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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2016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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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2016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 본 자료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종교문제연구소가 발간했습니다.자료집의 내용은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식 의견이 아닌

    집필자의 개인 의견임을 밝힙니다..

  • 대한민국은 지난 세기에 놀랄만한 경제적, 문화적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부러워할만한 발전을 성취했습니다. ‘한류’라는 말이 보여주듯 문화적인 역동성 역시 세계 여러 나라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는 우리나라가 그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시련들을 지혜와 끈기를 가지고,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승화시킨 노력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소중하게 지켜왔던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무엇보다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의식을 상실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참된 의미보다 치열한 경쟁과 경제적 부유함을 더 강조합니다. 서로 돕고 함께 성장하는 것은 낡은 가치로 밀려났고, 교육 역시 이런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교육은 더 이상 훌륭한 인성을 갖춘 전인적 인간을 지향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전문화된 지식으로 경제적 이윤 창출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인적 자원을 만들어 내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게 된 듯싶습니다.

    경제적 발전이 질병을 비롯해 피할 수 없었던 많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치를 폄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윤택해진 우리의 삶은 인간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본격적으로 되묻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제적인 복지를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이른바 ‘영적인 복지’(spiritual well-being)라는 인간 존재의 참된 가치를 묻는 일이 모색되어야 할 시점입니다. 특히 미래의

    머 리 말

  • 주역이 될 청소년들을 전인적 인간으로 키워내는 일은 공동체의 행복과 발전

    에 불가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학교 폭력과 청소년 자살이 그 어느 때보다 늘어나고 있는 현실은 오늘 우리의 교육이 바람직한 이상을 실

    현하는 데에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책은 이런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입니다. 무엇보다 종교 전통이 오랫동안 발전시키고 전승해 온 지혜가 우리 교육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

    다는 믿음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는 종교적 지혜를 청소년 인성교육에 결합시킬 수 있는 방안을 오랫동안 고심해 왔

    고, 그 첫 번째 결과물이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입니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는 왜 종교가 청소년 인성교육에 중요한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여러 종교 전통이 구체적으로 발전시켜온 지혜가 어떻게 인성교육을 풍요롭

    게 만들 수 있는지를 다루었습니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비교종교학의 종교 이해를 여러 각도에서 조망해 봄으로써, 종교와 인성 교육을 연결시키는 이론적 기반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는 왜 우리나라에서 특히 종교 교육이 중요한가를 다종교 상황과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보았습니다.

    이번 기획은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의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하려는 첫 시도입니다. 평소 종교학자로서 우리가 지녔던 문제의식을 구체화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준 문화체육관광부 종무실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책에서 제시된 내용은 이 기획에 참여한 학자들의 개인적인 의견임을 덧

    붙입니다. 모쪼록 우리의 노력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적 어려움을 지혜롭게 승화시키는 발전의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합니다.

    연구책임자 김 종 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 Ⅰ. 종교와�인성교육� / 03

    Ⅱ. 종교전통

    1. 기독교와 종교교육 / 23

    2. 불교와 종교교육 / 29

    3. 민족종교와 종교교육 / 51

    4. 유교와 종교교육 / 61

    Ⅲ. 종교이론

    1. 비교종교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종교 / 85

    2. 종교, 왜 믿는가? / 105

    3. 신화와 상징으로서의 종교 / 127

    4. 지혜 전통으로서의 종교 / 147

    5. 종교교육, 어떻게 시킬 것인가? / 169

    Ⅳ. 현대와�종교

    1. 종교, 어떻게 소통할까? / 193

    2. 다종교 상황과 종교교육 / 213

    목 차

  • Ⅰ. 종교와�인성교육

  • 종교와 인성교육∣김종서∙3

    종교와�인성교육

    김 종 서(서울대학교)

    1. 국민적 자본(national capital)으로서의 종교

    가) 선진국 대한민국 – 영적 복지(spiritual wel-being)

    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회 – 군종제도, 교정제도

    다) 동방예의지국? - 청소년 문제 – 청소년 종교교육의 필요성

    2. 종교교육: 인성교육의 중심

    가) 도덕교육과 종교교육

    나) 국민정신교육에서 인성교육으로

    - 민간주도, 시민 교육

    3. 한국적 다종교 상황 속에서의 종교교육

    가) 공존을 위한 종교교육

    - 종교간 갈등을 넘어서

    나) 공교육과 종교기관 및 사회기관들의 종교교육

    - 정교분리의 원칙과 적극적 종교정책

    다) 종교 감수성 교육

    - 종교적일 수 있는 센스를 길러주는 교육

    4. 통과의례와 청소년 종교교육

    가) 성년의례 이야기: 할례와 츄링거, 어른의 비밀 전수

    - 어른으로 거듭나기

  • 4∙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나) 경계성(liminality)과 공동체 의식

    - 개성화(individuation)

    다) 존재론적 변화: 방황과 투쟁으로 점철되는 입문식

    5. 청소년 종교교육의 새로운 비전

    가) 아래로부터 위로의 교육

    나) 엘리트 중심에서 열린 크라우드-소싱 교육

    다) 열린 관용을 위한 교육

    라) 인성교육: ‘사람다운 본성’을 종교는 가르쳐 왔다

    - 성숙한 시민사회를 위한 종교교육

  • 종교와 인성교육∣김종서∙5

    1. 국민적 자본(national capital)으로서의 종교

    오늘날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선진국입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힘들었던 시대를 생각해 보면 먹고 입고 사는 것이 풍요롭지요. 아무도 상상

    할 수 없었던 경제적 사회적 복지를 이룬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는 과연 행복할까요? 물질적인 성취를 달성해온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가 그

    러했듯이, 풍요 속에서도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이나 소외

    (alienation)를 겪으며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적 경제적 성취가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의 행복까지를 보장하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난하게 살 때보다도 치열한 경쟁 속에 낙오자가 되기 일쑤입니

    다. 정신병에 시달리고 술이나 마약 등에 중독이 되어 몸까지 버린 사람들도

    더 많습니다. 또 지나친 개인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공통된 규범을

    구성하던 가치관이 무너진 지 오래입니다. 직계존속을 죽이거나 배우자나 자

    식을 남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버팀

    목이 되어 왔던 가정이나 이웃 그리고 도덕이나 미풍양속들이 급속하게 파괴

    되었고요. 현대사회에서는 삭막한 광야에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

    을 목격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가졌던 사람들조차 이런

    정신적인 위기에 몰리면 급격히 생활이 피폐해지기 일쑤지요. 그러니까 경제

    적 복지국가가 반드시 ‘영적인 복지(spiritual well-being)’를 담보할 수는 없

    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아노미(anomie) 상태는 개인적으로는 생활의 가치관이 흔들

    리고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국가

    적으로는 엄청난 이탈자(deviator)들을 생산해내고 사회적 질병과 재난 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나

    라는 세계적인 경쟁에서 승리하는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병든 사회에서는

  • 6∙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창조적인 힘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국민들의 정신세계

    가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국가 발전에 가장 믿을 수 있는 밑천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 나라의 가장 높은 정신적인 가르침인 종교는 ‘국민적 자본

    (national capita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한 나라가 물질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의 행복을 약속하는 진정한 의미의 ’복지국가‘가 되려면

    국민의 ’영적 복지‘를 성취시켜 줄 수 있는 바른 종교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

    입니다.

