王夷甫.

    한씨 집서 살구를 보내왔고

    까마귀 머루는 부계에서 나네.

    나그네 신세라 별 게 업어서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47

    담뱃대로 닭 한 마리와 바꾸네.

    韓家貽杏子, 蘡薁出涪溪.

    旅况無多子, 煙桮易一難.

    박제가, , 貞蕤閣五集

    첫 수에서는 이웃에서 하인이 빌려온 낡은 책상과 파리나 쫓는 먼지떨이

    를 포착하여 적소에서 한가하면서도 무료하게 지내는 자신의 일상을 담았고,

    둘째 수에서는 이웃 한씨(다른 시에 자주 보이는 한희안을 가리킴)가 보내온

    살구와 부계에서 나는 머루, 담뱃대와 맞바꾼 닭과 같이 자신이 먹는 과일과

    고기를 통해 유배지의 일상을 담았다. 이와 같이 오언절구의 짧은 형식으로

    일상의 한 단면을 인상적으로, 집약적으로 포착한 연작시의 서정은 고시에

    담은 무겁고 장황한 서정과 확연히 다르다. 비록 유배지라도 삶을 영위하는

    일상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시인이 자각할 때 생긴 시적 여유라 하겠다.

    이학규 역시 근체시 연작으로 유배지의 일상을 즉흥적으로 써낸 시가 많

    다. 이학규는 1801년 신유옥사 때 전남 화순으로 유배를 갔다가 황사영 백서

    (帛書)에 연루되어 김해로 정배되어 24년의 세월을 보냈다. “만약 시라도 짓

    지 않는다면 이 수많은 긴긴 날을 무슨 수로 견디며 보내랴?”라고 하였듯이,

    이학규는 오직 시를 쓰는 일로 유배를 견뎌냈다.16) 칠언절구 연작 중 두 수를 읽어보자.

    16) 李國鎭, 「李學逵 漢詩의 표현기법과 미적 특질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10, 52면. 이 연구에 의하면, 이학규는 장편 고시를 통해 내면의 소회를 거침없

    이 서술하는 등 격앙된 정서와 부정적 현실인식이 주조를 이루다가, 아내의 죽음

    을 경험한 뒤 삶의 무상성을 자각하고, 그로 인해 응시와 성찰의 서정적 자세가

    본격화되면서부터 장편의 서술구조를 통한 회한의 표출방식은 사라지고, 대신에

    칠언율시의 정제미와 여운미를 활용하여 시적 사유의 공간을 확장하고 서정을

    심화해 나갔다고 한다.

  • 248 韓國漢詩硏究 25

    예전에는 등불이 없어서 늘 눈을 감았는데

    이제 새로 술을 끊어서 말조차 잊었네.

    지나는 길에 사람들이 노래를 하든지 곡을 하든지

    날이 따뜻하든지 춥든지 다만 문을 닫고 있네.

    舊爲無燈常閉目, 新因止酒便忘言.

    人歌人哭從行路, 天㬉天寒只掩門.

    방에서 들리는 벌레소리로 밤이 온 줄 알겠고

    자리에 사람 말소리 없어 부질없이 허공에 글을 쓰네.

    하루 종일 창가에서 턱을 괴고 앉았노라니

    이런 중에 얼마나 처량한지!

    室有蟲聲知近夜, 座無人語謾書空.

    臨窗盡日支頤坐, 多少凄凉在此中.

    이학규, , 洛下生集冊十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이학규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키는 대로

    읊은 시로, 정해진 순서 없이 하루의 일상을 인상적으로 포착하였다. 특별한

    시적 긴장이나 서정의 온축 없이, 유배지에서 하릴없는 이방인으로 하루를

    무료하게 방안에서 보내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학규의 도 위 시와 비슷하다. 그 중 다섯째 수를 보이면 다음

    과 같다.

    어부들 술자리에서 몹시 취하여

    귀첩이 차린 밥상을 함께 먹네.

    용렬한 의원이 약의 성질을 얘기하고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49

    속인이 문장의 기세를 논하네.

