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청사고(谷靑私藁)를 통해 본 의원 이현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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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 - 醫史學 제17권 제2호(통권 제33호) 2008년 12월 Korean J Med Hist 17ː177189 Dec. 2008 大韓醫史學會 ISSN 1225505X 곡청사고(谷靑私藁) 를 통해 본 의원 이현양의 글쓰기 허 경 진* 1. 머리말-조선후기 의원들의 글쓰기 현황 조선시대 의원들은 의과에 응시하기 위해 상당 한 수준의 한문을 배웠지만, 그들이 쓴 글은 의 서(醫書)를 제외하고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중인 신분이 처음 정착되던 17세기 초반에 의원 중심 삼청시사(三淸詩社)가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그 맥이 후배들에게 이어지지 못했다. 이들이 간행한 육가잡영(六家雜詠)에는 최기 남(崔奇南 宮奴)의 시 52편, 정남수(鄭枏壽 內醫 院正)의 시 53편, 남응침(南應琛 內醫院正)의 시 43편, 정예남(鄭禮男 內醫院正)의 시 21편, 김효 일(金孝一, 禁漏官)의 시 41편, 최대립(崔大立 敎 誨譯官)의 시 51편 등 6명의 시 261편이 실렸는 데, 의원 남응침이 영의정 이경석에게 서문을 부 탁하고 의원 정남수가 친구에게 발문을 부탁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의원들이 시사(詩社) 활 동과 시선집 편집의 중심에 있었다. 1) 이들은 약대후시춘궁하주찬근차제상현계운(侍藥待候時春 宮下酒饌謹次提相玄溪韻)같은 시에서 볼 수 있 듯이 왕의 병을 치료하면서 시를 짓기도 하고, 장자구용약명희음양절여효기체족성일률이수지(鄭 丈子久用藥名戱吟兩絶余效其體足成一律以酬之)같은 시에서 볼 수 있듯이 한약재(韓藥材) 이름 넣어서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놀기도 했다. 내의원정(內醫院正)까지 오른 이 3명의 의원 가 운데 정남수가 행림시고(杏林詩稿)라는 시집을 남겼다지만 전하지 않는다. 이후 해동유주(海東遺珠) 소대풍요(昭代風 謠) 풍요속선(風謠續選) 풍요삼선(風謠三選) 의 위항시선집이 간행되었는데, 그 작가 명단에서 의원으로 확인된 사람은 박군(朴頵)백흥전(白興 銓) 신명희(申命羲)신희명(申熙溟) 오창렬(吳昌 烈)유동역(柳東易) 정도이다. 2) 그나마 몇 편 실 리지 않았으니, 의서를 제외한 의원들의 글쓰기가 활발치 않았음이 확인된다. 2. 저자 이현양의 집안과 생애 곡청사고(谷靑私藁)저자 이현양(李顯養 * 연세대학교 1) 허경진, 三淸詩社와 六家雜詠. 韓國學報 제53집; 일지사; 1988. 참조. 2) 李相鎭, 閭巷人名錄 李朝後記閭巷文學叢書9: 여강출판사; 1991. p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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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醫史學 제17권 제2호(통권 제33호) 2008년 12월 Korean J Med Hist 17ː177189 Dec. 2008

    Ⓒ大韓醫史學會 ISSN 1225505X

    곡청사고(谷靑私藁)를 통해 본 의원 이현양의 글쓰기

    허 경 진*

    1. 머리말-조선후기 의원들의 글쓰기 현황

    조선시대 의원들은 의과에 응시하기 위해 상당

    한 수준의 한문을 배웠지만, 그들이 쓴 글은 의

    서(醫書)를 제외하고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중인

    신분이 처음 정착되던 17세기 초반에 의원 중심

    의 삼청시사(三淸詩社)가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그 맥이 후배들에게 이어지지 못했다.

    이들이 간행한 육가잡영(六家雜詠)에는 최기남(崔奇南 宮奴)의 시 52편, 정남수(鄭枏壽 內醫

    院正)의 시 53편, 남응침(南應琛 內醫院正)의 시

    43편, 정예남(鄭禮男 內醫院正)의 시 21편, 김효

    일(金孝一, 禁漏官)의 시 41편, 최대립(崔大立 敎

    誨譯官)의 시 51편 등 6명의 시 261편이 실렸는

    데, 의원 남응침이 영의정 이경석에게 서문을 부

    탁하고 의원 정남수가 친구에게 발문을 부탁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의원들이 시사(詩社) 활

    동과 시선집 편집의 중심에 있었다.1) 이들은 「시

    약대후시춘궁하주찬근차제상현계운(侍藥待候時春

    宮下酒饌謹次提相玄溪韻)」같은 시에서 볼 수 있

    듯이 왕의 병을 치료하면서 시를 짓기도 하고, 「정

    장자구용약명희음양절여효기체족성일률이수지(鄭

    丈子久用藥名戱吟兩絶余效其體足成一律以酬之)」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듯이 한약재(韓藥材) 이름

    을 넣어서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놀기도 했다.

    내의원정(內醫院正)까지 오른 이 3명의 의원 가

    운데 정남수가 행림시고(杏林詩稿)라는 시집을 남겼다지만 전하지 않는다.

    그 이후 해동유주(海東遺珠)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 등의 위항시선집이 간행되었는데, 그 작가 명단에서

    의원으로 확인된 사람은 박군(朴頵)․백흥전(白興

    銓)․신명희(申命羲)․신희명(申熙溟)․오창렬(吳昌

    烈)․유동역(柳東易) 정도이다.2) 그나마 몇 편 실

    리지 않았으니, 의서를 제외한 의원들의 글쓰기가

    활발치 않았음이 확인된다.

    2. 저자 이현양의 집안과 생애

    곡청사고(谷靑私藁)의 저자 이현양(李顯養 * 연세대학교

    1) 허경진, 三淸詩社와 六家雜詠. 韓國學報 제53집; 일지사; 1988. 참조.

    2) 李相鎭, 閭巷人名錄 李朝後記閭巷文學叢書9: 여강출판사; 1991. pp.1-38

  • 醫史學 제17권 제2호(통권 제33호) 177-189,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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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3~1852)은 중인 집안으로 이름난 안산(安山)

    이씨(李氏) 문중에서 침의(鍼醫) 이재우(李在祐

    1750~1808)의 외아들로 태어났다.3) 초명은 광수

    (光秀), 자는 의경(宜卿)이다. 호는 곡청(谷靑)․안

    락와(安樂窩)․용헌(庸軒)․경수당(警修堂)을 차례

    로 만들어 썼는데, 이러한 호를 지을 때마다 스스

    로 서(序)를 지어 그 유래와 마음가짐을 밝혔다.