    국가 간 전쟁에서는 화력만 가지고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력이

    중요하기에 건강한 종교들을 기반으로 군종제도를 통해 병사들의 영적인 복

    지를 추구해 오고 있는 것이지요. 또 감옥에서 형기를 채우고 생활력만 길러

    준다고 죄수들이 사회에 돌아와 갱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올바르게 살

    수 있는 정신적 가르침을 통해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하기에 교정

    제도가 발달해온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차치하고서라도, 수많은 종립학교들이나 종교단체들에서 세운 병원과 요양원,

    양로원, 고아원 등 사회복지기관들과 각종 문화재 등을 생각해 보면 실로 국

    가는 정신적인 것을 넘어 국민생활의 정말 많은 부분을 종교에 힘입고 있는

    셈입니다.

    전통적으로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 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가치관

    의 파괴는 어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훨씬 더 민감한 때

    라서 상업화된 텔레비전 프로나 컴퓨터와 휴대전화에 넘쳐나는 성인용 동영

    상물에 자칫 오염되기 쉽지요. 그리고 승부욕에 피폐해지는 수많은 게임 등

    에 빠져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많이 보도됩니다. 지식 교육

    을 넘어 학교폭력이나 취업, 성(性) 문제 등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확대되어 가는 청소년문제들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옛 어른들이 중시하던 예절

    바른 젊은이 상 등은 아예 생각하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요. 국가의 정

    신적 지주로서의 종교는 더 많은 역할을 요청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적

  • 종교와 인성교육∣김종서∙7

    자본’으로서의 종교를 더 이상 가만히 내 버려 둘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

    리 사회와 국가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동참할 수 있

    게 해야 할 것입니다.

    2. 종교교육: 인성교육의 중심

    따라서 현대사회에 있어서 종교교육의 필요성은 다양한 점에서 요청되어

    온 셈입니다. 특히, 현대국가에서 종교가 하나의 “국민적 자본(national

    capital)”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우선 정신적 교육의 차원에서 종교교육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 집니다. 교육이 더 나은 국민생활을 위한 정신적 투자

    를 위해서라면, 그것이 이미 축적된 국민적 자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은 당연한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에서는 훌륭한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으로서 종교교

    육의 필요성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수정 헌법상의 비국교화(no

    establishment) 즉 정교분리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학문으로서의 종교연구

    가 주립대학을 중심으로 최근 급증의 추세에 있습니다. 또 공립학교 보다

    정신교육을 더 잘 하는 종립학교를 선호합니다. 또 주일학교 등 종교기관들

    에서 시행해온 전통적 종교교육은 아직도 인성교육의 매우 중요한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후 국가신도 위주의 비

    학술적이고 지나치게 수신(修身)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 지녔던 한계를 경험하여 공교육에서 종교교육을 삭제해 왔습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비교파

    적 학문적 연구의 필요성은 계속적으로 강조되어 왔지요. 또 최근에는 다시

    청소년 범죄예방과 관련시켜 도덕교육을 강조하면서, 교육의 근저에 종교적

    이상을 도입해야 하며 따라서 종교교육을 국가적 차원에서까지 실시해야 한

    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아도, 진정한 의미의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민주, 자본주의 사회가 강점을 가졌다는 걸 알 수

  • 8∙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있습니다. 하지만 칼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종교의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라고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지요. 이것을 우리

    가 바꾸어 생각한다면, 사실상 모든 정신적인 교육은 종교교육에서 비롯되

    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흔히 가치관이 지극히 혼돈되어 있는 현대사회에서 종종 도덕은 학교 수

    업시간용 교과과정으로만 여겨집니다. 현대인은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어떠

    한 것인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도덕적이 되어야 할 필요를 실감하지 못하므

    로 비도덕적이 된다고 합니다. 비리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 “성실이 과연 밥

    먹여 주나?”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한 문제 청소년의 질문에 누가 자신을 가

    지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정직하게 사는 것이 왜 좋은가 하고 누가 과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물론 종교와 도덕은 또 다른 영역의 문

    제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도덕적인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예수,

    석가, 공자 등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본보기적 삶을 종교인들이 사회에 힘

    들여 상기시키는 것은, 많은 경우 현대사회의 밑바닥에 깔린 바로 이런 도덕

    적 요청 때문입니다. 그들의 사람다운 삶을 모방하는 것이 저절로 도덕적이

    게 되는 삶의 습관을 길러준다고 보는 것입니다. 올바른 수련의 도가 몸에

    배어서, 그것을 떠나서는 불안해지고 끝내 살 수 없게 되도록 한다고 생각하

    기 때문입니다.

    좀 더 실제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종교교육은 국민들의 정신적인 역량

    의 교육을 다원화하고 심화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60

    년대부터 시작하여 8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른바 국민적 정신교육의 이론적

    체계화가 이루어져 온 셈입니다. 그런데, 통일 안보교육, 새마을교육, 경제교

    육, 사회정화교육 및 국민윤리교육이 모두 정부주도하에 너무 피상적이고도

    획일적이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부 주도적, 획일적

    국민정신교육의 한계는 잘 알려져 있지요. 비록 우리가 이 분야에 심혈을 기

    울여 온 분들의 노고를 쉽게 간과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지속적으로 있어

  • 종교와 인성교육∣김종서∙9

    온 교육적 비효율이나 어용시비 등에서 그 한계가 잘 드러납니다. 따라서 성

    숙해진 시민사회에서는 국민들을 위한 정신적 교육은 주로 사람다운 본성을

    찾아가고 또 남의 본성을 중시하는 이른바 “인성교육” 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종교교육에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본래 교육은 무슨 교육이든 교육자와 피교육자간의 시간과 노력의 집중을

    요합니다. 어차피 “떳떳한 한국인”을 만드는 것은 명예심이나 도덕심 등을

    가르쳐야 가능하다고 보입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노력을 분산시켜 낭비하는

    것보다 지금껏 이런 덕목들을 강조해 온 종교교육 체계들을 잘 활용하는 것

    이 맞겠지요. 획일성의 지루함을 피하고, 효율적으로 심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한국적 다종교 상황 속에서의 종교교육

    대체로, 우리나라의 경우 종교교육은 주로 세 영역에서 실시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각종 학교 교육의 일환으로 공교육 기관에서, 둘째는

    주일학교나 경전읽기, 교리연구 모임 등을 주축으로 하는 종교기관 자체에서,

    그리고 셋째, 교양과 수련을 위해 여러 종립 병원, 고아원, 각종 종교복지시

    설 등 사회기관에서 산발적으로 실시되어 온 셈입니다. 물론 종교교육이 위

    에서 지적한 것처럼 공적인 목적이 중심인 이상, 공교육에서의 종교교육이

    가장 기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몇몇 대학에 종교학과 및 종교 관

    련학과들이 신설되거나 확장되고 있으며, 또 중고등학교에서도 ‘종교’가 교양

    선택 과목 중 하나로 새로 확정되어 중고교용 종교 교과서가 다투어 출판되

    었습니다. 한편 오늘날 공교육 기관에서의 종교교육은 주로 종립학교들에서

    실시되어 온 셈입니다. 그리하여 그동안 제대로 대우도 못 받으면서 중고등

    학교 종교교육 분야에 종사해 왔던 많은 사람들에게 자격증을 주기 위한 제

    도적 장치도 고려되어 왔습니다. 일정한 연수과정을 거쳐서 종교교사 자격증

    을 따게 된 것입니다.

