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원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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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원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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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1

1

날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그런데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삼위일체’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종의 형체란

나를 본 자 아버지도 보았거늘“이제부터는”

예수가 한 일보다 큰 것도

(하나님을 알리고자)

원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 (1)‘또 다른 보혜사’

어느 보혜사가 더 유익할까

원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 (2)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원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 (3)누구나 보혜사 성령을 받아야하나

같은 한 성령 안에서

원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 (4)보혜사 은사를 받을 자는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은 아버지를

2

3

제 Ⅰ 편

날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그런데

본 문 : 요한복음 제 14 장 제 7 ~ 9 절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

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

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삼위일체’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 같기도 하고, 서로가 다른 분 같기도 하여 매우 모호

할 때가 있다. ‘삼위일체론’은 오묘한 이 관계를 적절하게 표현해준 말이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본문7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본문9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요14:10)

본편에서는 이상의 말씀들을 중심으로 전하겠습니다.

이 말씀들은 어찌 보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 각각 다

른 분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였는지 신학자들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합칭(合稱)하

여, 딱히 성경 글에도 없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뜻이 손에 잡히듯 단번에

이해가 되던가요?

그렇다면 무척 다행입니다.

헌데 저 갈렙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4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 같기도 하고, 또 서로 다르신 분 같기만 했

습니다.

‘삼위일체’라면 ‘삼위가 일체’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체가

삼위’라는 말이기도 하기에 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독립적인 위(位)임을 기본 전제로 하

고서, 삼위가 일체라 하여 만든 말이니 그것이 어디 쉬운 말입니까?

여하튼 ‘삼위일체’란 말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관계에 관한, 그야

말로 알 듯 모를 듯 그런 성경의 글 모습을, 제대로 대변하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렙이 ‘삼위일체론’을 지지하고 옳다 주장하는 이유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던 요한복음 14장의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7절)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9절),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 안에 아

버지는 내 안에”(10절)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에 동등하고, 또 어찌 보면 하나님은 예

수님과 전혀 다른 것 같으면서도 다르지 않은, 그야말로 모호한 관

계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삼위일체’라는 말입니다.

‘삼위일체’야말로 성경처럼 모호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에 대단하

다는 것입니다.

5

다시 말씀드립니다.

‘삼위일체’란 말은 ‘분명 삼위이나 삼위가 일체이다’ 『분명히 삼위

이나, 그 삼위는 확실한 일체』라는 뜻이며, 또 아울러 『분명 일체

이나 그 일체는 확실한 삼위』라는 개념입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로 신묘막측하신 삼위요 일체이신 하나님을 어떻

게 다 알아서, 온전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알 듯 모를 듯 그러하기에 더 성스럽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요14:7)를 중심으로, 각 위의

격을 기초로 한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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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하나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 볼 수도 없는 것이 보면 살아남을 자가 없기

에 조치하셨기 때문이다. 과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있는 것일까?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를 보았거늘”(9절)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

나님의 형상과 그 모양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골1:15)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요1:18a)

그렇다면 하나님에게는 형상과 얼굴의 모양이 없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얼굴은 아예 영원 전부터 있었으며, 지금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요1:18a)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다는 것뿐이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7

그 하반절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도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

자” 하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1:26~27)

우리들에게 형상과 모양이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형상

과 모양이 있으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본 자가 없었습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되면, 죽고 살아남을 자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사람들(죄인)의 눈에 바로 보

이지 않도록 조처하셨던 것입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33:20)

8

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당신의 등만 보이셨을 뿐, 마주 대하여

볼 수 없도록 당신의 손으로 모세의 머리를 덮고 지나가셨다는, 기

록을 볼 수 있습니다. (출33:22~23)

저 갈렙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뵈었다’고

간증합니다.

환상이나 기도 중에, 또는 실제적으로 영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말합

니다.

대개가 주님의 뒷모습이나 허리 아래 모습을 보았다고들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뵙는다는 것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합니다. (고전13:12)

그러나 죄 없이함을 얻어 천국에 이를 때에는, 주님의 얼굴과 우리

얼굴이 서로 맞대면하여 선명하게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에는 뒷모습이나 허리 아래 부분, 옷자락 같은 부분적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나도 주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9

바꾸어 말하면, 그 때가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하여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낱낱이 확인하고 계시지만 말입니다.

죄인의 몸으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보고는 살아남을

자가 없기에 그리 하시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이라 아니할 수 없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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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종의 형체’란

‘종의 형체’로 오신 예수님은, 영광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셨다. 따

라서 사람(죄인)들은 예수님의 몸을 부담 없이 보고 만졌어도 죽지 않았다.

흥미로운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당시 예수님의 형상과 모양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과 같으셨을까?

아니었을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대략이라도 비슷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기야 아담과 하와,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은바 되었

다고 했습니다. (창1:26)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과 우리의 형상이 대략은 같겠지요.

예수님의 경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2:6)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과 같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얼굴이 나타내는, 권위와 카리

스마에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11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종의 형체』로 오셨다는 데에, 의문이 생

기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종의 형체’가 아니십니다.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왕 중의 왕’,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모양이요, 형체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고, 우리 사람들과 똑같이 되

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빌2:8)

이 기록을 보건대, 예수님은 본래의 형상과 모양으로부터 변모, 변

신해 오셨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설명을 더 드리겠습니다.

당시 제자들이나 백성들이 만날 수 있었던 ‘종의 형체’, 곧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양을 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당신 본래

의 본 모양이 아니셨습니다.

자기를 비워서, 다시 말해 본래 모습에서 변화하여 사람 모양을 해

가지고 오셨다는 것이매, 그렇다면 하늘나라 하나님의 본 형상, 본

모양과는 동등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갈렙은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12

‘종의 형체’로 변화하여 사람 되어 오신 예수님이셨기에, 죄인들이

직접 눈으로 보아도, 손으로 만져도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하다 하여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과 일체가 아닌, 다른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신중하게 상고해 본다면, 예수님의 실상은 영광의 하나님,

만왕의 왕이요, 절대 영원하신 하나님과 일체이심을 알 수가 있습니

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변화되셨던 관계로, 사람들이 만나기

에는 부담되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할 만

큼 변화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본래의 형상과 모양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일체

인고로, 만왕의 왕 영광된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조물주=예수’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창조주가 하나님이라는 해석에 반대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조물주이실까요?

이를 알기 위하여 성경을 보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1:15)라고 했습니다.

13

“나신 자”란 것은 낳으신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를 낳으신 자는 그의 아버지라야 맞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

었고”(골1:16)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로 ‘예수=조물주’, ‘조물주=예수’라고 간단하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석해도 될까요?

‘예수=바로 조물주’, ‘조물주=바로 예수’라는 해석에는,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라고 했지, ‘만물을 그가 창조하

되’라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되되’와 ‘하되’의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이 말씀은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

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창조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창조해주신 분이 따

로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계시다는

것을, 성경은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14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골1:16b) 창조되었다고 하셨으

니, 이 예수 어찌 천하 만물과 관계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와 관계없는 것은 천하에 하나도 없습니다.

