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그라 특허 끝나 고전… 100세 시대 ‘영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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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500 거대기업 탐구 6 2015년 9월 9일 <26> 화이자(Pfizer Incorporated)의 새 도전 화이자(Pfizer Incorporated)는 해마 다 수천 명씩의 군 제대자들을 채용하 고 있다. 대부분의 남성이 군을 거치 는 한국과 같은 징병제 국가에서는 군 출신 채용이 당연할 수 있지만 모병제 를 채택하는 미국에서 퇴역 군인 집중 채용은 그리 흔치 않다. 제약업계의 경쟁업체 머크(Merck) 가 MBA들을 대거 고용해 판매현장으 로 내보냈을 때 또 다른 경쟁업체인 일 라이 릴리(Eli Lilly)가 수백 명 약사를 판매원으로 파견하여 선풍을 일으켰 다. 업체가 프로모션 경쟁이 한창 절 정에 달했을 때 화이자는 퇴역 군인들 을 앞세워 인기를 끌었다. 화이자가 군인들을 선호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화이자는 수많 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인들과 함께 커 왔다. 군인들 때문에 성장한 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이자가 처음 문을 연 것은 1849년 이다. 그로부터 12년 만인 1861년에 미 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일 어나자 군인들의 식량이 문제가 됐다. 비아그라 특허 끝나 고전… 100세 시대 ‘영약’에 승부 전쟁과 함께 회사 성장… 퇴역 군인들에게 각별한 애정 스위스 노바티스社에 선두 내주고 연구개발에 집중투자 화이자 매출 구성비 (2015년 상반기 기준) 구분 매출 영업이익 총자산 장기부채 순익* 현금배당* 2011 2010 2012 2013 2014 49,605 9,119 169,274 76,021 1.44 1.04 15(상반) 22,717 6,621 미확정 미확정 0.81 0.56 51,657 11,410 172,101 72,115 3.19 0.96 54,657 9,021 185,798 74,934 1.94 0.88 61,035 7,860 188,002 75,914 1.22 0.80 61,591 7,951 195,014 76,789 1.02 0.72 화이자 경영지표 (단위: 백만달러 / *=주당 달러 / 자료: 미국 증권감독원(SEC)) 영업 이익 29.1% 제조 원가 17.7% 연구 조사 15.9% 감가상각 7.4% 구조조정 0.6% 판매비 28.6% 화이자는 사촌 사이이던 찰스 화이자 와 찰스 에하트가 공동으로 창업했다. 둘은 독일의 루드윅스버그에서 태어 났다. 에하트는 1821년생이다. 화이자 는 그보다 3년 늦은 1824년 출생했다. 1840년대 후반에 기회의 땅을 찾아 미 국으로 이민했다. 화이자는 독일에서 약사수련생 과정 을 이수한 화학도이다. 에하트는 제과 점의 제빵사 출신이었다. 둘은 그 경험을 살려 식품첨가물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막 시중에 나돌던 산토닌이라 는 구충약을 접했다. 맛이 너무 써 제 대로 삼킬 수 없었다. 구충약을 덜 고통스럽게 먹을 방법 은 없을까 궁리하던 중 약의 겉 표면에 단맛의 식품첨가물을 바르는 아이디 어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산토닌 당의 정이다. 의약품 역사상 최초의 당의정 이다. 이 당의정 만드는 기술을 토대로 1849년 뉴욕의 브루클린에 회사를 세 웠다. 상호는 ‘찰스화이자 앤드 컴퍼 니'이다. 지금까지도 화이자의 상징으 로 남아있는 브루클린의 붉은 벽돌 건 물이 최초의 본사사옥이다. 당의정은 인기를 끌었다. 제약회사들이 앞다투 어 약에다 단맛을 덧씌우는 화이자의 기술을 사갔다.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방부제 개발에 뛰어들었다. 군인들의 식량을 썩지 않 도록 하는 방부제는 날개 돋친 듯 팔 려나갔다. 당시 병사용 빵에 들어가는 방부제는 대부분 화이자 제품이었다. 전쟁 와중에 큰돈을 벌었다. 전쟁 이후 청량음료 붐이 일어났다. 화이자는 열대과일에서 구연산을 추 출해 청량음료 업체에 납품했다. 청량 음료에 본격적으로 단맛이 들어가는 데에도 화이자가 기여한 것이다. 화이자와 에하트는 미국 이민을 온 후에도 고국인 독일을 수시로 드나들 었다. 당시 유럽의 앞선 기술을 배우 는 데 공을 들였다. 화이자의 초기 식 품첨가물의 기술은 상당부분 유럽으 로부터 들여온 것이다. 화이자는 부인도 독일과 미국을 오 가는 배에서 만났다. 에하트는 화이자 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둘은 사촌간이 면서도 또 처남매부 사이의 인연까지 맺은 것이다. 화이자의 사업철학은 ‘시장이 원하 면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기술을 만들어 놓고 시장에다 그 기술을 맞추 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시장 의 필요를 예의주시하다가 그에 맞춘 기술을 개발해낸다는 것이 화이자의 정신인 것이다. 