  • 10∙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공교

    육으로서의 종교교육이 가장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섣부른 종교교육은 종교

    간 대립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고등학교 및 대학의 국민윤리

    교과서의 종교관계 기술에 대한 논쟁이 그 한 예입니다. 그동안 오래도록 피

    해의식에 시달려 왔던 불교계가 교과서의 기독교 편중 경향을 강력하게 비판

    하고 나선 것입니다. 또 현행 교육법상의 국조 단군에서 유래하는 ‘홍익인간’

    사상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너무 국수주의적이

    어서 민주주의 사상 등으로 고쳐야 한다는 일부 근본주의적 기독교 측 주장

    과 이에 반대하는 민족종교들 간의 갈등도 표면화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것들은 더 나아가 국민적 단합의 추구를 위해서도 큰 방해요인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 헌법 제20조 2항의 ‘정교분리’ 조항을

    근거로 하여 공교육에서 종교교육을 빼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교

    분리의 원칙은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가 다원화 되는 과정에 있어서 국가가

    어느 특정 종교에 지나친 후원을 하는, 이른바 국교화(establishment)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다른 종교들에 대한 상대적인 박해를 피하기 위

    한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오늘날처럼 종교다원주의가 극도로 만연되

    어 있는 사회에서는 사실상 국교화의 위험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정교의 분리는 종종 많은 국가로 하여금 국민의 영적 복지(spiritual welfare)

    에 대한 무관심만을 초래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정교분리의 원칙이

    오늘날처럼 철저한 다종교 사회에서는 점점 제한적으로만 적용되고 있는 셈

    입니다. 그러므로 정교분리 조항 때문에 종교교육을 공교육에서 빼자는 주장

    은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의 공교육에서 종교 교과는 윤리나 사회

    교과의 맥락에서만 다루어지고 있고, 진정 종교적 의미 자체는 아주 낮은 비

    율의 종립학교들에서만 일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전 국민을 놓고 생각해

  • 종교와 인성교육∣김종서∙11

    보면 인성교육으로서의 종교교육을 학교의 공교육에서만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요.

    그러므로 종교기관과 사회기관 등을 통한 종교교육이 절실히 더욱 요청된

    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기관이나 사회기관을 통한 종교교육은 때

    로 일반사회 전체에 예상치 못한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이른바 도

    시 산업선교가 종종 반체제운동과 동일시되었던 것은 이들 종교기관들과 당

    국의 종교교육상 이해의 괴리를 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한때 한국의

    급진주의 신학자들의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에 영향 받은 많은 학생운

    동 기구들과 이데올로기 비판교육 담당자들 양자 간의 흑백논리도 모두 종교

    교육의 심각한 문제를 노출시켰던 셈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각개 종교

    기관과 사회기관의 종교교육은 자기 종교의 관점에서만 모든 종교를 보게 하

    므로 편파적이고 왜곡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각개 종교기관이나 사회기관을

    통한 종교교육을 성숙한 시민사회를 향하여 사회적인 차원에서 같이 모색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에게 종교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은 우선 종교

    기관이나 사회기관의 종교교육까지 모두 포함하는 국가적 차원의 종교교육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는 다종교 국가입니다. 이에 대하

    여는 1985년도에 열린 한국종교학회 주최의 연구발표회에서 이미 몇 가지

    제안들이 나온 바 있습니다. 요약하면, 특정 종교의 선교가 아니라, 근본적인

    종교학적 내용들을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종교학의 포괄적이고도 객관적인

    안목에서부터 각개 종교들의 유산을 다시 살펴, 학생 스스로 ‘종교적일 수 있

    는 센스(sense)’를 길러 주자는 것이지요. 즉 종교가 국가의 정신적 지주 즉

    국민적 자본이라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창조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종교만이 아니라 타

    종교를 객관적으로 이해하여 공존해 갈 수 있는 능력도 길러져야 할 것입니

    다.

  • 12∙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4. 통과의례와 청소년 종교교육

    청소년의 종교교육에는 특히 고려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청소년기는 아직

    심신이 사춘기를 겪는 등 빠르게 변화하고, 인생의 영적인 경험을 충분히 이

    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른처럼 독자적이고 바른 정신적

    판단력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즉 제대로 된 어른이 되려면 아이들은 어른

    이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rites of passage)를 치러야 하는 것이지요.

    본래 아이들이 어른으로 되는 통과의례는 성년식(initiation)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혼상제 즉 관례, 혼례, 상례 및 제례 중 관례가

    이것에 해당합니다. 흔히 나이가 찬 아이들에게 성년식이 치러지는 것은 마

    을에서 동떨어진 깊은 산속 외딴 오두막 같은 곳입니다. 캄캄한 밤에 아이들

    에게 산 속에서 먹을 것 없이 살아남기, 멀리 보기나 멀리 걷기 등 여러 가

    지 극기 훈련을 시키고 지치게 한 뒤 두들겨 패거나 하여 기절했다가 깨어나

    게 하는 방식 등으로 거듭남(born again)의 경험을 재현합니다. 그러다가 때

    리거나 하는 대신에 생각해낸 것이 ‘생 이빨 뽑기’나 ‘온 몸에 문신하기’ 등

    도 있지만 소위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할례(circumcision)’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포경 수술‘인데 그것을 마취도 안 한 채 어른들이 달려들어 남근의 표

    피를 잘라 낸다고 상상해보세요. 아이들은 아프고 피나는 것을 보며 비명 지

    르고 울고불고 하다가 지쳐서 혼절하는데 한참 잠을 잔 뒤 깨어나면 절차를

    거쳐서 어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이의 존재가 상징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거듭나서 어른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신체적으로 변화한다고 해서 그냥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

    다. 사실 어른이 되는 데 진짜 중요한 것은, 어른으로서 알아야 하는 부족의

    거룩한 비밀이나 고급 지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프리카 피그미족의

    경우, 평소에 먼 산에서 들려오던 “뚜” 하던 경건한 신비의 소리가 신의 목

    소리라고 알고 있던 것이 사실은 쇠뿔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churinga)을

    불어서 나는 소리임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신의 목소리라고 해야 신의 존재

  • 종교와 인성교육∣김종서∙13

    가 믿어지고 모두가 신의 규범 아래 올바르게 살 수 있게 된다는 걸 가르치

    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것을 어떻게 불어야 하는 지도 배웁니다. 어른으로

    서 가끔 산에 몰래 가서 불어야 할 차례가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

    닙니다. 부족에 전래되어 오는 조상들의 창조와 전쟁에 관한 신화와 신을 불

    러내고 신을 기쁘게 할 노래 등도 배웁니다. 또 마을로 내려가서 여자 아이

    들과 혼인을 해서 어떻게 해야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하는 성교육도 자세히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른이 되는 성년식은 단순히 신체적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비밀과 신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부족 공동체가 존

    속되기 위해 필수적인 내용 등 매우 정신적인 면이 많습니다. 사실 그런 정

    신적인 면이 다 채워지는 것이 제대로 어른다워지는 것 즉 사람다워지는 것

    이고, 선조들 대대로 해온 일이라서 인간으로서의 그 본성에 다가가는 것입

    니다.

    특히 성년식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사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중간적인

    (betwixt)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일단 아이로서 죽어서 부족의 죽은 자 집단

    속에 포함되었다가 다시 어른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경계적(liminal) 상

    황에 놓입니다. 이 상황은 일상적인 속된(profane) 것이 아니라 매우 특별하

    고 성스러운(sacred) 시기입니다. 같이 성년식의 과정을 밟는 아이들은 같이

    극기 훈련을 밟는 과정에서 같이 방황하고 같이 투쟁하면서 특별한 연대감을

    공유하게 되고, 이것은 강렬한 공동체(communitas) 의식으로 연결됩니다. 이

    런 강한 공동체의 통일감은 쉽게 잊혀 질 수가 없지요. 상징화 되고 가끔씩

    상기되도록, 정기적으로 반복 기념됩니다. 그러니까 성년식을 통해 어른이 된

    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인 변화만이 결코 아닙니다. 정신적인 변화이고 공

    동체와의 새로운 관계설정이고 부족의 집단 속에 포함되었다가 자기를 스스

    로 찾아가는 사람됨의 매우 독특한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입니다.

