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은 먼 옛날 원시시대부터 바위(嚴盤)면에 · 里6뽕)를 서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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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λ}섣특의 F껑필쉴뜰 재탄생ιl쉬는 뜻갚운 껴,, J

    우리 조상은 먼 옛날 원시시대부터 바위(嚴盤)면에

    각종 상형(象形)형태의 모형을 돌에 새낌(石刻)질하여

    흔적을 남겨 왔으며 청동기시대에 오면서 종정(鍾鼎)

    에 각(刻)을하여 명(銘)을남김으로써 반만년 역사속

    에 금석문(金石文)을 찬란히 꽃피울 수 있게 한 우수

    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민족입니다.

    선현(先賢)들의 찬란한 문화유산(文化遺塵)인 금석 안앙문화원장

    장 석 재 문은 우리민족의 정신적 가치로서 그 팩을 이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급격하게 변해가는 글로벌 시대에 사는 오늘날 전통문화유산은

    각종 개발과 인간들이 오염시킨 자연환경 속에서 마모, 손실, 훼손되어가

    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십 수 년 전에 금속문에 관한 책을 발간하였으

    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고 잘못 기술된 부문을 바로잡아 역사속의 문장가

    (文章家) 명펼(名筆)들의 예술적 사료(史料)를 학술자료(學術資料)로 활용

    하고 보촌시키고자 부족하나마 이 책을 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손자이며 방의(芳劉의 아들인 익평부원군(益平府院

    君) 이석근(李石根)의 묘비를 추가로 넣었습니다.

    금번 안OJ=금석문을 발간하기까지 도와주신 안양시장님과 관계자료 및

    촬영을 할 수 있게 협조해주신 문화예술과 직원들께 감사드리며, 현장을

    답사하며 탁본 및 촬영에 애쓴 향토문화연구원들의 노고에도 감사드립니

    다. 이번 안OJ=금석문의 발간이 향토문화발전과 학술연구에 판 가치가 있기

    를기대하는바입니다.

    2008. 12

  • 녕환養·쏠J늠.종 I 目 次

    발간사

    금석문의 개관

    금석문의 발전상

    금석문의 현황

    5

    8

    9

    저11 장 사적비(事隨牌) 만안교배萬安橋牌)

    만안교비송 병세萬安橋牌않 井序) - 20

    저| 2장 신도비(神道釋) 박서 신도비(朴違 神道裡) 32

    제 3장 묘비(훌牌) 김순 묘지(金뼈 홍誌‘) 60

    류정현 묘갈(柳뀔顯 훌喝) 79

    류덕옥 묘갈(째따惠玉 훌喝) 87

    이후달 묘비李1흥達 훌硬) 112

    심간묘(;낌혔훌) 117

    익평부원군 이석근 묘비益平府院君 李E根 훌硬) 118

    저| 4장 부도비(浮屬牌) 안앙사 칠층석탑 명(安養폭 t層.fi±흉 銘) 126

    반월암 백운당 부도(半月廣 白雲堂 j좋屬) 128

    반월암 명성당 부도(半月 l훌 明慢堂 浮f홉) 129

    반월암 서영당 마애 부도(半月廣 西影堂 딸庫 ;쭈屬) 130

    염불암 서영당 부도(念佛廣 西影堂 浮尾) 131

    염불암 인봉당 부도(念佛廣 印훌堂 浮盧) 132

    염물암 현진당 마애 부도(念佛廣 現흉堂 f훔출 ;주f률) 133

    염물암 여산 송씨 마애 부도(念佛廣 碼山宋ff 딸庫 浮屬) 134

    염불암 도일당 부도(念佛1훌 道日堂 ;추屬) 135

    불성사 각원대사 마애 부도(佛性촉 覺圓;;1;:._giji 딸폴 浮f률) 136

  • “--‘----ζ‘→-- - - - 二 i

    저15장 애각(뿔刻) 삼막사 마애삼존불 조성 명문(프幕촉 摩庫三尊佛 造成 銘文) 138

    삼막사 칠성전 신건 명문(三幕촉 t星願 新建 銘文) 140

    삼막사 칠성각 중건 명문(三幕촉 t星聞 重建 銘文) 141

    마애종(딸庫鐘 142

    삼막사 []뻐각화(三幕촉 앉홍E흥~lj畵) 144

    저| 6장 당간7 11(禮쑥記) 석주명든R石柱銘文) 146

    저| 7장 공적비(功績牌) 송정명 -불망배宋正明 不忘硬) 152

    이태응 불망비(李泰應 不忘、碼) 153

    저18장 암각(끓刻) 삼막사 삼귀자 명문(三幕휴 =龜字 銘文) 156

    삼성산(=聖山) 매바위 각지{刻字) 158 관앙동 삼산동천 각자(冠陽洞 =山洞天 刻字) 159

    불성사 만력 십팔년조 각자(↑했性폭 萬層 十A年造 刻字) 160 삼막사 백련암지 신금대 각자{三幕휴 白違廣址 神金臺 ~IJ字) 161 삼막사 등곡대 각자{三幕휴 燈§臺 횟j字) 162

    제 9장 기타 삼막사 감로정 석조 명문(三幕촉 tt露井 :tli홈 銘文) 164

    반월암 약사영천 각자{半月廣 藥師靈果 刻字) 165

    풍앙조씨 정려판(風爆趙.Et 族聞뼈 166

    삼막사 주초석 문앙(=幕촉 柱짧E not.+:훨 167

    이성환(李星煥) 시비(짧뿔) 168

    제10장 주변필시의 금석문 169

    제11 장 부록 217

    - 7 -

  • 금석문(金石文)이라 하면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을 말하는 것으로 선인의

    얼과 숨결을 직접 체험하고 소중한 학술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따. 금문이라

    하면 금속면에 각명(刻銘)한 문자와 문장을 말하는 것이며 석문이라 하면 암

    석의 면에 새긴 문자와 문장을 말히는 것이다.

    석문은 중국에서 은염없나라 때부터 성행하여 발전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선

    사시대부터 시작하여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한국의 금석문은중국과는다른특정을 지니며 발전해 왔다. 금

    문과 석문으로 구분하여 그 유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첫째, 금문-계(金文系)로는 @ 기명(器銘)으로 동경명(鋼鏡銘), 완천명 (Jj觸||

    銘), 동호명(鋼뚫銘), 초두명應斗銘), 마탁명(馬繹銘), 촉대명(爛臺

    銘)등이 있고 @ 무기명(武器銘)으로는도검명(刀劍銘), 총포명(統抱

    銘) 등이 있으며 @ 불기명(佛器銘)으로는 조상명(造象銘), 동종명(鋼

    鐘銘), 금판경명(金版經銘), 찰간명(據쑥銘), 사리함명(舍利핍銘), 당

    간기 (r睡쑥記), 향완명(香琮銘), 금명(禁銘)등이 있다.

    둘째, 석문계(石文系)로는 @ 암각화(岩刻畵)가 있으니 반구대암각화(盤龜

    臺岩刻畵), 소전리암각화(小前里岩刻畵), 양전동암각화(良田洞岩刻

    畵), 금장대암각화(金文臺岩刻畵)등이 있고 @ 비명(牌銘)으로는 순

    수비(센符牌), 성비(城6뽕), 지비(池陣), 사적비(事隨6뿜), 유허비(遺虛

    牌), 능비(陸牌), 묘정비(基處牌 : 神道牌, 養碼, 基表, 基誌), 묘탑비

    (훌펴합뽕) 그리고 기적비(紀績B뿜), 공적비(功績b뿜), 선정비(善政6뿜), 송

    덕비(강행點뽕) 등이 있다. @ 불교관계 석문(石文)으로는 조상명(造像

    銘), 탑기(협記), 사리기명(舍利器銘) 석등명(石燈銘), 석경(石*엠등

    이 있다. 이밖에도 금석문에 포함시켜야할 기명(記銘)이 있는데, 태

    지얘섬誌),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석조명(石權銘), 애각(崔刻), 암각

    (岩刻), 부도명(浮屬銘) 등이 그러하다. 또한 와전명(표博짧), 토기명

    (土器銘), 자기명(磁器銘) 등이 있다.

    -8-

  • 한국의 비명(牌銘)이 시초로 한 것은 삼국시대이고 영일냉수려비(迎日冷水

    里6뽕)를 서끼 383년(新羅 禁꺼王 28)에 건립한 것으로 올려 잡고 있으니 이

    것을 사실효 믿는다면 4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

    릉비(廣開士王陸R뽕)가 서기 414년(長壽王 2)에 건립되었으니 한국비명의 시

    초는 4세기 후반 경에서 5세기 전반 경에 기원한 것이라 하겠다. 삼국시대의

    비명애뽕名)뜨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표로 예를 들어본다.