당의정과 방부제 그리 고 구연산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제품은 이 같은 기업이념을 구현한 셈이다. 둘의 지분은 50대 50이었다. 사후에 회사가 두 쪽이 나지 않도록 누구든지 먼저 죽으면 그 지분을 시가로 생존해 있는 다른 한쪽에 무조건 판다는 계약 을 맺었다. 1891년 에하트가 먼저 세상을 떴다. 에하트 유가족들은 생전 계약에 따라 회사의 지분을 모두 화이자에게 넘긴 다. 이후 화이자라는 기업은 화이자 가문으로 내려간다. 1인 오너가 된 찰스 화이자도 3년 후 인 1894년 타계한다. 장남인 찰스 화이자 주니어는 사업 에 별 관심이 없었다. 여우 사냥과 파 티를 더 즐겼다. 결국 경영권은 둘째 인 에밀레 화이자에게 넘어간다. 1910 년 제임스 큐리에가 설탕을 발효시켜 구연산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곧장 화이자로 찾 아갔다. 에밀레 화이자는 바로 그 가 치를 알아보고 거액을 들여 설탕발효 기술을 사들인다. 개발자인 큐리에도 스카우트했다. 그러고는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값비싼 열대과일 대신 설탕 에서 대량으로 뽑아내는 구연산은 그 야말로 대박이었다. 1930년대까지 전 세계 구연산 시장을 화이자가 석권하 다시피했다. 그 구연산으로 화이자는 초대형 기업의 길을 열었다. 설탕 발 효는 비단 돈뿐만 아니라 단순한 식품 첨가물 회사에서 본격적인 화학기업 으로 변신하는 교두보가 되기도 했다. 화이자는 구연산 대량 생산으로 번 돈으로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약을 만들기 시작한다. 비타민을 제조한 것 이다. 이 또한 당시 소비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던 것으로 시장이 필요로 하 면 화이자는 나선다는 창업이념을 또 한 번 발휘한 것이다. 비타민의 개발 로 화이자는 제약회사로 한발 더 다가 섰다. 김재희 기자 ● 창업주 찰스 에하트와 찰스 화이자 ● 화이자의 3대 히트작 페니실린•테라마이신•비아그라로 ‘벌떡’ 화이자는 페니실린 대량 생산에 성공 하면서 제약회사의 반열에 올랐다. 그 주역은 재스퍼 케인이었다. 10대 어린 나이에 사환으로 화이자에 발을 들인 케인은 큐리에 박사 밑에서 곰팡이 담 당 조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학구열이 유난히 뛰어났던 케인은 곰팡이를 기르면서 서서히 곰팡이 전 문가로 성장해갔다. 뒤늦게 야간으로 블루크린의 폴리테크닉 대학에 진학 하여 화학공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케인은 얇은 배양 판을 여러 개 중첩 해 쓰는 기존의 공정 대신에 크고 깊은 거대한 통으로 한꺼번에 발효시키는 법을 고안해 냈다. 그러자 곰팡이 생 산량이 수백 배로 늘어났다. 발효 통이 기존방식보다 훨씬 깊어졌다는 사실에 착안, 케인 방식을 속칭 ‘딥 탱크'(Deep Tank) 발효법이라고 부른다. 그즈음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하고 있었다. 수많은 군인들이 전선에서 병 과 상처로 고통 받고 있었다. 페니실 린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던 상황이었 다. 그런데도 페니실린 생산량은 너 무 적었다. 페니실린으로 임상실험한 다음 그 환자의 소변에서 다시 그 균을 회수할 정도로 귀했다. 다급해진 미국 정부는 기업에 SOS를 보냈다. 제약회 사나 화학회사들에 페니실린 대량생 산을 호소하고 나섰다. 물론 현상금도 내걸었다. 바로 이때 화이자의 케인이 나섰다. 딥 발효 공법으로 페니실린 생산을 시 도한 것. 연구에 착수한 지 4개월 만인 1944년 3월 1일 케인의 실험은 마침내 성공했다. 화이자의 옛 얼음공장 실험 실에서 페니실린이 대량생산되기 시 작한 것이다. 미 국은 화이자가 만든 페니실린 을 노르망디 상 륙작전에 참여 한 병사들에게 보냈다. 페니실 린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사기충천하여 노르망디를 함락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화이자는 금방 돈방석에 앉았다. 화이자는 이 성공을 기반으로 1950 년 흙속에서 테라마이신은 개발해냈 다. 전 세계로부터 13만5000개의 흙을 퍼와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땅에 서 가져왔다는 의미에서 땅의 영어표 현인 테라(Tera)란 말을 넣었다. 폐렴 은 물론 백일해, 트라코마, 발진티푸 스, 헤르페스 등에 광범위하게 효과를 인정받는 다목적 항생제다. 테라마이 신은 화이자 상표로 출시된 첫 의약품 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디푸루칸, 지 오펜, 유나신, 세포비드, 설페라존, 바이브라마이신, 디푸루칸 등을 잇달 아 개발해냈다. 우울증 치료제인 로푸트, 고혈압치료제인 노바스크와 지스로매르 그리고 고지혈증 치료제 인 리피토 등도 화이자가 만들어냈다. 비아그라 개발과정은 좀 색다르다. 그 원료인 실데나필은 고혈압 치료용 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임상실험과정 에서 엉뚱한 부작용이 보고됐다. 