다 그로 말미암았고, 다 그를 위하여, 그에게서 창조된 것이니, 참으

로 예수와 유관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로 인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성경 말로 들었어도, 여전히 알 듯 모를 듯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잘 들으신 것입니다.

성경도 우리로 하여금 알 듯 모를 듯 해주었으니 말입니다.

‘삼위일체론’도 성경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것이기에, 알 듯 모를 듯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하나님과 일체라고 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안타까워하지는 마십시오.

15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모호한 이런 문제들이 이해되고 믿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요16:13)

그때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주께 묻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성령이 임하시면, 알 듯 모를 듯하던 것들이 모두 해소되고, 다 깨달

아 믿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오히려 신적 권위를 더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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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두 분이 서로 다

른 것 같다가도 일체인 것 같기도 하여, 우리 인간의 두뇌로는 알 듯

모를 듯 오묘막측할 때가 있습니다.

삼위요 일체이신 하나님을 다 헤아려 깨닫게 할 방법이 없어서, 설

교자로서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하오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낼 것이라고 하시며, 그 성령이 임하실 그때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묻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 주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옵소서.

그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다 깨닫게 해주옵소서.

의심 없이 믿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진실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다려 기도드리옵나이

다.

아멘, 아멘.

17

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삼위일체라는 말은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은 어려운 내용입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말을, 공식처럼만 알고 있습니다.

아는 만큼만 믿을 수 있습니다.

관념적 지식은, 관념적 신앙을 낳습니다.

갈렙 목사님께서는 삼위 하나님의 실체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

록 설명해주셨습니다.

성경은, ‘조물주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본체(형상)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영광의 본체 위에, 종의 형상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18

장 2

19

제 Ⅱ 편

나를 본 자 아버지도 보았거늘

본 문 : 요한복음 제 14장 제 7 ~ 9 절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

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

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

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제부터는”

‘이제부터는 알았고 보았다’는 애매한 말씀은, 보혜사 성령이 오실 “그날에”

있을 사건이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헌데 그때 무엇을 알게 된다는 것일까?

본문인 요한복음 14장7절은, 문법적 측면에서 볼 때 말이 잘 되지

않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상반절 ‘알았다면’, ‘알았으리라’의 시제는 분명 과거형입니다.

현재형이라면 ‘너희가 나를 아니, 내 아버지도 안다’로 표현했을 것

이요, 미래형이라면 ‘나를 알게 되면,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라

고 해야 옳습니다.

이 문장의 문법이 틀리다는 것은, “알았더면”, “알았으리로다”는 과거

형에 이어지는 하반절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이라는 접두어 다음에 이어질 시제는, 당연히 미래형이

어야 합니다.

‘이제 이후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 것이고 또 볼 것이라’고 해야 맞는

데, 무엇이라고 기록돼있습니까?

20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과거형입니다.

또 “보았느니라” 역시 과거형입니다.

문장의 시작은 “이제부터”라는 미래로 열어 놓고서, 정작 ‘알았고 보

았다’는 과거로 닫고 있으니, 같은 한 문장의 시제가 옳지 않다는 말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번역에 오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관한 말

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호했을 것입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랜 동안 너희와 함께 있으되 아버지를 보이

라 하느냐”(본문9절)라는 말씀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신 “~을 알았더면, ~을 알았으리로다”에 이어서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는 과거형의 두 말씀 사이에, 미래 시제인

“이제부터는”이라는 접속사가 가운데 있으니, 제 아무리 무턱 믿었던

빌립일지라도 궁금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주님은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21

“이제부터는”이라고 하신 것은, 그 뒤에 하실 말씀, 곧 “그날에” 있을

사건을 근거한 말씀이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

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

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19~20절)

위의 말씀에서 “나”라는 존재는, 문맥으로 보나 분위기상으로 보나

예수님 당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있으면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뜻은 무엇이

겠습니까?

당신이 이른바 재림이라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본문에 관한 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요14:16a)

누구를 보혜하라고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너희’, 곧 제자들을 보혜할 보혜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보혜사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6절)

그분은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17절)

22

여기서의 “진리”란, 6절의 “내가 곧 진리요”의 그 진리를 말씀하신 것

입니다.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17:17)

‘예수님=진리’, ‘하나님의 말씀=진리’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

다.

성령 보혜사는 예수님과 전혀 다름없는 보혜사로, 보혜하는 일에 있

어서도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데 어찌하여 예수님은 자기와 같은 보혜사로 성령이 오시면, 지난

3년 동안 자기에게서 듣고 보았어도 아직껏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잘 모르고 있는 제자들이, 그때에는 소급하여 『소급하여』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그동안 내 입의

말과 내 행하는 능력으로 믿지 못하겠거든, 너희가 성령의 권능을

직접 받을 때에 나타날 그 일로 인하여, 그동안 내가 말해왔던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믿게 될 것이라” (요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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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예수가 하신 일보다 큰 것도 - 하나님을 알리고자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 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기를 원하셨다. 우리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

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

이니라” (12절)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믿는 자들도 할 것이며, 이보다 큰 것도 할 것

이라는 그 일은, 언제부터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앞서 말씀 드린 “이제부터는”(7절), 『이제부터』라는 말씀과 연결되

어있습니다.

그동안 육신을 가지고 하셨던 보혜를, “조금 있으면”(19절) 또 다른

형질, 또 다른 형태의 보혜사 성령으로 받게 될 그때를 지목하여 말

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님처럼 행할 것이요. 또 때에 따라서는 예수

님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4

그러나 성령으로 나타나는 모든 이적과 능력은, 원래부터 있던 자기

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권능은 예수께서 ‘아버지에게 구하여 보내주신 것’(16절)이었습

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따르는 능력을 저들이 직접 체험하게 될 때에

는, 그동안 예수님이 보혜 하시던 모든 것이, 제자들 안에 그대로 들

어와 계신 줄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12절)라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는 말씀이 시사(示唆)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과연 제자들이나 우리가 예수님이 행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어떤 이는 금식을 하더라도 예수님처럼 40일을 다 채우지 말고,

38일이나 39일 안에 마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감히 인간인 우리 주제에 어떻게 하나님과 대등한 행위를 할 수 있

느냐는 것이겠죠.

25

그러나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

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당신보다 더 큰 일도, 더 많은 일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 되기를 바라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에 앞서 먼저 알아둘 것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 안에 예수’, ‘예수를 본 자

는 하나님 본 자’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

다.

그런 제자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은 물론이요, 이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

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셨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믿게 하려는 바람이, 매

우 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26

지금까지 무능하던 제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께서 하시던 일을

그대로 하게 되고, 때로는 그보다 더 큰 일, 더 많은 일도 하게 된다

면, 무엇을 깨닫겠습니까?

