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군정실기를 통해 본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 · 2017-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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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군정실기를 통해 본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 박 준 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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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오군정실기를 통해 본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

    박 준 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의 재인식 61

    갑오군정실기를 통해 본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1)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1. 머리말

    2. 초기 동학과 원주 농민군의 활동

    3. 강릉부 점령

    4. 정선·평창 지역 전투

    5. 홍천 지역 전투

    6. 맺음말

    1. 머리말

    1894년 9월부터 본격화 된 강원도 농민군 활동의 계기는 제1차 농민전쟁의

    전개 과정과 집강소기 전라도 농민군의 활동 경험, 정부의 개혁조치 후퇴, 9월

    18일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단의 기포령이었다. 집강소가 설립된 지역의

    농민군 활동 소식은 강원도에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농민전쟁의 수습책으로 실

    시된 정부의 개혁은 후퇴하고 친일 내각을 앞세운 일본의 내정 간섭이 드러나면

    서, 농민들의 불만과 위기감이 높아갔다. 농민들은 지배층의 욕심으로 외세가

    조선 땅에 들어왔다고 인식하고, 지배층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

    냈다. 각지에서 농민들은 계속 폐정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동안 자제하던 양반과

    부민들에 대한 투쟁의 강도도 다시 높이기 시작했다. 강원도에서도 동학 조직을

    매개로 움직이던 농민들이 8월부터 드러내놓고 활동하기 시작했고 11월까지 싸

    움을 계속했다.

    1894년 당시 강원도 행정구역은 강릉대도호부, 원주목, 양양·삼척·회양·춘천·

    철원·영월·이천의 7개 도호부, 고성·간성·통천·평해·평창의 6개 군, 흡곡·울진·금

    성·김화·안협·평강·낭천·양구·인제·홍천·횡성의 11개현이었다. 강원도에서 농민군

    1) 이 글은 필자가 쓴 (1955, 새길)을 토대로 1999년 6월 4일 사단법인 강원향토문화연구회에서 주관한 ‘洪川 豊岩里 東學革命의 再照明’ 토론에서 발표한 미간행 글 에 와 여타 자료를 보완하여 전면 재구성한 것이다. 인용한 자료가 , 에 번역되어 실려 있는 경우는 다시 , 로 전거를 밝혔다.

  • 62 2016년 동학농민혁명 정기학술대회

    이 활동한 지역은 평창·정선·영월·강릉·삼척·홍천·원주·횡성·양양·기린·간성·인제·

    춘천·김화·금성 등지였다. 강원도에 전체 고을의 반 이상 지역에서 농민군이 활

    동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평창·정선·영월·강릉 삼척·홍천·원주 등지에서 활동이

    활발하였다.

    2. 초기 동학과 원주 농민군의 활동

    강원도 지역 농민군 활동의 주요 기반은 동학 조직이었다. 강원도 지방에 동

    학이 포교되는 계기는 최제우와 함께 체포되었던 이경화(李慶化)가 1864년 영월로 정배됨으로써 마련되었다. 그는 1864년 3월 무렵 정배된 영월 소밀원을 중

    심으로 포교를 하였다. 1870년대 후반 동학교단은 영월·정선 등 영서지방의 비

    밀 포교지를 중심으로 교단의 위기를 극복하고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단의 지도자와 교도들의 피신처 역할을 했던

    영월의 직동과 소밀원, 정선 고한의 정암사와 적조암, 정선의 무은담은 동학재

    건의 중심지 노릇을 한 곳이었다. 1880년 5월에는 인제 갑둔리에 각판소를 설

    치하고 한 달가량 작업을 벌여 동경대전 백 권을 간행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인제 천동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최시형이 정선에 머물던 1872년-73년 무은담 시절, 집과 식량을 제공하여 동

    학의 재기를 적극적으로 도운 유시헌의 본명은 유인상이고 자가 道元이었다. 그는 1894년 11월에 ‘비괴’로 지목되어 충청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성두한과

    함께 특별히 체포령이 내려질 정도로 강원도 평창 정선 지역 농민군 활동에 적

    극 참가하였다. 정선의 ‘비괴’로 지칭되던 劉道源은 道元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그의 차남 유학종도 농민군에 참가하여 활동하다 영월에서 체포되어 포살되었

    다.2)

    1876년경 인제 접주로 활동하던 김계원(金啓元)은 1879년 3월 인제의 김현수 집에서 해월이 치성제를 지낼 때 장춘보 · 김경식 · 김윤회 등과 함께 참가했

    다.3) 김계원은 이 제사에서 초헌을 담당했다.4) 초기 동학에 참가하여 인제에서

    활동하던 김계원은 1894년에는 나이가 많아 투쟁의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으나

    인제 · 양구 쪽에서 활동하다 1894년 말 쯤 양구에서 체포당한 것으로 보인다.5)

    2) 박맹수, 164쪽3) (국역총서11, 410쪽), (국역총서13, 248쪽)4) 5) 12월 13일. 소모관 정준시 보고. “12월 1일 양구에 도착하였더니 비괴 김계원(金桂元)이 (사람들을) 동학에 물들게 한지가 10여 년이 자났는데도 아직도 배반하지 않고, 나쁜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의 재인식 63

    그의 거주지는 인제 남면 고달동으로 인제에서도 양구와 가까운 곳이었다.

    1895년 63세의 나이로 고등재판소에서 “해당 지방에서 비류와 내통하여 인심을

    어지럽힌다고 하기에 본부의 재판소에 잡아와서 특별히 심문을 하였더니, 피고

    가 위의 사건을 함부로 행한 증거가 명확하였다”하여 장형 100대에 3,000리 유

    리의 형벌을 선고 받았다.6)

    1893년 보은집회 때 강원도에서는 이원팔(李元八: 또는 李哲雨)이 관동 대접주로 임명되었다. 이원팔은 1866년 10월 최시형이 최제우의 생일 기일 제사 비

    용을 마련하기 위한 계를 만들 때 김경화, 김사현, 유성원, 김용여, 임일조, 구일

    선, 신성우, 정창국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7). 강원도 농민군 지도자들 가운데 일

    찍이 동학과 관례를 맺고 있었다. 1892년 3월에는 정선 갈래산 적조암에서 수

    련하였다8). 적조암은 해월 최시형이 1872년 10월부터 49일 동안 수련한 장소

    이며, 최시형은 1887년 3월에 서인주 · 손천민과 다시 수련하였던 곳이기도 하

    다. 최시형의 적조암 수련 때 식량과 경비는 정선 무은담의 유시헌이 조달하였

    다. 이원팔이나 유시헌 모두 초기 동학 활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보아 이원팔

    이 적조암에서 수련할 때 정선접주 유시헌과 긴밀한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이원팔은 1893년 3월 10일 최시형이 충청도 청산군 포전리 김연국의 집에서

    교조 최제우의 ‘조난향례’를 거행할 때도 김연국, 손병희, 박용호(박인호), 이관

    영, 권재조, 권병덕, 임정준과 함께 참가하였다9). 곧 이어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보은집회에서 이원팔은 관동 대접주로 임명되었다. 이때 임명된 대접주는 충경

    대접주 임규호, 청의대접주 손천민, 충의대접주 손병희, 보은대접주 김연국, 문

    청대접주 임정재, 관서대접주 이용구, 옥의대접주 박석규, 호남대접주 남계천,

    상공대접주 이관영, 서호대접주 서장옥 등이었다. 보은집회 때 강원도에서는 원

    주접에서 200여 명이 참여하였다.10)

