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 web view통신시대의 출발. 가. 통신의 시작. 컴퓨터 통신의 역사는...

171
. 통통통통통 통통 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통통 통통 (·)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1856 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40km 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통 (teletype)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2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 통통통통 통통 7, 8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통통 통통통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통 1 통통 통통통 통통 통 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Off Line)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통. 1876 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 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 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 통통 2-3 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 통통통통 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 통통통통 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 통. 통통 통통 통통 1876 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 통 통통통 통통. 통 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 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통 통통통 통통통 통

Upload: lamkiet

Post on 30-Jul-2018

213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TRANSCRIPT

. 통신시대의 출발

가. 통신의 시작

컴퓨터 통신의 역사는 전신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신은 모르스와 그의

조수인 베일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된다. 모르스는 영어를 위한

전기부호를 도트(·)와 대쉬(-)의

조합으로 만들었다. 1856 년 그는

의회의 지원을 받아 40km 떨어진

발티모오와 오하이오 철도역 사이의

장거리 전신서비스를 시작한다.

텔레타이프(teletype) 개발은

프랑스의 통신기술자인 에밀 보도에

의해서 시작된다. 그는 최초로 전신에

2 진체계를 응용하여 통신의

신뢰도를 높인다. 그러나

텔레타이프의 상업적인 성공은

뉴질랜드 출신인 도널드 머레이라는

기사였다. 최초의 작품은 원통형의

글판을 손으로 돌리는 정도로

조악했다. 주위의 혹평에 굴하지 않고

이를 개량해 나아갔다. 그 시대에는

초당 7, 8 자를 보낼수 있었다.

텔레타이프는 종이테이프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보다 속도의 증가를

꾀하였다. 수신자측에서는 느린

타이프 대신 종이 테이프로 1 차로

수신을 받은 뒤 종이 테이프를 걸어서

원문을 재구성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이 오프라인(Off Line) 방식의

시초가 된다. 텔레타이프는 벨에 의해

발명된 전화 기술로 크게 진보한다.

1876 년, 벨은 이미 알려진 있는

전신용 선로를 이용하여 음성정보를

보내서 상대방의 직접적인

음성정보를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벨의 원래 목적은 음성신호의

상호 전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도 음악을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벨의 방식에서

한가지 획기적인 것은 서로 다른

전파를 한 도선에 서로 다른 주파수

대역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대략 초당 2-3 백 정도의

주기적인 진동을 한다. 이 단위를

헤르츠라 한다. 예를 들면 피아노

건반의 높은 쪽을 울리는 주파수는

사람의 목소리보다 높은 주파수를

가진다. 따라서 한 전선에 전신

정보나 텔레타이프 정보는 보다 높은

주파수 대역에 실어 보내고 인간의

육성은 훨신 낮은 주파수 대역에 실어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한 전선에

매우 인접한 대역폭을 선택해서 여러

종류의 메시지를 한꺼번에 보내려

한다면 각 전자파의 간섭 현상으로

말미암아 부호들이 뒤엉키게 된다.

한전선에 여러 주파수의 정보를

보내는 통신을 주파수 분할 다중화

방식이라 한다.

나. 벨의 전화 발명

1876 년, 벨은 이미 알려진 있는

전신용 선로를 이용하여 음성정보를

보내서 상대방의 직접적인

음성정보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즉

한 전선에 전신 정보나 텔레타이프

정보는 보다 높은 주파수 대역에 실어

보내고 인간의 육성은 훨신 낮은

주파수 대역에 실어 보내는 방침을

취하게 됐다. 그러나 한 전선에 매우

인접한 대역폭을 선택해서 여러

종류의 메시지를 한꺼번에 보내려

한다면 각 전자파의 간섭 현상으로

말미암아 부호들이 뒤엉키게 된다.

이래서 생겨난 데이터전송방식이 한

전선에 여러 주파수의 정보를 보내는

주파수 분할 다중화 방식이다.

2 .컴퓨터 시대의 출발

가. 천공카드

천공카드는 직조회사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이미 1725 년에 구멍이

뚫린 종이로 직물기를 조종하는

방법이 보촌(Basile Bouchon)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짜여진 직조물의

모양에 따라 종이에 구멍을 뚫어

놓고, 이 종이가 일련의 바늘에 의해

눌리면 구멍이 뚫린 곳은 그 자리에

있고 나머지들은 앞으로 움직인다. 이

때 직조기의 작동은 이 선택된 바늘의

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보촌의

직조기는 다른 직조기들에 비해

일련의 바늘만을 사용한 점에서

단순한 점에서 단순한 것이었지만

이것이 최초였다. 일련의 바늘들을

이용한 개량품들이 곧 등장했는데 이

기계들은 감긴 종이 대신 아주 작은

구멍이 뚫린 천공카드를 긴 벨트에

연결해서 작동시켰다. 1801 년에

잭쿼드(Joseph Marie Jacquard,

1752-1834)는 직조산업에 혁명을

불러 일으킨 자동직물직조기를

발명했는데, 이 기계는 바늘들이

끊임없이 회전하는 카드들의 체인에

따라 동작하는데 현재까지도

일부에서는 이러한 기계를 이용하고

있다. 1890 년 미국은 전체 국민에

대한 통계자료의 처리를 위해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즉 조사한

통계를 행정에 이용하려면 무려 2

년이 걸리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많은

상금을 걸고 이의 해결책을 공모

하였다. 이를 해결한 사람은 홀러리스

(Herman Hollerith, 1860-1929)라는 역무원이었고, 방법은

천공카드(punch card system)를

이용한 방법이었다. 이 방법 덕분에

미국 통계국은 4배의 속도를

향상시켰다. 홀러리스는 1894 년에

Tabulating Machine 이라는

회사를 세웠는데 1914 년에 C-T-R

Co.로 이름을 바꾸고 나중에 IBM

으로 발전하게 된다. 1907 년에

인구조사국의 기계기술자였던 파워

(James Power)가 천공카드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이 기계는

1910 년의 인구조사 때 사용되었다.

이 기계는 각기 다른 항목에 대응하는

240 개의 키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자기처럼 작동되었다. 필요한 모든

키는 사용 전에 이미 정의 되었으며,

기계의 천공속도는 정확도 면에서

점점 증가하였다. 이 기계의 성공에

따라 Power Tabulating

Machine 이라는 회사를 1911 년에

설립하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이

회사는 홀러리스(Hollerith)회사의

주요한 경쟁 회사였다. 여러 회사를

합병하는 가운데 이 회사는 초기에는

Remington Rand Organiztion의 일부가 되었다가 최근에는

NIVAC 의 일부가 되었다. 초기의

계산기들은 기어나 레버 등을 사용한

기계적 장치를 사용하여 신뢰도가

낮고, 크기가 크고, 무게가 무겁고,

연산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크기가

작고, 가볍고, 훨씬 빠르고, 신뢰성이

있는 기계를 개발한다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나. 컴퓨터의 개발

초기의 다수의 전자식 기계는 1938

년에 설립된 벨 텔레폰(Bell

Telephone) 연구소에서

만들어졌는데, 이들 특수 목적을 위한

컴퓨터들은 스티비츠(George R.

Stibitz) 회사에서 처음으로

작동되었다. 이 최초의 계전(relay)

컴퓨터는 Complex Calculator

라고 불리워 졌으며, 2 진 구성을

채택한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다. 이

기계는 1940 년에 최초로

가동되었는데, 두 개의 복소수의

산술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컴퓨터 신호를 이용한

장거리 전송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40 년대부터 이다. 1940

년대까지도 컴퓨터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다. 오히려 멀리 떨어진

컴퓨터를 전화선을 이용해 사용하는

것이 더욱 경제적이었다. 이런 일에

뛰어든 사람이 조지 스티비츠라는

벨연구소의 젊은 수학자였다. 그는

복소수 계산을 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그 성능이 뛰어나

건물내의 많은 수학자들이

텔레타이프로 이를 연결해

사용하였다. 스티비츠는 한

학술대회에서 아예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복소수계산기에 전신을

통해서 직접해 보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2 백 50마일의

전용케이블을 설치하고, 보통의

전신회로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1940 년 9월 11 일이 시범은 많은

관중들 앞에서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 제1세대 컴퓨터(

진공관)

1. 진공관 컴퓨터

가. 진공관의 발명

에디슨은 백열전등을 개량하면서

진공관을 발견하였다. 즉 전류가

전등의 탄소 필라민트와 양전하로

입혀진 금속판 사이의 진공속으로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에디슨은 진공관의 원리를 잘

응용하지 못했고, 그냥 에디슨

효과라고만 불렀다. 에디슨 효과의

실용성을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은

영국의 물리학자인 플레밍이었다.

이후 드 포레스는 플레밍의 도움으로

최초의 3극 진공관을 만들었다.

나. ABC

진공관을 이용한 최초의 컴퓨터는

아타나소프(John V. Atanasoff,

1903-1995))가 1939 년에 만든

ABC(Atanasoff Berry Computer)이다. 혹자는

아타나소프의 ABC 가 최초의 전자식

계산기라고 주장한다. 1934 년

아이오아 주립대학의 물리학교수인

아타나소프는 IBM 의 천공카드를

개조하여 계산을 기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5 년 뒤에 그는

컴퓨터의 원시 형태인 ABC 를

제작했는데 베리(Clifford Berry)

가 이 일을 도왔다.

다. Mark I

1944 년 에이켄은 IBM 내에서는

ASCC(Automatic Sequence Controlled Calculator)로

불리운 Mark I 을 개발한다.

마크 1(MarkⅠ)은 계산을 하기

위하여 긴 연속의 프로그램을

사용했는데 4칙연산과 삼각법에

의한 함수계산과 다른 복잡한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23 개의 자릿수를 가진 수를

더하거나 빼는데 0.3 초가

소모되었으며, 곱셈은 5.7 초,

나눗셈은 15.3 초가 소모되었는데 이

기계는 15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크 1 은 가로가 15m,

높이가 2.5m, 76 만개의 부품과

900km 의 전선을 사용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Mark I 의 후속으로

1948 년 1월 24 일 ASCC 의 후속

모델인 SSEC (Selective Sequence Electronic Calculator)이 발표되었다. 개발에

참여한 Watson 은 SSEC 를 전시한

건물이 기둥으로 인해 가려서 보기가

안 좋다고 기둥을 옮기기까지 했다.

수석 엔지니어는 프랭크

헤밀턴이었으며, 1948 년 1월 28

일에 공개시험을 통해

태음천체력문제를 수월하게

풀어냈다. 1952 년부터 1971

년까지의 달의 위치를 12 시간

간격으로 정확히 계산하였다. 이후

IBM 은 MODEL 701 을

생산하였다. MODEL 701 은

범용컴퓨터이면서 다량으로 생산되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최초의

컴퓨터이다. SSEC 는 모든

과학기술자에게 무료 사용이

허용되어 과학기술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이로서 IBM 은 컴퓨터계의

거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첫발을

내딛었다. 2 차대전이 막바지에

달하던 1943 년 영국의 보급선은

독일의 잠수함인 U 보트의 공격에

속수 무책이었다. 더욱이 독일은 모든

명령문을 에니그마(enigma,

수수께끼)라는 자동암호문 작성기로

작성된 암호문으로 만들어 보냈기

때문에 영국은 똑같은 기계를

입수하던지 이 기계를 만든 과학자를

납치해야만 했다. 이때 영국의 천재

수학자의 도움으로 이 암호문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젊은

수학자였던 알랜 튜링(Alan

Turing, 1912-1954)은 컬로서스

Colossu s 거인) 라는 암호문 해독

전용의 디지털 컴퓨터를 개발하여

독일의 암호를 쉽게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첫번째 프로토타입은 1944

년 2월에 개발되었고, 6월에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이때 개발된 기술과

사용된 지식은 1970 년대까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컴퓨터는

1500 개의 열전자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속도도 빠르고 계산

결과도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공학

판독기에서 해석된 메세지는 5 비트

(bit) 텔레프린트 코드로 테이프에

천공되었는데, 1 초에 약 5000

문자를 천공할 수 있었다. 내부적으로

컬로서스는 수를 세거나 비교하고,

간단한 산술 연산을 할 수 있는 전자

부속들을 갖추고 있었다. 계산결과는

전기타자기를 경유하도록

설계되었으며, 프로그램은

플러그판의 스위치를 조작함으로써

가능했다.

라. 프로그래밍 언어의 탄생

현대적 의미의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초는 2 차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의

공학자인 콘라드 추제(Konrad

Zuse)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발상은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무려 30

여년이 지난 1972 년에 가서야 빛을

보게 된다. 추제는 이미 1935 년에서

1938 년 사이에 Z-1, Z-2 라는

Computer 를 개발하면서,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개념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승전국 미국과

영국에서도 국수주의적인

프로그래밍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그레이스

머레이 호퍼(Grace Murray?

Hopper)라는 여성 과학자가

있었다. 호퍼는 유니백에서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연구했다. 그녀의

방식은 추제의 방식과 동일하게

대수학에 쓰이는 용어를 이용해

기계에 입력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수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복잡한

이진법이나 8 진법대신 자신들이

흔히 보아 온 수학기호를 쓰게

되었다. 1949 년 호퍼에 의해 최초의

원시적인 인터프리터인 쇼트코드

(Short Code)가 개발되었다.

쇼트코드는 이후 윌크스에 의해서

확장, 정리되어 어셈블러

(Assembler)로 나타난다.

어셈블러는 간단한 표현의 기호를

하나씩 기계 명령으로 바꾸어 주는

번역기였다. 1952 년 영국 출신의

애릭 글레니에 의해서 오토코드

(Auto Code)라는 고급 언어

번역기가 발표됐다. 오토코드는 마크

Ⅰ컴퓨터에서 사용됐으며, 최초의

컴파일러가 된다. 쇼트 코드와는 달리

오토코드에서 개발된 프로그램은

저장이 가능하였으며, 사용할 대에는

불러다 쓰기만 하면 되었다. 서브루틴

(sub routine)이라는 개념도 이때

생겨났다. 이후 호퍼는 오토코드보다

보다 나은 A-0 라는

언어번역시스템을 고안해 최초로

Compiler 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A-1, A-2 가 개량형으로

이어지면서 Machmatic 이라는

상품명으로 선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수학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수학적 표현만으로는

보통사람에게 친근한 Compiler 가

될 수 없었다. 호퍼와 그의 팀은

드디어 플로매틱(Flow-Matic)

이라는 상업용 컴파일러를 등장

시켰다. 플로매틱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프로그래밍언어 증가의

물고를 터 놓았다. 이와 유사한

스피드 코딩이라는 컴파일러도 IBM-

701 컴퓨터와 함께 개발 되었다. 

2. ENIAC

가. 최초의 컴퓨터(전기계산기) -

ENIAC 의 탄생

초기의 다수의 전자식 기계는 1938

년에 설립된 벨 텔레폰(Bell

Telephone) 연구소에서

만들어졌는데, 이들 특수 목적을 위한

컴퓨터들은 스티비츠(George R.

Stibitz) 회사에서 처음으로

작동되었다. 이 최초의 계전(relay)

컴퓨터는 Complex Calculator

라고 불리워 졌으며, 2 진 구성을

채택한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다. 이

기계는 1940 년에 최초로

가동되었는데, 두 개의 복소수의

산술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계산기의 새 시대는

1925 년 쯤에 매사츄세츠

공과대학에서 부쉬(Vannevar

Bush, 1890-1974 년)가 그의

교수들과 함께 전력 모터를 사용한

아날로그형 전자계산기를 제작할 때

그 막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939 년에 IBM 사가 배비지의

구상에 따라 완전 자동의

전기기계장치의 계산기 제작을

시작하였으나, 그것이 1944 년에

완성되기 이전에 ENIAC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alculator) 계획으로 말미암아 이미 유행에

뒤쳐진 것이 되고 말았다. 실제

개발은 에커트(J. Presper Eckert)

와 모클리(John Mauchly)가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1946 년 개발

공개하였다. 그러나 이미 에커트와

모클리는 이 성능에 만족하지 않고

1945 년에 EDVAC 개발을 위한

계약서에 서명을 한 상태였다. 진공관

속의 전자의 흐름을 이용한 최초의

전자계산기인 ENIAC 은 군부의 강한

요청에 따라 제작이 개시되었는데, 이

계획의 고문 중에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1933 년 프린스턴 고급

연구소의 최초의 종신연구원이 된 폰

노이만(J. von Neumann)이

있었다. 전자계산기의 성능에 돤한

노이만의 보고(1944-1946 년)에

이어, 1946 년에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방식의 전자계산기가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초기계산기는 릴레이를

스위치로 사용하였다. 하버드대학의

아이켄(Howard H. Aitken)은

1937 년 ASCC(Automatic

Sequence Contorolled Calculator)를 IBM 에서

제작하였다. 비록 스위칭 체계는

릴레이였지만 모든 수치자료를 2

진수로 표시하였다. 이러한 전기식

릴레이를 사용하는 기계는 다닥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ASCC 는 1944

년에 완성되어 하버드 대학에서

공식적으로 선을 보였다. 1937 년

벨전화연구소(Bell Telephone

Laboratory)의 George Stibitz

는 그의 2 진 가산기의 일부로써 Bell

Labs Complex Computer 의

구상을 시작하여 1940 년 마침내

완성한다. 현대의 의미에서 볼 때

전자계산기의 시초는 1946 년

펜실베니아대학에서 모클리(John

W. Mauchly; 1908-1980)와

에커트(John Presper Eckert;

1919-)가 만든 에니악(ENIAC :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er And Calculator)이었다. 에니악은 미군 탄도연구소의

의뢰로 만들어졌다. 1943 년 4월

펜실베니아대학의 학장인 John

Brainerd 에 의해 제안되었다. 2

차대전중에 사용하려던 에니악은 1

년의 개발 기간중에 이미 전쟁은 끝나

버렸다. 에니악의 덩치는 30톤,

진공관이 무려 1 만 7 천 4 백 68 개나

사용되었다. 사용된 전선의 길이는 1

백 30km 이다. 앞서 만들어진

MarkⅠ 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셈이다. 예전의 286 AT 성능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계산능력을 자랑하였다. 사람이 7

시간 정도 걸리던 탄도계산을

전기식계산기는 1 시간이 소요되며

에니악은 단 3 초 만에 해치워 버려

총알보다 더 빠른 계산기로 불리게

되었다. 에니악은 초당 5 천번의

곱셈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샹크스라는 수학자가 7 백짜리까지

계산한 π 를 검산하여, 7 백자리까지

수 초만에 계산하고 52 자리

이후에는 틀렸다는 사실까지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에니악에도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는 입출력이 자유롭지

못했다. 천공카드(punch card)에

부호형태로 기록했기 때문에 즉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두번째는

프로그램 내장방식-즉 폰 노이만 방식

이 아니었다. 에니악의 프로그램

방식은 기억장치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system 내의

전기배선을 모두 들어낸 이후 배선을

재배치하는 작업이어서 속도를

증가시키기 위해 방향으로 배선을

할수록 프로그램 작성은 더욱

어려워졌다. 뿐만 아니라 몇 가지

개념은 이미 오래전에 독일의

과학자인 Konrad Zuse 가 1936

년에 그의 아버지 거실에 만들었던 Z-

1 Computer 에서 구현되었던

것이었다. 에니악은 펜실베니아주의

무어(Moor) 학교의 전기공학과에서

가동된 이후 9 년간 사용되다가

1955 년 다른 종류의 다양한

컴퓨터가 개발됨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다. 에커트와 모클리는 ENIAC

뿐 아니라 후에 EDVAC, BINAC,

UNIVAC 등의 많은 컴퓨터 제작에

협력한다.

나. ENIAC 의 뒤를 잇는 컴퓨터

에니악이 발명된 이래 많은

연구소들이 컴퓨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에커트와 머클리는 에드백

(EDVAC : Electronic Discrete Variable Automatic Calculator)을 제작했는데, 이

기계는 에니악에 비해서 두 가지 면,

즉 명령어의 내부 기억장치가 디지탈

형태라는 점과 2 진수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에드백의 완성은

1952 년에야 이루어졌으며 이

사이에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에드삭(EDSAC : Electronic Delay Storage Automatic Computer)을 제작했는데, 이

컴퓨터가 최초의 프로그램을 저장할

수 있는 컴퓨터였으며 1949 년에

완성되었다. 에니악의 문제점의 해결

방향을 제시해 준 사람은 폴란드의

천재 수학자인 폰 노이만이다.

프로그램 내장방식의 도입이

그것인데, 기억장치에 계산의 순서를

미리 저장시켜 두고, 실행될 때

순차로 그 기억내용을 끄집어 내어 그

지시대로 수행하는 방식이다. 1949

년 이러한 노이만의 원리를 채택한

범용 계산기가 탄생했다.

케임브리지의 월크스는 에드삭을

개발하였다. 에드삭은 진공관수도 4

천개 정도로 줄였으며 전 과정에 2

진법 회로를 채택했다.

다. UNIVAC

에케트와 머클리는 1950 년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인 유니백을

만들었는데, 이 기계는 미국의

인구조사국에서 사용되었다. 한편

1986 년 버로우즈사와 합병해

유니시스가 된 스페리사는 유니백 1

(UNIVAC Ⅰ : UNIversal Automatic Computer Ⅰ) 을 개발

시판하는등 IBM 이 부상하기전인

1950 년대 초까지 세계

최대컴퓨터업체로 군림했던 관록있는

기업이었다. UNIVAC Ⅰ 이 작동된 지

얼마되지 않아 자동 프로그래밍

기법이 개발되어 더 좋은 기계들이

개발되었다. 즉, 초보적인 컴퓨터

언어의 개발과 함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최초의 시도가 1950 년대 초에

이루어졌다. 이 컴퓨터언어는

프로그래머가 명령어를 작성하기

위해 짧고 기억하기 쉬운 문자들을

결합시켜 만든 간략한 의사기호

(mnemonics)인데, 기존의 0과 1

로 이루어진 기계 코드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자주 사용하는 명령절차에

쓰도록 별도로 작성해 놓은 프로그램

명령어들의 집단인 서브루틴

(subroutine) 덕택에

프로그래머의 일손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렇게 작성된 프로그램은

어셈블러라고 불리 우는 별도의

프로그램이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2 진 코드로 변환시켜 준다. 이러한

어셈블러는 이후에 등장하는 상업용

컴퓨터에 필수적인 프로그램이

되었다. 앞에 언급한 유니백과 1953

년에 등장한 IBM 의 컴퓨터 시리즈는

모두 자체 개발한 어셈블러를 갖추고

있었다.

● 제2세대 컴퓨터(

트랜지스터)

1. 최초의 컴퓨터

통신망과 트랜지스터의

출현

가. 최초의 컴퓨터 통신망

1950 년대 최초의 대규모 컴퓨터

네트웍인 SAGE 시스팀이

대공방어장치로서 개발되면서

시작되었다. 전체를 통제하는

컴퓨터는 MIT 의 실시간컴퓨터가

채택됐다. SAGE 는 1,500

만마일이나 되는 거대한 통신 선로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 방어에 있어서

자료처리속도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만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관측된 자료를 중앙의

컴퓨터에 빨리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고속 모뎀의 개발은 필수적이었다.

모뎀의 출현을 통해 집안에서

주식시세, 각종 문화행사,

백과사전류의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의 컴퓨서브와 더소스

(The source)등이 그것이다. 이런

정보통신의 이용에서는 프랑스가

한발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나. 트랜지스터의 발명

1947 년에 벨 연구소에서

트랜지스터(transistor)가

발명되었다. 여기에는 존 바딘(John

Barden, 1908-1991), 월터

브래튼(Walter H Brattain) 및

윌리엄 쇼클레이(William

Shockley)로서 이들은 그 탁월한

업적으로 1957 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이는 조금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 1940 년대 초

진공관과의 결별이 멀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던 그 시기에 2 차대전으로

말미암아 벨연구소의 대부분의

연구원은 전쟁과 관련된 분야에서

일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전쟁이

끝난 1945 년에 가서야 연구가

재개되었다. 이것은 실용화되기까지

긴 세월을 거친 발명품이다.

트랜지스터는 진공관에 비해 크기를

1/200 로 축소시켰다. 트랜지스터는

크기가 작고, 속도가 빨랐으며 여러

개를 합쳐 하나의 패키지로 만들 수

있으며 정보를 전송하는데

전력소모가 훨씬 적었다. 또한 고체

물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뢰도가

증가하였으며, 진공관을 사용할

때보다 열이 훨씬 적었다. 한편

1954 년에 TI 로 옮긴 골든 틸을

중심으로 최초의 상업용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생산한다. 1959

년에는 좀 더 복잡한 컴퓨터가

탄생했는데 이 컴퓨터는 산술

연산용으로 트랜지스터를 사용했으며

기억장치로 자기코어를 사용하였고,

외부 기억장치로 자기테이프나

디스크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됨에

따라 10 자리수 2 개를 곱하는데 10

만분의 1 초 밖에 걸리지 않게 되었다.

다. 트랜지스터 컴퓨터

이 시대의 컴퓨터로는 IBM 계열로는

IBM 7030(STRETCH 라고도

불림), IBM 7190 등이 있었고,

다른 계열로는 RCA 301, CDC 3600, IBM 1401, Burroughs B200, Honeywell 400, GE 200, NCR 300, CDC 160 등이

있다. 1958 년 가을 트랜지스터를

갖춘 IBM 7000 시리즈의 출현은

상업용 데이타처리부문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진공관보다 훨씬 축소된

7000 시리즈는 전력을 적게 소모해

열을 적게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신뢰도도 높았다. 또 1959 년에는

1401 을 발표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기계식 천공기를 가지고 있는

중소기업가들에게 적합하도록 목표를

맞춘 것이다. 1401 은 초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어 1950 년 말에

미국전역에 설치된 컴퓨터의 대수가

6 천대에 불과했으나, 1960 년대

초에는 1 만 5 초대까지 끌어 올리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또한

예기치 못한 공헌도 했는데 7000

시리즈중의 하나의 개량인 7074 를

설치한 조세국의 활약상은 너무

명성인 높아진 나머지 지겹도록

끈질긴 세금 체납자들이 70 만달러

이상의 체납액을 자진 신고하고,

컴퓨터 없이는 도저히 적발할 수 없는

탈세부정이나 오류를 적발해

남부지역에서만 추가로 850 만

달러의 세수입을 올리기도 하였다.

라. 다른나라의 컴퓨터

한편 소련에서도 에니악이 탄생한지

5 년 뒤인 1950 년에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에서 진공관을 사용해

만든 에니악형 컴퓨터 MESM 을

만든다. 성능은 빈약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많은 테스트 데이터와

기술자의 육성 등에 크게 기여한다.

이어 52 년에 중형컴퓨터인 M-2 가,

53 년에는 본격적인 컴퓨터

스트레러가 각각 제조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MESM 의 제조를 지도했던

레베제프는 모스크바 수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52 년 당시 유럽에서

최고속도의 컴퓨터 BESM 을

만든다. 그런데 소련에서는 이후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논쟁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열되어 컴퓨터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컴퓨터와 같은

분야보다는 수학과 물리학 등의

기초과학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정책으로 말미암아 그 발전이 더디게

된다. 소련에서의 제2세대 컴퓨터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된 시기는 62

년 무렵이다. 이중 유명한 것은 범용

대형기종인 BESM6 (66 년 양산

개시), 중형시스템 민스트 32 ,

소형기종 나이리 , 미르 등이 있다. 제

3세대 컴퓨터는 72-74 년 무렵에

동구 6 개국과 공동으로 개발한

ES(라드) 시리즈이다. 72 년에 ESⅠ

시리즈가 발표돼, 75 년에 개발이

완료되었다. 이 컴퓨터는 사실 64

년에 발표된 IBM360 의

호환기종으로 제3세계 수출에

촛점을 맞춘 것이지만 출하가 상당히

늦어진다. 이어 70 년에 선보인 ESⅡ

도 IBM370과 호환기종이다.

소련에서는 군사산업위원회에서

서방기술의 습득을 위해 합법,

비합법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하지만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술을 축적하는

서방에 비하면 그 발전은 더딜 수

밖에 없다. 일본이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하게 된 데에는 국가적인

정책적 육성에 큰 원인이 있다.

1957 년에 전자산업육성법 을

제정하여, 마이크로 전자 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하였다. 이

법에 따라 일본 통상성은 전자분야의

연구개발을 총지휘하고 생산업체들에

보조금과 은행융자를 제공하며

유망한 신상품을 선정하고,

생산목표를 선정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심지어는 카르텔을

조직하며, 나아가 일본의 전자산업이

미국을 앞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있는 일종의

비상대권을 부여 받게 되었다.

2. 소프트웨어의 등장

가. 최초의 OS

50 년에 선보인 UNIVAC-1 이

최초의 상용 컴퓨터이며, 제너럴

모터스 연구소에서는 자사에

보유하고 있던 IBM 701 을 위한

운영체제를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50 년대초였다. 이전까지

사람의 손이 개입되는 비능률을

배제하고자 컴퓨터에 처리시키는

일을 어느 정도 모아서 그것을

오퍼레이터의 작업 없이 컴퓨터가

자동으로 처리하는 방식인

배치처리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50

년대 시스팀은 일반적으로 한 번에

하나의 작업만을 수행했으며,

컴퓨터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작업간의 변환을 원활하게

하도록 설계됐다. 이것은 프로그램과

데이터가 집산적으로 또는

일괄적으로 받아 들려지므로 단일

흐름 일괄처리(single-stream

batch processing)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또한 작업 제어 언어가

등장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50

년대 말부터 60 년대 전기에 거쳐

영국의 맨체스터 대학에서 아틀라스

운영체제가 설계됐는데, 이는 근대

운영체제의 표준이 될 만한 특징들을

보유하게 된다. 이를테면 디바이스

드라이버가 시스팀의 주요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고, 엑스트라 코드라

불리는 특별한 명령 단위에 의한

시스팀 콜이 등장한다.

나. 최초의 컴퓨터 언어

1951 년 보브 패트릭은 우연한

기회에 컴퓨터 프로그래머

양성교육에 참석함으로써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프로그램의 낭만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골치 아픈 것이었다.

어셈블리 코드의 길이는 점점 길어만

지고, 그에 따라 에러와 버그도

늘어만 가고, 결국은 이를 디버깅하기

위한 시간도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문제로 고민하던 패트릭은

스피드코딩(speed coding)이라는

선구적인 컴퓨터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언어는 IBM 의

젊은 설계사 존 배커스가 701 에

쓰기 위해 개발하여 무료로 준

것이다. 스피드코딩은 일종의

언어번역기로 단순화된 명령어로

작성된 프로그램을 직접 실행할 수

있는 기계어로 번역해 주는

소프트웨어였다. 두수를 더하는 네

개의 명령어가 필요하던

어셈블리어와는 달리 하나의

의사명령으로 똑같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프로그래머들은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스피드코딩이

주기억장치의 절반을 차지할 뿐

아니라, 실행시간이 최고 15배까지

늦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것이 디버깅

시간 등을 감안하면 더욱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결국 가장 유능한 프로그래머로

통하게 되었다. 1955 년 11월 IBM

사용자 모임인 SHARE 에서 새로운

운영체제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노스아메리카항공사에 근무하는 오웬

모크라는 엔지니어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IBM 이 704 을 발표하자 그는 GM

에서 704 를 연구하는 팀에

참여했다. 그는 704 를 다루는

방법을 연구하는 동시에 그 동안의

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최초의

운영체제(OS)에 대한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SHARE 에서의 모임이

있은뒤 14 개월뒤 3 단계 오퍼레이팅

시스템이라고 이름 붙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다. GM-NAA I/O 로

알려진 이 작품은 하나로 통합된

프로그램패키지로서, 모니터라고

부르는 일단의 감시 명령군의

통제아래 3 부분-입력, 실행,

출력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프로그램덕분에 일괄처리라는 말에

적합한 컴퓨터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의 활약은

놀라운 것이었다. IBM 은 704 의

성능을 그 이전의 701 보다 2배

정도 빠르다고 선전을 했지만 3 단계

오퍼레이팅시스템을 갖춘 GM 의

704 는 701 보다 무렵 20배의

성능을 나타낸 것이다. 당시에는

소프트웨어를 상품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배포된 지 몇 달

만에 704 의 대부분의 시스템에

사용하게 되었다. 1956 년 704

후속타에 쓰일 운영체제를 설계할

SHARE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57 년 1월 IBM 은

공식적으로 후속타인 709 를

발표하면서, SHARE 위원회로부터

SHARE 운영체제(SOS)의 개발을

위임받게 되었다. 그리고 SOS 는

스피드코딩을 개발한 존 배커스가

이끄는 소프트웨어 설계팀에도 큰

힘이 되었다. 배커스는 과학기술계를

겨냥한 FORTRAN 을 설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IBM 이 컴퓨터

업계에서 여전히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에 7 난장이로 불리운

회사중의 하나인 버로즈사가 1961

년 5000 시리즈에 쓰기 시작한

다중프로그래밍기술이 등장한다.

이전의 컴퓨터가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시간에 하나의 작업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5000 은

MCP(Master Control Program)로 알려진 운영체제의

감시하에서 같은 시간에 하나의

주기억장치를 여러 작업

프로그램들이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효율을 급속히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실용화하기에는

주변의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다. 컴퓨터 그래픽의 탄생

컴퓨터는 본래 계산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창작 활동에는

부적합하고 초기의 컴퓨터

예술이라고 불리우는 대부분의

작품은 컴퓨터의 연산속도를

이용하여 기호나 문자를 프린터로

찍어낸 그림이나 패턴들이다. 그후

컴퓨터를 통하여 직접 도형을 그릴 수

있는 X-Y플로터나 레이다의

브라운관을 개량하여 개발된 CRT

라고 불리우는 그래픽 디스플레이

장치에 도형이나 화상을 비추는

출력장치가 개발됨으로써 컴퓨터

그래픽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컴퓨터 예술은 입출력장치의 성능에

의존하는 까다로운 예술이며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개발에

따라 표현의 다양성과 시각의

다양성을 넓힐 수 있는 특이한 성질을

가진다. 제1 기를 1946 년 에니악

(ENIAC) 컴퓨터가 완성된 후부터

1950 년대 말까지 본다면 이 시기는

주로 라인 프린터를 사용하여 사진을

인쇄로 표현한 경우와 같이 망점을

프린터의 문자나 기호의 농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분류하여 바꿔 놓아

표현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1950

년경 영국에서 춤추는 댄서의 영상을

오실로스코프에 옮겨 보았다. 물론

앙상한 뼈로만 구성된 댄서였지만,

이는 최초의 영상이었다. 그래픽이

대중화한 계기는 MIT 의 포리스티가

만든 휘르윈드(Whirwid)라는

작품에서 비롯된다. 이 디스플레이

장치는 TV 세트와 비슷한

CRT(Cathode Ray Tube)를

사용하여 만들어 졌다. 휘르윈드는

바이킹로켓이 비행하는 동안 연료와

비행 속도를 수치가 아닌 그래프로

보여 주었다. 이 시범은 2 차 대전중

방공망의 개선에 골몰하는

군인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새로운

미사일등 공격용 무기의 성능은 매우

발전해 갔지만 이를 막아낼수 있는

방공방은 원시적이었기 때문이다.

휘르윈드 컴퓨터가 여기에

뛰어들었다. 휘르위드는 레이더에

잡힌 각 물체를 점이 아닌 약정된

기호로 나타내었고, 오퍼레이터가

정보를 알고 싶으면 광선총을 컴퓨터

스크린에 갖다 대고 있으면, 원하는

정보를 알수 있었다. 1951 년의

시범은 성공이었다. 그래서 이를

기초로 미국 전역의 22 개 지역과

캐나다까지 통합한 세이지(SAGE, semi automatic ground environment) 방공망이

완성되었다. 1958 년부터 구축되어

1983 년까지 별 무리없이

사용되었다. 1958 년

캘컴프사로부터 565 드럼 플로터가

개발되어 설계시스템에 위력을

발휘함으로써 큰 변혁을 주었다.

그러므로써 2 차 곡선, 곡면, 복잡한

도형, 좌표 교환에 의한 메타몰포오제

등의 도형을 종이 위에 정확히 그리는

것이 쉬워졌다. 이와 같이 50 년대

말까지의 컴퓨터 그래픽은

탄생기였으며, 이 시대를 출력장치의

이름을 빌어 프린터 플로터의

시대라고 불리운다. 50 년대에는

컴퓨터가 대화식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부적합하여 대화식 컴퓨터

그래픽은 많은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

이들 컴퓨터는 물리학자나 미사일

도안자들을 위한 거리 계산 정도에

불과했다. 단지 50 년대 말에 MIT 의

TX-0과 TX-2 등과 같은 기계의

개발로 대화식 컴퓨터가 가능하게

되었고, 컴퓨터 그래픽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3. 인공지능과 최초의

Super Computer

가. 스페리랜드와 IBM

2 차대전중 COMPUTER 는 주로

암호해독과 무기개발에 이용되었다.

특히 2 차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핵무기 개발경쟁은 매우 치열해졌다.

그중에서도 버클리대학부설

로렌스방사능연구소는 당시 가장

빠른 COMPUTER 로도 1 백시간

넘게 걸리는 계산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954 년 마침내 로렌스

연구소는 현재 개발된 COMPUTER

보다 1 백배 빠른 COMPUTER 를

찾는다는 를 냈다. 여기에 뛰어든

회사는 IBM과 스페리랜드라는

회사였다. 결국 스페리랜드의 신청이

받아들여졌고, 1956 년 3월

본격적인 개발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그 무렵 진공관 기술이 새로운

트랜지스터로 대체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해 보였다.

개발작업은 루코프라는 공학자가

주도하였고 새로운 기계의 이름은

LARC 라고 명명되었다. 순수하게

계산을 담당하는 부분과 외부로부터

입출력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전체

구조를 나누었다. 우여곡절속에

LARC 는 완성되었는데, 문제는

제작비가 너무 비싸 기꺼이 사줄

것이라던 고객들이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다. 게다가 잦은 부품 고장으로

애당초 인도하기로 계약한 성능의

90%에 그쳤다. 그뿐 아니라 원래

인도계약시간보다 2배 정도는 더

끌었기 때문에 스페리랜드는 할 말이

없었다. 한대는 로렌스연구소에 다른

한대는 미해군에 팔았을 뿐 이었다.

결국 상처뿐인 영광을 얻고 회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한편 스페리랜드에

패해 와신상담중이던 IBM 은 1957

년 원폭연구에 선구적인 역활을 했던

로스알라모스연구소와 IBM704

보다 일백배 빠른 COMPUTER

개발에 합의했다. 새로운

COMPUTER 에는 Stretch 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IBM 은 LARC

의 문제점을 분석하며 새로운

방법들을 도입하였다. 수동식 배선의

부정확성과 느린 속도의 개선을 위해

새로운 배선 PROGR AM 을

개발했다. 특히 이 배선 PROGRAM

은 IBM-704 로 처리되는

CAD(computer aided design, COMPUTER 이용설계) PROG

RAM 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인도기한을 1 년 가까이 넘기고서야

인도할 수 있었고 이나마 애당초

요구한 속도의 25%밖에 내지를

못했다. 낮은 신뢰도로 인해 원래

가격 1 천 3 백만달러의 절반정도인 7

백만달러에 판매하였다. 그뒤로 8 대

정도를 다시 주문 받았지만 그동안

손해액은 2 천만달러에 달했다.

나. 크레이(Clay)의 등장

유니백(나중에 유니백은

스페리랜드와 병합됨)과 IBM 의

실패로 한동안 대형 COMPUTER 의

개발에 참여하는 업체가 없었다. 이

와중에 뒤를 이어 1957 년 창립된

CDC 가 대형 COMPUTER 사업에

참여하였다. 1958(1957 ?)년

CDC 의 첫 작품은 1604 였는데

당대 최고의 속도로 알려진 IBM704

보다 빠른 속도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1604 는 진공관 대신

트랜지스터를 사용해 만든 최초의

상용 컴퓨터 중의 하나이다. CDC 의

목적은 사무용이 아니라 대형

COMPUTER 였다. 1964 년에는 더

빠른 MODEL 6600 을 개발하였다.

1064 는 MODEL 6600 에

추월당하기까지 최고 속도의

COMPUTER 자리를 지켰다.

MODEL 1604 의 설계를 담당한

사람중에는 크레이라는 뛰어난

엔지니어가 있었다. 미네소타대학을

졸업한 25세에 유니백 1103 의

개발책임을 맡았다. 그후 CDC 로

옮겨 MODEL-6600 개발에

참여하였다. MODEL-6600 은 초당

3 백만번의 계산으로 CDC-1604

보다는 20배나 빠른 속도였으며

IBM 의 스트레치보다는 3배의 빠른

속도였다. MODEL-6600 에 힘입어

MODEL-7600 도 개발하였다.

COMPUTER 의 전통적인 구조는

1950 년 폰 노이만이 제시했던

MODEL 이다. PROGRAM 내장

방식과 순차처리방식이 그것이라 할

수 있었다. SUPER COMPUTER 를

꿈꾸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음 세가지

개선책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더

빠른 부품, 짧은 배선에 의한

고집적화, 근본적인 구조개선이 바로

그것이다. CDC-7600 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무렵 벌써

SUPER COMPUTER 개발경쟁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TI(텍사스

인스트루먼트)사는 일찍이

ASC(Advanced Scientific Computer)라는 과학기술 게산용

고속 COMPUTER 를 개발했었다.

그리고 CDC 에서도 SUPER

COMPUTER 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해체됐던 팀을 재정비해

고속 COMPUTER 개발을

재개하였다. 그 결과 STAR-100

이라는 제품을 만들어 내었다. 초창기

COMPUTER 개발의 선두 주자였던

일리노이 대학은 할아버지인 일리악

(ILLIAC)에 이어 일리악-Ⅳ 이라는

고속 COMPUTER 를 생산했다.

STAR-100, ASC, ILLIAC-Ⅳ 등은

모두 전통적인 방법을 버리고

병렬계산구조라는 혁신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혁신적인 방법은

파이프라인 방식과 벡터처리기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를 선구자로

도입했던 ILLIAC-Ⅳ 은

상업적으로는 참패했다. 파이프라인

방식을 주된 처리방식으로 했던 ASC

역시 상업적으로는 실패를 맛보았다.

다. 인공지능

1769 년 바론 볼프강 폰 켐펠렌

(Baron Wolfgang Von Koempelen)의 자동 체스 게임을

하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기계 속에 교묘히 사람이 숨어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초에

찰스배비지(Charlse Babbage)는

그의 해석 기관(analytical

engine)의 제작비를 구하기 위해 틱

-택-토(Tic-Tac-Toe) 기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재정을 인하여

틱-택-토 기계를 온 나라에

전파하였다. 1914 년에 스페인의

발명가인 큐베도(Quevedo)는

정직한 게임놀이 기계를 만들었다.

1930 년경에 콘돈(Condon)은 님

(nim)이란 게임을 하기 위하여

특별목적 컴퓨터를 고안하였다. UIT

의 클라우드 샤논(Claud

Shannon)은 카이삭(caissac)

이라는 체스놀이 기계를 만들었고,

체스놀이를 하기 위해서 특별 목적

컴퓨터가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알게

되었다. 본격적인 자동기계는

찰스베비지의 미분기계에서

시작된다. 인공지능 (AI, Artifitial

Intelligence)이라는 용어는 1956

년 미국 다트머스대학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탄생한 용어이다.

전자공학이 발달하여 초창기 디지탈

컴퓨터가 개발되자, 인공지능을

구현해 보려는 대담한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1950 년

벨전화연구소는 컴퓨터를 이용한

자동응답전화기를 개발하려 하였다.

그보다 1 년 앞서 스웨덴의 과학자

웨렌 위버는 전세계의 언어를 모두

번역할 수 있는 기계의 개발을

선언했다. 그 시대 분위기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시도들이었다. 도한

같은해 새뮤엘은 IBM701 에

체스프로그램을 입력하여 당대의

체스 챔피언들을 굴복시키겠노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같은 기계에 이론적 배경를

제공한 사람은 세기의 천재인 위너

박사이다. 그는 사이버네틱스라는

학문분야를 만들었다.

사이버네틱스의 어원은 그리이스어로

배의 방향을 잡는 키잡이라는 뜻이다.

사이버네틱스는 보통 인공두뇌학이라

불리우며, 이는 모든 생물체의

일반적인 적응과정을 수리적으로

정형화하는 것으로 이후에

인공지능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위너가 발견한 적응과정의 핵심은

피드백(feed back)이다. 즉 주위의

환경에 일정한 작용을 한뒤 그 결과를

받아들여, 다음 작용에 적용하는

것이다. 피드백 이론은 레이더를

이용한 대공포 이론에 응용되어

명중률을 획기적으로 높이게 된다.

워렌 매컬리라는 신경생리학자는

뇌의 신경과정과 뇌의 동작과정은

근본적로 같아야 한다는 이론을

발표하기에 이르른다. 이러한

초창기의 인공지능 접근방식을

신경모델링(neutral modeling)

접근 또는, 상향식(bottom up)

방식이라 부른다. 즉 신경세포와 같은

컴퓨터 소자를 개발하여, 그것을

엮어서 두뇌와 같은 기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수백억개의 뉴런을

가진 두뇌를 철심(기억소자)과

전기줄로 엮어낸다는 것은 마치

바닷가의 모래알을 맞추어 바윗돌을

만든다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신경생리학과 컴퓨터과학 모두가

아직도 그리 발전을 하지 못했던

시기의 시도였다.

라. 기계 번역

기계번역은 지난 46 년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ENIAC)이

등장하면서 컴퓨터에 의한

기초연구가 시도되었으며, 괄목할

만한 기계번역기술은 8 년뒤인 54 년

미국 조지타운대학과 IBM 이

러시아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시제품을 개발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선보인 이 러시아-영어

기계번역시스템은 컴퓨터의 하드웨어

기술부족 등으로 구문규칙(문법)이 6

개에 불과했으며, 등록된 단어도

250 여개 밖에 되질 않아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기계번역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했다는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특히 이

시스템은 후에 개량되어 시스트랜

(SYSTRAN)이란

상용번역시스템으로 발전, 미

공군에서 활용되는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기계번역에

대한 연구는 미국과 유럽, 일본을

중심으로 지난 70 년까지 15 개

국가의 45 개 연구기관이 각종

논문을 발표했으며, 기업과 연계한

상용제품개발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각종 번역처리알고리즘이

개발됐는데, 영어-프랑스어, 한국어-

일본어 등과 같이 문법구조가 유사한

언어는 원문을 명사와 동사, 형용사

등으로 분할하고, 전자사전을 참조해

변환하는 직접방식과 문장 전체를

해석해 의미를 사전에서 참조하는

간접방식 , 나아가 다국어 처리를

가능하도록 중간표현을 생성한 후

이를 목표 언어로 번역하는 피봇방식

등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중

대표적인 연구는 프랑스

그루노블대학의 CETA , 미국

텍사스대학의 METAL , 독일

자브매킨대학의 SUSY, 캐나다

몬트리올대학의 TAUM-METEO ,

미국방성의 LOGOS, 그리고 일본

규슈대학 및 전자기술종합연구소의

YAMATO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기계번역에 대한 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하드웨어의 기술

부족으로 부정적인 면이 압도적이다.

이와 관련해 기계번역은 인간의

번역에 비해 질적이나 가격면에서

떨어져 실용가치가 없다는 미국

ALPAC(Automatic Language Processing Advisory Committee)의 보고서가 발표,

많은 개발과제들이 중단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4. 실리콘밸리의 탄생

가. 스탠포드대학과 HP

1906 년 AT&T 의 드 포레스토와

그의 동료는 진공관 증폭회로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은, 후에 실리콘밸리(Sillicon

Valley)라고 이름 붙여진

지역이었다. 실리콘밸리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외에도 몇가지가 더

있었다. 전자공학의 전도사라 할 수

있는 쇼클레이가 있었고,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스탠포드대학이

있었다.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은

1971 년 반도체산업전문정보지인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의 편집자인

돈 C. 호플러가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

실리콘밸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먼저 스탠포드에 대해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1891 년 창립된 스탠포드는

1920 년대까지 서부의 별 볼일 없는

학교였다. 스탠포드를 창립한 사람은

스탠포드 상원의원이었다. 1885 년

스탠포드의원은 전재산을 학교에

기증했다. 그 재산중에는

캠퍼스부지로 기증된 팔로알토

지역의 8 천 8 백 에이커 목장이

있었다. 스탠포드를 세계의 대학으로

키운 사람은 프레드릭 터먼이라는 그

대학교수였다. 터먼은 1946 년

스탠포드대학의 공학부장이 되었다.

터먼이 실리콘밸리에 뿌린 첫 씨앗은

휴렛팩커드이다. HP 의 창립자인

휴렛과 팩커드를 스탠포드로

불러들여 휴렛의 석사학위논문을

완성시켰다. 휴렛과 팩커드는

자신들의 차고에서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이용해 발진기를

제작했고 운도 따라 1942 년 벌써

연간 매상고 1 백만 달러의 회사로

성장했다. 1940 년대에 스탠포드는

경영위기에 봉착했다. 학교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설립자인 스탠포드의원이 기증한

토지를 팔수도 없었다. 기증 조건중에

매각이 불가능한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터먼이 아이디어를

내었다. 땅을 빌려 주고 그 임대료를

받아 첨단기술공업단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드디어 스탠포드 연구단지

(Stanford Research Park)가

완성됐다. 연구실에서 만든 기술을

근처 기업에 팔고 기술 이전을 하면서

땅장사와 기술장사를 동시에 하자는

것이었다. 싼 땅값과 기술이전이라는

호조건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몰려

들었다. 1 호 진출기업은 배이언

소시에이트사였고, 이어 HP 가

들어왔다. HP 사로 하여금 입주를

망설이는 기업을 설득하도록 하게

하였다. 결국 1970 년가지 70

년까지 리서치 파크에는 70 여개사가

입주하게 되어 토지임대에 따른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MIT 는

캠퍼스부지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스탠포드는 오히려

확대일로에 있다.

나. 반도체와 쇼클레이

실리콘밸리의 발전에 기여한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인 쇼클레이이다.

쇼클레이는 1952 년 당시 무게로는

금보다 비싼 상업용 트랜지스터를

만들었다. 벨연구소의

터줏대감이었던 쇼클레이는

쇼클레이반도체회사를 실리콘밸리에

세운다. 1956 년 봄, 쇼클레이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 것을

계기로 쇼클레이반도체회사는 절정에

다다른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쇼클레이

밑에서 기술을 익힌 8 명의 제자들은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그리고

쇼클레이의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해

회사를 새로 차리거나 다른 회사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봅 노이스는

페어차일드반도체회사를 설립했고,

고든 무어는 노이스를 따라 갔으며,

진 호니는 아넬코사를 설립하는등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쇼클레이의 반도체회사에서 갈라져

나온 이러한 회사들은 또 다시 여러

회사로 나눠어지면서 실리콘밸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쇼클레이는 지나친 금전욕과 가혹한

훈련 방식으로 결국은 파산하고

말았다. 진 호니에 의한 프레이너형

생산공정은 트랜지스터 생산확대에

전기를 마련했다. 이 기술은 이후

LSI(대규모 직접회로)의 기본의 되는

MOS 전계효과 트랜지스터개발로

이어지게 된다. 봅 노이스의

페어차일드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I)의 킬비와 우연의 일치로

집적회로 제조에 대한 특허분쟁을

일으켰고 영광은 킬비에게 돌아갔다.

봅 노이스는 페어차일드를 나와

두번재 회사인 인텔사를 설립했다.

모험자본가인 아서 록이 자본을

모았고,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개발한

E. 호프 쥬니어박사,

페어차일드사에서 옮겨온 피데리코

파진등이 어울려 1971 년 인텔

4004 라는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개발했다. 연이어 출하된

인텔 8080 은 몇년 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당시로는

혁신적인 가격인 2 달러 50센트는

인기를 더하게 되었고, 이는 컴퓨터와

다른 기기들의 결합을 촉진했다.

그러나 경쟁사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고, 호프는 게임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아타리(Atari)사로 옮겨

갔다. 쇼클레이로 부터 시작된

실리콘밸리의 신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성공을 이끈 또

하나의 요인은 막대한 군사자금의

유입에 있었다. 1965 년 록히드

항공회사의 주력부문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한때 국방부 구입

반도체의 40%를 이곳에서

차지했다. 특히 1960 년대

아폴로계획에 의한 미항공우주국

(NASA :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로부터 막대한 자금이 실리콘밸리로

흘러 들어왔다. 또 미소간의

냉전체제는 엄청난 양의 국방관련

자금의 유입을 가져왔다. 또한

자유로운 이직(30%)과 탄탄한

경쟁체제는 많은 기업을

도산시켰지만 도리어 자체 시스템을

안정시켜 주었다. 새로운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도 갈등구조가 있었다.

국제적인 스파이조직, 뿌리뽑히지

않는 암시장, 미소간의 소비체제,

항상 매스컴을 타는 10% 미만의

기술자를 제외한 첨단의 가난을

달리는 제3세계 출신 노동자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사장들은 일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는

노동조합이 있었다.

다. 최초의 해커

해커(hacker)라는 말이 엉터리

프로그래머, 컴퓨터광 등의 조소적인

의미로 심지어는 컴퓨터

범죄자로까지 인식되고 있지만

컴퓨터의 발전과정을 들추어 보면,

이들 해커야말로 오늘날의 컴퓨터

혁명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숨겨진 영웅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컴퓨터에 대한 광적인 몰두,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적과 무수한 일화가 이들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괴퍅한 외관의

이면을 들추어 보면 모험가이자

공상가이며, 행동주의자이자

예술가인 그들의 숨겨진 본성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왜

컴퓨터가 진정 가히 혁명적인가 를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한 IBM과

같은 거대 기업이나 관료주의에

대항해 컴퓨터를 모든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혁명가들이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한

해커 사학자 스티븐 레비(Steven

Levy)는 그의 저서 해커스

(Hackers)에서 컴퓨터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실질적인 원동력인

해커의 역사를 세시기로 나누고 있다.

제 1세대 해커는 해커의 원조라 할

수 있으며, 1950 년대 MIT 의

철도모형클럽 인공지능연구소가 이들

해커의 발상지였다. 이들은 당시

일괄처리방식을 채택하고 있던 IBM

704 등의 괴물 컴퓨터에 대항해 TX-

0 PDP-1 등의 대화식 컴퓨터로

우주전쟁 게임을 비롯한 전설적인

프그램들을 만들어내었고 해커의

윤리라는 새로운 컴퓨터 문화를

창출했다. 해크 (hack)라는 용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MIT 에서 흘러

다니는 은어였다. 이말은 MIT

학생들이 무슨 법칙이라도 되듯이

주기적으로 만들어 내던 대학 내의

고약한 농담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용어가 MIT 의

철도모형클럽(TMRC) 회원들에

의해 사용되었을때 거기에는 새로운

의미가 함축됐다. 그들은 작업과정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즐거움

이외에 어떠한 목표도 갖지 않는

프로젝트나 그에 따른 결과물을

해크라고 불렀다. 이들이 벌인

해킹중에서 가장 전설적인 것이 바로

우주전쟁 (Spacewar)이라는

최초의 본격적인 컴퓨터 게임이다.

달팽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티브

러셀은 당시 인공지능을 연구하던

매커시 교수의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화면을 통한 디스플레이

해커야말로 모든 사람을 놀라게 만들

해킹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컴퓨터가 가진

마술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마빈 민스키 교수가 멋진

디스플레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것은 몇개의 원과 나선 알고리즘을

사용해 화면에 환상적이고

소용들이치는 듯한 여러가지 무늬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러셀은

이 프로그램에 심취했으나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너무 수학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동료

해커들과 토론을 벌인 끝에 동료들도

심취해 있던 한 공상과학 소설에

등장하는 우주 활극을 모델로 하는

게임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1961 년

12월초에 시작한 작업은 1962 년 2

월에 기본 게임을 공개했다. 미사일을

적재한 두대의 우주선이 마련되었고,

반짝이는 별들이 스크린 상에 몇개의

점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러셀은

완성되지 않은 버전을 공개했다.

프로그램이 담긴 종이테이프를

상자에 담아두고 누구든 이

프로그램을 개선시키도록 하였다.

제일 먼저 피터 샘슨이 프로그램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임의로 배열된

별대신 그는 자세한 성도를 구해

실제와 똑같이 별의 위치를 입력했다.

아울러 게임의 진행에 따라 하늘이

장엄하게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또 댄

에드워드는 이 프로그램에

중력요인을 첨가했다. 즉 태양을 그려

넣고, 태양의 중력을 이용해 속도를

가속시킬 수도, 반대로 태양속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었다. 샤그가레츠는

초공간 튜브를 사용해서 새로운

은하계로의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주전쟁을 담은

종이테이프는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이는 동일한 프로그램을

위해 반복작업을 막는 역활도 할 수

있었다.  이를 개방성의 원칙이라고

할 때, 이외에 또다른 해커들의

윤리는 해드온 명령(hands on

imperative) 이었다. 해커들은

컴퓨터에 대한 접근은 여하한

이유로도 방해받아서는 안되며

완전히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해커들의 접근을 금했던 IBM

컴퓨터와 그 직원들은 그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적이었고, 컴퓨터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모든 관료

체제와 그 관리자들은 해커들의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제3세대 컴퓨터(IC)

PC 의 서곡 - 전자계산기의 등장

1. IC 의 탄생

가. IC 의 탄생과 제3세대 컴퓨터

1959 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사의 잭 킬비가 게르마늄칩위의

최초의 게르마늄저항기와 축전기를

포함한 서너개의 중요부품을

집적하는데 성공했다. 킬비는 칩위의

부품들을 미세한 금선으로 상호연결

시켰는데 일일이 손으로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 직접회로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의 밥 노이스는 여기에다

칩의 윗표면에 절연실리콘

산화물층을 입혔는데 이를 평면처리

라고 불렀다. 그 다음에는 사진처리

공정으로 산화물위에 가는 금속선을

프린트해 칩위의 부품들을

결합시키는 기술을 사용했다. 처음에

새로운 사진평면처리방식을 통해

단일 칩위에 2, 3 개의 부품을

집적하는데 성공한 노이스와

동료기술자들은 그 수를 백여개에서

천여개로 점차 늘려 나갔다. 단

한개의 트랜지스터가 있던 면적에

오늘날에는 백만개 이상의 부품들이

들어차 있는데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회로가 복잡해진 역사를 살펴보면

노이스와 함께 인텔사를 창립했던

고든 무어가 실리콘에 집적시킨

트랜지스터의 수는 18 개월마다

두배가 된다는 무어의 법칙 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법칙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3세대

컴퓨터는 부품들이 소형화되었는데

각 부품들은 선을 사용해서

연결하기보다는 하나의 부품에 새겨

넣기 시작했으며, 수정 구조체가

진공관이나 트랜지스터를

대신하였다. 자기잉크 문자판독기

(MICR : Magnetic Ink Character Reader), 광학문자

판독기, 그리고 보다 빠르고 대용량의

기억장치들이 이후 3세대

컴퓨터들로 하여금 데이타를 조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외에 제3

세대에 개발된 중요한 발명품으로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의 입출력을

가능하게 만든 통신채널의 사용과

이전에는 사람에 의해 조작되었던

여러 작업들이 자동화된 다양한

다용도의 소프트웨어들이 있다.

1960 년대 중반의 컴퓨터

기술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진보는

집적회로(IC : Integrated

Circuit)이다. 집적회로는 단일

부품으로 생산되었는데 그 안에

여러개의 부품을 모아 단일 품목으로

만든 것이다. 집적회로는 실리콘(Si)

이나 게르마늄(Ge)에 얇은 막을 입힌

칩(chip)으로 생산되는데 골무만한

크기에 10 만개를 집적시킨 것이다.

집적회로는 신뢰도가 매우 높은

반면에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쌌다.

초기의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컴퓨터들은 기술 면에서는 매우

발전하였으나 컴퓨터 상호간에

호환성이 없는 것이 단점이었다. 한

종류의 컴퓨터를 사용하던 사용자는

기종이 바뀜에 따라 그들의

프로그램을 재작성하는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특정 컴퓨터를

위해 고안된 보조장치들은 다른

컴퓨터에서는 사용될 수 없었다.

사용자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보조

장치들이나 프로그램들을 상호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들의

모임으로서의 컴퓨터 시스템이다. 2

차대전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의 발전에는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 첫째로 무기의 대량생산과

아울러 정확한 무기의 필요성이

절박해졌고 정확성을 보장해 주는

고성능의 컴퓨터 개발은 어쩌면

당연한 요구라 할 수 있었다. IBM 이

컴퓨터업계에서 줄곧 수위를 지켜 온

것은 특별히 IBM 의 제품이 우수해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탁월한

marketing 전략과 훌륭한 사후

service 때문이었다. 그리고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선두자리를 지키도록

하였다. 2 차대전이 끝나자 IBM 은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게 되었다. 보다

시장을 넓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그 첫번째 조건은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가격이 적당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IBM 360 System 의 탄생

1961 년 여름, IBM 은 순조로운

발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1955 년 이래 판매고는 연 16%씩

성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컴퓨터

산업전반에 걸친 문제들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커지고 있었다. 이는

컴퓨터 전문지식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기업체에서 시작하여, 거의 모든

컴퓨터 사용자와 기업들에게까지

불만이 커져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그 가격이 매우

비싸 구입보다는 임대형식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사용자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신뢰성이

떨어지며, 지나치게 비싸고,

미숙하기 짝이 없고, 경직되어

있으며, 유지가 어렵고, 재사용이

불가능이 불가능하다는 것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만은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것이 더 많았다.

사용자가 결국 사용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으로는 매년 10 여 개의

새로운 언어가 개발되었다. 이중에는

파스칼, C, 에이다(Ada) 등과 같은

표현능력이 탁월한 언어와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라는 방식을 구현한

스몰토크, C++, 시뮬라 등이

그것이다. IBM 특유의 전략이

시작되었다. 회장 토마스 왓슨 2세와

빈센트 리어슨 신제품

개발담당이사는 IBM 의

개발담당부서 담당자들에게 과제를

주었다. IBM 컴퓨터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전략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60 일동안의 통제속에서

원자폭탄 개발비용의 2배나 되는

SYSTEM/360 개발 PROJECT 가

그것이었다. SYSTEM/360 의

원칙은 세가지이다. 첫째는 상업적

성공을 위해 가격이 충분히 저렴할

것, 둘째로 다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범용 컴퓨터일 것, 세째는 기존의

컴퓨터가 비호환성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호환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964 년 4월 7 일 6

가지 model 의 SYSTEM/360 이

공개되었다. 여기서 360 이 의미하는

것은 360 도 모든 방면에 뛰어난

컴퓨터라는 것이다. 3세대 컴퓨터의

출발이었다. System/360 은

운영체제(OS : operating

system)이라는 시스템 프로그램

(system program) 개념을

도입하였다. 운영체제 작성에 참여한

브룩에 따르면 프로그램 완성을

앞당기기 위해 더 많은 인원을

투입할수록, 오히려 작업 속도는

느려지는 다소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로서 종전에 하드웨어

(HARD WARE)의 부속품 정도로

인식되던 소프트웨어(SOFT

WARE)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로서 소프트웨어 공학

(SOFT WARE ENGINEERING)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개발된

SYSTEM/370 도 SYSTEM/360

에서 사용된 프로그램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 한번 IBM 의 고객이

된 사람이나 기업은 계속 IBM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64 년 IBM

은 그동안 자사가 개발한 모든 컴퓨터

기종인의 생산을 일시에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새로운 컴퓨터기종을 통해 과학자와

기업가 모두를 만족시켜 주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획기적인 선언속에

최초의 상호교환이 가능한

컴퓨터들로 이루어진 시스템 360 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소형에서

대형에 이르는 여러 컴퓨터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스템은 이

시대의 다른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집적회로를 사용하고 있다. 360 은

하드웨어뿐 아니라 OS/360 으로

이름 붙여진 OS 에서도 여러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때까지 나온

OS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었으며,

전에 개발한 OS 의 모든 특징을 짜

넣었으며, 앞으로 OS 의 특징이 될

여러 기능도 아울러 포함하고 있었다.

OS/360 은 일반적인 모든 주변

기기를 제어하기위한 명령어와

대중적인 고급 프로그래밍언어를

떠받쳐 줄 일련의 루틴들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특수 용도에 쓰는

부속시스템을 갖추어 능력이 한층

증대되었다. 유연성으로 인해,

기존의 IBM 의 컴퓨터를 사용하던

기업들도 360 으로 교체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고, 새로운 고객들을

끌어들이고, 결국은 RCA 와

GE(General Electric)같은

회사가 컴퓨터부문에서 손을 떼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 IBM 의 경쟁자들

IBM 의 독주는 경쟁이 거의 불가능한

것 같았다. 그래서 Plug-

Compatible 이라는 새로운 산업이

발달하였다. IBM 에서 생산해 내지

않는 주변기기를 생산해 파는

회사들이었다. 그러나 난공불락 같던

컴퓨터 업계에도 경쟁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미 상대는 되지 않았지만

일곱 난쟁이로 불리운 경쟁상대들이

있었다. 그 중 IBM 이 파고 들지 못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시작한

난쟁이가 있었다. 바로

DEC(Digital Equipment Cooperation)이다. MIT 출신이

모여 출발한 DEC 가 공략한 분야는

미니 컴퓨터(MINI COMPUTER)

였다. 먼저 과학실험 실습용의 컴퓨터

시장을 노렸다. 1960 년

개인사용자를 위한 세계최초의 소형

컴퓨터인 PDP-1 을 발표했으며

이같은 여세를 몰아, 1963 년에는

현재 DEC 의 주요제품이 되다시피한

세계 최초의 미니컴퓨터인 PDP-5 를

선보였다. 그리고 1964 년에 DEC

는 세계최초의 대량생산

미니컴퓨터인 PDP-8 을 발표한다.

특히 1965 년에 개발된 PDP-8 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PDP-11까지 계속된 PDP

시리이즈는 Data처리용의 가격대

성능의 비가 우수한 컴퓨터였다.

이러한 전략은 적중해 DEC 는 IBM

에 버금가는 회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1953 년 봄, LA 에서

대륙횡단 비행기에 오른 IBM 의

영업책임자 블레어 스미스의

옆좌석에 뜻밖에도 아메리칸

항공사의 스미스 회장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메리칸항공의 업무를

수작업으로 처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동화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IBM과 아메리칸항공사의 8

년간의 공동연구가 시작되었다.

1964 년 첫선을 보인 컴퓨터에 의한

항공예약시스템인 SABRE(Semi-Automated Business Research Environment)를

탄생시켰다. SABRE 의 중추는

트랜잭션 모니터와 데이타베이스

매니져로 구성된 ACP(Airline

Control Program)라는 전문 OS

로 두대의 7090 으로 구축되었으며

미국 전역의 2,000 여

예약창구직원과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처리가 가능한 것은 병행처리

(concurrent processing)라는

기술 때문이다. 사실 컴퓨터는 한

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처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빠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구성과

OS 의 적합한 설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컴퓨터의

빠른 처리시간을 이용해 동시에

처리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한

것이다. SABRE 가 큰 성공을 거두자

델타항공사와 팬아메리카항공사도

이와 유사한 시스템의 개발을 의뢰해

왔다. 1965 년 IBM 은 자사의 360

컴퓨터로 가동되는 일반 예약시스템

개발에 착수했다. PARS (Program Airline Reservation System)라고 알려진 이 새 상품은

1968 년에 등장한다. 이 상품은

소규모 항공사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라. 최초의 OS 들

이 무렵 또 다른 병렬처리 기법이

대학내에서 개발되고 있었다. 시분할

(time-sharing)이라 불리운 이

방법은 대학 내의 본체 컴퓨터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필요성을 절감한

대학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이 역시 앞의

항공예약시스템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컴퓨터 사용자에게 그 결과를 즉시

알려 주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많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차이도

있었다. 앞의 예는 많은 양의 단일한

데이타를 취급하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다루는데 반하여, 뒤의

예는 비교적 다양한 프로그램이

비교적 적은 양의 제한된 데이타를

취급하는 데에 있다. 시분할의

실질적인 개념은 1959 년 MIT 의

통신과학교수인 존 매카시가 초안을

잡아 동료교수들에게 보낸 쪽지에서

비롯된다. 매카시는 여기에서 한

문제를 컴퓨터가 처리하는데에 드는

시간을 눈에 띄게 줄이는 획기적인

운영체제를 주창했다. 그 후 매카시의

주도로 CTSS(Compatible Time

Sharing System)가 개발되었다.

CTSS 를 위한 기라성 같은

프로그램들이 1961 년 첫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0 년대에

접어들면서 기업들이 시분할에

관심을 가지면서 컴퓨터 사용시간을

상품으로 팔기 시작한다.

매사추세츠주의 키데이타사

(Keydata Corporation)는

소규모 도매업체와 소매상에게 회계

및 재고관리 온라인 서비스를

시분할의 방법을 통해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집적회로의

보급확대로 인한 컴퓨터의 급속한

가격하락으로 그 열기가 식어 갔다.

시분할과 병렬처리(concurrent

processing)는 OLTP(On-line

Transaction Processing)로

발전해 갔다. 기본적으로 OLTP 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을

말한다. OLTP 시스템의 성능향상이

없었다면 1961 년 노스아메리칸

록웰(North American

Rockwell)이 최초로 인간을 달로

보내는 아폴로계획의 주계약자로서의

역활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국

각지의 공장과 200 만개 이상의

부품과 각 부품과 그 조립을 설명한

설계도 등을 포함하여 천문학적인

작업량이었다. 1965 년 계약을

체결해 1968 년 ICS(Information

System)에서 IMS(Information

Management System)으로

이름을 바꾸어 360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OLTP 를 설계했다. 또한

코먼웰스 에디슨이라는 시카고

일대의 전기를 공급하는 회사의

고객상담 온라인 시스템의 개발을

하였다. 이는 기존의 OLTP 와는

다소 다른 면이 있었다. 즉 고객을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인 것이다.

고객관리시스템(CIS:Customer

Information system)으로

불리운 이 시스템은 200 명이상의

직원이 250 만명 고객의 정보를

관리하며, 고객의 전기요금 문의에

즉각적인 답변을 해주는 것이었다.

차츰 OLTP 의 중요성이 증대되자

1968 년 3월 IBM 은

정보관리시스템(IMS : Information Management System)이라는 이름으로 상업용

버전을 발표하자 제조업체, 대형

소매점, 기타 회사들로부터 주문이

쇄도하였다. 또 CIS 개조하여

고객정보관리시스템 (CICS : Customer Information Control System)의 상업용

버전이 발표되자 폭팔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 첫 고객은 의외로

뉴욕시 경찰국이었다. SPRINT 라는

컴퓨터 통신시스템이었다. 가동식때

약간의 실수로 컴퓨터통신에

회의적이었던 일부 간부들은 고소해

했지만 곧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SPRINT 는 어느 면에서는

SABRE 와 비슷했다. SABRE 의

고객은 SPRINT 의 911 전화를 거는

시민과 마찬가지였다. 고객의

요구사항에 맞는 항공기좌석을

예약하듯이 시민이 원하는 곳으로

경찰을 보낸다는 면에서 흡사한 면이

있었고 그 예외는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마. SW - IBM 중심의 메인프레임

시대

60 년대 전기까지는 IBM 의 704,

709, 7094 기종 등의 제어를 위한

FMS (FORTRAN Monitor System)가 운영체제로 자리잡게

된다. 이어서 60 년대 후기까지 멀티

프로그래밍이 응용된 OS/360 이

IBM/360 을 제어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PL/1, ALGOL, APL,

BAISIC 등의 언어가 사용된다. 60

년대 시스팀 역시 일괄처리

시스팀이지만 몇 개의 작업을 동시에

수행시킴으로써 컴퓨터 자원을 보다

유익하게 사용하는 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카드 판독기 , 가트

천공기, 프린터, 테입드라이버,

디스크 드라이버 등 많은 주변장치를

포함한다. 대부분의 작업은 모든

컴퓨터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운영체제 설계자는

프로세서를 사용 중인 하나의 작업의

입출력 작용을 완료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동안 다른 작업이 이

대기중인 프로세서를 사용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하나의 작업이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동안 다른

작업은 입출력 장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사실상 다양한 작업을 혼합해 서

수행하는 것이 컴퓨터 사용을 최적화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운영체제의 설계자는

몇 개의 작업이 주기억 장소에 동시에

있게 하는 다중 프로그래밍의 개념을

개발했다. 즉 주변장치가 사용되는

동안 몇몇 다른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프로세서는 작업들 간에 이동하게

된다. 사소한 실수가 있더라도

처음부터 프로그램을 다시

실행시켜야 하는 환경이어서

소프트웨어 개발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시기이다. 1964 년 IBM

시스팀/360 계열이 발표됐는데,

여기에서는 하드웨어 호환, OS/360

의 사용 사용자가 상위계열로 이동 등

더 큰 컴퓨터 자원을 제공하도록 '

범용성' 있게 설계되었으며 수년에

걸쳐 360 설계는 370 계열에 이어

4300, 30X0 계열로 발전해

갔다.IBM 360 은 바이트,

마이크로코드, 시스팀 프로그래밍

개념을 처음 도입한 제품이기도

했는데, 이는 시스팀 프로그래머들의

운영체제 코드 결함 제거를 가능케 해

시스팀 프로그램 개발 방식의 장르를

열기도 했다. 360과 370

환경용으로 개발된 많은 패키지들은

하드웨어나 개발자나 사용자가 직접

개발할 필요가 없이 특정 업무용으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패키지 시대를 열었다. 컬리넷

소프트웨어社의 IDMS DBMS 는

굳리치에서 개발됐고, CICS 는

유틸리티 업체를 위해 IBM 이 개발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동시 다중

대화식 사용자를 위한 보다 진보된

운영체제가 개발됐으며, 대화식

사용자는 컴퓨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터미널을 통해 컴퓨터와

통신을 한다. 이렇게 사용자가

컴퓨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터미널을 통해 컴퓨터와 통신을 한다.

이렇게 사용자가 컴퓨터와 상호

작용을 하므로 컴퓨터는 사용자의

요구에 빨리 응답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사용자의 생산성이 저하된다.

