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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컴명 저 다이제스트 JUL 3JI maaHMH «■뼤 m^amm ™ l| THE PRESS Inside America’s Most Powerful Newspaper Empires From the Newsrooms to the Boardrooms 1963 년은 미국언론사에 있어 분기3 되는 해였 . 그해 여름 워싱턴 포스 트와 뉴스위크의 발행인이 필립 그레이엄이 권총으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 함으로써 그의 미망인 캐서 그레이엄 여사가 직접 영일선에 나섰다. 또한 랫동안 뉴욕 신문업계를 롭혀오던 격렬한 노사분규 평온을 되찾자마자 뉴욕 타임스의 발행인 오빌 드라 이푸스가 사망했다. 뉴욕 타임스 최고경영자의 자리 그의 아서 설즈버거 이어 받았다. 그러나 1963 년은 그레이 엄파 설스버거 사람이 문경영인으로 출발한 해라는 의미에서 아니라 앞으 미국언론계의 거물로 부상하게 몇몇 인물들이 세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기 시작한 해라는 점에서 미국 언론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 그로부터 4반세기가 흐른 지금, 거대 재벌기업으로 성장한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타임스 미러, 네트, 나이트ᅳ리더사에서는 또다시 세대교체를 단행, 새로운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25 동안 이들 신문사에 서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 ? 누가 변화를 주도했 으며 그들의 전략은 무엇이 었을까? 가족회사에 불과 했던 이들 신문사가 25 년전 총수업보다 월씬 많은 이익을 올리는ᅳ거대기업으 성장한 원동력은 무엇이 었을까 ? 또한 다음 세기를 이끌 변화의 주체는 누구이 이들이 주도하는 변화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 프레스’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책의 저자 엘리스 코제 (Ellis Cose) 시카고 타임스 기자로 출발, 유에 스에이 투데이,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 등을 거치며 20 여년 동안 언론인으로 했다. 수상경력도 화려한 코제는 그의 일선경험은 200 회가 넘는 인터뷰, 최신 서적, 수많은 문서, 음테이프, 그리고 개인 회고록 광범위한 자료를 초로 지난 4반세기 동안 미국 주요 신문사에서 일어난 변화의 내막을 프레스’란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1989 7 월호 ‘워싱턴 포스트편에 이어 ‘뉴욕 타임 스’편을 간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뉴욕 타임스 INSIDE AMERICA'S MOST POWERFUL NEWSPAPER EMPIRES — FROM THE WSeOOiSTOTHEBOARDROOis ELLIS COSE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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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스컴명 저 다이제스트

    JUL 3JI maaHMH떠«■뼤m âmm ™ l|

    THE PRESSInside America’s Most Powerful Newspaper Empires

    From the Newsrooms to the Boardrooms

    1963 년은 미국언론사에 있어 분기3 이 되는 해였 다. 그해 여름 워싱턴 포스 트와 뉴스위크의 발행인이 던 필립 그레이엄이 권총으 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

    함으로써 그의 미망인 캐서 린 그레이엄 여사가 직접 경 영일선에 ■나섰다. 또한 오 랫동안 뉴욕 신문업계를 피 롭혀오던 격렬한 노사분규 가 평온을 되찾자마자 뉴욕 타임스의 발행인 오빌 드라 이푸스가 사망했다. 뉴욕 타임스 최고경영자의 자리 는 그의 처 남 아서 설즈버거 가 이어 받았다.

    그러나 1963년은 그레이 엄파 설스버거 두 사람이 신 문경영인으로 출발한 해라는 의미에서 뿐 아니라 앞으

    로 미국언론계의 거물로 부상하게 될 몇몇 인물들이 실 세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기 시작한 해라는 점에서 미국 언론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

    그로부터 4반세기가 흐른 지금, 거대 재벌기업으로 성장한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타임스 미러, 가 네트, 나이트ᅳ리더사에서는 또다시 세대교체를 단행, 새로운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

    25년 동안 이들 신문사에 서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 까 ? 누가 그 변화를 주도했 으며 그들의 전략은 무엇이 었을까? 가족회사에 불과

    했던 이들 신문사가 25년전 의 총수업보다 월씬 많은 순 이익을 올리는ᅳ거대기업으 로 성장한 원동력은 무엇이 었을까 ? 또한 다음 세기를 이끌 변화의 주체는 누구이

    며 이들이 주도하는 변화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

    ‘프레스’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이 책의 저자 엘리스 코제

    (Ellis Cose) 는 시카고 선 타임스 기자로 출발, 유에 스에이 투데이,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 등을 거치며 20여년 동안 언론인으로 일 했다. 수상경력도 화려한 코제는 그의 일선경험은 물 론 200회가 넘는 인터뷰, 최신 서적, 수많은 문서, 녹 음테이프, 그리고 개인 회고록 등 광범위한 자료를 기 초로 지난 4반세기 동안 미국 주요 신문사에서 일어난 변화의 내막을 ‘프레스’란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1989년 7월호 ‘워싱턴 포스트’ 편에 이어 ‘뉴욕 타임 스’편을 간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뉴욕 타임스

    INSIDE AMERICA'S MOST POWERFUL N EW SPAPER EM PIRES — FROM THEW S e O O i S T O T H E B O A R D R O O i s

    ELLIS C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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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스컴명저다이제스트

    “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

    Jfeurj|atk Shne0

    인쇄노조)와 뉴욕의 6개 ITU지부(빅6) 가 뉴욕 발행 인들과의 협상을 중단함으 로써 시작되었다. 대지는 12년전 ‘뉴욕 월드 텔리그 램’을 상대로 전개한 파업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뉴욕 신

    문노조들 사이 에 이 른바 ‘혈 맹’ 관계가 체결된 이래 그■

    뉴욕 타임스가 미국 언론 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는 가히 독보적이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 전체

    나 뉴욕시에서 결코 가장 오 래된 신문이 아니다. 그러 나 이 신문은 유독 스스로의 역사나 전통에 대하여 자부 심이 강하며 다른 미국 신문 들이 감히 넘 겨 다 볼 수 없 '을 만큼 단연 휘'황한■거성이다. 그 렇기 때문에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의 사주 오티스 챈들러 는 아무 거 리

    낌없이 뉴욕 타임스를 자기 신문의 표본으로 삼을 수 있었고 워싱 턴 포 스트의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 역시 뉴욕 타임스맨인 제임스 레스턴을 그녀의 고문으로 영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언론의 큰 별

    탁월한 모든 것의 속성이기도 하

    지만 뉴욕 타임스는 그 나름의 깊은 신비의 장막으로 외부로부터 차단 되 어 있으며 사람들은 그 장막의 안 쪽을 살피려고 흡사 크렘린 지도층

    의 변화를 쫓듯이 이 신문의 제호란 에서 일어나는 조그■마한 변화까지 도 놓치지 않고 주목해 왔다.

    바로 그 제호란의 제일 윗쪽에는 무려 4반세기 동안이나 아서 오크스 설즈버 거 (Arthur Ochs Sulzber- ger) 라는 한사람의 이름이 변함없

    이 자리해 왔다. 설즈버 거는 신문으 로서의 뉴욕 타임스와 회사로서의 타임스사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발행인으로 취임하여 궁극적으로

    신문과 회사 모두의 혁신을 수행했 다. 그러 나 설즈버 거 는 켈리포니 아 의 챈들러 (LA 타임스) 가 스스로의 야망을 쫓아 그 신문의 혁신을 추진

    했던 것과는 달리 불가피한 필요에 쫓겨 그렇게 했을 뿐이다.

    노조의 파업

    1963년 3월 뉴욕시에서는 역사상 최장기간인 114일만에 신문파업이 끝났다. 이 파업은 타임스와뉴욕의 다른 모든 신문들에 있어서 경제적 으로 일대 파국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광고수입과

    판매부수가 기록적인 수준을 달리 는 가운데 대대적인 사세신장을 꿈 꾸고 있었다. 그런데 62년 마지 막 3 주간을 노조의 파업속빠 보내 야 했 고 이때문에 그해의 크리스마스 광 고대목을 놓쳐버렸다. 결과적으로 62년 매출액은 간신히 61년 수준을 유지했으나 이익금은 계획의 절반 으로 감소했다. 63년도의 타격은 더 욱 심해서 매출액이 62년의 저조했 던 수준보다 1,700만달러나 감±하 고 52만 7,000달러의 결손을 냈으나 부동산 매각과 계열 제지회사의 배 당금으로 간신히 적자를 면할 수 있

    었다.이때 설즈버거는 스스로의 표현

    대로 “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경리 부 책 임자”로서 노조앞에 피를 홀리며

    쓰러져가는 뉴욕 타임스의 모습을 겁에 질려 지켜보고 있었다.

    파업은 62년 12월 8일 ITU (국제

    어느 때보다도 자신만만하

    고 위세등등해 있었고 이에 대항하 여 뉴욕의 모든 일간지 발행인들도 독자적인 연맹을 결성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들의 싸움은 자기중 심적이고 강한 의지력의 사나이들

    인 뉴욕 타임스의 전무이사 겸 뉴욕 발행 인협회장이 었던 애머 리 브래드 포드 (Amory Bradford) 와 ‘빅6’의

    위원장인 버트램 파워스 사이의 힘 겨루기 였다.

    필립스 아카데미와 예일대학, 리고 예일법과대학원에서 공부한 브래드포드는 핸섬하고 고고하면서

    성격이 급하고 거만한 사람이었다. 파업 중재인 가운데 한사람은 그의 얼굴에 드리운 ‘얼음같이 찬 경멸감’ 이 어찌 나 차게■ 느껴 졌던지 호텔측 에 실내온도를 올려달라고 요청할

    까 생 각하기까지 했 다고 한다.반면에 고교 중퇴 생인 파워 스는

    17살때부터 인쇄공으로 일해왔으며 얼마나 개성이 강한지 그의 지지자 나 반대자 모두가 은색 리 리 에 말쑥 한 차림의 그ᅵ를 미국에서 가장 우수 한 노동협상가로 꼽을 정도였다.

    파워스는 협상 벽두에 기본급 141

    달러에 주 93달러의 임금인상을 요 구했고 발행 인측은 불과 8달러 의 인 상안을 내놓았다. 노사협 약이 만료 된 시점에서 노조측의 인상요구는 38달러로 내려왔고 로버트 와그너

    60

  • 뉴욕시장이 특별협상을 주선한 후 파워스는 요구액을 16.42달러까지

    낮춘 가운데 쌍방은 합의에 접근하 고 있었다. 그런데 브래드포드가 거 드롬을 피면서 “그것을 어떻게 10달 러짜리 지폐에 구겨넣지”라고 말하 면서 노조측의 요구를 거부함으로 써 협상은 깨어지고 전쟁이 시작되 었다.

