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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저11장 우리고장의 의병항쟁과 독립운동

1. 머 리 말 ……………--……·………………………………--…---------…… ····4

2. 을미의병과 이천 ……………………………………………………………5

3. 을사조약과 이천의 구국운동 ……………--………---------……… .......... 7

4. 정미의병운동과 이천 …………………………………………--…·………9

5. 이천과 3. 1운동 ·····································································11 6. 이천의 독립투사들 --------------------------------------------------------…·……12

저12장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서

1. 을미의병과 이천의병 전적비---------………………………--…·………… 16

2. 의병장 김봉기 기념비------………………………………·····················20

3. 의 병장 임형순 순국추모비 ·························································22

4. 신둔면 3 • 1독립선언 기념비-----------------…------------…………… ·······24

5. 이수흥의사 기념상과 유택수의사 추모비 ………………………………26

6. 구연영 • 구정서 순국추모비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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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우리고장의 의병항쟁과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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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우리고장은 마한과 백제의 옛 땅이었으며 고구려가 백제 수도인 한성

을 빼았고나서 부터는 고구려의 남천현(南川縣)이 되었다. 그후 신라가

남천주(南川州)를 두어 삼국통일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고,서기 660년

삼국통일이 시작되면서 태종무열왕이 거느린 신라군이 맨처음 주둔하여

작전계획을 싼 곳이기도 하다.

통일신라가 되면서 황무현(黃武縣)이 되었고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는

이천(利}||)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와서 인구가 크게 불어나자 세종

28년(서기 1444)부터 이천도호부로 숭격되었고,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이천군과 음죽군올 합하여 오늘의 이천군이 탄생하였다-

조선시대 후기로 내려오면서 일본 • 청국 • 러시아를 비롯한 강대국들

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손아뀌에 넣으려고 세력다툼을 벌린 결과 청

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앞서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는

조선을 넘보는 외국의 세력에 대향한 첫 싸움이었는데, 이때 이천군 율

면 사람인 어재연 장군은 강화도 광성진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1894년에는 부패한 관리와 외세를 몰아내고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는

동학교도들을 중심£로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다. 갑오농민전쟁은 농

민봉기가 처옴 발생한 전라도 지방과 공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방

이 중심무대였지만 거의 전국적인 호웅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

가 일어났다. 이천에서도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봉기하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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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9일 관아를 습격하였으며, 이어서 부악산(셜봉산)에서 일본군과 전

투를 벌리기도 하였다.

이듭해인 1895년 을미년에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전국적인 의병운

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올미의병이라 부른다. 경기도 각 지방에서도 활

발한 의병항쟁이 전개되었으니 이때 경기의병의 중심무대가 되었던 곳

이 이천이었다. 그후 을사년과 정미년에도 이천 의병들의 항쟁이 매우

활발하였던 탓에 일본군의 보복으로 이천읍 시가지의 절반 이상이 불타

없어지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고장은 한말 의병항쟁의 중심지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많

은 독립투사들을 배출한 고장이었다. 그런데 이와같은 사실들에 대해서

우리들 자신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으며, 또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올해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고장의 독립운

동 사설과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배워서 그들이 남긴 숭고한 애국정신

파 민족애를 본받아야겠다.

2. 을미의병파 이천

고총 32년인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 지

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경기지역에서도 이천을 비롯한 광주 • 여

주· 시홍· 안성 ·죽산·포천 • 양근· 양주 등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

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이천의 의병항쟁이 눈에 띠게 활발하여 경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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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의 중심지가되었다.

이천의 의병운동은 단발령이 내려지자 서울로부터 내려온 유생 김하

락 • 조성학 • 구연영 • 김태원 • 신용희 퉁이 중심인물이었다. 을미년 11

월 17일 이천에 도착한 김하락과 그의 동지들은 이천화포군 도령장(都

領將)방춘식과 의논하여 포군 1백명을 선발하였고, 구연영 • 김태원 퉁

이 이들올 나누어 인솔하고 인근지역으로 다니면서 의병을 모집하였는

데, 광주· 양근 ·지평 ·읍죽·죽산·안성 둥지에서 많은 의병들을 모아

이천쭈창의소(利川守f昌義所)란 의병부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천수창의소의 대장은 민숭천이었고 김하락은 도지휘의 엄무를 맡아

대오를 편성하고 군사들올 훈련시키던 중, 드디어 이듬해인 1896년 1월

18일 신식무기들로 무장한 일본군 수비대 1백여명과 첫 전투를 벌리게

되었다. 이천의병들은 적이 넘어오는 길목인 ‘넓고개 양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였으니 적군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달

아나는 적을 광주 장청장터까지 추격한 의병들은 많은 무기와 군량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개선하였다.