    경수당은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로

    이름난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의 호이

    기도 한데, 두 사람 다 청나라 석학 옹방강(翁方

    綱)에게 글씨를 받았다. 신위는 44세 되던 1812년

    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다가 추사 김정희의 소개로 옹방강을 만나 ‘유

    소입두(由蘇入杜)’, 즉 소동파의 시를 통해서 두

    보의 경지에 드는 시도(詩道)를 배우고, 귀국한

    뒤에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웠다. 옹방강이 ‘경

    수당(警修堂)’이라는 편액을 써 주었으므로, 신위

    는 이때부터 ‘경수당’이라는 당호를 썼고, 그의

    문집도 경수당집(警修堂集)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현양도 옹방강이 쓴 ‘경수당(警修堂)’ 편액을

    받았지만, 북경에 가서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서재를 낙성한 뒤에 친지에게서 받은 것이다.4)

    그는 이 글씨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가 편찬한 안산이씨세보(安山李氏世譜)에서 이현양과 가까운 선조를 중심으로 벼슬을 확인해

    보면 7대 충남(忠男)은 역관, 8대 영찬(英燦)도

    역관, 9대 유태(惟泰)도 역관, 10대 덕하(德夏)는

    음양과, 11대 준희(俊禧)는 역관, 12대 재우는 음

    양과이어서 역관과 음양과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안산 이씨 전체로 보면 7대 이윤영이 혜

    민서 교수를 지낸 것부터 15대 이명륜에 이르기

    까지 8대에 걸쳐 20명의 의관을 배출하였다.5)

    이현양 직계에서는 이현양이 21세 되던 1803년

    에 처음 의과에 합격했는데, 아버지 이재우의 벼

    슬은 관상감 직장이었다. 중도에 의과로 업을 바

    꾸면서 태의 김세선(金世選)에게 의술을 배웠으

    며,6) 1797년 겨울에 김문순(金文淳)을 따라 북경

    에 갔다가 치료 솜씨를 보여 청나라 의원들을 놀

    라게 하였다. 그는 아들 현양에게 의술을 가르치

    며 다음 두 가지를 당부하였다.

    의원은 궁리를 오로지 해야 한다. 영추(靈樞)와 소문(素問)만 종(宗)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사서와 육경도 또한 의가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醫者專事窮理, 非獨靈素爲宗, 四書六經, 亦醫家之

    本也.7)

    사람의 병을 고칠 때에 귀천을 묻지 말고, 오로지

    음덕을 쌓기에만 힘쓰라. 사람에게 보답 받으려 하

    지 말고, 마땅히 하늘에 보답받기를 구하라. 의약(醫

    藥)을 쓰는 것은 도(道)이고, 사생(死生)은 명(命)이

    니, 도를 다하고도 죽는 것은 명이다. (그러나) 도를

    다하지 않고 죽으면 사람을 찔러놓고 칼에게 핑계

    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治人病, 無問貴賤, 專務陰德, 毋責報於人, 當求報

    於天. 夫醫藥道也, 死生命也. 盡其道而死命也, 不盡其

    道而死, 何異於刺人而諉刃也.8)

    이재우는 아들 현양에게 맹자의 어법을 빌려 “(의원이) 도를 다하지 않아 죽으면 사람을 찔러놓

    3) 김양수와 안상우의 논문(김양수, 안상우. 조선후기 醫官집안의 活動. 東方學志 제136집: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6.)에서 안산 이씨 가계를 소개하면서 이현양의 생애를 밝혔으므로, 이 논문에서는 겹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저작활동과 관계있는 부분만 밝혀내기로 한다.

    4) 適有故人遺以華人翁學士方綱筆, 警修堂三字扁額, 使揭門楣. (谷靑私藁: 警修堂序)

    5) 김양수, 안상우. 조선후기 醫官집안의 活動. 東方學志 제136집: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6. p71

    6) 遂廢科, 而業醫, 問靈素之義於太醫金知事世選. 李彦璐, 「副司猛李公行狀」.

    7) 같은 글.

    8) 같은 글.

  • 허경진ː 곡청사고(谷靑私藁)』를 통해 본 의원 이현양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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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칼에게 핑계 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不

    盡其道而死, 何異於刺人而諉刃也.]”라고 가르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화(浮華)를 싫어하고 실학

    (實學)에 힘써, 가업인 의술(醫術)을 열심히 익혀

    그의 나이 21세 되던 1803년에 의과에 합격하였

    다. 평소에 유학(儒學)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여,

    의서와 함께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문집이라

    고 할 곡청사고에 보이는 서문들을 근거로 하여 그의 저술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보이면 아

    래와 같다. 수성편감(修省片監)(1798) · 천기미요(天機微要)(1799)·의학정원(醫學正源)(1801)·신성여의단(神聖如意丹)(1809)․광제비요(廣濟秘要)(1810) · 원병기요(源病機要)(1819)·본초정의(本草精義)(1826)·의약청지(醫藥廳誌)(1838) · 영화지(迎華誌)(1843) 등 9권에 이른다.

    순조·익종·헌종·철종까지 4조 32년간 내의

    원에서 근무하였는데, 순조 21년(1821) 의약동참

    (醫藥同參)을 시작으로 왕이 복용할 약을 지어

    올리는 일을 맡아 어의(御醫)로 근무하였다. 1839

    년에 조인영과 판부사 정만석(鄭晩錫)의 보살핌

    에 힘입어 동반직인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 와

    서 별제(瓦署別提),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 등

    을 지내고, 1843년에는 영화찰방(迎華察訪)에 제

    수되었다. 임기가 2년이건만, 판서 박영원의 계청

    으로 1년을 더 근무했으며, 1846년에 오위장(五衛

    將)에 제수되었다. 그는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시

    절에도 꾸준히 저술을 남겼다.

    3. 곡청사고(谷靑私藁)의 편집이현양이 지은 글은 상당히 많았다. 그의 문집에

    서문이 실린 책만 해도 9종이나 된다. 그러나 대부

    분 전하지 않고, 정작 서문이 실리지 않은 안산이씨세보(安山李氏世譜)와 점을 치던 책 영기경(靈基經) 2종만 따로 전한다. 그밖에 「선조고통훈대

    부행사역원판관부군이공행장(先祖考通訓大夫行司

    譯院判官府君李公行狀)」과 「선조고학생부군묘명(先

    祖考學生府君墓銘)」등도 문집에 실리지 않고 따로

    전한다. 행장과 묘명 등이 문집에 실렸더라면, 분

    량과 체제가 갖춰진 문집이 되었을 것이다.

    문집 곡청사고(谷靑私藁)는 90장 필사본으로 전하는데, 표지에는 ‘곡청용어(谷靑冗語)’라 쓰여

    있지만 권수제(卷首題)를 책명으로 하는 관례에

    따라 곡청사고(谷靑私藁)라고 부르기로 한다.집안의 기반을 닦기 위해 선산을 마련하고 선

    조들의 행장과 족보를 정리한 이현양은 자신의

    작품을 아들 이한경에게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

    한경은 이현양의 작품을 저술 연대순으로 편집했

    기에, 그의 생애와 작품의 관계 및 저술 배경을

    알기가 쉽다. 그러나 뒤에 가면서 연대가 뒤섞이

    기도 하여 일정치는 않다. 광곽(匡郭)이나 계선

    (界線) 없이 1면 8행에 매행 20자씩 180면에 걸

    쳐 필사했다. 첫 장에 「곡청사고목록(谷靑私藁目

    錄)」이 있는데, 마지막에 실린 「부동유록(附東遊

    錄)」까지 56편이다. 「동유록(東遊錄)」에 ‘부(附)’라

    는 글자를 붙인 것을 보면, 이 글도 처음에는 그

    가 지은 행장같이 따로 돌아다닌 듯하다.

