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보고서tour.chosun.com/review/201502-jby.pdf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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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제36회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보고서 (부제 : 한일간 존경하는 인물의 대립과 역사교육) 소속 : 한송중학교 성명 : 정 봉 열 1.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을 준비하며 역사를 객관적이고 생동감 있게 이해하는 데는 현장 탐방만한 것이 없다.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국내 유적 탐방은 많이 하였으나 일본역사와 관 련된 탐방 경험이 없어 생동감 있는 동아시아 교육활동 전개에 아쉬움을 가 지고 있었다.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은 역사를 가르치면서 자료로만 접했던 한일 관계 사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참가신청을 하며 내심 선정되기를 기대하였다. 행운인지 탐방단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기쁨과 함 께 교과서에 실려 있는 사진들이 떠올랐다. 한반도의 고대 유물을 포함해 9000여점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동대사의 정창원, 백제 장인의 기술이 담겨있다는 법륭사 5층 목탑, 우리나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흡사한 광륭사의 일본 국보 1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의 3대 자랑 중 하나라는 오사카성 등등. 역사탐방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학생들에게 누차 강조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학교업무를 핑계 삼아 답사지역에 대한 공부를 소홀했음을 반성하 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꾸려 탐방의 출발지인 부산 국제여객터미널로 향하였다.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출발에 앞서 오리엔테이션 및 학술 강연이 있었 다. 한일 관계사 속으로의 시간 여행을 하면서 일본의 가면과 실상, 그리고 저력을 살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주최 측의 언급을 필두로, 일본 속 한민족사 탐방 일정과 답사지역 안내와 조선통신사의 여정, 일본 고대 국가 성립과정과 한반도의 관계 등에 대한 개략적인 강연을 들으면서 “나는 왜 일본 속 한민족사를 탐방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2. 한민족의 자취를 찾으며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오리엔테이션과 학술 강연을 마치고 출국심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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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보고서

(부제 : 한일간 존경하는 인물의 대립과 역사교육)

소속 : 한송중학교

성명 : 정 봉 열

1.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을 준비하며

역사를 객관적이고 생동감 있게 이해하는 데는 현장 탐방만한 것이 없다.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국내 유적 탐방은 많이 하였으나 일본역사와 관

련된 탐방 경험이 없어 생동감 있는 동아시아 교육활동 전개에 아쉬움을 가

지고 있었다.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은 역사를 가르치면서 자료로만 접했던 한일 관계

사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참가신청을 하며 내심

선정되기를 기대하였다. 행운인지 탐방단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기쁨과 함

께 교과서에 실려 있는 사진들이 떠올랐다. 한반도의 고대 유물을 포함해

9000여점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동대사의 정창원, 백제 장인의 기술이

담겨있다는 법륭사 5층 목탑, 우리나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흡사한

광륭사의 일본 국보 1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의 3대 자랑 중 하나라는

오사카성 등등.

역사탐방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학생들에게 누차 강조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학교업무를 핑계 삼아 답사지역에 대한 공부를 소홀했음을 반성하

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꾸려 탐방의 출발지인 부산 국제여객터미널로

향하였다.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출발에 앞서 오리엔테이션 및 학술 강연이 있었

다. 한일 관계사 속으로의 시간 여행을 하면서 일본의 가면과 실상, 그리고

저력을 살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주최 측의 언급을 필두로, 일본 속

한민족사 탐방 일정과 답사지역 안내와 조선통신사의 여정, 일본 고대 국가

성립과정과 한반도의 관계 등에 대한 개략적인 강연을 들으면서 “나는 왜

일본 속 한민족사를 탐방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2. 한민족의 자취를 찾으며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오리엔테이션과 학술 강연을 마치고 출국심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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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 2만 톤급의 뉴카멜리아호에 승선하였다. 밤새 대한해협과 현해탄을 건

너 아침에 일본 하카다항에 정박하였다. 흔들리는 배에서 조선통신사들의 여

독을 느끼며 첫날을 꼬박 이동하는데 썼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난생처음

일본 땅에 발을 딛는다는 설렘에 선내 아침식사를 부리나케 하였다.

