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솥밥한울림-2016 가을호 - ignatiuswww.교육혁신.org/files/hsb_2016_04.pdf ·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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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가을호 Vol. 23 한솥밥 먹은 사람이 한울음 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교육혁신이라는 ‘한솥밥’으로 세상이 모두 함께 행복해지는 프로젝트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그 한솥밥이 ‘한울림’을 만들어 교육혁신의 가치가 세상에 전파되는 더 큰 기쁨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www.교육혁신.org 02 바람, 풍경소리 04 신임 이사장 인사 - 소통과 비전의 틀 06 영성소나타 Ⅳ <자비의 특별 희년을 보내며> 09 영성소나타 Ⅳ <잠심, 나를 넘어서는 디딤돌> 12 실천하는 지성, 캠퍼스 그리너 13 2017 네팔 현장 체험 14 2017 서강-정인욱 겨울 영어캠프 15 후원 회원 명단 16 후원 신청 양식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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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가을호 Vol. 23

    한솥밥 먹은 사람이 한울음 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교육혁신이라는 ‘한솥밥’으로 세상이 모두 함께 행복해지는 프로젝트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그 한솥밥이 ‘한울림’을 만들어 교육혁신의 가치가 세상에 전파되는 더 큰 기쁨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www.교육혁신.org

    02 바람, 풍경소리

    04 신임 이사장 인사 - 소통과 비전의 틀

    06 영성소나타 Ⅳ

    09 영성소나타 Ⅳ

    12 실천하는 지성, 캠퍼스 그리너

    13 2017 네팔 현장 체험

    14 2017 서강-정인욱 겨울 영어캠프

    15 후원 회원 명단

    16 후원 신청 양식

    CONTENTS

  • 글·사진 _ 정강엽 베네딕도 신부

    (예수회/학교법인 서강대학교 상임이사)

    聖事,

    하느님의 사랑

    바람, 풍경 소리

    聖事란 우리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표징을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성사가

    지니는 고유한 표징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은총의 장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성사의

    특성은 신비의 체험과 믿음의 확신이라는 또 다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물 속에서 활동하고 계시기

    에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에서의 삶 그 자체가 성사

    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살게 해 주시려고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

    내시어(요한 4:9) 그리스도의 강생을 통해서 가장 극명하게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

    이다." (요한 14:9) 그렇기에 이 세상의 모든 성사를 포괄하는 가장 근본적이며 완전한 성사는 예수님 그 자체이십니다.

    성체 성사는 세 단어–서로 분리되면서도 연결되어 있는–를 생각하게 합니다: ‘희생’과 ‘양육’ 그리고 ‘공동체’. 예수님

    의 ‘희생’으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양육’되고 성장해 가며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1. 희생 | 복음에서 희생은 어떤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불완전의 완전성

    제자들은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라고 지레 겁을 먹습니다. (루카 9:12) 하지만 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현재의 상태가 완벽해야 우리를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하기에 희생과 봉사의 가능성이

    열리고 확대된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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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의 것을 내어 주는 것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13) 희생은 나의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 나누는 것이 아닙

    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빛을 주려면 스스로가 태워지는 것을 견디어야 한다 (What is to

    give light must endure burning)” 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성찰

    제자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과정이 바로 내면 성찰과 자기 인식의 과정입니다. 자기를 깊은

    차원에서 인식할 때 희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나누는 법은 없습니다.

    비충족의 충족성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5000명의 장정을 먹이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모두가 배가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는 많이 지니고 있지 않아도 희생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상황에서의 나눔이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2. 양육 | 이런 희생을 위한 전제가 충족될 때 우리의 희생은 더 깊고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되며 남을 살리고 성장하게 하는 “양육(nurturing)”으로의 전환이 가능해 집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고 기를 수

    있는 양육은 희생이 선행되어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양육의 속도와 방향은 언제나 내 뜻이 아닌 주님

    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3. 공동체 | 희생과 양육은 분리된 개체들을 서로 연결해 주는 매개체가 됨과 동시에 그들이 서로를 향해 진보할 수 있도록 길을 밝혀 주는 등대가 되어, 궁극적으로 봉사와 나눔의 공동체가 되게 합니다.

    결 론 | 우리가 돌아가야 할 원래의 자리는 바로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 일상은 다시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일러 주는 ‘신성한 공간’입니다. 그 신성한 공간은 피정이나 기도

    중에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자신이 무엇이며 무엇이 될지를 언제나 경험하고 이

    끄는 일상이자 실험실입니다. 실험실에서는 언제나 완결품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시행

    착오를 거쳐가며,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자신을 예수님에 비추어 점검하는 곳입니다.

    그 ‘신성한 공간’에 머물다 보면 우리는 반드시 교차로나 변곡점을 지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변곡점은

    두 개의 힘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느님인가 재물인가? (마태오 6:24) 그렇기에 교차점에서 우리는 불안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히 교차점에서 망설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소명은 우리를 끊임없는 선택을 하도록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길을 선택한 뒤에는 단념한 길

    은 생각지 말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오롯이 가야 합니다. 두려움이나 미심쩍음으로 뒤돌아 볼 때 변곡점은

    문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은 언제나 암중모색의 시간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길을 찾아

    나가는 그 탐색의 마음과 손길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불안과 무력의 공백을 견딜 수

    있는 강인함을 매일 더 키워나가길 바랍니다. 그래야 자신과 남을 기를 수 있는 빵을 만들 수도, 스스로가

    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성사를 되새기며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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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이나 영화의 줄거리를 제시하는 방법 중에 한 가지는 줄거리의 실마리부터가 아니고 어떤 사건이 한창일 때부터, 즉

    배우들이 급히 움직이는 장면부터 그 영화나 연극을 시작하는 방법이 있지요. 제가 이사장직을 시작한 것도 그런 식이었

    습니다. 그 시작은 남양주 캠퍼스에 대한 논쟁과 차기 총장을 선출하는 일이 한창일 때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전 이

