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의 고대 문명과 교류·혁신 콘텐츠 연구 · 2019-08-16 · È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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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의 고대 문명과 교류·혁신 콘텐츠 연구 박 승 희 * Study on the Ancient Civilization of Nakdong River and Exchange·Innovation Content Park, Seung Hee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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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Vol.18. No.2 2019. 7. pp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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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낙동강의 고대 문명과 교류·혁신 콘텐츠 연구

    박 승 희*

    Study on the Ancient Civilization of Nakdong River and Exchange·Innovation

    Content

    Park, Seung Hee

    국문요약

    본논문은낙동강고대문명에대한고고학적자료를기반으로낙동강의고대문명을교류와혁신의

    관점에서고구(考究)한것이다. 주지하디시피낙동강유역은 24개의고대소국(小國)이생성·소멸한지

    역으로, 지역교류를통해독창적인문화혁신을이룬고대문명사의주요한현장이다. 논문은문화상호

    주의적관점에서이지역의회도(灰陶) 문화와철기문화를비롯한문화혁신의고고학적증거를살폈다.

    또한, 낙동강의고대교통로에대한추적등을통해낙동강의혁신성을재발견하고자하였다. 이를기반

    으로 고대 낙동강 철기 로드(road)와 고대 낙동강 문명길 등을 제안함으로써 낙동강의 문화적 가치와

    지역문화의새로운가능성을모색해보았다. 낙동강철기로드는낙동강과그유역의옛고갯길을연결

    하여울산, 경주, 대구, 성주지역의교류의흔적을공간콘텐츠로제안한것이다. 또한, 고대낙동강문명

    길은낙동강유역의주요박물관을중심으로, 고대소국들의독창적인고대문명을교육콘텐츠로제시

    한것이다. 낙동강은고대시대부터지역의물류거점으로지역을넘어한반도는물론동아시아를관통하

    는문화회랑(回廊)으로서의역할을해왔다. 따라서 낙동강의고대교류의역사와이를기반으로하는

    혁신의과정은우리시대의주요한강문화콘텐츠가될수있다. 그것은 곧교류과혁신의현장으로서

    낙동강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될 것이다.

    주제어 : 낙동강, 고대 문명, 교류 혁신 콘텐츠, 고대 낙동강 철기 로드, 고대 낙동강 문명길

    Abstract

    The ancient civilization of the Nakdong River was the history of exchanges and innovations.

    As confirmed by the archaeological materials, the innovation of Wajil pottery and the iron was

    the outcome of successful competitions and exchanges among the minor countries around the

    Nakdong River basin, which were made possible thanks to the existence of waterway, or the

    Nakdong River. In this vein, the ancient civilization of the Nakdong River is historical evidence

    * 영남대학교 교수(Professor, Yeungnam University), E-mail : [email protected]

  • 2 박 승 희

    대구경북연구 제18권 제2호

    of indicating the regional growth and potential. This is a new discovery of local culture and

    a new perception of the birth of culture. The fact that the process of exchanges based on

    cultural reciprocity is a key mechanism to realize cultural innovation and social revolution is

    well shown by the ancient civilization of the Nakdong River. In this sense, the ancient

    civilization content of the Nakdong River can be called the content of exchanges and

    innovations. The ‘Nakdong River iron road content’ and the ‘ancient civilization road content’

    can be through of a process of studying the cultural history of exchanges and innovations and

    the time of rediscovering the potential and value of local culture.

    Key Word : Nakdong River, Ancient Civilization, Exchange/Innovation Content, Nakdong

    River Iron Road, Nakdong River Ancient Civilization Road

    Ⅰ. 서 론

    인류 문명의 진화는 인간과 자연환경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인간은 다양한

    기술적 도구와 문화적 장치를 통해 자연적 한계를 극복해왔고, 자연환경은 인간의 사회적 삶의 조

    건이 되었다. 산악 지방에서는 원시 농경의 한 형태인 화전농법을 통해 생계를 해결했고, 강 주변에

    서는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한 집약 농경과 어로 활동을 통해 삶의 역사를 축적해왔다.

    고대로부터 큰 강 유역은 거대한 도시와 문명들이 싹틀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을 제공했다. 세계

    4대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황하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모두 큰 강을 끼고 발생한 것

    은 주지의 사실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기원 전 7,000년부터 약 1,000여 년 간 티그리스 강과 유

    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명을 형성하였다. 황하 문명 또한 기원 전 5,000년 경 중국의 황

    하 강 유역에서 발생했다.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200년부터 약 3,000년 동안 나일 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비옥한 충적지에서 번성했으며,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중엽부터 약 1,000여 년 동안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문명의 역사를 형성해왔다. 그리고 이들 고대문명은 모두 사적소유, 계급관

    계, 중앙집권적 권력 등을 특징으로 하는 거대한 정치체(政治體)를 성장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

    한 정치체계에 필수적인 물적 토대를 제공했던 것은 바로 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이용한 집약적

    농경과 그것을 통해 생산된 엄청난 양의 잉여였다.

    고대 국가와 문명이 강을 중심으로 발달했다는 사실은 한반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고대 삼

    한 78개국 중 상당수가 이른바 ‘나루국가’, 즉 강해(江海)도시의 형태로 발달했고,1) 고구려의 평양

    성, 장수산성,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등도 강을 끼고 형성된 도시였다. 고대

    도시와 국가가 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이유는 강의 하구를 장악할 경우, 그와 연결된 해상권을 장악

    1) 尹明喆, 2012, “한민족 歷史空間의 이해와 江海都市論 모델”, 「강과 동아시아 문명」, 경인문화사.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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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하는 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즉 부채살처럼 펼쳐진 복잡한 하계망과 ‘내륙수로’를 통해

    광범위한 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

    한반도의 여러 큰 강들과 마찬가지로 낙동강도 고대문명과 국가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낙동강은 강원도로부터 부산 앞바다까지를 잇는 한반도 남쪽을 종단하는 대표적인 강이다.

    특히 낙동강의 중심을 이루는 경상도 지역은 고대문명의 중심지였다. 대구, 부산, 경주, 포항, 울산,

    김해, 안동, 상주, 고령, 영천, 경산, 의성, 밀양 등 주요 지역이 낙동강 유역권에 형성된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그러므로 이들 지역에 고대문명과 관련된 다양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음은 당연한 결

    과이다. 그리고 이 유적들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고대문명의 성격과 역사적 발전 과정을

    규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물질적 증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낙동강 유역에 정확히 언제부터 인간이 살았는지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석

    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이미 농경생활이 시작되었고, 강변과 해안가에서 어로 활동이 활

    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방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다. 또한, 기술이 아직 미미

    했던 당시의 농경은 개인의 능력을 초월한 집단적 협력관계가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조직화된 집단

    적 협력을 통해 급격하게 향상된 농업 생산성은 인류 집단의 규모를 더 커지게 만드는 데 중요한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좀 더 복잡한 중앙집권적 정치시스템이 출현하고,

    이는 다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형성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낙동강 유역의 모든 지역에

    하나의 동질적인 고대문명이 발달했던 것은 아니다. 복수의 고대문명이 역동적인 상호작용 과정에

    서 명멸·공존하였으며, 이들 복수의 고대문명은 오늘날 낙동강 유역에 분포하는 여러 지역의 지역

    정체성과 로컬리티(locality) 형성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편 낙동강 유역에 고대문명을 형성하는 데 내적인 요인만 작동한 것은 아니다. 외부로부터 유

    입된 기술, 물자, 사람 등외부적 요인들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낙동강 유역의 고대인들은 필요한

    물자와 기술,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외부의 문화집단들과지속적이고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이러

    한 외적인 상호교류는 지역 내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문화적 역동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낙동강 유역의 고대인들은 외부의 문화와 기술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토착적 문화와 기술체계를 외부에서 유입된 문화요소와 접목시켜 좀 더 수준 높고 세련된 형태로

    발달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시 외부로 전파함으로써 다른 문화집단의 성장에 중요한 추동력

    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낙동강 고대문명을 형성한 내·외적 역동성,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이론적·실천적 함의는 한

    반도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교류와 협력의 가치,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 혁신의 주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낙동강 고대문명은 교류와 혁신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물리적, 지리적, 문화적 의미를 상

    징하는 것이다.

