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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사건 비망록

미네르바; 사건 비망록

(제 6 부)

- 예의란 기본이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서 가는 태도, 그것이 바로 전횡(專橫)이라는 것이다. 그 흉포함이 사회를 아주 병들게 한다. 그걸 고치는 데는 예의를 바로 세우는 수밖에는 없다. 그게 바로 진실찾기다.

들어가면서

1. 예의 없는 것들

2. M사 P, 여전히 진행 중인가?

3. 동아진상조사위 보고서에 대한 반박

4. 어떤 동일 관찰자의 시각

5. 박대성의 또 다른 거짓말 하나

6. 2008년 7월; 미네르바

7. 원조 미네르바 논쟁에 관한 단상

8. 동아일보사, 역시 그들은 기득권이다.

9. 박대성은 왜 가짜인가?

10. 2008년 8월; 미네르바

11. 2008년 9월; 미네르바

12. 2008년 10월, 11월; 미네르바

13. 복잡한 판이 된 이유; 김태동 교수의 법정 출석을 보는 눈

14. 김태동 교수가 법정 출석 후 아고라에 남기신 글

15. 미네르바 사태가 가는 길을 보며

들어가면서

제 1 부부터 제 5 부까지를 하나의 비망록으로 엮었다. <3.18합본>이다. 아직 동아일보사의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지 못했다. 들어오는 소식들로만 보면 나를 희생양으로 삼고 신동아(출판국)를 박살내면서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 듯하다. 예상했던 스탠스다. 그들은 사과문 게재 이후 줄곧 이런 것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렇게 간다고 봤던 것이니까.

그러나 과연 그들의 뜻대로 될 것인가, 그건 미지수다. 왜냐하면 그들의 논리에서는 너무도 허점이 많다. 그러니까 진상조사가 아니라 진상(眞相)을 왜곡하는 것으로 만들었고, 사과가 아니라 사과한 것을 재차 사과해야 하는 이상한 풍경도 나올 수 있다. 만일 박대성의 진위 여부에서 번연히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역할 하지도 않는 동아일보사라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중에라도 밝혀진다면 언론임을 포기한 셈이 되니까.

봐야 할 부분들이 아직도 많다. 그래서 비망록을 이어간다. 한 사회를 들여다보는 기록치곤 참으로 허망한 바가 없지 않으나 그러나 보기는 봐야 한다. 어차피 처음부터 보기로 하고 기록을 시작한 것이었으니.

1. 예의 없는 것들

동아일보사 김팀장에게 진상조사보고서를 파일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이런 답이 왔다.

2009년 3월 19일 (목) 오전 9:37, ooo 님의 말: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메일은 잘 받았습니다.

해외에 계신다니 전달하는 방법은 파일 형태 밖에는 없어보입니다만...

진상조사보고서의 파일을 디지털 형태로 전달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점을 이해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또 다양한 형태로 이미 보도가 되고 있고 동아닷컴에도 조만간 신동아 4월호 내용이 게재될 것이어서

공개된 형태의 진상조사보고서를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정리되시는대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일반적인 이메일의 경우에도 진상조사위원회 참여자들을 계속 참조 수신인으로 넣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보고 쓴 웃음을 지었던 것은 그들의 아주 얄팍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이메일을 바로 생각나는 대로 보냈다. 감정적인 이메일이었다. 보내고 다시 봐도.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들 또한 원래가 감정적이었다. 아주 영악할 정도로. 그건 이성적인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ooo 님,

메일 보고 약간 쓰게 웃습니다.

파일 형태로 전달은 어렵다는 걸 제가 잘 알 것이다?

잘 모르지요.

굳이 요청을 드린 것은 그 쪽에서 낸 내용을 제가 받아보고자 한 것이고,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요.

내가 협조 드린 것이 결국 그렇게 사용된다는 의미라면,

그것이 귀사의 입장이었다면,

최소한의 예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또한 부질없는 이의 기대였던가!

친구의 얼굴을 보아 그리 했지만...그 또한 부질없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보고서 요청은 가장 기본적인 예의를 말씀 드린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 말이지요.

이 또한 흘려 듣는다면 방법이 없는 것이고.

이 이메일을 모두 돌려보신다니

나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 드린 것으로 만족할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메일 주셔서.

그러나 아무리 까칠한 메일도 좋게 보이는 바도 있으나

아무리 좋게 쓴 메일도 까칠하게 보일 때도 있는 법입니다.

모두 자신의 눈으로 선택해서 보는 것이니까.

다시 한 번 메일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권오홍입니다.

저녁 무렵 송편집장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이미 사표를 18일자로 제출했고 또한 19일자부터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ooo의 말은 거짓이 된다. 그는 참조인으로 송편집장을 넣어서 보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이 하고픈 대로 할 것이라는 점은 익히 파악된 것이었지만, 그 정도가 극심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결국 L이사나 K팀장 두 사람에 의해 주도된 이 진상조사라는 것의 출발점은 <사과문 게재>로부터 시작된다. 보다 더 나아가면 신동아 2월호 게재를 두고 동아일보사 본사와 검찰 간의 유착이 없었다고 하지 못하는 판이다. 그 손발 잘 맞는 대응들을 보면 말이다.

이 상황은 아주 잘 짜진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그냥 삼류소설 쓴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M 뉴스에서 연락이 왔다. 지난 달 서울에 있을 때, 미리 조선일보 사안 등으로 인터뷰를 해둔 바가 있었지만, 동아일보 진상조사라는 것이 나오니 그에 의문들이 나온 셈이다. 비망록의 초안을 보내주었다.

바로 기사화 할 부분을 하자고 했지만 나는 동아일보사와 관련된 부분은 가급적 발언을 삼가고 싶다는 의견을 주었다. 그 때까지는 송편집장이 사표를 낸 소식을 듣지 못했었다.

그래서 신동아에 K를 소개한 부분, 그리고 나의 인터뷰 등으로 기사를 내보내겠다고 하여 그를 승락 했다. 보다 직접적인 대처는 내가 서울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이지만, 그 부분만큼은 동아 조사보고서도 언급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부족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는 내용이 사실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고, 그 부분에서 걸리면 그들의 의도대로 몰고 가지 못했을 테니까.

방송진출이라는 임무를 안고 있는 L 이사대우의 곤혹스런 표정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가슴을 퉁퉁 치면서 ‘이진법에서 십진법으로 튀어 나와서 문제가 된 게 아니요!’ 하던 그 모습도 기억이 난다. 그러나 사과문 게재를 누가 결정했는가에는 L이사나 K팀장 둘 다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건 내가 송편집장으로부터 그리고 여러 경로에서 확인하고 들은 내용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그들은 그 과실을 자신들이 인정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 사태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고, 저런 식의 선데이서울 식의 조사보고를 쓰게 만들었으니까. 자세히 읽어보고 대처할 일이다. 아직은 보지 못했으므로.

확실히 동아일보사는 언론이 아니다. 저널리즘의 영역보다는 회사라는 ‘컴퍼니 베이스’에 충실 한다. 물론 언로(言路)와도 다르다. 정권이나 정부의 그것과 닿아 있다면 그것은 국민이 말하는 그 길과는 다른 것이다. 회사 차원의 생존을 위한 방송진출이 그들의 눈, 귀, 입을 모조리 막더니 이제는 가슴까지 후벼 파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한국에서 언론이라는 하나의 공기(公器)가 저렇게 죽어가는구나 하는 걸 느낀다.

작년 촛불민심 때도 그랬지만 그들의 글쓰기는 이미 경도(傾倒)되어 있다. L이사가 그랬던가. 겸연쩍게 “우리도 사실을 쓰는 건데…”라고 했던 장면이 있었다. 내가 그에게 “동아는 사실을 사실로 말하지 않는 듯한데…”라고 한 말 끝에 나온 이야기다. 그들 스스로도 기자라는 직업의 공정성 원칙으로만 따진다면 입에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뉴라이트를 띄워준 장본인이 바로 동아일보가 아니었던가.

그나 저나 참 예의가 없는 사람들이다. 영화 ‘예의 없는 것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이 상황을 보면,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업무처리를 잘 하는 사람들의 특기이기는 하지만, 저런 방식의 교활성은 결코 그런 것과도 다르다. 김승환이 동아일보사 사장의 친구로 권력의 실세라고 하더니 저런 교묘한 글쓰기도 한 몫은 하는가 보다라는 생각도 펀뜩 들었다. 하기야 그것이 사회 생존술이라면 그리 하는 걸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옳은 방향이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그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때도 온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사.

누구의 말마따나 내 마음 속에서 그들을 지운다. 나는 비망록을 계속 작성할 것이지만, 이제부터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낱낱이 적어가면서 할 것이다. 이제 나에게 이를 방해하는 옵션이란 게 있다 여기지는 않으니까.

(2009.3.20 13:31)

2. M사 P, 여전히 진행 중인가?

M사 P의 존재는 현 시점에서는 K의 상선으로 확실히 부각되어 있다.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확인은 매우 쉽게 증명이 된다.

1월 중순 신동아K가 인터뷰를 하러 가기 전, M사는 그 내용에 대해 질의를 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M사와 통화 중 P는 K와 통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신동아 2월호의 그 인터뷰에서 자신들 전체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없다고 M사에 상황을 가르쳐준다. 사실이 그랬다. 그 통화의 일부까지 M사 측은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P와 K 둘 다가 이 홍길동 잡기 놀이의 한 축으로 자리한다는 건 이제 정설로 해도 무방할 듯 하다. K 또한 ‘아고라 최씨’라는 이름으로 그를 불렀고 그 둘 간의 소통방식이 어땠는가만 확인하면 될 일이다.