시분할 시스팀은 동시적인 대화식

사용자들의 다중 프로그램을 위해

개발됐다. 이 시대의 시분할 체제의

개발 노력이 MIT 에서 개발된

CTSS(Compatible Time-Sharing System), IBM 의

TSS(Time-Shared Operating System) 그리고 TSS 후속으로

MIT 에서 개발된

Multics(Multiplexed Information and Computing Service) 시스팀, 캠브리지

과학센터에서 개발되어 IBM 의

VM(Virtual Memory)으로

발전돼 CP/CMS 에서 선보인다.

CTSS 의 후계로 개발된 Multics 는

어셈블리어 대신 고급 언어로 작성된

최초의 주요 운영체제로 프로그램

개발 지원에서 시분할 시스팀의

가치를 중요성을 보여준 예이다. 또

TSS, Multics, CP/CMS 는

프로그램이 실제로 일차적인

저장장소 로 제공된 기억장소보다 더

큰 주소를 지정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가상기억 개념을 도입했다. 60

년대의 많은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데

있어 비능률적인 경험에 의해 좀 더

신뢰성 있고 이해하기 쉬우며,

유지하기 쉬운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새로운 접근 방법으로서

소프트웨어 공학이라는 분야도

출현하게 되었다. 한편 69 년에

벨연구소에서 켄 톰슨이 PDP

시스팀을 이용, 유닉스를 개발 하면서

소스코드가 연구기관 및 학계를 통해

확산되기 시작했다.60 년대 말까지

소프트웨어 산업은 규모 면이나 향후

성장에 대해서도 의심스러운

분야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69 년

소프트웨어 업체들에게 있어 서 의미

있는 해로 기억된다. IBM 이 기존의

정책을 바꿔 소프트웨어*하드웨어*

서비스 가격의 분리 책정을 선언하고

나섰고, 타 하드웨어 업체들도 이에

동조하기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이후

소프트업체들은 소프트웨어의 개발

빛 직접 판매를 통한 부의 축적이

가능하게 된다.

바. Mini Computer 의 탄생

1960 년대 이후 컴퓨터업계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대형기종에만 의존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업무마다 소형

컴퓨터를 설치하고 이를 통신망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아울러 대형

컴퓨터는 초대형인 슈퍼 컴퓨터로

발전해 나가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60 년대는 소프트웨어 분야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

즉 IBM 은 이 때부터 무료로 제공해

오던 소프트웨어의 공급을 중단한

일이다. 이는 일시적으로 IBM

사용자에게는 불편했지만, 결국

소프트웨어의 산업의 불을 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DEC 이후 세계

굴지의 컴퓨터 업체들이 속속 미니

컴퓨터 시장에 참여하였다. 후지쓰는

1965 년 FACOM 230-15 를

발표하면서 미니컴 시장에

뛰어들었다. 후지쓰가 발표한

FACOM 230-15 은 데스크

베이스의 OS 인 SPIRAL 로 코볼

(COBOL)을 사용한 사무처리에

뛰어난 기능을 발휘,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 뒤를 이어 IBM 은 S/3

소형시스템을 발표하게 됐다.

왕컴퓨터는 72 년 2200 시스템의

발표를 계기로 기본적 베이직

(Basic) 언어뿐만 아니라 코볼이나

포트란(FORTRAN)과 같은

고급언어(high level language)

로 응용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운용할

수 있는 VS 계열 미니 컴퓨터를

발표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77 년 왕컴퓨터의 2200 VS,

VS 80 이다. 후지쓰는 1975 년을

전후하여 후지쓰의 소형컴퓨터를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발전시키게

된다. 한가지는 법용 소형 컴퓨터로서

유저에 의한 개발, 운용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의

개발을 목표로, 기간 데이터 처리까지

가능하도록 하여 여러가지 비정형

업무도 유연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FACOM V 시리이즈를

발표한다. 또 하나는 유저의 사용

목적에 알맞게 완성된

업무처리시스템을 제공하는 것으로

설치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턴키베이스 개념을

도입하였다. 즉 유저측에 전산요원이

없이도 업무운용이 가능케 한다는

FACOM 시스템 80 의 발표이다.

이렇게 해서 발표된 FACOM V

시리즈와 FACOM 시스템 80

시리즈는 각각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유저의 요구가 점차 다양해짐에 따라

두 시스템의 상호보완을 위한

통합화가 추진된다. 또한 기술의

발달로 반도체의 집적도의 진보와

자기장치의 고밀도화에 따른 장치의

소형화, 퍼스널 처리장치의

인텔리전트 워크스테이션을 실현시킬

FACOM V 시리즈와 FACOM

시스템 80 시리즈를 통합한

FACOM K 시리즈가 1984 년

발표됐다. FACOM K 시리즈는

하드웨어의 기능을 강화시켜 86 년 K

시리즈 R 모델 K-301R 등 총 13 개

기종을 발표하게 됐다. FACOM K

시리즈 R 모델은 CMOS LSI 8,000

- 20,000 게이트를 신규개발하여

구성 부품수를 종래 모델에 비해 1/4

이하로 줄였고, 시스템 신뢰도를

비역적으로 높였을 뿐만 아니라

소형화, 저소비 전력화를 이루었다.

또한 마이크로 프로세서와

IPU(instruction proccess unit)의 고속화, 고속.대용량의 캐쉬

메모리를 탑재, 종래에 비해 1.5-2.3

배의 성능을 실현시켰다. 특히 이

제품은 1칩 1 메가 바이트의

다이나믹 램을 채용하여 컴팩트한

사이즈에서 대용량의 메모리 공간을

실현했다. 또한 소형, 대용량의 5

인치 및 8 인치의 마이크로디스크를

접속, 고속파일 채널을 채용함으로써

채널수의 확대 및 스피드의 확충을

꾀했다. 집적회로(IC)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더욱 중요한 역할을

점차 맡게 된 반도체는 가격이 상향

조정되었다. 71 년 인텔의 테드

호프는 마침내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개발, 메모리 칩의 역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컴퓨터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논리요소들이 포함된 칩이

바로 마이크로 프로세서인데 이는

최초의 프로그램 가능 장치로 여기에

몇몇 메모리칩과 지원(support)

칩만 추가하면 진정한 의미의

컴퓨터가 탄생되는 것이다. 이의

개발은 실리콘밸리지역의 산업을

변모시켰다.

나. 도전과 시련

그러나 SUPER-COMPUTER

시장을 크레이가 독점할 수는 없었다.

STAR-100 으로 쓰라린 경험을 가진

CDC 는 사이버(Cyber)203 이라는

고속 COMPUTER 를 만들어

해군기관에 설치를 했고, 이어 사이버

205 를 발표하여 크레이사에

도전했다. 나아가 ETA 라는

SUPER-COM PUTER 전문제조

자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참여를

하였다. 사이버 205 는 크레이사에

큰 위협이 되었으며, 태평양 넘어

일본의 3 대 COMPUTER 회사인

후지쓰, 히타치, NEC 가 연합하여

SUPER COMPUTER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미국 회사에는

내환도 겹쳤다. 1989 년 CDC 는

ETA 를 완전히 페업하면서 5 년동안

2억 4 천만달러의 적자를 냈다고

공개해 버렸다. 크레이의 독점이

예견되었지만, 시모어 크레이 자신이

자금사용문제를 둘러싼 회사내의

분규 때문에 크레이 리서치를

그만둔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

슈퍼컴퓨터 산업을 가일층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1981 년 일본은 원대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일본이 발표한

두가지 계획은 내셔날 SUPER

SPEED PROJECT 와 제5세대

COMPUER 개발 PROJECT 였다.

SUPER- SPEED-PROJECT 는 그

시대 최고의 COMPUER 인 크레이-Ⅰ

보다 60배나 빠른 초당 1 백억회의

실수계산이 가능한 기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제5세대 COMPUER 는

더욱 엄청난 목표를 가진 것이었다.

일본의 추격이 시작된 것이다.

첫번째는 히타치였다. 히타치는

S810-20 으로 명명된 이

COMPUER 는 약 6 백메가플롭스

(초당 실수 계산을 6억번 수행)의

성능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연이어

후지쓰가 발표한 기종인 VP-400 은

약 1 천 6 백메가플롭스의 성능을

자랑했다. 이어 1985 년말에 소개된

일본전기(NEC)의 SX-2 는 VP-400

보다 무려 10배나 빠른 1.3

기가플롭스의 놀라운 속도였다.

이러한 일본의 추격은 크레이의

명성을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미국은 다른 방면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즉,  도대체 SUPER

COMPUER 에서 최고속도 경쟁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속도가 빠른 속도보다는 실제

사용자의 요구에 만족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SUPER

COMPUER 의 성능을 측정하는

린팩(LINPACK)'이라고 명명된

PACKAGE 가 그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성능을 비교하려면

자신에게 유리한 PROGRAM 이나

PACKAGE 가 아닌 린팩으로 성능을

검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린팩에서

우수한 성능이 증명되었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모든

PROGRAM.PACKAGE 에서

우수한 성능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 휴스턴에 있는 어느

연구기관에서 SUPER-

COMPUTER 공개입찰공고를 냈다.

행운은 SX-2 에 돌아갔고 입찰에서

탈락한 회사들은 일본전기를 덤핑

혐의로 제소했다. 그러나 이제소의

승자는 일본전기로 돌아갔다. 실제로

싼 가격과 풍부한 SOFT-WARE 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SX-2 가 획기적인 구조나

설계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때까지 개발된

병렬처리기술을 종합하여 합리적으로

결합한 결과이다. SX-2 의 선택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새로운

기술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다소

실망스러워 했다.

다. 고속처리의 한계

신경망컴퓨터는 지금까지의 컴퓨터가

지상목표라고 여겨 왔던 빠르고

정확한 연산과 대용량의 정보처리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초연한 태도는 속도와 용량에 있어

기존 컴퓨터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원하는 정도의

속도와 정확성을 달성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분명히 남아 있으며, 게다가 이것들이

극히 중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적의

포탄이 날아오는 시점과 낙하하는

지점을 1 초의 몇 천분의 일까지도

계산할 수 있는 컴퓨터가 몇 개의

나무가지로 위장한 덩치 큰 탱크를

찾을 수 없다면 이건 분명 낭패스러운

일이다. 분명히 내가 그 중요하고

방대한 정보의 주인인데도 감기로

목이 좀 쉬었다고 컴퓨터가 나를 몰라

본다면 곤란하다. 게다가 왜 끊임없이

컴퓨터에 나를 맞추어야만 하는가. 왜

나만 자꾸 이 언어, 저 언어, 이런저런

소프트웨어까지 자구 외우고 익숙해

지려고 애서야 하고,컴퓨터는 내

언어를 이해하려고 조금도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기계 덕분에

편하자고 하는 일인지 기계 비위를

맞추는 일인지 모를 일이다. 기존의

컴퓨터가 보여 준 발전과 편리성

뒤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놓여

있었으며, 이것은 단순히 더 참신한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신경망 연구는 기존의

컴퓨터와는 달리 계산이나

정보처리보다는 확인이나 판단, 자기

학습의 능력을 컴퓨터 연구의 주요한

한 과제라고 보는 연구 태도이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과학 분야에 적용해도 크게 어긋남이

없다는 말은 과학 분야에 적용해도 큰

어긋남이 없다. 지금 이게 왠

날벼락이야 싶게 새로워 보이는 것도

사실은 나의 무지때문에 새로워 보일

뿐 실제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뉴턴 속에 이미

아인슈타인이 있고, 유클리드 속에

리만이 있듯이 과거없는 지식은 없는

것 같다. 갑자기 각광을 받고 새로운

기수처럼 나타난 신경망 연구 역시

아기자기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를 가지고 있다.

마. 퍼셉트론

1949 년 캐나다의 생리, 심리학자인

헤브(Donald Hebb)는 인간

두뇌의 작용은 개별 신경세포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간의 연결세기로 정해진다는

연결주의(connectionism)를

주창하여, 우리의 두뇌가 신경망

(neural networks)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맥쿨로치와

피츠, 헤브에 뒤이어 컴퓨터 과학자

로젠브렛(Frank rosenblatt)은

기초적인 신경망이론을 이용한 인공

신경망을 실제로 구현하려고 애썼다.

1958 년과 1962 년에 발표한

논문들을 통해 로젠브렛은

시경세포와 유사하게 입력층과

출력층으로 이루어진 인식자

(perceptron)를 제안하고 그

제작까지 연구를 이어갔다.

신경망컴퓨터의 출발이라고 평가되는

퍼셉트론은 신호를 받아들이는

소자들과 받아들인 신호의 특징을

검출하는 뉴런, 마지막으로 그 결과를

통합하여 결론을 내리는 출력

뉴런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0

년대에 MIT 의 민스키(Marvin

Minsky)등은 이 퍼셉트론 이론을

전개하여 교사입력(teacher

input)을 통한 도형 인식 등을

가능케 함으로써 신경망 컴퓨터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퍼셉트론은 학습처리와 병렬처리

기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인간의 뇌에

더욱 접근하는 성과를 얻었으나, 검출

뉴런을 필요한 신호만큼 준비해야

한다는 전제로 인하여 필요한 뉴런의

숫자를 천문학적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었던 데다, 1969 년

선형분리 이외에 여러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민스키와 페퍼트(Seymour

Papert)의 지적으로 그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무렵 한

신경병리학자가 인공지능에

도전한다. 그는 전형적인 뉴욕인

(New-Yorker)인 프랭크

로젠블렛이다. 그가 만든 퍼셉트론

(Percetron)이라는 전자회로는

아주 간단한 뇌의 기능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이었다.

퍼셉트론은 당대의 최고 컴퓨터인

IBM704 에서 시뮬레이션되었다.

실험은 서로 다른 형태의 사각형을

분류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한다면

눈깜짝 사이에 할 일들을 30

분동안에, 그것도 당시 최고 속도를

자랑하는 IBM704 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이 광경은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퍼셉트론은 광전지로

만들어진 인공눈을 통해서 조금씩

굼틀거리기 시작했다. 퍼셉트론은

아무 프로그램없이 단지 스스로의

학습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조직화

(Self-Organization)해 나갔다.

언론은 대서특필하였다. 모두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퍼셉트론을 빨리

훈련시키고, 도한 그 덩치를 커다랗게

만들것인가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로젠블렛의 접근에 반기를 든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로젠블렛의 뉴욕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동창인 민스키

(Marvin Minsky)였다. 1958 년

민스키는 만아프리카 출신 수학자인

패퍼트(Papert)와 함께 퍼셉트론

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퍼셉트론이라고 했지만, 퍼셉트론에

대한 비판을 꼼꼼하게 비판한

책이었다. 게다가 패퍼트의 수학

실력으로 이를 수학적으로 모두

증명하였다. 이후부터 인공지능은

하향식(top down) 방법을

선호하게 되었다. 1960 년대 초반

집적회로의 고안으로 활발히

진행되던 디지탈컴퓨터는 DARPA (Defence Advanced Research Project Agency)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지원을 받았던 반면,

퍼셉트론의 문제와 한계에 직면한

1970 년대의 신경망연구는 거의

관심 밖으로 몰려났다.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채로 미국의 그로스버그

(Stephen Grossbeg), 일본의

수니치 아마리, 핀란드의 코호넌

(Teuvo Kohonen)등의 개인적인

연구업적이 눈에 띨 뿐이다.

2. 실용화되는 컴퓨터 언어

가. Basic

베이식(Beginner’s All-

Purpose Symbolic II

nstruction Code)은 구조가

간단해 배우기 쉽고

인터프리터방식을 채용한 대화형

프로그래밍 언어다.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가 개발됨에 따라

현재는 다소 위축돼 있으나 개인용

컴퓨터가 소개되던 80∼90 년대

초만 하더라도 베이식은 PC 의 「

베이식」으로 인식되던 핵심적인

언어였다. 베이식은 1964 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의 존 케머니(John

Kemeny)와 토마스 쿠르츠

(Thomas Kurtz) 교수가 공동으로

개발한 프로그래밍 언어다.

교육용으로 개발된 언어답게 구조가

간단하고 대화형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장점이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베이식 프로그래밍 언어가 등장한

것은 지난 1975 년 2월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마이크로소프트社(MS)

최초의 고객이었던 MITS 에, 새로

개발한 베이식을 공급한 것에서

비롯했다. 그들이 개발한

베이식언어는 개인용 컴퓨터를 위해

개발된 최초의 컴퓨터 랭귀지

프로그램으로 기록되고 있다. MITS

는 그해 7월 그들의 「알테어

8800」 모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베이식 2.0 을 개발해 발표했다. 이후

베이식은 개인용 컴퓨터가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MS 는 인텔 프로세서가 발표될

때마다 프로그램을 잇달아 개발해

발표했으며 Q베이식이나 GW 베이식

등의 유사제품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베이식을 개인용 PC 에 적용하는

시도들도 크게 늘었다.

나. FORTRAN 의 개발

진정한 의미의 프로그래밍언어는

포트란(FORTRAN)과 함께

시작된다. 1957 년 웨스팅하우스

원자력 연구소에서 포트란

컴파일러는 성능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성공의 장본인은

존 배커스(John Backus)로서 그는

수많은 고등학교를 쫓겨났기 때문에

자신이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도 모르는 문제아였다.

그러나 2 차대전후 제대한 배커스는

밥벌이를 위해 군사용

무선기술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배커스의 재능을 발견한

기술선생님에게 더 밀리다시피

컬럼비아대학에 입학해 수학석사를

마쳤다. 배커스는 졸업과 함께 IBM

에 입사하여 스피드 코딩 번역기

작업에 참여했다. 배커스는 인간의

사용언어와 유사한 언어를

개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사용자로 하여금 기계어나

어셈블리어를 몰라도, 기계의 동작

과정을 몰라도 알수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로지 프로그래밍언어는 사용자를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 자체의

이해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포트란의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다.

포트란 언어의 특징을 몇가지 정했다.

대입문의 도입 Do 순환문 사용 등이

그것이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포트란 컴파일러가 1957 년

개발되었다. 그러나 전문

프로그래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IBM 은 꾀를 냈다. 모든 IBM705

사용자에게 무료로 보내 주었다.

반응이 좋자 IBM650 을 위한

포트란도 개발했다. 사용자들이

늘어가자 점점 상위 버전이

개발되었다. 사용자의 반응도 다양해

지고 포트란 컴파일러도 여러 종류가

시중에 떠 돌게 되었다. 자신에 맞는

포트란 컴파일러를 개발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표준안의 제정이

시급해 지자 1977 년 국제회의에서

포트란-77 을 세계 표준으로

발표하였다. 포트란의 성공은 고급

언어의 개발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사용자가

늘어나자 불만도 증가하였다. 즉

과학기술 계산에는 적합했지만

사무용으로 부적당했다. 이의 해결을

위한 회의가 열렸지만 혼란만 가중

시켰다. 그 누구도 객관적이지 못하고

자사의 아니면 개인의 이익에

우선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새로운

판정관을 찾았고, 컴퓨터업계의 최대

자금줄인 국방성이 판정관이 되었다.

왕년의 스타인 호퍼 여사도 문제의

심각성을 국방성를 방문해 지적했다.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CODASIL(Coference On Data S? Language)라 불렸다. 회의는

여러 위원회를 구성하고 의견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COBOL 이라는

상업용 언어에 합의가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IBM 이

반대하고 나서며 자신들이 개발한

커머셜트랜스?가 상업용언어로

채택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니웰이

속한 위원회에서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던 FACT (Fully

Automatic ? techique)를

담합해 이로 코볼을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우여곡절속에서 코볼이 채택되었다.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코볼은 몇번의 개정을

거치면서도 꾸준히 살아 남았다.

다. ALGOL과 PL/1 의 등장

언어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학자들은 언어에 대한 욕심을 알골

(ALGOL, Algorithm Language)가 그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이는 신대륙(미국)에

대한 구대륙(유럽)의 반항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1958 년 5월 28 일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과학기술용

범용언어에 대한 회의(ACM/GAMM

committee)가 열렸다. 배커스도

초청되었다. 그러나 소수점을 문장의

분리기호를 쓸것인가하는 문제로

격돌을 벌였다. 위원장인

웨그슈타인의 중재로 일단 격돌을

일으키는 부분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였다. 사소한 논쟁을 피하고

구조적인 측면을 중시한 언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포트란을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이후에 나타날

현대적 언어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특히 배커스표준형식(Backus

Normal Form, BNF)이 도입되어

이제 프로그래밍 언어는 하나의

언어과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의 포트란 추종자들은 알골을

헐뜯었다. 입출력도 제대로 없다,

구조가 모호하다는 등 그러나

유럽인들은 알골을 아꼈고,

미국에서는 시들어 갔다. 호퍼여사는

알골을 기절할 정도로 절묘한 구조의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 조금 쓸쓸할

따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알골설계의 철학은 미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블럭구조,

자기호출기능(recursion), BNF

형식에 의한 구문 정의가 그것으로 이

선물을 이어받은 파스칼은 포트란을

미국의 대학에서 몰아내고, 교육용

언어로서 자리를 굳혀갔다. 1960

년대 이후 새로운 언어는 포트란과

코볼의 영화를 꿈꾸며 여기저기서

탄생했다. IBM 은 야심적인

시스템/360 을 계획하면서 새로운

언어개발을 아울러 추진했다. PL/1

으로 명명된 이 고급언어는 포트란의

명료성과 속도, 코볼의 높은 가독성을

목표를 삼았다. PL/1 은 시스템/360

이 발표될 때까지 매끈하지는

못했지만 360 의 후광 덕분에 10

여년동안 많은 애용을 하게 되었다.

포트란이나 코볼에 익숙한 사람들은

곧 PL/1 에 익숙해 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즉

어느것 하나 빠진 기능은 없지만 막상

구체적인 용도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PL/1

은 공룡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다.

80 년대 초부터 마이크로컴퓨터가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파스칼이나 C언어는 곧

소형컴퓨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PL/1 은 배회할 수 밖에 없었다.

라. 특수 목적 언어

법용언어의 개발에 힘입어 특별한

목적에 적합한 언어의 개발도

활발해졌다. 그 최초의 언어는

APT(Automatically Programmed Tools)이었다.

APT 는 특별히 CAD(

컴퓨터이용설계) 프로그램을 위해

만들어졌다. 특수목적언어로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은 존 매카시라는

인공지능학자에 의해 개발된 리스프

(LISP)이다. 리스프는 리스트(list)

라는 자료구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요한 특징은 괄호가 너무

많아서 처음보는 사람에게는

공포심을 준다는 것과 프로그램과

data 의 구별이 없다는 것으로

인공지능분야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결국 하나의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을

읽어들여 고칠수가 있었다. 이는

엄청난 양의 기억장치를 요구해

초창기에는 비현실적인 언어로

받아들여졌지만 기억장치의 가격이

저렴해짐에 따라 각광을 받게 되었다.

(1)LISP

LISP 은 1960 년대에 MIT 의 한

그룹과 John McCathy 에 의해

설계되고 구현된다. LISP 은 특별히

인공지능을 포함한 컴퓨터과학분야의

연구에 폭넓게 쓰이고 있다. Lisp 의

최초 정의는 1965 년 McCathy 에

의해 처음 이루어진다. 그러나 Lisp

은 표준안을 확립하기 위한 몇가지

제안이 나왔지만, 매우 다양한

version 들이 나타난다. 그중에서

INTERLISP, Franz LISP, the

Standard LISP proposal of Marti et al 등이 많이 쓰인다.

리스프(LISP)는 60 년 미국 MIT

연구소에서 존 매카시 등

프로그래머들이 만든 프로그래밍

언어다. 리스트 프로세싱(List

Processing)의 준말로 프로그램과

데이터가 모두 리스트형태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즉 모든

프로그램이 이터처럼 취급돼

데이터나 프로그램 수정이 쉽다.

LISP 는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에서와

같이 특수한 표기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LISP 는 컴파일러

개발과정에서 탄생했다. 58 년 MIT

에서는 인간의 언어를 기계어로

바꿔주는 컴파일러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서브루틴 링크와

자료구조에서 중요한 스택 핸들링,

삭제를 위한 방법으로서 기존의

것과는 다른 방식의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이 가능함을 인식하게 됐다. 몇몇

프로그래머들은 프로젝트의 주목적을

컴파일러에서 LISP 개발로 전환해

60 년 LISP 개발 프로젝트를

끝마쳤다. LISP 의 개발 주역들은

다양한 함수를 어셈블리 언어로

컴파일링할 수 있고 이를 LISP

환경으로 이식하기 위한 서브루틴을

만들기 시작함으로써 읽기와

프린트리스트 구조를 포함하는

특이한 형태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탄생시킨 것이다.

(2)Prolog

리스프의 개발로 유럽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새로운 언어의 개발에

몰두했다. 이미 알골을 개발했었지만

알골은 엉거주춤한 상태에 있었다.

1972 년 마르세이유 공과대학의

알랭 콜메로어는 프롤로그(Prolog)

라는 논리언어를 개발했다. 그 구조는

리스프만큼이나 단순했다. 특히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를 적어야만

하는 절차적 언어(procedure

language)와는 달리 단지 문제가

무엇이냐는 것만을 기술함으로서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프롤로그가 발표되자

미국의 리스프가 독주하고 있던

인공지능학계에 약간 술렁거림이

일었다. 프롤로그의 우수성을 알리는

논문들이 속속 발표되고, 게다가

일본이 제5세대 컴퓨터의 전체

시스템 언어로서 프롤로그를

채택하자 인공지능학계의 판도가

변하는 듯했다. 리스프와

프롤로그간의 싸움이 일었고, 자신이

속한 지역(미국 또는 유럽)에 따라

아니면 학풍에 따라 양분되어 그

장단점을 쏟아내고 있다.1977 년에

영국의 에딘버러대학에서 컴파일러를

갖춘 DEC 10-prolog 가 나와 널리

보급되었다. Prolog 의

프로그래밍은 지식데이타베이스의

구축이고, 프로그램의 실행은 이에

대한 조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

Prolog 는 추론할 때 해당하는 답을

모두 찾아내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한 것이 백트랙으로 되돌림

이라는 의미에서 처리과정을

리프트하여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여

모든 답을 찾아낸다. 실제로 Prolog

에는 이 외에도 리스트라는

데이타구조를 다루는 등 여러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다. 1988 년부터는

ISO(국제표준화기구)에서 Prolog

의 표준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표준화작업은 일반 문법을 다룬 레벨

1과 모듈화에 대한 레벨 2 로

나누어져 있으며, 현재(1992 년 11

월) 레벨 1 의 표준안(

커미티드래프트)의 투표가 행해지고

있다. 레벨 2 에 대해서는 오는 93

년에 가서 투표가 행해질 전망이다.

이러한 특수 목적언어가 전성기를

누릴 즈음, 범용언어 사이에서도

약간의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앞에서

알골의 재정과정에서의 문제를

언급했지만 그 논쟁은 계속되었다.

계속된 개량형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다들 알골의 사용을 역설했지만

이용은 하지 않았다. 유럽을 통틀어

알골68 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영국

레이더 연구소 한곳 뿐이었다.

(3)SNOBOL 4

SNOBOL 4 는 벨연구소에서 개발된

언어중에서 60 년대에 마지막으로

구현된 언어이다. 제일 많이 쓰이는

분야는 자연언어와 같이, 많은 양의

문자열 데이타를 처리하는 분야에서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다. SNOBOL

4 에 대한 최초의 묘사는 1971 년

언어설계자인 Griswold 가 했으며,

구현설계는 1972 년에 이루어 진다.

SNOBOL 4 는 다른 언어와 매우

구별이 가는데 그 이유는 문자열

처리와 pattern-matching

연산에서의 개성으로 말미암아 매우

독특한 언어로 구분된다. 덧붙여

SNOBOL 4 는 사용자 정의

데이타타입을 구현한 최초의

언어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LISP

와는 유사한 점이 있다.

(4)APL

APL 은 1962 년에 Kenneth

Iverson 의 책 A Programming

Language 에서 최초로 언급되고

있다. APL 의 이름은 이책이

이름에서 유래한다. Iverson 의

원래 목적은 사용하기 편리한 언어의

구현에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컴퓨터에 직접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은, 그러나 리스트의

기록도 매우 어려운 언어가 되었다.

초기에는 이러한 어려움으로

개념상의 언어로 취급을 했으나

1964 년 IBM 360 에서 처음

구현된다. 현재의 APL 은 1960 년대

후반 IBM 의 Iverson, Falkoff

등에 의해 구현된 APL/360 이

그것이다. 이후에 나온 대부분의

APL 은 APL/360 의 변형이라할 수

있다.

 3. 광섬유와 컴퓨터 통신

가.레이저와 광섬유의 등장

(1)빛을 통한 통신의 시작

1970 년 9월말 로버트 모러

(Robert D Maurer)는 영국에서

개최된 유도전파를 이용한

트렁크통신회의에서 최초로 레이저를

이용한 대량 정보의 전송이 가능한

순수한 유리섬유의 개발을 발표했다.

이는 코닝유리사에서 그의 동료

도널드 케크, 피터 슐츠 등과

추진해온 연구였다. 그러나 광통신의

시조는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벨이었다. 뛰어난 창의력을 가진 이

통신의 천재는 임종에 이를 때까지도

스스로 광전자기기 라고 부른 그

장치가 자신의 이미 발명한 전화보다

더욱 훌륭한 발명이라고 주장할 만큼

그에 대해 강한 집념을 보였다. 그는

전화발명 특허를 얻은 직후에

광전자전화를 발명, 1880 년 2월

워싱턴에 있는 자신의 연구소에서 그

장치를 시연했다. 그는 햇빛의 강도를

크게 변환시키는 반사경의 진동을

이용해 음성을 전송했으며 수화기의

배터리에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셀레늄 봉(愼에 그 진동이 전달되게끔

했다. 벨은 당시로서는 최대의 가용

광원이었던 햇빛을 이용, 음성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나

대기중의 여러 구성 요소들이

태양광선의 통과를 방해해 이의

실질적인 이용을 불가능하게 했다.

1880 년대에 또 한사람의 영국인

찰스 버논 보이즈 역시 비록 그가

빛의 전송에 유리섬유를 이용할

의도는 전혀 없으나 최초로 가는

유리섬유를 만들어 냄으로써

섬유광학기술의 영역을 넓히는데

공헌했다. 그는 실크를 섬세하게 질긴

유리실로 대체할 수 있는 유리실을

발명하려고 시도한 끝에 원시적이긴

했지만 효과적으로 유리실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새로이 개발했다. 그는

석영을 녹여서 화살에 발라 긴

유리화살에 발라 긴 유리화살을 만든

다음 화살을 쏘았다. 그의 방법은

유리가 다양하고 다양하고 실용적인

용도의 섬유로 변화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2)다우코닝사의 참여

미국 표준연구소(Standard

telecommunication Lab)의

찰스 카오(Charles K Kao)와 조지

호캄(George A Hockham)은

새로운 연구를 통해 통신용으로서의

광섬유의 가능성과 한계성을 밝혀

냈다. 그들은 유리 자체보다도 거기에

섞여 있는 불순물이 빛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광도가

1km 당 20 데시벨 정도가 되게끔

불순물을 제거해야만 비로서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리섬유가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것은 빛이 1km 를 이동한 후에 그

1%의 광도를 나타내는 상태를

말한다. 유리소비제품업체로 알려진

코닝유리사는 다소 우회적인

방법으로 유리섬유분야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영국을 방문하고 있던 그

회사의 한 고학자가 영국 우체국의

연구요원들로부터 통신용광섬유를

제작하려다가 실패로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국후 그는 그

정보를 곧 회사측에 알렸다. 이에

코닝사는 새로운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연구팀을 구성, 제품개발에

총력을 집중했고 결국 이것이 이

회사의 주력제품 이 되었다. 로버트

모러가 이 새로운 연구팀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통신매체로서의 유리를

연구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선입견 없이 연구에 임했다.

연구과제에 관한 브리핑을 받은

모러와 동료과학자들은 필요한

자료를 수집한 다음 연구활동에 본격

착수했다. 우선 그들은 광섬유에

적합한 유리를 선정하는 생소한

작업부터 착수했다. 그들은 다른 나라

연구소의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합성유리를 가장 적합한

광섬유재료로 지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합성유리는 다양한 종류의

유리로 구성되어 있어서 필요한

정도의 굴절률을 구할 수 있고 쉽게

용해돼 섬유로 전환시키는 과정이

단순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코닝사의 연구요원들은 기본적으로

유리의 순도를 추구하는데 더 역점을

두는 연구방법을 택했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은 순도가 매우 높은

용융 석영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연구팀은 얼마 안가서 지름길로

판단하고 택한 방법이 잘못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용융석영은 용해점이 높아 섬유로

전환시키기가 지극히 어려웠을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유리중에서 빛의

굴절률이 가장 낮았다. 그들은 빛을

전송하기에 충분한 굴절률을 가진

심에 적합한 유리가 필요했는데

순도높은 용융석영이 그 목적에

적합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자료를 전송하는 빛을 심안에 있도록

가두어 두는 외피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에 굴절률이 그보다 더욱 낮은

유리가 필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으나 연구팀은

불리한 상황에서나마 그 안에서

최선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모러와 동료과학자들은

용융석영을 심으로 사용하려는

구상을 와전히 포기하든가 굴절률이

높은 유리를 선택한다는 생각대신 그

석영을 광섬유자체의 기본소재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광섬유의

심에 도펀트를 첨가해 굴절률을

높이는 한편 외피는 정상적인 상태로

놓아 두었다. 이 연구방법은 언뜻

보기에 복잡하고 비실용적으로

보이지만 빛을 유도하는 유리섬유를

개발하기 위해 오랫동안 추진해 온

여러 방법 중에서 가장 혁신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러와 동료

연구요원들은 독자적인 방법으로

용융석영을 이용, 섬유의 외피도관

제조에서부터 시작하여 광섬유개발에

착수했다. 굴절률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거친 도펀트가 첨가된

여러 용융석영은 화학작용에 의하서

검댕 이 되어 도관내에 퇴적되었다.

유리를 구성하고 있는 전체분자들은

가열되어 배열이 무너져 늘어나면서

섬유로 변했다. 그 기술은 효과가

있었다. 도펀트가 첨가된 내부의

석영은 바깥 부분을 감싸고 있는

외피보다 높은 굴절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특허를 받게 되는 코닝사의

이 기술은 내부의 증기침전으로

불렀고 훗날 상업적 목적으로

광섬유를 생산하는 다른

업체들에게도 표준 기술이 되었다.

모러가 개발한 초기의 섬유에 대한

실험은 만족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회사의 관심도

적었고, 회사의 지원도 없었다.

결국은 다른 프로젝트를 연구하면서

그 자금을 이용해 연구를 계속했다.

여름을 보내며 시간적 여유가 생겨

조금 더 많은 진척이 있었지만 쉽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1970 년 최소한의

목표를 달성한다. 그들이 새롭게

만들어 낸 섬유는 실험에 사용된 헬륨

-네온 레이저의 6 백 32.8 나노미터

파장에서 km 당 17 데시벨의 손실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모러는 영국에서

열린 한 통신회의에 불안감을 가지고

통신회의에 참석했으나 자신들의

연구가 상당히 진전된 연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연구의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즉 보다

다루기 쉬운 도펀트를 발견하는 것과

보다 적합한 크기의 심의 개발이

그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르마늄이 입수하기 쉬웠던

이산화티타늄보다 보다 효율적인

도펀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코닝사는 초기단계의 섬유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내부

증기침전기술을 개발했다. 이것은

핵심물질이 외피를 형성하는

시동도관안에 쌓이게 하는 방법이다.

그 다음 코닝사는 외부증기침전

(OVD) 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 그것은 유리그을음이 심축

주위에 쌓이게 한 다음 심축을

제거하고 쌓인 합성유리 원료를 다시

가열해서 광섬유로 추출하는

방식이다. 가장 실용적인 광섬유 심의

규격을 정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초기단계의 저손실섬유는 단일모드

디자인이기 때문에 빛의 한가지

도파모드만을 전달해

비실용적이었다. 심의 크기가 크면

많은 양의 빛을 통과 시킬 수 있지만

빛의 분산되는 성질을 생각하면 이

역시 좋은 대안이 될 수는 없었다.

나머지 가능성인 경사형

광섬유개발은 일본의 니폰판유리사가

1969 년에 시도한 일이 있었다.

코닝사는 이분야의 연구에 착수했다.

빛의 굴절은 심 자체내에서만

일어나므로 굴절률의 경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다량의 광파가

섬유를 통해 비슷한 비율로 전달된다.

따라서 광파의 확산현상은 줄어드는

반면 주파수의 범위는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코닝사의 래리 카펜터

(Larry L Carpenter)는 일련의

유리층을 침전시켜 심을 형성해

내는데 초점을 맞춘 실험에 착수했다.

침전된 각 유리층은 점차 굴절률이

낮아져서 나중에는 그 형성물질이

가열됨에 따라 유리광섬유가 되었다.

카펜터는 1972 년 드디어 저손실의

경사형광섬유를 제조했다. 다른

업체보다 앞서 특허를 획득함으로써,

연구개발의 성과가 소득을 가져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3)광섬유의 상업화 시작

코닝사는 이제 새로운 전환의 시기에

다가섰다. 즉 코닝은 광통신분야의

많은 획기적인 연구와 업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광통신의 모든 분야를

소화해 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광케이블과 관련된

기술은 일본과 이탈리아회사에

라이센스를 제공해 주었다. 또

프랑스와 영국의 기업, 그리고 독일의

지멘스와 합작으로 시코르사를

설립한다. 레이저는 광통신에서

핵심적인 기술이다. 그러나 당시 2

극관 레이저는 빔의 변조가 쉽고

크기가 작다는 점등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쉽게 가열이 되고 이는

빔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어

새로운 연구를 요구하게 되었다. 후에

M A Com 레이저 다이오우드

연구소로 개칭한 레이저 다이오우드

연구소는 75 년 실온에서 1

천시간동안 작동이 계속되는 반도체

레이저 장치를 개발한다. 2 년후에는

1 백만시간 또는 1 백년가 계속

작동할 수 있는 반도체 레이저를

발표했다. 단거리나 제한된 주파수

영역에서 유용한 비간섭성 발광

다이오우드(LED)의 개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미국의 2 대 통신기업인

AT&T 와 GTE 는 상업적 목적을

위한 광섬유통신의 실험에서 먼저

성공을 거두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 경쟁은 77 년 봄 GTE 의

시제품이 AT&T 보다 조금 먼저

가동됨으로써 일단락됐으나 AT&T

시스템의 시제품이 보다 우수한

성능을 나타냈다. AT&T 의 시스템은

초당 45 메가비트의 음성, 비디오 및

데이타를 시카고에서 1km 떨어진

거리에서 양방향으로 전송하는

성능을 발휘했다. 이것은 6 백 72 개

음성채널의 통신량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GTE 는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서 9km 되는

지점으로 초당 1.5 메가비트

데이타를 전송하는데 두개의

신호증폭기를 사용했던 것이다.

코닝사는 AT&T 와 GTE 양측에 모두

광섬유를 공급했다. 이들 두회사는 2

년간에 걸쳐 실시한 광통신시스템의

시험은 이를 기대하던 관련업계와

신문 등의 실용화시기를 앞당기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세계각국의

우편통신당국과 업계와 미국의 다른

통신 과련 업게에서도 앞다투어

광통신에 대한 연구와 실용화를

서두르기 시작한다. 이에 코닝사는

광통신 수용가 급격히 증가할 것을

예상하고 모든 시설을 완전가동하고

AT&T 의 자회사와 특허 라이센스

협상을 벌인다.

일본과 캐나다의 정부기관들은

미국보다 먼저 설치한다. 일본의

통산성은 Hi-OVIS(고성능 상호작용

광학정보시스템)라는 양방향 케이블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AT&T 와 GTE 가

광통신시험을 실시하기 1 년전인 76

년이었다. 일본은 78 년 7월 지방의

한 작은 도시에서 1 백 50 가구를

대상으로 이 시스템의 서비스를

개시했다. 그 시스템은 비디오

네트워크를 통해 가입자들이 각종

정보를 광범위하게 접하는 동시에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도 전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록 경비도

많이 들고 고가의 기존 통신 시설이

쓸모없게 된다 하더라도 일본은 이

새로운 기술의 장래성을 미리 내다본

것이다. 일본에서 Hi-OVIS 가

운영되기 시작할 무렵, 캐나다는

일본과 유사하지만 그 보다는 조금

소극적인 케이블 구축사업을

추진했다. 캐나다는 통신부,

캐나다통신협회, 마니토바전화국 및

노던-텔리컴사 등의 공동사업으로

마니토바 지역의 한적한 소도시인

엘리와 스테-유스타체에서 광통신

시험을 실시한다. 이 지방의 기존

전화시설은 4 개 이상의 가정이 한

회선을 공용할 정도로 낙후되어

현대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또한

유리섬유가 영하 40 도의 겨울

기온을 견뎌낼 수 있는지를 측정해

보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 시험은

단방향이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보다

적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각 가정마다 단독회선을

갖고 케이블 TV, 스테레오 FM

라디오, 광범위한 정보를 공급하는

비디오텍스 등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처럼 70 년대에는 실용화를 위한

선구적인 연구와 시험이 곳곳에서

이루어 지고 있어 80 년대의 급속한

발전을 예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컴퓨터 통신의 시작

컴퓨터 신호를 이용한 장거리 전송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40

년대부터이다. 1940 년대까지도

컴퓨터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다.

오히려 멀리 떨어진 컴퓨터를

전화선을 이용해 사용하는 것이 더욱

경제적이었다. 이런일에 뛰어든

사람이 조지 스티비츠라는

벨연구소의 젊은 수학자였다. 그는

복소수 계산을 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그 성능이 뛰어나

건물내의 많은 수학자들이

텔레타이프로 이를 연결해

사용하였다. 스티비츠는 한

학술대회에서 아예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복소수계산기에 전신을

통해서 직접해보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2 백 50마일(약 402km)의

전용케이블을 설치하고, 보통의

전신회로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1940 년 9월 11 일의 시범은 많은

관중들 앞에서 성공적으로 마쳤다.

1958 년 최초의 대규모 컴퓨터

네트워크인 SAGE (Semi Automatic Ground Environment) 시스템이

대공방어장치로서 개발되면서

시작되었다. 전체를 통제하는

컴퓨터는 MIT 의 리얼타임 컴퓨터가

채택되었다. SAGE 는 1 천 5 백만

마일(약 2413km)이나 되는 거대한

통신선로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 방어에 있어서 자료처리속도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관측된

자료를 중앙의 컴퓨터에 빨리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고속 모뎀의 개발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속도를 높일때

문제가 있었다. 지나치게 속도가

높아지다 보면, 각 비트간에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1964 년

벨연구소의 럭키(Lucky)라는

연구원이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개발했는데 이는 전송하기전 선로의

상태를 점검해주는 1.2 초동안

회선을 ? 시키는 방법을

개발함으로서 해결 되었다. 그 후 이

SAGE 시스템의 기술적 효과가

계기가 되어 1961 년에 아메리카

에어라인사에서 여객기의 좌석

에약과 회사 업무를 종합적으로

처리하는 SABRE (Semi Automatic Business Research Environment) 시스템이

발표되었고, 1964 년에 완성되었다.

또한 컴퓨터 시스템을 다수의

이용자가 공동으로 이용하기 위한

시분할시스템(TSS : Time

Sharing System)의 개발에

주력하게 되었고, 이런 목적의

시스템으로 미국 MIT 대학의

CTSS(Compatible Time Sharing System)을 들 수 있다.

 4. 다양해지는 컴퓨터

입출력

가.컴퓨터 그래픽의 제2 기

제2 기는 60 년대이다. 제1 기의

대표적인 기종이 에니악임에 비하여

제2 기의 대표기종은 IBM 7090,

7070 등이다. 60 년 보잉사에서

CRT 를 이용하여 제트 여객기 보잉

737 의 설계를 만들었으며, 중반에는

컴퓨터 예술가들이 많이 나타났다.

벨연구소에 있던 K. 놀턴,

엘슈와르츠 등은 컴퓨터 누드 ,

갈매기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데

이들은 사진을 기초로 한 구상형체를

문자나 기호의 농담으로 표현하고

이것을 플로터에 출력시킨 것이다.

또한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C.

크리스에 의해 제작된 플로터나 CRT

를 사용한 화상에 의한 작품은 매우

훌륭하다. C. 크리스는 현재의 3

차원 컴퓨터 애니메이션 원류의

하나라고 일컫는 ANIMA 11 의

제작자이다. 60 년대에 실용화된

보잉사의 CRT 에 의한 대화형 처리

시스템은 오늘날 캐드(CAD)

시스템의 원형으로서, 3 차원의 공간

표시에 대한 몇 가지 접근은 시각에의

가능성을 넓혀 주었고 컴퓨터가 시각

통신(visual communication)에

중대한 역활을 할 것이라는 예견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와 같이 50 년대

후반에 컴퓨터 출력에 의한 각종

장치들이 정비되고 60 년대에는 이들

기기를 이용한 컴퓨터 예술이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었다. 컴퓨터 뿐만

아니라 전기기법에 의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여 키네틱 아트,

라이트 아트, 옵티칼 아트,

일렉트로닉스 뮤직 등이 성행하였다.

60 년대에는 컴퓨터를 핵으로 하여

예술에 빛과 움직임, 소리를 가한

공간 예술의 시도가 여러 미디어를

통하여 실험되게 된 시기이다. 대화식

컴퓨터 그래픽의 주요한 새 분야로

나타나게 된 가장 큰 사건은 MIT

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서덜랜드

(Ivan E. Sutherland)의

brilliant논문이 1962 년에 발표된

사건이다. 이 논문은 Sketchpad : A Man-Machine Graphical Communication System 이란

제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대화식

컴퓨터 그래픽이 존재할 수 있으며

유용하고 매우 흥미있는

연구분야라고 깨우쳐 주었다. 60

년대 중반에는 MIT, 벨 연구소, General Motors, Lockheed Aircraft 등에서 컴퓨터 그래픽에 관

한 큰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 중

이었다. 51 년 세이지가 성공함에

따라 MIT 는 그래픽기술을 중심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방에

사용된 그래픽은 이반 서덜랜드라는

젊은 공학자에 의해서 급진전되었다.

그는 완성될 프로그램의 이름을

스케치 패드(sketch pad)라고

불렀다. 즉 컴퓨터 화면에서 스케치

작업을 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초기에는 간단한 선

밖에 그릴 수 없었으나, 여러 다양한

도형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스케치패드는 인간이 하기에는 너무

지루한 작업을 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예를 들어 6 백개의

육각형 무늬를 그리려면 전문가라

할지라도, 사나흘이 걸리지만 스케치

패드는 불과 몇십분 만에 해결하였다.

MIT 는 이를 자랑거리로 여겨

대대적인 선전을 하였지만,

기업가들의 반응은 작았다.

선견지명을 가진 기업도 있었다. GM

은 서덜랜드보다 2 년 앞서 자동차

설계에 컴퓨터를 도입하려 했었다.

GM 이 만든 DAC-1 시스템은

스케치 패드와 같이 소개되었다. GM

의 그래픽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기업들의 반응을 자극했다.

항공화사인 록히드사도 컴퓨터

설계를 도입하였다. 특히 IBM 이

IBM 2250 에서 DAC-1 을 지원해

주는 그래픽 전용 단말기를 부착해

줌으로서 그래픽 전문회사가 속속

생겨나게 되었다. 선두주자는 스케치

패드의 완성자인 서덜랜드와 UCLA

의 교수인 데이비드 에반스가

공동으로 설립한 에반스

서덜랜드사이다. 그들은

텍트로닉스사(Textronix)가 개발한

DVST(direct view storage) 기술을 도입, IBM 2250 의 그래픽

단말기를 선보여 시장을 석권했다.

나.가상현실(VR)

최근 영화 스크린에 자주 등장하는

가상현실(VR)은 글자 그대로 인간

감각의 착오를 유발시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 주는 기술을 말한다. 가상

실험이나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건설현장의 시뮬레이션등

산업적용도외에 가상의료나 패션,

공상과학 영화에서 곧 잘 볼 수 있는

「사이버섹스」등 성적인 용도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VR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던 3∼4 년전부터

멀티미디어와 함께 소개되곤 했으나

사실 VR은 멀티미디어를 뛰어넘는

차세대 기술이다. 연구분야도 시각

의존도에서 벗어나 청각과 후각으로

확대되는 추세에 있으나 아직까지는

개발의 여지가 많은 분야다. VR은

시각과 청각 촉각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착시현상을

이용하는 시각분야의 VR은

구현하기가 비교적 쉽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빠른 개발사를 가지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VR은 1962 년

사진가이면서 영화작가였던 「모튼

하일리그 (Morton Heilig)」가

「센소라마(Sensorama)」

기계를 고안했던것이 효시로

전해진다. 그가 개발한 센소라마는

컴퓨터를 이용한 기술이 아니고

몰입기술을 이용한 제품으로

영사화면에 따라 진동하는 의자를

이용, 가상체험을 할 수 있게 고안한

장비였다. 이후 1965 년에는 「

에반스 앤 서덜랜드」가 1833 년

찰스 휘스턴(Charles W

heatstone)이 고안한 입체거울을

근간으로 현재의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 (HMD)의

원조격인 디스플레이 장치를

개발하면서 본격화됐다.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가상현실기술은 영화분야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1937 년 미국

헐리우드의 한 영화사는 적· 녹색

필터를 이용하는 입체 3 차원영화인

「3 차원 살인(Third D

imension Murder)」을 제작해 3

차원 영화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특히

영화분야의 가상현실붐은 많은

제작비를 투자해야하는 영화분야의

속성상 컴퓨터와 게임업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게임업체인 세가나

스테레오그래픽스는 적외선

송수신기를 이용해 모니터의 영상을

입체로 구현해 주는 입체안경을 개발,

무거운 HMD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이들 회사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입체영상을 보장해주는

제품을 개발해 시각분야의

가상현실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가상현실의 한 부분을 이루는

사운드분야는 1950 년대 스테레오

음향이 발명되면서 구체화됐다.

스테레오 음향은 2 개의

마이크로폰을 사용해 소리에 대한

지각을 감지할 수 있게 한 방식으로

최근에는 3 차원 청각환경을 재생해

주는 저가의 장비들이 속속 출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다.입력장치

(1)톰 소여의 모험

타이프 라이터를 최초로 사용해

소설을 쓴 사람은 마크 트웨인이었고,

작품은 톰소요의 모험 이다. 1714 년

밀이라는 손재주가 좋은 기술자가

영국의 앤여왕은 글쓰는 노동에서

해방시켜줄 기계식 필기구를 만들어

보겠노라고 말했다. 기계가 글씨를

한자씩 직어내는 원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밀은 그 완성을 보지 못했다.

실패의 원인은 실제 제작을

뒷받침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 백 50 년이 지났다.

세상은 변해 신문이라는 것이

생겨났고, 글을 써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늘어났다. 위스콘신의 한 신문

편집부에 근무하면서 인쇄소의

사장인 크리스토퍼 숄즈의 등장으로

자동필기기구를 개발했다. 1872 년

숄즈와 그의 조수인 글라이든가 만든

자동필기 기구가 탄생한 것이다.

타이프 라이터(Type-Write)라는

이름도 붙였다. 숄즈는 자금의

부족으로 당시 총포류와 재봉틀로

유명한 레밍턴랜드와 손을 잡고

생산한 관계로, 최초의 타자기는 마치

재봉틀을 연상시켰으며 행을 바꾸기

위해서는 재봉틀 발판과 같은 것을

발로 밟아야 했다. 몇가지 문제도

있었다. 몇 센트하던 깃털펜에 비해 1

백 25 달러나 하는 가격, 자신이 친

글씨를 알아 보려면 타자기의

윗부분을 들어 올려야 했고,

대문자만이 인쇄 되었다. 몇몇

사람에게는 호평을 주었고 그중의

한사람이 마크 트웨인이었다.

트웨인은 이 타자기를 이용해 소설을

썼으며, 이의 제조를 위해 30 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투자한 돈을

고스란히 날리고 말았다.

(2)컴퓨터의 입출력

이 파산은 많은 사업가의 관심을

끌었다. 여러 사람이 숄즈의 기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대소문자가 모두

인쇄될 수 있도록 하고, typying

하고 있는 글자를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컴퓨터 입출력기기에 대한

관심과 연구도 컴퓨터 자체에 대한

관심에 못지 않았다. 컴퓨터에 사용된

최초의 매체는 천공카드였다.

천공카드는 일찍이 영국의 수학자인

베비지에 의해 도입됐지만 그 시초는

프랑스의 직조공인 자카르이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천공카드는

이후 홀러리스의 응용으로 인해

성공적인 매체로 자리를 잡는다.

그보다 앞서 1939 년 제2 차대전중

독일의 기술자인 코라드 추제는

자신이 만든 Z2 라는 기계에 35mm

자리 필름을 이용했다.

펀치필름이었다. 1951 년 유니백

(Univac)사는 종이테이프 대신

금속릴테이프를 선보였다. 또 1 년

뒤에는 IBM701 에는 날카로운

금속테이프 대신 부드러운 플라스틱

테이프가 채택되어 속도의 향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개선에도

불구하고, 천공카드는 근본적인

단점이 있었다. 즉 쉽게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타자기의

개선으로 관심이 기울었다.

전동타자기에 처음으로 뛰어든

회사는 IBM 이다. IBM 은

일렉트릭메틱사를 인수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타지기를 준비했다.

IBM 이 이처럼 새로운 타자기에 대한

투자를 한 이유는 IBM 보다 먼저

컴퓨터를 완성한 유니백 컴퓨터의

입출력장치는 당시 기술을 한단계

진보시킨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니백의 고속프린터 개발부는

라인프린터라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19세기 기계식

타자기가 한번에 한글자씩 인쇄한

것과는 달리 라인프린터는 1 백 20

자로 이루어진 한 행을 단 한번의

동작으로 인쇄하는 것이었다. 한

글자의 위치마다 한벌의 자판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기술은

프린터의 속도를 획기적으로

향상시켰으며 당시 최고 속도를

자랑하던 IBM 의 프린터에 비하면 4

배나 빠른 속도였다. 유니백의 모델-I

는 46 대나 팔려 나갔는데 이 고속

라인프린터 덕분이었다. 일격을 당한

IBM 은 셀렉트릭이란 볼타자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종래의 타자기

글쇄가 한글자식 분리되어 있었던데

비해, 모든 문자와 기호를 골프공처럼

생긴 뭉치에 양각시켜 놓은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글자를 수정할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타이핑 속도도

2배 정도 증가 시켜 주었다.

셀렉트릭은 IBM 의 회심의 역작인

스트레치 컴퓨터에 붙여졌는데

불행히도 2 천만 달러를 날리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부속장치인 셀렉트릭은 1970

년대초가지 프린터 시장을석권했다.

이렇게 뛰어난 기능을 IBM 에서는

파워타이핑(Power-typing)이라

불렀으나, 힐퍼라는 독일인의

제안으로 워드프로세서(Word-

Processor)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라.도트 프린터

IBM 의 셀렉트릭의 쇠퇴는 새로운

새로운 출력기계의 출현을 예고했다.

그 중에서 데이지휠 프린터는 단연

돋보였다. 데이지휠 프린터는

바퀴살에 달린 활자들을 작은 망치로

전기충격을 가하여 먹끈으로 하여금

종이에 인쇄를 하도록 하는

프린트방식이다. 데이지휠 프린터가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

센트로닉스라는 회사에서 보다

혁신적인 프린터가 나왔다. 보통

도트매트릭스(dot-matrix)

방식으로 불리우는 이 방법은,

전기충격을 단지 몇개의 핀뭉치가

필요한 모양의 글자나 도형을

찍어내는 방식이다. 도트매트릭스

방식의 실용화는 1970 년대 초부터

불기 시작한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열풍에 힘입은 바가 크다. 데이지휠에

비해 글자 모양은 예쁘지 않지만,

다양한 글씨체와 다양한 기호를

찍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데이지휠과

비교할 수 없었다.

도트매트릭스방식은 일본 세이코

계열의 일본 엡슨(Epson)사에 의해

주도되었다. 세이코의 발전은 1964

년 도쿄올림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탁상용 전자게산기와 금전등록기에

EP-101 이란 도트프린터가

사용되었다. 욕심이 생긴 세이코는

프린터 전문업체인 엡슨을 세우게

된다. 도트프린터도 몇개의 핀이

있는가에 인쇄문자의 품질이 다르게

된다. 그러나 데이지휠 프린터의

글자체만큼 모양을 만들 수는 없어

데이지휠 프린터도 없어지지는

않았다.

5. PC 의 서곡 -

전자계산기의 등장

1946 년 최초의 아날로그 계산기인

애니악이 개발된 이후 컴퓨터는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1969 년

인텔은 현재의 인텔의 신화를

창조하는 첫걸음이 되는 4004 를

개발한다. 이 칩은 인텔의 엔지니어인

테드 호프(Ted Hoff)와 페테리코

파긴(Federico Fagine)에 의해

설계 되었으며, 후에 당시

computer-on-a-chip 이라는

애칭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칩은

잘 만들어진 탁상용 계산기에 쓰이는

정도 이상은 아니었다. 1969 년

여름, 일본의 전자계산기 생산업체인

비지컴(Busicom)의 대표단이 대형

컴퓨터용 메모리 칩을 생산하는

미국의 인텔(Intel) 간부들과

캘리포니아에서 만났다. 비지컴은

새로운 계열의 업무, 과학용

전자계산기를 만들기로 결정했고, 이

신제품의 요체가 되는 전자부품을

인텔에서 공급해 줄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 인텔은 집적회로 분야의

선두주자로서, 얼마전 수백개의

트랜지스터와 그 밖의 전자부품은

이들을 연결하는 전선을 소형

실리콘웨이퍼 위에 설치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인텔은 2 천여개의

트랜지스터를 담은 획기적인

집적회로(IC)를 이제 막 생산한

터였다. 비지컴은 이 놀라운 소형화

기술을 메모리뿐만 아니라 다른

회로들에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새 전자계산기를

위해 IC 를 생산하도록 인텔을

설득했다. 인텔도 이를 수락했다.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 거기에 관여한

사람들조차 깜짝 놀랐다. 인텔이

컴퓨터 이용의 차원을 한단계 끌어

올린 것이다. 이제 컴퓨터가 활용될

수 있는 그 광대무변한 공간을 감히

헤아려 볼 ㅜ 있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았다. 인텔의 엔지니어들은

컴퓨터의 핵심 직접회로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발명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칩위에 얹힌 CPU 였다.

처음에는 인텔안에서도 이

마이크로프로세서가 간편한 계산기의

제작이라는 당초 설계의도를

넘어서서 활용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채 10

년도 못되어, 빈틈없이 설계된 인텔의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후예들이 사회

곳곳에 파고들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계산기

논리엔진으로 뿐만 아니라 신호등

통제장치로도 쓰였다. 사람들이 늘상

쓰는 가전제품 - 제봉틀,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에도 등장하여 거의

모든 사람을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탈바꿈 시켰다.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발명된 지 20

년이 채 못되어 장난감은 컴퓨터

두뇌를 얻게 되었다. 가령 인형이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한다든지,

저녁이 되어 쌀쌀해지면 스웨터를

입혀 달라든지, 하기에 이르렀다.

대형 컴퓨터에 못지않은 정교한

기능을 제공해 주는 운영체제의

발달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발전에 힘입어,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인텔이 최초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생산했을 때 시판되고 있던, 가장 큰

대형 컴퓨터보다, 성능이 뛰어나고

다양한 탁상용 컴퓨터를 탄생시켰다.

컴퓨터는 더 이상 돈 많고 힘 있는

회사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누구든지 몇만원만 있어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60 년대만

하더라도 컴퓨터는 대기업들이

사용하는 숫자를 빨리 처리해 주는

거대한 기계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1961 년 영국의 섬록

컴프토미터 (Sumlock

Comptometer)사는 전자계산기

가운데 하나를 만들었다. 이 계산기가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I : Texas

Instrument)와 그밖의 회사들이

내놓은 계산기들은 모두

기계식계산기의 기어를

임시기억장소와 영구적인 전선

논리회로로 만들었다. 비지컴은 각각

특정한 용도를 갖는 일련의

계산기들에 대한 전체 계획을 가지고

인텔에 접근했다. 인텔은 당시에 2

천개의 트랜지스터를 하나의 IC 에

집적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인텔은 이 계획에 관심을

가지고, 마시언 호프(Marcian E.

Hoff)라는 유능하고 젊은 설계사를

비지컴 계획에 투입했다. 동료들

사이에 테드로 불린 그는 비지컴의

계획이 인텔의 기술에 비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중에

계산기의 각 기능을 별도의 칩으로

구성하는 대신에 이를 하나의 칩으로

집적하는 데에 생각이 이르게 되었다.

이 IC 는 2 천개 미만의 트랜지스터를

포함함으로서 그 기능을 다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실질적으로는 대형컴퓨터의 중앙처리

장치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었다. 또

2 천개의 숫자는 인텔로서 가능한

숫자였다. 그리고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이름도 테드와

그 동료 연구원들이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본래 비지컴의

설계에 따르면, 하나의 계산기에는

매우 복잡한 10 여개의 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테드의 계획에

의하면 테드의 마이크로프로세서와 3

개의 칩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은

이를 통해 회로 설계와 디자인을 더욱

간단하고 산뜻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의 테드의 연구원들은

테드의 계획에 회의적이었으나

19969 년 늦여름 테드의 계획이

한결 융통성이 있고, 경제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70 년 인텔은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4004 를 공개했다. 이러한 이름을

지은 이유는 이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데이타를 4 비트 단위의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비지컴은

그러나 오늘날의 전자계산기에

비하면 매우 불편했다. 즉 입력에서

출력까지 하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 알고리즘을 입력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이전의 그 어떤 컴퓨터보다

매우 단순해 이에 대한 불평은 거의

없었다.

● 제4세대 컴퓨터(LSI

사용)             O 마이크로 프로세서와 제

4세대 컴퓨터

             O 본격화되는 PC 시대

             O 발전하는 컴퓨터 언어와

SW,  컴퓨터 통신

 

  1.마이크로 프로세서와 제

4세대 컴퓨터

가.마이크로 프로세서의 탄생

1970 년대 초반에 IBM 은 그들의

컴퓨터 시스템을 370 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와 같은 컴퓨터들과 다른 큰

컴퓨터회사들에 의해 제작된

컴퓨터들은 보다 더 정교하게 집적된

소재를 사용하게 되었다. 즉 이것이

대규모 집적회로(LSI : Large

Scale IC)와 초대규모 집적회로

(VLSI : Very Large Scale IC)이다. 초대규모 집적회로는 하나의

실리콘 조각에 수만개의 회로를

집적시킬 수 있는 것이다. 1970 년대

말과 1980 년대 초에 초소형의

회로는 마이크로 처리장치, 마이크로

컴퓨터, 기억장치, 또 다른

컴퓨터들이 다양한 작업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인텔이

마이크로프로세서와 D램 칩을

개발함으로써 미츠(MITS)라는

이름의 컴퓨터 회사가 최초로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 회사의 출범은

마이크로소프트사 창립의 자극제가

되었다. 프로그래머가 특정

하드웨어용 소프트웨어를

머릿속에서나 상상하게 하려면 우선

컴퓨터 하드웨어가 생겨나야 함은

물론이다. 같은 이치로 프로그래머

역시 컴퓨터가 없으면 소프트웨어를

작성할 수 없다. 하드웨어는 항상

소프트웨어의 개발을 유도하면서

산업을 주도해 왔다. 빌 게이츠 역시

1974 년 미니 컴퓨터에서 자신의

관심의 초점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1979 년도 말에 모토롤라

(Motorola)는 6800 개의

트랜지스터에 상당하는 것들을

포함하는 마이크로 처리장치인 MC

68000 을 소개했다. 1981 년에는

IBM 이 72000항목을 저장할 수

있는 기억장치를 소개했다. 4세대

컴퓨터들의 견본품에는 IBM 4300, IBM 3033, Burroughs B6900, Honeywell Series 60, NCR 8500 Series, Control Data Corporation's Cyber 205, IBM Personal Computer, Radio Shack PC-2 컴퓨터들이 있다.

SYSTEM/360 으로 시작된 제3

세대 컴퓨터는 1970 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규모 직접회로(LSI,

LARGE SCALE I.C.)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1971 년 인텔(INTEL)사에서

발표한 마이크로 프로세서(MICRO

PROCESOR) 4004 는 마이크로

컴퓨터(micro computer)의

주춧돌이 되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

(MICRO PROCESSOR)의 등장은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프로세서의 가격을 급격히 하락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내린

가격 덕분에 모든 공업제품에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사용이

보편화된 것이다. 더구나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컴퓨터 소유에 있어서도

큰 혁명을 일으켰다. 그 장본인은

애플(APPLE) 컴퓨터이다. 컴퓨터가

가정에 파고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AS/400 의 탄생

IBM 은 대부분의 소프트웨어기능을

마이크로코드의 형태로 하드웨어화한

혁신적인 아키텍처를 갖춘 S/38 을

1980 년에 발표한다. 이 시스템은

당시 최신 테크놀리지인 LSI

논리회로를 채택했으며, RAM

MOSFET 와 바이폴라제어 메모리를

사용, 혁신적인 시스템으로

평가되었다. 그 뒤 IBM 은 1988 년

새로운 미래 지향적인 AS/400 을

발표했다. 이 시스템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래머의 생산성,

네트워크 관리기능, 디스크를 포함한

재반 시스템자원의 관리를 시스템이

흡수, 자동화함은 물론 이미지,

보이스, ISDN네트워크 지원, IBM

의 통신구조인 SNA 이외에도

TCP/IP, OSI 지원등의 여타

시스템과 통합운용이 가능한

기종이었다. 이로 인해 엔터프라이즈

시스템, 혹은 전략정보시스템(SIS : strategy information system) 구축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협력처리(cooperative

processing)의 지원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아키텍쳐인

시스템응용구조(SAA : System

Application Architecture)등의

지원도 가능하게 됐다. 또한 AS/400

의 다중배열구조(multi array

structure), 단일기억역관리

(single level storage), 객체지향시스템(object oriented

system) 등은 48 비트 어드레싱에

따른 거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등과

연합하여, 아직은 정수나 문자에

국한되어 있는 데이터의 기준이

보이스나 이미지, 혹은 인공지능 등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스템 자원을 필요로 할

미래의 업무를 포용할 용량을 갖고

있었다. 현재 이미지 플러스, Call

Path/400 등 이들 분야가 가시화된

AS/400 용 제품들이 이미 발표되어

미국, 일본 등지에서는 실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유니시스의 미니

컴퓨터는 1989 년에 발표된 유닉스

(UNIX) OS 을 채택한 U6000

시리즈로 슈퍼 마이크로에서 슈퍼

미니급에 이르는 제품군이 있다. U6000/10, 31, 51, 55, 60, 70, 80 등의 기종이 있으며 전기종이

유니시스 시스템 V 오퍼레이팅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같은 해 발표된 U600/70, 80

시스템은 인텔 80386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탑재한 최신의

조화병렬처리 시스템(symetrical

multiprocessor system)으로

구현된 Tightly-Coupled 슈퍼

미니컴퓨터이다. 이 시스템은

유니시스 시스템 V3.2 를 근간으로

다중처리(multi tasking)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여러개의

중앙처리장치(CPU : central

processor unit)를 효과적으로

구성, CPU 상호간의 간섭을 배제,

CPU 들은 메모리 사용을 위한

시스템버스(system bus)의 통제나

끼어들기(interrupt)에 대처하는

추가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고,

이것을 고유한 기능의 회로에서

담당하게 했다. 90 년에 발표된 슈퍼

마이크로 U6000/60 은 25MHz 인

인텔 80486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수치프로세서인 80387 을

기본으로 제공하고 있어 강력한

계산기능이 제공된다. 또한 CPU 의

게산 속도를 지원하기 위해 고속의

캐쉬메모리(Write back cache)를

64KB 지원하여 25MHz 에서

메모리에 의한 시간 지연없이

처리되어 CPU 의 처리속도를

향상시켰다. 특히 메모리의 장시간

사용시에 시스템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2 가지 체크 방식을 지원한다.

기존의 패러티 체크 방식은 4MB 를

기본으로 80MB까지 확장이

가능하며, ECC 방식은 에러를

체크하고 정정하여 장기간 사용과

전압의 이상 변동에도 안정성을 준다.

다.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컴퓨터

업체들

왕컴퓨터는 1977 년 데이타프로세서

기능과 워드프로세서 기능을 통합한

최초의 VS 시스템을 발표한 이후

VS/1000 에 이르는 다양한 기종을

선보였다. 모든 VS 시스템은 32 비트

CPU 시스템으로 서로 호환성을

가지며 구성에 따라 255 명(멀티 OS

인 경우 928 명)까지 사용할 수 있고,

주기억 장치는 64 메가 바이트

(256MB/4 OS)까지 확장할 수

있다. VS 의 구조는 당시 VS 를

설계할 무렵 8 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처음으로 개발됨으로써

VS 는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I/O 를

관리하는 구조와 이에 적합하게

설계된 끼어들기(interrupt)기법,

OS 및 지원도구들을 가지고 CPU 를

구축하였다.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VS 를 개발하는 동안 사용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VS 시스템은 CPU 와

I/O 를 관리하는 훨신 더 간단한

별도의 처리기를 갖는 컴퓨터

시스템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분산 I/O 처리설계는 VS 의

구조적 장점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다.

VS 의 구조는 분산 3층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최상위 CPU 는

실제로 계산이 되는 장소이며

시스템의 다른 모든 활동을 관리한다.

두번째는 VS 의 핵심인 인텔리젼트

레벨은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모든

주변기기를 컨트롤한다. 세번째

레벨은 여러가지 지정된 작업을

수행하는 주변기기 레벨이다. 휴렛

팩커드(HP : Hewlett Packard)

는 1972 년 HP 3000 시리즈 CX

미니 컴퓨터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계속해서 1980 년에 HP 3000

시리즈 33, 30 등을 발표한 이후

1990 년 초 HP3000과 HP9000

계열로서 하위 기종에서부터 중간급

고위 기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델을 선보였다. 1990 년 발표한

HP-PA제품들은 CMOS 칩기술을

기초로 한 고위기종의 다중처리체계

(multi-processing system)도

포함, 종전의 메인프레임 수준의

성능을 필요로 하던 수준까지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90 년에 발표한

HP3000 시리즈 980/10과

980/200 의 특성은 RISC

아키텍쳐와 새로운 CMOS 기술을

사용, 프로세서의 성능과 제품의

신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또한

공기냉각방식을 사용, 차지하는

공간과 전력소모를 줄였으며

시스템관리가 간편해졌다. 949,

955 는 단일의 VLSI칩 프로세서를

이용하였다. 한편 HP9000

시리이즈는 기존의 고위기종에 비해

성능이 4배나 향상된

다중처리컴퓨터(multi

processing computer)를 포함,

HP-PA RISC 기술을 기본으로

했다. 특히 HP9000 시리즈의

최하위기종으로 발표된 832S 는

강력한 RISC( )프로세서를

내장했으며, 대용량 디스크와

테이프드라이버와 1.3GB 용량의

DAT(digital audio tape)드라이버를 포함하고 있다. DEC 는

1991 년 야심의 알파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이는 1991 년 2월

알파칩의 개발로 대두되기 시작한 이

계획은 21세기의 네트워크컴퓨팅

환경에 중요한 가교역활을 맡을 DEC

의 새로운 아키텍쳐이다. 이때에

개발된 알파칩 21064 는 피크성능 3

백 MIPS, 동작주파수 1 백 50MHz

로 현재 나와 있는 64 비트 리스크

마이크로프로세서 가운데 최고수준의

성능을 자랑하고 있다. 또 DEC 는

최근 기존 기술제휴선인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와의 제휴관계를

보다 강화함으로써 새로운 윈도우즈

운용체계의 도입 및 응용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섰다. DEC 가 이번에 IBM

과 결별한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음에 따라 미국 퍼스날 컴퓨터 및

워크스테이션 시장은 IBM-애플 과

DEC-마이크로소프트 양 진영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DEC 가 세계 컴퓨터업체들의

연합체인 ACE 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등 ACE 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실과 맞물려 그

위상을 한층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라.탠덤

(1)멈추지 않는 컴퓨터

1974 년 여름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탠덤 컴퓨터스

(Tandom Computers)라는

신생기업은 새로운 컴퓨터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컴퓨터는

저렴한 경비로 고장에 대비할 수 있는

컴퓨터의 개발이 그들의 목표였다.

새로운 컴퓨터는 하드웨어 혹은

소프트웨어만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포괄하는 컴퓨터 시스템의

개발이 그들의 목표였다. 설립자 짐

트레이빅(Jim Treybig)은 휴렛-

패커드(Hewlett-Packard)에

미니컴퓨터 영업부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였고, 그의 동료 기술자 역시

휴렛-패커드 출신이었다. 자금은

휴렛패커드에서 그를 채용했던

토머스 퍼킨스(휴렛패커드의

영업부문 총무 이사직을 끝으로

은퇴한뒤 벤쳐캐피탈 회사를 차리고

있었다)와 그의 동업자인 유진

클라이너(그는 실리콘밸리의 첨단

반도체회사인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의 창업주였다)였다. 5

만달러로 시작한 회사는 휴렛패커드

출신 간부 출신인 잭 루스타누와 함께

사업 구상을 함께 하면서 5 개년

계획을 세웠다. 그들 목표의 기본

방향은 고장방지능력, 온라인 수리,

모듈의 확장성 등 세 가지였다. 즉

어떤 한 부문이 고장 나더라도

컴퓨터는 전체적으로 이상없이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만족하는 컴퓨터를 위해서는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만 했다.

