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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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43 교수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 Ⅰ. 서 Ⅱ. 한국광복군 성립의 민족사적 의미 Ⅲ. 임시정부의 광복정책과 국내진공작전 Ⅳ. 한국군의 모태와 현재적 의미 Ⅴ. 결 <필자 약력> 고려대학교/대학원사학과 졸업, 문학 석박사 성신여대교수 35년, 국사편찬위 근대사연구관 12년, 국사편찬위원 10년, 문화재위원 20년 외 16기관 주요 임원 역임 <저서> 「한국광복군연구」 , 「대한민국임시정부사연구 (전 3권)」 , 「한국 역사 (전 20권)」 , 「정한론의 배경과 영향」 , 「이야기 한국사」등 편, 저, 역서 77권 <수상> 516 민족상 서울시 문화상 외 5건 수상, 황조근 정훈장 외 3건 수상 군역사 및 역사일반 2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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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사연구 제126집 43

    교수 이현희성신여대 명예교수

    Ⅰ. 서 론

    Ⅱ. 한국광복군 성립의 민족사적 의미

    Ⅲ. 임시정부의 광복정책과 국내진공작전

    Ⅳ. 한국군의 모태와 현재적 의미

    Ⅴ. 결 론

    고려대학교/대학원사학과 졸업, 문학 석․박사 성신여대교수 35년, 국사편찬위 근대사연구관 12년, 국사편찬위원 10년, 문화재위원 20년 외 16기관 주요 임원 역임「한국광복군연구」,「대한민국임시정부사연구 (전 3권)」,「한국 역사 (전 20권)」,「정한론의 배경과 영향」,「이야기 한국사」 등 편, 저, 역서 77권 5․16 민족상 서울시 문화상 외 5건 수상, 황조근 정훈장 외 3건 수상

    군역사 및 역사일반 2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 Ⅰ군역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44 군사연구 제126집

    Ⅰ. 서 론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의 법통성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1919~1945)

    27년사의 광복 투쟁 과정 중 동 직할 정규 무장단위 7백여 명 규모의 강건한 부

    대로 충칭시기(1940~45) 5년간 가장 빛나는 활동을 하였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

    군의 뿌리로서 현재까지 근 70여 년(1940~2008)의 성립과 눈부신 군사 활동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그 활동과 현재적 의미를 역사적으로 탐색

    해 본다. 광복군 연구의 대표로는 한시준 교수의 노작이 있다.

    필자는 대학에 재직하면서 1983년도 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사연구실장으로

    파견 근무 당시 연구과제로 중국의 임정 관련 지사들을 면담, 성책(成冊)한 이후

    두 번째로 한국광복군과 임정 관련 인사들을(20여명) 각계로부터 추천 받아 방문

    면담하여 그것을 풀어서 책으로 간행해 냈다.1)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의 일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광복군 출신은 김국주, 김승곤, 김신, 김준엽, 문응국, 민영수,

    박영준, 선우진, 안병무, 안춘생, 유해준, 윤경빈, 이재현, 이준승, 정운수, 조인제

    지사 등이었다. 그 중 생존해 있는 분은 7명 정도에 불과하다. 작고하신 분은 이

    것이 국민에게 남긴 공개 유언장이 된 셈이다. 필자는 이들을 통해 자료에 없는

    숨겨졌던 광복군의 중국 각지에서 실제 활동 상황을 상세히 파악하였다. 다행스

    러운 사실은 임정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이들을 통해 광복군 이해에 큰 도움을 받

    았다는 사실이다. 자료에 없는 숨겨진 진솔한 내용을 알게 되어 크게 고무된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쫓기던 시기여서 자료가 문자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Ⅱ. 한국광복군 성립의 민족사적 의미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동녕, 이시영 등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국

    제도시 상하이에 수립 선포된 이래 절대 완전독립 완수라는 정부의 목표달성을

    위해 전후로 도착한 40여 명의 지도자들은 충용, 혈전, 광복, 철혈의 의지로써 단

    결한 가운데 대일투쟁을 당당히 선포하였다.2) 광복군이 성립된 1940년 9월 17일

    주1) 이현희 편,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정문연(현 한중연) 1986, 402쪽.

    2)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호.

  • 군사연구 제126집 45

    오전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기 21년 전에 벌써 직할 군대인 광복군의 성립의지가

    임정의 군사정책 차원에서 정립되어 있었음을 알게 한다. 무력을 통한 독립이 가

    장 현실적이고 타당성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곧 서간도의 신흥무관학

    교 건학 정신의 연결인 것이다. 빼앗긴 나라의 복귀는 곧 무장투쟁을 우선시해야

    함을 적시, 예약한 것이다. 이들은 임정 수립 다음해인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

    로 결정을 해 놓고 국민개병제를 역설한바 있다. 모든 독립요원의 무장화가 제창

    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어떻게 실시될 것인가는 구체적으로

    계획이 성립되어져 있지 않았으나 그들의 완전한 독립결의와 신념만은 확고부동

    한 집념과 의지를 진솔하게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3) 뿐만 아니라 극비 자료에 나

    타나고 있듯이 임정 군무부는 동삼성과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도 동 지부를 설

    치, 원격 조정운영하고 있었다.4) 이는 1910년대 서간도 일대에 이회영 등이 설립,

    운영한 신흥강습소와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정신을 사상, 인맥, 정책면에서 계승 유

    지했던 것으로 연결, 평가해 볼 수 있다.5) 임정이 수립되자 즉시 이를 연결하여

    국민군 편성을 위한 임시육군무관학교가 1920년 3월 20일 임정이 자리잡았던 비

    좁은 상해 프랑스 조계 내에 창립되어 군사 막료들이 전후 몇 차례에 걸쳐 무관

    약 100여 명을 양성하여 실전에 배치, 대일전에서 승리한바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수차례 게재되어 국내외에서 숙지하고 있었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이해가 혈전의 해이다.………천하 일치하여 국가에 몸을 희생하자.’6)

    라고 온 국민의 참여와 혈전을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봉오동과 청산리승첩도 이

    들의 협조가 크게 기여된 것이다.

    임정이 역부족 중에 대일투쟁전선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무장군대의 필요성과

    실현성이 제기되지 못한 채 1930년대를 넘겼다. 중국이 일제에 의하여 상하이 등

    일부가 만주에 이어 함락당하자 그들도 군대의 양성과 훈련이 무엇보다 독립달성

    에 우선적이고 중요함을 절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세계를 경악하게 한 이봉창에

    이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임정을 감격적으로 재

    평가한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은 임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도로 독자적인

    무장군대의 창설을 지지하였다. 그것은 마침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

    주3) 상하이판『독립신문』, 1920년 2월 14일.

    4)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1976, 154~9쪽.

    5) 이현희, 신흥무관학교연구,『동양학』, 19, 단국대, 1976.

