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栗學에서 본 華西李恒老의 性理思想210.101.116.28/w_files/kiss9/63500762_pv.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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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栗學에서 본 華西李恒老의 性理思想 성 교 진(前 대구가톨릭대 교수) 한글 요약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조선왕조 말기의 저명한 성리학자로서 그의 학설은 주리론이요, 우주론에 있어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조 선시대 후기에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중심인물로서 19세기 후반기를 풍미(風靡)하였 다. 고려후기 안향(1243~1306)이 전수하였던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은 조선조 519년간 태극지리(太極之理)요, 음양기지(陰陽之氣)였지만 한당(漢唐)의 정현(鄭玄)과 공영달(孔穎達)의 태극관(太極觀)은 그것이 아니었으니 태극자(太極者)는 주역(周易)의 본의(本義)대로 순화미분지기(淳化未分之氣)인 것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본 논문의 핵심은 화서 이항로가「율곡전서답우계선생서기의(栗谷全書答牛溪先生書記疑)」이다. 율곡이 37세 때에 38세인 우계에게 보낸 답서 속에서 의심되는 부분이라고 화서(華 西)는 말하고 있었다. 그 분량은 모두 오항(五頁)에 달하고 있으니 주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본론의 제4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화서는 형 기(形氣)와 성명(性命)으로써 분별(分別)하지 않는 것이 의아스럽다고 했지만 율곡은 그 양자가 ‘무비심지발(無非心之發), 구시기발(俱是氣發)’이었음을 고수(固守)하고 있 었기에 그 답서(答書)에서 ‘기불용사즉도심야(氣不用事則道心也)요 기이용사즉인심야 (氣已用事則人心也)’를 간곡히 피력(披瀝)하였다. 제5장에서 화서의 사단칠정론(四端七 情論)을 본다면 약론기발이발지별(若論氣發理發之別)을 말했으니 화서는 이미 이발(理 發)의 타당성(妥當性)을 안고 들어간 듯하다. 하지만 율곡은 우계와의 왕복서(往復書) 에서 시종일관 기(氣)는 발지자(發之者)요 이(理)는 소이발자(所以發者)로서 이발(理 發) 이자(二字)는 철저히 배제(排除)하였기 때문에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표방(標 榜)했던 華西의 이기인도사칠관(理氣人道四七觀)은 처음부터 합치(合致) 될 수가 없었 다. 설사 화서가 ‘시기발이사단시이발야(是氣發而四端是理發也)’로써 동시발(同時發)을 말했다 하더라도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은 화서로부터 삼백년전에 이미 우율왕복서(牛栗往復書)에서 정론(定論)으로 나와 있었던 문제였다. 주제어 :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人心道心), 이발 (理發), 기발(氣發), 서 론(緖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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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牛栗學에서 본 華西李恒老의 性理思想

    성 교 진(前 대구가톨릭대 교수)

    한글 요약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조선왕조 말기의 저명한 성리학자로서

    그의 학설은 주리론이요, 우주론에 있어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조

    선시대 후기에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중심인물로서 19세기 후반기를 풍미(風靡)하였

    다. 고려후기 안향(1243~1306)이 전수하였던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은 조선조

    519년간 태극지리(太極之理)요, 음양기지(陰陽之氣)였지만 한당(漢唐)의 정현(鄭玄)과

    공영달(孔穎達)의 태극관(太極觀)은 그것이 아니었으니 태극자(太極者)는 주역(周易)의

    본의(本義)대로 순화미분지기(淳化未分之氣)인 것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본 논문의

    핵심은 화서 이항로가「율곡전서답우계선생서기의(栗谷全書答牛溪先生書記疑)」이다.

    율곡이 37세 때에 38세인 우계에게 보낸 답서 속에서 의심되는 부분이라고 화서(華

    西)는 말하고 있었다. 그 분량은 모두 오항(五頁)에 달하고 있으니 주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본론의 제4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화서는 형

    기(形氣)와 성명(性命)으로써 분별(分別)하지 않는 것이 의아스럽다고 했지만 율곡은

    그 양자가 ‘무비심지발(無非心之發), 구시기발(俱是氣發)’이었음을 고수(固守)하고 있

    었기에 그 답서(答書)에서 ‘기불용사즉도심야(氣不用事則道心也)요 기이용사즉인심야

    (氣已用事則人心也)’를 간곡히 피력(披瀝)하였다. 제5장에서 화서의 사단칠정론(四端七

    情論)을 본다면 약론기발이발지별(若論氣發理發之別)을 말했으니 화서는 이미 이발(理

    發)의 타당성(妥當性)을 안고 들어간 듯하다. 하지만 율곡은 우계와의 왕복서(往復書)

    에서 시종일관 기(氣)는 발지자(發之者)요 이(理)는 소이발자(所以發者)로서 이발(理

    發) 이자(二字)는 철저히 배제(排除)하였기 때문에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표방(標

    榜)했던 華西의 이기인도사칠관(理氣人道四七觀)은 처음부터 합치(合致) 될 수가 없었

    다. 설사 화서가 ‘시기발이사단시이발야(是氣發而四端是理發也)’로써 동시발(同時發)을

    말했다 하더라도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은 화서로부터 삼백년전에

    이미 우율왕복서(牛栗往復書)에서 정론(定論)으로 나와 있었던 문제였다.

    주제어 :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人心道心), 이발

    (理發), 기발(氣發),

    서 론(緖論)

  • 404 성 교 진

    조선조 철종(哲宗) 때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 1792∼1868 정

    조 16∼고종 5)는 경기도 양근군(楊根郡) 檗溪里에서 정조대왕 16년

    2월 13일 태어나서 77세에 연세(捐世)하였다. 화서는 오직「재세이

    화」(在世理化)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하였으며 「성기성물」(成

    己成物)하는 동안 학자로서 필생(筆生)한 성리학자이다. 화서는 18세

    때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였고, 더 이상 과시(科試)는 응하지 않았지

    만 1840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

    퇴하고 말았다. 화서는 1864년(고종 1)에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

    提)가 되었고, 이어서 전라도 도사(都事)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동부승지(同副承

    旨)로서 주전론(主戰論)을 펴기도 하였으며 공조참판에 승진하여 경연

    관(經筵官)으로서 대원군 중건과 조세(租稅) 부과(賦課)에 반론을 제기

    했던 실천도학자로서 솔선수범한 대학자였다.

    한국의 근세성리학사상 삼대학자(三大學者)가 있었다. 출생순으로 말

    해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 1792∼1868, 字, 而述, 謚號 文敬

    碧珍 李氏로서 경기도 楊平 출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 1798∼

    1876, 字, 大中 幸州 奇氏로서 전북 淳昌출신), 한주(寒洲) 이진상(李

    震相 : 1818∼1886, 字, 汝雷, 星山 李氏로서 慶北 星州 출신)이다.

    이렇게 조선조 후기 유학사를 찬란하게 빛내 오고 있었음은 전해 오는

    전적(典籍)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세 분의 공통점은 주리론(主理論)이

    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인데 이 중에서 노사는 주리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리론(唯理論)을 주창한 학자로서 그 위상을 굳히고 있었

    다. 화서가 경기도 양평출신이요, 노사가 전북 순창 출신이며 한주가

    경북 성주 출신이고 보면 지역적으로 고루고루 이 조선조 말엽에 태어

    난 셈이다. 화서는 한말(韓末)의 의리론(義理論)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선봉(先鋒)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위정척사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