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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Vol. 55, No. 10 51 2) 두산중공업의 발전 (1) 한국중공업의 민영화 창원기계공업기지에 종합기계공장을 세우겠다는 계획은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화정책선언]에서 나타난 기계 공업발전의 핵심공장이었다. 그러나 현대양행이 어려운 투 자결정을 내리고 전력을 다했는데도 준공하지 못하고 우여 곡절 끝에 정부가 직접 투자하는 공기업으로 한국중공업이 태어났다. 이제 문제는 빚투성이인 한국중공업을 완공하고 경영을 정상화하여 당초 계획한대로 우리나라의 중화학공 업을 뒷받침하는 종합기계공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1980년 10월 8일 김우중 회장에게 맡겼던 한국중 공업을 회수하고 1981년 말까지 3,600억 원을 투자하여 공 장을 준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즉, 한국중공업이 공사화(公 社化)된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한국전력 사장인 김영준 사장을 한국중공업의 사장도 겸직하게 하여 한국중공업을 정상화할 것을 지시했다. 이것은 결국 한국전력이 수요를 창출하여 한국중공업의 발전설비제작 기능을 살리려는 고 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2년 1월 신임사장으로 박정기 씨가 취임했다. 그는 아 직도 적자인 한국중공업의 경영을 정상화하기 위한 각종 노 력을 경주했다. 가장 큰 문제는 충분한 매출액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것은 해외영업실적이 오르지 않기 때문이 었다. 박정기 사장은 회사의 정신적 통일과 분발을 위해 4월 에는 서울에 있던 본사를 아주 창원공장으로 이전하여 현지 경영을 강화하였다. 지금까지는 행정뿐 아니라 기술본부까 지 서울에 위치하여 창원공장과는 상당한 심리적 괴리를 가 지고 있었는데, 본사를 옮김으로써 정신적으로 분발을 강조 한 것이었다. 본사를 이전한 지 2개월 만인 1982년 6월 29일 역사적인 창원공장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현대양행으로 시작하여 현 대중공업과 대우를 거쳐 정부가 주인인 공기업으로 한국중 공업이 완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중공업은 다른 공기업 과 달리 스스로 벌어 발전하여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 다. 즉,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그런 소비성 공 기업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을 지원하기 위해 중화 학공업의 발전을 지원하며 수익을 내어야 하는 공기업이었 다. 총 공사비 3,810억 원이 소요된 창원종합기계공장은 160 만 평 부지에 16만 3,000평 규모의 공장건물을 가진 세계최 대규모의 단일 기계공장으로 5년 8개월 만에 준공되었다. 오원철 수석은 창원기계공업기지를 건설하면서 기계공업의 현대화는 분업형태의 종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판단하였는 데, 결국 한국중공업은 소재로부터 제품까지 일관공정으로 제작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오원철 수석이 간과한 기 계공업만의 특성 때문이었다. 즉, 기계공업은 장치산업이 아니고 또 조립산업도 아니라 고도의 기술이 집약되어야 기 능을 발휘할 수 있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한국중공업에서 생산하려고 하는 대형기계와 플랜트 등은 부품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고도의 기술적 능력 위에 제조설비 의 완비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제조설비는 다양하 고 복잡했으며 그래서 건설이 어려웠고 투자가 막대했다. 창원공장의 주생산품으로는 원자력발전소, 화력발전소 의 모든 기계제품, 제철, 제강, 석유화학설비 등 대형 산업플 랜트, 그리고 불도저·로더 등 건설 중장비였다. 한국중공 업이 건설중장비도 비중있게 제작하려고 한 것은 아마도 현 대양행의 정인영 회장의 의도가 창설 당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처음에 건설중장비를 제작하려는 강한 의지로 현대양행을 발전시켜왔는데, 정부의 차관승인 과정에서 종 합기계공장건설로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건설중장비는 이미 대우중공업에서 점유하고 있었으며, 신생의 삼성중공 업에서도 생산하고 있는 업종이어서 국내에서의 경쟁이 불 김천욱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e-mail : [email protected] 한국기계공업사-54 김천욱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e-mail : [email protected] 전문가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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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Vol. 55, No. 10 ● 51