    6) 상하이판『독립신문』, 1920년 3월 23일.

  • Ⅰ군역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46 군사연구 제126집

    면서 임정 직할의 무장군대 창설논의가 법제적으로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다음에 언급할 백범 등이 군대양성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있었음을 감

    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의외로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에 의한 의열단의 조선의용대가 홍커우

    에서 창설되었다. 임정계는 아연실색하고 격분, 성토하는 가운데 이미 양성의 전

    제단계로 임정 자체를 위한 직할 군대조직에 전념하였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

    에 지속적인 의미로서의 유저우, 시안 등지에서 박영준 등 60여명의 한국청년이

    광복군의 모체가 되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초모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결코 시기적으로 따져 볼 때 광복군이 조선의용대보다 뒤늦게 성립되었

    다고 보지 않는다7)는 한 독립지사의 증언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임정은 14년간의 항일 투쟁을 성공리에 완수한 상하이시기를 지나 격동의 불확

    실한 이동시기 8년을 경험하며 장제스 국민당을 따라 서남천(西南遷)하여 5년간

    의 체류기를 맞은 충칭에 정착하였다. 임정 지도자들은 한때 유저우 등지에서 협

    조가 잘 안 되고 있는 장 총통을 무작정 따라 가기보다는 독자적 활로 모색을 위

    하여 차라리 베트남이나 라오스, 태국 등지로 옮겨보자는 자포자기적 푸념도 있

    었다고 한다. 임정의 지도자들이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장제스의 조선의용대 창

    설을 힐난 성토하면서 임정을 위한 광복군의 성립을 간청하고 그의 당위성을 설

    명하여 마침내 장총통의 정․군 간의 막료 등에 의하여 숙원이던 광복군의 성립

    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민족사 소생의 순간이었다.

    일찍이 석오에 이어 의정원 의장이 된 손정도 목사는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려

    면 혈전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안창호 노동국 총판은 ‘군인 양성에 노력한 곳

    은 중국 러시아와 국내이며 동포들의 신념의 소산’이라고 광복군 군인 양성의 필

    연성과 당위성을 이미 동시에 논증 찬성하였다.8) 임정에서 그 직할 무장 군대를

    성립시킨 위업은 1907년 8월 1일 수만 명 규모의 구한국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

    제 해산 당한 통한의 역사를 직접 연결하여 국가의 정규군대를 양성하겠다는 대

    본영으로서의 임정의 민족사적 의미는9) 그것이 어떤 형태의 보잘 것 없고 미성

    숙되었으며 영세하여 규격을 갖추지 못한 군대규모라 해도 구애받지 않았다. 나

    주7) 광복군 이재현의 증언,『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198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현희

    편저).

    8) 이현희,『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1991. 37쪽.

    9) 김락산,『춘산 이유필소사』, 1943, 미간행, 수필본 필자 소장.

  • 군사연구 제126집 47

    라를 지탱하고 운영하는 외곽적 국가 운영의 근간주체로서의 군대를 성립시켜서

    이를 토대로 중심을 잡고 독립군을 챙기며 용기를 북돋아 이끌면서 국권을 회복

    하겠다는 야심찬 큰 포부와 계획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임정이 비록 여

    러 가지 여건이 미성숙 단계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영세함을

    극복하면서 군대가 성립되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민족 발전의 영속성을 가

    져오는 큰 위력과 견인차의 기초적 임무 수행이 아닐 수 없겠다. 광복군 성립의

    한 조력자인 이유필의 개인적 노력은10) 임정 27년사의 이 같은 큰 군대 창설과

    그 운영의 민족사적 피의 역사는 복받은 민족의 은총이며 하늘을 섬기는 겨레의

    섭리로 인식되고 있다.

    Ⅲ. 임시정부의 광복정책과 국내진공작전

    1. 광복정책

    1920년 5월에 ‘상하이 임시정부 한국 독립 방책의 건’에 노출된 일제 측 정보에

    의하면 임정 대통령의 지휘감독을 받은 군무총장이 이를 책임지고 ‘독립 사업’을

    전개하게 되었다.11) 그에 따르면 첫째, 군사상 수양과 경험이 있는 인물을 소집

    하여 작전계획을 준비하며 군사직무를 분담 복무하게 한다. 둘째, 러시아 중국 각

    지에 10만 명 이상의 의용병지원자를 모집하여 대오를 편성하고 야학의 개설, 군

    인의 군사훈련 등 인재양성을 한다. 셋째, 러시아 중국 각지에 사범부를 분치하여

    군사교육을 감독한다. 넷째, 군사적 기관을 조사하여 군무부에 예속시킨다. 다섯

    째, 각지의 의용병을 모집하여 요새에 잠복시킨다. 여섯째, 러․중에 사관학교를

    설치, 사관을 양성한다. 이는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 일곱째, 청년을 미주에 파견하여 비행기 제조와 비행전술 전략을 습

    득한다. 여덟째, 청년을 선발하여 작탄대(炸彈隊)를 편성, 그 기술을 습득한다. 등

    등 14가지의 전술 전략이 법제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2) 이는 이미 1919

    년 12월 18일 공포된 임시육군군제에 의거 시정 방침으로 확정해 놓고 있었다.

    주10) 이현희,『춘산이유필연구』, 동방도서, 1991, 45~9쪽 78~94쪽 참조.

    11)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1976, 107~114쪽.

    12)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 전 55조 부칙 참조.

  • Ⅰ군역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48 군사연구 제126집

    결국 임정의 광복정책은 여러 가지 다양성이 있으나 군사정책이 가장 우선적이고

    근간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군사적으로 경험이 있는 역군을 통해 군사작전을 수

    립하며 군인 10만 명 이상을 양성하고 러시아와 중국지역 내에 사관 양성소를 두

    어 지속적으로 백년대계를 위하여 무관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의 건

    학정신을 임정에서 재현 실시하겠다는 결전의 의지인 것이다. 청년을 미국 등지

    에 파견하여 비행전술을 습득한다는 것으로 이는 노백린 군무총장의 미주 한인비

    행사 양성으로 구체화된 것을 지적해 둔다. 청년들을 선발하여 작탄대 같은 돌격

    형의 육탄 용사를 양성한다는 집념의 구체화인 것이다.13) 사활을 건 민족의 운명

    을 좌우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군사적 측면의 공격이 곧 완전한 광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군무총장 노백린의 명의로 1920년 1월 군사정책이 군무부 포고 제1호로 발포되

    고 내무총장 이동녕이 내무부 포고 제1호로 국가 정책을 발포한바 있다. 군무총

    장의 언급과 같이 독립전쟁의 완수는 군인의 양성과 군대의 편성이 화급한 사업

    임을 천명한바 있다. 육군사관학교라고 한 임시육군무관학교는 상하이 신민리 23

    호 군무부내에 있었고 1920년 12월 말 현재 졸업생 22명을 배출하였으며14) 4회

    졸업생까지 배출하였다고 한다.