    2) 尹明喆, 2012, 앞의 책,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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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낙동강유역 고대문명의 형성과 전개과정그리고 외부 문화집단과의 복잡한교류 양상

    에 주목하여 낙동강유역 고대문명의 문화적 특성과 그 중층적 함의를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낙동

    강 유역 고대문명의 형성과 발달의 맥락을 명확히 하고, 낙동강의 고대문명에 나타난 교류와 혁신

    의 과정을 인류학과 고고학, 그리고 지리학적 영역에서 다시 살피는 것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낙동강 유역의 교류와 혁신의 고대문화 콘텐츠를 제안해 보고자 한다. 이는 지역 문화

    속에서 교류와 혁신의 문화적 역량을 재발견하고, 이에 기반한 낙동강 문화의 가치를 제고(提高)하

    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Ⅱ. 낙동강의 인류학적 배경과 문화 상호성

    삼한시대의 여러 소국들이 고대문명에 해당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본 연

    구에서는 일반적인 문명의 기준과 함께 구성주의 문명론에 기반하여 문명에 대한 정의를 재설정

    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문명이라는 것은 기술적·물질적으로 일정한 발전단계에 도달한 상태를 의

    미한다. 따라서 과거의 특정한 문화집단이 문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술적 수준을 물질

    적 증거를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현재의 사람들이 과거의 특정한 문화집단

    을 문명으로 인식하고 실제로 그들의 현재 행위와 의식에 영향을 준다면, 그 또한 ‘문명’이라고 규정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러한 적극적인 구성주의적 문명론에 입각해서 삼한시대에

    낙동강 유역에 명멸했던 진·변한의 24개국을 ‘문명’의 단계로 설정하고, 연구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이렇게 삼한시대 진·변한 24개국을 문명으로 설정한 이유는 학계 일각에서 이미 진·변한 24개국 중

    일부를 고대문명으로 개념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 일부 지방 주민들이 해당 지역에 존재했

    던 소국을 고대문명으로 인식하고, 이를 지역 정체성 확립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동강 유역 고대문명의 형성과정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세 가지이다. 즉 북방기원설, 자체발

    전설, 상호작용설 등이다. 이중 현재까지 고대 중국에서 형성된 문명과 문화 요소들이 한반도를 거

    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보는 북방기원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북방기원설은 남방지역을 독자적인 문화 창출이 불가능한 곳이자 북방에서 기원한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한 곳으로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지구상에존재했던

    수많은 문화집단 대부분은 그것을 둘러싼 특수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생계방식

    과 문화를 창출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 지역의 문화집단이 다른 지역의 문화집단과 교류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정한 내적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적 발전은 외부의 새로운 문물이나 기

    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내적 발달이 전무한 집단은 외부 선진 문화의 전파

    에 직면해서 일방적으로 동화되거나 소멸해버린다는 것이 인류학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실제로 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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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동강 유역의 남방지역 사람들은 북방의 문화세력과 교류하기 전부터 이미 일정한 수준의 문화집단

    을 형성하고 있었고, 내적 역동성을 통해 구축된 정치체제와 문화 그리고 외부와의 교류를 위한 정

    보와 기술도 갖추고 있었다.

    둘째, 북방기원설은 북방의 모든 문화적 요소나 기술이 남방보다 우월하다는 관점을 전제하고 있

    다. 하지만 남방과 북방지역의 문화나 기술은 우월과 열등의 층위보다 차이의 성격이 더 크다. 더욱

    이 남방지역에서 창출된 기술과 문화 중 일부가 북방지역에 대해 비교우위를 가졌을 가능성도 항상

    존재한다. 비교우위는 어떤 지역이 특정한 수준의 기술에 입각하여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더

    적은 비용으로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농업이 중심인 국가와

    전자제품 생산이 중심인 국가가 있을 경우, 전자제품을 잘 만들지 못하는 국가는 농업만 하고 전자

    제품을 잘 만드는 국가는 그것만 만들어 교환하면 전체적으로 생산 효율이 높아져 서로 이익이 된

    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 지역이나 국가가 처한 자연환경과 그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전시킨 생

    산기술이 다르기 때문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특화 생산하여 서로 교환하면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 비교우위론에 따르면 한 집단이 모든 것을 생산할 수 없고, 한 집단이 가진 모든 문화적, 기술

    적 요소가 다른 집단보다 우월할 수는 없다. 따라서 북방문화의 모든 요소가 남방문화에 비해 우월

    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이거나 논리적 비약임에 틀림없다. 오히려 북방문화와 남방문화가

    각각의 비교우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진(共進)해온 것으로 보는 편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일 것이다.

    셋째, 북방기원설은 문명 간 상호작용과 문화요소들의 적극적 수용을 통한 토착화의 가능성을 배

    제하고 있다. 고고학 자료로 보면, 북방의 선진문물과 기술이 남방에 유입되어 사회문화적 변화를

    유도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사실이 남방의 문화집단들이 북방으로부터 전파된

    문화 요소를 기존의 토착 문화와 융합하여 더 선진적이고 독자적인 문화요소를 창출한 후, 역으로

    북방문화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넷째, 북방기원설은 북방과 남방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빠져 각 문화권의 내적 다양성과 역동성

    을 간과하고 있다. 즉 북방기원설은 북방문화 혹은 남방문화라 불리는 문화적 단위가 수많은 지역

    집단들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과 교류의 과정에서 형성된 지극히 다양한 문화요소들의 총체라는 점

    을 명시적·묵시적으로 간과함으로써 문화권 내의 내적 다양성과 이질성 그리고 하위 문화집단들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에 관한 관심과 논의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버리고 있다.

    한편, 북방기원설은 중심부에 의한 주변부의 종속적 관점에서 문화집단들 사이의 관계를 접근함

    으로써 상호 간 변화의 가능성을 무시한다. 각 문명이 가진 특징과 문명 간의 상호작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중심과 표준이 아니라 다중심적인 관점이 필수적이다. 세계의 다양한 인

    구집단은 주어진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문화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외부 집단들

    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기술과 문물을 획득함으로써 문화적 혁신을 이루어냈다. 문화집단과

    문화집단 사이에 이루어지는 문화요소의 전파와 상호작용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문화 전파주

  • 6 박 승 희

    대구경북연구 제18권 제2호

    의에 따르면, 문화요소의 전파 과정에 두 종류의 메카니즘이 작동한다. 하나는 자연적인 전파로서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진행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척활동이나 전쟁같이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전파이다. 문화전파의 두 가지 기제는 따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한 지역에서 두 기제가 동

    시에 작동하기도 한다.