2) 두산중공업의발전

(1) 한국중공업의민영화창원기계공업기지에종합기계공장을세우겠다는계획은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화정책선언]에서 나타난 기계공업발전의핵심공장이었다. 그러나현대양행이어려운투자결정을내리고전력을다했는데도준공하지못하고우여곡절끝에정부가직접투자하는공기업으로한국중공업이태어났다. 이제 문제는빚투성이인한국중공업을완공하고경영을 정상화하여 당초 계획한대로 우리나라의 중화학공업을뒷받침하는종합기계공장을건설하는것이었다.정부는 1980년 10월 8일 김우중회장에게맡겼던한국중공업을 회수하고 1981년 말까지 3,600억 원을 투자하여 공장을 준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즉, 한국중공업이 공사화(公社化)된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한국전력 사장인 김영준사장을 한국중공업의 사장도 겸직하게 하여 한국중공업을정상화할 것을 지시했다. 이것은 결국 한국전력이 수요를창출하여 한국중공업의 발전설비제작 기능을 살리려는 고려가있었기때문이었다. 1982년 1월신임사장으로박정기씨가취임했다. 그는아직도적자인한국중공업의경영을정상화하기위한각종노력을 경주했다. 가장 큰 문제는 충분한 매출액을 달성하지못하는것인데, 그것은해외영업실적이오르지않기때문이었다. 박정기사장은회사의정신적통일과분발을위해4월에는서울에있던본사를아주창원공장으로이전하여현지경영을강화하였다. 지금까지는행정뿐아니라기술본부까지서울에위치하여창원공장과는상당한심리적괴리를가지고있었는데, 본사를옮김으로써정신적으로분발을강조한것이었다. 본사를 이전한 지 2개월 만인 1982년 6월 29일 역사적인창원공장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현대양행으로 시작하여 현

대중공업과 대우를 거쳐 정부가 주인인 공기업으로 한국중공업이완성된것이었다. 그러나한국중공업은다른공기업과 달리 스스로 벌어 발전하여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즉, 국민의세금으로국민에게봉사하는그런소비성공기업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을 지원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지원하며 수익을 내어야 하는 공기업이었다.총 공사비 3,810억 원이 소요된창원종합기계공장은 160만 평 부지에 16만 3,000평 규모의공장건물을가진세계최대규모의 단일 기계공장으로 5년 8개월 만에 준공되었다.오원철수석은창원기계공업기지를건설하면서기계공업의현대화는 분업형태의 종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판단하였는데, 결국 한국중공업은소재로부터제품까지일관공정으로제작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오원철 수석이 간과한 기계공업만의 특성 때문이었다. 즉, 기계공업은 장치산업이아니고또조립산업도아니라고도의기술이집약되어야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한국중공업에서생산하려고하는대형기계와플랜트등은부품의조합으로이루어지는것이아니고고도의기술적능력위에제조설비의완비가절대적이었기때문에, 그만큼제조설비는다양하고복잡했으며그래서건설이어려웠고투자가막대했다.창원공장의 주생산품으로는 원자력발전소, 화력발전소의모든기계제품, 제철, 제강, 석유화학설비등대형산업플랜트, 그리고 불도저·로더 등 건설 중장비였다. 한국중공업이건설중장비도비중있게제작하려고한것은아마도현대양행의 정인영 회장의 의도가 창설 당시 반영된 것으로보인다. 그는처음에건설중장비를제작하려는강한의지로현대양행을발전시켜왔는데, 정부의 차관승인과정에서종합기계공장건설로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건설중장비는이미대우중공업에서점유하고있었으며, 신생의 삼성중공업에서도생산하고있는업종이어서국내에서의경쟁이불

김천욱ㅣ연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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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연재

52 ● 기계저널

가피했다. 창원공장 완공 당시 공장규모와 주요설비를 [표4-48]에서보여준다.이표에서특기할것은단조공장의 1만 3,000톤단조프레스였다. 이용량의프레스는당시세계에서몇안되는대용량으로한때작업물량이없어놀리고있었으나원자력발전소 수주가 시작되면서 오히려 용량이 부족한 것을 느끼고있다. 또한 중장비공장의 경우를 보면, 제작가공라인과 조립라인및검사라인으로공장은넓으나시설은비교적간단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많은 중공업체들이 양산제품을 위해중장비를선택하고있어경쟁이언제나치열했다.한국중공업의 창원공장은 준공되었으나 일감을 찾기는어려웠다. 국내에서는 발전소 건설 수요가 거의 없었고 매

출을올리기위해서는해외수출의길을터야하는데, 용이하지않았다. 대형엔진분야에서는현대중공업이이미선박용엔진을 중심으로 전문화되고 있었으나 정부는 한국중공업의 업무다각화를위해 1983년 8월 19일 현대중공업의독점을 제한하고 2원화하였다. 한국중공업은 덴마크의 MANB&W 사와 대형디젤엔진기술제휴계약을맺고 1984년 6월26일 1,700평 규모의 엔진공장을 준공하였다. 이해 12월에는 5만 7,000마력급 APL1호 엔진을 출하하게 되었다. 이를계기로하여 1984년 11월에는세계적인엔진제조업체인스위스의 슐처(Sulzer Brothers)와 기술제휴계약을 맺고 5만7,000마력엔진 5대를 수주하여 3,5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올릴수있었다. 이와같이발전소등대형구조물중심의기

구 분 면적 및 투지금액 주 요 설 비 주 요 생 산 품

기계공장8,400평

226억원

발전기코어라인, 400톤프레스, 블레이드

라인, 5축머시닝센터, 브레이드카핑기, 치

공구제작라인

터빈블레이드, 발전기코어, 스타이타바가

공, 중소형부품, 치공구제작

[표 4-48] 1982년창원공장준공당시의주요설비

자료: 두산중공업 50년사, I, 두산중공업, 2012. 9.

