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그랬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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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과 첨단기술 MARCH 2017 35 저자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과학원, 서울대학교 이론물 리연구센터, 연세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KAIST, 고려대학교, 건국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 며 가속기에서의 힉스입자, CP 대칭성 깨짐, 암흑 물질 등의 현상에 대해 연구해왔다. 현재 경상대 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LHC에서의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연구하고 있으며, 물리학회 물리학과 첨단기술실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그는 왜 그랬을까?* 이 강 영 *이 글의 내용 중 일부는 말과 활” 20145/6월호 에 실린 같은 필자의 글 <요르단의 경우>와 같습니다. 지난 20143월호에 <빗나간 과학자 >이라는 이름으로 나치스에 부역했던 두 노벨상 수상자, 필립 레나르트(Philipp Lenard)와 요하네스 슈타르크(Johannes Stark) 이야기를 했다. 이번 호에서는 역 시 나치스를 지지했으나 그들과는 조금 결이 달랐던 물리학자를 이야기해 보자. 물리학자들에게 1925년은 하이젠베르 크가 새로운 양자역학, 진짜 양자역학을 가져온 해로 기억될 것이다. 괴팅겐 대학 의 강사 하이젠베르크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해 6월에 북해의 작은 섬 헬골란 트로 휴가를 갔다가 새로운 양자역학 체 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돌아온 후 7 29일에 논문을 투고했다. 하이젠베르 크의 이론은 보른에 의해 수학적으로 체 계화되어 927일에 양자역학에 관해 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리고 1116일 다시 후속 논문 양자역 학에 관해서 II”가 발표되었다. 괴팅겐에 서 나온 이 세 편의 논문을 흔히 양자역학 을 만든 삼부작(trilogy)이라 칭한다. 삼부 작의 첫 논문은 물론 하이젠베르크 혼자 쓴 것이지만 두 번째 논문에는 하이젠베 르크의 이름은 없고, 그의 지도교수인 막 스 보른(Max Born)과 보른의 학생 파스쿠 알 요르단(Pascual Jordan)의 이름만 있 . 그리고 세 번째 논문에는 이들 세 사 람의 이름이 모두 실려 있다. 요르단의 집안은 스페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페인 남부의 귀족 가문인 호르다 (Jorda) 집안의 파스쿠알 호르다(Pascual Jorda)는 스페인-영국 연합군 기병대의 일원으로 나폴레옹과 맞서 싸웠고, 그 인 연으로 영국이 웰링턴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당시 영국 왕실 소유였던 하노버에 정착했다. 호르다는 새로운 땅에 정착하며 가문의 이름을 요르단(Jordan)으로 바꾸 었다. 19021018일 요르단 집안에 첫 아들이 태어났다. 집안은 장손에게 에 른스트 파스쿠알 요르단(Ernst Pascual Jordan)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장남 에게 파스쿠알이라는 이름을 붙아는 것은 이 집안의 전통이었다. 수학에 재능이 있던 요르단은 1921하노버 공과대학에 입학해서 수학과 물리 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하노버 공과대학의 물리학 강의는 수준이 너무 낮았다. 요르 단은 조머펠트의 책 원자 구조와 스펙트 럼 선 Atombau und Spektrallinien”으로 원자 이론을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다음 해에 당대 수학과 이론물리학 분야의 중심 지 중 하나였던 괴팅겐 대학으로 옮겼다. 괴팅겐은 가우스 이래로 독일뿐 아니 라 세계의 수학의 중심지였다. 20세기 초에도 괴팅겐의 수학과는 펠릭스 클라 (Felix Klein)에 이어 다비드 힐베르 (David Hilbert), 헤르만 민코프스키 (Hermann Minkowski) 등이 자리를 지키 며 수학의 중심 위치를 잃지 않았다. 또한 가우스가 그랬듯이 괴팅겐 수학의 전통은 수학을 과학과 공학에 응용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로 괴팅겐 대학은 최초로 산학 협동 협의체를 만들고 응용 전기학연구소와 응용수학연구소 등을 설 립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과학과 공학 분 야에서도 우수한 교수진을 갖추었다. 요르 단은 괴팅겐에서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수학 자인 리하르트 쿠란트(Richard Courant) 에게서 수학을 배웠고, 쿠란트의 조수가 되어 쿠란트와 힐베르트(David Hilbert)함께 쓴 유명한 수리물리학 책을 쓰는데 도 기여했다. 한편 요르단은 이론물리학 정교수인 막스 보른의 강의와 세미나에도 참가했다. 보른은 괴팅겐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베 를린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피터 드바이 (Peter Debye)의 뒤를 이어 1921년에 괴 팅겐 대학의 이론물리학 정교수로 부임했 . 보른은 유명한 뮌헨 대학의 조머펠트 의 그룹처럼 젊은이들을 모아서 떠오르는 새로운 학문인 양자론을 연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보른은 처음에 조머펠트 밑에 서 공부한 볼프강 파울리를 채용했고, 울리가 떠난 뒤에는 역시 뮌헨에서 조머 펠트의 학생이었던 하이젠베르크를 받아 들였다.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에서 보른 의 지도 아래 하블리타치온 논문을 제출 하고, 1924년부터는 괴팅겐 대학의 사강 (Privatdozent)가 되었다. 여기에 요르 단이 가세하고, 또 다른 학생인 훈트 (Friedrich Hermann Hund)도 합류해서, 보른의 그룹은 원자 이론의 중심지 중 하 나로 당당히 꼽힐 만한 진용을 갖추게 되 었다. 교수인 보른을 중심으로 강사인 하 이젠베르크와 보른의 학생이던 요르단과 훈트는 원자의 분광학의 이론적 해석에서 가장 앞서가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마침내 1925년 이들은 양자역학을 세상 에 내놓은 것이다. 당시 요르단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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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과 첨단기술 MARCH 201 7 35