    사장 김정택 신부님께서 건강이 나빠지고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 등 회복이 어려운 사유로 사퇴하시고 이어서 제가 그

    분의 임기를 채우는 이사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회 생활을 56년 동안 해 왔는데, 이전에 맡은 사도직은 모두 장상들과 대화한 후에 충분한 준비를 하고 나서 시

    작한 사도직이었습니다. 이사장직을 갑자기 맡은 것은 56년 만에 처음으로 경험한 일입니다. 관구장 신부님께서 예수회

    안에서 자문을 받으시고 박문수 신부가 이사장직을 맡아야 한다고 결정하실 때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하지만 관구장 신

    부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들은 순간, 한편으로 그 일은 하느님의 뜻이라 느끼고 필요한 은총이 올 것을 믿는 마음이 생겼

    으며 놀라움은 즉시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부르신 어부들이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를 따

    신임 이사장 인사

    소통과 비전의 틀

    박문수 프란치스코 신부

    (예수회/학교법인 서강대학교 이사장)

    Ⓒ 서강학보사 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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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른 것이 생각나면서 제가 다른 모든 일을 버리고 이사장직의 모든 부담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한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장직은 영광보다 욕을 많이 먹어야 할 자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작은 십자가이기 때문에 예수

    님과 함께 있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사장직의 부담이 있다면 그 부담을 함께 지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사장은 무엇을 혼자 해내는 사람보다

    서강대학교 법인과 예수회, 학교의 교수, 직원, 학생, 동문, 후원자 등 모두 다 그들이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하지요. 그 틀은 소통과 비전입니다.

    소통과 비전이란 틀을 만드는 데에 이냐시오 교육혁신 후원회가 기여해 온 것을 알고 기뻤습니다. 유시찬 전 이사장 신부

    님께서는 서강대학교 법인이 신임 교원들의 영성을 활성화하면 예수회 교육이념이 더 실천될 것임을 아시고 신임 교원을

    위한 연수를 강화시키면서 영성에 대한 도전을 그들에게 던지신 것을 기억합니다. 김정택 전 이사장 신부님께서는 이냐

    시오 교육혁신 후원회를 열심히 키우시고 자신의 전문적인 분야인 분석심리학 관련 강의를 통해 후원회원 분들과 더 가

    까이 만나기도 하셨습니다. 전 이사장들이 시작한 이 일을 제가 계속해서 추진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전에 맡은 사도직에

    서는 사회 약자의 인권을 실천하기 위한 연구와 활동을 했는데 이것은 교육혁신과도 관련이 됩니다. 서강대학교의 교육

    은 한국 사회의 심한 빈부 격차와 갑을 관계의 문제, 세계 차원의 환경 문제와 국가 간의 격차 및 폭력과 전쟁으로부터의

    피난민의 아픔과 같은 것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를 얻기 위한 공부와 연구, 그리고 우리 지구촌의 현

    실과 관련된 활동 간에 긴장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질이 좋은 교육을 위한 몰두와 세상에 대한 연민 양쪽을 모두 포용하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이런 지혜를 추구하는 교육이념 실천으로서의 교육혁신은 법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강대학교

    전체가 협조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런 교육혁신과 관련된 프로그램들은 학교 안에서 이미 시작되어 확대되고 있습니다.

    전인교육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교수학습센터의 프로그램, 늘어난 봉사 기회와 ‘성찰과 성장’이라는 교과목 등이 그

    것입니다. 물론 교육혁신은 전문 과목과 연결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육혁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예수회 교육이념을 적절하게 적용하는 발전 계획과 그 계획을 추진하는 인력, 그리고 충

    분한 재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출의 효율성도 개선해야 하지만 반드시 모금과 수익사업의 규모를 늘려야 합니다. 재

    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잘 해결한 예수회 대학교가 세상에 많기 때문에, 서강은 그들의 지혜로부터 힘을 입어

    이 도전을 잘 극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육혁신 후원회원 여러분을 매일 미사 중에 기억하고 있으며,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만나서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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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우리는 지금 자비의 특별 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자비의

    특별 희년은 올해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 계속

    됩니다. 특별 희년이 지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잠시 멈추

    어, 자비의 특별 희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다시금 새

    겨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크게 두 가지 관점

    에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서, 다른 하나는 자비의 인간 되기에 대해서입니다.

    자신에 대해, 자신의 죄에 대해 바라보기 위해서는 하느님

    의 자비를 열 번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직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 아이에게 너무 고백성사를 강요하게

    되면 커서 냉담할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사랑과 함께 살아가야 할 아기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잘못할 때마다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시니 고백성사를 봐야 한다고 가르치면 아이에게 예수님

    은 사랑의 친구가 아니라 심판관이 됩니다. 어른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 천국을 바라다 보는 분들 중

    에 고백성사를 습관적으로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미 용

    서받은 죄임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전에 고

    백했던 죄를 또다시 고백하고, 죽기 전에 총고해를 하고 싶

    어 합니다. 굉장히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마음 밑바닥

    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고백

    성사를 통해 용서 받았음에도 자신의 시선에서 볼 때는 이

    런 죄를 정말 용서 받았을까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 앞에 설 자신이 없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이런 분들은

    죽음이 기다려지는 사건이 아니라 두려운 사건이 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두 제자의

    운명은 서로 달랐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명예로운 교회 반

    석이 되었고 유다는 자살을 하게 된 그 차이는 “죄를 보기

    전에 그분의 자비를 열 번 바라다 보아야 한다”는 말씀 안

    에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만 초점을 맞춘 유다는 이

    세상에서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라는 사

    실을 깨닫지 못했던 반면, 베드로는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주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베드로에게는 언제나 죄와 용서가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예수님 앞에서 “주님 저는 죄인

    입니다” 하였고, 또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었을 때에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는지를 묻자 예수님으로부터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런