아쉬운 것은 M사가 보유한 P의 연락처는 대체로 1월의 그것이고, 내가 보유한 것은 작년 11~12월의 그것이다 보니 이를 크로스 체킹해도 별로 성과가 없다는 것이고, 또한 그들이 핸드폰 통화 중 다른 핸드폰 통화를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P는 두 대 이상의 전화를 사용했다고 보이니 이 또한 연락처의 온전한 확인은 어렵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정확하게 소재가 확인되어 있는 D사의 P다. 미네르바 필명에서 등장하는 ‘박씨’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를 통해서 상황을 거꾸로 모두 확인해보는 것이 가장 빠르지만, 이 또한 이미 K가 부인 모드로 들어간 상태에서 특별한 성과를 얻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일단 M사의 인터뷰 내용과 K의 신동아 인터뷰 전문을 함께 확인해보는 것이 상황을 어디까지 공유하고 보는 지에 있어서 일차적인 판단기준은 될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다 드러난다 해도 원래의 50대 그 멤버의 주축은 나타나지 않을 공산이 크다. M사 P가 했다는 말처럼 “신동아 인터뷰에서 조직을 전부 다 이야기할까 걱정했는데 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는 1월 중순, 신동아 2월호가 나오기 전 주 목요일경 M사와의 대화로 본다면 말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들의 구성도가 전체적으로 P가 말한 8명 수준이며 그 가운데 여러 유형의 인물도 포함된다는 의미가 타당하다. 물론 글의 패턴을 본다면, 누군가는 주관자가 분명히 있다. 그건 메시지로 판단을 해야 한다. 글의 흐름 말이다.

아고라의 readme를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짐작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전혀 드러나지 않았고 또한 드러날 이유도 없는 상황이다. 거세게 진행되는 ‘박대성 유일 미네르바 만들기’ 와중에서 그(들)가 나타나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어쩌면 이렇게 그들의 전체적 조직이건 혹은 구성을 말하는 것마저도 의미를 잃는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어떤 이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보여준 것은 실제로는 <담론> 즉, 그를 통한 시대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는 것, 그리고 몰지각한 국민들에 대한 현실에의 각성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약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를 정권이나 정부, 세력들은 폄하코자 한다. 이진법을 무시하려고 하는 셈이다.

이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박대성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그를 구속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사실상 구겨 넣기 식으로 진행된 일종의 ‘만들기’(되기)의 행진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다.

이 비망록을 작성한 뜻도 그렇지만, 이것은 사회 내부의 안전판이 전혀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에 나는 이 사건의 후폭풍이 몹시 염려스럽다. 더불어 동아일보사의 저런 태도 또한 결국은 박대성 미네르바 만들기의 한 가닥에서 해석해보면 쉽게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 저것은 저널리즘적 접근법이 아니다. 전혀 그에 해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처리의 방식도 매우 전격적인 엄폐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로 또 대두되는 것이 바로 ‘부인’(否認)이라는 것인데, 박대성은 자신이 미네르바라고 자임(自任)하는 데 반해 K와 그 주변 인물들은 이제 본격적인 부인 모드로 돌아섰다. 그것을 부인한다고 해서 사실을 이야기 하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만한 증빙 혹은 다른 것을 끄집어 내어야 하는데, 그 대부분이 실제로는 박대성에게서 거의 다 사용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담론(談論)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박대성을 통하여 미네르바 필명의 담론을 지우려는 작업은 이제 동아일보사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앞으로 어디까지 더 이어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무망하게 어디론가 강하게 흘러가는 종착점은 어디일까. 그 생각을 하면 머리가 지끈 아프다. 이것은 한 사회를 모조리 바보로 만들려고 작정하지 않은 바에야 벌어져서는 안 되는 유형의 사건이다. 그러나 벌어졌고, 왜곡된 채 흐르는 중이다.

P와 K.

이 둘 간의 역학관계를 보다 정확하게 짚어볼 필요성은 크다. 일단 M사를 통해서 그것을 재확인할 부분들은 하고 지나갈 때가 아닌가 싶다. 드러난 부분은 빨리 해소하고 가는 게 필요한 때 같다. 그것이 이 골치 아픈 홍길동 게임의 가닥을 잡는 게 맞을 듯 하다.

(2009.3.20 14:24)

3. 동아진상조사위 보고서에 대한 반박

20일 저녁 비행기로 서울에 들어왔다. 자정 넘어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다른 일들을 그대로 둔 채 오기는 어려웠지만 동아일보사의 보고서를 저대로 가만 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어떤 형태로건 처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무대응으로 가는 게 어떻겠는가 말하기도 한다. 결국 ‘미네르바’의 본류가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 기다리는 게 어떤가는 이야기다.

과연 그럴 수 있는가? 사회가 이 담론을 받아서 처리하는 방식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더 강력한 폄하 코드에 이어 이진법의 통제국면이 이어진다. 그렇게 이어져갈 경우에는 진실은 가만히 파묻히게 된다. 그걸 지금 저들은 원하고 있지 않는가 싶다.

그 고민을 밤새 해보았다. 답변서를 적어보니 대충 이런 형태가 된다. 오늘 내일 중 수정하기 위해 대략 일차 마무리를 해둔다. 아직 그들의 보고서도 읽지 않았다. 볼 가치가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 3월 23일 새벽 동아의 보고서를 봤다. 그리고 반박문과 소견문을 조정했다. 아래 내용은 동아일보사 반박문의 완결판이다. (2009.3.21 16:05 3.22 20:20, 3.23.10:30)

동아일보사 진상조사 보고서에 대한 반박과 소견

“한쪽 말만 믿어 간사한 사람에게 속지 말고, 자기 힘만 믿어 객기(客氣)를 부리지 말며, 자기의 장점으로 남의 단점을 드러내지 말고, 자기의 서투름으로 남의 유능함을 시기하지 말라.” (채근담 중에서)

먼저 이 경구(警句)를 꺼내면서 내가 아래 쓸 글을 가슴과 머리로 경계하고 경계하면서 써봅니다. 그만큼 무겁게 여기고 쓰고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뜻을 느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글과 이어지는 나의 비망록은 아주 많은 부분에서 여러 담론(談論)을 동아일보사(이하 ‘귀사’라 줄입니다)에게도 우리 사회에도 주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귀사의 3월 18일자 신동아 4월호에 실린 이른바 ‘진상 보고서’는 전혀 사안 자체의 <진상(眞相)>으로 근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나의 일관된 판단이기 때문이지요. 본디 ‘진상’은 사물이나 현상의 거짓 없는 모습이나 내용을 말하지만, 그에 접근하는 조사가 부실했거나 그에 다가서 있지 않다는 것이 나의 그간 관찰한 소회(所懷)입니다. 그러므로 간략히 귀사가 내놓은 보고서를 나는 결코 진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아래의 내용으로 나의 생각을 다시 정리합니다. 귀사는 이미 본지 및 신동아 4월호를 통해 보고서 발표를 했지요. 나에게는 귀사와 같은 매체 공간이 없습니다. 내게 열린 공간은 여기 이진법이니 여기를 통해 나의 의사를 밝힙니다. 귀사의 보고서가 공적(公的)인-사실상 공개적인 이라는 의미로-것이라면, 여기 쓰는 나의 이 반박과 소견 또한 공적인 것이라 여깁니다. 매체가 없는 이들이 사용 가능한 이진법 공간은 이런 특별함이 있습니다. 이 공간의 특성이기도 하지요. 가급적 자세히 들여다 보고자 했는데 시간을 많이 놓쳤습니다. 해외 출장 중에 보고서를 빨리 보질 못해서. 뉴스만 봐서야 무슨 내용인지 알 도리가 없었지요만.

이 글에 이어 나의 ‘진상조사 보고서’와도 같은 <비망록>도 단계별로 공개할까 합니다. 무엇인가를 ‘쓰는 것’(정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면팔방의 다면과 입체의 거울을 보는 듯, 그 진상이 명확해야 한다는 점, 그걸 최대한 지켜보고 찾아 보려고 합니다. 물론 귀사와 같은 규모 있는 진상조사단이 하는 일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보아온 사실에 대한 기록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 판단은 여러 측면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진실이 하나가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걸 한 번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 이하 인적 표시에서 알려진 명칭으로 ‘권모’처럼 상대를 모[某] 표기로 기본 합니다. 직책이 있는 경우는 그 직책을 사용합니다. 아닌 경우는 ‘씨’로 사용합니다. 혹여 글의 내용이나 문맥에 따라 존칭이 생략되는 점도 양해 바랍니다.)

= 목 차 =

1. <담론>을 이해하지 않는 눈으로 시작한 조사

2. 첫 머리부터 개념을 놓친 보고서의 오류에 대하여

3. 여전한 의문; 왜 진상조사는 처음부터 방향을 정했나?

4.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 세 가지와 귀사의 책임

5. 귀사가 해명해주어야 하는 사실과 예의에 관하여

6. 조사 보고서의 특별한 몇 가지의 오류들에 관하여

7. 일차 마치며; 나의 비망록에 관하여

1. <담론>을 이해하지 않는 눈으로 시작한 조사

<조사>는 대상에 대한 명확한 관점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게 보통이고 당연한 기초라고 판단됩니다. 그 점에서 아래 관점에 대한 문제는 실제로 이 사안의 첫 걸음에 해당합니다.

귀사는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미네르바 사안 자체를 <담론>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폄하 코드>가 작동된 어느 이진법 글쓴이와 관련된 사건 취급을 했지요. 확실히 그 점은 나와 전혀 다른 시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금년 들어 작년의 일과 함께 사안을 고정한 채 들여다 본 귀사의 진상조사 보고서는 몹시 격식을 갖추었으나 뭔가 텅 빈 것처럼, 마치 ‘삼류소설’처럼 사후 약방문의 사건처리용으로 밖에는 수준이 유지되지 못했다는 점은 아주 아쉽습니다.