    迎日冷水里陣

    |埈陣

    麗牌

    里書刻石

    廣開土玉

    中原高句

    關1 l1I J 11 훔

    댐1m 11륭

    좁提牌(f,적

    j한城牌

    里書刻石

    辰銘)

    明活山flt~11=

    員興王참i

    城6뿜

    員興王싹符陣

    훌興王씬符牌

    員興王띤符牌

    rxrx±.원까E

    南山新城牌

    u、S효智積E뿜

    (昌寧)

    (黃草鎭)

    (摩雲領)

    (北漢山)

    牌名王朝時代

    신 라

    고구려

    고구려

    신 라

    신 라

    신 라

    신 라

    신 라

    신 라

    신 라

    신 라

    신 라

    신 라

    신 라

    백 제

    -9-

    383떻꺼王 28)?∼443 념F까I.If王 2η,

    503(智證王 4)

    414(長壽王 2)

    394∼491(長壽王)

    (ζE銘) 525(1去興王 12)

    :26) (ζ未銘) 539(法興王 ::

    536(1去興王 23)

    551이전(員興王代)

    551(員興王 12)

    561(흉興王 22)

    568(員興王 29)

    568(員興王 29)

    569(員興王 3이

    578(員智王 3)

    591(흉平王 13)

    654(義慧王 14)

  • 한육긍석푼의 발전상(發展뼈

    이는 삼국시대의 석비 (:ti陣)만을 열기(列記)하여 보았다. 이들- 석비는 자

    연암석의 변죽을 쳐서 대체로 비형태로 하고 그 단면을 대충 짤아서 비명

    牌銘)을 각자(刻字)한 것이다. 그 서제(書體는 광개토왕비는 한예체(漢鍵

    體)를 따랐다고 보이며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I뿜)는 중국의 서체에 준한

    것이라 하겠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고졸(古쐐)하면서 강방준염(剛方u浚嚴)

    한 느낌은 고구려인의 기풍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사택지적비(沙숨智積陣)

    는 백제 무링!왕릉묘지석(武寧王I埈基地石)과 같이 중국의 육조체(六朝업劃의

    계보라 하겠으나 역시 부드럽고 유려(流麗)한 느낌은 백제인의 성격을 보이

    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영일냉수리비(迎日冷水里E뿜)를 비롯하여 여러 비의

    서체가 중국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삼국 중 신라는 독자적인 발전을 하고

    있어서 그 구수하고 토속화된 향체(劉體)를 창조하여 신라인의 전통적인 고

    유문화를 고집한 정취라 하겠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석비는 격삭은

    「辛家年二月什六日 南山新城作節 如法以作 後三年期破者 罪敎事馬 聞敎

    令활事之」

    「여成年四湖月十四日못쪽里村口嗚作記之---」

    「甲寅年lE月九日奈祝城꾀、:t;智積」

    라 하였다. 곧 「주支年何月何日…」형식으로 석비의 첫머리에 간지(千支)

    를 놓고 하웰이可月) 하일(何日) 등 연월일을 명시하고 그 비의 I영칭을 기명

    (記銘)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게 되면 그 처음부터 석비(石U뿜)의 건립이 활발하고 또

    석비의 형식또 정돈되어 갔다. 이 시기에 건립된 주요 석비는 다음과 같다.

    太宗武烈玉|埈牌(觸首 · 龜狀) 661(文武王 元年)

    四天王좋牌(龜앉) 7世紀 後半

    金仁問養健牌(龜妹) 696년경

    高仙좋활趣和尙t흙뿜(龜狀) 765-780年

    - 10 -

  • 한국긍석푼의 발전상(짧展*댐

    聖德王陸陣(龜앉) 798年(元聖王 14)

    善提牌(貞元銘) 798年(元聖王 14)

    이들 석비는 통일신라시대의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능비(|埈牌), 묘비(基

    牌), 사원비 (ii少院陣) 등이다. 이 시기의 석비는 청제비(훔t是牌)의 정원명(貞

    元銘)과 같이 삼국시대의 석비의 형식이 잔존(殘存)하기도 하지만 이미 정

    연한 이수(觸首), 비신애뿜身), 귀부(龜狀)를 완비하여 정리된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능비([埈牌)의 이수爛首)는 6마리

    의 용신(龍웰)이 좌우 3마리씩 내향(內向)하여 n 원두형(圓頭形)을 이루고 그 정면은 않발은 두마리 용의 앞발을 모아 여의주(如意珠)를 뜰고 그 밑 중

    앙에 규액(르E顯)이 있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牌)라 전액(豪顯)

    하였다. 또 귀부(龜狀)는 앞에 귀부(龜많)가 힘차게 사출(料出)하여 씩씩하

    고 유려(流麗)한 귀갑(龜甲)이 밑으로 네 다리가 사출(四出)하여 지면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의 사실적(寫實的)인 표현이다. 그리하여 당대(康大)

    의 석비의 계보에 속하는 것으로 신라의 전형적인 원두형(圓頭形) 이수爛

    首) 사실적(寫實的)인 귀부(龜많)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김인문(金仁

    問)앞 묘비의 귀부(龜봤)와 앞서서 사천왕사비(四天王좋6뽕)의 귀부는 태종

    무열왕릉비의 귀부에 준하는 사실적인(寫實的) 통일양식이다. 그러나 시대

    가 흘러가떤 점차 사실경향(寫實碩向)에서 도안경향(圖案碩向)으로 옮아가

    는 양상을 점작할 수 있다.

    한편 통알신라시대의 후기와 말기에 이르게 되면 사원(좋院)의 고승대덕

    (高借大德)의 묘탑비(훌t합뿜)의 건립이 성행하였다. 신라말기에 이르러서는

    선종구산문輝宗九山門)의 개조승(開祖價)의 묘탑비(劃짧뿜)가 그대표를 이

    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틀 묘탑비(황짧뽕)의 유례懶例)가 허다하여 이에 모

    두 기재할 여유는 없다. 쌍계사진감선사탑비(雙漢좋흉鍵l彈師t짧뿜)를 비롯

    하여 수많은 탑비가 있는데 특히 성주산무렴대사백월보광탑바(聖住山無쌓

    - 11 -

  • 한측긍석푼의 발전상(§홍展뼈

    大師白月陳光협6뿜).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智異山雙휠鍵輝좋大空

    搭b뽕),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뿔福춤牌),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

    비(購陽山鳳岩좋智證大師寂照t짧뽕)등은 유명한 것이다.

    이들탑비의

    @ 이수(爛首)는 구름 사이에서 9룡(품링이 상쟁(相爭)하며 정상에는 보주(寶

    珠)가 될출하고 정면에는 제액願願)이 있어 전서(婆書)로 표기하였다.

    @ 귀부(龜앉)는 경부(顆部)가 짧고 직립(直立)하여 목멀미로부터 주름지어

    머리부분은 귀면(鬼面)가까운 수형(默形)이고 혹은 여의주(如意珠)를 물

    기도 하였으며 귀갑(龜甲)은 도안화(圖案化)하여 경직(硬直)되었다.

    @ 비신(牌身)은 복연비좌(代運陣座) 앙연비두(띠運牌頭)로 만들어졌고

    그 비좌(牌座)와 비두(牌頭)안으로 들고 있는데 전후비면(前後牌面)이

    넓고그두께가앓다.

    @ 비문애뿌文)은 앞면에 새겼는데 그 첫머리에「有康新羅國故兩朝國師敎

    說大良和慧和尙白月探光행牌銘 井序」라 하고 또는「有康新羅國故智異

    山雙漢τ좋敎흉鐵뿔師大空t輔銘 井序」라 하였다.

    그 다음에는 찬자(構者)와 서자(書者)를 기록하고 비문과 명(銘)을 새겼

    다. 비명서체(牌銘書體는 대체로 구양순(歐陽詢)서체를 본딴 것이 지배적

    이었다. 최치원(崔致遠)은 구양통(歐|場通)의 서풍(書風)을 따랐다고 보아진

    다. 어쨌든 이들 석비의 형식은 당석비禮石牌)의 계보인 태종무열왕비(太

    宗武烈王牌)의 사실적(寫웹的)이면서 전형적인 신라 전기(前期)의 비에서

    발전한 당석비(康E牌)의 계보로써의 도안적(圖案的)이면서 변평적인 신라

    후기의 양식이 성립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역시 명승대덕(名價大

    德)의 묘탑배(基뺨牌)의 성행은 여전하였다. 그리고 보리사(홈提좋) 대경대

    사탑비(大鏡大師搭牌)를 비롯하여 보원사(普願츄)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

    國師寶乘t짧뿌)에 이르는 기원 900∼1000년대의 많은 묘탑비(髮t짧뽕)가 있

    - 12 -

  • 한국긍석윤의 발전상(發展*며

    다. 이들 묘탑비의 조형적(造形的)인 양식과 서예적인 서체가 신라의 영향

    을 그대로 전승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귀부(龜앉)에 있어서 귀깝문(龜甲文)

    안에 화문(花f찌과 불(러)자문이 틀어가고 이수(爛首)는 고각(흙刻)이고 화

    염보주(火淡寶珠)등 수식(修節)이 강하여지며 비명(牌銘)은 구양순(歐陽詢)

    체가 주류이지만 행서체(行書體가 가첨되고 있다.

    이와 같은 묘탑비도 기원 1000년대 이후에는 규제(規制)가 무너지고 변

    형적인 양상이 나타난다.

    @ 「浮土좋弘法國師寶相훔陣」는 비상단얘뿜上段)에 「開天山浮土좋故國師

    弘法大피單師之牌」라는 전서(塞書)가 첨가되고

    @ 법천사(法果좋) 지광국사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훔牌)는 귀부(龜狀)의

    배문(합文)이 방격자(方格子) 안에 육각귀갑(六角龜甲) 을 넣고 그 속

    에 왕자(王字)를 넣은 변형귀갑문(變形龜甲文)이다.

    이수爛首)는 천각(漢刻)이고 네모가 솟아오른 모자형이며 윗부분 주변에

    귀꽂은 장식이며 그 중앙에 복식 (fj\節) · 앙화(때花) · 보주(寶珠)를 거듭 쌓

    은 상륜(相輪)과 같은 장식을 하였다. 비신(牌身)은 상부에 전서비제(簽書牌

    題)가 있고 주의로 유려(流麗)한 보상도문(寶相度文)을 돌리고 측변은 고조

    (高影)의 운용문(雲龍文)을 새기는 등 파격적인 변화를 일으키었다. 특히 기

    원 1100∼1392년에는 더욱 변화하여 잡다한 형이 나타났다.

    CD 반암사(盤岩츄) 원경왕사비(元景王師牌)와 같이 귀부(龜~;lz)에 가첨석

    (加廳石)으로 처리하였다.

    @ 보경사(寶鏡좋) 원진국사비(圓員國師R뽕)는 귀부(龜않)에 이수(轉首)가

    생략되고 비신대뽕身) 상부를 말각(妹角) 처리하였다.

    @ 선봉사(價凰휴) 대각국사비야覺國~ffiii뽕)와 같은데는 장방형외 농대塵臺)

    받침에 옥개형흉蓋形)에 가첨석(加廳;cj)으로 성립되어 창성사(꿇聖좋)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흉覺國師大覺圓照#짧뽕)로 그 형식이 이어진다.