    오늘날에는 전통사회에서처럼 성년식을 치르고 어른이 되는 경우는 적습니

    다. 하지만, 사실 인생은 엄밀히 보면, 우리의 존재가 전환될 때마다 새로운

  • 14∙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성년식(또는 입문식)의 통과의례를 치러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고등학생

    이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일단 고등학생의 존재가 죽고 대학생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대학입시의 힘든 과정 동안 많은 고등학생들은 방황과 다른 학생들

    또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을 거쳐야 합니다. 또 대학생은 군대와 취직의 문을

    거쳐서 많은 방황과 자기투쟁을 이겨내야 제대로 된 어른으로서의 사회인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확대되어 동서고금을 통해서 많은 신화나 소설 등이 존재

    의 변화를 표현할 때는 방황과 투쟁을 어김없이 연관시켜 왔는지도 모릅니

    다.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나 호머의 오디시우스(로마에서는 율리시

    즈) 이야기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영웅이야기 등은 대표적인 방황의 이야

    기입니다. 한편, 괴물 미노타우로스와의 싸움으로 유명한 헤라클레스, 마르둑

    과 티아마트의 싸움, 여러 가지 무술을 연마해서 난관들을 헤쳐 나가는 소림

    사의 무술인 이야기 그리고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

    등등은 모두 전형적인 투쟁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러한 방황과 투쟁의 극

    적인 이야기들은 문학적인 원형(archetype)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영화들이

    나 심지어 컴퓨터 게임 등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테마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이런 점들을 고려했을 때, 일시적으로 학업을 소홀히 하며 방황하거나 주

    변과 거칠게 싸우고 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이야기들을 단순히 문제라고만 파

    악해서는 안 됩니다. 어른이 되기 위한 존재론적 변화의 기본적인 통과의례

    를 치르고 있다고 이해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 아프게 처절한 방황과

    자기와의 투쟁을 치른 청소년일수록 어떤 점에서는 성년식을 더욱 진지하게

    치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할례의 방법을 썼던 전통적인

    성년식으로부터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처절한 의례였으나 얼마 지나면 그 후유증은 없었습니다. 즉 방황과

    투쟁이 통과의례의 의미를 드라마틱하게 살려내지만 그 자체 때문에 후유증

    이 생길만큼 청소년이 다쳐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점은 청소년 종교교육에 매

  • 종교와 인성교육∣김종서∙15

    우 중요한 기술적인 기준이 될 것입니다.

    5. 청소년 종교교육의 새로운 비전

    흔히 우리나라에서의 종교교육에서는 종교적일 수 있는 센스를 길러주고,

    종교간 갈등을 해소시키고 대화를 통해 타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큰 부

    분입니다. 각 종단의 대표들이 만나서 상호 이해를 하고 친목을 도모한 경우

    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각 종단 대표자들은 어차피 종교적인 감각이 뛰어나

    고 타 종교를 상당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실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대개 평신도들 사이에서이고, 매우 경직된 종교관과 세계관 때문인 경

    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교육보다는 아래서부터 위로의

    교육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일찍이 청소년들이 종교교육을 받아서

    건강한 영성을 지니고 타 종교와 공존의 지혜를 배우는 것은 진짜 중요한 것

    입니다. 국민적 자본으로서의 종교가 탄탄해 지는 셈이지요.

    한편, 청소년 종교교육이라고 하면 강사가 일정한 내용을 강의하고 청소년

    들은 그것을 듣고 기억하는 것을 흔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 주입

    식 교육은 실천적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이런 것보다는 일정한 방향

    제시와 더불어 학생들이 경험한 종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각자 이야기 하

    고 서로 공유하면서 한층 더 높은 종교관과 타 종교관에 이르게 되는 것이

    훨씬 더 교육 효과가 클 것으로 여겨집니다.

    컴퓨터 포털 서비스에서도 초기 야후(Yahoo) 등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체

    계화해서 정리해내고 사용자들은 오직 그 틀 속에서 사용만 하게 한 것은 파

    급효과가 작았습니다. 구글(Google)과 네이버(Naver)처럼 자체 생성 컨텐츠

    뿐 만이 아니라, ‘사용자가 창조해낸 컨텐츠(user created contents)’의 양이

    훨씬 커진 시대입니다. 예컨대, 유튜브(YouTube)에도 어떤 오리지날 가수가

  • 16∙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올린 노래보다도 거의 문외한들인 일반 사용자가 올려놓은 내용이 훨씬 압도

    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방적인 지식 제공이 아니라 쌍방적인 지식 소통이

    중요한 시대라는 말이지요.

    이미 교수 같은 일부 지적인 엘리트들만이 지식을 독점적으로 창조해내고

    사용해내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오히려 일반 군중(crowd)들이 만들어 낸 위

    키피디아(Wikipedia)가 최고 전문가들만이 만들어 내던 대영백과사전

    (Encyclopedia Britannica)을 압도해 버린 시대지요. 종교적 지식도 마찬가지

    입니다. 일반인들이 종교 지식을 창조하는 데 적극 참여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청소년 종교교육의 경우도 종교교사나 일부 전문적인 강사들의 생

    각이 독점적으로 교육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청소년들이 종교의 지적 컨텐

    츠들을 스스로 발견해 내고 그들을 크라우드 소싱(crowd-sourcing)으로 엮

    어 나가는 것이 더 효과적인 종교교육을 초대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맥락을 따라서 가다보면, 분명히 청소년 종교교육은 반드시 열린 관

    용(tolerance)을 위한 교육에 이를 것으로 기대됩니다. 미국의 생태윤리학자

    내쉬(R. Nash)는 벌써 오래 전에, “인류는 윤리적으로 진화해왔다”고 했습니

    다. 그리고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는 범위가 더 폭 넓을수록 더 진화된 존

    재다”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물론 진화란 개체가 아니라 종의 개념

    에 집단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지만, ‘개체 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유

    전의 법칙을 적용해보기로 하지요.

    예컨대, 갓난아이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자기 입으로 가져갑니다. 자기

    만 아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조금 크면 아빠, 엄마와 형제자매들을 인식하면

    서 그들의 것임을 알면 자기 것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가족들을 자기와

    동류의 존재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만 알던 갓난아이에 비해

    가족까지를 폭넓게 동류의 존재로 보는 정도로 진화된 셈입니다. 이것보다

    더 나아가서 민족이나 모든 동포들을 동류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즉

  • 종교와 인성교육∣김종서∙17

    가족을 희생하면서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등은 분명히 보통 사람보다 더 폭넓게 민족에 동류의식을 느낀 분들로, 훨씬

    윤리적인 진화가 높은 단계에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을 애국자로 존경하고 있

    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동서양의 역사나 동서양의 위대한 경전들을 읽어보아도 여성

    들에 동류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트로이전쟁에

    나갔다 돌아온 오디세우스(Odysseus)는 데리고 있던 여자 12명이 모두 간통

    한 사실을 알게 되자 즉시 전쟁터에서 썼던 칼을 뽑아 그 열 두 명의 목을

    처 죽여 버립니다. 인간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놀라게 되는 데, 한 번 더

    놀라게 되는 것은 오디세우스가 그들을 그렇게 죽여 놓고도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소유물을 처분해 버렸다고 생각할 뿐

    이었지요. 그러니까 당시에 여자들은 결코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즘처럼 여성의 권위가 강한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

    는 일입니다. 하지만 남녀평등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여성들과 남성

    들은 동류의 존재임을 확인하는데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편 오늘날에는 동물의 권리도 존중되는 시대입니다. 칸트(Kant)나 토마

    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같은 대 철학자들도 당시에는 동물은 이성이

    없으므로 동류의식을 느낄 수 없다고 하며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러나 오늘날 싱거(Singer) 같은 동물보호론자는 왜 이성만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 반론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강아지도 발로 차면 아프다고 소리를 내

    는 것을 보면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감성을 기준으로

    하면 동물도 사람처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동류의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

    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동물에까지 동류의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인

    간에게만 동류의식을 느끼는 사람보다 더 폭넓은 존재에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더 진화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8∙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오늘날에는 심지어 나무 같은 식물에서도 감성을 느끼고 동류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열대식물인 유츠프라카치아는 사

    람이나 동물이 한번 건드리면 갑자기 꽃이 활짝 피는데 그날 저녁이 되면 죽

    어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오래 살 수 있던 것이 갑자기 건드린다고 꽃이 피

    는 것도 이상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왜일까 학자들을 연구했어요. 그러다가

    죽기 직전 다시한번 건드려주면 하루를 더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매일 한 번씩 건드려주니 계속 죽지 않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식물이지만 충분히 감성이 통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었던 것입

    니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식물까지도 동류의 존재로서 느낄 수 있는 사람

    은 삶이나 동물만이 아니라 더욱 더 폭넓은 동류의식을 가진 것이니 더 진화

    된 존재이겠지요.

