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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자연과 인간을 접목한 김원 (金洹) 의 건축철학 글_ 이세기 소설가ㆍ전 대한매일 논설위원 이세기의 예술인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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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인간을접목한

김원(金洹)의건축철학

_ 이세기소설가ㆍ전대한매일논설위원

이세기의 예술인 탐구(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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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대한적극성과창의력으로인해건축가김원(金

洹)의 일상에는 일이없어보인다. 그를 보면남보다

인생을 배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을 만들고

책을 읽고 쓰고 여러 모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1970년대이래독립설계사무실을운 하면서지금까지

그가이룩한업적은신문지한장이모자랄만큼한일

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아무리 천재적인

두뇌를지녔다고해도“그렇게살다보면에너지가고갈

되지않느냐?”고묻는사람이있을정도다. 자그마한체

구의어디에서저런열정이뿜어져나오는것일까. 김수

근, 김중업을잇는차세대선두주자로서그가하고있는

일은결국환경을생각하는건축을확립하려는것이다.

그의건축에서우선적으로언급돼야하는것은‘건축

대지에 대한 탁월한 주변 환경 해석능력’이다. 건축은

조각이나 회화가 아니므로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면을

외면해서는안되며주변의도시상황과자연지형에잘

어울려야한다는것이그의주장이다.

그의 작품을 단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남산 하얏

트호텔건너편에지어진갤러리빙(明寶廊)을빼놓을수

없다. 이 집은도시의숲속에파묻힌보석더미인양거

대한호텔건물앞에서조금도주눅들리지않고단단하

고 야무지게 서 있다. 그 기능이 보석상이듯이 노출된

내장마감과 하얀 알루미늄 판이 덮인 각진 외곽은‘먼

우주를향해떠가는비행체’또는‘현대추상회화’같은

이미지를띤채날씨따라계절따라건물의광채가다

르게빛나는것이특징이다. 이는 루이스칸의“건축을

만드는 것은 빛이다”라는 말에 향을 받은 작품이다.

그전까지는 호텔 건물이 강남과 강북을 가로지르는 경

계선이되어서울시가지를한팔에감싸안고있었으나

갤러리빙이들어선후어딘지어설프던주변환경에신

선한활기와생기를불어넣어주게되었다. 이처럼주변

환경에 흡수되지 않고 완벽하게 환경에 조응한 작품을

두고 평단은‘Neo-Contextualism(신맥락주의)’으로

표현하고있다.

같은건축가로서건축평론을하는민현식은“그의건

축은진행과정의명쾌성, 기능에의철저한제의, 기술과

재료의채용에따른엄격성, 또장식적인요소나기능을

순화시키기위한장치들이지나치리만큼배제되어순수

한뼈대만을남기고있다”고평한다. 그래선지첨단적인

모더니즘과 극도의 세련미를 추구한 그의 작품은 때로

‘차갑고거칠다’는말을듣기도한다.

이러한공간을시도하기위해그의선은아주가늘고

면은 얇은 박판 같은 긴장감이 차 있으며 격자화된 평

면, 기하학적볼륨, 단순화되고추상화된색과질감, 벽

돌이나스페이스프레임, 금속판, 흰벽등이자주등장

한다. 평면계획에서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고집하고 설

계과정에서도원이나곡선사용을절제하는대신일단

원을사용하면독특하고강렬한이미지를만드는데성

공하고있다. 설계자, 시공자, 건물주가 삼위일체가돼

야 하는 건축 설계에서 그는 작은 일도 허술하게 넘기

는법이없다. 주택설계를의뢰받으면먼저“기본설계

에두달이걸린다”고양해를구하고설계에필요한충

분한시간을확보한다. 지난 1979년서양화가변종하의

집을지을때설계도를다섯번이나뜯어고쳐가며 1년

만에설계를끝낸것이그한예이다. 그자신의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건축주가

까다로운 예술가 던 탓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이처럼

건축설계를할때보편타당하면서도독창적인스타일

을만들기위해그는연구하고노력하는자세를멈추지

않는다.