    파업 사태 가 장기 화되 자 케 네 디 대 통령과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 필 립 그레이엄(케네디의 절친한 친

    구), 노동장관 등 술한 사람들이 중

    재에 나섰으나 허사였다. 이때 뉴욕 의 신문들은 타임스와 데일리 뉴스 를 제외하고는 모두 적.자를 면치 못 하고 있었다.

    마침 내 3월초 뉴욕 타임스가 협 상 타결의 희망을 포기하고 신문발행 을 재개함으로써 발행인측 전열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와그너 사장 이 거중조정에 나서게 되어 합의가

    성립되었다. 이 최종결과는 임금인 상이 발행인측이 파업직전 최후로 제시한 인상수준보다 불과 2.50달 터밖에 높지 않은 12.63달러에 불과 했을 뿐이었으나 노조측은 근무시 간의 단축과 노사협약 만료시한의

    통일, 신기술도입의 제한 등을 관철 시킴으로써 발행인측을 거의 완전

    히 굴복시켰다.파업기간중 뉴욕 타임스 편집국

    장 터 너 캐틀리 지 (Turner Catled- ge) 와 설즈버 거는 거의 매 일 밤 만나

    판매국장과 다른 몇사람들과 함께 사태를논의했는데,이때 검은마리 칼에 활달한 성격의 설즈버거는 그 자신과 나머지 참석자들 사이에 일 종의 ‘클럽 동지’와 같은 기분을 '가지 고 있었다. 특히 캐틀리지 편집국장 은 아버지의 술친구이자 여 행 동반

    자로서 25년이나 연하인 설즈버거 에게는 흡사 보호자와도 같은 존재

    였다.캐틀리지 국장의 사무실에서 사

    태를 검토하면서 설즈버거는 노조 내부의 주도권 싸움때문에 파업사

    태가 불가피했었다고 결론내렸다. 또한 발행 인측은 그들 나름대로 분 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적절히 대응 할 수가 없었고 모든 것 이 순조로웠 다고 할지라도 브래드포드의 오만 이 노조와의 타협을 망쳤던 것 이 다.

    설즈버거는 윤전기가 서자마자 계열 제지회사를 하나 가지고 있을

    ᅪ뿐인 단일제품회사인 뉴욕 타임스

    의 이익금이 공중으로 중발해버리 는 모습을 보면서 “노조와 맞서 버

    티어 나가려면 회사의 이익기반을 강화해 야 되겠다. ”고 다짐했다.

    드라이푸스의 죽음

    파업이 끝난후 뉴욕 타임스의 발 행 인 오 빌 드 라 이 푸 스 (Orvil Dryfoos)는 푸에르토리코로 휴양

    을 떠났는데 그: 자신이 “생애중 가 장 고통스러웠던 100여일” 이라고 토로한 그때의 과로때문인지 심장 병 이 도져 그곳 병원에 입원하게 된

    다.그는 2차대전시 군입대를 지원했

    다가 결핵성 심장병을 앓았다는 사 실을 알게 되 었고 노조 파업중에는 심장박동에 이상이 생겨 의사들이 강심제를 복용케했다. 병원에 도착 했을 때 드라이푸스의 용태는 매우 악화되어 있었고 뉴욕으로 후송되 어 공항에 도착하는 즉시 컬럼비아 장로교 메디컬 센터의 하크니스 파

    빌리안 병원으로 직 행했으나 5월 25 일 그곳에서 50세를 일기로 사망했 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였던 제 임스 레스턴은 조사에서 그가 2년

    간 뉴욕 타임스의 발행 인으로 있었 던 재임기간에 “ 단지 스스로의 생명 을 소모해 버렸다.”고 아쉬워했다.

    드라이푸스의 죽음은 타임스를 새로운 위기에 몰아넣었다. 타임스 의 전 발행인이며 당시 타임스사 이 사회 희장이었던 아서 헤이스 설즈 버 거 (Arthur Hays Sulzberger) 는

    발행인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 고 판단,드라이 푸스의 후임자 선정 에 착수하는데 가족들 모두에게 받 아들여 질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외 아들인 설즈버거밖에 없다는 것을 금방 깨 달았다. 그는 아들.이 파업 기

    “사회적 격변 속에 오늘의 뉴욕 타임스가 있게 된 것은 타임스가 한 발은 현대 산업사회에,

    다른 한 발은 설즈버거 가운의 전통적 가치관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면서

    변화에 떠밀리는 대신에 그것을 수용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61

  • 매스컴명저다이제스트

    간을 통해 “ 처음에는 소년으로 그

    사태를 맞았으나 일이 끝났을 때는

    모두가 그의 판단을 존중하는 원숙

    한 어른으로 변한 것” 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나중에 토로했다.

    이때 타임스사의 전무이사일 뿐

    만 아니라 부사장과 이사회 임원이

    기도 했던 애머 리 브래드포드는 자

    신이 좀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

    도 그는 젊은 설즈버그를 대단치 않

    게 생각하고 있었고 설즈버거 역시

    그를 마땅치 않게 여겼었다. 드라이

    푸스가 죽고 2주일쯤이 지났을 때

    아서 헤이스 설즈버거는 브래드포

    드를 불러 아들을 발행인으로 지명 할 것이라고 통고했고 이에 브래드

    포드는 “ 가족 모두가 합의했는가”

    고 되물으면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2주일후 아서 오크스 설

    즈버 거 는 타임스의 사장 겸 발행 인

    으로 선임되었고(타임스 역사상 최 연소 사장) 같은날 브래드포드의 사

    임 도 발표되 었다 . 타임스에 실린 성

    명에서 브래드포드는 자신이 “ 개인

    적 인 사정과 회사의 인사개편에 찬

    성하지 않기 때문에 ” 사임한다고 밝

    혔다.

    설즈버거 의 누이 루스 골든은 타 임스 사보에 기고한 글에서 뉴욕 타

    임스의 새 발행인이 스카치를 즐기

    며 익살과 재담을 좋아하고 기차나

    비행기 시간에 습관적으로 일찍 도

    작하고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없으나 교묘하게 상대방에게

    이 사실을 숨기거나 상대방을 아주

    극진히 예우하여 이름을 부르지 않

    는 것처럼 넘긴다고 썼다.

    설즈버거는 어머니가 8살인 그에

    게 장차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물었

    을 때 “ 세계의 왕 ” 이 되어 전쟁을 중

    단시키고 모든 나라가 서로 친구가

    되도록 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설즈버거의 아버지는 20대의 아들

    부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면서

    “ 신분에는 책임이 따른다” 는 앞서

    의 대화내용에 언급, “ 좋은 집안에

    태어나는 행운을 가진 사람은 그렇

    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사회에 대하

    여 더 큰 책임을 지니고 있다. ”고 거

    듭 강조했다.

    설즈버거가문의 전통

    설즈버거의 할아버지며 뉴욕 타임

    스의 재 건자인 아돌프 오크스 설즈

    버거는 그가 9살이었을 때 죽었다.

    그래서 설즈버거는 할아버지를 언

    론인으로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식사시간이나 다른 기회에 할아버

    지는 엄격한 훈계가 아니라 따뜻한

    체온을 통하여 손자에게 설즈버거

    가문의 전통을 전수시켜 주었다.

    테 네 시 주 차 타 누 가 (Chattanooga) 에서 11살 때 신문

    배달원으로 차타누가 타임스외; 인

    연을 맺은 아돌프 오크스는 그후 이

    신문의 여 러 부서를 두루 거치면서

    경험을 쌓은 후 약관 20세에 스스로

    이 신문을 매수(현금 250달러 차입,

    부채 1,500달러 인수조건), 직접 운

    영함으로써 대대적인 성공으로 이

    끌었다 . 그는 이 경험을 동부에서

    다시 한번 되풀이하고자 1897년 뉴

    욕으로 떠난다 .

    아돌프 오크스는 처음에 매수대

    상으로 뉴욕 머큐리를 지목했으나

    매수에 실패하고 친지의 귀팀에 따

    라 방향을 뉴욕 타임스로 돌렸다.

    당시 이 신문은 30만달러의 부채를

    걸머지고 자금난에 빠져 있었다. 사

    주측은 신문사를 지방 유력자에게 넘기고자 했으나 회사 사정 이 너무

    나 나빴기 때문에 아무도 거들떠 보 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아돌프 오

    크스는 그로버 클리볼랜드 대통령

    과 다른 명사들을 동원, 자신을 사

    주측에 추천하도록 하는 등 적극공

    세를 편 결과 자기 돈은 단지 7만5,

    000달러만 내고 앞으로 3년간 연속

    혹자를 낼 경우 자신에게 주식 과반

    수를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타임스

    를 인수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당

    시 알만한 사람들은 뉴욕 타임스를

    되살리려 하는 것은 죽은 창업자들

    을 무덤에서 살려내는 것만큼이나

    아서 오크스 설즈버거

    어려울 것.이라고 비웃었다.

    이 신문은 1851년 9월 뉴욕 데일

    리 타임스라는 이름하에 헨리 레이

    먼드와 조지 존스라는 두사람이 70

    만달러를 투자하여 시작했다. 뉴욕 헤럴드 트리분에서 각기 편집국과

    영업부서 간부로 일했던 두 사람은 정 치 적 으론 중도적 이 며 선정적 이지

    않은 신문을 만들 경우 뉴욕시 일대

    에서 상당한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 을 것 이 라고 생 각했으며 6단 4면 체

    제에 가격 1페니의 창간호에서 “ 우

    리는 되도록 냉정을 잃지 않도록 노

    력할 것이 다. ” 고 다짐했다. 당시 이

    창간호에는 유럽에서 들어온 여러

    62

  • 건의 기사와 타임스 기자가 끝내 현

    장을 찾아내지 못했던 (그러나 경쟁

    지 기자는 찾아냈던) 화재사건 1건,

    그리고 라이벌 대장간 단체들 사이

    에 벌어질 뻔했던 주먹싸움에 관한

    기사 1건이 실렸다.

    레이먼드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

    고 있었고(한때 그는 국회의원과 공

    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 항상 공화당을 지지 하는 신

    문이긴 했으나 비교적 중립적으로

    타임스를 만들었다. 창간 1년만에

    발행부수는 2만 6 ,000부로 늘어났

    고 10년 후에는 7만5,000부로 늘어

    나면서 확고한 이익기반을 잡았다 .