이를테면 귀사의 입장에서는 사과문을 게재한 이후의 모든 일들은 그저 처리하기에 <골치 아픈 사안의 사건 처리> 영역이었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관점으로 접근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여지는 “보고서 발표 후 신동아 미네르바 오보와 관련하여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 그에 대해서도 조사할 방침”(보고서 I-3. ‘조사의 어려움’ 중에서)이라고 하셨지만, 그 수준으로 다룰 사안은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바로 진상(眞相)을 찾아가보면 그렇습니다.

전(前) 신동아 편집장의 경우, 이 사안을 보는 시각에서는 <담론>이란 개념이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는 작년 9월 시점 이후, 한국 사회에서 <인터넷 경제대통령>으로까지 불리는 이진법 내 인물의 글이 당시 시점에서 십진법으로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던 것이고, 또 그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 언론의 한 역할이라고 보았습니다. 보수 월간지 신동아의 편집장으로 쉽게 가지기 어려운 마음으로 ‘무탄초난’(毋憚初難) 했다는 점에서 그의 판단과 결정은 대단히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가 첫 어려움을 절대 꺼리지 않으며 했던 과감한 시도는 반드시 재평가될 날이 올 것이라고 나와 많은 사람들은 믿습니다. 그 점에서는 이진법과 십진법 간의 진정한 의미의 소통(疏通)이라는 것을 이 사회 내에서 아마도 가장 먼저 꺼내었다고 나는 봅니다.

이미 과거의 아날로그식 개념으로는 오늘처럼 강하게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이진법의 디지털 세계를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기사를 인터넷에 개시하는 웹 페이지 정도를 가졌다는 것으로는 절대 이진법에 접근했다고 설명하기 부족합니다. 열린 공간의 의미는 토론이고, 또한 당연히 이진법 글쓰기와 그 후속 처리라는 문제를 양산합니다. 그 점에서는 다음 아고라는 아주 독특한 이진법 토론장이지요. 그 또한 이상하게 ‘소통’(疏通)의 진정한 의미와는 거리가 멀게 자주 비뚤어지게 폄훼(貶毁)되는 조짐이 보이는 게 요즘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 가치를 낮추어 생각할 수 없다는 소견입니다.

작년 상반기 이후 그 토론의 가장 뜨거웠던 이슈는 단연코 <미네르바>였습니다.

이진법에서 제기된 담론은 십진법의 그것과는 다른 패턴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조차 이것을 최대한 십진법에서 흡입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지만 완전히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을 귀사는 아예 인정하지 않고 완전히 십진법 적 관념으로만 처리를 하더군요. 그러니 그 인식의 격간(格間)과 차이(差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보고서의 전반과 대책을 보면서 이 점은 여러 모로 앞으로 지속적으로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런 설명을 내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모 팀장의 이야기였습니다. IT 담당 기자를 해서 그런지 나름 남들보다는 경험이 있다고 여겨서 그런 듯 했습니다. “과거 인터넷 초창기 PC통신 시절, 고수라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보면 의외의 인물들이 너무 많았다. 세상 모두 알고 있는 영웅 같았는데 가보면 찌질이였다”는 겁니다. 분명 그러한 바가 있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익명의 공간이 가진 이진법 특성에 대해 ‘닫힌 고정관념’을 가진 십진법 사고라 할 수 있습니다. 닫혀 있는 거지요. 사안 자체가 십진법에서 꼭 확인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초보적 발상법입니다.

그래서인지 임모 이사는 ‘차라리 권선생이 미네르바를 하지…”라고까지 이야기 하더군요. 드러났으니 그리 하는 게 속 편하다는 이야기겠지만, 그 또한 가능한 바는 아닙니다. 이진법의 글에서도 분명히 뚜렷한 ‘격’(格)과 ‘개성’(個性)이 있습니다. 나는 미네르바 필명의 글을 쓸 재간은 없습니다. 그의 글은 그만이 가진 아주 독특한, 그러면서도 지향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의 글은 이진법 특유의 감성적인 접근도 없지 않지만, 전체로 봐서 그러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 동감하고 동조한 것입니다.

근래 들어 이진법은 아주 많이 여전히 익명성을 기반하는 중에서 깊이나 너비가 변모하고 있는 게 틀림이 없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큰 폭으로. 그래서 측량하기 힘든 다이내미즘이 존재하지요. 최근의 어떤 해외 방송에서는 아예 ‘인터넷 세상’이라는 하나의 별개 세계로 그곳을 설명하기도 하지요. 그를 무조건 부인하고 살기에는 영역이 너무 커져 있는 것입니다. 그걸 너무 강력하게 보여준 것이 경제로부터 정치, 사회 등의 사안을 거침없이 건드린 ‘미네르바’ 필명 이였습니다.

이진법에 있어 하나의 담론을 제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기에 그 가치는 쉽게 폄하 되어서도 되지 않거니와 그렇게 해서는 사회의 다이내미즘을 오히려 죽이는 지름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자꾸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귀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런가? 나는 전혀 귀사 혹은 그러한 접근법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곳을 통해서 나온 <미네르바 담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고서는 그 접근법에 대한 이해도 마치 코끼리 장님 만지듯, 다리를 만지면서 어디 좋은 목조건물 하나 지을 생각하는 엉뚱함이 드러날 뿐이라는 것이지요. 담론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반박은 귀사에는 전혀 성립되지 않을 겁니다만, 그 또한 십진법에서조차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이 내내 부담이 될 것으로 봅니다.

2. 첫 머리부터 개념을 놓친 보고서의 오류에 대하여

귀사의 보고서에 결정적으로 빠진 부분은 아주 많습니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 저 개념적 접근법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세한 사항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저널리즘적 기초마저 무시된 것들도, 때로는 인간적인 도리마저도 헝클기를 서슴지 않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전부 포괄해서 정리한 것이 나의 비망록이고 보면 그 세세한 설명들은 차후에 보시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많은 내용들 모두를 정리하는 것보다 간략히 몇 가지의 정리만 하도록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이 귀사는 내가 왜 K를 귀사에 소개했는가를 전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한겨레 신문에서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더군요. 왜 소개했는가? 바로 이 부분부터 귀사는 진상조사의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입니다. 이게 설명되지 않으니 뒤에서는 각종 판단에 있어서의 ‘무지와 왜곡의 단추’를 꿰매야 하는 악순환이 드러납니다.

물론 이번 일의 참여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경우들도 있을 터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자적 접근법과 현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인정을 하지요. 그렇지만 다루는 사안 자체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점, 여기에 또 모순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귀사의 진상조사 과정에서 조사를 담당하고 주관하는 측에서 미네르바 필명의 글들을 한 번 통독은 하신 바가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대상에 대한 이해가 없이 조사라는 것이 진행된 셈이니까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나는 귀사로부터 여하한 대가를 받은 바가 없습니다. 내가 요구한 바도 없거니와 귀사가 준 바도 없습니다. 진상조사 과정에서 만났던 김모 팀장이 그랬지요. “사실 신동아 12월호로 재미는 좀 봤지요” 라고. 책을 많이 팔아서 수익이 났다는 거지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당시 신동아가 나온 이후 서점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줄을 서서 여러 사람들이 책에 실린 그 부분을 본다는 글들도 아고라에 올라온 바가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책을 비닐포장 해야지 그것(그 부분)만 읽고 간다는 말도 들렸지요. 그러나 나는 그 수익에서 나의 소개료 같은 형식을 아예 생각조차 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귀사의 보고서에 흐르는 일관된 기조는 마치 내가 신동아를 ‘홀린 듯한’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군요. 그건 설명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조사 보고서가 그냥 따 붙이기가 되었지요.

그래서 왜 내가 K를 소개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지적 사항으로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 진짜 이유를 찾지 않은 것이 바로 귀사의 진상조사 첫 부분부터의 오류이고, 그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니 모든 조사는 사실상 ‘거짓의 영역’에 머물거나 혹은 ‘저급한 소설류’로 취급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서를 보면서 한겨레의 저 날카로운 지적처럼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목적을 가질 일도 없으니까요. 나도 내 할 일에 너무 많이 바쁘고 그런 소개가 내 업도 아니니까요.

내가 지난 2월 22일, 귀사 조사위와 첫 만남을 가진 직후부터 쓰기 시작한 비망록은 지금 꽤나 많은 분량이 되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내가 왜 K를 신동아에 소개했는가?’하는 부분을 설명한 글이 있습니다. 이의 해당내용을 그대로 따 붙입니다.

[5. ‘K’를 신동아에 소개하게 된 이유]

작년 10월 중순을 넘겨 나는 중국 동북지역으로 출장을 갔었다. 의료폐기물 소각장 설치와 관련된 일이었다. 기술자들과 중국측 인원들이 함께 열흘 넘도록 동북 전역의 대형도시는 거의 다 다녔다. 10월말에 겨울 첫 눈 내리는 광경을 그곳에서 보았다.

그리고 베이징에 돌아와서 업무정리를 하는 중에 연락하나를 받게 되었다. 폐쇄형 경제토론 사이트에서 같이 활동하던 인물 N이었다. 그는 당시 그 사이트의 운영진으로 활동하다가 불화로 인해 떠난 참이었고, 따로 모임을 만들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10월말 즈음 결성된 그들 모임(그들은 11아줌마, 반상회 등으로 명칭을 썼지만)을 안타깝게 보던 나는 N이 제시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바로 미네르바의 신변이 위태롭고 현재 자신들의 모임 속으로 들어와서 피하고 있는데 사실상 방법을 찾아주길 바란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연락을 받은 11월 8일경 직후, 나는 신동아 송편집장에게 전화를 했다. 미네르바 인터뷰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해보는 쪽으로 하자는 답변에 나는 미네르바 쪽의 컨펌을 받아서 연결하겠다고 했다. 11월 10일에 N과 그들 멤버 일부와 함께 의논을 나누었다. 그 즈음, 개편된 KBS의 프로그램인 ‘시사360’이 첫 방송에서 미네르바를 다루며, 매우 좋지 않은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제보도 있었다. 나는 걱정을 전달했고, 신동아와의 오프라인 인터뷰를 권유했다. 온라인 속에서만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 듯하다는 견해도 표명했다.