하선 후 300여명이 넘는 탐방단은 지문등록과 사진촬영을 해야 하는 일본

입국 심사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지문등록과 사진촬영을 거부할

경우 입국이 거부된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입국장을 나오니 8대의 전세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탐방단은 성명의 가

나다순에 의해 분승하였는데 7호차로 배정되었다. 일본에 대한 풍부한 교양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친절한 가이드와 41명의 교사. 앞으로 5일간 탐방을

함께할 일행들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보니 전국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초중등 교사들이 참여하였지만 정작 역사교사는 5명밖에 되지 않아 아쉬웠

다.

백제와의 연결고리 후나야마고분(船山古墳)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길목에 있는 후나야마 고분은 앞은 네모지

고 뒤는 둥근 모양을 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고분은 길이 62m, 높

이 12m 정도의 규모로 전방후원분 중에는 중간 정도의 크기라고 하지만 규

모가 상당히 커보였다. 특이한 형태의 이러한 무덤은 3세기에서 5세기에 걸

쳐 일본 열도 곳곳에서 축조되었으며 이 무덤이 등장하는 시기를 고분시대

라고 부른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모와 신발, 금귀고리 등은 전북

익산 입점리나 공주 수촌리 출토 유물과 매우 유사하여 백제와의 연결을 유

추할 수 있다.

무덤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석관의 뚜껑을 대하는 순간 비록 시대는 다

르지만 백제 무령왕릉이 떠올랐다. 후나야마 석관이 무령왕릉 목관 복원 형

태와 너무 닮아 있었다. 이 고분의 발굴과 출토 유물은 당시 대단한 것이었

지만 일제는 이런 사실을 즉각 발표하지 않아 사전 조율을 거친 것이 아니

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전래된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

규슈 사가현에 있는 요시노가리 유적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

지의 야요이시대 600년 전 기간의 마을 발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다. 이 유적은 야요이 시대 최대의 환호(環濠) 취락과 독널무덤(甕棺墓)이 분

포하고 있는데 환호취락의 크기와 구조, 독널무덤의 형태와 분포 수에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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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유적을 압도한다. 발굴 결과 한반도계의 청동기와 무문토기가 나와 한반

도에서 세형동검을 사용하던 집단의 일본 진출 과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고상(高床)가옥과 옹관묘 군락이

인상적이었으나 자루와 손잡이가 분리되는 한국식 동검이 전시되지 않아 아

쉬웠다.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 나고야 성터 및 박물관

규슈 사가현 가라쓰시(唐津市)에 있는 나고야 성터와 주변 지역은 도요토

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조선침략 기지이며, 한반도와

일본 간의 오랜 교류를 단절시켰던 불행한 역사의 무대이다. 전국시대를 통

일한 도요토미는 1591년 8월 이듬해 봄에 조선침략을 결행한다는 것을 전국

에 알리고 성을 축조할 것을 다이묘들에게 명령하였다. 나고야성의 건축은

가토 기요마사와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관장하였으며 8개월 후인 1592년 3월

에 완성하였는데 그 면적이 17만m²로 당시 성곽 규모로는 오사카성 다음으

로 컸다고 한다. 이 성을 전진기지로 3천여척의 전함을 정박시키고 이키섬과

쓰시마를 거쳐 부산으로 이어지는 조선침략의 역사가 시작된다.

처음 대하는 일본성곽은 많이 낯설었다. 비스듬하게 쌓아올린 성벽을 미로

처럼 세 번이나 돌아, 돌아, 돌아 들어가야만 중심부에 이르도록 축조되어있

었다. 평지나 약간 높은 곳에 축조한 평산성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구조로 이해하였다. 일본의 성에는 무사들만 거주하였다고 한다. 반면

한국의 성들은 읍성이나 산성으로 축조되면서 민간인들도 함께 거주하였기

때문에 성이 함락되었을 경우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는데 진주성 함락시

7만 여명이나 살상을 당했다고 한다.