    (이때 신문제호에서 ‘데일리 ’를 빼

    고 가격도 부당 2센트로 올렸다 .)

    1869년 레이먼드가 죽자 업무쪽

    을 담당해왔던 존스가 신문 전체의

    책임을 맡아 그의 경영하에 타임스

    는 정치 협잡꾼인 월리엄 트위드 일

    당에 대한 용감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터나 이때부터 타임스는 재정적

    어 려 움을 겪 기 시 작했다. ᅵ본사 사옥

    건축비와 지 가인하(뉴욕 월드 및 선

    과의 경쟁때문에 4센트서 2센트로

    인하)와 1884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

    화당 후보 제임스 블레인 지지를 거

    부한데 따른 공화당 광고주들의 광

    고게재중단 등으로 상황은 한층 더

    악화되었다.

    타임스의 재건자 아돌프

    1891년 존스가 죽은 후 그의 상속

    자들은 회사의 상황을 되돌리는데

    실패하고 1893년 편집인 찰스 밀러

    가 이 끄는 그릅에 신문을 매 각했다.

    하지만 밀러의 어설픈 경영으로 사

    정은 더욱 나빠졌고 아돌프 오크스 설즈버거가 인수에 나섰을 때에는

    발행부수 1만9,000부에 판매부수가

    고작 9,000부에 불과했다. '

    인수 즉시 아돌프 오크스는 반품

    정책을 바꾸어 신문 판매점들이 더 욱 적극적으로 판매에 나서게 하고

    북 리뷰란과 고급 매거진을 신설했

    고 신문 표어 현상모집을 전개,2만

    건의 응모가 몰리는 성 황을 이루었

    다. 그러나 아돌프 오크스는 “ 게재

    할 가치 가 있는 모든 뉴스를 ” 이 라는

    그 자신의 표어를 바꾸지는 않았다.

    아돌프 오크스에게 있어서 좀더

    과감한 도박은 1898년 10월에 닥치

    게 된다. 당시 월리엄 허스트의 뉴

    욕 저널이 스 페 인 • 미국전쟁을 요

    란하게 떠벌리고 나섬으로써 타임

    스는 그간 쌓아온 기 반을 대부분 상

    실하게 되었다. 전쟁때문에 광고수

    입이 격감한데다 전쟁 취재에 있어

    서 돈많은 경쟁지들에 완패했다. 이 에 아돌프 오크스는 타임스를 해체

    해버리는 기분으로 판매가격을 부

    당 3센트에서 1센트로 내렸다.

    뉴욕 월드와 저널은 이미 신문을

    1센트에 팔고 있었고 두 신문 모두

    3류지로 평판이 나 있었는데 비하여

    타임스는 항상 고급지로서 유력 독

    자층을 겨냥해 왔다. 따라서 이번

    가격인하를 통하여 타임스는 엘로 페이퍼의 대체물을 찾고 있던 대중

    속으로 기반을 대거 확대할 수 있게

    되 었 다 . 타 임 스 의 ' 발 행 부 수 는

    1898~99년 사이에 2만6,000부에서

    7만6 ,000부로 늘어났고 1901년에는

    10만부,아돌프 오크스가 77세를 일

    기로 사망했을 때에는 45만부로 늘

    어 났다.

    부수 증가와 함께 신문판매 가격

    도 꾸준히 인상되었고 타임스는 고

    급지를 지향하는 스스로의 엄격하

    고 사려깊은 편집 방향도 그대로 유

    지할 수 있게 되었다.

    ‘펀치’의 등장

    아돌프 오 크 스 를 승 계 ,타임스의

    새 발행인이 된 44세의 아서 헤이스

    설즈버거는 당초 직물 무역업에 종

    사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강권으로

    그를 도와 타임스에 합류했다. 아서

    헤이스는 아이피진과 결혼, 슬하에

    마리안과 루스, 주디스 세 딸을 두

    었고 마지막으로 1926년 2월 아들

    아서 오크스를 얻게 되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서 헤 이스는 아들이

    **주디의 끝 없 는 쇼에서 펀치

    (Punch) 역할을 할 것” 이 라고 말했

    기 때문에 아서 오크스에게는 ‘편치 ’

    어떠한 평가기준에 의하든 A

    뉴욕 타임스에1있어서아서 오크스 쓿즈버거의 시대는

    눈부신 성장의 시기였다.

    그의 재임기간중

    매출고는 거의 100배나 증가했고

    87년의 이익금은 1 가 취임하던 장3년도의

    총매출고와 같은 규모이다.

    63

  • 매스컴명저다이제스트

    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 (편치는

    코 믹 인 형 극 ‘Punch and Judy

    Show ’의 남자주인공, 주디는 그의

    아내)

    귀여운 소년이었으나 성적은 지

    극히 평 범했던 편치는 “ 학교측이 나

    롤 내쫓기 전에 어머니가 나를 끌고

    나왔기 때문에” 학교를 자주 옮겨

    다녀 야 했다고 회고한다. 학교공부

    가 싫었던 그는 17세에 아버지의 승

    낙을 받아 해병대에 입대, 생애 처

    음으로 독립적 인 생 활을 하며 “ 스스

    로 한 사람의 책 임 있는 인간으로서

    맡은 일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 ” 는

    기쁨을 맛본다.

    그는 군생활을 즐겼고 해병대에

    서 새롭게 성숙해졌다 . 그리고 1946

    년 제대한 후 컬럼비아대학에 진학

    했고 1951년 졸업한 직후 한국전이

    발발함에 따라 해병대에 재소집되

    어 17개월간 복무하는데 이때 그는

    아내 (바바라 그랜 트)와 아들(아서

    오크스 2세 )을 거느리고 본격적으

    로 사회경력을 쌓기 시작하고자 하

    는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편치의 할아버지는 뉴욕 타임스 의 소유권을 손자인 편치와 세 손녀

    에게 상속하도록 유언했기 때문에 타임스에서 편치의 위치는 확고히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서 헤이

    스는 아들이 우선 다른 곳에서 경 험

    을 쌓는 것이 좋다고 생각,워싱턴

    지 국 장 아 서 크 로 크 (Arthur

    Krock) 를 통해 밀워 키 저 널 발행 인

    J.D .퍼거슨에게 아들의 훈육을 부탁

    했다.

    1953년 2월 펀치'는 밀워키 저 널의

    기자로 입사하며,54년 뉴욕으로 돌

    아와 잠시 머문 후 타임스의 외국특

    파원이 되어 프랑스(여기서 첫 결혼

    이 파경),영국, 이탈리아에서 활동

    한다. 1956년 그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그해 12월 캐톨 퍼 맨 (Carol

    Fox Fuhrman) 과 재혼한다.

    이때 타임스에서 편치가 하는 일

    은 오로지 허드렛 일 뿐이 었고 시 간

    의 대부분을 건물 이곳저곳을 그냥 둘러 보는데 보냈다. 당시 편집국장

    터너 캐틀리지는 발행인 오빌 드라 이푸스에게 여러차례에 걸쳐 장차

    의 타임스 후계자를 그처 럼 허 술하

    게■대접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으

    나 드라이푸스는 손을 내저으며 그

    자신도 편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

    에이브러햄 로 젠탈

    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드라이푸스의 ■후임으로 타임스

    발행인이 된 첫날,펀치는 누이 주 디스에게 “ 나는 첫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내가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다는 거 야. ” 라고 익살을 떨었다. 그

    러 나 이 말은 익 살에 그치 지 않고 뉴

    욕 타임스를 새롭게 개혁하려는 그

    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새 발행인 아서 오크스 설즈버거

    (펀치 )가 취한 첫번째의 조치는 전

    무이사겸 부사장이었던 브래드포드

    밑에서 편집국 이외의 모든 부서들 이 직접 그에게 보고하면서 각부서

    상호간의 횡적 유대를 거의 차단당

    해왔던 보고체계를 타파하는 것과

    주요간부들을 외부에서 영입하던

    관습을 깨고 내부에서 기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타임스의 사보인 ‘타임스 토크 ’

    (Times Talk) 에서 설즈버거는 그

    배경에 언급하면서 “ 타임스 사원들

    은 하늘을 찌를둣이 꼿꼿이 뻗은 갈

    대숲의 모양이 다. 모두가 같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각기 하

    늘로 내뻗치려고만 할뿐 서로를 연

    결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

    고 표현했다.

    막스 프랑켈

    조직개편에 따라 한때 15개 부서

    에서 15층(여기 에 발행 인과 전무이

    사의 방이 있었음)에 직접 보고하던

    것을 6개부서 (4개 영업부서와 논설

    실, 편집이사)만이 그에게 보고토

    록 바꾸고 64년 1월에는 타임스 서

    부판을 패쇄시켰다. 타임스 국제판

    역시 없애려고 했으나 헤럴드 트리

    분이 국제판을 계속 하고 있었으므

    로 “ 먼저 백기를 들기가 싫어서 ” 국

    제판패쇄를 보류했을뿐이 다. 얼마

    지 나지 않아 타임스 사원들은 설즈

    버거가 온화하고 쾌할하면서도 결

    코 우유부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

    견하게 되었다.

    64

  • 로젠탈, 메트로폴리탄을 맡다

    설즈버거가 타임스의 새로운 발

    행 인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을 때 타

    임스의 편집국에서는 에이브러행

    마이클 로젠 탈 (Abraham Michael

    Rosenthal) 이 혜성처럼 떠 오르고

    있었다. 온타리 오주 출신으로 뉴욕

    에서 성장한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다섯 누이 가운데 4명이 성

    장하기도 전에 사망하는 지극히 불

    우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강한 의지

    로 역경을 이겨내고■시티 칼리지의

    타임스 학생기자로 활동한 후 정규 기자가 된다. 책벌레에 열정의 사나

    이기도한 로젠탈은 유엔출입기자를

    거 쳐 인도와 폴란드 특파원 (이곳에

    서 풀리처상을 받았고 또 추방되기

    도 한 다 .)으 로 활동하고 동경으로

    자리를 옮겨와 있었다.