    1893년 10월 해월 최시형이 교단조직을 개편할 때, 강원도에는 홍천에 차기

    석 포, 인제에 김치운 포소를 두었다.11) 9월 18일 최시형의 기포령 이후 강원

    도에서 기포한 지도자들로 거명되는 인물은 교단 측 기록을 보면 원주의 이화경

    (李和卿)· 임순화(林淳化 또는 林淳灝)· 신택우(申澤雨), 횡성의 윤면호(尹冕鎬), 홍천마음을 품은 부류들이 많았다”6) (국역총서12, 209쪽)7) (국역총서13, 221쪽)8) 박맹수, (2011, 모시는사람들, 170쪽)9) , , 10) (국역총서1, 46쪽)11) (국역총서11,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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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차기석(車基錫)· 심상현(沈相賢)· 오창섭(吳昌燮), 인제 김치운 등이었다.12) 1894년 원주지역 농민군들이 강원도 지역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 거의 드러

    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강원도 이외 지역에서 몇몇 인물들의 활동을 볼 수 있

    다. 원주의 ‘匪魁(비괴)’ 김화보(金化甫)나 접주 의희종(李喜鍾)이 그런 예이다. 김화보는 이천접주 이정오(李正五)와 경기도 지역에서 활동였다.13) 박학종(朴學宗)의 집을 접소로 삼아 (金化甫)는 교장(敎長)으로 활동하면서 장우근(張友根)· 박삼석(朴三石)· 김기순(金己順)· 김진해(金辰亥)· 김점복(金占卜)· 손재규(孫在圭)· 안재풍(安在豊) 등 7명을 입도시켰다. 김화보는 이정오와 함께 지평현감 맹영재에게 잡혀 10월 18일에 지평현 홍문(紅門) 밖에서 목숨을 잃었다.14) 원주 동도리 접주 이희종은 음성 팔성리 출신으로 보은에서 수접주로 활동하

    던 이기영은 제접 접주 정식 등과 함께 3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제천·단양

    ·영춘에서 활동하였으며, 영월·평창·정선으로 가서 강원도 농민군과 함께 11월

    초 정선-평창 싸움에도 참가하였다. 이들은 9월 경 일본군을 습격하여 충주 목

    계에서 일본병사 2명, 제천 화암리에서 1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5)

    관동대접주 이원팔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은 경상도 예천 농민군의

    활동이다. 강원도 춘천 사람으로 1893년 3월에 예천 소야에 접을 설치하고

    ‘관동 수접주’로 자칭하던 최맹순은 8월 20일 충청도·강원도·경상도의 각

    접소에 통문을 돌려 상주·이정 소야 등지에서 큰 회합을 갖고 장차 읍을 치려고

    도모하였다16). 8월 21일에는 ‘관동대접’과 상북·용궁·충경·예천·안동·풍기·영천·

    상주·함창·문경·단양·청풍 등 13명의 접주가 모여 회합을 하고, 예천 집강소에

    통문을 보냈다17). ‘관동대접’이 관동 대접주 이원팔을 지칭한다면 그는 9월 18

    일 최시형의 기포령이 있기 전 8월 하순에 충청도 경상도 세력과 연계하여 활

    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이후 이원팔의 행적은 드러나지 않으나「토비대

    략」에는 12월 18일 보은 종곡전투에서 대접주 임국호· 김군오· 정대춘과 함께 목

    숨을 잃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8) 최시형의 기포령 이후 손병희 등 북접의 주

    력과 공주 전투에 참가하고 퇴각하면서 최시형 등과 보은 종곡전투에 이르기까

    지 공동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원팔이 종곡전투에서 목숨을 잃었

    12) , , , 13) (국역총서9, 72쪽).14) 10월 21일15) 같은 책, 11월 20일, 11월 23일16) (국역총서3, 287쪽)17) (국역총서9, 289쪽)18) (국역총서3, 411쪽)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의 재인식 65

    다는 토비대략의 기록은 다른 인물을 오인한 것이었다. 이원팔은 살아남아 1895년 해월 최시형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1896년에는 보은 갈항리에서

    부인과 살고 있었다.19)

    3. 강릉부 점령

    1894년 여름부터 원주· 영월· 평창· 정선 등 4읍에서는 농민군이 곳곳에 접을 설

    치하면서 세력을 결집하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20) 이즈음, 평창에 살던 오덕보

    는 8월에 농민군을 이끌고 강릉부 연곡 신리면으로 가서 접을 설치하고 활동하

    였다.21) 그가 강릉 신리로 들어오기 이전 7월에 신리면에서는 촌민들이 모여

    화적을 방비할 뜻으로 한 집에 1명씩 창과 칼을 들고 점고․검열한 일이 있었다.22) 이미 7월에 평창 쪽 농민군들의 움직임이 있었고, 그런 정황이 알려지면

    서 방비책을 마련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8월 20일경에는 강릉부 대화면에서

    농민군이 김장수의 집을 헐고 재산을 빼앗았으며, 대관령을 넘어 강릉부로 진격

    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23) 강릉부 정동면 선교의 승지 이회원이 성묘하러

    강릉에 내려왔다 대관령이 막혀 서울로 못 올라갈 정도로 대관령과 서쪽은 이미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8월 25일 이회원은 자기 집 마당에 정동면의

    장정을 모아 무기를 검열하면서 농민군의 진출에 대비하였다.24) 영서의 농민군

    에게도 이회원의 동향이 알려졌다.

    8월 중순 무렵부터 평창 쪽에 결집해 있던 영월과 평창·정선 등 5개 읍의 농

    민군 수천 명이 9월 들어 공관 상태의 강릉을 향하여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영

    월·평창·정선 외에 나머지 2개 읍은 “호중의 내군인 제천과 청주 등지의 비도와

    영동산골의 영월과 평창의 비도들이 합세하니 1,000명이나 되었다”라고 하였듯

    이 제천과 청주의 농민군들이 강릉부 점령에 합세한 것이다. 강릉부로 진출한

    농민군은 강원도 영서지방과 충청도 제천·청주의 농민군 연합부대였던 셈이다. 강

    릉부 대화면 모로치를 넘어 진부면에 도착한 농민군은 각지로 돌아다니며 포총,

    창과 칼, 미투리(麻鞋)를 징발하여 무기와 군수를 보충하였다.25) 9월 3일 농민19) 20) (국역총서4, 389쪽).21) 같은 자료 439쪽, 450쪽. 오덕보가 접을 설치하고 활동한 신리 연곡 양면은 당시 강릉부 관할로

    지 금의 강릉과 주문진 사이의 소금강 계곡 연곡천 하류에 있었다. 22) (국역총서4, 472쪽)23) 같은 자료 471쪽. 24) 같은 자료, 472쪽.25) 같은 자료, 473쪽.

  • 66 2016년 동학농민혁명 정기학술대회

    군은 대관령을 넘어 구산역에서 하루 밤을 잤다. 9월 4일 오전, 천여 명이 넘는

    농민군 본대가 강릉부 관아를 점거하였다. 전라도 쪽 전봉준 세력이 집강소 체

    제를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9월 10일 무렵이나, 최시형이 9월 18일 기포령을

    내리고 북접 교단지도부가 활동에 나선 때보다 보름여 앞선 때였다.

