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베세토연극제 -...

4
12 The Korean Theatre Review 2012. 9 13 프리뷰 제19회 베세토 연극제 일상에서 신화까지 한중일의 위대한 상상력이 온다 상상력에는 국경이 없다. 올해 여름 런던에서는 운동선수들이 실력을 겨뤘다면, 가을에는 한중일 삼국의 내로 라하는 연극 예술가들이 위대한 상상력으로 서울에 모인다. ‘2012 제19회 베세토 연극제’가 9월 4일부터 6일간 한국에서 개최된다. 베이징(Be), 서울(Se), 도쿄(To)의 글자를 베세토 연극제는 1994년에 서울에서 회를 시작한 해마다 한국, 일본, 중국이 차례대로 주최 국이 되어 연극제를 연다. 베세토 연극제 한국위원회(위원장 양정웅)는 최근 2009년에 이어 한국에서 역사 깊 은 막을 올린다. 나라의 문화 교류와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연극제는 시대를 깊이 성찰하고, 고정관념을 깨는 작품으로 해 마다 동아시아 연극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번 연극제는 일상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작품부터 신화와 현실을 오가는 작품까지 삼국의 상상력을 골고루 선보인다. ‘조용한 연극’으로 한국에도 팬이 많은 히라타 오리자 연 출의 <달의 곶>, 파격적인 각색으로 체호프을 다시 일본 제칠극장의 <갈매기>, 중국식 웅장한 비극의 정수 보여주는 <뇌우>, 삼국유사와 한국근대사를 오가며 현대 사회를 반추하는 국립극단의 <꿈> 등 어느 연극제 보다도 수준 높은 작품으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2012년 가을에 하나의 색깔을 더할 연극제 - 웅장한 케일과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참가작들을 경험하며, 동시에 각국의 문화적 특성과 관심사, 상상력을 비교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일시: 9월 4일~9월 9일 장소: 명동예술극장, 남산예술센터, 백성희장민호극장 일상 속 대화에 엉켜있는 치명적인 균열 나카사키 현의 외딴 섬에 사는 사와코, 카즈미는 남동생 노부오의 결혼식으로 분주하다. 여름 방학 기간 이라 노부오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집으로 찾아와 진로 상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사와코와 알고 지냈던 사토루도 사와코를 만나러 찾아오고, 사토루의 아내와 딸은 사토루를 만나러 이 집에 온다. 무대는 일본의 평범한 툇마루이다. 등장인물들은 누구나 그렇게 하듯, 집에 들어오고 나간다. 누구나 렇게 하듯“배고프지 않아?”라고 묻고 무심하게“저녁 먹기에는 이르다”고 답한다. 이들은 어느 하나 특 별할 없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아무렇지 않은 이어지는 대화에, 어 때보다도 팽팽한 긴장감과 초조함이 서려있다. 평범한 말이 쌓이고 쌓여 눈에 보이지 않은 균열이 생 긴다. 눈앞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평온한 일상 밑에 흐르는 아픔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노부오의 근처에 있는 곶은 달빛이 밝은 밤에는 물이 차올라 등대까지 이어진 길이 끊긴다. 이곳은 사람이 많이 빠져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이처럼 갈등이 쌓여 달처럼 차오르면 서로에게 이어진 길이 끊어지고, 결국 섬이 된다. 누군가는 점점 차오르는 바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사라지기도 한다. 서서히‘관계’가 단절되는 과정을‘일상’이란 그릇에 담아낸 수작이다. 1997년 일본에서 초연할 당시 많은 상을 수상하며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다. 작가, 연출, 배우가 긴밀히 협업하는 방식으로 탄생됐으며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답게 일상을 날카롭게 파헤치면서도 시적인 감수성 이 애잔하게 스며있다. 일본 | 청년단 <달의 곶> 일시: 9월 4일~9월 5일 8시 장소: 명동예술극장 문의: 1644-2003 : 마쓰다 마사타카 연출: 히라타 오리자

Upload: others

Post on 30-May-2020

1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TRANSCRIPT

12 The Korean Theatre Review 2012. 9 13

프리뷰

제19회 베세토 연극제

일상에서 신화까지한중일의 위 한 상상력이 온다

상상력에는 국경이 없다. 올해 여름 런던에서는 운동선수들이 실력을 겨뤘다면, 가을에는 한중일 삼국의 내로

라하는 연극 예술가들이 위 한 상상력으로 서울에 모인다.