    용서의 주님을 통해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불구

    하고 매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거

    스르는 죄는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용서를 믿지 않고 밀

    쳐내는, 인간의 완고함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사

    람에는 완고하교 교만한 사람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

    니면서도 주님의 자비보다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사람도

    포함됩니다. 완고하고 교만하지도 않고, 신앙 생활을 열심

    히 하는 분들도 성령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만을

    쳐다보며 성령께서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를 거스르는 것입

    니다. 죄를 지은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단절하는

    것이 맞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그분 앞에 서기조차 싫게 되

    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단절을 시도하는 것입

    니다. 꼭 죄가 아니더라도 신앙 생활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를 소홀히 하면 더욱 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영성 소나타 Ⅳ - 예수님께 말을 듣다

    2016년 가을학기에는 를 주제로 네번째 영성 소나타가 진행되었습니다. 9월 21일(수) 예수회 송봉모 신부님의

    와 중 후원 회원님들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간추려 소개합니다. 회원님

    들의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의 _ 송봉모 토마스 신부

    (예수회/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6

  •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 편에서의 단절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세 차례 동안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을 때 예수님

    은 그 베드로를 연민의 눈으로, 용서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

    었습니다. 유다가 스승을 배반하고 그가 나름대로 잘못된 일

    들을 되돌리려 애를 쓸 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를 위

    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

    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저들을 십

    자가에 못박은 병사들로 이야기 하지만 복음서에 보면 ‘넘겨

    주다’ 라는 뜻의 단어로 ‘저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 십자가에 못박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다, 유다 법

    정, 빌라도 세 주체에만 그 단어를 붙입니다. 바로 원수들을

    위해, 유다를 위해서 예수님은 기도하신 것이지요. 유다는

    첫번째로 예수님 용서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어서 우리가 주님을 포기하는 경우는 있어도, 주님

    이 우리를 포기하시는 경우는 절대 없습니다.

    지난날을 되돌아 보며 내가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 살지는 않을 텐데,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습

    니다. 인생은 결코 다시 반복되지도 않지만 반복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비 자체이신 그분 앞에서 오늘부터 지금부터

    새롭게 살면 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어둠을 없애기 위해 할 수 있는 것

    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냥 빛이신 그분 앞에 나오면 됩니

    다. 우리가 어둠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

    니다. 주님의 은총을 가리키는 단어는 ‘그라티스(gratice)’

    라고 합니다. 이것의 문자적 의미는 ‘공짜’입니다. 주님의 사

    랑, 주님의 자비는 공짜로 주어지는 겁니다. 이 공짜를 은총

    이라는 신학적 용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

    습니다. 만약 뭔가가 있다면 공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

    리를 미워하실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분의 사랑은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거슬러서 살아갈 때 주님을 슬프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실망시키는 적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행위가 그

    분을 실망시킨다면 그분의 사랑과 은총은 조건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행위 때문에 실망하시지 않으

    며 다만 슬퍼하실 뿐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대다수는

    그분의 은총이 무엇인지를 모를 겁니다. 아주 뿌리 깊게 우

    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모습에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생존하며 존경받는 유다계 인물로 쿠시너라는 랍비

    가 있습니다. 이 랍비가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는 성직자와

    대화를 나눕니다. 통상적으로는 문란한 성생활 속에서 에

    이즈에 걸린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기존 관념 속에서 쿠시

    너가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당신이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는데 이 병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천벌이라 생각하고 있

    습니까?” 그때 개신교 성직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닙

    니다, 정 반대입니다. 내가 에이즈에 걸려서 좋은 것은 내

    가 믿고 있던 진리가 사실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던 진리란 그분은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

    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내 인생을 얼마나 망쳤는가에

    상관 없이 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병실에서 하

    느님이 계심을 느낍니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기 어려울

    때도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처음에는 내가 나의 행

    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 자신을 못된 놈이라 믿으며 경

    멸할 때 하느님도 나를 경멸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하지

    만 병원 침대에 누워 죽을 날을 기다리며 깨달음을 얻었습

    니다. 하느님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저지른 일을 알고

    서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 목사야 말로 예수님의 복음을 100% 체험하는 진짜 탕

    자였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탕자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 양면성을 갖고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의로움이 있는가 하면 추잡함도 있고, 용감함이 있는가 하

    면 비겁함도 있으며, 희생 정신이 있는가 하면 지극히 잔인

    하고 이기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아빠 하느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가며 멋대로 살아온 탕자입니다. 하지

    만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바로 온전한 사랑, 은총

    입니다. 에이즈 걸린 목사님은 훌륭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문란했던 삶이 훌륭하다는 것

    이 아닙니다. 그가 천국에 가기 전 하느님 아버지의 무조건

    적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7

  • 8

    이렇게 제가 강조해도 강의가 끝나면 저를 찾아오는 분이

    있으실 겁니다. “그렇지만 신부님 제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저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분들을

    꼭 만납니다. 하지만 지은 죄가 너무 커서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지은 죄가 너무 크기에 구원 받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우

    리가 변화되어야 할 점을 보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가 아니면 다른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만이 줄 수 있는 딱 한가지가 있

    습니다. 노숙자를 위해 음식을 마련해 주는 것도, 억울한

    사람을 위해 변론해 주는 것도, 정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서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 건설을 위한 수고를 하는 것도

    꼭 그리스도인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사람이 되기 위

    해, 좋은 인품을 갖기 위해 꼭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 은총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비를 전해 주지 않으면 알 도리

    가 없습니다. 그분의 자비와 은총을 전해주는 사람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느님 자비의 통로입니다. 그

    래서 교황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지요. “우리 각자는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뚜렷한 표지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교 최대의 적은 무엇일까요? 물

    질주의, 자유주의? 아닙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전혀 드러내지 못하

    는 그리스도인들이 최대의 적입니다. 만약 동의하기 어렵

    다면 성경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유

    다교 정통 교리를 철저히 믿고, 모든 계명을 철저히 지키고

    신앙 생활도 철저히 했으나 그들에게 자비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지금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이 놀라고 계십니다. 당신의 자