    - 13-

  • 한육긍석푼의 딸천상(짧展*田

    @ 보광사(普光좋) 금수비(金修牌)는 장방형의 농대(靈臺)받챔에 비신(牌

    身) 상부를 말각(妹角)처리하는 형식이 성립되어 서봉사(瑞鳳좋) 현오

    국사탑비(玄범國師搭牌)로 이어지고 있다.

    @ 회암사(橋岩츄) 선각왕사비(輝覺王師牌)는 귀부(龜앉)에 비신(牌身)을

    세우고 그 비신상부를 고각용(高刻龍)의 반원형 이수(觸首)로 하고 규

    액(圭짧)을 설(設)하여 「선각와사지비(輝覺王師之牌)」라 전액(養顯)되

    어 있어 그 양식이 조선초 원각사비(圓覺좋6뿜)에 전승한다.

    고려후기에 이르면 석비(石牌)의 양식이 정제(整制)된 규제(規制)가 없어

    지고 다종다양(多種多樣)한 비가 난립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고려시대의 석비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승탑비 (f曾t짧뽕), 승비 c1·曾牌),

    사원비(좋院牌) 등 불교계통의 비명애뿜銘)이 그 전부인 듯하다. 따라서 당시

    의 능묘(I埈활)의 비로서는 신성왕후(神成王팀) 정릉(貞|埈)과 경종연릉(景宗

    榮|埈)에 귀부(龜狀)가 있어 능비(陸牌)의 존재일 가능성이 있을 뿐이고 고려

    말경의 분묘(瓚훌)에 묘비가 몇 개 있을 뿐으로 고려의 능묘의 비가 없다

    이렇게 고려시대에는 능비(|埈陣) 또는 묘비가 없고 묘지명(基誌銘)으로 대

    신하고 있어서 알려지고 있는 묘지명만도 140여점(李蘭曉「韓國金石文追

    補」)에 달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는 분묘의 비가 없이 그 대부분이 묘지

    명(養誌銘)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14-

  • 얀양궁석푼의현황 '!';톨-를훌£·훌뚫훌를없훌률훌$

    안양의 금석문은 아직까지 금 이 발견된것은 없고 다수가 석문이라 할수

    기금석대관(京鍵金石大觀j」및 시흥군지 발

    (始興金石總魔)」에서 안양의 금석문을 부분

    있으며 경기도청에서 발간한 r

    간시 함께 렐행된r시흥금석총론

    적으로다루고있다.

    물론 서울 및 지방의 유서깊낙 고도에 비해 양적 측면에선 부족하나 시대

    황을 볼수가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인분포도나석문의다양한현

    사적비(事뚫牌)

    신도비(神道硬)

    묘 |벼|(훌牌)

    부도비(浮尾硬)

    애각(뿔刻)

    당간기(禮쑥記)

    공적비(功$훨뿔)

    암:z,~岩刻)

    만안교비 (萬安橋R뽕)

    삼막사적 비(三幕事隨E뽕)

    비(朴運神道E뽕) 박서신도

    김순묘 지(金1힘基誌)

    류정현

    트II르더 -, 」~

    묘갈(柳廷顯基碼)

    묘갈(柳德玉홍홍碼)

    익평부운 부원군 이석근묘비효平빼원君李石根龜웹

    묘비(李原達基6뿜) 이후달

    안양사 부도(安養좋浮屬)

    반월암 부도(半月廣浮屬)

    염불암 부도않;佛屬浮屬)

    불성사 부도(佛性츄浮屬)

    마애불 (摩崔佛)

    마애종 (摩崔鍾)

    마애각화 (摩崔刻畵)

    당간지주

    불망비(

    명문 (r睡쭉支柱銘文)

    (不忘、6뿜)

    삼귀자( 三龜字)

    매바위Z 각자(매바위刻字)

    삼산동천 각자(三山洞天刻字)

    만력십팔 년조각자(萬歷+八年造刻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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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각(岩刻)

    기티(其他)

    신금대각자(神金臺刻字)

    등곡대각자(燈짝臺갖lj字)

    감로정각자(합露井刻字)

    약사영천각자(藥師靈景刻字)

    정려판〔施聞板)

    이성환시비 (李星煥詩牌)

    와당문양(互當救樣)

    주초석문양(柱짧石救樣)

    현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안양의 석문은 멀리 신라 흥덕왕 2년(827년)의

    중초사지 당깐지주(中初持址 l樓쭉支柱) 명문에서 신라말 고려초로 추정하는

    마애종(摩崔3團과 조선 전후기의 불교적인 사적 또는 유교적인 각종 석비등

    의 다OJ=한 분포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당간지주 명문의 경우 조성연대와 위치 등을 알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당간지주 명분이며 애각 중 마애종과 마애불〔뽑뿔佛) 또한 사료잭 가치가 매

    우높고 뚜렷한 형태를 가진 유일한 작품들이다. 또한 만안교비(萬安橋牌)는

    사적비(事隨牌)로서 지금으로부터 200년전에 설치된 오늘날 안양발전의 효

    시이며 안양꾀 근본이 되는 사적비이다.

    묘비는 고펴시대에 묘지명만이 성행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묘지

    명과 묘비가 병행하였다. 안양의 경우에도 묘역조성에 있어 수많은 묘비가

    허다하나 대부분이 글자가 마모되고 결락(缺落)되어 있어 겨우 묘비의 형태

    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며 주목되는 점은 묘비 및 묘역의 현황월 통해 지역

    적으로 누대(累代)에 걸친 세거지와 가문을 파악할 수가 있는데 꼼 창령조씨,

    진주하씨, 전주이씨, 문화류씨, 펑송심씨, 진주류씨, 덕수장씨, 전주류씨, 안

    동김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등이다.

    묘비는 신도비, 묘갈, 묘표로 구분되는데 묘표만을 세우는 예와 묘표와 묘

    갈이 함께 하기도 하고 정4품이상의 관직을 받을 경우 또는 국까에 공적이

    있을때 묘소 아래 길가에 신도비를 세우며 후대에 증직이 될 경우에 추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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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얀양궁석윤의현황

    기록하여 비를 다시 세우기도 한다,

    부도(浮屬)는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보관하는 곳인데 안양사 부도비는 현

    존하지는 않으며 다만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안양사 칠층석탑명(安養

    좋 七層石搭銘)이라 하여 일부의 탁본내용이 전하여진다. 그 외에 부도로는

    반월암에 밀양장씨 대선사탑과명성당대사지탑이 있고, 염불임-에는서영당

    지홍, 봉인탕부도 등이 있는데 이들 부도의 구조양식은 기단위때 석종형 탑

    신과 승령의 당호를 음각하였고 밀양장씨 탑은 사각탑신에 팔각지붕형태의

    개석을올려놓았다.

    이들 부도는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부도로써 명문에 따라 누구의 부도인지

    언제 건립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가 있다. 이외에 4기의 애각(崔刻)부도

    가 있는데 이는 매우 드문형태의 부도로 불성사의 각원선(覺圓輝)부도, 반월

    암 주변의 서경당부도 염불암 경내에 현진당 및 고종27(1890년)년 부도 등

    이 있는데 고종27년에 제작된 부도는 위치가 너무 높아 현재로선 법명을 파

    악하지 못하고 제작연대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들 애각부도는 바위면을 다듬어 중앙에 암공(岩孔)을 만든 후 암공바닥

    에 다시 적뜬 암공을 만들어 사리나 유골의 재 등을 보관하고 암공자체는 크

    기에 맞는 사각돌로 다시 끼워 놓는데 현재 안양관내의 애각부도는 암공입

    구들은 분실되어 없으며 불자들간에 암공에 잔돌을 던져 돌이 들어가면 소망

    이 성취된다는 신앙적 믿음의 돌조각이 암공에 들어가 있다.

    암각으로는 석수동 삼막사 우측 백련암지(白運魔址)에 「삼귀자(三龜字)」

    삼성산 정상부의 r나무아미타불자(南無阿購院佛)」 관양동 오촌따을 r삼산동

    천(三山洞天)」 및 불성사r만력십팔년조」가 있다.

    r삼귀자」 는 백련암지 즉 백련암에서 수도를 하던 구한말 지운영(池雲英)

    은 삼귀자 우측에 r관음몽수장수영자(觀흡夢授長壽靈字)」 라 하여 꿈에 관음

    보살을 본 후 글씨를 썼음을 알 수가 있다. r나무아미타불(南無뻐꺼爾院佛)」 은

    삼성산 매바위에 각자되었는데 대청광서 이십년 갑오 3월로 일설에 청나라

    고승이 사람이 죽은 후 재를 뿌리는 최고의 길지라고 극찬한 곳이며 각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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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얀양끔석푼의현황

    한청나라고승이 하였다하나확인할길이 없다.

    「삼산동천(三山洞天)」은 관양동 오촌마을로 이곳은 일찌기 능정원 좌승지

    를 역임한 심-산 r오익서(吳益瑞)」가 살며 생전에 각자한 것으로 딸려져 있고

    오촌마을이란 마을 이름도 보성오씨의 오래된 세거지임에 붙여진 명칭이다.

    r만력십팔년조(萬歷十八年造)」는 화강암에 각자된 선조23(1590년)년 표석

    (表ti)으로 이는 불성사 약력중 선조때 서산대사의 중창연대와 맞물리는 귀

    중한자료이다.

    이밖에 기타 석문중 관양동 「영세불망비(永世不忘6뿔)」는 시훔군 현감을

    지낸 이태응(李泰應)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로 현감 이태응은 공조

    좌랑으로 재직중 고종3년(1866년) 12월 5일 시흥현감으로 부임후 고종 5년

    (1868년) 정월29일 황해도 송화현감으로 전임된 바 주변에선 ‘바을의 흥망

    을 좌우하는 영험한 현감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또한 r감로정(납露井)」은

    조선 헌종때 김창록이라는 사람의 등에 八자가 새겨져 있어 돌거북을 만들

    어 시주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r약사영천」각자는 근세 작자미상젝 “관악산”

    유람가 한 궈절에 r반월암(半月廣)에 들어가니 약수영천(藥水靈果) 양전하

    고」라 하여 샘과 각자된 석문을 표현하고 있다.