저자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과학원, 서울대학교 이론물

리연구센터, 연세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KAIST,

고려대학교, 건국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

며 가속기에서의 힉스입자, CP 대칭성 깨짐, 암흑

물질 등의 현상에 대해 연구해왔다. 현재 경상대

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LHC에서의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연구하고 있으며, 물리학회

‘물리학과 첨단기술’ 실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그는 왜 그랬을까?*

이 강 영

*이 글의 내용 중 일부는 “말과 활” 2014년 5/6월호

에 실린 같은 필자의 글 <요르단의 경우>와 같습니다.

지난 2014년 3월호에 <빗나간 과학자

들>이라는 이름으로 나치스에 부역했던

두 노벨상 수상자, 필립 레나르트(Philipp

Lenard)와 요하네스 슈타르크(Johannes

Stark) 이야기를 했다. 이번 호에서는 역

시 나치스를 지지했으나 그들과는 조금

결이 달랐던 물리학자를 이야기해 보자.

물리학자들에게 1925년은 하이젠베르

크가 새로운 양자역학, 진짜 양자역학을

가져온 해로 기억될 것이다. 괴팅겐 대학

의 강사 하이젠베르크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해 6월에 북해의 작은 섬 헬골란

트로 휴가를 갔다가 새로운 양자역학 체

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돌아온 후 7

월 29일에 논문을 투고했다. 하이젠베르

크의 이론은 보른에 의해 수학적으로 체

계화되어 9월 27일에 “양자역학에 관해

서”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그

리고 11월 16일 다시 후속 논문 “양자역

학에 관해서 II”가 발표되었다. 괴팅겐에

서 나온 이 세 편의 논문을 흔히 양자역학

을 만든 삼부작(trilogy)이라 칭한다. 삼부

작의 첫 논문은 물론 하이젠베르크 혼자

쓴 것이지만 두 번째 논문에는 하이젠베

르크의 이름은 없고, 그의 지도교수인 막

스 보른(Max Born)과 보른의 학생 파스쿠

알 요르단(Pascual Jordan)의 이름만 있

다. 그리고 세 번째 논문에는 이들 세 사

람의 이름이 모두 실려 있다.

요르단의 집안은 스페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페인 남부의 귀족 가문인 호르다

(Jorda) 집안의 파스쿠알 호르다(Pascual

Jorda)는 스페인-영국 연합군 기병대의

일원으로 나폴레옹과 맞서 싸웠고, 그 인

연으로 영국이 웰링턴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당시 영국 왕실 소유였던 하노버에

정착했다. 호르다는 새로운 땅에 정착하며

가문의 이름을 요르단(Jordan)으로 바꾸

었다. 1902년 10월 18일 요르단 집안에

첫 아들이 태어났다. 집안은 장손에게 에

른스트 파스쿠알 요르단(Ernst Pascual

Jordan)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장남

에게 파스쿠알이라는 이름을 붙아는 것은

이 집안의 전통이었다.

수학에 재능이 있던 요르단은 1921년

하노버 공과대학에 입학해서 수학과 물리

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하노버 공과대학의

물리학 강의는 수준이 너무 낮았다. 요르

단은 조머펠트의 책 “원자 구조와 스펙트

럼 선 Atombau und Spektrallinien”으로

원자 이론을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다음

해에 당대 수학과 이론물리학 분야의 중심

지 중 하나였던 괴팅겐 대학으로 옮겼다.