    내무총장의 포고도 석오가 일찍이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신흥강습소 소장)을 역임

    한 경력이 있음을 감안해 볼 때 외교적 술사나 실력 양성만을 거듭 강조하였던 것은

    아니었다.15) 이 같은 무장독립전쟁론이 실질적 독립혈전의 끈질긴 주의주장과 실천

    의지로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즉시 연결되었다고 평가함에 이론이 없는 것이다.16)

    그 뒤 1931년 9․18사변으로 일제에 의하여 만주 동삼성일대가 침략당하더 다

    음해 1월 말경 상하이가 함락되면서 임정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를 슬기롭게 돌

    파한 것이 곧 이봉창의사 의거에17) 이은 윤봉길의사의 홍커우 공원(현 루신공원)

    의거였다. 앞선 이봉창의사의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거울삼아 연습에 실

    습을 거듭하여 마침내 성공하였고 그것이 곧 장 총통의 뤄양군관학교에서의 한인

    반 편성과 무장군인양성의 실현으로 구체화되었다.

    주13) 임정의 임시육군군제 참조.

    14) 상하이판『독립신문』, 1920년 12월 20일.

    15) 이현희, 주 4) 참조.

    16) 앞의 자료, 109~120쪽.

    17) 이현희,『이봉창 의사의 항일투쟁』, 국학 자료원, 1997, 200~11쪽.

  • 군사연구 제126집 49

    중국의 7대도시 중의 하나인 난징은 임정의 광복군의 활동 등 무장 항쟁과 인

    연이 깊다.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이곳 난징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장제스 총통

    과 담판을 가졌다. 여기서 김구는 장 총통에게 2백만 원의 재정 지원을 요청하며

    그것으로 일본군의 교량 등을 파괴하겠다고 필담으로 제의하였다. 그는 군사양성

    제의를 수락하여 1934년 초에 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설반을 결성하였으

    니 이것이 광복군 성립의 단서라고 말할 수 있다. 광복군이 성립하기 6년 전의

    일이었다. 그 정식 명칭은 ‘동 뤄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 군관 훈련반 제17

    대’라고 한다. 한인청년들은 1933년 11월부터 중국인과 어울려 훈련을 개시하였고

    1934년 2월 한인특별반 92명이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김구는 그의 훈련 목표

    를 독립투쟁을 위한 간부양성에 두고 있었다. 그의 운영은 김구가 총지휘하였고

    지청천(총교도관), 이범석(학생대장), 오광선(학생반장) 등이 체계적으로 맡았다.

    지청천은 3월 1일 군관학교 강당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개최하였는데 그 중 학생

    대표 이이흥과 양철산이 일치단결하여 조선의 독립을 관철하겠다고 결의를 명백

    히 천명하였다. 이 한인 특별반은 1935년 4월 9일 졸업하였다. 이들 중 한국독립

    군 출신은 청년군사간부특별반(신한독립당 산하)에, 의열단 계열은 민족혁명당으

    로, 백범 측은 난징의 한국특무대 독립군에 소속되어 항쟁하였다. 백범은 1934년

    12월 말경 한국 특무대 독립군을 만들어 난징 목장영 고강리에 본부를 설치하고

    김구 구락부라 명명하였다. 그의 애국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해 초

    학생훈련소를 설치하였으니 그 명칭은 특무대예비훈련소라 하였다. 여기서 훈련

    을 받았다. 일제에 쫓기고 있던 백범은 비밀장소에 거주하여 안공근 형제, 박찬

    익, 엄항섭 등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었다. 그가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있었기 때

    문이다.18)

    그러나 그것도 엄격히 표현하면 일제의 압력으로 만족할 만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이보다 앞선 1933년 일제는 열하 등지로 침공을 개시하여

    적봉(赤峰), 승덕(承德) 등지를 점령하고 중국을 위협하여 각종 괴뢰기구를 만들

    었으니19) 청일전쟁으로 얻은 일본의 권리를 십분 발휘하여 교만을 부렸다. 또한

    천진 등 10여개 소를 공동조계로 삼아 이를 거점으로 하여 공관원과 거류민이 항

    시 왕래 거주 감시하고 있었다. 더욱이 소주 등 30여 개소를 상업지로 활용하고

    있어 일제의 중국에 대한 권리행사는 예사롭지 않았다. 관동군이 창춘에 있었고

    주18) 김구,『백범일지』, 서문당, 1992. 235~9쪽.

    19) 예를 들면 북평정무위원회 기동자치정부, 기찰정무위원회, 몽고자치위원회 등이다.

  • Ⅰ군역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50 군사연구 제126집

    칭따오에는 일본 육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일제의 육군 4만 명, 전함 40여 척,

    항공기 30여 대가 버티면서 군사력을 과시, 위협하고 있었다.

    마침내 대륙 침략을 위해 일제는 1936년 2․26사건을 일으켜 군부가 정권을 장

    악하면서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때 장제스도 감금하는 시안(西安)사변을

    야기하였다.20) 다음해 7월 교묘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8년간의 대륙을 누비

    는 노구교 부근에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중국은 노산에서 군 수뇌부와 문화

    계 대표가 모여 삼민주의교육을 실시 중이었다. 장 총통은 결전의 중대 담화를

    발표하고 결사 항전에 온 국민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21) 이 전쟁은 1년 6개

    월 간에 집계한 통계로 볼 때 일제군 70만 명과 중국군 11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큰 규모의 참혹 처절한 피의 전쟁이었다.22)

    중국군의 결전태세는 결사적이었다. 중국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한국청년까지

    가세하여 공동의 적인 일제군과의 항전을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

    는 임정이 상하이로 이동한 뒤였으나 조국수호의 의지로 대일전쟁을 수행하였다.

    개전 3개월 만에 위협적인 기습으로 중국군이 상하이에서 철수하여 뒤로 물러났

    다. 동년 12월 난징이 함락당하자 무고한 양민 30여 만 명이 학살당하는 천인공

    노할 만행이 펼쳐져 아직까지도 그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동시기에 접어든 임정은 중․일전쟁 중 전장(鎭江)에 체류하고 있었다. 중국

    으로서는 큰 충격과 타격을 받았으나 임정의 이동녕 주석 등은 지혜로운 대응책

    과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런 국지적인 전쟁이 임정으로서는 유리하

    게 작용하여 국면 타개의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도의 임

    정 시정방침을 보면 1개 사단(아마 1개 연대가 아닐까?)의 병력을 모집하여 기본

    대오로 편성하여 하급 장교를 양성 배출하려는 계획 하에 단기간 훈련과정을 거

    쳐 충당하려는 계획안을 갖고 있었다. 이에 장교속성소라는 양성소를 설립하여

    남북만주의 의용군과 기타 교포에게 알리고,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긴밀

    한 조직을 결성하여 임기발동을 목표로 표방하고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

    었다.23) 이 시기에 이동녕 주석의 지휘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특무공작을 행

    할 것을 결의하였다. 따라서 초급 장교 약 200명을 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주20) 이현희, 중경 임정과 한국광복군 연구, (상) 『군사』, 제23호, 1991.