비록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셔서 저들 근처에 없으실지라도, 전에

함께 있을 때 보여주셨던 그 능력이 지금 자기들 안에 그대로 들어

와 계시다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또 예수보다 더 큰 일,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때에는, 무엇을 깨닫겠

습니까?

‘하나님이 내 안에 와 계시구나’ 믿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내 안에 아버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 하셨던 그 말씀이, 자기들 속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알

게 될 것입니다.

‘아, 정말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셨구나.’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적인 일들과 진리의 말씀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말씀이었구나, 바로 그 능력이었구나.’

늦었지만 소급해서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7

예수께서는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요16:7)

또한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14:29)고 하셨습니다.

‘일이 이룬다.’는 뜻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보혜하시던 그 보혜를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저들 안에

들어와서도, 똑같이 나타낼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제자들에게도 이루어질 그때에는, 예수님이 행하셨

던 일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됨으로,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던바 아

버지를 믿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안에 계셔서 예수를 주장하셨던 그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하

여,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떠나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당신 대신 다른 형태의 보혜사 성령이 오실 수 있다고 하셨

습니다.

그분이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고 하셨습니다. (14:28b)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28

“너희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가 나와 같을 때에는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구나 여기고, 나보다 더 큰 역사가 일어나면 하나

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구나 생각하라.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

기 때문에 역사하시는 것도 나보다 큼이라. 그렇게 되면 너희는 나

를 믿고, 또한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라”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리고 ‘너희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비로소 믿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보다 더 크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게 해주

고 싶은, 진정한 바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입니다만, 그들이 당신의 하신 일보다 더 영광

스럽고, 더 큰 일을 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더 큰 일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그 열망이 얼마나 크

셨는지를, 새삼 헤아려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시니,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역사하게 됩니다.

29

때로는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됩니다.

이로써 예수님 안에 자기들이 있고, 자기들 안에 예수님이 계심과,

더 나아가 하나님 안에 자기들이 있고, 자기들 안에 하나님이 계심

을 믿게 됩니다.

이쯤 되면 본문 7절의 “이제부터는” 말씀의 앞과 뒤에, 왜 과거형을

두었는지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몸 가진 예수님이 아닌 다른 형태의 성령이 오셔서, 자기 안에서 직

접 역사하는 것을 보고는, 예수께서 과거에 하셨던 “나를 아는 자는

아버지를 알았고, 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말씀

을, 늦게나마 소급해 알게 되므로, 그런 시제를 쓰셨다는 것을 깨달

을 것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본문 말씀이 문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야

말로 제대로 된 문장이었군요.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또한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따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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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안

에 계신 예수님’이라는 진리를 이해 못하는 사실로, 얼마나 안타까

워 하셨는지를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소개하시는 내용들을 보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하게 나타내려 하셨는지도 확실히 알

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나타내셨던 일보다 더 큰 이

적 행하기를 바라셨던 그 심정도, 얼마쯤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받으실 바 그 영광보다는,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어

최고의 자리에 올려 영광 돌리기를 원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주여,

저희는 이제껏 우리 가운데 나타났던 성령의 능력들을, 내 것인 양

자랑하였나이다.

마치 예수님이라도 된 것처럼,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많은 사람

들에게 박수 받으며 이름나기를 원하였나이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31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우리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게 해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32

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보혜사’라는 말이 성령의 고유명사인줄 아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

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름은 야훼, 아들 이름은 예수, 성령이름은 보혜

사,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갈렙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이, 똑 같은 “보혜사

역할”임을 확실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성육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또 다른 형질

(영)의 보혜사께서 오시면, 직접 체험을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된다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지,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게 해주셨습니다.

33

장 3

34

제 Ⅲ 편

원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 (1)

본 문 : 요한복음 제 14장 제 16 ~ 17 절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

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또 다른 보혜사

예수님은 우리를 보혜할 또 다른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며, 하나님께로 떠나

셨다. 그렇다면 원 보혜사인 예수님과 또 다른 보혜사는 서로 다른 분일까?

‘또 다른 보혜사’에 관한 성경을 상고해보겠습니다.

대개 ‘보혜사’라고 하면, 어느 특정한 성령님의 고유명사쯤으로 이

해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또 다른 보혜사’의 ‘또 다른’이

란 말에 착안해 볼 것 같으면, ‘원 보혜사’가 있고 ‘또 다른 보혜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보혜사는 특정 성령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참고로 보혜사에 대한 성경 원문의 사전적 의미를 소개해 드리겠습

니다.

‘옆으로 오도록 부름 받은 어떤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명기돼있습니다.

즉 맡겨진 자를 격려하고 권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그

의 대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컬어, ‘보혜사’라고 한다는 것입니

다.

35

따라서 ‘보혜사’란 호칭은 오로지 성령께만, 그것도 어느 특정 성령

께만 부여되는 고유명사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염두에 두고 하신 예수님의 “또 다른 보혜사”(본문16절), 『또

다른 보혜사』란 말씀으로, 그리스도 예수 자신도 ‘또 하나의 보혜

사’이심을 전제로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흐름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린다면 예수님 당신을 ‘본보혜사’로 하고, 자기와

는 다른 보혜사를 소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를 위한 보혜사이심을 뒷받침해주는, 성경 몇 군

데를 소개하겠습니다.

예수님이 그것도 ‘본보혜사’이심을 증거하는 말씀들입니다.

첫째,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

도시라” (요일2:1b)

“대언자”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이를 ‘보혜사’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

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4b)

36

“간구하시는 자”를 다른 말로 하면, ‘보혜하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는 우리를 보혜하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확인한 바와 같이, ‘본보혜사’ 이외에 ‘또 다른 보혜사’도 있다는 지

식을 바탕으로, 본문 16절을 다시 상고해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나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

사” (본문16절a)

그렇다면 예수님이 ‘본보혜사’란 말일까요?

꼭이 그런 뜻은 아니올시다.

‘본 보혜사’와 ‘또 다른 보혜사’, 이 둘은 다만 그 체모와 형질만 달리

할 뿐입니다.

보혜할 내용에 관한 한,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보혜하도록 맡기신 지정된 사람을 격려하

고 권고하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를 대언하는 직무는, ‘본보혜

사’와 ‘또 다른 보혜사’ 둘 다 똑같다는 말입니다.

같은 정도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본보혜사’로부터 ‘또 다른 보혜사’에게 사역이 그

대로, 정말 『그대로』 넘겨지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37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12절b)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더 이상 너희를 보혜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뜻

입니다.

“내가 가면 아버지께 나와 같은 사역을 할 다른 보혜사를 보내달라

고 구할 것인데, 오실 그분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 저

는 진리의 영이라” (16~17절a)

당연히 ‘진리의 영’이실 테지요.

왜냐하면 같은 흐름 속에 있는 6절에서 “나 곧 예수가 진리”라고 하

셨지 않습니까?

그 진리의 흐름을 같이 하고 있는 영이니, ‘또 다른 보혜사’야 말로

종전에 예수께서 하시던 그대로를 대역하게 된다는 그런 말씀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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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어느 보혜사가 더 유익할까

육신을 입고 오신 ‘본보혜사’ 예수님과, 영으로 오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

중, 어느 분의 보혜를 받는 것이 더 유익할까? 성경에서 그 답을 얻는다.

