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受容背景과 造營勢力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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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受容背景과 造營勢力 都 文 善 1) Ⅰ. 머리말 Ⅱ. 淸州一帶 高麗時代 墳墓 分析 Ⅲ. 高麗時代 墳墓의 特徵 Ⅳ. 高麗時代 土壙墓의 受容 Ⅴ. 淸州地域 土壙墓 造營勢力 Ⅵ. 맺음말 - 요 약 - 본고는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토광묘 조영집단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하였다. 청주 는 후삼국 및 고려시대에 중앙과 지방에 대한 문헌사적인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분묘자료를 비롯한 고고학적인 자료가 풍부한 지역이다. 그러나 두 자료 형태를 통하 여 종합적으로 역사적 맥락에 대하여 함께 검토된 바가 없었다. 고려시대 분묘형태 가운데 하나인 토광묘는 기존의 전통적인 석축묘와는 다른 요소를 확인 할 수 있다. 요갱이나 편방(偏旁)시설이 존재하며 출토유물상에서 동경, 청동숟가락, 동전, 가 위 등 생활용구를 중심으로 부장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유물은 북방문화권에 해당 하는 요 및 금의 문화상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새로 운 문화의 수입으로 도입된 묘제가 청주지역에서 이른 시기부터 등장하고 있음은 청주지역과 중앙과의 긴밀한 관계가 상정되는 바이다. 청주는 문헌기록상 재경세력과 재지세력의 존재가 뚜렷한 지역의 하나이다. 청주 출신 재 경세력은 현재 청주읍성을 중심으로 하는 상당구일대를 호족적 기반으로 하여 활동하고, 재 지세력은 청주 김씨 세력으로 여겨지는데, 「龍頭寺幢竿記」의 내용처럼 일대를 거점으로 확 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청주 김씨 세력과 관련지을 수 있는 분묘군은 용암유적내 금천동으 로, 청주읍성에서 금천동 토광묘군까지의 거리는 2㎞이다. 이는 금천동유적 일대가 청주 김씨 세력의 족적인 매장지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비정이 타당하다면 청주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재지세력인 청주 김씨 호족집단의 분묘형식은 토광묘로 파악할 수 있을 것 이다. 주제어:高麗時代, 土壙墓, 石槨墓, 淸州 金氏, 豪族 * 도문선(중앙문화재연구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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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受容背景과 造營勢力

    都 文 善*1)

    Ⅰ. 머리말

    Ⅱ. 淸州一帶 高麗時代 墳墓 分析

    Ⅲ. 高麗時代 墳墓의 特徵

    Ⅳ. 高麗時代 土壙墓의 受容

    Ⅴ. 淸州地域 土壙墓 造營勢力

    Ⅵ. 맺음말

    - 요 약 -

    본고는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토광묘 조영집단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하였다. 청주

    는 후삼국 및 고려시대에 중앙과 지방에 대한 문헌사적인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분묘자료를 비롯한 고고학적인 자료가 풍부한 지역이다. 그러나 두 자료 형태를 통하

    여 종합적으로 역사적 맥락에 대하여 함께 검토된 바가 없었다.

    고려시대 분묘형태 가운데 하나인 토광묘는 기존의 전통적인 석축묘와는 다른 요소를 확인

    할 수 있다. 요갱이나 편방(偏旁)시설이 존재하며 출토유물상에서 동경, 청동숟가락, 동전, 가

    위 등 생활용구를 중심으로 부장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유물은 북방문화권에 해당

    하는 요 및 금의 문화상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새로

    운 문화의 수입으로 도입된 묘제가 청주지역에서 이른 시기부터 등장하고 있음은 청주지역과

    중앙과의 긴밀한 관계가 상정되는 바이다.

    청주는 문헌기록상 재경세력과 재지세력의 존재가 뚜렷한 지역의 하나이다. 청주 출신 재

    경세력은 현재 청주읍성을 중심으로 하는 상당구일대를 호족적 기반으로 하여 활동하고, 재

    지세력은 청주 김씨 세력으로 여겨지는데, 「龍頭寺幢竿記」의 내용처럼 일대를 거점으로 확

    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청주 김씨 세력과 관련지을 수 있는 분묘군은 용암유적내 금천동으

    로, 청주읍성에서 금천동 토광묘군까지의 거리는 2㎞이다. 이는 금천동유적 일대가 청주 김씨

    세력의 족적인 매장지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비정이 타당하다면 청주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재지세력인 청주 김씨 호족집단의 분묘형식은 토광묘로 파악할 수 있을 것

    이다.

    주제어:高麗時代, 土壙墓, 石槨墓, 淸州 金氏, 豪族

    * 도문선(중앙문화재연구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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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머리말

    묘제의 전통은 장기간 전승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묘제는 시대, 문화, 계층

    등 다양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 관계로 당대의 관념 및 사회상을 복원하는데

    주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묘제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이 가운데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시대는 선사에서

    통일신라에 해당한다. 특히 묘제의 축조형식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각 시대에 따라 보편성과 함께 다양성이 혼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청동

    기시대에는 지석묘, 석관묘 등 원삼국시대에는 목관묘, 삼국시대에는 횡혈식석실

    묘, 적석목곽묘, 석곽묘 등 석재를 이용한 석축묘가 주묘제로 이용되면서 지역성

    을 보이는 특징을 갖는다. 통일신라시대는 통일국가로서 석축묘로의 통일성이

    간취되나 여전히 각 지역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관련한 분묘 연구는 이전 시기에 비해 활발하지 않은 편이

    다. 관련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던 계기는 1980년대 충주 직동 석곽묘가 발굴되

    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활발한 발굴성과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자

    료축적이 있어 왔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많은 석곽묘 및 토광묘가 관련유적이

    가장 대단위로 조사된 지역은 청주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청원과 대전지

    역 일대에 대한 넓은 면적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그 분포상을 파악하는데 용이

    한 지역이기도 하다.