나고야성에서 “역사는 유적과 인물을 남기고, 유적과 인물은 역사를 이야

기한다.”는 유홍준님의 언급을 실감하였다. 미리 나고야성과 도요토미를 공

부하고 왔어야 재미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유적만 무심히 둘러보았을

뿐 과거의 도요토미와 이야기하지 못했음에 내려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

고야 성터에 인접한 나고야성 박물관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한일간 우호적 교류의 상징으로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

어 이채로웠다. 일본 속에서도 역사의 진실과 상생을 위한 노력들이 존재하

고 있음에 반갑고 친근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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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나야마 고분] [요시노가리 유적의 주거지와 옹관묘]

일본 도자기의 원류 이삼평 도예지

이삼평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어 일본 도자기 혁신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규슈 히젠국(현재 사가현) 영주

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임진왜란 시 철수할 때 일본으로 데리고 왔다고

전한다. 기술은 가져왔으나 백자 생산에 적합한 백자석이 없어 여러 곳을 전

전하다 아리타 지역에서 백자석을 찾아 일본 최초로 백자를 생산했다고 한

다. 일본에서는 이삼평을 도잔(陶山)신사에 도조(陶祖)로 모셔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14대 이삼평 후손이 도자기를 생산하며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도잔신사를 대하며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들만이 아니라 사람도 신격

화하여 제사하는 일본인들의 신앙을 조금은 이해하였으며, 가업을 성실히 계

승하는 이삼평 후손을 통해 100년 역사와 기술을 축적하고 있는 강소 기업

이 2만6천이 넘는다는 일본 경제의 저력을 느꼈다.

신라 공격에 대비한 방어 거점 다자이후(大宰府)

다자이후는 크게 주관하여 다스리는 관청, 즉 규슈지역으로 다스리던 행정

관청을 의미한다. 거대한 주초석들만 남아 옛 영화를 묵묵히 전하고 있는 이

곳은 백제와 관련된 유적이다.

서기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백제부흥운동을 이끌던

복신은 왜(倭)에 구원을 요청한다. 이에 왜는 하카다에서 400여척의 배에 2만

7천여 명의 군사를 태우고 백제 구원에 나섰지만 백촌강 전투에서 패하였으

며, 이로 인해 백제 부흥군은 재기의 힘을 완전히 잃게 된다. 3천여 명에 이

르는 백제 지배층은 이 때 패전한 일본 수군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으며, 텐

지 일왕은 신라가 규슈까지 쳐들어올 것으로 믿고 하카다만 연안의 전진기

지를 철수하는 동시에 백제식 토성과 산성을 만들어 방어요새를 구축하게

된다. 백촌강 패배 이후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자이후는 수성과 산성으

로 둘러싸인 요새로서 규슈를 다스리는 정청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외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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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하며 오사카를 지키는 서쪽 관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큰

규모를 자랑하는 듯이 거대한 주초석 몇 개만 남은 다자이후 터에 역사의

이끼가 없는 화강암 주초석들로 마구 채워 복원해 놓은 모습이 못내 아쉬웠

다.

조선통신사의 흔적이 있는 아카마 신궁,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청

일강화기념관

조선통신사의 숙소로 이용되었던 장소라는 아카마 신궁은 일본 세토내해

의 입구인 시모노세키에 있다. 시모노세키는 바다의 폭이 1.5Km 정도 되는

간몬 해협의 입구에 위치하는데 일본 국내의 교통요지이자 한국과 교류하는

중요한 창구로, 조선 전기에는 조선 상인들도 거주했었다고 한다.