정사각형, 평면형과연관된작품은옛날에지은정릉

자택(1967년), 새남터 순교자기념성당(1980년), 황새바

위순교자기념탑(1986년), 디자인포커스사옥(1987년),

통일연수원(1987년), 갤러리빙(1989년) 등이있고원을

문화예술이천삼년유월호 87

◀ 환경을 생각하는 건축가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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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한작품은미스박테일러(1967년), 팔레비국립도서

관(1977년), 독립기념관과 서울종합촬 소, 데코 사옥

(1987년) 등이이에속한다.

극기와절제의건축훈련기통해건축의본질에심취

김원은 1943년서울북아현동에서태어났다. 4녀 1남

중 딸 셋을 내리낳고 얻은 귀한 외아들로 해방 전부터

집에는자가용과기사가있었고청전(靑田) 이상범, 소

정(小亭) 변관식, 이당(以堂) 김은호 등 화단의 대가들

이드나들었다. 1947년부친이미군군정하에서외무부

부산출장소장에임명되어집이부산으로이사하는바람

에 그는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에 다녔다. 어릴 때부터

공부는물론음악, 미술, 공작, 짓기에서재능을보이

고페스탈로치연극을하는등못하는것이없었다. 그

러나부친이서울에출장간지 3일만에 6·25를만나전

쟁에 휩쓸려 타계한 후 어머니 혼자서 5남매의 생계를

책임지는혹독한시련을겪었다. 어머니는집안에산적

해있던고서화를헐값에팔아그들형제들을교육시켰

다. 교육열이 드높았던 어머니는 1955년 김원이 12세가

되었을때외아들만은“반드시서울에가서공부를해야

한다”면서어린소년을서울로유학보냈다. 객지 아닌

객지에서 혼자서 하숙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의 과보

호밑에서우쭐거리고살던그는편식과잔병치레가사

라지고독립심강한자생력을갖게되었다.

경기중고에서는주로미술반과산악반에서활동했다.

당시학교에는박상옥, 최경한, 김경승, 윤 자등훌륭

한 미술교사들이 있었고 해마다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학생작품전시회를열었다. 그는주로조각작품을내놨

다. 조각가가되고싶었지만어머니는가난한예술가보

다진취적인서울대공대에가기를원했다.

건축공학과에 다닐 때도 그는 산악부에서 등산을 다

니고특별활동으로는외부에서초빙된천재조각가권진

규에게조각을배웠다. 그러나대학은“서울대생은당연

히한국건축계의지도자가돼야한다”는자부심만을키

워주었고전문교육이아닌‘자율교육’을유도하여그는

강의실 밖에서 빙빙 돌면서 전공서적보다 역사책이나

문학작품을 읽고 걸핏하면 산에 오르거나 술독에 빠져

비분에찬논쟁을일삼았다.

1965년대학졸업후안국동김수근건축연구소에들어

갔다. 직장생활역시순조롭지만은않았다. 아침에일찍

나와서난로에불을지피고사무실청소가끝나면선배

들이출근하기전에도면을그려나갈연필 80여자루를

깎았다. 손가락이 새카매지도록 끝이 뾰족하게 연필을

갈아놔도누구하나일을시키는사람은없었다.

“내가자리에있는지없는지아무도관심을갖지않았

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밥을 먹으러 가자거나 퇴근 후

술한잔하자는사람도없었다.”

하는수없이독서에눈을돌려「건축철학」「공간심리

학」「네덜란드의 종합국토계획」에 이르는 책들을 섭렵

하고일본건축서적을읽기위해독학으로틈틈이일어

공부를했다.

어쩌다가 일이 주어지면 선배들은“서울대학에선 그

렇게가르쳤느냐?”고은근히비꼬았다. 1년이지나서야

구석에처박혀책만읽고있는그를발견한스승김수근

이 1967년 몬트리올 박람회 한국관 프로젝트를 맡겼고

이어서 여수수족관, 정부종합청사, 조선호텔, 여의도종

합개발, 과학기술연구소, 1970년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

설계에참여시켰다. 이기간동안그는참으로열성적으

로일했다. 부정적인시각이나조금도꾀를부리지않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나갔다. 공문 수발

정리, 문 편지 작성도 마다하지 않았다. 끈질긴 집념

과인내로써신뢰를쌓으면서일의중심에서는성공적

인안국동시대를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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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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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이화여대피아노과를나온박정애와결혼, 처

음에는 생활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양가에서 결혼을 반

대했다. 후암동누나네집에살면서도시락을싸들고야

근을해도월급 2,500원은버스비와담뱃값을충당하기

에도모자라는액수 다.