    청주는 후삼국 및 고려시대 관련한 문헌기록이 풍부한 곳이기에 많은 연구자

    에 의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진 지역이다. 이러한 결과로 청주를 중심으로 활

    동한 인물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龍頭寺幢竿

    記」와 같은 자료를 통하여 지역세력의 실체에 대하여 일정정도 파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고는 고려시대 청주를 중심으로 고고학적인 자료인 토광묘와 그 조

    영배경에 대하여 문헌사적인 자료를 이용하여 당대의 문화에 대하여 복원을 시

    도하려 한다. 특히 청주를 중심으로 고려시대에 석축묘를 대신하여 토광묘가 주

    묘제로 채용되는 역사적 맥락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고려시대는 지방을

    군현제로 편제하는 등 체제정비를 완료하고 새로운 문화정책을 실시한다. 청주

    를 비롯한 지방은 체제정비를 통한 중앙의 통제력이 강화되면서 지역성보다는

    중앙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당대 하나의 문화요소인 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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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중앙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기에 지역세력 독자적으로 새로운 묘제를 수

    용한다는 것은 상정하기 어렵다. 때문에 청주지역에 이른 시기부터 토광묘가 등

    장한다는 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청주 중심지에 위치한

    토광묘 조영집단은 청주를 중심으로 어떠한 지위에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淸州一帶 高麗時代 墳墓 分析

    청주 및 청원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최근의 대규모 산업단지 및 택지개발지

    구에 대한 사업으로 인해 풍부한 고고학적인 자료가 축적된 상태이다. 넓은 면

    적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는 분묘조영집단을 분석하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하는

    이점이 있다. 특히 청주지역은 고려시대에 조영된 대단위의 분묘군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묘형태가 공존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먼저 청주지역 일대에서 조

    사된 고려시대 석곽묘와 토광묘에 대한 분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주 중심에 위치하는 유적으로는 명암동․금천동․용정동유적 등이 있다. 명

    암동유적은 상당구에 해당하는데 도로개설로 인해 조사가 이루어져 일부에 한정

    되어 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은 상봉재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 입지

    한다. 고려시대 분묘는 Ⅰ지구에는 토광묘 10기, Ⅱ지구에는 토광묘 22기가 조사

    되었다.

    그리고 금천동․용정동․용암동유적은 청주시 상당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

    사는 대규모 용암택지개발사업으로 넓은 면적에 대하여 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이

    다. 고려시대 분묘가 조사된 유적은 금천동유적, 용정동유적으로 구분된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용정동유적은 Ⅰ․Ⅱ유적으로 세분된다. Ⅰ유적에서는 32기의 토

    [그림 1]청주 및 청원지역 고려시대 분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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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청주 및 청원지역 고려시대 분묘군 위치도

    광묘 중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토광묘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Ⅱ유적에서는

    168기의 토광묘 가운데 6기만이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 북쪽에 위치한 금천동

    유적은 다시 Ⅰ․Ⅱ유적으로 세분되는데, Ⅰ유적에서 조사된 28기의 토광묘 가

    운데 1기만이 고려시대에 해당한다. Ⅱ유적은 260기의 분묘 가운데 고려시대에

    조영된 것은 66기 등이다. 용정동․금천동유적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토광묘는

    총 126기로 파악된다.

    청주의 중심에서 거리를 두고 준공업단지 조성으로 대규모의 면적에 대하여

    조사가 이루어진 봉명동유적이 존재한다. 일대는 청주의 북서쪽에 해당되는 곳

    으로 유적의 북동쪽에 무심천이, 남쪽에 신봉동, 북쪽에는 송절동이 위치한다.

    발굴조사는 동-서로 형성된 능선의 정상부와 북쪽으로 뻗어있는 구릉의 정상부

    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려〜조선시대에 해당하는 분묘는 45기로, 이 가운데

    고려시대 석곽묘 1기, 토광묘 25기가 조사되었다. 주변유적으로는 북쪽의 송절동

    유적, 송절중학교부지유적이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신봉동유적 등이 입지하나 조

    사구역내에서 고려시대 분묘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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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남서쪽에 위치한 산남동유적은 택지개발지구 조성으로 인해 조사가 이루

    어졌다. 산남동유적에서 조사된 분묘는 총 138기의 토광묘 가운데 고려시대로

    여겨지는 분묘는 토광묘 14기이다. 반면, 석곽묘는 3기만이 확인된다. 인접한 분

    평동유적에서는 토광묘 29기 가운데 토광묘 1기만이 고려시대에 해당되어 일대

    에서는 산남동유적내 피장자가 청주 남서쪽을 중심으로 활동한 집단의 분묘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청주의 서쪽, 산남동분묘유적의 북쪽에 위치하는 비하동

    유적은 택지개발로 인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은 부모산에서 동남쪽으로 뻗

    은 가지능선에 해당한다. 조사된 토광묘는 15기이며, 이 가운데 고려시대에 해당

    하는 토광묘는 2호묘로 1기이다. 비하동유적 남쪽에 연접한 강서동유적은 택지

    개발로 인해 너른 면적에 대하여 조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분묘는 확인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비하동유적의 동쪽에 위치하는

    가경동 4지구유적에서도 118기의 토광묘가 분포하고 있음에도 고려시대 유물을

    반출하는 분묘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서촌동유적은 흥덕구에 해당하는데 일대는 비하동보다 청주 중심에서

    원거리에 위치하나 지형적으로는 북쪽으로 미호천에 연하고 있어 너른 평야지역

    이 위치한 특성을 갖고 있다. 조사된 분묘는 고려〜조선시대 토광묘 약 300기가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고려시대 토광묘는 3기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청주 주변지역에는 청원 마산리유적, 오송생명과학단지내 쌍청리․만

    수리․연제리유적, 오창과학단지내 송대리유적․양청리유적이 있다. 마산리유적

    은 도로공사로 인해 일부 지역에 한하여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된 토광묘 18

    기 가운데 고려시대로 판단되는 토광묘는 11기, 고려시대 석곽묘 2기이다. 쌍청

    리유적에서 223기, 연제리유적에서 94기의 토광묘가 조사되었다. 토광묘 중앙에

    요갱이 시설되거나 일부 유물상에서 고려시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분

    청사기 단계부터 조영된 것으로 인지된다. 따라서 전형적인 고려시대 토광묘로

    판단할 수 있는 분묘는 없다고 보여진다. 인접한 만수리유적에서도 토광묘 540

    기 가운데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토광묘는 4기에 한정된다. 반면, 고려시대 석곽

    묘는 14기가 확인되었다. 송대리유적에서 토광묘 23기 가운데 고려시대 5기, 고

    려시대 석곽묘 3기가 확인되었다. 송대리유적과 인접한 양청리유적에서는 토광

    묘 44기 중 고려시대 토광묘 1기, 고려시대 석곽묘 1기가 조사되었다.