부산을 출발한 조선통신사가 쓰시마를 거쳐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면 나가

토번의 모리씨가 안내선 100여척으로 마중을 하며 통신사의 숙소로 사용할

아미타지(阿彌陀寺 후에 아카마 신궁으로 바뀜)를 수리하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미타지는 자취가 없고, 온통 빨간색으로 장식한

아카마 신궁만이 남아있다. 아카마 신궁은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죽은 안토

쿠 일왕을 모신 신궁이다. 안토쿠 일왕은 무장 타이라노 기요모리의 외손자

로 세 살에 일왕이 되었는데 헤이시(平氏)와 겐지(源氏)의 전투에서 헤이시가

패배하자 마지막 전투를 벌인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후

사람들이 진흙으로 상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 사당이 바로 아미타지

옆에 있었다. 아미타지에 머물던 조선통신사들은 옆의 아카마 신궁에 들러

안토쿠 일왕을 조문하는 시를 여러 편 남겼다고 한다.

청일 강화기념관은 청일전쟁 결과 강화회의와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의 역

사적 의의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념관 입구 옆에는 이토 히로부미

의 흉상이 있으며, 내부에는 회담 장소에서 사용되었던 바로 그 현장의 탁자

와 테이블이 유리관 안에 보존되어 있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중국 중심의 동

아시아 질서를 넘어 제국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는 계기였으며, 그 희생양이

조선이었음에 전시관을 둘러보는 마음이 무거웠다.

신모지항에서 메이몬훼리에 승선하여 저녁을 먹은 후 배를 구경하였다. 최

신형 여객선이라기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여기저기 둘러보았는데, 좁은 공간

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개인 공간을 배려한 캡슐형 객실과 1인 샤워실이

인상적이었다. 일본을 여행하며 차창 밖으로 보았던 소형 승용차, 소형 아파

트, 단독주택의 작은 마당, 소박한 소량의 음식 등과 매치되면서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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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잔(陶山)신사] [조선통신사상륙지] [청일강화기념관]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 도다이지(東大寺)

일본 속 한민족사 탐방에서 가장 기대한 곳이 동대사였다. 정창원(正倉院)

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동대사에서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 했다고 배

웠던 신라장적을 보관하고 있는 곳. 고대 한반도의 유물을 비롯해 9000여점

의 국보급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는 보물창고. 그런데 동대사 탐방에서 정창

원은 시간상 관람이 어렵다고 하였다. 어찌하면 동대사 후원 깊숙이 자리 잡

고 있는 정창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정창원이 눈앞에 어른거리다보

니 세계최대의 목조건축이라는 대불전도,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청동대불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동대사의 목조 건축물들은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보아왔던 고대 목조 건축

물들을 아담사이즈로 만들어버리는 거대함에 잠시 놀랐다. 하지만 그 거대함

속에서 공포, 배흘림, 골기와 등이 고대 한반도 건축기술로 지어졌음을 묵묵

히 전하고 있었다. 한반도 기술들과 역사를 이야기하니 놀람도 잠시였다. 일

본에 첫발을 내딛으며 느꼈던 온화한 기후, 탐방 중 곳곳에서 목격한 거대하

게 자란 삼나무 군락, 이것이 거대한 목조 건축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정창원은 꼭 보아야겠기에 일행들이 대불전과 청동대불에 몰두하고 있을

때 후원으로 뛰기 시작했다. 신라장적은 못 볼지언정 건물이라도 눈으로 확

인해야겠다는 짜릿한 답사의 쾌감을 위해 달렸다. 앞뒤를 살펴보니 나뿐만

아니라 여러 선생님들이 뛰고 있었다. 선산에서 근무하신다는 역사 선생님도

뛰고, 경기도에 근무하신다는 역사 선생님도 뛰고…. 역시 역사탐방에는 역

사교사가 제 멋을 찾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정작 정창원 앞에 서

자 잠시 서운했다. 고대 한반도 보물들을 문틈으로나마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정창원의 역사를 안 지 40년 만에 보았다는

