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cient heritage, moder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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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유산, 현대 사회 유럽 정착민이 들어오기 원주민들은 호주 대륙의 대부분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의 언어와 방언을 사용하였고 그들의 생활모습과 문화 전통은 지역마다 달랐다. 그들의 복잡한 사회 시스템과 발달된 전통은 그들이 사는 곳을 반영해주었다. 유럽인이 많아지기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의 선원들과 무역업자들은 여러 세기 동안 호주 원주민들과 거래를 해왔다. 호주 북부의 많은 사람들이 특히 깊은 관계를 형성했었다. 유럽인의 정착 유럽인에 대한 최초 기록은 1606 3 네덜란드 항해가인 Willem Janszoon(1571-1638)퀸즐랜드의 케이프 요크 반도의 서쪽 해안 지도를 만든 것이다. 스페인 탐험가인 Luis Vaez de Torres 호주와 파푸아뉴기니를 가르는 해협을 항해했었다. 다음 세기 동안 유럽 탐험가와 무역업자는 호주 해안가 지도를 계속해서 만들었으며 것이 뉴홀랜드(New Holland)알려졌다. 1688 William Dampier 호주 북서 해안을 항해한 최초의 영국 탐험가가 되었다. 1770 년까지는 그가 유일했지만 다른 영국인 James Cook 선장이 호주의 동부 해안의 지도를 만들고 그것을 영국 왕실에 제출하기 위해 남태평양 지역을 여행하였다. 영국인은 새로운 나라를 죄수 유형지로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최초의 수인 선단으로 11 척의 배가 1500 (절반이 죄수)사람을 싣고 왔다. 함대는 1788 1 26 시드니 하버에 도착하였고 이후로 매년 호주의 (Australia Day)기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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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Ancient heritage, modern society

고대의 유산, 현대 사회

유럽 정착민이 들어오기 전 원주민들은 호주 대륙의 대부분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몇 백 개의

언어와 방언을 사용하였고 그들의 생활모습과 문화 전통은 지역마다 달랐다. 그들의 복잡한 사회 시스템과

발달된 전통은 그들이 사는 곳을 반영해주었다.

유럽인이 많아지기 전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의 선원들과 무역업자들은 여러 세기 동안 호주 원주민들과

거래를 해왔다. 호주 북부의 많은 사람들이 특히 깊은 관계를 형성했었다.

유럽인의 정착

유럽인에 대한 최초 기록은 1606 년 3 월 네덜란드 항해가인 Willem Janszoon(1571-1638)이 퀸즐랜드의

케이프 요크 반도의 서쪽 해안 지도를 만든 것이다. 그 후 스페인 탐험가인 Luis Vaez de Torres 는 호주와

파푸아뉴기니를 가르는 해협을 항해했었다. 다음 두 세기 동안 유럽 탐험가와 무역업자는 호주 해안가

지도를 계속해서 만들었으며 이 것이 뉴홀랜드(New Holland)로 알려졌다. 1688 년 William Dampier 는 호주

북서 해안을 항해한 최초의 영국 탐험가가 되었다. 1770 년까지는 그가 유일했지만 또 다른 영국인 James

Cook 선장이 호주의 동부 해안의 지도를 만들고 그것을 영국 왕실에 제출하기 위해 남태평양 지역을

여행하였다.

영국인은 그 새로운 나라를 죄수 유형지로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최초의 수인 선단으로 11 척의 배가

1500 명(절반이 죄수)의 사람을 싣고 왔다. 이 함대는 1788 년 1 월 26 일 시드니 하버에 도착하였고 이 때

이후로 매년 호주의 날(Australia Day)이 기념된다.

Page 2: Ancient heritage, modern society

약 160,000 명의 남성과 여성이 1788 년 죄를 지어 호주로 오게 되었고 1868 년이 되어서야 이러한 죄수

이송은 끝이 났다. 1790 년 대 초에 죄수들은 자유 이민자가 되었다. 1850 년대의 양모산업과 골드 러쉬는

호주에 많은 이민자가 오는 계기가 되었다.

호주는 노동력의 부족, 광활한 땅, 농업, 광업, 무역에 기반한 새로운 부의 가능성으로 기회의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호주 원주민들은 심한 핍박을 받았다. 사망, 질병, 강제 이주, 몰수 등으로 그들의

전통적 생활습관과 관습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국가의 탄생

1901 년 단일 헌법 하에 6 개 주 연방으로 호주 연방이 형성되었다. 당시 비원주민 인구는 380 만 명이었고

추정되는 원주민 인구는 약 93,000 여 명이었다. 이 중 반이 도시에 살았고, 3/4 이 호주에서 태어났으며

대다수가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혹은 아일랜드인의 후손이었다.