발기 현상이 잇달아 나타난 것. 그 부작용을 놓치지 않고 발기제로 만들어냈다. 우물을 파다 노다지를 캐 낸 격이다. 1998년의 일이다. 화이자 는 이 비아그라로 벌떡 일어섰다. 김윤식 기자 시장이 필요로 하면 반드시 만든다는 사업이념 정립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경제연구소 소장(경제학 박사) 대부분의 음식이 더운 날씨 탓에 이내 상해버리는 바람에 골치를 앓았던 것 이다. 썩어가는 식량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바로 화이자였다. 화이자는 방 부제를 개발해 군에 납품하면서 큰돈 을 벌었다. 그뿐 아니다. 조악한 수준 이었지만 생약으로 만든 진통제도 잇 달아 납품했다. 뉴욕에 기반을 둔 화 이자는 북군 쪽의 편이었다. 화이자의 방부제에 힘입어 북군은 음식 걱정을 덜고 싸울 수 있었다. 그 공으로 종전 후 포상을 받기도 했다. 전쟁 이후 북 군 세력들이 집권하면서 화이자는 승 승장구하게 된다. 1차 대전 때에는 식품첨가물들을 대 량으로 유럽에 수출하여 돈을 벌었다. 2차 대전은 더 큰 기회였다. 상처가 곪 는 것을 막아주는 페니실린은 전쟁의 필수품이었다. 그럼에도 생산량이 너 무 적어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화 이자는 이 절박한 시기에 사상 처음으 로 페니실린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다. 페니실린 덕에 미국과 연합군이 이겼 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였다. 영국 처칠 총리도 페니실린 덕을 봤다. 화이자가 퇴역군인들을 내세우는 것 은 애국심을 자극하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다. 군인들을 통해 화이자는 나 라가 어려울 때 앞장서왔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화이자의 애국심 호소 전략은 약사나 MBA를 동원한 경쟁업 체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만큼 화 이자는 미국사람들에는 국민기업으로 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후 고지혈증 치료제인 리피토와 고혈압치료제인 노바스크 그리고 발 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를 내놓으 면서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로 발돋움 한다. 1990년대에는 전 업종을 망라하 여 세계 100대 기업으로 부상했다. 1995년에는 스미스클라인비첨의 동 물건강사업부를 인수하여 가축과 동 물용 약품개발 및 생산에서 세계 1위 로 올랐다. 이때부터 화이자는 동물까 지 포함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을 위한 제약회사로 행동반경을 넓혔다. 동물 과 인간을 오가면서 제약의 수준은 더 높아졌다. 2000년에는 경쟁사였던 굴 지의 제약회사 워너 램버트를, 2002년 에는 역시 유망 제약사인 파마시아를 각각 흡수 합병했다. 2004년에는 월스 트리트의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다우 지수 종목으로 들어갔다. 2009년에는 종합비타민 센트룸으로 유명한 와이 어스까지 인수했다. 종합제약사로서 의 지위를 확고히 한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위상이 다소 흔들리 고 있다. 비아그라 등 신약들의 특허 기간이 잇달아 끝나면서 매출과 이익 이 크게 줄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기대 를 모았던 신약 개발은 잇달아 실패하 고 있다 그 결과 순위가 갈수록 떨어지 고 있다. 2015년 포천 글로벌500 랭킹 에서는 211위를 차지했다. 제약업체 선두자리는 167위에 오른 스위스의 제 약업체인 노바티스에 돌아갔다. 화이 자가 선두에서 밀린 것은 1990년대 이 후 처음이다. 화이자는 절치부심 권토중래를 다짐 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매 출액의 15% 이상을 연구개발비에 투 자하고 있다. 투자를 집중하고 있는 분야는 100세 장수 시대에 맞춘 건강 을 위한 신약이다. 질병과 고통 없는 노후를 위한 영약으로 다시 한 번 구연 산과 페니실린 그리고 비아그라로 이 어지는 제약신화를 이어가겠다는 것 이다. 최고와 최초의 수식어를 단 약 을 역사상 가장 많이 개발한 화이자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재스퍼 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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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비아그라 특허 끝나 고전… 100세 시대 ‘영약’에 승부nimage.globaleconomic.co.kr/phpwas/pdffile.php?sp=20150909_15_… · 비아그라 특허 끝나 고전…

