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library.kr · 2017-11-07 · 중종임금의태실이 왜 가평에 있나? 중종 태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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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

    “효구려I~ : 근명군(듀平엽ß) 또는병명군(뾰平都)이라 함 • 757년(신라 경덕왕 16) : 가평군으로 고침(加平 또는 嘉平으로 표기)

    ' 1413년앉선 태종 13) : 강원도에서 경기료 떻입

    ' 1888년 : 강원도에 편입 ‘ . 1895년 : 경기도 포천군에 편입

    ' 1896년 : 가명군우로 독립/ ‘ 1

    〈현황〉

    • 면 적 8'43.46뼈경기도략8.3%, 경 ?1톤저12위) • 인 구 : 24, 876세대 59, 112명 (2010.9.30 치준) • 군정구호(슬로건) : 자연과 문화가 살아 숨쉬는 에코피아(Ecopia) 가명 • 상징물 : 캐릭터 - 잣돌이(환f물잣표헨, 군호H爾잉 - 개나리, 군조椰鳥,)- 행, 군목(郵쩌- 잣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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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종임금의태실이

    왜 가평에 있나?

    중종 태실은 조선 제 11대 임금인 중종

    (1488~1544, 재위 1506~1544)의 태얘읍)를 모신

    곳으로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310번지에 있다.

    가평군에서는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하여 관리하

    고있다

    중종태실

    중종은 이름이 이역(李擇), 자는 낙천燦天)으

    로 성종의 둘째 아들이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어머니는 정현왕후이다.1494년(성종 25) 진성대

    군에 봉해졌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임금에 추대되었다. 왕비는 모두 세 분이었다. 첫 번째 왕비는 신수근

    의 딸 단경왕후지만 신수근이 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폐위되었고, 다

    음으로 왕비가 된 윤여펼의 딸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은 뒤 죽었으며,

    그 다음이 윤지임의 딸 문정왕후로 명종을 낳았다.

    태실빼室)이란 왕실에서 자녀의 태를 관상감에서 선정한 좋은 땅에

    묻은 시설을 말한다.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태봉애읍封) 또는 태봉애읍뿔)

    이라고도 부른다. 왕실에서 태실을 만든 것은 자녀의 수명장수와 장래

    를위한축원의 의미가담겨져 있다.

    ------------톨-------_----------------_-----------_------------_--_--------------38

  • 태실이 있는 곳은 주로 경기도와 남쪽 지방, 즉 충청도 · 경상도 · 전

    라도인데, 현재 가평에는 중종태실 외에도 태봉리태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풍수적으로 길하게 여긴 땅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태실의 규모는 정해져 있는데 둘러싼 면적이 대왕은 300보(步), 왕비

    소생의 대군은 200보, 후궁 소생의 왕자들은 100보이다. 니중에 왕에

    오른 경우에는 다시 만드는데, 내부와 외부의 장식이 달라지고 석물을

    추가로만들었다.

    태실에는 석함(石핍, 또는 석실)을 묻는데 그 안에 주인공의 태를 모

    신 태항아리와 태지석빼誌石)이 들어간다. 태항아리는 태를 보관하는

    그릇이며 내호와 외호로 만들었다. 즉 태를 넣은 작은 내호를 다시 큰

    항아리인 외호 안에 집어넣어 이중으로 태항아리를 만들어 사용하였

    다. 태지석은 태실 주인공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적거나 태를 묻은 연월

    일시를같이적었다.

    중종태실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태항아리는 백자로서 현재 외항아리만 남아있는데 어

    깨는 벌어지면서 아래로 좁아지며 어깨 밑으로 4개의 E자

    형 고리가 달려있다. 뚜껑은 넓은 대접을 엎어놓은 형태로

    윗면에는 단추형의 손잡이가 달려있으며 아래 부분에는 항

    아리와 묶을 수 있게 사각형구멍이 4개 만들어져 있다. 태지

    석은 까만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졌다. 그 내용은 중종이

    1488년(성종 19) 3월 5일 축시(표時; 1~3시)에 태어나고

    1492년(성종 23) 9월 7일 해시(갖時; 21~23시)에 태를 묻었

    다고적고있다.