    비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자비를 살지 않기 때문입

    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인들은 언제라도 죄인들을 위해 돌

    을 던질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단죄 의식의

    돌, 우월감의 돌, 비판의 돌, 격렬한 분노의 돌, 사랑이 전

    혀 없는 돌, 이런 돌들이 우리 안에 많습니다. 언젠가부터

    교회는 반짝반짝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었습

    니다. 나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신앙 생활을 하는 가까운 형

    제 자매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나의 부족한 점, 내 집안의 어려운 점이 드러나면 오히려

    손해가 되는 공동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왜 큰아들은 아버지가 잔치를 벌

    인 것을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왜 아버지가 문을 잠그지

    않고 잠자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왜 아버지가 날

    이 새면 동구밖에 나가 동생을 기다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

    했을까요? 그건 ‘타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

    앙심이 깊어도 타는 마음, 헤아리는 마음이 없으면 잔인해

    집니다. 본인 자신이 정의와 진실 속에서 살아간다고 믿으

    면서 그렇지 않은 죄인들에게 잔인하게 칼을 치는 것입니

    다. 하느님의 타는 마음을 성서에서는 ‘라하밈(~ymix]r;)’이

    라고 부릅니다. 라하밈은 복수이며 ‘레헴(~x,r,)’에서 왔습니

    다. 레헴은 엄마의 자궁입니다. 복수가 되면 자궁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됩니다. 구약성경의 “당신의 자비가 어서

    저희에게”, 여기서 자비는 바로 라하밈, 자궁의 복수형입니

    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타는 마음, 자비는 엄마의 자궁

    과 연결됨을 볼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심과 같

    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는 말씀이 나

    옵니다. 똑같은 평행 구절인 마태복음을 보면 자비 대신

    ‘완전함을 씁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

    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완전하심

    은 흠도 없고 완벽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사람을 뜻합니다. 그분의 자비 안에 희망을 갖고 살아갈 뿐

    만 아니라 우리 역시 자비의 통로로서 자비의 인간이 되어

    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비의 뿌리는 자신의 타락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이들에게 관대하게 대할 수 있습

    니다. 계속해서 모든 자비의 뿌리는 자기 자신이 하느님으

    로부터 큰 자비를 입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렇게 깨닫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해줄 수

    있습니다.

    8

  • 우리는 만들어진 나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잘 만들어진 나

    로 본다면 세상을 제대로 보겠지만, 잘못 만들어진 나로 본

    다면 세상을 잘못 보게 됩니다. 내가 잘못 만들어졌다면 어

    떻게 하면 될까요? 만들어진 나를 내려놓는 잠심을 통해서

    라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원뿔을 옆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보입니다. 밑에서 보면 원으로 보이지요. 옆에 있는 사람과

    밑에 있는 사람이 각각 삼각형과 원으로 다르게 볼 때 서로는

    상대방이 잘못 보고 있다고 단정하고 상대하지 않으려 합니

    다. 그러나 잠심을 한다면 먼저 판단을 중지하고 상대방이 어

    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만들어진 나를 내

    려놓는 시작입니다. 판단을 내려놓고 나는 저것이 삼각형으

    로 보이는데 왜 당신은 원으로 보이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은 나는 이렇게 보이는데 왜 당신은

    이렇게 보입니까? 라는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상대방에게 이리 와서 보라는 대화가 이어집니다. 그리고는

    상대방 쪽으로 직접 가서 보면 정말 원으로 보이기도, 삼각

    형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똑같은 것을 서

    로 다르게 보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저것이 과연 무엇

    일까를 다시 보게 됩니다. 3차원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을 2

    차원 적으로 보려 하니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

    니다. 차원을 높이면 저것이 무엇인지를 알뿐만 아니라, 보

    다 낮은 차원의 것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한 차원만 낮아도

    자기가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내 식대로 판

    단하고,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겠거니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잠심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잠심은 수고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자리에 앉아서

    만 보려고 합니다. 강의만 듣고 기도를 이해하려 하고, 기도

    를 하려 들지 않습니다. 3차원적으로 알고 싶어 하지 않고

    내 차원인 2차원에서, 한쪽으로만 보고 3차원을 설명하려

    합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만들어진 나에 빠진 사람들이고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

    다. 내가 잘못 볼 수도 있구나, 내 생각이 잘못될 수도 있구

    나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나는 다 맞고 저 사람은 다 잘

    못되었다는 판단을 중단하는 것에서 잠심은 시작됩니다. 잠

    심은 ‛알되, 그 앎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것은 외우셔야 합니다. 외운 다음 여러분이 첨삭하여 여러분

    의 것으로 만들고 나에게 맞는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어

    야 합니다.

    지금 이 강의실 앰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면 ‛저게 무슨 소

    리일까, 무슨 소리가 나네, 저걸 조용하게 할 수 없을까?’ 와

    같은 생각들을 합니다. 그것은 그 소리에 내가 잡힌 것임에도

    나는 그 소리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소리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은 그 소리를 알되, 그 소리가 나에

    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만드는 것으로 무시하는 것과는 다릅

    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리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사람을

    부리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데 그것은 그저 생각을 하는 사

    람입니다. 잠심은 생각을 흘려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흘러가

    게 놓아 두는 사람입니다. 흘러가게 놓아 두는 것은 자연스럽

    지만, 흘려 보내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영성 소나타 Ⅳ - 예수님께 말을 듣다

    강의 _ 정규한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회/서강대학교 관리처장)

    9

  • 소리를 듣지 말아야지,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은

    결국 다시 생각을 하면서 소리를 안 들으려는 생각, 생각들

    이 올라오는 것을 누르려는 생각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 알

    되, 그 앎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만드는 것을 우리는

    기도 시간에 계속 해 나가야 합니다. 혼자 고요히 앉아 있을

    때 슬픔이, 때로는 기쁨이 올라오더라도 그 슬픔과 기쁨을

    알되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쉽

    지 않겠지만 그 안에서 느끼는 또 다른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비우고, 버리고, 내려놓기를 강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런데 비운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나

    에게 10억이 있다고 가정 했을 때 비운 사람은 10억이 있지

    만 그 10억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고, 1억을 주고 9억이

    남아도 똑같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며, 돈을 다

    주고 마침내 남은 돈이 없더라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 바로 비운 사람의 상태입니다.