    그러나 한편 더 나아가 산에 있는 바위 돌과도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 즉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 여기며, 그들의 권리까지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래 전 미국의 디즈니랜드사는 놀이시설이 인기가 있

    자 주변 지역을 더 구매하여 놀이시설을 더 확대하려 하였습니다. 그때 자연

    보호협회인 시에라클럽(Sierra Club)이 반대하며 확장을 막고 나왔습니다. 이

    유인 즉 디즈니랜드사가 놀이시설 확장 때문에 자연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당연히 디즈니랜드사는 우리가 땅 사서 우리 땅에 짓는데 왜 참

    견이냐는 것이었구요. 의견이 팽팽하다 보니 결국 재판으로 갔습니다. 시에라

    클럽 측 변호사의 주장은 디즈니랜드사가 땅은 사서 토지소유권은 있으나 그

    땅 안에 있는 바윗돌의 권리는 산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당연히 디

    즈니랜드 측 변호사는 바윗돌에 무슨 권리가 있느냐는 것이었지요. 이 재판

    이 대법원까지 가서 아주 오래 걸려서 그 과정을 다 이야기 할 수는 없고,

    시에라클럽 측 변호사의 논변의 핵심은 “바윗돌은 제 자리에 있을 권리가 있

    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자리에 있을 권리?” 디즈니랜드 측 변호사는 말합

    니다. 만약 바윗돌의 권리가 있다 하더라도 재판은 진실보다 입증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윗돌이 제 자리에 있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 종교와 인성교육∣김종서∙19

    있는지 물었습니다. 시에라클럽 측 변호사는 사실 “입증은 어렵습니다. 다만,

    당신이 지금 살아 있고 죽고 싶지 않겠지요. 그런데 죽지 않고 지금 당신이

    왜 살아 있어야 하는지 입증할 수 있다면 바윗돌도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낫다고 입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대법원의 마지

    막 판결은 디즈니랜드사의 승소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재판장은 최종판결문

    에서 인류의 윤리진화를 인정했습니다. 즉 인류는 동류의 존재를 의식하는

    범위를 점점 더 확대해 왔다고 봅니다. 그래서 개인은 가족과 민족과 다른

    성 그리고 심지어 동물과 식물과 무생물에까지 동류의식을 갖게 되어 윤리적

    으로 더 높은 진화의 단계에 이르러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미래 언

    젠가는 우리가 바윗돌의 권리를 인정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바윗돌의 권리까지는 좀 시기상조일 뿐이라는 말이었습니

    다. 아무튼 이렇게 무생물에까지 동류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윤리적 진화의 최고봉에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으로 보면 동류의식을 전혀 못 느껴서 남과 싸우고 갈등하는 사람은 그

    만큼 윤리적으로 진화가 안 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타 종교를 동류로 느끼지 못하고 우상숭배라든지 하는 식으

    로 부정적으로 보고 배타적이 되는 종교는 사실 아직 윤리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종교입니다. 청소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윤리적으로 높은 진화 즉 아주

    폭넓은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는 종교관과 비전을 길러 주는 교육이 필요합

    니다.

    사람다운 본성을 가르치자는 ‘인성교육’으로서의 종교교육은 근본적으로

    성인들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쌓여온 자기 스스로가 사람다워지게 하는 종교

    적 내용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나아갈 것은 종교적으로

    사람다워지는 것이 자기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주변과 진정한 폭

    넓은 동류의식을 느낀 이야기들을 창조적으로 해석해내고 공유하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남과 동류의식을 느끼기 보다는 종교

  • 20∙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공동체적 차원에서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종교가 진정 열린 종교인

    것입니다. 이런 종교야말로 개인주의의 팽배로 그 한계를 극복해내고자 탄생

    한 성숙한 시민사회가 필요로 하는 종교임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 Ⅱ. 종교전통

  • 기독교와 종교교육∣임성욱∙23

    종�교� 전� 통

    기독교와 종교교육

    기독교와 타자: 건강한 자아 형성을 위한 제언

    임 성 욱(연세대학교)

    벌써 작년의 일입니다. 박사를 마치기 직전에 미국에 있는 모사립대학

    에서 인터뷰를 요청받았을 당시에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흔히 교수인터뷰

    를 하기 위해서는 흔히 두 가지 발표를 합니다. 먼저 교수법과 관련하여

    다른 하나는 연구주제에 관하여 한 시간의 발표 이후에 대략 30분가량 질

    의 응답시간을 갖습니다. 교수법과 관련하여서는, 그 대학에서 이미 가르

    치고 있는 다른 교수의 수업을 실제 가르치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업의 제목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교양과목이었습니다. 저

    는 이 수업을 위해 한 동안 시간을 보내며 기독교의 눈으로 보았을 때,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웃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되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수업 본문의 제목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

    는 누가복음 10장 25절-37절을 다시 한 번 깊게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습

    니다. 아마도 위 본문은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비유로 우리에게 너

    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동안 본문과 씨름하면서 저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누가복음 10장 29절에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는 “누

    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는가?”라고 누가복음 10장 36절에서 그

  • 24∙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질문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교사의 관

    심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문제에서 머뭅니다. 하지만 예수의 관

    심은 이를 넘어서서 “누가 실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이웃이 되는가”

    라는 문제에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

    리의 이웃을 찾기 위한 비유가 아닌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 위한 비유인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렇듯, 좋은 이웃이 되는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예수

    는 마태복음 22장 37절, 마가복음 12장 30절, 누가복음 10장 27절에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될 사실은 우리는 흔히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이웃을 소외시키

    거나, 이웃을 미워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소위 소외된 이웃 즉, 타자는 누구일까요? 먼저 인종적인 담론에서의 타

    자가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예로 국내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외국

    인 노동자를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최근에 나왔던《방가방가》라

    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나요? 요약하자면, 본 영화는 극심한 취업난에 시

    달리던 한 젊은 한국 청년이 외국인 노동자로 위장취업하면서 겪는 여러

    가지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 깊었던 장

    면은 주인공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의 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장

    면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욕이 얼마나 외국인들에게 심하게 노

    출되어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음, 성적인 담론에서의 타자가

    있습니다. 가슴 아프게도 우리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젊은 조선의 여성

    들이 위안부로 강제로 차출되어 성적인 고초를 당했던 기억이 생생합니

    다. 또한 우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사회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경우를 너

    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영화에서 예를 들자면, 영화《귀향》에서

    위안부 할머니가 정부에 지침에 따라 동사무소에서 자신의 숨겨왔던 과거

    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동사무소직원의 입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목도하고 분노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성들은 흔히

  • 기독교와 종교교육∣임성욱∙25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들의 억압받는 타자로 인지되기 쉽습니다. 마지막