“집이라도한채장만하면결혼시킨다”는장인의말을

듣고어머니의도움을받아정릉언덕받이에대지 50평

을 마련, 건평 20평짜리 자신의 집을 지었다. 그야말로

벽돌한장에이르기까지건축자재를직접구입해서맨

손으로지은집이바로그의건축작품 1호가된‘정릉자

택’이다. 집이 완성되자친구인김석철은“한국현대주

택의완벽한대표작”이라고칭찬을아끼지않았다.

다양한 경험을 쌓은 끝에 김수근건축연구소에서 나

와서 그는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는 닥치는

대로일했다. 부엌확장, 방한칸더만들기, 인테리어

등마음에들지않으면무조건부수고다시만들어보는

건축훈련기를 스스로 거쳤다. 2년 만인 1969년 종로구

관훈동에‘고하산방(古河山房)’이라는 인테리어 전문

점을오픈, 그때스승김수근은방명록에“‘멋’또‘멋’

또‘멋’또‘멋’계속하라”는유명한사인을남기고있

다. 그때부터 이대, 연대 등 대학강단에서고건축평

론에도 손대기 시작했다. 자녀는 남매, 두주불사의 애

연가다.

1972년과 1973년사이네덜란드로테르담바우센드룸

에유학, 단한시간도낭비하지않기위해주중에는세

계 각국에서 초빙된 석학들로부터 경제학·사회학·미

래학·도시학등건축실무숙련자과정을공부하고주

말에는 생활비를 아껴 유럽 곳곳의 고성과 교회, 기념

관, 학교건물들을일일이돌아보는기회로삼았다.

서울에돌아오자윤승중·변용체제로운 되던원도

시에 소속하여 부산 피닉스호텔 프로젝트를 완성시킨

후 친지의 도움으로 이번에는 조선호텔에 사무실을 얻

었다. 이때의작업은주로돈가진사람의주택을맡아

지었으나 자신의 전문지식을 재벌계층에 빌붙어 써야

한다는자괴심에빠져별로만족스럽지못한시기를보

냈다고한다.

건축설계뿐아니라뛰어난건축이론으로오늘의건

축에대한문제점을제기하는등잡지와신문에기고문

을발표하면서그는독한마음을먹고홀로서기를결심

했다. 그러니까대학졸업후김수근건축연구소에서일

하다가 1967년부터재택근무, 네덜란드에서돌아와서원

도시에 소속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는 남보다 일찍이

문화예술이천삼년유월호 89

◀서울대 공대 건축과 출신 건축가 모임 목구회 회원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안 배, 최장운, 유걸, 김병현, 김원, 공일곤, 고(故) 김현석, 고(故) 장종률,

윤숭중, 정진성, 마춘경, 원정수, 조창절

▶ 1959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개교기념 전시회에서 윤 자 선생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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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체제로작업을해왔다고할수있다. 사무실을열기

에는아직역부족이었으나 1976년종로구사간동에허술

한 사무실을 얻어 건축설계사무소 광장과 도서출판 광

장을설립, 건축 설계와함께한편으로는자신이쓴건

축평론집을출간했다. 그러나자신의출판사에서출간

한책은잘팔리지않는대신이책을읽고찾아온열화

당이기웅사장의제의로낸「건축예찬」은건축관련전

문서적중지금까지가장많이읽히는책이되고있다.

그 무렵 여동생 김 (金玲) 데레사 마리아 레티치아

수녀의타계로충격적인슬픔을경험하지않으면안되

었다. 여동생은김수환추기경의도움으로독일함부르

크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오랜 타국생활

과과도한공부로병마에시달리다가 1978년 8월,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그 대신 여동생으로 인해 그는

많은 신부들과 가까워졌고 한강성당, 명동 폴수도원,

광주가톨릭대학교등수많은성당관련건축에손대게

되었다.