중기계공장1만 8,000평

663억원

수평선반, 수직선반, 심혈보링기, 플래너

밀러, 황삭반, 수평보링기, 롤연삭반, 기

아절삭기, 1,200톤, 스태킹프레스, 400

톤천정기중기

터빈발전기 가공조립, 압연기가공조립,

대형주단품, 대형축 황삭가공

중제관공장1만 3,900평

441억원

수직선반, 대형자동용접기, 후판벤딩기,

2,000톤 프랜징프레스. 3축NC프레임플

레이너, 800톤천정기중기, 열처리로, X

선기

특후대형 제관품의 가공용접, 열처리검사

시험, 보일러드럼, 원자로(1,500MW), 수

력터빈, 터빈발전기케이싱, 콘덴서

고로 및 제강로 본체제작

보일러공장1만 600평

125억원

와셋트벤딩기, C형벤딩기, 튜브벤딩기,

튜브단가공기, 튜브절단기, 패널벤딩기,

패널용접기, 튜브핀용접기

발전소 보일러, 산업용보일러

단조공장1만 4,400평

589억원

1만3천톤·4,200톤·1,600톤 단조 및

성형프레스, 매니퓰레이터(400MT),

수직열처리로(20m), 가열로

터빈발전기 로터, 압연기롤 및 스핀들,

NSSS, 보일러드럼

주조공장1만 4,500평

388억원

100톤·30톤형 전기로, 진공정련로(155

톤), ESR로(80톤)

250톤강괴, 250톤 고급주강

단조 및 열처리, 터빈케이싱

압연기 스탠드 및 롤, 고로벨

중장비공장2만 9,900평

373억원제작가공라인, 조립라인, 검사라인

불도저, 크레인, 휠로더, 모터글레이더,

지게차, 굴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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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설비를 제작하려던 한국중공업이 매출신장을 위해 대형엔진까지성공적으로제작하게된것은한국중공업기계기술자들의피나는노력의결과였다. 그만큼한국중공업의경영은다급했다.한국중공업은중동의건설시장에진출하지않을수없었다. 중동의산유국만이대형프로젝트를수행하고있었으며선진 외국회사와 컨소시엄으로 공사를 따내어 기계설비를제작하는수밖에없었다. 말이컨소시엄이지실제로는험한제작작업을하청받아하는것과다를것이없었다. 하청이아닌 것은 입찰 시부터 함께 비용을 분담하여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처음 대형프로젝트는 사우디아라비아 아씨르(Assir)담수공장의증발기를제작하는작업이었다. 한국중공업이처음제작한증발기는모두4기로중량이2,700톤에달하는 거대한 파이프덩어리였다. 소요기간은 18개월이었고연인원 13만 명이 동원되었다. 공장에서 제작하여 바다로운반하는작업도큰일이어서멀티휠로더를여러대연결하여 운반하는 대공사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로18개월동안창원공장가동률을 17% 향상시켰고 1,000명의고용효과를얻게되었다. 한국중공업은이공사를실적으로하여 대담하게 두바이전력청의 22만 7,000kW의 가스터빈발전소와 2,400갤런 규모의 담수공장프로젝트를단독으로입찰을감행하였으나저가입찰로큰손해(1억 2,000만달러)를 감수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의 경영적 실패는 한국중공업에게 귀한 교훈을 주었다. 절대로 외국기술에 의존한해외프로젝트수주는결코성공적일수없다는교훈이었다. 한국중공업은 울진원자력2호기에 들어갈 발전기축(Generator shaft)을수주하고소재를단조하여황삭(荒削)가공하였다. 이 발전기축은 프랑스 알스톰 사가 건설하는 울진원전2호기에 들어가는 기본부품의 하나인데, 우리 정부에서한국중공업의기술축적을위해무리하게계약에넣은것이었다. 실제로이축은황삭가공한후배로실어프랑스로보내어터빈블레이드를장착하고완제품으로다시울진으로 수송하는 것으로 경제성을 따진다면 도저히 있을 수없는공정이었다. 그래도한국정부는한국중공업의발전설비제작 기술을 반드시 높이기 위해 기상천외한 계약을 했다. 참으로중공업건설이이렇게어려운것이다.한국중공업은 제철소용 밀하우징, 백업롤, 고로설비 등일감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맡아왔다. 또 수력발전소의수차등을소재에서가공까지완전독자기술로제작납품했다. 그리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의 기술을 증명하는 미국