기존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교환백업(back-up)이라고

부르는 방법밖에 없었다. 교환백업은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예비 컴퓨터를 준비하고

있다가 작동중인 컴퓨터가 고장이

나면, 준비중인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고장이 나지 않는 한

준비중인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콜드백업(cold

back-up)이라 불렸다. 또 다른

하나는 예비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있다가 고장이 나면 신속하게 새로운

컴퓨터가 작업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핫백업(hot

back-up)이라 불렸다. 그러나

두가지 방법 모두 작동이 멈춘 이후

새로운 컴퓨터가 작동할 때까지의

데이타에 대해서는 대책이 전혀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예비컴퓨터와

작동중인 컴퓨터 사이에 교신이

있어야 했다. 교신을 위해서는

운영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물론 하드웨어에 대한

재검토도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고 어느

회사도 쉽사리 도전하지 못했다. 탠덤

-16 으로 불리운 탠덤의 최초의

시스템은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만들어졌다. 기본시스템은

두개의 독립된 모듈로 구성되어

있으며 16 개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운영체제는 탠덤 트랜잭션

오퍼레이팅

시스템(T/TOS:Tandom Transaction Operating System)로서 각 모듈에 심어져

있었다. 그들은 작업에 뛰어든 지 17

개월만에 작업을 완료했다. 1975 년

12월 비지니스위크지에 고장을

모르는 컴퓨터라는 제목으로

짤막하게 소개되었고 다음해 5월

뉴욕의 시티은행에 최초로

납품되었다. 이때 신제품의 이름은

논스톱시스템으로 운영체제는 가디언

오퍼레이팅 시스템으로 바뀐

상태였다. 탠덤은 은행이

논스톱시스템을 구입함으로써 가장

큰 이익을 줄 수 있는 유망한

고객이라고 생각했다. 1970 년대에

들어서면서 은행은 고객의 증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점포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으나, 인건비와 운영비의

증가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1970 년대 초에

등장한 현금자동인출기(ATM)였다.

예금, 입금, 잔고확인 등의 비교적

단순하면서 많이 사용되는 업무를

자동화하여 한대의 기계로 모두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즉 이를 지금과 같이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인출할 수 있는 액수는

제한되어 있었고, 그 처리결과는 매일

중앙컴퓨터에 보내져 갱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번거로움을

해결한 것이 OLT P(On-line Transaction Processing)시스템이다. 즉 ATM과 은행의 중앙

컴퓨터와 온라인으로 연결하면서

은행업무를 대행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은행들은 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중앙컴퓨터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즉

만의 하나 중앙컴퓨터가 고장을

일으킨다든지, 아니면 ATM 의

고장을 인한 데이타의 이상을 복구할

방법을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은 실수라도

은행의 신용도를 결정적으로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등장한

것이 탠덤의 고장방지시스템이다.

그러나 은행들은 IBM 의 제품을

대신해 무명기업의 컴퓨터로

교체하는 것을 기피했고

고장방지시스템을 구입한 기업도

이를 부수적인 업무에 한정해 쓸

뿐이었다. 그러나 신용카드회사의

신용조회 등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은행들이 앞다투어

고장방지시스템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1977 년

퍼스트내셔날은행이 이를 본격적으로

도입했고 그 명성을 더해 주었다.

더불어 ATM 도 생활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고장방지

시스템은 증권업계와 제조업체에도

고장방지시스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더해 가기 만 했다.

(2)무정지 컴퓨터

1960 년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컴퓨터가 각 기업체에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컴퓨터의 구입이

늘어날수록 문제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즉 은행과 같은 기업의

OLTP(on-line transaction processor) 시스템이 정지하면

모든 업무가 정지하고 마는 것이다.

1970 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컴퓨터 시설이 하드웨어의

고장이나 소프트웨어의 고장때문에

적어도 1 년에 한 번은 예기치 않게

작동을 멈추곤 하였다. 어떤 컴퓨터는

서너달에 한번씩 고장이 나기도 하는

것이었다.컴퓨터 고장이 빚는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백업(back

up)을 위한 여분의 컴퓨터를

중복설치하는 것이다. 그것을

설치하려면 여러대의 컴퓨터를

사야하므로 많은 자금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특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주문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중복시스템을 설치하고

유지하는데에 1975 년 기준으로

연간 2억달러에 달했으며, 그 지출은

해마다 35%씩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주 의

산타클라라에 있는 탠덤 컴퓨터

(Tando m Computers)라는 한

신생기업에서 저렴한 경비로 컴퓨터

고장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중에 있었다. 비록

신생기업이기는 했지만 대표는 휼렛-

패커드(Hewlett-Packard)의

미니컴퓨터 영업부장을 지낸 짐

트레이빅(Jim G Treybig)이었고,

고급 엔지니어와 핵심 간부도 휼렛-

팩커드 출신이었다. 탠덤이전까지는

발생가능한 심각한 사고를 대비해

만들어진 시스템은 중소기업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비쌀 뿐

아니라, 문제를 피상적으로 밖에

해결하지 못했다. 어쨌든 사고를

대비한 방법에는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여분의 컴퓨터를

마련해 두는 것으로 사고가 나지 않는

한 켜지지 않는다고 한데에서 콜드

백업(cold back up)이라고 한다.

주컴퓨터가 고장나면 오퍼레이터는

예비컴퓨터를 작동시켜 트랜잭션

(transaction)을 처리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예비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손실된 데이타의 복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보다 조금 더

개량된 방법은 예비 컴퓨터를 주

컴퓨터와 함께 작동시켜 두었다가 주

컴퓨터가 고장나면 오퍼레이터는

일련의 명령을 입력함으로

예비컴퓨터가 작동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핫 백업(hot back up)

이라 불렀다. 이 과정은 단 몇분밖에

소요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의

데이타를 복구할 수 없기는 콜드

백업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두

컴퓨터의 종류가 다를 경우에는

데이타의 호한을 위해 운영체제 또는

해당 프로그램 등에서의

소프트웨어를 재설계해야 했다. 결국

핫백업시스템의 소프트웨어 가격은

일반 소프트웨어보다 훨씬 비싼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컴퓨터 업계에서는 단순한

일괄처리방법의 성능향상에만

주력하고 있었고 백업시스템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휼렛-팩커드에 입사한지 5

년이 되는 트레이빅은 1973 년

본격적인 백업시스템의 개발을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 트레이빅은 휼렛-

팩커드 시절 상사였던 토머스

퍼킨스를 통해 자본을 조달한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창업자 중에

하나였던 유진 클라이너 역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합류했다.

새로운 회사는 한 레이저회사의 공장

한 귀퉁이에 칸막이를 한 사무실에서

시작되었다. 1974 년 5 만달러와 두

설계자를 채용함으로써 새로운

사업은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스템의

특징은 고장방지능력, 온라인 수리,

모듈의 확장 가능성 등 세가지이다.

즉 컴퓨터의 한부분이 고장이

나더라도 계속 가동된다는 뜻이었다.

새로운 시스템의 설계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설계를 동시에

해나가기 시작했다. 최초의 시스템은

잠정적으로 탠덤-16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컴퓨터는 2 개에서 16 개의

독립모듈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

무정지(non stop)컴퓨터는

탠덤컴퓨터가 상표등록한 것으로

업계에서는 비상안전(fault

tolerent)컴퓨터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정지컴퓨터는 일반적으로

비상안전컴퓨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무정지컴퓨터의 아이디어를

창안하고 탠덤컴퓨터를 창업한

사람은 제임스 G 트레이빅이다. 41

년생인 그는 HP 에 근무하면서 이를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립해 탠덤컴퓨터를 설립한다. 43

년 33세때 일이다. 그는 76 년 제1

호를 뉴욕시의 시티뱅크에 납품해

신뢰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

논스톱컴퓨터의 이름을 드높인

사건이 블랙먼데이로 불린 87 년 10

월에 일어난다. 그때 통상의 3배나

되는 온라인트랜잭션이 몰려 시카고

등 각지의 컴퓨터가 고장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탠덤컴퓨터인 뉴욕의

증권거래소에서는 그야말로

무정지였다. 고장예비회로를 채택한

논스톱컴퓨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슈퍼 컴퓨터 지금까지

슈퍼컴퓨터는 파이프라인 자체의

클럭사이클을 단축하거나, 프로세서

내부의 파이프라인수를 복수화해

고속화를 이루어 왔으나, 앞으로는

병렬화 컴파일러의 개발과 함께

프로세서 자체의 병렬화가 진행되고

병렬도가 향상됨에 따라 메모리

공유형에서 크로바결합등의

상호결합형으로 이행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다수의 고속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똑같은 토폴로지에 의해

결합한 미니수퍼컴퓨터가

엔지니어링분야뿐만 아니라 각종

시뮬레이션용으로 광범위하게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범용컴퓨터는 중앙처리장치성능의

향상뿐만 아니라 주기억용량,

외부기억용량, 입출력성능, RAS(random access storage)기능, 자원보호기능의 향상으로

데이타베이스의 대규모고속화,

신뢰성의 향상, 보안기능의 강화 등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범용컴퓨터의 CPU 성능향상은

병렬화를 통해 단체성능 향상의

둔화를 보완하고 이와 함께 주기억,

확장기억의 대용량화가 진행될

것이다.

(1)논리 이론가

1978 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카네기멜론대학의 행정학교수인

사이먼은 쇼(Shaw)라는 조교의

도움으로 논리이론가 (logic

Theologist)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사이먼은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쓴 수학의 원리

(Principia Mathmatica)를

읽으며, 전통적으로 사람의 고유한

일이라 생각했던 수학의 정리의

증명을 논리이론가에게 수행시켜

보기로 하였다. 수학의 원리를 읽은

논리이론가는 조잡하기는 해도

증명을 하기 시작했고, 어떤 것은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한 것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증명하기도 하였다.

기세가 등등해진 사이먼은 10 년안에

세계 체스 챔피언을 이길 수 있는

컴퓨터의 등장을 장담했다. 더구나,

작곡, 번역, 작시 등 인간의 공유한

영역이라 생각한 영역까지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이먼은

계속해서 만능해결사 (General

Problem Solve)라는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이 프로그램의

최종개발목표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근사하게 해결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만능해결사는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모든 문제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아직도 체스

프로그램은 체스 챔피언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초기열기와는 달리 발전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화려하긴 하지만,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생각되지

않았던 문제점들이 계속 나타났고,

그때마다 연구자들은 보통 인간이 20

여년동안 배우는 상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더구나

1950 년대 초부터 거국적으로

시작된 자동번역(영어와 러시아어간)

의 실패는 인공지능에 기대를 걸어온

여러 연구자들에게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주었다. 하버드 대학의 안소니

에팅거가 이끄는 자동번역팀은

언어의 번역에 얼마나 많은 부수적인

지식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번역, 추론과 증명, 물체인식

등에서 초기의 기대와 달리 실패한

이유는 너무도 광범위한 목표를

잡았기 때문이다.

 2.본격화되는 PC 시대

가.진전되는 가정용품의 컴퓨터화

비지컴의 전자계산기는 무수히 많은

가정용품의 컴퓨터화의 서곡에

불과했다. 다음 주자는

재봉틀이었다. 어쩌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재봉틀과 전자계산기는,

정밀기계공학의 결실이었다. 인텔이

4004 를 내놓을 무렵 싱어라는

재봉틀회사의 도널드 커처 사장은

전자식 재봉틀을 만들어 보고자

결심했다.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금고제작 전문 회사에서 자동거래

단말기를 만들었던 존 라이즈를 이를

담당할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라이즈는 이를 위해 싱어가 자랑하는

푸투라(Futura) 모델을 가지고 직접

재봉을 하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푸투라는 그 바느질 솜씨에서는

나무랄데가 없었다. 그러나 재봉틀을

처음으로 돌릴때의 준비작업이

너무도 복잡했다. 다이얼과 레버는

무려 5 천여가지의 재봉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또 바느질의 시작

주기가 다소 불규칙했다. 1971 년 8

월 라이즈는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간편하게 조작할 수 있는

재봉틀을 8 명의 연구원을 중심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개발의 실무지휘는

가전제품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가진

잭 워스트(Jack Wurst)라는

엔지니어가 맡았다. 그 외에도

전자공학에 열정을 가진 연구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리 상부에서 어떤

구체적인 지시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기본계획을 짜는

데에도 석달 가까이 걸렸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인텔의 4004 를

사용했다. 3 년뒤 아테나 2000 으로

이름 붙여진 재봉틀을 생산했다. 이는

25 가지의 바느질을 간단한 스위치의

조작만으로 가능했다. 개발된 지 9

개월후 부터는 주문을 가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후에 조금 더 개량된

제품들도 소개되었다. 그러나 70

년대 말에 이르러 이 역시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소비자는 더욱

사용이 편리한 재봉틀을 요구하였다.

1979 년에 록웰 인터내셔날

(rockwell International)사가

생산하는 8 비트 프로세서에 의한

재봉틀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이

새로운 재봉틀이 1981 년 모델

2010 이 상점에 나왔다. 이제품 역시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1971 년은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비지컴은

많은 경쟁사와의 경쟁을 위해 인텔에

가격을 낮추어 줄 것을 요청했고,

인텔은 이에 응하는 대신 비지컴의

독점권을 없앨 수 있었다. 비지컴은

가격을 낮출 수 있었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다른 경쟁사들과 경쟁을 할

수 없었고 결국은 물러서고 말았다.

71 년 11월 인텔은 내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자관련 잡지에 칩을

선전하는 를 실었다. 집적회로의

새시대 선언, 마이크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칩위의 컴퓨터! 라는

자신만만한 문구였다. 다음해 2월에

인텔은 개당 200 달러인 4004 를 8

만 5 천달러 어치나 팔았다.

나.최초의 PC 들

최초의 PC 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아마도 1971 년 미국의

불랭켄베이커가 만든 켄벅Ⅰ 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마이크로

프로세서인 인텔의 4004 를 채택한

이 컴퓨터는 불과 256 자만을 기억할

수 있었으며, 전자계산기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컴퓨터는 불과

40 대 만이 팔렸다. 이 무렵 컴퓨터

테크놀로지 코퍼레이션(Computer Technology Corporation)-나중에 데이타포인트(Datapoint)

가 된다-이라는 회사로부터 좀더

성능이 좋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개발을 의뢰 받았다. 인텔은 인텔에 8

비트 칩의 개발을 의뢰하였고 1972

년 8 비트칩인 8008 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CTC 는 이칩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인텔은 이칩을 4004 보다

싼 120 달러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8008 을 제일 먼저 사간 사람중에는

조나단 티터스(Johnathan Titus)

라는 전자기광이 있었다. 1973 년

가을 이 칩을 사용해서 마크(Mark)-

8 이라고 이름붙인 컴퓨터를

만들었다. 내용물은 평범한

금속상자속에 8008

마이크로프로세서, 부속 사전배선

회로판 등을 포함하여 약 250 달러가

소요되었다. <라디오

일렉트로닉스>지 1974 년 7월호

소개되었고, 각각의 비트를 나타내는

스위치와 결과는 앞면에 있는

자그마한 역시 각각의 비트를

나타내는 전구에 나타나게 되어있는

이 불편한 기계를, 실제로 이를

만들어본 사람이 2,500 명 가까이나

되었다.

다.PARC 의 PC

1970 년대 제록스 PARC 의

컴퓨터과학 연구소(CSL : COMPUTER SCIENCE LABORTORY)는 가장 뛰어난

자취를 남긴 컴퓨터 연구의 산실

이었다. 그중에서도 PARC 의 연구원

버틀러 랩슨과 척 랙커는 1972 년-

1973 년에 알토를 설계하여 세계

최초의 퍼스날 컴퓨터 제작자가

되었다. 알토는 최초의 고속 컴퓨터

네트워크, 비트맵 화면과 마우스,

하드 디스크 데이터 저장장치 등을

갖추고 있던 컴퓨터 였지만 제록스는

이를 상품화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

어쩌면 이는 현명한 결정이었는지

모른다. 뒤에 나올 애플은

비지칼크같은 소프트웨어가

있었지만, 알토에게는 그런

소프트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1)최초의 상업용 컴퓨터 키트

알테어 8088 : 1975 년

사실 개인용 컴퓨터의 역사를 어느

기종으로 잡느냐는 데에는 사람에

따라 여러 견해가 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는 애플 II 를 처음으로 잡는

사람도 있고 코모도어의 PET 기종이

먼저 나왔으므로 이를 개인용

컴퓨터의 효시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키트의

형태로 만들었던 알테어 8088

이라는 기종을 개인용 컴퓨터의

효시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MITS 사에서 만든 알테어

8088 기종은 인텔의 8088 CPU 를

탑재했고 256 바이트의 메모리

용량을 지녔다. 그 당시 판매 가격은

395 달러였다고 한다. 그런데 흔히

개인용 컴퓨터라고 말할 때 연상되는

키보드나 모니터 부분이 없다. 그

외에 외부 저장 디바이스도

빠져있었다고 한다. 사용자들이

프로그래밍을 하기 위해서는 본체의

스위치를 조작하여 프로그래밍을

하였다고 하는데, 전자분야에 관심이

많은 매니아들에게 인기가 높아 3

주만에 개발사는 25 만달러를

벌었다고 한다. 이후에 이 기종의

호환기종인(최초의 호환기라 해야 할

것이다) IMSAI 8088과 68000 을

CPU 로 사용한 알테어 680, 그

외에도 키트 형태로 된 몇몇 기종들이

시장에 출시되었다. 애플사를 창립한

스티브 워즈니악도 회고하기를 애플 I

을 만든 이유 중의 하나가 알테어

088 기종을 살 돈이 없어서라고 한

적이 있을 정도로 개인용 컴퓨터

역사상 매우 중요한 기종 중의

하나이다. 특히 미국의 마이크로

인스투르멘테이션 앤드 텔레메트리

시스템즈(MITS:Micro Instrumentation and teleme try systems)사의 에드워드 로버츠

(Edward Roberts)가 1975 년에

알테어(Altair) 8800 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PC 의 역사는 그 어느 산업의

그 어떤 제품보다 발빠른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PC 의 1세대인 알테어

8800 은 인텔의 8080칩을

채택했으며,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확장슬롯의 개념이 도입되어

있었으나, 소프트웨어에는 상당히

미미하여 사용자가 일일이

프로그램을 작성해 주어야 했다. 또

오늘날과 같은 키보드도 모니터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 년

이 회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폴랜은

미츠(MITS)사가 개발한 알테어

8800 마이크로컴퓨터를 소개한

파퓰러 일렉트로닉스 지가 1975 년

1월호를 빌 게이츠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곧 퍼스널 컴퓨터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프로그램

언어가 절실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했다. 이는 MIT 의 학생이었던

에디 로버트와 하버드의 학생인 빌

게이츠가 공동제작한 것이다. 또 빌

게이츠는 폴 알렌과 공동으로 개인용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베이식

언어를 처음으로 개발해 냈다. 이는

75 년 컴퓨터 광처럼 고가의 알테어

8800 컴퓨터를 살 수 없었던

게이츠와 알랜은 하버드 컴퓨터

연구실에 있던 PDP 10

미니컴퓨터로 알테어의 인텔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능을 모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그로부터

6 주후 그들은 미니컴퓨터를

사용해서 모의 알테어 컴퓨터를

사용해서 모의 알테어 컴퓨터를 위한

베이식 프로그래밍언어를 작성했다.

이는 MITS 베이직 이라 불렀다.

라.2세대 PC (애플 Ⅱ)

(1)최초의 PC 용 OS

그러나 이 새로운 유형의 컴퓨터가

성공하기위해서는, 좀더 쓸모가

많아야 하고 쓰기에도 편리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운영체제(OS :

Operating System)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형 컴퓨터용으로는

GM/IO, SOS, OS/360 같은

운영체제가 개발되어 있었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한 운영체제는

개발되어 있지 못했다.

마이크로프로세서 제작회사는

운영체제의 설계를 컴퓨터

제작회사에게 떠넘겼기 때문에,

회사마다 운영체제는

천차만별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최초의 워드프로세서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마이클 슈레이어

(Michael Shrayer)는 자기의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자그만치 80

번이나 고쳐 쓰는 수고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프로그래머는 가장

많이 쓰이는 운영체제에 적합하게

몇가지 운영체제에만 적합하도록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결국 피해는

사용자에게 돌아가 아무리 유용한

프로그램이라도 자기의 컴퓨터의

운영체계와 다르면 그림의 떡일 수

밖에 없었다.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의 컴퓨터과학 교수인

게리 킬달(Gary Kildall)은 비교적

초기에 4004 를 구입했다.

항법계산을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킬달은

엉뚱하게 4004 의 내부 구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은

이를 개발한 인텔에게 계약직

직원으로 자신을 채용하도록

설득했다. 인텔에서의 첫번째 임무는

대형 컴퓨터용 언어인 PL/1 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PL/M 이라는

프로그래밍언어를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용으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PL/1 은 이미 과학용,

상업용, 컴퓨터 시스템용으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었다. PL/M 을 PL/1 에

가장 가깝게 만들기 위해서는 PL/1

이 쓰이고 있는 대형 컴퓨터와 유사한

운영체제하에서 설계해야 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킬달은 먼저

운영체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운 운영체계는 보조기억장치로

디스크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킬달은 디스크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 이어서 같은

학교의 존 토로드교수를 영입하여

새로운 운영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몇주일만에 8080 용의 새로운

운영체제인 CP/M 을 만들었다.

원래에는 컨트롤 프로그램 모니터

(Control Program Monitor)를

듯했지만, 나중에 그 의미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제어프로그램

(Control Program for Microprocessors)으로 바뀌었다.

CP/M 은 PL/M 으로 프로그램을 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렇지 않았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CP/M 은

대부분의 8080 프로세서를 사용한

마이크로컴퓨터에는 잘 작동했지만,

일부의 마이크로컴퓨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킬달은 이를 위해 운영체제의

일부를 재편했다. CP/M 은 결국

808마이크로프로세서 이외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사용한 업체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여기에서부터

소프트웨어는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2)애플 II 의 시작

애플이 잡스의 차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HP 의 연구원이었던

스티브 워즈니악은 179 달러나 되는

8080 CPU 에 불만을 품고 보다

값싼 컴퓨터를 만들기를 마음먹고

애플 I 을 개발하기에 이른다(그림

2). 알테어 기종과 달리 MOS

테크놀러지의 6502칩을 CPU 로

사용했는데 불과 25 달러에 판매되는

저렴한 칩이었다. 그리고 워즈니악은

보다 쉬운 컴퓨터의 사용을 위해서

키보드와 모니터를 연결할 수 있게

만들었다(그림 2). 하지만 이 기종은

사운드나 그래픽, 컬러가 지원되지

않았다. 맥 사용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워즈니악과 잡스는 ’76 년

4월 1 일 애플이라는 회사를 차린 후

근처의 바이트라는 컴퓨터 상점에

애플 I 을 팔기 시작한다. 그 당시의

가격은 666 달러였으며 모니터와

파워, 키보드는 구입자가 해결해야

했다. PC 의 제2세대는 1977 년 4

월 애플Ⅱ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기원은 더욱 거슬러 올라간다.

알테어의 출현에 큰 자극을 받은

젊은이들이 1975 년 캘리포니아의

한 차고에서 모였다. 그들은 다양한

신분과 처지를 가졌지만, 컴퓨터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고, 그 재능도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임의

명칭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 이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일부

이름만 들어보아도, 이 모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과

넥스트의 스티븐 잡스, 애플의 스티브

워즈니악등이 있었다. 이중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자동차를

팔고, 전자계산기의 외판을 하며

자금을 모으고, 모험 자본가를 통해

애플컴퓨터를 차렸다. 1976 년 4

월의 일이었다. 애플Ⅰ은 이미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소개가 되었다. 애플

Ⅱ라는 이름으로 1977 년 4월 16

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제1 회

웨스트 코스트 컴퓨터전시회에

소개되었고, 판매량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애플Ⅱ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개인용 컴퓨터의 잠재수요를 이끌어

내고, 수 많은 프로그래머를

출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잡스는

타임즈의 표지 인물이 되기도 했다.

이 PC 는 모토롤라의 M6800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CPU 로

채택했고 소프트웨어는 비지칼크

(VisiCalc)가 내장되어 사용되었다.

당시 이 PC 는 세계 컴퓨터 업계에 큰

방향을 불러 일으키며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소프트웨어의 개발도 급진전해

멀티플랜, 로터스 1.2.3.등이

발표됐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자부품 판매회사인 미국의

탠디사는 TRS-80 을 발표했는데

CPU 는 Z-80칩을 채택했다.

코모도어 인터내셔날에서는 애플Ⅱ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PET 라는 PC 를

선보였다. 애플은 회사내에서 힘들여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는 애플사밖의

제작자를 활용하기 위하여 애플Ⅱ의

중요한 몇가지를 보완했다. 그

가운데에 하나는 1978 년 6월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디스크Ⅱ라는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였다. 이 새

저장장치는 케이블로 본체와

연결되는 외부기억장치이다. 이러한

드라이브를 사용하는 당시의 PC 는

탠디라디오사의 제품과 애플Ⅱ가

전부였다. 이외에도 당시 소프트웨어

전문가들에게 큰 인기가 있던

프로그래밍언어인 파스칼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애플의 전략은

적절한 것으로 비지칼크 이외에도

워드 프로세서인 워드 스타 ,

데이타베이스 프로그램인 d Base Ⅱ

등과 같은 소프트웨어의 탄생을 볼 수

있었고 아울러 이들 소프트웨어의

덕으로 더 많은 판매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장기전략으로 캘리포니아주의

각 학교에 한대씩의 애플Ⅱ를

기증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모든

프로그래머들이 애플Ⅱ만을 위한

프로그램개발에 전력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장기적으로 회사에 직접적인 자산이

되었다. 그중의 하나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컴퓨터과학 대학원의 2

년차 학생이었던 앤디 헤르츠펠드를

애플의 신봉자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프램그램을 개발해 무료로

나누어 주었으나, 곧

직업프로그래머로 변신했다.

첫작품은 당시 대문자만 나오던 애플

Ⅱ의 단점을 해결해 준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후에

애플사에 입사해 매킨토시용

프로그램개발에 중추적인 역활을

하게 되었다. 1979 년엔 기존의 애플

II 를 개량한 애플 II+가 발표되기에

이른다(그림 4). 이 기종은 국내

컴퓨터 사용자들에게도 낯선 기계가

아닌데, 한국 컴퓨터의 메카라고

불리었던 세운상가에서 조립된 애플

II+ 호환 기종들은 우리나라 컴퓨터

보급에 일조했었다. 애플 II+ 기종은

48KB 램 용량을 가지고 있었고

초창기에 탑재되었던 애플의

Integer Basic 은 애플 소프트

베이직으로 교체되었다. 그 외에도

베이직 상태에서의 텍스트 에디팅

기능이 향상되었다. 애플 II 에 비해

많은 부분이 향상된 Apple II+

기종은 1 천 1 백 95 달러에

판매되었다. ’79 년도에는 최초의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인 비지캘크가

등장하였다. 마치 엑셀을 돌리기 위해

PC 를 구입하는 것처럼 비지캘크는

애플 II+ 기종의 폭발적인 판매를

이끌게 된다. 애플 II+ 기종은 83

년에 애플 IIe 가 나오기까지 개인용

컴퓨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8 비트

컴퓨터 중 하나였다. 애플 II

컴퓨터가 컬러와 그래픽과 같은

아기자기한 기능에 강점이 있었다면,

TRS-80 기종은 그래픽은 지원되지

않았지만 자사의 TRS DOS 를

일찍부터 지원했기 때문에 비즈니스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1980 년 8월에 출시된

TRS-80 Model III 는 경쟁사인

애플의 II+와 대응하기 위하여 롬을

16KB 로 확장하였으며 램도 48KB

까지로 확장할 수 있었다. 또한

자사의 TRS DOS 를 사용하여 면당

160KB까지의 용량을 지원했다.

1979 년 이후 애플은 개인용

컴퓨터의 리더 자리를 유지했다.

애플은 애플 II+의 후속 기종으로

애플 III 를 ’80 년 봄에 내놓기에

이른다. 애플 III 는 기본 80컬럼

기능을 지원하는 비즈니스 머신으로

발표되었지만, 초기의 제품 불량,

제한된 확장성, 부족한 애플 II+

에뮬레이션 기능, 전용

애플리케이션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엄청난 손해를 가져왔다. 애플

III 는 애플의 첫 실패작으로 기록된다.

(3)애플 II 의 경쟁자들

하지만 애플Ⅱ가 몰고올 엄청난

파장은 사실 HP 가 그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워즈니악은

HP 의 사원으로 애플Ⅰ을 생산할

것을 상관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애플

Ⅰ이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와 이미 HP 도 유사한

제품개발에 뛰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이 제품은 과학용과

전문가용으로 80 년에 완성되어 HP-

85 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자사제품에서만이 사용가능한

소프트웨어와 주변기기때문에 일부의

사용자에게만 위력을 떨쳤다. 그러나

이무렵 PC 시장은 애플Ⅱ 뿐 아니라,

코모도 PET, 라디오 색 TRS-80

으로 삼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애플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마이크로컴퓨터에 대해 전혀

경험이 없던 브리클린이 개발할

프로그램을 독점 판매키로 하고 PC

를 대여해 주었는데 이 PC 가

애플이었다. 즉 브리클린에게는 PC

에 대한 선호도는 전혀 없었고 오로지

빌려온 PC 가 애플이었을 뿐이다. 즉

1979 년 하버드 대학원생이었던 댄

브리클린과 프로그래머인 보브

프랭크스턴이 회계사의 장부를

전산화한 프로그램을 애플Ⅱ에서

구현한 것이다. 비지칼크가 소개되고

1 년동안 판매된 애플Ⅱ중 약 1/5 이

비지칼크의 사용을 위해서 구입해

간것으로 보아 애플Ⅱ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애플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코모도어의 PET 는

애플과 같은 완제품의 형식으로

판매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저렴한

가격(598 달러, 모니터, 카세트

레코드 포함)에도 불구하고 TRS-80

이나 애플 II처럼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애플 II 보다 약간 늦은 8

월에 시판된 기종이었는데 애플이

매니아들을 위한 개인용 컴퓨터에

중점을 두었던 반면에 라디오쉑의

TRS-80 는 업무용에 중점을 둔

개인용 컴퓨터였다(그림 3). 최초의

모델은 Z80 CPU 와 기본 사양으로

4KB 의 램, 4KB 의 롬을 가지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애플보다

앞서서 단면의 83KB 용량의

플로피디스크를 탑재하여 실용성을

높인 점이다. 아마 CP/M 모델을

제외하고는 최초의 DOS(Disk Operati ng System; TRS-DOS)를 탑재한 컴퓨터라 할 수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을

탑재했다. TRS 시리즈는 그 후에도

꾸준히 사양을 높여서 IBM PC 가

나오기 전까지 업무용 PC 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가격은

모니터와 카세트 레코더를 포함하여

600 달러였다. 수많은 컴퓨터 회사가

혼전을 벌이는 정글과 같은 시기에

코모도어는 Commodore 64 라는

모델을 발매하여 애플 II 에 버금가는

히트를 기록한다(그림 8). 흔히

말하기를 8 비트 시대에 세 개의

컴퓨터를 꼽으라면 애플 II 와 TRS-

80, 코모도 64 를 들 정도로 성공한

기종이다. 그런데 엄격히 이야기하면

코모도어 64 는 업무용이라기 보다는

가정용 컴퓨터로서 게임 및 그래픽에

나름대로의 강점을 지닌 기종이었다.

애플 II 보다도 월등한 해상도, 다양한

컬러 지원, 64KB 메모리 등은

매력적이었고 SID 라고 불리우는

사운드 칩을 최초로 채용하였다.

코모도어 64 는 저렴한 가격과

다양한 소프트웨어의 출시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수많은 기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각

기종들간의 호환성에는 문제가 있어

이기종간에 소프트웨어는 서로

교환할 수 없었다. 하나의 표준을

세우고 각 기종간의 호환성을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MSX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최초의

주창자는 일본의 아스키이며

하드웨어 설계는 일본의 아스키사가,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은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가 담당했다. 사실

MSX 의 취지는 매우 원대했지만

실제로는 주로 가정용 컴퓨터로

개발되었고 NEC 나 후지츠, 샤프

같은 일본의 메이저 컴퓨터 회사가

아닌 소니나 미쯔비시와 같은

가전업체가 주로 개발에 참여했다.

’84 년부터 본격적인 발매가 시작된

MSX 는 미국에서는 별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한국, 일본과 같은 아시아

지역, 브라질이나 칠레같은 남미,

네델란드와 같은 유럽지역, 구소련

등에서는 많은 인기를 끌었다. 특히

코나미나 남코와 같은 대형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MSX 용 게임을

개발하여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던 기종이었다.

(4) 애플 II 의 후속 모델

’79~’82 년까지 애플 II 의 새로운

시리즈는 발표되지 않았는데 결국

애플에서 신경쓰고 있는 매킨토시

프로젝트와 별개로 애플 Iie 기종이

발매되기에 이른다. 약간의 마이너

체인지가 있었지만 애플 IIe 기종

은 ’93 년에야 단종되는 등 역대

애플사의 개인용 컴퓨터 중에서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우선 애플

IIe 는 80컬럼 디스플레이 기능과

소문자 표시 기능을 제공했으며,

64KB 램과 뱅크 개념을 사용하여

128KB까지 램을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오픈 애플과 클로즈 애플키 등을

제공했고 보조슬롯(auxiliary slot)

을 지원했다. 또한 키보드 역시

촉감이 좋은 키보드로 교체되었다.

그래서 한 달에 6 만대 에서 7 만 대씩

판매되었는데 이것은 애플 II+

기종보다 두 배나 많은 판매량이었다.

또한 많은 기대를 모았던 IBM PC jr

이 예상외로 좋지 못했기 때문에 ’83

년 크리스마스에 애플 IIe 기종은

경이적인 판매실적을 올리게 된다.

3.발전하는 컴퓨터

언어와 SW

가.베이식의 발전

1977 년 11월에는 애플이 MS

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은 베이식을

기초로 플로팅 포인트 연산기능, 즉

소수점 이하 연산기능을 갖춘

베이식을 개발해 自社의 제품에

적용했다. 멀티미디어 기능이 탁월한

아미가로 유명한 코모도 역시 1982

년에 64 의 주메모리와 20 의 롬을

장착한 自社의 「코모도 64」기종에

MS 의 베이식을 포팅했다. 이같은

베이식 열풍은 80 년대 들어 강력한

개발환경을 제공하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등장과 함께 수그러드는

경향을 보였다. 구조가 간단하다는

것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1 년 5월에

MS 는 윈도환경을 위한 비주얼

베이식을 개발함으로써 베이식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비주얼 베이식은

본격적으로 대두될 윈도시대에 각종

응용 프로그램 개발에 적용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많은 프로그램 개발자들이 현업에서

프로그램 개발에 사용하고 있다.

나.파스칼과 Ada 의 등장

FORTRAN, COBOL과 같은

기존의 언어에 회의를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1980 년 튜링상을

수상한 옥스포드대학의 호어이고, 또

한 사람은 니콜라우스 비르트

교수였다. 먼저 비르트는

스탠포드대학의 객원교수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새로운 언어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최초의 계산기 제작자인

볼레르 파스칼의 이름을 따 파스칼로

불리운 이 언어는 단단하고 많지 않은

구문 규칙이 파스칼 언어의 기본

철학이었다. 입출력기능은 다소

약했지만 교육용으로 쓰기에는

적합했다.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연구소에서 파스칼 바람이 일었고

교육용으로 파스칼에 비길만한

언어가 없었다. 그러나 파스칼의

성공에는 괴짜 과학자 다익스트라가

있었다. 다익스트라는 이무렵

소프트웨어 위기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소프트웨어의 개발

관리비용이 증가되는 것을 보고 이를

해결하는 한 방안으로

대형소프트웨어의 사후 관리를

용이하게 해 주는 구조적

프로그레밍기법을 소개했고, 그동안

아무 죄책감없이 써온 GOTO 문장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파스칼은

구조적 프로그래밍이라는 흐름을

타고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때에 이미 쓰이고 있거나

개발된 언어는 1 천여종에 달했다.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언어가

바벨탑과 같이 될 무렵

HOLWG(High Order Language Working Group)위원회가 탄생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의 국방관련 연구소에서

쓸 통일된 언어를 위해 생겨난

것이다. 위원회는 여러 학자와

기업체에 한가지씩 시안을

보내줄것을 요청했고, 하니웰-볼

연합팀에게 새로운 언어의 설계가

주어졌다. 새로운 언어의 이름은

최초의 프로그래머인 어거스터

에이다의 이름을 따 Ada 로

정해졌다. Ada 는 국방관련

프로젝트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

적합하게 짜여졌다. 패키지 구조,

추상적 자료제공, 구조적

프로그래밍기법을 포함한 것이었다.

엄격한 기준과 2000 여가지의 성능

테스트를 거쳐 Ada compiler 가

개발되었다. 또한 미 국방부는

국방부에 납품하는 프로그램은

반드시 Ada 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포트란이나 코볼

사용자의 반발이 심했다. 그러나 이

반발은 리스프 사용자보다는 못했다.

포트란이나 코볼 프로그램은 번역

프로그램을 통해 쉽게 번역이 될 수

있었지만, 리스프는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번역할 수 밖에 없었다.

리스프 옹호론자들의 반발은 더욱

심해져 갔고, 국방부와 국립표준국

(ANSI)도 조건부로 양보했다. 즉

리스프도 수많은 방언있었는데, 이의

표준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사실

언젠가는 필요한 작업이 요구된

것이다. 이래서 탄생한 것이 커먼

리스프(common lisp)이다.

국방부에 납품하는 프로그램은 크게

두가지 즉, 에이다와 리스프로

작성되도록 하였다.

PASCAL

PASCAL 은 초기에 교육용과

COMPLIER 와 같은

시스템소프트웨어의 구현을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최초의 정의와 구현은

1971 년에 이루어진다. 1973 년

새로운 정의가 내려지고, 현재는

1983 년의 정의를 바탕으로 한

PASCAL 이 쓰이고 있다.

PASCAL 의 설계에는 ALGOL60 이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반적인 구문의 형식과 블럭구조

뿐만 아니라 강조된 단순함과 우아?

한 설계 등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ALGOL 60 은 60 년대 당시의 많은

언어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에 많은 언어에 영향을 줄뿐

아니라 이론적인 연구를 하는데에도

매우 중요한 언어가 된다. PASCAL

은 1970 년대에 마치 60 년대의

ALGOL과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즉

교육용으로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이후에 개발되는 Ada, Euclid, Gypsy, CLU, Concurrent PASCAL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Ada

Ada 는 프로그램 언어로서는 독득한

발전을 한다. 1970 년대 초에

미국방성은 항공기나 군함, 통신 등에

사용할 프로그래밍 언어를 찾고

있었다. 여러 언어를 검토했지만

적합한 언어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언어를 국제 설계공모를

내기로 했다. 17 개의 제안이

들어왔으나 그중 4 개의 그룹에 예비

설계의 자격이 주어졌다. 4 개의 언어

모두 PASCAL 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전문가들의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두개의 안이 뽑혔다. 결국

1979 년 Ada 로 명명된 최종 언어가

선택되게 된다. 초기의 제안들은

상당히 PASCAL과 유사했지만

최종안은 수정을 거치면서 PASCAL

과는 매우 달라진 모습을 드러냈다.

즉 Ada 는 PASCAL 에 비해 매우

복잡하고, 큰 언어가 되었다.

다.산업계의 표준 C언어

그러나 이러한 여러 언어가 개발되고

권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산업계에는 엉뚱한 언어가

애용되었다. 1972 년 벨 연구소에서

만든 C언어가 그것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허술하고,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널리 쓰이는 것은

다소 의외의 일이다. 물론 UNIX 의

활발한 보급에 편승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는 될 수 없다. C

언어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사람들을

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지나치게 엄격한 구문법이나 기절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원하지 않는다.

프로그래밍 언어도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보여주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완벽을

추구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난

언어들이 이를 나타내 주고 있다. C

는 1970 년대 초반에 Bell 연구소의

Dennis Ritchie 가 개발했다. C 의

선조는 하나의 설계 계보를 통해

추적할 수 있는데 그 계보는 Algol

로부터 시작되었고 파스칼과 PL/1 을

포함한다. C 는 UNIX 라는 새로운

운영체제에서 사용하기 위해

프로그래머의 언어로서 개발되었다.

UNIX 는 PDP-7 에서 어셈블러

언어로 작성되었고 PDP-11 에

이식되었다. C 는 그 이전의 언어인 B

는 Ken Thompson 이 작성했고

BCPL 로부터 나왔다. BCPL 은

1969 년 Martin Richards 가

작성했는데 London 대학과

Cambridge 대학의 공동프로그래밍

언어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다.

UNIX 는 곧 C 로 재작성되었는데

1974 년에서 1975 년 사이 UNIX

는 Bell 연구소 밖으로 처음

공개되었다. 이것은 어셈블리 언어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능력과 융통성이

있는 언어라면 운용체제를

성공적으로 작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뢰성을 주었다. 1978 년 Brain

Kernighan과 Dennis Ritchie 는

the C Programming Language (Prentice-Hall 사

출판)라는 책을 썼다. 내국인(

미국인)에게는 하얀책 (역주 :

겉표지가 하얀색이기 때문에),

다른나라 사람들에게는 K&R 이라고

불리는 이 책은 C 언어의 표준 정의가

되었다. K&R 이 씌여졌을 무렵 C

컴파일러는 PDP-11, Interdata

8/12, 그리고 IBM 370 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수는 점차 불어나기 시작했다. 1970

년대 후반, C 언어 재품들이 CP/M

을 운영체제로 한 8080 이나 Z80

계열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Scott Guthery 와 Jim

gibson 은 Tiny-C 를 개발해서

판매했는데 인터프리터 방식을

사용한 이 제품은 C언어의 일부분을

바탕으로 했으나 대성공작인

Microsoft BASIC과 비슷한

대화식 프로그래밍 환경을 가지고

있다. 1980 년 Ron Cain 은 CP/M

과 8080 하에서 운용되는 Small-C

자체가 Small-C 자체로 작성되었다.

Cain 이 Small-C 의 첫 버전을

Tiny-C 인터프리터로 작성했을 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 일게 되었다. 그후 Cain과

다른 사람들이 개선된 Small-C 를

컴파일하기 위하여 Small-C

컴파일러를 사용하며 컴파일러의

기능을 추가시켰으므로 마치 진흙탕

속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구두끈을

잡아당겨 빠져나온 것처럼 Small-C

는 자기 스스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Small-C 는 C 로 작성된 원시코드를

공개했다. (역주 : A Small-C Compiler, Second Edition, 출판사 : Prentice Hall, 1990,

628 쪽 이라는 책을 시중에서 구입해

볼 수 있다. Small-C 컴파일러의

원시 코드와 라이브러리 원시 코드도

함께 실려 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Leor Zolman 은 CP/M 을

기본으로 한 BDS C 컴파일러를

소개했는데 이것은 C 의 일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 컴파일러의

강점은 빠른 컴파일 속도와 재배치

가능 목적 모듈들(relocatable

object modules)을 링크하여

실행가능 모듈(executable

module)로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BDS C 가 소개된 후 곧 C 전체를

지원할 수 있는 컴파일러를 CP/M

운영체제에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크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C

의 엄청난 영향이 시작되었고, 1981

년 마이크로 컴퓨팅의 세계는 IBM 이

PC 를 발표함에 따라 거대한 도약을

했다.

PC 의 영향이 커질 것이 명백해지자

곧 각종 C 컴파일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몇개는 8080 용으로부터

개선된 것이었으며 대부분이

처음부터 PC 시장을 겨냥해서

개발되었다. 오늘날에는 최소한 17

종 이상의 PC(DOS)용 C

컴파일러가 판매되고 있다. 1983

년, 미 국립표준국(ANSI)은 X3J11

기술위원회를 구성하고 C언어의

표준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

표준은 C 언어뿐만 아니라

컴파일러의 환경 및 표준 함수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의

위원들은 C 에 관한 권위자들 뿐만

아니라 PC 용을 포함한 주 C

컴파일러 공급회사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X3J11 위원회의 활동은

컴퓨터 관련 매체의 많은 관심을

모았고 관심을 가진 모든 단체로 부터

의견을 듣기 위하여 제안된 표준이

공표되었다. PC 용 컴파일러

공급자들은 X3J11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컴파일러 공급자들은 이 제안된

표준에 있는 수정 사항들을 반영한

새로운 버전의 컴파일러들을 내놓고

있다.

라.본격적인 SW 시대의 도래

< 유닉스 태동기, DBMS 단초 >

70 년대 시스팀은 주로 일괄처리,

시분할처리 실시간 처리를 지원하는

다중모드 시분할 시스팀이다. 70

년대는 버추얼 스토리지 운영체제인

S/VS 와 OS/370 이 IBM

시스팀/370 을 관장하며, MVS/370

이 뒤를 잇는다. 78 년 버클리大의

VAX 에서 운영된 유닉스 V7 이

지금까지 많은 업체들의 유닉스

제품의 근간을 이루는 BSD 계열이

시발이었다. 한편 70 년대 말부터 벨

연구소에 판매한 유닉스 코드를

AT&T 를 비롯한 업체들에서

상품화하기 시작하면서 유닉스의

전파가 가속되었다. 유닉스는 보다

편리한 작업환경을 구축하려는

AT&T 연구원들의 노력에서

출발했다고 봐도 무방하며 자유로운

연구 활동이 보장될 수 있었다는 점이

연구원의 창조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또

유닉스의 확산은 자리에 앉아서

결정을 내리는 위원회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연구원들이 직접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만들어졌기 때

문이다. 개인용 컴퓨터는 마이크로

프로세서 기술의 지속적인 촉진에도

불구하고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

PC 의 경우 72 년 인텔에서 만든

최초의 칩, 4004 가 美 해군대학원

게리킬달 교수 손에 들어감으로써

최초의 본격 운영체제의 개발에 불이

당겨졌다. 4004 에 PC/I 라는

언어를 채택했고 다시 8008 칩에는

CP/M 의 원조가 되는 PC/M 이라는

운영체제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이후

CP/M 은 79 년 마이크로소프트와

IBM 이 도스를 시장에 투입하기

전까지 업계를 주도하고 나가게 된다.

60 년대의 실험적 시분할 시스팀이

70 년대 확고한 상품으로

발전되었다. 한편 미국 전역을 통한

컴퓨터 시스팀의 통신이 증가했는데

특히 미국방성의 통신 표준인

TCP/IP 는 특히 군대와 대학 컴퓨터

환경을 비롯해 널리사용되었다.

랜에서의 통신은 이서넷 표준에

의해서 실용화되고 경제적으로

되었다. 70 년대 데이터베이스

분야는 RDB 기술을 실현하는데

역점을 뒀으며, 개방형 유닉스 시대가

열리는 70 년 후반부터 80 년대초에

걸쳐 전문 업체인 오라클, 인포믹스,

사이베이스 등의 업체가 생겨나는 등

상용 RDBMS 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RDB 기술은

이전 세대 기술처럼 재고 관리, 급여

등가 같은 기존 업무 데이터 처리

응용들을 위한 것이 고작이어서

다양한 형태의 응용을

뒷받침하기에는 불편함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업무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은 워드프로세서는

64 년 IBM 이 주요 단어를 마그네틱

테이프에 기록시킬 수 있는 타자기를

개발한 것을 시발로 보며,

마이크로프로 인터내셔날의 워드

스타가 78 년에 선보이게 된다. 79

년 브르클린은 스프레드시트와

회계분석 프로그램인 비지캘크-

[Visible Calculator]의 약칭-를

출시 2~3 개월만에 1 만개가 넘는

판매를 기록해 패키지 소프트의 상품

가능성을 알리게 된다.

마.WP 전용시스템 - 왕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분야에서 최초로

선봉을 선 사람은 중국인 유학생

왕안이었다. 중국인 왕안은 전파상의

방한칸을 빌려 왕연구소(Wang

Institute)라는 회사를 차렸다. 왕은

범용컴퓨터 시장에 매달리는 대신

워드프로세서 시장에 뛰어들었다.

왕의 아인\'b5助箏 스크린 상에서

먼저 문서를 편집해 사용자로 하여금

완성된 문서를 미리 보게끔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기능을

위해서는 컴퓨터와의 결합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사용자에게

편리한 당야한 기능을 제공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영어권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권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언어체계를 준비했다. 왕의

아이디어는 대성공이었다.

다락방에서 출발한 왕연구소는 일약

컴퓨터계의 강자로 떠 올랐다. 1980

년대 초에는 세계 워드프로세서

시장의 30%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기존의 타자기는 서서히 값싸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워드프로세서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가격 하락으로

개인용컴퓨터의 보급이 늘어났고,

가정에서 컴퓨터와 위드프로세서를

동시에 구입하는 것은 부담이 되었다.

그러자 컴퓨터에서 워드프로세서의

기능을 가진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Word-Star 같은

프로그램은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바.CP/M

킬달은 CP/M(Control Program

for Microcomputer)을 개발했다.

이는 8080 중앙처리장치를 위한 OS

였지만, 처음에는 사용하는

하드웨어업체가 극히 제한되어 있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같은 OS 였다.

그러나 76 년 미국에서 두번째

생겨난 퍼스널컴퓨터 업체인 임사이

(Imsai)라는 괴상한 이름의 회사가

킬달에게 전화를 해오며 CP/M 의

채용을 문의해 왔고, 당시에 유일한

OS 였던 CP/M 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같은

중앙처리장치를 써도 그 외의 부품이

서로 다른 하드웨어 사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회사는

OS 를 곧 개발해 제공해 주겠다는

약속만을 하고, OS 도 없는 HW 를

판매하고 있었다. 결국 CP/M 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HW

사양에 맞도록 각 회사마다 모색을

하게 되었고 그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BIOS(Basic input/output system)와 CP/M 을 분리하여

장착함으로서 이를 해결하였다.

기존의 CP/M 은 BIOS 에만

집중하면 되도록 되어 있었다. 킬달은

CP/M 의 성공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고, 이를 기반으로 인터캘락틱

디지탈 리서치(후에 디지탈 리서치로

바꿈)를 설립하여 CP/M 의 보급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그러나

사업보다는 단순히 CP/M 의 보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킬달은

사회와 수요자의 반응에 둔감했다. 또

MS 에 대해서는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즉 MS 는 언어

위주의 사업을 할 것이고 DR 은 OS

위주의 사업을 할 것이라는

착각속에서 사업을 해나갔고 결국은

IBM PC 의 OS 자리를 MS 에

내주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BASIC 의 개발은 CP/M 의 개발과

비교해 뒤지는 것으로 생각해 PC 용

PASIC 의 개발은 일찍이 포기하기도

하였다. 다른 이유는 MS 가 이미

개발한 상태이므로 조금더 혁신적인

분야에 투자하겠다는 생각도 큰

작용을 했다.

사.UNIX 의 탄생

1968 년 미국 벨 연구소의

컴퓨터연구 그룹에 있던 켄 톰슨

(Ken Thompson : 뒤에 C언어의

개발자로 알려짐)과 그의 동료들은

MULTI CS 라는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벨 연구소는 AT&T 사의

지원 아래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전화 및 통신망에 관계되는 많은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다. 물론

컴퓨터도 그 일부분에 포함된다.

MULTICS 는 제너럴 일렉트릭사와

MIT 및 AT&T 가 함께 추진한

것으로, 많은 사용자들이 동시에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충분한 계산 능력 및 저장 장소를

제공하며 사용자가 원할 경우 자신의

데이타를 서로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운영체계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MULTICS 시스템은 1969 년에 그

초판이 GE645 에 설치되어

실행되었지만, 1965 년 실행된 이래

벨 연구소는 그 프로젝트가 의도했던

서비스를 만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발 목표를 언제 달성할 지

명확하게 예측할 수 없어 이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MULTICS 계획이 끝남에 따라 켄

톰슨과 그의 동료들은 GE645 의

편리한 기능들을 사요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켄 톰슨과 데니스 리치

(Dennis Ritchie) 등 몇몇

연구원들은 그들의 프로그래밍

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종이위에

개략적인 화일시스템을 설게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유닉스의 초기

버전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개발

배경은 그 당시로는 획기적인

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프로그래머 및 사용자에 의하여

제기된 운영체계의 설계라는 점이다.

즉, 그 당시에는 회사의 입장과

회사의 운영 방향에 따라 상위층에서

운영체계의 규격 및 기능들이

결정지어져 수행되어 왔지만, 이

유닉스는 실제로 프로그래머들이

프로그래머의 필요에 의한 기능들을

수행하는 시스템으로 설계되었으며

운영체계가 본질적으로 어떠한 역할

및 기능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토론을 한 결과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탄생배경에 따라 유닉스는

사용자의 입장을 존중하게 되었고,

그에 다른 수정 요구 및 기능 향상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 오늘의

유닉스가 생명력을 지니게 된

이유중의 하나이다. 톰슨은 위에서

제안된 화일 시스템과 Demand-

Paging 환경하의프로그램을

흉내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또한 GE645 용의 커널을

구상하기도 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Space Travel 이라는 게임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를

위하여 한번의 실행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75 달러가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양질의

그래픽 표시장치를 제공하면서도

구석에 놓여져 사용되지 않던 PDP-7

이란 컴퓨터를 발견했다. PDP-7 에

Space Travel 을

프로그램밍하면서 톰슨은 톰슨은

기계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수

있었다. 그러나 PDP-용 프로그램을

개발할 운영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을 짠후

기계어로 출력하여 종이테이프를

통하여 PDP-7 에 입력하여야 했다.

보다 나은 개발환경을 위해 톰슨과

리치는 유닉스 화일시스템의

초기버전과 프로세서 서브 시스템 및

몇개의 유틸리티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시스템을 PDP-7 내에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시스템에 유닉스라는

이름을 주게 되었는데, 이는 동료인

브라이언 커니언(Brian

Kernighan)이 MULTICS 라는

이름에서 역설적으로 UNICS 라는

이름으로 부르다가 같은 발음의

UNIX 로 고친 것이다. 이러한 유닉스

시스템의 초기버전의 많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제

프로젝트에 쓰이기 전까지는 그것이

가진 잠재력을 현실화시킬 수 없었다.

1971 년 벨 연구소의 특허 부서에서

사용할 문서 편집 시스템으로

사용되면서 유닉스 시스템은 PDP-

11 으로 옮겨졌는데 이 시스템의

특징은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시스템은 16KB, 사용자 프로그램은

8KB, 512KB 의 디스크 하나,

그리고 각 화일은 64KB 로

제한되었다. 그것의 초기 성공 후에

톰슨은 새로운 시스템을 위한 포트란

컴파일러를 구현하기 시작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BCPL 에서 영향을

받은 B언어를 고안하게 되었다. B

언어는 BASIC과 같은 방식인

인터프리터였으며 그러한 언어가

가지는 성능상의 제한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리치는 이것을 기계어

코드의 생성과 데이타 타입의 선언

그리고 데이타 구조의 선언 등을

허용하는 C언어로 발전시켰다.

1973 년에 운영체계는 C언어로

다시 쓰여졌는데, 이 당시에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나 이것은 외부

사용자들이 이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실로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벨 연구소에서 유닉스

시스템을 설치한 곳이 25군데로

늘어나고 내부적인 지원을 제공하기

위하여 유닉스 시스템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AT&T 는

연방정부와 1956 년에 체결한

협정에 의하여 컴퓨터 제품을 판매할

수 없었으나, 교육목적으로 유닉스

시스템을 요구하는 대학에 대해서는

그것을 허용해 주었다. AT&T 는

협약을 잘 지켜 유닉스 시스템을

하거나 판매하거나 지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만 갔다. 1974 년

톰슨과 리치가 Communication

of ACM 에 시스템에 관하여 논문을

한편 썼는데, 이것이 시스템을

수용하는 데 박차를 가해 1977

년에는 유닉스 시스템을 설치한 것이

25 개의 대학을 포함해서 500 여

곳으로 늘어나게 된다. 유닉스

시스템은 특히 좋은 프로그램 개발

환경을 제공해 주고 네트워크

트랜잭션 업무와 실시간처리를

가능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전화회사에서도 인기를 얻게 되었다.

또한 유닉스 시스템에 대한

라이센스가 대학과 마찬가지로

상업기관에도 제공되어 1977 년에는

사무자동화환경에 유닉스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인터랙티브

시스템즈사가 최초의 상업화된

제품을 Intedata 8/32 라는

기계에서 작동하도록 발표되었다.

아.UNIX 의 발전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대중화됨에 따라

많은 회사가 유닉스 시스템을 새로운

기계에 이식하였으나, 또 다른

개발자들은 유닉스의 단순성과

명료성을 바탕으로 나름의 방법으로

시스템의 성능향상을 도모하여 기본

시스템의 몇 가지 변형이 나타나게

되었다. 1977 년에서 1982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벨 연구소는 몇

가지 AT&T 의 변형을 모아 단일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유닉스

Ⅲ이다. 벨연구소는 나중에 유닉스

시스템Ⅲ에 몇 가지 기능을 더 첨가해

유닉스 시스템Ⅴ이라고

발표하였으며, AT&T 는 1983 년 1

월 유닉스 시스템 Ⅴ를 공식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에 반하여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도

유닉스 시스템의 변형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의 최신 버전은

VAX 기계에에서 운용되는 4.3BSD

로서 몇가지 새롭고 흥미로운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계통에서 나온

것으로 386BSD 와 SunOS 등이

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립자인 빌게이츠도 유닉스에

관심을 두어 별도의 출자회사인 사타

크루즈 오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SCO제닉스를 발표하였다.

1984 년 초에는 세계적으로

100,000 대에 가까운 컴퓨터에서

유닉스 시스템을 사용하였으며,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메인프레임에

이르는 다양한 처리 능력을 가지는

컴퓨터와 여러 회사에서 제작한 여러

기계에서 운영된다.

4.컴퓨터 통신

가.2세대 광섬유

제1세대 광섬유통신시스템은 모두

8 백-9 백 나노미터 파장의

범위안에서 운용되었다. 과학자들은

연구를 거듭해 석영섬유는 파장이

커짐에 따라 빛의 분산손실이

감소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정립했다. 이러한 특성은

신호를 보다 먼 거리에 있는

중계기까지 전송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장거리 통신사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일정한 파장을 지닌 유리의 굴절률이

다양화게 변화하는 특성은 이른바

파장의 분산 현상을 일으킨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한 파장을 지닌 빛은

파장이 다른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때문에 펄스를 일으키며

넓게 퍼져나가는 것이다. 파장의

분산은 주파수의 폭이나 신호로

전달되는 정보의 양을 제한할 수

있다. 그것은 1 천 3 백 나노미터에서

최소한의 파장분산과 특별히 넓은

대역폭을 나타내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장파에 관한

연구는 76 년 일본에서 핵심 기술이

개발됨으로써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즉 일본은 1 천 3 백 나노미터의

파장을 가진 빛이 km 당 0.5 데시벨

밖에 손실되지 않는 섬유를 제작했던

것이다. 그 이듬해에 영국과 미국의

과학자들은 파장이 1 천 3 백

나노미터되는 빛이 분산손실 0 으로

나타나는 물질을 개발했다. MIT 공대

링컨연구소 소속의 J J 시에와

동료과학자들이 77 년에 1 천 3

백나노미터의 파장을 지닌

인듐비화갤륨 인화물반도체 레이저를

개발해 1 천 5 백시간의 수명을

갖도록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때

나타난 장파는 1 천 3 백

나노미터에서 석영검파기로는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검파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게르마늄

컴파기와 인듐비화갤륨의

합성반도체가 개발됨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이 신속히 해결되었다.

코닝사와 다른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1 천 5 백 50 나노미터, 즉 1.55

마이크로미터의 파장을 지닌

광섬유도 역시 전망이 밝은 것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이의 개발사업에

착수하였다. 석영섬유는 1.55

마이크로미터 이상의 파장에서는

빛이 멀리 전송됨에 따라 점차

약해지는 특성을 갖고 있으나 정확한

특정 파장에서는 최조의 손실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일본 NTT 의

연구위원들은 1.55마이크로미터의

파장에서 km 당 0.2 데시벨의

손실만을 나타내는 단일형태의

섬유를 최초로 개발했다. 또한 그들은

79 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동일

파장에서 km 당 최저 0.18

데시벨까지 손실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82 년초

코닝사의 과학자들은 파장 1.55

마이크로미터에서 km 당 0.16

데시벨의 손실을 기록하는

단일형태의 광섬유를 개발했다.

이것은 빛의 1%가 광섬유를 통해

77.5마일의 거리를 이동한 후

그대로 남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1 천 3 백

나노미터에서는 없었던 빛의

분산현상이 표준적 광섬유에서 다시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후

광섬유의 구성요소를 세밀하게

조정함으로서 1.3 - 1.5

마이크로미터의 파장범위 내에서는

낮은 분산률을 나타내는 광섬유를

개발했다.

나.프랑스의 미니텔

프랑스는 70 년대 중반 오일 쇼크

이후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전화선을 이용한 정보서비스 개발을

국가의 주요 과제로 다루게 된다. 75

년 정부는 컴퓨터와 통신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80 년 55 명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전자전화번호부

서비스를 1 차 실시한 이후 81

년에는 이를 보완한 2 차 서비스를

실시한다. 82 년 2 천 5 백가구를

대상으로 1 백 90 개 정보에 대한

종합적인 마무리를 실시, 다음해 83

년 텔레서비스가 실시된다. 현재

텔레콤은 초창기의 1 백배에 달하는

1 만 7 천개 정도의 각종

정보서비스를 제공하고 총 7

백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도 제공되고

있으며 지난해말(전자신문 1356 호

기준) 현대전자를 통해 국내에도

제공되고 있다. 또 서비스 개시 6

년만인 89 년 손익분기점에 도달,

흑자로 전환되기에 이르른다.

프랑스의 성공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통신시장 보호정책,

프랑스텔레콤의 추진력, 미니텔

단말기의 무료보급, 컴퓨터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ONA(오픈 네트워크 아키텍쳐)를

채택하는 한편 상용화 이전에 실시한

사용자 대상의 실험 및 검증으로 그

성공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Desktop Network

1973 년 제록스 PARC 의 연구원 봅

멧칼프와 그의 연구팀은 컴퓨터와

레이저 프린터간의 연결 속도를

높이는 데에 골몰하고 있었다.

프린터와 컴퓨터의 처리속도는

당시로는 빠른 편이었지만, 이 둘을

연결하여 사용하려면 속도가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그 원인은 이

둘을 연결하는 선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해상도가 600dpi

였으므로 페이지당 3 천 3 백만

비트가 전송되어야 했고, 컴퓨터는

초당 한페이지의 해상력을 가졌고,

프린터는 2 초에 한 페이지를

프린트할 수 있었지만 이둘을

연결하면 자료를 전송하는 데에만 15

분이 걸렸다.

새로운 전송장치의 개발에 뛰어든 멧

칼프는 새로운 레이저 프린터를

개발했다. 이들이 개발한 프린터는

접속된 컴퓨터와 의사소통이 가능해

그 자체만으로도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이러한 양방향

의사소통은 두개의 시스템이 동시에

기능할 경우, 데이터가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다. 더욱이 십여개의

컴퓨터와 프린터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면 그만큼 충돌의 가능성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전화통화 방식처럼, 기계를

사용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사용여부를 확인한 다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한 기계의 사용이 끝난

다음에 다른 기계가 사용하도록

고안된 장치가 이더넷이다. 초당 2 백

67 만 비트의 데이터를 동축

케이블로 전송할 수 있는 이더넷은

600dpi 페이지의 전송시간을 15

분에서 12 초로 단축시킨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결국 이더넷은

2.67Mbps 를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와 프린터,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는 필수적인 장치가

되었다.

라.컴퓨터 통신의 진보

컴퓨터 네트워크의 개념은 종래의

전기통신망의 확장이 아니고 컴퓨터

시스템의 고유의 개념위에 데이타

통신망을 구축하는 네트워크 구조

(network architecture)로

발전하였다. 이 대표적인 예가 1974

년 IBM 이 발표한 SNA(System

Network Architecture)로서

컴퓨터간의 접속을 용이하게 하고,

이용 형태의 다양화, 복잡화에

대처하기 위한 체계화된 네트워크

방식이 있다. 1976 년

국제전신전화자문위원회(CCITT : comit  consultatif international pour telegraphie et telephonie)는

여러 프로토콜 시안중에서 X.25 를

국제표준으로 정했다. 1980 년

중반에는 이미 많은 컴퓨터와

통신기기들이 시장에 나와 있었고,

이를 이용하는 기업도 그 수가

급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기들의

호환성 결여로 한 기기에서 사용한

정보를 다른 기기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점점 더 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985 년 50 개 이상의

컴퓨터 회사들로 구성된 컨소시엄

공개시스템공사(COS)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이 컨소시엄의 핵심목표는

공개시스템 상호연결(OSI : open

system interface), 이른바 OSI

프로토콜을 촉진하기 위한 데에

있었다. 컴퓨터 통신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은 1876 년의

전화발명과 1984 년 1월 1 일에

취해진 미국전신전화회사(AT&T : American telephone and telegraph co.)가 미국 전화망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상실한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마벨(Ma Bell) 이라고도 불리웠던

AT&T 는 보다 작은 회사들과 7 개의

지역전화회사로 분산된 사건은

세계전역에 규제해제의 물결을

일으켜, 유럽, 일본, 캐나다,

오스트리아 등으로 그 파도가 밀어

닥쳤다. 규제해제는 경쟁을 고조

시켰고 컴퓨터 통신산업의 국제화를

촉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일반 기업체에는 각종 유용한

서비스의 혜택과 경쟁으로 인한

요금인하의 효과가 있었지만, 일반

가정에는 잘 이용하지도 못하는

다양한 서비스를 명목으로한

요금인상만을 가져와 불만을 사게

되었다.

●제5세대 컴퓨터 (PC)

             O 멀티미디어화를 향한

전진 O 3세대 PC (IBM PC

의 등장)

             O 슈퍼 컴퓨터와 인공지능

O 본격적인 통신 시대의 개막

             O 나쁜 해커, 좋은 해커

O 멀티 미디어와 주변기기

             O SW        O WS

 

80 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컴퓨터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대의 컴퓨터는 5

세대 컴퓨터로 불리우며, 그 지향하는

연구 개발 목표는 지식 정보 처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기능으로 다음의 3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어진 정보에

대해 이미 기억하고 있는 정보 혹은

지식에서 컴퓨터 자신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 추측하면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추론 기능과 새로운 문제에

대응하는 내용을 고도로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기억하는 학습 기능,

둘째는 문제의 대상 영역에 대한 정보

및 법칙성, 의미 등의 정보를 고도의

지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조직화해서 기억하고 검색할 수 있는

지식 데이타 베이스 기능, 세째는

자연 언어, 음성 입출력, 도형, 화상

등의 이용으로 유연하며 자연스러운

회화 능력을 실현하기 위한 지적

인터페이스 기능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능들을 지원하는 제5세대 컴퓨터

시스템은 하드웨어, 지식 중심 언어,

인공 지능 소프트웨어, 그리고

코드화된 지식 베이스로 구성된다. 그

중에서 일본과 DARPA[Conway

84, LHTA 182]에서 제창한

하드웨어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는 초고속

장치이다. 소형이면서도 대규모로

집적된 VLSI 를 이용한 빠른 장치로

시스템에 요구되는 속도를 얻을 수

있다. 둘째는 거대한 병렬처리를

허용하는 구조를 고안, 개선하여

해결할 수 있다. 세째는 논리적

추론을 지원하는 원시연산이

필요하다. 따라서 하드웨어는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그 연산을 구현하여야

한다. 네째는 논리적 프로그래밍,

인공 지능 기법, 그리고 병렬 처리

개념을 내포하는 추상적 언어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 언어를 지원하는

구조는 코드 밀도와 처리 속도에

이점을 제공한다. 한편, 1982 년 4

월에 제5세대 컴퓨터의 연구 개발을

추진하는 모체로서 신세대 컴퓨터

개발 기구(ICOT : Institude for New Generation Computer Technology)가 발족되어 많은

연구 성과가 있었으며 현재는 세계

각국의 연구 참여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단순히 미국을

따라잡는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1957 년 전자공업 육성법

통과후) 정확히 30 년뒤인 1987 년

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행,

발표된 미국방과학위원회(DSB)의

한 결정적인 연구보고에 의하면

서방세계가 지금까지 가장 우려하던

일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 보고서는

일본이 반도체 기술의 핵심영역에서

미국을 따라 잡았으며 세계 제1 의

마이크로칩 생산국가가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일본 통상성은 강력한

힘으로 일본의 칩생산 및 가격과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기들의 수급을

통제함으로써 3 백 80억달러(1991

년)에 달하는 세계 반도체 시장을

중개자 역활을 하고 있다. 결국

1991 년 초 미국이 주도가 되어

수행했던 걸프전에서 사용된

첨단무기들이 주로 일제칩에

의존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입면에서 1990 년 세계 10 대

반도체 회사 가운데 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쯔, 미쓰비시, 마스시나

등 6 개가 포함되었다. 이제 일본은

신정보처리기술(NIPT : new information processing technology) 이라는 공식명칭하에

제6세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989 년 일본 통상성은 10 년간에

걸쳐 수행될 신경망연구계획을

시작한 것이다. 소위 제6세대

신정보처리 프로젝트는 첫째는

신경망에 큰 중점을 둘 것으로

예상된다. 인간두뇌의 모형에 다른

직관적인 정보처리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둘째는 퍼지로직(fuzzy

logic)을 이용하여 인간과 같은

판단능력을 가진 시스템을 개발하는

두가지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일본은

새로운 세대의 신경컴퓨터의 실현을

예상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를

실현시킬 하드웨어가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 낙관적이지만 그렇게

낙관적인지는 결과를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5.멀티미디어화를 향한 전진

가.컴퓨터 그래픽의 제3 기

1960 년대 기억장치가 자기코어로

되어있을 때에는 가격이 워낙 비싸

그래픽 처리를 위한 별도의

기억장치를 엄두도 못 내었다. 그래서

텔레비전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후 전자공학의 발달로

기억장치의 가격이 싸짐에 따라

그래픽 부분만 전문으로 담당하는

기억장치인 frame buffer 가

생겨났다. 이 방식을 래스터 스캔

방식으로 부르며 현재 대부분이

이방식을 쓰고 있다. 컴퓨터의

중앙처리 장치는 frame buffer

만을 검사하고, 각 buffer 의

해당하는 부분의 픽셀(pixel,

picture element)에 원하는 색과

밝기로 주사한다. 이방식을 최초로

사용한 곳은 미항공우주국(NASA)

이다. 개발 초기의 엄청난 가격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9 년

NASA 는 래스터 스캔 장치로 연결된

최초의 우주선 매리너 6 호를 쏘아

올렸다. 사용자에게 그래픽기술이

확대된 것은 1970 년대 초에 개발된

값싸고 빠른 RAM(random

access memory)칩이 개발되면서

부터였다. 70 년대에는 컴퓨터

그래픽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져

그래픽 디스플레이도 60 년대의

백터스캔형 CRT 에서 가격도 싸고

취급도 용이한 스트레지형 CRT 가

보급되었다. 70 년대 후반에는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보급되고

면표시의 도색도 가능한 스타스캔형

CRT 가 시장에 나오고 퍼스날

컴퓨터에 의한 비지니스 그래픽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인정되어 컴퓨터 그래픽의

적용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컴퓨터의 소자도 IC 로 대치되고

성능이 점점 향상되고 신뢰도도

높아져 제조업의 모든 분야에서

CAD/CAM 시스템을 많이 도입했다.

유타대학의 서덜랜드와 에반스는

스케치 패드 방식에 의한 대화형 처리

시스템을 완성하고 면처리의 실험적

작품 하프론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이것은 인간의 얼굴과 같은 구상

형체를 입력할 때에 다각형으로

나누어 표시하여 그 뒤에 스므드

쉐이딩기술이나 은선소거, 소프트

쉐이딩에 의한 빛과 그늘을 표시하는

소프트웨어 기술로써 실물에 더욱

근접할 수 있다. 지금가지의 도형

중심의 컴퓨터 예술을 영상 중심의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의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B. 라존스키,

반다뷔크 등의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기술은 비디오의 합성

기술인 DVE(Digital Video

Effect)와 융합되어 70 년 후반부터

CF 는 TV 영상으로 가정에까지

사용되었고, 많은 컴퓨터나 DVE 에

의한 CF 제작 프로덕션을 육성하게

했다. 스케니메이트는 70 년대의

대표적인 영상제작기계로 컴퓨터

이미지(Image)사로부터 생산되어

하이브리드 컴퓨터에 의한 영상의

새로운 시각을 보여 주었으며 많은

영상 작가를 길러냈다. 이와 같이 70

년대에는 컴퓨터 그래픽의 모든

기술이 비디오를 포함하여 레이저,

빛, 음향과 혼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혼합미디어로 형성된 것이다. 즉

비디오 아트, 홀로그래픽 아트,

새로운 키네틱 아트와 라이트 아트,

일렉트로닉스 뮤직 등의 공간적인

종합 조형으로 발전했다. 65 년부터

개발이 시작된 CAD 시스템의 디만드

프로젝트를 비롯하여 맥도널드의

CADD, 록히드의 CADA M 이

CAD/CAM 시스템의 확립에

기여했으며 컴퓨터 그래픽의 주요

기술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같은

시기의 NASA 우주선의 시뮬레이션,

비행 시뮬레이션, 유한 요소법에 의한

시뮬레이션, DNA 의 생물공학적

시뮬레이션, 리모트 센싱, CT 스캐너

등의 medical electronics 에

화상 처리 기술의 성과가 향상되어

영상으로서 시각화할 수 있게 되었다.

즉, CAD 를 중심으로하는 컴퓨터

그래픽 개발 기술이 컴퓨터 그래픽의

시각 세계를 넓혀 컴퓨터 예술이나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시초로 하는

컴퓨터 미디어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픽

기술은 초기의 2 차원 영상을 만들던

것을 벗어나, 보다 사실적인 3 차원

물체까지 다룰 수 있게 되었다.

