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잡지 수원 팔달산 자락의 사람 자연 문화에 대한 소소한 ... ·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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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목잡지 · 수원 팔달산 자락의 사람 , 자연 · 문화에 대한 소소한 얘기들 Vol.4 네번째

    φ}피〕

    -겨

    2013년 2월 네번째

  • 골목잡지 · 수원 팔달산 자락의 사람 · 자연 문화에 대한 소소한 얘기들 V이.4 네번째

    이천십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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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F}

    、겨

    2013. 2 네번째

  • 바쁜 연말을 보내고 바로 〈사이다〉 ‘겨울호 준비로 퇴근이 늦다, 늦은 저념을 먹는 내게 남편이

    갑자기 ‘왜, 대한민국이 행복하지 않는 지 알아?’ 라고 묻는다. 옥심이 많아서란다. 욕심을 버랄

    때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모두 알았으면 한단다. 골목잡지 〈사이다〉를 내는 나에겐 응원의 한마

    디이다. 점점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고 계시고 작년 12월말에는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인증도 받았

    다. 함께 한 많은 분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잡지를 낸다는 게 의외로 단순하고 당연한 일들 사이에서 감동을 찾고 이야기를 찾는 작업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것이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몇 번을

    만나보고 인내하고 기다리고 또 찾아보고 기다리는 시간이다.

    또한 한 번 쓰여 진 기록은 없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그 작업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번 호에는 죽음에 대한 예식 ‘상례 ‘를 담았다. 조금 무겁고 어려운 내용이라 주저함도 있었지

    만 누구나 가야o~는 길이며, 인간에 대한 마지막 예절이란 대목에서 선뜻 나서 보기로 했다. 하

    지만 이미 없어진 흔적을 찾는 일은 좀처럼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다. 오랜 세월동안 민족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담긴 예식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어졌다니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

    는 사이 많은 것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문화라는 것이 쌓이기는 시간이 걸려도 사라지는 것

    은너무나재빠르다.

    정밀 어렵게 찾아낸 이야기들을 담았다 아직 상여가 나간다는 오산 서랑리에서 열심히 말씀해주

    시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자료를 구해준신 이석근 통장님, 마을회관에서 따뜻한 점심을 차

    려주신 서랑리 주민들과 좀처럼 찾기 어려웠던 상여 나가는 사진을 제공해준 지인에게 감사드린

    다. 소중하게 기록하고 그 예식의 사이에 담긴 의미의 끝자락이라도 담아보려 노력했다.

    쉬원도 하지 않아야 할 일이 있고 어려원도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동네에서 처음 잡지

    를 만든다고 할 때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고, 서| 번째 사이다를 내고는 여기저기서 많은 칭찬도

    들었다. 아직은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딸치고 꾸준히 걸어가 봐야겠다. 같이 걸어가는 친구

    들과 함께, 그렇게 문화는 차근차근 쌓이는 거라고 한다.

    2013. 겨울 최서영

    02 I 03

  • Contents --

    골목특집 남창동에살다

    • 남창동에 살다 - 남창동을 거닐다 11

    • 남창동 사람들 - 남장동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 18

    • 남창동 사람들 - 영화루 필봉지 할머니 이야기 30

    • 그 곳에 있었던 남창동 99칸 앙성관가옥 42

    • 황색의 시대 48

    • 아름다운 행궁길에 놀러가자 52

    포토에세이 54

    기억 I- 중앙극장 앞에서 • 중앙극장의 추억과 간판화가 김승엽 56

    • 길에서 길을묻다 60

    기억 II - 영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 한옥 그 사이에 흐르는 이야기 66

    • 따뭇한초대 72

    • 남창동과 잃어버린 중학생모자 75

    • 우리동네 모임 소개 - 영사기 새로운 영화 데이트를 료h하다 78

    • 삶이 담긴 시 - 만설의 산촌에서 80

    • 보호수 81

    (사이대가 제요범}는 잃어버린 기억 찾기 - 네번째

    • 인E뻐|게 바치는 마지막 예절 ‘상례’ 82

    ·곡에대한기억 84

    • 유교식 상례의 규범과 실제 91

    • 눈물과 함게 소중한 이를 보내드리는 상례 94

    ·일러스트에세이 98

    우리동네공간소개

    • 도심 한가운데 존재하는 이런 학교 ‘남창초등학교’ 102

    • 자연을 만지고 순환의 원을 배우다 - 에코펀 μ실 106

    ·추억의 뒤안 길 108

  • 끓목잡지 · 수원 팔달산 자락의 사람 · 자연 · 문화에 대한 소소한 얘기들 V이.4 네번째

    추억의 사진관 110

    메이퍼 갤러리 - 윤석남 작가 112

    만남

    • 꽃씨 모으는 남자 - 소녀의 바구니 채우던 초록항기 겨울냉이 124

    • 인물열전 || - 화성영역 총리대신 채제공 125

    • 그림 한장의 인문학 - 기산 김준근의 〈시집가고, 장가가고〉 130

    • 오늘도 팔달산을 걷다 134

    ·틈을보았다 138

    • 명함, 너는 뭐하는 놈이냐 140

    나눔

    • 공부방 아이들과 사진으로 놀다 - 팔달희망지역아동센터 사진수업 142

    • 남창동 어린이문학교실 146

    시 - 럭키슈퍼, 아빠의 택배

    • 다문화 가족 그리고 그녀들의 가족 148

    • 외면하기 미요t하고 대면하기엔 불편한 사람들 150

    • 내 몸을 위한 착한 일 - 오십견 없애기 152

    • 망쳐야산다 154

    • 우리 시 착한기업 ‘사회적기업’ 을 소개합니다 156

    • 우리동네 착한기업 소개 - 떡으로 전히는 이웃사랑 160

    문화

    • 영화로 만나는 꿀목풍경 - 행복한 장의사 162

    •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고 - 발칙한 상상에 박수를 164

    ·동네에서 노는 사이다 세번째 - 〈사이다〉 가을공연 ‘시를 읽다’ 166

    i 동네소식 168

    ·전시공간안내 170

    • (사이다} 배부처 안내 172

    4낳릎휴

    04 I 05

  • 를목들집 | 남창동에 살다

    눈이내린다.

    행궁 앞 600년 넘은 느티나무 가지 위에

    훤하게 비어 더 시린행궁광장위에

    팔달산에서 그곳을 내려다보는

    대승원 커다란 부처님 어깨위에

    똑같이, 고르게 내린다.

    수원문화재단 지붕에 쌓이던 눈들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날려

    공방거리 쪽으로 우르르 달려간다.

    (

    눈송이들은한데우물가에 모여 우왕좌왕하더니

    몇몇은 오룡빌라 앞 오래된 담배 가게 앞쪽으로 치달아

    그 옆 은행나무 빈 가지를 흔들어 깨우고

    또 한 무리는 영화 자랑방손님과 어머니’ 의 촬영지였던

    한옥 지붕에 쌓이던 눈과 만나 까불고 논다.

    눈가루가 한우물 주차장과 단오 카페 앞으로 하양게 날린다.

  • 까=외시 판탁구 차도

    글 이경이 | 일러스트 박정신 | 사진 박김형준 | 캘리그래피 윤경숙

    06 I 07

  • 물목률집 | 남창동에 살다

    ;- --------- ----- --- ‘· 、--=-----

  • ---‘

    바람이잦아든다.

    한옥 기와에 곱게 눈이 쌓이고

    저 아래 보리회관 간판에도

    더 아래 오복서점 가는 길모퉁이에도

    조용히눈이쌓인다.

    99칸 한옥은 어디쯤 있었을까.

    양성관 가옥이 있던 자리를 상상하며 눈이 쌓이는·

    151견”천딴-해도 만인의 약속장소였던 ‘중앙극장’ 앞.

    더 이상 영화를 틀지 않은 그곳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눈 오는 팔달산과 남창동을 골목들을 돌아본다. 눈이 내린다.

    200년 전, 100년 전, 50년 전, 20년 전에

    내리던그모습그대로

    이제는사람들의 기억에만남은골목사이로눈이내린다.

  • 남창동을거닐다 글 앙만호 신부(성공회 수원 나눔의집) | 사진 박깅형준

    우리 집. 남창초등학교 후문을 나오자마자 아래쪽으로 두 번째 이층집. 주인은 1층 살고

    우리는 이층. 겨울에 이리 추운 줄 모르고 뭐가 씌었는지 단박에 맘에 들어 허겁지겁 전

    세 계약한 집. 우리 집에선 서장대가 보인다. 나는 저 놈이 언제 보아도 좋다. 든든하다.

    멀리 있어도생각만하면 뿌듯해지며 믿음직스러운친구처럼.

    봄기을이면 아이들은 행궁광장 가서 자전거 타자고 성화다. 어지간히 추워질 때까지 , 어

    지간히 더운 날도 꿀고 나가면 좋아라 한다. 언덕길 중턱에 있는 우리 집을 나와 내리막을 다 내려오면 피아노학원 건물을 사이로 갈

    라지는 길. 오른쪽은 주로 일하러 가는 길. 왼쪽은 한가롭게 노닐러 가는 길. 일과 놀이

    의경계.

    010 I 011

  • • • 」

  • 골목특집 | 남창동에 살다

    그 경계 오른편에 생뚱맞은 옷가게. 젊음의 거리에나 어울릴 듯한, 그 옆으로 모텔촌으

    로 들어가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먹 버티고 있는 슈퍼. 아이가 셋인 주인아저씨는 아이

    가 넷인 우리 집 사정을 알기에 걱정 반 호기심 반 짓꽃은 농담을 던진다.

    두세 개의 식당을 지나 왼쪽으로 뻗으면 버스정류장 가기 전 순대국집이 있다. 삼천오백

    원 하던 순대국이 작년에 사천원으로 올랐지만 손님들은 그까이거 하며 끊이질 않는다.

    어르신들만 잔뜩 있을 것 같지만, 오후쯤 가면 교복 차림의 중고생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도 한다. 값이 싸기도 하지만 인심이 후한 탓이겠지. 그만한 값에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훈훈히 럽혀 줄 곳이 수원 바닥에 몇 군데나 있겠는가. 참고로 99세 이상이 아니면 실내

    금연이다. 허름한 날에 몽을 맡기기 좋은 곳이다.