    잠심의 개념으로 돌아가 비우는 삶을 설명하면, 알되 그 앎

    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가지고 있는 것을 알되

    그 가지고 있는 것이 나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않을 때 비움

    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

    고 생각 속에서만 자꾸 비우고 내려놓으려고 하기 때문에

    진정한 비움, 버림 내려놓음이 쉽지 않습니다. 잠심의 과정

    을 계속할 때 여러분은 비로소 비운 상태가 될 것이고, 비우

    고 버리고 내려놓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쁨, 행복도 마

    찬가지 입니다. 기쁨과 행복을 알되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하지만 우리는 기쁨과 행복에는 빠지려 하고,

    슬픔은 이겨내려 합니다. 이것은 생각의 작용 때문입니다.

    공부와 사업에도 목표가 있듯 우리에게는 기도의 목표가 있

    습니다. 기도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합격을 위해, 성

    공을 위해 내 뜻을 관철시키는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기도

    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이 일치라는 개념은 사람

    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치는 다른 한쪽을 존중해 주

    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자에 앉고 싶고, 바닥에 앉기 싫지

    만 저는 의자가 싫고 바닥에 앉고 싶어서 서로 의견을 나누

    어도 일치되지 않고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 생각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일치해 왔

    습니다. 여러분이 의자를 절대 포기 못하고, 저도 바닥을 포

    기 못하는 생각과 욕심을 서로가 가지고 있는 한, 일치되지

    못하고 결국 힘 있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쉽

    고, 좋고, 편한 것을 포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이의 일치는 매우 힘든 것입니다. 쉽고 좋고 편한 것을 내

    려놓지 못한다면 일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제 말을 들으면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좋은 것을 받으리라는

    확신 때문에 제게 일치하고 바닥에 앉을 수 있게 됩니다. 그

    것은 저와의 일치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려면 먼저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좋

    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하느님의 뜻을 알

    아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 들은 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맞아떨어져야 하느님과 일치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용서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용서를 알았다고 생

    각했는데 용서가 무엇이냐 물으면 말문이 막힙니다. 잊어버

    릴게, 없던 일로 할게, 이것이 용서일까요? 없었던 일이, 잊

    어버리는 일이 될 수 있을까요? 이라는 영화에서 여

    주인공은 자식을 죽인 죄수를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가지

    만 죄수는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다 용서받았다”고 말합니

    다. 주인공은 화가 납니다. 내가 용서를 안 했는데 어떻게 하

    느님께서 용서를 해주시냐고 하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용서

    에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없었던

    일로 하는 것도 아니라, 그 사건을 알되 그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 사건이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고 그 사람을 대하

    는 것, 그것이 용서된 것입니다. 용서를 할 때 유의할 점은

    역할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하느님의 역할과

    나의 역할이 있습니다. 용서를 할 때 나의 역할은 용서할 지

    향을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고 싶은

    데 다음 날이 되면 또 화가 나더라도, 용서할 지향과 의지를

    가지고 그를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 하신 것입니다.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숫자입니다. 그것이 될 때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될

    10

  • 때까지는 용서가 된 상태를 만나게 될 때를 말합니다. 그 사

    람을 만나도 그 사건이 영향을 주지 않을 때 하느님께서 용

    서해 주신 것이며 나는 지향과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그

    를 대한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일까요? 익숙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

    람이 밤길을 가다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지던 중 간신

    히 나무를 잡았습니다. 올라갈 힘이 없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살려 달라 하는데 그 청이 너무 간절해서 하느님

    께서는 그 청을 들어 주십니다. 네가 살려거든 그 손을 놓아

    라, 했을 때 놓을 수 있는 분은 몇 분이나 될까요? 놓으면 죽

    는다는 내 생각을 믿는 것이지 놓으면 산다는 것을 믿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

    는 대상이 내 안의 주인이 되는 것’. 내 생각을 믿으면 내 생

    각이 내 안의 주인이 되고,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이 내 안

    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라 하면 주인의 말을 알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을 알아들어야 하는데 우리

    는 믿는다 하고 내 생각을 관철시키려 하며 말을 알아들으

    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내가 부리려 하고, 내가 이렇게

    고생할 테니 합격을 주고 성공을 달라며 내 뜻을 관철시키

    려 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내 생각을 믿는지 하느

    님을 믿는지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믿는 대상이 내 안

    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진짜 기

    도일까요? 그것이 기도가 아니라면 진짜 기도는 무엇일까

    요? 그래서 영신수련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적으로 튼튼해 지기 위해 운동을 합니다. 영적으로 튼튼해

    지기 위해서는 기도 훈련, 기도 실습을 해야 합니다. 육적으

    로 운동을 하듯이 계속 영적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

    로 튼튼해졌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기도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이며,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

    음과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

    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기도가 어려운 것입니다. 영적으

    로 튼튼한 사람을 하느님의 뜻을 잘 찾고 발견합니다. 내 생

    각을 관철시키는 사람일수록 영적으로는 허약한 사람입니

    다. 그 생각을 내려 놓고 잠심을 하는 사람일수록 영적으로

    튼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신수련 [23] 원리와 기초

    “……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해 초연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편에서는 질병보다 건강을, 가난보다

    부를, 불명예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를, 그리고 다른

    모든 일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더 원하지 않을 만큼

    되고 오직 창조된 목적에로 우리를 더욱 이끄는 것을

    원하고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치우치지 않는 마음, 불편심(不偏心)은 질병보다 건강을, 가