    그■때 편집국장 터너 캐틀리지는

    “ 마치 다른 곳에서는 써먹을 데가

    없는 기자들의 수용소” 같았던 메트

    로폴리탄 취재부를 대대적으로 쇄

    신하려고 구상해왔으며 비록 관리

    능력은 걱정스러웠지만 “ 명기자가

    명기자를 훈련시킬수 있다. ” 는 신 념하에 로젠탈에게 메트로폴리탄

    취재부장으로 취임할 것을 요청한

    다. 이때 로젠탈은 논설주간 존 오

    크 스 (John Oakes) 로부터 논설위

    원 자리를 제의받고 독자적인 칼럼

    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던 중이 었으

    나 캐틀리지의 집요한 설득에 굴복 하고 만다. 로젠탈은 특히 캐틀리지

    가 자신에게 “자네가 우리의 내슈어

    (1955년 프리크니스 및 벨먼트 경마

    의 우승마)가 되어 주어야겠네. ” 라

    고 하는 말을 듣고는 그의 요청을 따

    르기로 결정한다.

    로젠탈의 전임자인 프랭크 애덤

    스는 메트로폴리탄 취재부가 너무

    나 방대했기 때문에 취재기획이나

    지휘를 하기보다는 흡사 대형공장

    같은 부서내의 서무업무를 처리하

    는데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었 다. 따라서 로젠탈은 모든 서류업무

    룰 행정담당 차장에게 완전히 일임 하고 자신은 책상을 기자들과 맞대

    놓고 “물방울처 럼 영롱하고 모두를

    경 탄케 하는 기 사를 쓰도록”부원들

    을 독려했다. 그는 자신이 초과근무

    일지에 사인이나 하려고 뉴욕에 오

    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편집국장에

    게 취재비의 대폭증액과 경력에 상

    관없이 유능한 기자의 파격적 인 승

    급과 주요 출입처 배치를 요구하여

    관철시 킨다. 이때 그가 요구했던승

    급은 단순히 10%, 10달러 의 규모가

    아니라 40~50%에 이르는 것이었

    고 이때부터 뉴욕 타임스■편집국에

    는 이른바 균형 봉급 (기자는 스스로

    의 가치만큼 받는다) 이 라는 새로운

    개념이 자리잡게 된다 .

    그■터나 로젠탈의 개혁바람은 타

    임스 편집국 안에서 만만치 않은 비

    판세력에 부닥치게 된다.그 중에서도 특히 로젠탈은 “ 편집

    의 수호신” 이 라고 불리며 야간국장

    과 ‘불펜 ’ (기사 제목과 단수,게재형

    식 등을 결정하는 부서)의 책임자였 고 ‘승리자와 죄 인들’ (Winners &

    Sinners; 사내 정기간행물로서 타

    임스의 최早수 기사와 최악의 기사

    를 뽑아 싣는다) 의 집필자였던 데오 도르 번스타인 (Theodore Bemst-

    ein) 과 그 부하들의 강력한 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은 기존의 틀을 무시하면서

    화려한 스타일의 독창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로젠탈과 그의 후원을 받

    는 신진기자들의 글을 가차없이 죽

    이려 했고 편집국 안팎에서는 로젠

    탈이 독재자이고 돈을 밝히며 부하

    들 사이에 불만이 팽배해 있다는 뒷

    공론이 무성했다. 이 결과 타임스의

    감찰요원이 드디어 메트로폴리탄

    취재부원들의 사기문제를 윗조사하

    기 시작했고 이를 알게된 로젠탈은

    캐틀리지 국장에게 강력 히 항의,그 로부터 계속 소신껏 일하라는 격려

    를 듣게되며 감찰요원도 이 일에서

    손을 때고 철수한다.

    편집국조직개편

    캐틀리지의 다음 개혁목표는 이 른바 ‘공작령 ’ (Dukedom) 이 라고 불

    , 설즈버거가 타임스의 새로운

    발행인으로 :다리* 굳히고 있을때

    메트로폴리탄 취재부장을 맡으며 혜성처럼

    육오른 로젠탈은 '펜터건 페이퍼스,보도를 놓해

    타임스 편집국의 주역으S 등장,

    1986년 프랑켈에게 편집총책을 넘겨줄

    때까지 타임스 편집국을 이끌었다.■ 외. ' - ' • ■■ ■ -

  • 매스컴명저다이제스트

    리던 타임스 편집국의 분권체제를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타임스는 주간과 야간부장

    들 사이에 전혀 의사소통이 없었고

    외신은 발행인의 조카가 파리지국

    에서 통제하고 일요판은 일간팀과

    는 전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움직

    이는 별동대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

    었다. 여러 해 전부터 캐틀리지는

    이들을 자기 휘하에 끌어넣으려고

    애썼으나 매거 진과 북리뷰 , 주간 리

    뷰 (The Week in Review) 그리 고

    여타 일요 피처물들을 제작하는 선

    데이국 은 여전히 레스터 마켈

    (Lester Markel) 의 지 배하에 남아

    있었다. 능력은 탁월하나 완고한 마 켈은 아돌프 오크스 시절부터 근속

    해 왔고 발행인에게 직접 보고하고

    있었는데 캐틀리지가 이를 바꾸어

    주도록 요청했을 때 아서 헤이스는

    응하려하지 않았고 드라이푸스는 그러라고 하면서도 마켈이 은퇴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취임 후 2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설즈버거는 발행인 메모를 통해 일

    체의 대대적인 조직개편은 없을 것 이라고 다짐함으로써 사내의 술렁

    이는 분위기를 가라 앉혔다. 그러 나

    마켈이 캐틀리지와 대립하고 있다 는 것을 알고는 조치를 취하기로 결

    심한다 .

    그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편집

    이 사 (Executive Editor) 라는 자리

    롤 새로 만들어 캐틀리지를 승진시

    키는 한편 마켈은 부편집인이라는

    직 책에 임명,14층으로 사무실을 옮

    기고 발행인에 대한 자문역할과 새

    로 생긴 홍보국을 맡도록 했다.

    ' 그리고 편집국장에는 특파원 출

    신의 서글서글한 성격의 소유자이

    며 트루먼 대통령의 사위이기도한

    클리프턴 대니얼을 기용했다.

    드디어 타임스는 1962~63년 파

    업으로부터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

    1964년에는 발행부수 74만부(일요

    판은 그것의 두 배 ), 매출고 1억3,

    7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다만 이익

    률은 여전히 2%로 아주 낮았지만

    이것 역시 65년에는 3% , 66년에는

    거 의 5% 로 회 복되고 발행부수도 90

    만부까지 늘어났다 .

    새로운 기회

    이때 뉴욕의 여타 신문들은 고전 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며 1966년 3

    월 헤럴드 트리분과 월드 텔리그램,

    저널 아메리칸 3개지는 월드 저널

    트리분사로 합병하고 조석간으로

    각기 헤렬드 트리분과 월드 저널을

    발행키로 결정한다. 그러나 첫 신문

    이 나온 후 노조가 파업을 시 작,그_

    해 9월 두 신문은 다시 월드 저 널 트

    리분으로 통합하고 재 출발했으나 1

    년만에 문을 내린다.

    이 결과는 뉴욕 타임스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 주었다. 즉 그것은 한

    편으로 헤럴드 트리분이 없어진 이

    상 타임 스 국제판을 계속 발행할 필

    요가 없어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뉴욕에서 석간지로는 뉴욕 포스트

    하나만 남게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석간발행 가능성이 생겨난 것이다.이보다 여러달 전에 설즈버거는

    마켈에게 뉴욕 타임스의 미래를 연

    구하는 특별위원회를 맡도록 했으 며 에이브러행 로젠탈에게는 석간

    지 발행준비 기획팀을 이끌도록 했

    다.

    그런데 이 두가지 업무가운데 더 중요한 것은 로젠탈이 맡은 석 간 기

    획 팀 이 었고 편집부국장을 겸 임 하면

    서 영향력을 급속히 넓혀가던 로젠

    탈은 이 기획팀에 타임스 편집국의

    최우수 인재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앞으로 자신과 함께 타임스를 이끌

    어가게될 핵심요원들과 깊은 유대

    관계를 쌓게 된다. 이때의 멤버들

    중에는 주간 타임지의 인도지국장

    과 런던 특파원으로 일했고 존슨 행

    정부 시절에 국무성 대변인을 지낸 제 임 스 그 린 필 드 (James Green

    field) 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의 멤버는 설즈버거의 강권에

    따라 1952년부터 타임스의 광고미

    술국장으로 일해온 루이스 실버스

    타 인 (Louis Silverstein) 이 었는 데

    타임스의 석간지 구상이 좀더 화려

    하고 다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설즈버거는 기획팀의 연구결과를

    보고받은 후 어 떤 이유에서 인지 석

    간지 계획을 백지화하면서 “그■것이

    타임스의 고객들에게 한층 싼 광고

    를 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줄 뿐 ” 이 라고 둘러 댔다. 물론 기 획 팀은 매

    우 낙담했지만 이때 그들이 개발한

    여 러 구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타

    임스의 지면쇄신을 통하여 하나씩 선보이게 된다.

    한편 1964년 제임스 레스턴이 워

    싱 턴 지국장에서 물러 난 후 그의 후

    임자인 톰 워커가 기자로서는 유능 했으나 관리능력 이 신통치 않아 캐

    틀리지의 고민거 리가 되 어왔다. 그

    래서 해결책으로 그는 그린필드를

    지국장에 기용하기로 작정했으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워싱턴지국 기

    자들이 ‘외부인의 둥장 ’에 반발하고

    나서는 바람에 무산되 었다. 이 파동

    으로 그린필드는 웨스팅하우스 방

    송국 부사장으로 옮겨가지만 설즈 버거로부터 외신부장 자리를 제의

    받고(우선 차장으로 부임한 후 적 절

    66

  • 한 시기에 부장으로 기용한다는 조 건부로) 타임스로 복귀한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타임스 국제

    판 편집 인인 시드니 그루 슨 (Sydney

    Gruson) 에 게서도 일어났다. 여 러

    나라의 타임스 지국장을 지 냈고 외

    신부장을 거 친 그루슨은 헤 럴드 트 리분이 '파산한 후 설즈버거로부터

    그 신문의 월터 세이어 사장과 ‘공

    동사업 ’가능성을 타진하도록 지시

    받고 6개월 후 타임스 국제판과 헤

    럴드 트리분을 합치기로 합의했다.

    아울러 그 자신은 새 신문의 발행 인

    을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마지막 순

    간에 헤럴드 트리분에 주식지분을

    가지고 있는 워싱턴 포스트측이 반

    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그 계획이 바

    뀌게 되어 그루슨은 할일없이 뉴욕

    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터나 자신을 기 다리고 있는 것

    은 편집국에 덩그라니 놓여 있는 책

    상 하나 뿐이 었고 마땅한 책 임 이 주

    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뉴스데

    이 의 부발행 인으로 옮겼다. 그러 나

    설즈버 거 가 그 회 사의 사장 해 리 구

    겐하임에게 편지를 보내 “ 언젠가는

    그를 타임스로 복귀시킬 것” 이라는

    점을 다짐하며 본인 역시 뉴스데이

    편집국에서 공산분자들을 쫓아내라

    는 구겐하임의 압력에 지쳐 그는 9

    개월만에 타임스로 되돌아와 발행

    인 보좌역이라는 자리를 맡게된다.

