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로서의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정체성 5) 방민호손창섭의 자전적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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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I W II . 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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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소수자로서의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정체성 5) 방민호손창섭의 자전적 소설 연구_ r비오는 날 』 , 『신의 희작 낙서족J 유 맹』을 중심으로」,

한국문학논총 제61집 (2012. 8) 141 - 171쪽

소수자로서의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정체성 ~~~서 이 『 。매 。2:S.^lo 근 」 。 닙 ;'1 - Tr'O JJ 듣흐 큰;口-=-.=r::.

변 화 영 *

I 들어가는 말

차 려|

W 우리 안의 ‘너 ’, 소수자

II . ‘유맹’의 체험과 기억의 재구성 V. 맺음말

이 글은 『유맹』에 등장하는 초점화자와 서술자의 관계망을 통해 한국

과 일본의 특수한 상황의 소산인 재일조선인과 이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소수자의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드워킨 부부에 의해 제안된

소수자의 이론틀을 활용해 재일조선인의 사회적 제 양상을 국가, 세대,

개인의 차원에서 중층적으로 분석했다 이를 통해 재일조선인의 사회적

위치는 국민국가의 틀과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디수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따라서 소수자 재일조선

인의 정체성이란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인 경계 구분에 따라 재형성되는,

다중적이고 혼종적인 성호t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전북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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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한국문학논총 제61집

『유맹』은 1973년에 도일한 손창섭이 1976년 『한국일보』 에 연재한 장

편소설이다. 일본에 온 지 2년여 만에 발표된 『유맹』은 손창섭 자신을

서술자 ‘나’에 투사한 자전적 소설로,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응시한 의미 깊은 작품이다 0"유맹』의 서술자 뉴커머 ‘나’

가 올드커머 최원복을 초점화하여 재일조선인 1세와 2세의 일상을 전달

하는 가운데 소수자의 특정들이 나타났다. ‘권력의 열세’에 있는 재일조

선인 대다수는 자신이 ‘차별받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자각’이 있다

조선말로 이야기하고 마늘과 고추로 버무린 김치를 먹으며 치마저고리

를 입는 까닭에 일본인과 인종적 · 문화적으로 ‘식별 가능성’이 있는 재

일조선인들은 교육, 취업 , 결혼은 물론 선거에서도 ‘차별적 · 경멸적 대

우’를 받는 소수자였다.

일제강점기에 만주와 일본을 전전하다 분단 후 북한과 남한의 체제를

차례로 경험하고 도일한 서술자 ‘나’의 삶이란 국민국가의 틀 안의 ‘우리’

에 뿌리내릴 수 없는 ‘유맹’의 삶이자 국민국가로부터 떨어져 나온 ‘난민’

과 같은 인생이었다 초점화자인 재일조선인 1세 최원복이 그렇듯 자민

족, 국민 중심의 국가 틀이 바뀔 때마다 서술자 ‘나’의 정체성 또한 변화

되고 굴절되면서 재형성되었다 요컨대 『유맹』은 초점화자와 서술자의

관계망을 통해 소수자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이란 국가, 세대, 개인 간에

사회적으로 규정될 뿐 아니라 정치·문화적 맥락 속에서 변동적으로 재

형성됨을 함의하고 있다.

주제어 ‘ 손창섭, 유맹, 소수자, 재일, 뉴커머, 집합기억

1. 들어가는말

『유맹』은 유랑민(流댔)으로서의 체험과 기억을 형상화한 손창섭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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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 소설이다 1976년(1.1-10.28) 0"한국일보』에 연재된 『유맹』은 1973년

12월 일본으로 건너 간 손창섭이 2년여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일본

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연재된 『유맹』은 식민 지배와 분단 및 전쟁이 초

래한 비극적 현실을 견뎌내야 했던 손창섭의 유랑민적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손창섭은 1952년 「공휴일」로 둥단하여 1970년 『주간여성』에 「삼부녀

(三父女).J를 연재(1969. 12. 30-1970. 6. 24)할 때까지 활발하게 작품 활

동을 했다. 그러다 돌연 1973년 도일하여 1976년에는 『유맹』을, 1978년

에는 『봉술랑(棒術娘).1 을 발표했다. 후자는 고려시대의 무신정권을 배경

으로 한 장편소설로, 손창섭의 전기적 사실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은 아

니다. 하지만 전자의 『유맹』은 ‘재일(在日)하는 조선인’으로서의 삶을 ‘지

금 여기’를 토대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도일 후 손창섭의 작가적 변모

를 알 수 있는작품이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사회적 위치는 손창섭이 일본사회의 소수자로서 자

신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비국민으로, 분단

과 전쟁 후에는 ‘남한’정부의 월남인으로 살았던 손창섭은 도일 후 재일

조선인이라는 딱지가 붙기 시작하면서 소수자로서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수자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

을 위한’ 정체성의 정치(!Xllitics of identity)는 이제 막 일본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손창섭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되묻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맹』은 이러한 과정에서 생산된, 소수자 재일조선인의 체험과 기억들

이 재구성된 서사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한 집단이 소수자로 분류되는 데는 네 가지 특징을

들 수 있다. 식별 가능성(jdent펴ab피앙), 권력의 열세(differential !Xlwer) ,

차별적·경멸적 대우(differential and 어orative treatment), 집단 소속감

(group awareness) 퉁이다 1) 드워킨 부부에 의해 제안된 이 같은 특징

1) Anthony Gray Dwor닝n & Rosalind ]. Dworkin, πle Minoriη Report: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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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재일조선인에 적용해 볼 때, 거칠게나마 소수자의 사회적 제 양상

과 관계망을 살펴볼 수 있는 이론적 틀이 되기도 하다. 재일조선인은 한

일관계 및 국적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탓에 미국

사회의 소수자 문제를 주로 다룬 드워킨 부부의 이론적 틀과는 다른 특

수성이 파생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들이 제안한 특정들에는 『유맹』 에

등장하는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국가, 세대, 시공간적 차원에서 중층적이

고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이 내재해 있다. 이 분석의 과정에

서 재일조선인들의 사회적 정체성이 어떻게 재형성되는지가 밝혀지는

데, 특히 『유맹』 에 등장하는 초점화자의 체험과 기억들은 연구의 길잡이

가된다고 할수 있다

소수자의 문제는 근대 이후 ‘만들어진’ 개념이다. 근대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민족이나 국민이 필요했고, 그것을 규정하려면 이민족이나 비

국민의 존재가 필요했다. 근대국가는 이런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안고

출발2)한 까닭에 종족적 · 문화적 소수자 재일조선인은 근대국가 일본이

안고 있는 모순을 구조적으로 알 수 있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는 한국의 국민국가의 성격 또한 진단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은 피부색과 체형이 비슷해서 한눈에 둘의 차이

를 식별할 수 없기에 일본은 재일조선인의 전적(~購)을 관리하면서 차

별의 근거를 종족적·문화적인 차이에서 찾았다. 일본은 자국민 중심의

국민국가의 틀에서 재일조선인을 배제하기 위해 ‘조선인은 더럽고 게으

르다’라는 편견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확대재생산하는 한편, 이를 일본

인 다수자 공동체를 내적으로 결집하는 구심점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배

제의 정치를 통해 『유맹』에 등장하는 초점화자와 인물들은 일본인과 ‘식

별 가능하며’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차원에서 권력 동원 능력이 떨어

Introdu.ction to Ra.cial, Et에ÚC, and Gender Relations, Harcourt Brace College Publishers, 1999(3rd 어ition) , p. 17

2) 박경태 r소수자와 한국사회· 이주노동자, 화교, 혼혈인~ , 후마니타스, 2008,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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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권력의 열세’에 놓인 재일조선인이 되었다. 일본인 주류집단의 다

수자에게 ‘차별적이고 경멸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재일조선인은 상대적

으로 ‘소수집단의 일원’임을 스스로 인식하게 되었다.