    21) 국가보훈처, 『한국독립운동사』, 6, 1975, 138~141쪽.

    22)『항전 이래 적군 傷亡 통계표』, 1940, 중국군사령부 발행 .

    23) 국회도서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문서』, 1974, 745쪽.

  • 군사연구 제126집 51

    8개 조의 군사위원회 규정을 제정하여 의정원 상임위원회에 동의를 구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지 1주일 뒤의 일이어서 긴급히 대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동년 10월 17일 제3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추인하였다. 이동녕 주석이 조

    성환군무부장에게 지시하여 성사된 것이다.24) 이를 처리할 담당위원으로 유동열,

    지청천, 이복원, 현익철, 안공근, 김학규 6명을 선임하였다. 이의 목적은 광복군의

    양성인 중견간부의 집중 육성이었다.25)

    임정이 광저우로 이동하는 기간이기도 한 시기인 1938년 7월에는 이건우 등 청

    년 60여 명이 한커우에서 조선청년 전시 복무단을 조직하였다. ‘한․중 양 국민은

    연합하여 공동의 적 일제를 타도하자’라는 의연한 구호 하에 중국국민들에게도

    신뢰와 위안을 주었다. 중일전쟁으로 중국인들이 영토적 상실에 곤혹스러워하고

    있었기에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행보가 우리의 정규군을 성립시

    키기 위한 전초단계로 계획을 앞당기게 된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한국광복군

    의 결성을 향한 집념의 한걸음 앞장서는 역사로서 민족사적 위업의 중간 결실이

    었다.26) 이런 시기에 조선의용대가 홍커우에서 결성되어 ‘광선’ 측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27)

    광선측은 유저우로 가서 박영준, 이재현, 유평파, 지달수, 연미당, 오광심, 신순

    호, 오희옥, 오희영, 노복선, 민영구, 마초군, 이준식, 김석동 등 약 70여 명이 앞

    장서서 청년공작대를 조직하였다. 이때가 1938년 말경일 것이다.28)

    2. 광복군 성립과 활동의 의미

    임정 8년 동안 이동시기(1932~40)의 우리 정부는 유저우에 판공처를 정주한

    지 6개월 정도 밖에는 체류하지 못하였음으로 이곳에서의 본격적인 괄목할만한

    항일 활동은 전개하지 못하였다. 단지 광복군 성립을 위해 의식 있는 청년들이

    준비 단계에 있었다고 본다. 충칭에서 청년전지공작대가 재조직 강화되면서 뒤에

    광복군으로 정식 편제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임정은 1939년 10월 1일 군사

    주24) 상동 자료, 744쪽.

    25) 이현희 주 15의 논문 참조.

    26)『소탕보』, 충칭, 1938년 2월 8일 12월 25일 신촉보 충칭, 1938년 8월 20일.

    27)『남파 박찬익전기』, 1989, 을유문화사, 244~6쪽 237쪽.

    28) 1939년 4월 4일 촬영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在유저우 與각기관단체대표유별 기념

    촬영’이라는 사진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 Ⅰ군역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52 군사연구 제126집

    특파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임정 지도자 중 조성환, 부단장에 황학수, 단원에 왕중

    량(나태섭), 이웅 등을 임명하고 시안에 파견하여 활동 준비단계로 돌입함에 만반

    24)의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정은 중국 기강에서 연로한 원로 주석 석오

    이동녕 주재 하에 내각과 의정원을 개편하였다. 오직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이라

    는 지상 목표달성을 위하여 모든 가능한 노력을 집중 투하하는 가운데 오랜 숙원

    이던 좌우익의 통합이 결렬되어 우익 3당 요인만이 동참한 것이다. 의정원도 박

    찬익 등 18명을 영입하여 참신한 입법 활동을 위한 의회모습을 보여주었다. 치창

    의 임정본부와는 별도로 임정이 아직 충칭으로 이동하기 전인 1939년 10월 경 충

    칭에서 30여 명 규모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일명 복무대)가 유저우 시기의 청년

    공작대원까지 수렴하여 확대 조직 보강되었다. 이 복무대는 하나의 정공대(政工

    隊)의 양상을 뗬으며, 기능 발휘를 통해 광복군으로의 조직을 위해 구체화된 것

    이다. 그 주요 간부에는 나월환, 김동수, 박기성, 이하유, 한유한, 이재현 등이 포

    함되어 있다.29) 동 대장 나월환은 ‘3천만 동포를 구출하고 중국 내에 산재한 혁

    명역량을 총 집결하여 무장 단위부대를 결성하자’라고 역설하였으니 그의 평소에

    갖고 있던 애국적인 사상과 집념의 요지인 것이다. 조선의열단의 김원봉에 의한

    직할 군대인 조선의용대의 선 결성에 크게 자극된 것임은 두 말을 불요한다. 청

    년전지공작대의 창설자 중 한부인, 이재현은 ‘시안에 공작대 본부를 둔 우리들은

    중국군의 특수훈련을 받고 소위가 되어 대행 산맥 일대에 가서 1940년 초 한국청

    년 50~60명을 시안본부로 파견하였지요. 곧 청년전지공작대원이 100여 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이들이 광복군 결성 당시 기간요원 즉 주요병력이었지요’라고 증언

    하였다.30)

    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 5지대로 편성되었으니 이는 사실상의 광복군으로

    서의 기능과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충칭에서는 이미 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되어 있었다. 그 당시 중국일대에 일본군부대로부터 탈출하여 대

    기하고 있던 청년이나 흩어져 임정을 찾고 있던 청년들은 광복군 사령부를 찾아

    감격스럽게 합류 하였던 것을 당시 학병 탈출병 인 김준엽, 장준하, 윤경빈, 문응

    국 등 수십 명의 광복군이 된 애국지사들의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다.31)

    주29)『대공보』, 충칭, 1939년 10월 18일.

    30) 앞의 이현희,『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이재현 증언 참조.

    31) 김준엽의『장정』전 4권이나 장준하의『돌베개』기타 광복군 출신의 진솔한 여러 건

    의 귀중한 자료로서의 회고록 참조.