2월 .13일 다시 일본군 수비대 2백여명이 공격해 와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천의병들온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웠지만 추운 날씨에

바람을 안고 싸워야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던 탓에 결국 패하고 말았다.

김하락은 흩어진 의병들을 모으고 다시 새로운 의병들을 모집하여 2천

명의 의병들로 부대를 재편성하니 이천사랍 박준영으로 대장올 삼았다.

그후 이천의병진은 형세가 유리한 남한산성으로 근거지롤 옮겨 주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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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여러 차례 일본이 지원하는 관군들과 전투를 벌렸으나 그때마다

승리하였다.

이천의병들은 남한산성을 굳게 지키면서 서울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서울진공작전은 일부의 배반자들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실

패하고 말았다. 광주유수 퉁의 벼슬을 주겠다는 관군의 꾀임에 빠진 배

반자들은 3월 20일 잔치를 벌려 장병들을 술에 취하도록 하고 이튿날

새벽 몰래 성문을 열어 놓았다. 열린 성문을 통해 일제히 들어닥친 관군

의 공격 앞에 의병들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채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 김하락은 일부의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제천을 거쳐 영남지방으

로 이동하면서 여러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벌리는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영덕지방 전투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우리 5백년 예

의의 나라가 섬 오랑케에게 먹힌단 말이냐. 차라리 내 몸을 고기 배속에

장사지낼망정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지는 않겠다’고 크게 부르짖고 강물

에 몸을 던져 최후를 마쳤다.

3. 을사조약과 이천의 구국운동

김하락과 함께 남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갔던 구연영은

도중에서 김하락과 헤어져 이천으로 돌아왔다.

그후 기독교를 믿게 된 구연영은 전도사가 되어 기독교를 전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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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과거의 의병 통지들과 함께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 강압으로

체결하고 외교권을 비롯한 조선의 주권을 빼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을사

보호조약이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다시 전국척인 의병항쟁이 맹렬하

게 일어났는데, 이천지방의 경우는 당시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사정

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무렵부터 이천에서는 구연영이 조직한 구국회

(救國會)가 민중들을 대상으로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구연영온 서원보 션교사와 함께 이천감리교회를 중심으로 광주 • 양근

• 여주·음죽· 진천 ·음성과 충주·제천 • 원주 지방까지 다니면서 포교

를 하는 한편, 1905년 이천구역 답입목사가 되면서 과거의 의병 통지들

과 교인들을 중심으로 구국회를 조직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구국

회는 이천 • 여주 둥지에서 조약체결을 반대하는 성토대회를 열어 군중

시위를 ’유도하고, 상가들이 일제히 문을 닫도록 하는 상가철시를 통한

저항운동을 벌렸다. 구국회는 한편 친일파들의 모임으로 일제의 시녀노

릇을 하는 일진회를 규탄하면서 무력항쟁이 아닌 평화적인 군중집회를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구국회는 1907년 정미의병운통이 일어나자 더욱 맹렬한 항일구국운동

을 벌렸는데, 이틀을 눈의 가시처럼 여긴 일진회에서는 일본군에게 구

국회의 활통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민중들 사이에 반일감정이 크게 전파

되리라고 밀고하여 마침내 일본군 수비대가 구연영을 체포하기 위해 출

통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실을 미리 안 구국회의 회원이 구연영에게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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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와서 몸을 피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구연영은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몸을 피하느냐’고 거절하고 태연히 있다가 체포되

었다.

이때 구연영의 아둘 구정서도 아버지를 도와 포교활동과 구국회의 일

을 보던 중이었다. 일본군들이 구연영 부자를 나란히 포박해 놓고 모진

고문을 하였지만 오히려 일본의 잘옷을 꾸짖다가, 마침내 1907년 음력

7월 16일 지금의 이천경찰서 서편 언덕에 있던 핵나무 아래에서 총살형

에 처해져서 부자가 함께 순국하였다.

4. 정미의명운동과 이천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트집잡아 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하고 정미

7조약이 체결되었으며, 군대가 해산되는 퉁 조선 강점을 눈 앞에 둔 일

본의 야욕이 노골화되자 다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정미의병

에는 강제로 해산당한 구 한국 군인들이 다수 참여하였는데, 원주진위

대 출신 인물인 민긍호의 의병부대는 제천을 중심으로 충주·죽산·장호

원·여주·홍천 둥지의 중부 내륙지방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정미년 당시 이천은 구연영·구정서 부자의 구국운동과는 별개로 활발