본 논문은 『유맹』 에 등장하는 초점화자와 서술자의 관계망을 통해 한

국과 일본의 특수한 상황의 소산인 재일조선인과 이들의 사회적 정체성

을 소수자의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소수자의

사회적 위치는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시대적 산물일 뿐 아니라 특

정한 시공간 안에서 다수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 개념이

라는 점이 강조된다. 요컨대 소수자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이란 시대적 상

황과 정치적인 경계 구분에 따라 재형성되는, 다중적이고 혼종적인 성향

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파악하는 것이다.

II. ‘유맹’의 체험과 기억의 재구성

1922년 평양에서 출생한 손창섭은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10여 년 동

안 살았다 해방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온 손창섭은 1없8년 월남하여 서

울에서 살다가 전쟁이 터지자 대구와 부산 등지를 피난민으로 떠돌았다.

환도 후 서울에 정착했던 손창섭은 1973년 일본으로 떠난 후 아직까지

돌아오고 있지 않다.3) 황국신민으로, 월남인으로, 재일조선인으로 살았

던 손창섭의 삶의 이력은 『유맹』에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말하자면

『유맹』은 일제강점기와 분단 및 전쟁의 시기를 거친 20세기 한국 역사

의 프리즘이라 할 수 있다

16, 17년 살아온 흑석동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안주를 모

3) 편집위원회도일(禮日) 후의 손창섭에 대하여J , r작가연구 1: 손창섭J , 새미 ,

19S6, 160-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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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고 전전 유랑의 오십 평생을 통해 내가 가장 긴 기간 정주했던 곳이

다. 보통학교 6년을 졸업할 때까지는 평양서, 그 뒤 만주의 봉천 주변서

2년, 일본 교토에서 4년, 도쿄에서 6년, 해방 직후 서울서 1년, 평양서 2

년여, 피난시와 그 뒤의 전거뺑居를 합치면 부산서 근 5년, 환도 후는

주욱 서울서 살았지만 해마다 이리저리 셋방을 전전하다가 흑석동 한구

석에 초라한 날림집을 장만하고 17년간 살았다(엉8-489쪽)4)

『유맹』에 등장하는 서술자 ‘나’의 이력은 실제작가 손창섭의 그것과

유사하여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에서 태어나

만주와 일본에서 10년간 중학교와 대학교를 다녔고 해방 후 서울, 평양,

부산 등지로 전전했던 ‘나’의 공간이동은 손창섭의 인생행로와 맞닿아

있다. 또한 자세한 연대기적 서술은 『유맹』의 ‘나’가 작가 자신의 분심임

을 암시하기도 한다,5) 게다가 『유맹』 이 발표된 1976년은 1922생인 손창

섭이 55세가 되는 해이므로 “전전 유랑의 오십 평생”이라는 표현은 ‘나’

가 손창섭임을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근거들을 종

합해 볼 때 l'유맹』은 손창섭 자신을 서술자 ‘나’에 투사한 자전적 소설

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맹』은 총 2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은 숫자 표기가 없고 제목

으로만 장 구분을 대신하고 있다. 이야기의 발단에 해당되는 1장과 2장,

즉 〈증오의 눈>과 〈최 씨 일가> 이후로 각 장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져 있다. 홀수 장은 최원복의 이야기이고, 짝수 장은 ‘나’의 이야기이다

이 같은 구성은 17장인 <낙향까지>에서 마침내 하나로 묶여지고 18장,

19장, 20장은 서술자인 ‘나’가 초점화자 최원복의 이야기를 전달히는 방

식으로 통일되어 있다.

『유맹』의 서술자 ‘나’는 2년 전 일본인 아내와 도일해서 도쿄에 살고

4) 손창섭 r유맹J , 실천문학사', 2α)5, 488-쟁9쪽(본 논문의 본문과 인용문에 게재된

숫자는 이 책의 쪽수임) 5) 방민호손창섭의 자전적 소설 연구_r비오는 날』 , 『신의 희작』 , r낙서족J , r유

맹』을 중심으로」 , 『국어교육J 112집, 한국어교육학회, 2003, 또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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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어느 날 딸 종숙이 같은 반 친구 다케오에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마늘’ 냄새 방귀쟁이와 같은 악의에 찬 조롱을 받았디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아내와 논의 끝에 그 집을 방문했다 다케오의 부모가 조선인이라

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다케오의 자형(妹兄)인 최인기의 권유로 그의

아버지 최원복을 만났다.

최원복은 60세가 넘은 재일조선인 l세이다 김치제조업을 하면서 조

선음식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최원복은 평안남도 중화군 출신이다. 중화

에는 ‘나’의 조부모와 친인척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소박한 이북 사투리

로 기쁘게 맞아주는 최원복 덕분에 첫 대면부터 거리감이 없었던 ‘나’는

그에게서 해방 전후를 살았던 재일조선인들의 유랑민적인 삶의 이야기

들을 밤새도록 들을 수 있었다. 가끔 최원복의 집에서 김치, 불고기, 빈

대떡, 우거짓국 둥 조선 음식을 먹고 일박을 하면서 ‘나’는 그의 삶의 전

모를 거칠게나마 알게 되었다. 최원복은 훗카이도(北j흙흩) 슈마리나이

(朱輪內)댐 공사장, 아사지노(漢충野) 비행장 공사장, 비호로(美I~효) 비행

장 공사장 등을 전전하면서 조선인 노동자로서 겪었던 참혹한 일련의

사건들은 물론, 친구 고광일과 아내 사이에 있었던 비밀스런 일까지 ‘나’

에게 넌지시 털어놓았다.

“고인이 자네는 부르디 말라구 해서, 일부러 안 불렀네 했더니 다차

무라는 분향은 히지 않고 조위금을 놓고 돌아갔다. “나중에 봉투를 펴

보니까, 십만 원이 들어 있었어요 지끔두 부조금을 십만 원이나 히는

사람은 없디만 그땐 더 큰 돈이었디요 노인은 이런 말로 그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그러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창밖의 하늘을 묵묵히 바라보

았다. 그때 나는 지금까지 은근히 품어온 의심이 적중한 것을 알았다

죽은 선화 부인과 다카무라 사장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은 게 틀림없다

어떤 일이 있은 게 아니라, 한창 젊은 시절의 선화와 고광일이, 단칸방

에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에, 사내 쪽에서 우격다짐으로 여자를 건드렀

던 게 틀림없다 선화 부인이 죽기 전에 남기었디는 말을 듣는 순간 나

에게는 그런 직감이 들었다 ( ... ) 그러한 노인이 어째서 나에게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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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정을 넌지시 암시해 준 것일까 그와 같은 비밀을 안은 채 그대로 죽

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억울해서일까 그래서 차라리 이해관계가 없고, 소

문을 낼 것 같지 않은 나에게만이라도 완곡히 밝혀 두는 것일까. 아무튼

그러한 과거 때문에, 평생을 죄의식 속에서 살다간 부인이, 최원복은 측

은한지도 모른다. 되레 내가 용설 빌어야가서 한, 노인의 말 속에 그런

심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417-418쪽)

최원복은 조선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부터 일본에서 아내 장선화가

임종하기까지의 일들을 떠올리면서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의 기억들을

통해 ‘나’는 북송선을 타고 이북으로 갔다는 큰아들이 고광일의 자식임

을 짐작하고 있었다. 탈주하다가 다친 다리를 치료하고 돌봐준 최 씨 부

부의 은혜를 고광일은 선화를 겁탈함으로써 배신한 것이다, 하지만 최원

복은 고광일에게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둘째 며느리가 고광일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은 평생을 죄의식 속에서 살다간 아내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해서였다 오히려 최원복은 아내를 지켜주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최원복01 ‘당시의 일들을 회상하면서 말하는’(219쪽) 일련의

사건을 들은 ‘나’는 식민시기에 도일한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해 생각하

지 않을수 없었다.