11월 11일은 오전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 종일 이 일로 바빴다. N과 M등 그와 연락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송편집장에게도 연락해서 저녁 무렵 직접 채팅을 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신동아의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으므로 촉박한 기운이 감돌 때기도 했다. 11일 저녁부터 12일 새벽까지 오랜 시간의 채팅을 나눴다. 그리고 신동아와의 직접 연락 채널을 열어 주었다.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 노란토끼의 진실’이라는 신동아 2008년 12월호가 나가고 나서야 나는 서울에 돌아올 수 있었다. 11월 18일의 일이었다.

미네르바는 아고라에 10월 말부터 정권과 정부, 정책에 대해 경제, 정치, 사회 전반에 대해 히스테릭한 반응이 몹시 더 증가한 상태였다. 그 즈음 나는 N과 M 등이 그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모임을 결성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미네르바의 글로 직접 언급되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그게 바로 <일레븐클럽>이다. 그와 관련된 미네르바 글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10월 31일 “내일 손자가 컴퓨터를 가지러 온다”는 글에 주목하게 된다.

11 이라는건 일레븐 클럽이라는 토론 모임이다.. 처음에 동네에서 다 때려 치고 고구마 장사 시작할때 심심해서 남는 시간에 독서 토론 모임이라고 엘리베이터 계시판에 붙여 놓으니 아줌마 몇 명이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미심쩍은 눈으로 아줌마 3명이 찾아 와서 시작한 모임이였는데 그렇게 시작한 모임이 일레븐 클럽이라서 그런것 뿐이다. 그러다가 독서 토론 모임이 변질이 되서 이젠 주로 동네 아줌마들 재태크나 세무 상담이나 경제 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2008년 10월31일 미네르바의 글)

갑자기 흥미가 떨어졌어... 이젠 재미 없어서 그만 두기로 했어.. 이 나이 먹고 살해 협박에 욕까지 먹어 가며 시간 낭비 할 필요도 없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동네 아줌마 상담해 주고 빈데떡에 소주 얻어 먹는게 남는 장사지.. (10월 29일 미네르바의 글)

안 되겠다... 최씨 노인네가 불러서 이만 가 봐야 겠다..이제 고기 썰어서 다 구었나 보다.... 오늘도 가서 한 잔 퍼 마셔야겠어.. (10월 22일 미네르바의 글)

딱 이렇게 진행되어서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3명이 나가고 11아줌마가 만들어지고, 그리고 독서토론 모임에서 재태크 자산관리 경제강의 컨설팅이 되어 버렸다는 진행상황이 동일했다. 그들끼리 일레븐 클럽이라고 부르건 아니면 반상회라고 하건, 재테크 모임이라건 그 모임의 존재 확인이 중요했다. 나는 저 상황을 보면서 일단 ‘그’의 존재감에 대한 신뢰를 했다.

신동아로 소개한 직후, 나와 연락을 했던 N이 보내온 이메일 중 한 부분도 그것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당시 이들은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약간 의무감이 있어 이야기를 극도로 아끼던 때였지만 N은 그 이전부터 나와 교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눈 편이었다. 그리고 이 요청도 그가 해온 것이었다. 나는 최근까지도 N이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누군가 그는 남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서로 남자인가 여자인가, 나이가 얼마인가, 직업이 뭔가를 묻지 않는 이진법의 특성이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그들도 내가 누군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냥 글을 보고, 그 의식과 수준을 짐작하고 판단한다는 의미에서는 이진법이야말로 ‘글쓰기의 진검승부 장소’라는 생각마저 든다.

단체에서 축출당하고 몇 명이 반상회를 하고 있습니다. 글을 남고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11명의 아줌마들이 한 명의 고구마 늙은이와 이야기 하고 노닥노닥 합니다. 아니 3명이 축출을 당했는데, 아줌마들과 고구마 파는 할배가 왜 따라 나왔는지 의문입니다. 따라 나온 고구마 할배와 아줌마는 토론의 장을 요구 하였고 결국 반상회가 매일 열리고 있습니다. 고구마 파는 할배는 반상회에서 살아남기를 강조 하고 있습니다만 정작 자신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고 합니다.

정작 본인은 살아남기도 힘들면서, 코메디 같은 시절의 웃긴 이야기 입니다. 웃긴 세상 속에서 저 나름 데로 반상회도 참여하고 이리 글도 적고 하면서 노닥노닥합니다. 치열할 것인가? 노란 토끼들에게 사냥시즌은 아직 끝나지(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다고 알리고 말 것인가? 고민입니다. 그리고 저 위험 속에 홀로 남고 싶어하는 고구마 파는 영감은 어찌해야 할까요? 어제는 집에 들어가질 못하고 종일 서울의 모 공원에서 접속을 하더군요. 집 앞에서 누군가가 기다려서 껄끄럽다고 하면서 ㅎ. 우스운 시절의 눈물 나는 이야기들 입니다.

애칭 ‘할배’, ‘고구마 파는 할배’ 등은 아고라에서도 자주 썼지만 보편적인 용어가 되고 있었다. 재미난 것은 앞서 10월 22일경 이전의 글에서는 ‘최씨’를 만나고 술 한 잔을 했다면 그 이후는 아줌마들이 언급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모임은 10월말에야 자신들이 하나의 모임(반상회)으로 모여져 그 이후 밤을 새우면서 경제토론, 강의 등도 나눈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N이 저 메일을 보내온 것이 11월 10일이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일차적인 것은 확인되었다고 생각하고 나는 채팅을 한 이후, 신동아 측에 그를 연결하는 것으로 역할을 일단 끝내었다. 서울에 머물고 있지 않으니 더 할 일도 없었지만.

당시는 진보 언론들이 미네르바 필명에 관한 기사들을 슬슬 쓰고자 할 때였는데, 보수 언론에서는 별로 움직임조차 없었다. 오히려 미네르바를 폄하하거나 사법처리를 시사하는 발언, 사이버 명예훼손 방지법 등 인터넷상의 글쓰기에 대해 제재를 가하려는 조짐이 한층 깊어지는 때였다. 나의 입장에서는 미네르바가 펴는 담론이 온라인의 한계를 넘어서 오프라인, 그것도 이른바 보수언론이란 영역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이 보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그가 숨어만 있어서는 해답은 없다 여겼던 셈이다.

특히 그를 둘러싼 압박에 대해 상당히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은 그로 상징되는 사이버악법(미디어법) 통과의지가 여권에서 너무 찐하게 읽혀졌기 때문이었다. 언론통제, 그 가운데서도 이진법 온라인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전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없었다. 중국에서조차 하기는 한다고 해도 표면상으로는 제한적으로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꺼내는 중이었고, 그 폭풍의 와중에 미네르바 필명과 그의 글들이 존재했다.

11월 18일, 신동아 12월호가 나간 이후, 신동아K와 나는 다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가 걱정하는 책이 나간 이후의 반응과 그 이후의 조치에 대한 문제였다. 나는 그를 여러모로 달래면서 이어 주간동아 연재까지 해주는 것이 좋다고 추천했다. 그는 고려해 보겠다고만 했다. 결국 주간동아 인터뷰는 그 후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온라인에서는 ‘신동아 게재’를 둘러싸고 진위논란이 한창이었다. 미네르바 필명의 글이 가진 성향은 강한 정책불만과 비판, 그리고 경제외적으로도 정치, 사회를 비판하는 이른바 ‘천민주의’를 깔고 있었던 것인데, 난데없이 신동아라는 보수 매체에 기고를 했으니 그 반향이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온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 사회의 내부적 갈등이 어느 수준인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한 사례로 꼽힐 만도 할 정도였다.

신동아 기사는 한 가지 부분을 많은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바로 ‘노란토끼’다. 어렴풋하게 ‘내년 3월에 온다’는 것을 일본계의 자금이며 한국 금융시장을 흔들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적시한 것이다. 사실 월간조선은 이것 때문에 나의 지난 글들, 담론의 방향과 유사점을 가지고 나를 그 글의 당사자로 지목했던 모양이다. 글읽기가 부족한 소치라고 본다.

또 한 가지, 신동아라는 오프라인에 이미 의견을 개진한 상태에서 이제부터 온라인에서 글쓰기는 당분간(12월초까지라도) 중지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는 동의했다. 온라인 상에서도 절필선언이 이어졌다.

사실상 앞서 월간조선에 보낸 질의 이메일에서도 나타나 있지만, 당시 박대성이 진짜라고 했다면 매우 간단하게 신동아는 최악의 오보에 빠질 뻔 했을 터이다. 기고문이 실린 책이 나온 상태였다 하더라도 사과문 수준이 아니라 전면 회수, 심지어는 한 달 내내 환불조치가 불가피 했을 것이다. 즉, 아고라 경제방에 동일IP로 “신동아는 가짜다”라고 글 한 줄만 올렸다 하더라도 아마 신동아 3월호의 ‘사과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사건이 벌어졌을 테니까. 책이 나왔는데 당사자가 내가 쓴 게 아니라고 하는 사태, 그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 자체가 아예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절필선언이 나오고 온라인에서의 그의 침묵은 아주 오랜 시간, 12월호 판매기간을 훨씬 넘기며 이어졌다.