    문화 간 상호작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 즉 문화접변의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는 학계의 논의

    를 정리하면 대체로 4가지 모델로 수렴된다.3) 이들 문화접변 모델을 낙동강 유역 고대문명이 경험

    했던 문화 간 상호작용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이에 입각해서 당시 낙동강 유역에서 전개

    되었던 문화 간 상호작용의 제 형태와 그 결과를 개괄적으로 유추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첫째는 문명충돌론이다. 이 모델은 구미 자본주의와 생활방식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수용

    자 문화집단 내에 환멸과 소외, 분노를 초래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모델을 고대의 문화 간 상호

    작용에 적용시켜 본다면, 고대 중국의 문화와 기술이 낙동강 유역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지역 문화

    집단 내의 저항, 분노, 갈등이 초래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모델은 ‘맥도날드화’이다. 이것은 맥도날드로 상징되는 미국의 지배적인 기업문화의 강력

    한 영향력 하에서 전 세계가 문화적으로 동질화된다고 주장한다. 이 모델은 대량생산, 속도, 표준화,

    몰 인격적 서비스라는 원칙으로 구성되는 ‘패스트 푸드 문화’가 전 지구적 문화의 중심에 위치한다

    고 보고, 현재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생산과 소비패턴이 동질화되어 가는 과정을 분석한다. 이러한

    맥도날드화와 유사한 과정이 고대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중국과 시베리아의 기술과 물질

    문화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그것의 생산과 소비방식도 함께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낙동강 유역의

    생산과 소비시스템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모델은 혼합주의 혹은 크레올화라고도 불리는 문화적 하이브리드화, 즉 혼종화이다. 이

    는 둘 혹은 그 이상의 문화요소들이 융합해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방점을 둔 모

    델이다. 혼합주의는 비교적 대등한 위상을 가진 복수의 문화가 만나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

    지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아마존과 북극 지역의 토착민들이 위성영상이라는 서구의 최첨단 과학기

    술을 사용하여 조상들의 땅의 경계를 지도로 작성하고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현상은 문화적 혼합

    주의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최근 지구상 다양한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문화적 혼종화가 관찰되고

    있는데, 이는 고대의 문화접촉 과정에서도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고대의 북방문화와

    낙동강 유역의 문화가 접촉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낙동강 유역의 중심문

    화로 자리매김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모델은 지역화 혹은 토착화 모델이다. 지역의 토착적 미시문화들에 의해 전 지구적 문화

    가 해석 및 변용되어 새로운 무엇인가로 변화한다고 보는 방식이다. 한국에 전파된 맥도날드라는

    미국의 음식문화가 한국의 토착 음식문화인 김치와 만나 새로운 형태의 메뉴인 김치버거로 토착화

    되는 현상이 이에 해당된다. 김치버거처럼 고대사회에서도 북방의 문화가 낙동강 유역에 유입되면

    3) Miller Barbara, 홍석준 외 옮김, 2013, 「글로벌시대의 문화인류학」, 시그마프레스. 121쪽.

  • 낙동강의 고대 문명과 교류·혁신 콘텐츠 연구 7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서 그대로 수용되지 않고 지역의 토착 문화를 통해 재해석 혹은 변용되어 창의적으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의 4가지 문화접변 모델은 문화집단 간의 문화 관계를 일방적 영향 관계가 아니라 작용과 반작

    용이 동시에 수반되는 쌍방향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상이한 두 문화가

    접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어 지역의 지배적인 문화로 자리매김하거나, 지역의 국지

    적인 미시문화가 전 지구적 수준의 문화에 영향을 미쳐 의미심장한 변화를 촉발하기도 한다. 위의

    네 가지 문화접변 양상은 개별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여러 개의 양상이 겹쳐지거나 시차를 두

    고 순차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문화 간 상호작용의 초창기에는 맥도날드화 모델과

    같은 양상을 보여주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명충돌론이 강조하는 저항과 갈등이 발생하거나, 크레

    올화 같이 두 문화가 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형성되기도 한다. 고대 북방의 문명과 낙동강

    유역의 문명 사이에 전개되었던 상호작용의 과정에서도 하나의 문화접변 모델이 아니라 여러 모델

    이 동시에 혹은 시차적으로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Ⅲ. 낙동강의 고고학적 재발견과 교류·혁신의 증거

    낙동강은강원도에서발원하여영남의거의모든지역을흘러내리며남해안에이른다. 강물은흐르

    면서곳곳에분지성평지를만들어놓았고, 이는고대로부터지금까지인간활동의중심공간이되어

    왔다. 자연히 이지역에서는 기원전 2-3세기에 이미 초기국가의모습이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낙

    동강 유역의 초기국가(小國)들은 지석묘 사회와는 달리 지역 간 교역과 원거리 교역을 통해 성장해

    나갔다. 소국(小國)들의 이름은 문헌에 기록될 정도로 국가에 대한 인식도 분명했다. 사로국, 압독국,

    골벌국, 다벌국등이대표적이며, 이초기국가들은이후통합·발전하면서신라로수렴된다. 즉낙동강

    유역의 초기국가들은 신라를 고대 국가로 발전시킨 기반이자 문명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낙동강 유역 고대 문명 발전의 뼈대가 된 것은 ‘철기 생산기술의 확보’와 ‘토기생산의 혁신’

    이었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이 두 가지 혁신을 선진적으로 이루어 낸 지역이 바로

    낙동강 유역이었다.

    토기의 혁신은 무문토기로부터 와질토기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까지

    노천에서 구웠던 붉은색의 무문토기는 삼한시대가 되면서 회색의 환원염 소성 토기로 변하는 혁명

    적인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한국 토기문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를 흔히 와질토기(회도, 灰陶)로 부른다. 특히,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는 최초로 낙동강 유역에서

    이 와질토기가 발견된다. 와질토기는 9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 이전 시대의 토기에 비해 훨씬

    단단하며 내구력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물레를 활용한 성형 토기라 할 수 있다.

    한편, 낙동강의 지류에서 형성된 분지를 중심으로 초기국가(소국)가 등장하게 된다. 기원전 4세기

    대(代)부터는 비파형 동검과 이를 계승한 세형동검의 유입, 회도의 등장 등 영남지역에서는 커다란

  • 8 박 승 희

    대구경북연구 제18권 제2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초기국가(소국) 등 정치체(政治體) 상호 간의 경쟁도 격렬해졌다.

    회도의 등장은 초기국가(소국)의 등장을 상징하는 고고학적 지표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한반

    도 중남부와 일본열도를 포함한 공간에서 가장 먼저 회도가 등장하여 정착한 곳이 바로 낙동강 유

    역이었다. 종래 회도의 문화적 전파 과정은 중국 중원에서 동북지역을 거쳐 낙동강 유역에 이른 것

    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는 낙동강 문명권의 회도 발생이 다른 지역보

    다 압도적으로 빨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4)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 철기 혁명의 중심지로 낙동강 유역을 다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철기의 생

    산은 오랫동안 기원 전후한 시기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반도 서북한 지역, 남부지역으로의 전파되었

    다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최신 고고학 자료는 낙동강 유역권인 늑도, 울산 달천, 경주 황성동 유적

    에서 늦어도 기원전 2세기에 자체적으로 철기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5) 뿐만 아니라

    이들 철기들이 기존의 이해와는 달리 고조선의 철기제작기술에 기반한다는 주장도 제기된 상황이

    다. 낙동강 수계를 따라 이른 시기의 철기를 사용하거나 부장하는 무덤 집단들이 확인되고 있는 것

    도 주목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초기국가 발생 단계에 낙동강 유역권의 선진성에 대한 인식의 재

    고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낙동강 유역의 지역별 고대 초기국가들의 성장 또한 이와 관련된다. 낙동강 유역에서는 낙동강이

    만들어낸 여러 거점 공간에 초기국가가 형성된다. 청도지역에 이서국, 경산지역에 압독국, 영천지역

    에 골벌국, 의성지역에 조문국, 김천지역에 감문국, 상주지역에 사벌국 등 유력한 정치집단의 존재

    를 상정한다. 그 외에도 음집벌국, 실직국, 우시산국, 거칠산국 등 많은 정치 집단들이 낙동강 유역

    에 비정된다. 이후 2세기 대(代)가 되면, 사로국이 맹주국으로 성장하면서 주변 제소국 집단을 통합

    해 나갔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삼국지 등에서 복속기사에서 알 수

    있고, 4~6세기에 해당하는 지역 유력자의 고총 고분군들을 통해 그 거점지역을 추론할 수 있다. 종

    래에는 이러한 고총 고분에서 출토되는 신라식 토기와 위세품들의 분포를 통해 지배형태나 위계관

    계 등에대한 연구가집중되었으나, 최근에 와서는지역 고총 고분의성장 과정과배경에 대한 연구,

    개별 지역 고총 고분의 신라 고분으로의 공통성과 특수성을 밝히는 것으로 논의가 확대되고 있다.