  • 군사연구 제126집 53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새벽 충칭 가릉빈관에서 중국 측의 허가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광복군을 성립시켰다. 김구 중국지도자 등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광

    복군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서 5년의 역사를 개시한 우리의 임정 정규군

    인 한국광복군이 군대해산에 이어 계속적인 정통 군역사의 맥을 잇는 의미에서

    한국군의 정통을 연결한 것이다. 즉 나라 군대의 정규적인 맥을 잇는 정통 군대

    인 광복군의 찬란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임정의 지도자 김구 등이 일찍부터

    염원하던 정규 군대를 보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비록 남의 나라에서 간섭 하에

    창설 운영되었으나 자랑스러운 군의 확보라는 의미에서 자부심 속에 높이 평가되

    어야 할 것이다.

    광복군은 4개 지대와 토교대, 비호대 등으로 외곽조직이 편성되어 있었다.

    그 뒤 4개 지대는 5지대가 지대장의 피살로 3개 지대로 개편되었다. 제1지대

    (지대장 이준식)는 1941년 2월 지대장이 노태준, 안춘생, 이석화, 이영여, 조

    인제 등을 인솔하고 산시성 추림현에 가서 염석산 제2전구사령관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의 주선으로 대동 태원 등지의 한국교포들을 찾아 초모, 선전,

    첩보 등의 다양한 공작을 펴서 성과를 거두었다. 그 중 이석화는 중국 중앙

    군관학교 출신으로 중국에 안면이 넓어 다양하게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나

    다시 풀려나서 자기 자리를 찾아 공작에 임하였다.32) 이들은 1942년 4월 광

    복군이 개편 확장될 때까지 특무공작을 전개하였다.33) 제1지대 간부 안춘생

    의 증언을 통해서 그 당시 광복 공작의 어려움이 얼마나 심대하였는가를 짐

    작할 수 있다.34)

    제2지대(지대장 고운기)는 지대장이 앞장서서 1941년 2월 나태섭, 유해준, 지달

    수, 고시복 등을 인솔하고 수원성 포두로 들어가서 중국군 12전구 사령관 부작의

    와 유대 속에 초모공작을 폈다. 이들은 하북성의 북경 천진 장가구까지 확대, 적

    용하여 종횡으로 누비면서 한국청년들을 상대로 활발히 초모공작과 적정탐색을

    병행하였다. 그들은 이런 작전이 곧 우리나라를 찾기 위한 애국활동이라고 평가

    하면서 독립투사로서의 자부심 속에서 목숨을 건 투쟁을 지속적으로 펼친 것이

    다.35) 포섭된 청년 중 최준이란 자가 헌병대에 자수하여 대원 유해준이 체포되어

    주32) 국회도서관,『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 1974, 779쪽.

    33)『대한민국 24년 10월 27일 군무부 군사보고서』, 참조.

    34) 이현희, 충칭임정과 한국광복군 연구 (하)『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6집 1992.

    35)『사상정세시찰보고서』1, 258쪽 동 2, 437쪽.

  • Ⅰ군역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54 군사연구 제126집

    일단 철수하였다.36) 적진 내에 깊숙이 침투하였던 유해준은 ‘큰 고통 속에서 인

    내심을 갖고 공작을 전개하였다’고 말하기 어려운 고충을 털어놓은바 있다.37)

    제3지대(지대장 김학규)는 대장에 의하여 1942년 2월 시안을 떠나 안휘성 부양

    으로 가서 초모공작을 폈다. 이 지대는 지대장이 대원 신송식, 오광심, 서파, 지복

    영, 김우전 등을 인솔하고 부양에 도착하여 초모한 결과 51명을 한광반에 편입시

    킬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때는 광복군의 9개항의 행동준승이 발표되기 전이라

    중국군의 지원이 비교적 수월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동년 이평산이

    김학규와 같이 화북일대에서 공작 거점 확보에 진력하여 성과를 거두었고 제3지

    대 본부 비서실장 장조민과 김국주 등이 부양으로 돌아와 초모, 징모 분처가 활

    기를 띠고 서주 외곽에서 한국인 초모공작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38) 그 외 고성

    봉, 정원찬, 장호강, 조동린, 문수열 등이 헌신적으로 활동하여 광복군의 위상을

    정립하고 한국광복군의 면모를 일신함에 기여하였다.

    제5지대와 제3징모 분처는 책임자가 나월환이었다. 그는 시안을 중심으로 활동

    하였다. 그는 호종남 사령관에게 부탁하여 중앙전시 간부 훈련단 제4단 내에 한

    청반을 개설하여 소정의 군사훈련을 이수할 수 있었다. 이곳을 졸업한 인물로는

    문응국, 김천성 등 80여 명에 이르고 있다.39) 그러나 1942년 3월 31일 시안의 5지

    대 본부에서 나월환이 암살당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40) 제3징모 분처는 김

    문호가 주임이었고 이지일, 한도명, 신정숙 등이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4

    월 10일경 강서성 상요에 도착하여 안병무의 영접을 받고 간판을 달면서 활동하

    였다. 그들의 활동 중 방송국을 찾아 염전사상의 고취, 포로 심문, 반전 전단(삐

    라) 살포, 민족정서 함양, 일본군의 귀순 장려 등을 강조하는 초모 공작에 전념하

    여 성과를 거두었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되자 징모

    분처는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로 재편되었고 김문호는 제2분대장이 되었다.

    1944년부터는 건양에 근거지를 두고 항일전선과 초모 공작에 적극성을 띠고 활동

    하였다. 이런 광복군의 애국적인 활동은 그것이 국외라 해도 또한 여러 가지의

    열악한 조건이 압박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오직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달성해

    주36) 광복군 유해준의 자필이력서 참조.

    37) 이현희, 앞의『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유해준 항목 참조.

    38) 국가보훈처,『한국독립운동사』, 4. 947쪽 동 6, 224, 409, 420, 550쪽 참조.

    39) 상동,『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2, 511~2쪽.

    40) 국가보훈처,『독립유공자 공훈록』, 5, 927쪽.

  • 군사연구 제126집 55

    야 한다는 순수한 사명감에서 출발한 한국 청년들의 피 끓는 애국 애족심이 충만

    한 거사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3. OSS훈련과 국내 진공작전

    한국광복군의 자유로운 작전과 국내진공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에 의해 발목이 잡혀 있는 행동준승(準繩) 9개 조의 철폐만이 우리임시정부

    의 진로 모색이 가능해 질수 있었기에 이를 철폐하기 위한 노력이 결사적으로 전

    개되었다. 1943년 1월 이후 임정 국무회의에서 그 폐기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성안되어 집행단계로 돌입하였다. 그 대중국교섭대표로 김규식, 조소앙, 박찬익

    등이 선임되어 주요 막료인 주가화와 진과부 등을 찾아 격동 책을 활용하게 되었

    다. 의정원문서 기록에 보면 조성환 같은 군무부장은 ‘행동준승을 풀어주지 않는

    다면 차라리 우리 모두 죽음을 선택하자’면서 격렬성을 보인 일도 있었다.