괴팅겐은 가우스 이래로 독일뿐 아니

라 세계의 수학의 중심지였다. 20세기

초에도 괴팅겐의 수학과는 펠릭스 클라

인(Felix Klein)에 이어 다비드 힐베르

트(David Hilbert), 헤르만 민코프스키

(Hermann Minkowski) 등이 자리를 지키

며 수학의 중심 위치를 잃지 않았다. 또한

가우스가 그랬듯이 괴팅겐 수학의 전통은

수학을 과학과 공학에 응용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로 괴팅겐 대학은

최초로 산학 협동 협의체를 만들고 응용

전기학연구소와 응용수학연구소 등을 설

립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과학과 공학 분

야에서도 우수한 교수진을 갖추었다. 요르

단은 괴팅겐에서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수학

자인 리하르트 쿠란트(Richard Courant)

에게서 수학을 배웠고, 쿠란트의 조수가

되어 쿠란트와 힐베르트(David Hilbert)가

함께 쓴 유명한 수리물리학 책을 쓰는데

도 기여했다. 한편 요르단은 이론물리학

정교수인 막스 보른의 강의와 세미나에도

참가했다.

보른은 괴팅겐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베

를린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피터 드바이

(Peter Debye)의 뒤를 이어 1921년에 괴

팅겐 대학의 이론물리학 정교수로 부임했

다. 보른은 유명한 뮌헨 대학의 조머펠트

의 그룹처럼 젊은이들을 모아서 떠오르는

새로운 학문인 양자론을 연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보른은 처음에 조머펠트 밑에

서 공부한 볼프강 파울리를 채용했고, 파

울리가 떠난 뒤에는 역시 뮌헨에서 조머

펠트의 학생이었던 하이젠베르크를 받아

들였다.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에서 보른

의 지도 아래 하블리타치온 논문을 제출

하고, 1924년부터는 괴팅겐 대학의 사강

사(Privatdozent)가 되었다. 여기에 요르

단이 가세하고, 또 다른 학생인 훈트

(Friedrich Hermann Hund)도 합류해서,

보른의 그룹은 원자 이론의 중심지 중 하

나로 당당히 꼽힐 만한 진용을 갖추게 되

었다. 교수인 보른을 중심으로 강사인 하

이젠베르크와 보른의 학생이던 요르단과

훈트는 원자의 분광학의 이론적 해석에서

가장 앞서가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마침내 1925년 이들은 양자역학을 세상

에 내놓은 것이다.

당시 요르단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물리학과 첨단기술 MARCH 201 736

있었다. 요르단은 이 논문에서 보즈 기체

와 빛이 같은 방정식으로 기술되는 것은

양자가 동등함을 의미한다는 관점을 제시

한다. 즉 물질과 빛은 각각 서로 파동으로

도 입자로도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이 요르

단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요르단은 당시

슈뢰딩거 등이 했던 것과는 반대로 파동

을 양자화하려고 했다. 이는 현대적으로

말해서 바로 양자장(Quantum Field)의

개념이다. 당시 요르단은 자신의 생각을

슈뢰딩거 방정식과 같은 구체적인 모델로

제시하지는 못하고 수학적 대칭성으로 표

현할 수밖에 없었지만, 전자기장에 행렬역

학을 적용해서 아인슈타인이 1909년에

내놓은 보즈 기체의 식을 유도해낼 수 있

었다. 이에 대해 요르단은 “아마도 내가

양자역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일일 것

이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에게서도

찬사를 들은 요르단의 논문 “양자 복사 이

론에 관해”는 물리학의 역사에서 최초의

양자장이론(Quantum Field Theory) 논문

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물리학의 발전과는 달리 세상은 점차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1929년 대공

황의 여파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휘청거렸

고, 반면 뮌헨에서 시작된 극우 정당인 독

일 국가사회주의 당, 곧 나치당은 점차 세

를 불려갔다. 나치당은 1932년 7월의 제

국의회 선거에서 37퍼센트를 득표해서 제

1당이 되었고, 다음 해 1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연립 내각의 총리로 나치당 당

수 아돌프 히틀러를 지명했다. 그날 이후

독일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2월 27일에

는 악명 높은 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났

고, 이를 빌미삼아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

인 탄압과 폭력이 벌어졌다. 그로부터 반

년 뒤, 나치를 제외한 모든 정치 세력은

제거되었고, 독일은 더 이상 민주 국가가

아니었다.

1933년 요르단은 나치당에 가입했다.