    낮잠은 약속이나 있는 듯 깨고

    집에서 오는 편지는 한 달 걸러 보네.

    재주도 없고 또 배움도 없으니

    한결같이 신산한 인생살이.

    劇醉漁蠻席, 同餐鬼妾盤.

    庸醫談藥性, 俗子議文瀾.

    晝睡如期覺, 鄕書隔月看.

    無才復無學, 一味是酸寒.

    이학규, , 洛下生集冊十二

    이 시는 무려 105편에 달하는 연작시로 제목에서 밝혔듯이 율시의 평측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감회를 자유롭게 써나가는 데 치중하였다.

    어부들과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밥을 먹으며 그나마 식자층에 속한 의원

    이나 양반과 얘기를 섞어보지만 도무지 용렬하고 속물스럽기만 하고, 낮잠

    도 달게 자지 못할 만큼 열악한 환경에 집의 편지도 격월로 받아보는 처지

    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생활은 늘 무료하고 신산할 뿐이다. 이렇게 시의 내

    용은 심드렁하고 산문적이지만, 시의 묘미는 시어의 선택과 율시의 대구를

    통해 구현된다. 어부를 이르는 어만(漁蠻), 과부 신세의 주모를 이르는 귀첩

    (鬼妾)17) 등과 같은 시어, 함련의 대구 등을 통해 율시의 형식미를 보이지만,

    정경의 교직을 통한 서정의 심화 따위는 관계치 않고 있다.

    4) 고시로 쓴 박제가와 이학규의 영회시(詠懷詩), ‘나’의 발견

    박제가의 유배시는 대체로 근체시이지만 이따금 고시로 침울하고 비감한

    17) 귀첩은 남편을 잃은 첩을 이르는 말이다. 두보의 시에 “鬼妾與鬼馬, 色悲充爾娛”에서 온 말로, 주석에 주인을 죽이고 빼앗은 첩과 말을 귀첩, 귀마라 부른다.

  • 250 韓國漢詩硏究 25

    정서를 토로하였는데, 그 중에서 칠석이라는 절기이자 죽은 누이의 생일날

    을 맞아 쓴 시 (貞蕤閣五集)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는 무려 104구에 달하는 장편의 칠언고시로,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며

    누이의 삶을 회상하는 한편, 자신의 지난 삶을 자술하며 유배의 회포를 푼

    영회시(詠懷詩)이다. 첫 도입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오늘 저녁 어떤 저녁인가?

    우리 누님 태어난 날.

    하늘에선 견우직녀 만나서 기뻐했지.

    집집마다 걸교하며 즐거이 실을 꿸 제,

    고고하게 우는 아기 씻기기 시작했지

    今夕何夕降吾姊, 天上相逢牛女喜.

    家家乞巧賀穿鍼, 何况呱呱洗兒始.

    칠석에 태어난 누이의 출생을 시작으로 하여, 이어지는 장면은 누이를 낳

    은 어머니가 쌀밥에 미역국을 먹는 장면을 재현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누이

    의 생일상을 차리던 장면, 네 살이 어린 자신에게 누이가 책을 읽어주는 장

    면으로 회상은 계속된다. 다음 단락은 누이가 열다섯에 시집가서 조카를 낳

    고, 자신도 혼인하여 딸을 낳아 함께 즐거워한 일을 서술하고, 다음 단락은

    어머니가 죽은 일과 그 뒤 자형은 화현의 외직으로 자신은 공주 찰방으로

    나란히 관직에 나간 일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자신과 누이가 집안의 크고 작

    은 경사를 함께 나눈 일을 회상하고, 다음으로 누이의 기상과 인물됨, 특히

    강개한 협사의 기질을 가진 누이가 가난한 집에서 살림솜씨를 발휘한 정경

    을 서술하였다. 다음은 그 중 누이의 음식솜씨를 떠올린 대목이다.

    누이는 이아(易牙)를 뛰어넘는 재주 있어

    나물만 가지고도 호사를 다투었네.