    마침내 1944년 7월 중국의 군사부장(참모총장) 하응흠은 장제스 총통에게 ‘광복

    군은 임정에 예속시킴이 정당하며 9개 항의 행동준승은 취소해야 한다’라는 사실

    을 보고서로 올리게 조치하였다.41) 동년 9월 동 행동준승을 폐기하겠다는 용의가

    있다고 한 뒤 1945년 4월 해제된 것이다.

    이후 광복군은 독립전쟁을 위한 전투지역을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다 포함

    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각지에 우리 군을 파견하게 되었으며 연합군과 어느 곳

    에서라도 대일 항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42) 인도나 미얀마 등지에

    문응국 등이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 시기에

    한국인 학병과 기타 청년들이 탈출에 이어 광복군으로의 합류가 빈번히 이루어져

    김구 주석이나 동 국무위원들을 경탄하게 하였다. 이미 언급한 대로 광복군 장준

    하, 김준엽에 이어 오건은 ‘나의 양심적인 고백’에서 ‘우리들은 광복군에 귀순하기

    로 작정하고 기회가 되는 대로 탈출하자고 했다.---탈출은 성공했다’라고 어려웠

    던 당시를 회고하였으며,43) 백정현은 ‘나는 광복군 제2지대에 투신하였다.---후방

    공작원으로 뽑혀 활동하였으나 잡혀 베이징 감옥에 갇혔다.--감방을 탈출하였으

    나 한쪽 다리를 부러뜨렸고--결국 찔려 죽음을 당하였다.’44) 1944년 초에 광복군

    주41) 이현희, 앞의 충칭임정과 한국광복군 연구 (하) 참조.

    42) 앞의『의정원문서』, 416~35쪽.

    43) 독립신문 충칭판, 1945년 3월 1일.

    44) 앞의 자료 1944년 10월 8일.

  • Ⅰ군역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56 군사연구 제126집

    에 합류하였다는 이미 작고한 이준승은 ‘중국군은 사기가 엉망이었어요. 군화도

    못 신고 짚신을 신고 달렸지요 그것도 중국짚신이었어요’45)

    광복군의 특수훈련은 미군 OSS(미 정보전략처)와 합작함으로써 국토수복작전

    을 통치권이 미치는 범위 속에서 소신껏 행사하는 효과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중국은 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여 1945년 4월 4일 한국광복군에 관한 ‘한중양

    방상정판법’(8조)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해 광복군의 특수훈련과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중국에 파견되어있던 미 공군에서도 해외파견공작대의 명성

    을 듣고 그곳으로의 파견을 희망하고 있었다. 총사령부에서는 1944년 12월 엄도

    해, 안병무, 안원생, 안우생, 진춘호, 송면수 등 10여 명을 주 중국 미국 대사관에

    보내 한인공작대를 설치 운영하였다.

    미국 측에서는 이 시기에 곤명 주재 제14항공대에 서젠트와 한인 미 공군 중위

    정운수를 파견하여 제1, 2지대를 방문함으로써 OSS훈련의 계획이 성사되었다. 연

    합군이 국내에 진공할 때 특수병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1945년 3월 광복군과 미군

    사이에 ‘한미군사합작’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범석(제2지대장 ), 김학규(제

    3지대장)가 곤명의 미군 OSS 지휘관과 주 중국 미공군사령관 첸놀트 소장을 만

    나 이런 사항(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90명과 22명이 각각 2, 3지

    대에서 차출되어 5월부터 3개월 과정으로 특수훈련을 받았다. 이들 훈련은 이범

    석, 서젠트, 정운수가 제2지대, 김학규, 윔스, 버취가 제3지대를 맡아 훈련에 임하

    였다. 그 훈련 내용은 유격용의 특수훈련, 유격대 조직방법, 무전통신기술, 정보수

    집, 군사시설 파괴, 암호문 해독 등이었다. 20대 청년들은 ‘신명 바쳐 이 훈련을

    시종 진지하고 사명감에 입각 열심히 해냈다’는 것이다.46)

    한국광복군은 연합군과 손잡고 대일항전을 수행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작전은 국내진공이었다. 비행대까지도 편성해 놓았던 임정의 광복군은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이범석 2지대장, 김학규 3지대장 등과 협

    의한 뒤 국내 정진군의 특수 훈련을 실시한 것이다.47) 전국의 8도를 모두 3지구

    로 분류, 책정하여 각기 책임자를 두어 진공작전에 물샐 틈 없는 계획을 실천으

    로 전개하게 되어 있었다. 조국의 광복은 줄기차게 계속된 피나는 한국청년의 독

    립전쟁의 결과와 피의 대가로 평가해야 한다. 서남아 일대에서 대일 항전에 참가

    주45) 이현희 앞의『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이준승 항목 참조.

    46) 광복군 김준엽의 증언.

    47) 조일문, 한국임시정부항쟁사,『한국현대문화사대계』5 고려대, 1980.

  • 군사연구 제126집 57

    하고 있던 한국광복군은 겨레의 숙원인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성취하기 위하여

    직접 국내 진공작전을 펴서 빼앗긴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직접 쟁취할 것을 의미심

    장하게 결의하였다. 김구 주석은 정진군의 총지휘관인 이범석에게 국내로 진입하

    여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방방곡곡에 태극기를 꽂도록 각별히 당부하였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국내를 3개 지구로 분류하였다. 제1지구(평안․황해․경기

    도)대장에 안춘생, 제2지구(충청․전라도)대장에 노태준, 제3지구(함경․강원․경

    상도)대장에 노복선이 각기 임명되었다.

    이들은 8월 20일 내로 함경도에서 남해까지 주요 항ㆍ포구에 낙하 잠입하도록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48) 이를 독수리 작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이 원자

    탄을 일본 두 곳 도시에 투하하여 잿더미로 화하게 하자, 전의를 상실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우리의 이 작전을 무위로 돌아가게 하고 말았다. 매우 애석한 일

    이 아닐 수 없다. 8․15 민족의 광복을 애석하다고 개탄한 한국민은 없다. 모두가

    기쁨과 환희에 용약하였다. 오직 백범만이 그의 회고록에서 8․15의 감격을 매우

    애석한 일이라고 탄식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셨도

    다.’(사 9:2~3)라는 의미가 이 시기의 우리의 민족적 감격을 그대로 반영한 지적

    이라고 할 수 있다.