한강성당축성식에서함세웅신부는“이건물은하나

님과 인간의 합작”이라는 감동적인 강론을 폈다. 이후

명동의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성당, 명동구내수녀원

을리노베이션하고계성여고, 계성초등학교등을설계,

“조용히, 깊이있게건축의본질에심취할수있는”극기

와절제의훈련을쌓은끝에건축에

서커다란전기를맞게되었다.

‘ 자연속의건축’실천, 환경을생각하는건축가

그는 1990년종로구동숭동에자신의건축설계사무소

인광장빌딩을신축하고이름도아예‘건축환경연구소’

로바꿨다. “건축은건축이전에환경자체이며”그것은

이후 변치 않는 그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 자택은

북악산 애기봉이 오른쪽으로 보이는 옥인동으로 그는

집에다 세 칸짜리 한옥을 별채로 덧붙여 햇볕이 잘 들

고통풍이잘되는거실과달과별이보이는서재를만

들었다.

그가 풍수지리에 남다른 안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널리알려진일이다. 건축가로서건축설계뿐아니라건

물을지을부지를선정해주기도한다. 예를 들어충남

천원군목천면에세워진독립기념관과석관동한국예술

종합학교의중정자리는그가잡아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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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는고교시절산악회에서등반을다니면서산

삼을캐는심마니들에게배웠다. 심마니들은“좋은땅의

열매는달고이파리를씹으면목이마르지않다”고가르

쳐주었다. 산에서 야 할 때 자리를 잘못 잡아 텐트를

치면다음날아침에온몸이뻐근하고피곤이풀리지않

지만심마니들이정해준자리에서자고나면개운하고

편안한잠을잘수있다는데서이에대한관심을갖게

되었다.

독립기념관 부지의 경우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가추천한 21곳의후보지중교통편이나산세를보고부

적합한곳을골라내고괜찮은곳은직접답사해서지금

의독립기념관터를잡았다. 때마침천원군흑성산과목

천은 관련 서적에도 전래의 명당자리로 명기되어 있었

다. 좌우로북풍을막아주는좌청룡우백호의배산임수

에다 정남방향에는 넓은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가슴

이탁트이는곳이다. 1985년독립기념관을설계할때그

는기념관전체를굽어볼수있는흑성산꼭대기독립봉

중계탑에장승과솟대형상을디자인하여이는전통계

승과 주변 환경과의 연계가 가장 성공적으로 조화됐다

는평가를받았다.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에서알게된당시김동호

문공부기획관리실장이 화진흥공사사장이되면서서

울종합촬 소 설계를 맡기자 그는 모스크바 모스필름

스튜디오, 부다페스트의 마자르필름, 이탈리아의 치네

치타(시네시티) 등 세계 30여 군데의 촬 장을 꼼꼼히

돌아보고 나서야 마스터플랜에 들어갔다. 서초동 국립

국악원의국악당설계에서도가야금명인황병기, 명창

박동진등국악관련자와독주자, 합주자, 지휘자, 무용

가들을고루만나인터뷰하는데만 6개월이걸렸다. 가

야금연주회에서‘옥구슬을굴리는듯한소리’를제대로

살리기위해어떤극장조건이가장이상적인가. 길놀이

와뒤풀이를위해무대와객석간의유리감을줄이고안

방같은극장, 혹은 마당같은무대분위기를조성한다

는결론을얻고이를이룩했다.

이때부터새시대건축과도시의최우선과제는환경

문제임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방송 출연, 환경교

육을 통해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환경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가최근에펴낸「새세기환경이야기(20세기문명의

반성과 새 천년을 위한 백서)」(2002년, 열화당)를 보면

그것은 단순한 환경에 대한 우려와 경각심을 뛰어넘어

인간이근본적으로해결하지않으면안될환경의심각

성과중요성을깊이있게조명하고있다. 어떤환경전문

가가이런연구를할수있을까할정도로인구와자원,

물과 식량 에너지 문제, 자동차와 현대 도시건축, 환경

오염, 대기오염, 토양의오염, 다이옥신과전자파, 생명

복제문제에까지치 하게파고들어문제점을제시하고

분석하여경각심을일깨우고있다.