    농민군이 행군할 때 지휘부는 말이나 가마를 탔으며 나머지는 13자 주문을

    외우면서 걸었다.26) 농민군은 자기가 속한 접 단위로 움직였다.27) 농민군이 대

    관령을 넘어 강릉부를 넘어 오는 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대열에 합류하였

    다.28) 별 저항을 받지 않고 강릉부를 점령한 농민군은 관아와 점막에 나누어 머

    물렀다. 강릉 관아의 이서배들은 각 촌의 요호에게 쌀과 돈을 거두어 점막에 머

    물고 있는 농민군 1명에 쌀 한 되씩을 나누어 주었으며, 소와 술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서배들의 행동은 농민군에 호응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위세에 눌린

    나머지 시간을 벌어 기회를 엿보려는 의도였다. 9월 4일 밤에 농민군 후발대 수

    백 명이 구산역 쪽에서 내려와 합류하였다.29)

    9월 5일, 농민군은 강릉부 관아 동문에 “삼정의 폐막을 고치고 보군안민한다”

    라는 방문을 내걸었다30). 그리고 각 마을의 두민들을 불러 모아 삼정을 삭감하

    겠다고 선포하였다. 요호라 불리는 부자들을 잡아들여 토지와 재산 · 전답문서를

    빼앗고, 수탈을 일삼던 이서배들을 잡아 족쳤으며, 민간의 송사를 처리하였

    다.31) 농민군이 강릉부를 점령하였을 때 옥가에 살고 있던 사탕 파는 최가(崔哥)라는 인물은 자신에 집에 접을 마련하고 강을 벌였다. 2-3일 사이에 300여 명이 여기에 참여했다.32) 농민군이 활동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새로운 접이 만들

    어지고 동조자가 늘어나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9월 6일, 농민군은 다음날 영동일대의 최대 지주였던 강릉부 정동면 선교의

    이회원 집을 친 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때 강릉부의 이서배들은 겉으로는 농민

    군에 호응하는 척하면서 반농민군 세력을 결집하여 야습할 계획을 세웠다. 읍리

    26) 같은 자료, 473쪽.27) (국역총서4, 399쪽) “그들이 말하는 접의 이름이 각각 달라서 도착한 순서를 따지고 서로 적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비가 어수선합니다”28) (국역총서4, 475쪽) “마을에서 항산이 없는 무뢰배들은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 하고, 지각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징험할 수 있는 신비한 술법이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양반에게 눌린 분노가 있어도 지체가 낮아 펴지 못한 자나 남의 재물을 빼앗을 마음이 있으나 재주가 모자라서 빼앗기 어려운 자도 스스로 운수가 형통하리라 말하며 다투어 지름길을 찾아 몰려들었다.”29) (국역총서4, 475쪽)30) 같은 자료, 475쪽.31) (국역총서4, 390쪽, 399쪽) 32) (국역총서4, 476)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의 재인식 67

    정시중과 최희민은 농민군들의 동향과 이서배들의 야습계획을 이회원에게 알렸

    다. 이회원은 각 촌에 통지하여 사람을 불러 모아 야습에 동조하기로 하고, 백

    미 100말과 돈 300꾸러미를 농민군에게 보냈다.33) 농민군을 안심시켜 경계를

    풀고 선교를 칠 계획을 늦추려는 교묘한 술책이었다. 9월 7일 비가 쏟아지는 늦

    은 저녁 특별한 경계 없이 잠자리에 들었던 농민군은 어둠 속에서 반농민군의

    습격을 받았다. 방심했던 농민군은 제대로 반격하지도 못한 채 대관령을 넘어

    평창 쪽으로 퇴각하였다. 농민군은 20여명이 목숨을 잃고 총 7자루, 창 157자

    루, 말 3필을 빼앗겼다.34)

    강릉부 점령을 주도한 농민군 지도자들은 평창 전좌수 이치택(李致澤), 지관(地官) 권(權) 아무개, 진사 박재회(朴載會), 이름을 알 수 없는 영월의 나교장(羅敎長), 삼척의 황찰방(黃察訪), 정산 여량역의 지왈길(池曰吉), 강릉부 대화면 김상오(金相五, 구도미거), 공계정(孔啓正, 거사전거), 김순길(金順吉, 안미거), 손영팔(孫永八, 계촌거) 등이었다.35) 진사 박재회는 본래 강릉사람으로 당시는 평창에 살면서 농민군을 지도했던 진사 박재호와 같은 인물로 보인다. 강릉 사

    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강릉부를 점거 했을 때 “요호를 두루 찾아가서 협

    박하거나 회유하여 몰래 돈과 재물을 토색질” 할 수 있었다36). 대화면의 김상오

    는 접장으로 자칭했다고 한다.37) 이들은 접장을 칭한 김상오를 빼면 전 좌수 ·지

    관·진사·교장·찰방·역원 출신으로 지방의 유력 신분들이었다. 강릉부를 점령할 때 제

    천과 청주에서 참여한 농민군 지도자들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다.

    9월 26일 정부에서는 공관상태인 강릉부사에 이회원을 임명하고 농민군에 대

    한 방비와 토벌책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도록 하였다.38) 10월 22일 관동 소모사

    를 겸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10월 초에는 횡성현감 유동근(柳東根)에게 토포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횡성 출신 의정부 주사 정준시(鄭駿時)를 관동 소모관으로 임명하였다.39)

    4. 정선·평창 지역 전투

    강릉부를 점령했다 퇴각한 농민군은 9월과 10월 평창·정선·영월에서 활동하면

    33) (국역총서4, 476쪽)34) 같은 자료, 477쪽..(국역총서4, 400쪽)35) (국역총서4, 397쪽, 399쪽)36) (국역총서4, 475쪽)37) 위와 같음. 38) 갑오년 9월 26일.39) 10월 2일, 10월 7일.

  • 68 2016년 동학농민혁명 정기학술대회

    서 다시 강릉부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9월 26일자 보고에 따르면 “강릉부 대

    화면 구도미거 김상오, 거사전거 공계정, 안미거 김순길, 계촌거 손영팔, 평창진

    사 박재희 등이 동도를 칭하고 강릉부에서 쫓겨난 데 원망을 품고 도당을 모으

    고 포수를 불러들여 장차 영동을 구토하여 복수한다고 할 뿐 아니라 영동인이

    왕래할 수 없고, 진상 상납과 각양 문서를 주고 받을 수 없다. 또 강릉부에서

    목숨을 잃은 영월 평창 정선 3읍의 족척도 합류하고 있다”라고 하였다.40)

    강릉에서는 퇴각하였으나 농민군은 9월부터 10월까지 평창·정선을 점령한 상

    태였다. 이즈음 관동 수접주 최맹순이 예천에서 패한 뒤 평창으로 왔다. 평창접

    소에 머물던 최맹순은 평창에서 100명 정도의 농민군을 이끌고 다시 예천 돌아

    가 10월 17일에 적성리를 습격하였다.41)

    10월 하순 제천, 청주의 농민군과 연합한 영월 평창의 농민군 수천 명이 정선

    관아를 점령하였다. 영월 평창의 농민군이 충청도 세력과 연합하는 데 핵심 역

    할을 한 인물은 평창 북면 접주 이문보였다. 그는 호서의 4개 군에서 5천여 명

    의 농민군을 강원도 쪽으로 이끌어 들였다.42)

    충청도 쪽 농민군의 참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청산 접주로 유명한 성

    두환(成斗煥)이다. 충청도 영춘에서 민보군을 조직하여 성두환 휘하의 농민군 토벌에 나섰던 유생 정운경의 집안에 보존되어 왔던 고문서를 보면 성두환을 중

    심으로 하는 농민군은 “영월·평창·정선의 3개 읍의 무기를 빼앗고, 평창에 주둔하

    여 군사를 풀어 사방을 약탈해서 거두어들이니 지나가는 곳마다 전멸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라고 하였다.43) 영월 평창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정선 싸움에 나섰

    던 충청도 농민군이 성두환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두환의 농민군이 강원

    도로 진출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성두환은 9월 27일 밤 충주 덕산에서 일본군에

    게 그의 3촌과 4촌인 성운한(成雲漢)·전원여(全元汝) 및 이름을 알 수 없는 박가(朴哥) 등 모두 4인을 잃었다44). 목숨을 건진 성두환은 10월 23일 농민군 1

    40) (국역총서4, 397쪽)41) (국역총서3, 325쪽). 申榮祐, 「1894年 嶺南 醴泉의 農民軍과 保守執綱所」, 東方學志 44집, 198442) 소무관 정준시는 11월 8일 체포한 “평창(平昌) 북면(北面)의 접주(接主) 이문보(李文甫)는 동학의 포덕접주(布德接主)로서 제반 행패(行悖)는 이루 손꼽아 셀 수 없이 많고, 호서(湖西)의 4개 군에

    서 비류 5천여 명을 꾀어서 들여와 이처럼 큰 변란을 일으켰으니, 그가 한 짓을 따져보면 죄가 거괴

    (巨魁) 보다 더 큽니다. 이에 군민(軍民)들을 크게 모아서 그 자리에서 효수(梟首)하고 경계(警戒)를

    보였습니다”고 하였다( 11월 23일.)43) (국역총서6, 342쪽) 44) 10월 7일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의 재인식 69

    만여 명을 이끌고 청풍읍 서창(西倉)에 둔취(屯聚)했다가 충주(忠州)로 옮겨갔다.45) 성두환이 강원도로 넘어 온 것은 그 이후 일 것이다.