혹자는 이 두 가지의 부분만으로도 ‘그’를 확인하는데 소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틀리거나 잘못 보았을 확률은 까마귀날자 배떨어지는 것이 연속해서 미리 정해진 두 날짜에 벌어질 확률보다 낮은 것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은 가능하다. 그것까지 어떻게 해볼 도리는 없을 터이다. 영역이 다른 문제다. 그렇지만 만일 ‘그’가 그 정도의 우연이나 조합을 염두에 둔 상대라면? 정말 단순하지 않는 머리로 봐야 한다. 단순한 사이코 패스 수준은 아니다.

그가 절필을 하고, 나는 아고라 경제방에서 11월 20일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다. 본래는 11개의 글을 하나의 유닛(unit)으로 하는 4-3-2-1 즉, 110편의 연재만 하고 그만두려고 했다가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연재 형식이란 것도 인터넷 글쓰기에서는 소설 같은 류를 제외하고는 처음 도입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펼치고 있는 담론은 작년 6월부터 쓴 글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일본은 2010년에 맞추어서 <다시 백 년>(又100)이라는 희대의 한반도(일차는 남부) 침탈 계획을 세우고 실행 중이라는 사실, 그것이 ‘경제와 교육’을 중심으로, 또한 한국 사회 내부의 친일세력, 정치세력과 접합되면서 가동 중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이것은 미네르바가 말한 ‘노란토끼’ 수준의 금융 침탈이 겨우 일부분에 불과함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시하는 폭이 훨씬 넓고 깊다. 또한 사람이 개입되어 있는 아주 완전한 기획물이라는 점, 정치와 경제가 사회를 포획하는 과정에서 강력하게 작용하며, 그에 개입한 친일이 준동(蠢動)을 다각적으로 하면서 진행되는 일이었다. 실제로도 이 현상은 한국 사회 전반에 2008년에 이어 2009년 더욱 강화되는 추세에 있다. 아니, 악성으로 곪아가는 중이다.

그는 온라인 상에서 침묵했다. 길어지는 침묵에 미네르바의 이름은 오프라인에서는 잊혀지는 듯했지만, 결코 그렇지가 못했다. 12월의 국회는 이른바 사이버 악법이 여전히 방송통신법 개정 등과 어울리며 악의적인 사회통제를 염두에 두고 진행 중에 있었다. MB정권 1년 차 말미의 모습에서 나는 ‘독재’(獨裁)와 ‘친일’(親日)이라는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보게 되었다. 당초 110편을 쓴 후 온라인 글쓰기를 멈추고자 했다가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신동아 연재 이후에도 나는 그와 몇 차례 이메일을 나누었다.

신동아도 후속 취재가 되지 않으니 그 수준에서 활동이 중지되었다. 나 또한 굳이 그를 찾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쓴다면 쓰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일이었다. 잡지에 한 번 실렸다고 해서 그게 전속(專屬)이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다른 곳에 글쓰기를 하겠다고 한들 내가 말릴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 번 소개한 이후, 나는 그와 연락을 취하기만 했다. 굳이 그를 억지로 만날 필요도 없었던 입장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나는 작년 말부터 이진법을 통제하려는 어떤 움직임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네르바 필명의 ‘그 혹은 그들’을 이진법이 아닌 십진법, 그 중에서도 보수언론에서 다뤄주어서 그의 담론을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토론하길 원했습니다. 그의 담론을 나는 귀하다고 인정한 것인데, 지금도 십진법에서는(특히 정권과 정부, 일부 언론, 일부 기득권은) 이를 그저 틀린 구석이 많은, 혹은 편집증적 인터넷 글쓰기를 한 자, 그저 그런 수준의 감성적 토로, 심지어는 변태적 비관론 정도로 취급하는 <강한 폄하(貶下) 코드> 속으로 넣기를 희망하지요.

한 마디로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다루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한국 경제와 사회에 대한, 시기나 그 시점에 있어서의 아주 부당했던 조치와 정책들이 있었다는 걸 알고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와 귀사가 이 사안을 보는 눈은 완전히 기로(岐路)에 서게 됩니다.

진상(眞相)의 의미를 제대로 아셨다면, 적어도 이 차이를 생각했어야만 합니다. 부정하고 싶으시거나 혹은 귀사는 그런 스탠스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차이니까. 사실 좀 더 들여다 보면, <직감(直感)>이 없었다고 해야 옳은 말일 겁니다. 설명하거나 혹은 증명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사실(事實)의 영역에서 본다면, 오늘의 한국에 이진법과 십진법은 갈등이 좀 크게 있지요. 정책이 잘되고 옳다고 무조건 말하는 쪽과 전혀 그게 아니라는 쪽처럼 말입니다. 특히 다음 아고라는 그런 점에서는 작년 이후 비판 쪽에 서있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여러모로 사실로 확인되기도 하지요.

십진법 세상도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진법 글쓰기는 아주 독특합니다. 그걸 이해하지 않고 대하면 이진법의 가치를 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나와 귀사 간의 갈등과 차이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이 갈등 자체를 십진법의 무조건 우위 수준으로만 전제하고 그 이후 진행한 모든 귀사의 조사는 사실상 아무 것도 진실이나 진상이 없는 채로 십진법의 귀사가 필요한 내용만 보고 듣는 것으로 흘러갔습니다. 전형적 인지부조화입니다. 부분적인 몇몇 상황의 ‘사실’-당연히 ‘허위’도 있습니다-은 있겠지만, 이 사안의 진정한 의미는 찾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 핵심은 바로 <담론>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로부터 출발해서 벌어진 <사건>이 존재하고, 이 둘 사이에서 <갈등>이 나옵니다. 관련자도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거지요. 그러면서 온갖 실수들도 함께 나옵니다. 정리되어야 할 실수들이겠지요.

이제부터 그것이 왜 커다란 문제로 우리 사회의 오늘에 다가오는 지 설명을 드리지요. 그래서인지 부쩍 이진법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은 계속됩니다만,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조치라고 나는 봅니다. 그렇게 이진법 전체를 ‘매도’(賣渡)하면서 시작된 말들은 절대 진실이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귀사가 조사한 ‘진상’이라는 것, 대책이란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적어 보지요. 자세한 것은 결국 비망록에서 사안 사안별로 이어 가면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만.

3. 여전한 의문; 왜 진상조사는 처음부터 방향을 정했나?

“고기잡이 그물에 기러기가 걸리고, 버마제비가 먹이를 노리니 또 그 뒤에서는 참새가 노리고 있다. 계략 속에 또 계략이 숨어 있고 이변 밖에서 또 이변이 일어나니, 지혜와 기교를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채근담 중에서)

내가 귀사의 조사위와 만났을 때, 나의 몇 가지 질문은 항상 두 가지로 압축되었습니다. 왜 그랬나, 누가 그랬냐는 겁니다. 바로 조치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귀사의 고유 권한인 이 부분을 제3자인 내가 거듭 문의했던 것이지요. 그 이유를 잘 모르실 듯 해서 나는 재차 상황을 정리합니다.

신동아 3월호에서 K가 자기 부인을 하자, 귀사는 소위 ‘오보 사과문’이란 것을 게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여러 해프닝이 생깁니다. 지금도 그것은 진행 중이라고 나는 봅니다. 혹자는 사과문을 내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하는데, 그를 초래한 과정이나 현상이 아주 이상하다는 게 나의 지적이지요. 좀 근본적인 질문에 해당합니다. 그 핵심은 ‘누가 그 결정-사과문을 싣자-을 했는가’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임모 이사와 김모 팀장이 한결같이 내게 하는 이야기는 그 결정은 신동아가 있는 출판국에서 했다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동아에서 책 나오기 바로 전날 사과문을 들고 왔더라…기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사과문 싣자고 했다.”

이 두 발언은 위 두 사람의 말 각각을 하나로 이어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과문을 실어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해 출판국은 여러 의견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걸 서둘러 사과문을 싣자고 마무리한 것은 본사 측이었다는 것이지요.

보고서에서도 이 점은 애매하게 마무리 하셨더군요. 이를테면 그 결정의 여부를 이야기해주어야 할 출판편집인께서는 이번 진상조사 자체에 아예 응하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신동아 내부의 이야기가 적시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3월호에 편집장의 글을 통해 사과와 경위 설명, 그간 취재 경위 공개, 조금 늦게 내면서 정리해보는 것 등의 방안이 제기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결론은 없습니다. 유추해보면 사과문 결정은 결국 본사가 한 것이 되지요.

내게 왜 그걸 밝히기를 싫어했는가 하는 점이 요지입니다. 내게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는 데 그래야 했던 숨은 이유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과문 게재=관련 취재 중지>라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오보 사과에 이어 내려진 조치는 저 방향으로 갔습니다. ‘궁금증을 해소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나온 의견은 ‘그냥 덮자’ 방식이 적용된 셈입니다. 그러니까 진상조사 기간 중인 2월 16일부터 3월 16일 기간 동안은 신동아는 완전히 이 사안에 대한 ‘접근권 자체가 통제된 상태’ 였다는 것이지요. 이건 아주 이상한 행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널리즘의 의무를 기본 포기하는 것, 그것은 꽤나 중대한 사항임에 틀림 없지만, 그렇게 했고 앞으로도 이 특정하게 취급되는 사안에서는 그리 될 듯 하지요. 그게 아니라면 첫 머리부터 이야기한 부분과 뒤의 이야기들은 모두 새롭게 조망되어야만 합니다.