    경영혁신

    1964년 타임스사 중역들은 설즈

    버거의 주도하에 예산과 경영혁신

    에 착수한다. 당시 설즈버거는 타임

    스사의 경영에 관해 “우리는 하느님

    에게 너무 기대는 것같다. 과학적으

    로 작성했다는 예산과 이익예측이

    목표를 100% 나 빗나갔는데 다행히

    도 좋은 방향으로 빗나갔으니 망정

    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일났을 것”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설즈버거는 영업부서가 컴퓨터

    한대 없이 일하고 있고 각 부서 장들

    이 마땅한 후계자를 양성하지 않고 있으며 희사 자체는 노조의 명에에

    얽매여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가 없

    다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그는

    회사의 컴퓨터화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또 필연적으로 닥치게 될

    노조의 파업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신문을 계속 발행할 수 있는가, 그 리고 경영 다각화를 위 해 다른 기 업

    을 인수한다면 어 떤 기준으로 그렇

    게 할 것 인가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

    하기 시작했다.설즈버거가 전개한 이 경영혁신

    작업은 가차없이 추진되었고 경리

    국장 프랜시스 콕 스 (Francis Cox)

    와 여타 간부들도 “ 희사의 운명이

    걸려있다 .” 고 부하들을 다그치며

    그를 거들었다. 심 지 어 편집 이 사 캐 틀리지까지도 예산기획에 관해 다

    른 중역들을 설득하려고 애쓸 정도 였다. 그러나 몇달 후에는 캐틀리지

    자신이 느닷없이 “ 편집국을 예산기 획 제도에서 제외 하겠다. ” 고 설즈버

    거에게 반발했다가 경영혁신에의

    참여 여부가 결코 선택적이 아니라

    는 핀잔을 받을만큼 회사 안에서는 크고 작은 진통이 잇따랐다.

    기업공개

    뉴욕 타임스의 경영다각화는 기

    업공개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설즈 버거는 노조와 여타의 위협으로부

    터 타임스를 더욱 안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사업다각화를 필요로 했고 거기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면서.

    장차 상속세 등으로 인하여 타임스

    가 가족들 손에서 떠 나게 되 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기업공개가 불가피

    했다.그_ 당시 타임스는 이미 무의결권

    주식 (A 형 주식 )을 상당액 발행하고

    있었고 의결권 주식 (B형 주식)의

    일부도 발행했으나 그 대부분을 가

    족들이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기업

    공개가 논의되기 훨씬 이전부터 타

    임스는 라디 오 방송국 W O X R 을 소

    유해 왔고 1963년에는 소규모의 도

    서 줄판부를 설립했으며 64년에는

    췌벡의 한 제지회사의 주식 49%를

    인수했고 교육보조자재 개 발회 사의

    지배권을 취득하기도 했다.

    1970년대는 타임스에 있어

    비상한 기간이었다. C-섹션 특집남과

    새로운 6단체제를 채택하고 연방정부와의 ‘알권리’에

    관한 헌법심판소송에서 승리했다. 또한

    노초에 자동화를 수락토록 했으며 사내의

    여권 및 소수인종분규를

    무난히 수습할 수 있었다.

    67

  • 매스컴명저다이제스트

    그러나 아돌프 오크스 설즈버거

    는 타임스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원칙적으로 경영 다각화를 거부해왔

    으며 또 사내에서도 기업공개를 할

    경우 중권시장을 통하여 받게될 외 부 압력에 타임스가 굴복해 야 할 것

    이라는 이유로 반대의견이 제기되

    고 있었다.가족 고문변호사인 에드워드 그

    린봄과 금융고문 조지 우즈는 B 형

    주식을 추가로 발행하여 자금을 확

    보하도록 비공식적으로 제의하고

    있었다. 그러 나 타임스사의 단골 법

    률사무소 로드 데 이 앤드 로드에서

    기업합병매수 (M & A ) 업무를 주로

    다루다 타임스 고문변호사로 자리

    룰 옮긴 신예 제 임스 굿데 일은 거기

    에 반대하면서 A 형주식으로기업공

    개.를 하되 중권거래소 규정에 어긋

    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의결권을 부

    여하고 국세청의 공개기업 조세감

    면혜택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야 한 다고 주장했다 . 예 일대와 시카고법

    대 출신인 그는 아돌프 오크스가 설

    립한 신탁계정에 주식의 과반수를

    남겨두게 되면 가족의 회사 지배권 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

    방식의 기업공개는 나중에 워싱턴 포스트와 다른 여러 언론사들에서

    도 원용된다 .)

    1968년 9월 드디어 설즈버거는

    “ 적절한 시기에”A 형 주식을 아메리

    칸 중권거래소에 상장시키겠다고

    발표, 그해 12월3일 주당 53달러의

    시세로 64만주를 공모하여 첫날 하 -

    룻동안에 모두 팔리 게 된다. 이로써

    타임스 신탁계정의 보유주식은 A 형

    주식이 50%를 약간 넘는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나 B 형주식은 계속 65%

    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같은 해 타임스사는 도서관용 복

    사판 출판사인 아르노 프레스를 취

    득하고 ‘골프 다이제스트’와 ‘워드랭

    글 북스 ’ (나중에 타임스 북스로 개

    칭 )롤 매입하여 그 다음해에는 독자 적인 백과사전 세트를 발간한다.

    경영다각화와 기업인수

    1970년 설즈버거는 타임스 역사

    상 최대의 기업인수 협상을 시작한 다. 그 대상은 ‘루크’지를 발행하는

    카울스 커 뮤 니 케 이 션 스 (Cowles

    Communications) 로 설 즈 버 거는

    공동소유자인 마이크 카울스와 적

    당히 만나는 자리를 만든 후 은근하

    게 “ 뉴욕 타임스에 귀하의 회사를

    파실 생각이 없는가. ” 고 타진,“ 루 크지를 빼고 전부 팔겠다. ” 는 응답

    을 받아낸다. 당시 루크지는어려움

    이 한두가지가 아니어서 타임스사

    가 절대 사려하지 않으리라고 짐작

    했기 때문에 카울스는 루크지를 매

    각대상에서 자진하여 제외시켰다.루크지를 빼고서도 카울스 커뮤

    니케이션스는 엄청난 매스컴그룹이

    었다. 거기에는 "패밀리 서클’과 교

    과서 출판사 1개소, 플로리다주의

    여러 신문사들,멤피스의 CBS제휴 T V 방송국, 그리고 일단의 의학잡

    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카울스

    커뮤니케이션스의 인수에는 시가

    5,000만달러 상당의 A 형주식 260만

    주가 소요되 었다. 그러나 타임스사

    는 여러 새로운 시장에 발판을 확보

    하고 스스로의 미래에 관하여 새로

    운 비전을 갖게 되었다. 후일 설즈

    버거는 이때를 회고하면서 “우리는

    거기서부터 성장하기 시작했다. ” 고 술회했다고 한다.

    타임스의 법무실장 굿데일은 한

    층 실질적 인 표현으로 “ 카울스 거 래

    때문에 타임 스사가 살아났다. 그.리

    고 기업공개를 하지 않았다면 카울

    스 인수가 불가능했을 것 ” 이 라고 단

    정한다. 또 1970년 굿데 일의 보좌역

    으로 타임스 법무팀에 합류한 젊은

    여류변호사 캐서린 대로는 그때부

    터 타임스가 규모도 작은데다 패쇄

    적인 파벌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으

    나 카울스 인수를 통하여 거대출판

    그룹으로 변모했다고 지적한다. 특

    히 타임스사는 그때까지도 신문발

    행을 돈벌이 수단이 아니 라 “ 우리가

    세계공동체에 매일 제공하는 선물”

    이 라는 생 각으로 신문을 만들어 왔

    는데 ‘패 밀 리 서클’을 포함한 카울스

    매체들을 인수함으로써 본격적인

    상업언론의 문에 들어서게 된 것이

    다. “ 이 것은 가히 뉴욕 타임스의 분

    수령이라고 할 만하 다.” 고 대로는

    평가한다.

    ‘펜터건 페이퍼스’와 로젠탈

    카울스 그릅 인수가 마무리되고

    있을 즈음 타임스는 또하나의 대사

    건에 휘말려들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 진원지가 편집국이었다. 이른바 ‘펜터건 페이퍼스 ’ (국방부 기밀문

    서)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워싱턴

    포스트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재정

    립할 수 있는 기회(뉴욕 타임스와

    대등한 신문으로 경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기회)가 되었지만 뉴

    욕 타임스에게 있어서는 신문의 존

    립 그 자체가 걸려있는 훨씬 더 중

    대한 의미를 지닌 대사건이었다.펜터 건 페 이퍼스 사건을 통해 워

    싱턴 포스트가 타임스와의 대둥성

    을 과시 하고자 애쓰고 있었을 때 타

    임스 간부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뉴욕 타임스;의 이미지와 이상에 견

    주어 이 사건을 평가하고 있었다. 나중에 설즈버 거는 타임스가 이 사

    68

  • 건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사람들로

    부터 “ 뉴욕 타임스의 기백이 죽었

    다 .” 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것이라

    고 말하곤 했다. 실상 설즈버거는

    닉슨 행정부의 반격이 그처럼 거세

    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며 기껏 스

    피로 애그뉴 부통령의 신랄한 연설

    이나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타임스

    의 신뢰성을 공격하는 발언 정도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로젠탈과 타임스의 다른 편집국

    간부들은 사건의 중대성을 훨씬 더

    심각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일반 국민들이 펜터건 페이퍼

    스의 공개를 비애국적인 행위로 간

    주하게 될 때는 뉴욕 타임스가 국민

    들로부터 배척받게 되지 않을까를

    몹시 걱정했다. 부장단의 일원이었

    던 엘런 시 걸 (Allen Siegal) 은 심지

    어 “ 닉슨이 자신들을 반역죄를 범했 다고 비난하고 국민들이 이를 믿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뉴욕 타임스

    가 설 땅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

    까 . ” 라는 점까지 우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로젠탈은 펜터건 페이퍼스의 보도

    롤 거부하는 것은 책 임 감을 저버 리

    는 행위 라는 확신에 도달하며 그의

    이러한 판단이 결국 뉴욕 타임스가 펜터건 페이퍼스의 보도강행을 결

    정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

    다.이 사건은 로젠탈에게 있어 또다

    른 의미가 있었다. 그는 펜터건 페 이퍼스의 보도여부를 결정하는 과

    정을 통하여 타임스 편집국의 주역' 으로 등장하며 끝내는 편집이사 캐

    틀리지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

    고 있었던 편집국장 E 클리프턴 대

    니얼을 제치고 설즈버거로부터 장

    차 타임스의 편집총책임자감으로

    인정받게 된다.