    휘리릭 다시 화면을 돌려 집을 나서 위로 치달아 팔달산을 오르기로 한다. 가파른 언덕

    지나 계단을 오르려 하면 오른편에 고시원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누가 아직도 거기서

    고시 패스의 꿈을 꾸고 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수원의 요즘 고시원들은 대개 노숙을 갓

    벗어났거나 집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탈출한 가난하고 젊은 청년들의 거처이다.

    게서 오른쪽으로 쭉 뻗으면 거대한 불상이 있는 사찰을 오르기 직전 널찍한 마당을 갖춘

    한의원이 있다. 지난 봄이던가 겨울이던가 머리 뒤쪽이 지끈거려 신경외과를 들렀다가

    (참고로 남문 일대에는 없는 병원이 없다. 피부과, 비뇨기과, 이비인후과, 치과, 산부인

    과 내과 등등. 이 거리가 한때 얼마나 흥성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검사비만 60

    만원을 얘기하기에 냄다 도망쳐 찾아갔던 그 한의원. 훨씬 싼 가격에 약간의 약과 칩을

    통해 죽음까지 예감케 했던 그 지끈거림은 사라졌다. 처지를 알고 싸게 해 주셨던 게지.

    노래하는 한의사라더니 언젠가 갔을 때 정말로 노래방 기계를 틀어 놓고 노래를 하시더

    군. 물론 록은 아니고 트로트,

    자 다시 또 펼름을 돌려서 일과 놀이의 경계인 피아노학원 앞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탁

    돌리면 벽화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좀 가다보면 두세 점 더. 수고하며 그리신 분들께

    죄송하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더라.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벽화는 지금은 1층에서 먹

    012 I 013

  • 카페를하고 있는 2층짜리 건물외벽의 그림. 한때 카레집이 있었다는것을웅변하는, 웨

    이터가 카레 접시를 들고 가는 것을 그린 그 벽화가 훨씬 더 탐스럽다. 음식점을 알리려

    는 담백하고 단순한 의미가 명확하고 그림도 익살스럽다. 앞의 마음에 들지 않는 벽화들

    은화성이라는관광이미지에 너무갇혀 있다. 색채도왜 그리 어둡고탁한지. 카레집 벽

    화의 색채는 그 노오란 빛깔이 얼마나 발랄한지.

    그 맞은편 자전거포. 처음이라면 새 것을 사주라는 자전거포 아저씨의 권고를 잘 극복하

    고 새 것의 거의 5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으로 딸내미 둘에게 어린이날 중고 자전거 사준

    곳. 딸들은 자전거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좋아 새것인지 헌것인지 따지지 않는다. 고마

    운일이다.

    고민하는 돼지 조각상이 그 옆에 서 있다. 맞은편 술집 앞에 있던 놈을 옮겨 놓은 것. 고

    민이 얼마나육중할지.

    고민하는 돼지처럼 서장대를 바라보며 담배 하나 피운다. 비행기 한 대 멋지게 날아가

    네. 누가 타고 있을까. 나도 저 놈을 타고 어디 먼 곳으로 날아가고 싶다. 그러나 자신이 .

    사는 동네를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하기 힘들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우리는 모두 멀리 떠

    나려고만 한다고, 그래, 겨울바람 숭숭숭 들어오는 우리 집 창에 뿔뿔이 먼저 붙이고, 스

    티로폼 잘라서 방풍벽 만들자. 고것이 우선 중요하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014 I 015

  • 글 이경011 일러똥 김예햄A뺑준 | 캘리그래피 윤경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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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깅예술 | 배창일 할아버지와 50년된 연탄 리어카

  • 골목특집 I 남창동에 살다

    O:}짖]; 훗t 1)'~) 쉰웰울 월~ 서울 아현국민학교 1학년 때 “봄이요 봄” 단원을 배우다가 피난길에 오른 뒤로 다시 돌아

    가지 못하고 수원에 정착한 배창일 할아버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청년처럼 정정했다. 열아홉 살 때 돈이 된다는 말에 시작한 연탄 배달 일을 50년 가까이 하다가 지금은 그만뒀

    다. 또다른고향이 된남창동은 4년 전 행궁복원사업으로집이 헐리게 되면서 떠났다.

    지금은 거의 보일러로 바꿔 연탄수요가 없지만 한때는 하루에 1500∼2000장의 연탄을 배 달했다. ‘천일연탄’ ‘수원연탄’ ‘대성연탄’ 등 연탄공장이 있던 수원역 주변은 새벽부터 리어카 100∼150대가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석탄가루를 틀에 넣고 나무방아로 탄가루를 쩡어 연탄을 만들 때에는 물량이 달려 경쟁이

    치열했다. 한 장에 2원 하던 연탄 값도 530원이 되었고, 19구공탄이던 것이 22구공탄, 25 구공탄이되었다.

    한 번에 몇 백 장 쌓아두고 살 수 없던 사람들은 퇴근길에 한 장씩 사가곤 했다.

    해가 지면 새끼줄로 연탄을 한 장씩 묶어 20∼30개 정도 마련해 놨다.

    가난한 사람들은 퇴근길에 새끼줄에 묶인 연탄 한 장이 깨질세라 조심조심 들고 가 긴긴

    겨울밤을버렸으리라.

    외상도많았지만돈을떼이는일은거의 없었다.

    “돈이 속이는 거지, 사람이 속이는 거는 아니거든.”

    배달하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적도 있고 눈길에 미끄러진 적도 많지만, 그래도 그때는 인심

    이 후해서 배달을 끝내면 고생했다고 음식과 담배를 권하는 이웃들이 많았다.

    연탄 배달 일을 그만두고 남창동을 떠난 후에도 할아버지는 이곳으로 출근한다. “친구가 동F는 설비 일도 돕고… 뭐 그냥… 여기가 편해서.”

    024 I 025

  • 골목특집 | 남창동에 살다

    ·}받필E

  • .업공간과주거공간, 예술7뚫의 작업공간01 섞여 있는남창동은사랑방。1 많다 한데우물축제를 주관하는 행안지모(행궁동안전지킴이모임)를 비롯한 소소한 모임들이 많지만 18년 동안 남창동을 위해 봉사하고 계신 최영자 반장님이 자주 들리는 사랑방을 따라가 봤다, 그날도 반장

    님은 아흔이 넘은 골목집 할머니가 편히 계시는지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날이 좋은 때에는 밖에서

    도 모이지만 유난히 춤고 눈이 많은 올 겨울엔 이쁜이 홍시순 할머니 집에 날마다 모여 고구마도 쩌먹 고 화투도 치고 노래도 부르며 겨울을 나고 계신다고 했다.

    026 I 027

  • “변호사도 불러, 다 모여야지.”

    “아유∼ 다 모였어유. 오라고 했으니까 올 거예유∼.”

    집주인 이쁜이 할머니께서 변호사를챙기니까대전댁이라불리는분이 대답을하신다. 단풍나무댁, 모래사장, 꽃동네, 백내과, 반장---. 모두들 별명이 있었다.

    간식으로 고구마에 감자에 총각김치가 나온다.

    “어여 들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 책에다 실으면 뭐 하게. 영감들도 죽고 늙어서 쭈그령탱이 다 됐는데 ….”

    “성님, 이리 모여서 상께 얼매나 재미지고 좋은디 그라요, 요새 사람들이 이런 재미 알기나 하가니요? 우리 동네

    나 되니께 사람는 거 같으지. 뉴스 안 보요? 자식 있는 노인네들도 외로워서 세상 버리고 히는 거 보몬 내는 참

    복이 많다그라는디요. 새댁도우리 동네로 이사와. 이런디서 아이들 키워야지만잘났다고목뺏뺏하게 안들고

    탱긴당께.”

    요즘 부모를 아이들 키우는 모습 떠올리니 할머니 말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목포 출신 단풍나무댁이 ‘목포의 눈물’ 을 부르자 어느새 나도 박수를 치며 함께 부르고 있다. 여름에는 수원문

    화재단 앞 행궁 광장 한 켠에 모여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노래도 부르고 논다고 하신다. 이 유쾌한 할머니들과

    자꾸자꾸 더 놀고 싶어진다.

    가족보다 더 살뜰하게 어려운 이웃들을 챙기고 안부를 묻고 불러 모아 음식을 나누고 하는 일이 골목이 살아있

    는곳에서만가능한것일까.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 같지만 살고 있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그 마음도 여러 결로 나눠지는 것 같다. 골목을 나

    오자 들어올 때는 안 보이던 부동산 간판이 눈에 확 들어옹다.

    이번에 정말 아파트를 벗어나 봐?

  • 골목특집 | 남창동에 살다

    ‘영화루’ SHIH PI PENG CHIH(필봉지) 할머니 이야기

    --울 *t-1} 땀띤 과‘ .. , 홍;메.괜4 of

    글 이경이 I 사진 정성원(수원시평생학습관장)

    할머니는 명랑했다. 흑백 사진 속에서도 컬러 사진 속에서도 화사한 얼굴과옷차림이었다.

    얼핏 보면 고생 없이 자라고 나이든 멋쟁이 할머니 같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할아버지에 비해 할

    머니의 한국어는 유창해서 화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중국어와 한국어를 함께 쓰면서 할머니

    의 인생 이야기가 이어졌다.

    유년기

    20세기 초 근대화 과정에서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 중국을 떠나 산둥성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건

    너 옹 아버지는기핫장을만드는사람이었다. 마포에서 태어난지 12일 만에 부모품에 안겨 북한

    으로 옮겨 갔지만 배우지 못해 그곳이 어디였는지 정확한 지명은 모른다고 하신다. 함흥이라는 큰

    도시에서 더 안으로 들어간 ‘내호’ 였다는 것만 기억한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인, 한국인 가릴

    거 없이 중국인인 자신의 가족들을 놀려댔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아버지는 화전을 일궈 강냉

    이, 감자농사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 먹을 게 없었던 그[[H, 아버지는 폭격으로 타버린 밀가루 공장에서

    반쯤 구워진 밀가루를 담아와 빵을 만들고 우거지 죽을 쑤|서 자식들

    을먹였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야.

    왜 먹는 음식에다 폭탄을 터트리는지 모르겠어.”