1970 년대 들어 광추적 기법이

소개되고, 그것이 텔레비젼

프로그램에 이용됨에 따라 급속히

사업화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마이크로 컴퓨터로

말미암아 일반 사용자 수준에서

그래픽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최초의 게임

(1)SPC-1000과 Apple Ⅱ+로

태동한 게임

진공관을 사용하여 빌딩 전체가

하나의 컴퓨터였던 최초의 컴퓨터가

탄도 미사일의 궤도 계산을 위해

사용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트랜지스터가 개발되고 컴퓨터의

크기가 빌딩 한 채에서 방 하나의

크기로 작아졌을 시절, 요즘은

모니터라고 불리고 있는 음극선관

출력 장치를 통해 텍스트를 출력하여

볼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즐기기

위한 목적의 ‘게임’은 등장하기 시작

했다. 이를테면 컴퓨터가 1 부터

10000 사이의 생각한 숫자를 알아

맞추는 게 임(사용자가 일정한 숫자를

입력하면 컴퓨터가 생각한 숫자보다

‘크다’ 또 는 ‘작다’를 알려주어 몇 번

만에 해당 숫자를 맞추는가의 게임)을

비롯하 여,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비록 원시적이지만 다양한 게임들이

누구로부터라 고 할 것도 없이 쏟아져

나와 컴퓨터 게임의 원시시대를

장식하였다. 1972 년 퐁이라는

게임이 나왔다. 간단한 흑백

테니스게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실증을 냈다. 그후 1977 년 미국의

아타리는 비디오컴퓨터시스템을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이는

사용자들이 카트리지를 갈아

끼움으로서 다른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곧 이어 나온 우주의

침략자라는 게임을 내놓자, 비디오

게임시장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어 같다.

(2)애플 II 의 게임

그러나 오늘날 ‘컴퓨터 게임’이라고

불리는 본격적인 게임이 등장한 것은

1976 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컴퓨터가 등장하고

나서부터이다. 스티 븐 잡스가

창고에서 만들어서 들고 나온 최초의

8 비트 컴퓨터는 개인용 컴퓨터라는

혁명적인 개념을 일으키며, 과학

계산에 집중되었던 컴퓨터 사용을

보다 개인적인 용도, 즉 문서 작성과

가계부 계산, 개인 세금 계산, 명함

관리 그리고 게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애플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게임들은 수많은 개인 사용자들에

의해 개발되어 자발적으로 조직된

애플 동호회를 통해 미국 전역으로

무료 배포되었으며, 상업용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시판하는

회사들도 생겨났다. 당시 대표 적인

게임 전문 제작 회사로는

Brotherbund Software, Electronic Arts, Bruce

Artworks 등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로드런너(Load Runner),

스카이 폭스(SKY FOX), 플라이트

시뮬레이터(Flight Simulator)

등의 걸작 게임 소 프트웨어를

생산하여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1980 년 초반에 들어서는 가히 애플

II 왕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애플 II 의

보급이 확산되고, 주요 게임 개발

업체와 개인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수많은 게임들이 속속 개발되자

자연스럽게 컴퓨터 게임의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당시의 분류에 따르면 로드 런너

(Road Runner)로 대표되는

아케이드 게임, 울티마(Ultima)

시리즈로 대 표되는 롤플레잉 게임,

던전(Dungeon) 시리즈로 대표되는

어드벤처 게임, 그리고 플라이트

시뮬레이터(Flight Simulator)로

대표되는 시뮬레이션 게임 등이

게임의 주요 분류 기준이었는데, 이

분류 기준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1. 3세대 PC (IBM PC

의 등장)

가.초기 PC 시장의 경쟁

IBM 이 16 비트 컴퓨터를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업체들이

IBM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IBM 을 앞지르고 있는 회사도

있었다. 전통있는 사무기기

제조업체인 키드사의 빅터 9000

이라는 컴퓨터는 IBM PC 보다 휠씬

위력적이고, 저장 및 기억용량이

컸으며 그래픽 기능도 우수했고, 가격

또한 저렴했다. 제니스사의 Z-100

은 프로세스를 2 개 탑재해 8

비트용과 16 비트용의 소프트웨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었으며, 가격도

IBM PC 보다 낮았다.

휴렛팩커드사의 HP-150 역시 IBM

PC 보다 성능이 우수할 뿐 아니라

기억 저장용량이 더 크고 터치 스크린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디지탈

이퀴프먼트사(DEC)의 레인보 100

또한 성능과 용량이 IBM 제품보다

우수했고 적극적인 판촉활동을 폈다.

이외에도 제록스, 왕 래버러토리즈,

하니웰사등이 기술이나 가격 우위의

제품을 내놓고 IBM과 경쟁을 벌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쟁의 배후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보이지 않는

역활이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BM PC 의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업체들에게

새로운 PC 의 개발을 독려했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DOS 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를 마이크로소프트에

주문하도록 설득했고, 대부분

성공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일단 마이크로소프트의

DOS 를 선택하게 되면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인 멀티 워드 와 스프레드

시트인 멀티플랜 의 새로운 DOS

버전의 주문을 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 즉 MS-DOS 에서만

작동되도록 설계된 것을 통보하는

것이었다. 결국은 응용프로그램도

마이크로 소프트에 주문할 수 밖에

없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는 한번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기업들이 PC 를 만들고 있었지만

대부분 게임용이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탠디사는

TRS-80 모델Ⅱ를 사무용으로 선전,

판매하면서, 작은 회사난 전문가의

사무실에서 필요한 회계업무,

재고정리, 서신작성, 장부정리를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끼워 팔았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눈으로

보는 계산기 의 뜻을 가진 비지칼크

(visiCalc)라는 프로그램이었다.

1979 년 하버드의 대학원생이었던

댄 브리클린과 보브 프랭크스턴이

애플Ⅱ용으로 개발한 비지칼크는

회계사의 장부정리를 전산화한

것으로, 재정상태를 예측하는데에

이용할 수 있었다. 비지칼크가 소개된

후 1 년동안 애플사가 판매한 12

만대의 컴퓨터중 약 1/5 이 이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위의 회사들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한마디로 IBM과

호환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HP-150같이 터치 스크린 이라는

첨단 기술을 너무 일찍 발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그 필요성을

수요자들이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Microsoft 의 시작

마이크로소프트의 전신 'Traf-O-Data'

하지만 학교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센터도 재정적인 문제로 차압이 붙게

되었고, 알렌과 게이츠는 파산을

경험하게 된다. 사업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것은 알렌이

1971 년에 전기공학 잡지의

중간쯤에서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인텔의 4004

칩에 대한 기사를 찾아내면서부터

였다. 1 년 뒤 인텔은 8008칩을

발표했고 훨씬 나은 성능과

싼가격으로 컴퓨터 매니아를 사로

잡았다. 바로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전

세대보다 두 배 빨라지면서 값은

떨어진다는 무어의 법칙이 증명되던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게이츠와 알렌은 8008

칩을 360 개나 구매해 교통량 측정과

분석용 컴퓨터를 만들고 교통국에

납품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Traf-O-

Data'란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비록

Traf-O-Data 는 굉장한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있게 한 발판이

됐다. 이 둘의 관심은 컴퓨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포춘이나

비즈니스 관련 잡지를 탐독하며

기업가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1973

년 여름 드디어 소형 컴퓨터를 가지고

수력발전 댐의 전기를 분배하고

관리하는 워싱턴과 뱅쿠버의 TRW 를

돕는 직업다운 직업을 갖게 됐다.

이렇게 되자 워싱턴 주립대학에

싫증이 났던 알렌은 모든 것을

그만두고 게이츠와 새로운 회사를

차리고 싶어 하였지만, 게이츠의

부모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게이츠를 하바드로 가도록 압력을

가했다. 1 년 뒤 게이츠가 법학도를

포기한 그해 겨울 알렌은 그들의

삶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의 삶을 바꿔

놓을 기사를 한 잡지에서 읽었다.

MITS 알테어(Altair) 8800 에

관한 커버스토리였던 이 기사의

제목은 '상업용 모델과 경쟁하는 세계

최초의 미니 컴퓨터 킷'이었다.

알테어는 쉬운 프로그래밍 언어가

없이는 취미로 다루는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었다고 판단한 이들은 1

주의 망설임 끝에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될 거라는 결정을 내린

후 Traf-O-Data 기계를 설계와

함께 알테어에서 동작할 수 있는

베이직 언어를 개발했다. 그 다음

주에 둘은 MITS 컴퓨터에 맞춰

프로그램을 수정했고 계획대로 4

월까지 작업을 끝내 MITS 가 사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MITS 는 알렌에게

일자리를 주고 두 사람에게

Albuquerque 상가에 조그만

사무실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크로소프트가

탄생하였다. MITS 와 첫번째

계약서에 '폴 알렌과 빌 게이츠가

조그맣고 조용하게(Micro-Soft)

사업을 한다'고 서명했다. 왜

하이픈과 대문자 'S'를 사용했는지

알렌과 게이츠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소스라인 첫줄에도 'Micro-Soft

BASIC : 빌 게이츠가 상당 부분을

작성했고, 폴 알렌이 나머지를

만들었다'라고 넣어 두었다.

보스톤으로 돌아와 알렌게이츠로

할까 등등을 세기힘들 정도로 많은

이름을 생각해봤지만 Microsoft

라고 당락 짓고(DEC과 IBM과 같은

회사들은 개인의 이름이 들어가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창립주

이후에도 계속 장수할 수 있었다고

생각에서였다), 1981 년까지

공식적으로 법인화하지 는 않았다.

알렌이 늦게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게이츠와 불화도 있었지만 이러한

사소한 다툼 말고는 알렌과 게이츠

사이에 불화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초기

마이크로소프트는 낡고 보잘것이

없었다. 가끔씩 영화도 보는 여유도

가졌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고객

앞에서 잠이 들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고 부채를 얻어야 할 정도로

빈곤할 때도 있었다. 1978 년 말

MITS 를 먼지 속으로 세차게 내몰며,

개인용 컴퓨터의 물결을 몰고 온 애플

II 로 상황이 반전되었다. 전략을 대폭

수정해 1979 년 1월 게이츠와

알렌은 시애틀로 본거지를 옮긴 뒤 1

년 안에 직원수를 35 명으로 늘리고

사업을 재정비한다. 30 명 이상인

인원을 거느리게 되자 폴과 게이츠는

진행중인 프로젝트의 모든 부분을

관장하기에 어려움을 느껴 전문

경영진으로 게이츠의 하버드 동창인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를

영입하며, 마이크로소프트는

대전환기를 맞는다. 그리고 1980 년

또다른 잊지 못할 사건이 이들에게

일어난다. 그해 IBM 은 기밀 PC

프로젝트를 위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찾고 있고, 알렌과 게이츠는 어렵지

않게 Q-DOS 의 라이센스를 IBM 에

팔았다. 이로써 마이크로소프트는

PC 소프트웨어 산 업계로 입성하는

전기를 맞게 된다.

다.IBM 의 PC 시장 진출

1968 년 설립된 IBM 의 카보래튼

연구소에서는, 1975 년 컴퓨터

개발요원 30 명으로 구성된

ELS(Entry Level System)팀이

5100 시리즈를 내놓았다.

소규모기업을 겨냥한 개인용미니

컴퓨터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IBM

이나 소비자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1 만 달러가 조금 넘는 이

컴퓨터는 소프트웨어를 갖추지

못했다. 이 컴퓨터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따로 프로그래머를

고용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다른

회사도 비슷한 수준의 컴퓨터를

개발했고 비슷한 정도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IBM 은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적극적인 PC

산업의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고

더티더즌(Dirty Dozen)이라는

기획팀을 조직하여 2 주만에

기획안을 만들도록 하였다. 2 주라는

것은 당시 IBM 에 있어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만큼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동안

보통 IBM 에서는 한번

컴퓨터개발계획을 세우고 이를

생산하기까지는 보통 2 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나게 짧은 기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2 년전인 1978

년 6월에 인텔은 최초의 16 비트

프로세서인 8086 을 내놓았다. IBM

은 1979 년 6월 PC 개발 계획을

세우게 된다. PC 5150 은 어콘

(Acorn) 이라는 이름으로 1980 년

7월 프로젝트 체스(Project

Chess) 라는 암호명으로 어콘의

개발에 착수 되었다. 1981 년 8월

12 일에 8086과 함게 발표된 인텔

8088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택한

16 비트 PC 5150 을 뉴욕시에서

발표, 세계 컴퓨터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개발 당시 어콘 의

프로세서로는 모토롤라의 68000,

내셔날세미컨덕터의 16032 등이

검토되고 있었다. 68000 은

위력적이면서도 소프트웨어 작성이

용이했고, 16032 는 성능이

우수하면서도 강력했다. 그러나

인텔의 칩만이 유일하게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완벽한 서포트 칩을

가지고 있었다. 모토롤라와

내셔날세미컨덕터는 서포트칩을 아직

개발중이었다. 모든 부품들은 최저가

입찰방식에 의해 구입함으로서

개발비를 낮추었다. 그러나

프로세서뿐만 아니라 IBM PC 는

IBM 의 제품이라고 할 수 없었다.

MS-DOS 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QDOS 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있었고,

초기의 부품은 어느 반도체 회사의

재고품들이었다. 진짜 IBM 의 기술로

만든 것은 하드웨어와 MS-DOS 를

연결시켜 주는 ROM-BIOS

뿐이었다. 그동안 IBM 의 전략과는

배치되는 방법으로 조달했는데 즉,

모든 부품은 자체 제작이 아닌 외부의

경쟁입찰에 의해 공급했다. 결국

IBM 의 계열사가 따낸 부품은

주회로기판과 켄터키밖에 없었다.

작지만 신뢰성있는 회사인 탠던사가

디스크드라이브의 공급권을 따냈고,

제니스 일렉트로닉스사가

전원공급장치를, 주회로기판 이외의

회로기판은 SCI 시스템이라는

실리콘밸리의 신규업체가, 모니터는

대만이, 프린터는 일본의 엡슨이

공급하기로 했다. 당시 대부분의

CP/M 기계에는 S-100 이라고

불리우는 다른 버스가 사용되고

있었다. 애플Ⅱ용 회로카드는 S-100

에 사용될 수 없었고, 이와 반대로 S-

100 은 애플Ⅱ에서 사용이 불가능해

호환성이 없었다. 당시

카드개발자들은 표준설계 사양이

기록된 버스의 기본 사용서를 책자로

만들어 발간했는데, 많은 업체들이

이를 기초로 애플Ⅱ나 S-100 카드를

양산해 냈다. 결국 IBM 의 버스를

제작하고자 하는 업체는 누구든 쉽게

버스 사양서를 구할 수 있었다. 또한

IBM 은 직렬, 병렬 포트와 비디오

카드를 제외한 나머지 다른 카드를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는

서드파티로 넘겨진 셈이 되었고, 많은

업체들이 이 서드파티에 참여함으로

다양한 카드가 개발되고, 이는 다시

IBM PC 의 대량 판매를 촉진하게

되었다. 8088 은 8086 이 16 비트

버스를 쓰는 것과는 달리 8 비트

버스를 사용하고 주소공간은 1MB 를

넘을 수 없게 되어있다. IBM PC

5150 은 OS 로 MS-DOS 버전

1.25 를 채택했고, 클럭속도는

4.77MHz, 기억용량은 16 -

256KB 을 갖고 있었다. IBM 은

이때 오픈 아키텍쳐 정책으로 기술을

공개, 수많은 호환기종이

생산케됐고, 이것이 거대한 IBM PC

패밀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오늘날

세계 PC 의 표준이 되다시피했다.

IBM PC 등장의 의의는 개인용

컴퓨터의 포급에 촉진제 구실을 한

데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판매전략도 이전의 IBM 방식이

아니었다. 즉 이전의 IBM제품은

판매나 AS 에 있어서 자사의

직원이외에는 그누구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의 판매책임을

맡은 스파크스는 새로운 컴퓨터를

일반컴퓨터 대리점을 통해 판매할

것을 고집했고 결국은 당시 최대의

컴퓨터 판매망을 갖고 있던, 윌리엄

밀러드의 컴퓨터랜드사와 IBM 의

최대 고객인 시어즈 로벅사를 통한

판매망을 확보했다. IBM PC 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데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시판된지 4 개월만인 1981 년 말에

5 만대가 팔렸다. 이는 그해 애플

컴퓨터의 총 판매대수가 13 만 5

천대 였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2 년초에

마침내 애플ⅠⅡ의 총 판매량을

앞지르게 되었다. 이의 구매자들은

대부분 최초로 PC 를 구입하는

사람들로서, 응용프로그램보다는

IBM 의 이름을 믿고, IBM PC 를

구입한 것이다. 1982 년 시사주간지

타임 이 타임 지 역사상 처음으로

컴퓨터를 올해의 인물(Man of The

Year) 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라.IBM PC 의 수혜자들과 IBM PC

의 발전

IBM PC 의 성공은 IBM 에게만

행운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주변기기와 소프트웨어, 호환기를

생산하는 업체들도 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주변기기를 생산하는 회사로

최초의 행운을 얻게된 회사는 테크마

(Techma)사이다. 테크마사는 원래

전자실험기구를 만드는 회사였으나,

IBM PC 의 성공을 직감한 사장인

마틴은 즉시 IBM PC 를 한대 구입해

이를 분해하여 분석하여 6 주만에 20

여가지의 주변기기를 만들어

산업박람회인 COMDEX 에서

선보였다. 먼지방지용 덮개, 메모리

확장용 회로기판, 디스크 드라이버

등이 그것으로 엄청난 매상 증가를

가져왔다. 전자연필 이라는 초기의

워드프로세싱 프로그램을 개발한

마이클 슈라이어는 이 프로그램을

무려 78 가지나 작성해야 했다.

그러나 IBM PC 라는 가장 확실하게

잘팔리는 PC 를 만난 그는 더 이상

중소 업체의 PC 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1981 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노련한 경영인이자

기술자인 로드 캐니언, 짐 해리슨,

빌머토 등 3 사람이 동업해 컴팩

(Compaq)사를 설립했다. 컴팩은

처음부터 다른 클론 업체 들과

마찬가지로 IBM PC 와 호환성이

있는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1982 년이 일로 최초의

IBM PC 호환 기종을 발표한 업체가

되었다.IBM PC 의 모든 것을 모방할

수 있었지만 ROM-BIOS 만은

지적재산권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코드 등도 입수할 수 있었지만,

모방은 할 수 없었다. 컴팩은 여기에

도전했다. 즉 역엔지니어링

(reverse engineering)을 이용해

IBM 의 ROM-BIOS 와 같은 기능을

갖는 그러나 다른 ROM-BIOS 를 15

명의 기술자가 수개월간의 노력 끝에

개발했다. 결국 이러한 노력으로

컴팩은 어느 정도의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IBM 은 계속해서 PC XT 를

1983 년초 개발 시판하면서

컴퓨터왕국의 아성을 굳건히 했다.

IBM PC XT 는 인텔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택햇고,

클럭속도 4.77MHz 에 OS 에 MS-

DOS 버전 2.0 을 사용했다.

기억용량 128-640KB까지 확장이

가능하며, 10MB 의 HDD 를 연결해

사용이 가능한 제품이었다. IBM 은

1984 년 11월 라스베이가스에서

열린 컴덱스 쇼에서 운영체계인 MS-

DOS 3.0과 함께 하드웨어면에서

기존의 PC 보다 월등한 속도와

용량을 가진 PC 를 선보여 PC 기술을

한단계 끌어 올린다. 다름아닌 IBM PC AT(Advanced Technology)로 흔히 AT 로 불리우는데 CPU 로

인텔의 80286칩을 선택했고,

6.14MHz 의 클럭속도, 1MB 의

기억용량, 20MB 의 HDD 를 장착,

고성능 PC 시대의 막을 열었다.

80286 은 1982 년 개발되었으며,

주소공간은 16MB 에 이르며,

보호모드라고 불리우는 동작모드를

통해 가상메모리공간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80286 은 IBM PC 에

사용되기전 2 년동안은 사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1984 년에는

인텔의 첫 모방작품이 NEC 에서

나왔다. V20 으로 불리운 이칩은

8088 프로세서와 호환되는

칩이었다. 같은 시기에 8086과

호환되는 V30 도 발표되었다. 원래

80286 프로세서는 AT&T 의 유닉스

운영체제인 제닉스 를 탑재하고

멀티유저 컴퓨터용으로서 인텔사가

설계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가

판매했던 제품이다. 다라서 이칩은

PC 용으로 제작된 프로세서는

아니었다. 제닉스를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80286 은 실질모드와

보호모드 등 2 종류의 작동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AT 의 등장은

기술적인 뒷받침 뿐만 아니라, IBM

자체의 경영전략도 작용했다. 즉 많은

호환기 업체의 참여로 IBM 의 이윤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다. 결국은

새로운 PC 를 통한 이윤 확보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애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PC 라고 하면

인텔의 8088 혹은 8086칩을

내장한 IBM PC 를 의미했다.

마.도전하는 소수

*Apple IIc

’84 년 매킨토시가 발표되는 시점에

애플 IIc 가 발표되기에 이른다(그림

10). 비록 애플 IIe 기종처럼

베스트셀러 기종이 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애플 IIe 기능을 조그만

몸체에 집약한 애플 IIc 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작은 크기로 만들다

보니 확장성 슬롯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본체에 시리얼 슬롯 2 개와

모니터 포트, 조이스틱 포트,

플로피디스크 포트 등이 탑재되어

매킨토시와 같은 올인원 개념의 애플

II 였다고 할 수 있다. 후에는 Apple

IIc 용 LCD 도 따로 발매되어 포터블

애플 II 기종으로서의 가능성도

엿보였다.

*코모도어 Plus-4, Commodre 128

코모도어의 Plus-4 는 롬에 통합된

소프트웨어를 탑재했으며, 코모도어

128 은 기존의 코모도어 64 의

업그레이드 기종이었다(그림 11).

코모도어 128 기종은 128KB 램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네이티브

모드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코모도어 64 기종과 호환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전용 소프트웨어의

부족과 매킨토시나 아이비엠, 아타리

ST 와 같은 16 비트 기종에 밀려 큰

빛을 보지는 못한 기종이었다.

*TRS-80 Model 4P

한때 잘 나갔던 TRS-80 모델의 최후

기종이다(그림 12). 기본적인 사양은

Model 4 와 동일하다. TRS DOS

6.0 에서 6.2버전, LS DOS 6.3

버전을 사용했다.

*아타리 ST 520

사실 초창기의 8 비트 아타리

기종들은 그다지 주목할 만한 기종은

아니었다. 하지만 ’85 년 나온 아타리

ST 는 모토로라 68000 으로 무장한

매우 쓸만한 제품이었다(그림 13).

뛰어난 그래픽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디 인터페이스가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 그 이후에

아타리가 미디용으로 많이 사용되는

이유가 됐다. 운영체계는 TOS 라

불리는 것을 사용했는데, CPM/68

과 GEM 이라고 불리우는 그래픽

운영체계가 결합되어 있는 형태였다.

패러럴 인터페이스와 RS-232C

포트를 탑재했고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개인용 컴퓨터로는 최초로

미디 인터페이스가 내장되었다. 또한

512 컬러 팔레트에 16색을 사용할

수 있었다. 가격은 799 달러로

맥이나 IBM PC AT 에 비해 매우

저렴했다. 그 이후에 아타리 시리즈는

1MB 램에 플로피가 탑재된 아타리

ST 1040 기종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아타리 ST 는 그래픽과

사운드 기능이 향상된 Mega ST

시스템과 STe (enhanced)

시스템이 차례차례 출시된다. 이

기종들은 기존에 사운드 분야에서

인정받았던 아타리 ST 기종을 그래픽

분야에까지 끌어올리려는 시도에서

발매된 기종이었다.

*아미가 1000

코모도어는 ’85 년, 드디어 아미가

1000 이라고 불리워진 16 비트

기종을 출시한다(그림 14). 아미가의

기능은 그 당시 최고 수준에 이르는

매우 뛰어난 기종이었다. 이 기종

역시 모토로라의 68000칩을

사용하였으며 256KB 램을 탑재하고

880KB 의 3.5 인치 플로피

드라이브와 세 개의 커스텀칩을

사용하였다. 최대로 4,096컬러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놀랍게도 그

당시에 이미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지원했다. 또한 4채널의 디지털

사운드 기능과 마우스를 탑재했다.

*MSX2 의 등장

MSX1 의 차기 버전인 MSX2 가

일본에서부터 시판되기 시작한다.

MSX1 에 비해 해상도와 컬러기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으며 뛰어난

그래픽 기능으로 다양한 게임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MS-DOS

의 8 비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MSX-

DOS 와 디스크 드라이브가

탑재됨으로써 본격적인 홈컴퓨터의

자리매김을 확실히 했다.

*애플 II 16 비트로 탈바꿈 - Apple IIGS : ’86

애플 IIGS 의 시작은 애플 IIx 라는

프로젝트에서 시작된다. 65816

이라는 6502 계열의 새로운 16 비트

CPU 가 출시되자 애플사에서는 이를

이용한 새로운 애플 II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그들의 목표는 애플

IIc처럼 사용이 간편하고 애플 IIe

처럼 확장성이 있는 컴퓨터였다.

Apple IIGS 는 기존의 애플 II+나

애플 IIe 의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돌릴 수 있는 호환성을 확보하면서

다양한 기능을 추가하였다. 일단 화면

디스플레이에서 320×240 와

640×400 해상도를 추가로

지원했다. 320×240 해상도에서는

4,096 색상 중 16색을, 640×400

해상도에선 4,096 색상 중 4색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존의

애플 II 와 달리 Ensoniq칩을

사용하여 동시에 50 가지의 음을

조합할 수 있었다. 12MB까지의 램

확장이 가능했으며 ADB 포트와

애플톡 포트 등을 채용하여 애플 II 와

매킨토시와의 가교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애플

IIGS 의 상당부분은 퀵드로우와 같은

맥에서 사용되는 루틴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86 년 8월에

출시된 애플 IIGS 는 애플 II

매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애플의 최단시간 최다 판매기록을

세웠다(그림 15). 운영체계는

초창기에는 ProDos16 을 사용하다

후에는 매킨토시 운영체계와 거의

동일한 GS/OS 운영체계를 사용하게

된다.

바.IBM PC 의 발전과 IBM 의 전략

수정

1986 년 IBM 은 RT PC 라는

퍼스널컴퓨터를 소개한다. 여기서

RT란 RISC( 기술(Technology)

을 의미한다. 이 컴퓨터는 일찍이

1970 년대 중반에 존 코크 휘하의

IBM 연구팀이 실험적인

미니컴퓨터에 응용한바 있는 기술로,

코크와 그의 팀이 고속컴퓨터를 적은

비용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던중

발견한 개념을 토대로하여

제작하였다. 컴퓨터는 전체

명령어세트중 중용한 20%의

명령어가 실제작업의 80%를

처리한다. 따라서 잘 쓰이지 않는

대부분의 명령어 때문에

명령어처리속도가 늦어지고 있는

것이다. RT PC 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이용 기존의 명령어를 약

절반으로 줄이면서도 속도는 더욱

빨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다.

매우 뛰어난 착상이지만 다른

회사들도 곧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한

컴퓨터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어느

컴퓨터는 RT PC 명령어의 1/4 의

명령어만으로 동작하는 컴퓨터를

내놓기도 했다. 286PC 가 최고의

제품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무렵인

1985 년 10월 인텔은 80386DX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발표, PC

시장의 변화를 예고했다. 80386DX

는 32 비트 데이타 버스를 제공하는

최초의 프로세서로, 80286 의

보호모드 이외에 가상 86 모드라는

별도의 동작 모드를 가지고 있다. 이

모드는 안정적인 멀티태스킹 환경을

제공하며, 640KB 아래에서

수행되는 여러 응용 프로그램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이칩은

인텔의 발표 다음해인 1986 년

미국의 컴팩사가 전격채택, 386PC

인 데스크프로 386 을 발표하게

된다. 이 PC 는 세계 컴퓨터업계의

거성으로 자처해온 IBM 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컴팩은 세계적인 PC

업체로 급성장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컴팩이 386PC 를

발표한 1986 년은 PC 사( )에

큰변혁의 해로 남고 있다. 당시까지

PC 기술과 시장을 주도해온 IBM 이

286PC 보다 뛰어난 성능을 갖는

386PC 를 컴팩에게 넘긴 것은

기술적인 면에서 큰 타격을 입은

셈이다. 이와 함께 세계 PC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IBM 의 시장쉐어가

PC군에 의해 역전됨으로서 퇴조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해였다. 이에

따라 IBM 의 매출은 약간

증가했지만, 순익은 오히려

감소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PC 와

그 주변기기로 말미암은 것이다.

IBM 이 이를 만회하고 기술적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1987 년 4월

기존의 제품이 채택하고 있던 버스

아키텍쳐 대신 MCA(Micro

Channel Architecture)를

채택한 네가지 종류의

PS/2(Personal System/2)를

발표했다. IBM 은 PS/2 에 대하여

내부회로, 게이트 어레이, MCA,

BIOS 소스코드등의 사양공개 원칙을

포기했고 독과점을 선언해

호환기업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업체들이 유사제품을

만들기 어렵게 하기 위한 갖가지

조치를 취해 놓기도 했다. 이외에도

비디오 처리분야의 VGA(Video

Graphic Array)와 3.5 인치

플로피 드라이브 및 101 키보드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컴퓨터들은

IBM과 마이크로소프트가 보장하는

새로운 운영체제인 OS/2 를

사용했다. OS/2 는 PC 계열의 어떤

컴퓨터보다도 큰 용량의 메모리를

처리;할 수 있었다. 또 레이져

프린터, 200 메가바이트의

광자기디스크 등 최신의 다양한

주변기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PS/2 는 예상외로 판매실적이 저조,

PC왕국의 체면에 먹칠을 하여 IBM

에 상처를 남겼다. 이후 IBM 은 PC

시장에서 옛 영광을 되살리지 못하고

989 년 IBM PC XT/AT 생산을

중단, 현재(1991 년)는

호환기업체에 대한 기술료만을

챙기고 있다. 1988 년 빅블루라

불리는 IBM 을 제외하고, 그

호환기종을 판매하는 9 인방(Gang

of Nine)이라 불리운 컴팩을 비롯한

9 개의 회사는 IBM 의 MCA 에

대항하는 새로운 버스의 개발에

합의하고 ISA(Industry

Standard Architecture)와

EISA(Extended ISA)를 개발했다.

이는 기존의 AT버스와 호환이

되면서도 그 성능을 향상시킨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판매상들이 오리지날

PC버스 방식을 고집함으로 인해

PS/2 를 급격히 쇠퇴하게 만드는 큰

원인이 되었다.

사.386 PC 의 등장

IBM 이 PC 시장에서 헤메고 있을

무렵인 1988 년 6월 인텔은

80386SX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발표했다. 386SX 는 내부적으로는

16MHz 32 비트 80386칩과

똑같이 32 비트로 운용되나

외부적으로는 80286과 같은 16

비트 데디타 버스와 24 비트

어드레스를 갖는 가격대비 성능이

우수한 제품이다. PC 업계의 강자로

부상한 컴팩은 재빨리 386SX PC 인

데스크프로 386S 를 발표, PC

기술을 선도하며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386SX 는 가격대 성능비가

뛰어나 전세계적으로 크게 각광을

받으며 286 시장과 386 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386SX 는 16MB

램용량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용가능한 80286 소프트웨어를

모두 실행할 수 있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386, 파라독스/386과 같은

80386 소프트웨어를 실행시킬 수

있는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AMD 는

인텔의 386 호환칩 Am 386 으로

386 시장에서 15%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했으며, 92 년에는 50% 이상을

차지, 최대의 386칩 메이커로

급부상하고 있다. 데스크프로 386 을

내놓은 후, 컴팩컴퓨터사는 곧발로

마이크로컴퓨터의 최고봉을 개척하는

회사가 되었다. 델컴퓨터사와 다른

회사들이 인텔 80386칩을 내장한

PC 를 가지고 컴팩사를 바짝

뒤쫓았다. IBM 도 PS/2 계열의

신형컴퓨터인 모델 80 에 80386

칩을 탑재했다. 애플사 역시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여러가지 면에서

호환 가능한, 개량한 32 비트칩인

모토롤라 68020칩으로 강화한

매키토시Ⅱ를 내놓았다. 이러한

컴퓨터와 유사한 컴퓨터의 출현은

지난 20 여년 동안 발전해온 여러

컴퓨터들 사이의 차이점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다.

아.PC 의 업무용 시장 진출

1985 년 미국의 석유관련 업체들은

전국적인 석유산업의 침체로

비용절감운동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석유화학 정제설비의 설계로

유명한, 휴스턴의 피시 토목건설사

역시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회사의 사장인

짐보이드도 비용절감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중에 이 회사의

IBM4341 컴퓨터와 그

데이터처리진을 위해 지출되는 28

만달러는 매우 큰 부담일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컴퓨터 상담자와의

상담에서 현재의 기종으로는 무리가

따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새로운

기종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조금더 대형 기종을 바꿀것을

고려했지만 비용이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퍼스널컴퓨터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던 보이드는 모험을 하기로

결정했다. 즉 컴팩컴퓨터사로부터

데스크프로 286 을 중심으로 12

대의 퍼스널컴퓨터를 구입한후

컴퓨터망을 구성했다. 1986 년 9

월에는 조금더 강력한 데스크프로

86 이 실용화되자 이로 대체해

나갔다. 3 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이

회사는 사업의 번창과 더불어 130

개의 스테이션으로 확장된

퍼스널컴퓨터통신망을 갖추게

되었다. 피시사는 퍼스널컴퓨터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었다. 손으로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도면수정작업을 없애려고 여러가지

시도를 하던 실내장식가인 개리

휘트니는 마이크로컴퓨터 CAD 와

만났다. 휘트니는 이 분야에서는

최초로, 당시가지는 작업의 말미에나

기술적으로 완벽한 시공도면을

만들기 위해 이용하던 컴퓨터를

작업의 도입부부터 활용하는 것을

꿈꿔온 사람이었다. 휴스턴에 있는

3D/인터내셔날사의 설계부책임자인

휘트니는 홍콩과 디바이에서 호텔과

법인체 본부를 설계하면서 전통적인

방법에는 커다란 결함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바 있다. 그는 전통적인

방법에서 최초의 도면이 완벽한

건물로 되기까지는 각 단계마다

설계사가 말 그대로 백지위에다

도면을 다시 그려야만 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설계사가 통합된 프로젝트를

생각해서 스케치판 대신에 컴퓨터를

이용한다면, 애벌도면??이

최종청사진을 포함한 모든 설계도의

기초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

휘트니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런

시도가 작업시간을 상당히 줄여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휘트니는 이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1987 년 3D/

인터내셔날사를 나와서

휘트니그룹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의 새사무실에는 제도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대신에 벤틀리라는 4

천달러짜리 CAD 프로그램이 내장된

컴팩사의 데스크프로 네트워크만이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스케치판이

아닌 모니터위에 설계해야 하는것에

대부분의 설계사들이 당황하고,

불평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이런

불평은 곧 수그려졌고, 휘트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것이

100% CAD 사무실입니다.

여기서는 모니터가 종이이고,

마우스가 연필입니다. 그리고

삭제버튼은 지우개이지요.

휘트니그룹은 곧 다른 설계회사를

앞서가게 되었다. 훨씬 낮은 가격에

설계를 수주할 수 있었고, 설계시간도

단축할 수 있었다. 이는 생산성

향상을 고민하고 있던 다른 설계사와

건축가들에게는 희소식이라 할 수

있었다. 설계사들이 이러한 설계를 2

차원에서 3 차원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게 하는 데에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의 뒷받침도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즉 32 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탑재한 PC 는

수학계산용 보조처리기

(coprocessor)를 설치할 수 있게

함으로서 엄청난 계산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하드웨어의 발전은 소프트웨어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가장 많이 팔린

소프트웨어중의 하나인 오토캐드는

투영선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었으나, 이 프로그램의

그림에 색깔을 입혀서 입체구조물로

보여 주는 오토셰이드라는 프로그램

덕으로 더 많은 판매를 하게 되었다.

또 다른 프로그램인 로보솔리드는

간단한 입체도형들의 모음을

이용한다. 이 프로그램은

프리미티브라는 블록 을 연결해서

복잡한 도형을 만들 수 있는데, 이때

만들고자 하는 도형의 질량, 부피,

무게중심 등의 특성을 분석해낼 수도

있다.

자.NeXT 와 486 그리고 호환칩

1988 년 10월 12 일 스티브 잡스는

애플Ⅱ를 발표할 때와는 다른

분위기에서 새로운 컴퓨터를

발표했다. 애플에서 그가 기용한

사장인 스컬리에게서 쫓겨난후

와신상담 끝에 개발한 NeXT 를

발표한 것이다. NeXT 는 그가

이전에 개발한 애플Ⅱ보다 속도만

빠른 것은 아니었다. 동시에 여러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선명한

전용화면, 현악 4 중주같은 사운드

등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컴팩은 다시

한번 기술신화를 이룬다. 인텔은

1989 년 4월에 i486DX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개발했는데 컴팩은

미니급의 성능을 발휘하는 486PC

시스템프로 486PC 를 개발,

초고성능 PC 시대를 여는 개가를

올렸다. 80486DX 는 수치보조

프로세서와 캐시 시스템을 내장한

최초의 칩으로 4.77MHz 의 8088

에 비해 50배의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다. 1990 년 인텔은 386 이지만

새로운 기술을 채택한 칩을 발표한다.

이 칩은 80386SL 로 최초로

전력관리기능(APM : Advanced

power management)을 부과한

칩이다. 이칩은 동급인 80386SX

보다 집적도에서 훨씬 앞서고 있는데,

이는 캐시 및 메모리 컨트롤러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AMD(Advanced Micro Devices) 사에서는 AM386DX

라는 칩을 1991 년 3월 발표한다.

이칩은 386DX 와 완벽하게 호환이

될뿐 아니라, 20% 정도 빠른

처리속도, 훨씬 낮은 가격으로 인텔의

386 독점에 제동을 건다. 7월에는

AM386SX 를 발표한다. 9월에는

Chips & Technology 사가

F8680 이라는 8086/186 호환용

칩을 개발한다. F8680 은 CPU 와

USART(unvesal asynchronous receiver/transmitter), CGA급

디스플레이 컨트롤러, CPMCIA

표준을 지원하는 회로를 갖추고 있다.

내부적으로 향상된 코드를 쓰기

때문에 286급 성능을 낸다. 1991

년 12월 IBM 은 자사의 PS/2 에만

쓰게될 IBM386SLC 을 발표한다.

향상된 명령어 집합과 8KB 의 캐시를

내장하고 내부에는 32 비트 데이타

버스를 외부에는 16 비트 버스를 쓴

칩이다. 인텔은 1992 년 3월

80486DX2 를 발표한다.

80486DX 에 클럭-배가(clock-

doubling) 기술을 적용한 첫

작품이다. 4월에는 인텔을 이후

긴장시킬 사이릭스에서 386SX처럼

내부 32 비트, 외부 16 비트의

버스를 가진 Cx486SLC 를

발표한다. 이칩은 1KB 의 32 비트

내장 캐쉬를 가지며, 보조프로세서는

외장형이다. 6월에는 Cx486DLC

를 발표한다. 외부에도 32 비트

전송이 가능하며, 1KB 캐세를

내장하고 있다. IBM 은 9월에

486SLC2 를 발표하였다. 486 의

두배인 16KB 의 캐시를 가지고

있다. 사이릭스는 인텔의 486DX2

를 의식해 10월에 Cx486DRu2 를

발표한다. 486 프로세서 시대에

접어들면서 PC 의 개념은 486

프로세서와 SVGA, IDE 하드디스크

표준 등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면서

MS-DOS 나 관련 운영체계(DR-

DOS, WINDOS, OS/2)를

실행시키는 기계로 바뀌게 된다.

아울러 네트워크의 일부로써 표준

서버로까지 그 개념이 확장하기까지

한다. 여기에는 노벨사의 네트웨어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운영체계에 있어서도 기존의 MS-

DOS 또는 관련운영체계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PC 용 UNIX 의

등장으로 운영체계에 의한 PC 와

중대형 컴퓨터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새로운 운영체계가

새로운 시대의 주도권 장악을

추구하고 있다. MS-DOS

계열이라고 볼 수 있는 DR-DOS, MS-WINDOWS, WINDOWS-NT 이외에도 486 이상의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넥스트스텦(NextStep),

486DX 이상의 시스템에서

운영가능한 솔라리스(Solaris),

그리고 유닉스 관련 운영체계로 SCO

UNIX, SCO OpenDesktop, 노벨

UnixWare 등이 그것이다.

 2.슈퍼 컴퓨터와 인공지능

가.볼츠만 머신

1980 년대가 되어서 스탠포드대학의

라멜하트등이 연결고리(synaps)

결합의 세기를 변화시켜 한정된 수의

뉴런으로 부과된 문제에 반응할 수

있는 오차역전파(eror back -

propagation)를 고안하여

다층구조 인식자(multi layer

perceptron)의 학습방법을

발견하였다.

1980 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캘리포니아 공대의 홉필드와 토론토

대학의 힌튼 등의 연구를 통해 볼츠만

머신 이 제안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자극에 대하여 흥분이 확률적으로

결정되는 뉴런이 쓰이고 있다. 사실상

볼츠만 머신을 통해 수학자나

심리학자들에 의해 이론 연구에만

치우쳤던 신경망연구가 비로서

공학적인 관점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이제 이론 뿐만 아니라 고집적 회로를

이용한 새로운 신경망 칩 생산과

음성인식이나 문자 인식, 정보통신의

최적화 등 기존의 컴퓨터에서는

한계라고 여겨졌던 분야들이

신경망연구의 새로운 응용분야로 떠

오르고 있으며, 일련의 연구성과들로

인해 신경망컴퓨터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이 커 가고 있다.

최근 5세대까지 컴퓨터과학의

전제는 모든 것을 수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본 괴델(K.Goedel)과

완전히 기계적인 방식으로 수학의

정리를 증명하려고 한 튜링(Alan

Turing)의 수학이론, 프린스턴에서

함께 연구했던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과 샤논

(C.E.Shannon)의 정보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기존의 컴퓨터가

무의미한 기호나 상징을 사용하여

수리적이고 분석적인 기능을 강조한

것이라면 신경망 컴퓨터는 일견

산만해 보이지만 동시 다발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좌,우 두뇌의

양면성에 근거해서 신경망 컴퓨터는

수치, 연산, 분석의 좌뇌적 기능에서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우뇌적

기능으로 전이시킨 것이라고도 한다.

흔히 신경망 컴퓨터는 기존의 노이만

컴퓨터와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며, 사실 그러한

해설에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가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footnote)일 뿐 이라고

했던 말은 여기에도 해당된다.

전문가시스템(Expert System)은

인공지능의 응용분야로 전문가가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을 컴퓨터에

입력해 비전문가라도 지식과

추론과정을 이용해 해답을

제시하도록 한 시스템을 말한다.

용도를 지칭해서는 컨설테이션

시스템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문가시스템은 1960 년대 화합물의

구조를 추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

덴드럴 (Dendral)시스템」을

시초로 발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70 년대 의료진단 시스템인 마이신

(MYCIN)과 광물탐사시스템인

프로스펙터(Prospector) 등이

만들어져 사용됐다. 본격적인

실용화는 1977 년 개최된

인공지능국제회의에서 미국

스탠포트대학의 파이겐바움(E.

Feigenbaum)교수에 의해 발표된

후 산업현장에서 이루어졌다.

현재에는 의료진단이나 기계고장

진단, 설계지원과 보험 손해배상 판정

등의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금융분야나 심지어 법원에서의

형량산출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또

전문가들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석과 예측, 대책 수립 등 산업계와

인문과학, 자연과학분야에서 고르게

사용되고 있다. 전문가시스템은

인간에 의한 실수를 방지할 수 있고

휴식이 필요없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즉

사람처럼 잊어버리는 일없이 기억을

축적할 수 있으며 피로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질 수도 있는 인간에

비해 언제나 정확한 작업을 할 수

있다. 또 지식 치환이 가능해

최신지식만을 판단기준에 응용할 수

있다. 이외에도 범용적인 전문가

시스템 개발도구에 전문지식만

입력하면 특정분야를 위한 시스템이

구축되므로 비전문가도 전문가의

지식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잇점을

제공해준다. 이 전문가 시스템은

지식베이스(Knowledge base)와

추론엔진(Inference engine)으로

구성돼있다. 지식 베이스에는

전문가의 지식을 사실과 규칙으로

저장하는데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을

하고자 할 때는 지식베이스에 있는

사실과 규칙을 토대로 추론을 분석해

해답을 생성해 낸다. 1980 년대 초에

일부 엑스퍼트시스템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예를 들면

워싱턴주의 톨만산에서 찾기 어려운

몰리브덴광산을 프로스펙터라고

불리우는 엑스퍼트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발견됐다고 전해지자 전문가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초기의 소박한 과학적 열정으로

시작된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는 다소

시들해졌다. 그 이유는 먼저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부족하고,

아직도 상식과 같은 인간의 모호한

지식을 효율적으로 컴퓨터에

이식시키지 못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완전하지 못한 상품을

과장로 선전하고 이를 판매하는

기업들 때문에 올바른 연구의 방향을

흐려왔다. 최근에는 다시

퍼셉트론류의 상향식 연구방법이나,

광학소자나 병렬처리 기술의 발달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나.기계번역의 도약

그러나 80 년대에 들어서면서

기계번역은 컴퓨터의 비약적인

기술발전에 힘입어 새로운 전기를

맞게됐다. 이 때부터는 전자기술을

앞세운 일본의 활약이 눈부시게 전개,

NEC 의 PIVOT 과 후지쯔의

ATLAS , 쿄토대학의 MU 프로젝트

등이 추진됐는데 이들 연구는

인간적인 번역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현재 일본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번역제품은 대부분

영-일, 일-영 번역시스템으로 NTT 의

ALT-J/K , 후지쯔의 ATLAS 1.Ⅱ ,

샤프의 DUCT-E/J 등 40 여개

시스템들이 판매돼 세계 최고의

수준을 달리고 있다. 특히 일본

히타치나 NEC 가 개발한

기계번역시스템들은 번역을 할

언어를 중간언어로 변환하는

피봇방식을 사용, 쉽게 다국어를

번역할 수 있어 한-일, 일-한 번역도

가능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와

함께 유럽에서도 상용제품이 등장,

영국의 경우 영어로 된 매뉴얼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NTRAN ,

프랑스는 전자공학에 사용되는

불어를 영어로 변환하는 CALLIOPE

, 네덜란드는 독어, 영어,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ROSETTA 등이 상품화돼

활용되고 있다. 또 미국은 IBM 이

영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LMT 를

개발했으며, 특히 조지타운대학에서

개발한 SYSTRAN 은 지속적인

성능향상이 이루어지면서 현재

영어를 아랍어, 독어, 서반아어, 일어

등 8 개 국어로 번역하는 성능을

자랑하고 있다.

 3.본격적인 통신 시대의

개막

가.AT&T 의 분할과 본격적인 경쟁

동케이블은 1마일정도 전송되면

다시 강화시켜 주어야만 하지만,

광파는 도중에 보강시켜 주지 않아도

1 백마일이상까지 전송이 가능하다.

동케이블과는 달리 혼신의 염려도

없다. 오늘날 첨단 광파시스템은 1

초당 1.7 기가비트(1 기가비트는 10

억비트)의 자료를 전송할 수 있는데

이는 대영백과사전의 내용전체를 2

초내에 전송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AT&T 를

분할하라는 법원의 명령이 내려지자

미국의 여러 전화업체들이 광통신

장거리 서비스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나섰으며 그리하여 10 여개의

전화업체들은 총 70억마일에 달하는

광섬유통신망을 건설했다. AT&T 는

보스톤과 버지니아주 리치모든간에 1

천 5 백 km 의 광통신망을 구축하고

84 년에 서비스를 개시했다. 또한

AT&T 는 같은 해에 로스앤젤레스에

광섬유케이블망 FT3C 를 설치해

올림픽경기 실황을 각종

경기장으로부터 TV 중계센터까지

생방송으로 전송해 줌으로써 이

새로운 기술은 더욱 널리 인정 받게

되었다. AT&T 와 MCI 를 비롯한

여러 통신업체들은 미국 동부지역

회랑보다도 더 긴 광섬유 케이블망을

설치했다. 광섬유는 84 년에

본격적으로 새로운 통신 케이블로

선정되었다. 즉, AT&T 와 북미 및

유럽의 28 개 통신업체들이 88

년부터 가동된 여덟번째의 대서양

횡단 해저케이블망으로

동축케이블대신 광섬유케이블을

선정했던 것이다. TAT-8 로 명명된

이 해저 광케이블은 3 만 7 천 8

백건의 통화를 동시에 전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분량의

음성, 데이터 및 비디오 신호를 3 천

6 백 7 해리 떨어진 대서양을

횡단해서 보낼 수 있다. 이

해저케이블망은 파장 1 천 3 백

나노미터의 단일 모드 섬유로 된

한상의 케이블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모드는 1 초당 2 백 96 메가비트로

운용되는 1.3 미크론의 레이저에

의해 작동되도록 되어 있다. 영국과

프랑스를 해저로 연결한 이

케이블망은 광통로 기술을 통해

지상의 중계소에서 지선으로 갈라질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동축케이블을 사용할 때보다 훨씬

적은 1 백 25 개의 중계기가

설치됐다. 현재 2 백 50 개의

중계기를 사용하는 이와 유사한

태평양 횡단 케이블망 구축도

진행중이다. 이들 대서양 및 태평양

횡단 해저 광통신망 설치계획이

발표된지 2 년후인 86 년 미국의

AT&T, 캐나다의 텔리글러브,

영국의 텔레커뮤니케이션

인터내셔날, 프랑스의 우편통신부,

스페인의 텔리포니카 등은 유럽과

북미대륙을 광파로 연결하는 제2 의

해저케이블망 가설계획에 착수했다.

TAT-9 라고 불리우는 이

광케이블망은 91 년에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최신 기술이 동원되어

성능이 TAT-8 보다 거의 2배가 되는

초당 5 백 65 메가비트의 전송능력을

갖추게 했다. 이 새로운 광케이블

시스템은 독특한 수중 송신기술을

사용, 다중 중계기를 통해 미국 및

캐나다를 유럽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과 개별적으로 연결시켜

주고 있다.

이미 88 년초에 북미지역에는

전체인구의 거의 80%가 무제한에

가까운 정보를 접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광섬유 시설이 설치되었다.

그들은 전화, 전기, 라디오, TV 등과

같은 과학적 발명이 모두

대중화됨으로써 진가를 발휘했듯이

모든 주택 아파트는 물론 도시 전체가

광섬유화 되어야 비로서 이상향이

이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생활이 부유하고 교육수준이

높으면서도 정보에는 굶주린 수많은

시민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제일먼저 그 이상향이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러와 그의 동료들이

섬유광학통신을 탄생시키기도 한

바로 그 미국에서 그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미국에서는 기관이나 단체차원에서

고무적인 진전이 있었다. 통신용량을

확대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광섬유시스템을 설치하는 기업체,

학교, 병원 및 기타 단체들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사무용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상업구역이나 새로

종성중인 주거지역 등에 광대역

통신시설을 설치하는 추세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일반 대중을

상대로한 광통신기술의 실용화에는

일본과 프랑스가 앞서 갔다. 78 년 한

마을에 Hi-OVIS 시스템을

설치함으로서 실용화의 길을 연

일본은 그후 계속적으로 그 시설과

서비스를 확대해 나갔다. 오늘날

일본의 일부 전화가입자들은

고감도의 TV 카메라와 흑백모니터로

구성된 텔리페이스(Teleface)를

가지고 광섬유 통신망을 통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화상전화를 할 수

있다.

또 프랑스의 국영전화회사는 83 년

휴양도시인 비아리즈의 1 천 5

백세대를 대상으로 광섬유통신망을

설치해 비디오 전화서비스, 비디오

텍스트, 케이블TV 등을 제공했다.

이 서비스는 86 년까지 무려 2 백 50

만세대 이상의 가정이 가입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비디오텍스트

시스템으로 성공했다.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는 이 미니텔

시스템은 지금도 확대일로에 있다.

아직 미국에서는 일본과

프랑스에서와 같은 일반 가정을

대상으로한 광통신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관계

전문가들은 그 주요 장애 요인은

기술적 문제보다는 경제적 요인, 특히

전자단말기의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생산기술을 향상시켜 단말기의 값을

낮추고 일반대중이 광통신의 엄청난

효율성을 인식하게 되면 개인은 물론

기업활동에 일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다.

나.To Home, To Office(FTTO, FTTH)

91 년 美 벨연구소는 초당 3,500

억회나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실험용

초고속 레이저를 선보였다. 이것은

대략 초당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내용의 350배나 되는 양을 초당

한번씩 보낼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멀티미디어로 대표되는 앞으로의

통신환경 변화에서 대용량의 정보를

취급하기 위하여 현재의 동선 가입자

선로의 대체수단으로 등장하는 것이

광섬유를 이용한 광가입자 선로이다.

광가입자 선로의 잇점은 거의

무한대의 정보를 보낼 수 있고,

전송손실이 적으며, 전자파에 의한

간섭이 없다. 또 가느다란 광섬유의

사용으로 인한 관로의 포화 해소가

가능하고, 앞으로 동선가격의 상승에

대비해 경제성이 있다는 점이다.

광가입자선로의 궁극적인 방향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FTTH(fiber to the home)이고

다른 하나는 FTTO(fiber to the

office)이다. 즉 사용자가 있는

곳까지 광선로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광가입자선로를 구성하는

방안에는 별(STAR), 링(RING),

버스 (BUS) 등 여러 형태가 있으나,

그중에서 가장 미래지향적이고

경제적인 방안으로 PON (passive

optical network)이 선호되고

있다. PON 은 통신정보의

분기점에서 가입자 방향으로는

전화국에서 가입자에게 수동의

광분배기를 사용하여 분배전달하며,

전화국 방향으로는 각

가입자로부터의 광신호들을 수동의

광결합기를 사용하여 전화국으로

결합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

전화국으로부터 가입자로의 신호는

모든 가입자에게 반송되므로

가입자신호의 보안 방안 및

다중접속방안이 필수적이며 그

역방향 또한 유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수동적 방식의 PON 은 능동

광소자를 전화국 내부나 가입자

주거지역 내부에 국한시킴으로써

여러 경제적, 관리적 이점을 제공한다.

다.일본의 도전

1970 년대부터 일본은 광처리분야를

겨냥했으며, 1981 년에는 통상성을

중심으로 광전자 개발계획 을

시작했다. 대성공을 거두면서 3 백개

이상의 특허를 획득했고, 광반사

이극진공관(LEDs), 전하결합소자

(CCDs, 일명 전자디스크), 컴팩트

디스크, 광저장 디스크 등의 여러

분야에서 세게의 선두자리에 오르게

하는데 기여했다. 1988 년 소니와

마쓰시타, IBM 등은 다시 쓸 수 있는

디스크를 개발해 같은해 시장에

내놓았다. 그러나 이분야에서도 일본

기업의 성장은 분부셔 세계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같은 해

후지쯔는 매초당 5 백 12MB 의

교환속도-이것은 재래식 교환보다

50배나 더 바른 기록이다.-를 지닌

세계 최초의 광교환대를 발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편 미쓰비시는

영어 알파벳의 26 자를 식별해낼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광신경컴퓨터를

생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1989 년 IBM 이 8000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있는 세계에서

가장 밀도높은 광전자칩을

만들었다고 발표함으로 반격에

나섰다. 1990 년에는 오랫동안

광컴퓨터의 우수성을 강조해온

벨연구소의 앨런 황이 최초의 실제로

사용될 수 있는 실험용 광컴퓨터를

선보였다. 또한 1991 년에는 텍사스

인스트루먼츠가 개량된 광칩을

사용한 세계 최초의 광컴퓨터를

개발했다. 광컴퓨터는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이

초고속광슈퍼컴퓨터의 실용화는 더욱

먼 이야기라 한다. 그러나 광처리의

엄청난 잠재력, 광통신의 영향은

상상하기 힘들것이라는 데에는

대부분의 전문가가 동의하고 있다.

라.광통신

지난 60 년 미국의 GE 와 IBM 이

갤륨비소 계열의 반도체레이저를

개발한 이후 66 년 영국의

엔지니어인 찰스 카오 박사와 조지

호크햄이 이끄는 팀이 유리섬유를

이용해 광전송이 가능하다는 이론을

발표하면서 광통신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광섬유를 상업용으로 개발한

최초의 회사는 뉴욕의 코닝

클래스웍스로 증기침전 이라는

방법을 이용해 저손실 광섬유를

제작한 것으로 1970 년의 일이었다.

또한 AT&T 의 벨연구소를 중심으로

갤륨비소계열의 0.8μ급 단파장

반도체 레이저와 리튬.인계열의

1.3μ급 장파장 레이저반도체등이

개발돼 광통신 실용화를 앞당겼다.

이와 함께 최근에는 실리콘,

게르마늄, 인듐, 갤륨비소등 화합물

반도체를 중심으로 반도체 레이저가

연구되는 한편 이들 신호를 받아

전기신호로 바꾸어 주는

광검출기술등이 개발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1991 년 미국의 벨 연구소는 매초당

3 천 5 백억회나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실험용 초고속 레이저를 선보였다.

이것은 대략 매초당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내용전부의 3 백

50배의 양을 매초에 한번씩 보낼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멀티미디어로

대표되는 앞으로의 통신환경

변화속에서 대용량의 정보를

취급하기 위하여 현재의 동선 가입자

선로의 대체수단으로 등장하는 것이

광섬유를 이용한 광가입자 선로이다.

광가입자 선로의 잇점은 거의

무한정의 정보를 보낼 수 있고,

전송손실이 적고, 전자파에 의한

간섭이 없으며, 가느다란 광섬유의

사용으로 인한 관로의 포화 해소가

가능하고, 앞으로 동선가격의 상승에

대비해 경제성이 있다는 점이다.

광가입자선로의 궁극적인 방향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FTTH(fiber to the home)이고

다른 하나는 FTTO(fiber to the

office)이다. 즉 사용자가 있는

곳까지 광선로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광가입자선로를 구성하는

방안에는 별(STAR), 링(RING),

버스(BUS) 등 여러 형태가 있으나,

그중에서 가장 미래지향적이고

경제적인 방안으로 PON (passive

optical network)이 선호되고

있다. PON 은 통신정보의

분기점에서 가입자 방향으로는

전화국에서 가입자에게 수동의

광분배기를 사용하여 분배전달하며,

전화국 방향으로는 각

가입자로부터의 광신호들을 수동의

광결합기를 사용하여 전화국으로

결합전달하는 역활을 한다. 이 때

전화국으로부터 가입자로의 신호는

모든 가입자에게 반송되므로

가입자신호의 보안 방안 및

다중접속방안이 필수적이며 그

역방향 또한 유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수동적 방식의 PON 은 능동

광소자를 전화국 내부나 가입자

주거지역 내부에 국한시킴으로써

여러 경제적, 관리적 이점을

제공한다. 90 년대 말 미국과

일본에서는 1.6 - 1.7 기가비트급인

광통신기술이 개발되었다. 현재는

10 기가비트급인 광통신기술이

마무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으로는 앞으로의 멀티미디어

통신에는 부족하다. 적어도 수백기가

내지 테라비트급의 개발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기술로는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현재 광통신기술은 반도체

레이저에서 나오는 빛을 렌즈에 모아

광섬유 안으로 진입시킨 후 빛의

강도를 모르스부호처럼 점멸시켜

상대방에게 보내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빛을 점멸시키는

속도에 한게가 있다.

실리콘반도체로는 1 기가,

리튬반도체로는 40 기가,

캘륨비소반도체로는 2 백기가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 연구되는

기술이 코히런트 검파방식이다. 이

방식은 매우 좁은 파장을 갖는

광신호를 라디오 주파수 신호처럼

변조하는 것으로 광신호를

입력신호에 따라 진폭변조,

주파수변조, 위상변조해 송수신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기술이

상요화하려면 먼저 매우 파장이 짧은

고성능 레이저와 이를 변조시키는

기술이 개발되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좀처럼 쉽지 않아 오는

2000 년 이후에 가야 실용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국내의

광통신기술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

KIST 를 중심으로 연구돼 80 년대말

90 메가비트급 광통신이 개발됐으며,

최근에는 8 천 64 회선 용량인 565

메가비트시스템이 개발, 서울과

제주를 연결하는 시범운영에 나서고

있다. 또 오는 95 년을 목표로 3 만 2

천회선의 용량인 2,488

메가비트급의 광통신기술개발도

추진되고 있다.

마.PC 통신

미국의 프로디지 사는 서비스 개시 3

년만에 1 백 50 만 사용자를 확보하며

매출액 1억달러 이상의 매출로 대형

PC 통신업체가 되었다. 프로디지는

88 년까지 5 년동안 서비스 개발,

기술시험 및 시장분석 작업만을

계속해 왔으며 89 년 비로서

서비스를 실시하기에 이르른다. 특히

90 년 서비스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급신장, 현재는 1 천 5

백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이

되었다. 프로디지의 성공에는 치밀한

시장조사가 있었다. 즉 인구통계를

세밀히 분석, 서비스를 확보하고,

주를 적극 유치함으로써 성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컴퓨서브는

온라인 정보통신서비스 및

네트워크서비스 사업 등을 하는

정보통신 종합회사이다. 또한 이

회사에서 제공하는 VAN 서비스의

명칭이기도 하다. 자체

통신네트워크를 통해 미국내 5

백여개 도시를 포함해 전세계 1

백여개의 접속점을 두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포스서브를 통해 이를

제공하기도 했다. 서비스는 그 양과

질에 있어서 당양하고 광범위하여 각

분야의 DB 를 망라하고 있다. 또한

미국내에서만 1 천 1 백개의 회사와

정부기관에 전자우편과 부가통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가입자에게 비지니스 관련자료를

중점적으로 제공해 주고 있다. 79 년

서비스를 실시한 이후 이용자는

급속히 늘어 89 년에 50 만명을

돌파하고, 100 만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매출도 3 년전에 비해 94%

신장하는 등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다. 지난 86 년 닛쇼이와이(주)와

후지쯔가 각각 50%의 합작으로

설립한 니프티서브 는 미국의

컴퓨서브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있다. 회사설립후 만 1 년뒤인 87 년

4월 3 천 5 백명으로 서비스를

실시한 이후 92 년 5월 현재 42

만명의 회원을 확보, 120%의

놀라운 성장을 거두었다. 또한 20%

정도가 법인이라는 것도 자랑이라할

수 있다. 특히 전체 이용의 60%를

차지하는 포럼은 니프티서브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이외에도

전자메일과 사랑방을 합친 서비스의

이용이 전체 이용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전기가 제공하는 PC-VAN

은 86 년 4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GMail과 제휴하고

있다. PC-VAN 의 특징은 간단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전국을

망라하는 방대한 통신망, 정보의

충실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서비스

이용자는 88 년 5 만 5 천명에서 92

년 5월 현재 42 만명에 이르고 있다.

다이얼로그정보서비스사가 운영하는

다이얼로그(Dialogue)는 65 년

록히드사의 정보검색 연구개발

프로젝트로 시작되었으며 72 년

온라인 조사 서비스를 상업화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얼로그는

지난 88 년 7월 미국 제2 의 신문

재벌 나이트-리버사가

록히드사로부터 3억5 천만달러에

인수함으로써 소유주가 한차례

바뀌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이트

-리버사는 현재 1 백 35 개국에 1억

이상의 인구를 대상으로 뉴스 및

정보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다이얼로그의 가장 큰 강점은 3억3

천만 레코드 분량의 4 백개이상의

DB 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지니스에서는 6 백 70 만 기업의

재무상태 등을 알 수 있는 등,

기업관련 서비스가 2 백여개의 DB 로

구성되어 있다. 다이얼로그는 현재

90 여개국에 12 만명의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다우존스정보서비스

그룹이 운영하는 다우존스 뉴스/

리트리벌은 74 년에 벙카라모사와

합작으로 설립되어 주로 경제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용자는 91

년 3월 현재 23 만명에 이르고 있다.

영국 브리티시텔레콤(BT)의

비디오텍스 서비스인 프레스텔

(Prestel)은 73 년 BT 여?_

구센터에서 뷰데이터(Viewdata)

란 이름으로 처음 제공되었다. 78 년

6월 2 차 시험을 실시 79 년부터는

명칭도 현재의 프레스텔로 바꾸게

된다.

제공서비스는 1 천 2 백개에 이르며

이용자들은 주로 상품이나 서비스

구입에 이용하고 있다. 이용자는 80

년 1 만명에서 91 년 10 만명을 돌파,

예상한 마큼의 큰 성과는 거두고 있지

못하다. 이는 단말기 가격을 낮추지

못하고 수익성을 고려해 초기요금을

비싸게 책정한 것이 그 이유로

생각된다.

바.새로운 통신 기술

(1)다중접속방식

광섬유에서 사용되는 전달과정은

펄스코드변조(PCM, pulse code

modulation)라 불리우는 모스부호

(Morse code)를 아주 세련시킨

방법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

지금까지 개발된 관련 기술은

TDMA(시분할 다중접속),

CDMA(코드분할 다중접속)등이며,

TDMA 기술은 이미 미국기업에 의해

개발이 완료되어,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TDMA, CDMA 를

막론하고 디지탈 셀룰러 기술의

핵심은 가입자 수용능력을 현재의

애널로그 시스팀에 비해 2-5배 이상

향상시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으로 미루어 셀룰러

기술분야에서는 유럽보다는 미국이

다소 앞서 있으며, 단기적으로는

CDMA 보다 TDMA 기술이 주도권을

쥐고 이동통신 네트웍분야의 발전을

선도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무선전화기 기술을 출발점으로 한

기술개발 방향은 가정용에서

공중용으로 개념을 확대시키고 있다.

현재 1 단계인 CT-2 의 개발이

완료돼 유럽, 미국, 동남아

일부지역에서 시범 또는

사용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

단계이다. 향후 착발신이 가능한

시스팀인 CT-3 의 과정을 거쳐

완전한 개인 통신이 가능한 PCN

까지 발전해 갈 전망이다. 셀룰러와는

달리 PCN 에서는 미국에 비해

유럽업체들이 앞서고 있다는 평이다.

이런 통신 네트웍 기술은 결국 한단계

더 진화된 형태로 통합된 다음 광대역

ISDN 의 일부로 편입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각종 통신기술은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동통신망 기술의 경우 현재의

애널로그 셀룰러라고 불리우는

기술이 디지탈화돼 가는 한편 가정용

무선전화기 기술이 CT-2(발신전용

무선공중전화), CT-3(착발신용

무선공중전화)의 과정을 거쳐

개인휴대통신(PCN)으로 발전하고

있다. 데이타통신도 앞에서 밝혔듯이

X.25 라는 패킷통신 기술이

개발되면서 급속한 발전을 시작, 최근

들어 패스트패킷통신 등 신기술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신기술은 B-ISDN(광대역

종합정보통신망)이라는 최종목표를

향해 모여들 것이라는 게 통신

전문가들의 일관된 전망이다. 다시

말해 모든 통신망 기술은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모든 형태의 통신

단말기가 무리없이 사용되는 통신의

이상향을 향해 일제히 전진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이동통신은 셀룰러통신에서의

기술개발과 가정용무선전화기 (CT-

1)기술을 근원으로 하는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셀룰러(이동전화기)

기술은 네트웍 및 단말기의 디지탈화

작업, 즉 디지탈 셀룰러 시스팀의

개발이 최대의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을 선두로

이동통신시장에서 사활을 가늠할

디지탈기술 개발에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미국에서는 71 년

AT&T 가 이동통신을 최초로

제안했으나, 미연방통신위원회

(FCC)는 77 년이 돼서야 시카고에

시범용 이동통신을 운영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여러 규제로 83 년

말까지 실용화되지 못했다.

84 년이 되어서야 급속한 발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동통신의 급속한

발전으로 이보다 비용이 저렴한 CT-

2 또는 텔리포인트(telepoint)로

불리우는 시스팀은 처참한 패배를

경험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이동통신

시장에서 모토롤러는 일본의

경쟁사들과 그리고 스웨덴의

에릭슨사와 더 많은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에릭슨은 지멘스,

알카텔, 필립스 등과 같은 다른

유럽회사들과 제휴하여 유럽전역을

커버하는 이동통신망을 개발하고

있다. 그리고 2000 년까지

GMS(Global for Mobile Communication, 이동통신을

통한 세계적인 시스팀)을 통해

이동통신망을 세계화하려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동전화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GMS 의 성공은

유럽회사의 영향력 강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의 모토롤라도 같은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리듐

(Iridium) 이라고 불리우는 이

계획은 77 개의 위성을 연결하여

회사 자체의 세계적인 이동통신망을

구성하려는 야심찬 계획이다.

모토로라는 GSM과 마찬가지로 완전

디지탈방식을 채택할 것이며, 90

년대 중반까지는 설치가 완료될

것으로 예상된다. GMS과 이리듐

계획 모두가 인공위성을 통한 통신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위성통신의

시장전망은 어느 때보다 밝아지고

있다. 이 점을 의식한 일본 정부는

미국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기술에 기반한 위성을

개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일본은 자체 개발 중인 H-2

위성발사대의 완성을 서두르고 있다.

이것이 완성되면, 미국의 타이탄

(Titan) 로킷, 유럽의 아리안

(Arian) 로킷과 격렬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위성을 통한

직접방송(DBS: Direct

Broadcasting by Satellite)의

경우를 보면, 일본이 1984 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이래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이미

위성통신을 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경우, 행운과 불행의 쌍곡선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비교적

행운만을 경험하고 있다. 즉 섬과

산악지대가 많은 일본에서는

위성통신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2)분산통신, 클라이언트 - 서버통신

종전 호스트-단말기 중심의 기업

컴퓨터 환경이 고성능 PC 로 대체돼

가면서 소형분산처리(downsizing)

이 거스릴 수 없는 대세로 밀려오고

있다. 이미 미국, 일본 등

정보선진국의 각 기업들은 호스트-

단말기 중심의 중앙집중식

전산시스템을 PC 중심으로 한

소형분산처리시스템으로 서둘러

전환해 나가고 있으며, 이를 위한

컴퓨터업계의 신제품 개발경쟁도

뜨겁게 달아오를 전망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중대형기종에

맞물린 터미날이 자리하던 책상위를

PC 가 대신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특히 이같은 PC 는 GUI(grapic

user interface) 등의 유연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고해상도

그래픽처리, 다양한 소프트웨어의

보유등 기존의 더미 터미날(dummy

terminal)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강력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또

개방형을 지향하는 컴퓨터업계의

네트워크 기술수준의 향상으로

이기종 컴퓨터간의 접속이 점점

쉬원지고 있으며, 메임프레임등에

비해 월등한 가격대 성능비를

강점으로 업무효율이 크게 향상되고

있다. 최근 대두되고 있는

다운사이징의 개념은 개별적으로

운용되던 PC 특유의 강점은

살리면서 종전 호스트 역활을

대행하는 서버와 네트워크 장비,

그룹웨어등의 SW 를 통해 운영의

묘를 살린 통합적인

분산처리시스템으로 지향해 나가려는

것이 다운사이징의 주목적이다. 이를

위해 등장한 개념이 클라이언트-서버

컴퓨팅(client-server

computing) 이다. 메인프레임-

미니컴퓨터-PC 에 이어 제4 의 물결

이라 불리워 지는 클라이언트-서버

컴퓨팅은 데이터를 저장, 처리,

전송하는 중심 컴퓨터(서버)와

여기에 PC 나 워크스테이션 등의

단말기를 접속, 상호간 네트워킹을

통해 각각이 CPU, 하드디스크,

주변기기 등의 자원을 공유해나가는

분산처리시스템을 말한다. 결국

다운사이징은 상호 독립돼 작업을

하면서도 정보가 고립되는 정보섬

(Information Island)이 발생하지

않으며, 이기종간의 자유로운 통합을

통해 기업전체의 컴퓨팅파워가

올라갈 수 있는, 종전 LAN 등에 비해

향상된 네트워크 컴퓨팅환경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다운사이징은

최근들어 그 개념이 더욱 발전해

라이트사이징(Right-sizing)이란

신조어를 낳고 있다. 메인프레임이나

미니컴퓨터가 PC 로 이동하는

다운사이징과는 달리 라이트사이징은

고성능 컴퓨팅을 요구하는 작업에

대해 클라이언트의 데스크탑을

오히려 미니급이나 워크스테이션으로

이동, 다운사이징과 업사이징을 가장

적절하게 혼합해 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3)지능망

현재 다양하고 고품질의 서비스를

추구하는 통신망 및 서비스는 크게 3

가지 방향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첫째는 다양한 복합 미디어의 정보를

어디서나 주고받을 수 있는

정보전달속도의 고속화와

광대역화이고, 둘째는 개인휴대통신

(PCN)과 개인번호의 개념에 의한

통신서비스의 개인화, 세번째는

이용자에게 다양하고 안정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시스템

제어개념의 지능화가 그것이다. 이들

3 가지 가운데 광대역화 및 개인화는

전송 및 개인기술에 힘입어 발전될

것이고, 지능화는 통신망의 구조

측면에서 기존통신망(PSTN)에

새로운 기술의 부가가 용이하도록 될

것이다. 통신 이용자의 서비스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망의 지능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통신망을 운용하는

운용자의 입장에서 급속한 기술을

신속하게 통신망에 수용시켜

서비스의 품질 향상 및 사업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기존

통신망에 지능망을 도입하게 된

결정적인 요소는 전송로 및 교환기의

디지탈화 및 공통선 신호방식 (CCS : common channel signalling)의 채택에 힘입은 것이다. 지능망

서비스는 1984 년 미국의 AT&T 가

분리되면서 설립된 BOC (bell

operating company)사가

독자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800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출현하게 되었다. 현재 지능망

서비스는 다양한 고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미국 및 일본에서는 800

서비스와 프리 다이얼(free dial)

같은 서비스는 통신사업자의 수입을

증가시키는 유망 사업으로 꼽히고

있다. 오늘날 전기통신 분야의 급속한

기술발전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창출해 냄에 따라 국내의 통신은 물론

국제간의 통신접속을 위해서

규격화된 표준이 필요하게 되었다.