포천500 거대기업 탐구6 2015년 9월 9일

<26> 화이자(Pfizer Incorporated)의 새 도전

화이자(Pfizer Incorporated)는 해마

다 수천 명씩의 군 제대자들을 채용하

고 있다. 대부분의 남성이 군을 거치

는 한국과 같은 징병제 국가에서는 군

출신 채용이 당연할 수 있지만 모병제

를 채택하는 미국에서 퇴역 군인 집중

채용은 그리 흔치 않다.

제약업계의 경쟁업체 머크(Merck)

가 MBA들을 대거 고용해 판매현장으

로 내보냈을 때 또 다른 경쟁업체인 일

라이 릴리(Eli Lilly)가 수백 명 약사를

판매원으로 파견하여 선풍을 일으켰

다. 업체가 프로모션 경쟁이 한창 절

정에 달했을 때 화이자는 퇴역 군인들

을 앞세워 인기를 끌었다.

화이자가 군인들을 선호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화이자는 수많

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인들과 함께 커

왔다. 군인들 때문에 성장한 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이자가 처음 문을 연 것은 1849년

이다. 그로부터 12년 만인 1861년에 미

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일

어나자 군인들의 식량이 문제가 됐다.

비아그라 특허 끝나 고전… 100세 시대 ‘영약’에 승부전쟁과 함께 회사 성장… 퇴역 군인들에게 각별한 애정

스위스 노바티스社에 선두 내주고 연구개발에 집중투자

화이자 매출 구성비(2015년 상반기 기준)

구분

매출

영업이익

총자산

장기부채

순익*

현금배당*

20112010 2012 2013 2014

49,605

9,119

169,274

76,021

1.44

1.04

15(상반)

22,717

6,621

미확정

미확정

0.81

0.56

51,657

11,410

172,101

72,115

3.19

0.96

54,657

9,021

185,798

74,934

1.94

0.88

61,035

7,860

188,002

75,914

1.22

0.80

61,591

7,951

195,014

76,789

1.02

0.72

화이자 경영지표 (단위: 백만달러 / *=주당 달러 / 자료: 미국 증권감독원(SEC))

영업 이익29.1%

제조 원가17.7%

연구 조사15.9%

감가상각7.4%

구조조정 0.6%

판매비28.6%

화이자는 사촌 사이이던 찰스 화이자

와 찰스 에하트가 공동으로 창업했다.