    행정구역은 달리하나 청주 주변지역으로 파악 가능한 곳은 보은 및 진천이 존

    재한다. 보은 부수리고분군은 청주에서 보은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회북면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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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부수리고분군내 토광묘 16기 중 고려시대 토광묘 1기, 고

    려시대 석곽묘 약 35기가 조사되어 석곽묘의 비중이 높다. 그리고 청주의 북쪽

    에 위치한 진천 사양리유적은 청주에서 진천에 이르는 곳에 있는데 토광묘 118

    기 가운데 고려시대 유물이 반출되는 토광묘는 존재하지 않으나 고려시대 석곽

    묘는 5기가 조사되어 석곽묘의 비중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청주 및 주변지역에는 고려시대에 조영된 토광묘와 석곽묘가 공존한

    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청주의 중심에

    위치한 명암동유적과 금천동유적은 고려시대 토광묘만이 확인되었으며 석곽묘는

    확인되지 않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명암동유적의 남쪽에 연접한 용담동유

    적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고분군만이 입지할 뿐, 고려시대 분묘는 확인되지 않는

    다. 이는 명암동유적과 용암유적을 중심으로 묘역을 달리하는 피장자 집단이 분

    묘를 조성하였고 상호 중복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주의 중심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봉명동 및 산남동유적에서는 토광묘의 비중

    이 높기는 하나 석곽묘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인접한 비하동 및 강서

    동유적에서 통일신라시대 석실분 2기, 석곽묘 1기와 기와가마 2기, 고려시대 토

    기가마 1기 등이 조사되었다. 이는 일대가 통일신라시대 분묘는 용담동․명암동

    유적이 위치한 청주 동편보다 산발적일 뿐만 아니라 생산관련유구가 확인되는

    양상으로 보아 세력집단이 거주한 곳이라기보다는 생산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

    었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청주를 중심으로 하는 고려시대 분묘의 분포현황은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파

    악된다. 먼저 청주 중심에는 토광묘가 집중적으로 조영되고 있다. 그리고 청주

    중심에서 벗어난 지역에서는 분묘의 밀집도가 중심에 비해서 낮아지면서 여전히

    토광묘가 중심을 이루나 석곽묘의 존재가 확인된다. 반면, 청주 주변지역에 해당

    하는 청원 및 진천, 보은 지역에서는 청주지역보다 분묘의 조영이 산발적일 뿐

    만 아니라 석곽묘의 비중이 좀 더 높아지고 토광묘의 빈도가 낮아지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Ⅲ. 高麗時代 墳墓의 特徵

    청주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고려시대 석곽묘 및 토광묘는 기존의 전통과 다른

    차별성이 인지된다. 먼저 입지 및 분포상이다.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및 석실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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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면에 집중적으로 조영되는 양상이 확인된다. 청주 용담동고분군내 26기의 석

    곽묘는 남사면에 입지하는 반면, 금천동유적에서와 같이 토광묘는 능선과 사면

    에 조성된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통일신라시대까지 보편적으로 채용되었던 敷石의 생략화

    이다. 이전까지 생토바닥면에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전면에 부석하였으나 고려

    시대 석곽묘에서는 대부분 부석하지 않고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한편으

    로 벽석에도 이러한 경향이 확인된다. 벽석의 생략정도는 청주 외곽에 위치한

    보은 부수리고분군내 석곽묘 등에서 확연히 구분되며, 이외의 유적에서도 벽석

    의 석재를 정연하게 쌓기보다는 간략화시키는 경향이 관찰된다.

    고려시대 석곽묘 전체에서 확인되지는 않으나 일부의 석곽묘에 시설된 偏旁의

    존재이다. 편방이 확인된 유적1)은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조사된 석곽묘에 집중적

    으로 분포한다. 편방시설은 조선시대 토광묘에는 일반적으로 채용되었으나 고려

    시대 토광묘에는 그 예가 많지 않다.

    고려시대 이전의 분묘에는 확인되고 있지 않은 요갱의 시설이다. 요갱의 설치

    는 토광묘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이기도 하다. 금천동유적과 논산 정지리유적에서

    는 다수의 토광묘에 요갱이 존재한다. 요갱에는 석영이나 철편이 부장되는 것이

    다수이나 금천동 Ⅱ-1유적 128호 등에서와 같이 청자 광구병을 매납하기도 한

    다. 그러나 고려시대 석곽묘에는 그 예2)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주로 토광묘

    조영집단에 의해 채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요갱시설 전통은 조선시대까

    지 유지되기도 한다3). 그리고 금천동유적 내 토광묘에서 요갱과 함께 모서리 각

    각에 소형의 穴이 위치하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소형 혈에는 유물

    이 부장되지 않아 그 성격은 추후 검토의 여지가 있으나 의례행위에 의해 조성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유물 부장양상에서도 이전시기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통일신라시대 이전까지

    는 토기류를 중심으로 무기류, 교구류 등이 부장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토광묘에는 토기류를 대신하여 자기류가 매납된다는 점에서 연속성을

    찾을 수 있으나 금속기인 청동발 등이 부장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활용구를 중

    1) 고려시대 석곽묘에 편방시설이 존재하는 예로는 청주 율량2지구 택지개발사업부지내 주중동유

    적 1호, 청원 만수리고분군 1호․9호․14호․15호, 대전 미호동유적 1호, 보은 부수리고분군 15

    호 등이 있다.

    2) 만수리고분군 8호에는 석영이 매납되었으며, 청주 봉명동유적 21호에는 굴광만이 존재한다.