    030 I 031

  • 골목특집 | 남창동에 살다

    6. 25전쟁, 피란 6. 25전쟁이 났을때는 미군들이 어린 처녀들을잡아간다는소문에 아버지는 열다섯살이던 딸의

    얼굴에 검탱을 묻히고 -2.A}를 씌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친정어머니는 아홉 살 때부터 해 온 전족

    으로 인해 발바닥이 반으로 찢어지는 고통을 참으며 피란을 다녀야 했다. 인천, 용산, 평택을 거쳐

    서울 노량진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아휴∼ 그 고생을 어떻게 다 말로 해. 6남매가 걸음도 잘 못 걷는 엄마를 따라서 피란을 다녔으

    니…. 그런 이야기 쓰지 마. 다지나간이야기야.” 먹을 게 없었던 그때, 아버지는 폭격으로 타버린 밀가루 공장에서 반쯤 구워진 밀가루를 담아와

    빵을 만들고 우거지 죽을 웹서 자식들을 먹였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야. 왜 먹는 음식에다 폭탄을 터트리는지 모르겠어,”

    어렵게 노량진에다 땅도 장만해서 농시를 지었지만 형부는 부모님을 챙기지 않았다.

    “형부가 우리 가족한태 잘 못했어. 내가 대들고 싸우다 계단에서 미끄러졌지 뭐야. 내가 원래 운

    이 별로 없어. 하하하.”

  • 결혼,가난 열아홉 살이 되던 1953년 시누이 친구 소개로 같은 산둥성 출신인 남펀과 결혼했다. 강제 징집을

    피해 책 보따리를 든 채로 누이와 함께 단둥을 거쳐 한국으로 넘어 온 남편은 8. 15해방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열두 시 사이렌이 울리며 사람들은 일장기에 태극문양과 건곤감리를 그려 넣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해방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

    하다고. 누이 손에 이꿀려 영문도 모른 채 고향을 떠나와서 그런 지 남편은 지금도 어머니를 그리

    워하며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울적하면 어머니, 어머니 부르면서 울어. 좀 안쓰럽기도 하지 뭐. 인사도 못하고 떠나왔으니까.”

    열네 살에 한국으로 건너 온 남편은 당시 고관대작들이 드나들던 서울의 유명한 중국요리집 ‘아

    서원’ 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때 실력자였던 이기붕이 남편을 ‘왕서방’ 이라 부르며 중매를 서겠다 고 나서기도 했다. 두세 살 터울로 낳은 4남매와 친정 동생들까지 돌봐야 해서 살림살이는 나아지

    지않았다.

    “누나가 한 명 함께 왔다고 그랬잖아. 그 누나가 수원에 먼저 와 있었거든 남 밑에 있지 말고 수

    원으로 내려와서 자기 가게를차리라하더라고. 그래서 수원으로오게 됐지,”

    아서원 출신 중국인 주방장이 다섯 명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돌아가시고 남편만 생존해 있다. 20 년 동안 최고급 중국음식점에서 일한 경력은 수원으로 내려와 지금의 ‘영화루’ 를 유지하는 밑거 름이되었다.

    나는여기가고향이야. 친구들은 다 미국으로 대만으로 떠나고 남아 있던 이들도 다들 세상 댔지만 나는 여기 계속 살잖아. 한국에서 나고 한궁에서 자랐으니 여기가 고향이지.

    수원 남창동, 사는 곳이 고향 남창동에는초가집과기와집, 일본식 양철,집도많았다. 지금백내과자리에 있던수수깡으로지은

    일본식집을 63만원 주고 사서 살림과 장사를 함께 시작했다.

    “돈이 부족해서 언니가 베개에 고이 모아둔 금팔찌 두개를 빌렸지. 일수를 찍어가며 빚을 갚았어,

    팔달문이 있으니까 땅값이 내려가지는 않을 거다, 그랬지. 가게 옆으로는 세탁소, 인쇄소, 구뭇가

    032 I 033

  • 골목특집 | 남창동에 살다

    1953년 결혼식사진

  • 1 대 영화루 주민장인 남편 SHIH KUAN PIN(사관품)

    게가 붙어 있었어. 팔달산 저 위에 대승원 있지? 거기서부터 흘러 내려온 뱃가가 있었는데 배달

    하던 아이가 그릇을 그 멋가에 버려두고 수금한 돈만 가지고 도망간 적도 있어. 참, 기가 막혀서.

    하하하, 내가 인복이 없다니까.”

    할머니 참속도좋으시다. 사람복이 없어서 그렇다고웃기만하신다,

    남편은 수원에 내려와 화교사회에서 굿은 일,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봉사를 많이 해서인 지 호인

    으로통했고중국대사관으로부터 표창도받았다. 하지만 어려웠던 때라상장말고시계라도하나

    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다.

    어렵게 공부를 마친 큰아들이 미국에서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넘었지만 오래도록 가

    슴앓이를 했다. 남편을 닮아 괴묵한 둘째 아들 옆에는 할머니만큼 밝고 명랑한 며느리가 있어 큰

    의지가된다고하신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은 무시와 차별을 왜 모르겠냐만 할머니는 씩씩하다.

    “나만떳떳하면 되는거야. 나는실속이 없어 남좋은 일만많이 시키고손해도많이 봤지만후회

    는 없어. 아들이 해주는 밥 먹고 살면 호강이지 뭘 더 바라겠어. 나는 여기가 고향이야. 친구들은

    034 I 035

  • 골목특집 | 남창동에 살다

    대를 이어 영화루를 운영하고 있는 둘째아들 사옥춘사장

    다 미국으로 대만으로 떠나고 남아 있던 이들도 다들 세상 폈지만 나는 여기 계속 살잖아. 한국에

    서 나고 한국에서 자랐으니 여기가 고향이지. 할아버지는 중국에서 산 세월이 있으니까 얼마나 고

    향이 그립겠지만 나야 뭐, 여기서 자식들 다 키우고 했으니까…. 하하하, 고생이야 말도 못하게 했

    지만 다들 그러고 살았잖아. 요즘에 음식 버리는 거 보면 에이∼ 저저저…. 그럴 때가 많아, 그러

    면 벌 받아, 얼마나 어렵게들 살았냐 말이야. 먹을 게 있으면 그게 호강인 거야. 하하하, 내가 인덕

    이 없어 돈을 많이 모으지는 못했어도 그런 거는 알아. 하하하.”

    얼마 전 다친 다리 때문에 좋아히는 마실을못 다녀 하루 종일 할아버지와지내느라답답하다고 째

    면서도 할아버지가 이불도 덮어 주고 다친 다리 걱정도 많이 해준다는 자랑을 잊지 않으시는 할머니.

    “만날 싸워. 그래서 안 죽나봐. 지지고 묶고 이야기 하고 그래야 오래 사나봐. 친구들은 다들 세상

    폈는데 우리부부만 이렇게 오래 살아. 뭐 하러 얼굴 찌푸리고 살아? 하루 밥 세끼 먹는 거는 다 똑

    같은데. 내가운이 없어서 들었던 계도숱하게 깨지고 집도 경매 넘어가고 했지만그냥즐겁게 살

    아.하하하.”

    ‘영화루’ 할머니는 다 지난일이라고 명랑하게 이야기 하셨지만 나는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

    던 화교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혼란스러운 자기 나라를 떠나 서해를 건너 한반도로 흘러옹 그들의

  • 삶이 생존을 위해 만주로, 북간도로 떠났던 우리 민중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강제

    징집을 피해 책 보따리를 집에 내려놓을 새도 없이 어머니와 헤어진 수많은 ‘영화루’ 할아버지들 은 이 땅에도 많았다. 그 분들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일까.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어떤모습일까

    자는 곳이 고향 이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곱씹으며 시멋물이 흘렀다는 길을 따라 남창동 골목을

    빠져 나왔다. 돌아보니 백내과 옆 골목에 대를 이어 5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화루’

    간판에불이켜졌다.

    혼란스러운 자기 나라를 떠나 서해를 건너 한반도로 흘러온 그들의 삶이 생존을 위해 만주로, 북간도로 떠났던 우리 민중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율 것이다.

    굴곡많은타국의삶

    화교가 처음 한국에 들어온 것은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한국에 파견된 광둥성 수사제독(水g耐품督)

    군대를 따라 40여 명의 상인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초가 되었다. 당시 상업을 천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화교들은 상권을 넓혀갔다. 90% 이상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산둥성에서 이주해 왔고

    해방 후에는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때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등 경제

    활동 제한과 압박으로 많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났다. 선거권도 2006년에 와서야 영주권을 가진 이들에

    효f해서만 제한적으로 주어졌고 자녀들은 화교학교의 학력이 인정되지 않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로

    진학하거나 대만, 미국 등지로 떠나야 했다.

    지금은 그나마 화교사회의 구심점 역할 하던 화교학교 학생 수도 꾸준히 줄어 존폐위기에 놀여 있다. 35

    년 전 ‘영화루’ 할머니 자녀들이 다녔던 수원화교중정소학교(水原華橋中표小學校)는 당시 250명에 가까 운 학생들이 다녔으나 지금은 학생 수 감소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3년 수원시 인근에는 어른과

    아이틀을 홀}해 510여명의 화교가 살고 있다.

    036 I 037

  • 골목특집 I 남창동에 살다

  • 영화루 SHIH Pl PENG CHIH(필봉지) 할머니 연보

    1934.10.6 중국 산둥성이 고향인 중국인 부모가 이주한 서울 마포에서 6납매 중 셋째로 태어남. 태어 난 지 12일 만에 함경도 함흥 주변 내호로 이사 감. t별 오지여서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없었음.

    1950 (15세) 6. 25전쟁 때 피란길에 올라 인천, 용산, 평택을 거쳐 서울 노랑진에 자리 잡음. 아 홉 살 때부터 발에 붕대를 감아 전족을 했던 친정엄마가 잘 걷지를 못해 피란 길이 더디고

    힘들었음.

    1953.7.6 (19세) 14세에 누나와 함께 효백으로 이주한 산둥성 출신 SHIH KUAN PIN(사관품)과 결혼. 중국 현대사 격동기 한가운데 있던 남편은 전란을 피해 어머니와 작벌 인사도 못하고 단둥

    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옴. 사이렌 소리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과 함

    께 해방을 맞이한 남편은 고관대작들이 드나들던 서울의 유명한 중국요리집 ‘아서원’ 에서

    20년 가까이 일함. 당시 실력자였던 이기붕이 남편을 ‘왕서방’ 이라 부르며 자주 찾음.