    「등곡대@登짝臺)」는 세조때의 왕사였던 흑의 재상 학조대사가 수도하던 바위

    인데 등곡대 뒤로는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수도하던 등독굴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풍양조씨 정려판(豊壞趙民 施聞版)」은 유일한 목판으로 이번 석문탁

    본시 함께 탁본작업이 진행됐는데 이는 중초사지 출토 신라시대댁 연화문 숫

    막새 문양 및 삼막사 주초석 문양과 함께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며 과학

    적 보존과 함께 보호대책을 요하는 자료들이다.

    이밖에 새로 포함시킨 수도군단 내 사격장옆 익평부원군 이석근(李石根)

    묘비를 찾아 그 내용을 추가시켰고, 그 외에 삼막사 암각화, 신금대각자 및

    사찰 신 · 증축시의 시주자 명단 등을 금석문 조사시 일괄적으로 작업대상에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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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률표야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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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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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열월(閔月) 한 달 이상이 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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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갑(間) ‘ 물문 1이 체끊) 체는 듯이 분명하지 않아 원문확인이 요구된다

    11) 급{及) • 및 12) 도갱f힘힘 ; 깃대, 작은 다리 강‘ 걸어서 건너는 작은 다리

    13) 여량(興폈 • 수레에 사람이나 짐을 싣고 있는 다리 수레나 가마가 통행하는 교량

    14) 성주(成周) • 주나라의 미칭

    15) 가륙{驚六) 천자가 타는 수레 어가 여기서는 정조 임금의 가마 난게뿜짧) 역시 천자가 테는 수레

    16) 난화{빵和) 천자의 수레에 다는 황금으로 만든 방울 방울 란(뿔)

    - 2 1

  • 而i推其餘 進17)及萬姓 使遠行李1 8)視 以康莊19)이추기 여 이 급만성 사원행리 시 이강

    如一여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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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不誠盛롯乎龍 橋之始也 代石子川之f旁有石出품 불성성의호 재 교지 시 야 대 석우천지 방유석출언

    可以 〔][][]口 21) 減其半 神若有助 其亦;異훗 감기반 신약유조 기 역이의

    g=! 拜手積首 言其事 系之以頭日신 배 수 계 수 언기 사 계지 이 송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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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강장(康莊) ‘ 여러 곳으로 통하는 길, 왕래가 잦은 변화한 거리 康은 오 거리, 莊은 육거건| 2이 물의 김은 공띈 옷을 벗고 건너는 것을 려(深則團 얄은 곳은 옷을 걷어 올리고 건너늪 것을 게G觀|服)라

    고 한다 r詩짧(衛風〈짧有줌葉〉) “以衣涉水日廣橫£步水B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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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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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3 -

  • 월활牌嘉善 徐俠修 營校嘉善 徐殺繼비가선 서협 수 영교가 선 서의 린

    營更李孝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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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뽀I露邊手 崔興瑞 治[1L邊手鄭--成二홍 예변 수 최홍서 야 장변수 정일성

    上소 十t年 九月상지 십 구 년 구 월

    日일 효 립

    • 소 재 : 안앙시 만안구 석수동 260번지 • 연 대 ; 조선 정조 19년(1795년)

    • 규. 모 ; 높O l 164an, 폭 64an, 두께 3여n l 찬 자 ’서유방

    l 서 자 ‘조윤형 l 전면서자 . 유한지

    - 2 4 -

  • |觸떻만안교(萬安橋) 만안교비송(萬安橋購) 병서(井序) 풀이|

    남충현(현 과천) 관아 남쪽 20리에 안양천이 있는데 바로 화성으로 가는

    임금의 행차길이다. 우리 성상인 정조께서 해마다 원침을 전알하려면 이 하

    천을 건너게 된다. 올 봄에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이 내를 건녔으

    니 이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무룻 임금꾀 행차 길에 하천이 있다면 반드시 다리가 있기 미-련인데 이들

    다리는 나무로 놓아다가 왕의 행차가 지난 뒤에는 바로 철거하였다. 이로써

    얼음 풀릴 때나 장마가 질 때에는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였다,

    전 도신 서용보가 이 다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돌로써 대체하여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미천한 신이 명을 받고 취임하여 맹추에 이 일을 착수하여

    3개월 만에 준공하니 길이는 15장이요, 폭은 4장이며, 높이는 3장이고, 갑

    문이 다섯개다. 23)

    임금께서도L 이 일을 아시고는 감독하는 사람과 공장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

    리고 특별히 ‘만안교’ 란 이름도 내리셨다. 신이 생각건대 왕자자 다리로 편

    안히 건너게 된 것은 한나라의 장안교에서 비롯하였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도강과 여량은 성주 때에 이루어졌으나 돌

    로 만들어 만세에 전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 다리는 다행히도 화성 연로에 있으니 임금의 가마는 1년에 한 번, 임금

    어머니 가마는 10년에 한 번씩 육룡에 여넓 방울을 울리면서 팬안히 지나갔

    다가 편안히 오기를 만년을 한결같이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편의는 만백성에게까지 미쳐 원근의 짐 꾸러미틀이 튼튼한 다리

    로 건너게 되어 이제는 옷을 걷어 올리거나 험한 길로 돌아서 갈 걱정이 없어

    졌다. 이로써 만년토록 성은을 입게 되고 어머니의 덕을 기리게 되었으니 어

    23) 실제로는 7개이다

    - 2 5 -

  • 찌 참으로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사를처음시작하였을때 하천가에서 돌을채벌하는데 과연 돌이 나와경

    비를 반감할 수 있어 마치 신이 도운 것 같았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신

    은손을가치런히 모으고 머리를숙여 그 일을기록한다. 송은다음과같다.

    왕께 서는 성묘에 행차하심 이

    해마다 한 벤썩 이오니

    왕께서 이 다리 건너사 걸

    만년효록 하시 옴소셔 .

    복혹과 함께 이르게 되리니

    아래에는 내야 있습니다.

    때때로 。}머니흘 모사고

    얀년동얀 만얀하쇼서 .

    은혜_:)} 백성에 미치나

    마음 놓고 건너며 가빼하리랴.

    천 년토록 만년효록

    만석 장이 편얀하소셔 .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광주부유순 도순찰사 규장각검교직제학 신 서유방 삼가 지음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 조윤형 삼가 씀

    학신유한지 전면삼가씀

    - 2 6 -

  • 감동첨사 김천보 오위장 장 ~〕키 오위장 김대언

    오위장 김원섭 영비가선 서 협 수 영교가선 서의린

    여ζ〉 리 이효석 각수변수이삼흥 흥예변수 초| 흥서

    야장변수 정일성 석수변수 최귀특, 박복돌

    정조 19 (서기 1795년) 9월 일 세움

    27

  • - 2 8 -

  • - 2 9 -

  • φ콰 B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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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훌룹씩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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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훌흩폴

    박처 산도1:1 r (朴첼 힘패훨m뿔)

    有明 朝蘇國 資憲大夫 兵團맞lj書 暴知經鐘 義유 명 조 선 국 자 헌 대 부 병 조 판 서 겸 ‘지 경 연 의

    禁府春秋館事 體議朴公神道牌 井序금부춘추관 사 증시 박 공신도비 병서

    嘉善;大夫 更團參쌓lj 暴守弘文館 大폈學 藝文가선대부 이 조참판 겸수홍문관 대 제학 예 문

    館 大橫學知成均館事 同知經鐘 春秋驗事 世子관 대 제학지성균관사 동지경연 춘추관사 세 자

    右副寶客 趙錫}홉Ll) 擺

    正憲;大夫 議政府 左參贊 暴成t성館戀酒 宋浚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성균관쇄주 송준

    콰::2) 를좋 i::::i E크 길 서

    資憲;大夫 更團및lj書 暴弘文館大提學 藝文館자헌대부 이 조판서 겸홍문관 대제 학 예 문관

    1) 조석윤않밟a뼈U . 1605∼1654. 장유와 김상헌의 문인으로 이조 잠판 대사성 대제학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저서 에 낙정집(樂靜集)이 있다‘

    2) 송준길(宋∼찾솜) 1606∼1672. 이이를 시숙하였고, 20세에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예혁에 밝았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병조 판서와 지충추원사 우참찬 등의 벼슬을 지냈다

    - 3 2 -

  • 大提學 知春秋館事 同知經鍵事 金壽’|를3) 養대제학 지춘추관사 동지경연 사 김수

    士常愚、懷抱利器 而不遇時 不得施於世 觀遇其사상환회포이기 이불우시 부득시 어 세 기우기

    時훗 天下假之年 不克究其施폼 ~lj를닫不鴻千古之 시의 천하가지년 불극구기시언 즉거불위천고지

    恨也敵

    玄i쫓林公德大司馬4) 三載口5) 賽春日隆 將大用현계박공위 대 사마 삼재 예권일융 장 대 용

    훗一日以까훗잭E子官 의 일일이질 졸우관

    上 영!tJ.壽掉 朝之大夫士 下至與f臺6)里흉 莫不歡기진도 조지대부사 하지여대 이 항 막불탄

    惜좋률i弟 嗚呼痛載석수체 오호통재

    公義깅Z흠%敵年 公之季 將樹石子公基 騙書二千공장지기유년 공지 계 장수석우공 묘 처서 이 천

    3) 김수행金蘭밍 ‘ 1629∼1689. 좌의정 김상헌의 손자로 1646년(인조 24)에 성균관 시험에 수석을 하고, 진사시 에 장원을 하였으며, 1651년(효종 2년)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벼슬은 육조 판서를 거