    3) 조선시대 토광묘에 요갱을 설치하고 유물을 부장하는 예로는 청주 금천동 Ⅱ-1유적 160호에서

    백자대접, 청원 쌍청리Ⅲ유적 17호에서는 분청사기 사발 3점을 나란히 부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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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면 1] 고려시대 석곽묘 및 토광묘 출토유물

    심으로 부장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출토유물 가운데 청동숟가락, 청동젓가락,

    가위, 빗, 동경의 빈도가 높아진다. 또 다른 유물상의 특징으로는 동전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 석곽묘에서는 확연한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우나 토광묘에서 간취되

    는 특징으로는 묘광 규모의 규격화이다. 물론 천안 남산리 고려묘 1호는 묘광규

    모 길이 240㎝, 너비 90㎝의 방형석축을 가지고 있는 예가 존재하기도 하나, 대

    부분 일정한 규모의 묘광으로 조성된다. 묘광 규모가 길이 200㎝ 내외, 너비 60

    ㎝ 내외로 일반화됨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시대 전기부터 국가적인 틀을 확립

    하면서 무덤에 대한 규모를 신분에 맞게 규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4) 景宗元年二月 定文武兩班墓地 一品方九十步 二品八十步 墳高並一丈六尺 三品七十步高一丈 四品六

    十步 五品五十步 六品以下並三十步 高下過八尺(『高麗史』 卷85 志39 刑法2 禁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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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Ⅳ. 高麗時代 土壙墓의 受容

    중국 唐代에는 寒食때면 노비, 하인, 거지들까지 부모의 묘를 찾아 가느라 길

    에 남녀가 가득했다는 기록5)과 북송과 남송의 수도였던 개봉과 항주에서 청명

    때마다 관원과 사서가 모두 묘지를 찾아 가고 있음6)으로 보아 중국 당대 및 송

    대에는 계층을 망라하여 묘지를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

    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주지역내 고려시대 토광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개성시 고남리 일대

    고려 토광묘에서 부장공간이 없는 유형이 80%를 차지하나 단장의 형태 가운데

    편방 및 요갱인 부장공간이 확인된다는 점이다(김인철 1996). 전장에서 살펴보았

    듯이 석곽묘에서의 편방시설, 토광묘에서의 요갱시설이 다수 확인된다. 이는 청

    주지역내 고려시대 토광묘가 단순히 지역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중심

    지인 개경과 상호 관련성하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나아가 당시 국제정세와 연계

    하여 살펴야 됨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려가 918년 개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926년에 발표된 ‘훈요십조’

    에 반드시 당의 문물제도를 따를 필요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점 등에서 스스

    로의 행보를 걷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받는다는 기본적인 논리 외에 각각 독특한 문화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던 기존

    의 신라, 백제의 문화권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자 노력했던

    고려의 문화정책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황정욱 2002). 그러나 고려는 중국

    을 천자국, 책봉국으로 인정하고 스스로를 제후국으로서 위치 짓는 외교 관계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일차적으로 정치적, 군사적 힘의 우열에서 성립되는

    것이지만, 이차적으로 문화요소에까지 상당한 파급의 효과를 가져 올 수밖에 없

    는 결과를 초래한다.

    혜종대(944〜945), 정종대(946〜949)는 중국과의 관계가 긴밀하지 않았다. 이

    후, 북송(960〜1126)이 건국되면서 국교를 체결하였다. 이 당시에는 907년 내몽

    고 지역에서 통일국가를 형성한 요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단계였다. 926년 서

    방원정 배후의 불안 요소인 발해를 926년 멸망시키면서 고려입장에서는 불안한

    국제정세에 놓여 있었다.

    고려는 요에 대하여 건국 초 태조대부터 禽獸와 같다거나 人面獸心이라고 인

    5)『全唐文』卷573.

    6)『東京夢華錄』․『夢梁錄』

  • - 10 -

    식하였고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그 기조가 유지되었던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937년과 939년 거란의 사행에 대해서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942년 거란에서 낙타 50필과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에 대해 단

    교를 선언하며, 사신들을 귀양을 보냈으며 낙타는 萬夫橋 아래 매달아 굶어 죽

    게 하였다. 993〜1018년까지 3차례에 걸친 전쟁이 치러졌다. 요의 침입으로 시작

    된 고려와 요의 사신왕래는 12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가연 사회적으로 문화적인 측면이 과연 정치적인 상황과 동일시되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요에 대한 문화를 적대시 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

    진다. 고려 사회에서는 오히려 국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요의 문화가 상당히

    보급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의 훈요십조에서는 거란의 衣冠制度를 본받지

    말라고 금지한 사실이 주목된다. 태조가 反遼政策을 채택하고 사신왕래조차 없

    었던 당시에도 이미 전 고려사회에 요 문화가 상당히 수용되어 있었음을 반증하

    는 것이다(김순자 2009:125).

    이후, 현종대, 문종대, 선종대, 숙종대, 예종대 등은 사행의 빈도가 상대적으로

    잦고 요에서도 같은 시기에 사신을 파견한 예가 많아 양국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다. 문종 17년(1063) 契丹大藏經이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숙종 4년(1099)

    에는 요의 橫宣使가 藏經을 가지고 왔고, 5년에도 釋經 2函이 보내졌다. 또 睿宗

    2년(1107) 요의 사신 高存壽가 고려왕의 생일을 축하하며 대장경을 증여하는 등

    양국의 관계가 긴밀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란계 귀화인들을 통해 요문화

    가 고려사회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치기 시작하였다. 仁宗 원년 기록에 예종이

    요의 책봉을 받았다는 기록7)과 인종 장릉 출토 皇統 6年銘 諡冊의 사실은 요․

    금과의 교류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거란이 멸망한 인종 7년(1129)에 발표된 조서에는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

    는 민서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기풍을 다투고 丹狄(遼)의 풍속을 답습하여 가서

    는 돌이키지 않으니 깊이 탄식할 정도라고 하면서 국왕이 특별히 금지령을 내리

    고 있다8). 이는 고려의 지배층은 물론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북방문화가 널리

    흡수되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영향은 묘제의 전통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토

    광묘내 출토유물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동경으로 그 출자에 의미를 집중하고자

    한다. 동경은 의기, 부장품, 생활용구 등 용도에 따라 의미와 상징을 달리하며

    7)『高麗史』卷15 世家15 仁宗癸卯 元年

    8)『高麗史』卷15 仁宗 7年

  • 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受容背景과 造營勢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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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과 믿음, 기호를 반영하는 금속공예품이다. 동경은 한․중․일에서 무덤의

    부장품으로 뿐만 아니라 사지, 성지, 제사유적, 탑의 사리구 등에서 출토된다. 이

    는 종교나 사상의 유입 및 전파까지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경이 확인된 출토지를 보면 시대마다 그 사용례가 동일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창원 다호리유적 등에서와 같이 청동기시대에서 기원전후까지는 분묘

    내 副葬品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는 地震具, 舍利

    具 등으로 쓰인 반면, 부장품으로서는 무녕왕릉 출토품이 있으나 그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렇다고 동경이 가지는 중요성이 낮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물품만을 보관하는 정창원내에서의 동경의 존재에서 보듯이 국가적인 물품

    으로 취급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고려시대에는 이전과 달리 동경이 다량으로 출토된다. 또한 많은 형태와 문양

    이 등장하는데 그 출토지가 대부분 분묘, 특히 토광묘이다. 분묘에 매납된 동경

    은 단순한 화장구의 의미를 넘어 그 이상으로 이해되어야 할 개연성이 높다. 무

    녕왕릉 출토 동경은 왕과 왕비의 얼굴을 덮은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는 동경이

    왕의 얼굴에 위치시킬 만큼 특별한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이 추측된다.