    밀로 만든 만두는 임금님께 올릴 만했고

    호박 넣어 볶은 나물은 낙타고기 내려다봤지.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51

    姊有奇才勝易牙, 能將草蔬鬬豪奢.

    蕎麥饅頭可献君, 南瓜熬菜輕紫駞.

    누이와 자신의 우애는 계속해서 회상된다. 적현 고을에 함께 살 때는 움

    집에서 키운 콩나물, 사냥한 꿩고기를 나누어 먹던 다정한 일화를 재현하다

    가, 마지막 단락에서는 이렇듯이 행복했던 과거의 일상들로부터 시상을 급

    전환하여 마침내 죄인이 되어 유배 길에 오른 자신의 신세와 잇달아 접한

    누이의 죽음을 서술하여 현실의 비극을 극대화시켰다. 그리고 시상의 종결

    은 서두와 수미일관시켜 다음과 같이 칠석의 정경으로 맺었다.

    오동잎 하나 질 제 또 생일 찾아오나

    까막까치 부질없이 은하수를 메우누나.

    자형은 돌아가서 견우성 될 터이니

    누이는 예전처럼 천손으로 지내소서.

    아우 혹 언제가 박망후가 되고 나면

    훗날 뗏목 타고 만나 볼 수 있을는지.

    梧桐一葉又生朝, 烏鵲塡河空歲歲.

    定知兄敀作黃姑, 依然姊返天孫居.阿弟身爲博望矦, 他日乘槎相見無.

    이상에서 보듯이 박제가의 는 누이와 자신의 삶을

    곡절하고 핍진하게 회상하는 과정에서 유배의 깊은 회한과 애절한 그리움을

    마음껏 토로하였다. 특히 누이가 만든 만두와 호박볶음, 나누어 먹은 콩나물

    과 꿩고기 같이 지극히 사적인 추억을 소환함으로써 우애의 정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박제가의 이 시와 비슷한 예로 이광사의 유배시도 있다. 이광사의 는, 옛날 글씨를 써 달라는 등살에 못 견디어 달아날 생각까지 하였

    다는 기쁜 비명으로 시작하여 신바람이 나서 글씨를 쓰는 자기도취를 회상

    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무너진 창 밑에서 몽당붓을 호호 불며 기껏 저

  • 252 韓國漢詩硏究 25

    물어가는 책력에 날씨나 적고 있는 ‘나’를 그렸다. 에서는 며느리의 출신과 혼인날 및 딸의 출생, 가족과 즐거웠던 날, 며

    느리 딸과 함께 앵두를 따던 4월의 풍경, 며느리 딸과 밤을 줍던 8월의 풍경

    등 행복했던 추억들을 회상하다가 결말에 이르면 유배지의 ‘나’를 확인하는

    비감으로 맺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유배로 인해 영원히, 또는 잠정

    적으로 상실해버린 ‘나’의 온전한 삶이 장편의 영회시 속에서 재현되었는데,

    이는 전에 볼 수 없는 양상이다.

    한편, 행복했던 과거와 유배의 현실을 대조해보인 영회시와 달리, 철저하

    게 유배지에서의 일상 속 ‘나’에 초점을 맞춘 경우도 있다. 이학규의 (洛下生集冊十二)가 그 예이다.

    유월의 달은 어느덧 그믐인데

    무더위는 밤이 되자 더욱 기승을 부리네.(중략)

    내 마침 학질에 시달려

    허리와 다리를 가누지 못하니

    홑옷은 땀으로 목욕을 한 듯하고

    다섯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살갗을 긁는데

    당장에라도 옷을 벗지 않는 이유는

    전날 밤 멀리서 온 벗이 있어서라네.

    (중략)

    길거리 남쪽에 작은 주막이 있으니

    더듬거리면서도 찾아갈 수 있네.

    켜 놓은 등불에 타고 남은 잿불이 환하고

    발은 서로 기대어 겹쳐져 있네.