‘2012 제19회 베세토 연극제’가 9월 4일부터 6일간 한국에서 개최된다. 베이징(Be), 서울(Se), 도쿄(To)의 앞

자를 딴 베세토 연극제는 1994년에 서울에서 첫 회를 시작한 뒤 해마다 한국, 일본, 중국이 차례 로 주최

국이 되어 연극제를 연다. 베세토 연극제 한국위원회(위원장 양정웅)는 최근 2009년에 이어 한국에서 역사 깊

은 막을 올린다.

세 나라의 문화 교류와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연극제는 시 를 깊이 성찰하고, 고정관념을 깨는 작품으로 해

마다 동아시아 연극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번 연극제는 일상에 현미경을 들이 는 작품부터 신화와 현실을

오가는 작품까지 삼국의 상상력을 골고루 선보인다. ‘조용한 연극’으로 한국에도 팬이 많은 히라타 오리자 연

출의 <달의 곶>, 파격적인 각색으로 체호프을 다시 쓴 일본 제칠극장의 <갈매기>, 중국식 웅장한 비극의 정수

를 보여주는 <뇌우>, 삼국유사와 한국근 사를 오가며 현 사회를 반추하는 국립극단의 <꿈> 등 어느 연극제

보다도 수준 높은 작품으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2012년 가을에 또 하나의 색깔을 더할 연극제 - 웅장한 스

케일과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참가작들을 경험하며, 동시에 각국의 문화적 특성과 관심사, 상상력을 비교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일시: 9월 4일~9월 9일

장소: 명동예술극장, 남산예술센터, 백성희장민호극장

일상 속 화에 엉켜있는 치명적인 균열나카사키 현의 외딴 섬에 사는 사와코, 카즈미는 남동생 노부오의 결혼식으로 분주하다. 여름 방학 기간

이라 노부오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이 집으로 찾아와 진로 상담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사와코와

알고 지냈던 사토루도 사와코를 만나러 찾아오고, 사토루의 아내와 딸은 사토루를 만나러 이 집에 온다.

무 는 일본의 평범한 툇마루이다. 등장인물들은 누구나 그렇게 하듯, 집에 들어오고 나간다. 누구나 그

렇게 하듯“배고프지 않아?”라고 묻고 무심하게“저녁 먹기에는 이르다”고 답한다. 이들은 어느 하나 특

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화를 나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어지는 화에, 어

느 때보다도 팽팽한 긴장감과 초조함이 서려있다. 평범한 말이 쌓이고 쌓여 눈에 보이지 않은 균열이 생

긴다. 눈앞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평온한 일상 밑에 흐르는 아픔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노부오의 집 근처에 있는 곶은 달빛이 밝은 밤에는 물이 차올라 등 까지 이어진 길이 끊긴다. 이곳은

사람이 많이 빠져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이처럼 갈등이 쌓여 달처럼 차오르면

서로에게 이어진 길이 끊어지고, 결국 섬이 된다. 누군가는 점점 차오르는 바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사라지기도 한다. 서서히‘관계’가 단절되는 과정을‘일상’이란 그릇에 담아낸 수작이다.

1997년 일본에서 초연할 당시 많은 상을 수상하며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다. 작가, 연출, 배우가 긴 히

협업하는 방식으로 탄생됐으며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답게 일상을 날카롭게 파헤치면서도 시적인 감수성

이 애잔하게 스며있다.

일본 | 청년단 <달의 곶>일시: 9월 4일~9월 5일 8시

장소: 명동예술극장 문의: 1644-2003

작: 마쓰다 마사타카 연출: 히라타 오리자

1514 The Korean Theatre Review 2012. 9

현 적 감각으로 변신하다체호프의 <갈매기>가 75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도

이야기와 언어가 아닌 배우의 신체 움직임에 집중하면

서. 한국 초연작인‘제칠극장’의 <갈매기>는 일본의 전

통예술과 현 적 감각을 세련되게 조화시켜 컨템프러리

무브먼트 스타일로 새롭게 선보인다. 이 작품은 코스챠

가 자살함으로써 막을 내린 원작의 후일담을 보여준다.

코스챠의 죽음 이후 정신이 이상해진 니나는 정신병원

에 입원한다. 원작에서 죽은 코스챠를 발견했던 의사

도른이 병문안을 와 다른 환자에게 니나와 코스챠의 이

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니나는 마치 환 을 보는 듯 과

거를 다시 체험한다.