    고려시대 토광묘내 동경 부장풍습은 고려를 건국한 이후의 풍습이라 여겨진

    다. 918년 왕건이 왕위에 오른다는 내용이 기록된 古鏡의 讖文을 유포한 사실에

    서 유추해 볼 수 있다.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顕形黑金’9)으로 보아 雙龍文鏡이나

    龍樹殿閣人物文鏡 등이 아닐까 한다. 이전까지 후삼국기의 혼란으로 인해 중국

    과의 교역이 원활하지 않아 중국경에 대하여 일면식이 없었을 것이다. 이후 통

    일을 이루고 정세가 안정되면서 도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당시의

    장제적인 변화에서 찾고자 하며, 그 주요 원인은 외부적인 환경, 즉 국제적인 관

    계에 기인함은 위에서 언급하였다.

    동경이 분묘에 매장되는 풍습은 요대의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應歷 9년

    (959)에 해당하는 赤峰大營子駙馬墓에서는 四蝶連球龜背文鏡이 천정에 고정되어

    있으며, 張家營子墓에서는 6매 가운데 4점이 四像龜背文鏡이 네 벽에 걸려있고

    2점은 못에 박힌 흔적이 관찰된다. 喀左縣 白塔子鄕 北岺村 遼墓에서는 두부 왼

    쪽에 동경이 놓여 있었고 내부에 4점은 묘실의 네 방향과 대응하고 있었다. 이

    와 같이 遼代에는 동경을 무덤 벽면에 매달았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어 동경이

    가진 의미가 특별하였음을 알 수 있다(황정숙 2006).

    9)『三國史記』50, 弓裔傳.

  • - 12 -

    [도면 2] 宣化遼墓 M7墓 출토유물

    河北省 張家口 宣化遼墓 M7묘에서 자기와 동경, 가위, 동전 등이 부장되는 양

    상이다. 동전은 황송통보, 희녕통보 등으로 11세기 북송의 동전을 매납하고 있어

    우리나라 토광묘에 부장된 동전 대부분이 북송에 의해 제작된 중국전이라는 점

    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아 참고된다. 요대의 장법과 고려의 장법이 상호

    공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청동숟가락 또한 고려시대에 들어와 분묘에 부장되

    기 시작하는 유물이다. 개성시 고남리유적에서 토광묘 150여기 가운데 청동숟가

    락이 부장된 토광묘가 70여기에 이르고 있다. 숟가락 부장풍습은 위에서 언급한

    동경과 함께 북방문화권인 요나라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정의도 2007).

    이러한 동경 및 청동숟가락, 동전 등이 반출되는 토광묘는 금천동유적을 비롯

    하여 청주에 집중됨을 알 수 있고, 유물상에 있어서도 다종다양함이 관찰된다.

    기타 지역에서도 토광묘에 집중되고 있으며, 석곽묘 출토품은 대부분 편으로 출

    토되거나 분묘 주변에서 수습되어 관내 부장이라 보기 어렵다. 추후 면밀한 검

    토가 있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나 동경 출토 분묘군 가운데 가장 시기적으로 앞

  • 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受容背景과 造營勢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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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 유적은 청주에 위치한 유적으로 판단된다10). 이는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분묘조영 세력이 토광묘라는 묘제를 기타 지역보다 이른 시기부터 채택하여 조

    성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고려시대 토광묘 조영은 부장된 유물 등으로 보아 요 등 북방문화와의

    관련성 하에서 생각할 여지가 충분히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청주지역내 토광묘

    의 존재는 묘제의 변화 요인 가운데 정치집단의 이주, 교역을 비롯한 많은 요인

    이 작용될 수 있으나 국가적인 기틀이 마련된 고려시대에는 적용하기 어렵다.

    고려사회는 왕을 정점으로 중앙과 지방이 유기적인 관계에 놓인 체제로서 청주

    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된 문화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이다. 묘제의 특성상

    위계와 신분을 대변하는 상징인 것이다11).

    Ⅴ. 淸州地域 土壙墓 造營勢力

    여기에서 고려시대 토광묘 조영집단의 성격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

    려시대 전기에는 중앙의 관품을 가지고 지방에 파견된 지배층이 타지역에서 사

    망하였을 경우 대부분 개성이나 그 주변으로 매장지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

    었다(金龍善 1989). 반면, 고려시대 토광묘의 확산은 양인계층의 확대를 의미하

    는 견해가 있다(李義仁 2003:53). 그렇다고 한다면 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

    였던 호족집단의 묘제 존재가 현재까지 자료상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호

    족집단 및 지역세력의 매장지와 형태에 대하여 다른 시각으로의 접근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10) 경주 물천리유적에서 6점, 안성 신릉리유적에서 1점 등이 출토되었으나 청자팔각접시 등이 공반

    되고 있으며, 연미형의 청동숟가락 끝이 홈이 깊은 연미형으로 고려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

    단된다.

    11) 왕실의 묘제는 석실묘로서 왕도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개풍, 판문, 장풍 및 강화에 주로 분포한

    다. 특히 송악산 북쪽과 개성시 서쪽의 만수산 남쪽 구릉에는 일정 단위로 집단묘를 이루고 있

    다. 묘역은 석축을 3〜4단 쌓아 장방형으로 조성하고 각 단에는 조형물을 배치하였다. 1단에는

    무덤과 곡장, 2단에는 석등과 문인석, 3단에는 무인석, 4단에는 정자각과 능비를 두는 형식이다.