둘은 독일의 루드윅스버그에서 태어

났다. 에하트는 1821년생이다. 화이자

는 그보다 3년 늦은 1824년 출생했다.

1840년대 후반에 기회의 땅을 찾아 미

국으로 이민했다.

화이자는 독일에서 약사수련생 과정

을 이수한 화학도이다. 에하트는 제과

점의 제빵사 출신이었다.

둘은 그 경험을 살려 식품첨가물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막 시중에 나돌던 산토닌이라

는 구충약을 접했다. 맛이 너무 써 제

대로 삼킬 수 없었다.

구충약을 덜 고통스럽게 먹을 방법

은 없을까 궁리하던 중 약의 겉 표면에

단맛의 식품첨가물을 바르는 아이디

어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산토닌 당의

정이다. 의약품 역사상 최초의 당의정

이다.

이 당의정 만드는 기술을 토대로

1849년 뉴욕의 브루클린에 회사를 세

웠다. 상호는 ‘찰스화이자 앤드 컴퍼

니'이다. 지금까지도 화이자의 상징으

로 남아있는 브루클린의 붉은 벽돌 건

물이 최초의 본사사옥이다. 당의정은

인기를 끌었다. 제약회사들이 앞다투

어 약에다 단맛을 덧씌우는 화이자의

기술을 사갔다.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방부제 개발에

뛰어들었다. 군인들의 식량을 썩지 않

도록 하는 방부제는 날개 돋친 듯 팔

려나갔다. 당시 병사용 빵에 들어가는

방부제는 대부분 화이자 제품이었다.

전쟁 와중에 큰돈을 벌었다.

전쟁 이후 청량음료 붐이 일어났다.

화이자는 열대과일에서 구연산을 추

출해 청량음료 업체에 납품했다. 청량

음료에 본격적으로 단맛이 들어가는

데에도 화이자가 기여한 것이다.

화이자와 에하트는 미국 이민을 온

후에도 고국인 독일을 수시로 드나들

었다. 당시 유럽의 앞선 기술을 배우

는 데 공을 들였다. 화이자의 초기 식

품첨가물의 기술은 상당부분 유럽으

로부터 들여온 것이다.

화이자는 부인도 독일과 미국을 오

가는 배에서 만났다. 에하트는 화이자

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둘은 사촌간이

면서도 또 처남매부 사이의 인연까지

맺은 것이다.

화이자의 사업철학은 ‘시장이 원하

면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기술을

만들어 놓고 시장에다 그 기술을 맞추

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시장

의 필요를 예의주시하다가 그에 맞춘

기술을 개발해낸다는 것이 화이자의

정신인 것이다. 당의정과 방부제 그리

고 구연산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제품은

이 같은 기업이념을 구현한 셈이다.

둘의 지분은 50대 50이었다. 사후에

회사가 두 쪽이 나지 않도록 누구든지

먼저 죽으면 그 지분을 시가로 생존해

있는 다른 한쪽에 무조건 판다는 계약

을 맺었다.

1891년 에하트가 먼저 세상을 떴다.

에하트 유가족들은 생전 계약에 따라

회사의 지분을 모두 화이자에게 넘긴

다. 이후 화이자라는 기업은 화이자

가문으로 내려간다.

1인 오너가 된 찰스 화이자도 3년 후

인 1894년 타계한다.