일본 | 제칠극장 <갈매기>일시: 9월 7일~9월 8일, 금 8시, 토 3시

장소: 남산예술센터 문의: 758-2000

원작: 안톤 체호프 각색∙연출: 나루미 코헤

천둥과 빗줄기가 깨우는 30년간의 운명과 사랑탄광회사 사장 주복원의 후처인 번의는 자신의 의붓아들인 평과 연인관계이다. 그러

나 평은 하녀 사봉을 사랑하게 되고 주복원과의 사이에서 난 충마저 사봉에게 반해

버린다. 이에 화가 난 번의는 사봉의 어머니인 시평을 불러 딸을 데려가라고 명한다.

30년 만에 자신이 살던 집에 돌아온 시평은 자신을 버린 전 남편 주복원과 재회하

고, 사봉을 사랑하는 평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 시평은 사봉을 데리고 떠나려

하나 사봉은 이미 평의 아이를 가졌다. 곧이어 사봉과 평이 남매임이 밝혀지는데….

1894년부터 1924년까지 약 30년간의 중국사회를 웅장한 무 에 담아 보여준다. 마

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세련되고 강렬한 무 는 중국 근 사의 부유한 저택을 그

로 옮겨놓은 것 같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라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세계적으로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중국연극사의 수준을 높인 작품이다. 복잡하게 얽힌 두 가족

의 관계에 중국근 사의 어두운 뒷면, 계급투쟁, 이전까지 이어져온 봉건사회의 몰락

을 담아냈다. 한 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와 조적으로 세차게 내리꽂는 천둥과 빗

줄기 속에서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두 가문의 비극이 시작된다.

중국 | 다롄극단 <뇌우>일시: 9월 8일~9월 9일, 3시 장소: 명동예술극장 문의: 1644-2003

원작: 차오 위 연출: 가오 지에

인생이란 결국은 허망한 꿈일 뿐일제강점기. 조선 청년에게 독립을 향한 열망을 불어넣었던 독립운동가 춘원 이광수는 친일분자라는

비판에 크게 낙심한다. 끝없이 불안해하고 삶에 한 회의에 사로잡힌 그는 낙산사에 들어가『꿈』을

집필한다. 삼국유사의‘조신지몽’이란 일화를 소재로 을 써나가는 이광수. 그는 독립운동가에서 이

제는 변절자라고 비난 받는 자신과 파계하고 여인과 도망친 조신을 동일시한다. 소설은 점점 절정에

이르고 자신에 한 비난도 점점 고조되는데….

삼국유사가 갖고 있는 상징성을 통해 우리의 드라마를 찾고 이를 세계적으로 알리겠다는‘2012 국립

극단 삼국유사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와 현 의

한국인이 소통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보편적 가치를 찾고자 한다. 금기와 욕망 사이에서 번

민하는 조신과 이광수. 그들이 삶이란 얼마나 한낱 꿈처럼 허망한지 그럴수록 삶이란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천년 고찰 낙산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_윤민지(객원기자, [email protected])& 사진_(재)국립극단 & 명동예술극장 제공

한국 | 국립극단 <꿈>일시: 9월 1일~9월 16일

평일 8시, 주말 3시(9월 6일, 10일 공연 없음)

장소: 백성희장민호극장 문의: 3279-2233

작: 김명화 연출: 최용훈

16 The Korean Theatre Review 2012. 9 17

7개의 작고 고독한 방

연극은, 과거 평택 안정리 캠프 험프리 부근에 형성된 기지촌 클럽에서 미군을 상 로 일했지만 지

금은 독거노인이 되어 방치된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7개의 작고 허름한 방에서 시작된다. 그곳에 한

국 기지촌 여성 인권과 미국 여성 인권 사이의 상관관계에 한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차 하

나가 찾아온다. 하나는, 젊은 시절 기지촌 클럽에서 일할 당시 얻은 아들 마이클을 입양 보낸 순

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하지만 한 집에서 살던 할머니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발견되

고 자신의 과거와 닮은 인생을 살아가는 필리핀 여성 선희(써니)의 모습을 본 순 은 그동안 속에만

담아두었던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또한 클럽에서 일하는 선희, 미군기지 공사

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춘권, 미군기지 철수 활동가 상철 등도 모두 기지촌에 얽힌 그들의 사연들을

하나 둘 풀어내기 시작하는데…… 제목인‘일곱집매’는 일곱 집이 다정한 자매처럼 살았다고 해서

불려진 안정리의 옛 이름 중 하나다. 일곱 집이 사는 작은 시골동네 던 그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서