    1954 (20세) 서울 다동에 터롭 잡고 2∼3살 터울로 4남매률 낳음. 겨울이면 집안에서도 허떻게 유리창에 성에가 끼던 집에서 어린 자식들은 그 성에률 손톱으로 긁어내며 놀았고 부엌도

    없어서 마루에서 숲을 피워 밥을 해야 했음.

    1960 (26세) 청계천 2가로 이사 감. 실내에 나무 계단이 있던 집에 세 들어 살 때였는데 친정 동 생들까지 돌봐야 해서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음. 셋째룰 낳지 않으려고도 했지만 지금은 그

    아들이 아버지 일을 이어받아 ‘영화루’를 운영하고 있음. 그저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큼.

    1962 (28서|) 수원에서 자리 잡은 시누이가 경력도 많이 쌓였으니 남 밑에 있지 말고 자기 가게를 열어보라고 해서 수원으로 이사함.

    1966 (32서|) 처음에는 백내과 자리에 있던 일본식집을 63만원에 사서 살다가 3년 후 ‘팔달로 2 가 90-3번지 지급 ‘영화루’ 자리로 이사함. 주방서만 살아온 남편은 한국어를 잘 못함. 부

    랑자들이 가게에 와서 행때롤 부리면 연탄재를 던져가며 남편대신 싸움. 주방에서 즐면서 닭

    을.잡고 연탄 불씨률 살리려다 눈에 불똥이 튀어 명인안과에 가서 치료 받고 와서 또 일함.

    아이들은 소방서 앞 ‘수원화교중정소학교’에 다녔으나 학력이 인정되지 않아 중 • 고등학교

    를 서울에서 마침. 효백에 정착하기가 어려원 대만과 미국으로 떠남.

    1984 (50서|) 남동생들이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 서울 사시던 부모님을 수원으로 모시고 옴.

    1985 (51세) 대만을 거쳐 t떻성 고향에 다녀옴. 이후엔 인천에서 배를 타고 다녀옴.

    1989 (55서|) 둘째 아들이 대만, 일본, 미국을 거쳐 요리사로 일하다 한국에 정착하여 ‘영화루’ 의 새로운주인이될.

    1993 (59서|) 대만에서 대학을 마치고 기자로 일하던 큰아들이 미국에서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납. 오래도록 가슴앓이를 함.

    2006 (71세) 처음으로 선거권을 얻음.

    2013 (79세) 결혼 60주년, ‘영화루’ 50주년이 되는 해. 아들부부가 가게률 찰 이어가고 있고 딸 들도 대만에서 자리 잡고 사니 더 바랄 게 없는데 얼마 전 빙판에 미끄러져 무릎수술을 한 뒤로는 훌아하던 마실을 못 다녀서 답답하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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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스트 정훈모 | 뒤에서 본 화성행궁(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 2번지 일원)

  • 남창동 99칸 양성관 가옥 글 한동민(수원박물관 학예팀장)

  • 골목특집 | 남창동에 살다

    을사오적 이근택의 칩

    충청도 충주사람으로 1882년 임오군란으로 명성왕후가 충주로 피난하였을 때

    신선한 생선을 진상한 인연으로 출세하게 되었다.

    수원을 대표하는 상징 가운데 하나가 남창동 99칸 기와집이었다. 그 집 주인은 수원 최고 부자이거나

    최고 권력자였다. 일반인들에게는 ‘양성관 가옥’ 으로 널리 알려졌다. 당대 수원을 대표하는 부자와 권

    력지들이 살았던 남창동 99칸 기와집이 신축된 것은 1861년(철종 12년)의 일이다. 처음 지은 사람의

    존재를 더 확인해야겠지만 한 세대 후 이 기와집의 소유자는 이근택(합鍵 1865∼1919)이었다, 이근

    택은 을사5적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충청도 충주사람으로 1882년 임오군란으로

    명성왕후가 충주로 피난하였을 때 신선한 생션을 진상한 인연으로 출세하게 되었다. 명성왕후가 서울

    로 환궁하면서 1883년 선전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무과에 급제한 뒤부터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

    근택은 “큰 키에 빼어난 체격이고 눈빛이 형형하며 비상한 지략이 있어서 정계에서 제1등의 자리를 차

    지하고 있다”는 평가받을 정도로 훤칠한 외모와 지략을 겸비하였다. 이근택은 이용익과 함께 고종의

    측근으로 성장하면서 친러파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시세의 변화에 따라 적극적인 친일파로 변절하였

    다. 특히 1905년 9월 군부대신(軍部大몸)이 되어 11월 을사조약 체결에 찬동함으로써 을사5적의 한 사

    람이 되었디; 즉 이완용(李完用) . . 박제순(朴齊빼 · 이지용(李址짧) · 권중현(權重顯 등과 더불어 친일

    파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황현의 r매천야록」에는 이근택이 일본인 점포에서 피 묻은 수대(爛帶 허리띠) 하나를 6만원(元)에 구

    입하여 고종에게 올리자 고종과 태자는 슬피 울면서 황후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여겼다는 것이다. 그

    후 이근택에 대한 고종황제의 총애는 날마다 커져서 그의 형 근호(根游) · 근용(根鎔) 및 그의 아우 근

    상(根뼈) · 근홍(根洪) 등과 함께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을사조약 이후 민중

    들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5적에 대하여 응징을 하였다. 이근택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06년

    2월 16일 서울 중서(中暑) 교통(校洞)의 자택으로 퇴궐한 이근택은 내방한 6인의 방문객을 맞았다. 이

    들과 얘기를 나누고 새벽 1시경 후실과 취침하였을 때 기산도(奇山度 1878∼1928) 등 3명이 이근택

    방에 뛰어들어 그를 칼로 찔렀다. 이에 10여 군데 중상을 입었으나 이근택은 한성병원에 입원 치료하

    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기산도는 의병장 성재(省顆) 기삼연(奇參쩨의 종손이자 의병장 녹천(塵果) 고

    광순(高光洞)의 사위였다. 이에 놀란 이근택은 그 집을 3만원에 매매하고 수원으로 이주하게 된다. 수

    원으로 이사 온 것은 그의 애첩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1919년 이근택이 사망할 때까지 .99칸 기와집의

    주인은이근택이었다.

    042 I 043

  • 수원 최고 부자 양성관 가옥

    양성관은 차유순 · 홍민섭과 더불어 수원의 3대 지주로 경기남부 일대 논밭

    300여 정보 약 9만평의 땅과 소작인 600명을 거느리는 대지주였다.

    이근택을 뒤이어 이 기와집의 주인이 된 사람은 양성관(梁聖寬, 1867∼)이었다. 이에 ‘양성관 가옥’ 으

    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9년 출간된 r생활상태조사보고 1 - 수원군」에 수원의 대표적 상류기옥

    으로 사진이 실릴 정도로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기와집이다.

    양성관은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한 인물로 수원을 대표하는 최고 부자였다. 양성관은 차유순 · 홍민섭

    과 더불어 수원의 3대 지주로 경기납부 일대 논밭 300여 정보 약 9만평의 땅과 소작인 600명을 거느

    리는대지주였다.

    양성관은 1907년 상무사(商務r퍼 일원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1908년 31살의 나이로 수원

    향교의 명륜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수원상공회의소 부회두(부회장)가 되어 상공회의소 부설 수원

  • 현재 님창동 앙성관가옥 터 주변 | 사진 박검형준

    상업강습소에 재정 지원을 함으로써 강습소를 내실 있게 만플었다. 지금의 수원고등학교 전신이다. 이

    후 수원전기회사 이사, 용수흥업주식회사 취체역, 화성흥산 주식회사 대표이사, 수원금융조합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의 유지로 활동하였다. 또한 1930년 화성학원에 1000원 1935년 수원의 중학교(현 농업

    고등학교) 설립을 위하여 3만원을 기부하였고 수원여자고등학교 설립에도 큰 힘을 보댔다. 그러나 이

    러한 지역사회에 대한 기부와 함께 일제 침략전쟁의 도구였던 고사기관총 구입비로 1600원과 군용기

    경기호(京鍵調 4대를 헌납할 때 2500원 및 군수용 애국기 수원호를 헌납할 때 5500원을 기부하였다.

    일제의 침략행위에앞움이 되는 기부행위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남창동 동사무소와 국회의원 이병희의 집

    해방 이후 아들 %댄룡짧奎觸이 1947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의 충격과 함께 1950년 6·

    25전쟁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 기간 동안 넓은 양성관 가옥은 피아간에 차지하고 싶은 유용한 활

    용처가 되었다. 성안의 번듯한 기와집들이 공공기관으로 수용되어 활용되었다. 양성관 가옥도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활용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남창동사무소로 사용되었다.

    044 I 045

  • 가옥은 매매되어 1973년 용인민속촌으로 옮겨졌다. 용인민속촌의 그곳은 한국 을 대표하는 양반가옥으로 〈대장금〉과 〈다모〉 등 역사 드라마의 중요한 촬영장

    소로활용되고있다.

    한편 1961년 5. 16군사쿠데타 이후 수원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육사8기 출신의 이병희(李秉禮,

    1926∼1997) 의원이 이 집에 들어왔다.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 6·7·8 ’ 9. 10. 13 . 15대 국회의

    원, 국회운영위원장, 제1무임소장관을 역임하였던 ‘박정희 시대’ , 김종필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였

    던 수원지역의 패자였던 것이다.

    한편 양성관 가옥은 장손의 계속된 사업실패에 따라 매매 대상이 되었다. 결국 가옥은 매매되어 1973

    년 용인민속촌으로 옮겨졌다, 용인민속촌의 그곳은 한국을 대표하는 양반가옥으로 〈대장금〉과 〈다모〉

    등 역사드라마의 중요한 촬영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양성관 가옥이 있던 남창동 95번지 일대는 빌라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공방거리로 활기를 띠고

  • 용인민속촌에 있는 양성관 가옥(중부지방 앙반가 22호) | 사진제공 불교문화신문 취재본부장 하주성

    있는 그곳을 지나는 숱한 행인들은 지난날 수원의 영화롭던 한 자락

    을알지못한채지날뿐이다.