한 의병항챙을 전개하였으니, 김봉기·임형순·정용대 같은 의병장들이

이천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백사면 사람인 임형순은 <이천창의소>를

조직하여 의병활동을 하였고, 정용대는 양평 용문산에 본대를 두고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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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에서 좌군대장으로 엄형순과 합세하여 활동하였다. 김봉기는 마장

면 관리에서 의병올 조직하여 원적산 줄기를 타고 이동하면서 유격전을

벌렸으며, 신창현은 김봉기 대장의 부하로 있다가 김봉기 대장이 체포

당하자 계속 부대를 지휘하면서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이천은 이와같은 이천의병장들의 활약과 함께 원주의 민긍호와 이강

년 의병부대의 활동 무대가 되어 크고 작은 전투와 저항운동이 거의 매

일처럼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본군의 보복을 받아 이천읍을

비롯한‘R인근 마을들이 불에 타서 갯더미가 된 유명한 <이천충화 사건

>이 일어났다. 일본군들이 의병에 가담한 마을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

며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당시의 이천군수가 관찰사에게 피해상황을 보고한 내용을 보면 이천

읍의 480호를 비롯하여 신둔면과 백사 • 부발ι마장면 릉지에서 민가

930호가 불타 없어지고 사망인원도 14명이나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되어 있다.

영국의 신문기자인 맥켄지가 당시의 의병항쟁이 매우 격렬했던 지역

들을 돌아보고 기록을 남겼다. 맥켄지가 이천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보

면 ‘이천읍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일본군을 피해

산 속으로 달아나 숨어 버렸다. 한 노인을 만나 여자와 아이들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더니 높은 산을 가리키며 모두 저기로 갔소, 여기서 폭행

을 당하느니 보다는 아무도 없는 산 속에 숨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라

고 대답했다’라고 적고 있어 당시의 처참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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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있다.

5. 이천파 3·1운동

한일합방 이후로는 조선인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탄압으로 노골적인

항일운동이 국내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어 만주를 비롯한 해외에서의 투

쟁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이 선포되면서

열화같은 만세운동이 삼천리 방방콕콕으로 파도처럼 번져 갔다.

이천지방의 3 • 1운동은 3월 30일부터 4월 5일 경까지 약 일주일간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이천읍과 마장면, 신둔면을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만세시위를 벌렸다. 마장면에서는 관리 사람인 박종설 • 이창호 • 이기재

퉁이 주동인물이 되어 오천 장날인 3월 30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이날

저녁 오천 장터에는 약 1천여명의 군중들이 운집하여 만세를 불렀고,

일본경찰의 총검에 의해 1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마장면의 시위운동은

이후 2∼3일간을 계속되었으며 덕평리에서는 별도로 3백여명이 모여 시

위를 벌렸고, 박종설을 비롯한 주모자들이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

었다.

신둔면에서는 서기창 • 이상혁 등이 중심이 되어 4월 1일 신둔면사무

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렸다. 지나가던 일본사람을 붙잡아 함께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기도 했으며, 시위군중들은 이천읍을 향해 행진

하다가 급히 출통한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고 주동인물들이 체

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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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읍에서는 4월 2일 이천장날올 기해 약 3백여명의 시위군중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으며, 당시의 이천공립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최종석 •

강문형 퉁이 주도하였다. 모가면 서경리에서는 신둔면 시위운동에 참여

했던 권충효와 한석통이 주통이 되어 시위를 벌렸고, 4월 4일에는 장호

원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그밖애도 백사면 송말리와 현방리, 대월면

군량리, 부발면, 율면 둥지에서도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6. 이천의. 독립투사들

3. 1운동 이후의 민족 항쟁은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과 함께 만주일대

와 인근지역에 근거지를 둔 무장 독립군 단체들에 의한 활발한 무력 항

쟁으로 발전하였다. 독립군 단체들은 군사작전을 통해 정면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소수의 정예요원을 국내로 잠입시켜 일제의 요인암살,

식민지 중요기관 파괴, 군자금 모집같은 임무룰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천 사랍 이수홍은 1926년 주만참의부의 요원으로 국내로 잠입하여

동소문사건·백사면사건·안성군사건·수은통사건을 차례로 일으키며

신출귀몰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친지의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유돼수는 이천읍에 거주하면서 이수홍을 도와 수은통사건

을 혼자서 감행하는 퉁 활동하다가 함께 체포되어 순국하였으며, 율면

총콕리 사랍인 김원조 역시 독립군 요원으로 통지들과 함께 군자금 모

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순국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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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룡은 1932년 조선혁명군의 일원으로 사령관 양세봉으로부터 군자