    농민군이 정선 관아를 점령할 때 정선 군수는 이미 10월 20일 경 서울로 도

    망친 상태였다. 농민군은 정선관아를 점령한 뒤 이방의 목을 베고, 강릉부로 다

    시 점령하여 9월의 복수를 하겠다고 별렀다.46)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 사이

    영월 정선의 농민군은 수천여 명으로, 정선읍에 모인 농민군 수가 3천여 명, 평

    창 후평에 모인 농민군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47)

    강릉부를 다시 점령할 계획을 세웠던 평창 정선의 농민군은 보수 민보군의 반

    격과 11월 3일 파견되어 내려온 원주의 순영 중군, 일본병의 토벌에 의해 뜻을

    이루기 어렵게 되었다. ‘민보군’의 성격이 강한 지방 토벌군에 비해 11월 3일

    내려온 원주 순영중군과 일본군 2개 중대는 훈련된 군대였다. 이때 함께 온 소

    모관 정준시는 횡성 일대의 농민군 토벌을 끝낸 상태였다.

    일본군이 강원도에 파견된 것은 농민군의 활동이 함경도 쪽으로 번져 러시아

    에 출병의 구실을 주는 것을 방비하려는 의도였다.48) 일본은 전라도 · 충청도의

    농민군이 강원 함경 쪽으로 도주하는 것을 차단하고 전라도·충청도의 농민군을

    서남 방면으로 몰아붙여 포위공격하려는 방책을 세웠다.49)

    11월 5일 평창의 농민군 1만여 명은, 11월 1일 원주를 떠나 횡성 강릉을 거쳐

    온 순영 중군(巡營中軍)과 포군(砲軍), 일본군과 맞서 오시(午時: 오전11시30분~오후1시30분)부터 신시(申時: 오후3시30분~오후5시30분)까지 치열하게 싸웠으나 100명이 희생당하고 120여 명이 사로잡혔다.50) 충청도 지방의 농민군과

    연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평창 접주 이문보(李文甫) 등 5명이 사로잡혀 목숨을 잃었으며, 1만여 명의 농민군이 각지로 흩어졌다.51) 이 때 정선군의 신

    정숙·남복흥·이상선도 소모병에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52) 평창에서 패배한 농민

    군 가운데 수백 명은 대오를 이루어 영남지방으로 떠났다53).

    45) 11월 22일46) (국역총서4, 485쪽)47) (국역총서4, 404쪽)48) , 2, 機密送第79號, 국사편찬위원회 번역본, 248-249

    쪽.49) 1, (48) 공주구원요청과 강원.함경.경상도방면으로의 적도침입 경고,

    (49) 東路로의 1개중대 증파문제, (52) 동로로의 일개 중대 증파통고, 164-167쪽 참조. 50) 11월 23일. 51) (국역총서4, 430쪽)52) > 11월 23일.53) 11월 24일. “혹은 5,6,7 명, 혹은 십수 12, 3명씩 몰래 산골짜기로 다니면

  • 70 2016년 동학농민혁명 정기학술대회

    11월 6일 정선 여량의 농민군은 강릉의 중군 이진석이 이끄는 토벌군과 접전

    하여 10여명이 목숨을 잃고 이중집 등 5명은 붙잡혔다. 농민군 가옥 70여호도

    토벌군에 의해 불타버렸다.54) 이중집은 11월 22일 강릉 교장에서 포살당했다.55)

    영월 평창 정선의 농민군 가운데 일부는 토벌대에 밀려 11월 중순 이후 삼척

    상하 장면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56) 11월 25일에는 강릉부를 점령하는 데 참

    가했던 정선 여량의 농민군 지도자 지왈길이 잡혀 효수 당했다.57)

    한편 11월 11일 강릉부에서는 임계면에 유진하고 있는 중군에게 전령을 보내

    포수 장수 중에서 정병 100여명을 인솔하고 정선에 있는 일본군과 힘을 합해

    농민군을 토벌하라고 하면서, “비괴 성두환(成斗煥)과 유도원(劉道元) 등은 기한 내에 뒤를 밟아 잡아들여 뒷날의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58)

    평창에서 전투에서 패배한 뒤 성두환은 다시 충청도로 돌아왔다. 11월 25일

    충주 적곡 성두환의 거주지가 제천의 ‘창의유학’ 서상무 등 194명의 ‘민보

    군’에게 포위되어 그의 아버지 성종연이 잡혔고, 그 뒤 성두환은 스스로 관아에

    출두하여 잡혔다.59) 성두환은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1895년 3월 충청도

    “4개 산군 지방에서 무리를 모아 관고의 군물을 약탈하고 민간의 돈과 곡식을

    빼앗았으며 관정이나 마을에서 소요를 일으켜 더욱 혼란스럽게 해서 분수와 의

    리를 헤쳐 그 끝이 없다”라는 죄목으로 전봉준 · 손화중 · 최경선 등과 함께 사형

    당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60)

    5. 홍천 지역 전투

    홍천에서는 9월 중에 고석주(高錫柱) · 이희일(李熙一) · 신창희(申昌熙)가 이끄는 지평현의 비도 수백 명이 홍천에 접을 설치하여 활동하고 있었다.61) 지평현 농

    민들이 왜 홍천에 접을 설치하였는지, 접을 설치한 곳이 어느 곳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갑오군정실기는 이들이 접을 설치한 곳이 옛 홍천현 감물악면, 현재

    서 며칠 사이에 거의 수 백명을 모아가지고 곧바로 영남(嶺南)으로 떠났다”(영춘현감 신긍휴 첩보)

    54) (국역총서4, 445쪽)55) (국역총서4, 488쪽)56) (국역총서4, 439쪽)57) (국역총서4, 446쪽). 에는 여량 주민들이 사로잡힌 지왈길을 11월

    23일 목 벤 것으로 나온다(국역총서4, 488쪽) 58) 같은 자료, 429쪽. 59) 12월 20일60) (국역총서12, 185쪽)61) (국역총서7, 367쪽)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의 재인식 71

    홍천군 서면 필곡과 팔봉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필곡과 팔봉은 홍천과 지평의

    접경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필곡은 현재 서면 두미리에 있다. 두미리는 감묵악

    면의 두메라 하여 ‘두미’ 또는 ‘두미동’이라 불렸는데, 1916년 행정구역 개편 때

    덕거리· 됫말· 붓고지· 양지말· 웃말· 오릿골· 관사터를 합하여 두미리가 되었다. 필곡(筆谷)은 서당이 있어 붓골이라 부르던 이름이 변하여 붓구지· 붓고지· 부구지로 불린다.62) 필곡에 있는 관사 터가 예전에 지평읍의 관사 자리라는 이야기가 전해지

    는 것을 보면 필곡은 홍천에 있지만 역사 문화적으로 오히려 지평 쪽에 가깝다

    고 볼 수 있다. 지평에서 보았을 때 필봉이 팔봉보다는 가깝다. 지평에서는 필

    곡을 거쳐 팔봉을 가야 한다.