    역사와 이야기가 파괴되어 가는 성 안에서 남창동은 인물들 많은 대

    표적 부촌이었다 양성관가옥만큼은아니어도튼실하게 지어진숱

    한 기와집들이 즐비하였다. 이제 남창통에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의 촬영지로 유명한 ‘장준식 가옥’ 과 이병직 도립병원장이 살던 다 이병직 도되병원장이 살던 가옥 현재 모습

    쓰러져 가는한옥 및 연무정 초대사두를 역임한 ‘송순호 가옥’ 이 남아 있을뿐이다.

    지난해 우리는 장안동 설경동가옥이 포클레인 삽날에 부서져 제일감리교회 주차장이 되는 것을 목격

    하였다. 몇 년 전 한데우물 길 태화병원 건물이 사라지고 모댈이 들어서는 것과 같은 역사에 대한 모독

    과그모욕감이라니….

    과도한 종교적 열망과 속된 자본의 욕망으로부터 그나마 몇 채 남지 않은 성 안의 한옥만큼은 지켜야 할

    일이다. 늦었지만 이것이 이 시대 우리가할수 있는 역사와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046 I 047

  • 골목특집 | 남창동에 살다

    흉r)웰 11:밸 글 01달호(수 화 「〕。

    집주인 이기영 교장의 둘째며느리가 직접 그린 그림

    남창동 13-1번지 한옥

    지금은 화성행궁 광장이 들어서 사라졌지만 신풍루 바로 앞에 있던 집이다.

    1937년도에 지어진 이 집의 최초 소유자는 수원시에서 4번 국회의원을 지낸 홍길선

    의원이었다. 그 다음 주인은 종로에 있는 서울한의원 이문재 원장이었다. 우리가 세

    번째 주인인 셈이다.

  • 1937년 지어진 한옥 세 번째 주인 이야기

    남창동 13-1번지 한옥. 지금은 화성행궁 광장이 들어서 사라졌지만 신풍루 바로 앞에 있던 집이다. 우

    리 집안에게 이곳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옥을 워낙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꿈을 이룬 터전이기 때문

    이다. 1975년 지동의 307-44번지 조그만 한옥에서 어렵사리 집값을 마련하여 이곳으로 이사 오게 되

    었다. 당시 남창동은 수원에서 가장 좋은 주택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120평에서 200평 대지 규

    모의 한옥이 즐비하였다. 민속촌의 99칸 양반집도 이곳에서 이전 복원한 것이고 서민병원원장, 세종

    학원, 이병직 전 국회의원 등의 집들이 나란히 이웃해 있었다.

    1937년도에 지어진 이 집의 최초 소유자는 수원시에서 4번 국회의원을 지낸 홍길선 의원이었다. 그는

    국회에서 자동거수기로 유명했는데 주로 서울에서 생활하였고 그의 동생인 수원 최초의 사진작가 홍

    의선 가족이 살았다. 그 다음 주인은 종로에 있는 서울한의원 이문재 원장이었다. 우리가 세 번째 주인

    인셈이다.

    이 집을 인수할 때의 일화 한 토막을 알아보자. 서울한의원 원장 사모님과 필자의 모친은 북수동 성당

    에서 같이 성가대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서로 친분이 있었는데 이문재 원장이 경희대학교 교수로 발

    령이 나서 수원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남창동 집값은 350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부모님은 한옥은 마

    음에 들었지만 현금을 조달할 길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쉽게 풀리었다. 계약금 1000

    만원만 내고 나머지는 3년 동안 분할 상환하는 조건으로 두 분이 대타협을 한 것이다. 계약금도 여기

    저기서 빚을 내고 닥닥 긁어모은 돈이었지만 서로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 앞에서 (2005년 박물관 학예시들과 이달호관장)

    048 I 049

  • 람목륙집 I 남창동에 살다

    한손엔 멜로페이퍼, 한손엔 금서

    필자는 사춘기가좀 늦게 찾아왔다. 수원에서 서울로 유학하여 한 기차를 타고 등하교 하는 일명 ‘통학

    파’ 들은 중학교 1학년부터 술과 담배를 즐기는 것은 물론 여학생까지 사귀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까지 잘 버티던 나에게도 요상한 사악뻐惡)한 끼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술과 담배는 물론 놀부는 두

    손에 먹을 들었지만 필자는 한손에는 (선데이 서울) 또 다른 손에는 (씨알의 소리)를 쥐게 되었다. (선

    데이 서울)은 1968년 9월 창간된 황색주간지(yellow paper)였다. 컬러로 나오는 문희, 남정임, 윤정희

    등의 여배우 사진은 청소년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소설에 가까운 기사에 빠져들었다. 다른 한편 함

    석헌 선생이 1970년에 창간한 (씨알의 소리)에는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을 비판하면서 ‘생각히는 백성

    이라야바로산다’, 바른말을하자는논지가주류를이루었다, (선데이 서울)은길거리 어디서나살

    수 있었지만 (씨알의 소리)는 혜화동의 서울대 문리대 근처 서점에서나 몰래 살 수 있었던 금서였다.

    시대적 소명을 불러일으키려는 잡지와 이를 마비시커려는 상반된 두 매체의 틈바구니에서 펼지는 누

    구나 그러하듯이 정(표)보다는 사때)로 기울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하여 1978년 군대를 마치고 복학‘

    하여 시작된 남창동 생활은 고등학교 말년 생활과 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제대 후 모범적인 생활을 1 년쯤 한 후 어느 정도 자제하던 끼가 도지면서 또다시 술과 향락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흥청망청 허송

    세월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남문 주변은 중앙극장을 비롯하여 유명 술집과 유흥주점이 몰려있었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황색지대였다. 통행금지 시간을 지키려면 카바이드 막걸리와 소주를 급하게

    삼켜야 했다. 흠빽 취해 두 팔로 전봇대를 부여잡고 토악질과 배설의 찌꺼기까지 그곳에 반납:8-J는 것

    이 일상사였다 만쥔해 들어온 필자의 방 책꽂이에는 장식용 {시장계)가 몇 권 꽂혀 워을 뿐이었다 장

    준하 선생이 발행한 (시장계)의 주 내용은 민족통일과 민주주의에 대한 논문들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그러한사회과학적 용어에 익숙지 못했다. 훗날펼자가늦은나이에 역시를전공하게 되는

    이유빽 이러한용어를 ‘해독’하고자동}는욕망과무관하지 않다.

    현재 이 나라의 주류 언론과 TV방송에서 쏘아대는 내용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미디어를 믿게 하는 주술. 올바른 역사관과 세계

    관이 서지 않으면 그 주술에 빨려들어 허우적대고 질풍노도 위의

    낙엽에 불과한 인생살이가 되지 않을까.

  • 예솔과 전위로 포장, 뇌 마비시키는 주출

    당시 필자의 용돈이 10만원이었다, 대기업 대졸 초봉이 20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음을 생각해 보

    면너무나많은돈이었다. 그돈이독이 된셈이다.

    포르노의 전 단계인 황색 잡지는 미국에서 이미 1890년대부터 풍미했다. 성문제, 연예인 동정과 가십

    그리고 스캔들, 범죄사건 등을 실어 상업주의적 판매만을 목적으로 하는 저널리즘. 예술과 전위로 포

    장하면서 우리들의 뇌에 황색을 일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힘이 그곳에는 있었다.

    현재 이 나라의 주류 언론과 πf방송에서 쏘아대는 내용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미디어를 믿게 하는

    주술. 올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이 서지 않으면 그 주술에 빨려들어 허우적대고 질풍노도 위의 낙엽에

    불과한 인생살이가 되지 않을까. 요즈음 젊은이들과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스마트폰의 순기능을 인정

    하지만 쉽게 빠져드는 곳은 아마도 오락이나 ‘황색지대’ 가 아닐까 염려된다, 문명의 이기만큼 우리의 뇌와 마음은 변화 발전히는가 의문이다. 진부하지만 고상한 인문학적 문화생활을 사회에 퍼트리고 사

    회구조를 변혁하지 않으면 어지러운 범죄는 변함없이 생길 것이다. 인간의 행동과 사고는 어차피 사회

    역사적 환경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진리이기에.

    050 I 051

  • 세리오카떼

    제일뚝배기

    한잔할래요

    미각식당

    원할매

    홍어랑갈치랑

    통영굴사랑& 낙지사랑

    이서방치킨

    베이스캠프

    이만세삼겹살

    크로키

    예촌

    꽃가람

    임아트갤러리

    유동골뱅이

    핑크리본

    엄마생각

    나주홍어

    마포주물럭

    일번지할인마트

    호두야자

    팔장주차장

    허준과장금이

    나무아저씨

    너나들이

    ‘&채많췄·)

    영화루

    꼼빠또르제과점

    오복서점

    한지공방

    이음새작업실

    한데우물주차장

    행궁맛집

    나무자전거포

    수수꽃다리

    가항산방

    스위트아트

    칫집

    수원문화재단

  • 빠 γ

    l A 1 ·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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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행궁길 예술마당갤러리

    사랑방손님과어머니

    행궁재갤러리

    력키할인마트

    한데우물

    단오(떡?때|)

    선인장카페

    빈의상실

    항원중식

    한지갤러리 서윤

    민속악기공방

    m plus j

    행궁녹두빈대떡

    남장초교

    한봉석할머니순두부

    필사랑이야기

    남창주차장

    모박사부대찌게

    대구막창

    새한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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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 I 053

  • PHOTO ESSAY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다.

    종종 걸음으로 걸어다닐 만한

    눈길을치우자마자,

    =훌;---

    --쫓뜸참二느- - 훨 -

  • 기억 | | 중앙극장앞에서

    간판화가김승엽 글 영상랜역사탐방연구회 이사) | 일러스트 김에솔 | 사진제공 염상균, 극단‘성’ 김성열단장

    룰활풀賣

  • 남문 하면 중앙극장이요, 중앙극장 하면 곧 남문으로 대변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이 당시에는 수원의 중심이었고, 이름 또한 ‘중앙’ 이 아니었던가?

    남문 하면 중앙극장, 약국거리도 유명세

    50여 성상 수원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던 중앙극장 자리는 화성의 남문, 즉 팔달문 ‘

    서쪽이었다. 극장 앞에는 버스 정류장과 택시 승강장이 길 건너편에는 시장(영동시

    장, 지동시장)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 또한 많았다. 게다가 영동시장 입구, 즉 중앙극

    장 건너편 도로변에는 보건약국을 비롯한 대형 약국들이 성업 중이었으므로 항상

    번화한거리였다.