미네르바 사안은 작년 12월호 신동아에서 이진법에서 십진법으로 나온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만, 함께 나와버린 것이 바로 1월 8일 박대성씨의 체포로부터 확실히 법률적 쟁론 영역까지 번집니다. 복잡해졌지요. 그리고 다시 이어진 신동아 2월호, 월간조선 2월호, 그리고 진위논란, 그리고 3월호의 사과문까지, 그리고 4월호의 진상조사 보고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귀사가 결정한 사과문이란 것이 단순히 K의 자기부인에 의한 것만으로 성립된 것이었는가 아닌가를 살펴볼 필요성이 높아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사안은 작년 신동아 12월호 관련 기사가 게재된 이후 <이진법-십진법-박대성-진위여부-논란-나타나는 증거들-의문들> 등으로 아주 다양한 스펙트럼을 안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언론이 왜 공기(公器)라고 불리는 지는 여러 가지로 설명이 되지만 가장 우선되는 것은 바로 <진실찾기>와 <실체적 진실 접근>이라는 두 가지로 요약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다양한 의혹도 제기를 하고, 또 그에 접근해 들어가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귀사는 2월 18일 시점 이후-엄밀히 신동아 2월호 전후 시점에서도 논쟁은 많았고 그건 보고서에 아주 일부 적시가 되어 있더군요-왠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런 진실에 대한 발걸음을 아예 스스로 막아버린 것입니다. 더 접근할 공간을 완전 무장해제 시키고 사과문을 내고, 그리고 조사를 한다고 해서 서둘러 모두 막음질을 해버리는 이 광경은 전형적인 사건 긴급 처리반 같지요. 그러나 과연 그 과정에서조차 언론의 진실찾기 본분은 지키셨다고 생각하나요?

이 점에서는 보다 확실한 것이 이번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인 2월초에 이미 여러 가지로 확인되었습니다.

신동아는 박대성씨에게 인터뷰를 작년 9월(10월호 시점) 포털 다음 측을 통해 요청한 바가 없습니다. 내가 그 이후의 직접 소개자 이니 저간 사정을 좀 알지요. 그러나 그 인터뷰는 박대성씨가 지난 2월 5일자로 분명하게 ‘그런 요청을 (다음 측으로부터 전화로 수차)받았고 자신이 거절했다’ 라고 인터뷰로 발표했습니다. 그것도 시간이 충분하게 주어진 가운데 ‘서면’(書面)으로 제출된 인터뷰 문안입니다. 그러나 내용만으로 본다면 명확하게 거짓말을 한 셈입니다. 이것은 그간 드러난 것 중에는 하나의 사례였을 뿐이지만 귀사와 관련되니 깊이 고려를 해야 하는 게 마땅한 부분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부분-의혹 차원을 넘어서는-을 신동아 측은 확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나도 확인한 것이 꽤 됩니다. 신동아K와 이어지는 박대성씨 사건 등 일련의 일들은 하나의 궤적 속에 있습니다. 당연히 그 취재 영역 속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내용들이 다 무시됩니다. 용도 폐기된 것이지요. 더 이상의 취재도 이루어지지 않는 ‘무장해제’가 아주 오래 이어지더군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과문 결정이 성급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조사위와 만나서 많이 했습니다. 초기 담론이란 차원에서 끄집어 내어진 것이 점점 공권력이나 다른 언론 등에서 진행되는 박대성씨 진위논란을 재빨리 종지부를 찍자는 시도들로 퇴색이 되더군요. 그러면서 사안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좁혀 가기도 했습니다. 취재 원칙, 취재 윤리, 그리고 기타의 잡다한 스토리 구성 등으로 말입니다. 속말로 조사영역이 어느 순간부터 확 ‘찌그러졌다’는 게 올바른 표현입니다. 이건 아주 흥미롭지만 아슬아슬한 광경이었습니다. K가 부인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한 개인적 조사조차 되지 않았음을 보고서도 인정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는 사라졌습니다. 언론 본연의 저널리즘적 궁금증이 어디론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장면이었지요.

나는 그러한 태도를 보면서 진상조사위는 시작부터-아마도 그 이전부터-이미 방향을 그렇게 굳혔다는 걸 알았습니다. 내가 협조한 것은 순전히 내가 존중하는 지인 때문이었지만, 그러나 정확하게 이 담론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서로가 전혀 시각이 다르더군요. 벌써 정해진 방향, 바로 저 대답에서 나는 사과문을 누가 게재하자고 했는지를 혼자 짐작했습니다. 물론 귀사의 회사 내부 이야기이니 이건 쉽게 밝혀지지 않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 상황을 입체로는 구성이 가능하니까, 해보고 나면 누군가 보이긴 할 듯합니다.

귀사는 이 ‘사건’을 빠른 속도로 하나로 압축시켜 버립니다. 부인한 K, 그리고 취재 시작부터 과정까지. 그 속에서 제대로 발표에서 써먹을 ‘꺼리 찾기’ 정도로. 내가 진상조사팀을 세 번째 만났을 때는 이미 그것이 명확을 떠나 굳어진 상태더군요. 그 때만 해도 내가 깊이 개입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만, 사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분명히 나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나 또한 조사에 들어가도록 하겠다고 했지요. 이전까지는 사안별로 내가 아는 수준의 것을 협조하는 방식이었지만, 나의 의사와는 전혀 다른 보고서를 귀사가 낸다면, 나도 비망록을 내겠다는 걸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 볼 때는 아주 우스운-약간 기막힌-일 하나가 벌어집니다. 귀사 보고서가 담는 억지스런 ‘희생양’으로 나를 자주, 그것도 아주 이상한 각도에서 끌어 들인 겁니다. 나는 그 취재에 참여한 당사자가 아닙니다. 나를 끌어 들어간 것은 어떤 면에서는 귀사의 커다란 실수입니다. 나는 소개자이고 관전자일 뿐이지, 내가 사실을 일일이 확인을 해야 하는 언론이나 혹은 귀사의 게이트 키핑 의무에 속한 사람이 아니지요. 취재자가 따로 있는데 내가 그걸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내 방식의 접근 그 이상의 것은 하지 못하지요. [게이트 키핑이란 단어는 보고서에 아주 자주 이용되는 것이니 아래 따로 한 번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작년 12월호 원고 게재, 나아가 12월의 소강 상태에도 나는 언론매체인 귀사에 다른 특별한 역할을 못했습니다. 심지어 신동아가 지난 1월 K와 6~7시간 인터뷰한 전문 조차도 진행한 이후 나중에서야 겨우 얻어볼 수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길 들러 돈 안 주고 그냥 책이나 한 권씩 얻어다 봤지요. 그러나 월간조선 2월호부터 3월호까지 나를 거론하기에 이르면서 전혀 사실과 다른 이상한 과정을 거쳐 내가 당사자처럼 둔갑되었지요. 거기다가 이제 귀사까지 나를 책임 당사자로 인정하는 식으로 접근하니 이제는 오히려 기회를 빌어 그간의 진상을 말끔하게 다 정리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만들어주시니 그리 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앞서도 K를 신동아에 소개한 이유에서도 밝힌 것처럼 나는 그 정도 수준 이상도 이하도 할 일이 없었습니다. 내가 귀사의 직원도 아니고, 기자도 아니고 그런데 왜 그 이상을 내게 요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내가 악의를 가지고 한 일도 아니거니와 그 이후 귀사의 영역에서 처리할 일이 나보다 적었다고 말은 못하시지요. 물론 소개자이니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그 관전자의 입장도 모두 지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보고서의 내용 만으로만 본다면 신동아는 아예 이 사안에 일하지 않고 맥을 놓고 있었던 것처럼 묘사되어 있군요. 과연 그런가요? 지금 상황은 보편적으로 봐도 아주 우스꽝스런 상황이지요.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진상인가 하는 보고서에서 적시하고 있는 여러 사항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 점을 몇 가지만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4.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 세 가지와 귀사의 책임

여기서 아예 하나 더 깊숙하게 들어가보도록 하지요. 귀사 진상조사 보고서는 대체로 많은 부분들을 그냥 방향 맞추고 설명하는 쪽으로 하더군요. <게이트 키핑>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입니다. 이건 본래 나의 말은 아닙니다. 언론에서 자주 쓰지요. 그렇다고 나의 경우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 또한 그러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 분석 정리하면서 살아온 것도 사실이니까.

그래도 이 용어는 언론 영역의 단어로 봐야 합니다. 본래 이 말은 ‘기사 작성에서 편집까지 몇 단계에 이르는 검증을 거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실수하지 않으려는 안전장치지요. 뉴스 결정권자가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일이나 그런 과정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소위 저널리스틱한 단어지요.

질문이 바로 나오게 됩니다. 귀사(본사)는 작년 12월호 미네르바 필명의 원고 기사 게재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나요? 당시 귀사의 게이트 키핑에 내가 들어가 있었던가요? 있었다면 최종 책임은 귀사가 지는 것이고, 없었다면 귀사는 업무 소홀했다는 것이겠지요. 그 때는 소위 회의라는 것이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게 사과문으로 게이트 키핑을 강화하겠다는 식으로 나왔는데, 그 또한 약간 우스운 일에 속합니다. 미스터리가 그대로 존재하지요. 당시 관점에서 미네르바 필명의 원고 게재를 아주 심각하게 보수 잡지, 언론이 싣는다는 결정을 해본 곳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검증? 과연 그것이 가능했다고 그 때 생각은 하고 계셨는가를 반문합니다. 12월호가 나오고도 그에 대한 문제점은 지적된 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지요.

아래 세 가지 이야기에서 납득될 설명을 하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귀사 보고서의 설명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도록 합니다.

첫째, 내가 확인하고 소개한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일레븐 클럽>이 내가 본 것대로이건 아니건 간에 그 과정은 정말이지 미네르바 필명의 10월 31일 시점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귀사는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그 사람들이 ‘일레븐 클럽’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재미난 발상입니다. 하나의 사안을 보는 눈에서 당시 시점에서 그 정도 수준의 프로세스 검증이면 귀사가 말하는 게이트 키핑은 된 거라고, 충분했다고까지 보여집니다. 그리고 귀사도 박대성씨가 출현하기 전에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던 걸로 압니다.