    이 목록을 일반적인 문집 편제에 따른 문체 별

    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 서발(序跋) 22편

    숙흥야매잠발(夙興夜寐箴跋)․안락와서(安樂窩

    序)․온곡서(溫谷序)․용헌서(庸軒序)․용암서(庸

    菴序)․묵암서(黙菴序)․수성편감서(修省片鑑

    序)․천기미요서(天機微要序)․의학정원서(醫學正

    源序)․이요재서(二樂齋序)․신성여의단서(神聖如

    意丹序)․역림거사서(櫟林居士序)․송이여실개생

    약포서(送李汝實開生藥舖序)․우물서(寓物序)․광

    제비요변론인(廣濟秘要辨論引)․원병기요인(源病

    機要引)9)․본초정의서(本艸精義序)․경비헌서(景

    9) 목록에는 「광제비요원병기요인(廣濟秘要源病機要引)」이라고 썼지만, 위에 소개한 ‘광제비요(廣濟秘要)’를 실수로

  • 醫史學 제17권 제2호(통권 제33호) 177-189,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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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肥軒序)․경수당서(警修堂序)․의약청지서(議藥廳

    誌序)․운근루서(雲近樓序)․영화지서(迎華誌序)

    * 기(記)․논(論)․설(說) 9편

    계색론(戒色論)․가언기(嘉言記)․작구설(鵲鷗

    說)․제금설(啼禽說)․곡청자설(谷靑子說)․백승

    설(白丞說)․의양전기(宜陽田記)․대갹설(大噱

    說)․우도설(牛刀說)

    * 전(傳) 2편

    역림거사전(櫟林居士傳)․노풍선생전(老楓先生傳)

    * 서(書) 5편

    상해도인서(上海道人書)․여엄산태서(與弇山台

    書)․봉정이대아육교서(奉呈李大雅六橋書)․상해

    도인서(上海道人書)․봉증금초(奉贈錦樵)

    * 제문(祭文)․애사(哀辭) 10편

    대이여실제처부문(代李汝實祭妻父文)․제매부판

    관최공문(祭妹夫判官崔公文)․제장자씨공인최실문

    (祭長姊氏恭人崔室文)․대선건제사장김첨사문(代

    善建祭師丈金僉使文)․제송원김상서문(祭松園金尙

    書文)․망아일륙애사(亡兒一六哀辭)․제조우석여

    문(祭趙友錫汝文)․제매부이동지문(祭妹夫李同知

    文文)․제중자씨정부인이실문(祭仲姊氏貞夫人李室

    文)․제매도인이치명문(祭梅道人李穉明文)

    * 잡저(雜著) 8편

    잡저(雜著)․자감편(自感篇)․구전영응단(九轉靈應

    丹)․학의해(學醫解)․곡청섬어(谷靑섬語)․영화잡저

    (迎華雜著)․운근객화(雲近客話)․부동유록(附東遊錄)

    문장가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예에 따르면 앞부분에 시(詩)․부(賦)를 싣고, 그 다

    음에 서(序)․기(記)․전(傳)․서(序)․논(論)․설(說)․

    해(解)․잡문(雜文)․제발(題跋)․애사(哀辭)․제문․

    행장․기행․잡기(雜記) 순으로 실었다. 이현양의 글

    도 비교적 여러 문체로 여러 편을 지었으므로, 비슷

    한 문체끼리 합해서 권1 서발 22편, 권2 기․논․

    설 9편, 권3 전 2편, 권4 서 5편, 권5 제문․애사 10

    편, 권6 잡저 8편의 형태로 편집해도 좋았을 것이다.

    문집 앞뒤에 서문이나 발문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간행을 준비하게 위해 편집한 초고본

    은 아닌 듯하다. 문중에서 선조의 글을 간직하기

    위해 정서해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필사하다가 빠진 글자는 옆에 표시를 하고 작

    은 글씨로 보충하였다. 아버지의 문고이기에, 정

    성껏 필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내용별로 본 이현양의 저술 세계

    문체별로 나누면 위와 같지만, 내용별로 나누면

    의학에 관련된 글, 일상생활에 관련된 글, 수양에

    관련된 글, 편지, 제문, 기행문 등으로 나눌 수 있

    다. 물론 형식과 내용이 겹쳐 엄격하게 분류할 수

    없지만, 편의상 이렇게 나누는 것이 편리하다. 이

    에 따라 각 작품의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의서(醫書)의 서발(序跋)

    가. 수성편감서(修省片鑑序) (1798)

    기질이 맑은데도 선하지 않은 자와 기질이 탁한

    데도 선하지 않은 자가 있어 선한 행실을 익히는 것

    이 중요함을 알았기에, 경전 가운데 성현의 중요한

    가르침을 모으고 풍아(風雅) 가운데서 선유(先儒)의

    긴요한 의논을 골라 수성편감(修省片鑑) 1권을 편찬하고 이 서문을 지었다. 아침저녁으로 읽으며 선

    한 행실을 익히고 잘못된 행실을 줄이기로 다짐하였

    다. 본격적인 의서라기보다, 수양과 관련된 저술이다.

    나. 천기미요서(天機微要序) (1799)

    처음 의문(醫門)에 들어섰을 때 먼저 내경(內經)

    을 읽고 운기(運氣)를 근본으로 여겨 밤낮 생각했

    지만 그 이치를 알기 힘들었다. 여러 선생들이 궁

    통(窮通) 끝에 밝혀낸 묘용(妙用)을 대강 분류하여

    한 번 더 베낀 것이다. 본문에는 「원병기요인(源病機要引)」으로 되어 있다.

  • 허경진ː 곡청사고(谷靑私藁)』를 통해 본 의원 이현양의 글쓰기

    - 181 -

    구결(口訣)로 삼고, 뒷날 펼쳐보기 위한 적요(摘

    要)로 편찬한 것이 천기미요(天機微要)이다.

    다. 의학정원서(醫學正源序) (1801)10)

    전의(典醫)에 이름을 올린 뒤에 맥결(脉訣)을

    연구하여, 참다운 진맥이 병을 진찰하는 지름길임

    을 인식하였다. 맥결(脉訣)을 총괄하고 제가(諸家)

    의 변론을 교정하여, 증맥(症脉)의 방약(方藥)을

    덧붙여 편찬한 의학정원(醫學正源)의 서문이다.

    라. 신성여의단서(神聖如意丹序) (1809)

    1809년 가을에 김이현(金而賢)과 이여실(李汝實)이

    의학을 배우면서 가장 힘쓸 약 처방을 묻기에, 인교

    (仁敎)를 베풀어 백성을 교화하고 형정(刑政)을 펼쳐

    백성을 두렵게 하는 것은 성왕의 정치이니 나라가

    어지럽게 않게 되고, 기거(起居)를 삼가 사악한 것을

    피하고 심신을 편안케 하여 참됨을 기르는 것은 신

    의(神醫)의 치료이니 병이 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여러 의서를 참조해서 그러한 가르침을 정리하고, 신성여의단(神聖如意丹)이란 제목을 붙여 주었다.