    신라와의 역학 관계에서 다양한 지배방식을 취하고 있었던 제 소국이 ‘양식적 선택성’ 혹은 ‘양식적

    선택압’에 따라 어떠한 상호작용과 교역 활동을 했는지가 주요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세기 중엽 이후 진·변한 지역 소국들의 군사력은 서로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

    다. 이 중 이서국의 사로국 침입사례는 소국들의 군사력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이는 이서국이

    지리적 한계로 인해 겪는 폐쇄성을 타개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해석되는데, 이를 통해 당시 교

    환관계에서 지역 간 불균형이 심화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쟁은 종래 세력 확장에 근

    거한 복속 전쟁보다도 철과 소금 등의 생산과 유통을 위한 교역망 확보와 관련된 전쟁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도 있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에서 배제되었던 낙동강 유역의 각종 물자 교역망은 낙동

    4) 김옥순, 2011, “경북 북부지역 토기의 생산체계”, 「의성 금선산 고분군」, 의성조문국박물관·성림문화재연구원. ;정인성,2012, “와질토기의 출현과 역연대(歷年代) 재론”, 「원삼국·삼국시대 역연대론」, 세종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3, 학연문화사

    5) 정인성, 2016, “燕系 鐵器文化의 擴散과 그 背景”, 「영남고고학보」, 74: 45.

  • 낙동강의 고대 문명과 교류·혁신 콘텐츠 연구 9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강 문명 연구의 중요한 새로운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관점은 여러 고고학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우선, 와질토기와 관련된 고고학 연

    구 성과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경북 성주 예산리 3호 고분에서 출토된 단경호이다.

    이 토기는 일반적인 와질토기보다는 소성도가 높다. 그리고 노끈무늬 타날이 관찰되고, 저부에는

    바닥을 둥글게 만들려고 2차 타날한 흔적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와질토기는 낙랑의 단경호와는 형

    태면이나 제작기술적인 면에서 뚜렷이 구분된다. 그것은 1차 타날이 없으며, 어깨에서 무문타날도

    관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낙랑 타날문 단경호와는 다른 토기임이 분명히 확인되는 대목

    이다.

    또한 사천시 늑도 유적에서도 낙랑토기와는 다른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토기 중에는 요동

    지역에서 발견된 토기편과 유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틀빼기(형뜨기)의 흔적인 포흔(布痕)이 관

    찰되는 등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이는 낙랑지역에서는 발견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요동반도 지역

    과 낙동강 유역, 그리고 오키나와 등에서 보고되고 있다.6)

    이러한 낙동강 유역의 와질토기들은 낙랑군 설치 이전의 낙동강 문명을 설명하는 주요한 자료가

    된다. 이 말은 후기 고조선의 토기문화를 수용하고, 이를 자체적으로 완성 시킨 낙동강 유역의 문화

    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낙동강 유역권이 독자적인 문화 혁신을 이룬 또 다른 증거는 철기문화이다. 기원전 2세기 후반이

    되면, 낙동강 유역에서는 돌연 수계를 따라 각 지역에서 철기문화가 형성된다. 이러한 양상은 한반

    도 남부의 여느 지역과 비교해도 특별한 현상이다. 상주·대구·경산·영천·경주·성주 등 낙동강 중상

    류역(域)뿐만 아니라, 창원·밀양 등 하류역(域)과 그 지류에서도 이른 시기의 철기문화가 발견된다.

    더불어 울산 달천 철장을 비롯하여, 기원전 2세기 경의 유적으로판단되는 사천 늑도나 동래 내성에

    서 철기를 만들었던 흔적이 발견된 것은 철기의 생산과 소비가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매우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증거이다.

    또한, 경주 사라리 130호 무덤으로 대표되는 기원후 1세기경 무덤에서는 화폐나 철소재(鐵素材)

    를 사용한 다량의 철기를 큰 무덤 전체 바닥에 깔아 놓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전에 없던

    다량의 부장은 철기가 대량생산체제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며, 권력자 1인이 다량의 철기를 독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또한 울산 달천 철장의 계속되는 개발과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의 본격적인 운영은 철기 대량생산체제의 원동력이 되었다.

    결국 철기 생산 규모의 확대는 낙동강 유역에서 철기의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는상황으로 이어지

    고, 이에 따라 기원후 2세기 중반 경에 이르면 낙동강 권역을 넘어서 그 외부로 철기문화가 확산되

    는 계기가 된다. 이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共給二郡’이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원전 2세기경부터 지속적으로 일어난 낙동강 유역권의 철기 생산과 혁신은

    기원전 108년에 있었던 ‘낙랑군(樂浪郡) 설치’를 기점으로 보았다. 이 역사적 사건은 한반도 남부지

    6) 대구경북학회, 2017, 「낙동강 고대 문명사」.

  • 10 박 승 희

    대구경북연구 제18권 제2호

    역에 중국 한(漢)의 선진적인 철기문화가 확산되어 마침내 철기시대를 개막하는 일련의 과정을 설

    명하는 기준이 되어왔다. 즉 낙동강 유역의 철기문화는 애초에 낙랑군을 통해 한(漢)의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수용한 것이며, 그 바탕 위에서 점차 발전한 것이라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최근 낙랑군 설치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자료들이 낙동강 유역에서 속속 발견되고 있다.7)

    늑도나 동래에서 철기를 제작하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대구 팔달동과 월성동, 경산 임당동에서

    한의 철기와는 다른 계통의 철기들이 발굴되었다. 또한, 낙랑군 군치(郡治)였던 낙랑토성에서의 철

    기 생산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낙랑군 시기는 소형의 주조철기 생산이나 간단한 단야작업 위주의

    의외로 빈약한 생산시스템이었다.8) 이처럼 최근 밝혀지고 있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낙랑군 설치를

    계기로 한반도에 선진적인 철기문화가 정착·발전하였던 것이 아니며, 오히려 낙랑군을 통해 기존의

    철기 생산이 통제되고 쇠락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철기문화의 확산과 정착은 군

    현에 의해 통제되기 이전에 발생한 것이며, 그러한 현상이 현저하게 두드러지는 지역이 바로 낙동

    강 유역권의 제 지역이었다는 사실이다.

    Ⅳ. 낙동강 수운과 교통로

    낙동강 유역권의 수운과 육로가 어떠한 형태로 교통망을 형성했는지는 현재 명확하지 않다.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확인할 수 있고, 하천의 물길은 교통로의 주요 축이었다는 사실

    은 파악된다. 교통로가 당시의 주요 지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국이 입지

    한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고개와 하계망을 따라 길이 이어져 있었음은 분명하다. 고분군을 위치를

    보면, 대부분 낙동강 유역의 대분지 및 지류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의 산간 분지의 하천변 구릉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위치는 초기 철기시대의 소국 분포와 일치한다.