이제 와서는 하지요. 이진법에서 주고 받은 이메일의 신분이 남자니 여자니 하며 따지면서. 그러면서 은근 슬쩍 책임을 나에게로 전가합니다. 아주 비겁한 행위입니다. 이진법의 특성을 전혀 모른 아주 무지한 발상법입니다. 지금도 이진법은 익명을 기본으로 합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건 보편적으로 그렇습니다. 커밍 아웃하여 자신을 모두 드러내면서 불편한 이진법 글쓰기를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존재하는가요? 십진법에만 살아라는 건가요? 시대에 뒤떨어지는 발상법입니다.

둘째, 신동아 12월호가 나온 이후의 일입니다. 나는 이 설명을 꽤나 자주 해드린 기억이 나지요. 12월호가 나온 시점은 11월 18일, 그 이후 그게 가짜라는 걸 인터넷에 글 한 줄 나왔으면 나나 귀사는 아마 얼굴 들고 다니기가 좀 어려웠을 겁니다. 차라리 그 때 그렇게나 되어 버렸으면 내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하였지요. 그럴 경우에 소개가 황당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진 바가 없습니다. 그 설명을 해줄 사람이 있던가요? 그보다는 내가 11월 18일 직전 시점에 나와 K 간의 채팅에서 이진법에서 경제글쓰기를 당분간 멈춰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건 그대로 지켜졌지요. 그 설명이 가능한가요? 사실상 나조차도 이것을 어찌 설명을 제대로 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건 현실이었으니까요. 그냥 가정이나 예상이 아니라.

셋째, 12월 29일 <-폐업->이란 글입니다. 그것을 박대성씨는 ‘아고라에 쓴 글이 내부자료다’ 라고 하더군요. 나는 솔직히 그러한 설명에 많이 웃었습니다. 그건 소소한 사회 행정을 해본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 글에 대한 설명을 아마 글을 쓴 당사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합니다.

이 사건의 미스터리 중의 미스터리지요. 왜냐하면 모두 부인하는데 박대성씨만 자기가 썼다 하고 설명은 저기까지 밖에는 못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거기에서조차 ‘팔아먹은’ 자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팔아먹다’는 건 어떤 형태로건 연계를 가진 관련자를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 연관성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관점을 둘 수 있다는 것인지, 적어도 인과관계라는 걸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부분에서는 납득 안 되는 손쉬운 설명은 오히려 자신의 무지나 우기기를 드러낼 뿐일 것입니다.

진상 조사를 하기 전에 또는 하는 중에 귀사는 이 문제들을 명쾌하게 해결했어야만 합니다. 저것은 나의 게이트 키핑입니다. 나는 게이트 키핑을 저 정도 수준에서는 한 것이거든요. 그러나 귀사의 진상조사라는 것은 여전히 많은 미스터리를 해결하지 못했으니, 그리고 K가 스스로 자기부인을 했으니 이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니 사과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을 했지요. 게이트 키핑을 말한 건 귀사의 내부 사정이니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닙니다만, 오히려 귀사가 지금 진행한 진상조사 또한 게이트 키핑 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위험하기 그지 없게 보입니다. 내가 했던 저 게이트 키핑의 정도 수준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 조사할 방침’을 사족(蛇足)처럼 말했겠지만, 그것은 본의적으로도 전혀 수미(首尾)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과연 뭐가 관건인지 되짚어 보지요. 저기 나온 시기와 상황들을 가만히 보면, 박대성씨가 12월 29일 글을 본인이 썼다고 나선 판에 내가 미네르바 혹은 그 그룹의 일원이라 하더라도 ‘아니다’고 부인을 하겠습니다. 1월 8일 이후에는 초점이 박대성씨 사건으로 혼잡해질 때였지 않나 싶습니다. 이미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참에 왜 진짜다 라고 해서 골치가 아플 일이 없지요. K 스스로 가짜라고 하는 커밍 아웃을 했으니 십진법의 그는 이제 ‘가짜’가 됩니다. 그렇게 취급되지요.

작년 12월호 기고 문제만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가 남긴 6~7시간 인터뷰 가운데 특히 경제문제를 언급한 부분은 지금 봐도 오싹할 정도로 좋은 내용들이 많습니다. K는 자료 하나 없이 그 인터뷰를 장시간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내가 맞다’고 커밍 아웃을 한 어떤 이는 전혀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리고 오죽이나 박대성씨는 본인이 스스로 진짜라고 주장을 하는지. 게다가 주변에서는 오죽이나 그 사람을 진짜라고 입증하려고 노력하는지. 여러 부분들이 참 안타깝게 보일 정도입니다.

다른 관점입니다. 1월 15일 신동아는 K와 직접 인터뷰를 하고, 그것도 6~7시간에 걸친 장시간을 했고 한 두 사람이 아닌 많은 이들과 대화까지 나눕니다. 나는 그에 직접 참여한 바가 없습니다. 내가 할 게이트 키핑 상황은 아닌 것이지요. 당시 귀사는 그 게이트 키핑에는 참여하였다고 보고서는 적시하더군요. 내가 참여했나요? 당시 시점의 인터뷰를 둘러싸고 귀사에서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게이트의 키핑은 없었던 것인가요? 그건 어떤 게이트였나요? 1월 29일 귀사에 미네르바 담론과 사안, 사건이라는 걸 설명해줄 때도 나는 저 인터뷰 대화록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나는 이런 상황 자체를 귀사가 완전히 미스터리 혹은 그러한 범주에서 취급해버리는 광경을 보면서 언론의 공기적 역할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런가? 이상하게 박대성씨를 미네르바, 그것도 유일한 미네르바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접근법에 귀사가 적극 동참하는 듯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K는 자신도 박대성씨도 (미네르바가) 아니고 다른 50대의 존재를 말했다고 합니다만, 그건 예전부터도 그리 말한 바가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2월호 인터뷰에서도 40대와 50대에 대한 그 대목은 있다는 것이지요. 그는 그룹을 기본으로 말했으니. 물론 거기도 좌장이 있다는 식이었지요.

재미난 것은 귀사가 두 차례 일반적으로야 유례없이 사과문에다 거듭 사과를 표시하고 나서 그걸 빌미 삼은 것인지 박대성씨가 귀사에 또 다른 형태의 사과를 압박하는 듯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묘한 입장이지요. 앞서 2월초 서면 인터뷰의 거짓인지 착각인지를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착각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이지만.

관건은 귀사가 진상 보고서라는 걸 통해서 귀사의 이야기를 다했지만, 정작 내가 했던 게이트 키핑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첫 부분에 대해서만 나오지요만, 그것도 그리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귀사는 내게 저러한 상황 설명을 왜 누락 했는 지에 대해 설명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귀사는 내게 <소개 책임>이라는 형태의 아주 우스운 <죄>를 뒤집어 씌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소개해주고 대가를 원한 것도 아니고, 준다고 한 바도, 받은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귀사는 그 책임만 묻고 있지요. 저만한 상황도 없이 편집장이 그걸 결정했을까요? 게이트 키핑만 생각한다면 항상 그 당시에 최종 결정자가 모든 책임은 져야 합니다. 그건 사실상 결정권을 가진 본사, 그 결정자가 아니던가 싶지요.

끼워주기라도 했어야지 뭔 책임이라도 묻는 게 아니던가 싶습니다. 저 기간 동안 나는 외곽에서 내가 생각하는 방향을 신동아가 물어오면 모두 가르쳐 주었습니다. 보는 시각의 차이지요. 나는 담론과 사건이라는 각도를 동시에 보았고, 귀사는 지금 와서 이걸 사건 딱 하나만의 관점에서 보고 있으니까. 내가 여전히 폭이 훨씬 넓지요. 이런 지적이 조금은 골치 아프실 수도 있을 겁니다만 반드시 짚고 지나가야 할 부분입니다. 책임 소재를 귀사가 나에게 따지면서 그렇게 무슨 큰 권리를 가진 듯이 편향적인 보고서를 작성했으니까요. 귀사가 나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어떤 것입니까? 인간적 책임입니까, 아니면 일에 대한 책임입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는 명확해집니다. 귀사는 보고서를 통해 사실상 내게 책임을 물은 만큼 귀사의 책임도 내가 물을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한 부분-작은 일부분입니다만-이 바로 저런 부분입니다. 귀사의 진상조사는 저런 부분에 어느 만큼 ‘진실찾기’와 ‘실체적 진실에의 접근’을 했는가 하는 것이지요. 내가 보기엔 기초적인 사실관계도 제대로 파악된 듯 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시각 차이는 아니지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귀사는 이 사건에서 K의 자기 부인으로 작년 12월호부터 부인 시점까지 이르는 총체적인 책임 소재를 조사했노라고. 그러나 이 또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했던 게이트 키핑 과정과 함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저러한 <사실>은 신문이나 언론이 자주 말하는 팩트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 사실 이외에도 팩트는 아주 아주 많이 있습니다. 신동아나 혹은 나의 경우, 다른 곳에서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모두 무시했지요.

그리고는 마구 달려갑니다. [사과문 게재->조사->’삼류소설’ 같은 조사결과 발표->그리고 관련조치들]. 그러면서 박대성씨 출현 이후 꼬인 사건에만 초점을 두더니 난데없이 초창기로 돌아가, 혹은 취재원칙이니 윤리로 책임을 따지고 있더군요. 그러나 저 게이트 키핑은 나도 다 한 것입니다. 그것이 당시에는 전혀 문제가 된 바는 없었습니다. 아주 기괴한 접근법입니다. 계란에서 닭이 나왔는데 닭 잘못을 계란에게 묻는 꼴이지요. 사실 닭도 지금 무슨 잘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더욱 무거운 일은 그렇다고 지금까지 드러났거나 혹은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사실들이 죽었다가-죽은 것처럼 있다가-벌떡 일어나는 경우가 오면, 그게 진실이 된다면, 위의 모든 절차는 거꾸로 다시 돌려서 해야 하는 상황인 겁니다. 그러니까 관련조치들부터 거꾸로 사과하고, 조사결과 폐기하고, 다시 조사하고, 사과문을 게재하는 것이지요. 그런 경우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 입장이지요. 물론 자기 부인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나는 이 사안을 어느 한 개인의 영역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세한 부분은 비망록을 통해서 설명 드리지요.