    홍천의 팔봉과 필곡에 접을 설치한 동도(東徒) 수백 명이 “겁략하고 잔학을 저지르는 폐해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지평현에서는 관포군(官砲軍) 20 명과 사포수(私砲手) 300여 명으로 농민군을 지키도록 하고, 상동면(上東面)에 사는 전 감역(前 監役) 맹영재(孟英在)를 부약장(副約長)으로 삼아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9월 12일 필봉에서 맹영재가 거느린 관포군과 사포군 100

    여 명에게 김철원(金鐵原) 등 10명을 사로잡혔다. 맹영재는 김철원 등 3명을 향도(嚮導)로 삼아 팔봉으로 향하였다. 팔봉의 농민군 지도자들인 고석주(高錫柱)· 이희일(李熙一)·신창희(申昌喜) 3명이 사로잡혀 고석주는 참수 당하고 이희일과 신창희는 포살 당했다. 5명은 총이나 돌을 맞아 죽었다. 지도자를 잃은 농민군

    은 창 58자루를 빼앗기고 사방으로 흩어졌다.63) 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맹영재의 토벌대 포군 김백선이 부상을 입었다. 맹영재는 홍천 필봉과 팔봉의

    농민군 토벌한 공으로 9월 26일 기전 소모관에, 9월 29일에는 지평 현감에 임

    명되었다.64) 필봉과 팔봉의 농민군은 지역이나 구성으로 보아 홍천 내면의 차기

    석 접소로 갔을 가능성은 적다. 접소를 잃은 지평 농민군은 경기도의 다른 지역

    농민군이 그렇듯이 충주 황산충의포 도소쪽으로 옮겨갔다.65)

    홍천 접주로 유명한 차기석이 이끄는 1,000여 명의 농민군은 오대산 서쪽 깊

    은 산자락인 홍천군 내면(당시는 강릉부에 속해 있었음)을 근거지로 삼고 세를

    떨치고 있었다. “오대산이 10년 동안 적의 소굴이 된다는 정감록의 말을 누가

    허무맹랑하다고 했는가? 두 개의 면(내면과 봉평면)은 100리가 되는 산골짜기

    인데 곧 양산박과 같은 소굴이 되었다”66)라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차기

    62) 홍천문화원, 1998.63) 9월 26일64) 9월 27, 29일 65) (국역총서13, 114쪽), (> 1, 462쪽)

  • 72 2016년 동학농민혁명 정기학술대회

    석의 농민군 근거지가 실제 그러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내면

    은 오대산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길이 막히고 멀어 산과 계곡이 험준하여 가

    서 토벌하기 어려웠다”67)라는 이회원의 말대로 백두대간 서쪽, 오대산 서북쪽에

    있는 내면은 홍천에서도 가장 오지였다. 홍천 서석에서 뱃재를 넘어 자운·창촌·원

    당·광원·청두를 거쳐 구룡령에 이르는 길은 좌우에 들 하나 없이 첩첩 산중에 둘

    러 쌓인 협곡이다.

    차기석은 10월 11월 농민군이 내면을 중심으로 반농민군 토벌대에 맞서 치열

    하게 싸울 때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접주로 불렸다.68) 그는 9월 말

    경에 군대를 일으켜 창사를 불 지르고, 호응하기를 거부하며 농민군 토벌을 주

    장하는 자들을 위협하고 집을 불태웠으며, 포목·어곽·화우(貨羽) 등 상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물자를 충당하였다. 그 과정에서 협로 행상을 수백인을 죽였

    다고 한다.69) 행상과 부상들이 무리지어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에게 저지르는 폐

    단은 농민군을 진압하던 관측에서도 문제를 삼을 정도로 심각했다.70)

    내면에서 가까운 봉평면에서는 윤태열· 정창해· 조원중· 정헌심 등이 농민군의 세

    를 불리면서 창사 곁에 목책을 세우고 각 촌방에서 집마다 좁쌀 6말과 마혜(麻鞋,미투리) 1쌍식을 거두어 들였다. 이들은 거주지가 내면이면서 차기석의 영향 아래 봉평에서 활동하던 농민군 세력이었다.71) 진부에 사는 안영달(安永達)과 김성칠(金成七) 등도 차기석과 연결되고 있었다.72) 그 즈음 차기석은 충주로 진출하였다가 돌아왔다. 지평(砥平)현감 맹영재의 첩보를 보면 “충주 양반과 백성의 호소에 따라 동도(東徒)를 토벌하러 충주로 향해 가는데, 관동 소모관(關東召募官)이 공문을 보내 홍천 서석리(瑞石里)의 동괴(東魁) 차기석(車箕錫)이 갑자기 충주에서 와서 평민 7명을 죽이고 홍천·횡성·원주 등지를 침범하려고 하니

    포군 수백 명을 인솔해서 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73) 의정부 주사 정준

    시가 관동소모관에 임명된 날이 9월 30일이고 첩보 날짜가 10월 21일 것을 보

    면 차기석이 충주로 갔다 온 때는 차기석 부대가 홍천 동창을 친 10월 13일 이

    전으로 보인다. 충주에 가서 전반적인 상황을 보고 들은 차기석은 본격적인 싸

    66) (국역총서4, 483쪽)67) (국역총서4, 482쪽)68) (국역총서4, 443쪽)69) (국역총서4, 482쪽). 70) (국역총서4, 458-459쪽)71) (국역총서4, 482쪽).72) 위와 같음.73) 10월 21일.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의 재인식 73

    움을 준비하고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차기석과 접주 박종백이 이끄는 강원도 중부 내력의 농민군은 10월 13일 밤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東倉)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우고 강릉사람들을 죽였다.74) ‘강릉사람’이 누구인지 왜 누구인지는 의문이다. 홍천현감이 검시를 하

    려고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농민군 몇 백 명이 총과 창을 들고 시신을 둘러싸서

    검시를 못하게 막았다.

    현재 홍천군 내면 물걸리에 속하는 동창은 조선시대 역촌(驛村)으로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홍천과 춘천은 물론 서울에 이르는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강원도

    영서지방의 토산물과 세곡을 모아 두는 창고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동창에

    보관하였던 세곡은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나면 홍천읍 서창으로 보냈고,

    다시 홍천강을 통하여 소양강창을 통해 서울로 옮겨갔다. 차기석의 농민군이

    먼저 동창을 친 것은 교통의 요지를 장악하고 세곡을 군량미로 확보하려는 의도

    였다. ‘삼정이정’의 의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10월 15일 홍천현감의 지원요청에 따라 춘천 친군진어영의 별정군관 김동규와

    초관 박진희가 병정 70명과 포군 30명을 이끌고 저물녘에 홍천에 도착하였다.

    홍천의 농민군이 이에 맞서 싸우다 3명이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18명이 사로

    잡혔다.75) 그러나 토벌대는 농민군에 비해 숫자가 적고 화약도 떨어진 상태라

    응원군을 기다려야 했다.