    남문 하면 중앙극장이요, 중앙극장 하면 곧 남문으로 대변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이

    당시에는 수원의 중심이었고, 이름 또한 ‘중앙’ 이 아니었던가? 또 시내에 간다고 하

    면 남문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약속 장소도 대부분 중앙극장 앞으로 귀결되

    었다. 팔달문주변엔각종편의시설이 많아서 이래저래 남문상권이 활성화되었다.

    남문(시내)에 오는 사람들은 비단 수원 사람뿐만 아니라 인근 도시에서도 몰려들었

    다. 용인과 안산, 오산, 화성과 의왕, 군포 등지에서 수원으로 장을 보러 오거나 영

    화를 보러 오기도 하였다. 약을 사러 오기도 했는데 당시 전국에서 약값이 가장 싼

    곳으로 소문난 곳이 또한 남문 약국거리였다. 마치 수원이 서울이고, 주변 지역이

    위성도시가된것처럼 항상사람들로 번잡했던 것이다.

    거기에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고 간혹 돈이 떨어지더라도 걱정이 없었다. 정류

    장 언저리에서 조금만어슬렁거리면 누구라도아는사람을만나아쉬움을덜었으므

    로 1960년대를 비롯하여 1990년대 초반까지의 역사가 그랬다. 그러나 그 ‘남문’ 이 점점 제 기능을 잃어갔다. 먼저 북문인 장안문 근처가 발달하면서 일부 역할이 옮겨

    갔고, 동수원 개발과 수원역 주변 및 서수원 영통의 개발까지 이어지면서 남문은

    이제 도시 속의 섬이 된 것처럼 스산해졌다.

    중앙극장 앞은 또한 집회의 장소였다. 수원을 상징한다는 의미가 들었으므로 크고

    작은 집회의 출발선은 늘 이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부터 1980년대의 민주

    회운동에 이료기까지, 또 월드컵이나 각종 춧불집회에 이르도록 중앙극장 앞은 늘

    그 집회의 현장이었다. 수원역 앞에서 시작된 집회는 대개 남문으로 진출한다는 공

    식을지니기도하였다.

    056 I 057

  • 기억 I I 중앙극장앞에서

    이전한 중앙극E엠에서 수재민성금 모금방송 모습

    수원의 애환을모두담은중앙극장과그앞광장은이제 역사속으로기억된다. 만남의 장소였던광장

    은 자가용시대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그 기능을 잃어갔고, 동수원 개발과 영통 개발 등으로 상권도 많 이 위축되었다. 급기야 중앙극장은 2005년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 명맥은 옛 로얄극장으로 이어졌다.

    같은경영주가운영하던극장이기도하지만중앙극장의 ‘중앙’이라는상징을버리기 싫어서였다고한

    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젠 전설이 되고 말았다.

    중앙극장 간판울 그리던 화가 김승업 - 왕년의 스타들도 눈치 봤던 귀하신 톰

    전에는 전국의 극장마다 모두 사람의 손으로 직접 그린 아날로그 간판이 달렸다. 총 천연색으로 그린

    페인트 간판. 핸지 모르게 어색하지만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영화 홍보

    수단이라고는 아날로그 간판이 유일하던 그때 그 시절 ‘극장 간판화가 들은 ‘귀하신 톰’ 이었다. 영화

    계를 호령했던 왕년의 스타들도 눈치를 봤을 정도. 극장 간판 미술가들의 붓놀림에 따라 간판 안에서

    영화배우들의 모습이 천차만별로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장 간판 화가는 한때 선망의 직업이었다. 아침마다 젊은 지망생들이 극장 간판에 붓질을 배

    우기 위해 줄을 서던 시절이었다. 수입도 대졸 신입사원보다 훨씬 더 좋았다. 영화간판작업은 철저히

    도제식이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수성물감과 아교 등을 물에 섞

    은 ‘안료’ 만드는 것부터 모든 것을 곁눈질로 배웠다. 박봉에 단지 ‘그림 배운다’ 는 생각만으로 꿋꿋이

    버렸다. ‘10년쯤 눈으로 보고 손으로 익히고 나서야 겨우 그리던 시절”이었다. 혹여 실수를 하거나 재

    료를 잘못 가져오면 선배로부터 페인트 통을 뒤집어쓰면서도 열심히 배운 그들이았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간판 제작법도 변했다. 커다란 종이에다 그림을 그려 간판에 바르던 것이 페인트

  • 로 직접 그리는 방식이 됐다. 중앙극장에서 영화 간판을 그리던 김승엽씨는 간판 제작법에 2가지 방식

    이 있다고 ,증언했다. 배우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부드럽게 그리는 것과 거친 붓 터치로 강하게 표현하 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래서 “영화간판을 보면 누가 그렸는지 대충 알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배우에

    따라서 오른쪽 얼굴이나 왼쪽 얼굴을 강조하는 등 신체 부위도 배우의 특성을 살려 그렸다고 하였다.

    제작 시간은 가로 4m, 세로 2m 소극장용은 대략 3시간. 그러나 가로 16m, 세로 4m짜리 개봉관의

    거대한 간판은 적어도 3일이.걸렸다. 이전 간판을 철거한 뒤 흰색 바탕칠을 하고 밑그림을 그린 뒤 덧

    칠을 하는 등 작업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 계속 서서 작업을 하며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므로

    체력 소모도 엄청났다. 특히 명절 대목을 앞두고는 작업이 몰려 밤생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어깨가 제

    대로 올라가지 않는 일도 허다했다. “이제는 하라고 해도 못하는 일”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영화가 대작일 경우 간판의 크기도 커서 극장 식구들만 가지고는 설치할 수 없어서 인근 간판가게 직

    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돈을 주기보다 극장표와 소주로 인심을 썼다고 한다.

    실사 영화간판 등장 1990년대 몰락

    은퇴후 ‘아프면서 크는 나무’ (극단 ‘성’) 순회 공연중인 김승엽선생 모습

    영화간판 미술가의 전성기는 1980년대 들어 소극장이 생겨날 때였다. 김씨는 당시 경기도 각 지역을

    오가며 10여 개의 극장에서 영화 간판을 제작했다. 한 달 수입이 200만원을 넘어 “돈을 가방에 넣어

    다녔다”고 했다. 수원 시내에만 10여 명의 영화간판 화가가 활동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몰락기가 찾

    아왔다. 비싼 제작비와 긴 시간 때문에 ‘실사 영화간판’ 을 내걸고 대형 멀티플렉스가 영화시장을 장

    악하면서 실직자가 속출했다. 그래도 김씨는 간판을 그리던 그 시절이 행복했다며 웃는다.

    최근 병마에 시달리는 김승엽씨는 아직도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유명 영화의 DVD를 수

    집하여 보관하고 틈이 생길 때마다 ‘홈시어터’ 를 이용해 진지하게 감상한다. 극장에서 수없이 반복해

    서 공짜로 보았던 영화를 초식동물처럼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한때는 영화를 통해 갈고 닦은 연기력과

    그림 솜씨로 연극무대에 서기도 했다. 간판을 잘 그려서 중앙극장 경영주로부터 금일봉을 받은 일이

    며, 간판을 그려서 떼고 걸던 추억들, 한 여배우가 자신을 실물보다 잘 그렸다며 격려해준 일 등이 주 마등처럼 흘러간다고 한다. 그는 영원한 영화인 그 추억으로 1970대 노년기를 보내는 중이다.

    I 059

  • 기억 | | 중앙극장앞에서

    좋헤-글 김성멸(극단 ‘성’ 대표, 극작가, 연출가)

    글은길위에서 탄생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 새로운 화성, 새로운 계획도시 수원을 만들었던 정조대왕께서 이 글을 본다

    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별 가치도 없는 것들을 대단한 것인 양 다루고 있으니 이것은 필시 소품이

    다. 길을 떠나라; 임금은 임금이고 신히는 신하다! 이건 또 해괴한 문장인가? 시장에 사람이 많다고

    한줄만쓰면 그만인 것을, 쓸데없는묘사에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낭비하다니, 글도 형편없지만종이

    와먹과붓이 참으로아깝구나. 성 밖으로내치라! 감히 나를능멸하다니! 발칙하기 이를데 없구나.

    18세기 문체반정으로 곤욕을 치른 수원군 남양 출생 성균관유생 이옥에 대한 처벌이었다. 그 상황에

    내가 지금 빠져있다. 그렇지만 쓰리라. 붓 적셔 더운 세상 만들려던 사람들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으 니까. 글은 길 위에서 탄생한다. 30년 전 그 시대를 써 보리라.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두서없이 갈겨쓴

    것을 부디 용서해 주길 바라오.

    시와연극만을꿈꾸던

    ‘한가람고전음악감상실’ 시절

    인생은 한바탕 꿈, 꿈밖에서 또 다른 꿈을 꾸는 꿈일 터. 오목

    천동 축구선수 황재만 집에서 자취를 하며 연극공동체 생활을

    하고 지냈다, 100편의 연극을 보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잘난

    척 안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늘상 입은 근질거렸다. 오목천

    통을 나서면 길이 시작되고 중앙극장 도착. 순례길은 다시 오

    목천동으로 고색사거리 전까지는 잘 뻗은 가로수가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황석영 소설 5삼포 기는 길’을 즉시

    연상하시면된다)

    좌우로는 논이 질펀하게 깔려있어 눈 오면 핑굴고, 메뚜기 잡

    ’ 느라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터벅터벅 명동 다리를 신풍소극장시절

    (1985년∼1987년, 신풍동 새마을금고 옆)

  • 건너면 선경공장이 눈에 들어오고 동굴벽화도 없는 굴다리를 나오면 코끼리 시멘트 탑이 위용을 갖춘

    채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아래 꼬마열차 수인선 건널목. 빨간 · 파란수기를 든 역무원과 마주치게 된다.