쾌감을 셀까에 담으며 매년 가을마다 열리는 정창원 보물 공개 특별전을 기

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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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고대문화의 종합판 호류지(法隆寺)

법륭사는 아스카(飛鳥) 문화의 중심지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자 중국과 한반도의 불교 건축과 예술이 일본에 건너

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아사아 미술의 보고’로도 불린다.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시대 문화를 종합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일본이

한반도의 직접적인 문화적 영향권 하에 있었음을 여러 건축물과 불상, 그림

등이 웅변하고 있다.

법륭사의 건축물들은 백제의 목조건축 기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금

당건물과 5층 목탑, 회랑의 건축 구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거대함에는 이

미 동대사에서 경험했기에 거대함 속의 섬세한 건축기술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었다. 백제 관음상이라고 이름 붙여진 목조관음상 앞에서는 온화한

미소에 가녀린 손으로 살포시 정병을 잡고 있는 유연한 자태로 발걸음을 붙

들어놓았다. 다소 어두운 공간에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는 실체를 대하니 묘

한 감동이 일었다. 담징이 그렸다고 배우고 가르쳐온 금당벽화는 “담징이

그려놓지 않았을까?”라는 노학자의 언급이 “담징이 그렸다.”로 와전되면

서 굳어져버린 오류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

라도 학문적 고증이 없는 것이라면 비판적 검토를 해야 함을 재확인하는 기

회였다.

백제계 실력자 소가노우마코의 무덤 이시부타이(石舞臺)

이시부타이의 한자표기를 살펴보니 돌이 춤추는 높은 곳이란다. 이 고분은

오랜 세월에 봉분이 다 벗겨지고 내부의 현실도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다. 30

여개의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횡혈식 석실분으로 총 중량은

2,300여 톤에 이른다고 하니 돌이 춤추는 것이 아니라 무덤주인공을 위해 돌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무덤의 주인으로 알려진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는 그 조상이 백제에서 건

너온 도래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소가씨 가문은 6세기 이후 100여 년 동안

일본 열도를 사실상 지배했던 유력한 호족으로 소가노이나메를 거쳐, 그의

아들 소가노우마코에 이르러 왕을 능가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일본 최초의 절 아스카테라(飛鳥寺)

아스카테라는 588년 백제로부터 부처의 사리를 헌납 받은 일본 조정의 실

세 소가노우마코가 발원해 596년 창건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찰이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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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당시 아스카테라는 백제로부터 많은 기술자들을 초청해 3개의 금당이 탑

을 둘러싸고 있는 대사찰로 건축되었으나 가마쿠라 시대에 대부분 소실되었

고, 현재 본당은 에도 시대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기와를 제작한 기

술자들은 법륭사 등의 축조에도 관여했고, 이후 관련 기술을 익힌 기술자들

과 제자들이 일본 전역에 퍼져 사찰 건설에 기여했다고 한다. 금당과 연결된

복도에 전시된 와당들을 보면서 마치 백제와당이 일본으로 건너와 전시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동대사 금당과 대불] [법륭사 5층목탑] [이시부타이]

일본 권력의 변화와 함께한 이조성

교토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이조성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에

도막부를 연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왕이 있는 교토 방문 시 머

물기 위한 목적으로 1603년 건축을 시작하여 3대 쇼군 이에미츠가 1626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조성은 헤이안코 도성을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

으로 구획을 한 후 가로선 첫 번째인 제1조에 왕궁을 설치하고, 구획의 다음

가로선을 순서대로 2조, 3조 식으로 명칭을 부여하였는데, 도시 구획 가로선

2조에 위치하여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이조성은 일본 성의 기본구조인

해자가 둘러있고 성문을 들어서면 돌고 돌아 정무공간인 니노마루 고덴이

자리 잡고 있다. 니노마루 고덴에는 복도로 연결된 6개의 홀이 있으며 계급

에 따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에 제한을 두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오오