    한편 홍천 서석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 500여 명은 하군두리 청량리를 지

    나 횡성쪽으로 향하는 먼드래재를 넘어 10월 20일 오전 5-7시쯤 횡성현 청일면

    춘당리에 진을 치고 있던 횡성군 토벌대를 공격하였다. 횡성현감 유동근과 소모

    관이 이끄는 원주(原州) 포군(砲軍) 28명, 횡성현 포군 100명, 창군(鎗軍) 50명은 10월 17일 춘당리까지 이르러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한 채 서석쪽 농민군의 동

    향을 살피며 홍천과 지평의 토벌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횡성 쪽으로 진출하려던

    농민군은 춘당리 싸움에서 많은 목숨을 잃고 10여 명이 사로잡혔다. 농민군을

    이끌던 조희준과 고진성은 사로잡혀 참수 당했다.76)

    동창이 불타고 홍천 쪽에서 농민군의 세력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들은 지평

    현감에 맹영재는 토벌대를 이끌고 홍천으로 달려왔다. 맹영재가 이끄는 토벌군

    이 홍천에서 서석 풍암리까지 이르는 과정이 갑오군정실기에 어느 자료보다 74) (국역총서4, 402쪽), 10월 21일. 에는 동창을 친

    날짜가 10월 12일, 에는 10월 13일로 하루 차이가 있다. 75) 10월 22일. 76) 같은 자료, 10월 28일

  • 74 2016년 동학농민혁명 정기학술대회

    상세하게 실려 있다.

    10월 21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쯤 홍천 화촌면(化村面) 조개대(鳥介垈)로 들어가서 전진하는 적의 형세를 알아보려 했더니, 길이 끊겼기 때문에 창수

    (鎗手) 10명을 적들의 모양으로 꾸며 고깔을 씌워 먼저 보냈습니다. 비류 4명을 사로잡아 처음으로 장야촌(長野村)에 진을 친 것을 알았습니다. 즉시 행군하여 총을 쏘아 잡은 자가 20여 명입니다.

    그 다음날 22일에 송치리(松峙里)로 들어갔더니, 고개가 높고 길이 험할 뿐 아니라 적들이 사방에서 불을 놓아 거리를 구분하기 어려워서 그대로 머물렀습니

    다. 이날 밤에 때에 맞춰 비가 내려 그 불이 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22일에 서석면(瑞石面) 어론리(魚論里)로 들어가는데, 100여명의 적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10여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승세를 타서 풍암리(豊巖里)까지 추격했더니 그들은 흙으로 보루를 쌓아 백기를 꽂고 수천 명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접전을 해서 한낮부터 저물 때까지 이어졌고, 포병(砲兵)이 승세를 타니 적들이 점차 무너져서 그대로 흩어졌습니다.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

    여 총에 맞아 죽은 자를 셀 수가 없었습니다.77)

    맹영재의 토벌대는 홍천 화촌면 조개대-장야평-송치리-서석면 어론리를

    거쳐 서석면 풍암리로 들어왔다. 10월 21일 장야평 싸움에서 20-30명의 농민

    군이 목숨을 잃었다.78)

    친군진어영 병정과 홍천현의 포군의 행로는 맹영재의 포군과 달리 홍천 화촌

    면에서 영귀미면을 거쳐 서석으로 들어오는 경로였다. 영귀미면은 지금의 홍천

    군 동면이다. 영귀미면에서 농민군 9명이 목숨을 잃었다.79)

    서석은 동으로는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 동창을 지나 내촌으로, 서남으로 부목재

    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77) 11월 2일.78) 장야평은 현재 홍천군 화촌면 장평이며, 내촌면 동창에서 고개를 넘어 닿을 수 있고, 서석과 홍천

    을 잇는 길목에 있다. 접전이 있었던 곳은 장평 2리 상동골 부근이다. 이곳에서 전사한 30여명 가운데는 이 지역에 14대째 살면서 동학에 참여하였던 史仁淳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농민전쟁 이전부터 집안을 돌보지 않고 동학을 전파하러 다니는데 열성이었다고 한다. 농민전쟁 때 집 가까운 상동골에서 포살되어 불태워진 그의 시신을 묻은 묘는 장평 1리 국도에서 올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있다. 동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의 묘를 ‘동학군묘’라고 불러왔다고 한다(1999.2.11, 장평1리, 후손 史明煥 증언, 73세). 靑州史氏族譜에 의하면 그의 생년은 壬申년(1872) 12월 25일이고 忌日은 10월 20일로 되어 있다. 23살 한창 나이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의 아들 相彬은 甲午 11월 28일 생이니 아버지가 돌아간지 한달여 뒤에 유복자로 태어났다.

    79) 11월 3일.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의 재인식 75

    서석에 모인 농민군 수천 명은 풍암리 진등에 흙으로 보루를 쌓고 백기를

    꽂아 진을 치고 있었다. 맹영재가 이끄는 토벌대와 친군진어영 병정, 홍천현의

    포군 연합부대 1000여 명에 맞서 농민군은 한낮부터 저물 때까지 치열하게 싸웠

    다.80)

    농민군은 총이 모자라 버드나무를 깎아 먹칠을 해서 무기가 많은 것처럼 위장

    을 하기도 했고, 주문을 외우면 저들의 총에서 총탄이 아니라 빨간 물이 흘러나

    온다고 하면서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숱한 농민군의 식사를 해결하려고 소

    를 잡아 껍질 네 귀퉁이를 말뚝에 묶어 놓고 불을 지펴 밥을 해 먹었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던 비슷한 양상이 서석에서도 벌어졌다.

    횡성 쪽 토벌대는 풍암리 전투가 끝난 뒤 10월 24일 새벽에 서석에 도착하여

    26까지 주둔하고 횡성현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다쳐서 붙잡혔던 농민군 오복선

    이 도망치려다 붙잡혀 진영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81).

    홍천 동창을 습격하고 서석 풍암리 전투를 이끈 농민군 지도자 차기석과 박종

    백은 맹영재가 “그 이름은 들었으나 얼굴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었는지 도망

    갔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라고82) 했듯이 서석 풍암리 싸움에서 행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 근거지였던 내면으로 옮겨

    가 토벌대에 맞서 싸움을 계속하였다.

    맹영재가 이끄는 토벌대의 주력은 홍천·여주(驪州)·양근(楊根)·지평(砥平)·춘천(春川)의 포군들이었다. 신식무기로 무장을 한 토벌대에 맞서 싸우다 수많은 농민군이 목숨을 잃었다. 학살은 22일에 싸움에서만이 아니라 토벌대가 철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맹영재의 보고에서도 ‘총으로 쏘아 죽인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거나 수백명이라고 하였다. “홍천 서석 일대는 사람의 자

    취가 영원히 끊어졌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83) 증언에 따르면 이 날 희생당

    한 농민군과 일가친척, 동네사람들 수는 800여명에서 1000여명에 이를 것이라

    고 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서석 풍암리 일대에서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이 30여호나 있었다. 살아남은 농민군과 가족과 친지들 가운데는 깊은 상처를

    안고 고향을 떠나 타지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다.

    80) 진등은 현재 홍천군 서석면 면사무소 뒤편, 풍암1리와 2리를 가르는 낮는 구릉을 말한다. ‘진등’이라는 이름도 이곳에 농민군이 진을 쳤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81) 11월 9일82) 같은 자료 11월 2일83) (국역총서13, 123쪽)“홍천의 차기석이 동학군을 모았다가 전 감역 맹영재가 나아

    가 공격하여 동학군이 죽고 상해를 입은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불을 지르고 갑작스럽게 격파함으로 홍천 서석 일대는 사람의 자취가 영원히 끊겼다”

  • 76 2016년 동학농민혁명 정기학술대회

    전투가 벌어졌던 진등을 넘는 고개 이름이 ‘자작고개’이다. 현재 풍암1리와

    2리 사이에 있는 자작고개는 원래 서낭고개라고 했는데, ‘동학 난리’때 사람

    들이 자작자작 넘어가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해서, 또는 농민군들이 흘린 피

    가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흥건했다고 해서, 이곳에서 싸우다 죽은 농민군

    들을 묻은 시체가 썩어 땅이 내려앉으면서 자자진 고개라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됐다고

    한다.84)

    1894년 농민전쟁 이후 희생당한 농민군 위령제가 처음 열린 곳도 홍천이었다.