ASME(미국기계학회)의 9종의 스탬프와 소재부문에서MM·MS 등의인증서를획득하였다. 이것을바탕으로하여원자력발전소의원자로(Reactor Vessel)와 증기발생기, 터빈발전기, 화력발전소용터빈발전기와열교환기, 보조보일러,수력발전소의터빈발전기와스파이럴케이싱과항만하역시설을창원공장에서제작하여국내외에공급했다. 이제서서히한국중공업의주업종에종사하게되기시작했다. 한국중공업은 1991년이 되어서야 만년적자에서 벗어나 흑자기업으로변신할수있었다. 이와같은성과에는임직원의피나는노력이있었고경영진의과감한해외진출이원동력이되었다. 이제는세계어느곳이든지일감만따오면만들어낼수있게되었다. 1991년부터늘기시작한해외수주는 1993년이되자급증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사우디아라비아 해수담수청이발주한쇼바이바발전담수프로젝트였다. 담수설비는하루1억 갤런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규모였으며 한국중공업이단독으로 제작하고 50만 kW급 화력발전소는 벡텔, ABB와공동건설하는프로젝트로총액 5억 6,100만 달러의초대형프로젝트였다(1993. 11. 2). 이 계약을 계기로 하여 다수의소형해외프로젝트를턴키로수주하여완성했다. 이제한국중공업은기술적으로완성단계에들어섰다. 어떤 발전소도독자적으로건설할수있는능력이배양된것이었다.우리나라는 1980년대 후반의 불황에서 벗어나 1990년대에는다시성장궤도로들어서고있었고따라서전력수요도급증할것이예상되었다. 정부에서는 1993년부터 2004년사이에원자력발전소 12기, 화력발전소 21기, 수력발전소 6기등신규발전소건설을예정했다. 한국중공업에서는이막대한 국내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설비투자에 집중했다. 또한기술개발에도 766억 원 가량을 투자하여 기술수준을 높였다. 기술개발강화를위해기술연구소를실험동과연구동으로나누어신축했으며고급인력의지속적인증원과함께전문직제도를운영하여기술축적을꾀했다.우리나라는 1994년 우르과이라운드가 타결되고 세계무역기구체제가 출범하면서 발전설비 시장의 개방이 필요하게되었다. 지금까지한국중공업이단독으로제작하던국내발전설비가 독점이 배제되면서 경쟁체제가 되었고 따라서한국중공업의경영도어려워지게되었다. 이들 중공업체들은선진국회사들과기술제휴로기술의존을강화하면서저가입찰로 한국중공업의 가동률은 급격하게 저하되었다.1996년까지 90%의 가동률을 보이던 한국중공업은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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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약 40%로급감했고국내의발전설비제작시설은과잉되었다.1998년 IMF체제하에서 정부는 빅딜을 실시하여 과잉중복투자를조정하기로하였다. 드디어한국중공업이다시민영화열풍에휩싸이게되었다. 한국중공업의민영화는경영이순조로웠던 1995년에이미일어났었으나여러가지복잡한문제로미루어오다가 IMF가닥치자더이상미룰수없게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우리나라 산업 전체가 부실의위기에처하고있었다. 그만큼기업의해외의존도가커졌기때문이었다. 김대중정부하에서 11개 공기업이민영화대상으로결정되었는데, 국정교과서, 종합기술금융, 대한송유관공사, 포항제철이차례로민영화되었다. 이제한국중공업이민영화될차례였다. 한국중공업은한때 입찰에 부쳐져 유찰까지 된 경력을 가지고 있어 반드시성공해야 했다. 정부는 우선 정부가 보유한 24%의 주식을우리사주조합(10%)과 일반공모(14%)로 매각하고 경영권을주기위해주식의36%를공개입찰했다. 최종입찰에는두산컨소시엄과스페코컨소시엄이응찰하여결국두산컨소시엄으로낙찰되었다. 두산이주당8,150원으로총3,057억 8,000만 원을응찰한것이었다. 이로써현대양행이래수없이어려운고비를넘기며우리나라기계공업의상징이었던한국중공업이 민간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한국중공업 같이거대기업을인수하고싶은기업군이어찌두산뿐이었을것이나 맥주재벌 두산이 기계공업을 인수했으니 세간에서는그귀추가궁금했다. 왜, 두산이맥주를버리고중공업을택했으며과연성공할것인가.