새 국가 창설자들은 자신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과거의 좋지 않은 역사를 청산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호주가 조화롭고 단일의 평등한 국가가 되기를 바랬고 인권과 민주주의 절차, 비밀 투표 등

급진적인 제도를 만들었다. 첫 연방 의회가 실시한 제도 중 하나는 Immigration Restriction Act 1901 으로

영국인의 이민을 제한한 것이다. 이는 제 2 차 세계 대전 이후 계속해서 해제되었다. 오늘날 호주는

세계적이고 비차별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있고 200 여 개국에서 온 이민자들의 주거지가 되었다.

1900 년도부터 1914 년까지 호주의 농업과 제조업이 크게 성장하였고 정부와 사회 서비스 기관들이 많이

생겨났다.

전쟁의 영향

호주∙뉴질랜드 연합군(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ANZAC)은 절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진취성과 지략, 충실함, 동료간의 우애 및 인내심으로 무모한 용기를 위해 맞섰다.

제 1 차 세계 대전의 역사가, Charles Bean

제 1 차 세계 대전은 호주에 재앙을 가져왔다. 1914 년 호주의 남성 인구는 300 만이 채 안되었고 400,000 여

명이 전쟁에 자진하여 참가하였다. 약 60,000 여 명이 사망하였고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은 혼돈의 시기였다. 많은 호주 금융기관이 무너졌던 불황의 시기에

사회적 경제적 격차는 커졌다.

제 2 차 세계대전은 어떤 면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 힘의 권능을 부여하는 사건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대는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지역에서 연합군에게 대단한 공헌을 했다. 전쟁에

참전하여 생존한 세대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장래에 대한 자신감으로 그것에서 벗어나왔다.

Page 3: Ancient heritage, modern society

앤잭의 날(ANZAC DAY) by Michael McKernan

1917 년 한 호주 군인이 그의 술에 취한 북프랑스 장교에게 “Excuse him, sir, he’s been keeping up

Anzac”이라고 말하였다. 프랑스 군인들은 1915 년 4 월 25 일을 기억할 것이다. 그날 새벽 터키

갈리폴리에서 참전하였던 ANZA(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의 용기와 인내를 모든 호주인들이

기린다.

이 특별한 호주인의 날을 추모하는 의식은 먼저 조용한 교회나 개인적인 묵상에서 시작되며 옛 전우들이

전쟁의 참상과 동료를 잃은 슬픔에 대해 회상한 후 살아남은 자를 위한 즐거운 기념이 이어진다. 이들

모두가 호주인들의 희생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날의 의식은 1920 년대에 시작되었고 1990 년대에 재해석되어 활성화되었다. Anzac 은 동틀 녘에 그 곳에

도착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기념 받기 좋은 시기로 보인다. 본래 무사히 돌아온 군인들만 참여할 수 있었던

종교적인 의식이 매년 4 월 25 일 동틀 녘에 짧지만 감동적으로 특히 다른 일보다도 갈리폴리에서의 첫

아침을 기리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에서 생명을 잃거나 해를 당한 모든 호주인들을

추모하게 되었다.

1920 년대 후반 전쟁에 참가하였던 남성들은 모두 함께 뭉쳐 돌아왔고 그들 삶에 있어 가장 모험적이고

끔찍했던 시기와 맞서 살아 나갔고 주요 도시와 작은 마을 등지에서 함께 행진을 하기도 하였다- 전쟁

역사학자 Charles Bean 은 ‘(그들) 조국의 긴 역사와 같은 길을 따라 내려왔다’라고 썼다. 앤잭의 날의

행진은 1950 년대 제 2 차 세계 대전의 본래 Anzac 남녀가 모두 참가하여 그 수가 가장 많았다. 맬번과

시드니에서는 몇몇 도시 구획이 행진하는 사람들로 꽉 찼고 복장은 평복을 입었지만 본래 전투 군단으로 줄

지어 많은 사람들,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의 박수 갈채 속에 이들의 행진을 볼 수 있었다.