표준화는 시장점유와 기술의

조기확보 측면에서 국가간의

이해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

국제전기통신연합(ITU : International Telecomm unication Union)을 통해

지능망서비스 표준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세계적인

공통관심사속에 B-ISDN(

광대역종합정보통신망), 토큰링

네트워크( TRN : Token Ring

Network), UPT(퍼스널통신) 등과

함께 중점 표준화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선진국은 나름대로 표준을

개발하여 국가간의 표준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능망의 최종 목표는 어떠한

망이든지 각각의 서비스가 실현

가능하도록 표준화하는 것으로서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 CCITT

에서는 CS-1 (compatibility set-

1)이라는 제명으로 25 가지의 서비스

표준화를 발표하고 단계적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CS-2, CS-3

가 표준화될 때 수백가지의

지능망서비스가 이용자들에게 선보일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서비스가

국내는 물론 국제간에 통용되려면

지능망 서비스의 표준화는 서비스

상용화 이전에 우선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지능망은 공중전화망(PSTN : public switched telephone network)등 기존 통신망에 No.7

공통선 신호망을 통하여 컴퓨터와

고속대용량의 데이터베이스(DB)를

접속한 수직적인 망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고도의 통신서비스를

신속하게 실현할 수 있는 망구조를

말한다. 여기서 기존의 통신망은

음성이나 데이터와 같은 정보통신을

실제로 교환, 전송하는 전달층에

해당되고, No.7 공통선 신호망은

교환기 등 망요소 사이의 제어신호를

전달하는 신호층에 해당되며, 컴퓨터

및 데이타베이스는 제어 정보를

집중관리하는 서비스층에 대응된다.

지능망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망구성요소가

상호논리적으로 접속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망구성 요소는 전달층에

속하는 서비스수행교환기(SSP)와

신호층에 속하는 신호중계교환기

(STP) , 신호망관리시스템(SEAS)

등이 있으며, 서비스 층에 속하는

서비스제어시스템(SCP) ,

서비스관리시스템(SMS) 등이 있다.

(4)이동전화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애널로그 방식은 APMS,

TACS/ETACS,NMT900 그리고

NMT450 등이 대표적이지만,

이러한 방식은 모두 셀룰러

(cellular) 개념을 토대로 하고

있다. 현재와 같이 제한적인 주파수

자원속에서는 이러한 셀룰러 개념의

도입이 없이 일반인을 위한

이동전화서비스는 극히 일부인에게만

제한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동통신에서의 셀룰러 방식이란

제한된 주파수 스펙트럼의 반복된

사용을 통해 사용자수를 늘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주파수의 재사용을

위해 나누는 셀의 수는 7, 4 그리고

12 가 있지만, 이중 7셀구성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7 개의

셀은 인접채널과 혼신방지를 위해 3

개의 섹터로 나누게 되어 결국,

주파수의 반복 사용이란 점에서

이동전화에 할당된 주파수를 21 개로

쪼개어 7셀마다 계속 반복함으로써

서비스 지역의 크기와 관게없이 넓은

지역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파수 재사용을 위한

제안들은 1940 년대 미국의 AT&T

에서 시도되었으며, 69 년에

본격적으로 미국의 FCC 에

제안형식으로 제출되었다. 그러나

제안된 셀이 초기개념만으로 실제

시스템 구성과 운영상에서 많은 인접

채널과의 혼신으로 어려움을

겪어오면서, 시스템 하드웨어의

구준한 개선으로 70 년대말쯤

본격적인 셀룰러시스템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69 년 일본의 NTT 에서

400MHz 대를 이용한 셀룰러

시스템을 개발하였으나, 상용화되지

못하다가 79 년 도쿄에서 최초로

NAMTS 시스템을 사용하여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초기의

시스템은 셀룰러 시스템으로 8

천명까지 가입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셀룰러 방식의 도입 이전에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었던 서비스가

있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2 천명의

가입자를 수용할 수 있는 단일

시스템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높은 고지에 한개의 송신기를

설치하여 수십Km까지 전파가

도달할 수 있도록 고출력을

사용하였다. 대부분 VHF 나 UHF

대의 상대적으로 낮은 주파수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서비스는

주파수의 제한된 사용과 고출력,

사용자 수의 제한 및 서비스 지역의

제한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비스

요금이 비싸, 일부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서비스가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NAMTS 에 이어 81

년 NMT450 이 북유럽의

여러나라에 도입되었고, 수용할 수

있었으며, 83 년 10월 13 일 미국의

지역벨인 아메리텍(Ameritech)이

시카고에서 처음으로 AMPS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많은 나라가 이

방식을 채택하였으며, 현재

우리나라가 이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채택된

방식으로 전세계적으로 가입자의

60%가 AMP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AMPS 시스템이

채널수와 가입자수가 NMT450

시스템을 훨씬 능가하지만, 유럽의

주파수 할당 현황상 800MHz 를

사용하고 있는 AMPS 사용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자 TACS 와

NMT-900 을 속속 개발하여 유럽

여러나라가 채택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이동전화시스템의 종류와 가입자수에

의한 시장점유울을 나타낸 것이다.

92 년말 세계 이동전화의 총가입자가

추정수는 대략 2,300 백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88 년

세계이동전화 가입자수 400

백만명에서 매년 50%이상의

성장율을 보여온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향후 예측하는 바대로

연간 25%의 성장률을 감안한다면,

오는 95 년에는 세계적으로

총가입자수가 현 가입자 수가 현

가입자의 약 2배인 4,500 백만명에

이르게 되어 각 나라마다 현재

시스템의 수용가능한 가입자 용량에

한게를 이를 전망이다. 여기에 기존의

음성전화 이외에 여러가지 서비스,

예를 들면 이동 무선 데이타 서비스

등이 점차 도입되어 활성화되면,

이동전화의 새로운 수요가 더욱

증가하면서 시스템 용량의 한계를

더욱 빨리 나타내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주파수의 한게성에 기인하여

가입자수를 늘리기 위해 무한정

주파수 할당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새로운 방식의 도입으로 가입수를

늘리기 위한 차세대 이동통신

시스템인 디지탈 방식의 도입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라별 인구 100

명당 무선호출과 이동전화

가입자수의 현황을 92 년말까지

추정한 숫자이다. 이러한 가입자수의

증가는 결국 서비스의 경쟁체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서비스 도입을

시작할 때에만 해도 이동전화

시스템의 설치비가 워낙 방대하고, 도

이에 다른 비싼 이동전화 요금으로

인해 가입자수가 적은 관계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국영전화회사가

독점하고 있으나, 수년전부터

가입자수의 높은 증가율로 인해

수익성이 보장되자 각 나라마다

서비스 업체의 복수 경쟁체제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와 대만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가 복수도입을 도입하였거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경우 79 년 서비스의 도입이

시작된 이래 NTT 이외에 8 개의

이동전화 신규사업자가 지역별로

복수 경쟁체제를 이루고 있다. 또

홍콩의 경우 현재 3 개의 서비스

업체가 복수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이동통신의 복수경쟁

업체의 지정을 올해 중에 실시할

예정이다. 물론 작년에 선정한 제2

무선호출은 올 10월부터 본격적인

무선호출사업을 실시함으로 본격적인

경쟁체제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복수 경쟁의 유도는 장점과

단점을 각각 가지고 있다. 단점으로는

주파수 할당을 몇 개 업체에

나누어줌으로써 한 서비스 업체가

모든 주파수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용량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데

반하여, 할당된 주파수를 몇개업체에

나누어 사용하여 콘트롤 채널의

중복등 주파수 활용율이 떨어진다.

그러나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이동전화요금의 자연적인 하락을

유도하기 위해 복수경쟁체제의

도입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으며,

또 경쟁의 우위를 쟁취하기 위해

서비스의 질은 물론 새로운 서비스의

창출 또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이동전화의

셀구성과 밀집된 도시지역의

운영상의 노하우 축적은 경쟁을

통하지 않고는 기대하기 어렵게

때문이다. 예로써 일찍부터

경쟁체제가 도입되었던 홍콩의 경우

경쟁적 상황에서 부단히 서비스 질을

향상시켜 온 허치슨 텔레콤

(Hutchison Telecom)이 최근

아시아 각국에 진출하면서 세계로의

진출을 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자유경쟁이 가져온 장점인 것이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애널로그

방식에서의 가입자수가 2-3 년내에

포화에 이를 전망에 이르자 약 5

년전부터 연구되어 온 여러가지

디지탈 방식의 도입을 각국에서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도입될

디지탈 방식은 USDC(U.S.A.

Digital Cordless)과 GSM 및

코드분할 방식이 검토되고 있거나,

이미 도입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시분할 방식(TDMA)인 USDC

방식이 이미 미국표준 방식으로

채택되어 여러 이동통신회사가 이미

도입을 추진하고 있으며, 지금

시험중에 있는 CDMA 방식 또한

향후 표준채택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향후에 도입될

디지탈 방식을 결정하지 못한

상태이며, 다만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주관이 되어

CDMA 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CDMA 가

갖고 있는 큰 이점인 가입자 용량(

애널로그 방식에 비해 20배)에도

불구하고, 상용화가 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내다보는

이동통신 운영자와 각 나라들이 현재

사용 가능한 디지탈 방식으로 속속

전한하고 있다. 이미 유럽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GSM 을 유럽표준으로

제정하여 설치에 들어갔으며,

아시아에서는 호주, 싱가포르,

중국이 GSM 을 채택하여 시설도입이

시작되었다. 홍콩의 경우 4 개 디지탈

이동전화사업자 가운데 3 개 업체가

GSM 을 그리고 나머지 1 개 업체가

USDC 경쟁체제에 돌입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 잠정적으로 USDC 를

결정한 상태에서 세게적 추이를

관망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일본이 JDC(Japan Digital

Cordless)를 계획하고 있다. 결국

세계는 약 3 가지 방식으로 분할될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다가오는

디지탈 시대에서도세계적으로

이동통신의 호환성을 갖기는 어려운

전망이다. 다만 GSM 의 경우 거의

모든 유럽을 비롯하여 많은 아시아

국가가 표준으로 채택하게 됨으로써

가장 높은 호환성을 이루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 국가간의 상호통신

교류에서의 이익이 두드러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5)CT-2

CT-2 기술은 영국텔리컴(BT)이

지난 80 년말 처음으로 상용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술적 명칭으로는 CT-2 ,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텔리포인트

서비스라 부르는 이 새로운

통신방식은 지난 80 년대초 획기적인

이동통신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셀룰러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일반무선전화(코드리스폰) 기술에

의존한 것으로 특정 지역의 일정한

범위내에서 전화를 걸 수 있지만 받을

수는 없는 발신전용 통신시스템이다.

이 CT-2 시스템은 통화 가능지역이

불과 2 백-3 백 m 에 불과하고

핸드오프기능 등도 없어 기존

이동통신시스템에 비해 성능이나

편리성면에서 우수하기 때문에

일반전화처럼 사용료가 싸고

지갑크기만한 20-30 만원대의

단말기를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외에도 역, 백화점 등

대규모시설에 설치하면 대단히

효율적이며, 매우 좁은 주파수

내에서도 많은 통화를 수용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착발신이 가능한 CT-3 기술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89 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CT-2 가 상용화된 이후

세계 각국에서 이의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CT-2 에 대해

선두주자인 영국은 89 년

상용서비스를 실시한 이후

영국무역산업성이(DTI)이 이의

전담사업자를 선정하는 등 이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꾀하고 있다. 한때

주파수의 혼선으로 서비스를

중단하는 사태까지 빚었으나 서로

다른 사업자간에도 호환성을 갖는

CAI 기술표준화를 제정하면서 이의

보급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프랑스텔레콤의 경우 지난해(

전자신문 1288 호 기준) 9월

스투라스부르지역에서 7 백개의

기지국과 1 만대의 단말기를 이용한

서비스를 실시하였다. 올해부터는

본격적인 상용서비스를 실시할

예정이다. 이탈리아 역시 로마와

밀라노를 중심으로 상용서비스에

나서고 있다. 나머지 유럽의 나라들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의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4.나쁜 해커, 좋은 해커

가.2세대 해커 - 홈브루(Home

Brew) 컴퓨터 클럽

1975 년 3월 5 일 밤,

실리콘밸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든 프렌치라는 한 해커의 주차장에

30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프렌치가 여기저기 붙여 놓은

포스터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프리랜서 기술자, 전자부품상점

주인, 전자공학자등이 자신의 집에

컴퓨터를 갖는 꿈을 꾸며 모여들었다.

이들은 당시 막 개발된 인텔의 8800

칩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알테어

8800 이라는 3 백 97 달러 짜리

개인용 컴퓨터를 화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것이 이후 해커의 꿈을

한층 더 발전시켰던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탄생이었다. 홈브루 (home

brew)라는 말은 원래 집에서 담근

술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해커들은

스스로 제작한 컴퓨터를 일컫는 말로

통했다. 제 2세대 해커들은 핸드온

명령을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지키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보급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제 2세대 해커는

캘리포니아를 중심무대로 활동한

하드웨어 해커들로 제 1세대의

해커들이 MIT 라는 상아탑에

매몰되고 컴퓨터라는 마술 자체에

침잠해 컴퓨터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임무를

게을리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 등을 중심으로

컴퓨터를 상아탑이나 거대기업의

전산실에서 해방시켜 컴퓨터의

마술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았다. 결국 그들은

알테어 8800 , 애플Ⅱ 와 같은

최초의 퍼스날 컴퓨터를 만들어 냈고,

사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애플 컴퓨터로 유명한 스테판

워즈니액 역시 위의 홈브루클럽에

참여했다. 워즈니액은 자신처럼

컴퓨터의 제작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30 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8800칩을 연구하고, 이어

신형 마이크로프로세서 초기모델인

6502 칩을 구입해 초보적인

컴퓨터의 심장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저 홈브루의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만들었던 이 컴퓨터는 클럽의

회원들에게는 모두 공개되었고,

이들과의 토론을 통해 많은 개선을

거쳤다. 이 때 아타리사에 근무하던

스티브 잡스는 이 회로기판의 대량

생산판매를 주장했다. 워즈니액은

한때 과수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잡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애플 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애플을 세운다.

주소는 한 우체통으로 정하고,

주차장을 작업실로, 자금을 위해

잡스는 폭스바겐을 팔았고,

워즈니악은 HP 의 계산기를

판매하면서 자금을 모았다.

호사가들이 보는 잡지에 6 백 66 달러

66센트라는 가격의 애플컴퓨터 를

냈다. 아울러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는

무료 혹은 최소의 비용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나.3세대 해커 - 해커들의 게임개발

80 년대, 즉 제 3세대의

게임해커들은 앞선 선배들과는 달리

교외에 위치한 자택 침실에서

안락하게 컴퓨터를 마스터한 디지탈

모험가들이다. 이들은 선배 해커들이

이룩해 낸 성과를 토대로 신비의 집 ,

공주와 마술사 등의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게임왕국 시에라온라인사 등

본격적인 해커사업체를 만들어간다.

1980 년 1월 켄 윌리엄스는 거의

전재산을 들여 애플Ⅱ 컴퓨터를

구입했다. 그는 애플Ⅱ는

전문가들만이 사용할 것라는

생각으로 근사한 프로그램 언어의

개발에 메달렸다. 그의 아내 로베르타

윌리엄스는 내성적이고 공상을

즐기는 여자였다. 그러던 어느날

윌리엄스는 돈 우드라는 해커가 만든

어드벤쳐게임을 집에 가지고 왔다. 이

프로그램은 로베르타를 붙잡았고

며칠동안 이 게임에만 매달려,

결국에는 이 모험게임을 완전히 풀 수

있었다. 로베르타는 애플에서

실행되는 모험게임을 더 구해

보았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는

스스로 새로운 모험게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신비의 집 (Mystery

House)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신비스러운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작성해가기 시작했다. 2 주일간

작성한 시나리오를 남편

윌리엄스에게 보였으나 그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로베르타는

끈질기게 윌리엄스에게 이를

설명하며, 이를 프로그램으로

개발하도록 했다. 마침 버사 라이터

(Versa Writer)라는 그래픽

입력장치가 개발되자 이를 구입하여

수십장의 그림을 게임의 안에 그려

넣었다. 그러나 이는 아주 볼품이

없었다. 윌리엄스는 결국 70 장의

그림을 한장의 디스크에 압축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림전체가

아닌 그림에 나타난 선의 위치를

표시하는 수법이었다. 한달의 작업

끝에 완성된 프로그램은 온라인

시스템 (On-line System)이라는

회사를 세워 본격적인 판매에 나섰고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다.위험한 해커

(1)워게임

그러나 앞에서 밝힌 좋은 의미의

해커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해커들도 있다. 1983 년 발표된 영화

워게임 (War Game)은 이러한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고등학생이

비디오 게임 프로그램을 훔치려다

잘못해 미국 방공 사령부의 컴퓨터에

침입, 하마터면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위기상황을 소재로 엮은 것이다.

이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많은

청소년들이 해커를 자처하고

프로그램 개발과 불법 액세스

(access) 방법을 개발하는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영화가 발표된

직후 미국 밀워키시에 사는 일단의

청소년들이 텔레네트라는

정보통신망에 몰래 들어가

로스알라모스 핵폭탄연구소, 은행,

캐나다의 한회사, 뉴욕 암연구센터

등의 시스템속을 한동안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침투사실을 감추기 위해 몇개의

데이타 파일을 지웠는데, 불행히도 6

천명의 암환자에 대한 임상기록이

수록된 뉴욕 암연구센터의 파일이 이

가운데 포함돼 있었다. 이 사건이

공개되자 미국 국민들은 이들이

핵폭탄 연구소의 컴퓨터에까지

마음대로 드나들어 자칫하면 워게임

이 실제 상황에서 재현될 뻔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1989 년

3월 서독 경찰은 하노버, 함부르크,

서베를린 등의 15 개 가옥을

수색하고 다섯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프랑스의 무기 및 전자제품 제조회사,

유럽공동 첨단물리학연구소,

유럽공동 우주항공연구소,

미항공우주국(NASA),

로스알라모스 핵폭탄연구소, 일본

고에너지물리학연구소 등 세계적인

첨단군사과학 관련 컴퓨터만 골라

침투했다. 수사결과 이들이 군사관련

정보를 훔쳐 소련 스파이들에게

현금과 마약을 받고 넘겨준 사실도

들어났다. 이외에도 각국의

정부기관, 첨단연구소, 은행 등의

대형시스템들이 해커들의 주요

공격목표가 돼 몸살을 앓고 있다.

해커들이 이처럼 대형 컴퓨터에

침투하는 동기는 호기심과 공명심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은

컴퓨터에 흠뻑 빠져, 기발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대형시스템의 패스워드(password)

를 알아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다. 만약 어떤 해커가 기발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특정

시스템의 암호를 푸는데 성공했다고

소문이 나면, 그는 해커들의 세게에서

일약 영웅으로 칭송된다.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결합에 의해 최근

각광받고 있는 정보통신망들도

해커들이 활약하는 주무대이다.

유명통신망들은 한결같이 이들의

출입을 막기위해 보안장치를

강화하고 있지만, 일단 패스워드가

한번 공개되면, 해커들의 침투를

막기가 용이하지 않다. 보안장치를

강화하면 할수록 합법적인

이용자들의 불편 또한 커지기

때문이다. 통신광들은 자기들끼리

사설전자게시판(BBS)을 열고

해킹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2)바이러스

노이먼이 연구한 자기증식

소프트웨어란 자기자신이 복제를

한없이 계속해 점점 증식해 가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실제로 컴퓨터

바이러스가 만들어진 것은 그로부터

20 년쯤 지난 1970 년의 일이다.

덩굴풀(creeper)이라고 명명된

초기의 컴퓨터 바이러스는 개념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덩굴풀은 불리턴

보드 네트워크(BBN)의 보브

토머스가 시범용 프로그램으로

작성했다. 덩굴풀은 미 국방부의

DARPA 통신망을 통해 확산되었고

침입한 시스템에 나는 나는

덩굴풀이다. 잡을테면 잡아봐라!는

메세지를 남겼다. 이것을 잡기위해

덩굴풀을 제거하는 잔디깎기가

개발되었다. 덩굴풀과 잔디깎기의

전쟁이야기는 서부 온타리오 대학의

A K 듀드니교수를 자극시켰다. 그는

서로 파괴하는 프로그램의 개념을

도입한 컴퓨터 게임 코어워즈를

만들었다. 그는 게임이 얼마나 위험한

폭탄인지 몰랐다. 그러나 그 게임의

진화는 컴퓨터 바이러스의 새로운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 83 년 가을,

미남부 캘리포니아대학의 전기공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청년 프레드 코엔은

암호이론수업을 받던 중 컴퓨터

바이러스의 개념을 떠올렸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전세계의 퍼스컴을

모두 집어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비밀유지관리

관련작업을 하고 있던 주변

사람들에게 경고했지만 그들은

컴퓨터 바이러스를 공상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일로 간주하고

미리 대책을 강구하는데 소홀했다.

그러나 공상은 뜻밖의 장소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파키스탄의 한

조그만 도시에서 퍼스컴가게를

경영하던 형제가 컴퓨터 바이러스

소동의 장본인. 형인 암샤드 파루크

알비(26)는 펀자브대학에서

물리학과를 졸업한 경력으로 동생과

함께 퍼스컴의 수리방법을 IBM PC

환경에서 독학으로 배워갔다. 그들은

그 지방의 기업용으로 특수

소프트웨어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다른 업자가 이것을 멋대로 도용하고

있는 것을 알고 분노했다. 86 년

암샤드는 부정한 사용자의 컴퓨터에

침입해 처리를 마비시키고 그들

형제에게 수리를 의뢰토록 할

목적으로 자기증식형 바이러스를

만들었다. 로터스 1-2-3 이나

워드스타의 복사판에도 바이러스를

주입했다. 그것을 산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친구들에게 디스킷을

빌려주었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늘 때마다 바이러스는 전염됐다.

이렇게 해서 세계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일명

정보사회의 에이즈 (AIDS)라 불리는

컴퓨터바이러스도 대개 10 대

해커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바이러스가 유전인자를 갖고,

스스로를 무한정 복제하는 것처럼

컴퓨터바이러스도 프로그램속에

자기자신을 복제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이라고 불리운다. 1980

년대 중반이후 발견되기 시작한

컴퓨터바이러스는 퍼스널컴퓨터의

급속한 확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에도

큰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최초의

바이러스프로그램은

브레인바이러스는, 파키스탄인

앰자드형제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앰자드는 유명 소프트웨어를

복제해주는 브레인컴퓨터라는 가게를

운영했는데, 외국인이 복사하러 오면

몰래 바이러스프로그램을 끼워

주었다. 외국인은 복제행위가

불법인줄 알면서도 복사해가는

것이므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애자드의 논리였다. 그러나

브레인바이러스는 최근 기승을

부리는 바이러스들에 비해 실제 큰

피해를 입지는 않는다. 화면을 켜면

(c)brain 이란 메시지가 나타나고

쓸데없는 프로그램을 증식시켜

기억공간을 차지하며, 컴퓨터속도를

떨어뜨리지만 데이타나 프로그램을

파괴하지는 않아 양성바이러스에

속한다. 최근에 발견된

악성바이러스들은 자신을 복제할

뿐만 아니라 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타나 프로그램을 파괴하거나

변형시킨다. 또 브레인바이러스와는

달리 저작자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해커들이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력부족으로

미완성의 프로그램이 짜여져 이

프로그램이 무한정 자기복제를

계속하거나, 장난으로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악성바이러스로 변형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사상 최대의

바이러스사건은 1988 년 11월 2 일

발생했다. 이날 저녁 미국의

주요대학과 국방연구기관에 설치된

인터네트(internet)망은 한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았다. 이

바이러스는 급속도로 번져나가 1

시간만에 미국 전역의 6 천여개

컴퓨터를 감염시켰고, 겁먹은

사용자들은 스스로 인터네트와의

연결을 끊어 버렸다. 다음날 버클리와

MIT 의 전문가들이 인터네트의

복구에 나섰고, 이 바이러스의 정체는

곧 드러났다. 코넬대학 전산학과

대학원생인 로버트 모리스(당시 26

세)가 이 바이러스의 개발자임이

밝혀졌다. 1990 년 미국의

지방법원은 이 사건의 피고인

모리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1988 년 3월 이스라엘의 한

대학에서 발견된 바이러스는 1988

년 5월 13 일에 이 대학의

전체파일을 한꺼번에 지워 버리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이날은

팔레스타인들이 추방돤 지 40 년이

되는 날이어서 팔레스타인 출신의

프로그래머가 이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에서도

왕립협회의 컴퓨터가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아 피해를 입었고, 1989 년

태국에서는 한 은행에서 바이러스가

고객에 대한 데이타의 일부를

손상시켜 큰 피해를 입혔다. 국내에도

해커들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여러번

발견되었다. 지난해 봄

한국데이타통신(데이컴)이 운영하는

한글전자게시함에 바이러스서울연합

이란 이름으로 주전산기의 일부

기능을 마비시키겠다는 경고가

실렸다. 이 경고문에는 데이컴의

서비스가 미흡하고 사서함

이용자들의 장난편지에 분노를 느껴

호스트컴퓨터의 데이타파일을

파괴하겠다 고 적혀 있었다. 다행히

이 경고는 실행되지 않고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데이컴은 컴퓨터 단말기의

비밀번호를 모두 바꾸고, 기술자들이

24 시간 대기하는 소동을 벌였다. 또

다른 증거는 근래에 발견된

바이러스프로그램 가운데 몇 종류는

국내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바이러스백신프로그램

개발자 안철수씨는 지난해 악명을

떨쳤던 LBC 바이러스는 개발자가

한국인일 것으로 추측한다. 전염성이

강하고 하드디스크를 몽땅 못쓰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이 바이러스는

프로그램중에 virse program

message Nih to Lbc 라는

메세지가 나오는데, 여기서 Nih 나

Lbc 가 한국인의 영문명 머릿글자로

짐작된다는 것이다. 또 바이러스가

외국에서 발견된 예가 없고

프로그램중 영문 철자가 가끔씩

틀린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1990 년 8월에 발견된 11월 30 일

바이러스는 제작자가 케텔에

공개사과문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제작자는 원래 5월 18 일(

광주민중항쟁기념일)에 518 이란

숫자가 깜빡이도록 할 계획이었는데

실수로 11월 30 일에 1130 이

깜빡이도록 되었다고 해명했다.

라.GNU

GNU(Gnu’s Not Unix)는

소프트웨어의 공개 개념을 표방하는

비제도권 단체 인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ree Software

Foundation)의 종합적인

프로젝트다. 지난 1985 년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일원인

도브박사가 GNU 를 논문에 발표하긴

했으나 기본적인 개념은 이보다 1 년

반전쯤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리더인 「리차드 스톨만」에 의해

정립됐다. GNU 는 컴퓨터

프로그램은 물론 모든 관련 정보를

돈으로 주고 구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법률정보나 의학상식들을

특별하게 값비싼 대가를 치루지

않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것 처럼 향후

21세기 정보화사회를 맞아

현대인들이 인류 공동의

지적재산으로서 컴퓨터 관련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GNU 의 기본 정신이

정립되던 80 년대 초반은 PC 시장의

급격한 성장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필두로 상업용

소프트웨어들이 줄을 잇던 시절이다.

당시 일부의 해커들은 소비자가 일단

물건을 구입하면 제조사는 어떤

권리나 제약도 가할 수 없는 일반적인

소비재와 달리 소프트웨어의 경우

구입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용상에

제한을 하는 소프트웨어회사들의

상업화에 염증을 느끼게 됐다. 따라서

이들은 누구나가 제약없이 자유롭게

소프트웨어를 배포하고 공유할 수

있는 필요성을 느끼고 자유

소프트웨어재단의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 설립의 취지에 따라 이

재단에서 개발된 소프트웨어는

자유롭게 수정을 가하는 것이

허용됐고 개인이나 기관에서 이를

수정해 성능을 향상하면 이를 더욱

권장하는 형태로 소프트웨어를

배포해 왔다. 업무에 사용하는

실행프로그램은 물론 소스코드까지

체계적으로 공개해왔기 때문에 일부

제품의 경우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상업용 소프트웨어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이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OS 에서

워드프로세서, 전자메일 프로그램,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버거,

유틸리티 등을 총망라하는 완벽한

소프트웨어 사용환경을 만드는 것.

이미 상당부분 이 계획이 진척돼

디버거와 OS 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현재 일부

매니아를 중심으로 사용이 급증하고

있는 리눅스의 경우도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부르짖고 있는

소프트웨어 사용에 대한 자유, 무료

배포의 정신에 따라 세계 각국의

프로그래머들이 개발해 배포하고

있는 GNU 소프트웨어의 하나이다.

5.멀티미디어와 주변기기

가.컴퓨터 그래픽의 제4 기

80 년대에 들어와 컴퓨터 그래픽은

반도체의 급속한 진보에 따라

대형화와 퍼스널화가 진행되어 OA

시대를 맞게 되었다. FA 시대,

로보틱 시대로 불리워질 만큼 컴퓨터

그래픽은 산업계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다. CRT 는 76 년대의

스트레지형 CRT 대신 선표시부터

풍부한 색채표시 능력을 갖추면서

면표시 기능까지 갖춘 래스터 스캔

CRT 가 개발되어 색면으로 입체물의

표면을 색칠할 수 있어 현실의 시각에

가까운 솔리드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즉 선표시로부터

면표시로 변화하여 옮겨가는 형태를

화상에 자유스러운 형태로 조작할 수

있다. IBM 의 연구원 만델브로트가

주장한 프렉탈 이론은 산의 표현,

해안선, 혹성의 표면 등 자연계의

복잡한 경관을 묘사하는 새로운 질감

묘사 기법을 가능하게 했다. 이와

같은 사실주의적 경향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며 컴퓨터 그래픽의

기술혁신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최근의 컴퓨터 애니메이션에 의한

컴퓨터 그래픽의 실용기술은 컴퓨터

애니메이션이나 예술적 표현법으로서

정착했고 근래에 없었던 예술

표현으로서의 새로운 시각을

개척했다. 70 년대에 이미

제록스사의 팔로알토 연구소에서

개발된 앨토 컴퓨터는 모든 대화를

마우스가 지원되는 그래픽 모드에서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앨토의

개념을 근간으로 애플사는 1980

년대 중반에 리자(Lisa)와

매킨토시를 잇따라 개발한다.

(1)홀로그램

홀로그램이란 그리스어의 Holos(

완전한)와 Grama(메세지)가

합쳐진 합성어로 3 차원상이

기록되어 재생될 때 입체적인 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록체를 말한다.

이는 47 년에 영국의 과학자 데니스

게이버(Dennis Gabor)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이를 생각해 낼

때까지는 3 차원상을 사진에

기록하여 재생시키는 일은

불가능했다. 처음 홀로그래피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특이한 성질

때문에 많은 놀라움이 표현되었다.

게이버 교수는 이미 과거에 마련되어

있었던 홀로그래피의 기본 부분들을

결합하였으나 그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시기가 일렀다.

왜냐하면 근대까지 간섭성을 지닌

단일 진동수의 빛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홀로그래피에 필요한 이

빛은 60 년에야 이런 성질을 가진

새로운 광원인 레이저(laser)가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47 년 당시

게이버 박사는 완전한 홀로그래피를

실증하지 못했고, 63 년 미국의

과학자 에미트 리드(Emmett

Leith)가 레이저를 홀로그래피에

이용하게 됨에 따라 빛을 발했다.

홀로그램은 물체에서 나오는 광파와

기준파의 간섭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간섭무늬를 기록한 것으로 이 사진

기록이 현상된 다음에 다시 레이저

광으로 조명하게 되면 원래의 모습이

상으로 재생하게 된다. 이 재생상은

대단히 생생하고 입체감을 보여주며

보는 사람의 여러 각도에 따라 각기

다른 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홀로그램의 패턴은 레이저로부터

나오는 단일 빔(beam)을 편광기로

나누어 한 쪽 파동은 사진 건판에

기록하고자 하는 물체에서 나ㅏ오게

하고 나누어진 다른 쪽 빔은 단순히

평면파(reference beam :

기준파)를 발생하도록 하면 이 두

파는 간섭을 일으키게 되고, 간섭을

일으킨 파는 사진 건판에 기록되어

간단한 홀로그램이 만들어지게 된다.

반대로 기록된 물체를 재생하고자 할

때에는 홀로그램을 원래의 기준파와

같은 파동으로 비추어 주면 물체는

실물과 똑같은 완전한 3 차원으로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은 놀라운

성질에 많은 관심이 쏠렸으나

실제로는 3 차원으로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은 놀라운 성질에 많은 관심이

쏠렸으나 실제로는 3 차원 영상에

대한 발전보다 상업, 군사목적에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이전까지

쓰인 사진 건판은 현상을 해야 하는

시간적 제약 때문에 실시간으로 쓸 수

있는 물질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PROM (Pockets Readout Optical Modulator), LCLV(Liquid Crystal Light Value) 등과 같은 우수한 물질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들 물질은 값이

싸기 때문에 일부 분야와 고신뢰도를

요하는 군사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2)영화와의 결합

그래픽 기술과 영화산업의 결합도

이루어진다. 컴퓨터를 영화에

이용하려던 최초의 사람은 존 휘트니

1세이다. 그는 1970 년대에 ?를

소재로한 몇몇 영화에 컴퓨터를

등장시켜 카메라를 제어하는데

이용한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진전된 영화는 1977 년에

발표된 루카스 감독의 별들의 전쟁

(Star Wars)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전체 3 시간의 영상중에서 컴퓨터가

그려낸 영상은 90 초에 불과했다.

이마저 ? 컴퓨터가 그린 영상을

덧칠을 한 것이었다. 어쨋든 별들의

전쟁의 흥행성공에 자극받은 ?

스튜디오 영화팀은 블랙홀 ?이라는

본격적인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이용한 영화를 만든다. 젊은

애니메이터인 리스?와 전직 변호사인

쿠슈너는 모스크바 올림픽용

만화영화인 ?올림픽 을 완성하기

위해 손을 댔다가 미국의 불참으로

NBC 와의 모든 계약이 취소된다.

낙심한 그들은 비디오 게임에서

힌트를 얻어 한 시나리오를 꾸몄다.

다소 엉둥한 내용의 이 영화는 1 백 5

분의 상영시간중 15 분이 컴퓨터로

제작되었는데, 자연적인 물체를

수식으로 표현하고 이를 다시 화면에

표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계산이

필요했고 그만큼의 투자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 자체의 문제로 인해

트론이라는 이름으로 개봉된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다. 휘트니의

아들 존 휘트니 2세는 아버지의

실패를 설욕이라도 하려는 듯 다시

컴퓨터 영화업에 뛰어든다. 이번에는

조금더 첨단인 슈퍼 컴퓨터 크레이

XMP 를 이용해서 트론보다 7 백배나

빠르고, 정교한 영상으로, 7

백억가지의 색을 절묘히 배합, 기존

애니메이터로는 불가능한 영상을

창조하였다. 이번에는 본전도 건지고

약간의 수입도 올렸다.

(3)자연과학과의 접목

그래픽이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분야는 의학분야이다. 현재 수준은

컴퓨터상에서 수술을 수행한후, 여러

그래픽 기술을 이용해서 걸음걸이를

시켜볼 수 있다. 이 때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이 과정을 걸음걸이가

완전해질때까지 다시 반복해볼 수

있는 것이다. CAD/CAM 기술이

인간의 신체에도 적용된 것이다. 실제

미국의 특수외과에서는 CAD/CAM

을 이용하여 주문받은 부품을

설계하여 그 모형을 보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래픽은

실험수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를

만들었다. 이제 생물학자나,

화학자가 컴퓨터를 통해 분자

모형이나 유전자 배열모형을

그려주는 것은 이제 필수적인 연구

수단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인간의

창조력을 돕고 있는데, 메스매틱스

라는 수학용 프로그램은 수식으로

표현되는 거의 모든 모형을 보여준다.

이 도구를 이용해 새로운 발견이 속속

이루어 지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서 이를 응용한

분야가 나오게 되었다. 예술과

컴퓨터기술, 통신기술이 결합한

인공현실 (Artifitial Reality),

가상현실 (Virtual Reality),

가상환경 (Virtual

Environment), 인공두뇌공간

(Cyber-space)이라 불리우는

세계이며, 이를 구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가상현실시스템 (Virtual

Reality System)이라한다.

인공현실이라는 단어는 이미 70 년대

중반 이분야의 개척자중의

한사람이며, 비디오플레이스

(Video place) 개념을 창안한

크루거(Krueger)에 의해

탄생했으며, 그후 VPL 리서치의

레이니에(Lanier) 사장이 가상현실

(VR)이라는 말로 다시 표현했다.

오늘날의 가상현실은 전자계산학,

특히 인공지능학(Artifitial

Intelligence), 입체 혹은 실체

안경학(Stereoscopy), 모의 실험

(Simulation) 등 여러 학문의

복합체이며, 이는 지난 4 반세기 동안

행해진 학계, 산업계, 연구소의

꾸준한 연구결과라 할 수 있을것이다.

그 예로 미국

라이트패터슨공군기지의 한

연구소에는 지난 20 년동안 Super

cockit Program 과 관련하여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HMD :

Head Mounted Display)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해 왔으며, 이곳에서

개발된 비행 시뮬레이터(Flight

Simulator)는 VR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MIT 에서는 1970 년

후반부터 가상탐험 (Virtual

Exploration)이라는

입체디스플레이 (Stereo-scopic

Display)에 관한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빠른 진전은

1980 년대 중반 미항공우주국

(NASA)의 에임즈 연구소에서 이

연구에 필요한 인력, 재력, 기술이

모임으로써 이루어 졌다.

미래예측자를 포함한 그 구성원을

보면 컴퓨터분야 연구원, 특히 인간과

컴퓨터 인터페이스(Human

Computer Interface)기술자,

인지과학자, 예술방면에 능통한

사람, 그리고 모험게임

프로그래머들이 처음으로 VR 의

시제품을 제작하였다. 실제로는

오토데스크사에서는

하이사이클이라는 고정자전거를 타고

머리에 HMD 를 쓰고 자전거의

페달을 빠르게 돌리면 자신이 둥둥

떠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전원위를 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상용화

되어 개인에게까지 보급되려면

2020 년경에 가서야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시장은 6 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VR 의 정의는 사람에

다라 약간씩 차이가 난다. 그 예를

보면, 컴퓨터를 이용하여 생성한

무한한 인공의 세계에서 인간이

현실감을 체험하는 것 , 사용자가

단지 컴퓨터 데이타로 존재하는

대상물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하는 것 , 대화식 3 차원 모델링

시뮬레이션을 위한 첨단 기술과

움직임 (Movement)을 감지할 수

있는 입력 메카니즘의 병합적인 응용

, 컴퓨터를 이용하여 생성한 3 차원

환경에서 사용자가 특수 안경, 데이타

장갑, 특수 옷(body suit),

비틀리는 공(torque ball)을

이용하여 대상을 조정하는 것 등으로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현실은 인간성이라든가, 윤리

도덕에 미칠 영향을 자금부터

연구하는 것이 밝은 미래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84 년말 VPL

리서치사를 설립한 이후 재론

래니어는 VR(Virtual Reality)

머신의 개념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에 온힘을 기울였고 VR 이라는

용어 자체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영에서는 서툴러 그가

가구어온 VPL 리서치사를 프랑스의

톰슨사에 넘기고 만다. 그리고 자신은

VPL 의 핵심간부와 함께 도메인

시뮬레이션사를 설립해 재기를 위해

연구에 몰두한다.

나.게임과 MSX

그런데 이러한 1980 년대 초 초기

게임 전성시대에 가세한 또 하나의

주역이 있었는데 MSX 기종이 바로

그것이었다. 애플 II 로 대표되는 애플

시리즈가 미국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MSX 기종은 일본을 기반으로 한

기종으로서 팩(Pack)이라는 게임

전용기에 일반화된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었다. 애플 시리즈의

게임들이 대부분 5.25 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통해 배포되고 있었던 것에

비해, MSX 기종의 게임들은 게임

팩이라는 롬(ROM)에 수록된 형태로

게임을 제공하였다. 롬은 플로피

디스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입출력 처리 속도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MSX 기종의

게임들은 거의 오락실 수준의 빠른

스크롤링과 사용자 응답 속도를 보일

수 있었다. 따라서 MSX 기종의

게임들은 이른바 슈팅(Shooting)

게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는데, 이는 애플 시리즈의

비교적 느린 아케이드 게임의 장르와

유사하면서도 보다 빠른 스피드

위주의 게임을 가리키는 차별화된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85 년

말경, MSX 라는 새롭고도 이상한

기종이 국내에 상륙했다. 모 기업의

과장 탓도 컸지만, 새로운 기종에

흥미를 느낀 일반 사용자들은 쉽게

하드웨어의 교체를 선택했고, 이때

이미 국산게임의 맥은 시들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MSX 는

무엇보다 게임을 하기 쉽게 되어 있는

셈틀이었으며, 롬팩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나중에 가면 거의

게임기화돼 버리게 된다. 게임을

만들어 하겠다는 소박한 생각은 이미

일반 사용자에게서 사라져 버리고,

오직 새롭고 신기한 게임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새로운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Apple 은

그나마 미국의 본의 아닌 지원사격에

힘입어, 새로운 Apple 용

상업게임들의 유입과 함께 여전히

사용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86 년, 울티마(Ultima)

시리즈 4탄이 등장해서 불법복제의

온상이던 세운상가가 북새통을 이룬

일이 있었으며, 이후로도 <마이트 앤

매직(Might & Magic)> 시리즈,

<바즈 테일(Bard's Tale)> 시리즈

등의 게임들이 속속 유입, 애플의

황금시대로 불리기까지 했다. 비디오

게임은 전대미문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82 년 미국에서의

매상고는 30억달러에 도달했다.

그러나 너무 빠른 성장 때문인지 85

년에는 이러한 상승이 갑자기 멈추기

시작했다. 아타리는 카트리지를

쓰레기 매립장에 묻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다.XT 의 출현과 게임

즉, 88 년 IBM-XT 가 개인용으로

나타나기까지 국내 개인용 셈틀 시장,

그 가운데서도 게임시장은 Apple,

MSX 의 양대산맥이 완전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이런 상태가

적어도 2~3 년은 가리라 믿고

있었으며, Apple과 MSX 의

계속적인 업그레이드는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듯이 보였다. 필자

역시 Apple II 를 구입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 87 년이었다.

그러나 88 년 XT 가 본격적으로

양산, 보급되면서부터 이러한 기대는

뭔가 불안하게 바뀌어가기

시작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XT 의 출현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1970 년대 후반에서 1980 년대

중반을 풍미한 초기 게임 전성시대는

16 비트 IBM PC 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리며 암흑기를 맞게 된다.

게임의 전성시대 구가와는 달리 한글

처리에서 난맥을 보여 사무용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던 이들 8 비트

기종들은 16 비트 PC/XT 가

등장하자 급속하게 쇠퇴해 버리고

말았다. 이와 함께 기존 애플 II 용

게임을 공급하던 업체들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부분 PC/XT 의 하드웨어

공급업체로 업종을 전환하자, 신규

게임의 공급마저 단절되어 8 비트

기종의 몰락과 함께 초기 게임 전성

시대는 급속하게 막을 내리고 만다.

1980 년대 중반부터 호황을 누린

IBM PC 호환기 시대는 과거 애플 II

시대와는 달리 사무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어 일시적이나마

컴퓨터 게임 암흑기를 가져왔다. 당시

대부분 흑백 허큘리스 카드(일명

천하장사 카드)를 장착하고 출하된

XT 기종들은 애플 II 나 MSX처럼

가정용 TV 에 연결할 수도 없었고,

과거 16컬러는 표시했던 8 비트

기종에도 못미치는 게임 환경이어서

8 비트에서 16 비트로 발전한 만큼

보다 나은 게임 환경을 기대했던 게임

매니아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통칭

XT 라 하면 메인메모리 640KB 를

가진 IBM 호환 개인용 셈틀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

비트군 Apple 의 최고 128KB 와는

비교도 안되는 메모리를 가진 이 XT

는 대용량에 10MHz 라는 초고속

처리속도 때문에 89 년이 되기까지도

업무용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컬러가

거의 보급이 안된 상황이라 Apple 의

16컬러는 흉내도 못냈으며, Apple

의 뛰어난 사운드 기능에 비하면 PC

스피커는 가히 소음이라 칭할 만했다.

하지만 일단 게임 제작사들이 XT 를

게임이 가능한 셈틀로 인식을

전환하자, 그 발전속도는 실로

엄청나게 빨라지게 된다. 필자가 처음

XT 를 구입한 것은 89 년

여름이었다. 이미 이 당시 IBM-XT

용 게임은 어느 정도 국내에

유입되었으며, 유통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뭣하지만 복사전문점을 통해

소규모로 서서히 퍼져 나가던

단계였다. 게임들은 아직은 Apple

게임을 그대로 컨버전한 것이

대부분이다.

*게임의 장르개념 도입

이 게임은 Apple 공전의

히트작으로, 롤플레잉 게임(RPG)

이라는 개념을 국내 게임가들에게

심어 준 작품이다. 생각해 보면

게임의 [장르]라는 개념이 성립된

것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였다. 게임의

장르는 시간이 지날수록 세분되고,

개인에 따라서는 수십 가지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어드벤처(ADV),

롤플레잉(RPG), 아케이드(ARC),

시뮬레이션(SIM)의 네 분야의

기본구분이 이때 겨우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장르에 대해선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아무튼 Apple

게임 컨버전이란 바람은 적어도 90

년 초반까지 계속 불어, 사용자는

Apple 에 있는 모든 게임을 훨씬

빠른 속도로 다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언급했던

울티마시리즈와 각종 롤플레잉게임

시리즈, 그리고 시에라(Sierra)

사의 게임을 주축으로 하는 어드벤처

게임, 마이크로프로즈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대표격인

시뮬레이션 게임은 이미 Apple 에서

상당한 인기를 올린 구종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종처럼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그 원인은 몇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어느

XT 에서나 잘 돌아가는 운영체제인

MS-DOS 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일단

각 기종 간의 비호환성이 사라진

만큼, 사용자는 어느 회사의 어느

셈틀이라도 같은 소프트웨어를 돌릴

수 있다는 데 상당한 구매의욕을

가지게 되어 그 전까지의 소극적인

관망자세를 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입에서 입으로 퍼진 게임

그래도 국내에서는 여전히 게임, 즉

소프트웨어는 거의 대부분

불법복제에 의존해서 퍼지고 있었다.

더구나 한국경제신문의 케텔

(KETEL)이라는 통신망이 가동되기

전까지 게임을 하고 싶었던 사람은

스스로 나 소문을 통해 카피점의

위치를 알아내 복사료를 마련, 직접

찾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국내의

8 비트 셈틀을 한꺼번에

무용지물화시킨 정부의 16 비트

교육용 셈틀 도입 정책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전히 제작사나

기업들이 소프트웨어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옳다. 이

당시 퍼진 게임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자. 초기에는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이 640KB 라는 메모리

공간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얄팍한 상혼의 대기업이 주메모리

256KB 나 512KB 만을 내놓아도 별

저항없이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때의 게임은 640KB 의

공간을 가지고도 넉넉하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Apple 에서는

고급사양이었던 2FDD 는 XT 에선

기본이었으므로 게임 역시 메모리를

최적으로 사용(요즘처럼 낭비를 하지

않는)하기 위해 2FDD 를 활용하는

방법을 많이 택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게임인 <Outrun>이나 Apple 의

롤플레잉 게임들, 간단한 아케이드

게임 등은 도스를 띄운 상태에서의

512KB 에서도 무리없이 작동했다.

때문에 누구나 XT 라는

하드웨어보다는 좀더 새롭고 구하기

어려운 소프트웨어를 찾기 시작했고

또 소중히 생각했다. 이때 가장 널리

퍼지고 또 지금까지도 애용받고 있을

만큼 커다란 반향을 울린 것이 <

테트리스>였는데, 누구나 셈틀을

사면 이 게임이 무료로 따라 붙었다.

전국 어느 셈틀에서나(심지어

관공서에서도) <테트리스>는

돌아갔으며, 사용자들은 싫증내는

법도 없이 이 게임에 열광했던

것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기 위해 만들어 유포시켰다는

그럴 듯한 소문이 사실로 들릴 만큼

이 게임은 사무처리를 지연시켰으며,

수업에 빠지게 하고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단일 게임으로 이만한

반향을 불러온 예는 아마도 <

테트리스>가 전무후무일 것이다.

또한 시에라(Sierra)의 어드벤처

게임 역시 XT 를 게임기로 만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

킹즈퀘스트(King's Quest)>

시리즈를 필두로 하는 시에라 사의

게임은 우선 무엇보다 사용자가

이야기를 찾아가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해 주었으며, 화면 속의

주인공이 사용자가 된 듯한 느낌을

주어 게임 애호가들로 하여금 하루

온종일을 소비하고서도 지루함을

못느끼게 하는 신기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인기를 끌었던 것이

<Leisure Suit Larry> 시리즈

첫작품으로서,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비록 미국일이지만) 스크린 안에

재현, 유쾌하고 별로 낯설지 않은

일들을 약간은 성인취향적으로

풀어나가게 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들

시에라의 작품은 CGA 카드를

보유하고 있다면 16컬러를 보여

주었기 때문에, 한때 세운상가에서는

이 게임을 하기 위해 CGA 카드를

구하려는 사용자들의 발길로 매우

부산했던 적도 있다. 한편, 다소 장난

같은 어드벤처와는 달리 되도록

사실에 가깝게 하려고 노력한

시뮬레이션 게임인 <F-16>이나

<F-19>의 등장은 가상현실의

초보적 단계를 개인용 셈틀에서

실현시켜 준 명작이었다. 이 게임들이

워낙 인기있었기 때문에 원래

복사방지장치(프로텍터)가 있던

것들을 국내 모 사용자가 풀어,

대량으로 복제되는 일도 생겨났다.

이렇게 많은 용량의 램은 게임의

풍요를 한동안 보장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로 성공한 <

인디아나존스(Indiana Jones)

III>와 아케이드 게임 <페르시아

왕자>가 상상을 초월할 만한 인기를

누리게 되면서 사용자들은 점차 XT

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라.그래픽 카드

그래픽카드는 PC 의 필수 부품이자

주변기기로 PC 가 등장함과 동시에

개발되었다. 그래픽카드의 원조는

MDA(Monocrome Display Adapter)카드. 세계 최초의 16

비트 IBM PC 인 "PC 5150"에

탑재돼 사용됨으로써 그래픽카드의

신기원을 이뤄냈다. 가로 80 자와

세로 25열에 흑백 문자를 표현할 수

있었던 이 제품은 당시엔 모니터에

글자를 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사용자들의 큰 감탄을 자아냈다.

MDA 카드는 그래픽카드라기보다는

비디오카드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래픽 처리가 불가능하고 다양한

색상을 표현할 수 없는 단색용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MDA 에 이어

80 년초 컬러 그래픽을 지원하는

그래픽카드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CGA(Color Graphic Adapter)카드이다. CGA 는 최대 16 가지의

색상을 표현할 수 있지만 한번에

표현할 수 있는 색상은 4 가지로

한정된다. 또 해상도가 낮아 주로

게임기화면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82 년)에 컬러를

표현할 수 없지만 고해상도의 장점을

무기로 장수를 누린

HGA(Hercules Graphic Adapter)카드가 발표된다.

일반인들에게 허큘리스카드로 더

많이 알려진 HGA 카드는 단색이지만

명암처리 등 각 분야에서 해상능력이

뛰어나 오랫동안 표준 그래픽카드로

사용돼 왔다. 2 년후인 84 년에

이르러 PC 사용자들은 본격적인

컬러그래픽의 세계를 맛보게된다.

IBM 사가 AT(286 PC)를

발표하면서 EGA 카드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IBM 은 당시 AT

발표와 함께 EGA 의 하드웨어적인

스펙을 공개했다. 이로써 그래픽카드

제조업체들이 너도 나도 EGA

호환카드를 만들기 시작, 일반에

널리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

사용자들에게도 익숙한 "EGA

WONDER"는 그때부터 급부상하기

시작한 제품 가운데 하나이다. EGA

카드는 16색을 지원하는 표준모드

이외에도 최대 8 백×6 백 해상도를

지원한 것이 특징이다. CGA 카드는

높은 해상도와 색상 표현기능이

보강돼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한국을 포함한

동양권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한글과 한자를 표현하기에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87 년에 와서 컬러 그래픽카드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CGA 가 컬러그래픽의 문을 열자마자

곧이어 컬러그래픽의 시대를

개화시킨 제품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IBM 이 PS/2 라는 PC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컬러그래픽 표현을

자유자재로 할 수있는 VGA(Video

Graphic Array)카드가 나왔다.

IBM 의 스펙발표 후 곧바로 EGA

카드 호환업체들이 VGA 카드

개발에열을 올리기시작, 수개월만에

VGA 카드 호환제품들이 속속

출시되었다.  초창기 VGA 의

표준사양은 6 백 40×4 백 80

해상도에 16색을 표현했고 최대 26

만가지의 색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최근에는 화면에 계단식 형상을

메워주는 CEG 기법 등 새로운

기술발전으로 1 천 6 백×1 천 2 백

80 의 해상도에 1 천 6 백 70 만개의

모든 자연색상을 모두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색상수도 2 백 56 가지로 확장된다.

뛰어난 성능의 VGA 카드는

그래픽카드와 동일어로 통용될 만큼

현재 거의 모든 PC 에 채택되고 있는

제품이 되었다. IBM 은 87 년 VGA

카드를 발표하면서 그래픽

처리기능을 보강한 제품을 별도로

선보이기도 했다. IBM 은 PS/2 의

선택사양으로 그래픽카드인 8514/A

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1 천 24×7 백

68 의 해상도에서 2 백 56색을

표현하는 이 카드는 자체

그래픽처리전용 보조 프로세서를

내장해 CPU 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후인 80 년말 IBM 이 PS/2 의

새로운 모델을 발표함과 동시에 나와

주목을 끈그래픽카드는

XGA(eXtended Graphic Array)카드. 8514/A 의 기능을

보완함으로써 빠른 그래픽처리

기능을 보여주었다. 8514/A 와

XGA 카드는 현재 IBM 사의

표준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주로

PS/2 기종에 채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래픽카드의

특성은 각 제품이 발표된 당시의

스펙을 기준으로 삼았다. 현재에는

일반 PC 사용자들에게 널리 보급된

그래픽카드는 VGA 카드이며

초기발표된 사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그래픽칩업체의

부단한 기술발전에 힘입은 결과이다.

최근에 판매되고 있는 그래픽카드는

거의 모두가 1 천 2 백 80×1 천 2

백의 고해상도를 지원하고 모든

자연색을 구현하고 있다.

그래픽 처리속도도 일부 대기업 PC

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64 비트

그래픽가속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래픽카드의 선택기준이 되는

해상도, 그래픽 처리속도, 색상표현

등이 모든 제품에 최상의 조건이

갖춰지면서 점점 그 가치기준의

역할이 퇴색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프트웨어 MPEG 나 3D 그래픽 등

별도의 멀티미디어 기능의 탑재

여부가 그래픽카드의 새로운

선택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부

제품에 소프트웨어 MPEG 기능을

내장한 제품이 등장하는가 하면 3

차원 입체영상이 가능한 3D 그래픽

칩을 탑재한 제품도 나오고 있다.

VGA 카드의 또 다른 발전방향은

다른 I/O 카드의 기능통합에서도

엿볼 수 있다. TV 수신.

오버레이.MPEG.3D 등 기존의 I/O

카드의 기능을 통합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합보드는 안정성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으나 칩과 회로

설계기술 발전에 힘입어 미래에는

그래픽카드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마.레이저 프린터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발달과 복사기

기술의 결합으로 레이져 프린터가

개발되었다. 글자체는 보통의

활판인쇄의 글씨만큼이나 뛰어나다.

1980 년대초 미국의 휴렛팩커드는

값싼 레이저 프린터 시장의 잠재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84 년

레이져젯 이라는 이름의

레이저프린터를 세상에 내놓았다.

1991 년 휴렛팩커드의 레이저

프린터 시장 점유율은 60%에

달했다. 이는 그 동안 일본에 계속

몰리고 있는 미국의 컴퓨터산업의

반격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휴랫팩커드의 레이저프린터의

실제적인 제조자는 일본의 캐논이나

다름이 없었다. 레이져 프린터의

핵심부품인 엔진의 대부분은 일제

캐논제품이었기 때문이다.

6.SW

< PC 시대 개막, 다양한

애플리케이션 선뵈... >

80 년대는 PC 와 웍스테이션

시대라고 칭할 수 있다.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 발달로 70

년대의 메인프레임과 같이 강력한

데크스탑 컴퓨터를 구축함이

가능하게 되었고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집중적이고 대규모 컴퓨터

장치로 데이터를 가져오기보다는 그

데이터를 필요로 하는 장소에 분산해

처리되었다. 80 년 설립된 노벨은

PC 용 네트웍 시스팀으로 네트웨어를

공급하면서 시장주도권을 쥐는

시점도 바로 이때부터이다. 81 년 빌

게이츠와 몇몇 프로그래머에 의해 PC

용 OS 제작이 완성, [MS-

DOS(IBM 은 PC-DOS 로 명명)]

라는 작품을 만들어 낸다. 82 년

로터스 디벨롭먼트를 설립한

케이퍼는 이듬해에 IBM PC 용

스프레드시트 제품인 로터스 1-2-3

을 선보인다. 84 년 애플이

워드프로세싱, 데이터베이스 관리,

스프레드시트 계산 모듈 내재한 통합

소프트 패키지인 애플웍스를

내놓았다. 같은 해 dBASE 제작사인

애시톤테이트는 로터스가 로터스 1-

2-3 에 워드프로세서와 통신의

기능을 더해 선보인 심포니에 대적,

통합 소프트웨어인 프레임워크을

내놓고, 89 년에는 최초의

소프트웨어 패키지인 콘트롤을

공급하기도 했다.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워드로프세서

데이터베이스 패키지, 그래픽 패키지

등과 같은 응용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은 사업가들에게 깔끔하고

전문적인 예산과 제안 및 판매물의

표시를 경제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개인용 컴퓨터의 변혁을 이끄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개인용컴퓨터의

소유와 접근이 늘어나게 됐다.

80 년대 중반부터 IBM PC

호환기종이 기업의 필수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으며, 이때의 표준

운영체제은 도스였다. OS/2 가

선보인 시기도 이때 였으나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리케이션

시장을 성숙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PC 이 본격적 확대와 더불어 PC

네트워킹에 대한 시장에 대한 요구가

늘게 되었다. PC 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고립된 작업 환경에서 타

PC 그룹이나 웍스테이션에서

메인프레임까지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킹이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또한 중요하게 대두된 것은 컴퓨터

네트웍에서 컴퓨터간의 정보전달로서

전자우편, 파일전송, 원격

데이터베이스 액세스 응용

프로그램들이 확산되었다. 이와 함께

클라이언트/서버 모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86 년 AT&T 에서 시스팀 V

R3 을 발표하면서 유닉스 원시코드

사용권에 관한 정책의 변화가 생기게

된다. 즉 AT&T 표준에 의거한

개발에 국한된 사용권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IBM*DEC*HP 등에서는

독자적 유닉스 개발에 나서게 된

것이다. 87 년 노벨은 산타클라라

시스템즈, 소프트크래프트 및 CXI 를

합병함으로 써, 네트워킹 하드웨어

가격 인하는 물론 데이터베이스*

개발툴*IBM 기종 연결 부분 등에서

전문성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88 년

IBM*DEC*HP 를 중심으로 설립된

OSF 와 AT&T*썬 등을 중추로 한

UI 는 각각 AIX3.0과 시스팀 V 4R

로 방향을 달리하게 된다.

가.PC 용 OS

현재 세계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제품의

시초는 1981 년 7월 1 에 발표된

MS-DOS 1.0 이다. 이 버전은 마침

IBM PC 가 처음발표되던 1981 년

가을에 IBM 에 의해 주요 운영체제로

채택되었으며, IBM 은 이를 IBM PC

-DOS 1.0 이라 명명하였다. MS-

DOS 버전 1.0 은 그때까지의 주요

개인용 컴퓨터였던 CP/M-80과

유사성이 있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보강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디스크

디렉토리 구조화일의 크기, 화일의

작성 날짜등에 관한 정보를

포함시켰다. 또 우수한 디스크 공간

할당, 경영기법과 운영체제기능

호출을 포함, 확장시켰다. 1982 년

6월에는 MS-DOS 버전 1.25 를

발표하였다. 이 버전에서는 1.0 의

버그를 수정하고, 양면 디스크의

기능을 보강된 기능이 들어 있었는데,

IBM 이외의 다른 OEM 들에게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IBM 가 MS-

DOS 를 OS 로 채택한 데에는 그

우수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즉 8 비트

PC 에서 CP/M 이라는 운영체계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디지탈

리서치사도 16 비트 운영체계인

CP/M-86 을 개발하고 있었으나,

IBM 은 이를 알지 못하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계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디지탈리서치는

마이크로소프트가 프로그래밍언어

분야에만 욕심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를

나았다. 한편 MS-DOS 역시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츠사에서는 QDOS

라는 16 비트 운영체계를 만들었다.

그리 우수한 성능의 OS 는 아니어서

마이크로소프트에서도 만들 수

있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는

시애틀컴퓨터프로덕츠사로부터

QDOS 의 사용권을 당시로는 매우 큰

돈인 5 만달러에 사들였다. 그런데 이

QDOS 는 CP/M 의 모방품이라는

시비가 휠씬 후에 일게 된다.

매킨지사의 경영 자문들과 케이퍼는

대리점 확보 경쟁을 피하기 위해

대기업에 직판하는 방식을 택했다. 는

컴퓨터 전문 잡지대신 타임지나

뉴스위크같은 일반잡지를 택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방법을 택했다.

그들은 1983 년 1월 1 달동안 1

백만달러를 에 투입하는 등 전력을

투구했고, 성과는 기대를 지나치게

초과했다. 목표 4 백만달러를 1 천 7

백 퍼센트 초과달성한 것이다. 이는

매킨지의 성공뿐 아니라 IBM PC 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IBM

PC 는 특별한 응용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이다. 점차 PC 에서

하드디스크를 사용하게 되면서

대용량 플로피디스크와 하드디스크를

지원하는 버전 2.0 이 1983 년 3

월에 공표됐다. 이 버전은

개인용컴퓨터의 통상적인

운영체제와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사용자가 새로운 장치들을 임의로

설치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한

구동장치의 지원등 그 기능이 훨씬

다양해졌다. 보통 MS-DOS 2.XX

이라함은, 2.0 의 버그를 수정하고

기능향상 및 다국언어를 지원할 수

있도록 개발된 MS-DOS 버전 2.11

을 일컫는다. 1983 년 가을 탠디사는

IBM PC 의 경쟁 상품으로 모델

2000 을 내놓았는데 IBM PC 보다

처리속도가 두배나 빨랐으며, 저장

용량도 컸고 그래픽의 해상도 역시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IBM 의

기존 8088 PC 에서도 작동하는

보다 강력한 인텔 80186 프로세서를

채용하고 있었다. 빌 게이츠는 모델

2000 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소프트웨어 윈도우즈 를 탑재할 수

있는 유일한 퍼스날 컴퓨터라는 사실

때문에 이 제품에 대단한 기대를

걸었다. 윈도우즈는 제록스사의

알토에 사용되었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 graphic user

inteface)를 사용자 퍼스널

컴퓨터에 적용한 제품이었다. 그런데

윈도우즈는 8088 을 채용한

컴퓨터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윈도우즈의 성공을 위해서는 모델

2000과 같은 성능이 우수한

컴퓨터가 필요했다. 탠디와 거래하고

있던 모델 2000 의 성공을

예측했으며, 공개석상에서 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패했다. 이유는 IBM PC 와

호환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탠디사는 이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큰

이익을 얻게 되었다. 모델 2000 은

라디오색의 마키팅 실패에도 책임이

있었고, 라디오 색의 컴퓨터사업

책임자였던 존 셜리는 자신의 자리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1983 년

셜리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사장으로

영입되었다. 이어 MS-DOS 버전

3.0 은 1984 년 8월에 IBM 이

80286CPU 를 채택한 IBM AT 를

공표함과 동시에 발표되었으며, 버전

3.1, 버전 3.2 가 계속 발표되었다.

현재 일반적으로 버전 3.XX

이라함은 버전 3.2 를 가르킨다. 이는

3.5 인치 플로피디스크드라이버를

지원하고, 다국언어지원기능의

지원기능과 하드디스크 최적지원기능

등을 보강한 것이다. 1987 년 IBM

PS/2 가 발표되면서 MS-DOS 3.3

이 함께 소개돼 PS/2 시리즈를

지원하며 1.4MB플로피디스크를

지원하게 됐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1988 년 8월에 MS-DOS 버전 4.0

을 발표했다. 이 버전은 도스쉘, 자동

설치프로그램, 확장메모리

지원기능이 추가되었고, 아울러

다국언어 지원, 32MB 이상의

화일크기지원이 보강되었다. 이중

특징적인 기능은 도스쉘 기능으로

OS/2 의 프리젠테이션 매니저,

윈도우즈와 같은 그래픽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나.DR-DOS

디지탈리서치사는 최초 OS 버전인

CP/M 80 으로 8 비트 PC 시장을

석권하였다. 이 CP/M 80 은 인텔

8080, 8085, Z-80 용의 싱글

유저, 싱글데스크 도스로서 후일

CP/M 86, MP/M, 컨커런트 CP/M

으로 발전하였고, 또한 MS-DOS

에도 많은 영향을 준 PC OS 이다.

16 비트 PC 의 등장과 더불어

디지탈리서치사도 16 비트용의

운영체제로 CP/M 86 을

개발했으나, 그 발표시기가 늦어져,

보다 앞서 발표되고 IBM 의 PC OS

로 채택된 MS-DOS 에 그 주도권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싱글유저

싱글태스크 운영체제시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대부분의 시장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던

디지탈리서치사는 1988 년 5월

DR-DOS 버전 3.3 을 발표하였다.

89 년 1월에는 버전 3.4 를 89 년 6

월에는 버전 3.41 을 발표한다. 버전

3.4 는 MS-DOS 3.3, MS-DOS

4.0과 호환성을 가지며 MS-DOS

에서 지원되지 않는 여러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DR-DOS 3.4

는 롬에서부터 DR-DOS 를 실행

시킬수 있으 DR -DOS 가 자동으로

실행되며, 또 많은 양의 메모리를

기본방식보다 더 쓸수 있다. MS-

DOS 3.3 에서는 하드디스크의

분할이 32MB까지만 지원되었는데,

DR-DOS 3.4 는 대용량 하드디스크

지원이 가능해 최대 512MB까지

한개 또는 그 이상의 크기로 분할

지정이 가능하다. 특히 도움말기능은

도스 유틸리티로서 제공되는 모든

실행화일의 사용법에 대한 도움말을

제공해 줌으로써 초보자들도 설명서

없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우수한 기술력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디지탈리서치사는 MS-DOS

5.0 에 앞서 DR-DOS 5.0 을 발표,

주목을 끌었다. 1990 년 여름에

발표된 이 버전은 기존의 도스들과

호환됨은 물론 메모리 맥스기능과

배터리 맥스 기능을 갖고 있어 랩탑,

노트북과 같은 소형컴퓨터의

운영체제로 주목받고 있다. DR-

DOS 의 메모리 맥스기능은 커넬부분

및 COMMAND.COM 부분을

UPPER 메모리 또는 하이 메모리에

로드 시킬 수 있어 랩탑컴퓨터 등

배터리전원을 사용하는 소형컴퓨터의

배터리 수명을 연장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화일링크기능과 뷰맥스기능도

돋보인다. 버전 5.0 은 뷰맥스(View

Max)라는 윈도우 기능을 제공,

마우스를 사용하여 모든 명령어를

실행시킬 수 있게 하였다.

다.PC 용 DB

dBaseⅢPLUS 는 dBaseⅢ 를

개선한 프로그램이다. dBaseⅢ 는

마이크로 컴퓨터에서 처음으로

인기를 얻은 데이타베이스 메니저인

dBaseⅡ 의 개선된 프로그램이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이미

오래전에 데이타베이스가

출현하였다. 캘리포니아의

파사데나에 있는 제트추진 연구소

(JPL)의 과학자들은 JPL 의

인공위성으로부터 수신되는 위치를

추적하기 위하여 메인 프레임

컴퓨터에서 데이타베이스

관리프로그램을 사용하였다.

마이크로 컴퓨터가 도입된 초기에

메인 프레임 데이타베이스 메니저의

능력과 특징에 감명을 받은 JPL 의

소프트웨어 디자이너인 웨인

래트리프는 JPL 시스템을 모델로

하여 마이크로 컴퓨터의

데이타베이스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데이타베이스 시스템을

완성한 후 래트리프는 자신의

데이타베이스 메니저를 시장에

내놓기로 결정하고 벌칸(Vulcan)

이라고 명명하였다. 벌칸은 dBaseⅡ

와 dBaseⅢPLUS 에 있는 많은

효과적인 정렬(sort)이나 인덱싱

(indexing) 명령들을 사용할 수

없는 제한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벌칸은 강력한 데이타베이스

언어였다. 조그만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지만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벌칸을 사용해보고 벌칸의 능력에

매혹된 소프트웨어 판매업자인 죠지

테이트는 이 프로그램을 판매하려고

래트리프를 만날만큼 감동을 받았다.

세일즈맨보다는 프로그래머로서 더욱

편안함을 느끼는 래트리프는 벌칸의

판매권을 테이트에게 넘겼으며

테이트는 프로그램의 판매로 생기는

로얄티를 래트리프에게 주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테이트는 벌칸

프로그램의 판매량을 높이기 위해

많은 판매 전략을 사용했다. dBaseⅠ

이라는 프로그램이 없었으나

BaseⅡ 라고 이름을 바꿨으며

dBaseⅡ 는 새로운 개선된

프로그램이라고 선전했다. 컴퓨터

쇼에서는 전시장 상공에 양측면에

dBaseⅡ 라고 쓰여진 비행선을

띄웠다. 돋보이는 방법으로 경쟁사의

제품인 빌지 펌프와 비교되자

빌지펌프의 제조업자들과

경쟁업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일반인들은 를 눈여겨

보았고 제품을 알게 되었다. 테이트는

할 래쉬리와 합작으로 dBaseⅡ 를

판매하기 위한 Ashton-Tate 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Ashton 이란

이름은 없었지만 테이트는 그 이름이

호칭하기 좋게 느꼈다. 수년간에 걸쳐

dBaseⅡ 가 성공하자 경쟁사들은

dBaseⅡ 가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개선된 특징을 가진 제품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 대응책으로 래트리프와

Ashton-Tate 사의 디자이너 팀은

새로운 프로그램인 dBaseⅢ 를

만들기 위해 2 년을 소비했다.

dBaseⅡ 와는 달리 dBaseⅢ 는 16

비트 마이크로 컴퓨터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디자인 되었고 C

언어로 쓰여졌다. 개인용 컴퓨터의

통신망에 대한 욕망이 커지고

사용자가 친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 때문에

dBaseⅢPLUS 가 개발되었다.

dBaseⅢPLUS 는 dBaseⅡ 와

dBaseⅢ 보다 훨씬 뛰어난 개선점을

제공해 준다. dBaseⅡ 가 유명했지만

문제점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dBaseⅡ 는 주어진 시간에 처리할 수

있는 자료의 양에 제한을 받았으며

레코드당 최대 1,000 자까지 처리할

수 있었지만 레코드당 32필드

이상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한

데이타베이스에서 65,535 레코드를

넘을 수 없었으며 dBaseⅡ 는 오직

한 필드만을 정렬(sort)할 수

있었다. 한번에 오직 2 개의 화일을

열 수 있는 dBaseⅡ 의 제한 때문에

많은 응용플그램에서 프로그래머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dBaseⅢPLUS

로써 Ashton-Tate 는 dBaseⅡ 에

있는 많은 애로점을 없앴다.

dBaseⅢPLUS 는 10억개의

레코드와 레코드당 128 개의

필드까지 처리할 수 있다. 한

레코드에는 4,000 자까지 수록할 수

있다. 동시에 여러 필드로 정렬할 수

있으며 또한 10 개 정도의

데이타베이스 화일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큰 능력 때문에 실제보다는

더욱 더 깊은 감명을 받은지도

모르지만 데이타베이스 화일의 각

128 개 필드에서 10억의 레코드를

저장하고 있다면, 한번

데이타베이스를 읽는데 PC 로써는

한달 이상이 소요되며 3 천만장의

플로피디스크가 필요하게 된다.

dBaseⅡ 로 정렬하는데 50 분 정도

걸리는 화일을 dBaseⅢPLUS 로

정렬한다면 60 초 정도 소요되므로

dBaseⅢPLUS 가 매우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dBaseⅡ 의

사용자라면 dBaseⅡ 의 화일과

데이타를 변형시켜 dBaseⅢPLUS

에 사용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BaseⅢPLUS 가 갖고 있다는 것에

반가움을 느낄 것이다. 근거리 통신망

(LAN : local area network) 상태에서 dBaseⅢPLUS 를 작동할

때에는 여러 사용자들이 프로그램을

이요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프로그램의 보호 특징은 IBM PC 와

PC 호환 기종에서 대부분의 인기있는

LAN 에서 사용될 수가 있다.

데이타베이스의 응용프로그램인

dBaseⅢPLUS 의 능력을 크게

벗어난다면 메임프레임 컴퓨터의

세일즈맨과 이야기해야 할 정도로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1 년 애시턴 테이트는

볼랜드 인터내이셔날에 인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라.유니코드

지금까지 미국에서 개발된

소프트웨어가 한국이나 일본에서

사용되려면 6-12 개월 정도의 시간이

경과해야 했다. 현지국어로

메세지등을 변환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메세지를

소프트웨어에서 분리하고 2 바이트

문자코드를 취급할 수 있는 국제판

소프트웨어의 등장이 예상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벌써 미국산

소프트웨어의 무차별 유입을

우려하고 있다. 현재 OS 를 중심으로

국제판 소프트웨어 작업을 벌이고

있는 기업은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노벨 등의 소프트웨어

선진기업들이다.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즈 NT 를

처음부터 여러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애플, IBM 양사가

공동개발중인 객체지향형 OS 인

핑크 와 노벨사의 네트워크 OS 인

네트웨어 3.2 도 국제화를 겨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같은 국제판

OS 의 등장은 당연히 다국어에

대응한 어플리케이션SW 의 개발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 이는

여러국가에서 쓸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기 위한 기본

기능을 국제판 OS 가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 결과 앞으로 미국산

어플리케이션의 한국이나 일본의

유입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이처럼

미국 SW 업체들이 국제판 OS 의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는 개별

기업의 매출변화와 관계가 깊다. 즉

세계적인 경기침체속에서 미국내

SW 판매수입은 해외판매수입에

상대적으로 크게 밑돌게 된데에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해외부문의 비율은

약 60%에 달하며, 로터스와 노벨은

각각 50%에 이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금까지 일본 어플리케이션

SW 업체가 상대적으로 열세라는

SW 분야에서도 미국에게 시장을

내주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2 가지

장벽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독자적인 아키텍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언어의 장벽이다. 그러나

이같은 아키텍쳐의 장벽은 윈도우즈

의 보급에 따라 무너지고 있다.