‘밤나뭇골’에서 태어나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한 최원복은 장선화와

결혼하여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하지만 추수기가 되어도 4할이 넘는 도

조를 내는 탓에 극빈에 시달리자 결국 면사무소 앞에 붙은 일본행 노동

자 모집공고를 보고 도일6)을 결심했다. 일본에 도착한 최원복은 훗카이

6) 한일강제병합 이후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잃은 조선인들은 어쩔 수 없이 고호t을 등지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조선인 노동자들 중 전라도와 경상도 출

신이 대부분인 까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이곳이 상대적으로 농토가 많았기 때문

이었다 이북 출신들은 대부분 만주로 이주한 까닭에 도일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로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전환한 일본은 일본인 노동자가

점차 줄어들자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이듬해에는 ‘국민정용령’을

시행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현상에 직변

하자 1942년부터는 국기총동원법과 국민정용령을 본격적으로 발동해 조선인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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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슈마리나이의 우류(雨홉힘댐 공사장에 배치되었다. 소위 함바(飯場)라

불리는 합숙소에서 통제된 생활을 강요당하며 고혈을 짜는 중노동을 하

면서 최원복은 같은 중화군 출신의 강춘식을 의지했다. 하지만 강춘식은

공사판에서 크게 다쳐 죽고 말았다. 일본인 반장이 다친 강춘식을 내팽

개치다시피 버려둔 것을 보고 최원복은 분개했다. 하지만 힘없는 조선인

으로서는 항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춘식 말고도 수많은 조선인 노동

자들이 참혹한 사역을 견디지 못해 죽거나 혹은 몽둥이에 맞아죽는 사

람이 많았다.7) 또한 조선인들은 불의의 사고로 다치더라도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공사장에서 죽어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2년여를 훗카이도의

우류댐 공사장에서 일하던 최원복은 어느 날 모집이나 관 알선 노동지S)

도 징용되어 문어가 한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다코베야

(문어방)’에 갇혀 노예처럼 부려진다는 소문에 휩싸였다

훗카이도는 러시아와 접경지대라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

다 훗카이도의 우류댐은 당시 ‘동양 제일의 댐’이라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전력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

고 공사를 한 탓에 조선인 희생자가 많았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야 한다는 생각에 혹한과 구타와 욕설이 난무하는 이곳에서 가혹한 노

무자들을 대거 징집하여 일본 각지의 탄광, 철도, 벌목, 댐 공사장이나 비행장 건

설현장 등에 투입하였다. 7)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잉L규명위원회 「이 귀 어두운 거 하나가 북해도 간 표

라(슈마리나이(朱輪內)댐 공새; 이상석 할아버지 이야기J,이흡머리 넘어 북해

도로‘ 훗차이도 강제동원 피해 구술자료집~ , 2α애, 439쪽,

8) 조선인 강제연행은 크게 모집에 의한 강제연행(1939년 9월 1942년 1월), 관 알선

에 의한 강제연행 (1942년 2월-1944년 8월), 징용에 의한 강제연행(1944년 9월

-1945년 8월)으로 실시되었다. 모집, 관 알선, 징용에 의한 강제연행이 시기별로

변화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기본정책은 내용 면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39 년 모집단계에서부터 징용단계까지 공권력이 직접 개입되어 조선인을 강제연행

했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를 바 없고, 공권력의 정도가 점점 더 강화되었다는 점

에서나 차이가 있을 뿐이다(노영종일제 말기 조선인의 북해도 지역 강제연행

과 저항J ,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αXl, 5-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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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한국문학논총 저1161집

동을 참고 견디며 “우류천 댐 공사장에서 운명의 갈림길을 헤매던"(131

쪽) 최원복은 강제 예치된 1년 치 임금을 뒤로 하고 다른 구미 (*ID의 합

숙소로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소문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훗차이도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징용 영장이 발급되고 말았

던 것이다 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강제 징용된 최

원복은 “훗카이도 내에 있는 조선인 자유노동자에 대한 징용령"(172쪽)

에 의해 사루후츠무라(ð참빼、j)의 아사지노 비행장 확장공사의 전속 노

무자가되었다.

최원복은 고광일과 함께 지옥과 같은 아사지노 다코베야:9)에서 ‘탈주’

했다. 그러나 역전 근처에서 동료 노동자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순사에게 붙잡혀 최원복은 비호로 비행장 공사에 강제 배치되었다. 공사

장의 조선인들은 “매질이 무서워 죽을힘을 다 썼고"(330쪽) 그 매를 이

겨내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죽어 나갔다. 이런 참혹한 상황을 힘

겹게 견디고 있던 최원복은 ‘해방’을 맞이했다.

훗카이도는 최원복처럼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에 의해 건설된 섬

이다. 우류댐 공사장, 아사지노 비행장 공사장 비호로 비행장 공사장 등

훗카이도의 전략 지역뿐만 아니라 탄광 및 철도 등은 조선인 노동자들

의 피와 땀, 그리고 죽음으로 조성되었다. ‘나’가 최원복에게 들은 이야

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훗카이도가 태평양전쟁 돌입 후 “군 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는 그 대부분의 노동력을 오로지 강제 연행해 온 조선인

으로 충당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상덕의 말대로, 장기화한 중일전에 이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당시의 훗카이도 지방은, 일본의 육 해군이 군사시설의 대대적 신설 확

장에 혈안이 되어 날띈 곳이다 그곳은 바로 소련과는 눈코 사이로서,

9)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다코베야라는 것을 들어봤어요?(아사

지노(浚좋野)비행장 반세(方世)비행장) : 지옥동 할아버지 이야기J , 앞의 책 , ?f37 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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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로서의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정체성 151

그만큼 중요한 전략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 전부터 그 지방의 탄광, 철

도, 댐 공사 등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많이 종사해 왔지만, 군 공사가 시

작되면서부터는 그 대부분의 노동력을 오로지 강제 연행해 온 조선인으

로 충당했던 것이다 조선인 노동자는 다코베야에 감금되어 인간 이하

로 혹사당하였고1 흔적 없이 죽어간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총면적 78,512

평방킬로미터로서, 일본 전토의 21퍼센트에 해당하며, 총인구 5,잃8,여3

인인 이 홍카이도 섬의 개발에 우리 훈L국인 노동자가 뿌린 땀과 피와

목숨의 억울한 희생은. 잊을 수 없는 원한의 역사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당시 군국 일본 정부에 의해 국외로 강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는

아래와 같이 놀라운 수에 달하였다. 1939년 53,120명, 1940년 81 ,119명,

1941년 126,002명, 1942년 잉8,521명, 1943년 300,654명 , 1없4년 379,747

병 , 1없5년 329,839명 이 합계는 1,519,142명으로서 8. 15 당시 훗카이도

北i'iiß흩에 남아 있던 조선인 노동자마저도 약 8만 6천여로 추산되며, 이

중의 한 사람인 최원복은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혹사가 가중되어갈 무

렵, 우류천 댐 공사장에서 운명의 갈림길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130-

131쪽)