지금부터는 ‘본 보혜사’와 ‘또 다른 보혜사’ 중, 어느 보혜사의 보혜

를 받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한지를, 가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성육신 하시어 몸으로 계시던 예수님을 ‘몸 보혜사’라 하고,

그 ‘몸 보혜사’와 교대로 오실 성령님을, ‘영 보혜사’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 두 분의 체질은 분명 각각 다릅니다.

그러면 과연 어느 체질의 보혜를 받는 것이, 당시 제자들에게나 우

리에게 더 유익할까, 그것을 한 번 가려보고자 합니다.

‘영 보혜사’가 더 유익하다?

아니다. ‘몸 보혜사’가 더 유익하다?

한 마디로 딱 잘라서 단정하기는 무척 곤란합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그 해답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

라』만일 떠나가지 아니하면 성령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못

39

할 것이니라. 몸인 내가 아버지께 가서 부탁하여 그를 보내리니, 영

인 그가 보혜하심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리라”

이런 취지의 말씀이 바로 본문입니다.

성육신하여 몸으로 계시던 ‘몸 보혜사’ 예수님이 하늘 아버지께로

가셔야만,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영 보혜사’, 즉 성령 보

혜사가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몸 보혜사’로 보혜해 주시던 예수님과, 교대하여 ‘성령 보혜사’로 오

실 ‘영 보혜사’는 서로 동등하시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14:26a)

아버지께로 가신 예수의 그 이름으로, ‘영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라

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시어 아버지와 동일, 동등

하셨듯이, 예수 이름으로 오시게 되는 보혜사 성령도 예수님과 동

등, 동일할 것이니, ‘예수의 영’이라 하여 결코 틀리지 않는 말입니

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고 성령이 오셔서 저희를 보혜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요16:7)

40

『더 유익하다』는 것은, 대체 어떤 유익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그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영이신고로, 나처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나이 많

아지거나 늙을 일도, 죽어야 할 일도 없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영원

토록 너희와 함께 있어 주실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

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할 것이라” (14:16)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에 관하여 계속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는 나처럼 몸이 아니시고 영이시기에 너희들 몸 안팎뿐만 아니

라, 너희 심령 속에도 직접 들어가 거하실 수 있는 분이라. 그러므로

그 보혜사는 너희 안에서 영원토록 그대로 계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 면에서 ‘더 유익하다’ 그 말씀입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

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

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17)

진리의 영인 보혜사 성령이 오시게 되는 그날에는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

라”(20절)고 하셨습니다.

41

모를 리가 없겠지요.

내 몸 안에서 역사하고, 내 몸 안에서 감동하고, 내 몸 안에서 나를

움직이고 계시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 보혜가 바로 내 입과 내 손에 나타나며, 예수님이 행하시던 일들

이 나로 말미암아 일어날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보다 더 크고 더 많

은 능력들도 계속 나타나게 될 텐데 왜 모르겠습니까?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던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부터는”(7절), 다시 말하여 저들 속에 성령이 임하여

예수의 보혜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직접 체험하게 되는

그날부터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

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본보혜사’와, ‘또 다른 성령 보혜사’가 전혀 다름이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나타내시는 일과 그 감동됨을 인하여,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예측을 하시고, ‘이제부터는’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42

예수님이 몸으로 계실 적에 말씀하셨거나 행하셨던 모든 것들이, 어

떻게 있었는지를 이제 이후부터는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라는 말씀을, 늦게나마 소급해

서 깨닫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또 다른 성령 보혜사’가 임하시는 바로 그

날, 그래서 저희가 성령을 직접 체험하게 되는 그날을 가리켜서, 그

날에는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또 하나님이 너희 안에 너

희가 하나님 안에’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이 그분이셨습니다.

두 보혜사, 곧 ‘본보혜사’와 ‘또 다른 보혜사’ 두 분이 하나임을 증거

할, 다른 설명이 아직도 더 필요하신지요?

그렇다면 성경을 더 찾아드리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4:18)

‘오리라’는 이 말씀은, 세상 끝 날 예수님의 재림을 두고 하신 말씀

이겠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그 해 오순절 날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43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

리니” (19절)

이 말씀 역시 제자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살다가 죽어 천국에 오

게 되면, 거기서 나를 볼 것이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얼마 후 120 문도가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을 그날에, 예

수님 당신을 접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성

령 받을 것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보혜사’와 ‘또 다른 보혜사’가, 여전히 하나임이 증명되

고도 남는다 하겠습니다.

만일 귀하께서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우들에게 물었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a)는 그 질문을 직접 받게

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설교를 들었으니 저들처럼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으며, 그래

서 알지도 못한다.”고는 대답 못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보혜하신 것이나, 다시 오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보혜하실 내용은, 결코 다르지 않고 같은 예

수 이름으로 하신다는 것을, 본 시리즈를 통하여 알았습니다.

44

결코 안 다르다고 하셨을진대, 무엇 때문에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더 받으라는 것이냐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내가 믿을 때에 성령과, 이미 믿는 자들에게 받으라는 성령이 다르

기라도 한 것이냐고 따지고도 싶을 것입니다.

다음 시리즈로 그 답을 챙겨드리겠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음 편을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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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본문을 중심으로 ‘원 보혜사’와 ‘또 다른 보혜사’에 관하여 상고해

보았습니다.

몸이 아니면 보혜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로, 몸으로 오시어 희생하

시면서 우리를 보혜해 주셨던 예수님,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때에 따라 세상을 떠나가야만 하셨기

에, 남아 있는 우리를 위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

셨으니, 영으로 오시는 그 보혜사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

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기에, 두 보혜사가 보혜할 내용은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원 보혜사’와 ‘또 다른 보혜사’ 둘 중에서, 어느 보혜사가 우

리에게 더 유익한 것인지는, 더 이상 따져보지 않겠습니다.

따져볼 필요도 없습니다.

주여,

‘또 다른 보혜사’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날 그때에는, 주님이 아버

지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알게 될 것

46

이라고 하셨으니,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충만하게 보내주시옵소

서.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확실히 믿게 해주옵소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다시 오겠다고 하신 주님,

우리의 생활터전에서, 우리의 교회에서 뵙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로 유익케 해주시옵소서.

진실로 유익케 해주시옵소서.

거룩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47

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본보혜사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동

일한 사역을 하시는, 그러나 형질은 다른 보혜사입니다.

사역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를 갈렙 목사님의 전편 설교로 우리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사역 내용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자를 권고하고 격려하며,

그를 위해 대언하는 직무입니다.

육신의 보혜사보다 영이신 또 다른 보혜사의 보혜가 더 유익하다

는 것은, 한시적이지 않고 영원함에 있으며, 또한 내 안에서 직접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와 성령, 보혜사의 사역을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습니

다.