    4. 비호대의 활동

    한국청년 20대의 박주대, 이운선 등은 북한지역에서 일본군부대에 징집되어 난

    징에 도착하였다가 선편으로 무한 삼진에 가서 보병부대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았

    다. 이들은 장사 형산 등지에서 훈련 중 탈출하여 중국유격대와 총격전을 전개

    중 잡혔으나 곧 석방되어 당지에 파견 나온 광복군 정치지도원 김경화에 인솔되

    어 현지에서 입대하였다고 한다.49) 광복군 소령 김경화는 일명 김귀선이라고도

    하였는데 9전구에 근무하면서 최문영, 이병곤 등을 현지에서 광복군에 입대하게

    주선하였다고 필자에게 증언한바 있었다. 그러나 9전구와 3전구와의 연락 미비로

    이운선, 백진규 등은 광복군으로의 편성이 지연되었다.50) 이들은 일본군의 후방

    을 통과하여 의춘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먼저 도착한 이봉훈과 같이 1945년 1월

    주48) 김준엽,『장정』1, 나남, 1987, 411~3쪽.

    49) 광복군 김경화와의 면담 증언(1987. 10. 30 자택).

    50) 비호대원 백진규의 증언(1987. 10. 25 자택).

  • Ⅰ군역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58 군사연구 제126집

    경 비호대를 조직하고 이봉훈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광복군에 정식 편성될 때까지

    과도기적인 항쟁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비호대에는 그 후에도 청년들이 합류하여 약 100여 명 규모로 확장하였으며 파

    음(播音)선전으로 한적(漢籍) 사병의 탈출을 촉진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중국군과도 합작하여 항쟁을 지속화하였는데 제4차 장사회전에도 동참하

    여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51) 장사회전은 9전구사령관 설악장군의 요청으로 비호

    대 전원이 동참하였으며, 일본어가 능통한 대원 20여 명을 선발하고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적 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탐지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귀대 시 적군 부

    대에 수류탄을 투척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고 일본군 대대장 등 5명을 납치해 왔

    다.52)

    이들은 1946년 6월 채원개 장군의 인솔 하에 부산을 경유 귀국하였다. 임정 지

    도자의 호위 임무와 일본군의 무장 해제 등의 공로가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소

    개한 바 있는 한국광복군 9전구 관병(官兵) 52명과 제1지대 3구대 2, 3분대원 91

    명의 명단을 보면 이들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이는 광복군 김경화가 당시에 작성

    한 문건으로 지금은 작고한 그가 아직도 소장하고 있을 것이다. 전자의 52명은

    중국 계동에서 후자의 91명은 의춘(宜春)에서 각기 항쟁을 계속하였던 대부분이

    국졸 출신의 숨은 애국자로 평가되고 있다.53) 이들의 명단은 필자가 이미 인용하

    여 활용한 이 방면 논문이나 저서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 외 충칭의 광복군 토교대의 항일투쟁도 특기할 사항인 것이다. 토교대원은

    거의가 독립지사로 포상을 받았으나 애석하게도 비호대원은 거의가 포상에서 제

    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의가 작고한 그들의 공로가 광복 이후라는 주장

    때문인 것 같아 아쉽다.

    Ⅳ. 한국군의 모태와 현재적 의미

    1940년 9월 17일 충칭에 이미 이동한 임정이 주관하여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의식 있는 발랄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여 정규무장 단위군대를 광복군이라는 이

    주51) 비호대원 정재윤의 증언(1988. 10. 5. 자택).

    52)『비호대 항일투쟁사』, 1990, 42~58쪽.

    53)『비호대사』, 1976, 2~8쪽.

  • 군사연구 제126집 59

    름으로 성립하게 한 것은 우리 국군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위업이며 민족사

    승리의 개가인 동시에 쾌거였다고 평가한다. 더욱 1907년 8월 1일 17,000명 내외

    규모의 구 한국군이 일제에 강제해산 당함을 애석히 여겨 이의 계승을 의미한다

    는 뜻으로 ‘창설’이란 말 대신 ‘성립’이라고 규정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실이라

    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성립전례식’이라고 표현하였다. 광복군의 성립일이

    9월 17일이지만 사실은 소급하여 8월 1일이라고 표현함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까

    울 것 같다. 오늘날의 국군의 날도 이에 맞추어 생각해 봄도 아주 무모한 발상은

    아닌 것 같아 건의해 본다.

    임정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은 비록 짧은 5년(1940~45)의 역사를 간직하였으

    나, 1907년 이전의 우리 정통 국군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로서 본다면 5천년의 장

    구한 민족의 역사를 찬란하게 빛나게 하고 있다. 국군의 역사가 곧 한민족사의

    장구한 역사라고 평가할 때 광복군의 역사는 5년으로 종료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광복군의 역사도 우리 민족사의 영속성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

    다. 하지만 무력이 뒤따라야 자력으로 광복할 수 있다는 일관된 정신이 깃든 임

    정과 광복군의 활동을54)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실은 중국 측에도

    충분히 알려주었다.55)

    임정의 광복정책은 다양하였지만 무엇보다 중점을 둔 것은 군사정책이었다. 그

    것은 신흥무관학교의 건학 정신을 계승한 무관양성에 주안점을 두고 정책을 펴나

    갔기 때문이다. 이동녕이나 이시영 같은 초창기 임정 산파역들이 대부분 신흥무

    관학교 출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임정이 외교와 실력양성만의 정책을 폈다고

    경솔하게 평가하는 것은 단견이 아닐 수밖에 없다고 본다. 임정이 무력투쟁을 비

    중 있게 다루었다는 정책에 이해가 가는 것이다.

    상하이 시기(1919~32)에도 육군무관학교를 프랑스 조계 내에 설치 운영하였던

    사실을 보더라도 증명이 되고도 남는 것이다. 중일전쟁 중에 직할의 군대를 양성

    하려 했으나 중국 당ㆍ정ㆍ군 고위 관계자가 참석치 않아 성립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1938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의 창설이 큰 충격을 주어 임정이 전력을 투

    구하여 2년 뒤 정식으로 광복군이 성립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유저우나 치

    장 등에서 전지공작대류의 한국청년들의 군사모임이 결성됨으로써 조선의용대의

    출범과 견주어 볼 때 시기적으로 그렇게 늦게 우리 광복군이 결성된 것은 아닌

    주54) 나월환, 建國必先建軍,『한국청년』, 1~4.

    55) 如 松, 論朝鮮義勇隊在革命運動中的地位,『조선의용대』제37기 (1940. 10. 10 충칭).

  • Ⅰ군역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60 군사연구 제126집

    것이다. 단지 임정의 당정고위층이 중국고위 당국자와 연결되어 협력관계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음에도 기선을 제압당한 것은 일고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Ⅴ. 결 론

    1945년 광복과 함께 정부 수립 이전에 벌써 동 12월 5일 세운 군사 영어학교

    (서대문 냉천동 : 군영)는 1946년 5월 1일 국방경비 사관학교(육사 전신)가 개설

    될 때까지 100여 명의 장교를 배출하였다. 이들이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이는

    처음에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선발한 뒤 각도에 배치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모

    집에 임하여 소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21세로부터 30세까지의 청년으로 군대훈

    련에 경험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었다.56)

    1945년 11월 미 군정청에 등록된 단체는 30여 개가 넘는다. 저마다 건군의 주

    역이 되겠다는 집념으로 가득 찼지만 극심한 이념 갈등으로 인하여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미군정은 1946년 1월 국방경비대(한국군)를 창설하면서 이들

    의 자유 분망한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개인자격으로 지원자를 접수한 것이다.