윈도우즈는 HW 를 직접 액세스 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장벽인 언어 역시 국제판 OS 와 SW

의 등장으로 무너져 가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80 년대 후반부터

나타났다. OS 분야에서는 상당히

진척되고 있으나, 응용 SW

분야에서는 단순히 메세지 만을

바꾼다고 사용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세금의 계산은 단순히 메세지를

고쳐서만은 사용할 수 없다. 그

나라의 세법등도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응용 SW 분야는

조금더 시간이 걸릴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6-12

개월이 소요되던 현지언어화 작업은

크게 단축될 것임은 당연하다. 국제판

OS 의 개발 포인트는 2 가지이다.

하나는 메세지 등의 언어의존부 와

하드웨어 의존부 를 분리하는것으로

이에 따라 SW본체는 손대지 않고

여러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시아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2 바이트 코드의

사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2

바이트 문자코드의 사용은 문자

코드와 관계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문자코드와 관련해서는 최근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윈도우즈

NT 나 핑크 등의 국제판 OS 에

Unicode 라는 새로운 문자코드를

채용할 예정이다. Unicode 는 세계

각국의 문자코드를 포함시킨 것으로

한국어와 일본어 프랑스어를 동시에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다국어에 대응한

문자코드로 안성마춤이다. 현재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이

문자코드의 보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국제 표준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92 년 5월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자체계는 84 년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제공한 ISO-

2020 규격으로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KSC-5601 규격이 이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ISO-2020 은

그 이후 각국의 다양한 욕구에 대응해

새로운 국제표준코드를 만들기로

합의를 보고 여러차례의 논의를 거쳐

현재 DIS-10646 이라는 4 비트코드

체계에 이르고 있고 국내에서도 최근

이에 대응, 조합형 코드를 근간으로

DIS제출안을 확정했다. 이같은 4

비트 코드체계는 종전 알파벳 중심의

코드체계에서 다국어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새로운 코드체계의 한

방법으로 이같은 코드체계가

표준화돼 사용된다면 지금까지

외국에서 만든 컴퓨터에서 한글을

사용하기 위해 도출했던 문제점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같은 ISO 의

코드표준은 DIS-10646 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업계의 유니코드

(Unicode) 체계로 인해 실질적인

표준이 될 수 있을지는 상당히 회의가

뒤다르고 있다.ISO 의 DIS-10646

의 시안을 반대하는 ISO 회원들이

실질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다국어코드를 만들자는 욕구에 의해

탄생한 유니코드는 일단 참여업체가

현재 PC 시장을 지배하는 주요 HW,

SW 업체가 망라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유니코드의

참여업체는 애플, 제록스, IBM,

마이크로소프트, 선, 넥스트, RLG 등

12 개 업체이다. 유니코드는 ASCII

코드를 사용하는 기존 PC 에서

사용이 가능해야 하며, 다국어를

지원할 수 있도록 알파벳, 심볼,

한중일 한자 및 사용자 정의 영역 등

5 개의 문자 영역으로 구분된다. 이들

유니코드는 이미 윈도우즈NT 등과

같은 다국어 지원 운용체계를 통해

본격적인 상업화가 이룽지고 있는데,

현재 한글의 경우 2,350 자 밖에

배열되지 않아 궁극적으로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글을 나타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입장이다.

그러나 상업성을 제일목표로 각국의

문자특성을 제대로 살려나가자는

것이 유니코드의 탄생 취지인만큼

현재 유니코드에서 배열된 제한된

한글코드는 충분히 조합형

한글코드로 대체될 수 있으며, 이의

기초 단계로 이미 DIS-10646 의

제출안으로 조합형안이 확정돼 있어

유니코드의 한글조합형채택 가능성은

비교적 높은 편이다. 어쨌든 향후

컴퓨터의 문자코드 체계는 사실상의

업계 표준안인 유니코드와 ISO 의

DIS-10646 으로 이분될 수 밖에

없는데 이같은 상황에서 대부분의

전례가 그랬듯이 유니코드 안이

실질적인 차세대 PC 의 표준으로

대두될 전망이다. 이는 또 자체

운용체계를 같지 못하고 있는 국내

PC환경으로서는 유니코드가

완성형의 한글배열만을 갖는다

할지라도 이를 따를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며 비록 근 5 년간의

공방끝에 최근 조합형 코드가

완성형코드와 함께 국내표준의

위치로까지 자리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또 다시 2350

자만을 사용할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해

준다.

 7.WS

가.WS 의 시작

WS 의 개념의 원류를 더듬어

올라가면 애틀랜틱 먼슬리 라는

잡지의 45 년 7월호에 게재된

논문에서 찾을 수 있다. 집필자는

MIT 의 바네바 부시교수로 당시

미국을 대표하던 과학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새로운 형태의 메맥스라는 장치를

제안한다. 즉 2 차대전후 엄청나게

늘어나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키보드와

자동색인능력, 사진복사능력을 가진

장치가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2

차대전말기 해군 레이더 기술자로

일하고 있던 엔겔버트는 이 논문을

읽고 컴퓨터로 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세계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이

탄생하고 엔겔바트는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에서 전자공학박사학위를

받고 착실히 준비를 해나갔으나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연방고등계획의 자금을

손에 쥔 리크라이더를 만난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

두사람은 협력을 통해 WS 개발에

뛰어든다. 1960 년, 디지탈

이퀴프먼트사는 미니컴퓨터를

내놓으면서 저가형

대형컴퓨터시장으로 파고 들었다.

비록 대형컴퓨터에는 성능이 미치지

못했으나 이 미니컴퓨터는 작은

기업들에게는 매우 적합한

기종이었다. DEC 의 첫번째

컴퓨터인 PDP-1 은 그 가격이 12

만달러로 부담이 되는 가격이었지만,

1963 년에 나온 PDP-8 은 18,000

달러로 미니커뮤터의 가격을 크게

떨어뜨렸다. 이정도의 가격은 작은

회사의 큰회사의 단위부서에 적합한

가격과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유사한 컴퓨터를 만드는 다른

회사들은 이러한 기종을 여전히

부담을 느끼는 고급기술자를 위해

임대해 주는 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이는 당연히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왔다. 보스턴시 교외의

아폴로컴퓨터사와 캘리포니아의

선마이크로시스템즈사는 재빨리

기회를 포착하고 이른바

워크스테이션이라는 컴퓨터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 워크스테이션들은

엔지니어링에서는 일반화한

CIGP(Computer- intensive graphics program)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1980 년대 초에

아폴로컴퓨터사는 모토롤라 68000

계열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주축으로한 일련의 워크스테이션을

내놓았다. 그리고 얼마 안돼

선마이크로시스템즈사가 경쟁상품을

내놓았다. 약 2 만달러에서 8

만달러까지 하는 이 컴퓨터들은

범용미니컴퓨ㅓ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나은 기능을 제공해주었다. 82 년

썬의 창립시에 썬의 스코트

맥닐리사장을 포함한 창업자들은

곤란한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했다.

즉 이미 공급과잉상태에 있는

범용컴퓨터시장에 진출을 선언은

했지만 어떻게 진출한 것인가가

문제였다. 즉 IBM 을 중심으로 한

대형시장에서는 계층 구조를

중심으로 한 제국이 형성되어 있었고,

미니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시장에서는 HP, DEC, 프라임 등의

우수한 업체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썬은 두번째 시장에

비중을 둔 그러나 새로운 시장의

개척에 촛점을 맞추었다. 즉 강력한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근간으로 하고

통신을 강화한 컴퓨터의 개발이었다.

이것은 분산처리로 나아가고 있던

DEC 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것이었다. 통신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정보와 고가의 주변기기도 공유하는

결과를 가져와 가격이 싸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OS 로서 UNIX 를

탑재한 것은 전략면에서의 큰

성공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즉

사용자가 시스템을 자신의 업무에

맞도록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되는 프러프라이어러티

시스템 을 고집하면서 86 년경 선을

앞지르던 아폴로 는 결국 HP 에 흡수,

합병되고만다. 워크스테이션은

1980 년대에 들어와서 알려지기

시작한 컴퓨터의 한 분야이다.

워크스테이션은 1981 년 아폴로가

처음으로 DN-100 기종을 소개한

이후 썬이 1983 년에 밉스 DEC 가

1986 년에 워크스테이션을 내놓았고

후발주자인 IBM 이 1990 년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워크스테이션 분야는 현재

컴퓨터군의 발빠른 주자로 영역을

확고히 하고 있으며, 전력투구 할

분야로 평가되고 있다. 원래

워크스테이션이라는 용어는 미국

제록스사 제품인 스타와 왕컴퓨터인

Z-80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채택한

컴퓨터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

워크스테이션은 세계 각 메이커들의

전략 상품으로 참여업체가 속속 늘고

있다.

나.WS 의 발전

최근의 워크스테이션은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을 자랑해, 3000

여종의 소프트웨어를 지원하는 것도

있다. 분야별로는 과학용, AEC/GIS, MCAD, EDA, DTP, Database, CASE, AI 등 나날이 영역폭을

넓혀가고 있다. 현재는 소프트개발과

캐드용으로 활용도가 60%이상

차지하고 있으며 인공지능,

사무자동화, 교육분야등에 나머지가

활용되고 있다. 1980 년대에는

일반적으로 오픈 시스템 아키텍쳐를

기반으로 한 것이 워크스테이션의

특징으로 보여진다. 통신규약으로는

TCP/IP, NFS 가 주로 채택됐으며,

X-윈도우, 리스크 아키텍쳐, 그래픽

엑셀레이터 등이 부가된 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편 1990

년대에는 클라이언트/서버 컴퓨팅의

시대에 알맞도록 시스템과 소프트의

표준화에 워크스테이션도 사양을

맞추는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제품은 더 값싸지고, 더 빨라지면서

사용의 편리성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워크스테이션은 한마디로 가격대

성능의 향상면에서 기술의 흐름을

관망할 때 밉스(Mips)치를 올리는

과정을 밟아 왔다. 이러한 접근은

클럭 스피드, 멀티프로세서 채택,

명령어 처리능력, 데이타 패스등의

병행적인 향상 위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소프트웨어적인 기술도

복합적으로 가미돼 진행되고 있다.

워크스테이션은 그래픽 분야를

포함한 업무에 적응하는 특성에서

많은 데이타를 빨리 처리해야한다.

이는 곧바로 밉스 경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한편 제품의 변천사를

결정짓는 것은 하드웨어적인 변화

특히 반도체분야의 기술혁신이 크게

작용한다. 프로세서의 클럭사이클은

기술변화에 따라 최근에는 CMOS

에서는 20 나노초(ns),Bi-MOS

에서는 10 나노초 이상, ECL 에서는

3 나노초이상의 영역이 가능해지고

있다.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는

CMOS 공정에 이어 갤륨비소

(GaAs), HEMT(High enectro Mobility Transistor)의 양산

기술과 실장의 고밀도화, 고속 저가

저발열소자 개발에 눈을 돌리고 있다.

또한 소프트웨어적인 처리기법으로

컴파일러 고집적화 기술은 향후

하드웨어적 변화요인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한편 32

비트 처리를 벗어나면, 1991 년

말부터는 본격 64 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장을 열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며, 병렬처리 또한 주요한

지침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다.RISC 기술의 등장

한편 채택기술을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CISC 에서 RISC 아키텍쳐로

변화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RISC 관련 기술은 1970 년대

토마스 J 왓슨 연구소에서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1975 년에 등장한

IBM801 등에 탑재되는 등 그

역사는 비교적 긴 편이었다. 느린

발전을 보여오던 RISC 는 1982 년

썬의 창립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워크스테이션의

성능 향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썬은 매년 성능을 배가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CISC

기술로는 한계를 느끼게 되자 자연히

RISC 기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프로세서의 설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즉 1980

년 이전에는 프로세서의 설계에서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명령을 갖추어

프로그래머들의 부담을 덜어 주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1980 년대를

지나면서 최소한으로 명령의 갯수를

억제하여 프로세서 개발에 관계되는

반도체 기술측의 부담을 경감하려는

방향으로 방향으로 설계의 개념이

변화하였다. 이 변화를 촉진시킨 또

다른 이유는 VLSI 기술의

성능향상에 수반한 CISC 내부구조의

복잡화이다. 복잡할수록 개발기간과

노력이 가중되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발 당시 일부에서는 RISC

의 성능을 의문시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CISC 의 경우 한 명령만의

속도는 느리지만, 프로그래밍할 때에

사용하는 명령의 수는 적다. 이에

비해 RISC 는 한 명령의 스피드는

빠르지만, 프로그래밍은 많은 명령을

필요로 한다. 양자의 실행 시간을

비교하는 것은 이론만 갖고서는 어느

쪽이 빠른가 하는 결론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RISC

프로세서가 등장했을 때, 이러한

우려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RISC

프로세서는 C언어로 쓴 프로그램을

대단히 빠른 속도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RISC 는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RISC

는 반도체의 새로운 기술, CMOS

라든가 ECL, 칼륨비소등에

접근하기가 쉬웠다. 소요되는

트랜지스터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스크(RISC) 아키텍쳐에

대한 의존도가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반면, 막상 시장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70% 이상이 시스크(CISC)

제품이 점유하고 있다. 관련 전문가에

의하면 1991 년 말부터는

기술채택의 격차가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특히 리스크 아키텍쳐의

채택은 제품향상의 주기를 점점

가속화 시켰고 고성능의 영역으로

진입을 가능케 했다. 워크스테이션이

나름대로 시장을 형성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이유로는 리스크의

출현을 들 수 있다. 리스크 경쟁에

있어 컴퓨터 업계로는 IBM과 HP 가

원류를 이루고 있다. 그 태동은 IBM,

스탠포드, 버클리에서 이론화가

모색되었지만, 본격적인 준비는

1980 년대에 들어와 이루어졌는데

특히 HP 는 리스크팀을 구성해 놓고,

조웰 범바윈 박사를 영입해

정밀측정작업에 들어가 프리시젼

아키텍쳐(Precision

Architecture)를 개발해

대형시스템에 탑재한 것이 상품화의

모태이다. 그러나 워크스테이션에

실제 리스크 아키텍쳐가 채택된 것은

썬의 스팟스테이션에서 비롯된다.

초기기술로는 성능에서 시스크와

성능상에서 뛰어남을 보이지 않았고

제한된 어플리케이션만을 운영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며 32 비트 데이타

처리, 외형의 캐쉬, 제한된 컴파일러

테크놀로지 등이 주요 특색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각사는 자체의

리스크 기술을 개발하면서 시스크

기술을 성능면에서 따돌리게 되었다.

칩제조 메이커들도 리스크칩 양산에

들어가 상용화된 제품으로 시장에

선보이는 활황기에 접어들게 된다.

소프트웨어 개발이 뒷받침되면서

시장에서의 인기를 갖게 됨에 따라

빠른 클럭스피드, 멀티프로세싱

기능, 향상된 메모리 기술보완에

관심이 모아지는 현상이 크게

나타났다. 한편 최근의 기술는

데스크탑에서도 미니급 이상의

성능을 보여 주고 있어 차세대

워크스테이션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핵심기술을

가진 공급업체만이 워크스테이션의

강자로 군림할 것으로 보이며, 기술

개발과 아울러 서드업체의

어플리케이션 확보도 중요한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다. 이제

데스크탑에 채택된 리스크 기술이

시스크의 존립을 거부할 정도로

비중있게 자리잡았으며, 복수의

명령어 처리와 통합네트워크화의

추세에 따른 부산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64 비트 아키텍쳐로의

전환도 서서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 분야의 1

위인 썬 마이크로 시스템즈에 공격을

가하고 있는 2 위인 휴렛팩커드(HP)

와 컴퓨터 전부야를 석권하려는 IBM

이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인텔과 밉스간의 CPU

다툼도 치열하다. 밉스는 RISC 의

개발로 단숨에 반도체 분야의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했고, 이

여파로, 반도체계의 거인 인텔은

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인텔은 직접 RISC칩을 만들어

반격하기 보다는, CRISC 인 펜티엄

등을 통해 반격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DEC같은 회사는 RISC 와

CICS 를 둘다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현재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업체인 썬은 1982 년에

설립되어 다음해 워크스테이션 썬-

100 모델을 출하했고, 1984 년 11

월에 썬-2/50 을 내놓았다. 1985 년

처음으로 2밉스의 성능을 갖는 썬-

3/160 을 발표하고, 이듬해 바로 4

밉스의 선-3/260 을 발표하여 업계를

놀라게 하였다. 또 1987 년에 업계

처음으로 썬-4/260 모델을 발표하여

리스크 머신의 새장을 열게 되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게 된다.

1990 년 말에 발표된

썬스팍스테이션2까지에 적용된 썬

전략은 스펙 오픈을 통한 클론

업체들을 대거 등장시키면서 저가로

시장을 공략하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90 년 회사 설립 8

년만에 썬은 세계 워크스테이션

시장의 40%에 이르는 점유율을

차지함으로서 막강한 기업으로

떠오른게 된다. 한편 IBM 은 70 년대

말 801 리스크 프로세서를

개발하면서 리스크 아키텍쳐에 대한

연구의 프로젝트에 일찍부터

들어갔다. 그러나 이 첫번째

프로젝트가 중단된 후, 1986 년에

리스크 초기단계 제품으로 RT-PC 를

발표했으나 커다란 실패를 보았고,

진정한 워크스테이션의 상품화는

1990 년 RS/6000 을 소개하면서

이루어졌다. IBM 은 이 제품을

계기로 워크스테이션의 차세대를

선언함과 동시에 선두업체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HP 는 1985 년 HP-

PA 아키텍쳐를 상품화에

들어갔으나, 다음의 상용화 단계에서

PA-RISC 로 정식 명칭을 바꾸면서

미니컴퓨터에 RISC 기술을

채택했다. 그러나 HP 의

워크스테이션이 본격적으로 리스크

아키텍쳐를 도입한 것은 800

시리즈부터였고, 데스크탑

워크스테이션에 고성능을 실현한

것은 1990 년 3월 26 일 전세게에

정식으로 발표된 HP 9000/700

시리즈가 처음이었다. 또

밉스컴퓨터는 1985 년에 R2000-8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다음해에

R200 -16 을 발표했다. 밉스는

1987 년 R3000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많은 시스템에 33MHz

의 성능을 부여했고, 최근에 발표된

R4000 64 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또 한차례의 치열한 64

비트 워크스테이션시장을 만들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대부분 밉스칩 채택

메이커들은 1991 년 하반기에

이칩을 채택 워크스테이션 시장에서

한판 승부를 벌일 것으로 에상된다.

1990 년 4월에는 DEC 스테이션

5000 계열을 10월에는 VAX

스테이션 3100/76 을 선보였다.

1991 년부터 RISC 에서도 64 비트

제품이 등장하였다. 1991 년 10

월에는 밉스가 R4000 을

발표하였고, 1992 년 2월에는 DEC

가 21064(아키텍쳐 이름은 Alpha)

를 발표하였다. 이런 뉴스에 접한

이들은 물론 지금부터는 64

비트시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6세대 컴퓨터

(Network)

O 5세대 이후 슈퍼컴퓨터와

인공지능

O 통신 O 인터넷과 PC 통신

O 멀티미디어와 게임의 시대 O SW

 1. 5세대 이후 (펜티엄,

파워, PDA)

가.펜티엄과 Windows95

1992 년 여름에 인텔은 또다른 CPU

인 펜티엄을 발표했다. 이는 i586

으로 불리울 것으로 예상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조금의 의외의

명칭이다. 펜티엄은 486 에 비해 4

배의 속도를 가지고 있고, 부동소수점

연산능력에서는 특히 탁월한 것으로

알려졌다. 64 비트 데이타버스를

지원한다는 것 이외에도 386 이나

486 에 채택된 많은 기술과 아울러

새로운 기술도 채택되었는데, 이중

파이프라인(pipe line)이나

분기예측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310 만개 트랜지스터의

집적, 100MIPS 이상, Load,

Store 등의 마이크로코드를

하드웨어로 구현, 각각 8KB 의 코드

캐시와 데이타 캐시의 분리, 고성능

부동소숫점 유닛(FPU : Floating

Point Unit), 앞에서 언급했던

기능등을 통합한 멀티 프로세싱 기능,

메모리 페이지의 크기를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펜티엄이 넘어야 할 산은

높고도 많다. 그 산은 지금까지

워크스테이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리스크(명령어 축소형

컴퓨터, RISC : 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er)칩과의 경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새로

태어난 알파 AXP 칩이다.

지금까지는 시스크(명령어 복합형

컴퓨터, CISC : Complex

Instruction Set Computer)가

리스크에 대항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리스크 칩에 가까운 기능을

제공하는 뿐 아니라 32 비트

아키텍쳐인 386, 486, 64 비트의

펜티엄 뿐만 아니라 리스크인

R4000 / R4400칩과 알파 ASP

칩을 모두 지원하기 때문에

워크스테이션 시장에서의 한판

대결이 예상된다. 또한 IBM과

모토롤라과 애플의 합작품인

리스크에 기반한 파워

PC(PowerPC)도 밉스당 가격과

성능에 따라 펜티엄과의 격돌이

에상된다. 이 펜티엄을 586 이라고

했을때 1996 년경에는 686 이,

2000 년경에는 786 이 나올

예정이지만 어느것이나 이 이상

알려진 것은 없다. 그러나 애플의

파워북 100 역시 일본의 소니가 한발

앞서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2

년 중반에는 애플사가 뉴턴

펜탑컴퓨터를 내놓았지만 뉴턴 역시

샤프에서 한발 앞서 개발했다. 이와

함께 기존의 데스크탑 PC 에서 들고

다닐 수 있는 랩탑PC 와 노트북PC

의 개발은 PC 기술의 또 다른 진전을

나타내고 있다. PC 소형화의

첫주자인 랩탑PC 역사는 1986 년

컴팩이 인텔 80286칩을 채택한

제품을 선보이면서 부터였다. 랩탑

PC 는 휴대용 PC 의 필요성을

일깨우며 확산되어 1988 년도에

랩탑보다 더욱 작아진 초경량제품인

노트북PC 가 일본의 NEC 에서

선보였다. NEC 의 Ultra Lite

노트북 PC 는 CPU 로 10MHz 의

V30 를 채택했고 기억용량이

640KB, 무게 2kg 의

초소형제품이다. 이후 도시바,

ATARI, POQET, 컴팩등에서

앞다투어 제품을 출시 새로운 PC

세계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랩탑 PC

분야에서도 일본의 활약은 뛰어난

것이었다. 시장 점유율을 높여 오던

일본회사는 1990 년에 들어 오면서,

도시바가 21%의 점유율로 1 위

제니스와 컴팩은 10%내외로, NEC

와 샤프가 9%, 8%를 각각 점유하게

되었다. 32 비트 PC시대를 열었던

「윈도 95」 운용체제(OS)가 24

일로서 출하 1 주년을 맞이한다. 윈도

95 는 공급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M

S)의 강력한 마키팅전략에 힘입어 1

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4 천만개가

팔려 나가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이같은 숫자는 컴퓨터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기록으로 남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윈도 95 는 지난해 발표와

동시에 몰아닥친 인터넷 열풍으로 M

S가원했던 당초 전략과는 거리감이

있는 OS로 변질됐고 앞으로도 「

윈도NT」라는 또 다른 OS에

흡수될 위기에 몰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윈도 95 가 기록한

각종기록을 보면 세계 최대

시장조사회사인 IDC는 96 년 7

월말까지 4 천만개가 팔렸고 올

연말까지는 3 천만개가 추가돼 모두

7 천만개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I

DC는 또 다시 1 년후인 97

년까지는 1억 3 천 2 백만개에 육박,

91 년 발표된 「윈도 3.1」의 5 년간

실적인 1억개 판매 기록을 무난하게

돌파할 것으로 예측했다. 윈도 95 는

현재 전세계 4 백여개 PC

공급회사들이 라이센스 형태로

번들공급 중이고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 PC사용자의

40%가 이 제품을 OS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세계적으로

4 천 4 백여개의 응용소프트웨어가

윈도 95 용으로 개발돼 보급됐는데

이 숫치는 전체 유가 소프트웨어의

80%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윈도 95 의 최대 장점 기능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플러그 앤드

플레이(PnP)지원 주변기기

하드웨어는 모두 3 천여종이나

출하된 것으로 조사됐다. 또 따른

장점으로 꼽혔던 인터넷용 프로토콜

TCP/IP 지원기능 역시 상당한

효과를 봤는데 7월말 현재 전세계

인터넷 사용자의 40%가 윈도 95

환경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나머지는 윈도 3.1,

매킨토시, 유닉스 등) 그러나 96 년

8월 현재 윈도 95 는 여러가지

면에서 MS가 당초 의도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마이크로소프트

네트워크(MSN)」의 포기와 인터넷

플랫폼 전략의 수용이다. 윈도 95 에

메뉴형태로 포함된 MSN의 경우

발표 당시만 해도 윈도 95 의 제품

성격과 향후 MS의 전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능이었다.

뿐만아니라 사용자들의 관심도

본제품인 윈도 95 보다 MSN에 더

집중돼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MSN은 인터넷에 정면

대응, 효율적인 통제와 고부가가치

창출이 용이한 「MS 만의 인터넷

구축」전략으로 추진됐었다. 그러나

MS는 넷스케이프가 주도한 인터넷

열풍에 밀려 윈도 95 발표 1 백일도

채 못된 지난해 12월7 일 「MSN

의 포기와 인터넷의 수용」을

발표하고 말았다. MS는 또 윈도 95

의 차기버전으로서 각각 윈도 96과

윈도 97 에 해당하는 「내시빌」 및

「멤피스」등 향후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처럼

발표됐으나 인터넷 수용전략과 함께

대대적인 전략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내시빌」은 윈도 95

와 웹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

3.0」과의 통합프로젝트로 그

내용이 완전 바뀌었고 멤피스는 그

미래가 오리무중이 돼 버렸다. 한편

지난해 8월24 일 이후 국내에서

기록된 윈도 95 기록을 보면 7월말

현재 일반 소매용 패키지의 경우

한글판은 16 만개가, 영문판은 1

천여개가 팔려 나갔다. 또 삼성전자,

삼보컴퓨터, LG전자, 대우통신,

현대전자 등 5 대 PC회사에 대한

라이센스(OEM)공급량은 월 10

만개 꼴인 1 백 10 만개에 이르러

지난 1 년 동한 국내에 보급된 윈도

95 는 모두 1 백 26 만여개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다. 이같은 수치는 윈도

95 의 한글판이 출하된 지난해 11월

28 일 이후 7 월말까지 8 개월동안

국내에 공급된 PC의 85%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윈도 95 의

미래에 대한 전략이나 일정에 대해 M

S는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사용자들의 추이를 봐가며

결정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윈도 95 가 오는 98

년경 발표되는 시카고의 클라이언트

OS 인「윈도NT워크스테이션

5.0」에 통합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나.MMX

MMX(Multi Media Extention)는 기존 CPU 에 멀티미디어 관련

명령어를 약 52 개 추가하고 32kB

의 캐시메모리를 내장, 하드웨어에서

담당하던 작업을 CPU 에서

도와줌으로써 멀티미디어 관련

프로그램의 성능을 최대 60%

향상시켜주는 기술을 말한다. 인텔이

지난해 3월 처음 공개한 CPU 의

새로운 규격으로 복잡한 멀티미디어

및 통신 응용프로그램, 컴퓨터그래픽

프로그램의 성능을 높이는 것이

특징이다. MMX 의 등장은

컴퓨팅환경과 PC마케팅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즉 다양한 그래픽

이미지와 사운드를 포함하는

멀티미디어와 인터넷의 비중이

커지고 전반적인 침체에 빠져있던

미국과 국내 PC 시장에 활력소가

됐다는 점이다. 지난 94 년을 전후해

컴퓨터분야에서는 멀티미디어가 최대

이슈로 떠올랐고 95 년부터는

인터넷이 마케팅의 좋은 호재로

부상하면서 컴퓨터 하드웨어에도

커다란 변혁이 요구됐다. 기능이

다양해지고 복잡한 멀티미디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더욱 진보된

하드웨어와 CPU 의 성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또 지난해를 기점으로

급격한 성장일변도의 PC 판매율이

주춤하는 가운데 MMX 의 등장은 PC

마케팅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MMX 기술은 그래픽, 오디오,

비디오, 압축 및 압축해제, 알고리듬,

음성인식, 이미지처리, 영상회의 등

다양한 분야의 응용프로그램을

분석해 가장 집약적인 루틴으로

처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압축속도를 개선하고 멀티미디어 및

통신 응용프로그램의 성능을

높여준다.

출시 초기에는 MMX 기능을

지원하는 응용프로그램이 개발되지

않아 무용론까지 대두됐으나

최근에는 매크로미디어 디렉터를

필두로 어도브 등 그래픽,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 전문업체가 제작한 MMX

용 소프트웨어가 등장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는 1 백 66㎒급과 2 백㎒급

MMX 컴퓨터가 주력 품목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조만간 일반 PC 를

대체할 전망이다.

다.K6

반도체업체인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AMD)의 K6 는 MMX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프로세서다. K6 는 인텔의 펜티엄Ⅱ

에 맞먹는 속도에 저렴한 가격으로

인텔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칩으로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상태. 인텔

호환칩을 생산하는 브랜드로 유명한

AMD 는 펜티엄급인 K5 에서부터

자사의 CPU 에 K 를 붙이기

시작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K 는

크립토나이드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크립토나이트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영화 「슈퍼맨」에서

슈퍼맨의 전지전능한 힘을

무력화시키는 물질. AMD 는 인텔의

칩 생산능력을 슈퍼맨의 그것과 같이

절대적인 힘에 비유하면서 인텔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솔루션이

AMD 의 K칩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제품명에 K 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인텔에 대한 AMD 의

도전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로 인텔

호환칩 생산업체 중에서 반인텔

성향이 가장 강했던 AMD 의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AMD

는 「전자는 인텔에서든 AMD

에서든 똑같은 속도를 갖는다」는

유명한 말을 만들어내며 인텔의 칩

디자인 능력에 비해 AMD 역시

손색없는 생산능력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게 된다. 그러나 AMD 가 지난

95 년 야심작으로 발표했던

펜티엄급의 K5칩은 시장상황의

변화와 성능이 변수로 작용해 인텔에

참담한 패배를 당하는 불행을

맛보아야 했다. 특히 AMD 의

신제품발표 때마다 인텔이

가격인하정책을 펴는 바람에 AMD

는 어려운 상황을 맞아야 했으며

인텔의 가격정책을 피하기 위해서는

보다 저렴하면서도 성능이 뛰어난

제품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등장한 것이 AMD 의 야심작 K6.

현재까지 K6 는 인텔 MMX 기술을

기반으로 한 고성능 프로세서와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다.

제조원가의 하락이 마케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관계로 HP 나

디지털과 같은 주요 PC제조사가

AMD 의 K6 칩을 채택하기

시작했으며 아시아권의 군소 PC

제조사들도 AMD 의 K6칩을

채택하고 있는 추세. 다만 인텔의

규모와 기술력이 AMD 에 비해

월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슈퍼맨의 능력을 저지할 수 있다는

크립토나이드가 얼마만큼 인텔의

독주를 막을 수 있을지 관심을 끌고

있다.

라.델컴퓨터의 등장

1991 년 컴퓨터업계, 특히 PC

업계는 새로운 전환을 모색해야 할

시기에 다다르고 있었다. 즉 기존의

기업들은 경영환경이 악화되자 PC 와

정보 관련 투자를 줄여 나아갔다.

가정용 PC 시장도 한계에 이른 듯이

보였다. 이때 PC 시장을 뛰어든 것은

마이크 델의 델컴퓨터 이다.

델컴퓨터는 다른 중소기업과

마찬가지로 저가정책을 썼다.

대기업과 같은 고가 경쟁이 불가능한

중소기업의 한계이자 특성이기는

했지만 델컴퓨터는 조금 그 의미가

틀렸다. 새로운 시장의 창출과 관습의

틀을 깨는 새로운 유통방법의 모색이

그것이었다. 델은 보통 PC 업체들이

대리점이나 판매상을 통해 판매하는

것과는 달리 소비자들로부터 직접

주문을 받아 우편으로 배달해주는

우편주문판매 제도를 도입,

정착시켰다. 또한 전화상담을 통해

사용자들의 불편사항을 접수하고

해결해 주면서 사용자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도 사용자들을

만족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특히

수신자 부담 전화서비스인 800

번으로 제품의 주문을 받고 우편으로

배달해 주는 전화중심의 판매는

커다란 홍을 불러 일으켰다. 델은 PC

의 일용품화, 일반 사용자들의

증가라는 시장추세를 적기에 판단,

정확히 판단 적기에 공급했으며 이를

미국 PC 시장에 전체적으로 확산

시켰다. 92 년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저가경쟁은 대기업에도 번져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혼전을 보이고

없다. 마찬가지로 전화서비스에 의한

판매도 앞을 다투어 도입했다. 특히

92 년 6월 컴팩은 저가형 PC 인

프로리니어 를 발표, 기술력을 앞세워

그동안의 기술을 앞세운 고가 정책을

포기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점차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즉 일본내 미국 기업들은

미국에서의 가격 하락에 발맞추고

일본에 시장 확대를 위한 저가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컴팩이 실시할 때에만

해도 무관심했던 일본기업은 IBM 의

가격 인하가 있자 미쓰이 물산을

선두로 저가 경쟁에 뒤따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대부분의 일본

기업과 애플, DEC 등의 가세했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 변화가 일고

있다. IBM 이 AMD 의 칩과

아시아의 저가 OEM 공급부품에 의한

암브라 공세를 시작으로 많은

회사들이 다양한 모델에 의한

저가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판매는 증가하는데 매출액은

감소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모델을 통해

이러한 가격경쟁을 이겨 나가려 하고

있다. 즉 델컴퓨터는 기업사용자들을

위한 델 시리즈를, 소규모 오피스를

위한 프리시전 시리즈를,

가정용으로는 디멘션 시리즈를

판매하고 있다. 컴팩사도 저가형 PC

프로리니어 , 데스크프로/m ,

데스크프로/i 등의 제품군으로 가정,

기업체, 소규모 기업 등의 사용자층을

소화해 내고 있다. IBM 도 기존의

PS/2 라인은 고성능 제품을

선호하는 사용자들을 위한 라인으로,

PS/1 은 가정내 PC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그에 맞는 영업정책을 펴고

있다.

마.파워 PC

PC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80 년대

말부터 90 년대 초까지만 해도

개인사용자들에게 CPU는 별다른

의미를 갖을 수 없었다. 그럴것이

「인텔」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AMD와같은 인텔

호환칩뿐만아니라 차세대 CPU를

노리는 CPU제조사간의 개발경쟁이

치열하지만 90 년대 초반에는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체제에 도전할 만한

업체가 거의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

위기를 느낀 IBM과 애플,

모토롤라는 1991 년 7월 파워PC

라는 새로운 CPU를

개발하기로하고 제휴했다. 이

제휴에서 IBM, 애플, 모토롤라는

워크스테이션에서 사용되는 RISC

아키텍쳐에 개방형 운영체제를

접목시킨 강력한 성능의 CPU를

개발키로 합의했다. RISC

아키텍쳐에 개방형운영체제는 그동안

문제로 제기되던 x86 체제를

능가하는 성능을 발휘할 것으로

알려져 파워PC 개발과 성능이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또 파워PC는

개인용컴퓨터에서 메인프레임에

이르는 사용환경에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환경을 쉽게 제작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개발됐다. 이같은

개발목적에 따라 92 년 10월 각각

40, 66, 80MH z 의 클럭속도를

갖는 파워PC 601 이 처음 개발,

발표됐다. 1993 년 10월에는

전력소비량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노트북컴퓨터에서 사용되는 저전력

603 모델이 개발됐다. 파워PC가

노트북에서 슈퍼 컴퓨터에 이르는

폭넓은 활용분야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노트북용 제품도

개발이 일루어졌던 것이다. 94 년 2

월에는 파워PC 601 보다 속도와

전력소모량을 개선한 파워 PC

601+가 발표됐고 94 년 4월에는

애플이 파워PC칩을 장착한

파워매킨토시를 처음 발표했다. 파워

PC개발을 합의한 이래 3 년만에 이

칩을 탑재한 첫제품이 발표된 것이다.

이후 파워PC개발은 더더욱 속도가

붙어 94 년 10월에는 이미 1 백 33

MH z 의 속도를 갖는 파워PC620

칩을 95 년 2월에는 캐시메모리를

16MB 로 확장하고 100MH z 의

성능을 갖는 603e 를 발표하기에

까지 이른다. 1974 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에서 지금의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20 여년이라는 컴퓨터

역사의 많은 우여곡절 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는 1991 년

파워피씨 동맹이 결성된 일이다. 한

때는 서로 적이었던 애플과 IBM,

모토로라가 힘을 합쳐 AIM 연합을

결성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혹자들는 ‘바보들의 집단’, ‘적과의

의미없는 동침’ 등의 악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AIM 연합은 꾸준히

제품을 개발해 윈텔 진영과 맞서고

있다. 파워피씨 진영은 출범 이후

줄곧 공동의 하드웨어 플랫폼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처음 3

사가 계획했던 표준 하드웨어 플랫폼

개발이 시장 상황과 일부 자사의

욕심으로 인해 난항을 겪었다. 최초로

동의한 규격은 PReP(PowerPC

Reference Platform)인데,

이것은 파워피씨를 바탕으로 IBM 의

AIX 와 OS/2, MS 의 윈도우즈 NT,

썬의 솔라리스, 노벨의 넷웨어 등

기존 윈텔 플랫폼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파워피씨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첨병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애플은 자사의 폐쇄적인 구조로

인하여 파워피씨를 이용한 자사의

독특한 플랫폼인 파워 맥을

만들어내고 IBM과 모토로라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애플의

이러한 정책은 나름대로 파워피씨

시장을 사실상 주도해 나갔지만

희망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즉

사용자들은 그저 또 하나의 플랫폼을

접하게된 것 뿐이다. 파워 맥이 침체

국면을 맞자 애플은 다시 협상

테이블에 나타났다. 3 사는 다시

PReP 의 계획을 일부 수정한 새로운

규격인 CHRP(Common Hardware Reference Platform)를 계획하였다. 그 후 96

년, 다시 PPCP 라는 명칭으로

규격을 정의하면서 불필요하게

되어버린 사양들을 제거하고 현재

속속 발표되고 있는 보드들의

규격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1)파워피씨의 탄생

파워피씨의 근간은 IBM 의 파워

(TM) 아키텍처이지만 파워피씨

아키텍처는 컴퓨터 업계의 세 거인의

연합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아키텍처는 뛰어난 소프트웨어,

시스템, 그리고 CPU 디자인

엔지니어들의 아이디어를 합병한

것이다. 이런 광범위한 정보와 함께

제 1세대 고성능의 아키텍처와 함께

파워피씨가 등장했다. 파워피씨

아키텍처는 특히 고성능 단일 칩

프로세서로서의 수행이 가능하도록

디자인되어 손쉬운 생산을 통해

고성능과 저가격을 실현한다. 파워

아키텍처로부터 나온 파워피씨

아키텍처는 세 회사의 설계자,

엔지니어, 그리고 프로그래머들이

컴퓨터 산업 자체의 흐름을 조사하고,

오퍼레이팅 시스템의 기능을 철저히

분석하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기술의 경향을 예측해서 아키텍처를

변경하고 확장하는 데 대한 의견의

일치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이것은

중요하지 않은 부분들에 대한 요구를

줄이고, 거의 사용되지 않는 명령들을

제거하여 명령들을 간소화시켜 좀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파워피씨는 현재 601, 601+, 603,

603e, 603ev, 604, 604e 등의

제품군이 발표되어 있으며 각 제품별

자세한 사양은 표 1과 같다

(2)새로운 파워피씨 G3 와 G4

MPC603ev, MPC604e 를 개발한

프로젝트의 명칭이기도 한 G3 는

애플과 모토로라, IBM 이 공동으로

개발한 제 3세대 파워피씨로 이 ‘G3’

시리즈가 곧 양산체제에 들어간다.

CPU 의 성능을 측정하는 기준 중

하나가 클럭주파수인데, G3

시리즈의 강점은 빠른

클럭주파수만이 아니다. 파워피씨는

미국 인텔사의 펜티엄계 CPU 에

비해 낮은 소비전력으로 높은 성능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이

G3 시리즈의 최대 특징이 파워피씨

603e 의 소비전력으로 604e 보다

나은 성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G3 시리즈의 기본 설계는

현행의 파워피씨 603e 나 604e 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2000 년대에 출하가 개시될 예정인

제 4세대 ‘G4’ 시리즈에는 ‘뉴

마이크로 아키텍처’라고 부르는

새로운 구조가 채용된다고 한다. G3

는 최고 300MHz까지 클럭주파수를

지원하며, 0.28 미크론 CMOS

기술을 활용하여 6 백 50 만개의

트랜지스터의 직접도를 자랑한다.

이는 인텔의 동급 프로세서인

클라메스에 비해 크기는 3 분의 1 에

불과하고 전력 소모는 5 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적인 가격대 성능비

면에서도 클라메스에 비해 가격은

30%정도 싸며, 성능은 10% 이상

빠르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파워피씨의 화려한 변신을 파워피씨

진영 모두가 기대하고 있다. 차세대

CPU 개발 경쟁에서 윈텔 진영은 64

비트 구조의 코드네임 ‘머세드’를 HP

와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는데, 이에

맞서 파워피씨 진영 또한 ‘G4’라는

코드네임의 64 비트 CPU 개발에

나서고 있다. 컴퓨팅 환경이 32

비트에서 64 비트 환경으로 변화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차세대

운영체계와 함께 상당히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G4 는 기존의

칩들과 비교하여 완전히 다른 구조를

채택할 것으로 생각된다. CPU 의

확장시 상당한 유연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과 캐시메모리를 CPU 와

동기화시킬 수 있는 구조로 성능의

향상을 꾀하리라 본다. 또한 G4 에는

인텔의 MMX 와 유사한

멀티미디어에 대응되는 기능인 VMX

를 추가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0.18 미크론 CMOS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5 천만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하여 처리속도나

반도체 생산 기술에 있어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G4 프로젝트로 탄생될

새로운 CPU 는 데스크탑과 서버

시장의 시스템 속도를 혁신적으로

개선할 것이다.

(3)매킨토시의 G3 선택

제 3세대 파워피씨 G3 를 맥에

탑재하기로 결정이 났다. G3 는

소비전력의 억제와 칩의 소형화에

의해 파워피씨 603e 수준의

발열량으로 파워피씨 604e 이상의

성능을 실현한다는 장점을 충분히

고려한 결론이다. 앞으로 1 년 이내에

맥에 탑재될 예정인 G3 칩은

파워피씨 603e 의 뒤를 잇는 ‘아서’와

파워피씨 604e 의 뒤를 잇는 ‘마하

5’ 두 제품이다. 둘 다

개발코드명이고 제품으로서 출하되는

때는 ‘파워피씨 7xx’가 될 것이라고

한다. 아서와 마하 5 를 채용하는

구체적인 제품명과 출하시기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아서는 클럭주파수

233MHz, 마하 5 는 300MHz 에서

시작하여 98 년 중 각각 300MHz,

400MHz까지 클럭주파수를 높일

예정이다. 마하 5 는 여러 개의 CPU

가 각각 메모리를 공유해서 정보를

교환하는 대칭형 멀티프로세싱을

지원한다.

(4)파워피씨 장착한 PPCP 출현

파워피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올 하반기에 선보일 새로운

구조의 시스템, 즉 PPCP 에 대해

관심이 많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한

시스템으로 여러 종류의 운영체계를

운용할 수 있다는 점과 인텔 피씨에

좀더 가까운 형태로 디자인되어

기존의 피씨에서 사용되던 각종 PCI

보드, I/O 기기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까지 피씨

시장에서는 유독 윈텔 진영에서만

시스템 구조의 공개로 수많은 클론을

양산하여 왔다. 하지만 파워피씨

진영에서도 공개적인 구조의

하드웨어 규격을 발표하고 이 규격의

추종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모토로라에서는

옐로우나이프나 바이퍼와 같은

프로토타입 시스템을 제작하여 각종

컴퓨터 전시회에서 선보였다. PPCP

의 프로토타입은 미비한 점이 있긴

하지만 올해 말경 PPCP 보드를

탑재한 제품들이 발표될 것으로

미루어보아 제품의 개발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고 판단된다. PPCP

보드의 코드네임은 ‘바이퍼’이며 현재

대부분의 프로토타입은 이 보드의

원형이라 할 수 있겠다. 바이퍼의

특징은 우선 마더보드의 크기가 ATX

규격과 호환된다. 다시 말하면 현재

흔히 볼 수 있는 PC 의 마더보드와

사이즈가 같다는 얘기로 PC

케이스에 조립이 가능하다. 보드의

구성을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패러럴 포트와 ISA 버스 슬롯이다.

PPCP 의 주요 OS 가 윈도우즈 NT

와 맥 OS 인 것을 감안할때 NT 쪽

규격을 더 배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시스템 8.0 의 PPCP

버전에서 이들 버스를 지원하기로

약속된 이상 맥 사용자들도 저가의

PC 용 프린터나 ISA 버스

확장카드를 사용하게 될 날이 머지

않았다. 애플에서는 패러럴 포트를

대비하여 기존의 PC 프린터의

드라이버를 새로 만들지 않고 GDT

소프트웨어사의 PowerPrint

소프트웨어를 라이센스하여 제공할

계획으로 알려져 PPCP 제품이

발표되는 즉시 사용자는 저가 PC

프린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바이퍼의 가장 핵심인 두 개 이상의

OS 지원을 위해 부팅 초기에 롬

상에서 OS 를 선택하는 기능이

제공될 것이다. 메모리는

SIMM(72pin)을 쓰며, PS/2 용

마우스와 키보드를 지원하고, PC 형

COM 포트(시리얼 포트)를 제공할

예정이다. 물론 애플의 지오포트 역시

제공될 것이며 ADB 포트도 제공될

것이다. 그 밖에 하드디스크나

시디롬을 위한 E- IDE 버스와 SCSI

버스가 제공되며 적외선 통신을 위한

IrDA 커넥터가 제공된다. 새로운

규격으로 포함되는 플로피 드라이브

커넥터는 CHRP 에 정의된 사양으로

포함되며 몇몇 핀은 새로 정의되었다.

올해 말 최초로 공개될 바이퍼 보드의

CPU 는 G3 를 채용하여 300MHz

의 고성능을 제공할 것이며

마더보드의 버스 속도는 80MHz 로

지금의 보드보다 향상된 모습을

선보일 예정이다. 바이퍼 보드 이후의

계획으로 듀얼 CPU, 노트북용

PCMCIA 가 추가로 지원될 계획이다.

(5)PPCP 상용화의 잣대, 탄자니아

PPCP 는 과연 어디까지 상용화되어

있을까? 그 해답은 애플과

모토로라의 공동 개발로 만들어진

탄자니아 보드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탄자니아 보드는 현재

모토로라의 맥 OS 시스템 전모델에

채용되어 있으며 애플 제품으로는

파워 맥 4400과 7220 이 있다. 또

다른 미국의 클론 제조사인 APS 와

PowerTools, Sonnet 등도 현재

탄자니아 보드를 채용한 클론을

제조하고 있다. 탄자니아 보드로는

현재 탄자니아와 탄자니아 2 보드가

나와 있는데, 애플의 파워 맥 7220

을 포함한 대부분의 제품은 탄자니아

보드를 사용하며 최근에 발표된

모토로라의 새로운 시스템인

스타맥스 5000과 5500(국내명

모토로라 5000/5500)만이

탄자니아 2 보드를 장착하고 있다.

탄자니아 보드의 특징은 이미 다른

기사를 통해 소개된 바 있으니,

여기서는 최근에 발표된 모토로라의

새로운 보드 탄자니아 2 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탄자니아 2 보드는

퀵타임과 퀵드로우 3D 그리고 DVD

를 지원하기 위하여 ATI 사의 RAGE

2 DVD 그래픽 칩셋을 사용한다.

또한 SCSI 버스는 SCSI-2 규격과

호환되며 다른 업체들도 잘 사용하지

않는 PC 형 플로피 드라이브

커넥터가 제거되었다. 또한 IDE

버스는 E-IDE 구조에 맞게 확장되어

하드디스크를 추가로 장착할 수 있게

되었고 전송 속도도 기존에 비해

30% 가량 향상되어 같은 RPM 의

하드디스크를 사용할 경우 SCSI

하드디스크를 장착했을 때와 거의

동일한 속도를 보여준다. 탄자니아

보드의 OS 는 현재 ‘탄자니아용 맥

OS 7.5.3’와 ‘맥 OS 7.6’이 있다.

7.5.5버전은 지원되지 않는다.

탄자니아의 보드의 특징은 보드의

사양이 상당히 PC 에 근접해 있으며

기존의 애플 제품에 비해 가격대가

저렴하게 책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8

월중 출시될 예정인 모토로라의

000과 5500 시리즈의 기본 사양은

5000 의 경우 파워피씨 603ev

275MHz 를 사용하며 기본 메모리

32MB EDO DRAM, 4.3GB E-IDE HDD, 16배속 SCSI 시디롬,

SCSI 집드라이브 내장, VRAM

2MB, 256K L2 캐시 등의

사양이며 5500 은 파워피씨 604e

200MHz 를 사용하며 기본 메모리

32MB EDO DRAM, 4.3GB E-IDE HDD, 16배속 SCSI 시디롬,

SCSI 집드라이브 내장, VRAM

4MB, 512K L2 캐시 등의

사양이다. 이 제품들은 탄자니아

보드의 규격 표준화 덕분에 가격을

낮출 수 있었는데, 앞으로 선보일

PPCP 보드도 낮은 가격대를

유지하면서 사양을 높여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바.새로운 PC 들

차세대 PC 를 쉽게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윤곽을 더듬어 보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는

편의상 3 가지로 분리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HW, 둘째는

OS 와 SW, 세째는 멀티미디어가

그것이다. 첫째 H/W. WINDOWS

를 선두로 한 GUI 의 일반화는

기존의 H/W규격으로 대응하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즉 텍스트

중심의 기존 PC HW규격을

그림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먼저

VESA 를 중심으로 모색되고 있는

로컬비디오버스의 표준방안이 그

하나이다. 그러나 업계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VESA 의 방안을 제치고

인텔, IBM, NCR 등의 PCI 가 손을

잡고 이들 나름의 PCI 를 발표해

새로운 표준 사움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의 ISA, EISA, MCA 를 대체해

나가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새로운 혼란이 찾아올지 아니면

통합된 표준안이 나올지 판단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둘째는 OS 와

SW. 먼저 살펴 보아야 할 곳은 ACE

이다. IBM, 인텔, 애플 등의

대기업을 배제하고 MS, DEC, 컴팩,

밉스, 실리콘 그래픽스 등이 참여하고

있는 이 그룹은 밉스의 R4000칩을

중심으로 인텔의 80X86 계열 칩의

지원, SCO UNIX 와 호환되는

WINDOWS NT 를 운영체계로 한

스펙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ACE

진영은 최근 분열의 조짐이 있어

이들의 계획이 성과를 거둘지

의문시되고 있다. 또한 IBM, 애플,

모토롤라가 손잡고 개발하고 있는

파워오픈도 차세대 PC표준을 위해 1

년후 발표를 앞두고 있다. DEC 는

자신의 알파칩에 사운을 건 모험을

하고 있다. 운영체계는 GUI 가 거의

기본으로 지원되고 있다. MS 의

윈도우즈와 윈도우즈NT, IBM,

애플, 모토롤라의 파워오픈, X

윈도우를 기반으로 한 UNIX 진영의

UI 나 OSF 도 작은 UNIX 도 차세대

PC 시장을 노리고 있다. 이외에도

솔라리스 2.0, 넥스트스텦 등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한

제한된 한 나라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한

소프트웨어의 개발을 수월하게 할

다국어지원코드의 개발도 SW 시장의

태풍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1990 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가 생겨난다. ??년 5

월 애플의 존 스컬리는 직접 뉴턴 의

프로토타입을 들고 나온다. 정보의

처리 및 검색과 통신이 모두

손바닥만한 컴퓨터에서 처리되는

휴대정보통신기기(PDA)의 개념을

제시해 나가면서 PDA 는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펜컴퓨터

펜은 키보드보다 강하다. 라는 새로운

격언을 유행시키고 있는 펜컴퓨터가

미래 PC 업계를 주도할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다. 펜컴퓨터는 현재 PC

에서 사용되고 있는 키보드 대신,

컴퓨터 사용자가 특수펜으로 컴퓨터

입력 내용을 직접 써 넣는 새로운

방식의 컴퓨터로 사용의 편리함이나

간편함이 최대한 강조된 미래형으로

지목되고 있다. 펜컴퓨터는 지난

1989 년 미국 컴퓨터업체 그리드

시스템즈사가 그리드패드를

선보이면서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왔다. 그후 펜컴퓨터는

컴퓨터보급이 확대되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되고 있는 현대인들의 키보드

조작에 대한 거부감이나 오랜

키보드작업으로 인한 가가종 질병을

없앨 수 있을 뿐 아니라 편리한

유저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첨단기술분야로 기대를 모으면서

일본의 쏘니, 캐논, 미국의 NCR 등

대형업체들이 신제품개발에 참여해

날로 시장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1992 년 상반기중에는

펜컴퓨터의 선두주자인

그리드시스템즈를 비롯 NEC, IBM

마이크로소프트(MS)사등

대형컴퓨터 업체들이 HW및 SW 를

발표할 예정이어서 올 상반기를

고비로 본격적인 시장체제가 확립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대형업체들이 신제품개발과 함께 펜

PC 시장개척에 나서고 있는 것은

그만큼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OS

로서도 MS 사의 펜PC 용 윈도우즈,

고 사의 펜포인트등 새로운 OS 의

지원도 확대될 예정이다. 이와 같이

많은 기업에서 펜컴퓨터 시장에

뛰어들자 그 가격도 급락하고 있다.

1992 년 4월부터 NEC 는

펜컴퓨터의 가격을 4 천 99 달러에서

3 천 50(?)달러로 1 천 달러나

인하했다. 또 포킷컴퓨터사와 PI

시스템즈사는 2 천달러이하의 저가형

시장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시장조사인 데이터 퀘스트사는

1992 년 20 만대 규모로 확대되어

휴대형컴퓨터시장의 약 10%를

차지할 것으로 내다 보았다. 또한

펜컴퓨터는 1995 년에는 연간

판매대수가 4 백만대가 4 백만대에

이를 것이며, 매출액도 1 백억달러

규모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펜컴퓨터의 주요 수요층은 역시

기업체의 외근직 사원, 출장이 잦은

영업사원이나 항상 움직이면서 일을

하는 병원의 간호사, 보험회사의

손해사정인 등을 중심으로 수요가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펜PC 가 잠재

수요층을 더욱 확대하고 동시에 미래

PC 산업의 핵심적인 분야로 올바른

자리매김을 위해서는 손으로 쓴

문자인식의 정확도를 높이는 기술적

보완이 시급한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2)PDA

PDA 는 언제 어느곳에서건 정보의

자유로운 검색과 교류는 물론

통신메신저로 역할을 하게된다.

펜입력기능으로 간단한

문서입력기능이 제공되며 자료를

저장하고 검색할 수 있으며

전화약속을 챙겨주는 개인

일정관리의 기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PDA 를 컴퓨터의 일종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연한 전화,

통신기능과 데이터를 처리하는

방식면에서 볼 때는 컴퓨터와 상당히

다른 가전의 영역에 속하기도 한다.

PDA 개발이 컴퓨터회사와

가전회사간의 공동작품인 것도 이

때문이다. PDA란 용어는 1992 년

5월, 애플컴퓨터가 뉴턴이라는

제품을 발표하면서 최초 등장했다.

당시 애플컴퓨터가 개발한 뉴턴은

컴퓨터와 통신기술, 가전기술이

종합된 개인정보단말기로

중대형컴퓨터와 컴퓨터의 혜택에서

소외된 일반 대중들의

개인정보단말기로 큰 호응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PDA 는

첨단 정보기기로 인식돼 영화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사회전반에 걸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PDA

의 등장시점이 1990 년대이긴

하지만 기반기술은 컴퓨터와 가전의

역사와 맞먹는 오랜 개발사를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미 제록스의

팔로알토연구소나 애플컴퓨터사는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컴퓨터 개발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해왔고 GUI나

음성인식기술 펜입력 인식기술 등에

관한 연구가 집약된 것이 PDA 기

때문이다. PDA 가 활용하고 있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역시 마우스나

폴더, 윈도우 등 매킨토시 윈도에서

유래한 GUI와 유사한

인터페이스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도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기술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이후 1992

년 12월 미국전화회사인 AT&T와

EO사도 공동으로 개인휴대형

정보단말기 EO를 개발해 PDA

시장의 본격적인 경쟁시대를 열었다.

일본 전자업체인 카시오사도 주머(Z

oomer)를 발표하면서 PDA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시점을 계기로 모토롤라, 팩벨 등

다수의 가전 반도체, 컴퓨터 업체들이

PDA 개발경쟁을 벌여오고 있다.

(3)기타

랩탑으로부터 발달된 휴대형 PC 는

노트북, 팜톱, 등으로 이어져 나날이

한층 사용하기 간편한 시스템이

개발되고 있다. 또한 92 년 5월에

애플컴퓨터사가 데이터 통신 기능을

갖춘 개인용 디지탈 정보기기(PDA)

뉴튼 을 발표한 이후 이부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질세라 IBM, 탠디, HP 등

경쟁업체도 PDA 와는 다른 이름을

가진 그러나 비슷한 기기들의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즉 퍼스널

커뮤니케이터 (IBM, EO 사), 개인용

정보기기(PIA) (HP),

개인용정보처리기(PIP) (탠디사)

등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지난 92

년 11월 컴덱스쇼에서는 다양한

관련 제품들이 선보였다. 신생기업인

EO 사의 퍼스널 커뮤니케이터는

펜입력, 팩스, E 메일, 셀룰러 통신

기능을 갖춘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IBM 도 93 년 중에 다양한 제품을

선보일것 이라고 발표했다. 탠디사도

개인용전자수첩의 기능을 강화하고

통신기능을 보강한 PIP 를 선보일

예정이다. HP 는 좋은 반응을 보인

팜탑PC 95LX 에 무선통신 기능을

강화한 2세대 95LX 를 93 년

상반기중 발표할 예정이다. 그러나

최근의 변화를 보면 기술 경쟁이라기

보다는 가격경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예전에는 대기업은

기술을 내세워 고가의 PC 를 팔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대기업 마저 저가

정책에 뛰어들어 가격에 의해

대기업과 소규모 기업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 졌다. 이러한 경쟁은

북미에서 시작되었으나, 일본에서도

불고 있으며 이는 미국에서와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사.새로운 경향 - WS 와 PC 간의 담

험물기

1990 년대에 들어 오면서 PC 나

WS 업계에는 새로운 플랫폼 을

둘러싸고 컴퓨터 업계에 큰 변화를

일으켜 오고 있다. 지금까지 이

분야를 주도해온 대형메이커나

개발회사가 새로운 플랫폼 구축을

위한 프로젝트를 차례차례 실행해

나가고 있고 이러한 활동이 본격화해

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점점

더해가고 있으며, 이들 프로젝트에

의한 제품들이 하나하나 선 보이기

시작했으며, 이들의 목표는 그 제품을

널리 보급하는 소위 업계 표준 이

되기 위한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따라서 각 제품이 실제 유저에게

어디까지 수용될 것인가에 따라, 소형

컴퓨터용 OS 의 세력판도가 크게

뒤바뀔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강하다.

현재 이는 크게 두가지 흐름으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인텔의 i486

등장이후 PC 의 성능이 두드러지게

향상되고 있다는 점과 PC 의 보급

대수가 RISC WS 에 비해 월등히

많아 UNIX 시장을 일시에 확대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기존 PC 의

성능향상과 UNIX 탑재를 주도하는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RISC WS 의

저가격화가 급속히 진해되는 점과

UNIX 유저들의 DOS

어플리케이션의 요구가 증가되는

점을 들어 RISC WS 에 PC 계 OS 를

탑재하려는 경향이다. 실질적으로는

현재 4 개의 프로젝트가 새로운 OS

를 개발하기 위해 가동되고 있다.

첫째는 DEC 와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ACE 그룹에 의한 새로운 OS 와

RISC 프로세서를 사용한 하드웨어

개발을 추진하는 모임이다. 두번째는

USL(UNIX 시스템 라이브러리)의

PC 용 OS, UNIX Desktop (

개발코드 Destiny)의 개발을

추진하는 모임이다. 세째는

썬마이크로시스템즈로부터 분리된

썬소프트의 새로운 OS 인 Solaris

를 중심으로한 모임이다. 네째는

IBM과 애플 컴퓨터의 RISC

프로세서를 사용한 하드웨어와

새로운 OS 를 개발하는

PowerOpen 이 있다. 이들은 모두

소형컴퓨터용의 새로운 OS 를

개발하는 것이 중점 목표이지만,

ACE 와 PowerOpen 에는

하드웨어의 개발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ACE 기준 OS 와 Destiny,

Solaris 최근판이 1992 년부터

출하되고 있으며, PowerOpen 을

표준으로하는 제품은 1993 년말부터

1994 년초 사이에 IBM과 애플

양사가 출하할 에정이다. 이들

프로젝트의 면면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큰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OS 가

가동하는 하드웨어의 대상이 PC 와

WS 의 벽을 허물고 있다. 지금까지

PC 는 애플의 매킨도시를 제외하면,

IBM PC 가 사실상 세계 표준이었다.

또 인텔의 ix86칩을 사용한

하드웨어에서 DOS 나 윈도우즈를

실현시키는 것으로 보아도 이견이

없다. 그리고 어크스테이션 의

세계에서는 예전에는 모토로라의

680x0칩을 기본으로 했으나,

최근에는 RISC칩을 하드에

채용하는 추세가 늘어나고 있다. OS

는 UI (UNIX 인터내셔날)이나 OSF (Open Software Foundation)의 표준 UNIX, 또는 이들을

베이스로 한 각 메이커의 독자 UNIX

이다. 이 두 가지가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업계구도였다. 그런데

앞에서 들었던 프로젝트들은 UNIX

를 워크스테이션망이 아니라 PC

에서도 동작시킬 수 있다든가, 반대로

윈도우즈와 같은 PC 용 OS 를

워크스테이션에서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특이한 점은 PC 용 UNIX 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i486 등 인텔계

프로세서의 성능이 향상되어 RISC

에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으며, PC 의 보급이 RISC

워크스테이션에 비해 월등히 많기

때문에 UNIX 시장을 일거에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ACE 에

참여한 SCO (산타 클레이즈

오퍼레이션)의 ODT (Open

Desktop), USL 의 Destiny,

썬소프트의 Solaris 2.0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인텔의 X86 을 탑재한

머신의 총 출하대수는 7 천만대인데

반해 선의 SPARC 계

워크스테이션은 50 만대에 불과하며,

RISC 워크스테이션을 모두 합해도,

2 백만대에 불과한 것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결국 벤더는 7 천만대인

인텔의 칩을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하고 있다. ACE 는 MIPS 컴퓨터와

IBM 클론 PC 메이커 1 위인 컴팩,

DEC, SCO (PC 에서의 유닉스 OS

에서의 베스트 셀러 벤더),

마이크로소프트, NEC 등이 주창하는

것으로 90 개사 이상이 멤버로

소속되어 있다. 반대로 ACE 는 표준

OS 의 하나인 마이크로소프트의

Windows NT 를 밉스 컴퓨터

시스템즈의 RISC 프로세서에서도

가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산이다.

IBM과 애플은 PowerOpen

프로젝트에서 RISC 에서 움직이는

UNIX 에 매킨도시의 유저

인터페이스를 덧붙일 계획이다. 각

프로젝트는 공통점도 있다. 그러한

것으로서는 프로세서에 관계없이

공통의 API (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를

갖는다는 점과 UNIX 와 주변의

관련된 소프트웨어의 바이너리를

패키지한 시링크랩 제품으로

판매하려는 점, 기존의 PC 용

어플리케이션의 바이너리를 그대로

OS 에서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2.슈퍼컴퓨터와 인공지능

가.크레이의 초병렬컴퓨터

세계최대의 수퍼컴퓨터업체인 크레이리서치사는

초병렬컴퓨터를 개발하는 MPP (Massive Parallel

Processor)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92 년중 크레이는 제

1 호기를 완성하고 외부기관의 성능 점검을 거쳐 93 년 2/4

분기중 시판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 수퍼컴은 최대 1 천 24

대의 프로세서 유닛을 연결했을 경우 최고 성능이 3 백기가

플롭스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실제 성능면에서도 1

백기가플롭스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MPP 계획은 95

년까지 4 천 96 프로세서 유닛을 연결한 1 테라플롭스를,

97 년가지는 실효성능면에서도 1 테라플롭스 l

초병렬컴퓨터를 개발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이때

사용하는 프로세서는 DEC 의 64 비트 프로세서인 알파

칩이다. 이같은 크레이의 개발계획을 뒤쫓아 일본업체들도

점차 신기종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그 선발주자는

후지쯔이다. 92 년 9월 2 백 22 개의 캘륨비소를 채용한

프로세서 유닛을 연결, 3 백 55 기가플롭스의 성능을 가진

VPP 500 을 발표했다. 이는 그동안 수위를 차지했던

히타치의 10배가 넘는 빠른 속도이다. 후지쯔는

테라플롭스급의 개발에도 작신감을 보이고 있다. 즉 1-2

년안에 6 백기가플롭스의 개발이 가능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히타치는 92 년 4월 시판한 S3800 은 4 개의

CPU 로 구성된 8 기가플롭스제품이다. 히타치는 95-97

년경 테라비트급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NEC 는 90 년에

발표한 SX-3 가 4 개의 CPU 로 구성된 5.5 기가플롭스인

슈퍼컴퓨터를 23 대 이상 납품한 실적을 가지고 있다. 92

년 1월에는 피크시 25 기가플롭스의 속도를 내는

후속기종인 SX-3R 을 개발했다. NEC 도 4-5 년후에

테라비트급의 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나.컴퓨터와 인간의 대결

컴퓨터는 지능을 갖고 있는가? 지능이 있다면 과연 어느

정도인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일부나마 풀어 보려고 1996 년 2월 세계최대의

컴퓨터 제조사 IBM 이 컴퓨터 탄생 50 주년을 기념하는

인간-컴퓨터 체스대결 행사를 개최했다. 사람과 컴퓨터가

자웅을 겨루는 1996 년의 역사적 대결에서는 세계최강의

체스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가 6 전 3승2무1패로 IBM

의 수퍼컴퓨터 「딥 블루」를 물리쳤다. 당시 카스파로프는

이 싸움을 『인간의 통찰력과 무시무시한 「계산기계」의

야수적 힘과의 대결』이라고 자평했었다. 그러나 5월 11

일 끝난 1997 년의 대결에서는 카스파로프가 계산기계에

지고 말았다. 이번에 동원된 딥 블루는 지난해 패했던

기종보다 연산속도가 2배이상 향상돼 초당 2억개의

행마법을 검토할 수 있다. 딥 블루 제작.개발팀을

지휘하고있는 컴퓨터의 귀재 C.J.탄은 이번 승리에 대해

『인간의 지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며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릴까봐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는 『

지금부터 100 년뒤 사람들은 바로 오늘을 「정보화시대의

기원일」로 부를 것』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역사적으로 이번 일은 인간의 달착륙이나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과 마찬가지』라고 추켜세웠다.

 3.통신

가.정보통신

또한 완전한 디지탈영상통신의 기초라할 수 있는 비디오

폰의 규격이 1990 년 CCITT 에서 관련규격이 확정됨에

따라 64 비트급 비디오 폰에 대한 경쟁도 치열해 지고 있다.

미국은 1992 년부터 7 개 지역벨사(BOC)가 동시에

SMDS(Switched Multi mega -bit Data Service) 를 실시, 원격진료, 패션정보, 원거리부동산쇼핑,

관광정보검색 등에 활용하게 된다. 이 서비스는 B-ISDN 의

필요요소인 비동기식전달방식(ATM : Asynchronous

Transfer Mode)의 전이단계로 1994 년까지 전국적인

DS3급 통신망을 확보하고 1996 년에는 완벽한 B-ISDN

을 구축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1988 년부터 INS-

NET 64 와 INS-NET 1500 이란 2 종의 서비스를

가동중이다. 1991 년말 일본의 한 보고서는 1 천 3

백여개의 일본내 대기업중 약 45%가 NTT 의 INS네트 에

가입해 있으며, 1992 년에는 그 가입이 급증해 신청후

기다리고 있는 기업이 20%나 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1990 년대 후반에 이미지통신혁명 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21세기 통신서비스의 목표를 VIP(visual

intelligence & personal)로 설정, 이미 다양한 N-

ISDN 서비스를 개발했고, 각종 첨단 단말기를 개발해

미국의 ISDN 시장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일본의 N-ISDN

이 이처럼 고속성장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다양한

부가서비스와 고기능 단말기를 대량보급했기 때문으로

분석되며, 통신망과 단말기가 모두 1990 년대 후반에

본격화될 B-ISDN과도 쉽게 연결해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돼 확장성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B-ISDN

망이 본격적으로 구축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B-ISDN 의 본격구축시까지

발생할 광대역 서비스의 조기수용을 위해서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단계별 구축방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기업가입자군은 지역적으로 산재한 근거리 통신망(LAN :

local area network)들을 공중망 개념으로

상호접속시켜 초기의 고속데이터 통신서비스를 제공하는

광역고속정보통신망(MAN : Metorpolitan Area

Network)의 형태가 먼저 구축될 것으로 전망되며, B-

ISDN 의 본격구축 이전에는 광역고속정보통신망(MAN :

Metorpolitan Area Network)이 기업군 가입자의

지역적으로 발생하는 고속정보통신의 수용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가정은 CATV(케이블 TV)망으로 시작되어

구축되는 CATV 전송로를 B-ISDN 의 전송로로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B-ISDN 의 본격구축 단계에서는 바로 이

광역고속정보통신망(MAN : Metorpolitan Area

Network)과 CATV망이 가입자의 접속망 기능을

제공하는 형태로 발전할 전망이다. 최근 유무선 통신기술,

서비스 및 표준의 급격한 발달과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UN

의 전문기구인 국제전기통신연합(ITU :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이 92 년 12월에

제네바에서 가졌던 추가대표자회의에서 크게 개편되었다.

즉 기존에 전신전화에 관련된 표준을 권고하던 CCITT 와

무선부문의 표준을 관장하던 국제무선통신자문위원회

(CCIR : comit  consultatif international de radiocommunication)이 기구의 효율화를 기하기 위해

3 분야로 통폐합하여 개발부문, 전파통신부문 및

표준화부문으로 대폭체제를 바꾸었다. 특히 무선부문을

강화함은 물론 무선부문의 세계표준화를 한층 더 강화하고,

유선통신과의 효과적인 연계를 위해 표준화부문을 한 부문

(sector)으로 묶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세계 이동통신의

표준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활동으로 CCIR 이

권고사항으로 제안을 추진해 오고 있는 단일 규격의

세계이동통신의 표준인 장래공중육상이동통신 (FPLMTS : Future Public Land Mobile Telecommunication System)이 있다. 이를 위해 CCIR 은 10 개의

WG(Working Group)이 있고, 1997 년 표준 제정을

목표로 많은 나라들의 대표들이 적극 참가하고 있다.

나.ATM 과 ISDN

데이타통신 부문의 기술발전 목표는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얼마나 빠른 시간안에 오류없이 주고받을 수 있느냐'로

요약할 수 있다. 대표적인 데이터통신용 네트웍 장비들인

패킷교환기나 T1/E1급 다중화장치들의 신기술개발 추세도

대부분 이러한 기능에 집중되고 있다. 이중 가장 현실화된

기술이 '패스트패킷'이라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패킷통신의

속도를 현저하게 개선시킨 기술로 일부 업체에서 상용화돼

패킷교환기, T1, 다중화장치등에 적용되고 있다.

데이타통신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기술은 최근에

개발되고 있는 ATM(비동기식 전송방식) 기술이다. 이는

회선모드전송과 패킷모드 전송방식의 장점만을 취사선택,

온갖 통신방식을 자유자재로 수용하는 차세대 통신네트웍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이 기술이 완전 실용화할 경우 현재

음성, 데이터, 화상, 원격검침등의 통신이 별도의 기기나

네트웍을 통하고 잇는 것과는 달리 하나의 망으로 처리할 수

있게 돼 통신망의 일대 혁신을 이루게 될 것이다. ATM

기술의 골자는 정보전달의 기본단위를 53 바이트의 ATM

셀이라는 단위로 쪼개 정보의 크기에 따라 셀의 수를 늘렸다

줄였다하며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 기술은 데이타

통신 기술의 발전을 주도하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 광대역

ISDN 시대의 핵심기술로 발전하리라 생각된다.

유럽은 B-ISDN 의 구현을 위해 범유럽 RASE 프로젝트를

구현전략, 기술개발, 응용도구개발등 3 단계로 수행하고

있으며, 현재 기술개발의 단계에 있고 지난해 3 단계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시범서비스를 계획하고 있다.

오스레일리아와 프랑스는 근거리통신망(LAN)간의 접속을

주목적으로 하는 광역고속정보통신망 (MAN :

metorpolitan area network)을 구축, 수십메가급

고속데이터전송서비스를 실시하고 있어 B-ISDN 시대를

대비한 고속디지탈 통신망 확산에 기폭제가 되고 있다. 특히

이 서비스는 B-ISDN과 연결이 가능해 확장성이 뛰어나며

전송속도도 매우 빨라 동화상처리가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미국은 92 년부터 7 개 지역벨사(BOC)가 동시에

SMDS(Switched Multi megeabit Data Service)를 실시, 원격진료, 패션정보, 원거리부동산 쇼핑,

관광정보검색 등에 활용하게 된다. 이 서비스는 B-ISDN 의

필요 요소인 ATM 의 전이단계로 1994 년까지 전국적인

DS3급 통신망을 확보하고 1996 년에는 완벽한 B-ISDN

을 구축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88 년부터 'INS-NET

64'와 'INS-NET 1500'이란 2 종의 서비스를 가동중이다.