환경을생각하는건축가로서자연과인간, 건축을연

문화예술이천삼년유월호 91

◀ 1985년 독립기념관 독립봉

▼ 1985년 독립기념관 독립봉 상징탑 및 안테나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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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한건축설계를시도하고실천하면서지난 1998년정

부의동강댐건설을반대하는‘동강을사랑하는문화예

술인의모임’을결성했고수억년간자연이빚어낸산과

강이 어우러진 절경과 선사유적과 서식동식물 등 생태

계의 다양성이 잘 보존된 동강의 배경을 주제로 한 미

술·사진전등『동강예술제』를개최하기도했다.

또훼손위기에처한경북안동시풍천면병산서원(屛

山書院) 지키기에나섰다. 병산서원은조선왕조광해군

5년(1613년), 「징비록(懲毖錄)」「신종록(愼終錄)」을 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을기리기위해세워진

것으로건축사적의미못지않게인간과자연의일치를

꾀한대표적건물이다. 규제개혁으로관련된건축법, 문

화재보호법이완화된점을틈타서원입구에새로운건

물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이 훼손

될것을우려하여그는새건물건립반대서명운동을펼

쳤다. 그리고병산서원에그치지않고전통건축을보존

하기위해전국문화재와주변건물실태를조사하는등

문화재전반에감시 역을넓혀나가고있다.

옥인동 일대에 대해 누구보

다 잘 알고 있는 그는 누상동

윤동주가살던집과시인이상

의 집, 김수임의 집들이 다른

업소로 개조되거나 바뀌는 것

을안타깝게여긴나머지서울

의 북촌과 중촌 등 역사적 흔

적들이 있는 지역은 전체를

‘고도(古都) 보존법’을 적용

해보존하는방법을찾아야한

다고 주장하고 강북 재개발의

바람이잘못불면정겨운골목

길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을 관

계자들에게주지시켰다.

이러한공적이인정되어지난 1996년문학의해에문

협으로부터‘가장문학적인건축가’로뽑혔다. ‘가장문

학적인건축가’가된것에대해그는이렇게말한다.

“내가 알기로는 문학적이란 말은 인간적이라는 것과

상통하는것일테고, 나아가사랑과연민을안다는뜻이

고 꿈과 낭만을 간직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 시나

수필이나소설같은건축이있을수있다면좋겠다. 그

리하여미사여구나다변한췌사(贅辭)들이절제되고승

화되어구름에달가듯이뭔가걸리적거리는게없는그

런건축으로완성될수있으면좋겠다.”

실제로 그의 건축작품은 갤러리 빙을 예로 들었듯이

모든것이간결하게정리되어걸리적거리는것이없다.

그가 만든 주요 작품은 독립기념관, 서울종합촬 소

외에 통일연수원, 경주신라민속촌, 1977년까지 한국에

있었던가장대규모설계이던한국종합전시관(KOEX),

박경리기념관, 외무부외교센터, 서울 원서동불교박물

관, 주한 러시아연방국대사관, 분당시범단지공동주택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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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

▼ 1990년 서울종합촬 소(양수리)

▶ 1987년 통일연수원

▶▶ 1984년 국립국악당

▶▶▶1979년 서울 한강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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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출판사가뽑은‘ 세계의건축가101명’에선정

그는건축계에서발이넓기로도유명하다. 우선직함

만봐도현재건축환경연구소광장및도서출판광장대

표, 한국건축가협회 명예이사, 한국실내건축가협회 명

예회장,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관회 이사, 김수근문

화재단이사장, 건국대건축대학원겸임교수이다. 국무

총리실 월댐 공동조사단 문화분과위원장을 지냈고,

동강을사랑하는문화예술인의모임, 환경문화예술진흥

회·동강내셔널 트로스트·병산서원을 지키는 모임의

공동대표와NGO푸른나라대표, 국회환경포럼자문위

원을맡고있다.