    해방 후 1946년, 홍천 농민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를 거행하려는 계획이

    신문기사에 실렸다.

    甲午東學의 悲劇地인 洪川郡事件五十二周記念조선봉건제 타파의 봉화를 든 민중운동의 효시인 甲午東學혁명운동의 비극 중

    에서도 가장 처참한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동학군 二천여명 살벌사건 기념일인 十월二十일을 맞이하야 홍천靑友黨지부에서는 홍천 춘천 원주 정선 등 유가족급 유지참집을 구하야 五十二주년 위령제를 거행하기로 되었다 한다.85)

    이 기사는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전투의 농민군 희생을 ‘갑오동학혁명운동’

    의 가장 처참한 비극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희생자를 2천여 명으로 거론하고 있

    다. 서석 지역의 후손들이 증언하였던 800여-1000여명 희생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해 준다. 또한 유가족들의 거주지를 홍천 · 춘천 · 원주 · 정선 등지

    로 꼽고 있다. 물론 풍암리 전투에서 희생된 농민군 유가족이 이사를 다니다 해

    방 후 현재 그곳에서 거주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서석 전투에 참여한 농민

    군들이 홍천 뿐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합류한 농민 연합군이었음을 알려준다.

    홍천 서석에서 접전이 이루어지던 10월 22일 강릉부에서는 조발한 군정 100

    84) 서석 전투에 대한 전개 과정과 증언은 필자의 논문과 몇 개 글에서 소개한 바 있다 ( (여강, 1993), (역사비평사, 1994), (1994년 4월호). 최근 (모시는 사람들, 2016)이 출간되어 좀더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85) 단기 4279년 10월 18일(금 : 음 9.24). 위령제는 희생이 집중된 음력 10월 22일이 아니라 양력 10월 20일 일요일에 거행하였다. 이 위령제에 관한 기사는 1946년 10월 18일자에도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東學軍慰靈祭 오는 十월 二十일은 지난 五十二년전 甲午운동당시 東學軍 二千여명이 江原道洪川에서 학살당한

    날인데 洪川靑友黨支部에서는 이날 洪川에서 봉건제도 타파의 혁명운동에 쓰러진 洪川 春川 原州 旌善등지의 희생자 위령제(慰靈祭)를 거행하여 희생자의 혁명정신을 추모하는 동시에 영혼을 위로하게 되었다.」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의 재인식 77

    여명과 보부상 100여명, 포수 100여명을 선발하여 중군장 이진석을 우두머리로 삼고

    전감찰 이영찬(李永燦)과 사인 박동의가 그를 보좌하도록 하여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86) 한편 서석 전투 바로 뒤이어 10월 26일 봉평에서 활동하던 농민군 윤태열,

    이창문, 김대영, 김희열, 용하경, 오순영, 이한규 7명이 봉평의 강위서에게 체포

    되어 봉평에 들어온 강릉의 중군 이진석에게 포살 또는 효수되었다.87) 이즈음

    지금의 홍천군 내면으로 퇴각하여 다시 세를 모으고 있던 차기석은 기린·양양 ·

    간성의 농민군에게 봉평을 치자는 통문을 보냈다.88)

    봉평의 농민군을 토벌한 포군대장 강위서는 11월 6일, 토벌군을 이끌고 내면

    1리로 들어왔다. 산위에 매복해 있던 차기석과 정운심이 이끄는 농민군은 밤중

    에 강위서 군대를 습격하여 3명을 사살하였다. 강위서의 토벌군은 부상당한 8명

    을 이끌고 내면에서 물러났다.89) 이후 중부 내륙 지방의 농민군은 사방에서 연

    합작전을 펴면서 조여 들어오는 토벌군을 맞아 내면 일대를 피로 물들이며 마지

    막 싸움을 벌였다.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계방산과 오대산 기슭의 내면 자운 · 흥정과 계방천

    이 흐르는 협곡에 자리 잡은 원당리 청두리 약수포 등지에서 강원도 내륙지방의

    농민군 최고 지도자 차기석이 이끄는 농민군 주력과 토벌군 사이에 최후의 항전

    이 벌어졌다. 이곳은 구룡령에서 오대산 두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큰 산

    줄기에 의해 양양·강릉의 영동과 갈라지며, 그 사이에 모두 해발 1천미터가 넘

    는 신배령 · 응복산 · 응복령 · 약수산이 놓여있다. 그 가운데서도 청두리에서 약수포

    까지는 이르는 70리 길은 토벌군도 좁은 길을 벽을 의지하면서 전진하였다고

    할 만큼 험난한 곳이다. 잎이 무성한 여름이라면 유격투쟁을 벌이기 적합한 지

    형일지 모르나 활엽수의 잎이 모두 지고 눈이 쌓인 양력 12월 중순이라면 사방

    에서 협공하는 토벌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봉평에서 내

    면에 이르는 보래령 · 운두령과 양양 강릉에서 내면으로 통하는 신배령 · 응복령

    이 토벌군에게 장악된 상태에서 협공을 당한 농민군은 토벌군 뿐 아니라 험준한

    산세에도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11월 11일, 내면 자운의 농민군은 보래령을 넘어온 봉평 포군대장 강위서, 60

    여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합세한 홍천의 허경의 침입을 받아 접주 위승국 형제와

    접사 심성숙, 박군오, 정창호 등 17명이 포살당했다. 차기석은 내면 원당리에서

    86) (국역총서4, 484쪽) 87) (국역총서4, 485쪽), (국역총서4, 403쪽).88) (국역총서4, 415쪽).89) 같은 자료 427쪽.

  • 78 2016년 동학농민혁명 정기학술대회

    깃발을 흔들어 농민군을 독려하며 저항하였으나 12일, 운두령을 넘어온 강릉의

    박동의와 양양의 이석범이 이끄는 토벌군의 협공을 받아 사로잡혔다. 성찰 오덕

    현, 집강 박석원, 지덕화 3인은 포살당했다. 13일에는 내면 청두리에서 홍천의

    농민군 지도자 권성오, 권수청 등 12명이 포살당하였다. 오대산 깊숙한 골짜기

    약수포 쪽으로 밀렸던 농민군 500여 명은 청두리 쪽에서 뒤쫓아온 토벌군과 신

    배령을 넘어온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 응봉(응복)령을 넘어 온 이석범의 부종

    김익제의 토벌군에게 세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였다. 접주 김치실 등 11명이 포

    살당하고 접사 박학조는 붙잡혔다. 농민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3곳의 별당과 37

    채의 집도 불에 탔다. 내면 자운·흥정·신흥 등의 농민군도 강위서가 이끄는

    토벌군에 밀리면서 임정호 등 38명이 포살 당했다. 사로잡힌 농민군 지도자 차

    기석과 박학조는 11월 22일 강릉 교장에서 효수 당하였다. 정선에서 체포된 이

    중집 · 임순철 · 김윤언 등도 이때 같이 포살되었다.90)

    농민군 주요 지도자들이 잡히고 나서도 농민군의 활동은 산발적으로 이어졌

    다. 반농민군의 토벌도 계속되었다. 11월 말 내면의 민정과 양양군병에 의해 약

    수포에서 농민군 10여명이 잡혀 강릉부로 끌려가 포살되었으며,91) 12월 초에는

    신배령 부근에서 농민군 손장업, 김창수, 이관구, 오주실, 이동익, 고준성이 잡혔

    다. 진사를 칭하던 이동익과 활동을 자복한 고준성은 감옥에 갇히고 나머지는

    귀화하여 석방되었다.92) 이동익은 바로 포살당하였다93). 12월 7일에는 진부면

    소모종사 박동의에게 농민군 성찰(省察)겸 초장(哨長) 김성칠(金成七)이 잡혀 바로 포살당했다.94) 김성칠은 안영보,안영달 형제와 함께 진부면 두일촌에 사는