고 기지촌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곳은 버려진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기지촌 할머니들의

공간으로 무 위에 형상화 된다. 무 는 7개의 방이 한 공간에 조 하게 붙어있는 구조이고 그곳에

사는 할머니들은 모진 역사가 떠안긴 서 픈 운명들을 맥없이 끌어안은 채 고독하게 방치되었다. 하

지만 연극은 단순히 기지촌 할머니들의 과거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진 않다. 연극이 정말 이

야기하고 싶은 것은‘기지촌’이라 상징되는 부조리한 사회적 구조 때문에 삶이 부서지고 굴절되었

음에도 다시 그 사회의 그늘 속에 집을 짓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침묵의 아픔, 그 반향이다.

일시: 8월 30일~9월 9일 평일 8시, 토 3시ㆍ7시, 일 3시, 월 쉼

(9월 2일 오후 3시 공연 후 관객과의 화)

장소: 연우소극장

작: 이양구

연출: 문삼화

출연: 김지원, 김시 , 한철훈, 조시현, 최설화, 나다래 외

문의: 070-8236-0445

무 디자인: 김혜지 / 조명디자인: 박성희 / 의상디자인: 강기정 / 분장: 송 옥 / 사진촬 : 유진희

조연출: 김종심 / 그래픽디자인: 최 용 / 기획: 고은주, 최윤희

프리뷰

극단 해인 & 공상집단 뚱딴지

<일곱집매>

써니라 불렸던 우리 이웃 선희

기지촌이란 외국인의 기지 주변에 만들어진 마을이다. 우리나

라엔 미군이 있고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는 기지촌이 있고

이 촌에는 사납거나 방종하거나 쓸쓸한 미국인 남자친구들을

둔 여성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이제는 죽고 잊혀진 사람을 뺀 나

머지 몇 명의 늙은 여자들이 남아 있다. 서술되지 않은 기지촌

의 진짜 역사적 사실들이다. 그녀들의 추억은 중절 수술과 건

망증과 몇 통의 미국 초콜릿 그리고 입양된 아이들의 확인 안

된 소문들.

연극 <일곱집매>는 이 마을을 방문하는 학로 가을의 통증이

다. 극단‘해인’과‘공상집단 뚱딴지’는 기지촌 할머니들과 그

주변인들의 나흘간의 일상을 통해 한국 근 사의 롤러코스터

를 맨몸으로 굴러온 한국 여자들의 잔 을 보여준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약소국의 비극적 투지와 마침내 살아남은 약소

국의 비겁한 건망증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이야기는 없다.

이 극은‘양공주’, ‘양색시’라 불리는 사회적 편견 속에서 죄

의식에 시달리며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인생을 자책해야만

했던 기지촌 할머니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고자 한다. 행복하

고자 태어났으나 결코 행복할 수 없었던 이유 앞에서 그저 숨

기고 싶었던 과거 역사의 한 부분으로만 취급되었던 기지촌

여성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기지촌에 관한 이야기는 국내 연극에서 처음 다뤄보는 것으로

도 그 의의가 있으나 스마트폰으로 세계 지식을 다투는 오늘

날 우리들의 역사적 기억을 기지촌의 낡은 가로등이 비추고

있음을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 극을 쓴 이양구

작가가 기지촌 할머니들을 보살피는 (사)햇살사회복지회에 3년

째 자원봉사를 하면서 체험한 생생하고 진솔한 이야기들은 극

적인 감동은 물론 오랜 시간 지켜본 관찰자로서의 예민한 시

각도 함께 전해 줄 것이다.

16 The Korean Theatre Review 2012. 9

1918 The Korean Theatre Review 2012. 9

신의 뜻은 몰라야 하는 것이다

이제 기지촌 클럽에서 종사하는 한국 여성들은 거의 없다. 그 자리를 신하는 것은 필리핀이나 러시아 등지의 외국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써니 혹은 선희의 이름으로 그 어려웠던 시절의 한국 여성들의 삶을 되풀이하고 있다. 현재 안

정리 쪽방에서 기거하며 불우한 여생을 이어가고 있는 할머니들은 똑같이 써니 혹은 선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국

의 여성들을 바라보며, 어떤 식으로든 삶에서 되풀이되는 이 기이한 부조리함에 해, 그 가혹함에 해 더 이상 말하

지 않는다. 가해자, 피해자, 국가, 역사, 사회, 필요악, 생산성, 부조리 등의 단어는 저녁 햇살 한 줌만큼의 쓸모도 그녀

들에게는 없다.