    난보다 부를, 단명보다 장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좋

    은 것을 주시는데도 슬픔, 좌절, 고통과 같은 것들 때문에 하

    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주시는 모

    든 것이 좋은 것인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고 행복과

    불행, 슬픔과 기쁨을 갈라 놓는 불편심으로 본다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을 갈라 놓으

    면 누가 불행을 선택하겠습니까? 하나로 보지 못하고 갈라

    놓는 생각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로 본다는 것은

    잠심, 즉 슬픔과 기쁨을 구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

    이는 것입니다. 잠심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내 생각대로 들어

    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

    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후 보시니 참 좋았다 하셨지만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니 참 좋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것

    은 인간을 미완성의 존재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하

    느님 대전에 가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말씀을 들을 때 인간

    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내 방식대로 보고 살려는 그

    삶 속에서는 보시니 참 좋았다는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

    다. 잠심의 삶을 살 때 우리는 노후는 물론 사후까지도 보장

    받게 되고 우리 삶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이 훈련을 계속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행복이 오거나 슬픔이

    올 때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만들어 보십시오. 알되 그

    앎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11

  • 2015년,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기 위해 프란치스코 교

    황님의 생태 회칙 가 발표되던 즈음 우연

    의 일치와도 같이 서강대학교에서도 환경 동아리가 구성

    되었습니다. 학생이 주체가 되어 학교 환경 개선을 위해

    친환경적 생활 방식을 캠퍼스 내에서 실천함으로써, 서강

    대학교의 그린 캠퍼스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모

    인 공동체 ‘캠퍼스 그리너(Campus Greener)’입니다.

    지난 11월 10일(목) 낮 12시부터 캠퍼스 그리너 학생들의

    친환경 컵홀더 배포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서강대학교

    내에만 해도 총 6개의 카페가 있으며, 어느 정도 차이는

    있으나 카페 한 군데당 일 평균 300개 이상의 일회용 컵

    홀더를 소비한다고 합니다. 대개 한번 쓰고 버려지는 컵홀

    더와 종이컵 한 세트를 제작하려면 약 450g의 종이가 필

    요한데, 이는 자연서식지 0.9㎡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

    지라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부직포를 이용하여 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컵홀더는 지속

    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쓰레기를 줄이고, 컵홀더 제작에 필

    요한 여러가지 자원 절약에 도움이 됩니다. 캠퍼스 그리너

    학생들은 서강대학교 재학생 약 170명에게 컵홀더를 배포

    하고 친환경적 생활을 실천하겠다는 서명을 받으며 환경

    보호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캠퍼스 그리너 학생들은 학기 중 주 1회 정기 모임을 갖

    고 캠퍼스 정화 및 절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매

    학기 2회 컵홀더 배포와 같은 야외 행사를 진행합니다.

    2015년 2학기에는 교내의 이면지를 활용한 ‘친환경 이면

    지 노트’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는데, SNS와 학교 홈페이지

    를 통해 친환경 이면지 노트 제작의 취지 및 내용을 알리

    고 교내 곳곳에 설치한 이면지 수거함 및 교수 연구실 방

    문을 통해 직접 이면지를 수집, 총 500권의 노트를 직접

    제작하여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배포

    하였습니다. 2016년 1학기에는 버려지는 커피 찌꺼기를

    활용하여 ‘커피 방향제 만들기’ 캠페인을 진행함으로써 버

    려지는 젖은 커피 찌꺼기로 인한 환경 오염 실태와 처리

    비용을 알리고, 커피 찌꺼기를 다양한 방법으로 재활용할

    수 있음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학기 캠퍼스 그리너 대표를 맡고 있는 홍성웅(경영)

    학생은 “교내 구성원들이 한번이라도 더 환경에 대해 생

    각해 보고,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

    던 것들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캠퍼스 그

    리너 활동의 목표”라며, “교내에서 유일한 환경 봉사 동아

    리이고 아직 인원은 적지만 모든 회원들이 사명감을 갖고

    기쁜 마음으로 활동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냐시오 교육혁신 후원회는 2016년 2학기 캠퍼스 그리

    너의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의 몸은

    지구의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구의 공기를 마시고

    지구의 물로 생명과 생기를 얻는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

    떤 것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구 생태의 위기들을 자각하고 각자의 삶

    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는 지성, 캠퍼스

    그리너의 활동에 후원회원 여러분의 관심과 응원을 부탁

    드립니다.

    실천하는 지성, 캠퍼스 그리너

    12

  • 2016년 네팔현장체험 당시 교수님들은 카트만두의 바그마티강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빈민 정착촌인 타파탈리 세틀먼

    트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교수님들은 한국 샬트르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무료 공부방인 세인트 폴 교육센터

    학생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에 초대 받게 되었습니다. 천막, 비닐, 대나무를 얼기설기 이어서 만든 집에 어머니와 남매

    세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명이 생활하기도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8명의 일행은 넉넉한 인심과 환대 속에서 가족들

    과 나눔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너무나 반듯하게 자라준

    남매의 모습은 교수님들에게 깊은 반향을 주었습니다.

    교수님들은 아이들의 교육을 도와 줄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게 되었고, 현장 체험이 종료된 이후 국내에서 가진 모임

    에서 네 분이 의기투합하여, 세인트 폴 교육센터에서 선정하는 학생 한 명의 대학교육을 입학에서 졸업까지 책임지기

    로 결심하셨습니다. 이렇게 마련된 장학금은 2017년 네팔현장 방문 시 선발된 학생에게 지급됩니다.

    네팔현장체험은 서강대학교 교수님들이 이머전 체험을 통해 학생들에게 삶의 모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연구

    와 수업 안에서 그 결과들이 열매 맺기를 바라지만, 이처럼 개발도상국 학생들과의 직접적인 연대를 자발적으로 실천

    하는 노력은 네팔현장체험의 또 다른 영향력입니다.