    고대 낙동강 유역권의 교통로는 이러한 소국 간의 교류와 연맹체의 형성, 복속과 병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통로는 고대사회에서는 주어진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통로였을 것이다.

    당시 주요 지역 간의 교통로는 낙동강 유역권을 감싸고 있는 높고 험준한 산지 사이의 고갯길과

    하곡을 따라 이어졌다. 그러므로 이 시기 낙동강은 유역권 내의 지역을 연결하는 대동맥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낙동강의 수로는 고대 소국들 간의 교류와 문화적 상호 관계망

    을 형성하는 물리적 통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대의 낙동강 수로에 대한 문

    헌 자료는 사실 거의 없다.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지리지」 등 고려 이후의 문헌에서 부분적으

    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역추론하는 방법으로 고

    대의 낙동강 수로와 교통로를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7) 정인성, 2008, “‘瓦質土器 樂浪影響說’의 검토”, 「영남고고학보」, 47., ;정인성, 2012, “瓦質土器의 출현과 歷年代 再論”, 「原三國·三國時代 歷年代論」, 세종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3, 학연문화사.

    8) 정인성, 2013, “낙랑군의 철(기)생산”, 「원삼국시대 한반도 철기문화의 제 양상」, 제8회 한국철문화연구회 학술세미나, 철문화연구회. 23쪽.

  • 낙동강의 고대 문명과 교류·혁신 콘텐츠 연구 11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대동여지전도」에는 조선 후기 영남의 산줄기와 하천 등 자연 환경과 주요 취락 및 교통로 등

    인문환경을 표시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하천을 두 줄기와 한줄기로 표시하며 수운으로 이용

    가능한 하천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지만, 대동여지전도는 대략적인 형태까지만 확인된다. 또한, 주요

    고을을 연결하는 도로를 통해 강으로 이어지거나 또는 이를 가로지르는 육로의 흔적도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낙동강 중상류부터는 낙동강 양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도로가 표시되고, 동해안을 따

    라서도 길게 이어진 도로가 확인된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의 고개 중에는 현재는 등산로로만 이용

    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주요한 교통로로 이용된 길들이 많다. 이는 이후 시대까지 소규모 인원과 물

    자의 이동이 이루어져 험로라 하더라도 왕래가 가능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가정은 현재는

    거주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산지에서도 선사 시대 유적이 발견되어, 과거의 교통로와 현재의 교통

    로의 차이를 확인시킨다.9)

    고대의 교통로는 소백산맥과 태백산맥 등 산지 사이의 고개와 산지에서 흘러내린 하천의 하곡을

    따라 이루어졌다. 고개 아래와 하천의 합류점에는 취락이 형성되고 길은 마을을 연결한다. 또한 영

    남지역을 곳곳을 흐르는 낙동강 물길은 수로의 역할을 하고, 양안의 평지를 따라 육로가 이어진다.

    고대의 수운에 대해서는 전하는 자료가 없으나, 고고학 연구나 자료에서 고대 국가의 상당수가

    강 하구나 해안가에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으며, 해양 문화가 발달한 당시 상

    황과 연결해 ‘항구도시국가’의 성격이 강했다는 해석이 제출되기도 한다. 고대 국가가 대부분 만 안

    쪽이나 나루, 포구 등에서 성장하고 교역을 통해서 번창한 점을 기반으로 한 주장이다. 이 주장을

    근거로 낙동강 유역권의 소국이 내륙 한가운데 흐르는 큰강의 옆에 생성된 하항도시 또는 나루국가

    (海洋都市國家)로 해석한다.10) 대동여지도를 통해 상주를 거쳐 안동까지 낙동강 본류와 낙동강의

    주요 지류의 상류부까지 뚜렷하게 2줄로 하천이 표시되어 수운 기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이러

    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낙동강 중상류권의 소국을 나루국가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초기 철기

    시대부터 낙동강은 이미 수로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추정이 가능하다. 이러한 고대 낙동강의 수

    로 기능을 파악할 수있는문헌 자료로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나루에 대한 기록이있다. 「삼국사

    기」에는 황산진(黃山津)과 가혜진(加兮津), 매이포(買利浦, 밀진密津이라고도 함)에 대한 기록이 있

    고,11) 「고려사」에는 가야진(伽倻津), 하풍진(河豊津)과 황둔진(黃芚津)에 대한 내용이 적시되어 있

    다.12)

    「삼국사기」에 황산진은 신라본기의 탈해왕 20년(77) “秋九月 遣兵伐百濟 復取蛙山城 自百濟來居

    者二百餘人 盡殺之(가을 8월, 아찬 길문이 가야 병사를 상대로 황산진 어귀에서 싸워 1천여 명의

    9) 신정일, 2012, 「낙동강의 나루」, 국토.10) 윤명철, 2013, “고대 도시의 해양적 성격(港口都市)에 대한 체계적 검토-고대국가를 대상으로-”, 「동국사학」, 55: 77. ;윤명철, 1995, “한반도 서남해안의 海洋 歷史的 환경에 대한 검토”, 「전주박물관 죽막동유적 학술회의」.

    11) 「삼국사기」신라본기 제1 탈해니사금편과 열전 제1 김유신조에 전한다.12) 「고려사」권 제57 지 제11 지리2에 전한다.

  • 12 박 승 희

    대구경북연구 제18권 제2호

    목을 베었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아 그 공에 대한 상을 주었다.)”라 기록되어 있다. 가혜진과 매이

    포는 열전 김유신조에 선덕왕 13년(644) “庾信爲押梁州軍主 十三年爲蘇判 秋九月 王命爲上將軍 使

    領兵伐百濟加兮城省熱城同火城等七城 大克之 因開加兮之津 乙巳正月歸 未見王 封人急報 百濟大軍

    來 攻我買利浦城 王又拜庾信爲上州將軍 令拒之 庾信聞命卽駕 不見妻子 逆擊百濟軍走之 斬首二千

    級(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있다가 에 소판(蘇判)이 되었다. 가을 9월에 왕이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 성열성․동화성 등 일곱 개의 성을 치게 하니, 유신이 크게 이겼다.

    이로 인하여 가혜의 나루를 개설하였다. 을사년 정월에 돌아와 미처 왕을 뵈옵지도 못하였을 때,

    봉인이 백제의 대군사가 매리포성을 공격한다는 급보를 전하였다. 왕은 다시 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유신은 왕명을 듣자 즉시 말을 몰았다. 처자도 만나지 않고 백제군을 맞받

    아쳐서 쫓아버리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라고 나와 있다.

    황산진은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물금,13) 가혜진은 현재의 경북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에 위치한

    개산진(또는 개포)으로 비정되고, 매이포는 조선시대에 매포(매포진) 또는 멸포라고 불린 경남 창녕

    군 길곡면 오호리와 경남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외봉촌을 연결하는 나루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양주(梁州)와 영산현(靈山縣)의 가야진(伽倻津), 하풍진(河豊津)과 황둔진

    (黃芚津)이 전한다. 가야진(伽倻津)은 양주편에 “有伽倻津, 黃山江 ‘與務安之龍津, 光陽之蟾津, 稱爲

    背流三大江水’(가야진과 황산강 ‘무안(務安)의 용진(龍津), 광양(光陽)의 섬진(蟾津)과 함께 거슬러

    흐르는[背流] 세 개의 큰 강물이라고 일컬었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황둔진(黃芚津)은 “有

    黃芚鎭(황둔진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가야진은 양산군 원동면의 용당 나루터이며, 하풍진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 하풍리에 위치한 나루

    이고, 황둔진은 경남 합천군 초계면 성산리 내촌마을에 위치한 나루이다.14)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기록된 나루 중 중상류부에 위치한 나루는 고령의 가혜진과 예천의 하

    풍진, 합천의 황둔진이며, 하류부 특히 낙동강이 남류하는 양산천과 합류점 부근에 황산진, 가야진

    이 있다.