히마로(大廣間)는 쇼군이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의 방문을 받던 곳인데 이곳

의 마룻바닥은 외부의 침입자를 막기 위해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

리가 나도록 장치를 하였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 이에미츠는

일왕의 방문에 대비해 당대 최고의 미술유파인 가노파 화가의 그름으로 접

견실을 꾸몄는데, 1867년 마지막 쇼군이 메이지 일왕 앞에 무릎을 꿇고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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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을 넘겨준 곳(대정봉환)도 바로 이방이었다고 한다. 니노라무 고덴의 뒤쪽

에 있는 니노마루 정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축소해 인위적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려는 일본 정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에 익

숙해서인지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신라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류지(廣隆寺)

고류지는 스이코 일왕 11년(603)년에 건립된 교토 최고(最古)의 사찰로 호

류지 시텐노지와 함께 쇼토쿠 대자가 건립한 사찰 중 하나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가 “내가 고귀한 불상을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 이 불상

을 모실 자가 없는가?”라고 묻자 태자의 고문이자 당대 실력자였던 하타

(秦)씨 가문의 하타노카와카츠가 자진해 받으며, 고류지의 전신인 호코지(蜂岡寺)를 창건해 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하타씨는 한반도의 신라계 이주

집단으로 일본에 양잠과 견직, 농업 등 선진 문명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고류지에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비롯해 십이신장상, 십일면천수관음상

등의 일본국보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은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

사유상이다. 일찍이 독일 철학자 칼야스퍼스는 이 불상에 대해 “지구상의

모든 시간적 속박을 초월해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가장 정결하고 원

만하며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최고의 찬사를 바친 바 있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그 형태나 솜씨가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쏙

빼닮았다. 실제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한반도로부터 도래한 것이라는 기록

이 고류지에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으나 일

본의 한 학생이 불상에 반한 나머지 껴안으려다가 손가락 하나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불상의 재료가 한반도산 적송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신라 제작설에 비중이 쏠리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일본에서 제조된 목조상

들이 대부분 녹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적송이 일본에는 없고 한반도에

서 많이 자라는 나무라는 사실이 이 설을 뒷받침한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손가락 사고를 계기로 문화재보호에 관한 법률을 만

들 정도로 일본인이 가장 자랑하는 일본 국보 1호를 직접 관람하는 데는 인

내가 필요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관람 인원 및 사진 촬영을 철저히 통제하

였으며, 정숙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조금은 어두운 전시 공간에 차츰 적응하

니 은은한 미소의 미륵보살이 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동미륵보살의 미소

보다는 다소 복스러운, 서산 마애삼존불의 환한 미소와 같은 온화함을 느꼈

다. 미륵보살에 서원했던 불자들도 온화한 감화에 매료되어 불심을 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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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고대 절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시텐노지(四天王寺)

시텐노지는 스이코 일왕 원년(593년)에 건립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모

노노베노모리야와 소가노우마코의 전쟁 당시 숭불파(崇佛派) 소가씨의 세력

인 쇼토쿠 태자가 불리한 형세를 타개하기 위해 사천왕상을 만들며 “만약,

이 싸움에 승리한다면 사천왕상을 모신 사원을 건립하겠다.”라고 서원한 것

이 계기가 되어 승전 후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 절의 배치는‘시텐노지식 가

람배치’라는 양식으로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 오층탑, 금당, 강당을 배치하

고 이를 회랑으로 둘러싸는 형식으로 그 원류는 백제의 사찰이다. 이러한 연

유에서인지 이 절의 앞마당에서는 해마다 백제인이 왔음을 환영하는 와쇼이

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축제 기간중에는 시장이 열려 골동품도 많이 거래되

고 있다고 한다.