    1968년 6월 마침내 캐틀리지 가 편

    집이사 자리에서 물러나자 설즈버

    거는 두번이나 풀리처상을 받았고

    타임스의 워싱턴 지국장을 지낸 제

    임스 레스턴을 일단 그 자리에 앉히

    지만 1년만에 레스턴은 자신의 주3

    회 칼럼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물러난다 .

    이 시점에서 설즈버거는 레스턴

    에게 뉴스담당 부사장이라는 다분

    - 히 의례적인 호칭을부여하고 “ 유능

    한 젊은 간부들에게 좀더 큰 책임을

    맡기기 위하여” 인사개편을 한다고

    발표하면서 편집국장 대니얼을 부

    편집인으로 임명, 다 양 한 뉴스보도

    방법의 개선을 연구하도록 함으로

    써 그를 편집국 운영에서 완전히 배

    제시 킨다. 이는 물론 로젠탈을 위한

    조치로서 그는 편집국장에 임명되

    면서 동시에 발행인에게 직접 보고 할 수 있도록 됨으로써 사실상 편집

    총잭임자의 자리로 격상되었다.

    타임스의 역량 확인하다

    펜터건 페이퍼스를 맨처음 입수

    한 사람은 하버드대 출신으로 베트

    남 종군기자를 거쳐■ 타임스 워싱턴

    지국에 돌아와 있던 닐 시 한 (Neil Sheehan) 기자였다. 날로 미국의 참

    전이 깊어지고 정부는 이를 숨기려

    고만 하는데 분개해있던 시한은 우

    연히 대니얼 엘스버거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 역시 하버드대 동문으로

    서 베트남 전쟁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고위인사들의 행위에 혐오감

    을 느끼고 있었다.

    엘스버거는 국방장관 로버트 맥

    나마라를 위해 베트남 전쟁의 역사

    에 관한 극비의 공식문서를 작성하

    는데 참여했으며 상원 외교위원회

    를 동원하여 그 보고서를 공개토록

    하려 고 시도하기 도 했다. 그러 나 뜻

    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중 1971

    년초 시한을 만나게 되고 시한은 매

    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서 아내와

    함께 며칠 밤낮을 보내면서 방대한

    그 보고서를 복사한다.

    이 보고서를 입수한■후 로젠탈의

    가장 큰 고민은 그것 이 뉴욕 타임스

    를 물먹 이기 위하여 학생단체 둥에 서 조작해낸 것 이 아닌가 하는 점 이

    었다. 행정부에서 다년간 일한그린

    필드에게 보고서의 진짜 여부를 검

    토하게 한 것도 그때문인데 그린필 드는 그 속에서 자신이 직 접 보냈던

    전문까지 발견,그것 이 진짜임을 확

    인한다. 이에 로젠탈은 한편으로 정

    부 비 밀문서를 공개하는데 따른 법

    정투쟁을 준비하면서 시한과 20여

    명의 특별취재반을 편성, 보고서를

    기사화하는데 착수한다.

    19기년 6월13일 뉴욕 타임 스는 펜

    터건 페이퍼스 제1회분을 내보내면

    서 그간 타임스 내에서 벌어졌던 격

    론과 흥분은 전혀 내보이지 않은채 보고서 의 주요내용과 그 출처 에 대

    해서만 간략히 언급하는 지亏히 담

    백한 글을 시한과 헨드릭 스미스의 이름으로 내보냈다. 첫회분이 나간

    그날 오전 설즈버거는 시치미를 때

    고 벌써부터 예정되어 있던 해외출

    장을 떠나며 그날 밤 런던의 호텔 방 에서 본사로부터 법무장관 존 미첼

    이 연재중지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

    내왔다는 보고를 받지 만 그 요청을

    묵살한채 연재를 계속하라는 지시

    를 내린다.

    한편 편집국장 로젠탈의 입장에

    서는 행정부와의 대결도 걱정이었

    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뉴욕 힐튼호

    텔에서 비밀리에 진행해온 특별취

  • 매스컴명저다이제스트

    재팀의 작업이 도중에 누설되지 않

    을까 대단히 조마조마했다. 그는 보

    고서의 내용 가운데 국가기밀법에

    저촉될 수 있는 사항을 가려내기 위

    해 치밀한 작업을 벌였는데 대부분

    의 내용이 이미 단편적으로 행정부

    고위관리나 국회위원들의 입이나

    글을 통해 홀러 나왔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4대에 걸친 미국행

    정부가 어떻게 베트남 전쟁에 점차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공식기록으로선 지극히 귀중

    한 자료였으므로 설령 기밀사항이

    남아 있었을지 라도 "국민의 알 권리 ’

    롤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보도되어

    야 한다고 로젠탈은 다짐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을 통하여 뉴

    욕 타임스는 특별취재팀의 활동에

    관한 보안을 끝까지 지 킬 수 있었기

    때문에 내부적 역량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고 또 정부가 게재중지 가처

    분 명령을 법원에 신청,승인받았으

    나 1개월 후 대법원으로부터 그 명

    령이 기각됨으로써 뉴스보도의 경

    계선을 새로이 확대하는 값진 성과

    까지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왕국의 탈바꿈

    1970년대에 들어오기까지 뉴욕

    타임스는 설즈버거의 경영혁신 노

    력을 그런대로 쫓아왔다. 그러 나 그

    움직임은 조그마한 예인선에 이끌

    리는 거함처럼 느렸으며 주위환경

    의 변화는 너무나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1969년까지 지면이 없어 광

    고를 게재할 수 없을만큼 좋았던 경

    기가 70년대초의 불황과 함께 급냉

    각했고 뉴욕시의 재정위기가 깊어

    지면서 광고와 독자의 감소가 빨라 지고 교외지역에서의 경쟁마저 치

    열해지고 있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의 경영상황은

    19기년에 매출 2억9 ,000만달러에

    이익 950만달러, 74년에는 매출 3억

    9,000만 달러에 이익 1,200만달러

    로서 이익률이 매우 저조했다. 이에

    설즈버거는 제2의 경영혁신을 추진

    하기로 결심, 전무이사 월터 맷슨

    (Walter mattson) 이 그를 적극 돕

    는다.

    1960년2월에 약관 27세로 타임스

    사의 공무부국장으로 기용된 맷슨

    은 ‘만능 관리자 ’로 불릴 만큼 다재

    다능 했 고 1970년 에 이 사 (Vice

    -President), 72년 에 수석 이사

    (Senior Vice-President), 74년에

    전무이사(General Manager) 에 오

    른 다.

    1974년5월 맷슨은 첫단계로서 인

    쇄노조 지도자 버트램 파워스와 산

    업평화를 위한 협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한다. 이어 그는 설즈버거에게

    타임스사의 국장들이 새로운 경영

    혁신을 수행해가기에는 허 약하다고

    지적하고 1년안에 전원 교체하겠다

    고 진언,그의 동의를 받아내며 약

    속한 시한을 이틀 앞두고 광고에서

    판매,생산에 이르기 까지 모든 부서

    의 인사쇄신을 마무리짓는다.이때 스카우트된 인물들 가운데

    는 무뚝뚝한 개혁주의자 도널드 나 이즌 (Donald Nizen) 이 끼어 있었

    다. 타임스 서해안판의 판매국장으

    로 있다가 마이애미 헤럴드로 옮겨

    간 그는 로젠탈과 만난 자리에서

    “ 뉴욕 타임스야말로 정말 멋진 신문

    이 아니 냐. ” 는 말 을 듣고는 “ 따분하

    고 어 지 러운 신문” 일 뿐이 라고 응수

    하면서 신문체제를 8단에서 6단으 로 바꾸고 주말 특집을 일요일이 아

    니라 금요일자에 게재하는 것이 훨

    씬 좋을 것 이 라고 충고했다. 나이 즌 으로서는 로젠탈이 몹시 불쾌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뜻밖에

    도 며칠 후 그로부터 타임스로 돌아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즉시 응낙

    한다.후일 그때 두사람 사이에 있었던

    언쟁은 일요판을 만들기 위한 열띤

    토론으로 이어지며 3개월 후인 76년

    4월 로젠탈은 그에게 브로드웨 이와 오페라, 미술전시회,재즈,일요행

    사 등에 관한 다양한 피 처물을 담은

    일요판을 넘겨준다.

    새로운 변모

    흔히 타임스의 C 一 섹션이라고 불

    리는 이 부분은 평일에 제작되던 어

    느 부분과도 사뭇 다르게 그림과 사

    진을 한껏 사용하면서 화려하게 만

    들어졌다 .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 독 자들이 의외로 뉴욕 타임스를 충분

    히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후

    로젠탈과 편집부국장 세이머 토핑

    은 신문을 한층 흥미있게 만들기로

    결심하고 76년11월에 생활판을, 77

    년3월에는 가정판을, 78년1월에는

    월요 스포■츠판을,그리고 그해 5월

    에는 비즈니스 데이의 순서로 C

    一섹션을 잇따라 펴냈다. 뉴욕 타임

    스의 이러한 변모에 관해 논평하면

    서 맷슨은“ 우리 독자들도 밥을 먹는

    다는 사실을 뉴욕 타임스가 마침 내

    인정하기 시 작 했 다 /고 말했다.

    타임스 간부들이 제5및 6번째 C

    一섹션에 관하여 논의 하고 있던 78

    년 중반 뉴욕 신문가는 다시 파업사

    태를 겪게 된다. 뉴욕 데일리 뉴스

    의 편집 및 영업부서원들이 파업에.

    들어 가고 경 영 진은 그에 맞서 신문

    발행을 강행한다. 파업 3일째를 맞

    아 수송차들이 피킷 라인을 넘어서

    70

  • . 자 노동자들이 돌과 빈병 세례를 퍼

    부어 수송차 운전수들이 신체적 위

    험을 이유로 신문수송을 거부하지

    만 경영진은 신문발행을 계속한다.