48

장 4

49

제 Ⅳ 편

원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 (2)

본 문 : 요한복음 제 14 장 제 18 ~ 20 절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

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믿을 때에 성령과, 이미 믿는 자들이 받아야 할 성령은 서로 다른 것일까? 믿

음생활을 잘하고 있는 자도 보혜사 성령을 꼭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여러분께서는 바로 앞 제3편에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

냐”(행19:2a)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믿는 동안에’ 또는 ‘처음 믿은 그 후에 성령을 받

았느냐’는, 바울이 에베소교회 교우들에게 물었던 그 질문을, 여러

분에게도 드렸었습니다.

이 물음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보혜사 성령은, 앞으로 믿으려는 자가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자가 받는,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이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경도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9)고 했습

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를 믿지 못하는 자, 안 믿는 자는 지금 우리가 다

루고 있는 보혜사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그런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하다면 이미 예수를 잘 믿고 있는 교인들도 과연 이 성령을 꼭

받아야 하는지,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50

예수를 믿는 믿음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도

확보했으므로, 천국 갈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자들에게, “너희

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물었으니 말입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천국 가는 것은 구원 받을 때

역사했던 그 믿음이면 되는 것이지, 본문의 질문처럼 이에 더하여

보혜사 성령을 반드시 더 받아야 되는 것인지, 회의하는 자들이 있

어 정확한 해석이 요구되는 바입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 120문도에게 임하셨던 그 성령은, 혹 받지 못

한다 해도 괜찮을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 가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보혜사 성령보다는, 처음 믿을 때에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해주셨

던 그 성령의 감동이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성령부터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3b)

지금까지의 성령 시리즈를 통하여 ‘원 보혜사’이신 예수님과, ‘또 다

른 보혜사 성령님’은 남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51

두 보혜사는 형질만 다를 뿐, 똑같은 예수 이름으로 보혜하시고, 그

내용도 완전히 같은데, 굳이 이 둘 다를 꼭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두 보혜사의 보혜 내용이 같은 ‘예수 이름’이

실진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은 없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받는 것을 경계하거나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

을까 생각합니다.

이 교리 이 주장, 저 교리 저 주장들로부터 잠시 자유하면서,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우들에게 하였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

냐”(행19:2a)는 그 질문의 주변 정황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안수해주었습니다. (행19:5~6)

이미 믿고 있는 교인들에게 왜 굳이 안수까지 했을까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추가하여 조처했

을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52

에베소 교회가 설립된 지 한참 후에야, 바울은 그곳을 방문하게 되

었습니다.

오랜만에 갔을 그때까지도, 그곳의 교인 수는 ‘모두 열 두 사람’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행19:7)

바울 사도는 거기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꼈기에, 교인 수를 언급

했을까요?

더구나 “열 둘”이라는 숫자 앞에 굳이 “모두”라는 접두사까지 올려

놓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했을 때 설립 멤버였던 열두 명 말고는, 믿는 자가 한 사

람도 더 불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열 둘”이

라는 숫자를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의외의 그 상황에 답답해했으며, 속이 상했던 게지요.

그래서 물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처음 교회를 설립한 그 이후에 성령을 받았느냐?”

혹이라도 성령을 받은 자가 있었다면, 교회가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합니다.

53

“우리는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런 성령이 있음도 모르거니와, 듣지

도 못하였노라” (행19:2b)

성령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니, 당연한 일입니다.

바울의 추측이 맞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받게 하고

자, 안수 기도를 합니다.

그때 열두 명 모두 받았는지, 아니면 그 중 몇 명만 받았는지는 모를

일이나, 바울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도록 조처했던 것입니다.

그 후 열두 명뿐이던 에베소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받은 교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확실한 것은 에베소 교회에도 마가 다락방 120문도에게 나타났던

그 은사들과, 그 능력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면,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까요.

교인들은 예언을 하게 되었으며, 각색 병자들이 몰려오는 대로 고쳐

주었을 것입니다.

소문이 에베소 온 지역에 퍼지니, 몰려드는 사람들로 교회는 자연스

럽게 대 부흥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54

불을 보듯 번한 일이 아닙니까?

바울은 이렇게 되기를 원하여 저들에게 질문했던 것이고, 안수하므

로 성령을 받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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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교회생활 3년 이상인 자를 예수님은 오래된 신앙자로 여기신다. 그럼에도

아직도 직접 보고 체험해야 만족하겠다는 이들이 있으니, 실망하실 일이다.

지금까지의 지식을 바탕으로, 본문 주변의 정황을 헤아려보겠습니

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

이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고

말씀하시자, 빌립이 의외의 반응을 합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8절)

빌립이 하나님을 꼭 못 믿어서 이런 요청을 드렸던 것은 분명 아니

었습니다.

“보여주면 믿겠나이다.”라고 했던 것이 아니라, “만약 보게 된다면

족하겠나이다.”했던 것입니다.

빌립이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거나 믿지 못했던 것이 아니

라, 자기의 믿음 위에 실제체험까지 할 수 있다면, 더 만족하겠다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56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

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

를 보이라 하느냐”(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를 믿지 못하느냐’라고, 평가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빌립이 이런 대화를 하고 있던 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지 3년차 즈음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얼마 전에 주고받

았던 대화였습니다.

그때쯤의 제자들이라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못 믿을 일이 없었다고

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본다면, 이 대목에서 무엇인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너희와 이렇게 오

래』라고 하신 말씀을, 살펴보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하였던 그 3년을, 충분히 오랜

『충분히 오랜 기간』이라고 보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무려 3년의 세월동안이나 예수님을 보고 알았으면서도, 아버지를

또 따로 보아야 만족하겠다는 빌립이, 실망스러우셨던 것입니다.

57

아버지 하나님을 실제로 보지 않고서도, 아니 볼 필요조차 느끼지

않고서도,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기를 기대하셨던 주

님이었습니다.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20:29)

그럼에도 빌립은 만족할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과 3년을 보낸 제자들과 백성들이라면, 오늘날 교회생활한

지 3년이 되는 교인들과 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생활한지 3년이 넘었어도, 아직껏 하나님

이나 예수님을 보아야 만족하겠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여전히 실망

하시고 답답해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그들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런 성도 보다는, 하나님을 직접 못 보여준

주의 종들에 대하여, 더 안타까우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베소 교회 열두어 명 되는 성도들을 보고 답답하셨던 주님은, 오

늘날 교인 수가 많은 우리의 교회를 보고서는 더 그리하실 것입니

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그로 하여

금 아예 너희 속에 계셔 내가 하던 일을 너희도 하게 하실 것이며,

58

이보다 더 큰 것도 하게 되리니, 그렇게 되는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

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16~20)

그것을 알게 되는 날에는 ‘하나님을 보면 족하겠다.’ 말할 필요가 없

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시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의 생각으로, 심령으로, 손으로, 입으로 증거

할 것이니 말입니다.