최원복이 우류댐 공사장10)에서도 아사지노 비행장 공사장11 )에서도

간신히 살아 돌아왔지만, 훗카이도 전역에는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의 죽

음의 흔적이 어디에서나 발견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공식기록12) 어디에

10) 슈마리나이 댐의 정식 명칭은 우류 제1댐으로 l없3년 8월에 완성되었다 그 과

정에서 강제 동원된 조선인 3(XX)여 명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r 경술국치 100년, 원폭 ... 혹한…구타 ... 곳곳서 수많은 조선인

스러져가J,국민일보~ , 2010. 5. 11.) 11) 아사지노 비행장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만든 군사

시설이다 조선인들이 강제사역을 하다가 죽으면 활주로 공사 현장 구덩이에 그

냥 묻어버려 이 비행장 터에는 그들의 시신이 산재해 있다( r한 · 일 젊은이들 손

잡고 5년간 유해 30-40구 발굴J,한겨레J , 2010. 8. 11.). 12) 훗차이도 지역 조선인 강제연행 문제가 본격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강제연행 · 강제노동의 기록{훗카이도, 쿠렬, 사할린 편』이 간행된 1974년을

전후한 시기이다. 이 기록에는 1973년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훗카이도 전 지역

의 조선인 강제연행자를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료적 성격을 지닌 성과물이다강제연행 · 강제노동의 기록-훗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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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어떻게 살았고 죽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훗카이도에 살고 있는 조선인 강제연행지를 대상

으로 한 간단한 실태조사나 조선인 사망자 숫자가 간단하게 수치화되어

있을 뿐,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에 관한 ‘살아있는 기억들이’ 말살되어 있

다 하지만 최원복의 기억에는 이러한 공식기록에서 삭제되고 누락된 조

선인 노동자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창이란 창에는 굵직굵직

한 나무 창살이 츰츰히 박혀있는"(216쪽) 다코베야에서 쪽잠을 자면서,

세 때 “멀건 된장국에 왜싼지 두어 쪽”을 반찬 삼아 “뭉치면 한줌밖에

안 되는 잡곡밥"(218쪽)을 먹으며 “숫제 말 못하는 짐승이 되어"(330쪽)

갖은 몰매를 참으면서도 “비국민인 너희들 조선놈 새끼는 싹 죽이든 때

려죽이든 우리 맘대로다.’'(221쪽)라며 총으로 위협하는 일본인들에게 저

항 한번 제대로 못한 채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훗카

이도의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일어난 ‘비국민’의 참혹한 일상들이 최원복

의 기억으로 되살려지는 것이다.

서술자 ‘나’가 장(章)을 달리하면서 최원복을 초점화하여 3인칭으로 전

달하고자 히는 것은 그가 “훗카이도 섬의 개발에 우리 한국인 노동자가

뿌린 땀과 피와 목숨의 억울한 희생은 잊을 수 없는 원한의 역사로 남아

있는 것”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원복이 기억을 획득하고 배치하

며 되살릴 수 있는 것은 사회집단 ‘재일조선인’의 성원됨을 통해서, ‘나’

도, 쿠릴, 사할린 편j을 발표한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의 연구 활동에 이어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연구들이 민간인 차원에서 1990년대까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뒤늦게 관 차원의 보고서 『훗카이도와 조선인노동자-조선인 강제연

행 실태조사 보고서』가 5년의 연구와 그 동안의 연구결과물틀을 바탕으로 훗카

이도 도청에 의해 1m년에 발간되었다(박맹수훗카이도(北i따효)t뱀때의 ‘때까C

A’ ?뭘fljlJ連行 資料에 對하여」 , r한일민족문제연구J 4호, 한일민족문제학회, 2003,

8-13쪽). 1976년 발표된 r유맹』이 사실상 일본의 본격적인 공식기록 『강제연행·

강제노동의 기록-훗카이도, 쿠릴, 사할린 면』과 시간차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훗카이도 조선인 노동자들의 기억과 체험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하

기 위해 여러 충위의 재일조선인들을 만나고 모든 자료들을 섭렵한 작가 손창

섭의 문학적 노력을 상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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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의 직 · 간접적 관계를 통해서이다, 아무리 개인적인 기억이라고 할지

라도 모든 기억은 타인들이 지니고 있는 기억의 총체와 서로서로 관계

를 맺기 때문에 최원복의 개인기억은 사실상 집합기억 1 3)이다. 그러므로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야기하는 최원복의 구술사(때 historγ)는 집합기

억의 주요 소재이자, ‘나’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요람이 되는 활성적

과거가 된다 14) ‘최원복의 육십 평생 위에다 나의 오십 평생을 겹쳐보면

어느 한 시기의 한국인의 공약수적인 생애가'(516쪽) 집합기억으로 산출

되기 때문에 동향인 ‘나’와의 만남을 통해 촉발된 최원복의 기억에는 재

일조선인의 과거와 미래를 현재적으로 성찰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내

재해 있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재생이 아니라 현재를 토대로 재구성되기 때문

에 최원복의 기억은 한편으로는 일본의 공식역사 ‘죽은 기억 ’에 균열을

낸다. 서술자 ‘나’가 초점화자 최원복의 기억과 체험들을 사실적으로 재

구성하여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의도는 무엇보다도 일제 식민지 통

치의 산물인 재일조선인 그 가운데서도 훗차이도에 강제 정집된 조선인

노동자L5)를 집합적인 차원에서 피서술자인 독자와 함께 기억하기 위해

13) 김영범민중의 뀌환, 기억의 호출J , 한국학술정보(주), 2010, 313쪽(최원복의 기억은 순전한 회상이 아닌 현재를 바탕으로 해서 재구성된 것이며, 타자인 ‘나’

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집합기억이다 어떤 기억이든 철저히 개인적 기억이

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타인들과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기억행위를 하

기 때문에 모든 기억은 집합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

14) 위의 책 , 309쪽‘ 15) 1999년 훗카이도 도청에 의해 발간된 『훗카이도와 조선인노동지-조선인 강제

연행 실태조사 보고서』는 1939년부터 1없5년까지 강제연행으로 훗카이도에 끌

려온 조선인 노동자 총수를 일본 전체의 20%에 해당되는 14만 5천 명이라고 추

정하고, 가혹노동 혹은 중노동으로 인해 사망한 노동자 수가 2천 명 이상에 달

한다는 추정치를 산출해 냈다 그러나 1945년 이전에 일본 영토로 편입되어 있

던 λ}할린과 쿠릴열도 등으로도 상당수의 조선인 노동자가 훗카이도를 경유하

여 강제 연행되었다는 점, 추정치 산출 근거가 된 자료 외에 상당수의 자료가

일본이 패전할 당시 소각 처분되거나 산실된 사실, 강제연행 도중에 도망하거나

사고로 사망한 조선인들은 포함되지 않았음을 고려해 볼 때, 훗카이도 지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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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m. 안과 밖의 경계인, ‘재일’

해방을 맞이한 1945년 당시 재일조선인 인구는 약 210만 명에 달했고

이 가운데 140만여 명은 조국으로 돌아갔으나 나머지 70만여 명은 남게

되었다. 잔류한 70만여 명 중 ‘훗카이도에 남아 있던 조선인 노동자는 약

8만 6천여 명으로 추산되며 최원복도 이 중 한사람이었다’(131쪽) 해방

이전부터 아내를 불러와 함께 살고 있던 최원복은 빈손으로 귀향할 수

없어 농사지을 땅이라도 장만할 돈이 마련될 때까지 일본에 남기로 결

정했다. 북송선을 탄 큰아들이 북한행을 막는 편지를 암호화하여 보낸

후 최원복은 고향이 아닌 한국으로의 귀환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원복처럼 조국으로의 귀한을 꿈꾸거나 실천하는 재일조선인 1세와

달리,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들은 복잡한 정체성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재일조선인 2세에게 “관념상의 조국이 막연히 있을 뿐이지 그토

록 못 견디게 돌아가고 싶은 말하자면 피부로 체온으로 실감할 수 있는

조국"(밍4쪽)이란 없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 2세들은 일본에서의 정주

를 받아들이며 그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일본의 배제 정치로

인해 ‘재일’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각종 차별에 노출되었다.