    치고 영의정을 지냈다 저서에 문곡집(文감集)이 있다

    4) 대사미{大司馬) 병조판서의 별칭

    5) 1字缺

    6) 여대(與園 • 하인

    - 33 -

  • 里 請金顯갖lj之文 리 청 여현각지문

    嗚呼 金뚫忍、銘公載 且金時待罪邊합~ 難不敢오 호 여 기 인 명 공 재 차 여 시 대 죄 변 군 사 불 감

    흉f還훨f.I 請益固 X뚫忍、不銘 以負存沒之控也기환조 청익고 우 기 인 불명 이부존몰지탁야

    公룹꿇鎭 字尙之 玄i쫓其號也 自 YJJ類秀不群 早孤공휘서 자상지 현 계기 호 야 자유영수불군 조고

    受業於伯F: 南成童끼 才思鍵進 能作律詩 朝[有驚수 업어백씨 보성동 재사취진 능작율시 첩유경

    A語인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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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至有柱;孤之語지 유 탁 고 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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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年二十프 년 이 섭 삼

    移金펌l쾌 9) 蓋掌鉉者 李公而薦用也이금오랑 개장 전자 이 공 이천용야

    끼 성동(成휠 15세를 말함

    8) 백새白沙) 이항왼李↑를福 1556∼1618)의 호 1580년(선조 13)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체였다 임진왜란 때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송하였다 0 1조 잠판으

    로 오성군{驚城君)에 봉해졌고, 형조 판서,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저서에 백사집(白沙集)

    이있다

    9) 금오랑(金홈郞) 의금부 도사의 멸

    - 34 -

  • 歷績I;宗籍宗顧直長 登康午1이 文科 ;횡응慧承文 역선공-종부종묘직장 등경오 문과 선예승문

    P完 時將有薦入藝文館之議 而以↑士滿 |첼拜成t섬館 원 시장유천입예문관지의 이이사만 숭배성균관

    典籍 選戶兵二團住郞 司課院正言적 천호병이조좌랑 사간원정언

    司憲府持平사 헌 부 지

    暴知製敎

    쫓흩확 穩親養 出藍忠原縣 縣實大州也 介湖鎭계 유 위 친 양 출 감 충 원 현 현 실 대 주 야 개 호

    之間 物聚f섭’|펄 素號難治간 물중속한 소호난치

    公 ?1~11)任未一賽 治績大著 A蓋知 公有齊l劇l之材공 이 임미일기 치적대저 인개지 공유제극지재

    習年 fj持平검還 錄入玉堂 댐修構校i理 屬拜익년 이지명소환 록 입옥당 위수찬교리 누배

    正言持平 困子1 2) 體府醒鳥從事정언지 i영 병자 체부벽위종사

    一日登鐘 上 問諸路兵鐘於體察副使李聖求 13) 李일등연 상 문제로병량어체찰부사이성구 이

    10) 경오陳午) 서기 1630년, 인조 8년 11) 래밤) ; 다다르다 래잖)와 통용 12) 병자{困子) 서기 1636, 인조 14년 13) 이성귀李聖求) : 1584∼1없4. 벼슬은 대사헌 병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왕을

    호횡률從)하였고, 왕세자가 볼모로 심앵‘짧陽)에 갈 때에 수행하였다. 저서에 분사집(分沙횡 이있다

    - 35 -

  • 公不能對 公進對甚意 上 嘉之공불능대 공진대심실 상 가지

    .出按湖西 軍務未埈事 敵兵흉至 大罵幸南漢통출싼호서 군무미준사 적병졸지 대가행남한

    公 볕n進驗境上 碼諸將援 藍司鄭世規14) 兵使李공 즉진주경상 위제장원 감사정세규 병사이

    義培15) 皆遇敵慣敗 公將收給散亡 寫更學計 而和의 배 개우적궤패 공장수습산망 위갱거계 이화

    事以成훗 사 이 성 의

    復命 X拜校理修構 禮團正郞 選司憲府掌令 無복명 우 배 교리수찬 예조정랑 천사헌쭈장령 무

    H없16) 出德)I벨川副使 /觸輕듬상理 政化大行 --境歌認가 출 위순천부사 부경송리 정화대행 웰경가송

    己 J)p 遭憂去官 民皆號j立拜送 如失父母 於是기 묘 조우거관 민개호읍 배 송 여 실부모 어시

    물之士民及水陸軍兵 以至繼徒 各自立石頭德 其읍지사민급수륙군병 이지치도 각자입석송덕 기

    遺愛可知 凡公之所f位 去後思 皆如此유애가지 범공지소리 거후사 개여차

    14) 정세규명6世*빔 1583∼1661. 형조판서 전주 부윤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문음{文흉 출신으로 육경(六聊에 오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15) 이의배(李義염) : 1576∼1637. 인조 때의 무장으로 인조반정 후 각 지방의 수령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공정

    절도새公淸 節度使)로서 죽샌竹山)으로 진출하여 적병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6) r안앙시사」나 r경기금속대관」 7집에는 無何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져를도 없다’는 무개?뼈탱)가 맞다,

    -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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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時昭顯世子在i審 18) 中 官↑혔任觀重 A且'I單行 以시소현세자재 심 중 관료임기중 인차탄행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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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쫓未19) 適還 拜司讓太f業正 先是 顧堂 選↑憲닮之 계미 체환 배 사간 태 복정 선시 묘 당 선유신지

    有才略 可t甚將帥者 公實與품 至是 權拜黃海道유재략 가감장수자 공실여언 지시 탁배황 해 도

    觀察使관 찰 사

    西路률1 經禮홉L 衝뚱雲興 民不t甚命 公至 텃lj約 서로지-경화난 요역운흥 민불감명 공지 즉약

    己絡財 隨宜策應 不以搖購責民 民力大營 公如기 유재 수의책응 불 이 요부책민 민력 대 서 공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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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끼 복결(服關) 초상이 끝나다

    18) 심(屬 심'b~漫陽), 지금의 봉천(奉치

    19) 계미쫓치 ; 서기 1643년, 인조 21년 2이 3字缺

    -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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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議參知 戶團參議 入銀臺21) 序l훨 至右承붐 참의참지 호조참의 입은대 서승 지우승지

    ζ西 拜江原道觀察使 未走h 移授關~i P켈嘉善 을유 배강원도관찰사 미부 이수관서 승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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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其治 如在海西時 鋼年病適 丁갖 拜兵曺參判기 치 여 재 해서시 유년병체 정 해 배 병조참판

    奉使走h薰 還朝 拜짧}承붐 봉사부연 환조 배도 승지

    rx子 屬拜兩司長官 或댐漢城府左尹 蘇帶同知무자 누배양사장관 혹위한성부좌윤 겸대동지

    義禁副總、管의 금 부 총 관

    會大司課 林環22) 等 上節言事 上 以劉難引 R兪회 대사 간 임담 등

    失當 命改入 公在憲、府 謂실당 명개입 공재헌부 위

    21) 은대않R훌) ; 승정원의 별칭

    22) 임담(빼圍 1596∼1652. 1635년(인조 13)에 증굉문괴뻐| 병과로 급제하여 경상도 관찰사, 충청도 관잘사 대 사간, 도승지, 이조판서 듬의 벼슬을 지냈다‘

    - 38 -

  • “命改課;節 實君上過學 n候굵之많 不宜n音無i言”명개간차 실군상과거 후설지신 불의암무일언

    適職 習日特名除慶州府尹체 직 익 일 특 명 제 경 주 부 윤

    ;쫓쳤之 大件上릅 수 핵 지 대 오 상 지

    己표 쩔쫓흙23) 山 I埈 歸途接作 仍適罷 其적錄拜副 기축 회장 산릉 귀도질작 영체파 기동서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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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總총

    再長憲府暴재 장 헌 부 겸

    康寅24) 歷拜工兵二團參및IJ 都承릅 경 인 역배공병 이조참판 도승지

    經鐘 春秋館 備局25) 提調 自是在備局 常쫓 上 知경연춘추관비국 제조자시재비국상다 상 지

    公才局 可權用 特除工團맞IJ書 공재국 가 탁용 특제공조판서

    明年春 拜議政府右參贊 再走h薰 復命拜禮團맞IJ 명년춘- 배의정부우참찬 재부연 복명배예조판

    書 仍暴經鐘總、管 知義禁서 잉겸경연총관 지의금

    會連f直大行 26) 附顧 世子加冠大禮 贊引中禮 命회연지대행 부묘 세자가관대례 찬인중례

    23) 회장(會쩔 , 상사 지내는데 잠여할

    24) 경인(康寅) 서기 1650년(효종 1년)

    25) 비권備局) 비변사의 별칭

    26) 대행(大行) 大行王 승하한 前王의 묘호(願號가 내리기 전의 영칭

    - 39 -

  • 暴內局28)겸 내 국

    無H없 27) 拜兵團맞lj書 무가 배 병조판서

    /陽}聽馬 移拜大司憲사구 마 이 배대 사헌

    宗籍太f業 典姓等츄 提調종부태복 전생등시 제조

    公 觀受홉知 鷹本兵29) 重任 益自잦單斷奉職 鉉注공 기수예지 응본병 중임 익자탄려봉직 전주

    門無雜武士 必以其A 不用一훨私意 請託不行무사 팔이기인 불용일호사의 청탁불행

    塵 團룹범3이쳤然 不得者不敢想 塞훌훌按JL31J 費用大 진 여송 흡연 부득자불감원 색두거용 비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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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 賞建請 整鎭流民 換定水陸軍數件事 朝議공 상건청 정돈유민 환정수륙군수건사 조의

    公不欲久在錢地 每連章쫓용옳후 上공불욕구 재전지 매연장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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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주 13) 잠조

    28) 내국{內局) 내의원(內훌院의 멸칭

    29) 본병(本兵) 볍조(兵團의 멸칭

    3이 여원廳빼) ‘ (겨러 시람의 입에 오르는 밀 31) 색두거용{塞홈社元) : 잘못된 일의 구멍을 막고 을데없는 일을 제거함

    32) 연신(월많) 조정의 신하 33) 이후원(李훔j멤 1598∼1660. 대사헌 대사간 공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척화

    (F-ff[])를 주εh하였으며, 1657년(효종 8)에 우의정이 되어 북벌(~티;t) 계획떨 추진하였다.