    네팔현장체험의 이러한 영향력은 2014년 여름 1기 참가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기 참가자들을 통해 네팔현장

    체험의 지속적 운영을 위한 모금이 시도되었고, 교육혁신 후원회원 참가자는 이후 를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참가자들의 주변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시작한 네팔현장체험은 이렇게 참가자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에서 먼저 빛을

    내기 시작했고, 주변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의미 깊은 세 번째 발걸음을 다음과 같이 준

    비하고자 합니다.

    2017년

    네팔현장체험 개요

    네팔현장체험 참가자: 최대 9명 (강사진 4명, 교육혁신 후원회원 참가자 2~3명, 스태프 2명)

    네팔현장체험 기간: 2017.02.03.(금)~02.10.(금), 7박 9일

    강사진

    St. Xavier College 서강대학교

    학 과 교 수 전 공

    ENGLISH LITERATURE 정강엽 경영, 신학, 교육학

    SOCIAL WORK 강선경 사회복지학

    PHYSICS 김도석 물리학

    MICROBIOLOGY 조규봉 화학

    네팔현장체험 일정

    2월 3일 (금) 출국, 네팔 도착, 학교 투어

    2월 4일 (토) 강의 준비

    오전 오후

    2월 5일 (일) 강의 1일차 필드트립 1일차

    2월 6일 (월) 강의 2일차 필드트립 2일차

    2월 7일 (화) 강의 3일차 필드트립 3일차

    2월 8일 (수) 강의 4일차 필드트립 4일차

    2월 9일 (목) 네팔 문화·역사 체험

    2월 10일 (금) 트래킹, 귀국

    2017년 네팔현장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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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년 겨울에 교육혁신 후원회원 자녀들을 대상으로 처음 선보였던 만레사 캠프가 4년이 지난 2017년 겨울,

    라는 이름으로 돌아왔습니다.

    후원회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4년전 만레사 캠프는 서강대학교 학생들이 멘토로 활동하는 예수회 교육이념 기반

    의 인성캠프였다면 2017년 는 후원회원 자녀들과 서강대학교 학생들이 함께 멘토가 되어

    시각장애인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캠프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계획되었습니다.

    학교법인 서강대학교와 정인욱 재단이 함께 2017년 1월 서강대학교 전역에서 실시하는 영어캠프에 시각장애 중·

    고등학생의 1:1 멘토가 되어 그들 눈의 빛이 되어줄 교육혁신 후원회원 대학생 자녀를 다음과 같이 모집하오니, 후

    원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 드립니다.

    멘토 모집 공고

    캠프명 (시각장애인 중·고생을 위한) 서강-정인욱 영어캠프

    기 간 2017.01.05(목)~01.14(토), 9박10일

    모 토 PERSON WHO FINDS GOOD IN EVERYTHING

    장 소 서강대학교

    모집 인원 6명

    자격 조건 교육혁신 후원회원 자녀

    현재 국내 혹은 외국 대학 재학(혹은 휴학)중인 대학생으로 영어회화 우수자

    참여 형태 전 일정 합숙 참여

    모집 기간 2016.11.14.(월)~11.30.(수) ※ 인력 충원 시 조기 마감

    선발 방법 1차 선발 | 지원서에 근거하여 인터뷰 대상자 선발

    2차 선발 | 심층 영어 인터뷰로 참가자 선발

    특 전 학교법인 서강대학교 이사장 명의의 MANRESA PARTNER 수료증 발급

    봉사 활동 확인서 발급

    지원서 요청 및 접수(이메일): [email protected] (법인운영팀 노태근 계장: 02-705-4709)

    2017 서강 정인욱 영어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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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15

    2016년 7월 ~ 9월 152,659,53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따뜻한 관심과 후원에 깊이 감사 드리며, 교육혁신을 위해 변함 없이 노력하겠습니다.