도요토미 권력의 싱징 오사카성(大坂城)

후지산 그리고 가부키와 함께 일본의 3대 자랑이라고 하는 오사카성은 가

난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윗사람을 잘 만나 출세하며 권력까지 거머

쥔 행운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오사카 중심

부에 쌓은 거대한 성이다. 혼간지(本願寺)로 불린 절터에 1583년부터 축성하

기 시작해서 본채는 1년 6개월 만에 완성하였으며, 나머지는 그가 죽기까지

15년에 걸쳐 서서히 지어졌다고 한다. 폭만 60m가 넘는 이중 해자를 갖춘

화강암 성벽과 오사카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5층 천수각의 규

모는 일본의 3대 자랑이라고 할 만한 규모였다. 일본에서 성안에 천수각(天守閣)을 세운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근거지였던 아즈치성이 처음이었다고 하

는데, 도요토미는 오사카성에 두 번째 천수각을 지으며 아즈치성을 능가하고

싶어서 5층 누각 전체를 금과 은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일종의 신

분적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보상심리로 여겨지는데 심지어는 화장실조차 온

통 순금을 장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도요토미의 영화는 조선침략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죽음으

로써 끝났고, 1614년 겨울과 이듬해 여름에 벌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

판 대공세로 오사카성은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이에야스에게 패한 도요토미

의 아들 히데요리는 이 성에서 자결로 최후를 마감한다. 그 후 도쿠가와 막

부의 직할령으로 바뀐 오사카성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시절 각 지

역 영주들에게 공사를 할당하여 복원했다. 이때 5층(내부는 6층)인 높이

58.5m의 천수각도 다시 세워졌다(1665년 벼락으로 소실). 거대한 화강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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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은 성 외곽의 석축은 영주들의 충성심 경쟁으로 각 지역에서 잘 생긴 돌

만 골라 옮겨온 것으로 돌 귀퉁이에는 돌을 바친 영주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도 있다고 한다.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의 기부에 의해 시멘트로 복원된 현재의 천수각은 8

층 전망대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도요토미의 생애와 오사카 성의 역사,

오사카 여름전투 병풍 소개, 역사자료 전시 등의 자료관으로 개방되고 있다.

오사카 여름전투 병풍을 소개하는 5층 자료관에는 당시의 상황을 영상자료

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도쿠가와 세력이 도요토미 잔여 세력을 잔혹

하게 몰살하는 장면도 소개되고 있었다. 반대하거나 사리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해 처벌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무라이의 특권을 생각하니 정부에서

지침을 내리면 반발 없이 잘 따르는 현재 일본 국민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무사들의 지배가 1185년 가마쿠라 막부 성립 이후 1867년 대정봉환

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700여 년간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한편, 임진왜란을

‘조선침략’이 아니라 ‘조선진출’로 설명하며 도요토미를 영웅화하고 있

는 자료를 대하면서는 일본인의 역사 인식이 매우 자기중심적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본에는 전국(戰國) 시대를 대표하는 세 인물이 있다고 한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 버린다.”는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만든

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혼란시대의 오다는 강력한 지휘가 필요로 했을 것이며,

어느 정도 천하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는 굳이 죽이기보다는 인재를 활용하

는 쪽으로 방향 전환을 했을 것이며, 안정기에 접어든 도쿠가와는 내편으로

만드는 여유를 부렸던 것이 아닌가 하고 해석해본다.

70년 전통의 한국인 학교 백두학원(白頭學園)

1945년 일제의 패망 후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남게 되면서 생활이 극도로 어렵고 불안정한 가운데 자녀들의 교육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재일동포 사업

가들을 중심으로 동포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문화사업단체인‘백도동지회’

를 조직하였으며‘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통할 수 있는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교육 이념 아래 1946년 학교법인인 백두학원을 설립하였다고 한

다.