금 모집의 비밀업무를 받고 고향인 장호원에 내려와 대담하게도 장호원

장날 한낮에 통일은행지점을 습격하였다. 은행에서 거금 1만 3천원을 빼

앗은 이선룡은 산줄기를 타고 몸을 피하면서 동원된 수천명의 일본경찰대

와 숨박꼭질을 계속하다가 애석하게도 강원도 문막에서 체포되었다-

장호원공립보통학교를 나온 박영순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향에서

자기 또래의 동지들을 모아 〈삼인혈맹〉과 〈독수리소년단〉을 조직하여,

일본이 곧 패망한다는 통문을 몰래 돌리는 퉁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그밖에도 여기환 • 유성근 • 김기주 • 김현국 • 이기룡 같은 많은 이 고

장 출신애국지사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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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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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미의명과 이천의명전적비

〈위치 : 이천군 신둔면 수광3리 (넓고개)〉

조선조 말에 일어났던 첫 의병

운동은 1985년 말부터 1986년까

지 계속되었던 을미의병운동이었

다. 이때 경기의병의 중심무대가

된 곳이 이천이다. 이천에서 봉

기한 의병들은 86년 1월 30일 남

한산성으로 진을 옮기기까지 인

근 각 지역의 의병들올 규합하는

퉁 힘을 기르다가, 이를 저지하

려는 일본군과 광현(廣뼈), 이현

(짧l뼈), 원적산 퉁지에서 전투를

벌리기도 했는데, 광현은 광주군과의 경계인 지금의 넓고개를 말한다.

을미의병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을미년 8월에 일어났던 올미사변과 11

월에 내려진 단발령이었다. 당시 일본공사인 미우라가 무뢰배들을 이끌

고 경복궁으로 침입하여 명성왕후를 무참하게 살해한 올미사변이 일어

나자 민중들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이르렀다. 거기에 강제로 상투를 잘라

야 하는 단발령까지 내려지자, 이천으로 내려온 김하락 • 조성학 • 구연영

• 김태원 • 신용희 퉁이 중심이 되어 이천의 의병운동이 시작되었다.

을미년 11월 16일 이천에 도착한 김하락과 그의 통지들은 이천의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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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군 도령장 방춘식과 상의하여 포군 1백명을 우선 선발하였다. 선발된

포군 1백명올 여러 대로 나누어 구연영 • 조성학 • 김태원 • 신용희 퉁이

인솔하고 양근 • 지평 • 광주 • 안성 • 음죽 둥지로 흩어져서 군사를 모으

게 하였는데, 조성학은 광주산성으로 가서 별패진 포수 3백명을 모았고,

구연영은 양근 • 지평의 군사 3백명올, 신용회는 음죽 • 죽산지방에서 화

포군 3백명을 모으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태원은 안성으로 가서 그곳에

서 봉기한 의병대장 민숭천을 합류토록 하였고, 그 밖에 안성 • 포천 •

시흥 • 수원 퉁지에서도 의병들을 모아 부대를 편성하였다.

의병부대의 명칭올 이천수창의소(利川守f昌義所)라 정하고, 창의대장

에 민숭천, 도지휘에 김하락을 비롯한 각 부서의 책임자를 정한 다음,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작전계획을 세우는 퉁 크게 기세를 떨쳤다.

광현(넓고개)전투는 이천수창의소가 결성된 후 일본군을 상대로 하여

벌린 첫번째 전투이다. 1986년 1월 17일 일본군 수비대 100여명이 이천

으로 공격해 오고 있다는 척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이천수창의소에서

는 의병들이 대부분 전투경험이 없는 일반백성틀 임을 감안하여 복병전

술을 쓰기도 하고, 조성학 • 김태원 • 구연영 • 신용희 퉁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넓고개를 중심으로 야산에 매복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기다리

고 있었다. 이튿날인 1월 18일 일본군이 나타나자 먼저 조성학의 부대

가 공격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는데 적을 맞아들여 두 시간 가량 격전을 벌리던

조성학이 갑자기 쇠북을 울리며 퇴군하니, 적병이 고함을 치며 뒤를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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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쫓아와 넓고개 아래에 당도하였다. 그때 문득 대포소리가 울리며 구

연영은 전면을 가로 막고, 김귀성 • 신용희는 산중턱으로 부터 쏟살같이

내려오면서 공격하고, 조성학은 적의 퇴로를 가로 막고 사방에서 공격

을 감행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가 하루해가 지나서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고 하니 이 날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초생달 마

저 넘어가고 밤 열시경이 되자 일본군은 간신히 퇴로를 열고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도주하는 적을 쫓아 광주까지 추격을 하니 이튿날 새벽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측 기록에는 일본군 수비대가 180명이 출동하여 불과 2∼3

명만 살아돌아갔다고 하는데, 기록이 얼마쯤 과장되어 있다고 한다해도

이천수창의소가 첫 번 전투에서 눈부신 숭리를 거두었슴을 알 수 있다.