(2) 두산의대담한변신두산의창시는1896년박성직씨가배오게(현종로4~5가)에박승직상점을내면서시작되었다. 이곳은종로에전통을가진육이전과떨어져새로생긴상권으로나중에동대문시장의입구가되는곳이었다. 따라서박성직씨도한말의새로운 상인의 선구자였다. 그는 주로 소비재를 취급하였는데, 아들 박승직에 이르러 포목점으로 일제강점기 동안 꾸준히 부를 쌓아 거부가 되었다. 박승직은 일제전성기인1933년 소화기린맥주(주)가 설립되면서 김연수와 함께 이회사의소액주주가되었다.두산은 1952년 5월 22일 우리나라맥주회사의하나인동양맥주(주)를 정부로부터인수하여경영함으로써본격적인맥주회사로발전시켰다. 본래 동양맥주는 1933년 우리나라

에진출한일본소화기린맥주를해방이되자귀속재산으로관리하였는데, 주주인 박승직 씨의 장남 박두병 씨가 관리인으로 임명되면서 두산가와 인연을 맺었다. 1948년‘동양맥주(주)’로 사명을 바꾸고 귀속재산으로 정부가 관리하여오다가 6·25전란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을 인수한 것이었다. 동양맥주는영등포에공장을가지고있는또다른맥주회사‘조선맥주’와경쟁하면서점차성장하여상품명OB로명성을떨쳤다.처음으로우리나라에맥주가등장하였을때에는매우귀한술로비싼값에팔렸으며모던보이들이나일본인들의술로 여겨지었으나 1960년대부터 국민소득이 조금씩 오르고쌀로 술을 담그지 못하게 되면서 점차 고가의 대중주로 각광을받기시작했다. 1965년에는출고 100만상자라는당시로서는 엄청난 맥주를 출하하게 되었다. 물론 경쟁사인 조선맥주도있었으나동양맥주는시장점유율 60%를넘어우리나라제일의맥주회사였고따라서모기업인두산은재벌의길로들어섰다. 우리나라는건국이래로늘쌀의부족을겪어쌀로술을빚는 양조주가 자리를 잃고 말았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제주도의고구마재배를장려하기위해고구마를말려주정의원료로썼는데, 일본의남단사쯔마(현 가고시마현)의 소주가 발전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소주의 소비가 증가하면서수입당밀이주정의원료가되었고주정공장을진로가독점하면서진로그룹이탄생하게되었다. 1970년대이후국민소득이 증가하면서 주류소비도 증가하였는데, 싼 술은 소주(주정을희석한희석주), 고급주는맥주로자리매김했다. 드디어 독일의 유명한 맥주회사‘이젠벡’이 국내에 들어와‘한독맥주’를 설립하여 맥주시장은 3파전이 되었다. 그러나 동양맥주는 시설을 개량하며 선두자리를 지켰다. 특히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하여 맥주소비량이 급증하고 동양맥주는날로성장했다. 동양맥주는 독일의 양조기술을 들여와 시설을 확장하고생산량을높였다. 영등포일대가공업지대로발전하면서수질문제가 대두되자, 1976년 12월 물 좋기로 이름난 이천에공장을옮기고계속발전했다. 그러나새상품을만들지못하고판매량의증가에안주하고있었다. 1995년에는상품명으로 너무나 유명해진 OB를 회사명으로 하여‘오비맥주(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그것은 고객에게 친숙한 상품명으로회사명을하는혁신으로보였다. 그러나만년2위같았던조선맥주가전주공장에서새로운맥주하이트를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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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서일대지각변동이일어났다. 1993년조선맥주는전주에 공장을 세우고 깊은 땅 속에서 암반수를 채취하여 맥주를 만들었다. 당시 수질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어 맥주의원수(原水)문제가‘천연암반수’라는적극적홍보로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이트는 또한 맛에서도 변화를 주었다. 그러나 OB에는그런참신함이없이‘드라이’의회고로안주하고있었다. 국내 시장점유율 60%를 넘나들던 OB는 하이트맥주의 기세에 눌려 1995년말 적자를 보였다. 두산은 세계적으로유명한맥킨지에게그룹분석을맡겼는데,용역보고서는 참담했다. “이대로는 1년 이내에 파산할 수있다.”는것이었다. 두산은강력한구조조정을실시하여비수익성 부동산을 매각하고 경영이 양호한 해외합작회사도매각했다. 1998년 2월에는을지로사옥까지매각했다.1998년 초부터 불어닥친 IMF체제에서 오비맥주는 외국에서 매입하고 싶어하는 상품이 되었다. 드디어 세계적 맥주회사인 벨기에의‘인터브루’사와 50:50으로 자본참여를허용하면서귀중한외화 2억 7,000만 달러를들여오게되었다. 이것은 오비맥주의 실질적 매각으로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과감한 경영결단으로 두산은IMF의 파도를 일찍 넘게 되었다. 이제 두산은 개선된 현금유동성과확보된자금(환율상승으로막대한환차익도보았다)으로 새로운 사업, 맥주에 이은 새로운 100년의 사업이필요하게되었다. 두산은그룹전체를구조조정하면서미래의사업을소비재가아닌‘인프라지원으로의변신’을꿈꾸었다. 두산그룹에는 이미‘두산기계’와‘두산제관’이 있었으나그정도의회사로중공업으로의역사적변신을설명할수는없었다. 외국과합작회사인오비맥주는 1999년 12월 진로가세운맥주회사‘진로쿠어스’를 인수하며 경쟁이 치열해진 조선맥주의‘하이트’와의 전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2001년 6월(주)두산은오비맥주의지분 45%를 출자회사인‘인터브루’에모두인수하게하고50년의맥주재벌에서철수하였다. 이제두산에게는새로운세계가펼쳐지고있었다. 우선창원기계공업단지의 골칫거리인 한국중공업이 있었고, 막 파산해가는대우그룹의대우종합기계가있었다. 자금만있으면정부의적극적인종용을받아들이면되었다. 그러나맥주회사에서중공업회사로의변신이어찌그리쉽겠는가. 그러나두산은해내었으니그경영결단이위대한것이다. 두산이버린오비맥주는 2014년 1월 안호이저부시인베브(AB인베브)로경영권이넘어갔으니하이트의거센공세에서초연할수있