    으로 종교적인 담론에서의 타자도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흔히 신

    흥종교를 믿는 신도들은 기성종교에서 질타와 멸시를 받기 쉽습니다. 예

    를 들자면, 이슬람 극단주의 등장과 더불어 이슬람을 믿는 모든 무슬림들

    은 마치 테러리스트처럼 취급당하기 쉽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종적인

    차원, 성적인 차원, 그리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존재하는 타자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더 깊게 생각해 볼 점은 타자의 형성은 자아의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현상을 자아와 타자의

    변증법적 구조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한 철학자에 따르면, 자아의 정체

    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다름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자아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그 다름이 자아의 동일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다

    고 이야기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든은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이

    와 같은 자아와 타자의 변증법적 구조를 타자화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합

    니다. 흔히 자아는 소외된 그룹의 약점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우월성과

    권력을 획득합니다. 이와 같은 타자화를 통해서 사회는 지배그룹과 피지

    배그룹을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예를 들면, 남한에 있어서 타자는 누구일

    까요? 저는 북한이 남한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동시에 가장 먼 이웃이라

    고 생각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똘이장군》에서 북한에서

    내려 온 간첩들은 승냥이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모든 북한 사람들은 사람의 탈을 쓴 이리로 오해했었습니다. 물론 웃

    지 못 할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북한 주민을 타자화 함으로써 남

    한의 민족정체성을 재확립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

    가 다시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타자화의 결

    과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입니다. 타자화의 극단적인 결과는 아마도 증오와

    그에서 비롯되는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에서 그 극

    단적이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나치는 무고한 수많은 유

  • 26∙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대인들을 마치 악마의 자식들인 것처럼 대량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방금

    살펴보았듯이 극단적인 타자화는 극한의 폭력을 야기하며 정당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타자화에 대해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타자화의 논리가 인류평화를 주창하는 종교담론에도 깊숙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타자를 어떻게 접근해야 될까요? 먼저, 우리는 타자를

    해체론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한국

    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10년가량 미국

    에서 살면서 저 자신도 모르게 미국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이 무척 그리웠지만 10년 만에 한국에 귀국한 저에게 한국은 또

    한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 자신은 반

    쯤은 한국인, 그리고 반쯤은 미국인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현재, 전

    지구의 세계화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자아와 타자의 경계선

    은 굉장히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의 문화가

    동시에 통합, 변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는 타자를 대화론적으

    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자아는 타자에게 영향을 주고 있

    으며 동시에 타자도 자아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간단한 실

    험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두 분씩 짝을 지어주십시오. 그리고 서

    로에게 좋은 칭찬을 한 가지씩 해보십시오. 그러면 상대방의 말에 따라서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고, 다시 상대방에게 좋은 감정을 쉽게 전달하게 됩

    니다. 반대로 우리가 서로에게 나쁜 말을 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아와 타자는 끊임없이 대화를 통

    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으며 동시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

    습니다. 마지막으로 타자는 탈식민주의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예

    를 들자면, 일제 식민지 시절에, 사회적으로 주변인이었던 조선 민족은

    지배층이었던 일본 민족에게 끊임없이 대항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대항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적 타자도 주류 사회에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

  • 기독교와 종교교육∣임성욱∙27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해체론적, 대화론적, 탈식민주의적 관점에

    서 타자를 재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는 지금부터 기독교의 타자의 이해를 살펴보

    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서 요한복음을 그 예로 들도록 하

    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아마도 여러분들께서 길거리를 지나다

    니다 보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

    을 것입니다. 비록 요한복음은 가장 영적인 복음서로 이해 되기도 하지

    만, 동시에 요한복음은 가장 배타적인 복음서라는 오인을 받기도 합니다.

    그 이유로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이원론에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내

    에서는 여러 가지 이원론적 사상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빛과 어둠, 생

    명과 죽음, 천상과 지상, 진리와 거짓, 믿음과 불신, 영과 육신과 같은 극

    단적인 대립이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이원론의 눈으로 타자를 바라보게

    된다면 타자는 항상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요한복음에서는 소위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 사마

    리아 여인, 유대인, 빌라도, 애제자, 예수의 어머니 등등. 극단적인 이원론

    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예수는 흔히 우월한 위치에 놓이며, 위와 같은

    소(小)인물들은 열등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이원론이 아닌 다른 눈으로 소인물들을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앞에서 이

    야기했던 해체론적, 대화론적, 탈식민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소인

    물들은 보다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때로는 예수와 타자의 경계선은 모호하며, 때로는 예수와 타자

    는 서로 영향을 주고 있으며, 때로는 예수는 타자의 저항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소인물들의 타자성은 새롭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니고데모는 모호성의 타자성

    을 보여주며, 사마리아 여인은 내적인 타자성을 보여주며, 유대인과 빌라

    도는 외적인 타자성을 보여주며, 애제자와 예수의 어머니는 초월적인 타

  • 28∙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자성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다양화된 타자성으로 예수를 다시 바라보자

    면, 예수는 단지 우월자의 모습이 아니라 소위 타자와 함께 하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하는 모습으로 그려질 수도 있습니다. 한 예로, 요한복음 19

    장 25-27절, 그리고 34절에서 살펴보자면, 예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종과 성과 계급적인 차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하이브리드 기독교 요한공

    동체를 탄생시킵니다. 따라서 흔히 가장 배타적이라고 불리는 요한공동체

    는 실제로는 가장 수용적인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타자의 이해와 타자성의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보

    다 수용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 정신이 강조하고 있듯이, 기독교는 타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타

    자를 수용함으로써 가장 기독교다워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림으로써 강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새로운 타자

    의 이해를 가지고 보았을 때, 한국사회 내에서 소외된 타자 즉, 이웃은 누

    구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이웃들을 위해서 종교의 이름으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

    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이웃이 정작 우리에게 진정한 이

    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면 살아가는 동시에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면서 진정한 이웃이 되어갑

    니다. 저는 한국사회가 앞으로 소외된 타자를 찾는 이웃 찾기의 모델에서

    이웃 되기의 모델로 옮겨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동시에 저는 한국사회

    가 다 같이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가는 성숙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를 기대합니다. 그 첫 걸음으로써, 각 종교의 모든 지도자들이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기를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각 종교의 공동체

    들은 한국사회 전체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 불교와 종교교육∣윤원철∙29

    종�교� 전� 통

    불교와 종교교육

    불교,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

    윤 원 철(서울대학교)

    1. 불교를 가르치는 조건

    1) 불교를 대하는 관점의 문제

    불교를 쉽게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불교를 스스로 이해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이것을 남에게 쉽게 가르치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입니다. 여기에 더 어려운 점은 불교 내부에서의 가르침과 배움이 아니라,

    불교 외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불

    교에 대한 지식이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점과 함께 불교를 대하는 선입관과도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특히 기독교 내부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가르치기 어려

    운 점은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불교 이외의 종교 공동체에서 불교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불교를 가르치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타종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함인지, 자기 종교

    의 우위를 증명하기 위함인지, 자기 종교와 타종교를 학문적으로 비교하기

    위함인지를 분명하게 설정하지 않으면 타종교를 이해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

    게 됩니다. 무엇보다 타종교에 배타적인 입장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그 종교

    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종교에 대한 무지와 편견마저 그대로

  • 30∙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드러내게 됩니다. 적어도 종교교육의 관점에서 불교를 가르칠 경우에는 타종

    교에 대한 최소한의 관용과 존중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종교에 대한 기본 지

    식이 충분히 숙지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자신이 모르

    는 것에 대해 ‘모른다’라고 말하지 않고 ‘아니다’, ‘틀렸다’라고 부정해 버리는

    오류를 피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지극히 오랜 전통 속에서 다양한 논의들이 전개되어 왔습니다. 경