    이냐시오 기금 29,914,530원 강귀화 강길조 강대유 강상완 강성숙 강성희 강양님 강윤숙 강정자 강혜금 고영환

    공정숙 곽대주 권대주 권성순 권인락 권정미 권정자 권준범 권태희 권혁림 김경미

    김경순 김경애 김경호 김경희 김경희 김기성 김다함 김달원 김덕자 김동현 김명자

    김명희 김문식 김미숙 김민규 김민정 김상봉 김선정 김선혁 김성미 김성애 김소영

    김숙자 김순애 김승현 김시태 김신숙 김애성 김애숙 김여하 김연희 김옥귀 김용해

    김윤정 김은경 김은록 김은주 김은주 김인순 김인중 김인철 김재경 김정수 김정은

    김정자 김정태 김정홍 김정환 김정희 김종국 김종두 김종숙 김종열 김지윤 김차진

    김창석 김춘란 김태미 김현미 김현수 김혜숙 김홍희 김효진 김휘순 김희명 나상필

    남길용 남미자 남순남 남유순 남정효 남혜란 노순남 노은숙 노일선 노정미 노태근

    노현욱 류경숙 류길은 류정희 류호식 마평화 모명자 문부자 민경하 민병숙 민은숙

    박광영 박교순 박근영 박보연 박복자 박부현 박세종 박세진 박숙희 박순규 박순옥

    박순옥 박순희 박승옥 박시남 박양진 박연식 박예인 박완세 박용숙 박윤혜 박은자

    박인진 박재광 박재석 박재성 박재형/박재훈 박정자 박종명 박주연 박주홍 박쥬리

    박태은 박해영 박현서 박화자 박희규 박희선 방세솔 방옥순 방정혜 방 혁 배분순

    배정호 배종석 배철범 백경숙 백정현 서갑주 서금화 서덕순 서병길 서선영 서유경

    서윤경 서주표 선우은형 소권임 손미숙 손양득 손원민 송수미 송순희 송영순 송유찬

    신명의 신상우 신선옥 신인덕 신정희 신현미 신효숙 심정선 안병란 안병억 안옥영

    안현숙 양경철 양동위 양조자 양현숙 엄혜영 연규완 염영섭 오상구 오승한 오영순

    오종서 오희옥 옥유화 용경희 우복련 우선숙 우정수 우종희 원영혜 위선애 위희정

    유경숙 유보현 유순이 유승완 유연숙 유영란 유영희 유영희 유 완 유인자 유정민

    유정숙 유정인 유준자 유희숙 윤대영 윤정재 윤종희 윤창호 윤향순 윤혜원 윤효순

    윤희숙 윤희정 이경이 이규호 이대영 이대중 이데레사 이도행 이두이 이명규 이명자

    이미숙 이미영 이선옥 이선화 이선희 이성호 이성희 이수덕 이숙향 이숙희 이순례

    이애경 이양상 이양영 이연홍 이영숙 이영숙 이영애 이영인 이영주 이완걸 이완기

    이용화 이우영 이은경 이은정 이은주 이인주 이재영 이재옥 이재은 이점분 이정숙

    이정욱 이정웅 이정희 이정희 이종임 이주영 이주영 이주희 이지연 이지은 이진석

    이진자 이진홍 이철위 이춘자 이춘자 이현숙 이현옥 이현정 이혜숙 이혜영 이혜진

    이화남 이화영 이효신 이후녀 이 훈 임서연 임성순 임수아 임영숙 임영주 임현규

    장민자 장수연 장숙자 장옥현 장재창 장종자 장지혜 전경미 전문석 전미선 전신정

    전영애 전은숙 전효신 정갑순 정경희 정기삼 정래철 정문애 정선희 정성완 정순옥

    정연봉 정왕진 정윤희 정정연 정주인 정태동 정태임 정현애 정희순 정희진 조광미

    조명숙 조무진 조미자 조민희 조성호 조연비 조영순 조영주 조은영 조정희 조찬연

    주기영 주석태 주소현 주영희 주인배 주하연 차유옥 최금선 최명원 최미숙 최민지

    최민호 최선이 최순영 최순주 최신은 최영미 최영숙 최영혜 최옥희 최윤이 최은경

    최인선 최자순 최정옥 최정원 최정환 최창해 최해림 최혜정 최화규 추춘호 탁부진

    표남성 표영애 하영수 한기백 허영구 현소건 (정자영) 홍선희 홍은 홍은미 황명자

    황석렬 황선유 황선임 황인순 (주) 서강하우 (주)성북에스엘피

    철우 만레사 인성교육원 건립기금 5,365,000원 김건옥 민은숙 박영숙 박정인 신승우 연규완 우정수 우정혜 이강학 이재범 주하연

    최선유 홍종선 홍종율 (주)한디자인코퍼레이션

    토마스 모어관 건립기금 75,000,000원 ㈜디케이유엔씨 ㈜엔에이치엔엔터테인먼트 ㈜에셋플러스 자산운용

    개발도상국 장학후원 150,000원 이금자

    서강예수회 (에메트) 장학금 6,000,000원 알바트로스 인베트스먼트

    벨라르미노 학사 지원 28,330,000원남용현 박종하 (김영래) 서영숙 서정심 이영주 프란치스코 하경철 홍임숙

    (재)한국 예수회

    벨라르미노 (결식 학생) 중식 지원 400,000원 최영미 ㈜에이원플러스

    벨라르미노 (가계곤란 학생) 생활비 지원 900,000원 마포물회 사상섭

    서강 생활비 지원 600,000원 사상섭

    삽자루연구실 장학금 6,000,000원 ㈜스팀콘텐츠디스트리뷰터

    발행일: 2016년 11월 15일 발행인: 박문수 발행처: 학교법인 서강대학교 (서울 마포구 백범로 35) www.교육혁신.org 02-705-4711 디자인 재능기부·제작: 한디자인 02-2269-9917

    통권 23호

    후원 회원 명단

    • 무통장 입금을 통해 후원해 주시는 회원님들께서는 입금 전이나 후에 꼭 연락 부탁 드립니다. 기부해 주신 내용이 누락될 수 있습니다.

    • 거주지나 연락처가 변경된 회원님들께서는 지속적으로 후원회의 소식을 받아 보실 수 있도록 새로운 주소와 연락처를 꼭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냐시오 교육혁신 후원회: 02-705-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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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

    함께 더불어 걸어갈 줄 아는 사람

    따뜻한 피와 손을 가진 사람

    존재의 깊이를 일궈내는 사람

    아름다움을 깊게 깊게 파고 들어갈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교육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 교육혁신에 동참하고자 하는 여러분들의 따뜻하고 정성 어린 기부를 청합니다.

    문의 이냐시오 교육혁신 후원회 TEL. 02-705-4711 FAX. 02-718-2065

    E-MAIL. [email protected]

    교육혁신 동참 회원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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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4901-04-141563

    301-0023-2581-71

    ■ 후 원 금

    성 명

    휴 대 전 화

    집 전 화

    주 소

    2016년 월 일 (서명)

    개발도상국 장학 후원 ☐ 니콜라스 국제연대기금 ☐

    인성교육원 운영 ☐ 만레사 프로그램 ☐

    서강결식학생 중식지원 ☐ 스탈링스 ☐

    이냐시안 렉쳐 ☐ 사용처 일임 ☐

    일시금 후원 ☐ 정기 후원 ☐

    A new perspectiveEducation Innovation Challenge

    People Harmony

    Jesuit

    Philosophy

    Starlings

    Network

    Reading

    Happiness

    Happiness

    Enlightenment

    Child

    Environment

    Growth

    PracticeDream

    Dream

    Ego

    Necessity

    Sponsored business

    Social Justice

    Leader

    Universal Solidarity

    Sponsored businessActivity

    One mind

    Social Justice

    Vision

    Advancement

    Project Project

    Value

    TeachersCourse

    Together

    Plan

    ResolutionShout

    Ignation Lecture

    One ringingTeachers

    Shout

    ChangeDiscovery

    Ignatian Lecture

    Education

    Education

    Immersion Program

    IGNATIUS

    Realization

    Practice

    Leader

    Leader

    Consciousness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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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d

    Well-rounded educationAc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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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urse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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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scovery

    Voice

    IGNAT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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