    김상연과 아들 3명을 생매장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찍혀 있었다. 김상연은 강

    릉부의 전 좌수로 9월 7일 강릉부를 점령한 농민군을 밀어 날 때 중군장으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농민군이 강릉부에서 밀려 난 뒤 진부에 있는 집으로 돌

    아 와 살다가 아들들과 함께 복수를 당한 것이다.95)

    강원도 농민군 주력부대의 활동은 11월 중순 내면에서 농민군 주요 지도자들

    이 포살 또는 생포당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홍천 내면과 봉평 일대에서 체

    포되어 처형된 농민군 지도자들의 직위를 보면 차기석은 5읍의 접주로 불렸으

    90) 종합91) (국역총서4, 449)92) 같은 자료, 454쪽.93) 같은 자료, 462쪽94) 같은 자료, 455쪽.95) 같은 자료, 403, 404, 454, 455쪽.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의 재인식 79

    며, 그와 함께 동창을 불 지르는 데 참가한 박종백도 접주였다. 그리고 접주 위

    승국, 접사 심성숙, 성찰 오덕현, 접주 김치실, 접사 박학조, 집강 박석원 등도

    동학 조직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11월 하순에 잡힌 김흥조는 도금찰이었으

    며, 12월 7일 잡힌 진부의 김성칠은 성찰겸 초장이었다. 접주·접사·성찰·집강·금

    찰 등은 모두 동학 조직의 직책이었다. 동학 조직에서 접주· 도접·접사·강사·강장·

    교장·교사·교수 등은 포덕 시에 쓰는 이름이었으며, 성찰·검찰·규찰·주찰·통찰·통령·

    공사장·기포장 등은 기포할 때 쓰는 이름이었다.

    반농민군의 토벌의 광풍이 잦아들 때까지 목숨을 유지한 농민군과 지도자들은

    기린·인제·홍천·양구 등 강원도 산간 깊숙이 피신하거나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

    다.96) “양호의 비류 가운데 나머지 무리 수천 명이 배를 타고 바다 위에 떠있

    다”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97) ‘허황된 소문’으로 밝혀지기는 했으나 반농민군

    의 집요하고 끈질긴 토벌을 피해 배를 타고 바다로 빠져나가고 싶다는 원망을

    반증하는 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6. 맺음말

    1894년 강원도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농민군이 삼례에

    서 활동을 시작하기 전, 9월 18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리기 전 8월 중순부터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하여 9월 4일 강릉부를 점령하면서 11월까지 곳곳에서 투

    쟁을 전개하였다. 이 글은 1894년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만을 대상으로 몇 개 지

    역으로 나누어 살펴 본 것이다. 동비토론과 임영토보소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에 실린 자료를 바탕으로 삼아 이루어진 기존의 연구 성과에 의해서도 강원도 농민군 활동의 대략적인 전모는 알 수 있었다. 새로 발굴된 갑오군정실기에는 다른 자료에서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수록되어 기존의 연구를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 평창 영월 정선 지역에서 강원 농민군과 연합하여 활동한 충청도 농민

    군의 동향이 좀 더 자세하게 들어났다. 충청도 농민군을 강원도 쪽으로 끌어 들

    이는데 중심 역할을 한 농민군 지도자는 평창 북면의 접주인 이문보였으며, 강

    원도에 들어온 충청도 농민군의 핵심 인물은 성두환이었다.

    둘째, 평창 정선 싸움에서 패배한 농민군 일부가 충청도를 거쳐 영남 쪽으로

    빠져나갔다.

    96) 12월 19일.97) (국역총서4, 465쪽)

  • 80 2016년 동학농민혁명 정기학술대회

    셋째, 지평의 동학도들이 홍천에 설치한 접이 지평과 인접한 현재의 홍천군

    서면 필봉과 팔봉이었다. 맹영재가 필봉을 먼저 치고 사로잡은 농민군을 향도로

    삼아 팔봉으로 가서 농민군을 토벌하는 행로 또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넷째, 홍천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 내륙 지방의 농민군 최고 지도자 차기석이

    충주로 진출한 적이 있다. 그러한 경험은 차기석 농민군이 본격적인 투쟁을 전

    개하는 동인이 되었다.

    다섯째, 차기석과 박종백이 이끄는 농민군이 홍천 동창을 친 뒤 서석 풍암리

    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맹영재가 이끄는 토벌대는 맹영재의 토벌대는 홍천 화촌

    면 조개대-장야평-송치리-서석면 어론리를 거쳐 서석면 풍암리로 들어왔으며,

    그 과정에서 농민군과 접전을 벌인 양상이 드러났다. 춘천 친군어영군과 홍천의

    포군은 맹영재의 행로와 달리 홍천 화촌면에서 지금의 동면인 영귀미면을 거쳤다.

    여섯째, 횡성 현감 유동근과 소모관이 이끄는 토벌대가 10월 17일 횡성현 청

    일면 춘당리에 도착하여 서석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 진을 치고 있었다. 서석의

    농민군 500여 명이 10월 20일 오전 5-7시쯤 횡성군 토벌대를 공격하였으나 뚫

    지 못한 채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농민군을 이끌던 조희준과 고진성은 사로잡

    혀 참수 당했다. 횡성 쪽 토벌대는 서석 풍암리 전투가 끝난 뒤인 10월 24일

    새벽에 서석에 도착하여 26까지 주둔하고 횡성현으로 돌아갔다.

    일곱째, 원주 동도리 접주 이희종이 보은 수접주 이기영, 제천 접주 정식 등

    과 함께 3천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충청도 지역인 제천 · 단양 · 영춘에서

    활동하였으며 평창 ·정선 싸움에도 참가하였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원주 쪽

    농민군의 동선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여덟째, 단면이기는 하지만 초기 동학 활동에 참가했던 인제의 김계원이 1894

    년에도 인제 · 양구에서 활동한 사실을 알려준다.

    갑오군정실기은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혀 주었다. 그러나 ‘활동’을 통하여 추론해 볼 수 있는 다양한 해석과 평가는 될수록 배

    제하였다. 1894년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에서 동학 조직과 농민군 조직의 관계,

    동학 조직의 지도자와 참가 농민군의 결합과 지향, 평창·정선·영월과 제천· 청주의

    농민군 연합부대의 실상 그리고 그들과 차기석을 중심으로 한 홍천·내면·봉평 농

    민군과의 관계, 강원도 농민군과 경기도·충청도 농민군의 교류 등을 깊이 있게 알

    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다.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좀 더 세밀하고 섬세

    하게 살펴보아야 하겠다. 기존의 자료라도 토벌대·진압자·지배자들의 시각으로

    쓴 자료는 뒤집어 보고, 거꾸로 보면서 일단 농민군을 주어로 표현하는 읽기와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의 재인식 81

    쓰기가 필요하다. 의도가 담겨 있는 교단 측 자료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강원도 농민군 활동을 다시 정리하면서 특히 경기도 농민군 동향을 살피는 작

    업이 필요함을 실감하였다. 경기도 농민군 활동은 아직까지 따로 다룬 논문이

    한 편도 없을 정도로 개괄적인 전모조차 드러나지 않고 있다. 경기도 농민군의

    활동은 충청도 농민군의 활동과 따로 떼어 볼 수 없다. 다음 과제로 삼을 문제다.

    뿐만 아니라 1894년 이후 농민군과 반농민군의 동향을 살피는 작업 또한 거꾸로

    1894년 농민군의 활동을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