었던두산의혜안에재계는모두놀라워하고있다. 드디어2001년초두산은말썽이많은한국중공업을인수하였다. 참으로대담한행보였다. 맥주로시작하여정보통신쪽에도일부투자하고있었으나중공업이라는거대한배를맡아운전한다는것은누구나할수있는일이아니었다.그래도한국중공업을두산이맡은것은우리나라의축복이랄 수 있었다. 초기에 현대양행이 무리하게 맡았던 창원기계기지의핵심인중공업은오원철수석의희망대로일본의히다찌제작소(日立製作所)에 버금가는 종합기계공장이 되지는못하였으나그래도발전설비를포함하여포신에사용하는 각종 소재, 플랜트설비 등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회사였다. 대우의김우중회장이한때맡아한국중공업을창립하였으나그에게는너무나벅찬거물이었다. 그래서부득이 정부에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겨우 흑자를 내어 증시에 상장까지 하였으나 IMF체제하의 한국경제로서는 큰짐이었다. 그것을두산이맡았으니아마도김대중정부로서는최고의성적이었을것이다.두산은 2001년 3월 23일 정기주주총회에서 회사명을 두산중공업(Doosan Heavy Industries & Construction Co., Ltd)으로변경하고새로운출발을대내외에알렸다. 두산중공업은역량에비해성과를내는데걸림돌이되었던공기업문화를 불식시키고 새로운 회사로 거듭나야 했다. 이미 한국전력 발주의 발전설비에 대한 독점이 끝난 마당에서 언제나한국전력의 수요만 기다릴 수 없었다. 이제는 참으로 글로벌화해야했으며다시는두바이발전소와같은우를범하지말아야했다. 2001년 5월 4일창원본사에서열린‘새출발기념식’에서박용성회장은두산이중공업에진입한것이 105년 만에 제2의 도약을 기하는 성장엔진으로 한국중공업을인수했음을밝히며두산의강한변신의지를표명했다.새경영진은기존의업종에기초한기능적사업부를비즈니스별 사업부(Business Group: BG)로 개편하였다. 즉, 사업부문별로 영업, 사업관리, 생산 기능을 통합하여 프로젝트별로손익을분명히하여책임경영을도모하는것이었다.이것은 종래에 기계공업체에서 흔히 보아 온 생산 따로 영업따로의개념에서벗어나는새로운개념이었다. 즉, 그동안뿌리내린공기업의무책임성타성에서벗어나기위한조처였고이것이효과를발휘하기시작했다. 이에따라 BG별로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현금흐름 등 독립된 사업부로서의재무제표관리와이에필요한영업·사업관리·설계·생산의기능을통합하여책임과권한이명확한성과주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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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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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체제를구축하였다. 그리고부처를철폐하고팀제를도입하여결재단계를축소하고의사소통의신속화를지향했다.이제새로운두산중공업태어나는것이었다.두산중공업은 세계시장 개척을 위해 발전분야와 해수담수화 플랜트를 적극 개발하고 영업에 나섰다. 이것은 한국중공업 시절 두바이 발전·담수프로젝트에서 막대한 손실을입은것을경험으로하여다시는그런무모한수주를하지않을뿐아니라그때얻은뼈아픈노하우를적극활용하여세계적인제작회사로나아가는것이었다. 이프로젝트는특히중동지역에적용하는것으로해수의담수공정에고온의 열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발전하고 남은 폐열을 이용하여 증발기를 가동하여 담수함으로써 열효율을 극대화하는기술이었다. 드디어 2001년 6월 30일 8억 달러규모의후지아라발전·담수플랜트를수주했다. 이 플랜트는하루1억갤런의담수생산과66만 kW급발전소를동시에건설하는것이었다. 두산중공업은또미국 GE의발전소부품주문을받아 5억 7,000만 달러의계약고를올렸다. 이것은그동안하청으로단품으로수주하여수주액이적었으나이제는스팀터빈과 발전기 완제품을 일괄하여 수주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한국중공업이 쌓은 기술적 자산은 막대했고이를두산이적절하게활용하여두산중공업을세계적인제조업체로인정받은것이었다.2003년 3월 두산중공업은 한국중공업 출신의 경영자 김대중사장을맞이했다. 대개주인이바뀌면전에중요한직책에있던사람은옷을벗고떠나는것이상례였다. 그러나두산은한국중공업의귀한인재를그대로수용했다. 두산이성공한이유의하나이다. 김대중사장은두산중공업의단결이 무엇보다 중요한 선결문제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하는일에서사기(士氣)라는것이얼마나중요한지그는알고있었다. 그는 5월 워크숍에서 글로벌넘버원이라는 꿈을 강조하며‘세계수준의기술과원가경쟁력으로최고의가치를추구하는 플랜트 전문기업’이라는 비전을 선포했다. 더 이상한국전력의발주만바라보는그런시대는지나갔다.드디어 해외수주활동이 결실을 보아 2003년 7월 요르단암만에서 8,600만달러규모의 10만 kW급레합(Rehab)복합화력발전소의주요설비제작을따낸것이다. 이계약을통해두산중공업은 배열회수보일러(Heat Recovery SteamGenerator), 증기터빈발전기등핵심설비를자체기술로제작납품했다. 이제두산중공업은담수화를포함한복합화력발전소 분야에서 세계적인 제조회사로 자리잡아가고 있었