    전과 주석서들의 양은 다른 모든 종교들의 경전들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습

    니다. 따라서 이들 내용을 짧은 시간에 일목요연하게 이해하여 전달하는 것

    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불교를 가르치는 교사는 불교를 가르치기 전에 불

    교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도를 먼저 파악하여 배우는 사람들에게 양

    해를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불교를 체험적으로 이해할 것인지, 교리적

    지식을 전달할 것인지, 불교사를 나열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2) 교리에 대한 종교교육에서의 접근

    종교교육의 관점에서 불교 교리를 설명할 수 있는 두 가지 키워드는 중도

    (中道)와 연기(緣起)입니다. 교육학 이론에 의한다면 교육목적이 선정되고 그

    에 따른 교육의 과정으로서 교육방법과 교육내용이 수반됩니다. 이러한 관점

    에서 본다면 불교의 교육목적은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에 이르는 교육의

    과정을 단순화한 것이 교육방법으로서의 중도(中道)와 교육내용으로서의 연

    기법(緣起法)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일체의 고통과 욕망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실제로 깨달음

    을 체험해보지 않고서 깨달음이 어떤 상태인지 말할 수 없으므로 언어를 통

    해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중도는 어

    떠한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이분법적 극단을 넘어선 방법을 말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언어로서 공(空)의 논리가 동원되고, 실천의 체계로서 팔정도

  • 불교와 종교교육∣윤원철∙31

    (八正道)와 육바라밀의 수행이 뒤따릅니다. 이러한 궁극의 깨달음의 내용이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연기법입니다. 연기란 모든 것이 인(因)과 연(緣)에 의

    해서 존재하게 된다는 관계로서의 세계에 대한 진리입니다. 그 어느 것도 독

    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에 의지하여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이

    에 대한 내용이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12연기의 진리로서 표현됩

    니다.

    2. 불교의 기본 교리

    1) 붓다의 생애

    “부처님”이라는 명칭은 붓다(Buddha)라는 인도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붓다’라는 말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보통명사입니다. 글자 그대로는 “도道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중국 사람들은 각자(覺者)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도를 깨달았을 때”는 모두 붓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 일반적으로 ‘부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분 역시 도를 이루고 난 뒤에 이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붓다의 본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이고 성은

    고따마(Gotama)입니다. 그래서 붓다가 아직 도를 이루지 못했을 때는 ‘고따

    마 싯다르타’라고 불렸고, 도를 이룬 뒤에도 떄로는 ‘고따마 붓다’ 라고 했습

    니다. 우리들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 라는 명

    칭은 ‘샤까’족 출신의 성자(聖者 muni)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입니다.

    붓다의 탄생 연대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80세에 돌

    아가셨다는 것은 관계된 모든 불전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로

    믿어도 문제가 없겠지만, 이 80세가 되었던 때가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연

    대로 언제인가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적으로 음력 4월 8일을 붓다의 탄생일로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청소년 시절을 보내었지만, 그런 생활에

  • 32∙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 그 가운데서 특히 생, 노,

    병, 사와 같은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일상

    적인 삶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보다 극적으로 설명

    하기 위해 4문유관(四門遊觀)이라는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싯다르타

    가 동서남북 4성문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노인과 병자와 죽은 사람을 만나

    인생의 근본적인 고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북쪽 문으로 나

    갔다가 출가해서 수도하고 있는 수행자를 만남으로서 자신도 그와 같은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중도는 붓다가 성도한 직후 5명의 수행자를 찾아갔을 때 처음으로 설한 내

    용입니다. 이 초전법륜의 내용은 중도와 사성제(四聖諦), 오온무아(五蘊無我)

    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사회는 사상적 혼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육사외도

    (六師外道)를 비롯한 전통사상과 신흥 사상가들은 고정불변의 아트만이 끊임

    없이 윤회한다고 주장하는 상주론(常住論)과 윤회를 부정하고 한 번의 생으

    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부류가 주장하는 단멸론(斷滅論)으로 나누어져 있었

    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고행주의나 쾌락주의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범아일여

    (梵我一如)를 주장하는 사상가들은 아트만인 자신의 끊임없는 고행을 통해

    우주의 주재자인 브라흐만과 자신을 합일시키기를 주장하였고, 모든 것이 단

    한번의 생으로 끝난다고 주장하는 부류들은 인과를 부정하고 현실적 쾌락을

    즐기기를 주장하였습니다. 중도는 이러한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라는 양극단에

    서 벗어난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중도와 사성제는 연기법

    을 현실에 맞게 정리한 것입니다.

    연기법이란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관계를 가짐으로서 존재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깨어 질 때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연기법을 존재의 ‘관계성의 법칙(關係性法則)’, 또는 ‘상의성의 법칙(相依性法

  • 불교와 종교교육∣윤원철∙33

    則)’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존재의 보편

    적인 법칙이고 그 이법(理法)입니다.

    경전에서는 이 연기의 원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

    습니다.(잡아함 335)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차유고피유此有故 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차기고피기此起故 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차무고피무此無故 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차멸고피멸此滅故 彼滅)

    여기에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

    것이 생긴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

    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와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라는 구절로서 존재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

    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연기법이란 존재의 관계성을 말합니다.

    연기법은 불교의 모든 교리들의 사상적, 이론적 근거가 됩니다. 붓다의 모

    든 가르침은 그 설명이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모두 연기법을 그 근거로 삼

    고 있습니다. 불교의 모든 교리들은 연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응용이론들입니다. 그것들은 연기緣起라는 하나의 샘에서 흘러나온 크고 작

    은 물줄기와 같습니다. 모든 존재는 왜 무아인가, 세계는 왜 무상하며, 왜 공

    (空)인가. 그것은 연기적(緣起的)이기 때문에 무아이고 무상이고 공인 것입니

    다.

    3) 삼법인(三法印)

    대승불교에서는 삼법인을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

  • 34∙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적정(涅槃寂靜)으로 하고, 소승불교에서는 제행무상․제법무아․일체개고(一

    切皆苦)라고 합니다. 또한 제행무상․제법무아․일체개고․열반적정을 모두

    합쳐서 사법인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그대로 불교의 인연법(因緣法)을 설

    명하는 내용입니다. 무상과 무아 및 적정은 인연의 원리입니다.

    가.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제행무상은 연기의 시간적인 표현입니다. 즉, 모든 존재들은 시간적으로 볼

    때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제행이란 현상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항상(恒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순간 순

    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에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

    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고 하면 흔히 무

    상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상이라는 말은 단순히 감상적이거나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실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자연이나 사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천체나 우주도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을 통해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은 부귀영화도 끝내 변하여 사라지고, 병약

    자가 건강해질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리석

    은 중생이 지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 모든 것 어느 하나

    라도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 제법무아(諸法無我): 불변하는 실체는 없다.

    제법무아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공간적 관찰입니다. 즉, 연기의 공간적 표

    현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구 불변하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我)라는 것이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

    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두루 적용되는 말입니다. 제법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가리키므로, 제법무아는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변하지 않는 고정불

  • 불교와 종교교육∣윤원철∙35

    변의 실체라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치 불교가 생활의 주체인 '나'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처럼 생

    각한다면, 불교는 현실을 부정하는 염세주의적인 종교처럼 크게 착각하게 됩

    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무아라는 것은 '내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나'라고 할 수 있는 고정불변의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나'라는 존재는 인연 화합된 존재이기 때문에 끝없는 변화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온'(五蘊), 즉 다섯 가지 요소들이 서로 인연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색(色)이라는 물질적인 요소와 느낌(수: 受)․표상작용

    (상: 想)․의지작용(행: 行)․인식작용(식: 識)이라는 정신적인 요소가 유기적

    인 관계 속에 연기(緣起)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인

    간에 대한 이해는 육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다. 열반적정(涅槃寂靜) : 모든 집착과 욕망을 끊어야 평화가 온다.