    도청사거리 인쇄골목을 빠져나오면 수원시청이다. 지금은 가족여성회관. 후문에는 맛집 춘천메밀막국

    수, 우리 같은 연극쟁이는 맛도 못 보던 곳. 대한성공회 수원교회, 그 바로 밑에는 무용협회 수원지부

    라고선팅이 되어 있는건물 3층에 ‘한가람고전음악감상실’이 있었다. 유신고등학교지리전공문서룡

    선생이 사재를 털어 운영하셨다. 갑자기 잘 데가 없었다. 부탁 드렸다. 클래식음악이 내 귀에 들어올

    수 없었다. 탈춤과국악, 마당극에 탐닉하던.때라아이러니컬하게도전혀 관심을포기 해버렸다. 그좁 은 공간에서 연극만 하고 싶었다. 매진, 아뿔싸 공연도중 전력이 익t한지, 전선이 약한지, 합선인지, 전

    선이 관객과 배우 보는 앞에서 지지지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간다. 방법은 없었다. 달려가 전선의 불을

    손으로 끄는 수밖에, 공연은 암흑 상태에서 진행되고 두꺼비집 퓨즈를 일단 철사로 대치, 조명이 다시

    들어왔다. 눈 깜짝할 순간에 수원 유일의 클래식감상실이 화염에 휩싸일 뻔 했다. 다시는 공연을 허락

    할수 없다며 가슴을쓸어내리신다. 또하나의 복병이 생겼다. 바로 앞구멍가게 주인인 박효석 시인

    형이었다. 깎아내리고 잔인한 말들을 쏟아 부었다. 네가 동}는 건 연극이 아니다. 끔찍했다. 그렇지만

    어느 때는 딱 두 명이 앉으면 꽉 차는 고문실에서 쥐포를 연탄불에 구워주고 술을 나발 불며 시와 연극

    에 목청을 높였다. 욕먹는 것은 힘들었지만 헤어질 때면 담배를 찔러주니 내 아니 갈쏘냐. 꾸역꾸역 찾

    아갔다. 바람이 분다. ‘나는 살고 싶다’ 를 되뇌며 시작법 문하생들과 김수영 시인의 풀을 각색하여 외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부터 시집을 사 모으는 게 취미가 돼 버렸다. 밤엔 나만의 공간인

    고전음악감상실 소파에 톰을 던졌다.

    매진, 아뿔싸 공연도중 전력이 약한지, 전선이 약한지, 합선인지, 전선이 관객과배우보는앞에서 지지지직 소리를내며 타들어 간다. 방법은 없었다. 달려가 전선의 불을 손으로 끄는 수밖에,

    아,오주석

    풍광풍광 철문을 세차게 누군가 두드린다. 영업이 끝났다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막무가내였다. 음 악이 죽도록 듣고 싶어 왔다는 것이다. 문을 열어 젖혔다. 마음대로 들으십쇼. 소인은 피곤해서 이만

    실례. 담요를 머리끝까지 꿀어 올렸다. 캄캄한 담요 안이다. 음악이 웅장하다. 담요를살며시 꿀어내리

    고 봤다. 2005년에 고인이 된 오주석이다. 미친 지휘자가 허공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황당했다.

    그때부터 심심하면 항상 그 시간에 찾아왔다. 미안한지 막걸리와 두부를 사가지고 말이다. 나도 연극

    한 적 있습니다. y-house에서 말이요, 친하게 지냄시다. 그럽시다. 연극의 길을 계속 갈려면 클래식

    음악을 목 공부해야 된다며 말을 걸어왔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받아들였다. 문외한인 나에게 꼼꼼히

    가르쳐 주었다. 음악극의 대가 바그너가 다기왔다. 20대 중반 미치는 만남의 연속이었다.

    60 I 61

  • 기억 | | 중앙극장앞에서

    1990년 햄릿공연이 물난뒤

    둘은 쏘다녔다. 이젠 철학공부도 함께 했다. 주위에 사람도 늘어났다. 서울농대 연극반 출신 이기련

    형, 책을 읽어라. 한국에서 발간된 연극책 모두를 섭렵해라. 그리고 자신 있으면 해라. 책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수원교회 사거리 헌책방, 수원천 쪽의 책방 나들이가 일과가 되었다. 그렇지만 생활은 막막

    했다, 점점 위축되어 가는 우린 시대와 불협회음으로 답답했다. 어느 날 만석공원저수지로 용기 있게

    움직였다. 달 밝은 밤에 성큼성큼 들어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점점 물이 차오른다. 난 가슴이 덜킹

    내려앉았다. 오주석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살자고! 죽지 말자고! 목 놓아 울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다. 문서룡 선생의 춧불 아래 희랍극 강의, 이재인형의 강령탈춤, 김기훈 형의 배우

    술, 이기련 형의 부조리극과작품해석론, 박효석 형의 시극론, 조용하게 있을수밖에 없는수도원 같은

    y-house(등잔)의 소설가 백도기 목사, 선생의 작품을 각색하여 공연하자던 약속은 지켰지만 역부족이

    었다. 자괴감이 밀려왔고, 골목집, 충남집의 빈대먹과막걸리 한사발과침 튀겨가며 잘난척하는세상

    으로 떠밀려갔다. 허둥대는 몰이라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 가방을 챙겼다. 용주사 절에 들어갔다. 스님들 중 연극에 해

    박한 분한태 연일 터지고, 무너지고 야단법석 서서히 중심이 잡혀 나갔다.

    중앙극장 명사실 조수되다

    드디어 문밖으로나왔다. 고인이 된 이재인 형의 경인인쇄소(현 ‘크로키’ 2층)에 임시 사무실을두고움

    직였다. 수원시청부터 ‘중앙극장’, 사이는 1970년대 말 수원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고 작당을 하는

    곳이었다. 종로거리로 가면 ‘문헌화방’ 이 있어 수원의 화가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장소였다. 서울미

    대를 졸업한 최광천과 동생 최광호(작고)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최광천의 소개로 동창 박광수를 만나

  • 게 된다. 이미 연극을 하고 있었고 ‘서울영화집단’ 이라는 젊은 영화패를 꿀고 가고 있었다. 단숨에 수

    원으로 달려왔다 프랑스를 가자고 한다. 한국영화판을 새롭게 짜야 된다며 연극은 기초지만 30년이

    지나도 똑같을 거라며 갈파했다. 흔들렸다. 당장 힘든데 미래도 보장받을 수 없다. 심각하지 않은가. 중앙극장에 무작정 갔다. 영화를 무조건 봐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아무거나 시켜달라고 말이다. 결국

    영사실 조수로 들어갔다. 한 편의 영화를 여러 번 본다는 건 행복이었다. 밥도 해결되었다. 아는 사람

    공짜로 보여주기, 영화간판 제작실 기웃거렸으나 맞기만 하고 안착 실패, 그 후 중앙극장의 대부 화가

    김승엽 선생은 중앙극장이 사라진 후 극단 ‘성’ 에 입단해무대미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 장면 한 장면

    영화가 꿀난 뒤 공책에 복기하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중앙극장 앞은 약속의 장소,

    만남, 이별이 공존하는 10대부터 50대들의 열린광장이었다.

    다시, 길을묻다 그러던 중 화홍예식장(후생병원) 사장님이 소극장을 만들라고 하신다, 공사를 시작하였다. 정말 날아

    다녔다. 한가람고전음악감상실시대’ 에서 ‘화홍소극장시대’ 로 넘어가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글을 읽

    으신 분은 그 길로 나가보시라. 그리고 그 길에 물어보시라. 다들 어디로 가셨는지… .

    . 오주석은 수원출생으로 미술사학자이다. 우리 미술의 이룸다움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2005년 2월 지병으로 생을 마쳤다. 저서로 (옛 그림 읽기의 줄거용 I, II}, (오주석의 효택의 美 특강) 등이 있다.

    공연안내 : 극단 성 30주년 기념공연 - 음악극 ‘파리의 그 여자’

    2013년 수원문화예술인으로 선정된 나혜석의유일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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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작 : 나혜석

    각색;김성열

    연훌 : 김성열 작곡 : 정유진 음악감독 : 이 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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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 2013년 4월 13일(토) 오후 7시 2013년 4월 14일(일) 오후 4시, 7시

    장 소 : 수원청소년문화센터 공연문의 ; 극단 ’성’ (031)245-4578 suwonct@hanmai 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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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억 ” | 영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영화 촬영당시 여섯살이었던 장병학 선생과 옥희로 출언했던 배우 전영선과 마당에서 찍은 사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가살던 동네가수원 남창동이었다.

    영화는 1961년도의 수원과 남창동을 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사이다〉는 동네사람들과 영회를 보았다. 그리고 추억을 이야기 했다.

    집은 영회를 만든 사람들과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만났다.

    그 집에 살았던 딸은 그림을 그렸고 남동생은 옥희와의 사진을 건냈다.

    배우는 50년전의 열정을 회상했고, 소식을 전했다.

    글 사이다 | 사진제공 장병학,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

  • 기억 ” | 영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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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한옥은 독립된 건물인 채와 채가 만나 이루어진다.

    채와 채 사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고 사람과 자연이 만나는

    거리이기도하다. 멀거나혹은가까운그사이에서 서로바라본다.

    지난 세월 그 여백의 사이 공간에서는 무수한 이야기가 만들어졌으리라.

    긴장 · 갈등 · 설렘 · 우연 · 정 · 사랑 · 나눔 등을 소재로 말이다.

    글 박은영(자유기고가) | 사진 박김형준 | 일러스트 장경애

  • 영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의 무대 남창동

    조선시대는 국가적 차원으로 남녀유별 가부장제 등의 유교이념을 보급했다. 이는 집을 짓는데도 고스

    란히 반영되었는데, 안채와 사랑채라는 성M힘 구분이 뚜렷한 각각의 독립 공간을 만들어 냈다. 남녀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철저히 구분지어 그 활동영역을 제한한 것이다. 삶을 담는 그룻으로서의 건축

    이 아닌, 이념이라는 틀에 맞춰 집을 짓고, 집이라는 그릇 속에 인간의 삶을 끼워 맞춘 모양새가 되어

    버린것이다.