연극 <일곱집매>의 일곱 개의 방 중 어떤 것은 비어 있다. 아마 그 어두운 방에는 비망록을 들여다보며 움직이지 않는

신께서 사실 것이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비망록의 다음 장을 조금씩 써내려가고

계실 것이다. 인생이 이렇게 가혹할 리는 없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의 뜻은 알려지지 않고 알 수 없

으며 알지 못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 둑이 터지지 않게 다스리며 신경통의 문지

방을 넘는 할머니들이 있다. 말없는 눈동자처럼 가을이 오고 있다.

_김성민(객원기자, [email protected])

사진_박창현(포토그래퍼, [email protected])

인간, 여자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

연극은 극이 담아낼 무거운 소재에 비해 평범하고 잔잔한 드라마의 형식을 띠고 있다. 문

삼화 연출가는 이 극이 사회 정치극이라는 한 색깔로만 불릴 것에 우려를 표하 다. 무엇

보다 인간을 온전히 그려내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공감받길 원하고 그런 면에서 극의 완

성도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서 부디 선입견 없이 관극하실 것을 당부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불우하고 고독했고 사랑이 필요했던 사람들이요. 다

만 그 사람의직업이기지촌여성이었던거죠. 그분들은다른 얼굴을한 다른 세계의사람

들이 아니잖아요. 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고 엄마고 한 인간이죠. 실감해보세

요. 그들이당신의이모할머니고이웃이었다면지금처럼먼 데를 바라보는것처럼그들을

볼수있을까요?”-연출가 문삼화

“할머니를만나러평택까지갔었어요. 직접뵈니한인간으로서의면모에끌렸어요. 난사

실 내 발로 이곳에 왔어!라고 하는 할머니도 있었어요. 슬픔 같은 게 진하게 느껴졌어요.

무엇보다정부의나몰라라하는사후처리는부당한것같아요.”-배우 김지원

“기지촌 인식의 변화가 필요해요. 할머니 자신부터요. 인식의 층위를 달리 하면 죄의식에

서 벗어나실 수 있을 거예요. 우린 모두 신의 뜻을 모르잖아요. 신만이 모든 걸 아실 거예

요. 그래도자기탓을할줄아는할머니들은용감하신분들이죠.”-배우 최설화연출가문삼화

썩은 고기를 누가 던졌는가

평택 안정리에 미군 기지가 건설되자 미군 상의 기지촌 클

럽 등이 생겼고 전쟁으로 인해 생계가 막막했던 여성들은 마

지막 선택으로 그곳에 몰려들게 된다. 당시 정부는 그녀들을

국가의 산업역군으로 미화하며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 고‘외

화벌이 산업역군’, ‘민간 외교관’으로 칭하며 미군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독려하 다. 또한 1971년 주한미군 감축

을 막기 위한 한 방편으로‘기지촌정화운동’을 실시하며 기지

촌 여성들의 성병을 철저히 관리하기도 하 다. 이상은 국가가

포주 노릇을 하 다고 이해할 수 있는 근거들이다. 인간은 태

어나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어떤 국가의 일원이며 계급사회

에 있어서는 어떤 계급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일생의 무늬를

그려가게 된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운명은 개인이 속한 거

한 사회조직의 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무조건 사

회적 요구를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기지촌만 하더

라도 현재는 주한미군 감축 및 철수라는 사회적 상황의 향

으로 쇠퇴일로에 있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클럽의 여성들은

부분 필리핀이나 러시아 여성들이고 과거 기지촌 여성들은 나

이 들고 버려진 채 소외계층으로 근근이 삶을 이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한민국 1960~70년 의 기지촌은 과연

사회적 필연이었을까? 이 부분에 있어서 미군이 주둔한 나라

에서 기지촌이 형성된 곳은 한국과 필리핀뿐이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한국 정부는 분명 주도적으로 불

우한 여성들을 기지촌으로 이끌어 그들의 정책도구로 사용하

으며, 그 과정에서 운명이라는 포장지를 덧씌워 그녀들의 자

존감을 망가뜨렸고, 이제 쓸모가 없는 그녀들을 버리고 방치하

는 것이다. 그녀들은 여전히 그곳에 고독하게 버려진 채 남아

있다. 먹고 살기 너무 힘들었던 그 시절, 누군가 악하게 던

져준 썩은 고기를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자책하며

좁고 허름한 쪽방에서, 가족을 가진 적 없는 독거노인이란 쓸

쓸한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