    태실의 외부는석함을묻은그위에 마치 승려의 부도처럼

    중종태실 태 항아리

    석물을 올리고 난간을 둘렀으며 태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비애뽕)를

    세웠다. 임금의 경우 왕자 때에 세운 비와 즉위한 뒤 만든 비가 있는데,

    ------------••-- • -----------------------_-------- ‘ --•---------. 39 I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

  • 이전 것은 땅에 묻거나 새로 제작한 비와 함께 나란히 놓아두기도 한

    다. 그리고 태실의 보호를 위하여 태실이 있는 산 외곽에는 출입을 금

    지하는 금표비(禁蘭뽕) 등의 표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중종태실에는 중앙에 작은 태실비[아기비]가 있는데, 이것은 중종의

    왕자 시절 때 세워진 비애뿜)이다. 비의 지붕돌은 연잎이 새겨진 보주를

    없었고 비신애뿜身)에는 태실의 주인공과 태를 묻은 날찌를 앞뒤로 음각

    하였다. 비의 앞면에는 ‘ 口 口 口 口 口 [렘밍民뼈室’ 이라고 추정된다. 뒷

    면에는 년L治五年九月初七日갖時立’[홍치 5년 9월 7일 해시에 세움]이

    라고 새겨져 있는데, 홍치 5년은 1492년(성종 23)이다.

    그리고 임금으로 즉위한 뒤의 태실비는 작은 태실비 옆쪽에 세워져

    있다. 지붕돌에 용 두 마리를 조각하였는데 비를 받치는 귀부는 마모가

    심하고 머리는잘려져 없어졌다. 앞면의 글자는 ‘主댐觀며服藏으로

    추정되는데 주상전하는 곧 당시 임금인 중종으로서 그의 태를 묻었다

    는 뭇이다. 뒷면은 세운 때를 새겼을 텐데 역시 비신의 중간 부분이 없

    어져서 ‘正團 ..... . ’만을추정할수 있다. 정덕(표德)은중종재위 당시

    명나라 무종(武宗)의 연호이다.

    태실에는 따로 관리하는 관원을 두었으며 임금의 태실이 있는 고을

    은 명칭을 올려주기도 하여서 가평은 1507년(중종 2) 현(縣)에서 군(都)

    으로승격되었다.

    이와 같이 중종태실은 1492년 중종의 나이 5살 때 세워졌다가 중종

    이 즉위한 뒤 임금의 태실로서 그 모습을 갖추었다. 그 뒤 1929년 전국

    에 흩어져 있던 태실들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구역으로 옮겨졌

    다. 가평에 남은 석조물은 흩어져 있다가 1987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복원되었다.

    -- -- → ------- ~-------------------~----------------------------- ------- ----- ---40

  • 조종암의

    조성배경과의미는

    무엇인가?

    조종암은 좁은 의미로는 숭명배청을

    의미하는 25자를 새겨놓은 암벽과 비

    석, 즉 조종암기실비(朝宗嚴紀實b뿜)를

    말하고, 넓은 의미로는 이곳과 아울러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히는 대통행묘

    (大統行願) 및 그 부속건물까지를 포함

    한다. 가평군 하면 대보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

    었다

    조종암이 만들어진 것은 1684년(숙

    종 10) 가평군수 이제두(李齊1':1:)와 처

    사 허격(許格) . 백해명(빔海明) 등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망한 명나라를 추

    모하고 청나라를 적대시한다는 존명반

    청론과 대명의리론에 입각하여 암벽에 조종암

    숭명배청의 의미를 담은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로 인해 조종암이란 명

    칭과유적이생겨났다.

    -----------------------_----_ 를

    41 / 경기도 역사와 문화 액문백답

  • 조종암을 이곳에 세운 연유는 바로 앞에 흐르는 조종천에 있다. 8자

    형으로 여러 번 굽이치는 조종천은 강물이 여러 번 굽이쳐도 반드시 통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인 것처럼 명나라의 유교문화전통을 수호하려는

    충성심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별한 뭇을 지녔기에

    바로 이곳 가평군 대보리에서 조종암이 탄생하였다.

    이때 새겨진 글자는 사무사(思無뻐) 만절필동재조번방(萬折必東再

    造灌챔) , 일모도원지통재심(日훌道遠至痛在心) , 조종암(朝宗嚴) 등 22

    자인데, 뒷날 견심정〔見心亨)이란 세 글자가 추가로 새겨졌다.