이 넓고개 전투의 대대적인 승리는 그때까지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던

의병항쟁중에서 의병측이 최초로 거둔 통쾌한 승리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승리는 그후 의병봉기가 전국적으로 크게 퍼져나가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군과의 첫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천의병진은 사기충전하여 황

소 세 마리를 잡아 군사들을 먹이고, 사방 각 요로마다 병력을 파견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그러다가 2월12일 일본군 약 200명이 다시 공격

해 오자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종일 전투가 진행되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양 군사가 일시 후퇴하였다가, 다음날 새벽부터 다시 접전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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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 그런데 추운 날씨인데다가 공교롭게도 눈보라가 의병진 쪽으로

사납게 불어 의병들은 얼굴을 들고 싸울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

본군이 공격해 오자 의병들은 싸움을 포기한 채 흩어지고 말았다.

일시 봄을 피했던 김하락은 다시 이천으로 돌아와 흩어진 의병들을

모았다. 대장 민숭천을 박준영으로 바꾸고 모여든 군사틀을 점검해 보

니 모두 2천여명에 이르렀다. 그후 대오를 정비한 이천수창의소의 의병

들은 2월 28일 광주 남한산성으로 본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천의병전적비는 을미의병 당시 의병들이 일본군과 접전하여 통쾌한

첫 승리를 거둔 사실을 기념하고 이를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1988년 이원회(利元會)가 격전의 현장아었던 넓고개 마루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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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명장 김봉기 기념비

〈위치 : 이천군 신둔면 수광리 신둔국민학교 앞〉

績블

1907년 정미의병 당시 활약한

의병장 김봉기는 신둔면 남정리

사랍으로 당시 43세 였다. 기울

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여

의병봉기의 뜻올 세우고 이근풍

·주창룡·조상현·엄옥여 퉁의

동지들과 의논하여 1907년 7월

초순 이천군에 있는 이근풍의 집

에서 군포수 32명을 모집하고 의

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이근풍을 총대장으로 삼아 출

진하여 광주군에 도착하였는데 총대장 이근풍이 다른 사람들과 의견이

맞지않아 도망하였으므로 김봉기가 총대장이 되어 이천옵올 습격하고

일본 기병대와 접전올 벌렸다.

그후 김봉기 부대는 새로 가답해온 의병들로 수효가 점점 -불어나서

광주 • 양근 • 지평 • 여주 • 이천 지역을 누비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렸고,

장호원 • 음죽 • 죽산 • 안성 • 양지에서도 여러 차례 기습전올 감행하고

친일파 일진회원들을 붙잡아 처형하기도 했다.

그해 9월 양주군 마을에 도착한 김봉기 부대는 우연히 구 한국군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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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로 있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편지를 써줄테니 그 편지

를 가지고 서울에 사는 자기의 당축을 찾아가면 많은 군자금을 줄 것이

라고 하였다. 의병부대를 이끌려면 많은 식량과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

에 이 말에 깜박 속은 김봉기 대장은 농사군으로 변장하고 서울로 잠입

했다가 동족의 밀고로 체포되고 말았다.

그후 김봉기 대장은 일본경찰로부터 무수한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취소관에게 당당히 말하기를 ‘우리 한국

민족이 5백여년을 성장하여 왔는데 너희 왜놈들의 마수로 인하여 임금

께서 압박을 받으시고 나라가 하루 아침에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삼천리 금수강산이 허공에 뜰 지경이 되었으니 이 나라의 백성된 도리

로써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창의한 뜻은 왜국을 몰아

내어 나라를 보전하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하기 위함이었는데 오늘

이 지경이 되었으니 오로지 통분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김봉기 대장은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김봉기 대장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여러 지역을 누비며 한번도 패

전한 적이 없었다고 했으니, 부하들을 잘 통솔하고 전략에도 뛰어난 훌

륭한의병장이었다.

1992년 3월 신둔면 면민들이 뜻을 모아 신둔국민학교 정문 옆에 추모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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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명장 임형순 순국 추모비

〈위치 : 이천군 백사면 현방리 현방공원〉

엄형순 의병장은 본관이 풍천

이고 1870년 5월 22일 이천군 백

사면 송말리에서 태어났다. 송말

리는 풍천 임씨의 선조가 3백여

년 전에 터를 잡아 마을올 이룬

곳이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

으며,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퉁 일본의 야욕이 노골화되니 또

다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항

쟁이 정미의병운동이었다. 입형

순은 당시 37세의 청년 유생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성품이 강직하여 불

의를 용서하지 않았고 용맹과 담력이 남달리 뛰어났다고 한다.