특별히 더 보아야 되겠다느니, 특별히 더 경험해야 되겠다느니 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때에는 빌립도 충분히 만족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교회생활한지 3년이 되는 교인이라면, 오래된 신

앙인으로 보시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3년 이상 된 자들 중, 빌립 같은 교인들이 간혹 있습니다.

‘어디어디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어디어디에 이적이 나타

났다’ 듣기만 하면 ‘어느 교회냐?’ ‘어느 기도원이냐?’ ‘어느 목사

냐?’ 아무리 바빠도 달려가는 그런 교인들이 없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직접 현장을 가보아야 만족합니다.

59

뭔가 자기도 그런 체험을 가져야 직성이 풀립니다.

자기 몸에 어떤 신령한 접촉을 느껴야 좋은 신앙인으로 자처합니다.

이렇듯 교회생활 3년이 지나도 자기가 직접 보고 경험해야만 만족

하겠다는 자들을, 주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20:29)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그런 믿음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 등 제자들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가서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분은 성령 보혜로 너희를 만족

하게 해주실 것이다”

‘또 다른 보혜사’는 우리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수 있기에, ‘몸 예

수’께서는 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원리를 이미 터득한 바울은, 성령이 있음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

에게 안수하여,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받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교회뿐만 아니라 온 동네가 하나님께 향할 수밖에 없

게 되었으니, 교회는 자연히 부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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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원 보혜사’와 ‘또 다른 보혜사’를 상고하는 가운데, 날마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두 보혜사의 보혜 내용이 서로 다르지는 않지만,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하여 불만족한 생각을 가진 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갈등하지 않

도록 잘 설명해주심에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나, 천국 갈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자에게도,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받게 하고자 안수

했던 바울의 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마가 다락방에서의 능력과 이적들

이 나타나 교회가 부흥했던 것을 보면서, 우리들의 교회도 그런 역

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보지 않고서도 믿는 우리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무엇을 더 보고 경험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오, 주여!

61

천국 가는 여정 가운데 혹 역경이나 마귀의 역사가 있다손 치더라

도, 흔들림이나 의심 없이 견고히 설 수 있는 믿음의 장부가 되도록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원 보혜사’도, ‘또 다른 보혜사’도, 우리의 필요를 따라 충만하게 역

사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예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여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62

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예수를 영접하고 수년간 교회생활을 충실히 하였으나, 뭔가 부족

함을 느껴 하나님을 확실히 보고 싶다는, 빌립 같은 신자가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 보기 위하여, 신령하다는 소문을 따라가다

가 이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갈렙 목사님은 “믿는 자의 받을 성령”에 대한 말씀으로, 본보혜사

의 말씀을 영접한 자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영접해야하는 중요

한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내 안에서 증거 하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의 ‘직접체험’을 통해 은

사가 불 일듯 일어나서, 내 영혼과 교회가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

다.

믿음의 강력한 확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63

장 5

64

제 Ⅴ 편

원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 (3)

본 문 : 요한복음 제 14 장 제 22 ~ 23 절

22. 가룟 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누구나 보혜사 성령을 받아야 하나

‘또 다른 보혜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임하시는 분이지만, 그렇다

고 해서 사랑하는 모든 자들이 보혜사 성령을 받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보혜사’는 ‘원 보혜사’와는 달리,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미

믿는 자에 한하여 임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 이유를 물어본

유다의 질문 내용이 본문 22절입니다.

“가룟 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

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백성들을 보혜하실 때에는, 자기를 불신

세상에 오히려 더 나타내셨습니다.

이에 비하여 성령으로 오실 때에는,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안 나

타내시고, 이미 믿는 자들에 국한해 나타내시겠다고 하십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믿는 자들에게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임하신다

는 것인지,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본문23절b)

65

“저에게 와서... 저와 함께”라고 하신 그 “저”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씀

입니까?

“나를 사랑하는 자”(21절a)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사랑하는 자”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15절)

당신을 사랑하는 자, 그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친히

들어가셔서, 그를 성전삼아 그의 속으로부터 밖으로 당신을 나타내

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면 거기에 들어가실 수도, 거기에 거하실

수도 없으며, 그 속에서 당신을 나타내실 수도 없으시기 때문이겠지

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

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

게 나를 나타내리라” (21절)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서 당

신을 나타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66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도 저를 사랑하실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 즉 아버지와 내가 성령으

로 저에게 들어가, 저를 거처 삼아 저와 함께 하리라” (23절)

말하자면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속에 임하시어, 당신을 나타내실 것

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또 다른 보혜사’로 임하실 때에는, 이미 믿되

특히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만 들어가 거하

시겠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가 다락방의 120문도같이,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꼭 받

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만일 120문도들 못지않게 예수님을 사랑하며, 계명을 더 철저히 지

키고 또 지켜 나갈 수 있는데도, 꼭 ‘또 다른 보혜사’를 받아야 되는

것일까요?

객관적으로 우리 주변을 살펴볼 때에 ‘또 다른 보혜사’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실제로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고, 공궤하며, 구제하는 일

을 얼마든지 잘하는 이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도 보혜사 성령을 받아야만 하는지, 궁금하지 않

습니까?

67

※ 이해를 돕기 위하여 참고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편의상 처음 믿을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는 성령님을 A성령이라 하

고, 마가 다락방 120문도가 받았던 성령님을 B성령이라 하겠습니

다.

성령의 나타나심의 유형과 그 형태별 특징

A 성령이 임하실 때 :

바람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

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3:8)

“다 이러하니라”는 말씀 속에, 그 특징이 담겨있습니다.

A 성령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처럼 간절한 초청 기도에 의하여 오

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을 들을 때나, 예수님을 영접하려 할 때에, 임의로 『당신

임의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 성령은 언제 어디로부터 왔는지 갔는지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현재 예수를 시인하여 그 이름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성

령이 오고 갔음을 아무리 모른다 할지라도, 예외 없이 100% A성령

을 입은 것으로 알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68

B 성령이 임하실 때 :

‘또 다른 보혜사’ 곧 B 성령이 임하실 때는 A 성령과는 다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1~3)

오순절 날 믿는 사람들이 다 한 곳에 모였습니다.

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

습니다.

아주 물리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엄청난 힘으로 임하신 것

을, 저들의 육안으로든 영안으로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

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고 했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를 받은 분들은,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69

이같이 B 성령이 확실하게 보이고 알게 임하자, 그 얼마 후에 나타

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각양 은사였습니다.

이것이 A 성령과 다른 점이요, 다른 특징입니다.

마가 다락방에 나타났던 은사들은, 예수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

라’, ‘구제하라’ 그런 종류의 은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바로 그들이 있는 그 현장에 직

접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보고, 만지고, 체험할 수 있는 은사들이 나타났던 것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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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같은 한 성령 안에서

교회 공동체가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하여 각자 직분에 맞는 은사를 주셨으

니, 그 중 다중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는 일이, 가장 크고 좋은 은사이다.