어느 날 ‘나’는 닛보리의 곱창구이 집에서 최원복의 막내아들 성기 군

과 그의 선배 백 청년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

다 술김에 백 청년은 그동안 마음에 쌓아두었던 조국에 대한 생각과 재

일조선인의 신분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강제연행 당한 조선인 노동자 수는 동 보고서에 산출된 추정치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박맹수, 앞의 글,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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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로서의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정체성 155

주인아주머니는 제주도 출신이라 한다. 일본에 온 지 40년, 한국말도

영 서툴러졌다면서 일어만 썼다 내가 주머니에서 재일동포 의식조사서

의 설문 내용을 적은 종이를 슬그머니 꺼내들고 질문을 시작하려니ηt

백 청년이 취한 음성으로 방해를 놓았다. “소장님의 호구조사가 또 시작

됐네. 뭐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구요? 뭐가 대한민국입니까, 뭐

가‘ 우린 말예요 대한민국 사람도, 남조선 사람도, 북조선 사람도, 일본

사람도 아니에요 뭔고 하니, 우린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 반드시 대가

리에 그놈의 재일이란 딱지가 붙어 다니는 특수족이에요 아시겠어요?

(- .. ) “그래요 일본에 시는 조선 사람을 조사하러 온 거예요 남조선을

지지하느냐, 북조선을 지지하느냐 여기서 청년은 말을 끊고 커다

란 유리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켜더니 “말하자면, 부부가 남북을 따

로따로 지지하면 그건 파혼이다 이런 말예요"(369-370쪽)

백 청년은 “우린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 반드시 대가리에 그놈의 재

일이란 딱지가 붙어 다니는 특수족”이라고 설명했다 자신들은 ‘재일’(在

日), 그러니까 ‘자이니치’가 접두사처럼 따라다니는 ‘특수족’이라는 것이

다. 그런데 이 ‘특수족’은 조국 분단으로 인해 남조선을 지지하는 민단계,

북조선을 지지하는 총련계 그 어느 쪽도 아닌 중립파로 나뉘어져 서로

대립하고 있다. 사업을 하거나 모임을 도모하더라도 민단계인지 총련계

인지 사전에 알아 둘 필요가 있을 정도로 이데올로기 문제는 심각했다.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적 분열은 재일조선인 2세들의 결혼에도 영향을

미쳤다. 재일조선인 2세가 일본 국적자와 결혼하는 건수는 매년 증가하

고 있으나 민단계와 총련계 사람들이 서로 결혼하는 일은 드물었다 16)

재일조선인 중에서 결혼 당사자가 민족학교(총련계) 출신자들(주로 2세)

인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동포내혼을 했다 17 )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이

16) 재일조선인 결혼 당사자들의 국적이 다른 경우 이는 결혼에 걸림돌이 되는 심 각한 현실의 하나였다(이헌홍재일한인 소설에서의 혼인, 그 갈퉁과 거리 혹

은 소외 J,한국민족문화J 39집,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1, 127쪽). 17) 김병철가족 및 친족생활J,일본 관동지역 한인동포의 생활문화J , 국립민속박

물관, 2005,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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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한국문학논총 제61집

데올로기의 이분법적 폭력은 부부생활의 갈등 요인이 되곤 했다. 민족학

교 출신의 여성과 결혼한 백 청년이 아내의 극단적인 북한 편향적 사상

으로 인해 최근 이혼한 사실은 이러한 갈등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백 청

년이 “부부가 남북을 따로따로 지지하면 그건 파혼이다”라는 언급은 그

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가슴시린 말이다

재일조선인처럼 경계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속을 정의하는

국적은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 늘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다. 이런 특성이

재일조선인의 국적의 역사성을 나타내고 있다 18) 재일조선인이 일제 식

민지 통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들의 국적은 엄밀히 말해 ‘조

선’이다. 1947년 5월에 외국인등록령이 공포되었을 때 재일조선인의 국

적은 지역상의 표지인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1땅8년 남북한이 따로 정

식국가로 수립된 다음 한일국교정상화 회담 이후인 1965년부터 재일조

선인의 국적은 네 가지로 분류되었다. 대한민국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 국적, 일본 국적(귀화) , 그리고 조선적(朝蘇籍)이 그것이다. 재일

조선인 중에는 일본이나 남북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편의상 예

전대로 ‘조선’ 국적으로 살아가는 ‘조선적’ 즉 무국적(無國籍)의 사람들

도 많다. 이처럼 분단을 초래한 이데올로기의 폭력이 ‘특수족’, 재일조선

인의 국적마저도 다분했다.

재일조선인은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직하기 어렵고 또 취직이

된다고 하더라도 승진에서 제외되는 상황이 기정사실화되어 있다. 재일

조선인이라는 신분은 결혼에서도 지울 수 없는 사회적 오점으로 작용했

다. 최원복의 막내아들 성기는 일본인 여성에게 실연을 당하자 자살을

했다. 성기의 자살 동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추정될 수 있으나,

예상대로 여성 쪽에서는 성기를 친구로서 호감만 가졌을 뿐, ‘외국인’ 19 )

18) 조경희‘탈냉전’기 재일조선인의 한국이통과 경계 정치」 , r사회와 역사J 91집,

한국사회사학회, 2011 가을, 68쪽

19) 일본사회에서 재일조선인은 굳이 국적을 따지지 않더라도 귀화한 사람을 제외 하고는 대부분 ‘외국인’이다. 항상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하고 다녀야 하는 재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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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애초부터 결혼상대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기가 “일본이라

는 특수한 상황 속에 사는 한국인이 아니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고,

이진우 사건과 김희로 사건도 “그들이 일본에서 사는 한국인이 아니었

다면 그런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으로 헤아리던 ‘나’는 재일조선인

들의 ‘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이

라는 이방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심한 차별과 멸시, 거기에서 오는 견딜

수 없는 민족적 울분이 다분히 작용한"(453쪽) 사건들을 생각하면서 ‘나’

는 다케오와 그 형이 벌였던 유괴사건을 통해 재일조선인 2세의 삶을

되짚어 보았다.

‘나’가 다케오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중학교 2학년 딸을 괴롭히는 당

사자였기 때문이었다. 다케오의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그 집을 방문했던 ‘나’는 뜻밖에도 그의 아버지가 귀화한 조선인임

을 알게 되었다.