    -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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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計聞 上 遺#夜魔λ... 37) 問使病之由 又問何以治喪부문 상 견액정인 문질병지유 우문하이치

    仍下敎日하교왈

    “맞lj書朴鐘 寫國盡職勇38)不顧身 t붙誠熊思 事有판서박서 위국진직용 불고신갈성초사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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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권주{春벙 ’ 딛혜를 베품 35) 계새쫓El 서기 1653년(효종 4년) 36) 위여IG휠쫓) • 웰의 위독 3끼 액정인(被底人) ; 내시 38) 용{勇)보다는 감뼈이 더 옳은 듯하다.

    - 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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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수嚴) 수의(흙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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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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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之先祖 多以淸名著世 奏靖公 활受썼멘筆 「淸공지선조 다이 청 명저세 이정공 상수어펼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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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 尤濤於內行 十歲而孤42) 食素43) 如成A 待大공 우독어내행 십세이고 식소 여성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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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感、之後 不走tA壽席감지후 불부인수석

    41) 매(뼈 (명예)웰 더럽히다

    42) 고{t때 ;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를 말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애(황 두 분이 다 돌아가시면 고애(孤횡가 된다 43) 식소(食휩 어육을 먹지 않음

    - 43 -

  • 友愛深玉 衣食與同 敎養諸鏡 不異己44) 出 敎陸親우 애 섬욱 의식여동 교양제질 불이기 출 돈목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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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表爆46) 以此A皆愛耳幕之표 박 이 차 인 개 애 이 모 지

    公 常感、激知遇 平居 不問家A生塵 ’|桂IXIX於공 상감격지우 명거 불문가인생산 유자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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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 生於萬層王寅쩌척E之 日 年五十二공 생어만력임인 졸지일 년오십이

    公之先密I場A也 自三韓碼大姓 高麗開門祖候쩌 공지선 밀양인야 자삼한위대성 고려합문지후

    璥是十‘i世피且也 함시십일세조야

    44) r안앙시사」 나 r경기금속대관집」 7권에서 E로 되어 있으나 ‘자기출생’ 의 뜻이니 己가 맞다 45) 간죠l(ffi쩌 ‘ 즐겁게 지내다

    46) 표빅(表擺 뛰어나게 나타냄 자신을 드러내다

    4끼 임인(王寅) 서기 1602년(선조 35년)

    48) 합문지휘뽑뼈멍뤘 ; 합문은 고려 때 조회의 의례를 맡아보던 관정 지후는 고례흠麗) 때 합뭔團門)의 한

    벼슬로 1때 문종{文宗)이 정7품正t品)으로 정(定)하였다가 20대 선종{神텃)이 침상t參

    上)으로올렸다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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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祖譯說 官左贊成 릎益奏靖 고 조 휘 열 관 좌 찬 성 시 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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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男 볕n公之考也 남 즉공지고야

    自布衣尙氣義 휠率太學生百餘A 릅장松江鄭相 자포의상기의 상솔 태 학생백여인 송용;강정

    公49) 듬~t3E 士論훌훌떼 之공 무왕사론위 지

    自司↑業자 사 복

    然竟坐51)此 官不達 抱才而짧 댐世所惜 연경좌 차 관부달 포재이몰 위세소석

    正三代追榮以公貴也정삼 대 추영 이 공귀야

    49) 정상공명야g公) ‘ 정절맺S散 1536∼1593) 호가 승강松;끄 직제학, 강원도 관찰사 도승지, 여|조 참판 등의 벼 슬을 지냈다 저서에 송강집과 시가작품인 송강가사가 있다,

    5이위題);바르다

    51) 죄{坐) 언좌되어

    - 45 -

  • 日績 j團時才많 왈 추 위 시 재

    前夫A 검~守金t1;之女 生一男전부인 군수김변지녀 생일남

    不幸뿌世 後夫A 延日鄭BZ: 弘文典輪 j훌浩之曾 불행조세 후부인 연일정 씨 홍문전한 언호지증

    孫女 素節校屆t 希邊之女 觸德母↑義 皆마馬關률훈a 손녀 병 절 교위 희준지녀 부덕모의 개가위규곤

    ~IJ 敎諸子 嚴正有法度 常以f표梁53)以淸白家世寫 칙 교제자 엄정 유법도 상 이 무염 이청백가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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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英英朴公 識達器閔54)영영박공 식달기굉

    52) r안앙시人b나 r경기금속대관」 7집에는 호(옳)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여자 의 뜻인 곤이 찢다 53) r안앙시사J냐 r경기금속대관」 7집에는 첨(폈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더럽히다’ 의 뜻인 염(잖)이 맞는 것 같다 54) ’호농「하다’ 의 굉(宏)과 상통한다

    - 46 -

  • 盤錯)jlj -*'J 71

  • 훌·&훌용 박서 신도비(朴遭 神道牌) 비문(牌文) 풀이

    유명 조선국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증시 박공신

    도비병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수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

    연 춘추관사 세자우부빈객 조석윤은 글을 짓다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성균관 쇄주 송준길은 글을 쓰다.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동지경연사 김수

    항은 전액(寒顯)을 쓰다.

    선비는 항상 유용한 재주와 기량을 안고도 때를 만나지 못하여 세상에 베

    풀지 못함을 걱정하게 되는데 정작 때를 만났으나 하늘이 수명을 빌려주지

    않아 그 능력 발휘를 끝까지 다할 수 없었다면 어찌 천고의 한이 되지 않을

    수있으랴!

    현계 박공이 병조판서로 있은 지 삼년 동안 임금의 사랑이 날로 높아 앞으

    로 크게 쓰이게 되리라고 여겼는데 어느 날 병으로 갑자기 관소에서 졸하

    니, 상께서 진도(震掉)하셨고 조정의 벼슬아치에서 아래로 하인과 민간 촌부

    에 이르기까지 차탄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아 ! 슬프도다. 공의 장례가 끝난 이듬해 공의 계씨가 공의 표소에 비를 세

    우려고 2천 리의 길에 글을 보내서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아 !

    그러나 내가 어떻게 공의 묘에 명을 하겠는가 ! 더구나 그때 나는 변방에 있

    을 때라서 감히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는데 조정으로 돌아오니 더욱 굳이 청

    하였다. 이에 어찌 차마명을하지 않고생사의 부탁을저버릴 수있겠는가!

    공의 이름-은 서障)요 자는 상지(尙之)이며 현계(玄漢)는 그의 호이다. 어려

    - 48 -

  • ,. 좋養출JrJ송 ,i

    서부터 빼어남이 무리에서 뛰어났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판 아버지에게

    서글을배웠다.

    겨우 15세까 되었을 때 재주가 갑가지 진취하여 능히 율시를 지었는데, 사

    람을 놀라게 하는 말이 많았다. 여러 큰 선비의 문하에서 글을 익히니 백사

    (白沙) 이항복(李↑를福)이 자주 칭찬하고 원대하게 되리라고 기대하여 심지어

    자식을 맡길 만하다는 말까지 있었다.

    나이 23세인 갑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금화사 별제가 되었고, 금오랑인

    의금부 도사로 옮기는데 전형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이항복이끼 때문에 추

    천하여등용한것이다.

    선공감과종부시 종묘서의 직장을거쳐 경오년문과에 올라승문원에 예속

    되었다. 이때 예문관에 천거하자는 말이 있었으나 임기가 갔기 때문에 성균

    관전적에 볼랐다. 호조와병조의 좌랑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겸 지제교

    를 거쳐 계유년에는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충주현을 맡아 나왔다.

    충주현은 실로 큰 고을이고 호서와 영남의 중간에 끼어 있어 사람도 많고

    풍속도 고약하여 본래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러

    나 공이 부임한 지 1년이 채 못 되어 엽적이 크게 나타나니 사람들이 공에게

    사나운 것을 조제(調簡O하는 재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듬해 지평으로 소환되어 홍문록에 올라 수찬과 교리가 되었고 여러 차례

    정언과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병자년 인조 14년에는 체찰부에서 천거하여

    종사관이되었다.

    하루는 연춤에 오르자 상께서 체찰부사 이성구에게 모든 길의 병량(兵樓)에

    대하여 물으니 이성구가 대답을 못하자 공이 나서서 극히 상세하게 대답하

    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겼다. 겨울에는 호서를 안찰하게 되었는데 군무를 정

    돈하기도 전에 오랑캐가 갑자기 닥쳐 임금의 가마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공은 즉시 군 주둔 경계지역에 진주하여 제장의 후원이 되었순데, 감사 정

    - 4 9 -

  • 세규와 병사 이의배가 모두 오랑캐를 만나 궤멸되어 패하니 공이 흩어진 병

    사를 규합하여 재기할 계획을 세웠으나 강화(講*미가 이루어져 버렸다.

    복명(復命)하자 다시 교리에 제배되어 수찬과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 장

    령으로 옮겼고 오래지 않아 순천부사로 나갔는데 노동과 세금은 가볍고 송

    사는 잘 다스려지니 교화가 크게 행하여 그 일대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기묘년 상을 다하여 벼슬을 버리니 백성들이 모두 울부짖었고 배송하기를

    마치 부모릅 잃은 듯 하였는데 결국에는 고을의 사민(士民)과 수륙(水陸)의

    군병에서부터 승려에 이르기까지 각자 돌을 세워 공의 덕을 칭송하였으니

    그 끼친 사i캉을 알만하였는데 공이 부임하였던 모든 곳에서 떠|난 뒤의 사모

    함이모두이와같았다.

    초상을 마치자 연이어 수찬과 교리 응교로 제배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나

    가지 못하였고 얼마 후에는 집의로 올랐다.