    고려시대의 낙동강 수운에 대해서는 이 기록 외에 정확히 전해지는 바가 없고, 조선시대에 이르

    러 「세종실록」 지리지(1454)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고문헌에 상세히 전한다.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서는 용군현(현재의 예천군 용궁면)에 하풍진(河豊津), 상주에 낙동진

    (洛東津), 선산에 여차니진(餘次尼津), 인동현(현재 구미시 인동동)의 칠진(漆津), 성주의 동안진(東

    安津)과 무계진(茂溪津). 초계군(현재의 합천군)에 감물니창진(甘勿尼倉津), 의령에 정암진(鼎巖津),

    진성현(현재의 산청군 단성면)의 신안진(新安津), 함안의 울질포진(亐叱浦津), 창원의 주물연진(主

    勿淵津), 김해의 뇌진(磊津) 등 이전 기록에 없던 포구명을 확인할 수 있다.

    13) 물금(勿禁)은 고려시대까지 황산진(黃山津)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낙동강에 자리 잡은 모든 나루가 폐쇄되었던 때도 폐쇄되지 않았다 하여, 금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는 큰 나루였다. 국토지리정보연구원, 2011, 「한국지명유래집 – 경상도편」, 참조.

    14) 전덕재, 2007, “삼국시대 황산진과 가야진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47: 35-75.

  • 낙동강의 고대 문명과 교류·혁신 콘텐츠 연구 13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조선시대의 고문헌 속 수운 기록은 시기별로 점차 증가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낙동

    강 중상류부를 중심으로 안동에 견항진(犬項津), 대구 도호부의 동안진(東安津)·무계진(茂溪津)·달

    천진(達川津), 현풍의 답곡진·마정진, 의령의 우질진(于叱津) 등 이전 기록에 없던 포구명이 나타난

    다. 포구의 증가는 낙동강 수운의 기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대 낙동강 유역에도 기

    록상에서 확인되는 포구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후 기록에 등장하는 포구나 알려지지 않은

    곳곳이 포구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서 처음 확인되는 상주의 낙동진은 낙동강 중상류부에서 조선시

    대에는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는 영남대로를 잇는 최단거리 노선의 결절지였다. 낙동진은 문헌

    기록과 별개로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가장 번성한 나루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도 “조선조 문물

    (文物)의 유통은 수로(水路)를 주로 이용했는데, 세미(稅米)의 경우, 영남지방에서는 낙동강을 이용

    해 상주 낙동진에 모아서, 육로를 이용해 점촌, 문경을 지나고 조령을 넘어 충주 가흥창(可興倉)에

    서 다시 한강 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낙동나루는 조선후기까지만 해

    도 낙동강변에서 가장 큰 나루이며,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수산물의 4대 집산지였다.

    또한, 대구의 화원(花園)에서 고령군 다사면 평리동으로 건너가는 사문진 나루는 개항 이전까지

    동래(부산)·김해 등지의 장삿배가 소금과 여러 가지 물품을 싣고 오던 곳이다. 그 외에도 중하류부

    에는 고령을 지나 합천에 이르면 합천군 덕곡면 밤머리 일대와 현기리 일대에 율지나루가 있었다.

    율지 나루는 조선 중엽 이후 농산물의 집산지로 낙동강 중류의 최대 나루터였다. 낙동강에서 가장

    큰 지류인 남강에는 의령군 의령읍에 정남나루가 있고, 함안을 지나 임해진 나루가 있다. 임해진은

    옛날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창원시 북면 외산리로 건너가는 나루가

    임해진나루였다.15)

    나루는 시기에 따라 주요 지역이 변화되며 신설되거나 폐쇄되기도 했는데, 고대 낙동강 유역권의

    수운은 기록상에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조밀하게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소국을 연결하

    는 곳곳이 나루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낙동강을 중심으로 이동과 이서가 분리된 지역에

    서는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나루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이다. 낙동강의 수로는 고대로부터 생

    활과 정치, 전쟁과 교류의 현장이었다. 낙동강의 고대 문명도 수로를 통한 이동과 교류의 과정 속에

    서 문화혁신의 거점으로 성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Ⅴ. 낙동강 고대 문명과 교류·혁신 콘텐츠의 제안

    낙동강에서 형성된 독창적인 고대 문명이 교류와 혁신의 결과라는 사실은 우리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주지하다시피 낙동강 수로를 중심으로 하는 교류의 교통망은 고대 문명 생성의 원

    15) 신정일, 앞의 책, 2012.

  • 14 박 승 희

    대구경북연구 제18권 제2호

    동력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한 혁신의 문화적 역량은 다양한 고대 낙동강 문명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즉 교류와 혁신의 과정은 지역 문화를 우수한 시대 문화로 성장시키는 주요한 문화

    생성의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낙동강의 교류와 혁신의 문화는 우리 시대의 문화 콘텐츠의 방향성

    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고대 강 문명에 대한 재발견이자 지역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낙동강 고대 문명의 교류를 기반으로 문화혁신의 현장을 새로운 문화

    콘텐츠의 하나로 제안해 보고자 한다.

    낙동강 고대 교류 및 혁신 문화 콘텐츠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목적과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그것은 첫째, 낙동강의 고대 문명을 원(one) 소스(source)로 하는 강 문명 콘텐츠를 통해 지역

    공간과 문화에 대한 재인식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둘째, 낙동강의 가치를 현재화하고, 강문화

    산업의 토대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셋째, 낙동강의 문명사적 가치를 시민들과 함께 교감하고 이를

    통해 강과 마을, 문화를 연결하는 삶의 역사적 제 형태를 재구성해 보는 것이다.

    낙동강 고대 교류·혁신 콘텐츠의 첫 번 째 제안은 ‘낙동강 고대 철기 로드(Iron Road) 구축’이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 초기 철기 로드는 낙동강을 따라 흐르는 고대 철기 문명의 주요 거점

    을 중심으로 문명적 흐름을 구축하는 것으로, 낙동강 유역의 철기 문명 지역과 교통로, 지형 등을

    참고하여 교류와 혁신 철기 문명길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낙동강 고대 철기 로드는 시대별로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목관묘 축조 시

    기, 즉 기원 전 2세기 후반~기원 전 1세기이다, 흔히 초기 철기 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는 단조철기문

    화의 탄생, 중국 연나라는 물론 고조선의 철기문화와는 다른 독창적인 철기문화의 출현이라는 특징

    을 지닌 시기이다. 한편, 이 시기 철기문화의 유통은 낙동강의 수로(본류와 지류)와 재(고개) 및 계

    곡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낙동강 수로와 함께 인근의 고개 등도 함께 철기 로드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고려할 때, 이 시기의 철기 로드는 경주, 건천 등의 주요 철기 유적

    지와 금호강을 따라 영천, 경산, 대구의유적지를 연결해야 하며, 또한 낙동강 본류를 통해 경북북부

    와 남서부로 철기문화가 상호 유통 및 교류한 흔적도 담아야 한다.

    단조철기문화의 탄생과 관련된 지역은 대구 팔달동·월성동, 경산 임당동, 성주 예산리 등이다. 이

    를 연결하는 단조철기기술루터를 우선 개척해야한다다. 단조철기 기술은 철모 및철단검 등무기

    류생산과고강도의농기류보유로이어져각지역이국(國)으로 성장하는중대한계기가된다. 또한

    제형주조철부와판상철부등이등장하는지역도중요한의미를지닌다. 이는 철기의주요 부품들이

    낙동강 수로를 따라안정적으로공급된흔적을의미하는 것으로 철기의 공급과 교류의체계성을 보

    여준다. 관련된 자료나 유구와 유적들은 주로 대구 박물관이나 영남대 박물관 등에 산재해 있다.