    제법무상과 제법무아가 현실 세계라면 열반적정은 이상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상 세계는 현상 세계를 떠나 홀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고 바

    로 우리가 있는 현상과 현실이 무상이며 무아인 줄을 분명히 알게 되면 그것

    이 바로 열반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적정은 무상, 무아를 체득한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열반은 ‘니르바나'(Nirvana)라는 말을 소리나는대로 옮긴 것으로서, 원래의

    의미는 불을 확 불어서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불은 눈에 잘 보이

    지 않는 마음의 불입니다. ‘나'라고 하는 생각이 심지가 되어서 욕망(탐:

    貪), 성냄(진: 瞋), 어리석음(치: 痴)이라는 소위 삼독(三毒)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탐진치 삼독의 불이 붙으면 그 불은 눈․

    귀․코․입․몸을 통해서 대상 세계에 옮겨 붙는다.

  • 36∙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4) 4성제(聖諦)

    4성제에서 ‘제(諦satya)’란 ‘진리’ 또는 ‘진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4성제란

    “4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

    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간단하게 고(苦), 집(集), 멸(滅), 도(道)‘라고도 합

    니다. 4성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고’와 ‘고의 원인’, 그리고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4성제는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합니다. 붓다가 녹야원에서

    5명의 제자들(五比丘)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꾸시나가

    라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한 가르침이 바

    로 이 4성제입니다.

    4성제의 가르침은 불교의 궁극 목표인 ‘고苦 에서의 해탈’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간단한 교리입니다. 붓다는 인생의 ‘고’ 문제를 해결하

    기 위해 의사가 병을 치료할 떄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의사가 먼저

    병을 진단하듯이 붓다는 인생의 실상인 ‘고’를 말하고[고성제], 병의 원인을

    찾아내듯이 고의 원인을 규명했습니다[집성제], 그리고 병 치료 후 건강상태

    를 말하듯이 고가 소멸된 상태, 즉 열반을 설명했습니다[멸성제]. 마지막으로

    병의 치료방법을 말하는 것처럼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습니다[도성제].

    가. 고성제(苦聖諦)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살아간다는 것은 고(苦)이고, 이 고에서 어떻

    게 벗어나는가를 설명해 놓은 것” 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붓다는

    한 경전에서 “나는 단지 고와 고의 소멸(열반)만을 가르칠 뿐이다”라고 표현

    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모든 것이 ‘고와 고의 소멸’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인

    생이 고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병자가 병을 치료 받기

  • 불교와 종교교육∣윤원철∙37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그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

    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 고(苦)라는 말인 ‘duhkha'를 일반적으로 ’괴로움‘, ’고통‘, ’슬픔‘등

    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

    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 생리적인 고통, 또는 일상적인 불안이나 고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흐카‘를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이 하고자 하

    는 대로 되지 않는것‘,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

    은 우리의 생존에 따르는 모든 괴로움을 망라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는 ’모든 것은 고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는 4고 또는 8고를 말합니다. 태어남, 늙음, 병

    듦, 죽음(생노병사生老病死) 등의 4고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애별

    리고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구부득고求不得苦), 5온의 집착에서 생기는 고(오취온고五取

    蘊苦, 오음성고五陰盛苦) 등의 4고를 합쳐서 8고입니다.

    또한 고를 성질에 따라, 고고(苦苦), 회고(壞苦), 행고(行苦) 등 3종으로 나

    누기도 합니다. 고고란, 추위, 배고픔, 부상을 당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고

    를 말합니다. 이것은 원래부터 괴로움의 조건에서 생기는 고입니다. 괴고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파괴되거나 사라져 버릴 때 느낀 고를 말합니다.

    부귀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이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또는 애지중지하던 물건

    이 없어져 버릴 때 느끼는 고통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행고란 무상함을 조건

    으로 해서 느끼게 되는 고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끊임없이 변하는 현

    실(생生, 노老, 사死) 앞에서 느끼게 되는 괴로움입니다.

    나. 집성제(集聖諦)

    집(集)이란 ‘samudatya'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불러 모으다(초집招集)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집성제集聖諦에서는 ’고를 일으키는 원인

  • 38∙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을 밝힌다(초집생고招集生苦). 고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욕망입니다. 5관(五官)의 관능적인 욕망은 물론이고,

    재산과 권력에 대한 애착이나 사상, 신앙에 대한 집착 등도 욕망입니다. 인

    생의 모든 불행, 싸움, 괴로움은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욕망은 고의 뿌리입니

    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고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그것은 욕

    망이다”, “무릇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모두 다 욕망으로 말미암는다”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욕망은 인생을 이끌어 가는 동력일 뿐 아니라 또한 인생을 지배하는 힘입

    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욕망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욕망이 있

    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은 주인이 노예를 부리듯이 인간

    을 마음대로 부립니다. 인간은 한없이 욕망하고, 욕망 때문이 끝없이 고통을

    당합니다.

    인간은 욕망 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채워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은 채워주면

    채워 줄수록 더 커질 뿐 결코 충족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다에

    빠진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과 같은 것입

    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사람들은) 비록 히말라야 산만한 순금덩어리를 얻

    는다 해도 만족할 줄을 모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욕망을 구체적으로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 등으로 3종으

    로 나눈다. 욕애란 5욕(五欲), 즉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킨

    다. 유애란 존재에 대한 욕망입니다. 오래도록 살고 싶다든지 죽은 후에 천상

    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등의 욕망입니다. 무유애는 무존재(無存

    在)로 되고자 하는 욕망, 즉 사후에 허무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리

    킨다.

    다. 멸성제(滅聖諦)

    멸(滅)이란 열반(涅槃)을 번역한 말입니다. 그리고 열반은 ‘nirvana'를 음역

  • 불교와 종교교육∣윤원철∙39

    한 것입니다. 열반은 소멸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고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

    킨다. 고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에서의 완전한 해방’

    입니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반은 현재의 生에서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열반이

    아닙니다. 열반에 도달한 사람은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을 다스릴 수 있으므

    로 욕망 때문에 발생되는 괴로움, 즉 정신적인 괴로움에서는 벗어나지만 아

    직 육체가 남아 있기 때문에 병이나 부상을 입었을 때 받게 되는 육체적인

    괴로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

    의 근원이 남아있는 열반’ 즉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생존의 근원’(여의餘依)이란 육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여의열반을 성취한 사람이 죽으면 다시 육체를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됩니

    다. 이것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는 열반’ 즉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이라고 합니다. 이 무여의열반은 ‘완전한 열반’(반열반般涅槃: parinirvana)으

    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가 모두 소멸된 열반입니다.

    우리는 열반을 언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머리로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체험의 세계일뿐입니다. 아직 열반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에게 열반을 설명해 주어도 그것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마치 땅위에

    올라가서 산책하고 돌아온 거북이가 물고기에게 땅위에서는 헤엄 칠 수 없다

    고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물고기는 그것을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것과 같

    은 이치입니다.

    라. 도성제道聖諦

    도(道)란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중간의 길입니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반대로 극단

    적인 고행(苦行)도 아닌, 몸과 마음이 조화를 유지 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

    의 길”을 말합니다.

  • 40∙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경전은 중도를 거문고 줄의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문고 줄은 지

    나치게 팽팽해도,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느슨해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습니

    다. 거문고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

    나 지나친 쾌락적인 행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 중도를 구체적

    으로 말한 것이 팔정도입니다.

    5) 팔정도(八正道)

    가. 정견(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