    그때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심양(灌陽)에 있었는데 관료의 소임이 중하였

    으나, 사람씨 가기를 꺼려하여 공으로 시강원 보덕으로 삼았다 공이 이르자

    주선하고 보호함에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고 또 능히 조행을 딴결하게 간직

    하니 위아래에서 모두 존경하고 어려워하였다.

    계미년에 체직하고 돌아오니 대사간에 제배되었다가 사복시 정으로 옮겼

    다. 이에 앞서 묘당에서 유학자로서 재략이 있어 장군 임무를 감내할 만한

    사람을 가려 공이 포함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황해도 관찰사로

    뽑혔다.

    서쪽 길은 병란을 겪은 뒤로 노공과 세금이 구름처럼 일어나 백성들이 목

    숨을 부지할 수 없었으나 공이 부임하여서는 자기 월급을 절약하여 재물을

    넉넉하게 하고 편의에 따라 대응은 하되 노동과 세금으로 백성을 핍박하지

    아니하니 백성의 힘이 크게 퍼져 口디口 원근에서 칭송하기를

    “전후로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미칠 수 없다” 고 하였다.

    - 5 0 -

  • 조정에서또 가상히 여겨 임기가 다하자 다시 연임을 명하였으나 병으로

    바뀌었다. 여러 차례 병조참의와 참지 호조참의를 배수하고 은대에 들어와

    승차하여 우승지에 올랐고 을유년에는 강원도 관찰사에 재배되어 미처 부임

    하기도 전에 관서(關西)로 이배되었고 가선(嘉善)에 올랐는데 대체로 묘당에

    서 서쪽문호(門戶)를중히 여겼으나그럴만한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서를 다스리기를 해서에 있었을 때와 같이 하고 해가 지나서 병으로 체

    직하였으며 , 정해년에는 병조참판에 제배되었다가 사명을 받렐고 연경(월

    京)에 들어갔다가돌아와서는도승지에 제수되었다.

    무자년에는 여러 번 양사의 장관을 배수하였고 간혹 한성부 좌윤이 되어

    동지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대하기도 하였다.

    그때 마침 대사간 임담(林環) 등이 상소를 올려 일을 논하였는데 임금께서

    상소에서 인용하여 비유한 바가 정당성을 잃었다 하여 고쳐서 올리라 하였

    다. 공이 사첸부에 있는데 ‘사간원의 차자를 고쳐서 올리라고 명한 것은 실

    은 임금의 잘못인데도 승정원에서 말 한마디 없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탄핵하여 크게 임금의 뭇을 어겨 체직되었다.

    그러나 이뜯날 특명으로 경주부윤에 제수되었고 기축년 산릉(山陸)에 장례

    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병이나 그대로 파직되었다. 그해 겨울 서용되어 부

    총관에 제수되었고 경인년에는 공조와 병조의 참판을 거쳐 도승지에 제수되

    었으며 재차 사헌부의 장이 되어 경연과 춘추관 및 비국의 제주를 겸대하였

    다. 이로부터 비국에 있는 일이 항상 많았고 상께서 공의 재국을 알고 가려

    쓸 만하다고 여겨 특별히 공조판서를 제수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고 재차 연경을 다녀와서 복명하니

    예조판서에 제수되었고 경연과 총관 및 지의금(知議禁)은 그대로 겸대하였

    다. 그때 마침 대행왕의 부묘어밤願)와 세자의 가관(加冠) 등 큰 예식이 겹쳐

    찬인(贊A)으로 예의 집행이 예제에 맞으니 구마를 하사하라 명하고 대사헌

    - 5 1

  • 에 이배되었다. 곧바로 병조판서에 제수되어 내국 종부시 태복-시 전생시 등

    의 제조를펌대하게 되었다.

    공은 이미 임금의 총애를 받아 병조의 중임에 응명하였으므로 더욱 성력

    (誠力)을 다하여 봉직하였다. 무사를 선발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합당한 사람

    으로 하여 조금도 사사로운 뭇을 행사하지 않았다. 청탁이 용납되지 아니하

    니 문전에는 잡다한 먼지도 없었으며 여론도 만족스러워 어찌 하지 못한 자

    까지도 원망하지 않았다. 부정의 구멍을 막고 잡비를 없애니 정비는 크게 절

    감되어 한해가채 못되어 군용이 남아났다.

    공은 일찍이 유민을 정리하여 수륙의 군역에 환정하는 안건 등 몇 가지 일

    을 건의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시행되지 않자, 오래 전지(옳

    地)에 있고 싶지 않아 매양 連章을 올려 간절히 사의를 표하면 상께서는 선

    뭇 온건한 돗만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한번은 연신(鐘닮)인 이후원에게

    말하기를,

    “병판이 벼록 병이 있으나 병조와 사복시에는 바야흐로 개헥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쉽게 교체하지 못하겠으니 경의 나의 돗을 전하오.”

    하였는데, 임금의 권우가 이와 같았다.

    계사년 여름 상께서 병이 중하여 공이 약시중을 하였는데, 달포가 넘게 걱

    정하고 수고하여 병이 더하게 되자 이욱고 병가를 내고 집에 있었으나 병이

    덮쳐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이날이 6월 28일이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께서 내시를 보내서 병의 원을 물었고 또 어떻게 상을

    치를 것인지에 대하여 물었으며 이어 하교하기를

    “판교 박서는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고. 감히 자신을 똘아보지 않았

    으며 노심초사(勞心魚思)하여 일에 성취가 있었으므로 나가 그 충성을 가상

    히 여겨 앞으로 그를 전임하여 그 큰 뭇을 펴보게 하려 했는데 불행하게도

    나이 많지 않아 죽으니 내가 심히 애도하는 바이다. 생각해보띤 박서가 일찍

    - 5 2 -

  • 이 나의 병월 걱정하였는데 어떻게 내가 박서의 죽음에 비통해 할 줄 생각이

    나했는가!”

    라 하고 확별히 관의 재목과 장례 물품을 내렸다. 장례가 임박하자 신

    하들이

    “상여를 메고 묘소를 만들고 할 인부를 주기를 청하고 또 집안에 의금도 없

    어 친구가 수의(複衣)를 도와 비로소 염을 할 수 있었다”

    고 사뢰니, 임금이 안타까워하며 인부를 넉넉히 주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어떻게 국사에 진심한 사람으로 하여금 안장도 할 수 없게 하겠느냐?’

    고 하였으나 아 !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슬퍼함이 지극하다 하겠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고 품은 뭇이 심원하였는데 정사에 밝아 계획

    하고 실시함이 착착 제 경우에 맞아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지경이었다. 사

    나운 고을과 큰 도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청찰은 귀신처럼 하고 결판은 물

    흐르듯이 하였기 때문에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여 치적은

    항상 제일아었다. 청렴결백하기가 남보다 지나쳐 관직에 있으면서는 조금

    도범함이 없었다.

    양서(兩西)는 본래 기름진 곳으로 일컬어졌으나 처신하기를 불같이 담박하

    게 하니 고로(故老)들이 모두 칭송하기를 눈과 귀로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

    라고하였다.

    사신으로 다녀왔을 때도 저들한테서 받은 금백(金범)을 있는 대로 종자들

    한태 나누어 주고, 스스로 차지하지 않았으며 사복시에서는 의례 폐목장(廢

    物場)에 심븐 목화를 거두어 개인이 나누어 가졌는데 공이 제주;가 되어서는

    즉시 고쳐버리니 사람들은 중인燦시과 다르지 않나 의심하였지만 공은 거

    기에패념하지 않았다.

    공의 선조어l 청명(淸名)으로 세상에 저명한 이가 많았고 이정공(更靖公)을

    일찍이 어필로 청백전가(淸白傳家) 네 글자를 받기도 하였는데, 공 같은 분

    - 5 3 -

  • 은 집안의 병성을 떨어뜨리지 않은 분이라고 하겠다.

    공은 내행에 더욱 독실하여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어육을 먹지 않

    음을 어른과 같이 하였다. 대부인의 병구완을 할 때에는 여러 달 동안 띠를

    풀지 않았으며 임종 때 계씨와 함께 손가락을 깨서 피를 드렸고, 돌아가신

    뒤에는 남의 장수 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우애가 깊어 좋은 옷과 음식은 함께 하였고 여러 조카를 가쿄침에 자기가

    난 자식과 다름없이 하였으며 친족 간에는 돈목하여 은의를 극진히 하였다.

    본래 사권될 좋아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 사권 처지에는 신의가 매우 김었

    다. 술은즐기어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상을보아즐겁게 담소하였는데 흉금

    이 넓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사모하였다.

    공은 항상 임금의 총애에 감격하여 평소에도 집안 식구나 살림살이에 대해

    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나라 일에만 부지런하였으니, 공으로 하여금 오

    래 살게 하였다면 틀림없이 이 세상에 도움이 되었으련만 갑자기 죽으니

    아!천운이아니랴!

    공은 만력 임인에 태어나 죽을 때에 나이 52세였다.

    공의 선계는 밀양인이다, 삼한 이래로 대성으로 내려왔는데 고려 합문지

    후(開門祖候) 함(職은 공의 11세조이다. 이로부터 대대로 저명한 사람이 있

    었는데, 고조 열은 벼슬이 좌찬성이요, 시호는 이정(更靖)이니 아들이 없어

    형 운봉 현감 지의 아들 세정으로 뒤를 이었다. 이가 평시서(平市暑) 직장으

    로 사복정에 증직되었는데 또 아들이 없어 형 장사랑 희정의 아들 옹으로

    뒤를 이었다. 이는 문과에 급제하고 장단부사를 지냈으며 좌송지에 증직되

    었다. 이가 병조좌랑을 지내는 중 이조참판 효남을 낳으니 바로 공의 아버지

    이다. 벼슬하지 않을 때부터 의기를 숭상하여 일찍이 태학생 100 여인을 인

    솔하고 송강 정철의 무고를 변명하니 사론이 옳게 여겼다

    그러나 마침내 그 일 때문에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고 재주를 안고 죽어 세

    - 5 4 -

  • 상의 애석해 하는 바가 되었는데 사복정 이하 3대의 추증 되는 영광은 공이

    귀히 됨으로써 내려진 것이다.