장남인 찰스 화이자 주니어는 사업

에 별 관심이 없었다. 여우 사냥과 파

티를 더 즐겼다. 결국 경영권은 둘째

인 에밀레 화이자에게 넘어간다. 1910

년 제임스 큐리에가 설탕을 발효시켜

구연산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곧장 화이자로 찾

아갔다. 에밀레 화이자는 바로 그 가

치를 알아보고 거액을 들여 설탕발효

기술을 사들인다. 개발자인 큐리에도

스카우트했다. 그러고는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값비싼 열대과일 대신 설탕

에서 대량으로 뽑아내는 구연산은 그

야말로 대박이었다. 1930년대까지 전

세계 구연산 시장을 화이자가 석권하

다시피했다. 그 구연산으로 화이자는

초대형 기업의 길을 열었다. 설탕 발

효는 비단 돈뿐만 아니라 단순한 식품

첨가물 회사에서 본격적인 화학기업

으로 변신하는 교두보가 되기도 했다.

화이자는 구연산 대량 생산으로 번

돈으로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약을

만들기 시작한다. 비타민을 제조한 것

이다. 이 또한 당시 소비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던 것으로 시장이 필요로 하

면 화이자는 나선다는 창업이념을 또

한 번 발휘한 것이다. 비타민의 개발

로 화이자는 제약회사로 한발 더 다가

섰다.

김재희 기자

● 창업주 찰스 에하트와 찰스 화이자

● 화이자의 3대 히트작

페니실린•테라마이신•비아그라로 ‘벌떡’

화이자는 페니실린 대량 생산에 성공

하면서 제약회사의 반열에 올랐다. 그

주역은 재스퍼 케인이었다. 10대 어린

나이에 사환으로 화이자에 발을 들인

케인은 큐리에 박사 밑에서 곰팡이 담

당 조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학구열이 유난히 뛰어났던 케인은

곰팡이를 기르면서 서서히 곰팡이 전

문가로 성장해갔다. 뒤늦게 야간으로

블루크린의 폴리테크닉 대학에 진학

하여 화학공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케인은 얇은 배양 판을 여러 개 중첩

해 쓰는 기존의 공정 대신에 크고 깊은

거대한 통으로 한꺼번에 발효시키는

법을 고안해 냈다. 그러자 곰팡이 생

산량이 수백 배로 늘어났다. 발효 통이

기존방식보다 훨씬 깊어졌다는 사실에

착안, 케인 방식을 속칭 ‘딥 탱크'(Deep

Tank) 발효법이라고 부른다.

그즈음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하고

있었다. 수많은 군인들이 전선에서 병

과 상처로 고통 받고 있었다. 페니실

린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던 상황이었

다. 그런데도 페니실린 생산량은 너

무 적었다. 페니실린으로 임상실험한

다음 그 환자의 소변에서 다시 그 균을

회수할 정도로 귀했다. 다급해진 미국

정부는 기업에 SOS를 보냈다. 제약회

사나 화학회사들에 페니실린 대량생

산을 호소하고 나섰다. 물론 현상금도

내걸었다.

바로 이때 화이자의 케인이 나섰다.

딥 발효 공법으로 페니실린 생산을 시

도한 것. 연구에 착수한 지 4개월 만인

1944년 3월 1일 케인의 실험은 마침내

성공했다. 화이자의 옛 얼음공장 실험

실에서 페니실린이 대량생산되기 시

작한 것이다. 미

국은 화이자가

만든 페니실린

을 노르망디 상

륙작전에 참여

한 병사들에게

보냈다. 페니실

린 으 로 무 장 한

병사들은 사기충천하여 노르망디를

함락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화이자는

금방 돈방석에 앉았다.

화이자는 이 성공을 기반으로 1950

년 흙속에서 테라마이신은 개발해냈

다. 전 세계로부터 13만5000개의 흙을

퍼와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땅에

서 가져왔다는 의미에서 땅의 영어표

현인 테라(Tera)란 말을 넣었다. 폐렴

은 물론 백일해, 트라코마, 발진티푸

스, 헤르페스 등에 광범위하게 효과를

인정받는 다목적 항생제다. 테라마이

신은 화이자 상표로 출시된 첫 의약품

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디푸루칸, 지

오펜, 유나신, 세포비드, 설페라존,

바이브라마이신, 디푸루칸 등을 잇달

아 개발해냈다. 우울증 치료제인 졸

로푸트, 고혈압치료제인 노바스크와

지스로매르 그리고 고지혈증 치료제

인 리피토 등도 화이자가 만들어냈다.

비아그라 개발과정은 좀 색다르다.