처음 믿을 때의 ‘원 보혜사 성령’과, 이미 믿는 자에게 임하시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은 서로 다른 성령이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전 12:11)

이 같은 일이나 저 같은 일이나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 『같은 한

성령』이 행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사정, 시대의 필요를 따라, 각 사람에게

은혜를 나누어 주십니다.

하나님이신데 왜 안 그러시겠습니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시고 나타내주셔야, 공동체가 제대로 굴러가

지 않겠습니까?

B와 같은 A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A같은 B성령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71

“다 한(B=A)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A=B)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12:13b)

그러므로 결국 “성령도 같고 (4절)” “주도 같으며 (5절)” “하나님도

같다(6절)"고 했습니다.

A와 B성령이 같은 보혜사이고, 주도 같고 하나님도 같은 삼위일체

이실진대, 그렇다면 A성령(처음 믿을 때 믿도록 감동케 했던)이면

되지, 굳이 B성령(‘또 다른 보혜사’)이 꼭 필요한 것일까, 이러한 논

리가 있습니다.

설득력 있는 논리입니다.

의미도 충분히 있습니다.

교회 온 성도들에게는 각자 맡겨진 직임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직임들과는 상관없이, 온 성도가 다같이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받아야 된다고 강조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본래 각기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

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일례를 들겠습니다.

72

초대교회 사도들은 공궤하는 일까지 하다 보니, 그들의 본직인 말씀

증거 하는 사역을 제쳐두거나, 설교 준비하는 시간을 줄여야 되는

사정이 생길 때도 있었습니다. (행6:2)

고민하던 끝에 결국 “우리가 하는 여러 일들 중에서,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고 공궤하는 일은 집사를 세워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

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무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에 계명대로 사랑하는 일을 잘 하는 스데반 등 일곱 집사가 세워

져, 구제하는 일과 공궤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행6:2~4)

집사들은 특별히 추천 받아 세워진 일꾼들이었습니다.

헌데 스데반 집사가 그만 ‘또 다른 보혜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충만히 받자, 그에게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나타나

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처럼 하나님을 직접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들에게 행하게 되니, 본래 집사로

세워질 때 받았던 직무들은 뒤로 하고, 교회 밖에서만 능력을 행했

던 것입니다.

아예 사도들처럼 말씀 증거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행

6:8)

73

여기서 바울 사도의 말을 들어볼까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고전12:28~29)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본래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실 때, 모든 교우들을 다 사도

나 다 능력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교회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다중(多衆) 성도들에

게 말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

게 보이리라” (31절)

‘큰 은사’는 무엇이며, ‘제일 좋은 길’이란 무엇입니까?

그 답은 이어지는 13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제일 큰 은사’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제일 좋은 길’이란, 어려운 이웃들을 구제하는 일과, 그들을 섬겨 공

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74

교회 다중인 평신도들의 사랑 실천이야말로, 사도들이 행하는 그 어

떤 은사나 권능들보다 그 이상의 것입니다.

교회 중에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을 실천해야할 다중들 가운데, ‘아버

지를 보여주면 내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족하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공동체 중에 누군가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저희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바라시는 가장 큰 은사, 곧 ‘서로 사

랑’을 더욱 잘 감당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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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요한복음에 나타난 [성령론]에서 ‘원 보혜사’, 그리고 ‘또 다른 보혜

사’를 확실히 챙겨 알게 해주시니 참 감사하나이다.

이 두 보혜사는 다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필요

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나이다.

하오니 우리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마다, 필요를 따라 주시는 A성령

으로 충만하게 하사 주의 뜻 감당하게 하시고, 또한 B성령도 체험케

해주심으로 주님 오실 그때까지, 아니 우리가 주 앞에 이를 그때까

지, 굳건한 믿음 위에 서서 가장 큰 은사, 가장 좋은 길인 서로 사랑

하며,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게 하옵소서.

주여,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성령으로도 충분하지만,

우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또 다른 보혜사 성령도 충만히 받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킴으로,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거처 삼아 나타나시기를 바라나이다.

76

공동체마다 필요에 따라 원 보혜사로 주님의 뜻을 감당하게 하시며,

또 다른 보혜사로 체험케 해주시옵소서.

단 받은바 직임에서 벗어나는 능력 행함은, 절제하게 해주옵소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나이다.

가장 큰 은사와 가장 좋은 길인 사랑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내 몸같

이 사랑하며 도와주다가, 주님 나라 문 안에 들어갈 때에는 우리를

향한 장부들을 만나게 하시옵소서.

거룩하신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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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한동안 한국교회는 ‘방언 즉 성령세례’라는 교리를 주장하는 교단

으로 인해, 방언을 받기 위해 특별한 기도원을 찾는 일이 있었습니

다.

또한 성령의 은사라며, 거짓은사로 점치는 자들의 행각이 교회를

어지럽게도 했습니다.

갈렙 목사님은 성령의 실체를 성경으로 자세히 풀어 주셔서, 더 이

상 혼란이 없도록 신앙을 정립해주셨습니다.

성령은 한분이나, 성도의 거듭남을 증거 하는 성령과, 직분에 따라

나타나는 은사의 성령으로, 그 분야를 구분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특별히 초청하지 않아도,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임하시며, 성령의 은사 역시 하나님이 그 뜻에 합당한대로 주실 것

입니다.

78

장 6

79

제 Ⅵ 편

원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 (4)

본 문 : 요한복음 제 14 장 제 23 ~ 25 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

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

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

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은사를 받을 자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

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려는 자가 받아야, 뒤에 문제가 안 생긴다.

별 개념 없이 본문 23절과 24절을 읽으면, 그저 그렇고 그런 문장이

되고 맙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23절의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말씀이

요, 24절의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

다.’역시, 지당한 말씀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 바로 앞 22절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했던 질문,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

나이까?”에 대한 대답이 본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저 그런 내용이

라고 쉽게 넘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다의 질문에 앞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헤아려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줄 것인즉,

그분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할 것이로되,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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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

이라” (요14:16~17)

이 말씀을 들은 가룟인 아닌 유다가 “어찌하여 자기를 세상에게는

나타내지 아니 하십니까?” 물었던 것이고, 그 질문의 답변이 23절과

24절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를 어찌 그저 그렇고 그런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

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은 이미 믿는 자,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를 사랑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임하려 하시고, 예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 곧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임하려 하지 않

으신다고, 전편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임하지 않으시는 이유로,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

키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24절b)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안 믿고, 당신을 안 사랑하는 자에게는 안 임하시겠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으로 볼진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나, 믿는다고는 하

지만 예수님의 계명 따라 서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비록 ‘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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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보혜사 성령’이 그의 속에 들어가 역사하실지라도, 예수님의 말

씀을 지키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그런 자가 보혜사의 권능을 힘입는다면, 오히려 본래의 자기

기질만 더 강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점을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춘 자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받

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9:23b)

“자기를 부인하고”

그렇습니다. 자기를 버린 자라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그것도 날마다 말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나를 좇을 것’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그런 자라야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를 완전히 죽이고서, 예수님만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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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따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면』보

혜사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온전히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자아가 그대로 살아있는 자라면, 마가 다락방 같이 성령이

강하게 임하시는 집회에는, 참석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장소 안에는 보혜사 성령이 모든 자에게 들어가실 수 있기 때

문입니다.