    마. 광제비요변론인(廣濟秘要辨論引)(1810)

    아버지를 스승으로 삼아 10년 동안 의학 공부하며 가

    학을 전수한 사실을 밝혔으며, 아버지에게 인정받았던

    의원 이상은(李相殷)이 아버지와 주고받던 문답을 정리

    하고, 해결하지 못한 부분에 이현양이 자문하여 변론(辨

    論) 문답(問答)을 모아 광제비요(廣濟秘要)라는 책을 편찬했는데, 이 책이 편찬된 과정을 소개한 글이다.

    바. 원병기요인(源病機要引) (1819)

    그는 17세부터 가업을 전수받아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과 영추경(靈樞經), 월인(越人)의 난경(難經), 화타(華陀)의 중장경(中藏經),

    장기(張機)의 상한론(傷寒論), 금궤옥함경(金櫃玉函經), 손사막(孫思邈)의 천금방(千金方), 湯若望의 양담여작랍(洋淡如嚼蠟)과 이호(李杲)의 난실비장(蘭室秘藏), 비위론(脾胃論), 단계심법(丹溪心法), 하간전서(河澗全書) 등을 여러 해 동안 연구했지만 요령을 얻지 못했다. 이천

    (李梴)의 의학입문(醫學入門)을 깊이 연구하여 요점을 터득하고 1809년부터 10년 동안 사람들에

    게 시험한 다음 원병기요(源病機要)라는 책을 한 권으로 만들어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하였다.

    사. 본초정의서(本艸精義序) (1826)

    광제비요를 편찬한 다음, 실제로 환자들을 고치는 과정에서 새로운 내용을 정리하여 원병기요(源病機要)와 본초정의(本艸精義)를 편찬하였다. 약성준승(藥性準繩)은 주로 이시진(李時珍)의

    저술을 참조하였다. 의업(醫業)을 천직으로 여기

    고, 재상이 나라를 다스리는 심정으로 편찬하였다.

    아. 의약청지서(議藥廳誌序) (1838)

    인조(仁祖) 때에 의약청(醫藥廳)을 처음 설치해

    업의(業醫)와 유의(儒醫) 네댓 명이 함께 투약(投

    藥)을 의논했으며, 현종(顯宗) 계축년(1673)에는 열

    명까지 늘렸다. 지금 무술년(1838)까지 176년11) 동

    안 입사자(入仕者)는 167명이며, 포상을 받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관청의 역사를 지(誌)로 기

    록하는 것이 고법이므로, 의약청의 자료를 수집하

    여 한 책을 만들고 의약청지(議藥廳誌)라 하였다.

    (2) 일상생활에 관련된 글

    가. 안락와서(安樂窩序) (1798)

    16세 되던 1798년 8월에 청곡(靑谷) 남쪽에 초

    10) 그는 21세 되던 1803년에 의과에 합격하였는데 1801년에 이 서문을 쓰며 전의(典醫)라고 하였으니, ‘신유(辛酉)’라는 간지가 잘못된 듯하다.

    11) 이현양의 계산이 틀렸는데, 실제로는 166년이다.

  • 醫史學 제17권 제2호(통권 제33호) 177-189, 2008년 12월

    - 182 -

    당 몇 칸을 수리하고, 동네 유생들과 경전을 강

    론했는데, 서재 이름을 안락와(安樂窩)라고 하였

    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천명을 즐겨 따른다’는

    뜻이다.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야 몸이 닦여지니,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수신(修身)의 요체이자

    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이므로 서재 이름을 ‘안락

    와(安樂窩)’라 지은 것이다.

    나. 온곡서(溫谷序) (1799)

    친구 의원 이석여(李錫汝)가 호를 온곡(溫谷)이

    라 짓고 서(序)를 청하자, 사철 가운데 만물을 살

    려내는 것이 봄의 따뜻함이라는 점을 들어서 사

    람의 목숨을 살려내는 의원이 되기를 권면하였다.

    다. 용헌서(庸軒序) (1800)

    5~6년간 의서를 읽다가, 맥경(脉經)을 읽고 호를 용헌(庸軒)이라 하였다. 약제를 치우치게 사

    용하여 사람을 해치는 폐단을 없애고, 중용(中庸)

    의 도에 힘쓰기 위해 이 서(序)를 벽에 걸고 스

    스로 경계하였다.

    라. 용암서(庸菴序)

    ‘용(庸)’자를 주자(朱子)는 중용(中庸) 장구에서 “평상[庸平常也]”이라 설명했고, 정자(程子)는

    “바뀌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 한다[不易之謂庸]”

    고 했다. 서재 이름을 용암(庸菴)이라 정하고, 용

    (鏞․墉․傭․)자의 모든 뜻을 생각하며 군자답

    게 중용(中庸)을 지키며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마. 묵암서(黙菴序) (1801)

    천지가 말하지 않아도 사철이 돌아가고, 성인이

    팔짱만 끼고 있어도 천하가 다스려지며, 군자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만 리에 통하고, 세상 사람

    들이 말하지 않아도 길이 강녕(康寧)을 보존하는

    것을 보고 ‘묵(黙)’이 대도(大道)임을 알아, 서재

    몇 칸을 짓고 편액을 ‘묵암(黙庵)’이라 하였다.

    바. 이요재서(二樂齋序) (1808)

    1807년 가을에 의원에서 근무 중에 논어「학이(學而)」편을 청아하게 낭송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다가 18세 청년 이명중(李明仲)을 만나 친

    구가 되었다. 그가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호를

    ‘이요(二樂)’로 정했다는 말을 듣고, 산과 물의 덕

    을 논하며 이요거사(二樂居士)에게 인(仁)과 지

    (智)에 힘쓰라고 권면한 글이다.

    사. 곡청자설(谷靑子說)

    곡청자(谷靑子)는 이현양 자신을 삼인칭으로

    부른 말인데, 의양현(宜陽縣) 약봉(藥峯) 아래에

    서 메마른 밭에 농사를 짓고 살았다는 것을 보아

    우언(寓言)임을 알 수 있다. 가뭄이 들어 누구에

    게 도움 받을 수 없는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아. 경비헌서(景肥軒序) (1832)

    집 서쪽에 살았던 명과선생(命課先生)이 몇 년

    동안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아 찾아갔다가 장

    자의 풍모가 있는 것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 시절에 눈이 멀어 서당 선생에게서 유서(儒

    書)와 함께 복서(卜筮) 성명(星命)의 글을 배우고

    몇 년 전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름은 이동혁

    (李東爀)이고, 자는 군명(君明), 호는 경비헌이었

    다. 그의 눈은 멀었지만 마음은 밝고, 몸은 수척

    했지만 도(道)는 살진 것에 탄복하며 서(序)를 지

    어 정진하기를 권면하였다.

    자. 경수당서(警修堂序) (1834)

    이현양의 집이 한양 북쪽 청성고동(靑城古洞) 길

    가에 있었는데, 1834년 가을에 수리하고 벽에는 송원

    (松園)의 그림과 긍원(肯園)의 글씨, 기둥에는 기원

    (綺園)의 전서(篆書)를 걸자 친지가 옹방강이 쓴 ‘경

    수당(警修堂)’ 3자를 주어 처마에 편액으로 걸었다.

    처음에는 글씨가 너무 좋아서 감상하고 즐기다가, 3

    자의 뜻을 갑자기 깨닫고 “‘경수(警修)’라는 편액이

    참으로 나의 정수리를 찌른 신침(神針)”임을 알았다.