    또한, 경주에서 금호강 유역을 통과해 낙동강 본류로 접근하는 경로는 안강에서 고경을 지나 시

    티재(약 400m)를 넘어 영천으로 이어지는 길과 영천에서 아화 고개(약 200m)를 넘어 건천, 경주에

    이르는 길이 있다. 이 중 아화 고개를 통과하는 노선이 더 많이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교통로

    상에 골벌국과 압독국 등 지역의 소국이 있었다. 이 두 소국은 일찍부터 신라와 동맹을 맺으며 신라

  • 낙동강의 고대 문명과 교류·혁신 콘텐츠 연구 15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의 세력권 내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과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초기 철기 시대의 문화적 흔적을 살펴보면, 대략

    아래와 같은 경로를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울산 달천(철산지) 유적지(태화강) → 경주 모화리 → 경주 황성동 유적지→ 경주(건천) 사라리

    유적지→아화고개→영천용전리유적지(금호강) →경산임당유적지→대구봉무동유적지

    (낙동강 본류) → 성주 백전·예산리

    이러한 경로를 구축한 근거는 앞서 살핀 바대로 고고학적으로 제형 주조철부와 판상철부가 각지

    에 공급된 점과 낙동강 수로를 통한 안정적인 철기 공급 체계가 구축된 지역들이기 때문이다. 그리

    고 경주 황성동, 대구 봉무동, 울산 달천 등지의 국산화된 철기의 대량생산과 낙동강을 따라 각지에

    공급되는 낙동강 유역권 교환망 구축 또한 내적인 근거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경주, 영천,

    경산, 대구, 성주로 이어지는 철기 교환 로드 형성은 가능할 것으로 본다.

    한편, 지리학적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태화강과 금호강의 지리적 특성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낙동강 유역권 수로 및 분수계’를 보면, 태화강의 경우, 낙동강 유역권과 분수계를 이루는 동쪽의

    가지산(1240m)․고헌산(1033)․취서산(1059) 등 높은 산지에서 시작된 물을 모아 울산을 지나 동해

    로 유입되는 과정에 태화강이 놓여 있다. 이는 태화강이 낙동강과 동해를 연결하는 주요 공간이라

    는 사실과 철기문화의 교류 거점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태화강의 주요 지류인 동천은 울산

    광역시 북구 농소면의 울산과 경북의 도계에서 발원해 울산∼경주 간 구조곡을 따라 남남동쪽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흘러 하구 부근에서 합류, 동천의 합류점인 하구 일대에는 삼산평야와 병영평야를

    합해 울산평야를 이루다는 점에서 다시 살필 필요가 있다. 평야의 탄생은 강을 통해 교류되거나 연

    결된 철기들이 마을과 국(國)을 이루는 주요한 지리적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금호강 또한 지리적인 측면에서 주요한 지역이다. 낙동강 본류 유역과 함께 낙동강 중류부에서

    가장 핵심 지역은 대구․경산․영천이 자리한 금호강 유역권이다. 최상류부에는 영천이, 중류부에

    는 남쪽 산지를 중심으로 경산이, 남쪽 비슬산(1084m)에서 발원해 금호강에 유입하는 신천 합류점

    인 하류부에는 대구가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은 남북으로 흘러내리는 소백산맥의 동쪽 지역으로 금

    호강과 감천․백천의 유역권의 합류점인 것이다.

    이러한 강과 육로 등을 토대로 고대의 주요 교통로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동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경주∼울산∼동래 간의 교통로(동래 복천동 고분군)와 양산 단층선을 따라 이어지는 경주

    ∼언양∼양산 간 교통로(양산 북정리 고분군), 형산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동서 간 교통로인 경주

    ∼건천∼모화∼영천 간 교통로(영천 완산동 고분군), 형산강 지구대를 따라 이어지는 경주∼안강∼

    포항 간 교통로(영덕 괴시리 고분군)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경주와 영천을 연결하는 교통로는

    낙동강과 이어지는 금호강변(영천∼경산임당∼대구)을 따라 이어지는 축과 북쪽의 신녕을 지나 의

    성 탑리로 이어지는 축이 또 있다. 의성에서는 다시 북으로 안동, 예천, 영주(순흥고분군)로 이어지

  • 16 박 승 희

    대구경북연구 제18권 제2호

    고, 서로는 성주, 선산, 상주 등으로 이어진다.

    이를 신라 왕경 주변의 자연지리적 여건과 함께 고려하면, 왕경으로부터 외곽으로 향하는 교통로

    는 서쪽(건천․영천 방면), 북쪽(안강 방면), 남쪽(언양․양산 방면), 동남쪽(외동․울산 방면), 동쪽

    (양북․감포 방면), 동북쪽(연일 방면), 서북쪽(고경 방면), 서남쪽(청도 방면) 등 여덟 방면으로 나

    눌 수 있다. 이 중 금호강 유역을 따라 건천과 영천을 거쳐 전국의 대읍과 연결되는 왕경서로는 초

    기 철기의 주요 교역 교통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16)

    낙동강 철기 로드의 두 번째 시기는목곽묘 축조 시기로 기원 후 2세기∼4세기 경이다. 이 시기는

    철장검과 대도, 날이 긴 철모 등 장신(長身)의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높은 기술 혁신이 이루어진

    시대이다. 이를 대표하는 지역은 크게 두 지역으로 철기문화 혁신의 중심지이자 생산지라 할 수 있

    다. 그 중심에는 경주 황성동이 있다. 경주 황성동을 중심으로 첫째는 포항 옥성리, 울산 하대·하삼

    정·중산동 지역을 연결하여 동해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 루트는 낙동강 혁신문화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주, 울산, 포항을거점으로 하는 다른 강이나나라들과 철기 교역이이루어진 과정을

    확인하는 루트이다.

    이 시기는 철기 교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철기문화가 가장 활성화되던 시기였다. 금강과

    한강 하류역의 집단들과 낙동강 유역권의 집단들 간 철제 장거리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철기의 혁신

    이 일어나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낙동강 유역권의 철기 생산 기술이 안정되면서 마한, 동예,

    왜 등의 지역으로 수출, 한반도의 모든 수계와 교역망을 형성되었으며, 이는 결국 낙동강의 고대

    문명을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낙동강 철기 문화의 혁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역을

    중심으로 코스를 재구성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경주 황성동 → 포항 옥성리 → 소치재(감포) → 영덕 괴시리 → 울진 덕신리 → 왕피천 →

    한티재(울진) → 반변천(영양, 안동 등) →금강, 한강 등(진천 송두리유적, 오창 학소리유적,

    김포 운영동 유적, 평택 마두리 유적 등)

    낙동강고대문명콘텐츠의 두번째는 ‘낙동강고대 문명길’이다. 이는 낙동강의 고대 유적을 따라

    가는 일종의 박물관 여행이다. 낙동강 유역의 고대 소국들이 독창적인 지역 문화를 형성한 것은 주

    지의 사실이다. 이 소국들은 상호 교류와 연대, 긴장과 갈등을 과정을 거치면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주요 소국들의 독창적인 고대 문명은 낙동강의 교류와 문화

    혁신의 과정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고대 낙동강 소국들의 문화적 흔적들을 교류와 혁신의 문명

    을 탐색한다는 관점에서 역사문화 탐방 코스를 만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지역 박물

    관을 활용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 이들 박물관은 이미 각 지역의 고대 문명을 축적하고 콘텐츠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박물관을 소개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국립대구박물관은 ‘대구·경북지역에서 출토된 유물과 함께 영남지역의 선비문화 및 민속문화의

    16) 정요근, 2011, “통일신라시기의 간선교통로”, 「한국고대사연구」, 63: 68.