91 년말 일본의 한 보고서는 1,300 여개의 일본내

대기업중 약45%가 NTT 의 'INS네트'에 가입해 있으며,

92 년에는 그 가입이 급증해 신청후 기다리고 있는 기업이

20%나 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90 년대 후반에

'이미지통신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21세기 통신

서비스의 목표를 VIP(visual intelligence &

personal)로 설정, 이미 다양한 N-ISDN 서비스를

개발했고, 각종 첨단 단말기를 개발해 미국의 ISDN 시장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일본의 N-ISDN 이 이처럼 고속성장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다양한 부가서비스와 고기능 단말기를

대량보급했기 때문으로 분석되며, 통신망과 단말기가 모두

1990 년대 후반에 본격화될 B-ISDN과도 쉽게 연결해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돼 확장성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B-ISDN망이 본격적으로 구축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B-ISDN 의

본격구축시까지 발생할 광대역 서비스의 조기수용을

위해서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단계별 구축방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기업가입자군은 지역적으로 산재한 LAN(근거리

통신망)들을 공중망 개념으로 상호접속시켜 초기의

고속데이터 통신서비스를 제공하는 MAN(metropolitan

area network)의 형태가 먼저 구축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B-ISDN 의 본격구축 이전에는 MAN 이 기업군

가입자의 지역적으로 발생하는 고속정보통신의 수용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가정은 CATV(케이블 TV)

망으로 시작되어 구축되는 CATV 전송로를 B-ISDN 의

전송로로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B-ISDN 의 본격구축

단계에서는 바로 이 MAN과 CATV망이 가입자의 접속망

기능을 제공하는 형태로 발전할 전망이다.

다.위성통신

(1)위성통신의 시작

위성통신은 1945 년 영국의 클라크가 위성통신 이론을

제시한 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티니크(Sputinik)

1 호를 발사하면서 시작됐다. 그후 58 년 미국이 스코어

(SCORE) 위성을 발사, 그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성탄

메세지를 미국 전역에 위성중계 하면서 통신위성의 저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들 위성은 지구 상공의 한 지점에

위치하지 않고 지구 상공의 일정 궤도를 회전을 해 일정

시간만 통신에 이용할 수 밖에 없는 단점이 있다. 이에 따라

제안된 것이 정지위성이다. 최초의 정지위성은 63 년

미국이 발사한 신콤(SYNCOM)이다. 이러한 통신 중계

위성은 앞을 다투어 쏘아 올려 현재는 200 여개의

통신위성이 지구상공에서 정보중계의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통신위성은 크게 위성본체기술, 다원접속기술,

지구국기술등 3 가지 핵심기술로 나눌 수 있다. 이중 통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다원접속기술 및 지구국기술은 하나의

위성을 여러곳의 지구국과 동시에 교신할 수 있도록

통신주파수를 변조하고 이를 관리하는 기술로 70 년대

전반까지는 주로 주파수 분할방식을 이용했으나, 이후에는

시분할 다주엊속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2)위성통신의 상업화

세계적인 이동통신 시장에서 모토롤러는 일본의 경쟁사들과

그리고 스웨덴의 에릭슨사와 더 많은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에릭슨은 지멘스, 알카텔, 필립스 등과 같은

다른 유럽회사들과 제휴하여 유럽전역을 커버하는

이동통신망을 개발하고 있다. 그리고 2000 년까지

GMS(Global for Mobile Communication, 이동통신을 통한 세계적인 시스템)을 통해 이동통신망을

세계화하려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 어느곳에

있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동전화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GMS 의 성공은 유럽회사의 영향력 강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의 모토롤라도 같은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리듐(Iridium)이라고 불리우는 이 계획은 77 개의

위성을 연결하여 회사 자체의 세계적인 이동통신망을

구성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모톨라는 GSM

과 마찬가지로 완전 디지탈방식을 채택할 것이며, 1996

년부터 초기 서비스를 실시, 97 년부터는 전세계를

연결하는 본격적인 서비스에 착수할 게획이다. 그러나 최근

이를 다소 수정하여 66 개의 위성을 통한 시스템으로

바꾸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모토롤라 뿐만 아니라

신규이동통신사업자인 샐샛사가 모토롤라의 이리듐

프로젝트에 도전을 하고 있다. 샐샛사는 FCC 의 승인을

받는대로 93 년부터 지상통신망을 96 년에는 2 개의

정지인공위성을 발사, 위성통신망을 가동시킬 계획이다.

그런데 샐샛사의 도전은 도다른 측면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CDMA 와 TDMA 간의 대결이 그것이다. 기존의

TDMA 에 대항해 전력소모가 적고 회선용량도 2배이상

늘릴 수 있는 CDMA 를 채택하기로 함으로서 CDMA 와

TDMA 논쟁에 또 다른 마당을 제공해 주었다. 이외에도

러럴스페이스사와 퀄컴사도 글로벌스타계획 을 수립,

모토롤라와 동일한 서비스 실시게획을 가지고 있고, TRW

및 휴즈항공 등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도 NTT 에서 N-STAR 를 이용한 시스템을

추진중이다. 미국이 오비틀 사이언스사는 선박간

이동통신을 위한 오브컴 프로젝트 를 추진, 20 개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계획이다. 한편 세계무선통신

주관청회의(WARC92)에서는 저궤도 위성의 퍼스널

통신에 대한 중요성을 확인하고 이와 관련된 주파수를

할당했다. 모토롤라는 가입자용 기기부문에도 활발히

투자하고 있다. 현재 모토롤라는 독일의 만네스만

컨소시엄에서 운용되고 있는 GSM 방식의 디지탈

이동통신망을 위한 가입자용 단말기를 공급하고 있다.

세계최초의 디지탈 셀룰러 전화기인 모토롤라 GSM 은

무게가 5 파운드이며 가입자에 대한 정보를 담은

스마트카드 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

스마트카드를 사용하면 독일내 모든 GSM 방식전화기를

사용할 수 있다. 모토롤라는 오는 94 년부터 미국 최초의

개인통신서비스용 단말기인 PPS-800 을 시판할 예정이다.

이 전화기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으며, 기존

애널로그 방식은 물론 TDMA(시분할다중접속) 및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의 디지탈 통신망과도

호환성을 갖추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AT&T 도

개인통신서비스용 기기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와

동시에 AT&T 는 자사의 이동통신업 진출을 금지한 84 년의

지역벨사 분리, 독립시킨데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개인이동통신서비스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모토롤라와

AT&T 이외에도 이동통신기기개발을 추진중인 업체는

펜실베니아주의 IMM, 캘리포니아 서니베일의 사일링크,

퀄컴사와 공동 개발을 추진중인 핀란드의 노키아 모비라

등이 있다. GMS과 이리듐 계획 모두가 인공위성을 통한

통신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위성통신의 시장전망은 어느

때보다 밝아지고 있다. 이점을 의식한 일본 정부는 믹구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기술에 기반한 위성을

개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일본은 자체

개발중인 H-2 위성발사대의 완성을 서두르고 있다. 이것이

완성되면, 미국으 타이탄(Titan) 로킷, 유럽의 아리안

(Arian) 로킷과 격렬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위성을 통한 직접방송(DBS: Direct Broadcasting by

Satellite)의 경우를 보면, 일본이 1984 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이래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이미

위성통신을 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의 경우, 행운과

불행의 쌍곡선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비교적

행운만을 경험하고 있다. 즉 섬과 산악지대가 많은

일본에서는 위성통신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위성통신은 구미 등의 선진국 뿐 아니라 도서국가등에서

활발히 모색되고 검토되고 있다. 일본은 84 년 과학위성을

쏘아 올린 이후 2 년에 한번 꼴로 통신,과학위성을 번갈아

쏘아올리고 있는데 이를 통신에 이용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90 년 아시아샛1 호로

국내에도 알려진 홍콩의 스타 TV 는 94 년에 2 호 위성을

쏘아 올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 대만도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1997 년 새「이정표」가 하늘에 올려진다.

정보통신 혁명의 시대를 알리는 이정표. 오는 19 일까지

지상 7 백 80㎞ 궤도에 올려질 이리듐의 통신위성 3 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통신의 개념과 역사가 새롭게 바뀐다.

40 여년전 에코1 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지구상공에

올려진 통신위성 방송위성 기상위성 등은 줄잡아 4 천여대.

90 년대 후반들어 지구궤도의 위성식구는 1 년에 3

백여대가 추가되고 있다. 이리듐 위성은 지금까지의

위성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지구촌 어디를 가더라도

손바닥의 전화기 하나로 어느곳의 누구라도 불러낼수 있는

「단일통화권」을 겨냥한다. 태평양을 항해하며,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하며 또는 비행기를 타고가며 직장이나

정든 친구에게 언제든 교신할 수 있는 시대를 연다. 위성을

이용한 개인휴대통신은 과거에도 가능했다. 그러나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고, 높은 궤도의 위성과 연결하려면

휴대장비의 크기가 워낙 커져 실용화가 어려웠을 뿐이다.

이리듐은 「가벼운 단말기」로 최초의 범세계개인휴대통신

(GMPCS)시대를 연다. 우선 첨단의 반도체 통신기술을

이용, 단말기를 일반 휴대전화크기로 줄였다. 단말기 값은

98 년 2 천 5 백∼3 천달러(약2 백 10 만∼2 백 50 만원)

선으로 공급할 예정. 이 가격은 본격적으로 GMPCS 가

대중화될 2000 년경 절반 이하로 떨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요금은 기존 무선전화에 비해 상당히 비싼 편이다. 분당

통화료는 세계 어느 곳과 통화하더라도 3 달러(한화 2 천 5

백원). 유선전화나 기존 휴대전화(국내기준)에 비해

네배가량 비싼 셈이다. 비싼 통화료는 이리듐의 전략이기도

하다. 『지금의 무선전화와 GMPCS 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질적 차이가 있다』고 가격차별화를 시도한다.

가입자수도 세계적으로 2000 년 66 만명(무선호출기 27

만명), 2005 년 2 백 43 만명(〃 73 만명) 정도로

잡고있다. 국제적으로 「고급 이용자」만을 상대하겠다는

전략이다. 국내의 수요는 2000 년 3 만여명, 2005 년 30

만명에 이를 것으로 이리듐코리아는 예상하고 있다.

이리듐위성은 1997 년안으로 63 대, 1998 년초 10 대 등

모두 73 대(예비위성 7 대)가 발사된다. 1 년에 하나의

목적을 위해 가장 많은 위성을 발사하는 신기록도 세우는

셈이다. 시험운용을 거쳐 98 년 9월부터는 상용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 전화와 무선호출은 물론 팩시밀리와

데이터통신 서비스도 함께 시작한다. 이리듐위성은 6 개의

궤도에 11 대(예비위성 제외)씩이 배치돼 지구를 쏜살같이

선회한다. 위성의 이동속도는 시속 2 만 7 천㎞. 불과 1 시간

40 분만에 지구 한바퀴를 돈다. 마치 하늘에 거미줄을

쳐놓은 듯 중계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리듐은 특히 지진

화재 등 자연재해에도 통화가 가능하도록 지상관문국

의존도를 줄이고 「위성간 중계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남미 최남단 도시 푼타레나스에서 설악산 정상으로 전화를

할 경우 푼타레나스의 GMPCS 단말기∼남미 위성∼태평양

위성∼한반도 위성∼설악산의 GMPCS 단말기로

직접중계하는 방식이다. 하늘의 「징검다리」만으로

단말기끼리 잇는 것이다. 이리듐위성은 궤도가 낮아진만큼

수명이 5 년으로 짧아졌다. 따라서 위성을 대량생산해야 할

입장. 이를 위해 이리듐사는 위성제작 과정에 자동차를

만들어낼 때 쓰이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도입해

종전 2,3 개월 걸리던 위성조립 기간을 1 주일로 대폭

단축하는 신기원을 이뤘다. 「8816과 8817」.

국제무선통신연맹(ITU) 표준국은 지난해 12월 GMPCS

서비스로는 처음 이리듐에 서비스번호를 부여했다. 각

나라에 국제전화용 고유번호를 배정하듯 이 두가지

식별번호를 이리듐에 붙여준 것이다. 결국 「이리듐」은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은 셈이다.

"새 기술 새 세상"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통화권"

"저궤도 위성통신내년 말 서비스 개시"

산꼭대기든 사막 한가운데든 망망대해든 전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현재의 이동 전화기만한 단말기 하나만 있으면

원하는 사람과 간단하게 통화할 수 있다. 또한 인터넷이나

PC 통신을 통해 메일을 주고받거나 자료를 보내는 등의

데이터 통신도 전화선을 찾아 연결할 필요 없이 바로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결코 먼 훗날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내년 말이면 저궤도 위성통신을 통해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통화권으로 연결되면서 가능해질 청사진이다. 모뎀과

전화망을 이용한 데이터 통신이 등장하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PC 통신과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이제 데이터

통신은 PC 를 사용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컴퓨터나 PDA, 팩스 등과 같은 각종

정보통신기기를 사용해 전화선과 유선망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는 데는 큰 제약이 따른다. 이러한 정보기기를

사용하고자 하는 장소에 전화선이나 전용 회선과 같은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는 점이다. 팜톱이나

HPC, PDA 와 같은 소형 정보기기가 등장해 모빌 컴퓨터

환경의 시대가 열렸다고는 하지만, 데이터 통신을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유선 네트워크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 나라나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이동 전화나 PCS

와 같은 셀룰러 전화망이나 무선 데이터 전용망을 통해 유선

통신망의 한계를 극복해 좀더 자유로운 통신 환경 이용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 역시 대도시 주변이나 고속도로 등

인구 유동이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진 기지국의 통화권

내에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원하는 정보를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얻고 교환할 수 있는 세상을

‘정보통신’ 혹은 ‘정보화’ 사회라고 정의한다면, 이러한 ‘

어디서나’에 해당하는 공간적 제약의 해결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편리함과 자유로움을 가져다 주는 정보통신 혹은

정보화 사회를 앞당길 것이다. 불과 4∼5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정보통신 환경에서의 공간적 제약 해결은 상당

기간이 필요한 멋 훗날의 꿈같은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불과 1∼2 년 후면 현실로 등장해 그야말로

꿈만 같던 일들이 가능한 세상이 펼쳐지게 된다. 바로

저궤도 위성통신 시스템을 이용한 위성이동통신 서비스가

내년 말이면 상용화되어 이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3)위성통신의 현주소

1965 년 최초의 상업용 통신 위성인 인텔샛(INTELSAT)

1 호기가 발사 되면서 시작된 위성통신의 역사는 30 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통신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지구 상공에는 국제 전화나

TV 중계 등에 이용되는 인텔샛, 원양 어선과 같은 선박과의

통신에 사용되는 국제해사위성통신 시스템인 인마샛

(INMARSAT) 등의 통신 위성이 가동되고 있다. 또한 우리

나라의 무궁화 위성처럼 주로 자국 내에서 다양한 위성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이용되는 지역 통신 위성이 미국,

유럽, 일본 등의 국가에서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국제 및

지역 통신에 사용되는 위성만도 수백 기에 이르고 해마다

새로운 위성이 발사되고 있어, 바야흐로 통신 위성의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위성통신 서비스의

등장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던 일들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에 많은 변화와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다. 통신

위성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운동 경기를

가정에서 TV 를 통해 편안히 볼 수 있는 것이나,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사람과 언제든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통신 위성을

이용해 본사와 각 지사 간에 고속의 데이터 통신이나 화상

회의, 사내 TV 방송과 같은 멀티미디어 통신이 가능한 기업

내 종합 통신망을 구축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위성을

통한 학교, 학원, 교회에서의 원격 강의나 원격 설교도

기존의 유선 통신망을 이용하는 것보다 간단하게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해저 케이블에 문제가

생겼을 때 우회 통신망으로 활용하거나, 지진, 홍수 등의

비상 재해시 긴급 통신망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등, 통신

위성을 통한 다양한 서비스가 활용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통신 위성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고품질의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많은 나라에서

위성 보유 경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위성통신 시스템은 크게 지상의 지구국과 중계기가 탑재된

통신 위성으로 구축된다. 지구국은 공중 전화망(PSTN)과

같은 다른 통신망과 연결되어 이들 망으로부터 온 정보를

통신 위성으로 송신하거나, 위성으로부터 중계된 전파를

수신해 전화망이나 방송국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통신

위성은 지구국으로부터 받은 전파를 중계기를 통해 증폭한

후, 직접 전파가 전달되지 않는 지역에 있는 다른

지구국으로 보내주게 된다.통신 위성은

GEO(Geostationary Earth Orbit, 정지 궤도)라

불리는 정지 위성과, Non-GEO 라 불리는 비정지 궤도

위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방송 및 통신 위성은 정지 궤도 위성으로, 지구 상공 3 만

6,000㎞에서 지구의 자전 속도와 같은 시속 1 만 1,000㎞

의 속도로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 따라서 항상 일정한

위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정지 궤도 위성이라

불린다. 정지 궤도 위성은 한 개의 위성으로 지구 전 지역의

1/3 을 커버할 수 있다. 따라서 세 개의 위성만 있으면

전세계를 커버하는 위성통신 서비스가 가능하다. 지역 통신

위성의 경우에도 위성 하나면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자국의

영토를 커버할 수 있다. 현재 가동 중인 우리 나라의 무

궁화호 위성도 동경 116 도 상공에 떠 있는 정지 궤도

위성이다. 정지 위성은 적은 수의 위성으로 넓은 지역을

커버할 수 있어 국제 통신 및 방송 중계용은 물론, 한 나라

안에서의 다양한 위성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많이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정지 위성은 고도가 높아전파가

전달되는 동안 감쇄가 많이 일어나 전파가 약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위성이나 지상 안테나의 크기가 커져야 하고,

위성에 탑재된 중계기의 출력 역시 높아야 한다. 마찬가지

원리로 지상에서 위성으로 전파를 보내는 경우에도 역시 큰

안테나와 높은 출력을 가진 지구국이나 기지국 또는

단말기가 요구된다. 물론 이러한 정지 위성을 통한 위성

휴대 전화 서비스가 이미 상용화되어 있기도 하다. 이

서비스는 ‘인마세트 미니-M’이란 이름으로 국내에서도

서비스되고 있는데, 휴대 전화라고는 하지만 노트북만한

크기에 2kg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단말기를 사용한다.

이보다 작은 지금의 휴대 전화와 같은 소형 단말기로

위성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낮은 고도의 위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위성의 고도를 낮게 하면 작은 안테나와 적은

출력의 단말기를 가지고도 통신 위성을 통한 통신 서비스가

가능하다. 그런데 지구가 인공위성을 끌어당기는 인력과

인공위성이 지구의 주위를 공전하며 멀어지려는 원심력의

크기가 일치해야 인공위성이 지구와 일정 고도를 유지할 수

있다. 인공위성의 고도가 낮아지면 인력의 크기가 커지기

때문에 인공위성의 원심력 또한 커져야 한다. 그러려면 정지

위성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지구 주위를 돌아야 하므로

수십분에서 수시간의 공전 주기를 갖게 된다. 따라서

지구에서 본다면 이들 위성은 계속해서 지구 주위를 돌게

되므로 비정지 위성이라고 부른다. 비정지 위성은 위성의

고도에 따라 저궤도(LEO: Low Earth Orbit), 중궤도

(MEO: Midium), 고궤도(HEO: High Earth Orbit)로

나누어지지만, 편의상 국제전기통신연합(ITU: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에서는

비정지 궤도를 통한 위성통신 서비스를 저궤도 위성통신

이라고 통칭하고 있다. 최근에는 저궤도 위성통신 시스템의

구분이 고도뿐만 아니라 사용 주파수대와 제공 서비스에

따라 리틀 LEO 와 빅 LEO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편 ITU

에서는 1996 년 이전까지 궤도와 서비스에 따른 구분을

통해 세계 위성이동통신의 범위를 빅 LEO 에 국한할 것을

논의해 왔다. 그러나 현재는 리틀 LEO, 정지 위성을

이용하는 전세계 위성이동통신(GEO MSS: Mobile

Satellite System), 광대역 LEO 등 모든 종류의

위성이동통신 시스템을 통합해 범세계 위성이동통신

(GMPCS)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4)저궤도 위성통신의 특징

저궤도 위성통신 시스템을 통한 이동통신 서비스가 차세대

이동통신 서비스로 주목을 받으면서 현재 전세계적으로

추진 중인 저궤도 위성통신프로젝트만도 수십 종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저궤도 위성통신 프로젝트들은 고도, 사용

주파수, 서비스 종류에 따라 시스템 구성이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다. 우선 지구 주위를 수시간 단위로 빠르게 돌게

되므로 정지 위성 시스템에 비해 많은 수의 위성이

필요하다. 정지 위성의 경우는 항상 고정된 위치에 있게

되므로 해당 지역에서 위성을 이용한 통신이 언제나

가능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비정지 궤도의

위성 시스템에서는 위성이 서비스 지역을 벗어나게 되면

통신이 불가능하므로 계속해서 다른 위성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저궤도 위성통신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같은 궤도에만도 많게는 수십 개의

위성이 필요해, 지구 전체를 서비스권으로 하려면 적게는

수십 개에서 많게는 수백 개의 위성이 필요하게 된다(그림 1

참조). 또한 위성의 수명도 정지 궤도 위성에 비해 줄어들게

되어, 위성통신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위성을

발사해 수명이 다한 위성과 교체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위성통신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요구된다. 현재 저궤도 위성통신 시스템을 주관하고 있는

선진국의 통신업체들은 각국의 통신업체와 컨소시엄을

형성해 사업 비용을 조달하고, 해당 지역의 사업권을 할당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두 번째는 기존의 정지

위성의 경우처럼 시간 지연에 따른 통화 지연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3 만 6,000㎞ 상공에 떠 있는 정지

위성은 고도가 높기 때문에 지상에서 발사된 전파가 위성의

중계기를 거쳐 다시 상대편 지구국에 도달하기까지 7 만 ㎞

를 여행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약 0.5 초 정도의 시간

지연이 발생한다. 따라서 통신 위성으로 국제 전화 회선이

구성된 국가와 전화 통화를 할 경우 이러한 시간 지연으로

조금씩 통화가 중단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저궤도 위성의

경우는 정지 위성보다 훨씬 낮은 500∼1 만 ㎞ 고도를

사용하게 되므로 이러한 통화지연 현상이 훨씬 덜해

자연스런 통화가 가능하다. 세 번째는 다중 빔(Multi

Beam) 방식을 채택해 주파수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성으로부터 지상으로 발사되는 전파는

하나의 전파빔으로 서비스 지역 전체를 커버하는 단일 빔

(Single Beam) 방식과, 전파빔을 좁게 하여 하나의

지역을 여러 개의 작은 지역으로 세분화해 전파빔을 보내는

다중 빔 방식으로 분류된다. 현재 대부분의 위성은 단일 빔

방식이지만, 위성 이동 전화 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빅 LEO

위성통신 시스템에서는 다중 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다중

빔 방식은 현재 이동 전화에서 사용하고 있는 셀 방식과

비슷한 개념으로, 전파빔이 비치는 범위를 좁게 해 빔이

조사되는 인접 지역을 제외한 조 금 떨어진 지역에서 동일한

주파수의 전파를 재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를

셀룰러망을 예로 설명하면, A 라는 기지국에서 A′`라는

주파수의 전파를 사용하고 있을 때 이 주파수로 통화할 수

있는 지역을 하나의 셀이라고 한다. 그런데 A 기지국 옆에

있는 B 라는 기지국처럼 바로 옆에 인접한 기지국들에서는

주파수 간에 간섭이 일어나기 때문에 A′` 라는 주파수를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A`라는 주파수의 영향권 밖에 있는

다른 기지국의 셀에서는 이 주파수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동일한 주파수를 셀로 나누어진 다른 지역에서

재사용함으로써 좀더 많은 가입자들에게 서비스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서울 지역 전체를 하나의 주파수당 10 개의

채널(회선)을 수용할 수 있는 두 개의 주파수로 커버한다면

동시에 20 명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앞에서처럼 셀로

나누어 주파수를 재사용하게 되면 좀더 많은 가입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이러한 다중

빔 방식은 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어 수신 신호의 세기가

커지게 되므로 안테나를 소형화할 수 있고, 전송 용량을

증가시킬 수 있어 고품질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밖에도 빅 LEO 와 같은 저궤도

위성이동통신 시스템이 기존의 정지 위성 시스템과 다른

기술적인 특징은 기본적으로 핸드 오버(Hand Over)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저궤도 위성통신에 이용되는

비정지 위성들은 빠르게 지구 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에

전파빔이 도달하는 지역이 계속해서 이동하게 된다. 따라서

뒤이어 오는 다른 위성이나 좀더 나은 전파 상태를 제공할

수 있는 다른 궤도의 위성과 통화로를 형성해 주어야 통화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핸드 오버 기능은

현재의 이동 전화 시스템에서도 중요한 기능으로,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전화가 자주 끊기는 현상을 이동 전화

사용자라면 한두번쯤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

핸드 오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위성을 통한 이동통신 서비스에서도 통화 품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다.

(5)서비스 시작

저궤도 위성통신 시스템에는 많은 종류가 있지만,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저궤도 위성통신 서비스는 빅 LEO 로

분류되는 위성이동통신 시스템들이다. 빅 LEO 는 음성,

데이터, 팩스, 호출 서비스 등을 제공할 수 있어, 현재의

이동 전화 시스템의 서비스권을 지구 전체로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러한 빅

LEO 시스템들 가운데 현재 활발히 추진 중인 몇 가지

서비스의 특징과 서비스 시기 등을 간단히 소개한다.

(6)이리듐(Iridium)

지상 780㎞ 상공의 궤도에 운용 위성 66 개(예비 위성 7 개

별도)를 띄워 내년 9월부터 상용 서비스를 실시할

예정이다. 지구 전체를 6 개의 궤도로 나누고, 궤도당 무게

680㎏의 위성이 11 기씩 배치되며, 위성의 공전주기는

100 분 28 초로, 위성당 1,100 개의 채널이 제공된다.

이리듐(Iridium) 시스템의 가장 큰 특징은 위성체 내에

교환기가 탑재되고 위성 간의 직접 링크 기능이 있어 위성과

지상의 관문국(Gateway) 을 여러 번 거치지 않고 바로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위성 시스템의 설계가

복잡하고, 교환기 탑재 등으로 위성의 무게가 늘어나 수명이

짧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듀얼 모드를 지원해 이동 전화로

통화가 가능한 지역에서는 이동 전화망과 접속하고, 이동

전화망으로 통화가 불가능한 지역에서는 위성망과 연결되어

사용하게 된다. 단말기 역시 이러한 듀얼 모드를 지원하는

기본 모델이 모토로라와 교세라에서 개발되어 있고, 국내의

LG 전자나 맥슨전자에서도 단말기 개발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사진 1 참조). 이리듐망을 이용해 80 개의

문자와 200 개의 숫자 메시지를 수신할 수 있는 이리듐

호출기 역시 모토로라에서 개발한 상태이다. 이 밖에도

이리듐 시스템은 팩스 송수신 및 4,800bps 의 전송 속도로

데이터 통신이 가능하다. 서비스 준비 상황을 보면, 1997

년 5월 5 일 5 기의 위성을 발사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9월

27 일까지 모두 6 번에 걸쳐 34 기의 위성을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현재 발사에 성공한 위성과 음성 및 호출

서비스를 테스트 중으로, 금년 말까지 총 48 기의 위성을

발사하고, 내년 상반기까지 모두 72 기의 위성을 발사해

위성망을 구축할 계획이다. 미국의 모토로라 사가 주관하고

있는 이리듐 시스템은 총 사업비가 45억달러 규모로, 현재

미국의 스프린트(Sprint), 록히드마틴(Lockheed

Martin), 독일의 페바콤(Vebacom), 우리 나라의 SK

텔레콤 등 15 개국에서 18 개 업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미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전세계 18 개 국가에서 본허가 또는

가허가를 교부 받아 빅 LEO 시스템 중에서는 가장 많은

국가에서 허가를 받은 상태이다. 또한 올해 안으로 최소 42

개국에서 사업 허가가 날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경우는 SK

텔레콤의 자회사인 이리듐코리아에서 이리듐 사업을

전담하고 있으며, 8,200 만달러(지분율 4.5%)를 투자해

관문국 운영권 및 남북한 지역 서비스 관할권을 확보한

상태이다. 이리듐코리아측은 지난 4월 이리듐 교환국사를

완공한 데 이어, 현재는 내년 5월 완공을 예정으로

진천군과 충주시에 두 개의 관문국 공사를 진행 중에 있어

내년 상반기 중에는 시범 서비스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7)글로벌스타(Globalstar)

1,414㎞의 8 개 궤도에 궤도당 각각 6 기의 운용 위성을

발사해 총 48 기 (예비 위성 8 기 별도)의 위성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위성의 주기는 113 분으로,

위성당 최대 2,400 개의 채널이 제공된다. 이리듐과는 달리

글로벌스타 위성에서는 위성 간의 링크나 교환 기능을

제공하지 않고 단지 단말기나 지상의 지구국에서 발사된

전파를 중계하는 역할만을 담당한다. 따라서 교환 및 모든

통화 처리는 지상의 관문국에서 담당하게 되며, 현재 건설

중이거나 건설 예정인 200∼250 개의 관문국을 통해

지상의 유·무선 통신망과 연결된다. 이로 인해 서비스

지역이 세계 인구의 98%가 밀집되어 있는 남위 70 도에서

북위 70 도 지역으로 한정되는 약간의 제한이 있지만, 위성

시스템이 단순하고, 위성의 무게를 줄일 수 있어 위성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리듐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이동 전화망과 위성망을 함께 사용하는 듀얼 모드

단말기를 사용하거나 글로벌스타(Globalstar) 전용

단말기를 통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또한 다중 접속

방식으로 CDMA 방식을 사용해 현재의 CDMA 이동

전화와 같은 단문 전송(SMS: Short Message

Service), 음성 메시지 전송(VMS: Voice Mail

Service) 등의 다양한 부가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최대

9,600bps 의 전송 속도로 데이터 및 팩스 송수신이

가능하다. 위성망 구축을 위해 올해 12월 첫 위성 발사를

시작으로 1998 년 하반기에 32 기의 위성으로 상용

서비스를 개시하고, 1998 년 말에는 48 기의 위성을 통해

전세계를 대상으로 서비스할 계획에 있다. 국내의 경우는

32 기의 위성만으로 서비스가 가능해 내년 하반기경에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경기도 여주에

지구국이 건설되고 있다. 글로벌스타는 미국의 위성 전문

업체인 스페이스시스템(Space System) 및 로랄(Loral)

사와 CDMA 특허로 널리 알려진 퀄컴(Qualcomm) 사에

의해 1980 년 초 기본적인 시스템과 기능이 개발되었다.

현재는 이들 두회사 주관으로 미국의 에어터치(Air

Touch), 프랑스텔레콤(France Telecom), 독일의 다사

(DASA) 등의 업체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사업을 추진

중이다. 국내에서는 데이콤과 현대전자가 3,750 만달러의

사업비를 투자해 글로벌스타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데이콤과 현대전자는 전략적 파트너의 자격으로 남북한을

비롯한 중국 일부 지역, 인도, 태국, 뉴질 랜드, 칠레 등의

국가에 대한 사업권을 갖게 된다. 이에 따라 데이콤은

시스템의 기술적 설계와 시스템 개발 및 서비스 운용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현대전자는 위성체의 설계 및 제작과

발사에 참여하고 있다.

(8)아이코(ico)

아이코(ICO: Intermediate Circular Orbit)는

지상으로부터 1 만 355㎞ 높이에 위치하는 중궤도

위성이동통신 시스템으로, 이리듐이나 글로벌스타보다 적은

10 기(예비 위성 2 기 별도)의 위성을 통해 운용된다.

위성당 채널 수는 약 4,500 개로, 위성 간 링크 기능은

없으며, SAN (Satellite Access Node)이라 불리는 12

개의 지구국 등을 통해 기존의 이동 전화망이나 전화망과

연결된다. 위성 주기는 6 시간으로, 저궤도 위성 시스템에

비해 상대적으로 빔 체류 시간이 길어 핸드 오버의 빈도가

적고, 위성의 수명이 10 년 정도로 길다는 것이 특징이다.

상용 서비스 예정 시기는 2000 년이며, 단일 모드 단말기나

위성/셀룰러 또는 위성/PCS 의 듀얼 모드 단말기를 사용할

수 있어 상황에 적절한 단말기를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다.

아이코는 정지 위성을 통해 선박이나 항공기에서의

위성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제해사위성기구인

인마셋이 주도하고 있다. 현재 44 개국의 47 개 기관 및

업체에서 14억달러의 초기 투자비를 확보해 사업을 진행

중인데, 대부분 참여 업체가 해당 국가의 기간 통신

사업자로 구성되어 지상망과의 접속이 용이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는 한국통신, 삼성전자, 신세기통신이

8,400 달러를 투자해 5.84%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통신은 동북아 지역 위성 접속국(SAN)

운영자로 선정되어 위성 접속국을 구축하고 운용하게 되며,

삼성전자는 아이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단말기

제조업체로 참여하고 있다. 한국통신이 오는 2000 년부터

저궤도위성 휴대통신 서비스(GMPC S)에 나서기위해

1998 년 4월중 천안에 위성지구국(SAN)을 완공 한다.

GMPCS는 지상 500∼2,000㎞ 상공에 소형 위성

수십개를 띄워놓고 휴대전화를 이용, 지구상 어느곳에서든

음성과 데이터를 주고받을수 있는 시스템으로 천안

위성지구국은 중국 일본 몽고 등 동북아지역 통 신망의

중심기지 역할을 하게된다. 한국통신이 천안에 세우게 될

위성지구국은 송수신 안테나 5 개가 설 치된다. 한통은

다음달중 지구국이 완공되는대로 시스템 성능시험에 나서

내년 10월까지 이를 마친뒤 오는 2000 년 3월까지 위성

연동시험을 끝낸 뒤 8월부터 일반 서비스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한편 천안 지구국은 한국통신이 부지매입비와

건축비 160억원을 부담 했으며 51 개국 59 개 통신업체가

공동 설립한 ICO글로벌 통신이 500 억원을 부담했다.

우리나라는 ICO에 대해 6%의 지분을 갖고 있으며

한국통신이 60%, 삼성전자가 20%, 신세기통신이 20%를

각 각 투자했다. 한국통신 관계자는 "다른 위성이동통신

사업자의 지구국이 우리나라에 서 발생하는 통화량만

처리하는데 비해 ICO 천안지구국은 동북아 지역 전체의

통화량을 처리한다."고 설명했다. ICO글로벌통신은 지상

1 만 355㎞ 상공에 12 개의 위성을 띄우고 전 세계에 12

개의 위성지구국을 설치한뒤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며 첫

위성은 오는 11월 발사된다.

(9)오디세이(Odyssey)

아이코와 같은 중궤도를 이용한 시스템으로, 세 개의 궤도와

고도 1 만 400㎞에 올려진 12 기(예비 위성 3 기 별도)의

위성을 통해 2001 년부터 서비스될 예정이다. 위성의

주기는 6 시간으로, 아이코와 마찬가지로 위성의 빔 체류

시간이 길어 핸드 오버의 빈도가 적으며, 위성당 채널 수는

2,300 회선이다. 중궤도를 사용해 위성의 수명이 10

년으로 비교적 긴편이며, 위성 간 링크는 제공하지 않고 7

개의 지구국을 통해 운용될 예정이다. 현재 미국의 TRW

사와 캐나다의 텔레그로브(Telgrobe) 사가 360 만달러를

투자한 상태이며, 국내에서는 대우와 금호텔레콤이

참여중이다. 이 밖에도 위성을 통해 음성을 제외한 쌍방향

메시지나 데이터 통신, 위치 확인 서비스 등을 제공할

계획으로 있는 리틀 LEO 에는 오브콤 (Orbcomm),

스타시스(Starsys) 등이 있다. 이들 중 오브콤은 775㎞의

높이에 26 기의 위성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으로

있는데, 이미 1995 년 4월 2 기의 위성을 발사하고, 올해

6 개의 위성을 발사해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의 지역에서

상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오브콤코리아를 통해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한편

전세계적으로 추진 중인 광대역 LEO(Broadband LEO)

시스템으로는 스카이브리지(Skybridge), 엠스타(M-

star), 텔레데식(Teledesic) 등 10 여 개가 있다. 이들 중

마이크로소프트 사가 주관하고 있는 텔레데식은 당초 840

개의 위성을 발사할 계획이었으나, 궤도를 상향 조정해 288

개의 위성을 통해 2002 년부터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90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사업비가

필요해 서비스 시기가 지켜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10)위성이동통신으로 IMT2000 이 현실로

이러한 저궤도 위성을 이용한 이동통신 시대의 시작은

차세대 이동 전화 시스템으로 각국에서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IMT2000 을 통한 새로운 이동통신 시대를

여는 신호가 되고 있다. 공식적인 명칭이 지정 되기 전에는

플림스(FPLMTS: Future Public Land Mobile

Telecommunication System, 미래 공중육상

이동통신)란 이름으로 불리던 IMT2000 은 휴대용

단말기를 통해 지상, 하늘, 바다 등 전세계 어디에서나

음성은 물론 멀티미디어 통신까지 가능하게 하는 차세대

이동통신 시스템이다. 내년 말을 기점으로 현재 추진 중인

다양한 저궤도 위성통신 시스템이 상용화되어 오는 2000

년 중반쯤에 이르면, 이러한 위성 이동 전화 사용이 현재의

이동 전화만큼이나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재까지의

기술 수준으로는 기본적으로 음성 통화 외에 저속의 디지털

데이터 통신만 가능하지만, 머지않아 화상 전화와 같은

멀티미디어 서비스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과연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현재의 이동전화

시스템이 인류에게 주는 많은 편리함과 변화된 생활 모습을

통해 어렵지 않게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통신 시대가 열린다는 것이다. 현재의 이동

전화는 기지국을 중심으로 서비스권 내에 있어야만 통화가

가능하지만, 위성 이동 전화를 사용하면 언제 어디서나

통화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외국으로 출장이나 여행을 가든

깊은 산 속으로 등산을 떠나든 어느 곳이나 연결되는 이러한

위성이동통신망 덕분에 인류는 통신 두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특히

기존의 통신망이 취약한 국가를 사업상 여행하는 경우에도

언제나 본사로 부터 긴급한 연락이나 진행 상황을 수시로

송수신할 수 있어 비지니스맨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또한 위성을 통한 이동 전화 서비스에서는 어느

곳을 가든 개인이 한 개의 전화번호를 사용하게 되므로,

현재와 같은 이동 전화 국제 로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처럼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기존

통신망과의 연결이 어려운 지역에서 자연 재해나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통신 두절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면 등산을 갔다가

조난당했을 때, 위성 이동 전화만 있다면 바로 구조 요청을

할 수 있고, 만일 자기의 단말기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곳곳에 설치된 비상 전화를 이용해 연락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는 오지나 외딴

지역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유선 전화망을

설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태양열을 에너지로

사용하는 위성 비상 전화를 적은 비용으로 설치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은 택시나 고속

버스에 이동 전화가 설치되어 있지만, 위성이동통신

시스템이 실용화되면 비행기에 설치된 공중 전화를

이용하는 것도 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코노믹

클래스를 이용하는 승객이라도 누구나 이러한 위성 공중

전화를 통해 어렵지 않게 통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동

전화가 대중화되어 있는 지금도 이를 이용해 인터넷을

이용하거나 데이터 통신을 하는 사람은 드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점차 사용 요금이 저렴해지고 다양한 형태의

위성통신용 단말기가 등장함에 따라, 머지않은 장래에

지금의 PC 를 이용한 통신 환경만큼이나 위성이동통신

시스템을 통한 데이터 통신이 자연스런 환경이 될 것으로

기대 된다. 그렇게 되면 비행기나 버스 안에서 자고 있거나

신문을 보는 사람보다는, 채팅을 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TV

를 보는 사람, 또는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해 전자우편으로

전송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4.인터넷과 PC 통신

가.정보통신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이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정보화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미 클린턴 행정부는 정보고속도로

계획 을 통해 정보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도

신사회자본정비 를 목표로 공공부문에 2 조엔규모를

투자한다. 이것 역시 핵심은 정보화투자이다. 정보화에 대한

투자는 80 년대부터 추진되고 있는 구미각국의

비디오테크망 구축에서 가시화되었다. 현재 선진국들의

정보화를 위한 투자열기가 뜨겁지만 현재로선 프랑스의

미니텔 만이 정보화의 모범사례로 사회적 자산의 지위를

확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니텔은 84 년 처음으로 상용화되었다. 일본의 캡틴(문자,

도형 네트워크)도 같은 해 사용화되었으며 영국의 프레스텔,

독일의 빌트시름텍스트 등 같은 성격의 서비스가 각국에서

잇따라 등장했지만 현재 이들의 보급대수는 수십만대에

불과하다. 미니텔의 성공요인은 첫째, 70 년대 초기

투자때부터 공급이 먼저 수요는 다음 이라는 정책을 펴 1

백만대를 무료 공급했다. 둘째는, 대량공급과 사양단순화를

통해 공급가격을 인하하는데 성공했다. 세째는 서비스의

개방이다. 1 백만엔 정도의 투자로 서비스제공업체의

운영이 가능했다. 이제 미니텔은 프랑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의 진출도 추진하고 있다.

나.MNP

「엠엔피(MNP:Microcom Networking Protoclo)」

는 90 년대 초 마이크로콤사가 업계에서 최초로 제안한

통신 프로토콜을 말한다. 1 단계에서 현재 10 단계까지

표준안이 발표돼 있으며 모뎀 송수신시 자동오류수정과

자료압축기능을 제공함으로써 빠르고 정확한 통신을

가능하게 한다. 이 통신 프로토콜을 개발한 마이크로콤은

컴퓨터 개발이 활기를 띠던 지난 80 년에 설립됐으며 MNP

외에도 WAN 테크놀로지 등 통신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다양한 신기술을 선보인 회사이기도 하다. 마이크로콤에

의해 MNP 가 개발된 90 년대는 컴퓨터, 특히 PC 분야의

괄목할 만한 보급이 이루어지고 BBS 와 PC 통신망이 큰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더욱이 모뎀플레이를 지원하는

게임도 등장하고 국내에서도 통신망이 개설되는 등 모뎀의

사용 가능성이 본격화하던 상황이었다. 모뎀은 컴퓨터

사용자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주변장치의 하나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뎀의 성능은 이같은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전송률 자체가 기대에 못미쳤기

때문. 현재 3 만 8 천 bps급이나 5 만 6 천 bps급 모뎀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파일전송을 위해 수많은 컴퓨터

사용자들은 밤을 꼬박 새워야 했으며 파일송수신시 수많은

통신오류로 반복적이고 짜증나는 통신활동을 해야 했다.

이같은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마이크로콤의 MNP 기능이다.

MNP 는 펌웨어상에서 압축 알고리듬을 이용함으로써

통신시간의 획기적인 단축을 제공했다. 즉 MNP 기능을

가진 모뎀간에 2 천 4 백 bps 모뎀으로 파일을 전송할 때, 4

천 8 백 bps 의 전송속도를 제공한 것이다. MNP 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장점은 오류수정기능. 파일 압축의 경우에는

그 당시 통신인들이라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arj 나 lzh

같은 압축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었으나 전송시 발생하는 각종 오류들은 해결책이 없었던

실정. 때문에 MNP 모뎀은 많은 통신인들의 전화요금에

대한 부담을 해결해줌으로써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다.팩스모뎀

팩시밀리기능을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팩스모뎀은 1980 년대부터 PC-FAX 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이루어졌다. 지금까지도 모뎀칩분야의 선두주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시에라나 락웰사도 이 시기에

팩스모뎀분야에 뛰어들어 시장을 점유해 나갔다. 국내의

경우는 89 년 삼성전자가 체신부 형식승인을 획득하면서

PCFAX제품을 출시했으며 89 년을 기점으로 팩스모뎀

제품개발이 쏟아졌다. PC-FAX 간 표준화는 90 년 미국

EIA(Electronic Industries Association)에서 클라스

1 규격이 발표되면서 개발이 본격화됐다. 90 년말에는

클라스 2 가 제정됐는데 이 규격에는 데이터를 송수신할 때

데이터 크기를 줄이기위한 T.4 알고리듬과 팩스가

송수신시에 상대방의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T.30 등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라.BBS

풀뿌리 네트워크로 불리는 BBS(Bulletin Board S

ervices)는 PC통신상에서 전자게시판을 뜻한다. BBS

는 전화가입권역을 벗어나지 않는 지역적인 네트워크로

가입자들의 편지교환이나 정보교환을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PC통신이

필수적 존재로 부각되면서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BBS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었다. 개인사용자들의 경우에는 필요로

하는 데이터를 교환하는 목적으로, 기업들은 BBS를

애프터서비스나 신제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BBS는 1978 년 크리스텐슨(Ward C

hristensen)과 랜디 소위스(Randy Seuss)가 미국

시카고 지역에서 만든 「CBBS(Computer Bulletin

Board S ystem)」가 최초다. 이 BBS는 234KB

저장용량의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 2 대를 장착한

시스템에서 운영됐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3.5 인치

디스크의 저장용량이 1.44MB 인 점을 감안하면

전송속도와 시스템 사양면에서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CBBS는 가입자들간의 파일과 전자우편

교환이 주목적이었다. 1979 년 「컴퓨서브」가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상업적인 목적의 BBS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통신용 그림포맷인 gif 를 만든 것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컴퓨서브는 80 년대 폭발적인 통신인구의

증가에 편승해 현재 세계적인 통신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태다. BBS는 1981 년 해이즈 마이크로컴퓨터

프로덕트사에 의해 「스마트모뎀300」이 개발됨으로서

중흥기를 맞게 된다. 업계의 표준으로 자리잡은 스마트

모뎀이 보급돼면서 BBS의 활용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특히 1983 년 IBM이 BBS운영프로그램인 「RBBS

PC(Remote Bulletin Board S ystem)」을

개발하고 80 년대 초반부터 개인용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PC를 기반으로 하는 사설 BBS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게 된다. 1984 년 6월, 톰 제닝스(T

om Jennings)가 「그림자 인터네트」라고 불리는

파이도네트(F idoNet) BBS를 만들면서 BBS는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 파이도네트는 가입지역

BBS사용자가 다른 지역의 BBS사용자에게 전자우편을

보낼 수 있고 토론그룹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능을

제공했다. 국내의 경우에는 1986 년 데이터통신이 H

메일을 서비스한 것이 BBS를 소개한 최초의 계기였으며

사설BBS인 엠팔이 등장해 BBS시대를 열었다.

마.유스넷

인터넷 WWW 서비스와 더불어 유즈넷 뉴스서비스에도

네티즌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WWW 에 못지않게

세계각국의 네티즌들과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거나 필요로

하는 자료를 쉽게 받을 수 있는 게 뉴스서비스다. 유즈넷은

텍스트로 제작된 정보는 물론이고 프로그램이나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으며 기본적으로 유닉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장점을 갖는다. 때문에 유즈넷은

네티즌들에 의해 운영되는 뉴스서비스의 대명사로 이용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통신망의 게시판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으며서 어떤 특정한 목표를 가진 여러명의 사용자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의견교환의 장이다. 유즈넷은 70 년대말에

개설된 UUCP(Unix go Unix Copy Protocol)을

기반으로한 bbs 가 그 기초를 이루고 있다. UUCP 는

유닉스 사용자들이 전자메일교환이나 파일전송을

간편하면서도 값싸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 개설한 bbs

로 유닉스 사용자들의 자원봉사로 유지돼왔던 네트워크다.

이 시기는 유닉스 언어의 성숙기로 개방형 구조를 갖고 있는

유닉스의 특성을 살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공개함으로서

공동의 목표인 유닉스사용환경을 발전시키고자하는 노력이

진행되던 때였다. 따라서 유닉스 사용자들은 프로그램이나

컴퓨터 업계 동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유즈넷과 같은

정보교환의 장이 필요했고 이 노력들은 UUCP 기반

유즈넷의 발전으로 구체화됐다. UUCP 는 초기 인터넷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현재는 사용이 편리한

다이얼업 접속이나 전용선 접속에 밀리고 있는 추세. 이

UUCP 기반의 유즈넷은 90 년대에 들어 미국립과학재단이

개설한 과학 교육분야의 네트워크, NSFnet(National

Science Foundation Network)에 흡수, 서비스되면서

인터넷 뉴스의 원형이 됐다. 현재 유즈넷 뉴스에는 2

만여개에 육박하는 소그룹들이 개설돼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바.이더넷

LAN으로 사용되는 이더넷은 76 년 제록스사 멧 캘프와

보그스가 고안한 네트워크 시스템이다. 효율면에서는

토큰링 방식보다 떨어지지만 무엇보다도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다수의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는 네트워크 방식이다.

이더넷의 기본적인 개념은 하나의 물리적인 전송매체를

다수의 통신국이 공유하는 것이다. 이더넷의 탄생은 72

년부터 시작됐지만 기초개념은 69 년 하와이대학에서

개발한 ALOHA 라는 무선 컴퓨터 통신망에서 최초로

구현됐다. 이 ALOHA 시스템은 하와이에 있는 IBM360

주컴퓨터와 다른 섬이나 배에 있는 카드리더 또는 단말기

간에 4 천 6 의 링크속도로 접근하는 형태를 취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ALOHA 방식은 Slotted ALOHA 로

개량됐으며 현재 사용되는 이더넷 및 위성통신방식 등

대부분의 패킷 브로드캐스트 시스템의 기초가 됐다. 72 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팔로알토에 있는 제록스에서는 세계

최초의 레이저프린터인 EARS 와 최초의 PC ALTO 를

개발했다. 당시 제록스사의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멧

캘프와 보그스는 미니컴퓨터 NOVA 와 알토PC, 자사에서

개발한 EARS 레이저프린터를 연결시키는 시스템의

필요성을 느끼고 ALOHA 방식을 기초로 ALTO ALOHA

라고 불리는 망 개발에 착수했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73 년

5월 22 일에 2.94M 로 전송속도를 가지는 세계 최초의

랜이 탄생했다. 이들이 고안한 이더넷은 캐리어 감지기능과

충돌감지 기능을 바탕으로 ALOHA 방식보다 월등한 성능을

발휘했다. 이 기능들은 한 통신이 패킷을 전송하기 전에

채널의 상태를 감지하고 전송중 충돌을 감지해 전송을

중지하는 방식을 결합한 것이었다. 76 년까지 이더넷의

실험모델은 연구소 내의 1 천 m 전송선로 상에 1 백개의

노드를 접속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됐다. 이더넷 외에도

70 년대말까지 데이터포인트사의 ARCnet 등이

발표됐으나 이미 세계표준으로 자리잡은 이더넷의 영향으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사.하이퍼텍스트, 하이퍼미디어

(1)하이퍼텍스트 이론의 등장

하이퍼텍스트는 문서 중간중간에 특정 키워드를 두고

문자나 그래픽파일 등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만든 문서다.

문서의 중요한 키워드마다 다른 문서로 연결되는 통로를

만들어 여러 개의 문서가 하나의 문서인 것처럼 보여 주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CD롬 타이틀이나 CD롬 백과사전,

소프트웨어의 도움말파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서들은

기본적으로 이 하이퍼텍스트 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서를 제공하며 월드와이드웹에서 파란글자를 눌렀을 때

연관되는 하위정보를 볼 수 있게 한 것도

하이퍼텍스트활용의 한 예다. 최근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활용이 이뤄져 알려졌지만 하이퍼텍스트 기반기술의

발전사는 꽤 오래된 기술이다. 하이퍼텍스트라는 말자체는

테드 넬슨이라는 사람이 65 년 처음으로 창안해 냈다. 67

년에는 브라운대학의 앤디 반 담이 하이퍼텍스트 에디팅

시스템을 개발해 문서작성의 길을 열었다. 컴퓨터 태동기던

78 년에는 MIT 아키텍처 머신 그룹(현 미디어 연구소)의

앤디 리프먼이 하이퍼 미디어 비디오 디스크를 처음 개발해

텍스트로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미디어로의 활용가능성을

확대시켰다. 이 때부터 하이퍼텍스트 응용기술은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실질적인 활용분야가 늘어났다. 대표적인

경우가 애플. 애플은 84 년 자사의 매킨토시에

하이퍼미디어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87 년

하이퍼카드를 도입해 하이퍼텍스트를 매킨토시의 기본

환경으로 받아들였다. 인터넷 확산기인 91 년에 들어

하이퍼텍스트는 세계적인 문서표준으로 자리 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팀 베르너는 세계적인 네트워크인

월드와이드웹에서 하이퍼텍스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현재 인터넷 문서와 같은 형식으로 모든 문서들이

개작되었다. 이같은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92 년

뉴욕타임스는 북 리뷰 커버스토리에 하이퍼텍스트 기사를

준비할 정도로 이 문서기술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또

하이퍼텍스트는 디지털 백과사전이 종이로 제작된

백과사전의 판매율을 뛰어 넘게 한 기술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1945 년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라는

공학자가 일종의 데이터베이스인 메멕스 (memex)를

고안해냈다. 이것은 여러 정보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부시는 지식의 폭발적인 증가로

사용자가 자신에게 유용한 정보를 찾아갈 수 있는 경로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에

테드 넬슨(Ted Nelson)은 이 개념을 정리하여

하이퍼텍스트란 용어를 창안했다. 그는 1981 년에

리터러리 기계(Literary Machine)를 출판하여, 제나두

(Xanadu)라는 시스템을 설명했다. 제나두는 문서의

내부에 노드로 표현되는 정보들을 연결한 하이퍼텍스트를

생성시킨 최초의 시스템이었다.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을

응용한 것중 가장 실용적이며 널리 보급된 것 중의 하나가

매킨토시 시스템(http://www.apple.com)의

하이퍼카드(HyperCard)였다. 이것은 1987 년에 세상에

나왔으며, 사용자들에게 데이터베이스의 링크를 따라가는

비선형적 경로를 제공했다. 하이퍼카드는 두 가지의 이유로

대중화에 도움을 주었는데, 매킨토시 운영체제와 함께

제공되는 무료 소프트웨어 패키지이면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이 첫째 이유다. 텍스트 내의 링크를 제공할 뿐

아니라, 소리와 이미지로의 링크를 제공한 것이 두번째

이유였다. 이렇게 하이퍼텍스트와 멀티미디어가 결합되기

시작했다. 멀티미디어 기능을 가진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을

하이퍼미디어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월드와이드웹이

바로 이 하이퍼미디어시스템이다.

(2)하이퍼텍스트의 실용화

매킨토시의 하이퍼카드와는 별도로, 팀 버너즈리(Tim

BernersLee)는 독립적으로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을

개발했다. 월드와이드웹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1980 년대 초 개인적인 목적으로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을 고안하고 직접 구현했다. 80 년대 후반에,

버너즈리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럽 물리학 소립자

연구소인 CERN (http://www.cern.ch)에 취직하여,

CERN 연구소 및 전세계에 있는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원들을 위하여 하이퍼텍스트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고 연구하게 됐다. 1989 년 3월에 그는 이것을

연구하기 위한 하이퍼텍스트 프로젝트를 제안했다(화면 1).

버너즈리는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을 처음 설계할 때 동료인

로버트 카일리아우 (Robert Cailliau)라는 네트워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는 지금의 멀티미디어 온라인

서비스로 성장하게된 계기가 됐다. 1990 년 11월에

버너즈리와 카일리아우는 하이퍼텍스트에 관한 설계 문서를

작성하여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설명했다. 하이퍼텍스트는

사용자가 마음먹은 대로 브라우징할 수 있는 노드들의 웹

(즉, 하이퍼텍스트 문서들이 무수히 비선형적으로 연결된

것으로서 이러한 링크들의 네트워크를 웹이라 함)으로

다양한 종류의 연결된 정보들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하이퍼텍스트는 통합된 사용자 접속을 제공한다. 매우

거대하고 다양한 형태로 저장된 정보들에 대한 단일 접속을

제공해 준다. 이 정보들은 보고서, 메모, 데이터베이스,

컴퓨터 문서 및 온라인 시스템 가이드 등이다. 또한

문서들이 어떻게 짜여지고 연결될 수 있는 지를 설명했다.

텍스트 또는 문서들이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하여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으로 함께 연결된다. 처음

작성된 이 설계 문서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을

계층 모델을 지향하는 시스템과 분명히 구분했다. 웹은 계층

구조 또는 나무 구조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항상 어떤

주제들이 서로 관련될 때,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쉽게

따라 갈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설계 문서는

미네소타 대학이 인터네트 고퍼를 발표하기 1 년 전에

쓰여졌다. 결과적으로 하이퍼텍스트와 계층 구조

시스템들이 서로 비교되면서 서로의 장점들에 대한

토론들이 많이 일어났다. 1990 년판 문서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다음과 같은 웹의 기본적인 특징들이

이미 상당수 언급되었다.

(3)World Wide Web

월드와이드웹이란 용어가 분명하게 사용되지 않았지만 이

문서의 소개에는 이미 월드와이드웹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나타나 있다. 월드와이드웹을 구성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접근 프로토콜과 서로 다른 내용, 형식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방법들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너즈리는 CERN 하이퍼텍스트 프로젝트를

위하여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

자금에는 연구 개발을 위한 플랫폼으로 넥스트

워크스테이션도 포함됐다. 넥스트 워크스테이션은 많이

판매된 워크스테이션은 아니었지만, 시스템의 프로토타입을

신속하게 개발할 수 있는 개발환경을 제공해주었다.

버너즈리는 최초의 프로토타입을 1990 년 후반에

완료했다. 동시에, 니콜라 펠로우(Nicola Pellow)가 그

프로젝트에 합류하여, 텍스트 방식의 브라우저를 개발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텍스트 방식의 브라우저와 넥스트용

브라우저를 사용자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 1991 년 한해

동안에도 CERN 에서는 웹을 위한 연구 개발이 계속됐다.

CERN 및 그밖의 여러 곳에서 버너즈리와 그의 동료들은

웹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1991 년 5월,

CERN 에서 사용할 수 있는 웹이 발표됐다. 그해 8월에,

CERN 은 인터네트 뉴스그룹(alt.hypertext, comp.sys.next, comp.text.sgml, comp.mail.multimedia 등) 에 웹 도구들을 발표했다.

또한 12월에 미국의 텍사스주 산안토니오에서 열린,

하이퍼텍스트 (Hypertext)'91 학술회의에서

월드와이드웹에 대해 발표했다.

아.인터넷

(1)최초의 브라우저는 비올라

드디어 1992 년 1월, 텍스트 방식의 브라우저를

anonymous FTP 에 의하여 구할 수 있었다. 1992 년 7

월, CERN 은 월드와이드 웹의 라이브러리를 발표했다.

지금까지 이 도구들은 웹의 서버 및 클라이언트 개발자들을

위한 유용한 도구들로 사용되고 있다. 웹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확산되면서, CERN 연구소 이외에서도 웹

브라우저를 개발하는 곳이 나타났다. 가장 최초의 전 화면

(full-screen) 브라우저인 비올라(Viola)는 페이 웨이

(Pei Wei)가 개발하였는데, 개발 당시 페이 웨이는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상당한

심혈을 기울여 개발된 이 브라우저는 여러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버너즈리는 말하기를 웨이가

만일 그 브라우저를 상품화했다면, 모자이크가 차지한

웹브라우저의 명성과 중요한 역할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1991 년에 선보인 비올라는 최근에

등장하는 여러 브라우저의 모양과 유사했다. 예를 들면,

하이퍼링크들이 밑줄을 보이거나, 색깔을 다르게 표시한 것

등 이었다. 초기 비올라 버전은 1992 년 중반에 구할 수

있었는데, X-윈도우 브라우저는 대체로 마이다스(Midas)

라고 하는 다른 X-윈도우 도구와 함께 1993 년 1월에

이르러서야 개발됐다. 비올라의 매킨토시 브라우저는

CERN 에서 개발했다. 많은 웹 개발이 전세계 연구진들의

활발한 토론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러한 토론의 대부분은

처음에 'alt.hypertext' 같은 인터네트 뉴스그룹에서

이루어졌고, 후에 'comp.infosystems.www'

뉴스그룹과 '[email protected]'의 메일링

리스트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1993 년 초에 이르러,

월드와이드웹이라 불리우는 인터네트의 검색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정착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유행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인터네트의

고퍼서비스가 훨씬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IETF(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의 1993

년 3월 회의에서, 버너즈리가 이끈 BOF(Birds of a

Feather) 세션에는 단지 10 명만이 참석했다. 반대로

고퍼 세션에는 그보다 10배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그 회의에서 버너즈리는 웹이 주요

정보검색도구로 채택되는데 장애물이 무엇이냐고

청중들에게 질문을 했다. 참석자의 수는 적었지만, 웹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차 있었고 많은 대답들 중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나왔다.

● 웹을 처음

설치하는 것이

어렵다. 즉, 서버와

브라우저를 설치할

때, 어느 정도의

어려움과 노력이

요구된다. 또한

문서들의 대부분을

HTML 로 작성해야

한다.

● 사람들은

설치하기가 용이한

환경, 즉

워크스테이션에서

매우 우수한 기능을

원한다.

● 사람들은 또한

VT-100 같은

환경에서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 방식

브라우저를

원한다. 그러나,

텍스트 방식

브라우저는 더미

(dummy) 터미널에서 사용할

수 있지만, 간단한

풀스크린

기능들조차 이용할

수 없다.

(2)모자이크, 첼로, 링스

버너즈리는 위의 첫번째 항목을 잘 받아들여 설치 또는

구현을 간편하게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93 년 7

월부터 1994 년 7월까지 일년동안, 아리 루오토넨(Ari

Luotonen)이라는 사람은 CERN httpd 서버에 대해

많은 일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서버를 개발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다른 개발자들은 브라우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3 년 2월에 마크

앤더슨(Marc Andreessen)은 X-윈도우용 모자이크를

발표했다. 그때, 그는 NCSA(National Center for

Supercomputing Applications)의 본부가 있는 미국

일리노이주의 어바나-샴페인 대학의 학생이었다. 앤더슨은

모자이크를 처음 고안하여, NCSA 의 프로그래머인 에릭

비나(Eric Bina)와 함께 개발했다. 모자이크가 등장하자

웹은 인터네트를 사용하는 수천만의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설치하기가 쉽고 HTTP 와 HTML 을 다룰

뿐만 아니라, 고퍼나 FTP 와 같은 다른 프로토콜들도

다루었다. 매우 기능이 우수하였고, 개발과정에서 오류가

신속히 수정되어 완성품이 곧 나올 수 있었다. 그때는 물론

모티프와 X-윈도우가 실행될 수 있는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을 이용하는 사용자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1993 년 중반에 NCSA 는 그 모자이크 브라우저의

매킨토시 버전과 윈도우즈 버전을 발표했다. 1993 년 가을,

크리스 윌슨(Chris Wilson)이 개발한 윈도우즈

모자이크가 발표되었고, 또한 토마스 레드맨, 김 스텝슨,

마이크 맥쿨이 개발한 매킨토시용 모자이크도 탄생했다.

1993 년에 개발된 브라우저는 모자이크만이 아니었다.

코넬 법과 대학의 브루스 (Thomas R. Bruce)는 자신이

개발한 윈도우즈용 브라우저인, 첼로(Cello)를 그해 초에

발표했다. 브루스는 자기가 처음 웹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크롤 (Ed Krol)의 'The Whole Internet User's

Guide and Catalog'라는 책과 고퍼 뉴스그룹을 통해서

였다고 한다. 그는 CERN 의 텍스트 브라우저와 비올라

브라우저를 보았을 때, 웹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고,

그래픽 브라우저의 중요한 역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됐다. 브루스는 상당히 많은 하이퍼텍스트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사용자들의 데스크탑에 웹을 가져다 주려고 매우

노력했다. 첼로는 많은 윈도우즈 사용자들에게 인기있는

브라우저로 알려지게 되었고 계속하여 새로운 기능이

추가됐다. 한편, 1993 년 IETF 회의에서 필요하다고

지적된 VT-100 용 브라우저도 미국 캔사스 대학의 몬툴리

(Lou Montulli)에 의하여 1992 년 초에 개발됐다.

이것은 대학 정보 시스템의 일환으로 개발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표적인 텍스트 브라우저인 링스

(Lynx)다. 이 개발에 참여한 사람중 중요한 사람들은 찰스

레자크(Charles Rezac)와 마이클 그로브(Michael

Grobe)이다. http 는 하이퍼텍스트 트랜스퍼 프로토콜

(HyperText Transfer Protocol)의 이니셜을 딴

약어로 1990 년 이래로 인터넷 월드와이드 웹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자와 숫자, 기호, 그림을 포함한 정보의

전달방법이다. CERN 개발팀의 일원으로 현재까지

개발업무에 주력하고 있는 「팀 버너스 리(Tim Berners

Lee)」 라는 사람에 의해 1989 년 설계되었고 인터넷

기반에서 하이퍼미디어의 광역적인 정보 공유를 위한

프로토콜로 개발됐다. 이 프로토콜은 데이터가 분산돼

있으면서 빠른 전달 속도를 요구하는 시스템에 적합한

하이퍼 텍스트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돼 현재

인터넷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는 월드와이드웹에서

사용되게 됐다. 모든 정보제공방식이 순차적인 나열식이

아니라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하이퍼텍스트 구조로 제작돼

있고 서버하나에서 모든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망 전체에

정보를 담고 있는 특성을 갖고 있는 게 인터넷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같은 개념을 기반으로 한 하이퍼텍스트 트랜스퍼

프로토콜의 등장은 인터넷의 대중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이전의 인터넷이

텍스트기반에서 정보를 공유하던 것에서 그림과 텍스트가

함께 포함된 각종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걸음 발전시킨

것이다. 월드 와이드웹 서비스를 사용하다보면 사용자가

접속한 서버에 적합한 정보가 없는 경우라도 다른 서버에서

정보를 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하이퍼텍스트

트랜스퍼 프로토콜이 서버와 독립적인 데이터를 전송하기

알맞게 설계된 프로토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현재

하이퍼텍스트 트랜스퍼 프로토콜은 1994 년 이전에

만들어진 모든 데이터와의 호환이 가능하게 구조화됐다.

자.WWW 의 발전

(1)대중화되는 WWW

1993 년. 1 년 사이에 웹은 놀랄만큼 대중화됐다. 웹

브라우저 뿐만 아니라 웹 서버들이 전세계 여러 곳에서

탄생했다. NCSA 의 롭 맥쿨(Rob McCool)이 유닉스용

httpd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유닉스용

서버를 자신들의 웹 서버로 사용했다. 맥쿨은 앤더슨과 손을

잡고 일하면서, 모자이크 브라우저의 여러 특징들을 지원할

수 있는 새로운 기능들을 담아 원하는 서버를 개발했다.

맥쿨은 "우리가 처음 개발할 당시와 지금은 아주 다른

상황이 됐다. 앤더슨은 그의 넓은 눈으로 매일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내었다. 최초로 텍스트 안에 이미지를 넣는 방법을

보여준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는 또한 상호 대화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폼(form) 이라는 문서를 고안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으면 바로 그 작업에

착수하여, www-talk 뉴스그룹에 포스팅했다. 이렇게

하여 수월하게 작업이 진행됐다."며 모자이크가 NCSA 에서

개발될 당시의 여러가지 추억들을 회상하곤 한다. 맥쿨이

제안한 상당히 우수한 기능들 중 하나는 서버기능의 표준인

CGI (Common Gateway Interface)이다. 어떻게

마우스 이 가능한 이미지나 폼의 작성 및 데이터베이스와의

연결 등의 향상된 기능들을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 바로 CGI 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향상된

기능들을 위한 초기 작업들의 많은 부분들이 버클리

소프트웨어 설계 회사의 토니 샌더즈(Tony Sanders)에

의하여 수행됐다. 그는 펄 (Perl)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플렉서스 (Plexus) 웹서버 프로토타입을 개발했다. 서버를

개발한 사람 중 서버의 기능 향상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

있다. 찰스 헨리치(Charles Henrich)는 HTML 이

파싱되게 할 수 있는 기능을 UNIX 서버에 추가했다. 이

기능은 서버의 기능을 향상시키는데 매우 많은 공헌을 했다.

또한 이것은 역동적 HTML 문서를 제공하는데 필수적인

기능이었다. 1993 년이 지나기 전에 웹은 유닉스

시스템만이 서버를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라는

약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에딘버러 대학의 크리스 아디

(Chris Adie)는 윈도우즈NT 환경을 위한 웹서버를

개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제가 실행되는 인텔 칩이

웹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하드웨어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텍사스 의과대학의 척 쇼토(Chuck Shotto)는

매킨토시 웹 서버를 개발하여 1993 년 8월에 발표했다.

이러한 여러 서버의 플랫폼 제공이 붐을 이루자 수많은 서버

운영자들이 생겨나게 됐다. 포항공대 김기태 교수의 웹서버

(화면 2)도 당시 생겨난 것으로 매킨토시 서버에 속한다.

(2)다양한 웹 탐색 도구 탄생

고퍼의 베로니카(Veronica)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웹

개척자들은 1993 년부터 웹 카탈로그 시스템, 즉 웹 문서

탐색 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가장 최초의

카탈로그들은 W3 카탈로그(화면 3)와 점프스테이션

(JumpStation)이었다. W3 카탈로그는 오스카

니어스트라쯔(Oscar Nierstrasz)가 개발하였고,

점프스테이션은 조나단 플렛처(Jonathon Fletcher)가

개발했다. 이러한 웹 문서 탐색 도구들은 탐색한 웹

문서들을 인덱스에 추가했다. 많은 도구들이 탐색 사용자

접속 도구로서 HTML 의 폼 기능을 이용했다. 웹을

인덱싱하는 것은 고퍼 타이틀을 인덱싱하는 것보다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 인덱스 탐색이 문서의 타이틀만을 다루거나

포함된 링크들을 다룬다면, 혹은 문서의 전체 내용을

다룬다면 어떻게 되는가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 또한 선택된

항목들로서 사용자에게 무엇이 제공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웹 인덱싱을 위한 많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EINet 의 갤럭시 프로젝트(화면 4)

에서부터 조엘 (Joel)의 계층 주제 리스트 또는 슈와르쯔

박사의 하비스트 프로젝트 등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다.

이런 웹 문서의 카탈로그 중에는 수작업으로 작성되는 것도

있다. 그 유명한 야후(Yahoo) 시스템(화면 5)에서부터

CERN 의 분산 WWW 버추얼 라이브러리(Virtual

Library, 화면 6)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연구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3)웹 문서를 위한 표준 언어

HTML 표준문서의 기본 틀은 항상 SGML(Standard

Generalized Markup Language)이라고 하는 페이지

서술 언어였다. 이것은 수많은 사용자들이 있는 기존 그룹의

환경에서 HTML 이 태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HTML 이

SGML 의 원칙에서 다양성을 띨 때(예를 들어 페이지

양식으로부터 많은 변환 방식을 HTML 이 제공하려 할 때)

언제나 여러 뉴스그룹에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런 논쟁을 통해 표준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논쟁의 대표적인 사람들은 컨벡스(Convex)사에서

할소프트웨어시스템 (Hal Software Systems)사로

자리를 옮긴 댄 코놀리(Dan Connolly)와 데이브 라겟

(Dave Ragget)이다. 코놀리는 HTML 을 위한 SGML

문서 타입 정의를 작성하였고, HTML 의 표준을 만들어

내었다. 라겟은 HTML+로 알려져 있는 확장 HTML 을

발표했다. 새로 추가된 특징들은 표와 수식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과 텍스트가 이미지와 함께 같은 줄에 표현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1993 년도 하반기에 실리콘 그래픽스의

창업자인 제임스 클락은 앤더슨을 파트너로 하여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Mosaic Communications Corp.)사의

창업을 발표했다. 나중에 1994 년 3월에 네트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Netscape Communications Corp.)

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모자이크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버전인 네트스케이프를 개발했다. 1994 년까지, 웹

브라우저 프로그램들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NCSA

는 스파이글라스(Spyglass)란 회사가 모자이크 상업

버전을 계속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드디어 1994

년 스파이글라사는 'Internet in a box'란 구호를 걸고

집에서도 웹을 볼 수 있는 웹 브라우저로 모자이크를

발표했다. 1994 년 5월에 제 1 차 국제 웹 학회가 열렸고

그해 12월에는 첫번째 국제 컨소시엄(화면 7)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올해 1995 년 5월에도 제 2 차 국제 웹 학회가

열려 명실공히 전세계에서 공인된 웹학회로 자리잡게 됐다.

(4)웹의 진정한 영웅은 웹 정보제공자

많은 도구들의 개발도 중요하지만, 웹을 구성하는 정보

내용의 폭발적인 증가도 웹 혁명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지금 알려진 수천, 수만개의 웹사이트들은 웹이

알려지기 전인 1993 년부터 서서히 정보를 쌓아온

것들이다. 초창기에는 매일 수십, 수백 개의 웹 서버

사이트들이 탄생했다. 새로운 서비스들은 루브르 박물관의

예술 작품 여행들로부터 백악관 등 행정 및 정치 기관

페이지, IBM(화면 8)이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기업

정보 페이지나 NASA(화면 9)와 같은 실시간 디스플레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우편물 전문업체로 유명한 페더럴

익스프레스사도 또한 그들의 웹위에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소포 추적 데이터베이스를 올렸을 정도로 웹은 보편화되고

있다.. 전에 호노룰루 대학에 있다가 지금은 커머스넷에

있는 케빈 휴즈, 조지아테크의 마이클 밀링, 포항공대

기계공학과의 김기태 교수 (http://www-

me.postech.ac.kr), 바티칸 아카이브의 웹을 만든

프란스 폰 헤셀과 같은 개척자적인 웹 정보 제공자들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올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해 주었다.