    전부인은 군수 김변(金얀)의 따님으로 1남을 낳았으니 추(續)인데 당시의

    재신(才몸)아 되었으나, 불행히 일찍 죽었다. 후부인 연일 정씨는 홍문 전한

    언호의 증손녀이자 병절(秉節) 교의 희준의 따님인데 부덕과모의가두루규

    방의 모범이 될 만하였고여러 아들을가르침에 법도가있어 항상

    ‘너의 청백한 가문을 욕되게 하지 말라’ 고 경계하였다. 2녀 3남을 낳으니

    공이그맏이이다.

    공의 첫 부인은 별화 남양 홍여필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부사 파명 윤

    양의 딸인데 모두 일찍 죽어 아들이 없어 아우 매의 아들 시위를 아들로

    삼았다.

    시위는 참판 조석윤의 딸을 취하여 1녀를 낳았으나 어리고 측실에서 1자가

    있으니 시민이나 아직 어리다. 그 부인은 모두 원주의 손곡리에 장사지냈고

    공은 금천현의 남쪽 정향(丁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앞으로 두 부인을 옮

    겨 부장할 계획이라 한다. 명하기를

    영영딴 박콩은 삭 견도 롱달하고 기국도 켰다네.

    얼찍 첸윤 질에 드날라고 까성을 장도 이었다네 .

    내외 잭 듀류 거치고 임긍의 좌유도 묘듀 함당했다네.

    뒤얽 핸 별다른 이익에도 맹옥처럼 검어지지 않았다네.

    성칸이 계승한 첫 챙샤에 총애는 더육 옥진 하였다네.

    요래도록 영죠를 맏기시니 二Z대의 충성 야상히 。1 낌이랴네 .

    요직 콩영쟁대하여 。1 혼의 칭 송 이 따랐다네 .

    아야도 죠얀간에 크게 쓰얼 젓이랴 여 겼는데

    이며 그 재쥬흘 내려 쥬였으냐, 그 슈명을 빼앗‘음이랴!

    - 5 5 -

  • 야 ! 박공이여 하늘의 뜻을 어찌 하겠냐 !

    웅양의 언덕에 으쓴한 요도 있어 ,

    냐의 영 싹이지 않냐니 질이 후손에게 밝히리로다

    숭정 기원후 38년(1665 현종 6년) 을사 2월에 세움

    - 5 6 -

  • - 5 7 -

  • 박셔 신 도님1

    - 5 8 -

  • 훌표갱뀐

    표꿇

    뀐 I .뿔i뼈뻐

    ----ι깐파T흩벌

    -,

  • “·’혔變’

    검 순 묘까! (金Jjl힐 훌훌誌)

    重大l좋쌓IJ三司寶文關大提學 上護軍金’뼈 基誌중대광판삽사보문각대제학 상호군김순 묘지

    銘井}환

    古所謂君子者 德行즙乎歲 功業즙乎값; 予日고소위군자자 덕행운호재 공업운호재 여왈

    “|桂德行耳 非功業也 何也 德行在心 功業 在유덕행이 비공업야 하야 덕행재심 공업 재

    時 꺼E心者 A?JT-修也 在時者 天所授’也 能修

    A之所可修者 寫君子耳”지소가수자 위군자이

    夫德行本乎忠、孝 能以忠、孝 立揚於當世者 ,,桂부덕행본호충효 능이충효 입양어당세자 유

    됐判三司相君有폼 公譯j냄 字歸淳 系出新羅王아판삼사상군유언 공휘순 자귀후 계품신 라 왕

    金博 內孫三韓醒上功닮 司徒亞父三E重大똘 김부 내손삼한벽상공신 사도아부심-중 대 광

    - 6 0 -

  • 웰ξ훨한냄눈JD송

    平명

    건巨 선

    金김

    公寫金博十五世孫a 而安東府 郞其쫓掉3)之織也 공위김부십오세손 이안동부 즉기상재 지향야

    曾피且룹활敏成 追封左f業射 行掌治暑후 暴直史館증조휘민성 추봉좌복야 행장야서승 겸직사관

    祖譯孝:印 追封中書令 行4) 正議大夫 兵部尙書輪조휘효인 추봉중서령 행 정의대부 병부상서한

    林學士 充史館修構館知制듬쁨 림학사 충사관수찬관지제고

    考譯方「慶 宣據中奉大夫 管高麗軍者~元I~~ 推忠、고휘방경 선수중봉대부 관고려군도원수 추충

    靖難定遠功많 E률靖大夫 三重大똘 맞lj都愈議使司 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 대 광 판도첨의사사

    實실

    典理司事 上將軍上洛君開國功 食물一千戶 전리사사 상장군상락군개국공 식읍일천호

    §曾宣忠協讓定難靖國功 담조현좋上三韓 증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벽상삼한

    封三百戶봉 삼 백

    三重大탤忠、烈 삼중대광 충렬

    1) 원 비석문엔 ‘19자결’ 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1946년 묘지석엔 19자를 첨부하여 넣었다

    2) r기미보」〈안동김씨대동보{1979년 간)〉 엔 十世쯤、이라 기록되어 있음. 3) 상재쫓햄는 뽕나무와 지즈1나무란 뭇으로 조상들의 터전 즉 고흔띨 말한다 시경 면휴웹뇨〈소OK小뼈소변(小#)에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자작나무도 공경한다 .(堆훌뚱월¥ι·짧hl)라는데서 따왔다

    4) 행(行) 계급이 높지만, 사정상 낮은 직급으로 옮기는 경우 행(行)을 붙인다 반대의 경우직급은 낮지만 높은

    계급을 수행할 경우는 수(守)를 적는다

    - 6 1

  • 公母朴民 中書舍A知휩lj語 譯益雄之女 封陰平공모박씨 중서사인지제고 휘익정지녀 봉음평

    합~夫A

    公↓;A홉書 多寫牌文 年方志學 以門隱入f士 댐 공 이 선 서 다 사비문 연방지학 이문음입사 위

    掌姓暑캘 後&J.풍}jlj將 個]輩龍行首 職雖從東至西생서승 후개위별장 어견룡행수 직수종동지서

    其志未賞不在文學기 지 미 상 부 재 문 학

    릎늪嚴첩 雖f立極兩朝將相 堆j久未參桂藉댐,,뀔 薰개엄군 수위극양조장상 유이미참계적위한 기

    關子之能復祖業故也

    公 由是 力學不↑卷 至至元十六年 己~p春場 一공 유시 역학불권 지지원십육년 기 묘춘장 일

    훌합f풍金*旁副元 是年 初拜構郞將 後改寫國學直講거위금방부원 시년 초배섭낭장 후개위국학직

    此公之.能뼈大A之遺慣者也 차공지능신 대 인지유분자야

    自是 先公 益推偏季之恩 常令不離左;右 寶正자 시 선공 익추편계지은 상령불리좌우 하정

    上國 無不令隨 但其東↑正5)船上 不許追階者 不從상국 무불령수 단기동정 선상 불허추배자 불종

    5) 동정(東f퍼 일본 정벌

    - 6 2 -

  • 끊윤養좀눈JD송

    軍參危별也 군 참 위 사 야

    公 於是 置罵 不待命而先登戰繼 頻有‘技衛救공 어 시 호가 부 대명 이선둥전함 파유부위구

    援之功 是公’|桂專忠孝 而舊不顧身者也원지공 시공유전충효 이분불고신자야

    王午 選顯中待史 習年 出鳥尙州맞lj官 政聲登임오 천전중시사 익년 출위상주판관 정성둥

    聞 未一年而入 寫典法住郞 006)通禮門事 考功문 미일년이입 위전법좌랑 통례문사 고공

    正郞

    王成7) 奉使南方 f많n音先公 拜피且基於쫓했P也 임술 봉사남방 위 배 선공 배조묘어상향야

    rx子 除秘書少尹 知通禮門事 是年 上命公댐 무자 제비서소윤 지통례문사 시년 상명공위

    世子府行李別藍 委以師博之任세자부행리별감 위이사부지임

    任辰 加朝顯大夫典法總、郞知制諾 累遇;少府尹임진 가조현대 부전 법총랑지제고 누천소부윤

    6) 二字缺

    끼 비석과 족보에는 모두 王없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1322년은 문영공이 1321년 사'lfo"f였으므보 며成 1286년(문

    영공 29서|) 해라가 맞다-

    - 6 3 -

  • 00[]S) 學軍鐘總、郞 典理總、郞 朝奉大;夫秘書尹학군부총랑 전리총랑 조봉대부비서윤

    三司右尹皆籍三字사우윤 개겸삼자

    z未쪽 同知責學 所取皆當世휩士 因大을 미 동 동지공거 소취개당세명사 인대

    元貞원 정

    開績席 口口[]口9) 士 朝野莫不嘉歡 是先公之

    極於榮孝者也

    是年 加朝議大夫 困申 暴世子舍人 ;大德丁西시년 가조의대부 병신 겸세자사인 대덕정유

    選國學典酒 X拜奉烈大夫 密直使 右副承릅 鍵천국학전주 우배봉렬대부 밀직사 우부승지 취

    ;賽左副承릅寶文聞直學士 習年 加右承핍知版圖 천좌부승지보문각직학사 익년 가우승지지판도

    司事每選皆暴三字사사 매천개겸삼자

    是年春 f奉使南方 휩%還 &授通등義大失i 光政副시년춘 봉사남방 기환 개수통의대부 광정부

    使承답成均察酒 X&~풍正議大夫 集賢顯學士左사승지성균쐐주 우개위정의대부 집현전학사 좌

    8) 三字缺

    9) 四字缺

    - 6 4 -

  • 散騎常↑폼

    是年f;月 復寫密直司 右承톱 시년젤월 부위밀직사 우승지

    國學察酒 寶文국학쇄주 보문

    關學士 知民團事 依前三字각학사 지민조사 의전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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