    석실은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지하식 또는 반지하식의 횡구식이다. 석실바닥에는 관대를 설치하

    였다. 지배층의 무덤은 밀양 고법리 벽화묘에서와 같이 왕실 묘제와 닮아 있다. 고려전기에는

    개성과 경기지역에 매장지를 정하고 무인집권기가 되면서 향리로부터 중앙귀족으로 입신해 간

    계층 가운데 경기가 아닌 각 지방에 매장지를 정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후기로 갈수록 심화됨을 묘지명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金龍善 1989). 일반적으로 지방에

    위치한 분묘는 매장주체부만이 존재하며 호석 등을 포함한 부가적인 시설이 확인되는 예가 많

    지 않다. 중심지 주변지역에서 확인되는 묘제는 석곽묘와 토광묘인데 충주 단월동고분군, 충주

    누암리고분군, 진안 수천리고분군에서와 같이 석곽묘에서 토광묘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 - 14 -

    토광묘 조영세력 성격에 대하여 참고가 되는 것으로 인장이 있다. 韓 渠帥들

    이 낙랑으로부터 官爵 印綬 衣幘을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내에서 일찍부

    터 인장 사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서 인장의 사용

    은 좀 더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국정의 질

    서를 쇄신하기 위하여 문무왕 15년 정월에 동인을 만들어 백사와 주군에게 나누

    어 준 사실12)에서 인장이 지방으로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음을 추측케 한다. 신

    라는 영토를 확보하고 주군으로 편제하게 되고13) 새로운 영토에 대하여 지배력

    을 관철시키기 위해 중앙권력을 매개하는 지방행정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관

    인의 발급은 지방행정의 공식 담당자를 설정함으로써 해당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양주 대모산성이나 이천

    설봉산성, 포천 반월산성 출토품에서와 같이 지역 거점성에서 관인의 출토가 집

    중되는 양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에 인장은 지방사회까지 보편화되는 경향이 확인된다.

    乃却判官 高孝升 易置州吏 孝升旦授印而巳(『高麗史』 卷20 明宗 12年 3月)

    却奪縣令符印 發倉賑貸 村落飢民 多附之(『高麗史』 卷130 列傳43)

    各道大小各邑 皆有州司印信 戶長掌之 不惟移文村落 作弊多端 若戶口田准 奴婢

    文券印給等事 不問是非 徇私泛灠(『太宗實錄』 卷11 太宗6年 6月)

    今也任內郡縣 古號旣革 而其吏猶存 稱爲縣司 而帶印施令(『世宗實錄』 卷46

    世宗14年 6月)

    위 기록은 문서를 통해 행정업무의 수행과 인장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시사하

    는 것이다. 각 도의 대소 각 읍에는 인장이 존재한다. 읍사의 인장은 향리중에서

    도 호장이 관리하였다. 호장은 상서성으로부터 직첩을 발급받아 공무에 종사하

    였으며, 반대급부로서 직전을 지급받았는데 이는 호장이 관인적인 위상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촌락민에 대한 이동, 호구를 전유하는 것이나 노비문권을 인

    급하는 등 인장을 통해 관장하였다.

    또한 왕사나 국사가 가지고 있었던 印은 인․인장․인보․인신 등으로 표현을

    약간씩 달리하나 고려전기부터 사료상 확인된다14). 이들이 지위를 물러나겠다는

    12)『三國史記』 卷7 文武王 15年 1月 ‘以銅鑄百司及州郡印領之’

    13)『三國史記』 卷7 文武王 15年 2月 ‘然多取百濟地 遂扺高句麗南境 爲州郡’

    14) 智□, 學一, 坦然, 混元, 一然, 惠永, 混丘, 彌授, 復丘, 粲英, 混修 등이 있다.

  • 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受容背景과 造營勢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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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면 3] 고려시대 인장

    표시를 할 때 인장을 국왕에게

    반환하였고, 국왕으로서는 그 인

    장을 왕사나 국사에게 돌려보냄

    으로써 계속 그 지위를 유지하도

    록 한 사실이나 사망할 때 인장

    을 봉함하여 侍者나 그 지방관리

    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들의 지위

    를 확인시켜 주는 물건임을 알려

    준다(朴胤珍 2006:16).

    이러한 인장은 금학동 8호 토

    광묘 출토품과 진안 수천리 34호

    석곽묘 출토품, 공주 신관동 출

    토품 등이 있는데 토광묘 출토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출토품 인장 가운데 주목

    되는 것은 금학동․수천리 출토품의 인장 출토지가 공주와 진안으로 상당한 이

    격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성된 문인이 동일함으로 볼 때 유사한 지

    위에 있었던 인물로 추정된다.

    토광묘가 호족집단에 의해 조영된 묘제라는 상정이 가능하다면 청주지역내에

    서 토광묘를 축조한 지역세력에 대하여 살펴야 될 것이다. 후삼국기에 청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로는 궁예가 있다. 궁예는 청주 출신 호족인 箕萱과 申

    萱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점으로 보아 궁예와 청주지역간에 상당한 관련성이

    인지된다. 궁예는 청주를 기반으로 하여 904년 ‘淸州人戶 一千’을 철원에 옮겨

    수도를 설비케 한 뒤, 905년에 철원으로 천도한 사실에서 궁예와 청주의 관련성

    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申虎澈 1999:76-78). 그러나 궁예정권은 북방문화

    권의 문화를 접하였다고 볼 수 없어 청주지역내 토광묘와 연관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왕건이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즉위한 이후에 청주는 견훤의 후백제와 접경

    지를 이루게 되었다. 930년 왕건은 천안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청주에 행차하여

    성을 쌓았다. 932년에 매곡성주 공직이 고려로 귀부함으로써 일대에 대하여 지

    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청주를 중심으로 잔존하고 있었던 반왕건적

    세력은 소멸되었을 것이다. 이후, 왕건은 청주지역내 지역세력에 대하여 견제와

    회유정책을 동시에 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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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중심지역의 지배세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은 「龍頭寺幢竿記」에 보

    이는 인물들일 것이다. 용두사 철당간은 峻豊 3年 즉, 고려 光宗 13年(962)에 조

    성되었다. 철당간이 현재의 청주 읍성내에 존재하고 있어 고려시기 청주를 중심

    으로 하는 세력이라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당간건립을 위한 경제적 부

    담을 책임질 수 있는 호족들인 것이다. 청주에는 ‘人多豪傑’이라 하여 견금보다

    많은 지역세력이 존재하였던 듯하다. ‘一州之人 人名有心’에서 보듯이 통합세력

    보다 각기 독립적인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철당간은 주변 호족

    세력을 통합하고 이를 과시하기 위한 용도로 건립하였을 가능성이 크다(金周成

    1988:173).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金兢律은 두 딸을 惠宗과 定宗과 혼인시킴으로서 그의

    세력은 중앙에서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긍율과 함께 金勤謙․寬駿․金言

    規 등은 淸州 金氏 일족으로 보이는데(李樹建 1984:179-181) 고려 개국 초부터

    在京從士하여 중앙의 귀족이나 관인이 되었다. 이러한 在京 淸州金氏 勢力의 성

    장은 在地 淸州金氏 勢力의 성장을 뒷받침하였을 것이다15).