  • 허경진ː 곡청사고(谷靑私藁)』를 통해 본 의원 이현양의 글쓰기

    - 183 -

    나이 쉰에 평생 과실을 점검하고, 늙어 쇠약해진 몸

    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였다.

    그는 세간 만사가 공허(空虛) 아님이 없고, 종

    일 영위하는 것도 망상(妄想) 아님이 없으며, 화

    복이 모두 생사에 있지 않으니, 이 모두가 한낱

    꿈이라는12)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

    대는 옛사람의 책을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늙어가

    면서 불가와 도가에 빠졌으니 어찌된 일인가?”라

    고 묻자, “성명(性命)의 이치는 삼교(三敎)가 아

    마도 동일한 도(道)일 것이다”라고 답하였다.13)

    차. 운근루서(雲近樓序) (1843)

    1842년 4월에 사도시(司䆃寺) 주부에서 영화역(迎華

    驛) 찰방으로 전근하여 보니, 관아 남쪽에 있는 누각 1칸

    에 운근루(雲根樓)라는 편액이 걸렸지만 서(序)가 없었다.

    구름은 땅에서 나와 하늘에 쓰이는 것으로, 용을 따라

    해를 지키는 것이다. 이현양 자신이 23년 동안 삼조(三

    朝)를 받든 것도 용을 따라 해를 지킨 한 조각구름[片雲]

    이라 생각하여, 운근루 주인이 된 감회를 서술하였다.

    카. 영화지서(迎華誌序) (1843)

    14세 되던 1796년에 묘동(廟洞)에 있는 이오진(李五鎭)

    의 집에 찾아갔다가 영화역 찰방에 임명되어 관아 건축

    에 바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중에 영화역 찰방이 되

    라는 덕담을 들었다. 이오진이 찰방에 임명되었던 60세가

    되자, 이현양 역시 영화역 찰방에 임명되었다. 이오진이

    여러 건물과 제도를 정비했지만 47년 동안 달라진 점들

    이 문헌에 기록되지 않아, 여러 문헌을 참조하여 영화지(迎華誌) 1책을 만들어 뒷날의 읽을거리로 삼았다.

    (3) 수양에 관련된 글

    가. 숙흥야매잠발(夙興夜寐箴跋) (1798)

    “공경함이 게으름을 이기면 길한데, 일찍 일어

    나고 밤에 잠드는 것이 바로 공경함이 게으름을

    이기는 길이다”라는 말을 듣고, 이를 다짐하는

    명(銘)을 짓고 그 발(跋)을 덧붙였다. 16세에 지

    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이 그의 첫 저술인

    셈인데, 지금은 이 발문만 남아 있다.

    나. 계색론(戒色論) (1800)

    오행(五行)에 의해 여색을 경계한 글인데, 수신

    (修身)보다 의학적 입장에서 경계하였다.

    다. 가언기(嘉言記) (1800)

    의학을 함께 배우던 친구 이진규(李鎭珪)와 여

    색(女色)에 관해 논한 글이다. 경신록(敬信錄)의 가르침에 따라 명명지벌(冥冥之罰) 뿐만 아니라 현

    현지화(顯顯之禍)를 피하고, 적인걸(狄仁傑)이 “내

    가 남의 아내에게 음심을 품으면, 남도 내 아내에

    게 음심을 품는다”고 한 말을 명심하기로 하였다.

    (4) 편지

    가. 상해도인서(上海道人書) (1820)

    8년 동안 드나들던 해도인에게 중인의 신세를

    호소하며, 중인임에도 해도인에게 지나친 대우를

    받아 고마워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나. 여엄산태서(與弇山台書)

    내의원(內醫院) 수의(首醫)였던 엄산(弇山) 현

    재덕(玄在德)에게 본초유함(本艸類函)의 교정에 관해 상의한 편지이다. 여러 해 동안 수집한 본초

    집성이 의가(醫家)의 보장(寶藏)이긴 하지만 너무

    방대해서 쉽게 찾아보기 힘드니, 덜 필요한 것을

    삭제하고 긴요한 것 중심으로 편집해서 의학을

    배우는 자들이 외우기 쉽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의서에 익숙한 학자들이 한자

    12) 世間萬事, 莫非空虛, 終日營爲, 莫非妄想, 禍福皆是無有生死, 皆是一夢. (谷靑私藁: 警修堂序)

    13) 客或誚之曰, “子自負讀古人書, 而老淫釋老, 何也?” 主人啞然咲, 而謝曰, “性命之理, 則三敎恐或同一道也.” (谷靑私藁: 警修堂序)

  • 醫史學 제17권 제2호(통권 제33호) 177-189,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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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에 모여 먼저 범례(凡例)를 만든 뒤에, 본초 몇

    권씩 나눠주어 범례에 따라 필삭(筆削)하면 짧은

    시일 안에 마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의가(醫

    家)의 보장(寶藏)이 될 만하다고 하였다.

    다. 봉정이대아육교서(奉呈李大雅六橋書) (1832)

    육교(六橋) 이조묵(李祖黙)에게 자신이 한미한

    집안에 태어나 가업을 계승하여 공부한 과정을

    말하며, 1810년부터 1826년까지 편찬한 광제비요 몇 권의 서문을 부탁하였다. 범례와 목록, 변론이 실린 제1권과 변어(弁語) 및 인(引)이 실린

    제5권을 보내면서, 이것만 가지고도 일부의 뜻을

    터득할 것이며, 제2,3,4권은 모두 옛사람의 조박

    (糟粕)을 유편(類編)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라. 상해도인서(上海道人書) (1819)

    해도인(海道人)이 지금까지 이끌어주신 것같이,

    앞으로도 지도해 주시기를 부탁하였다.

    마. 봉증금초(奉贈錦樵)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동해 어부가 고기

    한 마리를 잡고 기뻐하던 것을 말하고, 늦여름에

    장마가 개자 농부가 뙤약볕에 농부가를 부르며

    농사짓는 즐거움을 말하였다. 귀인(貴人)과 한사

    (寒士)의 행차도 비교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귀천(貴賤)이 한가지라고 하였다. 금초의 편지를

    받고, 지음(知音)을 얻게 되어 다행스럽다고 썼다.

    (5) 전기

    가. 역림거사전(櫟林居士傳)

    영묘하면서도 낙백(落魄)한 역림거사 이시배

    (李時輩)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하게 자랐는

    데, 국부(國富) 이열재(怡悅齋)의 문객이 되어 부

    기(簿記)와 관약(關鑰)을 맡았다. 7년 동안 일한

    뒤에 의술(醫術)을 배워 역림으로 돌아가고, 호를

    역림거사라고 하였다.

    나. 노풍선생전(老楓先生傳) (1842)

    1842년 가을에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영화역

    관아로 돌아왔다가, 정당(政堂) 서남쪽 귀퉁이에

    서 있는 늙은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어 환영해주

    는 느낌이 들었다. 단풍나무 아래에서 손님과 술

    을 마시며 “금강산이나 설악산의 단풍보다 더 높

    고 그늘도 더 넓다”고 칭찬하였다. 취해서 잠이

    들었는데, 황관(黃冠) 자의(紫衣) 차림의 사람이

    나타나 절하며 “참으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라

    고 칭찬하였다. “송백(松柏)의 절개와 도리(桃李)

    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지 않으면서 60년 살았다”

    는 말을 듣고, “늙은 단풍나무가 사람이 된다더

    니,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군요. 그렇다면 선생

    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다가

    꿈을 깨어 이 글을 지었다.