“학생의 부친은 일본 사람인가요?" 나의 물음에 “천만에요 조선 사

람이지요. 귀화해서 일본인 행셀 하구 있지만, 그렇다고 조선 사람 피야

어디 가겠어요 부인은 남자 모양 서글서글한 말투로 대답했다 소년이

본시 한국인임을 알자 나의 심중은 몹시 착잡하였다 조선말 쓰지 말랬

잖아 하고 외치며 이쪽을 쏘아보던 소년의 음성이 흡사 어떤 비명처럼

나의 뇌리를 새로이 때렸다,(16쪽)

다케오의 어머니는 ‘나’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조선말로 반갑게 맞이

하면서 환대했다. 그러자 다케오는 “조선말 쓰지 말랬잖아 하고 소리

치며 ‘증오의 눈’으로 이쪽을 쏘아보았다. 일본문화에 동화된 다케오가

조선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한 순간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일은 어쩌면

선인은 납세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지만 선거권이 없다‘ 일본사회로도 남

한λ}회로도 북한사회로도 편입될 수 없는 조선인이기에 일상생활에서 경계인

의식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재일조선인의 경계인 의식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것은 취업과 결혼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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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일본인 학생들 앞에서 종숙을 비난하거나 조

롱하여 집단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는 다케오가 스스로를 검열하면서 일

본인으로 동화되고픈 심리의 소산이다. ‘일본인이 되고 싶다’라는 다케오

의 욕구에는 위/아래 혹은 우웰열등이라는 위계서열상의 차별적 인식

이 중층적으로 겹쳐있는 현실이 그 근저에 있다 2이

‘조선말’은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일본인과 구분하는 경계 구분

의 표지(標識)이다. 일본어를 ‘주된 말’로 하는 다케오에게 ‘조선말’로 인

해 환기되는 ‘조선인’이라는 혈연적 확인은 일본인‘처럼’(비국민)이 아닌

진짜 일본인(국민)이 되고픈 열다섯 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

찬 일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어로 말하는 다케

오지만 부모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일본인으로 귀속되는 데 걸림돌이

되곤 했다. 말하자면, 혈연이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는 경계 구분의

결정적 표지가 된다 언어는 혈연적 표지와 관련되어 다케오를 일본사회

‘안’의 ‘우리’가 아닌 그 ‘밖’의 타자로 밀어내고 있다. 더군다나 다케오의

아버지 고광일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일본인 여자와 재흔해 살고 있다.

일본에 동화된 아버지와 달리 아직도 조선의 정취가 가시지 않은 어머

니와 따로 사는 일은 다케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다케오의 아버지 고광일은 재일조선인 친구들과 주위사람들을 사기,

협잡, 배신에 연루시킨 끝에 10억대 재벌이 되었다. 그는 밀주장사를 하

고, 미군 물챔 빼돌리고, 고리대금업 등,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

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아 큰돈을 별었다. 고광일이 사장으로 있는, 식당

과 호텔을 겸한 ‘남북장’에는 재일조선인 직원이 단 한 명도 없다 고광

일을 믿고 밀항해 온 사촌을 경찰에 고발할 정도로 그는 피도 눈물도 동

포도 혈육도 안중에 없는 지독한 ‘장사꾼’이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다케오는 아버지처럼 살아야만 일본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

20) 김현선재일의 귀화와 아이멘티티 ‘일본국적 코리안’ 사례를 중심으로J , 사회

와 역사.l 91집, 한국사회사학회 , 2011 가을,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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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동시에 일본인 주류사회에서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질까 불안

에 떨어야 했다. 결국 다케오는 형과 함께 이복동생을 납치하여 1억을

요구하는 인질극을 벌여 일본사회를 발킥 뒤집어 놓고 말았다. 일본도

한국도 싫으니 1억을 갖고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귀화해도

일본사회에 ‘완벽하게’ 소속될 수 없는 재일조선인 2세의 불안감이 노출

된 이 사건은 ‘재일’하는 소년들의 어려움과 고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

고 있다. “소년들은 견딜 수 없이 고독하고, 불안히고 피로한지 모른다

표면상으로는 일인이면서도 완전한 일인이 될 수 없다는 약점에서, 귀화

한 한국계 일인임을 애써 숨겨야했던"(404쪽) 고광일의 아들들을 보면서

‘나’는 이들이 갖는 ‘혼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일’ 소수자 2세들, 성기 군과 백 청년, 고광일의 아들들은 일본과 한

국의 동시성을 내재한 ‘다블’의 혼성적 정체성을 ‘하프’로 가치 절하동}는

일본의 국민국가 틀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청소년 2세의 불안한 생활에

서 알 수 있듯이 ‘재일’21)하는 조선인의 사회적 위치와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그대로 내재되어 있는 용어가 ‘재일조선인’이다.

lV . 우리 안의 ‘너’, 소수자

『유맹』의 서술자 ‘냐’는 50세가 넘을 때까지 한국에서 살다가 도일한

뉴커머22)이다. 1973년 일본인 아내와 딸과 함께 도일한 ‘나’는 재일조선

21)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은 스스로를 ‘자이니치’(在日)라고 부른다 과거 일본의 비

국민으로 일걷던 이 말을 정주를 받아들여야만 히는 2, 3세들이 긍정적인 차원

으로 수용하고 해석하면서 2(XX)년 이후 자이니치는 ‘지금 여기’서 ‘현재’를 고민

하면서 ‘현재’에 살고 있다는 의미가 강한 주체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22)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뉴커머’(new comer)라는 용어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식민지 출신자들의 법적 지위가 외국인으로 변경된 뒤 일본

으로 들어온 외국인들을 부르는 일본식 조어이다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시용된

때는 1981년 국제 난민조약이 체결되고 인도차이나 난민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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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한국문학논총 제61집

인 1세들, 올드커머와 다른 사회적 위치23)에 있다. 일본에 온 지 2년여

밖에 되지 않은 ‘나’는 서울의 모 대학에서 사회학 강좌를 맡고 있는 친

구의 부탁으로 “재일동포 의식조사서”의 설문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재

일조선인들을 만나고 있다 조사서에 응답한 20명 중 3분의 2 이상이 한

국인에 대해 ‘신용이 없고 협잡성이 농후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한국인에 대한 재일조선인들의 평가는 일본인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

일본인끼리 모인 사석에서 한국인에 대해 물어보면 ‘믿을 수가 없다,

음흉하다, 불결하다, 사납다’고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은 신용이 없

음을, 음흉하다는 것은 협잡성을 뜻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이 같은 평

가는 ‘현재’의 한국인이 아니라 ‘과거’ 조선인을 타자로 만들기 위해 활

용했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메이지시

대 이후 만들어져24) 일제강점기에 확대 재생산된 ‘조선인’의 이미지를

1980년대 중반부터이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뉴커머란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

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한일 간의 복잡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특수성을 지니

고 있다 일반적으로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로 영주권을 얻은 재일조선인들을

올드커머(old comer)라고 하고 그 이후 일본으로 건너와 생활 기반을 마련한 이

들을 뉴커머로 일걷고 있다(홍성흡뉴커머의 역사와 생활세계」 , 『일본 관동지

역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 국립민속박물관, 2005, 잉4쪽) 23) 재일조선인 뉴커머를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볼 때 이들의 이주는 한국과 일본의 여러 사회적 조건에 따라 그 요인과 형태가

다르다 배제와 차별의 정도, 분리 및 자족성 면에서 뉴커머 집단의 형태도 변

화되고 있다(정진성재일한국인 뉴커머 형성과정과 집주지역의 특징. 오쿠보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J , 사회와 역사J g)집, 한국사회사학회, 2011 여름,

313-354쪽 참조) , 24)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근대 일본은 조선을 ‘문명 ’ 측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끊

임없이 ‘뒤떨어진=미개한’ 조선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막연한’ 이미지는 사진기가 보급되고 청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조선인과의 직접

적 대면이 가능해져 불결하고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로 구체화

되었고 이것이 조선에 대한 차별적 이미지로 고정되었다(박양선明治시대

(1868-1912) 일본 삽화에 나타난 조선인 이미지」, r정신문화연구~ 28권 4호,

2005, 301-329쪽 참조) 메이지 정부의 민간 대변자이자 근대 일본의 계몽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지나(중국) 숭배의 미몽”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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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로서의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정체성 161

고스란히 현재의 ‘한국인’에게 투사한 결과이다.