    추위가 와도 비단옷만 드리우니

    치마를 추킬 때면 나직이 사각사각 거리는데

    머리를 묶어도 여전히 부스스하네.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53

    일찍이 들으니, 이 사람이 술을 잘 빚는다고

    술꾼들이 칭찬을 하던데

    게다가 지금은 술 빚을 쌀값이 싸서

    진한 맛의 청주와 탁주가 잇따르네.

    술잔을 씻어 내게 보이고

    술을 따라 나보고 받게 하면서

    내 지출이 쉽지 않으니

    가격을 물을 필요 없다고 하네.

    이 시골 풍속의 순박함을 감사하니

    이처럼 정답고 친절한 곳 보지 못했네.

    오랫동안 앉았더니 점점 하품이 나고

    잔뜩 취해 그저 가슴만 쓰다듬으니

    나를 일으켜 신을 신기고

    나를 부축해서 도랑과 밭두둑을 넘어오네.

    돌아와서 잠들었다 문득 깨어보니

    성 위에서 둥둥 북소리 들려오네.

    六月月旣朓, 煩暑夜乃增.

    仰天一雲無, 立地如炊烝.

    牆東大柳樹, 淸露串珠凝.

    一葉不動搖, 鬱若堆薪蒸.

    飛蚊擾上下, 鍾鼓紛吰噌.

    其喙一毫耳, 利可穿鞹鞃.

    我室蟲所窟, 壁蝨與棚蠅.

    開戶試納頭, 觸手聲薨薨.

    我時困痎瘧, 腰腿不自勝.

    單衣汗如沐, 爬膚五指 .

    所不卽裸裎, 先夜有遠朋.

    聞其旅遊者, 卜夜以爲恒.

    喓喓壁間蟲, 爾生良可憎.

  • 254 韓國漢詩硏究 25

    人今但坐喟, 有若鳴自矜.

    病暍卽痛飮, 執熱思層冰.

    層冰理所無, 暍飮猶可能.

    蹣跚出門外, 仰視殘月昇.

    織女已中天, 殘月猶一稜.

    城南數畞地, 有爝如深燈.

    想此魚市墟, 敗鱗光澄澄.

    其傍香逆鼻, 市瓜堆如陵.

    瓜婆久熟寐, 百嘑無一譍.

    縱橫大道中, 赤體交股肱.

    或鼾睡動地, 或夢魘蹶興.

    揮扇聲撲撲, 爇艸煙騰騰.

    羣犬亦同臥, 狺怒敢相夌.

    衛南小酒壚, 摸索亦可徵.

    張燈耿餘燼, 簾箔疊依憑.

    有如倮壤人, 塞至但垂繒.

    褰帬稍綷䌨, 斂髻猶鬅鬙.曾聞此善釀, 酒徒之所稱.

    况今麴米賤, 淸濁釅相仍.

    滌桮使我看, 注壺今我承.

    言我出不易, 不必問斗升.

    感玆邨俗淳, 欵曲見未曾.

    久坐稍噫欠, 劇醉但摩膺.

    引我起納屨, 掖我越溝.

    歸來睡一覺, 城上鼓鼟鼟.

    위 시는 76구의 오언고시로, 무더운 한여름 밤을 보내는 자신의 행동을 시

    간을 따라 그대로 재현하였다. 먼저 시인의 누추한 집을 묘사하고, 이어서

    무더위를 견디는 자신의 고통과 번민을 서술하고,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55

    기 위해 한밤중 술집을 찾아 나서고, 가는 길에 어시장의 풍경과 시골저자의

    사람들을 보고, 마침내 주막에 이르러 술을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새벽 북소리를 들으며 시를 짓는 정황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그렸다. 특히 한밤중 들이닥친 자신을 맞이하는 주모의 부스스

    한 머리까지 포착하고, 또 유배객을 동정해 술값을 괘념치 않고 대접하다가

    취한 자신을 집까지 부축해주는 주모의 인정을 포착한 시인의 시선이 참신

    하다.