    청주 김씨 가운데 청주에 근거한 인물이 있다.

    師諱德謙 字則末 聞俗姓金氏 淸州上黨郡人也 其六世祖 守司徒 三重大匡 諱勤

    謙 國初□□(玄化寺 金德謙의 墓碑銘-韓國金石文追補)

    자료에서 김근겸은 태조대 忠賢이었으며, 이러한 공로로 守司徒 三重大匡의

    官階에 이르렀다. 그의 子와 孫인 忠郞과 懷玉은 侍中․侍郞職에 올랐다. 김근겸

    의 6대손이 德謙이다. 이들은 청주 상당군 출신이라 언급되어 있는데 현재 청주

    상당구에 해당하지 않을까 한다. 김덕겸(1083〜1150)은 김근겸에서부터 환산하면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후반에 해당한다.

    재지세력으로는 金芮宗16)과 金希一이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존재하였다.

    成宗 2年(983) 鄕職 개편 이전 지방 최고 유력을 의미하는 堂大等이다. 당대등-

    대등체계는 왕권이 신장함에 따라 통일되는 단계에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변태섭 1987:32-33). 김희일은 등장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중앙으로부터 正朝

    의 官階를 받았던 것은 청주지역 토착세력을 고려사회로 편제하기 위한 조치였

    15) ‘況此數人 皆有宣力 扶衛之功 欲得一州 而殺忠賢 朕下爲之’(『高麗史』92 列傳5 王順式傳 附堅金

    條)의 내용으로 보아 유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

    16) ‘州里豪家 鄕閭冠族’이라 한 것으로 보아 청주 토착세력으로 보인다.

  • 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受容背景과 造營勢力

    - 17 -

    을 것이다. 청주지방에 대한 중앙의 행정력이 미치고 있어 재경세력과 재지세력

    간의 유대관계는 약화될 수 있었으나 그 관계가 지속되었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청주지역에 토광묘가 이른 시기부터 채택된 배경에는 청주가 가진 역사적인

    맥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 청주인이 중앙과 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던 시기와 청주지역내 토광묘 조영시기와 대응되고 있음이 시사하

    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청주의 중심지는 읍성-우암산 지역으로 현재 청주시

    상당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일대는 통일신라시대 서원경의 중심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관련한 고분군은 용담동고분군이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중심지 또한 청주읍성-우암산 일대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17). 龍頭寺幢竿

    은 읍성내에 위치한다.

    청주 명암동유적과 금천동유적 위치는 현재 청주읍성과 우암산에서 남동쪽에

    위치하는데 2㎞이내에 자리한다. 명암동유적내 토광묘가 10세기말부터 조영된

    반면, 금천동유적내 토광묘는 11세기대부터 조영되었음은 시기에 따라 고분군이

    달리 조영되었음을 시사한다. 청주 중심지라 여겨지는 일대에서 토광묘를 제외

    한 고려시대 분묘군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시대 청주 이외의 지방 가운데 충주가 토광묘 도입이 호암동일대를 중심

    으로 주변지역보다 빠르게 도입되나 정도는 청주보다 약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리고 경주는 물천리를 중심으로 늦은 시기에 도입되는 현상이 보인다. 이는 고

    려 개국공신 裵玄慶 등이 중앙에서 활동하였으나 당시 몰락해 가고 있는 왕실과

    진골귀족에 대하여 회의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기에 경주에 호족적인 기반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鄭淸柱 1993:323). 그만큼 새로운 묘제의 파급 속도가 늦

    었던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청주 주변에 위치하는 보은 부수리고분군, 청원 만수리분묘군, 대전 미호동유

    적, 공주 봉암리유적 등에 조영된 석곽묘는 그 보수성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

    여진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집단규모의 차이는 존재하나 두 묘제는 공존하기도

    한다. 예로 대전 가오동유적을 들 수 있는데 2호 토광묘에서 남송대 유행하였던

    동경과 중국산 흑유완과 앵무문이 시문된 백자대접, 정교한 세공기술을 보여주는

    17) 청주 읍성내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고려시대 도로시설과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명문기와

    가운데 ‘城’銘과 해무리굽 청자편이 출토되어 고려시대 초기에 쌓았던 청주성의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어 주목된다(중원문화재연구원 2008:124).

  • - 18 -

    [그림 3] 청주 읍성․용두사당간과 명암동․금천동 토광묘군 위치도

    동곳 등이 공반되었다. 이는 국제적인 무역에 종사할 정도로 당시에 유력한 피

    장자로 추정되는데 이는 석곽묘 조영집단과는 차별성을 가진 세력으로 이해되나

    청주 토광묘군처럼 族墳을 형성하지는 않는다(中央文化財硏究院 2003:150).

    청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호족집단은 토광묘를 주묘제로 하였다고 보아

    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즉, 명암동 및 금천동유적내 토광묘 조영집단은 고려시

    대 청주를 근거지로 하는 주요세력으로 간주함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에 청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청주 김씨 세력과 주요 토광묘군이 연계될 수 있는 근거가 있

    을 것으로 판단된다.

    청주 지역 토광묘가 일찍부터 조영되기 시작한 이유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강

    한 재경세력과 재지세력간의 유기적인 관계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다. 이들 청주

    김씨세력은 현재 청주 상당구 일대를 族的 기반으로 하였으며, 현재 명암동, 금

    천동지역을 중심 매장지로 활용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한 개인이 스스로 획득한 위계를 표현하기에 노력한 반면,

    고려시대에는 현재의 지위를 드러내기 보다는 족적인 결합과 보호를 위해 족적

  • 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受容背景과 造營勢力

    - 19 -

    묘역을 조성하였다. 조상에 대한 공동제사를 통해 尊祖意識을 함양하고 집단의

    정체성을 찾음으로서 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동시에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의

    지위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송초기에 족인을 수록하던 族

    譜가 지속적으로 그 세대수를 위로 늘리고 수록 규모를 넓혀 갔던 것과 맥을 같

    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육정임 2007:340-343).