정미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엄형순도 스스로의 몸을 던져 구국운동에

앞장서기로 결심하고 의병올 모집하여 이천창의소라 이름하였다. 엄형

순 대장이 이끄는 이천창의소에서는 여주의 의병진과 긴밀한 연락올 취

해 광주· 양근 • 양지 ·용인 ·음죽· 여주 둥지를 무대로 유격전올 전개

하여 일본군과 수십차례 접전올 벌렸다.

이해 10월 임형순 의병진올 비롯한 인근 지역의 의병들이 지평군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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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집결하였는데 그 수효가 천여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11월 10일에

는 임형순이 광주군 실촌면장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들의 식량과 짚신을

조달하는데 협조를 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후 임형순 부대는 양

지군 추계리에 있는 매국노 송병준의 집을 한밤중에 습격하여 일본군

한명을 죽이고 총기와 화약을 노획하였다.

임형순 부대는 원적산에 진을 치고 여주군 이포에서 충주지역으로부

터 군량미를 싣고 남한강을 따라 내려오는 배를 여러 차례 습격하여 군

량미를 빼핫아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다. 이천창의소의 의병들은

그후 점차 일본군의 토벌전에 밀려 흩어지고 말았으며, 대장 입형순은

제천방면으로 퇴각했는데 1908년 5월 안동에서 적군과 교전하다가 전사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형순 의병장 순국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와 후손들이 뜻을 모아 백

사면 현방리공원 안에 순국추모비를 건립하고 1993년 12월 21일 제막식

올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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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둔연 3•1독럽선언 기념비

〈위치 : 이천군 신둔면 수광1리 신둔면사무소 앞〉

신둔면의 3. 1 만세운동은 신

둔연 수하리 사랍인 서기창과 이

상혁이 주동이 되어 3월31일 같

은 마올 김명규의 집에서 거사

준비를 위한 모임올 갖고, 김영

익(수하리 거주)이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같은 날 신둔면내 열

두 동네의 집집마다 이틀 돌렸

다. 거사 준비에는 서기창 • 이상

혁 • 김영익 외에도 이치조(도암

리 ) • 송면호(남정 리 ) • 권중효(모

가면 서경리)와 당시 백사면 현방교회의 목사이던 김순철 퉁이 함께 참

여하였다.

이들은 처음 이천 장날인 4월 2일올 거사일로 하여 시위군중들올 이

끌고 이천옵내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경찰들의 경계가

삼엄했기 때문에 시위 일자롤 앞 당겨 4월 1일로 정하였다. 4월 1일이

되자 거사장소로 정한 신둔면사무소 앞에는 약 500명의 연민들이 모여

들었다. 이상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기창이 만세를 선창함으로

써 시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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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가 벌어지자 지나가던 행인들도 함께 참여하여 만세를 불렀고,

일본인이 타고가던 자동차를 세워 강제로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부

르게 하기도 했다. 마침내 시위대열이 이천읍내로 향하자 급히 출동한

일본 헌병대가 총칼로 위협하여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후 일본 경찰은 면내를 샅샅히 수색하여 주동인물들을 체포하여 혹

독한 고문을 가했으며, 서기창 • 이상혁 양인이 징역 1년형을 받고 서대

문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고 사발통문을 작성한 김영익은 태형을 받았

다. 그밖에 이치조 • 송면호 • 김순철은 이천헌병대로 팔려가서 고문을

받았다‘

1985년 4월 한천회를 중심으로 한 신둔면민들이 신둔변의 3 • 1운동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기미독립선언 신둔면의거기념비)를 신둔

면사무소 앞에 건립하였으며, 1986년 12월에는 서기창· 이상혁 두 사람

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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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수홍의사 기념상파 유태수의사 추모비

〈위치 : 이천군 이천읍 창전리 이천국민학교 앞〉

이수홍 의사는 본관이 연안이며 1905년 9월11일 이천옵 창전리 224번

지에서 유생 이일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일형은 일찌기 연암

최익현 선생올 따라 의병항쟁에 가담하였던 인물이었기에 이수홍 의사

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 강한 민족정신과 배일감정을 지녔다

고 한다.

1915년 11세 때 이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이천국민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이사하여 어의동 공립보통국민학교를 다

녔으며, 1년 후에는 학업올 중단하고 백사면 원적산에 있는 영원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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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사진점에서 일하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사람들

올 멸시하고 심하게 차별대우를 하는 것을 보고 항일운동을 위해 몸을

받치기로 결심하였다.