    (6) 제문

    가. 대이여실제처부문(代李汝實祭妻父文)

    후배 이여실(李汝實)을 대신하여 그의 장인 정

    공(鄭公)의 장례에 지어준 제문이다. 여실(汝實)

    은 나중에 자(字)를 여고(汝固)로 바꾸었다.14) 장

    인이 의학을 수련한 과정과 성남매약옹(城南賣藥

    翁)이라 불리며 영약(靈藥)으로 인술을 펼치던

    모습을 기리며 슬픔을 표현하였다.

    나. 제매부판관최공문(祭妹夫判官崔公文)(1811)

    1811년 1월 14일에 세상을 떠난 첫째 매부 사

    역원 판관 최헌주(崔獻周)의 장례에 지은 제문이

    다. 19년이나 위였던 매부가 아버지같이 돌보아

    준 은혜를 기리며 슬픔을 표현하였다.

    14) 改其子, 爲汝固. (原註)

  • 허경진ː 곡청사고(谷靑私藁)』를 통해 본 의원 이현양의 글쓰기

    - 185 -

    다. 제장자씨공인최실문(祭長姊氏恭人崔室文) (1815)

    판관 최헌주에게 시집갔던 큰누이가 1815년 9

    월 7일에 세상을 떠나자, 진관리(津寬里) 매부의

    묘에 합장하면서 지은 제문이다. 총명하여 고금

    의 역사에 해박하였던 누이가 시댁의 파산으로

    인해 친정에 돌아와 고생한 것과 매부가 역과에

    합격하여 다시 집안을 일으켰던 것을 회상하며

    슬퍼하였다.

    라. 대선건제사장김첨사문(代善建祭師丈金僉使文)

    이한식(李漢植)을 대신하여 그의 스승인 첨사

    김우경(金宇敬)의 장례에 지어준 제문이다. 가업

    을 계승하여 의학을 전공하고, 왕을 치료한 공으

    로 초도진(椒島鎭) 첨사로 부임한 스승의 한평생

    을 기리며 슬퍼하였다.

    마. 제송원김상서문(祭松園金尙書文) (1813)

    1813년에 세상을 떠난 스승 김이도(金履度)의 장례

    에 지은 제문이다. 4조 판서를 지내고도 충후(忠厚)․

    청백(淸白)․공정(公正)․인자(仁慈)하다고 이름났던

    스승의 군자다운 면모를 회상하며 슬퍼한 글이다.

    바. 망아일륙애사(亡兒一六哀辭) (1814)

    8세에 죽은 아들 일륙(一六 1807-1814)의 장례

    에 지은 제문이다. 5세부터 한 방에서 함께 먹고

    자며 말과 글을 가르쳐 그림자같이 따랐던 아들

    의 죽음을 슬퍼하며, 5세에 천자문부터 시작하여 효경사략(史略) 등을 배우던 과정을 회상하였다. 아들이 자라면서 여러 차례 병에 걸렸을

    때의 증상과 소도제(消導劑)․보익제(補益劑)․백

    출산(白朮散)․건리탕(建理湯) 등의 처방, 치료하

    던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슬픔만 표현한

    다른 제문들과 다르다.

    사. 제조우석여문(祭趙友錫汝文) (1818)

    1818년 10월 24일에 세상을 떠난 친구 조석여

    의 장례에 지은 제문이다. 자신보다 10년이나 어

    린 친구지만 한 동네에서 함께 자라 1811년부터

    의술을 배웠는데, 1815년 자신이 병들었을 때에

    밤낮으로 드나들며 치료해준 고마움을 회상하였

    다. 올해 봄에 병들어 피를 토하다가 노증(勞症)이

    되어 백약으로도 고치지 못한 슬픔을 표현하였다.

    아. 제매부이동지문(祭妹夫李同知文) (1822)

    1822년 10월 3일에 세상을 떠난 둘째 매부 오

    위장 이시승(李時升)의 장례에 지어준 제문이다.

    10여차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온 공을 기렸으며,

    안기찰방으로 근무하면서 세운 업적과 만년에 화

    동자음(華東字音)에 관해 연구한 업적을 칭찬하였

    다. 병든 누이와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먼저 떠

    난 슬픔을 표현하였다. (이시승은 다산 정약용도

    제문을 지어줄 정도로 명망이 있던 역관이었다.)

    자. 제중자씨정부인이실문(祭仲姊氏貞夫人李室

    文) (1844)

    1844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난 둘째 누나 정부

    인의 장례에 지은 제문이다. 시집가기 전에 어려

    운 집안 살림을 돌본 기억과 시집가서도 홀시어

    머니를 모시며 우애 있게 살림하여 집안을 일으

    킨 공을 칭찬하고, 4남 1녀를 기르다가 3남 1녀

    를 먼저 보낸 아픔을 위로했으며, 부모와 첫째,

    셋째 누나까지 세상을 떠났는데, 둘째 누나까지

    여의게 된 슬픔을 표현하였다.

    차. 제매도인이치명문(祭梅道人李穉明文) (1845)

    1845년 5월 5일에 전의감정(典醫監正) 매창도

    인(梅窓道人) 이치명(李穉明)의 장례에 지어준 제

    문이다. 30년 동안 사귀던 우정과 늘그막에 홀로

    남은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하였다.

    (7) 잡저(雜著)

    가. 잡저(雜著)

    이목구비(耳目口鼻)의 각 기관이 저마다 하는

  • 醫史學 제17권 제2호(통권 제33호) 177-189,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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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능이 있는데, 한 기능이 너무 뛰어나면 병이

    된다. 사람들은 눌(訥)이 변(辯)보다 낫고, 매(昧)

    가 명(明)보다 나으며, 혼(昏)이 총(聰)보다 낫다

    는 미덕을 알지 못하니, 중용의 미덕을 지키겠다

    고 다짐한 글이다.

    나. 자감편(自感篇) (1804)

    이현양은 젊은 시절에 “청복(淸福)을 길이 누

    리며 천년(天年)을 사는 것이 인간 세상의 지극

    한 즐거움이지만, 그 기간을 헤아려보면 하루살

    이 같은 인생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22세 나

    이에 아버지가 되어 여러 성현들의 가르침을 되

    새겨보다가, 아내로부터 “복선화음(福善禍淫)은

    일상적인 천도요, 길흉화복은 사람이 스스로 불

    러들이는 것”이라는 말과 “수인사(修人事) 대천

    명(待天命)”이니 “지금 당신 나이에 열심히 공부

    하고 선한 일에 힘쓰면, 남들보다 못할 것을 어

    찌 걱정하겠느냐?”는 권면의 말을 듣고 학문에

    힘쓰기로 다짐한 글이다.

    다. 구전영응단(九轉靈應丹) (1819)

    백두산 아래에 살던 개미가 36년 동안 수행하

    여 사람이 되었는데, 남해수월진인(南海水月眞人)

    을 찾아가 신선이 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

    자 의경(義卿)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구전영응

    단(九轉靈應丹) 한 알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였다.