그 원료인 실데나필은 고혈압 치료용

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임상실험과정

에서 엉뚱한 부작용이 보고됐다. 발기

현상이 잇달아 나타난 것.

그 부작용을 놓치지 않고 발기제로

만들어냈다. 우물을 파다 노다지를 캐

낸 격이다. 1998년의 일이다. 화이자

는 이 비아그라로 벌떡 일어섰다.

김윤식 기자

시장이 필요로 하면 반드시 만든다는 사업이념 정립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경제연구소 소장(경제학 박사)

대부분의 음식이 더운 날씨 탓에 이내

상해버리는 바람에 골치를 앓았던 것

이다. 썩어가는 식량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바로 화이자였다. 화이자는 방

부제를 개발해 군에 납품하면서 큰돈

을 벌었다. 그뿐 아니다. 조악한 수준

이었지만 생약으로 만든 진통제도 잇

달아 납품했다. 뉴욕에 기반을 둔 화

이자는 북군 쪽의 편이었다. 화이자의

방부제에 힘입어 북군은 음식 걱정을

덜고 싸울 수 있었다. 그 공으로 종전

후 포상을 받기도 했다. 전쟁 이후 북

군 세력들이 집권하면서 화이자는 승

승장구하게 된다.

1차 대전 때에는 식품첨가물들을 대

량으로 유럽에 수출하여 돈을 벌었다.

2차 대전은 더 큰 기회였다. 상처가 곪

는 것을 막아주는 페니실린은 전쟁의

필수품이었다. 그럼에도 생산량이 너

무 적어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화

이자는 이 절박한 시기에 사상 처음으

로 페니실린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다.

페니실린 덕에 미국과 연합군이 이겼

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였다. 영국

처칠 총리도 페니실린 덕을 봤다.

화이자가 퇴역군인들을 내세우는 것

은 애국심을 자극하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다. 군인들을 통해 화이자는 나

라가 어려울 때 앞장서왔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화이자의 애국심 호소

전략은 약사나 MBA를 동원한 경쟁업

체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만큼 화

이자는 미국사람들에는 국민기업으로

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후 고지혈증 치료제인 리피토와

고혈압치료제인 노바스크 그리고 발

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를 내놓으

면서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로 발돋움

한다. 1990년대에는 전 업종을 망라하

여 세계 100대 기업으로 부상했다.

1995년에는 스미스클라인비첨의 동

물건강사업부를 인수하여 가축과 동

물용 약품개발 및 생산에서 세계 1위

로 올랐다. 이때부터 화이자는 동물까

지 포함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을 위한

제약회사로 행동반경을 넓혔다. 동물

과 인간을 오가면서 제약의 수준은 더

높아졌다. 2000년에는 경쟁사였던 굴

지의 제약회사 워너 램버트를, 2002년

에는 역시 유망 제약사인 파마시아를

각각 흡수 합병했다. 2004년에는 월스

트리트의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다우

지수 종목으로 들어갔다. 2009년에는

종합비타민 센트룸으로 유명한 와이

어스까지 인수했다. 종합제약사로서

의 지위를 확고히 한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위상이 다소 흔들리

고 있다. 비아그라 등 신약들의 특허

기간이 잇달아 끝나면서 매출과 이익

이 크게 줄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기대

를 모았던 신약 개발은 잇달아 실패하

고 있다 그 결과 순위가 갈수록 떨어지

고 있다. 2015년 포천 글로벌500 랭킹

에서는 211위를 차지했다. 제약업체

선두자리는 167위에 오른 스위스의 제

약업체인 노바티스에 돌아갔다. 화이

자가 선두에서 밀린 것은 1990년대 이

후 처음이다.

화이자는 절치부심 권토중래를 다짐

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매

출액의 15% 이상을 연구개발비에 투

자하고 있다. 투자를 집중하고 있는

분야는 100세 장수 시대에 맞춘 건강

을 위한 신약이다. 질병과 고통 없는

노후를 위한 영약으로 다시 한 번 구연

산과 페니실린 그리고 비아그라로 이

어지는 제약신화를 이어가겠다는 것

이다. 최고와 최초의 수식어를 단 약

을 역사상 가장 많이 개발한 화이자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재스퍼 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