    이들 중 광복군 출신들은 광복과 동시에 귀국할 때 임정과 같이 개인자격이라

    는 매우 불합리한 굴레가 덮여져 있어 정통성을 부여받지 못하여 내심 불평이 적

    지 않아 입대를 외면하고 청년단체 활동에 투신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만군이

    나 일본군 출신들이 대거 군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창군의 원로들을 보면 이해가

    간다. 광복군 출신들이 한국군에 입대한 것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로부터였다.57)

    미군정 당국자는 유경험자 중 영어를 해독하고 미국에 호의적인 인물이냐 아니냐

    의 여부를 따져서 우선 선발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과 자긍심이

    강한 광복군 출신들은 입대 후에도 민족주의적 배타성 때문에 미군과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를 보였다.58)

    군대 내에서 좌우익의 이념 갈등과 대립양상은 1948년 10월 여․순 군 반란사

    건과 이어 11월, 12월의 대구 6연대 반란사건으로 구체화되었다. 그 뒤 광복군 출

    신 송호성이 자신의 휘하 부대원을 인솔하여 월북한 사건도 이런 일련의 이념갈

    주56) 조선일보, 1946년 1월 12일.

    57) 창군의 저자 교원대 교수 한용원의 증언.

    58) 육사 교수 온창일의 증언.

  • 군사연구 제126집 61

    등의 소산이었다고 평가된다. 여순반란 사건 직후 시작된 숙군으로 1948~9년 사

    이에 파면된 장교가 242명, 불명예 제대한 사병이 4,133명으로 1948년 당시 육군

    총원 5만 명의 10%에 해당하는 많은 수자인 것이다. 이런 숙군 작업은 모두 7차

    에 걸쳐 단계적으로 단행되었는데 마무리가 된 1954년 10월까지 사법처리(국가보

    안법) 된 자가 군인 1,120명이었고 처벌 받은 민간인 까지 합하면 1,677명에 달하

    고 있음을 보면 이 당시 군 내외 사회전반에 걸쳐서 이념 갈등대립 질시구도가

    얼마나 심각하였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59) 6․25남침 전쟁 중 남한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숙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듣건대 전 대통령 박정희가 광복 직전 한때나마 중국에서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는 저서를 통한 주장 가운데 조갑제나 송남헌 등의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

    다.60) 나의 연구에 박정희가 만군이나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중위로 복무한 것은

    사실이지만 친일한 단서는 찾을 수 없고 광복군에도 입대하였다는 자료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광복군은 한말의 의병을 계승한 독립군정신을 이어 임정의 정규직할 무장 단위

    부대로서 많을 때는 1천여 명이고 적을 때는 4백 명 규모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

    나 보다 정확한 숫자 파악은 어려운 것으로 본다. 충칭시기 5년간의 항일투쟁을

    줄기차게 펼쳐왔다. 그들은 한국군의 정통을 계승한 한국군의 맥을 이은 기간 군

    요원으로 임정의 군사정책을 스스로 감당하고 조국의 독립투쟁을 최일선에서 수

    행한 역전의 용사였다.61) 이들은 한때 인도와 미얀마 지역에 파견되어 연합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이 정신을 이어 1948년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그 중 일부가 창

    군의 일원으로 중추적인 군 발전에 임무를 수행하여 왔던 것이다. 이범석 최용덕

    이 국방부를 맡았으며 이어 김홍일, 박시창, 장흥, 김관오, 안춘생, 이준식, 권준,

    오광선, 박영준, 김국주, 장호강, 전성호, 민영구, 김용관, 김영일, 정희석, 박영섭,

    한철, 김신, 김동수, 유해준, 이종국, 고시복, 박기성, 최덕신, 채원개, 오동기, 조개

    옥 등 다수가 국군의 영관이나 장성으로 입대, 진급하여 광복군의 정맥을 이어갔

    다. 왕정위군 출신의 창군 요원으로는 김응조, 이성가 등 뛰어난 장군들도 광복군

    주59) 중앙일보, 2008년 8월 11일.

    60) 이현희,『박정희 평전』, 효민, 2007, 83~4쪽

    61) 조항래, 한국군의 창군 맥락과 정통성 계승,『죽당 이현희 교수 회갑기념논총』, 1997,

    동방도서, 901~23쪽.

  • Ⅰ군역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62 군사연구 제126집

    의 맥을 이은 지사들로 손꼽을 수 있겠다.62) 6․25당시 납치된 광복군 출신은

    유동열 등 수 명에 이르고 있다. 그는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직에 재직하다가

    5사단장을 강등 역임하였으며 6․25 당시 청년방위 고문단장에 재직하였다. 그

    는 6․25 당시 서울에 잔류하였다가 인민군 소장으로 임명되어 낙동강 전선에

    출동하였다고 일본인 사사키 하루타카는 자신의 저서 한국전쟁에서 주장하였다.63)

    아직도 일제 강점 하 광복군(비호대, 토교대 등 포함)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던

    역전의 애국용사들이 자료 미비나 부족으로 국가로부터 응분의 건국공훈을 인정

    받지 못하였다면 속히 공적을 면밀히 조사하고 개발, 검토하여 공적에 걸맞는 마

    땅한 국가 포상과 훈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인들은 독립된 조국에서 국가

    의 포상을 염두에 두고 항일투쟁을 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무리 하건대 한국광복군 활동의 현재적 의미를 요약한다면, 오늘날 같이 국

    방안보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시기에 한국군의 뿌리인 광복군의

    헌신적이고 순수하였던 애국독립활동으로서의 대일항전이 외교적으로나 현안 문

    제의 해결을 앞둔 시기에 그 독립 운동적 조국수호 의식이 어느 때보다 귀중하게

    현실적으로 연결 이해되어 국책에 반영되어야 할 뿐 아니라 국민정신 함양으로

    높이 승화되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군은 이 점을 명심하여 선배들의 피나는 애국

    정신을 정통의 발전하는 세계 앞의 비약하는 군사 정책에 올곧게 반영해야 할 것

    이다.

    주62) 한용원,『창군』, 박영사, 1984, 64~66, 26~950~3쪽.

    63) 강창구 역, 병학사, 1977, 중, 565쪽 (김동춘의『전쟁과 사회』돌베개, 2005 개정판에

    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