    사실, 이 시는 제목에서 구점(口占)이라 하여 즉흥적으로 썼다고 하지만,

    평성 증운(蒸韻)으로 일운도저(一韻到底) 하여 고시의 기세를 자랑한 시이

    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이 시는 무더운 한여름 밤을 보내는 시인의 행동

    을 지나칠 만큼 자세하게 서술하여 시적 긴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

    배지의 시인에게 시적 긴밀도나 서정의 심화 같은 문학적 장치나 기교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특수한 ‘나’ 역시 보편화, 추상화된

    서정자아로 변할 이유가 없는, 그런 서정시의 면모를 이 시는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결론

    본고는 한시의 양식에 대응한 서정의 표출 방식을 문제 삼는 방식으로 유

    배시의 서정성을 살펴보았다. 조선 전기 근체시로 쓴 유배시와 조선 후기 고

    시나 근체시 연작으로 쓴 유배시의 서정성을 대비해 보는 것은 일견 한시의

    양식이 지닌 일반적인 성격을 재확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근체

    시 형식을 통해 구현된 전기 유배시가 보여주는 보편화된, 추상화된 서정의

    세계와 질적으로 다른 조선 후기 유배시의 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의 시인들은 유배시의 양식으로 고시를 전시대와 비교해 더욱

    선호하였다. 5언, 7언의 장편 고시는 복잡한 심경의 흐름을 굴곡적으로 표출

    하는 데 적합하고, 5언, 7언의 단편 고시는 시인의 심경을 솔직하게 드러내

  • 256 韓國漢詩硏究 25

    는 적합하다. 특히 오언고시는 평측과 운의 속박이 적어 예로부터 서정에 가

    장 적합한 양식으로 활용되었다.18) 또한, 근체시 연작은 복잡한 상념을 분절

    하여 표출하거나 자잘한 일상을 인상적, 집약적으로 포착하는데 적합하다.

    조선 후기의 시인들은 이러한 고시의 특성과 근체시 연작의 효과를 자신들

    의 유배시에서 잘 활용한 셈이다. 즉 유배라는 특수한 상황과 복잡한 내면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 양식을 달리 하여 개인적 정감을 토로하게 만들었던 것

    이다. 유배로 인해 상실된 가족과 자신의 삶을 시 속에서 되찾고, 낯선 곳에

    추방되었어도 인간으로서의 삶은 여전히 영위되면서 알게 된 일상의 소중함

    과 새롭게 발견한 따스한 인간애 등을 서정시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선 후기 유배시는 보편적 추상적 서정이 아닌, 개인

    적 체험과 감정이 주도하는 개성적 서정성을 확보해갔던 것이다.

    18) 장유승, 「17세기 고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2, 31면 참조.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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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8 韓國漢詩硏究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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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유배 한시의 서정성 259

    A study on the lyricism of the exile poetry during the late Joseon

    Kang Hye-sun

    Exiled poets were personally suffering and frustrated. On the other hand, they

    exposed new poetic tension and creative motivation in an exotic space called

    the exile area. The exile poetry has various aspects of subject, content and

    material. I paid attention to the lyric poetry of poet's personal feeling. Especially

    I have noticed that lyricism also appears differently in the form of poetry that

    the poet chooses. A short poem was favored during the early days of Joseon.

    A long poem was favored during the late Joseon. Yi Ju(李冑) and Kim Jeong

    (金淨) implied the feeling of exile by the description of the scenery. Yi Haeng

    (李荇) and Ro Sushin(盧守愼) expressed their sorrow and thinking at the same

    time while describing the scenery of the exile area. In the other hand, Yi

    Gwangsha(李匡師), Kim Rye(金鑢), Park Jega(朴齊家) and Yi Hakkyu(李學逵)

    wrote highly individualistic lyrics in the exile area. They recreated happy recol-

    lections of their families and depicted the grateful people whom they met in

    exile. Also they recreated their daily lives in exile. The lyricism of their exile po-

    etry during the late Joseon focused on personal experiences and emotions, not

    universal and abstract emotions.

    exile poetry, lyricism, form of Chinese poetry, personal experiences and emo-

    tions

  • 260 韓國漢詩硏究 25

    논문투고일 : 2017. 08. 30.

    심사완료일 : 2017. 10. 16.

    게재확정일 : 2017.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