원래 언론은 의혹을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기사를 쓰기도 하지요. 나는 귀사의 다른 기사에서도 그런 경우를 숱하게 많이 보았습니다. 의혹도 아닌데 제기를 하면서 나중에서야 반발이 강해지면 의혹이었다고 하거나 혹은 아예 그 의혹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특별한 경우인지 귀사는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의혹조사 수준도 다 던지고, 팩트 마저도 다 버리고, 그냥 ‘오보->사과->희생양 찾기->대책발표’, 이 하나의 포커스만 맞추어서 마구 달려 가더군요.

나의 경우는 전혀 귀사의 접근법과는 각도가 다릅니다. 내가 귀사와 같은 스탠스를 유지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요. 왜냐하면 내가 처음 이 사안을 들여다 본 것은 <미네르바 담론>으로부터 였지 사건이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건도 들여다 봐야 하니 자세히 들여다 보겠습니다. 그래서 재조사가 필요한 부분이 나올 수 있다면, 해봐야겠지요.

우선 저런 미스터리는 해결해야 합니다. 못한다면 이상한 거지요. 그냥 대충 해결했다 하고 가는 것이 요즘 보면 이른바 기계적 증빙 하나, 그리고 무슨 옥중 보고서 등으로 가고, 서면 인터뷰하고 그런 것인데, 그건 그렇게 현상과 경험, 담론 등에 바탕 하는 지식사회와 사회지식이 그저 인정하기 쉬운 사안이 아니라고 나는 지속적으로 지적해온 문제입니다. 그래서 묻게 되는 겁니다. “귀사는 미네르바 사안과 박대성 진위사건을 모두 언론 관점에서는 이제 앞으로 포기하는 것인가?” 이렇게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듣고 싶습니다. 애매한 수준 말고 명확하게 들어야 할 부분이지만, 실제로 ‘하겠다’ 하고 안 하면 그만이니 그 또한 무용의 질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한 거지요. 그러나 아깝습니다. 사실 귀사(신동아겠지요)가 작년 이후 취재과정에서 가진, 얻어진 정보가 내가 보기에는 가장 많은 듯 하니까요. 물론 최근에는 다른 쪽도 많이 가지고는 있습니다. 이런 저런 덕택에 나도 많은 부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취재의 내용을 내게 모두 전달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귀사로부터 얻은 것은 사실 그리 크지도 많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터뷰에도 참여하지 않은 내가 1월 29일 신동아에 가서 이 관련된 내용의 이야기를 긴 시간 해줄 필요가 없었겠지요.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 사건으로 더 많은 사실들이 주변을 통해 모아지는 과정에서 알게 된 내용이 무척 많습니다. 그걸 비망록으로 모두 종합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아주 재미난 새로운 사실들도 많이 나올 듯 합니다. 의혹이나 사실, 팩트, 그리고 거짓까지도. 그렇다고 내가 ‘미네르바 필명의 글을 쓴 사람(들)’을 찾아야 할 의무는 없다는 건 분명히 밝혀 둡니다. 그건 내 영역의 사안이 아니니까요.

혹여 세간에 말하는 것처럼 그럼 진짜를 내놔 봐라 라는 식으로는 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건 앞서도 말했지만 나의 관심은 될 수 있으나 <의무>가 아닙니다. 아울러 내가 생각하는 미네르바 필명의 <그 혹은 그들>이 가진 자유의지를 구태여 내가 침탈하고자 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처구니 없게 사회지식이 모두 엉터리로 취급되는 이런 판에 나오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진법을 이해하고자 하고 이진법과 십진법의 ‘담론의 가교(架橋)’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없는 사회에서 그것은 오히려 무리 중의 무리수일 뿐이란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나 숱하게 드러나고 있는 의혹의 제기는 나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비난이 아니라 비판의 영역에서는 당연히 해야 하구요. 지금까지 나는 내가 가진 의문에 대응하는 충족된 답변을 제대로 하나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비판은 이어집니다. 내가 보기에 귀사는 그걸 모두 포기하고 있지요. 그래서 최근에도 언론(言論)과 언로(言路)라는 관점에서 이진법과 십진법을 오가면서 세상 걱정을 많이 해보는 것입니다. 참 우스운지 무서운지, 기막힌지 하는 세상이다, 이런 생각도 하면서.

“열 마디 말 가운데 아홉 마디가 맞아도 신기하다고 칭찬하지 않으면서, 한 마디 말이 맞지 않으면 원망의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온다. 열 가지 계획 가운데 아홉 가지가 성취되어도 공로를 그에게 돌리지 않으면서, 한 가지 계획이 실패하면 헐뜯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온다.” (채근담 중에서)

5. 귀사가 해명해주어야 하는 사실과 예의에 관하여

월간조선 3월호가 나오고 나서 나는 신동아 측에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걸 해명해주기를 요청했습니다만, 그 때 이미 귀사는 사과문을 내고 진상조사위를 꾸민다고 하면서 이러한 일들에는 전혀 대처를 해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직접 했지요. 2월 18일 월간조선 3월호의 기사를 쓴 두 기자에게 이메일과 공개질의를 동시에 했고, 또한 답변이 없기에 3월 12일 재차 월간조선에 공개질의를 하였습니다. 월간조선은 4월호에서도 일언반구가 없는 모양새입니다. 오늘 현재까지 내게 보내온 이메일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냥 묵묵무답 스탠스군요.

귀사는 귀사의 권리만 이야기했지 내가 관련된 부분, 그러니까 작년 12월호 원고료를 내가 받았다느니 혹은 그런 관련성이나 의혹이 있다느니 하는 월간조선의 기사를 부인해준 바가 없습니다. 보고서를 봐도 그 부분은 명시적으로 적힌 부분은 아예 없더군요. 그냥 상황만 설명하면서 알아서 판단해라는 수준이었지요. 신동아 측도 그간 그렇게 대외적인 의사 표현을 아예 못하게 만들었더군요. 적어도 이 사안은 어느 시점부터 신동아 측에서는 “무장해제 당했다”는 것이 옳은 해석일 겁니다.

이건 하나의 예의와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적어도 그렇지 않은 것과 그런 것에 대해 구분하는 문제에서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하는 한 마디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귀사가 당사자가 아니던가요? 진상조사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귀사가 분명히 모든 해당 사안에 있어 당사자지요.

내가 진상조사위와 만났을 때, 이 부분을 거듭 언급했습니다만 귀사는 당시 이렇게 답변을 하더군요. “그것도 (하려고) 진상조사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그러나 보고서에는 없더군요. 그냥 설명했으니 글 안 쓴 거라고, 돈 안받은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알아서) 다 알아 먹을 것 아니냐는 식인가 싶습니다.

사람 간에는 절대 넘지 않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예의라는 게 있습니다. 내가 귀사의 수하도 아닌 데다가 또한 귀사의 말을 듣고 이리 저리 움직여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는 데다가, 내가 또한 고용인이나 계약자도 아닙니다. 가만 보니 어리석게도 나만 귀사의 진상조사에 가장 많이 참여한 외부 당사자더군요. 그건 아래서 좀 설명을 다시 하지요. 이 부분마저도 누락하는 것, 단순한 누락으로 볼 수 없게 받아들여집니다.

나는 보고서의 참 잡다한 이야기가 담긴 뉴스를 해외에서 인터넷으로 봤습니다. 그걸 보다가 바로 다른 약속도 다 취소하고 질의서를 보냈고, 보고서를 보라는 말에 귀사 김모 팀장에게 보고서 한 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답변은 디지털 형태로는 보내주기 곤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언급한 보고서를 나에게 파일로도 못 보낸다? 내가 알기로는 신동아 편집을 하게 되면 거기는 당연히 파일 형식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책은 나왔는데 내가 그 파일을 바꾸기라도 한다는 것입니까?

다음 이야기가 더 걸작입니다. 관련 기사를 보시거나 혹은 곧 동아닷컴에도 올릴 것이니 그걸 참조하라는 겁니다. 내가 분명히 해외 출장 중이어서 보지 못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더군요. 진상조사에 협조해달라고 참 끈질기게 아픈 사람을 불러낼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더군요.

분명히 이야기 하지만 나는 귀사에 조사협조를 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도 내 지인의 부탁에 의해서. 귀사가 법률 기관도 아닌 터이고, 또한 나를 조사할 이유도 없습니다. 내가 조사에 응할 이유도 없었지요. 보고서도 그 점을 적었더군요. “강제조사권이 없는 언론사”라는 것인데, 그 말은 곧 협조상대가 동의하지 않는 내용-혹은 동의했다 하더라도-은 모두 언제든지 부인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 이야기를 미주알 고주알 하는 것이 오히려 우습지만, 나는 지금 이 시간 부로 내가 귀사 진상조사위를 만나서 했던 모든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취중에 한 이야기, 술 먹여서 몇 사람이 달라 붙어서 이야기를 시키는 데 귀찮아서 모두 거짓말을 했다고 부인하겠습니다. 그럼 아주 쉽게 되겠지요. 귀사는 저 진상조사 보고서 전부를 나의 거짓말에 바탕 해서 쓴 것이 됩니다. 그리고 조사협조라지만 거의 대부분이 술이 없던 자리도 아니었지요. 마지막 세 번째에는 몸살 난 내가 새벽까지의 술자리에서 뻗어서 집에까지 저를 귀사 직원들이 실어주기까지 했으니까요. 물론 나는 혼자이고 귀사의 인원들은 다수였지요. 나도 위협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