어중간하게 앉아 있다가 ‘또 다른 보혜사’의 강력한 권능을 받게 될

경우, 예수님을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자기의 본성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만 가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도 이를 규제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본문24절a)

예수님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도 지키지 않

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자에게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의 권능이 들어간다 할지라도,

말씀을 지키지 아니할 것이기에, 임하시는 자체가 옳지 않다는 그런

논조로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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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본문24절)

이 말씀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본 14장을 “내 말”, “나의 계명”, “나를 사랑하는 자”, “나를 나타내리라”

이런 논조로 끌어가시다가, 후미에 가서는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 “너희가 나를 사랑함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함”,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함은 아버지를 순종치 아니함”이라고 하셨습

니다.

예수님 자기에 대하여 쭉 말씀하시다가, 어느 순간 자기를 넘어 아

버지에게로 귀결시키고 계시니, 왜 그러셨을까요?

아버지에게로 결론지은 예수님의 참 뜻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결과적 주역으로 삼으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경 신구약 전 66권은 장, 절, 또는 소절로 분단되어 있습니다.

한 장이 구성되려면, 적어도 그 안에 기승전결(起承轉結)이 확보돼

있어야만, 시작부터 끝까지 온전한 의미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은 기승전결(起承轉結)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을 ‘결

(結)’로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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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마지막 결과적 주역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셨던

것일까요?

문장 상식으로 본다면, 14장이 열려지는 처음 1절과 2절의 주체, 즉

기승전결의 ‘기(起)’가 아버지 하나님이어야 맞습니다.

하나님으로 결론 낸 장이라면, 그 시작의 주체 역시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지 아닌지 14장의 시작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절)

‘하나님’이 문장을 열고 계시죠?

‘하나님’이 주역이 되어 계시죠?

“내 아버지 집에는 이미 거할 곳이 충분히 많도다. 그렇지 않다면

많지 않다고 내가 미리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2절)

기승전결의 ‘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거할 처소에 관하여 불안해하

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결정적 ‘승(承)’ 사건입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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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겠나이다” (8절)

‘빌립이 가로되’라고 하기보다는, ‘빌립마저 가로되’라고 해야 더 맞

는 표현일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제자들 중 그래도 믿음이 좋다는 빌립마저,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

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했다는 거 아닙니까?

‘기승전결’의 구조 가운데 ‘승’ 부분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인 23절 24절은 본14장의 ‘전결(轉結)’ 부분으로, 예수

에게서 아버지 하나님으로 귀결되는, 그야말로 아버지 하나님으로

‘기승전결’하는 그런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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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들을, 아들은 아버지를

예수께서 나중에 하나님이 하실 말씀이라면서도 굳이 같은 말씀을 하신 이

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임을 믿게 하려 하심이었다.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일컬을 때마다, 14장의 주역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의식하여 언제나 존칭을 쓰셨습니다.

참고로 보시겠습니다.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7절b)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고’,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존칭하

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당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 물론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

실 것이요” (15:26)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 성령이 ‘오실 때에’라고 존칭을 붙이셨습니다.

아버지를 ‘또 다른 보혜사 성령’에 비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16:13a)

‘오시면’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경우에 존칭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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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제자들이나 백성들로 믿

게 하는 일에 열심이셨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강력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이 바로 그런 장입니다.

기승전결이 하나님이신 그런 장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읽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예

수님만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예수님만』 보게 됩니다.

한 장의 기승전결이 모두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무시하고, 한두

구절 잘라내 요절해 버린다면, 진정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

다.

성경 가운데 마음에 든다 싶은 몇 구절만 떼어낸다면, 진정한 핵심

은 찾지 못한 채 그저 그렇고 그런 뜻으로 헤아리게 됩니다.

따라서 그렇고 그런 수준의 믿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염려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5~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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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 또한 그저 그렇게 읽고 넘어갈 내용이 아닙니다.

그 의미를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대목입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저희 제자들 안에 드시사, 떠나지 않고 계속

적으로 모든 것을 친히 가르치실 것이라면서, 예수님은 왜 굳이 그

때에 하실 똑같은 말씀들을 미리 하고 계셨을까요?

나중에 잊어버릴까봐서요?

저희로 생각나게 할 목적으로 그리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전에 우리와 함께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이었

지. 당신이 하는 말은 아버지의 말씀이라면서 누누이 말씀해주셨던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과연 무엇을 위하여, 아버지는 아들을 생각나게 하시려 하고, 또 아

들은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려고, 이렇게 미리부터 사전 작업을 하셨

던 것일까요?

빌립, 아니 전체 제자들의 요구이기도 한,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절)라는 부탁을 들으신 주님은,

저들의 신앙에 대하여 실망하셨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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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아직도

믿지 못하느냐”(10절)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물으셨던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임을 제자들로 믿게

하기 위함,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임을 믿게 하려하심』이라(11

절)고 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 훗

날 너희 속에서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면, 그 말씀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저들 속에서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전에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해주신 말씀과 같다는 것

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에 하셨던 말씀을, 성령님도 계속해서 말

씀하실 것인즉,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 전에 예수께 들었던 똑같

은 말씀이네’ 생각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말이 아버지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하나님의 말씀』이

라는 사실을 나중에라도 알게 하기 위하여,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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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요, 아들 안에 아버지, 아버지 안에 예수’임

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관계

를 확실히 알게 해 주시려고, 나중에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일부러

미리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단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임을 믿게 할 목적으로 말입니다.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29절)

“일이 이루기 전에”

‘일이 이룬다.’는 뜻은, 장차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오실 그 일올 의

미하는 말씀입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곧 오실 보혜사 성령을 가리켜서 ‘일’이라고 하

셨습니다.

“이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

령으로 너희에게 드실 그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누구를 믿게 하려고 그러셨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나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믿으

라.”(1절)

바로 하나님을 믿고, 또한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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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라는 것입니

다.

그러고 보니 요한복음 14장은, 결코 그저 그렇고 그런 말씀이 아니

었네요.

할렐루야!

주께 영광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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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원 보혜사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제로 한 여러 말씀들을, 요

한복음을 통하여 접하였나이다.

그리고 깨달아 알게 되었나이다.

우리로 말씀을 새겨듣고 성령 충만함을 입어,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자 되게 하시고, 또한 우리로 이 말씀의 지식을 이웃에

게 전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모든 영광 주께 돌리옵고 거룩하신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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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성령의 은사들을 마치 특별한 권세와 능력으로 오해하여, 자기 자

랑과 욕심으로 받겠다고 한 결과, 한국교회는 많은 부작용에 시달

렸습니다.

갈렙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 주심에 요구조건이 있음을, 성경을 통

해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자, 곧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

입니다.

성령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증거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

고,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확

인시켜 주신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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