19세 되던 해인 1923년 만주로 건너간 이 의사는 부친의 의병시절 동

지인 의군부 총재 채상덕 선생을 만나서 채상덕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많은 감화를 받게 되었다. 스숭의 권유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이 길림성

에 세운 산ι명학교에 들어간 이수흥 의사는 본격적인 독립군 간부 훈련

을 받고 이듬해 2월에 학교를 졸업하며, 1925년 3월에는 역시 스숭의 권

유로 주만참의부 독립군에 가담하여 제2중대 특무정사가 되었다.

그런데 같은 달 고마령 산골짜기에서 작전회의 중이던 참의부의 주력

부대가 동족의 밀고를 받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고마령사건〉이 벌어 졌다. 참의장 최석순 이하 29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세명만이 겨우 목숨을 건진 고마령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서도

다행스럽게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이수홍 의사는, 중상을 입은 다른 대

원 2명을 이끌고 간신히 스승 채상덕에게 돌아와 참변올 알렸다. 패전

의 책임올 느낀 스숭은 ‘조국의 광복만을 일념으로 바라고 살아온 내 뜻

올 이어받아 기회를 엿보아 거사를 감행하여 민족의 정기가 아직 죽지

않았음올 보여 달라’는 유언올 납긴 뒤 자결하였다.

스승의 유언에 따라 의거의 뜻을 품은 이수홍 의사는 1926년 5월 권

총 두 자루와 실탄을 지니고 만주를 떠나 국내로 잠입하였다. 먼저 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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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필요했으므로 7월 6일 황해도 평산에서 부호의 집을 찾아가 군자

금을 요구한 〈평산사건〉을 일으켰다.

평산사건을 일으킨지 나흘만인 7월 10일 서울에 도착한 이 의사는 통

소문파 출소률 습격하여 보초를 서고 있던 일본인 순사를 권총으로 저

격하여 중상올 입도록 한 〈통소문사건〉을 잇달아 일으켰다. 6. 10만세

운동의 열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서울 장안을 깜짝 놀라게한 이 사건으

로 수천명이 동원된 일본경찰은 계엄상태에 까지 이르러 법인찾기에 혈

안이 되였으나, 이 의사는 철통같은 경계망을 감쪽같이 피해 고향인 이

천에 이르렀다.

7월 13일 이천읍에 도착한 그는 친구인 유남수를 찾아가서 유태수 •

남수 형제와 더블어 다음 거사를 모의하였다. 9월 9일 유태수와 함께 호

남은행 안성지점을 습격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성 부호 박숭륙

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한 〈안성군사건〉을 일으켰다. 이어서 10월

20일 이천군 백사면 현방리에 나타나 단신으로 현방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백사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저항하는 면서기를 사살한 〈이천군

사건〉올 일으켰다.

그후 이 의사는 몸을 은신한채 새로운 거사계획을 준비하던 중 부친

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성으로 가서 부친의 장례를 치르며, 한편

유태수 의사는 10월 25일 서울 수은동에 잠입하여 전당포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요구한 〈수은통 사건〉옳 일으키게 된다.

일본경찰의 철통같은 경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하여 사건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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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자 당시의 신문들이 이것을 〈기내 4대사건〉이라고 하여 크게 보도

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일본경찰에서는 서울과 경기도내 경

찰병력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범인찾기에 나섰다.

결국 이수홍 의사는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이천읍으로 돌아왔다

가 11월 8일 이천경찰서 무장 경찰대에 의해 체포되고 마는데, 현상금을

탐낸 가까운 친척의 밀고로 이 의사의 정체가 탄로가 난 때문이었다.

그후 재판과정에서 이 의사는 자신이 임시정부 주만참의부에 소속된

독립군의 신분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자신이 한 일이 독립전쟁을 수행

하기 위한 당연한 임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을사년 이후 20여년간을 우리 군대는 너희 일본을 상대로 항명 혈전

을 하지않은 날이 없다- 더구나 기미년 독립만세 이후 8년 동안을 우리

독립군들은 죽융도 두려워 하지 않고 피를 흘리며 싸웠고, 8년 간에 걸

쳐 동원된 군대가 3만명으로 적들을 무수히 죽였다. 그러나 이것은 국

경방면에서 일부전쟁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들은 국내로 깊숙이 들어와

서 너희들의 소굴을 도륙하려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 독립군의 직무인

것이다. 너희들은 지금 한 • 일 양국이 전쟁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결국 이수홍 의사는 사형언도를 받고 1929년 2월 27일 잃세의 한창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사형언도가 내려지자 담당 변호사

가 항소할 것올 권했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인데 어찌 구차

한 생명을 보존하려 구구한 변명을 하겠느냐고 거절하였다.