‘조국을 일으켜 세운다.’는 숭고한 희망을 담아‘건국’이라는 학교명을

사용하는 백두학원은 건국공업학교와 건국고등여학교를 첫걸음으로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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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초·중·고등학교를 갖춘 학교로 성장하였으며,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

인 학생들도 함께 어울려 우리말과 문화를 배우고 세계화 교육을 받고 있다

고 한다.

재학생들의 사물놀이 공연을 관람하면서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일본속의

한민족들이 우리의 전통문화 계승에 노력하고 있음에 반성하며, 모두 함께

부르는 아리랑 속에 모두 한민족임을 느끼며 가슴 뭉클하였다.

공연 후 학교장의 말씀이 있었다. 자기 분야에 이름을 걸고 성실하게 최선

을 다하는 일본인을 배우고, 혐한(嫌韓) 활동을 비판하는 현청 학예발표회에

최우수상을 주는 일본인을 바로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잘못이나 실수를 자신

에게 돌리기보다 남에게 돌리고, 자신을 비판하면 받아들이기보다 화부터 내

는 우리의 자화상을 돌아보며‘내 탓이오’라는 반성의 문구가 유행하는 세

태를 되돌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조성 니노마루고덴 정문] [광륭사 금당] [오사카성 해자]

3. 한민족사 탐방을 마무리하며

후쿠오카에 첫 발을 디딘 후 후나야마 고분에서 백두학원까지 5박 6일의

일본 속 한민족사 탐방 여정을 마무리하며 간사이 공항을 이륙하였다. 오사

카의 불빛을 뒤로하고 대한해협으로 접어들며“나는 왜 일본속의 한민족사

를 탐방했는가?”를 생각해보았다.

일본 속 한민족사 탐방을 통해서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일 교

류관계사의 대략을 파악하고, 일본 역사 전개의 중심 무대를 공간적으로 이

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이라는

동대사와 원형 그대로 유지 보존되고 있는 정창원 건물, 백제관음상과 미륵

보살반가사유상 등 세계적인 문화재를 눈앞에서 감상하는 호사도 누렸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조선침략이 아닌 조선진출로 표현하고, 일본의 대외침

략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며,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기치로 일본 군국주의의 시초를 제공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만엔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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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인물로 등장하는 일본을 그려본다.

그리고, 탐방 기간 내내 보았던 소형자동차, 집집마다 마련된 주차 공간,

쓰레기통과 불법주정차가 보이지 않는 거리, 화려하지 않은 복장과 주택문

화, 지나칠 정도의 인사와 예절, 가문의 이름을 걸고 가업을 계승하는 장인

정신, 혐한(嫌韓)활동을 비판하는 현청 학예발표회에 최우수상을 주는 일본

인, 임진왜란을 침략으로 표현하는 올곧은 일본인을 대비시켜본다.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의 상위권에 이순

신, 안중근, 김구를 선정한다면 일본인이 존경하는 인물의 상위권에는 도요

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리잡는다고 한다. 동 시

대에 상호 대립적 활동을 했던 인물들이다. 한일간 존경하는 인물의 대립은

역사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 교육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일 간 가깝고도 먼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객관적 시

각을 바탕으로 한 상호 이해의 역사교육이라고 생각한다. 한일간 자기중심적

인 역사교육에서 벗어나 교류를 바탕으로 한 상호 이해의 동반자적 역사교

육으로 전환하는 시도와 노력들이 점점 더해진다면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바뀌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역사교사로서 일제 강점기를 가르치면서 혹시나 반일감정을 키우지는 않

았는지 되돌아본다. 대립의 단절적 역사교육에서 상호 이해의 동반자적 역사

교육으로 발전하는데, 그리고 과거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대립을

넘어 교류와 화합의 역사교육으로 변화되도록 하는데 노력해야겠다는 마음

을 다져본다.

멀리 대한민국 인천 국제공항의 불빛을 바라보며 문득 일본 속의 한민족!

백두학원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일본을 바로 배우고, 일본인을

제대로 이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