Page 4: Ancient heritage, modern society

하지만 ‘앤잭의 날’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과도한 음주, 눈물겨운 감상성,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철저한 배척. 두 차례의 전쟁에 참가한 남성들, 특히 제 1 차 세계 대전에 참가한 남성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러한 반대의 목소리는 차츰 줄어들었고 앤잭의 날은 새롭고 더 뜻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행진하는 사람들은 이제 너무 노쇠하여 추모의 행진은 다른 특징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자부심, 가족 추모, 그리고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앞선 시기보다 1990 년대의 행진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눈물지었던 이유이다.

‘혹은 그것은 절제의 시기에 참아왔던 눈물의 방출이었을까? 빅토리아주의 지방에 살고 있는 25 세 청년

Jack Fothergill 은 공격이 시작되고 한두 시간 만에 Anzac 에 합류하게 되었다. 아침식사 시간에 그는 Pine

Ridge 에서 사망하였다. 그 후 30 년간 그의 부모님은 신문에 매년마다 다른 내용의 감동적인 ‘In

Memoriam’이라는 글을 실어 매년의 앤잭의 날을 기념한다. ‘내가 너의 무덤을 볼 수만 있다면 난 편안히 눈

감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1923 년 Jack 의 어머니가 썼다. 현재 호주인들은 앤잭의 날을 조용한 묵상으로

기념하고 있다.

Michael McKernan 은 호주의 전시 상황에 관심이 있는 역사학자이다.

전후 번영

1945 년 이후 호주는 호경기로 접어들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수천 명의 난민과 이민자들이 호주에 왔고

많은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길 원했다. 제조업에 종사한 많은 오스트레일리아는 20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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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부터 꾸준한 경제 성장을 해 왔다. 남자들이 전쟁으로 떠나 있는 동안 공장 일을 떠맡은 많은 여성들은

평화로운 시대에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경제는 1950 년대에 호주의 남동 산악 지역에 위치한 Snowy River 로 부터 거대한 수력발전능력을 창조한

"Snowy Mountain Scheme" 과 같은 주요한 국가 재건 프로젝트로 말미암아 튼튼하게 성장하였다. 집

소유율은 1947 년 40%에서 1960 년대 70%로 급격하게 상승하였다.

정부의 사회보장제도와 TV 의 보급과 같은 발전도 이루어졌다. 멜번은 1956 년 올림픽을 주최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2000 년 시드니에서 두 번째 올림픽이 열렸다).

변화하는 사회

1960 년대는 호주의 변화의 시기였다. 전후 이민에 의한 인종의 다양화와 영국의 유럽과 베트남 전쟁(호주가

군대를 파견했던)에 초점을 맞추는 것 모두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1967 년 호주인들은 연방 정부가 원주민을 대신하여 법률을 통과시키고 앞으로의 인구 조사에 원주민을

포함시킬 힘을 주기 위하여 압도적으로 국민 투표에 참여하였다. 국민 투표 결과는 원주민과 비원주민의

강한 의지의 소산이었다. 이로써 호주 국민들이 원주민의 생활의 조건을 향상시키도록 정부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 강하게 동의한다는 점이 널리 알려졌다.

호주의 노동당(Labor Party)이 선출되었을 때 자유∙국민당 연합(Liberal and Country (now National) parties)의

전후의 장기 집권도 막을 내렸다. 그 후 3 년 동안 호주의 사회적, 경제적 정책 의제와 보건, 교육, 외교,

사회보장제도, 산업 간 연계 등에서 개혁안이 많이 나오는 등 큰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1975 년 식민지

총독이 노동당 정부를 해산시켜 헌정의 위기가 닥쳐왔다. 다음 총선에서 노동당은 자유∙국민당 연합에

패하여 1983 년 동안 정권을 잡지 못하였다.

1983 년도부터 1996 년도까지 Hawke-Keating 의 노동당 정부의 집권이 이어졌다. 그들은 은행 시스템 규제

완화와 호주 달러에 대해 변동 환율을 사용하는 등 수많은 경제 개혁을 이루어 냈다. 1996 년도에는 John

Howard 호주 총리가 이끄는 자유∙국민당 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1998, 2001, 2004 년에 재선출되었다.

자유∙국민당 연합 정부는 세제와 산업 연계 시스템 등에서 제도 개혁을 이루었다. 2007 년 노동당으로

총리로 선출된 Kevin Rudd 는 기후 변화 문제, 보건 및 병원 시스템 개혁, 교육과 기술 훈련에 대한 투자,

호주 노동법 개정을 포함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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