    Ⅵ. 맺음말

    청주는 역사 기록을 통하여 많은 연구가 진전된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활발한 고고학적인 조사로 인하여 많은 관련유적이 보고된 지역이기도 하다. 본

    고는 청주지역 고려시대 토광묘를 중심으로 역사적 맥락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하였다. 두 자료 형태를 통하여 종합적인 역사적 맥락에 대하여 함께 검토된 바

    가 없었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내용 요약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청주를 중심으로 확인되는 고려시대 분묘는 토광묘와 석곽묘이다. 청주 중심

    에는 토광묘가 집중적으로 조영되고 있다. 그리고 청주 중심지와 인접한 지역에

    는 분묘의 밀집도가 중심에 비해서 낮아지면서 여전히 토광묘가 중심을 이루나

    석곽묘의 존재가 확인된다. 반면, 청주 주변 및 외곽지역에 해당하는 청원 및 진

    천, 보은, 대전 지역에서는 청주지역보다 분묘의 조영이 산발적일 뿐만 아니라

    석곽묘의 비중이 좀 더 높아지고 토광묘의 빈도가 낮아지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고려시대 토광묘는 기존의 전통적인 석축묘와는 다른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규모면에 있어서 규격화되면서 호석 등 부가시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묘광 내부

    에는 유물을 부장하기 위한 요갱이나 편방시설이 존재한다. 유물부장에 있어서

    도 기존 무구류 및 토기류를 중심으로 부장된 것과는 달리 토광묘에는 동경, 청

    동숟가락, 동전, 가위 등 생활용구를 중심으로 부장되고 있다.

    유물부장양상은 북방문화권에 해당하는 요 및 금나라의 문화상과 유사함을 보

    이고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새로운 통일국가인 고려는 기

    존의 신라, 백제 문화권과는 달리 독자적인 문화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는 문

    화정책과 함께 당시 요와의 국제적인 정세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북방에 위

    치한 요와의 빈번한 사신왕래를 비롯한 교역으로 인해 활발한 문화접촉이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국가적인 체제가 완비된 사회에서는 지방보다는 중앙에 먼저

  • - 20 -

    전파되게 되는데 토광묘 역시 개경을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편, 토광묘의

    수용이 비교적 이른 지역 가운데 하나가 청주 지역이다. 이는 청주지역과 중앙

    과의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청주는 후삼국기와 고려시대 관련한 문헌기록상 재경세력과 재지세력의 존재

    가 뚜렷하고 활발한 활동상을 보여주는 지역의 하나이다. 재경세력은 청주를 족

    적 기반으로 하여 활동하였고, 재지세력은 재경세력과 연계되어 지역에서 입지

    를 굳건히 하면서 존재하였던 것이다. 세력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집단은 청주

    김씨이다. 청주 김씨는 현재 청주읍성을 중심으로 하는 상당구일대를 중심으로

    근거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대변하는 자료는 「龍頭寺幢竿記」의 내용이다.

    청주 재지세력인 청주 김씨는 개경을 중심으로 활동한 재경세력의 토대가 되

    면서 중앙의 문화를 흡수하게 됨과 동시에 국가적인 편제에 일찍부터 들어가게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들의 묘제 또한 중앙에서 채택된 토광묘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금천동 및 명암동유적은 청주 김씨 세력의 근거지인 상당구에

    해당되며, 상당구 중심인 용두사당간이 위치하는 곳에서 약 2㎞의 거리에 입지

    한다. 명암동 및 금천동유적내 토광묘 조성지역은 일대가 청주 김씨 세력의 족

    적인 매장지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청주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재지세력인

    청주 김씨 호족집단의 분묘형식은 토광묘로 볼 수 있다.

    〈투고일 2009.11.09. / 심사완료일 2009.11.25.〉

  • 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受容背景과 造營勢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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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受容背景과 造營勢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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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roduction of Pit Burials in Cheongju Region

    in Goryeo Period

    Do, Moon Sun*1)

    This paper is designed for investigating a construction group of Pit burials

    in Cheongju region in Goryeo period. There are a number of scholarly data

    of central and local governments during the Later Three Kingdoms and

    Goryeo periods as well as plenty of excavated data of pit burials and pit

    burials with a stone outer‐coffin have been reported in Cheongju region.

    However, comprehensive study for revealing the historical context based on

    the two types of data is rarely attempted.

    Different elements from traditional burials built with stone have been

    reported in the pit burials of Goryeo. In particular, facilities such as a

    Yogaeng(腰坑, a small pit for burial furnishings) and a niche, and burial

    furnishings mainly consisting of household items such as a bronze mirror,

    spoon, and coins, and scissors are characteristics of pit burials of Goryeo.

    These items sharing similarities with those of Chinese states of Liao and

    Chin might imply interrelationships with northern China. The fact that a new

    burial style introduced with a new culture appeared early in Cheongju region

    could be a basis to suppose a close relationship between Cheongju and

    central government.

    Based on historical documents, it is certain that there were a group

    staying in the capital area and a group in local areas in Cheongju. While the

    group staying in the capital from Cheongju was a powerful local clan based

    on around current Sangdang district centering town fortress of Cheongju, the

    local group has been considered as that of Kim clan originated in Cheongju

    which maintained firm status at the region as mentioned in

    Yongdusadanggakngi(龍頭寺幢竿記, A Record for a Pole at a Buddhist

    * principal researcher / team manager, Central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 - 24 -

    Temple named Yongdusa).

    Distance from a main base of Cheongju Kim clan to a burial complex at

    Geumcheon‐dong, mainly consisting of pit burials is only about 2Kim.

    Accordingly, there is a high possibility that the area around the

    Geumcheondong Site is a gravesite of Cheongju Kim clan. In conclusion, a

    view that burial type of the Cheongju Kim clan, which mainly exercised

    influence around Cheongju region, was a pit burial is quite probable.

    Key words:a pit burial, a stone‐lined burial(or a pit burial with a stone

    outer‐coffin), Cheongju, Cheongju Kim clan, powerful local family(or clan),

    Goryeo Peri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