형장에 가서도 태연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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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수흥 의사의 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k게 있다.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시키려고 하였는데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률 맺지 못하고 가게됨이 원통한즉, 우리 동포들은 끝까지 싸

워서 나라의 독립을 성취시켜 주시기 바란다』

는 최후의 한마디를 씩씩하게 남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힘차게 부

른후 망서림 없이 사형대로 올랐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이 의사의 공훈올 기리기 위해 유해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1962년 건국훈장올 수여하였다.

1982년 10월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이 〈이수홍의사 기념사업회 〉를 구

성하고 그의 의거사실올 널리 얄리기 위한 전기집올 펴냈으며, 이 의사

가 일본경찰대에 의해 체포된 현장인 이천국민학교 앞 공원에 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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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을 추진하여 1985년 2월 27일 제막식을 가졌다.

유택수 의사는 이천군 읍내면(이천읍)중리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유

창륙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천읍에서 자동차 조수로 일하던중 밀

명을 띠고 찾아온 이수홍 의사의 감화를 받고 동생 유남수와 함께 이

의사를 도와 무장항일투쟁에 참가하였다.

1926년 9월 이수홍과 함께 안성의 부호 박숭륙의 집을 습격하여 군자

금을 요구한 〈안성군 사건〉을 일으켰으며, 〈백사면 사건〉을 일으키고 피

신하는 이 의사를 통생과 함께 도피시키기도 했다. 10월 25일에는 삼엄

한 경찰 경계망을 뚫고 훌로 서울로 잠입하여 수은통 전당포를 습격한

〈수은통 사건〉을 감행하였다.

이수흥 의사와 함께 체포되어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1929년 2월 서대

문형무소에서 2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한편 동생 유남수는 2년간의

징역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1968년 정부에서는 유택수 의사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고, 1985년 2월 〈이수홍의사 기념사업회〉에서 이수

홍 의사 기념상과 함게 추모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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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연영 ·구정서 순국 추모비

〈위치 : 이천군 이천읍 중리 이천중앙감리교회 안〉

구연영은 1864년 6월 20일 서

울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인 철조

역시 유인석 의병장 밑에서 의병

항쟁에 참여했으며, 아들인 정서

도 부친올 도와 구국운동을 전개

하다가 부자가 합께 순국하였으

니 할아버지에서 손자에 이르기

까지 가족3대가 모두 일제에 항

거한 자랑스러운 의혈가문이다.

구연영의 항일운동은 그가 32

세때인 1895년 김하락과 함께 이

천에서 봉기한 올미의병의 의병장으로 참여하면서 시작된 의병항챙기

와, 을미의병이 실패한 후 기독교 전도사가 되어 교세 전파와 함께 애국

계몽운동올 전개해 나간 구국운동기로 나누어 진다. 구연영은 이 고장

출생은 아니었지만 의병활동에서 부터 순국하기까지 12년간올 이천을

무대로 활동하였고, 이천에서 순국하여 자랑스러운 이 고장의 애국선열

이 되었다.

올미의병 당시 구연영은 이천의병진의 중요인물로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천수창의소의 중군장이 되어 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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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후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서울진공작전올 준비하던 이천 의병진이 통족의 배반으로 무너지자, 남

은 의병들을 이끌고 김하락과 함께 영남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항

전하였다.

도중에 김하락과 헤어져 이천으로 돌아온 구연영은 기독교에 입문하

면서 일제에 대한 투쟁방법을 무력투쟁에서 평화적인 애국계몽으로 바

꾸게 되었다.

1905년‘을사조약으로 또 다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나자 구연영

은 의병시절의 동지들과 교인들을 중심으로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하여

이천을 비롯한 인근 지역을 순회하면서, 포교활동과 함께 애국계몽운동

을 앞장서서 이끌어 나갔다.

가는 곳마다 군중들을 모아놓고 일본의 야욕을·폭로하고 일진회를 규

탄하는 모임을 열어 백성들의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높였고, 상점들이

일제히 문을 닫도록 하는 상가철시운동을 벌려 항거하기도 하였다. 구

연영의 아들 구정서 역시 전도사가 되어 부친을 도와 부자가 함께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이천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07년 7월 16일 이천장터에서 총살형으로 부자가 함께 순국하였다.

1979년 9월 6일 교인들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05년부터 순국할 때

까지 담임목사로 있던 이천중앙감러교회 안에 구연영 • 구정서 부자 순

국추모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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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매 품〉

1995년 7월 10일 발행 발행인/이 은구 편집인/이 인 수

발행처/이 천 문 화 원 경기도이천군이천읍 창전리 산1(군민회관 내) 전 화 (0336)잃5--2316

언 쇄/홍익문화인쇄사 전 화 (02)274-8110

※ 이 책은 이천군의 지원으로 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