    파업은 5일만에 끝났는데 뉴욕 신문

    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배달이 불가 능할지라도 신문은 계속 발행될 수

    있다는 새로운 선례를 남기게 되 었

    다.

    그해 8월에는 다른 노조들의 지원

    하에 인쇄노조가 3개 뉴욕 일간지들

    을 상대로 파업을 전개했다. 쟁점은

    경영진이 자연감소를 통해 윤전기 1

    대당 윤전원의 수를 줄이 려 하고 있

    다는 것이었는데 발행인측도 인력

    수준과 자동화 문제는 양보할 수 없 다고 강력히 맞섰다.

    9월 하순 뉴욕 포스트가 노조와

    별도협 약을 맺자 뉴욕 타임스와 뉴

    욕 뉴스 두 신문에 대한 노조의 압

    력은 더욱 거세어지게 되었고 10월

    중순 타임스도 직장보장과 자연감

    소를 통한 인력감축 문제를 잠정타

    결짓고 11월 신문발행을 재개할 수

    있었다.결과적으로 이 파업을 계기로 뉴

    욕 신문들은 노사관계를 새로운 단 계로 끌어을리고 신문제작 과정의

    현대파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게 된

    다.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편집국장

    로젠탈은 영업부서들과 또다른 조

    용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쟁점은

    여섯 번째의 마지 막 Cᅳ섹션을 무엇

    으로 할 것 인가에 관한 문제 였는데

    로젠탈은 지금까지의 C 一 섹션들이

    모두 소프트한 것이었으니 이번에

    는 타임스다운 진지한 특집판을 내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과학 타

    임스 ’판 제작을 내세웠다. 이에 대

    해 광고와 판매 쪽은 전혀 장사가 되

    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양보하 려고 하지 않았다.

    본지편집국과 선데이국 통합

    결국 이 문제는 전무이사 맷슨이

    영업부서들을 설득,지금까지의 특

    집판들이 영업위주였으니 이번 마 지막 것은 로젠탈이 원하는대로 하

    기로 결정지었으며 노조 파업이 끝

    난 직후 마침내 ‘과학 타임스 ’판이 선을 보이게 된다. 타임스 광고국은

    예상했던대로 처음에 는 광고유치 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급성장하는 개

    인용 컴퓨터시장을 목표로 컴퓨터

    칼럼을 신설하고 또 신제품에 관한

    광고문안이 정독하는 독자들로부터

    의외의 호응을 받게되어 얼마 지나

    지 않아 충분한 광고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이 일이 있기 몇년전■설즈버거는

    터너 캐틀리지를 편집이사로 승진 시키면서 이 조치로 선데이국과 뉴

    스국이 자연스레 그의 휘하에 통합

    운영되어가게 되기를 기대했다. 그

    터나 캐틀리지는 선데이국의 일에 매혹되 어 그쪽에만 신경을 쓰고 본

    지 편집국은 거의 방임하다시피 해

    왔다. 1976년 4월 드디어 설즈버거

    는 타임스의 곳곳에서 변화가 분출

    하는 가운데 로젠탈의 휘하에 뉴스

    국과 선데이국을 통합시킨다.설즈버거는 그 배경을 설명하면

    서 “ 선데이국이 일요판 10개 섹션가

    운데 5개 (매거진, 북 리뷰, 예술과

    오락,여행,주간 리뷰)를 제작할만

    큼 발전하게 됨 으로써 두 국 사이 에

    더이상 개념적인 경계선을 남겨둘

    필요가 없어졌으며 두 국을 통합함

    으로써 인력과 신기술을 한층 고도

    로 활용, 언론의 새 경지를 열어가

    기 위한 것” 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선데이국장이었던 막스 프

    랑켈은 헝 가리와 폴란드 항거를 취 재하고 모스크바 특파원을 거치는

    화려한 외국특파원 경력을 쌓고

    1961년 워 싱 턴지국에 배 치되 었으며

    여기서도 두각을 나타내 제임스 레

    스턴이 물러날 경우 그의 후임자로

    꼽히기까지 했다. 일단 레스턴의 후

    임에는 톰 위커가 기용되지만 프랑

    켈 역시 그• 후 워싱 턴지국장을 맡게

    되며 72년말 본사로부터 선데이국

    장을 제의 받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

    그러나 얼마 지 나지 않아 그는 주위

    로부터 자신이 로젠탈과 치열한 암

    투를 벌이고 있다는 구설수에 오르

    경영층의 인사개편과 함께

    시작된 1980년대는 뉴욕 타임스의

    기업안정화및 경영권 승계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설즈버거가 다져온 경영기반을

    한층 공고히 하고 후계자에게

    물려줄 길을 예비하는

    기간이라는 말이다.

    71

  • 매스컴명저다이제스트

    는 등 괴로움을 당한다.

    뉴스국과 선데이국이 통합된 직 후 프랑켈은 논설주간으로 기용되

    지만 여기서도 기존 논설팀의 반발

    로 그는 홍역을 치른다.그러나 자신의 전임자인 제임스

    오크스(설즈버거의 조카로 15년간

    논설주간을 담당) 가 정년을 불과 1

    년 앞두고 발행 인 고문으로 옮겨 앉

    고 다른 논설위원들이 그의 전보에

    분개하거나 스스로 논설부주간이

    되지 못한데 실망하여 사임함으로

    써 프랑켈은 그 자리에 새로운 논설

    위원들을 기용 , 설즈버거가못마땅

    해하던 기존의 논설방향을 새롭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이때 프랑켈이 영입한 인물에는

    뉴욕시 주택위원장을 지냈으며 뉴

    요커 필자이 기도 한 로저 스타,예

    일출신의 경제학박사인 피터 파셀 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타임스 안팎에서는 이때의

    논설실 개편을 ‘보수주의의 혁 명’으

    로 받아 들였으나 실제로는 논설주 간 프랑켈 이 나 부주간 잭 로젠탈(편

    집 이 사 로젠탈과는 무관 ) 이 모두 진

    보주의 자들이 었다.

    80년대를 위한 준비

    여러가지 측면에서 1970년대는

    뉴욕 타임스에 있어서 과거 어느 시

    기에도 비 할 수 없을만큼 비상한 기

    간이었다. 연이은 C一섹션 특집판

    과 새로운 6단체제를 채 택함으로써

    타임스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했

    고 뉴스의 개 념 자체를 크게 확대 했

    다. 타임스는 또한 연방정부와의

    ‘알 권리 ’에 관한 헌법심판 소송에서 승리했고 노조에 자동화를 수락토

    록 했으며 자칫 치명적인 상처를 남

    겼을 사내의 여권 및 소수인종 분규

    롤 무난히 수습할 수 있었다.

    이와함께 매출액은 1970년에 2억

    8,300만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80년

    에는 7억3,100만달러로 거의 3배나

    늘어났고 이익금 역시 1,400만달러

    에서 4 ,100만달러로 비 슷한 중가율

    을 기록했다.물론 타임스의 이러한 성정과정

    은 항상 그 중심에 발행인 겸 이사

    회 회장인 설즈버거가 위치하고 있

    는 가운데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1970년대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설

    즈버거는 1974년 이래 타임스를 이

    끌어온 월터 맷슨,제임스 굿데일,

    시드니 그루슨 등 3명의 부사장 ‘3

    두체제 ’를 종식시키고 맷슨을 이사

    회 부회 장과 사장 겸 최고경 영자로

    지명한다.

    맷슨의 사장 선임은 이미 오래전

    부터 공공연히 알려져온 비밀이었

    다. 그러나 78년말 막상 그 결정이

    발표된 후 굿데 일은 타임스를 떠 나

    변호사 생활로 되돌아가며 그루슨

    은 이사회 부회장으로서 계열기업

    업무조정역으로 자리를 바꾼다.

    기업안정화와 제작현대화

    이러한 상층부의 인사개편과 함

    께 시작된 1980년대는 뉴욕 타임스

    의 기업 안정화 및 경영권 승계 준

    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설즈 버거가 그간 다겨온 경영기반을 한

    층 공고히 하고 후계자에게 물려 줄

    길을 예비하는 기 간이 라는 말이 다.

    1970년대까지 타임스는 제작 현

    대화를 통하여 노조의 장기파업 속

    에서도 신문발행을 계속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전송기술 의 발달에 따라 이제는 제판필름을

    시카고나 여타지역으로 보내 뉴욕

    과 동시에 신문을 제작할 수 있게 됨

    으로써 본격적으로 타'임스 전국판

    제작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당시 타임스 광고국장이었던 랜

    스 프리미스 (Lance Primis) 에 따

    르면 전국판 준비팀은 발행인의 전 용기 에 매 일 신문을 가득 싣고 시 카

    고, 디트로이트, 클리볼랜드 둥지

    에 그것들을 뿌린 후 독자들의 반응

    을 조사하는 작업까지 벌였는데 여

    기선 타임스 전국판의 유력한 독자

    층으로서 뉴욕 줄신자나 뉴욕에 살

    았던 사람들과 함께 뉴욕에는 아무 런 연고가 없지만 타임스의 미술,

    문화,국제뉴스, 경제면의 기사를

    즐겨 읽는 독자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타임스사는 처음에 시카고에 공

    장 1개소를 짓고 전국판을 찍기 시

    작한 후 86년까지 다른 5개소에 새

    로이 인쇄공장을 갖추게 된다 ,

    경영자문회사인 매킨지사의 전문

    가들은 79년 타임스사로부터 미래

    설계를 위한 경영진단을 의뢰받고

    타임스의 경영다각화가 초점을 잃

    을만큼 방만하다고 지적 , 기본적인

    회사전략에 맞게끔 계열기업의 합 병 매수를 조정하도록 권고한다. 이

    로부터 수년간에 걸쳐 설즈버거와

    맷슨은 77년에 시작했던 인물과 가

    십을 다루는 잡지 인 ‘우리들’ (Us) 을

    포함해 여러 매체를 정리하고 컴퓨

    터 사업과 마이크로 필름 사업, 도

    서 출판부를 매 각해 버 린다. 그렇지

    만 설즈버거는 매킨지 보고서 가운

    데 타임스사의 고유영역과 동떨어

    진 분야로 진출하라는 권고는 묵살

    하고 성장시장 분야의 비노조 일간

    지들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한편 잡 지와 텔리비전,케이블 텔리비전에

    대한 투자는 줄인다.