    (義卿은 자신의 자 宜卿의 패러디이다.) 가르쳐

    준 연단법(鍊丹法)에 따라 풀무를 만들어 단약을

    만들었지만, 하나는 안기생(安期生)이 훔쳐 갔고,

    하나는 납과 수은이 잘 섞이지 않고 금빛도 제대

    로 나지 않았다. 의경이 초조해져 그 이유를 묻

    자, 연단하는 불이 뜨겁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

    다. 의경이 다시 기회를 달라고 청했지만, 진인은

    “옥추경에서 말한 것같이 천지의 신기(神機)를 인간이 알 수 없는 게 자연스럽다”고 말하였다.

    인간 의술의 한계를 설명한 글이다.

    라. 학의해(學醫解)

    누가 “의업을 배우는 방법이 있느냐?”고 묻자,

    명나라 의원 이천(李梴)의 습의규격(習醫規格)에서 말한 “무기(無欺)”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세

    상을 속여 이름이나 훔치는 의원은 기술가(技術

    家)나 천장부(賤丈夫)이니, 방서(方書)와 경험에

    아울러 능한 의원이 되기를 다짐한 글이다.

    마. 곡청섬어(谷靑섬語) (1838)

    누가 이현양에게 전형(銓衡)이 공정한데도 여

    러 해 동안 사과(司果)에서 승진하지 못하는 이

    유를 묻자, 의약청(醫藥廳)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사용(司勇)으로 30삭(朔)이 지나면 사과(司果)로

    승진하는데, 영조 계유년(1753)부터 왕실에 병환

    이 많아 30삭을 채우지 않고도 승진한 자가 많아

    졌고, 순조 임술(1802)․을축(1805)․신미(1811)․

    갑술(1814)년에 잇달아 칭경(稱慶)의 은혜가 베풀

    어져 더 이상 승진할 자리가 없어졌다. 수령(守

    令)으로 전출할 자격이 있건만 전출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한 글이기에 ‘섬어(섬語)’, 즉 ‘곡청의

    넋두리’라는 제목을 붙였다. 같은 해에 쓴 「의약

    청지서(醫藥廳誌序)」와 관련된 글이다.

    바. 영화잡저(迎華雜著)

    광교산(光敎山) 기슭에 있는 영화역에는 질박

    한 백성 백여 호가 살았는데, 나이 15-6세 된 지

    인(知印)이 총명해 구당집(瞿塘集)을 주어 읽게 하자 그 아비가 “문자를 몰라도 아전 일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면서 말렸다. 순박한 백성들이 문

    자를 모르면서도 농사를 잘 짓고 다스리기도 쉬

    워 좋았는데, 그 가운데 김금초(金錦樵)가 박학다

    문(博學多聞)하여 시와 술을 즐겨 벗을 삼으며

    지냈다.

    사. 운근객화(雲近客話) (1844)

    1844년 봄에 나그네가 운근루에 찾아와 “영화

    역 찰방의 임기가 끝나면 생계의 대책이 있느

  • 허경진ː 곡청사고(谷靑私藁)』를 통해 본 의원 이현양의 글쓰기

    - 187 -

    냐?”고 물었다. 이현양이 “29세(1811)부터 30여

    년 동안 의술을 업으로 삼았지만, 물려받은 재산

    은 없었다. 1821년에 의약청 천거로 약원(藥院)에

    벼슬을 시작하여, 1839년 운석(雲石 조인영) 대감

    의 천거로 실함(實銜)을 받았다. 1842년 초여름에

    영화역 찰방으로 부임하여 수천금의 녹봉을 받으

    니, 몇 십 달 만에 해묵은 빚도 약간 갚았다. 무

    너져 가는 집도 수리하지 못하는데, 어찌 여분의

    재산이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승진하지 못해도

    영화역에 그대로 근무하는 예가 있다고 나그네가

    말하자, “어찌 그런 행운을 바랄 수 있겠느냐?”면

    서 술잔을 나누고, 이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지방

    관으로 부임한 의원의 한계를 아쉬워한 글이다.

    (8) 기행문 -부동유록(附東遊錄)(1842)

    1842년 8월에 풍은부원군 조만영이 금강산 유

    람을 떠나게 되자, 아우 조인영이 영화찰방으로

    있던 이현양을 불러 수행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가 8월 7일 아침에 마부를 데리고 떠나 내․

    외․해금강과 설악산까지 돌아보고 9월 6일 돌아

    올 때까지 28일 동안의 행적을 18면 분량으로 기

    록한 일기가 동유록이다.이 작품에 나타난 금강산행의 노정은 다음과

    같다. 8월 7일 서울에서 혜화문을 나와 누원(樓

    院)→포천→양문역→굴천점(窟川店)→풍전역→지

    경점(地境店)→김화읍→금성읍→창도역→통구→

    경진목도(鏡津木道)→단발령→북창(北倉)을 거쳐

    5일 만에 표훈사에 이르러 조만영의 일행 11명과

    합류한다. 그때부터 이들은 함께 금강산을 구경

    하는데, 만폭동→원각사→강선대→표훈사→만폭

    동→팔담→마하연→불지암→묘길상→안무재(安武

    岾)→은선대→석문동→십이폭→유점사→구현(狗

    峴)→백천교(白川橋)→경고→신계사→구룡연→금

    강문→신계사→옹천(甕遷)→사진포(沙津浦)→윤잠

    (輪岑)→통천→총석정→두백진(頭白津)→사진포

    →양진역→삼일포→사선정→몽선암→고성→영랑

    호→현종암→명파역→화현(禾峴)→대진→간성→

    능파대→애아진(愛我津)→자마석(自磨石)→청간정

    →만경루→원암역→설악산의 천후산→계조굴(繼

    祖窟)→내원암→신흥사→비선대→와선대→강선대

    →낙산사→의상대→기사문(奇士門)→동선역→남

    해진(南海津)→주문진→연곡역→경포대→활래정

    (活來亭)→오죽헌→구산역→오봉서원→제민원(濟

    民院)→대관령→횡계역→월정사→진부역→대화역

    →운교역→안흥역→오원역→원주→작대동(爵臺

    洞)→부연(釜淵)→흑천(黑川)→이수두(二水頭)→평

    구(平邱)→흥인문으로 9월 6일에 귀경하였다. 이

    것은 역대 금강산행의 노정 중 특이한 노정으로,

    과거 세조대왕(世祖大王)의 동순노정(東巡路程)과

    비슷하지만 그리 흔하지는 아니한 길이다.15)

    26일 일기에서 의상대 해돋이의 장관을 묘사한

    다음 구절만 보더라도, 그의 문장이 얼마나 사실

    적인지 알 수 있다.

    청산의 아래로 붉은 놀이 짙게 덮여서 처음에는

    연분홍빛이 점점 짙어지면서 두터워지더니, 갑자기

    붉은 빛살들이 성하여져서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

    다. 어느 사이엔가 둥근 덩어리가 활활 타오르는 불

    꽃같은 것이 하나의 우리처럼 되어 한참동안 도깨

    비불처럼 일렁이더니, 갑자기 구름과 놀 속에서 솟

    구쳐 나왔다. 조금 있으니까 청산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고, 일 만 리 푸른 바다가 온통 붉은 빛살

    로 뒤섞여져 버렸다. 스스로 나를 돌이켜 볼 때에

    마치 제주도의 보잘 것 없는 백성이 서울에 와서

    구경하다가 임금님의 행차를 우러러 보았을 때에

    군인들이 탄 말들과 갖가지 깃발들과 북을 두드리

    며 피리를 부는 등 임금님의 행차에 따르는 갖가지

    의장들과 함께 백관들이 시위하는 모양과 의장대들

    의 복장과 남여(藍輿)들의 성대한 모양을 처음 보았

    을 때와 같았으니, 어찌 장하지 아니하며, 또 기이하

    지 아니하겠는가?16)

    15) 최강현. 미발표 금강산 기행 「동유록」을 살핌, 문화일보, 1999, 6, 1일자.