    이후 개화기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서양문물이 유입되었고 집도 자연스럽게 변한다. 1920년대 후

    반에는 개량한옥을 짓는 주택개발업자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도시형 한옥을

    공급했다. 집을 일종의 상품처럼 대량 공급한 것이다. 교환가치를 염두에 두고서 말이다. 삶을 위한 집 이 아닌 상품이 되어벼린 집이 싹트게 된 것이다, 집을 생산히는 과정뿐만 아니라 집의 양식도 점차 변

    화를 맞이하게 된다. 신문과 대중저널을 통해 주거환경 개선에 관한 논의가 오가면서 집에 대한 사람

    들의 의식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이는 1930년대 전통한옥이 근대한옥으로 변모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시기에 발표된 소설이 있다. 바로 1935년 주요섭의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 사랑채에 세 들어 살게

    된 손님과 안채에 홀로 남겨진 과부와 그의 딸에 관한 이야기다. 전통한옥에서 사랑채는 가장인 남성

    을 중심으로 한 남성들만의 사교공간이었다. 하지만 과부 홀로 남겨진 소설 속 사랑채는 임대를 위한

    잉여의 공간이며 경제적 가치 창출을위한공간으로탈비꿈했다. 하지만안채와사랑채, 그사이 공간

    에서는그들만의 이야기가펼쳐진다. 남녀 간의 사랑 그알수 없는묘한긴장이 감돈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감독 신상옥은 배우 김진규를 사랑방손님으로 배우 최은희를 어머니로 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1961년 제작된 이 영화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겐 개그 프로에 종종 등장하는 ‘옥희’

    의 말투만 이미지로 남아 희화화된 지 오래다. 그 유명세를 뒤로하고 영화 속 배경이 수원 남창동이라

    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별로 없다.

    영화는 1961년 남창동의 모습을 앵글에 담았다. 수원성곽, 화홍문, 한데우물, 교회, 남창여관 미장원,

    담뱃가게, 뱃가, 골목길, 기잣길 등…. 산과 천, 초가집과 한옥들이 오밀조밀 모여 이룬 50여 년 전 남

    창동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달갈장수로 분한 김희갑을 따라 영화 속 골목길을 걸어본다. 배경이 된 한옥의 벽들은 그 자체로 예술

    품이다. 벽돌로 쌓아올린 한옥의 담들은 똑같은 모습이 하나 없다. 벽돌과 흙과 기와를 켜켜이 쌓아 만

    들어낸 한옥의 벽은 집집마다 각양각색이다, 개성 없이 상자모양으로 하늘로 뻗어 올라 늘어선 아따트

    숲에서 커다란 숫자로만 자신의 존재를 겨우 드러내는 현대의 집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한옥은 그

    렇게 각기 다른이야기를전한다. 문을짜고 벽돌을쌓이올리며 무수한고민을했을장인의 숨결이 고

    스란히 느껴진다. 남다른 디자인 감각이다. 그러한 벽 사이를 걸었을 당시 사람들은 저절로 심미안이

    생기지않았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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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안채와 L자사랑채

    달갈장수가 마수걸이를 시도하기 위해 어느 집 대문을 열어본다. 옥희가 사는 집이다, 영화 속 배

    경이 된 이 집은 2013년 현재까지 남창동 24번지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 기자형 안채와 L자

    형 사랑채가 만난 口자형 한옥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말이다. 담장 없이 건물 몸체가 바로

    길에 면해 있는 근대한옥의 한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사랑채로 들어가는 아치형 대문과 안채

    로 들어가는 대문을 구별한 모습을 통해 전통한옥의 흔적 또한 엿볼 수 있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감정의 기복을 보여주는데 한옥의 사랑채와 안채 그 사이는 적절한 도구

    다. 두 공간이 떨어져 생긴 바로 그 사이에는 두 인물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그으며 맴도는 애잔

  • .,

    함이 묻어난다. 삶은 달갈과 월세를 넣은 봉투와 손수건을 전달하며 당당하게 두 공간을 오갈 수

    있는 인물은 여섯 살 옥희뿐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눌 용기조차 없었던 이들은 사랑채 저 끝에 놓인 우물가에서 비로

    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옥희를 통해서만 전해졌던 마음 속 깊은 응어리가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솟아오르고 만 것이다. 물이 있는 공간은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데 이상적 장소인가 보다. 벗가

    빨래터가 동네 아낙들의 수다 장으로, 물레방앗간이 남녀의 은밀한 밀월의 장소로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영화에 등장했던 이 우물에선 여전히 물이 샘솟고, 허물어진 담 뒤편에 생긴 주차장을 청

    소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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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억 ” | 영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옛집에는 사람과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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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촬영 당시 여중 1학년이던 장녀 장경애 선생이 기억하는 집을 그려주셨다.

    영화 속 배경이 된 한옥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이제는 수원에 몇 남지 않은 한옥의 모습을 하고

    서…. 영회촬영 당시 16살이었던 이 한옥의 장녀는 촬영현장의 분위기와 그곳에서 살던 그때 그 시절

    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밤을 지새우며 그림을 그리던 소녀시절 그녀를 말이다. 그때 이 한옥은

    여자와 남자를 나누지 않았다. 집에 들어온 행상을 내쫓지 않고 언제나 그네들의 물건을 사들였던 할

    머니와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아벼지 그리고 매 끼니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밥을 지어 먹이

    던 어머니---. 그녀는그렇게 그집에서 수많은사람을만났다. 이제는 인적조차드문남창동골목에 자

    리한한옥전체가예전에는동네를아우르는 자랑방’이었던셈이다.

    팍팍해진 삶,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고리가 끊겨버린 지금, 그 자이’ 는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옛집을

    통해 우리가 복원해야 할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똑같은 생활패턴을 요구하는 아파트에서 벽 하

    나를 사이에 두고도 옆집 사는 사람의 얼굴조차 모른 채 숨 가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남창동

    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한옥은 많은 메시지를 전한다. 이념에 따라 집을 짓던 전통한옥에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실질적 요구를 받아 안고 진화했던 근대한옥에서 아따트 평수로 사람의 능력을 명가하

    고,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현재의 집들까지….

    이런 현실 속에서 자랑방손님과 어머니 촬영지’ 라는 훗말이 박힌 채 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남창동 24번지 한옥이 맞이하게 될 그 다음

    이야기가 절박하게 기다려진다.

  • 깜짝인터뷰

    〈사이다〉 겨울호는 수원 화성행궁이 있는 ‘남창동’ 을 찾아갑

    니다. 그 곳은 1961년 신상옥 감독님의 영화 〈사랑방손님과 어

    머니〉 촬영 장소였던 한옥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난 1월

    9일(수) 저녁 7시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를 주민들과 함께 관람하고 관람 후에는‘한동민(수원박물관

    학예팀장) 팀장과 함께 영화 속 배경인 수원 남창동의 오래된

    골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영회장

    영을 준비하는 중에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 에 연락이 되어

    사무국장인 정선민 감독님께서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박행철

    제작감독의 그 당시 궁금한 이야기를 서면인터뷰로 진행해 주

    셨습니다 .

    • 이 동네를 촬영지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작품내용상 촬영지 헌팅을 다녔는데 그 시대 환경에 맞게 촬영지가 가장 적당했다.

    특히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와 장소가 작품에 적합했다

    • 처음 이 동네에 오셨을 때, 그 느낌이 궁금합니다. (초가, 한옥, 우물가, 교회, 골목길, 팔달산, 수원천, 기칫길 등등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들과 2년 전에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촬영지인

    수원에 와서 찾아봤지만 너무 많이 변해서 그 당시 장소는 촬영한 가옥 한 채만 확인해 봤다.

    수원전이라던가 지동시장 근처인 거 같은 느낌이었다 가옥과 멀지 않은 장소에서 촬영을 했다. (400M 이내라 표현함)

    •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촬영장소인 한옥을 기억하시는지요? 그 집에 대한 당시의 기억을 들려주세요.

    그 당시 살고 있던 가족들이 계속 그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 분들과의 기억도 있다면 들려주세요.

    그때 촬영했던 곳은 현재 남아있는 가옥을 보고 알았지 너무 많이 변해서 가물가물하다 사시고 계신 분들은

    저희가 많은 작품을 했기 때문에 일일이 기억을 할 수 없어 아쉽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

    • 촬영 당시에 남창동 근처에서 머물며 촬영했는지 궁금합니다. 머물렀다먼 어디에서 머물며 촬영했는지 알려주세요.

    촬영지가 서울과 그리 멀지 않아 서울에서 수원으로 매일 오며가며 촬영을 했다.

    수원에서 촬영날짜가 10일은 넘었고 기억으로 15일에서 17일 정도인 것 같다

    • 이 영호}는 어떤 의미로 남아있나요? 수많은 작품들을 연기해 봤지만 상당히 연기하기가 어려웠던 작품이었다. 왜냐하먼 주인공 대사가 많지 않고

    내면의 세계를 표정으로만 연기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결과적으로는 영화의 내용과 관객의 호응도가 좋아

    흥행에도 성공했고, 또한 영화제에서도 좋은 결과를 냈던 작품이라 애착이 간다.

    인터뷰어 박행철 사장(신필름시절 수석제작부장) 현재 건설회사 대표 최은희 (원로영화배우)

    070

  • fτF꽃t~ 글 김형효(시인) | 사진 박김형준, 김형효

    다시 한파주의보가 발령되었다. 올 들어 세 번째다. 추위를 뚫고 저녁 화성박물관을 찾았다. 골목잡지

    사이다에서 주관한 고전이 된 영화 ',.q랑방손님과 어머니’ 를 보기 위해서다, 사실 영화라면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이다. 대선 이후 48%의 상처 입은 국민에게 ‘레미제리블’ 이 정신치료라며 극장가에 화제가

    되었고 다른 영회들도많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극장을찾지 못했다.

    며칠 전 골목잡지 사이다에서 영화를 보러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오래되지 않은 수원에 사는 사람에게

    살똘히 챙겨주는 고마운 마음이다. 한파에 얼어붙은 마음도 녹여내는 따뜻함이다. 난 고전이라는 설렘

    을 따라 길을 나서기로 마음먹고 그날을 기다렸다. 자랑방손님과 어머니’ 를 보기 위해서다. 또 하냐

    의 욕심은 아내에게 한국의 고전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해도 좋을 일을 〈사이다〉가 자리를 마련해준 셈이다. 외국 여인과 결혼해서 사는 사람에 입장에

    . 서는 많은 다문화 구호보다 기분 좋은 초대였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너무나 유명한 영화다. 한국

    영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라는 점에서는 세계 영화사의 〈전함포뱀킨〉이나 한국영화사의 〈서

  • 편제〉 역할과도 비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요

    즘처럼 흥행대박 뭐 그런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

    는 아니다. 영화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영

    화라는것이다.

    영회를 보러가는 길에 난 영동시장과 지동시장

    길을 걸었다.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