다. 이어이란에서 2억 4,000만 유로규모의세계최대마프나(Mapna)복합화력발전소프로젝트계약이성립되었다. 이런 해외수주는 2004년 4월 인도 제일의 석탄화력발전소를턴키로수주함으로써절정에이르렀다. 즉, 인도화력발전공사의 시파트석탄발전소였다. 시설용량 66만 kW의 초대형발전소로계약금액이무려3억 7,000만달러였다. 턴키로발전소를 수주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어서 의미가 깊었다. 늘 외국전문회사의 설계를 사서 제작만하던 우리나라 중공업이 이제는 글로벌제조회사로 인정받은것이었다.이후두산중공업은발전EPC(Engineering, Procurement &Construction)사업에 전력하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발전소를설계하고자재를조달하며건설까지마치는종합건설이었다. 따라서 기술뿐 아니라 자금조달까지 모두 담당하는리스크가있었으나하청업체수준에서완전히탈피하는글로벌회사로서의 발돋움이었다. 인도 석탄화력발전소의 턴키수주이후증권시장에서도두산중공업의부상이눈에띄었다. 증시에서 두산중공업의 주가가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민영화한지불과 3년가장어려운중공업회사가증시의인기종목에오른것은두산변신의성공으로한국경제의신화라할수있었다. 그리고누구나기피하던기계공업의성공이었다.일단턴어라운드에성공하였으니두산의앞길은더깊고더넓게기계산업에진입하는것이었다. (주)두산은본격적인투자로 2004년고려산업을인수했고, 2005년에는대우중공업을인수하여완전히중공업그룹으로변신했다. 대우중공업을 인수한 두산은 두산인프라코어로 사명을 변경하고건설중장비와공작기계사업을확장하는한편, 막일기시작한국내원전건설에서주기기(主器機)를납품하면서발전설비 분야의 독보적 존재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발전설비는현대양행의정인영회장이하려고하였던사업의중심으로 당시에는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중공업 등이 다투고있던분야였다. IMF체제를거치면서대우가파산했고따라서교통정리가자연스럽게이루어졌다. 이제는국내에서불필요한경쟁이필요없게되었고글로벌기업으로변신하여세계시장으로나아가야했다. 두산중공업은2006년미국의보일러회사인바브콕(Babcock) 사를인수하여보일러원천기술을확보하였다. 이것은두산중공업이종래의기술제휴에의한기술도입은오래걸리는방법을지양하고직접투자로써 기계기술을 확보하는 적극적인 경영철학에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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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것으로대우자동차의동구권자동차회사인수와는차원이다른투자였다.두산중공업은 해수담수화플랜트에서 세계적인 회사로나타났다. 해수담수화설비에서 두산중공업은 MSF(MultiStage Flash)기술, MED(Multi Effect Distillation)기술, 역삼투압(Reverse Osmosis)기술을모두갖춘세계제1의해수담수화회사로 자리를 굳혔다. 2006년에는 영국에 있던 일본계Mitsui Babcock UK를 인수하여 보일러의 원천설계기술을확보하였다. 또한 루마니아 최대의 주단조회사인 KvaernerIMGB를인수하여대형주단조물의제조능력을확장하였다.실제로 한국에서는 2006년이면 강원산업이 몰락한 이후여서공해가심한주단조설비의증설은어려운실정이었다. 두산그룹은 2009년에 Fortune Gloval 500에서 471위에랭크되어 이제는 세계적 기업군이 되었다. 또한 이해에‘World’s Best 40 Company’에서 4위로랭크되었으니그동안의대담한해외투자가성공적이었음을증명한다. 두산중공업은발전기용터빈제작의명성을가지고있는체코공화국의 터빈제조업체 Skoda Power의 지분 100%를 4억 5,000만 유로에 인수하였다. 스코다 파워의 인수는 증기터빈의원천기술을확보하기위해서였다. 스코다파워는 1859년오스트리아제국시대에설립된유럽의가장오랜기계공업체의하나이며 1904년부터터빈생산을시작하여 62개국에수출한실적을가지고있는유력한기업으로두산중공업의글로벌화의한축으로성장할것이다.또한 해수담수화사업의 글로벌화를 강화하기 위해 해외연구센터를 미국 플로리다주의 Tampa, 사우디아라비아의Damman, 영국의 Birmingham에 가지고 있다. 2011년에는인도 보일러회사인 AE&E Chemar Works를 인수하여 인도의보일러시장을공략하고있으며 2012년에는영국의수처리전문회사 Enpure를 인수하여 플랜트분야의 업종을 크게넓혔다. 두산중공업은 이제 세계제일의 해수담수화설비제작은물론, 원자력발전소, 화력발전소, 각종플랜트, 주단조등업종으로중동, 유럽, 북미에활발하게진출하고있다.2009년 11월 15일 두산중공업은 EPC형태로국내남부발전의영월복합화력발전소에들어갈 180MW급대형가스터빈을자체제작하여출하했다. 두산중공업의가스터빈제작