    80년대에 들어와서도 타임스의

    72

  • 재 무 상 태 는 계 속 호 전 되 어

    1980~84년 사이 에 총매출고가 7억

    3 ,100만달러에서 12억달러로, 이익

    금이 4 ,100만달러에서 1억달러로

    각각 늘어 난다. 그러 나 이 러 한 가운

    데서도 설즈버거는 결코 느긋할 수

    가 없었다. 1987년이 되면 편집이사 로젠탈이 타임스 간부들의 관례적

    인 퇴직연령인 65세가 되기 때문에

    그로서는 1990년대와 그 이후의 타

    임스를 이끌어갈 편집총책임자를

    찾아내어 자리를 잡도록 해주는 마

    지막 책임을 결코 가법게 취급할 수

    아서 오크스 설즈버거2세

    가 없기 때문이다.

    프랑켈, 로젠탈의 뒤를 잇다

    실제로 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

    서 타임스 편집국 안팎에서는 누가 로젠탈의 후임이 될 것인가, 그리고

    언제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될지에

    관해 의논이 분분하가시작했다 . 마

    침내 1986년10월 설즈버거는 이러

    한 소란을 진정시켜야겠다고 결심

    하고 당시 56세인 논설주간 막스 프

    랑켈을 11월1일자로 편집이사에 임

    명하고 로젠탈은 부발행 인 겸 칼럼

    니스트로서 설즈버거 자신에게 직

    접 보고토록 했다. 편집국장에는 아

    서 겔브 (Arthur Geld) 가 기용되고

    세이머 토핑국장은 타임스를 떠나

    계열신문들의 지면개선 문제를 맡

    게된다.

    프랑켈은 자신의 1차임무를 그동

    안 후계 다툼으로 흐트러져 있던 타

    임스 편집국을 안정시키는 것으로

    설정했으며 그것이 설즈버거의 의

    도이기도했다 . 프랑켈은 과거 선데

    이국을 운영하던 경험을 살려 각 부

    서에 최대한의 권한을 위임하고 되

    도록 부하들의 사기 를 높여 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또한 타임스 역사상

    마침내

    부발행인으로 승격,

    타임스의 뉴스와 영업을

    직접 관장하고 있는

    아서 오크스 설즈버거 2세는

    미래의 뉴욕 타임스를

    이끌어나갈 주역이다.

    처음으로 편집예산의 관리를 위해

    공인회계사를 편집국에 상주시킴으 로써 그•때까지 기자들과 업무부서

    사이에서 일어나던 마찰을 근본적 으로 해소시키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프랑켈의 편집총책 기용이

    .발표되자 당시 워싱턴 지국장이었

    던 빌 코바츠 (Bill Kovach) 와 파리

    지국장을 지내고 86년초 이래 메트

    로폴리탄 취재부장을 맡아온 존 비 노 커 (J ohn Vinocur) 가 실 망하여

    각각 아틀랜타 저널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분의 편집이사로 자리

    를 옮긴다.

    프랑켈은 부하들에 대하여 일단

    미소작전을 취했으나 문제가 발생

    했을 때에는 엄격하기 짝이 없었다.

    예컨대 87년 대통령선거기간중 코

    바츠의 후임으로 워싱턴지국장이

    된 크레 이그 휘 트니 (Craig Whit

    ney) 는 각 후보자들에게 지나칠만

    큼 상세한 신상자료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는데 그중 한사람이 이

    에 대해 흡사 검찰의 소환장을 받은 기분이 라고 불평하며 “ 우리는 대통

    령 선거에 출마하고 있지 종교적 성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 고

    타임스에 강력히 항의해 왔다. 이 _게 .되 자 프랑켈은 워싱턴지국장을

    옹호하는 대신에 그의 요청 이 지나

    쳤다고 힐난하면서 그 일에 제동을

    걸었다. 그는 또 올리버 노스 중령

    의 증언보도가 문제되었을 때는 1면

    에 2단 크기 로 “ 타임스는 노스의 비

    밀자금 증언에 관하여 오류를 범했

    습니 다. ” 라는 정 정보도를 게재하게 함으로써 타임스기자들은 물론이고

    외부인사들까지 놀라게 했다.

    프랑켈을 맞아 타임스는 1면에 빈

    번히 짧은 기사와 멋진 새 도안을 사

    용하며 소비자 페이지와 육아, 건

    강, 법률 상담 등에 관한 칼럼을 신

    설하는 등 서서히 변화를 시작한다. 프랑켈은■로젠탈이 시작한 과학판

    이 대성공을 하는 것을 보고 (연2년

    째 풀리 처상 수상) 건강과 교육면을 신설하며 그대신 여기자들의 빈축 .

    을 사고 있던 패션면 ‘스타일 ’을 없

    애 버린다.

    타임스의 이러한 소프트화와 함

    께 타임스 전국판의 판매부수는 크

    게 증가 , 1987년에는 20만부에 이른 다. 판매이사 러샐 루이스 (Russell

    Lewis) 는 특히 미국 동부지역의 고

    소득, 고학력 독자들이 타임스의 미 t

    73

  • 매스컴명저다이제스트

    래 성장시장이라고 역설하며 그 지

    역에서의 판매신장에 힘을 기울인

    다.한편 타임스 편집국 안에서는 멀

    지 않아 은퇴하게 될 아서 겔브 국장

    과 제임스 그린필드 부국장을 계승

    할 후보자들이 서서히 부상하는데

    이중에는 행정담당 부국장으로 임

    명 된 워 렌 호지 (Warren Hoge) 와

    뉴스담당 부국장을 맡은 존 리

    (John Lee) 가 포함되 어 있다.

    설즈버거의 유산

    어떠한 평가기준에 의하든 뉴욕 타임스에 있어서 아서 오크스 설즈

    버거의 시대는 눈부신 성장의 시기

    였다. 그의 재임기간중 타임스의 매

    줄고는 거 의 100배 나 중가했고 87년

    의 이익금 (1 억6,000만달러 )은 그

    가 취임하던 63년도의 총매출고와

    같은 규모이 다.

    또한 87년 현재의 종업원 1만500

    명은 그 당시보다 2배의 규모이며

    계열회사 규모는 다시 라디오 방송

    국 1개소와 제지회사 2개소에 불과

    하던 것이 이제는 일간지 20여개에

    무수한 주간지와 잡지군,그리고 방

    송망의 기 업 군단으로 확장되 었다.

    시드니 그루슨은 편집예산만도 9,

    000만달러 에 이 르는 타임 스 왕국을

    ‘3중 왕관속의 다이어먼드 ’라고 자

    랑하는데 타임스가 이처럼 놀라운

    성장을 하는 가운데서도 설즈버거

    가문은 그 지 배권을 확고히 유지 해

    왔다 .

    1986년 타임스 주주들은 아서 오 ᅵ크스 설즈버거 이후에도 가족들의

    회사 지배권을 공고히 보장하기 위

    하여 이사 70%의 선임권을 가진 B

    형 주식을 매각할 때에는 1차 매수

    ̂ 권을 가족주주들에게 주고 그다음

    에는 회사가 2차 매.수권을 행사하며

    그래도 처분하지 못할 때에는 이사

    30%의 선임권만이 있는 A형 주식

    으로 전환하여 매각토록 하는 주식

    처분제한규정을 의결했다.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뉴

    욕 타임스의 가족지배를 지속시키

    는 것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그러 나 타임스 부회 장 제 임스 굿

    데일은 이 점에 관해 논평하면서

    “ 사회적 격변속에 오늘의 뉴욕 타임

    스가 있게 된 것은 타임스가 한 발

    은 현대 산업사회에, 다른 한발은 설즈버거 가문의 전통적 가치관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면서 변화에 떠

    밀리는 대신에 그것을 수용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고 지적한다.

    설즈버거 2세

    1987년1월 설즈버 거 는 자신의 후

    계자로서 아들 아서 오크스 설즈버

    거2세를 타임스 발행인보 (Assis-'

    tant Publisher) 에 임 명 하고 1990년

    준공예정인 4억달러 상당의 인쇄공

    장 건설을 포함한 타임스 미래기획

    위원회를 이끌도록 한다. 새 공장은 타임스의 인쇄능력을 대폭 강화하

    여 기사와 광고특집을 언제, 어떤

    형 태로든 소화할 수 있게끔 하기 위

    해서 추진되어 왔다. 그리고 이 공

    장이 완성될 경우 타임스의 지면을

    어떻게 꾸밀지, 사회환경의 변화와 설즈버거 가문의 전통을 여하히 균

    형시켜 나갈 것인지,또 보수적안 독자와 진보적 인 독자, 일반독자와

    전문독자들의 상이한 요구는 어떻

    게 충족시켜 나갈지 둥을 연구하는 것도 설즈버거 2세가 이끄는 미래기

    획위원회의 주요과제이다.

    매사추세츠 미드포드의 터프츠대

    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설즈버 거2

    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곧바로 타

    임스에 들어오는 대신에 발행부수 3

    만4,000의 롤리 타임스 (Raleigh

    Times) 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하며

    이 어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 AP통신

    에서 일한다. 1978년 그는 마침내 뉴욕 타임스 워싱턴지국에서 일하

    기 위하여 미국으로 돌아오며 81년

    에는 뉴욕 본사로 옮겨와 취재와 편

    집경험을 쌓는다. 이어 1982년에는 광고영업부서로 자리를 옮기는데

    이때 설즈버거2세는 기자생활과 전

    혀 성격이 다른 광고업무에 적응하

    는데 처음에는 대단히 어려웠지만

    이를 무난히 극복해낸다. 그후 설즈

    버거2세는 공무국과 기획부서에서

    도 일하며 하버드경영대학에서 3개

    월간의 집중적인 경영실무교육을

    받기도 한다.이제 그에게는 판매 부서 를 빼고

    는 뉴욕 타임스의 주요부서를 모두

    거쳤으므로 다음 보직은 그곳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설즈버거는 지금까지 없었던 발행

    인보라는 자리를 만들어 아들을 그

    자리에 기용하고 타임스의 제호란 에도 그의 이름을 올려줌으로써 본

    격적인 승계작업을 시작했다.이때 타임스사는 회장 설즈버거

    와 사장 월터 맷슨밑에 막스 프랑켈

    이 편집을, 잭 로젠탈이 논설을, 랜 스 프리미스가 부사장 겸 전무로서

    업무와 영업을 총괄하고 있었다.

    1988년4월 설즈버거 2세는 마침

    내 부발행인으로 승격되며 동시에

    프리미스가 사장으로 승진됨으로써

    스스로 타임스의 뉴스와 영업을 직

    접 관장하게 된다. 이로써 타임스에 서 이제 그의 통제를 받지 않는 부

    문은 오직 로젠탈이 담당하고 있는

    논설 페이지만 남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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