  • 醫史學 제17권 제2호(통권 제33호) 177-189, 2008년 12월

    - 188 -

    한글로 쓴 「의유당관북유람일기」 못지않게 박

    진감 있는 표현을 한자로 썼다는 점에서 그의 문

    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도 환갑 노인이 된

    종6품 관원이면서 권력자의 주치의(主治醫)로 불

    려가 금강산 험한 길까지 수행했다는 점에서 의

    원 신분의 한계를 느낄 수 있지만, 군데군데에서

    의학 관련 이야기가 나와 자료적 가치가 큰 작품

    이다. 의원들이 본연의 임무 외에도 어떤 일에

    불려 다녔는지 알게 해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5. 맺음말-이현양 글쓰기의 특징

    초기의 글들은 의과에 응시하기 위해 공부삼아

    지은 글들이다. 천기미요(天機微要)(1799)와의학정원(醫學正源)(1801)은 독자적인 의학적 견해를 피력한 책이 아니라, 시험공부 삼아 요약한

    성격의 책이다. 의과에 합격한 뒤에도 초기에는

    여러 의서들의 정수를 뽑아 책으로 엮어 주변 친

    지들과 나눠 보다가, 의원으로 경험이 많아지면

    서 자신의 임상 실험의 결과가 곁들여졌다.

    그의 의서가 남아 있지 않아 그 특징을 확실히

    논할 수 없지만, 그의 교육경력을 참조하면 사서

    육경의 경전 가운데서도 특히 중용(中庸)을 중요시했는데, 자신의 몸가짐뿐만 아니라 투약(投

    藥)에 있어서도 중용을 지키려고 애썼다.

    수양과 의술을 하나로 보았으며, 10대 후반부

    터 수양하는 의원이 되기 위해 힘쓴 자취가 여러

    글에 나타난다. 중인이라는 신분에 좌절하지 않

    고, 꾸준히 노력한 전문직업인이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환경이 바뀌거나 생각이

    바뀔 때마다 당호를 새로 지어 썼는데, 그가 안

    락와(安樂窩)․용헌(庸軒)․용암(庸菴)․

    묵암(黙菴)․경수당(警修堂) 등으로 당호를 바꿔

    쓴 데에서 꾸준히 노력하며 살았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봉엄산태서」를 통해 초고만 남아 전해지는 본초유함의 편찬과 교정 과정이 밝혀진 것도 중요하고, 편지나 제문을 통해 이름 없이 묻힌 의원들

    의 인간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점도 중요하다. 그

    가 문장을 잘 짓는다고 이름나자, 여러 의원들이

    그에게 자신이 지어야 할 제문을 대신 지어달라고

    청하였으며, 그는 기꺼이 지어 주었다. 남의 제사

    에 대신 지어준 글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보존하고

    문집에 넣으라고 아들에게 명한 것을 보면, 자신

    의 문장에 자부심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의원 이현양의 글쓰기는 10대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책을 편집하여 수양

    및 의학의 도구로 삼고 그 머리말을 써서 글쓰기

    를 생활화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다만 한

    시(漢詩)가 없다는 점에서, 그의 글쓰기는 문학성

    보다 실용성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색인어 : 이현양, 의원, 곡청사고(谷靑私藁), 의서(醫書), 글쓰기

    16) 靑山之下, 紫霞蒙蔚, 初則淡紅, 漸至濃厚, 忽有紅光氤氳, 金輝燦爛. 於焉團團赤炎炎之一圈, 神光盪盪

    良久, 忽然現出於雲霞中. 俄者, 靑山不知去處, 碧海萬里, 混然紅光矣. 自顧如耽羅之小氓, 來觀于京觀,

    瞻御駕之行, 初見軍馬․旗幟․鼓吹․鹵簿之壯, 百官侍衛․儀仗服輿之盛也. 豈不壯, 且奇乎! (附東遊

    錄: 谷靑私藁)

    투고일 2008. 11. 12. 심사일 2008. 11. 17. 심사완료일 2008. 12. 16.

  • 허경진ː 곡청사고(谷靑私藁)』를 통해 본 의원 이현양의 글쓰기

    - 189 -

    = Abstract =

    Medical Doctor Lee Hyeon Yang’s Writings in Gokcheongsago(谷靑私藁)

    HUR Kyoungjin*

    Medical doctors in the Chosun Dynasty read Chinese literature of high level in order to take the

    medical civil service examination, but there are not many extant writings of theirs except some

    medical books. Middle‐class people’s selections of poems such as Haedongyuju, Sodaepungyo,

    Pungyosokseon and Pungyosamseon were published, and among the list of the writers, those who

    were identified as medical doctors were Park Gun, Baek Heung‐jeon, Shin Myeong‐hee, Shin Hee

    ‐myeong, Oh Chang‐ryeol, Yoo Dong‐yeok, etc. Even their works are not many, and this

    suggests that doctors’ writing was not active except for medical books.

    Lee Hyeon‐yang (1783‐1852), the author of Gokcheongsago, was born the only son of Lee Jae‐

    woo (1750‐1808), an acupuncturist at the Lee family from Ansan, which was an influential middle‐

    class family. His pen name was changed from Gokcheong to Anrakwa, Yongheon and Gyeongsudang,

    and for each pen name, he wrote a foreword explaining the origin of the name and his resolution.

    The Lee family from Ansan produced 20 medical officials through eight generations from Lee Yoon

    yeong in the 7th generation to Lee Myeong‐ryun in the 15th generation. He learned medicine, his family

    occupation, diligently and passed the medical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1803 when he was 21. In

    addition, he studied Confucian scriptures enthusiastically and left many writing along with medical books.

    Based on the forewords in his anthology Gokcheongsago, there are eight writings of his as follows in

    chronological order: Suseongpyeongam(1798), Cheongimiyo(1799), Euihakjeongwon(1801), Gwangjebiyo(five

    volumes, 1810), Wonbyeonggiyo (1819), Bonchojeongeui(1826), Euiyakcheongji(1838), and Yeonghwaji (1843).

    He wrote not only medical books but also traditional Chinese texts in different styles. In the 180pages

    transcription, he as a medical doctor showed various writing styles based on Confucianism including 22

    prologues and epilogues, 9 diaries, discussions and opinions, 2 biographies, 5 letters, 10 memorial addresses

    and condolence messages, and 8 miscellaneous writings. His writing attitude was different among the

    periods when preparing for the medical civil service examination, when acting as a medical doctor, and

    when working as a magistrate, and it shows medical doctors’ life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Key Words : Lee Hyeon Yang, Medical Doctor, Gokcheongsago, Medical Books, Writing.

    * Yonsei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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