주위의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는 히틀러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있었

다. 공공연히 나치에 가담하는 과학자들은

이미 있었다. 나치의 세계관의 핵심은 반

유태주의, 반 마르크스주의, 반 자유주의

적인 범 게르만 민족주의였으므로, 나치스

는 아리안 인종을 위한 우생학을 뒷받침

할 생물학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사실 1920년대에 우생학은 널리 인기를

끄는 과학 분야였고, 나치스가 아니더라도

다윈의 이론을 정치에 이용하는 수많은

생물학자가 있었다. 여기에 나치스의 이념

을 가미해서 알프레드 플뢰츠, 오이겐 피

셔, 한스 귄터 등은 인종 차별에 대한 이

론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인종 청소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물리학자 중에 나치스에 적극적으

로 협력한 사람으로는 앞서 말한 레나르

트와 슈타르크 등이 있다. 이들은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일찍이 반유태주의를 공공

연히 표방했고, 그 귀결로 유태인 물리학

자들이 주도한다고 믿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배척했다. 일찍이 나치스에 입

당했던 레나르트는 히틀러를 직접 만나

독일의 대학 과학 교육 개혁을 역설했고,

자신의 강연을 모아 1930년대 중반에 “독

일 물리학”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더 젊은 슈타르크는 독일 물리학계를 실

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갖고자 했다.

슈타르크는 제국 물리 기술 연구소의 소

장과 독일 연구재단의 장을 차지했고, 이

를 기반으로 물리학 연구 프로그램을 마

음대로 주물렀다. 그들이 원하는 ‘독일 물

리학’이란 ‘전통과 확실한 실험에 기반을

두는 물리학’이었으며, 이를 상대성 이론

과 양자역학과 같은 ‘유태인 물리학’으로

부터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

는 대통령과 총리의 모든 권한을 갖기 위

한 국민 투표를 제안하고 대규모 선전을

벌였다. 슈타르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일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불러 모아 히

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성명서를 발표

하고자 했다. 이에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라우에, 네른스트 등은 과학을 정치에 이

용하는데 반대하며 서명을 거절했다. 그러

자 슈타르크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것은

정치적인 행동이 아니라 ‘독일의 지도자를

향한 독일 국민으로서의 고백’이라며, 아

인슈타인을 존경한다는 이유로 국가 지도

자에 대한 지지를 거부한다면 그것이야말

로 정치적인 행위라며 비난했다. (터무니

없지만 왠지 낯설게 들리지 않는 논리다.)

진정 야만의 시대였다.

요르단은 유태인 물리학인 양자역학을

건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

치즘에 젖어 있었다. 대체 그의 내부에서

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진정한 양

자역학을 최초로 깨달은 몇 사람 중 하나

인 요르단은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물리

학이 “세계의 혁명적 변화를 보여주는 거

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양자역학이

자연의 진정한 힘을 드러내는 것처럼, 나

치즘도 단순한 이념이나 정치적 선전을 넘

어서는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즉, 물리 법칙처럼 나치즘을 명

백한 진리라고 주장했다. 양자역학은 자연

현상의 진정한 실체를 기술하는 이론이다.

양자론에서는 고전 물리학에서처럼 주체

와 객체를 더 이상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

지 않으며, 부분과 전체를 분리해서 생각

하지 않는다. 나치즘 역시 새로운 물리학

의 유기적인 결정론처럼 개인과 국가를 결

합시킨다. 요르단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정치적 변화는 유럽 여러 국가에서 이

미 이루어졌다. 이제는 의회주의 정부가

아니라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정부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 추세다. 이는 단순히 정부

형태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고와 가치, 그리고 행동을

재구축하는 혁명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삶과 문화의 영역을 초

월할 수 있어야 한다.”

물리학과 첨단기술 MARCH 201 7 37

참고문헌

[1] 존 콘웰 지음, 김형근 옮김, 히틀러의 과학자

들, 크리에디트 (2008).

[2] 마르틴 브로샤트 지음, 김학이 옮김, 히틀러

국가, 문학과지성사 (2011).

[3] 피터 프로인트 지음, 김경태, 최귀덕 옮김, 발견

의 기쁨 (솔과학, 2015).

[4] Pascual Jordan(1902-1980), Mainzer

Symposium, PREPRINT 329, Max Planck

Institute for the History of Science

(2007).

[5] Christoph Lehner, (talk) The Resolution

of the Particle-Wave Dualism: Pascual

Jordan and the Quantum Field Theory

Program (2010).

양자역학을 배운 나도 도무지 무슨 소

리인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그런 식으

로 생물학, 심리학, 의식 등 모든 분야를

양자 이론을 토대로 새로이 설명했다. 실

제로 요르단은 1930년대 이후에는 우주

론과 생물학 등으로 연구 방향을 바꿨다.