책도많이냈다. 박식한이론을바탕으로「우리시대의

거울」「한국 현대건축의 이해」「빛과 그리고 그림자」

「우리시대건축이야기」「건축가없는건축」과건축소설

인「마천루」를 번역, 지난 3월에는 회갑을 맞아 프레스

센터국제회의장에서「행복을그리는건축가」출판기념

회를가졌다. 이출판기념회에는명사로지칭되는각분

야의유명인들이거의빠짐없이참석하여문화예술·정

계·재계·종교·언론·학계에 이르는 그의 인맥이 얼

마나다양한가를보여주었다.

천성적인친화력으로각계각층과원만한교분을맺고

있지만김수근과함께일세대건축가의한사람으로지

칭되는김중업과의인연은묘한기연으로맺어져있다.

1980년소위‘망명생활’을청산하고김중업이프랑스

에서 귀국하던 초기에는 전시회평이며 작품집을 만들

때 을써주기도하는등존경하는선배, 아끼는후배

로자주만나는사이 다. 이후독립기념관설계를혼자

서다하고싶었던김중업이후배가앞장선것을심히못

마땅하게여기게되어“내가김원을매장시키는데여생

을바치겠다”는악연으로발전한것은건축계가다아는

사실이다. 그러나김중업이타계하기전자신이만든현

상설계안(案)을“김원선생이한번봐주었으면좋겠다”

고해서‘매장시킬놈’에서다시‘김원선생’으로호칭

이바뀐것은아이러니컬하기만하다. 승승장구와 욕

이얼룩진속에건축계대선배의미움을받아소원했던

일, 어지러운세속에휘말려야했던곤혹과환멸이있지

만그는비교적대과없이자신의삶을성공적으로가꾸

문화예술이천삼년유월호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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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있다.

지난 1985년일본가지마(鹿島) 출판사가뽑은‘세계

의건축가 101명’에선정되었고한국인테리어디자이너

협회 작품상(1984년), 엄덕문건축상(1991년)에 이어 한

국건축가협회가 주는 작품상을 9차례(1979·80·81·

82·83·85·86·91·95년)나받았다.

그는아름답고세련된조형감각과투철한소명의식을

갖고 자기화된 건축세계를 이룩하고 있는 건축계 중진

의한사람이다. 지난 40년가까이건축실무와경험에서

터득한진리는“건축은유행가처럼히트하는것이아니

며건축가는 웅일수없다”는것이다. 그리고“사람이

어디에사는가하는것은어떻게사는가하는것만큼이

나중요하다”는것과“어디에살고있느냐하는것은바

로 나 자신이 어떻게 사느냐의 반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한다.

그의사고력은“어느때는넓은물과같고어느때는

깊은산속같다”는말을듣는다. 그와절친한건축가공

일곤에의하면“하나에파고들면끝장을내고야마는건

축계의몇안되는완벽주의자의한사람”이다. 그러면

서도하나의건축을이룰때마다‘불사불루(不奢不陋)’,

지나치게사치하지않고누추하지않은, 누구나애정을

가질수있는부드럽고청수한공간을조성한다.

김원은 수많은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딛고 건축계의

기린아로우뚝선지오래다.

건축계의 엘리트로 상징되는 그의 위상은 자신에게

축적된 모든 것이 용해되어 왕성하고 의욕적인 창작품

이흘러나오는시기다. 그의꿈은자연과인간이일체감

을이룰수있는쾌적한공간에서‘자연속의건축’을실

천하려는것이다. 또한건축이놓일환경을아는전문가

로서이제는사람이사람답게대우받을수있는건축을

책임지고싶어한다.

“사람은 혼자서가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때비로소진정한삶의의미를느낄수있다”는말이그

의인간성과직업성을대변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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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

이세기 약력

·이화여대 및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신춘문예 소설 당선, 『현대문학』소설 추천

·『서울신문』에‘이세기의 인물탐구’(1992∼1999) 연재

·『대한매일』논설위원, 본지 편집자문위원·한국간행물위원회 심의위원

·창작집「바람과 놀며」「그 다음은 침묵」, 김옥길 평전「자유와 날개」외

·현대문학상·서울언론인클럽 신문칼럼상

▼2001년 부산 몰운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