  • 낙동강의 고대 문명과 교류·혁신 콘텐츠 연구 17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재현’을 목적으로 1994년에 개관된 국립박물관이다. 고고실과 미술실, 민속실 등 전시장을 갖추고

    있다. 특히, 고고실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물질문화 전시를 통해 고대문화의 발전상을 시

    각적으로 알 수 있게 보여주고 있다. 선사 혹은 고대의 전시품 중에는 배 모양토기와 오리모양토기,

    안장장식, 허리띠, 환두대도, 금귀걸이 등 지역의 우수한 고대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다수 있다.

    한편, 국립대구박물관은 고대국가 관련 전시 콘텐츠를 통해 낙동강 유역의 고대국가가 얼마나 독창

    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첫 번 째가 고대국가 형성기의 유적들이다. 대구

    팔달동과 경산 신대리 유적의 목관묘에서 출토된 두형토기와 우각형파수부호, 주머니호 등 철기문

    화를 대표하는 와질토기의 전시를 통해 이 지역 토기의 발전양상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호형대구

    와 옥제경식 등의 장신구류, 무기와 농기 등의 철기류를 전시하여 당시 낙동강 유역의 작은 정치체

    들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당위성과 그 성장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철기는 단단한 재질 때문에 농기구와 무기 제작에 적합하여 이를 지닌 정치집단은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무력과 문화적 역량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기원 전후부터 약 300년 간 동북아시아의 중요

    한 국가들 중 한반도에서 성장한 국가가 많은 것은 바로 철기문화와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라 부른다. 원삼국시대에는 일상의 도구나 물건들이 철기로 제작되었으며, 굴가

    마를 이용한 단단한 회색 질그릇이 구워졌다. 또한, 국제교류가 활발해져 중국 대륙은 물론 일본열

    도와의 교역이 전면화되면서, 한반도 남부의 철기는 동아시아로 수출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국립대

    구박물관의 원삼국시대 철기문화와 회도문화는 고대 낙동강의 교류와 무역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낙동강 유역권의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삼국시대 콘텐츠이다. 삼국

    시대 낙동강은 경주의 신라권역과 서쪽의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가야권역이 교류와 경쟁을 한 현장

    이었으며, 그 과정에 문화혁신이 진행된 곳이기도 하다. 대구 비산동 고분군과 경산 임당동 고분군,

    의성 탑리 고분군 등에서 출토된 경질토기나 금동관, 마구류, 농공구류 등과 가야권역의 출토 토기

    나 금제이식 등 가야문화 유물은 그 교류와 경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특히, 4세기 이후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맹주로 성장하고, 백제가 일본 및 중국 남부의 국가들을

    연결하는 국제교역망의 주인공이 되면서 이러한 국제질서는 한반도 동남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로국이 낙동강의 동쪽 및 북쪽 지역을 통합하여 신라로 성장하는 한편, 변한의 구야국이 낙동강

    하구에 형성된 국제교역 항을 기반으로 낙동강의 남쪽 및 서쪽 지역의 중심이 되었다. 즉, 동북아시

    아 국제질서와 교역에서 초기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한 소국들의 역할이 주요하게 된 것이다.

    곧 낙동강 유역의 철기문화가 신라와 가야의 성장을 견인하게 된 것이다.

    국립대구박물관은 이러한 초기철기문화로부터 삼한시대의 교류와 문화혁신의 다양한 물증들과

    유적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관련된 유적의 상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특히, 대구와 경산

    지역의 와질 토기와 철기문화를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고대 문화혁신의 증거들이 집적된 곳으로

    낙동강 고대문명길의 주요 코스라 할 수 있다.

  • 18 박 승 희

    대구경북연구 제18권 제2호

    다음은 영남대 박물관이다. 임당지역 고분군의 출토유물을 중심으로 압독국의 유물을 전시한 곳

    이다. 박물관에는 발굴된 임당 지역의 많은 유구와 유물은 경산 지역의 문화발전단계를 파악할 수

    증거일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 나오는 압독국의 문화적 우수성 등 삼국 초기의 고대국가를 연구하

    는데 중요한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유물 중에 대표적인 것은 금제 화살통 장식과 말머리 장식 굽

    다리 사발, 기마문뚜껑 굽다리 사발, 금동관, 은제 허리띠 등이 있다.

    셋째는 의성 조문국박물관이다. 조문국 박물관에는 낙동강 유역의 대표적인 소국이었던 조문국

    의 역사와 선사 시대, 삼한시대, 삼국시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의성 탑리 금동관, 관모, 이식, 나비모양관장식, 각종 마구류, 의성양식 토기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조문국박물관의 나비모양관장식은 조문국을 비롯한 이 지역만의 독창적인 문화적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낙동강 고대 문명길의 또 다른 코스는 시립상주박물관이다. 시립상주박물관에는 사벌면 금흔리

    일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토광묘 유적과 병성동, 지천동, 함창읍 신흥리, 사벌면 화달리 등

    에 위치했던 고분군 출토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벌국과 신라문화 전시관에는 강성했던 사벌국

    의 문화와 경주에서 발흥한 신라세력의 상주지역 진출과 그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박물관과 지역 고분군을 연결하여 낙동강 고대 문명길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고대 문명의 형성과 혁신의 과정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그 유물들을 통해 지역문화의 가치를 재발

    견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는 교류와 혁신의 낙동강 고대 문명에 대한 재발견의 과정이자 지역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Ⅵ. 결 론

    낙동강의 고대 문명은 교류와 혁신의 역사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

    되는 바, 와질토기나 철기의 혁신은 낙동강 유역권의 주요 소국들의 경쟁과 교류를 통한 혁신의 결

    과였다. 그것은 낙동강이라는 수로가 존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낙동강 수로는 물적

    교류와 함께 새로운 고대 초기국가(소국)를 형성하고 성장시키는 물리적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낙동강의 고대 문명은 지역문화의 성장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는 지역 문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자 문화 생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준다. 문화

    상호성에 기반한 교류의 과정은 문화혁신과 사회적 대변혁의 현장으로서 낙동강의 가치를 재발견

    한 것이다. 낙동강 고대 문명 콘텐츠는 그런 의미에서 교류와 혁신의 콘텐츠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에서 제시한 ‘낙동강 철기 로드 콘텐츠’와 ‘낙동강 고대 문명길 콘텐츠’는 교류와 혁신의 문화사를

    공부하는 과정이자 지역문화의 가능성과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이다.

    본 논문은 낙동강의 문명적 가치를 고고학적 물증을기반으로 인류학과 지리학적 해석을 차용(借

  • 낙동강의 고대 문명과 교류·혁신 콘텐츠 연구 19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用)하여 재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우선, 고고학적 유적을 토대로 낙동강 유역권의 문화적 재생산과

    교류 및 경쟁의 문화생성적 관점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학의 문화상호적 관점을 통

    해 문화 발생의 흔적을 고대 낙동강에서 찾아보았다. 지리학적 조건이 교류와 교통의 흐름을 형성

    하는 절대적인 틀이 된다는 점에서 낙동강의 지리적 위상 또한 각별한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논문

    에서는 낙동강의 고대 문화를 찾아가는 교육 콘텐츠를 제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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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접수일:2019. 06. 17, 심사완료일:2019. 07. 12, 최종원고:2019. 07.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