은 가스터빈발전시장의 확장을 예견한 두산중공업이 2007년 4월일본의미쯔비시중공업(MHI)과 기술제휴를맺고기술이전을진전시킨결과였다. 일본MHI는일찍부터세계제일의 가스터빈제조회사인 GE(General Electric)와 기술제휴로꾸준히가스터빈기술을축적하여오고있었다. 가스터빈은 증기터빈에 비해 고온에서 작동하며 열응력이크므로설계기술은물론소재기술에서도쉽게접근할수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특히 앞으로의 세계에너지 시장이북미를시작으로중국에서생산하게될세일가스로변환되고있는상황에서복합발전의왕자인두산중공업이가스터빈기술에서도세계수준에도달한것은참으로의미있는기계기술의 발전이었다. 가스터빈은 초고온에서 작동되므로가스터빈을통해나오는고온의열로증기를생산하여중압증기터빈을 돌려 전기를 복합생산하고 폐열은 온수생산에이용한다면 가장 환경친화적이고 도시형 발전설비에 적합한 발전소가 될 것이다. 특히 원자력발전소는 환경문제와안전문제뿐아니라최근발생하고있는송전선및대형변전소 설치가 지역주민의 반발로 어려워지는 우리나라에서는수요처에근접하여발전소를건설하는가스터빈복합화력발전소가도시개발의첨병이될것이기때문이다. 두산중공업의쾌거는 2010년 6월 30일 이명박정부의최대 업적인 아랍에미리트 바라카(Baraka) 원전프로젝트에서주기기를공급하는계약을체결한것이었다. 이계약은프로젝트주관사인한국전력과총액약 4조 7,000억 원의대형프로젝트로 1,400MW급 원전 4기에 들어가는 모든 설비를 공급하는것이다. 지금 두산중공업은한때사용할곳이없어무리한터빈축제작을하던 1만 3,000톤 단조프레스의용량이이제는부족하여더큰것을설치하여야할정도로원자력발전소주기기제작이늘어났다. 참으로경하할일이다. 대우중공업의 인수와 함께 담당한 방위산업분야는 두산DST로독립시켜장갑차를비롯하여대공화기등활발한전투장비를제조하고있다. 두산이기계공업에전념으로투신한 것은 우리나라 기계산업 발전의 한 획을 그은 거사로서길이기억되어야할것이다. 이제남은길은세계유수의발전설비제조회사인 미국의 GE, 독일의 지멘스, 프랑스의 알스톰과어깨를나란히하여발전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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