일본사회에는 지금도 조선인의 피는 더럽고 열둥하다는 차별의식이

내재화되어 있다. 후진적이고 폭력적이며 모든 부정적인 것을 이르는 사

인(sign) 혹은 표상으로 조선, 조센이라는 말25)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메이지시대 서구인들에게서 받은 일본인 자신들의 신체 차별의 경험을

쇼와시대에 변형하여 재생산한 일과 맞물려 있다 26) 하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은 피부색 및 체형이 비슷한 인종이다. 백인이 피부색을 통해 흑

인을 배제하면서 착취를 정당화했던 것에 착안한 일본인은 피부색이 같

은 조선인을 ‘피’로서 구별하고자 했다. ‘조선인의 피는 더럽다’라는 관념

은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즉,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조센징’(朝勳A)

혹은 ‘센징’(蘇A)이라 놀리며 조롱할 수 있는 차별적 근거를 혈연으로써

마련한 것이다.

조선인은 외모로 식별 가능한 집단이 아니기에 일본인의 피는 조선인

의 그것과 달리 순수하다는 결론이 산출되었다. 그 오염된 ‘피’를 통해

조선인의 민족성이란 게으르고 신용이 없고 협잡성이 강한 것으로 생산

-유포되었다. ‘피’를 통한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 요컨대

순수한 ‘우리’가 불결한 ‘타자’를 차별 억압하는 장치는 일제강점기에 본

격적으로 작동되어 아직까지 일본사회의 저류에 흐르고 있다.

조선은 “붕우로서 의지할 만한 사람”이 못되며, “문명의 관점에서 사지가 마비

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없는 병지와 같을” 뿐이어서, 일본이 조선에 간섭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까지 주장했다(송석원 「근대일본의 조선민족성 인식에

관한 연구-제국의 시선을 중심으로」 , r일본연구J 49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

연구소, 2011, 28쪽). 25) 서경식 w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h 철수와영희, 2뼈, 45쪽

26) 서구인들은 아프리카에서 그랬듯이 일본에서도 피부색과 체형을 기준으로 일본 인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했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인들 또한 조선인들과의

차이를 통해 차별을 정당화할 만한 적절한 근거를 찾고자 했다 조선인이 일본

인과 구별되는, 즉 배제 장치를 마련해야만 식민 통제와 경영이 원활해지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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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에 한국인의 용모가 피부색이 서양인과 같다면, 영어에 능한 미

국병 환자 중에는 미국인 행세를 하려 드는 자가 수두룩할 것이다. 다만

원통하게도 살갖이 누렇고, 코가 낮고, 눈알이 검기 때문에, 미국인의 행

세를 하고 싶어 죽겠는데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리 한 일 양국인

도, 동서양인의 차이처럼 외 OJ:상의 특정이 뚜렷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일인을 가장하고 싶은 재일동포일지라도 엄두를 못 낼 것이요, 나 같은

사람은 일어 문제로 신경을 안 써도 좋을 것이다 (484쪽)

‘나’는 일본어의 서툰 발음 탓에 대화 도중에 ‘이 사람, 한국인 아냐?’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일본인의 심리적 변화를 싫어한다. 서툰 발음

을 내는 순간 그 일본인은 경멸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남의 땅에서 일본어를 잘할 필요는 없고 의사소통만 제대로 했으면 하

는 ‘나’이지만, 대화하던 상대가 ‘나’를 한국인임을 인식하고 태도를 돌변

할 때에는 종종 미묘한 감정에 시달리곤 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동양

인과 서양인의 차이처럼 외양상의 특정이 뚜렷했으면 ‘나’가 일본어 문

제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으련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동서양인의 차이처럼 외 OJ:상의 특징이 뚜렷”하지 않아 재일조선인들

중에는 일본인으로 가장하면서 일본사회의 ‘우리’ ‘안’으로 편입되고 동

화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재일조선

인일수록 외$탱 일본인과 쉽게 식별되지 않은 탓에 자신을 일본적인

자아에 합일시키고자 조선의 말과 음식, 치마저고리 등을 거부하고 부정

했다. 고광일은 이러한 유형의 재일조선인이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

하던 그가 귀화해서 조선인 조강지처를 버리고 일본인과 결혼해 억대

재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본인으로 ‘완벽하게’ 소속펼 수는 없다. 본

명 고광일(高光一)을 통명 다카무라 고이치(高村光,-)로 바꾼(엄쪽) 그

는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말이 모어(mother language) ~ 재일조선인 1세

이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재일조선인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고광일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강자가 될 수는 있어도 ‘다수자’ 일본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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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소속될 수는 없다. 반면 ‘권력의 열세’에 있는 재일조선인 대다수는

자신이 ‘차별받는 집단에 소속되어 었다는 자각’이 있다. 조선말로 이야

기하고 마늘과 고추로 버무린 김치를 먹으며 치마저고리를 입는 까닭에

일본인과 인종적 · 문화적으로 ‘식별 가능성’이 있는 재일조선인들은 교

육, 취직, 결혼은 물론 선거에서도 ‘차별적 · 경멸적 대우’를 받는 소수자

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황국신민의 비국민으로 분단 이후에는 남한의 월남

인으로 살았던 경험이 있는 ‘나’는 식민지배가 끝나고 월남인에 대한 차

별적 구분도 사라진 지금 일본 땅에서 재일조선인(한국인)으로서의 자

기를 형성해 나갈 수밖에 없다. 뉴커머인 ‘나’는 최원복, 고광일과 같은

올드커머와 그 2세들만큼 권력의 열세에 놓여 지독한 차별과 경멸에 시

달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족의 영주 도일에 따라"(138쪽) 앞으로 일

본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재일’하는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또한 일본이라는 국가에 국민으로 소속될 수 없기에 한국 국적의

‘나’는 일본인 다수자와 대립 갈동하면서 자기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언어와 음식이라는 문화적 경계표지뿐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국적과

혈연적 차이로 인해 ‘나’는 다수자 일본인들에게 차별받고 억압받는 ‘재

일’ 소수자이다. 하지만 그 자명한 사실은 ‘나’로 하여금 오늘의 재일조

선인 사회를 형성한 올드커머와 그 2세들처럼 ‘재일’ 집단의 성원임을

확인케 했다. 일제강점기에 만주와 일본을 전전하다 분단 후 북한과 남

한의 체제를 차례로 경험하고 도일한 ‘나’의 삶은 국민국가의 틀 ‘안’의

‘우리’에 뿌리내릴 수 없는 ‘유맹’의 삶이자 국민국가로부터 떨어져 나온

‘난민’과 같은 인생이였다. 이러한 개인사를 통해 형성된 ‘나’의 정체성은

민족국가 체제로부터의 뿌리 뽑힘을 경험한 데서 비롯된 난민으로서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27) 초점화자인 재일조선인 l세 최원복이 그렇

27) 류동규난민의 정체성과 근대 민족국가 비판-손창섭의 장편소설 r유맹』을 중

심으로」, r비평문학.!I 29호, 한국비평학회, 2003, III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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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 자민족, 국민 중심의 국가 틀이 바뀔 때마다 ‘나’의 정체성 또한 변화

되고 굴절되면서 재형성되었다.