    'J+무사(思無:fIJ)’는지면에서 가장높은바위 위에 세로로새겨져 있

    ,. 다. ‘생각할 때는 어떤 사악함도 없도록 하라’는 뭇으로 r시경」과 r논

    i 어」에 나오는 말이다. 김상헌(金尙憲)이 청나라 심양에 잡혀 있을 때 입 i 수한 명나라 의종(殺宗)의 어펼이다 이 말은 이이(轉)가 r격몽요결 : (擊豪要짧」에서 말한 이후 노론계 재야 유학자들이 평생 수양해야 할

    i 경구로인식하였다 j 만절필동(萬折必東)’은 선조가 조선을 구원해준 명나라의 은혜에 ; 감사하며 올린 상소문에 나오는 말로 선조의 어필이다. 물결이 만 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흘러간다는 말이다.

    i ‘재조번방(휩휠灌해)’은 조종암 석벽의 중앙에 위치한다. 명나라가 i 번방인 조선을 다시 세워 주었다는 의미로 명의 은혜에 감째}는 말이 다. 선조는 이 글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을 추모하는 사당인 선무

    } 사(宣武洞)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i ‘일모도원지통재심(日歡끓痛在心)’은 꽤샤가새겨져있는아 i 래 부분 왼쪽에 세뾰 새겨진 글이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 한 아픔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는 뭇으로 효종 임금이 척화대신 이경

    l 여(李敬與)에게 내린 비사를 송시열(宋時컸9의 글씨로 새긴 것이다. 이

    i 것은 병자호란때뿔 씻71 위해 북벌을 단행하고자 빡 제반여건 --톨 - ←←

  • 이 여의치 못함을 통탄한 말이다.

    ‘조종암(朝宗嚴)’은바위에 가로로 ‘햄宗輯라새겨져 있다. 이 글자

    외에는 모두 세로로 새겨져 있다.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李많)의

    글씨이다. 이상의 글씨는 모두 1684년 새겨진 것들이다.

    ‘견심정〔見心享)’ 은 이항로(李,'Q老)가 조종암에 정지를 세우려다 돗

    을 이루지 못하자 그의 제자 유중교가 1874년에 다시 정자를 지으려 하

    며 바위 옆에 새긴 글씨이다. ‘견심’ 은 r주역」에 나오는 문구로 현재의

    위기상황을 염려하면서도 사라져버린 강한 기운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는 낙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명나라의 멸망으로 천하가 오랑캐

    의 지배에 들어가고 또 서양의 문명이 범람하는 유교문화의 위기존망

    의 상황은 자연현상이 순환되는 것처럼 반드시 역전되리라는 믿음이

    이속에숨겨져 있다

    조종암이 만들어진 이후바위 밑에 작은단을세워 명나라의종의 탄

    일과 기일마다 배향하였다. 이들의 중화사상과 이민족 배척의식은 이

    후 이곳이 위정척사사상의 고향과 같은 곳이 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1804년(순조 4) 왕명에 의해 조종암의 역사를 기록한 조종암기실

    비가 세워졌다. 1875년에는 이항로의 문인인 김 영록에 의해 r조종암지

    (朝宗嚴誌JJ가 완성되었다.

    한편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그 부흥운동을 꾀하다가 실패한 인

    사들 9명이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구의사(九義士)의 후손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 가평의 유림들과 뭇을 모아 조종암 근처에 새로 제단

    을 만들었다. 이를 대통행묘와 구의행사(九義行洞)라 칭하고 매년 명나

    라 태조와 구의사에게 제사를 지냈다. 당시 그 단 아래에는 열천재(例

    景顆)라 하여 후손들이 기거하면서 제사를 모시다가 1863년 재실이 소

    실되자 다시 재건하여 조종재(朝宗顆)라 하였다.

    조종암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뒤에도 비밀리에 제향을 계속하다가

    ------------------------------------------------------------------_톨-- ----------43/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액답

  • 1934년 일시적으로 제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 후 구의사 후손들을

    중심으로 재건이 추진되어 1958년 제향이 재개되고 1977년 조종재가,

    1979년 대통행묘가 각각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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