요르단은 또한 이념적인 면뿐 아니라 실

질적인 면에서도 적극적이었다. 2차 대전

중에는 독일 공군에 적을 두고 한동안 페

네뮌데(Peenemünde) 로켓 센터에서 기상

분석가로 복무했다. 그는 “새로운 유럽을

창조하는 데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

다는 게 증명된 만큼, 과학을 군사력에 이

용하는 것은 과학의 남용이라고 볼 수 없

다.”면서 요르단은 나치스로 하여금 새로

운 무기를 개발하도록 촉구하고, 신무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의 여러 제안은 대체로 무시되었는데, 그

것은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것을 잘 이해

하지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주 이유는 아

이러니칼하게도 그가 주로 유태인 과학자

들과 함께 유태인 물리학을 연구했고 옹

호하는 사람이어서였다. 사실 막스 보른을

비롯해서 쿠랑, 파울리, 그리고 요르단과

마지막으로 함께 논문을 쓴 헝가리 출신

의 위그너, 폰 노이만 등이 모두 유태인이

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열정을 불태운

것에 비해서 요르단이 한 일은 사실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다.

우생학을 뒷받침하는 데 동원된 생물학

이나 의학, 인류학 등과는 달리 물리학은

‘독일 물리학’을 만드는 일이 쉽지도 않았

고, 막상 별 쓸모도 없어 보였다. 대학과

연구자들만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물리학

자들은 곧 나치스 관료와의 권력 및 이권

투쟁에서 려났다. 레나르트는 하이델베

르크 대학의 명예교수로 있다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해직되었고 1947년 83

세로 사망했다. 같은 해 슈타르크는 전범

으로 법정에 서서 4년형을 받았다.

레나르트와 슈타르크처럼 일신의 영달

을 위해 자신의 학문적인 위치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드물지 않으며, 그들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요르단의

경우는 참으로 기이하다. 요르단은 딱히 자

신의 성공을 위해 권력의 편에 선 것이 아

니며, 실제로 권력을 탐하지도 얻지도 않았

다. 요르단은 당대에 양자역학이라는 최신

의 지식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

나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깨달은 위대한 지식과 나치즘을 결

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는

당대는 물론이고 훗날에도 아무도 이해하

지 못하는 괴상한 신념 체계를 가지게 되었

다. 과학은 합리성의 체계이며, 이론물리학

은 그 정화(精華)라고 흔히 여겨지지만, 위

대한 물리학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도덕적, 정치적 판단을 하

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전쟁 후 파울리는 요르단을 복권해 줄

것을 당국에 요청했고, 그 덕분에 요르단

은 1953년에 다시 교수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경력 때문에 아무도

그와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시카고 대학

의 프로인트(Peter Freund)는 독일에 강

연을 하러 방문했을 때 요르단을 만나고

자 했으나, 모든 사람들이 극히 비협조적

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고, 결국 요르

단이 일종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

는 것을 알았다. 저 하이젠베르크조차도

독일 바깥에서는 어느 정도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닐 것

이다. 더구나 요르단은 냉전이 심화되면서

반나치 경향이 약화되자 학문에 전념하라

는 파울리의 충고를 무릅쓰고 다시 정치

의 세계로 발을 딛었다. 보수당인 기독교

민주연합으로 나서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

으며 1957년에는 연방 방위군에 전술핵

무기를 도입하려는 아데나워 정부의 정책

을 지지해서, 이에 반대하고 나섰던 예전

의 동료들과 관계가 더욱 소원해졌다.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과학사 연

구부는 2007년에 요르단을 주제로 심포

지엄을 열고 초기 양자론에 대한 그의 업

적을 다시 평가했다. 이 심포지엄에서 베

를린 이론물리학 연구소의 슈뢰어(Nert

Schroer)는 “파스쿠알 요르단의 경우만큼

인생에서 영광스러운 과학적 업적과 혼란

스러운 인간적인 약점이 함께 나타나는

물리학자는 드물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정치적인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물

리학에서 요르단은 통찰력을 갖춘 혁명가

였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견해나 나치와의 활동으로 그가

실제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다. 그가 받은

대가는 사람에 따라서 큰 것일 수도, 별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그가 만

약 나치에 동조하지 않았더라면 1954년

에 막스 보른과 함께 노벨상을 탔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QED를 만든 사람들”의

저자 슈베버(Silvan S. Schweber)는 그의

책에서 요르단을 가리켜 양자역학을 만든

사람들 중 유일하게 “찬양받지 못하는 영

웅(unsung hero)”이라고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