‘난민’의 성격이 강한 재일조선인은 일본사회의 소수자인 동시에 한국

사회의 소수자가 될 수도 있다. 최원복이 ‘고향(북한) 아닌 조국(남한)’으

로 영주 귀국한다는 샤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귀환동

포에 대한 한국의 사회적 틀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한

국에 살고 있는 귀환 재일동포는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전체에

비하면 소수이다. 재한 재일동포들은 한국인 아니면 일본인이 되라는 국

가 국적 중심의 이분법적인 논리와 편파적인 대일 감정 등에서 비롯되

는 여러 가지 심적 부담감을 안고 있다. 출입국과 법적 지위 같은 현실

적인 문제에서 각종 불이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몇몇 공공 직업에 종

사할 수 없다거나 정치적 권리를 제한한다는 점은 분명히 대한민국 헌

법이나 국제 인권 규약에 위반된다 28) 말하자면 귀환한 ‘조선인’은 일본

에서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었듯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정부는 정체성의 정치를 통해 재한 재일동포를

‘우리’ 안의 ‘너’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귀환을 준비하고 있는 최원복에게 큰아들의 북송 사실이 알려져 정보

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거나 간첩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주위사람들의

불안감이 결국 한창일과 ‘나’의 몸싸움으로 번졌다 “아들 녀석들은 조총

련에 직접 관계하구 있구, 니두 거기 가입하고 있으니까 허갈 안 해줄

거야. 설사 허갈 해준다구 해두 나야말로 남조선 땅에 내리기가 무섭게

당장 묶여 갈거야"(511쪽) 하고 절규하는 한창일의 한 맺힌 넋두리는

남북대치 상황에서 재일조선인을 배제하려는 귀환동포에 대한 ‘한국’의

사회적 인식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귀환동포를 껴안고 소

통하지 못하는 한국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내재된 이 사건은 소수

28) 정대성한국에게 재일동포란 무엇인가」, 『재일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 , 삼인,

2003, 5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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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로서의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정체성 165

자 문제란 ‘레드 콤플렉스’의 시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하

고 있다. 한국의 이러한 태도는 국가적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한

국에 사는 다수자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이다.

조국(祖행)과 고국(故國)과 모국(母國)이 일치하는 한국인 다수자들은

그렇지 않은 재일조선인을 자신과 다른 위치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

다 다수자들의 우리 ‘안’에서만 내면화된 ‘국민’이라는 의식은 이들로 하

여금 국민 ‘바깥에서 살아가고 있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존재를 무관심

하게 만든다. 따라서 국민의 한 사람인 개인은 자신을 우리 ‘안’에서만

바라보는 의식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무의식적

으로 자신도 모르게 내변화되어 버린 ‘국민’이란 말로 표현되는 국민의

식을 깊이 생각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좋은 창구가 재일조선인의 처

지29)라고 할 수 있다 ‘재일’ 소수자들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근대의 산물

인 국민국가의 틀은 여전히 일본과 한국에서 ‘탈’근대적이지 못한 채 오

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원복과 같은 귀환동포를 통해 소수자의 상대적인 사회적 지위까지

성찰하고 있는 『유맹』은 사회적 정체성이란 한 개인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재)형성되고 변화되는 것임이 함의되어 있다. 요컨대

소수자의 사회적 위치는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나 시대에

따라 규정되는 가변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일 ‘조선인’을

국민적 귀속을 강제하는 국가라는 편협한 차원에서 바라보기보다는 국

가, 세대, 개인을 바탕으로 한 융통성 있는 차원에서 중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29) 서경식, 앞의 책 ,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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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맺음말

본 논문은 재일조선인들의 체험과 기억을 재구성한 『유맹』을 대상으

로 국민국가 틀 밖의 유랑민의 사회적 정체성을 소수자의 입장에서 살

펴보았다. 손창섭의 자전적인 소설이기도 한 『유맹』은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역사적으로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작가의 역량이 개인적 차원을 넘

어 사회 · 역사적 차원으로 확대된 작품이기도 하다. 손창섭은 자신과 재

일조선인들의 ‘유맹’으로서의 삶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이란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재형성된다는 것을 『유맹』 에 함의하였다. 사회적으로 규정되

고 틀 지워지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살펴보기 위해 일본이라는 시공

간 속에서, 그리고 1세대와는 다른 사회적 환경과 관계 속에서 경계인으

로 살고 있는 ‘재일’ 2세들의 삶을 분석하였고 이로써 소수자 문제에 접

근할수 있었다

뉴커머인 소설 속 ‘나’가 초점화자 최원복을 통해 바라본 소수자 ‘재일’

의 정체성이란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고정되고 강제적으로 규정된 측면

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다수자와 소수자, 일본인과 한국인, 소수자와 소

수자 등과 같은 여러 관계망 속에서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재일’ 소수자는 ‘우리’와 ‘타자’라는 이원적 관계로 그 경계가 뚜렷이 구

분되는 존재가 아니라 경계선 안과 밖을 넘나드는 어느 지점에 위치하

고 있다. 그러므로 ‘재일’ 소수자는 ‘우리’와 분명히 구분되고 배제되는

‘남’이 아닌 우리 안의 ‘너’라는 입장에서 이해하고 소통해야 할 존재임

을 알수있었다

『유맹』은 작가 손창섭이 소설 속의 서술자 ‘나’에 ‘자기’를 투사한 자

전적 소설로, ‘재일’ 소수자들의 삶을 통해 ‘유맹’적인 자신의 사회적 위

치를 응시한 작품이다. 소설 밖의 손창섭은 초점화자와 서술자와의 거리

를 객관적으로 유지하면서 ‘최원복 이야기’와 ‘서술자 나의 이야기’가 교

호적으로 얽혀 들어가 소수자 재일‘조선인’의 이야기가 되는 문학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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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로서의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정체성 167

치를 구사하였다. 물론 그 문학적 장치는 소통 과정에 있는 소설 밖의

‘피서술자 독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집합기역의 주요 소

재인 초점화자 최원복의 구술사와 ‘나’의 구술사(서술)가 활성적 과거가

될 때 그 효과가 발휘된다. ‘한국인’ 피서술자 독자가 재일‘조선인’의 체

험과 기억들을 사회성원으로서 공유하고 이들 통해 ‘나’를 재형성해 나

가는 일이야말로 소설 밖의 손창섭이 『유맹』을 소통의 장으로 마련한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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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한국문학논총 제61집

<Abstract>

Personal Experience and Social Identity as a Minority:

Focusing Upon a Novel ‘Yumaeng’ by Son

Chang-seop

Byeon, Hwa-Young'

Ths study analyses the social identity of migrants which described

in a novel, Yumaeng written by Son Chang-seop. 깐llS novel

restructured and reorganized the ex:periences and memories of

Kor,않n-]apanese in terms of minorities. And this novel reflects the

life history of the author, Son Chang-seop, who is also a

Korean- ]apanese. In the novel the life of Korean- ]apanese is well

described historica11y and soci머ly. TIrrough his own e앵eriences and

those of other Korean- ]apanese, in Yomaegn, the author irnplicates

that the personal identity is ru1ed and formed by social force not by

individual' s own will. For ins맺cting closely the identity of Korean

]apanese which ru1ed and formed by social environment, he analysed

the life of 2nd generation of ‘]ainichi’, who are living as a ‘between’

and different compare to their father generation. By analysing those

of 2nd generation' s life, he can approach the problem of ‘]ainichi’ as

well as those of minorities πle identity of ]ainichi as a minority who

depicted by ‘me’, new comer in the novel, is 파(ed and forcibly formed

within the frame of nation state. But, he insisted in the novel, fina11y

* Chonb버{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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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로서의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정체성 171

the identity of ‘]ainichi’ is decided or settJed w:ithin sever떠

relations/relationships between the majority and the minority, the

]apanese and the Koreans, the one minority and the other minority,

and etc. As minority the ']ainichi' can not be distinguished in terrns

of binominal concept of ‘we’ and ‘other’. They are located somewhere

between ‘inside’ and ‘outside’ of the boundæγ So, they are not

‘others’ who excluded or distinguished from ‘we’, but the 야x>ple

w:ithin the categorγ of ‘we’.

Key Words : Son Chang-seop, Yumaeng, minority, ]ainichi , new

comer, collective memory

l 논문접수 : 2012년 6월 30일

l 심사완료 : 2012년 8월 2일

l 게재확정 : 2012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