이제는 국내에도 다음 커뮤니케이션의 버추얼 갤러리

(http://cezanne.daum.co.kr)처럼 가상 화랑과 가상

영화관등이 웹을 통해 등장할 정도니 모두 앞선 개척자들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네트, 특히 웹을 통하여 정보를

제공하는데 헌신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웹에

정보들을 올려 놓는데 수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은 지구촌의

수백,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서버나 모자이크를 개발한

사람들만큼 칭송받지는 못하지만 진정한 영웅들이다.

그들에 비하면 NCSA 모자이크이나 네트스케이프와 같은

웹 브라우저는 보잘 것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빈약한

인터네트가 무서운 속도로 불어나 철철 넘치는 바다로

변하고 있다. 바로 월드와이드웹을 만들어 나가는

수천만명의 정보제공자들 덕분이다.

 5.멀티미디어와 게임의 시대

가.멀티미디어 기술

멀티미디어는 컴퓨터, 가전, 미디어 등 3 가지 산업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컴퓨터를 제외한 두가지는 이미

제휴를 시작하였다. 가전과 미디어의 결합은

마스시타전기와 MCA 를 비롯해 소니와 컬롬비아픽처즈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도시바와 타임워너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멀티미디어의 특성은 첫째 상호작용성이다. 단순히

매체에서 나오는 정보를 듣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사용자가 가공해서 들을 수 있도록 한 점이다. 두번째는

동시성이다. 즉 화면과 스피커에서 동시에 한가지 상황에

대한 설명을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해 주고 있다.

세째는 정보의 가치이다. 전달되는 내용은 단순히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가치를 가져야 한다. 때로는 내용

자체가 금번으로 환산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멀티미디어의 탄생 배경은 정보의 폭발적인 증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발달로 인한 처리속도의 증가,

기억장치의 용량증가와 가격하락, 양질의 정보에 대한 욕구,

원하는 정보에 대한 접근을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일반 사용자의 욕구 등의 어우러짐으로

멀티미디어는 탄생하게 되었다. 더구나 매킨토시의 등장

이후 운영체계와 어플리케이션에서 GUI 의 채택으로

멀티미디어는 가속화되었다. 멀티미디어를 컴퓨터 상에서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저장,

전송, 표현하는 기능이 통합되어야 한다. 멀티미디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는 대용량 저장매체의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동화상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저장매체가 필요하다. VGA

그래픽 카드의 일반적인 해상도인 640 * 480 의 화면에

256 가지의 색상을 가진 그림을 보이기 위하여 307,200

바이트(640 * 480 * 1 바이트) 정도의 저장용량이

필요하며, 컴팩트디스크 정도의 음질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초당 176KB 정도의 저장용량이 필요하다. 더욱이

동화상의 경우에는 초당 30 개의 그림을 실시간으로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저장매체와 빠른

전송속도가 필요해 진다. 둘째는 압축, 복원기술의 발전을

들 수 있다. 비록 대용량의 저장장치가 있다고는 해도 양이

워낙 큰 동화상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저장하기도 힘들고 또

컴퓨터에 보이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양이기에 실시간으로

전송할 수 없다. 따라서 압축, 복원의 기술이 필요해졌고,

그 표준으로 정지화상의 JPEG(Joint Photographic

Experts Group) 와 동화상의 MPEG(Motion Picture

Experts Group) , 영상회의 시스템을 위해서 CCITT 의

H.261 이 있다. 현재는 JPEG 표준안만 완성된 상태이다.

(93 년 2월 현재) 멀티미디어기술의 발전은 두가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첫째, 컴퓨터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방향이다. 이는 DVI (Digital Video Interactive),

CD-ROM/XA, 인터액티브 LD 등으로 구성되어 발전하고

있다. 둘째, 가전제품 중심의 발전이다. 이는 CD-I 기술로

TV, 컴퓨터 기능을 갖는 플레이어로 구성하여 발전해 가는

양상이다. 멀티미디어 국내업체 동향 및 기술동향과 표준화

기술동향과 표준화 기술동향(MPEG, JPEG 등)이 1-2 년

이내에 제정될 것으로 보인다. DVI 는 인텔사와 IBM 사가

중심이 되어 개발하고 있는 동화상 부호화 방식으로 최대

72 분간의 압축된 동화상을 압축된 동화상을 1 장의 CD 에

저장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의 가장 주목받는 기술이다. 예를

들면, CD-ROM 한장에 600MB 이상의 데이타를 저장할

수 있는 반면에 TV 의 표준 화면은 초당 30 프레임이며, 각

프레임당 약 600KB 이상의 기억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압축을 하지 않는다면 CD-ROM 한장에 약 30 초

가량의 영상정보만을 저장할 수 밖에 없다. 또한 CD-ROM

드라이브가 데이타를 읽는 속도가 초당 150KB 이기 때문에

약 30 초의 비디오를 보기 위해서는 한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DVI 는 이러한 L 를 해결하기 위해, 1984 년

데이비드 사르노프연구소 (David Sarnoff Research

Center)가 개발한 것으로 1987 년에 CD-ROM

컨퍼런스에 발표한 것이다. 처음 DVI 는 PLV

(Production Level Video)와 RTV (Real Time

Video) 방식의 압축방법을 채택했고, JPEG 용 마이크로

코드 라이브러리 (Micro-Code Library)를 1991 년에

채택하였으며, 향후에는 ISO 의 MPEG 및 CCITT 의

H.261 을 채택할 예정이다. 1990 년 인텔사는 2세대 DVI

칩을 개발했다. 이는 처리속도를 2배로 높이고, 주변회로를

집적시킨 것이다. 그후 3세대 칩을 개발했으며, 이의

특징은 250밉스, 병렬형 구조, 복수연산기, MPEG/HVQ,

슈퍼 VGA 및 XGA 등를 지원한다. DVI 를 이용하는

소프트웨어는 윈도우즈, OS/2, 유닉스 등에서 개발되고

있다. 또한 멀티미디어의 플랫폼이 DVI 로 가는 추세에서

문제로 남는 것이 그래픽이다. 현재 DVI칩은 512 * 480,

800 * 600까지의 해상도를 지원하며, 특히 VGA (640 *

480, 256 칼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따라서 IBM 에서는

XGA 의 고해상도 그래픽 (1024 * 768, 256칼라)을

개발하여 멀티미디어용 그래픽 컨트롤러로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XGA, 윈도우즈, DVI 를 모두 갖춘 PC 가

멀티미디어의 플랫폼이 될 것이다.

(1)멀티미디어 경쟁

그러나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주역은

누가될 수 있을 것인가? 그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세계 유수 기업간의 경쟁이 치열하며, 각 기업간의

기술노선이 달라 경우에 따라서는 제 3 그룹의 지원 여부에

다라 판가름이 날 가능성이 놉아지고 있다. 아직까지는 미국

업체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마이크로소프트,

IBM, 애플 컴퓨터, 넥스트간의 4 파전이 치열한 가운데에

있다. 지금까지 제3 그룹의 가장 많은 지원을 받고 있는

회사는 마이크로소프트이며, 1991 년 여름 내놓은

멀티미디어용 PC OS 멀티미디어익스텐션을 시판,

관련업계의 상당한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멀티미디어익스텐션 은 차세대 OS 로 불리우는

WINDOWS 의 확장판으로 영상과 음성을 취급할 수

있도록 만든 마이크로소프트의 야심작이다.

멀티미디어익스텐션 이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는 MS-DOS

의 조작방법으로 CD-ROM 및 스캐너까지 작동할 수 있는

데다 MS-DOS 용 소프트웨어까지 사용할 수 있다. 이미

후지쓰, NEC 등 일본의 쟁쟁한 하드웨어 업체들이 이 OS

로서의 정착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즉 세계 PC 하드웨어

업체들이 마이크로소프트의 규격을 지원하는 멀티미디어

PC 를 잇달아 선보이고 있으며, CD-ROM 을 저장매체로

하는 각종 응용소프트웨어도 다량 내놓고 있다. 또한 1992

년 초 현재 50 여명에 이르는 멀티미디어 전문가를 매년

50%씩 늘일 계획을 가지고 있다. IBM과 애플은

멀티미디어, 특히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기술의 개발을

위해 공동 출자회사 카레이더 를 설립하기로 했다. (92 년 7

월 현재) 이 두 회사는 멀티미디어의 규격을 통일하기 위해

카레이더를 중심으로 거대한 컨소시엄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 측에서는 도시바, 마쓰시타전기, 히타치등 6

개사가 참여할 전망이다. 멀티미디어 분야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애플 컴퓨터는 1991 년 5월 매킨토시의 새로운

운용체계인 시스템 7.0 을 발표 멀티미디어 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매킨토시라는 제한된 환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가전제품화된 컴퓨터 즉

본격적인 멀티미디어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애플은 1991 년 일본의 가전제품 업체인 소니와 제휴

독자적인 멀티미디어 제품 개발에 나섰다. 애플은

필연적으로 디지탈화 되어가는 가전제품 개발 추세에 따라

컴퓨터기술을 바탕으로한 자신의 디지탈 기술과 풍부한 SW

기술을 일본의 가전업체들에게 제공하고 대신 일본 업계가

가진 반도체, 디스플레이 기술 및 소형화기술을 접목,

새롭게 창출될 신가전 시장을 주도해 나가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애플의 이같은 전략에 따라 최근

첫선을 보인 제품은 뉴턴 이라는 첨단 전자수첩이다. 일본의

샤프사와 공동으로 4 년여의 개발기간을 거쳐 올해 시판에

들어간(확인????) 이 제품은 RISC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택하고 있으며, 펜입력장치, 무선통신기능을 가지고

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올 팜탑컴퓨터와 같은 뉴턴은

멀티태스킹 운용체계와 하이퍼카드와 같이 그림이든 문자든

곧바로 찾을 수 있는 객체지향형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주소록, 메모장등의 정보관리 기능은 물론 IC 카드

형태의 지도, 사전등을 매체로 사용, 휴대형

데이타베이스로도 사용할 수 있다. 향후 현재의 PC 시장을

능가할 지도 모르는 이같은 첨단 전자수첩의 개발방향은

뉴턴의 개발과정에서 잘 나타나 있다. 뉴턴의 RISC 는

애플이 주식의 30%를 소유하고 있는 영구 ARM 사가

공동으로 개발, 생산을 맡고 있으며, 또한

PCMCIA(Personal Computer Memory Card Industry Association) 2.0규격과 호환되는

트림버스라는 버스 규격을 채택, IC 카드 제품을 사용할 수

있다. 결국 애플사는 운용체계를 비롯한 SW 기술을

제공하는 대신, 여러회사와 제휴 첨단 전자수첩인 뉴턴을

개발하고 있는데, 현재로서는 애플이 유일한 구심점이 되고

있다. 한편 애플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가 미래

멀티미디오시대를 겨냥하여 설립한 넥스트사의

멀티미디오용 워크스테이션 NeXT Station 도 업계

최초로 DSP(디지탈 신호처리 프로세서)를 기본 내장,

양질의 사운드와 비디오 기능을 가졌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시제품을 출하한 이후, 그동안 시장을

관망해온 넥스트사는 1991 년 초 모토롤라의 68040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탑재한 5 천달러 미만의 저가격

워크스테이션을 내놓고, 시장확대에 나서고 있다. 이

워크스테이션으로 넥스트의 위치는 한층 더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주에 맞서고 있는 IBM 은

1991 년 가을 컴덱스쇼에서 XGA 보드와 CD-ROM

드라이브 DVI-1750칩을 채택한 액션 미디어 Ⅱ 를

선보이고 최우수 멀티미디어 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서 마이크로소프트로 통일될 것 같은 멀티미디어

시장에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멀티미디어 분야의 선두

주자라 할 수 있는 애플 컴퓨터는 92 년 멀티미디어용

시스템소프트웨어인 퀵타임 을 발표하였고, 개인정보단말기

(PDA : Personal Digital Assitance?)의

제품화일정을 구체화하였다. 92 년 9월 14 일에는 CD-

ROM 드라이브를 갖춘 가정용 매킨토시 컴퓨터인 퍼포마

600 을 선보였다. 이외에도 PC 업체들도 멀티미디어 시장

공략을 위해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게임용업체로만 알려져 있는 탠디사도 멀티미디어 기능을

종합적으로 향상시킨 센세이션 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멀티미디어 시장진출을 선언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사운드보드 시장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교과서격인 애플의 매킨토시를

중심으로 일본기업들의 멀티미디어에 대한 관심은 매우

뜨겁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은 후지쯔가

내놓은 FM 타운즈 이다. 출발당시 SW 의 부족과 지나치게

높은 가격으로 거의 실패작이라고 인정되었던 FM 타운즈는

3 년여의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차세대 PC 의 한 모델로서

인정받게 되었고 일본 교육용 PC 시장에서 40%의

점유율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FM 타운즈가

지향하는 맨머신인터페이스(MMI) 는 매우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업게에서는 매킨토시와 FM 타운즈를

멀티미디어 PC 의 선구자로 간주하고 있다. FM 타운즈는

현재 2세대 제품이 나와 있다. 결국 멀티미디어 PC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IBM-애플의 진영과

마이크로소프트 진영(MPCMC : MPC 마키팅 카운실)의

한판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싸움의 승패는

일본에 의해 좌우되리라 여겨진다. 일본은 컴퓨터와 가전을

결합시킬 수 있는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멀티미디어는 가전과의 결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일본의 도시바가 IBM과 애플의 공동

출자회사인 카레이더에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IBM 은

도시바가 작년에 자본 참여한 미국의 영상정보회사인

타임워너와도 광범위한 제휴교섭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것이 실현될 경우 멀티미디어 공동 사업의 거대한

연합체가 탄생하게 된다. 한편 일본내 주요 전자기업중 가장

먼저 멀티미디어에 관심을 가지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소니는 CD롬 장치를 내장한 WS 을 비롯, CD-I플레이어,

CD롬장치와 약 3 인치의 디스플레이를 일체화시킨

정보검색단말 데이타디스크맨 을 상품화하여 인기를

글었다. 소니는 이와 함께 91 년 11월 애플의 관련 업체인

제너럴매직사와 미국 반도체 업체인 모토롤라와 함께 자본

참여해 휴대용 정보통신기기를 공동개발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나.FDD 뛰어넘기

(1)선두주자 Zip DriveZip, Jazz

(2)DVD, Super Disk, Power Drive

 

다.게임기 콘솔 시장

(1)게임기 콘솔시장의 개화

- 닌텐도의 판정승

’90 년대 초반까지 가정용 게임기 콘솔은 일본 3 대 게임

메이커의 3 파전이라는 색채가 짙다. 우선 닌텐도는 주로

가정용 게임기의 보급에 주력하고 있어 일본이나 미국과

같이 가정용 게임기가 일찍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지역에서는 웬만한 가정에 이미 1 대씩 보급되어 있었고

소프트웨어군 역시 그만큼 두터웠던 편으로 가정용

시장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후에 피씨엔진으로

도전장을 낸 NEC 는 일본의 PC 시장의 주류를 이루던 NEC

8801, 9801 시리즈로 인하여 재미를 보고 있었던 때라

소프트웨어 제조업체라기 보다는 하드웨어쪽인 반도체

제조업체라는 특성이 강하다 보니 기계 자체는 훌륭한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게임기 시장에서는 PC 시장에서

만큼의 활약은 보기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세가는 그 때까지

가정용 게임기 시장 보다는 게임 센터 쪽에 주력하고

있었지만, 닌텐도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세가 마크

시리즈나 제네시스를 통하여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2)수퍼 패미컴의 등장

- 패밀리 세대의 기착지

닌텐도의 패밀리 보급률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NEC 가

게임기 시장에서 다소 고전하고 있는 틈에 시기 적절하게

16 비트 게임기를 처음으로 내놓은 세가의 제네시스가

인기를 끌고 있을 무렵, 닌텐도에서는 회심의 역작 Super-

Famicom 이라는 패밀리의 최신판을 내놓았다. 전체적인

성능이나 기능면에서 제네시스를 압도한 수퍼 패미컴은

이제까지는 없었던 6버튼 컨트롤러를 지원하면서 타

기기에서는 보기 힘든 특색있는 게임들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수퍼 패미컴의 등장은 패밀리를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놀던 사용자가 성장함에 따라 슬슬 한 수

높은 기기로 옮아가려는 시점에서 적절하게 출시되었는데,

우선 VDP 나 사운드 칩에서 처음으로 확대·축소/투명 등의

특수 효과와 함께 스테레오 사운드를 지원해주고 박력있는

음향을 적절히 이용해서 수퍼 마리오, 젤다의 전설과 같은

번들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낯익은 마리오

캐릭터를 등장시킨 게임과 수퍼 패미컴이란 기기 발매와

함께 확보해놓은 써드파티에서 나오는 다양한 소프트웨어는

이 기기를 선택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제공해주고 있다.

(3)닌텐도의 피니시 블로우

- 게임보이로 휴대용 게임기 콘솔 시장 장악

닌텐도가 16 비트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세가를 앞서고

있을 즈음 닌텐도와 세가는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서 다시

한번 부딪혔다. 닌텐도는 수퍼 패미컴과 같은 고성능 게임기

콘솔을 보급하면서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도 줄곧 힘을 쏟아

인기를 얻고 있었다. 패밀리라는 기계가 이제 노후되기

시작하고 높은 연령층에게는 수퍼 패미컴이라는 새로운

기계가 보급되고 있던 와중에 저연령, 여성과 같은

소외계층에게도 파고들 수 있는 저렴하고 아기자기한

게임이 많은 GameBoy 를 내놓았다. 세가에서도 가정용

게임기 콘솔 시장에서부터 닌텐도와 대결해왔듯이 휴대용

게임기 콘솔 시장을 겨냥한 게임기어라는 컬러 액정

게임기를 내놓았지만 당시로서는 너무 비싼 하드웨어

가격과 액정 기술과 원가 사이에서 절충하여 탑재시킨 컬러

액정이 잔상이 너무 심하게 나타나는 등 문제가 많이

나타났다. 결국 세가는 게임 센터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움직임을 가진 자사의 게임을 게임기어에 이식시켰지만

이러한 많은 하드웨어적인 제약 때문에 그 매력이 반감되어

휴대용 게임기 콘솔 시장에서 닌텐도에 참패하게 된다.

(4)침체 상태, 32 비트 이상의 차세대 게임기 콘솔 등장

이 이후부터 새로운 가정용 게임기가 출현하기까지 다소의

공백기가 있었으며 새로운 하드웨어를 내놓기 보다 기존의

하드웨어에 새로운 주변기기를 다는 등 기존 기기에 대한

보강 작업이 이루어져 새로운 경쟁 요소로 떠오르게 된다.

NEC 에서 제일 먼저 피씨엔진에 외장형 시디롬 드라이브를

장착할 수 있게 만든 시디롬 2 라는 형태의 제품을

내놓았지만, 대용량의 시디롬이라는 매체를 적절히

이용하지 못한 수준 이하의 소프트웨어 몇 개밖에 선보이지

못해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후에 시디롬 2 는 PC-Engine

Duo 라는 시디롬 일체형의 제품으로 다시 선을 보이는데,

이 때에는 RPG 를 중심으로 하는 대용량 명작 게임이 속속

선을 보이고 NEC 의 8801, 9801 용으로 선보였던

게임들의 일부가 써드파티에 의해 피씨엔진용으로

컨버전되면서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끌게 되지만

닌텐도의 아성을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제네시스의

하드웨어에 시디롬이 탑재된 제네시스 시디라는 제품 또한

NEC 와 Victor 에서 후에 선을 보이지만 처음에는

소프트웨어의 질이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원하는

충분한 후속 소프트웨어군이 이어지지 않아 점차 사라지게

된다.

한 박자 늦게 신기종을 내놓았던 닌텐도에서는 주변기기

개발에도 힘을 써왔는데 수퍼 패미컴 용의 시디롬 드라이브

개발 소문과 함께 발매 의사를 밝혔었지만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이후에는 현재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32 비트 이상급 시디롬 드라이브를 탑재한 차세대 게임기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그 선두주자는 일본의 소니사.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게임기의 수준을 한단계 올라놓게

되었고다른 게임기 제작회사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5)에뮬레이터

유닉스 기반에서 개발, 맥용으로 컨버전 이렇게 게임기

콘솔은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매킨토시의 콘솔 에뮬레이터의

개발은 극히 최근의 이야기이다. 주로 에뮬레이터의 개발이

유닉스 기반에서 시작하여 피씨를 거쳐 마지막으로

매킨토시나 그 외의 기종용으로 컨버전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는 매킨토시 사용자 중에 게임을 좋아하는

사용자 수가 타기종보다 적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리라.

애플, fMSX 와 같은 8 비트 컴퓨터의 에뮬레이터 개발에

이어서 1~2 년 전부터 콘솔 에뮬레이터도 이식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파워피씨의 보급도

지금처럼 많이 이루어진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기기

전체를 에뮬레이션하기에는 CPU 의 파워가 부족한 점도

있었고 포팅 기술이나 매킨토시 구조 자체의 문제점으로

인하여 사운드 기능이 일단 제외된 절름발이 형태의 것이

많았다. 초기의 8 비트 게임기 같이 간단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에뮬레이션해야 할 요소가 비교적 적은 데 반해,

VDP 와 사운드 칩의 역할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한 16 비트

게임기의 경우에는 이를 매킨토시에서 100%

에뮬레이션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아직까지도 이러한 점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았고

에뮬레이션이라는 방식으로 하드웨어와 100% 호환성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다소 무리라고는 생각되지만, 현재의

매킨토시용 에뮬레이터는 일단 수적으로나 양적으로

초창기보다는 많은 발전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 다만

아직까지도 처음 개발 기반이 매킨토시가 아니기 때문에

타기종에서는 이미 해결된 문제점이 아직까지 남아있거나

정작 에뮬레이터는 있지만 오리지날 게임기

소프트웨어로부터 내용을 백업받기 위한 주변기기 등의

개발은 아직까지 타기종에 의존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라.업그레이드 열풍과 게임

89 년까지만 해도 VGA 모니터는 엄청난 고가였고, EGA

모니터조차 일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또한 대용량

하드디스크는 정부에서나 자료보관용으로 쓰는 고가의

사치성 장비로 여겨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기를 끈

<인디아나존스 3>이 2D 여섯 장으로 발매된 것이다. 이미

시에라 사의 <킹즈퀘스트(King's Quest) 4>가 2D 아홉

장이라는 엄청난 대용량에 허큘리스카드를 무시함으로써

XT 에 불만이 쌓여 가던 차에 계속 고용량 게임들이 나올

조짐을 보이자 XT 는 점차 천덕꾸러기가 돼 갔다. 즉, <

인디아나존스 3>을 하려고 보니 수도 없이 디스켓을 바꿔

끼워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래서 잠시 동안 XT

에 하드디스크를 설치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

페르시아 왕자>는 그래픽과 사운드면에서 사용자들에게

경종을 울린 게임이었다. 이 게임은 반드시 [매직키(Magic

Key)]라는 에뮬레이터를 띄워야 그나마 화면의 반쪽

정도로 허큘리스에서 겨우 실행됐던 것이다. 게다가 이때쯤

한창 새로 부흥하고 있던 용산전자상가나 세운상가에서

VGA 가 업소 전시용으로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

업소에서는 전시용 게임으로 대부분 <페르시아 왕자>를

내세웠고, 허큘리스와 비교도 되지 않는 그래픽에

사용자들은 컬러화면에 대한 열등의식까지 가지게 되었다.

(1) 애드립과 VGA 를 장착한 AT 로

이렇게 시작된 전세계적인 게임 암흑기는 1980 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점차 회복기로 접어들게 된다. AT 기종의

출하와 함께 비디오 보드도 흑백 허큘리스에서 16컬러

EGA 로 개선되었으며, 애플 II 의 사운드마스터 카드를

그리워하던 게임 매니아들에게 음악 카드들이 하나 둘씩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애플 II 이후 점차 잊혀져가던

Brotherbund, Electronic Arts 등 게임 전문 회사의

PC 용 게임이 속속 발표, 보급되었으며 애플 II 시대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조이스틱도 시판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애플 IIe, 애플 III, 리사 등의 연속적인 실패로 곤경에

처해 있던 애플은 매킨토시의 극적인 성공과 함께 다시

컴퓨터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기존 PC

와는 달리 완벽에 가까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본체에 내장된 사운드 기능 등 다채로운 시스템 구성은 과거

애플의 향수를 가지고 있던 사용자들을 다시 끌어 모으기에

충분하였고, Beyond DarkCastle 등의 매킨토시 게임은

게임 머신으로서의 맥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이럴

즈음, 국내의 한 업체에서 애드립(Adlib)이라는 이상한

하드웨어를 내놓았다. 5 만원이라는 싼 가격 탓도 있었지만,

그때까지 삑삑거리는 PC 스피커에 질려있던

사용자들에게는 하나의 복음과도 같았다. PC 스피커가

아닌 진짜 스피커로 애드립의 FM 음이 들리자 <페르시아

왕자>나 <인디아나존스>는 전혀 다른 게임으로 둔갑해

버렸다. 이 시점에서 게임이 단순히 셈틀 안에서 작동하는

풀그림이 아닌 진정한 하나의 영상과 음향으로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용자들은 앞다투어 이 신기한

하드웨어인 애드립카드를 구입하려고 했고, 자연히 좋은

게임의 기준을 따질 때 음악이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게끔

되어 버렸다. '89 년, 이와는 별도로 색다른 게임 하나가

사용자에게 인기를 끌었다. 일본 고에이(KOEI) 사의

작품을 미국시장에 맞도록 만든 <삼국지>가 그것이다.

빠른 손동작이나 고가의 장비가 전혀 필요없는 이 게임은

이른 바 전략게임의 하나로서 사용자가 진지하게 게임을

진행하게끔 구성돼 있었다. 때문에 사용자는 고가의 장비를

구해서 점차 발전하는 게임에 따라가려는 사람과, 삼국지와

같은 XT 로도 충분하나 놀랍도록 재미있는 게임이 계속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점차 양분되어 갔다. 이러한

분열은 적어도 오리진(Origin) 사에서 <울티마 6>을

내놓기 전까지는 별 변동없이 계속 되었지만, 이 게임이

나오면서부터 고가 장비로의 업그레이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도대체 XT 로는 너무 느리고 보잘 것 없어져서

게임 할 기분이 전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IBM-AT 라는 상위기종이 사용자 전면에 신속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울티마 6>은 2D 7 장의 게임이라

얼핏 생각하기에 XT 로도 무리없을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음이 곧 밝혀졌다. CGA 로 컨버전한 후의 그래픽은 거의

알아 보기가 힘들었으며, 그 속도 또한 참기 힘들 만큼

느렸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이때의 참담한 기분이 AT 를

마련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었지만, 아마도 게임광 대부분이

이때 XT 를 버리고 AT 에 VGA컬러로 전환했으리라고

생각한다. AT 는 몇 가지 점에서 XT 와는 아주 달랐다. 우선

최소 20MB 의 하드디스크를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기본메모리가 1MB 에 입출력이 완전한 16 비트라는

뛰어난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플로피디스크는 조금

생소한 1.2MB, 1.44MB 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더구나

여기에 256색이라는 화려한 컬러의 VGA 가 장비된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리하여 사용자들은 앞다투어 AT

시스팀에 VGA 컬러모니터 갖추기에 나섰으며, 그로 인해

용산과 세운상가 등의 조림업체들은 호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누구나 AT 를 찾게됨에 따라, 60 만원을 호가하던

XT 의 가격은 폭락하여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AT

로 시스팀을 업그레이드한 사용자들은 고가장비에 맞는

뭔가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부응하여 게임 또한

급속히 AT 에 맞춰져서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전의

플로피디스크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하드디스크를 염두에 둔

게임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으며, VGA 를 지원하는

게임도 <울티마>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나타났다. 점점

게임이 담긴 디스켓 장수가 늘어나는 것은 EGA/VGA 를

위한 그래픽 때문이었으며, 10 장을 넘기기 일쑤였다.

시에라의 명작인 <히어로즈 퀘스트(Hero's Quest)>나

<래리(Larry) 3>도 그랬으며, 루카스필름의 히트작 <

원숭이섬의 비밀> 또한 처음엔 EGA 용으로, 뒤에 2HD 4

장으로 된 VGA 전용판을 내놓게 되었다. 90 년은 이렇게

AT 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게임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게임은 대부분 360KB 2D

디스켓에 담겨져 있었다. 시에라에서 2HD 한장짜리로 <

존의 생활>이란 VGA 전용 게임을 만들어 2HD 의 유통을

가속화시키려 했고 <소서리언>이란 게임도 그랬지만,

그래도 여전히 2D 로 대부분의 게임이 나왔던 것이다.

일례로, 유명한 마이크로프로즈의 <사일런트 서비스>란

게임도 VGA/EGA/CGA 였지만 2D 네 장으로 나왔다. 이

시기의 다소 별스러운 게임으로 유명했던 것이 있다면 <

대항해시대>와 <삼국지 2>를 들 수 있다. 둘 다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끈 일본게임으로, 게임 내에 무역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대항해시대>와 전편 <삼국지>보다도 훨씬

향상된 시스팀과 다양한 계략, 풍부한 재미가 더해진 <

삼국지 2>는 그 후속편들이 등장할 때까지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장수 게임이 되었다. 90 년 후반, 오리진이 발표한

<윙커맨더(Wing Commander)>는 2HD 와

하드디스크, VGA 의 필수시대를 예상보다 훨씬 빨리

불러오게 만들었다. <윙커맨더>는 우선 2HD 세 장으로

출시돼 그때까지 2DD 를 고수하던 사용자들을 놀라게

했다. 더구나 VGA/EGA 만 지원하는 그래픽에 EMS 라는

생소한 메모리 관념을 요구하는 시스팀은 한동안

게임광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윙커맨더>는 본래 386 에서 적당히

동작하도록 만들어진 게임으로, 램이 1MB뿐인 AT 에서는

여러 모로 제약이 따르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여러가지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EMS 가 뭔가? 내

AT 에선 왜 작동하지 않는가? 비로소 VGA 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시에라나 겨우 VGA 게임들을 만들기 시작한

마이크로프로즈, 막 16컬러에서 벗어나 시에라에 합병되어

<스텔라 7> 같은 게임을 만들던 다이나믹스, 그때까지도

2DD 의 전통을 고수하던 루카스필름 등의 유명 제작사들이

AT 에 한창 적응하고 있을 때 오리진은 느닷없이 386

시대의 개막을 알린 것이다.

(2) 둠

나쁜 운명, 심판 등을 뜻하는 「둠(Doom)」은 94 년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컴퓨터 게임이다. 단순히

말하면 IBM PC 용 3 차원 액션게임이지만 게임분야에서는

3D 게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작품이다.

국내에서도 큰 호응을 받았지만 등장하는 괴물을 기관총,

바추가포로 무차별 살상하고 화면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등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정식으로 발매되지는 않았다. 93

년 1월 게임제작사인 id 소프트가 개발해 발표했으며

이듬해 6월 버그가 제거된 1.4버전이 발표되면서

본격적으로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둠은

기본적으로는 id 소프트가 이전에 발표했던 울펜스타인

3d(Wolfenstein 3d)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으나 어떤

각도에서도 탁월한 텍스처 매핑성능을 제공하는 기술과

치밀한 구성이 돋보였던 게임이다. 같은 3 차원 게임이지만

애니메이션되는 표면처리와 어떤 높이, 각도에서든

치밀하게 표현되는 조명효과 등으로 원작 울펜스타인 3d

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인기를 끌게 됐다. 특히 사용자가 직접

자신이 구상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즐길 수 있게 한 기능을

삽입해 사용자들의 관심을 높여 나갔다. 둠의 이런 기능이

알려짐으로써 PC 통신과 유즈넷, 인터넷을 통해 수천종의

둠 에피소드 모음이 발표될 정도로 호응을 받았던 것. 둠의

이같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사용자들의 창작력을 게임에

반영함으로써 둠의 생명력을 배가시켰던 방식으로

유명하다. 더욱이 486/33급의 컴퓨터에서도 부드럽게

처리되는 매핑효과와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컴퓨터

음악으로 제작사인 id 소프트를 일약 세계적인 게임

개발사로 알려지게 하는 데 효자상품 역할을 했다. 둠은

당시까지 평면에 그쳤던 게임의 수준을 3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헥센, 헤레틱 등 수많은

아류작의 등장을 이끌어 냄으로써 3 차원 액션게임의 붐을

조성했다.

마.PC 통신과 게임, 그리고 정품시대

조금 빗나가는 느낌이지만 빼놓을 수 없기에 언급하려 한다.

90 년, 한국경제신문은 이른 바 케텔(KETEL)이라는

공중망을 구축하였으며 시험가동을 시작함으로써 수많은

PC 개인사용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공공정보망이나

기업 정보망 단말기가 아닌 개인통신을 위해선 모뎀이

필요하다. 사실상 모뎀은 케텔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사치품에 들었으며, 일부 정신병자 (?)들만이 1:1 이나

사설 BBS 같은 매우 소규모의 통신을 위해 고가의 모뎀을

구입하는 형태였다. 그러던 것이 케텔의 등장으로 모뎀의

필요성이 커지기 시작, 급기야 모뎀가격의 대폭하락과 국내

대량생산 그리고 국내 대량보급이라는 모뎀 필수품시대가

아주 빨리, 상상외로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XT 에

허큘리스를 사용해도 모뎀은 2400bps급을 갖춘

허큘리스의 슬픔 처럼, 케텔은 PC 사용자들의 업그레이드

열풍에 발맞추어 착실하게 진보해 나갔다. 게임역사에서 왜

케텔의 탄생이 중요한가 하면 케텔 자체와 이를 기반으로 한

사설 BBS망을 통해 게임이 말 그대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갔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를 공짜로 보는 풍토가

여전한 때에 동호회를 지원하는 케텔과 개인의 사설 BBS 는

자신의 게임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동시에 많은 사람의

게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정말로 유용한 경로였다.

곧이어 데이콤의 PC 서브가 상용화되고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이런 경로는 더더욱 확대되어, 케텔의

유력 게임동호회 개오동은 게임을 좋아하는 통신인

사이에서 게임의 양과 질, 조속한 게임유입에 있어서는 거의

신화적인 위치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그러나

전화요금만으로 원하는 게임을 얻을 수 있는 통신망은 이른

바 동호회의 가입 및 레벨제도로 인해 불만이 생겨나 차차

배타적, 분리주의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통신망을 통한 게임유포의 절정에 이르면 많은 신규

동호회의 난립과 기존 원로 동호회와의 대립양상으로까지

전개된다. 이러한 대립이 첨예화돼 가고 케텔 가입자들의

동호회 개방요구가 점차 거세지던때에, 국내에

외국제작사와 계약을 맺은 공급업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서게임채널을 대표로 하는 이들 정품사 는 자신들이

계약한 게임에 대해서 법적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그

권리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통신망의 불법 유포 게임과 각

복사점의 불법복제 행위를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장치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저작권 보호법에 의해 통신망의

상용 게임은 거의 전부 삭제되기에 이르렀으며, 불법

복제업자들도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통신은

여전히 게임의 분석과 신종게임의 정보, 각 게임내용에 대한

정보등의 값진 자료를 여전히 보유하고, 현재도 이러한

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에 통신이 게임의 발전에

기여하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게임의 대형화

앞서 언급한 <윙커맨더>는 PC 게임에 있어서 거의 최초로

영화적 스토리를 가미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는 더

이상 천재적인 프로그래머 몇 명이 게임을 만들어내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주로 오리진이

주도한 이 물결은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되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임의 각 분야가 속속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이미 VGA 의 화려한 그래픽을 위해

디자이너가 동원되었으며, 음악 효과를 위해 전문 음악인이

필요해졌다. 프로그래머는 이제 그들 전문적인 사항들을

집약시켜 한꺼번에 동작되게 만들기만 하면 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더불어 게임들은 점점 더 대용량화되어

갔고, 이들 게임들은 필연적으로 좀더 나은 하드웨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리진을 제외하면 90 년

후반부터 92 년까지는 AT 도 가능한 일종의 타협의

시대라고 볼 수가 있다. 비록 2DD 는 완전히 사라지고 전

게임이 2HD 에 담겨져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AT

에서 잘 돌아갔고, 심지어는 XT 에서도 실행되는 약간은

시대에 늦은 게임이 나오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

바즈테일(Bard's Tale) 3>로, 이 게임은 Apple 시절

이미 히트한 게임에 자동지도 기능과 약간의 사운드를

추가해서 IBM PC 용으로 뒤늦게 컨버전된 것이다. 훌륭한

스토리와 뛰어난 아이디어, 과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미

VGA 에 맛이 든 사용자는 이 작품을 외면했으며, <

바즈테일(Bard's Tale) 3>는 나온 지 얼마 안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VGA 적응에 성공한 제작사는 이러한

실패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게임광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시에라의 <킹즈퀘스트(King's Quest) 5>가 나왔을 때

이미 시에라 사는 전환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VGA 만

지원하는 이 게임은 시에라 어드벤처 게임의 장점을 대부분

아주 잘 계승했으며, 사운드와 그래픽 양쪽 부분 어디에서도

흠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합병한 다이나믹스는 VGA 의

화려함을 바탕으로 <레드바론(Red Baron)>이라는

시뮬레이션 공중전 게임을 내놓았고, 이 게임 또한 비행

시뮬레이션의 명작 중 하나로 아직까지 기억되고 있다.

더불어 <마이트 앤 매직(Might & Magic) 3>이 드디어

등장, 롤플레잉 게임 팬들을 한없이 기쁘게 해 준 것은 가히

대형, 컬러 게임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될 만한 것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그때까지도 16컬러와 밋밋하고 별

특징없는 셈틀 같은 그래픽을 보유한 제작사들은 차츰

인기를 잃고 사라져야 했다. 수많은 게임이 명멸했지만 이

시기에 기억되는 뛰어난 내용의 16컬러 작품 다수가 그냥

전면에서 없어진 것은 다소 애석한 일이었다. 사용자들은

16컬러 게임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VGA 의

이러한 확장은 국내와 미국외의 게임 발전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대만게임들로, 일본게임계가

IBM-PC 를 무시한 반면, 대만의 신흥 게임업체들은 처음엔

성인용, 퍼즐게임으로 시작하여 고속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최초로 국내에 대만게임이 상륙한 것은 대만판 <

스트립포커>와 <칠소권>으로 알려진 유명만화를 소재로

한 게임이었다. 이후 주로 성인취향의 VGA 용 게임들이

하나 둘 들어오더니, 급기야는 그들 독자적으로 개발한

시스팀에 의한 일본취향의 롤플레잉 게임들이 만들어져

유입되었다. 국내 게임업체 또한 VGA컬러를 장점으로

내세운 화려한 아케이드 게임 제작에 나서기 시작, 오래지

않아 유치하나마 동작하는 시험적 게임을 만들어 냈으며,

상업용으로 <폭스레인저>라는 게임이 등장했다.

현재까지의 게임들을 돌아볼 때 게임 발전방향을 주도해 온

것은 미국의 오리진 사라고 볼 수 있다. 국내에 AT 가

정착되기도 전에 <윙커맨더>라는 386 요구 게임을 내놓은

지 얼마되지 않아 <울티마>의 아류작인 <새비지 엠파이어

(Savage Empire)>와 <마르시안 드림(Martian

Dream)>을 잇달아 발표, AT 에서는 사운드가 전혀

들리지 않게 해 놓음으로써(사운드를 EMS 를 통해

조절했기 떠문에) 결국 많은 사용자들이 386 을 고려하게

유도했다. 그러나 오리진의 게임들은 AT 에서

동작시키기에는 너무나 느렸으며, 그 현상은 <윙커맨더 2>

가 91 년 말에 나오면서 더욱 심해졌다. <윙커맨더 2>는

설치부터 AT 와 386 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필자도

경험한 것이지만, AT 에서 1 시간 40 분이 소요되는 데

비해 386 에서는 40 분 정도만 소요됐던 것이다. 이 시기,

AT 시대의 마지막 전조로서 시에라의 <스페이스퀘스트

(Space Quest) 4>, 루카스필름의 <원숭이섬의 비밀

2>, 그리고 <듄 2> 등이 나와서 AT 사용자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팰콘(Falcon) 3.0>의 등장도 이 당시였는데,

워낙 요구사양이 까다로워 오리진과 더불어 사용자가 빨리

386 을 마련하도록 재촉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영화라도

누구나 좋아하는 장르가 있고 이것은 게임 또한

마찬가지이다. 롤플레잉, 어드벤처, 시뮬레이션, 아케이드

게임 등 선호하는 게임이 각각 다르며, 특정 장르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전부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던 것이 386 으로 전환되는 시기쯤부터 전 장르를

소화하기가 사실상 힘들어지게 된다. 워낙 게임의 가지수가

많아지고 정품화로 구하기도 힘들다 보니 자연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의 것을 우선적으로 구입하게 되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어 나중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만 하게

되는 경향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인지 아닌지는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아무튼 게임을 즐기는 수준 또한 상당히 고급화된 것임은

틀림없다.

사.스트리트파이터 그리고 486

92 년, 통신망에 한 공개용 파일이 업로드됐다. 이 파일은

게임기와 오락실에서 한참 인기를 얻고 있던 게임인 <

스트리트파이터 2>를 본떠 국내 프로그래머가 개인적으로

PC 용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파일이 완성이

아닌 미완성 초기버전이라는 데 있었다. 제작자는 미완성을

업로드하면서 풀그림의 소스를 공개했고, 이에 자극받은

수많은 PC 사용자와 자칭 프로그래머들이 이 소스를

분석하기 시작해 통신망 하이텔(케텔이 바뀐)을 중심으로

급속히 그 열기가 확산되어갔다. 누구나 한번쯤은 게임 내

주인공의 데이터를 조작하여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변경했을 만큼 이 <스트리트파이터 2>의 개조열기가 높아,

통신상의 각 게임동호회는 <스트리트파이터 2>에 대한

특별 게시판을 신설하게 되었고, 곧이어 이 게임의 좀더

나은 버전이 업로드됐다. 하지만 그 역시 완성판은

아니었으며 제 3, 제4 의 업그레이드 파일이 계속해서

업로드되어, 오로지 외국게임만이 지배하던 게임동호회를

국산 게임의 열기로 가득 메웠다. 이는 더욱 발전하여 게임

동호회 게시판을 빌리는 수준에서 하나의 게임제작

동호회를 만드는 수준까지 올라갔으며, 비단 <

스트리트파이터 2>만이 아닌 새로운 게임제작의 노하우가

차츰 쌓여 갔다. 즉, 한 개인의 호기심에서 출발한 <

스트리트파이터 2>라는 미완성 게임 하나가 피폐하던 국내

게임개발의 분위기를 일신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이

정도밖에 묘사를 못했지만, 만약 국내 게임산업이 아주 크게

발전한다면 <스트리트파이터 2> 개조와 업그레이드

열풍이 몰아닥쳤던 92 년은 게임산업 중흥 발전기로 기록될

수 있지 않을까? 국내 게임계가 <스트리트파이터 2>로

술렁거리는 것과는 무관하게 386 의 바람은 게임광들을

386 으로 업그레이드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등장한

것이 <울티마 7>. 필자 또한 386 으로 업그레이드한 지

정말 얼마 안돼 이 게임을 접하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충격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화면 전체를

뒤덮는 화려한 그래픽, 살아움직이는 등장인물과 수많은

캐릭터.... 386DX 에 램 4MB 를 완전히 이용한 이 게임의

출현으로 오리진의 명성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빨리 AT 의 단명을 재촉한 것이 사실이다. 곧이어 <울티마

언더월드(Ultima Underworld)>의 등장. 요즘 말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확실하게 보여 준

초기작으로, 당시 떠돌던 게임 <볼펜스타인 3D>와 더불어

3 차원으로 전방향 직접 움직이는 새로운 게임의 장르를

개척했다. 모든 게임광들은 새롭고도 멋진 이러한 게임에

환호성을 올렸고, 앞으로는 도대체 어떤 게임이 나올

것인가에 깊은 관심들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AT 에서

안돌아갔던 <팰콤(Falcon 3.0)>이 확고한 인기를

구축했으며, 여전히 조금은 그래픽이 떨어지지만 내용이

우수한 마이크로프로즈의 시뮬레이션 <F-15 3>,

다이나믹스의 <에이스(Ace)> 시리즈와 <Rise of

Dragon> 등의 어드벤처, 그리고 전통의 시에라

어드벤처들인 <폴리스퀘스트(Police Quest) 3>이나

<스페이스퀘스트(Space Quest) 5>. <래리(Larry)

5>. 가히 황금시대의 도래였다. 이제는 국내 어디서나

원하는 게임을 구할 수 있고, 어딘가에서 막혀도 혼자

애태울 것 없이 도움을 청할 통신망이 산재해 있다. 대체 더

이상 더 뭘 바라겠는가? 386 4MB 에서만 동작하는 <

코만치> 게임이 나왔어도 사람들은 기뻐하며 받아들였을

뿐 더 이상의 업그레이드나 발전은 바라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당시 인텔이 486DX칩을 개발했지만,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에 누구도 그 칩이 게임전용에

가깝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92 년말, 오리진이

내놓은 <언더월드(Underworld) 2>는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게 만들었다. 이 언더월드 두 번째

시리즈는 가장 빠른 386 에서도 느리게 동작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마이트 앤 매직(Might & Magic)>

4탄인 <Cloud of Xeen>도 무리없이 돌아가는데...

사람들이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불안을 떨칠 무렵 <위저드리

(Wizardly) 7>이라는 게임이 등장했다. 이

롤플레잉게임은 그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인기를 누렸으며, 그 내용의 방대함과

장시간화된 플레이에 의해 사용자가 386, 486 을 생각않고

한동안 즐길 수 있었다. 이 즈음 시에라는 침체기였으며,

루카스필름은 <엑스윙(X-Wing)>이라는 새롭고 재미있는

게임을 개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점점 판매를 늘려나가고

있었다. <인디아나존스(Indiana Jones)> 4탄이 나와

어드벤처 팬을 기쁘게 한 것도, 유명한 성인용 게임 <코브라

미션>이 등장한 것도 이때( 92 년 후반)였다. 그러나 93 년

초, 울티마시리즈 7편의 후속편인 <파충류의 섬(Serpent

Isle)>이 나오자마자 386 에 불만과 짜증을 가지는

사용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 486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아.게임의 현재

확실히 <Serpent Isle>은 386DX 시스팀상에서

무리없이 동작하긴 했지만 지루하리만큼 느린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아직 486 이 상당히

고가이던 93 년 초에 486 으로 바꾼 사용자들이 많아진

것은 거의 <Serpent Isle> 탓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업그레이드 과정에 항상 오리진이 있었던 것처럼

서술했지만, 그것은 적어도 게임 역사에 존재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다른 제작사는 사실상 모두 오리진의 뒤를 따르는

형국이었으며, 이 상황은 현재까지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

이렇게 게임계를 선도하던 오리진이 얼마 있다가 <

스트라이크커맨더(Strike Commander)>라는 무려

41MB 용량의 대형 게임을 내놓자 이제는 486 의 게임계

지배를 누구나 인정하게끔 되었다. 그후 각 제작사들이 386

을 기본으로, 486 을 권장으로 내놓은 게임은 많다.

대표적으로 <킹즈퀘스트(King's Quest) 6>, <

폴리스퀘스트(Police Quest) 4>, <래리(Larry) 6>,

<유럽의 에이스(Ace of Europe)>, 오리진의 <

섀도캐스터(Shadow Caster)>, 최근의 <둠(Doom)>,

<플라이트시뮬레이터(MS Flight Simulator) 5.0>,

<심시티(Sim City) 2000>, <조크행성으로의 귀환

(Return to Zork)> 등. 현재는 586 이 새로이 등장하려

하고 있다. 이미 오리진은 586 용으로 <퍼시픽

스트라이크>와 <울티마 8>을 발표하여 판매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제는 플로피디스켓(FD)이 더 이상 주종이 될

수가 없게 되었다. CD롬이 93 년부터 등장하면서부터 CD

롬을 매개로 한 게임들이 급격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멀티미디어 시대의 도래와 함께 게임도

멀티미디어화로 갈 것인가? 현재는 486 을 중심으로 FD

게임에서 CD롬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586 의 시대와 CD롬의 시대가 열릴

것인가?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여태까지의

과도기에서 예측했던 모든 것이, 예상을 넘는 발전으로 인해

무너졌던 것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어떤 예측도 그리

신통하지는 않으리라는 예측만은 할 수가 있다. 현재까지의

게임은 항상 일반성을 뛰어넘는 반전을 하며 발전을 거듭해

왔다. 앞으로의 게임은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상황으로 전개되리라는 것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1982 년 트립 호킨스는 애플 컴퓨터를 그만두고,

오락 및 교육용 소프트웨어 개발에 뛰어든다. 당시에는 1 백

35 개 업체가 있었으나 현재는(미,하이테크의 주역들 15,

아마 1420) 4 개사만이 남았고 그중의 하나가 호키스가

설립한 일렉트로닉 아츠이다. 그러나 외형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호키스는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것은 오락 및

교육용 소프트웨어 시장에 표준화된 하드웨어가 없기

때문에 일렉트로닉 아츠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소프트웨어를 수십가지의 플랫폼에 맞게 재작성해야 했던

것이다. 호킨스는 이러한 낭비를 없애기 위해 하드웨어

표준을 만드는 작업을 착수한다. 이것이 후에 별도로 독립,

1990 년 3DO 사가 된다.

 6.SW< C/S, 인터넷 각광 >

클라이언트/서버, 다운사이징 등의 용어의 출현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은 90 년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RDBMS

시장이 열렸다고 보며, 멀티미디어 데이터 등의 처리가

용이한 객체지향RDBMS 등이 관심을 모으게 된다. 91 년

노벨은 디지탈리서치社 합병을 통해 데스트탑 기술의

통합이라는 국면을 열고, USL과 합작 유니벨이라는 회사를

설립 유닉스웨어를 내놓게 된다. 유닉스 시장이 커지면서 각

업체별로 추가한 기능들이 유닉스 본연의 이식성.

상호호환성.동일 사용자 인터페이스 등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자 이러한 장애 요인 극복을 위한 통합 노력이

OSF(Open Software Foundation)과 UI(Unix

International) 등에서 이뤄진다. 93 년 OSF, UI 를

비롯한 70 여 업체들은 SVR4 라는 공통 지원 사양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같은해 노벨은 네트웨어와 유닉스

사이의 긴밀한 통합으로 기업컴퓨팅 업계에 다운사이징

솔루션을 제시하게 된다. 93 년 윈도우즈 NT 의 등장은

유닉스 시장과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쟁을 가속하고, 불과 2

년여 만에 시장 선두를 논할 만큼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윈도우즈 NT 및 유닉스의 호황 국면은 기업컴퓨팅환경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메인프레임에서 웍스테이션으로의

전이를 가져오는 클라이언트/서버가 확산되며 네트웍

환경이 기업내 자리잡고 오픈시스팀이 주목받게 된다 90

년대 초반부터 PC 에서 32 비트 운영체제 출현이

되어왔지만 본격적으로 32 비트의 대중화를 선언하게 된

것은 95 년 윈도우즈 95 의 등장부터이다. 넥스트스텝과

솔라리스 x86, IBM 의 OS/2 등이 시장 형성에 실패한데

반해 윈도우즈 95 는 완벽한 32 비트 운영체제는 아니지만,

도스에서 윈도우즈 3.1 에 이르기까지 최대 사용자를

볼모로 급속한 파급을 보이고 있으며, 관 련

애플리케이션이나 하드웨어 산업까지도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92 년 CERN 에서 월드와이드웹을 발표되고, 94 년

NCSA 모자익이 선보이면서 인터넷은 경이적인 확산을

가져오고 이어 넷스케입의 출현은 웹 브라우저 시장을

평정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 썬 등 굵직한 업체들의

선두에서 새로운 소프트 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93 년부터

불기 시작한 웹 열풍은 모자익이라는 킬러

애플리케이션으로 시작됐다. 유닉스가 보편적인 인터넷에서

그래픽환경의 지원으로 사용자는 친숙하게 인터넷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으며, 이후 모자익을 개발했던 마크

엔드르센이 실리콘그래픽스의 사장과 손잡고 넷스케입

커뮤니케이션 사를 설립, 웹에 넷스케입의 돌풍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웹은 하루에다 수십, 수백개의 새로운

사이트를 생성해내고 새로운 신기술 이 쏟아져 나오는

소프트웨어 개발 경연장의 모습을 띄고 있다. 실시간으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리얼오디오, 인터랙티브한 환경을

제공하는 ㅅ웨이브 등의 출현과 웹 홈페이지를 구축하기

위한 HTML, VRML, 자바 등 은 96 년의 가장 뜨거운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가.PC 용 DB

차세대 환경을 지원하는 데이타베이스 기술이 최근 잇따라

개발되면서 DB 시장이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MS 를

비롯, 볼랜드, IBM, 노벨 등 세계 컴퓨터 산업의 리더들은

궁극적으로 DB 의 통합화와 멀티미디어화를 추구하는

신기술을 속속 발표, DB 의 세대교체를 선언하고 나섰다.

먼저 MS 의 윈도우즈용 DB 인 액세스는 비전문가도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기능과 뛰어난 개발환경으로 주목받고 있다.

윈도우즈 환경을 최대한 살린 이 제품은 마우스의 활용에서,

개체연결포함기능(OLE : object linking and

embedding)을 이용, 다양한 멀티미디어 정보를 DB 에

삽입하고 편집할 수 있다. 또 큐카드라는 새로운 개념의

도움말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액세스와 함께 주목할 만한

DB 는 폭스소프트웨어사의 폭스프로 2.5 이다. 기존 도스

제품인 폭스프로 2.0 의 윈도우즈환경을 끌어 올려 OLE,

DDE 등의 완벽한 윈도우즈기능과 함께 수행속도를 3

배이상 향상시켰으며, 도스, 윈도우즈, 매킨토시, 유닉스 등

현존하는 대부분의 운영체제에서 데이터 및 프로그램소스의

공유가 가능하다. 이 제품 역시 액세스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멀티미디어 정보를 DB 에 삽입 편집할 수 있다.

한편 MS 는 현재 다양한 플랫폼에 존재하고 있는 데이터를

궁극적으로 통합하는 ODBC(open database

connectivity)라는 차세대 지향의 기술을 발표, DB

시장의 전환점을 마련하고 있다. 윈도우즈환경을 통한

오픈아키텍쳐의 일환으로 선보인 OBDC 는 서로 다른

형태로 구축된 DB 들이 상호 데이터를 주고 받을 수

있도록한 일종의 네트워크상의 연결규칙이다. MS 는 내년

폭스프로, 사이베이스 SQL 서버, DEC Rdb 및 다양한 DB

에 부착, 상호 데이타를 교환할 수 있는 ODBC 드라이버를

발표할 계획이다.

나.윈도우즈의 등장

1985 년 MS-DOS 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WINDOWS 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버전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자체를 완성품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윈도우를 동시에 열수 없었고, 화면을 분할하는

다이얼링방식으로만이 가능했다. 둘째는 대응

어플리케이션이 거의 없고, 기본으로 제공되는 몇가지 밖에

없었다. 결국 비지니스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세째로 IBM

과 마이크로소프트는 본격적인 WINDOWS 시스템으로

OS/2 상에서 동작하는 프리젠테이션 매니져(PM)를

개발중에 있었다. 이것은 1988 년 제품으로 발표되었고,

그때까지 윈도우즈 1.0 은 별 변화없이 PC 유저용의 작은

윈도우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2 년후인 1987 년

윈도우즈 2.0과 윈도우즈/386 이 미국에서 등장했다. 이

버전에서야 윈도우를 중복시킬 수 있어, 본격적인 윈도우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윈도우즈/386 은 386SX 이상의

시스템을 위한 PC 용 제품으로 메모리 사용법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이 버전에 이르러서 윈도우즈는

중요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OS/2 PM 이 거의

완성되기는 했지만 강력한 프로세서 파워와 메모리나

하드디스크의 확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PC유저의 사용에는

무리가 따랐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컴팩트한 윈도우즈

시스템 그것이 2.0 의 설계 개념이었다.

다.윈도우즈 3.0, 3.1

그리고 윈도우즈 3.0 이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1990 년,

국내에서는 1991 년 판매가 시작되어 시스템

소프트웨어로서는 공전의 대 히트를 기록했다. 이

버전에서는 그래픽스 기능이 특히 강화되어,

어플리케이션의 표시에 아이콘을 사용한다든지, 입체적으로

보이는 버튼 등을 사용하는 그 예이다. 내부적으로는 32

비트 프로세서의 능력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메모리 관리

기능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버전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을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텔의 프로세서를 탑재한

PC 용 기간 OS 로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는 스케일러빌러티(Scalibity)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최근의 PC 업게에서는 귀에

익은 말로, 동일한 OS 나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작은

컴퓨터에서 큰 컴퓨터까지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 특성이 중요한 이유는 규모가 다른 컴퓨터를

접속하는 네트워크 컴퓨팅이나, 큰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를 하위의 컴퓨터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다운사이징을 행하는 경우에 유효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3.0 이후의 윈도우즈를 스캐블러 GUI

시스템 이라고 부르는데, 아래로는 노트북 컴퓨터에서

위로는 서버나 워크스테이션에 이르기까지 모든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통의 플랫폼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또 펜

컴퓨터나 멀티미디어 기기용의 추가 기능을 갖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WINDOWS for Pen 은 펜 컴퓨터에

Windows MultiMedia Extension(MME)이

멀티미디어에 대응하는 것으로, PC 가 앞으로 상품전개

폭을 넓히는데 중요한 것이다. 1992 년 4월 6 일 미국에서

윈도우즈 3.1 의 발매가 개시되었다. 1000 만본이 팔린

윈도우즈 3.0 의 후속 버전인 만큼, 초기 출하 예정이었던

100 만본이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IBM 이 발표한 OS/2

에 대항해 기존의 WINDOWS 3.0 의 다음 버전인

WINDOWS 3.1 을 발표함으로서 WINDOWS 3.0 으로

잡은 기선을 쉽사리 내놓지 않을 전망이다. WINDOWS

3.1 은 OS/2 2.0 의 취약부분인 멀티미디어 부문의 오디오

기능을 내장하고 있으며, 어플리케이션간의 동적인 데이타

교환을 가능케 해주는 강력한 OLE(Object Linking

Embebded) 기능을 내장, OS/2 에 비해 한 수위의

제품임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MS 사는 OLE 기능을

지원하는 워드 2.0 , 파워포인트 3.0 , 프로젝트 3.0 , 엑셀

4.0 등 윈도우즈용 어플리케이션을 3.1과 동시에 발표,

OS 시장은 물론 윈도우즈용 어플리케이션 시장까지 일거에

장악할 진영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윈도우즈 3.0 에 비하면

기본적으로는 안전성과 사용의 편리성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안전성 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복수의 어플리케이션을 동시에 기동하는

윈도우즈에서는 PC 내 메모리의 공용작업에 대해서 엄격한

룰이 있다. 각 어플리케이션은 자신에게 할당된 메모리에만

써 넣는 것이 허용되고, 다른 어플리케이션이나 윈도우즈가

사용하는 메모리에 써 넣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윈도우즈 3.0 에서는 이 룰을 어기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윈도우즈에는 이것을 방지할 수 없었으므로 윈도우즈에는

이것을 방지할 수 없었으므로 윈도우즈 3.0 자체가

동작하지 않는 트러블이 발생했다. 이런 경우 소위 복구

불가능한 어플리케이션 에러 라는 메시지가 출력된다. 일단

이 에러가 발생하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며, 유저는 다시

리셋 스위치를 누를 수 밖에 없다. 윈도우즈 3.1 에서는

이러한 트러블이 발생하면 자동으로 대처하게끔 되어있다.

3.1 의 기능을 어플리케이션이 이용하는 때에 그 매너 를

체크해서 부당하게 쓴 것을 발견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복구 불가능한 어플리케이션 에러 라는 메시지가 출력되는

대신 어느 프로그램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는가를

표시한다. 이런 상황에서의 리커버리는 간단해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리셋하지 않아도 무제의 어플리케이션을 기동하기

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잇다. 최악의 경우에도 윈도우즈만을

다시 스타트를 할 수 있도록 되었기 때문에 리스타트에

필요한 시간은 대단히 줄어든다. 퍼포먼스 측면에서는

하드디스크로의 액세스를 고속화한 것이 최대 개량점이다.

BIOS 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파일의

쓰기, 읽기, 속도를 고속화한 것이다. BIOS 의 기능은 16

비트 프로세서용이므로 32 비트 프로세서의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스크 캐쉬인 SmartDrive 도

읽기, 쓰기의 액세스 조작에 대해서 캐싱이 유효하므로,

실제 읽기, 쓰기 속도는 대단히 향상되었다. 이외에도 각종

드라이브를 튜닝하여 화면표시나 프린터 인쇄도

고속화하였다. 어플리케이션 간의 연결 기능으로는

클립보드와 DDE(Dynamic Data Exchange)에

일시적으로 파일과 비슷한 작업을 하여 데이타를 주고

받으며, DDE 가 어플리케이션의 윈도우간에 직접 데이타를

카피하는 것에 대해, OLE 는 데이타의 색인만을 교환한다.

이 때문에 데이타를 아이콘과 같은 오브젝트로서 다룰 수

있어, 원래의 어플리케이션에서 데이타의 내용을 변경하면

그것이 바로 링크한 곳에 반영되는 메리트를 얻을 수 없다.

OLE 의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전형적인 조작으로 드랙

앤드 드롭이 있다. 이 기능은 OS/2 V2 에서 등장한 것으로

화면상에 보이는 데이타를 마우스로 드랙해서 다른

윈도우나 아이콘을 프린터 매니저 상에 떨어뜨려 인쇄를 할

수 있고, 또 OLE 의 기능으로서 문서내에 버튼을 작성하고,

거기에 음성 데이타를 집어넣는 것도 가능하다. 한편

윈도우즈 3.1 에 들어있는 TrueType 폰트를 사용하면

아웃라인 폰트를 화면에 자유로운 크기로 선명하게 표시할

수 있고, PostScript 대응의 페이지 프린터 없이도 깨끗한

인쇄물을 얻을 수 있다.

라.XENIX 와 Windows NT

XENIX 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사용자에게 더욱 강력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AT&T 사의 UNIX OS 를

재구성하여 퍼스널 컴퓨터에 이식한 PC 용 OS 이다. 즉

XENIX 는 마이크로 컴퓨터 대상의 레벨에서만 채택되어

사용하고 있는 유닉스를 286 /386 시스템 환경에서

적합하도록 수정, 보완 작업을 거친 일종의 변형된 PC

버전의 UNIX 라 할 수 있다. 하드웨어측면에서 XENIX 는

640KB 이상의 기본 메모리 용량과 20MB 이상의

하드디스크를 필요로 한다. 실제로 4 명 이상의 멀티유저

시스템을 원할하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2MB 이상의 메인

메모리 용량과 40MB 정도의 하드디스크를 필요로 한다.

MS-DOS 와의 데이타 호환성 기능을 제공하는 XENIX 는

컴퓨터전문 프로그래머에게 유리하며 고급 언어로 구성,

OS 의 수정 및 시스템 프로그램의 개발에 용이하다. 또 멀티

유저 OS 로 뛰어난 화일보호 처리능력과 높은 이식성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까지 표준 UNIX 와 비교할 때 적지

않은 기능이 제한을 받고 있지만, 마이크로소프트사가

AT&T 와 공동으로 제닉스를 유닉스와 비슷한 성능을 갖게

하기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으므로 격차는 앞으로 많이

감소될 것이다. XENIX 는 유닉스와 관련되어 발전하여

왔는데, XENIX 버전 2.0 은 유닉스 버전 7과, 제닉스 버전

3.X 은 유닉스 시스템 3과 각각 대응관게가 있으며, 제닉스

버전 5.X 는 유닉스 시스템 5과 상관관계가 있다. OS

시장의 판도를 가늠할 IBM과 MS 간의 한판 승부는 1992

년에 MS 사가 발표한 32 비트 데이터 전송을 실현시킨

윈도우즈NT 가 등장함으로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일단

PC OS 시장에서 만큼은 MS 사가 IBM 에 비해 월등한

위치에 있다. 1991 년 이후 PC 용 신세대 OS 가 속속

등장하였다. 1991 년 OS/2 V2 가 발표 되었고, 1992 년

5월에 출하되었다. 1992 년에는 이외에도 Solaris 2.0

과 Windows NT 가 등장했다.

마.Os/2

1987 년 4월 IBM 의 PS/2 의 발표와 함께 OS/2 는 전용

OS 로 소개되었다. OS/2 는 리얼모드에서 MS-DOS 와

호환성을 가지며, 프로텍트 모드에서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OS 이다. OS/2 의 멀티태스킹 기능은 80286 이 가상

메모리 기능을 활용하여, 실현시킨것으로 OS/2 의 대상

기종은 80286 및 80386 CPU 를 갖고, 메모리가 1.5MB

이상인 PC 이어야 한다. 현재 IBM 의 확장판 OS/2 는

MCA 버스 아키텍쳐를 채택한 IBM 의 고유 기종에서만

실행되므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독자적인 노선으로

옮겨가고 있다. OS/2 는 기본적으로 싱글 유저용 OS 로

UNIX 와 같은 멀티유저 기능을 필요로 하는 분야로는

진출할 수 없으며, 또한 싱글 유저용 어플리케이션 분야에

OS/2 의 프로텍트 모드의 장점을 충분히 살린

소프트웨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OS/2 는 단순히

거대한 MS-DOS 에 불과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로 인해

OS/2 는 차세대의 표준 OS 로 정착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으며, 앞으로 수년간은 MS-DOS 의 향상된 버전과 PC

급으로 내려온 UNIX 등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러나 OS/2

는 윈도우즈와 비슷한 GUI(graph user interface)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기존 DOS, OS/2 는 물론

WINDOWS 어플리케이션의 운용이 가능, GUI 와

멀티태스킹 기능으로 지금까지 고성능 PC 시장을 독주해온

WINDOWS 의 강력한 경쟁상대로 떠 오르고 있다. 그러나

286 하드웨어를 기반으로하는 1.0 에서는 GUI 기능이

없는 반면 당시의 분위기가 고도의 하드웨어(메모리,

디스크)를 요구함으로써 개인사용자에게는 별 인기를 끌지

못했으나, 호스트 통신을 위주로 하는 회사에서는 통합

전산망이용을 위하여 필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PC 의

사양이 고급화, 고성능화하면서 32 비트 운영체제로 OS/2

2.0 이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 OS/2 2.0 은 80386SX

이상의 CPU 와 3MB 의 메모리, 30MB 이상의 하드디스크

등을 요구하였다. 설치방법은 1.x 에 비해 대폭적으로

향상된 것으로 예전의 방법과는 달리 현재의 설치 상황이

화면에 그래픽으로 표시되어 설치 진행 상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으므로 상황을 점검하며 진행시킬 수 있다.

사용자의 선택에 다라 모든 코드(30MB 필요) 또는 일부

코드(15MB 필요)를 설치할 수 있다. 즉 온라인 문서,

DOS 와 WIN-OS/2 지원, 폰트, REXX 등은

선택사양이며 OS/2 설치 후에 필요할 경우 추가로 설치할

수도 있다. OS/2 2.0 의 Boot manager 를 설치하면

하나의 디스크에 DOS, OS/2 1.x, AIX, OS/2 2.0 등을

설치할 수 있으며, 시스템 시동시 선택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DOS 와 OS/2 1.x 는 장치 C 에만 설치할 수 있으며

OS/2 2.0 은 C 이외의 논리 장치에도 설치할 수 있다. 다른

사용자를 위하여 OS/2 2.0 을 설치하여 주는 관리자는

응답화일(설치시에 필요한 변수값을 가지고 있는 파일)을

사용하여 일반적인 설치때에 나타나는 화면을 표시시키지

않고도 설치할 수 있으며, LAN 을 사용하여 A 이외의

장치로부터 하드디스크에 설치할 수 있다. OS/2 2.0

에서는 새로운 개체지향의 사용자 인터페이스 (OOUI :

Object Oriented User Interface)를 제공한다. OS/2

2.0 의 데스크 상에 있는 모든 것은 아이콘으로 표시되는

파일, 장치, 프로그램등의 개체(Object)이다. 사용자는

마우스를 통해 Drag & Drop 조작을 통해 쉽게 개체를

복사, 이동, 삭제 또는 인쇄가 가능하다. 일관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통해 사용자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데스크탑 상태 가 그대로 보존되어 다시 시동할

대에는 이전의 상태로 복구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작업장

쉘에서 제공되는 SOM(System Object Model)은

근래에 각광받고 있는 오브젝트 지향 프로그래밍 시스템

(OOPS, Object Oriented Programming System) 을 사용한 것으로 텔리젠트사(IBM과 애플사의 합작회사)

와 Pariot Partners 사로부터 개발된 새로운 오브젝트

지향기술은 계속 OS/2 에 적용될 것이다. OS/2 2.0 은 32

Bit 어드레싱과 프로그래밍을 지원하는 첫번째

운영시스템으로서 기본적인 32 Bit 디자인은 인텔의

마이크로 프로세서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는 DOS

용 어플리케이션이 아직까지는 가장 많이 개발되었고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다양한 DOS

어플리케이션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OS/2 1.x 에서의 DOS BOX 는

80286 의 실제모드(Real Mode)에서 지원됨으로써 많은

제약이 따라 왔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OS/2 2.0 는

80386 에서 지원하는 가상 8086 모드를 사용하여 DOS

V5.0 에 상당하는 가상 DOS(VDM : Virtual DOS

Machine) 세션을 최대 240 개까지 기능을 지원하고

있다. OS/2 2.0 에서는 윈도우즈 어플리케이션을 여러가지

환경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나의 VDM 상에서 윈도우즈

3.0 코드 자체를 윈도우즈의 실제 모드(Real Mode)로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윈도우즈 3.0 을 별도로

구입해야 한다. 그렇지만 OS/2 2.0 에서는 WIN-OS/2

커널이 제공됨으로 별도의 윈도우즈 시스템을 구입할

필요는 없다.

바.그외의 OS 들

곧(1991 년 4월) 국내에 소개될 FlexOS386 은 리얼타임

처리기능을 최대장점으로 꼽고 있으며, 프로텍트 모드에서

사용되는 제품이다. DRI 의 이 제품은 FlexOS 186,

12MHz 의 FlexOS 386 등 모델이 다양하며, DR-DOS

와 마찬가지로 롬으로부터 실행가능하고 적은 메모리를

요구하는 장점이 있다. 이외에도 미국TSL 사의 PC-MOS

386 이 국내에 공급되고 있으며, 이밖에 THEOS 386,

VM/386 등의 제품이 있다. 이외에도 MS 와 IBM 이 주로

격돌하고 있는 OS 시장과는 달리, 응용 S/W 시장에서는

MS 사에 대한 볼란드의 추격이 뜨거웠다. 1990 년

애시턴데이트사를 인수, 데이터베이스 시장의 단연

선두업체로 부상한 볼랜드사는 올들어 C ++ 3.0,

오브젝트 비전등의 신제품을 개발, 끼워팔기등을 통한

저가공세에 돌입했다. MS 사 역시 볼랜드의 대응, 최근

(1991 년?) 폭스 프로등으로 만만치 않게 dBase 시장을

파고들고 있는 폭스소프트사를 인수, 처음으로 DB 분야의

제품 라인을 구축했다. 이어 윈도우즈 3.1 의 발표와 동시에

윈도우즈용 개발툴인 MS C/C++ 7.0 을 발표 볼랜드 C+

+의 독주 가능성에 제동을 걸었다. MS C/C++은 펜

윈도우, 멀티미디어 확장판, OLE 기능등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윈도즈 3.1 용의 최신 라이브러리와 기존 위도툴

SDK 를 제공하고 있으며, 기존 사용자에게는 저가의

업그레이드 비용으로 가격경쟁에 돌입했다. 한편

일본에서도 소니만의 독특한 연구소인 소니 컴퓨터공학

연구소(CSL) 에서 몇년간의 연구끝에 일본산 OS 인

아페르토스를 만들었다. 일본의 폐쇄적이고 실용지향적인

연구풍토에서 이같은 성과를 올렸다는 것은 일단 높이

평가갈 일이라고 일본 업계는 입을 모으고 있다.

사.Linux

리눅스는 워크스테이션에서 주로 사용되는 유닉스와 유사한

운영체제다. 중대형급 이상에서 사용되는 유닉스와는 달리

386급 PC 에서도 활용할 수 있고 유닉스와 거의 비슷한

기능을 제공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공개를 목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유닉스에 대해 관심있는

사용자들이라면 추가 비용 부담없이 사용할 수 있기도 하다.

리눅스는 핀란드 헬싱키 대학 Linus Torvalds 에 의해

개발됐으며 지난 91 년 11월 버전 0.10 이 공개되면서

보급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소프트웨어는 그래픽 환경의 X

와 텍스트 형태의 언어, TEX, TCP/IP 의 네트워킹을

지원하고 응용 프로그램들 역시 다수 개발돼있기 때문에

유닉스와 거의 유사한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리눅스의 개발역사는 유닉스와 상당한 관련을 맺고 있다.

프로그램 개발 과정이나 동기면에서 유닉스가 미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1960 년대 벨 연구소에서 처음 개발돼

공개소프트웨어 형식으로 배포되던 유닉스의 상용화가

리눅스의 탄생의 배경이 된 것이다. 당시 유닉스를 사용하던

많은 프로그래머들은 유닉스와 같이 강력하면서도 동일한

환경을 제공하고 소스 역시 여러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운영체제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리눅스 개발작업에

동참하게 됐다. 91 년 11월 버전 0.10 이 공개된 이래

한달만인 12월에는 0.11 로 업그레이드 됐고 수많은

버전업과정을 통해 94 년 리눅스 1.0 이 탄생했다. 물론

멀티테스킹을 지원하는 32 비트 OS 이며 이더넷 연결로

랜이나 모뎀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등 상업용

버전인 유닉스가 지원하는 거의 대 부분의 기능을 지원했다.

리눅스는 소프트웨어 버전업과정에서 개발자들이

독립적으로 만든 다양한 종류의 프로그램이 발표됐는데,

레드 핫(Red Hat)소프트웨어에서 만든 「레드햇 리눅

스」와 「슬랙웨어」 등이 현재 인기를 끌고 있다.

[출처] *&정보통신의 진화와 발달 과정 소개&*|작성자 도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